『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정도전과 정몽주, 이성계가 만들어내는 화음
김탁환 역사 소설의 중심에는 사건이 아닌 사람이 자리한다. 『불멸의 이순신』『나, 황진이』『혜초』『허균, 최후의 19일』이 모두 그러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늘 과거가 아닌 오늘이었다. 100년 전 이 땅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를 그린 『뱅크』에서도, 조선 정조 시대의 실학자들에 대해 이야기한 ‘백탑파’ 연작(『방각본 살인사건』『열녀문의 비밀』『열하광인』) 안에서도,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은 현재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떠하냐고, 묻고 또 묻게 되는 것이다. 김탁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이 모든 이야기들을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혁명’일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 김탁환의 인물들이 염원했던 단 한 가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입을 통해 작가가 나지막하게 뱉어난 단 하나의 외침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김탁환 작가가 새로운 작품의 주인공으로 정도전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그 이야기에 ‘혁명’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사실까지도.
“작가로서 저에게 가장 매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제는 혁명과 사랑밖에 없어요. 그래서 혁명 같은 사랑, 사랑 같은 혁명에 대해서 쓰고 싶은 거죠. ‘지금의 체제가 아닌,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체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한테 매혹되는 것 같아요. 그게 정도전이고, 허균이고, 백탑파들이고, 개화기 때의 인물들이죠. 그 중에서도 정도전은 새롭게 만든 패러다임으로 잘 건너갔던 인물이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성공했을까’ 하고 관심을 갖게 된 거죠.”
“굉장히 독특한 문제적 시간인 거죠. 다른 무신이었다면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이후에 바로 왕을 자처하고 나섰을 거예요. 그런데 이성계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죠.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다른 왕을 세우고 정몽주를 중심으로 개혁 정치를 펴기 시작해요. 이성계는 그걸 묵인하고요. 세 사람이 나름대로 혁명 정치를 펴나가기 시작하는 시기인데, 그 부분을 잘 보면 그들이 하고자 했던 혁명의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혁명 1세대인 세 사람이 알지 못했던 건, 혁명 2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죠. 혁명 2세대들은 권력을 장악하면 당연히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자신들이 요직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세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던 상황이니까 굉장히 문제적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죠.”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이 기록한 시간들 안에서 이방원으로 대표되는 혁명 2세대는 혁명의 시기와 방법을 두고 정도전, 정몽주, 이성계와 충돌한다. 특히 이성계는 자신을 태조로 옹립하려는 이방원의 야망을 염려하며 강력하게 경고하기를 반복한다. 그런 이성계를 바라보며 정몽주는 역성혁명 없이도 개혁은 가능하리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이 이성계가 군사를, 자신과 정도전이 정치를 맡아 개혁 정책을 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지점에서 세 사람의 꿈은 같은 것이되 같은 것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 사람이 나누었던 마음과 이상은 결코 작거나 단순하지 않았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재상 중심의 새로운 국가 체제에 대해 논의해 왔다. 그 위로 이성계의 바람이 겹쳐진 시간 또한 짧지 않다. 그 방대한 이야기들을 18일 안에 모두 담아낸다는 것은 어쩌면 고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김탁환 작가는 이전에도 허균의 이상과 삶을 19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펼쳐 보인 적이 있다. 『허균, 최후의 19일』이 그것이다. 한정된 시간 안에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두 작품은 닮은 듯 보이지만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은 전혀 다른 방식의 말하기를 시도했다.
“『허균, 최후의 19일』하고는 또 다른 것 같아요. 『허균, 최후의 19일』은 19일 동안 스토리가 이어지는데 이번 작품은 다른 공간의 이야기들을 하잖아요. 정몽주는 개경, 정도전은 영주, 이성계는 해주에 머물죠. 같은 날 다른 장소의 이야기이고, 같은 날 공식적인 기록과 비공식적인 기록의 이야기죠. 『허균, 최후의 19일』을 쓸 때보다 두 배 가량 어려운 게 아니고 스무 배 정도 어려웠어요.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죠. 저는 음악적으로 화음을 넣는다고 생각했어요. 왕과 이성계와 정몽주가 개경에서 만들어내는 화음 아래로 영주에 있는 정도전이 개경을 생각하는 화음이 있고, 또 민중들과 어울리는 화음이 있는 거죠. 동시에 5도 화음 정도가 쭉 이어지면서 울림을 주는 음악처럼 생각하고 썼어요. 과연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지 굉장히 궁금해요.”
작가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정몽주와 이성계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객관적인 기록으로 전한다. 그리고 같은 날 영주에 머물렀던 정도전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기와도 같은 그의 내밀한 기록으로 보여준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한 날의 기록을 통해 혁명의 과거와 현재는 깊이를 더해간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실제 그들이 향유했을 문학 작품들이다. 김탁환 작가는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안에서 편지와 동물우화, 여행기와 전(傳) 등 당시의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했던 문체를 빌려 그 안에 세 인물의 마음을 채워 넣었다. 그들이 어떤 형식으로 어떤 뜻을 주고받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내용이 새로운 것도 중요하지만 스타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싶은 거니까요. 영화나 드라마는 배우를 통해서 보여주면 되지만 소설은 그게 안 되니까 글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거죠. ‘당시의 정도전이 추천사를 쓴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고 죽을 사람을 기리는 묘지명을 쓴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혹은 ‘친구들을 그리면서 작은 전기문을 쓴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문집들을 다 읽고, 그 사람들이 좋아했던 글 쓰는 스타일들을 뽑은 다음에 제가 정도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씩 쓴 거죠. 각색을 한 거니까 문집에는 하나도 없는 글들이죠. 하나하나가 작은 단편들인 거예요.”
정도전, 21세기 대한민국의 문제를 고민하다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작품을 쓰는 그의 고집은 이번 작품에서도 계속됐다. 3년의 준비기간 중 절반의 시간을 인물들에 대해 공부하는 데 쏟아 부었다. 그들이 직접 기록한 혹은 곁에 두고 아꼈던 문집들을 빠짐없이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논문과 책을 찾아 읽고 모임을 만들어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작가는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다른 모습의 정도전과 만났다. 단순히 왕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는 책사로만 여겨졌던 정도전이 아닌, 조선 왕조를 설계하고 밑바탕을 닦아놓았던 역동적인 인물로서의 정도전을 보게 된 것이다.
“영ㆍ정조 시대의 실학파들을 다룰 때에도 기존에는 한 명씩 다뤘거든요. 그런데 실제 삶을 보면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들이 같이 모여서 어울리거든요. 그러면서 시너지 효과가 생겨서 지식이 확 타오르죠. 백탑파 연작을 쓰면서 그런 모습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그 이후에는 어떤 인물을 다룰 때 항상 이 사람의 옆에 누가 있었는지, 친구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만나서 어울렸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보게 되는 거예요. 이번 작품에서도 저한테 중요한 건 이색 학당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현과 이색으로 전통이 내려오는데, 그 밑에 여러 명의 뛰어난 문하생들이 들어가는 거죠.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하륜, 이런 사람들이 전부 이색의 제자들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만났고 어떤 책을 공부했고 어떻게 정치했는지, 어떻게 서로 틈이 벌어지고 어떻게 서로 죽고 죽이게 됐는지를 자세히 탐구하는 소설은 없었던 거예요. 다시 얘기하면 모든 것들을 아주 정치적으로 단순화시켜서 정몽주는 충신이고 정도전은 정몽주를 죽인 사람이라는 식의 정치 논리로만 한 인간의 삶을 해석해버리는 단순화의 오류에 빠졌던 거죠. 저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차근차근 보여주려고 했어요. 지금까지 그런 시도는 없었던 것 같아요.”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의 본격적인 탄생은 3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작가 김탁환 안에서 정도전의 이야기가 태동한 것은 그보다 이전의 일이다. 7년여 전쯤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단에서 내려올 무렵, 앞으로 자신이 10년 동안 써야 할 작품에 대해 생각하던 작가는 세 가지 주제를 떠올렸다. 자연과 인간, 자본주의, 그리고 혁명가가 그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잔혹하게 정복하는 모습을 멸종해가는 호랑이를 통해 보여주었던 『밀림무정』과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조명한 『뱅크』는 그때의 계획이 실현된 작품이다. 그리고 한국의 혁명가로 작가가 선택한 정도전은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으로 태어났다.
“제가 대학을 다녔던 80년대 후반은 굉장히 격동의 시절이었죠.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있었던 큰 변혁의 흐름들, 그런 걸 써보고 싶은 거죠. 물론 직접적으로 80년대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고 정리해야 될 부분들이 더 있어요. 그렇다면 스무 살 이후부터 제가 살아왔던 기간과 가장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누가 있었을까 하고 찾아보니까 정도전이었어요.”
지금 우리에게 정도전의 삶이 던져주는 질문과 깨달음은 무엇일까. 김탁환 작가는 한 인터뷰를 통해 “지금 사람들이 정도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개혁이 필요한 시대라서 그런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도전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600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개혁은 무엇일까.
“그들이 혁명의 텍스트로 삼은 것이 <맹자>예요. 맹자 사상은 여러 가지로 설명 가능하지만 가장 날카로운 부분은 백성이 가장 귀하다는 거죠. 백성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왕은 바꿀 수 있다, 백성을 가장 귀하게 여기지 않는 왕은 왕도 아니다, 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부분에 근거해서 보자면 당시와 지금은 비슷한 부분들이 많죠. 빈익빈 부익부가 굉장히 심했고요, 서울 중심의 사람들과 지방 사람들의 간극이 엄청났어요. 그리고 공직 사회가 굉장히 부패했었죠.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세계사적인 패러다임이 바뀌는데 그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었죠. 지금도 우리나라가 중국과 미국이라는 큰 나라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만약 미국과 중국이 충돌을 일으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정도전이 고민했던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보면 그냥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문제예요. 정도전이 내린 결론은 국가 체계를 바꾼다는 거였죠. 철학, 시스템, 제도, 도읍지 전부를 바꾸는 거죠. 지금 우리 안에서도 수도를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기자, 경제 구조 도 바꾸자, 교육 정책을 바꾸자, 중앙과 지방의 문제를 해결하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데요. 600년 전의 고려에서는 정도전이라는 한 사람이 그 모두를 계획하고 실행한 거예요. 어떻게 보면 그것이 정도전의 광활한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죠.”
정도전의 혁명은 성공한 것일까. 그는 백성을 가장 위하는 재상이 중심에 선 국가체제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를 제거한 이방원은 왕권 강화를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죽이고 심지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했던 처가까지 멸문시켰다. 과연 조선은 정도전이 꿈꾸었던 새로운 나라였을까.
“정도전은 죽었지만 정도전이 마련해 놓은 시스템은 그대로 있는 거죠. 왕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모여서 회의를 해야 돼요. 그리고 고려의 왕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조선의 왕들이 어렸을 때부터 유학자로 성장한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맹자》를 읽혀요. 왕이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면 제거될 수도 있다는 걸 교육 받는 거죠. 그 시스템은 정도전이 만들어 놓은 거예요. 고려의 왕들처럼 불교 신자라고 해서 갑자기 신돈같은 중에게 권력을 던져주고 정치에서 물러날 수가 없는 시스템이죠. 그런 체계 자체를 만든다는 게 무서운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도전이 세워놓은 국가를 제거하지는 못한 거죠. 정도전이 세운 체계 속에서 왕을 한 거니까요.”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이는 때때로 미온적인 태도로 현실을 바라본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들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할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독재정권이 존재했던 시기도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면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견뎌내기만 한다면 봄날을 맞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역사를 공부할수록 경계해야 할 것은 회의 아닌 회의에 사로잡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 안에서 진정으로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9세기를 들여다보니까 100년 내내 나라가 엉망이에요. 정조가 죽고 난 다음부터는 몇몇 가문들이 국가를 장악하고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왕을 뽑아요. 왕이 마음에 안 들면 갈아 치우고요. 정도전이 세워놓은 체계에 따라 공부를 시키지도 않아요. 왕이 멍청해야 그들이 잘 사니까요. 그렇게 100년을 보낸 거죠. 그래도 그 때 희망을 갖고 혁명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삶을 살았던 사람들, 이이화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봉기꾼’으로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건 역사를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아는 건 너무나 중요하죠. 역사가 거울일 수 있는 거예요. ‘나한테 이런 문제가 닥쳤는데 옛날에 비슷한 경우가 없었나?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결했지? 어떻게 잘못해서 실패했지?’ 이런 걸 살펴볼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아는 게 미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소설가 김탁환이 꿈꾸는 혁명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은 김탁환 작가와 민음사가 함께 기획한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조선 500년의 역사를 소설로 재구성하는 작업인 만큼 작가가 느끼는 부담감도 적지 않았을 터. 그 험난한 여정을 자처한 이유가 궁금했다.
“정도전을 공부하면서 영향 받은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한영우 선생 같은 사학자는 정도전을 왕조의 설계자라고 정리하시는데요. 설계자는 자신이 어떤 국가를 만들겠다는 걸 가슴에 품고 계획대로 삶을 살아가는 거잖아요. 정도전이 설계한 것이 조선이었다면 저한테는 ‘소설조선완조실록’ 시리즈인 것 같아요. 제 가슴이 그 정도 크기는 안 되지만 설계를 하고 계획대로 살아가보고 싶은 거죠. 물론 설계대로 완벽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또 설계대로 되지도 않고요. 변화와 우여곡절 속에서 어떤 사람의 인생도 미완성으로 끝나죠. 정도전도 그랬고요. 그렇지만 시작하는 거죠. 계속 소설을 쓸 거니까 자의식을 하나 더 얻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쓰면서 동시에 이 인물이 조선이라는 거대한 왕조의 흥망성쇠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살펴보는 거죠.”
뒤이어 그는 한 생애에 그치는 사유가 아닌 100년, 500년으로 사유의 폭을 확장시켜 나간다는 점에서 ‘소설 조선왕조실록’ 작업에 매혹됐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600년 전의 인간과 만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설가로서 자신의 역할인 것 같다고 밝혔다. 그를 위해서 김탁환 작가는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과 같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한편, 기존의 작품들을 재탄생시키는 작업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소설 조선왕조실록’으로 새 옷을 입게 될 작품은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이라는 작품은 숙종 때 장희빈과 김만중의 이야기를 쓴 건데요. 출간된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있었고, 저도 숙종 실록을 다시 읽으면서 숙종이라는 인물에 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을 쓸 때는 ‘김만중이 왜 최후의 작품을 장희빈을 저주하는 소설을 썼을까, 한 인간의 최후의 작품이 왜 저주의 문학일까’ 이런 부분이 고민의 포인트였거든요. 그런데 저도 공부를 더 하다 보니까 그 반대쪽에 있는 숙종이라는 숨겨진 위대한 왕이 보이는 거죠. 우리는 위대한 왕을 생각할 때 세종과 영ㆍ정조를 꼽지만 제가 볼 때는 숙종도 조용하면서도 굉장히 센 사람이거든요. 우리 영토를 백두산까지 확장시킨 왕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숙종은 계속 후궁들에게 놀아난 나약한 왕으로 재생산되고 있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을 조금만 수정하고 숙종 이야기를 다시 쓸 수도 있고요. 그게 아니라면 연결고리를 찾겠죠.”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들은 1400년대와 1800년대 조선의 인물들이다. 태조과 세종, 사육신과 생육신을 비롯하여 홍경래, 전봉준과 같은 민란 시대의 영웅들이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들이다. 그들 중 누가 김탁환과 만나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며 그 마음을 활자로 새겨 넣을까.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올 혁명의 모습을 기대하며, 그 안에 감춰둘 김탁환의 혁명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제가 《한국일보》에 문학 칼럼을 쓰고 있는데요. 오늘 인터뷰에 오기 전에 「삐딱함을 옹호함」 이라는 칼럼을 쓰고 왔어요. ‘우리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말하지 마라, 올바르게 살라고 말하는 사람이 삐딱한 땅 위에 서 있는 거다’라는 내용이에요. 자신이 삐딱한 땅 위에 서 있는 걸 모르고 나한테 삐딱하게 살지 말라고 말하는 건 횡포라는 얘기죠. 특히 예술가들에게 삐딱함을 권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작가는 삐딱하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는 다양한 삶이 공존하는 사회예요.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어서 거기로 가는 것만이 옳다고 하는 사회가 아니고요. 생태학에서도 생물 다양성을 얘기하잖아요. 한 지역에 하나의 생물만 살고 있으면 금방 멸망한다고요. 다양한 생물들이 모여서 섞여 살아야 하듯이 우리가 하나같이 비슷한 말만 해서는 안 되겠죠. 각각 다른 삶,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가야 되는데 그렇게 안 되니까 힘들 때가 있죠.”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은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인물들의 삶이, 그들의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 까닭이다. 이따금씩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멈추게 되고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은, 600년 전 혁명을 꿈꾸었던 그들의 현실과 이상이 오늘의 우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의 독자들로부터 ‘너무 세다’는, 짧고도 강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는 작가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가득했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 독자들이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느끼고 그로 인해 많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기를, 작가는 바라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이 가진 묵직함은 정도전과 정몽주, 이성계의 이상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곧 작가 김탁환이 가진 이상의 무게이기도 했다. 그 무게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라며 작가는 독자들에게 작은 부탁을 전했다. 어쩌면 김탁환의 정도전 이야기에 보다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귀띔이기도 했다.
“저는 독자들이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소리 내어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눈으로도 읽지만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은 소리 내서 읽어보셨으면 해요. 그러면 제가 넣어놓은 리듬들을 몸으로 더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이 소설이 몸에 더 잘 붙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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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김탁환 저 | 민음사
이 책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부터 정몽주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고려라는 불꽃이 스러지고 조선이라는 동이 튼 18일의 광활하고 내밀한 비망록을 담고 있다. 편년체를 통한 외면적이고 공식적인 세계와 정도전의 일기를 통한 내면적이고 비공식적인 세계를 동시에 구현하는 이 작품은, 형식에 있어서 다양한 실험을 담고 있다. 편지, 동물우화, 전(傳), 여행기 등 다양한 문체를 구사하며, 하나의 문체만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역사가 어떻게 문학적 옷을 입게 되는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