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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만화가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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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사실은, 고양이가 ‘슬그머니’ 인간 곁에 왔다는 점이다. 이는 통계로도 증명되는데, 농축산검역검사본부가 조사한 자료로는 고양이 수가 2010년 63만 마리에서 2012년 116만 마리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만큼 고양이가 가진 매력에 빠진 사람이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낭만 고양이, 인간 세상을 탐닉하다』도 슬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온 책이다. 책을 쓴 최동인 작가와 정혜진 작가는 수년째 고양이와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다.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책으로 탄생했다. 특별히 강력한 제목도, 다루는 소재가 자극적이지도 않지만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이 책은 글과 그림, 사진이 함께 어우러진 픽션이다. 크게 보면 단편 8편이 모인 연작 소설 형태다. 글과 구성은 최동인 작가가, 그림은 정혜진 작가가 담당했고 사진은 두 저자가 함께 찍었다. 글, 그림, 사진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서 두 저자가 표현하려 한 것은 인간 세상과 고양이 세상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고독, 소소한 기쁨, 잔잔한 감동이 함께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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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정근 씨가 골목에서 잠들자

인간의 몸을 따뜻하게 덮여주는 길고양이(114-115쪽)

 

고양이, 개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


『낭만 고양이, 인간 세상을 탐닉하다』가 책으로 나온 사연이 특이하다고 들었습니다.

 

최동인 : 특이할 것까진 없고요. 블로그(http://blog.naver.com/7net8net)에 '안녕 고양이'라는 만화를 업로드 했는데요. 출판사에서 만화를 보고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책은 블로그에 올렸던 ‘안녕 고양이’가 아닌 다른 내용의 ‘낭만 고양이, 인간 세상을 탐닉하다’였습니다. ‘안녕 고양이’ 출판이 미뤄지면서 연재했던 내용 중에서 『낭만 고양이, 인간 세상을 탐닉하다』로 넘어간 이야기도 있습니다.

 

책에 사진과 글 그림이 모두 들어가 있는데요. 어떤 게 가장 힘들었나요?

 

최동인 (이하 최) : 음…. 일단은 정혜진 작가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이야기 해두겠습니다. (웃음)

정혜진 (이하 정) : 저는 그럼 최동인 작가가 더 힘들었을 거라고 이야기를…. (웃음)
: 어떤 게 더 힘들었다기보다는 각자가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걸 했습니다. 저는 글 쓰는 게 즐거웠고, 정혜진 작가는 그림을 즐겁게 그렸습니다. 즐겁게 작업했고 힘든 것도 각자의 상황에서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글과 그림은 창작자가 오롯이 통제할 수 있다고 쳐도, 고양이를 담는 사진은 찍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 현재 고양이와 살고 있는데, 예전부터 사진을 쭉 찍어 와서 그런지 고양이 사진은 많았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사진 때문에 힘든 건 없었어요. 고양이를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열심히 찍어 두고 있어요.

: 정혜진 작가 말처럼 이번 작업은 준비된 사진이 많았습니다. 만화 작업을 하고 이야기에 필요해서 사진을 찍은 경우도 있지만, 원래 있던 사진으로부터 이야기가 나온 것도 있었죠. 예를 들어 이야기 여덟 ‘반짝반짝’은 골목에서 만난 개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였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저 개는 누굴 기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의 구상을 시작했거든요. 정작 사진은 책에서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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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인 정혜진

 

고양이에 언제부터 관심이 생겼나요?

 

: 가족과 함께 살 때는,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반려동물과 함께 살 수 없었어요. 독립하고 나서 동물이랑 함께 살아볼까 생각을 했어요. 강아지가 좋을까, 패럿이 좋을까 고민도 하고, 그때는 반려동물이 아니라 애완동물이란 생각을 했고, 함께 살아가기보다는 키운다는 생각을 할 때였죠. 그렇게 어떤 동물을 키울까 생각하던 어느 날, 어느 순간 고양이가 마음에 다가오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해서 십수 년 정도를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4마리 고양이 함께 살고 있어요.
: 저는 2006년부터 고양이랑 함께 살기 시작했죠. 고양이 이름이 “용이” 인데 용이랑 지금도 같이 잘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현실과 섞인 허구인가요?

 

: 일곱 번째 이야기 “진우는 사진이다”에서 진우가 제 얘기인지 물어보는 분들이 계세요. 진우 이야기에서 제 마음이 들어 있기도 하고 제가 만난 사진가의 이야기가 들어 있기도 하고요. 직업병처럼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는 버릇이 있는데, 어쩌면 제가 만난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우는 사진이다”는 질문처럼 현실과 섞인 허구가 맞겠네요. 몇 편은 완전히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입니다.
정 : 제 동생의 어릴 때 꿈 이야기가 세 번째 이야기 “오늘도 정근 씨는 달린다”에 정근 씨 꿈 중 하나로 들어갔어요.

 

전작이 『용산 개 방실이』였잖아요. 동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가 있을까요?

 

: 처음 제가 시작했던 만화의 주인공이 고양이였고, 지금은 제가 제일 잘할 수 있고, 잘 그릴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게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예요.
: 정혜진 작가처럼 저도 동물을 좋아하고 지금은 고양이랑 살고 있어서 그런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동물 이야기네요. 그리고 반려동물들은 사람과 같이 살아가니까 자연스럽게 사람의 이야기를 쓰게 되고요.

 

즐겁게 읽으면 더는 바랄 게 없어


단편 8편이 모인 연작 소설 느낌의 책입니다.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었나요?

 

: 여운이 있는 에세이나 시를 생각하고 작업을 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갈등이 촘촘하게 들어가지는 않고 생략했는데도, 보이는, 그래서 보는 사람이 나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데 이야기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 그래서 그림에 색을 입힐 때도 잔잔한 이야기 톤에 맞춰서 작업했어요. 사진도 마음에 들어서 넣었다가 전체 톤에 안 맞아서 빼기도 했고요.

 

『낭만 고양이, 인간 세상을 탐닉하다』가 삭막한 도시 속 인간과 고양이의 삶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전작도 ‘용산’이라는 시사적인 주제를 다뤘는데요. 주제 선정을 할 때 사회적인 메시지도 고려하는 편인가요?

 

: 하고 싶은 이야기, 잘 아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요즘 준비하는 이야기들이 길 위에서 살아가는 고양이와 자기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기이거든요. 시사적인 주제나 사회적인 메시지는 이야기의 방향에 따라 나올 때 되면 자연스럽게 나오리라 생각해요. 이야기보다 메시지를 먼저 앞에 세우고 싶지는 않아요.

 

독자가 어떻게 읽었으면 하나요?

 

: 책을 보고 아는 선배는 블루라고 하더라고요. 들어가면 끝을 알 수 없는 깊을 것 같은 짙은 바다처럼 차분해지고 때로는 우울해진다면서요. 이야기가 유쾌하면서 즐거울 거로 생각했다가 놀랐나 봐요. 그래도 그 속에서 따뜻함을 느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행복할 때가 많았어요. 독자들도 보시면서 그 행복을 같이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면 더는 바랄게 없습니다.


어떤 계기로 두 분이 함께 작업하게 됐나요?

 

: 책 앞날개에 있는 프로필에 있듯, 정혜진 작가가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죠. (웃음)
: 회사를 관두고 뭘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최동인 작가가 제가 고양이랑 살고 있으니까 잘 아는 고양이 만화를 그려 보라고 제안했어요. 만화를? 처음엔 뜬금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영상 쪽 일을 직업으로 10년 넘게 꽤 오래 했고 만화 쪽은 전혀 몰랐거든요. 어릴 때 꿈이긴 했지만 아는 게 전혀 없었죠. 최동인 작가의 계속되는 권유와 도움으로 ‘안녕 고양이’를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안녕 고양이 이후에 계속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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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로 산다는 의미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평하세요 ?


: 정혜진 작가는 작업을 즐겁게 하는 게 제일 큰 장점이고요. 점점 만화가의 빛이 나고 있습니다.
: 제가 스쳐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주는 사람? 그리고 만화 선생님?

 

동물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두 사람은 모두 동물을 좋아하잖아요.


: 제 주변엔 없어요.
: 저도요~


정혜진 작가는 ‘칠렐레 팔렐레’. 최동인 작가는 ‘달커피’를 닉네임으로 사용합니다. 닉네임에 담긴 의미는?

 

: 칠렐레 팔렐레, 즐겁게 살자는 의미로 쓰고 있어요.
: 저는 달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해서, 달커피로 했습니다.

 

전업 작가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 그리는 일은 즐거운데. 금전적으로 힘들 때도 자주 있어요. 앞으로 책을 쓰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은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기분이 좋네요.
: 힘들어요. (웃음) 책만 써서 생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안녕 고양이’ 외에도 앞으로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공개해 주세요.


최:블로그에 올리고 있는 ‘안녕~고양이’를 다시 연재할 예정이고요. 웹툰으로 준비 중인 이야기가 두 편 있습니다. 이번엔 바로 책으로 내지 않고 연재를 하고 책을 내보려고요. 주인공은 역시 고양이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편은 고양이와 사람들 그리고 사진 이야기이고, 한편은 고양이가 주인공인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에 뿌리를 둔 판타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에는 이야기를 촘촘히 만들어 보고 있습니다.

 

이야기 셋 ‘오늘도 정근 씨는 달린다’에서 여러 사람의 꿈이 등장하는데요. 혹시 꿈이 있다면?

 

정:이번에 두 번째 책을 내면서 만화가로 산다는 것도 재미가 있구나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동물, 사람들과 함께 살고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그리고 싶고, 세 번째 네 번째 책을 쭉 내서 독자 분들을 계속 만나고 싶어요.

: 책 내는 걸로만 생활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책만 써서 생활할 수 있는 게 꿈입니다. 당장은 올해는 작업이랑 상관없는 일을 차츰 줄이는 게 목표고요. 정혜진 작가랑 함께 계속 사진 찍고, 이야기 쓰고, 그림 그리고 해야죠. 그리고 이사 그만 다니고 조그맣게라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마당에 고양이 밥집 차려 놓고 고양이들이 오며 가며 편하게 밥 먹을 수 있는 고양이 식당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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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고양이, 인간 세상을 탐닉하다 최동인 저/정혜진 그림 | 21세기북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 이곳의 고양이는 매일 이곳저곳을 산책하며 사람들을 관찰한다. 취업을 걱정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고양이에게 맛있는 밥을 만들어주는 아줌마, 아침마다 만나는 30대 샐러리맨, 고양이 사진을 찍는 남자, 대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등 고양이의 관찰 대상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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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 어떻게 발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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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회에는 책이 팔리지 않는다.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지 싶다가도, 금세 뒤쳐질까 봐 생각을 멈춘다. 스마트폰을 쉴새 없이 확인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생각할 여지를 철저히 차단하는 디지털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인문학자 도정일의 제안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쓰잘데없는 것이 어찌 고귀한 것일 수 있을까? 도정일은 말한다. “세상이 쓰잘데없다고 여길지 몰라도 우리네 삶에 지극히 소중하고 고귀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고.

 

만나고-도정일교수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이 6년 만에 펴낸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는 20여 년간 도 교수가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글을 묶어낸 산문집이다. 2014년, 지금의 한국 사회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 변하지 않은 모습들이 담겨 있다. 행복의 역설과 인문학, 디지털 시대의 우울, 학교를 살리는 길, 부자 이데올로기 등 150여 편의 글을 읽다 보면 ‘사회라는 게 이토록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도정일 교수는 새로운 시대를 말할 때마다, “변화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에 민감하고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통찰과 감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 통찰과 감각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바로, 독서다. ‘독서력의 결핍’은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빼앗아갔다.

 

“너는 이 지구에 왜 왔는가?” 이 질문은 도정일 교수가 인문학 입문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즐겨 하는 질문이다. 엉뚱한 질문으로 여겨지지만, 이 쓰잘데없어 보이는 질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위대한 실용을 갖는다. 첫째, 정답이 없으므로 우리는 각자 그 질문에 응답할 방법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야 한다. 둘째, 그 질문이 없고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의 모색이 없을 때 우리네 삶은 의미, 가치, 목적을 확보할 길이 막막해진다. 삶이 무의미하게 여겨질 때, 우리는 밥으로만 견딜 수 없다. 도정일 교수에 의하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가 인문학의 출발이다. 여기에서 나와 너의 관계, 관계의 건축술이 생겨난다. 호기심과 질문, 생각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없이 인간의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정일 교수는 두 권의 책으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은 무엇이며, 별들 사이에 길을 놓는 상상력이 있냐고.”

 

“우리가 영혼의 춤을 가장 잘 출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마음, 타인의 정신, 타인의 영혼을 만날 때이다. 이 만남의 소중한 순간을 제공하는 것이 ‘책 읽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 영혼의 만남이 일으키는 신명나는 춤판, 마음의 공동체가 벌이는 즐거운 무도회, 인간이 자기 존재를 들어올리고 확장하는 사계절 축제이다. 거기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삶의 품위를 지키고 삶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박한,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이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103쪽)

 

 

문학작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많이 접해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의 서문을 읽어 보니, 서문을 쓰기 싫어 늑장을 부리셨다고요. 그래도 20여 년간의 글을 모아놓으니,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놀면서 20년을 보냈다고 해도, 의미가 있을 수 있잖아요. 뭐든지 되새겨보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동안 내가 썼던 글을 모아놓고, ‘내가 무엇을 썼던가? 무엇을 읽으라고 독자에게 내놓았던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절반은 추려냈는데, 그래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내 주제에 종이를 크게 낭비하지는 않은 게 아닌가? 나중에 염라대왕한테 크게 야단 맞을 정도는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20년 세월이 담긴 이야기이지만, 지금 사회와 비교해도 크게 변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지금, 이 시대와 관계 있는 이야기들을 뽑아냈습니다. 멀어 보이는 이야기는 다 뺐지요. 아직도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들을 보면, 참으로 놀랍게도 바뀌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행복 강박증이나 책 읽는 문화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죠.


시민단체나 사회의 노력이 있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상당히 떠들었지만, 약간의 성취가 있을 뿐 후퇴한 부분도 많고요. 문화적으로도 여전히 전근대적 문화유산 속에 침잠해 있습니다. 권위주의, 연고주의, 서열주의 같은 것도 완전히 사라지지 못했죠. 다시 말해 합리성의 확장이 성취되지 못했어요. 근대사회가 되려면 어떤 것보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면서 확장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려워하고 있죠.

 

오래 전부터 인문학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는데요. 최근 출판계에는 인문학 바람이 불기도 했습니다.


책은 많이 팔렸지만, 교육계에서 얼만큼 소화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궁극적으로 인문학 책을 읽는 목적은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문적 가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인데요. 유행처럼 책은 읽지만, 정작 학교에 오면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 취업만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2,3년 대학을 다니다 졸업을 앞두면 허망해지죠. 많은 학생이 3학년이 되어서야 인문학 강의실을 기웃거리면서 관심을 둡니다. 1,2학년 때는 아예 관심도 없고 모르죠. 중등교육 때부터 인문학적 교육을 받아 왔어야 했는데, 입시와 같은 특정한 목적을 둔 교육만 받아 왔으니, 작금의 사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깊고 넓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교수님께서는 2001년부터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시작해 어린이 전문도서관 ‘기적의 도서관’을 전국적으로 확대했고,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운동, 교사를 위한 독서교육연수 프로그램도 주도하고 계시죠. 지역사회 도서관은 이제 많이 생겨난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도서관에 갈 시간이 있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기적의 도서관을 설립했을 때, 붐이 일어났죠. 아이들이 엄청나게 도서관을 많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부터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도서관을 온다는 거죠. 4학년부터는 따로 공부할 것이 많아지고, 중학교에 대비하다 보니 도서관을 찾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정책을 짜고 있는데, 문화부에서 할 일이 있고 교육부에서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을 보면, 문학작품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채 졸업을 합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문학을 접할 기회가 박탈된다는 건, 엄청난 손실입니다. 문학을 포함한 인문적 독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따로 있는데, 그게 열다섯 살부터 입니다.

 

인문학 도서 붐이 일면서, 10대들에게 고전을 추천하는 책도 많이 나왔습니다.


고전은 어른이 되면서 다시 읽게 되는데, 청소년 때 읽었던 기억보다 더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경우는 없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고전을 대하는 게 중요한 까닭이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문학전집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게, 제가 고등학교 때입니다. 그 때 읽은 독서량이 저의 평생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인격적 형성이 되는 시기에 읽는 책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성교육 또한 독서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한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 교양입니다. 지금처럼 자극이 많은 사회에서는 본질을 챙기는 것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융단 폭격을 맡게 됩니다. 자극적인 매체, 광고, 디지털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일수록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상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독서는 시간이 있을 때 하는 게 아닙니다.

 

유행 따라 책을 읽는 경향도 짙습니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입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트렌드가 그러니까 끌려가야지’하고 손을 놔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서는 트렌드가 아닙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한때 유행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젊었을 때도 늙었을 때도 휘둘리지 않는 정신의 강건함은 오직 책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최근 나온 책 중에 일본 비평가인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가 30대 청년인데, 이 친구에게 있어서 책은 혁명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아주 신선한 이야기였습니다. 일본의 독서 시장이 예전보다 작아졌지만,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은 대단히 긍정적입니다.

 

만나고-도정일교수

 

 

행복의 열쇠는 ‘질문’

 

과거에는 청춘을 말할 때, 부러운 존재로 여겼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안쓰럽고 불안한 세대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마주하다 보면,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고민이 참 많다는 걸 느낍니다. 가장 큰 고민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을 잡았는데, 사회에 나가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다는 걸 느낄 때, 그 괴리를 어떻게 메워야 하냐는 거죠.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 삶의 목적이 있는데 그것들이 실현할 수 없는 이상처럼 여겨질 때 괴로워합니다. 그 다음은 돈 문제입니다. 어떤 학생은 벼락을 맞아도 좋으니, 돈방석에 앉아 봤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절박하면 이런 말이 나올까, 싶습니다. 돈을 무시하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돈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돈에 시달리지 않을 만큼 물질적인 것을 확보했을 때, 그 때도 여전히 삶의 가치를 생각해두지 않으면, 돈이 없을 때보다 더 괴로워진다는 사실이죠.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돈만 많지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으로 학생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교양수업을 하며 만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책을 추천해주기도 하나요?


때때마다 생각나는 책들을 추천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책에 대한 정보로 넘쳐납니다. 단순 광고를 넘어 판단의 정보도 많습니다. 책에 대한 추천 글도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데, 여전히 학생들은 선생, 친구가 책을 추천해주길 기대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아는 사람이 추천해줬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학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추천할만한 책 목록을 가지고 다니길 제안하고 싶습니다. 적당히 자기가 아는 책을 추천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하나의 문화운동이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학생들의 요구는 절실한 부탁입니다. 그럴 때, ‘아 내가 이 책을 읽었는데 좋더라. 나를 흔들었던 책이 이 책이다”라고 말한다면, 학생들이 책을 다르게 여길 겁니다. 그럴만한 성의와 열정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합니다.

 

질문하기 힘든 시대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질문을 생각할 여유도 없어 보입니다.


질문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질문이 없으면 교육이 안 되고 탐구를 할 수 없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은 어릴 때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행복의 열쇠가 바로 호기심입니다. 우리는 ‘인문학이 행복의 비결을 알려주지 않을까?’ 찾아 다니는데, 그런 의미의 정의를 넘어서, 자신만의 목록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질문을 잃어버린 아이는 자라서 멍청이가 됩니다. 질문은 정신이 살아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보다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뭔가를 성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호기심’입니다. 그 호기심을 대표하는 것이 곧 질문이고요. 많은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질문이 행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는 ‘글쓰기의 날’을 지정해 서평, 에세이 백일장을 열고 있습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공포를 가지고 있는데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비교적 잘 쓰는 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그래도 잘 씁니다. 글쓰기는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일입니다. 가끔은 학교에 있는 숲에 들어가서 30분 동안 나무와 대화하고 오라고 합니다. 나무랑 이야기를 하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결국은 자신하고 이야기하는 거죠. 이렇게 한 번도 안 해봤던 일을 하다 보면, 쓸 거리가 생깁니다. 두 번째 학기에는 나에 대한 글쓰기를 넘어 세계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학생들을 독려합니다. 내가 놓여 있는 사회. 환경 등 범위를 점차 넓혀 발전시킵니다.

 

교수님의 글은 언제나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어떤 글을 쓰고자 하는 원칙이 있나요?


글의 용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칼럼 같은 경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성찰이 담겨져 있나?, 둘째는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문제를 질문으로 제기하고 있는가?, 셋째는 사색이 있는가? 입니다. 이번 산문집 두 편을 펴낼 때, 글을 고른 기준도 다르지 않습니다.

 

만나고-도정일교수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


이번 산문집 제목이『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입니다. 반어적인 표현인데요. 무엇이 가치가 있는가를 아는 것이 자신의 삶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보름달은 왜 뜨는가’(『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35쪽)에서 보름달이 왜 뜨는지 생각해보며 혼자 실실 웃는 것도 쓰잘데없이 재밌는 일이라고 썼습니다. 1년에 하루만이라도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해보자는 것, 이것 참 중요합니다. 고향 마을에 가서 달빛을 보고 있으면, 이 달빛이 완전히 쓸모 없이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고추밭의 고추가 햇살만으로 자라는가? 아닙니다. 달빛으로도 자랄 수 있습니다. 지붕의 뒤웅박은 달빛을 먹고 자라고, 박쥐들은 달빛 속에 날아다닙니다. 아이가 낮에는 햇살 속에서 자라지만 오후가 되어 평상 위에 잠들었을 때, 아이를 키우는 건 달빛입니다. 아이가 고향 마을 골목에서 성장기의 고민을 할 때도 그 곁을 함께하는 건 달빛입니다.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39쪽)은 학부모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글이었습니다. 가치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는 일보다 더 귀한 교육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요즘 부모들은 열정이 많아서, 자신이 공부를 해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걸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동시에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 가치인가’ 가치에 대한 감각을 아이들에게 키워줘야 한다는 거죠. 사람을 사람답게, 인생을 인생답게 만들려면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가치 있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판단력이 사라진 지식이 백해무익합니다. 지식이 강조되는 시대에 부모가 해야 할 일은 ‘가치에 대한 감’을 아이들에게 익히게 하는 겁니다. 여행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독서 교육,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부모들이 자녀가 초등학생 때까지 독서 교육을 잘합니다. 좋은 책이 뭔지에 대한 판단이 서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면, 학교에서 자꾸 지식교육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책을 추천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자녀를 위한 책에 대한 판단이 서야 하는데, 부모 스스로도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어느 한 작가가 쓴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다락을 정리하다가 어머니가 젊었을 때 읽은 소설책을 발견했는데, 어머니가 밑줄을 친 내용을 보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독서교육입니다. 선배, 부모 세대가 읽었던 책을 접할 때 얻는 감회, 이런 걸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디지털 매체는 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책은 전원을 킬 필요도 없이, 인내를 가지고 우리를 마냥 기다려주는 존재입니다.

 

교육은 ‘발견, 연결, 갱신’의 세 가지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결하는 능력은 곧 ‘상상력’이라고 지적하셨는데,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문학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연결’이니까요. 은유라고 하면, 두 개의 유사한 특성을 가진 다른 두 사물을 붙인 것, 아닙니까? 사랑은 장미라고 말하죠. 단어로만 보면 전혀 상관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두 단어를 연결하면 새로운 의미가 탄생합니다. 역설, 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게 바로 문학입니다. 창조력,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한 줄이라도 시를 읽게 하고 글을 쓰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만나고-도정일교수

 

 

책을 대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무엇일까요?


단순한 정보 습득을 떠나서, 책이라는 형태로 온 타자를 나의 대화 상대로 삼아서 “한바탕 춤을 춰야지” 이런 태도가 중요합니다. 춤 한 번 춰보자라고 생각하면, 한 줄 한 줄이 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을 많이 읽고 전부를 읽는 게 다가 아닙니다. 한 줄, 한 편을 읽어도 좋으니까 ‘이 대목 하나랑 춤을 춰봐야겠다’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권의 책에서 좋은 글귀 하나만 발견해도 하루가 즐겁지 않습니까? 춤은 즐겁게 때문에 추는 거잖아요. 내 영혼을 춤추게 하는 문장, 글을 찾아냈다는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지금, 교수님께서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지금 방식대로 산다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너무도 암담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옛날에 중국에서 황사가 오면 자연현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야단법석입니다.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산업화 문제와 많은 것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죠. 점점 사회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 세계를 지금의 방식대로 운영했을 때,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당대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를 살 세대를 대신해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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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도정일 저 | 문학동네
도정일은 “지금쯤 우리는 쓰잘데없어 보이는 것들, 시장에 내놔봐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 돈 안 되고 번쩍거리지 않고 무용하다는 이유로 시궁창에 버려진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기억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그것들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다시 챙겨봐야 할 때가 아닌가?”라며 1권 표제의 의미를 전한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서는 전방위 인문학자의 사상 전반이 총론처럼 제시된다. 그가 은연중 제시한 ‘목록’들이 앞으로 연이어 출간될 ‘도정일 문학선’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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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도정일 저 | 문학동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에서는 그의 ‘목록’ 중 일부가 좀더 구체적으로 집약/제시되고 있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라는 표제는 ‘이야기로 아들을 키운 여자’인 괴테의 어머니 회고록에서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책과 이야기의 개인적?사회적 효용을 ‘문학적’으로 역설하는 두번째 산문집은 저자가 문화운동가로서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을 일으키고 ‘기적의 도서관’을 짓는 일에 몰두해온 맥락과 함께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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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로고에 커피가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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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련 교수(좌), 장동련 교수(우)

 

경영과 디자인,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미묘하게 다른 분야다. 흔히 쌍둥이라고 하면,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많을 거라 예상하지만 두 교수는 다른 점도 많다고 한다. 단적인 예로, 스포츠팀이나 스포츠 선수를 응원할 때 장대련 교수는 주로 강한 팀이나 강한 선수를, 장동련 교수는 그 반대를 선택했다.

 

아무리 30분 차이를 두고 한 배에서 난 쌍둥이라고 해도, 이렇듯 ‘다름’은 존재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기에, 서로 잘 조화를 이룬다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트랜스 시대의 트랜스 브랜딩』이 이를 의도했다. 한때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활약하는 장동련 교수. 경영학을 전공하고 학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장대련 교수. 두 교수의 관심 분야는 ‘브랜딩’으로 모였고 시너지 효과를 내며 책으로까지 나왔다.

 

브랜딩은 학자마다 정의하는 내용이 다르겠지만, ‘~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삼성답다, LG답다, 현대답다, 하고 할 때의 ‘다움’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브랜딩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하면, 그 기업에는 미래가 없다. 해당 브랜드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면, 고객이 그 제품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매체와 소비자의 기호가 다양해지는 이 시대에 브랜딩을 잘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케팅 일선에서는 “예전에는 TV와 신문에만 광고하면 끝났는데…”하는 볼멘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한다.

 

『트랜스 시대의 트랜스 브랜딩』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트랜스 시대라고 진단한다. 트랜스란 단순히 변한다는 뜻을 넘어 초월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 매체 환경은 급격히 변했다. 케이블TV, 인터넷, SNS, 모바일 등 새로운 매체가 한해가 멀다 하고 등장했다. 당연히 시장 환경도 급변했다. 급속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라진 기업도 많다. 이 책에서 두 저자는 빠르게 변하는 시장과 매체 환경에서도 성공적으로 브랜딩을 실천한 기업 사례를 분석했다. 스타벅스, 이케아 등 외국 기업에서부터 현대카드 등 한국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책은 브랜딩에 성공한 이유로 2F를 꼽는다. Fit, Flexible을 합쳐 2F라 부를 수 있는데 기업이 가진 본질은 지키고,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연구자는 다르게 생각하는 게 필요

 

어떻게 책을 냈나? 계기가 궁금하다.

 

장동련 : 오랫동안 연구 분야가 달랐지만,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브랜드였다. 장대련 교수가 마케팅, 나는 디자인을 연구하는데 둘을 연결하는 고리가 브랜드였다. 일상적인 브랜드보다는 새롭고, 현대 환경에 잘 대처하는 브랜드를 대상으로 삼았다.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책을 함께 내보라고 권유를 하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썼는데, 이 책은 4년 동안 준비했던 성과다.

 

장대련 :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지향하고자 하는 게 공교롭게도 같았다. 다른 게 합쳐졌을 때 기존 영역을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걸 구현했다. 마케팅과 디자인을 합쳤을 때 이 책이 나온 것처럼 말이다.

 

함께 책을 쓰면서 부딪친 부분은 없었나?

 

장동련 : 약간 충돌이 있긴 했지만 견해를 확장하고 각 견해를 연계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모든 연구는 다양한 견해가 필요하다. 다양한 견해를 연계할 수 있는 ‘브리지’를 찾다 보면, 심화한 연구로 이어진다. 마케팅과 디자인, 브랜딩 간 새로운 융합이 트랜스 브랜딩이 아닐까? 연구자에게는 같은 생각보다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장대련 : 나는 경영학, 장동련 교수는 디자인 전공인데 경영학은 논리, 이성을 강조한다. 디자인은 직관, 감성을 좀 더 강조하고. 결국은 다 필요하다. 독자 입장에서도 모든 게 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를 바라진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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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련 교수

 

트랜스 브랜딩은 비용 절감에도 유리

 

『트랜스 시대의 트랜스 브랜딩』은 기존 브랜딩을 다룬 책과는 어떤 부분이 다른가?

 

장동련 : 브랜드 회사를 직접 운영도 해 봤고, 수석 자문 위원도 해봤다. 기존 브랜딩은 관리 위주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통제다. 그래서 브랜딩 프로세스가 제한되어 있다. SNS나 빅데이터나, BTL(Below The Line) 등 상호 소통이 많은 미디어에서는 기존 브랜딩 프레임이 역부족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 책을 썼다. 변화하는 환경에 통제가 아니라 변화에 맞춰 함께 갈 수 있도록 기업의 동반 프레임을 마련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파격적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장대련 : 시중에 Leading by Reading이라는 책도 있던데, 이 책은 Leading by Transbranding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브랜딩은 정적인 게 아니다. 미래를 지향하면서 동태적이고 역동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향하면서, 많은 기업과 많은 마케터들이 헤맨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미래 지향적으로 브랜딩을 할 수 있는가 지침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트랜스 브랜딩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 기업은 어느 수준인가?

 

장대련 : 삼성, 현대 등 일부 기업은 잘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세계 유수 기업이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하는 관행이 남아 있다. 한국인에게 와 닿게 하면서 세계인에게까지 와 닿게 하는 건 영원한 숙제다.

 

장동련 : 책으로도 다뤘지만 현대카드가 잘하고 있다. 콜라보레이션, 코퍼레이션으로 등으로 카드회사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전환된 건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IMC를 우리나라가 도입한 것처럼, 트랜스 브랜딩 개념도 한국 기업이 도입하지 않을까?

 

트랜스 브랜딩을 고려하면 발생하는 게 비용 문제일 것 같다. SNS에서 확산을 목적으로 영상을 만든다든지, 유명 아티스트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데는 상당한 비용이 들 텐데.
 
장대련 : KPI 기준을 무엇으로 사용할 것이냐가 문제다. 단순한 KPI로는 무리가 있고 트랜스 미디어에 걸맞는 새로운 KPI가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때때로 시장 점유율과 브랜드 선호도가 다를 때가 있다. 우리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평가 지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장동련 : 트랜스 브랜딩이 완전히 새로 하는 걸로 오해할 수 있는데, 아니다. 일부는 새롭게 시도하고 일부는 기존에 잘 된 성과를 하나의 시스템으로써 의지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낭비를 줄일 수 있다. 핵심은 2F다. 잘 되는 요인은 계속 유지 관리하고 어떤 부분은 상황에 맞게 확장 또는 유기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장대련 : 기존에는 광고할 때 TV, 신문, 라디오, 잡지 등 4대 매체만 생각했다. BTL 매체를 보면 비용이 저렴하다. 트랜스 브랜딩은 요즘처럼 4대 매체를 외면하는 소비자에게 어떻게 하면 다가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 고민 끝에 나온 철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타벅스 로고 변화는 기업의 브랜드 리더십을 나타내

 

책에서 여러 기업을 분석했다. 놓치지 않아야 할 꼭 한 가지 사례만 꼽는다면?

 

장동련 : 유니클로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기업이면서도, 유니클로는 항상 최신의 감수성을 부여한다. 최신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하면 유니클로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유니클로는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라이프브랜드로 각인되어 있다. 현대카드도 마찬가지고.

 

장대련 : 스타벅스 사례가 중요하다. 브랜드도 진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에는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VSA(Vison Strategy Action)라고도 한다. 비전과 전략, 액션. 많은 사람이 간과하겠지만 스타벅스 로고에서 커피라는 단어를 뺀 건 정말 과감한 액션이다. SNS가 활성화되면서 브랜드 주도권을 소비자에게 빼앗긴 셈인데, 브랜드 주인이 주인 의식을 갖고 주도해야 한다. 이러한 브랜드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스타벅스다. 커피라는 단어를 빼면서 스타벅스가 다른 사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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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련 교수

 

트랜스 브랜딩을 위해 고려할 게 SNS다. 많은 기업이 악성 루머나 악성 클레임 등으로 SNS에서 곤혹스러워 하기도 한다.

 

장동련 : 중요한 점은 진정성과 투명성이다. 과장광고가 문제 아닌가.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소비자를 파트너라 생각하고 브랜드의 소유권은 모두에게 있다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장대련 : 소비자도 다 안다. 브랜딩은 장기적으로 해야 한다. 하루아침에 안 된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데 요즘 청춘은 어떤가.

 

장대련 : 조심스러운데. 대학생활을 즐겼으면 한다. 너무 스펙 쌓기에 열중, 연연한다. 대학 들어와서 예전 선배에 비하면 여유가 없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장동련 : 비슷하게 생각한다. 나는 현업에 오래 있다 학계에는 뒤늦게 온 편인데 홍대 왔을 때 맨 처음 맡았던 과목이 디자인 경영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고 어떻게 가치를 부각하는지에 관한 과목이다. 수업에서 창업을 추진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학교 졸업하고 창업한 친구도 있고. 그중에 몇몇은 200명이 넘는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도 있다. 지금 학생들에게 고민이 많다. 틀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한다. 학생에게 권유할 때 부모와 소통할 수 있는 안목도 키우도록 말한다. 자신의 상품 가치를 어떻게 하면 높일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유학도 권하기도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스펙이 목적이 아니다. 자신만의 깨달음을 높이는 길이다. 어떤 진로를 택하든 개성 있게 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계획은?

 

장대련 : 쌍둥이다 보니, DNA가 비슷하지 않겠나. 나도 장동련 교수처럼 예술적인 본성이 있었는데 그동안 교수를 하면서 키우질 못했다. 지금 만드는 영화도 그렇지만, 다양한 시행을 해 보고 싶다. 그게 착오가 될 수도 있겠다. 웹툰도 하나 그리고 싶다. 이렇듯 다양한 콘텐츠로 소통하려고 한다.

 

장동련 : 장대련 교수와는 반대로 마케팅으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기업을 위한 세부적인 모델을 개발하는 게 목표다. 연구가 연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활용해서 인정도 받고, 기업도 도입하고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두 사람 이름으로 나오는 책을 또 쓸 계획은 없나?

 

장동련, 장대련 : 이 책이 성공하면 2.0이 나오지 않을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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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시대의 트랜스 브랜딩장동련 장대련 공저 | 이야기나무
휴대전화기가 인터넷과 결합하고 텔레비전이 쇼핑과 결합하는 세상. 그리고 이러한 이종 결합이 더는 새롭지 않은 시대. 이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미디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서로 맞물리고 있는 작금의 시대를 장동련, 장대련 교수는 ‘트랜스(Tarns)’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이 책은 ‘트랜스’의 개념 정의와 특징 그리고 트랜스 시대에서 생존해야 하는 기업의 브랜드 전략을 제시한 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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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진 감독 “내일이 예상되는 삶은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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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계의 마이너스 손, 희귀음반 전문 제작자로 이름을 날렸던 인재진 감독. 그는 어떻게 아시아 최고의 재즈 페스티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기획하게 됐을까. 때는 2003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인재진 감독은 친구의 부탁으로 한 신문사에서 주관한 문화기획 관련 강의를 하게 됐다. 당시 재즈 페스티벌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인 감독은 페스티벌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그로부터 두어 달 뒤, 수강생이었던 가평군 공무원 이문교 주사가 인재진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재즈 페스티벌을 하고 싶은데, 예산이 얼마나 들까요? 가평에서도 재즈 페스티벌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인 감독의 대답은 간단했다.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인재진

 

 

두 사람은 재즈 페스티벌을 열 공간을 찾기 위해, 가평 공설운동장을 시작으로 축구장, 고수부지 등을 열심히 돌았다. 그러나 페스티벌을 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었고, 결국 마지막 후보지였던 자라섬을 찾았다. 입구에는 경비행장이 있고 골재용 모래를 채취하는 허허벌판 황무지였던 자라섬. 비가 오면 잠기는 섬 ‘자라섬’에서 인재진 감독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푸른 잔디 위에 펼쳐진 재즈 페스티벌이 머릿속에 그려진 것.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2004년 제1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핀란드의 ‘포리 재즈 페스티벌’을 부러워만 했던 인재진 감독은 그에 버금가는 아시아 최고의 재즈 페스티벌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난해까지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방문한 누적 관객은 총 140여만 명이다.

 

해외 음악계에서는 ‘JJ’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인재진 감독은 현재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 페스티벌 감독이다. 대학로에서 재즈 전용 극장 ‘딸기극장’을 운영하며, 자칭 ‘희귀음반’을 제작했고, 한국 재즈 아티스트를 해외에 알리는 일도 적극적으로 해왔다. 그는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남편이기도 하다. 나윤선과 결혼한 일을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손꼽는 인재진 감독은 8년 전, 가평으로 이주해 텃밭 가꾸기와 요리를 즐기고 있다.

 

 

Nothing ventured, nothing gained

 

청춘은찌글찌글한축제다

8년째 가평에 살고 있다. 서울에서의 일상과 어떻게 다른가?


서울과 거리가 있지만 오히려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불필요한 인간관계가 정리된 것도 좋은 점이다. 멀리 산다고 생각하니까, “한 번 놀러 갈게”라고 말했어도 오는 경우가 잘 없다(웃음). 진짜 오는 사람은 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항상 권하는 것 중 하나가, 여러 가지 여건이 허락되면 시골에 사는 것도 좋다는 거다. 낚시를 좋아하는데, 집 밖에 어디를 가도 낚시를 할 수 있다. 일산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거 생각하면, 비슷한 거리다.

 

첫 책을 썼다. 그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이야기는 많은 언론에서 다뤘지만, 인재진 감독의 사적인 이야기는 처음 공개했다.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 지지부진하게 작업하다가, 마감을 앞두고 폭풍 집필했다. 막상 책이 나온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나중에 다시 내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도 같고. 기회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팔린다면 낼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제목이 『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이다. ‘찌글찌글’이 썩 좋은 어감은 아닌데, 왜 청춘은 찌글찌글한가?


평소에 내가 많이 쓰는 말이다. 내가 워낙 찌글찌글한 인생을 살아와서 그렇다. 또 재즈와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 ‘찌글찌글하다’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재즈 아티스트들의 삶에 굴곡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누구나 공감할 거다. 영국의 파노니카 드 퀘닉스워터가 펴낸 『세 가지 소원(Three Whishes)』를 보면, 재즈 아티스트 300명의 소원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비밥 재즈를 창조한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의 첫 번째 소원은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주하지 않았으면’하는 것이었다. 모던 재즈 트럼펫의 1인자 마일즈 데이비스는 ‘백인이 되는 것’을 첫 번째 소원으로 꼽았다. 재즈계에 업적이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들도 지극히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의 찌글찌글함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순간에 재즈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곡을 만들어 낸 거다. 청춘도 같지 않을까?

 

대학 때는 심각한 아웃사이더였다고 들었다.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경찰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영문과를 전공하게 됐다. 재수 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 정도 성인으로서의 삶을 누려서 그런지, 학교생활이 다 시시하게 느껴졌다. 졸업여행, MT도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대학 때 열심히 했던 건 밴드부 생활뿐이었다.

 

밴드부에서의 포지션은 무엇이었나?


음악을 좋아했지만 음악적 재능은 없었다(웃음). 유일하게 잘한 건 연주자 섭외였다. 당시 고려대와 연세대의 경기가 있을 때면 대규모 응원전이 있었는데, 응원에 필요한 음악을 취주악부가 담당했다. 대중가요를 연주하는 밤무대 뮤지션을 섭외해야 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카바레나 스탠드바에 찾아가 뮤지션들의 무대를 보는 게 꽤 흥미로웠다. 좁은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내가 친화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뮤지션들과 친해지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생 때부터 섭외의 비결을 터득한 건가?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술을 잘 마시는 것도, 붙임성이 뛰어나지도 않다. 하지만 누구나 코드가 잘 맞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 깊게 교류하는 편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같은 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공감대가 있지 않나? 학생 때 섭외를 잘했던 건, 스무 살 남짓 어린 나이에 밤무대를 뛰는 뮤지션을 찾아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었으니까(웃음), 귀여워해줬던 것 같다.

 

음악에 심취한 대학생활을 보냈으니,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을 것 같다. 아티스트로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나?


전혀. 예술은 재능이 없는 사람이 하게 되면 심각한 민폐가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민폐고, 자기 자신한테는 너무 큰 불행이다.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고, 전혀 욕심이 없다.

 

대학 졸업 후에는 PD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취업 준비도 했고, 실제로 직장 생활도 했다. 그런데 상사를 보면서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5년 뒤, 10년 뒤 내가 상사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니 답답했다. 미래가 예측 가능한 삶은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겨날지 모르는 게 설렌다. 멋진 일 아닌가?

 

막상 좋아하는 음반 제작, 공연 기획을 시작한 후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7년간 신용불량자로 살기도 했는데.


인형극 <손오공 대모험>의 참패로 7년간 신용카드는 물론 생활비도 없이 빚에 쫓겨 사는 우울한 시절이 있었다. 웃지 못할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카드 값이 밀렸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독촉 전화가 올 때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등(웃음). 전기가 끊긴 집에서 촛불을 켜 놓고 3개월간 살기도 했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3회까지는 금전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 때 깨달은 게 “부채(負債)는 성자(聖者)의 영혼도 좀먹는다”는 말이다. 지금도 그 말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실패의 기록들이 지금은 큰 자산이 됐을 것 같다.


물론이다. “Nothing ventured, nothing gained”라는 말이 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실제로 내가 힘들었던 일을 다 열거하자면, 책에 나온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한 시점에 있어서는 전혀 쓸모 없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굉장히 많은 응용력이 생겼다.

 

인재진

 

 

Before 나윤선, After 나윤선


일에 대한 만족감이 100%라고 했다. 90%도 쉽지 않은데, 100%라니.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시작이 쉽지만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100% 만족감을 느꼈나?


사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확신했다. 핀란드의 ‘포리 재즈 페스티벌’과 같은 유사한 전례를 본 적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변화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1,2년 더 늦게 반응이 왔다. 페스티벌이 4회차가 됐을 때, ‘이거 정말 멋진 일이구나’를 확신했다. 나처럼 흥미진진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까? 별로 없는 것 같다.

 

정년 퇴직을 앞둔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많이 살 것 같다.


부러워한다. 예전에는 나보고 다 건달이라고 그랬으니까(웃음). 지금은 너무 부러워한다.

 

타고나길 긍정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너무 긍정적이라서 문제다(웃음). 실패를 하더라도 심하게 좌절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다. 너무 긍정적이면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기도 하는데, 나는 너무 긍정적이다(웃음). 누구나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실제로 무궁무진한 변수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작은 일로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하루하루 살면서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닐까?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과 결혼한 일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결혼 전과 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변했다. 아내를 통해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됐다. 아내는 항상 내 편이다. 칭찬을 많이 해준다. 나 역시 늘 아내의 편이 되려고 한다. 아무래도 같은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서로의 일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고 상보작용이 엄청나다. 아내가 국제 무대를 많이 서니, 페스티벌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나는 아내가 활동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부분들이 있고. 비즈니스적인 것들도 잘 맞지만, 성격적으로도 잘 맞는 파트너, 베스트 프렌드다(웃음).

 

아내에게 가장 고마운 일은 무엇인가?


우선 나랑 결혼해준 것 자체가 고맙다(웃음). 결혼할 당시만 해도 내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울 때였다. 미래가 불투명했지만 아내는 선뜻 나와 결혼을 해줬다. 늘 나에게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서울을 떠나 가평으로 이주할 때도 나를 믿고 따라왔다. 결혼 후, 우리는 모든 것이 좋아졌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엄청난 시너지가 있었다.

 

아내가 해외 무대에 많이 서다 보니, 1년 중 함께하는 시간은 5개월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더욱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것 같다. 아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일찍 퇴근하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아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다. 지금도 항상 신혼 느낌이 난다. 아내가 한국에 있는데, 내가 해외 출장을 가는 경우가 생기곤 하는데 그럴 땐 정말 싫다(웃음).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 인생이 ‘before 자라섬’ ‘after 자라섬’으로 나뉜다고 하지만,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before 나윤선’ ‘after 나윤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인재진

 

 

백발 노부부 관객 볼 때, 행복감 느껴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시작으로, 한국에도 페스티벌이 붐을 이루고 있다. 언제까지 이 붐이 이어질 것으로 보나?


5,6년 전부터 붐이 일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발점이 자라섬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적으로 보면 거스를 수 없는 트렌드다. 향후 20, 30년까지는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페스티벌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여가를 보낼 다양한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페스티벌은 좋은 대안이다. 캠핑 열풍이 일어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페스티벌을 즐기는 관객의 연령대도 많이 높아졌다.


확실히 그렇다. 머리가 백발인 노부부가 페스티벌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그 자체가 멋진 그림이다. 점점 연령대가 올라가고 있다. 실제로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의 유명 페스티벌과 비교해도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음악을 즐기는 차원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축제로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다. 해외 연주자들이 자라섬에 방문하면, 깜짝 깜짝 놀란다.

 

현재 11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아티스트 섭외, 스폰서십과 관련된 미팅을 하는 단계다. 아티스트 섭외는 초기에 비해 무척 수월하다. 해외의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모두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무대에 서고 싶어 한다.

 

언제까지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수장 역할을 할 계획인가?


잠정적으로는 20회까지만 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는 또 다른 멋진 일을 하고 싶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이 일보다 훨씬 신나고 재밌는 일이 나타나면 그걸 선택할 거다. 지금은 자라섬보다 재밌는 일이 없어서, 여기에 몰두하고 있다. 10년 더 페스티벌을 만들면 더 재밌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인재진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꼭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명확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이름만 들어도 무엇을 하는 축제인지를 정확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먹거리다. 공연예술을 콘텐츠로 하는 축제라도 일정 수준의 먹거리를 갖추는 건 매우 중요하다. 셋째는 편의시설이다. 특히 화장실이 중요하다. 축제의 볼거리와 먹거리에 만족한다고 해도 화장실을 가기 위해 30분 이상 줄을 서야 한다면 그 축제는 끔찍하게 기억이 된다. 넷째는 연속성이다. 방문객이 다시 축제를 찾아올 수 있도록 미리 내년 행사 일정을 알려주는 게 좋다. 마지막은 조직의 항구성(恒久性)이다. 운영조직이 변함없이 축제 곁에 있어야 한다. 축제를 만드는 노하우가 전수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연속성이 있는 축제라도 절대 발전할 수 없다.

 

문화예술계에 관심이 많고, 공연기획자를 꿈꾸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첫째, 예술적 안목과 시장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것. 둘째,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출 것. 셋째, 자신의 가능성을 넓은 시장에서 펼치기 위한 외국어 능력을 키울 것. 넷째, 컴퓨터 3종 세트(엑셀, 파워포인트, 한글 등)를 최고 수준으로 다룰 것. 다섯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기 등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건 문화예술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다. 또 늘 긍정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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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인재진 저 | 마음의숲
여기, “미래는 예측할 수 없어 더욱 흥미진진하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자칭 흥행계의 마이너스 손, 민폐 마케팅의 시초라 부르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총감독 인재진이다. 자신의 20, 30대는 수많은 실패와 실수로 찌끌찌글했지만, 그 삶이 모두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인재진 감독. 그가 만들어 낸 위대한 실패의 기록이라고 말해도 좋을 에세이,<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 20년 전, 그는 국제적인 네트워킹이 전무했던 공연계에 뛰어들어 기획자로서 감당해야만 했던 삶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꿈에 대해 솔직하고 담백하게 펼쳐 놓았다. 이 책은 그의 즉흥적인 삶의 고군분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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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동구리 화가 권기수, 예스24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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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날을 맞아 예스24와 권기수 화가가 만났다. 권기수 화가는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가 그린 동구리는 한국화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평을 받으며 널리 사랑받았다. 동구리 모습은 누가 다가가도 부담이 없을 정도로 친근하다. 이러한 친근함 덕분에 권기수 화가는 여러 기업과 콜라보레이션 하기도 했다. 2014년 책의 날, 동구리가 등장한 곳은 기프트카드쇼핑백. 기프트카드쇼핑백 모두 책의 날을 기념해 스페셜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다.

 

 권기수 동구리

 

동구리 곁에 있는 누군가가 있다 

 

예스24와 어떤 계기로 콜라보레이션 하게 되었나요?

 

콜라보레이션은 작가가 직접 하는 게 아니라 기획하는 사람의 제안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제안을 받고 흥미로웠습니다. 책과 하는 프로젝트는 매력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독자가 봤을 때 내 작업 이미지와 책의 날, 온라인 서점을 연상하게 할 수 있는 걸 고민했어요. 동구리가 책을 읽는 모습을 경쾌하고 즐겁고 따사롭게 적용하는 데 포인트를 맞췄죠.

 

동구리 옆에 동물을 넣은 의도는?

 

엄밀히 말하면 자기 자신이에요. 나와 나를 투영할 수 있는 새로운 대상을 넣으려고 했는데요. 너무 똑같은 모습으로 하기보다는 좀 더 친근한 모습으로 접근해 보고 싶었어요. 반려라는 개념까지 도입한 건 아니지만 고양이나 강아지와 같은 친근한 모습을 빌려 왔어요.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굉장히 절친한 친구일 수도 있고요. 동물로 봐도 되고, 인격적인 존재로 봐도 됩니다.

 

왜 기프트카드와 쇼핑백이었나요?

 

처음에는 머그컵, 유리컵을 의논했어요. 그런데 머그컵, 유리컵은 다른 데서 많이 응용해봤어요. 좀 더 재밌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외국에서 쇼핑백 디자인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효과가 좋았습니다. 다만 상품으로 받기에 쇼핑백은 약소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은 있었죠. 그래서 반은 찬성, 반은 다른 걸 생각해 보자고 요청했는데요. 예스24에서 활용도가 높아 보인다고 제가 제안한 거 이상으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기프트카드랑, 쇼핑백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여러 기업과 콜라보레이션을 했습니다. 여러 기업이 동구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기획자 분들이 동구리를 여기저기 써먹을 데가 많아서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수년간 큰 기업에서부터 1인 기업까지 여러 기업체와 협업했는데요. 제 작품에 디자인적 성향이 강하게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디자이너가 레이아웃 잡기 굉장히 수월합니다. 어떤 디자이너는 아무 부분에나 넣어도 레이아웃이 맞아 들어가서 작업하기 편하다고 말하더군요. 나쁘게 보면 가벼워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술이라는 게 가볍든 무겁든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면 생명력이 길어지니까요.

 

예술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예술이 도 닦는 것처럼 뭔가 특별한 게 아니고요. 남들도 다 생각한 것을 표현까지 하면 예술이 아닐까 해요. 일반적으로 생각은 할 수 있지만, 표출까지 하지는 않죠. 독특한 사고를 한다든지, 기이한 삶을 사는 게 예술가가 아니라 머리에 있는 사고를 표출하면 예술가죠.


권기수 동구리

 

동구리는 슬픈 기호


동구리가 밝고 경쾌한 이미지인데요?

 

우선 저는 캐릭터라는 말보다는 기호나 심볼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동구리는 굉장히 슬픈 기호죠. 서커스의 피에로와 비슷해요. 피에로는 웃겨주는 역할이지만 행동은 굉장히 슬프죠. 넘어져야 하고, 뒤집어져야 하고, 실수를 많이 해야 합니다. 동구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역설적으로 행복을 전해 주고 있네요.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가 흘러가진 않지만, 결과가 나쁘진 않네요.

 

동구리 외에 다른 만들고 싶은 상징은 없나요?

 

원래 동구리와 어울리는 여러 가지 모양을 10개 이상 만들었어요. 팝 아트나 캐릭터 작업으로 흘러갈 우려가 있어서, 동구리만 남겼죠. 다른 도상은 항상 찾고 있는데, 쉬운 일은 아니에요. 아직은 동구리로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고요. 딱히 동구리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버리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순리적으로 좋은 영감이 떠오를 때가 오겠죠.

 

동구리라는 기호와 완전 딱 떨어지는 브랜드, 상표가 있을까요? 협업해 보고 싶은데, 아직 안 해 본 기업이 있다면?

 

브랜드를 가리진 않아요. 그 회사가 문화, 예술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봅니다. 예를 들어 철강 회사라고 해도, 미술을 사랑한다든지, 미술에 협찬한다든지, 운영진이 미술을 사랑한다고 하면 충분히 협업할 수 있어요. 선호하는 브랜드, 기준이 있다기보다는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와 그 회사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다만 제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콜라보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죠. 제 삶과 연결할 수 있는 회사라면 어느 회사든지 환영합니다.

 

6월에는 지방선거가 있는데요. 엉뚱한 질문이긴 한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이 콜라보를 제안한다면?

 

상당히 위험한 질문인데요. (웃음)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행동과 실천을 한다면 충분히 서로 도움을 나눌 수 있겠네요.

 

선거 벽보나, 홍보물에 디자인 요소가 너무 없지 않나요?

 

유권자의 상당수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드신 분이고요. 그분들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죠. 그분들은 형식 파괴를 싫어하지 않을까요? 예술에서는 형식 파괴가 중요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유권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포스터가 예술화되면 보수 정당이건 그렇지 않은 정당이건 유권자가 당황스러워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젊은 후보라면, 과감하게 시도를 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법 테두리 안에서 파격적인 걸 시도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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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보면 발전한 한국 예술계, 하지만...

 

권기수 화가의 작품 세계를 형성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많아요. 크게 보면 일상 모든 게 아이디어 소스죠. TV를 보다, 책을 읽다, 대화를 나누다, 고민을 하다 떠오른 모든 게요.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의 큰 원류는, 대학원 다닐 때 석사 논문 썼을 때에서 나왔어요. 조선 후기 중인 문화를 여항 문화라고 하는데요. 문학 쪽에서도 크게 다루는 분야이기도 하죠. 그때 작가를 연구하면서 작가의 희망이라든지 실천, 한계에 관해 고민했어요. 특히 한계에 관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상황이 지금에 제가 처한 상황과 많이 다르진 않아요.

 

중인이라면 주변인인가요?

 

주류 언저리에서 주류를 추종하던 사람도 있고요. 주류와 놀았던 사람도 있고요. 서얼들, 김정희의 후예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의학, 통역에 종사하던 전문직이었죠. 그때도 나쁘진 않았으나. 지금보다는 사회적 지위가 낮았죠. 공통점은 전문직에 있는 사람이 문화의 주춧돌을 형성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활발하게 사회 참여를 하고 후원을 해서 공유를 하면 문화계가 풍성해지는데요. 지금도 똑같아요. 금융위기 이후로 전문직 기반이 무너졌어요. 동시에 문화계도 힘을 많이 잃었어요. 조선 후기도 신분이 상승함과 동시에 중인들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오는 좌절이 있었고요. 지금 저도 많이 느끼고 있어요. 당시는 신분제에서 오는 좌절이라면 지금은 경제 활동에서 비롯되죠. 전문 지식인 사회가 풍성해지면 많은 사람이 문화적인 공유를 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경제 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네요.

 

작품 활동을 한 지 20여 년이 되어가는데요. 그간 예술계 변화를 어떻게 보나요.
 
20년을 놓고 보면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풍성해졌습니다. 1990년대 초반과 지금 미술 자본력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커졌어요. 다만 조금 줄여서 보자면, 2000년대 중반하고 지금은 다르죠. 지금은 암흑기에 가깝습니다.

 

날이 풀리면서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는데요. 미술관, 갤러리에 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 듯합니다. 미술 감상할 때 요령을 알려 주세요.

 

누누이 강조하는데요. 미술 감상은 돈이 안 들어요. 옷을 차려입을 필요도 없고요. 클래식 공연 갈 때, 재킷을 입고 구두 정도는 신어야 어색하지 않잖아요. 미술 감상할 때는 슬리퍼 끌고, 추리닝복 입어도 아무도 말리지 않아요. 몇몇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 외에는 90~95%는 무료이고요. 입장료가 있더라도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이죠. 만 원 넘는 전시는, 비용 많이 든 전시에요. 사전 교육도 필요 없고요. 보고 싶은 거 보고, 이해 안 되는 건 넘어가면 되고요. 어떤 문화 장르보다도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인데. 거의 안 가요. 허허. (웃음)

 

책의 날 아마도 이 책을 읽을 것


예전에 한 매체에서 세월이 흘러가면서 느끼는 고민에 관해 말했죠. 최근 고민은 무엇인가요.

 

요즘 뿐만 아니라 계속 하는 고민은 역시 '돈'이에요. 예전에는 예술 하는 사람이 돈 이야기만 꺼내면 분위기가 싸해지는데. 사실 예술만큼 돈이 필요한 분야가 없어요. 옛날에는 돈 없어도 할 수 있는 게 예술이고 예술가는 돈을 염두에 두면 안 된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예술은 돈 없으면 못해요. 한 단계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장 장악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 작가가 알려지기 위해서는 작가의 자본력이 아니더라도 작가를 지원해주는 자금력이 있어야 하죠. 예술은 자본의 꽃이에요. 자본이 열악한 시대에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예술이 꽃피지 않았습니다. 자본이 축적되어야만 예술이 활성화될 수 있어요. 현재 한국 미술계는 자본이 전혀 축적되지 않았어요. 많은 작가가 생계뿐만 아니라 작업 자체를 힘들어합니다. 아이디어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선 신의 영역이라면, 자본은 인간의 노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데, 이 부분이 힘들어요. 자료마다 다르긴 하지만, 3만 불 이상 정도를 미술 시장이 커가는 시기로 예상합니다. 몇 년 전에는 조만간 3만 불이 된다고 장밋빛 전망이 나와서 기대했는데요. 지금은 과연 그 때까지 얼마나 많은 작가가 버틸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죠. 버티는 게 다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버팀의 미학이네요.

 

기다림 끝에는 뭐가 있을까요? 죽림칠현을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친 한 가지로 꼽기도 했는데요. 죽림칠현처럼 유유자적하는 삶을 꿈꾸나요?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겠지만요. 그런데 죽림칠현은 사실 신화입니다. 그렇게 신화화할 존재는 아니에요. 그 중에는 아사한 사람도 있고 변절해서 속세로 돌아온 사람도 있어요. 결말이 아름답지는 않아요. (웃음) 이야기로 만들다 보니 7명의 신선, 이런 개념이 됐지만요. 사실 죽림은 또 다른 현실 생활입니다. 거기서도 새로운 덫이, 절망이 존재해요.

 

앞으로 계획은?

 

작업을 묶어서 이미지북을 낼 계획입니다. 나름대로 여러 계획이 있는데. 살아 보니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계획을 잘 안 세우려 해요.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더 즐거운 게 튀어 나오더라고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계획은 어느 순간부터 안 잡고 있어요. 원래 꿈도 화가가 아니었어요. 과학자가 어린 시절 꿈이고 대학에서는 록커였죠. 이렇듯 희망대로 되진 않더라고요.

 

4월 23일은 책의 날인데요.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중고등학교 때는 교과서 이외에는 본 책이 거의 없었죠. 그래서 대학 때 책 읽기가 힘들었는데요. 20대, 30대가 지나고 40대가 되면서 책의 중요성을 절감해요. 경제적으로 봤을 때, 책을 읽는 게 저투자에 고효율인 학습입니다. 여행도 좋고, 토론도 좋지만 책 읽는 게 손쉽게 할 수 있고 효율도 높아요. 책은 보통 저자가 몇 달에서 몇 년을 준비해서 쓰지 않나요. 책 읽는 건 몇 시간에서 며칠이면 다 읽어요. 비용도 10,000~20,000원 사이죠. 이 돈으로 몇 달, 몇 년 고생한 분들의 지식을 취할 수 있잖아요.

 

책의 날, 독서 계획이 있나요?

 

『총균쇠』를 사 놓고 몇 페이지 읽다 못 읽고 있어요. 그 책을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다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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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뉴욕은 세계의 꿈이 모여드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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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학자 마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는 5단계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생리적인 욕구, 안전 욕구, 소속과 애정을 바라는 욕구, 자존감, 자아 실현의 욕구가 그것이다. 마슬로우 이론에서 특이할 점은 각각 욕구가 평등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욕구 간에는 위계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 생리적인 욕구가 가장 하등하고 이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를 충족할 수 있다고 본다.

 

마슬로우 이론은 개인을 대상으로 했지만, 사회에도 그의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며 달려왔다. 생계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황. 그 이후를 고민할 시점이다. 이 고민에 대한 답은 ‘문화예술’이 쥐고 있다. 그래서인지 20세기에 비하면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많이 풍성해진 느낌이다. 전시관과 박물관이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의 중소도시에도 생기고, 뮤지컬과 공연 시장도 커졌다. 싸이는 글로벌 스타로 우뚝 섰고 한류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도 수출된단다.

 

그럼에도 아직은 미진하다. 예술계에서는 백남준 이후로 세계적인 한국인 예술가가 찾아 보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예술가는 많은데, 그들을 알릴 기회가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 예술가를 세계에 널리 알리려는 시도를 예술인들이 하고 있다. 손보미 대표가 이끄는 프로젝트AA도 그 중 하나다. 프로젝트 AA(Asia Arts)는 문화예술 마케팅 기업을 표방하며 전시에서부터 교육에 이르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소녀시대의 <I got a boy> 무대 의상을 김지희 동양 팝아트 화가와 협업해낸 게 AA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다. 

 

손보미

 

손보미 대표에게는 이번에 나온 책 『뉴욕 아티스트』가 두 번째 책이다. 그녀가 쓴 첫 번째 책인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여행』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번 책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봉사활동과 예술, 하나로 묶기엔 다소 어색하기도 하다. 사실,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 사이에 저자 인생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이는 뉴욕으로 가다

 

첫 책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봉사여행』과 두 번째 책인 『뉴욕 아티스트』사이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근황을 말씀해 주세요.

 

대학을 좀 늦게 졸업했어요. 보통 4년이면 졸업하는데 저는 휴학하고 전공을 3개씩 하느라 7년 6개월 다녔네요. 졸업 후에 마케터가 적성에 맞겠다 싶어서, 다국적 기업에서 생활 용품 마케팅을 했어요.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세계경제포럼에 초대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분들이 사업하는 걸 추천하시더라고요. 그냥 하신 말씀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주변에 물었죠. 100명을 쫓아다니면서 제가 사업에 어울리는지, 주제는 뭐가 좋을지를요. 신기하게도 80퍼센트 이상이 사업을 하는 게 좋겠고, 문화 예술이 어울리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마케팅에서는 소비자가 원하는 게 최고라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원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저도 사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경영학이 전공이잖아요. 다른 전공 2개는 무엇인가요?

 

과학이랑 영문학이에요. 똑똑해서 공부한 건 아니고요. 제가 처음에 배우는 속도는 느려요. 끝까지 하는 인내, 끈기는 있어요. 졸업하기 위해 논문도 모두 썼죠. 수준은 좋지 않고, 겨우 겨우. (웃음)
 
『뉴욕 아티스트』를 쓴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무리 대학을 오래 다녔다고는 해도 문화 예술 쪽에 쓸 시간은 부족했어요. 사업 하면서도 6개월 정도는 뉴욕에 다녀 오고 아트페어가 열리는 홍콩, 바젤도 돌아다녔죠. 그래도 집중해서 시간을 쓰고, 전문가에게 얘기를 많이 들어봐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사업을 한 지 6개월 됐을 때, 너무 힘들더라고요. 혼자 펑펑 울기도 했고. 전환점이 필요했어요. 그렇게 뉴욕에서 100명의 사람을 만났어요. 미술, 무용, 음악, 축제 기획하는 사람 등 다양하게 만났어요. 예술가 뿐만 아니라 기획하는 디렉터, 갤러리 운영하는 분, 예술 관련 사업하는 분도 만나면서 왜 예술을 하는지, 예술이란 무엇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도 했고요. 사업 상담도 받았어요. 뉴욕의 트랜드가 뭔지 알아보기 위해서 가기도 했고요.

 

100명을 만났지만 책에는 30여 명의 아티스트가 실렸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책에 실을 아티스트를 선정했나요?

 

다양한 사람을 만났는데, 책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책은 전문가가 충분히 쓸 수 있고. 뉴욕의 재밌는 걸 소개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고요. 저 같이 뉴욕도, 아티스트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어요. 힘들 때 찾았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고자 했어요. A부터 Z까지 아티스트 이름을 적은 게 아니라, 제가 그 사람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알파벳순으로, 단어로 적었어요. 예를 들어 처음이 accept인데요. 부족한 걸 느꼈지만 인정하고 시작하는 걸 여행으로 배웠거든요. 이런 간단한 메시지를 정리하다 보니 총 30여 분을 다루게 된 거죠. 어떤 챕터에서는 2~3명을 이야기했고요.

 

뉴욕은 어느 정도 머물렀나요?

 

2년 동안 3번 갔어요. 짧게는 1주일 간 적도 있고, 본격적으로 책을 써야겠다고 해서 갔을 때는 50~60일 정도 머물렀죠. 처음에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컨텍 포인트가 없어 한 사람도 못 만난 적도 있었어요. 나중에는 인터뷰한 사람이 소개를 해 주기도 하고, SNS 통해서도 연락이 닿아 하루에 5~6개 인터뷰를 했어요. 마지막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미팅을 했을 정도에요. 예전에는 뉴욕에 가서 맛있는 걸 많이 먹었는데, 오히려 살이 빠져서 돌아온 상황이었죠.

 

『뉴욕 아티스트』는 어떤 독자가 읽으면 좋을까요?

 

예술을 잘 모르는 분이 읽으도 좋겠어요. 예술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대중적인 책이구나, 하고 실망할 수도 있어요. 직장 일이나 하는 일이 정해져 있어서 새로운 기분 전환이 필요하거나 대리로 어딘가를 여행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하고 싶은 분이 읽으면 좋을 것 같고요.

 

질문했던 그녀, 이번에는 답할 차례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뉴욕에서 예술가, 또는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 100명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뉴욕에서는 그녀가 인터뷰어였다면, 이번에는 인터뷰이가 되는 자리였다. 그녀가 뉴욕에서 던진 질문을 이 자리를 빌려 그대로 던져봤다.

 

손보미 저자에게 뉴욕은, 그리고 서울은?

 

뉴욕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하는 바와 일맥상통 해요. 앨리샤 키스의 노래에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저에게도 꿈을 발견하게 하는 도시에요. 살인적인 물가, 집값에도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고통스러워 보이는 생활고도 있지만, 꿈을 위해 치열하게 사는 젊은 사람이 많아요. 그 사람의 열정을 보면 전 세계의 꿈이 모여드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서울은 제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고향과 같은 베이스.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어릴 때 전학 와서 그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죠. 아무리 뉴욕을, 전세계 27개 국을 돌았지만, 결국은 서울로 오게 되더라고요. 서울을 베이스 삼아 글로벌한 일을 하고 싶어요. 서울 없이는 못 살죠. 사랑하는 도시고요.

 

꿈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꿈은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에요. 꿈이 없으면 하루 하루가 무의미해지고, 행복해도 순간의 즐거움으로 끝날 수 있어요. 꿈이 있다면 뭘 해도 기분이 좋죠. 뉴욕에 조그마한 오피스가 있어요. 한국에 전시를 한두 번 해 보면서 뉴욕에서 전시도 해 보고, 한국이나 아시아의 아티스트를 뉴욕으로 진출시킨다든지 하는 중간 다리를 하는 게 목표죠.

 

일을 사랑하세요?

 

뉴욕에서 “Do you like your job?”이라고 질문을 했거든요.  “I love my job”이라는 답을 많이 들었어요. 소득이 높다고 해서 일을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일 자체가 즐겁대요. 일을 꿈을 위한 단계나 과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요. 일이 꿈 자체일 수도 있죠. 일이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운 생활이에요. “가족 좋아해, 사랑해?” 하면 당연히 YES가 나오는 것처럼요. 그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못했는데요. 저렇게 답하는 사람을 보면서 가족을 사랑하듯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일을 해요. 사실, 기본적으로 일을 좋아해요. 회사 다닐 때도 일을 즐겁게 했어요. 다만 조직이라는 걸 처음 경험해 보니 직장 오춘기, 사회 생활 적응기 같은 걸 겪었죠. 어떤 프로젝트는 재미있지만 어떤 프로젝트는 재미없고, 어떤 건 왜 혼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많이 생겼어요. 사업을 하고 나니, 더 힘든 것도 많은데요. 근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일 위주로 하게 되고, 시간을 관리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좋죠. 물론, 회사 다닐 때도 즐거웠죠.

 

책에서는 회사 다닐 때 만난 상사 이야기도 했잖아요.

 

지금은 그 분에게 감사해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처럼 일도 잘 가르쳐 주셨어요. 약간 비이성적인 일도 조직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고요. 나중에는 어떤 상사를 만나도 그렇게 어렵지 않더라고요. 초반에 고생하는 게 왜 중요한지 배운 시기였죠.
 
행복한가요?

 

지금 행복해요. 얼마나 행복하니, 하고 물으면 크기를 가늠할 순 없어요. 작게라도 제 사업을 하고, 키워나가는 걸 보고, 행동할 때마다 성과가 나오고 책도 나오고, 전시도 하나씩 하고 사람들이 반응해 주고 하면 기분 좋고 행복해요.

 

손보미

 

프로젝트 AA는 어떤 곳이에요?

 

AA는 ‘Asia Arts’ 앞머리를 따온 단어에요. 아시아의 아티스트를 글로벌하게 성장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자, 해서 처음에 시작한 게 한국 화가 김지희 작가와 소녀시대의 <I got a boy> 의상 콜라보레이션이었어요. 한국의 젊은 작가부터 유명한 작가를 모아서 <강남 마이동풍> 전시도 했고요. 최근에는 <남자의 시선>이라는 전시를 하기도 했어요. 저 혼자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니 같이 일할 분을 양성하기 위해서 문화양성아카데미를 운영하기도 하고요. 기획자나 실무자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죠. 궁극에는 미술계, 미술을 넘어서 문화예술계의 소녀시대도 만들고 싶어요. 문화예술계의 SM엔터테이먼트, YG 같은 기획사로 만들어서 한국 또는 아시아의 콘텐츠를 글로벌하게 판매하고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지향하고 있어요.

 

청춘 멘토로 청춘에게 당부하는 말

 

지금은 프로젝트 AA의 대표이지만, 첫 번째 책에서 손보미 저자는 ‘청춘 멘토’였다.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겪으며 느낀 것을 많은 청춘과 공유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짧은 회사 생활을 거쳐 이제는 창업에 도전했다. 청춘에게 말할 거리가 더 많아졌을 것 같다.

 

청춘 멘토로서 여러 자리에서 강연하잖아요.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나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적성은 무엇인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은 뭔지, 자기를 잘 알라고 얘기해요. 철학적인 주제인데요.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뭘 해도 자기만의 것이 되죠. 중심이 잘 안 서 있으면, 고시를 해야 할까, 사람과 만나면서 뭔가를 만들어야 할까, 수능 다시 쳐야 할까, 이 직장이 맞나, 등 고민이 많아지죠. 자기가 잘하는 걸 발견하고, 하나씩 해 봐야 해요. 해 보진 않고 생각만 많은 거죠. 이런 과목이 잘 맞았으니, 잘 하겠지? 이 회사가 맞을까, 저 회사가 맞을까? 이렇게 고민하다, 눈은 높아져서 시도조차 안 하는 경우도 있고요. 적성과 상관 없이 이력서 한 줄이 될 만한 스펙을 쌓는 게 안타깝기도 해요. 좋은 직장, 좋은 대우 중요하지만, 저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세계 봉사 여행을 다니면서 혼자 다니는 시간도 많고, 세계적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대화 시간이 많았어요. 그쪽 문화에서는 당연해요. 직업에 귀천도 별로 없더라고요. 변호사가 됐든, 길거리 청소부가 됐든, 조그마한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를 하든 자기 소신대로 적성에 맞게끔 살아가니까 평등한 부분이 있어요. 저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잘하는 걸 알아야겠고,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 신조, 철학이 분명해야겠더라고요. 그걸 찾았으면 해 봐야죠. 20대 10년 정도는 고민하고, 실행해 보고, 그러면서 맞는 걸 찾아가는 과정이었죠. 지금까지 선택 중에 못 한 것도 많죠. 인턴, 공모전 떨어진 적도 있고요. 수능도 재수했으니까요. 원하는 대로 안 된 경우 많았는데. 자기 목표를 스스로 정하고 부딪쳐 보고 결과를 만났을 때는 받아들이는 게 쉬워져요. 물론 가끔 유혹이 들죠. 저 사람은 저래서 잘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직장 생활과 사업을 모두 해 보니 장단점은 있더라고요. 누구나 다 힘든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는데 내가 행복한 걸 찾아야죠. 그걸 하자, 이게 제가 하는 주된 이야기입니다.

 

27개 국을 여행하면서 한국사회를 타자화 하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나요? 한국의 문화적인 풍토, 시스템, 어떻게 느꼈나요?

 

한국이 문화적으로 강한 잠재력이 있어요. 한류 보면서 저는 예전부터 엄청나게 기대했거든요. 한류가 뜨기 이전부터 혼자 모든 사람이 열광할 거다 믿으면서 지내왔어요. 한국이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 그간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질 때에요.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문화가 필요하고요. 대한민국을 한 번 업그레이드 할 계기가 문화에요. 미국에서도 뉴욕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게 브로드웨이가 크게 성장하면서였거든요. 문화 콘텐츠가 많이 모이고 사람들이 그걸 통해서 행복해지고, 행복해지면 창의적인 게 많이 나와요.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되겠죠. 앞으로 대한민국은 다양한 문화가 생겨서 월급이 적고 많음을 떠나 문화 활동의 행복함,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문화예술은 아이들을, 미래를 이끌어가는 것인데, 아직도 문화예술의 소중한 경험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물론 과학도 중요하죠. 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예술이 꼭 필요합니다. 아이들에게 문화예술 교육이 꼭 필욯다는 거죠. 지금은 18세기가 아니기 때문에 생산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인재들은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 팀워크를 지니고 있어야 해요. 그러니 쓰고 남는 돈을 예술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꼭 투자해야 하는 할당량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98쪽)

 

『뉴욕 아티스트』를 썼으니, 앞으로 『서울 예술가』가 나올 수도 있겠네요.

 

도시별로 돌면서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도시를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고. 에피소드를 많이 얻을 계획은 있는데요. 언제, 어디를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고요. 『서울 예술가들』을 영문으로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민해서 좋은 책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을지 준비하겠습니다.

 

작품을 보다 보면 직접 창작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나요?
 
미술은 진짜 못해요. 궁극에는 이 사업을 잘해서 굉장히 재밌는 스토리가 되어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면 하는데요. 상상은 자유잖아요. (웃음) 영화가 만들어지려면 이야기거리가 많아야죠. 그래서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4월 23일은 책의 날인데요. 어떤 책 주로 읽으세요?

 

요즘은 여성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요.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여성, 현대에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성 이야기를 읽어요. 감사해요. 내가 과연 서태후, 클레오파트라를 책이 아니었으면 알 수 있었을까 싶어요. 물론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책으로 느끼는 바가 많죠. 요즘은 모바일로 짧은 글 보기 바쁘잖아요. 지하철에서 책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더라고요. 작가들이 재미있고 정제된 이야기를 쓰려고 얼마나 고심했겠어요. 내가 모르는 세상, 역사를 아는 데 책이 도움이 많이 되죠. 모바일에서 약간 떨어져서 책을 읽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관련 기사]

-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미술 감상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 동구리 화가 권기수, 예스24와 만나다

- 나만의 드로잉,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 그림을 보는 안목, 좋은 그림을 기준으로 삼자

- 진중권, 한국의 미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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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아티스트손보미 저 | 북노마드
5년 동안 25개국 여행, 6개국에서 봉사활동의 기록을 담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봉사여행』 출간 이후 ‘청춘 멘토’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해온 손보미. 그녀가 두번째 책 『뉴욕 아티스트』로 돌아왔다. 전 세계 예술의 핫스팟으로 불리는 뉴욕을 찾아 100여 명의 아티스트 및 문화예술 종사자를 만나고 돌아온 기록을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재걸 “건강해지려면 의사와 약을 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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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의 독소를 없앴다면, 이제는 균형을 되찾을 때!


삶은 채소와 생과일을 갈아 만든 한 잔의 주스로 몸 안의 독소를 없앤다는 ‘해독주스’. 『서재걸의 해독주스』를 통해 저자가 소개한 레시피와 그 효과는 이른바 ‘해독주스 열풍’을 몰고 왔다. 양배추와 토마토, 사과, 바나나 등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간편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영양소들을 최대 90%까지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서재걸표 해독주스’에 열광했다. 해독주스를 통해 체중 감량과 피로 회복에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들이 각종 매스컴과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 등을 통해 소개됐다. 하지만 ‘해독주스’를 통해 의사 서재걸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단순한 다이어트 방법이나 건강 회복의 비결이 아니다. 병원이 아닌 가정에서, 약이 아닌 음식으로도 얼마든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서재걸 슈퍼 유산균의 힘』에서도 그 이야기는 계속된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균들의 균형을 되찾음으로써,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채울 수 있는 근본 바탕을 마련한다는 것.

 

만나고-서재걸

 

 

사실 유산균의 효능은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우선 대표적인 것들만 소개하면 우선 장내세균들이 균형을 유지하게 만들고 기본적인 면역 능력을 강화해서 건강을 지켜준다. 또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 불내성을 완화시키고 소화 기능을 촉진시킨다. 해로운 생성물을 해독하고 암을 유발하는 물질을 제거하며 음식에 들어 있는 병균을 억제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청소부와 같이 우리 몸속의 나쁜 물질들을 없애주는 고마운 존재다.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39쪽)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에는 유산균을 통해 환자들을 치료한 다양한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위염, 위궤양, 변비, 소화불량, 과민성대장증후군 등 소화기계통의 질병들뿐만 아니라 아토피, 천식, 류머티즘 관절염, 안구건조증, 우울증, 당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질병에 걸쳐 그 효과가 입증되어 있다. 약물 치료와 유산균 처방을 병행하며 얻은 결과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례들에서 유산균이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를 두고 ‘유산균이 만병통치약이냐’며 의심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수많은 세균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는 우리에게 유익한 균뿐만 아니라 해로운 균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유익균을 대표하는 유산균의 비중을 늘림으로써 유해균을 억제하면 같은 음식을 섭취하더라도 좋은 영양분을 더 많이 흡수시킬 수 있고, 반대로 좋지 않은 성분은 배출할 수 있는 것이다. 섭취하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약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자는 “유산균이 모든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근본을 이루는 면역력을 강화시키고 기본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조절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유산균 섭취가 몸에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원리로 그것이 건강에 도움을 주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의 양을 섭취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각종 진통제와 항생제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의사는 많지만 유산균에 대해 설명해주는 의사는 만나기 어려웠고, 유산균을 처방 받는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는 얘기였다. 그런 점에서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을 통해 저자가 들려주는 유산균 이야기는 낯설면서도 반갑다. 유산균의 역할과 중요성, 선택과 복용의 방법에 대한 조언들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직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과 만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그 정보들을 공개한다.

 

만나고-서재걸

 

 

건강해지려면 의사와 약을 끊어라


처음 ‘유산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15년 전부터 쉽게 치료되지 않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의사로서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다양한 공부를 하다 보니 장내에 면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장 속에 있는 미생물들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공부하게 됐고요. 장내 세균을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10여 년 전부터는 직접 유산균을 만들어 공급해 왔습니다. 모든 환자들의 기본적인 치료를 유산균을 가지고 해왔어요. 저는 산부인과 전문의이지만 다양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유산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반대로 얘기하면 어떤 질병이든 장의 면역을 만들어주면 빠르게 치료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다양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산부인과 전문의가 ‘유산균’을 통해 환자들을 치료한다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보통 산부인과 전문의는 출산, 분만, 응급 수술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알아야 하죠. 특히 산부인과에서는 유산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무균 상태로 있다가, 생후 6개월 안에 어떤 균이 자리 잡느냐에 따라서 면역의 70%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산부인과 의사가 몰랐다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한 거죠. 저 역시 전문의 과정에 있을 때는 아이들의 아토피나 태열이 장내 균의 불균형과 상관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었어요. 전문의가 되고 난 후에 유산균 공부를 하게 됐죠. 저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출산만 도우면 되는 게 아니라, 아이의 미래 건강까지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산균이 그런 부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굉장히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됐고요.

서재걸

 

국내 최초 자연치료의학 인증 전문의이시고, 국내 제1호 자연치료전문 병원을 개설하셨습니다. 자연치료의학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분야인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해독주스가 계기였습니다. 제가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만성 두통으로 고생하고 계셨어요. 하루 열 알 정도의 진통제를 복용할 정도이셨는데, 우연히 과일과 채소의 효능을 알게 되신 후에 해독주스 같은 걸 드시기 시작하셨죠. 그러더니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되실 정도로 증상이 호전되셨습니다. 그때 저는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 때문에 살이 많이 쪘었어요. 어머니께서 저한테도 과일과 채소를 권하셨는데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먹어 보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장이 좋아지면 살이 빠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때 처음으로 ‘자연에 뭔가 있겠구나’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자연치료의학을 학회를 통해서도 많이 알렸고요.

 

자연치료의학을 민간요법이나 대체 의학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신데요. 저는 이것이 대체하는 의학이라기보다는 우선하는 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병이 생겼을 때 바로 약을 쓰는 게 아니라, 식습관부터 교정시키면서 자신의 문제점을 바로잡은 후에도 안 될 때 약을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고 진단명이 떨어지는 순간 바로 약이 등장하면 약과 질병의 만남만 이루어지잖아요. 그곳에 ‘나’는 없는 거예요. ‘내가 주체가 되어야 된다’는 게 자연의학의 핵심이죠. 그리고 저는 자연치료의학이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가 산골로 가라는 뜻이 아니에요. 원래 내가 가지고 있었던 환경을 만들자는 거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환경이 장내 미생물들의 환경이기 때문에 유산균에 대한 책을 쓰게 된 거예요.

 

‘해독주스’가 몸 안의 독소를 없애는 방법이었다면 ‘유산균’은 몸 속 균들의 무너진 균형을 잡아주는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죠. 실제로 면역의 70~80%가 소장과 관련 있습니다. 음식을 먹었을 때 흡수되는 곳이 소장이기 때문이죠. 나머지는 지나가는 곳일 뿐이에요. 영양분이 흡수되면서 균도 들어올 수 있고 독소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니까 소장에 면역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성분을 받아들일지 배척할지는 소장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배척되면 배설이 될 것이고, 받아들이면 몸 안에 들어오게 되겠죠. 그걸 결정하는 곳이니까, 당연히 소장이 면역 기관이 되는 거예요. 유산균은 소장의 점막에서 수비수 역할을 합니다. 유산균이 좋은 비율로 장내에 있으면 아무리 나쁜 걸 먹어도 걸러낼 힘이 있어요. 그런데 이 수비수가 없어지면 아무리 좋은 걸 먹어도 유해물질을 만들면서 우리 몸에 흡수가 되는 거예요. 흡수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이 소장 점막에서 이루어지고, 그곳에 유산균이 살고 있기 때문에 유산균이 면역 조절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건강해지려면 의사와 약을 끊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몸의 균형을 찾고 독소를 없앤 상태가 되어야 어떤 병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의사나 약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사와 약으로만 해결하려는 우리의 습관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건강 문제에서는 자기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죠. 하지만 ‘아프면 병원에 가서 약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한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게 되겠죠. 그건 순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아프면 먼저 자신의 문제를 교정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훌륭한 전문가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아프면 전문가부터 찾아가죠. 그리고 약만 받아 와서 먹을 뿐 생활 습관은 바꾸지 않아요. 물론 의사는 필요하지만, 모든 경우에 무조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선순위가 중요한 거죠.

 

만나고-서재걸

 

유산균 보충제, 균의 종류와 숫자를 보고 선택해라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에서 치료를 위해 ‘해독주스’와 함께 ‘유산균 보충제’의 복용을 권장하시는데요. ‘유산균 보충제’는 어떻게 선택하면 좋을까요?


우선 균이 다양해야 합니다. 균마다 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필요한 유산균이 다를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다양한 균주를 섭취해 봐야 해요. 그 중에서 자신한테 적응되는 균이 생긴다면 면역이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거죠.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건 숫자예요. 보통은 1억 마리에서 100억 마리 사이의 균주를 섭취하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청국장이나 고추장, 된장, 간장 같은 발효음식을 먹으면서 유산균을 섭취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장류조차도 다 가공식품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먹고 있잖아요. 실제로는 좋은 균을 먹을 기회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에서 직접 담가서 오랫동안 숙성시킨 장류를 먹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별도로 유산균을 섭취해야죠. 그렇다고 무조건 섭취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부족할 경우에 먹어야 한다는 거죠. 만약 스트레스 없이 좋은 환경에서 현미와 천연 장류를 먹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산균의 섭취가 크게 필요하지 않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런 장류나 발효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면역을 지키기 위해서 유산균을 먹는 게 맞다는 이야기입니다.

 

장내 세균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대표적인 생활습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제일 대표적인 건 밀가루 음식입니다. 밀가루가 무조건 나쁘지는 않지만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없는 상황이라면 과도하게 섭취를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밀가루를 이용해서 음식을 만들 때는 설탕, 소금, 기름과 같은 것들이 첨가되잖아요. 그러한 첨가물들에 대한 문제도 굉장히 많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밀가루가 글루텐 함량이 가장 높은 곡물 중 하나라는 거예요. 글루텐은 곰팡이 균과 세포 배열이 아주 유사합니다. 밀가루가 곰팡이 균의 증식에 일조하게 되면 어느 순간이 되면 균들이 폭발해요. 그리고 공격적이지 않은 미생물들이 공격적으로 바뀌게 되죠. 그리고 밀가루가 탄수화물로 들어와서 위 안에서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면 알코올을 먹은 것과 똑같은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글루텐이 이산화탄소를 머금고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죠. 이런 음식들이 들어가는 한 유산균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어요. 상대적으로 곰팡이 균이 늘어나면 가려움, 어지럼증, 피곤, 통증, 면역 저하 등의 증상을 보이는데요. 이 원인 자체를 피 검사에서 발견할 수가 없어요. 몸 상태가 정상이라고는 하는데 매일 피곤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이런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유산균이에요. 밀가루를 먹는다면 유산균을 더 먹어야 될 것이고, 밀가루를 끊는다면 유산균을 적게 먹어도 되겠죠. 환자의 상황에 따라서 방법을 선택하는 거예요.

 

몸 속 유해균과 유익균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걸 알 수 있는 징후에 대해 알려주세요.


굉장히 많죠. 요즘 들어 피곤하거나, 두드러기나 알러지가 잘 생기거나, 원인 없는 두통이 자꾸 생긴다면 의심해 봐야 합니다. 밀가루 음식이나 가공식품의 영향으로 유해균들이 증가하면 여러 가지 발암성 물질이나 유해 물질들을 만들어 내게 되고, 그것들이 결국은 우리 몸에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될 호르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결합해야 할 물질이 아닌 중금속 같은 것과 결합되면 교란을 일으키는 거죠. 그걸 면역 체계의 교란이라고 설명하는데요, 그건 검사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기가 어려워요. 결국은 먹는 것을 바꾸는 게 가장 중요한 방법이죠.

 

‘유산균 보충제’의 복용을 중지해야 될 때는 언제인가요?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장내에 좋은 균들보다 유해한 균들이 우세한 거예요. 그럴 때 치료 원칙은 유해균들이 아닌 좋은 균들의 먹이를 줌으로써 좋은 균들을 증식시키는 거죠. 유산균이 좋아하는 먹이를 먹는 게 치료 방법이에요. 현미라든지 과일, 채소에 있는 식이섬유가 전부 유산균의 먹이가 됩니다. 그렇게 유산균의 입장에서 좋은 먹이를 먹으면 유해균들의 세력은 감소가 되죠. 좋은 균과 나머지 균의 비율이 85:15 정도의 균형을 이룰 때 유해균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데요. 이 균형이 깨지면 유해균들이 우리한테 공격적으로 변하게 되는 거예요.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먹어야 되는 음식들이 현미나 해독주스, 유산균 보충제 등이죠. 그리고 유산균 보충제를 복용하는 초반에는 투여량을 조금 많이 정하고 증상이 좋아지면 줄여나가는 게 좋습니다. 최소 3개월 정도의 복용은 필요하고요. 만약 음식 습관이 바뀌고 건강이 좋아졌다면 복용량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어요. 자신의 습관이 하나도 안 바뀌었다면 유산균도 계속 먹어야 되겠죠. 그렇게 균형을 맞춰 가면 얼마든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증상이 개선된 후 ‘유산균 보충제’의 복용을 바로 중단해도 될까요?


그래서는 안 되죠. 실제로 환자들 중에 유산균을 먹고 이틀 만에 붓기가 빠지는 사람도 있고, 4년 동안 먹던 류마티스 약을 일주일 만에 끊게 된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고 이틀이나 일주일 후에 유산균 보충제를 끊으면 안 되죠. 스테로이드나 항암제 같은 면역 억제제를 쓰는 것도 좋지만 조절자인 유산균이 들어가는 게 훨씬 중요하거든요. 균이 있으면 균을 죽이고 면역이 활발하면 면역을 억제시키는 건 일방향성 치료라고 볼 수 있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몸 속에 들어가서 판단하고 조절하는 조절인자들이 우선 몸에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유산균의 가장 큰 역할이에요.

 

‘유산균 보충제’를 통해 섭취한 유산균은 복용을 중지한 후에도 체내에서 자생하나요?


정착을 하는 균이 있고 그냥 지나가기만 하는 균이 있습니다. 각각의 균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유산균에 대한 많은 공부가 되어있어야 하죠. 혹시라도 균의 숫자만 많은 것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실까봐 우려가 되는데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어떤 균을 어떤 조합으로 만들어 먹느냐도 중요합니다. 그걸 알지 못하면 ‘유산균 보충제’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도 균만 많이 집어넣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게 되겠죠. 그래서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산균 보충제’를 복용했는데도 치료가 안 되는 사람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세월들이 모였을 때 발전을 이루는 거죠. 유산균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면서 적어도 3개월은 ‘유산균 보충제’를 집중해서 먹다보면, 이후에는 본인의 유지 용량으로 줄여나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유산균의 종류와 양이 다를 텐데, 정확하게 처방해줄 수 있는 의사가 많지 않다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렇죠. 많은 분들이 ‘나에게도 유산균을 통한 치료가 가능한지’ 물어보시는데요. 다양한 병을 봐왔던 사람만이 설명해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어떤 작용이 생겼을 때 그에 대해서 확실하게 얘기해 주거나 보완해 줄 수 있어야 하죠. 그런데 제가 일일이 답변을 드리기에는 그 분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상담 글에 답변도 해드리고 강의를 통해서 알리기도 하지만 버거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유산균을 먹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은 앞으로의 건강을 위해서 아주 좋을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본인에게 맞는 균과 안 맞는 균을 찾아내려면 먹어서 알 수밖에 없기는 하죠. 균의 이름을 보고 판단하기는 어렵거든요. 만약 최대한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유산균을 만든다면, 대중들한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요.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대안도 가지고 있다면 더 좋을 것 같고요.

 

만나고-서재걸

 

봄철 건강, 해독주스와 생강대추차를 마셔라


많은 사람들이 ‘해독주스’를 음용하고 있습니다. 혹시 잘못된 복용사례를 목격하신 적도 있나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이해도를 가지고 얘기를 듣는 건 아니니까 오해도 있었죠. 채소, 과일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필요한 만큼 섭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그래서 저는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하려고 삶고 갈아서 만드는 방법을 소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해독주스’가 너무 다이어트로 방법으로만 인식되어서 시작된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하지만 건강해졌기 때문에 살이 빠진 거지, 살이 빠졌기 때문에 건강해진 건 아니거든요. ‘해독주스’는 과일과 채소의 흡수율을 높여서 한 두 번이라도 먹는 실천을 하게끔 만드는 거예요. 다이어트 때문에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 ‘해독주스’만 먹는다거나 ‘해독주스’를 믿고 다른 음식을 더 많이 먹는다면 올바른 방법은 아니겠죠. 원칙은 ‘해독주스’를 한 두 잔 정도 마시고 나머지는 생으로 추가해서 먹는 것입니다.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에서 말씀하셨듯이 “일교차가 커지면 생체리듬 변화와 적응 간에 생기는 불균형으로 면역력이 떨어”집니다. 지금과 같은 봄철이 딱 그러한 시기인데요.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쌀로 된 음식을 소화가 잘 되게 하는 거예요. 소화가 안 됐을 때 바이러스 질환을 이겨낼 수는 없거든요. 빵을 먹고 있으면서 독감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거죠. 독감이 유행하고 있을 때는 쌀로 된 죽을 먹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소화가 안 되면 소화시키는 데 많은 영양소들을 써버리기 때문에 실제 면역을 감당하는 면역세포들이 부족해지거든요. 예를 들어서 서양에서는 감기에 걸리면 치킨 수프를 먹잖아요. 단백질이 풍부한 닭에서 아미노산을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우리 몸에서 부족한 아미노산을 보충해주면서 그 아미노산들이 면역체계를 만들어내게끔 조절자와 원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닭죽을 먹고 장내에 면역을 결정하는 유산균이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게 좋죠. 그리고 바이러스에 의한 돌연변이를 막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타민 D3와 엽산을 먹는 게 좋아요. 여기에 추가적으로 비타민 C를 고용량으로 섭취하고 있다면 어떤 바이러스가 와도 잘 견뎌낼 수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장내 유산균의 불균형을 회복하는 게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수분이 있어야 면역 체계가 돌아가기 때문에 카페인 음료를 끊고 물을 충분히 섭취해야 하죠.

 

봄철에 도움이 되는 ‘해독주스’ 레시피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봄철은 일교차가 심해지고 환경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남성들의 경우 혈관이 수축했다가 이완되는 능력이 조금 떨어집니다. 혈관이 막혔다가도 다시 확장시킬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인데요, 여성들은 50세까지 여성 호르몬이 충분하니까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남성들은 에스트로겐이 부족하기 때문에 환절기에 술을 마시고 수축됐던 혈관이 이완이 안 될 경우에 갑자기 응급실을 가는 경우도 많죠. 그럴 때 ‘해독주스’ 기본 레시피 6가지를 먹는 게 좋고요. 추가로 생강대추차를 한 두 잔씩 꾸준히 섭취하는 게 좋습니다. 처음 ‘해독주스’ 복용을 시작할 때 먹기 힘들다면 따뜻한 물을 먹고 나서 ‘해독주스’를 먹으면 되는데요. 차가운 음식을 섭취했을 때 위가 잘 움직이는 않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런 분들은 해독주스가 잘 안 맞는 게 아니라 차가운 상태에서 마시는 게 문제인 거예요. 그러니까 ‘해독주스’ 복용을 유지하시면서 생강대추차를 추가로 드시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독자들은 책을 읽어보고 이해가 됐을 때 가장 많이 신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많은 얘기들을 본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굳이 의사가 필요 없이 본인이 의사가 돼서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 한 권에 모든 이야기를 담기는 어려웠지만, 이 책을 보고 직접 실천을 해서 건강을 찾게 된다면 저에게는 굉장히 큰 보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에게 『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가짐과 나의 생각들이 결국은 건강을 좌우한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긍정적인 삶에서 추가적으로 이런 것들을 먹게 되면서 몸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기억하셨으면 좋겠고요. 뭔가 획기적인 걸 찾아다니는 시간에 물 한 잔을 더 먹는 게 훨씬 건강에 더 도움이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 물이 내 몸을 낫게 해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먹으면 그게 바로 약이 되는 거거든요. 약만 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에 많이 공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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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걸 슈퍼유산균의 힘서재걸 저 | 위즈덤하우스
우리 몸을 조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몸속의 세균들이다. 우리 몸속에는 엄청난 수의 세균들이 있어서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구성하고 건강을 유지시킨다. 위염과 변비와 같은 소화기질환은 물론, 아토피, 알레르기, 비염, 갑상선 질환과 같은 자가면역질환, 우울증, 불면증, 발달장애와 같은 신경성 질환에 불임, 비만, 당뇨와 같은 대사성 질환까지 장내 유익균(유산균)만 잘 관리한다면 얼마든지 자연치료가 가능하다. 방송 출연으로 화제가 된 티벳버섯 요구르트, 유산균 고추장 제조 비법까지 생활 속에서 슈퍼유산균을 섭취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법도 모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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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재, 뽀글이 파마와 배불뚝이 아저씨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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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라도 노화는 찾아온다. 다만 시기가 조금 빠르고 늦을 뿐이다. 언제부터 노화를 대비해야 할까? 기본기가 훌륭하다면 나이 드는 것이 무작정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올해로 마흔 여섯. 중년으로 보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 모습이지만 김희재 작가는 오래 전부터 ‘나이 듦’에 대해 생각했다. 어린 시절 폐결핵을 앓고 4년 전, 고혈압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변화를 마음 아프게 바라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화병은 왜 갑자기 폭발하는지, 깜빡 거리는 기억력은 찾을 수 없는지, 고약한 입 냄새는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남자는 왜 갑자기 눈물이 많아졌는지…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을 읽다 보면, 내 옆에 있는 선배, 상사,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책을 읽은 한 독자는 김희재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직장인 여성이에요. 엄마와 사이가 좋았는데, 엄마가 몸이 안 좋은 후로부터 성격이 변하셔서 많이 다퉜어요.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우리 엄마만 변한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당연한 변화였는데 제가 그걸 몰랐어요.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간 두 편의 에세이집을 펴냈지만, 이번 책만큼 사연이 있는 리뷰는 많지 않았다. “내가 이런 책을 써도 될까?” 적잖이 고민했던 김희재 작가는 독자들의 다양한 리뷰를 듣고는 마음을 쓸어내렸다.

 

누구에게나 절대 공평 사항으로 흘러가는 세월은 사람의 몸에 다양한 흔적을 남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가 뿌리고 간 흔적은 대체로 힘들고, 아프고, 추접스럽고,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  뿐입니다. 젊은 자식과 후배들은 나이 든 부모와 선배의 추접함이 개인의 불결함이나 게으름, 혹은 낙후된 취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역시 그런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선배들이 접어들기 시작한 노년의 시간, 내가 준비해야 할 그 시간, 딸 서연이와 그 친구들이 감당해야 할 부모들의 노년까지…. 저와 같은 오해로 서로 간의 사랑이 덜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나이 든 이들 역시 무지로 인해 자신의 자랑스러웠던 인생을 혐오하며 마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 듦에 대한 변명』 9쪽)

 

만나고-김희재

 

 

건강 무시증이었던 나, 몸에 대한 미안함을 갖다


처음 생각한 책 제목이 ‘뽀글이 파마와 배불뚝이 아저씨에 대한 변명’이라고 들었어요.


너무 슬프지 않고 싶어서요. 출판사에 세 번쯤 설득했는데(웃음) 마켓에서 통하는 언어는 아니었나 봐요. 그 후에 ‘노화에 대한 변명’이라는 제목도 생각했는데, 조금 풀어서 가자고 하셔서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이 되었어요.

 

아직은 저자님을 젊게 보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책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만화가 이현세 선생님이 올해로 딱 60세, 청마세요. 책을 읽으시더니, “김희재가 어떻게 알지? 이걸 알 나이가 아닌데?” 그러시더라고요(웃음). 책에 나온 증상들을 모두 겪은 건 아니지만, 조금씩 경험하면서 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싶었어요. 준비를 하면 갑작스러운 변화가 조금은 덜 고통스러울 수 있잖아요. 주변 분들의 리뷰를 들으면서, 서로에게 이런 위로가 필요했구나 싶었어요.

 

5년 전에 펴낸 『죽을 때까지 섹시하기』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제목부터 확 달라졌는데요. 이번 책을 쓰면서 전작을 쓸 때와는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해요.

나이듦에대한변명


그 때만해도 신체적 노화에 대해 무감각했던 것 같아요. 몸의 노화에 대한 이해가 크지 않았죠.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가짐을 하면 좋지 않겠냐고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 같고요. 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몸을 먼저 돌봐야 하는 이유를 깨달은 거죠.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4년 전쯤, 생전 처음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있었어요. 원래 저혈압이라서 혈압이 높게 올라간 적이 없었는데, 혈압이 190이 넘으면서 머리가 깨질 것 같더라고요. 계속 토가 나오고. 휠체어에 실려서 응급실을 갔는데, 침대가 다 만석이었어요. 예전 같으면 기다렸을 텐데, 너무 아프다 보니까 못 참겠더라고요.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나 좀 어디에 눕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눈으로 봐도 결코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누군가를 곤란하게 할 만큼 아픈 경험을 한 거죠. ‘인격을 저버릴 만큼의 고통이 찾아올 수 있구나’를 그 때 처음 깨달았어요. 혈압강화제를 맞고 나서 회복이 됐지만, 노화는 어떻게 치유가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너무 끔찍하겠다,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지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응급실을 가기 전까지는 건강에 무신경한 편이었나 봐요.


어릴 때부터 폐결핵 증상이 있어서 건강 체질은 아니었어요. 시즌마다 감기도 달고 살고요.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식사습관이나 다른 생활에 대해서는 건강 무시증에 가까웠죠. 지금도 ‘무조건 건강해야 해’ 이런 건 아닌데, 빌려서 쓰고 가는 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몸에 대한 미안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됐고, 한의원도 꾸준히 다니고 있고요.

 

책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많아요.


65세에 돌아가셨는데, 참 감사하게도 엄마는 제가 존경할 수 있는 분이었어요. 엄마를 사랑할 순 있어도 존경하기는 어렵잖아요. 제가 막내딸인데, 엄마는 제가 결혼한 해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임상상담 자격증을 따고 심리 상담도 꾸준히 하고, 평생을 영어성경을 끼고 사셨어요. 그것도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킹제임스 성경을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으셨어요. 어릴 적 가난하고 힘들 때도 생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식들에게 한 번도 화내신 적이 없었어요. 그런 엄마를 내 엄마로 둬서 정말 행복했는데, 간질환을 앓고 나서 간경화 진단을 받으셨어요. 그 때 신경정신과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엄마 성격이 변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엄마가 아기처럼 변하시고 신경질을 자주 내셨고요. 병 때문인 걸 아니까, 화가 나는 것보다 슬프더라고요. 훌륭했던 엄마가 무너지는 걸 보는 게 힘들었어요. 아마,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사전 예고를 듣지 못했더라면 엄마를 많이 오해했을 것 같아요. 이런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쓰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폐경기를 지난 여성들은 예전보다 감성적이게 되고, 화병도 많이 생겨요. 화병의 치료는 주변 사람들의 배려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많은 엄마들, 아줌마들이 갑자기 화병이 잦아지는 건 어느 순간 호르몬의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에요. 피로가 쌓이면서 몸이 내 몸같이 느껴지지 않은 시기가 찾아오죠. 또 집안에는 큰일도 많이 생기고.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 사고가 터지면 우아할 수 있었던 감정의 끈이 끊어져 버려요. 이럴 때는 다소 이기적으로 느껴지더라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해야 해요.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참아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해요. 다른 일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게 중요해요. 또 가족은 이 같은 감정을 잘 겪어낼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해요. 당사자는 햇빛도 많이 보고, 일상적인 일도 무리가 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노력해야 하고요. 주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요. 당사자가 스트레스 상태에 오래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주의를 기울여 줘야, 그 시기를 잘 지나갈 수 있어요.

 

남자들도 중년을 지나면, 눈물이 많아지죠. 자식들은 언제나 당당했던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면, 무척 당황하기도 해요.


젊은 시절까지 남자들은 감정을 절제하라고 강요 받았고, 조금이라도 이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비난을 받기도 했어요. 태어나 세 번 울어야 한다는 남자들의 감정을 통제해온 사회적 풍토도 있어요. 젊고 건강할 때, 대뇌피질이 튼튼하던 시절에는 그래도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50년 긴 세월을 보내며, 이성을 관장하는 대뇌 근육의 힘이 서서히 떨어지면 차곡차곡 쌓아왔던 감정들이 튀어나오게 돼요. 더 많이 참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서러울 거예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에요. 만약 감정이 폭발하지조차 못하면 침몰해 버릴 지도 모르니까요. 감정적이게 되는 걸 두려워하면 안 돼요. 그동안 눌렸던 것들이 숨을 쉬고 싶다는 신호니까요. 감정의 균형을 잘 맞추려면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것도 필요해요. 뇌가 필요로 하는 영양분은 ‘당분’이에요. 당분이 부족하면 시력이 떨어지고, 이성과 기억의 영역이 차단돼 치매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나이가 들면, 구취(口臭)도 점점 심해집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르신들을 피하는 까닭이기도 하고요.


물을 자주 마시고 침이 마르지 않도록, 음식을 많이 씹어 삼키는 습관이 구취를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후루룩 마셔버리는 것이 아닌 꼭꼭 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아침밥을 먹는 것도 구취 예방에 좋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단순히 입 속의 문제만은 아니에요. 위의 상태가 나쁜 사람에게서 많이 발생하죠. 또 편도가 붓고 콧물이 흐르는 증상이 유독 심한 사람에게도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아요. 아무리 양치질을 열심히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요. 관리를 잘못한다고 비난할 일만은 아니에요. 나이 듦의 증거이기 때문에 어르신들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도 있어요. 우리도 언젠가 연민을 받을 시기를 맞게 되니까요.

 

책을 보니, 침 뱉는 습관은 좋지 않다고 나와 있어요.


땀, 눈물, 콧물, 침, 위액. 소변까지 몸 안에서 도는 물기를 모두 일컬어 진액(津液)이라고 해요. 내가 뱉는 침도 단순히 그냥 맹물은 아닌 거죠. 내 몸의 기운이 서려 있는 액체라는 뜻이에요. 젊었을 때는 이 진액이 몸 안에서 원활히 순환하며 필요한 곳에 잘 고여 있지만, 나이가 들면 점차 새어나가기 시작해요. 몸 안에 진액을 보존할 힘이 없어지면서, 울지 않는데 눈물이 흐르고 가벼운 재채기에도 소변이 찔끔 새어 나오고. 소변이나 피, 땀, 눈물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침은 뱉지 않고 삼킬 수 있어요. 침을 삼켜 몸을 부드럽고 빛나게 할 수 있죠. 동의보감에는 ‘입안의 침이 신선이 쓰는 약과 같다’고 ‘회진법’으로 설명해놓았어요.

 

 

만나고-김희재

 

 

몸에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생활습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가능하면 험한 음식은 먹지 않고, 다이어트도 감히 도전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잠을 자고 2,3시간 밖에 자질 못했는데 요즘은 가능하면 길게 잠을 자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수면시간을 확보하려고 하는 건, 저에겐 엄청난 변화죠. 예전에는 워낙 일을 많이 해서, 줄일 수 있는 게 잠밖에 없어 수면 시간이 정말 적었거든요.

 

스토리전문기업 ‘올댓스토리’를 창업한지도 6년이 되었는데요. 직원들에게도 건강 관리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할 것 같아요.


사옥 2층에 운동센터가 있어요. 따로 운동을 하지 않는 직원들은 대부분 여기서 운동을 해요. 회사 차원에서 내고를 좀 해서, 할인을 받을 수 있게 했어요. 예전에 한창 필라테스를 열심히 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강사를 사무실에 모셔서, 같이 운동하는 시간을 갖곤 했어요. 혼자 사는 직원들한테는 특히 더 잔소리를 좀 하죠. 잘 좀 먹고, 건강 좀 챙기라고요.

 

젊은 사람들 중에 건강불감증에 걸린 사람이 많아요. 잠깐 건강에 신경 쓰다가, 폭식을 하고. 군것질과 커피를 달고 사는 젊은 여성들도 많고요.


컴퓨터 모니터를 계속 봐야 하는 직업군도 많아졌고, 요즘은 누구나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질 않잖아요. 산소 공급도 잘 안 되는 환경에서 일하는데, 앉는 자세도 잘못 되어 있고요. 제가 다이어트 20년의 노하우를 말해줘도, 아직은 젊다고 생각해서인지 실감이 안 되나 봐요. 몸에 좋은 걸 먹는 것도 중요한데, 내 몸에 좋고 나쁜 걸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에요.

 

젊을 때부터 건강 관리를 하면, 아무래도 노화가 늦겠죠.


중년이 넘어가면 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노력을 해야 해요. 하지만 20,30대는 조금만 노력하면 효과가 금세 보여요. 몸이 균형 잡힌 상태에서 중년을 맞으면 훨씬 피로가 덜하죠. 딸한테도 항상 하는 이야기가 지금 몸을 만들어 놓으라는 말이에요. 기초 공사가 부실하면 나중에 정말 힘들어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떻게 푸나요?


제 문제 중 하나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몸이 많은 공격을 받았죠.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풀기 위해서 뭔가를 해줘야 하는데, ‘나는 괜찮아’하고 다독이는 순간 몸은 힘들어지고. 딱히 스트레스를 받고, 풀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이런 경우는 있어요. 예배를 드리다가 유달리 폭풍처럼 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내가 그동안 쌓인 게 있었구나 싶어요. 예배를 드리거나 찬송을 부를 때,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고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감정기복이 심하지 않나 봅니다.


딸이 대학생인데, 키우면서 한 번도 안 때렸어요. 언젠가 딸이 그러더라고요. “나는 엄마처럼 못 키운다고. 때리면서 키울 것 같다”고. 직원들한테도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인데, 좋게 해석하면 컨트롤을 잘하는 거지만, 오히려 사람을 더 어렵게 만드는 단점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은 쉬운데, 분명히 야단을 맞을 일인데 조용히 있으면 더 무섭고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때때로 직원들한테 사과해요. 당신들, 힘들 거 안다고요(웃음).

 

만나고-김희재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위로 받기를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전공했는데, 영화 연출을 공부하셨죠? 연출을 공부하다 시나리오 작가가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당시 현역으로 활동하던 여성영화감독이 한 분밖에 없었어요. 정말 열악하고 힘들었어요. 제가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현장을 견뎌야 하는 연출부부터 시작하기에는 무리였어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만화 스토리 공모전에 글을 냈는데, 주최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수상을 한 건 아닌데,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만화스토리 작가를 10년을 넘게 했어요. 그러다 다시 대학원에서 영화 전공을 했고 학교에서 만난 선배와 인연이 돼서 시나리오를 작업하게 됐어요.

 

영화 <공공의 적2>, 〈실미도〉, 〈한반도〉, 〈국화꽃향기〉 각색을 하고, 2011년에는 드라마 <더 뮤지컬> 극본도 쓰셨어요. 시나리오 작가로도 이미 명성을 얻었는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건, 어떤 동기였나요?


2004년부터 대학에서 영상시나리오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2008년도가 졸업생을 배출하던 시기였어요. 학생들이 어디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하더라고요. 콘텐츠 비즈니스라는 업계가 굉장히 열악하다 보니, 스토리 매니지먼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음 작품도 계획하고 있나요?


드라마 각본을 계약해서, 현재 자료조사를 시작했어요. 내년 방송을 목표로 16부작인데, 고액 탈세자에 대한 이야기에요.

 

시나리오와 산문은 아무래도 집필 과정이 많이 다를 텐데요.


우선 시나리오를 쓸 때는 구상 단계가 굉장히 길어요. 집필에 투자하는 시간은 3분의 1도 채 되지 않아요. 구상과 설계가 대부분을 차지해요. 구상이 잘 되어 있으면, 머릿속에 이미 영상으로는 완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언어로 받아 쓰는 집필은 기술적인 부분이에요. 시나리오는 영상 언어로 변환되는 거라서, 문장이나 단어 선택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죠. 하지만 책을 쓸 때는 내 문장으로 바로 연결이 되는 거라서, 단어를 고를 때도 굉장히 신중해야 해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도 조심해야 하고요.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을 집필하면서는 어려움이 없었나요?


전체를 세 번이나 수정했어요. 심지어 서간체로 완성을 해놓고 다시 엎기도 했죠(웃음). 처음에는 이민을 간 한의사 이모가 서울에 있는 여자 조카에게 답장을 하는 콘셉트로 썼어요. 엄마랑 잘 지내가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많이 부딪히는 고민을 이모에게 털어놓고, 이모가 그에 대한 답장을 하는 이야기였죠. 전체 원고까지 완성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서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그만큼 되게 조심스러웠던 것 같아요. 내가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오류가 있거나, 오해가 있을 까봐 마음이 많이 쓰였던 것 같아요. 건강 지식과 관련한 부분은 전문가에게 감수를 받았고요.

 

만나고-김희재

 

 

독자들이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연세 드신 분들은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하고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고, 젊은 분들은 ‘우리 아빠가 이래서 이랬구나, 엄마가 변한 이유가 있구나, 직장 상사가 이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해하면서 읽었으면 해요. 또,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나에게도 벌어질 일이니까 준비를 하고, 몸을 돌보는 습관을 갖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으면 해요.

 

책을 내며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가요?


잘 늙어가면 좋겠죠. 지력과 체력의 밸런스가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고, 균형을 맞춰서 가다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늙어 갔으면 좋겠어요. 먼 친척 어르신 중에 농담을 그렇게 재미 있게 하는 분이 있었어요. 명절 때마다 만나는 파파할머니였는데, 집 입구에 들어오면서부터 농담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온 식구들이 할머니를 기다리고, 좋아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농담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 싶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 할머니를 참 좋아했는데,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늙어 갔으면 해요.

 


나이듦에대한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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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에 대한 변명김희재 저 | 리더스북
저자는 책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나이 듦의 과정과 건강하고 품위 있는 생의 관리를 주제로 우아하게 노후를 맞는 방법을 전한다. 언젠가부터 작은 일에도 참을 수 없이 치솟는 마음속 울화, 주책없게 많아진 눈물 등 젊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갖가지 증상들. 저자는 이 같은 몸과 마음의 변화가 왜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 또 언젠가는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나이 듦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몸의 속도에 맞춰 삶을 준비해갈 수 있는 지에 대해 ‘변명’이라는 형식을 빌어 따뜻한 공감과 연민의 시선을 담아 풀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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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뮤지션 “박진영, 이적, 타블로 선배님 닮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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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온 10대 남매 듀오, 악동뮤지션이 지난 4월 7일, 1집 앨범 『PLAY』를 발매했다. 2013년 SBS <K팝스타> 시즌2 우승을 하고, YG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활동하게 된 악동뮤지션은 본격적인 가수 활동에 앞서, 음악 에세이 『목소리를 높여 high!』를 출간했다. 악동뮤지션 남매 이찬혁, 이수현은 “꿈 때문에 힘들어 하던 때가 있었다. 꿈에 대해 고민을 하는 또래 친구들이 책을 읽어준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악동

 

 

“저희의 일기장을 공개한 기분이에요. 쑥스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방송에는 음악하는 모습만 보여 드렸다면, 이 책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남매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찬혁)

 

“노래로만 저희 이야기를 하다가, 책으로 더 자세하게 말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이 책을 봐주실 분들을 생각하면서 정말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했고, 또 나중에 제가 커서 봤을 때 어떨지 궁금해요.” (수현)

 

“오디션 무대를 통해 가수가 되는 것. 우리라서 그 행운을 거머쥔 게 아니다. 우리도 오디션 무대에 서기 전에는 미래를 고민하는 평범한 십대였다. 다만 우리가 가진 건 “그래, 한번 해봐.” “정말 멋있다!”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부모님의 한마디였다. 이것도 해봐, 저것도 해봐라고 부모님이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기회를 얻지 못한다. 지금은 몽골에서 보낸 하루하루, 무엇보다 힘들었던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꿈의 기회를 만드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때의 나처럼 지금 고민을 가득 안고 있다면 기회를 만들 시간이 된 거다.” (『목소리를 높여 high!』 8~9쪽)

 

홈스쿨링 안 했더라면, 가수 되지 못했을 것

 

악동뮤지션

이찬혁, 이수현 남매는 어떻게 ‘악동뮤지션’이 됐을까. 6년 전,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몽골로 떠난 두 남매는 학교 대신 홈스쿨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풍족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찬혁은 “우주만큼이나 어두운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고 말한다. <K팝스타> 오디션 무대에 서기 전, 그들은 불투명한 미래를 고민하는 여느 사춘기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두 남매가 또래와 다른 일상을 보낸 건, 홈스쿨링을 시작한 후부터다. 영어 때문에 매일 아침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를 향했던 찬혁과 수현. 어느 날, 아버지는 남매에게 홈스쿨링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신났어요(웃음). 하지만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부모님이 최선을 다해 홈스쿨링을 준비하셨거든요. 어마어마한 양의 교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현)

 

몽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아버지는 두 남매의 수업을 위해 인터넷 강의를 다운 받았고, 어머니는 공부하기 편하도록 집 구조까지 바꾸는 정성을 보였다. 찬혁과 수현은 일과는 학교 못지않게 빡빡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가정예배를 드리고 묵상, 아침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9시부터는 수업을 받았다. 또 오후에는 영어, 국어, 사회, 수학, 과학 공부를 해야 했다. 가끔 두 남매는 ‘학교에 가는 게 낫겠다’며, 푸념을 늘여놓기도 했다.

 

“홈스쿨링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힘들었어요. 수업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하지만 저희에겐 자유 시간이 많이 허용됐죠.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학원에 많이 다녔는데도,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공부 때문에 학원에 간 적이 없어요. 만약 중고등학생 시절까지 한국에서 보냈다면 악동뮤지션이 탄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공부 때문에 정말 내가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겠죠. 지금은 저의 모든 상황에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찬혁)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친구들과 놀 때는 어김없이 튀는 행동을 어딜 가나 유명인사였던 찬혁.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MK스쿨에 다닐 적, 찬혁은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소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찬혁에게 ‘가요 청취 금지’를 요구했다. 욕설이 있는 비속어가 있는 노래를 듣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순화된 노래만 들었던 찬혁은 ‘아이들이 듣고 불러도 될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요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악동

 

홈스쿨링을 하면서, 두 남매의 우애는 더욱 돈독해졌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손에 꼽혔다. 찬혁, 수현의 놀 거리는 구닥다리 디지털 피아노와 기타, 부모님의 휴대전화가 전부였다. 찬혁이 기타로 흔한 반주나 코드를 치면, 수현은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렀다. 수현이 “아~ 우동 먹고 싶어라”라고 하면, 찬혁이 가사를 이어 붙였다. 노래 부르기가 시들해지면 남매는 뮤직비디오를 찍고 놀았다.

 

“홈스쿨링이 힘들었기 때문에 노래 부르고 만드는 일이 더 재밌었어요(웃음). 오빠와 저는 마치 쌍둥이처럼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떻게 느끼는지 훤히 알게 됐으니까요. 만약 몽골에서 홈스쿨링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끼리의 악동뮤지션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K팝 스타>에서 우승도 하고 YG에 들어오고 1집 앨범까지 내는 일은 상상도 못 했을 것 같아요. 홈스쿨링을 하면서 공부에 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노래, 피아노, 기타를 가지고 놀면서 음악을 했던 게 정말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수현)

 

악동뮤지션은 <K팝스타>와 홈스쿨링이 “똑같다”고 말한다. 시간표도 직접 만들었고,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도 있었다. 힘이 들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악동뮤지션’이 존재하게 됐다.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수현은 어릴 적부터 가수를 꿈꿨다. 목소리가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로 가수가 되고 싶다는 목표는 없었다. 음악을 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홈스쿨링을 시작한 후부터다. 춤과 그림을 좋아했던 찬혁은 워십 댄서나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찬혁은 『목소리를 높여 high!』에 직접 일러스트를 그려 넣었다.

 

“어릴 때는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는 걸 좋아했어요. 작곡을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으니까요. 춤은 지금도 열심히 추고 있고 그림도 시간날 때 가끔 그려요.” (찬혁)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찬혁은 오랫동안 꿈에 대한 고민을 했다. 진짜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머릿속이 정리되기까지는 입을 열지 않는 버릇이 있었던 찬혁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빠 출입 금지’를 외치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2병’으로 불리는 사춘기를 톡톡히 겪은 것이다.

 

”부모님이 잔소리를 자주 하진 않으시지만 한번 하시면 설교 수준으로 몇 시간이 넘어가요(웃음). 하지만 일방적으로 말씀 하시는 걸 싫어하고 제 의견을 듣고 소통하기를 원하세요. 제가 사춘기 때에는 말을 잘못해서 오히려 말을 뱉으면 상황이 더 악화될 줄 알고 침묵을 했거든요. 그게 서로 오해가 되고 부모님도 저도 답답해했는데, 나중에는 아빠가 먼저 사과하시고 서로 이해하기로 마무리했어요. 지금은 저도, 부모님도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저를 이해해 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하고, 그때 잔소리해주신 것도 감사해요.” (찬혁)

 

몽골에 온 지 3년이 되었을 때, 남매는 비자 때문에 한국에 잠시 들어갔다. 당시, 찬혁에게 가장 큰 숙제는 검정고시. 아버지에게 ‘꿈 계획서’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던 찬혁은 검정고시에 붙으면 자유를 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후 기타에 몰입한 찬혁은 작곡의 재미에 빠져들었고, CCM 가수를 꿈꿨던 아버지는 찬혁의 재능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찬혁이 만든 노래를 수현이 부르자, 혼자 듣기만은 아까운 노래가 됐다. 아버지는 남매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고 금세 ‘악동뮤지션’의 앵콜 요청이 수백 개의 댓글로 이어졌다. 남매는 길거리 공연을 제안 받기에 이르렀고, <K팝스타> 시즌2에 도전하게 됐다.

 

“가수의 꿈은 <K팝스타>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생겼어요. 저는 꿈 때문에 힘들어하던 때가 꽤 길었어요. 또래에 비해 늦은 진로 결정 때문에 가족들도 걱정했죠. 불과 1, 2년 전만 해도 꿈이 없었던 제가 지금은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건, 성공하고 나서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에요. 누군가 저희를 특별하다고 말하는데요. 네! 저희는 특별한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저희가 특별하면 세상 모든 사람 중에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실망할까봐 희망을 갖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함께 모험을 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찬혁)

 

여행을 떠난다는 기분으로 무작정 결정한 <K팝스타> 시즌2. 대중들은 악동뮤지션의 신선한 노래와 모습에 환호했고, 심사위원들에 극찬 속에 남매는 최종 우승자가 됐다.

 

악동

 

“<K팝스타>를 통해 음악을 더욱 진지하게 대하게 됐어요. 최종 우승을 하고 기획사를 선택해야 할 때, 우리의 기준은 ‘우리 노래를 가장 잘 간직해줄 수 있는 곳’이었어요. 양현석 사장님께서 방송에서 ‘악동은 그냥 악동답게 하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셨는데, 우리랑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빅뱅 선배님, 투애니원 선배님과 같은 회사 식구가 되다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떨렸던 것 같아요.” (수현)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어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실험적인 가사, 곡 해석도 보여주고 싶었죠. 하지만 대중들의 기대가 커지면서 힘들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저희는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쪽을 택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심사평은 ‘이게 바로 싱어송라이터입니다’라는 한 마디였어요. 악동은 악동답다는 최고의 찬사였죠.” (찬혁)

 

우리의 음악은 ‘우울할 때 마셨던 우유’

 

악동뮤지션은 지난 4월 7일, 1집 앨범 『PLAY』를 발매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타이틀곡 「200%」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앨범은 발매 20일 째 음원차트 1위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악동뮤지션을 기다리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너무 감동받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는 「얼음들」이라는 노래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저희가 이때까지 보여주지 않은 스타일이어서 사람들이 좋아해 주실까 걱정했는데 좋은 반응이어서 다행이에요. 저는 순위 결과에 상관없이 이 곡을 타이틀로 밀고 싶었어요. 저희의 첫 앨범 『PLAY』는 앞으로 악동뮤지션이 보여줄 큰 구름 같은 음악을 작은 공기가방에 함축해 놓은 앨범이에요.” (찬혁)

 

“1위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니 사실했어요 아 그게 아니라 예상은 아니고 상상을 했어요(웃음). 마냥 1위해보고 싶다. 근데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우리끼리 얘기만 했지 정말 1위를 하니까 감격스럽고 우리 음악을 들어주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했어요(웃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200%」에요 가장 부르기 신나고 많이 연습한 노래예요.” (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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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뮤지션은 어떤 가수가 되길 꿈꾸고 있을까. 찬혁은 “항상 지금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 노래하는 장르는 다양해져도 지금의 감성을 잃지 않고, 순수한 음악을 하고 싶은 것이 꿈이다. 악동뮤지션이 노래할 수 있는 곳이라면, 무대의 크기를 상관하지 않고 노래를 할 계획. 수현은 바람은 “지금처럼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가수”가 되는 것이다. “어떤 무대를 서더라도 정성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악동뮤지션을 기대해달라”고 말했다.

 

찬혁이 롤 모델로 꼽는 작사가는 타블로, 이적. 작곡가로는 박진영이다. 좋은 가사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작사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면서 롱런하는 작곡가가 되고 싶단다. 수현은 “자기 음악과 색깔에 대해 확고한 사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존경스럽다”며, “박진영, 이적, 소향,. 에일리, 아이유 등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악동뮤지션의 음악은 '우울할 때 마셨던 우유'에요. 우울할 때 우유를 마신다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뜻을 자세히 알진 못해도 흐름만으로 마음에 안심이 되는 노래, 우울한 사람에게 우유 한 잔이라도 건네며 옆에서 고민을 들어주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우울, 우유' 성질은 다르지만 서로의 모양을 흉내 내어주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찬혁)

 

“악동뮤지션의 음악은 숲이에요. 숲이 저희 음악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숲은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자연에 의해 생긴 거잖아요. 사람이 만든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고 부담 없고 아름답고요. 우리도 무공해 같은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음악을 계속하고 싶어요.” (수현)

 


*위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악동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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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높여 high!악동뮤지션 저 | 마리북스
이 책은 순수한 감성과 건강한 창의력으로 그들만의 음악적 색깔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지금의 악동뮤지션을 있게 한 것들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 남매가 몽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때 묻지 않은 순수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몽골의 대자연이 이들 남매에게 유기농 정서를 안겨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 속에서 가족이 함께하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었기에 꾸밈 없는 풍부한 감성을 키울 수 있었다. 친구, 이웃들과 함께하고 나누었기에 충만감을 키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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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레인 안승준, 음악에 대한 신념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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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싱글 「My last song」은 국내 음원사이트에서는 판매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음악이 너무 싸게 팔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음악이 조금은 더 비싸게 팔리길 원합니다.”

 

다음은 안승준이 자신의 공식사이트에 올린 글의 일부다.

 

보드카레인의 보컬 안승준이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첫 솔로 싱글을 냈다. 유튜브에 음원을 공개하며 노래를 듣는 건 무료로 하되 소장은 아이튠즈와 밴드캠프를 통해 유료화한, 조금은 색다른 방식을 통해서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그는 동일한 글에서 '애초부터 아티스트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3월의 어느 날, 홍대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현재의 왜곡된 음악 산업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안승준은 새로운 유통방안을 고민하고 실행하며 이에 저항하고 있었다. “사실 아직은 시기상조잖아요. 이 방식으로 계속 싱글을 이어가서 EP가 나올 정도의 성과가 있을 때 '저 이랬어요'하고 자랑하고 싶어요.” 이제 겨우 첫걸음이라며 조심스러워했지만, 그의 말은 담담하면서도 막힘이 없었다. 어떤 질문에도 시종일관 허심탄회했다. 길게 이어진 대화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향한 차분하고도 단단한 열의가 숨길 길 없이 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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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이라는 이름으로 내는 첫 자작곡인데 제목이 First song이 아닌 「My last song」이다. 제목의 의미가 궁금하다.


이 노래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노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 곡이에요. 가사에도 나와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틀어줄래? 내가 언젠가 침대에서 나올 수 없게 된다면'하고요. 영국에서 아내랑 지내면서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좋았어요. 그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가사로 옮겼는데, 좋으면서도 이런 순간이 다시 올 수 없겠지 하는 깨달음이 동시에 올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게 나의 라스트 송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고, 또 반어적인 의미도 담긴 것 같아요.

 

유통 방식이 독특하다. 국내 음원사이트에는 유통하지 않고 아이튠즈와 밴드캠프를 통한 판매 방식을 취했는데, SNS에 이번 싱글을 소개하면서 매달 같은 방식으로 낼 거라고 적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내는 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제가 윤종신 선배처럼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매달 낸다기보다는, 싱글을 주기적으로 내서 그것이 모아져서 하나의 피지컬 앨범이 나오기까지의 행보를 지켜봐주십시오 하는 개념이 더 큰 거 같아요. 한 번에 앨범을 듣는 시대도 아니고. 더군다나 안승준이라는 사람의 앨범이 많이 노출될 리도 없는데. 12곡을 피 토해서 써도 타이틀곡 한 곡으로 앨범을 인식하게 되는 시장 형태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있었고, 제 능력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지연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고. '잘 안 되네' 그러면서 손을 놔 버릴 수도 있거든요. 복합적인 것 같아요. 음. 가치를 하나하나 더 높이고 싶어요. 판매 유통에 있어서도 한곡 한곡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죠. 일종의 실험 비슷한 거죠.

 

영국에서 뮤직 비즈니스를 공부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러한 유통방식을 선택한 데는 유학하며 공부한 영향도 있는가?


제일 친한 친구도 제가 뭘 공부했는지 잘 몰라요.(웃음) 뭉뚱그려서 뮤직 비즈니스 관련된 거라 말하고 다녔는데, 골드스미스 대학의 'Creative and Cultural Entrepreneurship'학과라고, 아티스트를 위한 경영자 과정을 배워요. 경영에 대한 전통적인 방식을 가르치진 않아요. 거기서 원하는 것도 혁신적인 방법이고, 사례 위주, 네트워크 위주죠. 미디어와 예술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강해요. 뭐를 가르치기보다는 어떻게 사는지 다양한 면면을 보여 줌으로써 깨닫게 해 준 거 같아요. '내가 왜 시스템을 따라가야 하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시스템을 따르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선배들이나 친구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들을 해요. “한 곡이 600원에 팔리면 69원 돌아오는데, 작사 작곡에 노래 다 불러도 10% 좀 넘는 건데...” 그럼 아예 거기에다 유통을 안 하면 안 되냐고 제가 그러면, 다들 대안이 뭐냐고 물어요. 그런데 그만한 가치에 상응하는 대안은 없죠. 그래서 완전 혼자 해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혼자 해야 가능한 부분이 있으니까요. 회사도 없고 멤버도 없고, 이때 안 하면 언제 하나, 내가 무엇을 배우고 느꼈으며, 언제까지 시스템에 종속될 것인가, 좋은 시스템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쭉 쌓여 왔던 생각들이 그쪽에 가서 다른 생각들과 방식들 태도들을 만나면서 더 발전한 거 같아요.

 

주위 반응은 어땠나?


정말 말리더라고요. 지지하는 건 아내밖에 없고요. 다 좋은데, 그래도 하나는 백업을 마련해 두는 게 어떻겠냐고. 그런데 하나를 덜어내면 눈에 띄는 1만 인식하잖아요. 나머지 9는 안 보고요. 걱정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 자체가 아예 안 보일 수 있다고 염려하죠. 노출되는 게 0인데, 그래도 1은 보여야하지 않겠냐고. 그런데 저는 1이 보이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그게 성공하면 멋있어도 실패하면 어쩌냐 하지만, 예술은 한 번도 대안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대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바뀌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내가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영상에 사랑스러운 시선이 담긴 게 느껴졌다. 뮤지션이 본인의 사생활을 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 영상은 틈틈이 아이폰으로 찍어놓은 거예요. 학교에서 배운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 많이 돌아다녔고, 특히 페스티벌이나 공연 같은 델 주로 다니다 보니 춤출 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춤추는 장면이 많이 나오게 됐죠. 뮤직비디오로 쓰려고 찍은 건 아니지만, 그 당시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영상에 진정성이 담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음. 뮤지션은 그래도 신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저도 뮤지션은 언제나 섹시해야 한다고 믿어요. 또 섹시하고 싶고요. 그런데 사생활이 드러난다고 섹시해지지 않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생각이 섹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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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레인 때와 비교했을 때, 창법과 스타일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역시 유학의 영향이 아닌가 싶은데 음악적으로 영향 받은 부분이 있다면.


외톨이가 되면서.(웃음) 제가 외향적인 편인데도 영국에 가니 위축이 되더라고요. 말은 다 할 수 있어도 못 알아듣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러면서 음악을 무척 다양하게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말 좋은 노래는 많은데 나 같은 목소리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노래를 잘한다는 게 아니라, 세상에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고, 나는 나의 매력을 100%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어요. 한국에서는 노래를 어설프게 하는 정도라고 여겼거든요. 가창력을 비교하니까 스스로 목소리에 대한 자부심도 없어졌는데 그걸 극복했어요. 제가 가진 게 그거(목소리)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 목소리에 가장 어울리는 키와 진행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저는 저음이 별로 안 예쁜 편이라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런 걸 없애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점층법을 위한 쓸데없이 낮은 벌스는 필요 없다, 그냥 가장 예쁜 목소리로 시작하자! 전 악보도 못 그리고 기타도 못 치고 화성악도 몰라요. 아이패드에 가라지 밴드라는 툴이 있는데 그걸 갖고 흥얼거리다 이 목소리가 난 가장 마음에 들어,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키 잡고, 근데 이게 무슨 키지? 그러면 화면에 코드가 나와요. 그렇게 혼자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 치듯이 만들었어요. 제일 중요한 건 내 목소리에 가장 맞게 만든다는 거였죠.

 

중간에 등장하는 트럼펫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들은 음악들이 관악기의 따뜻함을 많이 갖고 있었어요. 관악기를 넣은 음악을 꼭 하고 싶었어요. 쓸쓸한 사랑노래지만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언젠가 우리는 끝난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춤을 지금 추자는 건데, 그래서 조금 신나고 즐겁더라도 쓸쓸함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트럼펫이 그 쓸쓸함을 담은 튠에 가장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곡 판매를 시작하면서 기대와 다른 부분도, 거꾸로 애초의 우려가 기우로 변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경험도 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제일 중요하는 건 음악의 힘이 있느냐 없느냐인 거 같아요. 제 음악의 힘이 있다면 살아남겠죠. 소셜 네트워크가 좋은 게, 힘이 있는지 없는지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걸 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기대보다 실망한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밴드캠프에서 음악을 팔면 곧바로 메일이 날아오거든요. 사람들이 거기서 사고 메시지를 보내요. 제가 처음으로 받은 메시지가 'Thank you for your beautiful song'이었어요. 고시가격이 1달러인데 3달러를 주고 보냈더라고요. 그걸 받는 순간에 내가 이거 하길 잘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 한순간만으로도 나는 한 거다! 누가 제 음악을 3배의 값으로 사 준 거잖아요. 나는 내 음악이 600원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의 10%인 69원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음악을 원하고 있고 그것에 맞게 사고 있다는 걸 체감해 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평생 잊지 못할 3달러죠.

밴드에 대한 질문을 좀 하고 싶다. 보드카레인은 현재 어떤 상황인가? 잠정 중단인가 아니면 해체한 건가?


사실은 해체 상황이죠. 멤버가 이 자리에 다 있는 게 아니라 저만 뭐라 말하기는 좀 그래요. 제 입장만 전달되면 안 되니까요. 그만큼 해체에 대한 멤버들의 관점이 다 달라요.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해체를 결정하게 된 건 제 선택이었다는 거예요. 저 때문에 해체한 거예요. 제가 더 이상 못할 거 같았어요. 같이 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고 그 이유는 말씀 드렸듯 (새로운 유통 방식 같은) 혼자 해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어요. 사실 그게 이상적인 것에 가깝지 부귀영화는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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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집 앨범이 괜찮았는데 영국 유학을 갔다. 굳이 유학행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


그건 보드카레인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던 거였어요. 3집 가수라는 말이 있어요. 음악계에선 3집 정도 냈으면 살아남았다고 인정해 주는 풍토가 있는데, 3집까지 내보고 나는 그때 유학을 가서 비즈니스를 공부할 테니까 그 후에는 회사를 만들어서 하자. 그게 10년 전에 윤하랑 보드카레인을 해 보자고 하면서 우리가 술 마시며 하던 이야기예요. 갑작스럽게 간 건 아니고, 사실은 그걸 다 지킨 거죠.

 

유학을 가 있는 동안, 다른 멤버들은 모두 개인 독집을 냈다. 멤버들의 작품은 어떻게 들었나?


윤하의 앨범은 유학할 때 들었는데 윤하만의 감성이 보여서 좋았어요. 막 터프할 거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섬세한 면이 있거든요. 해완이는 완전 변했죠. 보사노바, 삼바로 갔으니까. 제가 볼 때 해완이는 브라질 음악을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거 같아요. 가사에 비치는 삶에 대한 태도도 달라져 있더라고요. 상준이 음악은 한국 와서 들었는데, 워낙 드럼을 잘 치는 애니까......, 그래서 혼자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멤버들만의 면면들을 계속 가져가고, 이걸 유닛 형태로 합칠 수 있다면 어떨까. 처음 우리가 홍보될 때 '대한민국의 비틀스가 되고 싶어요'라고 나왔는데, 비틀스가 되고 싶은 건 맞아요.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건 멤버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는 거거든요. 자기 앨범이 다 있고요. 아무리 전설적인 밴드라 하더라도 퀸의 베이시스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콜드플레이 베이스가 누구며 드럼이 누군지 매니아가 아닌 이상 누가 알아요. 유일하게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멤버를 다 알고 있는 건 비틀스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비틀즈를 닮고 싶었죠.

 

보드카레인은 음악적인 면보다 이미지나 대중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런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드카레인 첫 EP가 나왔을 때는 되게 자신감이 있었어요. 당시 우리가 좋아했던 게 브리티시 팝이니 그걸 구현해보자 했죠. 제일 큰 문제는 보드카레인이 데뷔할 때 '서울대 아티스트'라는 꼬리표를 달았다는 거예요. 지금도 소속사 형과 술 마시면 제가 욕을 해요.(웃음) 사실 멤버들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당시엔 그런 이미지가 주는 효과가 더 클 거라 기대했었어요. 그런데 그건 하루 히트에 불과한 거였죠. 흔히 말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는 순간 촌스러워졌어요. 진정성이 전해질 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저희를 저런 워딩을 하는 애들 중 하나구나 하시면서 그저 그렇게 생각해 버리게 만들었죠. 그런 부분이 저희를 오랫동안 잡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아트적인 지점에서 시작하려는 건가. 이런 방식이 홍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앨범이 나오기까지는 사막을 걸어가는 과정일 것 같다.


쉬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게 터져서 잘되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 같고. 사막을 걸어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걸어야겠죠. 저는 저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딱 4명만 있어도 남들이 어렵다는 거 해 볼 만한 힘은 얻는다고 생각해요. 이게 훨씬 어려운 환경에서 노력하시는 분들에겐 건방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예술계라고 제한했을 때, 아무리 남들이 어렵다고 가지 말라고 해도 지지하는 사람이 서너 명만 있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 같아요.

 

인터뷰 : 김반야, 윤은지
정리 : 윤은지 (theothers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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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원 “똑똑한 척하면, 정말 피곤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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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래피가 유행하기 전, 김원은 자신의 손글씨를 잡지에 실었다.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는 책”을 만들고 싶어 <페이퍼>를 창간했고, 19년째 같은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누구는 정년을 맞이한 나이, 김원은 여전히 ‘청춘’을 이야기하는 곳에서 20, 30대와 어울려 지내고 있다. ‘전력투구’가 인생의 모토였던 김원은 유학 시절 중,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고 ‘나답게 사는 삶’을 꿈꾸며, 그렇게 살고 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낙천주의자인 그는 시시때때 친구들로부터 “아직도 그렇게 살아? 좋니?”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김원의 대답은 한결같다. “응, 좋아!”

 

『봄날을 지나는 너에게』는 <페이퍼> 독자들이 ‘백발두령’ 김원에게 물은 인생의 소소하고도 깊은 질문들을 기록한 책이다. ‘철이 든다’는 게 도대체 뭐죠? 부모님을 속이고 여행을 가도 되나요? 왜 저는 사랑을 못 하는 걸까요? 평범하게 사는 법은 무엇인가요? 화를 잘 내는 방법은 없나요? 등 청춘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에 김원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대답을 이었다.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예요?”였다. 평범하고 진리에 가까운 답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김원은 어떤 응답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훔쳤을까? 몽상가 기질이 다분한 그에게 물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에는 한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에도 그 한계가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뭐 그렇게 아둥바둥거리며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결국 죽는다’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게 있어서, 우리의 삶에 끝이 있어서… 살아있다는 것’이 더욱 빛나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왕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 있는 거, 어떻게 살면 나 자신이 좀더 만족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나의 질문은 시작되고 나의 대답도 시작되는 것이다. (『봄날을 지나는 너에게』 14쪽)

 

만나고-김원

 

 

마음대로 만드는 책, 월간 <페이퍼>


책에 실린 저자 소개가 인상 깊다. 따뜻한 심성을 지니기는 했으나, 무책임한 성격의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고?!

 

봄날을지나는너에게

무책임한 앞에 ‘다소’를 써야 하는데 빼먹었다(웃음). 잡지사 발행인은 배를 이끌고 나가는 선장인데, 무책임하면 어떻게 되겠나?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다. 다만, 개인적인 성향으로 봤을 때 “나, 아무렇게나 할 거야” 이런 스타일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20년 동안 잘 살아남았으니,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닌가? (웃음)

 

문화전문지 <페이퍼> 이야기를 먼저 묻자. 19년째 한 해도 쉬지 않고 발행하고 있다. 잡지계가 점점 힘들어지고 꽤 잘 팔렸던 잡지들도 폐간되고 있는데, <페이퍼>는 여전히 건재하다. 어떻게 가능했나?


독자들의 힘이다. <페이퍼> 독자들은 그냥 독자라기보다는 응원군이다. 항상 전폭적이고 꾸준하게 우리에게 힘을 준다. 새로운 독자들이 끊임없이 생기는 점도 우리에게 큰 힘이다. 반응이 폭발적으로 있다가 식는 게 아니라, 새 독자들이 찾아오면서 초창기 독자들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기자, 필진들이 나이를 먹어 가고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20대에게 가 있으니까, 그 마음이 통하는 것 같다.

 

초기 멤버들이 아직도 함께하는 것이 놀랍다.


우리는 마인드 자체가 가족이다. 말로만 가족이 아니라, 가슴에서 가슴으로, 서로를 가족이라고 느끼는 관계다. 그런 느낌이 있기 때문에 가족으로 갈 수 있는 거다.

 

멤버들은 어떻게 꾸려진 건가?


<페이퍼>를 만들기 전, 황경신 편집장과 같은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나는 아트디렉터, 황 편집장은 기자였다. 큰 조직 안에서 책을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내고 싶었는데, 내가 그 때 회사를 관두고 유학을 떠났다. 그 후 1년쯤 있다가 황경신 편집장도 퇴사를 하면서, ‘우리 마음대로 만드는 책’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정유희 기자는 황 편집장의 친구의 친구였고, 만화가 김양수 씨는 정유희 기자와 누나 동생 하는 사이였다. 태동부터, 가슴이 통한 상태에서 만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끈끈하게 이어진 것 같다.

 

만약 <페이퍼> 발행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글쎄, <페이퍼>가 없었더라도 나는 잘 살았을 거다(웃음). 무용을 했을지, 뮤지션이 됐을지는 모를 일이다. 운명론자는 아닌데, 상당 부분은 필연적인 게 있다고는 생각한다. <페이퍼>가 그렇다. 우리는 매월, 작품을 발표하는 느낌으로 <페이퍼>를 만든다. 백남준 선생님이 그림을 그려서 작품을 발표한 게 아니라,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대중과 소통을 한 것처럼 우리도 잡지라는 매체를 통해 작품을 발표한다.

 

19년간 만들어왔으니, 발표한 작품이 벌써 230여 권이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없다. 한 두 시간만 이야기를 하면, 하고 싶은 게 다 나온다. <페이퍼>가 좀 더 매력적인 이유는 각자 원하는 걸 한다는 거다. 조직에서는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표지를 디자인해서 가지고 가면, “이거 말고 딴 거 해봐”라고 하니까 의욕이 안 생긴다. 그런데 <페이퍼>는 각자 하고 싶은 걸 한다. “누구 인터뷰 해봐”가 아니라, “나 이번 달에는 이 사람 만나고 싶어” “그래? 해봐” 이렇게 진행이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사람은 후끈 달아오른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니까 준비를 많이 하게 되고, 다른 데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 느낌들을 담을 수 있다.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니까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지겹고 재미없고 소통이 막혔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만나고-김원

 

얼만큼의 돈이 있으면 나답게 살 수 있을까


책으로 돌아가자. 제목이 『봄날을 지나는 너에게』다. 인터넷 PAPER 홈페이지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라는 코너에 독자들이 질문한 내용을 답변과 함께 소개했다.


독자들이 이렇게 많은 질문을 쏟아낼 줄은 몰랐다. 하루도 쉬지 않고 질문이 올라왔고, 거기에 꼬리를 물고 대답들이 이어졌다. <페이퍼> 친구들의 질문을 보면서, 나 역시 공부를 많이 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첫 질문이 “돈 버느라 젊음을 보내버리면 나중에 후회할까요?”다. 슬프지만, 청춘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 정말 많다. 풍족하게 사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동일한 선으로 보니까. 하지만 이런 가치관은 문제 있는 거 아닌가? 돈이 소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돈을 최상의 가치로 둔다는 게 문제다. ‘내가 얼만큼의 돈이 있으면 나답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너무 높게 측정되어 있는 게 문제다. 서른 살쯤 되면 차가 있어야 하고, 30대 중반이 되면 번듯한 생활거주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과연 잘 사는 건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월 50만 원으로 사는 젊은 친구가 있는데 아주 재미있게 산다. 해외여행도 자주 다닌다. 세 달을 모으면 150만 원인데, 몇 달 동안 아껴 쓰면 동남아, 티베트, 네팔 같은 나라를 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돈을 쓰는 것보다 적게 드니까. 사람이 200만 원을 번다고 더 행복한 건 아니다. 300만 원을 버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지니까. 내 지금 상황을 불평하게 되고. 그래서 가치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중요하다.

 

독자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청춘 시절도 떠올랐을 것 같다. ‘나도 이 고민 많이 했는데’하고 동병상련을 느낀 질문은 무엇이었나?


사랑을 하는데 외롭다는 이야기, 사랑에 빠지는 게 두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와 닿았다. 사랑에 빠지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서로 마음이 통할 때는 좋지만, 내 뜻이 통하지 않거나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너무 고통스럽다. 또 많이 사랑하는데 그 마음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너무너무 심각한 고통이라서, “사랑만 없으면 정말 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랑이 온갖 고통의 근본이 될 때가 있으니까.

 

가장 황당했던 질문은?


책에 실리지 않은 질문들도 많은데, 책 내용 중에 고른다면 “남자친구와 예쁜 펜션에 놀러 가는데, 내 몸을 지키고 싶다”는 질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질문이지? 이건, 남자를 고문하겠다는 거 아닌가? (웃음)

 

젊었을 때, 저자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문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내가 잘 사는 거 말고,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가 관점이었다. 내 인생을 바라볼 때, 내가 행복하고 내가 즐거운 게 우선이다. 수입은 많지만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면? 나는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돈이 중요하다면 그걸 해야 맞겠지만, 내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걸 안 할 수 있는 거다. 그 절반만 받으면서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생각했다. 그 선택이 유학이었고.

 

미대 졸업 후, 아트디렉터로 7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한 살 아이도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유학을 떠났다. 회사가 싫었던 건가? 새로운 환경이 갈급했던 건가?


어려서부터 꿈이 화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는데, 사회에 실제로 쓰임새가 있는 일을 한다는 건 좋았지만, 내가 자유롭지 못했다. 예술을 하려면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답답했다. 나도 자유로운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결혼을 했으니 기본적인 수입이 있어야 하니까 직장 생활을 했지만, 이렇게 계속 살다가 끝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 10년 후는 어떻게 될까 상상해봤더니, 아득했다.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아서 일단 그만두고 보자, 이렇게 된 거다. 그림 공부가 내 선택이었는데, 자신감은 있었다(웃음).

 

2년간의 유학생활은 어땠나? 상상대로 자유로웠나?


서양미술의 본고장인 프랑스에 가면, 내가 훌륭한 화가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웃음). 당시에는 자만심이 많았다. 그런데 알아보긴 뭘, 나 같은 애들이 너무 많았다(웃음). 그래서 인생 공부를 많이 하고 왔다. 그림 공부도 했지만, 삶에 대해서 많이 깨닫는 시간이었다. 쫄딱 망하면서 깨닫고 건들건들거리다가 한국에 다시 왔는데, 그래도 7년 동안 책을 만들어온 게 나의 자산이고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다른 책을 만들어보기로 마음을 먹고, <페이퍼>가 탄생한 거다. 다행히 독자들도 재미있게 생각해줬고.

 

책 속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질문에 “열심히 일하며 살면서도 특별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욕심을 갖지 않는 삶이란, 인간에게 불가능하지 않나?


젊어서는 욕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대부터 욕심이 없으면 청춘도 아니다. 꿈도 꾸고 욕심도 있어야 한다. 욕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욕심이 우리를 살게 하는 에너지 아닌가? 다만, 그 욕심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정도의 욕심은 자신에게 좋지 않다. 젊을 때, 나는 기고만장한 삶을 살았다. 자만심과 착각, 그게 나를 지탱해준 삶의 힘이었다. 내가 좀 성장한 건, 꿈꾸던 것을 실천하고 망했을 때 얻은 깨달음이다. 실패를 받아들이면서 많이 배웠다. 거기에서 다시 돌파구를 찾았다. 실패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걸 통해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게 중요하다.

 

바보처럼 사는 게, 똑똑한 척하면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척이라는 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군다는 거 아닌가? 겉만 있고 알맹이는 없다는 건데, 그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안다. 자기가 어느 정도인지, 재능이나 능력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 거기에 맞게 움직이는 게 좋다는 거다. 남들보다 위에 서려고 노력하니까 힘든 거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편안해질 수 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내가 언제 행복해지는지를 공부하면서 살아야 한다. 매사에 ‘약게 그리고 똑똑하게’ 살려면, 인생이 진짜 피곤해진다. 머리를 너무 많이 쓰면, 머리를 쓰지 않은 게 차라리 더 나았겠다 싶은 경우도 많고(웃음).

 

만나고-김원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길 


요즘은 언제 행복한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잘 그려져서 좋고. 말이 통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는 시간도 즐겁다. 생각이 통하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또 음악도 만들고 있다. 뚱땅뚱땅 만들 때, 기분이 좋다.

 

또래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동창생이나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나보고 이상하게 산다고 한다. 너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고(웃음). “그렇게 사는 게 좋냐?”라고 물으면 나는 “좋다”고 한다. 그러면 나를 보고 “부럽다”고 한다(웃음). 친구들의 생활을 보면 일단 나보다 스케일이 크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니 간부급이 되고, 회사의 대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랑은 발상이 다른 것 같다. 내 발상은 “내 영혼이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느냐”인데,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재산을 키우거나 노후 대비에 대한 관심이 많을 거다. 나 역시, 돈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자본 문제 때문에 못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내 식대로 사는 삶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간혹, 그래도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


내 장점 중 하나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빨리 포기한다는 점이다. 젊은 나이로 돌아가면 어떨까? 상상해볼 수는 있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생각을 안 한다(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살아온 거랑 비슷하게 살 것 같다. 다시 20대로 돌아가서 30년을 산다고 해도 지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

 

좀 더 편안해지는 것. 받아들이는 자세가 된다는 거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젊을 때보다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게 됐다. 젊을 때는 빨리 바꿔버리고 싶었는데, 그것도 긴 역사의 한 대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꼰대 같은 선배, 상사 때문에 고민하는 청춘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다른 사람의 고민을 생각해볼 때, 그 자리에 나를 대입시켜 본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고, 답을 찾는 편이다. 꼴 보기 싫은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가 이 회사에 오래 머물 가능성이 많다면 나는 회사를 옮길 거다. 그렇게 살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이 선배가 왜 이렇게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연구를 해볼 것 같다. 왜 맨날 나한테 잔소리를 하고 못 살게 구는지, 그 선배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보긴 할 거다. 집에 우환이 있는지, 건강이 좋지 않은지 등 선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게 되면, 선배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있을 거다. 나로 인해 생긴 짜증이 아니고, 다른 환경 때문에 나에게 짜증을 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이 정말 상대를 못할 만한 막돼먹은 사람이라면, 이별하는 게 현명하다.

 

‘어른’을 정의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세상을 열심히 잘 살아서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은 사람”. 스스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고 있으니까(웃음). 간혹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너 아직도 그렇게 사냐? 딱하다”고 한다. 나는 반대로 그들이 딱하다. 그들의 탐욕스러움을 볼 때, 딱한 마음이 든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소박한 욕심을 넘어서 거대한 욕심을 갖게 되면, 그건 탐욕이 된다. 그건 여러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는 경계해야 하는 욕심이 아닌가, 싶다.

 

만나고-김원

 

<페이퍼>를 통해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꼭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나?


살아가면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덕목을 묻는다. 또 마무리할 때 ‘세 가지 소원’을 묻는다. 뭐든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이루고 싶은 세 가지 소원.

 

저자에게도 묻고 싶다. 지금 소망하는 세 가지는 무엇인가?


나는 한 가지 소원만 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뤄주세요(웃음).

 

아, 이거야 말로 진정한 탐욕 아닌가!


(웃음). 사나운 욕심, 정말 탐욕스러운 욕심 맞다.

 

책 제목과 딱 알맞게, 지금 봄날이 지나가고 있다. 계절의 봄이든, 인생의 봄이든. 독자들이 『봄날을 지나는 너에게』을 어떤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까.


한가로운 휴일에 읽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좀 넉넉한 상태에서. 이 책이 공부하는 책이 아니니까. 친구랑 이야기하고 싶을 때 보면 좋을 것 같다. 왠지 살아가는 게 답답해질 때, ‘나 지금 잘 살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 때, 가볍게 쉽게 읽으면 좋겠다.

 

방금 질문을 마지막으로 하려고 했는데, 또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누군가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변을 해줄 것인가.


환경적으로 조용한 상태를 만들어 봤으면 좋겠다. 숲 속이라든지, 호숫가도 좋겠다. 아니면 TV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환경에서 자기 내면을 좀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내면의 소리, 생각들을 주의 깊게 집중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다.

 

 


봄날을지나는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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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을 지나는 너에게김원 저 | 큐리어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한 당신의 마음 78가지에 대한 문답집. 19년간 청춘과 함께 걸어온 월간 PAPER의 ‘백발두령’ 김원이 위트 있는 글로, 따뜻한 손글씨로, 아름다운 사진으로 당신에게 대답한다. 솔직하고 유쾌한 그의 대답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고민은 고민 같지 않고 막막하던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섣부른 위로나 강요된 희망이 아니라 말 없이 들어주는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우리에게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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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지나 “서울문묘는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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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인은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공간이 곧 시간으로 치환된다. 이동할 때 고려 대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간이다. 시간적으로 이동하는 데 최단거리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일상에는 여유가 없다. 빨리 가야 하는 게 목표이다 보니, 주변을 둘러볼 틈은 더 없다. 조금 늦을 각오를 하고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보자. 아니, 가려고 했던 길이라도 주변을 둘러보면서 걷자. 일상에서도 기억하고 기념할 공간은 넘친다.

 

『서울 재발견』은 일상을 재발견하는 책이다. 인구 1,000만이 사는 대도시 서울. 많은 한국인에게 서울은 일상적인 공간이다. 일상이라는 단어를 풀어 보면, ‘늘 그러함’ 정도일 텐데 특별할 게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서울에는 특별할 게 없을까? 많은 사람이 자고 먹고 생활하는 일상적인 공간이라서?

 

책을 쓴 이지나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서울에도 특별한 공간은 많다. 그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을 뿐이다. 심지어 그녀는 인터뷰 중에 재발견한 서울은 “충격”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무엇이 그녀를 놀라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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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넘게 찍어온 사진이 바탕이 된 책


여행작가가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국문과 학생이던 마지막 학기부터 라디오 작가 생활을 했어요. 평소 좋아하던 가수의 취미가 사진이기도 했는데, 그가 쓰던 카메라를 산 게 계기가 되어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어요. 여행 가는 것도 좋아했고요. 여행 갔다 와서 그곳에서 모아온 팸플릿을 친구에게 나눠 주고, 여행지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요. 친구들이 여행지에 관해 물어봤어요. 언제나 정리를 잘해주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감동한 것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 이라고 말해줬어요. 그러다 나무[수:]에 도시를 주제로 한 여행 책으로 기획서를 냈는데,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책 『샌프란시스코』가 나왔어요. 그 도시에서 친언니가 공부하고 일을 하고 있었고, 서울에는 그곳에 관한 책이 거의 없었거든요. 언니도 저처럼 정리하는 게 습관이라 평소에 모아둔 자료가 있었고, 그곳에 놀러 오는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만든 책이었어요. 그 뒤로 꾸준히 출판사와 연결이 되어서 지금까지 사진 찍고, 글 쓰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안에 도시이고, 그 안에 사람이 담겨 있고요.

 

『서울 재발견』에는 서울의 사계절이 담겨 있는데요. 시간적으로도 다양한데, 여러 공간을 다뤘습니다. 책 내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나요?

 

외국 친구가 많아서 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라도 서울에 관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어요. 구체적으로 계획한 건 2년 전 여름입니다. 책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사람이 추천사를 써 주신 나가오카 겐메이 디자이너에요. 이분이 『d design travel』 이라고, 일본의 47개 도도부현을 디자인 관점으로 보면서 소개하는 시리즈를 만들고 있어요. 그 책에선 무엇보다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담고 있어요. 그 지역에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개하고요. 『서울 재발견』의 씨앗이 된 게 이분의 말과 책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알던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추천사를 받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요?

 

서울에서 행사가 있을 때 찾아간 적이 있어요. 그때 평소에 정말로 만나고 싶었던 분이라 한국의 기념품과 편지를 써서 드렸어요. 그 후 바로 일본에 갈 기회가 있어서 가서 그분 숍에 찾아갔는데, 우연히 뵙게 됐고, SNS를 활발하게 하는 분이라 그 안에서도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인연이 계속 이어졌죠. 그렇게 추천사를 받기까지 됐습니다.

 

책에 담긴 사진은 최근 2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겠네요.

 

그동안에 취미로 찍은 사진 중에서 5, 6년 전 사진도 넣기도 했어요. 계획하고 찍은 사진도 있지만, 아닌 사진도 있어요. 책에 넣으면서 마지막에는 다소 마음에 안 드는 사진도 있었죠. 예를 들어 구도가 마음에 안 드는데, 찍던 순간에 날씨는 정말 좋은. 그런데 돌아가서 그 장면을 찍을 순 없으니까... 아쉬워도 넣게 된 컷들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진행한 건 2년, 집중해서 완벽하게 빠져든 건 1년이지만 그 전에 찍어둔 사진이 바탕이 됐으니 제 마음 안에 있던 서울의 시간이 담겼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총 걸린 시간은 5, 6년 정도죠. 그래서 출판사에도 말했어요. 이 책을 다시 쓰지는 못하겠다고요. (웃음)

 

사진도 사진이겠지만, 글을 쓰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

 

제 글에는 라디오 방송 때 썼던 원고 영향이 남아 있어요. 라디오 작가는 모든 게 소재잖아요. 이 책 안에서도 삶, 일상이 묻어날 수밖에 없고요. 친구들이 책을 보고 따뜻한 시선과 마음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좋은 글, 말을 모아서 오프닝 때 활용하거든요. 지금도 책 속이나 말 속에 활용하기도 해요. “Writing is a Discovery” 라는 말이 있잖아요. 쓰기 위해서 발견해야 하고, 발견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서울을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한 이유


이지나는 여행작가다. 그녀가 쓴 전작, 『샌프란시스코』『엄마 딸 여행』 『카페 수업』은 모두 공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채널예스의 인터뷰도 특별한 공간에서 진행했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저자가 『서울 재발견』에 소개한 장소이기도 한 윤동주 기념관을 오가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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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노력을 많이 쏟은 책이니, 책이 나오고 나서 지금은 홀가분하겠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휴식기이긴 한데, 대학원에 진학해서 바쁜 대학원생으로 살고 있어요. 제가 쓴 책에 ‘도시’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들어가요.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야이고 조금 더 확장해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한 교수님을 뵙게 되었고, 현재는 건축 도시 디자인과 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문묘 일원의 성균관을 참 좋아해서, 자주 갔었는데 결국 그 학교의 학생이 됐네요. 마친 짜인 각본처럼요.

 

책 제목이 『서울 재발견』입니다.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인데요. 책을 쓰기 위해서 서울의 곳곳을좀 더 집중해서 취재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발견한 서울은 어떤 공간이었나요?

 

서울에서 태어났고 원래 서울을 좋아했어요. 사진기를 사면서 이곳 저곳을 찾아보게 됐고요. 호기심이 많아요. 기사, 칼럼에 나오는 공간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직접 가서 보고 사진기로 담았어요. 무엇보다 서울은 저를 비롯한 사람들의 일상 안에 있는 도시에요. 일상이지만, 주변의 외국친구들 덕분에 이 도시만 갖고 있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매일 보는 것이나, 흔히 보았던 것을 조금 다르게 보는.. 사실 거창한 건 없어요. 제목이 재발견인 건 이 책이 재발견할 수 있게끔 하는 시선을 주면 좋겠다 싶어서예요.

 

예를 들어, 저는 명동성당을 자주 가는데요. 사람들이 명동성당이나 경복궁을 도로표지판이나 지하철역에서 자주 보겠지만 실제로는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잖아요. 서울에 살기 때문에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잘 안 가는데요. 가 보면 관심이 없었어도 생각했던 것과 다르구나, 또는 이런 곳이 있었네? 하는 깨달음이 들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조금 더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려면 조금 더 살펴봐야 하고, 자세히 보면 그 안에 구체적인 한 장소나, 공간이 담겨있게 되고.. 이 책을 보고 난 뒤에 그곳에 가 봤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서울은 다양한 공간입니다. IFC와 같이 최신식 고층 빌딩도 있고, 궁이나 학림다방 같이 오래된 공간도 있습니다. 주로 후자를 담았습니다.

 

카페를 좋아해서 『카페 수업』이라는 책을 썼어요. 그 책을 쓴 게 2010년인데 지금 그곳에 소개한 20곳 중 2/3이 없어졌어요. 슬프죠. 빨리 없어지는 것보다는 오래 남아 있는 곳을 찾아보게 되고, 그곳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어요. 세련되진 않지만 오래된 곳, 사람들의 추억이나 시간이 담긴 곳을 좋아하게 됐어요. 물론 IFC 같은 곳도 갑니다만 선호하는 곳은 오래된 공간이에요.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인 비원을 최고의 공간으로 꼽았습니다. 비원 외에도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면?


서울문묘요! 그곳의 명륜당과 은행나무을 추천합니다. 자연이 이럴 수 있구나, 라는 사실이 충격적이기까지 했어요. 원래 자주 가는 동네가 아니었는데, 은행나무를 보러 자주 찾아갔고 그 시간은 이 책에도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한강도 몇몇 지구를 선호하는데 선유도 공원을 특히 좋아해요. 또 종묘에 처음 갔던 때는 눈이 왔는데 눈 앞에 펼쳐지던 장면이 참 근사했어요. 결정적인 한 장면, 마음에 남은 순간 때문에 좋아하는 장소는, 서울 곳곳에 있는 것 같네요.

 

오래된 공간을 좋아하는 것과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는 게 관련이 있을까요?

 

디지털카메라도 쓰기는 합니다. 포토샵을 전혀 못하지만요. 필름 카메라가 디지털카메라보다 불편한 점이 있죠. 동네 현상소가 사라지면 현상소를 다시 찾아야 하고, 또 비용도 들고요. 그럼에도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보다는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애착이 가요. 라디오를 좋아했고 아직도 손 편지를 써요. 부탁이나, 감사를 전해야 할 때는 손으로 뭔가를 써서 청해야 한다는 저만의 원칙이 있어요. 책이 나온 뒤에 책에 이 나오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께도 책만 가는 게 싫어서 엽서도 써서 함께 전달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주얼리 디자이너, 셰프, 플로리스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추천하는 장소가 실렸던데요. 원고 받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그래서 친한 사람들 위주로 받았어요. (웃음) 이 책을 응원해준 주위의 분들에게 정중하게 부탁했죠.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기도 했고요. 모두 이런 형태의 책에 지지를 보내준 분들이어서 참여해주신 분들도 즐거워하셨어요.

 

원고를 받은 사람이 혹시 함께 여행가고 싶은 사람이기도 한가요?

 

서울을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한 지역에 대해서 각자의 결과물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같은 공간이지만 다르게 볼 수 있는 사람들과요. 도쿄나 뉴욕, 파리에서는 그곳에 살고 있는 소설가, 일러스트, 아티스트가 움직여서 만들어지는 책이 있어요. 이런 책이 그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하죠. 단순히 서울의 맛집, 공간을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저런 책은 드물어요. 보다 다양한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또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

 

앞으로 쓰고자 정해둔 도시가 있나요?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 다음에는 카페, 그리고 『엄마 딸 여행』이라는 국내 여행 책을 만들었어요.어쩌면 저의 시선도 한 번 외국을 거쳤기 때문에 서울에만 있는 것, 이 도시가 가진 매력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책에선 그렇게 제가 찾고 발견한 서울의 장소를 담았고요. 그런데 결국 공간을 완성시키는 건 그 안의 사람이라 사람에 관해서도 쓰고 싶어요. 서울 이외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곳은 외국은 도쿄, 한국은 제주요.

 

좀 추상적인 질문인데요. 작가님에게 여행의 의미는?

 

어떤 때는 완벽한 휴식이고, 어떤 때는 일이고, 또 어떤 때는 새로운 자극, 배움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호기심이 많고, 또 좋아하는 것도 많아서 찾아갈 곳은 꼭 가보거든요. 미술관을 좋아해서 한 두 곳은 꼭 찾아가는데, 거기서 본 전시로도 많은 것을 느끼게 돼요. 그런데 멀리보고, 또 길게 보면 그런 여행도 결국 저라는 사람의 인생 안에 있는 것일 테니까, 여행의 의미가 곧 인생의 의미와 맞닿아 있을 것 같네요.


어떤 여행작가로 기억되길 원하나요?

 

무엇보다 공간과 사람을 잇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 같이 먼 곳을 갔다 와서 무언가를 쓰는 작가도 있고 그런 글도 좋지만 저는 제가 찍은 사진, 쓴 글로 독자가 뭔가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계절과 시간에 반응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편인데 그런 것으로 일상을 재발견하게 하고. 환기하는, 그런 여행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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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위해 쏘카(http://www.socar.kr/)에서 피아트 차량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쏘카는 카 셰어링으로 공유 경제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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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재발견이지나 저 | 나무수
『서울 재발견 Rediscovery Seoul』은 기존의 가이드북이 보여주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서울을 소개하는 책이다. 정보를 가이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어떤 주제를 갖고 도시를 여행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미 가보았거나 알고 있는 장소일지라도, ‘낯설게 바라보기’를 권하며 자신의 감성에 맞는 서울을 재발견하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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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영 “도전하는 열정에 장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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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은 청각장애를 가진 저자가 세상을 향해 펼쳐 보이는 삶의 한 페이지다. 선천성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그녀는 단 한 번도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자신의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바깥의 소리들을 지워내고 나니 ‘나는 할 수 있다’는 내면의 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그 열정이 이끄는 삶 속에서 저자는 좌절의 순간마다 도전을 선택했다. 청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충북대학교에 입학했고,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통일대장정을 완주했다. 자신의 장애가 뛰어넘을 없는 장애물인지 시험해보고 싶어 홀로 떠난 중국여행에서는 ‘열정만 있다면 어떤 일에도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아테네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완주에 성공하면서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노선영

 

그러나 그녀의 도전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따뜻하지만은 않았고, 그 안에 담긴 마음 역시 응원만은 아니었다. 수화를 사용하는 자신을 안쓰럽게 혹은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에나 있었다. 비장애인 친구와 수화로 대화를 나눌 때면 동네 어른들이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고, 그 모습을 보고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말하는 친구의 어머니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서 느껴야 하는 그 외로움은 일반 학교에 진학하며 더 짙어졌다. 비장애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가 버거웠을 뿐만 아니라, 대화가 되지 않는 탓에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한계를 긋는 일이었다. 내 가능성이 최고로 발휘되는 것은 한계를 긋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였다. ‘할 수 없어’라는 생각보다는 가능성의 힘을 믿고 정면으로 현실을 돌파해야 행운을 불러들일 수 있다.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54쪽)

 

그럼에도 그녀는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을 글에 담았고,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책 속에서 찾았다. 그녀에게 글은 ‘장애에서 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절박함이 담겨 있는 혼’이기에 더 많은 것을 읽고 배우기 위해 지식의 장을 찾아 나섰다. 지난 2012년에는 청각장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지식포럼에 참가하면서, 장애인 할인 제도가 마련되고 수화가 사용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지식에 대한 끝없는 열망, 세상과 소통하려는 뜨거운 열정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보다 넓은 무대 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보였다. 지난 해 <북포럼 톡스(톡쏘는 스토리)>와 CBS의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의 강사로 초청받은 것이다. 청각장애인으로 살면서 겪어야 했던 좌절을 도전이란 이름으로 뛰어넘은 그녀의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도 정작 자신 안의 소리는 듣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에게 많은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저자 노선영이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 안에 담아놓은 것은 바로 그 소리에 대한 이야기다. 온전한 청력을 가진 이들은 무심코 지나쳤지만, 청각장애를 가진 저자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던 우리 안의 이야기다. 


 
장애에서 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찾은 것은 ‘책’

보이는-소리들리는-마음


노선영 저자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수화통역사 전혜영 씨와 함께 인터뷰에 응했다. 두 사람은 대학시절 수화동아리 ‘보이는 소리’에서 처음 만나 10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친구의 귀와 입을 대신해 세상의 소리를 전해주는 전혜영 통역사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소통을 이어나가는 노선영 저자. 두 사람의 우정은 ‘지음(知音)’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다.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에서 전혜영 씨를 저자님의 ‘제1호 수화통역사’라고 소개하기도 하셨죠.


네, 맞아요. 대학교 수화동아리 ‘보이는 소리’에서 같이 임원 활동을 하게 되면서 친해졌어요. 저는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애화학교에 다니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반 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소통이 어려워서 친구가 없었어요. 완벽한 외로움 속에서 지냈죠. ‘친구가 뭘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이 친구를 만나면서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어요.

 

자신을 위해 친구가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요. 그런 점에서 저자님이 참 부럽습니다(웃음).


수화 통역을 해주는 친한 친구가 있으니까 다른 농아인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해요. 그리고 수화를 통역하는 스타일도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기 때문에 서로의 스타일을 잘 파악할 수 있죠. 그리고 친구가 저에 대해서 잘 아니까 제 이야기를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친구를 완벽히 믿기도 하고요. 무슨 말을 하든 알아서 잘 전달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친구가 기자님께 제 말을 전할 때도 수화를 멈추지 않잖아요. 제가 말한 대로 잘 전하고 있는지 알려주려고 하는 거거든요. 저를 배려해주는 거죠. 
 
많은 분들이 <북포럼 톡스(톡쏘는 스토리)>와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을 통해서 저자님의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책에 대한 지식을 쌓고 싶어서 <북포럼>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화장실에서 김영서 PD님을 만나게 됐는데, 수화로 인사를 건네 오시더라고요. 제가 깜짝 놀라서 ‘어떻게 수화를 아시냐’고 여쭤봤더니 예전에 배운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북포럼>과 인연이 시작됐고, 고우성 PD님이 강연에 도전해 보라고 권유를 하셔서 <북포럼 톡스>의 무대에 서게 됐죠.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망설였어요. 제가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데 일반 청인들 앞에서 말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거든요. 그런데 제 한계를 깨트리고 싶어서 도전하게 됐죠. 그때 강연을 하면서 용기를 얻어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도 출연하게 됐고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의 제작진도 제가 <북포럼 톡스>에서 강연하는 모습을 보고 출연 요청을 하셨던 거래요. 청각장애인 특집을 기획하면서 저를 강연자로 섭외하신 거죠.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에서 “글은 내게 ‘혼’과 같았다”고 밝히셨습니다. 장애에서 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절박함이 담겨 있는 혼이었다고요. 책 읽기를 좋아하고 다수의 강연에 참가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제가 일반 중학교로 진학했을 때 소통이 어려워서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면서 책을 파고들었죠. 가장 힘들었던 건 선생님이 농담하실 때였어요. 친구들은 다 웃는데 저 혼자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그럴 때 외로움을 느꼈지만 책을 보면서 풀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책을 통해서 결핍을 채우려고 했던 것 같아요. 강연도 비장애인에게 맞춰진 경우가 많지만 기회가 된다면 매번 참가하려고 노력해요.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 위해서라도 비장애인 친구들보다 더 오래 책을 읽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책을 ‘결핍을 채워주는 도구’라고 생각하게 되셨나요?


맞아요. 제가 애화학교에 다닐 때 수녀님께서 ‘듣지 못해도 글을 잘 쓰면 너의 모든 이야기를 잘 전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때부터 ‘글은 나의 희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글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세 배 노력하고 혼자서 공부했던 거예요. 그때 다산 정약용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는 부분이 제 생각과 잘 맞았거든요.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을 쓰시면서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꼭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책에도 썼지만, 제가 일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생일날 친구들을 초대한 적이 있었어요. 마흔 장이 넘는 초대장을 직접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나눠줬는데, 생일파티에 와 준 친구는 한 명도 없었죠. 그때 기억은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어요. 다시 떠올려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건 농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잘 전하고 싶어서예요. 제가 솔직하게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계속 이어질 테니까요. 그 아픔을 말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농인들도 똑같은 아픔을 계속 겪게 되겠죠. 그래서『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을 쓰게 된 거예요.

 

노선영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청각장애인’과 ‘농인’이라는 두 표현이 어떻게 다른지조차 알지 못하죠.


청각장애인은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이에요. 농인 역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똑같지만, 그것이 다만 특성일 뿐이고 수화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져요.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농인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에요. 듣지 못해도 글도 읽을 수 있고 수화도 잘 볼 수 있어요. 입모양을 읽을 수도 있고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거죠.

 

비장애인들에게는 ‘외국어와 마찬가지로 수화 역시 다양한 언어들 중 하나로 인식해야 된다’는 이야기도 낯설게 들립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수화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죠. 수화를 하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가 수화하는 걸 보고 청인이었던 친구의 어머니가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하셔서 멀어졌던 적도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인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화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수화를 사용하는 언어적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에서 사용하신 ‘농문화’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하게 다가오는데요. 비장애인들은 모르는 농인들의 문화에 대해서 몇 가지 알려주세요.


농인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누군가 뒤에서 부르더라도 알아채지 못하잖아요. 그럴 때는 어깨를 쳐서 불러요. 그리고 비장애인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앞을 보고 걸어가면서 대화를 하지만 농인은 눈을 마주치면서 대화를 나누죠. 가끔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다들 무표정하게 앞을 보고서 대화하는 모습을 봐요. 그 안에서 친구와 수화로 대화를 하다보면 마치 우리만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해요. 농인들은 박수를 치는 방법도 비장애인과는 다른데요.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반짝반짝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손을 흔들어요. 또 다른 점이 있다면 농인의 시야는 비장애인보다 넓어요.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손을 흔들어서 부르기도 하죠. 만약 농인들이 한창 수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주의를 집중시키고 싶다면 조명을 끄면 돼요. 불을 끄면 수화가 안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멈추게 되거든요.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게 되는 편견은 무엇인가요?


청각장애는 눈으로 보이는 장애가 아니니까 비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당연히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은행에서 카드를 발급받을 때도 농인임을 알려주고 휴대폰 번호 옆에 ‘문자’라고 써주는데도 항상 전화를 해요. 대부분 본인 확인도 전화로 하잖아요. 그럴 때 농인들은 직접 은행을 방문해야 하죠. 그리고 택배 기사님이 오해하시는 경우도 있는데요.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택배를 못 받는 경우도 있죠.

 

<북포럼 톡스(톡쏘는 스토리)> 강연에서 ‘장애는 동정의 대상’이라는 생각의 틀을 깨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애를 가진 이웃을 대하는 비장애인의 태도는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저를 배려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농인이 수화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하는데요. 일반 사람들은 수화를 TV에서만 볼 수 있으니까 직접 만나게 되면 신기해서 보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수화를 봐도 모르는 척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시선들이 사라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이 그 변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이 단순히 마음 아픈 이야기, 안타까운 이야기로 비춰질까 걱정되지는 않으세요?


그렇더라도 상관없어요. 모든 사람이 아픔이 있는 거니까요. 단지 저는 아픔을 드러내고 제가 가진 열정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에요.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지만 극복하는 방법이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저만의 방법을 찾은 거죠. 그리고 비장애인이라고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어떻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시나요?


농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라고요.

 

노선영

 

상처에 대한 내공이 도전 정신의 씨앗으로

 


통일대장정과 아테네국제마라톤을 완주하고, 홀로 중국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셨는데요. 그 도전 정신과 용기는 무엇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쌓인 상처에 대한 내공이 대학교 때 폭발한 것 같아요. 그리고 환경도 중요하고요. 고등학교 때는 많은 도움이 없어서 제가 가진 재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대학에 입학한 다음에는 수화동아리도 만났고, 장애인을 위한 대필 도우미의 도움으로 수업을 듣기도 수월했어요. 특히 수화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내 곁에도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첫사랑도 만났죠. 그러면서 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 믿음과 사랑, 우정, 주변 사람들 도움이 모여서 제 안에 쌓아뒀던 걸 폭발시킬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던 것 같아요.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어렵게 얻은 거죠.

 

어머님의 영향도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예술과 체육 활동도 적극 지원해 주셨잖아요. 참 강인한 어머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 대장정을 떠날 때는 “우리의 인생에 가장 신중해야 할 것은 ‘포기’란다. 포기한다면 다음 일도 또 포기하기 쉬우니까”라고 말씀해 주기도 하셨죠.


어머니도 처음에는 약한 여자였어요. 그런데 언니랑 제가 둘 다 농인인 걸 알게 되시고 더 강해지신 것 같아요. 듣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예술이나 체육활동, 예를 들면 태권도나 수영, 피아노를 모두 배울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어요. 그리고 항상 ‘할 수 있어’라고 말씀해주셔서 ‘나는 못해’ 하고 말할 수 없었죠. ‘결과는 좋지 않아도 괜찮다’고 격려해 주셨고요. 제가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힘이 가장 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버지의 힘도 컸죠. 처음에는 아버지와 대화하기가 어려워서 중간에서 어머니가 통역을 해주셨어요. 그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랑 더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어머니는 언니와 제가 특수학교에서 수화를 배울 때 곁에서 같이 배우셨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면 몇 번이고 손에 써주셨죠.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요. 처음으로 제가 농인인 걸 아셨을 때 ‘이 아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을 읽고 나서 걱정이 없어졌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감동받으셔서 서른 번 가까이 읽으셨대요.

 

스스로 더 큰 목표를 향해 도전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건가요?


만약에 제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안 돼, 넌 못해, 할 수 없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텐데, 저는 안 들리기 때문에 제 안에 있는 목소리만 믿고 도전할 수 있었어요. ‘너는 할 수 있어’ 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믿고 도전했던 거죠.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내면의 목소리가 더 소중했어요. 지금 저의 새로운 목표는 세계일주예요.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5년 전부터 스터디 활동도 하고 있어요. 세계일주하는 비장애인들을 보면서 부럽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들을 수 없지만 그 한계를 깨트리고 싶어요.

 

작가님의 인생을 변화시킨 책으로 『꽃들에게 희망을』을 꼽으셨습니다. 혹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또 다른 책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쓴 『뜬 세상의 아름다움』을 읽으면서 지혜를 안에 두지 말고 밖으로 행동하라는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어요.

 

주로 어떤 이야기들에 마음이 이끌리세요?


어렸을 때는 위인전처럼 성공하는 사람들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식물이나 꽃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요. 듣지 못해도 살아가면서 아름다움을 많이 보고 싶었거든요. 요즘에는 창의적이거나 새로운 것, 그리고 철학이 있는 책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책에서 『가방 들어주는 아이』의 고정욱 작가와의 인연을 소개하기도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을 쓰시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셨나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너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까지는 고정욱 작가님 혼자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하셨는데 함께 해줄 후배들이 많이 필요하시다고요. 제가 그 후배들 중 한 명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죠. 제가 앞으로 작가님보다 더 큰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이 좀 부담이 되더라고요(웃음).

 

노선영

 

“무엇보다 농인이 정당한 권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번 책을 썼다고 밝히셨는데요. 현재 계획 중이신 활동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청인과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리고 수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수화를 배우기 싫어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농인 후배들 중에는 저를 보고 수화를 배우기 시작한 친구들도 있거든요. 그들처럼 침묵하지 않고 밖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비장애인들에게는 농인도 생각할 수 있고, 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만약에 저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저를 통해서 희망을 얻는 사람들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 것처럼 말로만 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앞으로 또 다른 책을 통해서 진심을 보여주고 싶고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힘들게 살았지만 그만큼 더 노력해서 보여주면 다른 사람이 저를 보고 큰 용기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비야 씨는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세계를 누비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저는 장애인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벽에 부딪혀야 하지만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마음으로 도전을 계속할 거예요.

 

작가로서 다음에 들려주실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두 번째 책은 저에게 용기를 주시는 청인 분들을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서 쓰고 싶어요. 그리고 세 번째 책은 세계일주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앞으로도 비장애인은 겪지 못하는 일들을 재미있게 엮어서 들려드리고 싶고요. 감동적이고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을 썼으면 좋겠어요.

 

노선영 저자가 인터뷰를 마치며 남긴 한 마디는 “도전하는 열정에 장애는 없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그녀는 누구나 장애와 트라우마,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녀의 말처럼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은 청각장애를 가진 한 여성의 삶의 기록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그녀와 같이 선천적인 혹은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꿈꾸는 일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때로 그것은 과거의 상흔일 것이고, 또 때로는 스스로 정해 놓은 한계일 것이다. 저자에게는 그것이 들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에서 그녀가 보여준 좌절과 도전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녀가 발견한 ‘내 안의 목소리’ 역시 우리 안에 있고, 그녀가 그랬듯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만 한다면 누구나 자신을 뛰어넘는 도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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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노선영 저 | 가교
지식나눔공동체 북포럼과 CBS강연프로그램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도전하는 열정에 장애는 없다’라는 주제로 강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노선영이 첫 책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을 출간했다. 그녀는 선천성 청각장애로 태어나 일반학교에서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면서 자살시도를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특유의 긍정 마인드와 열정, 도전정신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왔다.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들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봐야 할 필독서”라는 유영만 한양대 교수의 추천글이 이 책의 많은 것을 표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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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성은 “엄마가 아이에게 노래를 많이 불러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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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변하면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한국 사회는 급격한 경제발전을 거치며 그 정도가 다른 사회에 비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육아의 문제에서 많은 엄마 아빠가 혼란을 느끼고 있다. 이는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육아책의 존재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책을 확인하면 서로 상충되는 정보도 많다. 어떤 책은 아이가 울게 놔두라고 하고, 어떤 책에서는 우는 걸 방치하면 아이의 감정 표현에 장애가 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 육아에도 딱 떨어지는 답은 없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아이가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를 테니, 그 상황에서 맞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럼에도 많은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행동이 있다. 바로 노래다. 특히 아이가 잠투정을 할 때 노래가 유용하다. 아이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는 것도 음악의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음악의 활용 범위는 육아에서 더 넓어진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엄마가 만들었다』는 ‘육아’와 ‘음악’을 다룬 책이다.  부제인 ‘태교부터 13세까지 음악이 있는 행복한 육아’의 표현처럼 총 3부에 걸쳐 저자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음악 활동을 소개하고, 항간에 퍼져 있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는다.

 

저자인 김성은 원장은 대학에서는 성악을, 독일에서는 합창지휘를 전공했다. 대학에서 아동복지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김성은 발달음악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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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이에게 노래를 많이 불러줘야

 

『세상의 모든 음악은 엄마가 만들었다』에서는 음악에 관한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요.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잘못된 지식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음악에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을 위해서 썼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음악성이 참 좋아요. 음악도 좋아하고요. 초등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피아노 교육을 받잖아요. 그런데 음악에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은근히 자랑스럽게 취향을 밝히고, 대중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은 상대를 봐가며 하죠. 음악에 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어요.

 

육아, 음악 교육, 클래식 등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했는데요. 가장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여러 가지를 썼지만, 이 책을 한 마디로 줄이라고 하면 “엄마가 아이에게 노래를 많이 불러줘라”예요. 엄마들에게 노래해보라고 하면 부담을 느껴요. 그런데 우리 할머니들은 노래를 계속 불렀잖아요. 제 외할머니도 한글도 모르고 평생 사셨고 가끔은 우물우물 가사가 불분명했지만 항상 노래를 부르셨어요. 물론 제게 들려주시려고 부른 노래는 아니었지만요. 노래는 인간의 본능이에요.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책 제목처럼 아주 예전부터 인류가 노래를 계속 해 왔어요. 교육이나 문화 교양 차원이 아니라, 그냥 아이의 엄마니까 본능적으로 노래를 하면 아이와 소통을 많이 할 수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존의 생각에 반하는 이야기도 하게 된거고요.

 

대표적인 게 ‘모차르트 태교’인데요. 모차르트 태교의 효용이 과장된 면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모차르트 태교 음반이 잘 팔리잖아요.

 

모차르트 효과는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예비부모들은 이 말이 솔깃해요. 큰 효과를 바라진 않지만 그것말고는 막상 뱃속 아기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거든요.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도 갓난아이는 누워만 있잖아요. 청소년 아동 상담소 소장님이 10년 동안의 임상데이터를 통해 나타나는 특이현상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정서적 불안을 겪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클래식 태교와 영유아 시기에 클래식 감상을 많이 했다는 내용이었어요. 이 데이터만으로 클래식 음악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단순하게 판단할 수는 없어요. 아이와 음악의 관계만 이야기해서는 안 돼요. 이 논쟁에서 음악을 전달한 엄마는 늘 빠져있었거든요. 아이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을 전달해준 엄마가 뭘 하고 있었느냐가 관건이죠.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고 엄마는 다른 일을 했다면, 아이가 외로움이나 표현욕구좌절을 느낄 수 있었겠죠.

 

음악, 어떻게 들으면 좋나

 

클래식이라도 다 같은 클래식은 아니잖아요. 연주회에서 듣는 음악과 LP, CD, MP3에서 듣는 음악이 다 다를 텐데요.
 
다 다르죠. 요즘에 ‘백색소음’이 집중력을 향상시킨다고 해서 여러 기관에서 활용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틀어주죠. 그런데 이 백색소음은 아날로그 소리여야 효과가 있어요. 디지털화된 백색소음은  또 하나의 소음일 뿐 기존의 소음을 중화시키는 기능이 없거든요. 우리 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구별할 수 있어요. 디지털화된 소리는 깨끗하고 청량감을 줄 수는 있지만 사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소리는 대부분 아날로그 소리예요. 저는 디지털화된 소리를 오래 못 들어요. 5~10분은 괜찮은데 이후에는 피곤해지거든요. 클래식 음악도 MP3로 듣게 되면 소리가 납작해져요. 대중음악의 경우도 큰소리의 타악기, 전자악기가 많이 연주되는데 이런 경우 음량간의 밸런스를 위해서 많은 부분을 깎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많이 다듬어진 소리를 듣는 거죠.


음악을 듣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공연장에서 듣는 것이고요. 꼭 공연장이 아니라도, 실제 연주를 듣는 게 좋아요. 특히 어린 아이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게 필요해요. 엄마 아빠의 서툰 연주라도 직접 들려줄 수 있다면 최상의 음악이 되죠. 그 다음 대안은 LP, CD, MP3 순이라 하면 될 것 같네요.

 

부모님이 전자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도 별로 좋지는 않겠네요.

 

전자피아노의 장점은 층간소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하나죠. 전자피아노는 피아노가 아니에요. 그냥 전자악기라고 생각하면 돼요. 디지털소리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청각이 둔해져요. 이럴 때 예민한 청각 훈련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산 속에 가서, 그 곳에서 나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낙엽 밟히는 소리 등 여러 가지 소리를 하나 하나 집중해서 들어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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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음악 교육

 

음악 교육, 하면 다소 여유 있는 집안에서 하는 것이라는 인식도 있는데요.

 

지인 중에서 책의 목차를 보고 돈 많고 교육열 높은 특수계층 위한 책이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이와는 정반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책을 썼는데 말이죠. 음악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잘 못되어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얘기죠. 시간이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도 음악적 자극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아요. 사실 엄마들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이미 잘하고 있고요. 아이에게 성인과 대화하듯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억양이나 말하는 속도가 달라지죠. 말하는 음의 높낮이가 다양해 지고, 조금 천천히 이야기하고, 끝을 살짝 길게 끌어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죠. 이게 바로 모두 음악적인 것이죠. 이렇게 음악적으로 아이에게 접근을 했을 때 아이도 반응을 더 많이 해요.

 

많은 엄마들이 잘 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녀 교육 문제로 상담을 많이 하잖아요. 상담하시면서 요즘 엄마들이 잘못하는 부분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모든 게 과유불급인데요. 음악도 학습으로 생각하며 접근하는 게 제일 안타까워요. 말로는 정서를 위해서 음악을 들려준다고 하지만, 그 뒤에 숨은 목적은 이 아이가 음악을 듣고 두뇌개발이 되고, 그러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죠. 영유아 교육프로그램들에 이런 경향이 많아요. 이런 자극들은 아이를 오히려 지치게 해요. 그리고 너무 많은 자극 때문에 정작 느낄 수 있는 자극이 적은 게 문제에요. 더하기 빼기 개념이 없는 20개월 된 아이에게, 나중에 학습할 때 더 잘 받아들인다는 논리로 더하기 빼기를 주제로 율동을 가르치기도 하구요. 스마트폰, 컴퓨터로 음악이나 동화를 들려주죠. 이런 식으로 너무 많은 소리에 노출되면 진짜 작고 귀한 소리를 들을 기회를 놓쳐요.

 

원래 전공은 성악인데 영유아 교육으로 관심사가 옮겨졌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평생 노래하면 행복하겠다는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성악을 전공했어요. 나이 들어가면서 젊어서는 할 수 없었던,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보이더라고요. 보다 많은 사람이 음악을 잘 누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어요. 그게 20, 30대에는 연주가로서 활동하는 거였고, 지금은 교육이 된 거죠. 대학교수 10년을 하다 보니 더 어릴 때 잘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교육을 하다 보면 대상연령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요. 문제를 발견하고 원인을 생각하다 보면 청소년기, 아동기, 영유아기 이런 식으로 변해가죠. 결국은 태교까지.

 

안타까운 게, 5~6살 때 음악이 좋아서 피아노를 시작한 아이가 2~3년 안에 관둡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고민하다 보니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되었고요. 피아노 학원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들이 연구원에 찾아오기도 하는데,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님들과도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학원 원장님들이 이미 잘 하고 계시지만 아이들이 꾸준히 음악을 사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해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음악은 훌륭한 동반자

 

직접 두 아이를 키운 경험도 원장님의 관심사를 형성한 배경이었을까요?

 

큰 애는 제가 유학하는 동안 만 다섯 살까지 독일에서 자랐고 작은 애는 한국에서만 키웠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를 대하는 태도, 교육하는 방식,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가치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죠. 한국과 독일의 교육은 앞서고 뒤쳐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요. 어느 쪽이 좋다고 할 순 없어요. 다만 안타까운 게, 한국에 들어와 있는 영유아 프로그램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변형 보완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도 그냥 도입되어 운영되는 사실이에요. 영어로 된 노래를 영어 그대로 가르쳐서 마치 영어 교육도 되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하고요. 노래 안에 문화가 숨어 있는데,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문화의 동요를 부르면서 음악적 감성을 똑같이 느끼기를 바란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이런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요.

 

지금 운영하는 김성은 발달음악연구원에서는 하는 프로그램 중에는 어떤 게 있나요?
 
주력 프로그램은 셀프메이드 뮤지컬이라고, 아이들이 뮤지컬을 스스로 만들어요. 동요를 석달 동안 15~16곡 배우고 이야기가 되게끔 꾸며 내야 하죠. 그 안에 논리, 드라마 구성 요소도 있어야 하고요. 장면과 장면 사이 비연관성을 연결하려면 상상력도 필요하죠.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끼리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려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야 하고 관철하려면 친구를 설득해야 하고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죠. 자기 의견을 포기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요.  분석해서 아이 성향과 장단점을 부모님께 알려 드립니다. 예전엔 이런 교육이 특별히 필요 없었죠. 골목에서 놀면서 언니나 동생, 친구 사이에서 의사소통하는 걸 배웠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게 학습 위주라 정작 중요한걸 배울 시간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지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시겠어요.


육아는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일임에 분명해요. 하지만 모든 엄마들이 이 힘든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매일매일의 변화가 기쁨과 놀라움을 선사하기 때문이죠. 아이의 작은 발달도 노치지 않고 감탄하고 함께해주는 엄마가 가장 좋은 엄마예요. 그런 좋은 엄마가 되는데 음악이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어요. 지금 아이가 보여주는 귀한 모습을 조금만 자라면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가 귀하고 행복할거예요. 아이를 직접 보살 필수 있는데 무상보육복지를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 손에 키우는 일은 줄었으면 좋겠어요. 음악이 있는 육아로 엄마와 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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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음악은 엄마가 만들었다김성은 저 | 21세기북스
지식교육에만 치우친 결과, 정서적 문제를 보이는 아이들이 최근 급속도로 늘고 있다. 'ADHD'로 불리는 극도로 산만한 유형, 또는 '선택장애'를 겪는 의존적이고 소심한 유형으로 주로 양분된다. 단적인 분류지만, 많은 엄마들이 아이의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을 호소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정서와 지능발달을 함께 돕는 것, 그 답이 바로 음악에 있다. 음악은 훌륭한 육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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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황인범 “독문학 전공, 그러나 내 운명은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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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자리잡은 ‘서촌’ 일대에는 600여 가구의 한옥이 있다. 서촌의 보존, 개발을 위해 한옥보존구역이 지정되었고, 2010년부터는 수십 채의 한옥이 새 주인을 맞이하고 있다.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의 저자, 황인범 도편수는 그 중 9개의 한옥을 신축, 대수선했다. “목수가 된 일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도시형한옥 ‘어락당’의 탄생기를 담은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를 펴냈다. 책을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저자의 필력은 꽤 탄탄하다. 누군가로부터 “출판사, 편집자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거 아냐?”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 한옥에 깊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더라도, 퍽 흥미로울 책이다.

 

서촌에서는 ‘황 목수’로 통하는 황인범 대표의 프로필도 눈길을 끈다.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했지만, 전공과는 무관하게 졸업과 동시에 목수의 길을 택했다. 1997년 순천 선암사에서 목수로 입문한 후로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 설악산 백담사 요사채, 가평 현등사 2층 목탑 등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 수리 현장에서 목수와 도편수로 일했다. 2010년부터는 서촌에서 도시형한옥을 신축, 대수선하고 있다. 일이 있는 곳에 새 터를 잡는 ‘17년차 목수’ 황인범 대표는 5년째 서촌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집을 짓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한옥을 좋아하고 살고 싶은 꿈을 꾸는 이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고민해왔고, 이 집에 이르러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관한 인문적 지식이나 집 짓기 기술에 관해서라면 이미 훌륭한 저작들이 많다. 그러나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닌 ‘집으로 말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작은 한옥 한 채를 어떻게 지었는지 사실 그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 5쪽)

 

 

만나고-황인범

 

내 몸에 맞는 일이 천직이다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고 들었다. 책으로 만들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건가?

작은한옥한채를짓다


내용으로 승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통 초안과 기획안만 보낸다고 하는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를 완성해서 보냈다(웃음). ‘어락당’의 주인인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이 출판사를 소개해준다고 했는데, 내 힘으로 쓰고 싶었다. 다행히 돌베개 출판사가 글을 좋게 봐줬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돌베개 책이 가장 많다(웃음).

 

그동안 서촌에서 9개의 한옥을 신축, 대수선했다. 책의 주인공은 ‘어락당’인데, 다른 한옥과는 달랐기 때문에 책으로 쓰게 된 것인가.


서촌에서 한옥을 계속 지어 오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또 동네에 적응하면서 벌어지는 일들도 많았다. 한 해 한 해 살아가면서, 이 동네에서 한옥은 이렇게 지어져야 한다는 어떤 방법론을 찾게 됐다. 집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는데, 마침 ‘어락당’을 짓게 됐다. 한옥에 대한 확실한 관점이 있는 건축주인 파우저 교수를 만난 거다. 한옥에 관련된 책들은 지금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 서론과 결론만 있더라. 철학적, 인문학적 이야기를 하다가, 완성된 집 사진을 한 장 보여주고, 결론을 내버린다. 예쁜 설명만 있고 수많은 노동력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쓴 거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집을 짓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가고 싶었다.

 

서촌 토박이는 아니지만, 이제 서촌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저자도 실제 한옥에 거주하고 있나?


나는 그냥 주택에 산다(웃음). 목수는 집을 따라 다니는 사람이다. 아마 평생 집을 따라 다니면서 집을 지을 거다. 대학에서는 독문학을 전공했다. 다른 직업도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졸업하자마자 곧장 목수의 길로 뛰어들었다. 4학년 졸업반에 들어가면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학력이나 주변 상황에 관계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계속 물었다. 바로 목수였다. 가장 자연스러운 노동인, 목수 일이 내 몸에 맞았던 거다. 대의 같은 건 없었다. 내 몸에 무엇이 가장 맞는 일인가, 내가 평생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보통 목수 일을 하다가 5,6년차가 되면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단 한 번도 나무를 다루는 일이 나한테 맞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당시에는 목수학교와 같은 전문학교도 없었는데. 어떻게 목수가 되었나?


대학교 4학년 때, 창덕궁 보수공사를 대대적으로 했다. 뉴스에도 많이 나왔다. 당장 찾아가서 목수 일을 하고 싶다고 면접을 봤다. 하지만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실망했다. 내 생김새를 보면, 일단 힘 좋게 생기지 않았나?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도 많이 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가방끈을 숨겼어야지’라고 하더라. 그 후로 어디서 목수 일을 배워야 할지 모르겠어서, 유명한 절을 다 찾아다녔다. 섬진강을 좋아해서 근방에 있는 절을 순례하듯 방문했다. 절에 가면 목수가 있을 테니까. 연곡사, 화엄사 등 정말 많은 절을 찾아 갔는데 공사를 안 하더라. 마지막으로 순천 선암사를 찾아갔는데 노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다. 절간에서 그 어른들을 모시고 일을 했다.

 

처음 목수 일을 시작했을 때, 쉽게 적응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연장도 없었고 술 심부름만 했다. 눈 큰 사람이 지붕을 못 올라간다고, 처음에는 지붕에 올라가는 것도 무서웠다. 위험한 직업이었고 기약도 없었다. 학년을 마치고 다음 단계에 올라가는 과정이 없으니까, 답답했다. 내일 뭘 할지를 모른다는 게,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런 과정들을 수없이 거쳤다. 힘들었지만 일단 나무를 만지는 일이 재밌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까.

 

목수를 시작으로 도편수(공사현장의 책임자인 목수)가 됐다. 문화재수리기능자 제3702호(대목) 자격을 가지고 있다. 본격적으로 한옥을 신축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목수는 일을 하는 순간부터 한옥을 짓게 된다. 서원, 항교, 사찰, 박물관 등 한옥이 아닌 것은 없으니까. 문화재는 곧 한옥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지었던 건,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었다. 내부 공간을 보수하지만 텅 빈 공간을 만들었다. 사람이 실제 사는 집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한옥을 신축하고 대수선하게 됐다.

 

만나고-황인범

 

 

한옥은 상품이 아니다. 과정이다


생활한옥 ‘어락당’의 건축주는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다. 한옥에 대한 애정이 많고 공부도 많이 한 경우다. 다른 건축주에 비해 참여도도 높았을 텐데.


건축주와 이미 친한 사이라서, 처음에는 부담스러워서 같이 안 하려고 했다. 반 년 이상 걸리는 험난한 건축 과정을 건축주와 시공업자가 갈등 없이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어려워지는 싸움이다. 그걸 뻔히 알기에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망설이고 있는데, 파 교수가 인간관계보다 집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어, 나에게 맡겨보기로 한 것이라고 하더라. 집에 대한 확고한 신념, 솔직하고 합리적인 말에 불안이 많이 사라졌다. 결국 같이 하게 됐다. 건축주가 한옥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가진 만큼, 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 말로, 케미스트리가 충만했다(웃음).

 

어락당(語樂堂)은 ‘말을 즐기는 집’이란 뜻을 가졌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 대수선(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뼈대를 살려 수선하는 것)을 진행했나.


파우저 교수는 1930년대식 도시형 한옥으로 고쳐달라고 말했다. 어락당은 넓은 들판 한 가운데 홀로 서 있는 단독주택이 아니었다. 오래된 골목 안, 기와지붕이 넘실대는 동네 가운데 자리잡은 한옥이었다. 그래서 지역, 역사, 경관적 가치 등을 훼손하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이 중요했다.

 

건축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


설계가 3개월 반, 공사가 5개월 정도해서 총 8개월 정도 걸렸다. 공사 기간에 겨울이 있어서, 평균 기간보다 조금 더 길었다. 보통은 설계 2개월, 시공 4개월 정도로 최장으로 걸려도 6개월이면 끝난다. 기술적으로 봤을 때, 공사 기간이 어떤 계절인가가 관건이다.

 

어락당을 지으면서, 도편수로서 가장 애정이 많이 가진 공간은 어디였나?


화방벽이다. 어락당을 지으며 건축주를 포함한 건축 주체들은 이 골목의 한 중간에 차갑고 딱딱한 사괴석 담장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목재는 도색 칠을 하면 옛날 색이 나오지만, 돌은 칠할 수도 없다. 앞으로 어락당의 많은 부분이 바뀔 수 있겠지만, 화방벽은 쉽게 변하지 않을 거다. 나는 사람들이 집의 내부만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항상 아쉽다.

 

보통 한옥에 살 때, 추위에 대한 걱정이 크다. 어락당의 경우, 단열은 어떻게 해결했나?


어락당 전까지는 대부분의 한옥을 ACL블록과 압출법 보온판으로 단열 벽체를 구성했다. 압출법 보온판은 일명 아이소핑크, 분홍색 스티로폼이다. 흰색 스트로폼에 비해 단열 효과가 좋다. 어락당은 삼간일목 권현호 소장이 단열 컨설팅을 맡았는데, 신소재 단열패널을 제안했다. 한옥의 취약한 차음에 효과가 있고 경량이라서 시공성, 내진성도 좋다고 했다. 현대 한옥에 맞는 제품이었다. 좋은 단열재로 완벽하게 시공을 했다 해도, 벽에 국한된 것이고 창호는 다른 문제였다. 추위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새시’를 설치했다. 전통적 삼중창을 하고 싶었지만 비용 문제와 단열 문제로 새시로 결정했다. 새시의 미관 문제는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언어학자인 로버트 파우저 교수는 어락당을 짓고 나서, 집 짓는 과정 자체가 큰 공부였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어락당은 집을 짓는 과정부터 모든 것이 정말 좋았다. 건축주, 그리고 디자이너분들과의 소통은 말할 것도 없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 주변까지 거의 완벽했다. 시공적인 면에서 이전의 집들도 거의 완결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락당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집을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일들과 함께 일한 사람들과의 소통과 호흡은 그동안의 집들과 사뭇 다른 지점이 있었다.

 

도편수로서 한옥을 지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실험이다. 지금의 한옥은 새로운 걸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 부담감이 매우 크다. 새로운 실험을 할 때마다, 한 코스를 넘길 때마다 힘이 빠진다. 한옥에는 정답이 없다. 언제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느낌이다. 과거의 집을 현대적인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어, 새롭지 않은 건은 아무 것도 없다. 국가에서 각종 기관을 만들어 실험을 하듯이, 나 역시 계속 실험을 해야 한다.

 

한옥에 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건축주가 한옥을 짓기 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몇 달 전, 한옥 신축 의뢰를 받아서 짓고 있는데 건축주 부부가 한 달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건 미친 짓이다. 한옥은 과정이다. 물건을 사듯이 돈을 내고 가져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맞춰 가는 게 한옥이다. 그래야 내 마음에 드는 한옥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옥에 대한 의미가 많이 없어진다. 어떤 건축주라도, 한옥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북촌에 있는 한옥문화원을 비롯해 건축주를 위한 강좌가 꽤 많다. 현실적으로 마음에 드는 강좌를 수강하고, 공부하는 것도 좋다.

 

만나고-황인범

 

목수, 집으로 말하는 사람


목수가 된 일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천직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집을 짓고 난 후의 일에 관심이 없다. 다만 집을 짓는 일에 관심이 있고 나에게는 이것이 모든 것이다. 전부다. 앞으로 집 주인이 어떻게 살아갈 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건 건축가의 몫이다. 집을 짓는 일은 강력한 하드웨어적인, 현장 노가다다. 집 짓는 행위는 자체로서 엄숙한 행위고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다. 그래서 몸으로밖에 표현이 안 된다. 나는 집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집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목수로서, 꼭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집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무를 잘 깎는 건 기술이다. 그 자체로 목수의 최고봉이 될 수 없다. 목수에게는 다른 장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집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장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만 하면 끝이 나지만, 목수는 집 전체를 보고 나무를 만져야 한다. 목수 출신이 도편수가 된 경우가 많지 않다. 목판 기술자로 흘러간 부분이 많아 아쉬운 마음이 크다. 목수 10년 차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10년은 경험을 쌓아야, 집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앞으로 어떤 집에 살고 싶은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 사람들은 마당이 얼마나 소중한 공간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작은 마당이 생긴다면, 그 존재감을 금세 느낄 수 있다. 마당 없는 아파트에만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안타깝다. 골목을 지날 때, 종종 조화롭지 않은 집을 만난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만나고-황인범

 

 

좋은 집의 정의를 내린다면?


일단 자연스러워야 한다. 내 삶과 내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집이여야 한다. 한옥은 자연스럽다. 나무가 뭘 뿜어내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주거 공간 자체도 몸에 딱 맞게 자연스럽다.

 

도편수로서, 또는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현실적인 꿈으로는 2층 한옥에 도전하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보고 싶다. 두 번째로는 한옥교회를 지어보고 싶다. 10년 전에 문화재로 지정된 경상북도 영천 자천교회를 보수한 적이 있다. 한옥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교회라는 공용공간에서 만들어보고 싶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소망이다. 마지막으로는 유럽전통건축을 눈으로 보고 싶다. 유럽의 장인들, 그들의 손길을 확인해보고 싶다.

 

“목수들이 걷는 길이 남다르다면 그것은 그들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지만, 자신의 땀과 열정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오롯이 집 한 채로 남아 100년도 가고 200년도 간다는 사실 아닐까. 노인네 스승들께 “목수는 집 짓고 연장 챙기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 법”이라고 배웠다. 그만큼 모든 걸 쏟아내라는 의미이고, 집은 서 있으되 나는 사라지는 무명의 빌더(Builder), 어쩌다 선택한 그 길을 평생 마다 않고 가는 이들이 목수라는 뜻일 게다.”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 89쪽)


작은한옥한채를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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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황인범 저 | 돌베개
미국인으로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 중인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경복궁 옆 서촌 체부동에 직접 마련한 작은 한옥 어락당語樂堂의 대수선 과정을 담은 기록이다. 이 책은 현장에서 직접 이 집을 세우고 만든 도편수, 즉 한옥 공사현장의 책임자인 한 목수의 기록에서 출발한 것으로 집이 다 지어진 뒤 일 년을 맞아 그동안 현장에서 느끼고 본 바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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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힙합의 차세대 리리시스트, 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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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플로우, 로우디가와 함께 비스메이저 크루를 비스메이저 컴퍼니(VMC)로 진화시킨 뒤 지난 3월, 첫 정규 앨범< Zooreca >를 발매했다. 인상적인 앨범이었지만 힙합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는 아직 낯설다. 우탄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작년 < 쇼미더머니2 >에 나간 것도 그런 이유였으며 발라드 랩을 향한 소신 있는 발언 또한 마찬가지다. 속해 있는 크루의 이미지나 소수의 곡만 듣고 그의 정체성을 오판하기도 한다. 정작 카페에 들어온 그의 입가엔 고집스러운 팔자 주름이 아닌 순박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힙합 꼰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하는 자유로운 청년이었다.  

 

이즘-우탄

 


반갑습니다. 앨범 발매 후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오늘 같이 인터뷰들을 하고 있어요. 라디오에도 출연하고요. 또 4월 25일, 제 생애 첫 번째 쇼케이스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비스메이저 크루가 VMC(Vismajor Company) 레이블로 설립되었습니다. 딥플로우가 회사를 만들자고 했을 때 위험이나 부담도 있었을 텐데 단번에 결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음악을 할 때도 멋있지만, 딥플로우 형은 회사를 차릴 때도 빛을 발할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한참 하고 있었는데 만든다고 하니까 믿음이 갔죠. 로우디가 형도 해외 뮤지션들과 아트 워크 작업을 많이 하고, 비즈니스를 하던 형이에요. 모두 신임이 가는 임원들이라 잘 할 수 있겠다 싶었죠. 제가 제일 무능력해요.(웃음) 음악 하나 열심히 해야죠.

 

크루가 회사로 변하면서 무엇이 달라졌나요?


저희들의 개인적인 성격이 야망가라든지... 막 야심 있는 성격들이 팀에 별로 없어요. 하다 어떻게 되겠지 이런 식으로 음악을 해왔었는데 회사를 만들면서 무형의 것들이 형체가 잡히니까 성공하고 싶은 욕망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아요. 또 싱글을 내건 뭐 하나를 내건 크루였을 때보다는 책임감이 따르면서 확실한 동기부여가 돼요. 기동력 면에서 의욕도 더 생기고, 좋아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탄

 

단점은 무엇인가요?


아직까진 없어요. 음... 아무래도 그런 건 있죠. 이제는 '회사'로 넘어왔고 저희 인생이 걸린 일이라 크루 때처럼 모든 멤버를 케어하기가 어려워졌어요. 저희가 그래서 크루 멤버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다들이 컴퍼니의 잠재적 멤버들이긴 한데 그림을 그려와 달라. 어느 정도 그려와야지 색을 칠하든 뭘 할 수 있으니. 의욕적인 멤버들, 계획을 세운 사람들에 한해 정리를 해주겠다.”고요. 또 저희 내에서 앨범을 내더라도 스케줄을 조정해야하고 시기를 기다려야하고, 유통도 그렇고 체계가 생기면서 복잡해지긴 했죠.

 

비스메이저 크루 멤버가 14명가량 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계신지 소개 부탁드려요.


굉장히 다양해요. 래퍼는 대여섯 명, 프로듀서도 있고, 디제이, 아트디렉터도 있고. 심지어 그 안에 MTV PD를 하던 형도 있었고, 곧 저희가 밝힐 거지만 막 잘나가는 그런 건 아닌데 아이돌도 하나있고요. 한마디로 크루는 친한 친구들이랄까요? 이익활동을 하고는 있어도 친목에 더 가깝긴 해요. 그래서 별의별 거하는 사람 되게 많죠. 영어 강사 하는 형도 있어요.(웃음) 가끔 취미로 비트를 만드는.

 

공동 대표인 딥플로우는 래퍼이면서 뮤직 비디오 감독도 하고, 여러 아트 워크를 작업했습니다. 이번 앨범에 자체적으로 손이 많이 갔다고 하셨는데, 우탄 씨도 랩 외에 맡은 역할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진짜 랩만 하고요.(웃음) 저희 크루에 동생들이 있어요. 오디라든지 그런 친구들 곧 앨범을 낼 건데 어떤 식으로 할지 상의하고, 얘기도 많이 나누고 방향을 잡아주고, 이 정도예요. 딱히 제가 아트 워크를 한다든지 따로 하는 건 없어요.

 

첫 정규작품입니다. 신보 < Zooreca >에 '정체성의 발견과 그것을 통한 다양한 깨달음'을 담았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Zoo'는 다양함을 의미해요. 예를 들어 동물원에 가면 강한 사자도 있고, 순한 양도 있고, 간사한 뱀도 있고. 한 곳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잖아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사운드적으로도 다양하고 싶었고요. 'Eureka'는 깨달음도 있지만 인지라는 뜻도 있거든요. '제 안에 여러 부분을 인지하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을 가사로 표현하겠다.' 그래서< Zooreca >로 정했어요.

 

「No role model」, 「Ballad rap」, 「놀이터」에서의 표현력이 돋보입니다. 가사 작업할 때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또 요즘 힙합의 큰 주제인 돈, 여자, 자랑이 아니라 인생, 연애, 힙합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합니다. 차별화한 이유가 있을까요?


전 제가 다루지 않은 다른 분야들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아요. 그냥 그 사람이 다룰 수 있는 게 그런 거고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런 거니까요. 가사 작업할 때 고민이나 어려움은 별로 없어요. 이번에 느낀 건데 제가 가사 쓰는 걸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래퍼들이 할 수 있는 게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가사 쓰고, 랩 뱉고, 공연을 하고, 누군가는 비트를 만들기도 하죠. 전 그중에서 가사 쓰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때문에 돌아다니면서 가사거리가 없을까, 매일 메모장에 저장하는 습관도 많이 들고. 작업 자체를 재미있게 했어요.

 

드라마를 통해 영감을 얻기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My name is my name」도 드라마 < The Wire >에서 따오셨다고요?


맞아요. 미드(미국 드라마)를 광적으로 좋아해요. 영감을 많이 얻는 편이죠. 가사가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인데, 제한된 시간에 많은 경험을 해볼 수 없잖아요. 제가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게, 간접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느낄 수 있는 것도 많고요. 가사의 소스를 얻는 거죠.

 

가사 쓰는 것이 즐거웠다는 답변은 의외입니다. 「Ballad rap」 같은 경우엔 치밀한 중의법이 계산된 곡이잖아요. 이런 것들 까지도 재미있으셨나요?


아 네 그렇죠. 근데 래퍼들이 다 그럴 거예요. 가사 쓰는 게 힘들다가도 정말 괜찮은 펀치라인이 나왔을 때, 그 희열은! 작업실에서 혼자 막 나스라도 된 것처럼!(전원 웃음) 사실 그 맛에 하는 거죠.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Ballad rap」은 그러한 형식의 음악이 지루하다는 생각을 연인 관계에 빗대어 표현한 곡인데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런 음악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크루가 어떤 사건들로 인해 '타도 발라드 랩' 이미지를 얻었는데, 그건 일종의 퍼포먼스였어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저희가 굳이 아이돌을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돌들은 아이돌만의 음악 세계가, 산업 체제가 있는 거니까요. 저 매드 클라운 형이랑 친하기도 하고, 연락도 많이 해요. 착해 빠진 형이라고 놀리기도 하고요.(웃음) 장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해요. 대중을 욕할 수도 없어요. 근데 그런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굳이 '힙합'이라고 포장하는 거는 싫죠. “사실 돈 벌려고 했어요.” 이러면 얼마나 깔끔하고 보기 좋아요. 그리고 저는 그냥 제 음악 꾸준하게 열심히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장르 음악 발전에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우탄

 

그렇다면 우탄 씨가 하고 싶은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요? 아니면 이번 < Zooreca >를 작업할 때 레퍼런스로 생각해둔 앨범이 있나요?


어...저희가 한 곡, 한 곡 디테일하게 레퍼런스를 잡은 건 있는데 하나의 앨범을 레퍼런스로 잡은 건 없어요. 메이벡 뮤직 그룹(Maybach Music Group)을 좋아하긴 해요. 저희가 거기서 어느 정도 차용하는 부분도 있고. 커뮤니티에서의 얘기처럼 (저스티스 리그 말이죠?) 그렇죠. 영향 안 받았다고 한다면 정말 사기꾼이에요. 왈레(Wale)의 앨범도 그렇고. 제가 좋아했던 음악에서 많이 영향 받았죠.

 

이즘의 공식 질문이기도 한데요. 인상 깊게 들으신 앨범 한 장에서 세 장정도 꼽아주세요.


정식 단위가 아니어도 되는 거죠? (예) 저는 믹밀(Meek Mill)의 랩을 되게 좋아해요. 믹밀의 < Dreamchasers 3 >가 2에 비해 빛을 못 발했지만 저는 3를 더 좋아해요. 그리고 제이콜(J. Cole)의 < Born Sinner >. 그 앨범은 아침에 들어요.

 

그걸 아침에 들어요? 시작부터 이번엔 더 어두울 거라 말하는 음반 아닌가요?


네. (전원 웃음) 아 그렇긴 한데, 사운드가 빈티지 한 게 아침에 듣기 좋지 않나요? 그렇게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좋더라고요. 아 그리고 우리나라 뮤지션 중에 넉살이란 형 정말 좋아해요. 넉살 형의 「RHYD YO」 꼭 들어보세요. 랩 초사이언이라고 제가 부르고 있어요.

 
 앞서 언급한 곡들이 주목을 받고 있어요. 이 가운데서 「나비야」를 타이틀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단은 현도 형이 피쳐링을 해주셨고요.(전원 웃음)(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죠?) 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치면 그레이 형이 피쳐링해 주신 「자각몽」도 좋았죠. 그런데 「나비야」가 가장 좋았어요. 다른 곳에서도 많이 얘기했는데, 전 여자 얘기 하는 걸 좋아해요. '여자'를 되게 좋아...아 말이 이상한데...(웃음) 여성을 피사체로서 표현할 때, 브레인스토밍이라든지 가사 쓰는 게 잘 되거든요. 개인적으로 「나비야」 가사를 표현적인 부분에서 좋아해요. 그런 스타일이 저한테는 일종의 시도기도 했고요. 애초부터 작업할 때 타이틀로 하자고 세션 작업하고 그랬어요. 중간에 「자각몽」을 하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할까도 했지만 결국은 처음 생각대로... 그리고 현도 형이 해주셨고.(웃음)

 

스킷인 「20's line story」를 기준으로 앞뒤의 분위기가 달라요. 앞에는 강력한 힙합 넘버들이, 뒤에는 감성적인 노래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도 하신 건가요?


예, 그렇죠. 사실 전부터 꿈꿔왔던 입장으로 한 가지 강박처럼 있었던 게, 사운드도 일관적이고 흐름도 유기적으로 정규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No role model」로 시작하면서 앨범에서 이야기할 모든 것들의 이유를 설명해놓고. 「My name is my name」, 「Do do do」, 「One hunit」, 강한 노래들이 나오다가 텐션을 떨어트리기 위해 「자각몽」이 나오죠. 그리고 스킷이 뚝 떨어트리면서 다시 시작하는 듯 한 느낌을 주고요. 어떤 사람들은 투 씨디를 듣는 느낌이라고 하더라고요. 저의 작전이 잘 맞아 떨어진 거죠.(웃음)(마지막은 너무 쳐지지 않게 「Champagne」으로 살짝 띄우시더라고요.)맞아요. 너무 청승맞게 끝내긴 또 그래서(웃음) 마지막에 축하하는 분위기로 마무리했죠.

 

보너스 트랙을 제외하고는 티케이가 모든 곡을 프로듀싱 했습니다. 음악적으로 합이 잘 맞는 다고하시던데 어떤 프로듀서인지 설명 부탁드려요.


일단 티케이의 뜻이 '타쿠'에요. 오타쿠. 얘는 말도 안 되는 양의 음악을 항상 듣고 있어요. 기계처럼. 또 얘가 배운 애에요. 대학도 미디과인가 나왔고... 일단 믿음이 가요. 걔랑 하면 믹스를 같이 할 때도 그렇고, 곡에 대해 편곡 얘기 할 때도, 뭔가 애가 하는 말들은 다 맞는 거 같기도 해요.(웃음) 또 말도 잘 알아듣고요. 뭐 좀 해 달라 그러면 딱딱 만들어오고. 작업하기가 수월하죠. 또 좋아하는 음악도 비슷하고요.

 

처음 정규 작업이었기에 욕심이 많았겠고, 동시에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고생을 많이 한 케이스더라고요. 투자도 고난이 많았어요. 했다가 막판에 “안 된다.” 엎어진 경우도 있었고, 뮤직 비디오 모델도 8명이나 만나고. 또,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던 게 원래 현도 형이 쓰신 비트가 있었어요. 가사 쓰고 녹음까지 다 하고, 믹스 작업 들어가려고 하는데, 현도 형이 < 쇼미더머니2 >때 비트를 무료 공개로 풀면서 제 것까지(웃음) 공개하셨더라고요. 고민이 많았죠. 그래도 첫 앨범인데 이런 식으로 곡을 넣긴 싫기도 했고요. 안 그래도 「나비야」 보코더 때문에 현도 형네 가야했어요. 가서 “형 그거 공개하셨더라고요”했더니 되게 쿨하게 “뭐 아마추어 애들이 거기에 랩 해봤자 너보다 잘 할 거 아니잖아. 하나 더 써줄게”라고 하시는 거예요. 결국 그 곡을 빼게 됐죠. 차후에 다른 곡을 받기로 했고요. 그래서 급하게 만든 게 「One hunit」이에요.

 

 

이즘-우탄

 

 

엎어진 곡 공개할 생각은 없나요?


글쎄요. 아직 공개할 스케줄은 없고 제 컴퓨터에 묻어 두는 걸로. (웃음) 정말 괜찮았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무료 공개를 할 수도 있고요. 아직 계획은 없어요.

 

'단점은 없지만 끌어당기는 매력이 부족하다.'는 반응이 있습니다. 이런 의견을 깨어버릴 본인의 강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 부분은 저도 약간 통감해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요. 저라는 캐릭터 자체가 은은할 수는 있어도 강하거나 한 번에 확 가는 또라이가 아니에요. 사람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요. 물론 저도 강한 자극에 눈길도 가고 매력도 느끼지만 저는 그렇지 않은 거죠. 쇼미더머니할 때도 작가들이 저한테 답답해하던 게 그런 거였죠. 스윙스 형 인터뷰하는 거 보면 욕하고 소리 지르고 이러는데, 저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요. '단점은 없지만 끌어당기는 매력이 부족하다.'에 해결책이라고 한다면 꾸준함밖에 없는 거 같아요. 꾸준히 하다 보니 제 음악 색이 잡혀가는 것 같거든요. 그냥 열심히 작업물을 계속 내면서 지금 제가 가진 걸 보여주는 게 해결책 같아요.

 

던 밀스의 「88 remix」에서 '아이돌 그룹, 발라드 뭔 단어들을 앞뒤로 갖다 붙여'라고 하셨습니다. 발라드는 아까 말씀하셨고 '힙합 아이돌'에 대한 의견을 여쭤보고 싶어요. 또 나아가서, 「My name is my name」에서 '머리 어깨 무릎 발 Swag 가사 고쳐'는 지드래곤 디스인가요?


사실 '힙합 아이돌'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게 너무 싫어요. 아이돌들이 “나도 뿌리가 언더였다.” 이런 얘기하면서 “언더시절 믹스 테이프 공연도 했었다”고 하잖아요. 언더그라운드랑 마이너는 다른 개념이에요. 언더그라운드는 언더그라운드예요. 공연장 대관해서 친구 몇 명 불러놓고 랩하면 이게 언더냐는 거죠. '힙합 아이돌'이라고 나와서는 “언더 생활하다가 힘들어서 이 길로 왔어요, 나중에 잘 되면 하고 싶은 거 할게요”라고 하면 그건 비겁한 변명이에요. 구려요. 마치 언더 뮤지션들 다 굶어 죽는 것처럼 얘기하잖아요. 그런 게 아니거든요. TV 앞에서 그렇게 말해버리면 안 보이는 데서 열심히 하는 뮤지션들은 뭐가 돼요. 15년 동안 굶어가며 했던 거면 이해하겠는데, 한두 번 해보고는 안 돼서 오디션보고, 아이돌 하고, 그러고서는 힙합 글자 붙이고, 이게 싫은 거예요. 전 아이돌 되게 좋아해요. 실제로 광희(제국의 아이들)도 친구고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어요.

 

솔직한 게 중요한 거군요.


그렇죠. 아이돌이면 아이돌인 거죠. 깔끔하게 “나 아이돌이다”하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그럼 「My name is my name」에서 '머리 어깨 무릎 발 Swag가사 고쳐'는 무슨 의미인가요?


오히려 그건 아예 다른 얘기에요. 뒤에 가사가 '이 시스템은 머리와 수많은 발뿐인 몬스터'거든요. 이 힙합 신에 중간은 없다는 거죠. '어중간해서는 안 된다.' '각박한 곳이다.' 그런 의미죠.

 

디스나 조롱보다는 오마주에 가까워 보이네요.


네, 지드래곤 좋아합니다.(전원 웃음) 팬입니다.

 

나가셨던 < 쇼미더머니2 >도 면밀하게 보자면 힙합에 오디션을 갖다 붙인 '힙합 오디션'입니다. 힙합 신에서 논란이 많았고요. 배척하시는 '발라드 힙합', '힙합 아이돌'과 무엇이 다른가요?


(긴 침묵 후) 그러네요.(전원 웃음) 듣고 나니까 그러네요. 음... 그런데 진짜 별 뜻 없이 나갔어요. 거기까지 올라갈지도 몰랐고요.(웃음)

 

어떤 계기로 나가게 되셨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스윙스 형이 나간다는 거에 혹해서 나갔어요. 재밌을 거 같았어요. 주위에 누가 나가는지 소문이 돌았거든요. 붙어보면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왜냐하면 다 친한 형들이고, 디스를 하지 않는 이상 누가 이기고 지는지 알 수 없잖아요. 당장 누구를 디스 하고 싶지 않지만 대결은 해보고 싶었죠. 스윙스 형이랑 붙어보고 싶었는데, 못 붙어보고 떨어진 게 한이에요.(웃음) 잘 나간 것 같아요. 그 짜릿함은 진짜.(웃음) 2000명 줄 세워 놓고 예선 할 때, 전 솔직히 안 떨릴 줄 알았어요. 공연을 한 두 번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심장을 토할 뻔 했어요.

 

그날도 공연하다가 가지 않으셨나요?


아 맞아요. 그날 또 밖에서 스윙스 형 만났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형이 “야 이거 존나 떨리지 않냐? 미쳐버릴 것 같다.”(전원 웃음) 특별한 경험이었죠. 힙합을 제쳐두고 개인적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쇼미더머니2> 이후 부각된 래퍼들에 비해 스포트라이트가 적었습니다. 앨범을 빨리 내야겠다거나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나요?


분량이 왜 그러냐, 피디한테 돈 꿨냐는 말도 들었어요.(웃음) 불안감은 없었어요. 최대수혜자는 아니지만 저도 나름 수혜자라고 생각해요. 전보다 확실히 나아졌으니까. 근데 그런 말은 너무 싫었어요. 앨범 낸다고 했을 때 “이거 사그라지기 전에 빨리 내야지.” 맞는 말일 수도 있는데, 사실 저한테 중요한건 급한 거 보다 앨범 퀄리티거든요. 대답만 “네”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웃음)

 

<쇼미더머니2>는 우탄 씨에게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은데 불만도 있었나요?


몸이 힘들었어요. 예선은 정확히 24시간 걸렸고요, 하루 16시간 계속 촬영하는 건 일도 아니고. 몸이 힘든 거 빼고는 다 재밌었어요. 대기하고, 메이크업 받고. 진 빠지죠. 근데 그 짜릿함을 또 느껴보고 싶어요. 또 나가보고 싶어요... 절대 안 나갈 거긴 한데(전원 웃음) 그리울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어요.

  
추후 VMC 아티스트들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올해는 앨범이 많이 나올 예정이에요. 다음 타자는 <양화>라는 딥플로우 형의 3집이 아마 6월 정도에 나올 거에요. 확실하진 않고요.(웃음) 오디의 미니앨범도 나오고. 던밀스의 싱글, 「88」도 본인 정규의 수록곡이에요. 곧 나올 거고요. 저희 컴필레이션 앨범도 나올 거고요.(그것도 올해요?) 열심히 해야죠.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해야죠. 물량공세라도(웃음)

 

쇼케이스 이후, 우탄 씨의 개인적인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프로듀서 친구랑 앨범 같이 준비하고 있어요. 프로젝트 식으로요.(티케이씨인가요?) 아니요. 티케이와는 나중에 할 거고... 이번에 같이 하는 친구가 누군지는 나중에 밝히겠습니다.(웃음) 풀렝스로 내고 싶었지만 회사 다른 임원 측에서 안 된다 해서 미니 앨범으로 계획 중이에요. 머릿속으로 여름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풀렝스 만들어보니 미니는 금방할거 같더라고요.(전원 웃음) 여러 가지 계획하고는 있지만 다른 앨범 시기 겹치지 않게 양보는 해야죠. 저는 지금 냈으니까요.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회사도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앞으로 음악만 하면서 살고 싶어요.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어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아빠, 남편 되고 싶고요... 소박해요. 뭐가 막 되고 싶다 그런 건 없어요. 지금 하는 거 계속하고 싶어요.(웃음)


인터뷰 : 이수호, 전민석, 정유나
정리 : 전민석
사진 : 이한수 
 
글/ 전민석(lego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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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루드비히 트리오로 무대 서는 임효선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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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세계 정상급 클래식 연주가들이 많다. 임효선 피아니스트도 그 중 한 명이다. 특히 2007년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에 당당히 입상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미 그녀는 서울예고 재학 당시 최연소로 동아콩쿠르에 입상, 서울대 수시입학 후 세계최고의 명문인 커티스 음대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등 명연주가로 입지를 탄탄히 다져나갔다. 지금은 경희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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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외국에서 활동했던 임효선 피아니스트는 귀국 후 한국에서도 연주를 이어가고 있다. 오는 5월 29일에는 ‘루드비히 트리오’의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선다. 그녀와 트리오를 이끄는 두 멤버의 이력도 화려하다. 아벨 토마스(Abel Tomas)와 아르나우 토마스(Arnau Tomas)는 저명한 현악 4중주단 ‘카잘스 콰르텟’의 멤버이면서 친형제다. 임효선 피아니스트와 토마스 형제로 이루어진 ‘루드비히 트리오’ 공연은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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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트리오 내한 공연이 성사되기까지

 

5월 29일에 루드비히 트리오 내한 공연이 있는데요. 피아노 트리오에 관해 소개 부탁합니다.

 

다른 악기가 될 수도 있지만 보통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이렇게 세 명이 함께 하는 삼중주를 말해요. 피아노 트리오는 챔버 뮤직(chamber music), 실내악인데요. 살롱 안에서 소규모로 하던 연주가 발전해 온 게 실내악입니다.

 

세 명 조합이 특이합니다. 임효선 피아니스트와 나머지 두 분은 스페인 뮤지션인데요. 아벨 토마스와 아르나우 토마스는 친형제이기도 하고요. 세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두 형제가 카잘스 콰르텟으로 15년 이상 활동해 오고 있었어요. 이 그룹과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잘 맞아서 트리오로 한 번 해 보자고 해서 루드비히 트리오가 만들어졌어요. 음악적으로 서로 배울 점이 많아요. 제가 한국에 귀국한 지 2년 반 정도 됐고 이 그룹으로는 5년 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트리오 이름이 루드비히인데요. ‘루드비히’는 베토벤 이름입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베토벤 곡만 연주하나요?

 

베토벤 곡만 아니라 모차르트, 브람스 곡도 연주해요. 이름 짓는 게 중요한 일이잖아요. 세 명 모두 고민하다, 아마데우스 콰르텟도 있는데 루드비히라는 콰르텟이나 트리오는 없더라고요. 세 명 다 베토벤을 가장 좋아해서 ‘루드비히 트리오’라는 이름을 짓게 됐네요. 저희는 연주할 때 베토벤 곡은 하나씩은 했어요. 이번에는 베토벤 초기 곡을 연주합니다. 내년에는 베토벤 프로젝트라고 해서 베토벤 전곡을 시리즈로 연주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이번 공연에 연주할 곡을 정할 때 어떤 점을 고려했나요.
 
화려한 곡도 좋지만, 음악적으로 깊이 있는 곡을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고전 로맨틱 장르를 선호한답니다. 우선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고려했고요. 우리가 좋아하는 곡으로 연주할 때 관중도 제일 좋아하더라고요.

 

한국 관객은 열정적


한 달 전에 스페인에서도 연주를 했는데, 현지 반응은 어땠나요?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스페인에서도 다양한 공간에서 연주해요. 큰 홀에서도 하지만 작지만 의미있는 곳에서 연주하기도 하고요. 바르셀로나에 팔라우 데 라 뮤지카라는 곳이 있는데요. 홀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티켓을 끊어서 볼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에요. 2,000석 규모인데요. 이런 곳에서도 연주했어요. 이미 이 두 형제는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인지도가 높기에 관객이 많이 찾아와요.

 

한국과 외국에서 클래식을 즐기는 관객 반응 사이에 다른 점이 있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저희 연주에 관심 있어서 보러 왔기에 호응도는 비슷합니다. 잘하면 당연히 박수가 많이 나오고, 저희가 잘 안 되었다고 느낄 때 관객도 그렇게 느끼죠. 한국 관객은 환호성을 지른다든지 기립박수를 친다든지 하는 게 특별해요. 이렇게 호응을 보내면 외국 뮤지션들도 좋아해요. 아무래도 무대에서는 반응이 확 오면 힘이 나거든요. 이에 비해 독일 사람들은 얌전하고, 묵직하고요. 나라마다 다른 점이 있는 듯해요.

 

한국에서는 클래식 공연에 갈 때는 좋은 턱시도를 빼 입어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클래식을 다소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외국은 어떤가요.

 

외국 생활을 많이 했고 특히 독일에서 오래 살았는데요. 독일이 패션 감각이 별로에요. 겉치장보다는 내실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이들이 클래식 공연 갈 때는 깔끔하게 정장 같은 걸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화려하다기보다는 격식을 차리면서도 즐기는 문화에요. 한국이라고 해서 특별하지는 않아요. 클래식이 18세기, 19세기부터 계속 되어 온 문화니까 이런 문화가 계속 이어지죠. 클래식 볼 때는 어느 정도 갖춰 입어야 한다는. 다만 한국은 클래식이 상류층에만 국한되었다는 이미지가 아직은 있는 듯해요. 한국 민요를 보통의 한국사람들이 불렀듯, 유럽에서는 클래식이 그렇거든요. 그 사람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접했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음악이에요. 클래식 음악이 발전된 게 한국은 50년 정도인데, 아직은 이미지가 상류층 음악이라는 게 있어요. 앞으로는 클래식이 많은 사람에게 조금씩 더 확산이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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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콩쿠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입상했는데요.

 

김연아가 올림픽을 위해 몇 년을 준비해왔듯,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참가했을 때만 해도 4년에 한 번씩 열리던 콩쿠르이었어요. 역사와 전통이 있는 3대 콩쿠르 중 하나죠. 3대 콩쿠르가 쇼팽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그리고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인데요. 쇼팽은 폴란드에 있고,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에 있는데 퀸엘리자베스는 유럽 중앙에서 열려요. 그리고 앞의 두 콩쿠르는 한 작곡가 위주인데 퀸엘리자베스는 여러 곡을 두루 쳐야 하죠. 그런 면에서 중요성이 큰 콩쿠르이에요.

 

그때 이야기를 해주세요.

 

우선 DVD 심사로 서류로 뽑아요. 뽑힌 뒤에는 1차만 2주에 걸쳐 연주를 해요. 연주하기 한 시간 전에 프로그램 6개를 내면, 심사하는 분들이 그 중에 몇 개를 골라요. 사람을 극도로 몰아세우는 콩쿠르이죠. 본선 때는 12명이 경합하는데 2명씩 6일에 걸쳐 해요. 1주일 전에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곡을 줍니다. 어려운 곡이죠. 곡을 외워서 오케스트라랑 리허설하고 연주하죠. 이렇듯 콩쿠르가 1달에 걸쳐 열려요. 끝나면 쉬고 싶은 마음밖에 안 나는 콩쿠르이에요. 한국인으로서 입상해서 기뻤죠. 한국에서도 이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뉴스에도 속보로 나왔대요. 그 전에도 제가 한국 음악계, 한국 학생들에게 조금은 인지도가 있었는데, 이 콩쿠르에서 입상함으로써 사람들이 더 인정해주고 인지도도 높아졌죠. 외국에서도 연주 잡을 때 훨씬 쉽게 잡히고요.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됐죠.

 

피아노를 하다 중간에 포기도 많이 하잖아요. 교수님은 중간에 고비가 없었나요?

 

계속 하기 위해서는 노력, 재능, 열정이 합쳐져야 하는데요. 그 세 가지를 갖추려고 노력했어요. 좋아하는 걸 하니까 그렇게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오히려 외국에서 약간의 인지도가 생기고 연주하면서부터 “한국에서 먼 곳에서 부모님과 떨어져서, 친구도 별로 없고, 연주를 계속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슬럼프라고도 할 수 있는데, 불안감이 계속 될 때 조금 힘들었어요. 지금은 만족하는 게 교수 생활을 하면서 학생에게 영향도 많이 받고 줄 수 있는 것도 있고, 연주 생활도 유지할 수 있어요. 평소에 티칭에도 관심이 많았거든요.

 

연주가로서의 삶, 교육자로서의 삶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어렵지는 않나요.

 

연주가로서의 삶이 없다면 교육자로서의 삶이 존재할 수 없어요. 피아노를 잘 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가르칠 수 있죠. 연주력이 먼저 오는 건 당연하고요. 두 가지는 뗄 수 없는 상호보완 관계에요. 티칭이 제 삶에 활력소를 줘요. 너무 많아지면 정신적으로 피곤해질 수도 있겠지만요. 연습할 때도 지금은 가르치기 위해 분석을 하다 보니, 시간도 줄어들고 좀 더 효과적으로 연습할 수 있어요. 제 연주를 객관적으로 불 수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 두 가지가 시너지 효과가 나죠.

 

학생을 가르치면서 교수님의 학생 시절을 떠올리기도 할 텐데요. 교수님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제 제자들은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열심히 하는 애들이 예쁘죠. 저는 학창 시절에 친구와 많이 어울렸어요. 서울대 입학하고 반년 다니다 커티스 음악원이라는 소수 인원만 뽑고 전액 장학금을 주는 미국에서는 유일한 음악대학에 갔어요. 전교생이 100명 조금 넘는데요. 좋았던 점이 한국에서는 경쟁이 많았는데 그곳은 윈윈이었어요. 서로 정보 공유도 하고 서로 잘 되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연습도 많이 하고 음악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외국에서 했던 연주를 한국 관객에게도 보여주고파


스케쥴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방학에 외국 연주를 많이 잡아 놓고요. 이번 여름 방학에 스페인에서 마스터클래스를 하고 폴란드에서 챔버 패스티벌 하고 이런 식으로 캘린더 정리를 잘해야 하고요. 한국에서도 이제 연주를 많이 하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최대한 학기 중에 연주를 하려고 해요.

 

외국 생활을 많이 하다 보면 외로울 것도 같은데요.

 

독주회가 제일 심할 수도 있지만 협연 끝나면 혼자 밥 먹기 싫어져요. 호텔에 들어오면 “관객들은 가족끼리 공연 보고 맛있게 밥 먹는데, 나는 머하는 거지?” 하는 기분이 살짝 들어요. 한국 들어오니, 좋은 사람이 많아서 외국 있을 때보다는 외로움을 덜 타는 듯해요. 하지만 사람이 원래 같이 있어도 외롭고, 혼자 있어도 외로워요. (웃음)

 

연주 없을 때는 어떻게 지내요?

 

여행 좋아하고요. 바쁠 때는 되게 바쁜데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기도 해요. 그렇게 3일 정도 지나면 지루해져요. 그리고 많이 못 읽긴 하지만 시간 날 때 3~4권씩 책을 쭉 읽기도 하고요. 미국에서는 영어를 열심히 해서 영어책 읽을 수준이었는데 독어로는 그런 수준까지는 아니었어요. 독일에서 영어 책 구하기도 힘들고 해서 책 읽는 습관이 사라졌는데요. 한국 돌아온 뒤로, 내가 원하는 책을 집을 수 있다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네요. 가벼운 책으로는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을 좋아하고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헤르만 헤세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으면 슈만이 떠올라요. 슈만이라는 작곡가에는 자아분열적인 면이 있었는데요. 헤르만 헤세도 그런 것과 싸우고, 부디즘을 다루기도 하고 했죠. 헤세 읽으면서 감동 많이 받았어요.

 

이번 공연에서 특별히 한국 관객과 소통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끝으로 한 말씀 부탁합니다.

 

외국에서 오래 활동하다 보니, 제 활동을 국내 팬에게는 많이 알리지 않았어요. 외국 연주와 한국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활동을 하다 보니, 처음 2년간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이제는 외국에서 연주했던 모습을 한국 관객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요. 이번 공연이 좋은 계기가 되어서 제 활동을 한국에도 많이 알리고 공유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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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한의학 박사 “커피, 우유 알고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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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건강이 망가졌을 때 오는 곳이다. 건강을 예방하는 위해 찾아오는 곳이 아니다. 작은 증세만 보여도 병원을 자주 찾는 사람이 현명하다?! 절대 그렇지 않다. 병이 생기지 않게 생활 속에서 예방하는 것이 진짜 건강을 생각하는 지름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당뇨병 환자는 약 800만 명. 아이, 청소년 인구를 제외하면, 다섯에 한 명이 당뇨를 미세하게 앓고 있거나 치료를 받고 있다. 당뇨 인구는 왜 이렇게 계속해서 증가하는 걸까? 현대인의 식생활 습관이 나날이 불규칙해지고 서구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보건복지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지금과 같은 의료 시스템이 유지될 경우, 우리나라 생산인구 1인당 부담해야 하는 연간 의료비가 2020년이 되면 478만 원, 2050년이 되면 5,273만 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아무리 외제 고급 자동차라도 하더라고 급발진, 급제동을 일삼고, 소모품 교환을 제때 하지 않으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잖아요.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에요. 중고차라 하더라도 부드럽게 운전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면 10년 넘게 탈 수도, 사고도 나지 않을 수 있죠. 건강은 결코 갑자기 망가지지 않아요. 요즘 사람들의 최대 고민인 비만, 고혈압, 동맥경화, 심장병, 중풍, 골다공증 등의 성인병은 스스로 쌓아온 ‘악습의 결과’에요. 안다면, 바꿔야죠.”

 

MBC <기분 좋은 날>의 인기 강사이자, 4년간 MBC 라디오 <라디오 동의보감>을 진행했던 이재성 한의학 박사는 어려운 의학지식보다는 누구나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생활습관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최근 출간한 『우리 가족은 안녕하십니까』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평생에 걸쳐 겪을 수 있는 질병 상식과 치료법, 건강 습관에 관한 정보를 담은 책이다. 아이들의 아토피와 성조숙증, 여성들의 생리불순, 산후조리, 기미, 남성들이 주로 겪는 전립선 비대증, 과음, 흡연 등을 소개해 2대, 3대에 걸쳐 온 가족이 볼 수 있다.

 

이재성

 

단 음식 안 먹는 게 가장 중요


2006년에 펴낸 『이재성 박사의 MBC 라디오 동의보감』이 많은 독자에게 큰 반응이 있었습니다. 재출간 문의가 많았는데, 8년 만에 개정증보판 『우리 가족은 안녕하십니까』를 펴내셨어요.

우리가족은안녕하십니까


제가 나이를 먹었듯이, 세상도 변했고 건강에 대한 정보도 많이 바뀌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건강상식도 있고요. 사람들이 병에 안 걸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 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에게만 알려주기에는 아깝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아는 지식들을 많은 분에게 알리면 좋은 일이니까요.

 

카카오스토리에 ‘이재성의 여성 동의보감’을 연재하고 있는데, 개설한 지 2개월 만에 무려 22만 명에 달하는 회원 수를 돌파했어요. 주로 어떤 이야기를 쓰시나요?


잘못 알고 있는 건강상식부터 몸에 좋은 음식, 몸에 나쁜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사실 나쁜 걸 안 먹는 게 더 중요해요. 좋은 음식을 많이 먹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잖아요. 단 것을 안 먹는 게 가장 중요하고요. 이를테면 콜라, 빵, 주스, 아이스크림, 초콜릿, 음료수, 사탕 같은 거죠. 이것만 안 먹어도 대한민국의 당뇨는 해결할 수 있어요.

 

최근에 팝콘을 먹지 말자는 이야기를 올렸는데, 반응이 뜨거웠죠.


팝콘은 마가린 류의 쇼트닝 기름으로 튀기는데, 30~40%가 지방이에요. 70%가 옥수수인데 유전자가 조작된 옥수수를 주로 사용하죠. 기름으로 튀기면 상당히 많은 포화지방을 먹게 되요. 극장에 가면 큰 양동이 같은 거대한 양으로 팝콘을 주잖아요. 그것도 몸에 안 좋은 콜라와 같이 먹고. 안 먹는 게 최선이고, 차선은 적은 양을 선택하는 거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올렸더니, 어떤 분이 “나는 어떤 음식이 좋고 나쁘다며, 가리는 사람이 제일 싫다. 그냥 골고루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댓글을 적으셨더라고요. 골고루 먹는다는 건, 좋은 음식을 골고루 먹는다는 거지 나쁜 음식까지 골고루 먹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음식이건 생활이든, 자기 선택의 문제지만 선택에 따른 결과는 반드시 오게 마련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아직 문제 없다고 마구 먹는 경향이 있는데, 50, 60대가 되면 반드시 증상이 찾아와요.

 

커피를 끊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아요. 중독되는 사람들도 많고. 하루 1잔 정도는 몸에 좋다는 정보도 많이 듣고 있는데요.


커피는 중독성이 있는 음식, 어찌 보면 약이에요. 사람이 쳐지고 힘들 때, 잠깐 활력을 주는 데는 도움이 되죠. 커피를 계속 마시면 부신이 과열되고, 부신의 피로를 유발해요. 임신을 하는 데도 많은 방해가 됩니다. 임신 말기에 한 두 잔은 괜찮다고도 말하는데, 괜찮은 게 좋다는 건 아니에요. 먹는다고 큰 해가 되진 않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죠. 커피가 건강에 좋은 음식은 결코 아니에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커피가 괜찮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우유도 마찬가지에요.

 

우유에 대한 정보도 너무 달라서 혼란스러워요. 마시라는 책도 있고, 몸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많고요. 우유 반대론자들이 쓴 책도 많습니다.


세상에 어떤 이론이 있으면 분명히 반대 이론이 있어요. 결국은 내가 선택하는 거죠. 내가 어디에 설득 당하느냐죠. 우유도 마찬가지에요. 우유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유를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우유는 소의 젖이잖아요. 사람이 원래부터 먹었던 음식이 아니에요. 옛날에는 단백질이 부족하고 먹을 게 없어서, 영양소를 채우기 위해 우유를 먹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잉여에요. 사람들에게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아요. 다 큰 동물의 젖을 먹는 건, 오직 사람이에요. 송아지를 위해 나오는 젖을 사람이 먹는다는 것 자체부터 자연주의가 아니에요. 맥락적으로도 전혀 맞지가 않죠.

 

젖소가 먹는 사료의 문제도 많죠.


소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젖이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소가 어떻게 맨날 젖이 나오겠어요. 그러니까 젖을 많이 나오게 하기 위해 사료를 먹이죠. 소는 원래 풀을 뜯어먹는 동물인데, 90% 이상이 옥수수로 만들어진 곡물사료를 먹여요. GMO, 유전자가 조작된 옥수수가 대부분이에요. 옥수수에는 불포화지방산이 들어 있지만 오메가3는 거의 없고, 주로 오메가6만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사료로 먹는 소가 만들어내는 우유에도 역시 오메가6 및 포화지방산만 가득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성인병을 유발하는 지방이죠.

 

우유 한 잔을 마실 바에는 단백질, 칼슘이 들어 있는 다른 식품을 먹는 게 더 낫나요?


사실 우유를 대체할 무엇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아요. 단백질, 칼슘이 들어간 음식은 정말 많아요. 생선, 콩, 좋은 살코기를 먹어도 되고요. 칼슘이 필요하다면 멸치나 해조류를 먹으면 되죠. 두부 반 모와 우유 한 잔의 칼슘 섭취는 비슷한 수치에요.

 

 

이재성

 

좋다고 착각하고 먹는 식품들


우리가 일반적으로 몸에 좋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식품은 무엇이 있나요?


주스, 요구르트 같은 식품이죠. 요구르트는 유산균이 들어있긴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당분이 들어있어요. 100g당 17~20g이 설탕이에요. 300g 정도의 다소 큰 용량의 요구르트에는 당류가 50g이 넘게 들어 있어요. 조그마한 각설탕 25개가 들어 있는 거죠. 요구르트를 하나 먹으면서, 설탕을 퍼먹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차라리 유산균 캡슐을 먹는 게 낫죠.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보다는 주스를 많이 마시는 사람들도 많은 데요.


그것도 잘못된 선택이에요. 250cc 주스 한 잔에는 당류가 약 20g이 들어 있어요. 비타민C를 섭취한다고 오렌지주스를 마시는데, 그 효력을 짓밟고도 남을 만한 당류가 들어 있는 거죠. 주스 한 잔당 각설탕 7,8개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꽃등심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인공적으로 가짜 마블링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곳이 있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국내산은 물론이고, 호주산도 마찬가지에요. 며칠 전에 한 마트의 전단지를 봤는데, ‘눈꽃이 내린 마블링이 잘 된 청정육’이라고 호주산 소고기를 광고하더라고요. 호주에서는 그런 고기를 만들지 않아요. ‘Heart smart’라고 해서, 심장에 해를 끼치지 않는 빨간 살코기를 팔아요. 호주에서는 원래 마블링이 있는 고기를 만들지 않는데, 한국 사람들이 마블링을 좋아하니까 호주 소들이 수출되기 전에 한국 소비자를 위해 비육 과정을 거쳐요. 한국인을 위해서 마블링을 만드는 거죠.

 

가려 먹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을 바에는 그냥 먹는 게 낫다는 의견도 많아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바로 알면 돼요. 저도 옛날에는 피자, 빵,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어요. 그 때는 먹지 말아야 하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하지만 지식이 분명해지면서는 먹고 싶은 생각 자체가 안 들어요. 뭐 하러 이런 음식을 먹지?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맛있는 건 분명하지만, 가끔 먹는 거죠. 술을 몸에 좋다고 생각하면서 마시는 사람은 없잖아요. 저도 술을 마시긴 해요. 나쁘다는 건 알지만 아주 가끔 여흥을 위해서 즐기죠. 음식도 마찬가지에요. 커피에 중독된 사람은 며칠간 커피를 끊으면 무척 힘들어요. 심하면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고. 환자들에게 커피를 끊으라고 해요. 2,3주는 당연히 힘들어요. 하지만 잘 알고 나면,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이 크게 들진 않게 되죠.

 

건강을 위해 꼭 챙겨 먹는 식품이 있나요?


기본적으로 식생활이 중요해요. 메뉴를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관건이죠. 밥상에서는 최대한 채소를 많이 먹으려고 해요. 두 가지 원칙이 있어요. 채소는 종류별, 부위별로 골고루 먹는 거예요. 이파리부터 뿌리, 열매 채소가 밥상에 종류대로 있는 게 좋죠. 색깔도 다양한 게 좋아요.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초록색 등 다양한 채소를 먹는 게 좋죠. 밥은 현미밥이나 잡곡밥으로 주로 먹어요. 이렇게 먹으면 웬만한 영양분은 섭취할 수 있어요.

 

미네랄 부족도 지속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먹는 시금치가 20년 전 시금치와 달라요. 땅이 미네랄이 없어 무기질이 생기질 않는 거죠. 식물이라는 건, 땅에 있는 미네랄을 빨아 먹고 자라나는데 사람들이 쉬지 않고 농경을 하니까 문제에요. 시금치에 포함된 철분의 함량이 20년 전과 비교하면 1/20의 수준으로 볼 수 있어요. 야채를 제대로 챙겨 먹어도 미네랄이 부족한 현상이 생겨나는 거죠. 영양제를 챙겨 먹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재성

 

체질보다 중요한 건 습관이다


불임전문한의원을 운영하고 계신데, 난임이 점점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식생활, 스트레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식생활이 불규칙해지면 생리가 불규칙해지죠. 스트레스가 점점 많아지는데 줄이기는 힘들죠. 해결하면서 살아야 해요. 적극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야죠. 또 하나는 기본적인 마인드를 바꿔야 해요. 불평하면서 살지 말고 감사하면서 살아야죠.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고요. 임신이 잘 안 되는 이유가 피로감을 관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피로하니까 부부관계를 안 하게 되고, 또 한 쪽만 원하면 갈등이 생기고. 관계를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안 생기는 비율도 많아요. 잠을 많이 잘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밥 먹는 것만큼이나 잠이 중요해요. 11시 이전에는 자는 게 좋죠.

 

유산을 염려하는 산모들도 많아요.


임신 초기가 중요한데, 주변에 유산을 한 경우를 본 산모들은 굉장히 불안해 해요. 병원에서는 환자들만 보고 있으니까, 대체적으로 좋은 케이스보다는 안 좋은 케이스를 많이 만나죠. 멀쩡한 임산부가 와도 걱정이 앞서는 경우가 생기니까, 조금만 잘못하면 기형일지도 모른다고 말을 흘리게 되죠. 보통 사람에게는 의사가 흘린 한 마디가 대목으로 박히게 마련이잖아요. 엄청 불안해 하고요. 그래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면서 산모를 안심 시키는 게 의사로서도 중요한 역할이에요.

 

남자들은 경우는 지방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합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오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요.


대한민국 남성들은 빠르면 30대, 보통은 30대부터 지방간 소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건강검진을 하면 4명에 1명 꼴로 간수치가 높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하나 같이 배가 나왔어요. 술을 좋아하는 경우도 많고요. 지방간이라는 건, 배 속 내장 사이사이에 지방이 잔뜩 끼어 있는 거예요. 초음파를 보면 지방이 마치, 육류의 마블링처럼 만들어져 있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니까 생기는 거예요. 밤에 먹는 거 좋아하고, 탕수육, 치킨, 아이스크림, 빵을 좋아하면 더 심해지죠. 30, 40세 때는 서막에 불과해요. 이제 막 성인병 기차를 타고 출발을 한 거죠. 이 분들은 10년 뒤 고혈압, 당뇨가 분명히 생기게 되어 있어요.

 

결국 비만에서 벗어나야 고혈압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실제로 비만인 사람은 정상 체중인 사람보다 고혈압 발생률이 2~6배에 달합니다. 복부 비만이 되어 배 속의 내장 주변에 기름이 잔뜩 끼면 고지혈증이 되죠. 비만, 고혈압, 고지혈증, 이 삼총사가 어우러지면 심장병, 중풍 같은 큰 사고가 납니다. 혈압 강하제로 혈압을 내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원인을 잡는 게 중요하죠. 한 환자가 2년 만에 체중이 늘면서 고혈압 증세가 있었어요. 제가 내린 처방은 살 빼기였고 방법은 생활 개선이었죠. 삼겹살에 소주 먹는 일을 금하고 금연을 요구했죠. 또 하루에 30분 이상 빠르게 걷기를 하고, 밥은 현미 잡곡밥으로, 반찬은 식물성 위주로, 인스턴트 음식은 먹지 않기로 했어요. 6개월 꾸준히 실행했더니 무려 15kg을 감량하면서 배가 쏙 들어갔어요. 정상 혈압으로 돌아오면서 혈압약을 완전히 끊게 됐죠.

 

이재성

 

고혈압에 좋은 음식을 추천해주신다면?


다시마를 추천하고 싶어요. 다시마에는 요오드, 칼슘, 칼륨 등 마흔 종이 넘는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요. 고혈압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소금기, 즉 나트륨을 과도하게 섭취하는 것이 주원인이에요. 다시마에는 각종 미네랄뿐만 아니라 ‘라이신’이라는 혈압을 내리는 효과가 있는 성분이 있어서 좋은 식품이에요. 쌈 다시마를 사다 깨끗한 물에 담가서 소금기를 뺀 후, 먹기 좋게 썰어서 된장에 찍어 먹는 게 가장 좋아요.

 

60대에 들어서면 심장혈관질환이 많이 생겨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고혈압, 당뇨로 힘들어 하다가 결국엔 관리가 안 되면서 심장혈관질환이 생기는 거예요. 심근경색, 뇌졸중과 같은 무서운 병을 안게 되죠. 이건 약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역시 생활습관을 바꾸는 결단을 해야죠. 좋아하는 음식도 최대한 정리를 해야 하고요. 안타까운 건, 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 개인의 탓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회가 산업이 안 좋은 먹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요. 사회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죠.

 

『우리 가족은 안녕하십니까』어떻게 읽는 게 좋을까요?


통독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일종의 백과사전처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까요. 집안 거실에 올려 놓고, 눈에 다래끼가 생겼을 때, 병원에 갔는데 혈압이 높을 때, 각 해당 부분을 찾아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각자 자신에게 비슷한 문제가 생겼을 때, 펼쳐본다면 유익할 책입니다.

 



우리가족은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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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안녕하십니까이재성 저 | 소라주
10년 넘게 TV 건강박사로 이름을 떨친 이재성 한의사가 온가족의 건강을 책임질 건강 비법서를 새롭게 펴냈다. ‘병들기 전 건강한 몸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착한 건강 전도사’로 알려진 이재성 박사는 재치 있는 비유와 입담, 쉬운 설명, 맞춤형 건강해법 제시 등으로 방송가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 있는 한의학 박사이다. 이재성 박사는 가족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만 가족 건강을 챙기기에는 너무 바쁜 주부들을 위해 온가족이 쉽게 볼 수 있는 이 책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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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25억 빚을 극복하고 키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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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중심으로 한 온정주의 덕분에 사업을 하는 형제가 있는 집안은 대부분 연대보증으로 묶여 있던 시절,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IMF 광풍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형제, 친구라서, 무심코 사인해 줬던 ‘연대보증’은 혹독한 굴레가 되어 수많은 가정을 빛 더미에 올려놨다. 당시 이채원 작가가 직면한 현실은 더욱 가혹했다. 오랜 동안 고생해서 마련한 아파트, 그리고 결혼 후 두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작가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에 불행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남편이 시누이 사업자금을 대기 위해 섰던 보증이 화근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 작가는 천국에서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을 경험했다. 작가는 이를 ‘지진’이라 표현했다. 10억, 그저 숫자로만 다가오는, 실감할 수 없는 엄청난 빚이 지워졌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가 버릴 아파트인데 나는 무엇하러 죽어라 그 돈을 갚았을까. 왜 그렇게 아등바등했을까.” 나는 멍하니 앉아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 中 )

 

 

만나고-이채원

 

아이러니하게도 10억이라는 빚이 지워진 시기는 작가가 막 아파트 대출금을 다 갚았던 즈음이었다. 빚은 단지 빚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가족의 미래가 사라졌고, 깊은 한숨과 절망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작가는 그 시기에 처음 남편의 눈물을 보았고, 눈 뒤집어진 채권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크고 작은 빚으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원망도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삶이 급했다. 더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큰 딸 연우와 둘째 상우는 한창 민감해져 가는 시기였다. 이 작가의 가족은 그런 상태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사고가 터지기 전부터 예정 돼 있던 남편의 장기 해외 연수 일정이 닥쳤기 때문이다.

우리는공부하는가족입니다

 

IMF 사태 이후 환율이 치솟던 시절, 3년이라는 미국 생활은 팍팍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그 기간에 석, 박사 과정을 모두 마치기 위해 공부에 몰입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들은 낯선 타국의 생활을 무난하게 적응해 나갔다. 3년은 이들 가족에게 불행의 유예기간인 동시에, 힘을 키울 기회의 시간이 됐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론 가족 간에 갈등으로 위기가 닥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때마다 대화를 통해 극복했고, 그런 작가의 말은 고스란히 자녀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공부하는 가족’으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이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엄청난 빚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이 작가와 가족들은 그 이후에도 저마다 치열한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는 값진 열매로 돌아왔다. 이제 성인이 된 큰 딸 연우 씨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MIT장학생으로 박사과정 수료를 앞두고 있으며 아들 상우 씨는 행정고시 교육직렬에 최연소로 합격한 후 공군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이자를 더해 무려 25억 원으로 불어있던 빚 역시 남편의 적극적인 채무조정 노력으로 인해 탕감되었고, 이들 가족은 끝내 빚에서 해방됐다. 수필집과 소설을 포함해, 힘겨운 시련 속에서도 글쓰기를 이어나갔던 작가의 네 번째 책,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를 놓고 마주 앉은 자리. 작가의 표정은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힘겨운 삶의 시련으로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는 작가의 지난 이야기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시련이 지나간 자리  

 

 

만나고-이채원


어려운 상황에서 자녀 키우신 과정만으로도 대단한 스토리인데요. 빚과 관련된 불편한 이야기까지 숨김 없이 책에 담으신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맞아요. 이제까지 우리 가족이 겪은 일들은 친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지냈어요. 남편 역시 직장 동료들에게 함구하며 살아왔죠. 그렇게 알리지 않은 채로 문제를 해결해 왔어요. 그런데 모두 해결이 된 다음에도 주위사람, 친구들한테 지난 얘기를 못하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문득 ‘내가 아직도 이걸 부끄럽게 여기고 있구나, 이러면 내가 더 이상 성장을 못 하는 거다’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생각 끝에 소설 쓰는 일을 비롯해 내가 살아온 이야기, 우리 식구가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해 가며 책을 쓰게 됐어요.

 

지금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의도도 있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정말 힘든 사람들이 많잖아요. 물론 그 힘든 상황은 저마다 다르겠죠. 그러나 가난이라든가 역경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가 느끼고 있는 처지, 그 형편 안에서 좌절하지 말고 딛고 일어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써 내려갔어요. 역경을 역경 그 자체로 생각하면 주저앉고 추락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꿈을 발판 삼아 절실하게 노력하면 지금의 현실은 물론 미래도 나아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죠.

 

2009년은 작가님의 가족들에게 전환점이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큰 딸 연우 씨가 MIT 장학생으로 합격하고, 아들 상우 씨 역시 행정고시 패스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근황을 알려주신다면?


연우는 지난해 결혼하고 올 6월에 박사 학위를 받게 됐어요. 상우는 지금 공군 장교로 복무 중이에요.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장교로 군복무를 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정확히 지키고 있는 셈이죠. 

 

연우가 떠나기 한 달 반쯤 전에 이삿짐 회사 직원이 방문해서 짐을 짰다. 짐을 넣고 남는 공간에는 평소 연우가 좋아했던 둥지냉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미국으로 짐을 부치기 전날 부산에서 올라와 연우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마트에서 마지막 쇼핑을 했다. 미국에서 구하기 힘든 방충제와 세탁망, 육수용 주머니 가은 자잘한 물건들을 골랐다. 이번에 미국으로 떠나면 몇 년간 그곳에서 혼자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결혼을 하게 될 테니 다시는 이렇게 오붓하게 지낼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中 )

 

책에서 작가님은 지금의 상황을 마치 예견하시는 것처럼 쓰신 듯한데요. 엄마의 직감인가요? 

 

그건 엄마라면 다 생각하는 부분일 거예요(웃음). 딸을 유학 보내면서 벌써 나이가 이렇게 됐으니 곧 결혼하면 나에게서 멀어질 거라는 것은 예상되죠. 그럴수록 서로 더 노력할 부분도 있을 거고요. 그런 생각 하나하나가 애틋하게 느껴졌죠. 연우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이 책의 원고에 대해 조언을 많이 해 줬어요. 어떤 부분은 내용이 너무 늘어지는 것 같다고 해서 줄이기도 했고, 제가 잊고 있던 이야기를 해 줘서 추가된 부분도 있죠. 남편 역시 원고를 수정할 때마다 검토해 줬어요.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모두 공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족들의 검토는 필수적이었거든요. 다만 상우만은 군 복무 때문에 잘 보지 못했죠(웃음).

 

남편이나 시댁을 향한 원망과 서운함도 담겨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의제기를 안하시던가요?

 

아니요.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 말 없던데요(웃음).

 

IMF, 수많은 가정들이 해체되던 시기

 

 

만나고-이채원


2007년의 사건은 비단 이 작가 가족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IMF 사태 이후 이어진 가족 해체는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그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그 시절을 힘겹게 보낸 부모는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자녀들은 청, 장년층이 되어 이 사회를 지탱해가고 있다. 작가의 에세이는 그래서 그 시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작가님 가정이 겪으셨던 상황은 당시 수많은 가정이 경험했던 일이기도 할 듯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기가 막히고 정신이 없었죠. 남편의 미국 연수 일정을 받아 놓고 출국해야하는 즈음에 일이 터져 정말 정신없이 지냈어요. 떠나면서도 우리가 귀국하면 살 집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걱정이었어요. 게다가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문제였죠. 이 시기를 어떻게 넘어가느냐가 제게는 더 큰 걱정이었어요. 저는 사람이 사춘기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넘겼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 역시 사춘기를 심하게 겪은 터라, 내 아이가 자라서 사춘기를 맞이하면 현명하게 넘길 수 있도록 돕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하필 그 시기에 이런 일이 터진 거 였어요. 그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란 생각 뿐이었어요.

 

작가님 역시도 남편과 시댁에 대한 원망을 모두 숨기지는 못하셨을 정도인데요. 자녀분들을 향한 마음으로 버텨내신 거네요.


제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중심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큰일이 닥치면 사람들이 남의 탓을 하잖아요.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이죠. 문제는 그런 생각을 지닌 채 생활해 나간다는 점이에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가정이 찢어지죠. 그런 가정을 많이 봤고 저희 역시 그런 위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누구 탓을 하기 전에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 아이들과 이야기하지 못하고, 위로조차 할 수 없었죠.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데 아이들은 오죽했겠어요.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서 아이들 얼굴 밖에 떠오르지 않았죠. 부모 형제가 싫어지고 바깥세상과 친구가 좋아지는 시기에 그런 일까지 겹치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라는 사람들이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고 미덥지 않은 존재가 된 거예요. 그 상황을 바꿔나가야 했죠.

 

연우는 더 이상 부모를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 듯했다. 남편과 나는 미국에 오기 전부터 빚 문제로 잔뜩 위축되어 있었던 데다 영어도 서투른 탓에 아이들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도 못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의 복잡한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들을 곤경에 몰아넣었다는 자책,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공부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남편과 연우는 자주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집안 분위기도 덩달아 싸늘해져 내가 둘의 눈치를 보며 기분을 풀어 주거나 자연스럽게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中 )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작가의 가족들은 하루하루 적응해 나갔다. 딸과 갈등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남편은 공부에 매진하며 아이들에게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들 역시 놀라운 적응력을 보이며 성공적인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물론 그 와중에 사춘기시기에 찾아오는 갈등과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작가는 더 많은 대화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3년, 시련 속에 꽃이 피다

 

 

만나고-이채원


미국에서의 3년이란 시간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 준 시기였다. 작가는 그 곳에서 영어 공부와 수필 집필을 이어가며 불안감과 싸워나갔다. 책의 제목처럼 그야말로 모든 가족이 공부하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점차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남편 역시 공부에 탄력이 붙으며 무사히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시련 뒤에 굳어진 땅에서는 그렇게 희망이 꽃피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3년은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살아간 시기가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족들 간에 소소한 추억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많았죠. 그 중에서도 첫해 겨울방학 때 아이오와에서 플로리다 최남단 키웨스트까지 갔던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빚지고도 어떻게 여행 갈 생각을 하냐고 해요. 하지만 저도 그 일을 겪으면서 삶을 사는 방식을 바꿨어요. 그 전까진 아파트 하나 장만하려고 전형적인 옛날 어머니 방식으로 무조건 아끼기만 했죠. 콩나물, 두부 값에 전전긍긍하는 소시민 아줌마였어요. 하지만 그렇게 장만한 아파트가 한 순간에 사라진 이후에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가진 한도 내에서 최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아이들에게도 돈이 드니 집에만 있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되잖아요. 3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면서 남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아이들 정서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죠.

 

11일간 여행하며 우리 가족이 달린 거리는 무려 6,500km나 되었다. 그 머나먼 거리를 달리는 동안연우와 상우의 마음의 키는 훌쩍 자라 있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헤아려 조금이라도 더 싸게 햄버거를 사려고 애썼던 연우,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마다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갖 이야기를 지어 냈던 상우. 비록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는 여행에 들어갈 돈을 걱정했으나, 우리 가족은 그 여행에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재산을 얻었다. 내가 만약 전과 같이 돈 걱정에만 매달려 그 여행을 포기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中 )

 


자녀들이 사춘기를 거치면서도 어긋나지 않았던 건, 특별한 가정교육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모든 대화가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아이들과 저는 순간 눈빛만으로도 서로 속마음을 알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남편보다도 더 잘 알죠(웃음). 평소에는 아이들과 농담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남편과 아이들이 갈등할 때는 정말 힘든 순간도 있었죠. 하지만 그 시기를 넘기고 짜증내는 아이를 따라다니며 대화하고 설득하고 화해시키기를 반복했죠. 그 시기에 아이들의 이야기는 무조건 들어줘야 해요. 부모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안 되죠. 그러면 아이가 입을 열기 시작해요. 지금도 아이들은 “엄마와 세대차를 느끼지 못한다”고 이야기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것이 '자식농사 잘 지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작가님은 세상 많은 부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듯한데요.


우선 ‘공짜로 된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좋은 장난감을 사주지 못하고 풍족하게 생활을 누리지 못하게 한 것은 미안해요. 하지만 사교육을 시켜주지 않아 미안한 것은 없어요. 보통 엄마들이 아이들 학원 보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학원을 보내는 것이 잘못이죠.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엄마인데, 다른 사람에게 교육을 맡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돈을 주고 학원에 보내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것은 사실 본인이 힘들기 때문이에요. 그걸 돈으로 해결하는 거죠. 전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녀를 키우며 직접 가르치고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엄마들을 보면 대체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희생 하냐고 묻고 싶어요.

 

연우 씨와 상우 씨 모두 적극적인 성격에 호기심이 많고, 특히 연우 씨의 경우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특성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부모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남편 역시 사무관으로 시작해서 굉장히 바쁘게 살았어요. 집에 일찍 오는 일이 없을 정도로 일이 많고 주중에는 저녁을 같이 먹는 일이 드물 정도였죠. 하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아이들과 놀아줬어요. 아이들이 무엇을 처음 접할 때 주저하거나 뒤로 물러서기보다 일단 시도해보는 것은 아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덕분이죠. 미국에 가서도 전혀 쭈뼛거리지 않고 금방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해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커가는 과정에서 작가님이 고수하셨던 교육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었어요. 적어도 초등학교 4학년 될 때까지는 그랬죠. 첫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마음먹었던 거예요. 또 다른 제 원칙은 ‘내 부모세대와 정 반대로 키우겠다’ 였어요. 제가 커오며 싫었던 것을 시키지 않겠다는 거죠. 물론 크고 작은 것에서 아이들과 함께 방법을 찾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방법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부모님 세대는 전쟁세대잖아요. 수동적이고 주입식이고, 특히 제 외가가 전쟁 당시에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하셔서 저희 어머니는 ‘나서지 마라’가 주된 교육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인데. 그런 방식의 교육이라면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무조건 반대로 한다’, 그게 기본이었어요. 또 막연하게 공부하라는 말 대신 구체적으로 함께하자고 권했죠.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도 전에 공부라는 말에 질려 버리거든요. 예를 들면 막연히 공부하자는 것 보다는 ‘우리 같이 그림일기를 그려볼까?’처럼 구체적이고 놀이처럼 접근하는 것이 좋아요. 그게 더 자극이 되고 흥미를 유발하죠. 

 

지금도 힘겨운 상황에 직면한 가족들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신다면?


역경……, 맞아요. 그 순간에는 너무나 힘든 역경이죠. 하지만 너무 그 순간에 빠져서 절망만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사실 이런 말조차 너무 힘든 사람들에게는 사치로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뭔가 살길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집요하게 하고 절실하게 살면 방법이 생길 거예요. 요즘도 힘겨운 삶 속에 해선 안 될 선택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 상황에 함몰되지 말고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공부하는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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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이채원 저 | 다산에듀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는 빚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 가족이 공부를 통해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들려준다. 가장 힘겨운 순간 함께 공부하며 희망을 발견한 엄마와 두 아이의 이야기는 인생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뿐만 아니라 입시를 위한 공부에만 매달려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우리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생히 들려주고, 뚜렷한 목표나 원칙 없이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해 온 부모들에게는 자녀 교육에 관한 값진 조언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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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이즈 가든, 90년대 록 밴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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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V-Hall은 인디 음악계의 녹(祿)을 먹고 있는 이들 모두가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계보도 없고, 정통성도 따로 없었던 한국 록계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헤비 메틀 밴드 노이즈가든(nOiZeGaRdEn)의 <1992-1999 Deluxe Remastered Edition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전성시, 발 디딜 틈도 없었던 공연장은 그들을 변함없이 지지해온 팬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이 재발매 앨범은 1집 < Noizegarden >(1996)과 2집< …But Not Least >(1999),데모 및 부틀렉 음원의 3CD로 탄탄한 구성을 자랑한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지만, 인디 차트를 1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공연 직전 이즘에서는 팀의 리더인 윤병주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공연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을 주었고, 이모티콘 하나도 빼지 말아 달라는 세심한 부탁도 있었다. 윤병주는 로다운 30의 인터뷰 당시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항을 하나하나 챙기는 꼼꼼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또 다시 확인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힘을 얻는 음악가들이 분명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윤병주는 여러모로 많은 이들에게 감사한 뮤지션이다.

 

만나고-이즘

 

이즘과 인터뷰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습니다. 노이즈가든 인터뷰에서 만나서 더욱 반가운데요. 윤병주씨가 다시금 '노이즈가든'이라는 카드를 꺼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카드를 꺼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시기가 맞았다고 봅니다. 어쩌다 보니 20년이 지났고 마침 강명수 대표님의 리마스터 음반 준비도 잘 진행되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밴드'인 로다운 30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는 상황에서 '추억팔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시기도 딱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 로다운 30의 < 1 > 앨범 활동을 약 2년간 꾸준히 하고 이제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려는 시점이어서 공백 기간을 이용하는 느낌이랄까요.

노이즈가든

 

사실, 모든 것이 전설처럼 여겨지고 있죠.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자, 팀의 중추인 윤병주씨는 어떤 면에서 노이즈가든이라는 밴드가 팬들의 애를 타게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음반이나 음원을 구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옛날을 기억하는 팬들 혹은 여러 글을 통해 소문이 부풀려진 탓도 있겠죠. 이번 음반의 라이너노트에도 적어놓았지만 진정 노이즈가든을 그리워하거나 이 밴드에 대해 궁금해 하는 팬들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어요. 단지 '내가 냈던 앨범이 샵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판권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뮤지션들도 봐왔기 때문에, “나 말고 재발매를 진짜 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한 걸까?”라는 생각도 했죠.어쨌든 노이즈가든의 '넘버원 팬'임을 자처하는 제작자 명수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충 다시 찍어내는 식의 재발매는 저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

 

미국의 저명한 A&M 스튜디오를 통해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혹시 이것도 사운드가든(Soundgarden)과 연관이 있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사운드가든(Soundgarden)을 패러디한 이름의 밴드이다 보니 해외 마스터링을 고려할 때 그분들의 앨범 크레딧을 최우선적으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마스터링이라도 같은 곳에서 하면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았죠. 에피소드라면... 당시 음반기획사라든가 레이블을 운영하시는 분들의 마인드는 사업가에 가까웠어요. 요즘 많은 인디레이블 오너분들 같은 '덕심'이란 게 없었죠. 따라서 음반에 관한 자료보존 등이 허술했고, 제 생각엔 노이즈가든의 자료들도 앨범 발매 이후엔 다 사라지거나 묻혀버릴 것 같았어요.

 

 1, 2집의 해외 마스터링 진행을 제가 직접 이메일로 했었는데 '마스터를 두 개 보내달라'고 해서 하나는 제작자 측에 전달하고 하나는 제가 몰래 보관하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이번 리마스터 앨범은 나올 수가 없었겠죠. 최소한 이 정도 퀄리티로는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다 예전 일이고, 이번 남상욱씨의 리마스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만나고-이즘

 

활동 당시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1999년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이야기를 묻고 싶은데요.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나요?

 

별다른 계기라기보다는 그냥 매니지먼트의 주선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꽤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그래도 끝나고 나니 좋은 추억거리로 남더라고요. 저희 곡과 유명한 해외 커버곡, 그리고 서울 팝스 오케스트라가 항상 연주하던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팝적으로 편곡한' 곡 등을 연주했던 기억입니다. 그쪽에 편곡을 담당하셨던 분이 록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관계로 저희 곡과 해외 커버곡의 관현악 편곡을 동료뮤지션 '페인'(칼파, 언니네이발관, A Doom 등으로 활동했던)이 맡아서 해주었습니다. 이 역시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타의 기타리스트들이 그렇듯, 윤병주씨 역시 기타와 장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다양한 장비를 자유롭게 구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장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셨나요?

 

사실 장비, 사운드, 톤에 관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이제 좀 지겹습니다.저의 장비에 관한 관심이나 사운드, 그리고 톤 같은 것들... '윤병주 정도가 기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이 관심을 갖고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는 건데 보통 그 단계를 건너뛰고 싶어 해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톤을 가진 기타리스트들의 인터뷰를 (웬만하면 원문으로) 읽고 최대한 모든 걸 따라해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떤 경로로 무슨 악기를 샀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처럼 인터뷰에서 해야 한다면 저 자신이 조금 비참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양해를... ^^;

 

해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클럽에서 커버를 위주로 하는 밴드를 만들고자 2002년에는 로다운 30을 결성하고 지금까지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음악적인 성과를 얻고, 매니아층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던 노이즈가든 해체의 '결정적 이유'를 지금 다시 물어본다면 실례가 될까요? 그것이 음악적인 이유인지, 아니면 음악 외적인 문제인지 궁금합니다.

 

노이즈가든의 당시 위상이나 지명도가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음악적으로는 과소평가 되고 있다는 건방진 생각도 했지만요. ^^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계속 한다면 몇 년이 지나 다시 클럽에서 열 명 스무 명 놓고 하는 밴드로 돌아가리라는 예상을 했고 그걸 걱정하는 저 자신에게도 짜증이 났습니다. 또 같이 하는 멤버들이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을 어른스럽게 멤버들과 터놓고 얘기하지 못한 점이 미안하게 생각되기도 해요. 하지만 당시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는데 이상하게 큰 밴드로 부풀려진' 노이즈가든을 거품 빠지기 전에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만나고-이즘

 

윤병주씨의 기타에 새겨진 이름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습니다. 고(故) 이상문씨는 어떤 음악인이었나요? (이 질문이 실례가 된다면 답변 안 해주셔도 좋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저의 가장 친한 친구로 정말 유쾌하고 쾌활한 성격에 주변 분위기를 항상 좋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 덕에 음악의 매력에 빠져든 친구들도 많았고 그 중 몇은 아직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정통 헤비메탈을 가장 좋아했지만 노이즈가든이나 언니네이발관에서도 무리 없이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적인 스펙트럼도 넓었으며 레코딩이나 사운드에 대한 관심은 특별했습니다. 노이즈가든 앨범 사운드의 반 정도는 그 친구의 업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네요. 2집 때도 멤버는 아니었지만 많은 도움을 주었거든요. 로다운 30 결성초기에도 그 친구 덕에 정말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 이야기를 종종 하고, 죽은 사람임에도 슬프기보다는 웃긴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친구였어요.

 

라이너노트 앨범 크레딧에는 친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입니다. 마치 유명 뮤지션의 평전이나 자서전에서처럼 중간 마다 참여한 전설의 이름과 같아 반가운데요.

 

당시 저와 함께 작업했던 파트너들이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습니다.

 

얼마 전 총동문회도 가지셨다고 들었고요. 박건씨의 인터뷰에서처럼, “어쩌다 한 번씩 하는 밴드”가 되고 마는 것인가요? 노이즈가든의 차후 행보는 어떻게 될까요?

 

'되고 만다'는 표현은 마치 풀타임 밴드로의 재결성을 바란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전 기본적으로 그러한 감성적인 바람 등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풀타임 추억팔이'로 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구요. ^^ 저는 저 자신이 즐겁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고 현재 가장 즐거운 일은 로다운 30입니다. 건이도 밴쿠버에서 '앰버힐스(Amber Hills)'라는 밴드를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밴드가 원하는 음악적 성과 혹은 뜻한 목표를 이루었을 때 가장 행복할 것이고, 그런 상황이라면 '노이즈가든 공연이나 또 한 번 해볼까?'가 나올 수 있겠죠.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활동이나 신곡 작업은 딱히 없는데 갑자기 옛 명성이라도 이용해 볼까 해서 전혀 다른 멤버로 이루어진 밴드를 급조하여 나온 경우를 본 적은 없는지, 항상 이름 뒤 괄호 속에 유명했던 전 밴드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뮤지션은 없는지, 그들을 보며 팬으로서 흡족한 기분이 들었는지... 안타깝게도 전 그런 게 좋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로다운 30(Lowdown 30)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드렸었지만, 노이즈가든 활동 당시와 요즘 음악계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 있으실 텐요. (이제는 로다운 30의 윤병주가 아닌 노이즈가든의 윤병주로서 바라보는 현 음악 시장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뮤지션이 음악 시장 상황에 대해서까지 생각해야 하는 이 상황... 이것이 바로 현 음악 시장의 슬픈 상황입니다. ㅠ

 

 

인터뷰 : 신현태
정리 : 신현태
사진 : 조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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