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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섭 “이제라도 대우 해체, IMF 체제 재평가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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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섭

 

『김우중과의 대화』는 논쟁적인 책이다. 대우를 만든 ‘김우중’ 회장이라는 인물 자체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평범했던 샐러리맨이 단돈 500만 원으로 회사를 세웠고, 그 회사는 ‘세계 경영’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녔다. 회사 이름은 대우. 그 지역에서 대우는 대한민국보다 더 유명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좌초할 때 대우는 매출 71조 원, 자산 78조 원으로 한국 재계 순위 2위였다.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는 1997년 대우그룹을 개발도상국 출신 다국적기업 중 해외자산 규모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승승장구하던 대우는 대한민국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부터 급격하게 몰락한다. 이때 IMF가 돈을 빌려주면서 내건 조건은 철저한 구조조정이었다. 구조조정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핵심은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라는 것이었다. 부실로 판정받은 기업은 자산을 매각했고, 합리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대규모 감원에 들어갔다. 이런 맥락에서 대우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당시 신흥국 시장 개척에 매진했던 대우의 사업 중 많은 부문이 부실로 판정받았다. 대우자동차가 GM에 팔리고, 다른 계열사도 뿔뿔이 흩어졌다. 김우중 회장은 한국을 떠나 오랜 시간을 외국에서 머물렀다.

 

이후 김우중 회장이 귀국했고 법원은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등을 주도한 혐의를 물어 2심에서 징역 8년 6개월과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선고했다. 징역과 추징금 액수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긴 했으나, 대우를 잘못 경영하여 국민 경제에 혼란을 끼친 김우중 회장이 대가를 치르긴 치러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김우중과의 대화』가 나왔다. 김 회장이 직접 쓴 책은 아니나, 대화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간 침묵으로 일관했던 김 회장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는 의미다.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우와 김우중 회장이 지니는 화제성을 증명한 셈이다.

 

책을 쓴 신장섭 박사는 오랫동안 IMF 체제의 부당함을 지적한 경제학자다. IMF 체제에서 해체된 대우 그룹은 신 박사의 학문적 관심사였다. 김우중 회장 역시 IMF 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구조조정에 회의적이었던 경영인이었다. 두 사람의 생각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했다. 신장섭 박사는 대우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자고 김우중 회장을 거듭 설득했고 결국 2014년, 책이 나왔다.

 

이 책은 대우의 흥망성쇠를 다루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IMF 이전과 이후의 한국경제를 분석한다. 특히 IMF 체제에 관해서 상세하게 논의하는데, 책이 문제 삼는 시각은 ‘IMF 위기는 금융위기와 기업위기가 함께 발생해서 벌어졌고, IMF 처방을 철저하게 실행함으로써 빠르게 경제회복에 성공하며 금융 투명성도 확보했다’이다. 그에 비해 신장섭 박사와 김우중 회장의 인식은 ‘IMF 위기는 금융위기였고, 이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는 과정에 대우가 해체됐으며, IMF 프로그램을 아무 비판 없이 시행하는 바람에 한국은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데다 고용 불안이나 제조업 경쟁력 약화 등 경제 체질 전체도 악화되었다’이다.

 

책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렸지만 신장섭 박사의 육성으로 몇 가지 쟁점을 들어보기로 했다.

 

신장섭


 
책에 쏟아지는 관심, 반갑지만 아쉽기도

 

책이 화제다. 『김우중과의 대화』가 대우의 흥망성쇠를 다루긴 했어도, 한국의 경제 성장 전반을 훑은 책이지 않나. 그럼에도 주로 김우중 회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되는 것 같은데. 다소 아쉽기도 할 듯하다.

 

아니다. 이 책은 김우중 회장에 관한 이야기니 그런 관심이 당연하고 반갑다. 대우 해체라는 소재가 언론으로부터 관심을 받으리라 예상했다. 문제는 대우 해체는 굉장히 커다란 사건인데 지금 논의는 지엽적인 문제로 흐르고 있다. 경제 관료가 대우를 죽일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작은 문제다. 기획 해체인가 좌초인가, 자살인가 타살인가, 이런 방향으로 논쟁이 전개되니까 안타깝다.

 

그렇다면 큰 문제는 무엇인가.

 

대우 김우중 회장은 기업가니까 보통 때는 정부 관료와 충돌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대우 김우중 회장과 경제 관료가 IMF 금융 위기 때 충돌한다. 이 둘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대우가 해체됐다. 대우 해체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

 

둘은 왜 충돌했나.

 

금융 위기 극복 방안을 두고 철학과 방법이 달랐다. 당시 정황이 어땠는가 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대선 주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IMF 재협상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캉디쉬 IMF 총재가 각서를 받으러 한국에 온다. 각서 내용은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IMF 프로그램을 그대로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어쩔 수 있나. 사인했다. 그렇다고 김 대통령의 생각이 많이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IMF 프로그램을 이행하면 안 좋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 반대로 당시 정계 관료나 학계,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IMF 프로그램을 철저히 집행하자는 쪽이었고.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반대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김우중 회장은 반대편 이야기를 가장 잘해주는 인물이었다.

 

많은 기업가가 있었을 텐데 왜 김우중 회장이었나.

 

첫 번째는 전경련 차기 회장으로, 회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특정 기업가를 자주 만나면 이상한 말이 나올 수가 있지만 전경련 회장을 자주 만난다고 부담될 게 없었다. 그리고 김우중 회장은 신흥 시장을 중심으로 세계 경영을 했는데, 신흥시장에서는 금융 위기가 빈번했다. 그러니 김우중 회장은 금융위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우중 회장과 경제 관료 사이에 정책 논쟁을 붙였다. 어떤 때는 김우중 회장이 옳다고 끝낸 적도 있었고. 김우중 회장이 왜 반대편 이야기를 세게 했느냐 하면, 굉장히 민족주의자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IMF 프로그램대로 하면 한국 경제 나빠질 거로 예상했다. 책을 쓰면서 자료를 발견했는데, 1998년 5월에 했던 공개강연에서 김우중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IMF 프로그램은 겉으로는 한국을 도와주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국제 금융 기관이 자기들의 관리 체제로 넣는 과정이고 이 체제에 오래 있으면 경제가 많이 나빠진다고.

 

정리하자면 당시 경제 관료는 IMF에서 이야기하는 구조조정론자였고, 김우중 회장은 거기에 반대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당시 김우중 회장이 내건 대안은 무엇이었나.

 

IMF 체제에 들어왔으니, 완전히 거부까지는 못해도 이왕 들어왔으면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산시설을 열심히 돌려서 수출하자는 쪽이었다. 김 회장은 동아시아만 잠시 위기지만, 세계실물경제는 좋은 상황으로 봤다. 게다가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까지 가니까 수출은 잘 되고, 수입은 줄 거로 예상했다. 연간 50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해서 2년 만에 탈출하자고 했다. 이 과정에서 신흥 경제 관료와 강하게 부딪쳤고 대우가 해체된다.

 

IMF 체제를 기점으로 산업에서 금융으로 이동

 

신흥 경제 관료라고 표현했는데, 이전 관료와 어떤 점에서 달랐나.

 

IMF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금융이 산업을 도와주는 게 주 역할이었다. 그때는 오히려 금융이 억압받는다 할 정도로 산업자본 축적을 위해 존재했다. IMF 이전에는 한국에 모기지도 없었다. 모기지는 생산적이지도 않고, 부동산 투기만 조장한다고 인식했다. 관료들의 기본적인 생각도 경제성장 성공하면서 금융 쪽은 천천히 조정해 나가야 한다는 쪽이었다. IMF가 들어오면서 급진적으로 하자는 쪽으로 바뀐다. 이헌재 위원장은 금융 관료를 하다 1980년대 초에 외국으로 떠난 다음에 신용 평가 회사, 외국 금융 회사에 다니면서 신자유주의를 접한다. 이 사람이 금융감독위원장이 되면서 IMF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더 세게 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자신의 회고록에도 썼듯 본인이 재벌개혁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이들은 이렇게 하는 게 국익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전 관료는 산업 중심이었다면 바뀐 다음에는 금융 중심으로 갔다.

 

산업과 금융이 서로 도우면 선순환일 텐데, IMF 때 왜 산업으로 흐르는 돈을 막았을까.

 

산업과 금융 간 비슷한 부분도 많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장기 투자를 바라보는 시각. 대우차도 결국은 산업자본이 장기적으로 갖고 있는 안목을 금융자본이 인정해주지 않은 사례다. 대우차는 투자를 굉장히 빨리했다. GM과 1993년에 헤어지고 나서 1997년에 연 200만대 생산 규모를 완성한다. 당시 삼성이 자동차에 뛰어들면서 갖추려 했던 규모가 20만 대였으니,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규모의 경제라고 해서 생산 규모를 크게 하면 단가는 떨어지고 자연스레 경쟁력은 강화된다. 당연히 이렇게 갖추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때는 국내 시장에 팔겠다는 게 아니라 신흥 시장을 노렸다. 당시에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중남미 여러 곳에서는 이미 그 나라 내수 점유율 1위를 대우가 차지했다. 신흥 시장 성장 가능성을 보고 선투자를 했고 2000년대 이후에 엄청나게 과실을 거들 수 있었다. 그런데 금융자본이 중간에 뚝 잘라서 이익도 못 내고 투자만 많이 했네, 부실이야, 해버렸다.

 

산업을 보면 장기 투자가 필요할 때가 많지 않나.

 

삼성 반도체도 그렇다. 지금은 세계 1등이지만, 처음 시작했을 때 적자였다. 적자가 크니까 삼성전자에 붙였다. 그러다 삼성통신이 돈이 버니 삼성반도체통신 이렇게 했고. 통신이 돈을 못 버니 다시 삼성전자에 붙였다. 이렇게 그룹 차원에서 도와주면서 성공했다. 산업에서 이런 게 많다. 대우조선도 10년 이상 걸려서 세계 수위의 조선회사로 만들었다. 금융자본 논리로 보면 불가능하지. 중간에 뚝 잘라서 이거 안 돼, 부실이라고 몰아붙이고는 더 나아가 경영인이 부도덕하다며 범죄자로 몰아갔다. 그 분위기가 IMF 때 굉장히 강했다. 현재 국내에서 팽배한 반기업 정서는 이때가 기점이었지 않나 싶다. 잘못된 건 다 기업 잘못이라 하지만 금융기업도 책임져야 한다. 처음에는 돈 빌려주다가, 조금 문제 있으면 쏙 빼서 산업이 잘못했다고 말하며 있는 자산 팔고 담보 내놓으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게 정부인데, 정부가 중간에서 국가 경제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은가를 판단해야 한다. 돈은 어차피 금융이 쥐고 있으니 산업과 금융이 갈등하면 산업이 밀린다. 이때 정부가 산업 편을 조금 들어줘야 한다. IMF 때는 정부가 금융 편을 들었다.

 

당시 구조조정의 핵심은 뭐였나.

 

그때 구조조정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자산 중에 팔 만한 걸 팔아서 부채비율을 낮추라는 의미였다. 과연 헐값 매각하는 게 애국이었을까. 김우중 회장은 헐값 매각하면 한국 경제가 나빠진다고 말했다. 김우중 회장이 수출을 늘리자 제안했는데, 이게 확장 경영이라고 비판받았다. 역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15년 지나고 나서 보자면, 어느 게 애국이었고 역적이었는가? 그동안 헐값에 판 게 문제 된 게 많다. 대우자동차만 해도 210억 달러 정도를 손해 본 걸로 본다. 대우자동차를 헐값에 산 GM은 중국에서 승승장구했다. 대우자동차가 정말 부실기업이었으면 이게 가능했겠나. 그 밖에도 제일은행, 외환은행, 한미은행 등. 진로소주도 골드만삭스에 헐값에 팔았다 비싸게 되사왔다. 그런 게 부지기수다.

 

신장섭

 

구조조정의 허와 실, IMF 체제 이후 한국 경제 나빠져

 

그럼에도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구조조정론자들은 그렇게 구조조정을 철저히 했기에 한국 경제가 빨리 회복됐고, 금융 안정성을 얻어서 경제가 더 탄탄해졌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빨리 회복했다고 해도, 지금은 저성장이다. 경제가 좋아진 게 아니라 나빠졌다. 좀 더 자세히 보자. 기업 부채비율 낮추라고 해서 기업 부채비율은 현재 미국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대신 가계부채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결국 기업부채가 가계부채로 이전된 거다. 가계부채도 함께 줄었다면 경제가 좋아졌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아니다. 그럼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은행도 살아야 하는데 기업에는 돈 빌려 주지 말라고 하니 모기지에 기댔다. 부채를 누가 갖고 있는 게 나을까? 기업이 낫다. 기업은 10~20%, 많을 때는 두세 배 성장이 가능하다. 그렇게 성장해서 부채 상황이 가능하다. 가계에 그런 능력이 있나? 가계부채 느니까 내수가 부진할 수밖에. 자, 그렇다면 금융 안정성. 2008~2009년 세계 금융 위기 때 한국이 3,000억 달러 넘는 외환보유액이 있었다. 그렇게 많았는데도 1997년 외환위기에 준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나라와 스왑 계약 맺어서 보유해둔 외환보유액도 별로 쓸모없었고. 간단히 말하자면, IMF 프로그램대로 해서 경제는 나빠지고 한국의 자산은 팔아먹었다.

 

2008년 위기를 거론했는데, 실제로 2008년 위기 때 미국의 대응과 1997년 한국의 대응이 상당히 달랐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때 선진국이 한 짓을 보자. 선진국도 IMF 프로그램대로 했는가? 전혀 안 했다. 금리도 0%로 낮추면서 심지어 양적 완화까지 했고. 대우 죽여라 해놓고는, 정작 자신들은 부실한 기업의 경영인조차 안 바꾸고 다 살렸다. 시티은행, GM, AIG 등 다 살렸다. 자기들의 자산을 매각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선진국이 다르게 적용하는 거에 대해서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조지프 스트글리츠는 IMF가 이중잣대를 적용한다고 했지만, 아니다. 단일잣대다. 자기의 이익이라는 잣대라는 점에서는 단일잣대인 셈이다. 다른 나라 금융 위기 때는 자기들이 주워 먹을 게 많아지니까 그렇게 했고, 자기들이 금융 위기를 당했을 때는 그렇게 안 하는 게 자기들 이익에 부합한다. 그런데 1997년 한국의 관료나 미디어는 상대방 이익과 나의 이익을 구분하지 못했다. 상대방의 이익을 국익이라 착각했다. 결국은 김우중 회장 말이 옳지 않았을까, 전반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책에서도 다뤘지만 고용 불안, 제조업 위축도 IMF 프로그램을 이행한 뒤에 심해진 문제 아닌가.

 

맞다. 한국은 그 전에 정리해고가 거의 없었다. 그 당시는 한국처럼 정리해고를 안 하는 건 비효율적인 경영이라고 IMF에서 몰아붙였다. 그런데 이게 사회적인 문제가 되니까 이제서야 다시 상생 경영해야 하고 비정규직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것만 봐도 속은 거지. 그 당시에 속지 않은 재벌 총수가 김우중 회장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정리해고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한국이 과잉 투자이니 생산 시설을 줄이라고 한 지적에 대해서 줄여야 할 나라는 선진국이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랬다. 선진국은 오랜 기간에 투자해서 낡은 시설도 많았는데, 한국은 단기간에 제일 좋은 시설로 투자했다. 양쪽이 과잉이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곳에서 시설을 줄여야지. 그리고 한국이 투자한 대부분은 신흥시장을 겨냥했다. 전혀 과잉 투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는 과잉투자론을 받아들여서 제조업을 줄이라고 한다. 그 당시 정책이 지금의 저성장을 초래했다. 그때 올바른 판단을 했다면 이미 국민소득 3만~4만 달러 진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징법 피하기 위해 책 낸 게 아냐, IMF 체제 재평가 필요해

 

책 출간 동기, 시기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해 보자. 많은 경제학자, 칼럼니스트, 인터뷰어가 있을 텐데 왜 신장섭 박사가 김우중 회장의 회고록을 쓰게 됐나.

 

김우중 회장 측의 의뢰를 받고 쓴 책은 아니다. 나는 지난 15년 동안 IMF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쭉 써 왔다. 책도 여러 권 냈고. 이런 부분에서 김 회장과 내가 생각이 비슷했는데, 첫 번째 만남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처음 만나 이틀 동안 단둘이서 15시간을 이야기했다.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했다. 그 뒤로 종종 만났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대우 이야기를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더라. 대우가 성장하고 해체되는 이야기가 한국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1997년에서 1999년, 격동의 시기에 경제부 기자도 하고 논설위원도 맡았다. 현장에 있으면서 IMF 비판하는 글도 많이 썼다. 내 딴에는 많이 안다 생각했는데, 김 회장과 만나고 보니 잘못 알던 게 많았고 알더라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게 있더라. 나조차도 이렇게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겠나. 시간이 갈수록 김 회장의 반대쪽 이야기가 정설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래서 김 회장이 살아 계실 때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자고 설득했다. 설득에 성공한 게 2010년 여름. 그렇게 해서 책을 썼다.

 

출간 시기가 미묘하다는 지적이 있다.

 

김우중 회장 추징법을 회피하기 위해 낸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오비이락이다. 이 책은 오히려 추징법 때문에 손해를 봤다. 원래는 작년에 나올 책이었다. 원고가 다 나온 상태에서 인쇄만 들어가면 되는데, 전두환 추징법이 나오니까 김우중 회장이 전두환 추징금과 얽히는 게 싫다고 이야기하더라. 책에도 다뤘는데, 김우중 회장 추징금은 문제가 많다. 원천 무효라 생각한다. 어쨌든 전두환 추징금과 얽히면서 언론에서 추징금 프레임 안에 가둬버리니까 책을 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김우중 회장 측근 사이에서도 논란이 생겼다. 나는 책을 가능한 한 빨리 내자는 쪽이었으나 이 추징금이라는 게 김 회장 본인과 가족 그리고 대우 임직원도 걸려 있으니, 그 사람들이 험한 꼴을 당하면 안 되지 않겠냐, 해서 입법 추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결국 그래서 책이 1년 정도 늦게 나왔다.

 

김우중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가까웠으니 박근혜 대통령 때 책을 낸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말이 안 된다. 책을 내자고 합의한 게 2010년 여름. 그때 누가 대통령이 될지 알았나? 만약 야당 대통령이 됐다면 책 출간을 6년 이상 늦췄을까? 시간이 충분히 지났으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자, 대우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낸 거지 시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전혀 연관 못 시키는 게, 김우중 회장 추징법이 다른 정권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행정부에서 나왔다. 박근혜 정권에서 가장 피해를 봤다.

 

신장섭

 

산업 강화하고 신흥국 시장 개척해야

 

어쨌든 상황은 안 좋아졌다. 경영, 리더십, 청년 실업에 관해서도 책에서 다뤘는데. 대안은 무엇일까.

 

일단은 산업 금융 시스템을 국가 차원에서 제대로 갖춰야 한다. 예전 개발 독재할 때처럼은 못하더라도 산업금융을 담당하는 국책금융기업은 강화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역할을 하는 산업은행마저도 민영화를 추진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민간은행도 산업 쪽에 물꼬를 틀 수 있도록 정부가 유인해야 한다. 텍스 인센티브를 준다든지 해서. 지금은 민간은행이 수익을 내야 하니 모기지 등 다른 쪽에 돈 많이 빌려주지 않나.

 

또 하나는 청년 실업 문제인데 한국 젊은이들 불쌍하다. IMF 시스템 때문에 큰 피해를 봤다. 내가 졸업할 때만 해도 고시 준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IMF 시스템 이후에 정리해고 하고 기업이 우르르 무너지니 부모도 그렇고 본인도 ‘대기업 들어가 봤자 처음에야 멋있지 나중에 무슨 일 벌어질지 모른다.’라며 처음부터 철밥통 쪽으로 인력이 몰린다.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과 공무원 이쪽으로. 그런데 이런 분야가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진취적인 일을 하는 곳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내수 업종이다. 합격하려고 과외도 많이 받는다. 예전에는 고시 보는 사람도 학원 안 다녔다. 요즘은 고시뿐만 아니라 9급 공무원까지 몇 년을 학원 다니며 공부한다. 이게 얼마나 낭비인가. 이런 상황으로 한국사회가 변해 버렸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인가.

 

제조업 육성해야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한국은 제조업 계속해야 한다. 내수도 좋지만 외국으로 뻗어 나가야지. 이 책이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진취적 기상을 가져라’는 거. 재밌어서 일부러 앞부분에 썼는데, 김우중 회장은 27살 때 외국으로 나가서 30만 달러 주문을 받아 한성실업을 살린다. 회사 지원을 받아 간 게 아니었다. 김우중 회장은 젊었을 때부터 남이 안 가는 곳에 갔다. 선진국은 이미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들어가 봤자 매력이 없다. 신흥국 중에서도 일본이나 화교 기업이 이미 들어가 있는 데는 싸우기 벅차다. 이들이 못 간 데에 들어가야 한다. 이들이 왜 못 갔겠나. 힘드니까. 성장하려면 희생이 필요하다. 대우는 가장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을 아프리카에 보냈다고 한다. 1970년대 아프리카는 지금보다 더 심하다. 아무것도 없다. 그 열악한 곳에서 성공하면 그 사람 역량이 얼마나 커지겠나. 이런 사람은 전세계 어디를 가도 잘 된다. 대우인 중에 아프리카 한두 번은 대부분은 다 갔다 온다. 어렵지만 남들 안 가는 데 들어가는 진취적인 기상으로 대우는 성공했다. 비록 나중에 해체됐지만.

 

어쨌든 결국은 당시 5대 기업 중 가장 미진하게 구조조정했고 정부와 타협을 안 하면서 해체로 갔는데. 김우중 회장 책임도 있지 않을까?

 

타협을 안 했다기보다는 정부 관료가 공정한 잣대라고는 말했지만 프로쿠르스테스 침대를 들이민 게 아닌가 싶다. 공정하진 않았다. 5대 그룹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했는데 대우는 5대 그룹 중에서 수출을 가장 많이 했다. 금융 시스템 막히고, 수출 금융이 끊기니까 할 수 없이 단기 차입금을 끌어 쓸 수밖에. 그러면서 가장 어려워졌다. 회사채 발행하려 했지만, 그것도 막혔고. 이런 걸 보면서 노무라 증권은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고 표현했다. 이러니까 다른 데에서도 돈을 회수하기 시작하고. 기업이 다 다른데, 단일한 잣대로 평가하는 게 공정하다 할 수 있나? 어떻게 보자면 야구선수, 배구선수, 농구선수 모두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서, 목표를 주고 그 목표에 도달하지 않으면 너는 선수 아니야, 하는 거랑 똑같지.

 

김우중 회장은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다. 나라 잘되려고 했다.” 이런 말을 굉장히 자주 하면서 공동체 강조했던데. 실제로 만나보면 어떤 인물인가.

 

정말 독특한 기업가다. 만나서 이야기해도 비즈니스 이야기는 별로 안 하고 한국 경제, 기업가, 젊은이,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더라. 대우를 경영할 때도 국내 중소기업 하는 분야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고. 이들과 함께 외국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어 했다. 일찍부터 번 돈을 사회 공헌에 많이 내놓았다. 아프리카에서도 50대 50 법칙이라 해서 그쪽과 공생, 상생하는 걸 고민했다. 한번은 “예전에야 국가 발전과 기업 발전이 함께 갔지만, 선진국으로 가면 기업가에게 이런 마음이 약해지는 게 아닌가” 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선진국 되면 민간 역량이 강해지면서 마음만 먹으면 국가 발전과 궤를 함께하는 게 더 쉬워진다고 답하더라. 마음 먹기에 달린 거다. 지금 주는 메시지가 굉장히 크다. 독자들도 김우중 회장이 주는 메시지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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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과의 대화신장섭 저 | 북스코프
이 책은 대우그룹의 성장과 해체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그에 따른 역사적 재평가를 위해 탄생했다. 김우중 회장과 대우가 침묵한 15년간 한쪽의 이야기만이 정설처럼 굳어졌기에 『김우중과의 대화』가 불러올 파급은 크다. 그러나 본서는 대우그룹의 성장과 해체의 실체적 진실을 말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금융위기 극복방안의 타당성과 이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담고 있다. 결국 이 책이 진정으로 전하려는 것은 대우의 흥망으로 읽는 우리 사회의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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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기호 “당신들 책만 읽고 있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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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소설을 끝냈다. 이기호의 두 번째 장편『차남들의 세계사』이야기다. 계간 「세계의 문학」에 2009년 가을부터 2010년 겨울까지 연재됐던 「수배의 힘」. 원고지 700장 분량의 경장편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던 소설이 장편이 되었다.『차남들의 세계사』는 얼결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 신세가 된 ‘나복만’의 인생을 그린 작품이다. 1980년대 초반 군사정권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부조리한 삶과 인생의 아이러니를 담았다. 작가는 아픈 현대사를 구체적으로 건드렸지만, 소설의 미학도 놓치지 않았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의 삶에 연민이 생기고 자꾸만 궁금해지는 건, 작가의 요상한(?) 주문 때문이다. ‘이것을 턱을 괸 채 한 번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누워서 한번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창문 활짝 열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서 들어 보아라’ 등, 소설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작가는 독자들의 주변을 환기시킨다. 소설은 무거운데, 작가의 주문은 가볍기 짝이 없다. 어떤 장단에 맞춰 소설을 읽어야 할지, 독자들은 혼란스럽다. 결국, 덫에 걸리게 되는 독자들. 재밌게 읽히는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 수 있다.

 

소설가 이기호는 1999년 단편소설 『버니』를 《현대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가로 살아온 지어느새 15년. 지금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교수로, 그리고 세 아이의 아빠라는 타이틀도 더했다. 이기호는 심야 라디오 DJ를 하면 딱 어울릴 만한 목소리를 가졌는데, 농담을 던져도 뭔가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은 묘한 음성이다. 그런데 문단에서의 별명은 ‘젊은 구라’다.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첫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까지, 이기호의 작품에서는 좀체 평범한 제목을 찾을 수 없다. 제목이 먼저 다가와야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작가 이기호. 『차남들의 세계사』는 유일하게 나중에 제목을 바꾼 작품이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차남들의 특징을 ‘늘 곁눈질 하는 사람들’로 정의했다. 방점은 ‘세계사’에 찍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차남들의 세계사』를 두고 ‘쓸쓸한 농담 같은 소설’이라고 말했는데, 어쩌면 누군가에는 ‘씁쓸한 진담’으로 여겨질 수 있는 소설이다. 이기호는 이 작품을 통해 스스로의 변화를 체감했다. 독자들은 그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을까? 작가의 요상한 주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까? 자, 이 인터뷰를 턱을 괸 채 한번 읽어보자.

 

만나고-이기호

 

어느 순간, 어금니가 나가 버렸다

 


그간 단편소설집은 펴냈지만 장편은 6년 만이다.『차남들의 세계사』가 유독 시간이 많이 걸린 까닭은 무엇이었나.

 

역시 인물 때문인 것 같다. 처음 생각했던 『차남들의 세계사』는 인물보다는 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시대의 어떠한 부조리를 보여주기 위해, 에피소드에 부합되는 인물을 떠올렸는데 결국엔 내 마음속에 이 인물이 깊이 남았다. 2009년부터였나, 냉소주의에 빠졌던 시절이었는데 소설마저도 허무해지면 도대체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거대한 철학적 사유나 인문적 소양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 별 다르게 의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내 옆에 있는 친구, 이웃들에게서부터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때부터 ‘나복만’이라는 인물이 다른 차원으로 들어왔던 것 같다.

 

소설을 쓰기 전, 전지를 꺼내놓고 캐릭터 구상을 먼저 한다고.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에는 원고지 700장 정도의 경장편으로 끝낼 생각을 하고 시작했는데, 쓰는 와중에 바뀐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거다. 첫 문장과 끝 문장이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쓰기 때문에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거리감 같은 걸 둘 수 없으니까. 『차남들의 세계사』 1부를 끝낼 때쯤, 이걸로 끝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는 무척 고생스러웠던 작품이다.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소설을 쓴 장소도 여러 군데였다. 담양, 무주, 광주, 원주, 우즈베키스탄까지. 가장 집중적으로 소설을 쓴 공간은 어디였나?


제일 몰입해서 쓴 건, 광주였다. 광주에서는 월셋방을 ‘상아방’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서 가장 많이 썼던 것 같다. 집 밖을 나서면 노점상이 많아 굉장히 시끄러웠는데, 소설을 쓰기에는 썩 좋은 공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이나 감정을 얻는데 꽤 보탬이 됐다. 우즈베키스탄은 학교에서 학생들하고 고려인 문학을 조사하려고 3주 정도 갔는데, 밤에는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글을 썼다. 나성국 이야기의 배경이 우즈베키스탄인데, 때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집, 연구실에서는 소설을 쓰지 않나?


집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고 연구실에서는 짧은 원고는 모를까, 길게 써야 하는 작품은 못 쓴다. 눈 앞에 뭐가 있으면 그걸 먼저 해결해야 하니까. 소설을 쓰려면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진도 간첩단 사건을 겪은 김정인 씨의 편지로부터 구상된 작품이다. 이 편지를 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사실 이 소설의 처음 의도는 국가보안법과 도로교통법의 차이에서 시작됐다. 오히려 내가 의도한 바는 ‘국가보안법이 도로교통법보다 못하구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이나 논리의 측면으로 봤을 때,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형편없이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를 쭉 찾았다. 자료조사를 하면서 김정인 씨의 자료를 봤는데, 이게 결국은 나복만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다른 방대한 조사도 이뤄졌지만, 당시 나랑 비슷한 나이였던 김정인 씨의 짧은 편지에 큰 영향을 받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택시운전사 나복만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한국은 문맹률이 매우 낮은 나라이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는 문맹률이 높지 않은가.


소설에 형제고아원이 나오는데,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실제 있었던 곳이다. 한 반의 학생이 60명이 넘었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그 친구들이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무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존재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 나복만 같은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나라는 인물도 나복만이라는 사람의 한 부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복만이 마지막까지 고문을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커다란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거나 부조리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멍청하고 답답하고 고집이 센 거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걸 지키려고 노력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희망은 나복만이 그 사건 이후,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변했을 거라는 믿음이다. 평범하고 아무것도 없고 어찌 보면 멍청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복만이 고문을 받는 장면은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더라.


고문 장면을 쓸 때는 심리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소설적으로 형상화를 잘한다고 해도 어떠한 르포, 사실의 기록에 닿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회의감이 있었고, 애초에 ‘내가 그것보다 잘 써야겠다, 잘 묘사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렸다. 결국엔 고문하는 과정도 소설을 쓰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문을 하는 이유도 합당한 플롯을 만들고 답을 내기 위한 것들이 아닌가. 소설도 스토리를 따라 쭉 간다면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에 도달한다. 고문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보다 템포를 쉬면서, 이것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접근해보자는 생각을 많이 했다. 고문하는 장면은 짧은 분량이지만 가장 많은 파지를 냈다.

 

고 김근태의 저서 『남영동』을 참고했다고 들었다.


김근태 선생은 나에게 소설을 가르쳐줬던 은사님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몇 번 뵙기도 했고, 형님을 통해서 절절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책을 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남영동』을 읽으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웠고 쓰는 내내 힘들었다. 연극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힘들었던 건 소설가는 악역이라 하더라도 개별인물에 대해서 감정이입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장편 같은 경우에는 더하다. 객관적 거리감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차남들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스포츠머리, 손등에 털이 많이 난 요원 같은 경우에 감정이입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었다. 어느 순간 글을 쓰고 있는데, 어금니가 나가버렸다. 이를 너무 꽉 물고 있었던 거다.

 

만나고-이기호

 

잘 쓴 문장이란, 공감할 수 있는 문장


소설의 재밌는 지점 중 하나는 화자가 변사처럼 등장해, 이렇게 저렇게 읽어보라고 독자에게 주문을 거는 장면이다. 마치 저자와 1:1로 대화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많이 읽었던 후일담 소설, 즉 1980년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상처 입은 시대를 다루다 보니 작가들의 시선이 진지하고 딱딱했다. 나 또한 그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똑같이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설은 예술적 장르니까 미학적으로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미학과 정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 논문이나 르포를 쓴다면 정치적인 것을 부각시킬 수 있지만 소설은 예술이기 때문에 미학이 먼저다. 내가 예술을 대할 때 갖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 중 하나는 미학적인 차이를 줘야 한다는 점이다. 잘 쓴 문장이라는 건, 표현력이 아주 뛰어난 문장이라기보다 누군가 옆에서 들려주고 있는 듯한 문장,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다.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접근하는 문장 같은 거다.

 

제목이 먼저 다가와야지 소설을 쓰는 스타일이라고 했는데, 이번 작품은 예외였다.


작은 소동극을 생각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제목을 정했는데, 쓰다 보니 이렇게 갈 수는 없겠더라. 『차남들의 세계사』는 제목을 마지막에 정한 유일한 소설이다. 나복만과 같이 별다르게 힘이 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늘 곁눈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무엇을 왜 바라보는지 모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칭적으로 차남이라고 생각했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 제목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문단에서는 소설가 이기호를 두고 ‘젊은 구라’라고 평하기도 한다. 유머러스한 작품을 썼기 때문인데 『차남들의 세계사』는 이기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듯하다.


내가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마무리를 했으면, 그냥 이기호에서 크게 변하지 않고 그냥 이기호로 끝났을 것 같다. 『차남들의 세계사』를 쓰면서 얻은 것 중 하나가 내가 조금이라도 확장됐고 변했다는 점이다. 그 감각이 지금 나에게 굉장히 소중하고 좋다. 독자들 입장에서도 책을 읽을 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찾아온다. 이를테면 『차남들의 세계사』의 김순희의 선택과 같은.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끈질기게 물어서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과거의 나, 이기호에서 멀리 떠나갈 수 있다. 나에게 지금 존재하는 딜레마는 다른 작품을 쓸 때도 이번 소설을 쓸 때만큼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겼을 때 오랫동안 성찰하고 고민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느냐? 확보하려면 학교를 그만두면 되는 문제인데, 이건 또 현실적인 문제와 얽혀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나복만의 애인이었던 김순희의 결말, 읽으면서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순희를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나복만을 기다리는 게 김순희를 위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순희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갈등, 나약한 모습 같은 걸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한 사람을 기다리는 게, 인간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나고-이기호

 

책을 읽기만 해도 되는 사람이 부럽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매우 단조로운 일상을 지낸다고.


난 별다른 취미도 없고 재미 없는 사람이다. 그냥 뭐랄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고 소설도 써야 하고, 또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해야 하는 역할들이 있는데, 이런 의무적인 것들만 하더라도 하루가 빠듯하다. 대부분의 시간이 일과를 하는데 마쳐지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남는 시간이 있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늘 원고 마감에 쫓기는 게 딜레마다.『차남들의 세계사』같은 경우는 내가 쓰고 싶은 시간을 확보하면서 쓴 작품이다. 2010년에 마감을 해야 했던 작품이니까 욕을 먹으면서 쓴 거다(웃음). ‘아직 우리나라 출판사가 그렇게 각박하지는 않구나’를 깨달은 작품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소설이 써지지 않으면 성경을 읽는다고 했는데, 요즘은 어떤가?


성경을 읽었던 건, 종교적인 양식으로써가 아닌 이야기적인 차원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원고가 안 써지면 그냥 걷는다. 또는 차를 타고 어디로부터 좀 떠난다. 아마 시간적인 텀을 줘서 그렇겠지만 장소를 옳기면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얻게 된다. 그 밖에 다른 재미난 짓을 하거나 그렇지는 않다. 영화를 열심히 찾아보거나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나란 사람은 정말 심심하다.

 

평범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내가 과연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무언가에 깊이 미처 본 적은 없었나?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소설을 쓸 때, 좀 미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몸이 너무 안 좋은 상태에서 밤에 노트북을 켰는데, 어느 순간 화면이 환하게 보여질 때 넋이 좀 빠져 있는 듯한 나를 봤을 때,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소설 속 장면과 장면이 연결될 때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그 지점을 찾기 전까지는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뎌야 한다.

 

누군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나?


책을 한 권 내고, 평생 안 쓰는 사람. 말하자면 책을 읽기만 해도 되는 사람이 부럽다(웃음). 책을 쓰는 고통이 너무 크니까. 그냥 빨리 은퇴를 해서 하루 종일 책이나 읽으면서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어떤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독자로서만 내가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물론 막상 책을 쓰지 않는다면 괴로워할 수도 있겠지만(웃음).

 

만나고-이기호

 

글을 쓰는 건 굉장히 괴로운 시간을 견뎌야 하지만, 스스로를 가장 흥분시키는 일이기도 하지 않나? 소설가가 되지 않은 이기호의 인생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취직의 압박이 심했을 때 입사지원서를 결국 내지 않은 일인 것 같다. 그 때를 말하자면 별다른 소설적 재능이 보이지 않았다. 강원도 원주에서 올라와서 공부를 했는데, 아버지는 퇴직을 하시고 이제 내가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력서를 가지고 몇 군데를 찾아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버티다 버티다 종로에 있었던 한 출판사를 찾아 갔는데, 그 날이 신입사원 마감일이었다. 인터넷 접수가 없던 때라 줄을 서 있는데, 이 줄이 쉽게 줄지가 않더라. 줄이 짧았으면 지원서를 내고 돌아올 수도 있었는데 20분쯤 있다가 결국 줄에서 이탈해 홍대 앞 마포도서관 분원을 갔다. 거기서 그냥 취직을 안 하기로 결심했다. 돈도 없었던 자취생으로서는 꽤 큰 용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잘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단에 데뷔한지 15년이 됐다. 작가로서의 변화를 느끼는지.


신인시절에는 내가 쓴 소설에 대해 믿지 못했다. 얼마나 객관화 되어 있고, 독자에게 얼마나 가 닿았는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내 문장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건데, 이것에 대해서 만큼은 조금 자유로워진 것 같다. 적어도 신경이 곤두서있지는 않으니까. 그런 의심 같은 게 들면 열심히 퇴고하면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고 하고.

 

올해 초까지 <한국일보>에 칼럼을 꾸준히 썼는데, 돌연 중단했다.


5월까지 썼던 것 같다. 내가 느끼고 있는 우리 시대의 부조리나 혹은 내가 느끼고 있는 어떤 문제점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열심히 썼다. 그런데 1년 정도 쓰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이 글이 조금이라도 사회에 환기가 되어 고쳐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는데, 이게 과연 영향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작은 돌멩이를 하나 던졌을 뿐, 사회는 꿈쩍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는 나 혼자서 ‘이 문장 잘 썼네’ 이런 식으로 자족하고 있더라. 가장 심했을 때가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나서였다.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어서 신문사에 전화를 해서 못 쓰겠다고 했다.

 

요즘 주로 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


물론 나는 작가니까 문장에서 의미를 찾아가겠지만, 어떤 벽에 막히다 보면 그 문장 자체만 남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로서 문장과 더불어 행동, 실천적인 모습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소설을 썼으면 그에 대한 책임, 행동이 필요하다. 소설적인 의미만 부여 받고 평가 받는 건, 이미지만 남을 뿐이다. 작은 행동, 실천이 없이 문장만 쓰는 건, 또 다른 허무와 의미 없음을 만드는 것뿐이다. 『차남들의 세계사』를 쓰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소설과 함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소설 외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오히려 어쩌면 실천이 먼저 진행되고 또 다른 문장이 나와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주문을 했듯이, 『차남들의 세계사』를 읽을 독자들에게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라’하고 한 마디 주문을 한다면.


맨 처음 작품을 시작하면서 ‘이 소설을 턱을 괸 채 한번 들어 보아라’라고 썼는데, 이런 의도도 있었다. ‘너희들 그렇게 방에 앉아서 편하게 책을 읽었지? 그리고 나서 무엇을 할 거니?’ 이 느낌이 컸다. ‘어떤 사람은 유유자적하게 책을 읽고 있을 때, 다른 어떤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살면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너희들은 책만 읽고 있니? 책을 읽고 났으면 뭘 할 거니?’ 같은.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소설 맨 마지막에 직접적으로 말을 할까도 생각했다. ‘당신이 턱을 괴고 책을 보다 화장실에 갔다 오고, 물을 한 잔 마시면서 책을 읽을 시간에 어떤 사람은 30년 동안 이런 일을 겪었다’라고. 그런데 너무 과격해 보이는 것 같아 최종적으로는 빼버렸다.

 

소설은 개인적인 시간과 경험이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밌는 이야기로 다가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구나’, ‘이런 시대도 있었구나’ 정도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14년 지금이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볼 때, 한두 사람 정도는 ‘현재까지도 이런 일이 이어지고 있네. 내가 뭘 해야 하지? 어떤 걸 생각해야 하지?’와 같은 고민을 해봤으면 하는, 작가로서의 욕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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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 저 | 민음사
이기호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계간 《세계의 문학》에 2009년 가을부터 2010년 겨울까지 연재됐던 『수배의 힘』이 제목을 갈아입고 나온 것이다. 얼떨결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 신세가 되고 만 ‘나복만’의 삶을 이기호 특유의 걸출한 입담으로 풀어내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으로, 광기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삶과 꿈이 어떤 식으로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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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주 5일제, 육아휴직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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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사관계, 노동자들의 복지 문제는 여전히 심심치 않게 언론의 도마에 오르곤 한다. 그런데 보통 그 패턴은 비슷하다. 우선 노조에서 임금인상과 처우개선 등을 이유로 파업에 돌입한다. 전투적인 구호를 쓴 머리띠와 깃발을 들고 대개는 광화문이나 청계천 일대에서 교통 불편을 야기하는 파업이다. 이어지는 것은 시민의 불편에 대한 우려와 파업에 부정적인 여론이다. 그러면 기업은 마지못해 협상에 들어가고 노조가 요구하는 조건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타협안을 내 놓는다. 노조가 받아들이면 파업은 끝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된다. 만약 파업이 평소보다 길어질 경우, 정부가 개입한다. 여기서 개입이라는 것은 중재라고도 할 수 있지만, 최근까지는 보통 ‘공권력 투입’이 일반적이다.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뉴스를 통해 보이는 패턴만 되짚어보면 이렇다.

 

만나고-이용득

 

노동운동이 가져다 준 것들


사실 ‘노동’이라는 단어는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터부시됐다. 이념적인 단어로 치부되며 언급되는 동시에 핸디캡을 안고 가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 오늘날의 상황도 그리 다르진 않다. 노조활동, 파업 등을 사회불안, 시민불편 등의 소재로 관행인 보도를 반복하는 뉴스의 시각 때문이다. 또한 역대 대부분의 정부가 노조의 파업을 강력하게 진압해 온 풍경으로 인해 ‘노동운동’이라는 단어는 사실 많은 대중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 이르러 몇몇 대기업 노조, 철밥통으로 일컬어지는 공기업 노조들의 파업은 ‘황제노조의 파업’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언뜻 이들의 행위는 그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동자 전체를 대표한다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역시도 끊임없는 편 가르기를 하며 대중들에게 피로감을 유발시킨 것 역시 잘못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들의 노동운동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는 듯 누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주 5일제, ‘육아휴직제’ 등이 그것이다. 불과 10여 년 전인 2002년 은행권이 처음 시작한 ‘주 5일 근무제’와 1985년 상업은행이 국내 최초로 도입한 ‘육아휴직제도’가 이끌어 낸 우리사회의 변화는 실로 엄청났다. 여가생활이 늘어나며 각종 문화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삶의 질’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끈 사람의 이름이 ‘이용득’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 본인조차도 구태여 생색내지 않은 탓에 정부정책 정도로 여겨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전설적인 한국노총 ‘용팔이’ 위원장, 한국 노동계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그가 최근 자신의 한평생과 현대 노동운동사의 이슈와 문제를 한 권의 책,『노동은 밥이다』에 담았다.  1982년 대졸과 고졸 간 호봉의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상업은행 노조 대의원이 되면서부터 시작된 노동운동가로서 그의 삶은 상업은행 노조위원장, 금융노련 위원장, 금융산별노조 위원장을 거쳐 세 차례의 한국노총 위원장을 역임하며 34년간 이어졌다.

 

만나고-이용득

 

노동계의 대부, 지난 시간을 회고하다


초로의 작은 체구, 평생을 노동자의 권리와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투쟁한 투사의 첫인상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굵고 울림 있는 음성으로 털어 놓는 지난 이야기들은 그가 ‘용팔이’ 이용득 위원장임을 새삼 확인시켰다. 그가 노동운동을 통해 평생 추구했던 것은 노동계의 통합과 노조의 정치세력화, 중앙단위 노사관계 구축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이 너무나 컸기에 그 어느 것 하나도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의 지난 이야기와 더불어 그가 절감한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와 한계, 숙제에 대해 들어봤다.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잘 정리된 현대노동운동사를 보는 듯했습니다. 책을 쓰시게 된 동기를 ‘후배들과 일반국민을 위해’라고 하셨는데, 원고를 준비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것이 있다면?


대개 노동운동은 언론에 투쟁하는 모습만 비춰진 탓에 국민들에게 부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었어요. 그런 국민들에게 노동운동이 꼭 필요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었죠. 지금 제가 주장하는 노동운동의 사회적인 기능, 산별노조와 중앙노사관계 구축, 노조의 정치세력화 같은 것이 사실 좀 어려운 내용이에요. 물론 이제까지 함께 노동운동을 한 후배들은 이해가 빠르겠지만, 국민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인식부터 바꾸고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 마치 제 자랑 같기도 하고 해서 몇 가지를 빼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또 노동운동의 흐름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지더군요. 한정된 한 권의 책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좀 고민을 했죠.

 

현재 한국노총 상임고문이자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으로서 노동계와 정치계에 양쪽에 몸담고 계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노동운동가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노동운동에 입문하던 시절을 돌이켜 봤을 때 지금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상업은행에 입사했을 당시 저는 사내에서 좋은 평을 받는 직원이었어요. 당시에는 상고출신들이 직원의 절반 이상인데다, 저는 상고출신으로 입사해 드물게 주경야독하며 대학을 다녔거든요. 또 1979년 쯤 상업은행 행보에 서울서 부산까지 사이클을 타고 여행한 여행기를 싣게 되면서 유명세를 좀 탔죠(웃음). 그 후로 사내 행사 같은 것을 도맡아 하게 되면서 더 알려지게 됐고요. 그러다 1982년에 고졸과 대졸의 호봉차를 4호봉에서 5호봉으로 늘린다는 방침이 알려졌어요. 결국 후배들이 찾아와서 “형님이 나서야 된다”고 하더군요. 상황을 보니 그게 맞고 정당하다 싶더군요. 물론 인사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제게 “당신은 야간대학 다니니까 나중에 졸업하고 나면 학력 인정받는데 왜 이런데 나서느냐”고 말리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노조 활동은 바로 탄압이 들어왔습니다. 회사가 저를 바로 암사동에 지점 전산부로로 발령을 낸 거죠. 그 당시 살던 곳이 수유리고 학교가 명륜동인데 직장을 암사동으로 해 놓으니 학교를 다닐 수가 없는 상황이 된 거예요. 노조에다가도 이야기하고, 회사에다가도 원대복귀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노조도 어용이었던 셈이죠. 결국 내가 들어가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노조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니냐’란 생각으로 잠시동안만이라고 다짐하고 시작한 것이 평생이 된 셈이에요. 그 뒤로 노조 위원장 선거에 나가서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보니까 계속 하게 된 측면도 있어요(웃음). 사실은 노조를 하면서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민주화투쟁 과정을 거치고 하면서 떠나질 못했죠. 그 시절을 겪고 나서도 노동운동의 바른 방향을 찾다보니 어느새 34년이 지났네요(웃음).

 

노동운동가로서 상업은행 노조위원장, 금융노련 위원장, 금융산별노조 위원장, 한국노총 위원장 3차례 역임하셨고 한국노총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전태일 노동자상’까지 수상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이뤄낼 것은 다 이뤄내신 듯한데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인 삶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제 성격이 하나를 정하면 그거 외에는 다른 길을 쳐다보지 못해요. 노동운동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희생도 제가 자청을 한 것이고요. 그러나 외부보다는 내부적인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어요. 위원장 선거에서 떨어진 반대파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각종 사업 방향에 딴죽을 걸 때는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하는 회의도 생겼죠. 여러 가지 고민 끝에 2008년 은퇴를 선언한 뒤 은행 임원으로 가 억대 연봉을 받던 시절도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죠. 노동운동은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가족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을 듯한데요. 미안함도 크실 것 같습니다. 


처음 노동운동을 시작했을 때 은행은 참 좋은 직장이었어요. 그때는 빨리 시급한 것만 해결하고 직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건데, 노총위원장까지 되고 한국노동계의 대부로 불리는 지경까지 오다보니 미안한 점이 많죠. 지금도 노조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공장이나 제조업 출신들이 대부분이에요. 은행원으로 평생 노동운동했던 사람은 없었죠. 그러다보니까 가족은 물론 주변에서 그렇게 말렸어요. 하지만 노동운동으로 감옥 생활도 하게 되고 해고도 당하고 하면서 제 스스로 ‘숙명적 길’이라 생각했죠. 요즘 아내는 제게 “당신은 당연히 이 길이였다”고 이야기해요. 또 아들이나 딸도 나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맙죠. 

 

아버지가 노동운동가라는 점이 자녀들에게 미친 영향도 컸을 텐데요.


아들은 이 책 나오자마자 5권을 사서 사인해달라고 하더군요. 친구들에게 돌린다고요. 자식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사회에 대해서 시시비비는 구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특히 아들과 저는 제일 죽이 잘 맞는 술친구기도 하죠(웃음).

 

노동운동가로서 보람을 느낀 다양한 순간에 대해 책에서 언급하셨지만 그중에서도 손꼽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주5일제 근무를 시행 할 때인 것 같아요. 주 5일제가 논의되던 시기는 제가 수감되어 있을 즈음이었는데, 당시에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주류였어요. 그러다 결국 산업별로 순차적 시행이 대안으로 떠올랐는데, 그렇게 되면 정착이 안 될 것 같았죠. 산별로 시행이 되면 금융권이 제일 늦게 가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체적인 속도가 더뎌질 것이 뻔했어요. 전체적인 속도를 빨리 내기 위해서는 금융권이 먼저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죠. 은행이 주5일 근무를 하면 일반 회사도 도입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제가 크리스마스 특사로 2001년 출옥 후 첫 사업으로 한 것이 금융권의 주 5일근무제 쟁취였어요. 2001년 12월 24일 나와서 2002년 5월23일 최종 협상에서 청와대와 합의를 봤어요. 여성육아휴직제 시행 당시와 마찬가지로 그 5개월 동안 모든 관련된 책임자들, 이를테면 노사정위원장, 노동부도 사용자들, 청와대 등을 돌아다니며 공감대를 넓히는 작업을 했죠. 

 

노동운동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산업혁명 이후에 유럽에서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 16~18시간 근무를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그랬고요. 전태일 열사 같은 분들도 그래서 생겨났죠. 그런 상황을 노동운동을 통해 12시간, 10시간, 일 8시간 근무제로 줄여나간 거예요. 국민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일일 8시간 근무제는 그야말로 피의 산물입니다. 

 

만나고-이용득


 
풀지 못한 숙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과 우리나라 노동계의 현주소는 여전히 괴리가 있다. 노조의 정치세력화와 중앙단위 노사관계 구축, 범 노동계의 통합은 아직까지 그가 풀지 못한 숙제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치며 그는 역순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방안을 이야기한다. 역시 아직까지 이런 주장은 그의 목소리 하나뿐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과업을 수행 중에 있는 학생’, ‘정책연대의 실상을 살피는 관찰자’, ‘노동자들의 심부름꾼’으로 스스로를 표현하시기도 하셨는데요. 현재 한국노총 상임고문이자 새정치민주연합의 최고위원으로서 고민도 크실 듯합니다.


제 남은 인생이 20년 정도라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살고 싶었어요. 소설을 쓰고 싶었죠(웃음). 책에도 있지만 사이클 여행이나 수배 당시 경찰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던 일화를 쓴 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거든요. 하지만 그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 꿈은 3가지입니다. 하나는 범노동계 통합, 하나는 노조의 정치 세력화, 마지막으로 중앙노사의 시스템 구축이에요. 하지만 여러 가지 시도들이 많았음에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어요. 노동조합이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투쟁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예요. 노조가 힘이 없기 때문에 울타리 안에 머무는 투쟁밖에 못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내꺼 지키는 운동에 머물러 있는 셈이죠. 노동운동이 발전한 선진유럽처럼 노조가 힘이 있으면 사회적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어요. 

 

대안으로 중앙노사관계 구축을 역순으로 이뤄내서 그를 통해 노조의 힘과 역량을 강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통합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치세력화도 실패했습니다.(그는 한국노총 소속임에도 금노련이 민노당의 조직과 활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었으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국노총이 창당을 주도한 녹색사민당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중앙노사관계 구축뿐인데, 우리나라는 중앙노사관계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나 노총 등이 있는 것 같아도 각자 자기 대표성만 있지 실질적인 네트워크나 시스템이 없는 것이 사실이죠. 노조도 힘이 있고 경총도 힘이 있으면 중앙노사관계는 자생적으로 형성됩니다.

 

하지만 힘이 없는 상황이니 억지로라도 역순으로 합방을 시키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물론 학자들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요. 자생적으로 가야지 역순으로 간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치권에서 노조법을 구실로 노조를 약화시켜 놓은 상태에서 역순이 아니면 힘들어요. 제가 지금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라고 해도 정치를 하러간 건 아니에요. 바로 이 일을 정치권에서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가 있는 거죠. 하지만 정치인들이 내 말을 관심 있게 듣지 않아요. 그래서 책을 쓰게 된 겁니다. 말로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강의를 해도 안 되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역순으로 가려고 해도 정부의 의지, 정치권의 조력이 필요한 상황인데요.


제일 문제는 관료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돈이 걸린 문제거든요. 연간 7조원이나 되는 고용보험 재원이 있다는 것도 국민들이 잘 몰라요.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 7조원이나 되는 돈을 고용노동부가 일방적으로 집행하고 있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고용노동부는 근로복지공단, 산업안전공단을 만들어 쓴다고 하는데, 그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정부는 정부대로 하고 노사는 노사대로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봐요. 왜냐하면 일자리의 현황을 가장 생생하게 잘 알고 있는 것이 기업과 노조거든요. 고용보험의 재원 일부를 기업과 노조의 중앙노사관계 구축에 투자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전국의 업종을 나눠서 분석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 시작하면 일자리와 직업훈련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거죠. 기업과 노동자만큼 현장의 상황을 잘하는 이들이 없으니까요.

 

취업난을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씀이죠?


지난 이명박 정부 때 노사민정 협의를 통해 고용보험가지고 생색을 내기는 했지만 성과가 없었어요. 그런 방식으로는 일자리 창출 안 되거든요. 정부가 일자리 창출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공공부문이에요. 나머지는 민간차원에서 이뤄져야 되요. 그런 면에서는 현 정부도 달라진 게 없어요. 제가 박근혜 대통령을 7번이나 독대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제가 이야기를 할 때는 이해를 하세요. 그런데 저와 얘기가 끝나고 주변 사람들이 노조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는 게 문제죠. 그래서 현실에 반영이 안 되고 있는 것이고요. 저와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10명만 있어도 좋겠어요. 그런데 저 혼자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저 안타깝죠.
 

만나고-이용득

 

노조, 국민공감을 얻어야 한다


그가 이야기한 숙제를 한 단어로 말하자면 이른바 ‘사회개혁적 조합주의’로 정의할 수 있다. 노조가 단순히 개별 기업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닌 산업별로 묶이고, 하나의 중앙노조를 형성해 사용자측과 협상을 한다면 단순히 급여나 복지와 같은 문제 외에도 사회 전반적인 이슈나 문제를 풀어가는 창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들의 노조에 대한 인식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지난 선거에서 볼 수 있듯 노조의 정치세력화 시도 역시 지향점 없이 겉돌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현장에서 부딪히며 노조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신 입장에서 현장 노조운동의 문제라면?


저도 현장 노동자들이 왜 내 얘기에 대해 관심을 안 가질까 생각해 봤어요. 우선은 자기 사업장 업무에 너무 바빠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거죠. 또 3년마다 돌아오는 노조선거를 준비하려면 조직관리가 더 우선인거에요. 그러니 제 이야기에 무관심할 수밖에요.

 

최근 크고 작은 재난이 이어지며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관피아, 정피아라는 말도 유행이 됐고요. 노동계도 이익집단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은데요.


그래서 중앙노사관계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중안노사관계를 통해 상시적으로 사회적 대화가 이뤄진다면 일자리만이 아니라 이런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에서는 복지부분만 거론을 했는데, 지금 복지에 대해서도 여당과 야당이 다르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중앙노사관계는 그런 부분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기구에요. 일자리와 같은 상시적 업무가 아닌 사회적 이슈로 대화를 한다는 거죠. 거기에서 어떤 결론이 도출되면 정치권의 부담이 줄어듭니다. 노사가 합의한 대로만 가면 되니까요. 세월호 사태처럼 국민적 사안인 경우 노사협의에서 당연히 의제로 올라오게 되죠. 거기서 결론이 내려지면 정치권이 훨씬 방향잡기 좋고 부담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우리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사회적 대화로 풀어가는 해결방법이 바로 중앙노사관계 정립이라는 말이죠. 

 

노동계에서 이념적 노선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도 지적하셨습니다. 국민들 중에는 노동조합원인 분들도 있지만, 조합과 별계의 삶을 사시는 분들도 많잖아요. 국민들의 공감을 얻는 노조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인데요. 노조가 힘을 강화하고 사회적 공헌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식이 바뀌겠죠. 그런데 노조가 방향성을 잃고 자기 울타리 안에서 집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인식이 나빠지는 거예요. 유럽의 예를 들어보면 노조가 사회적 주체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노조에 대한 교육이 필수적으로 이뤄지고 있고요. 우리나라의 상황은 악순환의 반복이라고 봐요. 지금 노동운동을 사람들에게 ‘대동단결해서 인식의 전환을 하자’는 것은 어렵고요. 점진적인 교육으로 바꿔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려운 상황이죠. 3년마다 노조 지도부의 80%가 바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실 저도 2008년에 은퇴를 했던 거예요. 평생을 헌신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으니까요. 노무현 정부 시절 정부의 동의를 얻어 겨우 만든 것이 노사발전재단이었지만, 결국은 관피아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죠. 통합도 실패했고 정치세력화도 실패했고, 그러면 중앙노사관계 구축만이라도 하자고 했던 것도 노사발전재단으로 한계를 경험했고요. 그래서 떠날 결심을 한 거죠. 그러나 다시 노조원들의 부름을 받고 돌아온 것은 우리한국 사회의 발전과 자라나는 세대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노조의 발전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번 책을 통해 목소리를 내보는 건데, 언제까지 관심이 이어질지는 미지수에요.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노조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국민들이 노동운동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제 바람이죠. 

 

책 서두에 미국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을 넣으셨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어 온 위원님의 여정은 아직도 한참은 계속 돼야 할 텐데요.


제가 그 시를 택한 이유는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남이 하는 노동운동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것들을 계속 시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뭘 할 때마다 “이용득이 이번에 이걸 했다, 저걸 했다”며 ‘노동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주장도 최초고요. 그 시를 삽입한 것은 그렇게 남이 만들어 놓은 길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오면서 이젠 그 길을 대로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어요. 또 하나는 저와 같은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다면 이제 다른 길을 가보고 싶다는 의미도 있죠. 60세부터 80세까지는 또 한 번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기간이라 생각했거든요. 가보지 않은 길을 갈 기회죠.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음악, 미술 같은 분야에 투자한다면 20년 후에는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뜻에서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싶다는 바람 담은 셈이에요.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노동이라는 단어가 공기나 밥처럼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땔 수 없는 건데,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잘 못해서 노동이 부정적으로 비춰진 부분이 있어요. 노동운동가를 대표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우리가 제대로 된 방향만 찾으면 본래의 의미대로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사회를 발전시키는 노동운동이 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 사과를 받아들이시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후배들이 생긴다면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 책에 대한 관심도 부탁드리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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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밥이다이용득 저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노동은 밥이다』는 노동이 개인과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동력이라는 소신으로 예순 살 넘어서까지 노동과 함께 하고 있는 평생 현장노동운동가인 이용득이 쓴 것으로, 30여 년의 세월을 노동 현장의 최중심에서 활동했던 운동가가 몸으로 체득한 것을 이론에 접목시켜 현실감 있게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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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찬 ”누구라도 고통당하면 피할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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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는 손명찬 시인이 3년 만에 낸 책이다. 손명찬 시인은 다소 특이한 이력을 걸어온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낸 시집 두 권, 『바라보고 싶은 곳에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반짝이는 것이 떠올라 별이 되기까지』로 많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정식으로 등단하지도 않은 시인이었는데 말이다.

 

이후로 그는 문단이 아니라 사회로 나가 기업 홍보와 경영 컨설팅에 종사하면서 CEO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같은 남다른 이력 덕택에 손명찬 시인은 한국의 대표적인 월간지인<좋은생각>의 편집과 경영을 총괄 지휘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좋은생각>과 웹진 등에 발표한 글을 엮어낸 『꽃필날』도 널리 읽혔다.

 

이렇게만 본다면 손명찬 시인의 삶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것 같다. 그는 아니라고 말한다. 누구든 삶에서 위기를 피해갈 수 없다. 갑작스레 닥친 교통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고, 신체적 고통과 무관하지만 마음이 무너지는 일도 겪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쓴 책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손명찬 시인의 글과 함께 밤삼킨별이 찍은 사진이 책에 실렸다.

 

손명찬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쓴 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는 갑자기 겪은 교통사고 이후 3년에 걸쳐 쓴 작품을 모은 건데요. 이번 책을 소개해 주신다면.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르는 문턱을 밟아본 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살아온 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났던 건 아니에요. 어려서부터 유신론적 실존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청년 때에는 회의주의자인 장 그르니에를 탐색한 적도 있었죠. 그래서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그동안 보류해둔 생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져 보다 분명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교통사고보다는 그 일 직후 뜻하지 않게 마음이 무너지는 일을 당한 게 힘겨웠습니다. 자세히 사정을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교통사고가 몸을 파괴했다면 그 일은 마음에 충격을 줬죠. 사태 파악을 할 겨를도 없기 그냥 쾅 소리를 내며 단번에 무너졌습니다. 나름 산전수전도 겪었고, 마음과 관련한 일을 오래 해왔고, 힐링 에세이, 칼럼을 써 온 사람으로서 어이가 없었어요. 그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상처에는 내성이 없다는 거. 고통을 당하면 피할 길이 없더라고요. 누구라도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치유의 글쓰기’를 기어가듯 시작했습니다. 이게 이번 책의 탄생 배경이에요. 써놓고 보니 ‘진심의 조각들’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내 마음이 있는 그대로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글 쓰는 일 외에도 다양한 일을 했고 지금도 하고 계신데요. 현재는 마음 치유를 테마로 한 ‘공감커뮤니케이션’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일이 결국은 마음을 치유하는 한 가지 일로 볼 수 있을까요?

 

네, 같은 일이에요. 공감 커뮤니케이션은 힐링 콘텐츠를 기획하고 개발하면서 종합적인 문화예술치료를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책, 애니메이션 및 게임 콘텐츠 등에 ‘힐링’ 주제와 소재를 융합하는 일을 해당 전문기업과 제휴하고, 자체적으로는 힐링 관련 프로그램(공연, 강연 등)을 만들어 기업 컨설팅 개념으로 기획, 제안하고 있어요. 최근 한국독서치료학회와 함께 <마음치유 아카데미>를 기획, 주관한 것이 한 예입니다. ‘마음치유’를 기획과 컨설팅에 접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기업의 CEO를 맡아 경영한 경험과 활동의 노하우가 근간이 되어서겠죠.

 

힐링 열풍이 들었고, 여전히 한국사회에 ‘힐링’이 유행인데요. 손명찬 식의 힐링과 치유는 어떤 것인가요.

 

현대에 마음 건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데 대개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의사나 심리치료사를 제 발로 찾아가지 않아요. 이들을 만나야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요. 왜일까요. 사회적 낙인이 두렵고,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거의 대부분이 ‘셀프 힐링’에 나섭니다. 책을 읽고, TV를 보고, 영화를 보고, 잠을 자고, 산책하고, 여행하고, 친구를 만나고, 술 마시고, 자기계발 강연도 듣죠. 자신에게 맞는 힐링법을 찾느라고 애써요. 그렇지만 그뿐이에요.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현실로 되돌아와요.

 

저는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힐링 세팅(healing setting’을 도와주고 싶어요. 자신감을 얻고, 스스로 통찰을 얻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면 셀프를 위한 마중물 같은 도움이 먼저 필요합니다. 진단하고, 처방하고, 사후 관리하는 순서만 이해해도 절반은 성공이에요. 작은 것 하나라도 ‘모티브’를 잡는 순간, 힐링 세팅이 되고, 셀프 힐링은 시작됩니다. 그 첫걸음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이에요. 이 책이 다루는 일관된 주제이기도 하죠.

 

손명찬

 

하면 된다, 과연 하면 될까?

 

마술을 부려 그걸 다시 어쩔 순 없다. 새로운 사람이 와서 조금씩 붙여주든가, 새살이 돋을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깨끗이 잊어” “힘내” 같은 속성 비법이 있다지만, “누가 그게 된답디까” 같은 부작용도 있어서 어렵다. 격려와 처방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 60쪽)

 

<마음 부스러기>라는 작품을 읽다가 ‘누가 된답디까’ 하는 직언이 와 닿던데요. 어떤 상황에서 쓴 글이었나요.

 

‘누가 그게 된답디까?’는 제가 본격적으로 심리치료와 관련한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말하자면 폭탄 같은 화두였어요. 겪어보니 그랬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중환자실에 누워서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데, 이미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이미 한겨울로 들어섰는데, 이미 의지와 의욕이 꺾일 대로 꺾였는데 어찌 ‘하면 된다’ 하는 마음으로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단 말인가요. 이런 태도는 오히려 자신을 속일 뿐 아무 이유와 근거가 없는 막연한 긍정이고, 무모하기까지 한 낙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자신에게 보다 솔직해져서 지금의 내 처지가 바닥임을, 겨울임을 인정할 때 계단이 보이고 언덕을 넘어 봄을 향해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번 책에 수록한 작품 중 가장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글은 무엇인가요?

 

<눈부시게 해줄 테다>를 꼽고 싶네요. 이 글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옆에서 부축해준 사람. 결국 나를 걷게 하고, 뛸 수도 있게 만든 사람. 이 글은 긴 재활의 끝을 보여주는 해피엔딩의 장면이기도 합니다. 글에서처럼 아내는 내 눈을 열어 마음에 빛을 가득 넣어주었어요. 그저 감사합니다.

 

창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지던 어느 아침.
아내가 옆으로 지나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내 머리를 잡아 창가 쪽으로 휙 돌리고는
손가락으로 내 눈을 집어 크게 벌렸어요.
그러고는 윽박지르듯 말했지요.
“눈부시게 해줄 테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152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은 어디인가요?

 

지금, 여기, 이 순간, 내가 딛고 있는 곳. 다행히 우리는 같은 별에 살고 있죠. 만약에 우주 저 너머에 우리 말고 외계인이라도 사는 별이 있다면, 그들은 이쪽, 아름다운 초록별을 보며 ‘저런 별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꿈을 꿀지도 몰라요. 책에 썼듯, 원래 자기가 거주하는 별은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 별인지 모르죠. 거리를 두고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 곁에 있는 것, 지금 가진 것, 꼭 잃고서야 그 가치를 깨닫는 게 우리입니다. 지금이라도 곁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이전보다 더 사랑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등단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들었는데요.

 

등단 안 한 걸, 무슨 대단한 소신의 소산으로 생각하나 본데요. 간절히 원했더라도 아마 실력이 안 됐을 거예요. (웃음) 글을 계속 쓸 생각이 없었죠. 실제로 1992년과 1994년에 시집을 낸 후 2010년까지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았습니다. 그 계기는 잠시 글 선생님이 되어 주셨던, 지금은 작고하신 조병화 시인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어요. 두 번째 시집의 권두언을 써 주시면서, 이미 시집 두 권을 냈으니 앞으로도 독자와 직접 소통하라고, 문단을 기웃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단의 거두로 사신 분이라 깊은 뜻이 있다고 믿었어요. 그러겠노라고 덥석 약속하고는 그 이후, 두어 번의 유혹을 잘 이겨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주 잘한 일이죠. 그 결과, 저는 자유인입니다.

 

손명찬

 

사람 사이에 필요한 건 정의가 아니라 용서

 

‘시’란 어떤 의미인가요?

 

‘진실한 마음의 반짝임’. 그것을 바라거나 무시하지 않고 가슴에 잘 모으다 보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는 것. 특별한 이들의 경험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에요. 우리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일이 버릴 게 하나도 없고, 하나하나 다 소중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게 시입니다.

 

주로 언제 시를 쓰나요. 시적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지.

 

시를 쓴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지는 않아요. ‘반짝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때그때 메모를 하는 편이죠. 그러나 그 메모량이 대개 적어요. 메모는 그냥 놓아두었다 내킬 때 타이핑하면서 글 한 편으로 완성합니다. 그게 시와 모양이 많이 닮았어요. 언제나 글의 소재는 ‘일상’이고, 주제는 ‘사랑’입니다. 철학도 시절을 지낸 덕분에 사람, 사물, 상황 앞에서 생각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심리학을 접하고 나서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상황이든 그 ‘입장’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듣는 자세가 생겼다는 건 참 기쁜 일이죠. 이번 책은 ‘안’이 ‘바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읽어본 독자라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거예요.

 

마음이 힘든 순간에 자신을 지켜준 신념은 무엇이었나요.

 

‘사람’입니다. 사람을 향한 믿음. 사람이 있기에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고 사랑이 있기에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고 믿어요.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유합니다. 상처 준 사람이 있고, 약을 발라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 필요한 말은 ‘정의’가 아니라 ‘용서’입니다. 용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천국도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가해자 배역을 맡은 사람이 따로 있고, 피해자 배역 전문인 사람이 따로 있는 건 드라마지, 인생이 아니에요. 우리네 삶은 무수한 관계 속에서 어제는 가해자였다 오늘은 피해자였다, 내일은 또 무슨 짓을 할지, 또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요. 용서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로 사는 나를 위해 필요한 거예요. ‘나를 위한 용서’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은 가해자 짓을 하는 중에는 해당하지 않아요.

 

끝으로, 이 책을 특히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사랑하며 자기주도의 삶을 살고 싶은데, 잘 안 돼서 속상한 분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알고 보면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사랑하기에, 상처에 아파하며 앓고, 어떻게든 낫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게 아닌가요. 이런 분들은 자신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진실하게 살려고 애쓰죠. 그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봐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복을 받고 세상이 밝아지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은 이런 분들이 만든다고 믿습니다.

 

살다보면 움츠러들고 고개 떨굴 때도 있어요. M. 토케이어의 말을 선물하고 싶어요. ‘몸을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는 말. 삶에서 무엇 하나도 ‘잉여’는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아요. 애써 찾고, 없으면 만들고, 마음껏 누리고, 듬뿍 나눠주는 삶을 살아보자고, 오늘, 당신과 나, 만난 김에 새끼손가락을 걸어요. 그게 부담이라면 발가락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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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손명찬 저/밤삼킨별 사진 | 비채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서야 비로소 생生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시인 손명찬. 〈좋은생각〉 홈페이지와 웹진을 통해 38만 회원들에게 ‘따스한 목소리’를 전하며 사랑받아온 그가 3년 만에 포토에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로 돌아왔다. 이 책이 더 특별한 이유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이겨낸 힘겨운 시간을 ‘치유의 에세이’라는 특별한 선물로 엮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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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사랑 “콤플렉스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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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랑과 이즘의 3번째 인터뷰, 횟수는 제법 되지만 무려 5년 만에 그를 만난다. 지난해 네 번째 정규 음반<Human Complex Part.1 >를 발매하고 1년여 만에 그 반쪽. < Human Complex Part.2 >를 내놓은 시점이다.그는 여전했다. “어떻게 하면 음악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데뷔 15년차 뮤지션은 '여전히' 진지했고 '여전히' 해맑은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인디'도 아닌 '메이저'도 아닌 '중간'의 위치가 딱 좋다는 그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고, 시종일관 느리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이즘과의 3번째 인터뷰입니다. 저번에 인터뷰 때는 진천에서 생활하고 계셨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진천에는 3집을 준비할 때만 있었어요. 지금은 계속 서울에 있습니다.

 

이즘과의 이전 인터뷰에서 이번 4집 앨범에 대한 큰 그림을 말씀해주셨는데, 정말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네. 그 때 대부분 비트가 빠르고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많이 가미될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파트2는 특히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작업이 상당히 어려우셨음에도 파트 1,2로 나누어 긴 호흡의 앨범을 내신 이유가 있을까요?


하나의 앨범으로 냈다면 제가 원했던 스케치를 완성시키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 거예요. 안 그래도 팬들과 약속이 늦어진 상태였는데 작업날짜가 계속 미루어지다 보니 걱정이 많았어요. 주변에서도 차라리 파트를 1,2로 나누어서 작업을 하면 빨리 나오지 않을까 이야기를 해주셨고요. 저 역시 작업 흐름이 명확해질수록 파트를 나눠서 발매를 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김사랑

파트1,2를 나눈 기준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이게 같은 앨범인 듯 같은 앨범이 아닌 느낌이 들거든요.


파트1의 가사내용이 내적인 고민이 많다면 후작은 생각을 표출하는 부분이 많죠. 사운드는 파트2의 경우는 이펙팅, 그러니까 동굴에서 부르는 것처럼 공간감을 많이 주었고, 보컬도 코러스를 많이 넣어서 아련한 느낌, 멀리서 바라보는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번 파트2를 작업하면서 슬럼프를 겪었다고도 들었습니다.


파트2는 아이디어가 거의 나오지 않아서 압박감이 생겼어요. 매번 앨범 완성에 대한 고민이 큰데도 이번엔 좀 더 강도가 심했죠. 이번 파트 2는 어느 정도 습작을 해 놓은 상태였는데도 그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버린 곡도 있고요. 작곡, 작사, 연주 모두 제 손을 거치는 방식이라 수정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습니다.

 

앨범을 관통하고 있는 < Human Complex >는 무슨 의미인가요.


트랙 전체가 인간이 가진 콤플렉스를 노래하고 있어요. 콤플렉스하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머리가 큰 게 단점이 있다면 반대로 누군가는 그 사람 덕에 머리가 작아 보이는 장점을 갖게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콤플렉스가 서로 다른 대안,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양면적인 속성을 만들 수 있다고 봤어요.

 

2개의 앨범 커버 아트도 같은 듯 완전 다릅니다. 전에는 해골이었다가 이번에는 조각상이네요.


디자인 주문에는 제가 관여를 하지 않았고요. 저는 「ICU」와 자켓을 제작하는 김용민 감독님께 콤플렉스에 대한 양면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만 얘기했어요. 그리고 제 음악을 듣고 떠오르는 느낌을 마음대로 표현하시라고요. 그런데 멋있게 나온 것 같아 마음에 들어요.

 

1,2집에는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담기기도 했는데, 「ICU」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있는 것 같아요. 파트2는 어떤가요?


사실 이건 처음 이야기 하는 건데, 「Love UP」은 통일에 대한 노래에요. 가사에서 등장하는 '금단' '낡은 장막' 등이 하나의 단서기도 하죠.

 

「Love UP」은 남녀의 사랑에 대한 내용인 줄 알았는데. 설명을 들으니까 그렇게도 들리네요.


「Love UP」은 남녀의 관계로도 풀어내 중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해놨어요. 서로 이해하고 상대를 높이고 나를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것은 사랑에도 해당되는 거니까요. 다만 듣는 사람의 해석의 범위를 한정짓고 싶지 않아서 곡 내용은 최대한 직접 설명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건 통일에 대한 노래야 라고 단정 짓지 마시고 상황에 따라 해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Love UP」에서는 본격적으로 EDM 사운드가 도입돼있습니다. 최근 많은 밴드가 록과 일렉트로닉을 융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네 EDM이죠. 저도 '트렌드니까 만들어봐야지. 재밌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원래 제가 일렉트로니카를 좋아해 음악을 시작했고, 기계적인 소리를 담는 것도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기도 하니까 원래 관심이 많았죠. 그래서 어쩌면 음악 할 때 그 초심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3집 < U-Turn >처럼 초기 단계부터 앨범의 성격을 '어쿠스틱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하고 만든 건 아니에요. 뭐 앞으로도 장르에 상관없이 그때마다 하고 싶은 걸 하게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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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파트1에 있는 「ICU」가 이즘 '2013년 싱글'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중간에 등장하는 사이렌 소리가 인상적이었어요. 아기 울음소리 같이 들리기도 하고요.


기타에 리버브를 걸고 현처럼 연주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요. 이걸 연주하면 사이렌 소리와 비슷하게 나와요. 제가 이 효과음을 좋아해서 2집 < Nanotime > 때부터 많이 사용하고 있죠.

 

이렇게 독특한 소리를 시도한 곡이 또 있나요?


「You again」이요. 이 노래는 제가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심정을 다뤘어요. 밑바닥에 내려가면 다시 과거를 돌아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제 노래 중에 힘들고 우울한 분위기의 곡들을 가져와 썼죠. 「취중괴담」, 「하루살이」, 「Reborn」에서 쓴 기타가 섞여있어요. 그래서 제 노래를 계속 들은 분들은 이 노래가 어딘가 굉장히 익숙하실 겁니다.

 

음악을 하신지가 벌써 15년이 됐습니다. 메이저도 아니고 인디도 아니고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시나요?


전 지금에 만족해요. 대중성, 인지도. 그런 면에서 딱 중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실 저와 같은 중간자들이 많아져야 음악판도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중간인 사람들이 있어야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분들은 그들대로, 마이너한 음악은 그 나름대로 심오하게 빛날 수 있겠죠.

 

특히 인디 뮤지션 중에 눈여겨보는 팀이 있다면요.


'시저'라는 팀이요. (김)바다 형이랑 홍대 라이브 공연에서 봤는데 둘 다 잘한다 하고 감탄을 했어요. 뭔가 풋풋하면서도 잘하더군요. 거의 영어로 노래를 해서 처음에는 외국 살다온 줄 알았는데 양재동에 산다고 하더군요. (웃음) 지금 앨범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컴백인데 활동 계획은요.


오랜만에 팬들도 뵙고 특히 공연을 많이 가질 생각이에요.

 

이즘SNS를 통해 김사랑 씨 팬분들께도 질문을 받아보았어요.


재미있겠네요. ^^

 

김사랑 씨에게 팬이란?


친구, 가족이죠. 곡 작업하면서 안 풀릴 때는 혼자 자책하고 지치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내 음악을 기다려주고 들어주는 이 사람들이 있으니까 음악을 할 수 있고. 스스로를 극복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죠.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매번 직접 하고 계십니다. 아이디어가 잘 안 떠오를 때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정말 영감이 안 떠오를 때는 해결될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어요. (웃음)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곡을 만드실 때 부분별 구성부터 하시는 지 아니면 전체흐름을 고려하고 부분을 만드시는 지요?


두 가지 경우를 다하는데요. 「Love UP」은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내용이나 구성 흐름이 한 번에 지나갔고요. 앞서 언급했던 「You again」은 처음 부분을 먼저 만들고 부분씩 만들어가면서 다른 노래를 붙여봤어요.

 

이번 앨범에서 가장 작업하기 어려웠던 곡은요.


「You again」이죠. 가장 힘들 때 써서 그런지 정리하기도 힘들었어요. 그래도 저한테는 특별한 노래기도 해요.

 

김사랑 씨의 콤플렉스는?


머리가 커요.

 

몸이 작은 게 아닐까요. (일동 웃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몸이 작은 걸로 하죠.

 

인터뷰 : 김반야, 정유나
정리 : 김반야, 정유나
2014/09 김반야(10_b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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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셰어하우스 ‘우주’의 늪에 빠진 두 남자 - 김정헌, 박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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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우리는 꿈꿨다. 대학생이 되면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1970~80년대생이라면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를, 1980~1990년대생이라면 <논스톱>을 떠올릴 수도 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로망일 수 있다.

 

셰어하우스는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하지만 서양과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반화된 주거 형태다. 한국형 셰어하우스를 짓는 ‘우주’는 1인 주거층에게 새로운 주거 문화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매년 자취방을 구해야 하는 한 대학생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 ‘우주’는 현재 15개의 셰어하우스를 완공했다. 우주의 차별성은 매호마다 입주자들이 공유하는 ‘테마’ 속에 있다. 예비 창업가를 위한 집, 미술가를 위한 집,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집,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 등 단 하나의 셰어하우스도 똑같지 않다. 우주의 셰어하우스에 입주하려면 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입주자 자격으로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것. 왜 이 셰어하우스를 선택했는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같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같이의 가치를 짓다』는 소셜 벤처 ‘우주’의 창업 분투기를 다룬 책이다. 20대 중반의 다섯 남자가 어떻게 모여 ‘우주’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연애도 낭만도 없다고 툴툴대던 대학생들은 이제 할 말이 없어졌다. 새로운 주거문화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 우주(WOOZOO)는 ‘우리의 집’을 뜻하는 브랜드로, 그 공간에 함께 살며 공간을 만들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우주인’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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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헌 우주 대표와 창업멤버 박형수 씨(오른쪽)

 

셰어하우스를 찾는 사람들의 공통점


우주(WOOZOO)는 김정헌 대표와 4명의 대학생이 창업한 회사다. 특히 김정헌 대표와 우주의 막내 멤버 박형수 군의 인연은 각별하다. 박형수 군의 자취 문제 때문에 ‘우주’가 탄생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김정헌: 가장 몸빵(?)을 많이 뛴 친구가 형수다(웃음). 형수는 당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번 집을 구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우주의 셰어하우스였기 때문에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감정이입이 잘 됐고 여러 모로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

 

아직 셰어하우스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이 많다. 간단히 설명한다면.


박형수: 말 그대로 집을 나누어 쓰는 공동 거주 형태다. 우주는 집을 전세 또는 반전세로 임대하고 이를 다시 대학생, 사회초년생, 외국인 유학생 등 주거 소외계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저렴한 월세로 집을 내어준다. 전세 자금은 사회적 투자 자금, 지방자치단체의 유휴 공간 활용, 크라우딩 펀딩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조달한다. 이를 통해 수익을 내면 다시 재투자를 해서 주거 문제 해결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

 

우주의 첫 책이 이렇게 빨리 나올 거라고 예상했나?


김정헌: 처음 우주를 창업할 때,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 약속을 하나 했는데, “첫 번째는 월급을 얼마라도, 과외비 정도는 주겠다. 두 번째는 우리 멤버들 얼굴이 9시 뉴스에 나올 수 있게 하겠다. 세 번째는 책을 쓰게 해주겠다”였다. 실제로 창업한 지 6개월 만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웃음). 우리도 놀랐다. 여러 군데에서 연락이 왔는데, 가장 먼저 연락을 준 출판사와 인연이 되어 책을 냈다.

 

셰어하우스는 기존에도 존재했지만, 우주의 특징은 셰어하우스에 ‘테마’를 적용했다는 점이다.


김정헌: 처음 셰어하우스를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해외 리서치를 많이 했고 실제로 만화가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일본의 셰어하우스에 방문했다. 1층은 공방으로 사용하고 2층은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만화로 벌어들이는 수익을 나눠 갖는 구조였다. 우주보다는 더 나아간 단계였다. 일본의 셰어하우스 중에 콘셉트를 가진 셰어하우스는 5~10% 정도로 마이너 시장이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연, 지연이 아니면 처음 만난 사람들과 데면데면한 게 보통이라 어떻게 하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지, 고심했다. 집을 지을 때부터 포인트를 잡아서 콘셉트 하우스로 가기로 결정했고, 1호점은 우리와 같은 처지인 예비 창업가를 위한 집을 떠올렸다.

 

서울 종로구 권농동에 자리한 1호점의 첫 입주자는 우주의 창업 멤버 5명이었다. 8주간 합숙을 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김정헌: 집이 완공된 시기가 12월이었다. 방학 기간이었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대학생들이 없었다. 그렇다면 3월이 되기 전까지 우리가 살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경험하면서 살아본다면, 입주자로서의 불편한 점이나 이로운 점 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박형수: 부산에서 올라와 그동안 자취만 했던 나로서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확실히 혼자 사는 것보다 재밌었다. 비즈니스적으로도 실제 입주자 입장에서 경험을 해보니,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셰어하우스를 열자마자, 곧바로 만실이 되고 있다. 최근 공개한 16호점은 티저만 공개한 상태에서 마감이 됐다고 하던데.


김정헌: 서울숲 앞에 재활용을 콘셉트로 집을 만들었는데, 경쟁률이 10:1이 넘었다. 홈페이지에 정식으로 오픈하기 전에 티저만 올린 상황이었는데도 반응이 좋았다. 가장 경쟁률이 높았던 건, 1호점이었다. 16: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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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을 것 같다.


김정헌: 일단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소극적인 사람은 지원을 안 한다. 기본적으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 거리낌 없이 새로운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분들이 많다.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다. 해외에서 이미 셰어하우스를 경험해본 분들도 있지만, 의외로 굳이 자취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찾아오는 분들이 있다. <남자 셋, 여자 셋>처럼, 남녀 공용인 집도 있어서 그런지(웃음).

 

우주의 셰어하우스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우주 인터뷰’를 봐야 한다. 일종의 면접을 보는 건데,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는지.


김정헌: 우리가 봤을 때,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을 선정한다. 보통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분들은 입주자를 받을 때, 돈과 상황이 맞으면 입주를 시키는데, 우주는 ‘우리랑 같이 살면 어떤 느낌일까?’를 생각해본다. 탈락이 되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그 분들이 이 콘셉트 하우스랑 맞지 않을 뿐이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들과 맞는 집이 나올 때까지 대기를 한다.

 

박형수: 인터뷰를 할 때, 꼭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다.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냐는 질문이다. 여가 시간마저도 혼자 보내는 사람들은 우주에 올 의미가 없다. 인터뷰를 할 때는 가볍게 물어보지만, 우리는 심각하게 보는 부분이다. 입주자가 우주에 들어와서 어떻게 생활할 지를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주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집을 선택하고 싶나?


박형수: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라서, 마포구 현석동에 있는 9호점에 입주하고 싶다. 여의도와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맨션이다. 우주 지점을 통틀어 가장 시설이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프로젝터와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서 거실에 들어서면 영화관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김정헌: 위닝을 엄청 좋아한다(웃음). 만약 위닝을 매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셰어하우스가 지어진다면, 그 집에 들어가고 싶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도 만들어볼까 생각했는데, 사회적인 파장을 우려해서 미뤄 놓았다(웃음).

 

8호점은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다. 예스24 독자들이 가장 눈여겨볼 공간이기도 한데.


박형수: 마포구 현석동에 있는데 처음으로 아파트에 만들어진 지점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꿨을 법한 책장 인테리어가 이색적이다. 8호점 책장은 기증받은 책으로 채워서 더욱 의미가 있다. 우주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책 기증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예상보다 호응이 높아 금세 책장을 채웠다.

 

셰어하우스의 기본 입주 기간은 6개월이다. 연장은 불가능한가?


김정헌: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연장도 가능하지만, 가장 권장하는 기간이 6개월이다. 우주가 탄생하게 된 건,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 순위였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우주에 있을 동안 재밌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6개월이 지나고 나면 불편한 것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6개월이 길다고도 짧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기간인데, 가장 만족스럽게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집의 구조나 인테리어를 보면 월세가 높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저렴하다. 우주의 수익 구조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김정헌: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작년에 1억 원, 올해는 7억 원으로 700% 성장했다. 물론 일반 부동산업자였으면 더 많이 받았겠지만, 우주의 설립 목적 자체가 적정 이윤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저렴한 하우스를 제공하는 거다. 주거비를 낮추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이익을 많이 남기는 회사는 아니다. 우리는 돈을 더 버는 것보다 ‘입주금을 어떻게 하면 더 낮출까’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다른 부분으로 수익을 높일까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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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가치를 깨닫다


우주를 창업하면서 ‘집’에 대한 개념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


박형수: 예전에는 자취방을 보러 다닐 때, 그냥 쓱 둘러보고 돈을 내고 계약했는데, 지금은 창문도 열어 보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지도 확인하고 물도 틀어 본다. 집의 재질도 보고 바닥에 깔린 장판까지 눈여겨본다(웃음). 집이나 공간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집착 아닌 집착이 생겼다. 현재는 하숙집에서 살고 있다. 우주 1호점에 잠시 살아보면서, 함께 사는 일상에 재미를 느껴서 하숙집을 선택하게 됐다.

 

김정헌: 우주를 열고 집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다 보니까, 집이라는 것이 모든 생활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전까지는 밥 먹고 잠자는 곳을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집이 모든 생활을 이끌어가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든 밥을 먹든, 그 시간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게 됐다.

 

우주의 내년이 궁금하다.


김정헌: 올해까지는 서울에 집중할 예정이고, 부산이나 송도에도 셰어하우스를 오픈할 계획이다. 일본, 호주, 중국에도 파트너들이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많이 가니까 해외에도 우주를 소개해볼 생각이다. 내년의 최종 목표는 100호점까지 여는 거다. 회사가 커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우주를 창업할 때 가졌던 첫 번째 목표는 이미 달성했다. 우주가 국내의 주거 문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고, 셰어하우스를 만드는 회사들이 20, 30개로 늘었으니까.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꿈은 ‘연쇄창업마’가 되는 거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사회문제를 환기시키고 같이 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싶다.

 

책을 쓴 소감은 어떠한가? 꼭 담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나?


박형수: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 책을 쓰면서 지난 날을 돌아보니 정말 우주가 열심히 했구나, 싶었다. 성과가 좋은 만큼, 짧은 시간에 고생을 참 많이 했다(웃음). 개인적으로는 처음 우주의 셰어하우스 1호점에 입주해서 사셨던 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조차도 ‘이게 잘 될까?’ 확신이 서지 않았을 때, 기꺼이 우주에 입주한 세 분의 이야기를 꼭 담고 싶었다. 우주의 지금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해준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김정헌: 어떻게 보면 같이 일했던 친구들과 한 페이지를 마무리하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간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어떤 독자들이 『같이의 가치를 짓다』를 보면 좋을까?


김정헌: 한번쯤 창업을 고민해본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같다. 요즘은 옛날과 다르게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고 창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도 처음부터 창업을 한 게 아니다. 컨설팅을 하다가 창업에 뛰어든 거다. 이렇게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창업을 시작할 때, 처음 시작을 어떻게 했느냐에 대한 팁을 이 책이 줄 수 있을 것 같다.

 

박형수:창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대학생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창업에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이렇게 재밌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을 전환해봤으면 좋겠다. 창업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될 것 같다.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라”고 했다.


김정헌:보통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이야기를 길게 할 경우에는 흥미를 금방 잃는다. 얼마나 자기 아이템을 쉽게 짧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주는 “<남자 셋, 여자 셋>이요”라고 말하면 게임이 끝난다. 자신의 배경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빨리 주는 게 필요하다. 자기 사업을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1분 안에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 사람이 같은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함께 우주를 창업한 나머지 멤버 3명의 근황도 궁금하다.


박형수:두 명은 취업을 했고, 나머지 한 명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우주를 창업한 사람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건, 김정헌 대표다. 나는 복학을 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졸업 후 우주에 다시 올지, 다른 사업을 할지는 모른다. 이제는 내게 선택권이 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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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의 가치를 짓다김정헌,계현철,이정호,조성신,박형수 공저 | 유유
우주WOOZOO는 ‘셰어하우스’라는 대안 주거를 구현한 젊은 기업이다. 게다가 대학생이 창업해 직접 겪은 고민을 투영했다는 점에서 ‘다른 생각, 다른 삶’의 가능성을 쉽고 친근하게 열었다. 무엇보다 젊은층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되 자칫 가난한 청년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 여겨지면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낳는 결과가 되기에 이를 뛰어넘어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세대 취향에 맞게 집을 리모델링해 ‘살고 싶은 집’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 책은 채 2년도 안 되어 15개 지점을 열며 폭풍 성장한 셰어하우스 우주의 이야기를 시작부터 현재까지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고 유쾌하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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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은진 “아포리즘이 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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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듯 비범한, 비범한 듯 평범한 사람의 글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에 실린 100편의 아포리즘을 읽다 보면, 싱그러운 통찰력에 피식, 웃음을 짓게 된다. 저자가 누굴까? 묘한 호기심이 들면 책에 수록된 ‘최은진이 새로 부른 근대 가요 13곡’을 들어봐도 좋다. 「고향」, 「오빠는 풍각쟁이」, 「아리랑 낭낭」 등 간드러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 ‘시심’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최은진’이라는 본명보다는 ‘풍각쟁이 언니’로 한 시절을 풍미한 그녀는 〈산씻김〉〈오구〉 등 여러 편의 연극과 단편영화에 출연했고, 환경에 관심이 많아 쓰레기 퍼포먼스를 감행한 적이 있다. 재즈가수가 되고자 뉴욕에 가려고 했지만 아리랑의 선율에 운명을 느끼고 2003년도 나운규 탄생 100주년 기념 음반 『다시 찾은 아리랑』을 발표한 뒤, 서울 안국동에 ‘아리랑’이라는 문화살롱을 열었다. 카페 아리랑의 여주인으로,<풍각쟁이 은진>의 가수로. 이제는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의 저자로, 최은진은 나날이 새로운 일상을 탐닉하고 있다. 소설가 천운영은 “그녀의 목소리에는 오감이 있다. 오감 중에서도 봄의 오감”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우연이라도 트윗쟁이 최은진의 여섯 줄짜리 글을 마주하면, 달 뜬 기분이 만끽하게 된다. 가장 보편적인 인간 군상들을 노련하게 포착해내는 최은진의 영감. 그녀에게는 뚱딴지 같은 질문을 던져도 진부하지 않은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 ‘아리랑’에서 최은진을 만난 이유다.

 

체념

 

나는 시간에 늘 애타하는데
시간은 내게 늘 냉하다
그렇게 상대의 마음이 읽힐 때
정답이라면 순리일 것이다
아는 답인데도 매번 틀리는 건
사람이니까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 24쪽)

 

 

건강해지는 습관

 

읽고 싶었던 책을
하루종일 갖고 논다
달지 않아 몸에 좋은 사탕을
하루종일 빨고 있는 기분이다
양볼이 자주 울룩불룩해진다
웃음 하나로 보자면 큰 부자다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  71쪽)

 

만나고-최은진

 

직화구이 아포리즘, 들어보셨나요?


시집과 에세이집의 경계에 있는, 책을 펴내셨어요. 근대가요 13곡이 들어있는 앨범도 수록되어 있는데요.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콘셉트의 책이에요.


2년 전에 누군가 트위터를 해보라면서 계정을 만들어줬어요. 열심히 글을 쓴 건 1년 정도에요. 일이 끝나면 밤 12시, 새벽 2시쯤 되는데 일기처럼 조금씩 끄적거렸어요. 낮에는 사유할 때 많이 썼고요. 그러던 중 어느 잡지에 짧은 글이 실리게 됐는데, 기사를 본 수류산방 박상일 방장님이 “선생님, 제가 작은 시집 하나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문인도 아니고 못 낸다고 말했는데, “옛날에는 김삿갓, 이태백도 다 이렇게 썼어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책을 만들기로 했는데, 젊은 문인들께 추천사를 부탁하려고 김민정 시인에게 연락했다가 이렇게 정식으로 책을 내게 됐어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는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트위터에 하이쿠와 같은 짧은 글을 300편 정도 썼는데, 책을 만들면서 100편으로 추렸어요.


책을 만들면서 놀란 게 편집자의 마음과 제 마음이 너무 똑 닮아 있다는 점이었어요. 「봄」을 가장 첫 번째에 싣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제가 따로 말을 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첫 번째 순서로 들어가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암암리에 텔레파시가 전해진 건 아닐까, 생각했죠(웃음). 제가 30대 후반에 접어들 때, 음양오행을 공부했거든요. 그 때 어떤 분이 제게 “50세가 넘으면 책을 하나 쓰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해준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이 이야기를 듣고 콧방귀를 뀌었는데 일리가 있었던 말이었어요. 참 신기하죠?

 

흔히 아포리즘(aphorism)이라고 하죠? 유독 글이 쓰고 싶을 때, 써질 때는 언제인가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안타까울 때, 또 배울 점을 느낄 때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밤이 되면 안국동은 엄청 조용하거든요. 왁자지껄한 카페에 있다가 사람들이 다 물러가고 다시 고요해질 때, 혼자만의 고독을 느낄 때 글을 쓰게 돼요. 저는 원래 글을 전혀 안 쓰던 사람이었어요. 음악만 듣고 책을 읽었을 뿐이지 글을 끄적거린 적은 없었어요. 제 안에 창작욕이 있었는데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죠. 제 글을 재밌게 표현하자면 ‘직화구이’에요. 생긴대로의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는 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글이에요.

 

‘직화구이 아포리즘’이라, 재밌는 표현이네요(웃음).


어제는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큰 생선이 튀겨지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하늘을 쳐다봤는데 새들이 ‘짹짹짹’이 아니라, ‘지글지글’ 모여서 거대한 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생선을 튀길 때 기름을 한 가득 붓고 큰 생선을 올리면 지글지글 소리가 나잖아요. 이렇게 직화구이로 생선을 굽는 것처럼, 제 글도 그래요. 아포리즘이란 게, 생활 속에서 나오는 글이잖아요.

 

트윗쟁이 최은진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라요.


김민정 시인이 그러더라고요. “이게 쉽게 쓴 글 같지만 되게 어려운 말”이라고요. 제 글에는 어려운 표현이 없어요. 살면서 순간 순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쓸 뿐이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걸 쓰니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가 선명히 들어오는 것 같아요.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은 어떻게 나온 제목인가요?


제가 작곡한 곡에 나오는 가사에요. 15년 전인가? 한참 전 일인 것 같아요. 길을 걷는데 문득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평소에 터번을 즐겨 쓰는데요. 이게 가끔은 꽃처럼 만들어질 때가 있어요. 매사에 꽃과 같이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꽃이 참 예쁘잖아요. 보고 있으면 경이롭죠. 감나무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감이 다 떨어지고 나서 다시금 잎이 필 때, 마치 치마처럼 펼쳐지잖아요. 그런 장면을 볼 때면 자연의 신비를 몸소 느끼죠.

 

현재 운영하고 있는 문화살롱 ‘아리랑’이 영화<우리 선희>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죠. 카페를 연지도 벌써 11년이 됐어요.


홈페이지도 블로그도 하나 없이 11년이 됐네요. 일요일만 쉬는데, 평일에는 카페를 열어야 하니까 어디를 잘 못 가요. 2층을 없앤 지는 2년이 됐는데, 1층에 끽해야 자리가 2,3개밖에 없는데도 많이들 오세요. 예약하고 오시는 분들이 많고, 또 그냥 지나가다 들리는 분들도 종종 있어요<우리 선희>를 보고 오는 젊은 분들도 있고, 원래 단골들이 가장 많고요.

 

어떤 분들이 단골인가요?<우리 선희>에 출연하게 된 것도 홍상수 감독이 우연히 아리랑에 들리게 되면서 진행된 일이라고요.


정말 다양해요. 대부분 문화계에서 일하는 분들이고 책을 쓰고 만드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림, 사진, 패션, 언론 등에 종사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아리랑에는 뭐를 꼭 먹으러 오는 분들이 없어요. 그냥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이에요. 음악을 듣고 싶어서도 오시고요. 신청곡이 있으면 제가 직접 노래를 불러 드리기도 해요.

 

아리랑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요?


제가 2003년도에 앨범 『다시 찾은 아리랑』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자료를 남기려고 만든 앨범이기 때문에 누가 사서 들을까? 싶었는데 다들 재밌어 했고 앨범이 다 동이 났어요. 이 앨범을 만들 시기에 작업실이 필요해서 아리랑 카페를 얻게 됐는데, 이렇게 문화살롱으로 이어가게 될지는 저도 몰랐어요. 아마도 운명이었겠죠? 누가 저보고 아리랑을 해보라고 한 적도 없었고 다만 제가 ‘아리랑을 꿈꿔야겠다, 나는 아리랑을 해야 할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냥 저만의 아리랑을 부를 뿐이에요.

 

아리랑 단골들의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리뷰가 궁금해요.


부끄럽게도 황현산 교수님께서 “흠 잡을 데가 없다”는 극찬을 해주셨어요. 제가 다행히도 팔로어가 많은 편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읽은 분들이 다 좋다고 해주셨어요. 참 감사한 일이, 저같이 부족한 사람의 글로도 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준 사람들이에요. 저 같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감사해요.

 

만나고-최은진

 

노래가 곧 시고, 시가 곧 노래니까요


‘건강해지는 습관’으로 ‘읽고 싶었던 책을 하루 종일 갖고 노는 일’을 말하셨는데, 꽤 공감이 갔어요.


아리랑을 열지 않는 일요일이면 혼자 집에서 책을 읽을 때가 많아요. 여유롭게 책을 보는 날이면 정말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좋아요. 읽고 싶은 책을 조금 읽다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또 책을 읽다가 하늘도 한 번 쳐다보고. 그렇게 뒹굴 거리면서 책을 볼 때, ‘아 내가 행복하구나, 건강하구나’를 느껴요.

 

어떤 책을 읽을 때 그런 느낌이 드나요?


「건강해지는 습관」을 썼을 때는 고미숙 씨의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를 읽고 있었어요.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을 사주명리 분석으로 비교한 책인데, 무척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고미숙 씨는 연암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글이 간략하면서도 명징하고, 정말 아포리즘을 잘 쓰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팔자」라는 글에서 “헐렁한 빈 거리가 좋다”는 표현도 좋았어요.

 

가끔 친구들하고 번개 모임을 가질 때가 있어요. 일을 마치고 만나니까 모임을 끝내면 새벽 2, 3시가 되는데, 조용한 거리를 걸으면서 집에 올 때가 그렇게 좋아요. 팔판동, 삼청동 길을 주로 걷는데, 가끔은 일부러 새벽에 나와 걸을 때도 있어요.

 

아리랑 가수 최은진을 두고, 어떤 분은 ‘심리상담가이자 철학가, 예술가, 카페의 여주인’이라고 평했어요.


(웃음). 명상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저랑 인연이 16년쯤 되신 분이에요. 저희가 16년 동안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겠어요. 제 생활부터 생각들 모두 잘 아시는 분인데, 과찬의 말씀이시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인 것 같아요.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듣는 것도 좋아해요.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아는 편이고요. 타고난 기질적인 면도 있 어릴 때부터 기도도 많이 했고요. 여러 분야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경험들이 쌓였어요.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주 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자기 정리가 잘 안된 사람들을 볼 때 안타까워요. 가끔 너무 황당한 걸 물어볼 때가 있어요. 조금만 고민하면 보일 문제들인데. 자기 내면으로 들어갈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자기가 정리가 돼야 남이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 것만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클래식을 하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음악을 더 많이 들어야 해요. 예술을 하려면 모든 것을 열어 놓는 게 필요해요.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고 제대로 먹어야 조화가 가능해요. 먹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몸에 좋다고 자기 몸에 맞지도 않은 음식을 먹는 건, 바보 같은 일이죠. 생각이 다 음식에서 나와요.

 

젊은 후배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나요?


조금이라도 투자를 해서 문화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책 살 돈, CD 살 돈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은 영화를 보면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어요. 아침에 좋아하는 음악을 5분 만이라도 들어봐요. 하루의 시작이 다를 거예요. 라디오만 들어도 얼마든지 좋은 정보를 들을 수 있고요. 책도 많이 읽으라고 이야기하진 않아요. 하루에 열 장이라도, 그렇게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으면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질 거예요.

 

만나고-최은진

 

한때는 목사가 되기를 꿈꾼 적도 있다고요.


어릴 때부터 영혼, 영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신학대학에 갔는데, 예수님도 부처님도 스승일 뿐이지 종교를 만들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죠. 이건 아닌 것 같아 공부를 접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건 춤추고 노래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만약 아리랑을 만나지 않았고 1930년대 음악에 매료되지 않았다면, 가수 최은진의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요?


재즈를 하고 싶어 했으니까 뉴욕에 갔을 거예요. 재즈는 앞으로 나이 들어서 꼭 할 거예요. 제가 만들어놓은 노래를 재즈로 편곡할 수도 있고, 곡을 받을 수도 있고요. 지금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리랑을 재즈화하는 것도 하나의 아이디어에요. 1930년대 곡들을 재밌게 편곡하고 싶고요. 다양하게 구상 중이에요. 누구와 작업을 할지, 세션만 고르면 돼요.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에 실린 아포리즘으로 곡을 만들 계획은 없나요?


곡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쓴 글은 없었어요. 하지만 만들 순 있을 거예요. 노래를 하기 때문에 어떤 리듬으로 글을 써야 할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 같아요. 노래가 곧 시고, 시가 곧 노래니까요.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후속 시집도 만나볼 수 있을까요?

 

이번에 쓴 글보다 약간 긴, 산문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책으로 낼 수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사람들이 시집은 어려워서 잘 못 읽겠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쉬운 글들이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문장을 써놓고 작가만 희열을 느끼는 그런 책 말고요.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글들이, 시집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독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를 읽으면 좋을까요?


제가 쓸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얼결에 책을 내게 됐는데요. 저는 짧은데 재밌는 글이 무척 좋아요. 길게 쓴다고 무조건 글이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우연히 시청한 개콘은 부라보콘이다”, “비가 가지런하다. 부지런할 일이 없겠다”, “비는 추적자처럼 추적거리고 가로등이 가로로 눕고 싶은 밤”. 이런 게 말장난 같지만 그 안을 잘 살펴보면 고뇌가 들어있어요. 저도 모르게 써지는 거예요. 제 책을 읽고 문학이다, 뭐다 그런 걸 느끼는 것보다 가볍게 읽지만 그 안에 공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이 그랬던 것처럼 독자 분들도 스폰지처럼 푹 젖었으면 좋겠어요. 행복은 잠깐 잠깐 오는 거잖아요. 원래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합시다”라고 말하는 거고요.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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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최은진 저 | 난다
책과 음반이 한데 어울려 있는『머리에 꽃 이고 아리랑』, 글과 음악이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이 책은 총 2부의 짜임새를 가졌습니다. 1부는 ‘트윗쟁이 은진: 최은진이 쓰고 가려낸 아포리즘 100선’이라 하여 그간 부지런히 올려온 그녀의 트위터 글 가운데 주로 일상을 주제로 한, 평범하면서도 한줌의 감동을 한줄기 등뼈처럼 몸에 숨기고 있는, 마치 하이쿠와 같은 단상들을 추려 모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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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나인 “첫 한국 무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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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의 구석진 카페에서 만난 아리스나인은 너무도 친절했다.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를 처음 찾은 10년차 밴드. 무대 의상과 화장을 벗은 다섯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어른스럽고(멤버들의 정확한 나이를 알 길이 없었다) 안정된 톤으로 차근차근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Alice Nine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 무대, 한국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분이 어떤가요.

 

쇼우(보컬) :10년 동안 활동해오면서 처음으로 한국에 오게 돼 감개무량합니다.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으로 우리 연주를 집대성해 보여주고 싶어요. 기대가 큽니다.

 

해외 공연인데요, 특별히 더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사가(베이스) : 첫 아시아 투어이기도 하고, 특히 한국에서 첫 공연이기에 이번 < Supernova > 앨범 수록곡뿐만 아니라 대표곡들도 포함시켜 처음 보는 사람들도 같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리스 나인이 라이브에서 중요시 하는 부분은 뭔가요.

 

쇼우(보컬) :여러 사람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그건 그루브를 통해 표출된다고 생각하고요. 팬하고 밴드가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중점을 둡니다. 이런 효과를 내려면 우리가 먼저 즐겨야하니까 우리부터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떼창을 서슴지 않는 한국 팬들입니다.

 

히로토(기타) :가능한 많이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FT아일랜드와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음악 색에서 분명 차이가 있죠. FT아일랜드의 음악은 어떻게 보시나요.

 

히로토(기타) :특히 보컬 (이)홍기 씨와 사이가 좋아요. 노래하는 걸 보면 파워도 있고 밴드 연주도 스킬이 굉장히 높죠. 언제 같이 라이브를 하면 좋겠어요.

 

혹시 그 외에도 관심 있게 들었던 한국 아티스트나 밴드가 있는지요.

 

사가(베이스) :씨엔블루. 연주 실력들이 굉장히 좋습니다. 일본 밴드들과 비교해 봐도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어요.

 

사실 한국에서는 FT아일랜드를 밴드보다 아이돌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밴드로 인기를 누리고 있죠. 이 점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는지.

 

사가(베이스) :없어요. (웃음)

 

히로토(기타) : 보컬 홍기 씨 같은 경우는 스스로 음악 하는 걸 좋아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다고 했어요.

 

엑스 제팬과 루나 시(Luna Sea)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엑스 제팬은 한국에서도 팬층이 두터운 밴드죠. 두 밴드의 어떤 점을 높이 사는지요.

 

쇼우(보컬) :십대 전반, 막 음악을 시작하려던 그 시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밴드들임에 틀림없죠. 지금 비주얼 밴드의 근본을 만든 선배들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투 기타 배치는 지금 스탠다드죠. 대선배들입니다. 항상 다른 새로운 걸 시도하려는 모습, 음악적인 것들을 보고 배웠어요. 그런 모습들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현재의 비주얼 계 음악으로 파생되어 온 게 아닌가 생각해요.

 

Alice Nine

 

신보 얘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이번 음반의 콘셉트는 무엇인가요.

 

쇼우(보컬) :이번 앨범은 특히 1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에요. 유니버설 뮤직으로 이적한 후의 첫 음반이기도 하고요. 기존의 아리스나인 색을 잃지 않으면서 좀 더 팝스럽고 캐치한 음악으로 변한 느낌이 있습니다. 기념할만한 음반이 된 것 같아요.

 

「Shining」이 타이틀이죠? 타이틀곡 선정에 기준이 있었나요.

 

쇼우(보컬) : 「Shining」은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사가(베이스)가 가장 처음 작업한 곡인데요, 파워풀한 곡이고 음반 색을 잘 나타내는 것 같아서 타이틀로 정했습니다.

 

이번 음반도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영어 제목이 많이 보입니다. 이유가 궁금한데요.

 

쇼우(보컬) :구체적인 의미를 담거나 추구하는 곡을 쓸 때는 일본어 제목을 붙이고요, 이미지가 고정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내용을 쓸 땐 영어 제목을 많이 붙입니다.

 

예전부터 아리스나인의 음악에서는 댄서블한 요소를 많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의 「Cosmic world」도 그랬고 「Rainbow」에서는 기계적인 드럼루프를 사용해 비트를 구성하기도 했죠. 신작을 보니 「メビウス」에서는 아예 전면적으로 신스 사운드가 들어가고, 「Kid」에는 덥스텝이 절묘하게 삽입돼 있습니다. 트렌드인 EDM의 요소도 적극 도입한 걸로 보아 댄스 음악에 대한 애착도 상당할 것 같은데요.

 

쇼우(보컬) :원래는 메탈, 하드 록에 있는 요소를 기본적으로 사용해요. 하지만 동시에 라이브에서 관객들과 리듬을 함께 즐기기 위해 댄스 뮤직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어요. 그런 걸 적극적으로 집어넣으려고 노력을 하죠.

 

Exist」는 데뷔시절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사운드로 시작해 밝고 청량한 편곡으로 전환됩니다. 과거와 현재, 혹은 아리스나인의 명과 암을 아우르는 멋진 트랙이죠. 이러한 대비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인가요.

 

쇼우(보컬) :이곡은 제가 먼저 곡을 쓰고 사가(베이스)와 토라(기타)가 함께 편곡했습니다. 초기의 셀프 프로듀싱 때와 작업 방식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 게 아닐까 싶어요.

 

2007년의 「Jewels」에서부터 쇼우의 보컬이 지금과 같은 매력을 같게 된 것 같아요. 힘을 빼고 좀 더 팝 보컬에 근접해 부르려 했던 시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한 자각이 있는 건가요.

 

쇼우(보컬) : 「Jewels」전까지는 제가 멜로디를 직접 썼어요. 「Jewels」부터 다른 멤버들도 멜로디를 쓰기 시작했죠. 「Jewels」는 사가가 썼던 곡인데 너무 어려워서 계속 같이 연습하고 재녹음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다른 멤버들도 함께 곡을 만들게 됐죠. 보컬에 관해서는.. 자각하는 건 별로 없었어요. 고음을 내면서 고통스러워 할 때 좋은 목소리가 나고 섹시하다고 멤버들이 얘기해주더군요(웃음).

 

사가 씨는 곡에 만족하나요.

 

사가(베이스) :열심히 노력해서 녹음한 곡인만큼 만족합니다.

 

< Blue Frame > 이후로는 그룹의 이름이 아닌 멤버 각자의 이름을 작곡자 명단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쇼우(보컬) :앨범 < Vandalize >까지는 사가(베이스)가 작곡의 이미지와 전체를 담당했는데 < Gemini >부터는 다른 멤버들도 참여해서 책임을 지고 각각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걸 좀 더 강조하기 위해 크레딧에 팀명이 아니라 각자 이름을 올렸죠.

 

곡 작업방식이 궁금합니다. 체계가 있는 건가요.

히로토(기타) :곡을 일부러 쓰려고 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느낀 감정이나 기분의 온도에 따라 씁니다. 각자가 맡고 있는 파트가 다르고 곡을 만드는 스타일도 다르죠.

 

음악작업 하면서 서로에게 뺏고 싶은 능력이 있나요.

 

히로토(기타) : 사가(베이스)의 엄청난 기억력과 음감이 부럽네요.

 

사가(베이스) :모든 파트의 능력을 다 뺏고 싶어요.

 

나오(드럼) : 보컬의 능력. 인기를 제일 많이 받으니까요.

 

쇼우(보컬) :(이 말을 듣고 수줍은 듯 웃음)

 

토라(기타) :노래. 연습해도 노래는 잘 안 되니까요. 노래를 잘 했으면 좋겠어요.

 

Alice Nine

 

 

2010년을 기점으로 강한 콘셉트보다는 일반 모던 록 밴드 같은 자연스러운 스타일링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아리스나인 뿐만 아니라 여타 비주얼 밴드에게도 보이는 공통적인 변화죠. 일본 비주얼 계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생겨난 경향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떤 의도에서 이러한 변화를 감행했는지 궁금하네요.

 

쇼우(보컬) :비주얼 밴드이긴 하지만 그전에 스스로 뮤지션이라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음악적 요소에 불필요한 경우라면 비주얼적인 요소를 버리기도 하죠. 때에 따라선 화장을 진하게 하고 비주얼 밴드로 돌아가기도 합니다만 제일 중요한 건 음악이니까요. 판단에 따라 양보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비주얼 계는 비주류 음악에 가깝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비주얼계가 강세인가요.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하네요.

 

쇼우(보컬) :본도 비주얼 밴드가 메인스트림으로 여겨지진 않아요. 1990년대 인기 높은 밴드들이 나오면서 굉장히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요. 비주얼 밴드의 세계관, 아트워크 이런 요소들을 버리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일본도 댄스 음악이 주류긴 하지만 비주얼 밴드의 음악도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밴드 결성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리스나인의 10년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사가(베이스) :굉장히 먼 길을 돌아온 밴드인 것 같아요. 만드는 법, 활동하는 법에 있어 역할이 계속 바뀌기도 했고요. 자리 잡힐 때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린 밴드입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길지만 형태가 갖춰진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헝그리한 밴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계속 변화하고 싶고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히로토(기타) :이번에 아시아 투어를 하면서 확신을 가졌어요. 10년 활동하는 동안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아리스나인의 음악을 들어주는 분들이 있다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요. 씨 뿌린 걸 이제 수확하는 것 같아요.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더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나오(드럼) :결과가 전부는 아니니까요. 아리스나인의 미래로 이어지는 10년을 보낸 거 같아요.

 

쇼우(보컬) :처음 낸 음반으로만 성공하는 밴드들도 있죠. 저희는 10년을 해오면서 처음으로 이번에 해외투어를 하게 됐습니다. 고생해서 해왔기 때문에 이번 공연을 계기로 멤버들의 의욕이 되게 높아졌어요, 발전을 볼 수 있는 10년을 보내왔다고도 생각해요. 앞으로의 10년을 보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토라(기타) : 제 인생도 그렇고, 10년 동안 굉장히 많은 성장을 한 밴드라 생각하고 있어요. 10년이면 중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성장하는 밴드가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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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한국에는 속죄하는 사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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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상지대 교수는 한국 시단에서는 전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를 쓰는 시인으로, 시사적인 글을 쓸 때는 『말의 귀환』에서 보여줬듯 냉철한 논객으로써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김정란 교수가 이번에 발표한 책은 시집도, 칼럼집도 아니고 판타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 판타지.

 

제목은 『두룬』이다. 청소년을 주된 독자로 썼다고는 하지만 총 3권이라는 분량에서 나타나듯, 만만한 작품은 아니다. 청소년 독자를 염두에 둔 작품이니만큼 구조나 문장은 최대한 단순하게 하면서도 그 속에 넣은 주제는 묵직하게 썼다. 이 작품의 주제는 주인공 ‘두룬’의 삶으로 나타난다. 두룬의 삶 전반부는 많은 영웅 신화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를 따른다. 비범한 출생,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 고난 극복. 그렇지만 두룬의 삶 후반부는 반전이다. 영웅은 타락하고, 남은 삶을 속죄하는 데 바친다.

 

두룬이 타락할 때 독자는 우리 신화 속 존재인 도깨비를 만난다. 타락하기 전 두룬은 뛰어난 야금술사이자 연금술사였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도깨비의 기원을 대장장이 신으로 본 것이다. 김정란 교수는 『삼국유사』의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를 『두룬』의 출발점으로 꼽았다. 거기에 대장장이였던 석탈해 설화와 조선 시대 이후 도깨비 이야기를 녹아냈다. 이렇듯 『두룬』은 가볍게 읽으면 흥미로운 역사 판타지, 좀 더 깊게 읽으면 신라와 조선의 정신문화를 볼 수 있는 작품인 셈이다.  


두룬, 속죄하는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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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작한 계기는 실용적이었습니다. 2006년에 과가 생겼는데 학교에서 지원받아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외부 프로젝트를 따야겠다고 해서 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하는 프로젝트에 응모했습니다. 응모 과제가 OSMU(One Source Multi Use) 기획 인력을 키우기에요. 멀티유즈를 하려면 원소스가 있어야겠죠.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만들어보라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1권 분량으로 생각했는데 늘어났어요. 이런 게 직접적인 원인이긴 했지만, 그 전부터 판타지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 왔어요. 『해리포터』『나니아 연대기』가 문학적인 작품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정서를 고양하는 힘이 있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구체적인 계기가 생기니까 자연스레 만들어졌죠.


책에 들어간 삽화가 아름답습니다. 분량도 적절하여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극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삽화 때문에 오히려 책이 늦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쓰기로 했던 삽화가가 중간에 못하게 됐어요. 출판사에서는 삽화 없이 내자고 했는데, 아쉽더라고요. 기왕 늦어졌으니 기다리자 해서 거의 2년을 기다렸어요. 1년은 먼저 약속했던 삽화가를 기다리느라, 나머지 1년은 책에 실린 삽화를 기다리느라 보냈죠.


주인공인 두룬부터 시작해 길달, 지웅, 도토리, 야차 등 타락하는 인물이 많은데요. 두룬 같은 경우는 타락했으나 속죄하고 원래 자신을 찾아가려고 하죠. 왜 이런 인물을 그렸나요.


우리사회를 바라보면서 느낀 고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상을 버릴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지켜가는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매도해요. 그런 사람이 상층부를 장악했어요. 이런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게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인물을 많이 등장시켰어요.


역시 판타지라고 해도 현실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네요. '작가의 말'에서 한국에는 고백과 속죄의 전통이 약하다고 지적했는데요.
 
우리사회에 보편 원리가 없어요. 가치가 보편적인 층위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 발생해요. 그래서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 동네 사람이면 괜찮다고 용서해버리죠.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든 타락할 수밖에 없고 잘못해도 사죄하지 않아요. 왜 우리나라는 잘못에 관대할까요, 이렇게 해서 사회가 건강할 수 있을까요? 권력, 힘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번도 과거를 반성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부분에 관해서 평소에 느꼈던 감정이 있었고, 그래서 속죄하는 영웅을 그리고 싶었죠.


학교에서 신화를 강의하는데, 서양 신화에서는 참회하는 영웅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웅이 헤라클레스죠. 참회를 해야 비로소 진정한 영웅이 되는 걸 보면서 왜 우리 신화에는 이런 유형의 영웅이 없을까 싶었어요.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갖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몰락하고, 몰락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영웅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주제를 쓰느라 이야기가 길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정리하자면, 두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수한 한국적 기원을 가지는 이야기를 규모 있는 서사로 만들고 싶었어요. 또 한편에는, 한국 문화에 없었던 새로운 영웅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국, 속죄하는 전통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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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만 해도, 누군가가 제대로 잘못을 시인하고 속죄하는 모습은 없는 것 같은데요.


온갖 사람이 그래요.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해서 한 번도 정식으로 사죄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아요. 핑계 대서 모면하고, 언론이 덮어주고, 그렇게 넘어가죠. 제가 한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성공한 쿠데타'라고 말해요. 불합리하고 부당한 짓을 저질렀어도 성공하면 덮어준다는 거죠. 굉장히 병든 사회죠.


고독과 속죄가 기독교 전통에서 강조하는 덕목이잖아요. 요즘 교수님의 신앙은 어떤지.


저는 신앙을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교회에 안 갈 뿐이죠. 그렇다고 교회 가는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교회에 가는 걸 중요하다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나 같이 신앙이 있어도 안 가는 사람이 있고요. 신앙의 본질은, 교리가 아니라 내면적 존재가 명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예요. 교리는 세세한 부분에서 갈릴 수 있어요. 예컨대 동정녀 잉태설이 사실인가 상징적 비유인가, 이런 거죠. 어느 것이 맞다고 믿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가죠.


책의 주제와도 관련 있네요.


그렇죠. 두룬이 아무 것도 얻는 게 없어요. 그냥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뿐.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유화는 신라 여신은 아닌데요. 이런 설정에도 숨겨진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유화는 고구려 신이죠. 배경이 신라인데, 무리한 설정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어요. 알면서도 이런 설정을 취한 이유는 삼국시조 중에서 여신으로서 위상을 갖고 있는 게 유화인 까닭이에요. 신라에도 알영이라는 여성이 박혁거세 신화에 등장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크지는 않아요. 이뿐만 아니라 한국에는 여신 대부분이 원형에서 많이 몰락한 상태입니다. 삼국 여신 중에서 본래 여신의 위상을 잘 갖고 있는 여신이 유화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유화를 등장하게 했죠..


도깨비, 한국에 살아남은 드문 신화적 존재


『두룬』에 등장하는 인문학적 통찰력이라 한다면, 도깨비 계보를 야금술에서 연금술로 이어지는 연장선에서 찾는다는 점일 텐데요. 도깨비의 종교사적, 신화적 의의에 관해 설명해 주신다면.
 
도깨비 원형이 무엇인지는 모르죠. 저도 『두룬』에서 추정해 본 것에 불과해요. 학자마다 의견이 많은데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건 없죠. 저는 도깨비를 대장장이 신으로 보는 게, 설득력 있다고 본 거죠. 이야기를 만들게 된 근거이기도 했고요. 도깨비라는 존재의 의의라 한다면, 견고한 유교사회에서 신화적 존재는 대부분 사라집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존재가 도깨비죠. 민속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는 민간설화를 보면, 지배자의 신이라기보다는 민중의 신이었죠.


책에도 그려졌지만 도깨비가 털이 많고 뿔을 갖고 있잖아요. 이런 도상학적 의의는 뭘까요.


도깨비뿐만 아니라 괴물이 전반적으로 그런 모양이죠. 털이 많고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도깨비를 대장장이 신이 아닐까, 이렇게 봤는데 대장장이 신이 대개 괴물이에요. 그리스 신화에도 헤파이토스는 절름발이에 추남이잖아요. 대장장이가 갖고 있는 힘이 막강하거든요. 막강하니 사람과 떨어진 존재로 그려지는 거죠. 실제로 아프리카의 한 설화에서는 대장장이만 모여 사는 마을이 있어요.


혹시 영화로 만든다면, 배역을 생각해 보셨나요.


야차는 강동원이 맡으면 좋겠는데요. 강동원은 미남이면서, 악인으로 변하면 무섭게 변할 것 같은 같은 매력이 있죠. 그리고 두룬은 원빈. 그 배우 다 데려오려면 제작비가 감당이 될까요. (웃음) 여성 배역은 잘 모르겠네요.


창작하면서 영감을 받는 곳이 신화라고 말씀하셨는데, 신화가 가진 매력, 어떤 게 있을까요.
 
신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논리적이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본질적인 이야기입니다. 『두룬』에서 연금술을 그렸는데, 연금술이 가장 처참한 부분과 영광스러운 부분을 같이 드러내는데요. 신화도 그래요. 고결한 부분과 추악한 부분을 다 보여주죠. 문학 시작할 때는 신화를 알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문학과 신화가 맞닿아 있더군요. 신화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심성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악마이기도 하고 천사이기도 하죠. 이런 인간의 양쪽 극단을 보여주는 게 신화입니다. 그러니 신화를 공부하면 할수록 인간을 향한 이해는 깊어집니다.


가벼움도 좋지만 진지함도 필요해


요즘 학생은 어떤가요.


제 시절에 비하면 아무래도 가볍죠. 전반적으로 어른이 되는 시간이 늘어난 세상이잖아요. 사회적 분위기가 이러니 가볍다고 나무랄 건 아니죠. 그래도 좀 진지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만들어온 덕목이 있는데, 그냥 갖다 버리기에는 아까워요. 이런 덕목을 등한시하지 않나,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교수님이 대학생 시절에는 실존철학이 유행했고, 문학 쪽으로도 불문학, 영문학, 독문학 두루 읽지 않았나요. 가벼워지는 사회 분위기가 점점 책을 안 읽는 세태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아예 없지는 않겠죠. 현대 작가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지만,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작가도 좀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 시기가 인류가 굉장히 깊이 내려갔던 때에요. 그런데 지금은 마치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던 거처럼, 부담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가 옳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작가도 좋지만, 대체로 가볍죠. 문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고 덜 인문학적이에요. 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가를 젊은 세대도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 작가가 대단한 작가라는 사실 정도는 향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걸 잃어버릴 거예요.


깊이 내려갔다고 표현하셨는데, 양차 세계대전 전후를 일컫나요.


그렇죠. 인류가 그 시기에 굉장히 깊은 인간 실험, 정신 실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인류가 문화적 성과를 냈다고 봐요. 이런 작품들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무게나 잡는 것처럼 매도 당하는 건 잘못이에요. 우리가 손해 보는 거죠.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데, 물론 하루키가 좋은 작가이긴 하지만 노벨상을 받을 작가는 아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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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강의하면서 한국의 문화콘텐츠 전반에 고민 많이 할 것 같아요.


한국 문화콘텐츠는 단기적으로 보면 가벼운 재치, 플랫폼을 다루는 기술적 능력은 장점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화 콘텐츠 경쟁력은 인문학에서 나오죠. 인문학을 제대로 가르쳐야, 지속적인 경쟁력을 가진 문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한 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겠죠. 저는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전달하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어요.


요즘 관심사는?


이번 학기에 삼국유사 강의를 했는데, 학생들이 의외로 재미있어 합니다. 그리스로마신화 강의할 때보다 더 반응이 좋아요. 민족의 근원이라는 게 만만하지 않구나, 이런 생각을 하죠.


그리스로마신화와 달리 삼국유사는 한국의 이야기니까,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을 직접 찾을 수도 있을 텐데요. 추천할 만한 장소가 있다면.


낙산사. 낙산사는 의상과 원효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의상이라는 인물과 원효라는 인물의 대조적인 성격을 상상해 보면 재밌을 거예요. 낙산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일화 하나하나가 주옥 같아요. 인터뷰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는 없겠고 하나만 꼽자면, 여성성이에요. 여성성을 두고 의상과 원효의 해석이 다른데, 이런 이야기를 알고 낙산사를 찾으면 우리의 정신사를 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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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룬김정란 저/김재훈 그림 | 웅진주니어
〈불의 지배자 두룬〉은 신라 시대 죽은 진지왕과 도화녀 사이에서 태어난 비형이 귀신 길달을 물리치는 ‘비형랑 설화’(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도깨비에서부터 연금술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다양한 신화적 이야기를 놀라우리만치 조화롭게 버무려 탄생시킨 한국형 장편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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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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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이 끝난 직후,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50대 초반인 지금, 남은 인생의 후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학생들의 공부 시간과 어른들의 노동 강도. 덕분에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대국 20위 안에 들었지만 “나 행복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저자는 더 늦기 전에 ‘행복’을 찾고 싶었다. 개인의 행복을 넘어 이웃의 행복, 행복한 사회의 비밀을 알고 싶어 덴마크로 떠났다. 2년 연속 행복지수 조사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한 덴마크 사회가 궁금했다. 


북유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의 작은 나라, 덴마크. 우리에게는 ‘레고’의 나라로 알려진 덴마크는 인구 560만 명에 국토는 한반도의 5분의 1 크기, 작은 나라다. 날씨가 나쁘기로 유명해 여행지로는 선호하지 않는 나라. 그러나 2012년부터 UN이 발행하고 있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2년 연속 국가별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다. 심사 기준은 사회적 안전망, 자유, 관용의식, 주관적 부패지수, 1인당 국민소득, 기대수명 등이었다. 또한 덴마크인들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2011년 발표 조사에서 생활 만족도 1위, 직업 만족도 2위를 차지했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인들은 직업 만족도 27위로 꼴찌를 했고, 생활 만족도에서는 26위를 기록했다. 


오연호 저자는 세 차례에 걸친 덴마크 취재에서 택시기사, 식당 종업원, 주부, 고등학생, 대학생, 교사, 공무원, 언론인, 목사. 국회의원 등 여러 분야의 덴마크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 “당신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약속을 하고 만난 사람들 모두는 하나같이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두 명이라도 다른 대답을 할 거라고 기대했던 저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연호 저자가 덴마크 사람들 300여 명을 만나 발견한 ‘덴마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키워드 6개’는 자유, 안정, 평등, 신뢰, 이웃, 환경 등이다. 덴마크에는 이 가치들이 학교와 일터,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본보기로 여겨지는 것들이 이들에게는 문화였다. 튼튼한 사회안전망, 안정적인 복지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연호가 만난 덴마크는 ‘불평등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존중과 신뢰가 있는 사회였다. 


며칠 전, 오연호 저자는 한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 울면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교감 선생님은 왜 울면서 책을 봤을까? 덴마크가 몹시 부러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연호


우리가 본보기로 생각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문화였다


덴마크 취재기를 담은 책인데, 제목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다. 제목을 짓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그동안 ‘오연호가 묻고 OOO가 답하다’ 같은 시리즈를 냈는데, 이번에도 ‘오연호가 묻고 덴마크가 답하다’ 같은 스타일을 염두에 뒀다. 그런데 작년이 내가 51세가 된 해였다.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상태라 덴마크에 가자마자 고민이 많았다. 원래는 오연호가 묻고 덴마크가 답해야 하는데, 덴마크가 묻고 내가 답하는 꼴이 됐다. 덴마크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넌 어떻게 살래?’라고.


그래서 답한 것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인가?


책 제목은 고3 아들이 지어줬다(웃음). 제목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아들이 아침식사를 하면서 툭 던진 말이었다. 한국과 덴마크의 학업 현장은 엄청나게 다르다. 부모가 아무리 대입에 대한 부담감을 주지 않아도 아이의 초조함,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도 이 사회의 시스템을 느끼고 있으니까. 아들이 그동안 내가 쓴 책들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은 읽었다(웃음). 책을 다 읽고는 “위로 받았다”고 하더라. 자기 상처에 대한 치유라고 할까. 이렇게 경쟁에 시달려야 하고 각박하게 공부해야 하는 삶이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책 제목에는 ‘나’만 행복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우리’도 행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함께 들어있다. 책이 나오기 전에, 페이스북 친구들이나 강의에 온 교사들에게 “이 제목,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거의 3배수가 이 제목을 꼽았다. 다른 후보 제목은 ‘행복사회의 비밀’이었다.


현재 책 출간과 함께 전국에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출간 2주 전부터 공개 강연 신청을 받았다. 70곳 정도에서 신청을 했고 이미 시작했다. 오늘 남양주를 가는데 여덟 번째 강연이다. 교육청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경기, 강원을 이미 했고 광주, 대구 교육청 등을 방문 예정이다. 


강연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


공통적으로 물어보는 게 “덴마크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길래 그런 사회가 만들어졌냐?”다. 특히 학부모, 교사들의 관심이 뜨겁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더라. 자녀 이름으로 사인을 요청하는 독자들도 많았다. 


덴마크로 취재를 떠난 건, UN ‘세계행복보고서’에서 2년 연속 국가별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에서 행복사회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


지난 대선 후, 새 정치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나왔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유권자들이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를 따져볼 때, 우리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그냥 자연인이라기보다 뭔가 사회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인데,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행복을 줄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우리나라의 모델이 될 수 있는 나라를 보고 싶었다. 부탄, 방글라데시도 생각했는데, 우리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나라, 객관적인 지표를 바탕으로 한 나라를 떠올려보니 덴마크였다.


덴마크의 첫 인상이 궁금하다.


책에 첫 부분에 소개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연히 만난 덴마크인들이다. 그들한테 “요즘 걱정거리가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놀랍게도 모든 사람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딱히 걱정거리가 없다면서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UN조사만 신뢰하고 덴마크를 갔더라면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덴마크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보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 즉 자유, 평등, 안정, 신뢰, 이웃, 이런 가치들이 삶 속의 문화로 녹여 있었다. ‘우리는 이런 제도가 있어’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문화였다. 그래서 한 번 갈 취재를 두 번 가고 세 번 가게 됐다. 


2차 취재는 대학생 딸과 함께 다녀왔다. 딸은 어떤 소감을 남겼나?


덴마크가 물가가 비싸서 덴마크어로 통역을 하려면 하루에 80만 원 정도가 든다. 덴마크 사람들 대부분이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영어 통역을 해도 됐는데, 딸아이가 나보다 영어를 잘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열흘쯤 함께했는데, 자기가 학교에서 들은 수십 개의 수업보다 덴마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게 훨씬 좋았다고 하더라.


책 1부에 소개된 덴마크 사람들은 모두 우연히 만나게 된 경우다. 식당에서, 택시 안에서 만난 사람들인데 모두 여유로워 보일 뿐 아니라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좋아서 하는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40년 동안 요리사와 웨이터로 일했던 페테르센은 자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7년 동안 직업학교 교육을 병행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일을 더 좋아하게 됐다고 했다. 22살 아들이 열쇠 수리공인데, 아들 자랑을 그렇게 하더라. 한 번도 아들이 판검사나 의사, 교수가 되길 바란 적이 없다며, 열쇠 수리공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직업이냐고 되물었다. 노동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차이를 깨달았다. 


예상과 달랐거나 충격적인 모습은 없었나?


우리나라는 부자가 세금을 더 많이 내면 신문에 나올 만한 일인데, 덴마크는 매우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 우리가 본보기로 생각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문화였다. 우리나라는 혁신학교를 본보기로 삼고 있지 않나? 그런데 덴마크에는 혁신학교가 없다. 모든 학교가 혁신학교의 철학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공립학교, 사립학교, 대안학교 등 각자의 장단점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의 장점과 타 학교와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덴마크는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게 개인의 자유와 자존감, 더불어 연대다. 그 가치를 어떻게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해내느냐지, 장단점을 구별하지 않는다. 또 학업성취도를 자랑하지 않는다. 복지제도가 좋은 걸 떠나서, 이런 가치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덴마크는 실업률은 낮지만, 유럽에서 이직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 기간이 대략 8년으로 평생 6회 정도 직장을 옮긴다. 이직률이 높다는 건 안정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문제 아닌가?


이런 대전제가 있는 것 같다. 덴마크라는 나라에서 정말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실용성이다. 어떤 상황이든 쌍방이 서로 이해하고 일이 되는 방향으로 간다는 거다. 회사를 운영하다가 일이 잘 안 되면 직원을 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노동자 입장에서는 당황할 만한 일인데, 덴마크의 노동자들은 회사 입장을 고려해 합의해준다. 그 과정에 노동 탄압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실직을 해도 국가가 보장해주는 방안이 있으니, 받아들이고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 덴마크 정부는 직장을 잃어도 2년간 실업보조금을 주고 직업훈련을 시켜서 다른 회사에 취직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회사와 노동자가 서로 합의를 하는 과정에 신뢰와 소통이 있고, 그게 문화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정부는 물론, 회사도 새로운 직업을 찾아주는 Job Center를 운영하고 있고, 사용자와 노동자 집단이 함께하니까 ‘새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해볼까?’와 같은 사고가 가능하다. 


오연호


인생 설계 학교, 우리도 가능하다


덴마크에는 우리나라 교민이 3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 30명이 유학생이다. 유학생을 만난 일화에서 인상 깊게 읽은 것이 ‘한국은 눈치 보는 문화를 없애야 한다’는 말이었다.


미국에서 3년간 살았던 때가 있는데, 인상적이었던 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계속 인사를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덴마크는 이런 문화가 없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무뚝뚝하지?’ 싶었는데, 알고 보면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덴마크 사람들은 옷도 그냥 평범하게 입고 잘 꾸미는 사람이 없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니까 가능한 행동들이다. 이혼을 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괜찮고, 남의 눈치를 안 보니까 동창회에 가는 걸 편하게 여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건 내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건데, 이 자유는 평등과 안정에서 온다. 평등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보통 평등과 자유를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오히려 평등하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안정적이니까 창의적인 도전도 가능하다. 


우리나라가 덴마크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10가지로 정리했다. 그 중에 가장 부러운 것은 무엇인가?


인생학교다. 책 후반부에 우리 딸, 아들 이야기를 썼는데. 물론 허락을 받고(웃음). 딸이 대학생인데 덴마크에 취재를 같이 온 입장에서 안타까운 거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인생학교를 봤으니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인생학교에 가서 차분히 다지기를 했으면,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을 거다. 


인생학교, 즉 애프터스쿨(after school)은 덴마크 외의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시행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애프터스쿨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나라의 방과후 수업을 떠올리기 쉬운데, 덴마크의 에프터스콜레는 몇 시간짜리 프로그램이 아니다. 아예 1년을 통째로 빼내 만든 ‘또 하나의 학교’다. 덴마크의 초등학교는 9학년까지인데 고등학교는 10학년이 아니라 11학년부터 시작한다. 중간에 비는 10학년을 보내는 곳이 에프터스콜레다. 이른바 인생 설계 학교다.


덴마크의 에프터스콜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달라.


덴마크에는 250여 개의 에프터스콜로레가 있는데 3만 명의 10학년들이 다닌다. 원하면 집과 가깝고 9학년까지 다닌 기존 학교에서 10학년을 다닐 수 있는데, 대부분 집을 떠나 기숙학교 형태의 에프터스콜레를 선택한다. 사립학교가 대부분이지만 정부가 운영비의 50%를 지원해서 사실상 반 공립이라고 볼 수 있다. 종합 교육을 하는 곳도 있고 체육, 음악 등 특별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곳도 있다. 공통점은 공부보다는 인생 설계가 중심이라는 점이다.


에프터스콜레의 핵심 목표는 무엇인가?


에프터스콜레의 인생 계획 설계는 ‘스스로’와 ‘더불어’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부모를 떠나 이 곳에 온 아이들은 자립심을 키운다. 방 청소부터 시작해 집 안에서 생기는 일들을 토론하며 풀어간다. 좋아하는 것이 비슷한 학생들이랑 어울릴 수 있으니 아이들도 편해 한다. 국어, 수학. 축구도 배우지만 무엇보다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생각해보고 답을 찾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나라든 교육이 무너지면 성숙한 국가가 될 수 없다. 


처음 덴마크를 갔을 때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가질 않았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나? 행복사회는 무엇인가?를 묻고자 갔는데, 대답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 것?’로 사회를 봤더니 교육이 보인 거다. 


우리나라가 가장 빠르게 도입할 수 있는 것, 혹은 어렵지만 정말 필요한 문화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우선은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생각해봤으면 한다. 우리사회는 지나치게 하나의 길을 강조한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가졌던 하나의 측면이 경쟁을 너무 당연시 여기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루저가 너무 많아졌다. 아이들이 대학을 가는 것에도 ‘in 서울’이라는 단어를 만들지 않았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인원은 10%대인데, 그러면 나머지는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이게 사실 고비용, 고스트레스다. 우리나라는 성적우수상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그런 상이 없는 사회도 있고, 학급에 반장이 없는 학교도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바로 진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1년 정도 인생학교를 다닌 후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인생도 있는 것처럼.


오연호


대한민국의 인생학교, 실현 가능할까?


덴마크가 행복사회로 갈 수 있었던 건, 공동으로 합의한 어젠더가 있었고, 정치상황에 따른 변화 없이 지속적으로 실천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인생학교라는 어젠더를 설정했다면 한 정부로 끝내지 말고 최소 20년간은 준비하고 시행하겠다는 결의를 해야 한다. 어떤 핵심을 갖고 어젠더를 설정하고 장기적으로 추진한다면 불가능할 일이란 없다. 내가 알기로는 경기, 강원, 서울교육청이 지금 인생학교를 검토하고 있다. 장학사들이 직접 덴마크를 취재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학교란 공립이든 사립이든,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스스로 찾게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덴마크 취재를 다녀와서 저자 스스로의 변화도 있었다고. 먼저 오마이뉴스에서는 ‘자유독립 편집국’과 ‘아름다운 실패상’을 도입했다.


개인적으로는 최대한 여유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좀 행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웃음). 오마이뉴스에서 진행하고 있는 자유독립편집국은 수습기자 중심으로 하고 있다. 보통 회사에서 수습을 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부서에 배치되고 팀장의 지시를 받는 일인데, 자유독립 편집국을 통해 한 달간 원하는 취재를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다. 물론 이 제도는 상근기자에게도 열려 있다. 아름다운 실패상은 지난해부터 시즌별로 수여하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4명으로 시작해서 지금 110명이 넘었다. 소통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있다. 어떻게 잘 해내냐에 대한 과제가 있다. 지금 불만이 많은 직원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같기 때문에 편한 면이 있다. 


특히 어떤 독자들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으면 좋을까?


학부모나 교사들은 아마 많은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데, 신학기에 들어가서 바쁜 청소년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 30, 40대들이 많이 읽겠지만 오히려 고등학교 1,2학년생들이 읽는다면 뭔가 자신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에서도 종종 강의 요청이 오는데, 일반 강의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10명 정도를 패널로 뽑아서 몇 가지 주제를 갖고 토론을 하고 싶다. 현재까지 공개 강연을 신청한 70명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 버전으로도 펴낼 계획이라고.


초등학교 3~6학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어린이 버전을 준비 중에 있다. 강의를 하러 가면 가장  초롱초롱하게 경청하는 사람들이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와 교사들이다. 우리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하는데, 아이들이 직접 읽고 깨달은 바를 나눠도 좋을 것 같다. 


‘행복사회는 이런 사회’라고 정의를 한다면 어떤 표현을 쓰고 싶은가?


‘덴마크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회사 1위’로 뽑힌 글로벌 제약회사 로슈 데스크에서 만난 간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행복한지 아닌지를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출근할 때 내 발걸음이 가벼운지, 회사로 향하는 마음이 즐거운지가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더라. 학교에 다닐 때는 교실에 들어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것, 어른이 됐을 때 동창회에 나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어떻게 덴마크를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안에 이미 덴마크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자유, 평등. 안정, 신뢰, 이웃, 환경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의미 있는 곳에 기부를 하고 있고 활동을 하고 있고. 너무 자괴감 속에서 살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오연호 저 | 오마이북
덴마크는 훌륭한 복지제도가 있기 때문에 행복해졌을까? 복지는 곧 많은 세금을 동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행복사회로의 한 걸음을 주저하는 한국 사회. 하지만 행복사회의 비밀은 복지제도뿐만이 아니었다. 덴마크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남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으며 이웃끼리 연대하는 문화를 널리, 깊게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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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D다』의 저자인 배상민은 분명 성공한 디자이너다. 27세에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파슨스디자인스쿨의 교수가 되었고, 세계 최고의 디자인 회사인 스마트디자인과 데스키에서 근무했으며, 코카콜라와 존슨앤존스, 코닥, 3M과 같은 유명 기업들과 함께 작업하며 실력을 인정 받았다. 달콤한 명예와 화려한 생활로 디자이너의 성공을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일찌감치 성공을 이룬 디자이너였다. 그러나 배상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두를 움켜쥐기보다는 내려놓기를 선택했다. 2005년, 승승장구하던 뉴욕에서의 삶을 뒤로한 채 돌연 한국행을 결심한 것. 이후 카이스트 산업 디자인학과로 무대를 옮긴 그는 ‘나는 디자인한다. 고로 존재한다(I design therefore I am)’는 의미의 디자인 연구소 ‘ID IM’을 열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나눔을 위한 디자인을 창조해내고 있다. 


디자이너로서 배상민의 삶이 성공적이라 말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뉴욕에서 그가 이룬 성공은 꿈과 디자인이라는 철학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그곳에는 나눔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루는 3D(Dream, Design, Donate)의 마지막 한 조각을 찾기 위해 스스로 힘겹게 쌓아올린 성을 떠나왔다. 마치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듯 미련 없이. 그렇게 그는 움켜쥐지 않고 내려놓는 데 ‘성공’했고, 홀로 행복한 삶보다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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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한 가지


지난 9월 19일, 서울 도심의 작은 카페에서 만난 배상민 교수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배상민표 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언뜻 배기팬츠처럼 보이는 그의 바지는 파슨스 디자인 스쿨 재학 시절에 ‘한복 바지저고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디자인한 것이다. 개성 강한 뉴요커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스타일로 평가받던 이 옷에는, 디자이너로서 배상민이 가진 자기표현의 욕망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처음 ‘배상민표 바지’를 입었을 때는 사람들이 무대의상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저는 이상한 아이로 보고요(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옷이 저의 아이덴티티가 되었어요. 다른 디자이너들이 제 이름은 기억 못해도 이 옷은 기억할 정도니까요. 저한테는 하나의 브랜드가 된 거죠. 그런데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그 자체로 브랜드죠. 예전처럼 군중에 묻히면 안 되잖아요. 그 사람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대체 불가능한 것일 때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찾는 이유가 되고요. 어떤 분야의 일을 하든 자기만의 브랜드화 된 이미지가 있어야 해요.”


한 벌의 옷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디자인과 그 안에 담긴 ‘나다움’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배상민 교수에게 디자인과 자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나는 3D다』안에서 “자기만의 정답, 자기만의 관점, 자기만의 개성을 찾으려면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롤 모델을 찾으려면 벤치마킹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저는 벤치마킹이라는 말을 한국에 와서 처음 들었어요. 뉴욕의 디자이너들은 왜 벤치마킹을 안 했을까, 생각해 보면 이유는 간단해요. ‘누군가 이걸 만들어 냈으니 따라서 해보자’가 아니라 ‘우리는 그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벤치마킹 이전에 셀프마킹을 해야 해요. 내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배상민 교수는 다른 이의 성공사례를 모방하는 ‘벤치마킹’에는 그와 내가 똑같다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걷는 것은 자신의 꿈이 아닌 그의 꿈을 좇는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은 벗어버리고 ‘내가 누구인지’ 묻는 일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말했다. 


“파슨스디자인스쿨에 있는 친구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난리예요. 그런데 제가 카이스트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본 바로는, 천재라고 평가받는 이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더라고요. 정답을 제시하고 똑같이 따라해 보라고 하면 기가 막히게 해내요. 그런데 ‘네 것을 해봐’라고 하면 좀처럼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거죠. 셀프마킹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들여다 볼 시간이나 여유나 기회가 없었거든요. 부모님과 사회와 선생님이 만들어줬기 때문이에요. 결국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데, 사회적으로도 손해가 아닐 수 없죠.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되어 버리니까요.”


그가 정의하는 셀프마킹의 동의어는 자아인식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과 가장 잘 맞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디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워지는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가. 이상의 질문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 배상민을 ‘큰 성공을 거둔 디자이너’로 성장시킨 토양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잊어본 적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탐색이 끝난 후에는 성찰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아인식이 끝나면 자아성찰을 해야 해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들을 거듭할 때 자기만의 언어와 캐릭터가 나와요. 자아가 녹아들어간 캐릭터는 아주 고유한 거죠. 남과는 다른 시간과 기억이 담겨 있으니까 나만의 색깔이 나와요. 결국 자신이 어떤 인간이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인 거예요. 자신만의 브랜드, 창의성, 캐릭터, 스토리를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배상민표 바지’도 그런 연습 중의 하나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유치한 일이지만 ‘나는 나만의 것이 있으니 남들과는 다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발악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시도 덕분에 저만의 것이 생긴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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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되는 방법? 나만의 무대를 만들어라!


“한동안 파슨스에서 나는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였다”고 고백할 만큼, 유학 초기 그는 “병풍만도 못한 신세”의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미술학원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그림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유학길에 오른 이유는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관심 갖게 된 사진을 조금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함이었고, 사진과 만나기 전의 그는 꿈도 열정도 없는 영문과 학생이었다.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익히고 파슨스에 입성한 친구들과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코멘트도 듣지 못하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테러블terrible’이니 ‘호러블horrible’이니 온갖 나쁜 소리는 다 듣는” 날들도 비일비재했으니. 


그 시절 청년 배상민이 겪었던 당혹감과 혼란은 많은 이들에게 낯설지만은 않은 것이다. 열정으로만 가득 찬 시기, 같은 무대를 동경하는 친구들과의 경쟁은 으레 그런 모습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해 보는 일은 늘 초조하고, 누군가 앞서 나가기라도 하면 ‘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선 건 아닌지, 나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것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과 멀게만 보이는 꿈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고, 20여 년 전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100명의 사람이 모두 같은 걸 추구하면, 1등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99명은 병풍이 되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엑스트라처럼 생각되잖아요. 그런데 어른이 되면 내가 엑스트라인 것처럼 느껴져요. 저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내 인생에서는 내가 주인공인 거죠. 나만의 무대를 만들어 버리면 그 안에서 주인공은 나예요. 사회가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만 1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인 거죠.”


스스로가 주인공인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배상민 교수는 ‘나만의 색깔’을 찾아 나섰다. 그 시작은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이 없는-다양한 문화와 유행이 공존하는 맨해튼의 골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거리 위에서 서로 다른 문화들을 관찰하고, 그 차이에 대해 거듭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그림이 교수님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어떤 예술 사조에도 얽매이지 않는, 배상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각이 드러난 것이다.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실망하고 포기하는 건 비겁한 행동 같아요. 유명한 디자이너들을 보면, 이름도 없이 빛을 받지 못하다가 40대 50대가 되어서 갑자기 주목을 받는 경우가 있어요.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에요. 실패를 거듭하면서 오랜 시간 힘든 생활을 견디고 있었던 거예요. 소설가와 디자이너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대중과의 공감이에요. 수많은 인생 역경을 견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거죠. 오랫동안 꾸준하게 노력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과 스토리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중들은 공감해요.”


『나는 3D다』 안에서 배상민 교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수준의 감을 타고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흔히 디자이너는 타고난 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감’이라는 것 또한 노력이고 훈련이라고 말한다. 


나는 감각 또한 개발하고 학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재능이 없다는 타인의 냉혹한 평가, 자기 스스로 느끼는 불안과 불신에도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또한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무명 생활도 견뎌야 한다. 혜성처럼 나타나는 감 뛰어난 동료들에게 위축되지 말아야 하며 일희일비하지 않는 꾸준함으로 묵묵히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감 떨어지는 그(혹은 그녀)는 분명 일취월장한다. 내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역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해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3D다』


“제가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결과,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도 있어요. 정말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들이 있기는 한데, 만 명 중에서 한 명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항상 1등을 하는 건 아니었어요. 끝도 없이 올라가는 인생은 없는 법이잖아요. 오히려 너무 어릴 때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길을 힘들어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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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키우고 싶다면 관찰하고, 메모하고, 반복하라


‘감’을 기르기 위한 방법으로 배상민 교수가 추천하는 세 가지는 관찰하고, 메모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그가 ‘저널’이라고 명명한 메모장에는 이 모두가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일상에서 관찰한 풍경과 사람, 문제적 순간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기록에 그쳤다면 그가 이 메모장을 두고 ‘보물 창고’라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널에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인 ‘what if’가 숨어있다.


“어디를 가든 주변을 살펴보고 문제점을 찾아요. 그리고 ‘what if, 나라면 어떻게 바꿀까’를 생각하죠. 그렇게 생각한 내용을 저널에 적어 놓고요. 관찰하는 대상은 디자인된 물건뿐만이 아니에요. 사람도 관찰하고 그들의 패션도 관찰해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동선이나 인종마다 다른 반응도 관찰하고요. 누군가는 제품 디자이너가 인테리어나 여자들의 패션을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않냐고 물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달라요. 제품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저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디자이너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해결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물건이나 시스템은 해결의 매개체일 뿐이죠. 그러니까 저에게는 영역을 구분 짓는 일이 의미가 없어요.”


‘저널’ 속에 담긴 관찰과 메모의 시간들은 종종 새로운 디자인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2007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대상을 수상한 ‘롤리폴리팟Roly-poly pot’이 대표적이다. 평범한 화분처럼 보이는 이 제품의 남다른 점이라면, 아랫면이 평평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불룩하다는 것인데, 여기에 비밀의 열쇠가 감춰져 있다. 충분한 양의 물이 담겨있을 때에는 화분이 균형을 잡고 서있지만, 물이 부족한 상태가 되면 한쪽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나 목말라요’라고 몸으로 말하는 화분이라고 할까. 배상민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식물을 의인화한 화분”인 롤리폴리팟의 아이디어는 십 수 년 동안 저널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화초를 키웠던 그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물주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고 애꿎은 화초들을 죽이게 됐다. 새 화초를 사와서 더욱 정성을 기울여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상심에 빠진 그는 “열렬히 사랑했던 화초 ‘에마’마저 죽어나간” 어느 날 “저널에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에마를 잃은 슬픔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롤리폴리팟은 바로 그 날의 기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한 작품이다. 


“클라이언트로부터 디자인 의뢰를 받았을 때, 저널 속에서 그 힌트를 찾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에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경우죠. 가끔씩 학생들이 ‘어떻게 교수님은 모든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세요?’라고 질문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줘요. 어느 마을에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옆 마을에 천발천중의 사수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와 겨루기 위해 찾아갔더니, 그가 과녁이 없는 곳을 향해 화살을 쏘더래요. 그리고 자신의 화살이 지나간 곳에 과녁을 그리더라는 거죠.”


천발천중의 사수와 배상민 교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쓰는 저널의 방식이 그런 거예요. 저널이라는 구멍을 미리 뚫어놓은 거죠. 여러 가지 케이스로요. 그러다가 클라이언트의 제안을 받으면 이미 뚫어놓은 구멍에 과녁을 그려 넣는 거예요. 디자이너로서 가장 창피하고 자괴감이 느껴지는 순간은 ‘이미 뚫어 놓은 구멍이 없어서 클라이언트의 제안을 거절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저널에 구멍을 뚫어놔야 하는 거죠. 클라이언트가 그려 놓은 과녁에 조준해서 쏜다면, 어떻게 매번 적중시킬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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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드는 디자이너


천발천중의 사수 배상민에게도 아직 그리지 못한 과녁이 남아있었다. 어떤 기업도 요구하지 않았던 과녁, 그것은 나눔이었다. ‘어떻게 하면 디자인으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그 끝에서 얻은 아이디어들은 그의 저널 속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기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디자이너 배상민에게 기업이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돈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해서 소비를 이끌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 이를 두고 배상민 교수는 “쓰레기만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단언했다. 그가 『나는 3D다』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고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뉴욕에서 잘나가는 디자이너로 살던 시절, 나는 돈을 좇는 소비문화의 일선에서 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내 직업이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크 푸드처럼 쉽게 가치 없는 물건들로 사람들의 눈을 가려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일. 나 역시 언젠가 그 세계의 논리에 지배될까 두려웠다. 『나는 3D다』.


자신이 소비주의의 첨병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배상민 교수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3년 전 카이스트 측에서 제안한 대로 산업 디자인학과의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한 것. 물론 한국으로 간다고 해서 그가 원하는 사회 공헌 디자인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가 뒤따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더 큰 나눔이 필요한 곳으로, 더 많은 재화를 나누어줄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


뉴욕의 유명 디자이너라는 타이틀도 대단한 클라이언트들의 칭찬도,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소비주의 문화의 부속품으로 사는 일은 공허하고 무의미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할 작정이었다. 내가 이룬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더 가치 있는 디자인, 90퍼센트의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 인간애를 실천할 수 있는 디자인,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디자인이 그것이었다.『나는 3D다』 .


“뉴욕이라는 곳은 저에게 도전이었고, 너무나 새롭고 재미있었어요. 14년 동안 지내면서 한 번도 외롭다거나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정도로요. 그런데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감이 들었어요. 그리고 10년 후의 내 모습이 뻔히 보이더라고요. 더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테고 회사가 더 커지겠지만, 똑같은 디자인을 하고 있겠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조금 더 크게 할 뿐인 거예요. 그런 선배들의 모습을 많이 보기도 했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싶었어요.”


뉴욕에서 한국으로, 촉망받는 디자이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의 변화는 그에게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도전이 그렇듯이 약속된 미래도 없었다. 뉴욕에서 이룬 성공을 뒤로한 채 고국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했을 때,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교수들이 그에게 ‘미쳤다’고 이야기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카이스트는 저와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죠. 그동안 제가 감성의 끝을 달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1등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카이스트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야에서 1등이 되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요. 한국이라는 나라 역시 도전이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제 고향이기는 하지만, 한 번도 그곳에서 디자인을 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갈등했던 거죠.”


많은 우려가 뒤따랐고, 새롭게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불투명했으며, 이미 얻은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저는 인생에서 큰 결정을 할 때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해요. 이미 많은 사람을 걸어간 길은 그 끝을 알 수 있으니까 안심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항상, 객기 때문인지 반항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가지 않아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그 끝을 뻔히 아는 길을 뭐 하러 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길은 신기해 보이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을 때 제 나이가 서른 넷 즈음이었어요. ‘아직 청년인데 벌써 안정적인 삶을 살면 안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죠. 한국에 가면 제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상상하기도 했고요.”

 

나눔의 디자인으로 달성한 그랜드슬램


그의 간절한 바람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한국으로 돌아온 1년 뒤, 배상민 교수는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월드비전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나눔을 목적으로 판매될 제품의 디자인을 맡아줄 수 있겠냐는 요청이 뒤따랐고, 그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좋아요’를 외쳤다. 당시를 회상하며 배상민 교수는 “그 순간 내가 찾아 헤매던 길이 눈앞에 열리는 느낌이었다”고 적었다. 


그렇게 월드비전과 배상민 교수가 함께한 ‘나눔 프로젝트’는 세계 최초의 접이식 MP3 플레이어 ‘크로스큐브’를 시작으로 전기를 이용하지 않는 친환경 가습기 ‘러브팟’ 전등갓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빛의 밝기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스탠드 조명 ‘딜라이트’에 이르기까지, 실용성과 심미성 모두를 갖춘 제품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크로스큐브’는 세계 최고의 디자인 대회인 IDEA에서 애플의 아이팟을 제치고 은상을 수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아이팟은 동상에 머물렀고, 금상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차지했다). IDEA의 평가 기준 중 한 가지가 북미 판매량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개 대학 연구팀인 ‘ID IM’이 다국적 기업들 사이에서 이뤄낸 성과는 믿기 어려운 ‘이변’이었다. 이밖에도 나눔 프로젝트 제품에 대한 찬사는 곳곳에서 쏟아졌다. ‘러브팟’은 IDEA 뿐만 아니라 독일의 iF와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일본의 굿 디자인 어워드를 모두 수상하며 세계 4대 디자인상을 석권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IDEA와 일본 굿 디자인 어워드는 ‘러브팟’에 이어 ‘딜라이트’에도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일생동안 단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상을 배상민 교수가 독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결은 간단하다. 그가 디자인한 나눔 프로젝트 제품들은 굿 디자인의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기능과 미학, 상징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부의 목적으로 물건을 구입할 때 디자인적 요소나 기능적 측면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조금 덜 아름답더라도, 좋은 일을 위해 구매하는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배상민 교수의 관점은 다르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혹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구매했을 뿐인데 그 수익금이 좋은 일에도 쓰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착한 소비’에 동참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눔 프로젝트의 성공 이면에도 이렇듯 ‘배상민식 발상의 전환’은 숨어있었다. 그 결과 나눔 프로젝트는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총 15억 원의 수익금을 조성했고, 240명의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월드비전과 같이 시작한 ‘나눔 프로젝트’는 죽을 때까지 할 거예요. 그 뒤에도 후배들이 이어서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고요. 나눔 프로젝트는 선진국에서 자선 상품을 만들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현금을 기부하는 건데요, 지금 제2의 나눔 프로젝트를 기업과 함께 진행하고 있어요. 저는 모든 기업이 이런 프로젝트를 했으면 좋겠어요.”


‘나눔 프로젝트’를 통한 재능 기부 외에도 배상민 교수는 자신이 직접 기획한 ‘시드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생존을 위협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돕고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그 어떤 후원도 받지 않고 배상민 교수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나는 저 척박한 땅이 아니라 이 풍요로운 땅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내 선택도 노력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하나의 차이 때문에 나와 그들은 엄청나게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중략) 내가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이 행운이 당연한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행운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껏 당연한 줄만 알았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시드 프로젝트Seed project’의 시작이 되었다. 『나는 3D다』


시드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 배상민 교수는 아프리카에 산재한 문제들 중 ‘모기’에 주목했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사망하지만 백신의 보급률은 낮고 위생 시설은 부족한 탓에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지속적으로 이용 가능하면서 실질적으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 끝에 배상민 교수는 ‘사운드 스프레이’를 고안해냈다. 흡혈을 하는 암컷 모기가 수컷 모기의 소리를 피해 다닌다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한 이 제품은, 수컷 모기의 주파수와 같은 소리를 발생시켜 암컷 모기의 접근을 차단한다. 간단히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전방 5미터 이내에 모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제품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만으로 충전을 할 수 있다. 


“진짜 그들을 돕고 싶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마침내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말로 ‘진짜 나눔’을 정의하는 배상민 교수. 그는 2008년을 시작으로 매년 ‘ID IM’ 연구팀의 학생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찾아 식수와 전기부족 등 그곳의 이웃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찾아 떠나고 그곳으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이끄는 이유는 단 하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불편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내가 그들보다 더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도, 모두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한 이 진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잊고 있다.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 아이들의 눈을 보면 알게 돼요. 누군가는 저를 천부적인 아이디어로 성공한 디자이너라고 하지만, 그건 만들어진 이미지죠. 저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나에게 이렇게 많은 기회가 온 걸까요. 결코 제가 잘나서 얻은 기회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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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란 빚을 갚는 것


그도 한 때는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이야기는 20여 년 전의 뉴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학을 떠났던 1990년대 초반에는 뉴욕에 한국 유학생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 중에는 정재계 인사들의 자녀들도 다수 있었죠. 그들 사이에 있을 때는 제가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뉴욕으로 유학 와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한국의 학생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들 모두가 뉴욕으로 올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그때쯤 우연히 TV에서 한국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를 봤어요. 그런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저렇게 힘겹게 육체노동을 하면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벌어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들이 볼 때 나는 얼마나 부러운 사람인가 싶은 거예요. ‘나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도대체 내가 저들과 다른 게 무엇이기에 이렇게 다른 삶을 살고 있나’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만약 부모를 잘 만나서 갖게 된 행운이라면, 부모를 잘 만나기 위해 내가 한 노력이 뭔가’하고 저 자신에게 묻게 된 거죠.”


그때부터 배상민 교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노력의 결과로 주어진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자신에게 그토록 많은 기회가 주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가서 더 극명하게 알게 됐어요. 제가 카이스트에서 가르치는 학생들, 소위 천재나 영재라고 하는 아이들의 눈빛과 그곳 아이들의 눈빛이 다르지 않더라고요. 똑같았어요. 제가 그 아이들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왜 저는 뉴욕까지 가서 공부를 하게 됐고 그 아이들은 대학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살아갈까요? 제가 더 많이 노력했거나 더 많은 업적을 쌓았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저는 단지 기회를 갖게 되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기회는 그들을 위해 써야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들을 대신해서 기회를 갖게 됐으니까 저는 그들에게 빚을 진 거예요. 그러니 빚을 갚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잊고 있어요. 자신이 잘나서, 혹은 자신의 부모가 열심히 살아서 갖게 된 거라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아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어요. 태어나자마자 일주일에 한 끼밖에 못 먹는 아이들이 공부하고 일할 기회를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어요?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으면서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배상민 교수는 자신에게 나눔이란 빚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회를 가진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삶을 한 단계 더 윤택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배상민 교수의 작은 날갯짓은 이미 시작되었다. 


“디자인은 배려예요. 나를 위해서 디자인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모든 디자인에는 타겟 유저가 있어요. 사용할 사람을 생각하고 만들기 때문에 배려가 들어가는 거죠. 그 본래의 진정성에 맞게만 한다면, 디자이너는 벌써 나누는 사람이에요. 제가 더 적극적으로 사회 공헌적인 디자인을 하게 되면, 다른 디자이너들이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누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생업 때문에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 없는 사람들도 쉽게 동참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서 재능을 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는 『나는 3D다』의 독자들에게도 “세상에 나눌 게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3D다』를 읽은 독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뭔가 큰 것을 통해서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의 환경 안에서 나눌 수 있는 게 무척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고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동네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요. 저처럼 아프리카를 가거나 디자인을 공부할 필요도 없죠.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 기쁨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보세요. 분명 창의적인 생각들이 떠오르실 거예요.”


누군가는 디자이너로서 배상민 교수의 성공 비결을 찾고자 『나는 3D다』의 책장을 펼 것이다. 그러나 책장을 덮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성공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움직임으로 거대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존재들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 것이다. 한 존재는 다른 한 존재의 삶을, 그리고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사로잡혔다면, 아마도 당신은 배상민 교수가 이야기하는 나눔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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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D다배상민 저 | 시공사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은 ‘3D’다. 나다움을 찾아 자신만의 꿈을 꾸고(Dream), 그 꿈으로 삶을 디자인하며(Design), 궁극적으로는 세상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Donate). 그의 3D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 책은 그의 꿈과 디자인, 나눔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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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권영국 변호사 “세월호 진상 조사 꼭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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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배에는 승객 447명과 승무원 29명이 타고 있었다. 이중에서 결국 304명은 땅을 밟지 못했다. 사건은 참사가 되었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선장과 선원의 대처가 잘못됐다는 지적부터 시작해서 청해진 해운의 안전 관리가 미흡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조 과정에서는 해경과 안전행정부 등 국가 기관이 무능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가 터져 나왔다. 사실이 드러날수록 안전 관리 소홀이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반적인 모습이라는 게 나타났다. 이대로라면 언제든 제2의 세월호, 제3의 세월호 참사가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을 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구조적으로 따져보고자 했다. 선장이 잘못했다, 선원이 잘못했다, 해경이 잘못했다, 이런 수준의 문제 제기만으로는 생명이 위태로워진 대한민국을 바꿀 수 없다는 위기 의식으로 권영국 변호사, 박인동 변호사, 손명호 변호사, 조영관 변호사가 책을 써내려갔다.  


『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은 세월호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묘사한 책이기도 하다. 최근 급속도로 진행된 규제완화와 민영화, 외주화가 생명과 안전에도 영향을 미쳤을 때 어떤 비극이 생길 수 있는가를 냉철한 어조로 분석한다. 자칫 감정적으로 흐르기 쉬움에도 냉철하게 구조 분석에 집중했다는 점은 이 책의 강점이다. 세간에 떠도는 의혹도 최대한 배제하고 세월호 참사의 성격을 규명했다. 공저자 중 한 명인 권영국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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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국가가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건


416 세월호 사건 이후에 어떻게 지냈나.


충격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나 자신이 세월호와 관련해서 뭔가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막상 세월호가 아닌 다른 뭔가를 할 수도 없다. 그러던 중에 책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특별법 제정을 두고 계속 논쟁이 이어졌다. 그런데 청와대와 집권여당의 수사권, 기소권 반대에 부닥쳐 특별법이 사실상 표류 상태에 있다. 그로 인해 세월호 참사의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전제가 되는 진상조사의 절차와 틀에 묶여 실질적인 진상규명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그러던 중 참사의 내용에 대한 접근과 이를 통해 역으로 특별법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적 주장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책을 만들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은 언론에서 많이 보도했고 『내릴 수 없는 배』와 같이 책으로도 다뤄졌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다. 복잡한 문제이기도 한데, 『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은 어떤 관점으로 세월호에 접근했나.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의문이 많다. 배가 왜 침몰했을까에 관해서도 의문이 있지만, 침몰 후에 참사가 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국민들이 엄청나게 분노했고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을 보호할 거라 여겼던 국가와 정부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걸 TV 생중계로 목격하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구조와 제도, 정책, 그리고 정부의 무책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책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인가.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지향해온 방향이 생명이나 안전보다는 기업의 이윤과 돈벌이에 치중됐다. 그 결과 안전과 생명의 문제도 국가기관을 통한 보호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 나아가 보험이나 민영화 등 돈벌이의 문제로 전환되어왔음을 세월호 사건의 단면을 통해 간파하게 되었다. 따라서 세월호 사건을 말단에 있는 관련자 처벌과 사후적 보배상의 문제로 바라보아서는 사건 현상의 배경과 원인을 이루고 있는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있는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사건 직후 민변에서 특위를 만들었다. 그 이후로 진상규명을 위한 17대 과제를 발표했고, 이후로 몇 차례 보고서를 냈다. 그런데 보고서는 딱딱해서 일반인이 읽기에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접근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일종의 대중서 형태의 『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큰 사건이 생기면 음모론이 나오기 마련이다. 수많은 음모론이 등장했는데 책에서는 그런 의혹을 세세하게 다루진 않았다. 일부러 절제한 느낌도 드는데.


그렇다. 여러 가지 의혹이 있을 수 있다. 세월호 사건에도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다. 음모론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유효한 수단일 수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구조적인 문제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가림막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의혹도 명쾌하게 해명되어야겠지만, 세월호 문제의 핵심은 규제를 비용과 등치시키며 기업의 이윤추구를 비호해온 정부의 일방적인 규제완화 정책, 안전업무의 외주화 등 관련 법제도적 문제점, 관피아로 명명되는 유착구조의 관행 등등이 얽혀 우리나라의 안전관리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켜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의 발생원인과 발생주체가 누구인지 추적할 필요가 있다. 전 정권은 비지니스 프랜드리(business friendly)를 외치며 기업친화적인 정책으로 규제 완화를 지속했고 현 정부는 한술 더 떠 규제 혁파를 내세우며 규제총량제까지 도입했다. 이런 정책들로 국민의 생명이나 안전을 위한 제반 제도적 장치가 어떻게 해체되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만 왜 복원성이 없는 배가 백주대낮에 활보하고 다녔는지, 화물과적이나 결박에 대한 안전 감독 없이 선주나 선원의 임의대로 운행할 수 있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안전 감독이 서류 하나로, 혹은 전화통화로 이뤄졌다는 게 밝혀졌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감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태를 볼 수 있는 객관적 분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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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 외주화에 주목해야


책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의혹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국정원과 정부가 수세에 몰려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무언가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뚜렷한 물증은 없다. 객관적인 물증이 존재해야 한다. 법률가로서 보자면, 구체적인 증거 없이 이런 문제 제기를 계속 하는 건 신뢰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물론 의혹 제기를 중단하자는 취지는 아니다. 해명되지 못한 의혹은 당연히 진실규명의 조사대상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좀더 입체적이고 구조적인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했다.


민영화, 외주화를 책에서 심도 있게 다뤘다. 구조 과정에서도 구조 업무를 외주화한 문제가 부각되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로 계속 악화된 게 아닌가


IMF 이후에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을 민간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공적 영역이 상당부분 민간의 영역으로 넘어가 민영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공적 영역 중에서도 안전이나 생명을 다루는 분야는 국가가 재해를 예방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무를 져야 하지만 그 책무를 민간에게 떠넘기거나 포기해왔다는 사실이다. 안전뿐만 아니라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분야에서 민영화, 외주화가 지나치게 진행되고 있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나타났듯 안전을 관리 감독하는 업무가 해운사가 조합원으로 가입된 해운조합으로 넘어가 있고, 검사는 해운사가 출자한 사단법인(한국선급) 등에서 이루어진다. 구조도 마찬가지다. 2012년 수난구조법을 개정하여 해양구조협회를 신설토록 하였는데, 사실상 해경이 구조업무를 해양구조협회에 위탁해버리는 구조를 띠고 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문제를 해결할 때는 국가가 모든 힘을 집중해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런 업무를 민간으로 이양되도록 법이나 제도를 바꿨다. 민영화가 무조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지만 민간은 비용문제를 따져야 하고,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안전이나 생명을 비용과 이윤으로 전환한다는 의미는, 돈이 안 되면 국민의 안전이나 생명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린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방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위험한 상태다. 불필요한 규제는 당연히 없애야 하지만 적어도 안전, 생명에 관련한 규제까지 풀어 해치는 건, 국가의 책무를 스스로 내던지는, 포기하는 행위다.


대한민국에서는 큰 사건이 터지면, 가장 먼저 비난의 화살이 향하는 곳이 대통령이다. 


조원진 의원이 세월호 사건을 조류독감에 비유해 언론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조류독감이 발생해 대통령이 그에 대한 대책을 지시했다고 하여 그에 대해서도 일일이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하나 뭐 이런 취지였던 것 같다. 우선, 비유가 크게 잘못되었다. 사람의 생명을 조류에 비유함으로써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했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그 발언에서 볼 수 있는 문제점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 태도다. 사적 영역에서 선박의 침몰이나 조류독감의 발병일 수 있다(물론 이 과정에서도 관리감독이라는 공적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침몰된 선박에서 생명을 구조하거나 발명된 조류독감의 확산을 방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국가의 책무인 공적인 영역이 된다. 공적 영역에서 국가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그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만 대통령은 당연히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해양수산부 장관이나 해경청장이 잘못했을 때는 누가 바로 잡아야 하나?. 


두 번째는 구조와 관련된 문제이다. 침몰 후 배가 침몰한 시간을 고려하면 승객의 생명을 구조할 수 있었다. 해군이 할 거냐, 해경이 할 거냐, 안정행정부가 할 거냐, 혼란에 빠졌다. 법적으로는 안행부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본부장을 맡아서 구조업무를 제대로 지휘해야 했다. 실제로는 해경이 구조본부를 만들고 구조본부장을 맡았다. 어떤 곳이 주관하든지 관련 정부기관은 국민을 구조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제대로 못했다. 각 정부부처의 장이 자기 역할을 못하면 누가 이를 지휘?감독할 것인가. 행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정치적 법적 책임은 무겁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로부터 중대부 사무실에 방문할 때까지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 그런데 아직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른바 7시간 의혹인데, 특히나 우리처럼 강력한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 국민은 알아야 한다. 


국민이 왜 엄청난 비용을 쓰면서 대통령 선거를 하겠나. 대통령은 취임할 때 헌법 준수하도록 선서한다. 헌법 34조 6에 보면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나온다.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책무이므로 당연히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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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 진상조사를 제대로 해야 원인을 알 수 있어


특별법 두고 잡음이 여전하다. 여러 오해도 있는 듯한데.


특별법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진상조사를 제대로 해야 원인을 알 수 있으니까. 사람이 아프면 진료를 한다. 질병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질병 원인을 파악하는 건 처방하기 위해서다. 특별법도 똑같다. 진상조사를 제대로 해야 발생 원인을 알고, 원인을 알아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안전사회,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생기면 직접 당사자만 처벌하고 회사에 손해배상 물리는 정도로 끝났다. 이것은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상처를 봉합만 하면 된다는 태도이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경찰, 검찰 조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나.

 

청와대, 해경, 해양수산부, 안행부 이런 국가기관을 조사할 때 검찰이 지금까지 보여왔던 태도로보면 국가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성역 없는 수사를 하려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본 거다. 특별조사위원회 같은 형태를 만들어서 정부로부터 독립된 권한을 부여해야 가능하다. 외국 사례를 보면 대형참사가 발생하면 독립적인 권한을 부여해서 집중적으로 조사나 수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별도의 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때 이원회는 각 영역 전문가를 포함하여 꾸려진다. 대표적으로 미국 911 테러 때도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다.


대형참사가 발생할 때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수많은 독자일 텐데, 독자에게 한마디 한다면.


감정적인 형태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대형참사에 책임이 있는 정부나 권력에 분노해야 하는 건 맞다. 분노가 모여야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적어도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문제를 보기 위해서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의혹이나 음모론에 지나치게 빠지면 구조적인 문제점을 놓치기 쉽다. 


아무리 개인이나 민간이 진상을 파헤친다고 해도, 법원 판결이나 공적 기구의 공신력 있는 결정이 없으면 사실관계 확정이 안 된다. 국가 기구의 조사나 결정이 기준이 될 텐데, 그런 면에서 공적 기구에 의한 진상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공적인 결론을 제대로 내려야 사태가 일단락될 수 있다. 이 부분을 관철하려는 노력은 정부와 국회가 수락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의 내용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진상조사가 끝날 때가지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국민들은 유가족에게 약속을 했다. 잊지 않겠다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런데 요즘 일부 사람들이 ‘피로감’을 이야기한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됐지 않았냐고. 참으로 서글프기 그지없다. 참사의 진상과 관련하여 제대로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됐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직 침몰과 참사에 이르는 원인에 대해 제대로 밝혀낸 게 없다. 


또 하나 사회적인 추모 분위기 때문에 민생, 경제가 타격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이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한 악의적인 수법으로써 피해자인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관동대지진이 조선족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몰아 죄 없는 생명을 빼앗은 것과 성격상 크게 다르지 않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요구와 경기가 관계 없음이 숙박업 생산지수나 음식 및 주점생산지수로 증명됐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 국민이 현재까지도 우리 이웃의 아픔 때문에 계속해서 소비 안하고 유흥을 절제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면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위한 조사기구와 이를 제대로 반영한 법은 진작에 만들어지고, 그 진상도 상당 부분 밝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 요구가 마치 사법질서를 흔드는 것처럼 호도하고 유가족들의 잇속을 챙기려는 것인 양 왜곡해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사건의 책임자였던 정부와 여당은 진상규명을 위한 조치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상규명과는 관련이 없는 민생과 경제활성화를 내세워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그만하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요 국민에 대한 기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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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 민변의 기록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저 | 생각의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은 세월호 참사에 직면하여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이하 민변 세월호 진상규명 특위)’를 구성”했다. 그 후 민변 세월호 진상규명 특위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17대 과제를 제시하고, 2권의 검토 보고서”를 발표하여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과 원인을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이라는 책을 펴내게 되었다.




김영하 “소설 잘 쓰려면 엄마가 놀랄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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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소설가 김영하가 귀국했다. 미국 뉴욕으로 떠난 지 4년 만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굵직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용산 참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4대강 사업에 이르기까지. 당시 “망명 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해외에 머물면서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하던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다양한 매체에 산문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 데 엮어 산문집 『보다』를 출간했다. 


“해외에 머물면서 한국 사회를 바라볼 때, 사건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볼 수 있다는 건 장점이었어요. 하지만 사건의 의미라는 건 사건 자체로만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사회적 정서가 모여서 완성되는 건데, 밖에 있으면 그걸 잘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사람들과 좀 멀어진 느낌이 들었고요.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와  그 안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요. 글은 가장 좋은 생각의 도구잖아요.”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보다』


김영하 작가 특유의 예리한 시선에 포획되어 『보다』라는 투명한 유리수조 안에 담겨진 우리 사회의 모습은 분명 익숙한 것들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손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스마트폰,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화되는 노동 계층, 귀성 차량뿐만 아니라 택배 기사들까지 전쟁터로 몰아넣는 명절의 풍경… 한 가지 낯선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바라보는 김영하의 시선이다. 


그는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텍스트들을 넘나들며 솜씨 좋게 그것들을 봉합해낸다. 그리고 자신만이 들려줄 수 있는 ‘신선한’ 해석을 완성시킨다. 그 사이사이에 녹아들어 있는 김영하 스타일의 위트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소설에서는 만나볼 수 없었던 작가 개인의 기억과 감성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도 산문집 『보다』만이 가진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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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산문, 요리에 비유하자면 쓰는 칼이 다른 것



귀국한 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저 같은 작가는 그냥 집에서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그런 생각들을 신나게 쓰고 사는 게 바람직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사회 문제 같은 건 신경 안 쓰고요. 그런데 뭔가 무척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에요. 2012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느낌이에요. 정확히 무너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게 항로가 바뀌었다고 할까요? 한국이라는 배가 있다면 어딘가로 잘 가고 있다고 모두가 믿었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데로 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그리고 나 자신도 그런 거에 너무 무지했던 것 같고요.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보고 썼던 거죠. 자기 공부의 일환이기도 해요. 


소설로 쓰게 되는 소재와 산문으로 쓰게 되는 소재는 어떻게 다른가요?


산문을 쓰든, 소설을 쓰든, 강연을 하든, 그 모두가 사실은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소설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가정을 하는 거죠. 제가 1인칭의 살인자 소설을 썼다고 해서 ‘김영하가 살인자인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잖아요(웃음). 그런데 산문은 그런 보호막이나 장막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소설은 훨씬 더 분방하게 여러 가지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산문을 쓸 때는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지는 면이 있죠. 


소설과 산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소설은 딱히 이렇다 할 할 말이 없어도 괜찮아요. 무언가 말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건 아니잖아요. 소설은 흥미로운 정신의 미로 같은 걸 설계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탐험할 수 있도록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일종의 정신적 테마파크를 건설하는 거죠. 그와 달리 산문에는 반드시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돼요. 하나의 주제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감정적이라기보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산문에는 남다른 생각이 담겨 있어야 돼요. 남과 똑같은 생각을 풀어내기 위해서 쓸 필요는 없잖아요. 


산문을 쓰는 방식은 어떤 건가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얘기를 누군가 전에 했는가, 그리고 했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했는가, 이 얘기를 지금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게 돼요. 소설은 그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아요. 그냥 흥미롭고 굉장히 다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산문과는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소설보다는 산문을 쓰는 일이 더 수월하지 않으세요? 


요리에 비유하자면 쓰는 칼이 다른 거죠. 고기를 자를 때보다 적은 힘이 들어간다고 해서 생선을 손질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더 섬세한 칼이 필요하듯, 칼의 종류와 칼을 쓰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할까요? 


『보다』안에 담긴 작업은 우리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작가님께서 이해한 바로는 지금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변화라면, 예전보다 사회가 가진 희망의 총량이 많이 사라진 느낌이에요. 이제는 희망을 품는 것은 고사하고 다들 자기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라도 지키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침이 조금 더 야만 쪽으로 기운 것 같아요. 약자를 존중하고 사회적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 문명이라면 그 반대쪽으로 많이 움직인 것 같은 거죠. 


작가님에게 지난 2년 시간은 어떤 감정들로 기억될까요? 


글쎄요... 조금 안타까움? 그리고 조금 막막하고요. 개인적으로 제가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제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잘 살아야 되잖아요. 어제도 사인회를 했는데, 젊은 독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몇 년 째 취업 준비를 하는 이들이 제 독자라는 걸 알게 돼요. 저는 그들이 자기의 존엄성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스펙 쌓기도 바쁘고, 그 와중에 돈도 벌어야 되고, 그런데 왜 소설 같은 걸 읽을까요? 크게 도움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도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책을 보려고 노력하고, 제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듣기도 한단 말이죠. 그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인간다움, 존엄을 지키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더 존중되고 지켜졌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안타깝죠.


『보다』에는 작가님이 대학 시절에 만난 총각 점쟁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앞으로 말과 글로 먹고 살게 될 거라는 예언을 했다고요. 


그때는 여러 가지 얘기를 들으면서 그 중 자기 마음에 드는 걸 쭉 가져가는 거죠. 제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예로 들었던 영화 <관상> 같은 경우를 보면, 수양대군 같은 사람은 자기가 왕이 될 거라는 암시를 찾았었겠죠. 결국 자기실현적 암시들이 필요한 거예요. 저는 옛날부터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다만 그게 어떤 글일지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아, 그 길로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운이 좋아서 등단도 빨리 한 편이고 취업 면접 같은 걸 본 적도 없어요. 이력서를 내 본 적도 없고요. 그냥 그렇게 살다 작가가 됐어요. 그럴 때 그런 말이 도움은 됐겠죠.


등단과 취업 사이에서 갈등하지는 않으셨나요?


작가로 살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왠지 직장인으로 살게 될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건 확실히 알았어요.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습작할 때 이대 앞에 가서 귀를 뚫었어요. 친구들이 말하길 귀를 뚫으면 취직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이후에도 10년 정도 귀걸이를 하고 다녔어요. 예전 제 소개 글에 보면 문학상 시상식장에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때가 귀 뚫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냥 귀걸이가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였죠.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는 굉장히 불안해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작가님에게 필요한 자기실현적 암시는 무엇인가요?


요새 제가 계속 거듭하여 생각하는 것은 ‘계속 건강하게 작품을 쓰는 작가로 오래 가고 싶다, 오래 갈 것이다’ 라는 거예요. 출판의 미래도 어둡고, 독서 인구도 점점 줄어들지도 모르고, 그런 상황에서 어려움이 있겠죠. 그런데 그냥 ‘앞으로도 다른 데 한 눈 팔지 않고 계속해서 작가로 살아갈 거야’ 하고 생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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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자기에게 맞도록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세상에 맞춰 자신을 바꿀 것이냐, 세상을 자기에게 바꿀 것이냐. 아마도 모든 예술가의 고민일 것이다”라고 적으셨습니다. 어느 편에 속하시나요?


다른 직업은 잘 모르겠지만, 예술가는 어느 정도 자기에게 맞도록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무엇이 예술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계속 바뀌잖아요. 고정되어 있는 기준에 맞춰서 그 안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건 예술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자기 예술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예술가라면, 그런데 그것이 기존 예술계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당한다면, 새롭게 자기의 영역을 선포하고 거기에서 왕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보다』에서 공개하신 「비상구」의 탄생 비화가 떠오릅니다. 그 무렵 한국문학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데, 같은 고민 끝에 발표하신 또 다른 작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이 있죠. 거의 대부분 다 그래요. 「피뢰침」도 그렇죠. ‘벼락 맞으러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를 써볼까’라고 했을 때 제 아내가 웃었어요. 농담인 줄 안 거죠. 말하자면 그런 건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만화에나 나오는 얘기 같잖아요. 실제로 처음에는 제 소설들이 문학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전개도 빠르고 기괴한 사건들이 일어나니까요. 가족들 간의 중첩된 문제나 진지한 고민을 끌어안은 운동권이 등장하는 우리 근대 문학과는 너무 달랐던 거죠. 「흡혈귀」 같은 경우도 당시에는 굉장히 낯선 소재였죠. 그때도 ‘이런 걸 발표하면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런 고민을 했던 작품들이 늘 괜찮았어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빛의 제국』『검은 꽃』도 그랬죠.『살인자의 기억법』도 마찬가지였어요. ‘독자들이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데 70대 노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읽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죠. 게다가 치매라고 하니까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사람들이 비웃거나 ‘안 될 거야’라고 이야기하면 투지를 느껴요. 늘 그런 걸 쓰고 싶어요.


반발심이 생기는 걸까요?


그렇다기보다는 본성인 거죠. 저는 문학이라는 것이 써도 되는 것만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써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을 써오면서 확장되어 온 게 문학의 역사잖아요. 옛날에는 아주 고상한 얘기만 쓰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작가로 활동하면서 영역을 넓혀온 거잖아요. 어떤 작가들은 자기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어가서 계속해서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는 반면, 저는 탐험가에 가까운 작가예요. 아직까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것을 쓰고 싶어요. ‘왜 그건 문학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해요. ‘왜 그런 얘기를 쓰면 안 된단 말인가’ 싶은 거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문학으로 만들 수 없는 이야기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문학이고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평가는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팔리는 이야기와 잘 팔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잣대로 작품을 판단하니까요.

 

장편의 경우에는 한 작품을 쓰는 데 보통 1년~3년, 길게는 5년도 걸리잖아요. 그렇게 고생을 해서 썼는데 완전히 안 팔린다고 하면 힘이 빠지는 일이기는 해요.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는 이왕이면 독자들한테도 사랑받을 수 있는 걸 쓰라는 건데, 그렇게만 쓸 수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소설은 쓰는 동안 작가 스스로 납득이 잘 되지 않으면 힘이 떨어져요. 내가 이걸 왜 써야 되는지, 이걸 쓰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끝없이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냥 많이 팔기 위해서만 쓰겠다고 한다면, 저는 잘 못 견딜 것 같아요. 의미도 없고요. 그렇다면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죠. 책으로 거부巨富를 쌓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예전의 「비상구」처럼 지금도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작품들이 있나요?

많아요.


그 작품들은 어떤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쎈 이야기’여서 그런 건 아니고요. 잘 쓰지 못한 소설들인 거죠. 사람들이 읽으면 안 돼요, 그런 건(웃음).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는 그 이야기를 다룰 만한 능력이 없는 거죠. 좋은 이야깃감과 나쁜 이야깃감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작가가 그걸 다룰 역량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인 거죠. 그런데 때가 되면 그게 빛을 발할 때가 있어요. 『살인자의 기억법』 같은 이야기기도 사실 10년 전에 생각해놨던 거거든요. 그런데 마땅한 문체와 인물을 얻기까지, 그리고 그걸 제가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될 때까지 10년이 걸린 거예요. 가끔씩 서랍 속에 있는 작품들을 꺼내어 보기도 하는데 ‘혹시 다시 써볼 수는 없을까, 다르게 고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봐요.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넣어놓죠. 그렇게 서랍 속에 넣어둔 작품이 발표한 작품의 2배 정도는 될 거예요.


「비상구」는 신촌 거리의 삐끼들을 보고 돌아온 밤 멈출 수 없이 써내려간 작품이었다고 하셨어요. 소설을 쓰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건 무엇이었나요?


당시에는 어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건데요(웃음). 세상을 놀래키고 싶은 욕심 같은 게 있었어요. 쓰지 말라고 하는 걸 쓰고 싶은 욕구라고 할까요. 이건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더 잘 써지는 거예요. 가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봐요. 소설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냐고요. 그럼 제가 이렇게 충고합니다. 서랍에 넣어두었을 때 ‘엄마가 꺼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소설을 쓰라고요. 엄마가 보면 ‘얘가 미쳤구나’ 하면서 뒤집어질 것 같은 소설이요. 그런 글을 상상만 해도 잘 써져요(웃음). 그게 아니라 엄마나 선생님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소설이라면 저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건 진짜 마음이 아니에요. 소설이라는 것은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거잖아요.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 과정을 통해서 직설적으로는 말할 수 없었던 굉장히 깊은 게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어머니나 선생님에게 보여줬을 때 칭찬받을 것 같은 글은 문제가 있는 거죠. 자기 안에 진짜 충동으로 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기준에 맞춰 쓴 거니까요. 반면에 ‘엄마가 이걸 보면 뒤집어질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쓰면 솔직한 얘기, 보지 말았으면 하는 얘기를 쓰게 돼요. 「비상구」를 쓸 때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썼을 거예요. 내 안에 있는 폭력성, 이상한 상상력, 이런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쾌감이 있는 거죠. 


신촌의 삐끼들과 비슷해 보이는 작가님 안의 어떤 것을 표출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남자들 마음속에는 어느 정도 건달이 있잖아요(웃음). 10대 남자애들 봐요. 다들 건달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면이 있잖아요. 


‘엄마를 놀래킬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 작가님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건가요?


약간 흥분 상태가 되겠죠(웃음).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글을 쓰는 거죠. 감정이 살아있을 때 써야 돼요.


『보다』안에서 ‘연극적 자아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독자들이 바라보는 작가님은 어떤 모습일 거라고 예상하시나요?


글쎄요. 독자들은 저를 ‘이상한 생각을 하는 아저씨’로 생각하겠죠?(웃음) 남다른 이상한 생각을 하는 아저씨, 그걸 또 꽤 설득력 있게 남에게 말을 하는 사람. 어릴 때부터 저는 그런 인물이었어요. 남다른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얘기를 사람들한테 하곤 했어요. 그래서 ‘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예전에는 작가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 조금 차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새는 크게 차이가 안 나요. 약간 농담 좋아하고, 그러면서 또 굉장히 기괴한 상상들을 좋아하고, 그리고 남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런 사람이 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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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한국사회의 큰 갈등 중 하나


이번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일이 있었나요?


진짜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세대 갈등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저는 그것이 한국사회의 굉장히 큰 갈등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상 부를 독점하다시피 한 50대 60대와 그들에게 월세를 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20대 30대의 갈등, 그런 세대 갈등이 결국은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로 상징될 수 있잖아요. 많은 걸 가진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도전하고자 하지만 힘과 용기가 부족한 아들, 그들 사이의 문제들은 계속 격화될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도 대학에서 기숙사를 건립하려고 하니까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섰잖아요. 원룸 월세 떨어진다고,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대학을 찾아가 항의를 하고요. 사실 그 문제는 본격적인 세대 갈등의 신호탄 같은 거예요. 젊은 세대는 좀 더 싸고 질 좋은 주거가 필요하고, 땅과 부를 가지고 있는 노년층은 계속해서 자기의 안정적인 지대를 추구하는 거죠. 앞으로 이런 식의 갈등이 첨예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나쁜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어떤가요. 아이를 자신을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그럴수록 부모는 사랑을 주지 않음으로써 관계 상위를 차지하는 현상을 지적하기도 하셨죠.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요.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도 그런 거예요. 예를 들면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압박면접이라고 하나요? 그 무슨 사디스트적인 행동인지 모르겠어요. 취업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거잖아요. 그건 정확하게 나쁜 부모가 하는 행동이거든요. ‘너는 모자라다, 너는 왜 이렇게 부족해’ 이런 얘기를 하면서 모욕을 주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똑같아요. 그런데도 (지원자는) 웃어야 되잖아요.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자기는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해야 되고요. 심지어 실수로라도 실수로라도 반항하지 않도록 지배적인 논리로 자기를 설득하잖아요. ‘경쟁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가 선이야’ 이런 걸 스스로에게 설득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이건 나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아이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요.


한 인터뷰에서 ‘젊은 시대조차 희망 없이 사는 시대는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가님께서 성장하셨던 60년대~80년대의 젊은이들은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의 세대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1년에 10% 정도 나왔어요. 지금과 비교하면, 3년 동안 성장할 것을 한 해에 이룬 거죠. 그리고 교육의 기회가 넓어지면서 우리 세대 대부분은 부모 세대보다 더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확신이 있었어요. 우리는 부모세대보다 더 부유할 것이고, 더 문화적으로 풍요로울 것이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었죠.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의 부모보다 더 잘 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가진 것만큼이라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지금의 부모 세대는 대부분 대학을 나왔고, 30대 즈음에는 아파트와 자동차를 샀고, 다 풍요를 누렸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 단계에 도달하기 굉장히 어렵죠. 취업을 하기도 어렵고, 취업을 한다 해도 돈을 모으기도 어렵고, 집을 사기도 어렵고요. 그런 게 우리 세대와는 다른 점이죠. 이건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가 예전에 갖고 있었던 경제적인 활력은 사라져가고 있잖아요. 나라가 전체적으로 활력이 있을 때는 인구가 늘어날 때인데, 앞으로 그럴 것 같지도 않고요. 또 우리만 갖고 있는 굉장히 특별한 무엇도 이제는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희망이 없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보다』의 뒤를 이어 『읽다』 와 『말하다』가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두 권의 책에서 다루게 될 주제와 이야기 방식은 『보다』와 많이 달라질까요? 


그렇죠. 산문이라는 것 말고는 별로 공유되는 게 없을 거예요. 『말하다』는 제가 강연, 인터뷰, 대담에서 했던 말들을 중심으로 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저의 견해나 생각들을 대화처럼 풀어서 싣게 될 거예요. 당연히 『보다』와는 문체가 다르겠죠. 『읽다』는 제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책 읽는 시간』에서 짧게 소개됐던 독서에 대한 저의 여러 가지 생각 ‘이런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와 같은 생각들이 담긴 독서에 관한 산문들이 주를 이루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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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김영하 저 | 문학동네
예술과 인간, 거시적/미시적 사회 문제를 주제로 한 스물여섯 개의 글을 개성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묶은 이 산문집에서, 독자들은 인간 내면과 사회 구조 안팎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김영하의 문제적 시선과 지성적인 필치를 만날 수 있다. 예측 가능한 일상생활부터 심화되는 자본주의 시대의 시간과 책의 미래까지, 이 산문집에는 소설가의 눈에 포착된 한 시대의 풍경이 다각도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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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불황 10년! 1년치 생활비를 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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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경제학자 우석훈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갑자기 10억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예요?” 우석훈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은행에 넣어둘 것”라는 답변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각종 투자 정보를 알려줬는데, 그의 의견만큼은 달랐다. 우석훈의 주변에 있는 부자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골프를 치지 않는다는 것. 부자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우석훈의 조언은 언제나 ‘골프를 끊으라는 것’ 딱 한 가지였다. 2000년대 초반, 우석훈의 동료 대부분은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는 “그럴 시간 있으면 책 한 권 더 읽겠다”며 버텼다.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불편해질 일은 없었다. 


우석훈은 『불황 10년』을 읽기에 앞서, ‘내가 골프를 끊을 수 있는가?’ 정도만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골프를 치거나 안 치는 것이 사는데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담배, TV, 심지어 육식을 끊는 일보다 쉬운 선택이다. 우석훈이 ‘골프’를 논한 까닭은 딱 하나. ”골프를 친다는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좋은 점은 무엇이고 나쁜 점은 무엇인지를 한 번쯤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2007년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를 썼을 때,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5%였다. 아직은 물질적인 여유가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 30대가 된 사람들을 보면 한국사회가 얼마나 20대를 방치했는가를 알게 된다. 우석훈은 “지난 10년간도 그랬지만 앞으로 올 10년에도 개개인들이 느끼게 될 경제 키워드는 ‘생존’”이라고 말한다. 그가 『불황 10년』을 집필하게 된 배경이다. 10년 후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경제가 예상된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석훈의 해답은 ‘적절한 재무조정’이다. 그는 “어려운 시기를 오랫동안 버텨야 한다면 가급적 소비를 불편하게 일상을 재구성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조언한다. 정치가 실패한 나라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면, 일단 확률적으로 보장되는 안전벨트를 매는 것이 현명하다. 


한편, 우석훈이 쓴 책으로는 『88만원 세대』『조직의 재발견』『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생태요괴전』『문화로 먹고 살기』『1인분 인생』『모피아』『내릴 수 없는 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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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지보다 소규모 단지를, 월세도 나쁘지 않다 


『불황 10년』은 그간의 책들보다 쉽게 읽힌다. 가장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전수했던 노하우를 정리한 글이기 때문일까? 

다른 책들은 정치를 하거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도 염두에 두고 썼지만, 『불황 10년』은 정치인들은 포기하고 쓴 책이다. 여야가, 못하거나 안 할거라는 걸 아니까. 정치가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전제 하에서 개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기본적인 이야기를 했다. 정말 실행할 수 있는 것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같은 생각을 한 까닭은?


지난해 연말, 정치판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하더라. 우리 집에서는 아이가 막 한 돌이 지나서 일어나서 걷을 때였는데, 뭐랄까? 나는 아무 근심이 없고 평안한 마음이 드는 거다. ‘나만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나?’ 생각해보니, 평소에 개인적인 삶을 잘 정리 정돈하면서 사는 게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난 옛날 집을 다 정리하고 주식, 보험도 정리하면서 통장을 심플하게 만들었다. 돈이 특별히 더 들어온 건 아닌데 나갈 때가 없으니까 편하더라. 사람들이 먹고 사느라 바쁘다고 하는데, 돈은 편하게 살려고 버는 게 아닌가? 바빠서 편하지 못한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불황 10년』을 쓰게 됐다. 30대부터 할머니 세대까지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는데, 할머니들이 읽고는 “나랑 생각이 똑같다”고 하더라. 어려운 경제용어는 되도록 빼려고 했다. 일부러 수치, 표도 하나도 넣지 않으려고 했는데, 몇 개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분량도 많이 줄였다.


부동산, 개인 재무구조, 고용 문제와 창업, 육아와 교육 등 크게 4장으로 나눠 썼다.


영화 구조를 그대로 따왔다. 상업영화들을 보면 4장 구조로 이뤄져 있지 않나?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게 8 시퀀스다. 이 구조에 맞춰 조금 바꿨는데,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클라이맥스가 처음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부동산, 재무구조 문제가 3장 뒤쪽에 나오는 게 맞는데, 이 책에서는 앞장으로 뺐다. 중요한 것 먼저 말하고 싶었다.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가장 관심 있게 보는 챕터는 무엇이던가?


아무래도 여자들은 사교육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보고, 남자들은 무조건 집 이야기다. 보험을 정리하라는 이야기도 썼는데, 여기에도 관심이 많더라. 요즘 사람들은 보험을 너무 많이 든다. 보험 카달로그를 보고 있으면 왠지 다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돈이 있으면 그냥 가지고 있으면 된다. 개인이 다 문제 없이 해결하려고 하면 정치가 해결을 안 하려고 한다. 그러면 사회가 무너진다.


부동산 이야기의 핵심은 “이번 정부가 지나가고 집을 사는 게 옳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분양하는 아파트는 절대 사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분양 아파트는 좀 시간이 흐르고, 냄새도 빠지고 환기도 된 다음에 들어가는 게 현명하다. 분양 아파트는 몇 동에서 살지도 추첨하지 않나? 몇 년이 지나서 사면 골라서 들어갈 수 있는데 왜 미리 돈을 주고 건설회사에게 이득을 주나? 예전에는 싼 값으로 입주가 가능해서 집값이 오를 거란 기대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어지간하면 오를 일이 없다. 2011년 신분당선이 개통할 때, 지하철이 들어가면 집값이 확실히 오를 거라고 전망했는데, 개통하기 전까지는 오르다가 개통 후에는 호재가 반영돼서 오히려 떨어졌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오른다는 이야기도 다 업자들이 하는 말이다. 그런 걸로 아파트값이 바뀌지 않는다. 


대단지보다는 소규모 단지를 염두에 두는 게 낫다고도 했는데.


투기적 수요 때문에 다들 대단지를 선호하는데, 사는 건 다 똑같다. 외국에는 큰 단지와 작은 단지의 차이가 별반 없다.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특수 상황이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힘들게 살 거면 비슷한 지역의 소규모 단지로 이사를 가라”고 하면, 다들 “미래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당신 미래가 더 안 보인다”고 말한다. 싸게 샀기 때문에 싸게 팔아도 되는 거 아닌가? 비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차액이 중요한 거다. 빚을 내서 대단지 아파트를 사는 사람들은 어쨌든 투기적 수요가 있다.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잘 받아들이나?


세상을 좀 아는 사람들, 살아본 사람들은 수긍한다. 하지만 그냥 언론에서 하는 이야기만 듣는 사람들은 관심을 크게 기울이진 않더라. 


땅콩집이나 소행주 같은 공동주택도 하나의 대안으로 평가했는데, 유행처럼 지나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도 많이 짓고 있다. 라이선스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늘긴 늘고 있다. 이런 집의 경우는 입지에 따라 전세 값 정도로도 충분히 집을 지을 수 있다. 투기적인 목적보다는 실제로 이 집에 사는 식구들을 위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값이 계속해서 오르거나, 오르지 않는 그 사이에서, 자기가 살고 싶은 형태의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행주 같은 경우에는 입주 희망자들이 줄을 서 있다. 시민적 기반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가 만약 작업실을 얻게 된다면, 전세보다는 월세로 계약할 생각이라고 했다. 요즘 갑자기 전세에서 반월세로 변경하는 집주인들이 많아 세입자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전세가 혜택이 너무 좋은 거다. 전세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속이 쓰린 이야기인데, 유럽의 합리적인 소비자들은 월세로 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월세가 아까워 무리를 해서 집을 사는 경우, 자기 능력 범위 밖으로 나가니까 리스크가 크지 않나? 그에 대한 회피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월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평수도 줄여야 한다. 우리는 너무 큰 평수를 싸게 빌리고 있었던 거다. 나 역시, 작업실이 절실하게 필요할 경우에도 집을 살 의향이 전혀 없다. 지방에 있는 아파트를 알아보기도 했는데, 사는 건 문제가 아닌데 팔 수가 없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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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에 관심을 안 갖는 게 최고


30대 독자들에게 1년치 생활비를 모으라고 했다. 실제로 저자가 유지했던 상태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1년치 생활비를 여유자금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전세로 살면서 맞벌이를 하는 부부들은 좀 여유롭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들 어디엔가 묶어 놓는다. 그럼 돈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왜 전세로 살고 있냐? 집이 없는 건 나의 심리적 고통으로 끝나지만, 돈을 주고 사게 되면 실질적인 고통이 생기기 때문이다. 1년치 생활비를 손에 쥐고 있으면 소비를 줄이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소비를 줄이는 것보다는 가진 돈이 줄어드는 것이 사람을 더 초조하게 만든다. 그보다는 평균 잔고를 유지하되 소비를 줄이는 편이 훨씬 심적으로 낫다. 꼭 1년치 생활비가 기준은 아니다. 이 정도가 만약 직장에서 잘렸을 경우 다음 직장을 모색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목돈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1년짜리 정기예금을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정기예금 기간을 1년, 3년, 5년이라고 했을 때 이자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결혼을 안 했거나 출산을 앞두고 있는 부부의 경우에는 단기에 돈이 필요할 때가 많다. 1년짜리를 여러 개 나눠서 저금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매년 갱신하는 게 귀찮지만, 이 때 귀찮은 게 낫지 나중에 돈을 빌리려고 하면 더 귀찮고 속상하다. 


만약 저자에게 갑자기 큰 돈이 생겼으면,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내 돈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단기 MMF에 넣을 거다. 이자율이 높진 않지만 일반통장에 넣어 두면 써버리니까, 일단 귀찮게 해놓는 게 좋다. 


창업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 성공했을 때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이사 가기’, ‘차 바꾸기’를 꼽았다.


올해 책을 쓴 지 10년째가 됐는데, 그간 이사도 갔지만 돈을 벌고 한참 있다가 갔다. 차는 여전히 안 바꿨고 술도 거의 소주만 마신다. 친구들이 “너, 차가 왜 그래?”라고 하면, “왜? 멀쩡히 잘 가는데”라고 답한다. 국내 유명증권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입사 3년차에 집을 산 직원이 있는데, 죽어라 안 쓰고 다 모았다는 거다. 증권가에서 유명한 말이 증권을 하면서 집 산 사람이 없다는 거다. 내부 정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고객에게도 추천하고 자기도 샀다가, 자살 직전까지 가는 거다. 오랫동안 나와 친하게 지내는 증권사 임원이 있는데 연봉이 6억 원이다. 그런데 돈을 정말 안 쓴다(웃음). 자주 보지만 막걸리 그 이상의 것을 안 산다. 그 분 하는 말이 “임원은 임시 직원이라, 이 돈을 언제까지 받을 수 있지 모르니까 지금 버는 돈으로 평생 살아야 한다”는 거다. 연봉 6억이면 외제차 타고 그럴 것 같은데, 운전사도 없다. 


여전히 재테크 도서가 쏟아지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주를 찾기 힘들다. 어떻게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가?


재테크에 관심을 안 갖는 게 최고다(웃음). 재테크라는 말이 사실 없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이 단어가 맞는 말인가를 생각해볼 때, 영어나 불어로 옮겨지냐를 따져보는데, 이런 말이 영어에는 없다. 일본과 한국에서만 통하는 굉장히 특수한 단어다. 재테크는 80년대 일본이 호황일 때 만들어진 말인데, 경제학자 케인즈가 말한 ‘재테크’와는 다르다. 개인이 큰 돈이 생겼다고 주식에 다 넣으면 큰일날 일이다. 특수한 흐름에 따라 개인이 움직이긴 어려운 일이다. 재테크 도서를 읽을 시간에 차라리 소설을 읽는 게 훨씬 현명하다. 자기 일을 하면서 동시에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지 않나? 소설, 시, 수필 같은 장르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갖게 된 건, 살아보니까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검증된 옛날 것들이 좋다. 최근의 책들은 흐름 같은 것을 읽기 위해 보는 것이고,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기본 매커니즘이다. 그런데 어렵게 쓰니까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 개개인의 특수한 상황에 딱 맞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책들은 없다. 


30대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40,50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나? 지금 이들이 가장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집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 손절매를 할 것인가, 이게 문제다. 개인이 주식으로 손해를 보는 큰 이유는 정보 부족이 아니고 손절매, 딱 하나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이 안 따라주는 거다. 하지만 기업은 마음이 없으니까 가능한 거다. 증시 뉴스를 보면, 기관투자자들은 다 빠지고 개인이 산다고 했는데, 다음 날이 되면 거꾸로 돼있지 않나? 이게 손절매 때문에 생기는 결과다. 인생은 길다. 개인도 기업처럼 생각해야 한다. 기업은 여러 사람들이 판단하니까 충격의 최소화가 가능하다. 기업과 개인이 다를 이유가 없는데, 지금은 거꾸로 가고 있다. 많은 기업들이 하고 있는 재무조정을 개인이 한다고 생각하면 훨씬 편하다. 책에서 영화 <머니볼> 이야기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구단을 오래 끌고 가려면, 조금이라도 흑자 경영을 하는 게 맞다. 1등은 못하더라고 지금 상황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좋은 성과를 내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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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 걱정하지 말고, 아빠들이 움직이자


2012년에 『1인분 인생』을 썼을 때, “아이들이 학원에 중독되면 그 인생은 끝나 버린다”고 말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는데. 


다음 주면 둘째가 태어난다. 아내랑 아이가 둘이 되면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불황 10년』에 쓴 내용 그대로다. 책에 안 쓴 게 있다면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좀 가르치자는 거다. 요즘 부모들이 어지간하면 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나? 그런데 왜 초등학교 영어를 꼭 학원에 보내서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는 다 가르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에 공포가 있는 것 같다. 정확한 지식을 주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과 나보다 더 나은 선생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우리나라의 양대 사기가 있는데, 남편이 아내의 운전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과 부모가 자식 공부를 가르칠 수 없다는 거다. 이건 학원에서 만든 사기인 것 같다. 물론 안 해본 사람은 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운전학원이나 학습학원도 불친절하거나 능력 없는 사람을 만나면 결과는 똑같다. 확률적으로 다를 이유가 없다. 지금 이 세상에는 굳이 돈을 내고 배우게 만든 게 지나치게 많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는 2022년이 되면 사교육이 없어질 거라고 전망했다. 동의하나?


완전히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흐름은 분명 바뀔 거다. 외고나 특수 학교에 들어갈 때, 이제는 부모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내용을 적어 내면 영점 처리가 된다. 수상 이력을 적는 것도 감점 요인이 된다. 교육정책은 생각보다 빨리 바뀐다.


아빠의 역할에 대한 지적이 흥미로웠다. 한국교육과정에서 아직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자원이 ‘아빠’라고 했다.

사교육의 목표에는 지식 습득만 있는 게 아니다. 돌봄 기능도 있다.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야 하지 않나? 엄마들은 지금도 최대치를 할애하고 있으니 아빠가 시간을 더 내는 게 맞다. 주변 아빠들에게 “일주일에 책 한 권 읽어줄 시간도 없냐?”고 물으면 다들 대답을 못한다. 아무리 야근을 많아 바빠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시간이 난다. 야근을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인데도 아이들하고 놀아주는 게 귀찮아서 야근을 하는 아빠들이 많은데,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나이가 들어서 자식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아이랑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되는 건, 본인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다. 물론 비용도 들지 않고, 모두에게 이점이 되는 일이다. 못나도 아버지가 가르치는 게 낫다.


지난해 SBS CNBC <우석훈의 사람이 사는 경제>를 진행하면서 창업에 성공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만약 자유롭게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다면,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나?


대한민국 솔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30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다. 조금 큰 회사 사장이나 의사결정 권한이 있는 공무원들을 모아서 사회적 해법을 제시하고 싶다. 큰 대기업 인사팀장을 스튜디오에 초대해서 “요즘 직원 뽑을 때 스팩 안 보지 않냐? 부모들에게 제발 좀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해줬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밥 먹는 데 곤란한 상황이 이어지진 않아야 하지 않나? 정치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기 전에 최소한 세 끼를 먹는 일이 불행하지 않게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불황 10년』을 꼭 읽어야 할 독자층은 누구일까?


30대 초 중반 여성들이 많이들 읽었으면 좋겠다. 왜냐면 집 문제보다는 교육이 불안할 거다. 육아가 무서워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지 않은가? 불황일 때는 사회적으로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방법으로 가야 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생각을 달리 해봤으면 한다. 지금 우리 아이가 두 돌이 됐고, 다음주면 둘째가 태어난다. 큰 아이 때, 우리는 큰 돈을 들이지 않았다. 한 시즌도 못 입는 옷을 명품으로 사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자회 이런 곳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다. 차라리 그런 돈이 있으면 아이 이름으로 통장을 만드는 게 현명하다. 영어 조기교육도 필요 없다. 아이들만 스트레스다. 요즘은 아이들도 부모가 뭘 원하는지를 잘 알아서 그거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 이렇게 어렵게 사나? 그럴 이유 전혀 없다. 재밌게 놀면서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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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10년우석훈 저 | 새로운현재
《불황 10년》은 국가경제의 근간이 됨과 동시에 불황이라는 가장 잔혹한 시장에 내던져진 30대를 위한 생존전략을 담은 책으로, 우석훈이 지난 15년 동안 가장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전수했던 경제활동 노하우가 총망라되어 있다. 부동산부터 금융, 취업, 창업, 개인 재무관리, 자녀교육 등…… 개인이 짊어져야 했던 경제적 과제들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을 작가가 가진 경험과 지식, 노하우를 총동원해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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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소재원 위안부와 한센병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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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 소재원. 그래서 그는 ‘참 고마운 소설가’다. 영화 <소원>의 원작이 된 소설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를 통해 아동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고 ‘13세 미만 아동?장애인 대상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운동’에 앞장서 개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피해 가족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아동 성범죄 근절 운동에 나선 작가는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뿐만 아니라 『아버지 당신을…』의 수익금 일부를 어린이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그는 아동성범죄 지킴이로 활동하는 한편, 중증장애인재활시설 ‘한사랑마을’과 한센인 정착촌 ‘금오농장’을 찾아 봉사활동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첫 작품 『나는 텐프로였다』를 시작으로 『아비』『밤의 대한민국』『아버지 당신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언제나 누군가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그들은 때로 화류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한센병 환자였으며, 또 때로는 치매를 앓고 있는 늙은 아버지였다. 주목받기보다는 어딘가 변두리를 맴돌고 있는 사람들, 환희보다는 고단함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로 걸어 들어가는 작가를 보고 많은 이들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고 말했고, 그 행보의 원인을 작가의 지난날에서 찾으려고 했다. 지체 장애를 갖고 계신 아버지, 아버지와의 이혼 후 만날 수 없었던 어머니, 20대 초반에 찾아온 원인 불명의 시각장애… 그 모든 아픔들이 자신을 관통해갔음을 작가는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덤덤했다. 그리고 의연하게 희망을 말했다. 다른 이의 아픔에 눈감지 않고 공감하는 것도, 그 아픔 속에 자리한 희망을 발견하는 것도, 그 시간이 작가에게 남긴 선물이었다.


이제 그가 또 다른 아픔을 말한다. 이번에도 그 아픔의 다른 이름은 희망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이전보다 더욱 넓어졌다. 일제강점기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그날』의 두 주인공 오순덕과 서수철은 서로에게 순정을 주겠노라 약속한 정인이었다. 그러나 어린 연인들도 시대의 비극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젊은 청년들은 전선으로, 꽃다운 처녀들은 위안소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기약 없는 이별을 한 지도 7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열다섯 소녀의 순결은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고, 열여덟 소년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천형과도 같은 병을 얻었다. 그들의 순정은 이어질 수 있을까. 그들의 삶을 지탱해 준 단 하나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무거운 질문을 안은 채 소재원 작가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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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지금까지 발표된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작품


2년 6개월 만에 발표하시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방황을 많이 했어요. 독자들은 항상 전작보다 나은 작품을 원하는데 ‘과연 내가 이전의 작품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리고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가 출간된 이후로 모든 작품의 영화화가 결정됐거든요. 현재는『터널』이 영화로 제작 중이고요. 그렇다 보니 새 작품도  영화화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죠. 그런 강박증 때문에 한 곳에서 잠을 잘 수 없어서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여행을 떠났는데 우연히 소록도와 ‘나눔의 집’을 가게 되면서 이번 작품을 집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등단하신 후 6년 동안 열 작품을 발표하셨습니다. 워낙 왕성하게 활동해 오셨기 때문에, 작가로서 가진 모든 것이 소진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불안이 늘 따라다녔죠. 더 이상 소재를 찾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은 분명히 올 텐데, 그 한계가 서른두 살이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그날』을 쓰면서 깨달았어요. 스스로가 한계를 정해놓고 방황을 시작한 것 같더라고요. 그 벽을 무너뜨리면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됐죠. 지금은 작품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작품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즐기자’라는 생각이 더 커요. 


『그날』에 대해 “현재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작가의 철학과 내 고집을 담아낸 책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독자들이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공감하는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내 생각을 담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이번 글을 쓸 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게 첫 번째 원칙이었어요. 열다섯 살 청소년이든 마흔 살 아저씨든 누구나 공감하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복잡한 문장으로 저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간단하고 편한 문장으로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스토리 라인도 사실에 충실하려고 했고요. 상상력을 두 번째로 미뤄두기로 했어요. 작가로서는 위험한 도전이기도 하죠. 상상력이 뒷받침하지 않는 글은 지루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상상력을 최소화하는 대신 그 안에서 극대화시키자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로 누구나 읽으면 받아들일 수 있고, 주입이 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글을 썼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쓴 글과는 판이하게 다른데, 만족스러워요.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나는 텐프로였다』『아비』『밤의 대한민국』『형제』『소원』까지는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썼어요. 『아버지 당신을…』부터 는 문체가 달라졌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작가라는 오만함이 약간 깃들었던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제 작품 중에서 『아버지 당신을…』을 최고로 꼽고 작가적인 것들이 성숙했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제가 볼 때는 작가의 때에 찌들었던 것 같아요. 『그날』은 모든 걸 탈피하고 새로운 문장을 만드는 데 도전해 보자고 생각하고 썼어요. 이게 진짜 저의 색인 것 같아요. 


『그날』의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 모든 소설의 모티프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찾아낸 거예요.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여행을 다닐 때도 봉사활동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요. 그 전부터 익산의 ‘금오농장’에서 한센병 어르신들을 돕고 있었고 ‘나눔의 집’도 가끔 들르곤 했었어요. ‘한사랑마을’에서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는데 그곳에 가는 길에 ‘나눔의 집’이 있거든요. ‘한사랑마을’에 갈 때면 항상 ‘나눔의 집’에 들렀다 가곤 했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재를 찾게 된 거예요.


『그날』의 두 주인공은 각각 한센병과 위안부라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잖아요. 서로 다른 역사적 사건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공통된 시간의 공통된 아픔이니까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3~4년 전쯤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나눔의 집’ 밖의 어르신들과 만나게 됐어요. 그 분들은 수요 집회도 하지 않으시고, 본인의 과거에 대해서 숨기고 사시는 분들이셨죠. 


올해 초에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서 청원 운동을 진행하기도 하셨죠. ‘위안부’ ‘정신대’ 라는 말 대신 ‘꽃송이’라는 이름으로 할머니들을 불러드리자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역사적인 사실이 흐려진다’고 얘기하면서 반대하더라고요. 정작 당사자들은 원하고 있는 일인데 말이죠. 역사적인 사실로 인해서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건 아닌지, 그게 너무 잔인한 일은 아닌지 묻고 싶었어요. 해외에서는 ‘위안부’ ‘정신대’라고 부를 수 있겠죠. 그렇지만 왜 우리 안방에서조차 할머니들은 위안부라고 부르냐는 거예요. 나에게 새엄마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해도 우리 집에서만큼은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마찬가지로 우리 집안에서만이라도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라는 의미로  ‘꽃송이’라는 예쁜 단어로 불러주는 게 어떻겠냐는 거죠. 위안부 사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던 분들이 반대를 하시는데, 아동 성범죄 공소시효를 폐지시킬 때도 그랬어요. 변호사라는 전문 지식인들이 하는 말은 ‘법의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러면 모든 공소시효를 폐지시켜야 하는데 너무 무식한 소리다’ 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폐지를 이끌어냈잖아요. 그때도 제가 했던 말은 얕은 지식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거였어요. 『그날』을 계기로 ‘위안부’ 대신 ‘꽃송이’라는 명칭으로 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센병 환자분들과는 사회봉사를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각장애가 처음 찾아왔을 때 방황을 하면서 폭행상해 전과를 갖게 됐어요. 내가 누구보다 월등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힘을 기르고 사람들을 때렸었거든요. 그때 판사님께서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를 선고하시면서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셨어요. 가장 힘든 곳으로 봉사활동을 보내준다고 하셨는데 가 보니까 한센병 어르신들이 사는 마을이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인연을 이어오게 됐죠. 당시의 경험이 제 삶을 정말 많이 바꿔 놨어요. 사회봉사로 인해서 저보다 더 장애가 깊은 사람들이 웃으며 살 수 있는 것도 느꼈고, 그대 크게 다가온 모든 것들이 저를 소설가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만약 판사님께서 저한테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지 않고 그분들에게 봉사를 하러 가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 교도소에 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저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고 아직까지 그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봉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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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한 번쯤은 써야하는 이야기였다


처음 『그날』을 쓰기로 결심하셨을 때,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요?


한센병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한센병은 세 번 죽는다고 해요. 강제 낙태를 당하고, 시신 해부를 당하고, 죽으면 화장된 뒤에 아무렇게나 뿌려지죠. 살아있는 동안은 일제의 만행으로 노동을 착취당했어요. 그런 일들은 전혀 모르면서,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이건 내가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물론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의 이야기를 담기는 했지만 오래 전에 쓰여진 작품이고,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책으로 다시 한 번 다가가서 실태를 정확하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들의 천국』이 사회적 내부의 구조를 조명했다면 저는 일제 시대에 억압을 당했던 여성의 시선을 통해서, 그리고 권력 투쟁이 아닌 거기에서 밀려나 있는 순수한 분들을 위해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권력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해방 이후에 소록도의 시설을 두고 한센병 환자들 중 일부가 권력을 잡기 위해 싸웠던 일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1/10, 1/100도 안 돼요. 나머지는 모두 희생당했던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부분만 부각시켜서 이야기하는 건 친일의 잔재가 있기 때문이에요. 일제 시대에 소록도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어요. 하루에 시신이 백 구~이백 구가 나올 정도로요.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랬지만, 한센병 환자들도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거예요. 해방 이후에도 학대를 당했고요. 저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날』의 이야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 나가셨나요? 


처음과 끝 부분만 정해놓은 상태에서 써나갔어요. 70년 만에 해후하는 두 노인, 사이가 안 좋은 기자 둘, 과거와 현재의 서로간의 사랑, 역사적 사실들. 그것만 결정했고 나머지 부분은 있는 그대로를 취재해서 써내려가면서 스토리라인을 잡았어요. 지금까지의 모든 작품들이 처음과 끝만 써놓고 중간은 텅 비워놓고 쓴 거예요. 그때그때의 감정들과 사실들,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쓰면서 진행한 거예요. 중간에 공백을 두는 이유는 제가 독자의 시선으로 읽어가면서 쓴다는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결말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셨어요?


없었어요. 결말을 수정할 정도로 확고하지 않다면 글을 쓰기가 싫거든요. 


『그날』속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이 된 분들도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실제 인물들의 이름에서 가져온 거예요. 강학순은 김학순 할머니, 하춘희는 배춘희 할머니께 미리 허락을 받고 지은 이름이에요. 서수철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저와 인연이 있는 한센병을 앓고 계신 분이신데,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아버지 당신을…』에도 등장하시죠. 『그날』에서 하춘희가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사실은 그 말이 김학순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어요. 배춘희 할머니께서는 『그날』을 집필하는 도중에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그날』안에 할머니의 이야기가 남겨졌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집필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크셨겠어요. 


이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마음이 아팠죠. 출판이 늦어진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저는 ‘나눔의 집’에서 이 책의 출간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작품을 폐기처분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래서 출판사와 계약을 할 때도 ‘나눔의 집’의 허락을 먼저 받겠다고 얘기했어요. 위안부라는 사실은 기록이에요. 창작이 아니란 말이에요. 있었던 사실이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우리가 살아계신 분들께 허락을 받아야죠. 작품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요. 


실제 있었던 사건들이 작품 속의 일화로 삽입되기도 한 건가요?


어르신들이 실제로 당하셨던 모든 일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인물을 탄생시킨 거예요.


필하시는 동안 잠시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멈추지는 않았어요. 힘들어도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썼어요. 보통 한 작품을 쓰는 데 3개월 정도 걸리는데, 이번 작품은 7개월 정도 걸렸어요. 쓰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들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죠. 


힘들어도 쓸 수 있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을까요?


작가로서의 양심, 그리고 작가로서 한 번쯤은 써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예요. 누구나 작가로서 한 번쯤은 쓰고 싶은 소설이 있어요. 그게 저에게는 아버지 이야기였고,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사실적 기록들이었어요. 저는 『요코 이야기』를 읽고 화가 너무 많이 났거든요. 작가가 일본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으로만 그렸잖아요.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렇게 그렸던 소설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생각한 주관적인 사실만 가지고 쓰겠다고 생각했죠. 그들은 역사적 기록을 빼고 허구로 그렸지만 저는 역사적인 기록만 가지고 쓰겠다고요. 내 나라 한국의 입장에서 기록을 해서 『요코 이야기』가 얼마나 잘못된 소설인지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것이 사명감과 의무가 되어서 괴로워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을 쓸 때 가장 괴로우셨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힘들게 썼어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쓸 때는 굉장히 행복했고요.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너무 행복했어요. 정말 힘들었던 건 집필 기간 중에 『제국의 위안부』논란이 생겼을 때였어요. 저도 그 책을 읽었지만 그건 중립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자가 학자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사실들이 너무 많았어요. 과연 역사적 사실들을 다 알고 있기는 한지,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서 취재한 적은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어요. 저자를 직접 만났다는 위안부 할머니를 저는 만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이건 독자에 대한 사기죠. 그리고 그 사람은 교수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라고 생각됐어요. 일본에 대한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깊게 파고든 책도 아니었고요. 거기에 너무나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취재를 하고 썼더라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꽃송이’라는 이름 선물하고 싶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소설을 쓸 때 가장 고민되는 건 사실과 허구의 경계일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글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주는 글은 정말 나쁜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가적인 오만으로 누군가의 생각을 지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 세 가지를 항상 생각하죠. 그리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을 때는 배려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요. 독자에 대한 배려, 실제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 전체 대중에 대한 배려. 그러면 아름다운 글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려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날』을 쓰시는 동안에는 위안부 할머니와 한센병을 앓고 계신 할아버지께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많이 염려하셨겠습니다. 


단어 하나도 굉장히 민감하게 선택했어요. 매춘부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걸까, 일제 치하의 폭행 장면을 이렇게 그려도 되는 걸까, 며칠씩 고민을 했죠. 그런데 쓸 수밖에 없었고 그걸 인정해 주시니까 고마운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작품을 폐기처분했겠죠. 


‘나눔의 집’ 할머님들은 『그날』을 모두 읽으셨나요? 


안신권 소장님께서 다 읽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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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들의 반응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제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거든요. 제가 부탁드리는 것처럼 할머니들께서 느끼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직접 전달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책을 서경덕 교수님한테만 전해줬어요. 작가가 저라는 이야기도 하지 말고 ‘이런 글이 있는데 출판이 가능할까요?’하고 여쭤봐 달라고만 말씀드렸어요. ‘나눔의 집’에 후원금을 기부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기사화가 되어버리면 글로만 평가받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나중에 허락을 받고 나서야 인세를 기부하겠다고 밝혔죠.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피해 입으신 모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부분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가 이름이나 소개 없이 소설 원본만 전해드렸고요. 


당시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알릴 필요도 있지만, 그 순간을 다시 형상화함으로써 또 한 번 아픔을 드릴 수도 있기에 고민이 깊으셨을 것 같습니다. 


피해자분들의 생각이 모두 같은 건 아니에요. 과거의 이야기를 숨기고 가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다 모여야 우리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 모든 분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나눔의 집’의 안신권 소장님이 추천사를 써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서경덕 교수님께 소설을 전해드릴 때도 ‘단 한 명의 반대라도 있으면 폐기처분하겠다’고 했었어요. 누구에게든 상처 주는 소설은 쓰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분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작품을 폐기처분할 의향도 있으니까 그냥 보여드려라, 단 한 분의 반대라도 있다면 출판을 접자’ 고 말했어요. 저에게 있어서 배려가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종이뭉치일 뿐이에요.


그만큼 사실 검증에도 심혈을 기울이셨을 텐데요. 자료를 조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셨나요?


자료 조사에 대한 부분은 오히려 편했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작품을 8년 이상 준비한 거나 마찬가지죠. 봉사활동을 통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픽션을 가미해서 쓰기만 하면 됐어요. 『그날』의 내용처럼 소록도의 수호 원장이 죽기는 했지만, 소설과는 다른 인물이 죽인 거였죠. 그런 부분은 픽션이 가미된 거예요.  


『나는 텐프로였다』『희망의 날개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영화로 제작될 예정인가요?


이미 계약을 마친 상황이에요. 출간 전부터 제작 의사를 밝힌 영화사가 있었거든요. 기부를 약속하면 영화 판권을 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하면 영화사가 수익이 나지 않잖아요. 그래서 『터널』의 판권을 더 저렴한 가격에 넘겨주기로 했어요. 대신 영화 <그날>로 인한 수익은 기부하라고 이야기했죠. 

 

쉽지만은 않은 결정인데요


누군가를 돕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글은 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역사적 사실을 썼음에도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들을 외면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공인 양 생각하는 것도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으로 인한 수익은 기부하도록 계약을 한 거예요.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로 평가받는 작가님에게 소설의 의미는 남다를 것 같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해요. 독자가 있기 때문에 작가가 밥을 먹고 또 다른 작품을 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그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이 무얼까를 생각해 보면 기부인 것 같아요. 누군가를 돕는 일이요. 그것이 제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여준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독자들이 마련해준 돈으로 기부를 한다면 책을 사서 읽은 분들은 기쁨이 배가 되잖아요. 결국 기부가 독자들이 제 작품에서 얻은 즐거움을 배로 만들어주는 건데, 그걸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런 인식 때문에 작품의 영역을 제한될까봐 걱정될 때는 없으세요?


저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야기보다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는 이야기가 더 듣기 좋아요. 장르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를 써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버지 당신을…』『밤의 대한민국『나는 텐프로였다』도 그렇고요. 장르에 연연하지 않아요. 다만 저는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는 수식어를 너무 지키고 싶을 뿐이고, 그걸 잘 지키기 위해서 다른 장르에 도전하지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장르에 도전하면서 독자들의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그날』에는 두 주인공이 변함없이 품고 있는 ‘순정’에 대한 비유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작가님께서 알고 계신 ‘순정’은 어떤 것인가요?


저는 아버지에게서 순정을 배웠어요. 저희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나신 후 지금까지, 20년 넘게 혼자 저희를 키우셨는데요.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있으셨는데 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와 이혼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내가 예쁜 집을 지을 건데, 언젠가 네가 돌아오고 싶은데 차마 미안해서 못 돌아올 것 같으면 먼발치에서 그 집을 바라봐라’라고요. 그리고 ‘대문이 만들어져 있다면 내 모든 감정들이 닫힌 거고, 대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면 아직 널 기다리는 거니까 언제든지 들어와라’ 라고 하셨대요. 제가 작가가 된 후에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어머니는 이미 다른 분과 재혼하신 후였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대문을 만들자고 말씀드렸죠. 그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순정이라는 말을 아니? 우리 때는 순정이 있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대문을 만들지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이 저에게 많은 걸 느끼게 했어요. 이번 작품을 쓸 때 그런 감정들을 많이 이입시키고 싶었고요.


작가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부분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불편할 때는 없어요. 저에게 아버지는 신앙과 같은 존재예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아버지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분이라는 걸 자랑하고 싶고, 제가 아버지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거든요. 


『그날』을 계기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기를 바라시나요?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를 계기로 아동 공소시효 폐지를 했듯이 이번에는 『그날』이 계기가 되어서 할머니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물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이번 작품을 쓸 때 처음 가졌던 목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꽃송이’ 할머니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그에 맞는 법 개정을 독자들과 함께 이뤄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바람은 이 이야기를 읽고 우리가 새롭게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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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소재원 저 | 마레
이 책은 일제 말,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한반도를 자신들의 침략야욕을 뒷받침하기 위한 병참기지와 전시동원을 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일제는 침략 야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일제는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이란 명목 하에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이를 위해 한반도와 만주를 전쟁물자 공급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어 공산품과 식량 대부분을 전쟁터로 보낸다.





김희곤 “카사 바트요는 가우디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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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할배>에 등장해 스페인을 향한 관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원래 스페인은 관광 강국이다. 유럽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만나는 곳이고 제국주의 시절 엄청나게 광활했던 영토를 보유했던 나라가 스페인이다. 자연스레 스페인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건축이다. 특히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건축가가 있으니,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말년에는 초라한 행색으로 전차에 치여 죽은 가우디. 결코 화려하다고 할수 없는 죽음이었지만 죽음 뒤에 그가 남긴 작품은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한민국에 『스페인은 가우디다』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게 할 정도로 말이다.

 

『스페인은 가우디다』는 한국의 건축가 김희곤 저자가 쓴 책이다. 전작 『스페인은 건축이다』를 쓴 그는 마흔넷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성가족 대성당, 구엘 공원, 카사 비센스, 카사 밀라 등 가우디가 남긴 작품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건축이란 무엇인지, 한국 건축의 문제는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계기였다.

 

가우디 건축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김희곤 저자의 말로 하자면 ‘장인정신’이다. 책상에서 컴퓨터로 건축을 배우는 요즘 풍경과 달리 가우디는 하나 하나 자신이 몸으로 겪어 가며 건물을 만들었다. 더 대단한 점은 그가 평생 관절염을 앓으며 몸이 불편했다는 사실이다. 책에는 이러한 가우디의 삶이 다양한 사진과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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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는 건축의 신


많은 위대한 건축가 중에서 가우디에 관심을 둔 이유가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이 바르셀로나로 가는 이유가 가우디 덕분일 겁니다. 그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세계를 실현했죠. 한 인간으로, 건축인으로 가우디는 성자처럼 실천하는 삶을 살았어요. 건축가로서 그의 삶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우디는 건축을 위해서 자기 생을 오롯이 바쳤어요. 세계적인 건축가인 르 코르뷔제는 가우디를 건축의 신이라고 불렀는데요. 이 말이 모든 걸 함축하고 있죠.


책 속에 가우디에 얽힌 다양한 일화가 있잖아요. 그중에서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를 꼽는다면?


프롤로그에도 나오는데, 성가족 대성당을 설계할 때 가우디의 손을 들어준 사람이 로젠 학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졸업식 때 가우디가 천재 아니면 바보라고, 약간은 비아냥거렸던 사람이었죠. 예나 지금이나 대학은 규정과 절차에 얽매여 있어요. 자유로운 영혼이 시도하는 파괴적인 행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죠. 가우디는 교수들의 일방적인 가르침에 순응하지 않았어요. 특히 그는 관절염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할 수 없던 상황이었어요. 언제나 현장에서 걸어다니며 성찰하고, 모형을 제작하고, 굉장히 빠르게 도면을 그렸어요. 교수님들이 보기에 그리 성실하게는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로젠 학장의 말 그대로죠. 천재 아니면 바보. 이랬던 로젠 학장이 결국 가우디를 인정한 거죠.


가우디와 피카소 일화도 재밌는데요.


당시 피카소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천재적인 예술가였죠. 그렇다고 어린 피카소를 위한 자리는 없었어요.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피카소는 사회를 향한 불만으로 가득했죠. 반면 가우디는 전성기였죠. 피카소가 보기에 가우디는 부자의 비위나 맞춰주는 영혼 없는 건축가였어요. 하지만 가우디가 만들고 있던 트랜카디스 기법에서 입체주의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겁니다.


가우디가 건축 사무소 문을 열고 참 힘들게 살았잖아요 그 무렵 가우디는 어땠나요.


누구나 시작은 불안하고 초라하기 마련이죠. 가우디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대학 시절부터 공방을 들락거리며 자신의 내공을 키웠어요. 자신의 책상, 명함, 철제조형물을 직접 만들고 자신의 세계를 다져갔죠. 그는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가난한 자를 위한 일이나 부자를 위한 일이나 항상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파리 박람회에 출품한 작은 유리전시장 속에도 장인의 천재성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이었어요.


카사 바트요를 가우디의 자서전이라 평했는데, 그 이유는 뭔가요.


가우디만의 구조와 디테일, 장식 그리고 입면까지 가우디의 스토리가 완벽하게 실현된 첫 작품이에요. 모든 건축가의 바람은 일관된 스토리로 자신의 작품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건축주의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죠. 가우디의 천재성이 건축주의 지갑을 열게 했죠.


바르셀로나에서는 몬세라트 수도원과 검은 성모상을 봐야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인데요. ‘바르셀로나 비극의 일주일’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가우디의 건축물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1908년 방직공장에서 벌어진 무더기 해고사태, 1909년 모로코 반란군을 진압하려는 마드리드 정부에 대한 반발,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재벌과 교회의 착취에 항거하며 비극의 주가 시작됩니다. 가우디는 제자와 인부와 함께 집을 지었어요. 그들은 도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세의 마지막 장인이었죠. 가우디 작품이 그들의 작품이기도 했어요. 그러니 인부들이 나서서 파괴를 막았죠.


바르셀로나 여행을 준비하는 여행자라면 관심 있게 볼 만한 게 있을까요


가우디의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성산인 몬세라트 수도원과 검은 성모상을 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구엘성지 지하제실의 원시성을 만나야죠. 가우디의 독창성과 거친 대지의 원시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성가족 대성당은 언제쯤 다 지어질까요?


예언가가 아니라 확신은 못하겠지만, 2026년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에요. 이 시기를 맞추려는 카탈루냐 주정부의 의도도 있고요. 2010년 11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미사집전으로 이 곳이 가톨릭의 새로운 성지로 부각되며 2026년이 거론되었죠. 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바르셀로나 경제 사정이 하나의 변수이고, 두 번째 변수는 진입 축에 자리 잡은 기존 건물의 철거입니다.


굉장히 유명했던 가우디였으나, 전차에 치였을 때는 아무도 가우디를 알아채지 못했는데요. 이런 시적 죽음이 일어났던 이유는?


가우디의 말년은 쓸쓸했죠. 가족도 없고 친구도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가우디는 고집불통에 채식을 고집했어요. 마지막 열정을 성가족대성당에 모두 쏟았을 때, 제자와 인부와 똑같이 돌을 다듬고 작업했죠. 그러니 그의 옷차림을 보고 가우디일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죠. 항상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끊임없이 헌신하는 장인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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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못지 않게 대단한 우리 전통 건축


늦은 나이에 스페인 유학을 결심했잖아요.


우리가 건축사를 땄을 때는 의사 변호사보다 수입이 좋았어요. 건축사는 부족하고 사회가 전체적으로 고도성장기니까 그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수입이 생길 때였죠. 그러다 IMF가 오면서 경제가 추락하면서 건설경기가 죽었죠.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어요. 작고한 스승님이 권유했어요. 돈키호테가 풍차를 적으로 생각하고 출정하듯 한국 건축사가 거의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스페인으로 무작정 떠났어요.


상상 속 가우디 작품을 실제로 만났을 때는 영혼이 비틀거릴 정도로 충격적이었죠. 그의 작품에는 기하학과 구조의 질서가 퍼즐 조각처럼 녹아 있었죠. 어쩌다 그냥 나온 작품이 아니었어요. 끊임없이 노력하는 천재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건축 교육이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앞으로 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질문부터 답하게 만들었죠. 아름다운 삶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국 건축 교육의 문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부분인가요.


제 지도교수님이 지금은 돌아가신 홍익대 김성국 교수님입니다. 그분과 10년간 도제 관계로 배웠죠. 스승님의 스승님이 미국 분인데, 이 분이 한국에 와서 하시는 말씀이 이래요. 한국은 이상한 게, 실제로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가르쳐야 하는데 박사 학위 소지자가 가르친다고.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춤을 배우는데, 춤의 역사를 공부한 이론가가 전부를 가르쳐요. 물론 이론도 필요하죠. 춤의 역사를 배운다면 해당 분야를 공부한 사람에게 배우는 게 맞죠. 그러나 적어도 춤 자체는 세계적인 춤꾼에게 배워야죠. 건축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경영학과에서도 성공한 기업가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주로 경영학을 공부한 학자에게 배우잖아요.
 
스페인 건축에 관한 책을 연이어 두 권 내셨는데, 한국 건축 중에서도 훌륭한 작품이 많잖아요. 좋아하는 곳을 꼽는다면.
 
가장 좋아하는 건축을 하나로 꼽으라면 부석사. 스케치 해서 스페인 대학에서 강연도 할 정도로 아끼죠. 창덕궁 후원도 좋고요. 경상도 봉화에 가면 청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도 좋아요. 청암정은 그리 크지 않은데도, 그 안에 동양사상 모든 게 담겨 있죠.


우리 건축은 대단해요. 파리 개선문은 기껏해야 1836년에야 완성됐죠. 우리 건축은 조선시대 건축부터 해서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요. 시간적으로 길어요. 수적으로 따져도, 가우디 작품은 12개인데, 그나마도 완성된 게 거의 없죠. 우리나라 건축을 꼽으면 12개는 가볍게 넘습니다. 그런데 이 훌륭한 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세계에 못 알릴까요? 아직 한국 건축에 관해서 세계적으로 통용될 만한 보편적인 분석을 내놓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은 저술 활동에 열심히 하고 계신데, 앞으로 계획은?


스페인에서 배운 게 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이죠. 마흔넷에 공부를 시작했으니, 돌아와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오히려 나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게 필요했죠. 앞으로도 10년 정도는 일도 병행하겠지만, 이론적으로 방향을 제대로 갖춰나가려고 해요. 그래야 한 개를 짓든 두 개를 짓든 제대로 지을 수 있어요.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유행대로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게 가우디 철학이기도 했죠. 제가 생각하는 건축은 한국의 토양에 뿌리를 박으면서도 서구의 모더니즘을 융합하는 것이에요. 주택 하나를 지어도 그렇게 짓고 싶어요. 


제대로 지으려면, 공부를 해야죠. 책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쓰려면 수많은 책을 읽어야 하니까, 자연스레 공부가 되죠. 이번에 쓴 『스페인은 가우디다』처럼 동서양 건축에 관해서 계속 책을 내려고 합니다. 파르테논, 피라미드, 한국 건축 등을 소재로 해서 가벼운 여행서적이 아니라, 깊이가 좀 있는 책을 쓰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죽기 전에 걸작이 나오지 않을까요? (웃음) 죽기 전까지는 수행이고, 죽기 직전 작품이 최고의 작품이 되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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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가우디다 김희곤 저 | 오브제
『스페인은 가우디다』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삶을 연대순으로 보여주며, 그가 인류에게 선물한 건축물을 심도 있게 소개한다. 바르셀로나 곳곳의 가우디의 건축 사진을 보고 건축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며, 결코 화려하지 않았던 인간 가우디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최민석 “『풍의 역사』는 서사성에 의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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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우열이 어디 있으며,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좋은 소설의 조건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이중 구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렇게 읽어도 재밌고 저렇게 읽어도 재밌는 소설. 대표적인 게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시기에 일어났던 세계관 대립을 미리 알고 있는 독자라면 그 소설은 훌륭한 교양 소설일 테다. 이런 사상사에 굳이 관심이 없더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살인범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물 간 갈등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기인 덕택이다.

 

풍은 이때부터, 모든 것이 표면에 드러나는 이름이나 이야기보단 내면적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이중 구조를 좋아했다. (28쪽)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가진 힘은 여기에 있다. 이중 구조로 여러 층위의 독자를 유혹할 수 있어서다. 장편소설 『풍의 역사』도 그런 작품이다. 전작 『능력자』『쿨한 여자』, 소설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에서 경쾌한 유머로 무장한 독특한 소설을 선보인 소설가 최민석.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 『풍의 역사』는 경쾌함을 다소 뒤로 밀어두고 전면에는 진중함을 내세운다. 물론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는 중간 중간에 양념처럼 가미되어 있다.

 

 『풍의 역사』는 제목 그대로 풍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풍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해방 뒤에는 베트남에 건너가 이후에 다가올 대한민국의 문화적 격변을 주도(?)한다. 그렇지만 역사책 어디에도 풍에 관한 기록은 없다. 풍은 격변의 시기에 살아갔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고, 풍의 행동 역시 의도된 게 아니라 우발적이었으니까.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 속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주인공 풍에게는 사랑하는 연인 밤이 있었다. 밤을 연모한 앞잡이의 간계로 풍은 징집되어 전선으로 내몰린다. 전선에서 밤의 사진을 고이 간직하던 풍. 치열한 전투에서 밤의 사진이 날라간다. 이 사진을 잡으려고 전선을 가로지르며 풍은 ‘밤, 밤, 밤’을 외친다. 이 장면을 보던 미군의 지휘관은 ‘밤(bomb)'을 듣고는 영감을 얻어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을 끝낸다.

 

B급 유머 같지만, 어처구니 없는 사건 뒤에는 경제 침체, 식민지, 제국주의, 전쟁 등 어두웠던 20세기 세계사라는 진중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풍의 영웅담만 따라간다면 경쾌하게 읽을 수 있고, 그 속에 자리잡은 역사를 읽어낸다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그릴 수 있는 작품, 『풍의 역사』는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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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가 기교라면 『풍의 역사』는 서사성에 의한 소설


오늘 패션이 특별합니다.


딱히 컨셉으로 이렇게 입은 건 아니에요. 이번 추석 때 교통사고가 나서 눈 부위를 다쳤어요. 치료 중이라 상처를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인터뷰를 하는 점, 사과 드립니다.


쌍커풀 수술은 아니죠?


네.


『풍의 역사』는 전작인 『능력자』, 『쿨한 여자』와는 다소 다른 작품 같은데요.


장편소설을 3권 썼습니다. 첫 번째 『능력자』를 쓸 때는, 한국 순수문학의 범위 내에서 허용되는 농담의 끝이 어디인가를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이 작품은 스타일에 의한 소설로 그 안에는 많은 기교가 들어가 있죠. 서사적 요소는 많지 않습니다. 이야기 구조가 간단해요.『쿨한 여자』는 연애소설이죠. 서정성을 추구했던 소설입니다. 『풍의 역사』를 쓸 때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어요.『능력자』가 기교, 『쿨한 여자』가 분위기라면, 『풍의 역사』는 철저히 서사성에 의한 소설이죠.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3년 전쯤에 청탁 받았을 때, 원래는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작품을 생각했죠. 지인들이 다 손을 저으며 싫어하더라요. 쓸 수 있겠느냐 묻기도 했고, 더 충격적인 건 이야기가 끔찍하고 비극이라 싫다는 반응이었어요. 그때 『풍의 역사』이야기를 들려줬어요. 한국 근현대사, 동아시아, 세계역사에 모두 개입하면서 자기가 해결은 하지만 공식적인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인물에 관한 영웅담이었어요. 다들 이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걸 해 왔다면, 이젠 한 번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써 보고자, 해서 쓰게 된 거죠. 소설가로 계속 살 수 있는지 해 본 실험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페이스북에 장황한 출사표를 던지기도 한 거고.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차이, 괴리가 컸나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음원이 유통 안 되고, 기다리는 영화는 수입이 안 되고, 어쩌다 좋아하게 된 책은 절판이 되더군요.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었어요. 겪어보고 확실히 알았어요. 이제는 인정합니다. 처음에는 몰랐어요. 가끔은 마이너한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제가 때때로 좋아하기도 했어요 1,000만 관객은 아니지만 500~600만이 본 영화 중에서는 제가 좋아한 작품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접점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죠. 제가 좋아하는 것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지향점이 다르구나, 하는 사실을요. 소설가는 세상과 독자와 호흡을 맞춰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한두 번쯤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역시 삶은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단지 이력서에 몇 줄 써질 경력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별처럼 잠들지 않게 하며, 이불을 덮고서도 그 속에 빠져 새벽을 맞게 하는, 즉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전히 흘러가고 있기에, 또 하루를 온전히 살게 하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삶은 그 사람의 묘비에 새겨질 몇 줄의 이야기였고, 그 사람의 후손들 입에 담겨질 영웅담과 추억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이름만으로 눈물 맺히는 사연이었다. (277쪽)


언제까지 작가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고 했는데요. 전작을 향한 대중 호응이 덜해서였나요, 아니면 자신이 생각했던 문학적인 완성도가 있을 텐데 여기에 미치지 못해서였나요.
 
솔직히 말하면 둘 다죠. 제가 폭넓은 독자를 가진 작가는 아니에요. 농담처럼, 신에게는 12명의 독자가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소수의 독자가 꾸준히 찾아주는, 문학을 장사에 비유해서 죄송하긴 한데 장사로 치자면 단골손님으로 유지되는 작가죠. 사실 그런 게 제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거예요. 하지만 작가도 생활인이기에, 계속 살려면 어느 정도 작품이 소화가 되어야 하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게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B급 성향의 이야기, B급 취향의 이야기거든요. 작품 질이 B급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이런 매니악한 정서가 담긴 이야기만으로 작가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이번에 『풍의 역사』는 그런 정체성을 유지는 하되, 최대한 자제해서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서사로 꾸미려 했어요. 잘 안 된 거 같아요. (웃음) 독자들이 여전히 B급이라 말해요.


한국 역사는 이야기 소재로 풍성해


『풍의 역사』를 보면 풍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데리다를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유독 찬드라세카라 벵카타 라만의 사진만 나오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첫 번째는 재미삼아 넣었어요. 두 번째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라고 저와 동갑내기 작가가 있는데, 그 작가 작품에 사진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부러워서 넣어봤어요.


소설 속에서 중요한 두 인물이 풍과 앞잡이입니다. 어리석은 질문 같은데, 혹시 작가님은 어떤 인물에 가깝나요.


정확한 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작품에는 풍과 앞잡이가 있고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한데, 바로 오중사죠. 말이 굉장히 많고, 풍을 곤경에 빠뜨리고 나중에 반성해서 풍은 물론 구와 언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심지어 서태지 출현에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요. 스스로 생각했을 때 오중사에 가깝지 않은가 싶어요. 그리고 손자인 언이 기술자 역할이니, 글을 쓰고 이야기를 전한다는 점에서 언과 닮아 있겠죠.


한국 근현대사가 배경인데, 사관이라고 하죠. 역사가 보는 시각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잖아요. 어떤 면을 부각하고 싶었나요.


딱히 부각하고 싶은 건 없었어요. 제게 확실한 사관이 있어서 쓴 작품이 아니에요. 역사는 하나의 소재일 뿐이죠. 레바논 작가나 인도 작가나, 한국 작가에겐 자민족 역사를 쓰기에 좋은 토양이 있죠. 워낙 역사가 버라이어티 하니까요. 이 좋은 소재를 언젠가는 한 번 써 보고 싶었어요. 그 자체가 하나의 풍요로운 이야기 소재니까 활용했을 뿐입니다.


한 인물의 삶과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병치된다는 점에서 올해 나온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풍의 역사』가 비교되기도 하는데요.


금시초문인데…. 만약 그렇다면 선생님께 죄송할 따름이에요. 『풍의 역사』의 서사에는 시대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켰지만, 이 방식은 가능한 한 이번으로 끝내려고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시대는 시대, 개인은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네, 『투명인간』『풍의 역사』 비교는 제가 해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질문 드릴게요. 풍이 살아온 삶의 끝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증오와 이기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기사 댓글을 보면 엄청나요. 세월호 사건에 달린 댓글만 봐도 그렇고요. 한국이 이게 나라인가, 공동체가 맞나 싶을 정도죠. 과거보다 증오가 팽배해지고, 이해나 관용이 많이 떨어졌어요. 그럼에도 교통사고 겪고 나서 느낀 건, 적어도 마지막 인간성은 놓치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자기 시간을 쪼개서 위로하고, 병문안 왔어요. 고마웠습니다.


나는 어느 날 할아버지로부터 이 긴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었는데, 그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물어보았다.
-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용서만 하고 싸우지는 않으셨어요?
그날 할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아니다. 나도 싸운단다. 나는 너를 통해 싸우고 있단다. (241쪽)


풍이 세계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풍자스럽게 그린 초중반은 유쾌했습니다. 그에 비해 중반 이후는 다소 쓸쓸했는데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이야기 소재로 선택하면서 피할 수 없는 문제 같기도 한데, 창작자로 고민이 없었나요.


원래 이렇게 쓰고 싶었어요. 중후반으로 갈수록 슬프죠. 과거에는 식민 지배, 전쟁 등 극단적인 상황이 있었고 이후에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더 살기 힘든 시기를 보냈잖아요. 중후반으로 갈수록 쓸쓸하고 슬프게 흐를 수밖에 없었던 건 운명 같아요. 한국사를 택하면서부터 시작한 운명. 그 와중에도 오중사의 끊임없는 실수 등 웃음을 유발하는 양념은 넣고 싶었어요. 유머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되, 서슬 푸른 한국사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려 했어요. 피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허풍, 허구, 허언 이렇게 3명이 등장하고 허풍의 이야기가 주인데요. 구와 언의 이야기로 3부작을 낼 생각은 없나요.


끝났어요. 더 내서 얼마나 더 망하려고.


책 나오고 당한 교통사고, 좋은 일 안 생기던데?


『풍의 역사』가 나오고 나서 교통사고를 당했는데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은 액땜이다, 뒤에 어마어마하게 좋은 일이 있을 거다, 책이 잘 될 거다, 이렇게 위로해줬지만 좋은 일 안 생기던데?


소설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이야기를 해 보죠. 소재가 다양하고, 이야기가 기상천외하다고까지 할 소설집이었는데요.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가끔씩 계약금을 미리 주는 출판사가 있는데, 이럴 때 좀 더 아이디어가 제대로 발산되는 것 같아요. (웃음) 사실, 닥치면 다 해요. 다만, 미리 아이디어를 짜놓을수록 더 건강한 글이 나와요. 막판에 쓰면 쓸수록 좀 더 막장이 돼요. 본능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마감 이틀 앞두고 쓴 「독립운동가 변강쇠」가 원래 하루 만에 쓰려 한 건데, 체력이 안 돼서 이틀 걸렸어요. 그래서 막장 중에 막장인가 봐요. 다른 작가들 인터뷰 보니까 근사한 답변 많이 하던데, 오늘 인터뷰 망한 거 아닌가요.


다 질문자의 부덕입니다. 어쨌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장편 3편, 소설집 1편을 썼습니다. 소설 외에도 에세이와 시나리오 작업도 했는데요. 이토록 다양한 글을 쓰느라 아이디어가 고갈됐을 것 같기도 한데요. 현재 심신이 지쳐 있지는 않나요?


그간 창조의 원동력은 외로움이었어요. 외로운 사람에겐 시간이 많잖아요. 친구 만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그 시간에 소설도 쓰고 에세이도 써왔어요. <대학내일>에 애독자도 제목을 헷갈려하는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의 후속작을 연재했고, 채널예스에도 ‘최민석의 영사기’를 쓰고 있어요. 이렇게 쓴 게 만 3년이 되어 가는데, 약간은 지친 상태에요. 3, 4년간은 장편소설보다는 엽편소설, 그 외에 에세이나 다른 작업을 하면서 숨을 고르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주는 일을 닥치는 대로 다 할 생각이에요.


최민석 작가 하면 아무래도 ‘유머’일 텐데요. 소설이나 칼럼, 에세이에 유머가 뛰어납니다. 반면, 직접 뵈면 의외로 진지한데요. 글을 쓸 때 본능적으로 웃겨야 하는 욕구가 생기나요.


이중적인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웃음) 소설 쓸 때 웃기려는 욕구가 있는 건 아니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따로 있어요.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 이거죠. 결국 인간의 카타르시스인데, 차원이 다양하죠. 슬퍼서 재밌을 수도 있고, 웃겨서 재밌을 수도 있고, 감동적이어서 재밌을 수도 있어요. 독자가 어떻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풍의 역사』를 쓰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엔딩 쓸 때는, 풍과 작별하기 싫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 작품은 웃음만 기억되는 경향이 있어요. 웃음 외에도 쓸쓸함, 고독, 질투, 분노 등 다른 감정도 있는데 말이죠. 아마도 한국 문단이 진중함을 추구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유머 위주로 기억되는 모양인데, 사실 『풍의 역사』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넣으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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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글 쓰고, 오후에 달리기 하고, 가끔 맥주를 즐기고, 장편 3~4편을 내고 단편집을 중간에 발표하고, 이런 모습이 하루키랑 닮았는데요.
 
헙! 큰 일 날 소리. 하루키 팬에게 욕먹어요. 딱히 닮은 게 아니라, 대부분의 소설가가 비슷한 거 아닐까요? 소설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요. 아침형 소설가와 올빼미형 소설가. 제가 아는 상당수가 아침형 소설가입니다. 아침에 소설을 몇 시간 쓰면 몸에 좀이 쑤셔요. 소설 써 보면 알아요. 운동을 해야 장편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시나 단편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장편은 정말 체력이 필요해요. 운동해야죠. 소설가가 실내 체육관에 들어가서 역기를 들겠어요? 실내에서 글 쓰던 답답한 마음에 또 실내로 들어가긴 싫잖아요. 실외로 나가야죠. 산책을 하거나 달리기를 하겠죠. 이런 생활을 저를 비롯한 굉장히 많은 소설가가 반복한다고 생각해요. 글 쓰면 답답하니까 운동하고, 운동을 해도 실내가 아니라 밖에 나가서 하고. 당연히, 달리고, 달리면 목 마르니까 맥주 생각 나고. 맥주 마시면 자연스레 음악 듣고 싶어지고, 운동하는 소설가라면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요?


밴드 ‘시와 바람’ 앨범은 언제 나오나요. 지난 번 채널예스 인터뷰에서는 곧 나온다고 하셨는데.
 
며칠 뒤면 제가 독일에 가는데, 그것 때문에 앨범 녹음이 미뤄졌어요. 정규 앨범 1집 녹음을 스튜디오에서 몇 번 했어요. 비틀즈 정도 되어야 한다는 원테이크 방식으로요. (웃음) 독일 다녀 와서 남은 보컬 녹음하고 내년 상반기에는 내려고 해요.


독일에 간다고 했으니, 말이 나온 김에 독일 팬에게 한 말씀.


독일에 팬이 어딨어요. 이 질문의 저의가 뭐죠? 그래도 답해야 한다면 팬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 작품 읽으면서 부끄럽다고. 부끄러운 작품 써서 죄송하고요. 당분간은 장편소설을 쓸 계획이 없는데, 이 작품이 부끄러운 걸로서는 마지막일 테니, 많이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이 아껴주셔서 감사하고요. 다른 다양한 활동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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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최민석 저 | 민음사
최민석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풍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희대의 허풍쟁이 ‘이풍’이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박정희 정권, 5공화국, 서태지의 출현 등,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국 근현대사와 동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에 개입되면서, 특유의 영웅적 활약으로 세상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다.




신동일 “행복한 부자는 나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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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부자를 꿈꾸는 신동일 저자가 새로운 책 『마흔의 역전』으로 돌아왔다. 신동일 저자는 탁월한 자산관리 실적으로 ‘2012년 베스트뱅커 PB대상’을 비롯하여 교보생명 베스트파트너상, 국은인상 등 다양한 상을 받았다. 이렇듯 금융 전문가로 성공한 그는 책으로도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전작인 『한국의 장사꾼들』, 『한국의 슈퍼리치』은 맨손으로 시작해서 부를 얻은 사람을 조명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받는다.

 

이번에 나온 『마흔의 역전』은 이전 책과는 다소 성격이 다른 책이다. 이전 책이 목표로 둔 게 ‘슈퍼리치’였다면 이번에 나온 책은 슈퍼리치까지는 아니더라도 꿈을 실행에 옮겨 인생 후반부를 멋지게 가꿔 나가는 사람에 초점을 맞췄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집안이나 학벌에서 별다른 강점이 없었음에도 역전에 성공한 사람이 많다. 즉, 평범한 우리도 언제든 인생 역전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가 털어놓는 비법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의 가치를 높이라, 인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40대가 잘 되어야 사회가 건강해


『한국의 장사꾼들』, 『한국의 슈퍼리치』와는 비슷한 듯 다른 책이 『마흔의 역전』같습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같은데, 소재는 다른데요.


『한국의 장사꾼들』, 『한국의 슈퍼리치』는 맨손에서 시작해서 100억을 만든 사람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사업가, 장사꾼을 다뤘죠. 『마흔의 역전』은 엄청나게 큰 성취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소소하게나마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제가 40대 중반인데, 저 스스로가 역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요. 40대가 아니라도 20대든 50대든 평범한 삶을 반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책 제목에 들어간 '마흔'이 눈에 띄는데요. 40대에 주목한 이유는?


예전에야 마흔은 불혹이라고 해서, 인생 중후반 정도로 바라봤는데요.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흔히 100세 시대라고 이야기하는데, 옛날 마흔은 중간 위치지만 지금 마흔은 예전 30대 정도로 봐야죠. 앞으로도 30~40년을 활약할 수 있으니 40대부터라도 제대로 준비하면 역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40대들이 마음으로는 역전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건 사실이죠. 40대는 가정에서나 회사에서나 책임감이 무거운 시기니까요. 그래도 마흔에 주목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기둥이고 대들보이니까요 이 사람들이 행복하고 잘 되어야만 우리사회가 행복할 수 있어요. 저 자신이 책을 쓰기 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풀어내고 싶었어요. 실제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사람을 만나 보면서 답을 얻었습니다.


역전, 성공은 결국 경제적 독립


한국 40대 대부분은 회사에서 나가면, 프랜차이즈 개업 정도를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책의 40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모습은 다양합니다. 소위 말하는 ‘스펙’만 두고 본다면 전반적으로는 평범한 사람이 많았죠. 한우 목장주인 정기태 분 같은 경우는,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에요. 젊은 시절 방황을 거쳐 지금은 1,700평 부지의 한우 축사를 운영하면서 100여 마리에 가까운 한우를 키워요. 그런데 책 속 주인공들의 ‘역전’에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결국 '역전'은 세속적으로는 경제적 독립입니다. 세속적 독립은 내일 출근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생계가 가능하다는 뜻이죠. 이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전 책에서 썼듯, 수입에서 지출을 뺀 게 최소 1원 이상이어야 해요. 그래야 종자돈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이템이죠. 이렇듯 역전의 키워드는 분명히 있어요. 자신의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아서 경제적 독립을 이루자, 이걸 실행하면 행복해지겠죠.


40대와 꿈, 어울릴 듯하면서도 쉽게 이어지지 않는 단어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저는 꿈노트에 20년을 적어왔습니다. 20대 꿈은 굉장히 원대했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대하고 결혼하니 30대. 30대는 눈 코 뜰 새 없이 지나가요. 마흔으로 밀립니다. 그러면서 가슴 속 꿈도 묻혀버리죠. 그래도 만나 보면 40대들도 누구보다 가슴이 뜨거워요. 책 속 주인공은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고, 꿈을 이루고자 실행했던 사람들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일상을 살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데, 이런 내용이 독자에게도 굉장히 자극이 될 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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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외국어 공부와 인맥 형성을 강조했는데요.


나이가 들어서도 외국어 공부는 필수죠. 신동일꿈발전소에서는 영어모임과 독서모임을 하는데, 따로 영어이유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국내는 시장이 작아요. 결국은 진출을 해야 하죠. 『마흔의 역전』 속 내용을 예로 들면, 에트로 이충희 회장님은 800만 원으로 창업해서 동남아 시장에서 활약하는데요. 가능했던 게, 일본어였습니다. 책 속 주인공들은 영어든 일본어든 중국어든 완벽하게 외국어를 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요. 비즈니스 할 정도로만 해도 된다는 거죠.


인맥도 필수죠.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어요. 부족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채워야 하죠. 그러니 인맥이 있는 사람은 몇 배 성공이 빨라집니다. 책 속 주인공 중에서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시행착오 겪은 사례도 있어요. 혼자 하려다 보면 몸은 쓰러질 정도로 피곤하고, 일은 진행 안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럴 때는 위임할 건 위임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죠. 좋은 인맥을 구축해서 꾸준히 관리해야 합니다. 책에 썼듯 현직, 본업을 활용하라는 말과 맞닿아 있죠.


‘신동일꿈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회원들의 꿈은 어떤 의미인가요?


행복한 100억 부자, 입니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행복한 부자이죠. 돈 버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죠. 돈을 벌려면 아이템이 확실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잖아요. 자연스레 1%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이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 독서모임, 영어모임도 하고 강의도 듣는 등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부자는 나누는 사람


행복한 부자는 어떤 부자인가요.


100억이 생기면 명품을 산다, 명차를 타보고 싶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요. 그런데 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막상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면, 그런 데서 얻는 행복은 작다고 해요. 아무리 길어도 2주를 가지 않죠. 그것보다는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나눠주는 데서 얻는 행복이 큽니다.
 
딸과 함께 저자 강연을 듣는 장면에서는 아버지의 모습을 느꼈는데요. PB로 활약하면서, 꿈발전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시간 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가정에서는 어떤 아버지인가요.


시간이 없긴 하죠. 꿈발전소가 비영리인데, 이걸 꾸려나가느라 주말도 거의 못 쉬죠.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해요. 그래도 최근에는 아이들과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함께 하려 합니다. 2주에 한 번 정도는 조조로 영화를 보고요. 영화 끝나고 커피숍에 모여서 가족끼리 대화를 해요. 그간 있었던 이야기도 하고 영화 소재로 의견도 나누고요. 가족끼리 대화가 참 좋아요.


아이가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되었으면 하나요.


그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우선 저 자신이 최근에 많이 바뀌었어요. 『한국의 슈퍼리치』이전에는 샐러리맨 마음가짐이었어요. 일 열심히 해서 승진한다, 그 이상의 목적은 없었죠. 책 쓰면서, 아무리 훌륭한 샐러리맨은 월 1억을 저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사업가는 이게 가능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CEO 마음가짐으로 바꾸었죠.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이제는 내가 사장이다, 은행장이다, 이런 각오로 일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앞으로 5년, 10년 후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자식들도 아빠 모습을 봤기에, 아이들이 느끼는 게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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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님의 책이 인기가 있는 게 이른바 ‘개천에서도 용 날 수 있다’는 걸 깨우쳐주는 덕분인 듯합니다. 그런데 점점 이 사회가 용날 수 없는 사회로 간다는 지적이 있잖아요. 수십 년 동안 금융 쪽에서 상담을 하면서도 느끼시는 바가 있을 듯한데요. 계층 고착화를 느끼나요?


많이 느끼죠. 그럼에도 이런 부분을 돌파하는 것은 결국은 ‘꿈’입니다. 꿈발전소에 오는 분들도 현실이 답답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그 꿈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해요. 인생은 한 번밖에 없어요. 연봉이 2천이든 1억이든, 그 돈을 포기하고 세계여행 갈 수도 있어요. 책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이랑주 대표도 그랬어요. 박사학위를 따자마자 사표내고 남편과 세계여행 떠났거든요. 결국은 어떤 꿈을 꾸느냐가 중요하죠.


최근에 공무원 연금이 화제고. 100세 시대에 화두는 역시 안정적인 자산관리 같습니다. 자산관리쪽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소장님께서 채널예스 독자를 위해 자산 설계에 관해 조언해 주신다면.


인생 100세 시대 역전의 씨앗은 20~30대에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마흔에 희망이 없느냐? 그렇지 않아요. 40대에는 최소한 10년 정도의 사회 경력이 있죠. 일에 관한 노하우가 있고 인맥도 있어요. 이런 씨앗을 어떻게 발현시키느냐가 모두에게는 화두일 겁니다. 1순위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에요. 현업에서 최대한 활약해야죠. 주식이나 부동산, 이런 데 비중을 높이 두면 안 됩니다. (웃음)


서점에 가 보면 행복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책도 있고, 그 반대로 돈 없이도 행복할수 있는 방법을 논한 책도 있습니다. 결국은 행복, 성공이 중요하다는 뜻일 텐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행복', '성공'은?


처음 PB가 됐을 때 느낀 것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100억 부자가 꼭 되어 보고 싶었고 책도 빨리 써서 저 자신을 알리고 싶었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 추구했던 부자의 모습이 행복한 부자는 아니었다는 걸 느꼈어요. 꿈발전소가 추구하는 가치가 여기서 나왔는데, 한 마디로 ‘많이 나눠주자’입니다. 단순히 100억 있는 게 행복한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남에게 인정 받고,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게 행복인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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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역전신동일 저 | 리더스북
인생 후반, 자신의 ‘숨은 강점’을 찾아내 새 삶을 일궈낸, 우리 이웃들의 진솔하고 생생한 역전 스토리. 마흔 이후의 성공은 치기 어린 젊은 시절과 달라야 한다. 이력서용 스펙보다 실전용 기술이 중요하고, 경쟁적인 승리보다 자아성취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고민하되 행동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하며, 떠밀리듯 살아온 지난 삶은 과감히 접고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인생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한국 최초, 최고의 기록을 세운 EDM 아티스트 - 프릭하우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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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EDM(Electronic Dance Music)의 존재는 근래에 친근해졌다. 그렇다고 없던 것이 생겨난 건 아니다. 프릭하우즈가 증명한다. 이미 15년 전부터 디제잉을 시작했고, 비트포트와 트랙잇다운에서 한국 최초,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최근엔 슈퍼스타 DJ, 스티브 아오키를 SBS 파워FM, < 애프터클럽 >의 게스트 믹스에 섭외했다. 세계적인 파티 몬스터도 그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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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듣기엔 엄청나지만 우리가 만난 프릭하우즈는 알고 지내던 동네 형 같았다. 자유롭고 느슨했다. 인터뷰보단 수다에 가까웠고, 중간 중간 미공개 곡을 들려주거나, 스크래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끝낼 시간이 넘어간 줄도 모르고 즐겁게 진행되었다.


‘프릭하우즈’ 검색하면 국적부터 뜹니다. 실례지만 국적이 어떻게 되나요?


한국 사람인데, 외국에서 오래 살았어요. 싱가폴, 오래있진 않았었지만 미국, 유럽 쪽... 어렸을 때부터 외국 생활했어요.


음악은 언제 시작하셨나요?


외국에서 시작했죠. 열여섯 살이었던 것 같아요.


그럼 제일 먼저 시작한 음악이 EDM이었나요?


아뇨. 그때는 블랙음악이었어요. 재즈, 힙합, 소울, R&B 많이 했었어요. 당시 EDM이 알려지지 않았었어요.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이유가 없어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하고 싶었어요.(전원 웃음)


블랙 뮤직에서 EDM으로 넘어간 계기는요?


제가 원래 빠른 비트를 좋아해서요. 시기는 2002년 월드컵 전부터 많이 듣기 시작했죠. 15년 전에. 제가 DJ 생활 15년이에요. DJ 스케줄원, 소울스케이프, DJ 렉스와 같은 클럽에서 일 했었어요. 그 때에는 브레이크 비트, 비보이 음악을 틀었었죠. 그때엔 다 힙합이었어요. 저만 먼저 EDM을 한 거고요. 


당시 주변 반응은 어땟나요?


신기하게 쳐다봤죠. ‘될까 말까’ 라는 눈빛으로. 근데 저는 선택을 잘한 것 같아요. 


그때 장비 마련을 어떻게 하셨나요?


그때엔 하나하나 구했죠. 해외에서 배송 받고. 

 

음악은 어떻게 배우셨나요?


저는 독학이에요. 음악 배운 적 없어요. 혼자서 만져보고, 하다 보니 된 거죠. 배워서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음악, 예술은 타고나야 ‘할 수 있구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단, 타고나는 건 1%, 노력은 99%죠. 아무튼 독학이에요.

저 디자인도 하는데 배운 거 없어요. 돈 주고 배우는 건 하나, 요리!(전원웃음) 혼자서 살다보니 저를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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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레이블에 소속되어 계신데 설명 좀 해주세요.


저는 레이지 리치의 빅 피쉬 소속이에요. 스카우트된 거죠. 레이지 리치는 존경했던 아티스트였고요. “레이지 리치 정말 멋지다.” “베이스사운드 죽인다.” “꼭 레이지 리치와 함께 할 거다.” 라고 했었지만 사람들은 비웃었어요. “레이지 리치가 왜 너랑 하냐?” 지금 아비치, 마돈나랑 같이 하는 아티스트니까요. 결국엔 제가 레이지 리치와 공동 작업했죠. 그때 빅피쉬 레코딩에는 제드도 있었고 레이지 리치가 키운 포터 로빈슨도 있었죠.

「Get up」이라는 제 노래가 있어요. 비트포트에서 5위, 아시아인이 처음으로 비트포트 차트에 올라간 역사적인 곡이에요. 그 곡으로 제가 이름을 알렸죠.


비트포트 차트 설명 부탁드려요


EDM의 빌보드? 물론 빌보드 정도는 아니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그렇죠. 비트포트에서 탄생한 아티스트, 스타가 많아요.


EDM이 대세인 걸 언제 실감하세요?


한국에서도 쉽게 EDM을 접할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외국도 아직까지는 아니에요. 많은 페스티벌이 생겼지만 유럽은 옛날부터 있었던 문화니까. 아시아는 지금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요. 지금은 적응, 준비기간.

근데 EDM을 잘 이해하셔야 되요. EDM은 다 포함되는 거잖아요. 하우스는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테크 하우스, 딥 하우스, 미니멀 하우스... 트랜스는 프로그레시브 트랜스, 싸이 트랜스... 거기서 또 나뉘고요. EDM은 엄청 큰 장르에요.


갈수록 페스티벌 많이 열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거죠. 페스티벌 없으면 EDM시장 죽어요. 페스티벌이 음악뿐 아니라 많은 콘텐츠가 뭉쳐서 문화를 만드는 거잖아요. 더 좋은 거죠. 그래야 DJ 아티스트들도 먹여 살리고... 잘나가는 사람들은 한정적이지만요.


우리나라에서 아쉬운 EDM 문화는 무엇인가요?


공짜를 좋아해요. 술은 사 마시면서 왜 문화에는 돈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한 건데... 그러면 경제가 돌아가지 못하죠. 소비를 해주셔야 돼요.


생소하신 분들은 DJ와 EDM 프로듀서를 혼동하기도 하죠?


완전히 다르죠. DJ는 음악을 잘 틀면 되고 프로듀서는 음악을 잘 만들면 되는 거죠. 저는 DJ에 먼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DJ로 시작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땐 CDJ가 없었어요. 턴테이블부터 시작했어요. 이렇게 순식간에 장비들이 업그레이드 될 줄 몰랐죠. 근데 신경 안 써요. 음악은 소울이고...(전원웃음) 

흉내 낸다고 뮤지션이 되는 것 같지 않아요. 요즘 어린친구들이 컨트롤러 하나사서 DJ라면서 “아저씬 누군데?”(전원웃음) 스물두 살 애들이 그래요. 아는 만큼 보이는 거죠. 그렇게 해서 성공할 수 없어요. 디제이나 프로듀서를 쉽게 보시면 안돼요. 진짜 음악인은 달라요. 저는 모르는 악기가 없거든요. 안 만져본 장비가 없고요. 


DJ로서 믹싱할 때는 어디에 초점을 두시나요?


스토리를 만들어요. 영화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흐름을 만들어요.  


프릭하우즈 씨에게 좋은 클럽은 어떤 클럽인가요?


팬들과 소통 할 수 있는 클럽이요. 사람들이 제 음악에 즐겁게 논다면 사운드, 크기, 인테리어 상관없어요. 여기가 강남 무슨 클럽이라고 특별해요? 절대 아니에요. 소통을 해야 해요. 같이 즐기고, 끝나면 술도 같이 마시고. 그런 커뮤니케이션이 좋은 거죠. 정이 있는 분위기. 


프로듀싱 할 때는 어디에 초점을 두시나요?


사운드 메이킹. 자기만의 사운드가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스크릴렉스는 자기만의 사운드가 있잖아요. 


음악을 어떻게 만드세요?


방법은 없어요. 그냥 잘 만들면 돼요.(전원웃음)

저는 술 마시면 잘 만들어요. 둔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제 경우는 감성적이고 예민해져요. 


최근 시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나요? 


트랩, 요즘 유행하는 일렉트로 힙합을 해보고 싶어요. 100정도의 BPM에 릴 존의 「Bend Ova」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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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파워FM, < 애프터클럽 >을 진행 중이십니다. 믹스셋의 개념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Pre Recording이죠. 그냥 미리 녹음한 거를 여기에 내보내는 거 에요. 게스트 믹스는 와서도 할 수 있지만 한 번할 때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인터넷으로 교류해요. 보내주면 멘트 넣어서 방송하는 거죠. BBC Radio 1처럼 됐으면 좋겠어요. 


섭외는 어떻게 하시나요?


그냥 메시지, 이메일 보내고, 오면 술 사주고.(전원 웃음) 요즘 클럽에도 해외 DJ들이 많이 와요. 아시아가 새로운 시장이기 때문이죠. 외국에서 받는 것보다 더 주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엄청 좋아하죠. 관심 있고요. 주로 옛날 사람들을 좋아해요. H.O.T, S.E.S, 젝스키스...


빅뱅 리믹스도 몇 곡 하셨던데 좋아하시나요?


리스펙트하죠.   


개그맨들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샘 헤밍턴 씨와 「이태원 이장님」은 어떻게 작업하게 된 건가요?


샘 형의 기획사 대표님이 제 친한 형이에요. 그래서 친해지게 됐고요. 「이태원 이장님」은 코믹하게 만들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와서, 퀄리티있게 만들어보자 했지만 의견충돌이 있었던 노래죠. 


박명수 씨는 어떤 인연인가요?


함께 MBC에 출연하면서 친분을 쌓게 되었어요. 명수 형은 열정이 넘쳐요. 그 나이에, 그렇게 바쁜데...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 형은 DJ를 정말 하고 싶어 해요.


그렇다면 셀레브리티 DJ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셀레브리티 DJ와 오리지널 DJ는 완전 별개에요. 오리지널 DJ들은 목숨을 걸고 하는 거잖아요. 비난하는 게 아니라 셀레브리티 DJ들은 그들의 일을 하면서 DJ를 하는 거고요. 정말 진지하게 하고 싶다면 일을 포기하고 해야죠. 실력 괜찮은 사람은 많지만 진짜는 없다는 거예요. 


DJ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 부탁드려요.


일단 잠을 줄이고, 목표를 세워야 해요. 어린 친구들이 꿈이 없어요. 그냥 잘나가는 DJ들 보고 “아 DJ되고 싶다”라고 하는데 그건 꿈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한 목표들이 있어야 해요. 큰 계획을 세워서 한 발씩 나아가야죠. 그게 가장 큰 문제에요. 또 열심히 하는 걸로는 안돼요. 목숨 걸어야 해요. ‘성공하냐, 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성공하기위해 하고 있는가, 아닌가’ 가 중요해요. 현실이 중요해요


프릭하우즈 씨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꿈이 많아서 문제에요.(전원웃음) 뮤직 비즈니스를 더 다양하게 해볼 생각이에요. 후배 양성이라든지... 금전적인, 시간적인 투자를 더 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향후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이미 잡혀져 있지만 깜짝 공개를 해야 해서...(전원웃음) 좋은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인터뷰 : 김반야 이수호 전민석

정리 : 전민석


2014/09 전민석(lego93@naver.com) 



한학수 PD 영화 속 진실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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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은 영화<제보자>의 기자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초점을 둔 것은 언론의 자유, 우리 사회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한 언론인의 집요한 투쟁이었다”고. ‘줄기세포는 없다’는 진실이 밝혀진 지금, 줄기세포의 존재 여부에 대해 재론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 뿐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대신 임 감독이 주목한 것은 진실을 추적하는 언론의 외로운 싸움이다. 무엇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지, 그것을 밝혀내려는 이들을 가로막는 것인 무엇인지.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진실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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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추와 같은 질문을 가슴에 매단 채 극장을 나설 때, 다른 한편에서는 강한 호기심이 우리의 생각을 잡아끈다. 영화 속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 것일까. 『진실, 그것을 믿었다』안에는 그 실체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2005년 당시 <PD수첩>을 통해 최초로 황우석 박사의 논문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던 한학수 PD가 취재과정을 증언하고 있는 것. 사건 발생 1년 후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지난 8년 동안의 변화까지 담아내며 다시금 독자들 앞에 섰다.

 

한학수 PD와 <PD수첩>의 길고도 외로운 싸움은 2005년 5월에 시작되었다. 황우석 교수가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한 이후였고, 세계 최초로 ‘체세포 핵이식 줄기세포’를 만든 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국민 모두가 열광하던 때였다. 한학수 PD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단지 생명윤리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김현기 PD와 함께 취재를 시작하려 했지만 섭외에 난항을 겪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학수 PD는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황우석 교수의 명성은 “부정한 방법으로 쌓은” 것이며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의 사실은 자신의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제보자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는 과학자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지어낸 사기꾼이라니, 의심은 황우석 박사가 아닌 제보자를 향했다. 이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그러나 그가 내민 복사된 노트-실험에 사용된 난자에 대한 기록을 단초로 진실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난자는 매매된 것이거나 실험에 참여한 연구원들로부터 채취된 것이었다. 그보다 앞서, 줄기세포 연구 이전에 황우석 박사가 쌓았던 명성부터가 모두 거짓이었다.

 

그가 한국 최초로 탄생시켰다는 복제소 ‘영롱이’는 관련 논문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부는 관련 보도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 언론은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내용 그대로를 실어 날랐다. 국민들은 그 ‘말’을 믿었고 황우석 박사는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진짜’ 복제 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는 어디에서도 주목받지 못했고, 연구에 대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의심 없는 믿음은 점점 맹목적으로 변질되어 갔다. 급기야 황우석 박사는 존재하지도 않는 줄기세포를, 설사 그가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동물 실험도 시작하지 않은 줄기세포를, 척추손상 환자에게 임상 실험할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환자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다. 황우석 박사가 자신을 다시 걷게 해 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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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건’ 취재하면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임순례 감독의 영화<제보자>가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언론의 고된 여정을 보여준다면『진실, 그것을 믿었다』는 그 길 위에서 만난 ‘황우석 스캔들’의 조각들을 보여준다. 윤리를 저버린 한 인간의 욕망, 그 욕망에 편승한 정권과 언론과 과학계, 과정보다는 결과가 진실보다는 국익이 우선한다는 공공의 합의, 이 모두가 ‘황우석 스캔들’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시킨 퍼즐 조각들이었다.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로운 까닭에 『진실, 그것을 믿었다』 속을 거니는 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추리 소설을 읽듯 손에 땀을 쥐면서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가 ‘진실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비난 받아야 했던’ 이들의 시간 위에 쌓인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아이러니한 현실에 쓴 웃음을 짓게 된다. 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반대편의 이야기-추악한 욕망과 어두운 이해가 얽혀있는 거대한 존재의 이야기-의 위로는 짙은 한숨이 겹쳐지기도 한다.

 

그렇게 『진실, 그것을 믿었다』는 독자들을 씁쓸한 재미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씁쓸함, 이 재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저자인 한학수 PD에게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학수 PD는 부드럽지만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완곡하지만 물러섬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전하기에 앞서 한 가지 분명하게 밝혀둘 것이 있다.『진실, 그것을 믿었다』는 실제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영화 <제보자>는 실화에서 모티프를 얻었을 뿐 새롭게 창작해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이는 임순례 감독과 영화 <제보자>에 대한 오해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학수 PD가 거듭 강조한 말이었다.

 

‘진실, 그것만을 믿고 취재해 왔다’고 말하기에는 견디기 힘든 일들이 많으셨을 텐데요.


『진실, 그것을 믿었다』는 사건에 직접 관계되었던 제가 겪었던 바, 느낌, 실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가를 가감 없이 쓴 책이에요. 과장하거나 더하거나 빼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제일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에 대한 해석은 책을 읽으면서 학계와 국민들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고요. 만약 저 혼자 했다면 가능하지 않았겠죠. 영화 <제보자>를 예로 들면 캐릭터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저와 최초의 제보자가 부각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수면 아래에서 도움을 줬던 많은 사람들의 역할이 생략되어 있죠.

 

영화 <제보자>에서 실제와는 다르게 그려졌거나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영화에서는 김이슬 조연출이 (논문) 사진 조작과 관련한 글을 인터넷에 게시한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죠. 최초로 의혹을 제기하셨던 분은 익명의 농사꾼이었어요. 유전자 검사 전체가 잘못 되었다는 글을 올린 ‘아릉’이라는 분도 계셨고요. BRIC(생물학 연구정보센터)의 생명 과학도들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죠. 우리와 같이 끝까지 실험을 하면서 취재를 물밑에서 도와준 과학자들도 빼놓을 수 없어요. 김병수 박사, 황상익 교수 같은 분들이죠. 기자들 중에서는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있고요. 그 분들의 얘기들이 책에는 담겨있지만 영화는 두 시간 내에 압축적으로, 그리고 허구적으로 구성해야 하니까 담기지 못했죠. 사실은 그런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덜 고독하게, 힘을 내서 취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거죠.

 

용기 있게 나서준 제보자를 생각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처음 류영준 박사를 만났을 때는 완전히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웃음). 논문 자체가 없다고 하니까요. 첫 만남에서 저한테 가장 신빙성 있게 다가온 건 복제소 영롱이의 논문이 없다는 얘기였어요. 황우석 박사를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가장 중요한 토대가 영롱이인데 만약 그것 자체가 가짜라면, 이 모든 것을 한 번 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PD님에게 있어서 류영준 박사와의 만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대단히 좋은 제보자를 만난 거예요. 류영준 박사는 정말 순수한 동기만으로 찾아왔었어요. 2005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논문 속 2번 줄기세포의 주인공인 환자에게 임상실험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고 있는데, 어떻게든 그것을 막지 못하면 너무 큰 죄악이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모든 걸 걸었던 거예요. 보통의 제보자들은 사안이 벌어지고 자신에게 압박이 들어오면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심지어는 진술을 바꾸기까지 하는데, 이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을 바꾸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는 대단히 강직한 제보자, 무결점 제보자를 만난 거죠.

 

‘내가 아닌 다른 PD가 취재를 맡았더라면’하고 생각해본 적은 없으셨나요?


물론 해봤죠(웃음). 제가 류영준 박사를 만나기 전에 황우석 박사와 관련해서 윤리 논쟁을 해보자는 취지로 (방송) 아이템을 준비했다가 접었었어요. 그래서 제보가 들어왔을 때 최승호 팀장이 저한테 취재를 맡겼던 거죠. 취재하면서 힘들 때마다 ‘어쩌면 운명 같은 이야기에 내가 빠져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돌이키고 싶지도 않았지만 ‘누가 내 대신 나서서 진실을 밝혀줬으면’하는 느낌이었죠. 결국은 당시 공동 연출을 했던 김현기 PD와 윤희영 작가를 비롯한 동료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김현기 PD와 윤희영 작가는 저랑 같이 고통을 겪었지만 사안이 끝난 후에는 최승호 PD와 제가 가장 많이 조명된 측면이 있어요. 가장 정치적인 탄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지금에 와서 말하지만 두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이 있죠.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2번 줄기세포 환자에게 임상실험을 하겠다는 계획을 환자 아버지한테 들었을 때, 그때가 제일 분노했던 순간이었어요. ‘제보자가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이래서 제보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죠. 두 번째 순간은 황우석 박사가 연구원들을 병풍처럼 세워놓고 기자회견을 했을 때였어요. 사안이 다 밝혀지고 줄기세포는 없다는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앞날이 창창한 20대 초반의 연구원들 수십 명을 뒤에 배석해 놓고 기자회견을 했을 때요.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 저 젊은 후학들의 진로를 완전히 깔아뭉개는구나’ 라는 느낌을 들었죠.

 

이 사건은 단순히 논문 조작, 줄기세포의 유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건을 낳은 모체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진실, 그것을 믿었다』를 쓰게 된 의도인지도 몰라요. 줄기세포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도 물론 중요하죠.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중요한 문제예요. 그런데 저는 진실을 찾아 나가는 과정 자체가 한국 사회의 당시 모습, 당시에 우리가 처한 가장 커다란 문제를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우리에게는 진실 자체보다도 그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거죠. 지금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 관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당시 10년 전에도 똑같은 문제였어요. 언론, 정부, 학계가 동맹을 맺어서 서로 눈감아 주던 것이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진 것이 황우석 사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도 그런 구조적인 틀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발생한 거죠. 우리가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줄기세포 자체의 진위보다도, 각자가 이 세상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지 민낯을 본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황우석 사건’이 한 시대의 시상화석이라고 적었던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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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에는 없고 『진실, 그것을 믿었다』에는 있는 이야기


영화 <제보자>의 촬영 현장을 직접 방문하셔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영화 촬영 현장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다고 해서 잠깐 들러서 10분 정도 보고 나왔어요. 방송 쪽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보니까 마냥 신기해하더라고요(웃음).

 

그 전에도 임순례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을 텐데요. 특별히 당부한 부분은 없으셨나요?


임순례 감독은 저 뿐만 아니고 사건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저한테는 한두 차례 연락이 와서 책과 관련된 내용을 듣고 싶다고 하길래 만났었죠. 책에 기록된 상황들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이야기해줬을 뿐이지, 특별히 영화에 대해서 깊숙이 논의한 건 아니에요(웃음). 영화는 임순례 감독의 작품이잖아요.

 

8년 만에 개정판 『진실, 그것을 믿었다』를 출간하셨는데, 영화<제보자>의 개봉과 시기를 맞추신 건가요?


이전부터 아쉬움이 있었어요.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2006년에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을 썼는데, 여전히 황우석 신드롬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작고 지엽적인 문제들까지 세세하게 해명해줘야 할 때였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작은 해프닝이었거나 사건의 본질과는 크게 관계없는 것들도 많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저도 다소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적인 표현들은 절제하는 방향으로 수정했죠. 무엇보다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최초의 제보자인 류영준 씨가 실명으로 세상에 나왔고 황 교수 재판도 마무리가 되었고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언론사와 과학사를 위해서 완결판으로 정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영화가 개봉하니까 때를 맞춰서 출간하면 사람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질 것 같았고요.

 

8년 동안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시면서 아쉬운 점은 없으셨나요?


저도 취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황우석 박사를 지지했던 사람인데요.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 황우석 박사를 지지했던 분들이 충격을 받으셨잖아요. 충격 이후에 깊은 혼돈을 경험하셨고요. 그 부분이 제일 아쉽죠.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셨던 분 중에는 사건이 다 끝나고 채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분신자살 하신 분도 있어요. 그 어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람 생명이 중요한 것인데, 그런 면에서 참 마음이 안타깝죠.

 

아직까지도 속 시원하게 해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은 많이 있죠. 검찰이 법적인 측면에서는 수사를 했어요. 예를 들면 횡령, 생명윤리법과 관련된 난자매매 문제, 논문의 사기죄 성사여부에 대해서는 밝혔는데요. 논문의 진위 여부 자체에 대해서는 학계에 넘긴다고 했었죠. 논문은 다 철회되었지만요. 검찰의 발표대로라면 김선종 연구원과 황우석 교수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들이 있어요. 2번 3번 줄기세포의 섞어 심기에 대해서 황 교수가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혹은 전혀 몰랐는지, 그런 것들은 사건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죠.

 

이미 <PD수첩>을 통해 취재의 결과를 공개하셨는데, 별도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책을 출간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장 우선에 뒀던 생각은 역사를 위해서 기록을 남기자는 거였어요. 방송을 통해서 남긴 영상은 핵심 중의 핵심만 추려서 60분 안에 담아낸 것이라서, 수면 아래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충분히 기록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핵심은 있지만 그 핵심까지 가는 과정을 역사를 위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된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를 썼던 2006년에는 전문가들이 이 책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언론 쪽에 있는 분이든, 과학계에 계시는 분이든, 정부에 계시는 분이든, 바이오 주식에 관심이 있는 분이든, 어쨌든 전문가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개정판 『진실, 그것을 믿었다』를 출간하신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셨나요?


이번 책은 대중들이 봐줬으면 좋겠어요. 황우석 사건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기에 잊으면 안 되고, 지금 발생하는 사건들의 뼈대가 그곳에 시상화석처럼 있는 거거든요. 이제는 국민들이  『진실, 그것을 믿었다』를 보고 자녀와 대화도 나눴으면 좋겠어요. 직업윤리라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도 있을 거고요. 영화 <제보자>도 12세 관람가니까 자녀와 같이 보고 나서 진실과 삶의 자세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보고 토론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의 태세도 되어있는 것 같고요. 사건이 발생한 후 처음 1~2년 동안에는 아쉬움과 미련이 있었기 때문에 거들떠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거든요. 지금은 국민들이 『진실, 그것을 믿었다』를 통해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우리에 대한 얘기거든요.

 

영화 <제보자>의 관객들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까봐 염려되지는 않으세요?


일단 영화는 영화죠. 영화는 있는 그대로, 영화의 논리대로 봤으면 좋겠어요. 영화 시작 전에도 나오잖아요. 이 영화는 현실에서 모티프를 얻었으나 영화상으로 재구성했다고요. 예를 들어 영화가 황우석 사건과 비슷하게 비교해서,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이 사건의 주인공과 실제의 다른 점을 말할 수는 있을 거예요. 첫째는 진중권 교수가 얘기했듯이 제보자 부부의 딸은 병을 앓고 있지 않다는 거죠. ‘난치병 자녀를 키우는 제보자 부부’라는 설정은 난치병의 아픔이 있는 분들을 대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과 허구 사이에 또 다른 점이 있을까요?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차이는 제가 87학번이라는 거예요(웃음). 영화에서는 박해일 씨가 90학번으로 나오잖아요. 아마 87학번이라고 하면 너무 멀게 느껴지고, 또 박해일 씨가 87학번이라고 하기에는 연배가 어리니까 설정을 90학번으로 하신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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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제보자 보호 제도 마련의 계기가 되었으면


영화 <제보자>는 어떻게 보셨나요?


모티프가 된 실제의 사건, 즉 황우석 사건의 근간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게 봐요.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서 허구적인 요소들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큰 뼈대 자체는 변동되지 않았잖아요. 이장환 박사라는 인물의 고뇌라는 측면도 담아줬고요. 저는 임순례 감독이 참 우직하고 담백하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훨씬 더 허구적인 요소를 많이 넣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얘기했듯이, 영화적으로 보자면 주인공이 그렇게 열심히 싸워야 될 동기가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영화에서 윤민철은 그냥 진실을 밝히려고 해요. 싸우다 보니까 이건 자기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아주 담백한 인물이죠. 그런 면에서 대단히 절제해서 표현했다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 맞아요.

 

극적인 재미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부분은 없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를 들면,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음모론들이 있었어요? 한학수가 CIA의 첩자라는 이야기도 있었어요(웃음). 원천기술을 훔쳐가기 위해서 MBC에 오랫동안 숨어있었던 첩자라고요. 그런 음모론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면 얼마나 더 재밌었겠어요. 더 극적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임순례 감독은 근간을 흩트리지 않았어요. 저는 그런 우직함이 영화로써 돋보였다고 생각해요. 영화와 현실 사이의 차이는 영화가 극장에서 막을 내린 후에 학자 분들이 더 논의를 해주시겠죠. 그리고 내년이 (황우석 사건이 발생한지) 10주년이니까 많은 현실의 진행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정리를 하실 거라고 봅니다.

 

영화 <제보자>관람 후에 『진실, 그것을 믿었다』와 만나게 될 독자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영화 관람 후에 책을 보신다면 틀림없이 ‘영화보다 10배나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웃음). 『다빈치 코드』보다 재미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일단 한 번 책을 손에 들면 밤새 놓지 못하실 거예요(웃음).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영화적으로 허구가 개입되었을까를 살펴보시는 재미도 있을 거예요. 영화 속의 작은 대사 하나에도 그 말이 나오게 된 맥락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민철아, 구속 되라’라고 하는 팀장의 대사가 있잖아요. 실제 있었던 말이거든요. 어떤 맥락 어느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를 알게 되면,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풍성함을 얻을 수 있다고 봐요. 저는 영화와 책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독자들에게 미리 귀띔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책을 본다면 선행 학습이 될 것이고(웃음), 영화를 보고 나서 책을 읽는다면 더 풍성한 현실의 디테일을 느끼겠죠.

 

심화학습이네요(웃음).


네, 심화학습이죠(웃음). 선행학습을 할 건지 심화학습을 할 건지, 그건 취향대로 고르셔도 될 거예요. 저는 심화학습을 권해요. 왜냐하면 (영화 속) 두 시간은 짧기 때문에 책만큼 풍성할 수는 없죠. 그 중에서 또 핵심만을 뽑은 거니까요. 그렇지만 선행학습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영화<제보자>개봉과 『진실, 그것을 믿었다』의 출간으로 황우석 사건이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어떤 움직임으로 이어지길 기대하시나요?


두 가지로 작동했으면 좋겠어요. 첫 번째로는 현재의 언론 현실에 대해서 국민들이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두 번째로는 공익 제보자에 대한 보호 법률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국회의원들이 개정안을 발의하고 다듬어 가고 있는데, 도가니 법이 나오는 것처럼 제도적으로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영화 <제보자>와 다가오는 황우석 사건 10주년이 그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사실은 어느 조직, 어느 공동체든지 제보자에 대해서 불편해 할 수 있거든요. 조금 불편한 얘기를 하면 진실이라 하더라도 괴롭죠.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해야 결국 그 조직이 더 건강해지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의 현실적인 목표는 제보자 법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언론 현실에 대해서 돌아본다면 예를 들어 아주 작은 것이지만 '최승호 PD는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국민들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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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그것을 믿었다한학수 저 | 사회평론
『진실, 그것을 믿었다』는 황우석 사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 명의 용감한 제보자와 취재 진실을 보도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소임을 다한 언론인들의 이야기이다. 2005년 6월 한학수 PD가 속해있던 《PD수첩》에 익명의 제보가 도착한다. 제보자를 만나러 간 한PD에게 제보자는 이렇게 묻는다. ‘진실과 국익 중에 어느 것이 우선인가요?’ 황우석 논문 조작의 진실은 그만큼 거대했다. 이렇듯 놀라운 제보를 받고 그것을 진실로 밝혀내기까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취재 과정의 풀스토리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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