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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수필공장 직원들이 아우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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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만져지지 않는다. 책으로는 만들어지지만 글자는 만질 수가 없다. 무형의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유형의 것을 탐닉하게 되는데, 김중혁 작가에게는 종이와 가방, 문구가 그런 존재다.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메이드 인 공장』의 출발은 단순했다. 작가가 좋아하는 물건이 탄생되는 배경을 엿보고 싶었다. 사람을 이해하듯 물건도 이해하다 보면,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메이드 인 공장』은 지난 1년간 김중혁 작가가 <한겨레>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산문집이다. 종이, 콘돔, 간장, 초콜릿, 지구본 등 여러 공장들을 다니면서 물건들의 세계사를 들여다보았다. 비단 공장 취재기가 아닌 것은 작가가 공장을 거닐며 느낀 단상과 시간의 기억들이 주재료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물건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궁금했던 김중혁 작가는 호기심과 죄책감(?)으로 종이 공장을 찾았고, 다른 공장 사람들의 아이디어로 콘돔, 브래지어 공장을 방문했다. 어떤 지인은 브래지어 공장을 가게 된 그에게 "야, 세상에 재미있는 일은 네가 다 하는구나"라며 음흉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김중혁 작가는 산문집을 펴내고는 인터뷰를 자주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부분 털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다. 하나 『메이드 인 공장』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할 독자들이 많아 보였다. 소설가가 산책한 공장의 풍경, 제한된 지면 속에 그리지 못한 풍경이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만난 김중혁 작가는 다소 익살스러울 것 같았으나 꽤 단정한 모습이었다. 예의 바른 모습 속에서 그의 공장 취재 현장이 그려졌다. 김중혁의 글 공장 통제실에는 표어가 하나 적혀 있다. "멍하니, 바라보자. 오랫동안, 바라보고, 끈기 있게,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자. 모든 게 끝났으면 빠른 시간에 쓰자." 꽤 바지런한 작가 김중혁. 24시간 쉬지 않는 그의 공장의 연료가 궁금해졌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이 공장에서 하는 일보다 우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공장에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이 소설을 쓰는 일보다 구체적이며 직접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위로를 받는다. 인간들은 대체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메이드 인 공장』

 

김중혁4.jpg

 

다정한 서먹함을 느낀 공장 사람들

 

『메이드 인 공장』의 출발이 궁금해요. 어떻게 시작된 취재인가요?

 

예전에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으로 <한겨레 21>에 카툰을 연재했어요. 이 책의 ‘사물의 뒷면’으로 들어가 있는 ‘감정 이입’이라는 그림이 <한겨레 21>에 연재했던 것들이에요.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니까 ‘공장을 한 번 가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 뜨는 나라의 공장』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요. 왜 재미없을까 생각해 봤더니 공장 얘기가 좀 많더라고요. 하루키는 그런 취재가 재미있어서 간 건데 저는 공장에 대한 이야기보다, 공장에서 본 풍경이나 공장에서 느끼는 것,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물건들을 김중혁 식으로 소화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죠.

 

칼럼을 시작하면서 꼭 가고 싶었던 공장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막 우겨서 갔던 곳은 대장간이랑 지구본 공장 정도였어요. 책에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공장을 다니면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과자 공장에 가서 공장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 가보고 싶은 공장 없으세요?"라고 물었는데, 어떤 분이 "콘돔 공장, 되게 궁금한데요"라고 해서 콘돔 공장을 취재하게 됐어요.

 

<한겨레>에 연재할 때, 가장 뜨거운 반응이 있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웃음) 콘돔 공장이요. 콘돔이랑 브래지어가 제일 뜨거웠어요. 댓글도 많이 달렸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간장 공장 이야기도 반응이 꽤 있었는데, 일단 가장 뜨거운 반응은 콘돔이랑 브래지어였어요.

 

큰 기대 없이 갔는데 의외로 이야깃거리가 많았던 곳도 있을 것 같아요.

 

지구본 공장을 가보기 전까지는 지구본을 만드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지구본 공장에 가니까 분위기가 무척 좋더라고요. 공장의 규모가 크진 않은데, 공장의 풍경이 되게 좋았어요. 공장 분들이 모두 지구본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공장 자체가 매우 가족적인 분위기였어요. 공장의 동선이 한눈에 다 보이는데, 이쪽에서는 지구를 조립하고 있고 저쪽에서는 지도를 오리고 있고. 이런 풍경이 묘하게 재밌더라고요. 설명하기가 되게 힘든데요. 가서 직접 봐야만 알 수 있는 풍경이에요.‘이런 공장에서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한 번 취재를 가면, 몇 시간 정도 취재하셨어요?

 

처음 공장에 갔을 때는 엄청 열심히 봤어요. 그런데 열심히 볼 이유가 없더라고요. 왜냐하면 전문적인 이야기는 어차피 제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쓸 수가 없고, 게다가 요즘에는 홈페이지에서 웬만한 정보는 다 찾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한 두 번 취재를 한 후부터는 ‘그냥 내가 본 것만 써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 일반인들과 똑같은 견학 코스를 소개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공장이 대체로 비슷해서요. 다섯 군데 이상 가보니까 대충 시스템을 알겠더라고요. 공장 직원 분들하고 이야기할 때도 재미있는 게, 예를 들어 화장품 공장에 계신 분들은 자기 분야는 잘 아시지만 콘돔 공장 이야기는 전혀 모르시잖아요. 제가 다른 곳도 이 곳과 비슷한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드리면, 굉장히 재밌어 하면서 본인들의 이야기를 더 해주시더라고요. 되게 흥미로운 취재였어요.

 

프롤로그를 보면,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묘한 공통점을 느꼈다"고 했어요. '다정한 서먹함'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제가 시골의 작은 소도시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적 만났던 동네 분들하고 공장 사람들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 서울에서 홍보 업무를 하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느낌이 들어요. 저를 무척 서먹해 하면서 ''이 사람이 여기를 왜 왔지?' 이런 생각도 하시는 것 같고.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해보면, 다정한데 약간 낯을 가리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게 있었어요. 어릴 때, 동네 아저씨들을 바라봤을 때 느꼈던 풍경과 비슷해서, 되게 반갑고 기분 좋은 서먹함 같은 감정이 들더라고요.

 

공장 분들도 칼럼을 읽었을 텐데, 어떤 반응이던가요?

 

한 공장에서는 사보에 글을 싣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왜 싣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더니, "우리가 못 봤던 새로운 시각이라서 좋았다"고 하셨어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게, 저는 익숙한 제 시선으로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만 그 분들의 입장에서는 밖에서 보는 시선이 새로울 수 있잖아요.
 
꼭 가고 싶었는데 섭외가 안 돼서 못 갔던 곳도 있었나요?

 

많죠. 스포츠 장비를 만드는 공장을 꼭 가보고 싶었는데, 국내에는 별로 없더라고요. 또 문구 공장도 가보고 싶었는데, 단가 자체가 워낙 낮으니까 대부분 외국에 공장이 있더라고요. 글러브나 공을 만드는 곳도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닿았어요.

 

'나중에 소설을 쓸 때 배경으로 써도 되겠다' 싶은 공장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에게 산문과 소설은 분리되어 있는 작업이긴 한데요. 재미있다고 느껴서 한 번 써보고 싶었던 건, 유일하게 서울에 있는 초콜릿 공장이에요. 영등포에 있는 공장이었는데, 부지가 비싼데도 불구하고 옮길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초콜릿을 이동하는 수송관이 모두 땅 밑에 심어져 있어서, 그 관을 옮기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거예요. 그게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찰리의 초콜릿 공장>처럼 거대한 도시 한가운데 땅 밑으로 초콜릿이 흐르는 관이 있는 풍경을 상상해 보니까, 되게 재밌을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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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단위로 글 공장을 돌린다

 

독자 입장에서는 작가의 일상을 소재로 한 '김중혁 글 공장 산책기'를 흥미롭게 읽게 되는데요. 수필 공장의 생산량을 줄이는 게 김중혁 글 공장의 목표라고 했어요. 소설에 집중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렸는데요. 김중혁 작가의 산문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서운할 이야기에요. 하지만 최근에 <한국일보>에 새 칼럼 연재를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지금 수필공장 직원들이 난리예요(웃음).


빨리 원고를 달라고요?

 

(웃음) 네. 글을 써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꾸준히 아이템을 개발해야 하는데요. 발로 뛰든 어떻게 하든 책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저는 1년 단위로 글 공장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글 공장' 이야기를 쓰게 된 게, 공장 하나가 섭외가 안 돼서 얼결에 쓰게 된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요. 사람들이 창작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지금 <한국일보>에 연재하는 칼럼 '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해요.

 

하나의 작업이 또 다른 아이디어를 물고 올 때가 많네요.

 

어떤 작업을 하다 보면 그 작업이 다른 쪽으로 튀어서 아이디어가 생길 때가 많아요. 아마 칼럼을 쓰는 일은 계속 이런 식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소설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소설에 영향을 거의 안 미치기도 하고, 소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고, 그래서 편안하게 쓰는 것 같아요.

 

김중혁 작가의 공장에는 거래처는 많지만 직원은 작가, 한 명뿐이잖아요. 만약 공장에 직원을 둘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뽑고 싶나요? 어떻게 보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기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영화 <Her> 보셨나요? 스칼렛 요한슨 같은 사람이 비서일 수 있겠죠(웃음). 그런데 사람을 들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글을 쓰다 보면 약간 사람이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든요. 소설을 쓸 때의 나와 에세이를 쓸 때의 나, 그림을 그릴 때의 내가 다 달라요. 뇌가 다르게 움직이는 것 같고요. 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흥미로운 부분인데, 정말 내 안에 직원들이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작가님이 여러 사람이 되어서 글을 쓰는 것 같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죠.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건 매니지먼트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소설을 쓸 때는 이렇지 않거든요. 에세이 쓸 때도 이렇지 않고,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고요.

 

만약 글 공장이 아닌 다른 공장을 인수할 수 있다면, 탐나는 공장이 있을까요?

 

사업에는 흥미가 없지만 탐나는 공장들은 있죠. 예를 들면 맥주 공장? 아니면 연필 공장이나, 지구본 공장도 재밌을 것 같아요. 지구본 공장도 의외로 개발할 게 많더라고요. 취재 갔을 때, 최근에 개발한 아이템이 지구본의 특정한 부분을 카메라로 찍으면 그 지역 형태를 휴대폰이 인식해서 그곳의 정보를 보여주는 거였어요. 별자리가 보이는 지구본도 있었는데 신기하더군요. 

 

최근에 동료 작가들과 함께 소설 리뷰 사이트 '소설 리스트'라는 홈페이지를 열었어요. 김중혁 작가는 '표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메이드 인 공장』의 표지는 어떤가요? 흡족한 결과물인가요?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리스트'에 포함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마음에 들어요. '표지 평론가'라고 농담을 했는데, 저는 표지를 워낙 좋아해서 늘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심심할 때, 외국 서적의 표지를 보는 취미도 있고요. 남들보다 조금 표지에 관심을 가지는 편인 것 같아요. 『메이드 인 공장』의 표지 그림을 제가 그렸거든요. 아이콘으로 공장을 표현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든 조금씩은 계속 참여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그림을 그릴 때가 글을 쓸 때보다 편한가요?

 

그림을 그릴 때는 약간 뇌가 비어 있는 느낌을 받아서요. 보통 팟캐스트나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서 작업을 하거든요. 스케치는 미리 하고요, 들으면서 보면서 동시에 작업을 하는데. 그게 은근히 노동이어서 뇌가 텅 비게 돼요. 그래서 웃기는 얘기를 들으면서, 머리는 비어 있는 상태에서 손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약간 뇌가 포맷되는 느낌이 들어서 되게 편하고 좋아요.
 
책에서 또 흥미로웠던 부분이 ‘소설을 방문 판매하면 어떨까’라는 이야기였어요. 작가가 직접 방문 판매를 한다면 값이 엄청나게 올라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보통 방문 판매는 서비스를 많이 주잖아요. 만약 이벤트성으로 방문 판매를 해본다면 독자들에게 어떤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일단 제가 방문을 한다는 게 부록이고요(웃음). 친구들의 소설집을 부록으로 줘야 될 것 같은데요. 또 제가 직접 만든 책갈피나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있는 연필 같은 걸 화장품처럼 끼워서 드릴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러려면 책값이 한 10만 원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만약 방문 판매 이벤트를 열어서 신청자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떤 독자에게 찾아가고 싶으세요?

 

(웃음). 이런 이벤트를 안 할 것 같아서, 근거를 댈 수는 없는데요. 어떤 독자가 어떤 독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추첨을 하지 않을까요? 댓글 같은 걸 봐도 사실은 모든 댓글이 다 중요한 댓글이어서, 그런 걸 뽑을 때도 저는 추첨을 하자고 늘 이야기를 하는데, 출판사에서는 그렇게 안 하는 것 같아요.

말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훨씬 편한 사람이에요

 

요즘 일상은 어떤가요?

 

진짜 바쁘네요. 새로 시작한 칼럼이 격주 연재인데도 인터뷰를 해야 하니까 공이 많이 들어요. 자료가 많이 필요해서 예전에 나왔던 창작 관련 책들을 다 보고 있거든요. 거기에 있는 핵심 내용들을 요약해서 보여주면, 나중에 이 칼럼 전체가 하나의 창의성에 대한 자기계발서처럼 보일 수도 있고, 예술가적인 인터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창작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는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싶어서 관련 자료를 많이 보고 있어요. 그리고 소설도 꾸준히 쓰고 있어요. 지금 장편도 쓰고 있고 단편도 함께 작업을 하고 있어서 좀 많이 바쁜 상황이에요.

 

올해 봄에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펴냈는데, 최근에는 거의 1년에 2권씩을 냈어요.

 

그렇게 되네요. 소설을 쓰는 것과 에세이를 쓰는 작업이 별개로 움직이니까 사실은 ‘책을 너무 많이 내나?’ 라는 생각도 있는데, 지금은 쓰는 게 좋으니까 굳이 이걸 제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또 그렇게 많이 쓰는 건 아니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단편집이 먼저 출간이 되겠죠?

 

내년 상반기에 단편집 하나를 낼 생각이에요.

 

지금 쓰고 있는 장편 소설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아직 윤곽만 잡고 있는 상태라서요. 시기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아마도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것 같은데 SF는 아니에요. 제목만 정해 놓았어요. 예전부터 쓰고 싶었던 우주 비행사에 대한 이야기에요.
 
김중혁 작가를 두고 "아이디어가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림, 디자인 작업도 병행하고 있고요. 일반 독자들이 '김중혁 작가'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편견으로 듣지 않아요. 그것도 제가 만든 이미지일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게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요. 누구나 다 변하잖아요.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고, 변하게 되는데. 저도 변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예전에 첫 소설을 냈을 때 제가 지향했던 소설의 지점과 지금 생각하는 지점이 달라진 것처럼, 제 소설이나 에세이도 바뀌고 있어요.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동시대의 작가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는 게 흥미로울 수 있거든요. 최근에 많은 분들이 "소설이 약간 달라지는 것 같다", "페이소스가 더 생기는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잘 모르다가도 ‘아, 그런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변화가 조금씩 천천히 진행되면, '사람들이 편견이라고 하는 것들도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를 느끼게 되고, 그런 재미가 생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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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작가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말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훨씬 편한 사람이에요. 제가 사실은 이동진 씨와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해서 많은 분들이 '말을 잘하는구나'라고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말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50배 정도 편해요.

 

50배나요?

 

왜냐하면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뒤죽박죽일 때 글로 써내려 가면 정리가 돼요. 그리고 구조를 만들 수 있잖아요. 제가 OK한 것만 내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말은 그 과정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머릿속에서 정돈을 해도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그 부담감이 커서 글 쓰는 게 훨씬 편해요. 가끔 말하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웃음).

 

"소설을 열심히 쓰기보다는 오래 써야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변함이 없나요?

 

물론이에요. 재밌는 일은 오래 하고 싶잖아요. 재미있는 일을 질리지 않게 오래 하고 싶어요. 너무 몰입해서 생명을 걸듯이 하면 질릴 수 있으니까, 되도록 천천히 오래 쓰고 싶고, 1년에 한 편씩은 쓰고 싶어요. 동시대 작가들이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작을 내는 걸 보면 되게 좋거든요. 제 꿈은 독자들이 ‘올해 김중혁의 신작이 나오겠지? 올해는 어떤 걸 낼까?’라고 매년 김중혁의 소설을 궁금해 하는 거예요. 이런 독자들이 많아진다면 정말 최고로 좋겠죠.

 

요즘 작가로서가 아닌 사람 김중혁으로서 많이 하고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창작의 비밀’과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2014년에 사건이 많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무기력하고 우울해서 화도 좀 나고 짜증도 나고 약간 슬럼프가 왔던 것 같아요. 지금 <씨네21>에 ‘바디 무비’라는 몸에 대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제가 너무 무기력하니까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계속 생각해보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일단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였어요. '어떤 질문을 던질까' 계속 물어보다가 '사람들이 조금 덜 험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거칠어지는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보면 교육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들어가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제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데, 아마 새로 시작한 칼럼 '창작의 비밀'이 저의 대답인 것 같아요. 뭔가 만들고 창조적인 일을 하면 덜 싸우게 되지 않나요? 그런 세계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있는데요. 이게 아마 칼럼에 반영이 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어떤 독자들이 『메이드 인 공장』을 흥미롭게 볼 것 같은지, 저자로서의 생각이 궁금해요.

 

책에는 대체로 어떤 타깃이 있지만, 이 책은 제가 좋자고 만든 책인 것 같아요. 제가 관심 있어서 만든 책이라서 어떤 분들이 좋아할지 진짜 모르겠어요. 시작할 때부터 '공장 얘기를 사람들이 보겠어?'라고 생각했던 게, 약간 덕후 냄새가 나는 느낌도 있어요(웃음). 일단 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제 스타일로 했기 때문에 조금은 소프트해진 것 같고요. 사물에 대한 관심을 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면 재미있게 볼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소설이라는 건 어떤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건데, 요즘 사람들은 사물에도 감정 이입을 되게 잘하는 것 같아요. 휴대폰이 떨어지면 내 마음도 같이 깨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공감 능력이기도 하거든요. 사물이 태어난 배경을 알고 사물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다시 해보면 그 사물과 제가 더 친밀해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럴 때 생겨나는 공감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라, 이런 걸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의 공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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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공장김중혁 저 | 한겨레출판
이 책은 제지 공장부터 콘돔, 간장, 가방, 도자기, 엘피, 맥주, 그리고 김중혁 글 공장까지 호기심이 가득한 소설가 김중혁이 다양한 공장들을 다니면서 적어 내려간 시간과 기억, 속도와 사람에 대한, 느긋하고 수다스러운 글과 그림을 엮은 산문집이다. 15개의 공장 산책기와 더불어 노트 탐험기, 번뜩이는 가방 디자인 하기, 맥주 만취 시음기 등 작가의 재기 넘치는 토크(talk)와 인공 눈물, 글로벌 작가, 안경, 보온병, 시간표 등 사물을 담은 그림 등도 엿볼 수 있다






김민정 "엄마 덕분에 누구도 부럽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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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딸들은 엄마를 긍정하면서 또 부정하면서 자란다. 한없이 엄마를 따르다가도 엄마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한다. 『엄마의 도쿄』의 저자 김민정도 다르지 않았다. 일찍이 남편을 떠나 보내고 두 아이와 이국생활을 해야 했던 그녀의 엄마. 환갑을 앞두고 시한부 인생을 산 엄마를 보며, 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자신을 만났다. 엄마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는 스스로의 삶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엄마의 도쿄』를 썼다. 


'평범한 어느 모녀의 스무 해 도쿄살이'라는 타이틀을 단 『엄마의 도쿄』는 20년간 신주쿠 골든가에서 Bar를 운영했던 엄마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평범한 모녀의 일상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건 저자의 담백한 필력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보편적인 감정, 모녀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을 오롯이 담아냈기 때문이다. 

 

자칭 '신주쿠 마니아'인 김민정은  16세 나이에 엄마와 함께 도쿄 생활을 시작. 아베 고보와 데라야마 슈지의 책을 번역하며 타향살이의 고독을 이겨냈고, 결혼과 출산 후에 도쿄외국어대학 대학원에서 한일 대중문화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집필 중이다. 틈틈이 한국의 여러 미디어를 통해 일본 문화를 전하고 있는데,  『엄마의 도쿄』는 먼저 하늘로 간 엄마를 추억하며 쓴 첫 책이다.


  

엄마가 없는 도쿄는 아무리 번잡스러워도 텅 빈 느낌이다. 어디를 가든 엄마를 찾는다. 단발머리에 파마를 한 중년의 여자를 보면, 혹시 엄마가 아닐까 해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제 어디에도 엄마는 없지만 도쿄의 모든 곳에 엄마의 숨결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을 찾아 도쿄를 걸어본다. 마음을 가다듬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엄마를 떠나보내는 일은 그렇게 엄마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엄마의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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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선택하고 마음껏 즐겨


첫 책이에요. 『엄마의 도쿄』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여성월간지에 3년 정도 일본의 육아에 관한 글을 연재했거든요.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올린 게 계기가 됐어요. 자연스럽게 육아 에세이 출간 제안을 받았는데, 그 때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년쯤이 지났을 때였어요. 육아 에세이도 좋지만 엄마 이야기를 먼저 써보고 싶었어요.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우리 엄마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제 삶이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사실 전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거든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얻는 즐거움이 무척 커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지 않았던, 엄마가 돌아가실 때를 기억한다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가장 즐거운 시기에 가장 즐겁지 않은 걸 생각한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이번에 잠깐 귀국한 게, 독자와의 만남을 위해서라고 들었어요. 저자로서 독자를 만난 소감이 궁금해요.


재밌었어요(웃음). 여성 독자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남자 분은 딱 한 명 오셨는데요. 어떤 독자 분이 "엄마에게 들은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당당하게 살아라. 예쁘다. 열심히 살지 말아라"라고 대답했어요. 실제로 엄마가 제게 가장 많이 한 말이었거든요.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네(웃음). 제가 중고교 시절을 모두 모범생으로 살았거든요.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모범생으로 지내는 것 외엔 상상을 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제가 스무살이 되던 해, 엄마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신 것처럼 "스무 살이 됐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되고 집에 안 들어와도 되는데, 어디에 있는지만 연락을 해달라고요. 엄마가 제게 남겨준 최상급 교훈이 있는데요. "당당한 태도로 살아. 자유롭게 선택하고 마음껏 즐겨. 그렇지만 삶의 모든 책임은 네게 있다는 걸 잊지 마"라는 말씀이에요. 


엄마가 상당한 미인이셨어요. 젊은 시절에는 서울 음악다방에서 DJ로 활동하시기도 했고. 


젊었을 때 인기가 대단하셨대요. 아빠도 엄마에게 반해서 결혼을 하시게 된 거고요. 책 뒤표지에 엄마 사진을 넣었는데, 지금 봐도 정말 세련되고 아름다워요. 엄마의 꿈은 모델이었어요. 그냥 모델도 아니고 다리 모델(웃음). 20대 때, 한 영화감독이 영화 출연을 제안한 적도 있었는데 엄마는 거절을 했다고 해요. 엄마는 요즘 말로 정말 쿨한 사람이었어요.

 

'도쿄살이 스무 해의 맛'을 보면 모녀가 정말 맛집을 많이 다녔던 것 같아요. 엄마의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대부분 식당 이야기에요(웃음). 심야식당 생각도 나고요. 


엄마가 결혼했을 당시에는 음식을 하나도 못했대요. 밥도 못하고.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친척들의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인 거예요. 할아버지 댁이 부유했던 편이라 친척들이 아이들을 많이 맡겼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매일 해야 하는 밥 양이 20, 30명이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요리를 많이 하게 됐고 한국 전통음식을 많이 익히게 됐어요. 일본에 와서는 엄마랑 맛집을 자주 찾아 다녔는데, 엄마는 자기가 만들지 않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간장게장이요. 일본에서는 간장게장을 먹기가 쉽지 않거든요. 엄마는 일본에서 꽃게를 구할 수 있는 철이 오면, 꼭 간장게장을 해줬어요. 남동생이랑 저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죠. 엄마는 음식을 잘 만드셨지만 저한테 요리를 가르쳐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남동생은 요리를 꽤 잘하는데, 저는 우리집에서 '음식 재료를 낭비하는 사람'으로 불렸어요(웃음). 늘 먹기만 하는 존재였어요. 엄마가 젊었을 때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았거든요. 공부를 해서 성공을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딸인 저에게는 되도록 집안일을 많이 시키진 않으셨어요. 엄마는 제가 좀 더 시간을 자유롭게 쓰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요.

 

엄마들은 대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이 이루길 바라곤 하잖아요.  


엄마는 제가 성우나 기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엄마가 어렸을 때, 베트남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현장에 가서 취재를 하곤 했는데, 어떤 사회적인 모순을 밝혀주고 파헤치는 그런 기자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정작 직업적으로 저에게 어떤 걸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냥 자유롭게 살고 너무 열심히 안 살아도 된다고, 대신 내가 먹을 건 내가 벌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어요.

 

일본에 정착해서 생계를 위해 엄마가 일본에 Bar를 열어야 했을 때, 딸 입장에서는 속상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새벽까지 일을 하셔야 했으니까. 하지만 반대를 하진 않았어요. 그건 엄마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엄마는 술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먹고살아야 했고, 엄마는 가사도우미보다는 가게를 여는 쪽이 성향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흔이 넘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사교적이었고, 그렇게 시작한 가게 덕분에 우리는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엄마의 심야식당 '파인트리'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어요. 주요 단골들이 출판인, 언론인이었는데, 저자님이 후에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직업 선택보다는 남자를 선택하는 안목이 확실히 생긴 것 같아요(웃음). 골든가에 있는 엄마의 Bar는 다섯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작가나 기자, 편집자 이런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작가들이 편집자들을 만나 원고를 받곤 했는데요. 지금 기자나 작가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1960~70년대 때, 일본에서 학생운동을 했는데 골든가의 식당에 들어와 숨고는 했대요. 그 때의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저희가 그 분들의 인생과 크게 얽히진 않았지만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사람의 본질이 크게 다르진 않다는 걸 느꼈어요. 그게 저에겐 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됐나요?


예를 들어, 제가 한국에 올 때 탄 비행기 옆자리에 한국 아저씨가 앉아 있었거든요. 저는 아이들과 같이 탔기 때문에 아저씨는 많이 불편하셨을 거예요. 비행하는 동안 저희에게 한 마디도 안 하셨고 되게 무뚝뚝했는데,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저희 짐을 다 올려주시고 내려주시더라고요. 겉으로 보기엔 참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행동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또 얼마 전에 제가 분식집에서 튀김이랑 떡볶이를 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10,500원이 나왔다고 500원을 깎아주셨어요. 그런데 말투나 표정은 엄청 무뚝뚝하신 분이였거든요.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으시고. 우리가 표면적으로 봤을 때, 불친절한 것과 그 사람의 인간성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을 볼 때 직업이나 외모, 본질 등 무엇을 보더라도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외모를 보지 말고 본질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골든가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랬고요. 자신의 파트너를 정할 때는 자기한테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보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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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면 엄마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잖아요. 


스무살 때까지는 엄마가 담배를 피는 게 싫었어요. 건강을 위해서라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그게 엄마의 취향이구나. 내가 거기까지 관여할 관리는 전혀 없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엄마와 한결 멀어지면서, 한결 친해진 것 같아요. 

 

엄마를 떠올릴 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언제인가요?


엄마가 구강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을 때, 같이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실 때가 종종 있었는데 한 순간이었지만 그 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 같아요. 솔직히 엄마가 건강하고 우리랑 같이 살았을 때는 티격태격도 많이 했거든요. 일상의 소중함을 몰랐기 때문에 트러블도 많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엄마가 제게 준 메시지는 정말 컸어요. 엄마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인 걸 알고 있지만, 기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거든요. 그 모습이 저에겐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부모를 떠나보내면 자식들은 후회하는 일이 많이 생각난다고 하잖아요. 엄마한테 더 잘하지 못해 후회되는 일도 있을 것 같아요.


엄마가 자식들한테 돈을 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서 제가 많은 돈을 드리지 못했어요. 저는 엄마가 싫어하셨기 때문에 드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더 드릴 수도 있었거든요. 그걸 못해드린 게 좀 아쉬워요. 만약에 제가 매달 조금 넉넉한 용돈을 드렸더라면, 엄마가 계속해서 가게를 운영하지 않아도 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엄마와 도고 세이지 미술관을 가지 못한 게 무척 아쉬워요. 엄마랑 손잡고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싶었는데 결국 가지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엄마랑 함께하고 싶었던 것들은 사실 그렇게 어렵거나 복잡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살짝만 귀찮은 것들이라 마음만 바꾸면 금세 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는데, 번번이 바쁘거나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 벽을 넘지 못한 게, 아쉽고 또 아쉬워요. 

 

그래도 '파인트리'는 엄마의 존재를 증명하는 굉장히 소중한 공간이었잖아요.  


일본이라는 외국에서 엄마가 혼자 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니까요. 친구도 없고 누군가와 공감대를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파인트리는 엄마에게 정말 특별한 곳이었을 거예요. 엄마는 파인트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경제적인 의미에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그래서 투병을 하면서도 끝까지 열고 싶어 하신 게 아닐까, 생각해요.

 

스스로를 돌아볼 때, 엄마와 닮은 점이 있나요?


꼭 닮았다고 생각되는 건, 딱히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람이 강한 건 닮은 것 같아요. 자기 주장이 있고. 엄마와 저의 가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거든요. 사상 이런 건 버려도 되지만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 그건 닮은 것 같아요(웃음).

 

두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닮고 싶은 엄마의 모습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희 엄마는 항상 저에게  '예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자라면서 누구도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웃음). 누가 결혼을 잘했다고 해도, 그냥 '그 사람은 그렇게 사는구나' 그렇게밖에 생각을 안 해요. 일단 이렇게 저를 키워주신 게 정말 좋고요. 이렇게 예쁘다고 하면서도 항상 거리감을 두고 키워주신 것도 감사해요. 독립심인지는 모르겠는데, 예전에 아빠랑 함께 살 때도 엄마, 아빠가 밤에 둘이서만 데이트를 가는 일들이 빈번하게 있었거든요. 제가 울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웃음). 하지만 항상 엄마가 나를 제일 사랑한다는 확신은 있었어요. 혹시라도 제가 무슨 일을 저질렀더라도 저를 믿고 인정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죠. 예전에 동생이 고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맞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학교에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담배를 피운 건 나쁜 일이지만 당신이 선생이라고 해서 우리 아들을 때릴 자격은 없다"고. 저도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희 엄마처럼 자식을 대해주면, 아이가 나쁜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에 대한 추억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읽으면 굉장히 질투가 날 수도 있겠다는.


저도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엄마에 대해 안 좋은 기억들도 많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좋은 기억들만 남는다고 하잖아요. 마지막에 회상했을 때는 그렇게 나쁜 것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아요. 엄마들은 특히 딸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잖아요. 저희 엄마는 제가 무슨 색 스타킹을 신었는지도 체크하곤 했어요. 빨래를 갤 때도 엄마만의 법칙이 있어서 그걸 따라야 했고요. 되게 피곤한 성격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 모든 게 정말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와요. 저는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번 후부터 조금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좋은 모녀 관계를 위해서는 어떤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모녀라면 끈끈한 연대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제3자 입장이 한 번 되어보면 조금 더 돈독하게 오래갈 수 있는 사이가 될 것 같아요. 굵고 진하게가 아니라 길고 얇게(웃음), 계속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어떤 가족들은 서로를 안 보고 사는 경우도 많던데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각자가 제3자 입장이 되어보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엄마들이 딸들에게 너무 많은 걸 강요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상담을 받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더 위로가 됐어요


16세부터 도쿄 생활을 시작했고, 일본에서 대학 졸업 후 잡지사 기자로 활동했어요. 평소 글 쓰는 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제가 사춘기를 겪을 시기에 정말 힘들었거든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시니 너무 바쁘잖아요. 저희를 돌봐주실 시간이 많지 않으셨죠. 만약 제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면 문제아가 될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에서는 아빠가 없고 가난하면, 누구나 문제아가 금세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상황을 드러내지 않고 싶어서 그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꾸 뭘 쓰게 되고 읽게 되더라고요. 누구한테 상담을 받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더 위로가 됐거든요. 누군가 나처럼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어요. 정말 힘든 상황에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이 저희에게는 큰 본보기가 됐거든요.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제 개인적인 바람을 너머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 됐으면 해요.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20세가 넘은 후부터는 용돈을 한 번도 받지 않았어요. 학비도 물론이고요. 원래 전공은 정치학이었는데요. 종합정책학과라는 학부 안에 속해 있어서 대중문화와 마케팅, 정책 같은 걸 공부했어요.


근무했던 잡지사는 어떤 분야였나요?


대중잡지사에서 일했는데, 한창 일본에 한류가 들어오는 시기였거든요. 처음에는 월드컵 팀이었다가 1년 일하고 나머지는 한류 팀에서 일했어요. 당시 배용준 씨가 인기가 많았는데, 일본에 방문했을 때 열심히 취재했던 기억이 나네요.


현재 도쿄외국어대학 대학원에서 한일 대중문화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집필 중인데요.


그야말로 엄마의 영향이 커요. 엄마가 젊었을 때 서울에서  DJ를 하셨기 때문에 당시 구하기 힘든 LP판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계셨어요. 어릴 때 그 음악들을 많이 듣고 자랐는데, 알고보니 금지된 곡들이 많더라고요. 중학생이 돼서야 선생님이 알려줘서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왜 그 노래들이 금지될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한 번 재고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1960, 70년대 한국과 일본의 대중문화를 비교하는 논문을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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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산 엄마로 기억됐으면


육아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는데, 특별한 육아법이 있나요? 두 아이에게 자주 해주는 말, 행동이라던지.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냥 키우고 있어요(웃음). 부모들을 아이를 처음 키우게 되면 많이 혼내게 되거든요. 길을 걷다 넘어지거나 침대에서 뛰고 식당에서 크게 떠들면요. 그럴 때는 부모로서 혼을 내는 게 맞지만, 이렇게 혼내는 게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네가 다칠까봐 걱정이 돼서 혼낸다는 건 꼭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혼을 내더라도 이유를 설명해주려고 노력해요.

 

워킹맘 생활이 힘들진 않나요?


보통은 강의를 나가기 때문에 9시부터 3시까지는 학교에 있어요. 베이비시터는 따로 없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다녀요. 제가 원래는 아이를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까 소통이 되더라고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게 신기했어요. 막내가 한 살인데 "맛있어?", "이게 뭐야?", "젖 주세요", "배고파요" 이런 게 다 사인만으로도 되더라고요. 제가 한때는 일본 방송국에서 정보 방송 프로그램을 했거든요. 매주 방송이었는데 제가 아무리 기획을 해도 방송이 한 번 나가면 끝인데, 아이들은 끝이라는 게 없는 제가 계속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프로젝트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되게 재밌더라고요.

 

저자님이 엄마를 추억했듯이, 두 아이도 언젠가 엄마를 회상하게 될 텐데요.


 그냥 이렇게 우리 엄마 정도로, 엄마가 자유롭게 산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이가 더 성장한 후에 한국에 정착할 계획이 있나요?


저희 아이가 한국어를 했으면 좋겠거든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으니까 초등학생이 되면 방학 기간을 한국에서 보내려고 해요. 남편도 동의했고요. 

 

어떤 분들에게 『엄마의 도쿄』를 소개해주면 좋을까요?


아기 엄마들, 그리고 우리 엄마 세대를 살았던 어머님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책에 나오는 1970년대 노래들을 떠올려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엄마의 절친이 한 분 계셨거든요. 우연히 그 분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엄마와 음악다방에서 함께 DJ를 했던 분이신데, 지금은 소식을 몰라서요. 우연히라도 이 책을 알게 된다면 그 분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성 독자라면 분명 이 책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또 다른 책을 기대해도 될까요? 


육아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또 엄마의 이야기라서 차마 모두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아빠의 죽음은 내게 인생을 더 열심히 살라고 말해주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니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라고. 엄마의 죽음은 내게 알을 깨고 나오라고 말해주었다.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말고, 홀로 서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라고. 그 모든 죽음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이 세상은 슬프고 낯설지만, 한편으론 새롭다. 이 새로운 세상에 뿌리내리고,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엄마의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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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도쿄김민정 저 | 효형출판
서울 음악다방의 매력적인 DJ, 삼대가 모여 사는 시골 부잣집 며느리, 아이 둘을 키워낸 당당한 싱글맘, 신주쿠 심야식당의 살뜰한 여사장…… 짧은 인생에 찾아온 사건들은 유난히 진폭이 컸고, 그만큼 강렬했다. 영화 같은 삶을 산 엄마였다. 엄마의 특별했던 인생을 기록하는 것은,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저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엄마의 삶은 그렇게 한 편의 이야기가 되었다.



헬렌 오이예미 “스토리텔러보다는 독자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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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촉망받는 소설가 헬렌 오이예미. 첫 번째 작품 『이카루스 소녀』가 성공하면서 그녀는 일약 스타 작가에 오른다. 이때 불과 그녀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이후로 『건너편 집』, 『흰색은 마녀의 것』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네 번째로 발표한 장편 『미스터 폭스』가 이번에 한국에도 출간되었다.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재해석’이다. 『건너편 집』은 쿠바 신화를 모티브로 했고, 세 번째 소설 『흰색은 마녀의 것』은 헨리 제임스와 에드거 앨러 포에 뿌리를 뒀다. 그리고 『미스터 폭스』역시 잘 알려진 어떤 작품에 기반을 둔다. 바로 『푸른 수염』이다. 자신의 아내를 죽이는 연쇄살인마 푸른수염이라는 모티브는 『미스터 폭스』에서 기묘한 형태로 변형된다.

 

인기 작가 세인트 존 폭스는 작품 속 인물을 죽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어느 날 한 여성이 찾아온다. 메리 폭스라는 여성은 환상 속 인물로 미스터 폭스가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 그녀는 미스터 폭스에게 더는 작품에서 살인은 그만두라며 이야기 대결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소설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모르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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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읽어달라

 

『미스터 폭스』가 한국에서는 두 번째로 소개되는 책이고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다. 소감이 어떤가.

 

처음에는 한국 독자가 누군지 몰라 긴장 많이 했다. 만나 보니 참여 잘하고, 이야기가 길어도 경청해 주고, 많이 질문해 주셨다. 영화와 책 등 전반적인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많이 둔 독자들이었다.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미스터 폭스』를 비롯하여 오이예미의 작품은 독특하다. 독자가 읽기 전에 염두에 둘 부분이 있을 듯한데,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주의 깊게 읽을 책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읽기를 바란다. 이 대목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싶어도 다음 페이지에 가면 다른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읽어야 한다.

 

구성이 참신하다. 실마리가 된 작품이 있을 듯하다.

 

『미스터 폭스』는 여러 가지를 조합해서 만든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동화 『푸른수염』을 재해석한 책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로 영화, 그림으로 여러 차례 재해석된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보면서 나 또한 재해석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스릴러물로 시작했으나, 원하던 게 아니었다. 다시 시작했다. 『푸른수염』의 영국 버젼이 『미스터 폭스』라고 보면 될 것이다. 미스터 폭스와 레이디 메리가 서로 맞서 싸운다. 이 두 캐릭터가 대립하는데 1930년대 배경을 입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보는 식으로 썼다. 글을 쓰는 내내 놀랍고 두렵기도 했지만, 잘 끝냈다.

 

신화나 동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신화나 동화에 관심 있는 이유는 재구성하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이 아는 작품을 재구성하면 독자도 아는 이야기라 시작하기 편하다. 거기에 반전을 주면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스토리텔러보다는 독자가 되어야

 

어떻게 보면 『미스터 폭스』는 결국 사랑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연인이 얻을 수 있는 팁이 있다면?

 

대담하되 너무 대담하지는 않게.

 

끊임없이 작중 인물을 죽이는 작가와 그에 반하는 뮤즈 사이에 스토리텔링 경쟁이 펼쳐진다. 그런 면에서 작품의 주제가 스토리텔링으로 볼 수도 있다. 모든 독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스토리텔러가 되라는 메시지로 읽어도 될까?

 

굉장히 난해한 질문인데, 지금 현대인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SNS로도 그렇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강조해서 보여주고, 좋아하지 않는 일은 숨긴다. 이게 이야기다. 장단점이 있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는 걸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스스로 스토리텔러가 되라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읽는 독자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 삶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진 않는다. 삶의 파편을 스스로 읽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

 

서로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다 보니 작품에 이야기가 많다. 이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는다면?

 

특히 즐겁게 작업했던 부분은 ‘마담 데 실렌시오의 교습’이다. 신부 수업을 많이 다루지만, 신랑 수업은 드무니까.

 

한국에서는 소설이 예전보다 덜 읽힌다는 말이 나온다. 스마트폰 영향도 있고. 영국은 어떤가.

 

우선 예전에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 다만 요즘은 아이패드나 킨들을 이용해서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읽는다. 소설 인기가 없어졌다기보다는 플랫폼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다. 첫 책 『이카루스 소녀』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관심은 부담스럽지 않았나.

 

얼마나 부담스럽지는 기억 안 난다. 시간이라는 게 좋은 듯하다. 그때 얼마나 부담을 느꼈는지 잊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잊는다. 매번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평소에 취미도 독특할 거 같은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특별한 취미라면 주전자 수집하는 걸 좋아한다. 한국에서도 마음에 드는 주전자를 수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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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여성의 삶을 다루고 싶어

 

주목하는 아시아 작가가 있나.

 

책을 읽을 때 나라를 생각해서 읽지 않는다. 아시아 문학이라고 생각해서 보지 않고, 나와 같이 문학의 나라에서 살고나, 하면서 본다. 지역별로 따로 두고 읽진 않는다.

 

새로운 스타일에 계속 도전하는데, 지금 쓰는 작품은?

 

지금 쓰는 책은 다소 어렵다. 열쇠에 관한 책인데, 책을 쓰면서 마치 열쇠들이 나에게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미스터 폭스』처럼 각기 다른 장소, 다른 시간대, 스타일을 표현한다. 여러 가지 사람이 되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작업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앞으로도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 여성의 삶에 관심이 많다. 복잡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할 테고, 그 여성 캐릭터가 만나는 사람에는 남자도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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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폭스, 꼬리치고 도망친 남자헬렌 오이예미 저/최세희 역 | 다산책방
헬렌 오이예미는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경험했던 어려움과 정체성의 혼란을 성장소설로 담아낸 첫 번째 작품 『이카루스 소녀』를 스물한 살에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천재 소설가’라는 극찬과 함께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이후 헬렌 오이예미는 쿠바 신화에 영향을 받은 두 번째 소설 『건너편 집』을 발표한 데 이어, 헨리 제임스와 에드거 앨러 포에 뿌리를 둔 세 번째 소설 『흰색은 마녀의 것』으로 2009년 셜리 잭슨 상과 2010년 서머싯 몸 상을 거머쥐었다.



직장인의 80%가 고민하는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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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의 고단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과중한 업무, 그에 걸맞지 않은 보상, 상사와의 불화, 동료와의 경쟁, 부하직원의 무능함… 아마도 이 모두가 출근길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요소들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것이 비단 직장생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 내 마음 같지만은 않은 사람들, 보이지 않는 경쟁과 단절된 소통은 어디에나 있어왔다. 가정과 학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직장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들은 직장 밖의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은 바로 그 점에 주목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개별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들에 해답을 제시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직장 밖의 삶으로 확장시켜 보편적인 원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토사구팽 당하라』『회사에서 당신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법』『직장신공』등의 저서를 통해 직장인들에게 현명한 생존법을 조언해 주었던 저자 김용전은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안에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길에 대한 필자 나름의 철학”까지도 녹여냈다. 수년 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직장인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고 강연을 통해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직장 문제가 곧 우리네 인생을 살면서 부딪치는 근본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장의 현실이 꿈꾸던 모습과 달라 이직을 고민 중이라는 이에게 저자는 되묻는다. 현재의 직장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아직 자신이 보지 못한 희열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직장 생활에서 내가 아무리 빨리 맛보기를 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것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들도 많다”고 조언한다. 나아가 저자는 이러한 태도가 직장 밖의 삶에서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어떤 길을 포기하기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질문은 “과연 내가 이 길을 얼마나 가보았는가”라는 것이다. 이처럼『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에는 직장의 안과 밖, 삶의 구석구석에서 통용되는 원리들이 담겨있다. ‘유능과 무능’ ‘생계와 가치’ ‘개인과 조직’ ‘비굴과 처신’ ‘내근과 외근’ ‘아부와 정성’ 등 우리를 갈등으로 몰아넣는 두 개의 축과 그 사이에 숨어있는 지혜로운 해결의 길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현재까지도 KBS1 라디오 <성공예감 김원장입니다>에서 ‘직장인 성공학’을 6년째 방송하고 있으며, KBS 한민족방송 라디오 <경제를 배웁시다>의 ‘김용전의 직장신공’ 코너를 맡고 있는 저자의 멘토링은 듣기 좋은 위로와는 거리가 멀다. 상사 혹은 동료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직장인에게도, 승진이 좌절되거나 지방으로 발령받아 괴로워하는 직장인에게도, 저자는 제3의 시각을 주문한다. 자신만의 틀에 갇혀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회사와 동료들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묻는 청취자들을 향해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되묻는다.

 

인생에서 어떤 종류의 것이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의 지름길은 정견(正見)이요, 실패의 지름길은 편견(偏見)이다. 정견은 나는 물론 남의 입장에서까지 상황을 파악하는 것, 편견은 나의 입장에만 치우쳐 상황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편견보다 더 나쁜 것은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다 안다’고 우쭐거리는 쓸데없는 교만이다.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

 

‘문제의 원인은 당신에게도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날카롭다. 그러나 아픈 만큼 사안을 직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저자에게 직장생활의 조언을 구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보다 넓은 안목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은, 저자 역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임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의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창업하는 교육 회사에서 20여 년간 일하면서 연매출 3000억 원을 이뤄내고 삼십 대에 이사로 승진한 그는, 쉰의 나이에 조기 퇴직한 후 작가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이 경험한 직장생활의 생리를 후배 직장인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복한 직장인으로 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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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하려면 최소 3년은 버텨라


직장 문제와 관련한 저술로는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이 마지막 책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별적인 상황에 대해서 상담해주는 책들이 많은데, 그렇게 되면 소위 처세술이 되기 쉬워요. 상황을 모면하는 기술에 대해서는 알려주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거죠. 그런데 지난 6년 동안 라디오에서 직장인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다 보니까, 각각의 상황 안에도 일괄된 무엇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근본적인 원리를 깨달으면 비슷한 문제가 다시 반복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많은 사람들이 직장생활과 일반적인 삶을 별개로 생각해요. 직장 안에서와 밖에서의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을 사는 비결이나 직장에서 성공하는 비결이 거의 비슷해요. 그런 점에서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은 하나하나의 상황에 대해 기술적으로 쓰기보다는 종합해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듣는 고민이 이직에 대한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이직의 최적기는 언제라고 조언해 주시나요?


이직하기 좋은 시기는 근무 기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요. 근무 기간에 있어서 정답은 없지만, 저는 최소 3년은 근무하고 움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신에게 맞는 것인지 안 맞는 것인지 알 수 있으려면 적어도 3년은 일해 봐야 한다는 거죠. 옮겨가는 직장에서도 경력으로 인정받으려면 3년 정도는 일해야 하고요. 상황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부분 이직을 상담해 오는 사람들은 안 좋은 상황에 놓여 있을 때가 많아요. 승진이 안 됐다거나 상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가 그렇죠. 저는 그 상황 때문에 이직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올바른 이직이라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본인에게도 안 좋은 경력을 쌓고 가는 것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저는 상황이 좋을 때 움직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이직한다면, 새로 가는 직장에는 좋은 상사만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있는 곳에서 상사와의 문제를 해결하고, 어디에 가서 어떤 상사를 만나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 때 이직을 하라고 조언하죠.

 

이직을 결정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왜 이직을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보통 이직의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이직하려는 곳에서 더 좋은 연봉과 직급, 근무환경을 약속할 때가 첫 번째이고, 높은 업무 강도 때문에 이직을 원하는 경우가 두 번째, 그리고 지금보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이직하는 경우가 세 번째예요. 이 세 가지를 잘 점검하지 못하고 오판하게 되면 선택을 후회하는 경우가 생겨요. 실제로 저희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분들 중에도 다시 예전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많아요.

 

예전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는 언제라고 하던가요?


보다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자 이직했는데, 예전보다 업무 강도는 낮아지고 여유 시간도 늘어났지만, 이전 직장의 동료들이 승진도 더 빠르고 연봉도 더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러면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시간이 남는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반대로 높은 연봉을 좇아 이직했는데 업무 강도가 너무 세서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이직했을 경우에는 여유로운 시간이나 조건은 포기해야 하죠. 이때는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내다봐야 해요. 5년 10년 후에 전문가가 되어서 한 번에 더 높이 뛸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정견’, 즉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견’을 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알려주세요.


제가 직장인들을 상담해 본 바로는 일방에게만 문제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승진이 안 됐다거나 갑자기 좌천됐다고 할 때도 상사는 상사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각자의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양쪽을 다 봐야 하는 거죠. 나에게만 중심을 두니까 회사 또는 상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바로 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겁니다. 성공한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도 정견은 꼭 필요한 거예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만 보더라도 서로를 제대로 봐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서로에 대해 오해를 하고 대화가 잘 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직장 문제든, 인생 살아가는 문제든, 한 가지의 원리는 정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바로 보기 위해서는 ‘왜’를 알아야 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된 것 같은지’ 물어봐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가 문제의 원인을 깨닫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들이 단견적인 것만 고민을 호소했을 때, 기술적인 해결방법보다는, 종으로 횡으로 넓혀서 바로 보는 눈을 키워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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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는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환상을 버려라


상사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지사지가 중요하죠. 그런데 말은 굉장히 쉽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는 게 잘 안 되죠. 그 이유는 반응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감정의 반응 속도뿐만 아니라 전파하는 속도도 빨라요. 오늘 낮에 상사와 있었던 일을 저녁에 동료들한테 푸념해요. 그렇게 되면 상황에 대한 재해석이 불가능해져요. 결국 자기 스스로 퇴로를 막아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속도를 늦춰서 말을 아껴야 해요. 옆에서 부추기는 동료들에게 쉽게 휘둘리지 말아야 하고요. 정견을 하려면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거든요.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상대가 왜 그랬는지가 보여요.

 

반응의 속도를 늦추라는 말씀은 직장 밖의 삶에서도 유용한 이야기 같습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예요.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이야기하면 큰 싸움이 되지 않는데, 대부분 즉각 반응하다 보니까 전쟁이 되는 거예요. 전쟁에서는 가급적이면 상대방한테 치명타를 줘야 하죠.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이 전쟁이 옳은지 그른지, 상대와 내가 얼마나 다칠지,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이런 건 생각하지 않아요. 치명타를 입혀서 이길 생각만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거둘 수 없는 말실수를 너무 많이 하게 되죠. 직장뿐만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서도 똑같더라고요. 타이밍을 늦추고 너무 빠르게 말하지 않아야 해요.

 

“직장에서의 고민은 인간관계의 갈등이 80%이며, 그 인간관계 갈등의 80%는 대개 상사와의 갈등”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사와의 갈등’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상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상사에 대한 선입견인데요. 이건 기대치의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아랫사람에게는 ‘상사는 이래야 한다’는 이상향이 있거든요. 그 기대치 중에 가장 높은 것이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실력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죠. 보통은 상사가 인간성, 실력, 성격, 공정성 등 모든 걸 갖추길 바라는데 그런 사람이 되기는 힘들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정해놓은 범주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 상사를 폄하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직장의 생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에도 썼지만 기업은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에요. 회사가 상사를 그 자리에 앉힌 건 철저하게 ‘쓸모’ 때문이에요. 쓸모가 반드시 실력과 일치하는 건 아니에요. 실력이 없어도 쓸모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아랫사람들은 대부분 윗사람을 실력으로 평가하잖아요. 그 부분에서 서로 어긋나는 거죠. 또 하나,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이 맏형처럼, 아버지처럼, 대인배처럼 해주기를 바라죠.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어요. 자신이 그 위치에 간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상사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상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도통 말도 안 통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이해 안 되는 면만 보기 때문이에요. 제가 깨달은 바로는, 알고 보면 상사나 부하직원이나 똑같아요. 직장에서는 누군가의 아랫사람이고, 집에서는 공처가이고, 아이들 등록금 마련하기 위해서 통 크게 쏘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다 비슷비슷한 사연들이 있는데 그걸 찾아내지 못하는 것뿐이죠. 아랫사람이 그걸 찾아내면 대화가 통하는 부하직원이 되는 거고요. 대부분은 상사가 나를 인정해 주기만을 바라는데, 상사도 아랫사람이 자신을 인정해주길 바래요. 그런데 아랫사람들은 잘 인정해 주지 않고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걸 마치 특권처럼 생각하죠.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부하직원을 인정해 줄 상사는 많지 않아요.

 

상사와 부하직원이 서로 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사와 통하고 인정받으려면 상사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하죠. 고향과 출신학교뿐만 아니라 자녀 문제, 고민, 이런 것들을 소상히 파악하다 보면 ‘이 사람도 나랑 똑같은 사람이구나’ 라는 걸 알게 돼요. 그러면 서로 얘기가 통하죠. 상사도 마찬가지로 부하직원에 대해 연구해야 해요. 인사기록 카드에 적힌 가족사항만 외워도 부하직원은 감동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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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반전시키면 전설이 된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상담을 신청했던 청취자가 서운함을 토로했던 적은 없었나요?


딱 한 사람이 있었어요. 승진이 안 돼서 상담을 요청했었는데, 저는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하려고 질문을 계속 했었죠. 결국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기는 했는데, 속은 시원한데 불만도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사안의 핵심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위로도 받고 싶었다는 거죠. 그래도 마지막에는 있는 그대로 파헤쳐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동료들이나 선배들, 상사들은 위로는 해주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스펙보다 스토리를 쌓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스펙을 버리고 스토리를 쌓으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기본 스펙은 있어야죠. 다만 스펙에만 너무 몰입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가지고 보여주려고 하면 차별화가 안 되거든요.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에서도 소개했지만 지방대학 출신으로 서울 소재의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과장이 있었어요. 한 학기 등록금이 800만 원 가까이 되는데, 그 비용을 들여서라도 스펙을 쌓는 게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될지 물어왔죠. 저는 스펙만을 위해서 대학원을 가는 건 잘못이라고 얘기해줬어요. 본질적인 걸 찾아야지 간판만 보고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죠. 서울 소재의 대학원을 졸업하면 스펙은 쌓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실제로 자신이 실행하는 일에 중점을 두라는 거예요.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스펙에만 너무 기대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스펙 때문에 취업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회사에서 스펙을 보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거든요.

 

스토리를 쌓는 것과 함께 ‘전설’을 만들라는 조언을 거듭 해주셨는데요.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위기를 기회로 전복시켜야 하는 것이겠죠?


전설이 되려면 굴곡과 반전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굴곡이 있을 때가 전설을 만들 찬스라고 말합니다. 위기를 돌파하고 굴곡을 거꾸로 반전시키면 전설이 되거든요. 그리고 스토리를 쌓으려면 새로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 주어졌을 때 겁먹지 말고 과감하게 나아가는 게 중요해요. 그런 점에서 스토리를 빨리 쌓으려면 대기업보다는 차라리 중소기업으로 가라고 말하는데요. 미완의 땅에서 키울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에요. 대기업은 연봉은 많아도 이미 시스템이 다 짜여있기 때문에 직원은 하나의 부품처럼 돌아가요. 반면에 중소기업은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서가 계속 늘어나면서 새로운 일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죠.

 

『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은 어떤 독자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으신가요?


나는 성공한 직장인보다 행복한 직장인이 되라고 말하는데요. 연봉이 높은 직장, 승진 기회가 많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어딘가 공허해하는 직장인들이 의외로 많아요. 성공이라는 일방적인 하나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면서 남들과 같이 몰려가갔기 때문이죠. 반대로 연봉이 다른 이들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안으로는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있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나는 당당하다’라고 생각하는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을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이 책은 다른 사람을 제치고 빨리 성공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에요. 말하자면 상대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자극적인 맛은 덜하지만 건강에는 좋은, 유기농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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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철학 퇴근길의 명상김용전 저 | 샘터
우리는 매일 저마다 정해진 목적지로 갔다가 돌아오는 여행자다. 그 목적지는 직장이라 불리며 그 매일의 여정을 출퇴근길이라 부른다. 하지만 오가는 여정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에서 표정을 읽기란 어렵다. 대부분 무엇을 보거나 생각하거나 멍한 상태이다. 내일 또 살기 위해 오늘도 떠나는 여행. 정거장이 바뀔 때마다 여행자들의 머릿속은 희망과 걱정, 회의와 욕망이 번갈아가며 들이치고 있다. 이렇게 출퇴근길은 하루 중 가장 복잡한 마음을 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박연경 “집에서도 간단히 건강하게 먹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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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연구가 박연경. 현재 칼라쿡, 세계식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요리를 연구 중이다. 미국과 프랑스, 호주, 중국, 태국 등을 비롯하여 궁중음식연구원에서 한식도 공부했다. 이처럼 여러 요리를 공부하며 결국 돌아온 곳은 ‘건강 요리’. 그래서 그녀가 낸 첫 책도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요리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요리책』에는 총 85가지 요리법이 들어갔다. ‘건강 요리’라고 하면 왠지 오랫동안 준비해서 요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렇지 않다. 집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요리 위주로 선별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채널예스를 위해 연두부토마토무침과 마부추전 요리법을 직접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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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어


다양한 요리책이 있고 레시피도 많은데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요리책』에 담긴 레시피는 어떤점에서 다른 것과 다른가요.


이 책을 읽는 분들이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은 거잖아요. 건강은 지키지 않으면 나이가 들면서 떠나가기 마련인데 아플 때 시작하면 이미 늦어요. 건강을 위해서 내 몸에 맞는 운동을 하듯이 건강을 위해서 좋은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음식을 어떻게 먹느냐는 건강과 직결 된다고 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식재료 선택에 가장 신경을 섰습니다 건강 재료에 초점을 맞추어 레시피를 구성했습니다. 요즘은 100세 시대입니다. 3세부터 80세까지가 아니라 3세부터 100세까지 건강하게 먹어야 합니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는 말이 있어요. 먹는 것과 약은 근원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매일 매일 건강하게 먹어야 하죠. 어렸을 때부터 건강한 음식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산다면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식약동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왠지 건강요리 하면 ‘약’이 생각나면서 일반 가정에서는 쉽게 만들 수 없는 요리 같아요. 책에 소개한 요리는 어떤가요.


보통 건강한 요리 하면 맛이 없고 어렵다고 생각하죠. 이렇게 접근하기 시작하면 정말 어려워요. 박연경의 요리는 쉽습니다. 사람들이 제 요리를 두고 쉽다고 이야기를 해요. 이 책에서는 쉬우면서도 맛있고. 건강에 좋은 요리를 소개했습니다.


책에 들어가는 레시피가 85가지로 상당히 많습니다. 레시피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요리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항상 새로운 요리를 시도해 왔던 것 같습니다. 같은 요리도 할 때마다 다르게 만들어 봤어요. 똑같은 콩조림을 하더라도, 부재료를 한 번은 멸치, 한 번은 다시마, 이런 식으로 다르게 만들어 봅니다. 재료 선택 기준은 건강 재료입니다. 항상 새로운 건강한 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다 보니 수많은 레시피가 탄생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요리


프랑스, 미국, 중국, 태국 등 여러 곳에서 다양한 요리를 배우셨잖아요. 가장 사랑하는 요리 하나를 꼽아 주신다면?


제 경우는 세계 각국 요리 모두를 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좋은 요리는 아마도 어느 나라 요리인가보다는 정성이 담긴 요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손님이 오거나, 병문안 갈 때 제가 물어봐요. 가장 좋아하는 요리, 드시고 싶은 요리가 뭐냐고. 거기에 맞춤식으로 만들어 드리죠. 제가 좋아하는 요리라고 해도 상대방이 안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이왕이면 함께 즐겁게 먹는 요리가 좋죠.


역으로 손님 입장에서 대접 받을 때는 어떤가요. 이 요리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지만, 이 부분은 다소 부족하다, 이렇게 느끼는 직업병도 있을 듯한데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 기준은 사먹는 요리인지 만든 요리인지가 중요합니다. 요리를 못해도 혼자 장 보고 준비한 과정을 머릿속으로 생각한다면 그 정성을 알기에 굉장히 고맙죠. 오로지 저를 위해서 준비한 요리잖아요. 제게 가장 좋은 선물이 뭐냐고 물으면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라고 답할 수 있어요. 명품백 같은 건 돈 주고 살 수 있잖아요. 하지만 보름 동안 육포를 만들었다거나, 먼 데까지 가서 좋은 재료를 구해 참기름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건 돈만으로 할 수 없죠. 이런 데에서 느끼는 감흥이 더 커요.
 
운영하시는 칼라쿡스튜디오에서 ‘칼라쿡’은 어떤 의미를 담았나요?
 
20여 년 전에 쿠킹클래스, 요리연구소 이름을 고민을 많이 했죠. 저는 하나를 고를 때 신중하게 생각해요. 냉장고를 살 때도 오래 쓸 걸 생각하고 선택하듯, 이름은 더하죠. 그때 후보 중 하나가 중 하나가 레인보우쿡, 바닐라빈, 애플, 정도였는데요. 그때는 컬러푸드라는 이름도 없을 때였는데, 식재료가 컬러풀 하잖아요. 거기서 착안했고, 또 한가지는 남다르게, 색깔 있게 요리하겠다, 이런 의미도 담았어요. 차별화된 요리를 선보이고 싶었죠. 세계식문화연구소도 있지만 저는 칼라쿡이라는 이름에 더 애착이 가네요.



왜 맛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니 떠난 유학


결혼하고 나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그 뒤로도 외국 여러 곳에서 요리를 배우셨는데요. 그 때 당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우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미식가입니다. 이름난 음식을 먹으러 전국 곳곳을 찾아 다니신 분이죠. 특히 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셨고요.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이어진 것 같아요. 결혼해서도 요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은 못했지만 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은 했어요. 저는 먹을 때 그냥 먹지 않고 ‘왜’를 참 많이 생각했거든요. 왜 맛있을까, 어떻게 조리해야 맛있을까, 이런 걸 생각하다 보니 공부하게 되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이 맛있는 걸 매일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결혼하고 나서 여성 혼자 외국 여행을 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배우러 간다는 생각에 여러 나라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배우려는 욕심과 새로운 메뉴 개발을 위해 자연스럽게 많은 나라를 다니게 된 것 같습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요리를 연구했는데, 어디가 제일 좋았나요.


다 좋았어요. 저는 외국에 나가면 한식은 안 먹어요. 짧게 가더라도, 그 나라 사람이 먹는 걸 먹어요. 그 나라의 로컬 음식을 먹으면서 많은걸 배우게 됩니다. 꼭 들리는 곳은 야시장입니다.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곳이면서 진정한 로컬푸드를 만날 수 있는 장소죠.


그러다 건강 요리로는 어떻게 관심이 옮겨졌나요.


메뉴 개발을 하다 보면 한 요리를 계속 먹게 돼요. 튀김 요리 같은 경우는 맛은 좋겠지만 계속 먹다 보면 몸이 안 좋아지는 게 느껴지죠. 그래서 자연스레 건강한 요리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 몸으로 실감하니까 실천할 수밖에 없었어요.


선생님의 바람과는 반대로, 한국인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프렌차이즈화된 정크푸드가 많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우리 주변에 추천하고 싶지 않은 프렌차이즈가 참 많죠. 물론 괜찮은 프렌차이즈도 많고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가격 대비 품질이 어떤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장 흔한 분식인 떡볶이를 예로 들어 보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같은 양인데 5,000원짜리 떡볶이가 있고, 10,000원짜리 떡볶이가 있다고 쳐요. 당연히 5,000원짜리 떡볶이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고급 식재료를 쓰기가 어렵겠지만 충분한 가격을 받는데도 동일한 식재료를 쓴다면 문제죠. 제가 속상한 게 이런 거예요. 가격이 웬만큼 있는데도 좋은 재료를 안 쓰는 집이 있어요. 제품 마진만을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새우 맛을 내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새우를 듬뿍 넣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가격이 올라간다면 소비자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당부의 한 말씀.


이 책 레시피를 처음에는 50가지 정도로 생각했어요.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겨서 메뉴 수가 더 추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정말 정성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독자들도 이 책에 소개된 요리를 하나 하나 따라 하면서 제 정성을 느꼈으면 합니다. 또한 이 음식들과 함께 건강한 삶이 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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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요리책박연경 저 | 북로그컴퍼니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요리책』은 건강요리에 대한 선입견을 바로잡고, 쉽게 만들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박연경만의 건강요리 레서피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박연경은 건강요리는 만들기 어렵고 맛도 없다는 건강요리에 대한 선입견을 산산조각 내준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도 삶 속에서 건강요리를 실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 역시 요리연구가이기 이전에 가족의 건강을 위해 요리하는 주부로서 건강요리에 대한 고민을 오래도록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영욱 “가상의 섬에서 찾은 진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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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종종 산을 오르거나 바다를 건너는 일로 비유되어 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인생의 지도』는 실제로 산길을 걷고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통해 ‘삶’을 보여준다. 시각적으로 재구성 된 그 세계 안에서 산다는 건 더 이상 일직선의 시간 위에서만 진행되지 않는다. 순간순간 마주하게 되는 감정과 선택, 그 모두가 하나의 공간이 된다. ‘그림 그리는 건축가’ 오영욱이 들려주는 이 새로운 해석은, 낯선 만큼 반갑고 흥미롭다.

 

『인생의 지도』는 ‘니히르반’이라는 가상의 대륙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곳에는 태극 문양을 연상시키는 두 개의 마주보는 대륙이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바다가 있다. 여정은 ‘탄생’ 이라 이름 붙여진 지역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끝에 이르기 전까지는 종착지를 알 수 없다. 니히르반 안에는 수많은 길들과 그것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정답 따위는 없다. 숨어있는 지름길도, 단 하나의 목적지도 없다. 서로 다른 선택이 서로 다른 루트를 만들어낸다. ‘죽음의 길목’ 앞에서 ‘두려움’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고 ‘자유’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 ‘관계의 사거리’에서는 ‘배신’과 ‘신뢰’ ‘욕심’의 길이 교차한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표시된 페이지를 따라 책장을 넘기면 된다. 길을 찾는 과정은 전국도로지도를 볼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니히르반에서만큼은 마음껏 길을 잃을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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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이야기를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다


작가 오영욱은 니히르반 대륙을 108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그 위에 자신의 인생을 괴롭게 혹은 유지하게 하는 키워드를 배열했다. 총 147장의 지도 안에 담아낸 이야기는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의 큰 그림이 되었다. 이 거대하고도 세밀한 작업은 『그리스인 조르바』속의 문장-“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에 이를 수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왔다.”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원래 삶이란 건 정답에 의해서 살 수 없는 것이고, 계속되는 실패와 우여곡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이미지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스케치를 해 나가기 시작했고요. 그때 이미 갈림길이나 목적지 아닌 목적지, 그리고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는 지도에 대해서 생각했죠.”

 

『인생의 지도』는 삶에 대한 은유를 곳곳에 감추어 두었다.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이동할 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며,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빨려 들어가게 되는 터널이 있는가 하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누군가로부터 인생의 비밀을 전해 듣기도 한다.

 

“‘니히르반’이라는 이름은 열반, 염세주의, 기찻길의 세 단어를 조합해서 만들었어요. 진리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 세상의 원칙을 알고 싶은 마음은 열반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염세주의는 내 인생에서 모든 걸 해결하지 말자는 약간의 냉소라고 할 수 있는데, 보기에 따라서 하나의 세상도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는 거죠. 우리가 고통스러워하고 분노하는 것들도 다 지나갈 거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야한다는 의미에서 기찻길이라는 단어도 함께 조합했어요.”

 

오영욱 작가는 자신이 건축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모든 것이 ‘살아가는 일’로 설명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여정이 기록된 니히르반 대륙의 지도에 ‘인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고,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불행의 미학과 치유의 여정’이라 쓴 팻말을 꽂아둘 수 있었다.

 

『인생의 지도』에 담긴 인생의 키워드는 가끔씩 저를 괴롭히는 키워드인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그것들은 피할 수 없는, 인생에서 겪어야 되는 요소들이라고 인정하게 됐어요. 어쩌면 삶의 본모습일 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그 불행 혹은 고통을 삶의 아름다움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결국은 불행을 아름답게 인식하는 일 자체가 치유가 될 수도 있잖아요.”

 

니히르반 대륙의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작가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둔다. “이 책에서는 인생의 목적을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정한다”는 것.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행복하라는 한 가지 뿐’이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생을 말하기에 앞서 행복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삶은 없는 까닭이다. 다만 그곳까지 이르는 길이 저마다 다를 뿐인데, 작가는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이루는 방법을 선택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결국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그 전제 하에서 나머지 것들을 생각하니까 세상이 꽤 근사해지더라고요. 이건 아주 이상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운동가들 사상가들 철학가들이 만들고자 했던 사회에 근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잖아요. 이따금씩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럴 때 ‘내가 지금 고통스러움을 견디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야’라는 대답을 찾게 되면 힘들어도 버텨야 할 일들과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 일들이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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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허약한 남자와 자존적인 여자의 만남


『인생의 지도』가 독자들의 시선을 훔치는 첫 번째 방법이 새로운 시각과 흥미로운 상상이라면, 두 번째 방법은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나간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섬세함과 정성으로 놀라움을 자아내는 이 그림들은 옛 지도를 연상시킨다.

 

“옛날 사람들은 지구와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발로 뛰어다니면서 실제와 비슷한 모양의 땅을 그렸는지 신기하죠. 더불어서 옛 지도는 너무 아름다워요.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웬만한 명화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지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모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요. 그림과 기호가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도 옛날 방식의 지도를 그리고 싶었어요. 『인생의 지도』는 가상의 땅을 그린 거잖아요. 그렇지만 실제로 어딘가를 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입체와 평면, 위에서 본 모습과 옆에서 본 모습을 섞어 놓았죠.”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지도』에서도 오영욱 작가의 그림은 무심한 듯 친절하다. 대상을 단순화시켜 매우 담백하게 그려낸 듯 하면서도 특징과 상징은 놓치지 않았다. 특유의 유머러스함 역시 살아있다.

 

“‘종교’라 이름붙인 지역에는 아주 큰 호수가 있어요.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평선을 보면서 호수를 바다라고 생각하죠. 전체 지도에서 보면 사실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재미’의 땅에는 ‘웃음보가 터지는 원형극장’이라는 이름의 두 개의 극장을 그렸어요. 그곳의 무대는 항상 비어있어서 관객들은 맞은편의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어 있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웃긴 희극은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관점에서 그린 그림이에요.”

 

『인생의 지도』는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붙잡아 두는 힘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신선한 상상력, 세밀한 그림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짧지만 강렬한’ 글귀들 때문이다. “대체로 불공평한 이 세상에서 그나마 공평한 점이 있다면 같은 조건에선 인내한 만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를 아는 한 사람 앞에서는 버리고 나를 모르는 여러 사람 앞에서는 지켜야 하는 것이 자존심이다” “열등감을 숨기면 질투가 되고 열등감을 과장하면 집착이 된다” “파멸 직전의 인간관계에서는 분노를 가장 많이 표출한 사람이 지고 말을 제일 조금 하는 사람이 이긴다” 와 같이 본질을 꿰뚫는 이야기들이 숨 고를 틈 없이 이어진다.

 

물론 날카로움에서 비켜 선, 잔잔하고 미소를 짓게 하는 이야기들도 함께한다. 작가는 “좋은 친구란 서로에게 바랐던 게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고마운 일이 계속 생겨가는 사이다”라는 말로 친구를 정의하고 “결혼 제도는 인류의 문명이 허약한 남자들과 자존적인 여자들에게 선사한 선물이다”라고 결혼을 말한다.

 

“결혼을 해보니까 연인이 가족이 되면서 친구처럼 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키워드의 텍스트는 약간 냉소적이죠(웃음)? 지금의 결혼이 과도기적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쓴 거예요. 옛날에는 가장 건강한 수컷이 많은 암컷을 거느렸잖아요. 그러다가 인간이 문명과 제도를 만들어서 ‘무조건 일대일로 결혼해야 된다’고 명시한 순간부터 정글 어디에선가 혼자 굶어 죽었어야 될 남자들이 수많은 암컷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았던 여자들과 결혼을 할 수 있게 된 거죠(웃음).”

 

오영욱 작가는 지난 5월, 배우 엄지원을 아내로 맞았다. 『인생의 지도』는 결혼 후 첫 번째로 출간한 책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느낀 바를 이미지로 표현해 보겠다는 남편의 아이디어에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돌아온 대답은 무척 간결했다. ‘그래’라는 응원의 한 마디였던 것.

 

“책을 쓰면서 생기는 고민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한 적 없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으니까요. 아내는 존재 자체로 도움이 되었죠.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괴로울 때, 조금 있으면 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건 괜찮은 일인 것 같아요.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소재를 발견하기도 했고요.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일인데, 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얻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아내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의 세상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즐거움의 세상에 눈뜨게 됐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통해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 상황이 여의치 않아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젊은 친구들과 오영욱 작가가 함께 배낭여행을 떠나는 ‘우연한 배낭여행’ 프로젝트는 아내 엄지원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 여행을 같이 떠날 이들을 찾는 글을 올렸고, 총 네 명의 청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올해는 정말 행복한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아내와 즐겁게 살아온 것도 너무 행복한데 ‘우연한 배낭여행’ 프로젝트를 통해서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을 경험하게 됐어요. 함께 여행할 친구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의 아이들에게 기부를 하기도 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템인 여행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거잖아요.”

 

작가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네 명의 청춘들과 함께 내년 1월, 인도로 떠날 예정이다. 『인생의 지도』의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우연한 배낭여행’ 프로젝트에 기부할 계획 역시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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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지도』 인식의 캔버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지도』안에서 ‘그림 그리는 건축가’ 오영욱은 ‘철학을 말하는 건축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결코 무겁지 않다.

 

“처음에 생각했던 책 제목은 ‘개똥철학’이었어요. 제가 그렇게 깊이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무게를 잡는 것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가볍게 ‘찌질한 한 남자의 개똥철학’ 정도로 보여지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대신 독자들이 저를 매개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작가는 『인생의 지도』에 담긴 자신의 생각이 독자들에게 촉매제 혹은 매개체로써 작용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도 있겠지만, 공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자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인생의 지도』가 수많은 개인들의 의식 혹은 인식의 캔버스가 되면 좋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행복의 방법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맞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거든요. 그럴 때 저는 독자들을 향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라고 묻는 것이고 독자들은 ‘나는 이렇게 정의할래’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거죠. 그러다 보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니히르반 대륙에서 독자들은 작가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그가 가본 적 없는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작가는 그 과정을 롤플레잉 게임을 하듯 즐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길을 택할 때, 그 새로운 시각들을 여백의 공간에 채워 넣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인생의 지도』라는 캔버스를 마치 낙서장처럼 대하면서 생각의 조각들을 적어 나가라는 것.

 

『인생의 지도』에 실린 조각조각의 지도들을 여행하신 후에 전체 지도를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큰 그림을 펼쳐놓고 자신이 지나간 길을 표시해 보면, 108개의 땅 중에서 자신이 밟은 땅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 각각의 사람들마다 그 여정이 다르다는 것도요. 그렇게 한 개인이 만들어 낸 선이 넓은 세상의 일부만 거쳐 왔다는 모습을 경험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때로 선택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인생의 지도』에서 나만의 길을 걸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본모습이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손쉽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게 오영욱 작가는 ‘삶’ 뿐만 아니라 그 ‘주체’까지도 시각화해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인생을 꿈꾸는가. 그것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은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저마다 다른 루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각자가 선택한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인생의 지도』를 ‘지금 행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봐달라는 작가의 말은 니히르반 대륙을 탐험하며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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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지도오영욱 저 | 페이퍼스토리
오영욱 지도그림책 〈인생의 지도〉(El Mapa de La Vida)는 탄생에서부터 영원에 이르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거나 견뎌낼 수밖에 없는 삶의 유의미한 관문들을 108개의 키워드로 뽑아, 이를 이정표 삼아 그린 147개의 모자이크 지도를 이어 붙여 완성한 상상의 인생 전도(全圖)이다. 인생의 지도’ 원본을 펼쳐놓으면 약 가로 3미터에 세로 2미터가 넘는 큰 그림이 된다.





박찬국 “힐링보다는 고귀한 인간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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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참 팍팍하다. 대한민국은 OECD 나라 중 자살률이 무려 1위. 이유가 뭘까? 경제는 불황이고 가족 제도는 위기에 처했으며 복지는 취약하다. 그렇다면 경제가 다시 호황으로 돌아서고, 공동체 유대감을 키우면서 복지를 탄탄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자살률은 떨어지겠지만, 인간 사는 세상이라면 투쟁과 갈등은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모든 게 고(苦)라고 말했다. 불교를 비롯한 인도사상에 매료된 쇼펜하우어도 삶은 생에의 맹목적인 의지에 불과하며, 고통과 권태의 양극을 오가는 시계추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쓴 『초인수업』은 해답을 니체가 쓴 글에서 찾으려 한다. 이 책은 인생에서 만나는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니체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책이다. 그런데 하고많은 사상가 중에서 니체일까. 첫째, 우선 박찬국 교수가 주로 연구한 사상가가 니체다. 둘째 이유는 첫째 이유와 연결되면서도 보다 본질적이다. 삶의 니힐리즘, 그러니까 삶이 허무하다는 문제와 정면으로 대적한 사상가가 바로 니체다. 박찬국 교수 자신도 청년기에 삶의 허무와 싸웠고, 니체에게서 부분적으로 해답을 얻었다.

 

니체가 제시한 해답은 무엇일까. 니체가 살던 세상도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신념과 행동 기준을 제시해준 기독교 영향력이 쇠락하면서 유럽은 절대적인 가치를 잃어버렸다. 기독교를 대신해서 나타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찬양하며 인권을 발견하고 과학적 지식을 축적하는 등 여러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약속했던 불멸 대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주지 못했다. 물질적 부도 쌓이고,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도 향상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싸웠고 고통을 느꼈다. 무엇보다 살아가야 할 의미를 잃어버렸다.

 

많은 사상가가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저마다 주장은 달랐다. 종교가 사라진 자리에 민족국가를 넣으려 하기도 했고, 계급으로 대신하려 하기도 했다. 투표제도나 생산양식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니체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인간사에서 투쟁, 갈등은 절대로 사라질 수 없다고 그는 현실을 바라봤다. 사회구조를 쉽게 바꾸기도 힘들거니와, 바꾸더라도 탐욕, 경쟁심 등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꿔야 할 것은 구조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독일어로 위버멘쉬인 초인. 초인은 세상은 반복된다는 점(영원회귀)을 알고, 운명을 긍정하여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다. 진짜냐 가짜냐, 선이냐 악이냐는 이분법이 아니라 미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학적 인간이기도 하다.

 

『초인수업』은 이런 니체의 사상을 일반 독자도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다. 책의 구성은 10가지 질문에 대해 니체라면 어떻게 답했을지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 질문 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박찬국 교수의 연구실에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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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매력은 위험성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는 물음에 대해 니체가 답하는 식의 교양서입니다. 주로 학술서를 내다 교양서를 썼는데요. 계기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철학을 어렵게 여겨요. 교양서가 있어도 시중에 나와 있는 철학책이 어렵죠. 외국 교양서를 번역한 책이 대부분이고요. 그래서 예전부터 일반 독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철학 안내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출판사에서 니체에 관한 책을 내자고 제안받았고, 이런 계기로 썼죠. 우리가 살면서 겪는 물음에 대해 니체가 어떻게 답할지를 생각하며 쓴 책입니다. 강의실에서 학생에게 평소 강의하듯 편하게 집필하려 했어요.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웃음)
 
데카르트,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등등 여러 철학자가 있잖아요. 그중에서 니체를 꼽았다는 데는 분명 니체만의 매력이 있을 듯합니다.
 
니체 사상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나치즘 같은 극우파는 니체를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했고요. 무정부주의자도 니체를 자기들 식으로 해석하죠. 니체 해석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요. 제가 시도한 니체 해석도 그중 하나죠. 그럼에도 제가 해석한 게 핵심을 잘 짚었다고 생각해요. (웃음) 니체 해석할 때, 예수나 붓다와 비슷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죠. 또는 근대 휴머니즘으로 보기도 해요. 서로 평등해야 한다, 약자를 동정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모두 휴머니즘이 있어요. 니체가 쓴 글에서 모순되는 구절이 많기에 이런 식의 휴머니즘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아요. 하지만 이런 모습을 부각하면 니체 사상의 매력은 놓칩니다. 니체의 매력은 위험성이에요. 니체는 예수보다는 체사레 보르지아나 마키아벨리를 높이 평가해요. 니체는 기독교 자체를 비판했고 기독교적 성격의 휴머니즘과 사회주의를 반대합니다. 저는 니체 사상의 매력은 근현대 주류를 이루는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취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니체에게 중요한 덕목이 고귀함인데요.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인가요.


니체는 귀족주의를 찬양했죠. 심지어 노예제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민주주의자라 이런 극단적인 주장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지만요. 그럼에도 니체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점은, 그는 인간 현실을 냉정하게 봤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니체는 인간들 간 투쟁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요. 이에 비해 사회주의나 칸트 같은 계몽주의자는 인간의 가능성을 높게 보죠. 역사적으로 봐도 니체 생각이 옳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니체 사상의 매력은 투쟁과 경쟁을 인정하되, 어떻게 투쟁하고 경쟁할 것인가를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경쟁과 투쟁은 서로 비등한 상대나 상대방이 나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보일 때만 정당화된다는 뜻입니다. (99쪽)


고귀하게 경쟁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네요.


책에도 썼지만, 경쟁하려면 최소한 자기와 동등한 상대랑 하라고 했어요. 쉽게 이길 수 있는 자와 싸우는 건 비겁하다고 말하죠. 니체는 고귀한 인간상을 추구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기품 있는 인간은 기독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아니에요. 오히려 나폴레옹이 고귀한 인간에 가깝다고 보죠. 나폴레옹은 혁명과 반혁명이 경쟁하던 와중에 전 유럽을 대상으로 해서 싸웠죠. 패배를 인정하면 패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었고요. 이런 사람이 우리가 보기에도 멋있죠.
 

인간 자체를 정확하게 본 사람은 마라크스보다는 니체


책에는 교수님의 개인적 이야기도 들어가 있는데요. 고백하기에는, 처음에는 사회주의에 매료됐다가 이후에 니체로 이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이 니체라면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했을까를 상상하며 쓴 거라 그렇지만, 저는 니체 추종자는 아니에요. 기독교, 불교 이념도 숭고하다 생각해요. 이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필요하죠. 하지만 기독교의 성인,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너무 이상적이에요. 우리 주변에 봐도 성인이라 할 사람이 거의 없지 않나요. (웃음) 우선 저부터 성인이 아니고요. 마르크스주의도 그렇죠.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주의도 기독교 이념과 맞닿아 있어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진다? 천사들이 사는 세계죠. 젊은 시절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꿈이 아름답게 보였죠. 그 당시에는 인간성 자체에 한계가 있다기보다는 사회 구조가 잘못이라고 믿었어요. 잘못된 구조 때문에 인간성이 발현되지 못한다고 여겼죠. 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다 마르크스주의자였죠. 저도 7~8년 정도 빠져 있었는데, 동구권이 몰락하기 전에 이미 환멸을 느꼈어요. 이상과 현실이 달라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분석이 미흡했다는 뜻인가요.


그것보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요. 사회주의는 인간 간 증오, 시기심을 폐기하고 서로 형제애를 실현하자, 이런 거잖아요. 운동의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내가 올바른 노선이다, 다른 사람은 기회주의다, 이런 식으로 경쟁이 살벌하죠. 자본주의 경쟁보다 오히려 비인간적이에요. 자본주의에서는 경쟁에서 진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 도우려는 이타적 마음이라도 있지만 사회주의에서는 박헌영처럼 기회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면 끝이에요. 현실사회주의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회주의에서 바라보는 인간상에 회의가 들면서 이론을 봐도 맹점이 보이기 시작하며 지적 방황을 겪었어요. 그러면서 니체가 오히려 인간 자체를 더 정확하게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체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요. 사회 구조를 바꾸더라도 인간성 자체가 바뀌진 않아요. 게다가 바꿀 수 있더라도 사회구조가 비슷한 모습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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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운명은 위험투성이인데요. 인간은 위험하게 살아야 하는 존재 같습니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 중 하나가 ‘위험하게 살아라’인데요.


요즘 시대는 힐링인 대세죠.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 등등 경쟁에서 진 사람이 많은 시대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로하는 책이 인기를 끄는데, 니체는 힐링을 말하진 않습니다. 마음을 비워라, 남을 용서하라, 편하게 생각하라, 이런 휴머니즘을 반대합니다. 니체는 휴머니즘이 생명력을 상실한 문명에서 나오는 이념이라 말하죠. 쇼펜하우어 철학과 니체 철학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높이 평가해요. 니체가 불교를 좋게 봤다는 해석도 있는데, 오해입니다. 니체는 불교 역시 생명력이 퇴화한, 문명의 소산이라고 봤어요. 오히려 니체가 높이 평가한 문명은 그리스로마입니다. 청년다운 패기와 열정, 야심, 자기에 대한 긍지를 좋게 보죠. 그런 면에서 니체는 상처받는 자신을 동정하는 힐링보다는 위험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데서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고귀한 인간을 요구합니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만, 니체 입문서로 좋은 책 같아요. 특히 영원회귀에 관한 설명이 명쾌했는데요.


영원회귀 사상이 난해하고 논란 많은 부분이죠. 니체 자신도 거기에 양립하기 어려운 해석을 제시했고요. 제가 선호하는 해석은 실존적인 해석이에요.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그 당시 자연과학을 이용해서 증명할 수 있다고까지, 그러니까 과학적 이론으로 생각했어요. 저는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우리가 겪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게 영원회귀죠. 예를 들어서 지금 하는 인터뷰, 예전에도 계속됐고 지금도 하고 앞으로도 반복되겠죠. 니체가 영원회귀로 이야기하려는 건, 운명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간다고 생각하죠.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믿지만, 운명의 힘이 강해요. 부모, 나라, 기질을 선택할 수 있나요? 이런 운명에 불만을 느끼죠.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나고 싶어 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갈구하죠.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보다 나은 세계는 없어요. 세부적으로 변화가 조금 있지만 근본적으로 똑같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생과 사, 투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죠. 반복하는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이려면 강인한 정신이 필요해요. 영원회귀는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을 무효화시키죠. 대신 적나라한 진실을 직면하고 결단을 강요하고, 내모는 사상입니다.


쉬운 듯, 어렵네요.


세계는 투쟁과 갈등으로 가득하지만 이걸 받아들이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어요. 등산을 예로 들어보죠. 육체적으로 허약한 사람이 산에 오릅니다. 굉장히 힘들겠죠. 끊임없이 질문하죠. 왜 올라야 하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요. 산 정상에 가면 멋진 경치가 있겠지. 그런데 막상 정상에 섰는데, 멋진 경치가 없어 봐요. 허무하겠죠. 이에 비해서 강한 사람은 올라가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있어요. 산이 험악할수록 숭고함을 느끼고요.


대한민국, 고귀하게 경쟁해야


요즘 인문학 책이 많이 나와요. 그에 비해서 대학에서는 폐과하는 인문학 전공 학문이 많은데요. 이런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책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 강연에 가 보면, 상당히 많은 분이 오셔서 듣고 있어요. 보통 젊은 시절에는 인생 고민을 심각하게 하지 않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 갈수록 삭막해지죠. 자기 삶에 회의가 들기도 하고, 앞으로 방향을 정리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반대로 지방에서는 철학과 없어지죠. 심지어 인문대학 자체를 없애기도 하고요. 글쎄요. 물론, 대학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죠. 취업률도 중요하고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자기 전공 살려서 취업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나요. 업무적으로는 회사에서 거의 새로 배우는 상황인데, 인문학이 나중에 사회생활 하는 데 본인만이 아니라 기업에도 도움이 많이 돼요. 제가 아는 한 분은 불문학 석사를 하고 프랑스 기업과 거래하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프랑스 기업인과 만나서 사업 이야기하기 전에 프랑스 문학을 논하죠. 프랑스 사람보다 오히려 이분이 더 프랑스 문학을 잘 알아요. 그러면 거래처에서 이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사업 이야기가 더 순조롭게 진행되어요.


니체도 당대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했는데요. 교수님께서 보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인가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죠. 니체의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니체는 경쟁이 불가피하다 봤어요. 다만, 이런 경쟁에도 윤리가 있다고 했어요. 고결하게 경쟁해야죠.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갑을 관계가 한국사회에서 문제인데, 대기업이 골목시장까지 파고드는 건, 좀 아니죠. 한국 대기업이 글로벌 기업과 맞붙는 것, 이건 니체가 보기에도 멋있어요. 그런데 골목시장, 노동자를 상대로 싸우는 건 아름답지 않아요. 니체에게는 선악이 아니라 미추로 판단하니, 악하다고는 못해도 분명히 추하죠. 그리고 이건 니체와는 다른 생각인데, 니체는 노예제까지 긍정할 정도니 사회복지를 아마 반대했을 거예요. 사회보장은 필요해요. 우리사회는 사회복지, 사회보장 너무 안 돼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올바른 바람직한 경쟁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죠. 가난한 학생도 공부할 의지와 능력이 있으면 박사까지 마칠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요.


니체를 향한 관심이 생겨서, 직접 읽어보고 싶을 텐데. 니체 책이 꽤 많고, 색이 다 달라요. 보통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부터 읽는데,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부터 시작하면 절대로 안 돼요. 몇 쪽 안 읽고 좌절해요. 시적인 비유가 많아 니체 전공자에게도 어려운 책입니다. 니체가 난해한 사상가라는 인생은 이 책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해요. 니체를 이해하고 싶다면 『도덕의 계보학』, 『안티 크리스트』, 『비극의 탄생』등 논문식으로 쓴 책부터 시작하세요. 혹시 읽는다면 제가 번역한 책을 권하고 싶네요. (웃음) 니체 책은 고전, 철학적 예비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역자 주가 상세하게 달려 있어야 해요. 제가 번역한 책에는 이런 역주가 충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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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수업박찬국 저 | 21세기북스
우리가 살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10가지 질문과 이에 대한 니체의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찬국 교수는 수십 년간의 연구와 강의 활동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 니체 철학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인생론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풀어냈다.




차유진 “하루키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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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20여 년 전부터 꼭꼭 씹으며 읽고 함께 성장한 작가 차유진. 그녀가 쓴 대한 에세이 『하루키 레시피』는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빠져보기도 하고, 떠나보기도 하며, 무엇보다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손녀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는 차유진은 ‘분홍 옷을 즐겨 입고 샌드위치를 잘 만드는, 뚱뚱하지만 얼굴이 예쁜, 노박사의 손녀딸’이 책에서 걸어 나온 듯 했다. 단 분홍색 옷만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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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하루키 소설 속의 사람들처럼 외로웠고, 급작스러운 이별과 어긋나는 관계 속에서 오랫동안 방황했다. 쿨함도, 청승도 아닌 소설 안에 흐르는 그 외로움과 언제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쓸쓸함을 같이 이야기하고픈 사람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하루키 레시피』 中


하루키와 요리와 글쓰기가 만난 독특한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소감이 어떤가요?

일단 책이 나와 기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루키는 워낙 마니아들이 많은 작가라 제가 나름대로 생각하고 해석한 것들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해해주시고, 그걸 넘어 좋아해주실 수 있을지 쓰면서 내내 걱정했거든요. 작업을 하면서 제가 하루키를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고, 그냥 좋아하는 작가로, 책을 사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언젠가 하루키에 관한 팬심으로 책을 한 권쯤 쓰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보면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 셈이네요. 행복합니다.


『하루키 레시피』는 언제부터 계획했어요?

하루키의 책들을 정말 열심히 사서 읽던 시기에 저는 요리를 하고 있지 않았고, 요리에 대한 지식도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음악, 재즈 관련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키에 관한 책을 쓴다면 그의 책 속에 나오는 음악에 대해 몇 꼭지 정도 쓰고 싶었죠. 하루키가 직접 쓴 『재즈의 초상』이 많은 인기를 얻기도 했었잖아요? 제가 재즈 관련 일을 할 때 마침 하루키의 음악책이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었고 그 주제로 음악감상회도 열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역시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요리에 관한 거였어요.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남아 끝없이 궁금해하게 하는 다양한 요리들에 대해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고, 나중에 요리를 전공하고 그의 소설을 다시 읽으며 스토리 속의 음식에 대해 생각하고, 저 나름대로 의견을 붙이고, 또 제가 궁금해했던 것처럼 하루키 소설 속의 음식에 대해 작은 정보를 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획하고 다시 전작을 읽기 시작한 것은 3년쯤 되었어요.


그의 소설에서 요리는 일상을 묘사하는 도구이자 개인의 성격 내지는 취향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상실과 공허, 이별 등으로 어딘가 비어버린 주인공이 그 헛헛함과 불안을 달래기 위한 도구로 음식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 레시피』 中


『하루키 레시피』에 언급하신 요리들 중 요새 마음 헛헛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꼭 만들어보길 권할 만한 요리가 있을까요?

마음이 헛헛하고 힘들 때는 역시 잘 넘어가는 음식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뭔가 기름져서 입술부터 목으로 넘길 때 지방이 주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요리가 좋죠. 레시피에 나와 있는 요리로는 마카로니&치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책에는 없지만 수프와 스튜 종류도 좋죠. 저는 잘 삶은 파스타를 꼭꼭 씹어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양념 과하게 하지 않고요.


책을 보면 하루키의 요리들이 아닌 새로운 레시피로 책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도리어 차유진 작가님이 요리를 해주고 싶다며 제안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책 속의 ‘손녀딸’이 아닌 현실의 ‘손녀딸’인 자기 자신에게 단 하나의 요리를 해준다면, 어떤 요리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우울할 때마다 매번 먹고 싶은 음식이 달라지긴 한데 저는 너무 짜지 않게 소금간을 한 두꺼운 생선구이가 좋을 것 같네요. 삼치, 고등어, 임연수어, 조기 다 좋아요. 거기에 소주 한잔!


요리를 하시면서 글을 쓰는 삶은 어떤가요? 부엌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사이사이 글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을 듯한데, 푸드라이터, 요리하는 글쟁이로 살아가는 것의 장단점이 궁금합니다.
 
요리가 머릿속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후각과 미각의 기억을 되살려내 음식을 만들어내는 일이라면 글쓰는 것은 머리도 필요하지만 뭔가 마음속 깊은 곳, 정신적인 우물의 바닥까지 내려갔다 와야 하는 일인 것 같아요. 불과 칼을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시간을 맞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과 앉아서 차분하게, 활동하면서 들뜬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으로 들어갔다가, 그걸 다시 문장으로 꾸며 내보내는 일은 정말 너무 다른 일이라 사실 무척 힘이 듭니다. 제가 아직 서투른 글쟁이라 그럴 수도 있겠어요. 사실 우연히 번역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매력을 느끼고 계속하고 싶었는데, 번역은 글쓰기에 엄청난 양의 공부가 더해져요. 시간이 몇 배로 필요한 일이라 최근에는 못하고 있고요. 늘 50세가 되면 부엌을 떠나 글만 쓰고 싶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모든 일이 다 그렇듯, 며칠 쉬면 둔해집니다. 저는 마켓에서 일이 없는 날은 오믈렛이라도 만들려고 하거든요. 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요. 글도 그래야 하는데 앉아서 쓸 시간이 출분치 않아 그 글쓰기 근육을 되돌리는 데 매번 어려움을 겪어요. 그래서 쓰고 싶은 주제, 번역하고 싶은 책을 한 페이지씩이라도 매일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리도 그렇지만 글쓰기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에요. 미술을 하고 음악 일을 하다가 요리를 하고 있지만 그렇게 커리어를 바꾸어오는 동안에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 놓지 않았던 것은 글쓰기였어요.


하루키와 요리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라, 일, 사랑, 인간관계 등 작가님의 개인사도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분투의 과정을 이렇게 솔직하게 언급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책을 쓰면서 지난 삶을 돌아본 소회는 어땠나요?

편집자가 하루키 이야기도 좋지만 제 이야기를 많이 쓰라고 했을 때가 사실 2~3년 전인데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거든요. 건강도 좋지 않았고요. 그래서 제 이야기는 차마 못 쓰고 하루키의 글과 요리에 관한 이야기들만 썼어요. 그런데 그런 글만 쓰다 보니, 제 이야기가 안 들어가면 글 자체가 뭔가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은 거예요. 그렇게 쓰면서, 아 이건 하루키 소설 속의 음식 분석 글이 아니라, 하루키를 좋아한 차유진이라는 애가 요리를 전공하고 그의 책 속에 있는 요리 이야기를 나름 풀어주는 것이니, 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이야기들을 쓰는 것은 치료도 되었지만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자기 자신의 비루한 점이라든가, 고통받았던 기억을 다 꺼내어놓고 글로 쓰는 것은 참 힘들더군요. 내가 힘들었다고 알아달라고 징징거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팠던 것을 미화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고요. 그렇게 문장으로 차갑게 객관화시키다보니, 제가 생각한 것보다 별일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고, 어떤 건 참 잘도 버텼네, 라는 생각도 들어 기특하기도 하고 그랬죠. 그와는 별개로 나의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어떤 독자들이 돈 주고 사서 읽겠어? 란 공포도 함께했어요. 하하 책을 여러 권 써도,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정말 힘드네요.


하루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일상을 무덤덤하게 살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렇게 혹독한 고독을 겪는다. 사실 이 고독을 겪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 성장하는 일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토록 지독하게 외롭고 가늠할 수 없는 무게의 상실을 경험하고 나서야 겨우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하루키 레시피』 中


이 책의 테마 중 하나는 ‘성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위기가 오거나 떠나야 할 때, 작가님은 마치 소설 속 인물처럼 자신에게 어떤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새로운 여행이나 직업, 도전을 거리낌 없이 선택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 사실 두려운 일이기도 하셨을 텐데요. 그럴 수 있었던 계기나 동력 같은 건 무엇이었나요? 


하루키는 이사를 하면 좋은 것이 제로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 같아서라고 에세이에서 말한 적이 있어요.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저는 어떤 상황에서 최대한 겪을 만큼 겪어보고 안 된다 싶으면 얼른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나랑 맞는 환경, 상황, 일이 아니니 좀 떨어져서 바라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문제가 다 해결되어 홀가분하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도망가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비겁한 면도 있어요. 하지만 누구나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선 살아야 하니까, 떠나는 것을 선택하게 되잖아요? 일단 살아야 하니까. 남미를 간 것도, 일단 떠나고 싶고, 가서 다른 것도 배우고 싶지만 돌아와서 작가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싶어 떠난 것이기도 했거든요. 힘들긴 했지만 다녀와서 얻은 경험으로 또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고, 글도 쓸 수 있었어요. 하여간 제가 떠나게 되는 동력은 여기가 아니다 싶으면 떠나서 내가 할 수 있는,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안 하고 있는 일을 찾아 가보자,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책에서 이른바 ‘하루키 로드’라고 할 만한 일본에서의 하루키 여행에 대한 부분도 재밌었습니다. 진구마에 우체국부터 하루키가 된 듯한 하루.. 정말 좋았을 것 같아요. 언제 다녀오신 건가요? 

『하루키 레시피』를 기획하고 얼마 안 되어 여주로 이사를 갔어요. 이사하고 나서 보증금 차액이 조금 남아 그럼 가보고 싶었던 거니까 얼른 다녀오자, 란 생각을 했어요. 2011년 10월이었는데, 그때 계약하고 바로 후다닥 다 써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완전히 에너지 충만해서 표 알아보고, 하루키가 잘 가는 장소, 소설에 나왔던 곳, 정보를 모아서 떠났죠. 소설에 나왔던 장소도 좋았지만 저는 그가 재즈카페를 운영했던 장소 두 군데를 그렇게 가보고 싶었어요. 고쿠분지와 세타가야에 있는 두 군데를 가보니 감개무량하더라고요. 소설이 아닌, 그가 생활인으로서 지내던 곳이라 그런지 참 묘하더군요. 기간은 일주일 정도 걸렸고요. 4박 5일을 도쿄에 있었고 이틀을 오사카에 머물면서 고베에 다녀왔습니다.


하루키 여행의 여정 중에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을 꼽는다면?

책에도 적었지만 진구마에 우체국이 참 인상에 남았어요. 우체국과 가까운 곳에 있는, 고 안자이 미즈마루와 함께하던 커리집과 진구구장에서의 경기관람도 즐거웠고요. 그리고 영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찍은 장소인 고베 산노미야의 바 <하프 타임>도 아주 좋았습니다. 정말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바의 인테리어, 핀볼기계 등이 하루키의 초기작들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아주 멋진 곳이었어요. 카페 단골들이 직접 만들어 붙였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포스터도 보실 수 있답니다.


차유진 작가님이 작가로서 보는 하루키, 와 요리사로서 보는 하루키는 어떤 사람인가요? 작가님의 단평이 듣고 싶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가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는 생각과 동시에 아, 저분은 이미 얼마 정도의 책을 써야 하는지 정해져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느 정도의 양을 써야 한다고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아직도 그 양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양을 채우기 위해, 몸 관리 잘 하고 건강하게 식사하고 규칙적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해요.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아는 만큼, 자신이 무얼 먹고,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거고요. 그리고 하루키는 확실히 본인이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요리를 배경으로, 매개로, 은유로 사용하는 글들과 소설은 많지만 이 사람이 정말 요리에 대해 아는 사람인지, 그냥 어디서 픽업한 지식으로 글을 쓰는지 보면 알 수 있거든요. 말이 길어졌는데 단평으로 하자면 “하루키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 아닐까 해요. 우리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고요.


지난 20여 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며 너무나도 행복했고 누구보다 불행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책이, 당신의 책 속에 있는 세계가 저를 지탱해주었습니다.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바닥으로 꺼지는 그 순간마저 사실은 위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 계단을 오르고 문지방을 건너는 여행중이라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답니다. 지독할 정도로 고독하고 무심한, 하지만 운명이 바뀌는 시점에 두려움 없이 여행을 떠나는 당신 글 속의 주인공들이 곧 나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어떤 이야기 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내 주변의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계속 풀어갈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하루키 레시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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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레시피차유진 저 | 문학동네
차유진이 하루키 작품 속의 요리들, 그리고 하루키가 에세이에서 즐겨 먹는다고 언급했던 요리들을 책 밖으로 끌어내 한바탕 만찬을 열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은 어느 공허한 날의 저녁, 헛헛한 고독과 아픔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낸다는 증명이 절실히 필요할 때, 간단히 요리하고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는 하루키의 요리들에 대한 이야기.





김광진, 박용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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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진행한 장소는, 같은 날 더 클래식 신보< memory & a step > 음감회가 있었던 소격동. 서태지의 컴백 싱글 「소격동」이 가리키는 그 곳이다. 대화 도중 모두가 재밌어하던 부분이다. 요즘 넘실대는 1990년대 복고 열풍과 복귀 시기가 맞아 떨어진다고 할까. 더 클래식의 항해에도 순풍이 분다.


새 음반은 20년 전의 히트곡 「마법의 성」과 「여우야」, 「Happy hour- 꺼벙이의 일기」 등과 겹친다. 2014년의 길 위에서도 이들의 감성은 1990년대에 닿아있다. 여전하다, 그러나 여전하기에 더욱 아름답다. 솔로로서도 성공을 거둔 김광진과 작곡자, 편곡자로 자기 노선을 개척한 박용준이 간만에 만났다. 20여년 만에 돌아온 듀오는 소회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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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곡이 든 미니 앨범 < memory & a step > 을 발매하셨습니다.


김광진(이하 김) :다섯 곡이 다 재밌어요. 각각이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크게 보면 일맥상통하기도 하죠. 정말 좋습니다.


왜 다섯 곡만 하셨나요.


김 :저희가 딱히 홍보를 하진 않잖아요. 매니저도 없고 뮤직비디오도 없고, 마케팅이라 할 요소들이 하나도 없어요. 후배 뮤지션들이 그러더라고요. 대형 포털사이트 초기화면에 뮤직비디오 걸리면 몇 십만이 조회한다고. 그렇게 하기도 싫었어요. 그렇게 해서 앨범 내면 뜰 가능성보다 묻힐 확률이 더 높죠. 10곡 한꺼번에 묻히면 어떡해요. 그게 제일 싫었죠. 게다가 원래 전 곡을 써놓고 묻어둔 적이 없어요. 이번 2월에도 이미 10곡 써서 넘겼고요.


타이틀 「우리에겐」은 상당히 사운드가 풍부한 곡입니다. 편곡자 용준 씨께 여쭤봅니다. 편곡의 방향을 어떻게 정하셨는지요.


박용준(이하 박) :결정적으로 광진이 형이 힌트를 줬어요. 이런 저런 그림을 그려주면서. 풍성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힌트요?


김 :원래는 알앤비의 느낌이 나는 곡을 썼어요. 그러고 녹음실에서 용준이 버전을 보니 더 정공법스러운 방향을 택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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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


「Be yourself」는 어떻습니까. 정말 밝은 음악이언데요.


박 :처음 받았을 때는 사실 되게 암담했어요. (웃음) 좀 전 음감회 때도 말씀드렸지만,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만들어 본 거에요.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이런 저런 음악도 들어보고 리서치를 한참 했죠. 그래도 안 나오길래 그냥 가장 이상하지 않은 쪽으로 하나 잡아다 악보 그렸어요. 그러고 녹음실에 갔죠. 딱 주고, “매우 쳐라.”


김 : 어떻게 보면 필(feel)대로 간 거 아냐?


박 : 그렇죠. 연주자에게 맡긴 거예요. 대충 레퍼런스만 만들어서. 특히나 드럼이랑 베이스의 경우 그 레퍼런스가 굉장히 간단했어요. 더 좋은 방법을 찾아 주십사 하는 의도였죠. 계속 녹음하면서 괜찮은 방식 찾아보고요. (신)석철이도 '디스코로 해볼까요' 하면서 이리저리 바꾸고 (민)재현이 형도 맞춰서 다시 베이스 치고요. 그렇게 가니까 되게 좋더라고요. (이)성렬이가 어떻게 기타 칠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요.


김 :그게 재밌었죠. 사실 메트로놈 맞추기에 급급한 드러머들도 많아요. 살아있는 연주가 아니라 틀리지만 않은 연주를 만들자는 느낌이 강해요. 반면에 석철이는 20년 동안 같이 작업하면서 매번 공연 엔딩을 하는 것처럼 드럼을 쳐주더라고요. 얘가 녹음을 하는구나, 박자에 단순히 맞추는 구나 식의 생각이 안 들죠.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녜요. 긴 호흡을 갖고 소통이 되는 연주를 해주는 겁니다. 오랫동안 해온 걸 증명하는 거죠.


: 석철이가 또 광진이 형을 되게 좋아해요. 음악도 잘하고.


「종이피아노」에서는 용준 씨가 보컬까지 하셨죠. 좋던데요.


박 :(웃으며) 아녜요


김 : 사람들이 좋아하잖아요. 예전에도 사람들이 용준이 보컬 좋아했어요.


심심한 감이 있는 곡입니다. 편곡 과정에서 무게를 줄였나요.


박 :원래는 리버브를 넣고 싶었는데, 프로듀서 (윤)정오가 넣지 말자는 방향으로 가보자더라고요. 그냥 (윤)정오 프로듀싱 믿고 갔어요.


한편으로 광진 씨 보컬, 앳된 느낌의 목소리가 여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보컬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성숙함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스스로도 자기 보컬에 만족하십니까. 


: 저는 제 보컬 마음에 들어요. 전 늘 음을 정확하고 똑바로 내려고 애 씁니다. 밀도 있게 부르려고 하죠. 사실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다만 진정성의 측면에서는 그 순도가 높죠. 이건 단순히 높은 역량만으로는 가능한 게 아니에요. 굉장히 스킬이 좋아도 느낌에 있어서는 전달이 부족할 수 있거든요. 우리 음악의 스타일에서 또 제 보컬이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수려하게 넘어가고 능란하게 구사하는 소리에서 조미료가 느껴지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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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


음반에서 연륜이 나옵니다.


김 : 그렇죠. 우리 스스로도 뭔가를 막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했던 게 음악으로도 잘 나왔어요. 평가해주시는 분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마법의 성」과 「편지」를 잇는데 답습은 아닌 듯하다고요. 더 클래식 음악이라고 한다면 또 고유의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좋아요. 굳이 「마법의 성」에서 막 벗어나려 하기도 싫고요.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을 풀어가는 게 맘에 듭니다. 


다시 더 클래식으로 나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나 심경변화가 궁금합니다.


박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재미가 없을 텐데요, 그냥 갑자기 하게 됐어요. 제가 워낙 거절과 변명에 익숙하지 못 한 사람이라. 또 전에 성시경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도 있고요. '더 클래식으로 다시 할 거냐'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 “기회가 되면 해보겠다”고 했거든요. 광진이 형이랑 같이 방송을 나간 상태라 더 그렇죠. 속으로는 '10만장 사줄 거냐'고 하면서요. (웃음)


더 클래식으로 나오는 것에 대한 비전이 있었는지요.


박 : 아뇨. 오히려 전 제 첫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게 더 클래식과는 굉장히 많이 다른 방향이라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미지라는 측면에 있어서. 물론 두 가지 다 잘할 자신은 있었어요.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박용준 씨는 워커홀릭인가요.


박 :그런 것 같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거절을 잘 못 하니까요. 일 맡기시는 분들이 다 친한 분들이고 또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제 음악에 대한 갈증이 생긴 것도 그래서 그런 거 같아요. 전 항상 남의 음악을 주로 하잖아요. 그러다 한 번 한두 달 정도 가만히 집에서 쉴 기회가 생겼는데 그 때 드디어 움직였어요. 그 중에서 하나는 이번 푸른곰팡이 '강(의노래) 프로젝트'에 들어갔고 피아노 연주곡 「느리게」는 이번 더 클래식 앨범에 넣었죠.


둘이 만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김 :히트한 밴드의 경우 더 그런 것 같아요. 다시 모여 하기 어려워들 하잖아요. 오래하면서 자기 역량이나 스타일, 컬러가 굳어지니까요. 흔쾌히 하기 어렵죠. 저희의 경우에는 서로를 향한 신뢰란 게 있으니까 쉽게 가능했고요. 게다가 저는 옛날부터 용준이를 형처럼 느꼈어요. 튀고 싶어 했던 게 저라면 항상 절제하고 균형 잡는 건 용준이었거든요. 제가 하늘로 올라가려하면 얘는 땅으로 내려가고요. 그 결합부터가 저희는 잘 맞죠.


이번 음반의 큰 음악적 테두리가 궁금합니다.


박 :이런 질문에는 멋있게 대답해야하는데, 진짜 아무 생각이 없어요. 정신없이 만들었어요.. 


주류, 비주류, 반주류라고 얘기했을 때, 더 클래식의 음악은 무(無)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의적으로 현실세계서 이탈한 사람들의 관조라고 할까요.


박 : 이말 가져다 써도 돼요? (웃음) 정확히 그런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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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 있어 요즘 세대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1990년대의 음악을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김 :있죠. 요즘 트렌드에는 조급함이 있어요. 발라드도 30초 안에 다 보여주려 하잖아요. 그런 점에 있어서 저희는 다르죠. 옛날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3분 30초를 두고 전개하려 했습니다. 단단하게 가지만 그 흐름을 자연스레 이어가는 게 옛날 음악이 갖고 있는 힘인 것 같아요. 최근에는 잘 안 보이는 컬러죠.


마침 당시 같이 활동했던 아티스트들이 대거 컴백하고 있어요. 좋은 분위기를 타는 것 같아요.


김 : 돌아와서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좋죠. 일단 우리가 좋더라고요. 그럼 그 다음에는,


박 : 욕심만 버리면 그 다음은 나름 또 풀리죠.


김 : 다만 주변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듣는 사람들만 해도 실제로 많이 변했어요. 1990년대만 해도, 음반이 하나 나오면 “이 노래는 뜰만해”, 아니면 하다못해 “이 트랙에는 뭐가 있어” 이렇게 말들을 했는데 요즘엔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죠. 이런 생각도 했어요. '음악만 갖고 말하기엔 힘들어진 게 아닐까.' 물론 여러모로 바뀐 시대의 패턴 또한 감안해야겠죠. 하지만 저희는 우선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요. 


더 클래식으로 돌아온 소감, 듣고 싶습니다.


김 : 사실은 더 클래식 앨범이 안 나올 줄 알았어요. 5년 전부터 하겠다, 계속 얘기는 해왔지만. 이게 힘든 거니까요. 과연 나올까, 안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게 있었으니까요. 나오면 기쁠 텐데라고는 하면서도요. 막상 나오니 좋네요. 그간 용준이도 자기 음악 발표를 많이 안 했고, 저도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요. 이제 작은 한 발을 내딛은 것 같습니다. 저희 앨범 제목 < memory & a step >처럼요. 앞으로 더 기대도 되고요, 이제는 마음도 편해요. 부담 갖고 만들었던 예전 2,3집 때와는 또 다르죠. 얼마든지 새 시도를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또 그런 자신감으로 죽을 때까지 살 거고요. 전 우리 음악 좋아해요.


박 : 동감해요. (웃음)



인터뷰 : 임진모, 이수호

정리 : 이수호

글/ 이수호 (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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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미술을 즐기는 것은 삶을 즐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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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미술관을 즐기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보고 이해하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에게 누군가 친절하게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그림을 설명해준다면 분명 그 삶이 더 즐거워질 것이다. 17년 동안이나 서양미술을 쉽고 재미있게 강의해온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그 내용을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바로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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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이해를 위해서는 서양정신을 알아야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로 기자 생활을 하다가 미술평론가의 길을 지금까지 이어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미술평론이라는 길을 가시게 되었나요?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미대를 졸업하고 나면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언론사를 생각하여 입사 후 운이 좋게 기자가 되었어요. 그림에 대한 글을 쓰게 되자,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 미술 평론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아카데믹한 쪽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하였습니다. 기자 출신이다 보니까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훈련을 받았고 저의 관심의 측면에서 봐도 사람들에게 미술을 알리는 일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을 위한 글을 쓰고, 미술평론가로도 불리지만 아트스토리텔러로도 불리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양미술의 이해’라는 타이틀로 서양미술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설명하는 강의를 해온 지 햇수로 17년입니다. 그 내용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인가요?

IMF시절, 우리나라가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가 왜 이런 위기에 빠지게 되었을까 생각했을 때, 무엇보다도 근대화 과정에서 기초가 약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대화는 서양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니 이런 시기에 더 서양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양 미술을 보고 감상할 때에도 그림에 담긴 서양의 정신이나 사고방식을 조금 더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서양 미술의 이해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저서 중에 어린이를 위한 『오감이 자라는 꼬마 미술관』, 『네버랜드 첫 명화 그림책』등은 아이 엄마로서도 매우 갖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이번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어떤 독자가 읽어주길 바라나요?

특별한 대상은 없고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많은 독자가 읽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을 사랑하는 분, 미술에 대해 궁금하신 분, 그런데 지식이 모자라서, 또는 경험할 기회가 없어서 왠지 낯설고 어렵게 느끼는 분이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서양미술을 즐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미술을 즐기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을 즐기는 것이며 미술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취지에서 쓰게 된 책입니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다’라는 말의 일차적인 사전적 정의는 ‘깨달아 알다’ 혹은 ‘잘 알아서 받아드리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인데, 이 앎에 한계가 있는 게, 사실 무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의 세가지 특징을 모두 품은 그림 한 점으로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이라는 작품을 선택했습니다. 표지 또한 이 작품을 선택했고요. 사실 틴토레토의 당대에 유명한 미술가인 티치아노나 혹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작품을 언급하실 수 있을 텐데요. 왜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을 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은 서양미술이 지닌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봤을 때 서양미술의 고유한 특징ㆍ인간중심적, 사실적, 감각적인 특징이 아주 잘 담겨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림에 담긴 내용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적당한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뎅이 위대한 이유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그리고 헤라여신에 얽힌 이야기는 책 속에서 자세하게 만나볼 수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있는 <은하수의 기원>은 설명을 읽고 나면 그만큼 더 보이는 그림이었다.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은 책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아껴두고 다시 질문을 여쭸다.


<칼레의 시민>에 대한 설명도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간중심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아주셨는데요 각각의 인물의 설명을 듣고 나니 작품을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로뎅의 작품이 인정 받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인가요?

로뎅의 작품을 보면 인간의 내면이 생생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사람의 형태, 제스춰 등 여러 시각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조형적인 부분도 잘 표현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면이 아주 생생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칼레의 시민>들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말하는, 지체 높은 시민들이 다른 시민들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표정이 제각각 다릅니다. 제각각 다른 얼굴 표정과 자세에서 나오는 다양한 심리와 내면이 자세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양미술이 인간중심적인 미술로 발달하다 보니까 로댕 같은 작가가 나와서 그런 심리 묘사의 달인과 같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칼레의 시민>을 한국 서울 플라토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다고 알려주셨는데요, 한국에 있는 독자들도 실물을 가서 볼 수 있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가볼 만한 미술관을 추천 부탁드립니다.

한국에서 가볼 만한 미술관은 여럿 있습니다. 먼저 삼성에서 운영하는 리움 미술관이 좋은 미술관 중에 하나고요.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과 과천관 모두 중요한 전시가 많이 열고 있습니다. 서울역사를 개조하여 연 문화역 서울284, 아트선재센터, 아라리오뮤지엄, 성곡미술관, 일민미술관 등등 가볼 만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지방에서도 대구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다시 그림을 보니 나폴레옹 시대의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대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이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시스의 대관식>의 화면 구도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였다고 하였는데요, 이 시대에 이런 일은 보편적인 건지 궁금합니다.

그 시대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대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은 차용하고 응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양은 방작이라고 해서 더 많이 행해지는데 그대로 따라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대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걸 표절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구성이나 구도를 오마쥬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대부분 르네상스의 발생지인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 온 뒤 화풍이 확립되고 왕성한 활동을 하였는데요, 그럼 각 나라의 예술가들은 나라적인 특색보다는 이탈리아의 미술에 기초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이탈리아가 고전미술의 뿌리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유럽 화가들의 평생의 꿈 같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왕립아카데미에서 로마상이라는걸 만들어서 뛰어난 작가들을 로마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작가들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성취 등을 보기 위해서 많이 찾아갔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 지역적인 특색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각 지역마다 고유한 특색이 있었으며 계속 이어집니다. 특히 브리겔 같은 작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 후에도 고국에 돌아와서도 플랑드르지역의 전통적인 작품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동양과 서양 화풍이 다른 이유


인간중심적인 서양화의 특징을 동양의 산수화와 연관지어 동서양의 특징을 짚어볼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동양에서는 산수화를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95쪽)라고 하셨는데요 그럼 베두타Veduta같은 서양의 풍경화는 어느 정도 중요하게 여겨졌나요?

프랑스 왕립아카데미에서 분류한 위계로 따지면 가장 중요한 그림이 역사화, 그 다음이 초상화, 동물화, 그 다음이 풍경화, 정물화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니까 끝에서 두 번째, 위에서 네 번째였죠. 서양은 철저하게 자연을 물리적인 대상으로 본 측면이 큽니다. 화가들에 따라서는 풍경에서 신의 섭리를 느끼고 표현하고 서정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연은 인간의 지배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동양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귀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문인 산수화를 으뜸으로 쳤습니다.


그리스의 문화적 특징 덕분에 이렇게 급속한 조각의 진화는 흥미로웠습니다. 그리스 사회적으로 조각가는 어떤 지위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처럼 귀족에게 후원을 받는 입장에 있었는지요.

그 당시 기록을 보면 화가들이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더 큰 찬사를 담은 기록이 많은데요, 문제는 그 그림들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로마시대의 것은 폼페이 벽화나 화산재에 묻혀 보관된 것들이 있지만 그리스는 단지 조각들이 로마시대에 모각이 되어서 남아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나 천재 같은 지위는 아니고요. 장인, 기술자 같이 생각했습니다. 물론 예술을 하려면 신적인 영감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스 사람들도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우시스 같은 미술가가 실물같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러나 예술가에 대한 천재의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 때부터였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과 사고방식에 따라 화풍 또한 바뀌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이념과는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못했는데요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림을 볼 때 어떤 시각으로 보면 좋을까요?

우리가 그림작품을 생각하면 형태, 색채, 구성이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가 볼 때 그런 물리적인 아름다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도 보게 됩니다. 화가가 느꼈던 감정이나 정서,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정신, 삶의 모습이 그림에 다 담기게 됩니다. 그런 부분을 조금 더 생각하면서 그림을 보게 되시면 그림이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창고라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미술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죠.

미술은 문화의 한 갈래입니다. 지역 사이의 문화 차이는 미술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서양미술은 서양 문화의 맥락 속에서 탄생한 미술이지요. 그런 까닭에,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우리 문화의 맥락과 비교해 볼 때 서양미술이 지닌 특징이 더 또렷이 다가옵니다. 한 대상의 특질은 다른 대상과의 차이를 통해 더 선명히 인식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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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감상하는 요령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현존하는 서양미술가 중 가장 훌륭한 사람, 혹은 꼭 보면 좋을 작품은?

살아있는 서양 미술가 중에는 아니시 카푸어라는 인도 출신 미술가이나 영국에서 배우고 활동했습니다. 작품이 매우 신비롭고 정신적인 깊이가 있는 것을 물질로, 3차원 세계의 물질로 4차원 세계 또는 정신을 느끼게 해주는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현대미술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좋을까요?

현대미술은 미술이 가지는 크게 보면 조형미술로서의 특징, 즉 시각적인 것을 부각시킨 작품이 있고, 철학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전자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몬드리안의 기하학적인 추상화가 있다면 그대로 느끼면 좋습니다. 미술에서 문학과 이야기를 제거하고 형태를 제거하고 시각적인 요소만 남긴 겁니다. 두 번째로 철학적인 작품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혀주거나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줍니다. 그런 작품은 공부가 필요하며 그런 작가들의 이야기나 사상, 철학 등을 읽어보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처럼 훌륭한 미술평론가가 되고 싶은 학생에게 해주실 조언 부탁드립니다.

미술평론가가 되고 싶은 학생들이 있다면 물론 그림을 많이 보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삶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비평가라고 하면 논객, 날카로운 비평, 차갑게 분석하는 것을 먼저 떠올릴 수 있는데 사실 그렇게 날카롭고 차갑게 비판하는 것도 사람을, 세상을 그리고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랑의 토대 위에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을 공부해야 하죠. 또한 저는 비평가이면서 사람들과 미술 간에 중개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디어나 방송 등을 통해서 미술을 소개하는 글도 중요하고, 강의나 투어 가이드 역할처럼 앞으로 이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더 많아질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조금 더 넓게 보고 다양한 측면을 공부하는 것도 바람직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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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서양미술특강이주헌 저 | 아트북스
믿고 읽는 ‘아트 스토리텔러’ 이주헌이 17년 동안 이어온 강의 내용을 압축한 결정판이다. 저자는 서양미술에서 핵심만 정리한다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우리 미술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점을 바탕으로 세 가지 특징을 추출해낸다. 인간 중심적인 성격과 사실주의적인 성격, 감각적인 성격이 그것이다.




임진모 “음악과 경제 결합을 처음으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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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음악을 세계 공용어라고 말한다. 국경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음악은 회화나 문학에 비해서 감상하는 데 필요한 사전 지식이 필요 없다. 그럼에도 모든 창작물에는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맥락이 있는 법. 음악도 마찬가지다. 한 사상가는 이렇게 말했다. 하부토대는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음악평론가 임진모가 쓴 책 『팝, 경제를 노래하다』는 20세기에 전개된 영미 대중음악을 경제 상황에 비추어 해석했다. 이 책에 따르면 비틀스는 어느 순간에 번쩍하고 나타난 천재가 아니다. 물론 그들의 음악적 재능은 훌륭했으나, 전후 영국 경제가 불황에 시달렸다는 사실도 비틀스 탄생에 일조했다. 불황으로 사회적 진출로가 막힌 상황에서 영국의 젊은이들은 대서양 너머에서 활동하는 미국의 로큰롤 스타를 동경했다.

 

고용의 기회를 얻지 못한 가련한 이 젊은이들에게는 멋지게 포마드를 발라 넘긴 헤어스타일과 가죽 재킷 차림을 한 대서양 저편의 미국 로큰롤 스타들이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70쪽)

 

『팝, 경제를 노래하다』는 1970년대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전후하여 20세기와 21세기를 폭넓게 다룬다. 음악적 지식과 함께 정치경제를 꿰뚫는 시선이 없었다면 쉽게 쓰기 힘든 책이었을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데는 여전히 고전적 평론을 고집하는 임진모의 뚝심 덕분이리라. 이미지와 영상이 범람하는 21세기에도 임진모는 음악을 사랑하는 본능과 사회과학적 통찰력이 기본이 된 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전적 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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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결곡 시대 속 산물



주제가 팝과 경제다.


음악 좋아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다. 보통은 멜로디, 구성이 좋다는 식의 예술적 이유로 좋아한다. 음악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시대 속 산물이다. 음악을 즐기는 데는 예술적 이유만 아니라 사회적, 시대적 이유가 있다. 빼놓을 수 없는 게 경제다. 경제를 중심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영미 팝 음악이 어떻게 동행해 왔는가를 보고자 했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났다. 첫째, 시간이 안 됐다. 지금도 방송만 8개를 한다. 글도 써야 하고. 책을 쓰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데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둘째, 책을 쓰려면 전문성이 필요하다. 내가 경제를 알아봤자 상식적인 수준에서 안다. 자신감이 결여됐다고 할까. 그래서 경제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기초 자료를 제시하고 각 시대 경제 분위기를 굵직하게 묘사했다. 1950년대 성장, 1960년대 폭발,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 마지막으로 1990년대 경제적 불평등. 자부심을 느끼는 건, 거친 수준이나마 음악과 경제의 결합을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도 이런 책은 거의 없는 듯하다.


영국과 미국만 아니라 대한민국 이야기도 있는데.


그 부분은 강화하려고 했지만 다른 책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괜히 했다가 책 흐름을 깰 수도 있으니까. 사실 우리는 경제상황과 음악이 밀접하지 않았다. 음악은 언제나 쾌락적이거나 언제나 우울했다. 음악이 다양하지 않다. 그래서 책에서는 독자가 기분 안 나쁠 정도로 IMF 때 펑크가 나왔고, 남진과 나훈아를 다루려고 미국 농민 부분을 일부러 다루기도 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 중 하나가 남진과 나훈아 부분이다.


미국이 최대강국이라 해도 경제적으로 보면, 1970년대 이후는 쭉 불황이었다. 클린턴 시기 잠시 호황이었고. 이렇게 미국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두운 부분 분량이 더 길다. 혹시 임진모의 음악적 선호가 반영된 건가.


그렇지 않다. 내가 생래적으로 당기는 음악은, 비틀스 음악이나 펑크까지다. 그 이후로 책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전에는 억지, 견강부회라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니까 쓰기가 쉬웠다. 1980년대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 이 부분부터 잘 써야 하는데 자료가 허약하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경제가 기억에 남나? 나쁜 게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20대의 이데올로기가 뭘까? 자아실현이나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취업이다. 어렵게 취업해도 다 관두려 하고. 미래 불안이 육화된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지금만이 아니라 늘 그랬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마이클 잭슨이 명이라면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것은 암이었다. (161쪽)


그래서인지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노동계급의 대변인이다. 서민이 느끼는 경제적 황폐를 주된 소재로 노래했다. 그러니 이 책에서 여러 차례 나올 수밖에 없다. 마지막도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High Hopes’로 했다. 이 가사 죽이지 않나. 이렇게 글을 끝낸 데는 크리스 헤지스의 『미국의 굴욕』이라는 책 덕분이다. 온통 330쪽을 우울한 이야기를 하다 4페이지에서 그래도 우리는 아직 희망이 있다, 이런 책인데. 짧은 4쪽이 주는 파괴력이 엄청나다. 그래서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나도 이렇게 끝을 구성했다.


1970년대 넘어오면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문화비평으로 오지 않았나. 지젝, 스튜어트 홀, 프레드릭 제임슨, 이런 사상가로부터 영향도 받았나.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글, 높이 평가하는 게 글이지만 나는 글을 잘 못 쓴다. 글은 정말 아닌 거 같다. 그냥 쓴 거다. 지젝은 무슨 지젝. 그런 이야기하면 욕 바가지로 먹는다. (웃음)


한국 대표 음악평론가로서 삶


오이뮤직 핫뮤직 GMV 등 음악잡지가 다 폐간됐다. 지금 이즘은 14년째 건재하다.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뭔가?


내가 매달 돈을 제대로 내고 있다는 것. (웃음)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내가 돈을 못 벌었다면 사이트 유지 못했다. 매달 300만 원 이상 들어간다. 그보다 근본적인 건, 음악 정보를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이다. 많은 사람이 음악 이야기하고 많이 듣고, 사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는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음악이 좋다. 마니아 취향을 드러내는 순간, 더 멀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즘이 욕을 먹는다. 음악 마니아 쪽에서는 너무 뻔한 걸 이야기하고 신조류에 둔탁하다고 비판한다. 충분히 받을 만한 비판이지만, 범대중적인 게 더 중요하다. 방문자 천 명이 더 위대한 사이트일 수도 있지만, 나는 방문자수 10만, 15만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간혹 어떤 사람은 모르는 음악, 모르는 뮤지션을 이야기하면서 우쭐해 하기도 하는데, 이런 게 패망의 지름길이다.


영화 평론가는 우리가 떠올리는 여러 명이 있는데, 음악 평론은 임진모가 독보적이다.
 
아직 미디어 샤워를 못 받아서가 아닐까. 기량 뛰어난 친구가 많다. 내 자식뻘 인터넷 세대가 쓴 글을 읽어보면, 야 이런 생각을 하네, 하며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재야의 숨은 고수가 많다. 앞으로 10년 정도 있으면 부상할 거라 믿는다. 그런 친구가 나오면, 찬사를 보내고 귀농하려고 한다.


미디어 샤워라고 했는데, 사실 영화에 비해서 음악은 지면이 없지 않나.


영화 잡지 쪽도 많이 없어졌지만 음악보다 사정이 나은 건 영화는 차세대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을 이미 얻었다. 개인적으로 차세대 인문학은 다소 과잉된 타이틀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영화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소설가, 학자도 영화 평론하지 않나. 이렇듯 담론이 구축되어 있다. 영화 쪽 글쓰기는 확실히 지적인 코드가 있긴 하다. 그런데 음악을 그렇게 쓰는 게 좋은지는 고민해본다. 물론 영국이나 미국 평론가처럼 쓰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렇지만 잘못되어서 마니아적 느낌을 줄 경우, 오히려 더 후퇴할 수 있다.


뉴스에서 대중음악을 주제로 한 기사에서 가장 단골 취재원으로 등장한다. 힘들지 않나.


마이클 잭슨 죽었을 때, 일제히 몰려왔다. 지금 레전드를 소환하는 시대고, 나이를 보는 것 같다. 저런 레전드를 젊은 사람이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나. 나이 때문에 피해도 보지만, 덕도 보는 상황이다. 몰려서 피곤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내가 기자 출신이기에 기자들 마음 잘 안다. 힘들지만 성의 있게 답하려고 애쓴다.


지금 K-Pop, 한류 논의가 많다. 지겹도록 많이 들은 질문일 텐데, K-Pop의 힘과 한계를 어떻게 보나.


옛날에는 나도 명과 암을 분리했다. 요즘은 어둠과 빛은 친구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성공과 실패는 서로 사귄다고 표현한다. K-Pop도 똑같다. K-Pop 장르가 획일적이라는 비판이 있는데, K-Pop이 없었다면 한국음악이 바깥에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 K-Pop 흥행은 우리 문화의 기본을 지켜가는 충실한 과정이다. 하지만 문화의 기본 과정은 장르 다양성이라는 점에서 이제는 음악 내외의 노력이 중요하다.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은 K-Pop을 깎아내리고, 정부 관료처럼 잘 모르는 사람은 K-Pop에 과잉적 편애를 보인다. 이 극단에서 균형을 찾으며 문화의 기본을 빨리 확립해야 한다. 그런데 ‘한계’라는 말은 너무 저널리즘적 접근이다. 솔직히 한계 아닌 게 어딨나.


김동률 서태지 등 1990년대가 귀환하고 있는데.


1990년의 역습이 왜 주목받을까? 가까운 과거 시절을 확보했다는 게 중요하다.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 돌아옴으로써 아이돌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서태지 음악이 좋다 나쁘다는 개인적 취향이고 이들이 돌아오면서 그동안 부족했던 장르 다양성을 찾아간다는 게 중요하다.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고전적 평론에 충실한 평론가


프로필에 적혀 있는 ‘고전적 평론’은 어떤 의미인가?


평론가의 첫 번째 작업은 뭘까? 비평이든 정보 전달이든 글쓰기로 이뤄진다. 우리나라 평론가 중에 글 많이 쓰는 사람 있나? 글쓰는 사람보다는 방송에서 말하는 사람이 평론가로 보여진다. 나도 방송을 하긴 해도, 힘들지만 여전히 글을 쓴다. 한 달에 원고 10개 이상을 쓴다. 강의도 글쓰기의 연속이고 지금 인터뷰도 글쓰기의 연장이다. 글 없이 방송하면 망한다. 글이 평론의 시작이자 끝, 즉 전부가 글이라는 게 고전적 평론이 의미하는 바다 .


음악평론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몇 가지가 조건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건 음악을 좋아하는 동물적 본능. 음악에 무조건 끌려야 한다. 본능도 중요하지만 평론가가 되려면 음악학과 음악사회과학, 이 두 가지를 갖춰야 한다. 사회를 읽기 위해서는 기본이 역사와 철학. 더 중요한 건 경제학. 이 책이 바로 그 시도다. (웃음) 이 공부를 안 하니 평론이 허술하다. 열심히 음악 듣고, 사회 속에 음악이 있다는 걸 알고 사회과학을 접하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을 기본적으로는 글로 풀 수 있어야 한다.


음반 제작, 평론,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그 중심에는 음악이 있다. 앞으로 새로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나.
 
꼰대다, 임진모가 사라져야 음악판이 바뀐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의 주인은 20대, 30대지 나 같은 50대가 아니니까.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이지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나만의 영토는 있다. 그게 바로 역사라는 개념이다. 앞으로 한국대중음악사를 어쨌든 완성해야 한다. 꼭 내가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부분은 좀 끝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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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경제를 노래하다임진모 저 | 아트북스
『팝, 경제를 노래하다』는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이 책에서 1930년대 경제공황기부터 2000년대 세계금융위기까지 경제사를 대중음악을 통해 훑어 내려간다. 지은이는 대공황기의 ‘희망 송’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Over the Rainbow」로 시작해 2000년대 세계금융위기로 경제가 붕괴된 상황이 반영된 그린 데이의 「네 적을 알라Know Your Enemy」로 연결 지으며 책을 마무리한다.




김기창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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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정미경 등을 배출해온 오늘의 작가상이 2014년에 선택한 작품은 『모나코』이다. 노인의 평균 기대수명이 1위라는 풍요로운 나라, 모나코. 제목 『모나코』는 반어적 의미를 담았다. 모나코와 달리 노인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노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복지가 부실한 한국에서 노년을 유복하게 보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OECD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상식이다.

 

물질적인 빈곤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관계가 단절됐다. 임종 당시에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시신이 방치되는 것을 뜻하는 고독사는 사회적 문제다. 특히 노인의 고독사가 심각하다. 『모나코』의 주인공 노인이 그렇다. 노인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살고, 자식도 있지만 그의 고독사를 막지 못했다. 심지어 집안일을 봐주는 덕, 미묘한 이성관계였던 진과 같은 이웃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너도 진이 마음에 들었던 거냐?”
“제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 하나가 아버지랑 여자 취향이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둘째 며느리 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만두세요.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그 남자 아들이 둘이에요. 다섯 살, 일곱 살.”
“아들만 둘이라…… 신이 나보단 그 남자를 덜 미워했나 보군.”
“저는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내 덕에 사장 직함도 달고 있잖아. “

-『모나코』p. 170

 

김기창 소설가와 인터뷰를 준비하며 우려했던 게 있다. 소설 속 노인의 말투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인물과 소설가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지만, 작가가 혹시 노인과 비슷하면 인터뷰를 어떻게 하지, 하는 우려는 다행히도 그를 만나자마자 사라졌다. 소설 속 노인과 달리 김기창 작가는 차분하고 친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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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으로 등단

 

처음 쓴 소설로 등단했다. 당시 소감은 어땠나?

 

걱정 반 기쁨 반이었다. 우선은 당연히 기뻤다. 멍하니 발길 가는 데로 두어 시간 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자 왜 이런 작품에 상을 주나, 하는 반응이 나올까 봐 걱정도 되었다. 지금은 더 나은 작품으로 보여드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부담을 좀 덜었다. 소설을 쓸 때도 많이 걸었다. 그 당시 산책하면서 자주 마주치는 어르신들이 있었는데 ‘저놈은 일 안 하고 뭐하지?’ 하는 시선을 느끼면 마음이 찜찜하기도 했지만 막힐 때마다 걷고 쓰고 다시 걸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뿌듯함도 있다.

 

10대 혹은 20대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와는 달리 좀 늦게 시작했다.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가 있었나.

 

대학 때 영화를 좋아해서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장편 시나리오를 2~3년 정도 썼다. 성과가 없었다. 실망도 없진 않았지만 시나리오 작업 말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로 생각하고 포기했다. 글과 관련된 일을 이것저것 하다 올해 초에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소설을 써 보자고 결심했다. 소설 쓰겠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있었으나, 실행에 옮긴 것이다. 결심을 제대로 해서인지 아침형 인간이 아닌데 아침에 일어나지더라. 그래서 아침에 소설을 써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쓴 첫 소설이 노인의 고독사라는 사회적 문제를 다뤘다.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대학교에서의 전공과 관련이 있었을 것 같다.

 

없지는 않을 거다. 책을 볼 때 소설은 1/10이고 나머지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서적을 본다. 소설은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도 별로인 경우가 있어 신중하게 골라서 보거나 예전에 읽고 좋았던 소설을 여러 번 다시 읽지만, 다른 책들은 그런 확률이 소설보다는 적은 편이라 쉽게 쉽게 읽는 것 같다. 또 관심분야가 잡다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을 시나리오로 설명하자면, 메인 플롯이 사회적 문제라면 서브 플롯이 감정이나 관계다. 즉, 한 사람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메인 플롯이라면 노인과 진 그리고 덕의 관계와 그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서브 플롯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소설을 쓸 때 그런 계획을 짜고 한 것은 아니었다.

 

모나코는 현실의 극단에 있는 이상향

 

제목인 ‘모나코’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노인의 기대수명이 1위 국가인 곳이다. 노인에게 가장 풍요로운 나라다. 이런 풍요로움이 노인 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에게는 매혹적인 공간으로 다가왔다. 최근엔 공간이 사고를 좌우한다는 생각까지 한다. 비록 모나코를 잘 모르지만, 따뜻한 나라일 것 같고 여기서는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제목으로 택했다. 또 한 가지는, 소설 속 계절적 배경이 겨울이다. 제목과 내용이 대비되면 독자의 머리에도 강하게 남지 않을까, 하는 의도도 있었다. 

 

주인공 노인의 말투가 상당히 괴팍하다. 직접 이야기를 해 보니 본인의 언어는 아닌 듯한데, 혹시 주변 사람 중에서 모델이 된 사람이 있나.

 

나랑 진짜 가까운 사람들은 이 소설의 노인과 내가 닮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나에게 이런 면이 아예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말투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는 노인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냉소적이지 않다. 오랜 세월 타인과 관계가 단절된 채 산 노인이라면 말투가 까칠하리라는 생각으로 노인의 말투를 만들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노인은 노인이고, 나머지 인물도 진, 덕 이런 식으로 한 글자다.

 

작품 속 노인이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람으로 다가가게 하고 싶었다. 죽음을 코 앞에 두거나, 자신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이름 없는 노인’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 글자 이름은 실제로 내가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을 부를 때 보통 한 글자만 사용해서 그렇게 한 면도 있고, 또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특이한 이름들에 약간은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을 피하고자 했다. 등장인물 중 진과 덕에게만 이름을 붙였는데, 그 이유는 노인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에게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죽음을 장황하게 묘사하고 싶진 않아

 

어떻게 보면 가장 극적일 수 있는 노인의 죽음을 짧고 건조하게 묘사했다.

 

등장인물이 많은 작품이다. 캐리어 할머니, 학생들, 인부, 신문 보급소 사장. 이렇게 했던 이유는 애초의 의도가 노인의 죽음을 중간 부분에 넣고 노인이 죽은 뒤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주변인물들에 어떠 식으로든 영향을 끼침을 보여주고 했다. 쓰다 보니, 노인을 죽이지 않은 채로 끝까지 갔는데, 계획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음... 죽음을 장황하게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다 죽는 것이고, 한번 오는 순간이다. 짧게 하는 게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두고 블랙 코미디라는 평도 있던데.

 

얼마 전에 리마터링된 <올드보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가 냉소적인 유머를 잘 담고 있었다. 의식한 것은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모나코도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 다닐 때 영화를 많이 봤고, 그중에서 박찬욱 감독을 좋아했다. 퍼슨웹에서 일할 때도 인터뷰를 두 번이나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소설을 쓰는 당시에는 블랙 코미디를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블랙 코미디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죽음에 관해서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2~3년 전부터 죽음을 의식했다. 내 죽음이 임박했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 학문적으로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 궁금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후지와라 신야의 『메멘토 모리』가 인상 깊었다. 후지와라 신야는 “진정한 죽음이 보이지 않으면 진정한 삶이 보이지 않고 죽음은 삶의 저울, 죽음은 삶의 알리바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말하는데, 옳은 말 같다.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게 좋은 삶을 사는 한 가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 중에서는 유언장을 미리 쓰기도 하던데, 혹시 유언장 써 봤나.

 

유언장은 생각 안 해 봤다. 비명으로 뭘 남길까는 고민해봤다.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알았지”는 굉장히 유명하지 않나. 아직 구체적으로는 떠오르는 게 없는데, 쇼처럼 죽음을 웃음으로 승화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좋아하는 유언은 있다. 전기 의자에 사형당하는 사람의 유언이었는데 “지금 이 자리를 여성에게 양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였다. 야수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 명백하고, 또 야수다운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삶을 한 문장으로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유언을 남겼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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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와 NC 다이노스를 좋아하는 소설가

 

낚시 TV 보기를 즐긴다고 하던데.

 

아버지 따라 어릴 때 낚시하러 많이 다닌 영향도 있다. 낚시 TV가 여행 TV와 비슷하다. 물이 흐르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는 곳에서 낚시를 한다. 경치가 좋고 조용하다. 화면이 굉장히 정적이다. TV를 보면서도 사색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전에 낚시 TV를 즐겨 본다.

 

기존에 했던 인터뷰에서 아내를 향한 애정이 느껴지더라. 경상도 남자라면 이런 쪽으로 약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경상남도 마산 출신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좋은 남편은 아니다. 로맨틱하지 못하다. 되게 미안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작품 쓰는 데 아내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쓰는 게 소설 맞냐?” “이거 재미 있냐?” 등 이런 식으로 쓰면서 도움 많이 받았다. 그래서 아내 이야기는 계속 하게 되더라.

 

프로야구는 좋아하나. NC, 롯데 중 어디를 응원하나.

 

원래는 롯데 팬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사는 세상인데 나는 왜 롯데에게서 벗어나지 못할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 NC가 생기면서 게임에서 포탈 이동하듯, 그대로 가버렸다. 초기까지만 해도 롯데와 NC가 게임하면 흔들렸다. 올해 NC가 잘하기 시작하면서 완전 넘어왔다. 롯데가 요즘 시끄럽던데, 차라리 잘 된 것 같다. 수습을 잘하면 반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첫 작품이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나.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보다 이런 장면이 나왔다. 산골마을에 모여사는 작은 마을 공동체가 있는데, 그곳의 시인 한 분이 “삶이 먼저고 시는 다음”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나도 일단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게 우선일 것 같다. 소설은 그 다음 결과물로 필요하다 생각이 든다. 내용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희극적인 작품을 쓰고 싶다. 주성치 영화를 좋아한다. 주성치 발차기가 보기에는 성의 없고 어설프지만, 그게 주성치가 의도한 바다. 엄청난 노력으로 탄생한 발차기이고. 마찬가지로 노력과 의도와 연습의 결과로써 가벼움, 이런 작품을 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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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김기창 저 | 민음사
『모나코』는 좋은 집에 돈도 많고 취향도 고급인 할아버지, 즉 남들 눈에는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골드 실버’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풍요로운 삶의 조건을 전부 누리고 있지만 정작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은 가사도우미‘덕’과 아내 같고 친구 같고 딸 같은 사이로 지내던 중 이웃의 젊은 미혼모 ‘진’을 좋아하게 된다.



 

 

 

 


 

김정운 “지금을 읽는 키워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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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는 저자 김정운의 삶에서 단절이자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책이다. 재치 있는 문장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연속이지만, 다루는 주제와 논의의 깊이라는 점에서는 단절이다. 김정운 박사가 처음으로 뱉은 말도 “이제까지의 김정운은 잊어라”였다. 이전의 김정운이 파마하기 전과 파마한 후로 나뉜다면, 앞으로의 김정운은 『에디톨로지』를 쓰기 전과 쓴 뒤로 나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오랜 세월 고독과 싸웠다. 처음 계획했던 게 2006년이었고, 구체화 시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외로운 일본 유학 생활에서 김정운 박사는 묵묵히 써내려갔다.

 

그렇게 탄생한 『에디톨로지』는 세상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편집’을 꼽는다. 지식, 예능 프로그램, 백화점, 축구, 심리학, 프로이트, 책, 지도 등 저자는 세상 사물을 ‘편집’으로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지를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통찰력으로 예리하게 파헤쳤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그곳의 분류, 전시의 에디톨로지를 즐기는 데 있다. 백화점과 편집숍의 비적대적 모순관계를 통해 다양하게 진화하는 국내 상품 분류, 전시의 에디톨로지를 지켜보는 일은 아주 즐겁다. (255쪽)
21세기에 들어서는 또 다른 연령대의 개인이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이다. (269쪽)
말년의 프로이트는 이같이 명확해진 ‘이드-자아-초자아’의 편집 구조를 통해 자신의 여타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보다 확장해 설명한다.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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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읽는 키워드, 편집


어떻게 지내셨나요.


일본에서 3년째 지내는 중이에요. 어떻게 혼자서 3년을 버텼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화를 전공해서 내년 2월에 졸업하고 한국으로 들어올 계획이었죠. 힘들고 외로워서요. 그런데 『에디톨로지』를 쓰고 나니 좀 더 있어야 앞으로도 좋은 책이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새롭게 용기를 가지는 중이에요.
 
고독과 싸우면서 나온 책이 『에디톨로지』입니다. 이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당연하죠. 제가 만든 거니까요. 다들 원래 있던 단어 아니냐고 하지만, 없었어요. 왜 이런 단어를 아무도 안 만들었을까, 저도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더 자신도 생겼고요. 지금 시대를 읽어내는 중요한 키워드가 편집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요즘 종이 신문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네이버에 올라와 있는 뉴스를 보거든요. 스마트폰을 켜면 7~8개 뉴스가 떠요.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기사를 쓰는데, 첫 화면에 쓰는 건 7~8개밖에 안 됩니다. 선택하는 권력이 제일 센 권력이죠. 엄청난 권력이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없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죠. 개념이 있어야 현상이 보여요. 현상이 보여야 내가 이 현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요. 지금까지는 현상을 읽는 개념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에디톨로지』가 중요한 시대적 화두가 아닐까 싶어요.


책에서 주변부 지식인이 안는 고민을 썼습니다. 미국의 학계 비판도 했고요. 학문도 결국은 어떻게 보면 편집일 텐데, 이 편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듯합니다.


저도 제가 내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순 없는데요. 한국 지식인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이론이 없어요.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자만 자기 이론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기 개념, 이론이 없다는 건 심각한 지식의 종속을 의미합니다. 무서운 거죠.


심리학도 마찬가지예요. 독일에서 문화심리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한국 왔습니다. 발달심리학이나 사회심리학을 해야 교수가 될 수 있다고 해요. 절망했죠. 독일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에는 문화심리학이 없대요. 왜 없냐면, 미국 심리학 교과서에 없어서요. 지금은 생겼지만 예전에는 그랬어요. 한국의 학문이 미국에 대한 종속이 심하죠. 미국이 만들어놓은 지식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안 해요. 주변부 지식인의 열등감, 자발적 포기가 있는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요. 되든 안 되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해요. 대학이 지식 권력의 핵심이었는데, 대학에 있던 지식 권력이 해체되기 시작한 지 오래됐어요. 대학의 위기를 이야기 안 하는 게 못마땅하기도 했고요. 

 

원근법의 발견은 객관성의 발견이 아니다. ‘주체’의 발견이다. 인식하는 주체, 즉 ‘주관성’의 발견이라는 뜻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원근법이 동시에 주체의 발견을 포함한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 (155쪽)


전작도 그렇지만, 이번 책에서도 문장이 재밌습니다. 특히 이번 책에서는 현상을 해석하는 관점이 신선한데요.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나요.


저도 쓰고 나서 “정녕 내가 썼단 말입니까?” 할 정도였죠.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해 보니, 외로웠어요. 외로운데 집에 있으면 되게 슬퍼요. 나가거든요. 산책을 하죠. 미친 듯이 걸어요. 안 슬퍼지려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에버노트를 씁니다. 집에 와서 보면, 희한한 생각이 많아요. 자료를 찾아보고, 그것에 관해 썼어요. 외로움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생산적인 사고도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외로운 걸 무서워하고 관계 속에서 풀어보려고 하거든요. 관계 속에서 힐링하려고 해요. 그런데 관계에서 힐링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관계는 문제를 만들어낼 뿐이죠. 힐링 자체에 대한 환상도 버릴 필요가 있어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입니다. 견뎌야지 피해 가면 아무것도 못해요. 외로운 시간을 많이 가지면 생산적인 일이 됩니다. 꼭 생산해서 돈 벌겠다는 게 아니라, 생산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내면에서 밖으로 나오잖아요, 이게 행복하죠. 외로워져라!


만들어졌다면 나도 만들 수 있다


책에서도 좋아하는 사상가를 공개했지만, 독서 장려를 위해 더 소개해주신다면.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은 기가 막힌 책입니다.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도 마찬가지예요.  아동이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생겨난 거예요. 이걸 읽다 보니, 그렇다면 청소년도 언젠가부터 생긴 개념이겠지, 싶어요.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청소년이에요. 학교에서 교육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거든요. 불안정하고 세련되지 못한 청소년 개념이 생겼어요. 그리고 장년이 되면 발달이 다 끝난 걸로 봤는데, 요즘은 100세까지 살잖아요. 이제는 성년 이후에 노인 개념이 나오고, 노인학도 생겼죠. 이렇듯 훌륭한 이론 사상가의 글을 읽으면 생각이 팍팍 튀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당시 역사학계에서 무시당하고 비주류였어요. 저에게 이런 사람이 주는 통찰이 훨씬 큰 거죠. 지금은 제게 중요한 학자는 아리에스, 엘리아스, 벤야민, 최근에는 발터 그로피우스.
 
개념이 구성되었다, 푸코로 대표되는 이런 쪽이 한때 유행했던 담론이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저는 허무한 느낌도 들었는데요.


허무할 리가 없죠. 만들어졌다면,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요. 만들어졌다고 해서, 없던 게 만들어졌다는 실재론적 사고를 하는데요. 원래부터 있었던 건 없어요. 만들어져서 게 실재하는 거죠. 이게 왜 중요하냐면, 개념이 만들어진 거라면 나도 만들 수 있거든요. 심리학을 예로 들면, 심리학도 분트가 원래는 철학과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안 돼요. 교수가 되려면 특이한 게 필요했어요. 새로운 방법론을 이야기하며 철학과 교수가 되었죠. 심리학이 이렇게 생겼어요.


책에서 재밌는 대목이 <’나’는 내 기억이 편집된 결과다!’>인데요. 2003년 저자 소개와 2009년 저자 소개가 사뭇 다릅니다. 2014년에 쓴 저자 소개를 쓸 때는 어떤 점을 염두에 뒀나요?
 
아주 건조하게 썼어요. 혹시나 김정운을 모르는 사람이 “뭘 공부한 사람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잖아요.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까지 제 책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에디톨로지』를 보고 당황할 확률이 높아요. 예전에 쓴 책도 물론 내 이야기지만 내가 가진 이야기 중에 마이너한 이야기를 했죠. 『에디톨로지』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요.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이후에 비슷한 책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비슷한 책을 또 내면 분명히 실망했을 거예요. 독자가 당황할 수는 있겠지만, 내용상으로 좋은 내용이잖아요. 지적인 담론이 가능한 사회가 좋은 사회에요.


프로이트론도 재밌었는데요. 다른 사람이 김정운 삶을 편집해 본다면, 이 부분만은 꼭 살려달라, 이 부분은 빼 달라, 이런 게 있나요.


다른 사람은 내 삶에 관심 없어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뭐냐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관심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냥 심심하니까 물어보는 거죠. 진실은, 내 삶에 관심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남의 눈치를 봐요.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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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관계 과잉 사회, 외로워져야 해


책에는 독일 이야기도 자주 등장하는데, 독일에는 지적인 담론이 많나요?


주말신문을 보면 차이가 나죠. 우리나라 주말신문은 얇잖아요. 독일 주말신문은 원래 신문 두께의 열 배 정도 됩니다. 주제별로 정원 가꾸기, 음악, 미술, 문학, 학술, 스포츠 등 쫙 나와요. 제일 부러운 게 이런 거예요. 토요일 아침이 되면 독일인이 주말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브런치 카페에 혼자 앉아서 오전 내내 신문을 봅니다. 저녁이 되면 친구와 저녁 먹으면서 아침에 본 신문 내용을 화두로 이야기하죠. 주말의 삶이 그 나라의 수준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10위 권 정도로 잘살거든요. 빈부격차도 있긴 하지만요. 문화적 수준이 담보되어야 오늘날의 이분법적인 보수 진보 대립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와 다른 관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나만 옳다는 것처럼 오만한 게 없죠.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는 삶의 관심사가 다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에게 사회구조적 모순을 왜 이야기 안 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할 수 있어요. 잘할 자신도 있고요. 그런데 나마저 이런 이야기를 해버리면, 할 이야기가 이것밖에 없는가, 싶잖아요. 물론 다급한 문제이긴 해도 창조, 문화의 현대성, 이런 것도 21세기 한국에 중요한 주제거든요.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재밌는 사회, 행복한 사회입니다. 다들 행복하려고 싸우는 거잖아요.


대한민국 주말은 참 건조한 듯합니다.


나만을 위해 주말에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해요. 주말에 시간 어떻게 지내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거죠. 다들, 경조사로 바빠요. 술 마시고 정치 욕하고 연예인 이야기하는 데 바쁘죠. 이건 아니에요.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되게 중요한 문제거든요. 다들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니 관계 속에 함몰됩니다. 다 같이 술 마시고 정신없이 지내면 안 외로울 것 같지만, 다음 날 머리 아프고 허무하거든요. 이렇게 하지 말고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해요.


한국은 관계 과잉 사회, 쓸데없는 관계가 너무 많아요. 왜 결혼식 가고, 장례식 가요. 부조, 축의금 필요하면 돈 보내드리면 되잖아요. 차 막히는데 지방까지 갔다 오고 그 다음 날 완전히 망가지고. 저라도 결정해야 하는데 싶어서 생각하다, 아 장례식을 안 하면 되겠더라고요.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하고, 죽었다고만 알리려고 해요. 아이들 결혼식도 최소한으로, 남들 시간 안 빼앗고 싶어요. 저도 시간 안 뺏기고요. 그 대신 생산하는 일을 해야죠. 생산하는 게 제일 재밌다니까요.


정치 이야기 잘 안 한다고는 했지만, 책에서 화두 하나를 던졌습니다. 이민 문제요. 역시 선생님이 보기에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재생산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죠. 남들 다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진 않고요. 한국사회는 빨리 민족 개념이 해체되어야 해요. 저출산 사회인데, 돈 줘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적극적인 이민 정책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봐요. 한민족, 반민족의 유구한 역사 때문에 쉽지 않지만 현실 속에는 시골에 가면 외국에서 온 며느리로 꽉 찼단 말이죠. 있는데 왜 이야기를 안 해요. 민족 개념에 대한 사회적 집착이 존재해요. 왜 그럴까요. 분단되어서 그래요. 민족국가를 제대로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왕조국가에서 근대의 민족국가가 되어야 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겪고, 식민지 끝내니 분단되었습니다. 근대 숙제를 아직 못한 거죠. 민족 개념에 대한 성찰적 해체, 이런 게 한국에 시급한 과제 중 하나라고 봐요. 통일이 안 되니까, 이런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거죠. 그래서 통일이 빨리 되어야 해요. 한민족이어서가 아니라, 미래로 세계에서 리더십 발휘하는 나라가 되려면 발목 잡는 게 분단입니다. 독일 통일을 보니까 곧 될 거예요. 


지난 책은 굉장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번 책을 기존 독자가 당황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요. 이 책이 어느 정도 흥행할지 예상을 해 본다면.


지식인의 직무 유기했다고 생각하는데. 학술적인 담론을 일반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노력을 거의 안 한 거 같아요. 자신감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요. 쉽게 이야기하면 지식인으로서 쪽 팔린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가장 세상에서 쉬운 게 어렵게 쓰기에요. 내 이야기로 소화 못 한 상태에서 번역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어렵게 쓰죠. 저도 쉽게 쓰려고 노력하는데, 부딪치는 게 많았어요. 좌절할 때도 있기는 했죠.


이제는 이런 책도 많이 읽을 때가 됐죠. 만날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만 이야기하는 사회가 정상이에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외국 학자가 어렵게 쓴 책은 정말 재미없고 어려운데도 잘 사 봐요. 어떤 책은 내가 읽어도 재미없고 어려운데 잘 팔리는 게 있어요. 그러니 내 책이 안 팔리면 문제가 있는 거죠. (웃음) 사실 안 팔려도 상관은 없어요. 그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재밌는 사진도 많이 넣었고요.


<명작 스캔들>과 같은 방송에서 입담을 발휘하셨잖아요. 예능형 토론, 이런 걸 해도 어울릴 듯합니다만, 방송 출연할 생각은 없나요. 앞으로 계획은?


안 그래도 방송국 개편 때만 되면 연락이 와요. 방송은 재밌죠. 가슴 설레고 즐겁고, 무엇보다 저는 방송 체질이에요. 떤 적이 없어요. 다만 방송은 나를 소모하는 느낌을 받아요. 나중에 지적인 작업이 잘 안 된다, 그럴 때는 시트콤을 한번 해 보려고요. 실제로 시트콤 제의도 여러 번 왔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의했는지 모르지만요. 그렇지만 지금은 지적인 활동, 책을 더 많이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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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김정운 저 | 21세기북스
편집의 시대가 왔다. 에디톨로지 하라!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21세기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그의 탁월한 능력 역시 따지고 보면 ‘편집 능력’이다.



 

 

 

 

마스다 미리 “순간순간을 즐기는 게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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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뒷이야기부터 해보자. 인터뷰 주인공이 마스다 미리라고 했더니,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정말 많았다. 표본이 작긴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한국 팬이 많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각자 업무로 바빠 인터뷰에 참석한 사람은 필자 혼자였지만.

 

2013년에 소개된 ‘수짱 시리즈’는 한국 독자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결혼하지 않은 30대 여성이 직장에서,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건을 차분하게 표현했다. 고민이라면 고민이고, 일상이라면 일상일 수 있는 소재를 친근한 그림체로 풀어내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녀가 그려낸 연애, 사랑, 인간 관계, 회사 생활에 많은 독자가 공감했고 위안을 얻었다. 이쯤 되면 매력 넘치는 작품을 그린 마스다 미리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자신을 에세이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만화 주인공은 모델이 있나요?”
인터뷰할 때 종종 받는 질문이다.
모델은 없다. 그리다보니 이런 사람이 됐다, 하는 식이다.
‘본인의 만화 중에 본인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캐릭터인가요?’
내가 인터뷰어였다면 이런 질문을 할 텐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질문 받은 적이 없다. 만약 묻는다면 ‘세짱’이라고 대답할 생각이다.
세짱(세스코)은 『주말엔 숲으로』라는 만화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여행사에 다니는 여성으로, 내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평범한 사람.『여자라는 생물』p. 81~82

 

에세이집 『여자라는 생물』,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출간을 기념하여 한국에 온 마스다 미리를 만났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한국 와 본 적 있나요? 한국에서 선생님 인기가 굉장하다는 걸 아시는지.

 

10년 정도 전에 관광으로 3박 4일 서울에 온 적이 있어요. 그때는 서울 구석구석을 걸었어요. 한국에서 인기가 있다는 건 듣기는 했지만 실감은 전혀 못하고 있어요.

 

내일(인터뷰가 이뤄진 날은 10월 31일로 11월 1일에 마스다 미리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 팬과 만나는 행사가 있는데요. 심정이 어때요.

 

일본에서 이런 이벤트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매우 긴장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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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독자 만남을 위해 그린 그림


 

『여자라는 생물』의 제목이 직설적이면서도 강합니다. 어떻게 이런 제목을 붙이게 되었나요.

 

일본에서는 생리가 시작되면 여성, 완경이면 여성이 끝났다고 하는데요. 이 기간이 아닌 여성은 뭘까요? 계속 똑같은 존재인데 다른 존재처럼 여기는 게 신기했어요. 그런 궁금증으로 이런 제목을 지었죠.

 

이번에 출간된 『여자라는 생물』은 40대에 쓴 책입니다. 함께 나온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는 30대에 썼고요. 세월이 흐른 만큼 선생님의 글도 조금씩 변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요.

 

30대에 썼던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는 주로 사랑이나 연애를 다뤘어요. 사랑이나 연애가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죠. 40대에 쓴 『여자라는 생물』은 특정 주제를 넘어서 여성의 인생 전반을 소재로 썼어요.

 

성적인 부분도 솔직하게 썼는데요. 쓰기에 부담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책이 나오면 집으로 보내는데, 이 책에 관해서는 어머니가 아무런 감상을 말 안 하더라고요. (웃음) 여전히 윗세대는 딸이 이런 걸 쓴다고 하면 조금 충격을 받나 봐요. 
 
『여자라는 생물』에피소드 중에 3억엔 당첨되면 뭐 하고 싶어,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요. 선생님은 혹시 3억 엔이 생긴다면 뭘 하실 건가요.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하지 않을까요. 참고로 일본에서는 여성은 대개 여행, 남자는 저금한다거나 집을 산다는 답을 한다고 해요.

 

여행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한국에 가고 싶은 데가 있는지요.

 

서울 이외에도 가고 싶은데, 어디가 좋은지 잘 몰라요. 겨울연가에 나오는 춘천 쪽은 한 번 가 보고 싶어요.

 

 

수짱은 어떻게 탄생했나

 

한국에서 ‘수짱’시리즈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수짱은 어떻게 탄생한 인물이었나요.

 

35세 때 한창 장래를 고민했습니다. 그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나쁜 인생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고 생각해보고 싶어 만화를 그렸습니다. 출판 계약이라든지 정해진 게 없었지만 그냥 그렸어요. 그려놓고 나서 여러 출판사에 작품을 보냈죠.
 
‘수짱’시리즈을 보면서 독자는 선생님의 본인 이야기인지가 궁금했을 텐데요. 작품에는 어느 정도 선생님의 이야기가 들어갔나요.

 

작품 속 이야기는 제 경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수짱 시리즈를 쓸 때는 30대 여성이 읽는 여성지를 본다든지 하면서 그려나갔어요.

 

수짱을 보면 감정을 과격하게 표현하지 않고, 차분하게 생각하는 인물인데요. 실제 선생님은 어떤가요?

 

수짱은 저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제 주변 사람과도 비슷해요.
 
선생님 주변에는 대체로 좋은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아무래도 싫은사람』도 쓰셨는데, 그럼에도 안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어떡해야 하나요?

 

어떡하죠? (웃음) 안 좋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좋은 면을 보라고 말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굳이 이런 시도를 굳이 해야 할까 싶기도 하고요. 그냥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요.

 

만화, 에세이 중에서 뭐가 더 편한가요?

 

에세이는 사실을 써야 하는 거라, 쓸 수 없는 부분이 나오기도 해요. 에세이로 쓸 수 없는 부분이 쌓이면, 만화에서 풀죠. 만화는 픽션이니까요. 마찬가지로 만화를 그리면서 만화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면 에세이를 쓰고요. 암울한 이야기는 에세이로 쓰면 독자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이런 소재는 만화로 그리는 편이에요.

 

한국은 웹툰이 유행하고 있는데요. 일본은 어떤 형태의 만화가 유행인가요?

 

일본도 있긴 해도, 종이책이 아직 강해요.

 

어릴 때부터 글쓰기와 그리기를 좋아했던 계기가 있었나요.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기에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일러스트를 그려보기도 했어요. 공부는 잘 못했지만 문장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늘 좋아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일로 일러스트를 그리게 되고, 편집자에게 ‘만화도 해보면 어때요?’라는 말을 들어서 만화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만화는 한 번도 그린 적이 없었는데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해봐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은 얼마 전까지 일기 쓰기가 숙제였는데, 일본도 그랬나요.

 

일본은 여름 방학 때만 숙제였어요.

 

선생님은 학생 때부터 굉장히 부지런했군요! 그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아요. 제게 일기 쓰기는 어린 시절 굉장히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

 

나 자신 외에는 안 보니까 괜찮았어요. (웃음)

 

 

마스다 미리가 말하는 행복

 

한국이나 일본 상황이 비슷해지면서 선생님 이야기가 더 공감을 얻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점점 결혼 안 하는 추세이고, 하더라도 연령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일본은 어떤가요.

 

결혼 연령이 높아지는 건 비슷해요. 10여 년 전부터, 계속 그랬죠. 수짱이 10년 전에 등장했는데, 10년이 지난 한국에서 인기가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궁금하기도 해요.

 

선생님이 쓴 책이 30~40대 여성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데요. 30~40대 고민을 차분하게 잘 표현하셨습니다. 30~40대 여성의 주요 고민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결혼, 육아 회사 일 등 살면서 겪는 고민이 있겠죠. 저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고민을 했고요.

 

선생님을 멘토로 여기는 독자도 많습니다. 답이 없는 질문이긴 합니다만,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인데요. 정해진 목적이나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예를 들어서, 인터뷰를 위해 여기까지 오다 만약 넘어졌다고 해 봐요. 그때는 행복하지 않겠죠. 하지만 여기 와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행복하죠. 순간순간을 즐기는 것, 이게 행복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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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생물마스다 미리 저/권남희 역 | 이봄
마스다 미리는 만화 캐릭터 수짱으로 인기를 얻은 만화가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스트로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그렇게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간 여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실 전작에서 고민에 대한 정확한 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마치 고민만 명확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의 정답은 사실 ‘현재’에 있음을 마스다 미리는 꾸준히 이야기 해왔고, 그것은 그녀의 실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에세이를 통해 설득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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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마스다 미리 저/박정임 역 | 이봄
여자들의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위트 있게 포착한 마스다 미리의 유일한 이 사랑 이야기는, 2004년 첫 출간 이후 일본 30대 여성 독자들의 호평 속에서 잡지에 3년 동안이나 더 연재된 수작이다. 특히 30대의 마스다 미리가 찾아낸 사랑은, 그녀가 기존의 에세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회고적이지 않다. 지금 막 누군가와 헤어진 듯 아프고, 지금 당장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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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허균은 인본주의자, 자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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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생각』은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이이화가 쓴 역사적인 첫 책이었다. 1980년에 출간되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허균의 혁명적인 정치사상이 신군부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균은 민중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누고, 억압적인 지배 계층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민중을 호민으로 정의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호민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그는 한 사회나 나라의 여러 모순과 부조리와 부패세력을 없애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나가는 지도자를 ‘호민’이라 했다.

-『허균의 생각』p. 104~105

 

허균은 당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었다. 그는 당대 지식인을 지배했던 주자학에만 함몰되지 않았다. 특히 주자학을 거부했던 좌파 양명학자 이탁오를 조선 지식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허균의 생각』은 이러한 허균의 혁명적인 모습을 정치, 학문, 문학 등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허균이 품었던 생각을 알 수 있도록 원문을 풍부하게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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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쓴 글은 촌철살인

 

1980년 출간하고 초판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금서로 지정된 이유가 무엇이었나.

신군부가 들어선 뒤 <창작과 비평>, <월간 중앙> 등 정기 간행물을 폐간시켰다. <뿌리깊은나무>는 시사 잡지가 아니어서 폐간시킬 이유가 거의 없었는데, 폐간되었다. 연재 중이던 『허균의 생각』을 바꾸라고 지시했는데 바꿀 시간이 없고 해서 그냥 실었기 때문이다. 이게 종간호가 됐다. 그 뒤에 『허균의 생각』이 나왔고 한동안 잘 팔리다 뒤늦게 금서로 지정됐다. 몇 달 지나서 풀렸다. 허균의 호민론, 이런 부분이 신군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때 『허균의 생각』을 쓰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허균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는지.

 

역사 기록을 보니 허균은 역적, 나쁜 놈이고 그 당시에도 나쁜 이미지였다. 불쌍한 사람 도와주자, 양반사회 깨자, 신분 철폐하자, 이런 주장을 했으니까. 거기에 매료됐고 푹 빠졌다. 허균의 문집이 굉장히 어렵다. 왜 어려우냐 하면 허균의 독서량이 많으니까. 제자백가를 다 읽은 사람이다. 나도 그 속으로 들어가야지. 당시 유명한 한문학자를 다 찾아다녔다. 그분들도 처음 볼 때는 해석이 잘 안 된다. 그렇지만 달려들었다. 허균의 글은 짧은데도 핵심을 찌른다. 시대의 아픈 곳, 고쳐야 할 곳을 찔렀다. 놀랐다. 촌철살인이다.

 

1980년 초판과 비교하면 어떤 내용이 바뀌었나.

 

첫 책이 원고지 1,000매 정도였는데 글자가 작았다. 그런데도 한자가 하나도 안 들어갔다. 필요하면 들어가야 하는데도 말이다. 프랑스는 개정판을 3~4번 낸다고 한다. 초판과 마지막 판이 반 이상은 달라진다. 『허균의 생각』도 초판과 비교하면 반 이상 달라졌을 거다. 그만큼 많이 고쳤다. 허균에 관한 기본적인 관점을 고친 게 아니라 허균의 글을 많이 넣었다. 편집자의 요구이기도 했고. 이 책은 ‘이이화 저’이지만, 어떻게 보면 허균의 글을 번역해서 수록했다.

 

호민론 외에도 인상적인 부분이 학문이었다. 허균이 이탁오와 같은 문제적 사상가를 좋아했는데.

 

탁오의 본명이 이지다. 중국의 좌파 양명학파로 현실 개혁, 신분 평등 성향이 강하다. 주자학은 귀와 천, 상과 하가 원래 있다고 주장한 데 비해 세상을 뒤집어엎자는 쪽이었다. 이탁오가 좌파의 선봉이다. 이탁오도 감옥에서 죽었는데, 허균과 비슷하다.

 

허균, 전봉준 등 민중, 민족 지향적 인물을 좋아하는데, 이이화가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정신문화원에 있다가 전업작가가 된 뒤로 글을 많이 썼다. <월간중앙>, <창작과 비평> 지금은 안 친하지만 당시 <월간조선> 같은 지면에 실렸다. 독자들이 인물에 관심 많으니 인물을 썼는데, 독특한 사람을 개발해야겠다 싶더라. 내 취향이 이런 쪽이라 허균, 전봉준, 정여립, 홍경래 등을 재평가했다. 농담으로 이이화는 죽어서도 술 대접 잘 받을 거라고 하더라. 허균, 전봉준 이런 사람이 역적이었는데 좋게 써줘서. 그분들이 잘해 줄 거라고. (웃음)

 

허균은 조선이 땅이 좁아 인재가 드물다고 말했는데, 이런 의견에도 동의하나.

 

허균만이 아니라, 허균 이전에도 임백호가 조선이 좁은데 양반 상놈 따지지 말자고 했다. 허균이 땅이 좁다고 한 건 비하가 아니라 우리끼리 오손도손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한탄한 것이다. 허균은 중국을 자주 다녔다. 안목이 넓었다. 중국에는 중동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과도 대화했다. 게12장을 최초로 들여온 사람이기도 하다.

 

허균이 활동하던 시기와 지금의 한국도 많이 다르지 않은 듯하다.

 

시대의 모순은 언제나 있었다. 구한말 동학농민운동, 3.1운동, 해방공간, 4.19에 요동을 친다. 최근에는 6월 항쟁이 그랬다. 이런 시기에 단체도 많이 생기고 다 잘난 척을 하려 한다. 오늘날 보수진보 갈등이 엄청나다. 지금이 해방공간과 비슷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고. 오늘날 이상한 현상이 있다. 정치적 문제로 아버지와 아들이 갈등하는 거다. 사회적 갈등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척, 형제끼리 갈등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경상도 출신으로 전라도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경상도에 가면 나보고 전라도 사람이 되었다고 비난한다. 나는 그 사람들이 꼴통이라 말하고. 이런 갈등이 참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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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이화의 삶, 학문

 

역사학자 이이화의 원래 전공은 문학이었다. 서울에서 문학에 관심을 두고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이내 중퇴하고 한국학 및 한국사 탐구에 열중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연구했고 역사문제 연구소 소장, 계간 『역사비평』편집인, 서원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원래는 문학을 전공하려다 역사로 전향했다. 계기가 있었나.

 

고등학교를 고학했다. 여관에서 지냈는데, 오늘날 모텔을 생각하면 안 된다. 칸막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방에서 헐떡거리고 싸우는 소리 다 들린다. 집중할 수 없으니까 복잡한 수학 문제는 풀 수 없다. 대신 책을 읽었다. 시도 써놓고 수필도 썼다. 써 놓은 걸 학생 잡지에 보냈더니 실어 주더라. 잡독이자, 난독이었다. 여관에 있는 신문 쪼가리, 이상한 잡지, 인쇄물이라면 다 읽었다. 읽을 게 많지 않았으니. 문학으로 자연히 빠졌는데 그때 김동리도 만났다. 문학 평론도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쯤 되니, 식민지와 분단을 왜 겪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고민 끝에 문학보다는 역사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학교 안 보내고 한문만 가르친 게 쓸 데가 있더라. 원전 보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좀 나았다. 한국사는 영어보다도 한문 잘하는 사람이 유리하다. 난독, 잡독으로 빠진 덕에 쉽게 쓸 수 있는 능력을 자연스레 습득했다. 온갖 경험은 다 했다. 가끔 꿈에 배고프고 잘 데 없이 돌아다니는 장면이 보인다. 다 어린 시절 영향이다. 이런 경험도 내게 자산이 됐다.
 
수많은 책을 냈는데 몇 권 냈는지 기억하나?

 

정말 이 말 할 때마다 쩔쩔맨다. 공저가 있다. 글 한 편 썼는데 공저자다. 어린이 책도 기존에 쓴 책을 어린이에게 맞게 바꾼 거라 빼야 한다. 이런 걸 다 빼면 한 100권 정도 된다.
 
그중에 가장 아끼는 책은?

 

『허균의 생각』은 첫 번째 낸 책이다. 대표작은 21권짜리 『한국사 이야기』. 10권짜리 『인물로 읽는 한국사』. 제일 많이 팔린 건 『이이화 선생님이 들려주는 만화 한국사』다. 보통 만화 한국사는 이현세처럼 만화가가 대표 저자인데, 만화가가 아니면서 대표 저자로 내세우는 건 이이화의 만화 한국사밖에 없다. 나도 몰랐는데 누가 지적해주더라.

 

 

여전히 대한민국에는 민족이 필요해

 

민중, 민족을 강조하는데, 한때 민족을 해체해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유행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 박원순 서울 시장이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같이 일하자고 해서 세미나 팀 만들고 젊은 사람과 토론했다. 그때가 막 포스트모더니즘 시작할 때였다. 그 시기를 참 진지하게 보냈다. 연구소가 현대사, 근현대사 중심이어서 나도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고대사를 중요하게 생각 안 한다. 단군은 뜬 구름 잡는 소리 같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는 침략을 받고 분단이 됐다. 이럴 때 민족주의는 필요하다. 민족주의가 필요 없다는 건 진보적 사상일 수 있지만, 유럽 쪽 이야기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침략적 제국적 우월적 민족주의가 아니고 방어적 생존적 민족주의다. 특히 남북 분단 상황에서 무기는 한민족, 같은 언어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 물론 개혁은 해야겠지.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 하고.  
 
여전히 강의도 많고, 집필도 많이 하시는데 이런 에너지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8년 전에 위암수술하고 더 좋아졌다. 원동력보다도 선천적인 것 같다. 아버지가 몸이 호리호리하고 날랬다. 산도 잘 타고. 축지법을 쓴다는 말까지 있었는데, 그건 거짓말이고. (웃음)

 

끝으로 독자에게 한 말씀.

 

허균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다. 차별 없는 세상,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인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다. 사상적으로 한 틀에 박힌 게 아니라. 넓게 봤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익한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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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생각이이화 저 | 교유서가
이 책은 허균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조일전쟁(임진왜란) 이후의 시대상황과 그의 집안내력을 살핀 다음 정치, 학문(종교), 문학의 세 갈래로 그의 삶을 재조명한다. 사대부의 자제로서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도 당대의 권위에 과감히 도전했던 그의 고발정신과 저항정신, 그리고 개혁의지와 냉철한 현실인식은 지금의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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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랩 같은 노래를 하고 노래 같은 랩을 하는 아티스트, 샘 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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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외국의 것이나 감성은 우리와 맞는 그런 음악이 있다. 샘 옥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미국에서 살아온 한국계 미국인 아티스트지만 작품들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우리의 색감과도 잘 맞는 부분이 드러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또 한 명의 팝 뮤지션과 만났다. 자신의 음악과,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세계관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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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옥이라는 인물보다는 음악이 더 많이 알려진 상태입니다.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왔습니다. 조용한 곳이에요. 그곳에서 가진 생활관과 신앙심, 제 개인적인 경험, 배경들이 음악 안에서 결합됩니다.

 

인터뷰도 처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렇게 인지도가 높지 않아서요. 미국에서도 그렇고요.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뢰가 없었던 거죠.

 

한국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많은 걸 먹었고. (웃음) 음악 쪽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바쁘게 보냈습니다. (한국에서의 활동 계획이 잡혔나요?) 내년에는 한국에 더 있을 것 같아요. 공연이든 녹음이든, 한국을 통해 더 활동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성적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한국 시장에 대한 전략이 있었나요.


처음엔 놀랐죠. 물론 의도한 건 아니에요. 한국에서의 성공이라고 한다면, 제 음악에 한국적인 느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해요. 제가 미국인이고 미국음악을 좋아한다고 해도 말이죠.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전 한국 가족들과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한국어로 대화를 해요. 집안 배경부터 영향이 있는 셈이죠. 구태여 다른 하날 버릴 필요가 없어요. 모든 걸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 양면성도 좋게 봐주신 거 같아요.

 

앰프라는 팀에서 활동하고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어떤 그룹인가요.


솔로 활동보다는 사실 소속된 앰프라는 그룹을 통해 더 많이 움직였어요. 크리스천 힙합 팀인데 한국계 미국인 교회 네트워크를 통해 잘 활성화됐죠. 나름 유명해요. 그 네트워크 안에 있다면 어쩌면 절 알 수도 있겠네요. 솔로 활동도 앰프에서의 활동을 시작하며 하게 됐어요.

 

한국계 미국인 사이에서도 음악 신(scene)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음, 신도 잘 알고 있어요. 어떤 뮤지션들은 정말 미국인처럼 음악을 하기도 해요. 그 안에서 성공을 하고 싶어 하니까요. 다만, 저는 제 음악에 아시아의 소리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팝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한국 가요처럼 들리게도 하고 싶은 거죠. 그런 결합을 늘 생각해요. 미국인이라는 요소만을 계승해 성공하기보다는 아시아인이라는 또 다른 배경도 이식하는 겁니다.

 

같은 한국계 미국인인 케로원과도 작업했습니다. 공감대가 형성됐을 거 같은데요.


처음엔 이메일로 연락했고요 나중에 캘리포니아로 가서 만났어요. 한국계 미국인로서 서로 공감하는 건 없었어요. 한국말 잘 못 한다는 게 동질감이었을까. (웃음) 좋아하는 음악이 맞긴 했어요. 힙합 좋아하고 또 뭐... 가장 크게 겹치는 건 둘 다 긍정적인 음악을 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사실 힙합이라는 음악에는 저주, 욕설, 성상품화, 약과 같은 어두운 요소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보다 조금 밝은 삶에 대해 노래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콜래보레이션도 잘 됐고요.

 

제프 버넷과도 자주 묶이죠.


재능이 대단해요. 음감도 좋아하고 목소리 색감도 좋아해요. 왜 연관 짓는지 알 거 같아요. 여러모로 추구하는 음악이 비슷해요. 만난 적도 있어요. 같이 얘기도 했고요. 한국 분들이 좋아해주고 찾아주시는 것에 둘 다 놀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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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같은 노래를 하고 노래 같은 랩을 합니다. 마치 제이슨 므라즈의 「Geek in the pink」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평소 어떤 음악, 아티스트로부터 영감을 받나요.


존 메이어, 스티비 원더가 있고요. 대개의 재즈 음악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고 1990년대 힙합도 많이 들었죠.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처럼요. 랩이나 힙합의 요소들이 제 음악에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악기적인 차원에서도 랩은 독특하잖아요. 톤도 그렇고. 그 자체로 시이기도 하고 말이죠.

 

의외로 좋아하는 장르도 있나요.


있죠. EDM도 좋아하고 하드코어 록, 뮤지컬 음악, 사운드트랙 음악도 자주 들어요. 장르마다 각기 다른 감성을 갖고 있잖아요. 그게 신기해요. 저도 뭔가 더 많은 음악을 표현하려고도 하고요.

 

지브리 스튜디오 음악도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2012년 앨범 < Rest Easy >에 있는 「Peaceful & lovely」가 그런 곡 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확히 그 쪽 영향에 있는 곡이에요.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들 보면 정말 예쁘잖아요. 이미지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요.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을 제일 좋아해요.

 

누자베스도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일본 문화에서도 영향을 많이 찾으시나요.


일본적인 요소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아요. 공간에 대한 콘셉트나 자연에 대한 광경, 평화로운 이미지와 같은 환경에 대한 개념을 잘 풀어내요. 누자베스에 관해 얘기하자면 제 음악의 원천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누자베스 음악을 접하면서부터 힙합과 부드러움을 결합하는 과정을 알 게 된 거 같아요. 덕분에 제 음악도 발전했죠.

 

이번엔 곡 작업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가사에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담아내나요.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요. 저와 하는 대화 내용이랄까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도 크게 다루고 크리스천이라는 면모에 대해서도 많이 다루죠.

 

작곡 방식도 궁금합니다.


이렇다 하는 절차는 없어요. 자연스럽게 쓰는 거 같아요. 그래서 매번 다르죠. 무작위로 멜로디가 떠오를 때도 있고 갑자기 가사가 생각날 때도 있어요. 아무렇게 생각하면서 나오기도 하고 기도하면서 영감을 받기도 해요. 인생에 대해 성찰하거나 음악에 대해 고민할 때 작업이 이뤄지는 것 같아요.

 

재밌는 건 저 자신이 되게 모순적이라는 거예요. 사실 전 고요하게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할 때도 있어요. 정작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사람인데도 말이죠. (웃음) 이런 어려운 점을 복잡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음악에 담아내려고도 하는 것 같아요.

 

편곡의 아이디어를 힙합 음악에서 찾으시나요.


처음에 비트 만들 때는 샘플링을 많이 했는데요, 그 후에는 작곡하는 걸 더 선호하게 된 것 같아요. 요즘 시도하는 건 작곡해서 샘플링한 듯한 느낌을 내는 거예요. 샘플했을 때의 느낌을 좋아하거든요. 다만 아쉬운 건, 샘플링에는 법적인 문제가 걸리잖아요. 그걸 생각해 요즘 잘 안 하는 거 같아요.

 

곡을 팔지 않겠냐는 의뢰도 있었을 거 같아요.


그런 제의가 많긴 했어요. 작곡 쪽으로 빠져보라면서요. 제 스스로도 고민을 많이 해요. 아티스트로 진출할 것인지, 프로듀서 쪽으로 몰두할 것인지 음악 인생에 대한 연구를 하는 중이죠.

 

다음 과제겠군요.


과제라기보다는 제가 차린 밥상에 그릇 하나 더 놓는 작업이랄까요. 균형감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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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존 리라는 아티스트와도 같이 작업했죠.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인디 뮤지션이에요. 대니얼이라는 형제랑 같이 활동하고 있고요. 아직까지는 정식으로 내놓은 게 없어요. 더 배우고 연습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 구상하는 중이죠. 공식적으로 데뷔하기 전에 만난 셈입니다.

 

색다른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성향이 이루는 조합이 재밌었죠. 제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존 리는 세부적인 요소를 잘 만지는 사람이에요. 작업도 쉬웠어요. 제가 설정한 비전, 이상향에 존 리가 디테일, 현실성을 더했죠. 잘 맞았어요. 편하기도 했고요. 저 혼자 할 때는 재생버튼 눌러놓고 뛰어 들어가 바로 녹음해야했는데, (웃음) 콘솔 앞에 그 친구가 앉아있으니까 편하기도 했고요.

 

어떻게 같이 하게 됐나요.


앰프에 청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같이 찬송가를 록 스타일로 바꿔 부르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쯤에 그 친구가 존 리라는 사람을 추천하더라고요. 음악도 잘 하고 재능도 좋다면서요. 저도 마침 새로운 걸 하고 싶어 했어요. 나중에 (존 리가 지내는) LA로 갔을 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만났죠. 아, 존 리도 음악을 공부하고 있어요. 보스턴 버클리 음대에 다닙니다. 이것도 서로 어울리는 한 요소였네요.

 

아, 음악이 전공이죠?


음악 기술(뮤직 테크놀로지)을 전공으로 했습니다.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단은, 조금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어렸을 때부터 클라리넷, 드럼, 키보드 이런 악기들을 쭉 다뤄오면서 내게 음악적인 능력이 있구나 싶었죠. 한편으로는 주변에서도 좋은 자주 들었고요. 고등학교 2,3학년 때 많은 고민을 했고 4학년쯤, 대학교에서 더 음악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뮤지션으로 인생이 흘렀네요.


맞아요. 어떻게 보면 행운이 엄청 따르는 거죠. 기회도 많았고요. 최선을 다해 음악으로 보답하려 합니다. 감개무량해요. 어렸을 때는 억지로 연습하는 걸 진짜 싫어했어요. (웃음) 특히 피아노 연습이요. 뭔가를 갈고 닦아서 어느 지점에 올라야겠다, 이런 생각보다는 즐겁게 음악을 하고 자연스럽게 피드백도 받는 과정이 좋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뭔가 유명한 팝 가수가 되기보다는 주어진 달란트로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곧,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에 오를 예정입니다. 다가오는 내년 1월 17에 단독공연도 계획돼있죠.


완성도 높은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고 함께 해주신 분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싶어요. 공연을 잘 해야겠죠. 팬 분들과 만나고 즐길 생각하니 기대되네요.


*인터뷰는 10월 셋째 주에 진행됐다.

끝으로,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 앨범 세장을 꼽아주세요.


오 마이 갓. 순서는 없어요. 데이비드 크라우터 밴드, < Illuminate > 앨범도 있고요. 이거 정말 어렵네요. 칸예 웨스트의 < The College Drop Out >도 좋아하고요. 데스 캡 포 큐티의< Plans >앨범도. 이렇게 탑 쓰리를 꼽을게요.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고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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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친 경험은 소중한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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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민주공화국은 주권이 국민 전체에 있는 국가를 뜻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세워졌지만, 민주공화국으로 서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87년 직선제로 개헌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불완전한 민주공화국이었다. 무엇보다 국민은 지도자를 직접 선출할 권한이 없었다. 많은 국민들이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대한민국은 직선제로 가는 역사를 열었다.

 

최영미 작가가 쓴 『청동정원』은 뜨거웠던 시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이 시기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을 달렸고,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등 굵직한 행사를 치렀지만 정치적인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주로 대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에 앞장섰다. 이 시기 많은 대학생에게 익숙한 장소는 강의실보다는 집회 현장이었다.

 

『청동정원』의 주인공 애린은 1980년대 신입생이 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고 문학소녀였던 그녀는 집단주의가 강했던 대학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겉돈다. 『청동정원』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애린의 주변부적 성향 덕분에 1980년대는 오히려 더 입체적으로 묘사된다. 만약 애린이 투쟁의 전면에 나선 투사였다면 이런 객관성은 떨어졌을 것이다.

 

『청동정원』의 또다른 매력은 저자가 시인 최영미라는 점이다. 이미 그녀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매력적인 언어를 보여준 바 있다. 시대적 배경이 어둡긴 하지만 최영미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복원된 1980년대는 마냥 암울하지만은 않다. 그 시절에도 사랑이, 낭만이, 웃음이 존재했다.

 

최영미선생님04 사본.jpg

 

젊은이 어깨에 시대의 짐이 얹힌 시대, 1980년대


제목인  『청동정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우리는 철기시대를 살고 있지요. 소설을 쓰며 저는 1980년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2014년에 돌아보니, 1980년대가 마치 청동기 시대처럼 아득했어요.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겹쳐지는 풍경이 바로 ‘청동정원’이지요. 물론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데뷔하기 훨씬 이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라고 밝히셨는데요. 이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왜 26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1988년 여름, 원고지에 처음 소설을 끼적였어요. 쓰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는 어렴풋했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지요. 그 뒤 틈틈이 메모는 계속했지만 바싹 긴장하고 달려들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 시인이 되었고, 소설보다 시와 산문을 주로 썼습니다. 그럼에도 소설 쓰기에 대한 욕망의 불이 꺼지지 않았어요. 50대에 들어서면서 노안이 와서 눈이 점점 나빠지는데, 더 늦기 전에 그때 그 시절의 열망과 좌절을 글로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일 텐데요. 프로필에 적힌 선생님의 이력을 보면 주인공 애린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전적 소설로 읽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그런데 책에는 전적으로 허구라고 썼습니다.


물론 제 경험이 녹아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애린과 최영미는 동일인물이 아니죠. 사실, 제 이야기를 하더라도 30년 전 이야기를 어떻게 꼼꼼하게 기억하겠어요. 세부적으로는 다 허구에요.


고유명사의 한두 글자만 바꿔서 진실과 허구를 기묘하게 뒤섞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살짝 비튼 이유가 있나요.


명예훼손 걸리면 안 되니까요. 출판사 다닌 것도, 출판사 다니면서 시 써서 등단한 것도 사실이에요. 억울한 건 추석 전에 관둬서 상여금을 못 탔다는 점이죠. (웃음) 이렇게 이름을 바꾸고 나니, 자유로워서 묘사를 더 마음껏 할 수 있어요.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 좋죠.
 

최근에 S대를 방문해 도서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신 적이 있다. 내 앞에 앉아 빵 봉지를 뜯는 남학생은 한참 어려 보였다. 1학년인지 2학년인지 가늠되지도 않았다. 저렇게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민주주의를 외치고 혁명을 논했는지. 젊디젊은 우리의 어깨가 왜 '독재타도'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무거운 시대의 짊을 짊어졌는지...... 군부의 총칼에 맞서 돌멩이를 들고 싸우던, 겁 없는 젊음이 역사를 바꾸었다. (160쪽)


1980년대 이후의 이야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1980년대를 그린 소설입니다. 1980년대를 기억하는 선생님의 심정이 S대 카페에서 빵 봉지를 뜯는 대학생을 보던 장면에서 느껴졌는데요. 선생님이 바라보는 1980년대는 어떤 시기였나요.


기껏해야 22세 정도 되는 앳된 젊은이의 어깨에 시대의 짐이 얹혀졌잖아요. 지금 우리는 선거를 통해 대통령 뽑는 게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는 선거 자체가 없었어요. 체육관 선거만 있었죠. 어른들이 잘못한 건데,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해결 못하니 젊은이들이 나섰죠. 당시 젊은 세대들은 운동하느라 청춘의 절반이 날라갔어요.


지금 젊은 세대가 보기에 쉽게 공감이 가지는 않는데요.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 것 같아요. 만약 그때 대학생의 저항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군부가 독재했겠죠. 그들이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았겠어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데, 6월 항쟁 때 100만 인파가 보름간 매일 시위했어요. 서울 도심을 점거하다시피 하니 노태우가 6.29 선언해서 직선제 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때 그렇게 못 했다면 지금도 우리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처럼 군부가 20~30년씩 통치했을 겁니다.


1980년대 대학생의 삶


소설이 1980년대를 다루니, 오늘은 1980년대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애린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와요. 그때는 지금처럼 사교육이 흔하지 않았고, 경쟁도 그리 치열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더라고요. 애린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던데요.
 
1981년부터 일시적으로 본고사가 없어지긴 했지만, 당시에는 본고사가 있었어요. 예비고사 점수로 학교를 지원합니다. 본고사에는 논술 식으로 3~5문제를 푸는데, 압박이 엄청나요. 애린이도 수학 5문제 중 이해할 수 있는 게 한 문제밖에 없을 정도로 문제도 엄청나게 어려워요. 그러니까 열심히 안 하면 대학에 못 갔죠. 불쌍하죠. 고등학교를 입시벌레처럼 살았으면, 대학 가면 좀 여유롭게 살아야 하잖아요. 기타 치고, 놀러가는 낭만을 기대했는데, 대학은 전쟁터였습니다. 배경으로 나오는 S대 학생은 대부분 애린이처럼 공부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고, 깨어 있는 시간에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죠.
 
많은 부분에서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은 어디서 위안을 얻었나요.


연애를 해야 하는 건데, 애린이는 연애를 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웃음) 위안은 주로 술이었어요. 당시는 취미를 묻는 것조차 부르주아로 여겨졌으니까요. 요즘 학생들은 1980년대 분위기를 잘 모를 텐데, 이 책을 좀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이애린은 그 당시에는 드문 개인주의자였는데, 지금 대학생은 대부분 개인주의자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대학생에 비해 1980년대는 왜 그렇게 치열했을까요.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죠. 명백히 보이는 적도 없고요. 우리 때는 교문에서부터 중무장한 전투경찰이 진을 쳤어요. 1980년 5월부터는 전경과 학교를 같이 다녔죠. 늘 닭장차가 수십 대 서 있고, 학교 안에도 사복경찰이 많았어요. 대학생처럼 스포츠머리 하고, 조다쉬 청바지 입었지만, 티가 나죠. 1980년 5월에 5.17이 터지기 전에 미리 각 대학 학생회를 덮치고 기숙사 점령한 걸 보면, 군부 정권이 광주 사람들의 데모가 심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에요. 극본은 짜여져 있었죠.


왜 학생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대학생은 적어도 학생 시절에는 취업으로부터 자유롭잖아요. 공부를 많이 하니 사회 문제를 자각하고요. 무엇보다 조직된 집단이죠. 당시에 가장 잘 조직된 집단은 군부와 학생이었습니다. 군부는 조직 그 자체고, 대학생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집단이잖아요. 군부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대학생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동원할 수 있는 조직은 대학생이죠. 회사원, 고등학생이 나서겠어요?


소설에 R, 그러니까 혁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시절 정말로 혁명을 믿었나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운동한 사람이 많았다고 지적하는 서평을 읽었는데요. 옳은 지적이에요.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혁명을 믿었어요. 전두환 집권이 말기로 갈수록 탄압이 더 심해졌거든요. 녹화사업도 있었고요. 학생들은 탄압이 심해지니까 더 혁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원래 젊은이는 점진적인 변화보다는 빠른 변화, 혁명에 경도되잖아요.


1980년대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


2002년 월드컵과 1987년 6월을 병렬적으로 회상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은 세대가 이해 못할 수도 있는 대목인데요. 6월항쟁 이후로, 서울 한복판에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인 게 2002년 월드컵입니다. 1987년 때도 광화문 도심에서 집회가 있었죠. 100만 넘는 사람이 매일 거리로 나갔어요. 해방구였죠. 모르는 사람과 어깨 걸고 구호 외치고 음식도 함께 먹고, 상인들도 나중에 동참해서 음식 갖다 줬어요.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에요. 2002년 월드컵도 겉으로는 비슷해요. 구호가 ‘대한민국’, ‘필승 코리아’로 달라졌지만요. 귀만 막고 봤다면, 시각적으로는 똑같아요. 대한민국에는 군부독재를 시민이 이겨낸 자신감이 있어요. 옆 나라 일본만 봐도, 일본은 자민당이 반영구 집권하고 있잖아요. 영국도 마찬가지로 지금도 왕이 존재하고요. 우리는 4.19부터 지난한 혁명의 역사였죠.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친 경험은 소중한 자산입니다.


민주화 투쟁을 그리는 한편 부동산과 중산층 형성 과정도 조금은 묘사를 했습니다.


중산층에게 약간의 떡고물을 넘겨주면서 정권 유지를 했죠. 부동산도 띄웠고요. 그 결과, 후유증도 커요. 전부 아파트잖아요.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요. 다 빚더미고요. 멀리 보자면, 전두환 정권의 유산이에요.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해서,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으면 기분이 오묘하겠습니다. 원고를 다 쓰면 바로 편집자에게 넘기고 다시는 안 보는 편인가요, 아니면 여러 번 반복해서 보시나요.
 
넘기기 전에 10번은 봤죠. 제가 문장에 관해서는 완벽주의에요. 문장을 외울 정도로 여러 번 보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은 보기가 징그러워요. 너무 많이 봐서요. 좀 시간이 지나서 읽으려고 해요.


오랫동안 고민해서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 전후로 문장이 바뀔 것도 같은데요.


바뀔 것 같아요. 이 작품만이 아니라 시집이나 소설을 낼 때마다 제가 조금씩 바뀌었어요.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해온 듯합니다.


어두운 1980년대였지만 즐거운 추억도 있지 않나요.


1980년대라고 살벌했던 것만 아니에요. 1981년 가을에 교내시위 중에 애린이 잡혀가죠. 열흘 구류 받아 유치장에 있는데, 간수도 심심하니까 노래를 시켜요. 남학생 다 시키고 우리 차례가 와서 유행가도 아니고, 민중가요도 아닌 ‘백치 아다다’를 불렀어요.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 보니 건너편 남자방에서 미팅하자는 말이 건너 와요. 우리는 2학년이었고, 그들은 1학년이었거든요. 전화번호 알려 달라고 해서 “여기가 어딘데 미팅이냐”고 야단쳤는데, 후회해요. 가르쳐 줄 걸. (웃음) 이 소설 읽고 그 남자가 나타나면 좋겠어요.


애린이 제주도 가서 클래식 카페에서 일하잖아요. 여성성을 회복하고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비행기 삯이 없으니 주인이 오기 전에 카운터에서 돈을 꺼내 공항으로 가요. 그 동안 일한 월급이라 생각하면서요. 이건 사실이거든요. 다방 이름이 제주의 수눌음 다방이었어요. 미안했다고 말하려고 나중에 갔더니, 그 자리에 다방이 없어요. 그때 한달간 DJ를 했던 경험은 지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죠. 그때 주인 분이 책을 보신다면 역시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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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혼자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많아졌으면


어느덧 등단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선생님께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우선 밥벌이, 직업입니다. 두 번째는 나를 표현하는 도구죠. 글로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세상과 만날 수 있어요. 인간은 혼자입니다. 그럼에도 제 글을 읽고 공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덜 외로워요.


시인 최영미와 소설가 최영미는 다른 자아인가요, 아니면 동일한가요.


완전 다른 자아입니다. 저는 시를 쓸 때 소설을 못 써요. 소설 쓸 때는 시를 못 쓰고요. 심지어 소설 쓸 때 에세이도 못 씁니다. 동시에 두 가지를 못 해요. 동시에 두 남자를 못 만나고요. (웃음) 시는 쓰고 싶어 쓰는 게 아니라 언어가 와요. 올 때 붙잡고 시상을 전개하죠. 저는 시를 못 만들어요. 만드는 건 소설입니다. 소설은 육체 노동 플러스 정신 노동이에요. 세상에서 힘든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소설 쓸 때는 수영도 안 했어요. 혹시 수영하다 다치면 소설 쓰는 데 지장이 있으니까요. 그 정도로 집중했죠. 소설 끝내고 나서 제일 하고 싶은 게 수영이었어요.


그렇게 소설을 끝내고 잠시 휴식 시간인데요. 뭘 제일 하고 싶어요?


바닷가에서 수영해 보고 싶어요. 실내 수영만 했지 바닷가에서 한 적이 없거든요. 지금은 추우니, 내년 여름에 원피스 수영복 입고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도 해 보고 싶네요.


젊은 시절 선생님의 꿈이 궁금합니다.


보통 부모님이 꿈을 심어주죠. 아버지는 제가 외교관이 되길 바랐죠. 그게 제 꿈은 아니잖아요. 꿈이 무엇인지 20대는 생각 못하고 살았어요. 저만 아니라 대부분 대학생은 군부독재 끝장내는 게 꿈이었고요.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없었지만 책을 좋아했어요. 무의식 깊숙이, 글쓰기 욕망이 있었나 봐요. 그게 30대에 표출됐죠.


지금 꿈꾸는 세상은?


아직도 한국사회가 야만스러운 구석이 많죠. 여성으로 혼자 살기가 힘들어요. 제 꿈은 소박합니다. 혼자 식당 가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다양해지면 좋겠어요. 춘천 살 때 일화인데요. 샤브샤브 집이 새로 생겨서 갔어요. 문전박대 당했잖아요. 샤브샤브가 2인분 메뉴라는 이유였죠. 한국에는 이미 독신 인구가 많은데, 식당에 혼자 가면 눈치를 줘요. 천박한 자본주의죠. 유럽에 여행가서 혼자라고 식당에 못 가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은 너무 당연하게, 자리가 있어도 혼자 가면 자리가 없다고 말해요. 2인, 3인 손님 받겠다는 거죠. 이런 것부터 고쳤으면 좋겠어요. 당장 눈앞에 이익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어도 길게 보면, 문전박대 당한 손님은 그 집에 다시 안 가요. 그 손님이 단체 손님을 데려 가면 다른 집으로 가겠죠. 한국은 당장 눈 앞만 보는 자본주의에요. 많은 한국인이 경제적 동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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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정원청동정원 저 | 최영미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청동정원』은 2013년 여름부터 1년 간 계간 《문학의오늘》에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뜨거웠던 80년대, 폭압적 정권에 맞서 앞장서지도, 뒤로 숨을 용기도 없었던 ‘경계인의 초상’을 그려냈다. 제목으로 쓰인 ‘청동정원’은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겹쳐지는 풍경을 묘사한 표현으로, 쇠와 살이 부딪치던 시대의 분위기를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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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가트맨 부부 “우리 세대의 위대한 유산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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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가트맨 워싱턴대 명예교수가 2014년 11월에 열린 글로벌 인재포럼 2014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존 가트맨 교수는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가트맨의 부부 감정 치유』등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감정코칭’은 EBS 다큐프라임으로 제작되어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다.

 

가트맨 교수가 내세우는 감정코칭은 아이의 정서지능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목표를 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이의 정서에 공감할 것을 당부한다. 감정코칭은 크게 5단계로 이뤄진다. 1단계가 아이의 감정 인식하기, 2단계는 감정적 순간을 좋은 기회로 삼기다. 3단계는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고 경청하고 4단계에 이르러 아이가 감정을 표현하도록 도와주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에서는 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글로 풀어놓으면 간단하지만,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감정코칭을 실천하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아이는 성인보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감정 표현에 서툴기 때문에 자칫 부모의 감정마저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트맨 박사는 감정 코칭은 단순히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을 찾은 존 가트맨과 심리학자이자 그녀의 부인 줄리 가트맨에게 그간 근황과 감정 코칭에 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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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진 에너지에 놀라

 

이번 한국 방문 어떤 계기로 이뤄졌나. 한국 방문 소감은?

 

존 가트맨 (이하 ‘존’) :글로벌 인재포럼 2014에 초대받았다. 줄리 가트맨과 함께 연구한 주제가 신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의 신뢰가 그 주제다. 신뢰가 가정에서 무너졌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어떻게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포럼에서 이런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인이 가진 에너지에 놀란다. 스스로 발견하고 탐구하는 의지력이 감동적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도 좋아 보인다.

 

줄리 가트맨 (이하 ‘줄리’): 세 번째 방문이다. 한국은 올 때마다 놀란다. 세계를 이끌 수 있는 리더 국가 자질을 갖췄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특히 한국은 미국보다도 자기계발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이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줄리 :한국의 10대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부모가 본인 자녀와 유대감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걱정해서 이런 책이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한국 부모는 항상 자식과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있는지, 아이가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나갈 수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지도. 책이 기본적인 답을 준다. 이 책으로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으면서 아이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든 세대들은 감정코칭 모르고도 아이를 잘 키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감정코칭'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존 : 우선은 한국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아이와 소통 잘하는 경우가 드물다. 내가 어릴 때도 그랬고. 어느 나라 아이나 꼭 필요한 건 아이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나중에 자기결정력을 형성할 수 있다. 본인의 감정을 잘 이해해주고 아이가 선택하게 해 주는 게 중요하다.

 

줄리 :구세대는 전쟁이 끝나고 생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 최근 신세대 양육 방식은 완전 다른 환경이다. 다양한 지식과 기회, 선택에 노출되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살지 못한 세상을 산다. 아이를 위해서 해야 할 건 창의력 계발이다. 창의력 계발에는 감정코칭이 도움이 된다. 더 많은 노출된 기회와 선택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능력도 뛰어나야 한다. 순종적이지 않은 아이에게도 감정코칭이 도움이 된다.

 

한국 사람은 너무 오래 일해

 

한국도 많은 부부가 맞벌이다. 워킹맘으로 감정코칭을 하는 게 쉽지만은 않은데, 워킹맘을 위해 조언한다면?

 

존 : 일에 바쁘고 쫓기다 보면 아이와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준다. 슬프다. 분명히 염두에 둬야 할 건, 감정코칭을 실천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을 꼭 들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이해하는 속도가 어른보다 느리다.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너무 오래 일을 한다. 이럴 시간이 없다. 안타깝다. 노력과 시간을 들여 균형 잡는 게 필요하다.

 

줄리 : 일의 목적을 생각해 보자. 커리어 성공, 사회 기여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세대의 위대한 유산은 우리 아이다. 올바르게 양육하는 게 훌륭한 유산이다. 그래서 아이와 시간을 함께 가지면 좋겠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부부 사이 관계다. 부부가 잘 지내는 게 아이 발달에 좋다. 좋은 부부 관계가 아이가 훌륭하게 자랄 수 있는 요람이다. 맞벌이 부부는 바쁘겠지만 서로에 신경 쓰고 부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가트맨 부부는 혹시 부부간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나.
 
존 : 우리도 싸운다. (웃음) 부부간 이견이 있다는 게 부부관계가 튼튼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툼도 건전한 부부 관계의 자양분이 된다.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프랑스 엄마처럼』을 보면 프랑스는 공공보육 제도를 많이 활용하고, 미국은 그렇지 않다고 나온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등 복지가 잘 된 나라에는 공공보육 제도가 잘 갖춰져 있다. 이런 공공보육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존 : 관련해서 연구를 많이 했다. 감정 코칭하기에 여건이 잘 되어 있는 곳이라면, 아이를 맡기는 데 좋은 대안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양육시설도 결국은 부모를 대신할 수 없다. 좋은 보충재일 뿐이다. 비록 부모가 바쁘지만 커리어 개발을 잘하고, 커리어 개발에서도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계기다. 엄마가 회사에서 승진하고 잘 지내고 하면 아이도 그걸 보면서 엄마가 행복하구나,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균형 잘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

 

줄리 : 일을 많이 한다는 건 맡기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의미다. 아이를 만나는 시간은 자는 시간이 될 때가 많고. 좀 일찍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주말은 아이와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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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코칭의 본질은 ‘너 자신을 알라’

 

한국경제가 저성장이고 미래가 불확실해서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는 사람이 많다.

 

존 :경제와 결혼ㆍ출산 상관관계를 끌어내는 게 흥미롭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부모가 불행해 보여서가 아닐까. 부모가 12~15시간 일하고, 부부 사이도 좋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 지쳐 보인다. 아이가 자라면서 보는 게 이런 모습이라면 왜 결혼을 해야 하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자라면서 압박을 많이 받았다면 부모가 되어서도 자녀 가지는 데 자신감이 없어진다. 성적을 내야 한다, 이런 압박 말이다.

 

사실 세상은 언제나 위험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을 때, 피난 경험도 있다. 미래는 불투명했지만 이때 부부가 서로 기대서 희망을 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세계는 위험하고 불투명하다. 이럴 때 가정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나마 통제할 수 있는 게 작은 세계, 가정이 아닌가.
 
감정코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신의 감정부터 아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코칭의 본질도 결국은 ‘나 자신을 알라’일까?

 

존 : 그렇다.

 

지금 관심 분야는 무엇인가. 앞으로 연구 계획은?

 

존 : 추가로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3개 있다. 첫째, 중독과 중독에서 회복되는 것. 둘째, 가족 폭력. 셋째, 불륜이 있었던 부부가 잘 풀어나갈 수 있는지. 부부 관계에 수학적 적용을 해서 치료에 도움될 수 있도록 한 책이 있다. 모델과 방정식을 구축해 부부 관계를 해석하는 책이다.

 

줄리 :하나 추가하자면,  부부 중 한 명이 트라우마를 가졌을 때 가정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연구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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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존 가트맨,최성애,조벽 공저 |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트맨 박사가 인정한 상담과 현장 코칭을 통한 감정코칭 실전법을 갖고 있는 최성애 박사가 그동안 경험을 통해 효과를 본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감정코칭의 노하우를 보여주고 있다. 생생하고 공감 가는 수많은 실제 사례는 감정코칭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자녀양육에 및 아동교육에 적용해야 될지 모르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현장에서 바로 사용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감정코칭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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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손정미 “현재 한반도는 삼국시대와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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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미 작가의 첫 소설 『왕경』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오래된 미래다. 이미 한 차례 통일을 이룬 바 있는 ‘오래 전 이곳에서의’ 시간을 되짚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기 직전, 수도 왕경(경주의 옛말)에서 펼쳐졌던 긴박하고도 결정적인 순간들을 재현해 낸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의 중심에도 ‘사람’이 있다. 바로 삼국의 청춘들이다. 동일한 민족적 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통일의 모습을 그리는 세 사람은 운명적으로 왕경에서 조우한다. 고구려의 귀족으로 신라 정찰대에 붙들려 노비가 된 ‘진수’는 신라 화랑 ‘김유’에게 귀속되고, 비밀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채 왕경으로 온 백제 소녀 ‘정’과 만나게 된다. 신라와 당의 연합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 선 그들의 운명은 한 줄기 빛처럼 격렬하게 흔들린다.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인가.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 사람의 마음이 어지러이 엉켜든다.

 

『왕경』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그 시작점을 되짚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삼국통일을 중요한 기점으로 본 작가는 사건 속으로 깊숙이 뛰어들었고,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위해 2년 동안 치밀한 조사를 거쳤다. 서당에서 동양 고전을 공부하면서 국내외 문헌을 200여 권이나 탐독하고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던 중국 집안과 백두산, 당 제국의 중심지였던 장안(지금의 서안)을 답사하는가 하면,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에 이르기도 했다. 그 결과 생생하게 되살아난 당시의 풍경과 생활상은 『왕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처럼 빈틈없는 사료 위에 세워진 탄탄한 이야기는, 지난 20년간 신문기자로 재직했던 작가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1990년에 조선일보에 입사한 이후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었던 그녀는, 조선일보의 첫 정치부 여기자가 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사건의 핵심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사실을 좇는 그 작업은 『왕경』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왕경』에 담긴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구성뿐만이 아니다. 문학적 상상력과 갈등이 탄탄한 구조 속에서 생동한다. 대학 시절부터 소설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다는 작가는 기자로 살아가면서도 습작을 멈춘 적이 없었다. 문화부 기자로 재직 시절, 그녀의 습작을 본 박경리 선생은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결국 『왕경』은 사실과 허구, 이성과 감성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작가의 지난 시간 속에서 탄생한 셈이다.

 

손정미 작가가 주목한 것은 당시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체로 올라설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반도의 방패 역할을 했던 고구려, 유려한 문화와 활발한 무역으로 세를 키워나갔던 백제를 제치고 가장 소국이었던 신라가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의 끝에서 작가는 ‘공동체의 목표와 자신의 욕망을 조화시킨 사람들’ ‘신라 화랑이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힘’을 발견했고, 그 연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단군 조선에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해법을 들려주기 위함 이 발견한 그 해법을 들려주기 위해 『왕경』을 집필했다. 삼국통일 이전의 한반도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지금 이곳에는 또 한 번의 민족 분단과 대치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과 민족의 정체성, 신라 화랑의 저력과 단군 조선 사이에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손정미 작가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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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화랑도는 신을 지키던 신군(神軍)이었다


삼국통일을 우리의 정체성이 시작된 기점으로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단군의 맥을 이어온 민족이라는 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생각들이잖아요. 굉장히 모호하고 희미한 의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은 끈질긴 생명력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단군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그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삼국에 주목하게 됐죠. 단군 이후의 사상이나 전통이 삼국에 의해서 나름의 변형을 겪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뿌리는 같다는 걸 알고 있지만 상황에 의해서 총칼을 겨누고 있잖아요. 그 상황을 신라가 통일을 함으로써 수렴한 거라고 생각돼요. 신라는 단군 시대부터 이어왔던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제대로 발현시켜서 통일을 이룬 세력이라고 보고요.

 

당시와 지금의 상황과 유사하다면 해법 역시 다르지 않겠군요.


삼국통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고구려는 중국이 두려워할 만큼 가장 강대한 국가였는데 연개소문이라고 권력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욕심을 버리지 못했죠. 그래서 2세인 삼형제가 자중지란을 일으켰고요. 반면에 신라는 소국이었지만 탄탄히 실력을 쌓아왔었고 김춘추라고 하는 전략적인 위정자가 있었어요. 영적인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었던 화랑도라는 무사 집단이 있었고 그곳에 상징적 영웅인 김유신이 있었고요. 그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영적인 에너지가 많은 민족이거든요. 그걸 스스로가 자각해서 자긍심을 갖고, 힘을 키워서 대비해 나가면서, 그에 걸맞은 비전과 전략을 제시할 수 있는 위정자가 있다면, 훨씬 더 지혜롭고 완결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민족이 지키고 있는 영적인 에너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왕경』을 준비하면서 그 사실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화랑도를 용맹한 무사 집단 정도로만 알고 있잖아요. 저 역시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과연 삼국통일이 무사적인 기술력만 뛰어나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인가’라는 거죠. 그래서 역사적 자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화랑도와 단군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화랑도는 단군 시대부터 이어져 왔던 신단을 둘러싸고 신을 보호하던 신군들이었거든요. 신을 지킨다는 것이 무적인 용맹함과 함께 영적인 힘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다가 신라 화랑도에서 꽃을 피운 거죠. 고구려에도 조의선인이라는 신군 집단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었고, 제도화되면서 본래의 힘과 정신이 흐려졌어요. 그런데 신라의 화랑도는 제대로 중흥을 맞은 거죠. 그래서 통일 시기에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었던 거예요.

 

『왕경』은 역사소설이면서도 어렵지 않아서 좋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역사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서 좋았다는 독자들도 많고요.


독자 분들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제가 진짜 원했던 반응이고,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정말 보람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몰랐던 역사와 훌륭한 면들이 정말 많거든요. 저 자신도 너무 몰랐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걸 공유하고 싶다. 너무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전달하면서 각인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우리에게 단군은 굉장히 공허하게 소비되어 왔던 이름 같아요.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야, 단군의 후손이야, 라고 이야기하지만 너무 멀고 공허한 구호처럼 느껴졌었다는 거죠. 그런데 『왕경』을 준비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됐어요.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했고요. 『왕경』에서 도입처럼 보여드렸다면 다음 작품에서는 더 깊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번 작품을 위해서 2년 동안 자료를 조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야기의 70%를 ‘팩트’로 채울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싶은데요.


세 명의 주인공과 묘사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팩트인 셈이에요. 읽고 난 뒤에 공허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려면 제대로 된 팩트를 전달하면서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화랑도의 검법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사료에 근거해서 쓴 거예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참고했는데요. 조선시대에 왕명에 의해서 우리 무술을 집대성한 책이에요. 그리고 당시에 목재로 쓰인 나무, 중요하게 취급된 보석류, 그런 부분들도 모두 조사했죠. 제대로 재현해보고 싶었어요.


박경리 선생께 습작을 보여드렸더니…


오랫동안 신문 기자로 재직하셨던 경험이『왕경』에 미친 영향이라면 무엇일까요?


20년 동안 끊임없이 글을 써왔던 게 초석이 됐던 것 같아요. 기자로 살면서 정확하게 취재하고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있기도 했고요. 역사소설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이 필요하니까, 그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이 됐죠. 특히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거시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고요. 사람들이 얼마나 권력을 갈구하는지,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변화되는지도 볼 수 있었죠.

 

당시에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계셨나요?


기자들은 특종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획을 해야 되거든요. 그럴 때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우리가 지향하는 건 무엇인지 항상 염두 해 두었었죠. 그 고민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 진지해진 것 같아요. 그 질문에서 시작해야 저와 제 소설이 중심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설가를 꿈꾸던 대학생이었는데 졸업 후에는 신문 기자가 되셨어요.


그때는 막연하게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소설가는 경험이 많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문기자가 되면 간접경험이나마 풍부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기자 생활이 너무 바빠서 완결된 소설은 쓸 수 없었지만 습작은 계속했어요.

 

그때 쓰신 습작 중 한 편을 박경리 선생께서 보신 거군요.


제가 문학담당 기자로 『토지』를 취재하러 갔을 때였어요. 선생님께서 저를 잘 봐주신 덕분에 인터뷰가 끝난 후에 댁에서 잘 수 있었는데요. 물론 여자라서 가능했겠지만, 당시 출입 기자로서는 거의 유일하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그렇게 몇 차례 찾아뵈면서 선생님과 가까워졌어요. 사실 작가가 되고 싶은데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고민도 털어놓았고요. 그 후에 용기를 내서 습작을 보여드렸는데 며칠 후에 전화를 주셨어요. “보통 소설을 쓴다고 해서 작품을 들고 오면 대화가 너무 어색하고 마치 나무에 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딱딱한데, 너는 그렇지는 않더라. 아마 습작을 계속 해온 것 같다. 소설을 써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께서 정말 대쪽 같은 분이셔서 빈말로 덕담하실 분은 아니시니까 용기를 얻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자 생활을 했어요. 기자로 사는 삶이 재미있기도 했고, 과연 내가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 확신하기 어려웠거든요.

 

박경리 선생께서는 작가님의 어떤 부분을 높이 평가하셨던 걸까요?


모르겠어요. 저를 보면 조금 짠하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선생님도 기자 생활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더 이해를 해주셨을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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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왕경』의 세 주인공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물을 설정할 때 각 국가의 특성을 반영했어요. 화랑인 ‘김유’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면서 대의를 위해서 희생하는 인물이라면, 고구려 출신인 ‘진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흔들리기도 하고 또 도망치고 싶어 하기도 하는 인물이죠. ‘정’은 백제의 유려한 문화와 진취적인 면을 보여주고요.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희생당하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고뇌하기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개개인의 삶은 소중하고 다시 얻을 수 없는 거잖아요. 모든 순간이 중요하고 그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인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보하고 희생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왕경』의 주인공들은 모두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아마도 작가님의 모습이 투영된 것  아닐까요?


왕경』을 준비하면서 제가 읽고 싶은 책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서당에서 동양 고전을 공부한 순간들도 좋았고요. 무엇보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들고 올 때 가장 기뻤어요. 한껏 들떠 있었는데, 그런 시간들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왕경』에서도 세 인물을 통해서 당시의 희열감, 그리고 책 속에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인상 깊게 읽으신 책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동식 연세대 신학과 교수님이 쓰신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서울대 국문학과의 신범순 교수님의 『노래의 상상계』도 무척 흥미로웠어요. 『노래의 상상계』는 주요 시인들의 사상을 해석한 책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을 정도예요.

 

첫 소설 『왕경』을 출간하신 후에 “평생 쓸 소설 10편 중 한 편을 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9편의 작품을 통해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당분간은 역사 소설을 쓸 것 같고요. 미술과 건축을 다루는 소설도 써 볼 생각이에요.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학성 있는 작가로 인정받는다면 가장 좋겠지만, 저는 재미있고 사랑받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어요. 그렇다고 소비 지향적인 작품을 쓰고 싶은 건 아니고요. 한 구절이라도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행복한 작가가 아닐까 싶어요.

 

『왕경』과 만나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왕경』으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우리 역사를 더 알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해드릴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삼국통일을 앞둔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드리려고 노력한 만큼, 독자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통일을 앞두고 있으니까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 가면서 읽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슬기롭고 완결성 있는 통일을 이루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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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경손정미 저 | 샘터
삼국 중 가장 소국이었던 신라가 어떻게 중국과 겨뤘던 고구려나 백제를 이기고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고자 했다. 그 결과 공동체의 목표,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구성원들이 각자의 이기심을 누르고 공동체의 목표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작가가 찾은 답이었다. 더불어 우리가 뿌리로 생각하는 단군 조선이란 무엇이며, 신라 화랑의 영적 무사적 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 소설은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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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연수 “왜 이렇게 나쁜 세계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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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제9회 네티즌 추천 한국의 젊은 작가’ 부문 1위는 김연수였다. 지금도 김연수는 젊지만 그가 등단한 지는 햇수로 20년이 지났다. 작가로 활동한 기간을 보면 김연수는 이제 중견작가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경력을 보면 그는 대한민국 대표작가이다.

 

『소설가의 일』은 대한민국 대표작가 김연수가 공개한 소설론이자 창작론이다. 소설은 무엇인지, 작가는 어떻게 글을 쓰는지를 다룬다. 이런 내용이라면 예비 작가를 꿈꾸는 사람만 읽어야 할 것 같지만, 이 책은 일반인이 읽기에도 상당히 재밌다. 가령 이런 문장을 보자.

 

한국 작가가 쓴 그 작법책의 제일 첫 장에는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소설을 쓰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니! (중략) 어떤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원양어선을 타보란다. (‘차라리 인간이 되겠습니다. ㅠㅜ) 또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먼저 라캉이나 데리다부터 공부하란다. (‘에잇, 원양어선 쪽을 다시 알아보자.’) - 『소설가의 일』99쪽

 

반대로 이런 문장도 있다.

 

세계 각국의 속담이 말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잔인한 진실은 세계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농담할 겨를조차 없는, 이런 직설의 진실은 도처에 널렸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그 잔인한 진실을 저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 왜? 잔인한 진실을 좀더 완화시키고 짐짓 모든 게 축제인 듯 살아가기 위해서다. -『소설가의 일』 185쪽

 

잔인한 진실을 완화시키고 모든 게 축제처럼 느끼게 도와주는 김연수 소설가를 만났다.

 

김연수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고 웃기게 쓴 책

 

『소설가의 일』이라는 제목을 보고 일상을 담은 산문이라 생각했는데, 소설론ㆍ창작론입니다. 이번 책을 기획한 계기가 있을까요.

 

책에 실린 글들은 2012년에 네이버의 문학동네 카페 게시판에 연재한 글들입니다. 햇수로 치자면 등단한 지 20년이 된 해였죠. 처음에는 쉬어 갈 겸, 제목 그대로 소설가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쓰려고 했습니다. 강연을 가보면 독자들은 이런 걸 궁금해하더군요.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책은 몇 권이나 읽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써 보자, 라고 해서 책의 초반에는 그런 식의 느낌이 남아 있죠. 예를 들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어떤 식으로 읽는지 같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내용이 바뀌었어요. 20년 정도 소설을 썼더니, 소설가 김연수는 결과적으로 이런 시각을 가지게 되더라는 식으로요. 소설가의 눈에는 이 세상의 일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썼더니 마치 작법 책처럼 나왔어요.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데 도움받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소설을 썼더니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됐다는 거지, 이런 것들을 알았기 때문에 소설을 썼다는 건 아니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책에는 소설가의 일상은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는데요. 글 쓰는 시간 외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요?
 
저는 단순해요. 별다른 취미가 없거든요.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옛날 노래보다는 신곡을 주로 듣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어떤 신곡이 좋은지 알려면 이것저것 많이 들어봐야하니까요. 그리고 책을 읽는데도 많은 시간을 들이고요. 가끔 달리기나 산책을 하고요, 드문드문 여행을 갑니다. 이게 전부죠. 아, 술은 자주 마십니다. 원래는 맥주를 좋아했는데, 최근에는 독한 술이 맛있어졌습니다.

 

『소설가의 일』에 유머를 잔뜩 넣었는데요. 독자를 웃기려고 노력하셨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노력까지는 아니고요. (웃음)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라 꽤 진지한 내용인데, 진지한 내용을 진지하게 쓰면 더 웃길 것 같아서요. 잔뜩 폼을 잡고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소설가는 기본적으로 결여된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지닌 인간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듭니다.” 이렇게 써버리면, 내용이야 아주 훌륭하지만 너무 웃기잖아요. 독자들 보기에는 “뭐, 어쩌라고?” 이런 느낌도 들 테고요. 그래서 너무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고 하느라 일부러 웃기게 쓴 것입니다. 말이 되나요? (웃음) 진지하게 소설가의 일에 대해 썼으면 진짜 웃긴 책이 됐을 거예요.

 

이번 책 말고도 산문집이 전반적으로 경쾌하잖아요. 소설 쓰는 자아와 산문 쓰는 자아가 좀 다른가요?

 

산문이 대상으로 하는 세계는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고 주인공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대로 쓰면 좀 민망한 감이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자꾸 웃기게 나오네요.

 

 

김연수는 황희 정승형 소설가

 

세상에는 헤밍웨이처럼 하드보일드 형의 소설가도 있고, 다자이 오사무처럼 자멸파 형의 소설가도 있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황희 정승 스타일의 소설가다. (중략) 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소설가의 일』 57~58쪽

 

자신을 황희 정승형 소설가라고 진단했습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가 황희 정승형 소설가인데요. 우리가 소설을 읽는 목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갈수록 소설을 안 읽는 사회가 되면서 더 팍팍해지는 걸까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세대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를 보면 마흔이 넘으면 소설 안 읽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궁금한 게 있다면 인문서 한 권만 읽으면 되는데, 왜 길고 성가신 소설을 읽느냐는 거죠. 나이 많은 사람들의 꼰대스러움은 여기서 생기는 게 아닐까요? 기성세대들은 굉장히 많이 알아요. 그래서 문제에요. 실제로 피케티 책, 이런 거 한 권만 읽어도 정말 아는 게 많아지잖아요. 하지만 많이 알면 뭘 하나요? 다른 사람의 마음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데. 지식이 아무리 많은들 전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요? 제 아무리 좋은 지식이라도 전달이 안 되니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얼마나 고역입니까?

 

공감하는 바가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잖아요. 공감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게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지 가능해요.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의 항변이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요? 특히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죠. 그러니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그런 능력을 키워야 해요. 이런 연습은 나이 든 사람들 이 많이 해야만 해요. 경직돼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나이 든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식이죠. 우리의 수많은 문제는,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그 모든 문제가 그래서 일어난 게 아닐까요?

 

선생님 친구들도 안 읽나요?

 

안 읽죠. 당연하다는 듯 안 읽어요. (웃음)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정말 많은 책을 읽으시던데요. 책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어려서부터 나만의 서가를 가지려고 책을 쭉 모았는데, 서른다섯 살 정도가 되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이상 책을 꽂을 공간이 없었어요. 그때부터는 서가에서 뺄 책을 골라내는 게 일이죠. 계속 볼 책은 꽂혀 있고, 아닌 책은 다 바닥에 누워 있거나, 벽장 속에 들어가 있거나. 책에도 썼듯이 일흔 살이 될 때까지 소설 365권, 비소설 365권을 제일 좋은 순서대로 꽂아놓은 서가를 가지는 게 꿈이에요. 그때부터는 새 책을 안 읽고 그 책들만 읽을 거에요. 오전에는 소설, 오후에는 비소설, 뭐, 이런 식으로요.

 

좋아하는 캐릭터로 『적과 흑』의 쥘리앙 소렐을 꼽았습니다. 김연수의 작품 중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밤은 노래한다』에 나온 여옥. 여옥은 잘 뛰어서 편지를 배달하는 연락원이 됩니다. 생생한 캐릭터에요. 너무 생생해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 가지만 있어도 벽을 뚫을 수 있어

 

이야기에서 인물의 절망이 중요하다고 쓰셨잖아요. 실제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고비가 없는 사람이 없을 텐데, 작가 김연수에게 고비는 언제였나요. 혹시 영화배우(김연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출연한 바 있다) 시절이었을까요.

 

영화배우 시절은 고비를 못 넘고 끝났고요. (웃음) 소설가로서는 스물일곱 살 때였을까요, 두 번째 책을 펴냈는데 반응이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나 미미했어요. 그래서 소설은 그만 쓰고 딴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고비였는데, 사실 그때는 고비가 아니라 막다른 벽이었어요. 그렇게 3년 정도 소설을 안 썼어요.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으니까. 이때 많은 걸 버렸습니다. 기대, 목표 같은 것들을요.

 

끝에는 딱 한 가지만 남더군요. “글을 쓰고 싶다.” 이거 하나요. 책으로 출판하겠다는 기대조차도 바라지 않았어요. 실제로 출판을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요. 책에 제가 하루에 3시간만 쓴다고 했잖아요. 그때 그렇게 글을 썼습니다. 3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소설만 생각해보자. 직장에 다니던 시절인데 하루에 3시간 내는 게 힘들었어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무엇도 바라지 않고 계속 썼어요. 소설을 다 쓰고 나니 그게 벽이 아니라 고비였다는 걸 알겠더군요. 소설을 못 쓰면 벽이고, 쓰면 고비가 되는 거죠.

 

누구에게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을 거예요. 다들 비슷할 테니까. 그건 뚫고 지나가고 나면 고비가 되는 벽이에요. 온갖 욕망들, 다른 사람들에게 원하는 거, 자신에게 바라는 거, 그런 것들을 그 벽 앞에서 하나둘 버리고 나면 돌멩이처럼 단단한 한 가지 정도만 남게 되는데, 그 하나를 믿고 벽을 뚫고 지나가는 거에요. 그 하나가 없으면 통과가 불가능하죠. 그 하나가 뭔지는 다들 다르겠죠. 제게는 '소설을 쓰는 일'이었어요.

 

이미 많이 받은 질문일 텐데요. 등단 초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이 세상에 기대를 덜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나쁜 곳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나쁜 사람이 세속적인 관점에서 성공하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에요. 죽기 전에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에 제발트의『현기증. 감정들』을 읽는데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채 추이를 지켜본 재판은, 결론부터 밝히자면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이상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답니다. 즉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으며, 정의는 정의롭지 않다는 진실 말이죠."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관적인 세계관이 자리잡은 뒤로 오히려 예전에 비해서 인간에 대해 더 너그러워졌어요. 예전에는 괴로웠거든요. 악행을 하는 인간을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이해가 됩니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세상이고, 그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인 거죠. 그래서 요즘은 개개인의 나쁨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힘듦은 줄어든 반면에 근본적으로 왜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소설가의 일』에도 밝히셨지만, 1991년 대학생들의 연이은 죽음이 창작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후 글쓰기 욕망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나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야기로 치자면 나쁜 이야기, 잘 못 쓴 이야기, 그러니까 읽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는 것을 넘어서 나는 심지어 그 이야기 안에 살고 있어요. 조물주랄까, 이 세계를 창작한 존재의 관점에서는 나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씌어진 것이겠죠. 그렇다면, 왜 이런 세계를 썼는지가 저는 궁금합니다. 이렇게 나쁜 세계가 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작가라면 더 좋은 세계를 만들었을 텐데. 예컨대 가만 있어도 통장에 돈이 입금되는 세상,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이 세계의 작가는 모두가 고통받는 세상을 만들었어요.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런 궁금함이 글쓰기 원동력이 되겠죠.

 

올해 한 북콘서트에서 되고 싶은 사람으로 할머니를 꼽았는데요.

 

할머니들은 기본적으로 말을 많이 하시고, 잘 웃으시죠. 무엇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세요. 아전인수라는 말 좋잖아요? 세상이 제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아전인수해서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인간의 능력을 이길 수는 없겠죠. 세상은 하나뿐이지만, 이야기는 사람마다 하나씩입니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을 잘 하는 사람이 좋은 거죠.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해도 멋진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는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네요. 할아버지는 왠지 그런 느낌이 아니에요. 일단 할아버지들은 모든 걸 너무 많이 알아요. 

 

김연수06-사본.jpg

 

김연수의 글은 79점

 

소설가 아니라 소설 쓰는 김연수라고 소개를 하시는데.

 

소설가라는 말이 이상하게 입에 잘 안 붙어요. 일찍 등단한 편인데요.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내가 지금 소설을 잘 쓰고 있는지 어떤지 자의식도 강하니까 소설가라는 말이 잘 안 나왔어요. 그래서 소설 쓰는 김연수라고 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말하죠.

 

배우로 연기에도 도전하셨잖아요. 선생님의 글과 연기력을 100점 만점으로 치면 어느 정도일까요.

 

배우는 50점. 소설가로는 글쎄요. 79점? 안타깝게 80점이 안 되는 정도.

 

시키면 다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했는데, 혹시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레너드 코헨처럼 목소리를 깔고 웅얼웅얼거려서 잘 부르는지 못 부르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현대소설이 추리소설의 일부라고 진단하셨잖아요. 본격 추리소설 써 보실 계획은 없나요.

 

계속 생각중입니다.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안 썼지만, 제가 쓴 소설은 대개 추리소설의 영향 아래에 있어요. 예전에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써볼까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쓰고 싶은 건, 북구 스타일의 추리소설입니다. 긴 분량에 알코올 중독에 절어 있고 폭력성이 강한, 쫓겨나기 직전의 형사가 등장하고 범죄자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나오는, 뭐 그런 소설.

 

지금 쓰고 계신 작품은?

 

지금은 없어요. 조만간 2048년을 다루는 짧은 소설을 시작해 볼까 하는 계획은 있어요. 다음에 어떤 책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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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김연수 저 | 문학동네
김연수의 신작 산문집 『소설가의 일』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이 떠오른다. “산문은 모든 예술을 포괄한다. 한편으로 단어는 그 안에 온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자유로운 단어는 그 안에 말하기와 생각하기의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을 쓸 때보다 자유로울 단어들로, 김연수는 이 책에서 생각하기와 말하기, 쓰기뿐 아니라 어떤 삶의 비밀/태도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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