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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점집을 왜 좋아하는지 궁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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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그 사람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아니, 글이 그 사람을 반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은, 어떤 사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단, 단서가 붙습니다. 글쓴이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문장 안에 굴절 없이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문장 안에는 글쓴이의 어린 시절, 글쓴이의 성격, 글쓴이의 성격적 취약점 등까지 미묘하게 배어있어 독자들은 어느덧 그 사람을 상상하게 됩니다.
<채널예스>는 그런 글을 쓰고 있다고, 또는 쓰게 되리라고 여겨지는 남자 몇 명을 여러분께 소개하려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오직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편집자 주

영화를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언젠가 ‘적정관람료’라는 특별한 칼럼을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겨레 ESC 섹션에 4년 넘게 연재한 후 현재 딴지일보에서 볼 수 있는 영화평론가이자 소설가인 한동원의 적정관람료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독특한 형식의 칼럼이다. ‘적정관람료’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극장관람료 8천원을 기준으로 영화의 인상 요인과 인하 요인을 종합해 그 영화의 적절한 관람료를 산출하는 칼럼이다. <베를린>의 경우 밀도 높은 액션 설계 100원, 화려한 캐스팅 150원, 남북 국가권력 어느 쪽도 이상화하지 않은 균형감 70원, 기본적으로 본 시리즈의 향취 후끈 -120원, 일부 첩보 액션 디테일에서의 설득력 부족 -30원 등으로 8510원이 적정관람료라는 평이 나왔다. 참고로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7250원, <더 헌트>는 8910원, <라이프 오브 파이> 10,080원(3D감상 시)이 책정됐다.

이 독특한 칼럼을 만들어낸 주인공, 한동원이 궁금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돌직구 스타일의 어법, 적당한 무게의 유머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그의 필자 데뷔기가 예사롭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채널예스> ‘글 쓰는 남자 인터뷰 시리즈’ 네 번째 인물로 한동원을 만나기로 했다. 스마트 폰을 쓰지 않아서 아직도 011 번호를 사용하는 남자, 2009년 작 『삐릿』으로 고교생 록밴드의 딴따라 행보를 소설로 써낸 작가 한동원은 2002년 영화 소개 프로그램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결정적 장면’ 코너를 진행해 화제를 모았던 주인공으로 그의 칼럼 앞에는 언제나 ‘무규칙, 도발’이 따라붙는다. 한동원의 색깔이 궁금하다면 그의 홈페이지(http://www.handongwon.com)를 먼저 방문해도 좋다.




9000원 이상의 영화는 가족이랑 다시 본다

2011년 9월에 개봉한 영화 <도가니>의 적정관람료 칼럼에는 다소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나 청소년 알아서들 관람 권장’. <도가니>의 원작자인 공지영 작가는 한동원의 칼럼을 ‘ㅋㅋ’라는 코멘트와 함께 리트윗했고 포털 검색어 순위에도 올랐다. 그리고 얼마 뒤 영화제작사에서는 <도가니>를 청소년들이 관람할 수 있는 등급으로 순화시킨 버전으로 상영할 계획을 발표했다. 적정관람료가 이 일에 얼마나 순기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가니>를 보고 싶어하는(그리고 봐야만 할) 18세 이하들의 정당한 여망을 조금이나마 반영하지 않았을까.

“적정관람료라는 칼럼은 한 마디로 ‘게으름의 소치’라고 볼 수 있어요(웃음). 그동안 영화와 관련된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화평을 쓰면서 일반적인 형식, 즉 산문 형식의 글을 썼는데 벅차더라고요. 쓰고 싶은 영화들은 많은데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간략하면서도 편하게, 재밌게 소개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봤죠. 보통 독자들이 영화 리뷰를 읽으면서 ‘그래서 이 영화를 보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예비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하기에 앞서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영화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깊이 있는 해석, 전에 보지 못했던 영화평보다는 ‘내 친구한테 이 영화 어땠어’라고 소개해주는 영화평을 쓰고자 했다. 관람료를 정할 때는 기본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이 영화를 볼지 말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 한동원 작가는 보통 기본 관람료에 1000원 이상을 기록한 9000원 대의 영화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꼭 다시 본다고 한다.

“내 취향에만 의존해서 친구한테 영화를 잘못 추천했다가는 욕 먹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걸 감안해서 각자의 취향 하나하나를 일관적으로 드러내면서, 그걸 기준으로 영화를 판단할 수 있게 쓰려고 해요. 기본적으로 영화를 본 다음 바로 평을 쓰려고 하진 않아요. 하루 이틀 지나, 일주일 지나 그 영화를 생각할 때 느끼는 바가 다르더라고요. 적정관람료가 매우 짧은 평이지만 설익은 판단으로 평을 쓰는 건, 그 영화를 만든 제작자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니까요. 최소한의 이야기를 하되 최대한의 시간을 들여서 가능한 설익은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요즘, 한동원은 ‘나의 점집문화답사기’를 한겨레에 연재 중이다. 영화전문기자가 웬 점집? 점집마니아였냐고 오해하면 조금 섭섭할지도. 마니아는 커녕 오히려 ‘점집 기피자’인 한동원은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점집에 내방하고 있다는 작금의 현실” 때문에 점집 답사 칼럼을 쓰고 있다. 지난해 2월, 새 칼럼을 시작하면서 쓴 출사표에 의하면 이 칼럼은 ‘너의’도, ‘남의’도, ‘우리의’도, ‘니네들의’도 아닌, ‘나의’ 점집문화 답사기. 즉, 한동원이 방문한 점집에 대한 지엽적이고도 근시안적인 답사기다. 그는 “만에 하나 당 칼럼이 너의 점집 문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깊이 있고도 거시적이고도 포괄적이고도 문화인류학적인 통찰 뭐 이런 걸 하려 들면 그 즉시 가까운 군부대나 파출소에 신고해주시기 바라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2년에 한 번쯤? 제가 예약하지는 않지만 가끔 지인들에 이끌려 점집을 간 적이 있었죠.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런 건 없었는데 점집문화답사기를 쓰면서 뭐랄까, 점집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건 맞아요. 점집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 사회분위기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여러 가지 장르(?)의 점집을 돌아다니다 보니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더라고요. 각 점집마다 잘 보는 점도 따로 있고 손님 연령층도 다르고요. 다 나름의 재미가 있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요즘 세대는 점집을 아주 결정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심각한 마음으로 간다기 보다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이 강해진 거 같아요. 점을 보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인테리어나 음악 등도 신경 쓰고. 왜 이런 분위기가 생겼을까, 보면 영화를 보는 행위, 소설을 읽는 행위, 테마파크에 가는 것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점집문화답사기를 연재하면서 그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첫째 점집에 대한 정보, 그리고 ‘점쟁이가 손님 외모로 대충 때려잡은 거 아니냐’는 것. 최근 조교 투입에 맛들인 한동원은 성형수술한 전적이 있는 지인과 동행해 관상으로 유명한 점집을 방문했다. 과연 주인공은 ‘외모로 때려잡기’ 신공을 발휘했을까? 결론은 한동원의 칼럼에서 공개된다.




공대 출신, 딴지일보 공채 1기 영화기자

한동원의 학창시절을 엿보자. 대학에서는 기계공학을 전공했는데 소위 딴짓(?)을 많이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학교에 상시적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동기들과 의기투합했는데, 졸업 후에야 시네마테크가 생겼다. 결론적으로는 후배들에게만 좋은 일을 한 셈.

“영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학내 시네마테크를 만들기 위해서 한마디로 용을 썼죠(웃음). 당시에는 단과대 강당을 빌려서 영화를 틀곤 했어요. 그 때는 저작권의 지배를 받지 않던 시절이라 열심히 틀어댔죠. 영화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봉준호, 정지우, 이재용 감독의 단편도 틀고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 이렇게 다들 거물들이 될 줄은 몰랐죠(웃음).”

그가 학부를 졸업했을 때는 호황기였다. 대기업을 골라서 들어가던 때였으니 취업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회사를 고르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계공학에 미래를 거는 건 아니다 싶었다. 당시 삼성은 새로운 직장문화 바람이 불어 반바지를 입고 출근을 해도 될 것처럼 광고를 했는데, 막상 들어가보면 복장 규정이 엄격했다. 한동원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기업 입사를 거부했지만 억지로 들어갔어도 김어준 총수처럼 몇 개월 일하다 때려 쳤을 것 같다”고 했다.

“무작정 마음에도 없는 직장생활을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취직 말고 다른 걸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대안은 대학원이었죠. 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알아보니 엔지니어링를 먼저 공부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산업디자인대학원을 가려다가 꼬임에 넘어가 기계공학으로 석사까지 전공했어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 허송한 것 같지만, 제 글 쓰는 스타일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받은 거 같아요. 제가 소재를 찾는 방법이나 사물을 보는 법들이 기본적으로 공돌이들의 접근방식이거든요. 학생일 때는 내가 가진 딴따라 기질이 합쳐지지 못하고 상충했는데, 적정관람료 같은 칼럼을 보면 제가 논문을 썼을 때 문체나 특유의 말투들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대학원 석사를 마친 이듬해는 IMF가 터졌다. 아무도 취직이 되지 않던 시절, 그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무작정 노느니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 싶어 이태원 블루스 클럽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고, 이후 인터넷영화전문사이트 회사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98년에 창간된 딴지일보에서 99년에 유일하게 영화전문기자를 공채로 뽑았는데 그가 덜컥 붙었다.

“딴지일보에서 영화기자, 편집장으로 있다가 KBS <문화지대>, CBS 라디오 영화프로그램에서 패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프리랜서로 일하게 됐어요. 원고 의뢰가 끊임없이 들어온 건 아니지만, 희한하게 끊길 만하면 들어오고 조금 쉬어야 하나 싶으면 또 들어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신기했어요. 과연 내 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누군가는 보고 있구나 싶었죠. 가끔 독자들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그러면 업계에서도 복이 있구나 싶어요.”




작가는 책을 재미로 읽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프리랜서 글쟁이로 활동한 지 7년. 2009년에는 소설집 『삐릿』을 펴냈다. 정식 등단한 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천문학사는 한동원의 작품을 흔쾌히 출간했고 반응도 꽤 좋았다. 『삐릿』은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BEAT IT'에서 따온 제목으로 비주류에 속하는 아웃사이더 명랑 남고생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담은 작품. 학교와 록 밴드라는 소재를 통해 학교 내 권력싸움, 혹은 제도권의 교육현실을 풍자했다.

“소설을 쓰고 싶다, 소설집을 내고 싶다 이런 것 보다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욕구가 있었어요. 대학교 동아리 시절, 영화를 열심히 보던 때도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스토리 창작에 대한 열망만 있었던 거 같아요. 영화평이나 방송, 교양 프로그램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불충분하다는 느낌이 있었죠. 완전한 나의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결국 소설이라는 결론이 났고, 어느새 소설을 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어느 날 영화 <스쿨 오브 락>을 보다가 밴드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제 학창시절과도 영향이 있고 몇몇 인물은 제 고등학교 친구들의 캐릭터를 빌려오기도 했지만, 주인공은 절대 제가 아닙니다(웃음).”

현재 두 개의 소설이 완성 단계에 있다. 하나는 옴니버스로 펼쳐지는 단편집과 분노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 한동원은 우리나라 사회에 공기처럼 떠도는 분노가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묻지마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 그런 분노가 가장 폭력적이고 돌발적인 방법으로 표출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결국 제 생계를 해결해주는 일이 글 쓰는 일이니까 전문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 적어도 글 쓰는 일에 대해서는 프로가 되야 한다고 생각해요. 프로다, 아니다의 차이점은 그냥 재밌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취미인 거고, 돈을 받고 그에 따른 역할을 해야 하는 게 프로인 거죠. 내가 가진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쓸 수는 없지만, 매체가 원하는 것과 독자에게 마땅히 전달해야 할 바를 전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글을 쓸 때 자기검열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단 쓰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써놓은 후 다듬는 과정을 갖는다. 야구에서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체중을 실어 던지듯, 한동원은 체중을 실어 글을 쓰고자 한다. 체중이 실리지 않는, 무게나 관성이 느껴지지 않는 글은 함부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글쟁이 한동원의 원칙이다. “작가는 책을 재미로 읽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동의합니다.”한동원의 글에 대한 철학의 근거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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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릿한동원 저 | 실천문학사
미니시리즈 「돌아온 일지매」의 나레이션을 집필한 한동원의 첫 장편소설. 영화평론, 드라마 및 문화 소개 프로그램, 쇼프로 대본, 인터넷 칼럼 등 장르를 불문하는 종횡무진 글쓰기로 우리를 매혹해온 그는 시청각을 자극하는 문체와 분야를 막론하는 무한 조합의 상상력, 풍자적 시선으로 무장한 특유의 내공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1980년대, 고교생 록 밴드-딴따라들의 행보를 그려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관객 평점 9.25 천재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황유시앙’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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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오브 라이트>는 제 63회 베를린 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분 경쟁작으로 선정된 작품. 한국에서는 제 17회 부산국제 영화제 관객상으로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제 25회 도쿄 영화제 공식 초정작이기도 하다. 특히 지난 1월 국내 정식 개봉을 앞두고 실시한 모니터 시사에서는 9.25점의 놀라운 평점을 기록하며 이미 입소문이 자자한 상황이다. 이렇듯 황유시앙의 자전적 스토리가 녹아든 <터치 오브 라이트>는 세계 각국의 영화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는 한편, 시련을 경험한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영화로 만난 또 다른 세상

3박 4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황유시앙은 매서운 꽃샘추위가 익숙지 않은 듯 “타이완에 비하면 상상 이상”이라며 웃음 지었다. 한국 방문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두 번째, 서울은 첫 방문이다. 그가 직접 출연한 <터치 오브 라이트>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다양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한다. 그 시작은 타이완 영화계에 유망주로 손꼽히고 있는 장영치 감독과의 만남이다. 2005년 여름 처음 황유시앙과 만난 장영치 감독은 피아노를 치며 짓던 밝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시각장애인들이 사는 세계에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호기심은 황유시앙의 첫 영화 출연으로 이어졌다. 바로 타이베이 영화제 단편 영화상을 수상한 단편 영화 <터널의 끝>이다. 시각장애를 비롯해 이제까지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황유시앙이 자전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장영치 감독의 적극적인 권유 덕분이었다. 놀라운 스토리는 그 뿐이 아니다. <터널의 끝>이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새로운 조력자가 등장한 것. 바로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왕가위 감독이다. 그는 <터널의 끝>을 연출한 장영치 감독의 독특한 비주얼 스타일과 황유시앙의 실제 스토리가 만들어 낸 감동 코드에 감명을 받아 장편 영화인 <터치 오브 라이프> 제작을 제안했다. 세계적인 감독과 젊은 유망주, 그리고 시련을 희망으로 일궈낸 황유시앙이 만들어 낸 감동은 전작을 뛰어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타이완 현지의 반응도 남달랐을 듯 한데요.

<터널의 끝>을 찍었을 때는 <터치 오브 라이트>처럼 관객들의 반응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만지 않았어요. 다른 단편 작품과 같이 상영을 하는데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해 생활 속에 큰 변화는 없었죠. 그런데 이번 <터치 오브 라이트>홍보를 하면서 반응이 남다르더라고요. 아무래도 장편인데다가 전작이 알려진 터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없나요?

많은 분들이 알아보셔서 조금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생활이 좀 더 바빠지기도 했고, 더 충실하게 살아가게 됐죠. 많은 인터뷰를 하고 공연을 요청이 이어진 것도 달라진 점이고요. 제 음악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점은 참 기분이 좋아요.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엊그제 한국에 와서 신사동 가로수길을 걸었는데 타이완에서 관광을 온 분이 저를 알아보시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던 순간이에요. 타이완도 아닌 한국에서 팬을 만나는 경험이 특별했죠.

장영치 감독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는데요.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네요.

제가 앞을 보지 못하는 탓에 연기를 하면서 감정을 잡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었어요. 시각장애인이 직면하는 문제 중 하나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표정이나 몸짓으로 잘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감독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었는데 표정이나 연기로 표현해 내는 게 참 어려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은 서두르시지 않고 많은 설명을 해 주시면서 저를 이끌어 주셨죠.

프로듀서가 왕가위 감독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접 만나 본 소감은 어떤가요.

왕가위 감독님의 명성은 저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영화 제작과 관련해서는 장영치 감독님과 주로 상의하시는데, 처음 뵌 것은 올해 1월 즈음이었어요. 만날 때 마다 항상 친절하시고 거리감 없이 대해주셔서 감사하죠.

영화 제작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무래도 시각장애로 인해 어려운 부분이 없지는 않았죠. 하지만 특별히 갈등을 겪거나 한 부분은 없었어요. 다만 대본을 외울 때 기계나 사물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야 연기를 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데 일반 스태프들이 ‘저것, 이것’ 같은 대명사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움이 있었죠. 그럴 때는 정확한 대상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해서 연기를 해 나갔어요. 그 외에는 스텝들 모두 사려 깊고 배려해줬기 때문에 영화를 찍을 때만큼은 큰 불편함이 없었어요.

영화의 스토리는 황유시앙이 경험한 삶과 함께 스토리텔링을 덧붙여 일정부분 허구와 가공인물도 포함 돼 있다. 어릴 적 트라우마로 세상과 소통을 멈춘 황유시앙이 편견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며 자신의 꿈을 찾는 친구 치에가 대표적이다. 황유시앙과 치에가 함께 겪어가는 에피소드는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감동을 전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시작 된 삶

스물여섯 살의 황유시앙은 태어났을 때부터 시각장애를 안고 삶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빛을 거두어 간 대신 다른 선물을 줬다. 어릴 적부터 듣는 곡의 모든 음을 외울 만큼 절대 음감을 타고났던 황유시앙. 어둠 속에서 음악을 통해 세상을 인지해 나간 그는 절대 음감과 더불어 놀라운 감성으로 피아노에 몰입한 끝에 타이완 국립 예술 대학에서 피아노 연주 학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타이완에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태어났을 시기부터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는데, 처음 자신의 핸디캡을 인지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요.

아주 어렸을 때는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원래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안 보인다는 것의 개념을 몰랐죠.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제 상황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나이 아이들이 그렇듯 악의 없는 친구들이었지만, 자신과 다른 제 모습을 향해 조소를 보냈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점차 장애를 실질적으로 깨닫게 됐어요.

당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장애인을 향한 크고 작은 편견은 그 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졌어요. 어린 시절 친구들의 조소를 시작으로 일반인이 무심코 던지는 말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죠. 가족들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3살쯤일 때 저를 업고 길을 가던 어머니는 “아이가 자고 있는 거냐”고 묻는 주변사람들에게 앞을 보지 못해서 그렇다는 설명을 해야 했어요.

황유시앙은 현재 타이청 시각 장애인 복지 협회에서 후원하는 ‘바바밴드(Baba Band)’와 ‘다크 글래시스(Dark Glasses)’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어린 시절 처음 음악과 접했을 때 느낌을 묻고 싶네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2살 정도부터 어머니께서 피아노를 치게 해주시면서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해요. 삶 속에서 음악을 접하면서 기쁨을 느낄 수 있었죠. 피아노를 연주할 때만은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행복함으로 충만함을 느껴요. 그래서 계속 피아노를 치게 됐죠.

어머니의 응원이 큰 힘이 됐을 듯 한데요.

네 맞아요.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특히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죠. 제가 어렸을 때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배우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장벽을 경험하곤 했는데, 어머니는 항상 응원을 해주시면서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셨어요. 어머니의 격려 덕분에 피아노 연주 실력이 늘어나면서 성취감도 느낄 수 있었죠.

음악가로서 어떤 음악을 추구하고 있나요?

제가 하고 싶은 음악가는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음악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했고 다양한 시도를 이어왔죠. 어떤 장르로 한정 짓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제겐 음악을 계속 하는 것 자체가 목표죠. 색깔을 정의하긴 힘들지만 음악은 제게 세상의 빛깔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거든요.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세상의 모습이나 대상에 대한 느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죠.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두 번째 한국 방문에서 황유시앙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듯했다. <터치 오브 라이트>홍보 중 스타킹에 출연한 예은이와 함께 공연한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주억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

혹시 좋아하는 한국 음악가나 가수가 있나요.

한국에 와서 저와 같이 장애를 가졌음에도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희야 씨라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기회가 된 다면 그분과 같이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또 타이완에서 친구들이 해 준 말이 “한국에 가서 ’소녀시대‘의 사인 정도는 받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가능할까요(웃음).

영화를 보게 될 한국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터치 오브 라이트>를 좋아해주셨으면 하죠(웃음). 또 제 이야기를 통해 포기했거나 잊었던 꿈을 찾는 기회가 되길 바라요.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제 이야기를 통해 최선을 다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드리고 싶었거든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표정이 다르다. 순수한 영혼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황유시앙의 시야는 비록 어두울지 몰라도 마음만은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인간은 희망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어 황유시앙이 전하는 감동으로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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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여름, 삼성전자는 컴퓨터사업을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키우기 위해 주력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총괄법인 설립을 맡고 있던 이명우 교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업장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과 독대를 하게 됐다. 이건희 회장이 그에게 건넨 첫 마디는 “무슨 일을 하다가 여기 왔어요?”. 이명우 교수는 “영국에서 가전 영업을 했다”고 답했고, 이건희 회장은 “가전을 잘하는 사람을 왜 컴퓨터로 데려왔냐”고 채근했다. 이건희 회장은 가전제품과 똑같은 방식으로 컴퓨터를 판매하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있었고, 바로 직전 방문한 미주지역 책임자도 가전부문 출신이라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담당자를 바꿀 것을 지시했던 참이었다. 결국 이명우 교수를 원래 자리로 가게 하고 외부에서 전문가를 채용할 것을 관리자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이명우 교수의 원래 자리에는 이미 후임자가 와있는 상태. 마지막으로 이건희 회장이 그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이명우 교수의 대답이 과연 명답이었다.

“회장님 말씀대로 세상에는 훌륭한 컴퓨터 전문가들이 많이 있고 삼성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영입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되면 삼성의 조직문화를 새로 익히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과 일하는 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제가 차선으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6개월 정도 일하다 보니, 제가 이전에 하던 가전제품 영업이 건어물 장사라면 새로 시작한 컴퓨터 영업은 생선 장사쯤 된다는 감을 익힌 것 같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생선 장사를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건어물 장사와 생선 장수. 이 같은 비유는 어떻게 나왔을까. 이명우 교수는 당시 소비자들이 찾는제품이 12주 만에 286컴퓨터에서 386SX로, 3주 만에 386SX에서 386DX로 변하는 현상을 보며, 컴퓨터사업에서 무엇보다 제품의 ‘신선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신선도가 사업 성공의 주요 키워드라는 점에서 컴퓨터와 생선이 같다고 본 것이다. 이명우 교수의 명답에 이건희 회장은 방금 지시한 사항을 취소하고, 외부 전문가를 채용해 서포트를 받을 것을 지시했다.

‘컴퓨터 = 생선’이라는 명쾌한 개념을 떠올린 이명우 교수는 말한다. “보통 그런 자리에 가면 대부분 하는 이야기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아니면 ‘앞으로 잘하겠습니다’잖아요. 분위기가 무거웠지만, 회전문 인사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고 어떻게든 내가 그동안 깨달은 바를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나가더라도 내 자리로 올 사람에게는 누가 되지 않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24년간 삼성전자에 몸담고 2001년 말 일본 소니로 스카우트돼 소니코리아 사장 역임, 당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초의 현지인 출신 소니 최고경영자로 화제가 됐던 이명우 교수는 치열한 마케팅 세계에서 땀이 밴 통찰로 해외영업 전문가가 됐고 2006년에는 한국코카콜라보틀링 회장, 2007년 레이콤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교 경영대학 특임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눈높이 소통이 커뮤니케이션의 진리

“고3 때만 영화 84편을 볼 정도로 마니아였어요. 대부분 외국 영화를 봤는데, 세계 다양한 나라의 문화나 사람들을 영화에서 만났죠. 그 때부터 글로벌에 대한 욕구가 생긴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만 보던 에펠탑, 개선문을 실제로 보고 싶었으니까요. 요즘 인문학이 유행이잖아요. 대학 때 인문학을 공부한 것도 비즈니스를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아 싶어요. 교과에 나오는 공부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아는 게 중요해요.”

이명우 교수가 세계 유수의 바이어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바는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새로운 바이어를 만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비즈니스만 이야기하는 건 상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70~80%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나머지 시간에 비즈니스에 대해 논한다. 동질감을 주는 것, 공감하는 부분이 무엇일지, 그것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트 스토밍(heart storming)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진정성과 신뢰가 중요해요. 브레인 스토밍보다 하트 스토밍이 먼저에요. 한국의 일반적인 학연, 지연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를 알면 소통이 되고 그러면 비즈니스 이야기도 잘 풀리게 되죠. 꼭 상대보다 많이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배우는 자세도 중요해요.”

1980년대 중반, 이명우 교수가 눈높이 소통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일화가 있다. 갈비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독일 바이어가 있었는데 사소한 문제에도 클레임을 거는 무척 깐깐한 바이어였다. 정도가 너무 심한 나머지 이 교수의 상사는 ‘바이어가 서울에 오면 먹기 힘든 한식을 먹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하늘과도 같았던 바이어를 두고 이명우 교수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생선회도 먹지 않는 바이어였거든요. 고민 고민하다가 언젠가 영화에 나온 ‘타르타르’라는 요리가 떠올랐어요. 몽골의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음식인데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육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바이어에게 ‘한국식 타르타르’라며 육회를 소개했죠. 최고의 한우를 엄선해서 만들고 또 몽골이 세계를 정복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타르타르스테이크와 한국식 타르타르가 뿌리가 갚은 음식이라고 너스레를 떨었고요(웃음) 그랬더니 눈이 반짝반짝하더라고요.”

내친김에 육개장도 소개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출장을 갔을 때 먹어본 ‘굴라시수프’가 육개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독일 사람들도 굴라시수프를 독일식으로 만들어먹는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한국식 타르타르에서 이미 재미를 본 바이어는 ‘한국식 굴라시수프’라는 말에 땀을 뻘뻘 흘리며 육개장을 먹었고, 이명우 교수에게 “미스터 리가 미식가인 줄 몰랐다”며 반색했다.

“상사의 말을 거역할 수도 그렇다고 바이어에게 강제로 먹일 수도 없고, 그래서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영화에서 봤던 타르타르스테이크가 떠올랐고, 굴라시수프의 경험도 생각났죠. 바이어가 그동안 먹어왔던 음식들과 같은 뿌리의 음식이라고 소개를 하니, 거부감이 없었던 거예요. 대화의 상대방이 누구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죠. 다행히 그 바이어는 우리의 뜻을 간파했는지 그 후 더 이상 무리한 클레임이 없었어요(웃음).”




편할 길 대신 어려운 길 선택, 미국에서 MBA 취득

1977년 신입사원 시절, 이명우 교수는 ‘하면 된다’를 좌우명으로 정말 물불 안 가며 일했다. 하지만 직급이 점점 올라가며 무조건 열심히 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15년차 차장의 직급을 달고 있을 때, 미국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으로 MBA를 따러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만해도 MBA가 대중화되지 않았고 이명우 교수처럼 집까지 팔아 유학을 떠나는 케이스는 정말 흔치 않았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어요. 유럽지사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갔으면 더 편했겠지만, 유럽은 이미 경험했으니 공부를 하면 미국으로 가야겠다 싶었죠.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회사에서 승진도 안 되고 평가도 어정쩡해서, ‘나랑 이 일이 안 맞나?’ 이런 심정이었어요. 보통 이런 경우에는 포기를 하거나 이직을 하는 게 대부분인데 저는 휴직을 하고 공부하기로 결정했죠. 회사를 관두는 시점이 오더라도 인정을 받을 때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미국에서 2년간 공부를 하고 오니, 굉장히 중요한 자리로 저를 부르더라고요. 중동, 유럽에서 일하고 공부는 미국에서 했으니 지역전문가로서는 제격이었던 셈이죠.”

이명우 교수는 삼성전자 유럽 정보통신ㆍ컴퓨터 판매법인장, 본사 해외본부 마케팅팀장을 거쳐 미국의 가전사업을 총괄하는 부문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삼성전자의 북미시장 진출에 앞장서 대형 유통업체와 거래를 성사시키는 등, 국내에서도 드문 해외 영업 전문가이자 유통 전문가로 실력을 쌓았다. 1999년에는 컨설팅기업 ADL이 미국 가전업계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국제휴머니테리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1년 말에는 삼성전자의 경쟁사인 일본 소니로부터 스카우트돼 소니코리아 사장을 역임했다.

“삼성전자에 24년 동안 있으면서 미국에서 일한 시간들은 자기실현을 하면서 회사에도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정말 재밌게 일하고 있었는데 소니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죠. 사실 삼성에 있으면서 임원들이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처음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상황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나중에는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하나의 기회라고도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람들의 행보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랬죠.”

와튼스쿨에 MBA 원서를 낼 때,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서술하라’는 문항이 있었다. 이명우 교수는 integrity(진실성), consistency(일관성), reciprocity(호혜성)이라고 답했는데, 평상시 이 교수가 비즈니스를 할 때의 원칙과도 같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파트너십도 마찬가지에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측 가능하게 일관되게 소신 있게 해야죠. 신세를 지면 갚기도 해야 하고, 받은 것은 사회에 돌려줄 줄 알아야 하고, 진실성은 물론 1순위이고요.”




이 정도면 됐다?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와인 애호가인 이명우 교수에게는 특별히 잊히지 않는 와인이 하나 있다. 로버트몬다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나파밸리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으로 캘리포니아의 포도주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와인이다. 이 와인이 특별한 이유는 10년 전, 삼성전자가 후발업체 시절 브랜드 인지도가 약해서 겪었던 애환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이다.

“유독 중부에 있는 한 대형 유통업체의 문이 열리지 않았어요. 아예 사람을 만나주질 않아서, 인맥을 총동원해서 간신히 저녁 약속을 잡았죠. 어떻게든 담당자를 설득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담당자들이 와인에 대해 까다롭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몬다비리저브’라는 와인을 좋아한다고요. 근데 가격이 문제였어요. 당시 한 병에 300달러 정도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하며 보통 몬다비와 몬다비리저스를 두고 블라인드 테스팅을 해보기로 했어요. 가격 차이가 큰 두 와인을 상표를 보지 않고 마셨을 때, 과연 구분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한 거죠. 운이 좋았는지 한 사람만 중립을 지켰고 모두 보통 몬다비를 선택했어요. 이 결과를 설명하며 바이어들에게 말했죠. ‘두 와인의 수준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가격은 리저브가 훨씬 높다. 마치 삼성과 소니의 제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의미 있는 테스트가 된 것 같다’고요(웃음).”

와인 시음회가 열린 날, 이명우 교수의 테이블은 더 이상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식사를 즐겼고, 다음 날 본격적인 거래가 성사됐다. 이명우 교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둘 때, 비로소 비즈니스에도 성과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글로벌하게 일했던 것이 후에 모두 자산이 됐어요.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여행을 하고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해보는 것이 언젠가 반드시 도움이 됩니다.”

이명우 교수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다. 과제가 주어지면, 최고의 대안이 만들어질 때까지 데드라인 안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수정하는 것.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만족을 절대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명우 교수가 33년 동안 비즈니스 분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항상 내 한계까지 가보자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면서 ‘이 정도면 됐다’는 식으로 했으면 오랫동안 필드에서 일하진 못했겠죠. 보고서를 써도 10년, 20년 후가 되더라도 후배들이 찾아봤을 때 도움이 되게 써야 해요. 잘 써야죠. 제가 대리였을 당시, 과장님께서 보고서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셨는데 그땐 피곤했지만 지금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 때 같은 부서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 7명이 임원이 됐어요. 무관하지만은 않겠죠.”

『적의 칼로 싸워라』를 읽을 예비 독자들에게 이명우 교수가 조언한다. “말이 되네. 재미있네. 이렇게 책을 읽지 말고 ‘내가 그런 상황이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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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칼로 싸워라이명우 저 | 문학동네
이 책은 저자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국내기업과 해외기업, 전자회사와 소비재회사 등 33년 동안 다양한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에서 MBA,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습득한 첨단의 경영이론을 화학적으로 결합해, 남과 달라지고 이로써 탁월해지는 차별화의 방법을 전달하는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비즈니스를 경험하며 겪었던 생생한 실제사례와 ‘아웃사이드인 마인드’ ‘업의 개념’ ‘마켓센싱’ ‘풀ㆍ푸시전략’ 같은 체계적인 경영의 방법론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다름’을 경영하는 2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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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과 콩나무』는 도둑질과 살인한 이야기 - ‘껌정드레스’ 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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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클릭할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인터넷 ‘낚시 기사’ 만큼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애들 동화책도 아니고, 말랑한 에세이도 아니고, 하품 나오는 전문 역사서도 아닌 이 책은 ‘책꽂이에 벤츠 한 대 값에 버금가는 책들을 꽂아놓고’ 무식하게(?) 읽고 쓰는 일을 하고 있는 역사 에세이 작가 박신영이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야심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로 우리가 잘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어린이 십자군 동원설과 연결되고, ‘해리포터’ 시리즈가 연금술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을 눈으로 좇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하, 그렇구나!’를 외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비어 있었던 상식의 창고에 정보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동화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배우는 역사 상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는 의문, 맥락, 입장이다. 당연시 되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 하나의 현상을 전체적인 맥락과 연결해 입체적으로 이해할 것, 그리고 이 이야기가 누구의 시각으로 기술되고 해석된 것인지를 질문할 것. 왕자와 공주, 악마와 마녀, 영웅과 괴물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동화가 전면에 등장하는 책이지만 동화가 말해주는 것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익숙하지만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하고 있는 박신영의 첫 번째 책은 맛도 좋고 영양가도 만점인 밥상 앞에 앉은 기분이 들게 한다. 마음껏 먹고 즐기고 나름대로 소화시키는 일은 이제 독자들의 몫이다.


흥미로운 콘셉트의 책인데요, 이 책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예스24 블로그(blog.yes24.com/mkkorean)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고 있었어요. 주로 역사 관련 책과 영화를 보고 리뷰를 올렸는데, 페이퍼로드라는 출판사에서 제 글을 보고 연락을 하셨더군요. 출판사가 책 읽기에 관한 입문서를 기획하면서 국내 필자를 찾고 있었는데, 제 글이 그분들 눈에 들어 온 것이죠. 그래서 읽었던 역사서 목록을 좀 뽑아 갔는데, 결국 아예 처음부터 새롭게 기획을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고 구성안을 잡아보았지요.

이 책을 읽으면 ‘동화’라는 텍스트가 가진 잠재력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동화’로부터 출발하셨습니까?

사실 이 책은 동화보다 ‘역사’에 더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역사 에세이를 쓰고 싶었는데, 뜬금없이 어렵고 딱딱한 주제를 택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모두 아는 그런 이야기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처음 접하게 되는 책이 세계 명작 동화 전집 같은 것이잖아요. 어렸을 때 동화를 읽으면서도 항상 이야기보다 이야기의 배경이 훨씬 더 궁금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 두 가문은 왜들 이렇게 싸울까 궁금했고, 커서 『제인 에어』같은 소설을 읽을 때도 멋있는 로체스터보다 ‘광인’으로 알려진 로체스터의 전처가 서인도 출신인데 서인도는 어디일까, 인도 여자인가, 그런 게 더 궁금했습니다. 궁금하니까 찾아보게 되고, 더 많이 알고 싶으니까 관련 책을 찾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가 깊어진 것이죠.

저자 서문에 보면 ‘나는 황인종 한국 여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고 세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아이들은 미성숙한 상태로 동화를 읽게 됩니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동화의 주인공과 자신을 쉽게 동일시하지요.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읽는 세계 명작 동화들은 대부분 19~20세기의 것들이라 제국주의적 세계관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웅들의 모험담은 알고 보면 남의 나라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정복한 이야기들이죠. 아이들은 책을 읽으며 그런 행위를 ‘선’이자 훌륭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서구, 남성, 기독교 중심적인 사고를 알게 모르게 세뇌 당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역사도 해석입니다. 고정 불변의 과거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해석하는 사람의 현재 자세가 중요하죠.

명확한 역사적 배경이 없어 이번 책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잭과 콩나무』이야기를 생각해보세요.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재크가 거인이 사는 하늘나라에 가서 몰래 보물을 훔쳐서 도망 나오고, 콩나무를 베어 거인을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거인의 부인은 재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도 배신을 당하죠. 알고 보면 남의 집에 쳐들어가 주인의 호의를 무시하고 도둑질에 살인까지 한 이야기인 셈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인들의 심리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덩치는 큰데 무식한’ 거인처럼 본 것이죠. 이런 동화는 그 나라에 침략해서 재산을 빼앗고 노동을 착취했던 유럽인들의 행위를 ‘모험 정신’으로 미화시키고 합리화 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무굴 제국, 청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 그들이 미개하다고 무시했던 지역은 모두 찬란한 문명이 꽃피었던 곳이었습니다. 벌거벗고 ‘우가우가’하는 곳이 아니었거든요.

동화 선정을 할 때 이런 관점에서 할 이야기가 많은 것, 확실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을 골랐습니다. 처음에 뽑았던 목록은 엄청 많았는데 많이 알려지고 유명한 것 위주로 선정했죠. 예를 들면 ‘산사나무 그늘 아래’라는 이야기는 아일랜드 감자 기근과 관련된 이야기로 풀 수 있는 좋은 텍스트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르는 이야기라 제외했고요. 최근 영화로도 나온 ‘재크와 콩나무’도 할 말은 엄청 많은데 확실한 역사적 배경이 없어서 뺐습니다.


여러 유명한 동화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책에 실린 글 중에 특히 애착이 가는 글이 있거나 쓰기 어려웠다거나 하는 글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정말 쉽고 빨리 쓴 글이 있어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가지고 쓴 ‘비둘기는 프랑스어로 울지 않는다’라는 글인데요. 제 책의 대표 원고라고 생각하는 글 중에 하나입니다. 『마지막 수업』처럼 조선의 한 소학교에서 일본인 선생이 마지막 수업을 한다고 상상하면서 글을 재미있게 시작했어요. 『마지막 수업』은 우리가 정말 많이 오해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글을 통해 그런 오해를 풀어주면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분쟁의 역사를 알기 쉽게 개괄하고 싶었습니다. 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야기인 『반지의 제왕』처럼 애썼지만 결국 못 실은 글도 있어요. 이야기의 모티프가 된 바그너의 오페라 ‘리벨룽겐의 반지’부터 히틀러와 2차대전까지 연결시키려고 했는데, 범위도 너무 넓고 제 공부가 얕아서 한두 문단 빈 곳을 결국 채우지 못했습니다. 파묻어 두었는데 언젠가는 다시 꺼내야죠.

책을 쓰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공부할 게 많아요. 게다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고증해야 합니다. 이 사실이 맞는지, 연도를 제대로 썼는지, 굉장히 검토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역사 에세이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중세사를 읽어보면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대륙의 마녀와 영국의 마녀가 빗자루를 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영국 마녀는 막대기 쪽이 아니라 반대쪽을 앞으로 해서 타거든요. ‘해리포터’ 시리즈는 사실 고증을 제대로 안한 것입니다. 판타지 소설을 쓰려고 해도 제대로 알아보고 써야 하니, 역사를 다루는 일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이 책을 더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기 위한 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가벼운 서양 유럽사 통사를 읽고 맥을 잡은 후에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저는 독학으로 공부를 한 사람인데, 참고문헌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관심 분야가 있으면 관련 책을 찾아 읽고 그 책 뒤에 정리된 참고 문헌 리스트를 보고 또 읽을 책을 찾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책 뒤에 자세하게 참고문헌을 정리해서 넣었지요. 중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 이후로 역사를 거의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에릭 홉스봄이나 하워드 진의 책을 추천하고 싶고요, 중세 유럽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베 긴야의 책도 참 재미있습니다. 약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박노자와 이성형 선생님 책을 추천하고 싶네요. 시야를 넓혀줄 수 있는 그런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신데렐라를 읽을 권리’라는 글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 소비하는 사람 모두 ‘다른 신데렐라’를 만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 글은 샤를 페로와 그림 형제의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를 통해 서구, 남성, 백인의 입장으로 정리된 동화를 읽으며 세뇌당하고 오염되고 편협해진 시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썼습니다. 다른 신데렐라를 만나려면 우선 다양한 이야기들을 많이 읽고 많이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이건 좋은 이야기, 저건 나쁜 이야기, 정해서 아이들에게 읽히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모든 좋은 이야기의 주제는 인간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좋고 나쁜지, 자신이 직접 찾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죠. 자기만의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내가 알았던 것과는 다르구나, 이건 내가 몰랐던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 자연스럽게 그것에 대한 내용을 파헤치며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내 것이 아닌 다른 이의 시선을 학습해서 평생 문제의식 없이 써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무식해서 죄를 짓는’ 상황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평소 독서량이 엄청날 것 같습니다. 요즘 관심을 갖고 읽고 계신 책은 무엇입니까?

사실 제 별명이 ‘책 읽는 변태’입니다. 집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책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하루 이틀에 한 권씩 읽는 것 같아요. 흥미 있는 주제와 관련된 책들을 연이어 읽다 보면 아는 내용이 반복되기 때문에 독서 속도가 빨라집니다.

최근에는 ‘신밧드의 모험’에 관련된 원고를 쓸 일이 있어서 이슬람 세계의 해양 팽창, 이슬람의 해상 교역, 중국 정화 함대 원정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중앙일보>가 리뉴얼 하면서 새로 섹션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2주에 한 번씩 칼럼을 쓸 예정이거든요. 기록에 남아 있는 활동 시기는 다르지만 신밧드가 중국인 정화라는 설이 있습니다. 정설은 아닌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잖아요?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 대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사람 정화도 신밧드처럼 7번 항해했고, 실론 섬에서 루비를 가져다 황제에게 진상하기도 했죠. 정화라는 이름의 유래를 파헤쳐보아도 정화가 신밧드일 수도 있다는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들이 바다를 선점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알고 보면 그 이 전에 아라비아 해상 세력이 있었고, 정화의 원정도 있었습니다. 이미 인도양 태평양 쪽은 아시아의 바다였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밧드가 정화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쓰고 있는 칼럼도 결론은 이 책과 비슷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가 고정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역사 에세이 작가로 첫 발을 내딛으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전문 연구자가 아닙니다. 블로거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지요. 강단에 서는 사학자들은 전문 분야에 대해 깊고 정확하게 글을 쓰지만, 저 같은 사람들은 대중들이 친숙하게 역사를 접할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는 글을 씁니다. 특히 여러 분야를 넘나들면서 관련된 지식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저 같은 필자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과 역사가 다 되는 필자다, 글이 딱딱하지 않고 유머러스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기쁩니다. 첫 번째 책이 어느 정도 그런 면에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앞으로 이 책과 비슷한 콘셉트로 아시아 편, 한국 편 이렇게 시리즈로 내보고도 싶고요, 영화나 뮤지컬로 보는 세계사, 우리가 잘 모르고 오해하고 있는 역사 상식에 대해 정리한 책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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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박신영 저 | 페이퍼로드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독이 든 사과를 먹은 백설 공주를 비롯한 동화 속 모든 공주님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왕자의 구애를 받고 결혼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그 많은 왕자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왜 그렇게 남의 나라 영토를 싸돌아다니고 있었을까?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는 이런 도발적인 질문들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을 파헤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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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경제세미나 수강신청, 10초 만에 마감 - 정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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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과 맺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2010년대인 지금도 활개를 친다고 한다. 바로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거래에서 언제나 죽어나는 것은 중소기업, 즉 을(乙)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 대기업이 운영하던 대형할인점과 납품 상담을 벌인 한 중소기업 사장이 분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건실하게 기업을 잘 꾸려왔지만 대형할인점의 횡포로 인해 20억 원이라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결국 자살을 택했다. 서울대학교 전임교수 시절부터 ‘경제민주화’에 포커스를 두었던 정운찬 교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지금 같은 ‘을사’ 조약 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하는 시스템으로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이 동반성장연구소의 설립 이유이자 목적이라고 말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99%가 중소기업이고 고용의 88%가 중소기업인 상황에서 중소기업인들의 어려움은 곧 가정의 어려움, 개인의 어려움이 되고 있다. 정운찬 교수는 “우리 국민 모두의 노력으로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가 극복했지만 그 과실은 소수 대기업에만 편중되어 사회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자유경쟁시장의 논리를 앞세워 너도나도 뒷짐 지고 바라만 보다가는 중소기업이 백년하청(百年 下請) 신세를 면하는 것은 정말 백년하청(百年河淸)인 일이 되고 만다”고 말했다.

2010년 12월, 정운찬 교수는 국무총리에서 물러나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동반성장(同伴成長)이란 단어를 듣고 ‘동방성장’이라고 잘못 발음하곤 했다. 2년여 시간이 흐른 지금은 다소 익숙한 용어가 됐고, 정운찬 교수는 ‘동반성장 전도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위원장을 사임하고 지난해 6월부터 직접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는 정 교수는 “동반성장은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일이다. 문자 그대로 ‘더불어 같이 성장하자’는 뜻”이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의 폐단이 지적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동반성장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오랜만에 강단에 서는 느낌이 어떠십니까? 수강 인원이 적은 수업이라 신청자들이 많이 몰렸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수강 신청을 하는데 10초 만에 마감이 됐다고 들었습니다(웃음). ‘산업경제 세미나’라는 제목으로 강의가 이뤄지는 매주 화요일 날, 2학점 짜리 강의입니다. 보통 수업들이 교수와 학생 간의 직접적인 교류가 많지 않은데, 작은 클래스 안에서 소통이 가능하도록 제가 경제학부 부장 교수 시절에 만든 수업입니다. 여러 가지 섹션이 많은데 저는 부제목으로 ‘동반성장과 경제민주화’를 선택했습니다. 경제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재밌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은 그동안 교수님께서 펴낸 경제서와는 다른 느낌입니다. 작정하고 ‘동반성장’을 알리기 위해 내신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2월에 출판기념회도 크게 열었는데, 최염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회장만 내빈 소개를 해서 주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연 것이 처음입니다. 4년간의 총장 생활을 마치고 쓴 『가슴으로 생각하라』가 나왔을 때도 이렇게 책을 알리고자 한 적이 없었죠. 하지만 『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만큼은 많이 알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동반성장’을 알리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사람들이 동반성장을 알기 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강연을 통해 소개했지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을 쓰게 됐습니다. 최염 회장만 소개한 것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웃음). 내빈 소개를 하려다 보니 너무 유명하신 분들이 많아 생략하기로 현장에서 결정했는데, 단에 올라갔더니 최염 회장님이 딱 눈에 보이셔서 소개하게 됐습니다. 동반성장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가문이 경주 최씨이기도 하고요.




동반성장,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한 오해

언제부터 동반성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성장이 잘 되려면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정신과 육체가 균형을 이뤄야 건강하게 살 수 있듯이 사회도 경제와 금융, 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성장을 빨리 하는 바람에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해소는 못하더라도 완화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90년대에 이미 『도전 받는 한국경제』를 집필하면서 ‘한국경제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장이 경제민주화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고 답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경제민주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4개의 정부를 거치면서 정치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해졌습니다. 주요 재벌 그룹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영향이 무척 커지면서 지니 계수가 점점 나빠졌습니다. 총리 시절 때, 어떤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분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이민을 가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니, 대기업들의 후려치기가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 때 직원들에게 조사를 시키기도 했었는데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 경쟁이 유일한 살 길이라며 정부가 모든 걸 수용을 하다가 이 지경이 됐습니다. 중소기업의 고유 업종을 없애고 납품가를 후려치고 있는데 국제경쟁을 위해서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반성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신다면.

한 마디로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것’이 동반성장입니다. 성장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분배를 공정하게 하는 것. 잘 사는 사람의 것을 뺏는 게 아니라 경제 파이는 크게 하고 분배는 공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넓은 개념으로는 국가 간, 남녀 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모두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서울대 총장 시절,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해서 서울과 지역 간의 균형을 꾀했고 또 서울대 역사상 최초로 여성 교수를 연구처장, 학생처장에 임명했는데 이것도 남녀 간의 동반성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벌 총수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서문에 밝혔습니다. 교수님께서 초과이익공유제를 발의했을 때 많은 논란이 있었고 대기업은 두 차례나 회의를 보이콧하기도 했습니다.

동반성장위원회의 첫 작품이었던 ‘초과이익공유제’가 알려졌을 때 재계, 정계, 학계에서 모두 반발했습니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재벌 총수에게 이 책에 대한 관심을 부탁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들이 장기적인 사고를 했으면 합니다. 미국의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이클 블룸버그만 보더라도 그들이 왜 사회에 이익을 환원했을까요? 단순히 그들이 착해서 일까요? 그건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허용해준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또 다른 성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계속해서 독식을 한다면 다른 이들로부터 불만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사고가 나지요. 이런 것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사회 환원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 재벌 총수들은 이것을 인식을 못하는 거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초과이익공유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용어 아닙니까? 자본주의사회에 부합하냐에 대한 논란도 있었고요. 확실하게 용어 정리를 해주신다면.

자본주의 용어니, 사회주의 용어니 모른다는 말씀도 하는데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미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1920년대부터 초과이익공유제를 시행했습니다. 영화 제작자가 배우, 감독, 배급처를 구할 때 영화가 잘될지 안될지 모르니, 이 정도는 보장한다고 개런티를 책정하는 거죠. 그리고 나서 영화가 대박이 나면 수익을 나눠줍니다. 자동차회사 클라이슬러, 롤스로이스도 비슷한 방법으로 수익을 공유했습니다. 초과이익이라고 하니까, 공짜로 주는 거냐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좋지만 용어가 나쁘다는 비판도 있었고 그래서 ‘협력이익배분제’라는 이름으로 도입됐습니다. 초과이익공유제란, 너희가 많이 벌었으니 좀 나눠주라는 단순한 개념이 아닙니다. 큰 이익을 내는 데 협력업체들의 역할이 컸다면 그에 맞는 대가를 되돌려주라는 겁니다. 내 몫의 빵을 나눠 갖자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한 대가를 공정하게 되돌려줌으로써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초과이익공유제를 당위적으로 접근하신 건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혜적인 차원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많은 대기업들이 납품을 받을 때 이미 형평성에 어긋나는 가격으로 받았으니 보상적 차원으로 초과이익공유제가 시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본주의사회가 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경제 체제에 비해서 흠이 가장 덜합니다. 그래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주의적인 것도 써야 하는 겁니다. 수정자본주의가 나오고 신자유주의가 나오고 그것에 따른 피해가 많아서 따뜻한 자본주의, 자본주의 4.0이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건 자본가들의 무한한 탐욕 속에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 탐욕보다는 절제에서 시작합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자본주의의 시초가 됐는데 그의 저서 『도덕감정론』에도 각 기업들이 절제 속에서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초과이익공유제는 자본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오해는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초과이익공유제’는 이름에 ‘제’라는 글자만 들어 있을 뿐 실제 내용에는 강제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다. 강제로 시켜서 뭔가 하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래서 동반성장위원회는 대기업의 협력업체 지원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약간의 인센티브를 도입하고자 했다. 물론 민간기관인 동반성장위원회로서는 그저 ‘약간’의 인센티브만 제안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초과이익 공유를 잘한다고 평가 받는 대기업에는 정부공사를 수주할 때 일정한 가산점을 줘서 좀 더 유리하게 할 수 있다. 마치 기부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기부금에 소득공제를 해줘 세금을 덜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기부금에 소득공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기부활동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초과이익공유제 역시 결국엔 당신의 곳간을 채워준 수많은 조력자의 미래에 알아서 투자하라는 일종의 제안 같은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익 공유를 잘하면 국세청이나 공정거래위원회에 세무조사나 공정거래 관련 조사 경감을 권고할 수 있다. (p. 37~38)




동반성장이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

현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계신데, 동반성장위원회에서의 활동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두 기관 모두 민간기관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구소를 설립한 게 작년 6월부터이니 1년이 조금 안됐습니다. 위원회는 2011년 10월에 만들어졌는데 국무총리 시절부터, 대통령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러 번 언급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총리 시절에는 기관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퇴임 후 동반성장위원회가 설립됐습니다. 위원장을 맡으라고 제안이 왔는데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발제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수락했고 1년여의 시간 동안 나름대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처음 위원회가 출발할 때는 법적 근거가 없어서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대ㆍ중소기업상생법(상생법),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에 근거를 마련했고 2012년 초과이익공유제가 대기업들의 보이콧으로 무산됐다가 ‘협력이익배분제’라는 이름으로 통과됐습니다. 이후 위원장 직에서 물러나고 연구소를 열었는데 아직 인프라가 부족합니다. 위원회는 민간위원회지만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전경련, 지식경제부 중소기업청에서 예산이 나오지만, 연구소는 현재 저 혼자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반성장연구소는 올해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요?

갑을문화를 개선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제조업에서의 동반성장, 유통서비스업의 동반성장을 위해 힘썼다면, 문화콘텐츠산업에서도 대ㆍ중ㆍ소 기업 간의 문제가 많습니다. 동반성장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한 달에 한 번 세미나를 열 계획입니다. 중소기업들이 겪는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중소기업, 벤처기업들의 고충을 잘 해결해나가려고 합니다.

『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을 집필하면서 참고로 한 책들이 있었습니까.

동료 교수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90년대 동료들과 쓴 『도전 받는 한국경제』도 다시 읽었고 곽정수 기자가 쓴 『재벌들의 밥그릇』, 유진수 교수가 쓴 『가난한 집 맏아들』도 읽었습니다. 『가난한 집 맏아들』은 픽션도 논픽션도 아닌데, 집안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도움으로 성공한 맏아들이 막상 부를 이루자 동생들을 돌보기는커녕 부모도 찾아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재벌 그룹에 빗대 쓴 책입니다. 재밌으면서도 현재의 경제 상황을 잘 표현한 책입니다. 박상인 교수의 『벌거벗은 재벌님』, 경주 최 부잣집의 일대기를 다룬 책들도 읽었습니다.

동반성장이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허황되게 숫자 놀음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의 일자리를 좋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없는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나쁜 일자리를 좋게 만들자는 거죠. 나쁜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만드는 건 비정규직 문제도 없앨 수 있는 실마리가 됩니다. 기업들은 환경이 급박하게 바뀌다 보니 유연한 인력 운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필요에 따라 비정규직 운영을 인정하되 이들이 차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양산은 고용 안정을 보장할 여력이 없기 때문 아닙니까. 지금처럼 중소기업의 몫을 재벌 대기업이 독차지하는 시스템이 이어 진다면 좋은 일자리는 점점 없어질 겁니다. 중소기업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받을 때 사회가 안정되고 개인과 가정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올해도 여전히 취업시장이 어렵다는 분석인데, 취업준비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사회에 나서야 할까요.

많은 준비생들이 대학까지 나왔는데 손에 기름을 묻힐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중소기업에 가봐야 근무환경이 만족스럽지 않고 소개팅도 안 들어오니 더욱 머뭇거리고요. 하지만 대기업에 간다고 해도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일하기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중소기업은 능력이 있으면 오랫동안 일할 수 있고 독립적인 기업가가 될 가능성도 있고요. 너무 공기업, 대기업, 공무원만 하려고 하지 말고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물론, 중소기업의 조건을 좋게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중소기업의 재정이 합리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연구개발 자금 확보를 비롯해 해외 진출도 정부가 나서서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취업준비생들도 단기적인 시각에서만 사고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2013년 새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정부가 5대 국정목표를 발표했는데 ‘경제민주화’는 빠지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많이 아쉽습니다. 대선이 진행될 때는 경제민주화를 외치다가 정부가 출범하고 발표한 목표에는 빠졌으니까요. 하지만 5대 목표에는 빠졌지만 세부 계획 안에서 실행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경제민주화가 이뤄져야 크게는 동반성장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동반성장은 무엇보다 삶의 철학이다. 나는 동반성장 사회는 ‘더불어 잘 사는 사회’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사회’ ‘꿈과 도전을 기대할 수 있는 공정한 사회’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처럼 동반성장은 삶의 철학이자 또한 사회공동체의 운영 원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민주화는 동반성장이라는 삶의 철학과 사회공동체의 운영원리가 경제 부문에 반영되는 것이어야 한다.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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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정운찬 저 | 21세기북스
동반성장은 문자 그대로 ‘더불어 같이 성장하자’는 뜻이다. 선두만 혼자 앞서 나가니 ‘같이 갑시다!’라고 외치는 소리이다. 이 책은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서울대 총장을 지낸 동반성장연구소 정운찬 이사장이 내놓는 행복의 경제학이다. 그동안 동반성장을 위해 발 벗고 뛰어다니며 담아두었던 얘기를 모두 털어놓고 있다. 동반성장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동반성장이 왜 필요한지, 동반성장을 이루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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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브로커 출신, 1년 만에 10억 원 자금 모았지만 - 장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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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낸 세금, 물건 구입의 대가로 지불한 돈은 국가와 기업에 의해 다시 어디론가 투자가 되고 다양한 형태로 변신을 거듭한다. 돈을 가지고 하는 일을 ‘금융’이라고 이야기하고 은행, 증권사, 투자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돈을 다루는 기관들이 모인 곳을 ‘금융가’라고 한다. 미국으로 치면 월가, 우리나라는 여의도로 대변되는 금융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금융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굉장히 멋지고 화려한 직업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금융가는 태생적으로 도덕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돈을 대하는 인식 자체가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보편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돈은 또 다른 돈을 낳는 수단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엄청난 돈이 다시 돈을 낳는 과정에서 때론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대개는 합법적인 일들이지만, 그 중에는 비합법적인 일들도 적지 않다. 주가 조작, 내부 거래, 조세 회피 등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문지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불법 사례의 명칭들이다. 『돈』의 저자 장현도 작가는 그러한 금융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를 전제로 하고 있다지만 그의 작품이 놀라운 사실성을 품고 있는 이유는 그가 한때 그 금융가에 몸을 담고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억 원의 돈을 다뤘던 삶 속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권의 소설 속에 담긴 금융가의 놀라운 이야기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금융인에서 소설가로 변신하기까지

남부럽지 않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20대 중반까지 여의도 금융가에서 법인 브로커로 일을 했다. 여의도의 욕망은 한때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듯, 나중에는 회사를 나와 비합법적 사금융업체인 ‘부티크’를 설립하기도 했다. 단 1년 만에 10억 원이 넘는 자금을 모집해 운용하기도 한 그지만 결국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돈과 탐욕의 노예로서 살아 온 삶을 청산했다. 그 후 그가 한 일은 소설 집필이었다. 소설가로서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첫 장편소설인 『트레이더 1, 2』에 이어 『돈』을 발표하는 기간은 불과 몇 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작가가 되기 이전에도 글쓰기나 문학, 소설에 관심이 많았나요.

네(웃음), 주로 첩보물 같은 외국소설을 많이 읽었죠. 하지만 애독자였을 때와 작가로서 직접 집필을 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갑작스레 작가로 변신한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하네요.

금융가에서 성공을 하기도 했고 실패도 맛봤어요. 그러면서 보다 생산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자본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생산적인 일이 뭘까’를 찾다가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는 작가에 도전하게 된 거고요. 평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좋아하던 성격이라 우연찮게 시작한 건데 여기까지 왔네요.

소설의 내용은 상당히 전문적인 부분도 있는데요.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써나가셨나요.

『돈』의 경우는 주인공이 했던 법인 브로커 일들이 정확히 제가 했던 일이에요. 물론 그 안에 사건들은 본 것도 있고 들은 것도 있죠. 예를 들어 금융시장에 갑자기 급격하게 올라가는 수량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거든요. 그럴 때면 ‘이걸로 누군가는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궁금했죠. 당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소설을 쓰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재가 된 셈이에요. 아마도 제 소설은 여의도에서 브로커 일을 한 사람들이면 90% 이상은 공감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금융 분야는 사실 일반인들이 알기 힘든 내용이 많은데요. 엄청난 돈을 다룬다는 자부심에 정보의 독점이 더해졌을 때는 그 사람의 인격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나요.

그렇죠. 저도 그쪽에 몸담고 전문적으로 일 했었지만 딱히 사람들이 웃으면서 바라봐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가 쓰는 말이 ‘합법적 돈놀이꾼’이라는 거예요. 저는 글을 쓰게 됐지만 사실 10, 20년 일하신 분들을 만나면 속된 말로 약간의 이죽거림이 있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뭐랄까, ‘나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전문가’라는 뉘앙스가 있죠. 같은 업종에 있었던 저도 그렇게 느껴질 정도인데 외부사람이 봤을 땐 꽤 심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사실 그 분야에서 5~6년 정도 일하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거든요. 금융가라는 전문분야에 계시는 분들이 어려운 용어를 쓰면서 모르는 사람을 깔보는 듯한 인상은 있는 건 사실이에요.

법인 브로커로 일하거나 ‘부티크’를 경영하다보면 보통 사람들의 월급은 돈으로 보이지 않을 법 합니다. 돈의 대한 가치가 차원이 다를 것 같네요.

그렇죠. 사실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현실과 괴리감이 있어요. 예를 들면 왔다 갔다 하는 돈을 100개라고 부르면, 100억 원을 의미하거든요. ‘10개 좀 넣어’ 그러면 10억 원인 거고, 5개 정도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5억 원을 이리 저리 옮기는 거죠. 그런데 그런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샐러리맨이잖아요. 막상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 커피 한잔 마실 현금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다들 비현실과 현실 사이를 넘나들며 살고 있는 거죠.

한때 몸담았던 입장에서 그곳 사람들의 인생 목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당시 저를 포함해서 금융가에서 일하는 부류는 둘 중 하나 밖에 없어요. 하나는 빨리 인센티브든 뭐든 단기간에 벌어서 은퇴하길 바라죠. 금융가의 정년은 되게 짧아요. 마흔 중반만 되도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죠. ‘갑’인 쪽에서 20~30대들이 주름잡고 있는데, 40~50대가 돼서 ‘을’로서 일을 하려고 하면 맞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거죠. 40대 초중반이면 끝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 전에 뭔가를 하고 탈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굉장히 강해요. 그게 아니면 임원이 되는 길 뿐이죠. 정말 그 둘 중 하나 밖에 없어요. ‘돈을 벌어서 좋을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거의 안하죠.

집필을 하면서 수위조절도 고심하셨을 듯 합니다. 어찌 보면 영업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텐데요.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것 때문에요? 글쎄요. 사실 과대포장 시킨 것도 아니고 있는 얘기를 뺀 것도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넣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 각자가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치부를 드러내서 고발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솔직히 금융가의 이야기 중에는 굉장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도 있어요. 전 그 중에 흥미를 삼을 만한 소재들을 추려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거죠. 독자들 중에는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좀 더 과감한 이야기를 원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어찌됐든 제 고민은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갈 수 있게 하는 거였으니까요.




돈의 노예가 되는 삶

금융가의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돈을 모니터의 숫자만으로 이리 저리 옮기면서 더 큰 돈과 수익을 추구한다. 그러는 사이 점차 욕망의 부피는 끝없이 커져버린다. 작가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그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려대학교와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MBA를 수료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데요. 가정환경은 어떠했나요.

솔직히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어요. 재벌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어도 부족함 없이 살아왔어요. 하지만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해서 계속 잘살아 온 것만은 아니에요. 우여곡절도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물질적으로 큰 구애를 받지 않았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생활을 위해 글을 써야 했다면 아마 다른 일을 택했을 거예요.

그럼에도 주인공인 조익현에 대한 묘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네요. 시골에 부모님을 부양해야하는 가난한 시골마을 출신에 대한 심리를 잘 알고 계시는 듯 하던데요.

조익현이라는 인물은 이런 저런 간접경험을 통해서 만들어 낸 인물이에요. 물론 조익현이 점차 돈에 노예가 되고 처음에는 몇 억 원에서 백억 원까지도 욕망하게 되는 과정은 실제로 제가 경험했던 것이고요. 제가 일을 했을 때는 끝을 몰랐던 것 같아요. 사실 그 정도면 꽤 돈을 잘 버는 것임에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뿐이었죠.

실제 법인 브로커 일을 할 당시 회의가 느껴졌던 경우는 없었나요.

난 열심히 하는데 고객이 날 알아주지 않는 경우죠. 보고서를 보여줘도 그보다는 ‘나와 오늘밤 어떻게 재미있게 놀거냐’며 접대에 더 흥미를 가지는 사람도 있어요. 또 ‘난 서울대 출신 보고서밖에 안받아’ 아니면 ‘난 10년차 브로커들 보고서밖에 안받아’라는 식의 태도로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동료들끼리 종종 우스갯소리로 했던 얘기가 당구공으로 그들의 머리를 깨버리고 싶다는 거였어요. 학교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모두에게 무시를 당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좌절감이 있었어요.

부티크를 설립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나름대로의 야망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엄청난 야망을 갖고 있었죠(웃음). 일단은 그 당시에 저의 가치척도로 성공의 기준은 ‘남보다 많이 버는 것’이었어요. 물론 부모님의 충고를 통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죠.

부모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부모님은 평범한 삶을 살길 원하셨어요. 그렇게 돈을 쫒는다고 세상을 다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셨죠. 그전까지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무언가를 계속 뛰어넘고 싶었거든요. 제 선배들 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오만함도 있었어요. 그런 욕망이 돈의 액수에 집착하게 한거죠.

책에서 명시했듯 비합법적인 일이었는데, 도덕적인 갈등은 없었나요.

글쎄요. 고민이나 갈등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이것으로 해서 내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못 사는 사람이 더 못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죠. 불법과 합법을 나누는 기준은 ‘세금을 내느냐, 안내느냐’ 문제밖에 없어요. 물론 세금을 안내는 건 죄가 맞아요. 하지만 저는 그 시장에서 피라미에 불과했어요. 사실 부티크를 운영하면서도 ‘나보다 더 큰 손이 많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던 것 같아요.

부티크를 운영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맛봤다고 하셨는데, 돈 앞에서 인간은 가장 본연의 모습을 보이는 듯합니다. 깨달은 것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스스로한테 멈추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그러다 문득 ‘아 이대로 가다가는 둘 중에 하나구나’ 싶었죠. 여의도에서 대자산가가 되던가 아니면 제 첫 소설 『트레이더』처럼 도망자가 되던가 였어요.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차라리 지금 멈추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굴려야 되는 돈이 1백억 원을 넘어 5백억 원, 1천억 원까지 올라간다고 하면 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왜 그만 두냐고 더 해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그런 유혹을 쓴물을 머금는 심정으로 이겨냈어요.

그런 생활은 보통 사람은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본인 스스로 느끼기에 지금 생활은 어떤가요.

즐거워요. 정말 즐거운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죠. 물론 이전에도 일은 즐겁게 했지만 한편으로 쓰디쓴 것도 적지 않았거든요. 수익이 올라가고 떨어지는 것에 10초 단위로 희비가 엇갈렸으니까요. 지금은 그때보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식, 언젠가는 모두 잃는다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면서 재테크는 필수가 됐다. 급격한 양극화 속에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해지는가 하면,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금융 전문가들은 주식과 펀드로 자산의 포트폴리오를 만들라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 변치 않는 사실은 주식해서 돈을 벌었다는 사람보다 잃었다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복잡해지는 금융 시스템 속에 서민들은 왠지 봉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샐러리맨 중에는 주식과 펀드로 일확천금의 재테크를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요. 하지만 경험자들 대부분은 시간의 문제지 결국 돈을 잃게 된다더군요.

동의하는 바입니다. 일반인이 주식을 한다는 건 타짜와 카드게임을 하는 것과 같아요. 자기 일과 재테크를 병행하면서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전문가가 되긴 어려워요. 모니터 너머의 상대방은 그 일만 20년 동안 한 사람이거든요. 스스로가 재미있어서 공부를 하고 정말 ‘내 돈을 지켜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없이 시작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죠. 보통 많은 사람들이 ‘동료가 월급 200만 원으로 한번에 400만 원을 벌었다’는 소리에 혹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시작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성공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렇다고 재테크를 포기할 수는 없는데요. 조언을 해주신다면?

재테크를 위해 은행이나 증권사의 PB센터라는 곳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사실 저는 그 사람들이 일종의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금융업은 모든 사람이 약간의 사기성을 갖고 있는 하는 일이거든요. PB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온화한 사기꾼이죠. 그들이 쏟아내는 말든 거의 듣기 좋은 이야기뿐이에요. 내가 알고 싶은 걸 물어봐서 대답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쓰디쓴 얘기까지 해주지 않거든요. 조언을 하자면 PB를 한명만 알면 안 된다는 겁니다. 최소한 다섯 명은 알고 있어야 되요. 또 내가 채권을 공부한다고 하면 채권전문가를 따로 알아야 되는 거고요. 사실 PB들이 다 아는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요. 그저 재테크 책을 보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죠. 정말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솔직히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황금알을 낳는 법을 안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자기만 알면 되지 왜 굳이 책으로 내겠어요. 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이전 정부에서는 몇 차례 외환위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이 선진화 됐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과 정보는 한쪽으로 몰리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게 문제라고 보지는 않아요. 물이 한쪽으로 쏠리는데 그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죠. 그 흐름에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한정된 정보에 한정된 스토리를 가지고 내 돈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 흐름을 알고 있지 않으면 실패는 불 보듯 뻔합니다. 그 흐름은 천년이 지나고 바뀌지 않을 거예요.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당연한 이야기에요. 이건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에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거든요. 물론 경제랑 금융은 다르기도 하고요. 금융을 공부하려면 첫 번째는 ‘내 돈을 어떻게 지킬까’, ‘연금이 15만 원씩 빠져 나가는데 왜 아무런 혜택을 못 받을까’ 그런 것에 대한 공부부터 해야 돼요. 분노할 필요도 없어요. 어떻게 해야 손해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살아남는 다는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제 책은 다른 인문, 경제 소설과 다르게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미없는 소설은 쓰지 않을 거라는 게 제 각오입니다. 앞으로는 장현도의 소설은 모르는 세계의 스토리를 재미있게 담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게 목표에요. 단 ‘배보다 배꼽’ 식의 확대 해석은 안 해주셨으면 해요. 그냥 소설 그 자체로 봐주신다면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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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어느 신입사원의 위험한 머니 게임장현도 저 | 새움
근사한 증권가 엘리트의 삶을 꿈꿨지만, 소심한데다 연줄까지 없어 낮은 인센티브를 한탄할 뿐인 신입 브로커 조익현. 그는 손잡는 순간 막대한 이익금을 얻게 된다는 수수께끼의 인물 ‘번호표’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자취방 월세를 내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그는 번호표를 만나는데……. 평범한 청년에게 다가온 뭉칫돈의 유혹! 과연 인생 역전의 기회인가, 아니면 파멸로의 초대장인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갸루상’ 박성호 “최종 목표는 50세까지 개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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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란 결코 남이 자신의 방법을 납득할 때까지 무작정 시간을 들여 들이미는 것이 아니다. 남이 납득할 만한 무언가가 나올 때까지 스스로 변화하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끈기다.”『웃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인터뷰어 위근우의 말 中

남들을 웃기는 것만큼 ‘끈기’있는 일이 또 있을까. 상황을 설명해주는 지문, 숨소리까지 미세한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음을 잡아주는 악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스타일리스트의 ‘분장’에 마냥 의지할 수도 없다. 오롯이 본인의 아이디어와 끊임없는 노력만으로 평가되는 냉정한 세계가 ‘코미디’다. 그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은 ‘개그맨’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 KBS <개그 콘서트>의 대표얼굴 박성호, 김준호, 김원효, 최효종, 신보라가 인터뷰어 위근우와 함께 1년 전부터 기획하고 집필한 『웃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코미디언의 말간 이면을 담아낸 책이다. 지나가버린 개그맨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책이 아니라 ‘웃음을 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라는 철학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고 있는 ‘현역 코미디언’들의 이야기다. “개그맨들 이야기면 재미있겠네”라는 일반적인 통념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딱! 노력한 만큼만 웃길 수 있다”는 결코, 우습지 않은, 꽤나 치열한 코미디언들의 삶이 당신의 조금은 성급한 선입견을 송두리째 흔들어 줄 것이다.




후배들 보며 자극 받는 요즘

『웃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는 책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박성호, 김준호, 김원효, 최효종, 신보라 다섯 명이 모인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지금 <개그 콘서트>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 최고참, 중간 급 선배, 신인에서 한 명씩 뽑다 보니 이렇게 다섯 명의 구성원이 모이게 된 거죠. <개그 콘서트>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선배와 후배의 호흡이 중요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 책도 그런 조합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책이에요. 어떻게 보면 제 자리에 김대희 씨가 들어갔어도 좋았을 텐데요. 이 책의 기획자 분이 저를 좋게 보셨는지 저까지 다섯 명이 모이게 되었네요. 그때는 ‘갸루상’으로 인기를 얻었을 시기도 아닌데 말이죠. (웃음)

책을 살펴보니, 질문에 답하는 인터뷰 형식이더라고요. 답변이 곧 책이 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인터뷰와는 달리 고심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책이라고 특별히 준비한 건 없어요. 인터뷰 질문지를 받아서 답변을 준비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면 답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진실되지 않은’ 그러니까 ‘조금은 가식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스스로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게 책을 읽는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거든요. 멋지게 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요(웃음). 정말 100%! 솔직하고 편안하게 인터뷰에 임하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인지, 정말 박성호 씨가 옆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기분이더라고요. 책을 읽은 동료, 주변 분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일단은, 16년 개그맨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나온 책이라 정말 특별해요. <개그 콘서트> 후배들도 많이 부러워하더라고요. 주위 친?인척에게 ‘책 출판을 축하한다’라는 격려의 메시지도 많이 받았어요. 반응은 최고였죠, 뭐.

책에 함께 실려있는 후배 김원효, 최효종, 신보라씨의 인터뷰를 읽어 본 소감은 어땠나요? 특히, 라이벌인 김준호씨의 인터뷰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인터뷰를 각자 했으니, 책이 나오기 전까지 서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몰랐어요. 후배들의 경우에는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정말 새롭고 기특하더라고요. 김준호 씨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더군요. ‘정말 욕심이 많은 친구구나… (웃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칫하면 파랑새만을 쫓는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걱정했죠(웃음). 농담이고요. 의지와 열정, 무엇보다 후배 사랑이 대단한 친구에요.

그럼, 본인은 김준호 씨에 비해서 ‘욕심’이 없는 편인가요?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전혀, 욕심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고요. 계속 욕심을 내게 되면 그만큼 쉽게 불행해진다는 거죠. ‘욕심’이라는 게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전 항상 지금, 그리고 오늘의 일과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많은 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파랑새만을 쫓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바로 내 옆에, 정말 가까이에 존재하는 법이거든요. 그런 조언 아닌 조언을 준호 씨에게도 해주고 싶네요(웃음).




개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첫째, 연기는 둘째

책을 읽어보니 놀라웠던 건 ‘콧물 그리는 방법’, ‘쟁반 맞는 방법’, ‘김 붙이는 방법’에도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과 공식이 존재했다는 거예요. 철저함은 물론이고 연기력까지! 박성호가 생각하는 ‘개그맨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개그맨의 조건은 무엇보다 개그를 사랑해야죠. 너무 단순한가요? (웃음) 연기력은 나중 얘기에요. 무대에 익숙해지면 연기는 자연스럽게 늘어요. 그리고 요즘은 개성시대잖아요. 연기를 못하는 것도 충분히 본인의 개성이 될 수 있어요.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개그를 보여주면 계산된 행동이나 공식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본질은 개그를 사랑하는 것, 그 순수한 마음 하나만 있으면 결국 시청자들도 그걸 알아보고 웃어줄 거라는 거죠. 물론 인기, 돈, 명예를 위해서 개그맨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오래가지 못해요. 지금 개그맨을 꿈꾸고 있는 친구들에게 ‘개그를 정말 사랑해야 개그를 오래할 수 있다.’ 그것이 곧 ‘개그맨의 조건’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책을 살펴보니, 예능보다는 다큐멘터리나 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평소 어떤 다큐멘터리를 즐겨보시나요?

<100분 토론> 같은 시사 프로그램이나 <역사 스페셜>을 즐겨봐요. 예능 프로그램보다는 삶에 가까운 프로그램들이 저에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 동안 ‘운동권 학생’부터 ‘남성인권보장위원회’에서 강기갑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했는데요. 개그 포인트가 주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같은 삶에 가까운 멘트였거든요. 지금도 동물로 분장을 하고 웃음을 드리지만 그 안에는 ‘사회 풍자’가 녹아있어요. 최근에는 미스터리, 역사 관련 프로그램들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앞으로도 쭉, 삶과 가까운 개그를 하고 싶어요.

팀 내에서 ‘박 작가’로 불릴 만큼 글 쓰기에도 소질이 있으시다고요. 혹시 개그를 짜는데 영감을 주는 책이 있나요?

저는 시집을 주로 읽어요. 특정 시인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신춘문예 당선 시집을 년도 별로 쭉 찾아봤어요. 한 편의 시에 함축되어 있는 표현들을 읽다 보면 온 몸이 ‘찌릿’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개그라는 것도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간접적인 비유나 은유를 통해 전달되었을 때 그 웃음이 두 배, 세 배가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시와 개그는 나름의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활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웃음). 초등학생 시절에 어머니가 세로로 된 빽빽한 문학전집을 세트로 사오셔서 읽으라고 강요하셨거든요. 그 이후부터, 책과는 별로 친해지지 못한 것 같아요. 지금도 후회하고 있죠. 근데 이상하게 글 쓰는 건 또 좋더라고요. 개그를 짜면서 글을 자주 쓰고 있어요.


책의 마지막에 “50세까지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만큼의 행복은 없을 거예요”라는 말을 하셨는데요. ‘개그맨 박성호’가 앞으로 어떤 수식어로 대중들에게 기억되길 바라나요?

어떤 수식어나 인기를 바라면서 개그를 한다는 건 ‘욕심’ 같아요. 저의 최종 목표는 이 일을 계속하는 거예요. 조촐해 보일 수도 있지만,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웃음’을 드릴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하고 위대한 일이거든요.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개그소재를 찾아서 노력을 한다면, 수식어는 대중들이 알아서 붙여주겠죠.

마지막으로, 이번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 책을 통해서 브라운관 이면의 개그맨들의 솔직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에요. 그런 의도에서 기획된 책이기도 하고요. 저뿐만 아니라 김준호, 김원효, 최효종, 신보라 등 <개그 콘서트>을 대표하는 얼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100% 내추럴하게 담아냈어요. ‘개그맨이 결코 쉬운 직업은 아니구나’, ‘<개그 콘서트>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 이런 삶을 살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개그 콘서트>를 사랑해주시는 시청자 분들이나 개그맨을 꿈꾸는 친구들까지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일요일 밤마다 여러분의 지치고 힘든 한 주를 위로해 드릴 ‘웃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것만 알아주세요. 언제나 스마일!


[특집기사] <개그콘서트>의 개그맨들에게 주목하는 이유
http://ch.yes24.com/Article/View/2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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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박성호,김준호,김원효,최효종,신보라,위근우 공저 | 예담
『웃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이 프로그램의 위상을 이어가는데 큰 몫을 하고 있는 재기발랄한 신인, 박성호, 김준호 등 중견 개그맨과 김원효, 최효종, 신보라의 인터뷰집이다. '개콘'의 대표 인기 개그맨인 이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개그 철학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낱낱이 털어놓았다. 『웃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이 프로그램의 위상을 이어가는데 큰 몫을 하고 있는 재기발랄한 신인, 박성호, 김준호 등 중견 개그맨과 김원효, 최효종, 신보라의 인터뷰집이다. '개콘'의 대표 인기 개그맨인 이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개그 철학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낱낱이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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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아파트를 아시나요? - 구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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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어디에서 만나면 좋을까? 안국역 앞 스타벅스? 인사동 골목 안에 전통찻집? 실용성을 따르자면 지하철 역 앞 카페가 편하겠지만 친구와의 공감대와 친밀감을 위해서는 전통찻집이 나을지도 모른다. 시끌벅적한 공간에서는 아무래도 삶의 고단한 이야기를 나눌 터, 옛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보다 감성적인 장소가 가는 것이 이야기의 질을 높인다. 공간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스타벅스에서 나누는 대화와 인사동 한옥 찻집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다르듯,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공간에 따라 하고 싶은 이야기, 느끼는 감정이 달라진다.

꿈, 밥, 일, 책 같은 한 글자짜리 단어를 좋아하는 구본준 기자는 스스로를 “시험에 안 나오는 것들에 관심이 많은 기자”라고 칭한다. 한때 미대지망생이었고 만화 관련 저서도 여러 권 집필했고 허영만의 『각시탈』이 복간될 때 해설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10여 년 넘게 자칭 타칭 ‘건축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니, 평범한 프로필은 아니다. 『한국의 글쟁이들』, 『서른살 직장인 책 읽기를 배우다』등 글쓰기 관련 책도 펴냈으나 “제가 글 잘 쓰는 기자는 아니에요”라고 겸손해하는 구본준 기자. 그는 시중에 나오는 건축 관련 도서는 모두 사 읽을 정도로 ‘건축광’이지만 전문 건축인과 일반인 사이의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하는 데 만족한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을 쓰게 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건축을 좋아하면 답사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집 이야기를 알게 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집을 보면 집이 사람처럼 느껴져요. 결국 그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이 확연히 달라지는 거죠. 평범해 보이는 건물도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을 듣고 보면, 그 건물이 뿜는 주파수가 달라져요.”어떤 사람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 공간의 의미가 달라지듯, 건물의 역사를 알고 보면 건물이 풍기는 냄새, 온도가 달라지고 여운의 깊이도 다르다.




건축,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극장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건축교양서이지만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술술 읽힐 책이다. 쉽고 재밌고 신선하며 마음에 작은 물결이 일렁인다. 책에 등장하는 12개의 건축물을 왜 나는 몰랐을까? 봄날에는 이 곳들을 한 번씩 둘러보자고 단짝 친구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이다. 건축전문기자이니만큼 인터뷰 장소를 세심하게 골랐다. 낙점된 곳은 기둥이 없는 널찍한 카페이자 복합문화공간인 무대륙.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장소가 마음에 드는지 구본준 기자에게 물었다.

“흥미로운 공간이에요. 아무래도 용도를 바꾼 건물인 것 같은데요. 바뀌면서 새로움과 낡음이 남아 있어 흥미롭네요. 이런 공간을 좋아해요. 낡았다기보다 세월이 축적된 분위기가 주는 감흥 같은 게 있죠. 건축은 기억을 담는다고 생각해요.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 공간을 매개로 떠올릴 때가 많잖아요.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동창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초등학교 시절에 자주 갔던 곳, 학교를 가면 옛날의 추억이 더 생생하게 떠오르잖아요. 그래서 오래된 건물이 소중한 거 같아요. 다양한 시간,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들이 모두 담겨 있으니까요.”

구본준 기자는 홍대를 좋아한다. 주택가와 상업지역이 묘하게 섞여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강남에 가도 새로운 건물, 멋진 건축들이 많지만 걷고 싶지는 않다. 강남의 길들은 자동차 스케일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걷는 데는 알맞지 않은 거리다. 구본준 기자는 사람들이 알맞게 복작대고 부대끼는 재미가 있는 곳, 홍대와 인사동 길을 걸을 때 재미를 느낀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의 상당 부분도 홍대에 있는 한 북카페에서 썼어요. 카페라는 공간을 좋아하는데 알맞게 공적이면서 알맞게 사적인 장소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어느 정도 작업해야 한다는 강요도 받으면서 자유로움, 한가로움도 보장 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 책도 주말마다 카페를 전전하며 쓴 책이에요.”

건축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역사, 지리가 새롭게 보였다는 구본준 기자. 취재를 하면서 또 사적으로 답사를 하면서 혼자만 알기엔 아까운 건축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한 책이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이다.

“아무래도 찾아가는 건물들이 건축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물이 많은데, 유명한 건축물을 보러 갔다가 의외의 건물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사실 제가 찾아가는 그 건물은 제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의 건물은 될 수 있잖아요. 소유권은 한 사람이지만 그 건물이 미치는 영향, 그 건물이 있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주는 여운은 한계가 없죠. 내 마음의 집이 그 곳에 있어서 그 거리가 좋아지고 또 다시 찾아가고 싶고…. 그런 감정들이 있잖아요. 책에 소개하는 여러 집은 시대도 다르고 나라, 스타일도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 자체에요. 그 집들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 쓰게 됐어요.”




슬픔이 기쁨이 된 건물, 뼈아픈 도시개발

집에 담긴 이야기를 알게 되자 건축이 다시 보였다. 그 이야기는 한 사람, 한 도시, 한 나라가 가진 인생 그 자체였다.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슬프기 짝이 없는 사연도 있었다. 구본준 기자는 “오육칠정이 스며든 건축은 희로애락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극장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의 서문을 여는 희(熹)의 첫 번째 건축물은 ‘기쁨으로 승화된 슬픔,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아름다운 도서관’ 이진아기념도서관이다. 어째,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건물이라고 말했을까. 이유인즉, 이진아기념도서관은 꿈조차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딸 진아를 위해 아버지가 사재 50억 원을 털어 사회에 기부한 도서관이다. 이상철 씨의 기부가 만들어낸 이진아기념도서관은 개인의 비극이 낳은 슬픈 기부였지만 공공도서관을 개인이 사회에 기증한다는 점에서 한국 기부사에 남을 이야기였다. 구본준 기자는 이진아기념도서관이 완공되기까지 기부자의 뜻, 건축가의 구상과 고민, 변경된 설계 등을 책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당시만 해도 도서관은 네모난 열람실이 반복되는 개성 없는 건물들이 대부분이었죠. 이진아기념도서관 건축을 맡은 건축가는 ‘이진아기념도서관’이 공부하는 곳보다 책을 읽는 공간으로 쓰여지길 바랐어요. 쉼터 같은 도서관이죠. 그래서 기부자인 아버지와 담당 공무원을 설득해서 진정 책을 읽는 공간으로 도서관을 짓기로 했죠. 개관식 날, 기부자와 건축가는 어느 한 아주머니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는데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생겨 너무 좋지만 그래도 진아 양이 살고 도서관이 없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진 쪽지와 도서관이 완성되기까지의 모습을 1년여 동안 찍은 사진 84장이 들어 있었어요. 무척 감동이었죠. 아버지는 딸이 생각날 때마다 이곳을 찾고 있어요. 기부자 아버지가 겪은 슬픔은 건물이 됐고 그 건물은 다른 이들에게 기쁨이 된 거죠.”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이야기가 담긴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은 누군가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건축에는 이야기가 담기며,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람에게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또 다른 행위를 하도록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둥굴레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세상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건축만큼 아름다운 건축은 없다. (p.29)
세 번째 장 애(哀)에서는 봉하마을 묘역, 시기리야 요새, 아그라포트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아파트, 세인트루이스와 서울에서 벌어진 비극’ 프루이트 아이고와 세운상가를 소개했다. 구본준 기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건축가는 자신의 대표작이 헐린 아픔을 겪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설계한 일본계 미국인 건축가 미노루 야마사키. 자신의 작품이 인류 최악의 테러 대상이 됐으니 그는 건축 역사상 가장 불행한 건축가였음에 틀림없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출세작인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지어진 ‘프루이트 아이고’라는 아파트 단지가 훗날 범죄의 온상이 되어 1972년 폭파 철거되는 역사를 마주해야 했다.

“한국에도 불행한 아파트가 있어요. 한국 최초의 도시재개발 사업이었던 세운상가죠. 세운상가는 건축적으로 대형 건물로 도시를 바꾸자는 현대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도로 출발했어요. 아래는 상업시설, 위는 고급 아파트인 복합건물 여덟 채를 지어 서울의 동맥인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를 관통해 잇는다는 거대한 구상이었어요. 이 세운상가를 설계한 이가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이었죠.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어요. 서울 구도심을 살리기는커녕 종로에 치명상을 입혔죠. 너무 큰 상가 건물이 동서로 이어지는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를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양쪽에 극심한 단절이 생겼어요.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부에 세운 상가란 건물이 폭탄처럼 떨어져 주변이 초토화된 거죠.”

대한민국의 60년대 말, 유명 연예인과 고위 공직자, 사회 명사들이 대거 입주해 화제를 모았지만 세운상가는 흉물 취급을 받다가 2008년 철거된 후 현재 다시 재개발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해법이 요원한 상태다.

여전히 소득이 낮은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를 지어 돈 많은 이들로 채우는 재개발 방식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고, 이명박 오세훈 두 시장 시절에는 ‘뉴타운’이라고 이름만 바뀌어 더욱 성행했다. 세운상가는 사라졌어도 한국 대도시의 도시계획은 좀처럼 나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말했다. 그러나 잘못된 도시계획은 늘 비극으로만 되풀이된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야 하고 더욱 고민해야 한다. 프루이트 아이고와 세운상가란 건물은 사라졌어도 그 이름은 여전히 우리 곁에 뼈아프게 남아 있다. (p.232~233)
네 번째 장 락(樂)에 소개된 ‘세상에서 가장 작아 가장 커진 집’ 충재는 구본준 기자가 특별히 좋아하는 공간이다. 가장 기본적인 조선시대 건축 디자인의 원형을 보여주는 ‘충재’는 조선시대 문신 권벌의 고택이다. 대학자,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작은 집을 지었다. 극한의 절제를 보여주는 충재는 규모, 구조, 형태도 모두 최소한이다. 심지어 집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경관까지 아꼈다. 그럼에도 충재의 공간감은 다른 집보다 훨씬 크고 역동적이다. 작더라도 갖춰야 할 것들을 모두 갖췄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공간의 느낌이 살아난 것이다.

“집은 작을수록 만들기 어렵다고 해요. 충재는 정신의 가치를 담았기 때문에 집은 작지만 의식의 우주는 어마어마하게 큰 거죠. 조선 성리학자들의 건축이 위대한 이유가 규모와 장식미가 아니라 겸손함이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존재였지만 절대 오만하지 않았죠.”

집은 주변환경과 하나가 되어 완성된다. 10년을 구상해 세 칸 초가집을 짓는데, 그 한 칸으로도 혼자 살기 충분하니 다른 한 칸에는 시원한 바람을, 나머지 한 칸에는 저 밝은 달까지 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이보다 정신적 스케일이 큰 집이 또 있을까. 이 아름다운 시가 그대로 집이 된 것이 충재다. 충재는 사람 한 명, 작은 집 하나에서 시작된 건축과 정신의 동심원이 우주로 퍼져 나가는 성리학적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 작은 집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과 즐거움은 그 어떤 집보다도 크다. (p.323)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나오는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셨다고 말해요. 그만큼 건축이 대중화되지 않았다는 거죠. 건물을 본다는 것, 건축도 곧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증명하는 매개가 될 수 있죠.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통로가 건축물이 될 수 있고요.”




좋은 건축? 만져 보고 싶은 느낌을 주는 건물

일본 사람들은 4인 가족이 25평 이상 집을 가지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이 너무 넓어지면 청소하는데 다른 사람 손을 빌려야 하고 그러면 벌써 자기 집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3년째 용인 동백 땅콩집에서 살고 있는 구본준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파트에서 살다가 단독주택에서 사니까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을 아직도 받죠. 그런데 다른 거 별로 없어요. 저는 마당도 작은 게 좋아요. 마당이 넓으면 좋을 수도 있지만 관리도 어렵고, 마당이 작기 때문에 더 소중할 수도 있잖아요. 땅콩집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오두막 같은 정자가 있는데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해요. 온 동네 아이들이 거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가죠. 높은 정자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 도시 아파트에서는 누리기 힘든 것들이잖아요.”

좋은 건축이란 무엇일까. 구본준 기자는 “딱 보았을 때 감동스러운 것보다 며칠이 지나서 기억에 남는 건축, 만져보고 싶은 느낌을 주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순간의 감격, 감탄은 잊히기 마련이다. 두고두고 떠오르고 어떤 질감일지 궁금해지는 건축, 그것이 구본준이 말하는 ‘좋은 건축’의 정의다. 여행을 가면 수많은 건축을 보지만 막상 ‘건축’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60년대 지어진 국립극장, 80년대 지어진 예술의전당, 그리고 새롭게 짓기 시작하는 최신 문화시설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듯이 낯선 여행지에서도 건축물을 보며 시대를 읽을 수 있다.

“건축이 특별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상 위의 포스트 잇을 좀 더 이쁘게 붙여볼까? 하는 것도 건축이라는 행위가 될 수 있고 벽지를 바꾸는 일도 건축이 될 수 있죠. 그러면서 나의 취향을 알아갈 수도 있고요. 개인적으로 조금 거창한 꿈을 말하자면 한국건축박물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서민들의 주거 양식을 모아놓은 달동네 판잣집부터 다가구주택, 아파트까지. 일상 속에서 너무 친숙하지만 당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가 담긴 건축들이니 나중에 보면 민속촌이랑 뭐가 다르겠어요.”

건축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달라진 점에 대해 묻자, 구본준 기자가 답했다. “혼자 잘 논다는 것과 낯선 건물에 들어가도 화장실을 잘 찾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상한 골목길을 남들보다 쉽게 간다는 점이 될까요?”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일상의 순간순간을 탐닉할 수 있다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반갑듯이, 익숙한 길을 걷다가 마주친 건물에게 말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분명 반갑게 자신의 역사를 들려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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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구본준 저 | 서해문집
집을 좋아해 건축 전문 기자가 된 저자 구본준은 여러 매체와 블로그를 통해 건축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을 꾸준히 해왔고, ‘땅콩집’을 짓고 살며 집 짓는 이야기를 엮어낸 『두 남자의 집짓기』라는 책으로 ‘땅콩집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건축에 대한 저자의 오랜 애정이 녹아든 책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여러 건축들이 품고 있는 마음속 이야기를 오롯이 담았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건축물들의 뒷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독자들도 건축에서 인생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나보다 잘난 자녀의 미래를 왜 부모가 결정하나? – 고성국,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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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만들어진 동기가 무척 흥미롭다. 정치평론가 고성국과 인문학자 남경태는 1980년대 초 백산서당 출판사에서 기획의원과 편집부원으로 만났다. 고성국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이 작당해 만든 책 때문에 출판사 사장이 늘 도망 다니거나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고. 지난해, 20년 만에 남경태와 조우한 고성국은 ‘남경태는 같이 일해볼 만한 친구인데, 작업 한번 해볼까?’ 생각했고, 이런 작은 사심이 ‘고박과 남쌤이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인생론 시리즈’ 『덤벼라, 인생』『열려라, 인생』을 탄생시켰다. 남경태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이게 책으로 나올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선배 고성국과 대화는 치기 어렸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데 불씨를 지폈다. 현재 불교방송 라디오 <고성국의 아침저널>을 진행하고 있는 고성국은 때때로 “제 인생도 좀 열어 주세요”라는 청취자들의 문자 메시지를 받곤 한다. 10대를 염두에 두고 쓴 책 『열려라, 인생』인데 50대 중년의 청취자도 인생이 좀처럼 열리지 않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열림’의 의미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청소년을 불문하고 우선 『열려라, 인생』을 한번 펴본다면 꽤나 흥미로운 자기 탐색에 들어설 수 있다.

사랑, 권력, 죽음, 정의, 공부에 대해 이야기한 『덤벼라, 인생』에 이어 2편인 『열려라, 인생』에서는 우정, 자유, 관용, 직업, 행복에 대해 고박과 남쌤이 대화를 펼쳤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두 사람은 “책은 진지하고 어딘가 고고해야 하며, 가르침과 훈계, 교훈을 줘야 한다”는 강박증을 버리고 그저 독자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던진다. ‘너도 우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니? 우리도 그랬는데’라는 단순하고 가벼운 질문을 슬쩍 내민다.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조언은 일찌감치 갖다 버린 지 오래. 인문학자 남경태는 심플하게 말한다. “음악이든 운동이든 그냥 막연히 보면 수십 년을 봐도 초보적인 재미밖에 모르는데, 관심을 기울이면서 보면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어. 행복도 그렇겠지. 관심을 기울일수록 행복의 농도가 진해질 거야.” 『열려라, 인생』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도 다르지 않다. 다섯 가지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인생의 농도가 꽤 진해질 수 있다는 것. 고박과 남쌤이 출간을 기념해 <채널예스>와 마주한 자리에서 나눈 『열려라, 인생』의 후일담을 사설 없이 옮긴다.




가끔씩 자기 성찰을 해보는 건 어때?

남경태 아무래도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아. 청소년 때 자유에 대해 진진하게 고민했거든. 청소년기에 나는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진보적인 학생도 아니었는데 길에서 장발단속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 정치적 독재에 대해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답답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 말라는 것 좀 없었으면 했지. 정치보다 문화적으로 더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어. 지금의 청소년들도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어? 청소년이라는 처지에서의 자유, 현실에서의 부자유, 그런 고민들을 하겠지. 보통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는 현실적인 의미고 철학적 자유는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하는데, 청소년 당시에도 두 가지 측면에서의 부자유를 느꼈지. 『열려라, 인생』을 통해 ‘자유’에 대해 풍요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고성국 내가 10대일 때를 돌이켜보면 우정, 사랑 이런 걸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 나는 10대 때 자유, 평등 이런 개념은 잘 안 잡혔어. 성인이 돼서야 자유를 고민했지. 우정,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깊은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지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 사실 내 초등학교 성적표를 보면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 지금 방송도 진행하고 있는데 설마 고성국이 그랬겠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할 수 있겠지만 지금도 나는 낯선 사람이랑 편하게 이야기를 못 나눠.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는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겠지만 나는 티가 나는 거지. 그래서 성격 안 좋다는 소리도 종종 들어(웃음). 항상 내가 변명처럼 하는 이야기가 ‘친구 백 명 있으면 뭐하냐, 목숨이랑 바꿔도 좋을 한 명의 친구가 있는 게 낫지’인데, 이런 이야기도 있잖아. 아들이 친구에 죽고 못 살자 아버지가 그럼 한번 시험을 해보자면서 살인사건을 일으킨 것처럼 꾸며서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아들 친구들은 다 도망갔고 평소에 친구 하나 없어 보였던 아버지의 친구만 발벗고 나서서 도와줬다는. 난 그런 친구를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지. 하여튼 난 ‘우정’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게 가장 기억에 남아.

고성국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공부를 가장 잘했던 나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야. 내 지적 능력이 최고도로 발달했던 때 같아. 중3 1년 동안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밥 먹는 시간에도 책을 파면서 공부했는데 영어도 그 때 제일 잘했지. 지금은 발전은커녕 오히려 퇴조하는 거 같아. 인생, 사랑 죽음. 우정 이런 고민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중학생이 되면서 집중적으로 고민했어. 14, 15살 때 가장 강렬하게 나를 성찰적으로 돌아봤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열려라, 인생』이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을 거야. 수준과 형태가 다를 뿐이지 모두들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잖아. 나이가 들면서 사회의 상투성에 물들어가면서 하루하루 별 고민 없이 사는 어른들에게는 좀 낯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남경태 그렇지. 나이가 들면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진 않으니까. 내가 중1 때, ‘우주소년 아톰’이 나왔는데, 나름 어릴 때도 조숙하고 체면을 차리는 성격이었는데도 친구네 집에 가서 가족들이 밥 먹는 틈 바구니에서 그걸 보고 왔어(웃음). 요즘 애들이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다고 문제라고 하는데,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똑같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조건이 달라져서 어쩔 수 없다는 거지. 얼마 전에 버스를 타는데 여중생이 카톡을 하다가 친구한테 전화를 걸더라고. 뭐 화해하자 이런 내용이었던 거 같아. 참 보기 좋은 결말이긴 한데, 우리 어릴 때를 비교해보면 친구랑 학교에서 싸우면 내일 등교할 때까지는 친구 얼굴을 못 봤잖아. 전화를 할 수도 카톡을 할 수도 없었으니까. 소통 면에서는 굉장히 나쁜 시대였는데 성찰적 측면에서 보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어. 뭐 하루 동안 생각을 하면서 친구랑 더 크게 싸울 수도 화해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성찰의 기회는 생기니까. 하지만 당장 카톡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지금 이런 매체 시대에 갖다 놓으면 누구라도 지금 상황에 적응하게 될 거야.

고성국 나처럼 휴대폰을 열심히 안 하면 성찰하게 돼(웃음).

남경태 소수의 차원이지, 다수한테 그럴 순 없으니까.

고성국 휴대폰 안 쓰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아. 나는 권하고 싶어. 휴대폰을 좀 꺼두자고. 요즘은 핵가족 사회라서 가족들끼리 모여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식당에 가도 가족들과 함께 있을 뿐인지 다들 자기 휴대폰 보기만 바빠.

남경태 맞아. 지하철도 재밌어. 다들 휴대폰만 보고 있으니까 맞은편에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어도 눈 마주칠 일이 없다니까(웃음). 나는 사람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데, 저 사람들은 뭐 하러 가는 걸까? 궁금해하기도 하지.

고성국 집에서는 전파를 방해해서 휴대폰이 안 터지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어.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템플 스테이를 많이 권해. 아주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을 한번 끊어보는 거지. 현대문명을 근원적으로 부정하진 않지만 가끔은 끊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남경태 조금 다른 의미일지 모르겠지만, 책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비주얼 메시지가 강한 매체라는 생각이 들어. 어릴 때 무협지를 보면 늘 절세미녀가 나오는데 영화화가 된 작품을 보면 절세미녀가 아냐. 내 머릿속에 세팅된 그림을 영화감독이 구현할 수는 없는 거지. 영상매체가 확실히 강렬하지만 텍스트라는 매체가 주는 성찰은 상당히 깊고 강력해. 형 말처럼 소통도 중요하지만 강제성을 띠더라도 가끔은 소통을 끊고 자기 성찰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견해를 만들자

고성국 내가 20대 후반, 박사과정을 밟다가 대학강사를 하던 중에 감옥에 갔어. 나름대로 사회과학적으로 훈련이 된 상태였지. 그런데 감옥에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읽게 됐어. 괴테가 소년기 자기 삶을 쓴 건데 아마 나이가 열다섯 정도 된 중학생이었을 거야. 이 친구가 지적 방황을 하고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는데, 난 책에 나오는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고 책도 읽은 게 하나도 없는 거야. 나름 대한민국의 괜찮은 정규학교를 나와서 진보적인 사회과학자라도 자부했던 소장학자가 독일의 열다섯 살 소년의 지적 수준에도 못 미치는 거였지. 그 때 굉장히 부끄러웠어. 미학은 20대에 승부를 보고 사회과학은 늦게 숙성된다고 하지만, 독일의 열다섯 소년과 비교할 수 없는 처지였지. 그 때 다시 고전을 읽기 시작했어. 다이제스트로 읽었던 고전을 넘어서는 기회가 됐지. 지금의 10대들에게 그런 걸 심어주고 싶어. 토익점수, 수학경시대회 1,2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글로벌시대로 나가려면 보편적 가치, 교양을 청소년 시기에 습득해야 한다고. 사실 『덤벼라, 인생』『열려라, 인생』을 쓰게 된 것도 그런 문제의식을 표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남경태 마찬가지야. 20세기 초 하이젠 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보면, 10대 후반의 소년이 캠핑에 가서 하는 이야기의 수준이라는 게,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 개인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게 동양과 서양이 학문의 출발점부터 달랐다는 거야. 제자백가시대 동양의 진리는 시험관이 이미 알고 있어. 네가 이걸 알았냐 모르냐가 아니라 이미 시험관이 정한 답을 찾으라는 거지. 하지만 서양은 차이를 발견하고 철학을 구성해 견해를 만들라고 해. 오피니언을 내라는 거지. 우리나라 학생들이 유학에 가면 1학년 때 배우는 팩트 중심의 수업은 잘하는데 2학년이 되면 토론 중심의 수업이 되니까 잘 못 따라간다고 하잖아. 최근에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외국인 교수가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을 보고 두 번 놀랐다는 거야. 처음엔 영어를 너무 잘해서, 두 번째는 영어밖에 잘하는 게 없어서. 우리 교육 풍토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역사를 보면 학문부터가 차이가 있었던 거야. 극복을 해야지.

고성국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런 주제로 고민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던지는 것까지만 하고 싶어.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이 문제가 중요하니까 고민을 좀 해봐라’는 거지. 10대 어릴 때, 이런 문제에 열병을 앓아보지 않으면 인생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남경태 책에서 내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뭘 가르쳐주겠다는 생각은 없어. 부담을 지는 것도 싫고. ‘나는 이렇게 고민했는데 너는 어떠냐’ 이렇게 던져주고, 함께 고민해보자는 거지.




우리 시대에도 왈패는 있었지만

고성국 남쌤이랑 작업하면서 느낀 건데, 남경태는 참 솔직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솔직하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의미, 느낀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거든. 정형화된 틀 안에서 숙성시켜서 정제된 표현으로 말하지 않는 건,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느낌과 생각의 진정성이라고 할까. 거칠더라도 적나라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게 이 사회에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 내가 정치평론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정치인은 보통사람들과 비교해보면 겉과 속이 훨씬 달라. 평범한 사람도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지만 그 평범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지. 이 이중적인 성격, 생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야. 저런 아주 극한적인 상황을 소화할 만큼 특별한 DNA가 있는 건지, 그것을 넘어설 만큼의 권력의지가 있는 것인지. 정말 선택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직업이 아닌가 싶어. 때때로 나한테도 정치를 안 할거냐고 사람들이 묻곤 하는데, 나랑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정치를 할 수 있는 것 같아. 난 정치인의 이면을 보여줌으로 정치의 본질을 국민들이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 그래서 적도 많이 생기지만 반대로 통쾌하다는 말도 종종 들으니까.

남경태 고 선배는 방송을 많이 하니까 시청자나 청취자들로부터 피드백을 많이 받잖아. 일일이 다 모니터하는 편이야?

고성국 난 안 봐. 안 듣고 안 보는 거지. 나도 사람인데 악플에 영향을 받을 수 있잖아. 그리고 사실 난 컴맹이야. 아예 할 줄을 몰라.

남경태 그럼 중간에 사람들이 걸려서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건가?

고성국 그렇지. 기사는 보는데 댓글까지 찾아보진 않아. 할 줄도 모르고. 혹시 나를 공격하고 싶어서 악플을 다는 사람이 있는데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 어차피 난 안 보니까.

남경태 난 안 보긴 하지만 궁금하긴 하던데(웃음).

고성국 불교방송에서 라디오를 진행하는데 작가들이 청취자들의 문자나 시청자 게시판 글을 추려서 나한테 보내줘. 그런데 어느 날, 제대로 못 거르고 원고를 준 거지. 어떤 한 청취자가 ‘고성국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고 쓴 글을 나한테 줬는데 난 그런 글인지도 모르고 읽은 거야. 근데 그냥 넘어갈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내일 당장이라도 방송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지. 피디들이랑 작가들은 난리가 났고(웃음). 사실 그 청취자의 글이 심각한 의견도 아니고 거친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난 진짜 내가 편향적인 사고로 진행을 하고 있다면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건 방송인의 기본 자세가 아니니까.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말한 거고. 그 다음부터 작가가 원고를 잘 안 보여줘(웃음).

남경태 나도 가끔 방송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피디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모니터를 생전 안 하니까.

고성국 이런 의견들에 영향을 받아서 평정심을 잃고 방송하는 게 싫어서 못 보는 거야. 상처받지 않는다면 봐도 되겠지만 인간은 대부분 이런 데 약하잖아. 연예인들은 댓글 보다가 충격을 받아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자신이 없는 경우에는 안 보는 게 좋다고 봐.

남경태 비판과 비난은 한 끗 차이인 거 같아. 애정이 있는 비판은 감정이 안 상해. 하지만 말은 정중해도 아주 비난 같은 느낌이 들면 정말 기분이 나쁘지.

고성국 한 달 전에 어떤 독자가 편지를 보내왔어. 내가 인터넷을 잘 안 한다는 걸 아는 독자라서 우편으로 직접 라디오국에 보내준 거지. 예전에 내가 쓴 책을 읽었는데 오타가 있다고 무려 15군데를 발견해서 어떻게 고쳐야 맞는지를 몇 페이지에 걸쳐서 편지를 썼더라고. 정말 고마웠어. 한 달 가까이 주머니에 그 편지를 가지고 다니다가 오늘 마침 그 출판사 대표를 만나게 돼서 전해줬지. 이런 애정 어린 비판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같아.

남경태 애정이 바탕에 깔려 있으니 그런 거지. 정치기조가 다르더라도 바탕에 애정이 있으면 수용할 수 있는 거 같아. 어떻게 보면 침소봉대일 수도 있지만 우리 때도 왈패는 있었잖아. 돈 뜯는 동네 형들도 수두룩했고. 그런데 뭐랄까 돈을 뜯지만 휴머니즘 정신이 아주 없진 않았어. 상대방이 죽을 정도의 고통은 주지 않았지. 그런데 요즘은 정말 야비한 폭력을 가하잖아.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니까 죽으라는 이야기로밖에 안 들리는 거야.

고성국 나는 인류가 진보하고 있다고 믿어. 추상적인 이야기 아니라 구체적인 이야기야. 아버지 세대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해. 우선 내가 아는 게 더 많아. 그러면 나보다는 자식세대가 백 번 더 잘났어. 그러니 당연히 못난 나보다 백 번이나 잘난 게 분명한 자식의 미래를 왜 내가 결정해? 사회가 매우 잘못됐어. 인류가 진보한다고 믿으면 내 자식세대가 나보다 낫다는 것, 구체적으로 믿어야 해. 하지만 나보다 나은 자가 왜 깨어있지 않냐? 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않냐? 그렇게 야단치고 격려할 부분은 있어. 맨날 잠만 자고, 먹고 자고만 하는 그런 애들 야단쳐야지. 다만 일단 얘가 깨어서 뭔가 하고 있다면 나보다 나은 짓이니까 원하는 방향대로 도와줘야 해. 그건 내가 살아봐서가 아니라. 무한히 믿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야. 그들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거니까.

남경태 실제로 나도 그랬고 가급적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말해주고 싶어. 가만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구속도 있었던 거 같아. 집이 어려우니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사실 학교를 다닐 때 왜 개근을 했을까, 후회가 돼. 땡땡이를 쳐본 적이 없다니(웃음). 본인이 선택해서 그런 거라면 이해하지만 난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스스로 제약을 가했던 거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가급적 주어진 조건에서 자유롭게 살고 자유롭게 누린 삶이 후회되지 않는 것 같아.

고성국 망하는 회사는 신입사원의 말을 안 들어서야. 임원이 자기가 가진 생각을 절대시하니까 망하는 거야. 큰 조직이든 작은 조직이든 밑에 있는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면 덜 망할 거야. 난 실천하고 있어. 불교방송 클로징 곡을 선택하는 권한이 있는데, 난 20대 AD의 말을 믿어. 30대 메인 작가, 50대인 내가 원하는 곡을 틀면 안 되거든. 무조건 20대가 원하는 걸 선곡해야 청취율이 올라(웃음). 그렇게 살아야 해.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중요시했던 삶의 태도 중의 하나로 ‘안분지족(安分知足)’ 이라는 게 있어. 자기 분수를 지키고 거기에 만족한다. 굉장히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 권력이나 부처럼 바깥에서 주어지는 무언가로부터 행복을 찾는 게 아니라, 자기 됨됨이를 스스로 평가하고 그 됨됨이에 맞는 정도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와 부를 누리겠다는 거거든. 검소한 가치관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을 외부의 시선이 아닌 자기 내면의 시선으로 본다는 거야. 더 많은 권력과 부를 향해 치닫는 오늘날에 비추어 의미 있는 가치관이라고 생각해. -『열려라, 인생』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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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인생철수와영희
청소년들이 인생을 살면서 절실히 고민하는 우정, 자유, 관용, 직업, 행복 이 다섯 가지 주제에 대한 대담집이다. 사랑, 죽음, 공부, 정의, 권력을 다룬 『덤벼라, 인생』에 이은 ‘고박과 남쌤이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인생론 시리즈’의 두 번째 편이기도 하다. 동성과 이성간의 우정, 사랑과 우정의 차이와 같은 가벼운 주제로부터 시작하여 ‘자유’의 근원 철학과 ‘관용’에서의 민주주의, 새로운 ‘직업’과 직업의 위기, ‘행복’의 정의에 대한 담론이 자유롭게 펼쳐진다. 청소년들은 이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시야를 넓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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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수십 명 앞에서 공연하던 오빠들 기 죽은 사연 - 좋아서 하는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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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하는 밴드는 ‘생존’하기 위해 길로 나섰다. 밥벌이 자체가 달려있기 때문에 공연장에서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릴 수 없었다고 한다. 길로 달려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했다. 그리고 5년 후, 사람들은 그들을 ‘최고의 버스킹 밴드’라고 부른다.

파란만장한 경험은 ‘고민’과 ‘선택’을 통해 그들을 성숙시켰다. 그들은 자신만의 분명한 철학을 이야기하면서도 내내 건강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겨울이면 앨범을 만들고 봄이 되면 공연을 떠난다는 밴드는 올해 튼실한 정규앨범 <우리가 계절이라면 >을 내놓았고, 곧 떠날 채비에 분주했다.




“작은 상자 속 내 맘을 넣어 이 눈이 그치면
 길 끝에 다다르면 나와 손을 잡고 돌아가” - 「달을 녹이네」


정규 1집이 인디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공연 뿐 아니라 앨범도 사랑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준호 : 인디차트에 한 번 1위를 찍은 걸로 알고 있어요. 저희가 길에서 팔려고 산 게 있으니까 저희가 올린 순위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웃음) (앨범이 사랑받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5년 만에 정규앨범을 냈다는 것도 있고요. 앨범을 준비하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공연을 접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동안 저희가 직접 CD를 팔아왔는데 처음으로 유통사와 함께 일했거든요. 회사의 유통과 홍보도 무시 못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밴드가 직접 유통하는 것과 유통사와의 작업,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준호 : 인디 차트 1위를 했어요. (웃음) 회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 힘으로만 꾸려가는 밴드치고 CD 판매에 있어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정규 앨범도 CD를 팔아서 만들었고요. 하지만 음원 같은 경우는 저희가 전혀 관심을 안 가졌던 부분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여러 반응이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요. ‘회사가 도와주니까 이런 식으로 노출이 되고 홍보가 되는구나’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번 정규앨범은 네 멤버들 모두가 작곡, 작사, 노래를 참여해서 인상적이었는데요?

준호 :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네 멤버가 참여하기까지 기다렸어요. 그리고 저보다 멤버들이 돋보이면 좋겠다 싶은 부분도 있었고요. 계속 곡을 계속 써보자, 노래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를 많이 했죠.

멤버들이 작곡, 작사, 노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이유는 뭘까요?

준호 : 예전에 했던 팀에서 비슷한 문제 때문에 억눌린 게 있었어요. 거기서는 제가 보컬이 아니었어요. 제가 가끔씩 노래를 했는데 팀 보컬이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 때 내가 다음에 팀을 하면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 밴드는 멤버들 모두 작곡, 노래를 잘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앨범에 다 참여하자 이렇게 된 거죠.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멤버간의 음악 스타일도 다를 것 같은데요?

가영 : 저 같은 경우는 팝이나 가요 같은 대중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멜로디 같은 경우도 대중적인 걸 많이 써보려고 하고 쉽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연주할 땐 가영이 니 곡이 제일 어려워 (웃음) 저야말로 쉬운 코드와 쉬운 구성이에요. 보통 써놓고 많이 고치잖아요. 저는 많이 뜯어고치는 편이 아니고 해놓으면 정리만 하는 스타일이에요. (어떻게 보면 진정한 천재 아닌가요?) 그건 아니고요. 뜯어고쳐봤자 저한테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준호 : 전 가사가 정말 중요해요. 가끔은 음악 하는 분들께 미안할 정도로 가사를 중시해요.

복진 : 저는 원래 피아노를 전공하고 재즈음악을 주로 연주했어요. 그래서 가사에 신경을 쓰거나 제가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좋아서 하는 밴드를 시작하면서 진솔하게 자기 얘기를 노래하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았어요.

영향을 받은 뮤지션과 노래도 궁금해요.

가영 : 어릴 때부터 토이를 좋아했어요. 음악적인 워너비는 정재일 씨고요. 추천곡은 「너에게 가는 길」입니다.

복진 : 제가 처음 만났던 싱어송라이터가 이장혁 씨였어요. 제게 큰 영향을 줬고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추천하는 「오늘밤」은 제가 처음으로 녹음한 곡이기도 해요.

: 영향을 받은 뮤지션은 너무 많아서 꼽기가 힘들어요. 처음 기타를 쳐본 곡은 레드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이네요.

준호 : 음악적인 워너비는 베이루트(Beirut)의 「Elephant gun」이라는 노래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 노래 때문에 우쿨렐레를 시작하게 됐어요.

본인이 쓰신 곡 중에 자신이 아끼거나 경험이 들어간 가사가 있다면요?

복진 : 「달을 녹이네」는 실제로 제가 울면서 달을 본 경험이 있는데요. 눈물 사이로 보니 달이 녹고 있는 거예요. “달을 녹이네”라는 이 말을 가지고 노래를 써보고 싶다 생각을 해서 쓴 곡이에요.

준호 : 저는 경험적인 스파크가 없으면 곡을 잘 못써요. 그래서 가사를 생각하면 영감을 받았던 순간들이 떠오르는데요.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퍼즐조각」이라는 노래에요. 연애라든지 사랑을 나누는 경험들로 쓴 노래기 때문에 그 기억이 가장 예쁘죠. 저에겐.

: 솔직히 「샤워를 하지요」는 너무 내용이 없잖아요. 음원사이트에 가사 뜨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섯줄인가 여섯 줄인가가 뜨더라고요. 「네가 오던 밤」은 여러 가지 저의 경험이 섞여 있는 곡이에요. 이뤄지지 않았던 사랑의 총집결체라고 할까요? (웃음)

복진 : 개인적으로 우리 앨범 중에 「네가 오던 밤」이 가장 진정성 있는 트랙이에요 (웃음) 소설가 김중혁씨가 그렇게 표현해줬어요. 동네 오빠가 기분 내키는 대로 흥얼거리는 노래라고.

: 의도한 거예요.(웃음) 원래 잘 부르는데.

준호 : ‘의도한 거예요’ 그 부분에 볼드 처리 좀 해주세요. (웃음)

가영 : 저는 「길을 잃기 위해서」가 실제로 여행 갔을 때 쓴 노래여서요. 노래를 들으면 어떤 풍경 같은 게 머릿속을 지나가요.

사람들이 ‘좋아서 하는 밴드’의 음악을 들으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복진 : 앨범 뿐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에 해왔던 기록이나 쌓아놓은 이미지가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고 할까요. ‘좋아서 하는 밴드’라는 이름이 갖는 느낌이라든지, 네 명의 하모니라든지 그런 복합적인 것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추운 봄날에 우린 길을 떠나네 우린 여행을 떠나네”
 길이 만든, 길을 만든 ‘좋아서 하는 밴드’


여러 가지 의미로 밴드 이름이 참 좋아요. 그런데 가끔은 오히려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저의 지나친 기우(杞憂)인가요?

준호 : 밴드 이름이 갖고 있는 장점 뿐 아니라 단점도 우리한테 도움이 많이 돼요. 그런 기우들 때문에라도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음악적으로 그렇게 안보이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름만 ‘좋아서 하는 밴드’지 음악은 취미같이 하는 밴드야 라고 보이지 않으려면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거든요.

‘좋아서 하는 밴드’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건가요?

준호 : 밴드를 시작할 때 음악만 하는 팀이고 싶지가 않았어요. 어떤 이야기가 있는 팀이면 했어요. 밴드를 통해 단순히 음악 뿐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정말 이렇게 음악만으로도 먹고 살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요.

그 밴드의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준호 : 밴드를 직업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인 것 같아요. 그냥 취미로 음악 한 번 해볼까 밴드 한 번 해볼까가 아니었어요. 저는 이걸로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고 반대하는 부모님에게 어떻게든 독립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됐기 때문에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을 했죠.

사실 정말 궁금해요. 좋아서 하는 일만 해서 살 수 있던가요?

준호 : 모른다는 게 어쩌면 대답이에요.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왔고요. 당장 내일 망할 수도 있어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보고 싶은 거죠. 만약 ‘좋다’는 순수한 마음만 있었다면 5년 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몇 번 하다가 말았겠죠. 사실 이거는 버틴다는 개념이거든요.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라서요. 믿고 따라준 멤버들에게 항상 고맙죠.

복진 : 만약에 지속이 안 된다면 더 이상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지치면 그만큼 좋아서 하는 마음도 사그라지잖아요. 오빠 말대로 정말 답은 모르는 거고요. 종종 인터뷰를 할 때, 주로 원하시는 답은 “그래도 저희는 끝까지 좋아서 할 거에요.” 였어요. 끝을 모르는 희망, 이런 거 있죠. 너희들은 끝까지 좋아하면서 독자에게 희망을 줘야해 이런 느낌 있잖아요. 그래서 농담으로 싫어하게 되면 나중에 이름을 바꿀게요. 라고 대답해요. 싫어도 하는 밴드, 지금은 별로 안 좋은 밴드 이렇게요.

버스킹 뿐 만 아니라 여러 가지 공연도 기획하고 착착 실행해 나가고 있는데요?

준호 : ‘보신 콘서트’와 ‘사무실 구석 콘서트’가 대표적인 것 같아요. ‘보신 콘서트’는 여름마다 하는 공연이고 음악으로 몸보신을 시켜주겠다 그런 컨셉이고요. ‘사무실 구석 콘서트’는 저희가 사무실에 찾아가는 공연인데요. 정말 ‘좋아서 하는 밴드’ 아니면 못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일이 회사에 연락해서 스케줄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가영 : 회사를 가게 되면 각각 분위기가 다른 게 재밌었어요. 어떤 직종인지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인원수 마다도 달라요.

준호 : ‘사무실 구석 콘서트’ 중에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공연은 대표쯤 되는 사람이 와서 “박수 안쳐? 박수” 이러는데 직원들이 다 울상이 되어서 박수를 치고 있었어요. 그러면 저희도 힘이 안나요. “저 사람만 나가면 분위기 띄울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죠.

복진 : 간호사의 밤도 재밌었어요. 간호사 몇 십 명 앞에서 공연을 하는데요. 여자 분들만 있으니까 오빠들이 기가 팍 죽어서요. 특히 간호사분들은 환자들을 다루니까 넉살도 엄청 나시잖아요. 노래하는 데 계속 말 걸고 뭘 해도 다 귀여워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막 이러시고요. 물론 여자 멤버는 안중에도 없으셨죠. (웃음)

이건 맛집에서 음식 비법을 가르쳐 달라는 질문과 비슷한 느낌이긴 한데요. 거리 공연 때 사람들 발길을 잡는 노하우가 있나요?

준호 : 요즘 거리공연 하는 분들이 많은데 팁을 하나 드리자면요. 사람을 모아놓고 시작해야 돼요. “저희 공연할거에요. 시작할거니까 좀 모여주세요.” 하고 몇 명을 모으고 시작하면요. 그 때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잘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줄 알아요. 그런데 일단 노래를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추길 바라면 사람들이 안 모여요. 그냥 지나가버리죠. 그리고 다른 팁들도 많은데요. 이건 말로 다 할 수 있는 것 같진 않고요. 저희랑 인턴생활을 1년 만 하시면 몸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웃음)

다른 인터뷰들에서 보니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요?

준호 : 네,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요. 첫 번째는 그 계획 때문에 멤버들이 희생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고요. 두 번째는 계획을 세우지 않아야 계획한 것보다 더 높이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죠. 만약에 저희가 “음반을 내고, 1위를 하고, 영화를 찍고, 페스티벌에 나가서 헤드라이너가 되자” 라고 계획을 세우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요? 단지 오늘은 주어진 이 인터뷰를 열심히 하자, 그리고 합주를 열심히 하자 이렇게만 생각하거든요. 그랬더니 어느 새 영화도 찍고,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도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 덧붙이고 싶은 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고 해서 내키는 대로 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계획을 세우는 대신 정말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해요. 그 단서가 붙지 않으면 실패하거나 원하지 않은 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어요.

: 여행을 가서 100m 달리기를 하듯이 뛰어다니는 사람은 없잖아요.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 가서 “끝!” 이런 사람도 없잖아요. 천천히 발길 닿는 대로 가다보면 좋은 여행이 되는 거고요.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려가서 도착했는데 거기가 원하는 데가 아니면 어떡해요.

복진 : 결론이나 목표가 없으면 이뤄질 때 기쁜 마음이 더 커요. 우리가 ‘음반 차트 1위를 하자’ 이런 목표를 갖고 앨범을 만들었다면 1위를 했을 때 이렇게까지 기쁘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밴드 이름이랑 연결이 되는데요. 저희가 십년이 지나서도 ‘좋아서 하는 밴드’를 하자 이런 계획은 전혀 없어요. ‘난 이걸 좋아해’ 하고 결정지어 놓고 좋아하지는 않잖아요!

인터뷰: 김반야, 신현태
정리: 김반야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로봇이 인간을 구하는 세상, 멀지 않았다 - 데니스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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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SF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한 세상이 실현될 것이라 믿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주위를 둘러봤을 때 오늘날 역시도 우리가 보는 SF영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그리 좁혀지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데니스 홍 박사는 조금 달랐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으며, 우리의 일상에는 이미 많은 로봇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우리는 로봇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바꿔야 할 듯하다. 실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차 로봇이 가지는 의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대개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봇이란, 사람과 같이 말하고 행동하며 심지어 생각하는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아직 그리 많지 않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먼 미래의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반면 그가 이야기하는 로봇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런 로봇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꿈이다.

최근 출간 된 『로봇 다빈치, 꿈을 설계하다』는 데니스 홍 박사가 자신의 삶과 실패, 그리고 그 실패를 거름삼아 이뤄낸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놀라운 노력의 과정들, 우여곡절의 사연들, 그리고 그것이 뭉뚱그려져 만들어진 성과는 놀라울 따름이다. 하나, 그는 자신의 모든 애정을 담아 쓴 책이 ‘자서전’으로 비춰지기를 거부한다. 그가 오직 바라는 것은 자신의 꿈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꿈의 씨앗이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것이다. 미국 유력 과학 잡지인 <파퓰러사이언스>는 그런 그를 ‘젊은 천재 과학자 10인에 선정했다.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이 직접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로봇을 만들어 내겠다는 그의 꿈은 이제 시작해 불과하다.




유쾌한 과학자

아직은 꽃샘추위로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한국의 봄은 그에게 익숙한 듯했다. 미국 버지니아텍 교수이자, 로봇공학자로 활약하는 한편 국내 대학들과도 협업을 위해 자주 방한을 하기 때문이다. 마산에 짓고 있는 ‘로봇랜드’ 프로젝트도 관여하고 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하는 프로젝트는 그 뿐만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동차가 실용화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고, 고도의 재난 구조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을 개발하는 ‘토르 프로젝트’ 역시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주 잠시 미뤄두고 택한 모국 행은 꽤나 유쾌한 듯했다.

바쁘신 상황에서 한국에 오시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평소에도 자주 와요. 강연 때문이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도 오죠. 하지만 이번에는 100% 책 출간을 위해 온 거예요. 저한테 굉장히 소중한 책이거든요. 바쁜 스케줄 중에도 페이스북에 제가 있는 장소를 실시간으로 올려놓죠. 그러면 책을 읽은 독자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듭니다. 어제도 오후 동안 2시간 사이에 20명이 모였는걸요.

평소에도 박사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팬들이 아닐까 싶은데요.

글쎄요. 7살짜리 꼬마부터 신문기자, 새로 벤처기업을 만드는 젊은 친구들까지 다양해서요. 꼬마 아이는 어떻게 하면 로봇을 만들 수 있냐고 묻기도 하고,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제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고요. 모두 제 책을 읽어보고 온 분들이라 관심사가 비슷해서 재미있더군요. 그렇게 저를 보기 위해 온 분들이지만 나중에는 제가 없어도 모임을 만들어 모이시기도 하더라고요.




로봇과 함께하는 일상, 이미 와 있다

그가 만들어 온 로봇은 사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상상하는 로봇의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대개 영화에서는 인간의 형상에 가깝게 구현하는데 치중을 하지만, 데니스 홍 박사는 그보다는 실용성, 효율성에 중점을 둔다. 물론 인간의 형상으로 로봇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은 우선순위에서 중요한 것부터 이뤄나가겠다는 생각이다.

많은 프로젝트를 병행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간단히 설명을 해 주신다면?

좀 많긴 해요(웃음). 기어 다니는 로봇, 굴러다니는 로봇, 화학적으로 움직이는 로봇,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동차 등등 너무 많은 것을 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를 할 필요가 있는 듯해서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을 했어요. 물론 모두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 개발인데, 하나는 시각장애인들이 복잡한 실내에서 길을 찾아 갈 수 있게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프로젝트가 바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화재진압용, 재난구조용 로봇인 토르의 개발이에요. 거기에 모든 시간과 열정을 다 쏟아 붓고 있죠.

많은 사람들이 박사님께 하는 질문 중에는 아마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이 언제쯤 탄생할 것인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사실 로봇은 이미 우리 주변에 있어요. 예를 들어 몇 년 전부터 보급된 로봇 청소기가 그렇죠. 또 우리가 많이 쓰는 스마트폰과 자동차 역시도 로봇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정말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는 걸어 다니는 로봇을 이야기하시 거겠죠. 그런 로봇이 탄생하려면 기술적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어야 하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요. 가사 노동을 비롯해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수준의 로봇을 기술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비용이 엄청나다는 거죠. 그걸 누가 살 수 있겠어요. 한마디로 경제성이 없는 거죠. 또 걸어 다니다 자칫 아기에게 쓰러지거나 할 때 생기는 안전 문제도 고려해야 하고요.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봇은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그런 고려들이 다 깃들어 있어요. 또 인간과 같이 정교한 움직임이 가능한 기술까지 발전한다면 우선돼야 할 것은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분야에서 먼저 사용 돼야겠죠. 아마도 처음에는 재난의 현장 같은 곳에서 그런 로봇을 보게 될 거예요.




실패에서 얻은 성공의 비법

많은 이들이 그의 성공에 놀라워하지만 그 성공 뒤에는 수십, 수백 배 쓰디쓰고 아픈 실패가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천재라고 해도 그 과정을 모두 경험한 데니스 홍 박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똑똑한 사람들은 많지만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실패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있다.

박사님께서 해 나가시는 일을 보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요. 자신만의 시간 관리법이 있으신가요.

24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잖아요. 제 경우만 특별히 30시간이 주어지진 않죠. 그래서 저는 잠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하루 평균 4시간 15분 정도를 자죠. 일단 새벽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잠을 자고 그 다음에는 학교에 출근을 해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 15분 정도 낮잠을 자요. 젊은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놀라긴 해요(웃음). 물론 졸리면 자야죠. 절대 잠을 덜 자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피곤해서 자는 것도 있지만 사람은 잠을 자야 낮 동안에 배우고 학습한 것이 정리가 되거든요. 저는 단지 그렇게 습관이 들었을 뿐이에요. 그럼에도 그 많은 프로젝트를 병행할 수 있는 것은 저희 팀이 있기 때문이고 많은 사람들과 협업을 해서 가능한 거죠.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개발했을 때는 물론이고 최근 무인 자동차를 시각장애인이 운전할 수 있는 차동차를 개량한 것을 두고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해 CBS, NBC, 영국 BBC, 일본 NHK 등에서는 격찬을 쏟아냈다. 특히 워싱턴포스트에서는 그의 기술을 ‘달 착륙에 버금가는 성과’로 대서특필했을 정도다. 전 세계에서 천재라 칭하는 그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박사님 스스로는 천재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박사님의 성취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이 있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간과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요.

제가 책을 낸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 중에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의 ‘성공’만을 보죠. 심지어 미디어에서도 성공 스토리만을 부각시키는데 집중하고 있고요. 저는 그것이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거든요. 저 역시도 엄청난 실패를 거듭했고 좌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좌절은 해도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실패의 이유를 파악하기위해 애썼을 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님께서 남들과 달랐던 점은 무엇이라 보시나요.

천재는 아니지만 똑똑하다고는 생각해요(웃음). 그 누구보다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열정이에요. 제가 하는 일은 너무나 즐겁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캠퍼스가 제 일터기도 하고요. 눈이 반짝이는 학생들과 새벽까지 로봇연구를 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또 제가 하는 일이 인간의 삶과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즐겁죠. 그것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한 사람의 성공은 부모와 스승에게 달려있다

꿈을 향한 그의 끝없는 열정과 비범한 호기심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빛을 발했다. 집안의 가전제품이라면 안 뜯어 본 것이 없고, 한번은 로켓에 한창 흥미를 가지고 있을 때 아파트 옥상에서 폭발실험을 해 모두를 혼비백산하게 한 아찔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단 한 번도 그의 호기심을 나무라지 않았다. 어린 그의 호기심에 날개를 달아주고 꿈을 향한 열정에 촉매를 더해준 것은 바로 부모의 남다른 교육방식 덕분이었다.

박사님의 부모님은 그 시절 어른들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미국에서 사시다가 어린 저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셨고요. 일찍이 미국을 문화를 접한 영향일 수도 있고 부모님께서 생각이 깨이신 부분도 있겠죠. 물론 혼내지 않으신 것은 아니에요.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혼내셨죠. 그러나 절대 감정적이시진 않았어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를 알게 하신 후 혼내셨죠. 그러려면 참 인내심이 강해야 한다는 걸 저도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고 있어요.

주입식 교육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신데요. 고교시절까지 한국에서 공부하셨는데 우리나라 교육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한국에서 고교시절까지 계속 공부를 하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학생들에게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해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는 수학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하지만 일곱 살 때 영화 ‘스타워즈’를 보고 로봇공학자를 줄 곳 꿈꾸면서 로봇을 만들기 위한 도구는 과학이고 과학의 언어는 수학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열심히 공부했어요. 교육이 주입식이건 아니건 간에 적어도 왜 배우는 지를 확실히 이해시키고 가르친다면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점점 심화되는 경쟁위주, 남을 이겨야만 하는 교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필시 문제가 있을 텐데요. 한국의 여러 대학 교수 친구들과도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의 경우는 팀 프로젝트를 거의 하지 않는 듯해요. 미국은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서로 협동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가르치거든요. 우리나라는 그게 부족한 것 같아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마인드에 가로막혀, 협업과 토론의 경험이 없는 거죠.


박사님의 경우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지금 제 아이는 네 살이에요(웃음). 아직 어리죠. 물론 자라면서 제가 경험한 대로 배우게 하고 싶어요. 특히 저희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은 아무리 바쁘셔도 주말에는 꼭 저와 시간을 보내셨다는 거예요. 저도 제 아이를 자주 제 로봇연구소로 데리고 와요. 아직 말을 잘 못하면서도 로봇을 상당히 좋아하거든요.

한국 부모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자녀와의 대화인데요. 조언을 해주신다면?

맞아요. 대화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단지 자녀와 시간만 같이 보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봐요. 바쁘다는 핑계대신 시간을 내서 아이와 함께 한다면 대화는 시작될 거예요.

성공의 기준을 돈과 명예에 두는 부모들도 많은데요.

그게 큰 문제죠. 사람들이 제게 성공했다고 하고 저 역시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실제 이뤄낸 것도 보람을 느끼고요. 하지만 한국에서 일반적인 성공이 돈과 명예로 국한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자신이 하는 것을 즐기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 두 가지는 자연스레 쫓아오거든요. 또 성공의 개념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요.

독자들에게 전할 마지막 말씀이 있다면?

미국에서 강연을 하면 학생들은 기숙적인 것에 질문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꿈을 찾나’, ‘실패가 두렵다’는 질문을 많이 해요. 전 그런 질문에 답할 준비가 거의 안 돼 있었어요. 학생들의 질문이 충격이기도 했죠. 그러면서 제가 거친 과정을 우리나라 학생들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고 책을 쓴 거예요. 돈과 명예가 아닌 진정한 꿈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것, 열심히 노력하면 이뤄낼 수 있는 것, 윤리적이면서도 행복의 가치를 공유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어야 해요. 저 역시 지금도 다른 꿈을 좇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최고는 인류를 구할 로봇을 만드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는 어떤 꿈이 기다리고 있을지 저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데니스 홍 박사는 어린 시절부터 로봇공학자의 꿈 외에도 마술사, 요리사와 같은 꿈을 키워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직업이 된 로봇공학자의 꿈과 나머지 꿈을 함께 꾸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단순했다. 끝없이 꿈꾸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그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이 식지 않는다면, 언젠가 은퇴 후 놀라운 요리를 만들어 내는 레스토랑 요리사가 된 그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마도 척척 수발을 드는 로봇 조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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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다빈치, 꿈을 설계하다데니스 홍 저 | 샘터
〈파퓰러사이언스〉가 선정한 ‘젊은 천재 과학자 10인’이자 세계 최초로 시각장애인용 자동차를 개발한 데니스 홍(한국명: 홍원서)! 미국 버지니아텍 교수이자 창의적인 최첨단 로봇연구소 로멜라를 이끌며 세계적인 로봇공학자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두 차례의 TED 강연을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뜨거운 감동과 긍정 에너지를 전했다. 더불어 시각장애인 등 누군가가 평범하지 못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들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기술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는 한 인간의 열정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힐링은 과정이지, 한 순간의 이벤트가 아니다 - 윌리엄 폴 영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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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후보로 2번이나 올랐던 『아웃 오브 아프리카』(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 『바베트의 만찬』등을 쓴 덴마크의 작가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 다른 필명 ‘카렌 블릭센 (Karen Blixen)’, 1885~1962)’은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can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인용해 더욱 알려진 이자크의 이 말. 그녀는 슬픔이 속으로 곪아 자신을 삼키기 전에 이야기를 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슬픔을 다스리는 좋은 방안이라고. 그래서 많은 이야기꾼들이 ‘자전적’ 이야기를 꺼내놓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또한 작가 자신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어떤 좋은 영향을 미칠 때, 우리는 이야기의 치유 기능을 믿게 된다. 이야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폴 영. 이자크 디네센의 말을 증명하듯,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와 슬픔을 견디고 치유했다. 그의 첫 책 『오두막』이 그랬다. 미국에서만 800만 부 이상 팔린 이 소설은 그를 치유하고 세상과 소통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책의 제목이자 소재인 ‘오두막’은 누구나 가진 깊은 상처를 의미하는데, 이 책은 기억하기 싫고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응시하면서 화해할 것을 권한다.

많이 알려졌지만, 그는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고, 원주민과 기독교학교 기숙사에서 상급생에게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것은 어린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그를 구원한 것은 ‘관계’였다. 종교를 비롯해 가족, 친구들의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차츰 그를 회복시켰고, 『오두막』을 쓰면서 그는 슬픔을 치유 받았다. 그는 “오두막 문을 열고 아버지와 화해하는 데 11년이 걸렸으며 이 책이 큰 도움이 됐다”“모든 아픔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만 치유할 수 있는데, 사람 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신의 관계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처지였던 그는 2005년 아내와 자녀 6명의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오두막』을 썼다. 15부를 인쇄하여 지인들에게 돌렸던 이 책, 감동받은 친구들이 출판을 권했으나 출판사에서 족족 거절당했다. 결국 자비 출판을 통해 세상에 선보인 이 책, 서점에 놓을 수도 없어 인터넷으로만 판매를 했다. 그랬던 책이 입소문을 타고 선풍적으로 나갔다. 800만 부 이상 팔렸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서도 10만 부 이상이 팔렸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소설 『갈림길』을 들고 한국을 찾아왔다. 『갈림길』역시 ‘관계’와 ‘치유’의 작품이다.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받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40대의 앤서니 스펜서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여러 갈림길이 그의 영혼 앞에 나타난다. 이 갈림길들 앞에서 앤서니는 끊임없는 선택의 시간을 겪으며 황폐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마음이 변화하는 여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가치 있는 선택과 진정한 삶을 고민하게 된다.

지난 3월 1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윌리엄 폴 영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시종일관 유쾌한 와중에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땐 진지한 답변을 내놨다. 독자들과의 만남에 설레어하는 그는 영락없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윌리엄 폴 영, ‘관계’를 말하다

이번에 한국을 오면서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를 되도록 많이 주선해달라고 했다. 앞선 『오두막』때도 4년에 걸쳐 유럽, 남미, 아시아를 넘나들며 직접 독자들을 만나는 북투어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윌리엄 폴 영 작가에게 독자들과 직접 만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북투어를 하면서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다. 독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이야기에 초청을 받은 셈이지. 특별한 장소, 그 자리에 내가 갈 수 있다는 허용을 받았다는 의미다. 내겐 영광이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내 전체에 스며든다는 뜻이다. 북투어는 내 이야기를 읽고 독자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기쁨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기회를 많이 갖고 싶다.

이번 소설 『갈림길』이 첫 번째 소설이었던 『오두막』보다 주제의식도 깊어지고 문학적으로 성숙해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오두막』이 전 세계적으로 워낙 큰 성공을 해서 『갈림길』을 쓸 때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 어떤 생각을 품고 집필했는가?

사실 부담을 느낄 만큼 내가 똑똑하진 않다(웃음). 소설을 쓰면서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내가 모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줬고, 또 다른 인생이라는 느낌을 갖고 책을 썼다. 하루하루 주어진 자체가 기쁨이며 부담을 느끼지도 않았고, 기대를 하면서 책을 쓰지도 않았다. 강물처럼 창의성이 발현되고 강물을 따르는 신뢰성을 갖고 글을 썼으며, 이번 글도 그렇게 써보자고 했다. 『갈림길』이 이전보다 문학적으로 성숙했다고 많은 분들이 평을 해주시는데 감사하게 생각한다.

『갈림길』『오두막』모두 종교적인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작가는 종교가 없는 독자들도 느끼는 바가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과거와 달리 지금 지나치게 세속화되고 오염된 신과 종교의 본질적인 의미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신과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을 찾아야 한다. 우선 이렇게 묻고 싶다. 종교의 의미가 뭘까? 그것에 대한 정의를 해야 한다. 관행이나 행동 같은 것이 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시스템화 한 것이 종교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세속적인 사람이라고나 할까. 내 책이 종교인, 비종교인 모두에게 영향을 준 것은 진정하고 인간적인, 흔히 말하듯 본질적인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비극과 상실감을 매일 경험하고 나름대로 언어를 통해 신과 대화를 시도한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모든 문화마다 차이가 있고 다르겠지만, 관계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는 건, 하나의 존재지만 정신, 영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을 설명한다는 건, 성령, 아버지, 아들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과 같아. 체험과 관계를 통해서 이해해야 해.”(p.163)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신에 대한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고, 이는 종교를 초월한 진지 인간적 대화라고 역설했었다. 방금도 관계에 대해 말했는데, 『오두막』『갈림길』모두 종교보다 ‘관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다룬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가 관계를 말할 때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정직함. 진실함. 그리고 숨기지 않는 것. 즉, 비밀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함의 여정을 계속 밟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바깥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관계에서의 모든 위험을 쥐고 신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관계의 중심에는 위험이 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위험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뢰를 해보는 것이 긴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에 이런 신뢰를 누군가 져버렸다, 침해당했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기가 꽤 힘들다. 그렇더라도 이런 위험을 극복하고 다시 신뢰해야 성숙할 수 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물론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너무 진지하지 않나? 웃을 줄 모른다. 웃을 줄 안다면 관계에 있어서의 어떤 압력을 없애 버릴 수 있다. 인간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니까. 실수 이후의 태도와 자세가 중요하다.

“나 혼자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관계가 곧 내 존재의 핵심이지요.”(p.92)
앤서니 스펜서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에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다 결국 관계를 통해 치유를 하고. 작가 스스로 상처로부터 치유된 것도 관계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기 위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활용하지만, 그것이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보다는 피상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작가는 제대로 된 관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 궁금하다.

관계에는 여러 관계가 있다. 심원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니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쉬운 것도 있다. 어려운 관계도 있다. 쉬운 관계는 아는 것처럼 느껴서 쉽게 맺어질 수 있다. 어쨌거나 관계를 위해서는 의도성이 있어야 한다.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도 있고, 노력해야 맺어지는 관계도 있다. 사람은 내 인생에서의 여러 관계,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계속해서 발전하는 성장 과정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관계는 주어진 선물과도 같다. 선물을 수용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어떤 일을 하던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이런 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그의 삶을 파괴했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길로 그를 내몰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일을 거뜬히 할 수 있는 강하고 거칠고 유능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여린 갈망이 바윗장 같은 겉모습을 뚫고 들어와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려 할 때면 그는 곧바로 귀를 막아버렸다.”(p.25)


윌리엄 폴 영이 말하는 ‘힐링’

『오두막』『갈림길』, 모두 ‘치유(힐링)’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지금 한국은 ‘힐링’ 열풍에 빠져 있는데, 작가가 생각하는 진짜 ‘치유’는 무엇인지 듣고 싶다.

힐링. 사실 내 스스로는 치유가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사건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내 스스로 인격체가 돼야 한다. 혼자든, 친구나 가족과 있든 간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인격체가 돼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개념에 대한 답변이 일관돼야 한다. 나도 통합된 인격체가 아니었다. 어릴 때, 가족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 배반과 손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마음이 찢겨나가 흩어져 나갔던 때도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분리됐고, 건강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영혼과 정신이 모두 하나가 돼서 인격체가 돼야 하는데, 그게 안 됐을 때가 있었다. 이것도 관계에 의해서 조금씩 나아졌다. 따라서 힐링(치유)은 과정이다. 한 번 순식간에 일어나는 이벤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녀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썼던 『오두막』이 거둔 예상치 못한 큰 성공은 큰 화제가 됐다. 삶이 확 바뀌었을 텐데, 그럼에도 작가가 잃지 않고자 하는 초심이나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가.

어딜 가나 이런 유사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강조하는 점은 하나다.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책을 써서 순간적인 성공을 맞보고 있는데, 유명한 건 영구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명성은 진리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내 정체성과 동일화하지 않는다. 명성이나 인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영구적인 것은 신뢰에 기반을 둔 관계가 아닌가 싶다. 나의 본질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다. 한때 아이로 돌아가 초심 같은 때가 있었다. 진정한 관계를 하느님, 친구와 맺으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 성공은 내 정체성이 아니다. 내 가치를 지키며 사는 게 하루하루 나의 행복이고 기쁨이다. 사람들이 ‘왜 이리 변하지 않았니?’ 하고 물으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아내가 누군지 모르지?’ 하고 농담조로 말한다(웃음). 아내를 비롯한 내 주변의 관계가 그렇게 나를 지켜준다. 언제든 진지해지려거나 아는 척 하려고 하면, 그건 “내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나는 평범하다 가족 모두, 내가 진지해지려고 하면 웃는다. 이상한 모습으로 중요한 척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인들이 보인 반응에 감사하고 놀랍다. 평범한 일반인도 있고, 종교인도 있고, 무척 다양한데, 나의 책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성찰해보고 진면목을 보는 게, 내게도 그렇고 독자에게도 의미가 있다. 한국인들이 나와 책에 대해 보인 반응도 영광이고 기쁘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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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윌리엄 폴 영 저/이진 역 | 세계사
『갈림길』은 우리 모두가 성공한 삶이라고 여기는 40대의 사업가 앤서니 스펜서의 이야기다. 냉철한 판단력으로 오직 성공으로 향하는 길만 선택해온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의 앞에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죽음이란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던 앤서니 스펜서가 겪는 갖가지 사건들이 마치 유쾌하고 가슴 뭉클한 영화의 한 장면들처럼 전개되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다시 다지며 정화해 나가는 과정이 교차 서술된다. 앤서니와 예수, 할머니의 심도 깊은 대화를 통해, ‘죽음 이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같은 인간의 본질적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스물아홉살에 파일럿에 도전한 여성 - 조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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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조은정에게 “어릴 적 꿈이 파일럿이었니?”라고 물으면,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사방이 산과 들, 논밭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이천 산촌리에서 자란 조은정은 6남매 늦둥이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양한 분야의 직업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10살 꼬마 조은정의 장래희망은 미술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은정이는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는 언니의 반복되는 말에 반항심이 생겨 교사의 꿈을 버렸고 그나마 잘했던 미술 실력을 살려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그녀의 꿈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해 문구디자인을 하겠다는 꿈이 전부였고, 졸업이 다가오던 해에 건축디자이너에 호기심이 생겨 일본으로 무작정 유학을 떠났다. 구두쇠 아버지가 유학비를 지원해줄 리는 없었고 기내식을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 자금을 마련했다. 비행기와 관련된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녀는 자연스레 항공사에 관심이 생겼고 최종 목표를 스튜디어스로 변경한다. 하지만 항공사 입사시험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연거푸 입사시험에 낙방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 있었던 영어, 일본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또 다른 직업 ‘호텔리어’가 되기로 결심하고 힐튼호텔에 입사한다. 그렇게 3년 동안 호텔리어로 활약하던 중,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외국인 여성 조종사를 본 뒤 파일럿의 꿈을 갖게 됐다. 그때 조은정의 나이는 스물아홉.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하나 둘씩 낳기 시작했던 때였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에 파일럿에 도전한다?! 그것도 한국 항공사의 파일럿 자격 조건에는 한참 딸리는 나이, 시력인데? 비행 훈련을 받기 위해 세 번의 도전 끝에 미 대사관 입사, 대사관저 비서로 일하면서 오산 미 공군부대 에어로클럽에서 훈련을 받은 조은정은 결국 35세가 되던 해, 파일럿이 됐고 2011년 39세 나이에 마침내 ‘캡틴’ 타이틀을 얻었다. 현재 상하이 지샹항공에서 기장으로 일하고 있는 조은정은 중국항공사 최초 한국인 여성 파일럿으로 약 3%가 채 되지 않는 여성 파일럿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6년 전, 여성 파일럿의 유니폼과 구두가 하나도 없어 손수 구두를 맞춰야 했지만, 이제 10명의 여성 후배들이 조은정을 따르고 있다.




호텔에서 외국인 여성 파일럿을 마주친 후
많은 사람들이 꿈을 멀리 있는 것으로만 여기고 바라보기만 한다. 그 이유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금의 학비와 시간을 들여 공부했으니 전공 분야에서 일을 해야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것, 지금까지 일해 왔던 곳에서의 직위와 경력이 아까워 그만두지 못하는 것. 어쩌면 당연하다.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돈,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들인 노력을 불안한 미래와 맞바꾸기란 쉽지 않다. 특히 가장이라는 경제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금 하는 일을 내려놓고 꿈을 좇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자꾸만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거나 다른 것이 하고 싶어 마음이 답답하다면, 지금의 자신이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변화가 없다면 변화는 있을 수 없다. (p. 139)
지난주에 <김미경 쇼> 녹화를 했다. 벌써 방청객들의 후기가 인터넷에 올라왔더라. 여성 파일럿이라는 점에도 화제가 됐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도전을 했다는 것이 젊은 사람들에게 이슈가 된 것 같다. (tnN <김미경 쇼> 폐지 이전에 진행한 인터뷰임)

예전에 KBS <강연 100℃>, 스토리온 <김수로 김민종의 마이 퀸>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이 닿았다. <김미경 쇼> 토크는 『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의 첫 번째 챕터인 ‘오픈 마인드’의 내용을 축약해서 이야기했다. 녹화하기 2주 전에 다른 게스트의 방송을 지켜봤는데 다들 열정이 빛나 보였다. 사실 처음에 출간 제안을 받고서는 거절을 했다. 내가 에세이를 쓸 만큼 대단하지도 않고 글도 써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파일럿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도움이 될만한 팁을 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파일럿에 대한 정보를 다루려고 했는데 정보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곁들인 파일럿 이야기를 쓰게 됐다. 며칠 전에 책을 한숨에 다 읽었다는 후기를 전해 들었다. 가장 기분 좋은 리뷰인 것 같다(웃음).

미대 출신, 호텔리어, 대사관저 비서 등 프로필이 화려하다. 미술과 언어에도 재능이 많았는데 파일럿의 길을 가게 된 것이 흥미롭다.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을 즐기는 편인가? 인생에 열정이 많은 것인가?

한국에는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는데 한 가지를 꾸준히 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로 여겨지는 것 같다. 실제로 외길 인생을 걸으면서 성공하신 분들도 많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 혹은 내가 하는 공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아니거나 의문이 드는 것이라면 굳이 그 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동기들 대부분 어느 정도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삼천포로 빠진 내 직업을 신기해한다(웃음). 대학에서 배운 것들이 아깝지 않냐고도 말하는데, 난 대학에서 전공과목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과 협조하는 삶,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내, 능률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웠고, 굳이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고 나의 한계를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튜어디스 지원을 포기하고 호텔리어로 3년간 생활했다. 호텔리어도 많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업이고 3년쯤 됐을 때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텐데, 어떻게 파일럿에 도전할 생각을 했나?

호텔리어를 지원한 건 내 언어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에 붙은 건 아니다. 1년 동안 지겹도록 이력서를 썼다(웃음). 호텔리어로 몇 년 경험을 쌓고 나면 해외 지점에서도 근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로컬로 취업을 한 경우라 해외 발령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후, 20년 후를 상상해봤는데 그 때도 이렇게 체크인, 체크아웃을 하며 직장생활을 할 생각을 하니까 답답했다. 그렇다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던 중에 호텔에서 우연히 미국 페덱스 화물기 기장인 ‘제니스 스킬라’를 만나게 됐다. 처음 ‘제니스 스킬라’ 기장님을 만났을 때는 그녀가 여성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미리 받은 투숙객 명단에는 성과 이니셜만 적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 어떤 파일럿보다 당당하게 호텔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 때부터 파일럿을 꿈꾸기 시작했다. 내 인생을 바꿔준 분이다. 지금도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호텔리어로 생활할 당시, 투숙하는 외국인 파일럿들과 친분을 돈독히 쌓았는데 비결이 있었나? 아무리 호텔리어라고 하더라도 수백 명의 고객들과 친해지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면에서는 윈윈(win-win)이었다. 그들도 나의 관심을 좋아했으니까(웃음). 호텔리어와 고객과의 대화는 거의 매일매일 똑같은 내용인데, 고객들에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해주면 그들은 신나게 대답해준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한 기색으로 호텔에 왔더라도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면 기뻐하기 마련이다. 덕분에 그들을 통해 나는 파일럿에 대한 정보도 얻었고. 그래서 윈윈(win-win)이지 않았나 싶다.

2001년 당시에는 한국에 저가 항공사가 없었다. 국내 두 개 항공사의 파일럿 자격 요건에는 나이도 시력도 맞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면 포기하기 마련인데.

그 때 내 나이가 만 29세여서 채용 기준 나이는 훌쩍 넘은 상태였다. 1990년대 후반의 채용공고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나이 제한은 25세였고 시력도 양쪽 모두 1.5 이상이어야 했다. 나는 시력이 0.8이었기에 내가 파일럿이 되는 길을 없는 듯 했다. 그래서 포기를 해야 하나 싶던 중에 오산에 있는 미공군 부대 안에 페덱스 여기장 스킬라가 비행을 시작했던 곳과 같은 에어로클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난 당장이라고 비행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가슴이 벅찼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미군 부대에 출입할 수 있는 출입증이 없어 입학이 안 된다는 거였다. 하지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출입증이 필요하면 발급을 받으면 되는 일 아닌가(웃음). 미군 부대나 미국 대사관에서 일을 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미국 대사관으로 직장을 옮겼고 다행히 대사관에서의 임무가 대사의 비서였기 때문에 미군 부대 출입증도 받을 수 있게 됐다.

비서로 일하면서 훈련을 받는 것이 가능했나?

대사님 부부께 비행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을 때, 두 분은 흔쾌히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다.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하길 원하셨다. 대사님이 한국에 있는 3년 동안은 절대로 비서 일을 관두지 않는다는 것. 나는 비서 일을 하던 3년 동안 주말에는 에어로클럽에서 비행공부를 하면서 미국 각지에 있는 항공학교 정보들을 스크랩했고 미국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교 투어를 했다. 그리고 대사님께서 한국을 떠난 해에 나도 미국으로 떠났다.

대서관저 비서 직무를 마치고 미국 델타항공 비행교육원에서 전문 파일럿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중국 항공학교에서 교관활동을 했다. 중국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에 갈 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파일럿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중국 항공학교에서 외국인 비행교관을 채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모아뒀던 유학 자금도 다 써버린 시점이라 급여조건에 이끌려 간 것뿐이었다. 어찌 보면 또 한 번 정상적인 길을 가지 않고 먼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미국 친구들은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으니까. 하지만 2006년 미국 경제가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정상적인 길을 선택했던 미국의 친구들과 나의 미래는 정반대가 됐다. 돌고 돌아 늦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내 미래는 중국 항공업계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지금 난 마흔의 나이이고 기장이 되었지만, 내가 스물아홉이었을 때 한국에서 부기장을 하던 파일럿 중에는 아직도 기장이 되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조금 늦게 출발하더라도 남들과 조금은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침착하게 방법을 찾고, 찾은 방법을 잘 실행하면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것도 생각보다 더 빨리. 미래를 예측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꿈을 이룰 수 없거나 다른 사람에게 뒤지는 것이 아니다. (p.88~89)


동북아시아의 관계 발전을 위한 일 하고 싶어
파일럿은 나의 천직이다. 비행을 하는 것이 내 취미이자 일이 되었다. 파일럿이라는 직업은 늘 나를 약간의 긴장 속에 살게 한다.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들고 체력유지와 같은 자기관리를 하도록 만든다. 또 계속해서 공부를 하도록 부여한다. (p.80)
누구나 꿈을 꾸고 꿈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고민만 하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많고. 파일럿 조은정이 있기까지 성격적인 면도 영향을 많이 미쳤을 것 같다.

성격이 급한 편이다(웃음). 보통 사람들보다 판단을 빨리 하는 편이고. 뭐를 하나 생각했는데 해볼만한 것이면 비교적 빨리 빨리 추진한다. 뭉그적대는 걸 싫어한다. 한두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 당장 실현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마 이런 성격도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된다. 비행교관으로 일했던 중국 항공학교는 오전과 오후로 교대 근무를 하는 자리였는데 나는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 퇴근했다. 그저 학교에 있는 시간이 많으면 조금이라도 비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가능했고(웃음). 더불어 내 학생들도 비행 진도가 빨리 나갔고 너도나도 내 학생이 되길 희망했다. 그 결과 예상치도 못했던 이전에는 없었던 ‘우수 교관 표창장’도 받았다.

파일럿이 되기 위해 한 길을 걸어온 사람과 비교해서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파일럿 조은정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여자들이 많이 있는 직장에서 일을 해봤기 때문에 승무원들의 고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거 같다. 눈물 쏙 빠지게 교육받는 승무원들의 세계를 호텔에서도 경험해봤기 때문에 포용력이 생기지 않았을까. 또 대사관에서 비서로 일했던 경험은 계획을 짜고 수행하는 업무에 많은 도움을 줬다. 지금도 상해에 놀러 온다는 지인들이 있으면 그들의 분 단위 스케줄을 모두 완벽하게 짜주고 있다(웃음).

한 달에 며칠 정도 비행을 하고 있나? 가장 많이 비행하는 나라는 어디인가?

13일~15일 정도 비행을 한다. 보통 중국 국내 왕복과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여행지 방콕, 치앙마이, 말레이시아를 자주 간다. 한국은 오는 5월 정도부터 취항한다. 휴가 때 자주 한국에 방문하지만 직접 비행해 온다면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기대된다.

현직 항공사의 첫 번째 여성 파일럿이다. 지금은 여성 후배들이 많이 생겼나?

5년 전 내가 지샹항공사에 첫 여자 파일럿으로 입사했을 당시 전체 파일럿의 숫자는 겨우 50명 내외였다. 지금은 조종훈련생을 제외하고 현역으로 일하는 파일럿이 약 300여 명이 된다. 그 중 여성 파일럿은 10명, 약 3%다. 아직 미미하지만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파일럿은 남성의 직업이라는 시각이 아직도 많다. 여성이 도전한다면 ‘그래,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라는 시선으로 본다. 하지만 그 시선을 한번 즐겨보는 건 어떨까. 그 곱지 않은 눈빛이 놀람의 눈빛으로 바뀔 때까지(웃음).


많은 초등학교, 중학교로부터 직업 특강 요청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파일럿이 될 수 있냐’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듣는다. 그런 경우는 어디에서부터 대답해줘야 할지 난감한데,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이 보인다’고 답해준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그 길이 보인다. 지금부터 파일럿이 되는 길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시험제도나 자격 요건은 매년 바뀌기 마련이다. 우선 지금 현실에 닥친 공부부터 열심히 하다 보면 파일럿이 되는 길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시력에 대해 걱정하는 학생들도 많은데 미국이 5년 전에 라식 시력을 인정했듯이 한국도 곧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파일럿을 꿈꾸고 있진 않지만, 자신의 꿈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당장에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미래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다. 자신의 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일들을 여러 방향에서 고민했으면 좋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꿈을 향한 작은 시도부터 시작한다면 언젠가 그 꿈에 닿아 있을 거다. 한 단계씩 가는 게 중요하다. 한번에 곧장 가는 길 말고, 가고자 하는 방향에 조금 더 가까이 가는 일들을 하나씩 해봤으면 좋겠다.

왠지 조은정의 마지막 직업이 파일럿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최후의 꿈이 있나? 

(웃음). 우선 10년, 20년 아직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보지 않았지만 동북아시아의 관계 발전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중국 전문가 교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우리는 미래를 예상만 할 수 있을 뿐, 언제 어떤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실제로는 알 수가 없다. 적당한 시기를 놓쳤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고 이미 늦은 나이라는 생각에 새로운 시도가 망설여지고 미래에 닥칠 것 같은 태풍 예상도가 두려운 것이라면, 어느 정도의 착륙 가능성을 믿고 이륙하는 비행기처럼 우리도 자신의 꿈에 대한 믿음을 갖고 이륙을 해야 한다. 설령 선회비행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회항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막상 그 미래에 도착했을 때 당신은 그 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일 수 있다.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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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조은정 저 | 행성:B잎새
이 책은 늦은 나이에 파일럿이란 꿈을 꾸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면서 느끼고 깨달았던 것들, 하늘과 비행기와 함께 했던 이야기들, 파일럿을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는 실질적인 조언들이 담겨 있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파일럿을 꿈꾸는 후배들, 파일럿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항로를 이탈하지 않고 찾아가도록 조언해주고 함께 고민해주는 관제사, 앞서간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탄치만은 않았던 가정환경, 늦은 나이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이야기, 파일럿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을 담아냈다.”고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30대를 넘기고서부터 여자에게 더 관심이 갔어요 - 안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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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생활 백서』『사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모든 것』의 안은영 작가는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리는 쿨한 언니였다. 그리고 『여자공감』『이지연과 이지연』안의 작가는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고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는 따뜻한 언니였다. 그래서 독자들은 알게 됐다. 작가의 예리하고도 서늘한 충고들은 그녀가 뜨거운 가슴으로 낳은 것이었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싶다

『여자 생활 백서』『여자공감』의 독자들은 안은영 작가를 ‘언니’라 부른다. 그리고 한 번쯤 작가를 만나 고민 상담을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직접 메일을 보내 자신의 진로와 연애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독자들도 많다. 아마도 그 중 많은 이들이 안은영 작가를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이상형으로 생각할 것이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사랑 앞에 당당한, 똑똑한 여성이 되는 팁을 제시해 주었던 작가가 아닌가. 게다가 그녀는 1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기자로 활동했다. 많은 이들이 작가를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전형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언니’라면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안은영 작가를 생각하면 유능하고 빈틈없는 직장 선배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옷차림에서부터 여유와 카리스마가 묻어나고 ‘나는 언제쯤 저런 선배가 될까’ 싶은, 까마득한 선배의 모습이다.

『여자 인생 충전기』이전의 작가는 분명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생활도 연애도 서툴기만 한 후배들에게 명쾌한 해답을 척척 제시해주는 선배이자 언니였다. ‘사랑해도 외롭다는 걸 잊지 말라’ ‘진정성 갖춘 선배, 싸가지 없는 후배가 되렴’ 이야기하는 그녀에게는 오랜 시간 고민할 문제도, 상심에 빠져있는 시간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던 선배가 어느 날 갑자기 사직서를 낸다면 어떨까. 그것도 ‘100퍼센트 백수에의 열망’이 그 이유라면? 역시 선배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삶의 방향이나 가치관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다. 안은영 작가의 경우는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녀는 18년 동안의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려 백수로의 삶으로 들어섰다. 무심하거나 염증에 찬 표정으로 불순한 시간을 채워가고 싶지 않아서, 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라면 ‘무얼 할 것인가(To do)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To be)’를 고민하고 싶어졌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작가가 꿈과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우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녀가 새롭게 발 디딘 곳은 비움의 시간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소모하기 위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담기 위해 충전하는 시간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 인생 충전기』는 작가의 삶의 변화가 담겨 있는 책이자, 그녀의 작품이 맞게 된 새로운 전환을 보여주는 책이다.




책, 나 자신을 위로하는 다락방
살다보면 무릎이 꺾이는 순간 기적적으로 만나는 책이, 분명히 있다. 그 순간의 황홀경을 모른 채 청춘을 지난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체온으로 위로받지 못할 때, 책을 들고 당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가라.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빳빳하게 펴지면서 책이 당신에게 다짐 놓을 것이다. 인생, 아직 긴 레이스가 남아 있다고, 시작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p. 74)
안은영 작가는 말한다. 저마다 마음의 다락방이 있다고. ‘삶이 나를 속여서 슬프거나 노여울’ 때 자신을 보듬어 위로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의 다락방. 그녀의 다락방은 늘 책이었다. 분노와 슬픔 속에 빠져들 때마다 그녀는 책을 집어 들었다. 텅 비어버린 마음을 충전해야 할 시간에도 그녀는 책의 다락방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았다. 잔잔한 수면 위에 떠오르는 얼굴을 바라보듯이, 책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우리 삶의 모습들을 마주했다.

『여자 인생 충전기』는 안은영 작가가 지난 1년 동안 자신을 치유하고 새롭게 채워준 35권의 책들을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책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통해서 “빛나는 순간이 박힐 때 더 깊숙이 박히도록 마음의 근력을 키우고, 비수가 꽂힐 때 새살이 빨리 돋도록 내공을 키우는 것 말고, 예측할 수 없는 인생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하고 깨달음을 전하는가 하면 “나의 서른 언저리는 외롭고 불안했다. 누구든 나를 인정해 주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더 자라야 한다고 마음 속으로 고함쳤다. 외침을 들어줬던 건 그 여름 하루키의 성장소설 『해변의 카프카』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에 기대어서는 사랑을, 『밤의 피크닉』에 비추어서는 청춘을 이야기한다. 안은영 작가를 통해 독자들이 만나게 될 이야기들의 끝은 어디일까. 한층 더 커지는 기대와 설렘을 안고 작가와 함께 그녀만의 다락방에 올랐다.




책은 어떤 순간에 찾는 게 아니에요. 없을 수 없는 것이죠.

『여자 인생 충전기』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책 읽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정말 좋아하는 책들을 정리해 보고 싶었어요. 어떤 책들은 저에게 굉장히 깊은 단상을 주고, 또 어떤 책들은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메시지를 주기도 하죠. 책이라는 것은 참 정말 재밌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론 놀랍기도 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책으로 내게 됐어요.

서른다섯 권의 책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셨나요?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책들, 그리고 독자들도 반길 책들을 실었어요. 독자들과 소통할 접점이 생기는 책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렵고 난해한 책들 보다는 무난한 책들을 싣게 된 것 같아요.

책을 쓰는 동안 지난 시간과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셨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랬어요. 제가 책 칼럼리스트도 아니고 리뷰어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책을 잘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 책이 아니고, 제가 읽은 감성과 책을 통해 얻었던 응원이나 위로를 같이 나누기 위해 쓴 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제 내면이 들려야죠. 헤집어져야 되는 거죠.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생각하기 이전에 제 자신을 다독이고 정리하는 일이 우선이었어요. 그 과정이 굉장히 소중했고요.

책을 찾게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책은 어떤 순간에 찾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있는 것, 없을 수 없는 것이죠. 누군가에게는 휴대폰이나 음악이 그렇듯이 저에게는 책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굉장한 문학적 깊이가 있어서 책을 옆에 두는 게 아니라, 어떤 책이든 항상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해요. 종이가 주는 어떤 따뜻함이 있잖아요. 책은 그런 온기가 있는 하나의 물체라고 할까요. 그런 물체를 옆에 두고 책 등을 한 번 만져보고 펴 보고, 그 안에 일러스트나 화보가 있다면 그런 것도 보고요. 그런 아날로그적인 감성들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날로그 감성을 꼭 가지고 있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책은 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책들이 작가님의 관심과 흥미를 끄나요?

역사의 뒷이야기들 같은 정사나 팩트 이면의 얘기들을 좋아해요. 『조선의 탐식가들』처럼 분류는 인문학이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책들이요. 그리고 연산군이나 황진이 같이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좋아하고요. 꼬박꼬박 한 번씩은 들춰보는 책들 중에는 역사 뒷이야기, 인물들, 그리고 음식에 대한 책들이 있어요. 계절이나 어떤 순간, 감정에 따라서 다르기는 할 텐데 굉장히 마음이 가라앉는 날 찾는 책들은 주로 따뜻한 책들인 것 같아요. 음식 이야기가 담긴 책들이 그럴 텐데,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라 『소박한 밥상』같은 책들이죠. 『소박한 밥상』은 자기계발서도 아니면서 정말 독보적인 영역이잖아요. 그런 책들은 언제 봐도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쉽게 읽히는 책들에서 위로를 많이 받아요. 만화책은 늘 보고요(웃음).

책과 사람의 만남에도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책과의 인연이 기억에 남으세요?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여자 인생 충전기』안에 있는 35권으로 얘기해 드릴 수 있어요. 그 안에 없는 책을 얘기하자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 있겠네요. 중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그 때는 정말 이해가 안 됐는데도 문장이 너무 좋았어요. 이해할 수 없지만 아주 간결하고 정중하면서도 뜨거운 문장이었죠. 『연인』을 읽고서 난해하지만 아름다운 문장에 대해서 처음 알았어요. 어렵고, 난해하고, 아름다운 소설이었어요. 완벽하게 이해를 한 건 대학교에 들어가서였지만(웃음) 저는 그 문장이 너무 좋았어요.




직장 선배였다면 ‘언니’가 될 수 없었을 거예요

작가님에게는 ‘2030 여성들의 멘토’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 이미지가 굳어져서 작품의 영역이 한정되지는 않을까 걱정한 적은 없으세요?

초기에는 그런 걱정이 당연히 있었죠. 거부감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거예요. 그것이 싫었다거나 염려됐기 보다는 거부감이라고 얘기하는 게 더 선명할 것 같아요. 누군가를 멘토로 삼는다면 그 사람은 최소한 인생의 기승전결에서 ‘전(轉)’까지는 넘어간 사람이어야 돼요. 자신의 부모님 세대는 되어야 하는 거죠. 세대를 같이 사는 사람을 멘토로 삼기는 어려운 일이에요. 같이 인생을 살아가는 언니에게 멘토라고 얘기한다는 건 저 역시도 부담스러운 얘기고요. 그래서 『여자 인생 충전기』서문에도 언니가 되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하다고 쓴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쓴 책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여자 인생 충전기』를 멘토링의 자세로 접근하면 굉장히 실망을 할 거예요. 왜냐하면 지적질이 없잖아요(웃음). 그냥 제가 쓰고 싶은 글, 하고 싶은 얘기를 에세이로 쓴 거니까요.

여자들의 삶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여자고, 여자를 제일 잘 아니까요. 거창하게 얘기를 하자면 조직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잘 되는 집은 여자들이 잘해요(웃음). 물론 뼈대가 되는 아빠의 역할도 크지만 가정을 윤택하게 하고 진보하게 하는 것은 여자의 역할인 것 같아요. 조직도 마찬가지이고요. 저 역시도 여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깊은 내면의 소리들을 얼마나 스스로 들으면서 자기를 아끼고 살아가는지,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아요. 특히 30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신기하게도 제 스스로가 여자인 저한테 관심이 많아요. 『여자 생활 백서』를 쓰면서 더 구체화되고 내용적으로 갖추게 되었을 수도 있겠죠. 저는 여자로 나이 들어가는 제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해요. 안간힘을 쓰면서 살 안 찌려고 노력하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급적 보톡스를 안 맞은 채로 피부 나이를 늦추려고 하고, 그런 모습들이 바람직한 것 같아요. 여자 이야기를 쓰겠다고 못을 박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잘할 수 있는 얘기, 가장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는 게 여자 이야기예요. 어떤 작가한테 있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걸 쓰라 그러면 정말 쉽진 않을 거예요. 다 관심사의 영역부터 시작을 하니까요.

2030 세대 여성들은 왜 ‘언니’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여자 생활 백서』『여자공감』을 쓸 때 의도했던 건 아닌데, 다 쓰고 보니 어떤 공식이 있더라고요. 제가 독자들에게 ‘이건 꼭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하는 맥락들이 있으면 앞에서 충분히 사례를 들어주는 거예요. 그 후에 경우의 수 몇 가지를 준 다음 거기에 대해서도 설명을 다 해줘요. 마지막에는 어떤 선택을 하든 결론은 독자한테 남겨놓고요. 어떤 얘기를 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요. 대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방향 정도는 제시해줄 수 있겠죠. 그러려면 경우의 수 몇 개를 두는 게 좋을 거고요. 저 같이 언니들은 그렇게 자기 확신이 들 때까지 충분히 사례들을 주고 경우의 수를 두는 거죠.

아무래도 직장 안에는 그런 ‘언니’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직장 밖에서 직장생활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겠죠.

왜 그런 줄 아세요? 『여자공감』이나 『여자 인생 충전기』안의 얘기들을 회사 선배한테 하면 그 회사는 망해요. 선배랑 그런 관계가 되면 일은 언제 해요? 언니는 회사에 있으면 안 되고 한 다리 건너서 둬야 해요. 직장 내에서 외로운 건 당연합니다. 직장 내에서 나랑 마음 맞는 사람이 없고, 하는 일은 똑같지만 왠지 다른 나라 얘기를 하는 것처럼 소통이 안 되잖아요. 특별히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건 당연해요. 서로 일하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그 사이에 접점이 생겨서 잘 맞고 형?동생이 되고 언니?동생이 되면 좋겠지만 그건 위험해요. 그런 사이로 직장 생활을 잘 하려면 일에 대한 애정이 먼저거든요. 회사에서 언니?동생 관계가 성립되려면 일로 먼저 인정을 받아야 하고, 그 관계가 유지되는 데는 서로의 노력이 굉장히 필요해요. 서로 잘 보여야 해요. 서로 견제해야 하고 거리가 너무 가까워도 안 돼요. 그런 관계가 멋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접점에서 뜨겁게 만나서 일하는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이 언니?동생 관계까지 된다면 그건 인생의 파트너가 되는 거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동지라고 하죠. 같은 부서에서 일한다고 모두 동지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언니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의 직장 선배가 아니니까(웃음).




『이지연과 이지연』귀한 아이지만 떳떳한 아이는 아니에요

예전에는 기자라는 본업이 있으셨지만 이제는 전업 작가가 되셨다고 볼 수 있는데요. 어떤 점이 다른 것 같으세요?

그게 참 이상해요. 회사를 그만 두고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지만 전업 작가인 거죠. 저는 전업 작가를 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는데 자꾸 주변에서 저보고 전업 작가라고 해요(웃음). 그래서 주변에서 떠밀 듯이 전업 작가가 됐어요. 그러니까 고민이 남은 거죠. 이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생각이에요. 뭘 쓰고 싶은지, 뭘 써야 할지. 독자들에게 정말 해주고 싶은 얘기, 들려주어야 할 얘기는 무엇인지. ‘소명을 가지고 쓸 책’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요. 저는 제가 글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글 쓰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도 잘하지만 말보다 글로 전달하는 것에 약간 능한 사람인 거죠. 아직까지는 내가 쓴 글로 같이 공감하는 정도라고 생각해요. 글 쓰는 게 저한테 소명은 아니에요. 소명이고 싶은 거죠. 겸손이 아니라 글 쓰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아직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싶어요.

예전에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고, 마흔이 넘어 책을 내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죠. 최종적인 목표는 소설을 쓰시는 건가요?

네, 아마도요.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아주 재미있게, 누구나 혹할 만한 거짓말로 이야기를 지으려면 분명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 재능은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이 과연 개발을 하면 나오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데, 절대 그건 아닐 테고요. 지금은 제가 갖고 있는 얘기들을 풀어놓는 것이 맞는 것 같고, 앞으로는 실험을 해봐야겠죠. 제가 지어낸 이야기를 꺼내놨을 때 독자들이 얼마나 반응을 하는지요. 『이지연과 이지연』같은 경우는 첫 소설이니까 저한테는 굉장히 실험적인 시도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귀한 아이지만 떳떳한 아이는 아니에요.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아요.

‘무엇을 하겠다’ 보다 ‘어떻게 살겠다’를 고민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셨는데요. 정답을 찾으셨나요?

지금까지 18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잖아요. 연봉 올라가는 거 신경 쓰고 수당 떨어지는 거에 열 받아 하고, 그게 직장 생활이죠. 이제는 다달이 월급 버는 것을 포기하고 물욕을 조금 버리고 살고 싶어요. 최근에는 가지고 있던 책과 CD도 팔았어요. 그러니까 되게 선명해지더라고요. 팔 책과 남겨둘 책을 고르면서 저의 취향과 독서 습관도 선명해지고, 홀가분해 지더라고요. 물리적으로는 그렇게 쌓여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방향이 잡히는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나도 긴 시간 대화하게 되니까 훨씬 밀도 있고 내밀한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것 같고요. 좋아요, 느리고 게으르게 사니까.

『여자 인생 충전기』를 읽은 독자들이 어떤 자극을 받고 어떻게 반응하기를 바라시나요?

『여자 인생 충전기』에 나와 있는 어떤 책을 읽어보고 싶어지고 ‘당신 글을 읽고 그 책 하나 샀다’고 말해준다면 정말 좋겠죠. 그리고 ‘당신이 왜 그렇게 무릎이 꺾일 때마다 그 책을 찾았는지 알 것 같더라’ 또는 ‘당신은 그 구절이 좋았다고 하는데 난 이 구절이 훨씬 더 가슴을 울렸다’ 하고 감상을 나눌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할 것 같아요. 나중에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인데요, 서른다섯 명의 독자들에게 책에 나온 서른다섯 권의 책들을 한 권씩 사주는 거예요. 그리고 모여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얘기를 나누는 거죠. 그게 저한테는 가장 즐거운 리뷰일 것 같아요. 당신의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이 읽고 싶어 졌다는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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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인생 충전기안은영 저 | 해냄
베스트셀러 『여자생활백서』를 통해 40만 독자들에게 일과 사랑에 관한 멘토로 활동해온 안은영 작가가 신작 『여자 인생 충전기』를 내놓는다. 18년이라는 오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작가 스스로도 충전의 시간을 보내며 써내려간 이 책 속에는 "뭘 하기보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성장과 치유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 찾기'를 해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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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전교회장 선거, 어른들과 어떻게 다를까요? - 진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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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잘난 것 없는 시장 떡집 아들 안석뽕(안석진)이 어느 날, 전교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본인의 뜻은 아니었으나 순댓국집 손자 조조(조지호)와 건어물집 아들 기무라(김을하), 단 두 명의 친구의 부추김에 의해 덜컥 마음을 먹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석뽕이는 선거운동을 하는 내내 스스로가 정말 회장을 하고 싶은지, 마음을 살핀다. 당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선거 유세를 시작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돈 없는 집 아이들을 대변하기에 이른다. 석뽕이가 아이들에게 내건 공약은 단 세 가지. 수학 시간을 줄이자, 수학여행은 싼 데로 가자, 1학년 엄마들한테 급식 도우미 좀 시키지 말자. 회장에 당선되면 햄버거를 쏘겠다는 유력후보 기호1번 고경태, 엄마가 회장선거에 나가면 게임기를 사준다는 약속 때문에 선거에 나온 기호2번 방민규. 그리고 반장 한 번 못해본 처지의 기호3번 안석뽕. 과연 아이들을 누구를 회장으로 뽑을까? 기상천외한 선거운동을 펼치는 석뽕이에게 표를 던지는 친구는 있을까?

제목만 읽어도 코믹성이 엿보인다. ‘기호3번’이라는 타이틀에 붙어있는 이름은 ‘안석뽕’. 서예가 한석봉의 후예인가? 라는 오해를 할 찰나, 석뽕이네 집이 시장에서 떡집을 한다는 힌트가 보인다. 초등학생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동화를 어른이 읽어본 소감은? “자녀가 있다면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주고 싶네.” 왜냐, 첫째로 재미있고 둘째로 생각할 거리를 주기 때문. 그렇다면 뻔한 교훈적인 이야기냐고? 오해 마시라. 세상의 어른들이 주는 케케묵은 조언 따위, 애당초 작가에게 없었다. 첫 데뷔작 『기호3번 안석뽕』으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고학년 부문 대상을 수상한 진형민 작가는 책 표지에 상세한 프로필을 적지 않았다. 무슨 대학 무슨 과, 이런 작가 소개가 실리면 어린이 독자가 ‘아, 이런 과를 나와야 작가가 되는구나’하고 선입견을 갖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게 협조를 구해 작가 사진도 실지 않았다. 중성적인 이름 탓에 ‘남성 작가’로 착각하고 인터뷰 장소에 나온 필자에게 “그걸 노렸어요”라며 뿌듯해하는 진형민 작가. <채널예스> 덕분에(?) 성별이 밝혀지게 됐지만 이왕 공개된 것, 한껏 웃으며 사진 촬영에 응했다. 진형민 작가는 1년 동안 세 딸들과 함께한 아시아 여행기를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연재하기도 한, 평범하지만은 않은 엄마다. 적어도 세상이 보는 시각에서 평범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특이한 엄마’. 동화를 쓰게 된 계기를 묻자, 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기준, 관념이 맞는 거야? 이런 의심을 가져보라고 아이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보고 싶었어요.” 무색무취 평범한 모범생으로 자녀를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라면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궁금해하는 자녀의 성장기를 보고 싶다면 『기호3번 안석뽕』을 펼쳐도 좋겠다.




학교가 정한 틀 안에서 평범해진 아이들

소재가 재밌으면서도 현실적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전교회장 선거, 그리고 재래시장 앞에 들어선 대형마트 이야기 등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현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작년에 동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선거하는 모습을 보면서, 또 대선을 지켜보면서 이걸 통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재래시장에 대한 단편도 하나 썼는데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기호3번 안석뽕』을 썼다.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 건 ‘반드시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 필요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까 자연스레 관심이 갔고 쓰게 됐다. 아이들도 사회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 아이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건 없다. 결국 어떤 걸 얻어 가느냐는 아이들의 몫이다. 다만, 2년 뒤 5년 뒤 다시 이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지금 얻은 것과 다른 걸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기호3번 안석뽕』을 쓰면서, 본인들이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이미 주어진 사회구조 안에서 너무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정말 옳은 걸까’ ‘공정한 걸까’하는 의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 의심을 부정하거나 비관하려는 게 아니라 의심을 통해서 ‘또 다른 이면의 진실이 있구나’를 깨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어떤 결론을 내든, 옆에서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며 ‘그거 맞아? 이상한 것 같은데?’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었다.

평범하지만 은근히 속 깊은 주인공 안석뽕(안석진)부터 석뽕이를 회장 선거에 내세우는 친구 조조(조지호)와 기무라(김을하), 슈퍼집 딸 백발마녀(백보리), 부잣집 아들 반장 고경태 등 캐릭터들이 모두 애정이 간다. 사고뭉치지만 하나하나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어떻게 구상했나?

처음부터 뚜렷하게 캐릭터를 만든 건 아니었다. 쓰고 또 쓰면서 ‘이 아이는 이런 녀석일 거 같네’라는 예측으로 살을 입혔다. 대안학교에서 5년 동안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초등학교 아이들이랑 생활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책을 쓰면서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진 않았고 늘 봐 왔던 아이들의 여러 캐릭터를 결합했다. 누가 하나 예쁘지 않은 캐릭터가 없다. 내가 딸이 세 명인데, 첫째 딸은 이래서 예쁘고 둘째, 셋째 딸은 또 다른 면 때문에 예쁘다. 토탈해서 점수를 낼 수 없다. 『기호3번 안석뽕』이 일인칭 화자로 서술되기 때문에 각 인물들이 이름으로 불러지느냐, 별명으로 불러지느냐에 따라 거리의 차이는 있겠다. 동화 속 석뽕이가 느끼기에는 거리감이 있는 저만치의 아이들이라고 해도, 독자들 각자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다.

현실에서는 안석뽕 같이 평범한 아이가 전교회장 선거에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모범생도 아니고 부모의 지원도 없다. 하지만 동화 속 독백을 보면, 사뭇 진지하고 또 속도 깊다. 이렇게 평범한 캐릭터를 주인공을 삼은 데는 작가의 뜻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평범하다는 평가는 학교라는 체제 안에 들어갔을 때 평범해지는 게 아닐까. 학교에서 인정하는 영역, 즉 공부나 예체능에 뚜렷한 실력이 없으니까 평범하게 묻혀버리는 거다. 학교라는 공간은 어떤 다른 걸 가지고 있어도 평범하게 묻혀지는 곳이기도 하다. 평범한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평범한 건데 말이다. 학교에서 판단하는 잣대로 아이들이 계속해서 평가 받는다면, ‘난 평범해’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안석뽕을 떡집 아들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종종 그런 질문을 받곤 하는데,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건 아니다. 동네 재래시장에서 떡도 먹고 순대국도 먹고 시장을 왔다갔다하면서, 여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어느 가게 아이들로 할까’ 훑어 보면서, 이야깃거리가 따끈따끈하게 나올 공간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 중에서 선별된 가게들이 책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가게다. 실제로는 책에서만큼 시장에 아이들이 많이 없다. 동네 떡집에서 종종 떡을 해먹는데,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이 아이들이 떡집에 들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 직업란에도 ‘떡집’이라고 잘 쓰지 않는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부모가 일하는 공간, 시장에 있지는 않지만 주위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리며 글을 썼다. 아무래도 떡집 아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떡집에 자주 가서 가래떡, 시루떡 만드는 걸 곰곰이 살펴보기도 했다. 이 책을 쓰면서 떡을 하도 많이 사오니까 아이들이 ‘엄마 또 떡 사왔어?’라고 말하더라(웃음).

위트가 남다르다. 어른들도 킥킥대면서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이 무척 많다. 파출소에 잠깐 다녀온 친구한테 두부 대신 ‘두유’를 선물하는 장면이라든가, 떡집 아들이기 때문에 가래떡으로 춤을 추면서 선거운동을 한다는 설정도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됐다.

내 유머코드가 대중적일까? 나 혼자만 재미있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웃음). 겉으로 보기에는 재밌어 보이진 않는 캐릭터인데 숨겨진 본능이 있는 거 같다. 평소에 ‘어떻게 웃길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재밌는 글에 대한 욕구가 늘 컸다.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 올인 한 적이 있었다. 저학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연기도 하고 고학년이 돼서는 연출을 했다. 사실 학업보다 연극 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대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연극을 한 일이다.

결말이 현실적이면서도 또 비현실적이다. 어린이 독자들을 위해 좀 더 해피엔딩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니까 긍정적이고 판타지적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기운차게 끝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은 늘 있는 것 같다. 어두침침하게 끝나거나 너무 열려져 있는 절망을 건네기는 마음이 아프니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거나 기운을 줄 때는 그 밑에 정확한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로만 건네는 위로는 더 서먹할 수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기운찬 결말이지 않았나, 싶다(웃음).




대안학교에 대한 선입견, 버렸으면 좋겠다

『기호3번 안석뽕』이 첫 소설인데 큰 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방송국, 책방, 학교, 출판사를 오가며 일을 해왔지만 소설을 쓴 적은 없다고 했다. 어린이 장편동화를 쓰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

작년 1월부터 6개월동안 한겨레 아동문화작가학교에서 동화를 공부했다. 그동안 글 작업을 꾸준히 하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형태로 어린이책과 가까이 지내긴 했다. 대안학교에서 일하기 전에 잠깐 어린이서점에서도 일을 했었다. 일산에 ‘동화나라’라는 어린이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동화를 한참 읽을 나이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책을 접했다. 그리고 나서 대안학교에 가서 전 학년 국어과 수업을 맡게 됐는데, 교과목은 ‘우리말과 글’이었지만 대안학교의 특성상 교사들의 자율성에 따라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한 학기에는 오로지 시만 공부한 적도 있고, 신화를 가지고 그림자극, 인형극 등을 하면서 발표회를 진행한 적도 있다. 아이들과 책에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겁내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대안학교 교사의 경험이 어린이 동화를 쓰는데 도움이 되었나? 자녀들도 모두 대안학교에서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대안학교나 대안교육의 현장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안교육이 공교육을 배척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답답한 건 교육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공교육만이 정답이 아닌데, 다른 형태의 교육을 배척하는 현실이 문제다. 홈스쿨링이나 작은 공동체에서의 다양한 실험적인 교육 형태가 공존할 수 있다면, 서로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청소년기에 있는 세 아이가 있는데, 모두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지만 공교육을 받고 싶다고 해서 다시 돌아간 아이도 있다. 대안학교가 가지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의 고유함도 있고 여러 가지 변수들도 있기 때문에 ‘대안학교 아이들은 이렇다’하는 정의를 내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보면서 대안학교로부터 받은 수혜가 있다면, 여전히 소통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뭔가 하고 싶은 의지가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부모로서 아이들을 양육할 때, 특별한 문화체험을 공유한 경험이 있나.

아이들의 학교를 휴학하고 1년 동안 아시아 9개국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여행기 ‘세 딸과 느릿느릿 아시아여행’을 연재하기도 했다. 여섯 나라는 좀 길게 살아봤고 세 나라는 배낭여행 하듯이 거쳐 갔다. 아이들이 길 위에서 성장했을까, 키가 한 뼘씩 자란 것 말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교육의 기치를 가지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대신 같이 걸었던 길목들과 우리 집 삼았던 숙소들과 새 친구들을 만났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가르침을 주기보다 ‘너도 한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봐’ 이런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기호3번 안석뽕』이 매우 재밌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것처럼.

부모나 교사에게는 수행해야 할 만한 역할이 분명히 있다. 부모 같은 경우에는 그 사회가 가진 도덕, 관습을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아이들이 부모의 방식대로 한가지 흐름을 가지고 쭉 성장하는 것보다 주변에서 누군가 아이들을 흔들 수 있는 여지도 남겨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책이 될 수도 어른이 될 수도 있다. 다사다난한 세상 속에서 ‘너를 보호해줄게’가 아니라, 방황하고 고민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부모의 삶이 아니니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일 아닌가.

학습서를 주로 사주는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누구나 책 속에서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건 아이가 게을러서도 부모가 열의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너무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원하든 원치 않든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쉽지 않게 된 거 같다. 책뿐만이 아니라 여타의 학습과 무관하다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되는 걸 볼 때 안타깝다. 그렇다고 부모들을 비난할 수도 없고 아이들에게 열심을 강요하면서 책을 읽으라고 말할 수도 없다. 더 본질적인 것, 심심함 속에서 책을 찾고 그러면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사실 심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이들을 심심하게 만드는 정책과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심심함을 굳이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 활동, 놀이들을 통해서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의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합의하고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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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3번 안석뽕진형민 글/한지선 그림 | 창비
유치원 영어반에서 ‘제임스’로 불리던 주인공 안석진은 아버지가 퇴직하고 시장에서 떡집을 시작하자 ‘떡집 안석뽕’으로 불리면서 하루아침에 인생이 급커브를 그리게 된다. 같은 시장 순댓국집 손자 조조, 건어물집 아들 기무라와 어울려 다니면서 여자애들에게 교실 구석에 세워 둔 대걸레 같은 취급을 받으며 반장 한 번 못 해 본 처지인 안석뽕. 기무라의 ‘배 째라’ 정신에 휘말려 얼떨결에 전교 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빠른 속도와 경쾌한 분위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사건이 전개되는 내내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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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 스크립트(The Script)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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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예사롭지 않은 신인의 등장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3인조 록 밴드 스크립트(The Script)의 데뷔 싱글 「We cry」는 밴드 전형의 록 음악이지만, 엄연히 달랐다. 기타는 전체 악곡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고, 드럼은 일정한 루프를 무한정 찍어낼 뿐이다. 보컬은 랩과 멜로디 쉴 새 없이 오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읊조리듯 풀어낸다. 정체성에 대한 의문부호가 지워지기도 전부터 그들을 향한 세계적인 팬덤은 날로 거대해졌다.

3월27일 공연이 예정된 서울 광진구 소재 악스홀의 대기실에서 그들과 만났다. 보컬 대니 오도노휴, 기타 마크 시한, 드럼 글렌 파워 이 세 남자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나이스 가이’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현장의 모든 사람과 짧은 인사말과 함께 악수를 건넸고, 환한 미소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U2를 잇는’ 이라는 수식어와 흑인 소울과 록 음악의 결합이라는 ‘켈틱 소울’은 더 스크립트의 클리셰로 뒤따른다. 그렇지만 그런 단어들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면 무엇이든 ‘OK’라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새 앨범 < #3 >의 타이틀처럼 3명 각각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지만, 함께 할수록 밝은 기운을 전하는 쾌남들이었다.


작년 이즘에서 ‘2012년 올해의 팝 앨범’으로 스크립트의 < #3 >를 톱10의 하나로 뽑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직접 만나게 돼서 반갑고, 영광입니다. 먼저 앨범의 첫 싱글 「Hall of fame」은 영국 차트에 처음으로 1위를 기록했고 미국 내 차트 성적도 준수했는데, 세계적인 인기를 실감하고 있는지.

대니 : 요즘은 달 위로 뜬 것처럼 날아다니는 기분이에요. 5년 동안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거든요. 그저 모든 것이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죠. 1집에서부터 3집 앨범까지 오면서 우리는 모든 음악과 곡에 집중해왔는데요. 특히 멜로디에 중점을 두면서 곡 작업에 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선 언급한 「Hall of fame」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면요. 스튜디오에 있는 우리 자신을 응원하고 영감을 얻기 위한 취지로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역시나 이 곡이 이렇게 국제적인 인기를 얻을지 몰랐죠. 비교하자면 「강남 스타일」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 곡을 듣자면 모두 똑같이 입고,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들을 하는데, “왜 그래야 하나?”라는 식의 메시지를 담고 있죠. 일종의 응원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팝 뮤직’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세상 모두에게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어요. 모든 사람에게 좋은 메시지를 주고, 영감을 전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곡의 제목인 ‘명예의 전당’이라는 것은 운동선수나 뮤지션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죠. 우리가 생각하는 ‘명예의 전당’은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 #3 >의 수록곡 가운데 「No words」에서 들려오는 귀곡 소리가 인상적으로 들렸습니다. 어떻게 녹음된 것인가요?

대니 : “아아아아~ (노래를 부르며)” 이 부분 말인가요? 재미있는 이야기인데요. 그 소리는 아일랜드 음악 역사상 가장 오래된 녹음 기록이에요. 그것을 「No words」에 샘플링 한 것인데 약간의 귀신의 목소리처럼 들려오도록 작업했습니다.

좀 전에 멜로디를 얘기했으니까 말인데요, 이번 「Hall of fame」은 물론이고 스크립트의 「The man who can't be moved」, 「We cry」, 「Breakeven」, 2집의 「For the first time」, 「Nothing」과 같은 곡은 정말 멜로디가 압권이죠. 이런 음악적인 영감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대니 : 우리 음악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군요! 감격에 울 것 같아요! (We cry!) (웃음) 일단, 우리가 음악을 만드는 공식이 있었다면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 실패했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특별한 공식 같은 것은 지양하려고 하는데요. 멜로디와 가사는 우리의 일상생활 모든 부분에서 나오죠. 우리에게 음악을 창조함은 일종의 치유(Therapy) 과정이며, 샌드백(Sand bag)과 같은 거예요. 우리 곡을 들으면, 우리가 굉장히 부정적이고 슬픈 사람들일 거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가사 대부분이 슬프고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긴 하죠. 그렇지만 우리는 곡을 만드는 과정에서 샌드백을 치듯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풀어내고, 치유합니다.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는 해요.


그렇다면 밴드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마크 :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한다면 ‘정직’입니다. 스크립트는 다른 사람들이 노래하고 싶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해요. 슬픔에 대해서, 혹은 어떤 아픔에 대해서 말이죠. 이런 부정적인 주제는 대부분 음악가들은 다루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정직하게 노래하려고 해요. 이런 것들에 진실이 있다면,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에요.

스크립트는 상기한 것처럼 귀에 잘 들리는, 멜로디 중점의 팀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세계 유수의 평단에서도 아일랜드 출신이기 때문에 ‘켈틱 정서’에 대한 언급들이 많습니다. 본인들도 아일랜드 전통적인 정서가 음악에 많은 영향이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대니 : 우선은 아일랜드 출신이라면, 록밴드의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에요. 우리 음악에는 흑인 음악의 요소가 많은 부분 녹아 들어있기 때문에 ‘켈틱 소울, 켈틱의 정서 때문이다’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아일랜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타를 칠 줄 알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도 그 일부였을 뿐이에요. 이런 배경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긴 해요. 멜로디적인 부분과 스토리텔링적인 부분이 함께 만나서 곡이 완성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죠.


「The man who can't be moved」가 여성 내의의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에 쓰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글렌 : 끔찍하죠. (웃음) 농담이에요! 「The man who can't be moved」라는 곡이 상업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우리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다양한 예술 분야에 쓰인다는 사실은 정말 행복한 일이죠. 밴드에도 좋은 기회였어요. 그렇지만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우리를 그 란제리 쇼에 초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웃음)

우스운 질문이지만 스크립트는 남자 팬, 여자 팬 중에 어떤 쪽이 더 많은가요?

마크 : 솔직히 말하자면, 여자 팬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니 : 그렇지만, 지금은 50대 50이에요. 첫 앨범 때는 70대 30, 2집 때는 60대 40으로 여성이 많았죠. 초기엔 여자 팬들의 환호가 너무 커서 연주하기가 어려운 적도 있었는데요. 이제는 관객의 비율이 어느 정도 비슷해져서 만족하고 있어요. 그래도 여자 팬들이 많으면 기분은 좋죠!


활동이 5년 정도가 되었는데, 처음부터 랩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나요? < #3 >은 1집과 < Science & Faith >에 비해 랩을 강화했는데, 랩을 선택한 이유와 동기가 뭔지.

대니 : 우선 처음 결성 당시부터 ‘이렇게 하자!’라는 것은 없었어요. 우리의 방식이 그래요.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한다기보다 즉흥적으로 작업에 임하는 것이 보통이죠. 첫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택하고요. 두 번째는 ‘우리가 좋아하고, 잘할 줄 아는 것’을 해요. 예를 들자면, 「If you could see me now」라는 곡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어요. 이런 말들을 전부 다 풀어내려면 노래보다는 랩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마크는 미국에서 11년 정도 미국에 있으면서 프로듀싱 작업을 하고 곡도 많이 써왔는데, 그 동안 접해온 R&B와 힙합은 우리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마크 : 랩은 저와 대니가 하고, 글렌은 주로 포장(Wrap)을 해요. (웃음) 우리는 랩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데요. 구태여 표현하자면 ‘랩’이라는 단어가 많은 대중에게 익숙하기에 사용할 뿐이에요. 사실은 아일랜드의 포크 뮤직, 전통음악에는 스토리텔링의 일환으로 랩을 사용하는데요. 우리도 같은 맥락입니다.

대니 : 우리 중에 두 명이 랩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힙합 뮤지션과 ‘랩 배틀’ 같은 것을 하라면 절대 못할 걸요. (웃음)


지금까지 발매된 곡 중에서 본인들이 평가하는 가장 훌륭한 멜로디를 가진 곡이 있다면. 그리고 멜로디 작법(作法)에 대해 듣고 싶네요.

대니 : 한 곡을 고르기는 어려운 것 같은데요. 저희 곡의 멜로디에는 항상 아치 형 모양이 있어요. 우선은 낮은 음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해서 코러스로 가는데 코러스의 멜로디가 1절의 멜로디보다 낮은 경우는 잘 없죠. 항상 높아져서 뭔가 빵 터뜨리는 느낌을 주죠. 그런데 코러스를 지나서 저희는 B 코러스라는 있어요. 후크(Hook)로 따진다면 A후크, B후크가 있는 셈이지요. (노래를 부르며) ‘I'm not moving∼’ 이 부분이죠. 아니면 ‘Fall into pieces∼’ 이런 부분이요. 이 부분들은 후크 다음에 방출되는 그런 부분들, B후크입니다.

당연히 이 부분은 한 옥타브가 높죠. 그래서 저희는 모든 음역을 다 커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성 음역에서 시작했다가 남성과 여성이 부를 수 있는 코러스가 나오고 B 후크는 여성들만 도전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이죠. 그래서 스크립트 음악의 멜로디는 남성과 여성의 음역 대를 다 들을 수 있게 되는 거죠. 거의 대부분의 곡에 그런 구조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뭐랄까, 일련의 수학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지요.


밴드를 처음 결성했을 때 베이스주자를 정식 멤버로 들이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

마크 : 인간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요. 누구든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었다면, 멤버로 영입해 활동했을 거예요. 아일랜드에서는 밴드 멤버를 모집할 때 “밴드 멤버로 들어올래?”라는 질문을 할 때 악기 연주를 할 줄 아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아요. 대부분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할 줄 알기 때문인데요. 대신 “포커 좀 칠 수 있나?”라는 농담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에요. 밴드 생활에서는 인간적으로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장 중요한데요. 우리 셋은 오랫동안 친구였고, 최소한의 멤버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어요.

대니 :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1집은 내가 베이스 연주를 해서 이미 녹음이 끝난 상태였어요. 음악을 만들면서 멤버들 각자가 모든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고, 당연히 녹음과 편곡도 가능했어요. 누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였죠.

그렇다면, 그런 인간적인 부분 때문에 윌.아이.앰(Will.i.am)과 함께 작업하게 되었나요?

마크 : 우리는 오디션 프로 <더 보이스>(The Voice)에서 친분을 쌓기 시작했어요. 방송 외적으로 윌.아이.앰의 인간적인 면에 끌린 것 역시 사실인데요. 우리는 평소 일상 속에서도 굉장히 열정적으로 음악을 쓰는 사람이에요. 그런 면에서 친구가 되기 쉬웠습니다. 「Hall of fame」이라는 노래가 이미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윌.아이.앰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만족해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곡에 초대되었고, 유기적으로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완성되었어요.


멤버 각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앨범’이 무엇인가요?

글렌 : 아바의 베스트 앨범이긴 한데… (웃음) 저는 제프 버클리의 < Grace >앨범을 가장 좋아해요. 완벽한 클래식이죠.

대니 : 제임스 테일러의 1991년 앨범 < New Moon Shine >가 저에게 가장 결정적인 앨범이에요. 그 앨범을 듣고 기타를 처음 잡게 되었죠. 말씀한 초기 히트 싱글 「Fire and rain」도 역시 사랑하는 곡이에요.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비틀즈의 <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를 뽑고 싶어요. 프로덕션의 모든 것이 담긴 앨범이에요. 7, 8살 즈음에 처음 들었는데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마크 : 어떤 하나의 앨범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뽑아보자면 데이비드 보위의 베스트 앨범인 < Changesbowie >나, 곡으로 따지자면 「Fame」같은 곡이랄까요. 저는 특정적인 하나의 앨범에 사랑에 빠지기보다는 어떤 곡의 구간과 구간에 반한답니다.

한국에서 아일랜드의 뮤지션들이 상당히 인기가 있는데요. 시네이드 오코너, 유투, 밴 모리슨, 엔야 그리고 치프턴스(Chieftains)같은 음악가가 알려져 있고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스크립트에게 가장 절대적으로 영향을 준 아일랜드 뮤지션이 있다면 누구인지.

대니 : 어렸을 때 운 좋게도 학교 선생님께서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들과 친분이 있어서 치프턴스(Chieftains)와 함께 연주도 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었어요. “이런 악기를 사용해 만든 음악을 옛 사람들이 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충격을 받았는데요. 그때부터 아일랜드의 전통음악에도 빠져들기도 했어요.

엔야(Enya)의 멜로디나 하모니도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밴 모리슨(Van Morrison)은 아일랜드에서 지속적해서 소울과 R&B를 지속적으로 해왔기에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뮤지션입니다.

모두가 훌륭한 아티스트이자 스승이었어요. 언급해주신 모두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유투(U2)가 절대적이에요. 음악적으로는 물론 지형적으로도 영향을 받았죠. 유투는 우리와 같은 더블린 출신인데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 동네 사람들이 세계로 뻗어 나가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준 것이죠. 원대한 꿈 말에요.


인터뷰: 임진모
정리: 신현태
사진: 소니뮤직 제공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코끼리 얼굴, 돼지 몸통, 코뿔소 눈 ‘따삐르’를 아세요? - 김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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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삐르’라는 동물을 아시나요?”김한민 작가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 등이 굽은 동물을 좋아하는 그는 <EBS 세계테마기행> 출연 차 페루 남부의 정글 ‘마누(Manu)’에서 마주친 따삐르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사진, TV, 동물원에서 수없이 보고 에콰도르의 한 자연보호구역에서 직접 만져 보기도 했지만 김한민 작가는 야생에서 ‘따삐르’와 마주하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작은 진흙탕 앞에 진을 친 결과, 진흙을 핥아 먹기 위해 살금살금 사뿐 거리며 다가오는 따삐르를 만났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사뿐 살금살금 걸어오는 따삐르를 본 순간, 김한민 작가는 따삐르를 주인공으로 한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특유의 걸음걸이로 사냥꾼을 따돌리게 되는 따삐르의 이야기 『사뿐사뿐 따삐르』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잠깐, 김한민 작가를 어린이 동화 작가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현재 한겨레신문에서 ‘김한민의 감수성 전쟁’을 연재하고 있으며, 최근 그림소설 『카페 림보』을 펴내기도 했다. 『사뿐사뿐 따삐르』의 그림을 보고 『카페 림보』를 읽는다면, 김한민 작가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따삐르를 그린 작가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카페 림보』를 그린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동명 이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른 그림체. 과연 김한민 작가에게는 얼마나 많은 모습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리스 비극의 가면 제작사를 다룬 만화 『유리피데스에게』를 시작으로 유아 그림책 『웅고와 분홍돌고래』, 그림 소설 『혜성을 닮은 방』 3부작, 소설 『공간의 요정』을 썼으며, 김탁환 작가와 정재승 교수가 집필한 장편소설 『눈먼 시계공』의 그림까지. 김한민 작가는 전천후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궁금하기 짝이 없는 김한민 작가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채널예스>가 만남을 청했다. 그와 약속한 장소는 서강대 근처에 있는 문화공간 숨도. 1층에 있는 카페부터 외관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김한민 작가가 인테리어 작업에 참여한 공간이었다. 이런, 질투를 샘솟게 만드는 전방위 예술가 같으니라고! 뭔가 허술한 점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했는데 이럴 수가! 그는 달변가 기질까지 충만했다. 필시 필자가 그림과 글 작업을 동시에 하는 작가였더라면, 김한민 작가에 대한 질투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책으로 만드는 직업

『사뿐사뿐 따삐르』에 관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 탐색 차원으로 김한민 작가를 한번 떠보았다. 당최 ‘김한민 스타일’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물음이었다. 어떠한 답변을 꺼내놓을지 사뭇 기대감이 차오르는 찰나, 김한민 작가가 이실직고 했다. “사실 저한테는 많이 불리해요. 아무도 이 작품이 김한민이였어? 라고 눈치채지 못하니까요. 하나의 스타일로 꾸준히 하면 그림만 봐도 작가 이름이 떠오를 텐데 전 그렇지 않으니까요. 불리하긴 한데 그래도 똑같은 스타일로 반복하는 게 어려워요. 다만 비슷한 결이 있다면 그림이 둥그스름하고 각지지 않았다는 것, 캐릭터가 많이 살아있고 동물을 많이 쓴다는 것 정도가 될까요? 의도한 건 아닌데 저도 제 변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요(웃음). 하지만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그에 맞는 필요한 옷이 따로 있는 것 같긴 해요.”

『혜성을 닮은 방』에서 이런 대사가 나와요. 어떤 애가 이상한 개똥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듣고 있는 꼬마가 ‘형은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좋아’라고 말해요. 저도 그랬던 거 같아요.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재밌었어요. 지금은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는 아이를 안 좋아했어요. 아이는 보통 아이를 좋아하진 않잖아요. 작가에겐 내 마음의 상태, 상상력의 상태가 중요한데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려면 누군가에게 읽힐지 포지셔닝을 해야 하잖아요. 제가 꺼내고 싶은 결은 두 가지가 왔다갔다하는데, 하나는 진지하고 비판적인 거고 다른 하나는 소년 같은 이야기인 거 같아요. 제 안에는 소년도 소녀도 있으니까요. 작가라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책으로 만드는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저 같은 경우엔 그 정체성이 다소 산만하게 펼쳐지고 있지만, 하나가 파워풀하게 작용하는 사람은 그걸로 자신의 색깔을 구축할 수 있겠죠.”

그래서 김한민 작가는 결정했다. 어른 책 하나, 아이들 책 하나씩 번갈아 작업하기로.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상상력들을 대상에 맞게 재구성해 어른, 아이 독자를 찾아가고 있다. 눈치챘겠지만. 지난해 출간한 『카페 림보』는 어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었고, 이번에 펴낸 『사뿐사뿐 따삐르』는 아이 독자들을 위한 그림 동화다. 『사뿐사뿐 따삐르』는 김한민 작가의 동화적 감수성이 흠뻑 스며든 ‘따삐르’라는 동물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따삐르’에요. 얼굴은 코가 좀 짧은 코끼리 같고, 몸통은 돼지 비슷하고, 눈은 코뿔소와 닮았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몰라요. 따삐르는 주로 남미와 동남아시아에서 사는 포유류인데, 영어식으로는 ‘테이퍼’라고도 불려요. 우리나라에선 서울동물원 남미관에서 볼 수 있어요. 따삐르는 절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물인데, 정글에서 따삐르를 봤을 때는 정말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스리랑카와 덴마크에서 살았어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동물을 많이 키웠어요. 맨날 곤충 잡으러 다녔고요(웃음). 문제는 동물을 키우는 능력이 너무 많아져서, 친구들이 ‘아 이 동물이 좀 키우기 힘들겠다’ 싶으면 모두 저희 집으로 갖다 줬어요. 동물을 키우는 관리자 리스트도 만들어서 혼자 검사필 사인도 하고 그랬죠. 베란다에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팻말을 달고 마치 동물사육사인양 생활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스리랑카 콜롬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자란 김한민 작가는 형, 누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유년을 보냈다. 형은 성인이 돼서 동물학자가 됐고 그와 함께 ‘동물들이 함께 사는 법’이라는 부제를 단 『STOP』시리즈를 펴내기도 했다. 7권까지 펴낸 『STOP』은 9권으로 완성될 예정이며, 김한민 작가는 현재 돌고래 재돌이에 관한 동화, 개구리를 주인공으로 한 ‘양서류의 꿈’, SBS 라디오 <최혜림의 책하고 놀자>에서 진행하고 있는 ‘김한민의 책 섬’을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이번 작품 『사뿐사뿐 따삐르』가 아이 독자들을 위한 그림책이니, 오는 5월에는 어른 독자를 위한 ‘그림 여행’을 테마로 한 책이 나온다.




자연스러움이 나의 최대 화두

김한민 작가는 고2 때까지 이과생이었다. 미술에 관심은 많았지만 작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4남매가 그림을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고, 그 중 김한민의 실력은 다소 탁월했다. 김한민 작가는 고3이 되어서야 산업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있는 걸 알게 됐고 방향을 틀었다.

“고등학생 때는 예술은 정말 천재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피카소의 약력을 읽어보니까 전 끝나 버린 것 같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디자인은 컴퓨터 베이스로 하는 작업이라 괜찮겠다 생각했죠. 동기들은 지금 자동차디자인을 비롯해 산업디자인 쪽에서 일하고 있어요. 저처럼 활동하는 친구들은 흔치 않아요. 운 좋게 그림책을 출간하게 돼서 지금까지 이렇게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거죠.”

가끔 웹툰 작업에 대한 제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이니 도전할 만도 한데, 김한민 작가는 딱 잘라 말했다. “웹툰은 아무래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토리텔링 위주잖아요. 저는 생각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거고요. 저랑은 안 맞는 거 같아요. 순발력도 있고 빠르게 소비돼야 하는 콘텐츠인데, 저한테는 책의 형식이 맞다고 생각해요.”

일상 속에서 종종 세상에 대한 현기증을 느낀다는 김한민 작가.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으니 인터넷과 친할 것 같지만 SNS도 하지 않고, 고작 이메일만 확인하는 정도다. 한동안 독일에서 체류한 적이 있는데, 노숙자와 도서관의 따뜻한 자리를 다투며 보냈던 일상이 그립다고 한다.

“‘요즘 대학도서관들이 일반인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야속한 마음이 들어요. 일반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모교 졸업생들한테까지도 개방을 잘 안 해주더라고요. 엄청나게 좋은 책들을 쌓아놓으면서 읽지를 못하게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못됐다고 생각이 들어요. 전 도서관에 가서 책 냄새 맡으면서 한가롭게 거니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은 참 쉽지 않네요.”

김한민 작가는 대학 재학 중, 인권영화제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디자인잡지 <아니다>를 창간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소설가 김탁환과 함께 문화계간지 <1/N>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장기 휴간 중이다. 잡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는 “순수 문화잡지가 없어지는 현실이 아쉽다. 잡지는 언제라도 또 만들고 싶은 매력적인 매체”라고 말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작업하고 있지만 제가 가진 최대의 화두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언젠가 제 작업실에 놀러 온 분이 ‘유머와 깊이’를 스페인어로 적어 놓은 액자를 보고 인상 깊다고 하시더라고요. ‘유머와 깊이’. 이 말을 좋아해요. 고미숙 선생님이 ‘유머라는 건 타인을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웃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맞는 거 같아요. 자연스러움이 뭘까, 우리가 사는 게 정말 자연스러운 걸까? 이런 고민들을 많이 해요.”

『사뿐사뿐 따삐르』에 나오는 따삐르는 날쌘 표범이 쫓아오는 걸 보고 사뿐사뿐 걸어서 위기를 피한다. 모든 동물들은 저마다 큰 소리를 뽐내느라 바쁘지만, 따삐르는 개미 한 마리 밝을까 봐, 잠든 악어를 깨울까 봐 늘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고 움직인다. 김한민 작가는 “누군가 『사뿐사뿐 따삐르』를 읽고, 층간 소음문제에 교육적인 동화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최재천 교수가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타인에게 다가갈 때 너무 함부로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김한민 작가는 세상에 좋은 문턱들이 만들어지길 바라본다.




국민여동생 왜 필요하나? 친동생이나 잘 챙기지

글과 그림이 조화된 픽션형 저서를 다수 발표한 김한민 작가는 현재 한겨레신문에 일러스트 칼럼 ‘감수성 전쟁’을 연재하고 있다. 『카페 림보』에 나오는 콘셉트이기도 한 ‘감수성 전쟁’. 김한민 작가는 “지금은 감수성 전쟁 아닌가. 나와 맞는 사람은 아군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군으로 칭하는.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이 감수성이 맞다고 볼 수도 없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매주 1회 연재인데 벌써 50회를 넘어섰어요. 더욱 연대감이 생길 수도 반감이 생길 수도 있는데, 혼자만의 느낌? 이런 걸 포착하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나름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데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평도 있고 ‘대부분 찬성한다’는 평도 있어요. 마음 속의 벌집을 건드리고 싶었고 사실 더 세게 나갈 수도 있는데(웃음). 너무 부담스러운 주제라며 잘린 칼럼도 몇 개 있어요.”

최근 기억에 남는 칼럼으로는 ‘국민 여동생’을 꼽았다. “도대체 국민 여동생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김한민 작가. 국민 여동생이 무슨 가방 메는지 일일이 간섭할 시간이 있으면, 친동생이나 잘 챙겼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끼는 마음은 좋은데 공인으로서 논문을 표절한 것도 아니고 일일이 패션 같은 걸 지적하면서 음흉한 시선으로 ‘내 국민여동생 성장했네’라며 가슴을 클로즈업해 사진을 올리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요. 저는 그런 여동생을 둔 적 없거든요. 왜 이렇게 합의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지난해 출간된,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림보’와 바퀴족 이야기를 다룬 『카페 림보』도 ‘감수성 전쟁’의 출발과 다르지 않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90년대 중반을 지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대한민국을 빡빡하게 만들 때, 김한민 작가는 평소 좋아하는 공간들이 하나 둘씩 모두 사라져가는 걸 목격했다. 그는 “일상에서 겪는 불친절을 거듭 느끼며 상처를 깊게 받았다. 도저히 작품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고 토로했다.

『카페 림보』는 10년 전부터 구상한 작품이었어요. 어느 순간,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 비관적으로 다가왔거든요. 환경이 오염되면 개구리가 먼저 반응을 하잖아요. 작가, 시인들은 예민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느끼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죠. 『공간의 요정』이 수비만 했던 전초전이었다면 『카페 림보』는 다소 공격적인 성향이 있고, ‘감수성 전쟁’은 아예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죠. 느슨하게라도 공감해줄 수 있는 연대감은 있는 거 같아요. 적어도 혼자는 아니니까 버티기 덜 힘든 거죠.”

김한민 작가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까. 현재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은 환경보호와 동물보호다. 동물원에서 동물을 보호하기보다 서식지 보호를 통해 동물들이 살아갈 공간을 마련하고, 무턱대고 캠페인을 벌이는 것보다 동물들을 진짜 마음으로 사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정책보다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숲이 좋아야 나무를 지킬 수 있듯이, 김한민 작가는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밭에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축구팬 아니더라도 올해 K리그 재미있어요! - 서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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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계에서 서형욱 해설위원은 진정한 럭키가이다. 그가 가진 ‘최연소 해설위원’ ‘최초의 비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라는 타이틀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눈 팔지 않고 한 길만을 걸으며 커리어를 쌓아, 취미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참으로 부러운 사람이다. 축구 기자 혹은 축구 해설위원을 꿈꾸는 많은 학생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으며 좇으려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축구와 함께 걸어온 그의 길은 시작도 끝도, 모두 ‘좋아서 한 일’이었다. 유럽축구에 대한 관심으로 PC통신 동호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내 최초의 해외축구 웹진 ‘토탈사커’를 출범시키게 됐고, 그의 활동을 눈여겨 본 방송국 측의 제안으로 축구 해설을 처음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설위원으로 활동해 오면서 ‘스포츠 굿데이’의 축구 전문기자, 월간 <Four Four Two(한국어판)>의 수석 에디터를 병행하기도 하고 ‘경향신문’과 ‘스포츠 서울’ 등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MBC 스포츠플러스’의 축구 해설위원으로, 동시에 팟캐스트 ‘주간 서형욱’의 진행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TV 중계와 칼럼, 팟캐스트까지 빡빡한 일정 속에서 잠 잘 시간이나 있을까 싶지만 ‘모두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묻어난다.

TV와 신문을 통해 축구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가 책으로써 독자들과 만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유럽 축구 기행』을 집필하면서부터다. 유럽의 20여 개 도시를 직접 찾아가 보고 느낀 축구 문화를 소개하며 현장에서의 유용한 팁까지 담아낸 『유럽 축구 기행』은 국내의 유럽 축구 마니아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축구산업학을 공부하기 위해 리버풀대학교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난 2년 동안, 서형욱 해설위원이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유럽의 축구 이야기’는 『유럽축구 유럽문화』에서 계속 이어졌다. 『폭주 기관차』의 만화가 조재호와 함께 출간한 이 책에서 저자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축구와 유럽의 역사ㆍ문화를 들려준다.

해설위원으로서도, 그리고 저자로서도 서형욱은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와 들려줘야 하는 이야기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아직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풋볼리스트’를 탄생시키고 『2013 뷰티풀 K리그』를 출간했다. 아직 하고픈 말들, 해야할 역할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형욱 해설위원은 다양한 목소리와 방식으로 축구를 얘기해 온 기자, PD, 편집자들을 ‘풋볼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모아 인터넷 언론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축구를 전문으로 취재ㆍ보도하는 기사와 칼럼을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들이 직접 기획ㆍ생산하는 ‘축구로 소통하는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2013 뷰티풀 K리그』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올해부터 K리그는 승강제를 도입하며 새로운 변화를 시작한다. 달라진 K리그의 경기 방식과 더욱 풍성해진 관전 포인트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것으로 ‘풋볼리스트’는 함께 즐기는 축구 문화를 만들기 위한 첫 발을 떼었다.




2013 K리그, 끝까지 재밌는 경기가 펼쳐진다

『2013 뷰티풀 K리그』를 계획하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2013 뷰티풀 K리그』는 한국프로축구연맹과 같이 만든 책입니다. K리그 가이드북은 연맹에서 매년 출간하던 것이었는데, 이전에는 대회 안내책자의 느낌이 강했어요. 영화제 팜플렛 같은 관보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 점이 아쉬웠어요. 유럽에는 읽을 만한 안내책자들이 많고, 프로야구도 책자가 잘 나오고 있잖아요. K리그에도 그런 책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연맹에서도 제작할 곳을 찾고 있어서 같이 하게 됐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책을 굉장히 좋아하고 출판 사업에 관심이 있었어요. 출간을 한다면 ‘풋볼리스트’가 가진 전문성을 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첫 책을 『2013 뷰티풀 K리그』로 선택했죠. 이번 책은 이전의 가이드북보다 기획이나 구성 면에서 더 공들여 만들었어요. ‘풋볼리스트’ 기자들이 직접 기획하고, 섭외ㆍ취재해서 기사를 쓰고, 지면 배치까지 모두 참여했어요.

‘풋볼리스트’에서 계획하고 있는 다음 책은 무엇인가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분야의 책도 많이 내고 싶어요. 그래서 ‘풋볼리스트’의 이름을 바꿔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웃음). 스포츠는 자기계발에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 스타가 되는 분야고 우리가 잘 만들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죠. 특히 축구는 ‘풋볼리스트’의 특장점이기 때문에 관련 책들을 계속 출간할 거예요. 하지만 그에 국한되고 싶지는 않아요. 다양한 프리즘을 갖고 출판하고 싶어요.

올해부터 K리그가 승강제를 도입하면서 경기 운영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변화가 『2013 뷰티풀 K리그』를 출간하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되었나요?

올해가 프로축구 출범 30주년이에요. K리그가 변화, 재도약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죠. 한국프로축구 연맹 측에서도 때에 맞춰 가이드북도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해왔고요. 그래서 더욱 신경을 많이 써서 만들었어요. K리그의 팬도 새롭게 유입되는데 그들을 더 만족시킬 수 있는 참고자료가 필요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범 30주년을 맞아 한국프로축구 연맹에서 새롭게 단장하고 있는 부분들을 소개해 주세요.

기념행사들이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승강제 도입 자체가 큰 변화죠. 승강제라는 것이 규모의 확대이기도 하지만 재미 요소도 되잖아요. 승강제를 빨리 정착시키고 널리 알리는 데 많이 집중하고 있는 것 같고요. ‘K리그 클래식(1부 리그)’ 뿐만 아니라 ‘K리그 챌린지(2부 리그)’도 최대한 많이 중계가 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3 뷰티풀 K리그』에서도 그 부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소개하고 있어요.

2013 K리그에서 주목해야 할, 관전 팁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승강제가 있겠죠. 우승팀만 가릴 경우에는 중간에 1위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팀들의 경기는 보는 재미가 없잖아요. 한 경기 한 경기 이기고 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 순위 싸움이 중요하니까요. 아시안 챔피언스리그에는 상위 3개 팀이 출전하기 때문에 2위ㆍ3위 싸움도 굉장히 치열해졌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머지 순위가 재미가 없어지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강등제가 생겼기 때문에 ‘K리그 클래식(1부 리그)’의 14개 팀 중에 13위ㆍ14위는 무조건 강등이 돼요. 12위는 ‘K리그 챌린지(2부 리그)’ 1위 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루고요. 이제는 하위권 싸움도 굉장히 재밌어지게 된 거죠. 그래서 순위 경쟁 구도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또 올해는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알만한 선수들, 예를 들면 정대세, 이천수, 차두리 선수도 K리그에서 뛰게 되었기 때문에 그 선수들을 보러 가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응축된 감정들이 폭발하는 쾌감, 그게 축구의 매력이죠

다양한 스포츠 종목들 중에서 유독 축구에 매력을 느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축구만 대단히 좋아하지는 않아요. 다른 종목들과 비슷해요. 저는 ‘축구 없으면 죽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절대 이해 못하거든요.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분명히 있죠. 이를테면 집안일 같은 거요. 축구의 매력이라면, 굉장히 공정하고 공평한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체격이 좋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영역에서 똑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야말로 맞대결을 펼치는 거죠. 그리고 다른 스포츠에 비해서 골이 많이 나오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 시간에 걸쳐서 응축돼 있는 감정들이 폭발할 때 느껴지는 쾌감이 더 크다고 생각 되고요. 또 축구는 역사가 가장 긴 프로 스포츠 중에 하나거든요. 그동안 쌓여왔던 역사, 켜켜이 쌓여있는 얘기들이 있기 때문에 경기는 90분이지만 90분 밖의 시간에도 축구는 계속 진행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지리에 능한 사람아 아닌데도 불구하고 축구를 좋아하다 보면 굉장히 많은 걸 알게 돼요. 이를테면 어느 나라는 무슨 말을 쓰고, 세상에 어떤 나라가 있고, 저 나라는 수도가 어딘지, 이런 정보들이 굉장히 글로벌해요. 그래서 문화적인 면에서 봤을 때 어떤 취미보다도 가장 글로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종목인 것 같아요. 그만큼 축구는 단순히 육체 행위가 주는 매력 이외에도 굉장히 다양한 즐길 거리를 주기 때문에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 같아요.

공정하고, 응축된 에너지가 폭발하는 부분은 다른 종목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글쎄요, 저는 못 느꼈으니까요. 정답은 없죠. 그렇게 못 느꼈다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각자 느끼는 게 다른 거 아닐까요? 저는 커피 맛이 다 똑같은 것 같고 차이를 모르겠어요. 마찬가지에요. 제가 커피 미맹이라면 스포츠 미맹인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죠. 축구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변 사람들한테도 굳이 보라고 권하지 않고요. 축구만이 옳다거나 축구가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냥 제가 좋아하고 재밌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한테 설득하려고 노력하진 않아요.

경기 해설을 하는 것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경기를 눈으로 보면서 귀로는 해설을 듣잖아요. 똑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제가 어떻게 얘기해 주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다르게 기억하게 되죠. 그러니까 누군가의 기억을 제가 만들어줄 수 있는 면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이번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 한국 대 카타르 전에서 손흥민 선수가 마지막에 결정적인 골을 넣었잖아요. 그 때 누가 ‘결정적인 상황입니다만 주워 먹었네요’라고 얘기하면 주워 먹은 골로 기억되는 거고요. 그렇지 않고 ‘아무나 넣을 수 있는 거 아니었는데요’라고 얘기해주면 정말 그렇게 기억이 되는 거잖아요. 물론 100% 그렇진 않겠지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치거든요. 뉴스에서 똑같은 사건을 놓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부분에서 해설은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에요.




글이 말보다 강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축구가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축구가 범용한 취미의 범주에 들어가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친구들끼리 만나서 ‘영화 한 편 보러 갈까’라고 말하면 이상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만나서 ‘축구 한 경기 보러 갈까’ 이러면 ‘왜?’라고 물으면서 부담스러워하거든요. 그런 벽이 좀 없어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도 마찬가지인데, 대부분 한국 남자들이 놀 줄 몰라요. 놀 줄 모르고 컸어요. 그러니까 남자 둘이 커피 마시자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조건 술을 마셔야 하는 거죠. 그런데 축구는 긍정적으로 서로 시간을 보낼 수 있잖아요. 굳이 여자, 연예인, 정치 얘기가 아니고도 대화할 수 있는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보면 사회적으로도 필요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축구가 우리 생활에서 하나의 평범한 가치로서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풋볼리스트란 이름으로 소설책을 내도 이상하지 않은 것?(웃음). 스포츠가 뭔가 다르거나 낮은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그게 문화로 정착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린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출간하신 『유럽추구 유럽문화』에도 그러한 바람이 담겨 있나요?

보통 어릴 때 접한 것들을 나이 들어서도 좋아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잖아요. 제가 유럽에서 1년 반 정도 있다가 왔는데, 그곳에서 보니까 대화의 주제가 무척 다양하더라고요. 특히 남자애들은 스포츠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해요. 그런데 우리는 다 연예인, 드라마, 쇼 프로 얘기 밖에 안 하잖아요. 우리 매체 자체가 예능과 연예 쪽에 치우쳐져 있고 그 환경에서 자란 결과일 텐데요. 저도 미디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있었어요. 스포츠에도 훨씬 더 건전하고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데 그걸 모르니까 못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요. 그 저변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유럽축구 유럽문화』를 출간하게 된 거예요. 축구를 재미있게 즐기는 데 밑바탕이 되는 정보들을 알려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됐고, 그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해설가님께서는 프로필에 ‘글이 말보다 강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적으셨습니다. 출판 보다 방송의 파급력이 더 큰 시대인데요. 그럼에도 집필활동을 계속 이어나가시는 이유가 아닐까요?

제가 시대에 뒤떨어져서 그럴까요?(웃음). 저는 어릴 때부터 늘 서점에 갔어요. 책을 안 사더라도 그냥 갔어요. 종이 냄새를 무척 좋아하고, 1차적으로 책이라는 하드웨어 자체에 대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번에 출판사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서점에 가서 출판사의 창업 및 운영에 대한 책을 사서 읽었어요. 그런 식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있어서 책 지향적인 성향도 있는 것 같아요(웃음). 말은 한 번 하면 그냥 날아가잖아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책은 쓰는 사람이 한 번에 쓰고 낸 게 아니잖아요. 끊임없이 검토하고 수정하고, 그렇다 보니 한 마디라도 무게감이 좀 더 있는 것 같은,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매력이 있는 것 같고요. 출판 산업이 지금 망해가는 상황이라는 누군가의 얘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어쨌든 분명히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MP3가 그렇게 많아도 아직 CD를 팔잖아요. 그런 것처럼 책의 가치나 매력은 적어도 우리 생애에는 유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책이라는 게 구입해서 한 번 읽고 나면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읽은 후에 책장에 꽂아놓으면 되게 뿌듯하거든요. 기억은 안 나도 뭔가 내 뇌에 쌓여 있는 것 같고요. 좋은 책이 갖는 그런 매력이 적어도 우리 세대의 사람들한테는 유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설 위원, 칼럼니스트, 작가, 팟 캐스트까지 다양한 통로를 통해 축구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모든 활동들에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축구가 문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목표는 거창한 이유고요,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소비자라서 재밌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생산자로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3 뷰티풀 K리그』가 K리그와 국내 관객들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키길 기대하시나요?

아쉬움이 많은 책이긴 해요.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기존 포맷에서 근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걸 담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스포츠 안내책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많이 깼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기존 이미지의 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고요. 축구 없으면 못 살겠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K리그? 한 번 보러 가볼까?’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봤을 때도 흥미를 증폭시켜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만 된다 하더라도 굉장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13 뷰티풀 K리그』를 보고 K리그가 더 좋아졌다는 분들이 100명 정도만 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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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뷰티풀 K리그편집부 편 | FOOTBALLIST
한국 축구의 근간인 K리그를 친절하게 소개한 가이드 북이다. 골수 축구팬은 물론 축구를 처음 접하는 여성 축구팬의 궁금증과 관심을 모두 해소했다. 선수들의 기본적인 신체조건과 경력, 인생의 롤 모델과 이상형을 세세하게 조사했다. 특히 K리거의 이상형을 집계해 ‘미스 K리그’로 등극한 소녀시대 멤버 태연과의 인터뷰는 백미. 그리고 각 팀 레전드가 꼽은 ‘마이 클래식 XI(MY CLASSIC XI)’은 클럽의 과거와 현재를 곱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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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대담집 이후, 제정임 교수가 진단한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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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북 경제’. 한국 경제를 이처럼 적확하게 표현한 단어가 있을까. 제정임 교수는 5년 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기고한 칼럼들을 다시 정리하고 또 새로 쓰면서, 한국 경제를 수식할 만한 단어를 떠올렸다. 지나치게 대외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우리 경제는 해외에서 작은 변수만 생겨도 주가가 떨어지고 환율이 치솟으며 경제 흐름이 출렁인다. 안타까운 단어이지만 ‘동네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는 제정임 교수는 지난 5년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좌절감이 컸다. 대선의 결과가 달랐다면, 제 교수는 지금쯤 새 정부가 추진해야 할 개혁 정책의 각론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를 보는 시각,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판단이 저와 다른 정부를 맞게 되면서, 제 숙제도 달라졌어요. 왜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필요한지, 새 집권층과 그 지지자들의 생각 중 어떤 것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기초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 된 거죠.”『동네북 경제를 넘어』는 제정임 교수가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KBS 2라디오 <김광진의 경제포커스>에서 방송한 경제 해설과 한국일보, 국제신문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아 현 시점에도 유효한 이슈들을 보완해, 읽기 쉬운 문체로 바꾸고 통계도 수정했다. 우리 경제의 취약성, 재벌과 노동자의 현실, 원전 정책의 문제점, 언론과 안보 문제 등을 촘촘히 들여다보았다. 재벌의 기를 살리고 노동자의 입을 막는 것 대신, ‘재벌이 법을 지키게 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제정임 교수는 경향신문, 국민일보에서 사회부와 경제부 기자로 약 14년간 일했고, 지난해 안철수 후보와의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펴내 화제가 된 바 있다. 『동네북 경제를 넘어』의 출간을 계기로 제 교수를 만났지만,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안철수 후보와 관련한 질문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제정임 교수는 그동안 많은 매체를 통해 “정치 입문의 의지는 전혀 없다”고 밝혀왔다. 그 마음에 변화는 없는지, 안철수 후보의 행보에 대한 평가도 궁금했다. 제 교수는 예상대로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안철수 후보가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든 후로는 사적으로 연락한 적이 없다”“현재 저널리즘과 한국 경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내 본분이고 숙제“라고 선을 그었다.



경제뉴스, 10년 전과 왜 똑같을까

동네북 경제, 참 안타까운 말이다. 제목을 지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딸이 고2인데, 책 제목으로 ‘동네북 경제’ 어때? 라고 물으니까 괜찮다고 하더라. 50대인 남편은 ‘글쎄’라는 대답만 했는데, 아무래도 10대 말을 듣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일단 그 단어가 가진 의미도 있고 어려운 경제 이야기를 쉽게 풀었다는 느낌을 주려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서문에도 밝혔듯이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야 갈까를 생각해 보며 내가 해야 할 몫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리 사회의 경제가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되길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갖고 읽었으면 좋겠다. 경제 전문가들이 읽고 왜 이런 비판이 나오는지,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자기성찰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또 젊은이들도 우리 경제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현재 경제 구조가 잘못되면 제일 고생할 사람이 바로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내 앞날은 불안한지, 사회가 왜 이런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우리 경제의 취약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선진국의 입맛에 맞는 세계화를 강행한 역대 정부의 정책에 큰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글로벌 금융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 사회의 취약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요즘 경제를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말하는데, 전 세계로 떠도는 유동성 있는 자본이 이를 테면 ‘돈 놓고 돈 먹기’에 쓰이고 있다. 고용을 창출하는 데 자본이 쓰이는 게 아니라 외환 투기, 제동이 걸리지 않는 이윤만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자본 흐름이 계속되다 보면 생태계가 파괴된다. 자본의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환경, 지구온난화 같은 문제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금융 문제나 에너지 구조의 문제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자본의 탐욕과 민주적인 통제다. 앞으로, 어떻게 자본의 탐욕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서 한 나라의 안정성을 지켜내고, 지구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2002년에 전직 기자로서 『경제뉴스의 두 얼굴』를 펴냈다. 10년 전과 지금의 경제뉴스, 변한 게 있다고 보는가. 기자로 생활할 때와 교수인 지금, 한국경제, 한국언론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나?

2002년에 기자를 그만두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내가 있었던 필드를 돌아보면서, 우리 언론이 달라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경제 보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의 주제로 삼아 심층적으로 담았다. 『경제뉴스의 두 얼굴』이 2002년 말에 나왔는데, 나름 폭로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년 후가 되면 이 책이 아무도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변할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너무나 불행히도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더 나빠졌다. 저널리즘의 정신을 자본에 팔아먹었던 그 때보다 더 나빠졌고 언론사 경쟁이 너무 치열해졌다. 언론사의 처우도 그 때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열악해진 부분도 있고…. 이런 현실 속에서 필드에 나가는 후배들, 제자들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다. 하지만 실력 있고 정의로운 기자들이 언론계에 있을 때 우리 언론에도 희망이 생길 거라 믿고 있다.

새 정부가 인선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 있나.

어느 자리에 누구를 장관으로 임명하는지에 따라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진행된 경제팀의 인선을 보면 과연 경제민주화, 복지 강화, 양극화 해소 이런 것들에 대해 진정한 의지가 있나 의문이 든다. 물음표가 큰 상황이다. 이번 정부는 무엇을 잘못한다고 해도 그냥 지켜보고 있을 여유가 없다. 고통 받는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잘못 가고 있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하고 국민들도 여론을 형성해 중간선거나 재보선을 통해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경제민주화가 퇴색하지 않고 이탈하지 않도록 각자 영역에서 감시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현재 유럽의 경제제도와 정책들을 살펴보기 위해 영국, 벨기에, 독일 등을 방문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슈를 취재하고 있나.

영국 런던과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독일 베를린을 취재했다. 유럽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 국제 금융을 어떤 시스템으로 바꾸려고 하는지, 그 분야의 석학들을 만나 한국 사례를 가지고 인터뷰도 하고, 금융의 불안정성, 리스크 문제에 대한 토론도 했다. 유럽 국가들을 다니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수백 개 사안을 가지고 지겹도록 토론을 한다는 점이었다. 또 이 토론과정에서 관련 정보들이 구체적으로 공개되고, 의회와 국민들은 정책의 쟁점과 찬반논리, 관련 사례 등을 인지하고 판단을 내린다.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이 확고하다는 점이 정말 부러웠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재생에너지를 실용화하는 부분이 이미 유럽에서는 하나의 삶의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현장을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동영상도 찍고 실무진 인터뷰도 했다.




사회학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기자 생활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학생 기자들과 함께 온라인신문 <단비뉴스>를 만들고 있다. 2012년에는 학생들과 『벼랑에 선 사람들』을 펴내기도 했고, 이 책을 계기로 『안철수의 생각』을 집필하게 됐다고 들었다. 현재 <단비뉴스>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외국의 유명 저널리즘스쿨은 모두 자체 매체를 가지고 있다. 실제 언론을 통해 훈련을 받아야 실무에 나갔을 때도 유효한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명문 저널리즘스쿨은 그 지역의 훌륭한 지역언론으로서 공공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도 기성 언론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대안언론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2008년도에 만들어졌는데 학교가 자리를 잡으면 매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2,3기 학생들이 생기면서 매체에 대한 욕구가 생겼고 2010년 6월에 창간했다. <단비 뉴스>는 주요 시사 현안은 물론 기성 언론이 충실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빈곤문제, 지역 농촌 이슈, 미디어 업계 동향, 청년세대의 고민 등을 철저한 현장취재를 통해 심층 조명하고 있다. 『벼랑에 선 사람들』은 약 1년 반에 걸쳐 연재한 특집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을 묶은 책이다. 학생들이 <단비뉴스>를 통해 많이 공부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이 언론인이 되면 제 교수의 후배가 되는 셈이다. <단비뉴스> 출신 언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나. 언론인 출신 교수로서 제자들에게 가장 신경 써서 가르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4기수가 졸업했는데 약 60명 정도가 언론사에 들어갔다. 중앙 일간지, 방송사, 케이블TV, 주간지 등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제 서서히 세명인들의 언론계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는 거 같다. 공공의 사안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의롭고 실력 있는 언론인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력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정의를 쫓는 언론인이 되길 기대하고 또 그런 언론인이 될 수 있게 가르치고 있다. 경제사회 쟁점토론, 글로벌경제 심층토론, 시사 현안 세미나 같은 수업을 진행하는데, 한 주의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피드백을 하고 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경영학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보통 기자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에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회사를 관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모두가 그렇듯 사회부 기자로 처음 직장생활을 했다. 법조, 검찰, 교육도 재밌다고 생각했지만 노동 이슈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았다. 사회학을 전공했을 때도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늘 가지고 있었다. 노동 이슈는 기업하고 관계가 있는데, 언론에서는 기업인 관점으로 뉴스를 더 많이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자 관점으로 고르게 살펴보고 기사를 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경제부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많다는 걸 느꼈다. 97년 외환위기를 겪을 때, 파생상품, 투자은행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글로벌 경제시장이 얼마나 냉정하고 무서운 지를 내가 제대로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각이 생기면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을 늦게 가게 됐다. 내가 가려고 한 대학원이 풀 타임 학생만을 받아서 회사를 관두게 됐다.

기자가 될 결심은 언제부터 했나?

평소 언론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내가 사회를 하나도 모르면서 사회학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가장 단 시간에 효율적으로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직업이 기자라는 생각이 들어, 언론사에 취업하게 됐다. 그 때도 언론이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면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후배를 가르치고 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일종의 독립언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학자로서 우리나라 경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해서 대안을 내고 싶은 욕심이 있고, 소속과 상관없이 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언론의 모습을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개혁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경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 학자들이 많지 않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여성 고위직 비율도 낮고.

여성경제학회 활동을 하고 있는데 실력 있는 분들이 많다. 남성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직책 없이 활동하는 분들이 많아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여성을 중용하는 정책을 쓰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여성고위직 비율이 꼴찌다. 이건 제도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스웨덴을 보면 비례대표를 남녀남녀 순으로 제도화해서 선발한다. 때문에 여성들이 정치권에 많이 나오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크니까 교육제도나 보육제도가 프랜들리하게 만들어지고 탄탄한 복지제도가 가능하다.

안철수 후보가 4.24 재보궐 선거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다. 안 후보가 귀국한 후 혹시 연락이 닿았는지 궁금하다.

대선 때 안철수 후보가 출마를 포기하고 미국에 간 후부터 전혀 연락이 없었다. 책을 같이 쓴 다음에는 두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했는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후로는 서로 연락한 일이 없다. 내가 앞으로도 언론 영역에서 계속 활동할 건데, 특정 정치인이랑 특별한 관계가 생기면 나에게도 좋지 않고 학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분명하게 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는 걸 출세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엄청난 영광이 있거나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지만, 이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 국가 경제나 공적인 부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설계도를 그리는 역할이 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영역들은 내가 해야 할 부분이지만, 현장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감독하고 실행하는 일은 그 일을 더 잘할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문분야 활동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정치적 인물이 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 신념이 변할 수도 있지 않나. 『안철수의 생각』에 대담자로 참여했을 때와 지금의 입장이 변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나.

『안철수의 생각』에 참여한 건, 안 후보가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된 상황에서 국민들이 안철수가 어떤 사람인지, 한미FTA를 지지하는지, 원전을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모르는 상태였고, 유권자의 권리를 위해서라도 이 이야기가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안 후보가 조선일보, 한겨레 기자를 선택할 수는 없지 않나. 특정 언론을 대상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은 불가능했고, 내가 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라고 여긴 걸로 안다. 기자 출신이니 인터뷰를 진행하는 데서도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처음 만났을 때는 인터뷰를 전제로 만난 게 아니었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 입장에서 걱정됐던 건, 안 후보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을 경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언론이고 공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부분인데 특정 정치인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확실히 말했다. 나는 당신을 정치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안철수의 생각』은 내가 기자들을 대신해서 질문하는 역할을 한 거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 국민들이 궁금해 할만한 모든 부분을 불편하더라도 성실하게 답변해 줄 수 있으면 하겠다고 했고, 안 후보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수락했다. 안 후보가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선언한 후부터는 연락한 일이 없고, 대선 당시 캠프에 와서 도와달라고 말한 적도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관심사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있다. 정치라는 일이 나한테 매력적이고 탐나면 안 하려고 했다가도 마음이 쏠릴 수 있지만, 나는 지금 하고 있는 내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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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북 경제를 넘어제정임 저 | 오월의봄
이 책은 지난 5년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왜 국민들에게 허탈과 분노, 배신감을 줄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 그 핵심은 어디에 있는지를 진단한다. 왜 한국 경제는 갈수록 악화되는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위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진짜 해법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책이다. 세계 경제위기, 금융시장, 부동산, 가계부채, 노동문제, 복지사회, 남북문제 등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주제를 중심으로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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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 서현진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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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구석에 처박힌 낡은 수세미가 된 느낌

성공에 대한 의지와 에너지, 거기에 운까지 따랐던 20대의 나는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날들을 만들어갔고, 계획대로 멋진 30대를 맞이할 거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중략) 그리고 맞이한 서른. 이미 10여 년 전에 야심차게 세웠던 멋진 서른 맞기 프로젝트 속 내 모습과 달리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여자가 거울 저 너머에 있었다. (프롤로그 중)
서른 즈음이 되면 여자들은 혹독한 몸살을 앓는다.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좋을 만큼 십중팔구 그러하다. 원인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이제 꽃다운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회적 통념, 그 영향으로 ‘나도 이제 늙었나봐’ 생각이 들면서 찾아드는 서글픔, 일에서든 사랑에서든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감. 그 중에서도 결정타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다. 이따금씩 ‘내가 꿈꾸던 서른의 모습이 이런 거였나’ 자문해 볼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이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까닭이다.

청춘의 황금기라는 20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도 생각했던 것만큼 찬란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서른은 다를 줄 알았다.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되어 만족할만한 수준의 연봉과 혼자 힘으로 마련한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될 거라 생각했다. 사랑에 있어서도 진짜 멋있는 남자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이 생겨나고, 그들과의 연애에서 당당하고 여유 있는 태도를 잃지 않는 매력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꿈꿨다. 하지만 서른의 날들이 시작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직장 내에서 커리어는 쌓았지만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경쟁은 계속 진행 중이다. 쟁쟁한 경쟁자들은 오히려 늘어났다. 그들은 20대 때의 나보다 더 뛰어난 스펙을 자랑하며, 내게는 시들해진 패기와 젊음까지 가지고 있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월급은 만족스러운 수준이 되지 못하고, 내 집 마련의 꿈은 요원하다. 이렇듯 서른은 기대와 현실 사이의 낮은 싱크로율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또 중심을 잡아가는 사이 시간은 흘러간다.

아나운서 서현진에게도 서른은 그렇게 찾아왔을까. 『다시 나를 생각하는 시간, 서른』안의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서현진의 서른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국가가 공인한 미녀일 뿐만 아니라 스물다섯의 나이에 MBC의 아나운서가 되면서 지성까지 인정받은 그녀가 아닌가. 미모와 능력 모두를 겸비한 그녀에게 서른은 꽤 아름다운 날들의 연속이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서른의 성장통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직장생활 5년차, 반복되는 업무는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였고 그 안에서 자신을 새로 채울 틈 없이 소진하기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녀는 ‘물이 바짝 말라서 흉하게 비틀어져 싱크대 구석에 처박힌 낡은 수세미가 된 느낌’이었다고 적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서른 살의 나에게 마음속으로 물어본다. ‘현진, 너 행복하니?’ 한참을 기다려도 또 다른 나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들여오지 않는다.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니, 잔뜩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벽 쪽으로 돌아앉아 있는 내가 보인다. 축 처진 어깨에 구부정한 등을 보니 많이 지쳐 보인다. ‘왜 그래…… 너 힘드니?’ 나는 가만히 또 다른 나의 등 뒤로 다가가 두 팔을 벌려 살포시 끌어안는다. (p. 16~17)


어떡하지, 내 서른 왜 이렇게 초라해?

화면 속의 그녀는 언제나 여유가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생기 넘치는 에너지를 전해주었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를 지켜야 하고, 동료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반적인 직장에서 여성들이 결혼과 육아, 그로 인해 중단해야 하는 커리어 사이에서 갈등하듯이 그녀는 여자 아나운서로서 가지는 한계 때문에 고민했다. 9시 뉴스의 남자 앵커는 연륜이 깊은 중년을 선호하면서도 그 옆의 여자 앵커는 젊어야만 ‘보기 좋은 그림’ 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편견, 그 결과 40~50대 여자 아나운서의 활동이 극히 적은 현실. 그 안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함께 늙어가는 아나운서로 남을 수 있을까, 그녀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 시간들 가운데에서 서현진 아나운서는 마치 운명처럼 팝페라 가수 키메라(김홍희)와 만났다. 당시 그녀가 진행을 맡았던 프로그램 <네버 엔딩 스토리>가 계기가 되었다. 성악을 전공하던 유학생에서 ‘팝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수가 되기까지 끊임없는 도전을 해왔던 키메라는, 쉰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꿈을 갖고 살아 현진아, 그리고 나중에 나처럼 나이 먹은 후에도 지치지 말고 계속 또 다른 꿈을 가져. 멋진 남편도 아니고 그럴 듯해 보이는 네 직업도 아닌 그 꿈이 네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 거야.” (p. 64)
꿈을 가지라는 키메라의 한마디는 서현진 아나운서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했다. 아나운서로서 5년 후, 10년 후의 삶을 고민하던 그녀는 버클리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서른의 나이, 직장 내에서 커리어를 견고히 하거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할 시기에 유학을 떠난다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까, 그녀 자신과 주변의 우려가 뒤따랐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이 아니면 영영 용기를 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 가고 싶다는 자기 안의 목소리를 따라 떠남을 선택했다.

『다시 나를 생각하는 시간, 서른』은 그 시간들의 기록이다.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노트 한 권 빼곡히 꿈을 적어 내려가던 시간들부터, 미국에서 홀로 2년 동안 공부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취재 기사를 작성하며 저널리즘을 공부했던 시간들까지, 그녀가 수많은 고민 속에서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잡아갔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나를 생각하는 시간, 서른』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쓰신 건가요?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서른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두려움도 있을 테고 기대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생각들이 있잖아요. 저는 서른이 그렇게 끔찍한 나이도 아니고 대단한 나이도 아니고, 그냥 순간순간 즐기고 최선을 다하면서 지내면 충분히 멋진 나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제가 그러지 못했거든요. 서른이 되면 큰일 날 것 같고 ‘어떡하지, 내 서른 왜 이렇게 초라해’ 이런 생각들 하잖아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서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4년이 지나 서른넷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린 나이에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싶은 거예요. 아마 지금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서른들이 너무 많을 거예요. 그러지 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웃음). ‘서른에 난 되게 특별할 줄 알았는데 내가 이래?’ 생각이 들겠지만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것만으로도 훨씬 더 인생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시행착오도 덜하고요.

평소에도 글을 쓰면서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을 좋아하시나요?

예전에는 완전 싫어했었는데 좋아하게 됐어요(웃음). 저는 미국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면서 글 쓰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미국에서 존경을 받는지 알게 됐어요. 저널리즘 스쿨 안에서도 글 쓰는 아이들을 보면, 생각이 논리적으로 잡혀있고 제일 똑똑하더라고요. 그만큼 글을 논리적으로 쓰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쓰는 게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널리즘 스쿨에서 글을 쓰고 그걸 고치고 다듬고, 구조를 바꿔보고 얼개를 풀어보는 과정을 연습하면서 매력을 알게 됐어요. 글과 마찬가지로 방송도 나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방송은 종료되면 끝이거든요. 아무리 영상으로 남아있다고 해도 그걸 누가 다시 보겠어요. 그런데 글은 방송보다 훨씬 더 깊이가 있고, 굉장히 보람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요.




20대로 돌아가고 싶긴 하지만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서현진 아나운서가 그리던 서른의 모습은 어땠나요?

저는 서른쯤 되면 모든 게 다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인생의 노선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결혼도 했을 것 같았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부분, 그리고 직업에 있어서도 그렇고요. 그런데 세상이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전의 여자 나이 서른이면 지금이랑은 너무 다르지 않나요? 결혼 적령기도 훌쩍 올라갔고요. 지금 서른들은 예전의 20대 초중반 정도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감정들도 그렇고, 사회에서의 위치도 그렇고요.

책에서 ‘우리가 서른이란 나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건 아닐까’라고 적으셨는데, 그런 사회의 분위기나 시선들에 반발감을 가졌던 적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완전 억울해 하는 스타일이죠. ‘왜 여자한테만? 왜 대한민국이라는 이 좁은 나라에서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실 미국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면서 나이에 대해 인식하거나 압박을 느낄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곳의 학생들은 제가 한국에서 온 방송인 출신의 저널리즘스쿨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몇 년 생의 누구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몇 년 생인지, 몇 살인지 부터 물어보잖아요. 그렇게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 30대 초반의 황금 같은 2년을 보내고 한국에 왔더니 서른셋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동안 주변의 여자 친구들 대부분이,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결혼했더라고요. 제 주변에서는 너 이제 어떡할 거냐고 하고요. 그런 걸 보면서 생각했던 게, 우리 사회는 특히 나이 때가 되어서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으면 약간 지진아 취급을 하는 것 같아요. 평생 지진아가 된 적은 없는데 약간 지진아가 된 느낌이랄까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유학 마치고 한국에 왔을 때 처음 한동안은 힘들었어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보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었던 서른의 모습은 어땠나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선배들도 그렇고, 여자 친구들도 서른 즈음에 다 결혼을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여자들은 아무리 잘나도 결혼이 삶을 굉장히 좌우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어른들도 자꾸 그렇게 얘기를 하고요. 자신의 인생에서 그냥 나로서 평가받고 힘들어도 깨지고 부딪히면서 뭔가를 만들어 가고 싶어 하던, 자존감 있는 똑순이들도 서른 즈음이 되면 마찬가지더라고요. 일과 결혼 사이에서 휘둘리다 결국에는 그 쪽으로 따라가게 되는 애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다 보면 자기가 생각했던 계획이나 꿈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사회나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스스로가 몸을 끼워 맞추는 것 같아요. 나중에 마흔이 되고 쉰이 됐을 때 그들의 인생과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지켜봐야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남들이 하니까, 아니면 남들이 이게 좋다고 하니까 그걸 이유로 선택하면 나중에 그 인생을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요?

20대와 비교했을 때 30대에 생겨난 것은 무엇이고,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요?

우선 되도 않는 오기와 자존심이 없어진 것 같아요. 사람마다 각자의 성격과 기운이 있잖아요. 그런데 20대 때는 나와 맞지 않는 기운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때 굉장히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분위기를 불편하게 하는, 그렇게 필요 없는 에너지 낭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30대에는 그게 없어졌어요. 그것이 얼마나 치기어린 짓이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며, 나 자신을 깎아먹는 일인지 알게 된 거죠. 더 많은 사람들과 둥글둥글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친화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웬만한 건 이해하고 양보하는 법도 알게 됐고, 한 마디로 세상사는 법을 좀 더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요?(웃음) 20대 때는 좀 뾰족뾰족 했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30대 때는 이런 저런 감정도 경험하고 고생도 하고, 여러 가지 인생의 파고를 겪으면서 달라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40대가 기대되기도 해요. 주름살 생기고 늙는 것만 관리 잘 하면(웃음) 40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20대 여성과 그 시기를 지나온 여성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이 있지 않나요?

대놓고 보이는 경쟁이 있지 않나요(웃음)? 저도 사실 20대 때 생각했어요. ‘30대 때 뭐가 있겠어, 쟤네 왜 살아?’ 약간 이런 느낌이었죠.

이를테면 20대 여성들은 ‘좋은 시기 다 지났지?’라는 시선으로 30대를 바라보는 거죠. 30대 여성들은 ‘너라고 항상 20대일 것 같지?’라는 시선으로 응수하고요. 서현진 아나운서도 그렇게 느끼실 때가 있나요?

느끼죠. 학교에서 20대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아니면 회사에서 파릇파릇한 후배들도 많이 올라오고 하니까요. 물론 모든 20대가 그런 건 아니에요. 굉장히 지혜롭고 벌써부터 철이 들어있는 아이들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30대가 되어도 절대 철이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서른이 된다고 갑자기 굉장히 현명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죠. 그런데 저는 그런 20대들을 보면 ‘내가 조언을 한다고 해서 받아들일까?’하는 생각을 해요. 저의 경험상 그런 조언 자체가 나이가 많은 언니들의 열등감이나 질투에서 비롯되는 간섭이라고 느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20대와 30대가 부딪힐 때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우선 얘기를 듣죠. 그리고 ‘그래 한 번 도전해 봐’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들의 도전을 받아들여요.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죠. 왜냐하면 알거든요. 연애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것을 얻었다고 해서 절대 게임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걸요. 경험상 그걸 깨달았으니까 내가 할 것은 기다리면서 내공을 쌓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젊은 지금, 가고 싶은 길을 가자

서른의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뒤로하고 유학을 떠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만류하는 주변의 목소리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 흔들렸었어요. 다들 결혼할 짝을 찾는데 나도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일을 더 열심히 해서 확실히 뭔가를 만들어 놔야 되는 거 아닌가, 별 생각을 다 했죠. 그런데 그렇게 현재와 타협해서 차선책을 찾아봤자, 결국엔 더 늦은 나이에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꿈이 확실하고, 자아가 굉장히 뚜렷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아니라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어있거든요. 제 인생의 경험상 비추어 봐도, 그리고 제가 아는 많은 언니들을 봤을 때도 그래요. 그래서 힘을 냈죠. ‘어차피 나는 하고 싶은 걸 하지 않고는 못 베길 타입이다’ ‘괜히 나중에 두 배 세 배의 시간을 들여서 힘들게 고생하지 말고, 힘들어도 조금이라도 젊은 지금 가고 싶은 길로 가자’ 그렇게 나 자신을 다그쳤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 년 정도만 늦었어도 훨씬 더 용기를 내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널리즘 스쿨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언론 관련 전공자가 아닌 채로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인가요?

그런 이유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언론 전공자나 관련 공부를 한 사람들은 훨씬 더 어린 나이에 미디어 환경에 노출이 됐고, 4년 동안 체계적으로 공부를 한 거잖아요. 그런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저널리즘이라는 분야가 우리 생활과 정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잖아요. 그냥 우리 생활 얘기에요. 그게 정말 재미있고 매력적이거든요. 우리 생활 속의 이야기들을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더 세련된 방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거니까요. 일상생활의 부분들을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방송을 더 잘하고 인생을 더 재밌게 살겠어요. 그래서 저널리즘은 정말 잘 선택한 것 같아요. 그렇게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와서 제가 더 업그레이드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건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거니까요. 그런데 확실히 더 많이 보여요. 방송을 할 때도 그렇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요.

아나운서로서 5년 후, 10년 후의 모습을 생각해 본 결과 유학을 결심하셨습니다. 어떤 모습의 방송인으로 남고 싶어서였나요?

우선은 방송인으로 남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어요.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마흔, 쉰이 넘을 때까지 방송을 한다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거든요. 아시다시피 여자 방송인 중에 마흔이 넘어서까지 활동하시는 분들이 정말 손에 꼽을 정도거든요. 대부분의 아나운서들이나 방송인들이 30대 정도까지 활동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화면에서 사라지거든요. 저는 방송을 하면서 예쁘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러면서 제 나이 때에 맞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방송인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자존심 있는, 지조 있는 방송인이 되고 싶죠. 일관성 있는 방송인이요. 상황이나 실리에 따라서 캐릭터가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어쨌거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방송을 하고 싶어요.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아니까요.




서른,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책 속에서 자신의 연애사를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한 부분이 놀라웠습니다.

물론 여러 개 중에 몇 개를 뽑은 거고 그 중에서 찌질한 것들, 아니면 나의 찌질함을 만 천하에 공개하는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죠. 동생들에게 나름대로의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런 에피소드들을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연애할 때 제 모습이 그랬어요.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우선 남녀 사이가 되고 나면 그 사람 직업이 뭐든, 그 사람이 얼마나 잘났든 못났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냥 남자고 여자인 거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자를 볼 때의 체크리스트도 달라지지 않나요?

완전 많이 달라지고 늘어났죠. 눈은 좁아지고요. 장난이 아니라 정말 큰일 났어요. 시집 못 갈 것 같은데요(웃음). 저의 체크리스트 중에 상위 목록 몇 개를 보면, 저한테만 잘해주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조금 똑똑했으면 좋겠고요. 다른 거 뭐가 필요하겠어요.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있고, 정말 박학다식해서 인생사는 데 있어서 내가 모르는 것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되죠.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내가 너무 존경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것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어떤 특정한 조건 하나만을 보고 그 사람을 만난다면, 그 조건이 없어지면 매력이 사라지는 거죠. 결혼한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가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뭐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한다고요. 그러니까 그 한 가지가 뭔지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내가 어떤 걸 포기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없는지 안다는 게 쉽지 않죠. 결국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안 되는 거예요. 『다시 나를 생각하는 시간, 서른』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이야기도 결국 그거예요. 우선 나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거죠.

서현진 아나운서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결혼을 하고 싶어요.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요. 결혼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의 선택사항이에요. 그런데 저는 결혼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저는 혼자 있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외로움을 되게 많이 타고, 뭘 먹어도 뭘 해도 누구랑 같이 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저랑 굉장히 죽이 잘 맞는 이성 친구 같은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냥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죽 맞아서 시시덕거리면서 농담하고, 예쁜 아기 낳아서 키우고, 그런 사람을 찾아요.

지쳐서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안아주었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직업 특성상, 자신에게 엄격했던 순간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굉장히 심하죠. 생각해보면 저는 20대 때 정말 많은 도전을 했고, 도전에 성공하고 많은 걸 이루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 번도 저 자신한테 ‘너 진짜 잘했어, 최고야, 넌 정말 자격이 있어’ 라고 말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좀 더, 좀 더’ ‘됐어, 이제 다음 스텝이야’ 이런 식으로 채찍질만 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부족하니까 그랬을 테고, 아니면 더 잘되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어요. ‘나는 특별하니까’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러던 중에 진짜 너무 지치고 힘들었던 거죠. 책 속에 썼던 그 시기에요. 나 자신한테조차도 내가 막 다뤄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내가 왜 이래야 되지?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데, 나도 좀 더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인데’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나는 나한테 이러지 말자’고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지친 나를 안아주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우선 그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 같아요. 예전에 20대 때는 끝까지 해결책을 찾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굳이 그렇게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스스로를 몰아치지 않아요. 그 점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옛날에는 무조건 나를 채찍질하고 몰아치면서 ‘나는 열심히 해야 돼, 나는 특별하니까, 더 특별해 져야 돼’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그냥 ‘아휴 힘드네, 좀 쉬자’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때는 영화나 책을 보거나 여행을 떠나는 식으로 자신한테 힐링 타임을 줘요. 그리고 ‘굳이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욕심이 없어지고 대충 살자는 게 아니에요. 주어지는 일은 굉장히 열심히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거야 기다려 보자’ 하고 마음을 다잡는 거죠.

또 다른 에세이로 서현진 아나운서와 만날 수 있을까요? 계획하고 계신 다음 책이 있나요?

글은 정말 계속 쓰고 싶어요. 평생 글을 쓰고 싶은데요. 그냥 일기나 미니홈피에 쓸 법한 얄팍한 이야기 말고, 쓸 거리가 있을 때 쓰고 싶어요. 진짜 내가 마음속에서 울림이 있을 때요. 『다시 나를 생각하는 시간, 서른』을 읽은 아나운서 선배들은 저한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같은 칙릿 소설을 써보라고 하더라고요. 이번 책 속에서 제가 정말 솔직했다면서, 다음에는 욕망에 충실한 이야기를 써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써볼까?’ 잠깐 생각은 했죠. 그런데 우선 쓰고 싶은 건 여행 에세이예요.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지는 않지만 꼭 한 번 써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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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를 생각하는 시간, 서른서현진 저 | 글담
유독 여성들에게 민감하게 다가오는 나이, 서른. 넘어서는 안 될 선 같은 나이이자 묘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애매한 숫자다. 『다시 나를 생각하는 시간, 서른』은 서른 즈음의 여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서른을 이렇게 보내라는 충고보다는 자신이 지나온 날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만 이런 게 아니야’라는 위로와 ‘아직 늦은 게 아니야’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엿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 이 책은 30대의 길목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여자들에게 한걸음 다시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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