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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 “나를 불편하게 하는 책을 읽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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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인문학’이 중요하다 말한다. 몇몇 철학자는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린다. 제목에 ‘인문학’이 들어간 책이 서점을 채운다. 이렇듯 여전히 대학에서 인문학 전공 학과는 기피 대상이고, 여러 대학에서 국문과나 철학과는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확산되는 듯하다. 


총 2권으로 이뤄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가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은 인문학을 갈구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제목 그대로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선택한 목적은 ‘지적 대화를 하기 위해서’일 테다. 저자는 지적인 대화가 필요한 이유로 다음과 같이 쓴다.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이고 대중은 주인으로서 선거를 통해 보수와 진보를 선택할 권한을 가졌다. 모든 책임은 대중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선별하는 시야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그 선별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정치는 썩었다면서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무관심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실제로는 보수 정당에 표를 던졌으면서도 집권한 보수 정당이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면서 열을 내는 사람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 지적인 대화는 분명 ‘놀이’지만 나의 이익을 위한 심오한 ‘놀이’다. (1권, 285쪽)

 

저자가 쓴 글에서 드러나듯, 『지대넓얕』은 지식을 가나다순이나 분야별로 나열해놓은 사전류의 책은 아니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로 분야를 나누긴 했지만 1권은 저자가 제안했듯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게 좋다. 상부구조를 규정하는 건 하부토대이고, 역사란 다른 말로 계급 투쟁의 역사, 즉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이라는 사적 유물론이 『지대넓얕』의 관점이다. 그렇다고 하부토대에만 주목한 건 아니다. 2권에서 채사장은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등을 다루면서 현실 너머의 차원도 소개한다. 얕다고 할 수 없는 넓은 지식이 두 권에 걸쳐 담긴 셈이다. 인기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운영자이기도 한 채사장을 만났다.

 

주변 사람과 대화하려고 쓴 책

 

『지대넓얕』이 처음으로 쓴 책이잖아요. 어떤 계기로 책 쓸 생각을 하셨나요.

 

여러 곳에서 많이 이야기했던 말인데요. 2011년 이전까지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완벽한 유물론자죠. 먹고 사는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 2011년에 큰 사건이 있었어요. 제주를 여행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두 분이 돌아가시고 한 분은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수습하는 시간이 길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 한 번에 죽을 수 있는구나. 세상이 불안했어요.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치유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을 명료하게 정리해놓으면 이런 불안감이 조금은 없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써내려갔죠. 원래 관심사를 정리한 게 1권인데, 1권 원고는 2011년에 써놨어요.

 

2권의 내용인 철학, 종교 쪽은 교통사고 이후로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인가요.

 

네. 최근 관심사는 종교, 신비 쪽인데요. 『지대넓얕』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냥 제가 관심 있는 소재를 따라갔습니다. 물질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신비까지 도착한 여정이 책으로 나왔어요.

 

1권에서는 하부토대를, 2권에서는 상부구조를 다뤘다는 점에서 결국 『지대넓얕』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같습니다. 채사장이 생각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요.

 

강연할 때도 종종 이야기하는데, 인간이란 여행자라고 생각해요. 배우면서 여행하는 존재죠. 세상은 학교이고, 저나 많은 사람이 배워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관계 맺어나가면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경험을 확장하며 결국에는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금은 베다 철학, 우파니사드, 티벳불교에 관심이 있어요. 깊게는 못 들어갔지만, 개인의 의식과 우주 전체의 의식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인도 세계관을 배우고 있습니다.

 

보통 인문학 입문서는 학계에서 저명한 분이 쓰는 게 보통이었는데요.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도 그랬지만 『지대넓얕』은 전공 학자가 아닌 사람이 썼는데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많은 책이 인문학을 쉽게 소개했다고 해도, 막상 읽어보면 어려워요. 제가 쓴 책은 그에 비해서는 쉽죠. 이미 익숙한 개념으로 경제, 정치를 설명하고 흩어져 있는 걸 정리하기 좋게 배열한 책이라 독자들이 좋아한 것 같아요. 재밌게 읽은 독자들이 소문을 내주시면서 책이 인기를 끌지 않았을까요.

 

정리하려고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염두에 둔 독자는 있었겠죠?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내는 것마냥 낭비적인 책은 없어요.책을 써서 저자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는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생각은 있었죠. 제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항상 정치 경제나 철학 예술 같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분들은 고졸이거나, 그렇게 유명한 대학을 나오지는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삶이 바빠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친구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쓰게 된 면도 있어요. 주변 사람과 함께 대화할 수 있도록 썼죠

 

책은 책, 채사장은 채사장

 

『지대넓얕』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책 읽으면서 노트에 정리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편하게 쭉 읽었으면 해요. 어차피 이 책이 전달하려는 건 개별적 디테일이 아니라 커다란 구조거든요. 1권에서는 다수의 피지배자와 소수의 지배자, 2권에서는 진리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큰 틀을 읽는다면 충분해요. 너무 세밀하게 보시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칠 수 있어요.

 

팟캐스트도 운영 중인데요.

 

팟캐스트는 작년 4월에 시작했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독특한 사람이 있어서 재미로 해봤어요. 어떤 사람들은 책을 잘 팔기 위해 계획적으로 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건 결과론적 해석이고요. 실제로는 특별한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팟캐스트도 하고, 책도 쓴 거예요. 원래는 저희끼리만 좋아서 하려 했는데, 알려지다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긴 해요. 저희의 말 하나 하나에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니까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위축되기도 하고요.

 

채사장이 실명은 아니잖아요.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느낌도 드는데요.

 

지금 저는 제 삶에 관심이 있어요. 이 삶에서 뭘 배워갈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가 고민인데, 다른 무엇인가가 삶을 장악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도 버거운데, 『지대넓얕』으로 인해서 제가 이 책에 마음 쓰거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안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책은 책으로의 길이 있고, 저술한 이는 나름대로의 삶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이 인기가 많으니 채사장을 향한 호기심이 생길 텐데요. 이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은?

 

다행인 건, 저를 털어도 나올 게 없어요. 그저 주변에서 흔하게 보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큰 관심을 보내주시지만 금방 잊혀질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죠.

 

채사장은 어떤 의미에요?

 

의미 부여를 하려 했지만, 사실 별다른 의미는 없어요. 지식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 그리고 제 성이 채 씨니까.

 

원래 전공은 뭐에요?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어요. 다만 대학 때의 전공이 저의 정체성을 반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사회에서 일하고 배운 내용들이 삶에 있어서의 전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위기? 인문학은 그냥 존재해

 

『지대넓얕』이 서구 지식을 위주로 소개하셨잖아요. 못 다룬 부분도 있는데, 혹시 3권 계획은 없나요?

 

1권이 현실 세계를 다뤘고 2권이 현실 너머를 썼으니 더는 쓸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초월적 세계를 쓸 수 있겠지만, 일단은 3권 계획은 없습니다. 이 책은 완간이에요.

 

인문학 부흥이다, 인문학 위기다 이런 담론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문학은 뜨고 지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 같아요. 인문학의 부흥과 위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인문학의 부흥과 위기에 대한 이슈만이 있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에 대한 최근 이슈에 관해서는 잘 몰라요. 아직은 TV가 최신 이슈에 가장 민감한 시대인데, 집에 TV가 없거든요.

 

TV는 없는데 책은 정말 많이 읽었잖아요. 왜 그렇게 많이 읽었어요?

 

학사장교로 가기로 해서 취업 부담이 전혀 없었어요. 3학년, 4학년 때 할 게 별로 없으니까 신나게 읽었죠.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만 봤어요.

 

추천하고 싶은 독서 방법은?

 

도서관에서 정말 많이 읽었는데, 저는 불편하게 하는 책 중심으로 많이 읽었어요. 자기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소재만 따라가면 금방 실증이 났어요. 예를 들어서, 저는 학생 운동권이 다 죽은 시절 학교를 다녔는데, 그래서인지 『공산당 선언』같은 책은 제목만으로도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함을 꾹 참고 읽어보니까 내적 논리가 굉장히 탄탄해요. 그렇게 마르크스에 관심이 생겼죠. 어떤 책이 불편한지는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어요. 불편함을 느끼면 그 책을 읽으시면 돼요. 기독교인이라면 불교나 이슬람에 대한 책을 보면 비로소 종교인이 되고, 종교인은 과학을 읽으면 또 그게 도움이 되죠. 종교나 과학같이 현실 너머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재테크나 정치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좀처럼 신인 저자가 유명해지기 힘든 인문 분야에서 채사장이라는 존재는 특별한 듯합니다. 채사장을 보고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듯한데요. 글을 쓰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조언해주신다면.

 

정확한 답이 아닐 것 같긴 한데, 뭘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뭘 해도 어쨌든 삶의 여행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글을 쓰든 다른 일을 하든지요. 저자로 먹고 사는 건 불가능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나 성공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건 현실적이지 않아요. 그렇다고 글을 쓰지 말라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책으로 나오든 아니든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니, 누구나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강연도 하시잖아요. 어떤 이야기를 하세요?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종교 신비 쪽인데. 강연은 주로 1권 내용을 해요. 경제 정치 사회 연결고리에 관한 강의를 주로 하죠. 강연 오신 분들 중에서는 팟캐스트를 듣는 분이 많아서, 팟캐스트에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하시고요. 그리고 지식을 구조화하고 흐름을 만드는 노하우를 묻는 분도 계신데요. 노하우는 없어요. 저는 단지 대학생 때 시간이 많아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경제활동과 사회생활을 하시며 삶에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는 다른 지식들을 배우고 계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쓸 책은?

 

아직은 생각만 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잡힌 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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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2 권 세트채사장 저 | 한빛비즈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현실 너머 편은 이제 그 세계를 넘어서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단언컨대 이번에는 지식의 역사가 단순하게 구조화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철학 상식들, 철학자들, 학창 시절 암기했던 과학 지식들, 난해했던 예술 작품들, 막연했던 삶과 죽음 그리고 의식에 관한 문제 등 당신 안에 있던 단편적인 지식들이 드디어 자리를 찾을 것이다. 현실 너머 편까지 아우르고 나면 진짜 힘 있는 지식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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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탐욕스러운 1%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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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혹은 임진년 조일전쟁을 류성룡과 이순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류성룡 대신 콜럼버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콜럼버스와 이순신으로 이해하는 임진년 조일전쟁은 좀 더 세계사적 시각을 넓힐 수 있다. 김경집 저자는 『생각의 융합』에서 당시 조선을 둘러싼 명나라와 일본 정세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서구의 대항해 시대로부터 생긴 막대한 은이 어떻게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이 참여한 국제전을 일으켰는지를 알려준다.

 

1장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적 소재인 임진왜란에서 출발했다면, 3장 역시 눈여겨 볼 만한 내용이다. 에밀 졸라와 김지하를 엮어 쓴 3장은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 사회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지식을 단순히 축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의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인문학의 사명이라면 이 책은 그러한 본질에 충실하다.

 

도처에 잠복해 있는 악의 세력은 언제든지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망가뜨릴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공포와 위기감을 조장하려는 짓은 단순히 내가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남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 이유를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정권의 안위를 위한 온갖 조작과 무리한 기소와 패소에도 불구하고 담당 검사가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는 작금의 현실은 스스로 법질서와 정의를 파괴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173쪽)

 

김경집 저자는 서강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대학교 인간학 교육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안정된 곳에서 연구할 수 있는 특권을 그는 스스로 버리고 지금은 저술과 일반인을 향한 강연에 매진 중인 그와 이야기를 나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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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고, 나머지 25년은 글 쓰는 게 꿈이라고 하셨는데요. 최근에 많은 책을 내셨습니다. 그중에서 ‘생각의 융합’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 책인가요.


강단을 떠나 본격적으로 인문학 책을 쓴 것은 인문학은 밥이다였습니다. 흔히 문사철로 정의하는 인문학은 사실은 19세기 후반의 매우 좁은 의미였는데,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선 인문학의 대상과 범주에 대해 다루고 싶었고, 그 기준은 어떤 분야나 주제건 인간에서 출발해서 인간으로 귀결한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12개의 주제를 다뤘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문화나 교육은 빠졌는데, 그것은 그 주제 자체가 매우 혼합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다뤄야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책에서는 인문학의 ‘기본 메뉴’를 중심으로 식탁을 꾸몄습니다. 『생각의 융합』은 본격적으로 그 메뉴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새로운 식탁을 차릴 수 있는지, 그 레시피를 다룬 것입니다. 저로서는 이 책이 인문학의 구체적 방법을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목, 내용도 ‘융합’을 테마로 하고 계십니다. 이 책의 성격이 문사철, 동서양의 융합 같이 느껴졌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융합’은 어떤 뜻인가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문학은 문사철의 좁은 개념이 아닙니다. 인문학을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융합은 단순히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섞고 어울리게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 체계를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는가, 상상력은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 것인가를 제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지식을 시간과 공간으로 가로지르며 그 결절점을 찾아내 엮고 해석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미래의 삶의 방식이자 대안인 ‘창조적 방식’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인문학의 밥』과 마찬가지로 『생각의 융합』은 인문 사회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두루 읽으면 좋을 책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염두에 두신 독자가 있나요?

 

솔직히 이 책은 직장인들을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정보와 지식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고 이미 기업 환경도 변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조직이 ‘팀’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왜 팀으로 재편했는지는 정작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보입니다. 팀은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구조여야 하며, 팀원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역량과 상상력들이 결합해야 단순한 산술적 합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생각의 융합』은 그런 시너지를 체감하는 도화선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업과 기관에서 지속적인 교육을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일종의 직무 직능을 위한 교육이지 각 개인을 위한 것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흔히 착각하지요. 그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역량이 성장한 것처럼 말입니다. 진정 자신의 역량을 기르는 것은 바로 자유로운 개인들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영감을 이끌어내고 그것들을 상호 결합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점들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보통 인문학 입문서는 시대순으로 사상사를 서술하거나, 문학 / 철학 / 예술 사조 등으로 분과 학문 체제로 소개하곤 하는데요. 생각의 융합』은 역사적 사건을 여러 가지 지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점 같은데요. 선생님께서는 ‘생각의 융합’의 장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생각의 융합』은 일반적 카테고리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갖고 썼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범주 속에 가둬놓은 것은 이해의 용이성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을 현재의 환경과 상황으로 이끌어내 미래를 가늠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교육은 철저하게 상호 융합하는 훈련은 거의 배제한 채 각 과목의 전문적 텍스트 추종만 가르쳐왔기 때문에 상상력과 창의성을 결핍시켰습니다. 그런 태도에 대해 이 책은 매우 낯설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느껴질 겁니다. 이 책은 카테고리의 울에 갇힌 지식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해석하며 스스로 재구성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는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여러 장에서 선생님의 비판적 현실 인식과, 현실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누가 봐도 지금 우리나라는 정상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는 양극화가 극에 달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절망적입니다.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지금의 현실에 대해 맹목적으로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 자체가 일종의 범죄입니다. 당연히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싸울 것은 싸워야지요.

 

대안을 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큰, 그리고 유일한 힘은 ‘연대’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 담론이 아닙니다. 앞에서 팀제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왜 팀제로 전환했을까요? 스티브 잡스는 이미 일찍이 “사업에서 대단한 일은 결코 한 사람이 아니라 팀이 해낸다는 것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 발상이 바로 팀제로의 전환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팀들은 어떤가요? 팀은 수평적 구조여야 하는데 우리의 팀들은 여전히 수직적 구조로 운용됩니다. 유연성과 탄력성도 없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소대(platoon)의 역할만 맡습니다. 수평적 체제로 완전히 정립되어야 팀의 장점이 살아납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정치 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존의 방식입니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해 팀제의 본래적 가치를 실현하지 않으면 미래는 참담할 뿐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민주주의를 어렸을 때부터 교육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1%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각 시민들이 연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탐욕부터 어느 정도 덜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큰 가치를 위해 연대하고 그것을 실현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인문학은 바로 그러한 가치를 깨닫고 실현하려는 의지를 이끌어내는 아주 큰 힘이 될 바탕입니다.

 

제가 앞에서 『생각의 융합』이 직장인들을 우선적 염두에 두고 썼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명령이나 지침, 규율과 체제에 따라 순응하는 것은 결국 개인과 조직 모두를 죽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미래를 낙관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가장 큰 힘인 상상력은 ‘자유로운 개인’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통제된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MF를 기점으로 인문학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진단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무엇으로 보시나요. 우리가 인문학을 알아야 할 당위성을 말씀해주신다면?

 

흔히 1997년의 IMF를 경제 문제로 국한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 체제를 3년만에 졸업했으니 그 문제는 일단 끝났다고 여깁니다. 큰 착각입니다. 1997년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산업화시대의 프레임인 ‘패스트 무빙(fast-moving)' 사회의 유일한 가치 척도인 ’속도와 효율‘의 일방적 추종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미 세계는 그 틀을 벗어나고 있는데 우리만 그 틀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자초한 불행입니다. 결국 이전의 한국 사회 구조가 전체적으로 붕괴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실제로 IMF가 초래한 대량 해고와 직업에 대한 불안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계발서에 몰두하게 만들었지요. 그러나 그 책에서 하라는 대로 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아무리 용을 써도 그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문제는 개인의 나태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계발서 수십 권 읽어도 삶은 나아지지 않지요. 그렇게 5~10년쯤 하면서 지치게 되자 ‘위로’에 관한 책들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달달한 위로나 격려에 그쳤습니다. ‘사회적 위로’가 없었습니다. 사회적 위로는 바로 복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기계발처럼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켰지요. 그리고 ‘사회적 위로’는 우리가 산업화 시대를 겪으며 잃고 잊고 지냈던 인간의 가치와 인격성 등을 회복하는 반성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위로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힐링도 소셜힐링이 되지 못하고 ‘셀프 힐링’에 그쳤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삶을 다운사이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자 사람들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뭐야?’ ‘내 인생은 뭐야? ’세상을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야?‘ 이런 질문들은 결국 철학, 문학, 역사의 문제입니다. 자기계발서나 위로와 힐링을 다룬 책은 읽을 때뿐인데 반해 이 책들은 생각할 것도 많고 머리와 가슴에 남는 것도 제법 묵직하지요. 그러면서 인문학 열풍이 일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문사철의 좁은 의미로 접근했고, 왜 인문학인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결여된 상태에서 그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인문학은 최소한 97년 체제 이전과 이후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성찰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삶의 방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대안입니다. 미래는 ‘퍼스트 무빙(first-moving)'의 프레임으로 바뀝니다. 97년 이후 현재까지 이미 그렇게 가고 있어요. 그 패러다임은 무엇일까요? 바로 ’창조, 혁신, 융합‘입니다. 이게 빠지면 미래는 없습니다. 인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품위 있는 교양이 아니라 진화하는 삶을 위한 기초입니다.


많이 들으신 질문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여쭙자면, 선생님께서는 강단에 서기를 자발적으로 그만 두셨는데요. 깊은 고민이 있었을 듯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원하는 교수 자리를 스스로 버리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생각을 30대 초반에 혼자 속으로 막연하게 동경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저지른(?)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대수명이 길어진 현재와 미래의 삶에서 힘이 있을 때 삶을 전환(turn around)해야 그 다음 단계의 삶의 추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정말 평생 꿈꾸던 나의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책 마음껏 읽고 자유롭게 글 쓰며 문화운동을 하고자 했던 꿈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둘째는, 가르침의 설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연구실에서 강의실로 갈 때마다 늘 설렜습니다. 마치 연애하러 가는 청년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대학은 이미 취업을 위한 간이역으로 전락했고 학생들은 수업의 내용과 자신의 지적 성장보다는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에 휩쓸려 수업 시간에 스파크가 생기는 활력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설렘은 사라졌어요. 그 설렘과 떨림이 없는 학교와 강의는 회의적이었고, 그렇다면 그런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시키기 위해 밖으로 나가 교류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중 강연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출판계에서는 인문 교양 책이 많이 나오지만, 한편으로는 일부 대학에서 인문학 관련 학과가 폐지되고 있는데요. 앞으로 인문학 관련한 교육 및 제도는 어떻게 정비되어야 할까요?

 

일종의 과도기 현상이라고 보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참혹한 게 작금의 대학 인문학 현실입니다. 기초 학문이 없이 실용 학문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최근 각 대학이 경쟁적으로 학과를 통폐합하는 것은 대부분 교수 인력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경영적 시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음모는 거의 보지 못하고 그저 인문학 관련 학과가 통폐합되는 것을 현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학문으로 개편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저는 앞으로 대학의 절반은 개방대학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개방대학들은 일반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관심 분야를 개발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다양한 과목들을 개설해서 졸업 이후에도 새로운 학위를 취득하여 미래의 선택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을 외면하면 절반 이상의 그 대학들은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은 대학들은 지금의 이상한 명칭들의 학과를 다시 해체하여 기초 학문을 독립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오히려 독립된 인문학 관련 학과들로 돌아갈 텐데, 지금처럼 그것을 말살시켜버리면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저는 바로 그런 점을 우려의 시선으로 봅니다. 살고자 하는 꼼수가 결국은 자멸의 자충수가 될 것입니다. 대학은 본연의 기초 학문의 보루며 진원지의 역할을 수행해야 미래가 요구하는 다양성과 창조성의 바탕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쓰시고 계신 책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150~180쪽 가량의 책을 하나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직 제목은 정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정치 담론으로 접근하지 않고 삶의 방식,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래 경제를 위한 가장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필연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정치 담론으로 삼으면 늘 진영 논리에 빠지거나 그 논쟁에 휘말려 본의를 상실하게 되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 팀제가 제대로 운용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이며 미래의 필수입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97년 체제에 대한 반성적 비판과 미래의 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특히 내년과 내후년에 중요한 선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의 올바른 선택과 미래의 책임을 제대로 인식하자고 하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아주 짧고 명료하게, 그러나 메시지는 또렷하게 담아서 일종의 사회적 화두를 던지는 팸플릿처럼 써보려고 합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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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융합 : 인문학은 어떻게 콜럼버스와 이순신을 만나게 했을까김경집 저 | 더숲
인문학자 김경집의 신작 『생각의 융합』은 최근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융합적 사고에 대한 시대적 요구들을 인문학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런 융합적 사고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흥미롭고 다양한 지식과 생각의 이야기들을 통해 엮고 있으며 이런 지적 자유로움의 과정들이 얼마나 사고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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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애정 고통과 상처 한글 사랑을 노래한「홀로 아리랑」한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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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 프로를 통해 재조명된 곡 「홀로 아리랑」은 1980-90년대 음악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바로 작곡자 한돌을 떠올린다. 이 곡은 1990년 서유석의 노래로 알려졌고 지난 2005년 조용필이 평양공연에서 부르기도 하는 등 명작의 위상에 올라 있다. 그는 신형원에 의해 대중화된 「유리벽」, 「개똥벌레」, 「터」, 한영애의 걸작 「여울목」과 「조율」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말부터 그의 노래가 대학가에서 유통되었으니 그의 활동도 어느덧 35년을 넘겼다. 1989년부터 한돌타래라는 제목으로, 직접 노래한 앨범을 내고 있는 그가 올해 초 앨범< 한돌타래 571 가면 갈수록 >을 가지고 돌아왔다. 15년 만에 내놓은 2009년 앨범 < 그냥 가는 길 >로부터 근 5년만이다. ‘가면 갈수록’이라는 제목은 “음악을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그를 일산 고양아람누리 극장 근처의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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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돌의 음악은 크게 독도를 노래한 「홀로 아리랑」이 말해주듯 이 땅에 대한 애정, 우리네 삶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우리말 한글 사랑이란 3가지 코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가운데 한글 사랑은 단순한 애정을 넘는 신념이 묻어납니다. 앨범 타이틀의 571도 한글 창제 이후 571년 후에 발표되었다는 의미라면서요. 주된 테마로 사용하는 독도에 대한 태도는 이 땅에 대한 애정의 표현일 텐데 왜 독도인지 궁금합니다.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있다면 이렇게 편히 노래를 못했을 것 같아요. 한글은 우리말이니까 당연히 하는 것이고, 독도는 우리 동네니까 자연스레 이야기의 소재로 드러나는 것이죠. 특히 독도는 백두산과 제주도 사이의 한 중간, 남북이 만나는 접점이잖아요. 통일에 대한 염원도 독도에 관한 노래들에 같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나오는 것들이지, 특별한 사유는 없죠.

 

「홀로아리랑」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외롭다는 느낌을 주려고 홀로라는 말을 쓴 게 아닙니다. 독도가 홀로, 혼자서 노래를 부르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도로 붙인 거죠. 굳이 여기에 일본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지요. 넣지도 않았고. 우리 얘기만 한참 해도 모자라잖아요. 그런데 독도 얘기를 시작하면 일본부터 꺼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안 그래도 되는데. 지금도 방송 매체에서 독도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전 도망가요. 쑥스러워서 막 굳어지거든요. 뭐 독도지킴이, 독도사랑꾼 막 이런 식으로들 붙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개념하고는 전 거리가 멀죠. 전 그냥 우리 동네 이야기를 했던 거니까요.

 

2005년에 조용필 씨가 「홀로아리랑」을 평양콘서트에서도 불렀죠.


들어봤죠. 자랑스럽지요. 다른 가수 노래는 거의 안 부르는 사람이잖아요. 굉장히 고맙고, 그 노래를 택할지 몰라서 또 놀랬고요. 평양콘서트 때문에 생긴 웃기는 일도 있어요. 언젠가 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자기네 노래인 줄 알더라고요. “선생께선 모르십니까. 조용필 씨가 평양에 와 특별히 부른 우리 노랜데.”하면서요 이것 참... (웃음)

 

이번 음반 < 가면 갈수록 >을 얘기하지요. 발표하고 들었던 기분은.


좋았죠. 숙제를 하나 했구나. 물론 숙제는 또 생기지만.

 

그럼, 앨범을 만들 때의 마음 상태는 어땠습니까. 전작 < 그냥 가는 길 >을 낸 2009년으로부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요.


큰 차이는 없었고요... 다만, 눈에 보일 정도로 두려움이 커지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창작에 있어) 더욱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고민만 커지네요. '아 이거 발표해도 괜찮나' 하는 갈등이 갈수록 커집니다.

 

한편으로는 그 두려움을 벗고 앨범을 낼 수 있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지난 앨범< 그냥 가는 길>이랑 이번 앨범< 가면 갈수록 >을 동시에 놓고 보면 걸음이 쭉 이어지고 있잖아요. 먼 길을 걷긴 해도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노래도 결국 안고 가야하고요. 여기서 주저 앉아버리면 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테죠. 그런 마음에 기대서 해나갑니다. 다음에 나오는 음반의 제목은 < 머나먼 길 >이 될 예정이에요.

 

수록곡 「노래는 떠나가고」에는 과거에 만든 노래에 사과하는 대목이 들어가 있죠. “욕망에 눈이 멀어 노래를 아프게 했네”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를 담은 곡인가요.


검열이란 게 있던 예전의 이야기예요. 그 때 많은 곡들이 고난을 겪었잖아요. 사실 검열망에 들었다고 해서 굳이 노래를 고치거나 덧칠할 필요는 없었어요. 제가 안 하면 그만이죠. 하지만 그 때의 전 무명신세에 있었고, 딱히 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때의 제 욕망에 노래가 더렵혀진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썼던 노래예요.

 

그럼 한돌을 널리 알려줬던 신형원의 「유리벽」이나 「불씨」 같은 노래들도 욕망에서 비롯된 작품입니까.


그 곡들은 애초에 검열에서 무사히 지나갔기에 욕망을 더하고 빼고 할 이유가 없었어요. 제가 아프게 했다는 노래들은 통과되지 못해서 고쳤던 결과물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발표 안 한 곡들도 많아요. 어떻게 보면 살아남은 것들이죠.

 

그럼 훼손되지 않은 노래를 모을 수 있는 기회도 올 수 있겠군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전처럼 자주 녹음을 못 하는 게 걸리긴 합니다만, 여건이 될 때마다 할 수 있도록 해야죠. 좋은 가수를 만나야지요. 이게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임진모 씨가 제 노래를 잘해줄 가수를 찾아주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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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소벌따오기」에서의 트럼펫 연주는 인상적입니다. 트럼펫 소리가 곡에 꽤나 잘 들어갔더라고요.


'이 곡에는 이 소리가 딱이다' 싶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소벌따오기」가 딱 그랬죠. 여기엔 무조건 트럼펫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에서의 하모니카 연주는 어떤가요. 근래 듣기 어려운 거칠고 이지러진 소리지만 너무 조화로운 음색이었어요. 초창기 밥 딜런의 음반에서 만나봤던 사운드라고 할까요. 연주도 직접 했나요.


직접 했어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모니카가 거부감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네요. 조금 우려했던 저로서는 의외의 반응인지라.

 

「까레이스키 살랏」에서는 러시아 음악과 우리 뽕짝의 느낌이 공존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했어요. 까레이스키(고려인)라는 개념 때문에 러시아의 분위기를 많이 가져가야했죠.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풍만을 전하는 것은 또 아니고, 우리 것의 느낌을 분명히 담을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런 풍의 노래는 의외의 접근, 非한돌적인 접근이라고 하자) 그렇죠. 맞아요.

 

「도라지 꽃」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다룬 곡이죠. 슬픈 분위기가 러닝 타임을 지배합니다.


보컬 해준 '모두나' 씨도 부르고나서는 슬퍼서 한참동안 울었다고 해요. 사실 17년 전 곡입니다. 원래 만들면서는 일본 가서 발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다른 사람 목소리를 싣고 싶은데 곡 배경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보니 주위에서 선뜻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꽤 두고 있던 와중에 어느 날 기획사 대표가 여기에 잘 어울린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며 곡을 두고 가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성악을 전공한데다 노래 부르면서는 기타도 직접 쳤다고 하네요. 실은 모두나 씨를 아직도 못 봤어요.

 

마지막 곡 「내 꿈이 걷는다」는 앨범 마무리와 아이들 합창이 잘 어우러졌습니다.


1999년에 제가 목포에서 임진강까지 쭉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굉장히 보람찬 일이었어요. 「내 꿈이 걷는다」는 당시에 같이 걸었던 대안학교 아이들을 보면서 만든 노래에요. 그 걷기 활동이 학생들 입학식 행사였는데, 아무래도 고되기도 한 일이니 애들 걸음에서 기운 빠지고 힘든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그 때 조금이라도 밝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착안했죠. 사실 제대로 완성되는 데까지는 2년이 걸려서, 노래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제 때 못 지킨 셈이 됐어요. (웃음) 결국은 학생 친구들이 불렀지만 어른들에게도, 이 나라에도 희망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가사가 먼저 나온 곡입니까, 곡이 먼저 나온 노랩니까.


가사가 먼저 나왔죠. 걸었던 그 때부터 갖고 있었어요.

 

한돌 음악의 중심축은 가사입니다. 이번 음반에서 보여준 노랫말들을 자평하신다면.


아무래도 예전보다 노래를 쓰는 속도가 줄었어요. 자꾸 아쉬워하게 되고 곱씹어보게 되요. 이거 괜찮은가 하면서 시간을 두고 계속 생각하는 결벽증 비슷한 습관까지 생겼습니다. 늙어서 그런가요. (웃음) 그런데 막상 오래 들여 써보면 제일 처음 했던 생각과 결국 똑같거든요. 살아오며 매번 느끼는 건데도 계속 이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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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많은 곡을 써왔습니다. 직접 불렀던 노래들은 물론 신형원의 「불씨」, 「유리벽」, 「터」, 「개똥벌레」, 한영애의 「여울목」, 「조율」 등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탔던 작품들까지 더하면 그 수가 상당한데요, 그 중에서 가장 아끼는 곡은 어떤 것인지요.


가장 아끼는 곡은 잘 모르겠고요. 한영애 씨가 불렀던 「갈증」이 애착이 많이 갑니다. 한편으로는 아쉽기까지도 하죠. 그래도 한영애 씨한테 갔던 노래 중에서는 「여울목」이 최고죠.

 

「갈증」은 (한돌씨가) 직접 부르기에는 힘든 곡인 거죠?


어유, 그건 일단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불러야 해요.

 

신형원의 노래 중에서는 뭐를 꼽으시나요?

 

터」로 하겠습니다. 대청봉에서 완성했던 노랜데, 그거 만들고 나서 좋다고 뛰어 내려오다가 넘어졌죠. (웃음) 군대에서 쓰기 시작하다 안 써지는 상태로 1년을 내버려뒀던 터라 더 신나했던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대청봉에 올랐다가 구름바다를 앞에 두고서 '설악산을 휘휘 돌아 / 동해로 접어드니' 요 대목이 그냥 쫙 풀리더라구요. 그때부터는 함부로 '노래를 만든다'고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이건 내가 만든 건가, 산신령이 던져준 건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한돌 음악은 포크입니까.


제가 언급을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정확히 전달이 안 된 모양입니다. 주위에서 자주 물어봐요. 한돌 노래는 어떤 장르의 음악이냐. 사실 대답할 말이 없더라고요. 크게 묶어서 포크라는 범주에 많이들 넣기는 하는데 저는 제 노래들이 포크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그럼 이렇게 된 거, 내가 내 노래에 이름을 지어줘야겠다'하는 결론에 닿았죠. '타래'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 거예요.

 

앨범에 늘 붙는 '한돌타래'라는 말은 결국 '한돌의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겠군요.


그렇죠.

 

그렇다면 '타래'는 어떤 경로를 거쳐 나오게 된 말인가요.


타래라는 우리말 단어에는 '느끼다'라는 뜻이 있대요. 예를 들면 '소름을 타다'라고 흔히들 말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노래를 다 같이 느껴보자, 타자는 생각을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래 아(ㅌㆍ래)로 표기해줘야 하고요.

 

음악을 꿈꾸기로 결심했을 때 주로 영향을 준 아티스트는 누구였습니까.


지금 돌아보면 피터, 폴 앤 메리가 가장 컸어요. 집 앞에 커다란 전파상이 하나 있었거든요. 「500 miles」가 나왔는데 무슨 이런 노래가 다 있나 하면서 들었던 거 같아요. 노래도 그쯤서부터 찾게 됐고요. 심지어 이 사람들이 무슨 마음으로 이런 노랠 썼을까 하고 상상도 했어요.

 

오랫동안 세상에 대해 노래해오셨죠. 평소 이 세상과 세상살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뭐... 하루라도 빨리 산속에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웃음) 사실 산에 들어가고 싶다고는 했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등지고 살기도 쉽지 않죠. 글쎄요, 나를 지키지 않고 사는 게 도리어 편한 것 같기도 합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 일들을 이리저리 더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 주변을 정리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렇게 사는 게 더 낫겠다 싶기도 해요. 물론 절대 쉽지 않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단련이 돼서, 우스운 말로 포기하자고 얘기하는 데에 적응이 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마음이 복잡할 때 꺼내드는 해결책이 있나요.


전 산에 종종 올라갑니다. 산에 올라가면 내가 보이고, 산에서 내려오면 날 두고 온다는 마음이 들어서 좋아요.

 

2012년에는 독도사랑 음악회 <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도 열었습니다.


보람이 컸죠. 독도 노래만 갖고 하는 첫 공연이었고, 오랜 생각 끝에 개최했던 공연이라 큰 보람을 느꼈던 것 같아요. 기획 단계에서 마찰도 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말 잘 된 음악회였죠. 저 말고도 성악가가 나와 노래도 부르고, 저는 저 나름대로 곡마다 설명을 붙이는 내용까지 채우기도 했죠.

 

40년 가까운 음악 인생 가운데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궁금합니다.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어요. 즐거웠을까요. 글쎄요, 크게 즐겁진 않았던 것 같아요. 하늘에서 던져준 내 일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해왔으니까요. 그 일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고 외부와 연결되는 지점서부터는 큰 즐거움은 못 느꼈던 것 같아요. 다만 일 안에서 벌어지는 즐거움은 정말 많았죠. 이걸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요. 그렇게 계속 해왔네요.


 

인터뷰, 정리: 임진모 이수호
사진: 이한수
2015/03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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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아나운서가 매력적이라 평한 소설가 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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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등록금은 전혀 낮아지지 않았고, 청년 실업률은 높아져만 간다. 이런 불우한 시대이지만 청년에게는 젊음을 누려야 할 특권이 있다. 사랑, 우정, 방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기에 요즘 작품에는 이러한 청년의 모습은 그다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모습이라든지, 일자리에서 잘려 백수로 지내는 모습 등 먹고 사는 문제의 치열함을 다룬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문학에 우열이 없듯, 어떤 소재가 더 훌륭한지를 묻는 건 의미 없는 질문이다. 확실한 사실은 신인 소설가 김율이 쓴『스무살을 적절히 부적절하게 보내는 방법』은 청춘의 치기 어린 모습을 그렸다는 점이다.

 

한 대학의 기숙사. 앞으로 다가올 대학 생활에 들뜬 신입생들에게 빨간아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빨간아이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SNS에 올려 부도덕한 짓을 한 학생을 고발한다. 빨간아이라는 존재 덕분에 캠퍼스가 깨끗해졌다며 좋아하던 학내 분위기는 점점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빨간아이가 캠퍼스를 구석 구석 탐색할수록 학생들이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에 가장 당황한 것은 주인공 유리. 빨간아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만든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유리는 누가 빨간아이를 사칭했는지 범인을 찾기로 결심한다.

 

추리소설 형식을 띈 이 작품은 여러 결로 읽어낼 수 있다. 빨간아이를 찾아가는 흥미로운 추리소설로, 다양한 청춘이 겪어내는 신입생 모습을 그린 성장소설로, SNS가 일상을 장악해버린 현재를 비판하는 이야기로, 21세기 대한민국 대학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햄릿』의 오마주, 그 외에도 독자에 따라 이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결은 다양하다. 이런 매력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김율 소설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스무살이 가기 전에 소설을 꼭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는지요?

 

‘소설 쓰기’라는 행위보다는 소설의 ‘주제’가 제게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습니다. 스무 살에 대한 이야기를 할거라면 나이 먹고 철들기 전, 나 자신이 아직 스무 살일 때 후다닥 끝내버려야 가장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잠시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수업을 맡으며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어느 날 5학년 학생 한 명이 저에게 다가와 다른 애를 흉보느라 귓속말로 “쟤는 아직도 뽀로로 보고 논데요. 쯧쯧”이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좀 더 유심히 들어보니 ‘뽀로로’ 애니메이션을 졸업했는지의 여부가 그들만의 문화적 성숙의 척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 나이 또래만이 공유하는 생생하고 재미있는 세대적 코드인거죠. 그래서 저는 제가 현역으로 몸 담고 있는 나이, 현 스무 살만의 정서, 문화, 코드 등을 마치 사진기로 찍듯이 생생하게 소설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보통은 신춘문예 등등에서 등단한 기성 작가들이 소설책을 내게 되는데요. 김율 작가님은 문단에서 등단한 경력 없이 바로 책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기성 작가들에 비해서 책 내는 과정이 약간은 달랐을 것 같은데요.

제 경우에는 출판사에 직접 투고하여 출판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집필 당시 문학상 수상, 혹은 출판 같은 현실적 문제들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쑥 투고를 해본 것이었는데 마침 출판사는 20대 독자들을 겨냥한 책을 기획하고 있다 하더군요. 그래서 관계자 분들과 몇 번의 만남 후 뜻이 맞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추천사를 써 주신 분이 손석희 아나운서인데요. 두 분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요.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십니다. 홀로 소설을 쓰다 보면 평가에 대한 갈증에 목이 탑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해 평소 존경하던 손석희 선생님께 소설을 보여드렸습니다. 그 분께서 제 소설에 해주신 ‘매력적이다’라는 평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애초에 제 주제에 첫 소설을 ‘잘’ 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시작부터 다소 부족하더라도 매력적인 소설을 쓰고자 했습니다. 뛰어남과 매력이 언제나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그런 와중에 손석희 선생님이 제가 목표로 삼았던 부분을 콕 집어 칭찬해 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작품에 관해 좀 여쭙겠습니다. 이 소설은 주요 장면마다 햄릿의 구절이 함께 등장하는데요. 작가님께 햄릿』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가요.

 

『햄릿』하면 마치 연관 검색어처럼 ‘우유부단함’이 연상됩니다. 우유부단함은 한마디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태인데 그것이 제 자신, 그리고 스무 살의 정서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햄릿은 정신 없이 폭주하는 주위 환경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헤매게 됩니다. 햄릿만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 20대도 비슷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400년을 뛰어넘어 느끼는 동질감에 햄릿을 제 소설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수업 때문에 햄릿을 영어 원문으로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무슨 뜻인지도 잘 해석조차 되지 않는 중세 영어에 무언가 멋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햄릿을 소설의 중심부에 올려 놓았습니다.

 

요즘 한국소설 중에서는 청춘을 다룬다면 대개 삼포세대, 루저 등 경제적인 빈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서 『스무살을 적절히 부적절하게 보내는 방법』은 등장인물의 경제적 상황이 드러나지는 않았는데요. 작가님께서 소설을 쓰시며 부각하려 한 청춘의 모습이 있다면?

 

작가는 300페이지 남짓한 책의 분량에 무엇을 담을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저는 ‘스무 살의 로맨티시즘’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분명 현재 청년 세대를 관통하는 주류적 정서는 ‘루저문화’입니다. 힘든 현실이 반영된 결과이겠지요. 그러나 시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설사 전쟁통일지라도 스무 살이라면 갖는 감정적 역동, 낭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다루고자 했기에 현실적 고민들은 잠시 차치해두고 스무 살의 흔들리는 영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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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SNS’, ‘감시사회’, ‘소외’ 등을 주제로 읽어낼 수 있겠습니다. 작가님께서는 SNS를 많이 하시나요?
 
SNS에 직접 글을 올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소위 말하는 ‘눈팅’은 자주 합니다. 온라인 상에 머물지만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들어 현실 세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SNS라는 소재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심지어는 약간 두렵게도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게 되었습니다.

 

책 속에 인용되는 여러 사상가의 글을 보면 평소에 독서를 열심히 하실 듯합니다. 주로 어떤 책을 읽으시는지요. 기억에 남는 책을 3권 정도 꼽아주신다면?

 

저는 거의 소설밖에 읽지 않습니다. 이런 편식에는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소설이 가장 좋아서 소설만 읽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을 세 권 꼽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그리고 박민규님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입니다.

 

『죄와 벌』은 살면서 읽었던 책들 중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가장 강렬한 영향을 받은 책입니다. 음울한 페테르부르그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비극적 절규, 스토리, 라스콜리니코프의 광적인 심리 묘사 등 모든 방면에서 압도당해버렸습니다. 많은 책들이 읽고 나면 휘발성으로 날아가버리지만 이 책은 마치 빈 속에 털어 넣은 독한 보드카 샷처럼 온 몸에 저릿저릿 파고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일까?』는 소설을 풀어나가는 알랭 드 보통의 문체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문장 자체에 감정이 듬뿍 배어있는 데에 비해 그의 문장은 비문학 도서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건조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등장하면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온갖 휘황찬란한 수사가 그것을 꾸며줍니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그 감정을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독자에게 이해시킵니다. 건조한 문체로 강렬한 감정을 전달하는 그의 아이러니한 문체가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며 박민규 작가님의 유머에 감탄 했습니다. 소설가가 되어보니 유머란 참 다루기 까다로운 놈입니다. 웃기지만 유치하지 않은, 메시지가 담겨 있으나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그 적정선을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소설에 쓰이는 뛰어난 유머의 교과서를 읽고 있는 느낌입니다. 
 
소설에서 청춘의 치기 어린 모습, 사랑, 우정 등 다양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작가님 개인적으로는 대학 신입생 때 가장 열정적으로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제 신입생 생활은 얇고 넓었습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리저리 쏘다니며 산만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보람차게 이룬 것은 없지만 산만하게 넓어진 견문이 책을 쓸 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꾸준히 열중했던 것을 꼽자면 독서입니다. 학교 도서관에 틀어 박혀 보고 싶은 책을 뒤적거리는 나날이 많았습니다.

 
첫 작품을 쓰셨습니다. 앞으로도 소설 창작은 계속 하실 계획인지요?

 

앞으로 두 권 더, 총 세 권 쓰고 20대에는 그만 쓸 생각입니다. 이 결심은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입니다. 책이란 것은 작가에게 지식, 경험 등의 인풋(Input)이 있을 때 아웃풋(Output)으로 산출되는 것입니다. 20대의 자산으로 쓸 책은 세 권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는 이것저것 조금 더 배우며 내실을 다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30대가 되었을 즈음에 또다시 책을 쓰려고 할 것 같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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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을 적절히 부적절하게 보내는 방법김율 저 | 푸른숲
《스무 살을 적절히 부적절하게 보내는 방법》은 기숙사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빨간아이’라는 괴담이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기묘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속도감 있게 펼쳐낸 이야기다. 대학교 1학년, 일곱 명의 친구들이 이 전대미문의 괴담을 함께 추적하는 내용으로, 그 과정에서 젊음의 맨 얼굴과 맨 언어들이 여기저기서 날것으로 튀어나와 활기차게 살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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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탁환, 『목격자들』은 ‘백탑파 비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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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이후 1년 만에 만난 작가의 곁에는 오랜 친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각본 살인 사건』으로 인연을 맺은 후 『열녀문의 비밀』『열하광인』을 거치며 지음의 정을 나누게 된 ‘백탑파’였다. 8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1780년의 ‘조운선 침몰 사건’을 수사해 나갔다. 각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을 한양으로 운반하기 위해 항해하던 배 스무 척이 비슷한 시기에 침몰했던 것. 정조는 담헌 홍대용을 어사로 임명하고 의금부 도사 이명방, 탐정 김진과 함께 현장으로 급파했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개운치 않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정감록 무리의 소행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지려던 찰나, 세 사람은 목숨을 건 함정을 파기로 결심했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크게 노하며 진상 조사를 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수확은 거두지 못했다. 풍랑 때문이라거나 드물게 있어 왔던 일일 뿐이라고만 적혀있다. 그러나 또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세곡을 횡령하거나 세곡의 양을 불리는 일이 적지 않았음을. 의도적으로 배를 빠뜨린 자를 징계하는 법이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록들이 작가의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더 깊이 파고들어 보니 세곡을 빼돌린 후에 배를 침몰시킨 일도 있었음이 확인됐다. 관리들이 밀수를 위해 배를 불법 증축하기도 했고, 그 결과 과적으로 인해 배가 침몰하기도 했다. 이 모든 사료들을 토대로 작가는 ‘어쩌면 진실이었을지도 모를’ 사건의 실체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목격자들 : 조운선 침몰 사건』(이하 『목격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1780년 영암과 밀양의 바다에서처럼, 2014년 진도의 바다에서도 탐욕에 물든 배가 숱한 생명들과 함께 가라앉았다. 생환과 진실의 소식이 요원할수록, 감당할 수 없는 사실들은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그 무게에 짓눌린 것은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필을 멈추고 질문을 시작했다. 생명의 존귀한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인간이 어떤 탐욕을 가지고 있기에 이 절대적인 가치가 훼손되는가.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인간다움이 위협받는 존엄의 문제였다. 그리고 남은 자들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색을 요하는 것이었다. 고통에 둘러싸인 가운데에서도 삶의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면, 고통 이외의 무엇이 필요했다. 비극이라면 가능할까. 무수히 떠오르는 질문들은 그 자체로 한 마디의 말이 되었다. 작가로서 세상에 걸어야 할 한 마디, 바로 이야기였다.

 

생명의 존엄성, 고통과 상처라는 질문을 풀어나갈 ‘이야기’를 찾아 헤매길 두 달.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이 있었다. 10여 년 전 백탑파 시리즈를 준비하며 조사했던 ‘조운선 침몰 사건’이었다. 사고의 이면을 파헤쳐야 한다는 점에서 이명방, 김진과의 재회는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목격자들』은 백탑파 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로 탄생했다.

 

『목격자들』끝나지 않은 이야기


오랫동안 치밀한 고증을 거친 후 집필을 시작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례적으로 『목격자들』은 8개월여 만에 집필을 마치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후유증이 좀 심한 상태예요. 원래 한 작품을 마치고 다음 작품으로 천천히 넘어가려고 시간적 여유를 두는 편이거든요. 그래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충격이 적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 작품 외에는 다른 걸 쓸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평소보다 집중하는 시간도 훨씬 길었어요. ‘작품 마치고 나면 굉장히 힘들겠구나’하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소설은 상황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천천히 작업하기는 어려웠어요. 최대한 집중해서 깊게 파고들려고 집중을 많이 했죠.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들 정도로 힘든 작업이셨는데, 탈고하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살이 10kg 정도 빠진 것 같은데, 몸이 가벼워진 건 좋았어요(웃음). 작품 쓸 때도 빠졌지만 탈고하고 나니까 몸무게가 확 줄더라고요. 주체가 잘 안 되는 거죠. 작품을 마쳤는데도 그 속으로 계속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아요. 출간 후에는 독자들에게 계속 묻고 싶더라고요. 어떻게 읽었는지. 『목격자들』은 머리로 치밀하게 계산해서 썼다기보다 가슴으로 쓴 부분이 많거든요. 제가 가슴으로 쓴 부분들을 독자는 어떻게 읽어줬을지, 걱정도 되고 기도도 되고 그래요. 독자들 얘기를 들으면 또 다시 각인이 되고요. 그리고 세월호 사건 1주기가 돌아오니까, 몸도 마음도 계속 작품 속에 젖어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 같아요.

 

『목격자들』에서 빨리 헤어 나오지 못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작 과정 자체가 각인의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어요. 해보다가 도저히 안 되면 놓아버리자고, 조금은 이기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요. 감당이 안 되는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이었죠. 자료들을 보면 감정이 차오르는 거예요. 글은 냉정하게 써야 하니까 감정을 누르기 위해서 절도 하고, 음악도 듣고, 돌아다니기도 했죠. 감정이 조금 누그러지면 글을 쓰고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다시 반복이에요. 그 과정을 5월 중순부터 12월 말까지 반복했는데, 지금도 독자들과 얘기하거나 책을 다시 볼 때 어떤 부분이 가슴에 걸리면 감정이 확 올라와요. 그래서 계속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고, 빠져나왔다가 또 들어가고, 그렇게 지내고 있죠.

 

『목격자들』집필을 서두르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더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셨나요?


시간의 길고 짧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일부러 포함시킨 부분들이 있는데요. 세월호 사건과 광주 항쟁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광주 항쟁 유가족 중 한 분이 ‘이건 세월이 약이 아니다. 평생 잊히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어떻게 잘 기억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목격자들』에도 세월이 약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목격자들』에서 이명방은 김진의 부탁을 받고 ‘조운선 침몰 사건’에 대해 기록합니다. 김진은 76년 만에 찾아온 행성이 머무는 동안 소설을 완성시켜 달라고 하죠.


76년이란 건 인생 전체를 거는 거잖아요. 김진이라는 인물이 어렸을 때 받은 충격 때문에 삶이 바뀐 인물이거든요. ‘조운선 침몰 사건’에서 경험한 죽음을 평생 기억하고, 탐정이 되어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범죄와 평생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인간인 거죠. 그런 점에서 『목격자들』은 백탑파의 첫 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 거죠. 저는 이번 작품이 ‘백탑파 비긴즈’라는 생각을 했어요. 김진은 자신의 고통을 비극으로 정리해서 승화시킨 거예요. 옆에 있던 이명방은 김진이 여전히 고통스러워 할까봐 그 사건에 대해 쓰지 않고 있었던 거고요. 그런데 김진은 ‘너도 고통으로만 묻어두지 말고 비극으로 승화시켜라. 그 과정을 함께 공유하자’고 이야기하는 거죠.

 

세월호 사건 이후 집필을 멈추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현실 앞에서 소설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으셨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지고 나서 줄곧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 있죠. 이를테면 죽음의 문제, 사랑의 문제, 협동의 문제, 자연을 정복해 나가는 문제 같은 것들이요. 제가 40대에 접어들면서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려 했던 문제들이었어요.『혁명』『뱅크』『밀림무정』같은 작품들이 그랬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굉장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주제들이라고 할까요. 마찬가지로 제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또한 작가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쓰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주 가까이 있는 것과 아주 멀리 있는 것들이 충돌하는 순간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지금의 문제들에 대해서 소설을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쓰는 것과 1년 뒤에 쓰는 것, 그리고 10년 뒤에 쓰는 것이 많이 달라질 것 같기도 했고요.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느낌과 고민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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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탑파를 그리워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세월호 사건이 남긴 건 충격과 분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한다고 해서 바뀌기는 할까’ 라는 무력감도 안겨준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낭만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 칠레에서 광산이 무너졌을 때, 당시 매몰되어 있던 노동자들이 그 생과 사의 기로에서도 네루다의 시를 읽고 있었다고 하잖아요. 저도 『목격자들』을 쓰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럴 때일수록 모여서 빛과 희망에 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 혜성에 대해 공부하게 됐는데요. 핼리 혜성의 경우에는 75년하고도 몇 개월 동안은 어둠 속에 있다가, 딱 한 달 동안만 빛난대요. 아마 그런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어둠 속에 들어갔다고 영원히 어두울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 바퀴 돌면 다시 밝음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네루다의 시 아닐까요. 그런 작품들 사이에 제 작품도 포함되어 있으면 좋겠어요(웃음).

 

많은 예술가들이 세월호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겠죠.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무력함을 느꼈죠. 김창완 선생님의 노래나 박재동 화백님의 그림은 그런 무력감 속에서부터 빛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들이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저도 동참하고 싶었고요. 어쩌면 예술가들은 옛날의 무당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싶어요. 모든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고통스러우니까, 조금은 편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먼저 느끼고 자기 식대로 풀어내는 게 아닐까 싶은 거죠. 책이 될 수도 있고, 그림이나 연극이 될 수도 있고요.

 

『목격자들』에 등장하는 혜성 이야기가 다시 떠오릅니다.


이야기 초반에 할아버지가 된 이명방과 김진이 같이 글을 쓰고 별을 보러 가잖아요. 굉장히 낭만적이죠. 그런 낭만이 지금의 상처를 치유하게 하는 다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요. 시와 소설과 노래가 가지고 있는 어떤 힘과 같은 거죠. 그걸 함께 공유하면서 더 나은 세상에 대해서, 그 세상이 76년 뒤가 됐든 100년 뒤가 됐든,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움직임들을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목격자들』의 시작과 끝에서 혜성이 등장하는 건 그런 이유죠. 

 

8년 만에 백탑파와 재회하신 감회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엄청 반갑고요(웃음). 처음 작품을 쓰겠다고 했을 때 일부에서는 본편보다 사랑받는 속편이 드물다고, 이제 그만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백탑파가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고, 이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아요. 흥행 여부는 이후의 문제죠. 어쨌든 저는 이 우정의 공동체에 함께하고 싶어요. 김탁환이라는 작가가 인생을 살면서 누리는 약간의 즐거움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계속 백탑파 이야기를 쓸 거예요. 나중에 눈 밝은 독자가 비평가가 있어서 ‘김탁환은 21세기에 살면서 18세기 말의 백탑파를 그리워한 작가구나, 백탑파들과 함께 노닐었던 작가구나’ 라고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웃음).

 

백탑파의 귀환을 반가워하는 독자들도 많습니다.


시리즈를 쓰는 건 부담도 있고, 우연도 있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되어야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백탑파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때 중학생이었던 독자들이 이제는 대학생이 되었더라고요. 그 점이 참 좋았어요. ‘독자들의 한 시절을 책으로 같이 지나왔구나’ 싶으니까 감회가 새로웠고요. 앞으로 20년이나 30년쯤 더 백탑파 시리즈를 쓰고 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어떤 감회가 찾아올지, 설레고 기대돼요. 걱정도 되지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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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동안 백탑파 시리즈를 멈춘 이유


김진은 발문에서 “이명방이 백탑의 이야기를 세 편만 발표하고 멈춘 까닭을 모르진 않는다”고 적었습니다.“소설에서 통쾌하게 사건을 해결하더라도 현실이 점점 더 어두워진 탓”이라고요. 작가님께서 백탑파 이야기를 잠시 멈추셨던 이유이기도 한가요?


맞습니다. 8년이나 안 썼기 때문에 뭔가 말을 해줘야 될 것 같더라고요. 그런 자괴감이 있었어요. 계속 범인들을 잡지만 내가 잡은 범인들은 현실에서 계속 활개치고 있는 거죠. 이렇게 쉽게 잡는 게 오히려 현실을 안이하게 바라보는 게 아닐까, 소설가라면 더 깊게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고요. 그래서 백탑파 시리즈를 중단하고 세 편의 장편을 쓰면서 나름대로는 더 깊은 심해로 들어가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접점을 찾은 것 같아요. 깊이 들어가면서도 백탑파를 통해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요. 그래서 이전보다는 조금 더 진지해질 것 같고, 범죄가 이뤄지는 과정도 훨씬 더 치밀하게 짜여 질 것 같아요. 잘 묘사해 보고 싶은 욕심이 많이 생기고 있죠.

 

동시에 김진은 “이야기에서만이라도 통쾌함을 실어 독자들이 희망을 품도록 만들 시절도 있음을” 이유로 이명방을 설득하고 싶었다고 밝힙니다.


그 문장을 쓸 때는 『레 미제라블』을 생각했어요. 『레 미제라블』이 실패한 혁명을 쓴 거잖아요. ‘성공한 혁명들도 있었을 텐데 빅토르 위고는 왜 실패한 이야기를 썼을까’라는 생각이 들죠. 김진이 이야기했던 시점은 1835년이기 때문에, 영정조의 전성기가 지나고 세도정치의 암흑기로 깊게 들어갔었던 시기였어요. ‘그렇지만 『레 미제라블』 같은 소설을 써야 되지 않느냐’고 김진은 말하고 있는 거죠. 지금 이렇게 어둡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실패했다고 해서, 백탑파 선배들은 대부분 죽고 우리도 이렇게 늙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쓰겠다고 하지 말라는 거죠. 이럴 때일수록 빛나는 시절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 분투했던 사람들과 영혼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가인 네가 써야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게 제가 백탑파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우리가 실패한 혁명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보통 인간의 운명은 ‘시시포스’와 같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오르막에서 돌을 굴려서 끝까지 올라가면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돌이 다시 내려오니까 처음부터 다시 굴려서 올라가야 하죠. 그런 게 인생이고 그런 게 비극인 것 같아요. 돌을 굴려서 올라가봤자 처음으로 다시 돌아올 거니까 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돌을 계속 굴려서 올라가는 인간의 의지, 한 발 한 발의 발걸음 같은 것들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것만이 삶의 이유가 되는 거죠. 마지막이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는 모르는 거예요. 올라가봐야 알죠. 이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결과는 잘 안 됐잖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당대를 살고 있는 인간들은 계속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 속에 있었던 거죠.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엄청난 재앙이 올 수도 있고 사고를 만나 생을 달리할 수도 있지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 고통 속에 있는 거예요. 비극 속에 있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영혼을 강건하게 해서 올라가는 거죠.

 

『목격자들』을 쓰시면서 “추리소설로서의 논리적인 전개와 감정적인 전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힘들었다”고 밝히신 바 있습니다. 작가님께서 찾으신 해결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해결점이라기보다는, 그게 소설가의 운명 같은데요. 논픽션과 달리 소설은 의미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어야 되잖아요. 주제가 무겁다고 해서 시종일관 엄숙, 진지, 슬픔으로 작품이 가득 차 있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둠을 쓰기 위해서는 밝음을 써야 글에 균형이 잡히거든요. 그래서 밝음을 생각하고 써야하는데, 그게 굉장히 아이러니한 거죠.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부분들과 진지한 부분들 사이서 균형을 잡는 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런 게 소설이고 소설가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집필의 계기가 된 사건 때문에 작품이 인정받는 건 원하지 않아요. 소설가의 임무는 잘 쓰는 거니까, 잘 쓰기 위해서 발버둥 쳤던 시간들이죠. 보통은 작품을 쓸 때 두 번 정도 반전을 주고 끝을 맺는데 『목격자들』은 여섯 번 정도 계속 치고 올라갔어요. 치고 올라가는 것 자체가 세상에 대한 소설가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이게 진짜 끝인가, 이게 정말 다인가’하고 한참 생각해서 계속 올라갔던 게 저한테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독자들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잘 읽어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웃음).


목격자가 될 것인가, 구경꾼이 될 것인가


목격자들의 중심에는 이명방, 김진과 함께 홍대용이 있습니다. 홍대용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도 많고요.


홍대용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홍대용은 이름만 알려져 있고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잖아요. 『목격자들』에서는 홍대용 선생이 음악가로서, 과학자로서, 사회 사상가로서 가지고 있었던 탁월한 면모들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홍대용이라는 인물을 따라서 읽으면 새롭게 읽히는 부분들도 많을 거예요. 박지원과 또 다른 면모들도 많거든요.

 

박지원이 청나라로 떠난 사이에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작가님의 치밀한 계획 때문이었군요(웃음).


일부러 그렇게 한 거죠. 독자들이 백탑파는 박지원 없이는 별로 일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박지원이 없는 동안에 홍대용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진행되도록 한 거예요. 마침 배가 침몰한 연도가 연암이 청나라로 떠난 연도와 일치해서 가능했죠.

 

『목격자들』에 담긴 홍대용의 사상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홍대용은 무서울 정도의 평등주의자예요. 대표작인 『의산문답』에서 세 가지의 평등을 이야기하는데요. 인물균(人物均)은 짐승을 포함해서 사람과 사물은 평등하다는 뜻이고, 지성균(地星均)은 지구와 별은 평등하다는 거예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모든 별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거죠. 모든 별은 자기 나름대로 중심에 있다는 뜻이에요. 마지막으로 화이균(華夷均)은 중화와 오랑캐들도 균등하다는 건데요. 중국도 더 이상 중심이 아니고 오랑캐도 더 이상 오랑캐가 아니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사상이죠. 그렇게 보면 엄청난 평등주의자이고,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가 가지고 있던 계층과 계급을 깡그리 무시할 정도로 스케일이 엄청난 사람이었던 거예요. 박지원보다도 훨씬 더 급진적이죠. 그런 사상은 근대에 들어서야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들인데, 홍대용은 100년도 훨씬 전에 써 놓았던 거죠.

 

홍대용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정조를 향해 간언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홍대용은 묵자의 사상까지 닿아 있어요. 묵자의 무리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술자라는 거거든요. 홍대용은 악기를 연주할 뿐만 아니라 직접 만들었고, 수학에 밝았고, 망원경을 만져서 실제 천문을 볼 정도였어요. 기술자들에 대한 경시가 없었던 거죠. 유학자였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기술자 무리 전체에 대한 존중이 깊게 깔려 있었던 거예요. 『목격자들』에서도 그 부분을 많이 부각시키려고 했어요.

 

이명방은 정조에게 ‘기억의 마을’을 지어 달라 청합니다. 그 이유는 이명방이 고백하듯 ‘국가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식 문서에 기록하는 것이 그들의 억울함을 푸는 시작’이기 때문이겠죠?


‘죽은 자들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를 이야기할 때 국가 차원, 공동체 차원, 개인 차원에서 할 일들이 다른 것 같아요. 국가 차원에서는 그 사람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이루지 못한 미래를 잘 모으고 그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노력들을 해야죠. 아무리 개인들이 한다고 해도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국가 차원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기억해야 하지 않느냐고 소설가로서 상상해서 보여준 거고요. 그렇게 하겠죠?(웃음) 그렇게 해야죠. 그렇게 해야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목격자들』이 희망을 말하는 방식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눈 감지 않고 목격한 바를 기억한다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해주는 걸까요?


우리 모두가 TV를 통해서 세월호 사건을 봤잖아요. 자신이 본 것을 구경꾼으로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고, 목격자로서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둘은 굉장히 다른 거죠. 작년인가요,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을 공습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덕에 올라가서 그 광경을 보면서 박수치는 사진이 공개됐었죠. 그 사람들은 구경꾼인 거예요. 미사일이 날아가서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우리 편 잘 쏜다고 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 자세로 살 것이냐, 아니면 자기가 본 것들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계속 고민하면서 살 것이냐, 둘의 자세는 굉장히 다른 거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처음에는 목격자 위치였다가 구경꾼으로 가게 되는 요인들이 있는 것 같아요. 빨리 잊고 생활 전선으로 복귀하자는 것도 그걸 망각시키려고 하는 의도들이 들어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삶 속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그것조차도 일상인 거죠. 세월호 사건은 두 권의 책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지 계속 작품 속에서 반복되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것 같아요. 그리고 계속 곱씹으면서 생각하겠죠.


기억하려면, 이름을 불러주세요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역사의 목격자이지만, 누군가는 방관자가 되기를 택합니다. 방관자가 되는 걸 스스로 경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격자들』에도 짧게 써놨지만, 사실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거든요. 굉장히 쉬워요. 그냥 이름을 한 번 불러주면 되는 거죠. 제가 소설에서 열다섯 명의 이름을 읽었잖아요. 실제로 아침마다 집필하기 전에 사망자들의 이름을 소리 내서 읽어봤거든요. 박재동 화백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요.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더라도 그냥 소리 내서 읽어보는 것, 천천히 읽으면서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연결되는 통로들을 예술가들은 많이 만들어야 될 것 같고요. 그 속에서 사람들이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인다든가 엄청나게 자발적일 필요도 없는 거예요. 우리 안에 벌써 들어와 있죠. 인터넷으로 검색 한 번만 해봐도 다 알 수 있는 거잖아요.

 

독자들이 『목격자들』을 통해 어떤 질문을 품기를 바라는지 말씀해 주세요.


‘절실한 질문만이 나의 이야기를 새로운 끝으로 몰고 간다’는 생각들을 많이 했었어요. 작가는 절실하게 질문하는 자이고, 그 질문에 답할 정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자죠. 독자들도 소설 속으로 잘 들어오면 작가가 던진 절실한 질문을 자신한테 던지게 되겠죠. 작가는 작품으로 답을 만들어 냈지만 독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답을 찾게 될 거고요. 저의 절실한 질문은 생명에 관한 질문, 인간 존엄에 관한 문제, 고통에서 비극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래서 구경꾼이 아니고 목격자가 되는 삶에 대한 고민, 이런 것들이었어요. 독자들이 찾게 될 질문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거죠.

 

『목격자들』이후에는 극장에서 뵙게 될 것 같습니다. 『조선마술사』와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이 영화화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저는 두 가지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장편 소설가로서의 삶과 영화 기획자로서의 삶이 있어요. 영화 기획에 대한 구상은 10년 전 쯤부터 시작해서 3년 전에 이원택 감독과 ‘원탁’이라는 기획사를 시작했어요. 그동안 준비한 것들이 이제 결실을 맺기 시작하고 있는데, 해마다 영화 한 편씩은 기획해서 내놓을 것 같아요. 『목격자들』이나 『혁명』같은 작품은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장편을 완성시키는 데 공을 들인 작품이에요. <조선마술사>는 배우 유승호 씨, 고아라 씨와 촬영 중이니까 하반기쯤 개봉하게 될 것 같아요. 책은 7월 쯤에 출간될 예정이고요. 작년 11월에 출간된『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은 빠르면 내년 말 쯤에 개봉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가는『목격자들』로 부활을 알린 백탑파 시리즈는 물론, 이번 작품이 포함된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작업 역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인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지켜보는 것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라고 귀띔하기도. 『목격자들』을 통해 그리워하던 백탑파와 다시 만난 독자들이라면, 작가의 목소리에 녹아들어 있는 자신감을 읽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 백탑파는 익숙한 듯 새롭고, 경쾌한 듯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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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1 : 조운선 침몰 사건김탁환 저 | 민음사
백탑파가 돌아왔다. 한국 역사 추리 소설의 새 장을 연 백탑파 시리즈가 8년의 침묵을 깨고 신작 『목격자들 -조운선 침몰 사건』으로 돌아왔다. 『방각본 살인 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으로 이어지는 백탑파 시리즈는 조선의 문예부흥기인 정조 치세, 백탑 아래 모여 학문과 예술, 경세를 논하던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젊은 실학자들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조선의 명탐정 김진, 이명방을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지식인의 고뇌와 백성들의 생활상을 담는 역사 소설이자, 추리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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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법이 아닌 요리하는 마음을 담은 『메이스테이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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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피어난 새싹 같은 연두색빛 표지 아래에 정성껏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만 같은 책을 만났다. 연희동에서 메이스테이블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 메이는 요리연구가로서의 삶과 일상을 소소하게 담아내었다. 흔한 레서피 북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북인메이스테이블』에는 사계절이라는 흐름으로 책을 구성하여 각 계절마다 즐길 수 있는 이야기와 레서피를 담고 있다. 봄에는 대청소를, 여름에는 맛있는 병조림을, 가을에는 아이와 함께 요리를 하며 겨울에는 맛있는 솥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의 소개에 담긴‘요리란 레서피를 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담는 것이고,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는 큰 축’ 이라는 말 그대로를 책 속에 녹여내려고 했다. 책을 읽고 있으니 연희동 골목의 저자의 쿠킹 스튜디오에 함께 햇살을 받으며 앉아있는 것 같다. 조만간 꼭 저자가 추천한 솥밥을 가족과 함께 만들어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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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연두색 책이네요. 그릇장 앞에 꽃을 꽂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간단한 책소개 부탁드립니다.


레서피만 있는 요리책은 충분히 차고 넘쳐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단순히 레서피만 담긴 요리책이 아닌 그 레서피가 나오기 이전의 어떤 마음, 요리를 대하는 자세, 요리를 만들고 담는 마음까지 함께 전할 수 있는 책이 없을까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책입니다. 요리 그 이상의 요리책이라고 할까요.

 

미국에서 생활하셨다고 하시는데 한국생활은 언제 시작하셨나요?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어요. 그리고 다시 한국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함께 다시 미국에 가게 되었어요. 다시 또 미국에서 몇 년을 지내면서 아이도 낳고 요리를 직업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 같아요. 미국은 20대의 전반, 또 30대의 전반을 보낸곳이에요.

 

미국에서도 요리를 즐겨 하셨나요?


제가 지낸 캘리포니아의 전세계 요리의 각축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세계의 인종이 모여들고 그 나라마다 레스토랑이 있고 유명한 셰프들이 매일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죠. 그곳에서 지내면서 요리를 즐겨 하지 않기는 어렵겠죠.

 

요리를 전문적으로 시작하시게 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원래는 기획 일을 했었는데 결혼을 하면서 남편이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미국에서도 한국 일을 간간히 했는데 임신과 함께 미국에서의 전업주부 생활이 시작된 거죠. 그래서 한국에서의 경력이 단절되는 것도 그렇고 미국생활을 그냥 보낼게 아니라 그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요리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었어요. 일이 아닌 진짜 즐거운 기획으로 요리사이트를 만들었는데 그 사이트가 엄청 화제가 될 정도로 유명해져서 한국에서 인터뷰도 많이 들어오고 계속 요리에 대한 일들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일로 이어졌어요.

 

쿠킹스튜디오에서는 요리 강습뿐 아니라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 강좌(예를 들어 꽃꽂이)가 있나요?


요리와 함께 하는 포장법, 그리고 가끔 티 클래스를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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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를 하시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어떤 건가요?


가장 기뻤다기 보다 내 요리를 하면서 하루를 평범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해요. 내가 만든 요리를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따라 만들고 그 요리로 인해 행복했다는 얘기들을 전해 들으면 기쁘기도 하면서 책임감도 커지구요.

 

이때까지 출간하신 책과는 많이 다릅니다. 레서피 중심이라기보다 이야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책을 쓰시면서 가장 신경 쓰고 담고 싶었던 이야기는 어떤 건가요?


결국은 사람이야기죠. 요리를 먹고 만들고 먹고 나누는 그 안에서 느끼는 기쁨 행복 그런걸 담고 싶었어요.

 

다양한 레시피가 어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만약 딱 한가지 레시피만 추천해주신다면?


솥밥. 가장 맛있게 지은 정성이 가득한 밥 한끼요. 가장 중요한데 중요한지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따뜻한 밥 한끼를 해보시기를 추천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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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양 달걀후라이가 계속 생각이 납니다. 다양한 요리도구들은 어디서 구입하면 좋을 지 장소 추천 부탁 드립니다.


아이를 키우는 주부의 입장이고 일을 하는 워킹맘이다보니 평소에 많이 쇼핑을 할 시간은 없어요. 주로 인터넷을 통해서 많이 구매하는데 라쿠텐이나 미국에서 직배송해주는 미국 내 사이트들을 이용하는 편이에요.

 

참 그리고 표지에 vol. 1이라는 문구가 눈에 띕니다. 혹시 두 번째 책도 계획하고 계신가요?


제 이야기가 다른 분들의 공감을 얻는다면, 계속 하고 나누고 싶어요.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주길 바라시나요?


누구든지 다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요리를 정말 좋아하는, 레서피 이외의 다른 얘기도 궁금한 누군가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요리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얘기들에 공감해주시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따뜻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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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스테이블 (May’s Table)메이 저 | 나무수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따뜻한 요리와 푸드스타일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요리연구가, 메이. 그간 다수의 요리책을 출간해 국내외 독자들을 만나온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쿠킹스튜디오로 우리들을 초대한다. 연희동에서 인기 요리 클래스를 운영 중이기도 한 저자는 ‘요리란 레시피를 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담는 것이고,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는 큰 축’이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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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가 제안하는 대한민국이 더 불행해지지 않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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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사람이다』는 제목이 나타내듯 이 책은 이명수 저자가 지금 이 공간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일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심오한 문제이지만 그는 간단하게 답한다. 함께 살아야 사람이라고. 우리 사회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일까? 불행히도 용산 참사, 쌍용차 해고 사태, 한진중공업 해고 사태 그리고 작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까지 대한민국 사회는 함께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사건을 계속해서 겪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이명수 정혜신 부부는 적극적으로 현장에서 고통을 함께하고 나누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삶을 오롯이 담아냈다. 정부, 국가, 일상에 존재하는 한국사회의 권위주의를 냉철하게 비판하면서도 사회 전반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함께한다는 점이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근황부터 여쭙겠습니다.

 

지난 해 5월 정혜신씨와 함께 안산으로 이주해 ‘치유공간 이웃’에서 주로 지냅니다. ‘이웃’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심리치유를 위한 민간주도의 심리치유센터인데 주중엔 그곳에서 유가족들을 만나고 주말엔 경기도 양평집에 다녀오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만난 지도 오래고 문화적 여가 활동도 안한 지 오래라서 어느 땐 현실감각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걸 스스로 알아차릴 정도입니다. 그럴 땐 정혜신씨와 함께 천변을 걷거나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떱니다. 그럼 좀 나아집니다. 지난 1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해요. 

 

『그래야 사람이다』를 책으로 내시면서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다시 읽어보셨을 텐데요. 주된 느낌은 어땠나요. 결코 ‘홀가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홀가분 하냐’는 질문 자체가 무리일 거예요. 홀가분과 정반대의 감정 단어가 ‘참담하다’입니다. ‘참담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정도가 적당한 질문일 듯해요. 글마다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져서 내가 계속 자기복제를 하고 있나 그런 의심마저 들 정도였죠. 오래전에 거론했던 어떤 문제도 현재 진행형처럼 느껴져서 좀 괴롭더군요. 
  
책에서 제기한 여러 문제 제기가 지금도 거의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쌍용차, 세월호까지… 선생님께서 쓰시는 글에는 특정인 1인이 겨냥된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런 많은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1명을 함께 거론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요. 아니면 저희 모두가 그 1인이어야 하는지 고견 부탁드립니다.

 

고견까지는 아니고요. 저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말하는 글은 암세포만 공격해서 치료하는 최신 레이저 장비처럼 정확해야 파괴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측이라든가 특정그룹 등으로 지칭하면 입 큰 개구리가 자기는 빼고 다른 대상을 지목하는 것처럼 모두 자기네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거론하지 않으면 글 쓰는 이의 만족이나 명분용 알리바이를 쌓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죠. 그건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치해서 다루는 일과는 다릅니다. 실용적 글쓰기의 한 방법일 수도 있겠네요.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동시에 공전을 합니다. 어느 하나만 굴러가서는 유지가 불가능한 우주의 원리입니다. 어떤 구조적 문제에 접근할 때도 그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분명합니다. 청와대를 비롯해서 세월호 선장, 해경 등등.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개인적 생각으론) 사고 당시 마흔 살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세월호 참사를 불러온 우리 사회의 구조적 적폐에 대해 죄의식과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성찰이든 어른의 역할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전과 공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인 것처럼 개인의 성찰과 구조적 문제에 대한 접근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사람일 살만한 사회가 된다는 거죠.   

 

정부, 사회, 일상에 존재하는 한국 사회 내 권위주의를 향한 일침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권위주의 모델이 단기간에는 유효한 것처럼 보이나, 장기적으로는 사람들이 지쳐 떨어지고 지금 한국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피곤해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무너진다면 그 원인 중 첫째나 둘째가 권위주의라고 생각할 만큼 저는 권위주의의 병폐가 끔찍하다는 쪽입니다. 매번 거론되는 체면(남의 눈)을 중시하는 문화도 권위주의에서 파생됐습니다. 그런 인식은 공적인 영역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에서도 행복을 느낄 기회를 차단해 버립니다.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인데 그조차 내게 권위 있는 누군가의 컨펌을 받으려 하니 행복지수가 낮을 수밖에요. 권위주의는 일사불란함과 짝을 이룹니다. 외형을 중시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 가정이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틀을 만들어 놓고 모든 걸 거기에 맞춥니다. 술 먹고 허구헌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라는 인간에게 대들고 욕 하는 자식에게 엄마는, 그래도 아버지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는 식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을 싸가지 없다고 매도하거나 왕따 시킵니다. 부모, 선배, 갑의 위치에 있는 이는 자기 말을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들이 자기가 권력자가라서가 아니라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거나 재미있어서 그렇다고 믿어 버립니다. ‘위협자의 환상’이라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외형상의 반응만으로 마음까지 그렇다고 재단해 버린 후 채찍과 당근의 리더십 운운하는 사회에서 무슨 소통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생겨나겠어요. 권위주의의 폐해가 먹이사슬처럼 작동하니 온전히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 없고 그러니 삶 자체가 고단할 수밖에요.

 

주당 6억 원 받은 운동선수와 주당 60만 원 받는 봉급자 중에서 재능을 전방위적으로 인정하면 양쪽이 다 망가진다(121쪽)고 지적하셨는데, 한국사회가 불행히도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모호한 질문이겠지만, 대안은 있을까요?

 

모호한 질문이라니 대답은 단순명료하게 해보죠. 사람에 대해 부위별 인식을 하면 그런 불행의 싹을 좀 줄일 수 있을 거예요. 노래 잘하는 가수가 있으면 그 부분에서만 존중을 하고 박수를 보내면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전인격적으로 우상화합니다. 예를 들어 전인권의 샤우팅 창법이 록의 저항정신을 누구보다 잘 드러낸다고 해서 그 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저항정신이 두드러진 사람은 아닐 거잖아요. 심장 수술 분야에서 신의 손이라고 불릴 만한 솜씨를 가졌다고 해서 그 이가 부부관계의 갈등을 봉합하는 문제에서도 그런 건 아닐 건데 우리는 그렇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돈 많이 번 사람에 이르면 자본주의 사회답게 그런 왜곡된 인식은 절정에 달합니다. 동서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돈 많이 벌고 출세한 동서는 교육, 부부문제, 사회 현안에 이르기까지 발언권이 훨씬 세집니다. 한 집단의 최고의사결정권라고 해서 그 이가 그 집단에서 가장 우수한 판단력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란 사실만 인지할 수 있어도 지금처럼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돈과 권력과 재능을 전방위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양쪽 다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게 제가 지속적으로 인간의 개별성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 사회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갈릴 거라 하셨고, 선생님도 거기에 동의하셨는데요. 곧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1년이 됩니다. 세월호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어떻게 기억하고 싶다 정한다고 그렇게 되는 기억이 아닙니다. 사계절의 특성을 외우지 않아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은 느낌으로 저절로 알 수 있잖아요. 세월호는 우리에게 집단 무의식에 가까운 기억입니다. 트라우마입니다. 세월호 재판 중에 나온 시뮬레이션 결과에 의하면 10분이면 전원이 탈출할 수 있었던 배에서 그 수십 배에 해당되는 시간 동안 무려 304명이 학살당하듯 수장되는 장면을 슬로비디오처럼 수천만 명이 지켜봤는데 그걸 무슨 수로 잊나요. 1950년의 한국전쟁과 1997년의 IMF 사태가 한국 사회에 유형무형으로 결정적 영향을 주었듯 2014년의 세월호 참사도 그와 같습니다. 국가의 존재 의미는 물론이고 개인적 영역에서도 사생관과 사람답게 산다는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어느 영화감독의 말에 빗대어 설명하면, 세월호 참사를 304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304 개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한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엄마였고 아버지였고 자식이었고 형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연과 그리움과 고통이 존재하겠어요. 세월호 참사를 먼저 사람으로 기억해야 안전사회도 만들고 사회도 변화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정혜신 성생님 모두 ‘엄마성’을 강조하시는데요. 저희가 일상에서 ‘엄마성’을 발현하려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아주 간단해요.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면 됩니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는 거죠. 현재 내가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그렇게 보듬어 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지치고 섭섭한 순간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감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라는 거지요. (예를 들어 엄마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우리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어떻게 엄마 아빠가 내게 이리 소홀할 수가 있지? 그럴 필요가 없어져요. 대개의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그 말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거나 큰 위안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남에게도 자기에게도 엄마성이 저절로 발현됩니다. 

 

선생님 하면 귀걸이가 생각나는데요. 귀걸이를 하시는 이유를 말씀해주신다면.

 

혈액순환에 좋다고 그래서요. 이건 젊은 친구들이 귀걸이 한 제 모습을 보고 ‘신경통이 있으신가봐요?’라고 물을 때 하는 대답이고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아내의 생일 선물이에요. 40대 후반의 어느 생일에 머리 염색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조언하면서 귀걸이도 해 보라고 귀를 뚫어 줬어요. 거절할 수 없게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하면서. 재밌게도 그 후부터 그녀는 귀걸이 등 악세사리를 전혀 하지 않아요. 매일 제 귀걸이를 다시 달아주면서 ‘참 잘 어울려. 근사해요’ 그런 추임새 넣어주거든요. 그러니 계속 귀걸이를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정혜신 선생님은 글쓰기의 스승으로 이명수 선생님을 꼽아주셨는데요. 선생님께 글쓰기 선생님은 누구인지요.

 

수많은 책들이 스승이었고요. 특별히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철학과 실용성에 많은 빚을 졌죠. 내용적으론 이 책의 머리글에 밝힌 대롭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글 쓰는 이로 자리매김 될 때 가장 축복 받은 자산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주저없이 그녀다’ 말 그대로예요. 그녀는 다른 일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쓰는 일에서도 무조건적인 응원자이자 속 깊은 도반이니까요. 글 쓰는데 그것만큼 강력한 스승이 또 있나요. 

 

많은 부부가 선생님 부부를 존경하며 본받고 싶어 합니다. 현명한 부부 생활을 하기 위한 팁을 주신다면?

 

낯간지럽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다정한 배려’요. 구순의 남편이 밤에 화장실 가는 아내를 따라가 그 앞에서 무섭지 않게 노래를 불러주는 다큐 영화가 있었잖아요. 7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내내 계속된 여러 일상 중 하나였겠죠. 근데 그거 쉽지 않죠. 추운 겨울날 한밤중에 화장실 간다고 깨우면 군대에서 오밤중에 불침번 걸려서 일어날 때처럼 얼마나 싫고 짜증나겠어요. 타박하고 거절할 수만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근데 그 노부부는 그렇게 했잖아요. 그런 게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를 20대 젊은 커플들이 많이 본 것도 사랑에 대한 그런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진짜 사랑이죠. <그래야 사람이다> 책에 사인을 하게 될 때 말미에 늘 ‘천천히. 오래. 다정하게’라고 적었습니다.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사랑에 대한 저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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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사람이다 : 사회심리에세이이명수 저 | 유리창
이 책의 열쇳말은 ‘이웃’ ‘함께’ ‘엄마’ ‘사람’이다. 따뜻하다. 저자의 글에 대한 생각은 “그것이 비판이든 인정이든 한 사람만을 겨냥한 미사일 같은 글”이지만, “인간에 대한 한없이 따뜻한 시선”(서명숙 추천사)을 가졌으므로 저자의 성찰은 독자에게 깊고 넓게 스며든다. 게다가 유머와 재치가 번뜩이는 촌철살인의 문장은 아름답고도 절절한 에세이로 읽힌다. 사람과 사회에 대해, 그 일원인 스스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고, 나와는 생각이 다른 가족, 이웃에게 권하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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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신광은 “한국 개신교 상황 이종격투기와 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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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시내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건물, 그 건물 안에도 한번에 들어갈 수 없어 시간별로 예배를 보는 장면, 교회 앞에 늘어선 신도를 싣고 온 수십 대의 고속버스 등등. 등록된 교인이 수십 만 명이나 되는 교회도 있다.

 

『메가처치를 넘어서』의 저자 신광은 신학 박사는 이러한 메가처치에 주목한다. 그는 현재 한국 개신교의 많은 문제가 메가처치 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메가처치 현상이란 교회가 공교회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개교회만의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 뭐가 문제인가, 신도 수가 많아지면 좋지 않으냐는 반문에 저자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한다. 성장만을 좇다 보면 교회는 원자화되고 교인 역시 고립된다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현재 메가처치가 추구하는 성장지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도 벗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메가처치, 윤리적 접근이 아니라 교회론으로 봐야

 

『메가처치를 넘어서』가 교회론으로 메가처치 현상을 바라보겠다는 책인데요. 이게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인가요.

 

메가처치 현상에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한 것은 국내에서는 제가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9년에 『메가처치 논박』이라는 책이 바로 그러한 시도였죠. 그때만 해도 메가처치 자체가 아니라 일부 잘못된 메가처치와 메가처치 목사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어요. 대부분은 건강하지만 몇몇 메가처치의 이탈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건강한 메가처치와 그렇지 않은 메가처치를 구분하는 것은 메가처치 현상을 윤리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윤리적 관점에서는 비교적 건강한 목회를 하셨던 복음주의 4인방이 목회하는 메가처치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거죠.

 

하지만 저는 메가처치 현상 자체를 문제라고 봤습니다. 메가처치 내에서 일어나는 헌금 유용, 교회 내 성 폭력, 비민주적 의사 결정 같은 문제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밑바탕을 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메가처치 현상을 신학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왜 메가처치 현상이 문제인지를 교회론적으로 접근한 책이 바로 『메가처치를 넘어서』인데요. 이 책에서 저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을 진단하고,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어떤 교회의 모습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썼습니다. 메가처치 현상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가나안 성도 현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 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겠습니까. 나갈 교회가 없다는 거죠. 메가처치 교회가 싫어서 다른 교회로 가면, 거기에는 함량 미달의 목회자가 있고, 때로는 헌금 강요가 더 심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다시 메가처치로 갈 수는 없고요. 어차피 메가처치에 가도 모르는 사람들 밖에 없고, 혼자서 예배를 드리다 오죠. 그럴 바에야 굳이 피곤하게 교회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거죠.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시고 책을 쓰셨나요.
 
『메가처치 논박』후속작이다 보니 아무래도 전작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겠나 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메가처치 논박?이 처음 나왔을 때, “무슨 목사가 그런 책을 쓰나?”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요, 그 분들도 이제는 왜 제가 그 책을 썼는지 동의하게 된 사람들이 꽤 많아요. 그 분들도 제 책을 읽으면서 함께 대안을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대형교회, 초대형교회라는 말 대신 메가처치라는 용어를 쓰셨는데요.

 

메가처치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생겨난 용어인데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출석 신자 2,000명 이상을 말합니다. 아직 학문적으로 정의가 이루어진 개념은 아니죠. 한국에서는 주로 대형교회, 혹은 초대형교회라고 불러왔습니다. 제가 대형교회, 초대형교회가 아니라 굳이 메가처치라는 말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1~3세기에는 교회가 20~30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건물보다는 가족 공동체의 이미지였죠.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성당을 처음 건축하면서부터 교회는 건물이라는 이미지가 생기죠. 그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교회의 크기는 대충 200~300명선을 넘기지 않았지요. 대도시의 대성당 같은 경우는 수천 명이 모이는 큰 교회이기도 했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어요.

 

그러다가 1950년 정도부터 2,000명이 훌쩍 넘는 초대형교회들이 등장합니다. 한 두 개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숱하게 많이 등장합니다. 대충 1970년대쯤에 이들 교회를 가리켜 메가처치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큰 교회(big church), 대형교회(large church)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메가처치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 냈을까요? 이것은 기존의 교회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생겨났음을 말합니다. 일단 크기면에서 200~300명이 아니라 기본 신도 수가 2,000명 훌쩍 넘습니다. 심지어 단일 교회가 80만 명에 이르기도 하니까요. 이런 교회는 옛날 교회 이미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거죠. 새로운 기의가 등장하니까 새로운 기표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고, 메가처치는 그러한 새로운 기표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메가처치는 단순히 크기만 커진 교회가 아닙니다. 신도 수가 많아지면서 교회의 구조, 건물 형태, 교회 조직, 설교 패턴, 목회자 리더십도 모두 바뀝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 리더십은 CEO 형으로 변합니다. 대규모의 신도를 관리하다 보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예배당은 오페라홀이나 스포츠 경기장 형태로 바뀌고, 예배는 퍼포먼스 형태로 바뀌고, 방대한 자원봉사자 조직이 생겨나며, 모든 것을 콘트롤하기 위해서 첨단 테크놀로지도 동원됩니다. 이런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교회죠. 이런 새로운 교회 형태를 그냥 대형교회라 불러버리면 새로운 교회적 현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은폐되죠. 또한 대형교회라는 말은 작은 교회에 대한 상대적 개념인지라 곧바로 방어 논리가 생겨버립니다.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거지, 좀 크다고 뭐가 문제냐?” 이런 반박이죠. 저는 이런 문제점 때문에 메가처치라는 용어를 계속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도의 첨단 테크놀로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교회와 첨단 테크놀로지, 잘 연상은 안 됩니다만.

 

옛날에는 2,000명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2,000명이 매주 모여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교회 활동을 하려면 테크놀로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마이크가 없다고 생각해 봐요. 목사님이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뒤에서는 잘 안 들리겠죠. 마이크가 있다고 해도 맨 뒤나 기둥 뒤에서는 목사님 얼굴이 안 보이죠. 그래서 대형 스크린도 있어야 하고, 모니터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또 먼 거리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수단도 있어야 합니다. 대개 메가처치는 지역성을 뛰어넘은 초지역교회(trans local church)인데요, 먼 지역에서 본 교회로 오려면, 대중교통이나 자가용, 교회버스 등 뭐든 이동성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런 단순한 기술 말고도 정교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여러 부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려면 시간을 잘 지켜야 하고, 정해진 시간 내에 감동적인 예배를 드리려면 잘 짜여진 큐시트가 필수죠. 2부 예배 때 성령이 임해서 예배 시간이 2~3시간 길어지면 3부 예배는 어떻게 드리나요? 그래서 철저하게 분 단위로 예배를 기획해서,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기획을 해야 합니다. 찬양 팀도 굉장히 전문가들이죠. 찬양 인도자는 예배 전에 어떤 찬양을 불러야 하고, 코드 진행은 어때야 하고, 기도는 어디서 해야 하고, 어디에서 절정감을 주어야 하는지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합니다. 예배 현장은 보통 방송용 카메라로 중계하는데 카메라 한 대로만 하면 좀 지루하니까 몇 대를 돌려요. 1번, 2번, 3번 카메라, 파워포인트, 영상, 이런 것들 스위칭하고 스크린에 띄우죠. 예배 실황은 녹화해서 그걸 또 인터넷으로 띄우고요. 이런 모든 것을 일반 신자는 잘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불편하지 않게 예배를 향유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대단한 테크놀로지가 동원되는 겁니다.

 

메가처치와 첨단 테크놀로지가 어느 정도로 밀접하냐 하면 새들백교회의 예를 들 수도 있을 텐데요, 그 교회에서는 목표 대중을 추적하는 마케팅 기술을 전도 전략에 활용했습니다. 즉 그 교회 주변에서 가장 전도하기 쉬운 사람의 평균 모습을 뽑아내서 가상의 캐릭터로 만들어 그걸 ‘새들백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리고 교회는 그 가상의 캐릭터를 공략하는 전도법을 개발하죠. 이런 기술은 방송에서 주요 시청자나 청취자를 추적하는 기술인데, 그걸 교회에서 쓰는거죠.

 

전세계적인 메가처치 현상 뭐가 문제인가

 

새들백교회를 말씀하셨는데, 흔히 메가처치 하면 한국 교회에 유달리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메가처치는 미국에서 먼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메가처치 현상이 굉장히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는데요, 미국의 메가처치 비율이 약 0.5%라면 한국은 1.7%나 됩니다. 3배도 넘는 비율이에요. 미국의 최대 교회가 약 5만명 가량인데, 한국의 최대 교회는 80만명이나 됩니다. 이처럼 한국의 메가처치 현상은 밀도나 강도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하지만 메가처치 현상이 한국만의 독특한 모습도 아니고, 미국만의 모습도 아니에요.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남미,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 유럽, 호주에서도 메가처치 현상이 보고되고 있어요. 메가처치 현상을 한국의 문제로만 보면 원인 진단이나, 해법이 한국적 상황 안에서 이루어지겠죠. 하지만 메가처치 현상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개신교 신학 틀 안에서, 특히 개신교의 교회론에서 문제 원인을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개신교 교회론에 어떤 문제가 있나요?
 
메가처치 현상이 전 세계적인 영역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신학적으로 보자면 대단히 개신교적 현상입니다. 최근에 한국 개신교회가 문제가 심각하니까 수혜를 가톨릭교회가 얻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가톨릭교회도 본당의 비대화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는 다른 교구의 본당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또 성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성장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주임 신부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임 신부는 언제 다른 성당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구요. 그러니 굳이 자기 본당을 성장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죠. 또 타 교구 신자를 자기 교구 본당으로 전도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회는 이런 게 없죠. 다른 교회 신자도 상관없이 전도(?)의 대상입니다. 바로 옆 교회와 성장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성장을 하면 그 유익이 거의 대부분 고스란히 담임목사에게 돌아갑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모든 교회들이 성장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겁니다.


교회론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개교회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교회 중심주의는 지역교회를 하나의 독립된 교회로 보고, 지역 교회 결정권에 누구도 간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독립된 개교회들이 개교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교회의 모든 자원을 쓴다는 것인데요. 그러다 보니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교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에 대한 모든 교회의 투쟁”이 벌어지는 거죠.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 다릅니다. 저는 책에서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교회론을 제시했습니다. 만일 교회들이 그러한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추구한다면 메가처치 현상에 어느 정도브레이크 장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현상의 배후에는 복음주의 영향도 있을까요?

 

네, 맞습니다. 메가처치들은 대부분 복음주의적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워낙 복잡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잘못 쓰면 비판을 받을 수 있어요. 복음주의의 의미가 하도 복잡해서, ‘과연 복음주의라는 정체가 있느냐?’ 이런 말이 나올 정도니까요. 저는 복음주의라는 표현을 쓸 때에 특정한 맥락 안에서 쓰려고 노력합니다. 저에게 복음주의는 전도와 교회성장을 최우선적 관심으로 두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러한 복음주의가 교회 성장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성장한 메가처치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메가처치 논박』에서 저는 메가처치의 문제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주로 메가처치 현상을 다루었습니다. 제가 볼 때 메가처치도 문제지만 메가처치 현상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메가처치는 1.7퍼센트 밖에 안 됩니다. ‘이러이러한 문제 때문에 메가처치가 문제다,’ 이렇게 해버리면 메가처치 아닌 교회는 문제 없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메가처치 배후에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 진짜 문제인 겁니다. 메가처치는 메가처치 현상의 빙산의 일각인 겁니다. 메가처치 현상이 문제인데요, 메가처치 현상 속에 포함되지 않은 교회를 찾을 수가 없어요. 메가처치든 비메가처치든 거의 모든 교회가 메가처치 현상 안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그럼 메가처치 현상이 뭐냐? 한 마디로, 내가 살기 위해서 내 교회가 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전도해서 교회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적 현상인거예요.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신도를 모으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전도해야죠. 옆 교회 신도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해서 우리 교회에 나오도록 합니다. 이 교회만 그러나요? 다른 교회도 똑같이 합니다. 그러다 보니 메가처치 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메가처치든 메가처치가 아니든 어느 교회든 이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정글이 되고 말죠. 정글이 되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남들 교회는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 오직 내 교회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죠. 강남 모 교회는 주변의 숱한 반대에도 엄청난 건물을 새로 지었어요. 내 교회만 성장하면 되니까요. 작은 교회라고 다를까요? 다 똑같습니다. 동일한 논리로 움직여요. 그 논리는 투쟁 논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보니 교회가 점차 이기적이 되고 자기 중심적이 되는 거에요. 본 회퍼는 교회가 남을 위하지 않으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고 말했어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냐?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런 분의 몸인 교회는 당연히 이웃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교회로서는 이것이 불가능하죠. ‘내 교회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남을 위해 활동하느냐?’ 이렇게 묻는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단 내 교회부터 성장시키고 단 뒤,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더 이기적이 됩니다. 성장하려면 건물 지어야죠, 건물 지으려면 융자 받아야요, 은행에 빚졌으니 이자 갚아야죠, 그러려면 새로운 신자들이 더 만이 들어와야죠... 영영 교회는 남을 위해 존재할 수 없게 되죠. 교회가 원자화되면서, 교회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교회가 되어가구요, 그러다보니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어요. 이게 메가처치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런 메가처치 안에서 신자들도 자기 중심적이 되어 가게 되지요.

 

교회가 커지고, 신자가 많아져도 한 교회 안에서는 신자들끼리 서로를 위하지 않나요?

 

교회의 원자화와 신자의 원자화는 분리될 수 없는 현상입니다. 교구제가 무너지고 모든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교단과 교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는 어떤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할까요?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좋으냐, 나쁘냐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확실한 건 선택은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하도록 이끈다는 겁니다. 소위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건데요, 합리적 선택이란 결국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게 하죠. 다수의 합리적 선택을 받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메가처치죠. 근사한 시설, 감동적인 설교와 프로그램이 좋은 교회. 그러다 보면, 합리적 선택을 한 소비자의 모임이 교회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교인은 원자적 개인, 원자적 소비자가 되는거죠. 그러면서 교회의 본연의 모습인 공동체성은 뒤로 밀립니다. 교회는 종교적 욕구를 소비할 수 있는 월마트 같은 곳으로 인식되고 마는 거에요.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교회가 이기적이 되어가고, 신자도 이기적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자는 본질을 잃고 마는 겁니다.

 

그럼 선택의 자유를 구속해야 하느냐?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죠. 자유는 강제로 억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이기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선택은 고쳐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경에서는 자유는 자유로만 억제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즉 자유는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거든요. 다시 말해 형제자매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도록 스스로 결정하는 게 성경적 의미의 자유입니다. 성경은 ‘서로 복종하라’고 하는데 바로 이런 뜻이죠. 하지만 메가처치 안의 신자는 자유를 이런 뜻으로 쓰지 않아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쓰죠. 그러니까 메가처치 안에서는 자기중심적 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남과 억지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힘들어요. 생일만 외워도 1년이 훌쩍 갈 걸요? 그러다 보니 관계도 선택적으로 맺습니다. 저 사람 괜찮네. 내 아들과 학벌도 비슷하고 학번도 비슷하네. 우리 가게 단골하면 좋을 사람이네... 이러면 명함 주고 받습니다. 취미, 특정한 사회 활동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폐쇄적 사교, 이기적 사교로 이어지죠.
 
개신교를 향해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가 정치적, 계층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건데요. 메가처치 현상의 연장선이라 보나요?
 
그럼요. 책에서는 메가처치를 총 4세대로 구분했는데, 1세대는 월남자, 2세대는 이농민 같은 이주민들에 의해 커졌습니다. 그런데 3세대 강남형 메가처치는 중산층이 주로 모이면서 계층적 특징이 강하게 생겨납니다. 사실 이것도 교회 선택의 자유 때문에 생겨난 현상인데요, 모든 선택을 개인에게 맡기면 어떻게 될까요? 이질적인 사람과 만날까요? 유유상종이라고 아무래도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겠죠. 그러니까 교회가 계층적으로 균질화되는 겁니다. 그 안에 끼지 못한 계층은 열패감을 느끼고 헤매고 나가떨어지죠. 그러면서 균질화는 더욱 강화되죠. 옛날 미국 남부 지역의 어떤 교회는 ‘흑인 출입 금지’라는 표시를 달아놓았다고 하죠.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교회 분위기가 푯말 붙인 거랑 다를 바가 없어요. 계층 균질화는 설교자로 하여금 그들 계층을 위해 발언하고 설교하게끔 동기부여를 시킵니다. 심지어 그런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적 활동을 하는 교회들도 생겨나게 되죠.

 

제가 책에서 개교회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교회성을 강조했는데요. 공교회성이란 가톨릭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고요, 교회가 계층, 성별, 민족, 문화, 이데올로기 등 모든 이 땅의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이 한 데 어울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보편적 교회여야 한다는 의미죠. 최고 부자와 가장 가난한 사람이 한 곳에서 예배할 수 있는 교회, 이게 공교회성인데 선택을 개인에, 개교회에 맡겨버린 지금에서는 불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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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메가처치 신학이 필요한 때

 

실제로 메가처치에서 사역하기도 했는데요. 그 때 경험으로 비판 의식이 가지게 되었나요?

 

꼭 그렇지는 않고요. 어렸을 때부터 의문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땐가 누구한데 들은 얘긴데요, 어떤 교회에는 주일 예배 때 은행에서 헌금을 걷으러 차를 보낸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았는데 교회가 헌금 걷어 예금하려고 은행 차를 부르는 게 말이 되나? 어린 나이에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졌죠. 대학부 생활을 하면서도 과연 대형교회가 맞는지, 교회 형들이나 누나들과 토론을 벌였는데요. 그때 선배들은 큰 교회가 훌륭한 일도 많이 하지 않느냐며 반박했어요. 그때에는 그게 맞는가보다 하고 수긍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의문이 드는 거에요. 그럼 다시 또 질문하고, 선배들이 또 다른 반박을 하고,... 뭐 이런 질의-응답 과정이 반복되었죠. 그러면서 문제의식을 계속 키워나갔습니다.

 

그래도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이는데, 대안은 있나요.

 

책에서는 개교회는 자기 자신이 공교회, 곧 그리스도의 보편교회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웃 교회와 상생을 길을 모색하자. 또 개교회 내의 신자들은 참된 공동체성을 위해 한 몸을 이루도록 노력하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반론이 들어오겠죠. 좋은 말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저도 사실 의문입니다. 제 예상에는 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신자들도 별로 원치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금 한국 교회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공멸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교회 분위기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어요. 어제도 한 후배한테 전화가 왔더라구요. 도대체 요즘엔 갈 교회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 많은 교회들이 다 똑같은 설교만 하는지,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다 이상합니다. 제가 책에서 이종격투기 예를 들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 도박사들이 태권도가 세냐, 무예타이가 세냐, 유도가 세냐, 권투가 세냐... 이게 궁금해서 여러 종목의 선수를 모아서 링 위에 올렸어요. 어느 무술이 가장 센지를 보고 싶어서 경기를 했는데요, 경기를 하다 보니까 선수이 모두 비슷해지는 거죠. 선수들 입장에서는 자기 무술을 충실히 지키는 것보다 경기에서 이기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가장 효과적인 타격 기술, 그라운드 기술을 찾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전부 똑같이 경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아예 ‘이종격투기’라는 새로운 무술이 생겨버립니다.

 

이게 지금 메가처치 현상과 비슷하거든요. 지금 어느 교회 신자가 장로교, 감리교 같이 교단이나 신학보고 교회를 정하나요. 담임 목사가 누구냐, 프로그램은 어떠냐, 시설은 괜찮으냐, 한 마디로 신앙 생활하기 좋으냐? 이거 한 가지 기준 놓고 교회를 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그런 신자들을 끌어 올 수 있는 방향으로 최적화되는 거구요. 결국 교회는 전부 성장을 지향하고, 소비자를 끄는 데 최적화된 설교, 프로그램, 시설 등을 갖춥니다. 그러니까 결국 다 똑같아집니다. 교단, 신학 차이 없고 메가처치라는 하나의 교회가 생겨나고 만 겁니다. 그러니 교회들이 다 똑같이 설교하고, 똑같이 활동하는거죠. 메가처치 현상 속에서 교회는 성장지향적 교회, 이 한 가지 밖에 없어요. 심각한 문제죠. 성경 가르침에서도 벗어났고, 공멸이 눈앞에 온 거죠. 저는 과연 한국교회가 한 세대를 버틸 수 있지 걱정입니다.

 

가나안 성도가 진짜 100만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갈 교회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요. 교회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야 해요. 우선 병을 자각해야 병원을 가든지 할 텐데, 지금 본인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고쳐질리 만무하죠. 자꾸만 메가처치 현상이 병이 아니라고 말하니까 저는 병이 맞다고 말을 하는 거예요. 저는 이 책에서도 얘기했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연합해서 ‘반-메가처치 신학 선언’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쪽 방향은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어느 방향이 맞는대?하고 질문을 하지 않겠어요? 그때 교회가 대안적 방향을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달릴 때는 메가처치 현상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저성장이고 절대 인구도 안 늘 테고, 도시로 집중 현상도 둔화된 상황입니다. 신학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조건도 메가처치에는 안 좋게 작용할 듯합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한국교회는 성장 고점을 1995년에 찍고 이후는 완만하게 하락 추세입니다. 대세 하락 추세가 바뀔 거 같지는 않습니다. 이대로면 꾸준히 추락하겠죠. 그러면서 교회의 동질화와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겠죠. 그러나 신자들은 여전히 메가처치를 찾을 것이고, 교회들은 성장을 하려는 관성을 바꿀 것 같지 않습니다. 1세대 메가처치 지도자들이 떠나겠지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재능 있는 신규 목회자가 등장해서 새로운 형태의 메가처치를 만들어내겠죠. 분명 상황은 메가처치 현상에 타격을 가하는 쪽으로 바뀌겠지만 메가처치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도리어 미국 같이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되겠습니까? 시장 자체가 줄어드는데... 제가 볼 때 이 추세는 한 세대 이상 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길게 잡아야 30년 이내에 한계가 올 텐데, 그 한계가 오기 전에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기는 할 겁니다. 메가처치가 미자립 교회와 협력을 강화하기도 할 것이구요, 분립 개척도 더 많이 시도하겠죠. 그러는 사이 많은 교회는 문을 닫을 거예요. 근본적인 갱신이 일어나야 할 텐데... 기존 패러다임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면 결국 한국 교회는 더 추락하고, 더 망신을 당하고, 더 수치를 당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합니다.

 

끝으로 두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에게 신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성경에 전도서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은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흙에서 왔다 흙으로 가는 존재잖아요. 진짜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면 인간의 삶이라는게 다 뭘까요? 과연 삶에 의미와 가치는 있는 걸까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일까요? 무슨 근거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는 제게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제 존재가 신의 영광으로 둘러 싸인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제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흙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심어줬어요. 본회퍼가 죽음 앞에서 ‘이것은 끝이 아니다’라고 했다죠.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선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제게 주었습니다. 영생이라는 게 천당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오해가 있는데요, 영생의 진짜 의미는, 내 삶이 흙으로 흩어지지 않으리라는 소망, 영원한 가치로 보존되리라는 기대입니다. 저는 기독교 이외의 이론이나 설명 체계에서도 저의 이러한 소망을 대체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이죠.

 

끝으로 선생님께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지 말씀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오셨거든요.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정치 지도자, 대기업 사장도 무릎을 꿇어야 하는 최고 권력자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가장 낮은 자의 발을 씻으셨고, 자신의 생명을 비루한 인생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참된 왕의 통치 행위라고 말씀하셨어요. 십자가는 왕의 통치 행위의 절정이라는 것이죠. 저는 그 어떠한 종교 지도자나 정치지도자 중에서도 그러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왕의 모습으로 새로운 통치를 실현하셨고, 그러한 통치가 구현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셨습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군림과 지배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으로 왕노릇 하는 나라구요, 그래서 그 나라는 남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다 왕이 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 그 분과 함께 섬김으로 왕 노릇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새 나라에서 새로운 방식의 통치를 행하고, 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신 분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타개할 수 있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 뿐이며, 을(乙)들에게 갑(甲)질하는 한국 사회가 고쳐질 수 있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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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처치를 넘어서 신광은 저 | 포이에마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메가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욕망하고 지향하며 따르고자 하는 ‘메가처치 현상’에 있다. 메가처치 현상이 왜 유독 한국 교회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다. 교회론적 개인주의가 낳은 부정적 현상들을 ‘공교회성’과 ‘공동체성’의 회복으로 극복할 것을 요청하는, 한국 교회를 향한 반(反) 메가처치 선언문! 균형 있는 신학적 반성과 치열한 성경적 실천으로 메가처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교회에 처방전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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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국민 시인 윤동주를 소설로 살려낸 안소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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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이덕무, 김옥균 등 조선의 인물을 써왔던 안소영 작가가 이번에는 국민 시인 윤동주를 선택했다. 장편소설 『시인 동주』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작품을 다룬 작품이다. 아무도 우리말로 시를 쓰려 하지 않았던 어두운 시대, 왜 그는 우리말을 고집했을까. 소설은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안소영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르다 보면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간 정약용, 박지원, 김옥균 등 조선 시대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써 오셨는데요. 많은 인물 중에서 윤동주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역사적 인물의 삶을 그리는 책을 쓰다 보니, 다루고 있는 시대가 점점 아래로 이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 책 『책만 보는 바보』의 이덕무와 벗들은 18세기 후반의 사람들이고, 유배지의 다산 정약용과 그 가족이 보낸 삶은 19세기 전반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과 벗들이 살다 간 시대는 19세기 후반이지요. 특히 세 번째 책 『갑신년의 세 친구』를 쓸 때 무척 힘들고 안타까웠습니다. 조선의 변화와 개혁을 열렬히 소망하던 젊은이들의 이상과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목숨까지 걸고 헌신했던 젊은이들은 살아남은 뒤에 변절하여 일본의 주권 침탈에 적극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긴 하지만, 마음을 기울였던 주인공들의 변모에 당황스럽고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헌신은 결국 ‘한때’에 불과한 것인지. 


  그다음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제 강점기, 그 엄혹한 식민 통치 아래 어떻게 살아갔을까. 시인 윤동주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 무렵, 여학생 시절의 어머니가 노트에 옮겨 놓은 시인의 시에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도 빼앗기고 우리말도 빼앗긴 그 시절에, 맑고 고운 인상의 청년 윤동주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심정으로 살아갔을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고증도 꼼꼼히 하셨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그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집필하셨는지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들을 그려보고자 할 때는, 사실에 철저히 근거해 있어야만 하는 책임감이 따릅니다. 일반적인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상상으로 창조해 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역사 속의 그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당시의 사회 제도와 당대의 사건에 관심을 표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며, 한 가족의 구성원이자 독립된 개인으로서 물질상의 풍요와 결핍 등에 따른 반응을 하고, 저마다 고유한 기질과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인물을 둘러싼 이러한 ‘사실’들을 가능한 샅샅이 살펴야 합니다. 살다 간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공부뿐 아니라, 그가 남긴 글과 편지, 그에 대한 주변 사람의 평가나 전해오는 기록 등을 보며 어떠한 성격과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을지 그려 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 제가 그 인물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 때, 비로소 상상을 덧붙여 생동감을 입히게 되지요. 


  이 책에서 한 예를 들자면, 동주가 교토 도시샤 대학으로 옮겨 영문학 수업을 듣는 장면이 있습니다. 분지라는 특성상 일교차가 큰 교토는 가을 단풍이 유달리 아름답습니다. 함께 영문학 수업을 듣던 여학생 급우 사와다 하루(澤田ハル)와 무라카미 마리코(村上萬里子)는 실존 인물로, 영어와 불어에 능숙하던 늙수그레한 동급생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함께 찍은 사진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영작문을 담당한 다키야마(?山) 교수는 도시샤 대학 시절의 학적부에도 나오고, 『로빈슨 크루소』를 쓴 대니얼 디포 전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변의 여러 ‘사실’들에 근거하여, 1942년 10월의 새 학기가 막 시작된 도시샤 대학 영문학 전공 강의실의 풍경을 그려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자료를 읽고 검토해 ‘사실’의 얼개를 세우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 인물과 장면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정교한 퍼즐 조각을 맞추어 가는 것처럼 흥미롭기도 합니다.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상상’도 망설여지고 흔들리지만, 사실의 뼈대가 탄탄히 서고 나면 상상과 표현이 더욱 자유로워짐을 글을 쓰면서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윤동주 시인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하듯 쉬운 시’에 있지 않을까요? 윤동주의 시에는 어려운 개념어가 별로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리듬감이나 운율이 특별한 것도 아닌데, 눈으로 대하건 소리 내어 읽건 가만가만 뛰는 맥박처럼 마음을 두드리고 이내 편히 스며드는 시입니다. 


  윤동주의 시가 처음 다가오는 것은 대부분 사춘기 무렵일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갑자기 달라진 집안 형편에 몹시 어리둥절하고 근심스럽기도 한 때였습니다. 무언가 어지럽고 불안정한 마음에 실망스럽기도 한 사람들과 세상이지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그래도 소중히 여기고 추구해 나갈 맑고 고운 세계가 있는 듯했습니다.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시인과 동년배인 청년 시절에 볼 때는, 자신의 마음 어느 곳에서인가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더욱 공감이 됩니다. 더 나이가  들어 대할 때는 세상과 사물을 보는 시인의 깊은 눈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 생을 마감한 시인이지만, 사색의 깊이와 깨달음이 삶의 긴 시간을 보낸 사람 못지않게 풍부하고 치열했기에 얻을 수 있는 눈길일 것입니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에는 그야말로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작품은 시인이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시점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건너뛰고, 대학생 시절을 시작점으로 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조선의 봄, 북간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 윤동주가 고국 땅에 와 처음 맞는 봄 햇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가족을 비롯한 북간도의 수많은 동포들이 그리던 고국의 봄이기도 합니다. 1938년 3월 말, 윤동주와 송몽규가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성역에 내렸을 때는, 바야흐로 봄기운이 조선 땅에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3월이면 북간도는 아직도 한겨울일 테지만, 위도가 높고 낮은 것에서 오는 차이만은 아닐 것입니다. 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주재소가 들어서 있기는 해도, 흰옷 입은 동포들이 오가는 삶의 터전이며 아직은 조선말이 자유롭게 오가는 고국 땅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배움을 일구어 가려 하는 청년 학생 동주의 벅찬 마음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윤동주는 저항 시인, 순수 시인 등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시인의 어떤 면모를 부각하고 싶으셨는지요? 
 
  미리 염두에 둔 이미지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윤동주라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그려 보고 싶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윤동주는, 시에서도 느껴지듯 맑고 여린 심성의 청년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 평가에 대해 의문이 들긴 했어요. 윤동주가 전문학생으로서, 그리고 일본 유학생으로 보낸 시기는, 조선 민족의 완전한 해소와 강제 징용과 징병 등 일본의 식민통치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 청소년기도 아닌 한창의 청년기를 보낸 젊은이가, 그것도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던 전문 학생이, 과연 맑고 여리기만 한 심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보낸 시간들은 어떠했을까…….    


  시인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 그가 남긴 시와 산문, 그에 관한 벗들의 회고와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진정으로 맑고 여린, 고운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 맑음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어린 시절이나 소년기의 무구한 맑음이 아니었습니다. 거짓과 변절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말들이 어지러이 오가던 탁한 시대에, 지켜야 할 것을 꿋꿋이 지키고 간직해 나가는 지조의 ‘맑음’이었습니다. 그의 여린 마음은 상처받기 쉬운 나약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가운데 일어나는 공감의 파동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현실과 동포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문학의 본성과 사회의 현실, 순수와 저항 등 자칫 대립하기 쉬운 개념들이, 윤동주의 시와 삶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작품 속에는 주인공인 윤동주 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윤동주의 벗들 중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윤동주의 짧은 삶에서 송몽규와 함께한 시간은 뗄 수 없습니다. 송몽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해방 뒤에 가족이 모두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 그에 관한 기록들을 더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기도 합니다. 


  윤동주에 관한 추모의 글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인데, 그를 회고하는 가족이나 벗, 후배들이 장년기를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던 무렵이었지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처럼 절절하고 그리운 심정을 담아 따뜻하고 세밀한 기억들을 펼쳐 놓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그러한 기억을 심어 놓은 윤동주의 성품과, 떠난 사람을 살뜰하게 그리워하는 남은 사람의 인품이 함께 돋보이는 회고들이었습니다. 


  특히 후배 정병욱 교수가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국문학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스스로 한 일 중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동주 형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것이라 했습니다. 전쟁과 분단으로 북간도의 가족과 헤어져 생소한 남쪽 땅에 홀로 남게 된 시인의 동생 윤일주와 누이동생의 결혼을 주선하여 한 가족이 된 사연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처럼 자상하고 세심한 마음은 생전의 윤동주도 인정하였고, 제자들이 펴낸 추모 문집에서도 그와 같은 인품이 느껴집니다. 흥이 오르면 고요히 날아오르는 학처럼 춤을 추고, 긴 시조 창을 읊던 멋진 스승이었다고 합니다. 70년대에 시국 관련 사건으로 제자들이 구속되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구명을 위해 애쓰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결같은 후배 정병욱 교수의 마음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사귐은 죽음과 삶의 제약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작품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검토하셨는데 그중 집필에 많은 도움이 되었거나 혹은 의외의 발견이라고 꼽을 만한 자료로는 무엇이 있었는지요.

 

 1969년에 발행한 『연세대학교사』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14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 학교사를 펴낸 것도 그러했지만, 1960년대에 나온 책인데도 인용 자료를 제외한 본문이 모두 가로쓰기에 한글 전용이라는 점에 놀랐습니다. 국학과 한글 연구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온 학교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져 있는 듯했습니다.

 
  『협력과 저항』을 비롯한 김재용 교수의 책들을 보며, 일제 말 지식인과 문인들의 의식 변화에 대해 새롭고 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친일 행위는 드러난 결과로 평가할 것만이 아니라, 어떠한 의식상의 흐름으로 그렇게 귀결되어 갔는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역사 속에서 같은 모습이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요. 일본 문학을 전공한 왕신영 교수의 학위 논문 「윤동주와 일본의 지적 풍토」도 기억에 남습니다. 왕신영 교수는 학문 연구 과정에서 『(사진판) 윤동주 자필시고 전집』의 발간을 제안하고 참여한 분이기도 합니다. 1940년대의 지식 청년 윤동주의 독서와 지적인 탐구에 대해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억압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려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사상의 흐름은 서양과 동양을 넘어, 식민과 피식민을 넘어, 윤동주와 같은 조선 지식 청년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윤동주와 연희전문의 벗들은 파시스트 전쟁에 반대하는 당시 세계 지성계의 흐름과,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권에 반대하여 국경을 초월한 국제여단을 조직해 달려갔던 세계 청년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에 맞서 일어난,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의 민중들의 저항 운동에 대한 소식도 일본의 진보적 잡지를 통해 접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아끼고 지금도 그의 흔적을 쫓고 있는 많은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고노에 에이치는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현대문학』 1980. 10)에서, 윤동주의 죽음의 원인이 잔혹한 생체실험에 있다고 근거를 대어가며 양심적으로 추론하였습니다. 이부키 고는, 일본 유학에서 옥사까지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며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문학사상』1985, 3-4월)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부키 고의 끈질긴 노력은 무척 놀라웠습니다. 윤동주의 재판 기록과 판결문을 발굴하였을 뿐 아니라, 그 기록에 나오는 시모가모 경찰서의 특고 형사와 기소 검사, 판결을 내린 판사들 중 생존자들을 찾아가, 수십 년 전의 조선 청년 윤동주 사건에 대해 다시 물었습니다. 일본의 치안유지법으로 수감된 조선 청년들은 한둘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윤동주와 송몽규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의 일을 다시 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고, 자신은 조선인에게 온정적이었다며 행적을 미화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시체제라 자신도 어쩔 수 없었지만 ‘치안유지법’은 잘못된 것이라며 인정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건 그처럼 끈질긴 추적을 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라 할지라도 물어야 할 것을 다시 묻는 모습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식민지 시절의 조선 지도층과 지식인들의 부끄러운 모습들, 뒤이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수많은 희생, 그 후로도 계속되어 온 여러 부당한 일들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는커녕 회피하고 덮어두기만 했던 여러 가슴 아픈 일들이 떠오르며, 부끄럽고 참담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인의 시 중 작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지요?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 김민기의 낮은 목소리가 함께 떠오르는데,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할 무렵에 쓴 「해바라기 얼굴」이라는 시에 작곡가 김영동이 가락을 붙여 만든 노래입니다. 가락을 붙여 불러도, 가만 읊조려 보아도, 왠지 가슴이 아려오는 짧은 시입니다. 1930년대 말에 쳐진 어깨로 일터에서 돌아오는 조선 소녀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시인의 마음과, 1970년대에 공장에 나가는 어린 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음악인의 마음이 긴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지닌,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성이기도 합니다. 


  윤동주의 후배 정병욱의 호는 ‘백영(白影)’인데, 그가 따르던 동주 형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따온 것입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그해에 도쿄에서 쓴 시이지요.“흰 그림자들 /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이라 되풀이하는 구절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고국에서 그려보던 것과 막상 일본으로 떠나와 부딪히는 현실은 다르고,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도 들었을 테지요. 그래도 한탄하거나 좌절하지 않고,“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고 마무리하는 시구가 윤동주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안쓰러워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에서, 시인이 죽은 지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잔혹한 말들은 여전하다’고 쓰셨습니다. 윤동주의 삶이 현재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윤동주의 삶을 그려 보겠다는 구상을 하던 초기에는, 이 책을 쓰는 과정이 사진 속 시인의 표정처럼, 그리고 그가 남긴 시처럼 맑고 고요하고 잔잔하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무덤덤하게만 대했던 여러 가지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놀라기도 했고, 그간의 둔감함이 부끄러워 새삼 앓기도 했습니다. 몹시 고통스럽고 힘이 들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역사 인식에 격렬한 소용돌이가 이는 듯했습니다. 망각과 외면은 가슴 아픈 식민지 시절을 겪어왔던 윗세대만의 일이 아니라 그다음 세대인 우리 삶에도 깊숙이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70년대, 대통령의 사진과 국기가 걸려 있는 교실에서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야만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국기 게양과 하강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부동자세로 지켜보아야 했고, 어머니는 매달 빠지지 않고 반상회에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군사 정부의 획일적인 통치 방식이라고만 여겼는데, 윤동주가 살아간 식민지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일장기에서 태극기로, 천황의 사진에서 대통령의 사진으로 바뀌었을 따름입니다. 윤동주의 시대를 함께 보낸 저명한 인물과 문인들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변절과 친일 협력으로 시인을 실망시켰던 이들이 해방된 뒤에도 학계와 언론과 문화계에서 여전한 명성과 지위를 누리며 살아갔다는 사실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난날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에 대해 고백하고 참회한 자취는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윤동주의 삶과 시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채 덤덤히 보내 온 우리의 역사와 일그러진 양심을 다시 돌아보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윤동주의 시와 삶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양심과 진실을 바로잡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바로미터와 같다고나 할까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난봄에 꽃 같은 아이들의 목숨을 그렇게 잃은 것도 참담한데, 그 뒤에 오간,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말들은 더욱 참혹하기만 합니다. ‘참 파렴치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이 쓰신,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지요.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이 속한 집단이 논리에 따라, 혹은 귀찮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거짓을 묵인하고 그에 편승합니다. 그러한 파렴치함의 근원은, 윤동주가 살다 간 그 시대에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선일체’는 일본 천황이 베푼 시혜적 조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천황의 은혜에 감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선 청년들의 목숨을 바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죽음의 전쟁터로 나갈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식민 통치를 하던 일본은 물러났으나, 그에 협력하던 이들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한마디의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넘어, ‘그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파렴치한 말까지 버젓이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민족을 모욕하고 진실을 호도하던 그 시절이, 상처 입은 이들을 모욕하고 선한 마음과 진실을 조롱하는 지금의 시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윤동주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유달리 민감한 심성을 지녔던 청년이었습니다.“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감성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며 함께 아파하는, 그리고 그 해결에 동참하려는 연민과 공감의 마음인 것입니다.

 

조금 이른 질문이지만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을 여쭙겠습니다. 

 

 『시인 동주』에서 시인의 삶과 시대에 너무 깊게 이입해서인지 아직은 뚜렷이 작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해 오던 것처럼 시대를 이어내려 가기에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간 다양한 시대를 살다 간 여러 인물을 그려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어느 곳에서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고, 여러 가지 주어진 상황에서 느끼고 생각하며 반응하는 사람들의 사유는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낡은 통념이나 질서에 타협하지 않고 선하고 열정적인 청년들은 늘 존재하는 법이지요. 앞으로의 시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건 그러한 인물을 또 만나고 싶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안소영 작가와 만남 신청하기 http://ch.yes24.com/Culture/SalonEvent/4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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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안소영 저 | 창비
아무도 시를 쓰려 하지 않던 시대에, 묵묵히 위대한 문학을 이루어 낸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 생전에는 무명 청년으로 지내야 했으나, 유고 시집을 통해 암흑의 식민지 시절을 통과한 가장 빛나는 작가로 남은 시인 윤동주의 궤적을 찬찬히 되짚으면서, 작가 안소영은 시인의 삶과 시가 띠었던 빛깔을 섬세하게 복원해 낸다. 작가 특유의 서정적이고 성찰적인 문체로 시인 윤동주의 광범한 독서와 치밀한 사색, 벗과 문학에 대한 단단한 애정을 펼쳐 보인다. 절절한 슬픔과 좌절 속에서도 한 편의 서정시를 길어 올리던 청년 윤동주를 마음으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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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슘두유 윤소연 PD의 평당 100만 원으로 북유럽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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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숙소 정하느라 인터넷 검색으로 밤 새 본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을 있을 테다. 일상에서는 접하기 힘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여행지에서라도 느끼고 싶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사는 집은 그냥 그렇다. 특히 전월세로 사는 세입자는 사정이 더 심한데, 굳이 내 집이 아닌데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해보면 어떨까. 제대로 꾸민 집이 생기면, 굳이 멀리 여행 갈 필요가 없다. 밤샘 검색과 숙소 항공권 예약을 위한 무한 클릭도 안녕.

 

이런 이유는 아니지만, 칼슘두유로 유명한 블로거이자 M본부 편성PD로 활동 중인 윤소연 저자는 집을 뜯어고쳤다. 준비 기간 100일, 실제 공사 2주. 처음 그녀가 생각한 리모델링 비용은 평당 100만 원. 인테리어 업체에 견적을 받으면서 그녀는 좌절했다. 예상 비용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녀는 책 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리모델링 개척기’를 쓰기로 한다.

스스로 디자이너가 되기로 선택한 윤 PD는 한정된 비용으로 원하는 집을 만들기 위해 읽고 보고, 또 보고 읽고 생각하며 기록했다. 그렇게 셀프 리모델링을 꿈꾸는 사람에게 희망을 전하는 책,
『인테리어 원 북 Interior One Book』이 나왔다. <무한도전> 김태호 PD가 “덴마크 코펜하겐의 잘 단정된 아파트를 그대로 옮겨온 상암살롱”이라 표현한 그 집의 탄생비화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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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기면 편해요 하지만 비싸죠

 

리모델링을 하고 싶지만 비용 문제로 고민하는 독자에게 고마운 책이네요. 어떻게 이런 책을 쓰기로 하셨나요?
 
책을 내야겠다 해서 글을 쓴 건 아니었어요. 집 리모델링을 하려고 인테리어 책, 잡지를 정말 많이 봤어요. 그런데 책에도 잡지도,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설명이 없어요. 답답했죠. 집을 고치는 데 정보가 너무 없으니, 블로그에 남겨 놓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겠더라고요. 결혼 준비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그때도 제가 찾은 정보를 블로그에 올려뒀거든요. 그러다가 회사가 바쁘니까 블로그를 잠시 쉬었는데요. 리모델링 준비하면서 블로그에 몇 편 썼더니,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중에서 <행복이 가득한 집>을 펴내는 디자인하우스 제의가 왔을 때 솔깃했죠. 출판사와 저의 셀프 리모델링이 딱 맞잖아요. 고민할 여지 없이 책을 내기로 결심했어요.


이왕 책으로 만들기로 했으니, 책에 당위성을 불어주고 싶었어요. 『인테리어 원 북』이 희망을 전하는 책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저처럼 10년 넘게 집 없이 서울에서 살아가는 분도 언젠가는 예쁜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 말이죠. 3천만 원이라는 큰 돈을 집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큰 결심을 했고, 결심을 한 저변에는 12년 동안 추레한 집에 살면서 설움을 당한 경험이 있었어요. 저처럼 예쁜 집을 가지고 싶은 분이 있다면, 몇 년 정도는 원하는 집을 마음에 품고 그려봤으면 좋겠어요.


셀프 리모델링이라 하면, 직접 드릴로 벽 뚫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는데요. 『인테리어 원 북』에서 말하는 셀프 리모델링의 작업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셀프 인테리어는 대개 DIY를 뜻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셀프 리모델링은 그런 개념은 아니에요. 미대나 공대를 나오거나 전문적으로 기술을 배우지 않는 한 자기 손으로 모든 인테리어를 손 볼 수는 없거든요. 저도 몇 번 시도했는데 실패했어요. 좀 쉬워 보이는 페인트칠마저도 예쁘게 안 나오더라고요. 이렇게 될 바에는 전문가 손을 빌리되, 총괄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쉽게 말하면 직영 공사라고 할 수 있는데요. 디자이너 역할과 기술자 섭외를 제가 하는 거죠. 책에 노하우를 모두 소개했어요.


그냥 인테리어 업체에 맡기면 편하지 않나요.


편하죠. 하지만 비용 문제가 있어요. 인테리어 업체에 처음부터 끝까지 맡기면 디자이너 노력에 해당하는 수수료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수수료가 천차만별이고 때에 따라서는 높게 책정되기도 하거든요. 비용적으로 여유로운 분이라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는 않잖아요. 저도 비용 때문에 고민이 많았고요.


우리가 생각한 예산은 3,000만 원이었습니다. 잡지에 나오는 유명 업체에 연락해보니 기본으로 평당 200만 원이고, 어떤 곳은 300만 원까지 불러요. 남편 친구 중에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있어서 물어봤어요. 책에도 등장하는 D선배에게 물어보니 3,000만 원으로는 절대로 원하는 모양이 안 나온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오기가 생겼어요. 친한 오빠마저도 이렇게 이야기하다니, 꼭 해야겠다 싶었죠. 다 끝내고 나서 D선배가 왔는데, 정말 잘했지만 우연일 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 친구도 4명이나 이 방식으로 고쳤어요. 블로그 이웃 중에도 예쁘게 바꿨다고 알려 주시고요.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어요.


비용도 비용이지만 신혼 부부는 다른 문제도 있잖아요. 아이가 태어나면 어차피 집도 아이에 맞춰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있거든요.
 
그 말을 백 번도 넘게 들었죠. 집 팔 때도 도움 안 되고, 아이 태어나면 아이 위주로 다시 바꿔야 한다는 말이죠. 결론은 하지 말라는 건데요. 아직 아기가 없지만 아이도 여기에 맞게 키우면 되지 않을까요? 바닥이 타일이라서, 형광등이 없어서 불편할 거라 하지만 막상 살아보면 전혀 문제 없어요. 어쩌면 아이가 지금 모습을 더 좋아할 수도 있고요. 아이 때문에 고치기를 망설인다면, 평생 못 고쳐요. 아이 다 키우고 독립시키면 그때는 집 줄여야 하는데, 그런 핑계로 안 고치겠죠.


윤소연


오로라 보러 떠난 북유럽에서 인테리어 영감 얻어


리모델링을 결심한 건 자취생활이 길었던 영향도 있었다고요.


네, 맞아요. 어쩌면 부모님 집에서 계속 자랐다면 집을 향한 간절함, 절실함이 덜했을지도 모르죠.저는 스무살부터 하숙방에서 시작해 주거 불안을 겪었어요. 이사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취업한 뒤에도 이어졌고요. 절망적이었던 게 입사해서 돈을 벌어도, 사는 집은 똑같아요. 남의 집은 꾸며도 한계가 있거든요. 이럴 바에야 한 번에 뜯어 고치자 해서 집도 빚내서 사고, 고쳤어요.


인테리어 방법론도 좋았지만 북유럽으로 떠난 에피소드가 재밌었습니다. 북유럽으로는 왜 떠나신 거예요.


인테리어 견적에 좌절하던 중에 오로라가 보고 싶었어요. 오로라 볼 수 있는 곳이 아이슬란드, 캐나다, 노르웨이 등이 있는데, 그 시기에 볼 수 있는 곳이 아이슬란드였어요. 아이슬란드로 가기 위해서는 직항이 없고 코펜하겐에서 갈아 타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연하게 코펜하겐에서 3일을 보냈죠. 인테리어 영감도 많이 얻었고요.


북유럽 스타일에서 영감 받아서 집을 꾸미셨는데요. 북유럽 스타일을 묘사해주신다면.


알록달록한 색감, 패턴이라고 생각하며 갔는데 한국에서 봤던 스타일이 그곳에서는 없어요. 한국에서 유행하는 북유럽 스타일은 현지에서는 아기를 위한 디자인이더라고요. 진짜 북유럽 스타일은 세련되면서도 편안한 느낌이었어요.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살기에 최적화된 모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멋스럽고 비싼 느낌이 아니라, 살기에 편하게 맞춰진 스타일. 살아보니까요 정말 편했죠.


현지에 가면 꼭 하는 게 두 가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현지 음식 먹기와 꽃 사기. 음식 먹는 건 이해 가는데, 꽃 사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꽃은 꼭 안 사도 되잖아요. 사도 집에 가져갈 수 없고요. 거기에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분위기에 투자하겠다는 행위니까, 꽃을 사는 순간 로맨틱해져요.


리모델링 하는 데 14일이 걸렸잖아요. 직장인들은 14일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좀 막막해집니다. 한국에서 휴가를 2주일이나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책에도 썼지만 친정 어머니가 현장을 보셨어요. 저는 출근 전, 퇴근 후에 가서 보고 반장님과도 계속 통화하거나 메일을 주고 받았어요. 토론도 정말 많이 했죠. 그렇게 해서 가능했어요. 그런데 굳이 사람이 없어도 다 돌아가긴 할 거예요. 그분들은 어차피 다 프로잖아요. 집을 의도적으로 망치는 사람은 없어요. 믿고 맡기면 알아서 다 작업을 해 주시죠.


작업하는 분들 간식, 밥값 챙기는 그런 세심한 배려심도 인상적이었어요. 꼭 안 해도 되지만, 하면 더 좋은 이런 팁도 리모델링할 때 중요한 듯합니다.


예능 PD 때 경험인데요. 촬영 나가면 스텝이 30~40명이 되어요. 이분들을 다 챙겨야 하는데, 잘 챙기지 못하면 결과물이 안 좋아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당연하죠. PD에게는 스텝이 배고프면 밥 챙겨야 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거든요. 집 고치는 일도 비슷하죠.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그분들이 기분 좋게 해야 잘 지어주시겠죠. 저는 항상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먹을 거 사다 드렸는데, 그분들 하신 말씀이 90퍼센트 집주인들은 지시만 한대요.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하고 가버리면 기분 나빠서 대충 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고 해요.


결혼 준비하면서 신혼집, 식장 정하는 게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인테리어 할 때도 중요도가 큰 게 있을 듯합니다. 두 가지 정도 꼽아주신다면?


제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게 좋은 기술자를 찾는 거예요. 두 번째는 목공사. 좋은 목수 팀장님을 만나면 나머지는 거의 다 해결됩니다. 팀장님이 허브이기에 중간에서 스케줄 잡아주시고 페인트, 마감 이런 것도 다 챙겨주시거든요. 목수 팀장님이 중간에서 아무 일도 안 해 주시면 정말 답이 없어요. 목공사는 견적도 천차만별인데, 저는 처음에 받은 곳이 1,400만 원이었고 두 번째는 800만 원 그리고 마지막이 400만 원이었어요. 이렇게 비용도 차이가 많이 나요. 독자와 대화 겸 인테리어 클래스를 4월 25일에 하기로 했는데, 그때 저와 그 목수 팀장님이 함께하기로 했어요. 궁금한 분은 오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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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마음은 집에서 생긴다


어쨌든 그런 치밀한 준비와 과감한 실행으로 인테리어 비용을 절반으로 줄이셨는데요.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남편이 가장 좋아했죠. 당시 남편은 <무한도전> 촬영으로 집에 거의 못 들어왔어요. 한 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은 책에 실은 얼굴의 초상권 비용을 내놓으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죠. (웃음) 남편이 아무 것도 안 도와줘서 결과적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요. 집 고칠 때 부부끼리 엄청 싸울 수도 있거든요. 의견 절충하느라 시간 다 보내기도 하는데,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고마웠죠.


추천서를 써 주신 김태호 PD님이 책을 보고 무한도전에서도 프로젝트를 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요. 만약 한다면 누가 우승할까요?


그 녀석이 있었다면 그 녀석이 하지 않을까요. 지금 멤버라면 유재석 님?


주변 친구에게도 추천해서 4명이 했는데 지금 주거 생활은 만족하시나요?


하우스푸어가 됐지만 집에 살고 있으면 마음이 정말 편해요. 집값 떨어져도 계속 살면 되지, 이런 느낌이고요. 삶이 변했죠. 남편도 변했고, 저도 변했어요. 중요도가 보통 의에서 식, 그리고 주로 간다고 하잖아요. 우리나라도 점점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집을 가지니까, 그냥 마음이 편해요. 그리고 대출하면, 다른 부분에서 돈을 아끼게 되니 강제 저축 효과도 있어요.


리모델링, 결혼 준비를 보면 PD님의 정보 수집 능력에 놀랐습니다. PD님은 어떤 성격인가요.


원래 집요한 성격이에요. 하나에 꽂히면 이룰 때까지 달리죠. 이 책도 원래 훨씬 두꺼웠어요. 직업병이기도 한 듯해요. 제가 하는 일이 프로그램을 보고 재밌는지 재미없는지, 왜 재미있는지 왜 재미없는지 분석해서 보고서 쓰는 업무이거든요. 제 블로그도 보면 보고서 느낌도 나죠. 주변 사람은 변태 같다고도 하는데, 그런 평가를 들으니까 재밌더라고요. (웃음) 제 블로그를 보면, 포스팅 수가 적어요. 3년 동안 쓴 게 60개도 안 되는데요. 하나 쓸 때마다 2~3일씩 걸립니다. 성격상 내용 없는 포스팅은 안 올려요. 올릴 때도 두 세 번씩 검토하죠. 책도 많이 읽어요. 지금도 남편과 함께 책 많이 사고 읽는데요. 둘 다 소설을 좋아해요. 이상문학상 수상집은 나오면 매년 살 정도이고요. 조예가 깊진 않지만 순수문학 좋아해요.


PD가 선망받는 직업 중 하나잖아요. 방송을 꿈꾸는 청춘에게 한 말씀.


PD라는 직업은 만족도가 높아요. 안정적인 조직 안에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PD는 추천해 드리고 싶죠. 어떻게 해야 PD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저는 다른 삶을 살아보라고, 남들 하지 않는 일을 해 보라고 하는데요. 연애를 많이 하라고 조언해줘요. 연애만큼 새로운 사람을 경험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꼭 PD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을 탐구하고 관찰하고, 새로운 상황에 자신을 던져서 경험해보는 것만큼 재밌는 일은 없는 듯해요. 그래서 집도 고쳐봤고요. 항상 호기심 갖고 새로운 시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다음 책 계획은?


『인테리어 투 북』을 써 보라고 하는데, 그렇게는 못해요. 이 책은 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이유가, 열정을 갖고 집을 고친 진짜 경험을 쓴 덕택인데요. 또 인테리어 책을 쓴다면 진짜 경험이 아닐 거예요. 책을 쓰기 위해 집을 또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지금은 제가 꽂힌 게 없어서 책 쓸 계획은 없어요. 혹시 모르죠. 베이비 원 북을 쓸지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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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원 북윤소연 저 | 디자인하우스
리모델링, 인테리어, 스타일링 등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자신의 취향대로 고쳐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이자 안내서이다. 인테리어 정보의 홍수 속에서 걸러 낸 가장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 철거에서 목공사, 페인트, 타일, 조명, 스타일링까지 14일간의 일정과 예산이 빽빽하고 섬세하게 짜여진 이 책은 한 권으로 끝내는 인테리어 완전정복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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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왜 우리는 을 불러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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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명량>에 이어 드라마 <징비록>까지 임진왜란 혹은 임진년 조일전쟁이라 불리는 사건은 늘 대한민국에서 인기 있는 역사 소재다. 임진왜란은 일본과 조선 사이에 명까지 참전하여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이어진 스케일 큰 전쟁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발굴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특히나 이순신이라는 특출한 영웅의 존재는 소설, 영화, 드라마가 조명하는 단골 인물이었는데, 과연 전쟁사 전문가는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볼까.

 

알마에서 출간된  『징비록』은 유성룡이 쓴 원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되, 임진왜란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도록 전쟁사 전문가인 임홍빈의 해설을 실었다. 그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책임편찬위원과 국방군사연구소 지역연구부 선임연구원을 역임하는 등 전쟁사 연구를 지속해왔다. 한편, 이 책의 또다른 강점은 지도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지도를 보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KBS 드라마 <징비록>이 화제입니다. 작년 영화<명량>에 이어 <징비록>까지 임진왜란을 향한 대중적 관심이 끊이지 않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원인을 파악하시는지요.

 

지금 한국은 안팎의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국민 간의 갈등과 알력은 극심한 지경입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둘러싸인 형편에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를 속수무책 바라만 보고 있지요. 분단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긴박하기만 한데, 한국인은 한국인의 운명을 결정할 어떤 역량과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현실을 타개할 동력을 바라는 마음이 <명량>을 불러내고 <징비록>을 불러냈겠지요. 하나 영웅이 역사의 정동을 담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웅을 바라는 대중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는 일 없이 영웅을 바라는 얄팍한 마음만큼은 경계하고 싶습니다. 해방되고,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살게 됐습니다. 신민이 아니라, 시민입니다. 시민은 제 역사에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징비록』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첫째 임진왜란의 처음과 시작과 끝의 윤곽을 이만큼 선명하게 드러낸 기록도 없습니다. 17세기 이후, 『징비록』은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이 공유한 임진왜란의 기본 문헌이 됐습니다만, 7년 전쟁의 경과를 이렇게 잘 압축한 기록이 다시 없었으므로 세 나라가 모두 『징비록』에 기대 임진왜란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을 개관한 면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공정한 서술이 특장점입니다. 유성룡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저주를 퍼붓고 마는 데서 그친 기록자가 아닙니다. 일본군의 전술은 전술 측면에서 중립적으로 평가를 합니다. 적장에게도 부친 공평한 평가가『징비록』의 가치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분단을 외세가 논의한 무대였습니다. 곧 명과 일본은 조선의 역사성과는 아무 상관없이 조선 분단을 의논합니다. 그 한쪽 당사자가 조선에 나와 있던 심유경이고요. 그런데 유성룡은 조선의 왕에게나 최고위 관리들에게 징그럽고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심유경마저도 하나의 사료로 대합니다. 심유경의 행태를 통해 임진왜란의 정치외교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보기 싫으니 불쾌하니 피했다면 심유경의 말과 행동을 이렇게 잘 기록하지 못했을 테지요.


셋째 생생한 형상이 있습니다. 탄금대 전투 패배의 이면, 전투 당일의 묘사 등은 손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모든 전투 장면에서 유성룡은 글로 묘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묘사력을 동원해 한 순간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위 세 가지는 유성룡이 파악한 정치외교라는 동인 위에서 다시금 서로 손을 잡습니다. 곧 7년 전쟁의 시간 흐름과, 주요 인물의 행동과, 인물이 개입된 개별 사건이 긴밀하게 엮여 기록문학으로서도 최고 수준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한 번 펼치면 도무지 손을 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지요.


시중에도 『징비록』관련 책이 많이 나왔는데요. 알마에서 나온 ‘징비록’의 장점을 꼽아주신다면?

 

무엇보다 지도를 꼽겠습니다. 가령 일본군의 한양 도성 진공로를 봅시다. 충주에서 고니시와 가토는 어떻게 길을 나누어 한양으로 갔습니까? 부산, 동래, 상주, 충주…. 이렇게 지명만 늘어놓으면 보입니까? 이해가 됩니까? 가토 군의 용인 통과, 고니시 군의 양평 우회, 구로다 군의 충청도 관통을 한눈에 보아야 만 한양 진공의 속살을 알아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지도가 보물입니다. 주요 전투마다 부친 지도를 꼼꼼히 읽어주십사 독자 여러분께 다시금 부탁드립니다.

 

김기택 시인의 본문도 대단하지요. 유성룡의 속보는 김기택의 한국어로 속보로 변신합니다. 유성룡이 피눈물을 흘릴 때 김기택의 문장은 오늘의 한국어로 피눈물을 흘립니다. 지금 나온 어떤 판본보다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린 본문이라고 해설자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 본문과 해설과 지도가 긴밀하게 손잡고 있습니다. 이를 감히 특장점으로 손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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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임진왜란을 일본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전쟁으로 기억하는데요. 임진왜란에서 승자는 누구였나요?

 

승자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나요? 명제국이 허둥댄 7년은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대륙 경략의 기반을 다진 7년이지요? 인조반정의 파행과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무엇을 배웠나요? 승자는 없습니다. 다만 조선이 가장 비참한 피해자임이 분명합니다. 그것만이 분명합니다. 승자가 누구냐는 질문, 저는 의미 없는 질문이라 봅니다. 조선의 비참함, 임진왜란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420년 전 조선의 역사 건망증이 보다 큰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다시 분단 한국을 사는 한국인은 어떤가요? 승패라는 틀을 벗어나 진짜 교훈과 진짜 깨달음을 이끌어낼 질문 방식을 새로이 모색해야 합니다.


9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사를 연구하시면서 임진왜란만의 특이한 점이 있을까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처음, 외세가 우리 국토를 제멋대로 분단하려 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입니다. 조선 8도를 갈라 넷은 명이 가져라, 넷은 일본이 갖겠다 할 때, 조선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성룡은 중국인들로부터 “동탁”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불리며 조선의 이익을 지켜보겠다고 동분서주했지만, 사태의 경과는 오로지 막강한 군사력을 쥔 외세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물론 유성룡이며 이항복 같은 영민하고 책임감 있는 관리에 이순신이며 권율이며 곽재우 같은 일선의 인력들의 역할이 컸지요. 그러나 양상을 봅시다. 평양성 탈환 이후, 개별 전투는 어쩌면 북경과 명 야전 사령관 사이의 ‘연락’에 따라 벌어지고 아퀴가 지어지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명과 일본의 줄다리기가 전쟁의 양상을 결정했지요. 거기 조선이 낄 자리가 없었어요. 정치외교의 연장으로서 전쟁. 임진왜란보다 더 잘 보여주는 전쟁도 없을 테지요.

 
『징비록』의 두 주연은 역시 류성룡과 이순신일 텐데요. 선생님께서 왕이라고 가정하고, 만약 두 인물 중 한 명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인물을 고르시겠습니까.

 

전쟁은 정치의 연장입니다. 이순신만으로도 안 되고, 유성룡만으로도 안 됩니다. 답변이 되겠습니까?


연구하신 전쟁사 중에서 선생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떤 사건인가요.

 

외구의 침략과 토벌, 여진족 토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역시 임진왜란입니다. 외세가 당사자를 무시하고 분단을 의논한 전쟁이니까요. 그런 가운데 또 하나, 선조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선조는 수도를 포기한 왕으로서, 왕자 광해군에게 전선 임시정부를 맡긴 왕으로서, 외국군에 애걸해 간신히 체모를 유지한 왕으로서, 각지에 전에 없던 군사력이 생겨난 상황 아래서 왕 노릇하는 왕으로서 열등감과 시기와 질투에 시달렸습니다. 선조는 좁은 의미의 정치, 곧 궁중암투며 정쟁의 장에서 자신의 병적인 측근 의심을 해소하려 했습니다. 관리와 장수는 난리를 타계해 보겠다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최고위는 정쟁에 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체모를 유지하려 했지요. 북경과 한양과 남원 사이의 연락, 조정과 전선의 밀고 당기기, 한양과 대마도와 오사카, 북경과 대마도와 오사카 사이의 연락 등등 이 모든 것이 제 관심 안에 들어옵니다. 
 
역사란 결국 현재와 연관성 속에서 의미가 두드러질 텐데요. 임진왜란과 지금, 우리는 임진왜란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백성은 7년 동안 지옥에서 살았습니다. 이 7년의 시작을 즈음해서 조선은 국제 정세에 둔감했습니다. 대비는 불철저했습니다. 7년이 지나고, 조선의 정치외교 역량과 군사력이 적을 내쫓았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체성 잃은 민족의 역사가 얼마나 비참한가, 이를 확인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또 역사 건망증을 앓다가 일본의 침략을 다시 겪었는가” 하는 질문을 품고 『징비록』을 거듭 읽어야 할 시점입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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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유성룡 저/김기택 역/임홍빈 해설/이부록 그림 | 알마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국방?군사?정치?외교?민사작전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 기록이다. 조선에서 간행된 이후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 새로이 간행했고, 중국 역시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영어판까지 나온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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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 기자가 젊은 웹툰 작가에게 꽂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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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다. 윤태호, 강풀, 조석, 하일권 등을 비롯한 많은 웹툰 작가가 웬만한 연예인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린다. 자연스레 웹툰 작가를 향한 대중의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호기심을 풀어준 사람이 바로 위근우 기자다. 좋은 인터뷰는 최종적으로 인터뷰어의 것이 아닌 인터뷰이의 것이라고 그는 썼지만, 과연 위근우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위근우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바로 『웹툰의 시대』다.

 

작품론과 작가론 그리고 인터뷰가 어우러진 『웹툰의 시대』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인 웹툰의 매력을 전달해준다.  책에는 인터뷰 본문처럼 이미 네이버캐스트로 공개된 글도 있지만, 작품론과 작가론은 위근우 기자가 새로 썼다.

 

지금까지 그가 인터뷰한 웹툰 작가는 60여 명을 넘는다. <텐아시아> 시절부터 웹툰 전문 기자로 명성을 쌓아온 그는 네이버 캐스트에 웹툰 작가 인터뷰를 연재하면서 입지를 굳힌다. 책에 그가 만난 모든 작가를 실으면 좋았겠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작가는 그 중 24인이다. 가스파드, 이말년, 정다정, 조석, 주호민, 하일권 등등으로 대부분 위근우 기자 또래다. 젊은 작가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삼포세대라는 씁쓸한 말이 더는 새롭지 않은 이 시대에 위근우 기자는 태블릿 하나만으로 인정 받은 젊은 작가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한다.

 

젊은 웹툰 작가에 매료된 이유

 

『웹툰의 시대』는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한 인터뷰를 모은 책인데요. 네이버 캐스트 연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텐아시아>에서는 2011년 하일권 작가 인터뷰 이후로 본격적으로 웹툰 작가와 인터뷰를 시작했어요. 정말 이 작가만 만나면 그만해도 소원이 없겠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석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가 퇴사를 결정했을 무렵에 조석 작가 인터뷰가 잡혔고, 그게 제 마지막 기사였어요. <텐아시아>를 떠났을 때는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회사 없는 떠돌이가 되었으니까요.

 

<텐아시아>를 관둔 게 2012년 2월이었고 5월쯤에 지금은 대표인 네이버 김준구 당시 웹툰 팀장을 인터뷰하러 간다고 후배가 말을 해줬어요. 관심이 있어서 저도 갔죠. 김준구 대표가 저를 알아보며 기사 관심 있게 봤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식 인터뷰가 끝나고는 네이버 쪽에 인터뷰 원고를 써 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저야 좋죠.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8월 정도에 다시 하자는 제안이 왔고 10월부터 시작하게 되었어요.

 

책에 실은 인물이 기자님 또래입니다.

 

주호민, 하일권 작가를 만났을 때 제 또래라는 점이 자극됐어요. 인터뷰를 시작했던 때가 제가 30대 초반이었는데, 기반이 있을 나이는 아니죠. 특히나 지금은 젊은 세대가 윗세대를 치고 나가기 어려운 시기잖아요. 그런데 웹툰 쪽에는 가능했어요. 천재도 정말 많았고요. 가능했던 게 출판 만화 때의 도제식이 아니었잖아요. 지금에야 만화학과 출신도 많아졌지만, 웹툰 초기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정말 태블릿 하나만으로 계급장 떼고 붙은 거죠. 이런 세대를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제 또래 작가 위주로 책에 실었어요. 만나지 못해서 다루지 못한 사람도 있죠. 책을 기획하고 나서 했던 인터뷰도 있고요. 어쨌든 기준 자체는 만족합니다.

 

제목에 쓰인 시대가 중의적이네요.

 

그렇죠. 웹툰이 대세라는 의미도 있고, 웹툰을 그린 젊은 작가의 시대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어요.

 

네이버 캐스트와 책은 다른 부분이 좀 있다고 들었어요.

 

인터뷰 본문은 네이버 캐스트 거의 그대로지만 작가론과 작품론은 책 쓰기 위해서 다시 다 썼어요. 인터뷰도 리드문은 다시 다 썼고요. 인터뷰한 시간과 책이 나오는 시간 사이에 간격이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책 나오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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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인터뷰어 위근우의 인터뷰 원칙

 

기자님만의 인터뷰 원칙이 있을 듯해요.

 

잘 지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 있어요. 인터뷰이가 욕먹는 게 정말 싫어요. 공격적인 인터뷰도 필요하겠지만, 제 인터뷰는 그런 인터뷰는 아니거든요. 이 작품이 괜찮다는 걸 영업한다는 생각이 제게는 기본적으로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인터뷰이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데 민감하죠. 작품을 꼼꼼하게 읽는다, 이런 건 원칙이 아니라 기본이죠. 안 하면 문제이지, 기자라면 꼼꼼하게 읽겠습니다가 원칙이 되면 안 되죠.

 

질문에 인터뷰어를 드러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김혜리, 백은하, 강명석 선배 정도 되는 인터뷰어라면 독자도 궁금해할 수 있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자라면 독자가 그 사람이 뭘 질문하는지 궁금할까요? 실제 인터뷰에서는 많은 질문을 할지언정 글로 나올 때 질문은 최대한 간결한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정치인이나 일반인이 아닌 작가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만의 독특한 점이 있겠죠?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니 작품 이야기를 많이 하죠. 작품 이야기를 하되 최종적으로는 작품을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인터뷰 중에도 사적인 이야기를 하긴 해도 너무 신변잡기라거나 재밌지만 전체 흐름에서 튀는 건 제거해요.

 

가스파드 작가는 부산까지 직접 가서 만나셨는데요. 힘들지는 않았나요.

 

부산은 가능했던 게, 작가들이 몰려 있어요. 서울 다음으로 많아요. 시간 대비 효율이라는 면에서 해 볼 만한 거죠. 그래도 힘든 일정입니다. 2박 3일 일정으로 가서 네 명을 만나는데요. 주말을 포기하죠. 일과 끝나고 가야 하니까, 금요일 밤에 출발해서 토요일 새벽에 도착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세 명을 쭉 만나고, 끝나도 다음 날 한 명 남아 있으니까 마음껏 뒤풀이를 못 즐겨요. 하루에 세 명 인터뷰를 하는 게 생각보다 힘듭니다. 짧으면 1시간 30분, 길게는 2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하는데 진이 빠져요. 하지만 웹툰 작가에게 흥미가 있으니 좋아서 했죠. 이런 기회 아니면 정말 만나기 어려운 분들이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웹툰 전문기자라는 타이틀은 부수적이고, 이 프로젝트 자체가 좋아요.
 
인터뷰 하시면서 인상 깊었던 사건이 있었나요. 섭외가 쉽지는 않았을 듯한데요.

 

섭외 쪽으로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없어요. 조율은 네이버에서 해 줬으니까요. 질문과 안 맞는 답일 수도 있는데요. 말을 잘하는 인터뷰이와 그렇지 않은 인터뷰이를 이야기해줄 순 있어요. 이종범 작가는 정말 말 잘해요. 굉장히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말하는 사람이죠. 그 재능으로 EBS 라디오 DJ도 했고요. 작품을 완벽하게 의도하고 구현하는 작가입니다. 『닥터 프로스트』리뷰를 쓰면 이종범 작가가 저보다 잘 쓸 거예요.

 

그에 비해서 말을 못하는 사람이 하일권 작가예요. 왜 못 하느냐 하면, 천재라서 그래요. 천재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걸 하고 있는지 잘 몰라요. 하 작가는 “재밌을 거 같아서 그냥 해 봤어요”, 이렇게 답하는데요. 인터뷰 하는 입장에서는 맥 빠지는 대답이지만, 정말이거든요. 그냥 재밌을 거 같아서 했는데 무지막지한 콘텐츠가 나와요. 하일권 작가는 그런 사람이에요.

 

성공한 웹툰의 조건

 

웹툰 작가의 다른 유형을 말씀해주셨는데, 성공한 웹툰 작가의 공통점을 꼽아 주실 수 있을까요.

 

조석 작가가 <텐아시아> 인터뷰 때 했던 이야기인데요. 조석 만화를 만화학과 교수들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해요. 교수는 커리큘럼을 짜서, 그걸 익혀야 잘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인데 조석 만화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다른 성공한 웹툰도 보면 공통된 답이 없어요. 이 책의 방점을 성공에 찍는다면, 많은 독자들이 염두에 둘 건 정해진 방법은 없다는 사실이에요. 책에 실린 작가들은 개척한 사람들이거든요. 용기인지 낙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웹툰으로 성공하겠다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 했던 사람들이에요. 하고 싶은 게 명확한 사람이 좋은 작품을 냈고. 결과적으로 인기, 명성을 얻었어요. 유명한 웹툰 작가가 되려고 방법을 찾는 사람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답이 없다는 게 핵심인데, 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경계했으면 좋겠어요. 최근에는 만화학과 출신이 많아졌는데, 평타 치는 괜찮은 작품은 있지만 기시감이 많이 느껴져요. 뛰어난 작품은 기시감이 전혀 안 느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뛰어난 작품을 ‘마스터피스’라고 표현하시잖아요. 마스터피스의 기준은?

 

스토리툰이든 일상툰이든 장르는 중요하지 않아요. 『마음의 소리』『신과 함께』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둘 다 마스터피스에요. 생각도 못했던 게 나왔다는 느낌이 들면 마스터피스입니다. 젊은 작가 중에 실수 많이 하는 부분이, 인기가 설정빨이라 생각해요. 주호민 작가가 트위터에서도 이야기했듯, 설정 자체로 풀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어떻게 구성하느냐인데,『방과후전쟁활동』은 설정도 좋지만 주제 의식과 풀어내는 방식이 훌륭하죠. 만약 올해 나왔다면 세월호에 대한 은유라고 할 정도예요. 『마음의 소리』는 지금도 재밌지만 400~500화 때는 정말 존재한 적 없는 이야기로 웃겼거든요. 『패션왕』도 허점은 있지만 이전에 그런 작품이 없었잖아요. 세 작품처럼 아비 없는 자식의 느낌? 이런 작품이 마스터피스죠.

 

명작, 걸작이라는 말 대신 마스터피스라 칭하는 이유는 따로 있나요?

 

영어로 허세 부리려는 건 아니고요. 명작, 걸작이라는 말은 남용되니까, 덜 남용되는 단어를 쓰려고 했어요.

 

기자님이 생각하는 마스터피스를 몇 작품 더 추천해주신다면?

 

『목욕의 신』, 『신과 함께』정도? 제가 마스터피스라고 말한 작품은 웹툰에서만이 아니라 TV, 영화, 드라마를 다 합쳐도 마스터피스라 부를 만한 작품이에요.

 

아무도 없는 곳에 깃발을 꽂기까지

 

위근우 하면 웹툰 전문 인터뷰어, only one이잖아요. 어떻게 지금에 이르게 되었나요.

 

아무도 없는 곳에 깃발을 꽂아서겠죠. 기자는 재밌고 특별한 곳을 찾아야 하는 존재니까요. <텐아시아> 시절에는 이게 내 밥줄이 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매체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썼어요. 2010년에 조석 작가에 관한 칼럼을 썼는데요. 그 전에도 김낙호 씨가 개인적으로 쓰긴 했지만, 매체에서 웹툰을 다룬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인터뷰도 윤태호 작가처럼 출판 만화 때부터 인지도 있던 분을 소개할 때가 대부분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웹툰은 출판만화의 대안 정도로 여겼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대세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2008년이었을 거예요. 매거진 T에서 ‘내 인생의 드라마’라는 주제로 명사로부터 원고를 받았는데 제가 하일권 작가를 추천했거든요. 그런데 회사 사람 중에서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지금은 하일권 작가 모르면 간첩인 세상이 되었죠.

 

제가 선견지명이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고요. 처음에는 재밌어서 봤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만나면 조석의 『마음의 소리』이야기밖에 안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웹툰을 누구도, 어디에서도 다루지 않아요. 기사든 인터뷰든 제대로 웹툰을 다루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텐아시아> 시절에 웹툰이야말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이다,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고 받아들여졌어요. 

 

Only one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네이버 지원받으면서 못하면 안 되죠. 저보다 웹툰을 많이 보는 덕후는 있겠죠. 그런 덕후가 저보다 웹툰을 많이 보고 알겠지만, 그들이 웹툰 작가 인터뷰를 잘할 수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인터뷰란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다행히도 백은하 강명석 같은 훌륭한 선배로부터 훈련을 받았고 네이버에서 지원을 받았으니 잘 풀릴 수밖에 없었죠. 이 결과물을 저 혼자 누리기는 민망하긴 하네요. 다행인 건, 네이버에서도 만족했고 독자도 재밌게 읽어주셨어요.

 

문학, 스포츠가 아니라 왜 웹툰인가요?

 

초기에는 재밌어서 봤어요. 출판 만화가 지지부진하던 시기에 강풀이라는 뛰어난 스토리텔러가 등장했고, 강도하는 스크롤로 애니메이션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어요. 지금 봐도 초기에는 훌륭한 작품이 정말 많이 나왔어요. 조석 작가를 보며 “우리나라에 이런 개그 센스가?” 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재밌게 보다가 집중하게 된 게 2006년이었습니다. 그때가 하일권의 『삼봉이발소』가 나왔던 시기죠. 하일권의 『목욕의 신』과 기안84의 『패션왕』을 볼 때는 웹툰이야말로 대세이고 지금 가장 재밌는 엔터테인먼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대한 많이 보려고 했죠. 그때에는 편했던 게 작품이 많이 없었어요. 2010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진 않았거든요.

 

기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웹툰은 어떤 쪽이에요?
 
최배달이 이런 말을 했죠. 무술에 우열은 없다, 하는 사람의 실력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는 없어요. 조석과 이말년처럼 병맛을 훌륭하게 그려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하일권과 주호민처럼 설정과 이야기를 잘 짜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죠.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신다면.

 

새롭고 재밌는 작가와 인터뷰는 계속 하고 싶고요. 제가 많은 작품 중에서 옥석을 가린다는 건 오만하고요. 이 작품은 웃기니까 함께 보자는, 영업은 하고 싶어요. 저는 리뷰나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훈련 받은 사람이니, 민망하지 않게 영업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웹툰이라는 콘텐츠와 플랫폼에 애정이 여전히 있습니다. 만화로 쓸 수 있는 2차 콘텐츠를 계속 쓰고 싶어요. 비평이라고 해도 웹툰 비평은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비평이 재미없으면 작품이 아무리 재밌어도 독자들이 호감이 없을 테니까요. IZE에서 예전에 웹툰 캐릭터별 전투력 측정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요. 독자 반응도 좋았어요. 이런 글을 계속 쓸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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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의 시대위근우 저 | 알에이치코리아(RHK)
『웹툰의 시대』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마음껏 뽐내는 젊은 작가 24명의 노하우가 담긴 생생한 인터뷰집이다. 기발한 소재와 다양한 장르의 변용, 웹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활용한 창의적 연출력 등으로 우리를 열광케 하는 슈퍼 콘텐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본다. 2년이 넘도록 네이버캐스트에 웹툰 작가 인터뷰를 연재하며 여러 웹툰 작가들을 만나온 저자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기반으로 등장한 창작자의 특징과 자질을 면밀하게 포착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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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방은진 감독의 변신 기다려준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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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진,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참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1989년 민중극단 ‘처제의 사생활’로 데뷔하여 서울연극제 우수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더니 1994년 영화 <태백산맥>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1995년 영화<301 302>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더니만 2005년 <오로라 공주>로 입봉하여<용의자 X>, 2012년<집으로 가는 길>까지 3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요즘은 <슬픈 인연>을 통해 16년 만에 연극배우 활동을 재개했다.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한 그녀가 최근 자전에세이 『라마야 기다려』를 펴냈다.

 

책에 실린 저자 소개처럼 그녀는 언젠가 우주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는 바람을 간직한 채 자신의 역작을 향해 쉼 없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라마는 항상 도전하는 그녀와 함께한 반려견이다. 방은진 감독은 라마와 지내면서 여러 영화를 만들었다. 그녀 주변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라마는 묵묵히 기다려줬는데, 어느덧 노견이 된 라마에게서 저자는 많은 걸 배웠다. 그중에서 가장 큰 가르침은 살아가는 법이었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사랑을 하고 꿈을 꾸며 찬란하게 빛나던 순간들과 시련을 견디고 상처가 아물기까지 가슴 저미도록 흘려보낸 순간들이 씨실과 날실로 교차하는 것이 인생의 현장이란 것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종종 잊는다. 그 현장의 가장자리에서 우리가 고단한 여정을 마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_「라마야 기다려」중에서

 

첫 번째 에세이를 쓰셨는데요. 글쓰는 과정은 어땠나요.

 

라마가 10살 때부터 편지처럼 쓰기 시작했던 책인데 이제는 인생이 보태져서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친한 감독 말을 빌리자면 ‘라마를 빙자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하더군요. 제가 감독으로 데뷔는 2005년도에 했지만 사실은 2001년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다는 것과는 또 다르게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은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더군요. 하지만 시나리오는 계속 써오던 것이었고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것인데 반해 『라마야 기다려』는 온전히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막상 내 이야기를 녹아내려고 하니 많은 시간을 반추해야 했습니다. 일주일에 3챕터씩 꾸준히 집필했으며 1,500매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책은 반을 줄인 분량입니다. 촬영을 하면서 2시간짜리 영화면 3시간 분을 촬영해서 사운드를 입히고 편집을 해서 좋은 영화를 만든 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책을 보니 감독님의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드러내셨는데요.

 

굉장히 솔직히 썼고요.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를 솔직히 다 드러내서 보여줬습니다. 왜 그리 솔직했을까… (웃음)


라마가 감독님 반려견이죠? 제목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세요.

 

반려견이라는 용어 자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지는 몇 년 안됐어요. 예전에는 애완견이라고 불렀던 거 같아요. 대형견을 키우는 입장에서는 애완견이라는 말이 잘 안 어울려요. 집안을 숙숙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뛰는 것도 벙벙 느낌이 다르거든요. 어쨌든 그 존재감 자체가 사람 이상으로 공기를 가르는 느낌이 있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할 텐데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기다려'입니다. 나갈 때도, 밥 먹을 때도, 산책을 갈 때도 '기다려'를 먼저 하죠. 하루에 몇 십 번도 더 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때로는 얼마나 잔인한가하는 생각을 어느 날 하게 됐어요. 왜 애는 나를 계속 기다려야 하지? 너무 불평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많이 미안해졌어요. 특히 대형견의 수명이 10년인데 10살 넘은 라마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기다려’이기도 하구요.

 

라마는 몇 살인가요. 라마와 함께한 그 시간이 영화감독으로 거듭나는 시간이었을 텐데요.

 

라마는 14살이에요. 처음 데리고 왔을 때 3개월 반이었어요. 골든 리트리버예요. 지금도 크지만 그때도 되게 컸어요. 라마가 참 복 받은 게 감독으로 데뷔할 때까지 5년 걸렸는데 그 사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거든요. 이걸로 안 된다고 하면 다시 중단했다가 아이템 찾고 뭐하고 집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나가서 회의를 한다고 해도 감독이 될지 어떨지도 모르고. 그래서 라마와 참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걸었고, 여행하고. 같이 안 다닌 곳이 없었어요.

 

대형견이 되면 어디 가방에 넣고 숨겨서 넣고 다니는 건 불가능해요. (웃음) 라마는 조용하고 많이 순해요. 그리고 고고해요. 요즘은 굉장히 많이 짖어요. 예민하고 안 보이고 안 들려서 그런가 봐요. 이상한 감촉이 느껴지면 계속 짖어요. 아주 아주 컹컹 크게 짖어요. 시끄러울 정도로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혀놓고 말씀드릴 때의 느낌이에요. 그런데 평소에 하는 행동은 똑같아요. 장난감 물고 오고 하는 거요.

 

책에도 쓰셨지만, 감독님이 라마에게서 배운 점은 무엇인지요.

 

함께 제일 오래 살았던, 사람과 동물을 통틀어 가장 함께 오래 살았던 개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어떤 인내, 제가 가지고 있지 못했던 그런 것이죠. 전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요. 말이 나온 즉시에 뭔가 되어야 해요. 그렇게 해서 얻는 것도 있는데 하다 보면 굉장히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도 많아요. 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경우도 많았고. 불같아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어렸을 때 꽤 많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라마를 통해서 순화된 것 같아요. 인간이 조금 될라고 말라고. (웃음) 책 속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저는 라마에게 고작 기다림만 가르쳤지만 라마는 제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방송에서도 털어놓지 않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담았습니다.

 

저 얼마나 고생했어요, 저 얼마나 이렇게 시련을 이겨냈어요, 이런 것은 아니구요. 제가 얼마나 무엇을 기다렸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기다렸는가, 그 기다림 때문에 무엇을 얻었는가를 이야기하다 보니 제일 먼저 기다린 게 엄마였고 어쩔 수 없이 엄마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엄마의 최근 모습을 쓰게 되어 좋았어요. 책이 나온 후에 미국에 계신 엄마한테 책을 보내드렸는데 아직 답이 없으세요. 아마도 생각하시기에는 내가 내 딸에 대해서 이렇게 몰랐구나 하고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오히려 가족끼리 더 모를 때가 있더라고요. 아무리 속 얘기를 다한다고 해도 엄마용 아빠용 멘트가 따로 있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배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들 연기를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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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오로라 공주>로 감독으로 데뷔하셨고 , 2012년 <용의자 X>  2013년 <집으로 가는길> 등 상업영화는 3편 연출을 하셨는데 작품마다 느낌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첫 작품에는 ‘우와 진짜 감독 되는 거네’ 했어요. (웃음) 진짜 치열하게 했습니다. 두 작품 정도가 배급 결정이 안 되고 해서 배우 출신 감독은 해프닝으로 끝나나 했거든요. 그동안 대학원도 다니고 단편도 찍고 했지만요. 두 번째 작품 할 때는 굉장히 친했던 촬영 감독과 스텝, 물론 배우도 마찬가지로 우애가 좋아서 현장 분위기가 파이팅 넘쳤습니다. 워낙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원작인데다 일본에서도 영화가 만들어졌고 해서 어떻게 비껴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본 영화는 콘티 하면서 한 번 봤어요. 비슷한 앵글이 나오면 안 되니까. 두 번째 작품에서는 좀 더 차분해졌고 작품 자체가 섬세한 감정을 그려내는 거니까. 세 번째 작품은 해외 촬영 고통을 겪고, 지구 한 바퀴 돌고, 그 나름대로 치열했어요. 영화 세 편 하면 그 방법을 좀 알 수 있을까 했는데 점점 어렵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집으로 가는 길>에서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 받았잖아요.

 

저의 멘토이신 이창동 감독님의 칭찬, 절대 안 하시는 칭찬, 동료 감독, 선후배 감독들이 진심어린 문자를 보내줬을 때, 그리고 우들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아껴주고 감사했습니다. 더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았겠지만 흥행이란 모르는 거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힘든 시기도 거쳤는데 지금은 오히려 거뜬하게 잘 일어났습니다.

 

감독이라는 자리는 참 힘든 자리인 것 같아요. 방향을 결정하는 리더잖아요.

 

저는 의논을 해요. 배우가 더 좋은 의견을 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럴 때 제가 생각했던 대로 감정선을 몰아가거나 하지 않거든요. 특히 주연 배우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많이 얘기하고 현장에서는 많이 의논하구요. 서로 좋은 것은 다 좋더라고요.

 

영화가 개봉하는 날, “내가 지금 죽는다면 관객들이 호기심에라도 영화를 보지 않을까”라고 대목에서는 감독 방은진은 얼마나 스트레스가 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론 시사회 때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투자가 결정될 때까지 그리고 캐스팅도 그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배우가 흔쾌히 할 때도 있지만 고민할 때도 있고… 이런 것들이 책에 쓰여 있는데 흔쾌히 주연 캐스팅을 잘하게 될 때 감독으로서 힘이 나요. 궁극적으로는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를 선보이는 거니까, 영화는 관객들 것입니다. 거기서 많은 동의를 얻어내면 감독을 하면서 보람되기도 하고 행복하죠. 물론 가장 행복한 건 촬영 현장에 있을 때 입니다.

 

그렇게 힘든 일이 많음에도 감독으로서의 새로운 열정을 계속 불태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과반수가 제가 만든 영화를 보실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건 공감이잖아요. 그 영화 보면서 위안을 받았어, 용기를 받았어 하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가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해서 지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다음 작품 계획은요?
 
작년 여름부터 써왔던 시나리오가 있어요. 나문희 선생님이 출연을 하실 예정이고, 까막눈 할머니가 초등학교 가는 이야기에요. 그 작품 곧 들어갈 예정이구요. 큰 작품도 준비하는 것이 있습니다. 쉼 없이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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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야 기다려방은진 저 | 북하우스
『라마야 기다려』는 한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통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힘듦과 슬픔을 응시하게 만든다. 인생은 그녀의 말처럼 부조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희망과 절망,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는 우리들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림을 대하는 자세가 곧 미덕이다. 그녀가 말한다. 나와 당신에게 ‘고도’는 분명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브라보 유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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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만 독자가 선택한 『감성제곱』 『사랑제곱』의 이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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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사랑에는 출구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들어온 사랑이 쌓여 가득 차면
그 사랑의 온도에 온도가 더해져서
더 따뜻한 사랑으로 다시 나에게
쏟아져 내린다. (75쪽)

 

18만 명이 넘는 구독자가 날마다 이힘찬 작가의 글을 기다린다. 특별할 것 없고 피곤한 일상이지만 그의 감성적인 글을 보고 힘을 얻을 수 있어서다. 특히 이 작가가 쓴 사랑에 관한 글은 중독성이 있는데,『사랑제곱』을 읽으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냉소적인 사람도 어느덧 사랑의 온기에 전염된다.

 

『감성제곱』에 이어 두 번째 책인『사랑제곱』으로 돌아온 이힘찬 작가는 이번 책에서 오직 사랑만을 이야기했다. 그 만큼 사랑은 작가 자신의 인생에서,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감정이다. 책이 다루는 사랑의 범주, 범위를 작가는 제한하지 않았다. 사랑을 정의하고 제한하려는 것을 싫어한다는 이힘찬 작가와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는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 ‘감성제곱’에서 이루어졌다.

 

10대에서 50대 독자의 사연으로 만들어진 책

 

『사랑제곱』이 나온 과정이 궁금합니다.

 

감성제곱은 제 아픔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이 큰 책이었어요. 제 페이지가 알려지고 책이 나오고, 강의와 북콘서트를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주로 사랑 이야기를 들었죠. 기존에 쓴 글로는 부족하구나, 내가 아는 사랑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감성제곱’ 카카오스토리에 당신의 사랑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더니 10대에서부터 50대까지, 참 많은 사연들이 올라왔어요. 이런 사연을 바탕으로 제가 아는 사랑을 접목시켜서 『사랑제곱』이 나왔어요.

 

어떤 독자가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을 쓰셨나요.

 

사랑 이야기를 감춰둔 사람이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위로가 되길 원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후회 안 해 본 사람도 없고, 갇힌 분도 많은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고 아파했는지를, 사랑에 많은 걸 걸었지만 후회로만 끝나지 않았는지를, 그리고 누구라도 더 예쁜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삼포세대, 사랑을 포기한 세대가 지금 대한민국 청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사랑제곱』이 지금 흐름과는 벽이 있는 책일 수 있어요. 어쩌면 감성제곱 팬 수가 100만 명이 아니라 18만 명인 의미도, 제 코드와 맞는 분이 딱 이 정도라는 뜻일지도 몰라요. TV나 강의에서 나오는 연애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실에 맞게 대응하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에요. 감성적인 사랑은 비현실적이라고, 추상적이라고 욕을 먹죠. 하지만 저는 외모, 능력 등 주어진 환경을 보고 만나라는 이야기를 정말 싫어해요. 사랑의 모습은 정말 다양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보면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실제로 그런 사랑을 하고 계시거든요.

 

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의하고 국한시키는 게 싫어요. 매번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관계도 다르죠. 연인과의 사랑도 있지만, 가족이나 스승과 제자 그리고 친구 사이에도 사랑이 있을 수 있어요. 얼마나 감정을 쏟느냐에 따라서 크기, 색깔이 달라지는데 차갑게 정의할 수는 없잖아요. 가끔 제 글과 그림 덕분에 관계를 회복했다는 메일을 받기도 하는데, 역시 사랑은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에 등장하는 사연을 보면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는데요. 사연 보낸 사람을 익명으로 두려고 한 느낌도 있어요.
 
제가 성격이 예민해요. 게다가 온라인은 반응이 빠르니, 제 글이 원하지 않던 해석으로 퍼지는 걸 보면서 더 조심스러워졌죠. 이 책에서 전하려 했던 건, 어떤 사랑이 옳고 낫다가 아니라 다양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러한 점만 전할 수 있다면 굳이 사연의 주인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상담사는 아니니까 세세하게 지시하는 게 어울리지도 않고요.
 
글이 작가님 이야기인지, 독자의 사연인지 헷갈리기도 한데요. 책에 실린 글은 작가님의 자전적인 경험인가요?

 

책을 자세히 보면 위에 두 줄 정도 작은 글씨가 있습니다. 원래는 더 긴 사연이지만 2줄로 줄여서 담아놓았어요. 나머지는 다 제 경험과 생각을 토대로 썼죠.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이해

 

참 많은 사람이 사랑으로 고민하고, 『사랑제곱』에도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오죠. 왜 이렇게 사랑하기가 어려울까요.

 

구독자의 대부분이 여성분들인데, 보통 여성이 감성적이고 남자가 무뚝뚝하잖아요. 표현 문제가 제일 많아요. 여성은 표현을 원하는데 남자들은 잘 못 해주고, 여기서 많이 엇갈리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이해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정말 다르잖아요. 남자라서, 여자라서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은 다 달라요. 다른데 끼워 맞추려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겨요. 저 사람이 나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있어요. 이러면 사랑하기 어렵죠.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니까, 내가 그 사람처럼 되기도 하고 동시에 그 사람이 나처럼 되어야 해요. 책에 실은 에피소드처럼 내가 먼저 한 걸음 다가가기도 하고, 때로는 물러서기도 하면 좋겠어요.
 
저보고 연애를 잘했느냐고 물어보는 독자 분들도 있어요. 제가 잘했다면 글을 못 썼겠죠. 제 글은 후회에서 시작했어요. 저도 좋아하는 마음만 앞서다 실수 때문에 예쁜 만남을 싸움으로 만들고 어긋난 적도 많아요. 그럴 때는 며칠 울기도 했어요. 눈물이 엄청 많거든요. 다음에 사랑할 때는 좀 더 조심하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하죠. 어떤 만남에서나 문제는 생길 수밖에 없지만, 그럴수록 한 번 더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사랑을 정의하기 싫어한다고 하셨는데요. 그래도 물어볼게요. 사랑이란?

 

사랑이라면 어렵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일도 피곤한데 사랑까지 피곤할 필요 있냐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하면 절실해야 하고 어렵게, 힘들게 하더라도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살아가는 이유라고 하고 싶어요.

 

이성과의 사랑을 결혼과도 관련 짓기도 하는데요. 작가님의 결혼관이 궁금해요.

 

사랑이 결혼하기 위한 수단, 방법, 단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은 수단, 방법이 아니잖아요. 남녀가 사랑하고 결혼까지 갈 수도 있지만 ‘결혼하기 위해’ 사랑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무리 사랑해도 이뤄질 수 없는 경우도 있잖아요. 아직 제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정의할 순 없지만, 사랑을 쉽게 생각하지 않게 해주는 커다란 약속 같아요. 저도 어서 결혼을 해서 그 사랑 안에 깊이 들어가 있고 싶어요. 사랑, 결혼 다 마찬가지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도 문제는 있을 거예요.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사랑의 힘인 것 같아요. 저도 결혼해서 그런 힘을 느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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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이힘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언제부터 감성 에세이를 쓰고 싶었나요?

 

원래 꿈이 작가였어요. 문예창작과로 편입한 이유도 꿈을 버릴 수 없어서였죠. 졸업 학기 직전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했지만 글은 계속 쓰고 싶었어요. 회사에 다니다가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 생겼습니다. 이별이었죠. 주변에서 많이 걱정했어요. 워낙 성격이 감성적이니 우울증 걸리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거든요. 승화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때 개인 SNS에 생각을 함축해서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표현하고 나면 스스로 위로가 되었어요. 좋아요가 늘어나고 주변에서 반응이 와서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며 카카오스토리라는 채널을 알게 되었는데요. 페이스북에서 카카오스토리로 넘어와서 팬 수가 몇 천 명, 몇 만 명 그리고 지금은 18만 명이 넘었어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공감 해 주신 덕인 것 같아요. 팬 수가 많아지니까 좀 더 완성도 있게 쓰고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 팀장으로 진급하던 때였는데도, 회사를 관뒀죠. 감성제곱에 집중하려고요. 관두고 가끔은 후회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듯해요.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책을 내자는 제안도 받고, 지금은 두 번째 책까지 나왔잖아요. 일하면서 이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글도 감성적이고, 성격도 감성적이라고 하셨는데요. 작가님의 이런 모습은 누구 영향이 컸나요.

 

아버지가 정말 자상해요.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사랑도 많이 받았죠. 아버지가 가족을 향해 보여주시는 사랑에서 많이 배웠어요. 저는 그럼에도 더 사랑 받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받아도 받아도 부족한 게 사랑이잖아요. 지금도 제 삶에서 가장 큰 의미는 사랑 하고 사랑 받는 것이죠.

 

카카오스토리 채널 팬이 18만 명이 넘었는데요. 이렇게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제 페이지를 보시면 알겠지만, 상업적 내용이 전혀 없어요. 광고도 당연히 없고요. 깨끗하고 순수한 공간이다 보니 카카오스토리에도 추천 콘텐츠로 자주 소개해주기도 해요. 지금은 페이지가 커지니 광고 제안이 많이 들어와요. 하지만 감성적인 공간에 광고라니, 말도 안 되죠.

 

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세요?

 

독서, 영화, 음악 감상도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출사입니다. 카메라 들고 나가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한창 작업하다가도 사진 찍으러 가고 싶으면 다 접고 카메라를 들고 나갑니다. 찍은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이야기가 있어요. 찍을 때는 몰랐지만, 찍고 나서 보이는 게 있죠. 그걸로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고요. 원래 가장 먼저 쓰고 싶은 책은 사진 에세이였어요. 하지만 이 글은 실력을 더 쌓은 뒤에 내려고 해요.

 

이름은 본명이에요?

 

필명이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본명입니다.

 

많은 팬이 작가님의 하루 일과를 궁금해할 듯해요.

 

올해는 카페, 책 준비로 시간이 없어서 패턴이 일정하진 않았어요. 원래 연재할 때 이야기를 하자면, 낮에는 카메라 들고 돌아다녀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카페에서 나머지 시간을 보내요. 찍은 사진을 보면서 생각하고, 감성이 담긴 사진은 글을 써 놓죠. 연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때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써요. 밤에 감성적이 되기 되기 때문에, 연재 글은 그때 주로 써요. 11시가 넘어가면 완전히 집중해서 수십 번을 쓰고, 잠이 들죠. 잠이 많지 않아서 4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감성이 빠진 상태에서 다시 읽어요. 혹시 과잉된 건 아닌가, 하고요. 최종으로 나온 글에 맞게 그림으로 표현해요.
 
하루가 빼곡한데, 사랑할 시간은 있나요?

 

제 가장 우선 순위는 사랑입니다. 구분되는 게 아니죠. 제 이야기를 보면 남녀가 나오는데, 저희가 그 역할을 하면 되는 거잖아요. 몇 달 전에 올린 글에도 표현했었지만, 저는 사랑을 안 하면 글도 그림도 사진도 다 안 되더라고요. 사랑에 관해 쓰려면 저도 간절하게 사랑을 해야 해요.

 

감성제곱 카페를 여셨는데요. 카페를 소개해주세요.

 

연 지 한 달 정도 됐는데요. 예전부터 커피도 좋아하고 카페라는 공간도 좋아했어요. 책도 카페에서 주로 썼거든요. 건너편 커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의 사연을 훔칠 때도 있었어요. 카페에서 부족한 감성을 많이 채우죠. 회사를 관두고 시간 빌 때에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카페는 나중에 여유를 갖추면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친형이 준비하면서 함께하기로 한 거죠.

 

평소에도 온라인 소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채팅방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만나서 대화하는 게 무게가 다르잖아요. 카페를 열고 나서 제주에서 저를 보러 와주신 부부가 계셨는데, 저보다 더 감성적이었어요. 이곳에서 사연을 직접 들으니, 감성을 마시는 느낌이 들었어요. 감성을 마시다는 카피를 이곳에 붙였는데, 제가 카페를 그렇게 사용하고 있어요.

 

이곳에 전시한 글, 그림은 계속 바꿀 거예요. 오프라인 연재처럼요. 독자들 사연도 받을 수 있겠죠. 프렌차이즈 카페가 업무적, 사무적, 기계적인 느낌이라면 이곳은 좀 더 아날로그 느낌이 났으면 해요.  아무 것도 안 하더라도 쉬면서 감성을 충전하는 그런 장소가 됐으면 합니다. 위치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는 제가 어릴 때 살던 곳이기도 하고, 역 앞이기도 해서요. 이곳에서 독자 분을 초대하기도 할 텐데 교통편이 안 좋으면 오시기 어렵잖아요.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글을 올릴 때마다 항상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써요. 그 분들이 아니었으면 책을 두 권이나 내지 못했을 거예요. 덕분에 제 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었죠. 그 분들이 저에게 기회를 준 만큼 어떻게든 좋은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함께 공감하며 위로하고 위로 받는, 무엇보다 감성으로 가득 차 따뜻하게 소통하는 감성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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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제곱 이힘찬 글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작가는 17만 명의 카카오스토리 팬들에게 ‘사랑’에 대한 수천 개의 정의를 받았고 그것에 새로 스토리를 부여해 글을 완성했으며 자신의 작은 장기인 그림을 더해 책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사랑제곱》이다. 작가만의 생각이 담긴 일방적인 결과물이 아닌 팬들과의 ‘소통’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라 더 진솔한 이야기가 가능했다고 말하는 작가 이힘찬.모두의 이야기이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아날로그’ 감성으로 서로 ‘소통’하며 교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사랑제곱》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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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 컬러링북으로 만든 수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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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세는 컬러링북이다. 컬러링북의 매력에 빠진 사람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컬러링북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주로 단편적인 장면이 이어지는 형식이 많았다면 지금은 스토리가 있다거나 주제가 독특한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수와 작가의 컬러링북 『Hers』가 그러한 작품이다.

 

『Hers』는 제목이 암시하듯, 여성을 소재로 한 컬러링북이다. 한 여성의 탄생에서부터 성장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책에 담겼다. 색칠하는 데 집중하는 것만으로 힐링을 느낄 수 있는 컬러링의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스토리를 결합하면서 독자에게 다양한 선물은 준 셈이다. 이야기가 있다 보니 그려나가는 게 재밌고, 특히 여성 독자라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옷, 모자, 신발 등 패션 아이템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책을 만든 수와 저자의 관심사를 반영했기 때문인데, 그녀는 뉴욕에서 여성복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귀국해서도 영화 의상 및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Shaping Your Creativity』라는 앱북을 전세계에 선보이기도 했던 수와 작가는 출판에도 흥미가 많은데 『Hers』는 보다 많은 대중과 소통하려 만든 컬러링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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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s』가 결혼으로 끝나는 이유

 

패션 디자이너로 활약해오셨는데, 컬러링북은 어떤 계기로 만드셨나요.

 

안그라픽스에서 작품을 한 적이 있었어요. 출판사가 제 성향을 알고 있었고, 내보자는 제안을 했어요. 복잡하게 생각 안 했고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죠. 그래도 기존 컬러링북과는 다른 걸 해 보자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초기 컬러링북은 대부분이 패턴 위주였거든요. 『Hers』를 통해 조금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Hers』가 여성의 삶을 탄생부터 결혼까지 담았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기획 의도를 설명해주신다면.

 

여성 독자가 많으니 여성 취향으로 가면서, 글이 없더라도 스토리로 읽을 수 있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독자들도 칠하면서 좀 더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결혼으로 끝낸 것은, 결혼이 대개 여성이 가지는 로망이잖아요. 결혼 이후의 삶은 막연하지만, 많은 여성이 결혼까지는 그려 보거든요. 그래서 『Hers』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봐도 좋고, 결혼한 여성이 봐도 괜찮을 거예요.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물론이고요. 다양한 세대가 좋아할 수 있게 『Hers』를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세대를 생각하며 만들기 위해서는 조사도 많이 하셨을 듯합니다.

 

책에 담은 소재는 제 취향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공통적인 거예요. 여성이 뭘 좋아하는지 조사를 많이 했죠. 서점에 가서 몇 시간씩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사는지 지켜보기도 하고요. 주변 사람에게도 많이 물어봤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덜 여성적인 취향이지만, 그렇게 해서 여성적인 컬러링북이 나올 수 있었어요.

 

장수도 꽤 많고, 스토리가 있는 컬러링북인데 구성하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여성스럽게 예쁘게 그려야 하는데 초기에는 못 그렸어요. 그래도 마냥 여성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을 텐데요. 순정 만화 같은 그림체는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리얼하되 개성 있으면서 예쁘게 그리는 게 힘들었다면 힘든 점으로 꼽을 수 있겠네요.

 

요즘 컬러링북이 참 인기가 있는데요. 『Hers』도 반응이 좋습니다. 인기 비결을 생각해 보셨나요.

 

컬러링북은 칠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고민을 잊으면서 저절로 힐링이 되죠. 제 책은 공감하면서 힐링을 할 수 있죠. 독자들이 책 구성이 사진 같다고도 말씀해주시고요. 어린 시절 추억을 투영할 수 있다고 해요. 책에 있는 소재가 갖고 있거나 갖고 싶었던, 혹은 가져 봤던 것들이니까 컬러링북을 보며 추억할 수도 있고 멋진 미래를 꿈꿀 수도 있죠.

 

말씀처럼 사진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책에 담긴 장면에는 작가님의 체험도 있나요.

 

있죠. 지금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또래가 그러하듯 긴 머리와 핑크를 좋아했어요. 뒤로 갈수록 머리 짧은 여자가 나오는데, 학교에는 한 명씩 있을 법한 그런 소년 같은 소녀죠. 제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할로윈은 빠질 뻔했던 장면

 

컬러링북이다 보니 리뷰를 보면 독자들이 칠한 사진도 함께 있잖아요. 보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리뷰가 있나요.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예쁘게 칠한 분들에게 좋아요를 눌러주고 있어요. 특별히 인상적인 리뷰는 아니지만, 좋았던 부분이 있어요. 책 속 할로윈 파트를 출판사에서 빼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무섭게 보인다는 이유에서죠. 저는 요즘 할로윈이 유행이고 어른에게도 친숙하다며 꼭 넣자고 해서, 지금 분량이 나왔는데요. 할로윈 부분을 칠해서 올리는 독자가 많았어요. 남들이 싫어할 것 같지만 막상 해 보니 반응이 좋을 때, 이럴 때 즐거워요.

 

작가님이 독자라면 『Hers』를 어떻게 칠하시겠어요?

 

SNS로 독자와 소통하고 싶어서 조금씩 칠하고는 있지만, 바빠서 빠른 시간 안에는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서 나중으로 가면서 내용에 따라 색감은 변할 것 같은데요. 저라면 원색적인 것보다는 살짝 회색이 낀 틴트 느낌으로 칠하려고요.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는 느낌으로 빛이 살짝 바랜 색으로 칠하지 않을까 해요.

 

작가님의 오늘을 있게 한 인물, 사건을 꼽는다면?

 

딱히 그런 건 없어요. 그림은 5살부터 시작했고 쭉 그렸죠. 어릴 때 인형놀이 하면서, 인형 옷 입히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 경험이 패션으로 전공을 정하는 데까지 이어진 듯합니다. 서양화 전공을 준비하다가 패션으로 전공을 정했을 때 어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미술 책이 아니라 패션잡지를 사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패션을 좋아했는데, 유행 좇는 건 싫었어요. 어머니 옷과 아버지 옷을 섞어 입기도 하고, 옷을 자르고 붙이고 해서 저만의 옷을 입었어요. 멋 부리고 싶어서 하루에 세 번 갈아입던 시절도 있었고요. 그런 성향이 커리어로 이어졌는데요. 남이 관심 없거나 모르거나 불편해하는 걸 더 멋져 보이게 만들고 싶은 욕심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커요.

 

뉴욕에서도 생활하셨고, 한국에서도 패션, 디자인, 예술 방면으로 활동하시는데요. 뉴욕과 서울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뉴욕과 서울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선 시대가 바뀌었어요. 뉴욕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던 때가 9년 전이니까 세월이 많이 흘렀죠. 뉴욕과 한국 사이에 예술을 대하는 문화 차이는 있어요. 예로, 뉴욕에서는 제가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도 아이디어 스케치에 대한 비용에도 돈을 매겨요. 아이디어 스케치를 10장 들고 가면, 소정이라도 지급을 하죠. 기본적으로 디자인, 예술을 존중하는데 한국은 그런 면이 좀 약했어요. 주로 비용 절감 쪽으로 디자인 쪽을 접근하니 처음 귀국했을 때는 아쉽기도 했고 적응하는 데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은 시장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다양해진 것 같아요. 제가 20대만 해도 창업해서 브랜드 만드는 게 어려웠는데 요즘은 많은 제도와 창구가 있어서 가능하잖아요. 확실히 한국도 예전보다는 환경이 좋아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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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다양하게 도전하려 해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시나요.

 

놀면서 얻죠. 노는 것의 기준과 방식이 모두 다르겠지만 저는 일렉트로닉 음악 즐겨 듣고 페스티벌 가는 것을 좋아해요. 여행도 자주 하는 편이죠. 특별히 계획을 짜는 여행보다는 가서 놀다가 옆 사람과 말을 트면 정해진 일정이 있어도 취소하고 그 사람들과 어울린다든가 하는 식의 즉흥적 여행을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 나라에서 젊은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곳은 꼭 가고요. 책도 정말 좋아해요. 혼자서 조용한 시간 많이 가지려고 하고요. 지금은 옷 패션 아이템보다는 책 욕심이 많아서 구하기 어려운 책을 외국 여행하며 많이 사는 편이에요.

 

작가님의 예술관, 창작관을 소개해줄 수 있나요.

 

제가 예술을 논할 지점에 와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추구하는 게 있긴 해요. 작은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많은 사람과 호흡하고 공감하고 싶습니다. 컬러링북은 공감하는 상대가 좀 더 많고 전에 낸 앱북은 좀 더 적었다는 차이는 있지만요. 다수를 위해서든 소수를 위해서든 상대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게 예술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은 저랑은 안 맞는 듯해요.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제 이야기를 담았지만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하고요. 책과 또 다른 전문적인 일도 하겠죠. 아마 패션 쪽이겠지만, 범주를 규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한국 와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뭐 하는 사람이냐였는데, 그게 고정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세상이 변했잖아요. 한 가지 직업으로 평생을 하기 쉽지 않은 시대가 지금인데요. 커리어 변화는 계속 일어날 거예요. 외국 나가서 여러사람들과 대화해보면 하나의 고정된 직업보다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 일도 패션, 예술 안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책을 내는 형태가 됐든 교육 쪽이 됐든, 다양한 방식으로 도전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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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S 그녀수와 저 | 안그라픽스
『HERS그녀』는 크리에이티브 테라피로 하루의 휴식을 선사하는 안그라픽스 ‘컬러링 투데이’ 시리즈의 첫 번째 컬러링 책이다. 탄생부터 모든 순간이 엣지 있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삶을 채색하며 완성해나갈 수 있다. 그 따뜻한 시간을 당신만의 색으로 채우는 순간 영원으로 남는다. 오늘, 소중한 순간을 색으로 물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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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옥 작가 “상상은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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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비룡소 문학상 대상은 우미옥 작가의 『두근 두근 걱정 대장』이다. 김진경, 김리리, 김지은, 한윤섭 심사위원은 심사평에서 “아이들 마음 구석구석을 잘 들여다본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사랑스럽고 놀라운 작품”이라 평했다. 심사평대로 이 이야기는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근거 없는 걱정으로 힘들어했던 경험을 소재로 한다.

 

주인공 소녀 소이에게 이모가 걱정 인형을 선물한다. 걱정 많은 소이가 염려되어 걱정 인형을 샀다는 이모. 상자에서 나온 걱정 인형은 신기하게도 말을 한다. 이쯤 되면, 대개는 걱정 인형이 소이에게 걱정을 이기는 법을 알려줄 것 같지만 이야기는 엉뚱하게 전개된다. 소이보다 더 걱정이 많은 걱정 인형. 결국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야말로 걱정을 이기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에는 『두근 두근 걱정 대장』를 포함해서 총 4편의 단편이 실렸다. 외모로 고민하는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등 뒤에 고양이」와 어린이의 다양한 소원을 묘사한 「소원을 들어주는 상자」, 꿈 속에서 나무가 된 주인공의 상상을 담은 「포도나무가 될지도 몰라」 모두 짧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우미옥 작가 특유의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다.

 

어른에게는 작은 걱정이지만 어린이에게는 큰 걱정

 

어떻게 지내셨나요.

 

4회 비룡소 문학상 발표가 2014년 8월이었고, 수상식은 12월에 있었어요. 책이 나온 게 3월인데 그 동안 겨울잠을 잤어요. 아무 것도 안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가지에 집중했다는 뜻입니다.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동시를 열심히 공부하고 썼어요.

 

이 작품에는 작가님의 실재 경험도 있나요?
 
당연히 제 이야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죠. 첫 번째와 네 번째 이야기가 제 경험에 가깝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상상한 이야기에요.

 

제목에도 나오지만 이번 작품집에서 한 가지 주된 심정이 걱정이에요.
 
제가 걱정, 근심이 많아요. 최근에는 여러 가지 무서운 일이 사회적으로도 일어났고요. 아이들도 두려울 거예요. 심사평에서는 사소한 걱정을 다뤘다고 했지만, 작은 걱정이 아이들에게는 정말 큰 걱정일 수 있어요. 우리들도 그랬잖아요. 어른이 되면서 잊었겠지만 어릴 때는 성인이 보기에는 작아도 자신에게는 정말 큰 걱정이거든요. 어른들은 이런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들은 걱정을 이겨내는 힘을 이 책으로 좀 키웠으면 좋겠어요.

 

요즘 아이들은 어떤 걱정을 할까요?

 

걱정은 비슷하겠죠. 학교 생활, 친구, 가족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거예요. 더 큰 걱정을 하는 친구도 있겠죠. 우리나라의 통일을 염려한다든지 하는. 구체적으로 어떤 걱정인지는 다 다르지 않을까요.

 

상상은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걱정을 이겨내는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을까요. 「등 뒤에 고양이」에도 거울을 보면서 주인공이 생각하잖아요. 알고 보면 큰 걱정이 아닌데 부풀려지는 게 많아요. 그럴 때는 걱정을 똑바로 보고, 자기 안에 강한 힘이 있다고 믿어야 해요. 제 글을 읽기만 하면 안 되고, 엄마나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 좋겠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큰 걱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이 책이 걱정을 다뤘지만, 읽으면서 깔깔 웃는 아이도 있어요. 그럴 때 기분이 되게 좋아요. 책을 읽을 때는 그 이야기 안에서 즐겁게 놀고 대화할 수 있는 편안한 독서가 되면 좋겠어요.

 

걱정 인형이 말을 한다든지,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 상자가 등장한다든지 하는 상상적 요소가 작가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해요. 
 
어른의 현실과 아이의 현실은 달라요. 나이가 어릴수록 많은 걸 상상할 수 있죠. 백화점 같은 공간에서도 아이들은 판타지를 만들어요. 공간, 물건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게 그 나이 대의 특권인데요. 생각의 틀을 깰 수 있는 이야기를 주고 싶었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상자」에는 다양한 소원이 등장하는데 작가님 소원은?

 

책이 잘 팔리는 것? (웃음) 제 글을 많은 사람이 읽고 재밌다고 해 주시면 좋겠어요.

 

동화는 희망과 사랑의 문학

 

아동문학 쓰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요?

 

희곡으로 박사 과정에 들어갔는데, 아동 문학, 특히 창작을 공부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걸 깨달았어요. 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내 안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느꼈는데요.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잖아요. 상처받고 나약하고 외로운 아이를 느끼면서 그 아이를 위해서 동화 창작을 시작했어요. 다른 일, 다른 공부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걸 동화 쓸 때마다 느껴요. 지금도 그렇고요. 동화가 희망의 문학, 사랑의 문학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쓰면서 저도 밝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걸 느끼죠. 덕분에 선물을 많이 받았죠. 이 책도 제게 선물이고요.

 

어린 시절 작가님은 어땠어요?

 

전학을 많이 다녔어요. 초등학교만 5군데를 다녔는데요.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서 일어난 일을 되게 선명하게 기억해요. 이런 경험이 동화 쓰는 데 씨앗이죠. 책 쓰는 작가의 공통점일 텐데, 저도 나가서 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노는 게 좋았어요. 아버지가 국문과 교수님이었는데, 집에 책이 많아서 온갖 책을 섭렵했죠.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했어요. 초등학교 때 쓴 일기부터 다 보관하고 있는데요. 일기 쓰기를 좋아했어요. 동화를 쓰기 위해 본 적은 없지만, 가끔 정리하다 꺼내면 기억이 생생히 떠올라요.

 

2011년에 등단하셨는데요. 그 뒤로 중간에 슬럼프는 없었나요.
 
당연히 있죠. 혼란스러운 고비가 있었어요. 결국 마음을 다시 잡는 건 저 자신이니까,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요. 다른 사람 속도가 아니라 저만의 속도를 지키려고 노력하죠. 창작을 시작했을 때도 단기간에 이루겠다는 게 아니라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어서 쓰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느려도 상관 없다는 마음으로 이겨냈어요.
 
창비어린이 문학상과 비룡소 문학상 등 큰 상 두 가지를 받으셨는데요. 스스로 비결을 생각해 보셨나요.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왜 제가 됐는지 생각해 볼 때가 있는데요. 아직 모르겠어요. 심사하신 분들은 제 이야기가 독특하다고 해요. 그게 뭔지는 고민이지만, 제가 자랑할 만한 건 정말 즐겁게 쓴다는 점? 글 쓸 때 힘들고 어렵게 쓰는 작가님도 있는데, 저는 즐겁게 써요. 글을 쓸 때 가장 최적의 상태에서 쓰죠. 늦잠을 자는 편이라 주로 오후에 그런 상태가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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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 작품을 쓰고파

 

혹시 글쓰기에 영향 받았던 사람이 있나요.

 

우리나라 작가 중에는 마해송 작가님, 현덕 작가님을 좋아하고요 외국 작가 중에는 미하엘 엔데,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아놀드 노벨, 오르한 파묵, 사무엘 베케트, 외젠 이오네스코를 좋아해요. 제 독서 취향은 잡식성이에요. 커피의 역사, 향수의 역사 같은 미시사를 좋아하기도 하고 철학자가 쓴 수필집도 즐겨 읽어요.

 

이야기 소재는 어디서 찾으시나요.

 

독서 논술 과외를 10년 정도 하면서 아이들을 많이 봤어요. 그 후로는 아이를 만날 일이 많지는 않은데요. 조카와 이야기를 하거나, 제 또래 친구가 엄마니까 또래 이야기를 들으면 도움이 돼요. 제가 결혼을 안 해서 보이는 장점일 수도 있는데요. 엄마들에게는 일상이지만, 제게는 정말 특별하게 보이는 그런 소재가 있어요.

 

조카 만나면 주로 어떤 이야기 나누시나요.

 

휴대폰만 봐서 이야기를 나누기가 쉽지는 않아요. (웃음) 어릴 때는 조카가 상상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재밌었는데, 크니까 시들해졌나 봐요. 요즘은 학교 생활 이야기를 많이 하죠. 책은 많이 안 읽는 듯해요. 요즘은 필독서, 이렇게 해서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라 더 안 읽는 원인 같아요. 하고 싶어도 강요하면 하기 싫어지잖아요.

 

그럼에도 우리가 이야기를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가장 원형이잖아요. 이야기의 힘은 공감이라고 봐요. 아이들이 동화를 봤을 때 공감의 능력이 커지죠. 상황을 이해하는 훈련이 되고요. 갈수록 사회가, 아이들이 이기적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공감력을 키울 수 있는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20~30년 뒤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원하나요.

 

소망하는 건,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될 만한 작품을 쓰는 게 최종 목표인데요. 사실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많은 좋은 작품을 쓴 작가? 좋은 아동문학은 공감하고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해요. 그 작품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작가가 되면 좋겠고요. 재밌고 공감하고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을 많이 쓰고 싶어요. 전세계 아이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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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걱정 대장우미옥 글/노인경 그림 | 비룡소
제4회 비룡소 문학상 대상 수상작 우미옥의 『두근두근 걱정 대장』이 비룡소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올해 대상작으로 선정된 『두근두근 걱정 대장』은 십 대 시절로 접어들기 전 성장기의 고민을 네 명 아이들의 일상을 통해 재치 있게 다룬 단편 모음집입니다. 유아기를 벗어나 몸과 마음이 쑥쑥 커 가는 아이들의 마음 구석구석을 보듬어 주며 공감의 선물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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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손씨의 지방시’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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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고 내밀하다. 연애를 바라보는 찌질하고 유치한 본심이 솔직하게 담겨있다. 평범한 상황인데 손씨의 글을 거치면 감성적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즐겼던 이유는 바로 ‘나와 똑같은’ 마음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글봇’에 게재되었던 <손씨의 지방시> 연재 글을 모은 『어른은 겁이 많다』라는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일기처럼, 동화처럼, 편안하고 다정한 글이 독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는 지금 낮에 떠 있는 달 같아서
세상은 해에 가려진 너를 못 알아보는 것뿐이니까.

 

언젠가 해가 지면 너는 어둠속에서 밝게 빛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꼭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일부(50~51쪽)

 

어떤 부분은 무척이나 섬세해서 ‘손씨’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만일 남자라면 이 남자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도(?) ‘남자’인 손씨는 인터뷰 내내 담담했다. 첫 책을 내고, 많은 독자에게 호응을 얻은 신인 작가의 모습 같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것 같지 않은데 허투루 말하지 않았다. 글만큼이나 솔직했고 책만큼 예뻤다. 현실에 대한 균형감각 또한 무척이나 어른스러워서 과연 ‘겁이 많다’고 한 그의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 손씨가 살면서 겪은 다양한 일들이 어떻게 지금의 그를 만들었는지 들어보는 일은 무척 흥미로웠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요


첫 책이신데,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주변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원래 말도 안 했어요. 집에도 책 나오기 한 달 전에야 말했어요. 친구들한테도 말 안 하고요. 창피해서요. 지금도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아요.(웃음) 이게 제 본업이 아니니까 너무 부끄러워요. ‘손씨’라고 한 것도, 제 이름을 알리는 게 창피해서예요. 친구들이 놀릴까봐서요. 결국 본명은 어쩔 수 없이 넣어야 했지만 그것도 없었으면 부모님이 안 믿으셨을 거예요. 어머니는 책이 나올 때까지도 안 믿으셨어요. 제가 받아쓰기도 많이 틀리고, 고등학교 때까지도 맞춤법 많이 틀리고 그랬거든요. 놀기만 하면서 무슨 책을 썼냐고 하셨어요.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고 나니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셔서 사과하셨어요. 책 냈다고 한 말이 끝까지 거짓말인 줄 아셨대요. 아마 그때 어머니에게는 제가 어른이 됐을 거예요.


누나는 저인 줄도 모르고 <손씨의지방시>를 받아보고 있었더라고요. 퍼가기도 하고요. 모르는 척 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저라는 사실을 알고 엄청 전화가 왔어요. 일부러 안 받았어요.(웃음) 그 후에는 제 사진을 퍼가더니 동생이 책을 냈다고 하고 그러더라고요. 누나 친구들은 ‘동현이 어른됐네’하고요. 답 안 했어요. 부끄러워요. 

 

솔직한 이야기를 쓰셨습니다. 원래 책으로 쓰신 게 아니잖아요.


회사의 SNS에 글을 하나씩 올렸는데 반응이 괜찮아서 개인 페이지까지 만들게 됐어요. 사람들이 ‘좋아요’를 많이 눌러주고, 댓글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니 계속 글을 쓰게 되더라구요. 신기하게도 지금 여러 가지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들이 생기고 있어요.

  

현실을 알아버린 ‘어른’


제목 『어른은 겁이 많다』부터 묻고 싶어요. 어른이 되고, 무엇이 가장 겁이 났나요? 


심각하게 말을 하자면, 어릴 때는 여자를 만날 때 그냥 감정으로만 편하게 만나잖아요. 나이가 먹으니까 사귈 때 고려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보이는 거예요. 현실을 알게 되니까 그만큼 멀리 보게 되고요. 겪어야 할 장애물들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거기까지 못 가는 거죠. 어릴 때 저는 진짜 우주에도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소방관이 되고 싶었고, 여러 가지가 하고 싶었는데 나이를 조금씩 먹으니까 그런 것을 하려면 많은 지원이 되어야 하고,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겁이 나는 것 같고, 그렇게 쓴 것 같아요.

 

누가 이 책을 읽어줬으면 하세요? 혹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으면 하나요?


그냥 중고서점에 제 책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잘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 그냥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대충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참 따뜻해요. 그래서 글의 주인공이 무척 궁금해졌어요. 많은 독자들이 그럴 텐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요?


따뜻하다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는데.(웃음) 누가 이런 후기를 써놨더라고요. 이 책에는 힘내라, 도전해라, 그런 말이 절대로 없대요. 그런데 신기하게 위로가 된대요.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까 당신이 하고 있는 고민을 다른 사람도 다 하고 있다, 는 식의 메시지기 때문인 것 같아요.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모두 힘들어, 라고요. 그러면 글을 보고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혼자 밥을 먹으러 갔는데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많으면 위안이 돼요. 클럽에 갔는데 못생긴 사람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기잖아요. 나보다 못난 사람을 보고 용기를 얻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것과 비슷한 케이스죠. 그래서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책에 대해서 크게 자만하지 않으려는 것도 그런 경험 때문인가요?


26살에 창업을 했다 실패를 했는데, 실패 이유가 사업할 때 자만했었죠. 매일 대표님, 대표님 하니까 진짜 그런 줄 알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너무 창피해요. 지금은 자만하지 않아요. 대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저 잘하는 일 중 하나였고, 그 일을 그냥 했을 뿐이에요.

 

여가 시간에는 그럼 뭐 하세요?


운동 하고요. 술도 잘 안마시고, 담배도 끊었어요. 주말에는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거나 그래요.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안 하거나 고쳐야 하는 것 같다.

 

싫어하는 고치는 것은
너와 닮아가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스킨십을 싫어하지는 마(137쪽)

 

글에서 얻는 큰 재미는 역시 제목이 아닐까 싶어요. 내용을 먼저 쓰셨나요? 아니면 제목을 먼저 생각하고 글을 쓰셨나요?


쓰고 나서 제목이 떠올라요. 제목을 많이 바꿔요. 글이 잘 써지면 몇 번 수정없이 완성이 되는데, 한번 막히면 수정을 많이 해요. 백 번도 수정을 해요. 일주일 묵혔다가 또 보고 다시 수정하고 그런 식이에요.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는데 글을 보면 재치가 있으신 것 같아요.

 
관찰력이랑 생각하는 것, 그리고 말할 때 감정 캐치하는 것, 우울한 생각,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글을 쓰신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관찰력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죠.

 

시처럼 읽히는 대목이 종종 있어요. 혹시 시인의 꿈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시라고 쓴 건데 사람들이 시가 아니래요.(웃음) 에세이래요. 시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그래서 이건 ‘시세이’다, 라고 생각했죠. 나는 시라고 썼는데 사람들이 아니래요. 수필과 시의 경계가 무너진 거라고 누가 그렇게 써놨어요. 그래서 이건 에세이구나, 생각했어요.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갈 정도로는 팔리지 않았어요?


많이 팔렸죠. 저는 다 이런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래요. 예스24 문학 분야에서 7위까지 올랐대요. 전부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신 덕분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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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들어보면 어른은 겁이 많다고 했을 때의 ‘겁’이라는 것이 ‘현실’을 고려하는 면과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내가 뭘 도전하기에는 지금 상황을 버리기 힘든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사회는 젊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젊다’거나 ‘꿈을 가져라’라고들 하잖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편하게 하는 말인 것 같아요. 지금 세대에게 꿈을 찾으라고 하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에요. 당장 월세, 휴대전화 요금, 보험 이런 것들 다 따져야 하는데 꿈을 찾아 노력하라고 하면 직장을 관두고 다른 것을 해야 하잖아요? 수입이 없이 생활하기가 힘들어지면 사람 자체가 힘들어져요. 저는 주변 환경에 맞춰 사람이 생각하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주변이 시궁창인데 어떻게 좋은 꿈을 꿀 수가 있겠어요. 비관적이 되겠죠. 어른들이 꿈을 찾으라고 하면 젊은 사람들은 다 계산을 해봐야 돼요. 부모님의 지원이 가능한지, 생활비를 어디서 충당할지, 그런 걸 떠나서 꿈을 찾는 건 그것도 잘못된 거죠.


꿈을 찾는 방법도 잘못 됐어요. 만일 요리가 너무 재미있어서 요리사가 되면 매일 뜨거운 불 앞에서 요리를 해야 하잖아요. 의사가 되면 행복할 줄 알지만 밀려오는 환자를 마주보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고요. 이건 내 꿈이니까, 하면서 계속 하다보면 서서히 불행해진다는 거죠. 성격도 날카로워지고요. 그때는 꼭 내가 요리를 하는 요리사가 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찾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요리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직업이 있으니까요. 무조건 이건 내 꿈이야, 라면서 참다가는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기 환경을 행복하게 맞춰야 하는 것 같아요. 퇴근 시간도 잘 지켜지는 회사에 들어가야 하고, 연봉도 낮지 않아야 하고, 그런 여러 가지가 다 맞아야 하는 거죠.

 

역시 ‘꿈’에 대해 평소 많은 생각을 하셨네요.


저는 서른 살이 되어서 제가 잘하는 일 하나를 찾았거든요. 그렇게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잘하는 일을 찾았어요. 그런데 스무 살 때 자기 진로를 정하고, 과를 정한다는 건 미친 짓이에요. 사람은 살면서 직업이 40번이 바뀐대요. 그런데 문과, 이과로 나뉘고, 그에 따라 직업을 택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대학이란 것도 잘못된 시스템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에게 칭찬 받기 위해서 잘하려고 하지만 성인이 되면 부모님과 떨어지잖아요. 그때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나는 누구에게 칭찬을 받아야 하나, 칭찬 받을 대상을 찾게 되고요. 부모님의 역할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공부 보다는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줘야 하고, 아이가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그 성향에 맞는 직업을 찾도록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사업을 해보셨으니까 현실도 알고, 그런 부분에 좀 지치신 것 같아요.


포화상태죠. 쌓이고 쌓여서 불분명한 분노가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받잖아요. 그걸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방치하면 그게 계속 쌓여서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게 돼요. 그냥 그대로 가슴 속에 화가 있어요.

 

왜 이런 질문을 드렸냐면 말씀하신 것과 맥이 닿아 있는데, 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 꿈을 꾸라고 하면서 창업 지원도 하고, 청사진을 보여주면서 부추기는 면이 있잖아요. 사회가 만든 환상이 있는데, 실제로 해보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은 다르다, 내가 안정적이어야 행복할 수 있고 날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겪으신 것 같거든요.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웃음) 맞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아직 어리지만 갓 사회에 발을 들인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 번 해보라는 거예요. 누구는 ‘내가 책을 어떻게 써?’하면서 글을 잘 쓰는 애들이 책을 안 써요. 그림 잘 그리는 애들이 웹툰 잘 된다고 그려보라고 하면 ‘내가 웹툰을 어떻게 그려?’하면서 안 해요. 재능 있는 애들이 도전을 안 해요. 저는 무조건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책도 나오게 된 거고요. 운이 좋았죠.


창업을 했다가 망해봤잖아요. 그런데도 창업을 해보라고 하는 이유는 행복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사업이 망하지 않고, 빚이 없었을 때 월급을 받는 것과 지금 월급을 받을 때랑 행복의 수준이 엄청 달라요. 드라마에서 사업이 망하면 힐링 여행을 떠나고 그러잖아요? 현실은 안 그렇잖아요. 저는 6개월 동안 노가다를 했거든요. 빚을 갚기 위해서요. 취직을 바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빚을 갚기 위해서 노가다를 했어요. 겨우 빚을 갚아 나가는데 6개월 정도 되니까 돈을 더 주겠대요. 30만원이 더 생겼는데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행복의 기준이 50이었다고 하면 사업 실패 이후에 10까지 떨어진 거예요. 그 이상만 되면 계속 행복한 거죠. 그 후에 창업하면서 알게 된 분이 저를 스카웃하셔서 서울 올라와 일을 하게 됐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전에 서울에서 지낼 때는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는데 다시 서울에 왔을 때는 쪽방에서 살게 됐거든요. 그런데도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예요. 빚 때문에 진즉에 관뒀을 일을 꾹꾹 참고 하다보니까 또 얻어지는 게 있고요. 그때는 끈기가 너무 약했었는데 창업하다 망해보니까 끈기도 더 생기고, 더 행복해지고요. 빚은 있지만 투정도 안 부리게 되고, 책임감도 더 생기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죠.

 

‘사랑’과 ‘연애’에 대해


책의 백미는 무엇보다 ‘사랑’, ‘연애’에 관한 단상들입니다. 저자의 연애 이야기를 좀 물어볼게요. 가장 치열한, 혹은 힘들었던 연애를 얘기해주세요.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아주 솔직하게, 대담하게 사람의 비겁한 못된 본심을 다 담았거든요. 그래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보통 연애 이야기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그렇잖아요. 이 글에는 무릎 꿇고 빌고, 찌질하고, 그런 걸 담았죠. 남자가 여자에게 무릎 꿇고 빌면서도 다른 생각이 들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쳐다보면 어떡할까, 내일 업무는 어떻게 하나, 지금 차에 기름 떨어지기 직전인데 에어컨이라도 끌까, 이런 생각들이요. 좀 야한 말이지만 관계를 가질 때 다른 이성을 상상할 수도 있어요. 그런 말을 솔직히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 것들을 다 담았으니까 재밌는 거죠.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보통의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편인가요?


관찰력이 좋은 편이다 보니까 스스로 피곤하죠. 단점인데요.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기분이 더럽잖아요. 더러운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요.(웃음) 그렇지만 상대에 잘 맞추려고 노력해요. 이 사람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어색하게 대하는 면도 있는 것 같고요. 저는 직장 생활이 안 맞는 것 같아요.(웃음)


글을 읽는 분들이 제가 여자라고 오해를 많이 했어요. 여자 감성이라고요. 웬만한 여자만큼은 소심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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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겁이 많다손씨 저 | my
저자는 청춘의 끝에 서 있는 나이이기에 어른아이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강제로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는 손씨는 세상이 어른이라고 규정한 그 순간부터 꿈도 목표도 현실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또한 앞으로 겪어야 할 아픔과 상처를 생각하니 앞으로 나아가는 게 겁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글로 풀어냈다. 저자가 써온 [손씨의 지방시]는 겁이 많은 어른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어른은 겁이 많다》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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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신학기를 맞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이 조금씩 흩어지는 때다. 훈훈해진 공기와 다채로운 색을 자랑하는 봄꽃을 보면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기에는 삶이 너무 건조하다는 생각도 든다. 잠깐 머리나 식힐까 해서 놀다 보면 어느덧 여름이 오고, 무더위로 지쳐있다 보면 가을과 겨울이 순식간에 찾아와 한 해가 다 간다.

 

많은 사람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공부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면서도 성취감이 바로 바로 나오는 행위는 아니다. 그래서 일부 공부가 체질인 사람을 제외하면 공부보다는 노는 게 즐겁다. 그렇다고 공부를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요즘처럼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평생 학습이 누구에게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양현, 조준희 두 저자가 쓴 『서울대생 100인의 시크릿 다이어리』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서울대 합격생 100인의 노트 정리법』을 쓴 양현 저자는 후속편으로 다이어리에 관해 쓸 생각이었다. 그때 다이어리를 써왔던 조준희 저자를 만났고 둘은 그렇게 책을 함께 만들었다. 조준희 저자는 다이어리를 쓰면서 공부 습관을 잡고, 결과적으로 서울대 합격으로 이어졌는데 이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다른 서울대생과 인터뷰를 나눴다. 그 결과, 많은 서울대생이 다이어리를 활용해서 자신만의 공부법을 발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은 이런 다양한 다이어리를 풍부한 시각 자료와 함께 소개하며 독자가 자신에 맞는 다이어리 활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왔다.

 

책을 쓴 두 사람 중 조준희 저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다이어리는 입시만이 아니라 일상 관리를 위해 필요

 

서울대생 100인의 시크릿 다이어리』는 어떤 계기로 만들었나요?

 

글쓰기 모임에서 양현 형을 만났고, 형이 다이어리에 관한 책을 쓴다고 말해주었어요. 제가 다이어리를 열심히 썼다고 하니까 함께 책을 만들자고 제안해서 쓰게 됐죠. 양현 형을 만난 지 3개월 만이었어요. 2014년 6월부터 약 8개월 정도 작업하여 책이 나오게 되었어요.

 

공부법에 관한 책이 많은데, 이 책은 어떤 점이 기존 공부법 책과 다른가요.
 
어떻게 보면 양현 형이 쓴 『서울대 합격생 100인의 노트 정리법』의 후속편이니, 전작보다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책도 시각적으로 뛰어난 책이었지만, 『서울대생 100인의 시크릿 다이어리』에도 시각적인 측면에 많은 신경을 썼어요. 사진과 그림이 많은데, 독자들이 그대로 따라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정말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말이죠.

 

독자들이 어떻게 이 책을 활용했으면 하나요.
 
우리나라 입시 제도가 참 안타깝다고 생각해요.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죠. 무한경쟁 사회에서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 대학 가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큰 그림을 그리면서 넓은 의미의 공부를 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서울대 간다가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내는데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책이 나온 걸 보고 주변에서는 꼭 대학 입시만을 위한 책은 아니라는 평을 해줬어요. 다른 공부를 하거나, 계획적으로 삶을 관리하고 싶다면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얻지 않을까 생각해요. 책에는 정말 다양한 모습의 다이어리와 삶이 들어있거든요. 분명 느끼는 바가 있을 거에요.

 

서울대생의 다이어리는 어떤 모습일까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책인데, 원래 자료는 두 사람이 수집했잖아요. 다양한 다이어리를 모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세부적인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확실히 있어요. 책에서 세 가지 단계로 나눴는데요. 목표 설정과 동기 부여, 계획과 성취도, 자기 분석과 학습 전략이라는 세 가지는 모든 다이어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것에 기초해 세 가지 단계로 나눴어요.

 

그 중에서 인상적인 다이어리를 꼽는다면?

 

정말 많은데, 특이한 사람은 주로 3번째 파트에 실었어요. 먼저 조우성이라는 친구는 다이어리에 빼곡히 자신의 3년ㆍ5년ㆍ10년 후 모습을 쫙 그렸어요.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관한 계획까지 빡빡하게 썼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쓰면서 스스로 되돌아보고 청사진을 기록했어요. 다음으로 김지윤이라는 친구는 10년 동안 작성한 다이어리 11권을 상자째로 갖다 줬는데요. 인터뷰하면서 많은 친구들이 다이어리를 잃어버리거나 버렸는데, 그 친구는 10년치를 보관한 것 자체가 놀라웠어요. 그 시간 동안 진화하는 모습이 보였고요. 책에는 자세히 안 나왔지만 윤솜이라는 친구는 슈퍼 대회전 종목에서 국내 랭킹 2위의 스키선수 출신인데요. 훈련일지를 많이 썼어요. 공부하는 친구만이 아니라 운동하는 친구도 이렇게 열심히 다이어리를 쓸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솜이랑 친한 편인데, 훈련일지를 보고 나니 사람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조정윤이라는 친구는 자신의 하루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평가했어요. 잘한 날에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는다든지, 대학에서 학점 평가하듯 A, B, C 이렇게 기록하는 모습이 신선했어요.

 

책을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스스로 다이어리를 열심히 쓴 경험 덕분일 텐데요. 다이어리는 왜 쓰게 되었나요?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 쓰기를 싫어하진 않았어요. 이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썼어요. 야구를 하다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래서 남들보다 2배 이상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효율적인 일정 관리가 필요해서 다이어리를 사용했어요. 오늘 한 일, 반성할 일, 보완할 일, 오늘의 질문 등을 쓰면서 삶을 관리하니까 자기 관리가 잘 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느낌이 좋았고요. 대학입학 후에는 소홀히 하다가 군대에서 많이 썼어요. 이등병 때부터 군대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을 모조리 기록했어요. 습관이 이어져 복학 하고 나서 계속 썼는데요. 지금은 휴대폰이나 웹으로 일정을 관리하죠. 아날로그가 맞는지 디지털이 맞는지는 개인차가 있을 텐데, 그래도 입시 공부하는 친구들이라면 손으로 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요.

 

다이어리 쓰는 습관을 들이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어떻게 하면 습관이 붙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상 갖고 다니면서 펴놓고 있는 것이죠. 눈에 보여야 쓰게 되니까요. 다이어리 쓰는 걸 게임 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게임을 하면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오르는 쾌감이 즉각적으로 나타나 게임이 재미있잖아요. 다이어리도 쓰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성취하고 있는지가 한눈에 보여요. 다이어리를 되돌아보면 ‘나’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단번에 보이고, 성취한 사항에 대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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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왜 공부하는지를 알아야

 

책에서 소개한 다이어리는 서울대 학생이 쓴 거잖아요. 대학 생활을 하면서 본 서울대생은 어떤 사람인가요.
 
공부가 좋아서, 재미있어서 하는 친구도 있지만요. 제 주변에 있는 친구 중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오히려 공부 외 다른 활동을 많이 하죠. 그래도 시험기간이 되면 특히 느끼게 되는데, 확실히 공부를 해나가는 힘은 모두 있는 것 같아요. 시험 보기 싫다고 하고, 공부 하기 싫다고 말은 하지만, 공부를 할 때에는 집중력 있게 하더라고요. 공부와 공부 외의 활동을 균형적으로 맞출 줄 아는 것 같아요.

 

스스로는 공부가 재밌나요?

 

저요? 요새는 별로요. (웃음)

 

정말 많이 받는 질문일 텐데,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말 교과서 위주로만 하면 될까요.

 

절대 안 되죠. (웃음) 글쎄요. 무슨 이야기를 드려야 할지 고민되는데요. 개인차가 많을 텐데, 왜 내가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해요. 목적 의식 없이 공부를 하면 중간에 포기하기가 쉬운데요. 서울대 합격한 친구 중에도 입학한 뒤에 방황하는 사람도 간혹 있어요. 목표가 서울대 입학이었는데, 목표를 성취한 이후는 생각해보지 않은 거죠. 장기적인 관점에서 왜 내가 공부해야 하는지를 알고, 그 후에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겠죠. 학원을 다닐지 말지, 어떤 방식으로 공부할지는 개인에 따라 게 다를 거예요.

 

조선일보 <맛있는 공부>와 EBS의 <공부의 달인>, SBS <밥상머리의 기적> 등에 출연하셨잖아요. 어떤 계기였어요?

 

책도 그렇지만 다 우연한 계기였는데요. 조선일보에 나온 건 정말 우연히 고등학교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서 실렸고요. 그걸 보고 EBS에서 연락이 와서 출연하게 된 거죠. 별 생각 없이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었는데, 여러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던 것 같아요. 요새도 페이스북 페이지에 캡쳐사진이 떠돌아 다니더라고요(웃음) 제 진로를 교육 분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멘토링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도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요.

 

야구부와 공부를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요. 시간 관리의 비결은?

 

모범적인 답안을 이야기한다면 다이어리 덕분이라고 할게요. (웃음) 대학 입학하고 나서 공부 말고 다른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정말 필요한 만큼만 공부를 하면서, 나머지 시간은 다른 활동에 쏟았죠. 그 활동 중 하나가 야구부였는데요. 야구부에서 인생을 배우는 것 같아요. 저희 야구부가 대학야구 꼴찌인데, 맨날 지는 경기를 왜 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감독님께서도 이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는 경험이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말씀하세요. 인내, 희생, 끈기, 도전의식, 유비무환 등 다양한 가치를 배워요. 결론적으로 야구부와 학업을 병행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관리에 신경을 쓰게 되었던 것 같아요.

 

책 읽는 건 좋아하세요?

 

대학생이 되고 좋아하게 되었어요. 특히 군대에서 많이 읽었죠. 읽으면서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고, 글쓰기 모임에도 들어간 거죠. 박웅현 작가님을 좋아해요. 그 분이 소개한 사람 중 한 명이 김화영 교수님인데, 그 분의 문장을 좋아하죠.

 

앞으로 계획은?

 

진로를 구체적으로 정해야 하는 시기인데, 스포츠 매니지먼트에 관심이 많아요. 요즘은 창업 쪽에 꽂혀서 획기적인 지식공유 네트워크 서비스를 생각 중인데요. 외국에서 일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책은 꾸준하게 쓰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가능하다면 글은 많이 쓰고 싶고, 스포츠 관련한 글도 한번 써보고 싶어요. 다양한 분야에 거침없이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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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100인의 시크릿 다이어리양현,조준희 공저 | 알에이치코리아(RHK)
학창 시절, 철저한 시간 관리와 남다른 목표 설정, 자기관리 습관으로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100인의 다이어리 120여 권을 모아 분석하여 공통된 핵심 요소를 도출한 책이 나왔다. 이 책의 기획부터 힘을 합친 서울대 선후배 저자들은 서울대생들을 한 명 한 명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고심 끝에 공개한 다이어리들을 모두 분석했고 그 결과, 최상위권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핵심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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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범죄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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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눈매가, 꽉 다문 입술이, 그가 해온 ‘공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범죄 전문가’라는 수식으로 잘 알려진 표창원. 경찰대 학생으로, 일선 형사로, 경찰학 박사에서 경찰대학 교수로 걸어온 그의 뚝심 있는 발자국은 지금 그의 인생 2막에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선택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공부하며 얻은 지표들 덕분이었다.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목적지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살피는 것 모두 표창원의 중요한 지표다.

 

“우리는 왜 살까요? 우리가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삶의 연결이라고 생각해요. 살아내는 거죠. 우리 시대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 후 다음 세대에 바통을 이어주는 것, 그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봐요. 끝에 뭐가 있느냐? 우린 모르죠.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이데아라고 하는 낙원, 존 레논이 ‘imagine’에서 얘기했던 종교도 없고, 전쟁도 없는, 그런 세상이 올지 어떻게 알아요?”

 

역설적이게도, ‘사람에 대한 관심’과 ‘희망’이었다. 표창원은 범죄를 공부하고 범죄자들을 만나면서 결국 인간은 모두 같다, 미세한 방향 차이가 범죄를 촉발시킨다, 때문에 범죄는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안타깝다. 범죄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환경을 조금만 변화시켜줬다면, 자신이 살면서 만난 좋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도 있었다면, 사회가 조금만 더 관심과 애정을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다.


자신의 역할을 늘 깊이 고민하는 표창원의 공부는 현재진행형이다. 셜록홈스를 꿈꾸던 표창원이 만드는 새로운 문화가 기대된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


‘표창원 인생 1막 자서전’ 같습니다. 어떻게 책을 쓰시게 되었나요?  


출판사로부터 먼저 제안을 받았죠. ‘공부’라는 것의 의미가 최근 많이 퇴색되었잖아요. 주로 진학, 취업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 집중되어 있어요.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이룬 사람들이 진솔하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공부했는지 이야기해주면 도움이 될 거라는 출판사의 기획을 듣고 취지가 정말 좋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쪽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미화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 보이면 오히려 도움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주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게 있었죠. 모든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다 아픔도 있고, 어둠도 있고, 잘못도 있고 그럴 수 있잖아요?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드리는 게 예의다 싶어서 하게 됐습니다.

 

제목이 말하듯이 ‘배움과 깨달음의 쾌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독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 궁금합니다.


전체 내용을 통해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공부라는 것은 정말 사람의 삶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을 쉽게 표현하기가 어렵잖아요. 다들 그냥 ‘공부해’라는 말만 듣다 보니까요. 저도 그랬고요. 공부라는 것에 반감이 심해요. 또 책의 트렌드가 자기계발이라는 영역 내에서 뭔가 남보다 앞서고, 성공하고 이런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공부법들을 많이 내놓다 보니 공부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어 왔다는 아쉬움이 있었죠. 공부라는 것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한 번 같이 나눠보고 싶었어요. 제가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과정은 짧게 설명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삶 전체에 걸쳐 깨달았으니까요. 공부와의 갈등, 도피도 있었고요, 필요에 의해서 하기도 했고, 그러다 정말 뒤늦게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나가는 과정의 기쁨을 찾았어요. 이렇게 찾은 공부의 재미를 전달해드리고 싶었죠.


가능만 하다면 내 안에서 공부하고 싶다, 알고 싶다, 라는 욕구와 열망, 갈증, 호기심 이런 것들이 생기기 전까지는 공부를 확 놓아버리고 노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싶었어요. 특히 부모님들에게요. 저도 많이 아쉬운 부분이거든요. 청소년기 때는 특히나 공부하기 싫을 때가 많잖아요. 그냥 놀고 싶은데 초조감 때문에 혹은 감시당하고 강요당하다 보니까 놀지도 못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눈 속이는 상태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들이 너무 많단 말이죠. 그런 것들을 다른 후배, 젊은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본인이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를 좀 찾아주고 싶고, 그게 안 될 때는 차라리 노는 게 낫다는 걸 말하고 싶었죠. 놀고, 뛰어다니고, 건강하고, 즐거움이라도 찾고, 정신이라도 맑게 하고요. 이 두 가지 메시지를 드리고 싶었어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데에는 어렸을 때 마음껏 뛰어놀며 탐정 놀이하던 경험이 스스로에게 무척 소중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더불어 자녀 이야기도 하셨는데 학부모로서도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억지로 하는 공부는 의미가 없다고 느끼셨던 거죠?


저는 대한민국이 참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두 아이를 키우면서는 이런 이상한 나라에 적응하고, 자기 자리를 찾도록 해주는 게 부모의 도리 아닌가 하는 의무감과 강박관념,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이 당연히 있었죠. 그런 마음을 이기고 떨쳐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어요. 고민도 많이 하고 저를 돌아보기도 하고요. 쉽게 말하면 싸움이었죠. 그 결과 제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행복’이었어요. 제 나이 또래에 얻을 수 있는 걸 얻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요. 그러다보면 제가 그랬듯이, 자기들이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스스로 알아서 나는 뭘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뭐지? 하는 것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거든요. 그게 남들보다 늦게 시작되더라도 훨씬 더 안전하고, 탄탄하고, 자기를 찾는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가진 거죠. 그렇게 초조함과 불안감을 이겨냈어요.


아내와도 계속 이야기를 나눴어요. 당연히 저보다는 아내가 더 불안했죠. 아내가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큰일 난다, 아이들 과외도 안 시키고 무슨 짓이냐, 왜 넋 놓고 있느냐 하는 말들이었어요. 이런 얘기를 계속 들으면 좀 불안해하다가도 서로 얘기 나누고 그래, 우리가 옳아, 이러면서 지켜내 왔던 거예요.

 

인내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신념대로 산다는 게 쉽지 않은데, 유학시절 한국 여학생의 사과를 대신 받아준 일이나 경찰대학 시절 일들도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일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남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념이 강하죠. 그리고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해요. 제가 다른 친구들과 달랐던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다닐 때 보면 조금이라도 가정에 여유가 있거나 하는 친구들은 거의 과외를 했어요. 저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때문에 정답이라는 게 저한테는 없었어요. 누가 안 가르쳐줬고, 모든 걸 다 제가 체득해야 했죠. 책에서 읽은 것도 많았고요. 특히 세 살 위의 형이 있어서 형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했던 것들이 다였죠. 사실 사회가 정해준 정답이라는 게 있잖아요. 가만히 있어라, 시키는 대로 해라, 권위를 따라라, 지시를 이행해라, 이렇게 정해진 답이 있는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정답을 정해주면 따라가는 삶이 아니었고, 그러다보니까 남과는 다르고 이상한 절차들을 거치기도 했죠. 그렇지만 그 자체가 저한테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력과 자생력을 키워준 것 같아요. 경찰대학 학생이라 하더라도 그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건 대학생이라는 것, 대학생보다 중요한 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류라는 것, 이런 기본적인 인식에서부터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로 접근했어요.

 

그런 생각이 갑자기 생기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런 것이 시작된 것 같으세요?


초등학교였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라는 나만의 사회에 들어갔죠. 부모님의 틀을 벗어난 또래 아이들과 학교, 선생님이라는 사회로 말이에요. 그것에 부딪치기 시작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규칙, 권위, 이런 것에 순응하고 들어가지 않았고 자꾸 질문을 했어요. ‘왜?’ 라는 질문이요. 선생님들이 무척 귀찮아하셨죠. 저도 그렇지만 의례적으로 선생님들이 ‘자, 질문 있으세요?’라고 묻잖아요. 다들 가만히 있거든요. 의례적인 말로 받아들이고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하죠. 그런데 저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어요. 예를 들어 이름표를 차야 한다는 말에 ‘왜 이름표를 차야 하죠?’물어요. 선생님은 당황하시죠.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하면 사실 좋은 보상이 오진 않잖아요. 다들 잘 따라 하는데 너만 왜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질문을 하냐고 하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고요. 그렇지만 그치지 않았어요. 궁금한 건 물어야 했고, 이런 데서 내려오는 원칙, 규칙이 저에게 단단히 만들어져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반항하던 어린시절


꽤 다루기 어려운 아이였습니다. 반골기질도 눈에 띄고요. 어떤 순간에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 없이 반드시 “꼭 이렇게 해야 하나?(112쪽)” 생각합니다. 지금, 부모의 입장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바라본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제 아이 둘 중 큰 아이가 저와 비슷해요. 딸인데요. 좀 충동적이기도 하고, 도전적이기도 하고, 의문도 많이 제기하고, 호기심도 많고, 뭐든지 직접 해봐야 하고, 그래서 사고도 좀 치고 그래요. 둘째, 아들은 정 반대예요. 안정을 추구하고, 순응적이에요. 그래서 두 아이를 보면서 제 어렸을 때 모습을 상기하게 돼요. 제 아들이 이해 못하겠다는 그런 친구들이 있거든요. 그때 제 모습이 딱 떠오르는 거예요. 소름이 끼치기도 해요.(웃음) 나름대로는 아들에게 어렸을 때 저에 대한 이해를 시켜주기 위해서 그 친구 편에서 얘기를 하기도 해요. 그러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갖죠. 내가 어렸을 때 선생님이나 부모님, 형 같은 사람들에게 참 어려움을 많이 끼쳤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형이 또 저 때문에 엄청 속을 끓였거든요. 물 좀 떠오라고 하면 ‘내가 왜 물을 떠와야 하는데?’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아드님 이야기가 의외네요. 아버지와 많이 다르고요.


아내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제 경우는 부모님의 영향도 많이 컸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아버지께서 월남에 가셔서 안 계실 때, 아버지 없는 아이라는 말을 안 듣게 하려고 엄청 엄하게 하셨어요. 조금만 실수하고 잘못해도 매를 드셨고요. 많이 맞았죠. 형은 매와 체벌을 피하기 위해 순응을 한 거예요. 방법을 따라가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죠. 그런데 저는 대항을 했어요. 어린 나이인데도 ‘왜 나를 때리는 거야!’ 이런 식이었어요. 어머니가 무척 성격이 강하신데,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이 세상에서 못 이기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대신에 잘못한 건 무조건 받아들였어요. 잘못했다고 느꼈을 때는 눈물 뚝뚝 흘리면서 반성했지만 불합리하다고 생각이 들면 대항했어요. 형과 다퉈도 시시비비가 있을 텐데, 어머니는 무조건 형 말을 안 들었다고 혼을 내세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형, 동생을 떠나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를 따진 후에 내가 잘못했다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무조건 형이니까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 못 받아들이겠다, 이런 식이었어요.

 

형 말씀을 하셨는데, 부모님의 권위에 순응하는 편이었던 형이 거기에서 오는 불만을 동생에게 풀었을까요? 형에게 많이 맞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것도 있겠고요. 또 하나는 제가 정말 싸가지 없는 동생이었으니까 그랬기도 했겠죠. 제가 지금 생각해도, 만약 제 동생이 저한테 그랬으면 저도 아마 형처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정말 힘든 동생이었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그런 반항의식 같은 게 있었어요. 지금도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세 살 위의 형이니 얼마나 힘이 세겠어요. 그런 형 밑에 깔려서 막 맞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끝까지 반항했어요. 절대로 ‘형, 잘못했어.’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얼마나 얄미웠겠어요.

 

범죄를 공부한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애정에 가까운 이런 관심은 어디서,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저는 그냥 호기심 천국이었어요. 뭐든지 다 궁금했고, 특히 사람들에 대해서 그랬죠. 제 상황이 억울하다는 느낌을 많이 가졌거든요. 그토록 반항적이었던 이유 중에는 물론 제가 어린 나이에 잘못 생각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죠. 하지만 어쨌든 저는 나름대로 정당성, 명분이 있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에 대한 반응이 주로 잘못했다는 것이니까요. 선입견을 가지고 너는 원래 그런 말썽부리는 아이 아니니, 하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교실에 화분이 깨져있는데 아무도 자기가 깼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시선이 저에게 쏠리는 상황 말이에요.(웃음)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남들이 저를 좀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강했어요.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내가 남을 이해해야겠다는 것도 많이 깨닫게 된 거죠.


지금도 무상급식 때문에 난리지만 저희 어렸을 때는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들이 절반 밖에 안 됐어요. 저희 어머니는 꼬박꼬박 도시락을 싸주셨는데요. 도시락을 혼자 먹는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어떤 경우에는 배부르다고 도시락을 다른 친구에게 주기도 하고, 나눠먹기도 하고, 아예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점심시간 시작하자마자 ‘축구하러 가자!’고 하면서 도시락 안 싸온 아이들과 축구하러 가고, 수돗물로 배 채우고 그렇게 하기도 했어요. 그 친구 집에도 가보고, 같이 생활하고, 이야기 해보고요. 중학교, 고등학교 가서도 늘 말썽꾸러기 아이들, 선생님이 포기한 아이들, 흔히 말하는 불량학생, 폭력 써클 아이들과 많이 지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정말 궁금해서였어요. 이 친구들은 왜 이렇게 불량스러운지 알고 싶었어요. 그들이 사는 동네도 가보고, 그 친구들의 동네 형들도 만나보고요. 후에 보니까 그 중 강력범죄자들도 많더라고요. 그런 가운데도 그 친구들은 저를 보호해줬어요. 너는 공부를 해야 해, 이런 데는 끼면 안 돼, 하지만 친하게는 지내자, 이런 식이었죠. 그런 과정이 어떻게 보면 저는 날 때부터 범죄문제와 관련돼 살아가는 운명을 타고났나,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들(친구의 강간살인, 친구 여자친구의 유괴살인 등)이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 같은데 몇 번이나 있었어요.


두 가지죠. 하나는 제가 살아온 삶 자체가 조금 위험을 동반할 수 있는 모험적인 삶을 살다보니까 인간관계, 친구관계가 좀 그런 부분들이 있고요. 또 다른 측면은 이런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양을 보면 누구에게나 주변에 있는 사람이 가해자거나 피해자인 강력 사건이 발생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그걸 신경 쓰지 않거나 모른 채 넘어가요. 분명히 그 친구들과 같은 반을 거쳐 온 친구들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거치면서 무수히 많았을 텐데, 그들이 모두 자신이 알던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거나 공감하진 않는다는 거죠. 관심이 있는 사람만 ‘어떻게 내가 아는 사람이 이렇게 됐지?’라는 것을 느낀다는 거예요.

 

방금 말씀하신 친구관계에서부터 경찰대 생활처럼 엘리트적 관계까지 삶에서 겪은 경험치가 굉장히 넓은데, 그것들이 이후에 선택들, 주요한 고비 때마다 지위나 명예가 아닌 ‘옳은 것’을 선택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들이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게 제 장점이자 한계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한계라면, 저는 순수한 학자는 절대로 못 되겠다는 걸 일찍 깨달았어요. 그것도 남다른 재미가 있거든요? 힘들고 어렵긴 하지만 논문을 써내고, 학회에서 발표를 하고, 토론하고, 그럴 때마다 느끼는 학술적인 희열이 있죠. 그런데 뭔가 내 옷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내게 맞는 곳이 아닌 것 같았어요. 많은 석학들처럼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것, 그것은 못하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덧붙여 관료 조직에서 높이 올라가는 것, 그거는(웃음) 못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살아온 그런 경험, 특히 범죄 피해를 당한 분의 말로 표현 못할 아픔을 직접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그 근처까지는, 그분들이 얼마나 아프실까 하는 것까지를 공감해보려는 자리까지는 가보고, 반대로 완전히 인성이 망가진 범죄자들, 그들을 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해봤단 말이에요.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 무엇이 어떻게 널 그렇게 왜곡시켰는지 상당히 이해가 되고, 조금만 일찍 이런 짓 저지르기 전에 내가 만났던 좋은 분들이나 혹은 나라도 만나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기까지는 가는 거죠.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사람은 그런 관료 조직 내의 불합리라든지, 권위에 대한 충성이라든지, 이런 건 절대로 못해요. 그게 저의 가장 큰 한계죠.


정치와 관련해서도 자꾸 얘기를 하시는데요. 한 번 생각해봤어요. 나 같은 사람도 참여해서, 사회에 좋은 일도 하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요. 그 안에 벌어지는 매커니즘과 그 속에 있는 제 모습을 그려본 순간, 아유.(웃음) 저는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이단아가 되고, 말썽 저지르고, 스캔들이나 일으킬 것 같다, 차라리 안 가는 게 낫겠다, 얼마나 그 생활이 불편할 것인가 생각이 드는 거죠. 순수한 학자라든지 관료 조직에서 위치를 밟아 나간다든지 정치세계에서 타협과 권모술수 안에서 살아나는 것, 그건 저는 못하게 생겨먹은 사람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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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범죄를 다루면서 접한 일들 중 가장 안타까웠던 사건이 있다면요? 청소년 범죄에 대해 사춘기 교육, 정서적 안정에 대해 말하기도 하셨고, 몰라서 법을 어기게 되는 사람들을 엄격히 처벌한 안타까움이나 성폭행 친고죄가 없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보이셨어요.


범죄는 다 안타깝죠. 특별한 한 가지를 꼽을 순 없어요. 모든 게 다 안타까워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입학식 하러 가다 처음 본 놈이 시비 걸어서 싸우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같은 반이었고 친해졌는데, 얘가 나중에 강간 살인범으로 사형을 당하더란 말이죠. 범죄라는 게 그런 것이에요. 날 때부터 나쁜 놈은 없다는 거예요. 일부 학자가 사이코패스니 뭐니, 날 때부터 그렇다고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 그렇게 믿지 않아요. 후천적인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죠. 요즘 언론 인터뷰를 안 하려고 하는데요, 뭔가 자꾸 마음에 걸려요. 언론이라는 것이 표면에 드러난 사건의 잔혹성과 엽기성을 자극적으로 내세우면서 얼마나 괴물 같은 인간인가에 집중하거든요. 박춘봉 사건(2014년 11월 발생한 시신훼손 유기 살인사건) 때 딱 그랬잖아요. 하지만 들어가 보면 박춘봉이라는 인간도 불쌍한 인간이거든요. 물론 범죄는 안 되는 거지만 그때까지의 인생을 보면, 그 사람도 중국에서 어렵게 살았고,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다가 고생하고, 처음부터 자기가 사람을 죽이겠다고 한 게 아니잖아요. 그걸 그냥 10초, 20초 되는 인터뷰 속에서 많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범죄가 얼마나 위험한지 얘기하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범죄 사건이라는 건 모든 사건이 다 안타까운 것 같아요.


피해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피해를 당할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그분들이 당한 것을 어떻게 보상하겠으며,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느냐 질문이 늘 많이 생기죠. 세월호 참사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저처럼 많은 분들의 아픔, 고통, 이런 것들을 지켜보며 살아온 사람들은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으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죠. 그런데 공감하지 못하고 ‘시체 팔이 하느냐’, ‘너무 오래됐다’라고 말하는 그 사람들도 이해가 간다는 거예요. 왜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역정이 다 보이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답지 못하게 공부와 성공에만 매몰돼서 그 자리까지 살아왔으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 됐느냐, 보이는 거죠. 범죄 사건을 떠나서 이 사회의 모든 것들이 저는 그냥 불쌍하고, 안타깝고, 화나고 그래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이해가 가고요.

 

‘그것이 알고 싶다’도 보면 저마다 사연이 전부 있고, 일어나선 안 될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아주 미세한 차이로 방향이 틀어진 것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사회라는 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단순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그 선을 넘어서게 된다면, 비난 받을 수밖에 없는 거고,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가장 원하는 것은 그 선을 넘기 전에, 그럴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사람들이 선을 넘기 전에 어떻게든 좀 말리고, 붙들고, 묻는 거예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우리는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하에서 정부가 보여주는 것들, 말하는 것들을 보면요. 그들이 제시하는 한국의 미래는 미국 같은 나라, 또는 일본 같은 나라인 것 같거든요. 여건 차이에 의해 그렇게 되지도 못할뿐더러, 그 방향이 옳은 것이냐에 대해서는 국제 사회에서 다 의문을 제시하고 있어요. 학계에서도 그렇고요. 그들 스스로가 지금의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는 목표의식이나 명분, 논리도 없어요. 경제나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범죄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도저히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불행해요. 초등학교부터 망가지고, 중학교에서 포기하고, 고등학교에서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이런 아이들이 양산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무슨 수사를 하고 해결을 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조그만 한 가지에서 사람의 방향이 바뀐단 말이죠. 그런데 그 조그만 것이 이미 여러 군데에 도사리고 있어요. 충암고등학교 교감이 아이들 식사하는데 못 들어가게 하고 급식비 안 낸 애들은 밥 먹지 마, 돈 가져와, 라고 했다고 막말 파문이 있었잖아요.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인격체고, 이 아이들에게 그 한 마디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교육자로 앉아있단 말이죠. 이게 대한민국이에요. 제가 교장 대상으로 학교 폭력 예방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학생들이 학교 폭력으로 자살하는 과정, 심리적인 과정을 다 설명하면서, 물론 이것들이 온전히 학교의 책임은 아니지만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에는 교장선생님이 가장 큰 책임자가 된다고 말했어요. 여러분은 분명히 이런 것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학교와 관련 없다든지, 개인이 우울증이 있다든지, 가정 문제가 있다든지, 이런 얘기 하지 마시고 책임을 인정하시라고요.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탄원을 제기해서 예정되어 있던 강의에서 잘렸어요. 정말 절망감을 느꼈던 게, 제가 겪은 피해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그런 옹졸한 태도 자체가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반교육적인가 하는 것 때문이었죠. 범죄를 양산해 내는 잘못된 인식과 구조와 관행, 문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이 많이 있어요. 

 

“경찰이 신뢰받지 못하는 사회는 불행하다”(131쪽)고 하셨습니다. 안타까움과 자성의 감정이 느껴졌어요. 경찰대학 폐지 논란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셨는데요. 최근 경향신문 칼럼에서는 교수사회에 대한 비판도 하셨던데, 이런 발언을 하는 것에 어떤 소신이나 의무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뭐랄까, 참 불평분자인 것 같아요.(웃음) 다 불만스러워요. 그러다 저에 대한 반성도 하고요. 저는 힘이 많을수록, 많이 알수록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노력해 얻은 것이긴 하지만 혼자 잘나서 가능했던 것만은 아니거든요. 주어진 여건이 많은 도움을 준 것이죠. 저도 그랬다고 생각하고요. 그렇게 본다면 많은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힘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힘을 사용하라는 의미거든요.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이 있잖아요. 과외 한 번, 사교육조차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있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배운 사람들이 제발 우리 자식들이 제대로,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한 가지 희망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인간들이 하는 짓이 정말 너무 화가 나는 거죠. 자신의 힘이나 지식을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용하고, 도구로 이용하고, 다른 사람을 짓밟는 데 쓰잖아요. 그 순간 사회 전체에 신뢰가 없어지는 거거든요.


돈 많은 사람, 존경 받아야 돼요. 대신 그 존경의 근거란, 이것을 자기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쓴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덜 받고, 덜 가지고, 덜 존중받으면서도 가진 자들이 그만큼 사회 전체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신뢰가 생긴단 말이에요.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서울대 교수 성추행 문제뿐 아니에요. 학계에도 있어봤지만, 대한민국의 학계는 심각하게 말하면 범죄 집단이라는 생각까지 들어요.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만큼이라도 제대로 학문이건 진리건 간에 인간적인 교감이라든지 이런 것을 주고 있는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최소한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미안한 마음은커녕 자기가 누리는 연봉, 지위 이런 것들을 제공해주는 고마운 고객분들 위에서 갑질을 한단 말이죠. 다양한 형태의 갑질이에요. 성(性)적인 것뿐 아니라, 특히 권력이 있는 분들이 취직을 볼모로 하기도 하고요. 그런 현상 자체에 대해서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어요. 이번에 성추행 문제가 연달아 터지기에 아예 얘기를 하자고 생각하고 말을 한 거죠.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앞서 발언해주시는 것이 고맙지만, 발언하는 입장에서는 또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으니까 어려운 점도 많을 것 같은데요.


제 경험이 그런데요. 처음 한 두 번은 ‘이상한 놈이다’, ‘도대체 왜 그래?’ 라는 시선을 받지만요, 계속하면 포기현상이 일어나요. 쟤는 원래 저렇다고 하는 포기요.(웃음) 그동안 소위 말하는 돌직구, 정치나 군, 관료사회, 검찰, 학계까지 발언해왔지만 마찬가지였고요. 처음 국정원 사건 때 저 사람들이 압력을 가하려고 많이 했었거든요. 그게 잘 통하지도 않았고, 그러다가 제가 다른 쪽까지 계속 발언하다보니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 같아요. 우리 사회의 가진 사람들 측에선 ‘저 놈은 원래 저래’이렇게요. 압력 넣어봐야 소용도 없고요. 글쎄요. 아직까지는 제가 잃을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안감은 있죠. 우리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잘 지내는 와중에 다른 것에 의해서 노력이 좌절될 수 있는 상태라면 고민을 하겠죠. 그런데 봐서는 그런 건 아닌 것 같고요.(웃음)


또 하나는요. 힘세고 강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대신, 보이지 않는 수많은 분들의 지지와 보호가 있더라고요. 마찬가지로 경험을 해온 거예요. 고등학교 때도 학도호국단 회의에서 흡연실을 만들자고 건의했을 때 실제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쟤는 지켜줘야 해,(웃음) 이런 것들이 있었어요. 선생님들 중에도 학교나 당시 강압적인 시대, 군사 문화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분들이 계셨거든요. 그분들도 표현은 못하셨지만 저 같은 아이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던 거죠. 학교 측에서 몇 차례 저를 두고 퇴학 건의가 들어간 적이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선생님들께서 얘는 그런 애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은 갖지 않는 게, 저는 그다지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에요. 정부나 권력이나 재벌이나 이런 분들에게 바라는 게 전혀 없어요. 그냥 잘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던지는 비판도 애정이 있으니까 비판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봤으면 좋겠고요. 다만 저는 이렇게 책을 내면 책을 사 보시는 독자 분들, 제가 방송을 나가면 방송을 봐주시는 분들, 그런 분들은 다 보이지 않는, 힘없고 하지만 올바른 세상이 되길 바라는 이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괜찮아요. 그런 불이익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요.

 

표창원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가 궁금했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없다면 어떤 부분을 가장 시급하게 수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한때는 정말 절망스러웠고,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희망이란 것은 결국 우리가 포기하면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이라는 걸 느끼게 됐어요. 누군가, 특히 힘 있고 가진 자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리라는 기대 그 자체가 잘못된 거라는 걸 느끼게 된 거죠. 역대 왕조나, 지난 일제 강점기나, 해방 이후 언제 단 한 번이라도 권력을 가지고 힘 있고 돈 가진 사람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행동한 적이 있었는지 보세요. 언제나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는 분노 속에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거든요. 분노가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리 지금 우리가 이 사회를 비판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거든요. 기가 막힌 일이에요. 그렇죠?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나마 지금은 우리가 성소수자의 권리까지 이야기하고 있고, 세월호 참사 같은 경우도 우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더 했단 말이에요. 국가에서도 피해자 분들을 지원해 주거나,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지 않았거든요. 학생들의 권리도 그래요. 저희 때는 그야말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그런 선생님들 많았거든요. 아무 이유 없이 때리는 일들도 많았어요. 그런 불합리 속에서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훨씬 나아졌죠.


하지만 ‘그러니까 불만 가지면 안 된다’ 라든지 ‘비판하면 안 된다’ 그건 절대 아니에요. 힘 있고 권위 있는 자들이 마련해 준 게 아니잖아요. 여기까지 온 것은 그만큼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 힘 있는 자들을 압박하고, 비판하고, 요구하고, 어쨌든 선거란 것을 통해서 국민의 힘을 보여주고 해오면서 왔죠. 그러한 힘을 활용하고 힘을 보태준 소수의 지식인들, 소수의 엘리트들이 조금씩 도움을 줬고요. 그것이 희망이라고 봐요. 지금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느냐? 당연히 희망이 있죠.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어려움에 처한 분이 있으면 여러 분이 다 도와주시잖아요. 그런 모습들을 계속 목격하거든요. 이게 바로 희망이구나 생각해요. 권력자들은 잘못된 교육 시스템 속에서 어린 아이들을 전부 경쟁하게 만들고, 공부 기계로 만들고, 인간성을 말살시켜 나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국민들의 힘은 도도하고 강하게 인간성을 잃지 않고 놓지 않고 가지고 계시는구나 생각하면 그게 힘이라고 봐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앞에서 경찰의 일원이란 사실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고 하셨어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이 어떤 감정으로 현재에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여전히 남아있죠. 아마 끝까지 갈 것 같아요. 박종철, 이한열 사건 모두 제가 대학생일 때 일어났던 일들이고 그들과 동년배이고요. 여전히 그것 때문에 저를 비난하는 분들도 많아요. 그 시절 너는 권력의 주구로 있었지 않느냐, 그때 그런 마음을 가졌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요. 그분들의 비판 다 정당하고요. 다만 그런 부채의식을 가지고서 지금의 경찰이나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에요. 사실 저에게는 죄가 없잖아요. 그런 일에 가담한 것도 아니고, 그들과 인식을 공유한 것도 아닌데요. 단지 그 조직의 일원이기 때문에 가지는 죄의식이란 말이에요. 다시는 그런 젊은이들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는 게 가장 큰 바람이에요. 예를 들어 일제시대에 일제 순사, 앞잡이 일을 한 사람들 중에도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전체적인 인식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눈앞에 주어진 좋은 일자리 때문에 가서 일한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만을 탓할 게 아니에요. 그렇게 우리 젊은이들을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는 그런 상태로 몰아넣는 시대가 잘못이죠. 저는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노력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죠.

 

지금 일어나는 어떤 일들도 후에 역사의 평가를 받을 일들이 굉장히 많고,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나에게도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같은 게 있을 수 있잖아요. 지금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서라도, 혹은 지금부터라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고민을 하셔야 돼요. 또 하시는 게 고마운 거고요. 제일 안타까운 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고민조차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심리학적 방어기제의 발동이라고 볼 수 있죠. 부정하는 거예요. 자기는 아무 죄의식 없이 일상적으로 보는 업무지만 이게 커다란 사회의 톱니바퀴 속 하나로 이 톱니가 사람들을 말살하고, 학살하는 기계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상황을 나 혼자 어쩔 수는 없어요. 톱니바퀴 하나가 혁명을 일으켜서 ‘돌지 마, 돌면 안 돼!’ 라고 해봐야 그 하나가 잘려 나갈 뿐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질문한다면, 결국 치열하게 인간 이성의 한계 속에서 깨닫고 비판하고 싸우고 투쟁하고 해야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까지 책임지려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생각을 가져요. 나의 한계를 알 필요가 있다는 거죠. 내가 서있는 이 자리, 내가 하는 일, 그 안에서 고민하되, 그 이상 되는 부분은 죄책감이나 미안함으로 가져가고 그것 때문에 나의 존재나 나의 삶이나 내가 가진 것 모두를 의미 없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글쎄요. 결국 왜 사느냐의 문제로 연결되잖아요. 우리는 왜 살까요? 철학적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지만 우리가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삶의 연결이라고 생각해요. 살아내는 거죠. 우리 시대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 후 다음 세대에 바통을 이어주는 것, 그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봐요. 다음 세계는 우리가 해온 성과나 우리의 잘못, 우리의 문제, 이런 것들을 조금씩 더 개선해서 그 다음에게 이어주는 거죠. 계속해서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두를 ‘지속가능성’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거라고 생각해요. 환경도 보존하고, 가급적이면 덜 오염시키고요. 끝에 뭐가 있느냐? 우린 모르죠.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이데아라고 하는 낙원, 존 레논이 ‘imagine’에서 얘기했던 종교도 없고, 전쟁도 없는, 그런 세상이 올지 어떻게 알아요? 이외수 선생이 ‘존버(존나게 버틴다)’라고 얘기했지만, 우리의 사명은 일단 지금의 한계 속에서 더 파괴하지 말고, 더 망가지지 말고, 더 나쁘게 하지 않은 채, 버텨서 가급적이면 좋은 상태로 다음에게 넘겨주는 것, 이것이 우리 생존의 목적이고 존재 의의라고 생각해요.

 

안타까운 사건들도 많이 있었죠.


너무 한 개인이 세상 전체의 짐을 다 지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일 안타까운 게, 이남종 열사(2013년 12월 31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국정원 대선개입 특검’을 요구하며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서 분신) 같으신 분들, 김기종 씨(2015년 4월, 리퍼트 미국 대사 피습) 같은 경우예요. 결국 자기 개인의 책임이나 의무를 너무 과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러신 것 같아요. 의무와 책임감을 견디지 못해서 내 몸을 불사르든지 테러를 하든지 하는 것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저 세상 전체의 커다란 인류 공동체의 공통의 목적 하에, 한계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임무라는 생각을 한다면 너무 크게 자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교수님도 그런 마음으로 지내시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늘, 지금도 좀 마음속에 죄책감 같은 게 있어요. 그걸 또 자극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당신은 뭐하냐? 우리를 이렇게 불사질러 놓고서 왜 그렇게 조용하고 나서지도 않고, 박근혜가 무섭냐? 계속 그런 분들이 계세요. 그런 자극에 반응을 해서 앞장서고 투사가 된다? 그건 제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부분은 저에게 일정의 부담감과 미안함, 죄책감 이런 걸로 분명 작용해요. 가지고 있어요. 그걸 제가 안고 가고, 담고 가야 할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마저 없다면 철면피가 되는 거죠. 변절자가 되는 거고요. 하지만 분명히 아무리 생각해도 제 한계를 생각할 때 제 역할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시대도 그런 시대가 아닌 것 같고요. 저도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미안함, 부담감, 책임감, 죄책감, 이런 것들을 잘 다독이면서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사건 하나를 다루면 사건 하나만큼의 상처가 생겨


수사법이 진화하듯이 범죄 방법도 진화할 텐데요. 범죄를 공부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계속 어렵죠. 인간이야말로 변화무쌍하고, 창의적이고, 특히 모방의 천재잖아요. 그 와중에 범죄라는 것은 범죄자 입장에서는 인생을 거는 것이거든요. 허투루 하다가는 자신의 삶이 망가지는 것이니 자기의 모든 걸 쏟아 붓는 거예요.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차이는 없다고 봐요. 김연아, 박태환, 이런 천재 같은 사람들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거기까지 들어간 시간이 다른 거죠. 노력이 다른 거예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바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어려운 노력들을 포기한 사람들일 뿐이지, 그런 능력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범죄라는 데에 쏟아 부으니까 이게 문제인 거예요. 환장할 노릇이죠.(웃음) 기기묘묘한 수법을 쓴 범죄자들이 나오면 사람들이 ‘저런 능력을 좋은 일에 쓰면 얼마나 좋았을까’하지만 그게 안 되거든요. 그 인간들도 좋은 일에 한때는 노력을 해봤죠. 어렸을 때요. 하지만 바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아들이 축구를 하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했지만 잘하는 축이 아니었어요. 늘 벤치 멤버였고 조금씩 올라갔죠. 특유의 성실성을 가지고요. 지금은 축구 명문 중학교에 갔고, 거기서도 주전 후보로 올라가 있어요. 제가 아들과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게 그런 거예요. 절대로 남보다 못하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끝까지 가는 게 중요하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 남보다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욕심 때문에 조급해지고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실망하고, 감정이 개입되게 되면 오랫동안 노력을 들여 나타나는 성과는 이룰 수 없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범죄 저지르기 전에 어렸을 때부터 계속 해줬다면 이 친구들도 그렇게 안 됐을 테죠. 근데 성적도 다른 애들이 훨씬 더 좋지, 노래 잘하는 애는 따로 있지, 자기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내 자리는 없나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고, 말썽을 저지르는 것이거든요. 그게 범죄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얘네가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떨어지냐, 아니란 말이죠. 진즉 그걸 좀 잡아주었더라면 싶고, 너무 안타까운 거죠.

 

역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네요.


안타까워요.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현장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상당히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 온 사건 관련 자료, 조사 내용이 모두 정확한 사실인지, 어떤 주관이 개입된 건지, 변동이 일어난 건지 가려낸다는 게 제일 힘들어요. 아무리 지능화, 첨단화 된다 하더라도 그 친구들이 자기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 과학적, 기술적인 우위에 서 있는 건 절대로 아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어려움은 없어요. 다만 이미 발생한 이후에 많은 것들이 변하거나 왜곡된 상태에서 사건을 접하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해내는 것이 제일 힘들죠. 때로는 사건 관계자들의 오해나 오인도 있고, 기억의 혼돈도 있으니까요. 얼마 전 강남 80대 재력가 할머니 피살 사건 있잖아요. 처음 언론보도에서 조카며느리의 진술에 따라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있었고, 협박을 당하고 있었고, 낯선 사람이 와서 몸싸움을 하다 갔고, 이런 식의 얘기가 나왔어요. 거기에 집중해서 수사를 하다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저는 그걸 딱 보는 순간, 첫째로 이건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절대로 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혹시라도 이 사람이 사건 관계자일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건에 관련 없는 이야기를 일부러 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 부분을 제외하고 객관적인 사실부터 파악을 한 다음 진술의 객관성, 부합성을 파악해서 수사해야 해요. 처음에는 혼란이 있어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오는 정보 중에는 왜곡이라든지 변질, 오류, 오해, 오인 이런 것들이 많이 섞여 있는데 이런 것들을 가려내는 게 제일 힘들죠.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정신적으로도 피해가 크고요. 스스로 거리를 두는 방법이 있나요?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죠. 내가 죽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시험지 분실사건 경우도 완전히 무에서 시작해서 혐의점이 점차 경비과장에게 모아지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체포 영장이 청구된 상태였는데 그 사람이 자살을 해버린 거예요. 조금만 더 빨리, 일단 인신부터 확보를 한 후 영장처리를 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무척 괴로웠어요. 거기다 형사팀에서 이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알아온 건데 집안 내력이 있었단 말이죠. 아버지도 유사한 상황에서 자기 동생에게 혐의가 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치장에서 자살을 했는데,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하지만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떻게 보면 합리화죠. 나 때문이 아니야, 라는 합리화를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었어요. 심리적으로 어려운 건 상당히 컸죠. 어쨌든 극복을 해내면서 한계라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했어요. 내가 모든 걸 다 할 수 없다, 단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 라고요. 불합리하게 감정적으로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일을 못하는 거니까요. 만약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다면 당연히 전적으로 그 책임을 끝까지 져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서 일어난 것은 지나치게 책임을 느끼고 그로 인해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반면 그런 생각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인간성이 상당히 메마르게 돼요. 매너리즘이라고 하잖아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또 많이 필요해요. 다행히도 저는 그 이후 유학을 가게 되면서 일선에서 빠졌기 때문에 감성과 정서를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일 계속 일선 형사로 있었다면 지금쯤 아주 냉혹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 같아요. 모든 감정이 다 차단되고, 그러면서 속으로는 트라우마가 계속 일어나고요.

 

실제로 그런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많으실 거예요. 겉으로 드러나진 않죠. 그러한 트라우마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표출되거든요. 실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어요. 예전에 포천 여중생 피살사건 수사 반장이 자살한 일도 있었잖아요? 그런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개인의 차이긴 하지만 범죄 수사하는 사람에게 누구나 주어지는 상황이란 말이에요. 그걸 제도적으로, 경찰 심리 상담사라든지 제도가 있어서 언제든지 그런 큰 사건이 발생하면 상담을 하고 사전에 보호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게 제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죠. 다 개인들이 알아서 대처해야하는 상황이에요.

 

‘이익보다는 옳은 것’을 택하는 ‘삶에서 얻은 감성’이 포함된 일련의 모든 선택들이 늘 만족스러웠을까요? 혹시 후회한 적은 없었나요? 특히 최근 가장 큰 선택이었다고 하면 경찰대학 교수직에 대한 선택이었을 텐데요.


그 선택에 대해선 일말의 후회도 없어요. 전혀요. 그건 제 원칙에 완전히 부합하는 선택이었고 괜찮아요. 오히려 홀가분해요. 저한테 덧씌워졌던 틀이랄까 규격화된 옷을 벗어버린 느낌이거든요. 당연히 잃는 것도 많지만 동으로 가면서 서쪽에 있는 것까지 갖겠다는 건 욕심이잖아요. 그런 욕심은 안 갖는 훈련이 저는 오랫동안 되어 있어요. 잘못된 선택에 따른 결과를 후회하지 않는 그런 연습은 충분히 되어 있으니 전혀 문제가 아니에요. 그 선택 외에 살아오면서 했던 여러 가지 선택 중에는 잘못했구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하는 건 있죠. 그걸 다 안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다음에는 유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고 있어요.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 소개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꿈을 많이 꾸고 있어요.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에 많이 부풀어 있고요. ‘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라는 곳을 통해서 제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범죄에 대한 다양한 접근, 범죄를 테마로 한 교육, 범죄에 대한 분석, 또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곳에서 보여드린 것들을 좀 더 체계화하는 일들도 계속 하고요. 현실, 실제 사건들은 힘들거든요. 당사자는 아니지만 사건 하나를 다루면 사건 하나만큼의 상처가 생겨요. 감정적인 개입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당연히 피해자의 고통이 전달이 되고, 또 가해자가 그 상황까지 이르게 된 삶의 흔적들에 안타까움과 분노가 일어나고 그렇거든요. 이제는 좀 편안하게 범죄나 추리를 테마로 한 가상의 문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늘 선이 이기고 악을 마음껏 혼내줄 수 있고, 또 실제 사건에서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범죄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을 좀 더 부담스럽지 않게, 제가 상처받지 않으면서 풀어내는 거죠. 그것을 우리 아이들이 ‘명탐정 코난’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콘텐츠, 우리 스토리로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성인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부분에 상당히 제가 관심이 많아서요. 결국 한국의 ‘셜록 홈즈’ 같은 추리 소설, 영화, 이런 것들을 좀 만들어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죠.

 

소설 출간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소설이나 픽션의 경험이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계속 노력을 하고 있어요. 다른 작가들과도 협업 제안을 많이 받고 있고요. 어린이 추리 소설, 소년 중앙에 연재했던 것은 15회로 끝내기로 했는데 그것을 좀 보완해서 올 여름 전에는 책으로 나오게 될 것 같아요. 성인 대상 소설도 비밀리에(웃음) 준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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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범죄를 공부하는가 표창원 저 | 다산북스
그의 말처럼 “삶은 특정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끝을 규정할 수 없는 ‘여행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의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를 이루어내면 그다음으로 다른 것을 꿈꾸어야 한다. 수많은 두려움을 뚫고, 삶이라는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공부하기를 그치지 말라고 강조하는 표창원 박사. 『왜 나는 범죄를 공부하는가』에는 담긴 그의 고군분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공부를 통한 삶을 꿈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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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유진 “방송 들은 사람도 책 읽고 생각해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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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스24에서는 어떤 책을 구입했을 때 ‘말빨껌’을 2,000명에게 선착순으로 준다. 책을 사면 주는 사은품 종류가 다양해지는 지금, 웬만한 사은품은 신기하지 않지만 ‘말빨껌’이라는 존재는 특별하다. 씹으면 말빨이 세질 듯한 말빨껌. 어떤 책의 사은품일까. 바로 노유진이 쓴 『생각해봤어』다.

 

이 글로 노유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면 생각 좀 해 봐야겠다. 노유진의 정치카페는 4,200만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팟캐스트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인기 방송이니까.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와 붙어도 말로는 지지 않을 듯한 세 사람, 즉 노회찬과 유시민 그리고 진중권이 함께 만들어간다. 특별 게스트가 있기도 하고 없을 때도 있는데 그 주의 가장 뜨거운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기존 정치 관련 팟캐스트가 재미를 추구하거나, 너무 음모론적 해석에 치우쳤다면 노유진의 정치카페는 팩트를 근거로 대한민국 전반적인 문제를 다뤘다. 이들이 다룬 소재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환경,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인터뷰가 있던 날은 한창 화제인 성완종 리스트가 화제였다.

 

『생각해봤어』는 인기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14가지 꼭지를 뽑은 책이다. 이미 방송을 들은 사람도, 아직 듣지 않은 사람도 노유진이 던지는 14가지 질문을 생각하다보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에 관한 단서를 조금이나마 잡을 수 있을 듯하다. 팟캐스트 녹음이 끝나고 서둘러 다음 일정으로 향하려는 세 저자로부터 어렵사리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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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클럽 옆방에서 10만 불을 주고 받는 게 정치는 아냐


세 분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향이잖아요. 노유진의 정치카페 팟캐스트를 하기 전과 지금, 관계가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유시민 (이하 ‘유’) :옛날에는 많이 까불었는데, 요즘은 아주 잘해요. 그게 제일 많이 달라진 점? (웃음)


진중권 (이하 ‘진’) : 옛날에 정말 얄밉게 굴었죠. 소수정당이라고 얼마나 무시했는데.


노회찬 (이하 ‘노’) :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가까이 있으면 닮아가요. 큰일 나잖아요. 닮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쉽지 않아요.

 

세 분 다 말을 잘하시잖아요. 그 중에서 진중권 교수가 진행을 맡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진 : 비쥬얼 아닐까요? 손석희 아나운서도 비쥬얼이 뛰어나잖아요.


유 : 진행에는 비쥬얼이 진짜 중요해요. 진 교수가 독일 가서 없는 동안 제가 했는데 비쥬얼이 딸려서 힘들더라고요.


노 :진행은 딴 사람에게 맡기고 유 작가는 대본을 잡았죠.


진 : 지금도 전체 방송의 60퍼센트를 넘는데, 진행까지 하면 유 작가가 분량의 9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거예요.

 

팟캐스트 내용이『생각해 봤어』라는 책으로 나와서 인기가 좋은데요.
 
노 : 이미 방송을 들은 사람도 있을 텐데요. 방송으로 들은 소리를 왜 또 봐, 할 수도 있겠지만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을 『생각해 봤어?』로 뽑은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정치 카페이지만 교황, 인공 지능, 진화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는데요. 넓은 의미로 정치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정치 카페이지만 교황, 인공 지능, 진화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는데요. 넓은 의미로 정치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노 : 그게 정치죠. 정치라고 하면 헬스클럽 옆방에서 10만 불을 주고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정치가 아니죠. 정치 탈락자 이야기고요. 인공 지능, 건강 보험, 세월호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게 정치입니다.

 

지식을 지혜로 옮겨야


부제가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인데요. 지식에 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 :가장 아래 있는 게 데이터이고, 이것을 처리하면 정보입니다. 정보를 연결하면 지식이 되고, 여기에 성찰을 가하면 지혜가 되는데요. 저희가 하는 건 지식을 지혜로 옮기는 일이에요.


유 : 빙고.

 

정치카페로 부르고 싶었는데 못 부른 게스트가 있었나요?

 

유 : 문재인 대표를 모시고 싶었는데, (섭외가) 잘 안 되나 봐요.


진 :박근혜 대통령도 잘 안 되죠.


유 :거기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대화가 되는 사람을 모셔야지.


노 :우리가 일부러 누구를 부르고, 일부러 안 부르는 건 없어요. 대부분 게스트는 캐스트에요. 던져진 사람입니다. 기획하는 팀에서 모셔 오면 어떤 분이든 하죠.


진 :대부분은 세월호 1주기 같이, 정치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우리가 머리를 짜낼 때가 더러는 있지만 많지는 않죠.


유 :최근에 사건 사고가 많아서 게스트 선정에 어려움이 없어요.

 

세 분이 좋은 화자이자 좋은 청자이기도 합니다. 다른 분의 말을 경청하시던데요.

 

진 : 유 작가만 좀 잘 들어주시면 될 듯합니다. 게스트 말을 끊어요.


유 : 게스트 말을 끊어야 해요. 너무 대접해주면 안 돼요. 긴장이 있어야죠. 게스트에게 끊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제대로 되거든요.

 

방송 전에 어떤 준비를 하시나요. 대본이 있나요?

 

노 : 없어요. 대본 있으면 재미 없어요.


:그러니 방송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죠.


:식사 제 때 하고 잠 매일 자는 게 준비죠.


:타임라인을 한 꼭지 준비해야 하니까 일주일 내내 고민해요. 월요일에 방송 녹음인데, 최종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정해요. 처음에는 기습적으로 하다가 골탕 먹이는 것 같아서 미리 알려드리죠.


진 :신문 많이 보죠. 주제와 관련한 기사를 많이 검색하고요.


유 :대개 그 때 가장 중요한 주제로 하니까.


노 :돌발적인 게 나오진 않아요.

 

녹음 끝나고 함께 하시는 활동 있나요?

 

노 : 없어요. 끝나고 같이 하는 건 해산. 

 

노회찬이 떠올린 2가지 데자뷰


곧 4.16인데요.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 :작년에도 그랬는데, 한편에서 슬프고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요. 그런 기분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어요. 이런 기분을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문제가 해결되면 기분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겠지만, 해결 안 되고 가니까 이 기분을 어느 정도 가져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진 : 1년이 지났는데 해결된 건 없죠. 도돌이표, 제자리걸음, 오히려 출발보다 뒤에 있는 기분도 들고요. 세월호 사건이 한국사회의 단면이죠.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할지 뻔히 답이 나와 있는데 이상하게 안 돼요.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어떻게 이거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나 생각이 들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 걱정되죠.


노 : 데자뷰라는 말이 있죠. 과거의 기억이 재현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상황인데요. 작년 4월 16일 세월호를 버리고 혼자 빠져나온 이준석 선장을 보면서 올해 4월 16일 국민들을 내버려두고 혼자 중남미로 빠져나가는 박근혜 대통령이 오버랩되는 데자뷰가 있고요. 또 하나는 그때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상황을 보면서 이게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1년만인 4월에 초대형 비리사건을 보면서 과연 이게 나라냐,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데자뷰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봤어?』 를 읽을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유 : 비쥬얼 대표인 진 교수님이 하시죠.


진 : 혼자서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사서 주변에 돌리면서 토론도 같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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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 노회찬,유시민,진중권 공저 | 웅진지식하우스
이 책의 시작은 이들이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로, 100만 다운로드를 달성하고, 청취율 1위를 놓치지 않아 팟캐스트 계의 블록버스터로 불린다. 《생각해봤어?》는 그동안 다룬 주제 중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 앞으로의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 14가지만 뽑아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녀노소, 지역불문, 세대초월,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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