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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국영 10주기를 추모하며, 팬심으로 채운 그리움의 기록- 주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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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4월 1일 홍콩으로부터 전해진 배우 장국영의 자살 소식은 전 세계 많은 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우절이었던 그 날, 거짓말 같은 죽음이었다. 1990년대 남성미 물씬 풍기는 배우들로 가득했던 홍콩영화의 전성기에 남다른 소년의 이미지로 그 어떤 배우보다 두드러진 매력을 드러냈던 장국영. 그런 그의 죽음은 제임스 딘, 리버 피닉스와 같이 젊은 날 생을 마감한 스타들의 죽음처럼 의문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모형 플라스틱 쌍권총을 가방에 넣고 다니던 소년들은 어느덧 30~40대가 되어 바쁜 일상 속에 유년 시절의 설렘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 그 시절 치기어린 소년들에게 장국영은 그리 선호되는 배우가 아니었다.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는 장국영은 동경하는 배우라기보다 오히려 질투의 대상에 가까웠다. 그것은 주성철 기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현존하는 배우가 아닌 추억으로 남은 장국영을 다시 떠올리는 이들에게 남은 감정이란 그리움뿐이다. 그의 10주기를 맞이해 주성철 기자가 써내려 간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은 그런 그리움의 결과물이자, 홍콩시네마 키드의 한 사람으로서 장국영을 기억하는 팬의 입장에서 쓴 추도사라고 할 수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과 함께 영원히 기억되는 배우의 이야기는 추억을 되새기며 간간이 터지는 웃음과 어쩔 수 없는 한숨, 아쉬움으로 이어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

책에서 ‘만모사원 선향 냄새를 맡으며 처음 집필을 생각 하셨다고 하셨는데요. 홍콩에는 자주 가시는 편인가요.

제가 워낙 홍콩을 좋아해요. 사실 전 지금도 제주도를 못 가봤는데(웃음) 홍콩을 정말 좋아해서 이제까지 출장을 포함해 대략 스무 번 정도는 간 것 같아요. 앞서 냈던 책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을 쓸 때 집중적으로 좀 더 많이 가기도 했고요. 그런데 작년 이맘 때 즈음 홍콩을 돌아보며 갑자기 장국영의 10주기라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4월 1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전까지는 늘 스쳐 보냈는데, 왠지 그 10주기라는 느낌이 남다르게 다가오더군요. 그러면서 ‘장국영’ 만으로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홍콩이나 중국본토, 일본에도 10주기에 맞춰서 장국영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고요. 우리나라도 과거 홍콩영화 전성기 시절 어느 나라 보다 많은 팬들이 있었는데 10주기 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상하잖아요. 묘하게 승부욕이 생기더라고요(웃음).

어떤 이는 그저 떠올리는 것과 글로 써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하는데요. 기자님의 경우는 어떠셨나요.

이미 한참 전에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끝났죠. 그 시절 열광했던 세대들도 이젠 나이도 먹고 직장이든 어디든 삶에 바쁜 상황이잖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물론 영화잡지 기자 일을 하고 있지만 장국영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은 취미 정도가 됐고, 그 마저도 가끔씩 들춰보는 정도였죠. 하지만 글을 쓰면서 당시의 감정이 다시 오더라고요. 알 수 없는 후회 같은 것도 들더군요.

책이 나왔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책을 쓰는 동안에는 속이 되게 후련할 거 같았어요. 뭔가 끝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책을 쓰는 동안에는 늘 장국영의 영화만 보고 음악만 들었거든요. 끝나면 정말 숙제가 끝나는 느낌으로 차와 집에 있는 CD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책이 나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지금도 계속 장국영 노래를 듣고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있어요.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것 같아요.




홍콩시네마 키드의 추억

1990년대 처음 주성철 기자의 눈길을 빼앗은 홍콩영화는 단연 무협영화였다. 그 시절 홍콩영화의 부흥이 무협영화 팬들에 의해 시작 된 만큼 그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호기심은 성룡에서 이소룡, 장철의 외팔이로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도포자락 휘날리던 무협 스타들이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칼이 아닌 권총이 들려 있었다. 많은 홍콩시네마 키드들에게 그것은 신선한 설렘으로 기억된다. 주 기자는 당시 소감을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라고 고백했다.

199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는 홍콩시네마 키드들에게는 충격이었는데요. 기자님 역시 다르지 않았을 듯 합니다.

그때는 홍콩영화 인기는 어마어마했죠. 거의 매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나 <유머 1번지>같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한국을 찾은 홍콩 스타들이 출연했고, CF도 꽤 많이 찍었고요. 더구나 같은 아시아인이다 보니까 외국 배우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성룡은 방송에서 한국말도 잘하고 늘 오면 한복 입고 와서 고아원에 선물 돈 기증하기도 하고 거의 국내 배우와 다름없었죠. 하지만 반대로 한국영화는 엄청난 침체기였어요. 지금이야 1,000만 관객 시대라고 하지만,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볼만한 한국영화가 없었죠. 그런 상황에서 홍콩영화가 국내영화를 대체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 세대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땐 그랬죠(웃음). ‘스크린’이나 ‘로드쇼’ 같은 영화잡지도 두 권씩 샀어요. 하나는 오려서 코팅한 뒤에 책받침 만드는 용으로 쓰고 하나는 보는 용으로 하려고요. 남학생들은 <영웅본색>의 영향으로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장난감 권총을 가방에 넣어 다니던 시절이었죠.

2000년 영화잡지 <키노>에서 영화기자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기자의 길을 가게 된 데는 홍콩영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죠. 아까 <영웅본색>을 말씀을 드렸는데, 그전까지 영화라는 건 제게 극장에서 즐기는 오락거리 정도였어요. 하지만 <영웅본색>을 본 이후에는 약간 달라져 있었어요. 처음으로 영화를 매체로 느끼면서 연구하고 공부해보고 싶어졌죠. 또 단지 배우를 따라하는 수준에서 영화를 볼 때 느꼈던 이상한 감정들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니까<영웅본색>이 저한테는 기자가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때부터 홍콩영화 뿐만 아니라 스필버그의 <E.T.>라든가 <구니스>, <인디애나 존스>같은 것을 통해 영화를 계보로 보고 써보고, 감독과 배우가 누군지,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 공부하게 됐죠.

하지만 그가 기자가 됐던 2000년은 이미 홍콩영화가 침체기를 걷고 있던 시절이었다. 특히나 1년 전인 1999년 영화 <성월동화>홍보 차 방한했던 장국영을 만나지 못한 것은 평생 아쉬움으로 남게 됐다. 만약 1년만 빨리 그가 기자 일을 시작했다면, 그래서 장국영과 만남이 이뤄졌다면 지금 주성철 기자가 떠오르는 추억은 더욱 풍부해졌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직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요. 기자님의 경우는 예외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잡지 기자로서 또 팬으로 살아오며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요.

홍콩과 홍콩영화배우에 대해 두 권의 책을 쓴 일 같아요. 영화잡지 기자로서 출장차 자연스럽게 홍콩을 처음 가게 됐고, 글 쓰는 일 자체가 그렇게 동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좋았죠. 이번 책 같은 경우는 다른 책과 달리 저 나름대로 어떤 자부심 같은 것이에요. 비록 중국어를 못하고 장국영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어쨌든 영화기자가 된 덕분에 성룡, 왕가위, 관금붕 등 장국영의 주변인물을 실제로 다 만날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것은 홍콩에 있는 장국영 관련 책 필자라도 영화잡지 기자라는 직업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홍콩의 필자보다 제가 더 장국영을 잘 그려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분명 팬심이 가득한 책이지만, 한편으로 그 분야에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는 것, 그 안에서 배우들을 만나고 겪은 사람으로서 쓴 책이라는 게 자부심이죠.




장국영의 영원한 팬으로 살기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끝나며 잊고 지낸 미안함 탓일까.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뒤 주성철 기자는 한동안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의혹의 실체를 찾고 또 찾았다. 죽음으로서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신을 각인시킨 장국영. 10년이 지난 지금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담담히 떠올리는 것뿐이다.

장국영의 경우는 <영웅본색>이후로는 확 떠오르는 누아르 작품이 없는 듯 한데요. 당시 홍콩영화 스타들과 비교하면 좀 다른 식으로 어필하지 않았나 싶네요.

장국영의 인기 비결은 역시 절대적인 동안(童顔)의 아름다움이죠. 그와 닮은 배우가 아마 리버 피닉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닐까 싶어요. 나름 규정을 해보자면 여전히 소년인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당연히 나이도 많고 아저씨였죠. 그런데 이상하게 장국영이나 디카프리오를 보면 늘 아이 같은 느낌이에요. 왠지 유부남의 이미지는 안 어울리고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소년 같은 이미지라고 할까요. 재미있는 건 제가 장국영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데도 불구하고 항상 동생 같은 느낌으로 다가 온다는 거예요. 거기서 멈춰진 거죠. 그 아름다움을 유지한 채로…. 더구나 죽음 이후에는 영원히 박제화 된 채로 남아있는 거고요. 다른 아시아 배우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매력이죠. 젠더(성별)를 떠난 아름다움 같은 거요.

책에서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 느낌들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배우 장국영에 대해서 언제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가 궁금하네요.

영화 <아비정전>을 봤을 때였어요. 그것은 꼭 제 평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다 하는 이야기일 거예요. 왕가위 감독의 세계에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장국영이고 장국영이 <아비정전>을 찍으면서 진짜 배우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 전 까지는 철부지, 반항아, 귀여운 바람둥이 같은 이미지였거든요. <아비정전>에서 친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있는 ‘아비’의 모습을 보면 실제 그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 것 같다는 느낌도 있어요. 배우로서도 보게 되고, 장국영이라는 개인으로서도 보게 된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2003년 4월 1일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여쭤보고 싶은데요. 기자님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다가왔나요.

그때는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격보다는 당혹감을 많이 느꼈을 거예요. 지금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가 죽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원로 스타가 죽는 느낌도 아니었고요. 그때는 사실 장국영의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되지 못한지 꽤 됐고 그래서 그가 한국을 찾은 지도 오래된, 애매한 시점이었어요. 팬들은 이미 장국영을 잊고 산지 3~4년 정도 된 상태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거죠. 아이러니 한 것은 장국영이 직전까지 죽음의 이미지와 가까운 작품들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거예요. 받아들이기 싫으면서도 뭔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충격은 충격인데 갑작스러워서 정리가 안 되는 상태였죠. 게다가 그게 또 4월 1일 만우절이었으니…. 그때는 ‘멘붕’이란 표현이 없었지만, 즉각적인 충격으로서의 멘붕이 아니라, 내 감정이 감당이 안 되는 멘붕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는 열렬하게 인터넷 자료도 찾고 의혹을 가지기도 했어요.

만약 기자님께서 지금 장국영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고 하면 첫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두 가지에요(웃음). 하나는 <영웅본색>에서 형 역할을 한 적룡을 발견하고 뛰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대체 어떤 식으로 감독이 지시를 했기에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었는지 묻고 싶어요. 책에도 사진으로 넣었는데, 시나리오만 보면 그저 ‘형을 발견하고 반갑게 뛰어간다’ 정도일 텐데 정말 좋아하면서 뛰어가는 게 느껴지거든요. 제가 장국영을 떠올렸을 때 정말 좋아하는 이미지 중 하나에요. 마찬가지로 <아비정전>의 맘보춤 추는 장면 역시 어떤 디렉팅을 받아서 그렇게 한 건지 묻고 싶어요. 너무나 명장면인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영화 현장에서는 음악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장면의 비밀로서 궁금해요. 그리고 나머지는 질문이라기보다, 팬으로서 감독이 되지 말라고 했을 거 같아요.(장국영은 죽기 전까지 <투심>이란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하려고 했다) 그의 연출 실력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감독하고 안 맞을 거 같아서예요. 그 이전에 그가 연출한 단편영화를 보면 너무 완벽주의자고 잘하는 게 보이는데 또 한편으로 너무 스스로를 소모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보였거든요. 너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봐요.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수많은 감독을 보면 좋은 감독과 착한 사람은 잘 매치가 안 되는 거 같아요. 물론 감독이 다 못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웃음). 단지 그런 성품으로는 감독을 하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말렸을 것 같아요. 물론 그 말은 더 많은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죠.

지금의 홍콩영화계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고 스케일도 훨씬 커졌다. 하지만 주성철 기자는 더 이상 장국영과 같은 배우는 나오지 못할 거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는 그런 아쉬움을 ‘비애’라고 표현했다.

“이제는 장국영 같은 배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환경이나 시대가 아니에요. 그런 영화를 만들 던 때가 지나버린 거거든요. <동사서독>을 찍을 때 왕가위 감독처럼 톱스타들을 몇 개월 씩 사막으로 데리고 가 촬영할 수 없게 됐어요. 그 때는 몇 년 스케줄이 잡힌 장국영이라도 아르헨티나까지 데리고 가서 영화를 찍을 수 있던 시절이었죠. 우리가 좋아했던 장국영의 영화들은 이제 장국영이 살아있다고 해도 만들어지지 않는 환경이 됐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더 슬픈 거죠. 그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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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주성철 저 | 흐름출판
이 책은 누구보다 홍콩영화를 사랑하고 잘 알고있는 씨네21의 주성철 기자가 지금까지 수십 차례 홍콩을 여행하며 모은 정보, 장국영이 활동하던 당시 수집한 귀한 자료와 관계자 인터뷰 그리고 장국영의 작품을 통해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기록이다. 저자는 장국영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를 고르고 하나의 키워드 안에 그의 삶, 사람, 사랑, 작품 등을 맞물려 장국영이란 인간 혹은 배우를 새롭게 보여준다. 장국영을 사랑하는 팬들은 물론 자신의 나이테에 ‘장국영’이란 이름을 새겨져 있는 3ㆍ40대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모든 영화팬들에게 그의 비밀스런 생애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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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 “달을 보고 있으면 잘못했던 일들이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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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작가는 신경숙의 소설을 두고 “느릿느릿 사소하고 아름다운 것들,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한테까지 한눈을 팔며 소요(逍遙)하듯 따라가게 만든다. 나에게 신경숙 문학의 매력은 식물이 주는 위안과도 같다”고 평했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박완서 작가의 말에 밑줄을 긋게 된다. 작가는 특별한 삶을 사는 인물만을 조명하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가장 보편적인 인간군상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림에 여백이 필요하듯 문장에 쉼표가 필요하고, 작가는 때론 사소한 일상을 담아낼 수 있게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게 소소할 수 있을까, 싶은 평범한 사람의 사소한 일상의 흔적이다. 작가가 문득 떠오른 유머가 샘솟았던 순간들을 기억해내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평소 독자들로부터 “신경숙 소설은 읽고 나면 며칠은 마음이 가라앉아 평상심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 즐거운 이야기는 쓸 계획이 없냐”며 애정 어린 타박을 들었던 신경숙 작가. 그녀가 작정하고 펜을 든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원고지 스무 장 내외의 손바닥만한 글 26편을 모은 단편집, 그동안 작품 속 쪽지처럼 숨겨뒀던 유머를 활짝 열어 젖혔다. 물론 강박의 어조는 없다. 작가 특유의 조심스러운 속삭임이 독자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무방비 상태였던 독자는 간지러움을 타듯, 피식 웃을 수밖에 없다.

작품에 들어가면 알람을 맞춰놓고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 신경숙 작가지만, 이번 소설은 ‘어느 한 순간’에 쓰여졌다. 신경숙 작가는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새벽의 한 순간, 여행지에서의 한 순간, 일상을 꾸려가는 한 순간, 책을 읽는 한 순간에 쓰게 된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머물러 있던 어떤 순간들의 반짝임이 스물여섯 번 모인 셈”이라고 말했다. 순간에 의해,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들썩임 없이 써내려 간 짧은 이야기들에는 입꼬리를 올리는 재미는 기본, 싱그러운 통찰력이 부록으로 따라 붙었다.




달을 보고 있으면 잘못했던 일들이 떠올라요

“지난 주말에 사인회를 다녀왔어요. 소설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읽고 오신 독자 분들도 많더라고요. 감사했죠. 요즘은 사인만 해주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누려고 해요. 독자 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하고 제가 질문을 하기도 하죠. 이번에 고등학생 독자 분이 여럿 왔는데, 참 재밌는 일도 많을 텐데 여기까지 와주고…. 괜스레 더 고맙더라고요(웃음).”

첫 질문대신 독자들의 이야기를 꺼내 놓자, 신경숙 작가는 수다스러워졌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고 있는 한 독자는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속 세 번째 이야기 「하느님의 구두」의 마지막 글귀 밑에 사인을 해달라고 청했다며, 31페이지를 펴 작은 목소리로 읊었다. “네가 고통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한 것들은 저절로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고 쓸모 있는 것이 될 거야. 그걸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미래에 네가 그리는 그림이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게, 쓸모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구두」는 실제 재수를 시작한 신경숙 작가의 조카에게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영성에 대해 기록한 책 『하느님의 구두』를 소개하는 편지 글이다.

“젊은 친구들이 「하느님의 구두」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마지막 글귀를 직접 써달라는 친구도 많았고, 30대 독자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에 나오는 브레히트의 시 ‘나의 어머니’ 이야기도 많이 하고…. 조금 나이가 드신 분들은 「우리가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인상 깊었다고 했어요. 나이가 들면 이 말 점점 못 듣잖아요. 예쁘다는 말(웃음). 가장 재밌었던 반응은 ‘선생님이 어딘가에 유머를 감춰 놓았다고 하던데 나는 못 발견했다’는 말이었어요. 이 분이 나를 웃기려고 하는 소린가? 싶었어요(웃음).”

명랑한 소설집을 펴내서 일까, 신경숙 작가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걸렸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은 폐간된 서평잡지에 2008년 1월부터 2년여간 매달 연재한 작품들을 모은 소품집. 신경숙 작가는 ‘한 달 동안 날 가장 웃게 했던 일, 가장 흐뭇하게 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써내려 갔고,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울적했던 마음들도 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마침표를 찍고 일어났어요. 소설을 쓰는 시간들이 행복했어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익명의 사람들의 일상에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저한테 더 귀했어요. 신문, 방송 뉴스를 통해 너무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서 ‘내가 인간인 게 참 싫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쓸 때는 반대였어요. 언제나 조용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빛나는 순간순간을 발견할 때, ‘내가 인간이라서 참 좋구나’ 싶은 기쁨을 느꼈어요.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듯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이 있어요.”

화자, 시점 등은 바뀌었지만,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작가 신경숙이 직접 들은 이야기거나 함께 시간을 나눴던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다.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상상해 붙여 넣지도, 꾸미지도 않았다. 작가 개인이 느낀 그대로를 담담하게 그러나 위트 있게 담아냈다. 연재 요청이 들어와서 쓰게 된 글이지만, 언젠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글을 써보려고 했던 신경숙 작가. 어떤 달은 쓸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행복한 고민도 했다고 한다.

“평소에 초저녁 시간에 동네 산책을 자주하는 편인데 그 시간이 참 좋아요. 생각들도 많이 정리되고. 동네가 한적하니까 자주 하늘을 쳐다보게 되더라고요. 언젠가 늦은 밤이었던 거 같은데, 달이 떠있더라고요. 누구나 걷다가 하늘에 달이 떠 있으면 가만히 보게 되잖아요. 어릴 때 학교랑 집이 십 리쯤 떨어진 곳이라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 때 혼자 가는 일이 많았어요. 그 때는 자연의 이치를 잘 모르니까, 하늘의 달이 나를 막 따라오는 거 같았어요(웃음). 내가 막 뛰면 달도 뛰어 오는 거 같고…. 그게 너무 신기해서 장마를 피하려고 쌓아놓은 모래집 뒤에 숨어보기도 했어요. 학교 행사가 있어 늦게 끝날 때면 혼자 가는 게 무서워서 ‘달이랑 함께 있다’고 주문을 외우기도 했고. 우습죠? 달에 대한, 그런 즐거운 기억이 있어요.”

신경숙 작가. 달을 보면 마치 거울 같단다. 달을 보고 있으면 잘못했던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이 떠오르는지, 어느 순간순간 힘들어서 내팽개친 일도 생각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내가 연락할 차례인데 못했던 인연들도 기억난다. 그래서 달을 오래도록 보게 되는 날이면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지금 달 떴어. 하늘 좀 봐봐’라고. “달을 보고 있으면 계절도 잘 느끼게 되고, 달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달 속에 그림도 있어요. 달을 보면 생각이 정리되는 그런 순간들을 많이 만나요.”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26편 소설들은 ‘초승달에게, 반달에게, 보름달에게, 그뭄달에게’라는 타이틀을 달고 4부로 나눠졌다. 작가가 어떤 것을 발견했거나, 시작의 느낌을 주는 이야기는 초승달에게 전해졌고, 인생의 중반에서 마주칠 법한 이야기는 반달에게, 기운이 다 차고 기우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는 그믐달에게 속삭였다. 신경숙 작가는 “결국 다 비슷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달의 차고 기움이 배어난다.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책, 읽어보세요

작가라고 반드시 특별한 일상을 누리지는 않겠지만, 이번 소설이 일상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니 만큼 작가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문학 페스티벌’을 다녀온 신경숙 작가는 전작 『엄마를 부탁해』가 세계 30여개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해외 방문이 잦았다. 『엄마를 부탁해』는 최근 러시아, 인도에서 출간됐고 곧 세르비아, 루마니아 독자들도 만날 예정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I will be right there』를 제목으로 내년 4월, 미국 독자들에게 선보일 계획이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요즘은 이 책에 관련된 일정들을 소화하고 있어요. 틈틈이 새 작품에 관한 자료 조사도 하고 있고요. 마음으로 삭혀 놓아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그런 것도 정리하고, 번역자랑 이야기도 하고, 시시때때 오는 편지에 답장을 쓰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래요. 작가라고 하면 보통들, 특이한 일상을 보낼 거라 생각하시는 데 기본적으로 다 비슷하죠 뭐. 다만 작품에 들어가면 혼자 있는 시간들을 많이 갖게 되죠. 소설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진행될 수 없어요.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자기 시간이 확보돼야만 나오는 노동에 가까운 작업이니까요.”

신경숙 작가는 올해 초, 문학계간지 <문학동네> 2013 봄호에 중편소설 「봉인된 시간」을 발표했다. 「봉인된 시간」은 고국으로부터 버림 받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측근이었던 육군 현역장교와 시인인 그의 아내의 30년 세월을 다룬 작품으로, 신경숙 작가는 “이 작품을 완성해야만, 다음 장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소설 집필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지만 대부분의 일상은 보통 사람들과 같아요. 대개 자기 일상에 대해 사소하고, 귀하지 않게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내가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시간인지,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요즘 다 그렇잖아요. 잘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많고, 세상은 잘 굴러가는 데 ‘난 왜 이렇지’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잖아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지금이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라고요.”

신경숙 작가는 독자와의 만남을 누구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소설가다. 이번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펴내고는 조금 더 특별한 만남을 생각해보았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르지 않고, 자신도 독자의 한 사람이 되어 그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눠보는 것.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읽다가, ‘이거 내 이야기 같은데?’라고 생각한 독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싶다.

“열아홉에서 스물이 될 때, 개인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 힘든 일이 있었어요. 내가 집 밖을 나가질 않으니까, 어느 날 우리 형제 중 한 명이 책을 사줬어요. 삼성출판사에서 나왔던 한국문학전집이었는데 60권짜리였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읽지도 못할 엄청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인쇄된 책이었죠. 집 안 창문에 도화지를 붙여서 늘 밤처럼 해놓고, 눈만 뜨면 책을 읽었어요. 한 3개월 동안, 누구의 작품을 읽겠다 그런 게 없었던 터라, 그냥 1권부터 순서대로 읽었어요. 당시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껴안고 있었는데,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네가 뭐 어떤데? 이 사람을 봐봐’라고 말을 걸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그 책들이 내게 텃밭이 되어준 것 같아요. 다 읽고 나니까 세상에 나올 힘이 생겼고 나를 믿게 됐어요. 내가 든든해졌어요.”

누군가 신경숙 작가에게 추천한 독서법이 있다. 계절마다 한 분야를 골라 기초들을 섭렵해보는 것. 봄에서 여름이 될 때까지는 음악에 관한 기초 도서를 읽고, 여름이 되면 미술 분야의 책들을 보고. 신경숙 작가는 언젠가부터 소설집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미술 책을 펼쳐놓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요즘 힐링에 대한 책들을 많이 보시잖아요. 그만큼 고독하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그게 과연 진정한 치유인가 아쉬울 때도 있어요. 뭔가 자기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그런 책들을 보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다음 생애는 목수, 무용가처럼 몸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011년 신경숙 작가는 북 투어 첫 지역으로 스페인을 방문했다. 3박 4일동안 17개 언론 매체와 인터뷰를 할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기억에 남는 많은 일이 있지만, 어느 한 광장에서 본 연인의 풍경이 인상 깊었다.

“거리를 걷다가 예쁜 것만 보면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거든요(웃음). 어떤 남녀가 등을 대고 앉아 있는데 무척 아름다워 보였어요. 티티카카 호수 알지요?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호수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노족이 살고 있는 섬이 있대요. 우노족은 티티카카 호수에서 자라나는 갈대를 짚단으로 쌓아서 집을 만들어 사는데, 밤이 되면 물결이 출렁이니까 서로 의지하려고 등을 대고 잔대요. 그 이야기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서, 누군가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친근감이 느껴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연인을 오랫동안 쳐다 봤어요. 그렇게 몇 분을 봤나?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니 서로 자기의 휴대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는 거예요. 등을 기대고 있지만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거였죠. 그걸 보면서 우리 시대의 풍경이 이렇구나, 싶더라고요.”

누군가와 연결이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 카페, 지하철, 거리에서도 동행하는 사람이 있지만 또 다른 연결고리를 찾는 사람들을 보며, 작가 신경숙은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가끔은 사람들과 연락이 안 닿는 상황도 좋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도 해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해보고. 우리는 순간순간 연결이 너무 잘 되니까 점점 생각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심심할 때가 없는 현대인을 보며, 신경숙은 어떤 문학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까,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집필할 때는 새벽 3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지만 나중에는 알람 울리기 3분 전에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는 신경숙 작가. 요즘은 새벽 4시쯤 일어나 아침 8시까지 책도 보고 일도 하다가,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요가 학원에 간다. 10년 전부터 꾸준히 요가를 하고 있는데 ‘요가’를 주제로 수다를 떨자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마흔이 됐을 때 건강이 너무 안 좋고 어깨가 무너질 거 같았는데, 누군가 요가를 권해줬어요. 저는 하자마자 효과를 봤어요. 뭐랄까, 어깨 아래에서부터 무릎까지 힘이 생겼다고 할까요? 요즘 여성이나 남성이나 최대 관심사가 슬림해지는 거잖아요. 요가 선생님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요가는 다이어트와 별개인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에게 요가를 자주 추천하고는 하는데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요(웃음). 특별히 시간을 내서 요가를 한다기 보다, 요가를 한 끼 식사라고 생각하고 하면 참 좋은데 말이에요.”

10년 요가의 흔적일까, 신경숙 작가는 중년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건강미가 있었다. 언젠가 작가는 다음 생애가 주어진다면 “목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손재주가 너무 없어서 손으로 무엇을 만드는 직업을 경험해보고 싶다”며, 신경숙 작가는 천재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피나>이야기를 꺼냈다. “뉴욕에서 본 영화인데, 주인공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사람 자체가 필요한 것만 딱 남은 나무 같은 느낌이었어요. 저 사람도 몸을 많이 쓰는 사람이니, 나도 이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생각했어요.”목수가 된 작가, 무용수가 된 작가. 선뜻 상상이 되지 않지만, 글재주가 아닌 손재주를 꿈꾸는 작가의 얼굴은 다소 설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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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신경숙 저 | 문학동네
작가 신경숙이 낮은 목소리로 풀어놓는 짧은 소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작가가 다른 어떤 지인도 아닌 우리에게 보내는 꼭 그 마음이다. 작가의 어느 한순간에 스며든 어떤 마음. 모르는 이의 뜬금없는 안부인사가 지친 일상을 잠시 보듬듯, 그렇게 우리를 쓰다듬는 손길. 이 소품집은 결국 더운 손끝의 작가 신경숙이 들려주는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이다. 평범하고 소소하다 여겼던 풍경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내는 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짧고 경쾌한 리듬을 타고 독자들의 입꼬리에 슬몃, 웃음을 어리게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밴드로 기억되고 싶어요 - 스몰 오(Small O)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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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 사이드 킥의 인터뷰를 2012년 8월에 진행했으니, 멤버 중 세 명은 약 8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알려져 있다시피, 스몰 오에는 이스턴 사이드 킥의 멤버 고한결, 배상환, 오주환이 속해있다.) 그리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인상부터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멤버들과 모여 새로운 음악을 하기 때문일까. 홍대 근처의 한 카페에서 좀 더 여유로워진 분위기의 그들을 만났다. 그 여유가 분위기뿐만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그룹 이름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던데요.

주환 : 처음에는 저 혼자서 포크 밴드를 만들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이름을 뭐로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방구석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보이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머릿속에서 붕 뜨는 게 스몰 오라는 이름이었어요. 아. 이거다 싶었어요. 마침 좀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이미지의 이름을 찾고 있었거든요.

멤버 분들은 팀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원 : 훌륭하죠! 맘에 들어요.
한결 : 저는 그다지…
상환 : 이런 얘기 꺼내도 되나?
주환 : 말해봐 뭔데?
상환 : 저는 솔직히 밴드 이름이 뭔지도 몰랐어요. 첫 공연 날 처음 알았거든요.

혹시 스몰오의 활동을 두고 이스턴 사이드 킥(이하 이사킥)의 다른 멤버들[고명철(드럼)/류인혁(기타)]이 섭섭해 하지는 않나요?

주환 : 지원이가 인혁이랑 많이 친하잖아. 어때?
지원 : 그런 얘기는 해본 적이 없는데(웃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아무래도 이사킥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네요. 스몰오와 이사킥은 이미지가 꽤나 상반되는 느낌이 있는데요.

주환 : 어떻게든 변화를 주려고 해요. 애티튜드도 달라요. 이사킥 때는 나쁜 남자스타일이죠. 시크하고 무심한. 포크는 아무래도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둥글둥글한 모습이 어울려요.

어떤 게 진짜 모습인가요?

주환 : 다 제 모습이에요. 음악에 따라 모드 전환이 바뀌는 것일 뿐이에요. 물론 무대 위에서 그렇다는 얘기고, 일상에서는 따뜻하죠. (웃음)
지원 : 일상에서 시크하면 그것도 큰일이에요.
주환 : 맞아요. 모드 전환이라는 게 시차를 두고 해야 하는데, 조금 있다가 스몰 오 공연이랑 이사킥 공연이랑 한 시간 간격으로 있거든요. 이럴 때는 모드 전환이 좀 힘들어요.

다른 멤버들은 어떤가요?

상환 : 일단 스몰 오 때는 가죽 재킷을 안 입어요.(웃음) 이사킥 때는 입고 스몰오 때는 벗고.
주환 : 상환이 형 스몰 오 때는 노래도 해요.
상환 : 바지도 헐렁한 거 입고.
한결 : 마인드 차이보다도 관객들 반응이 다르니 거기서 오가는데 중점을 둬야할 것 같아요.


멤버 중 이지원(드럼) 님과 박지혜(키보드, 아코디언, 플루트) 님은 어떻게 합류하게 된 건가요? 원래 알고 지내던 관계였나요?

지혜 : 저는 원래 혼자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제 공연을 본 오빠들이 같이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죠. 저도 나중에 오빠들 공연을 봤는데, 중간 멘트도 좋았고 성향도 비슷하게 보였어요. 사회를 바라보는 눈 같은 것도 그렇고요.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라면?

한결 : 좌파에요 좌파.
지혜 : 꼭 그런 건 아니고(웃음) 속는 거 싫고 무시당하는 거 싫고 그래요.
지원 : 그래서 뭘 준비하고 있죠?
주환 : 지혜는 지금 변호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로스쿨 다니고 있으니 인재죠(웃음) 로스쿨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밴드 활동에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법적인 보호도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든든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이지원 님도 수염을 기르고 계신데. 이번에도 멤버 모집 요건이 ‘수염 기르는 남자’가 된 건가요?

주환 : (웃음)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 건 아니에요. 어떻게 모이다보니 다들 자연스럽게 수염을 기르고 있더라고요.

가사가 난해한 편이에요. 「까마귀」의 가사는 어떤 내용인가요?

주환 : 당연히 제가 생각한 의미도 있지만, 꺼내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제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는 그 사람 이야기로 해석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사실 전체적으로 「순환선의 풍경」만 빼고 모든 가사가 다 그래요. ‘어떤 노래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말해서 굳어지는 그런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해석을 빼고 이미지를 말할게요. 「까마귀」 같은 경우 성경에서 모티브를 따온 곡이에요.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걸어가는 그런 이미지를 담았어요. 김연수 작가가 『꾿빠이 이상』이라는 소설에서 쓴 ‘믿지 않으면 가짜가 되고, 믿으면 진짜가 된다’는 그런 의미도 넣었고요.


이전의 이사킥 인터뷰 때는 가사가 함축적이라 어려움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요.

주환 : 스몰 오의 가사는 아무래도 그거보다는 짧으니까요. (웃음)


이사킥에서는 한결 님이 주축으로 작사 및 작곡을 하고 계신데, 한결 님은 스몰 오의 가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한결 : 제 방식과 굉장히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저는 가사에 풍경을 주로 담는 스타일이거든요. 여기에는 뭐가 있고 저기에는 뭐가 있고 이런 식으로. 그런데 스몰 오는 가사의 대부분이 은유에요. 그러니 주환 형이 제가 쓴 가사 부를 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웃음)

박자가 신기한데요. 어떻게 작곡이 된 건가요?

주환 : (놀라며) 잘 들으셨네요! 이거 캐치하기가 쉽지 않은데. 처음엔 완전 길었다가 나중엔 조금 길었다가 후로 가면 점점 짧아졌다가 그래요.
지원 : 템포가 다른 거지 않나?
주환 : 템포에요 템포. 박자는 똑같아요. 템포가 다른 거예요.
지원 : 공식적으로는 템포가 다른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보통은 템포와 리듬, 박자를 혼용해서 쓰니까요.

주환 님이 대부분 작곡을 했는데, 편곡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주환 : 멜로디나 코드 진행을 써놓으면 다 같이 모여서 편곡을 하고 의견을 나누고 그래요. 입으로 부르면서 멜로디를 찾기도 하고요. 대부분 노래에서 가사가 붙기 전까지 기본적인 틀은 그렇게 나오는 것 같아요.

영감은 어떤 방법으로 얻으세요?

주환 : 예를 들어서, 꿈을 꾼다고 생각해보세요. 꿈이 굉장히 기묘하잖아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나오고 세상이 왜곡되기도 하고. 그런 이미지가 꿈에 나올 때는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녹음을 해요. 일어나서 5분만 있으면 다 까먹거든요.
아니면 다른 음악을 듣다가 다른 멜로디가 떠올라 캐치할 때도 있어요. 멤버들끼리 연주하다가 떠오를 때도 있고. 요즘은 한결이가 하는 방식을 따라해 보기도 해요. 이 친구는 기타를 치면서 멜로디를 만들거든요.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려고 노력중이에요.


「Fisher and another father」에 대한 곡 설명도 부탁드릴게요.

주환 : 「Fisher and another father」는 추운 겨울의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눈이 있는 곳에 빙하가 떠다니고, 삼나무 숲이 있고 이런 이미지들. 내용면으로는 사회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세상과 멀어지게 된 소년의 심정을 그린 곡이에요.

밴드 내에서도 곡에 대한 느낌 공유를 많이 하는 편인가요?

지혜 : (주환)오빠가 곡을 가져오면 ‘이렇게 저렇게 쳐봐’하면서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게 아니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이야기해요. ‘여기는 별이 쏟아지는 느낌으로 쳐봐’ 뭐 이런 식으로.
한결 : 미쳐버리죠.
지혜 : 그러면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연주하죠. 의사소통을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지원 : 처음에는 짜증도 났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는 거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주 다투거나 하진 않나요?

지원 : 티격태격은 하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죠. 얘기를 많이 하려고 하면서 부딪히는 거니까요.
지혜 : 성격에 담아두는 것보다는 바로 얘기해서 풀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여성 멤버를 받으며 달라진 점은 있나요?

한결 :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어요.
상환 : 음악도 달라졌지만 아무래도 태도도 달라지죠. 이전에 ‘너 장난하냐’라고 말할 일이 있었다면, 이제는 (하이 톤으로) ‘너 왜 그래’ 이런 식으로 바뀌었죠.
주환 : 음담패설을 아무래도 못 하게 되죠.
지혜 : 이사킥에서는 많이 하나보지?
주환 : 좀 했지 (웃음) / 한결 : 많이 했지 (웃음)

「코끼리」는 곡 안에서 국면전환이 잦던데요.

주환 :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제가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해요. 음악을 들으면 굉장히 서사적이잖아요 파트1, 2 이런 식으로. 근데 이런 걸 EP에서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 곡에 담았죠.

그렇다면 나중에는 그런 앨범을 낼 생각도 있으신 건가요?

주환 : 사실 그렇게 해보고도 싶지만 온전하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곡이 길어지게 되면 듣는 사람들도 부담을 느낄 것 같고. 아무래도 걱정이 되죠.
지원 : 그래서 필요하다면 한 두 트랙에서 천천히 해보려고 해요.

싱글 「That will fall」은 경고성 메시지에 비해 곡이 굉장히 밝고 예쁘다고 느껴지는데요.

주환 : 「코끼리」랑 「That will fall」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어떻게 보면 처음 스몰 오를 구상했을 때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워요. 사람들이 곡을 들으며 순수하게 흥겨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처럼 속뜻 있는 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그냥 들어도 좋고, 속뜻을 알고 들어도 좋은 곡이라고 생각해요.

이미지와 메시지 중 어떤 걸 더 중요시하나요?

주환 : 둘 다 중요하죠. 이미지만 있고 메시지가 없다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생각해요. 작은 거라도 어떻게든 메시지를 부여하려고 해요.

맨 처음 ‘Fall-’하는 부분은 몇 개의 목소리가 들어간 건가요? 안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목욕탕 사운드처럼 ‘붕 뜬’ 느낌인데.

주환 : 그 부분에서 멤버들 목소리가 다 들어가요. 아무래도 공간감이 중요한 노래이다 보니 붕 뜬 소리가 나죠.


라이브가 힘들지 않나요?

상환 : 전 정말 너무 힘들어요. (웃음) 저는 노래를 처음 해봐요.
지원 : 원래 리듬파트들은 리듬을 치면서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러요. 생각만 하다가 실제로 하려니까 안 되는 거죠.
상환 : 그렇게 리듬을 쳐왔는데 멜로디를 부르려니까 어려워요. 제 목소리를 스스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요.

일전에 주환 씨는 플릿 폭시스와 핑크 플로이드를 합친 듯한 음악을 하고 싶다 하신 적이 있는데, 스몰오가 그 결과일까요?

주환 : 그렇게 보이나요? 그렇다면 좋을 것 같네요. (웃음)

녹음하면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거나 가장 어려웠던 트랙은 어떤 곡인가요?

주환 : 다 힘들었어요. 녹음이 저희 첫 녹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시간도 짧은데 녹음은 파트별로 하나씩 다 해야 하고, 그걸 또 믹싱하고 해야 하니까 힘들었죠.

힘들게 녹음을 하셨는데, 결과물인 앨범에 대한 만족도는 어떠세요?

지원 : 사운드가 정말 잘 나온 거 같아요. 사실 작업이 길어지니까 지겨운 마음도 컸었어요. 제 파트를 부분 부분 너무 많이 듣게 되니까요. 스스로를 위해서 앨범이 나오고도 한참동안 우리 음악을 못 들었어요. 제가 먼저 지겨워져버리면 안 되니까요. 한참 지나고 차타면서 우연히 듣는데 정말 좋은 거예요. 사운드를 잡아주신 분들도 잘 해주셨고 형도 노력을 많이 했죠. 만족합니다.
상환 : 좋아요. 좋은데, 에너지는 라이브가 낫고 깔끔한 맛은 앨범이 낫고 그런 건 있죠. 개인적인 취향은 화사한 음악, 새가 지저귀고 이런 거 보다는 진흙탕 같은 음악을 더 좋아하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앨범보다는 라이브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지혜 : 저는 녹음된 곡을 들으면 어색한 느낌이 있어요. 스몰 오의 사운드도 중요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자연스러운 게 좋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스몰 오는 라이브가 더 어울리는 밴드 같아요. 앨범 사운드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앨범은 약간 어디 여행을 가면 여행객들을 위해 내놓는 메뉴 같은? 그런 정돈된 느낌이에요. 깔끔하게 내놓은 느낌. 어색한 느낌은 있죠.
상환 : 제 말이 그 말이었어요.
한결 : 저는 개인적으로 즉흥적이지 않아요. 곡을 쓰는 면에 있어서 밥 먹고 일하듯 정자세로 녹음을 하고 확실한 것만 녹음을 하는데 이 형은 굉장히 즉흥적이에요. 똑같은 걸 다시 치라고 그러고 이펙터 놉을 1만 내려도 다시 쳐보라 주문하고 그래요. 0.5만 내려도 다시 쳐보라 그러고. 할아버지처럼 쳐보라 그러고. 노인처럼 쳐보라 그러고.
지원 : 근데 이게 맞는 거 같아요. 이 밴드에는 이런 방식이 어울려요.

성토의 장이 되었네요.

주환 : 이거 혼나는 느낌인데? (웃음)
지혜 : 이런 얘기는 처음 해보는 거 같아요.
주환 : 어쨌든 기한 내에 이뤄진 밴드의 첫 녹음이면서 셀프 프로듀싱임을 감안하면 어쨌든 정말 잘 된 것 같아요. 분명 아쉬운 점은 있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1집을 더 잘 만들 수 있겠죠.

1집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주환 :지원이가 군대 가기 전에 해야죠.

1집도 이런 느낌의 음악이 될까요?

주환 : 그럴 것 같아요. 다만 보다 여러 곳에서 영향을 받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사킥은 한결 씨가, 스몰오는 주환 씨가, 에이틴그램은 인혁 씨가 중심을 잡고 있는데요. 혹시 상환 씨도 다른 밴드 계획이 있으신가요?

상환 : 이거 되게 속마음인데. 옛날에는 그렇게도 생각했었어요. 내가 이거저거 많이 하고 그런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그건 아닌 거 같아요. 한 방향으로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것 같아요. 밴드는 어떻게 보면 가족이에요. 같은 가족인데 아버지가 두 집 살림, 어머니가 둘 이러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이사킥 인터뷰 때에도 했던 질문인데요. 스몰오는 어떤 밴드로 기억되고 싶나요?

주환 : 음… 어려운데?
지원 : 저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그런 밴드!
지혜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인터뷰 : 김반야, 신현태, 여인협, 이수호
사진 : 이한수
정리 : 여인협

글/ 여인협(lunariani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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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 디자이너, 멤버들을 패션쇼에 올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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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고난 천재 디자이너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로 여유롭게 공부하지도 못했다. 학창시절에는 숫기 없는 내성적인 성격에 공부도 특별하게 잘하지 못했다. 디자이너가 되어서도 남들과 잘 소통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에는 늘 행운이 따라 주었고, 행운은 사람이라는 소중한 보너스를 나에게 선물했다. (p.8)

한글 패션, 김연아의 스케이팅 의상, <무한도전>멤버들의 패션쇼, 동그란 안경. 디자이너 이상봉을 기억하는 대중들의 시선은 무척 친근하다. 언제나 화려한 무대에서 모델들을 지휘하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이지만, 이상봉은 “디자이너는 고독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운명이 아닌 ‘우연’으로 패션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이상봉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았다.




연극배우의 꿈을 버리고 택한 패션디자이너

언제나 평범하고 조용했던 아이 이상봉. 어디를 가도 눈에 띄지 않았던 소년 이상봉은 스무 살이 되던 해, 연극의 꿈을 열병처럼 앓았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입을 여는 대신, 연필을 꺼내 글을 썼던 소년이었지만 사람들과 몸을 섞여가며 무대에 오르는 짜릿함을 알게 된 후, 그의 머릿속과 마음은 오로지 연극을 탐닉하는 일에만 집중됐다.

“한두 해가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연극에 청춘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는데 연극을 알게 된 후 달라진 거죠. 그런데 꿈을 향해 가기에는 현실적인 조건, 상황들이 눈에 보였어요. ‘배고픈 연극배우의 낭만’은 사치였던 거죠. 대학 때까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문학과 미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늘 존재감이 작은 학생이었고 옷에도 관심이 없었죠. 20대 때 꾸는 꿈과 10대의 꿈은 다르잖아요. 연극을 포기한 후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 혼자만 꿈을 향해 달려갈 순 없었어요.”

한번 무대에 서면 그 감동 때문에 영원히 무대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연극을 잊기 위해 차선을 택했고, 친구의 ‘먹고 살만하다’는 한 마디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국제복장학원에 다니게 됐다. 평생 패션에 대한 관심을 한 번도 갖지 않았던 이상봉이었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옷과 씨름하며 하루 종일 매달렸다. 고급 과정인 패션디자인연구원 과정이 신설되며 이상봉은 패션에 눈을 떴다.

“요즘 청소년들은 거대한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포부로 꿈을 말하잖아요. 제가 패션을 시작할 때는 그냥 수선집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직업적으로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니 어렵게 학원에 들어갔죠. 학원에 다닐 적에는 하루 종일 바느질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 때만 해도 한국은 패션 불모지였지만 패션디자인연구원의 학생들과 교수들의 열정은 대단했어요. 패션디자인연구원과 고 최경자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이상봉은 없었을 거예요.”

이상봉 디자이너는 학원을 졸업하고 기성복 회사에 들어가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1985년에 브랜드를 갖게 됐다. 명동 제일백화점에 ‘이상봉 부티크’라는 이름으로 매장을 열었을 때, 이상봉은 그 때의 벅찬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 중앙디자이너클럽에서 활동하다 1993년 패션디자이너그룹인 SFAA에 가입하면서 첫 컬렉션에 참가하게 됐다. 당시 이상봉은 패션쇼 테마였던 ‘탄생’을 표현하기 위해 모델의 머리를 삭발해 하늘 천(天), 땅 지(地) 자를 새겼고,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렸다. 그 때부터 파격적인 퍼포먼스 패션쇼는 이상봉의 상징이 됐고, 1997년에 처음 참가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을 비롯해 현재까지 150회가 넘는 국내외 패션쇼를 진행했다. 이제 이상봉에게 패션쇼는 익숙한 일상이자 풍경이지만, 그는 여전히 패션쇼를 앞두고 악몽을 꾼다.

“때가 되면 컬렉션 악몽을 꿔요(웃음). 33년 동안 디자이너 길을 걸어왔지만 패션쇼는 늘 떨리는 순간이죠. 부족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정말 많은 분들이 행운을 만들어줬기 때문이에요. 저는 늘 37살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37살이 됐을 때 더 이상 나이를 먹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은퇴하기 전까지 37살로 살기로 결심했어요(웃음). 3과 7을 더한 수의 끝자리인 ‘제로’ 즉 무(無)의 상태가 좋아요. 그래서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언제나 ‘37’이라고 답해요.”

이상봉은 지금의 성공을 말할 때, 언제나 “운이 좋았다. 좋은 사람들 덕분이었다”라고 말한다. 다만, 그의 집념과 절실했던 마음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80년대 처음으로 파리를 갔을 때, 패션을 어떤 예술 그 이상의 것으로 여기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패션이 가지고 있는 위상이 파리에서는 30년 전이었던 거죠. 80년대 후반까지 세계 패션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는 여전히 비주류였지만 늘 ‘1% 가능성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이상봉의 트레이드마크 한글패션ㆍ<무한도전>패션쇼

디자이너 이상봉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한글패션’이다. 한글을 이용한 이상봉의 패션은 그를 대중적인 디자이너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했다. 한글 스타일을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외국에서 패션쇼를 열며,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이상봉은 어느 날, 지인인 장사익, 임옥상 선생으로부터 받은 자필편지를 보면서 한글을 패션에 응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 결국 두 사람의 동의를 얻어 2006년 2월, 파리 컬렉션에 처음으로 ‘한글’이 들어간 패션을 선보였다. 반응은 뜨거웠다. 이상봉의 한글 패션쇼는 파리 일간지인 <르 파리지엥> 1면에 소개됐고 해외 언론의 인터뷰가 쏟아졌다. 이후 서울에서는 ‘한글, 달빛 위를 걷다’를 타이틀로 한 한글 패션 전시회를 열었다.

“한글 스태프들은 많이 반대했어요. 낯선 작업이었고 실패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외국 친구들의 반응이 좋았고 용기를 얻어 무대에 세웠죠. 2006년부터 한글 작업은 계속하고 있어요. 이제 제 트레이드마크가 됐죠. 김연아, 린제이 로한, 쥘리에트 비노슈 등 세계적인 스타들에게도 한글 옷을 선물할 수 있었고요. 올해 한글날이 22년 만에 다시 법정 공휴일로 정해졌잖아요. 저에겐 더욱 큰 의미죠.”

2006년 11월, 이상봉 디자이너가 출연한 <무한도전>‘슈퍼모델 특집’ 편도 그에게 있어 소중한 경험이자, 행운이었다. 당시 이상봉은 ‘2007년 봄/여름 서울 컬렉션’ 무대에 <무한도전>멤버들을 세워달라는 제작진의 제안에 많이 망설였다. 멤버들과 전문 모델을 같이 무대에 올리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았기 때문. 더욱이 디자이너에게 컬렉션은 1년 농사의 반에 해당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봉은 ‘평균 이하 대한민국 남자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에 도전한다’는 <무한도전>의 콘셉트가 마음에 들어 제안을 응했다.

“홍록기 씨나 구준협, 박미경 씨 등 많은 연예인들이 제 무대에 섰지만, 개그맨 분들이 단체로 오르는 건 처음이었어요. 막상 준비에 들어가 보니 좀 힘들긴 하더라고요(웃음). 키가 크면 비주얼이 좀 약하고 비주얼이 되면 키가 작고. 단연 돋보인 멤버는 유재석 씨였어요. 완벽한 몸매 라인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멤버와는 달리 두 번이나 무대에 섰죠. 한글패션의 대중화는 무도 6인방의 공이 가장 컸어요. 지금도 김태호 PD와 멤버 분들에게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상봉에게 <무한도전>출연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올려줌과 동시에 고객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이상봉은 “멤버들의 끈끈한 우정을 보면서 동료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새삼 느끼게 됐다”며, “내성적인 내가 외향적으로 바뀌게 되는 동기를 가져다 준 작업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년을 앞서가는 디자이너, 여전히 행복하다

“디자이너들은 1년을 앞서가잖아요. 예전에는 6개월을 앞서 살았는데 이제는 한 해를 앞서 준비해요. 올해 봄에 열린 F/W 뉴욕 컬렉션이 끝나면, 내년의 봄, 여름을 어떨까, 자연스럽게 생각이 되는 거죠. 점점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디자이너는 바람처럼, 물처럼 빠르게 흔들리되 본질은 잃지 않아야죠.”

가끔은 보통 사람들과 함께 템포를 맞추고 싶진 않을까? 물으니, 이상봉은 “한 해를 앞서갈 뿐 계절은 함께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쇼를 마치고, 혼자만의 휴식을 가질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이상봉. 그는 2011년 MBC <세상의 모든 여행>을 통해 브라질 여행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의외로 그 때 방송을 보셨다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평소 여행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인데 딱히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떠나진 않아요. 좋아하는 책 몇 권 가지고 가서 독서 좀 하다가, 지루해지면 백사장으로 가서 수영도 하고. 그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의 풍경입니다.”

“음악도 없이 동행자가 없이 가도 좋은 게 여행이에요. 수영복 바람으로 백사장에 누워 있다가, 또 물 속에 잠깐 들어갔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요. 강렬한 태양 앞에서 발가벗고 누워 있으면 멍해지다가 물 속에 들어가면 마치 블랙홀에 빠져들어간 것처럼 보이죠. 여행은 가장 행복한 힐링이고,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외국의 벼룩시장이나 인사동을 돌아다니면서도 영감을 받고요.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시장, 백화점, 박물관, 서점을 들여다보죠. 모든 것이 영감을 주니까요.”

이상봉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했던 칼럼과 새로 쓴 글들을 모아 『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 Fashion is Passion』을 펴냈다. 패션을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지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하지만 ‘이상봉의 자서전’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서전이라고 말하기엔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 “패션을 공부하는 사람들만을 위해 쓴 책은 아니에요. 이 시대의 청춘들이 꿈 때문에 고민이 참 많잖아요. 미래에 대해 방황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상봉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청춘에 만난 첫 꿈은 포기했지만, 또 다른 꿈이 찾아왔고 지금 이상봉은 대한민국 대표 패션디자이너가 됐다. 항상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비우고 다시 채우라”라고 말하는 그는 마음 움직이는 대로, 끝없이 변화하며 패션을 만들어가고 있다. 신인 시절, 특유의 옷차림 때문에 ‘검은 망토’로 불린 적이 있는 이상봉. 그가 창조하는 패션은 늘 변화하고 있지만, 30년 전 입었던 ‘검은 망토’는 여전히 가장 즐겨 입는 옷이다. “이상봉 스타일은 없어요.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바람처럼 내 스타일도 자유롭길 바랄 뿐이죠. 하지만 검은 망토만은 이상봉 스타일일지도 몰라요(웃음).”

언젠가 나는 디자이너를 은퇴하고 잃어버린 내 꿈과 나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다. 흔들림은 위태롭지만 흔들림 없는 삶은 권태롭다. 지난 33년간 나는 위태로운 흔들림을 즐기면서 숨가쁘게 달려왔다. 앞으로도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나의 도전은 아직도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규정하지 않는 삶은 불안하지만 살아 있음의 또 다른 모습이기에 지금 난 행복하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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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 Fashion is Passion이상봉 저 | 민음인
한글과 조각보, 태극문양 등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디자인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한국적인 것을 세계에 알리는 독보적인 디자이너 이상봉의 패션 철학과 열정, 디자이너로서의 의미 있는 경험담을 엮는 『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이 출간되었다. 해외 시장 진출기와 한글과 패션의 접목, 김연아의 스케이팅 의상 제작, 탁구 국가 대표 유니폼 디자인, 「무한도전」패션쇼, 파리 컬렉션 현장 등 대중이 궁금해하는 패션 이야기가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 변화한 80년대 이후 패션과 국내외 패션계의 면면과,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한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주옥같은 조언들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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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와 쓰지 신이치, 왜 그들은 부탄으로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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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들을 찾아 떠난 여정

한 배를 탄다는 것. 그것은 운명을 함께한다는 의미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동일한 속도로,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며 인생의 바다를 건넌다는 말이다. 2010년, 한 명의 여자와 또 다른 한 남자가 ‘한 배를 탔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불편한 역사적 관계, 전혀 다른 직업, 20년에 가까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곧 좋은 길벗이 되었다.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의 두 저자, 여행작가 김남희와 문화인류학자 쓰지 신이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이 함께 오른 배의 이름은 ‘피스 앤드 그린 보트’. 동아시아의 평화와 환경 실태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피스보트와 한국의 환경재단이 공동으로 띄운 배였다. 일주일 동안의 항해 속에서 둘은 금세 서로를 알아보았다. 각자가 그려온 행복한 삶의 모습이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슬로라이프’를 최초로 제창한 쓰지 신이치와 자신을 가장 가슴 뛰게 하는 일을 찾아 떠남을 시작한 김남희. 그들이 꿈꾸는 삶은 자신이 타고난 혹은 선택한 모습과 속도대로 살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행복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또 다시 한 배를 탔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그 실마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항해의 첫 목적지는 부탄이었다. 국민 행복도 조사에서 3위를 차지한 나라(2006년, 영국의 조사 결과), 전 국민의 단 3.3%만이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응답한 나라(2005년, 부탄 정부 조사 결과) 부탄. 쓰지 신이치가 그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김남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행을 결심했다. ‘피스 앤드 그린 보트’ 위에서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였다.

그들이 부탄에서 목격한 것은 행복한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욕심 부리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김남희와 쓰지 신이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한국과 일본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저자는 한국의 강원도와 안동, 지리산, 제주도, 일본의 훗카이도와 나라를 오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 떠난 1년간의 여행이었다. 곰배령에서는 도시를 떠나와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젊은 부부를 만났고, 훗카이도의 ‘베델의 집’에서는 정신 장애를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공존하는 삶의 모습을 보았다. 안동에는 한국의 옛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나라에는 자연농업을 실천하는 농업인이 있었다.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은 그 소중한 만남들을 기록한 항해 일지다. 김남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결국 평화와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느리게 사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을 출간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남희 : 쓰지 신이치 선생님과 같이 부탄에 갔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그럼 한국과 일본의 사람들은 어떤지, 그 사람들을 만나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부탄으로 떠날 때까지는 책을 쓸 계획이 없었는데, 여행을 하고 나서 제가 쓰지 신이치 선생님께 제안했어요. 함께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쓰자고요. 여행이 끝난 후에 그 경험들을 각자 글로 쓰고, 교환해서 읽으면서 책으로 엮었죠.

서로의 어떤 부분에 마음이 이끌려 친구가 되셨나요?

김남희 : ‘피스 앤드 그린 보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이미 쓰지 신이치 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런데 책에서 본 것보다 실제로 뵈니 훨씬 더 멋있으셨어요. 굉장히 부드럽고 유연한 방식으로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우리는 보통 멋있는 이야기를 할 때, 조금 무거운 방식으로 무게를 잡으면서 말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의 방식이 너무 좋았어요. 아무런 편견 없이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습도 좋았고요.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이분이 내 인생을 흔들 스승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쓰지 신이치 : ‘피스 앤드 그린 보트’를 탈 때 꽤 긴장했어요. 처음으로 한일 양국의 사람들이 몇 백 명 모여서 함께 여행하는 자리였으니까요. 두 나라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긴장됐어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요(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황해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온 한국인이다). 그런데 김남희 작가를 만났을 때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어요. 제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대립적인 상황이나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시점을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김남희 작가의 내면에서 그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죠.

느리게 사는 삶에 주목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쓰지 신이치 : 제가 청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될 때까지 일본은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였어요. 경제가 모든 것인 시대였죠. 그런 사회에서 자라면서 위화감을 느꼈고, 어른들을 보면서 ‘ 인생이란 게 고작 이런 건가, 뭔가 틀린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외국을 동경하게 되었고, 20대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게 되었죠. 그곳이 미국이었어요. 미국과 일본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미국에는 소수민족이나 여러 가지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그 다양성에 굉장히 감동했어요. 흑인이나 인디언, 난민들이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자주 드나들면서 저는 그들 안의 윤택함과 풍족함을 보았어요.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고 낮은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무척 행복해 보였죠. 마음을 울리는 말과 살아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거든요. 그 후 멕시코에 가게 됐을 때는 ‘아, 이거구나’ 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어요. 바로 시간이에요. 그들에게는 돈이 없고 물질도 적지만 시간이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겨요. 그게 바로 풍족함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이나 캐나다에 살 때는 인디언들 만났는데, 그들이 사랑가는 모습과 자연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 모든 시간들 속에서 점점 슬로우의 철학을 키워가고 있었죠.

김남희 : 저는 주류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 안에서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케이스였어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좋아하는 일,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여행이었거든요. 그래서 여행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속해있던 시스템 속에서 빠져 나왔죠. 그렇게 제 방식대로, 제 속도대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 보니까 훨씬 충만하고 행복한 거예요. 그리고 후진국이나 저개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그곳의 사람들 속에 들어있는 윤택함을 계속 보게 됐어요.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죠. 여행하는 동안 저에게 손을 내밀고 밥을 한 끼 건네주고, 잘 곳을 내어주었던 사람들은 우리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었거든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훨씬 풍성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 삶의 방식이 뭔가 굉장히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점점 굳히게 되었죠.




약함을 유대로, 베풂을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

많은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오셨습니다. 그 여행의 끝에서 작가님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란 어떤 모습인가요?

김남희 : 저에게는 ‘베델의 집’이에요. 약하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있잖아요. ‘약하면 안 돼, 약한 모습 보여주면 안 돼, 강해야만 살아남아’ 그런 편견을 깨게 해준 곳이었어요. 약함을 유대로 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인간은 누구나 다 약한 존재인데 굳이 그걸 감추고 강한 척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들을 갖게 해줬거든요. 약하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게 해 준 곳이어서 저는 ‘베델의 집’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누구나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고 실패를 반복하는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약함에 기대어 살아가는 곳이 베델의 집이다. 삶의 모든 어려움과 실수를 ‘살아가는 고생’으로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비장애인들에게도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베델의 집에 오면 자신의 병이 다 드러난다.”는 말은 이런 의미인가보다. 이 짧은 시간에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p. 74)
쓰지 신이치 : 전 지리산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한국이 굉장히 많은 고난의 역사를 거쳤는데 그 시간들을 지탱해 온 정신의 중심과도 같은 지역이 강원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곳에는 도법스님 같은 정신적인 지도자와 이제 막 도시에서 내려와 커뮤니티를 만들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요. 도교적인 사상이나 삶의 방식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예전에는 그곳에 빨치산이 숨어 살았다는 역사를 알게 됐을 때는 굉장히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마치 경제만 중요한 것처럼 완전히 변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지리산에는 정신적인 전통이 살아있어요. 그것이 굉장히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 알려졌다. 예로부터 상처받은 자, 지친 자를 인자하게 품어 상처를 치유하고 쉬어가게 해주는 장소로 여겨졌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지리산은 비극의 무대가 되었으나 좌니 우니 하는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모든 사람을 자비롭게 보듬었다. 이곳은 은신처이자 일종의 성역이었다. (p. 250)
부탄의 사람들이 보여준 베풂의 모습은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쓰지 신이치 : 저는 부탄에 갈 때마다 충격을 받아요. 그들은 저를 맞이할 때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줘요. 술과 달걀, 오렌지, 꽃, 바나나 같은 것들을 거의 다 주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무언가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들은 카르마를 믿고 있는데, 그것은 ‘이걸 하면 바로 보상이 돌아온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베풀면 그것이 언젠가, 천 년 뒤에라도 어딘가에 좋은 일로 생긴다고 믿는 거예요. 그들은 세계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부탄에는 기도 깃발이라는 것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 깃발에 적은 자신들의 소원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죠. 그것이 카르마 속으로 흘러들어가서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어요. 자신이 사는 동안은 아닐지라도 말이죠. 아마 이전의 한국과 일본에도 그러한 삶의 모습들이 많이 있었을 거예요.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 같은 것은 바라지 않고 베푸는 거죠. 그걸 선물(gift)이라고 하는데 교환과는 다른 거예요. 저는 그 선물이 본래의 경제 원리라고 생각해요. 이것을 일본과 한국이 중요한 경제 모델로 삼고, 또 세계 속의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김남희 : 카르마가 우리말로는 업이거든요. 불교의 업이라는 것이, 이번 생에 내가 잘 살고 있으면 지난번에 쌓은 선업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해줘서 선업을 쌓으면 다음 생 혹은 그 다음 다음 생에라도,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는 마음이잖아요. 사실 우리는 그 마음을 굉장히 많이 잃어버렸는데, 부탄 사람들의 생활에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고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이걸 하면 언젠가 나 자신이 혹은 내 후손이 좋은 일로 보답 받을 거야’라고 생각해요. 선업을 쌓는 의미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나누어주는 거죠.

인연에 대한 부탄 사람들의 믿음은 베풂을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인 것 같습니다.

김남희 : 제가 파키스탄을 혼자 여행할 때 ‘훈자’라는 지역을 갔었어요. 훈자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들로 유명한 곳이에요. ‘또 만나요’ 라는 말이 그 지역 말로 ‘피르밀렝게’인데, 그곳 사람들은 ‘피르밀렝게’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샬라’라고 답해요. ‘신이 허락한다면’이라고 대답하는 거죠. 우리는 신이 허락해야 또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관계예요? 신이 허락해서 다시 볼 수 있는 관계인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인사말이 너무 좋았어요.




내 삶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 가는 방법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만의 속도대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쓰지 신이치 : 지금 우리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경제를 위해서 모든 것을 조직하고 있어요. 경제 원리는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근간으로 하다 보니까 점점 빨라지죠. 과속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모든 의미를 잃어버려요. 자연에서도 당근이 자라나는 속도가 있고, 곡물도 자라나는 속도가 있어요. 다 자신만의 속도를 가지고 있어요. 그 속도가 잘 조화되어 있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인간도 그 일부예요. 그런데 경제와 시스템이라는 것은 자기가 점점 커지기 위한, 증식을 위한 속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해요. 그것은 곧 나머지 각자의 속도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속도대로 사는 삶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더 작아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다 보니,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해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 아닐까요?

쓰지 신이치 : 지리산에 갔을 때, 도시에 살다가 지리산으로 와서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을 만났어요. 도시에서 제주도로 옮겨 온 사람들도 만나봤고요. 그들은 진짜로 자기 시간을 자신이 살고 싶어서, 그리고 아이들의 시간도 존중해 주고 싶어서 용기를 가지고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용기나, 그곳에 옮겨와서 함께 사는 인연을 가진 것은 아니죠. 도시에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도시에서 살아도 느리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어요. 도시에 산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직 할 만한 일은 많아요. 아무래도 도시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그 때는 시골로 옮겨가서 살면 돼요.

김남희 :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나만의 속도로, 나의 방식대로 행복을 찾아서 살고 싶어도 굉장히 어려워요.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 너무나 강고한 틀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삶을 되게 힘들게 만들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상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대화를 하고 살아가느냐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가치관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내 일상의 많은 부분을 나누는지’가 중요한 거죠. 만약에 제 주변에 매일 주식 시세를 확인하고 부동산만 알아보거나 아니면 매일 아이들의 과외나 학원만 알아보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생각들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있고 그걸 지향한다면,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혹은 그런 삶에 대한 동경을 가진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게끔 하는 것도 무척 중요해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건강한 에너지도 나누고 ‘우리가 소수는 아니야.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네’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을 읽고 삶의 속도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실 것 같습니다.

김남희 : 그럴 수 있다면 너무 기쁘겠죠. 저는 쓰지 신이치 선생님을 만난 게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삶에 대해서 계속 보여주시고 이야기해 주시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셨거든요. 그 새롭게 만들어진 인연들 덕분에 ‘진짜 여기 이렇게 사는 분이 있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하고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이 독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시나요?

쓰지 신이치 : 이제 한국은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이 이제는 벽에 부딪힌 거죠. 그럴 때 자기를 너무 책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한국의 주류 사회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해서 시선을 맞춰보면, 일본이 배워야할 만한 좋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아직은 저도 그 중 일부를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직감으로 그걸 느끼고 있어요. 여러분이 그 힘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한국이 힘내시기를, 그걸 계기로 삼아서 크게 전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모범이 될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국가가 분단되어 있고 여러 가지 고난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 시간과 경험들이 오히려 앞으로의 한국에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그 길에 이 책이 계기라든가 뭔가 힌트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 기쁜 일은 없겠죠.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쓰지 신이치 : 저는 아버지의 조선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으로 한일 양국을 강하게 잇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두 나라가 세계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김남희 :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은 20대의 친구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시스템 안에서만 삶의 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서 조금 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도록, 20대의 친구들에게 이 책이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젊은 친구들에게 가장 읽히고 싶은 이야기이고, 젊은 친구들이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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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김남희,쓰지 신이치 공저/전새롬 역 | 문학동네
동아시아의 평화와 환경 문제를 고민하는 한일 공동 NGO 교류 행사 ‘피스 앤드 그린 보트(Peace&Green Boat)’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금세 좋은 동료이자 친구가 된다. 이후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행복지수는 여느 나라보다 높은 부탄을 함께 여행하며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에게 행복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물음을 품게 된다. 이에 두 사람은 홋카이도, 안동, 오사카와 나라, 지리산을 거쳐 강원도와 제주도까지 여행하며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의 속도’와 ‘행복의 방향’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선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가수 김경호, “춤추는 로커? 는 나에게 소중한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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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록이어야만 하나?’. 오디션을 보러 간 음반사마다 김경호는 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제작사들은 록을 고집하는 뮤지션을 비아냥거리는 ‘록부심’을 논하며 김경호에게 수 차례 다른 장르로 도전할 것을 권했다. 오로지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 김경호. 그는 기타 연주 아르바이트, 버스킹을 하며 무대에 설 날을 기다렸고 음반 제작사에서 막내 일을 도맡으며 가수를 준비했다. 1997년 2집의 타이틀곡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큰 인기를 얻으며 로커로 자리잡았지만, 가수로서는 치명적인 성대결절에 소속사와 불화까지 겪고 그는 점점 대중에게 잊혀졌다. 7집으로 복귀를 시도했지만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증’이라는 희귀병은 김경호를 또 한번 절망시켰다. 의도하지 않게 갖게 된 휴식기. 대중으로부터는 멀어졌지만 스스로에게는 단단한 자아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지난해 <나는 가수다>를 통해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 가수 김경호가 오랜 망설임 끝에, 자전 에세이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를 펴냈다. 최근 <댄싱 위드 더 스타3>에 출연하며 팬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고 있는 김경호. 춤을 추는 로커라니, 다소 낯선 모습이 아닐까 염려스러웠지만 김경호는 늘 무대를 가장 빛내는 출연자다. 스무 살이나 어린 댄스 파트너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한다는 그는 내년이 되면 데뷔 20주년을 맞는다. 이제는 좀 느슨해져도 되지 않을까 물으니, “겸손은 지나쳐도 좋은 것”이라며 “고개를 더욱 숙여야 한다”고 말했다. 곁에 두고 있는 후배, 제자들로부터 ‘꼰대’ 소리를 듣는다는 김경호. 왜 일까. 그는 정상에서 내려오는 법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는 배우 차인표 이야기를 꺼내며 ‘차인표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고작 데뷔 년도가 1년 밖에 차이가 안 나는 배우에게 ‘선생님’이라 칭하며, “차인표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한다’고. 나도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스갯소리도 몇 마디 할 법한데,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인터뷰이를 마주한 김경호. 그가 정말 꼰대라면, 단어의 정의를 조금 바꿔야 하는 건 아닐지, 자문했다.




김경호가 무대에 서는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스물 중반에 나는 수천 명의 청중 앞에서 노래했다. 오로지 나만을 보기 위해 비싼 티켓을 구입하고 찾아온 관객들이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몇 번 왕복하면 숨이 찰 정도로 넓은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열정을 불살랐다. 시간이 흘러 마흔이 가까워진 어느 날, 나는 조그마한 소극장 라이브 무대에 서 있었다. 짧지 않은 공백 기간을 깨고 다시 팬들과 만난 자리였다. 오랜만에 참 행복했다. 나를 무대에서 떠나게 만든 것은 결국 나였다. 어쩌면 나는 가수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먼 길을 돌고 돌아 제자리로 왔다.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가수가 된 것 같아’.(p.5)
책을 내기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스케줄도 바빴겠지만 무엇보다 과거 힘들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제안을 받은 지는 1년이 훨씬 넘었는데 계속 거절했었다. 내가 아직 인생을 많이 살아본 사람도 아니고 아픈 기억들도 많고, 또 그 이야기들을 서술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동정표를 얻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책 자체가 부정적으로 흐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됐고. 하지만 힘든 과거를 겪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내용들을 담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방송에서 언급하면 문제가 될만한 예민한 일들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책을 쓰면서 좋았던 기억보다 안 좋았던 기억들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완성본을 읽고 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다만 내가 많은 사랑을 되찾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여전히 일을 하고 있으니까, 담담한 마음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평소 일기나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는지.

내가 의외로 단순한 편이라서 두 가지 일은 잘하지 못한다. 그나마 기록하는 버릇이 있어서, 예전에 일기처럼 써놓았던 노트가 몇 개 있었다. 이번에 책을 쓰면서 많이 도움이 됐다. 문장이 세련되지는 못한 것 같다. 한꺼번에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하는 작업이다 보니, 담금질을 하는 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 하지만 김경호에게 세련된 표현을 기대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팬들과는 자주 소통하지만 독자들과는 첫 만남이라 쑥스럽고 민망한 기분이다.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제목이 진지하고 무겁다. 직접 지은 제목인지? 로커로서의 다짐이 깃든 문장 같다.

책을 쭉 쓰다 보니 이 제목이 생각났다. 누구나 공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하차라고 표현하긴 싫고, 본의 아니게 중도에 활동을 쉰 적이 있다. 사실 가수나 연예인들은 활동을 쉬게 되면 오히려 더 힘들 때가 많다. ‘나도 한 때는 20,30만 명 관객을 앞에 두고 공연을 했던 사람인데’ 라는 생각도 들고, 결국 나 자신이 만든 늪에 빠지기도 한다. 요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학기 초에는 모두 의욕이 충만하다. 하지만 결국 한 두 달이 지나고 보면 50명이었던 학생들이 15명도 채 남지 않는다. 너무 쉽게 중도에 포기하는 거다. 강의를 하다 보면 너무 잘하고 있는 학생들은 조급증 때문에 오디션을 보러 가버린다던가 학교보다는 학원 같은 곳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반면 꾸준히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들에게 정이 가는 것처럼, 팬들도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려주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활동을 하고 어딘가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 내 음악을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책에서도 나오지만 데뷔 초,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자존심도 상했고. 하지만 가늠해보고 싶었다. 내가 성대 결절도 겪고 예전 소속사와 힘든 점도 있었지만, 로커로서 변함없이 무대에 서고 있다는 것. 그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경호는 언제나 ‘대중 가수’를 지향하고 있다. 보통 로커들은 ‘록부심’이라는 말도 있을 만큼 스스로에 대한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크지 않은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는 것도 중요할 텐데.

평소 신조가 겸손이란 건, 지나쳐도 된다고 생각한다. 후배들한테 자주 하는 소리가 우월감을 표출하면 음악이 순수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게 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음악을 과시하고자 하니까 대중들에게 비아냥을 받는 거 아닌가. 대중들의 수준을 뒤에서 욕하느니, 좀 더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할 음악을 하는 게 낫지 않나. 밴드 멤버들에게도 늘 이야기한다. 우리는 음악을 과시하러 온 게 절대 아니다. 평가 받기 위해 나온 거라고. 후배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소리를 하냐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된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자만하게 되고 중심을 잃는 동료들을 많이 보는데, 그 분들이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대중들과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나와 관련된 모든 기사와 글들을 찾아서 보신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 얼굴이 먹칠하는 일은 절대 안 하려고 한다. 내가 김종서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듯이 누군가도 나를 보며 꿈을 키울 수 있으니 불미스러운 일은 절대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최근 부모님 두 분이 전직 아나운서였다는 사실이 방송에서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를 보면 부모님의 교육열이 다소 높았던 것 같다. 책을 읽으신 반응은 어떤가?

많이 놀라셨다. 많이(웃음). 어릴 적에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형과 많이 비교가 되기도 했고, 내가 무척 소극적인 아이였다. 어릴 적, 어머니가 주변에 공부 잘하는 수재들을 모아서 독서토론회 시간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그 정도로 발표력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 한다. 내 뒷모습을 보면서 그 때 왜 이렇게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를 했었는지, 미안해 하시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과정들이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 것 같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평범했을 거다. 재주도 없었을 거고. 유혹이 많은 직업이지만 중심을 잃지 않는 걸 부모님을 통해서 배웠다.
생각해보면 끝이란 것은 없다. 내가 서 있던 무대의 환호가 어느 순간 야유로 바뀌는 일도 있었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상한 루머가 되어 돌아오는 일도 겪어봤다. 형제처럼 믿었던 동료가 나의 돈과 나의 음악을 앗아가는 배신도 당해봤다.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연인이 내가 가진 것만을 원하다가 떠나가는 모멸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잊지 않는 팬들이 있었다. 연변에서 내 노래를 들으며 꿈을 키워가는 소년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내 손을 잡고 끝까지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동지도 있었다. 이제 예전 같지 않은 헤드뱅잉에도 환호하고 더 힘을 내라고 큰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모든 것이 더욱 소중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p.265)


팬들에게 ‘노친돌’로 불리는 일 행복하다

<댄싱 위드 더 스타3>에 출연 중이다. 가장 의외인 출연진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로커 김경호가 댄스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팬들도 많이 놀라지 않았을까. 두 번이나 우승을 했으니, 부담감도 적지 않겠다.

매니저를 맡고 있는 황 이사가 처음에 “형, <댄싱 위드 더 스타3> 출연할래?”라고 물었는데, “너 미친 거 아니냐?”고 했었다. 너는 나를 뻔히 알면서 그걸 제안이라고 받아들인 거냐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황 이사 대답이 이랬다. “아니, 형이 결정은 하는 건데 나는 보고만 드릴 뿐이에요. 그런데 왜 형은 말의 앞뒤가 안 맞아요? 이거 댄스 프로그램이잖아요. 형도 공연하면서 춤 추시잖아요. 로커는 왜 춤 추면 안되냐고 말한 것도 형이고. 평소 뮤지컬도 하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왜 안 잡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겁을 먹고 있었구나 싶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춤을 배우고 무대에 서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무척 걱정이 됐지만 지금은 재밌고 즐겁다.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어린 선생님이 파트너인데,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럽다. 나이가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선생님이지만 스승으로 모시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무엇보다 기쁜 건 다들 좋아하시고, 나에게 이런 끼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는 거다. 이 미션을 수행하면 내 공연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뮤지컬 무대에 서본 적이 없나? 섭외가 많았을 것 같은데.

예전에 제안이 왔는데 다리를 수술하기 전이었다. 회복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해서 거절을 했는데 그 때 이후로 제안이 끊겨 버렸다. 보여줘야만 믿으시는 것 같다(웃음).

최근 10집 앨범 <共存-part 01-sunset>이 발매됐다. 4월 27일에 콘서트도 연다.

앨범이 나온 지 얼마 안됐는데, 가장 힘든 건 앨범이 나와도 노래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여전히 많지 않다는 거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야 사람들이 ‘이 가수가 앨범을 발매했구나’를 안다. 아직 라이브 컴백 무대를 세 번밖에 하지 못했다. 주변에 물어보면, 그나마 나온 음악 프로그램은 아무도 안 봤고, 토크쇼만 다 봤더라(웃음).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또한 좋아질 거라 믿고 앞으로 주어진 음악 프로그램이 있으면 최선을 다할 거고, 콘서트를 통해 팬들을 만날 거다. 여름 시즌에 part 2를 공개할 계획이라서 무척 바쁘다.

유독 안티 없는 가수이기도 하다. 본인도 느끼는가? 팬들이 ‘노친돌’이라고 부른다던데 기분은 괜찮나?

<나는 가수다> 이후에 신생 팬들이 많이 늘었다. 예전에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히트했을 때는 인기를 실감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깊숙이 느껴진다. 단 한 사람의 팬도 감사하고. 십 수년 지켜온 팬들도 있다. 불혹을 넘긴 중견 가수이지만 교복을 입는 학생 팬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 팬들도 있으니 가수로서 정말 행복하다. 팬들이 나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켜줄 테니 오빠는 음악만 하라고. 노친돌이라는 별명도 맘에 든다.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긴 어렵지 않나, 아저씨는 너무 했고(웃음). 노친이라고도 부르고 노친돌이라고도 부른다. 내 팬들은 마치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 같다. 하물며 나에게 너무 조심스럽게 방송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들이 알아서 지켜줄 거니까 걱정 말라면서(웃음). 어떻게 안티 팬이 없겠나. 있긴 하겠지만 내 눈에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쓰더라도 기껏해야 피곤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자극적인 글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만약 그런 분들이 많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개선할 거다.

반항적인 로커가 아니라 바른생활 사나이로 보인다(웃음). 스스로에게 냉정하고 혹독한 사람인가? 방송에서는 무척 부드러운 사람으로 느껴졌는데.

자신에게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서 나쁠 건 없다고 본다. 예전에는 노래만 잘하면 성공했지만 요즘은 팬들이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본다. 오죽하면 종합 엔터테이너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나. 노래를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히트를 안 되는 사람이 있고, 괜스레 정감이 가는 사람이 있다. 호감 가는 인상도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혹독하고 겸손한 사람이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후배나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꼰대가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만, 난 죽을 때까지, 믿을 때까지 그렇게 잔소리한다. 나도 물론 예전에 선배들이 이야기할 때는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이만큼 살다 보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는다. 이 나이가 되니까 그 때 선배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책에도 언급했듯이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질 거다. 내 이름을 건 장사 같은 건 안 한다. 샤우팅 갈비? 안 할거다. 대신 내 이름을 건 실용음악아카데미는 꼭 만들고 싶다.

로커 김경호의 인생, 후회하는 부분은 없나?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장르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을까?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록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이다. 첫 단추를 너무 잘 끼웠다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1집을 만들었는데, 그게 댄스뮤직이었으면 아찔했을 거다. 나에게 잘 맞는 음악이 밴드 음악이고, 강인한 성대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한다. 다시 태어나는 생애가 있다고 하더라고 나는 로커가 될 거다. 작은 무대이든, 큰 무대이든 어디서 음악을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고 선배로서 귀감이 되고 싶다. 장르 음악이 버겁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있게 노력할 거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인기를 올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지속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음악을 할 거다. 차인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한다’고. 나도 꼭 그렇게 하고 싶다.

<댄싱 위드 더 스타>도 <나는 가수다>와 마찬가지로 경쟁 프로그램이다. 관객에게 점수를 받고 다음 참가 여부를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 프로그램을 통해 합격만을 원하는 지망생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다. ‘봐라! 장애인 5급도, 그것도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도 춤을 출 수 있다’라고. 합격과 성공 이전에 도전하고자 하는 정신이 우선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강변하고 싶다. 온전한 몸으로 표현하는 춤사위에 비해 나의 춤은 그리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탈락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할 것이다. 도전하는 것이 인생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조금 더 보여주기 위해서다. (p.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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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김경호 저 | 알에이치코리아(RHK)
1990년대 말, 혜성과 같이 등장해 대한민국의 음악 지형도를 바꿔 놓았던 가수가 김경호다. 4옥타브를 넘나드는 가창력과 폭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샤우팅 창법으로 대한민국을 사로잡았던 그는 2000년 초부터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었다. ‘나는 가수다’를 통해서 대중에게 가수 김경호를 다시 알리기까지,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긴 슬럼프와 희귀병을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는 무대를 찾아 ‘멈추지 않는 도전’을 즐기고 있는 가수 김경호. 이 책에서 그는 삶의 여정이 주는 교훈을 깨우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 ‘꿈의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앨범은 내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해요” - 시오엔(Sioen)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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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익숙한데 가수는 낯선 예는 흔히 있다. 벨기에 뮤지션 시오엔도 국내 대중들에게는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이름(실제 발음은 ‘시온’에 가까웠다)은 생경할지라도 대표곡 「Cruisin'」을 들어 보면 금세 그의 존재가 친숙해질 것이다. 해당 음악이 광고에 쓰이면서 그의 보이스는 알게 모르게 대중들의 무의식을 파고든 상태다.

4월인데도 진눈깨비가 흩날릴 정도로 괴의하고 어수선한 날씨였다. 미칠 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회색 풍경을 배경삼아 우리는 목동의 한 카페에서 날씨답게 ‘멜랑콜리’하고도 ‘크레이지’한 만남을 가졌다. 이 두 단어는 시오엔이 빈출하는, 그에겐 각별한 소재이자 감탄사이기도 했다. 스스로도 멜랑콜리의 차분함과 크레이지의 역동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생각을 풀어내다가도 과장된 표정과 재치 있는 모사로 주위 사람을 즐겁게 했다. 그 익살은 예민함을 숨겨두고 타인을 편하게 만들기 위한 배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덕분에 그날의 인터뷰에는 재미가 흘렀고, 우리들의 대화는 신중하면서도 결코 서로에게 무겁지 않았다.


한국은 두 번째 방문입니다. 이번 내한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프로모션 차 오게 됐어요. 라디오 방송, 공연 등 많은 스케줄들을 소화 중이고요. 한국에 대한 느낌은 음. 처음 왔을 때는 잘 몰랐어요. 미디어에서 접했던 이미지만 갖고 있었죠. 빠르고 바쁘고, 또 복잡한 느낌 같은. 지금은 오히려 지역이나 도시의 분위기에 여유가 있다는 인상이 강해요. 사람들도 그렇고요. 좋아요.

여자 친구가 한국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네. 그렇지만 어려서 입양이 된 친구라 국적은 벨기에고요, 혈통이 한국이에요. 그래서 한국에 대한 인상을 이전부터 갖고 있었어요. 여자 친구가 직설적이고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그랬거든요. 전 그런 게 좋아요. 그런 반면에 또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손님들한테 잘 해 줘요. 파티에서도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콘서트 끝나면 선물도 많이 주는데, 그런 정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의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 표현을 잘 안하고 폐쇄적인 느낌이 강해요. 누군가를 새로 알게 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나 봐요. 그에 비해 한국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여는 면이 있어요.

작년에 발매한 여섯 번째 앨범 타이틀이 < Sioen. >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 정체성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었어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 강점이 뭔지 단점이 뭔지 등등에 대한 것들이죠. 다른 음악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바깥에서 저를 바라보는 입장에 서게 됐는데 그러다 ‘이게 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듣고 나면 ‘아 시오엔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를 노래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확신이 들었달까. 마침표의 의미도 ‘종결’이에요. 나라는 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 마지막. 탐색의 과정이 비로소 끝났다는 거죠. 앨범은 내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해요. 내가 누군지 나타내는 수단이죠.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어요.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누구나 20대를 거쳐 30대가 되는 동안 이런 저런 정체성의 고민을 하게 되잖아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결정들을 어떻게 내릴 것인가. 미래 계획에 대해서도 그렇고, 직업적인 고민도 그렇고. 근데 언제부턴가 제 자신이 편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지나서 지금 이대로의 나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 앨범을 낼 수 있었습니다. 또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가사를 쓸 때 스스로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면 심리적인 부분을 자주 들여다보게 돼요. 자연히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많죠.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누군가’라는 제 정체성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음악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이란 거예요.

가사를 쓸 때 주로 어떤 이야기를 다루게 되나요?

굳이 하나의 주제를 정해놓는다기보다는 곡을 만들 때의 순간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듣거나 읽거나 보거나 하면서 감동을 받거나 짜증을 느낀다거나 하는 모든 감정에 대해 가사를 쓰는데, 그런 면에서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가사를 쓴 적도 있지만, 보편적인 주제는 사랑으로 묶이는 것 같아요. 남녀의 사랑에서부터 직업에 대한 사랑, 인생에 대한 사랑 등등. 그 대상이 사람이 됐든 사물이 됐든, 큰 주제는 사랑!


「Cruisin'」 가사는 경험담인가요?

네. 슬프지만.(웃음) 관계에 있어서 뭔가가 잘 안 풀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의사소통이 안 된다든가 벽이 생겨버린 것 같을 때, 기차를 타고 가며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됐을까’ 몽상하는 순간을 표현한 곡이죠. 보통 우리가 누구를 좋아하거나 연애를 하면, 어느 시점에서 남녀 간에 오가는 말들에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있어요. 예컨대 여자 친구에 대해 ‘어떻게 얘를 기쁘게 해줘야 하나’, ‘어떻게 하면 관계를 더 원활히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들 같은 것. 사실 그런 것 없이 소울메이트처럼 자연스럽고 편한 관계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느낌이 안 들더라고요. 헤어질 만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갑자기 난센스처럼 느껴졌어요. ‘조심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깨닫게 되면서 삐걱거리는 마음. 그런 느낌을 「Cruisin'」에 담았죠.

< Calling Up Soweto >앨범은 남아프리카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어떤 계기로 그런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나요? 색다른 작업인 만큼 어떤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요.

옥스팜이란 공중무역 단체로부터 초대를 받아 갔어요. 그전부터 다른 장르에 대해 개방적인 마인드였기 때문에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당연히 가야 하는 거라고, 이건 인생에 올까말까 한 기회라고 생각했죠. 어릴 때 아프리카 타악기를 배운 기억도 있었고, 유럽을 벗어나 다른 대륙, 다른 환경에서 작업을 하는 게 매력적이라 결정했어요. 기존에는 그냥 편곡을 아프리카 식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새로운 것을 직접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아프리카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갔어요. 지붕이 없는 집에서 자 보기도 하면서 다른 방식의 경험, 다른 감정들을 많이 느꼈죠. 잘 알려진 가난의 실상들도 그렇고......, 다른 나라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현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 모든 게 영감이 됐어요.

또 이런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어느 나라로 가고 싶은가요?

아프리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특히 블루스 음악! 음악에 관해서는 말리라는 나라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활발한 곳이라 생각해요. 언제가 되든 꼭 가서 프로젝트를 할 거예요. 흔히들 아프리카는 지옥과 천국이 공존하는 곳이라고도 하는데, 유럽에선 멜랑콜리라 하면 슬프고 우울한 느낌만 연관 지어 생각된다면, 아프리카의 멜랑콜리는 그 안에도 ‘웃음’이 묻어 있어요. 긍정적인 기운이 있고요. 그런 감정을 배웠고 앨범에 그 느낌을 담았죠. 멜랑콜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

혼자 쭉 작업을 해 오다 < Calling Up Soweto >프로젝트부터 공동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협업 방식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사람들과 함께 이 부분에서는 어떤 악기를 쓰고, 여기서는 또 어떻게 하고를 소통하는 작업이 참 좋았어요. 특히 같이 노래를 하면서는 서로의 생각을 물어가며 완성해 나갔는데, 그렇게 협업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제가 좀 더 발전한 느낌이 들었어요. 혼자 작업을 할 때는 내 생각만 생각하면 됐는데 밖에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는 타인이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생각해 보게 되니까요. 그 경험과 즉흥과 생각들이 앨범에 반영되니까 내 자신의 수준이 조금은 더 나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혼자 일할 때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내 맘대로 한두 시간 이내라도 금방 음악을 만들 수 있으니까 좋은 점이 있는데, 장단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만 고집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맞는 방식을 취하려 하죠.


같이 하면서도 즉흥성이 반영된 곡이라면 어떤 곡이 있을까요?

「Johnny Mary Tommy & The Sun」이요. < Sioen. >을 만들 때 이전에 곡을 많이 써놨었는데 녹음 들어가기 직전에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좋은 코러스라인도 없었고, 여러모로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뭔가를 해야 하는데 하며 막 고민을 하던 차에 앨범 프로듀서이자 기타리스트인 프레데릭이 “이거 어때?”하고 들고 온 게 이 노래였어요. “와, 좋은데?”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여서 만들었어요. 협업의 결정체예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마술 같았던 그 당시 생각을 하게 돼요.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배웠고 전공도 플루트인데, 대중음악으로 방향을 튼 계기가 있나요?

15~16살 즈음에 단체 활동 겸해 바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때 우연히 다른 팀에서 ‘우리 그룹에 싱어가 그만뒀다’는 이야길 듣고 리허설 갔다가 같이 노래를 하게 됐죠. 거기서 커버 곡을 많이 불렀어요. 펄잼이나 너바나 같은 록이었죠. 그전까지는 플루트를 배우고 있었는데 아마 그 이후로 마음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어요. 멤버들이랑 노래 연주하고 맥주 마시고, 또 노래 부르고, 또 맥주 마시고. 문제는 저는 계속 음악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친구들은 마시는 것에 더 집중했다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그 후로 혼자 음악을 하게 됐죠.

초기작들이 피아노 솔로와 현악이 두드러지는 사운드였다면, 가면 갈수록 밴드 사운드가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음악적 변화인가요?

네. 첫 앨범은 클래식적 요소가 많았어요. 그간 음악교육을 통해 배운 것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앨범이죠. 첫 앨범 내기 전에도 이미 바이올린을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어요. 그러다 이후엔 다른 색을 찾으려 노력 중이에요. 최근까지는 팝적인 감각을 계속 가미해 가고 있고요.

앨범 전체적으로 앞쪽에 바이올린 소리가 자주 나오던데, 바이올린을 특별히 좋아하시는 건가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많은데, 특히 애착을 갖는 악기가 있다면요?

좋아하죠,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조합이 특히 좋아요.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져서요. 그렇지만 특별하게 애착하는 악기는 드럼이에요.

목소리에 관해서는, 「Bad bad world」나 「I‘m not ready to love you like I do」 같은 곡이 부드러운 허스키라면, 「See you naked」 같은 곡에서는 힘들게 느껴질 정도의 강한 허스키예요. 어떤 쪽이 본인 목소리에 가장 가깝나요?

음… 그건 어느 정도는 효과를 준 부분도 있어요. 목소리에 대해선 저는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을 못했어요. 그런데 벨기에 유명한 뮤지션인 Zap mama가 제게 ‘네가 아프리카에 갔다 와서 진짜 네 목소리를 찾은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니까 옛날에는 자연스럽지 않게, 좀 억눌러서 나오는 목소리였다면 지금은 그때에 비해 밝아진 것 같아요. 옛날에 피아노 치면서 노래할 때는 방어적인 부분이 있었어요. 피아노 아래 저를 감추고 보호하려는 느낌이랄까. 요즘엔 자유로워졌어요. 콘서트 할 때도 풀 밴드와 함께 무대를 즐기면서 더는 숨지도 않고요. 그러면서 목소리뿐 아니라 성격도 개방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음악을 만들 때 어떤 타입인가요?

저는 제 스스로에 대해 까다로운 편이에요. 순간의 감성을 더 잘 캐치하려 노력해요. 짧은 시간에 그걸 한다는 게 도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면에서 3분 안에 한 감정에 관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완벽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노래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곡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정직해야 해요. 인위적인 감정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요. 전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 아티스트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음악을 할 때 저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진솔함이 저한텐 가장 중요해요. 누군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가 저 사람의 말을 믿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하는데, 팝송은 좋아하지만 그런 면에선 믿음을 주지 못해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음악(factory kind of work)들에서는 진솔함을 찾기가 힘들죠.

자신을 다 드러내는 뮤지션이라면 누가 있을까요?

제 음악적 영웅은 데이먼 알반이에요. 블러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멜랑콜리를 잘 포착해내는데,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과 섞어서 작업한 게 보여요. 고릴라즈도 멋지고요.
밥 말리도 자신의 진심을 담아서 노래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감정을 캐치하기가 어렵지 않아요. ‘Could you be loved~’ 한 소절만 불러도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단번에 믿어요. 닐영이나 밥 딜런 같은 사람들도 그렇고. 정말 많죠.


내 인생의 앨범을 하나 꼽는다면?

플레이밍 립스(Flaming Lips)의 < The Soft Bulletin >이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앨범이에요!(because of so crazy!) < See you naked >와 < Ease your mind >를 작업하는 사이에 이 음반을 처음 듣고서는 ‘불가능은 없다’ ‘모든 걸 다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Cruisin'」 인기의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에는 한국 사람들은 멜랑콜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마 역사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드라마만 봐도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왔다 갔다 해요. 표현적이고요. 그런 감정을 음악으로 찾게 되는 것 아닐까요?

국내 젊은이들에게는 감성적인 인디 분위기의 카페 음악이 인기예요. 벨기에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취향이 너무 다양해서 하나를 말하기가 어려워요. 댄스 음악도 있고, 밴드 음악도 있고, 소프트 팝도 있고, 덥스텝도 있고, 드럼 앤 베이스도 있고. 벨기에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취향을 갖고 있어요. 대세가 없죠. 밴드도 모두 다양함을 갖고 있고요. 템포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죠. 장르 믹스의 움직임도 있고요. 한 가지로 정의하기가 어렵네요. 이게 핫하다 해서 트렌드가 되고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국내 팬들은 고티에와 당신 외에는 벨기에 뮤지션에 대해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 음악팬들에게 벨기에 뮤지션들을 추천한다면요?

젊은 밴드인데 Balthazar! 셀라 수(Selah Sue)도 굉장히 유명한 뮤지션이고요. 인디밴드인 데우스(Deus)나 소울왁스(Soulwax)도 좋아요. SX, Trixie withley 등 정말 많죠.

음악가로서 목표는 무엇인가요?

평생 음악을 만드는 게 목표예요.

한국 음악가 중에 같이 작업해 보고 싶은 음악가가 있다면?

이름이 어려운데… 도와주셔야 해요, 이름이 길고요, ‘스텔라’가 들어가는 밴드예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맞아요! 그리고 Black skirt(검정치마)도요.

인터뷰 : 조아름, 여인협, 윤은지
사진 : 이한수
정리 : 윤은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주철환 PD “의심, 근심, 욕심을 버리면 당신은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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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텔톤 초록색 워커를 신고 나타난 주철환 PD를 만났다. 명동에서 5만 원을 주고 산 워커인데,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컬러라며 흐뭇해한다. 분명 처음 본 사이인데 좀처럼 어색한 기운이 없다. 쉴새 없이 이야기를 꺼내 놓는 주철환 PD, 인터뷰 도중 틈틈이 카메라를 쳐다봐주는 센스까지 발휘한다. 주철환 PD가 새로이 펴낸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는 ‘산뜻한 인생 관찰기’라는 타이틀을 단 에세이. 그는 벌써 ‘13권째 저서’라며, “가끔 너무 많은 말을 했나? 싶기도 하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몇 해 전부터 누군가 사인을 청하면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라고 적어주곤 했어요. 그렇게 작게나마 응원해주고 싶었으니까요. 소박한 바람은 이 책을 읽고 많은 이들이 조금 더 행복하고 즐거워졌으면 좋겠어요.”

주철환 PD는 대학 졸업 후,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다가 우연히 본 방송사 시험에 덜컥 합격해 1983년 MBC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퀴즈 아카데미>, <우정의 무대>, <일요일 일요일 밤에>,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히트시킨 후, 7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다시 방송사로 컴백했다. OBS 경인TV 사장으로, 그리고 현재는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상무이자 JTBC의 유일한 대PD로 인생 후반전을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걸출한 예능PD로 중년을 마치 청년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주철환은 “집념보단 잡념의 사나이로 살았다. 그래서 지금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얼마 전 그는 서점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타이틀로 단 책을 보았다. 그리고 문득 ‘어떻게’ ‘얼마나’ 살 것인가를 떠올려보며, 산뜻한 해답을 냈다. “늘 즐겁게 살자. 행복하게 살자. 감사하며 살자.”참으로 단순한 이치이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 하지만 주철환 PD는 웬만한 일에는 얼굴을 찡그리는 법이 없다. ‘화를 내는 것은 화를 부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주철환 PD는 “누군가 묘비명에 글을 새겨준다면 ‘친절하게 살다 간 사람’이라는 적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람 사는 재미는 ‘사람 사귀는 재미’

“책을 내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게 참 즐겁고 기쁜 일인 것 같아요. 책을 내지 않았으면 이렇게 인터뷰를 할 일도 없었을 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는 소위 말해서 인생에서 얻은 교훈이나 생각들을 정리한 에세이에요. 살다 보면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고, 또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또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저는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이번 책은 지인들에게 선물 안 했어요. 사서 보라고. 정말 내 책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은 사서 봐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웃음).”

방랑자였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남달랐던 주철환 PD. 학창시절 음악과 책을 좋아하는, 다소 독특한 친구로 여겨졌던 그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PD가 됐다. 교직 생활을 거쳐 방송사 CEO로, 그리고 다시 현업 PD로 돌아온 주철환은 싱어송라이터로 2집까지 낸 이력도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렇게 젊어 보여도 될까, 연예인 못지않은 관리를 받고 있는 건 아니냐고 물으니, 주철환 PD의 강한 부정이 뒤따라온다. “젊음이 관리만으로 되는 거겠어요(웃음). 아직 현직에 있으니 친구들이 부러워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를 질투하진 않아요. 제가 얄미운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학창시절 때는 축구도 못하고 좀 감성적이고 그러더니, 주특기를 잘 살려서 재밌게 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죠 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사이의 브릿지가 돼주는 걸 좋아해요. 일대일로 만나는 건 부담스럽지만 내가 즐겨가는 모임에 어떤 사람을 소개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요. 어떤 새로운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 알고 지내면 좋겠다 싶을 때 두 사람을 연결해줘요. 그런 모임을 되게 좋아해요. PD를 지망하는 학생 여러 명이 ‘주철환 PD’를 만나고 싶다고 청하면 언제든지 찾아가죠. 실제로 PD 최종시험에 낙방한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만난 적도 있고요.”

인터뷰 도중, 주철환 PD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한 언론사에서 모 배우의 인터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는데 알고 보니 배우 김혜자에 대한 섭외 건이었다. 주철환 PD는 평소 김혜자와 돈독한 관계인데, 가끔 이 같은 매니저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다. 주철환은 김혜자가 가장 신뢰하는 PD이자 애제자다. “가끔 선생님의 섭외 요청 전화가 저한테 올 때가 있어요. 매니저 없이 활동하시니까, 방송 관련 일은 제게 물어보라는 말씀을 종종 하세요.”얼마나 가까운 사이길래, 김혜자의 출연 의향을 이미 다 알고 있을까. 주철환 PD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가 현명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사람을 만날 때 내 나름대로의 파악을 하는 거예요. 절대 일관적이지 않아요. 제가 이문세 씨한테 하는 거랑 주병진 씨를 대하는 게 같을 수 없잖아요. 박진영, 이수만, 양현석 대표를 다 다르게 대해야 하는 것처럼, 상대의 입장과 상황, 심리상태를 파악할 줄 알아야죠. 사람의 마음을 훔칠 줄 알아야 섭외를 할 수 있듯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가가야 하는 거예요.”

고독을 즐기기보다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주철환 PD. 최근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요즘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물었단다. 친구는 “운동하는 재미로 산다”며 “매일 아침 근처 산에 오르는 게 그렇게 재밌다”고 즐거워했다. 뜻밖의 실직으로 인해 한동안 술로 지새던 친구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이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고. 주철환 PD는 이 친구를 위해 친구 몇 명과 함께 작은 통장을 선물했다.

개인적으로 나이 먹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사는 편이다. 다만 걱정되는 건 내가 만나고 싶은 젊은이들이 나를 낡았다고 따돌리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더 두려운 일은 내가 그 젊은이들의 사고나 행동을 못마땅해 하며 쓸데없이 잔소리나 하는 늙은이가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곱게 늙자’라는 게 한결 같은 나의 목표다. (p.165)


옳은 선택의 기준, 나도 즐겁고 남도 즐거운 일인가

인생은 흔히들 ‘선택과 집중’이라고 말한다. 방송생활 30여 년. 그동안 주철환 PD에게는 얼마나 많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 왔을까. 프로그램의 시작부터 출연자 캐스팅, 그리고 막을 내리기까지. PD로서의 선택부터 개인, 남편, 아빠로서의 무수한 선택이 지금의 주철환을 만들었다. 그는 마흔 살이 되던 해, 당시 지방대학의 교수였던 아내로부터 뜻밖의 제안(?)를 받았다. 1년간 미국에 교환교수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동행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가뜩이나 주말부부로 생활했던 이들 부부. 주철환 PD는 때마침 실력 있는 프로듀서로 정평이 나면서 승승장구를 하던 터라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내와의 미국행을 택했다. 돈과 출세, 사랑과 건강이라는 문제에 있어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에서 보낸 1년은 우리 가족에게 대단히 생산적인 시간이었어요. 아내가 학업에 정진하는 동안 전 아들에게 수학과 일기 쓰기를 가르치고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마음껏 즐겼죠. 아내와의 역할 바꾸기를 통해 잃어버렸던 나를 되찾고, 사랑과 성공의 의미를 재해석하게 된 거였어요. 아내의 결단이 내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든 거죠.”

주철환 PD의 선택은 언제나 ‘재미’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수시로 이 말을 내뱉는다.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한 후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재미 없었냐”고 묻는 게 버릇이다. “제가 선택하는 최상의 기준은 재미였고 집중하는 최고의 목표도 재미에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내가 가고 싶은 장소의 등급도 얼마나 재미있느냐에 따라 결정돼요. 재주 있는 사람보다 재미 있는 사람, 풍경이 좋은 곳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을 선호하죠.”

PD, 교수, CEO. 그리고 ‘대PD’를 타이틀을 걸기까지. 주철환 PD가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은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가, 그들이 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파트너로 인정해주는가’ 바로 두 가지였다.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할 때 즐거운 마음이 드는가,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나처럼 즐거워하는지. 주철환 PD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확신이 들면 선택을 하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만 즐거우면 그건 문제잖아요. 다른 사람도 함께 즐거워야죠. 제가 성장과정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고모님이 저를 아들처럼 보살펴주셨는데, 몸도 약하고 형편도 훌륭하진 않았지만 그런 환경을 원망하거나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강한 자가 아니라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고 하잖아요. 저는 적응을 잘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최근에 청춘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했는데, 늘 말하는 건 ‘생각하기 달렸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거예요. 마음먹기 달렸으니까, 마음먹고 달리라는 거죠. 가끔 면접을 보게 될 때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보는 건 ‘명랑성’이에요. 스펙 이런 건 다 걸려지잖아요. 얼마나 밝고 환한 마음으로 일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게 중요해요.”

오래가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동행하는 게 바로 마음일 것이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좋은 마음을 먹으면 좋은 삶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나쁜 마음을 먹으면 그 반대일 것이다. 잘 살려면 사실 밥을 잘 먹는 것보다 마음을 잘 먹는 게 더 중요하다. 마음을 곱게 쓰라는 선인들의 조언은 오늘도 유효하다.(p.79)

좌우명을 물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답한다. 재미있게 살고 의미 있게 죽자. 재미로 시작하여 감동에까지 이르려면 거기에 사랑이라는 의미가 결합되어야 한다. 나만의 재미, 나만의 즐거움으로는 결코 기쁨이나 감동에 이르지 못한다. 남을 재미있게 해주고 남을 즐겁게 해주려고 마음먹을 때 비로소 기쁨과 감동이 찾아온다. 이제 나는 안다. 재미의 뿌리는 호기심이지만 감동의 줄기는 인내심이다. 거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건 물론 사랑이라는 열매다. (p.49)


버리면 더 행복한 삶, 아시나요?

“지난 주인가 TV에서 다큐멘터리를 하는데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는 사람이었는데, 간혹 보면 정신을 쌓아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누군가와 대화를 했는데 ‘그 사람이 내 말에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를 일주일 동안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트위터에 올린 글 중 리트윗이 가장 많이 된 글이 있어요. ‘사람은 세 가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의심, 근심, 욕심인데, 의심은 마음의 고름이요, 근심은 마음의 주름이요, 욕심은 마음의 기름이다’라는 말이에요. 그것만 한 번 버려보세요. 인생이 달라질 걸요.”

방송에서 초보 연출자들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버려야 할 것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다. 하지만 힘들게 촬영한 신을 버리기 아까워서 꾸역꾸역 넣으면, 시청자들은 ‘왜 이 장면이 여기에 들어갔지?’라고 지적하게 된다. 일도 이러하듯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주철환 PD는 말한다. “화도 마찬가지에요. 화를 내면 스트레스가 풀릴까요? 화를 내면 화를 불러올 뿐이에요. 상대가 좀 무례하다 싶었어도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가 봐요’ 이렇게 여기고 말아요. 친절하게 살면 이익이 많아요. 감정도 너무 욕심내면 좋지 않아요. 좋은 감정만 욕심 내야죠.”

주철환 PD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깜냥을 아는 것도 실력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주철환은 반문한다. 단점을 고치려고 애쓰는 인생보다는 강점에 집중하는 삶이 성공한다는 것. 그는 “주철환만의 스타일이 있는데 내가 갑자기 김훈을 흉내 내고, 조정래, 황석영 작가가 되려고 한다면 그게 좋은 일일까요? 내 강점은 사람들을 만나서 즐겁게 담론하고 나누는 일”이라고 말했다.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은 강하지만 누군가의 문체를 따라가고자 창작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독가는 아니에요. 하지만 주철환 만의 독서법이 있죠. 제목을 보고 무슨 이야기일까 먼저 상상해보는 거예요. 베스트셀러였던 『정의란 무엇인가』를 손에 들게 됐으면 책을 보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상상을 해보는 거죠. 그리고 왜 지금 시점에 이런 책이 나올까를 생각해보고,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며 책을 읽어요. 마음의 부자가 되는 연습을 하려면 꼭 써야 하는 게 글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쓴 기록 즉 가계부를 써도 좋지 마음을 쓴 기록, 일기는 더 좋아요. 반성의 글, 용서의 글, 희망의 글을 매일 쓰다 보면 성격이 인격으로 변하지 않겠어요? 저는 제 글을 읽은 독자들이 조금이라고 더 즐거워질 수 있다면 계속해서 책을 낼 거예요. 출판사가 허락하는 한이겠지만요(웃음).”

헤아려보니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내 가장 젊은 날이었다. 아마도 내일의 나는 어제나 오늘보다 조금 늙거나 낡아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살아 있는 날들 가운데 가장 젊은 날인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나의 지갑이나 창고에 무언가를 꾸역꾸역 집어넣는 일 일까. 아니다. 그 반대일 것이다. 오히려 쌓아놓은 재고를 방출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눠주며 행복하게 사는 게 좋지 않을까.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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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주철환 저 | 중앙m&b
한 자리에 말뚝을 박는 ‘집념’은 부족했지만, 매 순간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더 행복한 일을 선택하는 ‘잡념’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온 주철환. 그는 “돈과 명예를 쫒아온 인생은 아니라서 ‘사회적 성공 비결’을 말해줄 순 없지만, 일상의 웃음과 행복을 발견하는 ‘긍정의 레시피’는 말해줄 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인사 발령에서 ‘물 먹은’ 이와 낙방한 지원자를 위한 위로에서 ‘식물성’ 부부 혹은 친구 같은 아빠로 사는 법, 사랑할 때 버려야 할 것들과 같은 일상적인 레시피가 담길 수 있었다. 소중한 인연, 감동의 멜로디, 눈물의 순간이 만든 프로듀서 주철환의 행복한 인생 강의가 시작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열폭이 뭐야? 진짜 청춘이 말하는 세대론 - 한윤형 김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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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잉여.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가장 자유롭고 화려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를 ‘잉여’로 여기는 청춘들이 늘고 있다. 정치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한윤형의 저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어쩌다 잉여가 되어 버린 청춘들의 이야기를 하며 대한민국 사회를 짚어본다. 저자의 자의식을 고백하며 20대 멘토 담론의 현실, 88만원 세대론의 딜레마를 지적한다. 한윤형은 자유기고가로서 먹고 살기 위해(?) 여러 소재와 청년 세대를 접합한 글을 쓰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세대 담론이 실제로 정치적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어떤 직관을 갖게 됐다고. 이보다 더 직관적인 출간 동기를 알고 싶다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양 날개 페이지에 수록된 저자 소개를 읽으면 된다. 글쟁이로 사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의 독서 취향을 만든 학창 시절부터 독립 자유기고가의 비루한 삶을 견디지 못해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에 취업을 하게 된 스토리까지, 한윤형이 세대론을 말하기 된 근원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학습이 필요하다. 책장을 펼쳤는데 모르는 용어가 불쑥 튀어나온다면, 11페이지에 친절하게 안내된 ‘용어 설명과 등장 인물 소개’를 펴보아도 괜찮다. 사실 저자 소개와 서문만 읽어도 논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용어 설명을 읽다 보면, ‘아, 이 단어는 언제 나오나’ 찾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넘사벽, 듣보잡, 멘탈, 중2병 같은 단어들. 사회과학도서로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마음이 동화되는 순간이 곳곳에서 목격되니, 약간의 마음가짐을 하는 것도 좋겠다. 읽는 이가 청춘이냐 아니냐에 따라 감정선이 달라질 수 있지만, 적어도 세대론에 관심이 있는 독자일 테니. 물론 소설을 읽을 때의 감정과는 다르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오로지 현실만을 목도하고 있으니까.

저자가 서문에 밝혔듯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한윤형이 기획하지 않은 유일한 책이다. 오랫동안 한윤형의 글들을 탐닉하던 어크로스 편집자 김류미가 ‘청춘 당사자가 말하는 세대론’의 필요성을 깨닫고, 저자의 마음을 열어 탄생한 책이다. 그러니까 30대 초반인 두 사람이 기성세대가 말하는 세대론의 논지에서 벗어나, 청춘 당사자로서의 세대론을 이야기한 저서다. 편집자의 강한 설득에 의해 저자가 고심 끝에 키보드를 두드려 펴낸 책. 20대 논객론이 유행하면서 한윤형은 ‘20대 필진’으로 호명됐는데 이제 30대가 됐으니 뭐라고 불러야 할까.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출간된 지 3주차가 되던 날, 한윤형과 김류미의 접선을 <채널예스>가 함께했다.

영화이자 소설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명백한 패러디인 이 책의 제목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 세대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식의 징징거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구의 청년 세대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88만원 세대’로 불렸던 우리는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삶이 어려운 세대를 고른다면 당연히 노년 세대일 것이다. (중략) 그러나 청년 세대의 문제는 그들이 가장 힘든 세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의 사회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표층(表層)이기에 문제가 된다. 등록금 문제와 청년 실업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 부모 세대의 고난이다. 또한 청년 세대는 자신의 미래가 위에 언급된 노년 세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p.7)


한국사회의 모순을 담고 있는 캐릭터?!

김류미 : ‘희망청’이라는 세대론 현장에서 만났잖아. 우리는 윤형 씨를 강연자로 섭외했는데, 상근자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너무나 기꺼이 거들어줘서 기억에 남았어. 광화문에서 고깔 모자를 나눠줬던 야외 행사였지? 『88만원 세대』출간 후, 20대의 경제적 어려움을 사회 이슈로 만들고자 했던 취지로 열렸던 행사였잖아. 그 때도 언젠가 우리가 이 세대 담론을 가지고 다른 걸 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 이렇게 5년 뒤 편집자와 저자로 만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지만(웃음).

한윤형 : 류미 씨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기획안을 가져왔을 때, 이 기획이 과연 출판사에서 통과될지 의문이었어. 난 사실 전작으로 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새로 쓴 글도 많지만 예전에 썼던 칼럼들을 다듬는 작업이었는데, 난 그렇게 유명한 대중적인 필자도 아니니까 과연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지.

김류미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써줬잖아(웃음). 저자는 의문을 갖고 시작했지만 그래도 반응이 좋으니 소감이 어때? 한윤형 책을 두고 대부분의 독자들이 ‘동의한다’ ‘탁월하다’고 평가하지만, 이번 책은 ‘공감했다’라는 평을 많이 받았잖아.

한윤형 : (웃음). 즐거웠어. 저자 소개도 이렇게 길게 쓴 건 처음이지. 자기 PR하는 걸 안 좋아하는 성격인데, 류미 씨가 써온 견본을 봤을 때는 정말 오글오글하고 경악스러웠어. 하지만 이게 또 먹고 살자고 하는 거니까(웃음). PR보다는 나 혼자 자조하자는 마음으로, 약간 자학적인 소개로 가야겠다 싶었지. 그런데 읽어본 사람들 반응이 너무 재밌다고 하더라.

김류미 : 이견이 있지만 어느새 즐기면서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저자, 한윤형. 뭐 이런 건가?(웃음) 책을 기획할 때, 한윤형이라는 저자의 포지션이 386세대가 좋아하는 저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트위터에서는 ‘어떻게 이 사람이 청년 대표가 될 수 있냐’는 의문을 가진 사람도 많았지. 어떻게 서울대를 나온 천재 글쟁이가 우리를 대표하냐는. 하지만 난 한윤형이라는 개인 캐릭터가 한국사회의 모순을 담고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고 대표성이 있다고 봐. 편집자 입장에서 독자들 반응을 살피게 되는데, 내 또래 청년세대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런 책을 기다려왔다는 반응이야. 멘토 담론, 힐링 담론이 식상했던 지점에서 나왔으니까. 기성 세대의 반응은 아직 잘 모르겠어. 이해한다는 반응도 있지만 감흥을 아직 못 찾았다는 반응도 있고. 다만 ‘공감한다’는 반응이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지. 디자이너가 책을 받자마자, ‘열폭이 뭐야’라고 물었었는데(웃음).

한윤형 : 나도 그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열라 폭발’의 준말인가? 싶었어(웃음). 책 서문에 ‘용어 설명과 등장인물 소개’를 썼잖아. 처음엔 이런 걸 어떻게 쓰나 싶었는데, 또 쓰다 보니 재밌더라. 평소에 번역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가끔 나 자신을 번역기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세대적 방언일 수도 있고 전공 방언일 수도 있지. 인터넷 논쟁이 꼬이는 이유가 사실 알고 보면, 생각이 달라서라기보다 서로가 사용하는 방언 체계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든. ‘난 이렇게 생각해, 넌 이렇게 생각해’라고 끝내면 되는데, 서로 다른 언어체계에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니까 계속 겉도는 거지.

김류미 : 윤형 씨의 탁월한 장점이 요약을 잘 정리한다는 거잖아. ‘요약정리지왕’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고 말이야.

한윤형 : ‘넘사벽’이라는 말이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의 준말이잖아. 인문학 방언으로 번역한다면 ‘심연의 간극’ 쯤이 되겠지. ‘열등감 폭발’의 준말인 ‘열폭’은 ‘인정 투쟁을 몹시 하고픈 상태’로 해석될 수도 있고. 난 ‘열폭’을 가지고 사회과학담론을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왜 사람들이 타블로 사건을 참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 웹툰을 잉여의 시선으로 보는 공공성이 있는데, 인문학은 굳이 이말년의 웹툰을 분석하며 대표성을 가지려고 하지. 사실 이말년은 특이한 웹툰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대표성을 띤다고 볼 순 없잖아. 인문학 담론도 뭔가 제일 튀어 보이는 것을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직관적으로 느끼고 접근하고 있지. 해석을 소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잘 알게 하는 인식을 줘야 하는데, 전공자들은 자신의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만 바쁘지. 어느 사회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매개가 부족해. 좀 심하지. 제법 선진화되면서 각 전공에 맞게 학자, 전문가가 있는데 몇 십 년이 지나도 똑 같은 주제로 싸우고 있다는 것, 이게 문제지.




보편적 감성을 건드리다

김류미 : 우리, 책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안 하는 거 아냐(웃음). 내가 독자라면, 윤형 씨가 세대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할 것 같은데.

한윤형 : 글쎄, 5년 전에 희망청에서 『88만원 세대』의 후속작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들어갔을 때도 난 그게 특별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합류한 건 아니었어. 그 때 내가 스물여섯 살이었는데, 이 나이 언저리에 있는 사람도 한 축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지. 처음엔 세대론에 대한 관심보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두 가지 문제가 서로 연결되는 지점이 많잖아. 프로젝트가 좌초되고 이후에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쓰게 되면서, 또 세대론에 대한 원고 청탁을 많이 받으니까 더 파게 됐지(웃음).

김류미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만들면서 우리 세대는 정말 뭔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세대였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어. 처음에 책을 기획할 때는 한윤형이라는 저자의 캐릭터를 드러내고 세대론의 종결자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책이 나온 후 반응을 보니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더라. 청춘 세대론을 분석할 때 보통 88만원 세대, 우석훈부터 이야기하는데 윤형 씨는 근원부터 짚어내잖아. X세대, 월드컵 주체, 촛불시위부터 봐야 한다고. 이 책의 2부에 실린 ‘누가 우리를 명명하는가’는 세대론에 대한 충분한 가이드가 되는 글이라고 자신해. 이 글만 읽어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맥락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한윤형 : ‘20대 멘토 담론의 현실’도 쉽게 읽히지 않나, 싶어.

김류미 : 맞아. 요즘은 다들 멘토 찾기에 혈안이 돼있잖아. 윤형 씨는 멘토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한윤형 : 멘토가 필요 없다는 관점은 아니야. 책에도 썼듯이 누군가는 그들에게 위로를 받기를 바라. 본인이 받을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하지. 그렇지만 그 위로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것이 자신을 더 괴롭히는 조언이 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김난도 교수의 조언을 가지고 살아도 되는 친구들이 있어. 다만 이 조언을 사회 전체, 우리 또래의 청춘들이 모두 적용해도 되는 조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문제지. 나 자신에게 한계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조언은 문제가 돼. 자기계발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90년대 영화 <굿 윌 헌팅>에서 ‘It's not your fault’라는 대사가 나오잖아. 그런데 요즘 세상은 주변 환경 자체가 ‘다 네 잘못’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 그래서 안철수의 청춘 콘서트가 인기를 끌었잖아. 다 네 잘못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세상을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했으니. 물론 이런 사과도 대표성을 인정받는 사람이 해야 받아들여지는 거지만.

김류미 : 지금 멘토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유감스럽게도 책을 내고 유명 강연자가 된 배경에서 권위를 얻고 있잖아. 모양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게 사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싶은 하나의 모습인 것 같아. 그들을 보면서, 내가 있을 데는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들게 되는 거지. 현실을 무시할수록 멘토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넘쳐나는 열정들과 방향성은 있는데 이걸 원하는 것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잉어력이 멘토에게 다 투사되어 버리는 거지. 그런 느낌을 받아. 좋은 멘토란 어떤 사람일까?

한윤형 : 끊임없이 들으려고 하는 어른들이 멋지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저자인 엄기호는 계속 들으려고 하잖아. 계속 수렴하려고 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

20대 세대론과 청년 담론의 범람은 이 필요성을 무의식 중에 자각한 진보 진영의 나름의 대응 방안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년들을 사회문제 인식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말하는 지식인들이 새로운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 ‘멘토’ 역할에 대한 경쟁을 시작한 것에 가깝다. 물론 여기서 ‘멘토’나 ‘멘토링’이 보수적이라고 질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시장의 필요가 되었든 사람들의 심리 문제가 되었든 ‘멘토’를 요구하는 구조가 있었을 때, ‘88만원 세대’ 담론의 주창자도 멘토로 군림하게 되었고 그 세대론에 기반하여 청년층에게 이런저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이들도 멘토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분석이 더 타당하다. (p.142)


20대도 자기계발서 쓸 수 있지 않을까

김류미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타이틀이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이잖아. 스스로 정말 잉여라고 생각해?

한윤형 : 자유기고가 시절일 때 그런 느낌을 많이 가졌지. 우울증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진 않아. 다만 창작, 예술하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어. 소설은 읽는 사람한테 어떠한 모습이든 도움을 주잖아. 정치 평론은 뭔가 바꿔보려고 쓰는 글인데 그런 목적에 대한 적합성이 떨어지나 보니, 종종 이게 뭐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 글을 쓰면 문빠들은 내가 안빠라고 하고, 안빠들은 나보고 문빠라고 하니(웃음).

김류미 : 난 아르바이트를 정말 오랫동안 했잖아. 아르바이트를 오랫동안 하다 보니, 정규직이 되기 전에 계층화된 착취 구조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 알바, 계약직, 인턴까지. 교사 세계에서까지 계약직, 시간강사, 기간제가 있으니. 그 안에서 느꼈던 잉여감,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언젠가 지하방에 앉아 있는데 구두 신은 여자들이 출근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거야. 당시 주호민의 『무한동력』을 열독했는데 ‘아 나도 출근하고 싶다’를 외쳤었지. 그런 시절이 길었어. 먹고 살려면 뭔가를 해야 했고. 한 때 알바사전을 써보고 싶은 희망사항도 있었지.

한윤형 : 과외도 90년대에는 명문대만 들어가면 잘 들어왔는데 지금은 양태가 달라졌잖아. 강남 아이들은 부모 친구 아들로부터 고액 과외가 연결이 잘 되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은 업체에 수수료 떼이고 그나마 연결이 되면 몇 달 있다가 잘리고. 과외도 이제 안정적인 아르바이트가 못 되는 것 같아. 과외비도 동결됐잖아. 이런 사소한 문제를 역사적 맥락으로 접근해보면 다 이유가 있어. 덕후 기질 같지만 내가 이런 사소한 것들에 관심이 많아.

김류미 :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회 현상에 대해, 우리만 이해하는 언어로 말하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서 소통하는 책을 만들고 싶어. 자족적인 담론, 표현에 머물지 않고. 난 20대가 말하는 자기계발서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사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회과학서인데 그렇게 읽히지만은 않잖아.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친절하게 말하고 있으니까. 편집자로서의 이 시대 주목할 만한 필자들을 발굴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게 나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

한윤형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쓰면서,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마무리를 하고 보니, 내고자 했던 열망이 컸던 것 같아. 무엇보다 공감한다는 평가를 받으니까. 창작 욕구가 없진 않지만 이미 계약된 글빚들을 다 갚고 나서, 뭔가를 시작해야겠지.

김류미 : 그렇다면 지금 뭘 가장 하고 싶어?

한윤형 : 편하게 책을 읽고 싶은데 자유기고가였던 상황에서도 직장인이 된 상황에서도 정말 쉽지만은 않아. 변화를 위해 글을 쓰지만, 정말 변하는 세상은 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그래도 읽고 또 쓰게 되겠지, 아마도.

이제는 ‘주류’에 대한 부정적인 규정으로서의 ‘나-루저’가 아닌 다양한 루저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 안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서로의 모습을 발견해가는 시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런 시도가 진행될 대에 루저들은 ‘비참함을 지각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굴레에 벗어나 자신보다 아래의 ‘부속품’들의 삶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담론의 영역에서도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을 통해 그들의 삶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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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한윤형 저 | 어크로스
세대론 담론의 등장 이전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치 사회 분야를 넘나들며 가장 많은 글을 쓴 칼럼니스트 중 한 명인 저자 한윤형은 ‘20대의 목소리’를 사수하기 위해 분투해야만 했다. 그는 청년 세대가 가진 냉소와 무기력을 발견했고, 모순 속에 놓인 자신의 20대를 통해 오늘의 청년 세대의 문제를 눈물이 날 정도로 재밌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게 되면서도, 시대와 사회를 탐구하는 저자의 작업을 통해 세대를 넘어선 사회 문제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청춘의 존재 선언’을 만나게 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작가 김경, 취향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말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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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말하는 사회에서 패배자에게 끌림을 느낀다는 작가 김경. 패배자의 정의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물으니 김경은 되물었다. “우리 사회에서 승자가 몇 명이나 될까요? 3%도 안 되지 않을까요?”승자가 됐다고 착각하는 순간, 또 다른 승자가 나타나고 이내 패배자가 되는 현실이다. 상처 받고 무시 당하는 괴로움을 아는 보통의 사람으로서 김경은 “패배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다는 건 인류에도 유익한 일이 아니냐”고 물었다. 또한 그들 편에 속해 있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김구 선생은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경 역시, 동정, 연민을 긍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를 썼다.

김경은 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피처 에디터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 이름 난 유명인, 화려한 스타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연약한 모습이 많은 한 인간이었다. 같은 취향으로 마주했을 때 그들은 더없이 끌렸지만,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고 나면 매정하리만큼 애정도 끝났다. 평생을 살면서 변하지 않고 좋아할만한,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김경은 끊임없이 갈구했고 찾았고 만났으며, 결국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이현세의 ‘까치’가 아닌 고행석의 ‘구영탄’을 좋아하는 남자, 아무리 가난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절대로 명성이나 돈에 타협하지 않은 의기양양한 패배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바로 김경의 남편이다. 에디터의 타이틀을 떼고 생계형 작가가 된 김경은 ‘도시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할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재택근무자’인 화가 남편과 혼인신고만 한 채, 강원도 평창에 터를 잡고 집을 짓고 있다. ‘벽돌 한 장도 우리 손으로’를 모토로 향수 대신 흙 냄새를 맡으면서 부지런히 돌담을 쌓고 있다. 평창의 공기 덕분에 탄생한 책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를 읽고 김경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평소 서울에 올라오는 일이 잦지 않은 저자인지라 라디오 방송 녹음이 있는 날, 어렵게 김경과 얼굴을 마주했다. 책으로 마음의 속살을 훔쳐 보았으니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 좀처럼 미사어구를 사용하지 않아서 일까, 김경의 생각이 수월히 읽혔다.

‘취향’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취향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취향이라는 게  있을까.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오래 사랑을 느끼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 누구랑, 어디서, 어떤 대화를 하면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가 바로 취향이라는 거다. 톨스토이가 취향이 인간 그 자체라고 했는데 그건 아마 이런 말이 아닐까 싶다. 태어나는 건 우리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취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변화시키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인생에 어떤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누구와 함께 살을 맞대고 평생을 살 것인가 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누구를 사랑하는지 그 대상에 대한 취향이 제일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패배자에게 끌린다는 건 무엇일까. 취향보다 연민 같은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많은 사람들이 연민이나 동정을 값싼 감정으로 여기는데 내 취향은 물론 도덕이나 연애관까지도 그렇지 않다. 특히나 상처받고 무시당하는 약자 편에서 그들 편에 속해 있는 자신을 긍정하는 건, 자기 자신은 물론 인류에게도 이로운 거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패배자’와 ‘패배자처럼 보일지라도,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자기만의 가치에 따라 사는 사람’과는 구별이 되야 하지 않을까.

물론이다. 못나게 패배 의식에 젖어 사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대로 의기양양하게 사는 패배자를 좋아한다. 예의적으로 자책하고 자괴감에 늘 불행했던 카프카라는 위대한 패배자가 있긴 하지만. 그건 예술가들의 숙명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취향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지 않나?

처음부터는 모른다. 내 취향이 뭔지. 호감을 느끼고 있는, 혹은 평소 취향이 좀 나랑 맞다 생각한 지인이 패티 스미스가 좋다, 멋있다 하면 한 번 찾아보는 거다. 음악도 듣고 책도 읽어 보고. 그렇게 계속 탐색하고 경험하고 느끼고 배워야지 자기한테 정말 좋은 걸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취향이 부딪칠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바람직할까?

그런 사람이 이웃이거나 동료이거나 친구면 아무 문제가 없다. 아 그냥 나랑 다르구나 하면 되니까. 그런데 남편이거나 아내이면 각자 자기만의 취향 속에서 고독하거나 권태로울 수 있다. 그래서도 기왕이면 배우자만큼은 취향이 잘 맞는 사람이면 좋다는 거다. 하지만 이왕 취향 이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닐까. 서로의 취향을 긍정하고 나누고 공유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계속 기회를 주면서.

김경의 사람 취향도 궁금하다. 분명 끌리는 사람의 공통적인 모습이 있을 텐데.

궁극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완벽하게 순수할 수는 없지만 순수라는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이 좋다. 그리고 정직한 사람, 저항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돈이라는 지배로부터의 저항감도 중요하고 기업이 원하는 대로 순종적인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저항감도 중요한 것 같다.

김경이 현재 저항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

빌라든 아파트든 업자들이 지은 집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집안을 내 취향에 맞게 꾸민다고 하더라도 내장재는 대기업이 만든 게 아닌가. 요즘 집을 짓고 있는데 벽돌도 문도 내가 만들 계획이다. 네팔에서 사온 천으로 커튼을 만들고 싱크대 같은 것도 직접 만들고자 한다. 무엇보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대도시의 숨막히는 고만고만한 아파트나 빌라에서 살기 마련인, 심지어 그렇게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곳에 살면서도 매달 은행 융자금의 압박을 느껴야 하는 그런 보통의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언젠가부터 니어링 부부나, 소로우, 타샤 튜더처럼 시골에 나만의 소박한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는데, 지금 그 꿈을 실현시키는 일을 시작한 셈이다.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릴 거다. 남편과 내 손으로 직접 지을 거니까.

진정으로 고상한 취향은 결코 에르메스나 샤넬 매장에서 얻을 수 없다. 냉혹한 이 세상에서 여전히 순수와 예술을 사랑하고 연민에 이끌리는 인간적 온기에서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작가의 영감은 수치심으로부터

패션지 에디터라는 직업은 취향을 다루는 직업이기도 하다. 직장을 그만두고 후회한 적은 없었나. 에디터라는 타이틀을 버리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무엇인가?

패션지 에디터로 산다는 건, 대중이 열광할 만한 매혹적이고 황홀한 수많은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어 독자에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매우 흥미롭고 나름대로 보람도 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매달 새로운 매혹거리들을 다루는 일이 나로서는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또 내가 그런 것들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내가 진심으로 살고 싶은 삶, 그리고 한때의 트렌드처럼 바뀌는 게 아니라 계속 사랑하고 영속적으로 열광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결국 내 취향이 그런 대상을 찾아내서 그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장소에 정착하게 된 거다. 마감 시간에 쫓기며 경쟁적으로 일하는 직장 생활이 참 괴로웠다. 회사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17년을 다니다 보니 덜컥 공황장애에 걸렸다. 그런 상황에서 상사와 불화가 생기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회사라는 곳이 우리의 인간됨과 개성을 조금씩 조금씩 말살하는 곳이 아닌가 싶어서 용기를 내어 그만둔 거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당황스럽지 않았는지? 일을 그만두고 난 뒤, 공황장애가 사라졌는지 궁금하다.

도시에서의 직장 생활은 필연적으로 늘 시간에 쫓기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동반한다. 그래서 생긴 병이었는데 지금은 터널에서도 80킬로미터를 밟을 정도로 괜찮아졌다(웃음). 비록 고속도로는 안 가고 국도만 이용하는 형편이지만 불편함은 전혀 없다.

‘망할 놈의 로고에서 헤어나는 법’이란 글에서 명품에 열광하는 대중의 취향에 대해 매우 시니컬하게 썼다. 패션지 에디터로서 활동을 오래 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는 아닐까.

그렇다. 천만 원짜리 발맹 재킷을 야단법석 칭송하다가 6개월만 지나면 일종의 역겨움을 느끼는 대상인 양 끌어내리고 또 다른 것에 영광하며 대중을 유혹하는 게 패션지의 본질이니까. 다행히 난 패션 기자가 아니고 책이나 미술, 영화, 인물들을 다루는 피처 기자이긴 했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매체를 진심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는 게 늘 딜레마였다.

이 딜레마를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에서 고백했다. 현재 패션지에서 일하고 있는 선후배들이 보면 서운해할 수도 있겠다.

사실 제일 두렵고 괴로운 점이 열심히 일하는 패션지 후배 기자들 힘 빠지게 하는 내용이 제 책에 포함되어 있다는 건데, 그건 나로서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계속해서 괴롭고 외로운 건 내 몫인 거고. 책을 내면서 트위터를 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친구가 작가 에밀 시오랑의 ‘작가의 어떤 영감은 자신의 수치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인용했더라. 이 이야기에서 용기를 좀 얻었다.

‘새 코를 장만했다’ 편에서는 성형수술을 받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런 경험을 털어놓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성형 수술 권장하는 글처럼 읽힐까 두려웠지만 아름답고 싶은, 아니 적어도 볼품 없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고 싶지 않은 우리 시대 여자들의 비애를 몸소 경험한 바가 있어서 솔직하게 쓰고 싶었다. 성형 수술 과정에서 깨달은 것, 생각한 것, 느낀 것까지 모두 다.

패션에 민감한 사람이나, 겉모습의 취향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나.

간지 나게 멋있게 입으면 좋다. 옷이 때로는 신분증이나 입장권 같은 역할을 하니까. 하지만 거기에 너무 도취하거나 매몰되면 자기 자신을 잃을 수가 있다. 그걸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인간의 결핍감을 메우기 위한 도구로 옷만큼 허망한 게 없지 않나 하는 믿음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옷이란 가치 없이 버릴 수도 취할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 사람은 거의 평생 영향을 미치지 않나.

인생은 짧다. 그러니까 내 말은 스물이든 서른이든 갈 길을 확실히 정했다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을 유혹의 대상으로 정해 시간을 낭비하며 쫓아다닐 여유가 전혀 없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누구를 유혹의 대상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자신의 전 생애를 걸어도 좋을 만큼 가치 있는 대상을 찾는 게 중요하다. (p.111)


남편의 신념, 감수성에 반했다

책을 통해 남편을 만나게 된 것도 취향 덕분이라고 말했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연애를 한 걸까.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엄청난 수의 우연이 겹친 운명이지 않았을까 싶다. 서른여덟살 쯤 만났는데 ‘아이쿠 내가 저 사람을 만나려고 그동안 그렇게 실패한 연애만 주구장창 했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남자다운 구석이 별로 없는 깡마르고 다소 무능력해 보이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내 눈에는 숨겨진 보석처럼 보였다. 음악이나 책,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 같은 취향도 잘 맞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을 위대한 것으로 보는 그 사람의 생각이나 신념, 감수성 이런 것에 반했다. 우리 시대는 운이 없으면 누구나 금방 가난해질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이 사람은 물질적으로 아무리 가난해도 결코 가난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흔 가까이 보람도 없이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연애 대상을 끊임없이 물색하더니, 내가 드디어 엄청난 보물을 찾아냈구나 싶었다(웃음).

결혼을 저주받을 재앙 속으로의 몰락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는데, 현재 결혼 생활은 어떤지 궁금하다.

‘결혼식 따위에 쓸 돈 없다’ 이러면서 혼인신고만 했다. 혼인신고도 건강보험을 통합하기 위해서 한 건데, 앞으로도 그걸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강원도 평창에서 살게 된 후 다시 시를 읽는 즐거움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일상이 즐겁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 걸까.

서울과 평창의 차이는 안정감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 에디터 생활을 할 때 1년 동안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다. 항상 다른 곳에 있는 내 모습을 꿈꿨다. 그래서 불행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예전에 발렌시아에서 여행을 하는데, 실이랑 바늘을 사서 공원에 앉아 뜨개질을 오랫동안 했다. 그 때 느꼈다. 내가 절실하게 원하는 게 나만의 비어있는 듯한 한가로운 시간이라는 걸. 지금은 충분히 그렇게 살고 있어서 괜찮다. 행복하다(웃음).

언제 가장 행복감을 느끼나?

남편이 조금 먼저 일찍 일어나 강아지들 밥을 주는데, 내가 눈을 뜨고 아는 척을 할 때. 잠들기 전에 남편과 뭔가를 먹으면서 음악도 듣고 가끔 춤도 출 때, 행복하다. 남편을 만난 지 3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도 연애하는 것 같다. 24시간 느껴지는 조용한 고향감도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생계형 작가가 됐다. 김경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발굴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발견한 걸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조심스럽게 두려움을 품고, 그러나 미소와 함께 호의를 안고. 물론 그걸로 밥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생계형 작가답게 더 잘 썼어야 했는데 이제 겨우 2년차라 많이 설익은 걸 내 놓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수치심을 동력 삼아 더 열심히 쓰려고 한다.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어떤 절박함 속에서 더 바닥까지 내려가면 더 좋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바도 있다.

사랑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라면, 결혼은 ‘알아본’ 그 사람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더 ‘알아가는’ 거다. 사람 한 명이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평생 한 사람만을 탐구한다 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반생 동안 계속되는 우주여행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리석게도 나는 나이 마흔에 아직도 그런 꿈을 꾼다.(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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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김경 저 | 달
사랑, 패션, 라이프스타일, 인물, 사회 등 우리 삶의 깊숙한 면면을 훑어 취향의 넓은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이 책은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면 인생이 무슨 대단한 보물찾기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저자 자신이 자기 영혼을 걸고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모든 경험담과 사유를 불러들여 그야말로 살아온 생애로 증명한다. 무엇보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끌어당기는 놀라운 인력, 세상의 수많은 영혼 중 아무 계산도 없이 즉흥적으로 한 영혼을 선택하게 하는 힘이 취향임을 인식한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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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깡통 스프, 알약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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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프랑스의 다다이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마르셀 뒤샹이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갤러리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보낸 작품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샘>이라 이름 붙여진 이 작품은 당시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남성용 소변기였던 것이다. 결국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전시회였음에도 <샘>은 작품으로서 합당치 않다는 이유로 전시가 거부됐다. 하지만 그렇게 기존 미학의 질서를 뒤집으며 탄생한 <샘>은 현대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예술의 정의와 미학의 영역까지도 뒤흔들어 놓았다.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뒤샹의 경우와 같이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해체시킨, 일종의 저항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진중권 교수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변화를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구분하며 전후 예술계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주요 비평가들의 평론을 중심으로 맥락을 짚어준다. 난해한 현대예술사가 그의 치밀한 분석과 글쓰기를 통해 일종의 교통정리가 된 셈이다.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출간을 즈음 해 논객의 입장이 아닌 미학자 진중권 교수와 마주했다.




5년 만에 완간한 서양미술사 시리즈

현재 동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진중권 교수는 일주일에 3개의 강의를 맡고 있다. 학교까지 2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을 ‘체력을 보충하는 휴식시간’이라며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일단 5년 간 총 3권으로 서양미술사 시리즈를 완간한 소감이 궁금했다. 헌데, 끝은 끝이되 완간은 아닌 듯하다.

이번 『서양미술사-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2008년부터 시작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시리즈 완결편으로 알고 있는데요. 완간한 소감은 어떠신지요.

처음에는 기획이 간단했어요. 서양미술사 전체를 일괄해서 보여준다기보다 미술사의 코드 중심으로 간단하게 쓸 생각이었고, 그래서 원래 2권 분량으로 기획을 했거든요. 그런데 쓰다 보니 양이 많아져 3권으로 쓰게 된 거죠(웃음). 그런데 그렇게 3권까지 왔음에도 여전히 빈틈이 보이는 거예요. 두 가지 정도가 있어요. 하나는 19세기 말 모더니즘이 탄생할 때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가 중요한데, 그 부분을 통으로 빼버렸어요. 또 하나는 1990년대 이후 지금의 예술이 빠졌죠. 이 부분은 쓰기에 무리가 있거든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비판적 거리를 취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3권을 내 놓고 보니 한 번 다뤄줄 필요는 있겠다 싶더군요. 일단 3권으로 완간을 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넘버링을 안했으니, 보론 비슷하게 중간에 한권, 끝에 한권 씩 좀 얇게나마 보충을 하면 성에 차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후 서양미술인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 미니멀리즘, 플럭서스, 팝아트 등으로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짚어주셨는데요. 각각 미술사조에 공통 된 특징은 없을까요.

공통점으로 묶을 수는 없고요. 모더니즘, 그 중에서도 2차 세계대전 전에 클래식한 모더니즘과 구분되는 전후 후기 모더니즘 혹은 2차 모더니즘의 서사를 만들어 낸 것이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요. 그린버그가 없었으면 사실 미술사의 흐름이 잘 구성이 안 될 정도죠. 2차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굉장히 형식주의적으로 좁게 이야기한 그린버그의 정의에서 벗어나려는 흐름들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모더니즘은 자기 논리가 있었거든요. 평면성을 향해 발전해 나가는 동적인 흐름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모더니즘 자체가 그린버그에 의해 너무 형식주의 적으로 규정된 부분이 있었죠. 아방가르드의 측면들이 억압 돼 있었던 거예요. 그것이 1960년대부터 튀어나오기 시작한 거고요. 그러한 움직임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이 자기 동력을 가지고 전개되는 측면이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 반발하는 흐름이기도 했어요.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이런 동적인 흐름을 봐야 해요.

그럼에도 크게 봐서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적어도 1960년대 전 후기 탈 회화적 구성까지 모더니즘의 서사는 이어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미니멀리즘부터 갈라지기 시작하죠. 이때부터 형식주의라기보다 아방가르드의 느낌들, 반 미학적인 느낌들이 강해지거든요. 모든 것이 공통 돼 있다는 논리보단 그런 서사적 흐름을 보는 것이 맞아요. 어렵게 느껴진다면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줄기로 삼고 보면 될 거예요. 또 그 이후는 그린버그의 탕아, 즉 말을 안 듣는 자식들(웃음)의 운동이라고 보면 후기 모더니즘의 맥락이 잡힐 거예요.


사실 ‘서양미술사 시리즈’는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난이도가 조금 있는 듯한데, 독자들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마 그럴 거예요. 사실 이 책은 초보자를 위해서 쓴 책은 아니니까요. 우리나라에 미술사에 관련된 책이 거의 없기도 하고요. 관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아직까지 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를 읽고 있더라고요. 아주 오래된 책이거든요. 현대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기도 하고요. 두 번째로는 미술사를 서술하는 관점 자체가 시대마다 달라지거든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피카소를 높이 쳤지만 요즘에는 뒤샹이잖아요. 서술의 관점 자체가 달라졌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죠. 그나마 괜찮은 것이 『1900년 이후의 미술사』에요. 굉장히 훌륭한 책인데 다만 연대기로 돼 있어서 맥락을 잡기가 좀 어렵긴 하죠. 제 책은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할 때 보면 될 거예요. 그냥 미술사를 들어가게 되면 너무 방대해서 정신이 없어요.




미학에 대하여

사실 미학은 일반인들에게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진중권 교수 역시 미학적 관점에서 미술사를 짚었지만 그 외 다른 분야에서도 적용되는 미학의 정의는 다양하다. 이에 진 교수는 큰 틀에서 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미학을 설명했다. 철학의 ‘진선미’가 있다면 ‘진’은 인식론과 존재론을 다루는 것이고 ‘선’은 윤리학, 마지막으로 ‘미’가 바로 미학이라는 것이다. 광활한 범주의 미학을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 진다.

미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막연한 편인데 예술사에서 미학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미학은 개별 예술학과는 달라요. 비주얼(visual)이 아니라 콘셉츄얼리(conceptually)거든요. 이전에는 감각적인 쾌감을 줬다면 현대미술부터는 지성적인 쇼크를 준 단 말이죠. 지성의 문제이기에 철학적 미학의 도움이 없이는 미술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미술사를 한 분들은 철학적 훈련을 거친 분들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다보니 가시적 양식의 변화는 기술할 수 있어도 그 밑에 깔린 철학적 관념들의 변화와 논리전개는 약하죠. 저는 미술사학을 하는 분들에게 꼭 철학공부를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미학이 사회 각 분야에 적용하는 사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미학은 이미 영역이 넓어졌어요. 미와 예술에 관한 학문이었다가 최근 20세기 후반부터는 지각론으로 가거든요. 거기다 감각론 일부를 다룰 정도로 넓어졌고요. 사실 미학은 원래 17세기에 감각론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동안 미와 예술로 좁혀졌다가 다시 옛 지혜를 획득한 거죠. 미학은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요. 문화평론도 그 예이고 하다못해 아이폰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고요. 아이폰을 통해 영상을 보는 문화, 조그만 스크린으로 보는 문화와 큰 스크린으로 보는 문화 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겠죠.

교수님께서는 사회의 각 현상 혹은 대상을 바라보실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시는지 궁금하네요.

글쎄요. 그냥 그 현상을 남과 다르게,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남들이 보지 못한 것, 알아채지 못한 것을 볼 때 철학과 미학의 도움을 많이 받죠. 사실 제가 트위터나 논객으로 활동하는 것과는 큰 연관이 없고요. 다만 에세이를 쓸 때 정도는 관련이 있을 수 있겠죠.

복잡한 사회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좋을 듯 한데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책을 많이 사야해요(웃음). 일단 책을 많이 봐야죠. 그 다음에 읽은 것을 적용을 시켜 설명을 하려 노력해야하고 또 써봐야 해요. 하다못해 블로그 글이라도 쓰고 설명하려 하고 노력하는 게 좋아요. 적용하지 않는 이론은 배우나 마나하죠. 고작 자기 과시 정도 될까요? 실제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떤 이론을 배웠다고 하면 ‘넌 그 이론으로 어떤 것을 설명해 냈느냐’ 그렇게 물어야 하거든요. 내가 어떤 책을 한권 읽었다고 하면 그 특정한 현상에 대해 남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글보다 다른 글을 쓰는 노력들이 평소에 연습이 되어야하겠죠. 그런데 요즘 블로그 글들은 너무 천편일률적이에요. 그건 낭비거든요. 뭘 한다고 하더라도 콘텐츠가 다르거나 같은 콘텐츠라도 말하는 방식이 달라야 해요. 이 두 가지를 항상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하고 책이나 여러 가지를 참고할 수 있겠죠. 명심할 것은 ‘이론은 도구다. 쓰지 않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에요.




직설화법의 대가? 오해와 진실

많은 사회 현상에 대해 혹은 사건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의견을 이야기하는 진중권 교수이기에 때로는 학자로서가 아닌 비평가, 평론가로 대중들에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그 덕분에(?) 손해를 많이 보고 있다”며 웃음 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인다.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그의 이미지는 어쨌든 극과 극을 호불호가 갈린다. 본인의 생각은 과연 어떨까.

다양한 사회 현안들에 대해 직설화법으로 의견을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로 인해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말을 아끼시지는 않는데요. 개인적인 소신이 궁금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있어요. 사인이면서도 공인이기도 한 거죠. 예를 들어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사인이지만 참정권을 갖고 있고 투표권을 갖고 있으면 국가공동체에 이해에 대해서 발언하고 참여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말을 안 할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라는 것은 참여하지 않으면 위험해지잖아요. 보수든 진보든 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좋다고 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참여해야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고, 인간의 기본조건을 정치성으로 꼽았고요. 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동의해요. 물론 정치에 참여 안 한다고 해서 인간 이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그것을 경제적인 손실로 따지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대게는 강성이셔서 오해도 적잖이 받으실 것 같은데요?

제 책보고 사람들이 쓴 서평 중에 ‘이런 사람인줄 몰랐다.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책을 쓰다니 다시 봤다’는 서평이 많아요. 그런 걸 보면 ‘내가 손해를 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죠(웃음). 또 하나는 언론 보도가 후져요. 나는 풍자하고 패러디를 하는데 정색을 하고 보도를 해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누구처럼 탄핵하거나 성토하거나 심판하는 것은 싫어하거든요. 내가 하는 것은 약간 조롱하고 비웃고 비꼬는 풍자코드, 도덕적 코드라기보다 미학적 코드인데, 기자들은 이 코드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것 같아요. 그게 좀 부담스럽죠. 예를 들어 ‘북한에 퍼준 지원이 핵무기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두고 제가 그걸 비꼬아서 ‘북한에 보내는 삐라에 달러를 넣은 것도 핵무기가 되어 돌아온 거 아니냐’고 하면 그건 농담이잖아요. 그런데 정색을 한다니까요. 웃어야 하는 대목에서 웃지 않는 거죠.

교수님이 소신껏 이야기하신 의견에 대한 평가는 많은데, 정작 교수님 스스로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전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저를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 안 쓰거든요. 제 정체성에 대해 악평부터 혹평까지 다양한 컬러가 있는데 그 총체가 모두 제가 아닌가 싶어요.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춰졌다면 나한테 그렇게 비칠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저를 정말 부당하게 욕한다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미화한다거나 해도 어쨌든 제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인정해줘요. 나만 아는 나의 실체라는 게 과연 사회 속에서 중요한가 싶어요. 어쩌면 대중들이 알고 있는 나의 이미지가 사회적 실체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그것은 그대로 내버려두자는 편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특별한 프로젝트가 또 있을 듯 한데요.

원래는 이 책을 작업하면서 고대부터 짚어내는 미술 비평사를 쓸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사실 본격적인 비평이라는 게 18세기 프랑스에서 발생 했어요. 물론 그 전에는 단편적인 비평들이 있긴 했죠. 저는 그 역사를 쭉 훑어가지고 20세기까지의 미술 비평사를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미학사 정리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우리나라에 미학사를 다루고 있는 게 블라디슬로프 타타르키비츠의 책과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정도니까요(웃음). 그래서 미학사를 제대로 다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했어요. 고대부터 중세, 근대, 현대까지 정리하려면 장기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한 10년은 걸릴 것 같아요. 잘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어나 라틴어도 배워야 할 거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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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편진중권 저 | 휴머니스트
이 책에서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화의, 새로운 사회의 생산자가 될 수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시대 예술과 대중문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현재적 질문에 따라,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의 예술이 만들어지고 있는 치열한 현장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중문화와 사회 전반에 대해 늘 소신 있는 독설을 서슴지 않는 미학자 진중권의 사회적 책임감과 신념, 그 미학의 총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할리우드 스타들은 왜 지니킴 구두를 신고 싶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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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유행했던 노래가사처럼 인생은 정말 ‘말하는 대로’ 되는 걸까. 신기하게도 지니킴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이 흘러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단순하고 경쾌한 그녀의 에너지 때문이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상대방이 그 마음에 감동하고 결국 우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지니킴의 이야기에는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다. 사랑하는 일을 만나고 그 일에 열정적으로 빠져들 것! 매 순간 마음 속 이끌림에 따라 움직였다는 그녀가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었던 건 마음을 다해 일을 사랑한 때문일 것이다.

신나는 걸음으로 꿈을 그려가는 『지니킴 스토리』를 읽고 그녀가 더 궁금해졌다. 봄볕이 따사롭던 날, 지니킴을 만났다. 독특한 미니드레스에 높은 힐을 신고 나타난 그녀 책 속에서 만난 것만큼 꾸밈없고 유쾌했다. 주변의 걱정과 만류 속에서 사랑하는 것을 지켜낸 사람의 자신감도 느낄 수 있었다. ‘지니킴’에 이어 론칭한 ‘페르쉐’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그녀는 이제 LA에 ‘지니킴’ 매장을 세우려 한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즐겨 찾을만한 특별한 콘셉트의 매장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는 지니킴에게서 생기 가득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자신의 꿈은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그녀. 지니킴의 꿈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책을 쓰는 일은 지난 시간을 돌이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 같다. 집필을 마치고 달라진 부분이 있나?

요즘 들어 겸손함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직도 배우고 이루어야 할 꿈들이 많이 남아있다. 구두 디자이너라는 사랑하는 일을 찾았지만, 인생에서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는 않을 거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감사하고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다.

큰 결정들을 수월하게 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택의 기준이 있다면?

본능에 충실했다. 정말 마음으로 원하는 일이면 그냥 시작했다. 사실 지금은 그렇게 일을 하면 실수를 할 확률이 높다. 일의 규모도 커졌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20대 때는 잃을 게 없지 않나.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시기다.

의상 디자인을 공부했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구두의 어떤 점이 자신을 끌어당겼다고 생각하나? 구두 디자인의 매력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을 때 만났기 때문인 것 같다. 지원했던 회사에 모두 떨어지고 가장 힘든 시간에 나타났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철이 좀 든 상태에서 만났다는 거다. 대학시절에는 노는 게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 원 없이 즐겁게 지냈다. 의상 디자인은 주변에 잘하는 친구들도 너무 많았다. 재능도 없는 것 같고, 계속해서 비교하다 보니 시작하기도 전에 흥미가 떨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구두 디자인은 혼자 즐거운 마음으로 빠져들어서 배워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구두 디자이너라는 길을 택해서 시작한 사람들에 비해 다양한 길을 거쳐 온 지니킴만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패션 잡지와 PR회사에서 일했고 유학을 가서 패션 비즈니스를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을 시작할 때 판매나 마케팅까지 모두 생각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계획이 서는 거다. 디자인에 매몰되지 않고 비즈니스적인 측면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 내가 가진 강점일 것 같다.

한때는 왜 나는 다른 사람처럼 하나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는지, 왜 나는 이토록 여러 갈래에서 방황하고 있는 건지 회의를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매 순간 점 하나를 찍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남들처럼 직선으로 쭉쭉 뻗은 길은 아니었지만, 여러 개의 점을 찍으면서 결국에는 예쁜 그림 하나를 완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p.122)
책을 읽다 보면 친구들과의 관계가 계속 등장한다. 중요한 순간에 함께 동행해주고, 지니킴의 로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친구는 어떤 존재인가?

친구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 살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꿈과 비전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친구다. 어렸을 때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친구들만 있었지만, 점차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적극적으로 친구 관계를 만들어간다. 같은 관심사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좋은 기운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맺으려 한다. 나는 친구를 따라 무엇이든 많이 하는 편이다. 구두를 시작할 때도 그랬고, 요즘 한창 흥미를 느끼고 있는 요리도 친구 덕분에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친구가 중요하다.

단순히 디자이너가 아니라 한 브랜드의 홍보 전문가이면서 최고 경영자로서 모든 역할을 해냈다. 많은 역할을 소화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부분인가?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디자인을 보면 비즈니스 부분까지 한 번에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디자이너만의 순수한 기쁨을 느끼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디자인이 가진 예술적인 측면을 마음껏 즐기는 그 기분이 부러울 때가 있다.


지금까지 많은 ‘기적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했을 때, 일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꼽자면 언제인가?

맨 처음 온라인으로 구두 주문을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인터넷으로 주문자명을 쭉 보는데 아! 이 사람들이 내 구두를 사준 사람들이구나, 하면서 굉장히 감격스러웠다. 갤러리아에 입점하게 되었을 때도 정말 행복했다.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라 전화 연락을 받았을 때 꿈같았다. 그리고 잡지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이 내 구두를 신을 걸 봤을 때도 그랬다. 잡지를 보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여자로서나 사업가로서 세상과 만나는 과정에서 조정해 나갈 수 있는 부분과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각각 어떤 것이 있을까?

글쎄. 콕 집어 그런 부분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나는 굉장히 단순하다. 직관적인 편이라 미리부터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만, 참을 수 없는 건 이런 일이다. 누군가 찾아와서 굉장히 빨리 해외 시장과 연결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있다고 걱정 말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인정받지 않고 인맥으로 상황을 해결하면서 일하는 건 정말 싫어한다.

함께 일할 사람을 뽑을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뽑는가?

다른 것보다 인성을 많이 본다. 함께 일하는 건데 혼자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취향도 중요하다. 디자인이 좋더라도 색을 고르고 가죽을 고르는 과정에 따라 어떤 구두가 만들어지는지 결정된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취향이 중요하다. 고급스런 소재를 고르고 배치하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책에도 ‘좋은 취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비싼 취향’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좋은 취향’이란 어떤 걸까. 젊은 친구들이 좋은 취향에 가까이 가기 위한 팁을 선물한다면?

좋은 취향은 비싼 취향과 다르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취향을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포도주를 예로 들자면, 처음 포도주를 마실 때는 단 맛이나 과일 맛이 많이 나는 걸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계속 마시다 보면 포도주 안에서 나는 다양한 맛들을 즐기게 되고 드라이한 맛이 가지는 매력도 알게 된다. 그러다 관심이 생기면 공부를 더하게 되고 그러면서 좋은 취향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많이 체험하고 즐기고 배우다 보면 좋은 취향에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영화감독이 ‘창작물은 취향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좋은 취향을 갖고, 자신의 취향을 잘 알며,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사랑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의 삶 역시 취향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나고 자라는 환경이야 어떠하든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취향을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삶의 질을 바꾸게 된다. (p.236)
이번 책의 경우, 인세의 50%를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 컴패션 활동에 기부한다고 알고 있다. 성공과 나눔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내가 남들보다 크게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행운으로 여기까지 온 거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걸 나누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가진 것들이 많지 않아 나눌 수 있는 것도 적었다. 가끔 강연을 다니는데, 강연을 들은 친구들이 덕분에 힘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앞으로 점점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이 꿈을 그리고 이루어 가는데 중요했던 삶의 낱말 세 가지를 뽑는다면?

제일 먼저 ‘열정’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열정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에 마음껏 뛰어드는 열정이 가장 중요하다. 다음으로는 ‘행동’이다. 나는 치밀하게 계산하고 모두 준비된 상황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원하는 게 있으면 일단, 움직였던 것 같다. 움직이면 다음 문이 열리고 또 다음 문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긍정’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나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께 400만 원을 빌려 창업을 하면서도 분명히 될 테니까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도 꿈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은 긍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만 있다면 그 다음은 저절로 풀린다.(p.181)
빠르게 변화하는 패션 트렌드를 흡수하는 동시에 디자이너로서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지켜나가려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패션 쪽은 흐름이 정말 빠르다. 유행에도 민감해야 하고, 소비자의 니즈도 만족시켜야 한다. 그래서 매번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지니킴이 처음부터 추구했던 로맨틱 할리우드 스타일은 꾸준히 지켜가려고 한다. 지니킴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 시즌마다 제품의 20-30% 정도는 할리우드 스타일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바자>의 전미경 편집장의 말처럼 지니 킴의 끝은 여기가 아닐 것 같다. 지금 구상하고 있는 최후의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

패션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라이프스타일을 아우르는 브랜드를 론칭하는 게 꿈이다. 단순히 구두에서만이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지니킴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물론 곁눈질도 많이 해보자. 꿈은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직선도로가 아니다. 수많은 샛길이 있고,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험한 밭도 있다. 그 많은 갈래 길에 모두 관심을 기울여보아야 한다. 어쩌면 그 길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는 진짜 꿈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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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킴 스토리김효진 저 | 중앙북스(books)
국내 셀러브리티는 물론 할리우드 스타까지 매혹시킨 지니 킴. 스물여덟이란 나이에 4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첫 론칭한 ‘지니킴’을 샤넬, 구찌, 프라다 등과 나란히 하는 명품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패션의 평등을 꿈꾸며 두 번째 브랜드 페르쉐를 론칭하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그녀의 꿈과 도전의 드라마를 담았다. 20대 중반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선택해 뉴욕 FIT에서 패션 머천다이징 매니지먼트를 전공하고, 어느 날 우연히 친구가 만든 구두를 보게 된 뒤 운명같이 사랑에 빠져 구두와 함께해온 지난 7년간의 스토리가 고스란히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웅현 “한국사회 살면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것, 자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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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광고하다』에서 광고라는 창을 통해 그가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남다른 시선을 드러내더니, 그 시선으로 발견한 것들을 『책은 도끼다』에서 이야기했다. 자신이 감동했던 책과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감동이 우리의 삶에도 출렁거리는지 확인해보라고 재촉했다. 그는 우리가 살면서 쓰지 않는 감각을 깨우는 사람이다. 다른 어른들이 ‘너 빨리 안 일어날래?’ 윽박지르거나, ‘피곤해도 괜찮다’고 토닥일 때, 박웅현은 온갖 놀 거리, 볼거리, 재미거리를 눈앞에 가져다 보이고는, ‘어때? 재밌겠지? 재밌겠지? 이래도 안 일어날래?’하고 꾀어낸다. 『책은 도끼다』이후 많은 강연을 하면서, 그는 “대학생, 청년, CEO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서 놀랐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건 이런 그의 화법 때문이 아닐까.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것으로 받은 감동까지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여덟 단어』는 지난해 10월 12일부터 8주간 예스24 <채널예스>와 북하우스가 공동 주최한 ‘인문 읽는 광고인 박웅현의 8주 특강- 젊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의 강연을 묶은 책이다. “인생을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덟 단어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저자 박웅현이 꼽은 여덟 개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 인생.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남의 한 강의실에 젊음이 모여들었다. “인생은 책처럼 주어진 걸 읽어나가는 게 아니라, 공책처럼 써내려가는 것”이라는 데에서 『책은 도끼다』의 실전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근황을 물었더니, “21년 동안 똑같이 해온 대답”을 들려준다. “지금 하고 있는 캠페인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더불어 심심할 틈 없이 딴 짓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최근에 회사에 팀을 하나 만들었어요. 0팀이라고, 어처구니없을 만큼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팀입니다.”최근의 0팀의 성과로는, 지난달 코엑스에서 열렸던 ‘정신의학박람회’에 참가해 ‘안나카레리나 프로젝트’를 진행한 일이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품고 있는 인생의 질문을 전시해서, 부스에 방문한 방문객들에게 곤혹스러운 고민의 시간을 안겨준 것. 그는 이 자리에서 ‘톨스토이가 묻습니다’라는 스피치도 진행했다.

“컨버전스죠. 광고와 다른 것들과의 결합. 이렇게 새로운 점을 찍는 일이 중요해요. 못 보던 그림을 보게 되는 거니까. 이걸 어떻게 해나갈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한 치 앞을 모르겠는 거예요. 광고는 26년을 했으니까, 이다음 순서가 그려지는데, 내가 신경정신학회랑 엮일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래서 재미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요즘의 관심사는 그거예요. 그러다 보니 순간순간 집중하게 되고요.”


그가 ‘도찰’한 매화와 달의 은밀한 한 장면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자존을 이야기하든, 변화를 이야기하든 자신이 삶 속에서 그 문제를 어떻게 맞닥뜨리게 되었는지, 그때 어떤 선택을 했는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즘 시대, 요즘 세대, 요즘 어떤 문제들을 논하기보다, 그저 그가 요즘 몰두해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재미있다. 게다가 그가 감탄을 거듭해가며 찬양해마지않는 것들이 문학, 음악, 자연 순 본질적인 것들이라, 그의 기호는 여느 독특한 취향도 섭렵해낸다.

요즘은 날이 따뜻해지면서, 꽃과 눈 맞추고 대화하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호기심이 동해, 그 이야기 좀 들려달라고 졸랐다.

“매화하고 달하고요. 한밤에 아주 진한 연애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농염하기가 짝이 없어요.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 보세요. 매화가 유혹을 하는데, 달은 모른 척 슬쩍 곁눈질하고 있잖아요. 이런 게 꽃하고 나누는 대화죠. 옛날 어른들은 ‘야매도(夜梅圖)’라고 밤의 매화를 그렸어요. 선현들은 놓치지 않았던 거죠. 그 다음 날 이것들이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봤더니, 이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어요.(웃음) 유혹적인 그 밤의 매화, 어떻게 잊겠어요? 요즘엔 책보다 이런 게 더 많이 말을 걸어와요.”


당신이란 유기체를 존중하시길


『책은 도끼다』가 정말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았어요. 『책은 도끼다』를 통해 개인적으로 느끼는 변화가 있다면 뭘까요?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거죠. 여러 사람이 내 머릿속을 궁금해 해요. 예전에 저는 ‘왜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할 말이 충분히 있는가?’ 생각하죠. 그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에요. 내 뜻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울분이 사라졌어요.

『책은 도끼다』이후 많은 인문학 강연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셨을 텐데요. 강연자로서는 어떤 시간이었는지, 청중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어떤 확실한 답을 내려주길 바라고 올 땐, 답답한 마음도 있었어요. 저는 이런데 어떻게 해요? 답은 뭐예요? 묻거든요. 그건 나라는 유기체에 대한 존중이 아닌 거죠. 이럴 땐 이렇게 하라는 건, 회로도잖아요. 젊은 친구들이 그런 훈련이 부족한 것 같았어요.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돼요. 당황하죠. 그게 유기체거든요. 그렇지만, 뭐든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 일도 10년이 지나서 돌아보면, 아, 내가 이만큼 왔네, 느끼게 되거든요. 온오프 스위치처럼 내가 작동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그걸 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멘토는 답이 안 돼요. 참고사항으로만 가져가는 거죠.

젊음을 대하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언가 축적하고 완성해나가는 사람이 있고,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태도,라고 읽었어요.

목표를 뭐로 두느냐에 따라 완성이라는 의미가 다르겠죠. 완성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과정 아닐까요.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없는 지향점을 향해 가는 거죠. 그보다 순간순간 집중하고 즐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여정이 목적이 될 수 있거든요. 성공이란 말도 그렇죠. 성공이 뭘까요? 취직하면 성공이에요? 사장이 되면 성공일까요? 풀빵을 팔아도 그 일이 내게 발전을 주면 성공인 거잖아요. 나의 바깥에 있는 성공이나 완성이란 말에 너무 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 속에서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상사가 되고 후배를 거느리다 보니 비로소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고 하셨잖아요. 아마 시기별로 이 여덟 단어가 삶에 꽂히는 순간이 다를 것 같아요.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소중한 가치지만, 젊은 시절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면 역시 1번으로 꼽고 있는 ‘자존’일까요?

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제일 먼저 갖춰야 할 게 자존이라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를 꼽자면 권위를 꼽고 싶어요. 우리는 권위 앞에 너무 약해요. 무검증 상태로 상대에게 굴복해요. 책에서 말한 권위에 관한 담론이 한번쯤 나왔으면 좋겠어요. 허리 함부로 숙이지 말자. 그러나 내가 인정할 만한 것 앞에서는 기꺼이 무릎을 꿇자. 이게 멋있는 거잖아요.


자존을 지키는 매직 워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존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 자존을 지켜낼 힘이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 말대로, 전인미답의 인생을 가려면, 나의 부족함을 끌어안아야 하잖아요. 내가 발견한 나의 부족함, 남이 지적한 부족함, 그것들을 낱낱이 인정하고 나면, 자존감이 떨어져버리는 것 같아요.

이때 ‘매직 워드’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요. 내 안에 힘이 있을 것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약하다는 거죠. 남들은 강해 보이죠. 특히 나보다 성공한 사람들. 각광받는 사람은 늘 강해 보이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도 약해요. 그걸 아는 게 되게 중요해요. 나만 못난 게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내가 못난 것만도 아니에요. 잘난 구석도 있어요. 이런 걸 찾아내고 발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자기 삶을 걸어 나가는 거겠죠. 부러워만 하다 보면, 자기 것도 놓쳐요.

선생님이 책을 내고, 알려지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졌죠. 그래서 사람들이 더 귀를 기울이고요. 그렇다면, 이전의 박웅현이 ‘왜 내 말을 안 들어줘?’라고 지금의 선생님께 묻는다면, 무슨 얘길 해주시겠어요?(웃음)

남이 듣든 말든 신경 쓰지 말라고 할 거에요. 그때도 그랬어요. 왜 내 말을 안 들어 주느냐고, 사회에 불만을 품기보다, 나는 그냥 내 길을 갔어요. 듣든 말든,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의 기회가 온 거죠. 만약 내가 그때 뭔가 무리수를 써가며, 내 목소리를 높이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때 박웅현에게 이렇게 말할 거예요. ‘남이야 듣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옳은지 그른지만 봐.’

‘소통’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듯, ‘자존’이라는 가치에 직면했던 순간이 있나요?

많죠. 일할 때, 그런 상황이 많이 생겨요. PT를 할 때나, 갑을 관계에 놓여있을 때, 나보다 워낙 힘이 센 사람들이 날 눌렀을 때, 내가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할 때, 자존이라는 가치를 생각하죠. 애를 기를 때도 그래요.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과 아이가 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아이를 존중할 것인가, 그래도 아이가 살아나갈 이 땅의 풍토를 존중할 것이냐. 자존의 싸움이잖아요. 그때 ‘자존’이라는 가치를 떠올리며 선택을 해나가는 거죠.

늘 확실하게 답을 찾을 것 같은데, 선생님도 고민하면서 결정 내리는 거죠?(웃음)

그럼요.

후회도 하고요?

후회도 많아요(웃음).


자각했다면, 그 생각 놓지 마세요


며칠 전에 공부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우리가 암기하고 있을 때, 외국 학생들은 철학을 논하고, 토론하잖아요. 완전히 토대가 다르더라고요. 우리는 참 고단하게 공부하고 일하면서도 결국 이웃은커녕 자기 삶도 돌보기 어려워하며 사는구나 느꼈어요. 그렇게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구조적인 것들이 나를 좌절시킬 때, 어떻게 그걸 인정하고 ‘아모르파티’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이렇게 물어봐야죠. ‘그렇지 않으면 뭘 할 수 있어요?’ 이민 가요? 죽고 다시 태어나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모르파티에요. 여기서 답을 찾는 수밖에 없어요. 짐꾼이면 짐꾼의 운명을 사랑하라. 니코스 카잔차키스거든요. 내가 한국에서 태어난 건 고정 변수에요. 그럼 거기서부터 답을 찾아야죠. 거시적으로 우리 사회를 바꿔나가는 노력, 미시적으로 내 생각을 바꿔나는 노력을 하는 거죠. 그걸 해내는 사람이 사회를 변화시킬 거고요.

지금의 교육이 정말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사는 재미를 알기도 전에, 사는 게 고단하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의욕이 없다는 친구들이 많아요. 재미가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삶의 동력을 스스로 찾는 법을 잃은 것처럼요.

교육이 그래서 나쁘구나, 그걸 자각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게 제일 큰 문제거든요. 자각했다면, 그 생각을 놓지 말아야죠.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살다 보면 희석되거든요. one of them이 되는 거죠. 우리 사회가 이러이러하다는 걸 아는 것이 ‘돈오(頓悟)’에요. 그런데 1년 후에 ‘역시 어쩔 수 없네요’ 말한다면 ‘점수(漸修)’를 안 한 거죠.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면-여기서 ‘옳다’는 생각은 정말 중요하고요-그 생각이 흔들린다면 그걸 입증해줄 만한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검증해보면서 그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 같아요.

결국, 움직일 수 있는 동력도 자기 생각, 불만에서 나오는 거겠군요.

그게 시작이에요. 불만을 느끼지 않으면, 변화를 일으킬 방법이 없어요. 재미가 없다? 음악이 왜 좋은 거지?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까? 연극은 왜 보는 거야, 비싼 돈 내고? 뭘 봐야 그 연극의 재미를 알 수 있는 건데? 그렇게 노력하는 거죠.


온몸이 촉수인 사람이 되고 싶다


불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흔들리지 않는 것. 그건 포기하는 용기에서 나오는 힘인가 봐요. 근거 없는 희망을, 귀를 간질이는 세상의 기준을, 마냥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한 열광을 포기하는 용기요. 알지만 어려워요.(웃음)

맞아요. 그 포기가 지혜로운 거예요.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거든요. 그리고 정말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을까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거예요. 매화 피고 달 뜨는 거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걸 주목하느냐 마느냐가 시인이 되느냐 영화감독이 되느냐 결정해요. 그런 거 다 떠나서 그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삶의 풍요를 지닐 수 있느냐, 이거라는 거죠. 제가 능력만 있으면 매화를 두고 시를 썼을 거예요(웃음).

세상이 변하는 속도 때문에 휙휙 흔들리는 것 같아요. 변하는 대로 적응해가기도 어렵지만, 정말 우리를 어렵게 하는 건, 방향이 없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삶의 방향이나 기준을 잡는데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시나요?

경험이 많은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여행이 좋은 거죠. 여행 많이 한 사람은 지혜로워요. 직접 경험이 안 되면 간접 경험을 해야죠. 그게 난 책이에요. 인생은 전인미답이라 아무도 몰라요. 모르니 여러 가지 삶이 있다는 걸 보고 느껴야죠. 그렇지 않고 하나만을 향해 가는 사람은, 언젠가 닥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질곡에서 당황하거나 올바르지 않은 선택으로 힘들어질 수 있겠죠.

재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서 광고를 만드는 사람으로, 인생에 조언을 해주는 선배로서, 한 사람으로서 선생님은 무엇을 쫓아 어디로 가시나요?

난 내 울림판이 예민해지는 게 좋아요. 눈물이 많은 사람이 감정이입을 잘하고, 리액션이 좋은 사람들이 덤덤한 사람보다는 창의적일 거예요.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면 돼요. 내가 언제 웃음이 나고 눈물이 나오는지. 카찬차키스가 그랬거든요. ‘온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게 내 목표에요.

인생의 정답을 찾지 마시길. 정답을 만들어 가시길.
내일을 꿈꾸지 마시길, 충실한 오늘이 곧 내일이니.
남을 부러워 마시길,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시류에 휩쓸리지 마시길, 당대는 흐르고 본질은 남는 것.
멘토를 맹신하지 마시길, 모든 멘토는 참고사항일 뿐이니.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시길.
그리고 당신 마음속의 올바른 재판관과 상의하며
당신만의 인생을 또박또박 걸어가시길.
당신이란 유기체에 대한 존중을 절대 잃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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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박웅현 저 | 북하우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쯤 마주쳤을 여덟 가지 가치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만난 사람들, 그리고 책과 그림, 음악 등을 예로 들며 함께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왜 삶의 기준을 내 안에 두어야 하는지, 고전 작품을 왜 궁금해 해야 하는지, 동의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현재의 행복을 유보시키지 않고 지금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본질을 추구하는 그의 이야기는 새로운 질문이 되어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윤용인 “남편의 진짜 속마음이 궁금하다면 먼저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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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결혼을 안 했으므로 남편의 심리와는 무관하다”라거나 ‘남편의 본성이면 남자들만 보는 책인가 보지?’라는 식의 생각이 들거들랑, 부디 회개하고 생각을 고쳐 잡숫기 바란다. 남편의 본심이라고 쓰고, 인간의 본심으로 읽는 것이 바로 이 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세상의 모든 책장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어찌 됐든 뉴스에 탁해지고 오염된 마음, 본 책으로 정화하기 바란다.” 『남편의 본심』의 저자 윤용인이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여행사 홈페이지에 올려 놓은 ‘책 추천의 변’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조금 뻔뻔하다. “잦은 손가락 클릭은 류마티스 관절염 예방에 최고”라며 인터넷서점 구매 페이지를 링크해 놓았다. 이토록 껄렁한 제스처라니, 과연 전직 딴지일보 기자답다. 『남편의 본심』은 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 3년 동안 연재한 윤용인의 칼럼을 재구성한 에세이다. 단숨에 읽을 만큼 재밌기도, 그러나 씁쓸하기도 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아내, 남편들만을 타깃으로 정하지 않았다. 외로운 사람이 비단 남편뿐 일까. 남편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는 고통스럽고, 지켜 보는 사람들도 답답하다. 윤용인은 “우리 남편들 힘드니까, 좀 봐줘요. 잘해주세요”라는 응석받이를 요구하기 위해 글을 쓴 게 아니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이해해야 하고 ‘자기 돌봄’이 가장 중요하다고 속삭인다. 어쨌거나 『남편의 본심』을 읽은 독자들은 말한다. “어머, 어쩜 좋아. 전부 내 남편 이야기네.” “남편의 뜬금 없는 행동, 이런 뜻이었어?”

『남편의 본심』의 저자 윤용인을 만나기 위해 그가 운영하는 여행사가 있는 마포의 한 빌딩을 찾았다. 여러 지면을 통해 그의 칼럼을 호기심 있게 읽은 터라 사뭇 친근감을 느끼려는 순간, 글에서 느낀 인상과는 퍽 다른 모습에 흠칫 놀랐다. 조금도 과장되게 말하지 않는 말투에 진지함까지. 솔직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니라 원체 꾸밈말을 쓰지 않는 느낌?! 유머러스한 저자를 상상하고 온 필자는 잠깐 당황했지만, “원래 작가의 성격과 문체는 다르지 않냐”는 저자의 대답에 이내 수긍했다. 어찌됐든 이번 저서는 ‘아내가 알지 못하는 남자의 속마음’ 즉, 남편의 본심을 적나라하게 털어놓은 책이니, 결혼 20년 차를 맞은 저자 윤용인을 살짝 탐색하기로 해본다. <딴지일보> 기자와 사업국장을 거쳐 여행 전문 웹진 ‘딴지관광청’을 창간했고, 2003년에는 여행컴퍼니 ‘노매드 Media & Travel’를 설립했다. 그리고 여기서 밑줄 쫙. 윤용인은 타고난 천성이 사람에 대한 관심, 심리학에 대한 흥미가 많아 오랫동안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명상, 상담, 치유 프로그램 등을 경험했으며 가톨릭 신자지만 대학원에서 불교상담학을 공부했다. 사람 관찰을 즐기는 까닭에 펴낸 책들은 모두 심리에세이. 『사장의 본심』,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를 집필했고 이번에 출간한 『남편의 본심』은 일회성으로 진행됐던 칼럼이 좋은 반응을 일으키면서 탄생한 책이다.




자녀의 사춘기 지켜보며 자각했다

“3년 전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는데, 때마침 ‘남자의 편견’이라는 주제로 칼럼 제안이 들어왔어요. 가볍게 썼는데, 반응이 좋으니까 한 번 더 쓰자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3년 동안 연재하게 됐고 이번에 책으로 묶은 거예요. 원래 글을 쓸 때, 나의 지금 현재 상황이나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요. 『사장의 본심』도 회사를 운영하면서 겪었던 직원들과의 갈등을 소재로 쓴 거였고요. 사장이라는 사람도 하나의 노동자일 뿐이지 특별한 게 별로 없거든요. 권력가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고, 『남편의 본심』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썼던 글이에요.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힐링’이라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는데, 글의 힘으로 저는 힐링한 거죠.”

처음 대학원에서 ‘집단 상담’이라는 과목을 접했을 때, 윤용인은 다소 시큰둥했다. 평소 상담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의를 듣고 실습을 하면서 집단 상담이 주는 치유의 힘을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들이 집단 상담을 통해 변하는 것을 보고, 발설의 능력을 몸소 체험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남편의 본심』은 미처 언어로 발화하지 못하고 감정의 씨앗으로만 남은 남자의 마음을 펼쳐 보인 책이다.

“책을 쓸 때, 둘째 아이가 사춘기를 겪었어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무서운 10대 아이의 예측불허 행동이 나타나면서 우리 가정에 지옥이 닥친 거죠.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를 어려워하고 비난했는데, 아내가 심리 공부를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진작에 명상, 심리 공부에 심취했었지만 아내가 제가 하는 걸 따라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아주 적극적으로 심리 공부를 하고 종교 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많이 변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고맙더라고요. 같이 심리 공부를 하다 보니 공통 주제가 생겨서 이야깃거리도 많이 생기고, 서로의 대화법에 대해 피드백도 주고 받고…. 둘째 아이가 저희를 성장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어준 거죠.”

아내는 스스로가 어떤 엄마인지를 되돌아 보기 위해, 유년시절의 자신을 상기하고 스스로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를 변하게 하기보다 부모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방향에 가치를 두고,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아내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깨달았고, 남자이자 남편인 자신의 본심을 보다 보니, 스스로의 삶, 주변을 더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다.

“예전에 심리학에 한창 빠져있을 때는 프로이트, 칼 융에 관심이 많았고 지적 욕구도 상당했어요. 그런데 불교철학, 불교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그런 기계적이고 분석적인 부분보다는 사람을 보는 시각,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좀 더 넓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됐죠. 과거에는 개별적인 접근으로 심리의 배경을 파악하고 해석하려고 했다면, 세상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불교철학을 공부하면서 저 스스로도 많은 선물을 받게 됐죠.”

열아홉, 열다섯 아이의 아빠가 된 저자는 20년 결혼생활을 통해 얻은 지혜, 노하우를 말하고자, 『남편의 본심』을 쓴 것이 아니다. 화목한 부부가 되는 법, 잉꼬부부가 되는 법을 설파하려는 의도도 없다.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상대에게 갖는 기대는 모두 나의 욕망일 뿐. 실망하고 욕망하는 건 변함 없는 법칙’이라는 사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 인가. 받아들이고 인정하라고? 하지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일까.

“심리 상담가들은 내담자와 상담할 때 상대가 말하는 언어만을 주시하지 않아요. 비언어적인 신호, 즉 흔들리는 눈빛이나 안색, 상대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죠.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상대의 비언어적 신호를 부부 각자가 얼마나 잘 관찰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물론 남자들의 사인은 여자들보다 훨씬 단순해요. 아시잖아요. 남편이 입맛이 없다고 하면 그게 뭔 뜻이겠어요. 아이한테만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도 좀 신경 써달라는 거죠. 돌이켜보면 저 역시 젊었을 때 아내가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는 데 많이 서툴렀어요. 이제야 조금씩 보이는 거죠.”




대화의 농도는 훨씬 진해졌다

요즘 중년 부부들은 집에서 단 30분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식사를 할 때도 함께 TV를 볼 때도 눈을 마주치는 경우가 손가락에 꼽힌다. 이제는 적응이 돼서 불편하지도 않다는 ‘대화의 단절’.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하나의 답은 없는 것 같아요. 저희 집에도 그런 현상들은 있어요. 서로 너무 잘 아니까, 어떤 주제로 깊이 이야기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거죠.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다행인 건 평일은 각자의 삶을 살다가 주말에는 그래도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요. 일요일에는 딸하고 동네 시립도서관에 가서 같이 공부해요. 전 글을 쓰고 아이는 책을 보다 던지. 답답할 때는 북 카페를 가기도 하고 저녁까지 해결하고 오죠. 아내도 같이 갈 수 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원하니까 집에서 쉬라고 그래요. 하지만 이게 정답이 아닌 게, 우리 식구들은 공통적으로 책을 보는 걸 좋아하니까 패턴이 유지되는 것이고, 등산을 좋아하는 가족이라면 산에 오르는 게 좋은 방법이죠. 공통적으로 함께 즐길 수 있는 뭔가를 찾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저희 아랫집 두 부부는 산책하는 걸 즐기고, 위층의 나이든 형님 부부는 종교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해요. 그들만의 방식인 거죠. 그런 무언가를 같이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느새 결혼 20년차, 윤용인 부부. 서로 바쁘니 대화할 시간은 줄었지만 대화의 농도는 훨씬 진해졌다. 예전에는 이야기 중간에 상대의 말본새에 상처를 받아 부부 싸움으로 결론이 나거나 자기 말만 앞세우려 신경전을 벌였는데, 이제는 한 쌍의 거북이처럼 느긋하게 대화의 과장 자체를 여유 있게 바라본다고 한다. 저자는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꾹’하고 누른 후, ‘탁’하고 놔버릴 수 있게 된 건 세월의 힘, 시간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남북전쟁보다 치열했고 한국전쟁보다 격렬했던 시절도 있었어요. 설거지를 하다가 퍽퍽 소리를 내기도 하고…. 제가 ‘박 터치게 싸우고 머리 나쁜 새처럼 화해해라’라는 말을 책에 썼는데, 어느 순간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걸 즐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싸우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죠. 오전 11시쯤 싸웠으면 보통 저녁 때까지 갔는데, 이제 오후 3시쯤 되면 ‘어디 가서 외식할까’ 그런 모드로 전환이 돼요. 어떻게 보면 성격인 거 같아요. 제가 뒤끝을 오래 갖고 가는 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엄청 화나는 일이거든요. ‘나는 아직 화가 덜 풀렸는데 왜 너만 쿨한 척 해?’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억울할 수 있죠.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거죠. ‘이 사람은 원래 성격이 이렇구나’. 확실히 싸움도 경험에서 터득이 되는 거 같아요.”

저자는 때때로 아내에게 무척 고마운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얼굴에 팩을 해줄 때가 아니다. 물론 상대가 챙겨줄 때 고마움을 갖지만 마음 깊이 감동할 때는 끊임 없이 자기 성장을 하려는 아내의 모습을 볼 때다.

“저한테 잘해줄 때가 고맙지만 잘해준다는 게 365일 잘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기대할 수도 없는 거죠. 아내도 저처럼 성장하고 있는데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보통 성장보다는 정체, 자기 만족에 빠지게 되고 퇴보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끊임 없이 자기 성장을 하려는 모습들 속에서 자극을 받거나 존경의 마음을 품을 때가 있어요. 자기가 이야기한 것은 게으름 없이 끝까지 추진할 때, 자신에 대해, 세속적인 외부 환경에서 초연한 모습을 볼 때가 제일 고마워요. 저는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스님이 말씀하신다. 결혼한 사람은 늘 자신을 돌아보라고. 내 속의 화를 들여다보고, 화가 쌓이지 않게 연습하고, 상대에게 말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라고. 이 말씀에 아내는 밑줄을 그었고, 나는 그 밑줄에 크게 공감했다. 살아본 경험으로 반추해볼 때 문제는 나에게 있었지 상대에게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내가 자신을 먼저 챙기기 위해서, 자신의 상처를 먼저 위로하기 위해서 만드는 시간의 분주함이라면 일주일 내내 밥을 차려주지 않더라도 불만을 표현할 의사는 손톱만큼도 없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편이 자신의 마음과 몸의 건강을 알아서 잘 챙기며 그것을 위해 며칠간의 워크숍에 참가한다 해도 아내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가정과 부부의 평화에 유익한 것이라 생각하며 자기 돌봄에 열중할 것이다. (p.109)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는 사람

『남편의 본심』은 남자들의 사소한 속성들을 이야기하면서 결국엔 사람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말하고자 한 책이다. 오래 전부터 결혼이라는 제도를 마뜩잖게 생각한 저자는 황혼이혼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반드시 잉꼬부부가 되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 필요는 없다고 봐요. 지금 나와 20년 넘게 산 사람과 같이 늙어가는 입장인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단계이지, 화목한 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을 따라야 한다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앞으로 20년 더 살았는데 우리가 각자 따로 떨어져 사는 게 행복하다면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 만나 산다는 게 아니니까, 서로 친구처럼 만나면서 보살펴주기도 하고요. 결혼이라는 속성이 인간을 안정시키고 서로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일 수 있고, 또 아이가 태어나면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우리 사회가 황혼이혼을 꼭 안타깝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아직도 우리 부부는 많이 다투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비록 다툰 만큼 화해하고, 상처를 주고받은 만큼 위로와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결혼은 참 어렵고 부부 관계는 날씨처럼 늘 변덕스럽다. 상대만 잘하면 가정은 행복할 것 같고,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집은 언제나 평화로울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내 마음 같지 않다. 다만 위로가 되는 것은, 결혼 일 년 차보다 5년 차 때, 그보다는 10년 차일 때, 그리고 바로 지금 20년 차일 때 부부는 자신의 속과 서로의 속을 좀 더 잘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알아차림 속에서 어떻게 대화를 해야 나와 상대에게 모두 득이 되는지도 헤아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면, 부부간의 관계에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고지가 보이는 느낌이다. 조금만 더 싸우면서 이 길을 가노라면, 쑥스러운 미소를 서로에게 보내면서 함께 있어서 든든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 예감은 늙어가는 결혼 생활의 유일한 보상이자 훈장이다. (p. 215~216)
『남편의 본심』『사장의 본심』을 썼으니 이제 ‘아빠의 본심’을 쓸 차례냐고 물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저자. 최근에 『남편의 본심』을 읽은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아빠의 본심을 써보라”고 제안했는데, 이렇게 또 한 번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마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교수님의 둘째 아이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그 과정에서 아빠로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있었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아빠의 본심’을 쓰게 된다면 많이 울 것 같네요.”

“지금도 여러 책을 준비 중에 있어요. ‘마흔 넘어 해야 할 스물세 가지’라는 가제로 2년 넘게 붙잡고 있는 책도 있고(웃음). 요즘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수행, 힐링이에요. 얼마나 수행을 꾸준히 성실하게 잘해나갈 것인가가 숙제죠. 구체적으로 나를 객관화시키는 작업과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동요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우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데, 이게 목표고 가장 큰 관심사에요. 그리고 좀 더 심층화된 내 글을 한 번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전업작가는 아니지만 꾸준히 책을 내면서 한 번쯤은 온전하게 책 작업에만 몰입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에 대한 욕심은 없을까. 저자 윤용인은 대답했다. “’살아보니 책임감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었구나’ 이 정도요? 그리고 끊임 없이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갖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아빠 윤용인’의 모습도 궁금했지만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힌트를 주자면 『남편의 본심』의 들어가는 글에 적힌 글귀, ‘아픈 성장통을 겪고 있는 아들에게 사랑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 책을 선물한다’. 미사어구 하나 없는 이 글귀가 왠지 찡하다. 아마도 여지없이 윤용인의 다음 책은 ‘아빠의 본심’이 되지 않을까, 홀로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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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본심윤용인 저 | 디자인하우스
남편이 TV에 꿀이라도 발라둔 것처럼 묵묵히 화면만 바라보고 있더라도 지금 남편의 마음속에는 나비가 100마리쯤 날아다닌다. 말이 되어 튀어나오지 못하는 사연의 파편들과 말주변 없어 정리하지 못하는 생각의 조각들이 폐와 간과 콩팥과 심장 여기저기에서 제각각 꿈틀거린다. 그것들을 차분히 모아서 퍼즐처럼 맞춰본 사연 덩어리가 바로 《남편의 본심》이다. 아내는 남자를 모른다. 남편도 아내만큼 복잡하다. 강한 척하는 남자들도 사실은 더없이 이해받고 싶다. 남편이라면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었을 내밀한 속내가 이 책에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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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만의 선명함에 한 걸음 더 다가서다 - 가을방학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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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방학의 2집 앨범 자켓에는 포옹하는 남녀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파란 셔츠의 남자는 뒷모습이고, 그를 앞에서 안은 여자의 옅게 웃음 서린 얼굴은 이들의 음악처럼 따뜻하고 가깝다. 인터뷰 도중 가을방학은 대뜸 자신의 신보를 들어 보이며 그림 속 포옹이 어떤 상황인 것 같으냐고 물어 왔다. 재회 중인 듯하다는 응답이 나왔고, 헤어지기 전 마지막 인사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남녀의 관계는 연인이 되었다가 친구 사이로 변했고, 가족 간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퀴즈 같지만, 정해진 답은 물론 없다. 여러 풀이가 모두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모호한 것일까? 어떠한 절대적인 답을 좇으려 할 때 정해져 있지 않는 불명확한 상황은 혼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 경험과 정서와 직관을 통해 길어 올린 자신만의 답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면, 각자가 내린 해석은 그것이 무엇이든 점점 더 뚜렷한 형태로 뻗어 갈 것이다. 그림 한가운데 ‘선명’이라는 타이틀을 둔 것도, 더불어 이번 앨범 타이틀이 ‘선명’인 것도, 모호함을 뚫고 핀 저마다의 오롯한 색깔들을 응원하기 위함이 아닐까.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무엇도 규정할 수 없는 세상에서 선명함을 위한 길은, 결국 나 자신을 찾아 나가기 위한 과정과 같다. 두 번째의 앨범을 완성하면서, 가을방학은 자신만의 선명함에 한걸음 더 다가선 듯 보였다. 듀오만의 서정을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만큼의 변화를 자연스레 담은 새 노래들은 그 정직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 자신에 닿기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었다.


오랜만에 새 앨범이 나왔습니다. 팬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계피 : 1집에는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나 「취미는 사랑」처럼 사람들이 특별히 좋아해 주시는 곡이 있었는데, 이번 앨범은 딱히 꼽히는 곡은 없는 것 같아요. 수록곡 골고루 얘기를 다 해 주시는 것 같고. 또 의외로 많이 좋아해 주지 않을까 싶었던 곡이 말이 없는 것도 같고요. (어떤 곡이 그렇죠?) 「편애」요.

정바비 : 「편애」 얘기 많던데? (웃음)

계피 : 그래? 제가 오늘 검색을 잘 안 했나? (웃음)

정바비 : 아무래도 타이틀이라고 표시해 놓은 곡은 라디오 전파를 타기도 하고 노출도 많이 돼서 결국 반응이 어느 정도 오잖아요.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가중치가 있는 거라 볼 수 있는데, 우리 음악은 1집 때도 그랬지만, 공연 때 자주 안하는 노래나 타이틀이 아닌 곡, 아니면 잘 선곡이 안 되는 곡들도 사랑받는 걸 보면 딱히 노출에 치우친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게 우리 음악의 장점이자 단점인데, 한 곡에서도 훅이 없고 앨범 통틀어서도 훅이 없어선지 그런 부분은 좀 있는 듯해요.

1집이 반응이 좋았고 여전히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어서 다음 앨범을 만드는 데 부담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정바비 : 부담은 회사가 갖고 있었을 것 같고요 (웃음)

계피 : 우리는 없네요. 부담이라는 게. 가을방학이라는 팀 자체가 ‘작정하고 음악하자’ 하고 시작했던 게 아니었어요. 노래 부르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1집을 많이 들어주셨으니 2집에서는 반드시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뭔가를 쌓아야겠다,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어요.

정바비 : 우리가 사실 완전히 신인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각자 원래 하던 것들이 있고, 그걸 기반으로 어느 정도 포커스를 잡아서 하는 측면도 있고요. 그래서 1집이 오히려 더 부담이 됐어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시작을 했고 기존에 하던 음악들이 있었으니까요. 좋은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우리를 소개하기는 편해졌죠. 처음부터 신인가수라고 나오면 이런 저런 설명도 해야 하고 말을 덧붙여야 하지만, 우리는 전에 하던 게 있으니 그걸 토대로 설명하면 되거든요. 2집의 출발점은 앞에 나왔던 1집을 기반으로 하는 거잖아요. 사실상 부담은 없었어요.

앨범 타이틀인 <선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정바비 : 1집 때처럼 이번에도 일본에서 라이선스 음반이 나왔어요. 인디 레코드 회사에서 나오는데 가사 해석이 다 수록돼요. 일본어로도 들어가고, 앨범 타이틀 같은 경우는 영어로도 들어가고요. 그러려면 ‘선명’이란 단어를 영어로 보내줘야 하잖아요. 뭐로 보낼까 고민하면서 ‘distinction’, ‘vivid’ 등 여러 가지를 꺼냈어요. 최종적으로 고른 게 ‘clarity’예요. clear나 clean and clear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웃음) 타이틀을 정한 데는 처음 EP 데모를 작업했을 때 워킹 타이틀로 했던 그 느낌도 아마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가지고 회사 사람들, 세션 사람들 미팅하는 과정에서 더 구체화되었죠. 1집 때보다는 선명한 느낌으로 하자는 그런 식으로.

계피 : ‘선명’이라는 가제를 제가 제안했어요. 어떤 질문을 어떤 식으로 확실하게 풀고 싶다는 건 없었고 모호하게 지향점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가 자켓 디자인을 하고, 녹음을 하고 프로듀서랑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각도 더 떠오르고, 처음에 잡았던 이미지와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어요. 말을 계속 품고 있으니 무의식적으로 뒤따라서 뚜렷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1집 때랑 비교했을 때, 음악적 혹은 개인적으로 변화가 있었다면요?

계피 : 지금껏 음반을 여러 장 냈는데 음악적인 면에서 많이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녹음하는 자리 전반에 다 있었고, 의견도 계속 냈고요. 제 참여율이 다른 프로듀서 분들에 비해서 높진 않지만.(웃음) 제겐 새로운 경험이었죠. 처음이라 시행착오도 있었어요. 제가 음악적인 용어나 코드를 모르니까, 어떤 부분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는 하는데 손짓 발짓을 하는 느낌이었죠. 불어를 모르고 프랑스인과 얘기하는 것과 비슷했던 것 같달까요. 바비 씨가 소통해 주려고 노력 많이 해 주셨어요. 프로듀서 분들께 제 의사도 계속 전해 주셨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정바비 : 저는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요. 1집 때는 피드백 받으면서 놀란 부분이 많았어요. 굉장히 밝고 부드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런 얘기들에 특히 놀랐거든요. 물론 사운드적으로는 이지 리스닝 쪽이 맞긴 하지만 저희가 1년, 2년 거쳐서 만들어 온 전체적인 느낌은 싸하고 찬물을 끼얹는 그런 성격이었어요. 가을방학이라면 ‘방학’보다는 ‘가을’ 쪽에 포커스를 맞추는 느낌인데, 대부분이 살랑 살랑한 이지 리스닝 쪽으로 봐 주시더라고요. 저희 입장에서는 그게 재미있었고 놀라웠죠.
앨범 하나를 만들 때 20곡 정도 작업하고 음반에는 12곡씩 넣고 있어요. 어느 정도 앨범 윤곽이 드러날 시점에서 음악적 색깔 등을 보고 결정하거든요. 이번에는 총 14곡을 추린 다음에 2곡을 뺐습니다. 돌이켜 보면 1집 곡 선별을 할 때, 준비한 20곡 중에 밝은 곡이 5곡 있고 나머지는 다 어두운 곡이었어요. 그러면 밝은 곡과 어두운 곡 비율이 5대 15잖아요. 그런데 앨범을 12곡으로 채우면서 밝은 노래 다섯 곡을 다 넣으면 그 비율이 5대 7이 되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밝은 색깔이 나왔던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준비된 곡 중에서 밝은 곡도 한두 곡 빼고, 어두운 곡도 한두 곡 빼고 하는 식으로 선별을 했어요. 전체적인 비율이 균형 있게 맞춰졌죠. 아마 이번에 처음으로 가을방학을 듣는 분들은 1집 때와는 다르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네요.


계피 : 그래서 1집 때를 기대하는 분들은 이번 앨범을 어떤 면에서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저희 음악을 두고 발랄한가 차분한가를 굳이 따지자면, 사실 저희는 차분한 면이 더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1집은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부분이 있기도 했어요. 보이는 것과 스스로 표현하려는 부분에 다소 차이가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런 종류의 다름에 대해 결국 이질감을 안고 갈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죠.


보는 시점에 따라 앨범에 대해 ‘실험적이다’라는 의견과 ‘예전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나뉘는 듯합니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바비 : 실험이라고 해도 진짜 어려운 것 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녹말가루에 요오드 떨어뜨리는 정도의 실험이죠.(웃음) 우리가 실험을 한다고 할 때는 곡에 제일 잘 맞다고 생각되는 것, 이 곡에 이런 가능성이 있다 싶을 정도의 느낌을 내는 것 같아요. 사실 건방을 떨자면, 이미 1집도 해 봤고 저도 음악 오래했고 계피 씨도 보장할 수 있는 퀄리티를 내는 보컬이거든요. 컨디션이 바닥이어도 일정 수준씩 보여 주는 고정적인 능력도 있고요. 피아노 들어가고 퀄리티 있는 반주 넣고 편안한 8비트 스타일로 가면서, 시간도 좀 들이고 공도 좀 들이고 적절한 인재도 넣으면 충분히 좋은 음악이 가능하죠. 하지만 그건 재미가 없어요.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밸런스를 어느 정도로 잡나, 어느 정도가 우리에게 맞나 하는 것을 생각했어요. 처음엔 반반을 생각했죠. 그 기준이 어디서 나오나 하면 요즘엔 음원 위주로 음악을 듣는 분들이 있고 음반 단위로 음악을 듣는 분들이 있잖아요. 타이틀 음원만 듣는 분들께는 잘 할 수 있는 걸 들려드리면 되고, 음반을 듣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해 온 여러 가지를 다 들려드리면 되고, 그 적정을 찾으면 반반의 느낌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최종적으로는 잘 할 수 있는 걸 ‘8’, 나머지를 ‘2’ 정도 했다고 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그 ‘2’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정바비 : 계피 씨가 좀 더 감정적으로 노래를 부른다든지 노이즈를 넣는다든지, 내레이션을 한다든지.

그렇잖아도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곡 「삼아일산」을 신선하게 들었습니다. 이 곡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요?

정바비 : 저는 보통 멜로디를 먼저 쓰고 가사를 붙여요. 그런데 「삼아일산」의 경우에는 먼저 머릿속으로 하나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구성을 했고 나중에 쫙 펼쳐봤어요. 절대로 노래가 될 수 없는 내용이더라고요. 디테일을 다 잘라내기 시작했죠. 내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도 생각했고요. 근데 가사를 아무리 드러내 봐도 지금 실려 있는 양 이상은 안 됐어요. 노래로 하면 「Bohemian rhapsody」가 될 정도였죠. 텍스트가 상당히 많으니까. 그래서 굉장히 고민을 하던 차에 계피 씨가 KBS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속으로>의 멕시코 편 내레이션을 맡았던 게 생각났어요. 괜찮다고 생각했죠. 계피 씨는 말하는 목소리도 좋잖아요. ‘어, 이거 내레이션하면 되겠다’라고 떠올렸고 어울리는 반주를 만들어서 완성했죠.

이번 앨범에서 가장 애착하는 곡은 무엇인가요? 싱글로 낸다면 어떤 곡을 꼽고 싶은지?

정바비 : 「잘 있지 말아요」. 뮤지션을 떠나서 사람의 특성이 많이 드러난 곡인 것 같아요.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는 곡인 것 같고, 가을방학이라는 팀 정서에도 가장 흡사한 것 같고요. 안착에 대한 내용이잖아요. 그게 애틋하고 또 스위트한 거죠. 한동안은 작업 과정에서 송라이터가 결과물을 다 컨트롤해야 한다는 강박에 잡혀 있었어요. 제 의도와는 다르게 조악해지거나 나빠지면 ‘저것도 내가 컨트롤 했어야 하는데’하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아닌 것도 있다는 걸 점점 알게 되었어요. 그런 결과물 중에 가장 기분 좋게 나온 게 이 곡이 아닌가 싶어요. 아코디언 연주도 좋게 들어갔고.

계피 : 저도 「잘 있지 말아요」.

가장 힘들게 작업한 곡이 있다면요?

정바비 : 저 같은 경우는 「더운 피」. 곡에 대한 이미지가 곡 작업이 거의 끝날 때까지도 안 그려졌어요. 남들과 다른 이미지거나 성공적이지 못한 이미지, 성긴 이미지라도 있어야 뭔가 해 볼 수 있는데 그런 이미지가 나오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결과물은 다행히 잘 나온 것 같아요.

계피 : 곡 구성을 가장 많이 바꾼 게 「더운피」예요. 처음에서 아주 많이 달라졌어요. 확신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리듬은 넘어갈 수 없다는 부분이 있어서 들어내기도 했고, 또 그 부분이 없어지기도 했고요.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어요.

정바비 : 비틀즈 초기 앨범은 그냥 흘러가잖아요. 사운드도 일정하고 작법도 일정하고. 그런데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같은 앨범은 곡마다 아주 다르죠. 편하게 가느냐 아니냐의 차이인데 1집이라고 한다면 앞의 경우, 편한 음악이겠죠. 플랫하면서도 편하게 따라갈 수 있는 음악을 좋아해요. 어떤 정서를 3~40분 동안 함께 할 수 있는, 그게 1집의 장점이라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2집을 그렇게 할 순 없다고 생각했죠. 사실 우리는 굉장히 단순해요. 분자기호로 치면 수소 산소 탄소 정도? 그 정도로만 만드는 거 같고요. 텅스텐이나 황이 들어오진 않아요. 맞나?(웃음) 항상 뻔하죠. 어쿠스틱 피아노에 어쿠스틱 기타라든지. 미니멀리즘이죠. 거기에 계피 씨 목소리 들어가면 그걸 또 좋아해 주시고. 그런데 그게 싫었어요. 2집도 똑같이 해도 되고, 그렇게도 갈 뻔 했지만 새로운 것을 해 보는 쪽으로 선택했어요. 드럼이나 베이스도 또 넣어 보고.

정바비 씨의 작업 스타일은 어떤가요? 왠지 일상 속에서 무던히 곡을 써 내려가는, 다작하는 스타일일 것 같은데.

정바비 : 열심히 하죠.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가사는 일상의 모든 것을 쓴다고 생각하면 돼요. 다른 사람 얘기 많이 듣고요. 특별한 소스가 있진 않아요. 옛날엔 제 이야기를 많이 넣다가 그 비율을 점점 낮췄어요. 가을방학 1집 땐 거의 안 넣었죠. 이번에는 조금 있네요.

가사를 보면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듯합니다. 감성적인 소재를 다룸에 있어서도 내러티브의 논리성이 일순위에 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정바비 : 방식에 있어 일단 두 가지가 있어요. 멜로디를 먼저 작업하고 90퍼센트 이상 확정되면 가사를 쓰는 방식이 첫 번째죠. 멜로디 진행이 만들어졌을 때 얹어 올리는 건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또 한 과정은, 그렇게 편곡을 짜고 고르면서 시선을 바꾼다든지, 요소를 뺀다든지 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여배우」 같은 경우는 화자가 모호해요. 남자일 것 같지만 백퍼센트 단정 지을 수 없죠. 앞에서 말한 두 번째 과정을 이용했다면 여성 화자로도 바꿀 수 있었는데 모호한 편이 더 재밌겠다 싶어서 그대로 갔어요.

계피 : 그때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걸 추구했어요. 여성 화자가 남자이야기를 하는 게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 종류의 세련됨이 어떤 건지 이제 알 듯해요. 사실 화자가 남자건 여자건 감정이입에는 그리 상관없는 것 같지만요.

계피 씨는 슬픈 내색을 하지 않는 목소리지 않나요? 가을 방학이 품은 쓸쓸한 정서의 바탕처럼도 들립니다.

계피 : 쓸쓸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게 크게 2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는 송라이팅 스타일이고, 하나는 노래죠. 노래에 대해서 얘길 한다면, 제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담백하다. 절제한다’라는 말이었어요. 칭찬을 많이 받았던 거죠, 운 좋게도. 돌이켜 보면 처음 노래 시작 한 게 2005년, 첫 앨범 낸 게 2007년, 벌써 8년 전 일인데, 스물네다섯 살 때예요. 그런데 사실 담백한 건 고수의 어법이에요. 제가 그 나이에 담백함을 이해한다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말 어렸을 때부터 사연이 많지 않고서야. 과잉, 치기 열정의 나이인데 그 나이에 담백함을 풀어낸다는 건 일종의 뻥이 아니었을까.(웃음) 없는 걸 있는 척 했다기보다는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옛날 노래 들어보면, 이렇게 젊고 어릴 때에 이렇게 불렀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게 아닌데 말이죠. 들어주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신기하잖아요. 그런 종류의 호감이 발생하지 않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요.


정바비 씨가 생각하는 계피 씨의 보컬 매력은 무엇인가요?

정바비 : 음색. 그림 그리는 분들도 그런 게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염료로도 낼 수 없는 색이 있잖아요. 어떤 한 나무에서만 낼 수 있는 빨간색이라든지 이 그림에는 그걸 꼭 써야 한다든지. 계피 씨는 그런 유니크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요. 유니크하면서도 흔치 않죠.

계피 씨는 스스로의 보컬, 음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계피 : 제 유니크함은 점점 사라질 것 같아요. 음색이라는 게 타고나는 것이잖아요. 음색 얘기를 많이 들어서 생각을 해 봤는데 배우를 보면 배우가 내는 인상은 생김새보다는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이 혼합된 형태에 가깝다고 느끼거든요. 음색도 그런 종류의 것이에요. 타고나는 것보다는 특징들이 계속 섞이는 거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유니크함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 더 이상 그게 내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죠.

보컬적인 면에서 좋아하는 가수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다면요?

계피 : 대중없이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는 구피도 좋아하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모창도 해 보고.(웃음) 딱히 취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헤비 리스너도 아니었고 취향이 세련되지도 않았고.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저는 음악에서보다 책에서 더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노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다른 창법을 하기로 선택을 한다면 연습을 하면 되는 건데, 태도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이런 가수처럼 노래하고 싶다’ 하는 분은 없나요?

계피 : 김윤아 씨. 창법이나 음색보다도 무대에 섰을 때 그 사람의 아우라가 좋아요. 이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그분의 아우라와는 굉장히 다른 색을 내는 타입이라고 깨달았어요. 매우 존경하고 있죠.


계피 씨는 전업 가수 선언을 하셨습니다. 어떤 계기였나요? 선언 이후 생활이나 마음가짐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요?

계피 : 일단 심심하고요. 시간이 진짜 많이 남아요. 나처럼 곡을 안 쓰고 가사도 안 쓰는 보컬은 평소에 뭘 하는 걸까, 생각하기도.(웃음) 다른 생활과 음악을 병행하는 건 강도가 다르죠. 뇌의 한 부분을 놀리고 살아도 되는 걸까, 슬슬 뭘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역시 다른 종류의 뇌라서…

노래 부르는 것에 있어서 고민이 많은 것처럼 보여요.

계피 : 생각을 많이 하긴 했어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얘기를 계속 듣는 게 어떤 비애냐면, 부분모델의 느낌이랄까. 나는 목소리만의 사람이 아닌데. 간극이 느껴지는 거죠. 선천적으로 타고나서 쉽게 간다는 이미지도 있는 것 같고. 물론 다 부정할 순 없지만요. 목소리가 좋아서 음악을 한다는 건 뭘까, 다른 사람의 가사로 노래한다는 건 뭘까, 얼마 전까지도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인데, 이런 생각도 하고.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건 확실히 신뢰하고 있어요. 정바비 씨를 믿어요. 그렇지만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은 항상 하게 되죠.

정바비 : 돈 벌고 있지. (웃음)

계피 : (같이 웃음) 이젠 직업이니까 중요한 게 됐죠.

각자 다른 팀에서 활동을 했던 이력들이 있죠. 가을방학의 멤버라는 정체성으로서 정바비 씨와 계피 씨 각각 언니네 이발관과 줄리아 하트, 혹은 브로콜리 너마저에서 활동할 때와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계피 : 그때는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이 없었어요. 폐를 끼친 부분도 있겠고, 내 주장을 제대로 할 줄도 몰랐고, 제대로 컨트롤도 못했고, 서로의 역할에 대한 혼돈도 있었죠. 뭘 잘 할 수 있냐에 대한 확신도 서로 없었어요. 있다고 해도 과잉되게 있거나, 어느 한쪽만 말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혼동 상태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근데 지금은 시간 개념이 생겼어요. 어떤 걸 하고 싶고, 할 수 없고. 이런 것들이 명확해지다 보니까 지금은 편하죠.

정바비 : 저의 경우는 음악 외에 다른 걸 해 본 적이 없어요. 과외도 알바도 안 해 봤고, 운이 좋다면 좋았던 거죠. 잘 벌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다른 걸 안했어요. 졸업하면서 전업뮤지션이 됐는데,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살게 된’ 수준이 된 건 가을방학부터예요. 스트리밍이 없고 음원이 천원 인상이 되면, 기본적으로 음반 판매가 천장 단위로 올라간 아티스트는 먹고살 수 있어야한다 이런 말들이 있어요. 산업구조의 문젠지 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선 낯설게 느껴져요. 운 좋게 음반이 잘 돼서 오히려 더 그렇기도 하고요. 저 같은 경우는 가을방학 말고도 다른 팀도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가 단적으로 비교가 돼요.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잘나가나 못 나가나라고 했을 때 전 잘 된 팀과 운을 타지 못해서 안 된 팀의 경계에 있다고 봐요. 가을방학 할 때 잘나가고 다른 팀 할 때는 못나가고. 그렇다고 다른 팀 할 때 가을방학보다 열심히 안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다른 요소가 있겠죠.


정바비의 자아가 가장 많이 담긴 팀이라면?

정바비 : 제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내 음악이라고 틀어놓는 건 ‘바비빌.’ 줄리아 하트는 워낙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다르다 보니.

둘의 성격은 잘 맞는 편인가요?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요?

정바비 : 결정적인 부분은 잘 맞아요. 크리티컬한 부분은 잘 맞죠. 평소에 나랑 잘 맞는 사람을 만난 기억이 오히려 없어요. 맞아서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오히려 힘들지 않나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라이브 공연과 앨범 중 어디에 더 애착을 두는 편인가요?

정바비 : 공연이라는 것은 몸을 움직여서 공연장을 찾아가서 모르는 사람들 부대껴 가면서 봐야 하는 건데 음반은 인터넷으로 음원을 구입하는 거니까 수고나 품이 적게 드는 거고……, 저는 사실 음반으로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저도 굉장히 공연 자체를 찾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닌데,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그런 타입이 아닐까 해요. 공연을 찾아다닌다기보다는 실제로 현장에서 라이브를, 계피의 목소리를 들어 보고 싶다거나, 하는 분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는 취향이 확인이 되고 공동체적인 느낌이 들어 좋아요.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서 많이 만나는 느낌이죠. 뮤지션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일 수도 있고.

내 인생의 음반을 꼽는다면?

정바비 :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의 <Songs From Northern Britain>고등학교 때 나와서 대학교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이에요. 멜로디가 정말 좋고 하모니도 좋아요.

계피 : 트래비스(Travis) 1집, 미선이 1집, 루시드 폴 1집, 스타즈 (인디)1집. 아심 1집.

요즘엔 어떤 음악을 듣고 있나요?

정바비 : 프레네시(フレネシ: Frenesi)요.
계피 : 동업자들 음악을 듣고 있어요.(웃음) 전기뱀장어 등‥

가을방학의 음악적 지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정바비 : 기본적으로는 음반을 꾸준히 발표할 수 있는 팀이 되고 싶어요. 음반마다 기억에 남는 좋은 노래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음악활동 계속 쭉 해서 나중에 공연을 했을 때, 사람들이 보면서, 우리가 들려주는 20여곡을 들으면서, ‘좋은 노래밖에 안 해’ 라고 말하는 것. 그게 뾰족한 지향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피 : 저는 음악적인 지향점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음악을 진짜 하고 싶은지, 하고 싶으면 언제까지 할 건지 그걸 정하기도 바쁘기 때문에.(웃음)

마지막으로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있다면?

계피 : 밥 뭐 먹어야 하나?(웃음) 진심이에요.
정바비 : 포털사이트에서 ‘정바비’ 치면 연관 검색어로 ‘정바비 게이’가 뜨는데 어머니가 보시지 않았으면…(웃음)



인터뷰 : 조아름 윤은지 이기선
정리 : 조아름
사진 : 이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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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 “아버지의 만화방 덕분에 언제나 문화충격 속에 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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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 있는 사람은 덕을 상하기 쉽다. 항상 손을 보는 사람이 돼라.” 소년 박재동이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자녀들의 교육만큼은 때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는 언제나 ‘생각하는 삶’을 강조했다. 좀처럼 만사태평인 날은 찾아 오지 않았지만, 항상 현재에 충실했던 아버지는 편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마흔이 되던 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6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하루를 기록했다. 그리고 아들 박재동은 환갑이 되어 『아버지의 일기장』을 펴냈다.

박재동이 엮은 고 박일호의 일기 『아버지의 일기장』는 대한민국 1970, 80년대를 살아간 서민들의 녹취록이다. “자식은 옆에 있어도 부모가 하는 일은 모른다”며 부모가 살아온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남기고자 한 아버지의 기록이다. 박재동은 “아버지는 자신의 일기장이 세상의 책으로 나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아팠던 아버지가 일기를 쓰셨다는 건 알았지만 차마 모두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양이었다. 『아버지의 일기장』를 엮으며 진짜 내 아버지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책이 출간되고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아버지는 어머니의 꿈 속에 나타나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 일기장을 통해 아버지의 맨 얼굴을 마주한 박재동 화백을 만나, 켜켜이 쌓인 부정(父情)을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자란 아들

“너무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신 아버지의 기록이에요. 아버지가 시골에서 교사 생활을 하시다 몸이 편찮으셔서 만홧가게를 열게 되셨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평범하게 교사를 계속 하시거나 회사원을 하셨더라면 만화가 박재동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홧가게 덕분에 말할 수 없이 풍요로운 문화충격을 받았으니까요. 제가 방황 끝에 민중미술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었을 거예요. 매일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두 몇 봉, 떡볶이 몇 봉, 하면서 동전 하나하나를 세며 계산을 하셨고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거든요.”

책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쓰셨던 아버지, 모든 일에 빈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책과 화구만큼은 꼭 사주셨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라며 좀처럼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고, 아들이 고등학교 때 전교 꼴찌를 하자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법”이라며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셨다.

“어렸을 때 송곳으로 장판을 쪼개도 ‘잘 그렸다’며 혼내지 않던 아버지셨어요. 할아버지는 땅을 갖는 게 소원이셔서 자식들에게 땅을 물려주셨는데 아버지는 공부를 하겠다고 지게를 부숴 버리셨다고 해요. 농사를 지으면 공부를 못하니까요. 결국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되셨는데 몸이 아파 꿈이 좌절되니까, 자식들만큼은 건강하게 자기 꿈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셨어요. 그 꿈을 향해서 평생을 살아오신 거죠. 아버지는 매일같이 점포에서 매상 걱정을 하셨는데 저는 그걸 안 했잖아요. 결국 아버지께서 희생을 해주셔서 지금의 제가 있다는 생각도 들지요.”

『아버지의 일기장』을 펴내며 박재동은 아버지에게 퍽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네 평범한 인생사를 뭐 그리 열심히 적으실까 생각했는데, 20년 세월이 빼곡히 들어있는 일기장을 제대로 펼쳐보니 이제서야 아버지의 고단함을 깨닫는다.

“만홧가게를 하면서도 신문을 그렇게나 꼼꼼히 보셨는데, 어릴 때는 이해가 안 됐어요.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없는데 뭘 저렇게 열심히 보시나 싶었죠. 그런데 꼭 사회적 영향이 있어야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의식 자체가 사회를 튼튼하게 만든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죠. 아버지 생활신조가 ‘금전을 잃으면 작은 손해다. 신용을 잃으면 손해다. 용기를 잃으면 마지막이다’였어요. 매일 같이 가계부를 적으셨으니 청렴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아버지를 닮은 까닭일까. 박재동은 오랫동안 그림 일기를 쓰고 있다. 간혹 바빠서 빼먹을 때가 있지만 기록의 힘을 느낀다. 그는 “꿀 같은 시간이 랄까. 일기를 안 쓰면 삶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자성하기도 하고 내 생각을 표현하기도 하고 그러죠. 어느 날 시간이 있어서 일기를 오랫동안 쓰다 보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마냥 재밌어요. 사실 부모의 삶이란 힘들기 마련인데, 자식들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하다 보면 잔소리가 되고, 또 대화할 시간 자체가 없을 때가 많잖아요. 아버님의 일기가 없었더라면, 하루하루 조상들이 성실히 살아왔던 그 기초 위에 내가 있고 또 그 우위에 자식이 있다는 걸 몰랐을 거예요.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1971년 4월 5일,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식목일을 맞아 비록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해도 마음속에나마 나무를 심듯 삶의 기록을 심을까 한다. 13년간의 투병 속에 또는 생활의 궁핍 속에 그날 그날의 생활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때문에 기록을 남긴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차라리 당시의 기록이라고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러 있다. 내 13년간의 생활은 그야말로 붓으로 또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병마와 가난이 겹친 힘든 생활은 우리 가족, 특히 내 아내가 아니고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길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굽이치는 물결처럼 사납고도 억센 지난 인생의 역사가 있다. (p.19)


만화가가 될 아들을 짐작이라도 하셨을까

큰 아들 박재동은 아버지의 자랑이었다. 만홧가게를 드나들면 공부 못하는 아이로 생각하던 시절에 만홧가게 아들이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을까. 부모님은 어쩌다 만화쟁이가 된 죄로 불량만화 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드나들기도 했지만, 세 자녀의 교육비를 위해서는 풀빵 장사, 팥빙수 장사도 꺼리지 않았다.

“6학년 때였던가, 미술 선생님이 ‘불량식품 먹지 말자’는 포스터를 그리라고 시킨 적이 있어요. 우리집이 만홧가게에서 떡볶이, 팥빙수, 오뎅을 파는지 모르셨던 모양이었어요. 마음이 참 뭐랄까, 얄궂더라고요. 그 때는 선생님이 시키면 못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도 조차 없는 시절이었거든요. 이 그림을 잘 그려야 하나, 못 그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결국 자존심 때문에 못 그릴 수 없어서 열심히 그렸죠. 선생님이 그림 잘 그렸다고 하면서 짜장면을 사주시는데, 맛 없어야 마땅한 짜장면이 왜 그리 맛이 있던지(웃음). 그래 놓고 집에 와서는 아버지께 ‘오뎅 장사 안 하면 안되냐’고 투덜거렸죠.”

1970년대는 만화가 청소년들을 망치는 사회악으로 지목되어 어린이날이 되면, 학부모들이 만화책을 불태웠다. 어떤 부모들은 만홧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 아이의 귀를 잡고 나가면서 “남의 애 다 버리는 장사, 오래오래 해먹어라.”며 화를 내기도 했고, 빌려간 만화책을 찢는 부모도 있었다. 지금처럼 만화가 문화 콘텐츠의 중요한 축으로 여겨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전포동 만화업소정화위원장을 맡아서 가게에서 아이들에게 담배를 못 팔게 하고 수업 중에 나와 있는 애들은 꼭 돌려보내곤 하셨어요. 전 보통 하루에 보통 20권쯤 읽었는데, 그 나쁘다는 만화책을 읽고서 나쁜 짓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웃음). 오히려 글을 깨치고 지식을 알게 되고 약자를 깔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죠.”

어릴 적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박재동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만화가가 될 거라고는 차마 짐작하지 못했다. 박재동이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했으니, 자신이 오래도록 갈망했던 교편을 계속 잡을 것이라 생각했을 터. 하지만 박재동이 다소 진보적인 수업 진행으로 학교에서 나오게 되고, 오랫동안 방황할 때에도 그저 묵묵히 지원하고 격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다.

(1976년 7월 7일, 피곤한 재동)
재동이는 오늘 피로한 듯하다. 군복무 마치고 화실로 가니 고된 일과다. 성실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놀라운 일이며 나를 감동케 한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이 있어 믿음직하다. 격무에 몸이 지탱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비노니 부디 건강한 몸으로 뜻을 이루기를. 오늘도 수강료로 받은 1만 1,000원을 갖고 왔다. (p.81)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다시금 꺼내보며, 박재동은 ‘자신이 어떤 아버지인가’ 떠올려 보았다. 언제나 올곧고 불의에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던 아버지. 그에 비하면 자신은 여전히 철 없는 아버지라고.

“훌륭한 모범이 되는 아버지도 아니고 아직도 철이 없고 그래요. 너무 아버지처럼 각을 잡으면 저도 부담스럽고 아이도 부담스러워해서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친구처럼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많은 걸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야단을 치기보다 공범자가 돼야 하니까요. 좋은 점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예요. 가끔 아들이랑 철학적인 이야기도 하고 꿈에 대해서도 말하고 그러거든요. 내가 아이한테 근엄하게 대했으면 이런 대화는 못했을 텐데, 그런 생각은 있죠.”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박재동의 교육관은 단순하다. ‘지원을 해주되 잔소리는 하지 않는다.’ 박재동은 “나 자신도 내 말을 안 듣는데, 어떻게 아들이 내 말을 듣겠는가. 자기 삶은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게 맞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원칙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 이런 까닭에 자녀들에게 심부름을 시킨 기억이 손가락에 꼽는다. 때론 ‘어릴 때는 많이 시켜봐야 했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언젠가 스스로 하리라 믿었다.

“요즘에 아이들이 스스로 요리를 즐기는 걸 보면 그렇게나 뿌듯할 수가 없어요. 자식은 언제나 걱정스럽기 마련이거든요. 밥벌이를 하는 순간부터는 걱정을 안 하지만, 사회에 나가기까지 늘 걱정이 되죠. 그런데 걱정을 잘못하면 역효과가 나니까 지켜보는 거예요. 며칠 전에 아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도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되든 ‘이만큼은 돼야 한다’는 이런 생각만 버린다면 잘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어차피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좋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믿지 못하는 것이고 모독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는 거의 걱정을 안 해요. 장점을 믿고 나가는 거예요.”

『아버지의 일기장』이 출간되고 두 자녀에게 책을 건넸지만 “읽어 봐라”, “읽었니?”라는 물음은 없었다. 박재동이 이런 질문을 싫어하는 까닭이다.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읽고 싶으면 읽고, 또 관심이 없으면 50이 돼서야 읽을 수도 있죠. 언젠가 때가 있다고 봐요.”




전복을 볼 때, 과로할 때 아버지가 생각난다

지금은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계신 박재동의 어머니. 큰 아들이 고향에 내려가면 꼭 전복죽을 내오신다. 아버지가 건강 때문에 꼭 챙겨 드시던 전복죽은 박재동이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몸을 보양하는데 전복죽 만한 게 없거든요. 아버지를 닮아서 저도 좋아하는 음식이죠. 어머니가 언젠가 그러시더라고요. ‘옥이 흙에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다 흙이라 하는 도다. 두어라. 알 이가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이 시조를 읊다 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고. 참 그래요. 돈과 권력이 없으면 사람까지 하찮게 보는 세상이었잖아요. 만홧가게를 한다고 너무 천시 당하니까 그런 세상을 개탄하게 여겼어요. 그래도 꿋꿋하게 바위처럼 견디셨죠.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랑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논리적으로 말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말을 안 하셨죠. 같이 성질 내서 싸우는 걸 못 봤어요. 어머니가 그런 아버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신 거죠.”

박재동의 어머니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일기를 이어 썼고, 15년 전에 『천리 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를 펴내기도 했다. 5년 동안 대학노트 8권에 꼼꼼히 써내려 간 어머니의 회고록은 아들 박재동의 삽화와 함께 세상에 빛을 보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책이 나왔을 때보다 『아버지의 일기장』이 출간된 지난 5월 1일, 더 없이 기뻐하셨다. 박재동은 『아버지의 일기장』의 출간을 기념해 오는 6월 30일까지 출판사 돌베개 사옥 1층 갤러리 ‘행간과여백’에서 아버지의 일기장과 편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요즘도 달력에 스케줄이 빽빽해요. 학교 수업도 해야지 또 여러 의미 있는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지.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벌여 놓은 일이 많아요. 몸을 생각하면 조금 자제도 하고 거절도 하고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가끔 지나치게 과로를 할 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요. 아버지가 늘 건강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다 못 누리다 가셨잖아요. 내가 여기서 더 무리를 하면 아버지처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든 쉬는 거예요. 아마 아버지가 없으셨더라면 이런 생각을 못했겠죠. 아버지 때문에 내가 구제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올해 예순을 넘어선 박제동은 딱 지금의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모든 게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홧가게 아들로 성장해 아버지의 20년 세월을 담은 일기를 펴낸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아버지로부터 배웠구나’ 자각한다.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다고 느낄 때, 인생에 대한 질문에 봉착할 때마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펴보리라 다짐한다.

다시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예전과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병약하기만 한 모습 대신 가난과 병고와 싸워 이긴 한 사람의 모습으로, 절망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으로, 불의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으로,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자신과 가족에 대한,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한 사람으로 다시 떠오른다. 피지 못한 꿈을 안고 자식들만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해야겠다는 염원으로 끝까지 살아낸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우리가 지금 이 정도로 살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모두 그분들이 자신들의 꿈을 키우지 못하고 접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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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일기장박일호 저/박재동 편 | 돌베개
‘박일호 일기/박재동 엮음’이라고,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이름을 올려 세상에 나온 책 『아버지의 일기장』은 1971년부터 1989년까지 가난하고 힘든 일상 속에서 자식 셋을 키운 어느 아버지가 남긴 수십 권의 일기장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수십 권의 일기장을 펼쳐 읽으면서 어느새 돌아가실 무렵의 아버지 나이가 된 아들이 글과 그림으로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고, 아버지와 인생의 고락을 함께 한 어머니의 기록을 곁들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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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제 사건, 최초 보도한 사람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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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광주 씨의 첫 인상은 그저 평범한, 아니 어쩌면 우리네 어머니들에게서 느껴지는 친근한 푼수기를 겸비한 여느 아줌마와 다르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며 쏟아내는 빠른 말투며, 격의 없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인상이 그랬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참 무서운(?) 사람이다. 적어도 양심을 속이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그녀의 직업은 17년 째 VJ이다. 지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불량 음식점의 잘못된 관행과 사회 곳곳의 충격적인 실상을 그녀는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던져 밝혀냈다. 그녀가 최초로 촬영한 수많은 영상들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관심과 경각심을 갖게 했으며 잘못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관심은 단지 먹을거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영화 <도가니>의 실화인 청각장애인학교 성폭력 사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악덕 산후조리원, 묻지마관광, 여성노숙인 문제 등 소재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방송을 통해 공개된 영상을 본 사람들은 충격 한 편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저런 영상은 어떻게 촬영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곧이곧대로 카메라를 들이대면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영상들이기 때문이다. 해답은 바로 ‘잠입취재’, 사광주 씨는 수많은 부정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위장취업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론 음식점 주방보조였지만, 어느 순간에는 공장 일용직 노동자로 변신했다. 마트 점원은 우스웠고 보험 아줌마는 예사로 들이 댄 위장 신분(?) 이었다. 산모로 변장해 산후조리원에 잠입하는가 하면 일주일이 넘도록 노숙인으로 살아보기도 했다. 노래방 도우미도 불사했고 심지어 의사로 위장해 성형시술 과외를 받는 의사들의 실태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녀의 신분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다르지 않았던 것은 늘 카메라를 숨긴 가방이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협박도 있었고, 원망도 수없이 들었다. 아찔했던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책으로 풀어냈다. 바로 『사광주가 간다』이다. 과연 무슨 이야기일까. 그녀와의 인터뷰는 그런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여상출신 아줌마가 특급 VJ가 되기까지

<PD수첩>, <시사매거진 2580>, <추적 60분>, <불만제로>, <소비자고발>, <먹거리 X파일>의 공통점은 우리 사회 부정과 비리에 돌직구를 던지는 시사고발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몰랐던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VJ 사광주 씨가 활약한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그녀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방송가에서 ‘몰카의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 적어도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그녀가 여상 졸업의 학벌이라거나 여성, 아줌마라는 이유로 폄하하는 경우는 없다. 현재 그녀는 그 모든 편견을 극복하고 국내 최고의 VJ로 손꼽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욱더 그 비결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을 거슬러가 보면 일단 처음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부터가 남다르다. 그녀는 여상을 나와 중소기업 경리로 일하다가 결혼 후 어려운 형편 탓에 구슬 끼우기, 쇼핑백 접기 등 온갖 부업을 마다하지 않았던 주부였다. 그러던 중 사보에서 원고료를 준다는 소리에 글을 써 보내며 자유기가고로 활약하게 되고 이후 전국여성백일장에서 수상을 하는 등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TV 퀴즈프로에 출연해 ‘퀴즈박사’ 칭호를 받으면서부터다. 아줌마 특유의 입담으로 방송 리포터로 활약하며 방송의 재미를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던 1996년 MBC VJ공채에 모두의 편견을 깨고 덜컥 합격했다. 살아있는 말투와 남다른 임기응변 능력, 매끄러운 대응 등이 심사를 맡은 PD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VJ로서 남다른 그녀의 두 번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 일할 당시를 떠올려보시면 기억에 남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듯 한데요.

VJ로 17년 퀴즈, 리포터로 시작한 것까지 합하면 20년 가까이 방송 일을 했죠. 처음에는 어디를 가도 찍을게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정말 많이 개선됐다는 걸 느껴요. 또 한편으로 요즘은 촬영이 더 힘들어지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잠입을 해도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가 힘들죠. 예를 들어서 설렁탕에 프림을 넣는 것을 고발하는 방송이 나가면 다음 날 벌써 설렁탕집에 ‘저희 집은 절대 프림을 넣지 않습니다’란 플랜카드라 걸려요. 또 사람들도 관심을 갖으니까 그렇게 했던 집들도 고치더군요. 그리고 사실 개중에는 몰라서 그랬던 음식점들도 있거든요. 재료를 받는 공장에서 부정한 짓을 할 수도 있고, 혹은 20~30년씩 해온 전통방식이라고 생각하며 몸에 안 좋은 걸 모르고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나중에 말씀을 드리고 고칠 것을 요청하면 대부분 고치시더라고요. 지금도 세재로 씻은 곱창을 걱정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제 생각에는 거의 없어졌다고 봐요.

요즘에는 어떤 방송을 하시는지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하다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것 같네요.

MBC에서 일을 하다 몇 년 전부터 프로덕션을 설립해서 <추적 60분>, <소비자 리포트>, <컬투의 베란다 쇼>, <불만 제로>, <PD수첩>을 위주로 하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때로는 몸이 세 개쯤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일도 일이지만, 일주일 전에 예약해 놓다 시피 하는 PD들이 많아요. 어쩔 때는 제발 빨리 똑같은 후배를 빨리 양성해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요(웃음).

요즘 가르치는 후배들이 있나보죠?

지금은 제가 함께 다니며 가르치는 사람이 5명 정도 되요. 그런데 저처럼 오래하질 못하더군요. 처음에는 흥미를 갖고 하다가도 오래 이어가는 경우는 드물어요.

여상 출신이라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공개하셨는데, 처음 시작 당시에는 핸디캡이어도 지금 선생님께는 일종의 트레이드마크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러니까요. 덕을 많이 봤어요. 예전에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것도 그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정말 VJ 분야를 정식으로 배웠고 대학에서 전공을 했다고 했으면 그런 게 화제가 안됐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 처음에 뽑혔을 땐 조금 편견이 있었어요. 무시한다고 할까요. 하지만 같은 동료들이나 동기간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금방 알게 되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VJ를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관점에서 핸디캡이지만 제게는 여상출신이라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VJ일을 하는 케이스는 아직도 없으니까요.




현장에서 기운이 더 난다

잠입 취재를 할 때면 일단 평범한 외모로 한수 얻고 들어가는데다, 말투까지 영락없는 아줌마로 보이는 그녀이니 대개의 경우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면 이상할 정도로 자세히, 때로는 자랑스럽게 말을 해주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적응력도 최고여서 처음에는 다들 쭈뼛한다는 대형 마트 고기 판매대에 시작부터 목소리를 높이며 손님들을 끌어 모아 인재(?)로 평가받기도 했다고. 과연 불량 기업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만의 비리’를 술술 털어놓게 하는 그녀의 비결은 또 뭐가 있을까.

잠입 취재의 대가로 손꼽히시는데, 어떤 이슈가 떠오르시는지요?

처음 일할 때는 8mm 비디오카메라를 썼는데 카메라를 들고 직접 섭외도 하고 촬영, 리포터까지 다 했어요. 청소년에 관한 프로그램을 많이 했죠. 앵벌이 같은 거요. 산부인과에서 미혼모의 아기를 거래해 앵벌이로 팔아넘기곤 했어요. 몇 년 전까지도 아기를 업고 구걸하러 다니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 아기들이 그렇게 팔려 온 거예요. 아기가 크면 여자아이 같은 경우는 사창가로 팔아넘긴다더군요. 한번은 어떤 남자가 오토바이로 쫓아와서 면도칼로 얼굴을 그어버린다고 협박하기도 했죠. 그래도 그때는 무서운 걸 몰랐어요. 기본 교육을 받을 때 강사님이 ‘여러분은 이제부터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입니다’라고 하시는데 그때부터 자부심이 느껴졌죠(웃음). 그래도 지금이 훨씬 편해졌어요. 그때는 카메라도 렌즈가 큰 것을 까만 스타킹 씌워서 가방 위에다 얹어서 다니면서 취재했어요. 40분마다 테이프도 갈아야 했고 배터리도 컸거든요. 또 차도 없어서 늘 지하철 다니고 했는데 지금은 그때 비하면 정말 장비들도 좋아지고 환경도 좋아진 거죠. 한편으로 매너리즘에 빠질까봐 걱정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태해질 때면 처음을 생각하곤 해요(웃음).

취재 하신 것 중 가장 최근에 화제가 된 것은 뭐가 있을까요?

최근에 가짜 냉면 육수에 관한 이야기를 채널A <먹거리 X파일>에서 했어요. 육수 한 통을 끓이는데 정말 다시다만 몇 바가지 넣고 이것저것 조합해서 끓여내는 거였죠. 보통은 주방보조나 설거지 담당으로 취업을 해서 잠입 취재를 하는데 이 가게는 유독 주방장만 뽑더라고요. 그래서 대뜸 할 수 있다고 하고 갔죠. 물론 해 본적은 없어요(웃음). 첫날은 그래도 전임자가 인수인계 해주겠지 했는데 나오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내가 삼계탕 집만 해봐서 잘 모른다’고 둘러댔죠. 주인이 며칠 같이 해 주겠다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가짜 냉면 육수를 밤에만 만든다는 거예요.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밤까지 일해서 현장을 찍을 수 있었죠.

불량 업주들이 자신들의 영업 비밀(?)을 술술 털어놓게 하는 사광주 씨의 노하우는 어눌하게 보이는 것이다. 수다스럽고 궁금한 것은 많은데 조금은 모자라 보이는 아줌마가 콘셉트.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면서 일은 일 대로 잘해줘서 기분을 맞춰주니 어쩔 때는 묻지 않아도 이야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천직이 따로 없다 싶다.

한편으로 방송으로 나가고 나서 항의나 위협이 적지 않을 듯 한데요.

맞아요. 특히 여동생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 잘못은 그 사람들 몫으로 놔두라며 남의 잘못을 들추고 다닌다고 심하게 이야기 듣기도 했어요. 남편 역시도 늦게 취재를 하고 오면 걱정을 많이 하는데, 한번은 ‘나 이제 그만 할까’ 하니까, 계속하라고 하더군요(웃음). 어쨌든 방송이 나가면 고소를 하는 사람도 있고 집까지 쫓아와 거짓말했다며 항의하는 경우도 있죠. 경찰에서는 무고죄로 고발하라고 하시는데, 제가 안하겠다고 그래요. 차라리 취재할 때 너무 못됐거나 방송 나가고 쫓아와 악담을 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는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불법을 저질렀어도 주인이 정말 착한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미안하기 이를 데 없죠. 그래서 종종 취재해서 받은 돈을 전부 다 물건 사는 걸로 써버릴 때가 많아요. 저희 집에 항상 취재하는 상품들이 쌓이는 이유죠. 아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아 이번에는 두부구나’ 하고 알곤 한다더군요(웃음). 보통은 저희 아버지가 등산 가셨다가 친구 분들 데려와서 인심을 쓰시는데, 산거라고 하면 아까워하시고 못주시니 다 공짜로 얻어왔다고 말하곤 해요.

말씀을 듣다보니 문득, 선생님은 현장에서 몸소 부딪히며 저널리즘을 배우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어떤 것인가요.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저는 어려운 말을 잘 못해요. 그냥 제가 그랬듯 보통 사람들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누구나 참여하고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 항상 서민들을 생각하면서 같이 가야 하는 것이라고 믿어요.

힘겹게 취재해 세상에 알려지고도 방송 이후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이슈들도 많은데요. 그럴 때는 힘이 빠질 듯도 한데요.

금세 잊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해요. 그래도 제가 처음 말씀드렸듯, 20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느낀 건 과거에 비해 (각 분야의 불법, 부정 사례들이) 정말 많이 개선됐다는 거예요. 대중들이 관심을 갖고 이야기가 회자되다보면 그렇게 했던 업소조차도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아요. 또 다시 되풀이 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일으키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못한 말씀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가 하는 일이지만 방송에서 안 좋게 나가고 나면 항상 걱정되는 것이 일부 잘못된 업소로 인해 잘하시는 다른 업소 주인 분들까지 피해가 간다는 거예요. 그럴 때가 제일 미안해요. 제가 취재를 다니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경우도 있지만 절대 제가 잘나서 그런 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개중에는 제가 그 입장이어도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때로는 영세하고 어렵게 일하시는 분들, 예를 들어 어묵 같은 것은 취재를 하고도 접곤 했죠. 서민들이 먹는 음식이고 대기업이 하는 건 아니니까요. 차라리 고위층 비리나 대기업의 부정 같은 것이 취재할 때는 마음이 편해요.

일을 할 때는 독하게(?) 해내는 그녀지만, 그 속마음은 측은지심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그런 마음 때문에 더욱 잘못을 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여성의 눈으로 때론 어머니의 마음으로 각계의 잘못된 관행과 비리, 불법을 담아내는 그녀의 꿈은 우리 사회가 보다 정직해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광주가 간다』의 이야기가 2011년까지 취재 내용의 절반 정도만 추려 담았다는 사실이다. 벌써부터 2탄 3탄이 기대되는 이유다. 그녀의 신념이 변치 않는 한 ‘사광주의 이야기’ 또한 계속 이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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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광주가 간다사광주 저 | 공감의기쁨
영화 〈도가니〉의 실화인 청각장애인학교 성폭력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대한민국 VJ(비디오 저널리스트) 1호이자 여상 출신의 평범한 30대 주부에서 국내 최초, 최고의 VJ가 된 입지전적 인물 사광주의 취재수첩이 공개된다. <PD수첩〉 〈시사매거진 2580〉 〈추적 60분〉 〈불만제로〉 〈소비자고발〉 〈먹거리 X파일〉 등 대표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취재현장을 누빈 잠입취재의 달인으로 방송가에서 ‘몰카의 여신’으로 불리는 그녀가 말하는 한국사회 속 각종 사건 사고 현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안철수 대담집 이후, 제정임 교수가 진단한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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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북 경제’. 한국 경제를 이처럼 적확하게 표현한 단어가 있을까. 제정임 교수는 5년 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기고한 칼럼들을 다시 정리하고 또 새로 쓰면서, 한국 경제를 수식할 만한 단어를 떠올렸다. 지나치게 대외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우리 경제는 해외에서 작은 변수만 생겨도 주가가 떨어지고 환율이 치솟으며 경제 흐름이 출렁인다. 안타까운 단어이지만 ‘동네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는 제정임 교수는 지난 5년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좌절감이 컸다. 대선의 결과가 달랐다면, 제 교수는 지금쯤 새 정부가 추진해야 할 개혁 정책의 각론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를 보는 시각,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판단이 저와 다른 정부를 맞게 되면서, 제 숙제도 달라졌어요. 왜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필요한지, 새 집권층과 그 지지자들의 생각 중 어떤 것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기초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 된 거죠.”『동네북 경제를 넘어』는 제정임 교수가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KBS 2라디오 <김광진의 경제포커스>에서 방송한 경제 해설과 한국일보, 국제신문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아 현 시점에도 유효한 이슈들을 보완해, 읽기 쉬운 문체로 바꾸고 통계도 수정했다. 우리 경제의 취약성, 재벌과 노동자의 현실, 원전 정책의 문제점, 언론과 안보 문제 등을 촘촘히 들여다보았다. 재벌의 기를 살리고 노동자의 입을 막는 것 대신, ‘재벌이 법을 지키게 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제정임 교수는 경향신문, 국민일보에서 사회부와 경제부 기자로 약 14년간 일했고, 지난해 안철수 후보와의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펴내 화제가 된 바 있다. 『동네북 경제를 넘어』의 출간을 계기로 제 교수를 만났지만,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안철수 후보와 관련한 질문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제정임 교수는 그동안 많은 매체를 통해 “정치 입문의 의지는 전혀 없다”고 밝혀왔다. 그 마음에 변화는 없는지, 안철수 후보의 행보에 대한 평가도 궁금했다. 제 교수는 예상대로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안철수 후보가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든 후로는 사적으로 연락한 적이 없다”“현재 저널리즘과 한국 경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내 본분이고 숙제“라고 선을 그었다.



경제뉴스, 10년 전과 왜 똑같을까

동네북 경제, 참 안타까운 말이다. 제목을 지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딸이 고2인데, 책 제목으로 ‘동네북 경제’ 어때? 라고 물으니까 괜찮다고 하더라. 50대인 남편은 ‘글쎄’라는 대답만 했는데, 아무래도 10대 말을 듣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가벼워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일단 그 단어가 가진 의미도 있고 어려운 경제 이야기를 쉽게 풀었다는 느낌을 주려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서문에도 밝혔듯이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야 갈까를 생각해 보며 내가 해야 할 몫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리 사회의 경제가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되길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갖고 읽었으면 좋겠다. 경제 전문가들이 읽고 왜 이런 비판이 나오는지,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자기성찰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또 젊은이들도 우리 경제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현재 경제 구조가 잘못되면 제일 고생할 사람이 바로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내 앞날은 불안한지, 사회가 왜 이런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우리 경제의 취약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선진국의 입맛에 맞는 세계화를 강행한 역대 정부의 정책에 큰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글로벌 금융이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 사회의 취약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요즘 경제를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말하는데, 전 세계로 떠도는 유동성 있는 자본이 이를 테면 ‘돈 놓고 돈 먹기’에 쓰이고 있다. 고용을 창출하는 데 자본이 쓰이는 게 아니라 외환 투기, 제동이 걸리지 않는 이윤만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자본 흐름이 계속되다 보면 생태계가 파괴된다. 자본의 탐욕을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환경, 지구온난화 같은 문제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금융 문제나 에너지 구조의 문제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자본의 탐욕과 민주적인 통제다. 앞으로, 어떻게 자본의 탐욕을 민주적으로 통제해서 한 나라의 안정성을 지켜내고, 지구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2002년에 전직 기자로서 『경제뉴스의 두 얼굴』를 펴냈다. 10년 전과 지금의 경제뉴스, 변한 게 있다고 보는가. 기자로 생활할 때와 교수인 지금, 한국경제, 한국언론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나?

2002년에 기자를 그만두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내가 있었던 필드를 돌아보면서, 우리 언론이 달라져야 할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경제 보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의 주제로 삼아 심층적으로 담았다. 『경제뉴스의 두 얼굴』이 2002년 말에 나왔는데, 나름 폭로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년 후가 되면 이 책이 아무도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변할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너무나 불행히도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더 나빠졌다. 저널리즘의 정신을 자본에 팔아먹었던 그 때보다 더 나빠졌고 언론사 경쟁이 너무 치열해졌다. 언론사의 처우도 그 때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열악해진 부분도 있고…. 이런 현실 속에서 필드에 나가는 후배들, 제자들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다. 하지만 실력 있고 정의로운 기자들이 언론계에 있을 때 우리 언론에도 희망이 생길 거라 믿고 있다.

새 정부가 인선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 있나.

어느 자리에 누구를 장관으로 임명하는지에 따라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진행된 경제팀의 인선을 보면 과연 경제민주화, 복지 강화, 양극화 해소 이런 것들에 대해 진정한 의지가 있나 의문이 든다. 물음표가 큰 상황이다. 이번 정부는 무엇을 잘못한다고 해도 그냥 지켜보고 있을 여유가 없다. 고통 받는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잘못 가고 있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해야 하고 국민들도 여론을 형성해 중간선거나 재보선을 통해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경제민주화가 퇴색하지 않고 이탈하지 않도록 각자 영역에서 감시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현재 유럽의 경제제도와 정책들을 살펴보기 위해 영국, 벨기에, 독일 등을 방문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슈를 취재하고 있나.

영국 런던과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독일 베를린을 취재했다. 유럽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 국제 금융을 어떤 시스템으로 바꾸려고 하는지, 그 분야의 석학들을 만나 한국 사례를 가지고 인터뷰도 하고, 금융의 불안정성, 리스크 문제에 대한 토론도 했다. 유럽 국가들을 다니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수백 개 사안을 가지고 지겹도록 토론을 한다는 점이었다. 또 이 토론과정에서 관련 정보들이 구체적으로 공개되고, 의회와 국민들은 정책의 쟁점과 찬반논리, 관련 사례 등을 인지하고 판단을 내린다.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이 확고하다는 점이 정말 부러웠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재생에너지를 실용화하는 부분이 이미 유럽에서는 하나의 삶의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현장을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동영상도 찍고 실무진 인터뷰도 했다.




사회학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기자 생활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학생 기자들과 함께 온라인신문 <단비뉴스>를 만들고 있다. 2012년에는 학생들과 『벼랑에 선 사람들』을 펴내기도 했고, 이 책을 계기로 『안철수의 생각』을 집필하게 됐다고 들었다. 현재 <단비뉴스>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외국의 유명 저널리즘스쿨은 모두 자체 매체를 가지고 있다. 실제 언론을 통해 훈련을 받아야 실무에 나갔을 때도 유효한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명문 저널리즘스쿨은 그 지역의 훌륭한 지역언론으로서 공공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도 기성 언론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대안언론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2008년도에 만들어졌는데 학교가 자리를 잡으면 매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2,3기 학생들이 생기면서 매체에 대한 욕구가 생겼고 2010년 6월에 창간했다. <단비 뉴스>는 주요 시사 현안은 물론 기성 언론이 충실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빈곤문제, 지역 농촌 이슈, 미디어 업계 동향, 청년세대의 고민 등을 철저한 현장취재를 통해 심층 조명하고 있다. 『벼랑에 선 사람들』은 약 1년 반에 걸쳐 연재한 특집 ‘가난한 한국인의 5대 불안’을 묶은 책이다. 학생들이 <단비뉴스>를 통해 많이 공부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이 언론인이 되면 제 교수의 후배가 되는 셈이다. <단비뉴스> 출신 언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나. 언론인 출신 교수로서 제자들에게 가장 신경 써서 가르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4기수가 졸업했는데 약 60명 정도가 언론사에 들어갔다. 중앙 일간지, 방송사, 케이블TV, 주간지 등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제 서서히 세명인들의 언론계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는 거 같다. 공공의 사안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의롭고 실력 있는 언론인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력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정의를 쫓는 언론인이 되길 기대하고 또 그런 언론인이 될 수 있게 가르치고 있다. 경제사회 쟁점토론, 글로벌경제 심층토론, 시사 현안 세미나 같은 수업을 진행하는데, 한 주의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피드백을 하고 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경영학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보통 기자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에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회사를 관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모두가 그렇듯 사회부 기자로 처음 직장생활을 했다. 법조, 검찰, 교육도 재밌다고 생각했지만 노동 이슈에 대해 관심이 가장 많았다. 사회학을 전공했을 때도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늘 가지고 있었다. 노동 이슈는 기업하고 관계가 있는데, 언론에서는 기업인 관점으로 뉴스를 더 많이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자 관점으로 고르게 살펴보고 기사를 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경제부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많다는 걸 느꼈다. 97년 외환위기를 겪을 때, 파생상품, 투자은행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글로벌 경제시장이 얼마나 냉정하고 무서운 지를 내가 제대로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각이 생기면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을 늦게 가게 됐다. 내가 가려고 한 대학원이 풀 타임 학생만을 받아서 회사를 관두게 됐다.

기자가 될 결심은 언제부터 했나?

평소 언론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내가 사회를 하나도 모르면서 사회학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가장 단 시간에 효율적으로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직업이 기자라는 생각이 들어, 언론사에 취업하게 됐다. 그 때도 언론이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하면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후배를 가르치고 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일종의 독립언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학자로서 우리나라 경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해서 대안을 내고 싶은 욕심이 있고, 소속과 상관없이 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언론의 모습을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개혁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경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 학자들이 많지 않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여성 고위직 비율도 낮고.

여성경제학회 활동을 하고 있는데 실력 있는 분들이 많다. 남성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직책 없이 활동하는 분들이 많아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여성을 중용하는 정책을 쓰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여성고위직 비율이 꼴찌다. 이건 제도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스웨덴을 보면 비례대표를 남녀남녀 순으로 제도화해서 선발한다. 때문에 여성들이 정치권에 많이 나오고 여성들의 목소리가 크니까 교육제도나 보육제도가 프랜들리하게 만들어지고 탄탄한 복지제도가 가능하다.

안철수 후보가 4.24 재보궐 선거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다. 안 후보가 귀국한 후 혹시 연락이 닿았는지 궁금하다.

대선 때 안철수 후보가 출마를 포기하고 미국에 간 후부터 전혀 연락이 없었다. 책을 같이 쓴 다음에는 두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했는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후로는 서로 연락한 일이 없다. 내가 앞으로도 언론 영역에서 계속 활동할 건데, 특정 정치인이랑 특별한 관계가 생기면 나에게도 좋지 않고 학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분명하게 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는 걸 출세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엄청난 영광이 있거나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지만, 이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 국가 경제나 공적인 부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설계도를 그리는 역할이 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영역들은 내가 해야 할 부분이지만, 현장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감독하고 실행하는 일은 그 일을 더 잘할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문분야 활동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정치적 인물이 나왔다고 생각했을 때, 그 신념이 변할 수도 있지 않나. 『안철수의 생각』에 대담자로 참여했을 때와 지금의 입장이 변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나.

『안철수의 생각』에 참여한 건, 안 후보가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된 상황에서 국민들이 안철수가 어떤 사람인지, 한미FTA를 지지하는지, 원전을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모르는 상태였고, 유권자의 권리를 위해서라도 이 이야기가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언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안 후보가 조선일보, 한겨레 기자를 선택할 수는 없지 않나. 특정 언론을 대상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 놓는 것은 불가능했고, 내가 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라고 여긴 걸로 안다. 기자 출신이니 인터뷰를 진행하는 데서도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처음 만났을 때는 인터뷰를 전제로 만난 게 아니었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 입장에서 걱정됐던 건, 안 후보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을 경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언론이고 공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부분인데 특정 정치인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확실히 말했다. 나는 당신을 정치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안철수의 생각』은 내가 기자들을 대신해서 질문하는 역할을 한 거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 국민들이 궁금해 할만한 모든 부분을 불편하더라도 성실하게 답변해 줄 수 있으면 하겠다고 했고, 안 후보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수락했다. 안 후보가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선언한 후부터는 연락한 일이 없고, 대선 당시 캠프에 와서 도와달라고 말한 적도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관심사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있다. 정치라는 일이 나한테 매력적이고 탐나면 안 하려고 했다가도 마음이 쏠릴 수 있지만, 나는 지금 하고 있는 내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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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북 경제를 넘어제정임 저 | 오월의봄
이 책은 지난 5년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왜 국민들에게 허탈과 분노, 배신감을 줄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 그 핵심은 어디에 있는지를 진단한다. 왜 한국 경제는 갈수록 악화되는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위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진짜 해법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책이다. 세계 경제위기, 금융시장, 부동산, 가계부채, 노동문제, 복지사회, 남북문제 등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주제를 중심으로 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유승우 “언젠가 제이슨 므라즈와 무대에 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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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떤 노래를 부르냐고요? 글쎄요. 하고 싶은 노래를 하겠죠. 자유롭게 공연할 거예요(웃음).”방송, 공연 무대를 제외하고 팬들과 단독으로 만나는 자리는 처음. 하지만 유승우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공연장에 가득 모인 팬들을 보며, “과연 모두 제 팬이 맞을까요? 그냥 지나가다 들리신 분은 없나요?”라며 짓궂은 농담까지 던진다. 수줍은 미소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가수’라는 타이틀로 무대에 선 유승우. 최근 트위터를 통해 <무한도전>의 멤버 하하와 트윗을 주고 받은 일화를 말하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무한도전>에 나가보고 싶어요.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아무래도 저와 성이 같은 분, 유재석 선배님이요”라며 미소를 보였다.




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노랫말이 떠올랐어요

“행사를 갈 때마다 가끔 실감이 나긴 해요. 환호를 많이 해주셔서, 감사하게 기 안 죽고 열심히 하고 있죠. 그래도 가수, 연예인이다 이런 기분은 아니에요. 아직도 가수들을 보면 팬의 입장에서 더 보게 되고 그래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가수로 데뷔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유승우. <슈퍼스타 K4>에 출연해 TOP 10으로 무대에 선 것만으로도 천안시 성환읍의 자랑이었다. 슈퍼위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생방송 무대에 섰을 때, ‘이렇게 평생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는 유년시절부터 한결같이 ‘가수’를 꿈꿨다.

“언제부터 가수를 꿈꿨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옛날부터 막연하게 ‘가수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년 전에 기타를 치면서 음악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됐고요. 이제 기타는 저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악기가 되었어요. 학창시절에는 막연히 선생님들,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를 잘하기로 소문난 아이 정도였어요. 그런데 확인이 안 되니 친구들이 믿지 못했죠(웃음).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축제에서 ‘끝사랑’을 불렀는데 그 뒤로 이미지가 굳혀졌어요. 노래 잘 부르는 아이로요.”

함께 듀엣 무대를 서고 싶은 가수는 아이유. 유승우는 “싱어송 라이터이면서 기타를 친다는 공통점이 자신과 닮지 않았냐”며 되물었다. 미니앨범 ‘소풍’에서 이미 자작곡 두 곡을 선보인 유승우는 “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이야기로 곡을 썼다”고 말했다.

“작사를 먼저 하는 편인데, 주제를 떠올리는 게 힘들어요. 처음에 정하기가 어렵고 작사가 끝나고 나면 멜로디를 입히는 게 난감하죠. 무엇이 더 어렵다고 판단하는 게 쉽지 않아요. ‘서툰 사랑’이라는 노래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이별하는 장면을 보다 만든 곡이에요. 제가 사랑이 정말 서툴거든요(웃음). 제목만 보면 제 이야기 같아요. 연애 경험이 없어서 제가 남자주인공이 됐다고 생각하고 불렀어요.”

유승우가 이번 앨범에 수록한 자작곡은 ‘서툰 사랑’과 ‘한심한 남자가 부르는 노래’. 타이틀 곡  ‘헬로’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지인들로부터 자작곡에 대한 칭찬도 종종 듣는다고.

“뭐 안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웃음) 대부분 잘 들었다고 말씀해주세요. <슈퍼스타 K4>에 함께 출연한 형들과도 자주 연락하는 편인데, 좋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끼리 메신저 방도 있고 그런데, 로이 킴 형은 너무 바쁜지 연락이 잘 안 돼요. 답신 받으려면 몇 년을 걸릴 것 같아요(웃음).”

사랑에 가장 서툴다고 말하는 유승우. 그렇다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는 언제냐고 물으니, “사랑을 못할 때”라고 답했다. 모든 대답에 연애, 사랑 이야기가 빠지지 않자, 혹시 짝사랑을 하는 중일까 짐작했는데 “아니요. 요즘은 좋아하는 사람도 없네요”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제이슨 므라즈와 무대에 서보고 싶어요

“요즘은 웹툰을 자주 봐요. 책은 잘 못 읽고요(웃음). 허노 작가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웹툰을 봤는데 재밌으면서도 심오하고 흥미롭더라고요. 얼마 전에 한 팬 분이 류시화 시인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선물해주셨는데 좋았어요. 다른 팬 분들도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유승우는 롤 모델을 묻는 질문에 언제나 ‘제이슨 므라즈’를 빼놓지 않는다. 유승우가 기타를 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제이슨 므라즈가 무대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가수의 꿈을 정했기 때문이다. 국내 가수 중에 롤 모델은 김건모와 이문세. 언젠가 단독 콘서트를 연다면 두 선배님을 초대하고 싶단다.

“이문세, 김건모 선배님은 언제나 우리나라에서 ‘국민 가수’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분이시잖아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시고 언제 들어도 좋은 최고의 음악인 것 같아요. 제이슨 므라즈는 세계적인 싱어송 라이터고, 제 우상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제이슨 므라즈의 <We Sing, We Dance, We Steal Things>에요. 수많은 명곡과 기타를 칠 수 있게 해준 명반이죠. 또 브루노 마스의 <Doo-Wops & Hooligans>을 좋아해요. 뛰어난 싱어송 라이터가 꿈인 나로서는 그의 음악을 듣고 자작곡이라는 사실에 놀랐어요.”

17살에 가수 인생을 시작한 유승우의 버킷 리스트는 무얼까. 유승우는 망설임 없이 쉽게 대답했다. “엄마 아빠한테 집을 꼭 사드리고 싶고요. 두 번째는 제이슨 므라즈와 같은 무대에 서기, 그리고 기부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야구 캐스터 정우영 아나운서, 야구 볼 때 치킨 대신 닭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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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의 비밀, 숨은 맛집의 비밀

한국 프로야구 700만 관중 시대. 이제 야구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많은 연인들이 야구장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나들이 장소를 찾아 야구장으로 향하는 가족들의 발걸음도 늘어났다. 저녁이 되면 편의점 앞에도, 치킨집 앞에도, 야구를 안주삼아 맥주 한 잔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들 모두에게 정우영 캐스터는 무척 친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MBC스포츠플러스의 아나운서로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 중계를 맡은 후로 그는 한결같이 야구팬들의 곁을 지켜왔다. 야구장에서도 거리에서도 야구팬들과 함께 탄식하고 환호하는 그의 호흡이 전해졌다. 절묘한 표현으로 관중들의 마음을 대신해주고,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짚어주는 캐스터 본연의 역할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는 그가 들려주는 야구 이야기다. 경기의 룰과 기록들에 대한 딱딱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아니다. 캐스터로서 현장에서 보고 들은 생생한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도 야구팬들이 가장 궁금해 할, 경기장 안과 밖에서 만난 선수들과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쉽게 알 수 없었던 경기 전후의 상황과 중계 현장의 모습들도 귀띔해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전국 10개 도시의 야구장과 인근의 맛집들에 대한 정우영 캐스터의 ‘리뷰’다.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에 따르면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은 중계진에게 최고의 시야를 제공하는 구장이고, ‘사직구장’은 관중들이 선수의 눈높이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최근 롯데 자이언츠의 제2구장에서 NC 다이노스의 홈구장으로 바뀐 ‘마산 야구장’은 놀라울 만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이렇듯 정우영 캐스터는 야구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만이 알법한, 각 구장의 특징들과 새로운 소식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렇다면 맛집은 어떨까. 야구장이 일터이니 근방의 맛집들에 대한 정보도 훤히 꿰고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기대는 다행히도 엇나가지 않았다.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는 지역별로 나누어 맛집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야말로 알짜배기 정보들이다. 조금만 공개하자면 청주에는 끝내주는 버섯찌개를 맛볼 수 있는 ‘경주집’이 있고, 대전구장 앞에는 ‘먹다가 정신 잃을 것 같다’는 닭백숙 전문점 ‘황금알’이 있다. 이제 야구팬들은 낯선 지역에서 맛집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지역 구단의 관계자들과 방송 중계진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확실한 맛집 정보를 정우영 캐스터가 누설(?) 해 준 덕분이다.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 와 『야구장 습격사건』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를 통해 ‘야구와 먹방’이라는 새롭고 흥미로운 만남을 시도한 정우영 캐스터.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5월 24일, 잠실야구장으로 향했다. 인터뷰는 구장 내의 중계석 앞에서 진행됐다. 정우영 캐스터에게는 가장 익숙한 곳이자 언제나 짜릿함으로 가득한 곳일 터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시종일관 유쾌한 에너지를 잃지 않았다.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를 출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본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가 쓴 『야구장 습격사건』이라는 책이 있어요. 일본 야구팀들의 제2구장을 순회하면서 보낸 시간들을 쓴 이야기인데, 굉장히 재밌게 읽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써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시험 삼아 블로그에 써봤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리고 출판사 한스미디어에서 연락이 왔고요. 한스미디어는 저와 『괴짜 야구 경제학』번역 작업도 같이 했고 『MBC SPORTS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출간도 함께 했던 출판사거든요. 제가 블로그에 쓴 글을 보고 ‘이런 글들이 모이면 『야구장 습격사건』의 우리나라 야구장 버전도 나올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2011년부터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를 준비하게 됐고요. 출장 다닐 때마다 블로그나 다이어리에 메모해 뒀던 이야기들을 엮어서 책으로 출간하게 된 거예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야구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셨을 텐데, 맛집 이야기를 함께 다루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가 야구에 대해서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아요. 그저 일반인들보다 야구를 좀 더 많이 접할 뿐이죠. 사실 야구란 게 봐도 봐도 몰라요(웃음). 오죽하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해설위원님의 가장 유명한 멘트가 ‘야구 몰라요’겠어요. 야구라는 게 참 어려운 거거든요. 어떻게 보면 캐스터는 야구를 알아야 되는 사람이기보다는 해설위원에게서 내용을 끌어내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야구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어불성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야구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야구장 습격사건』에는 맛집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요. 제가 처음에 블로그에 글을 썼을 때는 오쿠다 히데오의 글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변형을 시켜볼까’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 맛집이었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거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갖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료들과 뒤풀이를 했던 장소라든지 혹은 굉장히 맛있게 먹었던 장소들을 한 번 엮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맛집에 대한 이야기들은 야구를 모르는 분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나름 성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는 무엇인가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단편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소울메이트』)을 읽고 나서는 눈물을 흘렸어요. 정말 저는 그 글이 너무너무 좋아요.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에 이순철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와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그 중에 초현실적인 부분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게 실화예요. 뭔가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잖아요. 선수들이 타격 훈련을 하면서 계속 외야로 타구는 날아오고, 난 무서운데 이순철 해설위원은 그냥 터벅터벅 걷고 있고요. 뭔가 초현실적인 그런 부분이 약간 ‘블루베리 아이스크림’과 닮아 있는 단편이네요(웃음).

걷는다. 천천히. 걷는다. 타구는 계속 우리 근처로 날아온다. 마치 백전노장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유유히 걸어가는 그런 느낌이다. 나는 그 곁에서 파를르 떨고 있는 직속 부관? 이 기분 아주 묘하다. 외야 쪽으로 나가자 관중 몇몇이 입장해 있다. 그 중 아주 간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p. 181)


‘홈런’의 또 다른 이름

책의 첫 장에서 ‘스포츠 캐스터의 하루’에 대해 쓰셨습니다.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독자들 중에는 스포츠 캐스터를 꿈꾸는 분들도 많을 텐데요.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보면 카메론 디아즈와 결혼하는 남자의 직업이 스포츠 기자에요. 카메론 디아즈가 일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때 남자의 대답이 ‘그래. 나는 정말 보수도 낮고, 매일 안 좋은 숙소에서 잠자고, 정말 안 좋은 음식만 먹고 다니지만 불행히도 나는 이 일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게 스포츠 업계에서 일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스포츠 업계에서 모든 부와 명예는 선수들에게 돌아가요. 우리 같은 경우에는 보수가 낮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엄청나게 높은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일로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그 꿈을 깨야 돼요. 정말 이걸 사랑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가 없어요. 일은 힘든데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 있거든요. 거기에 대한 각오를 해야 돼요. 사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친구들도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도 몸도 상당한 각오를 하는 게 필요해요. 사람들은 캐스터가 중계방송을 위해서 3~4시간 정도만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3시간의 중계를 위해서 그보다 몇 배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거든요. 메이저리그 같은 해외 경기 중계할 때는 새벽 5시에 나가야 돼요. 그런 불규칙한 생활을 계속 하니까 몸도 힘들죠. 그런 부분들을 참아내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캐스터들과 차별화되는 정우영 캐스터만의 색깔 혹은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김성주 아나운서가 저를 모니터 해주신 적이 있어요. ‘너는 다른 캐스터들보다 인물이 나으니까 그 장점을 살려라’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좀 집중을 하고 있고요(웃음). 제가 야구 중계를 한 지 6~7년 정도 됐지만, 그동안 대표적으로 야구 캐스터로 알려져 있던 한명재 선배, 임용수 선배, 권성욱 선배 같은 분들에 비해서는 후발주자잖아요. 사실 적응을 하는 데 어려운 점도 있었어요. 시청자들은 익숙한 걸 좋아하잖아요. 그때 저는 선배님들의 중계를 전부 보면서 그 분들의 장점을 파악하고 조합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리고 저만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한 상황이 일어날 때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 좋게 봐주시는 관중 분들도 생겨나고, 그래서 힘이 나죠.

인문학도 출신 중계 캐스터로서 그동안 스포츠 중계방송에서 쓰이지 않던 표현들을 찾아내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방송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래서 나는 1년마다 새로운 표현 다섯 가지를 찾아내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p. 13~14)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에서 1년마다 새로운 표현 다섯 가지를 찾아내는 게 목표라고 하셨는데요. 올해는 어떤 표현들을 발견하셨나요?

올해는 홈런 타구가 나올 때 “높습니다. 뻗습니다. 넘습니다”라는 표현을 써봤어요. 작년 같은 경우에는 홈런 표현을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라는 말로 바꿔봤죠. “담장 밖에서 뵙겠습니다”라는 표현도 있었고요. 다행히도 야구팬 분들께서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올해 추신수 선수가 끝내기 홈런을 쳤을 때 굿바이를 여러 번 세게 외쳤는데, 그것도 들어보니까 괜찮더라고요. 새로운 표현을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다음번에 우리나라 경기에서도 같은 상황이 나오면 써보려고 생각중이에요. 올해 제일 마음에 들었던 표현은 목동에서 이성열 선수가 홈런을 쳤을 때 했던 말이에요. 그 때 공이 맞는 순간 전부 홈런이란 걸 알았거든요. 그래서 야수들도 모두 뒤도 안 돌아보고 가만히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모든 야수 정지”라고 말했죠. 이어서 “우측 담장 넘어갑니다”라고 했는데, 제가 듣기에도 굉장히 좋더라고요(웃음).

많은 야구팬들이 정우영 캐스터 하면 ‘투투피치(two-two pitch 투 스트라이크 투 볼의 볼카운트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라는 표현을 떠올리지 않나요? 어떻게 찾아내신 표현인가요?

‘투투피치’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 상황이 굉장히 중요한 상황인데 아무도 강조하지 않아서였어요. 투수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결정구를 던져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거기에서 만약 볼을 던지게 되면 풀카운트가 돼서 투수한테 불리해요. 그렇기 때문에 투수는 반드시 그 상황에서 승부구를 던져야 되고, 타자도 상대가 승부를 해 올 것이기 때문에 공을 반드시 때려야하는 카운트인 거죠. 그래서 중요한 상황인 걸 강조하자는 의미에서 2010년부터 ‘투투피치’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런데 투 스트라이크 투 볼 상황이 될 때마다 ‘투투피치’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탈삼진율이 높은 선수의 볼카운트가 ‘투투’일 때만 써요. 볼을 많이 던지는 선수일 때는 쓰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이 팬들에게 각인됐다면, 시청자 여러분들께 감사할 일이죠. 중요한 상황에 잘 썼다고 알아주시니 정말 고마운 거죠. 그런 게 알려지고 인정을 받으면 행복한 거고요.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스무 번 넘게 읽었어요

잠들기 전에 스포츠와 관련된 책을 읽는다고 쓰셨는데요.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어요. 요즘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은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예요. 스무 번도 넘게 읽은 것 같아요. 특히 5권, 6권은 2,000번 정도 읽었어요. 정말 다 외울 정도예요. 올해 3월부터 침대에서 매일 그 책만 읽고 있어요. 아내가 이제 좀 그만 읽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할 정도죠(웃음). 전생에 제가 징기스칸이었는지(웃음) 너무 재밌어요. 제가 허영만 화백을 정말 사랑하거든요.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에서 맛집 이야기를 다룬 것도 『식객』이 큰 영향을 끼친 걸 수도 있어요.

야구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야구가 그냥 숨 쉬는 것과 똑같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단 매일 할 수 있는 스포츠잖아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경기가 있고, 메이저리그는 일주일 내내 경기를 해요. 그러니까 오늘 봤던 경기의 승패가 결정 됐어도 내일은 또 제로에서 출발을 하는 거죠. 이런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야구라는 스포츠는 이기는 팀도 전승을 기록하진 못해요. EPL(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 리그) 2003-2004 시즌에서 아스날이 무패 우승을 했었는데요. 야구에서는 그게 불가능해요. 약팀도 강팀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게 야구예요. 통상적으로 승률이 1위 팀은 6할, 꼴찌 팀은 4할 정도 되는데요. 열 경기로 치면 최하위 팀도 4번 웃을 수 있고 1위 팀도 4번은 지는 거죠. 이런 게 야구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요. 전날 경기에서 이겼더라도 혹은 졌더라도 매일매일 새로 출발하는 거예요. 그게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야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일까요?

끝내기죠. 끝내기 승부가 야구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아닌가 생각해요.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의 ‘인천’ 편에 김연훈 선수가 끝내기 홈런을 쳤을 때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때가 진정한 스포츠 캐스터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마 그런 끝내기의 순간이야말로 팬들한테도 가장 살아있는 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고요.

아직 야구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분들에게 추천해주실 책이 있으시다면 어떤 책인가요?

아나운서 후배들이 저한테 ‘어떤 책을 보면 좋을까요’라고 물어보면 그때마다 제 대답은 똑같아요. ‘책 보지 말고 경기 봐. 책은 나중에 봐’ 라고 하는데요. 그게 제가 항상 강조하는 점이지만, 굳이 꼽자면 레너드 코페트 기자의 『야구란 무엇인가』가 가장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번역이 너무 잘됐어요. 돌아가신 이종남 기자님께서 번역을 하신 책인데, 저는 우리나라 스포츠 번역 서적 중에서 가장 번역이 잘 된 케이스라고 생각해요. 이 책은 꼭 추천합니다. 사실 1990년대에 소량만 찍었는데 절판이 되고 나서 최근(2009년)에 다시 나왔어요. 『야구란 무엇인가』는 야구팬이라면 한 번 꼭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에요.

언젠가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로 라디오 중계를 꼽으셨는데요, 그 외에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음악 프로그램을 한 번 진행해보고 싶어요. 음악은 제 곁의 숨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음악 프로그램은 언젠가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스포츠와 연관된 음악들, 예를 들어서 선수가 등장할 때의 음악이라든지 방송 프로그램의 예고편에 쓰이는 다양한 음악들이 있잖아요. 사실 그 음악을 쓰는 게 이유가 다 있는 거거든요. ‘왜 이 순간엔 이 음악을 썼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저와 같은 관심을 갖고 있는 PD와 같이 그런 작업을 해보려고 계속 얘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라디오 중계도 굉장히 욕심나요. TV 중계는 시청자들도 화면을 같이 보면서 듣는 분야지만, 라디오는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제 이야기로만 상황을 그려가는 과정이잖아요. ‘내가 뭔가 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점에서 라디오 중계도 꼭 한 번 도전하고 싶어요.

책과 관련해서는 어떤 도전을 해보고 싶으세요?

3, 4개월 전부터 다음 작업을 시작했어요. 앞으로 1년 반~2년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스포츠 명언록을 준비하고 있어요. 단순히 명언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누가 언제 이 말을 했고, 어떤 상황에서 이 말을 했는지, 그리고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어요. 골프가 됐건 축구나 농구가 됐건, 종목 구분 없이 다양하게 작업을 해 보는 게 목표예요. 『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도 시즌 2가 나올 수 있으면 물론 그 작업도 해보고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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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에 출근하는 남자정우영 저 | 한스미디어
이 책은 스포츠 전문 케이블 MBC스포츠플러스 채널에서 국내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 중계를 맡고 있는 10년 차 스포츠 캐스터 정우영이 전국의 야구장을 다니며 경험한 소소한 일상의 기록과 야구장 주변 맛집 소개 등을 한데 엮은 책이다.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시청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숨겨진 조연인 스포츠 캐스터는 과연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중계방송 전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시청자들에게 좀 더 새로운 즐거움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등 스포츠 중계 캐스터의 다양한 일상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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