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채널예스 : 만나고 싶었어요!
Viewing all 8510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린, 솔로 여가수로서 성실히 자리를 지켜오다

$
0
0

ed_1.jpg

 

「주정 블루스」, 「청사포」 등 노래 제목을 보고 린(LYn)에게 이런 한국적인 감성이 있나 생각했다. 그동안 들려준 세련된 그러나 약간은 패턴 화된 발라드를 떠올려보면 집시와 탱고를 품은 곡도 마찬가지다. 고혹적인 재즈로 보컬의 완숙함을 드러내고 있기에, 새롭게 지향하는 영역이 그와 어우러질 수 있었다. 린의 9집 < 9x9th >는 이처럼 처음의 낯설음을 걷어내고 자연스레 스며든다.

 

2000년대 가수들의 복귀가 이어지는 가운데 동시대부터 꾸준히 노래해온 린의 활동기가 새삼 '길게' 다가온다. 공백을 크게 가지지 않으며 차곡차곡 쌓아낸 앨범은 이즘 리뷰에서도 볼 수 있다. 9집까지 마친 뒤 그가 가진 생각, 작년 한 해 드라마 < 별에서 온 그대 >사운드트랙으로 중국에서 사랑받은 것 등 근황도 궁금했다. 솔로 여가수로서 성실히 자리를 지켜온 가수, 린을 홍대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어느 덧 9번째 앨범이다. 이번 앨범의 주안점은 뭐였나


20살 무렵부터 에고-래핑(Ego-Wrappin')이라는 재즈 혼성 듀오를 좋아했어요. 그 팀이 부른 '색채의 블루스(色彩のブル?ス)'를 제가 아주 오래 들었는데요. 이 곡에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사를 이해하고 들은 것도 아닌데 분위기에 끌렸던 거 같아요. 일본 재즈곡은 완전한 정통 재즈가 아니라, 뽕이 적절히 섞여서 특유의 엣지나 색깔이 있거든요. 제가 어릴 때부터 구성진 멜로디를 좋아해서 예전부터 이런 노래를 하고 싶었어요.

 

감미로운 발라드나 아기자기 팝에서 다른 시도를 한다는 부담도 있었을 것 같다


이전의 음악과 이질감이 들까봐 고민했지만, 할 수 있는 걸 다 못 보여준다는 아쉬움이 더 컸기에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인지 차트 100위권에서 3일 만에 없어지더라고요. 예전 곡들이 10위 안에 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저조한 성적이죠. 반응이 크지는 않아도 제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기에, 오랫동안 사랑 받길 바라는 앨범이에요.

 

전체적인 앨범은 변화했지만 역시나 타이틀곡은 '린 스타일'이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은데.


정말로 벗어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곡들이 제 기반이고 제 정체성이라 쉽게 바꿀 수 있을 거 같진 않아요. 예전부터 실험을 해오기는 했지만 그 곡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것이기도 하고요. 이번에도 재즈를 가져왔는데, 대중가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해서 가요 느낌을 적절히 섞어냈어요.

 

어느 곡이 마음에 드는지


저는「주정블루스」요. 제가 또 술을 좋아하기도 해서요. (웃음) 처음 제 머릿속에 있던 음반의 색깔과 가장 일치하는 곡이고 제일 먼저 녹음한 곡이기도 해요. 사실 이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하고 싶었는데, 재즈 블루스 쪽으로 움직였다고 이걸 내걸면 너무 예상 가능한 거 같아서요.

 

(후렴 왜 사랑이 변하고 그래요 멜로디가 좋았다는 이야기에 린은 이 대목을 직접 불러줬다.)

 

ed_2.jpg


최백호를 오래 전부터 좋아했나. 「청사포」라는 노래도 리메이크했다.


정말 좋아해요. 2003년 라디오 < 컬투 쇼 >에서 처음 뵈었는데 그 때 코너 제목이 '신구(新舊)의 조화'였어요. 워낙 하늘같은 선배님이시고 저희 아빠보다 더 연배 있으셔서 떨렸지만, 무심한 듯 쓰시는 경상도 말투나 스타일이 멋지셨어요. 「청사포」를 라이브로 불러주셨거든요. 당시 제가 23살이었는데 노래가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어요. 선생님께서 그 때 어린 친구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렇게 우냐고 전화번호도 여쭈어 봐주시고, 그 뒤로 제가 연락도 드리고 그랬죠.

 

그래서 저한테는 이 신보가 최백호 선생님이랑 저희 아빠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리고 두 분께 모두 칭찬받아서 기뻤어요. 선생님은 내년에 40주년이신데 같이 듀엣 했으면 좋겠다고 해주셨고, 아빠는 백 마디 말 안하시다가 저한테 엄지를 척 해주시더라고요. 딸이 아주 어릴 때부터 해왔던 일인데, 점점 제 스타일이 생길 때 마다 좋아해주고 계세요.

 

애절한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밝고 편하게 불렀다.


결혼하고 내는 첫 앨범이에요. 밖에서는 결혼한다고 문제도 되고 그랬지만 실제로 아주 편하고 좋았거든요. 곳곳에 그런 감정들이 들어있고요. 나중에 들어도 신혼 때가 떠오를 거 같아요.

 

「나 하나만 남겨줘요」는 수록곡 중 가장 달콤하게 불러서 마치 아이유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유도 최백호 선생님이랑 작업했고, 방향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던데.


저도 가볍게 부르는 것이 편하더라고요. 댓글에 요즘 린이 아이유를 파나보다 이렇게 올라온 적도 있었어요. (웃음) 아이유 노래를 따로 집중해서 찾아본 적은 없었는데, < 꽃갈피 >를 좋게 들었거든요. 그 친구의 행보를 후배 가수로서도 팬으로서도 지지해요. 저도 어린 나이 때 어떤 음악을 할지 스스로 제시할 수 있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가수가 되어있었을 거 같아요. 제가 하지 못한 부분이기에 부럽기도 하고. 지금 아이유의 보컬에 연륜과 드라마가 쌓이면 다른 느낌으로 이어질 거 같아 기대가 되요.

 

드라마 ost에서 강세를 드러내면서 린에게 2014년은 특히 바쁜 해였다. 「My destiny」를 부른 드라마 < 별에서 온 그대 >가 중국에서 인기가 폭발했고 ost도 덩달아 호응을 얻은 덕에, 지난해 중국 음악시상식 'QQ 뮤직 어워드'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류 관계자들은 한국 대중문화에 대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는 중국에 K팝 가수를 바로 진출시키기가 어려워, 새로운 형태의 시도가 요구되고 있는 현실에서 드라마 ost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라는 점을 설명하고 그 사례로 린을 든다.

 

린은 이전의 < 해를 품은 달 >에서도 ost 「시간을 거슬러」를 불러 역시 중국에서 만만찮은 인기를 얻었다. 이 때문에 그는 8집을 한국과 중국 동시에 발매했고 타이틀곡인 「보고 싶어... 운다」는 중국에서 제법 알려지는 성과를 안았다. 린은 “드라마 ost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ed_3.jpg

 

2012년에는 < 해를 품은 달 > ost 「시간을 거슬러」로 음원 차트 1위를 했다. 한동안 린을 잊고 있었는데 드라마 ost로 되는구나 싶었다


맞아요. 제가 당시 주춤했었고, 그게 오래 되어서 저 스스로도 이제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무덤덤해질 무렵이었죠. 제가 아주 오랜만에 1위를 하니까 동료 가수들이 굉장히 좋아해주시더라고요. 팬들과 가요계 선배님들께서도 축하해주셨어요.

 

< 별에서 온 그대 > 삽입곡 「My destiny」 는 어떻게 부르게 된 건가


저도 휴식할 때 드라마를 자주 보고, 특히 이 작품은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와서 요청이 왔을 때 하고 싶다고 했어요. 진명용 드라마 음악 감독님께서 저한테 여러 곡을 보내주셨는데, 처음에는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다보니 빠르고 귀여운 노래를 받았었거든요. 그 때부터 감독님하고 상의를 하고 여러 곡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로 다시 골랐어요. 가사도 새롭게 다듬고 수정을 거쳐서 만들게 되었죠.

 

이 곡이 중화권에서도 뜨고 러브콜이 왔다. 중국 'QQ 어워드' 상황을 스케치해달라.


중국 좋았어요. 많이 기다리고 그런 것만 제외하면 방송 시스템도 마음에 들었고요. 다만 시간에 대한 엄격함이 한국이랑 달라서인지, 생방송인데 3시간씩 지연되더라고요.

 

한국에서 참석해볼 일이 없었던 레드카펫이나 시상식도 신기했고, 그 때 초청가수로 갔는데 행사장에서 관객들이 저를 잘 모르시는 거예요. 처음 보는 가수니까 당연히 모르시겠죠. 나중에 무대에서 You're my destiny 이 후렴이 나오니까 따라서 불러주시고, 앞에 계신 중국 가수 분들도 기립박수를 쳐주셨어요. 그 때 이 노래가 가진 힘을 느꼈던 거 같아요. 한류가 지금 정점에 있고, 제가 작은 부분을 맡아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던 귀한 경험이었죠.

 

드라마 ost로 인기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제가 음악감독이거나 연출자라면 목소리가 튀거나 도드라지는 가수를 섭외하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영상을 해치지 않아야 하고 배우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그런 것을 잘 구현하고 최적화된 가수라고 생각은 해요. ost에서는 더 잔잔하게 부르려고 하고, 이런 서정적인 분위기는 한국과 중국 차이 없이 모두 좋아하시더라고요.

 

9집까지 마치고 주변 이야기를 종합해서 린은 이런 가수인 거 같다, 스스로를 정의한다면.


저는 지금까지 되게 얇고 길게 왔던 거 같아요. 스스로를 '회색 가수'라고 생각했거든요. 제 음반을 쭉 들어보면 욕심이 느껴지지도 않고, 화려하거나 무대에서 뛰고 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노래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은 많은데, 정작 제 자신은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라 이걸 고민하는 과정에서 외로웠던 거 같아요.

 

음악적 조언이나 고민을 나눌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린의 이야기에, 앞으로의 앨범을 두고 대화가 이어졌다. 평소 린의 노래에서 느낄 수 있었던 여성스러움이 대답과 어조에서도 담겨있었고, 상냥하게 귀 기울여주었기에 자연스레 10집에 대한 상호의견 교환이 이뤄졌다.

 

ed_4.jpg


린의 많은 노래 중에 이 곡 하나만은 정말 감사하다고 꼽아본다면.


2집 타이틀곡이었어요. 「사랑했잖아」(2004). (린하면 그 노래죠) 사실 이 곡이랑 「My destiny」, 「시간을 거슬러」 합쳐서 세 곡으로 매번 행사하고 그래요. (웃음) 무대 위에서 춤추기도 어렵고 그래서 좋은 곡이 필요한 시점이고요.

 

말한 대로 린에게는 「사랑했잖아」 외의 결정적인 곡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곧 나오게 될 10집은 숫자로서 의미도 있고, 앞으로의 가수 생활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그게 곧 저를 만든 거니까 부인하고 싶지는 않은 거예요. 내 자식 같은 노래들인데 모른 척하면 안 되고. 그래서 10집은 린의 음악과 제가 원하는 것, 모두를 통틀어서 완전 린 표 발라드를 하고 싶어요. 오케스트레이션도 넣고 웅장하게요.

 

아니면 전곡을 자작곡으로 채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 같아요. 요즘 음반으로는 수익을 얻기 어렵지만 그마나 저는 사람들이 노래를 들어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작은 돈으로 생활이 되는, 그런 가수에 속한다고 생각 하거든요. 그런 소소한 지지나 수입이 줄더라도 무엇보다 제 마음에 드는 앨범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제 스타일도 곡으로 녹여보고 싶고요.

 

린은 어떤 가수가 되고 싶나?


저는 넓은 팬 층을 가지고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타켓으로 하는 층은 딱히 없고요. 지금까지도 여고생이랑 70대 팬 분까지 골고루 팬레터를 받아요. 지금 제 팬덤이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만족하고 있거든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죠.

 

어렸을 때 음악으로 이끈 노래는 뭐였나


이미자 선생님도 많이 들었고요. 아빠 꿈이 가수셨는데, 저도 옆에서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장희, 심수봉 선생님 음악까지 접할 수 있었어요. 학생 때는 심수봉 선생님 버전 「개여울」을 (원곡 정미조) 들으면서 버스에서 감동해서 울고 그랬어요. 이게 무슨 가사인지도 모르고 노래만 듣고 그렇게 울었어요. 그런 곡들이 바탕이 되어서 지금 제 음악이랑 이번 앨범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2001년에 데뷔한 뒤로 단독공연은 몇 번 했는지


작게라도 해오다보니 단독공연은 매년 해왔어요. 3년 주기로 매진이 되는데 안 그런 때는 손해를 보면서까지 진행해서, 사실 공연으로는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매년 콘서트를 하는 여가수가 거의 없어서 저한테는 큰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

 

에이미 와인하우스 다큐 영화 < 에이미 >가 곧 개봉하는데 보기를 권한다. 충분히슬퍼보기도 우울해보기도 하고, 그런 것에서 오는 명암이나 사연을 앨범에 담으면 좋을 것 같다


저한테 이런 조언을 해주신 곳도 많이 없었고, 그래서 이야기하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 임진모 이수호 정유나
사진 : 이한수
정리 : 정유나
2015/11 정유나(enter_cruise@naver.com)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3년 만에 빛을 본 펑크 록 앨범, 더 모노톤즈

$
0
0

무성한 소문과 함께 어마어마한 크기의 기대감이 밀어닥쳤다. 전설로 남은 초기 노브레인의 지휘자이자 20세기 한국 록의 마지막 기타 히어로인 차승우와 한국 언더그라운드 록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어온 베이시스트 박현준의 조우에. 이들이 만든 밴드 모노톤즈의 숨소리 하나하나에 인디 록 신의 시선이 따라 다녔다. '과연 어떤 음악을 보일 것인가, 어떠한 작품을 갖고 나올 것인가'

 

그러길 꼬박 3년이 반복되고 나서야 모노톤즈의 첫 정규 음반은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다. 허나 이들의 모습은 많은 관심을 모았던 결성 초기와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보컬은 수십 차례의 오디션을 재차 반복해 건져 올린, 경력이 전무한 뉴페이스였던 데다 박현준은 공식 탈퇴를 한 상태였고 원년 멤버인 차승우와 최욱노의 얼굴은 꽤나 피곤한 표정을 띤 상태였다. 부정할 수 없는 수작 < Into The Night >을 내놓기까지, 모노톤즈의 긴긴 밤, 그 검은 베일 사이에서는 대체 어떠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11.jpg

 

활동 기간에 비해 음반이 늦게 나온 편이다.


차승우 : 햇수로 3년이 걸렸다. 그간 안팎으로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런 희로애락들이 앨범에도 고스란히 반영됐을 거라 생각한다.

 

공을 많이 들여 나온 음반인데 만족도는 어떠한가.


차승우 : 대체로 만족한다. 믹싱의 경우 미국에 있는 엔지니어와 원거리로 연락해가며 작업했기에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일단은 되게 잘 나왔다고 느낀다. 한 공간에 옆에 앉아 작업했다면 개인적으로 모자라다 느끼는 15% 정도의 공백을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The beat goes on」의 경우에도 조금 더 공간감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다만 어디까지나 디테일 수준의 얘기다. 크게 보자면 웬만큼은 좋다.

 

다른 멤버들은 어떤가.


조훈 : 승우 형 말이 맞다. 하지만 원거리 소통이라 가능했을 장점도 분명 있다. 우리가 레퍼런스로 삼았던 보 디들리나 푸 만추, 밤비 몰레스터스 같은 아티스트 예시들을 그 쪽에서 꼼꼼하게 듣고 체크해 더욱 공이 크게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나름 장단이 있는 방식이다.


최욱노 :나는 일단 감개무량하다. 멤버 구하는 시절서부터 지금까지 같이 쭉 함께 했기에 감정적으로 짠한 것도 있다. 한편으로는 작업이 자연스럽게 진행된 부분도 있어서 좋았다. 현준 형이랑 승우 형 만나 술 마실 때마다 비틀스 얘기를 해대서 비틀스처럼 치밀하게 일들이 진행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스톤스처럼 굴러가더라. 난 이런 점이 오히려 더 좋았다.

 

22.jpg
조훈

 

보컬리스트 조훈은 공식적으로 뮤지션으로서 첫 레코딩이고 첫 음반이라 소회가 또 남다를 것 같다.


조훈 :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일산에서 지낼 때 승우 형이 찾아와서 연습시키고 합주도 정말 많이 하고 이런 저런 공연 기획하고 진행해가며 바삐 지냈지만 다 좋았다. 배운 것도 많았고. 앞으로 더 잘 하고 싶다.

 

보컬이 들어온 뒤 음반 제작에 속도가 붙은 셈인가.


차승우 :맞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우리 불씨가 금방 꺼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 이 친구를 만나고 우리 보컬이라고 결론을 내린 그 순간에 '바로 음반 작업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조훈이 음반의 사운드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셈인데, 보컬로서 어떤 매력, 장점을 가졌기에 마지막 수를 둘 수 있었나.


차승우 : 근자에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저음 음색에서 먼저 끌렸다. 또 스스로 「Into the night」을 유튜브에서 보고 다 커버해 데모를 만들어 우리한테 보낸 것에도 감동을 받았다. 사실 내 취향의 보컬이 아닌데도 말이다.
최욱노 : 우리 노래들이 대체로 다양한데 조훈은 거기에 맞게 소화할 수 있는 너른 구사 범위를 갖고 있다. 다각도로 활용이 가능했다. 도구 다루듯 말했네. (웃음)

 

노브레인 시절에는 펑크 음악을, 문샤이너스 시절에는 고전적인 로큰롤 음악을 했다. 그간 특정 장르를 명확하게 구사하는 행보를 보여 온 차승우인데 이번에는 조금 모호하고 다양하게 음악들을 뒤섞는 모습을 보였다.


차승우 : 내 스스로도 이번 음악을 규정하기 어렵다. 아마 다들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1950년대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로큰롤 역사 가운데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 코드 등을 여기저기서 뽑아다 재조합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널찍이 접근해보면 개러지 록, 세밀히 접근해보면 비틀스, 롤링 스톤스 식 로큰롤, 비치 보이스 식 서프 팝, 딕 데일 식 서프 록 등 수십의 요소가 모노톤즈 음악에 들어가지 않았나.


차승우 :말한 대로다. 1960년대 개러지 록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었고 음악사에 굵직한 기록을 남긴 비틀스, 비치 보이스에서도 레퍼런스를 많이 얻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에서도 마찬가지고. 더 나아가, 일례로 'A'의 경우에는 벌스 부분에서는 보 디들리 식 정글 비트를, 나머지 리프 부분에서는 푸 만추 식의 육중한 느낌을 이용했다. 또 기타 솔로 파트에서는 오아시스의 「Columbia」에서 보이는 그 무렵 맨체스터 풍의 리듬 라인과 비슷하게 비트를 가져갔다.

 

음악이 상당히 독특하고 다채롭다.


차승우 : 여태까지 들어온 음악을 가지고 말도 안 되게 조합해보자는 생각을 우리끼리 항상 해왔다. 다른 노래들도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러다보니 중구난방이 된 구석이 없잖아 있다. (웃음)

 

개개의 곡이 가진 기본 틀은 상당히 직선적인데 공간감 섞인 사운드가 더해지며 큰 그림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이 섞인 느낌이랄까.


차승우 : 레고를 만들 때 맨 처음에는 설명서를 따라 경찰서나 소방서 모델을 만들지 않나. 하지만 그렇게 만들고 난 다음에는 보통 갖고 노는 재미가 떨어진다. 그 뒤에 여기에다가 블록 끼워보고 저기에다가 블록 끼워보면서 소방서로 감옥도 만들어보고 색다르게 짜 맞춰야 또 다른 재미가 튀어나오듯 우리도 그런 식으로 송 메이킹을 했다.

 

한편으로는 1950,60년대 사운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결과물이 상당히 세련됐다.


차승우 : 1950,60년대 사운드를 레퍼런스로 삼는 것은 문샤이너스 때도 해왔던 작법이다. 다만 당시에는 '내가 이런 음악을 하고 있다'는 함의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해 우리의 함의를 최대한 감추고 감추는 방향으로 작업을 했다. 우리끼리의 짓궂은 재미 요소를 넣은 부분이다. 그렇기에 앞에서 말했던 대로 이 밴드가 어떤 사운드를 내는지 모르게 된 것 같다.

 

33.jpg
차승우

 

정말 복합적이다. 이쯤에서 차승우의 곡 쓰는 방식이 궁금하다. 리프나 전반적인 곡 진행을 보면 스트레이트한 편이지만, 보컬 멜로디를 따로 떼어보면 섬세함과 유려함도 느껴진다.


차승우 : 전체적인 흐름이나 틀을 잡고 노래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팟'하고 떠오르는 한두 소절 멜로디를 기본적인 뼈대로 삼는다. 그렇게 얻은 멜로디들 중에서 써먹을 수 있겠다 싶은 건 아이폰에 녹음했다가 차차 확장시켜서 커다란 노래로 만든다.

 

멜로디 작업이 우선인가.


차승우 : 그렇다. 특히 이번에는 더욱 그랬다. 예전에는 기본적인 비트와 리듬을 짜놓고 그 토대 위에 멜로디를 얹었는데 이번 음반을 작업하면서는 대체로 멜로디를 먼저 고려했다.

 

그럼 밴드 단위로 확장해서 곡 작업을 할 때에는 파트 별로 각자 구성을 가져와 설계를 하는 편인가 잼을 통해 즉흥적으로 결과를 뽑아내는 편인가.


차승우 :잼으로 하는 방식에서는 한계를 느꼈다. 모노톤즈가 가져갈 음악에는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은 방식인 것 같다. 편곡이나 사운드 구성 면에서 정교함을 추구하기 위해 로직으로 밑그림을 먼저 그린 뒤 연주해가며 틀을 잡아갔다.

 

크레디트를 보니 편곡에서의 최욱노의 지분도 상당하다.


최욱노 : 승우 형과 현준 형 사이의 음악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돼있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둘이 추구하는 음악 성향이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그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맡지 않았나 싶다.


차승우 : 욱노와 훈이 실제로도 음악 공부를 해서 편곡을 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현악 3중주 같은 스트링 파트나 혼 섹션 같은 요소를 이 두 친구가 맡았다. 악보까지 그려가면서 현악 하는 사람한테 넘겨야하는 작업이었던지라. 그리고 욱노 군이 오르간, 피아노 같은 건반 악기도 다 책임졌다.

 

음반을 만들며 특히 어떤 점을 주안점으로 두었나.

 

차승우 : 편곡적인 얘긴데, 세부 단위를 살리려고 많이 시도했다. 레이어도 쌓아보고 여러 조화도 이뤄내며 사운드적으로 재미를 주어야겠다 싶었다. 기타도 파워 코드로 잡고 사운드도 큼지막하게 단위를 설정했던 과거와 반대된다. 전처럼 호쾌하게 밀어 넣는 노래는 많이 없는 것 같다. 나름 드라이브를 사운드에 걸어놨던 「A」의 경우에도 전개에 변칙을 부여했으니.

 

각자가 좋아하는 곡, 혹은 음반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곡을 꼽는다면.

 

차승우 : 다른 인터뷰들에서는 기르는 강아지에 대한 노래인 「K군의 어느 하루」를 애착 있는 곡으로 꼽아왔는데 이번에는 「Into the night」을 내세우고 싶다. 보컬을 여러 번 교체해가며 고생했던 시기에 만든 노래이기도 하고, 만들 당시의 기억도 짙게 남아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10개월 정도 영종도에 들어가 칩거 비슷한 생활을 하며 느꼈던 감성이 트랙에 담겨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영종도의 매일 낮에 느꼈던 밤의 정서가. 이 노래를 만들고 나서 우리가 이런 음악을 할 수도 있겠구나하고 스스로 확인하기도 했다. 덕분에 모노톤즈가 유지될 수 있었다.


최욱노 :좋아하는 트랙이라고 한다면 계속 「Watchman」을 꼽아왔다. 승우 형, 현준 형이랑 합주하면서 손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만든 거라 큰 의미가 있다. 「A」도 그런 식으로 만들었다.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노래라 이 곡을 듣고 있으면 3년 간 겪었던 고생의 타임라인이 눈앞에 쭉 보인다. 약간 슬프게도 들린다. 그런 면에서 「A」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것 같다.

 

조훈의 경우에는 < Into The Night >이 음악인으로서의 첫 작품 아닌가. 어떤 곡으로 앨범을 요약하고 싶나.


조훈 : 「Into the night」이 정말 중요하다. 밴드에 들어오기 전에 이 곡으로 데모를 만들었고 밴드에 들어와서는 전임 보컬이 했던 스타일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좀 더 잘 대표할 수 있는 곡이라면 「The beat goes on」이 제격이지 않을까 한다. 가사부터 보컬 멜로디까지 승우 형의 아이디어가 확고했던 곡인지라 모노톤즈에 대한 형의 스케치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마지막에 녹음 작업을 진행했던 노래이기도 해 기억에도 잘 남아있고 공연에서 연주한 적도 거의 없어서 앨범 듣고 있으면 이 트랙에 손이 많이 간다.

 

차승우에게 조금 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커리어를 보면 각양각색의 음악 스타일이 담겨 있는데 그 핵심에는 항상 펑크적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차승우 :늘 펑크 록을 한다고 생각한다. 거시적인 시점으로 보면 모노톤즈에도 펑크적 의미가 분명히 실려 있다. 우리 스스로도 우릴 펑크록 밴드라 부르고 있고.

 

펑크 록을 가지고 다채로움을 뽑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하다.


차승우 :유명한 얘기고 진부한 얘기지만 비틀스도 여러 노래를 커버하던 초기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넓은 바운더리를 보여준다. 베사메무초를 연주하기도 했다가 로큰롤을 연주하기도 했다가. 아마 비틀스의 창작력도 그런 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뮤지션이 마찬가지다. 자양분이랄 게 있어야 토대로 삼고 발전할 수 있다. 우리도 그렇고.

 

< Into The Night >이라는 결과물이 반가울 것 같다. 후련하기도 할 테고.


차승우 :그간 내 스스로 위태로운 느낌을 많이 보여줬나 보다. 주변에서, 특히 지인들 중에서 비슷한 얘기를 해준 사람들이 많았다. '우려했던 것 보다는 매끈하게 나왔다', '다행이다'라는 말도 많이 해줬고.

 

모노톤즈라는 밴드로 음악하기 정말 어렵지 않았나.


차승우 :어려웠다. 3년간 변변한 결과물을 못 낸 채로 굴려오지 않았나. 특히 밴드의 간판인 보컬을 구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했던 것 같다. 서교그룹사운드의 김세영 군을 맞이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도 있었는데 그 찰나에 그 친구가 떠났다. 이후에는 세 명으로 밴드 포맷을 맞춰 구성해보기도 했고 다른 보컬들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한참을 그러다 조훈이 들어오게 된 거다. 그쯤부터 음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밴드를 하기 앞서 맨 처음 박현준과 만나며 그렸던 구상이 궁금하다.


차승우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나나 현준이 형이나 각자 음악 활동에 휴지기가 와 낭인처럼 살 때라 “놀기만 해서 뭐하냐. 뭐라도 해야 되지 않겠냐”며 밴드 제의를 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현준 형 연주를 인상 깊게 봐왔고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자적 매력을 가진 아티스트라 생각했고, 또 자주 술도 마시면서 친해진 상태기도 했고. 그러고 나서 욱노 군에게 드럼을 부탁해 3인조 대형을 짜면서 기본 틀을 만들었다.

 

초기 공연에서는 이기 팝, 데이비드 보위도 커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승우 :그 때 이기 팝 커버했던 게 각인이 많이 됐던 것 같다.

 

사실 모노톤즈에게 집중됐던 큰 관심 가운데에는 차승우-박현준의 만남도 존재했는데, 앨범을 발매하기 직전 박현준이 탈퇴했다. 박현준과는 어떻게 헤어지게 된 건가.


차승우 :어두운 기가, 짙은 아우라가 있는 사람이다. 형이 어느 정도 나이도 있었던 지라 밴드 안에서의 세대 차이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물론 현준 형이 꼰대라는 얘긴 절대 아니다. 다만 편히 대하기에 약간의 거리도 있었고, 우리들 사이에 묘한 텐션감이 있었다. 당혹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이게 창작력을 위태롭게 하는 순간부터는 피로가 쌓이기 시작한다. 형이 먼저 그만 두겠다 선언을 하셔서 우리도 막 붙잡진 않았다. 물론 밴드를 하면 다들 겪는 종류의 문제다. 우리로서도 낭패였지만 오래 갈 성질의 데미지는 아니었다.

 

박현준이 연주한 트랙을 두고 사용 여부에 대해 고심하지는 않았나.


차승우 :아무 고민 없이 고스란히 실었다. (박현준이) 워낙 그루브를 잘 뽑아내지 않나. 아홉 곡에 담아냈고 나머지 세 트랙을 작업할 때에는 현준 형이 밴드를 떠난 상태였던지라 다른 사람이 베이스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베이스 멤버를 다시 채울 생각인가.


차승우 :일단은 객원 체제로 갈 예정이다. 정규 라인업을 만들기 위해선 사람들끼리 여러 번 캐치볼을 해봐야 한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44.jpg
최욱노

 

밴드를 하며 겪었던 고민과 갈등, 긴장의 나날이 다큐멘터리에 담겨 내년쯤 공개된다고 들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나.


차승우 : 자잘한 표정서부터 갈등의 서막까지 다큐에 다 투영이 됐을 것 같다. 처음 밴드를 만든 그 순간서부터 카메라가 있었다.

 

처음부터?


차승우 : 다큐멘터리 감독이 내 중학교 동창이다. 원래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이라 현준 형과 음악을 하게 됐다고 하니 관심을 갖고 앞으로 밴드 활동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밴드 활동 처음부터 카메라가 돌아가게 됐다. 촬영 초기에는 '모노톤즈라는 밴드가 있었다' 정도의 기록물 차원에서 영상을 제작하려했는데 점차 의도가 바뀌었다. 그 친구가 우리 역정을 쭉 보더니 영화감이라더라. (웃음)


최욱노 : 카메라에 대해 원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운 우리 모습이 나갈 거 같아 걱정된다. 그렇다 해도 사실 이렇게 밴드가 갈등하는 모습을 그대로 담은 영상은 잘 없지 않았나. 밴드를 해본 사람들은 특히 공감 많이 할 거다.

 

갈등이 정말 많은 편이었나.


차승우 :아무런 갈등이 없고서야 정규 멤버 둘이 탈퇴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다들 겪는 고난이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는 살자고 열심히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네들과 진하게 연애를 한 것 같다. 밴드 하는 게 사실 연애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먼저 공개된 짧은 트레일러 영상을 보니 (차승우가 예전에 출연했던 영화) < 고고70 >을 4분 버전으로 압축시킨 것 같았다.


차승우 :거의 실사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계속 신경질 내고 하는 내 모습들에서 < 고고70 > 만식이가 떠오르더라.


조훈 : 실제로 어떤 공연에서 소란이 있어 경찰이 전원 뽑겠다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 “이거 < 고고70 >에 나오는 장면 아니냐며 관객들이랑 같이 막 웃었다. (웃음)

 

각자의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아티스트, 앨범이 궁금하다.


조훈 : 원래는 마이크가 아닌 기타를 잡고 있었던지라 친구랑 같이 기타 치면서 이리저리 커버해 녹음해봤던 비틀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기도 하다. 비틀스 음반을 단 하나 꼽는 건 정말 못 하겠다. 「If I fell」 같은 곡을 가장 좋아하고. 그리고 미국에서 자랐다보니 조니 캐시의 컨트리도 좋아한다. (차승우 : 미국 남부 감성을 갖고 있다.) 또 머디 워터스나 버디 가이 같은 시카고 블루스 계통 아티스트들도 좋아하고.


차승우 : 나도 비틀스를 꼽겠다. 팝 많이 듣던 누나의 테이프 컬렉션 중 CM송 모음집에서 「I wanna hold your hand」를 접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던 것 같다. 심지어 그 광고가 상일가구 광고였던 것까지도 기억한다. 그 때 겪었던 혼이 쭉 빨려나가는 느낌이 지금도 로큰롤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남아있다.

 

비틀스가 연속해 나왔다. 이번 음반을 얘기하면서 많이 언급된 밴드기도 하고.


차승우 : 말도 못 한다. 3일 밤새면서 얘기할 수도 있다.


조훈 : 진짜 그렇게 될까봐 술 마실 때 승우 형은 비틀스 음악을 못 틀게 한다. 너무 비틀스 얘기만 해댔다. 사실 비치 보이스나 스톤스도 좋아하는데.

 

최욱노는 어떠한가.


최욱노 : 스물한 살 쯤 홍대에서 밴드하면서 너바나 쪽에서 시작점을 잡았던 것 같다. 페이브먼트도 많이 들었고 알이엠도 많이 들었다. 비틀스도 좋아하지만 내 베스트는 아니다.

 

끝으로, 향후 활동이 궁금하다. 첫 음반이 잘 나온 만큼 다음 음반이 벌써 궁금한데.


차승우 : 다음 작품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대해 차츰 고민할 날이 올 텐데 지금 당장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분명한 건 이번에 작업하고 녹음하며 우리 각자 나름의 가능성을 스스로 읽었지 않나 싶다. 우려나 걱정은 없고... 이번 음반에 투입되지 않은 곡들도 있는데 그게 2집에 사용될지 안 될지는 잘 모르겠다. 자연스레 잡히는 것들을 가공하고 잘 연마해서 풀 렝스 2집을 만들겠다. 당장은 공연이 주된 계획이다.


조훈 :원래 1집이 더블 앨범 형식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승우 형이 비틀스 화이트 앨범처럼 갈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곡들을 많이 추려서 만든 게 지금 이 앨범이다.

 

풀 렝스로 바로 가는 건가. 요즘은 이피 발매가 성행하지 않나.


차승우 : 하긴 이 바닥에서는 요즘 천 장만 팔려도 대박 소리를 듣는다. 음반이란 게 작품이라기보다는 명함에 가까워진 시기지 않나 지금이. 그런 현상에 대한 반작용을 개인적으로 크게 갖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20세기 사람인지라. 어렸을 때부터 음반만이 가진 가치를 들으며 커왔고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 같다.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남기는 게 가장 멋있다. 그게 밴드가 할 일이고.


인터뷰 : 신현태, 이수호, 이택용
정리 : 이수호
사진 : 이한수
2015/12 이수호 (howard19@naver.com)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0
0

어쩌다 이리 된 걸까. 노동하는 인간이 아닌 노동하는 기계와 경쟁하면서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니. 서로를 ‘노답’과 ‘불통’으로 설명하는 세상에 살게 되다니.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해답은 『어쩌다 한국은』안에 담겨있다. 책은 노동, 역사, 정치, 언론, 종교, 교육, 국방, 미래 등 여덟 개의 키워드로 이곳의 현실을 설명한다. 대한민국이 경험한 공동의 사건들을 되짚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하나하나 파헤친다.

 

이 방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쉽게 풀어나가는 저자 박성호는 스스로를 ‘이승의견가’라 소개한다. “온갖 세상사를 관찰해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의 이런 호기심 덕분에 『어쩌다 한국은』에는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이야기가 담겼다. ‘물뚝심송’이라는 독특한 닉네임으로 유명한 저자는 현재 <딴지일보>에 정치 관련 글을 기고하고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 출연하고 있다. 그는 올해 초부터 대중들과 만나 ‘대한민국 모든 떡밥’이라는 이름의 강연을 진행했고, 그 내용은 『어쩌다 한국은』의 바탕이 되었다.

 

151211-박성호_IMG_8270.jpg



대기업이 돈을 쌓아두는 이유


책 제목이 『어쩌다 한국은』입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진단하시나요?


저는 하나의 고비를 겪고 있다고 봅니다. 비관적인 것도 아니고 낙관적인 것도 아니에요.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고비를 맞은 거죠. 우리는 1980년대에 절정의 성장기를 보내다가 90년대 말에 성장 속도가 꺾이는 경험을 했고, 지금은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 놓여 있어요. 이럴 때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우리는 또 성장할 것이다, 잠시 쉬고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게 됐어요. ‘이렇게 주저앉나 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사회 전반적으로 구성원들이 희망을 못 느끼고 있다는 증거는 바로 출산율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지금보다 나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마 미안해서 아이를 못 낳게 된 거예요. 저는 이 고비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면 우리 사회가 퇴보하기 시작할 거라고 보는데요. 이제는 양적 팽창이 아닌 질적 성장을 추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성장이 필요한 걸까요?


우리한테 적합한 민주주의와 약자를 보호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 사회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면 최하층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보면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약자를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전반적으로 퍼지는 사회가 질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주류 세력은 그쪽으로 시야를 돌리지 못했어요. 무조건 수출 잘해야 하고 허리띠 졸라매고 저축 많이 해야 된다고, 1970년대에나 먹힐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닐뿐더러 우리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 7, 8위의 무역 규모를 가진 무역 강국입니다. 국가 총생산량 규모는 10위권 초반이죠. 물론 채무도 많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산업기술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경제적으로 양적 팽창을 도모하기보다는 지금 의 자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책에도 기업의 ‘이익잉여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최근 ‘사내유보금’을 둘러싼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이익잉여금’이 “생산성 향상의 효과가 노동자에게 배분되지 않고 누적되어 남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그 돈은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업들은 본질적으로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은 투입 대비 산출이 높아진다는 거잖아요. 투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노동력인데,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투입 중에서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예전만큼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된 건데, 공장자동화가 대표적인 이야기죠. 그렇다면 노동력은 조금밖에 안 들었으니 그 노동력의 가격이 비싸진 걸까요? 아니면 노동력 이외의 것을 투자했으니 자본이 투입된 거라고 봐야 할까요? 후자라면 산출된 결과물에서 발생한 이득은 자본의 것이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는 논리도 가능합니다. 자본이 자본을 벌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생산성 향상이 일자리를 줄인다는 건 확실하게 누구나 동의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줄어든 노동이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데에는 사회적으로 동의하기 힘들 거예요. 그렇다면 ‘노동이 만들었으면 (이익은) 노동의 것이지 왜 자본의 것이냐’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죠. 일리가 있어요.

 

그렇다면 기업들은 왜 ‘이익잉여금’을 쌓아두고 있는 걸까요?


기업들이 가장 먼저 알고 있어요.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어요. 자신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서 잉여금을 쌓아둘 수밖에 없는 거죠. 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적응을 해야 되니까요. 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으려면 잉여금을 쌓아놓지 않아도 망하지 않는다는 비전을 보여줘야 되죠. 정부나 사회가 할 일은 그거죠. 우리사회가 그들에게 뭔가 제공할 필요가 있어요. 그들이 ‘이익잉여금’을 투자할 때 정부는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 거래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이익잉여금’이 많이 쌓여있는 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애플이나 MS, 구글이 돈이 많다고 해도 그들의 규모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쌓아 두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그건 확실하죠. 자본주의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그들의 판단은 옳아요. 그렇기 때문에 다 같이 모여서 고민을 해서 위기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하죠.

 

151211-박성호_IMG_8289.jpg

 


희망의 총량이 줄어든 사회, 연대는 이루어질까


‘노조는 과연 필요한가’라는 ‘떡밥’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있어요. 이 논제의 바탕에는 노조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귀족노조’라는 표현도 그렇죠. 이런 시각들은 어떻게, 왜 생겨난 건지 궁금합니다.


일단 현재 상황에서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이 노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애기 힘들 겁니다. 이건 경험적인 사실에 입각한 판단이에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로 우리사회에 노조가 기여한 바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게 더 많았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시대에 맞춰 발전하지 못했다는 건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대기업 노동자들이 독식한 경향이 있죠. 그건 아무도 부정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 거죠. 과실을 독차지하고 있는 무리에 낄 수 없잖아요. 자신이 그런 상황인 건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단체 행동에 함께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내 아이들도 거기에 끼지 못하는 건 곤란하죠. 게다가 노조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보도가 계속 나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중소기업에 노조가 생겼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없어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최규석 작가의 『송곳』을 봐도 결코 긍정적인 결말이 아니거든요. 그런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긴 거예요.

 

그렇다고 노조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나요?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연대로써 노조의 가치보다, 약자들의 연대로써 노조의 가치가 더 크게 부각될 것 같습니다. 개인 간의 연대죠. 단위 기업 노조보다 사회적 노조가 더 널리 퍼지기 시작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알바 연대, 청년 유니온, 이런 단체가 호응을 받을 거예요. 자영업자들의 연대도 가능하겠죠. 어떤 회사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들 간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건데, 이건 장기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이 노조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사회적 약자의 연대로써 노동운동은 변화할 것이고, 그래야 사람들의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약자들의 연대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올 거고요. 알바를 하는 청년 3만 명이 모였다면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죠. 최저임금 정할 때 목소리를 낼 수도 있고요. 그들이 일제히 특정 편의점에서는 일을 안 하겠다고 하면 그쪽(사측)에서 당황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대기업이 없어지면 단위 사업장 노조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죠. 직원 숫자가 적으니까요.

 

연대에 희망을 걸기에는 절망적인 징후들이 보입니다. 노동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귀족노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면서 노동자 계층 안에서 대립이 발생하잖아요.


그 부분은 다분히 정서적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죠. 그런데 현재 사회는 희망의 총량이 많이 줄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생존을 걱정하게 되고, 생존을 걱정하게 되면 아량이 줄어듭니다.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졌을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당시 가장 잘 나간다는 현대자동차 노조 또는 금속 노조의 대투쟁을 보면서도, 저 사람들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그들에게 아량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때 서울 시내 대부분의 사무직들이 현대자동차 정직원보다 처우가 좋지 못했거든요. 그런데도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했던 것은 자기의 상황도 더 좋아질 거라는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대가 어렵고 노동자들끼리 반목하게 되는 것은 다들 심각한 스트레스 때문에 아량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상징적인 희망이라도 보이기 시작하면 금방 좋아집니다. 희망만 보이면 자신의 상처라든가 스트레스를 빠르게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고, 연대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도노조 파업 당시에도 그들의 처우를 둘러싼 대립이 있었습니다.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왜 파업을 하냐는 시각이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왜 상향평준화가 아닌 하향평준화를 지향하느냐고 지적했죠. 그때도 아량을 베풀지 못했던 건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렇죠. 물론 거기에도 간과된 많은 부분들이 있죠. 20년째 정직원으로 근무한 근속자가 일주일에 특근 야근 다 하면서 160시간을 일해야 그 돈을 받는 건데, 한편에서는 우리는 그만큼 일해도 그 금액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상향평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나라가 가난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부자가 된 지 얼마 안 됐고 국가 채무가 많아서 빚 갚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봉 7000~8000만원 받는 것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말씀 드렸듯이 우리나라가 충분히 그 정도 수준이 되거든요. 우리보다 훨씬 인구와 총생산이 적은 나라도 훨씬 더 높은 임금을 주고 고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서로 간의 반목은 희망과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자본주의의 실패를 막는 대안 ‘기본소득’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뜨거울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각각의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제가 항상 ‘기본소득’을 설명할 때 덧붙이는 이야기가 ‘기본소득’은 자유도가 높은 정책이라는 거예요. 조절하기에 따라서 급 좌파 정책이 될 수도 있고 급 우파 정책이 될 수도 있어요. ‘기본소득’이 도입되면서 기존의 복지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서 극좌에서 극우로 오갈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 자체를 놓고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요. ‘기본소득’과 관련해서 기존의 복지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어떤 효과를 얻을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하니까요.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굳이 찬반을 이야기한다면 ‘기본소득’이 추구하는 사상에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15~16세기부터 국민의 기본권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국가는 자국의 국민들이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 한 마디로 다 표현되는 거죠.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나라의 국민이 되는 순간 나는 이 땅에 생존할 권리가 있다, 생존할 수 있게 해 달라, 이게 ‘기본소득’의 기본 개념이죠.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매월 똑같은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핵심 사안이고요. ‘기본소득’은 너무 복잡한 주제라서 그 이야기만으로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정도예요. 그것보다는 ‘기본소득’이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사안에 대한 동의가 필요하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어요. 나는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 이 땅에 살 권리가 있다는 거죠. 내가 일을 하건 안 하건 상관 없이요. 이게 게으름뱅이의 비겁한 변명이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정당한 권리라고 보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논리가 가능한가요?


자본주의는 일종의 경제적 싸이클이거든요. 생산부터 소비까지 하나의 싸이클이 돌아야 하죠.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생산자이자 동시에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생산을 해서 그 대가로 소득을 올리고 그 돈으로 소비를 하게 되고, 이 소비가 또다시 시장을 만들어서 생산이 가능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구성원이 생산에 참여할 기회를 봉쇄하고 있는 거예요. 냉정하게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면 시장이 같이 사라져요. 그러면 생산은 의미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생산에 참여를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소비를 통해서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실패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봅니다.

 

‘기본소득’ 보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기대하세요?


제가 ‘기본소득’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약자 간의 연대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에요. 먹고 살기 바쁜 현실 때문에 약자들의 연대가 어렵기도 하거든요.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데 어떻게 집회와 모임에 참석할 수 있겠어요. 심지어 투표할 시간도 없잖아요. 그런데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그렇게 장시간 노동을 안 해도 되거든요. 여력이 생기고 생존이 가능해지면 사람은 자신 이외의 것에 눈길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약자들의 연대, 소비자의 연대, 이런 사회 운동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거라고 봅니다. 어쩌면 집권층에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거죠. 약자들이 뭉치는 걸 싫어하니까요.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을 듣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한국은』에서 설명한 내용을 보면, 지금의 현상이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건들이 있었고, 그걸 청산하지 못한 것이 원인 아닐까요?


그 모순이 누적되어서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불신의 벽이 너무 높아진 거죠. 서로 화해를 할 때 자기가 끼쳤던 피해라든가 상처를 사과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런 화해를 주선하고 중재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쉬운 일이죠. 중재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 즉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거죠.

 

결국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그와 관련해서는 “이제 게임의 룰을 생각할 때가 왔습니다”라는 말씀이 가장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에도 쓰셨듯이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정치적 현안, 정파적 이야기 안에서만 논의가 맴돌잖아요. 게임의 룰에 대한 고민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게임의 룰을 생각해야 된다는 건) 정치인들이 어떤 정책을 내걸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그 전에 제대로 된 선거법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냐는 거예요. 게임의 룰을 만들고 게임에 참여해야죠. 그게 답답한 겁니다. 2014년에 위헌 판정을 받은 선거법을 아직도 못 고치고 있는데, 헌법 재판소는 올 연말까지 고쳐서 내일 총선은 바뀐 선거법으로 실시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이러다가 연말에 어느 날 기습적으로 발표하겠죠.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이 문제를 정치인들끼리 밥 그릇 싸움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유권자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선거법이라는 건 게임의 룰이고, 유권자들의 의견이 정치판에 반영되도록 만드는 장치거든요. 선거법에 대해서 구성원 전체가 고민해야 돼요. 그걸 제일 잘 하는 나라가 스웨덴이라서 『어쩌다 한국은』에서 스웨덴 선거 제도를 설명한 거고요.

 

151211-박성호_IMG_8303.jpg

 


4대 권력집단, 자본 언론 종교 사학재단


우리 언론이 거쳐 온 역사도 한 마디로 정리해주셨습니다. “권력을 피해 도망갔더니 자본을 만났다”고요. 언론사 역시 기업이기 때문에 광고료의 유혹을 뿌리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갖는 특수한 의무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국정교과서를 홍보하는 교육부의 광고를 실었다고 해서 <한겨레>가 비난을 받았던 것도 같은 이유죠. 어떻게 보시나요?


그 일이 있은 이후에 정부에서 민주노총 총궐기 시위에 대해서 성명을 발표했어요. 그때 <한겨레>가 하단 전면 광고를 거절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광고국에서 내부 항의 성명을 냈죠. 그 내용이 어떻든 합법적으로 성립한 정부의 성명을 광고로 간주해서 거절할 수가 있는 건가, 그게 언론의 역할에 맞는가, 라는 내용이었는데요. 저는 광고국 분들의 의견에 동의해요. 정부가 발표한 성명이라면 언론은 그 내용에 관계없이 보도를 하는 게 맞습니다. 대신 그에 대해서 사설로 비판하면 되죠. 물론 상업 광고였다면, 책에서 소개한 예처럼,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광고를 실어달라는 단체가 있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 받아준다면 자본의 문제가 되는 건데, 정부의 성명을 거절하는 건 언론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언론이 자본에 예속되는 문제도 심각하지만, 이제는 언론 스스로 자본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하셨어요.


자본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그것도 싫으니까 자신들이 자본이 되려고 하는 거죠. 그게 종편으로 나타나는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어디에서 얻어야 될까요? 언론은 정보라는 상품을 보급하는 회사입니다. 그러면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소비자들이 언론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메이저 언론들이 담합을 해서 시장을 왜곡시키는 한이 있어도, 제대로 된 언론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사회에 그런 시발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죠. 대안언론을 만들려고 하고 다수의 언론들이 시민들의 후원에 의존하기도 하잖아요. 후원제도 자체에도 문제는 있다고 봅니다. 과연 후원자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기사를 실을 수 있느냐, 그런 문제를 생각해 봐야죠. 앞으로의 언론은 탐사보도가 다시 돌아와야 하고, 또 돌아오고 있다고 보고요. 그래서 클라우드 펀딩도 가능해지고 있고 (포털사이트)‘다음’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있는데, 그런 시도가 다양해지면서 게릴라성 언론들의 시대가 올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그게 대안이 될 수 있죠.

 

우리나라의 네 개 권력 집단으로 자본가, 언론, 종교, 사학재단을 꼽으셨어요. 종교와 관련해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권력화 된 과정’을 소개하셨고요. 그들이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건 아마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사실일 겁니다. 궁금한 건, 과연 그들이 가진 힘이 사라질 날이 올 거냐는 거예요.


네, 옵니다. 당연합니다. 지금 이미 신도 숫자는 빠른 속도로 줄고 있죠. 교회가 사회의 자산보유 선두 그룹들이 자산 증식의 정보를 교환하는 일종의 사교클럽 역할을 하는 거거든요. 거기에 낄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줄고 있고요. 영업을 이유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예를 들면 식당 주인 같은 경우가 있겠죠,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아주 소수에게만 상업적 이익을 주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하죠. 전체 종교문화적인 차원에서도 개신교는 위력이 약해지고 있어요. 이미 유럽에서도 대폭 축소된 상황이고 미국도 세력이 줄고 있고요. 그래서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선교사들이 자꾸 새로운 나라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남은 곳이 중동밖에 없어요. 그런데 거기는 갈 수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빠른 속도로 줄어들게 될 거라고 생각돼요.

 

대형교회가 많은 인맥과 자본을 가지고 있는 만큼, 쉽게 영향력을 잃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들이 사업 다각화를 시키려고 하죠. 사립학교와 대학을 세우기도 하고요. 일부는 부동산 투자도 해요. 교회에 특권이 있거든요. 개발제한구역도 살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지속적인 수입이 줄고 있는데 세력이 강화될 수는 없죠. 사립학교에 투자한 것과 관련해서도 치명적인 상황이 다가오고 있잖아요. 아이들이 줄고 있어서 모든 사립학교의 반쯤은 없어질 거라고 해요. 그러면 그들의 세력도 반 조각이 난다는 거죠. 물론 그 뒤에 다시 늘어날 수도 있지만, 그 시기를 견디지 못하는 거죠. 학생이 없는데 어떡하겠어요?

 

『어쩌다 한국은』을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사학재단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국회의원의 숫자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거든요.


지역 사립학교 재단의 사람들은 정계에 굉장히 많이 진출하죠. 지역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거든요. 평생을 후학 양성에 공로하신 분이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서 출마한다고요. 그래서 출마가 쉬운 거예요. 국회의원 비중도 많아진 거고요. 그리고 사학법 같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법안을 완전 통제하는 거죠. 심지어 야당에서도요. 참여정부 때 내놓은 사학법 개정안이라는 게, 사립학교 재단 이사진 중에 한 두 명의 관선 이사를 포함시키겠다는 거였는데, 이것도 용납을 안 하는 거예요. 관선 이사가 들어오면 (회계)장부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게 될 거 아니에요. 투명하게 공개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거든요. 그걸 관철하기 위해서 촛불시위를 했는데, 참여했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들이잖아요. 이명박, 박근혜, 한나라당 중진들이 다 그곳에 있었죠.

 

『어쩌다 한국은』의 마지막은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제너럴리스트라는 말은 제가 만든 건 아니고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에요. 그런 의미를 가진 현대적인 표현으로 제가 만든 게 이승의견가라는 겁니다(웃음). 이승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의견을 가지려고 노력하죠. 이렇게 말씀 드리면 왜 그렇게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냐고 물으실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본 결과 굉장히 선한 전문가의 악행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사회는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너무 높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지성인에게 주어진 큰 의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각각의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내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만 넓게 가지면 쉽게 제너럴리스트가 될 수 있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제너럴리스트의 역할에 많이 투자하셨으면 좋겠어요.

 

 

 

img_book_bot.jpg

어쩌다 한국은박성호(물뚝심송) 저 | 로고폴리스
《어쩌다 한국은》은 ‘물뚝심송’이라는 닉네임으로 〈딴지일보〉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등에서 맹활약하며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풀어온 저자가 내놓은 한국 사회 관찰기다. 한때 물리학을 공부했던 과학도답게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냉철하고 분석적이다. 그 어떤 문제라도 역사적 근원부터 파고들고 전개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추적해 문제의 전체 상을 확실하게 그려 보여준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오한숙희 “지속 가능한 행복을 찾았다”
- 김영란 전 대법관 “‘최초’라는 수식의 무게감이 있었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혜숙 “중국어, 조혜련 만큼 하고 싶다면?!”

$
0
0

『자전거방 이야기』의 첫인상은 독특했다. 책 사이사이 작은 스티커를 붙여 내용을 봉인해 놓은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이 책의 학습방법’을 일러두며 절대로 스티커를 먼저 뜯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주의 사항에 따라 본문을 펼치니 또 한 번 낯선 지면이 나타난다. 중국어 회화책에 당연히 있어야 할 한자가 보이지 않는다. 종이 위에 적힌 거라곤 한자의 음을 로마자로 표기한 ‘병음’뿐이다. ‘소리로 문장을 익힌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자전거방 이야기』가 자랑하는 ‘소리학습법’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언어를 배우는 원리를 응용한 ‘소리학습법’은 주어진 이야기의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문장 전체 내용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특허출원을 진행 중일 정도로 독특한 이 학습 방법은 조혜숙 저자가 직접 고안해 냈다. 16년 동안 중국어를 가르쳐 온 베테랑 강사인 그녀는 개그우먼 조혜련의 동생으로 대중들에게 친숙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조혜련ㆍ조혜숙의 쩐빵 중국어 첫걸음』, 『조혜련ㆍ조혜숙의 기적 중국어』를 함께 출간하기도 했으며, 이번 책은 기존 독자들의 학습 과정을 고려해 ‘중국어를 3개월 정도 제대로 학습한 사람’을 대상으로 구성했다. 『조혜련ㆍ조혜숙의 쩐빵 중국어 첫걸음』과 마찬가지로 동영상 강의(유료)와 병행할 수도 있다.

 

5D3_0949.jpg



『자전거방 이야기』의 비결은 ‘소리학습법’


『자전거방 이야기』의 내용은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김자연이라는 인물이 중국 유학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담겨 있는데요. 조혜련 씨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나요?


맞아요. 언니가 저랑 같이 한국에서 1년 2개월 동안 공부한 후에 6개월 동안 중국으로 유학을 갔었는데요. 그때의 이야기가 바탕이 됐어요. 책에 등장하는 리페이라는 인물도 제 가장 친한 친구예요. 심천(Shenzhen)으로 떠난 것도 리페이가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요. 다행히 그곳에는 한국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중국어를 더 잘 배울 수 있는 환경이니까, 제가 원하는 조건이었죠.

 

이야기 구성 방식은 어느 분의 아이디어였나요?


제가 생각해 냈죠. 책에 적힌 게 전부 언니의 이야기는 아니에요. 언니가 경험했던 내용들이 50% 정도 실려 있고요. 나머지는 제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들, 우리와 다른 중국의 문화라든지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함시킨 거예요. 그런 부분들을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할 수 있도록 공을 많이 들였어요. 『자전거방 이야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실제로 언니가 자전거방의 회원들과 친구처럼 지냈어요. 순수한 인간관계를 맺었고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죠. 낯선 곳에 가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단계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 내용들을 책에 담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소리학습법’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어떻게 하면 중국어를 빠른 시일 내에 잘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 왔던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나온 게 ‘소리학습법’이에요.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건데요.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낯선 상황에 놓여도 이미 알고 있는 단어를 가지고 모르는 단어를 유추해낼 수 있잖아요. 그렇게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면서 배우는 거예요.

 

『자전거방 이야기』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요?


동영상 강의를 함께 보신다면, 책에 적힌 병음을 보면서 저를 따라서 읽으시는 게 첫 단계에요. 그러고 나서 책을 덮으신 채로 반복해서 세 번, 네 번 읽습니다. 화면에서는 제가 동작으로 힌트를 드릴 거예요.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제 모습을 보면서 의미를 유추하시는 거죠. 다섯 번째 읽으실 때는 제가 의미를 알려드리고 같이 맞춰보시고요. 모르는 단어를 표시하면서 풀어 나가시면 돼요. 이후에는 방금 전에 읽었던 병음을 한 번 읽고 배운 문장을 한자로 쓰시면 되는데, 모르는 한자는 다시 표시하면서 진행하시는 거예요.

 

이러한 방식을 고안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말 쉽고 빠르게 습득하실 수 있거든요. 잘 찾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어학을 꾸준히 잘 배워도 언제든지 낯선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럴 때는 의미를 빨리 유추해서 대응해야 하거든요. 그게 언어의 원리예요. ‘소리학습법’은 그 원리로 만들어진 거고요. 제가 지난해에 출간했던 『중국어회화 대박패턴 200』을 통해서 기본적인 단어와 어법을 배우셨다면, 이번 책에 실린 단어 중에서 아는 단어가 꽤 많으실 거예요. 공부하시는 과정도 너무 재미있으실 거고, 실력도 빠르게 늘 거예요. 그렇게 『자전거방 이야기』의 끝까지 거듭해서 학습하시면 낯선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자세를 완전히 훈련하실 수 있죠.

 

5D3_0976.jpg

 


조혜련의 중국어 수업, 고마움 때문에 시작했다


『조혜련ㆍ조혜숙의 기적 중국어』에서 소개하셨던 ‘그래 성조 학습법’은 이미 특허 등록을 마치셨다고요.


중국어는 가장 중요한 게 성조예요. 성조가 흔들리면 기둥이 흔들리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래 성조 학습법’을 만든 거고요. ‘그래 성조 학습법’은 학생들이 정말 효과가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요. 따라 하다 보면 성조를 자연스럽게 마스터하게 되니까요. 배우 한가인 씨도 ‘그래 성조 학습법’ 영상을 보고 성조를 마스터했다고 하더라고요.

 

한가인 씨는 『자전거방 이야기』의 추천사를 쓰기도 하셨습니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한가인 씨가 『조혜련ㆍ조혜숙의 기적 중국어』를 보셨나 봐요. ‘기적 중국어 카페’에 찾아오셔서 글을 남기셨더라고요. 제 수업을 듣고 싶다고요. 그런데 저는 개인 교습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수업을 해드리기는 어렵다고 말씀 드렸죠. 그 때 제가 학생들에게 음성 숙제를 내주고 있었는데요. 바른 성조와 발음으로 문장을 읽고, 그 내용을 녹음해서 메신저로 보내주면 피드백을 해줬던 거예요. 그런데 한가인 씨가 매일매일 음성 숙제를 보내시더라고요. 너무 성실하고 어학 감각이 뛰어나서 참 예쁜 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까지도 그 분이 한가인 씨인 줄은 몰랐어요. 나중에 본인이 이야기해서 알았고, 수업을 듣고 싶다고 하시기에 ‘한 권을 다 마친 후에 (시험에서) 한 문제도 안 틀리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100점을 맞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개인 강의는 안 한다고 하니까 아는 분들이랑 그룹을 만들어서 수업을 듣겠다고 하시고요. 그렇게 해서 강의를 시작하게 됐죠.

 

조혜련 씨에게 직접 중국어를 가르쳐주셨잖아요. 조혜련 씨는 어떤 부분을 가장 힘들어하셨나요?


그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았어요.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고(웃음), 일본어를 잘하잖아요. 그래서 한자를 많이 알아요. 그래서 조금 쉽게 공부했죠.

 

조혜련 씨에 대해 “학생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렇게 썩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진 않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웃음). “하지만 열정, 집중력은 아주 뛰어나다. 그래서 좋은 성과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덧붙이셨어요.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열정과 집중력일까요?


아무래도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거죠. 저도 그렇게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에요(웃음). 그래서 저는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으니까,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혜련이 언니도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아니거든요(웃음). 얼마나 기억력이 안 좋은데요(웃음).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모든 일이 그렇지만,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고요. 중국어도 14억 인구가 밥 먹듯이 쓰는 언어인데, 그렇게 어려울 수는 없어요. 정말 많은 한자를 알아야 할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500개 한자만 쓸 줄 알아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고요.

 

기존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셨잖아요. 가족을 상대로 수업을 하시는 게 더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정말 힘들었죠(웃음). 지금까지 많은 학생을 가르쳤지만, 그 중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 조혜련 여사예요(웃음). 성격이 장난이 아니에요(웃음). 그때 제가 안양 저희 집에서 일산 언니네까지 차로 한 시간씩 걸려서 수업을 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언니가 정말 바쁠 때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스케줄이 생기거나 녹화가 길어지면 가고 있는 도중에 연락이 와서 오지 말라고 할 때도 있었어요. 중국어 배우는 게 힘드니까 수업 중간에 화를 내기도 하고요(웃음). 제가 선생님인데 말이죠(웃음). 때로는 속상해서 눈물이 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 번 시작한 건 끝을 봐야 하잖아요. 언니도 바쁜 스케줄 속에서 끝까지 한다는 게 쉽지 않았고, 중간에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한 게 수백 번은 될 거예요. 그럴 때는 저도 속이 상해서 집으로 가죠. 그런데 조금 있으면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내요. 그러면 또 눈물이 나기도 했죠. 그러면서 했어요.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웃음).

 

두 분의 중국어 수업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제가 고려중국센터에서 HSK 강의를 하다가 허리 수술 때문에 잠시 쉬고 있었어요. 복귀가 약속된 상황이었는데, 언니가 중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언니한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죠. 제가 인민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우리집이 너무 가난했거든요. 그런데 배우고 싶은 열정은 너무 강하니까 유학은 너무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언니한테 ‘언니, 나 유학 가고 싶어. 좀 도와줘’ 그랬더니 망설임도 없이 ‘가, 도와줄게’ 그랬어요. 그게 정말 쉽지 않은 거거든요. 그 고마움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다시 (고려중국센터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미루고 언니를 선택했던 거예요.

 

유학을 결심하셨을 때는 중국어가 지금처럼 각광받을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대학에서 중국어 전공을 선택한 것도 처음부터 생각했던 건 아니었고요. 사실은 체대를 가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선택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대학을 다니면서 북경어언대학교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간 거예요.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무역 회사도 다니고 어학원에서도 강의도 했는데, 그만큼 배워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중국에 가서 더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한 거죠.

 

5D3_1079.jpg

 

 

중국어 공부, 한자와 병음을 분리하세요


요즘에는 중국어 유치원도 있다고 하던데요.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싶어 하는 엄마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세요?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닌 것 같고요. 부모님들한테도 중국어를 배우는 일이 의미가 있으니까, 열심히 공부하시다 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와는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신 것 같아요. 저희 학원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도 엄마랑 같이 와요. 그래서 올해 1월부터 어린이 반을 만들게 됐어요. 『중국어회화 대박패턴 200』을 어린이용으로 재편집하고, 회화도 어린이용으로 다시 만들 거예요.

 

현재 운영 중이신 학원에서 조혜련 씨의 강의도 들을 수 있나요? 


1년 정도 강의를 꾸준히 했죠. 그런데 요즘에는 강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방송 스케줄이 많아졌어요. 중국 활동도 늘었고요. 그래서 불가피하게 지금은 못하고요. 가끔 특강을 진행해요. 그 전에는 기업체에서 강의도 많이 했어요. 제가 ‘제대로 가르치려면 경험이 많아야 된다’고 말했거든요. 언니 수업은 정말 재미있어요. 한자도 너무 쉽게 외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요.

 

중국어 학원이나 교재, 인터넷동영상을 선택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중국어는 성조가 제일 중요해요. 그 다음 단계는 한자만 보고 성조를 지켜서 잘 표현해 낼 수 있어야 되고요. 그게 키포인트예요. 그런데 대부분의 교재들이 한자와 병음을 함께 표기해 놓잖아요. 그래서 저는 책을 출간할 때 한자와 병음을 분리해서 실었어요.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는 병음만 떼어 놓고 두 번 따라 읽게 해요. 그러고 나서 책을 보지 말고 성조를 지켜 가면서 반복해서 읽으라고 하고요. 그러면 한자만 보고도 다 읽게 돼요. 동영상도 그렇게 만들었어요. 이게 중국어 학습의 핵심 원리거든요. 성조는 반사적으로 나와야 되니까 ‘그래 성조 학습법’으로 익히고요. 그 다음에는 한자만 보고 다 읽는 거예요. 한자만 보고 잘 읽을 수 있으면 말도 잘 하게 되고요. 독해도 되고, 빨리 반응해서 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완벽하죠.  한자와 병음을 같이 써 놓은 책이 있으면, 학생들은 한자를 보지 않고 병음을 봐요. 그러면 한자만 쓰여 있을 때는 읽지 못하죠.

 

이번 책을 독학하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3개월 과정으로 만들었어요. 일주일에 3과씩 공부하는 스케줄이에요.

 

학습을 마친 후에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할 거라고 예상하세요?


제 강의는 HSK 시험 문제를 ‘회화교재화’한 거예요. 시험을 보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아니지만, HSK 시험문제가 제일 좋은 교재이기는 하거든요. 듣기, 독해, 쓰기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다양하게 연습을 하면서 언어 능력을 배양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HSK 시험 문제처럼 딱딱하거나 재미없지는 않고요. 참신하고 재미있게 다시 만들었어요. 『자전거방 이야기』를 공부하고 나서 (HSK) 3급 시험을 본다면 고득점으로 통과할 수 있죠.

 

『자전거방 이야기』로 중국어를 공부할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물론 있죠. 스티커는 절대 먼저 뜯어보시면 안돼요. 동영상 강의를 보시면서 제가 알려드리는 대로 함께 공부하시는 게 제일 좋은데요. 그게 어려우시다면, 책만 보고도 공부하실 수 있게, 앞부분에 학습방법을 상세하게 적어놨어요. 그 내용대로 잘 지켜주셔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책에 일일이 스티커를 붙여놓은 건데, 이게 전부 수작업으로 이뤄진 거거든요. 손이 많이 가지만 저는 이 방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어요. 너무 신통방통한 방법이니까요. 그러니까 스티커로 봉인된 부분이 궁금하셔도 앞부분 먼저 잘 공부해 주시길 부탁 드리고요. 중국어를 막힘 없이 구사하고 싶으시다면 그만큼 인내하셔야 된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어요. 물론 저는 제일 빨리,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드려요. 그래서 이번 책도 나온 거고요. 그렇지만 끈기와 인내가 없이는 왕도가 없어요. 제가 정해드린 스케줄대로 18개월만 꾸준히 하시면 조혜련 씨처럼 중국어를 하실 수 있어요.

 

 

 

img_book_bot.jpg

기적 중국어 회화 자전거방 이야기 조혜숙 저 | 기적이닷컴
『자전거방 이야기』는 중국어 기초과정을 학습한 학생들이 배우기에 적합한 회화교재이다. 하지만 일반 교재들과는 완전 차별화되어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언어의 핵심원리인 ‘소리학습법’을 전면 사용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스토리가 흥미진진한 한 권의 소설책 같다는 것이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김영란 전 대법관 “‘최초’라는 수식의 무게감이 있었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권우 “책읽기, 만화책부터 시작해도 좋다”

$
0
0

하나, 재미있는 책을 들어라. 둘, 쓰기 위한 책읽기를 하라. 셋, 독후감을 써라.
도서평론가 이권우가 제안하는 책읽기와 글쓰기 방법이다. “잘 쓰려고 해야 잘 읽을 수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쓰기를 염두에 둔 읽기는 전혀 다른 독서법을 구축한다. 지극히 수동적인 행위인 독서가 아주 적극적인 행위인 글쓰기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모양새다. 그리하여 누구나 논리적인 사유를 하고, 책을 쓸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폐쇄성이 조금은 무너지지 않을까.

 

“특별한 장르가 엄청 신성한 것처럼, 기득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기죠. 작가나 인문학자의 말이 굉장히 특별한 것처럼 생각하는데요. 그건 문제가 있죠. 우리 사회가 보다 의사소통이 잘 되고, 민주화 되려면 논리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거잖아요. 나이가 많아서도, 남성이어서도, 좋은 학교 나와서도 아니고 과정을 통해 쓰인 결과물이 논리성, 타당성이 높아 수용이 되고, 칭찬 받고, 대가를 받는 사회가 돼야 해요.”

 

맞다. 책읽기, 글쓰기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다.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행위, 책읽기와 글쓰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모두에게 ‘지독한 독서가’ 이권우가 전한다. ‘무엇을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 있다.

 

5D3_1716.jpg

 

 

‘재미’로 시작하면 된다


이권우의 독서론이자 창작론, 더 나아가서는 인생론으로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읽기와 쓰기 두 부분으로 나누어 쓰셨는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나요?


쓰기 쪽이죠. 쓰기도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요. 앞부분은 일반론이고 뒷부분은 그걸 바탕으로 한 서평 쓰기예요. 편집자 분이 글쓰기 일반론만으로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이 책은 잘 쓰려고 해야 잘 읽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잖아요. 쓰는 것만으로는 잘 설득이 안 될 테니 앞부분에 읽기를 넣자고 했어요.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이후에 책읽기에 대한 글은 써둔 게 좀 있었고요. 그 책을 썼기 때문에 더 이상 얘기가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또 쓰려니까 쓸 거리가 많긴 하더라고요.(웃음) 제일 싫어하는 것이 얘기를 반복하는 거니까 그걸 피하느라 애를 쓰긴 했죠.


관점을 바꿔보자는 거예요. 읽기가 중요하다지만 잘 안 읽잖아요. 그렇다면 잘 읽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쓰면 된다는 거예요. 잘 쓰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많이 읽는 사람들이거든요. 그 얘기를 좀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써야만 읽으니까 쓰기에 무게가 더 있긴 하죠.

 

사실 그리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거든요. 고전 읽기 사례도 있고, 글쓰기 부분도 단번에 따라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에요.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읽기와 쓰기가 좋은 사람들은 이미 책에서 제시한 이야기들을 실천하고 있을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책이 조금 어렵게 느껴질 테고요. 균형 잡기에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서평은 전문적인 영역이잖아요. 서평부터 시작하면 기가 죽을 수 있어요. 그럴 필요는 없고, 독후감이 무척 중요하다는 거예요. 저는 그걸 강조한 거고요. 욕심을 낸다면 비판적 서평까지 나아가야 할 텐데요. 그걸 언급하진 않았어요. 이 책은 처음 읽는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니까요. 경험 있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성실하게 얘기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책은 사실 위험하죠. 복불복이에요.(웃음)


쓸 때 술술 읽히게 쓰자고 생각했어요. 입말로 쓴 이유가 그건데요.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에서 평서문으로 써봤고 다음에 쓴다면 더 편안하게 써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특히 글쓰기 부분 때문에 그랬어요. 쓰기 책은 제가 굉장히 잘 써야 하잖아요. 한편 이건 굉장히 실용적인 글이죠. 그걸 잘 쓰려고 하는 건 헛된 일이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에요. 낭비가 되는 거죠. 그런 고민 끝에 입말로 쓰기로 결정한 거죠. 강의하듯 쓴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주변에서 녹취한 것이냐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성공한 거죠.

 

입말로 쓴다는 것은 또 새로운 글쓰기라 그것대로 어려움도 있었겠네요.


느낌도 다르고, 실제로 어렵기도 해요. 새롭게 배운 점도 있죠. 서술을 어떻게 끝맺느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배웠어요. 구어체로 써서 최대한 잘 읽히게 하겠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꼼수죠.(웃음)

 

앞서 이전 책에서 했던 얘기를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이 책에만 있는 새로운 내용은 뭔가요?


일단은 기초적인 얘기를 많이 했죠. 사전에 대한 내용, 만화책 읽어라, 외국어 영역 공부하듯 읽으라고 하는 내용 같은 것들은 어떻게 보면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수준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난이도를 주지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끌고 가서 초보자들도 글을 쓰는 단계까지 가면 좋지 않겠냐고 생각했죠. 흔히 말하지 않는 것들을 제가 얘기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경험으로는 자기도 그랬으면서 공식적으로는 말하지 않는 것, 그걸 말하겠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재미’로 시작하면 된다는 거예요. 재미있는 매체가 뭐냐는 거죠. 더 쓴다면 외국 작가들이 독서에 입문한 사례를 다 조사하고 싶었는데요. 시간 관계로 못했지만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 대부분 저급문화로 시작해요. 고급, 저급의 구분이 가능하냐는 논의도 있지만요. 즐거움을 주는 게 있고, 깨달음을 주는 게 있다면 깨달음을 주는 걸 고급문화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고급문화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힘을 빼고 시작하자는 이야기군요.


그렇죠. 워낙 책을 안 읽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책읽기라는 수동적 행위에만 목표를 둔다는 점이거든요. 글쓰기는 능동적 행위죠. 글을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는 동의를 하면 읽을 테죠. 어떻게 하면 독서 인구를 확장하느냐에 관심이 있어요.

 

신영복 선생은 “독자도 불손해도 된다”고 하셨고, 책을 읽는 데도 근육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입문 단계에 말씀하신 ‘재미’를 확보하는 것은 당연히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강연할 때 자주 하는 말인데요. 쓸 때도 다 이해하고 쓰는 게 아니라고 종종 말해요.(웃음) 문장을 보면 알잖아요. 필요하니까 썼지만 저자도 이해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죠.

 

그 같은 말을 쓰는 분이 하니까 독자 입장에서는 한결 응원이 되네요.


고전은 처음에 읽으면 30%도 이해 안 돼요. 그게 자꾸 쌓여서 90%까지 가야 하는 거죠. 몇 년에 걸쳐야 하는 거고, 몇 번 읽어야 하는 거예요. 바쁜 세상에 몇 번 읽을 책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책이 있다면 바로 고전인 거죠. 목록이란 것이 무척 중요한 거거든요. 그곳까지 가려면 사다리가 필요해요. 그런데 사다리가 없어요. 다들 점핑하라고 해요. 예전에는 점프 했겠죠. 지금은 왜 해요? 재미있는 게 이렇게 많은데 말이에요. 자꾸 사다리를 놓으려 하는 거고, 유혹하려 하는 거예요.

 

5D3_1776.jpg

 

 

단락 중심의 글쓰기


스티븐 킹과 가상 대화 나누는 대목에서 오히려 이런 시대에 글쓰기가 갖는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에 공감했어요. 디지털 공간에서 글쓰기가 큰 자리를 차지하잖아요.


SNS가 의외로 글을 쓰는 매체잖아요. 디지털 혁명이라는 게 대단히 재미있어요. 그림이나 영상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글이에요. 사람들에게 자기표현 욕구가 있는 거고 이때 글을 잘 쓰고 싶어지는 거고요. 잘 쓰면 ‘좋아요’ 눌러주는 거잖아요. 자기 생각을 올곧게 표현해서 동의를 구하려면 좋은 글을 써야 해요.

 

10년 동안 글쓰기 강연을 하시면서 받는 질문들도 바뀌어 왔을 것 같아요. 최근에 새로 등장한 질문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글쓰기를 두려워한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예요. 성급하죠. 특히 젊은 친구들은요. 빨리 성취를 보려고 하는데요. 글쓰기는 절대 빠르게 성취 안 돼요. 그걸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고민이죠. 그 다음, 올바른 문장 표현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어요. 영어의 영향도 많이 받고요. 영어 표현, 우리말 표현 차이를 물어보면 잘 몰라요. 참 어려운 문제예요. 글쓰기 초반에 문장론을 중요하게 여기면 안 되는데요. 강연을 하다보면 저도 거기에 걸려요. 고민이 되죠.


중요한 것은 어떻게 머릿속에 있는 걸 설득력 있게 옮겨 놓느냐예요. 그게 단락 중심의 글쓰기고요. 그런데 막상 강연을 하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문장에 더 관심이 많다는 거죠. 이걸 깨는 게 수업의 가장 큰 목표예요. 아무리 오랫동안 단락 중심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감을 얻자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문장에 더 관심이 많아요.

 

그 이유가 방금 이야기 한 디지털 환경에서의 글쓰기와 닿아 있을 것도 같아요. 호흡이 짧고, 자극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문장을 고민하는 것이지 구조에 맞는 글을 생각하진 않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 면이 있죠. 한 강연에서는 한 장 쓰기를 하는데요. 한 장을 쓰는 요령을 알고 한 꼭지로 석 장까지 쓰면, 그 다음 30개 아이템만 있으면 책 한 권이 나와요. 때문에 A4 한 장 분량의 글쓰기를 익히면 책을 쓸 수 있다는 설득을 하는 거죠.

 

요즘에는 짧은 호흡의 글을 담은 책들도 많이 출간이 되고 있거든요. 어떠세요?


그런 분들 보면 정말 존경스러워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대응할까, 생각이 들어요. 저는 10년 걸렸어요.(웃음) 저는 그런 재주가 없어서요. 어쨌든 모르겠어요. 저는 이 방법이 정통이라 생각해요. 단락 중심의 글쓰기가 가장 정통이고, 이걸 활용해서 독후감과 서평 쓰는 건 제 영역인 거죠.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하면 짧은 글도 잘 쓸 수 있어요.

 

바로 그 ‘정통이라고 생각’한다는 부분이 책에도 많이 읽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오독하면 고전을 도구적으로 해석하거나 책읽기와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결과도 가능할 것 같아요.


오로지 재미로 읽기를 시작하라는 거고요. 깨우쳐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렸을 때 책 읽는 게 좋아요. 그때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거잖아요. 재미있으면 몰입하는 거고요. 지금은 워낙 미디어가 많아져서 재미있기 때문에 몰입하는 것들이 많죠. 그렇지만 그 안에 책이 반드시 들어가야 해요. 어렸을 때 언어로 구성된 어떤 매체가 나에게 즐거움을 줬다는 경험은 다양한 매체와 경쟁하는 과정에서도 책을 꾸준히 읽어 나가게 해줘요. 그렇다면 이후에는 문제될 게 하나도 없어요. 책읽기에 있어 너무 시작이 늦기 때문에 문제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꾸 다른 곳에 눈을 못 돌리게 해야 하는 거고요.


논박 당할 가능성은 충분히 열어두고 있어요.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면 좋죠. 그렇게 해서 새로운 독서론이 나오는 거고요. 오로지 디지털로만 성장한 세대가 쓸 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독서론은 비슷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할까 고민하다보니 논법이 자꾸 이렇게 되는 거죠.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말씀 중에 ‘사다리를 놓’는다는 표현을 하셨는데요. 재미로 시작한 사람들이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는 동력은 또 다른 측면이잖아요.


출발은 무게감이 없도록 해줘야 하지만 어떻게 끌어올리느냐가 또 중요해요. 계속 재미에만 머물면 안 돼요. 그것도 대단히 위험해요. 재미로만 책을 읽으면 결국 안 읽게 돼요. 더 재미있는 게 많기 때문이죠. 특히 요즘은 하루 종일 TV 볼 수도 있겠더라고요. 이런 시대에 재미를 얘기한다는 건 굉장히 조심스럽죠. 재미를 느꼈다면 그것을 어떤 가치로 빨리 전환시켜야 해요. 고전을 강조한 것도 그런 이유예요. 결국 시간 지나고 보면 남는 건 고전 밖에 없잖아요. 왜 북한산을 올라가요? 지리산을 오르려고 가는 거죠. 목표는 분명하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뒷동산부터 다니다가 지리산, 설악산, 그러다가 에베레스트까지 가는 거죠. 자기 수준에 맞는 산을 올라야 하지만 근력이 생기면 높은 산을 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반드시 얘기하려고 해요.

 

대중들의 독서력이라는 것이 조금 더 폭넓고 깊어진다면 책의 풍경도 달라질 거란 생각이 들어요.


아쉬운 게 있죠. 더 다양한 사람들의 책이 읽힐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소통 능력이 강한 사람들의 책만 읽히니까요. 소통 능력이 강한 것을 부정하면 안 돼요. 대단한 내공이 있는 거고 그런 건데요. 독자도 그런 책을 읽고 단계를 높여가면 좋은데 그런 책을 수평적으로만 읽잖아요. 상향해서 안 읽고요. 그런 게 아쉬운 거죠. 강연을 하면서도 그래요. 조금만 두꺼워지고, 조금만 수준이 높아져도 힘들어해요.

 

5D3_1715.jpg

 

 

특별하면 안 된다


어렸을 때 책 읽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지금 교육현장에서는 말하자면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거잖아요. 독서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으시죠?


물론이죠. 책을 읽는 건 교육의 문제예요. 세상에 우리 같은 곳이 어디 있어요. 책 읽고, 토론하고, 질문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거고 교사나 교수는 지도를 해주는 건데 말이에요. 우리는 책을 읽으면 왜 공부 안 하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책 읽는 게 별도의 일이 되고 있죠. 이런 시대 속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제도적인 도움을 받지 못한 거죠. 한국 사회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특별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보면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가 돼 있어요. 그건 좀 문제가 있다 생각해요.

 

글 쓰는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이 무척 닿네요.


문학에서 표절 문제가 생기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글 쓰는 행위에 대해 경외시하다보니 작가들이 갖는 양면성이 있는 거예요. 특별한 장르가 엄청 신성한 것처럼, 기득권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기죠. 작가나 인문학자의 말이 굉장히 특별한 것처럼 생각하는데요. 그건 문제가 있죠.   


우리 사회가 보다 의사소통이 잘 되고, 민주화 되려면 논리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거잖아요. 나이가 많아서도, 남성이어서도, 좋은 학교 나와서도 아니고 과정을 통해 쓰인 결과물이 논리성, 타당성이 높아 수용이 되고, 칭찬 받고, 대가를 받는 사회가 돼야 해요. 이런 사회가 되려면 교육이 그렇게 됐어야 하는 거죠. 그게 제일 아쉬운 거죠.

 

하다못해 TV 토론을 봐도 제대로 된 토론이 진행되는 걸 본 경험이 드물어요. 논리적인 의사소통의 부재 탓이겠죠.


책 읽고 토론하는 것이 좋은 게 이해관계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훈련을 해보자는 거죠. 정치 영역에서는 잡음이 생기는데 문화 영역에서 훈련을 해보자고요. 결국 정치 영역에서 자기 이해를 대변한다 할지라도 문화 영역에서 훈련을 하면 경청하는 자세도 배울 거고, 상대방의 논리적 압박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답변하려고 노력하게 될 거라는 거예요. 어렵고 힘들겠지만 노력하게 되겠죠. 안 된다고 탓만 할 건 아니고요. 학교가 안 되면 학교 바깥에서 시민 사회, 문화 영역에서 해보자는 거죠. 한국 사회의 힘은 늘 그런 곳에 있었어요. 제도 안에서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제도화 되는 게 좋지만 아직 안 되고 있으니까 시스템 바깥에서 하면 돼요. 시스템을 절대 부정하지 않고, 시스템의 변화를 원하지만 그 과도기에 시스템 바깥에서 일련의 과정들을 계속 해보자는 거예요. 실제로도 많이 이뤄지고 있어요.

 

책에서도 독서 토론을 강조하셨는데 요즘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작은 모임이 많이 운영되고 있잖아요. 알고 보면 이런 욕구는 많이 있었던 거고, 필요한 건 장(場)이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페이스북 같은 데도 보면 모임이 많이 생겨나고 있더라고요. 모임 장소도 다양해지고요. 예전엔 모여서 얘기할 곳이 없었잖아요. 이렇게 생기는 걸 보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산업적 마인드가 무서운 거란 생각도 들고요. 처음엔 실험적이었을 거고, 모험적이었을 텐데 성공 사례가 생기니까 쫙 퍼져 나가는 거잖아요. 그런 것 보면 다행히 역동성이 있는 것 같아요. 죽어있진 않다는 건데 그게 정말 놀랍고, 감사한 일이죠. 수치를 보면 절망이잖아요. 책 읽는 횟수, 시간 등 모든 지표는 줄어들고 있는데 어쨌든 간에 그 상황에서도 꾸준히 해나가는 부분이 있다는 건 대단한 거죠. 깜짝깜짝 놀라요.

 

5D3_1722.jpg

 

 

올해의 책


자서전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고도 적으셨는데요. 요즘에는 어떤 책에 빠져있으세요?


동양 철학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와 관련된 책들을 모으고 있죠. 아마 내년부터는 강의도 할 거예요. 1년 정도 강의하고 강의한 글을 모아 책을 낼 계획인데요. 그 이후에는 뭘 할지 아직 모르겠어요.


최근 얼마 간 한국 문학을 거의 안 읽어서요. 반성하고 요즘 조금씩 읽고 있어요.

 

그렇게 발견한 작가가 있나요?


최근에 장강명 작가 작품이 재미있었어요. 장점이 많은 작가라고 생각해요. 현명한 작가더라고요.

 

한 달에 몇 권이나 읽으세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답을 안 하죠.(웃음) 첫 번째는 일반 독자들이 들으면 기가 죽을 테고요. 두 번째는 저도 약간 기분이 나빠져요. 더 읽어야 하는데, 생각이 들어서요. 직업이니까요.

 

올해도 거의 끝나가는데요. 2015년에 읽은 ‘올해의 책’ 세 권, 꼽아주세요.


안 그래도 글을 써야 하는데요. 첫째는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예요. 최고의 책이에요. 대단히 중요한 책이에요. 박헌영 사건에 대한 공식 결과를 뒤집는 아주 중요한 자료를 동원해 말하고 있어요. 대중들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대단히 탁월한 책이에요. 둘째는 장강명의 『댓글부대』예요. 한국의 보수 세력이 어떻게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가를 얘기하는 흥미로운 책이에요. 셋째는 제 책이죠.(웃음) 나만의 올해의 책이니까요.

 

 

 

img_book_bot.jpg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이권우 저 | 한겨레출판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은 저자 이권우가 책을 읽고 소개하는 글을 쓰며, 대학 및 여러 교육기관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얻은 깨달음과 노하우를 섬세하게 정리한 실용적인 지침서다. 단순히 이렇게 읽어라, 저렇게 쓰라 가르치는 얄팍한 비법이 아니라 책을 통한 내면의 성장과 더 나은 세상으로의 발돋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힘으로, 궁극적으로는 성찰을 유도하는 글쓰기, 새로운 존재로 도약하기 위한 글쓰기의 능력을 갖게끔 도와주는 안내서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김영란 전 대법관 “‘최초’라는 수식의 무게감이 있었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
0
0

‘자뻑의, 자뻑에 의한, 자뻑을 위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외수 작가를 만났다. 위암 투병 후 몸무게가 20kg 가량 줄었지만 집필과 생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팔팔하다. 8차 항암치료까지 무사히 끝낸 작가는 지난해 두 권의 에세이를 펴냈다. 1월에는 『뚝,』 11월에는 『자뻑은 나의 힘』을 썼다. 투병 생활 1년 반 만에 내놓은 책의 제목이 『자뻑은 나의 힘』이라니. 작가가 매일같이 외치는 버티기 정신이 없었더라면 독자는 이 책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뻑’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한자 스스로 자(自)와 강렬한 자극으로 정신을 못 차린다는 의미의 속어인 ‘뻑’이 합성된 신조어다. 하루하루 새로운 혼돈이 찾아오는 이 시대, 이외수 작가는 “국정교과서대로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각박하고 살벌하다. 자신을 부추기고 자신을 격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5K5A5821.jpg

 

 

평생 가는 근심은 없다


투병 중에 책을 쓰셨어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모든 사람이 자기 코가 석자잖아요. 자기 발등에 붙은 불을 끄기 바빠요.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가족들한테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에요. 결국 스스로 격려하고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게 기본 등식처럼 돼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대개 암 확진 환자들은 5단계의 공통된 심리 상태를 거치는데, 1단계는 부정, 2단계는 분노, 3단계는 인정, 4단계는 우울, 5단계는 수용입니다. 수용을 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작가님께서는 위암 판정을 받고 30분 만에 5단계를 뛰어넘었다고 하셨어요.


후회가 없을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는 거죠. 이만하면 더 욕심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떠나도 미련 같은 게 없으니까요.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사랑 받은 작가도 드물 것이다, 생각했을 때 오히려 행복했어요. 이 상태로 떠나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견딜만한 고통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산전수전, 네티전까지 겪었으니까요. (웃음) 암과 맞닥뜨렸을 때, 이것만 승리하면 전승이라고 생각했어요. 독자들에게 꼭 암을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요. 내가 사랑했던 작가가 옳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소설, 산문을 통해 평소 주장했던 것, 실천했던 것, 독자들에게 호소했던 것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저는 제 삶에 여한이 없지만,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힘든 분들께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좋겠다, 내 글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항암치료를 8차까지 끝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면서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셨다고요.


아침에 거울을 볼 때 얼굴이 우중충하면 의기소침해지기 쉬워요. 자괴감에 빠지기 쉬워요. 암환자들의 공통점이죠. 그래서 외모를 가꿔야겠다 생각했어요. 일부러 미용실도 자주 가고 마사지도 자주 하고 옷도 웬만하면 밝은 색으로 입고요. 가끔은 얼굴에 각질 제거도 하면서 기분전환을 해요. 거울도 자주 보고요. 스스로에게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아요. “너는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인간성도 썩 괜찮은 놈”이라고요. 가족들이랑 문하생들이 고생이 많죠. (웃음)

 

오랫동안 기른 수염도 깎으셨어요.


의료팀이 불편해 할까 봐요. 코에 호흡기를 넣어야 하는데 수염이 있으면 거추장스럽잖아요. 의료팀을 배려해서 깎은 거예요. 처음에는 많이 어색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썩 괜찮아요. 계속 짧게 살아도 괜찮겠다 싶어요.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에 봉착해 있는데, 수염이 길면 어떻고 짧으면 어떻겠어요.

 

역시, 자뻑이신가요?


실제로 괜찮기도 합니다. (웃음)

 

사실 작가님의 ‘자뻑 정신’은 역사가 짧지 않습니다. 언젠가 ‘자뻑’을 공표하는 책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책 제목을 정하면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요즘 9포세대라고 하잖아요. 소중한 것들을 몽땅 포기해야 하는 시대가 됐는데, 자신감이 너무 많이 떨어졌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 중에 자살률이 1위잖아요.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노인 자살률도 1위라는 불명예를 가족 있어요. 경제가 나아지면 뭐 합니까? 정신의 건강도 따라줘야죠. 물질의 풍요가 아무리 주어진다고 해도 정신적으로 허약하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저는 정신 건강의 풍요는 결국 책으로밖에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해요. 독자를 서점으로 이끄는 데는 작가의 몫도 있습니다. 출판 업계의 책임만이 아니에요. 작가도 위기 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자각해 어떤 치유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풍자와 해학이 곁들여진 자뻑은 매력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도무지 ‘자뻑’이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너무 밑천이 없는 경우 ‘나는 뭘로 자뻑을 해야 하나’ 고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찾아보면 쓸모 없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스스로를 주의 깊게 관찰을 안 했기 때문에 모르는 거죠. 부모들에게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대개 자기 자식을 말해요. 누구라도 누군가에게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만약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만들어가시면 됩니다. 노력을 기울이면 자뻑의 건더기가 전혀 안 생길 수는 없어요. 예를 든다면, 부족한 걸로도 자뻑을 할 수 있어요. “나는 내 자랑 같지만 너무 할 줄 아는 게 없어”, “나는 내 자랑 같지만 실수가 너무 잦아”라고 말하는 거예요. 단점이 오히려 장점처럼 느껴지고 오히려 열등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어요. 주문처럼 외워보는 거죠.

 

“심각해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이게 마음가짐의 문제이긴 하지만, 너무 심각한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이를 테면 실직을 했거나, 이별을 했거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요.


예컨대 근심, 불안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초등학생 때 근심이 없었나요? 숙제를 안 했거나 선생님에게 혼났거나 친구와 싸웠을 때도 근심은 생깁니다. 그러면 중학생 때는 없었나요? 고등학생 때는요? 입시 문제, 집안 문제로 끊임없이 근심이 있었을 거예요. 누구든지 사람이라면 근심이 생기는 게 인생이에요. 근심의 강도는 나이가 들수록 더 세지고 종류도 많아져요. 성장하면서 계속 생깁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세요. 그 근심들이 어디 갔나요? 아직도 내 앞에 있나요? 없잖아요. 새로운 근심은 찾아왔지만 겪은 근심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없어졌어요.

 

어차피 모든 근심은 평생 가지 않는다는 말씀이시죠?


내 곁에 아직도 붙어 있는 근심은 없으니까요. 얼만큼의 시간이 걸리느냐, 그 차이는 있겠지만 평생 가는 근심은 없어요. 모든 근심은 100% 사라지는데, 우리는 그걸 계속 붙잡고 자지러졌던 거예요. 모든 근심은 100% 사라집니다. 평생 가는 건 없어요. 그러니까 100% 사라진다는 신념 속에서 근심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왜냐, 거기에 종일 붙어 있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빨리 해결되지도 않고요. 붙어 있는 기간만큼 나만 힘들어질 뿐이죠. 관조가 필요합니다. 근심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그걸 바꿔서 생각하자는 거예요. 세상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항상 전화위복의 기회는 옵니다.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한쪽만 붙들고 근심하지 말고, 곧 다가올 좋은 일도 상상하면 근심이 좀 가벼워질 수 있어요.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2014년에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면 그만,』을 쓰고 나서, 암이 찾아왔기 때문에요.


제목이 정말 중요합니다. 2008년에 『하악하악』을 썼을 때, 담배를 끊었는데 급성장염이 와서 100일 동안 설사를 견뎠단 말이에요. 결국 쓰러져서 수술을 했죠. 그 때 내가 제목을 『하악하악』이라고 써서 좀 헐떡거렸구나 생각했어요. 그 다음에는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면 그만,』을 쓰고 암에 걸려 또 쓰러졌던 말이에요. ‘어, 이거 제목 정말 조심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년에는 『뚝,』을 썼는데 모든 악재가 사라졌어요. 고통도 뚝, 슬픔도 뚝 그쳤죠. 지금은 제가 일어설 때예요.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일어나야겠다 생각해서 자뻑이 필요하다, 『자뻑은 나의 힘』이라고 제목을 지었어요.

 

5K5A5853.jpg

 

 

버티기 정신, 왜 필요한가


전작 『뚝,』은 ‘이외수의 버티기 실천법’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자뻑을 하기 위해서는 버티는 능력도 필요할 텐데요.


중요합니다. 버티는 것도 정말 뛰어난 능력입니다. 위암 수술 후에도 인스피로미터(inspirometer) 연습을 줄기차게 해야 했어요. 크게 숨을 들이쉬어 구슬을 상단에 붙이는 훈련을 했는데, 불 때마다 절개한 자리가 찢어질 듯 아팠어요. 하지만 필사적으로 불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거뜬합니다. 가끔은 세상이 돌아가는 판국을 보며 탄식도 합니다. 울화통도 터뜨립니다. 어떻게 날마다 껄걸 웃고만 살겠습니까? 하지만 주저앉지는 말아야죠. 그래도 희망은 버리지 말아야지요.

 

잘 버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버틴다는 것은 억지로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반항기도 좀 필요하고요. 사회부정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정의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정의를 발판으로 해서 버티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버티는 정신이 가장 필요한 세대는 젊은 세대입니다. 우리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 세대는 불행해도 너무 불행합니다. 오죽하면 취업이 안 된다고 철학과를 없애나요? 정신적 풍요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물질적 풍요가 중요한 사회가 됐어요. 인간이라는 가치를 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될 뿐입니다.

 

버티는 정신이 있기 때문에 다작을 하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의 대표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개 작가들은 자기 작품에 대해 조금씩 불만을 갖고 있어요. 보완해야 할 게 있다고 보고, 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쓰고 싶어 하죠. 자신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대표작을 이야기하면 많은 작가들이 ‘다음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소설과 산문집, 선화집까지 다양한 책을 펴내셨어요.


사람에게 육신의 양식이 필요하다고 할 때, 한 가지 영양소만 필요한 게 아니잖아요. 정신의 양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소설이 갖고 있는 영양가, 우화가 갖고 있는 영양가, 시가 갖고 있는 영양가가 모두 다르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내 독자들한테라도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게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전기와 후기로 나눠본다면, 전기에는『들개』, 후기에는『벽오금학도』가 있겠지요.

 

“내 글이 묵은지가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요. 왜 묵은지인가요?


값도 저렴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서민의 음식이잖아요. 그렇다고 영양가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손쉽게 만들 수 있으면서 여러 좋은 장점을 갖고 있어요. 젊었을 때는 고통을 인생의 소금이나 고춧가루 정도로 생각하고 살았어요. 인생도 밥상 같아서 짠맛이나 매운맛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이제 제가 쓴 글들이 누군가의 인생에 목은지 한 접시라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책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책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고, 느끼고, 깨닫습니다. 아는 것보다는 느끼는 것이, 느끼는 것보다는 깨닫는 게 낫습니다. 우리는 보통 지식을 아는 데 머무르지만, 그것들이 느낌으로 깨달음으로 가려면 발효과정이 필요합니다. 아는 것을 발효하는 데 가장 좋은 에너지는 사랑이고요. 내가 읽은 책에서 사랑을 더하면, 책의 효용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생깁니다. 만물을 보는 깊이를 얻기 위해서는 책보다 좋은 것이 없어요.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사나? 싶을 때도 있는데요.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질 못했기 때문이에요. 완전히 소화를 시켜 영양소로 흡수해야 하는데, 책을 잘못 읽은 거죠. 제대로 읽었다면 그런 인생을 살 수는 없겠지요.

 

5K5A5977.jpg

 

 

독서 인구가 늘어나야 사회가 발전한다


감성마을에서 지내신 게 올해로 10년이 넘어섰습니다.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춘천에서 살 때는 사회활동을 거의 안 했어요. 사회성도 결여됐고 협동심 같은 건도 부족했죠. 그런데 감성마을은 오지란 말이에요. 첩첩산중이에요. 그 속에 들어갔을 때, 이제 나만을 위해 살 때는 지났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기 시작했고,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폐쇄적인 삶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삶의 형태로 바뀌었죠.

 

모든 작가가 독자와 친밀히 소통하고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건 아닌데요. 오로지 작품으로만 독자를 만나는 작가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변하지 않는 건 제자리에 있는 것과 같아요. 퇴보만도 못하죠. 제자리걸음만 계속 한다는 건 퇴보보다도 못해요. 작가는 어찌 보면 결국 자기완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최근 사인회를 통해 오랜만에 독자를 만나셨어요.


퇴원 후 첫 사인회를 했습니다. 걱정했어요. 제 건강이 염려된 게 아니라, 대한민국 출판계가 요즘 허기져있어서요. 유명 작가도 독자들이 안 와 30분을 못 버틴다고 하니까요. 이번 사인회는 3시간 정도 했어요. 덕담도 많이 주고 받았고, 표지 문구를 새긴 서각을 화선지에 찍어서 드렸어요. 액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불러들이는 소망을 담아 만들었던 서각이었거든요. 일일이 인사를 하느라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찾아와주신 독자들에게 감사했죠. 부분적으로나마 출판시장이 아직은 건강해 보여 좋았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우선 칭찬해드리고 싶어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영적 존재입니다. 정(精), 기(氣), 신(神) 삼합체(三合體)라고 하죠. 지금처럼 물질적 존재감만을 부각시키는 시대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보충, 보완하는 유일한 길은 책을 읽는 일입니다. 꼭 책을 사기 위해서만 서점에 오는 것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러 서점에 자주 왔으면 합니다. 습관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독서 인구가 늘어나야 사회가 좋아질 수 있습니다.

 

“오로지 암을 극복하는 것만 생각하겠다”고 하셨는데, 많은 다른 생각들을 하고 계신 걸로 보여요.


왜냐면 제가 살아가야 할 이유 중의 하나니까요. 극복이나 치유의 힘이 돼주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말해온 작가로서의 좌우명이 ‘쓰는 이의 고통이 읽는 이의 행복이 될 때까지’입니다. 더 근심하고 더 슬퍼하고 더 사랑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올해 목표가 있으신가요?


우선 건강을 완벽하게 회복하는 게 첫 번째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감성마을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에요. 많은 사람에게 감성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소설을 한 편 쓰고 싶습니다.

 

만약 작가님께 일간지 1면을 통으로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서로 배려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요즘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책을 쓸 때도 이 점을 강조하는데, 점점 제 작품 속 주장과 세상은 반대편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작가로서 무력감에 빠질 때도 많고요. 많은 분이 독서와 기도를 통해 나 자신의 아픔만을 생각하지 말고 타인의 아픔까지 헤아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img_book_bot.jpg

자뻑은 나의 힘 이외수 저 | 해냄
지난해 갑작스런 위암 확진으로 긴급 암수술과 이후 8차에 걸친 항암치료를 견디며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고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 이외수. 40여 년 작가 생활 동안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은 긴 머리를 하루아침에 싹둑 자르고 모질고 고통스럽다는 항암치료 과정을 겪으면서 그가 집필한 글과 직접 그린 그림들을 모아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에세이 『자뻑은 나의 힘』을 세상에 내놓는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김영란 전 대법관 “‘최초’라는 수식의 무게감이 있었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가수 김현철, 진솔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

$
0
0

이즘이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의 반응은 “한 게 없어서 할 얘기가 없는데..”였다. “한 게 없으니까 인터뷰를 해야죠!” 했더니 그는 “그런가?”로 답하면서 인터뷰를 승낙했다. 그가 TV에 얼굴을 안 비추는 것도 아니고 라디오의 경우 매일 프로(MBC FM <오후의 발견>)의 진행자라서 공백이란 표현은 적용할 수 없지만 그가 거의 10년 가까이 새 앨범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사항이다.

 

왜 그런지 묻고 싶었다. 2014년 여름만 해도 “신보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귀띔하기도 했다. 만약 음악을 엎었다면 현실에 대한 회의 때문일까, 아니면 창의적 답보에 의한 걸까. 지난 11월 23일 홍대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새 앨범은 동맥경화 상태”라고 고백했다. 「춘천 가는 기차」가 실린 1집을 창피하다고 털어놓은 그는 무거운 얘기도 미소와 특유의 껄껄 웃음으로 풀어나갔다.

 

김현철 (4).JPG


2006년 < Talk About L♡ve >, 그 해의 키즈팝 앨범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이 없다. 정규 10집을 기다리는 팬들이 많은데.


안 내고 싶어서 안 내는 것은 아니에요. 정규 1집부터 10집까지 한 각론으로 묶어서 빨리 보관해두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사실 곡은 이미 넘치고, 콘셉트 걱정도 제가 해왔던 대로 하면 되니 큰 고민은 없어요. 불만이 있다면 노랫말 부분이에요.

 

어떤 점에서의 불만인가.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솔직한 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렇게 하면 대중이 좋아할까? 이렇게 하면 우리 아내가 좋아할까?'하는 생각이 드는거죠. 물론 저는 대중가수기에 가장 솔직하게 가사를 쓰더라도 대중의 코드는 묻어있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더 진솔한, 의미를 담은 노랫말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유독 가사 부분에 집중하는 특별한 이유라면.


아티스트의 마음은 세월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죠. 지금 당장은 내가 참xx 브랜드 소주를 좋아하지만, 훗날에는 처음XX소주가 좋아질 수 있어요. 그 변하는 속에서 '내가 지금 뭘 좋아하나'를 찾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김현철은 성공적인 가수기도 하지만 한 명의 작곡자, 프로듀서기도 하다. 정규 앨범 고민은 뒤로 하더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공백이었다.


제 코를 풀어야지 남의 코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웃음)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가 이 앨범이니까요. 지금 이 작품을 비유하자면 동맥경화 같은데, 활동의 혈관이 막혀있으니 먼저 이걸 고치고 뚫어야 다른 작업도 가능한 거죠. 지금과 같이 방송 일정, 학기 일정 번갈아가면서 해결하려 하니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습니다.

 

공연 수요도 분명 있을 텐데 올 해 3월 이후로 공연 일정도 없다.


공연하면 좋죠. 그런데 계속해서 과거를 반복하는 것 같아 복잡한 마음이 들어요. 새 앨범으로 새 노래를 들려드리는 자리가 되어야 할 텐데, 계속해서 옛날 노래만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건 아니라고 봐요.

 

 

“1집은 창피한 앨범. 진실한 내 자신을 표현한 게 아니다!”

 

얼마 전 11월 14일, 1989년 데뷔앨범 < 김현철 Vol.1 > LP 리마스터링 발매 기념 음감회가 열렸다. 긴 시간에도 앨범을 잊지 않은 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하던데.


팬들께 1집이 왜 창피한 앨범인지를 말씀드렸어요. 아직 여물지 않은 감을 여문 것처럼 색칠해서 내놓은 앨범이라고 해야 할까. 이게 객관적으로 그렇더라도 저 자신이 익은 감이라 생각하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제 기준으로도 1집은 성숙하지 못한 앨범 같거든요. 제가 그린 김현철이라는 사람은 저의 진짜가 아니라 '제가 바라는 그러나 다른' 김현철이라는 사람임을 담은 앨범이에요. '허세'라고 할까요. 물론 내 이야기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 느낌이나 생각, 표현은 나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2집, 3집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춘천 가는 기차」, 「동네」 등이 수록된 김현철의 첫 앨범을 사랑한다.

 

그 점에 있어서는 대중과 다른 입장이라고 봐요. 긴 머리 휘날리면서, 구체적으로, 춘천 가는 기차 안에서, 허름하게 옷 입고도 나름대로 맵시 있는… 저만 아는 그 이상향이 있지요. 그 입장으로 만든 앨범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그 이상향을 아직도 쫓고 있기 때문에 지금 10집 발매도 늦어지는 건지 몰라요.

 

그렇다면 김현철의 출발점은 가수가 아닌 작곡자가 아닌가?


그렇죠. 저는 작곡자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노래를 제 자신에게 주고, 제가 부른 거죠.

 

음감회에 오신 팬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


이해한다는 반응이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잘 보이고, 멋지게 보이고 싶고, 다른 사람이 보는 나에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향후 10집의 스타일도 이를 바탕으로 변할 수 있는 건가. 김현철 (2).jpg


음악에는 크게 손대고 싶지 않아요. 코드워크나 스타일 자체를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9집까지 앨범을 내면서 가장 좋은 평가가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간다!'였거든요. 진솔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연예계 대표 노총각'이었던 김현철에게 결혼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2006년 이즘 인터뷰에서 그는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아티스트 행로를 고민하면서 '결혼은 뮤지션에게 또 다른 인생'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그 자신을 '패밀리 맨'이라 일컬으면서 이 부분도 노래 만들기에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요인임을 인정했다.

 

아이들을 위한 앨범 < 키즈 팝 > 시리즈가 나온 것도 2006년이다.


키즈 팝 앨범을 처음 꿈꾼 것은 4집 때였어요. 예전부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만들어보자는 작은 꿈은 있었죠. 결혼하고 나서 마음이 굳어졌어요. 지금 안 만들면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랄까. 아내도 정말 기뻐했고, 아이들도 좋아했어요.

 

지금은 사라진 < MBC 창작동요제 >에서도 김현철의 키즈 팝은 동요의 미래와 지향과 관련해 하나의 기준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이제 '동요'라는 단어나 기준 자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일단 그건 일제(日帝) 강점기부터 내려온 용어고, 가사만 좋다면 저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요라는 이름을 달면 아이들만 부르고, 유치한 노래처럼 여겨지잖아요. 사실 산울림의 노래도 동요고, 시인과 촌장의 「사랑의 일기」같은 노래도 동요에요. 외국을 보면 「Children's song」이라는 이름으로 밥 딜런, 존 레논도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죠. 동요를 '어린이를 위한' 개념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틀에 가두는 것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동요라는 단어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

 

40대 후반으로 가는 나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이글스(Eagles)의 「I can't tell you why」를 인생의 곡으로 꼽은 적 있었는데, 10년 시간 동안 그만큼의 감동을 주는 음악이 있었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없어요. 문화는 나사와 같다고 생각해서, 내부에서는 계속 진보하는 것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을 뿐이거든요. 음악도 마찬가지라 지금은 1970년대 펑크(Funk), 디스코가 다시 유행하고, 일렉트로닉 음악이 인기죠. 그 시절처럼 인기는 못 누리겠지만,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팝 음악의 르네상스가 다시 돌아올 거라 믿어요. 그 시대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가 저를 포함해서 윤상, 고(故) 신해철, 공일오비 같은 뮤지션들이죠.

 

김현철 (3).jpg

 

그런 의미에서 MBC 예능프로그램 < 복면가왕 > 출연은 의외다.


원래는 단 한 번 나가려고 했어요. 한 번 나갔더니 다음 주도 나오라고 하고, 그 다음 주도 같이 하게 되고… 그렇게 계속 나가고 있죠. 다른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김현철의 음악에 대한 이런 저런 칭송 외에 비판도 엄존한다. 그에 대한 입장은 있나.


저는 기본적으로 음악계에, 또한 팬들에게 원망이나 실망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가치관이 다른 어떤 사람이 있다고 쳐도, 그런 사람도 인정해야 나도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지난 이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이 갖는 의미를 '누림'이라 정의했던 것을 기억하는지. '첫 앨범을 냈을 때부터 한창 뛰던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가 좀 살게 되면서 제 음악, 과거 같으면 붙기가 어려운 음악이 수용되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본다.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거다. 만약 우리나라가 그렇지 못했다면 내 음악이 대중화되지는 않았을 거다!'라고 말했다.


제가 그렇게 멋진 말을 했어요? (웃음) 맞는 얘기네요. 제가 88학번이에요. 당시 우리 사회가 민주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전성기였잖아요. 저와 같은 1960년대 중후반~1970년대 초반 생들이 1990년대의 한국 음악 르네상스를 꾸려갔다고 생각해요. 과거와 달리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제 음악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졌으니까요. 제가 1970년대에 20대였다면 포크 록을 했을지도 모르죠.

 

9장의 앨범, 거기에 키즈 팝 앨범 2장이면 한 아티스트에게 굉장한 궤적이다.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이소라와의 작업이 떠오르네요. 데뷔 앨범 프로듀싱을 제가 맡았고 이후 2집도 제가 프로듀싱하기로 했는데 이소라는 셀프 프로듀싱을 원했어요. 그렇게 잠시 연락을 못했는데, 이후 4집에서 다시 만났어요. 소라가 회사(동아기획)를 나와서 낸 첫 앨범이었는데, 당시 새 회사의 계약 조건 중에 '김현철의 프로듀싱'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현재 음악은 아티스트에게 너무 산업을 강요한다!”

 

이소라 4집은 음악적으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 반주를 도와준 밴드가 정말 최고의 밴드였어요. 베이스에 서영도, 기타에 홍준호 등등. 대한민국 최고의 밴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앨범 녹음 후로도 6년 동안 '김현철밴드'라는 이름으로 함께 계속 함께했습니다.

 

올해 봄 이승철은 새 앨범 발매 후 < JTBC 뉴스룸 >에서 더 이상 풀 앨범을 낼 수 있을지 회의를 살짝 내비치기도 했다. 분명 10집이 기념비적인 작품이겠지만, 음악 만드는 것 외 흥행 부담은 없나.


흥행에 대한 부담을 없애려고 합니다. 제작비 다 까먹어도 좋으니, 제가 만족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일 뿐이에요. 스트리밍 사이트로 음악을 듣는 요즘엔 싱글 개념의 앨범은 성공할 수 있어도 앨범 단위 앨범은 흥행이 어려워요. 물론 그만큼 빅 데이터도 잘 구축되어있으니 유행하는 스타일, 노래 등을 계산해서 흥행할 만한 노래를 만든다면 성공이야 하겠죠. 그러나 그 음악 '산업'이 아티스트에게 강요되어선 안돼요. 현재 음악은 아티스트에게 예술 아닌 흥행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장에는 다 똑같은 블록버스터보다 다양함이 필요하거든요.

 

김현철 (1).jpg

 

김현철은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부럽지 않을 독보적인 길을 걸어왔다. 짓궂은 질문이지만 수많은 히트 곡 중 베스트 트랙 3개를 꼽는다면. (이 질문에 어렵다며 '10분을 달라'고 했다)


우선 「춘천 가는 기차」가 있겠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제가 느끼는 감정은 다르긴 하더라도, 어쨌든 가수 김현철의 첫 시작이니까요.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는 제가 레코딩하면서도 내가 가수인가, 아티스트인가라는 의문이 있었지만, 이 노래로 '가수 김현철'이 시작됐죠. 「달의 몰락」도 꼽아야죠. 가장 성공한 노래고, 앨범은 밀리언셀러가 되었고, 방송도 하게 된 노래이니까요. 마지막 노래는 곧 나올 정규 10집의 한 곡으로 하겠습니다.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게 만들어야죠.

 


인터뷰: 임진모, 김도헌, 정유나, 정민재
사진: 이한수
정리: 임진모
2015/12 임진모(jjinmoo@izm.co.kr)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백성현 “사진이 좋은 이유? 외로우니까!”

$
0
0

포토에세이 『당신에게 말을 걸다』는 백성현의 이야기였다. 가수 ‘빽가’도 아니고 사진가 ‘by100’도 아닌, 스물일곱의 청년 백성현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7년 만에 이어진 두 번째 이야기 『고마워요』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카메라가 곁을 지키고 있었고, 사진에서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뚝뚝 묻어났다.

 

그러나 어쩐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다. 첫 번째 책을 출간하고 1년 후, 백성현은 뇌종양 판정을 받고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그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제 그는 순간이 찰나이기에 아름답다는 사실을 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앞에서 삶은 흔들리며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것도 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과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은 더욱 깊어졌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피사체들이니까,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 애써 힘을 실을 필요도 없어졌다.

 

『고마워요』에 담긴 백성현의 독백은 담백하다. 투병을 시작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리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경험도, 그 시간 동안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사진에 대한 진한 사랑 고백도,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린 시절의 빛 바랜 기억들도, 모두 덤덤하게 털어 놓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러하듯이, 백성현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슬며시 나의 상처를 포개어 본다. 때로는 감추고 싶고, 때로는 잊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은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에게도 있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마워요』는 묘하게 힘이 되어주는 책이다. 평범한 일상과, 그 속에 숨어있는 시련과, 뒤이어 찾아오는 기적 같은 일상의 이야기가 ‘다 괜찮을 거라고’ 가만히 등을 두드려준다.

 

_IM_0644.jpg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었어요


『고마워요』에서 뇌종양 투병 경험을 솔직하게 들려주셨는데요. 당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게 쉽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파 봤기 때문에 지금 아픈 분들한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잖아요. 제 경험을 직접 들으시는 것도 아니고 글로 읽으시는 건데, 그걸로 아픈 분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건 분명 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일 솔직하고 정확하게 쓰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이야기들을 피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도 많은 분들이 (건강은) 괜찮냐고 물어보시는데요. 그럴 때 제가 슬프거나 힘겹게 대답하면 더 안타깝게 느끼시거든요.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그럼요, 보시다시피 건강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게 좋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야 그분들도 안심하시고요.

 

이번 책을 읽으면서 ‘상처를 공유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독자들이 『고마워요』를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픔이나 상처의 깊이를 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봤을 때는 작은 일 같다고 느껴도 그 사람한테는 큰 일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삶과 죽음 사이에 놓였던 적이 있었고, 그게 객관적으로 볼 때 많이 힘든 일이었으니까, 제 이야기를 통해서 아픈 분들이 조금 더 위로를 받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다행히도 저는 수술이 잘 돼서 건강해졌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됐으니까 ‘결국 이 사람도 이겨냈구나, 힘든 일도 다 지나가는 거구나’ 하고 위로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투병 이후에 가장 많이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책에서도 강조했지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감사 이전에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신이 아니니까 완벽해질 수는 없잖아요. 수술이 끝났다고 해서 부처나 예수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열 번 화낼 거 다섯 번 화내도록 노력하게 되고, 예전보다는 조금 더 많이 참으려고 노력하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을 것 같아요.


사실 예전의 저는 의식주 가운데에서 의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먹는 것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집도 신경 안 썼고요. 의와 관련해서 파생된, 보여주기 위한 것들에 집중했었는데요. 지금은 의가 빠지고 식과 주가 중요해졌어요. 이제는 음식 조절도 잘 해야 되는 사람이 됐고요. 안정된 보금자리, 집에 대한 욕심들이 많이 생겨났어요. 그러다 보니까 선인장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사업도 하게 됐고요. 그런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보면 저의 평온한 삶을 위한 과정인 것 같아요.

 

지금 저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곳 ‘씨클드로(Cycle de l’eau)’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죠. 병원에 계실 때 선인장의 강한 생명력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셨다고요.


맞아요.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 사업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때 선인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선인장만 판매하는 가게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꽃집은 많지만 선인장은 조금씩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런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선인장이 트렌드가 되면서 사업이 잘 되어 가고 있는데, 그런 걸 보면 모든 일에는 뜻이 있는 것 같아요.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거죠.

 

투병 당시 미디어와 대중의 반응 때문에 더 힘들기도 하셨죠. 언론은 특종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일부 네티즌은 악플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연예계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한데요. 어떠셨나요?


이건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요. 그때는 수술이 끝나면 연예 활동을 안 하겠다고 다짐했었어요. (코요테) 멤버들과 회사에도 제 뜻을 이야기했고, 파리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들이 저를 응원해주시고 힘을 주셔서 마음을 바꾸게 됐죠. 사실 저는,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새 멤버로) 들어와도 팀이 잘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멤버들이 탄탄하게 바탕을 다져놨으니까요. 그런데도 저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해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다시 멤버들과 함께하게 됐죠.

 

_IM_0677.jpg

 


사진이 좋은 이유? 외로우니까!

 

사진 작업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솔직히 결과적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 사진에 대해서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 마음가짐은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보는 사진은 (이전과는) 달라요. 타인들의 평가는 제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아요. 더 좋아졌다기보다 더 착해졌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책에 쓰신 것처럼, 착한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하게 되신 건가요?


그런 의미인 것 같아요. 욕심을 버리고 조금 내려놓으니까, 그만큼 더 자연스러워지고 진실 되는 것 같아요. 모든 일이 그렇잖아요. 제가 뭘 하든 마찬가지이고,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고마워요』에는 사진에 대한 절절한 사랑고백이 담겨있는 것 같아요. 만약 ‘사진이 왜 그렇게 좋으세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어요?


사실 되게 외로워요. 인간관계도 좁고 주변 사람들하고 교류하는 게 거의 없거든요. 저는 연예인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는 편도 아니고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그러다 보니까 사진이 제가 의지할 수 있는 공간, 친구 같은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저는 외로움 때문에 더 (사진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사진으로 (외로움을) 해소하고요. 사진은 시작부터 결과까지 다 제가 만들어내잖아요. 모든 게 제 책임인 거죠. 물론 상업적인 사진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로 찍어야 하겠지만, 일상적으로 찍는 사진들은 제가 계획한 거고 저의 결과물이니까요. 누구랑 상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저를 더 몰두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진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사진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진과 관련해서 사람들의 편견도 있었죠. 제가 ‘by100’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보호 장치였던 거고요. 누군가가 찍은 사진을 보지도 않고 ‘그 사람 사진은 별로야’라고 말하는 건 모순인데, 저는 그런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말에 답변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연예인이라는 위치에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화살을 쏠 수밖에 없는, 과녁이 다 열려 있는 상태였다고 할까요. 저는 예전부터 생각하기를, 어떤 일이든 한 가지 일을 10년 이상 한 사람은 달인이라고 생각해요. 장인과 달인은 다르잖아요. 달인은 베테랑인 거죠. 조금 있으면 제가 사진가로 정식 데뷔한지 10년이 되는데, 그때는 제 사진에 대해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20년, 30년 뒤에도 꾸준하게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렇게 자연의 순리대로 흐름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 말을 걸다』에 실렸던 사진들과 이번 책의 사진이 조금 다르다고 느끼세요?


더 편안한 것 같아요. 대부분 풍경과 자연, 일상을 찍은 사진들이거든요. 더 강렬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면 뭔가 연출을 했겠지만, 그냥 진짜 흘러가는 자연을 찍었어요. 구름도 그렇고 바다도 그렇고요. 그런 것들은 계속 변화하지만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는 거죠. 감히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인데, 그런 걸 담은 사진에는 욕심이 끼어들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예전에는 거기에 욕심을 넣었었어요. 포토샵도 조금 더 강렬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비뚤어지면 수정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있는 그대로 찍으니까,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찍어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사진이 된 것 같아요.

 

아직도 개인적으로 촬영하실 때는 필름 카메라를 쓰세요?


네, 항상 차에 가지고 다녀요.

 

자연스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필름 카메라를 쓰시는 건가요?


보통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은 쨍한 느낌이 있잖아요. 필름 카메라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과 감성이 있죠. 그리고 저는 필름 카메라로 공부를 하던 세대여서 그런지,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디지털 카메라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필름 카메라가 더 편한 것 같아요. 옛날 마인드죠. 상업 사진을 찍을 때는 빠른 작업을 위해서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어보자고 권하기는 해요. 그래도 상업사진은 십중팔구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고요. 제가 (개인적으로) 찍는 사진은 십중팔구는 필름 카메라로 찍습니다.

 

『고마워요』에는 자연을 찍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특히 밤하늘을 촬영한 사진(102쪽)은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데요. 촬영하기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로키산맥 부근에서 찍은 사진인데요. 친구들하고 촬영 겸 여행을 갔을 때였어요. 거기가 사막 한 가운데라 가로등이고 뭐고 아무런 전기 시설이 없거든요. 그래서 해가 질 때쯤 돼서 철수를 하려고 하는데, 주위가 밝은 거예요. 전기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밝은 거지, 하고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수만 개의 별이 떠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는데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건 포토샵을 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있는 그대로 찍었어요. 물론 포토샵을 하지 않았고요. 사실은 사진에 보이지 않는 별들이 더 많아요.

 

_IM_0613.jpg

 

 

마음을 비우면 용감해지는 것 같아요


책에 실린 사진 중에서 촬영하기 가장 힘들었던 사진은 무엇이었나요?


없어요. 잘 찍으려고 생각하면서 촬영한 사진이 없거든요. 그냥 다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찍은 거예요. 조심스러웠던 사진은 있었어요. 바닷가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찍은 사진이 있잖아요. 원래 타인을 촬영할 때는, 아무리 뒷모습이라 하더라도, 허락을 받는 게 예의니까 굉장히 조심스러웠고 책에 실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출판사) 담당자 분께서도 그 이야기는 꼭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다른 사진으로 대체하기도 마땅치 않아서 싣게 됐어요. 혹시라도 그 분들이 책을 보시고 연락을 주신다면 맛있는 건강식이라도 대접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그래도 막상 만나시면 치킨을 드시지 않을까요? 책에서 고백하신 것처럼 ‘닭고기 성애자’이시잖아요(웃음). 그와 관련해서 가슴 아픈 기억을 갖고 계시기도 하고요.


어린 시절에 양념치킨과 관련해서 있었던 일을 적었는데, 책 내용 중에 가장 치욕스러웠어요. 그 글을 읽으신 분들이 한 번만 제 입장이 되어 보신다면 그 기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기분이라는 걸 아실 거예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닭고기 좀 그만 먹자고요(웃음). 제가 틈 날 때마다 닭고기 먹자고 하거든요. 제가 닭고기를 너무 좋아하니까 저희 어머니도 무조건 닭 요리를 해주세요. 저 역시 닭 요리만큼은 자신이 있고요. 저는 닭 요리만큼은 지금보다 더 비싸게 판매돼도 되는 음식이라고 생각할 정도예요(웃음).
 
사진을 감상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주세요.


제 책에 있는 사진은 굳이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밤하늘의 별이나 호수에 거울처럼 비춰진 풍경을 찍은 사진은 쉽게 볼 수 없는 사진들이니까, 대리만족을 하셨으면 좋겠고요. 저처럼 떠나셔서 그 사진을 직접 담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 같은 사람이 막 찍어도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니까, 여러분도 충분히 찍으실 수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사진과 관련해서 봉사활동을 정말 많이 하셨더라고요. 양로원과 특수학교에서 사진을 찍어주시고, 지금까지 전시회의 수익금 전부를 기부하셨다고 들었어요. 오래 전부터 해 오신 활동이지만, 투병 이후에 조금 달라진 부분도 있을까요? 


제가 아프기 전에는 솔직히 동정의 마음이 조금은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몸이 아픈 친구들을 대할 때도 그들을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게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이나 조카들 보듯이 하게 되는 것 같고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누구나 그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걸까요?


그렇죠. 저도 제가 그렇게 투병하게 될지 몰랐잖아요. 저는 지금도 최악을 생각하고 있어요. 재발가능성도 있고, 그래서 더 검진도 자주 받고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로 몸이 아플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비워 놓은 상태예요. 항상 최악을 염두 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고, 조금 더 비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일회용 카메라 프로젝트’를 통해서 사진 무료 교육도 진행하셨습니다. 다음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계세요?


네, 다시 준비 중이에요. 연말까지는 저희가 콘서트 중이고, 2월까지는 날씨가 추워서 야외 활동이 힘들기 때문에, 봄부터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고마워요』에는 버킷리스트도 실려 있는데요. 시간이 지난 후에 얼마나 이루어져 있을 것 같으세요?


버킷리스트 중에 마흔 살 이전에 건물을 사겠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5년 안에 그 바람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마 그때 책을 한 권 더 낼 것 같은데, 다시 버킷리스트를 포함시키려고요. 제가 봤을 때는 목록에 있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_IM_0661.jpg

 


『고마워요』, 멋있게 쓰고 싶지 않았어요


음악, 사진, 사업, 봉사까지 다 해내는 거 보면 악바리라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맞아요. 독한 면이 있어요(웃음).

 

지치지 않고 계속 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벼랑 끝에 서면 간절함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가장이기 때문에 책임져야 될 것들이 많아요. 저 혼자만 생각하면 안주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님도 계시고 가족들도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죠. 가족이라는 목적이 굉장히 강한 거예요. 그런 목적이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아요. 

 

버킷리스트 중에 ‘요리 자격증 따기’도 포함되어 있던데요?


혼자 산 지 15년 차인데요. 3년 정도 배달 음식을 시켜 먹다 보면 MSG에 질리게 되거든요(웃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요리를 하게 됐는데, 조금씩 보완하다 보니까 요리가 맛있게 되더라고요. 2006년쯤부터 제대로 요리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요리 잘해요. 거의 다 직접 만들어 먹어요. 주변에서도 요리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까 자격증을 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요리로 방송 활동을 할 생각은 없어서 조용히 준비할 생각이에요(웃음).

 

‘마음속의 나쁜 것들 버리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마음을 버리고 싶으세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들이 생길 때가 있잖아요. 예를 들면, 제가 병원에 있을 때 정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연락도 한 번 없고 찾아오지도 않았던 사람들도 꽤 있었어요. 그때는 ‘이 사람들은 내가 죽어도 안 오겠구나, 그런 사람들을 봐서 뭐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미움이 생기기도 했어요. 제가 힘들 때 여러 가지로 저를 더 힘들게 한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게 저한테 독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 말고도 살다 보면 안 좋은 마음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버리고 살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있어요.

 

『고마워요』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힘드신 순간에 이 책을 꺼내보셨으면 좋겠는데요. 사실 그럴 때 책을 읽는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해결해야 될 일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시간 나실 때 읽으셨으면 좋겠고요(웃음). 첫 번째 책도 그렇고, 이번 책도 멋있게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려운 문장이나 단어들은 다 배제하고 덤덤하게 쓴 책이에요. 욕심을 내려놓았고 썼어요. 그런데 절대 가벼운 책은 아니거든요. 책을 보시고 ‘이 사람도 이겨냈으니까, 나도 충분히 다 이겨낼 수 있다’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몸이 아픈 것뿐만 아니라 고난이나 시련의 시기들이 왔을 때 ‘이 사람도 이겨냈는데 내가 못 이겨내겠나’ 이런 마음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img_book_bot.jpg

고마워요 : 백성현 포토 에세이백성현 저 | 시그마북스
뇌종양 투병과 수술을 겪으며 더 깊고 진솔해진 글과 사진으로 그가 다시 말을 건넨다. 소박한 문장과 감성 짙은 사진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능력이 탁월한 그답게 이번 포토 에세이 『고마워요』 또한 가만히 들여다보며 음미하고 싶은 백성현의 문장과 사진들로 가득하다.  그의 소박하지만 흡인력 강한 글은 물론이고, 하늘, 바다, 사막 등 그가 사랑하는 자연을 담은 사진과 세계적 명품 카메라 브랜드 라이카의 아시아 최초 모델이자 작가로 발탁되어 작업을 한 사진들이 풍성하게 실려 그만의 감성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꿈꾸는 여행가 안시내 “60대까지 청춘이고 싶다”

$
0
0

어린 시절 여행기를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그는 “제일 예쁜 나이에 1년만큼은 반짝이며 지낼 거라고 늘 생각했”으므로 여행을 떠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첫 번째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지만 다시 현실에 묶여 오랜 꿈이 조금씩 잊히는 듯했다. 안시내, 그는 그대로 지내지 않는 쪽을 택했다. 방법을 고민했고, 그가 찾아낸 것은 바로 ‘클라우드 펀딩’. 펀딩은 성공적이었다. 놀라운 사람들이 놀라운 응원을 보내왔다. 그의 여행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이 여행의 원동력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직접 그려 만든 티셔츠를 입고 그들을 떠올리며 킬리만자로에 올랐다(물론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킬리만자로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다녀온 아프리카의 빛나는 이야기를 묶은 책 『우리는 지구별 어디쯤』은 인세 전액을 기부함으로써 다시 아프리카에 힘을 보태게 됐다.


이 흥미로운 여행을 만든 안시내는 아프리카를 ‘무지갯빛’이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보살핌을 주었던 사람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작은 아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을 책에 꼭꼭 눌러 담았다. 지치고, 힘들고, 싫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아프리카가 아닌가. 언제까지나 청춘일 ‘진짜 청춘’ 안시내의 아프리카가 여기 있다.

 

5D3_2248.jpg

 

 

함께 한 여행


첫 책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출간 직후 곧바로 또 아프리카로 떠나셨어요. 그렇게 서둘러, 반드시 떠나야 했던 이유가 뭐였나요?


첫 여행 갔을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어요. 여행 작가분들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그분들이 어떻게 하면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셨어요. 학교에 한 탈북 소녀가 있었는데요. 어떻게 여행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 친구에게 알려주다가 비행기표는 이렇게 사면 돼, 하면서 보여주고 있는데 남아공까지 24만원에 갈 수 있는 표가 있는 거예요. 일단 이건 사야 된다(웃음) 생각하고 사버렸어요.


아무래도 첫 여행이 딱 저만을 위한 여행이었으니 또 그런 여행을 했다가는 그냥 도피가 될 것 같았어요. 의미 있는 여행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이렇게 프로젝트를 만들어 떠났던 거예요. 공정여행에 대해서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됐고요.

 

공정여행, 클라우드 펀딩, 인세 전액 기부, 이런 것들을 보면 안시내의 색깔이 보여요.


여행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그것이 또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하는 상황이 됐어요. 또 공정여행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알리고 싶었는데요. 제가 공정여행을 하면 사람들에게 많이 알릴 수 있고, 저처럼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획을 했었어요. 그런데 진짜로 제가 한 것을 보고 우물 만들기 프로젝트 등 많이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얘기 들으니까 또 뿌듯했고요.

 

쉽지는 않잖아요. 보통 생각하는 여행과 다른 모습이니까요. 어쩌다 이런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궁금해요.


일단 클라우드 펀딩이라는 것 자체에 무척 흥미를 느꼈어요. 아무것도 없고 아이디어만 있는데 여기에 투자를 해준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제가 딱 그랬어요. 가진 건 없는데 번뜩이는 생각만 있었죠. 이런 생각만 있는데 누군가 나의 청춘에 투자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생각 외로 잘 된 거예요. 준비할 때 너무 힘들거든요. 혼자서 다 해야 하고 후원한 사람들에게 제가 해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힘들었지만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람들과 정말 가까워졌어요. 특별한 사이가 됐어요. 후원해주신 분들과 단체 대화방도 열어서 아프리카 여행하는 내내 얘기하고 그랬어요. 사람들과 밀접하게 소통할 수 있기도 하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싶어서 프로젝트를 했던 게 결과적으로는 정말 잘 됐던 것 같아요. 좋았어요.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 그런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는 건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살아온 배경이나 모든 것이 다른 사람과도 가장 친한 친구처럼 우정을 나눠요. 


맞아요.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정말 좋아해요. 어떤 사람이든 하나씩은 다 본받을 점이 있더라고요. 클라우드 펀딩 했을 때도 정말 다양한 분들을 만났어요. 특히 아무래도 20대 분들이 많이 해주셨는데요. 저보다 어린데도 벌써 작가로 활동하는 친구도 있고, 정말 힘들게 사는데 제일 큰 금액을 후원한 분도 있고요. 이걸 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연락을 하게 됐거든요. 그러니까 혼자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천군만마를 얻고 가는 느낌이었어요. 킬리만자로 올랐을 때도 정말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사람들의 얼굴을 그린 티셔츠를 입고 올라갔잖아요. 정말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여기서 지면 안 돼,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여행의 동력이기도 했네요.


네, 정말 힘이 됐어요. 당시에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우리는 시내 씨만을 응원한다’고 단체 대화방에서 응원해주셨어요. 진짜 힘들 때였는데 정말 힘이 됐어요.

 

첫 여행은 오랜 꿈을 이루고자 떠났다면 이번 여행은 좀 다른데요. 이 두 여행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후원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떠난 여행은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솔직히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부담감도 있고요. 이전 여행에서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다녔잖아요. 그런데 사람들과 함께 간다는 생각을 하니까 행동 하나도 예전처럼 자유롭지 못했죠. 아무래도 함께 걱정해주시고, 같이 떠나는 것처럼 보고 계시니까 걱정 끼칠 일도 하기 싫고요. 행동도 항상 조심하게 됐어요. 예전 같았으면 여기서 뭘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느냐를 항상 생각했는데요. 이번에는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제가 여행하는 것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아프리카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게 있었어요.

 

보다 관찰자의 느낌으로 여행을 한 거죠?


네, 여행에 아예 들어간 게 아니라 한 발 떨어져서 보는 느낌이었어요.

 

5D3_2229.jpg

 

 

여러분이 생각하는 아프리카는?


프롤로그에 ‘여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미지의 세계에 갇힌 또 다른 삶 속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고 하셨었거든요. 출발 전에 생각했던 미지의 세계 속 삶이란 무엇이었나요?


제가 생각하는 아프리카 또한 다른 사람들의 아프리카와 똑같았거든요. 한 번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아프리카는?’이란 질문에 다들 ‘무서움’, ‘총’, ‘강도’ 이런 것만 말하더라고요. 저도 약간 그렇게 생각했어요. 무서운 것만 떠올랐어요. 가보지 않았는데 그런 편견을 갖는 것 자체가 안 좋은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 여행에서도 그걸 느꼈는데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생각이 제게 있더라고요. 일단 가봐야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다채로운 아프리카를 보고 싶어서 가게 된 거예요. 결론은 진짜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는 것을 느꼈어요.(웃음) 엄청 좋았어요.

 

항상 예상과 다르게 펼쳐지는 게 또 여행일 텐데요. 떠나기 전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듣고 싶었어요. 물론, 좋으셨겠죠?


가기 전엔 두려움이 있었는데요. 막상 다른 여행지와 다를 게 없더라고요. 정말 주의해야 해요.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말아야 하고요. 여행자를 위한 길이 있어요. 아프리카 국민 루트가 있는데요. 저도 잠시 모잠비크로 새긴 했지만 국민 루트로 가면 다른 여행지처럼 여행자도 많고 따뜻한 사람도 많아요. 물론 사기 치는 사람도 많고, 인종 차별하는 사람도 많지만 말이에요. 가기 전엔 무서웠는데 이제는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는 곳이란 걸 알아요. 아프리카를 다녀온 사람들은 항상 ‘무지갯빛’이라고 하더라고요. 다채로운 색이라고 하는데 저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하나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곳인 것 같아요.


달라졌어요. 이제는 빈곤, 기아, 이런 이미지가 아니에요. 그곳에도 아이폰 쓰는 사람도 있고요.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아프리카도 다른 곳과 똑같다는 말이 좀 의외기도 하네요. 


저는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 일 없다가 유럽에 가자마자 바로 소매치기 당하고 그랬었거든요.(웃음) 그것처럼 아프리카라고 해서 무조건 위험한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에요. 여행 중에 일이 생긴 건 저뿐이었어요. 정말 다른 여행지와 다를 게 없었어요. 조금 다르다고 한다면 자연이겠죠. 매일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렸으니까요.

 

무척 솔직한 글이었어요. 지친다, 싫다, 여기는 아프리카다, 이런 얘기들은 진짜 몸으로 겪은 이야기를 적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책을 쓰면서 세운 어떤 원칙이 있었나요?


감정 하나, 세포 하나까지 다 담아내려고 그 순간에 글을 썼어요. 너무 힘들고, 풀 데가 없기도 했고요. 너무 지치고, 짜증나고, 집에 가고 싶은 감정을 글로라도 풀어내면 속이 풀리더라고요. 엉켜있는 실타래 같던 생각도 글로 쓰면 어떤 부분에서 짜증이 났었는지 알게 되고 풀렸어요. 그게 좋기도 했고요. 진짜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항상 그 당시, 일을 겪자마자 썼던 것 같아요. 나중에 쓴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아무리 힘들었어도 미화가 되거든요. 그게 싫었어요. 그대로 드러내려고 했어요. 미화된 감정으로 책을 썼다간 그것대로 오해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킬리만자로 이야기도 잠깐 하셨는데, 아프리카 여행 중에 정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다면 하나 들려주세요.


제일 좋았던 것도, 제일 싫었던 것도 배낭 잃어버린 일이에요. 그때 정말 처음 깨달았어요. 안 그럴 것 같지만 우습게도 여행 떠나면서 고데기 챙기고, 화장품 챙기고 그랬거든요. 그런 걸 통째로 한 번 잃어버리고 나니까 완전 빈털터리로 여행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좋은 거예요. 가방이 가벼우니까 숙소도 자유롭게 알아볼 수 있고요. 살아가는 데 별다른 짐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그때 너무 크게 와 닿았어요. 그 교훈으로 다시는 배낭을 5kg 이상 안 싸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요. 여행 하는 데, 그리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딱히 필요한 게 없더라고요. 비누 한 개 정도(웃음) 들고 가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 사건이 정말 좋았어요. 함께 배낭 잃어버린 친구와 정말 많이 웃었거든요. 너무 바보 같고, 좋아서요.

  

타카는 말했다.

 

“그건 우리가 바보이기 때문이야!”

 

어차피 일이 벌어진 상태에서는 좀 더 바보가 되면 편하다고. 바보가 한 명이면 그냥 슬픈 거지만 지금은 바보가 두 명이라서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즐거운 거라고. 우리는 복잡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여행자니까. 그리고 여행 중엔 가끔은 바보여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며 좀 더 날 것의 감정을 즐겨도 된다고.(188쪽)

 

역시 그 장면이 읽으면서도 가장 좋았어요. 빛나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페이지를 접어두기도 했고요.


저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진짜 꼬질꼬질했어요. 버스도 엄청 오랜 시간을 달려서 흙먼지 다 묻고 그랬거든요. 안 그래도 더러운데 짐까지 잃어버렸으니 씻을 것도 없잖아요. 한편으로는 어떡하나 싶고 너무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죠. 중요한 것들을 따로 챙겨둔 작은 배낭 안에 그 친구는 케첩, 저는 고추장이 들어있었어요. 그게 너무 웃겼어요. 우리는 진짜 바보구나 그랬어요. 그 친구는 1년을 여행하면서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저와 있어서 그랬다며 ‘언럭키걸’이라고 하면서 또 엄청 웃고요. 그러면서 둘 다 참 좋아했어요. 언제 이렇게 가볍게 여행을 해보겠나 싶었죠. 그래서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 시작과 끝 모습이 달라요. 화장품이 없어서 민낯으로 다녔거든요.(웃음)

 

쉽지 않은 여정이잖아요. 정말 고생도 많이 했고요. 만약 똑같이 그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일단 킬리만자로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고요.(웃음) 정말 힘들었으니까요. 다시 가보고 싶은 곳도 있어요. 항상 저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고 싶거든요. 그 중에는 휴대전화도 있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도 있잖아요. 휴대전화도, 이메일도 없는 친구들,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러 가는 여행을 하고 싶긴 해요.

 

여행에서 결국 남는 건 다시 또 사람들인가 봐요.


네. 책을 아프리카로 보내줘야 해서 주소도 받아놨거든요. 한국 과자나 잡다한 것들 사서 함께 보내려고요. 그러면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저는 많은 보살핌을 받았는데 제가 줄 수 있는 건 이 조그만 책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읽지도 못하니까 그곳에서 접하지 못하는 한국 물건을 보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기뻐할 모습 생각하면 제가 더 신나요.

 

5D3_2198.jpg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일


자신만의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었나요?


지난 여행기부터 해서 저와 똑같은 루트로 여행을 가시는 분도 많고, 아프리카를 이 책 들고 가신다는 분도 있더라고요. 에세이는 가이드북이 아니라서 들고 가거나 그러면 절대 안 되겠지만요. 어찌됐든 한 발 더 친근하게, 그러면서 환상을 깨주는 그런 물밑 작업들이라고 생각해요. 한 번 읽어보고 떠나도 좋을 것 같고요. 여행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디를 여행해야 할지, 어떻게 여행해야 할지도 모를 수 있는데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오히려 같은 초보 여행자 입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참 좋기도 하면서 걱정도 되는 게 제 책에 쓴 사람들을 만나러 가서 사진만 찍고 가고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건 자제해주시면 좋겠고요. 책에 나온 사람들과 인연들을 제가 느낀 것처럼 사랑스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처음 여행하려는 사람들에게는요?


겁이 많은 건 참 좋은 거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여행에서 겁 내지 마라, 하는 것도 좋긴 한데요. 방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겁을 먹고, 여기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으면 항상 긴장하게 되고, 주의하게 돼서 더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요.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는 항상 ‘여기는 좀 편하다’ 이렇게 방심했을 때거든요. 이 겁은 내게 도움이 되는 겁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니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처럼 겁 없이 다니다가(웃음)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무척 밝으신 것 같은데요. 평소와 여행지에서 많이 달라지나요? 달라진다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해요.


저는 여행지에서 아주 감성적이 돼요. 평소에는 말 많고, 다른 여대생처럼 시끄럽고,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그런데요. 여행지에 가면 정말 나 혼자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런 상황이 평소에는 절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타지에 나가서 혼자가 되는 순간부터는 엄청 깊어진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저 자신에게 깜짝 놀라기도 해요. 무슨 일이 터져도 평소보다 훨씬 깊게 생각해요. 한국이었으면 별 일 아니라고 했을 텐데 여행지에서는 엄청 깊게 생각해서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혼자 모든 걸 다 책임져야 하니까 더 그럴 수 있겠네요.


제가 알아서 다 해야 하니까요. 또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한테 친한 척 못하는데, 외국만 가면 잘하는 것도 너무 신기해요. 여행지에서 한국인만 보면 너무 반가워서 달려가 끌어안고(웃음) 그래요. 외국인 친구들이라고 해도 진짜 반가우니까 먼저 가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 여행하는지 말 걸고 그래요. 친구 만들고 싶어서요. 성격이 훨씬 더 극대화되는 것 같아요. 원래 가진 면들이 더 커진 상태로 여행을 다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건 다들 그런 것 같아요. 여행만 가면 다들 시인이 되고(웃음) 그렇더라고요. 저만 느끼는 감정은 아닌 것 같아요. 주변 여행자 친구들도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들었어요.

 

여행을 가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건 왜였을까요?


내가 제일 예쁜 나이에 1년만큼은 반짝이며 지낼 거라고 늘 생각했어요. 그게 여행이었는데요. 왜 여행이었느냐면 책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학원을 따로 다니거나 하지 않아서 유일한 친구가 책이었어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는데요. 책 한 권 읽을 때마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 이런 세상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여행기를 읽으면 잠깐 읽으려다가 끝까지 읽곤 했어요. 다른 세상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여행도 여행이지만 그 여행을 나도 글로 써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21살, 대학에서 성적이 제일 잘 나왔을 때 지금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너무 숨이 막혔어요. 17살, 세계 여행을 꿈꾸던 시내는 오간 데 없고 어디가 취업이 잘 되는지 같은 얘기만 하고 있었죠. 성적을 잘 받아도 누군가 뒤에서 채찍질 하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 쳇바퀴 속에 머물게 되는 게 아닌지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딱 느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성적을 보고 내가 어느 새 꿈꾸던 건 잊은 채라는 걸 알았죠. 자크 라캉의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딱 내 말인 것 같더라고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건 아니었나 싶고,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 다짐하고 여행을 갔어요.

 

결과적으로는 그 다짐이 삶의 큰 전환이 되었잖아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처음에 페이스북에 여행기를 업로드 하며 다닐 때는 친구들도 길다, 스크롤 압박이다, 이런 것들만 댓글 달렸었거든요. ‘좋아요’도 얼마 없고요. 점점 사람들이 읽어주니까 친구들도 제 글을 읽더라고요. 기분이 참 묘하면서도 좋았어요. 글 속에서 제일 솔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행 자체를 욕망했다기보다 처음부터 여행과 글쓰기를 상상했었던 거군요.


어머니가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신데요. 혼자서 저희를 키우시다보니 결국 시집도 못 내셨어요. 그렇게 살아온 삶이 엄청 가슴 아프더라고요. 글 쓰는 것도 엄청 좋아하시는데 말이죠. 어머니가 못 다 이룬 꿈을 나라도 이뤄야지, 생각하기도 했고요.

 

어머니께서 참 좋아하시겠네요.


네. 어렸을 때 강제로 글쓰기 시키셨거든요. 초등학교 때부터 주제 하나씩 주고 글을 쓰라고 하셨어요. 점수도 매겨주셨는데 늘 A 아니면 A 였어요.(웃음) 그래서 저는 제가 굉장히 글을 잘 쓰는 줄 알았거든요. 알고 보니 저를 북돋아 주셨던 거예요.

 

벌써 책이 두 권이나 나왔잖아요. 어머니는 뭐라고 하세요?


글쎄요, 더 잘 될 거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부담스럽기도 해요. 저는 글을 잘 쓰는 건 아니지만 글 쓰는 걸 너무 좋아하니까 글 쓰며 살아갈 거라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머니는 욕심이 많으셔서 강연도 하라 하시고 그래요. 솔직히 홍보 영상 같은 것도 찍고 요즘 다양하게 많이 하거든요. 지금은 싫은 것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글만 쓰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살려면 우선 다른 작업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이것들이 나중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다 괜찮은 것 같아요.

 

5D3_2232.jpg

 

 

60대까지 청춘이고 싶어요


다음 계획이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네요.


아프리카를 두 달에 다녀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가고 싶어요. 인도도 다시 가고 싶고요. 가장 가고 싶은 곳은 파키스탄의 훈자마을이라고, 여행자 3대 블랙홀 중 하나예요. 방콕 카오산로드, 이집트 다함과 함께 꼽히는 곳인데 그곳을 못 가봤어요.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천국이란 수식어가 붙은 곳인데 어찌 안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친구들 다녀오는 것 보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코카서스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곳도 가고 싶어요. 엄청 물가가 싸대요. 제가 선택하는 여행지 첫 번째가 물가가 싼 곳이거든요.(웃음) 아시아, 유럽과 아시아 사이쯤이 늘 끌려요.

 

여행 얘기하니까 눈이 반짝반짝 빛나요. 꿈이 뭔가요?


자주 얘기해서 부끄럽긴 한데요. 제가 여행을 다니고, 다녀도 보면 다닌 데가 없더라고요. 안 간 나라가 훨씬 많아요. 20대 때는 계속 여행을 다니면서 살 것 같아요. 제가 예술을 전공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30대 때는 예술에 관한 기행문을 쓰거나 예술 평론 쪽으로도 해보고 싶고요. 청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연애라고 생각해서 40대에는 곽정은 작가 같은 칼럼니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웃음) 50대가 되면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 동화 작가가 돼서 다시 순수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60대가 되면 그때까지 모은 돈으로 캠핑카를 딱 사서 전국 일주를 하며 다시 여행을 할 것 같아요. 그게 제 꿈이에요.

 

굉장히 구체적이에요.


이걸 일부러 다 말하고 다녀요. 여행 갈 거라고 주변에 계속 말하면 나중에는 주변에서 여행 안 가냐고 묻잖아요. 그런 것처럼 한 번 흘린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려고 일부러 더 말하고 다녀요. 만 번을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인디언 속담도 있더라고요. 지켜봐 달라는 각오기도 해요.

 

큰일인데요. 이 이야기는 인터뷰 기사로 계속 기록될 테니까요.(웃음)


네, 지금 마음 같아서는 그 꿈대로 살고 싶어요.(웃음) 계속 철이 없고 싶어요.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철이 없어야지, 하고 생각해요. 계속 철딱서니 없이 60대까지 청춘이고 싶어요.

 

 

 

img_book_bot.jpg

우리는 지구별 어디쯤 안시내 저 | 상상출판
고단한 삶도 그녀의 ‘꿈’을 꺾어내진 못했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내고 남은 돈 350만 원으로 세계여행을 떠났고, 돌아와 쓴 한 권의 책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나’만을 위한 여행이었다. 1년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는 나를 위한 여행. 그 후 한 살 더 먹은 나이만큼 한 뼘 더 성장한, 그렇지만 155cm의 작은 키는 여전한 그녀는 또 하나의 꿈을 꾸게 된다. 이제는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여행을 해야겠다고.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0
0

만화가 마영신은 『엄마들』작가의 말에 “엄마가 깔깔깔 웃으며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런데 작품의 모델이 된 엄마는 ‘깔깔깔’ 웃지는 못하실 것 같다. 『엄마들』를 조금 먼저 본 독자로 감히 예언을 한다면, 이 만화는 ‘완독률 100%’를 보장한다.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읽게 된다. 짧아서도 아니고 무작정 재밌어서도 아니다. 뒷장이 몹시 궁금하기 때문인데, 연유를 명쾌하게 밝히기가 또 어렵다.

 

『엄마들』은 남편 도박 빚만 갚다가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흘려 보낸 엄마, 일터에서 용역업체 소장에게 해고 협박을 당하는 엄마, 남자친구를 두고 꽃집 여자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엄마, 연하남과의 연애를 찌릿하게 즐기는 엄마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목차를 잠깐 미리 보자. ‘야한 수다’ ‘지겨운 애인’ ‘사랑의 1차전’ ‘사랑보다 돈’ 등. 우리가 보통 엄마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단어들과는 사뭇 다르다. 만화의 반전은 ‘작가의 말’에 있다. 눈치를 채는 독자도 있겠지만 ‘어? 정말이야?’하고 탄성을 지를 수도 있다.

 

마영신 작가는 『길상』『남동공단』등 주로 사회성 짙은 만화를 그려왔다.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연재한 만화 『삐꾸 래봉』으로 초등학생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다. 『엄마들』은 월간만화<보고>에 열 달 동안 연재한 작품이다. 만약 엄마들이 주로 보는 여성잡지에 『엄마들』을 연재했다면 반응이 어땠을까. 1982년생 젊은 작가 마영신을 만나 묻고 싶었다. “당신의 엄마는 이 만화를 어떻게 보았냐”고. 그런데 묻기도 전에 대답이 들렸다.

 

815A5889.jpg

 

 

'청소노동자의 연애'라고 하면, 안 보잖아요


“재밌게 읽었다”는 좀 약한 것 같고요. “읽기 시작하고부터 다른 일을 못했다”는 평이 맞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쇼킹하다”고 하더라고요.


쇼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들이 나이트클럽에 가고 아저씨들이랑 연애하는 이야기를 그렸으니까요. 저희 엄마는 책이 나오고, 눈이 빠지도록 몇 번이나 봤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내 친구들을 이렇게 그려 놓았냐고요. 엄마는 심각하게 보셨어요. 재미로 다가가긴 어려우셨던 것 같아요.

 

민망하신 걸까요?


민망한 느낌은 아닌 것 같아요. 애초에 엄마가 직접 써주신, 엄마 이야기를 기초로 했으니까요. 노동 문제는 엄마의 실제 경험담보다는 스케일을 좀 크게 넣었지만, 토대는 엄마 이야기예요. 퍼센트로 따진다면 50% 정도가 실화예요. 느낌, 정서, 알맹이만 뽑아와서 새롭게 그렸으니까 허구의 이야기인데, 독자가 리얼하게 느낀 장면이 있다면 그건 진짜예요. 엄마 말투를 그래도 따온 내레이션이 많아요.

 

엄마 이야기를 작품화할 생각은 언제 하셨어요?


서른이 되기 전이었던 것 같아요. 종로 노점상에서 신발을 팔았던 경험을 토대로 『길상』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심리적으로 좀 힘들었어요. 내가 만화가로 계속 살아가야 하나, 자괴감이 컸어요. 20대 때는 혈기가 많아서 발표를 못해도 혼자 작업을 많이 했거든요. 언젠가 책으로 내겠다는 생각으로 200쪽 씩 그리곤 했어요. 『엄마들』도 그때 그렸던 작품이에요. 집에서 독립을 해서 나갔는데,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할 때마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엄마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됐어요. 엄마가 주인공인 만화를 그리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70% 정도는 4년 전에 완성한 작품인데, 만화잡지 <보고>에 연재하면서 그림은 다시 그렸어요. 이야기가 좀 세니까 그림은 완전히 귀여운 그림체로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엄마께 노트를 건네며 “아들이 잘되길 바란다면 여기에 엄마의 인생과 친구들, 연애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달라”고 하셨어요. 만화를 끝까지 읽으면, 이 제안을 수락하신 엄마가 더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아요. 제가 대단한 게 아니라 엄마가 대단하신 거예요. 저는 선택을 한 거죠. 아들이 자기 엄마가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이트클럽에 가는 장면을 그리는 게, 얼마나 웃겨요? 웃기면서도 이상한데, 이게 가장 재미있는 포인트니까요. 엄마가 곱게 화장한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 남자와 춤을 추는 모습, 드러내기 싫었지만 이거야 말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단행본이 나오기까지는 약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엄마도 이 작품을 기다리셨을 것 같아요.


엄마가 출판사도 아닌데, 독촉을 하셨어요. (웃음) “야, 이건 언제 그리냐? 책은 나오긴 하냐?”고 궁금해 하셨어요. 그런데 막상 책으로 나오니까 마음이 복잡하신 것 같아요. 재밌는 느낌도 있고 감동을 받은 것도 있지만, 불편하신 느낌도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집안의 치부가 다 들어 있으니까요. 잡지에 연재할 때, 누나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형은 첫 장부터 웃었고요. 태도가 다른 것 같아요. 아빠께는 생신 때, “반성 좀 하시라”면서 드렸어요. 어떻게 보셨는지는 모르겠어요.

 

 

177.jpg

ⓒ엄마들

 

 

그림을 그리면서 머뭇거리거나 고민을 많이 한 장면은 없었나요?


딱히 없었어요. 나이트클럽 장면을 그릴 때는 좀 그렇긴 했죠.

 

반대로 기분 좋게 그린 장면은요?


표지 그림이요. 엄마가 남자친구 때문에 꽃집 아줌마랑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장면이요. 제가 실제로는 못 보고 형이 봤는데, 아줌마 눈빛이 워낙 셌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 우리 엄마가 그 아줌마랑 붙으면 질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엄마들』도 읽으셨대요. 엄마한테 문자를 보내셨더라고요. 평소에 제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작가님도 작품 속에 등장합니다. 주인공 ‘이소연’의 아들, 음악을 하는 철부지 아들입니다. 


이 작품이 작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오히려 감정이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작가가 등장했네’라고 재밌어 할 수도 있지만 거리감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주변에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내가 음악을 하면 저렇게 살았겠구나, 싶었어요.

 

청소 노동자 이야기도 꽤 비중이 큽니다. 이소연의 직업이 청소 노동자인데, 용역업체 소장에게 해고 협박을 당해요. 부당한 대우 때문에 노조를 만들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고요.


이 만화로 정작 제가 노린 건, 연애 안에 노동 문제를 집어넣는 일이었어요. ‘청소노동자의 연애’라고 하면 사람들이 관심 없어 하잖아요. 만화는 아무래도 20, 30대가 많이 볼 테니까요. 무의식적으로 노동 문제를 넣고 싶었어요. 정치적 관심이 없으면 좌우를 떠나 사회문제에 깊게 관여하지 않잖아요. “그 아줌마들이 너네 엄마다, 우리 엄마가 너네 엄마 친구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엄마 직장 일 때문에 노동복지센터를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재계약 갱신권을 알아보려고 갔는데, 엄마는 결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도, 소송을 하려면 변호사를 사야 한대요. 500만 원이 있어야 하고요. 진행 자체를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센터의 존재 자체가 뭐지? 의심되더라고요. 63세까지 일해서 어떻게든 국민연금을 받으려고 하는데, 그것도 어려운 거예요. 지금은 결국 잘려서 다른 데서 일하고 계세요.

 

293.jpg294.jpg

 

ⓒ엄마들

 

 

풍족하게 살았으면 이런 작품 못 그렸겠죠


전작 『길상』, 『남동공단』등도 작가님이 실제 경험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노점상을 할 때도 ‘아 이거 만화로 만들면 재밌겠다’ 생각했고, 하물며 장례식장에서도 작품 생각을 해요. 어떤 상황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느껴요. 너무 슬픈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니까, 어떨 때는 너무 괴로워요.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할아버지가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저만 봤어요. 좀 팔자 같아요. 만약 제가 좀 풍족하게 살았으면 작품이 안 나왔을 것 같아요. 『빅맨』은 아는 형이 들려준 이야기로 만든 만화예요. 주인공을 미대 교수로 설정하면 좀 더 재밌겠다 싶었죠. 남의 이야기를 들어도 진짜처럼, 내 이야기처럼 뻥을 칠 수 있는 능력은 있는 것 같아요.

 

『삐꾸 래봉』이야기도 좀 묻고 싶어요. 어린이 잡지<고래가 그랬어>에 연재했을 때, 초등학생 독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잡지를 받아 보면 제 만화 먼저 읽었대요. 특히 래봉이의 절친한 친구 ‘은철’이가 인기가 많았어요. 은철이가 못된 친구들을 때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엽서를 보내준 친구도 있었어요. 2년간 연재한 작품인데, 이 만화도 저 어렸을 때 이야기를 많이 섞었어요. 요즘 자살하는 아이들이 많잖아요. 정말 심각한 학교 폭력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작업을 하면서는 다시는 이런 내용을 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감 날짜가 다가오면 어서 빨리 이 우울한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왕따를 당하는 ‘래봉’이의 괴로움에 익숙해져 가는 저를 보고, 제 안의 폭력성도 느낄 수 있었어요. 연재 막바지에 가서야 래봉이의 감정에 몰입됐던 것 같아요.

 

현재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19년 뽀삐>를 연재하고 계세요. 장발머리 ‘병걸이’와 반려동물 ‘뽀삐’가 주인공이에요.

 
『엄마들』연재 끝나고, 거의 바로 시작한 작품이에요. 좀 쉬고 싶었는데 통장 잔고를 생각해야 해서요. 비공개로 블로그에 올리던 만화였는데, 준비 기간이 길지 않아서 초반에는 엄청 힘들게 그렸어요. 정말 제 작업의 원동력이 엄마인 게, 전세자금을 엄마한테 꿨거든요. 만약 엄마가 “전세금 너 다 줄 테니까 알아서 살아라” 하셨으면, “어, 땡큐”하고, 하루에 그림 한 장만 그리고 예술 놀이나 했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웃음) 벌써 30대 중반이 됐고 빚도 갚아야 하니까요. 사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도 많아요. 하지만 먼저는 좋은 만화를 그리는 거예요. 가난한 선배 작가들 보면 다들 같은 고민을 해요. 돈이 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정작 안 해요. 하려고 보니 안 되는 거예요.

 

요즘은 어떤가요? 그래도 쉴 틈 없이 만화를 그리고 계신데요.


좀 우울해요. 세상 돌아가는 게 좀 어렵잖아요. 돈을 조금 벌게 되도 책이 잘되더라도, 뭔가 우울해요. 사람들이랑 술 먹고 웃고 떠들 때, 그 때만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요즘은 책도 잘 못 읽어요. 만화 그리는 일에 너무 지쳐서요. 하루에 3페이지씩은 그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긴 소설은 잘 안 읽게 돼요. 대신 시집을 좀 많이 샀어요. 시인이 되고 싶어요. 며칠 전에 시를 다섯 편 썼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읽어보니까 형편 없더라고요. (웃음) 한 편 정도는 살릴 만하고요. 나중에 이름을 바꿔서 시집을 내도 재밌겠다 생각해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19년 뽀삐>가 끝나면 좀 쉬면서 중편 작업을 하나 하고 싶어요. 삐뚤어진 소설가가 주인공인 작품인데, 재밌게 그리면서 정치적인 메시지도 넣고 싶어요. 엄마가 지금 한남동 빌라에 사시는데, 좀 있으면 리모델링을 해야 하나 봐요. 팔긴 아깝고 리모델링 비용은 또 벅차고. 제가 엄마한테 “10년 동안 내가 5천만 원 줄게”라고 뻥을 쳤어요. 사실 1년에 5백만 원이니까 엄청 큰 돈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되게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는 돈으로 뻥 치기 싫거든요. 저는 40대, 50대가 돼도 만화를 그릴 거예요. 그 때가 되면 후배들이 저를 보고 쫓아오겠죠. “이런 작품을 해도 먹고 살 수 있네”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돈보다 작품성을 생각하고 작업하고 싶어요. 거대한 계획 같은 건 없어요. 내년에는 이 작품 그려야지,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 말고는 없어요.

 

815A5941.jpg

 

 

한 작품 하고 말 거, 아니잖아요


『미생』, 『송곳』이 TV드라마로 제작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어요. 만화가로서 어떻게 보시나요?


부럽죠. 작가가 그동안 고생한 작업에 대한 보답이 온 거잖아요. 작가는 비정규직이니까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없는데, 이렇게 한 번에 크게 들어오면 다음 작품을 할 때까지 여유가 생기거든요.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만화 자체로도 훌륭한 예술인데 2차 저작권이 팔려야 그 때 빛을 본다는 점이에요. 만화를 하고 싶어도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20대밖에 안 됐는데도 많이들 관둬요.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주면 좋은데, 작가주의, 대안만화 같은 건 성과가 빨리 뚜렷하게 나지 않으니까 다 하다 말아요. 장기적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요. 젊은 친구들이 만화를 하겠다고 꾸준히 나오긴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어요. 단편 몇 편 하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너무 좋아서, 만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선배로서 조언을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무조건 만화를 많이 그려야 해요. 개인 블로그에라도 올리는 게 좋아요. 작품이 좋으면 어디든 연락이 와요. 그렇게 데뷔하고 단편을 한 두 편씩 하다 보면 20대는 그래도 버틸 수 있어요. 작가로서 성숙하는 시간도 분명히 필요하거든요. 세상도 조금 알아야 자기 만화도 컨트롤 할 수 있어요. 시나리오를 안 써놓았더라도 자기 작업을 믿게 돼요. 단편을 여러 편 해놓으면, 분량이나 박자감을 조절할 수 있어요. 그런 능력이 쌓아졌을 때, 뿌리가 싶어져요. 요즘은 웹툰 하나만 해도, ‘작가님’ 소리를 들으니까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그러는데요. 금방 사라지는 작가가 되지 말고, 자기 철학을 갖고 좋은 예술작품을 보면서 공부를 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한 작품 하고 말 거 아니잖아요. 나중에 정말 위대한 작품을 그리겠다는 목표를 버리면 안 돼요.

 

특히 『엄마들』을 읽었으면 하는 독자가 있나요?


30대 초 중반 제 또래나 엄마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친구들이 제 만화가 나온다고 다 사서 보진 않거든요. 그런데 『엄마들』은 기다렸어요. 단행본 나오면 자기 엄마한테 선물하겠다고요. 친구가 이랬대요. “엄마, 내 친구 엄마도 연애하니까, 엄마도 숨기지 말고 연애 자유롭게 하라”고요. 옛날 분들은 많이들 숨기잖아요. 자식들한테도 미안해 하고요. 엄마들은 저희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연애하고 있어요. 엄마들의 연애를 적극 권장하는 만화로 이 책이 읽혀도 좋아요. 되게 화목해 보이는 집도 속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요. 옆집 보는 느낌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나만 이런 생각하는 거 아니구나, 엄마들도 이럴 수 있구나’ 하고요.

 

만화의 내용을 떠나서, 누군가 내 삶을 이렇게 가깝게 읽어줬다는 사실이 엄마에게는 특별할 것 같아요.

(웃음) 조카가 나중에 커서 이 만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 외할머니가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하면서 재밌어 했으면 해요. 저는 할머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거든요. 지금은 조금 불편하게 읽힐 만화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 시대의 엄마를 기록한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img_book_bot.jpg

엄마들마영신 글,그림 | 휴머니스트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그들의 사생활은 차라리 모른 척하고 싶은 치정멜로이기도 하고, 단단한 현실감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마영신은 엄마의 모성애와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거나 나이가 들면 삶의 지혜가 생길 거라는 기대를 유쾌하게 전복시키며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던 우리 시대 엄마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열며 폭풍 성장한 셰어하우스 우주의 이야기를 시작부터 현재까지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고 유쾌하게 전한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정의석 “죽음을 지켜보는 일, 나에게는 일상이다”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0
0

발 딛고 선 땅이 답답하고 지칠 때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잠시 ‘영혼에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다. 상상만으로 그러한데 두 발 열심히 굴려 진짜 다른 세상에 발 딛고 서면 어떨지. 시들었던 영혼은 방금 씻은 아이 얼굴처럼 말갛게 피어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행을 꿈꾼다. 여행을 떠난다. 길 위에서, 끊임없이 길 위에서 다른 나를 경험한다. 


이제는 ‘여행 작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손미나. 이번에는 페루였다. 그의 페루는 ‘치유’의 장소, “세계의 배꼽”, 깨달음을 준 곳, 그 모든 것이었다. 아프고, 바빴던 시간에 페루가 떠오른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만큼 간절한 일이었다. 페루에서의 한 달, 페루를 알게 된 손미나와 그렇지 않았던 손미나는 전혀 달랐다. 이제 그는 “마치 월급에서 저축할 돈을 떼놓고 사용하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휴식하는 시간을 만든다. “내 삶 전체에 대한 그림을 생각할 여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가는 주사”를 페루에서 맞고 왔다며 그는 맑게 웃었다. 


_IM_9684.jpg



이야기 나눌 의무


책을 내면 종종 “이거 정말 사실이야? 지어낸 얘기 아니야?”라는 말을 듣는다고요. 그럴 만한 이야기들이에요. 아무리 여행지라도 특별한 일이 매번 일어나진 않잖아요. 


네, 맞아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처음 책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이런 행운을 나 혼자 겪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게 있었거든요. 그런 의무를 운명으로 갖고 태어난 걸까, 생각했었어요. 내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쓸 때 많았거든요. 그래서 대학 시절 이야기를 꼭 포함시키고 싶었고, 책이 그렇게 된 건데요. 그 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행할 때마다 항상 그런 좋은 분들을 만난 거예요. 가끔은 신기할 정도로 먼저 다가가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가오고요. 굳이 조르거나 애원하지 않아도 자기 인생 얘기를 털어놓으니까 정말 신기해요. 그런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페루에서도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런 것들에 정말 감사해요. 하여튼 뭔가 제가 이 삶에서 행해야 하는 임무 중 하나 같아요.(웃음) 


특별한 사건들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이 참 운명적으로 느껴지네요. 


또 그런 것들이 쌓여서 저라는 사람을 또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겠죠? 소명이라고까지 한다면 거창하지만 어쨌든 그런 운이 따르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걸 혼자 독식하기는 싫고요. 사람들에게 세상에 이렇게 생각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것도 얻을 수 있다, 내 삶의 양식으로 삼고 성장할 수 있다, 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책을 쓰면서 인생이란 이렇고, 이래야 한다는 그 틀을 깨고 싶었어요. ‘인생학교’ 프로젝트도 마찬가진데요.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의 전부 같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안데스에 이런 사람들도 있고,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싶어요. 마음이 열리고, 사고가 열리고, 영혼이 열리는 경험을 나누고 싶은 거죠. 그런 일을 하라고 자꾸 그런 행운이 따르는 것 같아요.


생각만으로 사고가 열리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죠. 다른 삶에 대해 구체적인 모습으로 알게 된다면 훨씬 다른 삶을 상상하기는 쉬워지겠고요


맞아요. 심지어 몇 백 년 전에 있던 유명한 철학자의 말도 지금 우리 현실과 맞추기는 어려워요. 현재 실제로 살고 있는 나와 다른, 그러나 나와 또 같은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만큼 설득력 있고 호소력 있는 게 없거든요. 내 환경이나 배경, 높낮이를 다 떠나 완전히 내려놓고, 마주하고,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는 건 여행자 신분으로 떠나는 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압권은 그레고리와의 인연이거든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인연이었는데 다시 만나기 위해 애를 써요. 저자에게는 특별한 사건을 만드는 능력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좀 적극적인 면이 있죠. 맞아요, 그것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제가 그냥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건 아니고요. 저도 보고 어떤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다가가죠. 사실 쿠스코를 다시 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다시 가도 굳이 그 여행사에 가서 그레고리를 다시 만나겠다고 안 했을 수도 있고, 전화 기다리고 이런 것을 안 했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아니까 그도 움직였을 테죠. 상호작용이 있어야 해요. 


그레고리를 다시 만난 것도 굳이 설명을 하자면 어느 동네에 묵고 있다는 정도는 말을 했지만 그 시간에 교회에 있을 거라고는 말한 적이 없고, 다른 데 가려다 숨이 차서 그곳에 있던 것이고,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아 어정쩡하게 서 있던 건데 거기서 마주쳤어요. 정말 신기하죠. 


『스페인 너는 자유다』,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등 다른 여행기에서도 특별한 만남은 계속 있었잖아요. 책에 담지 못한 추억이 있다면 하나만 들려주세요.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에는 쓰지 않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만남들이 많았어요. 에피소드로 책에 담기에는 다른 스토리가 없어서 담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아르헨티나에서 큰 길에 서 있는데요. 제 앞에 택시가 멈췄는데 그 안에서 아는 사람이 내린 거예요. 그것도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요. 너무 놀랐어요. 알고 보니 그녀도 갑자기 티켓 프로모션이 있어서 계획하지 않고 그냥 비행기 표를 샀고,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님 마음대로 내려주세요, 했는데 제 앞에 내려줬다는 거예요. 진짜 그런 식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나는 것 같아요. 


페루도 마찬가지였죠. 친구 이야도 그곳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테말라에서 시간 많이 보내는 애고, 자기 인생 흐름에 따라 프랑스에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 시기에 그곳에서 만난 거죠. 그랬기 때문에 친구의 할머니나 가족에게서 좋은 얘기도 들을 수 있었고, 정말 특별한 마추픽추 여행을 할 수도 있었어요. 가이드나 길에서 만난 상인들조차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번 씩 각자의 삶에서 교차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걸 놓치지 않고 눈 여겨 보려고 하는 편이죠. 


세린디피티(serendipity)라고, 여행에서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행운 같은 것들을 믿게 되는 것 같아요. 


네, 맞아요. 


_IM_9677.jpg



그리움을 안고 떠난 페루


콘도르 장면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이었어요. 자연마저도 특별한 행운을 안겨 주던 걸요.


정말 놀라웠어요. 우주 비행체처럼 유영하잖아요. 날갯짓을 하지 않고 날아요. 연처럼 나는 모습이 정말 신기해요. 


책 제목을 수식하는 ‘그리움을 안고 떠난’은 콘도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 그 그리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롤로그에 적은 것처럼 아버지는 페루 여행의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됐어요. 짐을 꾸리기까지, 너무 바쁘고 사실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여행길인데 그걸 가능하게 한 거죠. 콜카캐니언에서 콘도르 보고, 하는 여행은 흥미진진하다기보다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고, 운이 따라줘야 하죠. 찰나의 순간이 몇 달, 며칠의 기다림을 지배하고 보상하는 순간인 거잖아요. 인내심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제가 말한 ‘그리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죠. 간절함이 없으면 갈 수 없는 장소들인 거예요. 결국 여행의 확실한 동기도 됐고, 여행의 재료도 됐고, 에너지였고, 여행의 이유와 목적이기도 했어요. 결국은 그 전부 다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그리움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안정된 빛깔이 되어서 제 마음에 담겨 돌아온 거죠. 


좀 더 평화로운 상태의 그리움인 거네요. 


어차피 성인들은 모든 걸 다 떨쳐내고 아기가 태어났을 때처럼 해맑은 얼굴로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없어요. 자기가 겪는 여러 경험들 중 괴로운 것, 고민하는 것, 슬픈 것, 좋은 것,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잘 품고 에너지 삼아 살아가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어떤 사람은 그걸 잘 살아나갈 수 있는 밑거름으로 승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걸로 인해 파괴되고 좌절해서 어긋나는 경우도 있죠. 그런 걸 다스리기 위해 가끔은 한 템포 쉬어주고, 여행지에서 마음을 정화하는 게 중요해요. 페루 여행이 좋은 게 그렇게 멈출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주거든요. 콘도를 보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며칠, 몇 시간, 그런 것들이 진짜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진짜 영혼에 바람을 불어넣는 느낌이 들었어요. 


왜 페루였는지 질문하며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저자가 나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해 사색하는 부분이 눈에 띄더라고요. 다른 여행지와 페루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다양성이죠. 페루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한 가지 색을 보고 가기에는 일단 지역적으로도 다른 곳과는 다르죠. 광활해요. 생각보다 굉장히 넓은 땅이거든요. 사람은 또 적고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정말 많은 것을 초월한 것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집합체 같은 그런 나라예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볼 수 있는 장소죠. 고산지대, 아마존, 사막지대처럼요. 그렇지만 고생스럽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겨낼 때 한 번 쯤 밟아야 하는 과정인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극한의 슬픔이나 괴로움,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체력적인 한계를 뛰어넘거나 음악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해요. 페루는 다만 육체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 아마존에 있는 나보다 더 큰 나뭇잎을 보면서 존재의 한계를 알게 되잖아요. 나무가 웬만하면 몇 천 년이 됐대요.(웃음) 그런 것들 앞에서 나를 겸손하게 하죠. 


페루의 독특하고 유서 깊은 문화도 크게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그곳은 음악, 악기, 춤, 문화 이런 것들이 공기 중에 녹아있어요. 짧은 역사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인데요. 진짜 음악을 매개로 신과 소통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자연과 문화, 이 두 가지가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나라 같아요. 아르헨티나만 해도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기 때문에 같은 남미라 해도 조금 역사가 달라요. 페루와 대적할 곳은 멕시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외의 다른 곳과는 깊이가 조금 다르죠. 세계의 배꼽이라는 표현을 했잖아요? 딱 중심 같은 느낌이에요. 지금 세계의 수도는 파리다, 뉴욕이다 하지만 사실 인류 역사를 모두 놓고 봤을 때 중심, 배꼽의 역할을 한 건 페루였던 것 같아요. 인류 역사의 보물 상자 같은 곳이라 한 번 다녀오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_IM_9739.jpg



자궁 안처럼 평화로웠다


페루에서의 감정에 대해 종종 ‘완벽에 가까운 평화로운 행복’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게 과연 어떤 걸까 궁금하면서 직접 들어보고 싶었어요. 


엄청난 규모 앞에서 특히 그랬어요. 돌 하나가 몇 백 톤이고(웃음),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광활함에, 도인에 가까운 사람들의 말까지 그랬죠. 하늘도 다르고요. 쿠스코가 하늘과 굉장히 가까운 느낌의 도시예요. 광활함과 푸르름의 깊이가 말로 표현이 안 돼요. 그런 것들에서 마치 엄마의 자궁 안에 다시 들어간 것처럼 평화로웠어요. 걸어가고 있지만 잡음, 잡생각 없이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자궁 안에 유유히 떠 있는 듯, 그런 편안함이 있었어요. 뭔가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느낌이요. 인류 역사의 고향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편안함이 있었어요. 다 괜찮다고 위로하는, 그런 치유의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것들이 그랬어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아주머니, 행복하세요?”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내 손을 꼭 쥔 채로 이렇게 말했다. 

“젊은 아가씨, 우리의 땀이 곧 우리의 삶이에요. 인생은 그런 거지요. 어디에서 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아요. 중요한 건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있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당신도 부디 행복하세요.”(92쪽)


시기적으로 ‘지금’ 이 사회에 살면서 페루라는 공간에 눈을 돌리는 것이 또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워낙 바쁘고, 다들 힘들어하는 사회니까요. 


그러니까요. 사람들이 너무 스트레스와 분노가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아무리 조절하려고 해도 점점 바빠져요. 내리막길을 달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발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런 상태가 됐어요. 지나친 경쟁, 스트레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줄 방법이 별로 없죠. 그렇지만 그것은 나라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명의 멘토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 스스로 치유해야 해요.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그런 분이 계신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페루에 가기 전의 나와 다녀온 후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나마 저에 대한 생각을 좀 바꿀 수 있게 됐어요. 브레이크를 조금 걸고 살아도 되는데 왜 이랬을까 하는 자기반성도 하게 되고요. 다녀온 후로 노력을 해요. 마치 월급에서 저축할 돈을 떼놓고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축할 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진짜 없는 게 아니고 돈을 다 쓴 다음 나머지를 저축하려니까 없다고 하는 거잖아요. 휴식도 마찬가지죠. 내게 주어진 시간에서 얼마만큼 휴식에 쓸 건지 원칙을 정하는 거예요. 이 시간만큼은 무조건 가족과 보낸다, 이때는 일하지 않는다, 이걸 정해놓고 나머지 시간을 조율해요. 회사를 만든 게 얼마 안 됐는데요. 페루 가기 전에는 어딜 가든 일을 안고 다녔어요. 지금은 주말에는 무조건 일을 놓고 가버리니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스스로 그런 장치를 만들어야 해요. 성인이 되면 아무도 해주지 않잖아요. 사실 80% 이상의 한국 사람들은 일중독에 빠져있을 텐데요. 내 삶 전체에 대한 그림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일 거예요. 이번 달, 올해 당장 이뤄야 할 목표만 있잖아요. 승진, 월급 인상 같은 것만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인생을 길게 보고, 그 안에서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거죠. 페루 같은 여행지가 그런 깨달음을 줬어요. 확실히 주사를 맞고 온 거죠.(웃음) 천천히 가는 주사를 말이에요.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케노피 투어를 결국 하게 됐어요. 그 외에 여행지에서 한 특히 나답지 않은 행동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어떻게든 안 되는 것도 해보고 그래요. 안 된다면 더 해보고 싶죠. 정말 호기심이 많아서 참지를 못해요. 모험적이라 남들이 안 하는 것, 위험하다는 것 해보는 걸 좋아해요. 정말 못하는 건 번지점프 같이 높은 곳에서 하는 건데 케노피 투어를 하게 됐죠.(웃음)  


치차(전통 방식으로 발효시킨 페루 서민 술)는 어땠어요? 


치차도 실체를 알고 나서는 먹기가 힘들었는데 결국 마셨잖아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이 책을 쓰고 있을 때였는데요. 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입에 넣고 씹는지 클로즈업으로 나오는 거예요. 안 보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들의 전통적인 것이니까 비아냥거리거나 폄하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생각이 들었죠.(웃음)


_IM_9630.jpg



내가 가야하는 길


활발하게 아나운서 활동을 하다가 변신을 시도한 순간에 지금의 손미나를 얼마나 예상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어떤 건 꼭 이루고 싶었던 목표였고, 어떤 건 하다보니 해야 할 일이구나 싶은 게 있는데요. 가령 ‘인생학교’의 경우 2008년 알랭 드 보통에게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제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돕긴 했었는데요. 요즘 하는 표현으로는 내 운명의 파트너를 모르고 자꾸 내 친구를 소개시켜주려 했던 거라고 하고 있어요.(웃음) 알고 보니 내 짝이었던 거죠.<허핑턴포스트>는 사실 제가 저널리즘 쪽으로 다시 돌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것은 그냥 저널리즘이라고 하기엔 뉴미디어고, 국내 매체도 아니잖아요. 제게는 글로벌 프로젝트라는 것에서 오는 매력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세상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일이기도 하죠. 


작가로서의 활동은 어떤가요? 


책 쓰는 일은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회사 그만둘 때도 앞으로 10권의 책을 쓰겠다고 했었어요. 여행기로는 이번이 다섯 번째고요. 어쨌든 중도 포기하지 않고 가고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기쁘게 생각해요. 아나운서 시절 제 동기들 말을 빌리면 “나는 10년 정도 열심히 하고 그만 둘 거야”라는 말을 가끔 했다고 하더라고요. 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던 것 같아요. 


손미나라는 사람의 색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잘 닦인 길을 가기도 하지만 남이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보려는 의지도 보이고요. 


고집이 세서 그래요.(웃음) 좋게 말하면 주관이 확실한 거고요. 다른 사람들 말에 잘 흔들리지 않아요. 페루도 <꽃보다 청춘>이 가서 간 게 아니라 제가 3년 전부터 너무 가고 싶어 했는데 희한하게도 영석PD가 갔더라고요. 그것도 좋았고요. 내가 가야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두렵고, 실패할 가능성이 있어도 저는 가는 편이에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못하고요. 


앞으로 어느 곳에 가고, 어느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세요? 


뉴욕은 그냥 대도시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있는 곳 같아서 가보고 싶어요. <허핑턴포스트> 일을 하면서 매력을 더 느꼈고요. 뉴욕이란 도시는 내가 누구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진대요. 저는 <허핑턴포스트>일로 뉴욕을 가서 그런지 그렇게 멋있는 도시가 없더라고요. 그 경험을 담은 책을 빠른 시일 내에 쓰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도 한 번 쓰고 싶고요. 중남미를 한 번 더 가서 머물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멕시코를 쓰고 싶어요.


소설도 쓰셨는데, 소설가로서의 꿈은 또 다르겠죠? 


나중에는 정말 소설을 쓰며 살고 싶어요. 좋은 소설을 써보고 싶고요. 처음 쓴 소설이 초보다보니 겁이 많아서 안전하고, 착한 소설이 됐어요. 필명을 써서라도 파격적인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긴 해요. 사이코패스 이야기나 아주 진한 사랑 이야기도 써보고 싶죠. 진짜 스케일이 큰 가족사 이야기도 써보고 싶고요.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이상하잖아요. 근본적인 면을 파고들어보고 싶어요. 첫 소설도 완벽하지 못한 현실 때문에 갈등을 겪는 모습을 넣고 싶었던 건데요. 또 쓴다면 완벽하지 못한 면에 대한 고찰을 하고 싶어요. 사람이 갖고 있는 이상한 면이 극에 달했을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관찰해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을 만나니까요. 책에는 좋은 사람들 이야기만 쓰지만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어서요.(웃음)


명함에 ‘교장선생님’이라고 적혀있는데요. 교장선생님이 그리는 ‘인생학교’의 모습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2008년 2월에 알랭 드 보통을 인터뷰하러 한 잡지사와 런던에 갔어요. 한 시간 약속한 인터뷰였는데 세 시간을 했어요. 너무 얘기가 잘 통했어요. 두 가지 테마를 얘기했는데요. 주요한 테마가 인생에 대한 것이었어요. 알고 보면 캠브리지를 졸업한 사람이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나 인생에서 하는 질문은 같고, 고민도 같아요. 똑같이 어렵잖아요. 박사 학위를 땄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고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늙는 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외로움은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죠. 알랭 드 보통이 이런 것들이 답답해서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는데 제가 박수를 친 거죠. 이후 교류를 하면서 ‘인생학교’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그 무렵 회사를 만들고, 알랭 드 보통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파트너를 찾고 있단 소식을 듣고 정식으로 제안을 했고, 결국 저희가 된 거죠. 


사람의 마인드를 바꾼다는 건 어느 곳에 고속도로를 뚫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잖아요.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건 인문학 강의가 아니고요. ‘영혼의 찜질방’이라는 표현을 해요. 일상이 아무리 안정돼 있어도 빈곤한 구석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을 위한 장소라고 보시면 돼요. 영혼을 시원하게 찜질해줄 수 있는 곳이니까요. 이곳이 사회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면 좋겠고, 그런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img_book_bot.jpg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손미나 저 | 예담
일생에 꼭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 신이 숨겨둔 마지막 여행지, 열대 우림과 사막, 바다와 고산 등 세상의 거의 모든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있는 특별한 장소. 페루를 수식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단순히 낯선 나라를 넘어 진짜 페루의 모습이 궁금한 사람들한테는 늘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자연과 삶 본연의 모습이 살아 숨 쉬는 페루, 그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반가운 여행 에세이가 예담에서 출간되었다.


[추천 기사]

- 야노 시호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 마인드C “메리가 더 망가져야 한대요”
- 김중혁 “픽션이 너와 함께하기를”

- 이연복 셰프 “왜 자꾸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냐고요?”
- 만화가 허영만 “나에게 커피란, 사랑할 수 없는 여인”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준용 카이스트 교수, 블록버스터 인생의 법칙

$
0
0

<수퍼맨 리턴즈>, <나니아 연대기>, <가필드>, <80일간의 세계일주>, <해피피트>. 이 영화들 사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해 높은 완성도를 이루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노준용 카이스트 교수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USC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노준용 교수는, 졸업 후 할리우드의 대표적 시각 특수효과 제작 전문 회사인 ‘리듬 앤 휴즈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며 CG 분야의 세계 최고 기술력으로 주목 받았다. ‘그래픽스 사이언티스트’로서 그의 역할은 디지털 아티스트들이 영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과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가필드>의 생생한 표정은 노준용 교수가 박사 학위 논문에서 제시한 기법을 활용해 만들어졌고, <나니아 연대기>의 웅장한 전투 장면은 그가 고안해 낸 ‘지형자동생성기술’을 통해 완성되었다.

 

이후 1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카이스트 교수로 변신한 그는 ‘스크린엑스(ScreenX)’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상업화하는 데 성공했다. 몰입형 극장 시스템인 ‘스크린엑스’는 상영관의 3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해 영상을 투사하는 기술로, 김지운 감독의 단편영화 <더 엑스>를 통해 최초로 공개됐다.

 

그 모든 이야기가 담긴 책 『틀을 깨려는 용기가 필요해』은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대학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했던 평범한 삼수생이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기회를 움켜쥐고 할리우드라는 치열한 생태계 속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 그 안에서 배운 가치와 철학이 녹아있다.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작품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엿보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5D3_2312.jpg



할리우드의 가르침, 권위는 삶의 방식에서 나온다


보통 ‘CG 전문가’라고 하면 영상과 이미지 작업을 떠올리잖아요. 그와 관련해서 오해를 받으신 적은 없나요?


그래픽이라고 하는 것이 아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공학적인 부분도 있거든요. 많은 분들의 경우에, 특히 한국에 계신 분들은 아트적인 이미지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픽을 다룬다고 하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하셔서, 초기에는 홈페이지나 홍보영화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어요(웃음). 그럴 때 저는 그래픽 사이언티스트로 활동했다고 말씀 드리죠. 아티스트 분들은 소프트웨어를 활용해서 창의력을 발휘해 작업을 하시는 거고, 그래픽 사이언티스트는 그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설명을 해드리면 대부분 엔지니어링도 그래픽 작업을 포함 되냐고 하시면서 신기해하시는 것 같아요.

 

대학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하셨던 경험이 있다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미국 명문대학교에는 어렵지 않게 입학하셨잖아요. 


대부분의 경우에 한국에서는 한 번의 시험으로 결과가 정해지잖아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동안의 성적표라든지 학생을 잘 아는 사람들의 추천서가 결과를 많이 좌우하는 거죠. 그래서 저를 쉽게 뽑아준 것 같아요(웃음). 당시에는 ‘이렇게도 뽑히는 거야?’ 싶어서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리 평상시에 공부를 잘했어도 시험 당일에 컨디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잖아요. 저는 두 번 다 시험 보기 전날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샜거든요. 그러니까 시험 볼 때 머리가 멍했죠. 다음날 성적이 굉장히 잘 안 나왔을 거라는 걸 느낄 정도였어요.

 

만약 한국에서 대학 입시에 성공하셨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계실까요?


굉장히 달랐을 것 같아요. 해방감 때문에 수업도 많이 빼먹었을 것 같고, 잔디밭에 누워서 대학생활을 만끽하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고등학교 때는 확실히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요. 대학만 가면 모든 걸 보상받을 거고, 그때 가서 원 없이 놀아보자고요.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을 가니까 전혀 그럴 수 없었죠. ‘한국의 시스템이 나를 못 알아 본 것이지 나는 뛰어나다’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수업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시간에는 도서관에만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힘들지 않고 재미있었어요. 입시를 위해서 공부할 때는 싫어하는 과목도 억지로 공부를 해야 되지만, 대학교 때는 적어도 내가 선택한 전공과목들을 공부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한국에 있었다면 우물 안 개구리였을 것 같아요. 미국에 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할리우드의 시각 특수효과 제작 전문 회사인 ‘리듬 앤 휴즈 스튜디오’에서 3년 간 근무하셨습니다. 책에서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보면, 한국의 회사들과 근무환경이 사뭇 달랐던 것 같은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회사 사장님이 미팅에 들어오신 적이 있는데요. 그때 직원들과 사장님의 태도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평상시에 복도에서 만나면 꼬박꼬박 인사하던 직원들이 사장님이 들어오셨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앉으실 자리도 없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사장님도 그냥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노트북을 꺼내시더니 본인 할 일을 하시면서 회의 내용을 들으시고요. 확실히 문화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사장님의 사무실이 크고 화려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렇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이 우습게 보이는 건 전혀 아닌 거죠. 인간적으로 굉장히 존중해 주게 되고요. 권위는 목에 힘을 준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삶의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시에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많이 느끼셨다고요.


우리나라에는 내가 옆 사람보다 잘해야 되고, 나 혼자 뛰어나야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잖아요. 미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성장할수록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아요. 논문이 됐건 어떤 일이 됐건 혼자서 만들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과 팀을 이루면서 해야 되거든요. 그럴 때 옆 사람과 경쟁하면 그만큼 잘 해내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여러 사람과 일을 함으로써 더 큰 일,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고요. 그런 것들이 생활 곳곳에 묻어있는 것 같아요.

 

책에서 말씀하시길, ‘리듬 앤 휴즈 스튜디오’에서는 기한보다 일을 빨리 마친다고 해서 칭찬을 받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제가 처음 일할 때 실수했던 부분이었죠. 결과적으로 보면 모든 일들이 정확하게 스케줄에 따라서 움직여야 되는 게 맞거든요. 정확하게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청사진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만약 누군가 일을 빨리 해버리면 공백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그것 때문에 전체 스케줄을 다시 또 바꿔야 되고요. 그래서 한 사람의 퍼포먼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전체의 퍼포먼스가 중요해요.

 

5D3_2386.jpg

 


<명량>의 김한민 감독도 탐냈던 기술 ‘스크린엑스’


<가필드>제작에 참여하셨던 경험은 굉장히 짜릿했을 것 같습니다. 직접 만드신 기법이 활용됐잖아요.


제가 그 기법에 대한 내용을 박사 논문에 쓰고 나서 ‘리듬 앤 휴즈 스튜디오’에서 일하게 됐는데요. 그때 ‘리듬 앤 휴즈 스튜디오’에서는 해당 기법을 구현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었어요. 저한테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고요. 그 영화가 <가필드>였어요. 그때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고(웃음) ‘내 논문의 기술이 이런 식으로 활용되고 있구나, 이 사람들이 내 논문을 읽었구나’라는 생각에 기분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이후에는 <가필드>의 얼굴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효율적인 조합을 찾는 게 저의 일이었어요.

 

‘리듬 앤 휴즈 스튜디오’에서 개발한 기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지형자동생성기술’을 꼽으셨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제작에 활용된 기술이죠?


‘지형자동생성기술’은 말 그대로 2D로 촬영된 지형을 3D 영상으로 자동으로 변환시켜주는 기술이에요. 블록버스터 영화에 나오는 대규모 전투 장면을 만들 때, 일단은 CG 캐릭터들dl 하나도 없는 배경 지형만 항공 촬영을 하거든요. 그건 2D 이미지들의 연속한 시퀀스인 거예요. 그 위에 3D 캐릭터를 올려놓으면, 배경에 3차원 정보가 없기 때문에, 바위가 있어도 뚫고 지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뒤에 있는 3차원 정보를 생성해야 되는데요. 아티스트들이 프레임마다 넘겨가면서 손으로 하나하나 3차원 지형을 만들어요. 그게 할리우드의 아무리 숙련된 작업자라고 하더라도 평균적으로 하루가 걸리는 작업이라고 하더라고요. 한 컷 당 하루가 걸리는 거예요. 한 컷의 길이가 보통 3~5초 정도니까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죠.

 

그 작업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 ‘지형자동생성기술’을 만드셨던 거군요.


네, 여러 수학적인 지식들을 동원해서 필요한 기구를 개발해준 거예요. 결국 수학을 많이 알고 있는 게 많은 도구를 들고 있는 것과 같거든요. 기술을 만들고 나니까 버튼 하나만 누르면 몇 분 후에 3차원 지형이 자동으로 생성돼서 나오게 됐어요. 생산성이 수십 배, 수백 배 향상된 거죠. <나니아 연대기>를 제작할 때 이 기술을 처음 개발했고요. 이후에 만드는 영화들에도 계속 쓰였어요. 그래서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김지운 감독의 단편영화 <더 엑스>를 통해 ‘스크린엑스’ 기술을 소개하신 바 있습니다. 작가님에게 당시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스크린엑스’ 기술을 개발한 것이 하나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에게 주어진 가장 큰 미션은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시각적으로 더 큰 감동을 받을까’라는 거거든요. 그 부분은 세 단계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어요. 첫 단계는 특수효과를 통해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쪽으로 연구가 진행됐어요. 그러다가 <아바타>가 입체 영화로 개봉이 되면서 전 세계에 입체 영화 열풍이 불었죠. 우리나라도 그 흐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입체 영화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을 개발했고요. 그때까지는 할리우드를 따라가는 모양새였어요. 그런데 ‘스크린엑스’ 기술은 아직 할리우드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훨씬 더 진보된 방식으로 영화에 몰입감을 주면서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끌어올린 거예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개발해낸 것이고, 반대로 할리우드가 따라오는 형식이 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의미 있는 기술 개발이라고 할 수 있어요.

 

김한민 감독도 <명량>에 ‘스크린엑스’ 기술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습니다.


‘스크린엑스’의 경우에는 몰입감을 주기 위해서 3면에 영상이 투사되니까 (촬영할 때) 카메라 3대가 필요해요.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방식은 스토리를 만들 때부터 카메라 3대가 촬영할 것을 감안하고, 그에 따라 연출하는 거예요. 여기에 CG 작업이 더해지면 가장 좋고요. 그런데 <명량>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스크린엑스’ 기술을 생각하지 못했을 때라서, 스토리를 만들 때 염두 해 두지 않았어요. 촬영이 끝나고 난 후에 ‘스크린엑스’라는 기술이 있다는 걸 알았고요. 그 상황에서 기술을 접목시키는 게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요. CG 작업을 통해서 옆면에 투사될 화면을 만들면 되거든요. 그런데 비용이 더 많이 드는 부분이 있고, 개봉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었기 때문에 많이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하지 못했죠.

 

<더 엑스>이후에도 많은 영화들이 ‘스크린엑스’ 기술을 활용했죠?


<차이나타운><검은 사제들>, 그리고 최근에는<히말라야>가 이 기술을 사용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영화들을 가지고 ‘스크린엑스’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봤다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지금은 시범단계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조금 더 발전하면 스토리나 연출부터 ‘스크린엑스’를 염두 해두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거든요. 예를 들면,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화면 앞에만 있는 게 아니고 옆면을 타고 관객의 뒤쪽에서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런 식의 새로운 연출 기법들이 가능해질 수 있죠. 추후에는 훨씬 더 재미있고 몰입감 있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책에는 제목처럼 ‘기존의 틀을 흔드는’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진정 즐겨야 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인데요. “궁극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 성공은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공을 하기 위해 개인의 행복을 자진해서 희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신 말씀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대학 합격이라는 하나의 목표만 성취할 수 있다면 초중고 시절을 모두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암흑기였던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었고요. 교실이나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한 기억밖에 없어요. 그런데 만약 제가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그 기쁨이 얼마나 지속됐을까요? 한두 달이 지난 후에는 당연한 것이 되고, 또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 고생하고, 또 한 번의 기쁨을 맞이하고, 이런 시간이 끝없이 반복됐을 거예요. 크게 보면 잠깐의 기쁨을 위해서 굉장히 긴 시간을 희생하는 삶이거든요. 그걸로 과연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진짜 중요한 건 한 순간 한 순간을 가장 재미있게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결과가 나빠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하는데 결과가 나쁠 수가 없잖아요.

 

5D3_2421.jpg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갖지 못한 것에 목말라 하라


“한국의 실정에서 경쟁력이 있는 분야를 새로 발굴하고 찾아내어 남들이 아직 시도하지 않은 연구와 기술 개발에 지속적으로 집중”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조금 아쉬운 부분이, 대부분의 연구나 기술 개발들이 추격형이 많아요. 선진국에서 하나 성공했다고 하면 그 기술을 따라가야 된다고 하는 거죠. 패턴이 항상 그래요. 선진국에서 무언가 나오면 ‘우리나라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 되냐’를 가늠하는 뻔한 리포트가 나와요. 그 속에서 우리의 기술력은 선진국에 비해서 항상 70~80%예요. 그리고 지금 해당 기술을 개발하면 5년 후에는 비슷해질 거니까 개발을 시작해야 된다는 정당성이 생겨나요. 그렇게 해서는 따라갈 수가 있어요. 선진국은 또 새로운 걸 찾아서 발전하거든요. 선진국이 어떻게 가든지, 검증이 되었든 안 되었든, 우리가 필요한 기술을 스스로 찾아서 개발해내야 돼요. 그런 기술을 찾는 게 세계를 선두 해 나가는 데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작가님께서는 다른 시각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전 세계의 소비자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한국적 소재로 콘텐츠 상품을 만든 후 세계 시장에서 잘 팔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생뚱맞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생산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만들어서는 소비자한테 어필할 수 없잖아요. 소비자가 좋아하는 물건을 만들어야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소비자들한테 널리 알려져 있는 물건을 만들어서 어필하고, 그게 익숙해져서 소비자들이 ‘저쪽에서 나오는 것들이 굉장히 좋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의 색깔을 조금씩 담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한국적인 것에 얽매여 있는 부분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서든 아리랑을 부각시켜야 되고 김치를 부각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건 성공한 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분일 수 있거든요.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들을 보더라도, 전 세계 사람들한테 어필할 수 있는 주제인가가 중요한 거지, 무조건 철저하게 자신들의 문화를 찾지는 않아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우수 인력이 해외에서 근무하게 되면, 국위선양이라며 반기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인재 유출이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국의 인재가 유출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큰 그림을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어느 위치에 있든지 결과적으로 한국에 도움이 되느냐, 또는 지구 전체에 도움이 되느냐, 개인에게 도움이 되느냐,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게 맞죠. 인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실리콘밸리의 70% 정도를 인도 인력이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인도 사람들이나 정부가 괴로워할까요? 아니거든요. 도리어 미국 내에서 인도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면 10년, 20년 후에 미국에서 인도계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할 수 있고요. 유대인들이 월스트리트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괴로워할까요? 절대 아니거든요. 결국은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거잖아요. 그런 관점으로 보면 능력 있는 사람이 세계 어느 곳에 가서도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해줘야 하고, 다른 나라의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 올 때 충분히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줘야 돼요. 그렇게 해야 궁극적으로 지구적인 관점에서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많이들 당황하시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일 때 그런 꿈을 밝히면 ‘좋은 꿈이다, 큰 꿈을 가졌구나’ 하실 것 같은데, 나이를 한참 먹은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 꿈이 아직도 안 바뀐 거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 가진 꿈이 있었다면 굳이 바뀌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세상 제일의 부자가 그 자체로써 대단하다기보다는, 내가 충분히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누구한테 방해 받지 않고 살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 있다는 게 좋잖아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는 관점이고요. 영원히 그 목표를 향해 갈 거예요. 하다가 중단하면 한 만큼 이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책의 마지막에서 ‘블록버스터 인생의 법칙’을 소개해주셨습니다. 15개의 삶의 기준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만 꼽아주세요. 


일단 ‘고압적으로 나를 대하거나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과는 가능한 거리를 두어라’라는 부분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나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과는 장기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최대로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모두가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누군가 나를 함부로 대한다면 용납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게 맞고요. 그 다음으로는 ‘경쟁은 과거 또는 현재의 나와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경쟁은 나의 현재 또는 나의 과거와 하는 것이지, 주변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거든요. 나의 현재와 과거보다 미래가 이기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과 최대로 협업해야 되는 거예요. 주변 사람과 경쟁하기 위해서 나의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가 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건 잘못된 거죠.

 

마지막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갖지 못한 것에 끝없이 목말라 하라’는 거예요. 제가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불행하거든요. 그렇다고 현재에 만족하는 데에서 멈춰서도 안돼요. 아직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서 계속 노력하면서 사는 게 나를 발전시키고 더 높은 자리로 갈 수 있게 하니까요.

 

 

 

img_book_bot.jpg

틀을 깨려는 용기가 필요해 노준용 저 | 이지북
청년 실업과 수저 계급론이 언급되는 가혹한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며, 어떻게 하면 한 번뿐인 인생을 신나고 재밌게, 그리고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는지 알려 준다.  힘든 오늘에 치이고, 내일이 불안한 사람들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도록, 성공에 휘둘려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도록 정리한 노준용 교수의 따뜻한 마음과 삶의 원동력을 공유할 수 있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건축가 황두진, 출퇴근 시간 줄여 삶의 질을 높이자

$
0
0

전세 난민이라는 말까지 등장하다보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됐다. 치솟는 전셋값을 감당 못하고 점점 직장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 수도권 지역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악다구니를 담은 뉴스가 연일 쏟아진다. 그럼에도, ‘뜬다’는 지역에는 빼곡하게 마천루가 올라가고 사람들은 빚을 낸다. 누구의 잘못이라 하기엔 문제가 너무 복잡하다. 건축가 황두진은 건축가가 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별 건물이 갖는 도시적 논리’를 따져본 것. 아파트 시대 이후의 대안으로 그가 내놓은 것은, 바로 ‘무지개떡 건축’이다.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이란 ‘중층고밀도주상복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최소 3단계, 건물과 길이 만나는 저층부와 사무실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중층부, 건물과 하늘이 만나는 상층부로 나누는 개념이다. 이 상층부에 거주 공간이 있어 직장과의 출퇴근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된다면 개개인의 삶의 질은, 당연히 훨씬 좋아질 것이다. “이것이 사회에 잘 뿌리내렸을 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해줄 거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그의 말에 지금과 다른 모습을 한 도시를 상상해본다. 그 ‘동네’는 무척 생기가 넘치는 곳일 것 같다.

 

815A1377.jpg

 

 

아파트 이후


최근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평균 시간이 2시간 46분이라는 보도가 있었어요. 책에서도 삶의 질을 확실히 높이는 방법은 출퇴근 시간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개념이 이 대목에서 특히 시사하는 바가 참 많습니다.


서울도 따지자면 출퇴근 시간이 1시간 40분 정도예요. 출퇴근 시간이 짧으면 최고겠죠. 통상적으로 교수, 평론가가 아닌 기성 건축가가 책을 쓸 때 몇 가지 방향이 있을 텐데요. 상당히 많은 분들이 건축에 대한 담론을 쓰시죠. 이번 책은 그런 책은 아닌 거예요. 어찌 보면 사회에 제안을 하는 거니까요. 어떤 분들은 그게 뜻밖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시는 것 같아요. 국내에 건축가가 제안하는 방식의 책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요. 저도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내용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 부분이 제 개인 경험이에요. 굉장히 특별한 경우긴 해요. 아주 극단적인 경우니까 이걸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경우가 갖는 나름대로의 보편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걸 추출해서 쓰려고 노력했어요.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여러 정책이나 사업들이 있죠. 문화센터나 공원을 짓는 식으로요. 그럼 뭐하냐는 거예요. 집에 가서 쉴 시간이 없는데요.(웃음) 어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든 하루에 출퇴근 시간이 30분에서 1시간까지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그 시간이 넘어갔을 때 10년을 더하면 거의 학위 하나 딸 수 있는 시간을 길에 보내는 셈이잖아요. 물론 그 시간이 완전히 무의미한 시간은 아닐 수도 있지만요. 문제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도시라는 것이죠. 그것이 이런 책을 쓰게 된 발단이었어요.

 

기성 건축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아요.


네 번째 책인데요. 저 역시 독자기도 하잖아요. 책을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느냐는 거예요. 이 책 쓰면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통계 등을 사용하긴 했지만요. 기본적으로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쓰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이것이 제가 현실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기도 했고요.

 

도심 공동화 현상 등에 무척 일찍부터 관심이 있던 이유가 뭐였을지 궁금하네요.


학교 때 도심 공동화에 관심을 가졌던 건 솔직히 말해 알고 보면 우리나라의 잘못된 학문적 문화 때문이었어요. 서울은 적어도 그때까지는 도심 공동화를 얘기할 정도가 아니었는데요. 보통 공부할 때 미국 책을 가지고 하잖아요. 미국 도시는 도심 공동화가 너무 심하니까 서울에도 이 현상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예요.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국 같은 상황은 아니었죠. 어쨌든 일단 그때는 범죄에 대한 생각을 많이 가졌던 것 같아요. 도심 공동화란 텅 비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위험해지는 거니까요. 이후 공부를 할수록 도심 공동화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란 걸 알게 됐어요. 도시 만들기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면 미국식, 유럽식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제 책은 유럽식 도시 만들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책입니다. 사실 미국의 도시 만들기는 배울 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자본이 도시를 만드는 방식에 불과하고, 에너지의 무한 소비를 전제로 한 것이 때문인데요. 게다가 지금 얘기하는 저성장 시대라면 더더욱 도심과 교외라는 사고방식에 기초한 도시 만들기는 현실적 의미가 약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무지개떡’ 개념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 같아요.


개별 건물이 갖는 도시적 논리가 중요하다고 봤어요. 단독 주택 그 자체가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인 유형인 건 맞아요. 거주자가 많지 않고, 토지 밀착형의 삶을 산다면 정말 아름다운 유형이죠. 그러나 도시에 직장이 있고, 인구가 많은 지역에 산다면 결국 그런 단독 주택은 도시를 끊임없이 수평적으로 키워 나가는,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인 거예요.


모두들 아파트 시대가 갔다고 말하는데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들이 제가 보기에는 다 답이 아니었어요. 이제는 단독 주택의 시대다, 하는 게 헤드라인으로 뜨기도 했는데요. 너무 사회적 관점이 결여된, 오직 개인의 관점에서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이었죠. 이것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개인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지 의문이 들어요. 대안이 무엇인지 얘기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했고요. ‘무지개떡’이라는 이름으로 강연을 하거나 짧은 글을 쓴 건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오다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815A1319.jpg

 

 

새로운 유형, 무지개떡 건축


‘비워야 쾌적하다’든가 건물에 공극이 많을수록 좋다는 이야기는 원래 우리 건축, 한옥에 많이 있던, 우리가 갖고 있었던 모습이에요. 의문점은 이것들이 왜 제거되는 방식으로 흘러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파트 이후 담론들이 사회적 맥락 없이 진행되는 이유도 궁금하고요. 이를 테면 건축적 마인드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건축가지만 냉정하게 얘기했을 때 건축가들이 그런 것에 대한 합리적인 관점을 제공했느냐에 대해서도 자신이 좀 없는데요. 왜, 를 생각하면 이건 비단 건축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사회 전체가 그렇게 사회적인 사고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고요. 그 중에서 건축은 미학이라는 너무나 좋은 출구가 있어요. 미학 이야기 자체가 즐겁고, 우리를 풍요롭게 해주잖아요. 그 얘기를 하면 모두가 행복한 거예요. 땅의 깨달음, 하면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관점만 갖고는 우리 현실이 갖는 여러 문제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힘들다는 거죠. 맞는 말이지만 좀 찬물 끼얹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건축 쪽에서는 좀 안 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아주 젊었으면 안 썼을 책이 아니었을까 싶어요.(웃음)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이게 문화나 사회적인 소프트웨어와 잘 결합해야겠죠. 이것이 사회에 잘 뿌리내렸을 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해줄 거란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생각을 나누고자 한 것이에요. 여전히 집을 짓는 것 자체는 상당한 경제적 부담을 주는 행위기 때문에 개인이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무지개떡 건축을 가장 잘 지을 수 있는 행위 주체라고 생각하는 건 현재로서는 사회적 기업 같은 것들인데요. 좋은 부동산 개발 주체들이 많이 나왔으면 해요. 개발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리 넓게 생각해도 제 영역은 아니기 때문에 상식선에서만 언급을 했어요.

 

개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이란 말씀에 공감이 돼요. 어쨌든 요즘은 개인의 주거 문제가 큰 화두고 그에 대한 논의도 많아지면서 협동조합 같은 방식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 안에서 ‘무지개떡 건축’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물론이에요. 이제 협동조합법도 만들어져서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인 것 같은데요. 협동조합 주택은 개발하는 방식, 소유하는 구조에 대한 방식이고, 무지개떡은 하나의 건축적 유형이니까 이 둘은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어요. 협동조합 역시 거주하는 분들이 100% 그 건물 안에서 자기 일을 할 수는 없겠지만요. 예를 들어 저층부에 어떤 상업 시설이 있고, 중층부에 사무실이 있고, 상층부에 여러 주거 세대가 있을 수 있는 건물이라면 그 중에 저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 자유직에 계신 분들은 건물 안에서 일을 할 수 있고요. 자기 사업체가 아니라도 그 건물에 있는 회사에 취업을 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봤을 때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에 아주 잘 어울리는 그런 건축 유형이죠.

 

핵심은 복합, 결합이네요. 책에서도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죠.


이것이 하나의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죠. 부동산을 전문으로 하시는 분이 이 논리를 받아들여서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지었을 때 보급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면 가장 좋겠어요. 그것을 사회적 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단순 개인의 집합체든 고민해서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된다면 굉장히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게 어떤 것이냐를 설명하는 데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알려져 있고, 잘 어필할 수 있는 건축물로 카사밀라(Casa Mila)를 생각한 거죠. 워낙 유명하면서도 아무도 그 건물을 이런 관점으로 보지 않았는데요. 들여다보면 보편적인 유럽 도시 주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든요. 이 관점에서 카사밀라가 아주 좋은 예죠.

 

부동산에 대한 생각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건축물, 토지가 부동산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다른 상상력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 같거든요. 사회가 부동산을 건축학적 시각으로 보는 게 어떻게 하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게 사실 제일 어려운 거예요. 일반 시민들이 건축가들처럼 조직화된 관점을 갖길 기대하기는 사실 힘들잖아요. 관심 갖고 살아야 할 분야가 이 사회에 워낙 많고요. 여러 분야를 기본적으로 알고 살아야 하지만 그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들만큼의 관점을 가지라고 하기는 어려운 거죠. 결국 이쪽에서 만들어서 전달해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시장에 통용됐던 부동산 상품 유형 중 건축가가 만들어낸 유형이 어디 있을까 물으면 사실 없다고 봐야 하거든요. 그 어느 것도 어떤 건물들이 도시 여러 곳을 점유하게 됐을 때 그 결과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도시일 것이냐를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 여전히 아파트는 1층을 못 팔아서 난리고요. 그런 점에서는 제가 한 번 세상에 유형이라는 걸 던져보자고 생각했던 거고요.


무지개떡 건축을 ‘중층고밀도주상복합’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주상복합이라는 용어 자체가 갖고 있는 오염된 느낌이 있죠. 우리나라에 바람직한 주상복합은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책에 몇 가지 사례를 들기도 했지만 건축적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아서 이런 걸 지으라고 얘기는 못하겠고 그래서 책 쓸 때 좀 답답했어요. 잘된 예를 보여드리면 참 좋겠는데 말이에요. 오히려 그 답답함이 이 책을 써야겠다고 분발하게 만들기도 했죠.

 

아파트를 ‘단지라는 섬으로 분절된 중세적 상황’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게 무척 인상적이에요.


여러 챕터 중 쓰면서 재미있기도 했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던 게 아파트 단지를 해체하면 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어요. 아파트 살고 계신 분들 입장에서는 아주 불편한 얘길 수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통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다시 말해서 도시는 건물 못지않게 거리가 중요한 거예요. 아파트 단지의 가장 큰 문제는 그 거리를 없앤 거죠. 건물과 거리의 관계가 없어지니까 단지 안에 들어오면 평화가 있는 것 같지만요. 실은 단지 내부의 모든 모순을 외부로 방출하는 시스템이죠. 모든 건물은 길과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지개떡 건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각론으로 접근하는 건 별로 효과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 도시가 좋아?’라고 물었을 때 주저 없이 ‘좋아’, ‘밀도가 좋고, 거기서 생기는 경제적, 문화적 활력이 좋아’라고 하면 이 사람이 거의 100% 도시인이거든요. 그 100%짜리 도시인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희 세대도 아니에요. 실제로 도시 출신이 아닌 분들이 대부분이고요. 이 책은 그런 도시인들이라면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도시인이 아니고, 이런 데 살기 싫다고 한다면 그만인 거죠.

 

도시 안에서 아파트라는 건축 형태도 이제는 역사가 꽤 됐잖아요.


아파트의 품질은 올라갔죠.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측면에선 그런데요. 하나의 건축 유형, 건축적 생각 측면에서 보면 한국 아파트는 7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가 훨씬 개념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요. 단지 내에 수영장 있는 아파트도 있었고요. 상가아파트들도 꽤 많이 있었거든요. 낙원상가도 주거층으로 올라가면 가운데 엄청나게 큰 중정이 딱 있고 벽면에 큰 부조가 있고 아주 멋있어요. 지금 그런 거 하나도 안 하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됐을까 생각했을까 하면요. 자기 집 안에서는 지금 형태가 최고였기 때문이에요. 남향이 좋죠. 개인의 행복이 늘어나는 게 사회적 행복까지 늘어나는 건 아니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아파트예요. 개별 유닛 안에서의 아파트 환경의 질은 아주 높아요. 그건 부인할 수 없어요. 편리하고, 햇볕 잘 들고, 경치도 좋고요. 그걸 모았을 때 형태라는 것이 군대 병영과 뭐가 달라요? 거기 사회적 가치가 없는 게 아파트의 가장 큰 비극이죠.

 

815A1335.jpg

 

 

엄청난 발상의 전환을 해야


친환경의 허상을 짚어낸 부분도 주요한 지적이에요. 도시가 오히려 친환경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이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죠.


국내나 해외 강연을 할 때 항상 강조했던 건 집합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는 거였어요. 개인적이고 단기적 관점에서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똑같은 공동의 목표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방은 180도 다르게 나올 수 있어요. 개인 입장에서야 마당 있는 단독 주택에서 사는 게 친환경적인 삶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죠. 집합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건데 그걸 받아들이는 게 참 쉽지 않은 문제예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게 다 틀렸다는 엄청난 발상의 전환을 해야만 받아들여지는 책이에요.


『도시의 승리』라는 책에서 그 얘기를 해서 반갑게 읽었는데요. 지금 중요한 건 도시 문제, 농촌 문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아무리 도시라 해도 시민 대부분이 교외에 살고, 건물이 다 단일용도 건물이라면 그건 그렇게 도시라고 하기 힘들죠. 어느 정도 평균적 밀도가 되고, 복합이었을 때 비로소 교외 인구를 다시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도시는 별로 크지 않게 유지될 수 있는, 그것이 소위 그린 시티가 될 확률이 높아지죠. 유독 뉴욕이 그 성격이 강해요. 뉴욕은 도심 공동화 거의 없어요. 시내에 사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복합 건축물도 굉장히 많고요. 노인들도 그 도시를 안 떠나요.

 

그럼에도, 도시와 친환경에 대한 논의가 결합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친환경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하나는 개별 건축물에 소위 친환경 성능을 높여주는 거죠. 이것이 물론 중요해요. 지열, 태양열을 쓴다든지 하는 방식이요. 당연히 중요한데 대부분 시장에서 친환경 논의라고 얘기하는 것들은 다 그쪽뿐이에요. 산업이니까요. 얘기한 것처럼 복합과 밀도, 두 관점에서 도시를 만드는 건 산업처럼 안 보이는 거예요. 하지만 이것이 갖는 친환경적 기여도는 개별 건축물의 성능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거예요. 굉장히 매트리스적인 효과가 있기 때문인데요. 결국 기업들이 움직여줘야 해요. 비즈니스적 체감이 태양열 패널 만들어 파는 것에 비해 약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두 가지 접근이 다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친환경 건축에 대해 얘기할 때 어떤 유형이 등장하는지 자세히 보면 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 유형으로 발표를 해요. 아무리 그렇게 해봐야 단독주택이 건축 유형일 때는 거기서 절약한 에너지를 다 사회적으로 소비해버리고 말 거예요. 아파트 같은 것에 어떻게 이걸 적용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훨씬 더 보람 있고, 좋은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얘기하는 건물들이 보편화된 도시에 살면 따로 헬스클럽 가서 운동할 필요도 없겠죠. 결국은 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구글에서 ‘서울시 옥상 면적’으로 검색하면 정말 재미있는 자료들이 나온다. 2015년 1월 9일자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서울시 전체의 옥상 면적은 166제곱킬로미터로 시 전체 면적의 4분의 1, 여의도(2.9제곱킬로미터)의 무려 60배 정도다. (중략)이렇게 계산을 해보면 한 가구당 47.4제곱킬로미터(14평)가 조금 넘는 숫자가 나온다.(121~122쪽)

 

도시의 밀도가 조금 더 높아져도 된다고 하셨는데 의아해하는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일어나길 바라는 현상은 서울을 비롯한 국내 도시들이 작아지는 거예요. 저밀도로 펼쳐 나갔던 것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면서 평균 밀도가 2.5층에서 5층 정도로 올라가고 다시 회복된 땅에서는 농업, 임업을 하거나 해서 생산하는 자연으로 해주면 우리가 도시 안에서 조금 과밀하게 살아도 인근에 자연이 있으니까 괜찮겠죠. 도시가 작아지는 게 지금 시대에서도 필요한 생각인 것 같고요.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좀 더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시급하게 요구됩니다.


지금 총량적으로는 건물을 지을 만큼 다 지은 사회고요. 인구도 거의 안 늘기 때문에 기존의 도시에 무지개떡 건축을 도입하는 방식 상당수는 아마 고쳐서 만드는 걸 겁니다. 개조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신축으로 이걸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라면 그게 평화로운 남북교류라고 생각해요. 교류가 일어나면 인구도 늘어날 텐데 그 인구를 이런 아파트에 수용할 수는 없다는 거고, 그때 이런 고밀도 복합 도시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그게 상당히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무엇보다 한국 상황에 맞고요. 전 세계 수많은 도시 중 우리처럼 이렇게 지형이 있는 도시는 별로 없어요. 때문에 옥상을 잘 활용하는 게 더군다나 말이 돼요. 옥상에 마당을 만들면서 거주자로 하여금 주변에 있는 산을 볼 수 있게 하고, 지붕 모양도 적절하게 공명을 줘서 마을이 모여 있는 것처럼 되면 그 지붕의 곡선이 멀리 산과 함께 만들어지는 풍경이 지극히 한국적이지 않겠냐는 생각도 해요. 지금 올라가면 다 깍두기 같잖아요. 저는 파주 헤이리 같은 곳도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게 계획도시를 만들면서 어쩌면 그렇게 지붕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 했을까 하는 거예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관점에서 옥상은 거의 전원에 대한 대안이다, 라는 거죠.

 

815A1407.jpg

 

 

처절한 현실 인식

 

집이 개인의 사적 재산 안에서만 인식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말씀하신 아이디어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긴 하잖아요.


인구 감소 현상이 곧 올 거예요. 자신이 사는 아파트 상당수가 미분양이고, 드디어 범죄가 들끓기 시작하고, 밤이면 인적이 끊어져서 단지 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해지게 되면 개인이 이 선택을 안 하면 안 되게 될 거예요. 유럽은 기존 주거 단지들에서 인구가 빠져나가 이걸 어떻게 하느냐가 온 사회의 큰 관심 중의 하납니다. 일본은 푸드 데저트(food desert)라고 해서 근처에 식료품 가게가 없는 지역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어요. 노인들이 장을 못 봐서요.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오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그쯤 되면 이것이 문화적 선택 차원이 아닌 거예요.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가 미래에 대해 너무 안이한 것 같아요. 항상 낙관적일 수가 없는데 말이에요. 그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닐까요? 인구 감소, 저성장 시대에 살게 됐을 때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 책은 사실 무지갯빛 환상은 아니고 굉장히 처절한 현실 인식이 있는 거예요.

 

실제로 저자는 ‘목련원’이라는 극단적인 ‘무지개떡 건축’에 지내고 계신데요. 장점 외에 단점은 없을까 궁금했었어요.


이 목련원은 제가 관리하기는 너무 커요. 저와 아내가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시간을 써요. 아직은 즐겁고 좋은데 저희가 훨씬 더 나이 먹었을 때도 이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은 못하죠. 여기는 마당도 있고, 너무 분산된 구조다보니 그런데요. 단일 건물이라면 한결 수월했을 거예요. 한편으로는 통념상 직장과 집은 멀리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그 ‘멀리’가 ‘너무 멀리’면 안 되는 거죠. 적당하게 심리적인 거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면 좋을 텐데요. 그것도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았던 소위 직장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획일적인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데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가 않아요. 직장이 새롭게 변화한다고 했을 때 지금처럼 직장이 그렇게까지 멀리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쓰고 나서 죽기 전에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 적어봤어요. 그때 생각하며 계획한 책이 제 첫 책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의 강남 버전이에요. 그 책은 주로 강북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거든요. 서초동 사무실 생활의 경험, 프로젝트하며 생긴 경험들이 있으니까 주변 지인들 얘기를 종합해서 강남에도 동네가 있다, 이것이 소중하다, 갈아엎고 그러면 안 된다, 는 얘기를 해볼까 해요. 아파트 단지가 동네로 작동한 이야기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img_book_bot.jpg

무지개떡 건축황두진 저 | 메디치미디어
저자는 도시 역사나 사회학 등 인문적 지식과 건축공학, 개인체험을 자연스럽게 오가면서 한국 도시만의 해법을 찾는다. 한옥 연구도 ‘다공성’, ‘중첩된 기하학’의 개념으로 등장한다. 서울대와 예일대에서 수학한 황두진은 2000년부터 독립하여 서촌 골목에서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해왔다. 2012, 2015년에는 서울특별시 건축상을 받았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태원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닌 나, 이현주

$
0
0

그는 울었다. 잠깐 울먹이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조심스럽게 이유를 묻자 남편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했다. 솔직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내던, 아이 같은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모습이 돌연 그렇게 바뀌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이현주라는 사람의 삶과 고민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남편의 알코올 중독, 대마초 흡연과 구속, 자폐를 가진 아들의 육아,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딸과의 생활을 다 지나온 그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 생활을 여전히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켜봐야 할 것은 눈물 쪽이 아니라 웃음 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현주의 폭풍 같은 삶을 담은 책의 제목,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는 체념처럼 들린다. 어쨌거나 살아내야 했던 삶을 지탱하려면 이런 체념의 정서가 생명줄이 될 수도 있을 테니.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것은 다름아닌 감사와 희망,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5D3_6136.jpg

 

 

알려주고 싶었다


솔직하게 적으며 치유가 됐다고는 했지만요. 아무래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어떤 결심이 있었던 건가요?


이렇게 다 얘기하면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어요. 솔직히 그래요. 그런데 제가 워낙에 많이 솔직해요. 이게 저한텐 이상한 일이 아닌 거예요. 적으면서 힘들거나 그런 게 아니었고요. 그냥 계속 발견을 한 거죠. 쓰면서 ‘맞아, 그때 내가 이랬구나’ 하면서 다시 한 번 발견하고, 힘들고 기억하기 싫어서 기억하지 않고 있던 거란 걸 발견했어요. 그것뿐이지 솔직하고자 해서 애써 적은 게 아니에요.


‘어떻게 이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어? 안 힘들었어?’ 하는 반응이 도리어 예상 외였어요. 특히 주변에 신부님들 많이 계시니까 염려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책으로 나오는 건데 이렇게 솔직하게 적어도 되냐고 반문을 하시는 거예요. 다 아는 얘기 아닌가(웃음) 해요. 저한테 그렇게 이상하거나 힘들거나 한 일은 아니었어요.

 

이 ‘솔직한’ 글을 남편 김태원 씨나 딸 김서현 씨도 읽었겠죠?


남편에게는 글을 쓸 때마다 바로바로 보여줬어요. 남편은 만약 아침에 글을 안 보내면 ‘오늘은 없어?’했어요. 너무 재미있다고 기다리는 거예요. 딸은 읽기 싫어했었어요. 딸 이야기 중 제일 처음에 쓴 게 유치원 계단 이야기였거든요. 사람이 행복했던 걸 먼저 생각하게 되잖아요. 서현이가 어릴 때 아이에게 큰 울림을 받았던 그런 장면을 먼저 썼고, 나중에 안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썼죠. 서현이가 자살 시도한 날, 그날 낮에 제가 서현이를 안아주지 못한 그 이야기를 쓴 거예요. 딸 이야기를 슬프고 아파서 쓰지 못하다가 안아주지 못해 미안한 이야기를 적고 저는 이제 준비가 됐나보다 생각했거든요. 그걸 정말 뒤로 미루고 미루다 막바지에 썼는데 그날 딱 일이 생겼어요. 그러니 사실은 그게 버틸 힘이 된 거였죠. 그 다음에 오는 이야기는 사실 책을 안 내려고 그냥 솔직한 일기 형식으로 쓴 거였고요.

 

맞아요, 글이 뒤로 가면 약간 달라지거든요.


완전히 달라진 이유가 책을 안 내려고 했었기 때문이에요. 날짜만 적고 일기로 썼어요. 그러다 다시 책을 내기로 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딸 서현 씨는 그렇다면 책으로는 아직 안 읽은 거예요?


안 읽었어요. 저는 특히 서현이의 자살 시도 이후에 서현이가 나오는 글을 꼭 봐야 한다고 했어요. 엄마가 염려가 된다고요. 그랬더니 자기 사적인 얘기 두 가지만 빼놓고 나머지는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남편과 딸에게 얘기를 했었어요. 설득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요. 우리가 아들을 키우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잖아요? 그런데 딸이 우울증을 겪으면서 시행착오를 또 겪었어요. 지금 세상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알려주고 싶더라고요. 병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기는 사고가 너무 많으니까요. 이게 병이란 걸 알면, 마음에 지독한 감기가 걸렸다는 걸 알면 좋을 텐데 그걸 인지 안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우울증을 알고 있는 것과 병이라고 인식하는 건 천지차이에요. 그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죠. 가족과 함께 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에 남편과 딸이 많이 수긍한 것 같아요. 심각한, 죽고 사는 문제니까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걸 확실히 알면 치료를 더 적극적으로 할 테니까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문제 등은 이제 큰 사회적 문제기도 하잖아요. 


필리핀 지인의 딸이 자해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 엄마가 자기도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는데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괜찮을 것 같다고만 하고요. 얘기를 했죠. 안 괜찮다, 약 먹어야 한다고요. 정신과를 가야 하는데 정신과 가는 걸 꺼려해요. 제가 가야 한다고 했어요. 나도 이런 일 있었다고 얘기해주고요. 결국 그 친구도 한국에서 서현이가 갔던 병원에 가서 약 처방 받아 왔어요. 병이란 인식을 해야 한다는 걸 너무 뼈저리게 느껴서 이야기를 쓰게 된 거예요. 이 책은 일반 독자 외에 장애인 가족 분들도 많이 읽을 테니까요

 

장애인 가족이 겪는 우울증이라는 게 또 중요한 부분이겠네요.


그렇죠. 아이는 안 힘들어요. 우리 아이 같은 지적 장애나 자폐 아이들은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사회에 대한 적응이 떨어지긴 해도 자기 자신은 행복해요. 그 아이를 키우는 주변인이 힘들죠. 그러면서 우울증이 오는 거거든요. 책에 아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괴롭히느라 힘들었다고 표현한 구절이 있는데요. 진짜 가족들이 서로 괴롭히느라 힘든 거죠. 제가 하는 장애인 가족 캠프가 바로 그거예요. 처음 이 캠프를 얘기하면 ‘장애인’만 생각해요. 아니거든요. 우리는 가족 치유 프로그램이라고 하죠. 그렇게 연결이 되는 거예요.

 

내 문제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주변을 계속 보는데요. 나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큰가 봐요.


우리는 이제 편안해졌으니까요. 편안해졌으니 알려주고 싶은 거죠. 그것도 성향인가봐요. 저는 맛있는 거 먹으면 주변에 맛있다고 얘기하고, 화장품 좋으면 좋다고 권하고 그래요.(웃음) 물론 그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요. 그게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삶을 선택하게 할 수도 있는 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하는 거죠. 그 뒤를 생각하면 못하죠.

 

5D3_6224.jpg

 

 

견디는 삶


책을 쓰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같은 거죠?


네, 책을 쓸 생각이 없었는데요. 결심을 하게 된 건 장애인 가족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예요. 장애인 가족 캠프에 아들 우현이가 장수초등학교 다닐 때의 특수반 선생님이 3년 동안 함께 해주셨어요. 그 선생님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제자들, 제자 가족들, 장수초등학교와 주변 초등학교의 아는 사람들이 캠프에 왔어요.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와도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무서운 문제가요. 한 번은 캠프에서 큰 사고가 있었는데요. 우리는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없잖아요. 그러니 사실은 캠프가 굉장히 위험하죠. 그런 게 너무 힘들어서 책을 쓰게 됐어요. 책이 나오면 강연도 갈 수 있잖아요. 장애인 부모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도 있는데요. 놀랐던 건 아이가 장애 있는 걸 가족들에게도 숨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김태원 씨가 자기도 아이가 장애가 있다고 얘기를 하니까 우리 가족을 보고 힘과 용기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질문이 한 시간 넘게 쏟아졌어요. 그때 용기가 좀 생기더라고요. 이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써도 괜찮겠다, 하고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 아들 장애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저는 힘들었죠. 지금도 힘들어요. 계속 무너지면서 이만큼 온 건데요. 이제 시작하는 분들은 무너지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한순간에 100%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빨리 받아들이면 편하거든요. 빨리 알면 아이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고, 아이도 바르게 클 수 있어요.

 

꼭 장애인 가족이나 주변에 장애인이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상식선에서 인식이 좀 더 생겨도 훨씬 상황이 나아질 테죠.


우현이를 키우면서 생각했던 건 진짜 나는 행운이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당연히 있었지만 우현이를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손을 빨리 놓을 수 있었던 거죠. 서현이가 가장 큰 수혜자라고 얘기하는데요. 보통 아이를 엄마 욕심으로 키우잖아요.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만 하지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죠. 저는 그걸 빨리 깨달았어요. 어떻게 해도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요.(웃음) 서현이는 내 마음대로 다 됐거든요. 엄마 이전의 제 삶에서도 자신감이 넘쳤고요. 안 되는 게 없다, 이런 스타일이었는데 아들이 태어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아예 안 쳐다보는데 뭐가 되겠어요. 우현이를 통해 그걸 너무 뼈저리게 체험하고 나니까 그 다음엔 부모로서 하는 것들도 바뀌었어요. 내가 장애 아이가 없더라도 부모로서의 자세 같은 것은 정말 얘기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아들 우현 씨를 키우면서 깨달은 기본적인 자녀 교육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거죠?


그렇죠. 언니한테 배운 첫 번째가 ‘천재가 아니다’(웃음)예요. 그걸 보고 나중에 나도 그래야지, 하고 간직을 많이 했어요. 두 번째는 ‘안 돼’, ‘싫어’라는 말 안 하기로요. 제대로 된 자녀 교육이 되려면 우선 부모 교육도 중요한 것 같아요. 더 나아가서는 그런 얘기까지도 하고 싶더라고요.

 

책을 쓰는 도중에도 일이 또 터지곤 했잖아요. ‘이게 뭐지?’, ‘이건 또 뭐지?’ 했다고요. 정말 지칠 법도 한데 어떻게 이런 꿋꿋함을 갖고 있을까 싶었어요.


견디는 거예요. 죽을 순 없으니까요. 견디는 거지 특별한 힘이 있는 건 아니에요. 두 달 간의 여행에 대해 썼는데요. 왜 가려고 하는지 모르고 떠났지만 다녀와서 글을 쓰게 된 거고, 그러고 보니 내 모습을 돌아볼 힘과 용기가 생겼던 거죠. 솔직하게 쓰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내 모습을 다시 봐야 하는 게 두렵고 힘들었던 거니까요. 그 치유된 힘으로 또 서현이 일을 견딘 거고요. 도미노처럼 쓰러질 수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견디도록 저를 이끌어준 것 같아요. 그래서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는’ 거죠.(웃음) 저는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사람이에요. 신앙 생활이 없었다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이런 얘기는 김태원 씨가 들으면 서운하겠는데요.(웃음)


제게는 남편이 전부였거든요. 김태원 씨가 나의 우주였어요. 그래서 김태원 씨가 나를 더 사랑해줬나보다 생각이 들어요. 그 얘기를 어제 남편에게 했더니 김태원 씨가 “그랬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아 있었지” 하더라고요. 안 그랬으면 자기도 죽었을 거라고요. 자기가 없으면 이현주가 죽을 것 같아서 자기가 더 열심히 살았대요.(웃음)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남편한테 많이 미안했거든요. 용서하지 못한 시간이 길었어요. 남편을 원망했지만, 많이는 할 수 없었던 게 저한테 너무 잘해줬으니까요. 그 고마움이 너무 크니까 감히 화를 낼 수가 없었어요. 정신병원에 있을 그때요. 그 상태로 10년이 흘렀던 거죠. 이렇게 화가 나 있었는데 몰랐다고 이번에 와서 남편에게 얘기를 했어요.

 

며칠 전 평소 태원 씨와 형 아우 하며 지내는 수사님을 만나 요즘 우리의 심정이 어떤지 이야기했다. 많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진 못하겠지만 수사님의 폭풍의 언덕에 대한 해석이 일품이었다. 폭풍에 다 씻겨 내려가고 나면 우리 몸과 마음이 다시 정화되어 정돈될 거라고, 그 폭풍의 언덕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해석이었다. (중략)서현이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듯 우울증의 끝이 어딘지 알 길이 없다. 우현이의 자폐증도 알 길이 없어 그저 기다려온 세월이 우현이 나이 만큼이니 적어도 그만큼은 버틸 수 있으리라 믿자. 잘 자고, 잘 먹고, 잘 견디자.(170쪽)

 

눈물을 흘리셨는데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남편 생각만 하면 제가 요즘 울어요. 많이 미안해서요. 남편은 저한테 산소 같은 사람이에요. 없으면 내가 죽는데 그걸 모르고 있던 거죠.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당연한 게 아닌데 말이에요. 남편한테 더 잘해줘야 하는데 맨날 통보나 하고 말이에요. 남편은 미안해서 그런 거거든요. 결혼해서 잘살고 있으니까 그만 미안해도 되겠지 했는데 딱 아들이 태어나서 미안할 일이 또 생겼잖아요. 저는 그걸 알고 이용한 거죠. 연애할 때 대마초, 약, 이런 것 때문에 미안해했다면, 결혼해서는 아들 때문에 미안해하는 걸 제가 아니까 내 마음대로 하고 다닌 거죠. 허락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고마웠죠.(웃음)

 

이런 이야기를 다 따라가다보니 제목이 참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제목은 사실 이해인 수녀님이 지어주신 거예요. 수녀님이 추천사를 써주셨는데요. 미리 원고를 보시고는 “제목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나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가 좋겠다”고 얘기를 주신 거예요. 처음엔 제목이 ‘네버 엔딩 스토리’였는데 그 제목이 너무 흔해서 못했고요. 새로운 제목을 원했는데 마침 수녀님이 그 제목을 짚어 내신 거죠. 다들 제목이 좋다고도 하셔서 만족해요.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아마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신기하리만치 어떤 순간들이 다음 순간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면들을 보면서요.


저는 항상 보이지 않는 힘, 신앙의 힘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요. 제가 필리핀에 가게 된 것도 그렇고, 세례 받은 이후의 삶도 그렇고요. 신앙을 갖게 되면 여정이 있어요. 걷기로 표현을 하면 계속, 끊임없이 걸어가는 거예요. 쉬지 않고 말이죠. 계속 걸어가는데 그러면서 성장을 하거든요. 그 과정은 따로 배워서가 아니고, 정말로 나는 기도밖에 한 게 없어요. 기도도 그렇게 열심히 한 게 아니고요. 그렇지만 어쨌든 하나님 안에서 살려고 했더니 그걸 알아서 해주시더라고요. 10년을 느낀 거예요.

 

5D3_6261.jpg

 

 

사랑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이현주라는 한 인간의 성장기로 읽을 수 있어요.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엿볼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그 순간들을 저는 힘들다고 생각 안 했던 것 같아요. 폭풍의 언덕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을 때나 그런 말을 한 거죠. 남편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었을 때라든지 그럴 때요. 그 외에는 그야말로 그냥 버틴 거예요. 특별한 생각을 안 한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정말.


그러니까요. 어떻게 그렇게 지나왔나 몰라요.(웃음) 김태원 씨 사랑이 있었으니까, 누구보다도 더 사랑을 해줬으니까 가능했겠죠. 우리는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가 무슨 생각하는지 느낌이 와요. 말 안 해도 알고요. 그러니까 싸울 일이 없어요.

 

부모님이 이렇게 안정적으로 신뢰를 구축하고 있는 모습이라면, 자녀들에게도 그 에너지가 전달될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딸 서현이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엄청날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잠시 어려운 시기가 있었죠. 엄마가 안아주지 않고 밀쳐내고, 아빠와 떨어뜨려놓고요. 제가 아들 우현이에게 집중하는 시기에 아빠와 서현이가 돈독하게 갖고 있던 걸 제가 필리핀을 떠나면서 완전히 다 없애버린 거니까요. 그래서 서현이가 힘들어지기 시작한 거거든요. 혼자 남겨진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요. 저는 서현이에게 또 이렇게 얘기해요. 그것 때문에 네가 가사도 쓸 수 있고 그런 거라고요. 소용없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요. 힘들었던 것들이 또 예술가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6학년 때부터 작사, 작곡을 했으니까요.

 

정말 대범한 엄마네요. 딸에게 네 상처도 네게 의미가 있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엄마가 얼마나 될까요.


저희 엄마가 대범하셨어요.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자신감 있게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제가 그런 것 같아요. 아빠가 같이 스케이트 타고, 영화 보러 가고, 놀이동산 가고 그랬어요. 방학 때마다 늘 그러셨는데 그런 영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그 전에 남편 곁에서 겪어온 것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어주지 않았을까요? 연애 기간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제가 처음 남편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었느냐면 “태어나서 자기 주변 사람들처럼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은 처음 봤다”고 했어요.(웃음) 그러면서 전혀 알지 못한 다른 쪽 세상을 본 거잖아요. 한 마디로 음지를 많이 본 거죠. 진짜 남편 옆에서 너무 이상한 일들을 많이 봤어요. 그러면서 그런 강단 같은 게 생기기도 했겠죠. 10년 연애 동안 일어난 일 중 책에 적은 건 정말 만분의 1 정도예요.

 

그런 경험이 자녀 문제에서도 큰 작용을 했군요.


아이를 키울 때 그게 굉장히 좋게 작용을 많이 했었어요. 화를 내지 않는 부모가 된 거예요. 이해의 폭이 커지니까요.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하고요.(웃음) ‘그럴 수 있다’가 기본적으로 있으니까 화를 안 내는 거예요. 그게 많이 성공한 것 같아요. 오히려 아이가 더 명심하고요.

 

다시 태어나도 같은 선택을 하며 살까요? 문득 궁금하네요.   


결혼을 한다면 김태원 씨와 할 거예요. 더 좋은 사람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삶을 선택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른 행복하게 보이는 삶이 또 뭐가 있을까요? 다른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솔직하게 말하면 수도자가 되어보고 싶어요.(웃음)

 

앞으로도 장애인 가족에 대한 꾸준한 계획이 있으시죠?


장애인 가족 드림센터 같은 걸 설립하고 싶어요. 지금 제가 가장 하고 싶은 건 그거예요. 지금 하고 있는 장애인 가족 치유 캠프뿐 아니라 상담 치유라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아요. 그런 것들을 한 센터 안에서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치유 받고, 쉴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고요. 쉼터, 심리치료실, 놀이실 같은 것도 만들어놓고요. 그게 만일 교육적으로, 정책적으로 가능하다면 좀 더 확산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하고 있는 대로 가지만 이런 캠프가 전국에서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전주 교육청에서 1년 기획으로 장애인 가족 프로그램을 만들었더라고요.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거였거든요. 내가 하고 있는 걸 다른 곳에서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몰라서 못해주는 경우도 있으니까 알리고 싶어요.

 

강연도 많이 해주시면 좋겠네요.


억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원하는 곳이 있다면 강연을 많이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태원 씨를 많이 이용해야죠.(웃음) 얼마 전 공연에 아들이 함께 올랐어요. 좋아서 그런지 우현이가 자꾸 오바를 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렇게 자꾸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이 보여줘서 인식 개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보려고 해요.

 

 

 

img_book_bot.jpg

모든 순간이 이유가 있었으니 이현주 저 | 알에이치코리아(RHK)
가족은 늘 함께해야 할까?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가족 때문에 아프고, 가족 때문에 지친, 그래서 죄책감마저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이다. 힘이 들 때는 각자 마음 놓을 자리를 찾아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가까워지기도 한 이 가족의 이야기가, 가족이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하는 요즘 시대에 가족의 의미를 찾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윤영삼 “번역은 목적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
0
0

실용서 제목이 난해하다. 『갈등하는 번역』이라니. 번역가의 고뇌를 말하는 듯하나 실상 정확한 표현이다. 저자 윤영삼은 “원칙과 규범을 의심하라”는 말로 독자들의 귀를 세운다. 번역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점은 “글쓰기나 번역하는 데 원칙은 없다”는 말이다. “규칙 같아 보여도 무조건 믿지 말고 의심하라”고 당부한다. 사소한 처방, 혼란스러운 규칙들만 좇으면 글쓰기의 본질적인 기능을 잊기 때문이다. 윤영삼 저자는 번역은 ‘목적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왜 번역을 하려고 하는가’를 잊으면 독자와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은 ‘번역 실무에서 번역 이론까지 번역가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 하나, 번역에 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읽어도 꽤 유용한 책이다.

 

『갈등하는 번역』의 저자 윤영삼은 2003년부터 출판번역 프리랜서로 나서 인문서, 과학서 등 4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2007년부터는 출판번역가를 양성하기 위해 번역 강좌를 해오고 있으며 출판기획, 편집, 저술, 강의, 기술번역 등 번역과 관련한 여러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151222-윤영삼_IMG_9278.jpg

 

 

직역과 의역으로 이야기하면 답이 없다


제목 때문에 책이 더 눈에 띄더라. 실용서 느낌이 아니다.


책의 감수를 해주신 라성일 선생님이 지은 제목이다. 너무 인문서 느낌이 있지 않나 싶었는데, 오히려 제목 때문에 반응이 좋은 것 같다. 번역하는 분들이 글을 쓰거나 책을 쓰면, 대개 문장구성을 갖고 형태구문, 물주구문을 비교하거나 한국어다운 글쓰기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실질적으로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이다. 이론을 설명하다 보니, 실제 번역한 글의 사례를 많이 찾았다. 예시로만은 이해가 안 될 것 같아, 번역 실전 노하우도 정리했다.

 

번역을 10년 이상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수자와 함께 책을 썼다. 왜 감수를 받았나?


아무리 번역을 오래한 사람이라도 오역은 피해갈 수 없다. 또 번역을 하다 보면 익숙한 표현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 『갈등하는 번역』은 내가 번역을 한 게 아니라 번역을 가르쳐주는 책이기 때문에 내용의 정확성을 위해 감수를 받았다. 아이디어를 내고 집필을 시작하면서, 감수자 라성일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구성도 바꾸고 목차 배열도 다시 정리했다. 선생의 날카로운 피드백과 평가 덕분에 저술 작업이 1년으로 늘어났지만 훨씬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었다.

 

편집자가 직접 책을 쓰면, 왜 저자가 이렇게 고집 부렸는지를 그제야 실감한다고 한다. 번역가의 경우는 어떤가?


(웃음) 번역을 한다고 해서 책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번역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 생각이 좀 없어지는 것 같다. 역자 후기라도 쓰려고 하면 너무 힘들다. 직업에 타성이 좀 있는 것 같다. 책을 준비하면서 ‘내가 정말 책을 쓸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시간을 투자한 만큼 결과물을 제대로 내고 싶었는데, 어쨌든 끝까지 썼다. 작가가 번역가보다 훨씬 힘든 직업인 것 같다. 스스로 어떤 구상을 하고 아이디어를 찾아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창작은 작곡, 번역은 연주’라고 비유하는데, 이 책에서는 번역은 ‘목표 독자를 바꾸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번역가는 작곡가는 아니다. 지휘자 또는 연주자가 맞다. 모차르트 작품을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연주가 달라질 수 있는데, 변주를 하는 게 곧 번역가의 역할이다. 책에서 직접 언급은 안 했지만, 내가 번역을 다른 시각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건, 스코포스 이론과 번역행위 이론이다. ‘스코포스’는 그리스어로 ‘목적’이란 뜻이다. 1980년대에 나온 혁신적인 번역 이론인데, 번역을 기능주의적으로 본 관점이다. 번역 이론은 성경 번역부터 시작해서 2,000년 이상의 번역 역사가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번역을 말할 때는 항상 ‘직역이 좋냐, 의역이 좋냐’로 평가했는데 이것으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직역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번역가의 글을 보면 의역이 수두룩하다. 반대로 의역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의 번역을 보면 직역이 많다. 직역과 의역으로 이야기하면 답이 없다. 번역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 조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서문에서 ‘원칙과 규범을 의심하라’고 했다. 숱하게 강조되어 온 번역의 원칙들에서 모순을 발견했다고 지적했다.


번역가의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 역시 어떻게든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계속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번역을 계속해보니 금쪽같은 조언들이 답이 아니더라. 20년 이상 번역 일을 해온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니 너무 체계가 없는 거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꿀 수 있다는 방법을 제시해놓았는데, ‘왜 이렇게 번역할까?’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해 번역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통해 ‘번역의 목적성’을 발견한 것인가?


번역이 사회적 행위, 곧 커뮤니케이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수신자가 이해하느냐 못하느냐, 아닌가? 텍스트 하나하나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메시지의 목적이 중요하다. 이미 번역학에서는 소개됐지만 거의 이론적인 차원에서 그쳤다. 번역가들에게 매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론인데, 번역학도들만 알고 있으니 안타깝다. 번역을 연구하는 분야로 들어가면 깊이가 상당하다. 언어학 이론부터 시작해 기호학, 번역철학 등 상당히 방대하다. 사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번역가들도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번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래서 책을 쓰게 됐다. 번역을 단순히 한국어답게 옮긴다는 의미를 넘어, 번역가가 과연 무슨 일을 하는지, 번역의 의미를 말하고 싶었다.

 

현업에서 느끼는 딜레마 중 하나가 “원작에 오류가 있거나 문제가 있을 때 그대로 번역할 것인가, 개입하여 개선할 것인가”라고 했다. 해답은 행위 참여자들의 ‘목적’을 고려해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저자와 번역자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딜레마가 될 수 있겠지만 여러 번역 행위 참여자가 원하는 번역 결과물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번역은 번역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번역을 하겠다는 출판사가 있어야 가능하다. 원작의 판권을 사오고 번역을 의뢰하겠다는 결정이 있어야 번역이 발생한다. 또 이 과정을 진행하는 건 편집자다. 어떻게 책을 만들고 번역하고 교정해야 하는지, 그 큰 협업 과정 속에 번역가가 있다. 번역가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번역가 자신의 어떤 기준으로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

 

번역을 하다 보면, 수많은 어휘를 선택하기까지 고민을 해야 한다. 이 또한 목적성을 염두에 두고 선택해야 할 텐데.

 

이 어휘가 텍스트 전체에서 무슨 역할을 하느냐이다. 그런데 대개 독자들은 원문만 놓고 번역문을 판단하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번역은 다 오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역일 수밖에 없는 번역을 왜 지금까지 계속 해오고 있느냐다. 답은 번역의 효용성 때문이다. 번역은 원작을 100% 보여주지 못한다.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소통을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어느 정도는 의미가 손실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번역자가 의미를 보충하기 위해 첨가하는 부분이 있다. 여러 중재 작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서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어떤 의도로 왜 번역했는가’다.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번역문인가가 중요하다. 원문을 그대로 옮겼는데, 번역문 자체가 안 읽히면 문제가 된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 효과도 예상해야 한다.


물론이다. 독자가 이 글을 읽었을 때, 이렇게 표현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가?도 번역가가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인터뷰도 번역과 비슷하다. 녹취를 풀 때, 정확한 문장을 쓰고 싶지만 그러면 인터뷰이의 말투나 개성이 살지 않으니까 고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편집자도 그럴 거다. 편집자 입장에서는 정확한 맞춤법을 따르고 싶은 욕구가 있고, 저자는 자신의 문체를 살리고 싶어 한다. 독특한 말투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이 말투를 통해 메시지가 잘 전달되면 살리는 게 낫다. 하지만 그 사람의 습관이나 언어능력 때문에 자꾸 나오는 어휘라면 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번역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그동안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자국어로 바꾸는 것만 번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로만은 독자를 바꾸는 개념을 이야기했다. 성인판으로 나온 책을 아동판으로 바꾸는 것도, 장르를 바꾸는 것도 번역이라고 말했다. 이 개념으로 보면 인터뷰도 번역이다.

 

151222-윤영삼_IMG_9261.jpg

 

 

왜 또 번역을 했는가가 중요하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다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번역을 택했다. 왜 하필 번역이었나?


학생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과제, 보고서 같은 글을 써도 재밌었고. 이런 내 취향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여러 일을 찾던 와중에 번역 강좌를 듣게 됐다. 33살 때였던 것 같다. 우연히 신문에서 번역 강좌 광고를 보고 수업에 등록했다. 번역가가 되려도 들었던 건 아니다. 당시 웹디자인도 배웠었다. (웃음) 그런데 수업을 듣다 보니, 나도 번역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결단했다.

 

대개 인문, 과학 분야의 책을 번역했다.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자기계발서부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필명을 사용했다. 번역에는 꽤 긴 숙련 과정이 필요하다. 번역 학원을 몇 개월 다녔다고 번역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초보 번역가에게 원고를 맡기는 건 모험이고 손해다. 대개 기술번역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번역가 이름을 표지에 넣지 않는다.


번역 문화 자체가 다르다. 관습과 규범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번역의 윤리』를 쓴 미국의 진보적인 번역 이론가 로렌스 베누티는 이탈리아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좀 안 읽히게 번역한다. 왜냐면 미국은 워낙 번역을 안 하는 나라이고, 모든 게 자국어로 쓰여있다 보니 번역자에게도 원래 영어로 쓴 문장처럼 번역해달라고 요구한다. 로렌스 베누티의 지적은 이 문제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모든 세상의 중심을 미국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렌스 베누티는 다른 나라도 다양한 문화가 있다는 걸 일깨워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약간 부자연스럽더라도 원문을 그래도 갖고 온다. 번역의 목적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요즘은 잘 읽히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문학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출판하는 사람이라면 대개 문학을 지향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편집자나 마케터도, 지금은 자기계발서를 내는 출판사도 궁극적으로 문학을 하고 싶어 할 거다. 번역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출판 번역에 있어서는 보통 처음에 어떤 분야를 시작했느냐가 끝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하나의 출신성분인 거다. 문학을 번역한 사람은 계속 문학을 번역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불만이 있다. 인문서나 실용서 번역가들 중에 더 문학적으로 뛰어나고 정확하게 문체를 살리는 분들이 있는데 문학으로는 넘어가기 힘든 문제가 있다. 번역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없기 때문이다. 번역 작품이 목적에 맞게 잘 번역됐는지, 구성을 잘 맞췄는지 등 체계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평가가 없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이유다.

 

번역 논란은 언제나 있다. 작년에는 앵거스 디턴의 경제서 번역 왜곡이 한국 출판계 이슈였다. 결국 출판사는 다시 번역해 책을 재출간했다. 번역가로서 이런 논란이 끊임없이 나올 때, 어떤 생각을 하나?


요즘은 인터넷에서 웬만한 원문을 다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오역 문제는 더더욱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책마다 경우는 다르지만, 원문을 놓고 누가 더 번역을 잘했냐고 비교하는 건 번역에서 중요한 논의가 아니다. 물론 텍스트가 중요하지만 가장 결정적이지는 않다. 중요한 점은 번역을 한 의도와 번역된 결과물이 우리 사회에 초래하는 문화적 영향이다. 번역가가 어떻게 해석했는지,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려고 했는지, 어떤 변형을 가했는지 등을 전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이 단어를 어떤 단어로 바꾸는 게 더 옳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번역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는 필요하겠지만, 일반인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용 전체를 보고 단어의 기능을 판단해야 하는데, 문장 하나, 단어 하나로 평가하니까 우리나라 번역은 엉터리라는 말이 나온다. 또 번역가들 역시 자기의 번역을 방어할 수 있는 논리가 없으니까 숨어버린다. 어떤 의견을 제시할 공간도 없고. 결국 번역이라는 사회적 역할이나 번역가의 지위가 계속 축소되는 결과만 낳는다.

 

그동안 번역한 책 중에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아본다면.


2010년에 출간된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는 그 당시, 내가 가진 번역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책이다. 언어학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번역학도 깊이 연관된 작품이라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목은 직역했다. 원제가 『Don't Sleep, There Are Snakes』인데, 아마존 원주민의 굿 나잇 인사다.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잘자요”라는 의미다. 2011년에 번역한 『가족의 심리학』도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토니 험플리스의 책인데, 소통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많이 등장한다. 조사가 많이 필요한 책은 아니었지만, 실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화로 바꾸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고전 같은 경우, 여러 번역서가 있다. 독자가 책을 고를 때, 어떤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누군가 이미 번역을 했는데, 또 다른 번역서가 나왔다면 이유가 있는 거다. 왜 또 번역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때문에 번역 행위의 목적성을 갖고 번역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다. 번역가 스스로 목표 의식이 뚜렷하면 번역문 자체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번역가들의 번역의 변을 밝히는 공간이 없어 판단이 애매한 경우가 있지만, 여러 판본이 번역된 경우는 이 점을 따져 봐야 한다.

 

꼭 번역가가 아니더라도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팁들을 책에 소개했다. 모호한 명사구를 만드는 ‘의’만 줄여도 훨씬 깔끔하고 한국어다운 글을 찾아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번역가들이 너무 잦게 사용하는 관용 표현이나 자제해야 할 조사, 단어 등은 무엇이 있나.


표현 자체가 거슬리는 건 아니다. 어떤 어휘든 글의 맥락에 딱 맞게 들어가면 거슬리지 않는다. 우리가 글을 쓸 때 무수한 외래어를 사용하는데, 이를 테면 통찰가라는 단어를 두고 ‘visionary’라는 영어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는 낯선 단어를 굳이 왜 썼을까?를 따져보면, ‘통찰가’라고 표현하면 독자들이 ‘아, 통찰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 그치지만, ‘visionary’라고 쓰면 그 낱말에 주목하면서 단어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말이든 목적이 있어야 한다. 독자가 이 문장에서 무엇을 인식할 것인가, 어떤 건 술술 넘어가게 하고 어떤 걸 걸리게 만들 것인가. 이게 중요하다. 번역 강좌를 진행할 때, 항상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글쓰기나 번역하는 데 원칙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효과를 생각해야 한다.

 

번역가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일단 자기 글을 많이 써보는 게 좋다. 원문이 있으니까 번역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목적 의식이다. 원작을 왜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하는가, 왜 이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는지 스스로 인지해야만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하려면 일단 자기의 목적, 자기의 목소리에 관해 고민해야 한다. 또 피드백도 받아야 한다. 피드백을 받으려면 자기 일기를 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공표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목소리를 다듬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을 많이 연습하는 게 좋다. 그러다 보면 어휘 선정이나 문장 구성 등 여러 측면에서 민감해진다. 이 자체가 책을 읽든, 번역을 하든 모든 과정에서 도움이 된다.

 

 

 

img_book_bot.jpg

갈등하는 번역윤영삼 저 | 글항아리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번역 강의 수강생들이 번역한 예문이 앞서 나온 후 저자가 무엇이 잘못 번역되었는지 또 무엇이 잘 번역되었는지 지적한 다음 번역 이론과 함께 추천 번역문이 이어진다. 번역계에 막 발을 디딘 초보 번역자들 혹은 번역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이러한 구성을 취하였지만, 수많은 번역문을 읽고 다루어야 하는 편집자나 외서 기획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손미나 “페루, 다 괜찮다고 위로해줬다”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양재진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 안 돼요”

$
0
0

두 남자가 만나 여자에 대해 말한다. 남성의 시각에 치우친 표피적인 이야기가 오갈 거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이 둘이 만나면 다르다. 한의사 이경제와 정신건강전문의 양재진, 그들은 현대의 2040 여성들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연애, 결혼, 섹스, 일과 가족, 외모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고민들, 심리적 신체적 병리 증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아우른다. 이름하여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2040 여자들을 향한 돌직구 인생상담’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책 속의 이야기들은 부지불식간에 훅 하고 폐부를 파고든다. 날카로운 시각과 거침없는 입담으로 정평 난 저자들이니 낯설 것은 없다. 그들은 명쾌한 진단과 냉정한 조언을 들려준다.

 

서른에 접어들며 ‘안녕하세요’만큼이나 ‘결혼은 왜 안 하셨어요?’라는 질문을 많이 듣는 여성들에게 “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미혼 남녀 또는 비혼(非婚) 남녀를 괴롭히는 것일까요?”라는 문제제기는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함을 안겨준다. 모성애라는 단어로 포장된 희생을 강요 받는 여성들은 “모성애는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견해에는 남성 우월주의의 가부장적인 시각이 깃들어 있어요”라는 말 속에서 통쾌함을 맛본다.

 

반면 “외적인 변화를 통해 타인의 관심과 칭찬을 받는 건 일시적으로 만족감과 우월감을 줄 수 있겠지만 자존감을 높여주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라는 조언은 뜨끔하다. 외모만 달라져도 조금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던지는 말에 상처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이들에게 “너무 소심하고 내성적이라서 말을 못 하겠다고요? 그럼 지금처럼 상처 받으며 사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살짝 숨을 고르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그 사실이 아프게 가슴을 찌르는 까닭이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두 저자는 한국의 2040 여성들이 숱하게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들려준다. 공감에서 시작돼 위로와 성찰을 거치며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현대 여성의 삶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여성은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151230-양재진_IMG_9621.jpg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 안 돼요


두 분이 함께 책을 쓰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경제 원장님은 <황금알>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알게 됐어요. <동치미>에도 같이 출연했고요. 이경제 원장님은 한방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분이시고, 저 같은 경우는 치료법에 정답이 있기보다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거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지 않나 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 부분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이 책은 사회적인 현상, 특히 우리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여성이나 삶의 돌파구를 잘 찾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쓰게 됐어요. 정신건강의학과적인, 그리고 한방적인 관점에서 서로 다르게 이야기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현대의 여성들이 직면해 있는 문제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다고 생각하세요?


과거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인권이나 권익이 굉장히 올라갔죠. 그렇다 하더라도 남녀평등지수로 보면 여전히 후진국이거든요. 세계 140여개국 중에서 90~100위권이에요. 물론 과거 서양의 경우도 심했어요. 지금도 결혼하면 성이 없어질 정도니까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건 더 심할 수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여권의 신장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변화가 왔거든요. 길면 100년, 짧으면 수십 년 사이에 서서히 변화가 왔는데 우리나라는 불과 20~30년 사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그러다 보니까 권리와 파워를 쥐고 있었던 남성들이 볼 때는 당황스러운 거예요. 달라진 여성의 권익 앞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 많이 느끼면서 여성들에 대한 공격이 강해졌던 것 같고요. 여성들의 입장에서도 급격한 변화 속에서 목소리를 내다보니까 조금 과격하게 표현이 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아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가정 내에서 생기는 문제들도 간과할 수 없겠죠.


이제는 경제적인 이유로도 맞벌이를 해야 되는 세상이 됐고요. 여성이 자아실현을 위해서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가져야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남자들의 마인드가 그걸 못 쫓아간다는 거예요. 결국 일을 하는 여성들은 남자들에 비해서 이중고 삼중고를 겪는 거죠. 직장에서 일도 해야 되죠, 가정주부로서의 일도 해야 되죠, 거기다 아이 양육도 책임져야 되는 상황까지 돼버렸거든요. 남자들도 과거보다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고 하지만, 사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권력이나 파워 중의 일부분을 내어준 건데,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그걸 조금 얻은 대가로 훨씬 더 많은 부담과 책임이 늘어났어요.

 

외모와 관련해서도 압박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압축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건 황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 그런 것들인 것 같아요. 외국이라고 해서 그런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요. 남한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터치 하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평가나 잔소리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좋게 이야기하면 정이라고 하는 오지랖에 거미줄처럼 얽매여있고요. 그렇다 보니까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아요. 예를 들면 회사나 조직 내에서 나의 옷차림에 대해서 평가해도 아무도 항의를 하지 않거나 할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너 요즘 살쪘어’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허용되는 문화고요.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직장에서 가정에서 해야 할 역할도 너무 많은데다가, 거기에 더해서 자기 관리를 해야 돼요. 예쁘거나 날씬하지 않으면 사회적 패배자가 되는 것 같은, 혹은 약간의 잉여가 된 듯한 느낌을 받도록 만들거든요.

 

상당수의 워킹맘들은 아이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합니다. 여성들 스스로가 모성 신화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결혼을 한 후에도 일을 하려면 남편과 시어머니가 허락을 해야 된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거죠. 남편이 결혼한 다음에 집안일은 안 하고 일을 하겠다고 해서, 그거에 대해서 부인이나 장인어른이 허락한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잖아요. 사회적인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내가 인생의 1/3을 차지하는데 그걸 왜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결정을 내리나요? 그러다 보니 결혼하고 일을 하는데 남편이나 시댁의 눈치를 봐요. 허락은 받지 않아도 된다 하더라도 눈치가 보여요. 아이까지 낳으면 양육도 부인이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리죠. 집안 살림도 부인이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었던 집이니까요. 당연한 걸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죄책감이 생기는 거예요.

 

그 죄책감 때문에 ‘얼마나 더 벌겠다고 아이도 돌보지 못하면서 이렇게 사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월 250만원을 버는 워킹맘이 아이를 돌봐주는 아줌마를 고용했고, 그 분 월급을 드리고 나니까 20만원이 남았어요. 그러면 남편이 ‘얼마나 남는다고 일을 하냐, 직장 그만둬라’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그 비용은 남편과 아내가 반반씩 부담하는 게 정상적인 거예요. 아이가 태어나면서 드는 돈이잖아요. 그러면 부인이 일을 해서 벌어온 돈 중에서 130만원이 남는 거죠, 20만원이 아니고요. 그런데 많은 남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을 안 해요. 그러면 부인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기에 쫓아가요. 집안 살림과 양육이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맞벌이를 한다면 집안 살림의 책임은 반반이에요. 그리고 무슨 동정녀 마리아도 아니고, 아이를 혼자 낳은 게 아니잖아요. 남편하고 같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건데,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면 반반씩 부담해야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 모성 신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요.

 

일부 남성들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요(웃음).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절대 아이한테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해요. 지나친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엄마들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허용적이 될 가능성이 커요.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안 써야 될 돈을 쓸 가능성도 크고요. 그래서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 하나도 안 돼요. 남편이 자기 자식과 가정을 생각한다면 부인이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만들어 줘야 돼요.

 

151230-양재진_IMG_9589.jpg

 


왜 ‘골드미스터’는 없는 걸까?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골드미스가 아니면 다 쭉정이냐’는 푸념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연 ‘골드미스’의 범주에 드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라는 거예요.


말씀하신 대로 3040 미혼 여성이 100명 있다면 골드미스의 객관적 기준에 해당되는 분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골드미스라는 것도 결국은 기성세대 혹은 남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만들어낸 거거든요. 옛날에 나왔던 올드미스를 미화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올드미스터나 골드미스터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결국 남자들의 시각인 거예요. 여자가 스물다섯이 넘어가면 어떻고 서른이 넘어가면 어떻고, 그거 다 남자가 여자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고 나름의 평가를 내리는, 굉장히 되먹지 못한 말들인데요. 그걸 여자들이 사용한단 말이에요. 골드미스에서의 골드가 의미하는 게 뭘까를 생각해 보면 남자가 바라볼 때 쓸 만하다는 거예요. 저 여자는 값어치가 있어, 아직 쓸 만해, 라고 평가를 내리는 말이 골드미스인 거죠. 여자가 주체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골드미스가 아니라 ‘커리어우먼’ ‘사회적으로 능력 있는 여자’ ‘독신을 즐기는 여자’라는 표현이 나와야죠. 남성적 시각에서 바라본 잘못된 단어나 개념을 여성들이 활용하지는 않는지, 그걸 가지고 여성들끼리 너는 골드미스냐 나는 쭉정이냐 하고 싸우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안타깝죠.

 

왜 결혼 안 하는지, 왜 애를 안 낳는지, 묻는 것에 대해서 “관심과 걱정이라는 미명 아래 마구 던지는 사적인 질문은 언어폭력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결혼이라는 건 오롯이 개인의 선택이거든요. 필수가 아니에요.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결혼을 하고도 어른이 아닌 사람은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결혼을 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결혼하고 나면 왜 아이를 안 가지냐고 물어보고, 첫째를 낳고 나면 둘째는 왜 안 낳느냐고 물어보는데, 아이를 못 갖는 불임부부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만나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아이를 가지지 않냐고 물어보는 게 언어폭력인 거예요.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아이를 낳았건 안 낳았건, 그걸 물어 보는 건 굉장한 실례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관심과 사랑이라고 포장된 오지랖이 있어요. 사실은 그렇게 관심도 없어요. 그냥 인사치레예요. 그런데 하루에도 여러 번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엄연한 언어폭력이죠.

 

그런 질문을 받는 사람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죠.


사람이 혼자 태어나서 혼자 살아가요. 그러다가 누군가를 만나서 가정을 꾸린다는 건 그 사람 인생에서는 패러다임 쉬프트예요. 혼자 사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왜 결혼하셨어요?’ 라고 물어보는 게 맞는 거예요. 예전의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언어폭력입니다’라고 말하다가 요즘에는 결혼하셨냐고 물어봐요. 결혼했다고 하면 왜 결혼하셨냐고 물어보고요(웃음). 대부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죠.

 

책에는 다이어트와 성형 중독에 대한 고민도 등장합니다. 이런 문제의 바탕에 낮은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자존감이에요. 그런데 ‘내가 바라보는 나’ 이외에도 ‘남들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나’가 있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가 있거든요. 대부분은 자기가 가진 시간과 노력과 열정과 돈의 많은 부분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에게 쓰고 있어요. 그런데 타인이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에게 현혹되지만, 대화를 해보고 몇 번 만나다 보면 그 안에 숨어 있는 ‘내가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제일 투자하고 신경 써야 하는 건 ‘내가 바라보는 나’인 거예요. 그런데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 속에 숨어 있는 ‘내가 보는 나’가 들킬까 봐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를 더 키워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외모에 있어서는, 성형 중독이나 다이어트죠.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이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가 커지면 외적인 변화도 따라와요. 성형수술보다 더 그 사람을 달라 보이게 만드는 게 표정이에요. 스스로한테 자신이 있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감 있고 행복감이 충만한 표정을 짓는데, 그 표정보다 더 좋은 성형수술은 없어요. 자존감이 높다는 건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키워야 될 건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고요. 자존감을 제대로 키워 놓는다면 남들이 뭐라 하건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거죠.


그 외에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할까요?


외모 이외에 다른 걸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겨갈 수 있도록 무언가를 하는 건 필요해요. 남들이 외모에 대한 지적을 하는 거에 대해서 내가 신경을 덜 쓸 수 있게 하는 거죠. 나의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서 더 부각시키면 돼요. 단점으로 꼽히는 외모만 가지고 힘들어하지 말고요. 그러려면 나에 대해서 많이 알아가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관계 속의 나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요. 남편으로서 부인으로서 아빠로서 엄마로서 자식으로서 형제로서, 그 관계 속에서의 나는 많이 생각하는데, 본연의 나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신의 장점, 단점, 성향에 대해서 알아가는 작업들이 필요하고요.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것도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 있거든요. 어떤 부분을 바라보고 부각시키느냐는 내 몫인 거죠.

 

<렛미인>에 출연하시면서 목격하신 바는 어땠나요? 달라진 외모만으로 자존감이 높여지는 건 아니었나요?


사실은 <렛미인> 시즌 1 때부터 출연자 선정을 할 때마다, 프로그램을 통해서 외모가 변하는 게 본인 인생의 로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조건 반대했어요. 외모의 변화가 하나의 계기가 된다든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외모가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건 굉장히 좋은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렛미인>에 선정만 되면 모든 게 다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반대했어요. 외모라는 게 변화시킬 수 있는 여러 모습 중에 하나인 거거든요. 그런데 ‘외모만 바뀌면 내 인생이 다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수많은 부분 중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게 거의 다라고 생각한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힘든 현실을 사는 이유가 전부 외모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외모가 변하면 엄청 많은 것들이 바뀔 거라고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사실은 조금밖에 바뀌지 않은 걸 보고 좌절하죠. 이 사람들은 뭔가 핑계거리가 필요했던 거예요.

 

151230-양재진_IMG_9612.jpg

 

 

이렇게 섹스하면 변태인 걸까요?


섹스의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는 “익숙함을 깨는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섹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섹스에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하나의 이유겠죠.


그건 잘못된 성교육 탓이죠. 남자는 선택하는 존재이고 여자는 선택 받는 존재처럼 여겨져 왔고 살아왔잖아요. 재미있는 게, 섹스 파트너가 많다고 했을 때 여자는 문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자는 능력 있다는 이야기를 듣잖아요. 그런 차이겠죠. 남녀 역할의 차이와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남녀 성에 대한 고정관념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성교육들 탓이 큰 것 같아요. 대부분의 엄마들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성교육은 별로 안 해주시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콘돔 없는 섹스는 안 된다든지,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콘돔이 준비가 안 됐다면 준비될 때까지 강하게 NO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든지,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안 해주시는 것 같아요. 초경을 한다는 건 임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고요. 바꿔서 이야기하면 섹스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피임이나 성병 등등에 대해서 위험성이나 준비물 등을 알려줘야 된다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덮어놓고 하지 말라고 하죠. 음성적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그 안에서 많은 문제가 생기는 거거든요. 사실은 양성화해서 ‘관계를 해도 된다, 대신 이렇게 해라’라고 알려주고 보호해줘야죠.

 

부부 사이에서도 성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는 여성들이 많은데요. 이유가 뭘까요?


남편한테 먼저 부부관계를 요구하는 시도를 한 여성들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한 번이라도 거절을 당하면, 남자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큰 상처를 받아요. 정말 오랫동안 참다가 큰 맘 먹고 이야기했던 거기 때문에 그런 거죠. 사실은 남자들의 시각도 문제죠. 여자가 먼저 섹스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는다거나 리드하면, 그걸 즐기는 게 아니라 의심부터 하죠. ‘도대체 어디서 얼마나 놀았길래’ 이런 생각을 하니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처녀막 재생 수술을 하는 거고요. 첫째는 잘못된 사회적 편견, 고정관념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두 번째는 잘못된 성교육의 영향이죠. 여자가 먼저 무언가를 이야기하면 성적으로 문란했거나 문란한 혹은 지조에 문제가 있는 여자처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가 있다고 보고요. 남자가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여자는 가만히 있어야 된다고 잘못된 교육을 해주는 엄마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 중요한 건 부부관계에 있어서 자기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 밝히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대방이 그런 걸 밝혔을 때 부담스러워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죠.

 

섹스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다가도 자기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이 행위가 변태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검열은 교육에 의해서, 자신의 직간접적 경험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거거든요. 변태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오럴섹스부터 변태라고 생각하고요. 심지어 정상위를 제외한 나머지 체위는 다 변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반대로 애널섹스까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성관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은 그걸 맞춰가는 거죠. 나는 정상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하면 하지 않는 거고요. 내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상대가 요구한다면, 그럴 때 어색하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호기심이 생겨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행위도 정상인 거예요. 정상이라는 게 하나의 기준점이 아니에요. 범위(range)예요. 그 범위가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같이 맞춰가는 작업이 필요한 거죠.

 

이때에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거절당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려움이 생길 텐데요.


상대방이 싫다고 하면 안 하면 되는 거고요. 상대방이 뭔가를 요구했을 때 불편하거나 싫으면 ‘나는 싫다, 하지 않겠다’ 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자기검열이라는 게 자기가 죽어도 지키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걸 깨는 게 두려운 건지 스스로를 잘 돌아봐야 되고요. ‘내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섹스란 어디까지인지’ 그 기준을 어디에 잡을 건지는 나 혼자 정하는 것도 아니고요, 상대방 혼자 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준을 잡는다면 그건 성폭력이 되는 거예요. 만일 상대방이 나의 거절을 못 받아들인다면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죠.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사람인 거니까요. 협의점에서 멈추는 거예요. 내 의사 표현을 명확하게 해줘야 되고요.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죠.

 

연인과 헤어지고 싶으면서도 이별을 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한데요. 이 모순된 심리에 대해 “그냥 나쁜 사람 좀 돼주면 안 될까요?” “그냥 욕 좀 먹으면 안 될까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헤어지고 싶은데 헤어지자고 하면 너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해주면 좋겠다는 거잖아요. 그건 비겁한 거예요. 사귈 때도 서로 동시에 반하지 않듯이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한 쪽이 먼저 마음이 식었을 거고, 먼저 멀어지기를 원할 거예요. 자신의 마음이 멀어지는 걸 스스로 느꼈을 때, 그리고 돌이키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되거나 돌이킬 필요를 못 느낄 때, 그럴 때는 이별을 통보하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죠. 그리고 이별 통보에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 아직 나를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끌어내려고 한다면 어떤 짓을 하겠어요? 정 떨어지는 짓을 계속 하겠죠. 그건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질하는 거죠. 비겁한 거고 나쁜 거죠.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거절을 잘 하지 못해서 고민이라는 사연도 있는데요. 이런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나요?


여성에게 ‘착한 딸 신드롬’이 있다면 남성에게는 ‘착한 아들 신드롬’이 있죠. 보통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타고난 성향 자체도 그렇고요.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불안도나 긴장도가 높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거든요. 그런 생각 때문에 거절도 잘 못하고 싫은 소리도 잘 못하고요. 타고난 성향도 그렇겠지만 어렸을 적 환경에 의해서 그럴 가능성이 커요. 부모님, 특히 엄마와의 관계에 있어서, 엄마가 굉장히 무섭거나 냉정한 경우에 아이들이 이렇게 될 가능성이 크죠. ‘네’라고 하지 않으면 혼나니까요. 아니면 ‘네’라고 안 하면 엄마가 나를 버리거나 떠날까 봐 공포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20대 초중반까지는 부모님 때문에 그런 거라고 말하는 게 통하죠. 서른이 넘어서도 그렇게 말하는 건 미성숙한 거예요. 스스로 바꿔나가야죠. 선택을 해야 돼요. 요구 받은 일이 힘들면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거고, 못하겠다는 말을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면 감당해야죠.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이 책을 보시고 재미있다는 분들도 있고, 여전히 까칠하다는 분도 있어요(웃음). 너무 냉정하다는 분도 있고요. 기본적인 제 가치관이 그런 것 같아요. 본인의 선택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거죠. 내가 어제 살아온 결과가 오늘이고, 오늘 살아온 결과가 내일이거든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내 인생이 변했으면’하고 바라고, 그래도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의 나의 모습은 이전에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한 선택에 따른 결과는 이후에 나타날 거예요.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를 살아간다는 이야기이고, 결국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는 의미죠. 지금 현실이 내가 책임지기 싫은 모습이라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선택을 해야죠. 그래야 다른 내일이 올 가능성이 크겠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2040 여성들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2040 여성들 스스로 본인들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img_book_bot.jpg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이경제,양재진 공저 | 세종서적
골드미스가 아니라 쭉정이 취급받는 것에 대한 분노, 중독이라고 생각될 만큼 다이어트에 집착하는 모습, 재미없는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 남자친구에게 의존하는 성격 등 결혼, 외모 집착, 일과 직장, 가족, 심리적 병리 증상에 대한 고민은 이 시대의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걱정해봄직한 것들이다. 이런 여자들의 치열한 고민에 대해 한의사 이경제는 호쾌한 평소 이미지대로 시원시원하고 간단명료한 진단을 내리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양재진은 똑부러지는 인상 그대로 조밀조밀 설명하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윤영삼 “번역은 목적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박성호 “기업은 안다. 자본주의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유 “결국 나는 가해자면서 피해자”

$
0
0

강남에서 고물상을 하는 부녀가 있다. 딸 해미는 아버지를 ‘지창씨’라 부른다. 죽음에 관한 커다란 기억을 공유하는 이 둘은 그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며 자리를 지킨다. 무뚝뚝한 듯 애틋한, 좌절인 듯 희망인 이들의 일상을 그 자체로 ‘삶의 의미’라 이름 붙인다면 지나친 걸까. ‘열심’, ‘희망’, ‘의미’ 같은 단어가 이 소설과 과연 어울리는지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열심, 희망, 의미가 아니면 무엇이 열심, 희망, 의미인가. 예쁜 빛깔로 덧칠하지 않은, 이 삶에서 진짜로 도사리고 있는 민낯 그대로의 희망, 소설이 보여줘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며, 바로 그것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모두가 뒤엉켜 사는 곳, 바로 여기, 당신이 발붙인 그곳.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그저 구멍이 뻥 뚫린 채 있고, 내 손에 피 묻어 있지만 또 그대로 씩씩하게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그러니 외롭지 않다. 모두의 손에 피가 묻어 있고, 그의 가슴에도 구멍이 뚫려 있으니. 그 사실을 말해주는 작가가 있으니 외로워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이 세상의 축소판인 ‘고물상’과 이 세상의 끝자리인 ‘유품 정리’의 현장에서 외로이 서 있는 주인공 해미에게도, 그러니 홀로 외로워하지 말라고 말 건네고 싶다.  

 

5D3_8098.jpg

 

 

꼭 써야했던 이야기


먼저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웃음)

 

어떠셨어요? 수상 소식 듣고요.


너무 좋았죠. 저는 되게 좋은데 인사를 다니다보니 마냥 좋아할 순 없었어요. 안 만났던 친구도 만나고, 글 쓰느라 못 만났던 사람도 만나고 했는데 다들 상태가 안 좋아서요.(웃음) 오히려 만난 이후에 기분이 좀 가라앉았어요. 연말 같은 시기에 친구들을 몰아서 만나게 되는데요. 작년에도, 재작년도 그랬지만 올해는 특히 이상하게 연말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다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수상 얘기보다 사는 얘기 하느라 좀 그랬어요.

 

좀 다른 얘기긴 한데요. 유독 그런 것 같더라고요. 저도 주변 지인들과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예, 이번에 심하게 그렇더라고요. 집에만 있다 사람들 만나기 시작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저도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거예요. 올해는 정말 심하다, 생각했어요.

 

이유가 뭘까요?


모르겠어요. 언론에 나오지는 않지만 각자가 다들 제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했는데 제 또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고요. 수상하거나 하면 술도 마시고, 축하도 나누고 하는데 이번엔 안 그랬어요. 밥만 먹고, 바쁘기도 해서 일찍 헤어지고요. 어쩐지 미안한 느낌이었어요.

 

책도 그런 느낌이거든요. 굉장히 애써 썼을 거란 짐작이 생기더라고요. 쓰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실제로는 어땠나요?


그게 느껴지나요? 몰랐으면 좋겠는데요.(웃음)

 

작가가 힘들었겠다, 이런 의미만은 아니고요. 정말 밑에 있는 이야기들이라 끌어내서 써야했던 이야기가 아니었나 생각을 했었어요. 수상 자체는 기쁜 일이지만 쓰는 중에는 아주 고됐겠다 싶었던 거예요.


쓰기 쉬운 얘기는 아니죠. 어려운 이야기였는데요. 읽은 사람들이 너무 재미있고 빨리 읽힌다고 해서 저는 이렇게 말씀하는 걸 처음 듣긴 해요. 주변에 다른 일 하는 친구들이 많고, 저도 계속 문학 공부를 했던 게 아니라서요. 자비 출판 아니냐는 얘기까지 들었어요.(웃음) 읽어줘야 하는데 재미있다니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도 읽힐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었거든요. 그 고민을 제일 많이 했기 때문인데요. 이야기가 어둡잖아요. 저로서는 꼭 써야만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여서 써야했지만요. 그 지점에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가볍고, 그러면서도 꼭 써야 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말이죠.

 

꼭 써야만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거기 나오는 죽음과 남겨진 사람들에 관해서는 제 어릴 적 경험도 있고요. 그런 부채감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 건데요. 극복한다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그런 걸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했어요. 그게 제 이야기기도 해서요.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약간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 같기도 해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아프셨던 경험들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계속 아프셨고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게 생각보다 오랫동안 저를 지배했던 거예요. 이 소설은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고물상 얘기는 쓰고 싶었어요. 제 생각에는 이 시대 전체가 고물상이었어요. 이미 우리는 쓰레기가 된 거고요. 그렇다고 패배주의에 계속 사로잡혀 있을 순 없잖아요. 다들 지구가 쓰레기가 됐다고는 하지만요. 거기서 뭔가 건질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거죠. 그런 생각으로 고물상 얘기를 시작했고요. 조사를 하다보니까 고물상 하시는 분들이 유품정리사 일을 함께 하시는 걸 알게 됐어요. 고물상이 열악하니까 그쪽으로도 많이 넘어가서 명함을 봐도 한쪽에는 고물상, 한쪽에는 유품정리, 이렇게 돼 있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그 얘기가 제 안에 있던 과거 기억을 많이 꺼내더라고요. 그럴 수 있는 소재였던 것 같아요. 일단 쏟아 부으니까 쏟아 부어지게 되더라고요. 애초에 의도했던 건 아닌데 결국엔 이 이야기를 쓰려고 시작했었나, 이게 나에겐 과제였나, 이런 생각을 뒤늦게 했어요.

 

5D3_8133.jpg

 

 

뒤집어 생각해보기


고물상이라는 상징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네요. 쓰레기가 된 세상이지만 어쨌든 살아내야 하는 것은 고물상 안에서의 작업과 아주 가깝게 닿아있어요. 고물상 얘기를 쓰려고 한 것도 그 이유일 텐데, 작가가 집중하게 되는 소재, 주제는 주로 어떤 것들일까요? 


주로 어떤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들을 보는데요. 이게 왜 일어나는지 저도 모르게 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건 그렇게 갑자기 일어난 이상한 얘기가 아니라 분명히 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얘기일 테니까요.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고민들을 많이 하게 돼요. 주변의 것이 극적으로 치달아 거기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글을 쓰기 전에도 혼자 많이 공상을 했어요.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됐을까 하고요.


한 번은 여고생이 도둑을 때려잡았다는 뉴스가 있었어요. 알고 봤더니 여고생은 유도를 하던 사람이었고, 도둑은 정말 비리비리한 남자였던 거예요. 우리는 그저 미담으로, 여고생이 용감하다는 말을 하는데요. 그게 아니잖아요. 이면에 뭔가 다른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다시 뒤집어 생각해보는 게 굉장히 재미있어요.

 

수학 전공 이력이 무척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전에도 어떤 사건과 인물 뒤에 있는 이야기들을 늘 궁금해 했던 거군요. 글을 쓰겠다는 생각도 계속 했던 거죠?


어렸을 때 계속 좋았던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늘 소설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서 영화나 다른 것들로 위로를 받지만 저한테 소설은 절대적이었어요. 언젠가 쓰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어릴 때 계속 책을 읽으니까 나중에 크면 방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 책을 놓고 읽어야지(웃음) 그런 상상도 했었어요. 대학을 가고, 직장에 다닐 때는 이쪽은 아닌가보다 생각을 했었는데요. 나이 먹으면서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서 쓰게 된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쓰겠다고 결심을 굳힌 때는 어떤 순간이었어요?


작가들이 비슷할 거예요. 저도 하루키 책을 읽고 마음을 먹었어요. 『상실의 시대』를 계속 읽었는데요. 하루키에게 내면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하루키와 장정일을 어느 시기에 걸쳐 읽게 됐는데 그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하는 것도 들었고요. 직장 다니면서 조금씩 써보는 형태였죠. 신춘문예에 도전을 하잖아요. 일 하다가도 생각이 나면 또 내보고 그랬어요. 끝까지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나이도 있고, 정말 포기해야지 했는데 그때 신춘문예가 됐어요.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진짜 포기하려던 순간에 등단된 것도 참 흥미로운 것 같아요. 정말 포기를 했다면 독자는 이유라는 작가를 못 만났을 테니까요.


저는 행복했겠죠.(웃음) 계속해서 발을 빼려고 하면 약간씩 입질이 오는 느낌 있잖아요. 최종심에 오르거나 하면 다시 해볼까 싶다가도 결국은 안 되니까 참 힘들더라고요. 제 안에 있는 얘기들을 꼭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건 너무 진부한 거예요. 온갖 트라우마를 다 가지고 있는 인생이잖아요. 저로서는 어떤 강렬한 얘기도 재미가 없었어요. 내가 겪었던 일에 비하면 그다지 끌린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내 얘기도 별로 재미가 없었고요. 그런데 오히려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는 다른 시각으로 이 삶을 바라봤을 때 내가 쓸 수 있는 게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번 장편에서 그런 확신이 생긴 것 같아요. 작가가 역경을 이겨낸다, 이런 게 아닌 다른 관점으로 말이에요. 사실 이 소설도 그 부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 쓰고 싶었어요. 나를 짓눌렀던 것을 다 쳐내는 작업을 더 하고 싶었는데 충분히 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쉬움이 좀 있는 거군요.  


네, 그랬다면 어쨌든 사람들과 공감한다는 면에서는 공감을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더 썼으면 했던 이야기들을 여기서 전해줄 수 있을까요? 아픈 부모를 둔 아이의 감각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그것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말이죠.


그냥 기억에 있을 때부터 엄마가 아프셨어요, 계속. 늘 흐린 날이었던 느낌이죠. 세상은 밝았던 적이 없고 제대로 웃어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쓰다 보니 소설에도 나왔는데요. 엄마가 아빠한테는 말도 못하고 엄마대로 아픈 상황에서 저한테 엄마가 병원에 갈 수 있게 아빠한테 말 좀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가 그러면 제가 아빠한테 가서 눈치를 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면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을 해요. 물론 아빠는 좋아하지 않으셨고요. 처음엔 아빠도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다 상황이 반복되니까 그런 상태로 계속 살았던 거예요. 아버지도 너무 병원비가 계속 많이 들어가니까 힘드셨겠죠. 그런데 제게 그게 좋아보이지는 않았어요. 그 장면을 쓰고 나서는 조금 울었어요. 아빠를 계속 너무 미워했었거든요. 쓰면서 비로소 아이 심정이 아니라 어른 심정으로 보게 됐어요.


글을 쓴다는 건 그런 것 같아요. 객관화시키는 작업들인데요. 아빠는 어떤 심정이었을까를 처음으로 생각해본 거예요. 아빠도 결코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정말 힘들었을 텐데 하고 처음으로 이해가 됐어요. 저 역시 엄마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 상태기 때문에 아빠를 이해하는 것까지는 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나왔던 장면인데 쓰고서 생각하니 아빠가 정말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서로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구나, 싶었어요.

 

5D3_8137.jpg

 

 

그냥 우리 모습


소설은 절망에 관한 이야기죠. 그런데 그 절망은 꽤 씩씩한 절망이에요. 그 점이 참 좋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이 소설이 좋았어요. 특히 끝까지 아버지와 척을 지지 않고 살아나가잖아요. 두 사람이 크게 의지하진 않지만 상처를 공유하는 그런 것들이 저는 하지 못했던 것들이라서요. 저는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인물은 그랬으면 했어요. 그런데 제 아주 친한 친구는 주인공 해미를 보고 “이거 조증일 때 너잖아”(웃음)라고 하더라고요. 내면에서 곪았던, 아빠와 끝까지 화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렇게 그렸던 것이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았어요. 저는 아빠와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로 아빠가 돌아가셨거든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강남 일대도 의미심장해요. 흔히 생각하는 강남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데요. 이야기는 그런 강남의 그림자 같은 이야기예요. 배경을 강남으로 설정한 이유도 있었을 텐데 얘기 좀 해주세요.


어릴 때 강남에 살았어요. 잘 살아서가 아니라 아빠가 하던 일이 망해서 강남으로 가면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엄마도 아프시고 그러니까 상황이 좀 몰려있었는데 친구들은 다 잘 살았던 거죠. 여러 트라우마 중에 그것도 상당했어요. 살던 곳이 논현동, 영동시장 인근이었는데요. 사실 강남 특성상 대로변은 아주 넓고 건물이 늘어서 있지만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길도 좁고, 아파트나 대형 상가가 들어설 수 없어요. 중간 지역이 없죠. 지금도 그대로 골목 안에는 원룸이 몰려있고요. 제가 살 때는 수영장 딸린 주택들이 있기도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못하더라고요. 강남이라는 곳이 화려해보이지만 그 골목을 들어가 본 사람이 없어요. 겸사겸사 이 공간은 자신 있게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말씀처럼 그런 그림자 같은 느낌으로 쓴 거죠. 화려한 모습은 썼다가 다 뺐어요. 주인공 입장에서 그런 건 너무 가까이 있지만 결코 접할 수 없는 세계니까요. 그리고 강남이란 장소에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으니 그걸 굳이 쓸 필요도 없었고요. 힘을 줘서 쓰진 않고, 가볍게, 옆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처럼 쓰는 게 소설의 감각하고는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결말이 무척 비극적이잖아요. 어차피 현실이라는 게 언제나 해피엔딩은 아니고, 그것은 작가가 가지는 현실인식이기도 할 것 같아요. 잠시 행운이 잡히는 듯하다 손가락 사이로 싹 빠져나가요.


결말 부분을 많이 고민했어요.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어요. 내용도 전체에서 3분의 2정도는 뺀 거예요. 주인공도 남자였는데 여자로 바뀌면서 제가 투영이 되고 후반부를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한 거고요. 1년 넘게 붙잡고 있던 부분인데요. 묻지마살인 같은 게 많잖아요. 대로변 행인을 치고 간 운전자 기사를 접했어요. 그걸 보고 든 생각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는 거였어요. 혹시 이 사람에게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어요. 각자는 생각보다 참 이상한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어떤 무언가를 겪고 있는데요. 이 사람이 진짜 사람으로 행인이 보였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가정을 한 게 ‘사람으로’든 ‘사람이’든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면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랬을까 생각했어요. 그의 일상과 아픔을 생각했기 때문에 소설 마지막 장면은 꼭 있어야 하는 거였어요.


결국 나는 가해자면서 피해자고요. 나는 그걸 잘 모르는 상태에서 뭔가를 또 희망하는데요. 그 모습이 그냥 우리 모습인 것 같아요. 어쩌면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저를 발견한 것 같고요. 우리는 그저 구멍이 뻥 뚫린 채 있고, 내 손에 피 묻어 있지만 또 그대로 씩씩하게 살아나가는 것이죠. 누가 ‘그렇다면 작가로서 어떤 비전을 이야기할래?’라고 물으면 주인공의 태도를 말하겠죠. 파도가 언제 날 덮칠지 모르지만 거기서 피하지 않고, 숨지 않고 어쨌든 살아나가는 태도요. 굳이, 굳이 여기서 희망이라는 걸 찾자면 그런 모습일 거예요. 책에 있는 허리케인 파티처럼요.

 

“허리케인 파티라는 게 있대.”
해미가 희뿌연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뭔데?”
지창씨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태풍이 가장 세게 몰아칠 때를 기다렸다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담도 크네.”
“태풍이 절정에 이르면 꼭 지구가 죽음의 고통 속에 허덕이는 것처럼 느껴진대. 그 순간을 기다렸다 파티를 하는 거지.”
(중략)
“인생을 완전 쫑내는 파티지. 그래도 멋지잖아. 사람들이 지하대피소에서 숨죽이고 있을 동안 촛불을 켜고 수영복 입고 미친듯이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거야.”(200쪽)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요?


당연히 저는 지금을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 당면한 문제를 고민해요. 내재해 있다가 나타나는 현상들은 사실은 다른 문제들을 안고 있는 거잖아요. 당장 보이는 모습들이 이상할 뿐이죠. 그런 것들을 심층적으로 얘기하고 싶어요.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어쨌든 자기 일을 하지만 아프잖아요. 그걸 우리는 내가 왜 그런지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데요. 한 번 쯤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망가지고 있다는 걸 불편하더라도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이상한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 거라고요. 지금은 그런 것에 많이 심취해 있어요.

 

말씀이 공감이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충격적인 뉴스가 쏟아지지만 그냥 ‘재생’해요. ‘잠시 멈춤’하면 그 안에 굉장히 많은 게 발견될 텐데 말이죠.


너무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런 기사의 댓글을 보면 자기가 뭔가 경험했던 사람들은 이 일은 무엇 때문이라고 자기 입장에서 얘기하기도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어요. 삶이 너무 다양하니까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 못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어떤 부분이 닿아 있다면 이해할 수 있는 거죠. 댓글이 예리하더라고요. 그것은 어쩌면 내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고, 과거의 모습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야기될 수 있는 걸 찾아서 쓰고 싶어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면서요.

 

참 힘든 일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계속 들여다봐야 하잖아요. 왜 그랬을까를 상상하면서 말이죠.


그렇지만 그게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죠. 재미없으면 못해요. 막상 쓸 때는 좀 힘들지만 구상하고 그럴 때 정말 행복한 것 같아요. 구상하다가 엉뚱한 게 튀어나올 때 정말 행복하죠.

 

 

서로 잘 만났으면


인터뷰 초반에 다들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힘들고 바쁜 사람들이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어요. 실용적인 시대기도 하고요. 소설가로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작가가 문학을 하는 이유와도 닿아 있겠죠.


책을 많이 읽어달라, 이런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작품으로 보여주고, 나로서는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고요. 잘 만나지면 좋은 거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해요. 잘 모르겠어요. 문학이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 말이에요. 그걸 따진다고 만나지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이 의무감 때문에 뭘 하는 때도 아니죠. 다만 친구들을 보면 위로 받고 싶을 때 책을 읽으려고 하더라고요.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때 영화를 보거나 한다면 혼자 있는 시간, 조용한 곳에서 울고 싶을 때면 책을 찾는 것 같아요. 그때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서로 잘 만났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 싶을 때 그런 책이 발견되면 좋겠죠. 바람이라면 그 정도예요.

 

잘 모르겠다는 말이 가장 솔직한 답이겠네요. 어떻게 어떤 용도를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저 눈에 잘 띄어서 그 시간만큼은 덜 힘들었으면 해요. 그 만남이 지금은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리나라 작가들 보면 정말 재기발랄하고, 저도 좋아하는 작가들 정말 많은데 사람들은 모르는 경우도 많고요. 소설은 진입장벽이 좀 높으니까 그런 것들이 안타깝죠.

 

구체적으로 지금 들려줄 수 있는 작품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올해 하반기에 단편집이 나올 예정이에요. 이 작품 쓰기 전에 써놓은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약간 장르 쪽이긴 해요. 그것도 사실 꼭 써보고 싶은 얘기였는데요. 좀 다듬어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새로 단편을 좀 더 쓰고 싶어요. 바쁠 것 같아요. 계속 쓰려고 해요.

 

 

 

img_book_bot.jpg

소각의 여왕이유 저 | 문학동네
이유의 『소각의 여왕』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지창씨와 유품정리사인 그의 딸 해미, 두 부녀의 이야기이다. 누군가 쓸모없어 함부로 버린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생계를 잇는 소중한 수단이 되고 또 그렇게 모여진 것들은 분류작업을 거쳐 쓸모 있는 것들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 순환과정 안에는 비참한 세계에 기거하는 부녀의 일상, 그들이 꾸는 꿈의 다소 허황된 속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텅 빈 꿈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갈 수밖에 없는 산다는 일의 슬픔이 비친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윤영삼 “번역은 목적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양재진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 안 돼요”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재즈베이스 연주자 이원술, 사이드맨을 벗어나다

$
0
0

2015년 피아니스트 임인건의 음반 <올 댓 제주 All That Jeju>는 재즈 연주자가 만든 팝 음악이라는 새로운 발상을 통해 잔잔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여러 명의 보컬리스트들이 참여한 이 음반의 막후에서 재즈 베이스 연주자 이원술은 음반의 프로듀서를 맡으면서 이 음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아울러 그는 임인건과의 듀엣 음반 <동화 同化>를 연이어 발표했고 작년에는 석 장의 음반을 연속해서 내놓는 왕성한 창작력을 보였다. 이미 연주 경력 20년에 이른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사이드맨으로 활동해 오다가 40대 중반에 이르러 자신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1.jpg


어제(11월 25일)도 명동에서 공연이 있던 걸로 알고 있다. 어떤 공연이었나?


내 공연이라기보다는 인건이 형(피아니스트 임인건)의 공연이었다. 피아노 솔로가 위주였는데 몇 곡에서 베이스와 듀오로 연주하고 싶다고 하셔서 공연에 참가 했다.

 

요즘 무척 바쁘게 활동하는 것 같다.


아니다. 요즘은 몸이 별로 안 좋아 좀 쉬었다. '모자이크 코리아'란 프로젝트팀이 있다. 국악 연주자들과 재즈 연주자들의 연합팀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작년이 이 팀의 일원으로 유럽 투어에 다녀왔고 올해도 재즈 코리아라는 행사를 위해 해외에 나갈 예정이었는데 디스크 질환이 안 좋아져서 해외에 나가지 못했다. 또 내가 속한 '트리오 클로저'도 해외로부터 초대를 받아 유럽 몇 나라를 순회할 예정이었는데 역시 나가질 못했다. 그래서 요즘은 치료도 하고 시간이 조금 있는 편이다.

 

최근에 너무 바쁘게 활동한 탓이 아닌가 싶다. 몸이 좀 좋아졌나?


물리치료 받고 운동하고 많이 나아졌다.

 

작년에 음반 석 장을 냈고 올해는 임인건 씨와의 음반 한 장과 그의 음반을 제작하는 등 최근에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 재즈 뮤지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6년에 처음으로 재즈 동네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외국(뉴욕 주립대)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그리고 귀국한 2004년부터 기타리스트 정재열 밴드에서 4년 동안 연주했다. 재열 형과의 활동을 마친 뒤에는 프리랜서로 여러 밴드의 베이스를 연주해 주었는데, 그땐 정말 일주일 내내 클럽 연주를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늘 생각했다. 과연 내 음악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재열이 형과 연주할 때부터 그 생각을 줄곧 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쌓이다 보니 근래에는 여러 작품이 나왔다. 아울러 아무리 아이디어가 있고 곡을 만들어 놔도 함께 하는 연주자들이라든지, 음반을 발표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음반을 낼 수 없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운이 잘 풀렸던 것 같다.

 

임인건 씨와의 작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인건이 형은 재즈 동네에 들어온 후로 계속 친분을 쌓아 온 선배다. 클럽 야누스에서 처음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미 인건이 형이 '재즈 1세대'분들과 함께 그곳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가깝게 지냈다. 사실 이제야 형과의 작품이 만들어졌지만 지난 2007년에 형이 발표했던 음반 <소혹성 B-612>에도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여러 일들이 꼬여 음반에 참여하지 못했다. 형과 만난 지 거의 20년이 흘러서야 드디어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올 댓 제주>는 음악이 팝(가요)에 가깝다. 그럼에도 어떻게 프로듀서를 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가?


나는 함께하는 뮤지션을 선택할 때 음악적인 부분만큼이나 인간적인 면을 중요시한다. 내가 훌륭한 음악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음악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인건이 형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늘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의 음악도, 성품도 나는 모두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건이 형이 제주도로 이사 간 뒤로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주도로 연주하러 내려갔는데 어느 날 그 형이 <올 댓 제주>에 관한 계획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 계획을 봤더니 여러 가수가 참여하는, 꽤 규모가 큰 녹음이었다. 제주도에 사시는 인건이 형이 진행하기에는 조금 벅차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 형의 음악을 내가 멋지게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가수와 연주자들을 불러 모으고 편곡에도 참여하고 음반 전체의 녹음을 진행하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재즈 연주자들이 만든 음반으로는 굉장히 대중적인 프로젝트였는데 성과는 어떠했나?


나쁘지 않았다. 초판 1천 장이 모두 팔렸고 그래서 500장을 더 찍었다. 음반이 안 팔리는 요즘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음원 판매도 꽤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적자가 아닌 흑자 앨범이다.

 

재즈 음악인들은 보통 재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아마도 숙련을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하지만 이원술 씨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여러 음악 중에 재즈를 제일 좋아할 뿐이지 다른 음악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재즈, 클래식, 가요 등 모든 음악을 듣는 편이다. 내겐 음악 그 자체가 중요하지 재즈 그 자체만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재즈 뮤지션이 아니라 그냥 뮤지션이라고 불리는 게 맞는 것 같다.

 

요즘에 듣고 특히 인상 깊었던 음반을 꼽는다면?


(잠시 생각하다가) 선우정아의 음반이 참 좋았다. <이츠 오케이 디어 It's Okay Dear>였던가?
그 음반, 참 대단했다. 작곡도 좋았지만 음반을 프로듀싱하는 솜씨가 정말 좋더라.

 

이제 2012년 음반<접점 Point of Contact>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음반은 이원술 씨의 첫 음반이자 그 이름을 재즈팬들에게 처음 알린 음반이었다. 그만큼 의욕적인 작품이었다. 음반이 나오자 군터 슐러의 '서드 스트림 뮤직'(Third Stream Music)과 비교하는 평이 많았는데 늘 그런 음악에 관심이 많았는가?


아니다. 재즈 연주자이지만 그런 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래서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냥 고전음악의 사운드, 앙상블과 재즈의 즉흥연주를 섞으면 내가 늘 상상하던 음악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어떻게 작업을 진행했는지 궁금하다.


내 후배 중 하나가 한양대 음대 작곡가에 출강하고 있었다. 그 후배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하자 그 후배가 자기 학생 중에 김선욱 씨가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대중음악 쪽에도 관심이 많았고 유재하 가요제에서도 작곡상을 받았다며 소개해 주었다. 그가 수록곡 중에 반수 넘는 곡을 작곡했고 전체 오케스트레이션을 담당했다. 밴드에서 리듬 섹션을 맡은 재즈 연주자들 외에 바이올린, 첼로, 프렌치호른, 클라리넷, 플루트를 연주한 분들도 모두 클래식 연주자들이었다. 작곡부터 녹음이 완성 될 때까지 대략 1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재즈에서 솔로파트를 잘 이해하던가? 악보에 일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앙상블이 들어가고 나오는 지점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녹음할 때 재즈 뮤지션들의 리듬섹션과 즉흥 솔로를 먼저 녹음하고 그 위에 클래식 앙상블을 따로 녹음해 입혔다. 클래식 앙상블 녹음할 때 리듬섹션은 이미 녹음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지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재즈에서 즉흥 솔로가 어떤 형식으로 전개되는지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해야 했다. 정말 힘들었던 것은 재즈에서의 그루브, 스윙을 실어서 클래식 앙상블 파트도 연주해야 하는 점이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그러한 리듬으로 연주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리듬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녹음 때는 직접 지휘했다고 하지만 실황 무대에서는 어떻게 했나? 지휘자가 없으면 앙상블이 어려웠을 것 같은데.


한충완 선생께서 지휘하셨다. 건반 주자로 참여하셨지만 연주의 비중이 지휘하면서도 충분히 연주할 수 있는 분량이다. 한충완 선생께서는 이 작업을 무척 좋아하셨다.

 

<접점>이란 제목은 재즈와 클래식 음악의 접점을 의미하나?


그렇다.

 

2.jpg

 

이 음반은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하기엔 너무 많은 노력과 인력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단지 일회성으로 녹음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음에도 이러한 편성의 밴드를 만들고 곡을 만들어 녹음할 계획이다. 한충완 선생은 만날 때마다 이 프로젝트의 진행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2집 <시간 속으로 Into the Time>에서는 밴드가 축소되어 4인조 리듬 섹션에 두 대의 관악기가 등장하는 편성이었다. 특히 트럼펫과 하모니카가 등장하는데 흔히 들을 수 없는 편성이다. 어떻게 이런 사운드를 생각하게 되었나?


보통 재즈에서 두 대의 관악기 하면 트럼펫 한 대, 색소폰 한 대가 등장하는데 나는 그러한 전형성이 싫다. 사람들이 모두 따라가는 방식이 있으면 나는 왠지 그것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확실히 나는 취향에 있어서 비주류인 것 같다.

 

나중에 확연히 드러나지만 이 음반에서부터 이원술 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두 인물인 기타리스트 진 오(오정수)와 피아니스트 비안(김성배)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언제부터 함께 연주했나?


정수는 내가 정재열 쿼텟에서 나온 이후부터 함께 자주 연주했다. 매우 독특한 스타일의 기타리스트이며 비교하자면 빌 프리젤의 사운드와 유사한 면이 있다. 나는 그의 기타 사운드를 무척 좋아한다. 비안은 2009년부터 비안 트리오의 베이시스트로 내가 들어가면서 함께 연주했다. 훌륭한 연주자이며 성품도 참 좋은 사람이다.

 

비안 씨의 연주는 본인의 음반과 이원술 씨의 음반에서 스타일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


그런가? 내 생각에도 비안은 음악의 성격,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는 연주자다. 폭 넓은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

 

트럼펫 주자 조정현의 이름은 낯설다. 반면에 프랑스 하모니카 주자 로랑 모르는 이전에 해외에서 발매된 음반을 들어본 적이 있어서 이 연주자가 한국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요즘에는 국내에도 훌륭한 재즈 트럼펫 주자들이 꽤 된다. 하지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음색인데 조정현은 내가 찾던 음색을 가진 연주자였다. 음색이 참 아름답다. 반면에 음반에 하모니카 주자를 기용하고 싶었는데 재즈 하모니카 주자가 워낙 귀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SNS에서 로랑 모레를 만났고 그가 재즈클럽 팝에서 잼세션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직접 갔다. 역시 훌륭한 연주자였고 그래서 그날 당장 음반 녹음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략 녹음한 내 음악을 들려줬더니 그 역시도 좋다고 곧장 응답했다.

 

<시간 속으로>는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얻은 <접점>보다도 오히려 더 완성도 높은 음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밴드 전체가 만들어낸 빛깔이 개성적이다. 이러한 음악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언뜻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베이시스트를 꼽자면 데이브 홀랜드, 마크 존슨, 스콧 콜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난 그들의 베이스 연주도 좋아하지만 음악에 대한 그들의 태도, 음악을 만들 때 그들이 독특하게 빚어내는 밴드의 사운드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았다. 데이브 홀랜드의 음반은 한 장, 한 장 정말 파고 들었던 것 같다. 홀랜드의 음반의 전작을 듣고 또 다른 아티스트의 음반을 쭉 듣고....... 그러면서 한 아티스트에 대한 개성과 성향을 파악하고 배웠다.

 

마크 존슨은 그의 그룹 '베이스 디자이어'에서 기타리스트 빌 프리젤과 존 스코필드를 기용했는데 오정수와의 연주는 그로부터의 영향인가?


아마도 부지불식 간에 영양을 받지 않았을까?

 

이 앨범에는 『리트로그레이드』 Retrograde라는 곡이 있다. 어떤 의미인가.


그냥 현재에서 과거를 생각하는 회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2번이 먼저 나오고 1번이 나중에 나온다.

 

두 곡의 극적인 대조가 앨범의 절정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그런데 커버에 등장한 초현실적인 그림의 제목도 ‘시간 속으로’이더라. 그림을 보고 앨범에 관한 영감을 얻은 것인가?


아니다. 음악을 만들어 놓고 화가 김신혜 씨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그분이 음악을 듣고서 그린 그림이다.

 

그러고 보니 <접점>의 커버에 등장한 그림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박혜신 씨의 그림이었는데 전시회에 갔다가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분께 부탁해> 앨범 표지에 쓸 수 있었다. <접점>이 말하려는 바와 꼭 들어맞는 내용이었다. 그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곡은 2집 다음에 녹음된 '트리오 클로저'의 음반에서 발표 되었다.

 

지금 와서 이야기인데 <시간 속으로>는 그 훌륭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앨범 이후에 활동이 전혀 없었다. <접점>과 비교해보면 훨씬 활동하기도 용이했을 텐데.


이미 트리오 클로저의 녹음과 활동이 계획되어 있어서 <시간 속으로>는 그 음악에 많은 애정이 있었지만 그냥 접어야만 했다. 트리오 클로저는 누구 한 사람의 팀이 아니고 세 사람의 공동 팀이기 때문에 나 때문에 시간을 더 미룰 수 없었다. 또 다양하고 새로운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3.jpg

 

피아노에 비안, 그리고 드럼에는 새롭게 한웅원 씨가 가담했다. 어떻게 이루어진 팀인가?


원래는 비안 트리오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도 그렇고 한웅원 역시 작곡에 관심이 많은 친구다. 정말 다재다능한 연주자다. 피아노도 무척 잘 치고. 그래서 세 명 모두가 곡을 쓰고 함께 운영하는 팀으로 하자고 제안하자 비안이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조금 전에 『사이에서 In Between』란 곡을 잠깐 언급하셨는데 곡의 구조가 매우 독특했다.


긴 전주곡 다음에 하나의 주제가 계속 전조(轉調)를 하면서 네 번 반복된다. '사이'라는 것은 각 주제와 주제 사이를 의미한다. 그 사이가 세 번 등장하는데 트리오라는 숫자를 생각해서 세 번 등장시켰다.

 

트리오 클로저의 음반 <공존 Coexistence>에는 세 사람 모두가 작곡에 참여했음에도 통일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세 사람 모두 음악적으로 일체감이 있다. 내 느낌으로는 두 사람 모두 인간적으로도 좋다. (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이어서 트럼펫 주자 비르키르 마티아손, 진 오와 트리오 음반 <외로운 풍경 A Lonely Sight>을 녹음했다. 어떻게 만들어진 팀인가.


정규 밴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너무 훌륭한 연주자들이기 때문에 함께 녹음하자는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비르키르는 아이슬랜드 연주자인데 정수가 프랑스에 있었던 시절에 서로 알게 된 연주자다. 정수 소개로 만나보니 정말 한국사람 같았다. 수줍음도 많고. 트럼펫 사운드가 너무 좋다.

 

그래서인지 앨범에 수록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와 『아름다운 사람』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연주하더라.

맞다. 담담하고도 쓸쓸한 느낌으로 연주했다. 이 곡을 넣자는 아이디어도 정수(진 오)가 제안했다.

 

인터뷰가 많이 길어졌다. 일을 많이 벌이셨는데 (웃음) 어떻게 앞으로 활동할 것인가?


프로듀서로서 일을 계속할 것 같다. KBS 아나운서 출신인의 정인영 씨가 미니 앨범을 발표할 예정인데 그 음반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작곡은 이소리란 분이 하고 정인영 씨가 직접 가사를 썼다. 약간 재즈적인 느낌이 도는 인디 음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달에 한 곡 정도 내 싱글도 만들 예정이다. 아마도 재즈가 아니고 대중음악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 음악의 한계를 두고 싶지 않다. 연주는 트리오 클로저 팀으로 계속 활동할 예정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음반도 또다시 나오지 않겠는가. <접점>의 2탄을 늘 생각하고 있다. 한충완 선생님이 만날 때 마다 그 작업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고 물어보셔서 더는 미뤄서는 안 될 것 같다. (웃음)

 


인터뷰 : 황덕호
사진 : 변영옥
정리 : 황덕호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윤영삼 “번역은 목적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양재진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 안 돼요”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디자이너 효재 “노동 없이 성찰이 될까요?”

$
0
0

“어서 와요. 지금 배고플 때죠? 우선 배추전 좀 들어요. 앉지 말고 서서 먹어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요.” 30분간 배추전 시식을 하고 성북동 ‘효재’를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들과 얼결에 고수레 놀이를 한 후, 겨우겨우 바닥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복 디자이너이자 자연주의 살림꾼으로 유명한 효재 선생의 이야기다.

 

‘서울과 시골을 오가는 유쾌한 이중생활’을 담은 책 『효재의 살림풍류』는 생각보다 매우 예쁜 책은 아니다. 아기자기한 느낌도 없다. 물감을 아껴 써서 스케치가 더 살아 있는 느낌이다. 반은 사진이고 반은 글인데, 사람에 따라 눈길이 더 오래 머무는 사진이 있고, 글이 있다. 효재 선생은 가끔 독자로부터 “선생님, 다 연출이죠?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살아요?”라는 질문을 듣는다. 선생은 따로 답하진 않는다. 몸으로 보여준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독자는 자신의 질문이 우문이었음을 깨닫는다.

 

『효재의 살림풍류』에는 지난해 성북동 살림을 날라다 만든 ‘제천 시골집’ 이야기부터 제비꽃떡 찌는 법, 산야초 구절판 만드는 법, 겨울에도 봉숭아 물 들이는 법 등이 정성스레 담겨 있다. 청소기 쓰는 시대에 빗자루를 쓰는 살림꾼 ‘효재’ 선생. 그가 제천에서 5일, 서울에서 2일을 지내는 까닭은 시골이 주는 정신적 풍요로움 때문이다. 경계 없는 이웃들이 좋아, 폭풍한설이 몰아쳐도 안면 근육이 떨리는 증상이 와도 부지런히 제천 집을 완성한 효재 선생. 일상이 예술인, 그는 누구보다 노동을 좋아하는 아티스트다.

 

ed__IM_2069.jpg

 

 

일에도 흥을 더하면 놀이가 된다


꽤 오랜만에 책을 쓰셨어요. 서울과 제천을 오가며 지낸 근황이 담겨 있습니다. 부제가 ‘서울과 시골을 오가는 유쾌한 이중생활’이에요.


효재의 고정 독자들이 책을 많이 기다렸어요. 책을 읽고 문자를 보내준 독자도 있어요. 내가 눈이 떨려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읽고는 마음이 아팠다면서요. 고맙더라고요. 책을 읽어주시니 고맙죠.

 

책 속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온 계절에 들어 있어요. 지난 1년 동안의 선생님 일기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돌멩이와 책이에요. 책이 제본될 때, 저는 흥분해 있어요. 아기를 낳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의 심정이랄까요? 이번 책을 만들면서도 ‘아 나는 정말 책을 사랑하는구나’, 느꼈어요. 우리나라는 지구를 기준으로 보면 작은나라지만, 정말 알토란처럼 아름다워요. 『효재의 살림풍류』가 지역 콘텐츠를 개발하는데 좋은 교본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방자치단체에서 많은 간행물을 만들잖아요. 지도도 넣고 맛집도 소개하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잠깐 보고 승용차 뒷자리에 박아놔요. 왜 그럴까요? 갖고 싶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는 이 책이 사람들이 가져가고 싶은 책이었으면 해요. 좋은 교본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제천 살이를 시작한 계기가 배우 김수미 선생님의 전화 한 통이었다고요. 제천에서 본 구절초에 마음이 빼앗겨 새 터를 지으셨어요.


김수미 선생님이 제천으로 밥 먹으러 가자고 하신 게, 2014년 10월이었어요. 제천에 가보니 온통 쌀가루 뿌려놓은 듯 구절초가 하얗게 피어 있었어요. 이런 곳에 살면 좋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그럼 다른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살아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눌러앉은 곳이 충분 제천 백운면이에요. 난방은커녕 비까지 새는 둥근 양은집을 근사한 화덕이 있는 요리 스튜디오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고속버스를 자주 탄 해는 처음이에요. 날이 추울 때도 많았지만 고달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제천에 내려가면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가 없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결정이 빠른 편이세요?


빨리라는 것도 길어요. 그냥 해요. ‘이거 좋겠다’ 싶으면 벌써 하고 있어요. ‘여기 좋겠다’ 하면 벌써 살고 있고요. 힘들겠다는 생각은 크게 안 해요. 본능이고 성격이고 운명인 것 같아요. 앞뒤 생각 안 해요.

 

책을 읽다 보니, 제천 사과와 백운 막걸리, 가마솥 손두부가 먹고 싶었고, 전통빗자루를 쓰고 싶었어요.


시골에서 지내다 보면 소개랄 것 없이 저절로 알게 돼요. 찾아 다니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돼요. 무심코 지나쳤던 간판인데 어느 날 길을 잘못 든 덕분에 두부집을 알고, 이웃 분들의 정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를 먹을 수 있어요. 제천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의 모습이 그대로예요. 신기할 것도 없이 익숙한 모습, 나만 뻥튀기처럼 뻥 튀겨서 늙어 있어요. (웃음) 제천에 갔다 서울로 올라오는 날이면 양손이 무거워요. 백운 막걸리를 친구에게 소개했더니, “묵은 김장 김치와 탁주가 치맥을 눌렀다”고 술자리 사진을 찍어 보내줬어요.

 

아무래도 여성, 주부 독자들이 효재의 살림법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또 살림에 전혀 관심이 없고 하기 싫어하는 주부들도 많아요. 이유가 뭘까요?


생각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북동 ‘효재’ 직원들은 설거지 할 시간이 없어요. 손님들이 무척 많으니까요. 행사를 치르고 나면, 싱크대에 그릇을 더 이상 포갤 수 없을 정도로 그릇이 나와요. 그러면 직원들에게 그냥 퇴근하라고 해요. 설거지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요. 왜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받을까 생각해보면, 온통 그릇이 섞여 있어서 건드리기가 싫은 거예요. 나는 설거지 할 때, 그릇을 종류별로 정리한 다음 닦기 시작해요. 설거지를 다 마치고 주방을 빠져나오면 개운해요. 설거지를 통해 기도를 했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행위 자체가 자기를 정화해요. 물을 틀어놓은 것 자체로부터 사람 마음이 씻겨요. 뭔가를 헹구잖아요. 이 과정이 기도가 되고 수양이 돼요. 설거지 할 때 나는 고무장갑을 안 껴요. 장갑이 뜨거운 물에 녹아서 그릇에 자국이 생기고 미끄럽기 때문에 그릇을 자주 깨요. 맨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릇을 잡으면 느낌이 달라요. 가정집에서 아무리 설거지 양이 많아도 우리 가게만큼은 아닐 거예요. 사람이 설거지하는 게 힘들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요. 세상에서 가장 힘들 때를 생각해봐요. 이런 설거지하는 게 뭐가 힘들어요. 그런데 가끔 사람들은 효재 주방에 있는 설거지 더미를 보면 무섭대요. 그 소리를 듣고 내가 충격 받았어요. (웃음)

 

그래도 “효재 선생님처럼 살고 싶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으시죠?


들어요. 하지만 직접 우리 가게에 와서 하루 동안 내 모습을 지켜보면 전혀 그렇지 않대요. 인터뷰를 해도 풀 뽑으면서 하니까요. 한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않으니까, 자기 팔자가 제일 좋다고요. 자기는 이렇게 고달프면 효재처럼 안 살겠다고 해요. (웃음)

 

인터뷰하기 전까지도 계속 서 있으셨어요. 배추전을 부치시느라. (웃음)


원래는 돌아다니면서 인터뷰를 자주 해요. 오늘은 제천에서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평소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편이시잖아요. 달리 운동이 필요 없으시겠다고 생각했어요.


계속 움직이니까요. 배추 사러 갈 때도 걸어가요. 비가 오면 비옷을 입는데, 저만 걸어 다녀요. 배추는 무거우면 배달을 시키고 와인은 배달이 안 되니까, 가방에 넣어 품고 와요. 이렇게 살아도 감기는 많이 안 걸리는 편이에요. 감기 신호가 오면 양말을 두 개 신고 목을 따뜻하게 수건으로 감싸고 있어요. 그러면 감기가 비들비들 오다가 나가버려요. 목을 싸매는 게 중요해요.

 

 

ed__IM_2009.jpg

 

 

효재처럼 사는 법? <삼시세끼>처럼


최근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가 잔잔하게 화제를 모았어요. 『효재의 살림풍류』를 보는데 이 프로그램이 생각나더라고요.


집에 TV가 없어서 보진 못했는데,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알아요. 궁한 데 있으면 누구나 차승원이 될 수 있어요. 궁함에서 오는 기발함이 있는데, 『효재의 살림풍류』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창조의 신이 있어요. 제천 집 옆에 쿠킹 스튜디오 ‘달’을 만들 때, 철사 값만 80만 원이 들었어요. 원래 있던 둥근 양은집에 철사줄을 천장에 매달아 완성했어요. 나머지는 있는 살림 나르고, 말린 옥수수며 돌은 자연에서 가져왔어요. 비용은 적게 들었지만 공간의 균형미를 맞추는 데는 두 달이 걸렸어요. 머릿속에서는 백만 개의 가구를 뺐다 집어넣었다 했어요. 하지만 어울리지 않았고 돈이 많이 들고 아름답지 않았어요. 돈 안 들이고 하는 인테리어는 자칫 구질구질할 수 있어요. 그 경계를 잘 지켜야 정다운 공간으로 완성돼요.

 

앞치마, 행주 이야기도 흥미로웠어요. ‘주부를 가장 빛나게 하는 파티 웨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주부들이 앞치마를 안 쓰는 이유는 예쁜 앞치마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예쁘면 입고 싶어져요. 앞치마를 하고 요리를 하다 보면 음식물이 튀고 자국이 안 지워지는 경우도 있어요. 전 이 자국이 그 사람의 살림의 역사라고 생각해요. 요즘 강의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아이 키우면서 작아진 옷을 한 두 개씩 남겨 놓았다가 조각이불로 만들라는 이야기예요. 나이 때마다 하나씩 옷을 남겨 놓았다가 등판을 잘라서 실로 이으면, 예쁜 작품이 돼요. 천사의 날개 옷이에요. 아이가 집에서 잘 때, 여행가는 길 차 안에서 그 이불을 덮어줘 보세요. 조각 이불의 옷들을 만져 보면서, “이 옷은 네가 세 살 때, 앞집 아이와 함께 놀 때 입은 옷이야”, “이 옷을 입었을 때는 어금니가 빠졌을 때지” 이런 이야기를 아이한테 해주는 거예요. 그리움이 별 건가요? 이런 이불은 집에 도둑이 들어와도 안 훔쳐가요. 도둑이 훔쳐가지 않는 게 가보예요.

 

“그리움이 있는 사람은 부자”라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어떤 성공한 사람을 만났는데 오만하고 교만해요. 이유를 찾아보니 이 사람은 추억이 없어요. 추억이라고는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기억뿐이에요. 어렵게 그 분과 시간을 맞춰 짧은 여행을 갔어요.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갔는데 가는 길은 꽤 고달팠어요. 그 분께 제가 말했어요. “일정이 힘들었어도 지금 이 풍경이 내일 아침에 또 생각날 거”라고요. 다음 날 문자가 왔어요. 내 말이 맞았다고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기준이 뭐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은 유명하거나, 성취를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았거나, 돈을 많이 번 경우겠지요.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는 사람이 된 게, 정말 좋을까요? 내 경우는 엄청 불편해요. 나는 약간 오타쿠 같은 성격이 있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평소에도 투쟁하면서 살아요. 택시를 탔는데 내 얼굴을 알아보는 기사님이 있어요. 이건 불편한 일이지 성공한 게 아니에요. 성공이란 자기 내면을 극복했을 때 얻는 거예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애가 있어요. 장애를 극복하는 게 성공이에요. 되게 뻔한 이야기 같은데요. 이 뻔한 이야기를 직접 경험하면 뻔해지지가 않아요. (웃음)

 

효재처럼 사는 법, 살림에 관한 이야기를 여쭈려고 했는데 자꾸 사는 이야기가 나오네요. 책에 담긴 사진도 좋았지만, 단상도 좋았어요. 요즘 사람들의 인사말을 지적하셨는데, “예전에는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어요’가 인사였는데 지금은 ‘땅값 얼마나 올랐대요? 그 정치인이 어떻다면서요?’가 돼서 아쉽다”고 하셨어요.


너무 거칠어졌고 심각해요. 자기 이야기는 안 하고 남 이야기만 해요. 그렇다고 세상 이야기도 아니에요. 어떤 여배우가 살쪘다는 이야기부터 스캔들까지, 아니면 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막혀 힘들었다고 하고요. 이런 이야기가 들리면 나는 화제를 바꿔요. 얼른 배추전 이야기를 꺼내요. 줄기가 맛있냐? 잎이 맛있냐?고 묻고, 밀가루전이 맛있냐? 메밀전이 맛있냐?”고 물어요. 사람이 동물이라 참 감사해요. 오전 11시에 미팅을 하면 아점을 먹을 시간이잖아요. 4시쯤 미팅을 하면 슬슬 배가 고플 타이밍이고요. 미팅을 하기 전에 간단히 배추전을 대접해요. 요즘 배추 한 포기가 1,300원이예요. 이틀 동안 작업실에 오는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어요. 배추전을 먹으면서 대화하면 이야기의 소재가 달라져요.

 

‘효재처럼 사는 법’은 뭘까요?


<삼시세끼>처럼 사는 거예요. 있는 것으로 극대화 시키면 돼요. 흥부처럼 시작해서 놀부처럼 끝나는 거예요. 흥부네는 끼니를 챙기기 바빠서 철학이 없어요. 하지만 놀부네는 문화가 있어요. 누구에게나 창조의 신이 있으니까요.

 

 

효재.jpg

사진_ 스타일북스

 


서재를 보니 만화책이 정말 많아요. 만화방에 온 듯한 느낌인데요. 요즘도 읽으세요?


눈이 잘 안 보여서 자주는 못 봐요. 독일제 돋보기를 써야 해서, 안타까워요.

 

가장 좋아했던 만화는요?


이미라 작가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예요. 고추 따는 것부터 시작해서 너무 재밌게 봤어요. 서른이 넘어서 만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어릴 때는 오히려 만화책을 전혀 안 봤어요.

 

왜 성인이 돼서 만화책을 보기 시작하셨어요?


홍역은 죽어서라도 앓는다고 하잖아요. 사람은 어렸을 때 안 했던 걸 결국 해요. 어릴 때는 결벽증이 있어서 만화방에 안 갔어요. 만화책이 더러워서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대신 어린이신문을 봤어요. 이모들이 학교 선생님이었거든요.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무척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나눠주던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신문을 읽은 게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신문에서 잊지 못할 이야기를 읽었어요.

 

어떤 이야기요?


나사에서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전세계 언어로 우주에 쐈대요. 그 때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지금의 내 삶은 그 때 이미 지배된 것 같아요. 손을 딱 대면,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어요. 아이들은 눈깔사탕, 딱지 하나에 몰입해 있는데, 나는 그 뉴스를 읽고 생각의 단계가 층층층 열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그 때부터 나는 친구들이랑 노는 게 달랐어요. 애들은 땅따먹기하고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나는 동네 편물집에서 실을 요만큼 얻어서 인형옷을 만들었어요. 나는 인형옷으로는 50년 경력자예요. 친한 잡지 기자가 선생님은 어떻게 인형옷 치수를 이렇게 잘 맞추냐고 놀라워해요. (웃음) 동화책은 지금도 읽어요. 글자가 큰 편이니까요.

 

지금까지 ‘효재’ 작업실을 방문한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려보면 얼마쯤 될까요?


글쎄요. 숫자가 약해서요. 아마 엄청나겠죠.

 

독자들도 자주 만나시는 편이신데요. 어떤 이야기를 자주 들으세요?


책을 보면서 다 연출일 거라 생각했대요. 그런데 이 공간이 책이랑 너무 똑같아서 감동이라고, 책과 같은 공간이 있는 게 행복하다고 그래요. 전국에서 독자들이 와요. 팬 미팅을 하면, 책에 실린 사진을 일일이 다 찍어와서 실제랑 하나하나 다 비교해봐요. 멀리서 오신 분들이 많으니까 제철에 나는 재료로 즉석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그래요.

 

행사나 강연 제안을 많이 받으시는데요. 일하실 때 선택의 기준이 있으세요?


딱히 없어요. 방송은 되도록 신중하게 선택하고요. 강의는 대부분 하려고 해요. 책 인터뷰 같은 경우는 작은 지면이라도, 사보라도 해요. 글 쓰는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해지는데, 글은 평생 가요. 세상이 존재하는데, 글은 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보자기 아티스트로도 유명하세요. 선생님 덕분에 대한민국이 보자기 매듭 열풍입니다.


전국이 보자기예요. 모든 백화점, 시장 떡집이 효재 스타일의 보자기 매듭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주 흐뭇해요. 우리가 신경을 많이 쓰면 뇌졸중에 걸리지만, 말초신경을 자주 자극하면 치매 예방이 돼요. 지금은 물질의 풍요 속에서 잠재된 재능을 발견하는 시대예요. 사랑한다, 좋아하는 말도 계속 들으면 공허해요. 바람 잡는 말로 들려요. 그래서 마음은 손으로 표현해야 해요.

 

새해입니다. 책에 실린 남편 임동창 선생님의 신년 메시지 ‘쉿!’을 읽고, 탄성이 나왔어요. 이 말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이야기 아닐까 싶었어요. 우선 좀 조용히 들어야 하는 세상이기도 하고요. 효재 선생님께도 신년 메시지를 여쭙고 싶어요. 화선지에 한 문장만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알아서.” 사람은 누구나 창조의 신, 지혜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다 알아서 해요. 누구나 지금 한 일이 최선이라고 하면서 사는데, 세월이 흐르면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도 깨달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실수를 통해 사람은 또 발전하니까요. 지금은 최선이었지만 6개월 뒤에는 실수였어도, 모든 건 거름이 돼서 성장할 수 있어요. 지금 최선이면 후회하지 않아도 돼요. 사람들이 너무 학문적으로 풀어놓으니까 고달픈 거죠. 난 노동이 즐거워요. 노동 없이 성찰이 될까요? 한 번 노동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 봤어요. 절대 성찰할 수 없어요. 오만 잡생각만 떠올라요. 노동의 대가는 엄청나요. 하물며 내 가족을 위해 하는 살림만큼 더 빛나는 일이 어디 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 밥 주라는 거 아니잖아요. 내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이게 왜 귀찮을까 싶어요. 얼마나 귀한 일인데요.

 

『효재의 살림풍류』를 읽을 예비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커피 두 잔 값이잖아요. 커피는 마시면 끝이지만 책은 없어지지 않아요. 화장실 앞에 한 권 꽂아 놓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으면 재밌을 것 같아요. 책보다 멋진 인테리어가 있나요?

 

성북동 ‘효재’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 여러 사람이 서있다고 가정해 볼게요. 딱 한 명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면 누구에게 주고 싶으세요?


젊은 남자 줄 거예요. 집에 가서 엄마나 아내, 장모님 주라고요. “엄마가 좋아하는 그 사람 있잖아. 나 그 선생님 만났어”라면서, 책을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책이 한 잔의 시원한 물 같았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갈 때 빈 손으로 안 가잖아요. 롤케잌을 사고 와인을 사는데, 이건 다 서양 거예요. 대신 책을 한 권 들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대화가 바꿔요. 여기 가봤어? 이거 먹어봤어? 묻고 답하면, 만남이 달라져요. 주부들의 수다가 바뀌면 저절로 살림이 바꿔요.

 

 

 

img_book_bot.jpg

효재의 살림풍류 이효재 저 | 스타일북스
우선은 성북동 살림을 날라 만든 제천 새 집에 대한 사연부터다. 효재 공간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만난 손두부와 막걸리, 빗자루 장인들과 인연을 맺는 동안 느낀 단상을 풀어놓은 글도 사진을 곁들여 들어보는 재미가 크다. 이어지는 효재의 제천식 살림 소개는 그야말로 ‘풍류’라는 단어에 걸 맞는 유유자적함을 지녔다. 제철 꽃놀이, 혼자라도 가능한 풍류놀이, 약초를 이용한 밥상과 자연음식 레시피 그리고 다양한 소품 만들기의 노하우까지. 효재 고유의 감각 그리고 제천의 자연에서 얻은 감성으로 완성한 책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윤영삼 “번역은 목적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양재진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 안 돼요”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안민정, 중국인 남편과 일본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상

$
0
0

세상엔 완벽한 사람이 없는데 어째서 완벽한 육아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육아서가 적고 있는 육아 지침은 너무 많고, 하루에도 몇 번 씩 좌절을 거듭하는 전쟁 같은 육아에서 양육자는 슈퍼맨이 돼야만 하는 상황이다. 육아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불편해지는 것은 TV 속 모습이 전부인 듯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인데 세상에 ‘다른’ 방식은 얼마든지 있다. 중국인 남편과 결혼해 일본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한국인 엄마 안민정은 양육자가 “여유를 찾아가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너무 완벽할 필요 없다, 희생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찾자, 이것이 일본에서 저자가 발견한 힌트다. 의외로 집안 청소에 애를 쓰지 않고, 카레를 한 번 끓여 3일을 먹고, 그렇게 절약한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쓰는 일본의 사람들을 보며 저자는 어쩌면 육아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된다고 말이다. 청소 좀 덜 해도, 간편식으로 밥상을 차려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도, 그래도 된다. 아이 스스로 성장하는 능력이 있으니 그것을 믿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ed_5D3_9116.jpg

 

 

아이들의 능력


한국인 아내와 중국인 남편이 일본에서 살며 아이를 키우는 것, 특이하게 느끼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실제 생활하는 입장에서는 어떤가요?


드문 일은 드문 일인 것 같아요. 블로그를 해보니 ‘저희도 한중 커플이에요, 일본에서 만났어요’ 이런 분들이 한두 분 계시더라고요. 그런 분도 있긴 있지만 저희 같은 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웃음) 도쿄가 외국인이 워낙 많이 사는 도시기도 하고 그런데요. 편견이 아예 없진 않아요. 이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병원에서 이름 불리거나 할 때 사람들이 흠칫 쳐다보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렇지만 같은 동양권이고, 외모도 그리 다르지 않고 하니까 크게 불편은 못 느껴요. 한국에서 다문화 가정이라 하면 언어 장벽 같은 것 때문에 사회에 진출하기 어려운 점이 있잖아요. 저희 같은 경우는 일본에 오래 살았고 일본어에 문제가 별로 없어서 좀 다른 것 같아요. 둘 다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고요. 특별히 어려운 건 없지만 그래도 역시 계속 ‘외국인’이라는 건 있어요. 일본인이 아니니까 일본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못 받는다든지 하는 건 있죠.

 

아이를 키우기 전과 후의 일본이 다르게 느껴졌다고 말한 대목도 있었어요.


맞아요. 일본에 처음 갔을 때는 그래도 한국에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어쩌다보니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보니까 복지 제도 같은 면에서 굉장히 다른 장점이 느껴지더라고요. 운이 좋았지만 보육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그런데요. 보육원이 아이도 정말 철저하고, 잘 돌보고, 제가 키우는 것보다 더 잘 키워주고 있으니까 믿고 일을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다문화 가정이라 아이를 나중에 국제학교에 보내거나 할 생각인데 국제학교에 들어가기도 쉬워요. 의료비 혜택(도쿄의 경우 중학생까지 모든 의료비가 무료)도 너무 고마운 일이고요. 그래서 좀처럼 못 떠나게 되더라고요.(웃음)

 

이제 한국 나이로 5살 된 저자의 아이는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요?


엄마가 한국 사람이고, 처음 접한 언어도 한국어기 때문에 지금은 한국어를 제일 편하게 여겨요. 한국에 들어오면 말 통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평소에는 한국어를 하는 사람은 엄마 혼자고, 그 외에는 한국어가 통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걸 좀 힘들어하더라고요. 아무리 떠들어도 아무도 대답 안 해주니까요.(웃음) 그게 불쌍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서 일본 사람에게는 일본어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아요. 지금까지는 괜찮은데 조금 더 크면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때도 있을 거고, 다른 친구들과 자기가 왜 다른지도 생각하겠죠. 중국에 가면 저도 말이 잘 안 통하고, 아이도 말이 안 통하거든요. 의사소통에 어려운 면이 있어요.

 

여러 모로 고민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저는 고민을 할 때도 있는데요. 남편은 오히려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줄 수 있어서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 기초 교육과 생활 예절을 배우고, 중국으로 가서 그걸 기본으로 중국어와 중국 교육을 배우고, 한국인 정체성도 가지고 가는 게 다른 아이들은 겪지 못하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키우는 입장이라 가끔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든지 너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든지 그런 느낌도 갖고요. 지금 딱 말이 통하기 시작하는 때라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을 잘 못했거든요. 아이가 계속 눈치를 봤어요. 한국어를 해야 하나, 일본어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거죠. 저도 그런 건 항상 고민해요. 일본 사회에 살면서 일본 친구들도 사귀어야 하고, 선생님과 소통도 해야 하는데 아이에게 저는 한국말만 하고 있거든요. 아이가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선생님이 싫어하지 않을까, 그런 걸 계속 고민하며 키워온 것 같아요.

 

일본에서의 육아를 요약하면 아이에게는 생활예절, 가족에게는 인내와 지혜로움인 것 같아요. 무척 다르게 느껴졌어요. 남에게 피해주면 안 된다는 것을 엄청 일찍부터 가르치더라고요.


한국 육아와 제일 다른 점이 그거라고 생각해요. 시댁을 통해서도 보면 중국도 아이를 굉장히 보호해요. 아이를 너무 연약하니까 다치지 않게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본다면 일본은 그냥 가족 일원이 한 명 늘어난 것으로 봐요. 그 한 명을 독립적 자아로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 이래라 저래라 한다든지 계속 보호하지는 않는 거예요. 보육원에서의 교육도 그래요. 겨우 7~8개월, 이제 움직임이 가능해지면 스스로 컵을 잡고, 마시고, 수저를 쥐고, 그런 걸 연습시켜요. 처음에는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아이가 잘 따라가는 걸 보니 아이들의 능력을 우리가 과소평가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집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이미 보육원에서 다 배워서 아이가 수저질을 잘 하거나 혼자 물을 마시는 건 굉장히 놀라웠어요. 


한편 한국 엄마들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너무 희생하는 것 같아요. 아이가 잠들고 난 후에도 계속 집안일을 해야 하고 그런 것 같은데요. 일본 엄마는 일단 아이가 자고 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요. 공부를 해도 되고, 반신욕을 해도 되고요. 한국 엄마들은 너무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안은 항상 청결해야 하고요.(웃음)

 

ed_5D3_9061.jpg

 

 

체육을 잘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


일본인의 집이 의외로 지저분한 경우가 많고, 이것을 ‘노동력의 효율성’을 따지는 일본 양육자의 지혜라고 진단하셨죠.


처음 일본 지인의 집 몇 군데를 갔을 땐 좀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뭔가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더라고요. 그 사람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10년 동안 지내다보니 TV 보거나 다른 사람 얘기 듣고 그래도 비슷한 거예요. 이유를 봤더니 그것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한 거더라고요. 아이과 교감하고, 책을 읽고, 자기계발 하는 것에 더 집중하다보니 청소는 적당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 거예요. 그런 부분은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지금은 많은 엄마들이 일을 하니까 아무리 육아에 집중하더라도 자신을 찾는다는 점을 배울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지만 반대로 임신을 하면 재봉틀을 선물한다든가 보육원 준비물이 양육자에게 크게 의지한다는 점을 보면 다른 측면의 부담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은 직장 다니는 엄마가 아이를 보내는 곳과 전업 주부가 아이를 보내는 곳이 확실히 구분이 돼 있어요. 직장맘들이 보내는 곳은 대부분 보육원이고, 전업 주부들이 보내는 곳은 유치원이에요. 제도 자체도 그렇게 돼 있고요.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보육원에 보낼 수 없고, 직장을 그만 두면 2개월 안에 보육원에서 쫓겨나요. 아주 철저해요. 보육원에서는 아이가 아프면 직장으로 전화를 할 정도라서 보육원 같은 경우는 학예회를 한다 해도 선생님들이 거의 준비를 해요. 보육원 들어갈 때 준비물은 많지만 엄마가 아직 쉬고 있다는 전제 하에 있는 거니까요. 유치원은 전업 주부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준비물도 더 많고, 오라는 경우도 많아요. 옷가지, 준비물 하나도 만들어야 하는 게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보육원과 유치원 외에 다른 양육기관, 육아법도 있나요?


유치원은 보통 4살부터 들어갈 수 있고요. 전업 주부는 그전까지는 직접 키워야 해요. 전업주부인데 보육원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사립 프리 스쿨이나 프리 유치원 같은 것도 있는데 그런 건 많이 비싸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으면 들어가기 힘들죠.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문화센터에 다닌다든가 지역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이벤트 같은 게 있을 때 그런 데 나가거나 해요. 그래서 일본 엄마들은 한국을 되게 부러워해요. 일을 안 해도 어린이집에 보내니까 그게 너무 신기하다고요. 일본은 일을 안 하면 당연히 집에서 봐야 하니까요. 개별적으로 문화센터 같은 시설이 가거나 수영 같은 걸 가르치는 식으로 하더라고요. 일본은 초등학교가 수영 필수고, 모든 초등학교에 수영장이 있어서 일찍부터 수영을 가르쳐요.

 

학생들에게 체육 활동 같은 동아리 활동의 기회가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밖에서 뛰어노는 시간이 적은 한국과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요.


일본은 체육을 잘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체력을 기르는 데 많이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여자 아이나 남자 아이나 마찬가지더라고요. 여자 아이 중에는 체조하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고요. 남자 아이들은 역시 수영을 하다가 좀 지나면 합기도, 유도, 마라톤 같은 것도 시켜요. 축구, 야구 이렇게 가는 것 같아요. 동아리 활동을 굉장히 장려하는 분위기예요.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고 나머지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렇게요. 중고등학교에서도 체육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국은 고등학교 가면 체육은 거의 안 하는 과목이잖아요.


저도 안 했거든요.(웃음) 그게 참 신기했어요.

 

ed_5D3_9169.jpg

 

 

여유 갖고 지켜보자


일본 육아법을 보고, 체험하면서 세운 저자만의 육아 지침은 좀 다를 것 같은데요.


저도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잘 키우고 있어서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건 아니고요. 저는 잘하지 못하지만 일본 엄마들을 보니 이렇게 잘 키우더라,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갈팡질팡했지만 흔들리지 않는 일본 엄마들을 보면 배울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생각해서 제가 관찰한 얘기를 쓴 거죠. 여기서 힌트를 얻을 부분이 있으면 얻으세요, 라는 거예요.

 

그중 독자가 꼭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요?


사실은 뒷부분을 더 강조하고 싶어요. 엄마가 너무 육아를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어떻게든 크는데 한국 엄마들은 자신이 아이에게 계속 자극을 줘야 하고, 우리 아이가 뒤처지는 것 같으면 굉장히 조바심 내고 그런 것 같아요. 자기를 희생하고요. 그 와중에 시간 쪼개서 육아서도 읽고 말이죠. 자기 인생도 생각하고, 여유를 찾아가면 좋겠어요. 아이는 생각보다 약한 존재가 아니고, 스스로 성장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여유를 두고 지켜봐주면 될 것 같아요. 스스로 할 수 있게 도와주기만 하면 되고요. 그러면 마음의 여유가 조금 더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 메시지는 완벽한 육아를 꿈꾸다가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응원이 될 수 있겠어요. 오히려 양육자가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주변에서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하니까 아무리 주관이 있어도 여유 갖고 키우기가 힘들어요. 그렇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지켜봐주는 시선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한겨울에도 아이들을 맨발로 지내게 한다든지, 저자 역시 아직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 일본식 양육법도 있잖아요.


12월이었는데 아이를 보육원에 데려다주러 갔더니 한 5살 돼 보이는 아이들이 반팔, 반바지를 입고 밖에서 모래 놀이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 엄마들은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히는구나 생각하면서 잘 이해 못한 부분이 있긴 있어요. 그래서 물어보면 도쿄가 따뜻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안 춥다는 거예요.(웃음) 저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돼서 겨울에 아이에게 내복을 안 입히거든요. 많이 입혀야 두 장 정도 입히고요. 저는 항상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거예요. 쉽지 않아요.

 

저자가 바라보는 한국식 육아의 장단점도 궁금하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한국은 전업 주부도 어린이집을 보낼 수 있으니 그런 부분은 굉장히 부럽게 생각해요. 영어 교육도 굉장히 부러워하고요. 교재 자체도 그렇고, 한국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다 영어를 가르치잖아요. 일본은 안 그렇거든요. 유치원은 조금 가르치는 곳도 있는데 보육원은 전혀 가르치지 않아요. 초등학교도 한다고는 하는데 아직 완벽하게 영어 교육이 도입이 안 됐어요. 스마트 기기도 일본은 아직 별다른 기반이 없어요. 영어, IT 교육은 한국이 굉장히 선진적이죠. 사교육도 일본은 통학 버스 같은 게 없으니까 엄마가 직접 데려다주고, 데리러가야 해서 힘들거든요. 교육 측면에선 정말 한국을 따라올 곳이 없는 것 같아요.

 

높은 교육열이라는 게 강점인 동시에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대목이기도 하잖아요. 


일본은 전집을 사거나 엄마가 책을 읽어줘야 한다거나 하는 강요를 안 받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책을 보면서 자신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확실히 기준을 세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른 방법도 있는 거니까요. 엄마가 자극을 준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이 영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웃음) 물론 일본도 돈이 많은 사람들은 사교육 시키죠. 영어 유치원도 보내고, 과외 선생님도 붙이기도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따로 학원을 다닐 필요조차 안 느끼더라고요. 어릴 때는 뛰어 놀아야 하고, 체력을 기르고, 감성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진학을 할 것인지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할 것인지 스스로 정해요.

 

일본 교육 제도와 관련해, 고등학교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 있어요.


한국의 대학 진학률에 비해 일본은 대학 진학률이 낮아요. 60% 정도거든요. 주변에도 보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일하는 경우 정말 많아요. 일본 사람들도 역시 좋은 대학 나오고 그러면 엘리트라 생각하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어요. 편견이 크지 않아요. 보육원에서 봐도 어떤 아빠는 양복 입고 오고, 어떤 아빠는 공사장 인부복을 입고 오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그걸 절대 다르게 생각 안 하거든요. 모든 사람이 다 공부에 뜻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각자 꿈 있는 부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공부하기 싫어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그만 두는 경우에도 그건 그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ed_5D3_9162.jpg

 

 

엄마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


책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하고 싶은 얘기도 있나요?


저도 지금 일을 하고 있지만 일본은 여자가 꼭 정사원으로 일하지 않아도 파트 타임이라고 해서 정해진 시간만 일할 수 있는 제도가 아주 잘 돼 있어요. 다니던 회사에서도 파트 타임으로 전환할 수가 있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풀타임 정규직으로 근무한다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잖아요. 일본은 자기가 원하는 요일, 시간에 일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엄마들이 훨씬 일하기 좋은 환경이에요. 또 그렇게 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보육원에 맡길 수 있고요. 소득에 따라 차등이 있지만 큰 비용 부담 없이 맡길 수 있어요. 보육원 선생님들도 기본적으로 공무원이고, 안정적이다보니 믿고 맡길 수 있고, 아동 학대에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이 잘 해줘요. 엄마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어요. 이런 건 한국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더 쓰고 싶었어요.

 

파트 타임 전환이 남자의 경우도 가능한가요?


파트 타임은 시급으로 받아요. 임금이 적으니 가능은 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는 파트 타임으로는 안 하고, 정규직 사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출산, 육아를 거치는 여자의 경우 그렇게 파트 타임 전환이 가능하다는 정도군요.


꼭 육아를 하지 않고 결혼만 하더라도 전환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가사일 때문에요. 대기업에 다니는 일본 친구는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시간을 단축해서 근무를 할 수 있더라고요.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다시 풀타임 정규직으로 되고요. 일본은 지금도 계속 여자가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제도적 노력이 있어서 앞으로도 보완이 될 것 같아요. 한국은 맞벌이 부부가 육아를 한다면 꼭 조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저희가 조부모님 없이도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었던 건 역시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아이가 갑자기 아프거나 하는 경우 많잖아요. 그걸 회사에서 잘 이해해주는 분위기예요. 자기에게도 충분히 올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자신이 독감에 걸릴 수도 있고요. 한국과는 다른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은 사실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이런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이 경력 단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좋겠죠. 일본도 한국처럼 야근도 많고, 인력 공백이 생겼을 때 부담도 있지만 제도적으로는 잘 돼 있는 것 같아요. 야근할 때는 분 단위로 시간을 체크해서 잔업 수당을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일본에서도 임신으로 인한 퇴직 문제가 있었는데요. 그 문제로 소송을 건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마타하라(マタハラ maternity harassment의 일본식으로 mater hara, 일하는 여성이 임신이나 출산을 이유로 해고, 계약정지당하는 경우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라는 말도 있어요. 임신 중 부득이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서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판결도 있고요. 우울증도 그렇거든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자리를 비우고 치료를 받는다 해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게 놔두는 거예요. 노동자 보호가 제도적으로 잘 돼 있어요.

 

역사 문제나 사회 우경화, 혐한 시위 같은 문제들에 대해 체감하는 게 다를 것 같은데요. 특히 육아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고민되지 않나요?


그래서 계속 아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는데요. 고민을 할 때마다 남편이 하는 말이 있어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서로 합의를 해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데요. 아이가 한국 국적인 이상 한국인 정체성을 가지면 된다고 말을 해줘요.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이미 많은 부분이 결정이 되는 거였어요.(웃음) 그런데 출산하자마자 그런 걸 고민하기에는 너무 힘든 부분이 있죠. 지금에 와서 보면 여러 선택이 있을 수 있었겠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그냥 단순하게 선택한 거예요. 만약 둘째를 갖는다면 어느 국적으로 해야 할까는 또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도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할 것이기 때문에요.


일본에서 계속 일하면서 느끼는 건 반한 감정이 높아지고, 한일 관계가 안 좋아지는 것들에 대해 체감을 많이 못한다는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 자체는 한국 사람을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고, 한국말을 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도 않고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장애가 없는 것 같아요.

 

어쨌든 일본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일본이라 좋은 점을 선택한 것일 테죠.


맞아요. 아마 아이를 키우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한국이나 중국으로 갔겠죠. 아무리 직장이 일본에 있다고 하더라도요. 일본을 선택했을 때는 아이가 예의 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도 있었고요. 한국과 중국만 아는 것보다 일본까지 아는 것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게다가 일본은 외국인이어도 똑같이 세금 내고, 똑같이 일할 수 있으니까 일본이 외국인에 대해 조금 더 열려있다고 본 것도 있었어요. 아빠가 중국인이어도 덜 차별 받으며 크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img_book_bot.jpg

일본 엄마의 힘안민정 저 | 황소북스
이 책은 기자 출신의 저자가 10년 동안 일본 도쿄에 살면서 겪고 느낀 일본 엄마들의 특별한 자녀교육법을 담았다. 풍부한 취재와 기자 특유의 관찰력으로 일본 엄마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심도 깊게 파헤쳤다. 중국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가 일본에서 딸을 키우며 일본의 보육 시스템, 교육 제도, 일본 엄마의 육아 철학, 국가 교육 시스템 등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려낸 점도 흥미롭다. 이 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은 일본 엄마의 육아와 교육법에 대해 한국 엄마가 배울 수 있는 교훈과 힌트는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추천 기사]

- 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 윤영삼 “번역은 목적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 마영신 “애들아, 그 아줌마가 우리 엄마야”

- 양재진 “죄책감을 가진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 안 돼요”
- 작가 이외수, 자뻑이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Viewing all 8510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script src="https://jsc.adskeeper.com/r/s/rssing.com.1596347.js" async> </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