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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 디바제시카 “에서 내가 살아남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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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TV> 구독 애청자 36만 명, 팬클럽 2만 명, 3년 연속(2013~2015) <아프리카TV> 교육부문 BEST BJ 20 수상, 이 화려한 수치들은 모두 디바제시카의 기록이다. 그는 대학 시절 방학 때면 늘 미국에 갔다. 생활비를 벌면서 현지 문화를 직접 경험했고 그렇게 생활 영어를 마스터했다. 영화나 드라마, 뉴스도 관심 있게 봤다. 그는 자신이 생활 속에서, 문화를 이해하면서 영어를 즐겁게 익혔듯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재미있게 접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방송을 꾸몄다. 연예계 뉴스로 보는 영어 표현, 술자리에서 쓸 수 있는 회화, 시사뉴스로 배우는 고급 영단어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시청자의 호응을 얻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방송을 하던 그는 전업 BJ를 결심하고, 방송을 더 잘해내기 위해 아나운서 학원을 다녔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연기 학원까지 다닌다. 영상 제작 공부를 하고, 후배 양성을 고민하고,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을 즐겁게 기다린다. “인생은 경험이거든요. 좋은 것들을 경험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라는 디바제시카, 그는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쳤다. 섹시 콘셉트에 대해서도, 악플에 대해서도, BJ에 대한 비판적 시선에 대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쿨한 답변이 이어졌다. “나라는 사람은 외부에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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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트렌드는 유튜브

 

방송도 그렇고, 책 역시 가장 눈에 띄는 콘셉트는 ‘쉽고, 재미있게’예요. 이 외에 저자가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게 무엇이었나요?

 

‘쉽고, 재미있게’라는 말이 참 쉬운 말이잖아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데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들,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소재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슬랭이 될 수도 있고, 파티 문화가 될 수도 있고요. 보통 다른 책에는 ‘그렇다더라’ 정도로 적혀 있잖아요. 저는 워낙 공부쟁이가 아닌 스타일이어서요.(웃음) 많이 놀고, 많은 걸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경험했더니 이게 재미있더라’로 말할 수 있었어요. 많은 분들이 ‘라스베이거스에서 꼭 해야 할 10가지’를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이유를 물었더니 라스베이거스는 그냥 바깥만 보고 오는 곳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 책에서는 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라고 하니까 참 좋았다, 여행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겉핥기가 아니라 호기심을 많이 자극하는 내용에 초점을 뒀던 것 같아요. 

 

클럽도 많이 가봤다고요.(웃음)

 

죽순이였죠.(웃음)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해요. 지난 수 년 간 클럽에 갖다 부은 돈만 해도 어마어마하다고요.

 

방송을 보면서도 느꼈는데요. 뭐랄까, 가식 없다고 할까요. 모르는 건 모르겠다고 하거나 가끔 반말도 하고요. 방송이라기보다는 대화하는 느낌이 더 강해요.

 

1인 미디어고, 1인 방송이니까 내가 얼마나 잘 보이는지보다 서로 얼마나 소통하느냐가 더 문제인 거예요. 그런 부분 때문에 저도 변한 것 같아요. 처음엔 예쁘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다가 이제는 시청자가 아니라 친구들처럼 얘기하다보니 편해지는 것 같아요. 또 매일 방송을 하다보면 언젠가 거짓말은 들통나요. 그러니 그런 부분은 그냥 인정하는 거죠.

 

방송 보는 분들도 바로 그런 면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솔직하고, 쿨하고, 강할 때는 강하고, 내숭 안 떠는 모습을 좋아하시죠.

 

미국 과자를 먹으며 영어 표현을 살핀다든지 술자리에서 쓰는 표현이라든지 색다른 주제가 많은데요. 주제 잡는 것도 고민이었겠다 생각했어요. 여타 ‘교육 교재’, ‘교육 방송’과는 확실히 다르거든요.

 

어쨌든 요즘 트렌드라는 것은 TV, 뉴스보다는 유튜브잖아요. 해외 유튜브에 가면 이미 수많은 소재들이 다 쓰였고, 다 끝이 났어요. 저는 그걸 많이 응용해 와요. 제가 영어를 배워서 얻은 이점은 해외 쪽에서 재미있었던 주제를 가지고 온다는 거죠. 그게 조금 참신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외국인이 신기해하는 한국 물건’ 같은 거요. 그런 것도 한국에 와본 외국인들의 커뮤니티가 있고, 블로그 글들이 있단 말이에요. 저는 그런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내 것으로 만들고 하는 거죠.

 

안 그래도 계속 콘텐츠를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꾸준한 공부가 필요할 텐데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어요.

 

두세 시간 정도 자료 검색을 해요. 처음에는 제가 갖고 있는 경험치 만으로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어느 정도 한계가 있거든요. 내가 아는 내용에 검색한 내용을 가져와서 좀 더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거죠.

 

처음 방송 시작할 때와 지금,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어떤 부분인가요?

 

콘텐츠에 대한 애정도가 커졌다는 건데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준비하죠. 예전에는 그냥 준비된 것 없이 ‘그 말은 그거야’ 하면서 노는 식의 공부였다면 지금은 방송에 체계가 더 잡혔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계속 연구를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죠. 이제는 작가가 따로 있어요. 작년 5월부터 함께 했어요. 작가 분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혼자는 못해요. 일주일 동안 계속 다른 주제가 나와야 하고, 다시 또 그 사이클이 돌아가야 하니까요.

 

플랫폼이 있다 해도 이런 방송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이를테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회사를 다니면서 방송하다가 방송에만 전념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궁금해요.

 

그 결심의 순간에 중요했던 건 이런 것이 트렌드여서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아니었어요. 그것보다는 첫 번째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맞는 것 같았고요. 내가 나를 억지로 꾸며내지 않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는 경험은 정말 중독적인 거거든요. 그래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게 저한테는 가장 컸어요. 물론 수입도 잘 따라왔죠. 회사 다니는 수입보다 어느 정도 많이 따라왔으니까요. 회사 일은 사실 그렇잖아요. 항상 재미있는 일은 아니다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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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힘들 때도 있었겠죠?

 

있죠. 콘텐츠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장 커요. 이번 주에는 더 센 것, 더 강한 것, 더 재미있는 것을 꺼내야 하잖아요. 그걸 못 꺼내면 저나 저희 작가는 다 스트레스를 받아요.

 

입에 담기 힘든 아주 짓궂은 닉네임이 올라온다거나 악플이 달린다거나 하는 일도 많았잖아요. 그런 건 괜찮았어요?

 

항상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 성격이 그래요. 세상에 저 말고 다른 것에 별 관심이 없어요.(웃음)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 안 써요. 또 저도 악플을 달기도 하거든요. 그러면서도 악플 단 스타의 사진을 폰 배경화면으로 해놨어요. 그 스타가 부러운 거예요. 악플 다는 사람들 안에는 부러움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넓은 마음이 되는 것 같아요. 싫어할 수도 있어요.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아니면 방송 하면서 단련이 된 건가요?

 

성격이 그래요. 저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나라는 사람은 외부에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 안에 내가 있는 사람이니까 남이 나를 다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요.

 

조금만 더 질문할게요. ‘섹시’, ‘글래머’라는 수식이 늘 따라다니잖아요. 책에는 아예 섹시 콘셉트 엽서형 캘린더가 부록으로 들어있기도 해요. 성적인 측면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비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할 수 있죠. 그런데 일단 저는 예쁘고 가슴 큰 여자가 좋아요.(웃음) SNS 할 때도 마르고, 가슴 없는 여자는 별로 보지 않아요. 몸매가 탄탄하거나 가슴이 큰 여자들을 보면 너무 부럽고 좋아요. 내가 그런 게 좋으니까 나도 열심히 운동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있고요. 또 한 가지는 전략적인 것도 있죠. 전 세계적으로 섹시 코드 마케팅이 실패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초반에 빨리 이목을 끌 수 있잖아요. 그걸 이용했던 것 같아요.

 

이용했다고요?

 

네, 그리고 저는 원래 야한 걸 좋아해요. 오늘 이렇게 입고 온 이유는 출판사 쪽에서 하도 말씀을 많이 하셔서(웃음) 그랬던 거고요. 저는 원래 평소에도 야한 스타일이고, 몸매가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요.

 

‘일’이니까 늘 즐거울 순 없잖아요. 게다가 유명세도 있고, 반드시 오는 답보상태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방송이 지겹다고 생각되고, 힘든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있어요. 친구와의 저녁 시간 같은 것 말이에요. 오프라인에서의 인간관계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자기 가게를 열고, 사업에 성공하면 그런 시간을 못 보내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그냥 그래요.

 

방송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진행해요?

 

보통 밤 열 시, 열 시 반에 시작해서 새벽 두 시, 두 시 반에 끝나요. 프라임 타임이 열한 시부터 열두 시 반이에요. 딱 열두시 반이 되면 사람들이 보다가 잔대요. 그런 반면 늦게 일하고 오신 분들에게 이건 더 좋은 플랫폼이거든요.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고, 외롭잖아요. 새벽 한 시가 넘으면 정말 편하게 얘기하는 시간이 돼요. 음악도 듣고요. 물론 시작할 때는 막 에너지 넘치게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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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들을 경험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

 

다음 단계를 위해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들은 뭔가요?

 

지금은 책을 쓰긴 했지만 저는 앞으로도 영상으로 소통해야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하면 영상을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거든요. 그게 꼭 영어 콘텐츠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에요. 다른 방송에서 하고 있는 ‘미스터리’라든가 여러 가지 콘텐츠의 영상을 만들려고 해요. 영상 제작에는 연기력도 필요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연기 수업도 받고 있어요. 저는 여러 가지를 다 해보고 싶어요.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니에요. 인생은 경험이거든요. 좋은 것들을 경험하고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참 긍정적인 분 같아요.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란 생각도 들어요.

 

특히 <아프리카TV>는 좀 더 그런 부분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의상도 그래요. 계속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뭔가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선을 넘지는 말아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잃어서도 안 되죠. 시청자도 계속 반응을 하는데 거기에 너무 흔들리지 않으면서 콘텐츠는 계속 생산해 내는 것, 그런 거죠.

 

방송에 이어 책까지 냈어요. 디바제시카의 행보가 엿보이기도 하는데요. 영상 제작에 대한 이야기도 했으니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들려주세요.

 

전 사실 책을 가지고는 다음 행보가 뭐가 될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사람들이 원했고, 책으로 만들어줬음 좋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이었거든요. 솔직히 영상에 다 있는 내용이잖아요. 그걸 그냥 한 권으로 묶은 것뿐인데도 좋아해주시니까 너무 감사한데요. 이 책을 가지고 어떤 행보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걸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영상 사업에 있는 사람이니까 좋은 영상으로 만나 뵙고 싶고요. 40대가 됐을 때는 동기 부여 영상 같은 것 하고 싶거든요. 강연 쪽 일을 재미있게 해보고 싶어요. 

 

연기 수업에 아나운서 학원도 다녔다고 하고, 영상 제작이니 자료 조사니 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네요.

 

찾아내면 의외로 해야 할 것이 많고, 하다보면 발전이 큰데 1인 미디어 분야에 계신 분들이 그런 걸 잘 생각 못 하시는 것 같아 좀 아쉽죠. 자기 발전을 생각 못 하고, 안에 있는 것만 끄집어내려고 하면 어느 순간 한계가 오거든요.

 

BJ라는 직군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런 면도 조금 있는 것 같아요. 방에 웹캠 하나 두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라는 이야기 들으면 어떤가요?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사람이 많은 거겠죠.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보고 논란이 돼야 이곳에 사람이 몰려요. 저처럼 영어만 가르치고 있으면 사람이 몰리지 않거든요. 여기는 자극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분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지만 그걸 이해해달라고 하고 싶진 않아요. 다만 그런 것들이 어떻게 긍정적으로 다가오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아프리카TV>에 오면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 줄 알아요. 저는 그런 인식이 싫지 않아요. 또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한 3년 있었는데요. 이제 날라리 같고 이상한 건 많이 없어졌어요. 트렌드예요. 결국 <아프리카TV>도 트렌드를 따라가거든요.  

 

예전에 <tvN>에서도 B급 콘텐츠만 만들어냈어요. 불륜 현장 잡으러 가고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최고의 콘텐츠만 만들어내고 있어요. 그런 게 제가 보는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1인 미디어의 비전은 뭔가요?

 

저는 지금 생방과 동영상 두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요. 생방에 있어서는 끼 있는 모습이 정말 중요해요. 두세 시간 동안 어떻게 나만 보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러려면 당신을 계속 재미있게 해줘야 해요. 그래서 말도 굉장히 빠르고, 억양도 많고, 욕도 하고, 노래도 밝은 거 틀고 하거든요. 방송을 잘 만들고 싶어요. 하루 종일 음악만 편집할 때도 있거든요. 그게 잘 발전되면 이후에는 후배 양성을 하려고 해요. 지금도 관여를 하고 있는데요. 1인 미디어에 적합한 후배를 양성하는 노력을 하고 싶어요. 방송도 물론 재미있지만 저는 가르치는 병이 있는 사람이어서요.(웃음) 내가 3년 동안 경험한 걸 가르쳐주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동영상 플랫폼에서는 영상이 생방과 달라요. 생방은 두 시간 동안 시청자를 잡아야 하지만 동영상은 3분 안에 잡아야 하고 다음 동영상을 보게 해야 해요. 영상 감각을 계속 익혀야 하거든요. 호흡이 너무 길지 않게요. 그런 건 좋은 분들과 함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BJ 1세대로서 후배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렇죠, 기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고요. 제가 1세대라고 하지만 0세대가 없었던 건 아니거든요. 1인 미디어의 0세대는 그냥 대화하는 수준이 다였는데요. 콘텐츠 방송을 보다 보면 대화하는 방송이 되게 지루해져요. 더 재미있는 걸 듣고 싶거든요. 그렇게 트렌드가 변해요. 거기에 발맞출 수 있는 후배들을 돕고 싶어요. 자기만의 무언가를 갖고 있는 후배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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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가 되고 싶진 않다

 

요즘 방송의 트렌드는 무엇이라고 보나요?

 

장기적으로 보면 TV의 시대는 갔어요. 이제 스마트폰으로 콘텐츠를 보는 거죠. 과거엔 11시에 드라마가 하면 그 전에 집에 가야 했죠. 그다음엔 핸드폰으로 11시에 맞춰서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었고요. 지금은 굳이 11시에 보지 않아도 아무 때나 영상을 볼 수 있는 거예요. 사용자 중심으로 가는 거거든요. 그게 트렌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공중파 출연은 전혀 의미가 없어요. 왜냐면 그건 이미 올드 미디어니까요. 저는 뉴미디어고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저를 볼 거예요. 이렇게 트렌드 변화를 감지하면서 저도 주목을 많이 받았던 거죠.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변해버렸잖아요. 1인 미디어는 방송국과 일하는 게 아니에요. 모바일 방송인 거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이게 유행일까, 돈이 될까, 가 아닌 거예요. 내가 재미있어 할까, 잘할 수 있을까, 좋아하나, 하면 해보는 거예요. 여태까지는 결과가 좋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거든요.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었어요. 지금 중국 시장이 난리거든요. 그런데 재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못하겠더라고요. 저도 포기한 게 있어요. 포기 엄청 빨라요. 

 

저는 메시지가 있는 방송을 하고 싶어요. 쉽진 않아요. 하지만 메시지가 없는 방송은 죽은 방송이라 생각해요. 자극만 찾으면 그건 포르노나 마찬가지예요. 포르노에 메시지가 있나요? 저는 포르노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 강약 조절이 필요할 텐데 그건 진행자의 능력인 것 같아요. 또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얘기해봐라, 하고 들어줄 수도 있고요. 그게 참 좋아요. 누구나 자유로이 얘기할 수 있어요.

 

BJ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어떤 내용이에요? 

 

꾸준함과 자기발전을 많이 얘기해요.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도 중요하죠. 자기 콘텐츠는 제가 건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평가도 자기가 해야 해요. 스스로 만족하면 시청자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항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한 친구는 바둑 방송을 하는데요. 우리 중에 바둑 아는 사람 없잖아요. 워낙 사람이 적지만 자기 콘텐츠에 만족하면 그다음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별것 안 했지만 사람을 모았다면 또 달라져요. 더 흥분되고, 더 뭔가 보여주고 싶어져요. 그것도 또 하나의 경험이에요. 따라서 시청자를 가져가든지 콘텐츠를 가져가든지 아니면 별풍선을 가지라는 말해요. 거기에 꾸준함만 있으면 돼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별풍선은 필요해요.(웃음) 

 

자부심이 느껴지거든요. 남들이 가지 않던 길을 가고, 콘텐츠를 확장하는 것들에 대해서요.

 

그럼요. 그렇다고 다 제가 맞다는 건 아니에요. 다 저처럼 방송하면 <아프리카TV> 죽어요. 안 돼요. 누군가는 간장을 몸에 뿌려야 되고, 누군가는 섹시 댄스를 춰야 해요.(웃음) 그런데 그 안에서 재미있는 걸 만들어내고 싶어요.

 

본문 안에 QR코드가 있어서 바로 방송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도움이 되겠더라고요. 책과 방송을 엮어서 어떻게 공부하면 효율적으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조언해주신다면요?

 

이 책은 영어 공부에 적합한 책이 아니에요.(웃음)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해요. 영어 공부에 적합한 책은 1과에서 2과만 보고 그만 봐요. 반면 이 책은 영어 공부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지만 슬쩍 내용을 보다 보면 뭔가 재미있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한 권을 읽는 게 중요한 것이냐, 1~2과를 보고 영어를 배우는 게 중요한 것이냐 그 차이라고 봐요. 표현 하나를 배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거죠. 문화를 먼저 배우다 보면 흥미가 생겨요. 그다음부터는 영어가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니거든요. 저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초급자들은 그렇게 하고요. 중급자 경우에는 막 적으면서 공부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또 이 책은 해외에서 생활해본 사람에게는 ‘맞아, 나도 그랬어’ 하면서 그때 했던 표현을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요. 그렇게 즐길 수 있게 만들었어요.

 

저는 영어가 너무 좋았어요. 영어 잘하는 금발의 섹시한 여자가 너무 좋더라고요.(웃음) 제가 공부했던 방식도 그랬다 보니까 생활에서 하는 표현을 많이 캐치해서 담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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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바제시카의 미드나잇 잉글리시제시카 저 | 길벗이지톡
아프리카TV 교육부문 BEST BJ, 디바제시카! 매일 밤 미드, 비즈니스, 미스터리, 미국 문화 등 유쾌 발랄한 주제로 영어를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는 강사로 유명하다. 이 책 [디바제시카의 미드나잇 잉글리시]는 영어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철학이 담긴 파격적인 영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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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교수 “경제적인 외로움, 당신 친구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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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경제나 사회는 이분법적 접근이 불가능한 매우 복합적인 영역이고, 한 사회의 현재와 방향성은 역사적인 맥락, 그 사회가 겪은 경험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섬을 탈출하는 방법’을 모색하려면 어떤 장면에서도 ‘그럴 만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서 길이 갈라진다는 점이다. 사회는 선택해야 한다. ‘그러니까 할 수 없다’와 ‘그러니까 이제는 해야 한다’ 사이에서.

 

지금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 곳곳에 위기 담론이 넘친다. “우리는 ‘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산다.”(6쪽) 그런데 들리는 것은 대안 쪽보다는 좌절 쪽이다. 냉소하고, “다 알지만 안 하는 거”라고 한다. 과연 유행하는 말처럼 이곳은 ‘헬(지옥)’이고, ‘노답’인 걸까? 선진국의 ‘합리적인 선택’을 여기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걸까?

 

조형근 교수는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이런 문제도 있다는 것을 서로 공유하고 우리의 집합적 지혜가 커질 기회를 만들면 좋겠”다고 말한다. 유럽 국가의 복지 정책이나 협동조합, 참여 경제, 기본 소득 등에 대해 한 마디로 단언하지 않는다. “이게 참 좋은 건데 사실은 이런 문제도 있다”면서 독자를 힘들게 한다. 불편하지만 그것이 세계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끊임없이 고민하고 용기 내 대안을 상상하자. 이 상상이 쌓여 산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외로운 섬 넘어 다른 세상을 보고, 그곳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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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

 

서두에 로빈슨 크루소를 인용했습니다. 합리적 경제인의 원형인 동시에 섬에 고립된 인간이죠. 신자유주의라는 환상이 깨진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표현도 뇌리에 남더라고요.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이나 제도에 대한 이야기보다도 각자가 느끼는 심정에 먼저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인생 궤적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살아남은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 사람도 힘들죠.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거의 그렇게 됐다는 거예요. 초, 중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말이에요. 친구와 다 같이 공부 잘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못해도 친구가 더 못 하면 좋은 거고요.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굉장히 외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고독이 아니고 아주 구체적인 것이죠.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너무나 경제적인 외로움’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었는데요. 우리가 그렇거든요. 외롭고 힘들어도 일부러 자꾸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진실을 마주하면 힘들기 때문에 그래요. 상처받지 않을 도피처를 계속 찾으면서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굉장히 외로워요. 독자분들께서 이런 고독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렇게 썼어요.

 

외로움이나 상처를 회피하려는 태도는 각자도생의 삶이라는 모든 개인들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해요.

 

직시하면 굉장히 괴롭거든요. 또 직시해서 대안이 있다고 하면 직시하겠지만 사실 답이 없잖아요. 오늘날의 문제는 냉소주의라는 부분이 굉장히 크죠. 냉소하는 주체는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고요. 정치가든 사회개혁가든 장밋빛 약속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약속 어떤 것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다시 말하면 실패를 미리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냉소로 견뎌내는 거죠. 다 알지만 안 하는 거라고 해요. 좌절하거나 그걸 진지하게 고민하면 괴로워지니까요. 이것이 지금의 전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대안을 고민하려면 다른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겠죠. 그런데 보면 지금 좌든 우든, 모두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좌는 좌로 가고, 우는 우로 가는 게 맞는데요.(웃음) 우왕좌왕 하고 있다는 진단에 저도 전폭 동의합니다. 경제가 주제니까 이 분야에서만 본다면요. 노벨상 받으신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도 많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의 현재에 대한 진단, 처방을 봐도 중구난방 같아요. 한 방향으로 모이는 그런 느낌이 없어요. 비전의 우왕좌왕이라고 하는 현실 이전에 사실은 그것의 기초가 되는 경제 자체가 우왕좌왕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정확한 진단이겠죠.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지금도 연초부터 경제가 난리잖아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러시아, 브라질, EU 곳곳과 중국, 가장 최근에는 일본까지 난리라는 건데요. 금융 위기가 과거 대공황처럼 한꺼번에 터지진 않았지만 그건 대공황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대신 여기저기서 터졌다 꺼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죠. 소위 말하는 마이너스 성장, 지속적인 고용부진과 고실업은 어쩌면 이 시대의 ‘새로운 정상(뉴 노멀)’이라는 진단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어요.

 

정책이나 비전 이전에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군요.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현재 시스템이 답이 없기 때문이에요. 대안도 마땅찮지만 지금 들고 있는 카드도 이미 쓸 수 없는 카드인 거죠. 최근 로봇이 장래에 노동자의 50%를 대체한다는 뉴스가 있었는데요. 경제를 굴리는 여러 수레바퀴 중 대다수 사람들에게 절대로 중요한 건 소득이잖아요. 소득은 노동을 통해 얻는 거죠. 그런데 이런 대부분의 삶의 근거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거예요. 이 상태로는 자산가도 위기죠. 갈수록 돈이 쌓이면 뭐해요. 소비자가 물건을 팔아줘야 하는 걸요. 금융 자본주의 무너지는 것 봐서 알잖아요. 아무리 돈놀이를 해봐야 사람들이 소득을 통해 그걸 뒷받침해주지 못 하면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거죠. 이 시스템이 벽에 가로막힌 거예요. 근본적으로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어요. 훌륭한 석학들이 똑똑하지 않아서 제대로 진단하지 못 하는 게 아니겠죠. 이것이 ‘우왕좌왕’의 근본 원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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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발전

 

소련,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해 유럽 각국의 사회 발전에 따른 사회복지 시스템 등을 짚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겠네요.

 

사실 고민했어요. 옛날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하고요. 대부분 다 잊어버렸죠. 사회주의는 망한 거고 그걸 다시 들추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요. 저는 어쨌든 그것이 대안을 꿈꾼 인류가 수행했던 가장 거대한 실험이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해서 ‘끝났어’ 해버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과정에서는 일면 옳은 선택들이 있었고요. 그러니 역사를 보는 게 어려운 거죠. 결국 진지한 무언가를 꿈꾼다는 건 항상 강력한 반발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그냥 낭만주의겠죠. 

 

저는 설혹 전쟁이라고 해도 좋을 강력한 반발과 갈등이 있겠지만 그것조차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대안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 철저하게 지금부터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안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사정이 너무 급하니까 일단 이런 건 넘어가자’라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분들일수록 지금부터 대안을 현실 속에서 만들어나가고, 그렇게 살려고 해야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때도 대중의 지지 속에서 대안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일, 영국, 스웨덴 등 다른 선진국에서 경험한 잘못된 사례의 전철 밟지 않을 기회가 있다는 게 한국 사회의 무기일 텐데요. 현상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미, 특히 미국식의 정책 결정이 대다수를 차지하죠.

 

역사적으로 우리가 겪어온 과정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영미식, 콕 집어 말하면 미국식의 삶의 방식, 경제 노선이 유일선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에요. 당연히 그렇죠. 그러나 한국이 해방 이후, 적어도 1960~70년대 이후 경제적 성공 과정에서 밟아온 게 그 노선이었어요. 미국이 만든 세계질서 속에서 ‘초대받은 발전’이었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물론 한국 노동자들의 노력이 많았지만 미국으로부터 ‘초대받은 발전’이라는 열차의 탑승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죠. 그런 성공의 경험 때문에 이 믿음이 굉장히 대중적 차원의 것이 됐어요. 소위 진보개혁 진영에서도 이런 믿음을 적지 않게 발견하게 돼요. 그걸 너무 자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식견이 좁고, 미국 숭배주의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걸어온 경로가 그렇다는 사실도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감히 다른 상상을 한다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두려운 거죠. 그러나 이제는 상황에 떠밀려서라도 용기를 내야만 할 때가 된 게 아닌가 해요. 이 시스템으로 안 된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진다면, 해야죠.

 

경쟁 없이 협력만, 협력 없이 경쟁만 하는 시스템 없다, 경제는 경제만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다, 같은 말은 아주 중요하게 들립니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들이므로 종합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가장 염두에 뒀던 게 그거예요. 사실 단칼에 ‘이거다’라고 말하는 게 저도 마음 편하고 독자분들도 편할 텐데, ‘이게 참 좋은 건데 사실은 이런 문제도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힘들어요.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고민이었어요. 그래도 그러지 말자, 실제로 경제 정말로 복잡하다, 생각했죠. 복지국가,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과연 계속 갈 수 있을까 라든가 기본소득, 이걸 왜 우파도 찬성하는 걸까 라든가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지지 않으면 과거에 했던 잘못을 반복하게 될 거란 생각을 한 거죠. 저는 대중이 엘리트가 비전을 제시하면 박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선택하는 사람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중이 정치 소비자고, 정치를 생산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전형적인 시장 논리잖아요. 그렇지만 대중은 정치 주권자고, 주권자가 그러면 안 되죠.

 

책에서 다룬 사회적 경제, 참여 경제나 기본 소득도 그렇지만 이것들은 대중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모델이에요. 상품을 고르는 게 아니고 만드는 과정 자체에 자신의 지혜를 발휘해야 해요. 가급적이면 복잡하고 어려워보여도 이런 문제도 있다는 것을 서로 공유하고 우리의 집합적 지혜가 커질 기회를 만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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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은 안 된다

 

미국 뉴잉글랜드와 남미 복지를 비교해 빈부격차가 작은 사회의 복지 수준이 더 높다는 사실을 증명한 학자 케네스 소콜로프(Kenneth Sokoloff) 연구가 인상적이었어요. 명백한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여전히 복지는 잘 살고 난 뒤에 하자고 말하죠.  

 

5공화국 국정 지표 슬로건 중 하나가 ‘복지국가 구현’이었어요. 이해되세요?(웃음) 그때는 우리나라가 아직 부유하지 않아서 복지를 제대로 못하지만 복지국가로 가는 건 당연하다는 게 일종의 합의였어요. 차이가 있죠. 지금 복지는 잘 살고 난 뒤에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지 않아요. 복지국가는 지금 안 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역시 역사적 경험의 축적이 중요한 건데요.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복지는 나중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자꾸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는데요.(웃음) 90년대 고도성장을 하면서 계속 참으라고 했고, 많은 국민들이 희생을 했지만 전체적으로 상승했다고요. 산업화에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국민 다수가 소득 상승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체험한 거예요. 그래서 기다리란 말이 먹힐 수 있었던 거죠. 당장은 복지 안 하고 참았더니 나아졌다는 걸 체험한 세대인데요.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문제는 그게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게 명백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적어도 지금 시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야 해요.

 

독일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해요. 한국 사회에서 호감도도 높은 곳이고, 그 사회의 정책 중에 실현가능성이 엿보이는 부분도 있거든요. 독일의 여러 장면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방법론은 어떤 것인지 질문이 생겨요.

 

독일에 사는 분들은 독일이 재미없는 사회라고 하던데요.(웃음) 독일에 대해선 한국 사람들의 호감도가 높죠. 덩치도 그나마 비슷하고요. 제조업 중심, 분단 경험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막상 독일처럼 경제 시스템을 취하자 하면, 의문을 갖죠. 가령 노사 공동결정제도,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2천 명 이상 대기업에서는 동수로 경영을 결정하는 이런 제도를 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종북좌빨(웃음) 취급을 받아요. 경계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안 돼’라는 생각을 갖지 말자는 점이에요. 독일 역시 후진적이고 비합리적인 나라였어요. 히틀러 체제에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일으킨 민족이기도 하고요. 독일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고요. 우리는 독일처럼 합리적인 사회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다면 정당 역사를 들 수 있겠죠. 독일 사민당은 제가 알기로는 서구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당이에요. 1875년에 창당했거든요. 창당 주역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였죠. 세계 최초의 합법화된 사회민주당이기도 하고요. 그 당이 아직까지 있는 겁니다. 어떤 우파 정당보다도 역사가 오래된 당이에요. 아주 강력한 역사와 전통의 좌파 정당인 거죠.

 

합리적 우파는 치열하게 싸우는 대중, 좌파 없이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책의 구절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너무 성급한 것 같아요. 소위 386세대가 80년대 주로 대학생으로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90년대부터 정치권에 들어가거든요. 반면 1968년 유럽 차원에서 일어난 68혁명 이후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10년 뒤에 사민당, 무슨 당 들어가서 국회의원이 됐느냐? 그렇지 않단 말이죠. 가장 대표적인 게 녹색당이에요. 완전히 새로운 당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사민당보다 더 왼쪽이죠. 독일 녹색당 지도자 다니엘 콘 벤딕트(Daniel Cohn-Bendit)는 프랑스 유학 당시 68혁명에 참여해 지도자가 된 사람인데 이후 베를린 시장이 된 게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요. 오랜 시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을 해나갔던 거죠. 독일 사회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합리적인 모습보다 끈질김입니다. 이렇게 지독하고, 끈질기게 한 길을 가는 사람들 때문에 우파도 합리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니까요.

 

지금 한국 사회는 투쟁 동력을 잃은 것 같아요. 좌절감이 지배하는 사회죠. 성공의 경험이 없기도 하고요.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면 이른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대안은 있다’는 말을 더 많은 곳에서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굉장히 중요한 지적 같아요. 특히 세대가 젊어질수록 어제보다 오늘이, 내일이 더 나아지고, 힘을 합쳐서뭔가를 조금이라도 바꿔본 경험이 점점 줄어들죠. 젊은 세대는 거의 없고요. 이런 상황이 아마도 지금의 사회 전반적인 좌절, 활력의 소진의 원인인 것 같아요. 굉장히 공감을 하고요. 그런데요, 약간 근거 없는 소리 같지만 저는 믿음이 있어요. 젊은 세대가 좌절한 건 맞지만 진공 상태에서 그들만 살아온 건 아니잖아요. 부모 세대, 선배 세대를 보면서 크는 거고 그들과 대화하고 접촉하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저는 한국 사회가 가진 독특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흔히 하는 말로 한국인들이 평등 의식이 강해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적 역동성을 가졌고요. 예컨대 전쟁과 4.19 혁명, 격렬한 이촌향도와 산업화, 6월 항쟁과 2008년 촛불까지 면면이 이어져오는 것이 있잖아요. 보고 배운 것이 그건데 그게 어디 가겠어요. 너무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말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가요. 거기서 희망의 단초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개인이 희망을 갖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 요원하지 않나요?

 

제가 너무 옛날 얘기를 했죠?(웃음) 방금 얘기는 거시적인 이야기였고요. 실제 생활에서는 구체적인 게 필요하죠. 전쟁 용어를 사용해서 조금 그렇긴 한데, 공중전도 필요하지만 게릴라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해요. 20세기 내내 가장 활성화된 정치, 사회적 행동의 근거지가 대학이었거든요. 학생이라는 지위의 엘리트 집단이 정치적으로 활성화 돼 있었죠. 다른 무엇보다 연대의 경험을 한 거잖아요.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면에서 젊은 사람들이 함께 세대 체험을 하면서 자원으로 끌어갈 만한 기반이 붕괴돼버린 상황이에요. 저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원을 가진 기성세대들이 젊은이들이 뭔가 만들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스스로 하기에는 취업이나 스펙 경쟁이 너무나 심하니까요. 젊은이들도 연대의 체험을 해야죠. 친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의 경험을 하는 거예요. 하다못해 영화를 같이 보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서 집요하게 개인이 외로움에 떨지 않고 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은 경험이 확장되면 책 후반에 이야기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으로 이어질 수 있겠죠.

 

당연하죠. 책 상당 부분을 사회적 경제에 관해 썼는데요. 사회적 경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좋은 약이라서가 아니에요. 사회적 경제는 오히려 자본으로 들어가는 거란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왜 사회적 경제를 굳이 그렇게 말했느냐 하면 당장 그런 게 필요한 분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많아요. 복지 국가를 만드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죠. 그런데 이것은 긴 시간이 드는 프로젝트잖아요. 한편 지금 당장 직업을 잃은 분들이 너무 많아요. 제 주변에도 무척 많습니다. 이분들이 뭘 할 거냐는 거예요. 저는 이런 분들의 입장에서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투쟁과 복지 국가를 만들자고 하는 게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대립되는 용어가 아닌 거죠. 미래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국가가 책임을 져줘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지혜를 모아 대안을 만들고 이런 대안에 대해 정부가 더 제도적으로 지원해줘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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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탈출하는 방법

 

개인의 삶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모든 개인이 ‘상품화’ 되어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스웨덴의 복지가 노동의 탈상품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했다는 사실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스펙 경쟁이 엄청 치열한 사회가 됐잖아요. 이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노동 시장에서 얼마나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 건가를 가지고 경쟁하는 건데 우리는 이 사실을 굉장히 당연하게 생각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정치적 성향과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을 상품으로 만드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건데요. 이게 자연스러운 거면 힘들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 힘들죠. 한국 사회가 스펙 경쟁에서 탈진에 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웨덴 복지에서 탈상품화를 굳이 강조한 이유는 한국 사회의 복지 담론이 가진 왜소함에 대한 개인적 문제의식 때문이었어요. 한국에서 복지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를 말하잖아요? 당연히 보편적 복지로 가면 좋겠죠. 그러나 이 논쟁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복지 국가는 큰 국가가 될 수밖에 없어요. 출생부터 죽음까지 국가가 관리해주는 거거든요. 국민이 길들여져 있는 국가죠. 스웨덴을 볼 때 자꾸 우리는 사민주의는 빼고 복지만 보는데요. 봐야 할 것은 ‘사회민주주의’거든요. 보통의 국민들이 이 시스템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거예요. 주인이 되려면 상품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복지를 하는 거다, 이거거든요.

 

탈상품화와 연결되는 이야기 같기도 한데요. 본격적인 선거철을 앞두고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기본소득 이슈를 많이 논의하고 있어요. 책에도 한 챕터를 다루고 있는데요. 기본소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오해에 대해 한마디 해주세요.

 

질문의 취지와 다른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저는 기본소득이 오히려 대세가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주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해요. 핀란드 경우는 우파적 맥락에서 도입하려는 건데요. 이것이 더 절약된다는 겁니다. 다른 복지를 없애도 기본소득으로 복지를 통합하면 말이죠. 기존 복지 제도는 운용 자체에 비용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기본소득은 계좌에 돈 꽂아주면 돼요. 얼마나 편해요. 엄청나게 비용이 절약되는 겁니다. 또 세금으로 만들어진 돈이 소비를 통해 사기업으로 들어가고요. 우파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기본소득이 대세가 될까봐 걱정된다는 거고요.

 

진보 정당에서 그리는 기본소득은 그런 게 아니겠죠. 최소한 지금 지출하는 복지비용보다 같거나 그 이상을 기본소득으로 지출할 것을 생각하는 거죠. 기본소득으로 받은 돈을 시장에 바로 쓸 것이 아니라 공공부문, 혹은 사회적 경제 부문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겠고요.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이라는 건 더 이상 하나의 안이 아니라는 겁니다. 경합하는 모델이에요. 결국 기본소득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이 이야기될 거예요. 그 때문에 기본소득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반박은 줄어들 거고 오히려 ‘어떤 기본소득이냐’가 더 중요해질 거예요.

 

마지막으로 ‘섬을 탈출하는 방법’을 한 마디로 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협력할 방법을 찾자고 말하고 싶어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가 제일 문제가 되는 건 ‘혼자 있다’는 거잖아요. 한참 뒤 프라이데이가 등장하지만 그는 협력할 동료가 아니죠. 우리가 있는 곳은 로빈슨 크루소의 섬이 아니고 바로 곁에 협력할, 함께할 사람이 있어요.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불행하고, 더 이상 행복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퍼지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경제적인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것, 어쩔 수 없다, 이런 건데요. 다 이렇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내 옆의 친구도 이렇구나, 하고 공감하면 돼요. 그러면 뭔가 할 수 있는 거죠. 결국은 우리 모두 이기적 인간이지만 인간이 본성적으로 협력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정도로까지 이기적인 세상을 만들 수 없었겠죠. 협력이 우리 인간의 최고의 본성이에요.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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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탈출하는 방법조형근,김종배 공저 | 반비
『섬을 탈출하는 방법』은 성장은 멈추고 일자리는 점점 더 불안정해져 모두가 끝없는 경쟁으로 내몰리게 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시대에 다르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하는 책이다. 이제는 각자도생의 지옥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와 삶과 사회의 모델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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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기자 “클로징 멘트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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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SBS 정치부장이 첫 책 『뉴스를 말하다』를 펴냈다. ‘앵커 출신’ 기자의 성공담으로 비쳐질까 우려돼 고심 끝에 펜을 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첫째도 뉴스, 둘째도 뉴스였다. 세상에 뉴스가 왜 필요한지, 뉴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제목은 다소 딱딱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사람’을 향해 있다. 1994년 성수대표 붕괴 사고를 취재했던 SBS 공채 1기 기자는 20년 후, 세월호 침몰 사고를 전하는 메인 앵커가 되었고, 여전히 ‘뉴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뉴스를 만들고 있다.

 

“책을 쓰면서, 글은 무섭다는 것을, 남을 해칠 수도, 내 심장을 겨냥할 수도 있는 비수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참 원고를 쓰다가 되돌아보니 소재는 일상인데 글에서는 무슨 독립투쟁사 같은 비장한 냄새가 배어났다. 혼자 흥분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식은땀이 났다. 편하게 읽힐 책을 목표로 처음부터 다시 썼다. 저널리즘이 갈 길이나 사회가 발전해야 할 방향에 대한 과점을 담으려던 애초 목표를 버렸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되 그게 무리한 고집이나 어줍지 않은 선언으로 읽히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책에서 날카로운 송곳이나 묵직한 망치를 기대한 독자는 평범한 기자의 좌충우돌 방송 일기 따위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히려 성공이다.” (7-8쪽, 『뉴스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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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니 뉴스 좀 봐야겠네

 

1주일 만에 2쇄를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첫 책이신데요.

 

책을 내기까지 상당히 망설였어요. 자칫하면 앵커 출신들이 자기 자랑을 하면서 쓰는 방송기가 될까 봐요. 제목부터 건조한 느낌으로 쓴 책인데, 그래도 많은 분이 읽어주신 것 같습니다. 출판계가 상당히 어렵다고 해서 예상을 하긴 했는데, 정말 어렵긴 한 것 같아요.

 

2014년 12월까지 약 4년간 <SBS 8뉴스> 앵커를 맡으셨어요. 앵커를 하셨을 때, 집필 제안을 더 많이 받으셨을 텐데요.

 

청림출판 편집자 분이 처음 연락을 주셨을 때가 앵커를 하던 와중이었어요. 클로징 멘트에 관심이 많다고 책을 써보자고 하셨는데, 그 때는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여러 차례 메일이 오가다 거절했는데, 앵커를 마쳤을 때 다시 한 번 연락을 주셨어요. 잠깐 한가한 때여서 뵙기로 했는데, 이야기를 듣다가 말려든 거죠. (웃음) 어쨌든 제 인생에서도 중요한 한 단락을 마무리한 시점이기도 했으니까요.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뉴스라는 큰 주제에 맞게 내용이 있는 책으로 만들자는 제안에 넘어갔습니다.

 

정식으로 책을 쓰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요?

 

작년 3월쯤이었어요. 내용 중 상당 부분이 클로징 멘트인데, 그간에 페이스북에 짧은 단상을 올렸기 때문에 책을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제목이 『뉴스를 말하다』입니다. 원론적인 느낌이 들었는데요.

 

가제가 따로 없었어요. 일부러 제목을 생각하지 않고 글을 썼어요. 제목에 함몰될 것 같아서요. 무겁게 쓰려고 하진 않았는데 쓰다 보니 비장해지더라고요. 애초부터 아주 가벼운 생활 에세이를 쓰려고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널리즘에 관한 대단한 관점을 제시하거나 한국 정치를 비평하겠다는 생각도 없었거든요. 다만 4년간 <SBS 8뉴스>를 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를 담아보고 싶었어요. 앵커를 하면서 클로징 멘트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프롤로그를 읽어보니, 초고를 쓰다 한 번 뒤집으신 것 같습니다.

 

상식 선에서 쓰려고 했는데 자꾸 비장해져서요. 상식이 비장해지면 웃기잖아요. 상식을 이야기하는 만큼 상식 선에서 쓰고 싶었어요. 책은 또 재밌어야 읽히잖아요. 재밌게 쓰려고도 했어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기자 지망생들이 많이 읽을 것 같은데, 뉴스를 좋아하는 주부들이 읽어도 재밌겠다 싶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뉴스 좀 봐야겠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그냥 무심코 봤던 뉴스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구나, 하는 재미를 느끼신 것 같아요.

 

‘보고 싶은 뉴스, 봐야 하는 뉴스’라는 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2014년에 열린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이 3,000미터 계주에서 금메달을 딴 날의 뉴스 이야기입니다. 같은 날,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의 체육관 붕괴 사고가 있었고요. 타방송사 뉴스에서는 ‘금메달’ 소식을 톱으로 다뤘지만, SBS <8뉴스>는 붕괴 사고를 톱으로 전했어요. 많은 시청자가 “역시 SBS야”, “오프닝 듣고 눈물이 났다”고 반응했습니다.

 

현실에서 뉴스에 대한 시청자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면,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뉴스와 봐야 하는 뉴스는 뜻밖에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신나는 올림픽 기간이라고 해서 우리가 만사 제치고 메달 소식만 기다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이런 목소리가 작지 않다는 얘기예요.

 

책 카피가 “뉴스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하여”인데요.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2013년 고아원 아이들의 급식비를 다룬 <SBS 8 뉴스>였는데요, 실제 정부와 국회가 추가경정예산을 처리하면서 시설 아동 급식비를 549원 올렸습니다.

 

5천 만 인구 중 1만 6천 명의 아이들이 가정을 잃고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부는 고작 고아원 아이들 급식비를 100원 올렸어요. 후배 기자가 이 돈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음식을 해줄 수 있는지 시장을 돌아다녔더니, 무 하나 당근 몇 개 사고 나니 10명 급식비의 3분의 1이 사라졌어요. 이 리포트뿐이 아니었어요. 아이들의 상태는 보기보다 심각했어요. 인하대학교 의대 의료진이 시설 아동 115명의 발육 상태를 조사했는데, 초등학교 여자아이의 평균 키가 또래 아이들보다 약 14센티미터 작았어요. 아이들이 사실상 영양부족 상태였죠. 정부와 국회가 등 떠밀리듯 움직여 그나마 급식비를 549원 올려 가까스로 2,000원대에 턱걸이를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어요. 후배 기자와 이 리포트를 진행하면서,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든 뉴스에 반영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뉴스라면 남보다 한마디 더해야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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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자제력’

 

시청자에게 ‘김성준 앵커’를 각인시킨 건, 클로징 멘트였습니다. 응원도 많았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는데요. 멘트를 쓰는 원칙은 “비판은 아프게, 하지만 표현은 품위 있게”라고 하셨어요.

 

정치 이슈에 관한 멘트가 아무래도 화제가 됐죠. 제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될 때도 많았고요. 때로는 아픈 비판이어도 말에 일리가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집단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만 생각하면 문제가 있죠. 2013년 2월, 새 정부가 출범할 때 영국의 비평가 E.M.포스터의 글을 소개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민주주의를 두 가지 이유로 환호한다. 하나는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 소통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클로징 멘트의 길이를 140자 이내로 한정하는 원칙도 끝까지 고수하셨는데요.

 

처음에는 순전히 트위터에 올리기 위해서였는데, 글자수를 줄이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덕분에 뜻밖의 표현들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글자수 제한이 없었더라면 나올 수 없는 문장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이 원칙 덕분에 제약을 가하면 창의성이 솟구친다는 걸 발견했어요. 클로징 멘트를 대충 쓰지 않게 해준 감시자였죠.

 

반면 ‘종북 좌파 앵커’라며 공격을 받기도 하셨는데요. 그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웃음)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요. 그냥 회오리바람처럼 한꺼번에 확 몰았다가 사라졌어요. 극우 보수에 있는 분들은 저를 무척 좌파적인 사람이라고 기억하겠지만, 또 극우 좌파에 있는 분들은 보수 여권만 챙기는 앵커라고 기억하고 있을지 몰라요. 결국 입장에 따른 문제일 뿐, 제가 보수 이익을 챙겼거나 진보에 편향되진 않았으니까요.

 

앵커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자제력’이라고 하셨는데요.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부분이에요. <모닝와이드>를 진행할 때는 재밌는 뉴스를 만들고 싶어 여러 장치에 대한 고민을 했지만, 앵커 멘트에 대한 자제력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중요한 건, 팩트에 기초해야 한다는 거예요. 부정 부패를 고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멘트도 사실을 갖고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여러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면 안되죠.

 

원로 기자 선배의 편지를 공개하셨는데, “앵커맨은 정부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냥 한 번 죽게 돼 있죠. 뭐,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적혀 있던데요.

 

편지를 받았을 때, 정말 식은땀이 났어요. 클로징 멘트 때문에 여러 곳으로부터 시달리던 때였거든요. 편지를 여러 번 읽어보니, 더 용감하게 비판하지 못했다는 반성보다는 비판한다고 했던 말들이 목숨을 걸 만큼 치밀하게 준비된 것들이었는지 반성하게 됐어요. 관성적으로 말을 만들어냈던 건 아닌지, 비판 받아야 할 대상에게 제대로 비판한 건지 되돌아보게 됐어요. 권력이 사회에 올바로 봉사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비판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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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실패로부터 얼마나 배웠는지

 

지금은 보도국 정치부장으로 계시는데요. 현장에 나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있으시겠어요.

 

기자라고 모두 현장에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많이 받아서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하고자 합니다. 거꾸로 기자들이 좀 더 깊숙한 현장에서 마지막 알갱이까지 파헤칠 수 있도록 노력도 해야죠.

 

SBS <스브스뉴스>가 호평을 받고 있어요. SBS 공채 1기 기자가 보는 스브스뉴스에 대한 평가가 궁금합니다.

 

중요한 건 본질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거예요. 가치 있는 정보를 어떻게 잘 전달하는가가 뉴스의 핵심인데요. 이 기본적인 틀이 변하지 않는 이상 방식의 변화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뉴미디어 시대니까 낡은 방식은 변해야죠. 다 실험이라고 생각해요. 뉴스 수용자들이 가치 있는 정보를 취득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노력이든 해야죠.

 

청소년 멘토링을 할 때, 강조하는 부분이 “생각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이야기라고요.

 

책에도 썼지만, 종종 부모들이 아이들 몰래 이런 부탁을 해요. “기자가 되려고 해도 수학 열심히 해야 한다고 좀 해줘”라고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해요. “너희 아버지가 기자가 되려면 수학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해달라 하셨는데 그것뿐만이 아냐. 사실 뭐든지 열심히 해야 해. 학과 공부는 물론이고 책 읽기나 운동, 심지어는 고민도 연애도 많이 해봐야 해. 네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나쁜 녀석들과 주먹다짐도 해봐. 선생님이 틀렸다고 판단되면 항의도 하고. 무엇보다 생각이 자유로워야 한다”고요. 이러면 아이들은 환호하고 부모들은 괜한 부탁을 했다고 후회해요.(웃음)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자”를 핵심으로 꼽으셨어요.

 

세상의 수많은 부담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해 살게 하자는 취지였어요. 이 교육 목표는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리지 않았지만 아쉬움은 곳곳에 남았어요. 아이가 외동딸이에요. 때문에 함께 손잡고 사는 방법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함께 손잡고 가지 않으면 길을 걸어가기 쉽지 않은 시절이잖아요. 아이 교육은 부모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만, 분명한 교육 목표를 정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셨고, 기자 지망생들로부터 멘토 요청도 많이 받으실 텐데요. 젊은 세대가 가장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금 모두가 어렵잖아요. 특히 젊은 세대가 어려운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해요. 일부러 실패를 좀 많이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잖아요 실패하는데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고 짜증낼지도 모르지만, 위기에 빠져있는 조직을 구하는 사람은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에요. 성공만 해본 사람은 사회에 나가 느닷없이 거대한 바위에 발길이 막혔을 때 당황하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실패를 겪어본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보기 좋은 자기소개서나 화려한 성적표를 꾸미는 데 열중하지 말고, 아픈 실패로부터 얼마나 배웠는지를 보여줬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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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온다면, 정치에 뛰어들 마음은 있으신가요? 지금은 없어도 언젠가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텐데요.

 

(웃음) 전혀 생각이 없어요.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이 시즌에 책을 썼겠어요? 모든 사람이 의심할 텐데요. 물론 지금 정치부장으로 있고, 기자 생활의 절반을 정치부에서 했어요. 관심도 많고요. 뉴스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데 관심이 있을 뿐, 직접적인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치에 욕심 있는 분들은 이미 많잖아요. 저는 뉴스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새벽부터 일어나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뛰어다닐 자신이 없어요. 제 취향이 아니에요.

 

두 번째 책을 쓴다면요. 어떤 책을 쓰고 싶나요?

 

다양한 책을 써봤으면 하는데요.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요. 사진으로 세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책에 싣기도 했지만, 팽목항 사진처럼 현장 이야기를 담아내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이갑철 작가와 일본 사진가 모리야마 다이도를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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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말하다김성준 저 | 청림출판
김성준 기자는 그동안의 취재 기록과 앵커 시절 클로징 멘트를 돌아보면서 뉴스에 대한 작은 바람을 담아 이 책 《뉴스를 말하다》를 펴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뉴스의 힘이 무엇이며, 뉴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세상에 대한 소망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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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여에스더 “6가지 영양제 중 딱 하나밖에 못 먹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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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너무 많은 정보가 선택을 방해한다. 영양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편에서는 영양제를 복용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적당히’ 먹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여전히 선택은 쉽지 않다. 제품마다 함량도 다르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기준’이다. 어떤 성분을 피해야 하는지, 나에게 맞는 복용량은 어느 정도인지, 알기 쉽게 정리해 놓은 자료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왜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되었나』는 바로 그 기준을 제시해준다.

 

KBS 라디오 <건강365>, TV조선 <홍혜걸의 닥터콘서트> 등을 진행했던 의사 여에스더. SBS의 예능 프로그램 <자기야-백년손님>을 통해 대중에게 친숙해진 그녀는 어려운 의학 이론도 쉽게 설명해주는 ‘친절한 의사’다. 13세까지의 건강이 아이의 머리를 지배한다』, 『노화와 성인병을 일으키는 주범 나잇살』등의 저서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생활 속에서 손쉽게 건강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는 그녀의 노력은 『나는 왜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되었나』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이름하여 “영양제를 잘 골라 먹고 싶은 당신에게 드리는 특별 처방전”이다.

 

여에스더는 “영양제는 약이 아닌 식품”이라고 말한다. 과량 복용이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부작용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전제로 『나는 왜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되었나』는 영양제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영양제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많은 연구 논문들은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영양제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도 빼놓지 않았다. 종합비타민부터 비타민 D, 칼슘과 마그네슘, 프로바이오틱스에 이르기까지 영양제의 종류에 따른 효과와 선택 방법을 정리해 놓았다. 상황별 맞춤 처방전 또한 제시한다.

 

오랫동안 만성피로에 시달려온 저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기능의학을 공부하다 영양의 중요성에 눈뜨게 됐고, 현재는 ‘에스더포뮬러’의 대표이사로서 질 좋은 영양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영양제가 치료약인 양 오인되는 것은 경계한다. 『나는 왜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되었나』에서 ‘영양제에 대한 주의 사항’을 일러두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영양제의 올바른 복용 방법’은 무엇일까.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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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제가 식품보다 안전할 수 있다

 

이번 책에서 ‘영양제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셨는데요. 그동안 영양제에 대한 오해들로 많이 속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굉장히 많이 답답했고 속상했어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몸이 아프거나 힘들면 의사를 찾아가는데, 의사 선생님들 중에는 ‘영양제는 필요 없다, 먹으면 독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거든요. 저는 의사 입장에서 너무 답답한 게, 정말 환자를 열심히 보셨던 분들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 의과 대학 교육이 아프면 약물을 주고 수술을 하는 것 위주로 되어 있어요. 생활 교정을 하고, 영양적으로 도움을 주고, 운동을 하고, 스트레스 관리를 해줘야 더 건강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우리나라 의학 교육에서 많이 부족해요. 그게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예요.

 

영양제를 식품이 아닌 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영양제 복용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나는 것 아닐까요?

 

맞아요. 모양이 약 같잖아요. 그렇지만 책에서도 누누이 지적한 것처럼, 영양제는 약이 아니라 식품이거든요. 아직까지는 식품보다 부족할 수 있지만, 성분이나 함량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제제라면 적어도 식품보다는 안전하다는 걸 더 강조 드리고 싶어요.

 

“요즘같이 환경오염이 심각한 시대에는 음식도 더 이상 완벽한 먹거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셨어요. 등 푸른 생선을 예로 드셨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수산자원을 보호해야 되기 때문에 해양부 같은 곳에서 발표를 하지 않지만, 미국은 이미 15~16년 전에 환경청에서 제시했어요. 무슨 생선은 먹지 마라, 무슨 생선은 얼마만큼 먹어라, 어린아이와 임산부는 생선을 어떻게 제한하라, 그런 게 나와 있어요. 모두 공해 때문이거든요. 단순히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만 바다로 가는 게 아니라 공기 중에 있는 여러 가지 독성 물질이 비가 오면 바다로 들어가죠. 그걸 생선들이 먹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음식의 좋은 성분은 먹되 그 안에 들어있는 중금속이나 독성 물질들은 피하려고 노력해야죠. 지금은 먹는 것도 환경에 맞게 달라져야 하는 시기예요.

 

필요한 영양소를 음식으로만 충당하기에는 섭취해야 할 양이 너무 많아지는 것 또한 문제겠죠.

 

아시다시피 1900년대 초반에는 미군들의 평균 수명이 40대 중반밖에 안 됐어요. 그때는 뱃살이나 성인병처럼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었죠. 그리고 40대 중반이 되면 영양소의 흡수가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그런 변화를 느끼기도 전에 다 죽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않아도 오래 살잖아요. 예를 들어 40대 중반부터 90대 중반까지 50년 동안 영양소 흡수도 줄어들고 몸은 계속 늙어가는 거예요. 그걸 전부 다 음식으로 채우게 되면 엄청난 칼로리가 들어오거든요. 그래서 불필요하게 살이 찌게 되고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책에도 나와 있지만, 지금의 사과는 50년 전의 사과와 다르다는 거죠. 음식에도 정성이 들어가야 영양이 풍부해지는데 지금은 전부 대량생산을 하잖아요. 1년 내내 과일이나 채소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과일이나 채소 안에 들어있는 영양소가 옛날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잘 먹어서 영양제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틀렸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요. 칼로리는 넘쳐나지만 미네랄이나 비타민이나 각종 영양성분은 부족하다는 거고요. 그걸 모두 음식으로 섭취할 때는 내가 원하지 않는 성분들, 예를 들어서 등 푸른 생선의 중금속이라든지 고기의 포화지방 같은 것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음식으로 잘 먹도록 노력은 하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영양제로 채워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입맛도 좋고 음식도 잘 먹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비타민 D를 제외하고는 영양제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실제로 암이나 만성질환이 있으면 영양제의 도움 없이는 견뎌내기가 어려워요. 우리나라는 암 경험자가 100만 명이나 되고 대장암도 세계 1위거든요. 그런 항암 치료 과정을 견딜 때에는 특히나 영양제의 도움이 없으면 어려워요.

 

기능의학을 공부하시면서 영양이 “인체의 기능을 개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걸 알게 되셨다고요.

 

제가 처음 기능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30대 중반에는 저희 모교의 교수님들이 ‘여에스더 너 어떻게 된 거 아니니, 너 돈 벌려고 이러는 거니, 뭐 이런 이상한 짓을 하니’라고 이야기하셨어요. 그런데 너무나 다행히도 지난 15년 사이에 제가 공부한 이 분야를 뒷받침할 수 있는 논문이 굉장히 많이 나온 거죠. 그러니까 지금은 모교 교수님이나 동문들이 전화가 와서 어떤 영양제를 먹으면 좋을지 질문을 해요. 보람이 있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오래 사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요. 사는 동안 건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영양제가 삶의 질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미쳐요. 굉장히 오랜 세월 피로감이나 만성질환에 시달리거나 어디가 아프면 중년 이후에 우울증을 불러오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상당히 충분한 양을 먹으면 기억력 유지에도 도움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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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중요한 영양제는 비타민 D와 오메가-3

 

한편으로는 영양제가 만병통치약처럼 받아들여지는 걸 경계하신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반복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에서는 굉장히 반복적으로 영양제가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넣어 놓았어요. 책을 잘못 읽으면 영양제를 많이 먹으면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잖아요. 그런 걸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반복적이기는 하지만 영양제가 전부는 아니라는 내용을 많이 적어놨어요.

 

영양제가 식품이라면 부작용은 없다고 봐도 될까요?

 

영양제라고 통칭을 했지만 건강식품도 있고, 건강기능식품도 있고, 그 카테고리에 해당이 되지는 않지만 약국이나 건강식품 판매점에 가면 다양한 엑기스나 목초액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은 과량으로 먹으면 간 기능에 손상이 와요. 영양제 혹은 건강식품 중에서 정량화가 되어 있고, 중금속이나 독성 물질을 다 뺐고, 어떤 성분이 몇 밀리그램이 들어있다는 걸 정확하게 아는 제품에 한해서는 안전하고요. 그게 아니라 잘 모르는 엑기스나 환 같은 것들을 먹는 건 오히려 몸에 해로울 수 있어요. 영지버섯이 간에 좋다고 해서 많은 양을 다려서 드시면 영락없이 황달이 오거든요. 그러니까 책에서 이야기하는 영양제는 용량을 다 알고 있고 안전한, 제대로 인정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한국인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6가지 영양제로 종합비타민제, 비타민 D, 오메가-3, 칼슘과 마그네슘 복합제제, 프로바이오틱스, 비타민 C를 꼽으셨습니다. 이걸 전부 복용하면 위에 부담이 가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저와 남편은 매일 스물 몇 알의 서로 다른 캡슐과 태블릿(tablet)을 먹어요. 그렇게 먹어도 위나 간에 무리가 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종합비타민제를 먹는데 항산화제인 비타민 A를 또 먹으면 문제가 돼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종합비타민제, 비타민D, 오메가-3,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 비타민 C는 서로 다른 성분이기 때문에 함께 먹어도 괜찮아요. 우리가 밥을 먹을 도 밥과 국만 먹는 건 아니잖아요. 버섯도 먹고 생선도 먹고 김치도 먹고 나물도 먹듯이, 영양제도 다양하게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먹어도 위에 부담이 가지 않게 만들어진 제제를 드시면 되고요. 그래서 저는 영양제를 만드는 회사의 메이커를 많이 보라고 말씀을 드려요. 똑같은 합성비타민이어도 원료의 질이 다르거든요.

 

중복해서 먹지 않도록 신경 써야 되는 건 비타민 A 뿐인가요?

 

종합비타민제와 비타민 A가 들어있는 항산화제를 같이 안 먹어야 하고요. 제가 알려드린 6가지 영양제는 다 같이 드셔도 전혀 문제가 없는 제제예요. 종합비타민제 안에 칼슘과 마그네슘이 들어 있지만 충분한 양을 다 넣지 못하기 때문에 칼슘과 마그네슘 복합제제를 따로 드셔야 되고요. 비타민 C는 정말 피곤하거나 힘들 때 따로 드시면 돼요. 프로바이오틱스는 전혀 다른 미생물이니까 따로 드셔야 되고요. 그 중에서도 제가 정한 순서는 비타민 D와 오메가-3가 제일 중요하다는 거예요. 만약 제가 여섯 가지 영양제 중에서 딱 하나밖에 못 먹는다고 하면 비타민 D를 먹을 거고요. 두 개를 먹어도 된다고 하면 비타민 D와 식물성 오메가를 먹을 거예요. 세 개까지 먹을 수 있다고 하면, 종합비타민제와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의 순위가 비슷해요. 유산균은 대장암의 가장 위험한 요인과 관련이 있어요. 그 다음 순위는 칼슘 마그네슘, 그 다음이 비타민 C예요.

 

홍혜걸 박사님과 동일한 영양제를 복용하시나요?

 

똑같은 영양제를 먹는데요. 남편은 술도 좋아하고, 저보다 생활이 건강하지 않잖아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저희가 진행을 했던 TV조선의 <홍혜걸의 닥터콘서트>에서 비타민 D와 관련된 방송을 준비하는데, 제작진을 포함해서 서른 명 정도가 다 같이 혈중 비타민 D 농도 검사를 했어요. 남편과 저는 똑같은 영양제를 먹고 있었는데 검사 결과는 서로 달랐어요. 저는 28이 나오고 남편은 13이 나왔거든요. 남편은 과민성 대장 증후군도 있고 술도 좋아하니까, 똑같이 영양제를 먹어도 흡수가 다르죠. 그리고 술을 좋아하니까 보나마나 지방간일 거예요. 지방간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비타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요. 그러니까 똑같이 영양제를 먹어도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흡수율이나 효과가 다른 거죠.

 

당시 검사에 참여하신 분 중에 함익병 선생님도 계셨다고요.

 

네, 저와 같은 병원에 근무했던 함익병 선생님도 검사를 하셨는데요. 그 분은 저와 철학이 달라요. 영양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인데, 그만큼 과일도 정말 많이 드시고 요구르트로 꾸준히 드세요. 저와 남편은 사과 하나를 먹는 것도 너무 힘든 사람들이라서 영양제에 조금 더 의지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검사 결과를 보니까 함익병 선생님은 9가 나왔어요. 그렇게 잘 드시고, 요구르트와 과일을 많이 드시는데도 9밖에 안 되더라고요.

 

보통은 영양제를 사놓고 온 가족이 함께 먹잖아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나요?

 

체중이 30kg 미만인 아이들은 용량도 조금 달라야죠.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부터 영양제를 먹일 필요는 없어요. 특히 자연분만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6개월 정도까지는 있잖아요. 오메가-3 같은 경우도 아이가 굉장히 건강하면 24개월까지는 먹이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영양 결핍이 있거나 건강이 좋지 않으면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도 소아과 선생님이 액체로 되어 있는 영양제를 주시죠. 비타민이 섞인 우유를 주기도 하고요. 아이들의 경우에는 몸무게에 따라서 영양제를 줘야 돼요. 그리고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기도 하죠. 중년 이후가 되면 혈관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고, 60세 이후에는 뇌 기능에 신경을 더 써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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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 비타민, 무조건 피해야 하는 건 아니다

 

책에서 말씀하시길, 미국의 소아과학회는 모유 수유를 하는 신생아에게 이유식을 먹기 전까지 비타민 D를 먹일 것을 권유한다고 하셨어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필요한 부분이라고 보시나요?

 

우리나라도 필요해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장암 발병률은 전 세계 1위고요. 미국이나 외국에는 60대 이후에 유방암에 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40대 유방암 발생률이 1위예요. 단순히 음식 때문만은 아니에요. 가족력이나 생활 습관 때문에 암에 걸리는 사람들은 절반 정도예요. 우리나라만 봐도 마르고 고기도 별로 안 먹는 40대 여성들이 유방암에 많이 걸리거든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비타민 D 결핍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나라 여성들이 내장이나 우유, 치즈를 잘 안 먹잖아요. 표고버섯을 매일 4~5 접시씩 먹는 사람도 없고요. 그러다 보니까 혈중 비타민 D 농도가 낮아요. 아시겠지만 서양 여성들은 햇볕이 나면 나가서 뛰는 게 일인데, 한국의 여성들은 온통 썬크림으로 가리고 나가죠. 그런 이유들로 40대 여성분들이 유방암 발병률이 높아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비타민 D를 잘 챙겨야 되고요. 그것뿐만 아니라, 비타민 D는 아이들의 자가 면역 질환이나 알러지 질환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정말 챙겨서 먹어야 돼요.

 

종합비타민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복용하는 영양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합성비타민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선택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100% 천연 종합비타민제를 복용해야 할까요?

 

비타민 A는 100% 천연이 될 수가 없어요. 100% 천연 비타민을 먹으려면 차라리 과일을 먹는 게 나아요. 천연의 파이토케미컬(phytochemical)이 많이 들어가 있는 제제가 좋기는 하지만, 모든 종합비타민제 성분이 다 천연이려면 차라리 키위나 오렌지를 먹는 게 낫거든요. 비타민 A 같은 경우에는 조금씩 합성이 섞일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천연이라고 하는 게 충분한 영양을 담을 수가 없어요. 영양제는 몸이 힘들기 때문에 먹는 거잖아요. 그러면 적어도 영양제는 과일이나 이런 데 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영양이 높아야죠. 칼로리는 낮아야 하고요. 그런 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어요. 비타민 C 같은 경우에도 100% 천연을 먹을 바에는 정제로 된 걸 먹을 필요가 없죠. 키위를 먹으면 되죠.

 

그렇다면 합성 비타민이 포함되어 있는 제품을 선택해도 괜찮은 걸까요?

 

괜찮아요. 합성 비타민 A만 주의를 하시면 되고요. 합성 비타민 E도 안 드시는 게 좋아요. 합성 비타민 E는 오히려 먹었을 때 심장병 위험이 올라간다고 하거든요. 비타민 E는 천연을 드시면 되고, 유일하게 비타민 A는 100% 천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반 정도는 당근이나 호박을 통해서 섭취하시면 돼요. 요즘 많이 나오는 노란색 파프리카도 좋고요. 비타민 C는 합성을 먹거나 천연을 먹거나 다 괜찮아요. 다만 천연 바이오 플라보노이드라는 성분이 같이 있으면 조금 더 흡수도 잘 되고 조금 더 작용 시간이 더 기니까 그만큼 이익이고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된다면 주성분이 천연인 비타민을 먹으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다면 합성 비타민을 먹어도 돼요. 영양제는 음식처럼 매일매일 먹어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매일 먹으려면 경제적인 부담이 없어야 되잖아요. 합성 비타민도 A나 E만 아니면 매일매일 한 평생 동안 먹어도 괜찮아요.

 

상황에 따라 도움이 되는 영양제의 종류도 소개해 주셨는데요.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도 있다고요.

 

다이어트를 선전하는 수많은 영양제가 있지만, 먹어서 살이 확 빠지는 제품은 없어요. 그렇지만 강낭콩 추출물 같은 식이섬유 제제는 식사하기 전에 먹어주면 몸 안으로 들어가는 지방이나 탄수화물의 양을 30% 줄일 수 있어요. 물론 그런 보조제를 먹고 있다고 해서 음식을 더 먹으면 살이 찌죠. 그것만 주의하시면 돼요. 종합비타민제도 다이어트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요. 운동을 하면서 지방을 태울 때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이 필요한데, 종합비타민제를 먹으면 지방이 타는 데 훨씬 더 유리해요. 그리고 종합비타민제를 먹으면 기운이 나니까 운동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요. 피곤한데 음식량은 줄어들면 대부분의 경우 영양소 부족으로 2주가 지나면 피곤해져요. 4주가 지나면 우울해지고요. 3개월 지나면 머리카락이 빠져요. 그러니까 다이어트 할 때는 훨씬 더 영양제를 많이 먹어야 돼요. 영양제가 칼로리는 굉장히 낮으면서 체지방 대사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거든요.

 

다이어트를 할 때 섭취하면 좋은 또 다른 영양제가 있나요?

 

칼슘은 지방과 함께 몸 밖으로 나가는 효과가 있어요. 이미 잘 먹고 있는데 더 먹는 건 효과가 없고요. 부족할 때 드시면 좋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가장 부족한 영양소가 칼슘이거든요. 그러니까 종합비타민제와 칼슘제를 함께 드시고 식사하기 30분 전에 식이섬유를 드시는 게 좋죠. 그리고 제 경우에는 단백질 제제를 먹어요. 저희 나이 때는 다이어트를 하면 피부나 모발의 탄력이 손상되거든요. 다이어트하면서 근육을 만들려면 단백질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저는 단백질 파우더를 먹어요. 오메가-3는 1g에 9kcal의 칼로리는 있지만, 오메가-3 같은 기름을 먹으면 단 음식을 먹고 싶은 갈망이 조금 줄어들어요. 그리고 지방 흡입을 해도 많이 먹으면 그 자리에 다시 지방이 생기거든요. 그 과정도 오메가-3가 차단을 해줘요. 다이어트할 때는 탄수화물의 양을 줄이고 약간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게 탄수화물을 적게 먹는 데 더 유리해요. 올리브유나 카놀라유, 들기름 같은 좋은 기름을 먹으면 배고픔이 훨씬 덜하니까 과자 같은 걸 안 먹게 되죠. 그러면 훨씬 더 다이어트하기가 좋고요. 음식 양을 줄이고 운동을 하려면 기운이 있어야 되니까, 영양제의 도움 없이는 다이어트하기 쉽지 않아요.

 

중장년층 중에는 고혈압을 앓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추천하는 영양제는 무엇인가요?

 

고혈압을 앓고 계신 분이 영양제로 혈압을 낮추는 것에는 반대해요. 한 달에 만 원~만 오천 원이면 너무나 훌륭한 고혈압 약을 먹을 수 있잖아요. 고혈압이 있는 분이 영양제를 먹어야 하는 이유는 그 분들이 복용하는 고혈압 약이나 아스피린 같은 모든 약물이 몸 안에서 영양소를 빼내가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약물로 인한 부작용이나 힘없음을 예방하기 위해서 영양제를 먹는 거죠. 혈압 자체는 약으로 조절하셔야 돼요. 콜레스테롤도 마찬가지예요. 콜레스테롤도 훌륭한 약들이 많죠. 다만 그 약이 근육을 녹이니까, 콜레스테롤 약을 먹을 때는 코엔자임 Q10 같은 영양제를 약물에 의한 부작용을 막아주는 정도로만 섭취하시면 돼요.

 

성인병을 앓고 있는 경우는 어떤가요?

 

요즘은 성인병을 생활습관병이라고 하는데요. 생활습관병이 있어서 매일 약을 드시는 분들에게는 영양제가 꼭 필요하죠. 책에서 종합비타민제를 꼭 먹어야 되는 경우를 6개 정도 골라놨는데 그 중에서 고혈압, 콜레스테롤, 특히 당뇨가 있으신 분들은 오메가-3 같은 걸 열심히 드셔야 돼요. 많은 분들이 ‘내가 이렇게 한 움큼씩 고혈압 약이나 콜레스테롤 약을 먹고 있는데 또 이렇게 영양제를 먹으면 간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영양제는 식품이라니까요. 모양만 알약이지 식품이에요. 약으로 인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영양 결핍을 보충해주는 식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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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에스더가 영양제를 섭취하는 방법

 

임신부의 경우 종합비타민과 엽산, 칼슘, 철분 등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복용 기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시는 것 같아요.

 

맞아요. 엽산은 적어도 임신 4주 전에는 반드시 먹어야 돼요. 가능하면 12주 전에 먹어주면 좋고요. 책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미국에서는 밀가루 제품에 엽산 성분을 강화시키는 법률안이 통과됐잖아요. 임신부가 엽산을 먹지 않으면 만 명 중에 5명 정도가 신경관 결손으로 무뇌아로 태어나거든요. 그 결과가 임신하고 나서 4~5주 만에 결정이 돼요. 그런데 그때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모르는 여성분들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미국에서는 모든 밀가루 음식에 엽산을 넣어놓은 거예요. 미국은 만 명 중에 5명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머지 9995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엽산이 들어가 있는 밀가루를 먹는 거죠. 특히 임산부는 더 잘 챙겨 먹어야 하고, 요즘 노령 임신이 많으니까 조금 더 챙겨 먹으면 좋아요.

 

결석 때문에 고생하셨던 분들은 평상시 우유를 마시는 양도 줄이려고 하는데요. 칼슘제를 섭취해도 될까요?

 

담석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담낭에 생기는 돌은 칼슘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죠. 콩팥, 요로에 생기는 돌은 칼슘제도 위험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 번도 결석이 안 생긴 사람은 칼슘제를 먹는다고 해서 돌이 생기지 않아요. 이미 돌이 생겼던 분들은 가능하면 순두부나 저지방 우유의 형태로 칼슘을 먹는 게 좋고요. 한 번도 돌 문제로 고생하지 않은 분들은 칼슘제를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칼슘은 들어가는 속도의 문제거든요. 그래서 저는 칼슘을 한 번에 두 알씩 먹이지 않고 나눠서 먹어요. 칼슘은 굉장히 소량을 조금씩 나눠서 먹으면 돌이 생길 확률이 줄어들죠.

 

결석을 한 차례 경험했지만 오랫동안 재발하지 않은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서 이미 폐경이 됐고 뼈도 약한 50대 여성분이 있다고 가정해 볼게요. 그 분이 콩팥에 돌이 한 번 있었다면, 제가 주치의일 때는 칼슘제를 조심스럽게 줄 거예요. 그리고 요구르트나 우유를 많이 먹은 날을 칼슘제를 드시지 말라고 말씀 드리겠죠. 요구르트나 우유를 안 먹은 날은 칼슘제 하나를 드시라고 하고요. 평생 한 번 밖에 안 걸린 돌 때문에 칼슘제를 안 먹으면, 65~70세 되어서 허리의 척추압박골절로 키가 다 줄어들 수 있거든요. 그리고 나이 들면 제일 무서운 게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는 거예요. 그러면 뼛조각이 돌아다니다가 뇌나 폐의 작은 혈관을 막을 수 있고, 보통 6개월~1년 누워계시다가 다섯 분 중의 한 분은 돌아가시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의 현재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달라져야겠죠. 폐경이 된 분이 우유도 못 드신다면 칼슘제를 드셔야 할 거고요.

 

작가님께서는 영양제를 여러 번에 나누어서 섭취하시나요?

 

여러 번에 나누어서 먹는 게 더 좋죠. 칼슘제도 원래는 저녁을 먹고 나서 먹으면 잠자는 데 더 도움이 돼요. 그런데 저는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 잊어버리거든요(웃음). 대부분은 아침에 일어나서 유산균 두 알 먹고, 10분 후에 저지방 우유 100cc와 단백질 파우더를 먹고,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스물 몇 알의 영양제를 먹어요. 비타민 C는 들고 다니면서 스케줄이 너무 많거나 감기가 오려고 할 때 2알씩 대여섯 시간 간격으로 먹고요. 밤중에 방송이 있거나 할 때는 종합비타민제도 저녁 먹고 나서 한 번 더 먹어요. 오메가-3 같은 영양제도 나눠 먹으면 좋겠지만 그건 칼슘처럼 꼭 나눠 먹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한꺼번에 복용하고요.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없다면 임의로 영양제 복용량을 가감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영양제를 복용하기에 앞서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게 좋을까요?

 

그럼요. 우리나라는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없어서 안타깝지만 원래는 주치의가 해줘야 돼요. 내가 지금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몸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는 의사가 정해주는 게 가장 좋아요. 그게 안 되니까 약사나 전문영양사 분들한테 상담을 하는 거죠. 왜냐하면 종합비타민제와 칼슘제는 정해진 양 만큼 먹는 게 좋은데,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이나 비타민 C, 오메가-3, 비타민 D 같은 것들은 내 몸에 맞게 먹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종합비타민제나 칼슘제는 기본 양을 드시고요. 유산균제(프로바이오틱스) 같은 경우에는 조금 기름지게 식사했을 때는 용량을 더 늘리시면 돼요.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는 양을 더 늘려도 문제없어요. 비타민 C도 마찬가지니까 몸 상태에 따라서 조정하시고요. 그리고 여성분들은 생리 전에 뾰루지가 올라오잖아요. 그 날은 감마리놀렌산도 추가해서 드시면 돼요.

 

『나는 왜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되었나』를 통해서 동료 의사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픈 환자들과 만나는 많은 전문가 분들이 편협한 생각을 안 해주시기를 간절히 원해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모른다고 이야기해야지, 그 부분에 대해서까지 안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영양제 공부 한 번 안 해보고 영양제 처방 한 번 안 해 본 의사 분들이 영양에 관련된 논문을 쓴다든지 발언을 하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환자를 주치의처럼 볼 수 있는 일반 내과 의사가 없어요. 폐, 심장, 내분비, 이런 식으로 너무나 의학이 세분화되어 있어서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전문가가 없거든요. 그런 전문가가 영양을 공부해야 하는 건데 그런 교육이 안 되어 있는 거죠. 저는 우리나라 의과 대학에서 영양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져주고, 특히나 아픈 환자들을 진찰하는 많은 전문가들이 열린 마음으로 영양에 대해서 공부해주시기를 원해요. 다행히도 이 책을 저희 후배들이나 영양학과 학생들이 열심히 보는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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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되었나여에스더 저 | 메디치미디어
《나는 왜 영양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되었나》에는 두 가지 미덕이 있다. 하나는 영양제의 필요성과 효과를 단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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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 내 마음을 알아채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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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이 4년 만에 세 번째 책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펴냈다. “생각을 조금 더 묵히고 싶어 천천히 책을 냈다”는 스님은 하버드대 학위, ‘미국 최초 한국인 스님 교수’라는 타이틀보다 ‘트위터에서 자주 만나는 동네 스님’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전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통해 ‘대한민국 청춘 멘토’가 됐고, 지금은 ‘마음치유학교 교장’이 된 혜민 스님은 “완벽하지 않음에도 아름다울 수 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했다.

 

“마음에 고민이 많아 우울하고 힘들 때 머리를 들고 앞에 있는 사물을 아주 자세히 관찰해보세요. 사물을 보는 순간 생각의 진행이 멈추면서 조금 전 마음의 고민이 그냥 ‘생각 덩어리였구나.’하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생각들에게 너무 힘을 실어주지 말고 ‘고작 생각들이었어.’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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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기분이 나에게 왔구나

 

지난해 서울 인사동에 ‘마음치유학교’를 여셨어요. 스님께서 직접 프로그램도 진행하신다고요.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마음 잇다’예요. 사랑하는 자녀의 장애로 많이 지쳐있는 부모, 이혼의 아픔을 겪고 있는 분, 암 수술을 받고 나서 마음이 불안한 분, 취업이 안 돼서 고민인 분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다양한 방법으로 치유하고 있어요. 뜻을 같이 하는 치유자 선생님들과 글쓰기, 음악, 미술 등을 통해 서로를 돌보는 시간을 가져요. 가장 중요한 건, 비슷한 그룹이 모였을 때 얻는 치유의 힘이에요.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가까워지고 있어요.

 

학교를 여실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요?

 

마음치유콘서트를 통해 어려운 상황에 있는 많은 분을 만날 수 있었어요. 종교인으로서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에서 일하는 게 더 도움이 되겠더라고요. 책을 통해 만날 수도 있지만 한발짝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직접 와서 경험해보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어요. 마음치유학교에는 여러 선생님이 함께하세요. 전공도 가르치는 수업도 다 다르지만 뭐든지 함께해요. 한 공동체니까요. 한 달에 한 번씩 모두 모여 각자의 치유방식을 시연해요.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 회의도 하고요.

 

종교는 상관이 없나요?

 

전혀요. 가톨릭에서도 많이 오시고, 개신교 분들도 많아요. 사람을 치유하는 게 종교인의 역할이잖아요. 오시는 분도 선생님들도 종교는 다 달라요. 없는 분도 많으시고요.

 

혜민 스님의 책을 보고 모임에 오신 분도 많으시겠어요.

 

있으시겠죠. (웃음) 하지만 주제별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서요. 내 상황, 마음 상태에 따라 프로그램을 선택하세요.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4년 만에 신작입니다. 스님의 새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굉장히 많았나 봅니다. 예약 판매부터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정말 놀랐어요. 책을 아직 못 본 상태에서 구매 의사를 밝혀주신 거잖아요. 많이 놀랐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 출간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그 해 ‘네티즌이 선정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어요. 후속작 출간 제의도 무척 많이 받으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이번 책은  3인 출판사 ‘수오서재’에서 나왔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함께 만들었던 편집자께서 창업한 출판사예요. 제가 의리를 지킨 거죠. (웃음) 왜냐면 고마움이 많았거든요. 첫 책 『젊은 날의 깨달음』이 2010년에 나왔는데, 4년 전에도 꽤 큰 출판사에서 연락을 많이 주셨어요. 두 번째 책을 내자고요. 한 곳과는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마음이 확 편하지가 않더라고요. 그런데 수오서재 대표님은 정말 열정이 가득해 보였어요. 편집자도 책을 내고 싶어야 책이 잘될 거로 생각했거든요. 꼭 전작이 잘됐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참 잘 맞아요. 좋은 사람들이랑 일하면 일로 느껴지지 않고 즐겁거든요. 또 제 생각의 패턴을 잘 알기 때문에 일도 훨씬 수월하고요. 새로운 분과 함께해도 새로운 시너지가 나왔겠지만 익숙한 편안함도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또 제가 조금 과하거나 미진할 때도 조언을 많이 해주세요. 저자 입장에서도 따끔한 질책도 필요하거든요. 다 좋다고만 하면 그건 망하는 책이 나오니까요.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요.

 

출간된 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리뷰가 꽤 많더라고요.

 

찾아서 읽어봤어요. 글을 쓸 때의 제 의도를 잘 이해해주신 독자 분들이 많아요. 책을 만들면서 내가 누구를 위해 이 책을 쓰나 생각해봤어요. 젊은 청년들이 읽어도 좋고 병을 가진 분이 읽어도 좋고, 연애하는 분들, 누군가를 너무 미워하거나 용서가 안 되는 분들이 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노력을 하는데도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위로가 되는 책이었으면 해요. 다양한 삶의 주제를 담았으니까요. 남녀노소가 봐도 좋고, 수행자가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또 글과 함께 멋진 그림이 실려 있어요. 차분하게 그림을 보면서 천천히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마음에 관한 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끔 찾아오는 우울한 느낌, 울적한 기분을 잘 살펴보면 ‘나의 반복적인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지적하셨어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이 좌지우지돼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느낌이 생각과 함께 일어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또 부정적인 느낌이 생각을 좇아 함께 일어나고요. 결국 우울한 느낌을 이해하려면 느낌을 일으키는 원인 제공자인 ‘생각’을 먼저 이해해야 해요. 우울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저 ‘마음 하늘에 잠시 우울한 생각 구름이 하나 일어났구나’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이 구름은 하나일 뿐이지 내 인생 전체가 아니거든요. 많은 정신적 문제는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나요. 스님들이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우울한 느낌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아, 있구나’하고 알아채는 일이에요. 알아채는 것과 모르는 건 천지차이예요. 알아챔이 중요해요. 반면에 그 기분에 빠져 있기만 하면 그 감정대로 가버리는 거예요.

 

인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알아야 해요. ‘아, 이런 기분이 나에게 왔구나. 있구나’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난 후, 관조하기 때문이에요. 이 일에서 빠져 나와서 한 번 지켜보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삿디’라고 하죠.

 

잘 알아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가 힘들다고 할 때, “너무 괜찮다고 하지 마라”라고 하잖아요. 너무 벗어나려고 하면 더 힘들어요. 알아채는 것도 훈련이 필요해요. 훈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용을 할 줄 알아야 해요. 같은 문제도 답답하고 조그만 방에서는 무척 크게 보이지만, 벽을 하나 없애면 확 트인 공원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문제는 사라지지 않아도 공원 안에 있으면 수용할 수 있어요. 좋은 게 많거든요. 나에게만 문제가 있고 나만 우울한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걸 볼 수 있어요. 제 책도 어떻게 보면 자기가 수양된 만큼 느낄 수 있어요. ‘알아챔’이 그냥 몰랐던 것을 인식하는 정도로 끝날 수도 있지만, 계속하다 보면 ‘알아챔’ 자체가 갖고 있는 공간감을 느낄 수 있어요. 마음이라고도 해요. 이 공간감 안에 모든 게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질투라는 감정도 알아챔이 훈련되면, 질투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배경, 즉 ‘공간감’을 깨달을 수 있어요. 내 감정에 너무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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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공부

 

예스24 페이스북을 통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문혜숙 님이 “쇼핑을 해도 친구를 만나도 영화를 봐도 뭘 해도 마음이 공허해요. 뭘 해야 마음이 밝아질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셨어요.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 중에 가장 강렬한 행복은 다른 사람과 연결이 됐을 때예요. 혼자 재밌는 일을 했을 때의 행복감은 오래 가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행위를 해야 해요. 가장 좋은 건 봉사활동이에요. 내가 얼마나 이들에게 필요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어요. 봉사활동이 힘들다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집으로 불러서 뭘 해 먹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어요. 나누고 베풀다 보면 상대방도 나를 위해 베풀어주잖아요? 깊숙한 연결감을 느낄 수 있어요.

 

이은경 님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데, 친구들은 아니라고 하네요. 요즘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려고 한다”고 하셨어요. 이유가 뭘까요?

 

많은 사람이 행복이라는 감정은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말 원했던 일이 갑자기 이뤄지는 경우는 매우 희박하기도 하고, 실제로 엄청나게 큰 행복을 주지도 않아요. 행복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아요. 혼자 조용한 곳에서 산책을 해도 사람은 행복을 느끼는 존재예요. 엄청나게 큰 쾌락이 행복을 갖고 오는 게 아니에요. 또 이 같은 쾌락을 느낀다고 해도 후에 큰 후폭풍이 찾아와요. 그러니 스스로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누리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주말 아침, 조용한 클래식을 틀어놓고 나를 위해 책을 한 시간 읽을 때가 그렇게나 좋아요.

 

스님께서는 책을 사는 일을 참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좋아해요.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책은 사는 편이에요. 언젠가 꼭 쓸모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번 책을 쓰면서도 예전에 사놓은 책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인용해야 하는 문구를 많이 찾았어요.

 

지난해 한 온라인 경매에서 ‘혜민 스님과의 만찬 및 멘토링 쿠폰’이 1천 만원에 낙찰됐다는 뉴스가 공개되고, 많은 분이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어떤 분과 식사를 하셨는지요?

 

아주 훌륭한 분이셨어요. 이 경매 자체가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행사였잖아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좋은 마음으로 경매에 참여하셨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더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어요. 좋은 이야기를 해주셔서 많이 들어드렸고, 맛있는 식사를 했어요.

 

스님께서 어떤 한 사람과 식사를 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으세요?

 

(웃음) 아,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나요? 그렇다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고 싶어요.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현대인이 느끼는 소외감을 하루키 만큼 잘 표현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어요. 사실 하루키와는 만난 적이 있어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하루키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온 날, 제가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불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친구와 “와, 하루키다”하고 소리쳤더니, 놀라더라고요. 당시 오프라 윈프리도 함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모두 오프라 윈프리만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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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을 읽으면서 참 솔직하시구나 싶었던 글이 “결국 박사 학위라는 경험을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면 정말로 솔직히 말해 ‘교수의 삶이 이런 거였구나’를 깨닫는 정도였다”였어요. “분석하는 학문적 공부로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라고 하셨어요.

 

많은 대학이 논리적인 사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추는 것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어요. 하지만 논리와 비판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지 전체가 아니에요. 내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는 연구를 해야 하니, 어려운 마음이 있었어요.

 

지난해는 경북 문경의 봉암사 선방, 프랑스에 있는 틱닛한 스님의 플럼빌리지에서 공부하셨어요.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플럼빌리지에서 공부할 때는 모든 걸 천천히 했어요. 걸을 때도 천천히, 밥도 천천히 먹어요. 이게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공부예요. 숨을 쉬는 시간이 많았어요. 숨으로 딱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숨은 항상 현재에서 쉬고 있기 때문에 숨이 들어오고 나감을 느껴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기분도 좋아져요. 또 숨을 느끼는 현재로 마음이 오면 생각이 멈춰요.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숨으로만 돌아와도 우울한 마음은 한결 가벼워질 수 있어요. 뭔가를 크게 누리지 않아도 내 마음에 온전함이 느껴져요. 진짜 공부죠.

 

현대사회는 ‘공부 중독’에 빠졌지만, 시험에 나오는 공부만 해서 문제라고들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마음을 들여다보는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 다들 바깥으로 향해 있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따지니까, 자의식만 발달하고 자존감은 낮아져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매일 자기의 마음을 사용하면서 살잖아요. 맨날 마음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쓰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또 비우는 공부가 필요해요. 우리는 채우려고만 하는데 사실 비움 안에 온전함과 지혜가 있어요. 생각이 많다고 결정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고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도 아니에요. 비움 속에 존재하는 지혜를 믿고 잠시 쉬는 연습을 해야 해요.

 

스님께서는 현재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신가요?

 

마음 공부죠. 저도 제 본성을 깜빡 잊고 살 때가 있어요. 항상 확인을 해줘야 해요. 침묵도 한 방법이에요. 텅 비어있음을 침묵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사람이 사랑을 하면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잖아요. 따뜻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음이 열려요. 마음이 텅 비어 있어서 침묵하게 돼요.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침묵할 수 있어요. ‘모른다’하고 바라보는 거예요. 안다고 생각하면 관심이 생길 수 없어요. 저 또한 글을 쓸 때는 차분해지지만, 생활 속에 들어가보면 부족함이 너무 많이 보여요. 똑같은 상황에 있는 진리당체를 인식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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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책의 추천사를 이해인 수녀님이 써주셨습니다. 스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느껴지더라고요.

 

너무 감사했어요. 평소 ‘이모 수녀님’이라고 부르는데요, 많이 의지하는 수녀님이세요. 추천사를 읽고 무척 감동받았어요.

 

스님께서는 평소 많은 타종교인들과 밀접하게 교류하시는 거로 알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왜냐면 우리가 걷는 길은 다르지만, 삶을 살아가는 행동 패턴은 굉장히 비슷해요. 형태는 다르지만 수행 방법도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비슷한 게 많아요. 또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겪는 일도 다르지 않아요. 기도라는 게,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하는 거잖아요. 대상은 다를지 몰라도 집중이 만들어내는 마음 상태는 비슷해요. 고요해지고 차분해지죠. 어떤 피상적인 상징에만 매여 있으면, 상징이 지시하는 더 깊은 의미를 깨닫기 어려워요. 자비와 사랑의 행동이 어떻게 다를 수 있겠어요. 오히려 무신론자와 종교인이 만났을 때가 더 어렵겠죠.

 

종교는 왜 필요할까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와 같이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종교에서 찾을 수밖에 없어요.

 

대개 사람들은 ‘스님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스님은 결혼도 화려한 옷도 입을 수 없어요. 하지만 더 귀한 것을 얻으셨을 텐데요. 포기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진리에 대한 경험을 했죠.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본성 편에도 썼지만, 승려가 되면서 선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선어록을 보게 됐어요. 옛 큰스님들은 이렇게 묻고 있어요. “돌부처가 성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돌부처가 원래부터 성스럽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 마음이 성스럽다고 보기 때문인가?” 부처의 형상에서 성스러움을 보는 게 아니라, 성스러움을 아는 내 마음에서 느낄 수 있다는 말이죠.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기회를 통해 깊이 체득화한다는 의미와 같아요. 몰라서 못 깨닫는 게 아니라 아는데 아직 내 경험화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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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혜민 저/이응견 그림 | 수오서재
혜민 스님 4년 만의 신작에는 완벽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한 나 자신과 가족, 친구, 동료, 나아가 이 세상을 향한 온전한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 안에는 완벽하지 못한 부분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자비한 시선도 함께 있음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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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정환 “사람들이 의사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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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치료한다는 의사 입에서 “우리는 누구나 죽잖아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뜨끔한 건 왜였을까. 병원이라는 공간이, 병이라는 것이, 환자의 삶과 보호자의 고됨이 나와, 평범하고 건강한 일상과는 유리된 별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을지대 병원 가정의학과 김정환 교수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아, 아프지 마라』를 가만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것은 역시 당신과 나의 이야기고, 우리는 누구나 아프고, 아프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그 위태롭고도 단단한 삶을 엿보는 것으로 놀라운 삶의 내밀한 속살을 발견하게 되는 역설, 그것이 한 의사가 애를 써서 환자들의 삶에 더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한 이유라는 생각을 했다.

 

“너희가 만나는 것은 병이 아니라 사람이다. 너희들은 과연 사람에 대해 얼마큼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라며 도끼 같은 질문을 던진 은사의 말 한 마디에 누군가에게 가장 필요한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의사의 삶을 선택한 김정환. 그의 따뜻한 시선과 환자에게 건네는 애정의 말이 더 멀리, 더 넓게 퍼져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프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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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가족 이야기

 

기록해야 할 작고, 소중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의 한 구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글을 시작하게 한 장면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책을 낼 생각으로 썼던 건 아니에요. 맨 처음 썼던 글은 책에는 안 실렸는데요. 그림처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장면이 있었어요. 건강 검진을 받고 결과 상담을 하러 부부가 함께 왔는데 부인이 위암에 걸렸어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말을 전달하는 저도 굉장히 힘들지만 듣는 사람도 사실 힘들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곁에서 부인에게 계속 용기를 주는 거죠. “너도 알잖아, 별 거 아니야, 그렇죠?” 하면서 저한테 계속 동의를 구하고, 저도 “수술 하시고, 치료 잘 하시면 괜찮으실 거예요.”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딱 일어서서 나가는데 부인이 먼저 나갔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나가질 못하고 있는 거예요. 문을 붙잡고 제 쪽을 향해 서있었어요. 그리고는 울기 시작하시는 거예요. 눈물을 겨우 닦고, 자기 말에 동의를 해줘서 고맙다고 말씀을 하고 나가셨죠. 그때 그 장면을 그림처럼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저 혼자 알고 있기엔 정말 그림 같아서요. 글도 잘 못 쓰지만 아주 건조하게 그 장면만 묘사해서 페이스북에 올렸죠. 그걸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위암이 어떻고, 치료가 어떻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병에 걸린 사람들, 그들이 겪는 그 순간의 표정이나 모습을 말이에요. 그래서 주절주절 쓰기 시작한 거죠. 

 

그 같은 장면은 이전에도 있었을 텐데, 그 순간 발화가 됐던 거네요.

 

별로 생각이 없었다가 진짜 우연히 한 번 글을 썼고, 그걸 사람들이 공감해준다는 걸 알았어요. 저는 의사니까 사람들이 당연히 의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걸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죠. 소통이란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그건 공감에서 오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공감대가 형성되는 접점이라는 건 전문적 지식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에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사실 병 얘기는 거의 쓴 게 없어요. 어떤 분이 ‘이 이야기는 가족 이야기’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이야기의 90%는 엄마와 아들, 며느리와 시어머니, 할아버지와 손자, 이런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예요. 가족이란 울타리가 공감대가 가장 잘 형성되는 집단인 것 같아요. 사실은 가족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걸 수도 있어요.

 

거의 대부분의 글에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나와요. 여기에 저자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던 것 같군요.

 

정확한 지적이신데요. 어떤 질병의 발생 과정에서 치료 과정까지는 그 사람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당뇨병만 해도 그렇죠. 그건 약 잘 먹으면 낫는 병이 아니고 평소에 관리를 해야 해요. 그러려면 가족들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요. 먹는 음식, 운동, 주위의 환경 모든 것들이 적절하게 잘 형성됐을 때 가장 좋은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있거든요. 다이어트만 해도 그렇잖아요. 식구들은 밤만 되면 뭐 먹는데 나 혼자 안 먹으려면 너무 힘들잖아요. 아무도 운동 안 하고 나 혼자 운동하려고 나가기 너무 힘들고요. 가족이 다 같이 동참하는 분위기가 되면 편한데 질병도 그런 부분이 무척 커요. 저는 그런 걸 많이 물어보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하는 욕구가 있었던 건가요?

 

누가 읽었으면 좋겠다 보다 제일 읽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두 그룹 있어요. 하나는 의사예요. (웃음) 솔직히 말하면 창피한 게 좀 있어요. 쑥스럽기도 하고요. 너무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요. 의사들 다 비슷해요. 표현하지 못했을 뿐인데 마치 혼자 그런 걸 느낀 양 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요. 또 하나는 너무 힘든, 몸이 너무 아픈 사람들과 보호자들은 읽지 않았으면 했어요. 적당히 아픈 사람들에게는 이 ‘아프지 마라’라는 말이 도움이 되겠지만 너무 힘든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도 이 정도만 아팠다면 이럴 수 있었을 텐데 우린 너무 아프잖아, 이런 것도 불가능해, 한다면 그게 더 상처가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생각이 좀 바뀌게 된 계기가 있어요. 페이스북에 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해져서 경황없이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밤새 병간호를 하다가 이 책을 문득 보셨다는 분이 있었어요. 보면서 너무 위안을 얻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정말 고마웠어요. 제발 읽지 말았으면 했던 분이 읽었는데 오히려 위안을 얻었고 고마웠다고 하시는 걸 보고서 생각과 다를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러게요. 참 뜻밖이고, 감동적이네요.

 

환자는 언제나 의사 생각보다 강한 것 같아요. 독자도 마찬가지 같고요. 그래서 조금 달리 생각해야겠다 싶었어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거든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은 이 책을 내면서 가졌던 가장 큰 목표 중 한 가지고요.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을 깨닫는 장면도 많이 나오고, 공감 능력도 말씀했는데 이것들은 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 알아채기 힘든 것들이잖아요.

 

휴머니즘인간, 이런 건 아니에요. (웃음) 말씀처럼 박애정신이 투철하거나 이런 사람은 아니고요. 다만 적어도 제게 오는 환자니까 그 사람만큼은 잘 해주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가정의학과를 지망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스승님의 말씀 때문이었는데요. 학교 다닐 때 진짜 공부 못했거든요. 주변인, 학교 주변에만 있고 학교는 안 가고 하는 식이었어요. 그러다 본과 3학년 때 은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들이 배우는 것은 다 병에 관한 것이다. 너희는 병에 대해 자세히 알고 후에 환자를 치료한다고 생각하지만 너희가 만나는 것은 병이 아니라 사람이다. 너희들은 과연 사람에 대해 얼마큼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라고요. 그때까지 저는 왜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도 잘 몰랐거든요. 그 얘기는 뒤통수를 딱 때리는 이야기였어요. 가정의학과 교수님이었는데 저런 생각을 가진 의사가 돼야겠다고 하고 가정의학과를 선택했어요. 사람에 대해 관심 갖고, 그를 파악하지 않으면 질병이 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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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질병이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것

 

의사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진료하고, 처방 내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겠죠. 환자에 대한 관심, 이것이 의사에게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나요?

 

의사가 해야 하는 건 질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거거든요.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잖아요. 근시는 병이지만 안경을 써서 생활이 불편하지 않으면 더 이상 병이라고 인식 안 하잖아요. 암 환자를 치료한다고 했을 때 사람을 고치는 거라고 생각하면 다른 접근이 가능해요. 말기 암 환자라서 병을 치료 못 합니다, 가 아니라 아픈 걸 덜 아프게 만들고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지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요. 죽을 때까지요. 우리는 누구나 죽잖아요. 죽을 때까지 어쨌든 편안하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 그게 치료라고 봐요. 저는 만성질환, 당뇨병이나 고혈압, 고지혈증, 갑상선 질환 등 평생을 안고 가는 질환들을 주로 치료하는 의사예요. 그 병을 완치시킬 자신은 없어요. 하지만 병 때문에 힘들지 않도록, 일상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게 제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모든 의사들이 다 똑같을 거예요. 저처럼 책을 내지 않으셨을 뿐이지 마음은 다 똑같아요. 이 병을 다 고쳤으니 내 할 일은 끝났다가 아니라 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관점에서 치료하고 있을 거예요.

 

의사에 대해 오해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의사도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데에는 정보의 편중도 있지만 입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이 순간만큼은 의사가 절대적인 위치가 되잖아요. 저 사람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까, 나는 어떻게 치료될까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위축되기 마련이죠. 의사인데 저도 병원에 가면 똑같아요. 치과 가면 바들바들 떨어요. (웃음) 다 똑같아요. 그럼 의사는 환자와 마주쳤을 때 정말 절대적으로 강자의 위치에 있겠는가. 사실 그렇지 않아요. 여러 가지 이유로 의사들도 근엄한 표정으로 잘난 척하고 있겠지만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갈등하면서 힘든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거든요. 티를 내서는 안 되는 상황도 많고요. 티 내지 않을 뿐인 거죠. 어떤 치료를 했을 때 과연 그에게 도움이 되는가, 이건 너무 과한 것 아닐까 계속 갈등해요. 처방했을 때 보험 급여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까지 여러 가지 복잡한 고려 사유가 있으니까 결정하거나 환자에게 설명하는 모습이 딱딱할 수밖에 없기도 해요.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갈등하고, 고민하죠.

 

시선을 자신이 아닌 자신 바깥에 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쩌면 글을 쓰는 욕구와도 닿아있을 것 같아요. 의사가 바쁜 건 워낙 잘 알려진 일인데 틈틈이, 꾸준히 글을 썼단 말이죠. 원래 글을 계속 써왔던 건가요?

아니요, 저는 지금도 글을 잘 쓴다고 생각 안 해요. 사람들이 잘 못 보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공감을 얻은 거지 글을 잘 썼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잘 쓰는 사람들의 글을 많이 보니까 글을 잘 쓰고 싶은 욕망은 생기더라고요. 책을 많이 보는 건 아닌데요. 페이스북 친구들 중에 작가들도 많아서요. 그 사람들이 쓰는 걸 보고 있으면 정말 놀라요. 제일 친한 사람은 황종권 시인, 류근 시인, 김도언 작가, 임태주 시인, 이런 분들인데요. 이분들 글 보고 있으면 장난 아니죠. (웃음) 정말 다르구나 느껴요.

 

그분들과의 친분이 다 SNS 통해서 이루어진 건가요?

 

다 페이스북에서 만났어요. 정말 신기하죠? 희한한 일인데요. 2011년에 학회 일 때문에 페이스북을 시작했어요. 그땐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죠. 그러다가 동창들과 친구를 맺다 보니 친구의 선배들과도 친해지게 됐어요. 제가 뭐라고 썼는데 그걸 한 선배가 보더니 시인과도 친하게 지내보라고 하면서 류근 시인을 소개해줬어요. 그 후 단국대 오민석 교수님, 박호민 시인 등 몇몇 친구들이 모여 첫 번개를 할 때 불려가게 됐죠. 술도 엄청 먹었어요. (웃음)

 

아무래도 집중하게 되고, 기억에 남는 건 슬픈 장면들이에요. 이런 장면에서 특히 배우게 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은 환자와 가족들의 이야기지만 또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기도 하고요. 저자는 이런 장면에서 좀 더 특별한 감상을 갖고 있을 것 같아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존경이죠. 그가 살아온 길, 업적에 대한 존경이 아니고 그 순간에 보게 되는 존경이 있어요. 그 존경은 사실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잘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 존경스러운 거죠. 노부부 이야기가 많은데요. 그들을 보면서 왜 존경을 생각하느냐면 ‘나도 과연 저들처럼 늙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존경심이 일죠. 그냥 그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너무 존경스럽다는 거예요. 우리는 서로 존경할 만한 삶을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깊게 보지 못했을 뿐이라는 감상이 있어요. 또 하나는 다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한 할머니가 있어요. 딸의 아이를 키워주는데요. 손자 키우는 할머니들은 육아 스트레스 때문에 자기 자식들 욕 엄청 하거든요. 얘 때문에 운동도 못 하고, 외출도 못 한다고요. 그런데 이 할머니는 그런 말씀을 안 하셨어요. 나중에 보니 몸이 불편한 딸이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고 스스로 너무 미안했어요. 오해하면 안 되는 삶의 또 다른, 각자의 내면이라는 게 있구나 생각했어요.

 

많이들 바쁘고, 다른 삶에 별 관심 없고, 냉소적인 채로 살아가요. 그런데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런 냉소를 좀 덜어주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어요. 그 뜻깊은 발견을 아이러니하게도 몸이 아프거나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고요.

 

가장 냉소적이거나 차가울 것 같은 순간인데요. 그것도 사실 오해죠. 그것도 오해예요. 가슴이 뜨거운 사람끼리 앉아있는 거거든요. 의사도, 환자도 가슴이 뜨겁죠. 서로가 차갑게 보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니 그 안에서는 얼마든지 뜨거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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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특별한 노력

 

환자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의사의 특권 중 하나라 생각한다고 적었는데요. 몇 년간 이야기를 적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변화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기본적인 글 쓰는 마인드에서는 바뀐 게 별로 없어요. 앞으로 쓰는 글들도 그럴 텐데요. 누군가에게 어떻게 읽히길 바라고 쓰는 건 지금도 아니에요. 조심스러운 부분은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보는 눈이 많아지니까요. 환자 이야기니까 조심스럽죠. 그가 이 책을 볼 수도 있어요. 환자분들에게는 책 냈다고 얘기 안 했거든요. 그렇지만 우연히 볼 수도 있잖아요. 보면 자기 얘기라는 걸 아실 테고요. 그러다보니 표현을 조심스럽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저자 개인적인 삶 측면에서는 어떨까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고, 잘한다고 하니까 자꾸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환자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면 환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얘기가 안 들려요. 내가 필요한 정보만 얻어갈 뿐이죠. 그 안에서 환자 삶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건 좀 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해요. 생활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묻는 거지만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밥은 누가 차려주는지 묻다 보면 가족 이야기가 나오죠. 오지랖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제게는 필요한 환자정보기도 하고요. 사람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하는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페이스북에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과정 전체가요.

 

혹시 댓글에도 영향을 받나요?

 

별로 안 받아요. 잘 썼다, 재미있었다, 그렇게 써주시면 좋긴 하죠.(웃음) 이런 이야기 쓰길 잘했구나 생각하고요. 사실 그냥 쓰지 않거든요.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쓰고 지우고 하는데요. 그렇게 쓴 글에 잘 썼다, 공감된다, 하시면 기분이 좋은 거죠. 김도언 작가가 제 책을 보고 ‘이렇게 기름기 없고, 담백한 산문은 참 오랜만이다’라고 해서 댓글로 제가 뭐라고 했느냐면 ‘담백하게 쓰려고 한 게 아니라 기름칠하는 법을 몰라서 못한 거’라고 했어요. (웃음) 정규 교육 이후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책을 계획한 것도 아니었고, 시인들과도 SNS를 통해 친구가 됐고, 살면서 겪은 의외의 일들이 참 흥미롭네요.

 

좋기도 한데요, 사실 좀 부담스러워요. 저는 앞으로도 글 쓰는 작가는 아니에요. 운이 좋아서 책을 한두 권 더 낼 수는 있겠죠. 그런데 앞으로도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고요. 그냥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의사로 평생 살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은 제게 잠깐 스쳐가는 일인 것 같아요. 계속 환자 만날 거고요. 이런 일들이 환자들에게는 이 의사가 공부하고, 치료하는 것엔 관심이 없고 글 쓰고, 책 내고, 사람들 만나는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하실까봐 조금 부담스럽긴 해요. 오해는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저는 의사할 거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도 계속할 거예요.

 

개인적으로 보면 영광스러운 일이죠. 대한민국에서 책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책을 내고야 세상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요. (웃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내고 싶어 하지만 못 내잖아요. 그런데 일생에 한 번 책을 냈다는 건 개인적으로는 끝없는 영광이에요. 아마 평생 제게는 두고두고 영광이겠죠.

 

책에 이스터 에그(영화, 책, CD, 소프트웨어, 비디오 게임 등에 숨겨진 메시지나 기능)가 있다고 해요. 멋진 아이디어예요.

 

출판사에서 내준 아이디어예요. 페이스북에 출판사 팬클럽이 있어요. 거기 책 제목에 대해 투표를 받았어요. 1등한 게 제목이 됐고요. 출판사에 아이디어가 많은 것 같아요. 이스터 에그도 아이디어를 주셔서 알아서 해달라고 했는데요. 이렇게 민망한 이스터 에그가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것대로 찾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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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의사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었어요. 사진이요. 책에 실린 사진이 좋단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이 사진을 제공하신 분은 학교 선배예요. 재활의학과 의사고요, 미국에 오래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신지 1년 정도 된 분이에요. 미국에 계신 동안 페이스북에서 알게 됐는데요. 보니까 대학에서 주민들을 위해 연 강좌에서 사진을 2년 동안 배우셨더라고요. 사진이 이 책과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면도 없는데 다짜고짜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드렸어요. 당돌하게요. 이런 사정으로 책을 내게 됐는데 선배님 사진을 책에 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했더니 바로 승낙하시더라고요. 그 선배님께 너무 감사한 마음에 여러 번 인사를 했는데도 인터뷰 할 때마다 이 얘기를 하게 돼요. (웃음) 글만 줄줄 있었다면 이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놀라워요. 또 페이스북이잖아요. 이것으로 굉장히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네요.

 

저도 놀라워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운이 좋았던 것 같고요. 항상 도움 주시려고 하는 분들이 곁에 있었고요. 실력 없고, 공부 못했던 의대생이 대학 교수가 될 때까지도 많은 분들이 옆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책 내는 과정도 그랬고요. 하다 보면 옆에 참 좋은 분들이 많구나 하고 많이 생각해요.

 

의사로서의 꿈은 뭐예요?

 

환자가 돌아가실 때까지 저한테 왔다가 돌아가시고 나면 자녀분이 오셔서 부고를 들려줄 만한 의사가 됐으면 좋겠어요. 가정의학과가 갖고 있는 취지, 제가 의사가 되려고 했던 취지를 생각한다면 환자가 죽을 때까지 평생 지켜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어떤 의사라는 표현보다는 누군가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의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의사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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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프지 마라김정환 저 | 행성B잎새
《사람아, 아프지 마라》는 평범한 우리 이웃과 저자가 진료실에서 만나 울고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나눈 인생 이야기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다지 즐거울 일 없는 일상을 사는 우리 마음까지 다정하게 위로받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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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펴낸 윤석남, 한성옥 “모성은 다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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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를 보다 문득 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얀 백설기 같은 표지에는 꼬부랑 할머니가 그려져 있다. 허리가 90도로 구부러진 할머니 등에는 무당벌레, 거미, 개미가 기어가고, 머리에는 나비와 참새가 사이좋게 앉아 있다. 할머니의 팔은 너무도 가늘지만, 위태로운 느낌은 없다. 오히려 굉장히 안정적인 모습이다. 또 할머니는 허리에 가느다란 끈을 달았다. 무엇을 끌고 가는 것일까. 독자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Dear 그림책이다. 설치와 조각, 회화를 넘나드는 서양화가 윤석남의 드로잉을 그림책작가 한성옥이 아트디렉터를 맡아 완성했다. 윤석남에게는 첫 그림책, 한성옥에게는 여섯 번째 그림책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두 번 다시는 만들 수 없는 그림책인 것 같아요.”

 

다정 씨는 누구길래 ‘다정해서 다정한’ 사람일까. 두 작가가 그림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감정은 ‘모성’이었다. 한없이 다정해서 때로는 미안하고 안쓰럽고 아득한 ‘모성’. 가장 그리고 싶은 존재였던 ‘어머니’를 그리면서 나이 마흔에 화가가 된 윤석남은 간결한 드로잉과 차분한 필치로 독자들의 마음에 말간 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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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윤석남과 그림책작가 한성옥(오른쪽)


어머니를 ‘다정’이라는 단어로 담자

 

그림책을 보고 한동안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림을 보고 또 봤는데, 볼 때마다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윤석남책이 나오기 전에 가제본을 받았어요. 책 더미라고도 하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아, 이거 너무 좋다’ 싶었어요. 내 작품 같지가 않고 굉장히 객관적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표지를 열면 줄이 하나 나오잖아요. 다음 장에는 줄이 두 개 나오고, 그 줄이 그네가 되고요. 내 작품으로 만든 책인데도 읽고 또 읽고 그랬어요. 한성옥 작가가 아트디렉터를 맡았는데, 정말 잘 만났다 싶었어요. 아주 운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한성옥작년에 윤석남 선생님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SeMA 그린(Green): 윤석남 심장> 전을 열었을 때, 얼굴을 처음으로 뵀어요. 예전에 선생님의 작품 <어머니의 눈>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어요. 저희 어머니가 환갑 전에 돌아가셔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각별했는데, 선생님의 작품을 보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허전함 같은 마음이 훅 들어왔어요. 마음으로만 오랫동안 흠모했는데, 전시장에서 열린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인사하게 됐어요.

 

전시장에서 그림책 출간 제안을 하신 건가요?

 

한성옥전시장 입구에 선생님의 드로잉 108점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제가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특히 눈 여겨 봤죠. 선생님과 여러 질문과 답을 이어가다, 이 드로잉으로 그림책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요. 아직까지 그림책 독자는 어린이 위주잖아요.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서 성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그림책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어요. 윤석남 선생님의 작품을 성인 독자에게 그림책으로 소개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선생님도 평소 그림책에 관심이 많으신 편이라 흔쾌히 수락하셨어요.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어요. 선생님의 프로필을 읽다 보니, 어머니 성함이 ‘원정숙’이더라고요. 저희 시어머님 성함도 ‘원정숙’이거든요. (웃음) 저희 외할머니 성함은 ‘윤순남’이고요. 선생님과의 인연은 정말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윤석남한성옥 작가와 이야기를 하던 중 숀 탠의 『도착』이 떠올랐어요. 참 좋게 읽은 그림책이었거든요. 『도착』을 펴낸 출판사가 사계절인데, 한 작가가 그러면 사계절에서 내도 좋겠다고 했어요. 참 재밌는 인연으로 만들어진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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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라는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한성옥윤석남 선생님의 모든 작품은 모성을 기반으로 해요. 200점이 넘는 드로잉 작품에서 32점을 골라내면서 든 감정이 ‘다정’이이었어요.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모성이 뭘까? 생각해보니, 다정함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를 ‘다정’이라는 단어로 담자 싶었어요.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개인적인 자아 안에 있는 갈등, 그리고 어머니, 남편, 딸과의 관계가 바깥 세상으로 확대돼요. 그림책을 보면 세 가지로 나눠지는데요.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예요. 세가지 테마로 그림책을 보시면, 더 가깝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림을 보다 글을 읽다, 또 그림을 보게 되는 책이에요.

 

윤석남드로잉을 할 때, 그림 밑에 적어놓았던 글이에요. 한성옥 작가님이 조금 다듬어준 문장도 있고요. 그런데 완성된 책을 보고 있으니 구분이 안 갔어요. 다 내 글인 줄 알았어요.(웃음)

 

표지 그림만 보면 ‘이게 어떤 그림책일까?’ 잘 상상이 안 돼요.

 

한성옥선생님의 <공생>이란 작품인데요. ‘다정함의 에센셜’이라고 생각했어요. ‘모성은 왜 다정한가’를 생각해보면, 엄마라는 존재 안에 생명에 대한 공생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다정으로 표출되는 거고요. 허리가 구부정하지만 다양한 미물에 몸을 내어주잖아요. 얼마나 다정해요. 또 엄마의 허리에는 끈이 하나 있어요. 처음에는 이 끈은 뭘 상징할까? 잘 몰랐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드로잉을 몇 십 개 보다 보니, 이건 ‘짐꾼의 끈’이었어요. 제가 해석한 엄마 다정씨는 이렇게 이해됐어요.

 

윤석남이 드로잉은 약수터에 갔을 때 봤던 장면을 그린 거예요. 꼬부랑 할머니가 약수통을 끌고 가는데, 제 눈길을 확 사로잡았어요. 너무 늙었는데 표정은 너무 다정한 거예요. 물론, 할머니 허리에 거미, 무당벌레가 기어가진 않았죠. 이 장면은 외할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렸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의 부엌일을 자주 도왔는데, 어느 날 제가 뜨거운 물을 하수구에 버리니까 외할머니가 갑자기 화를 내시는 거예요. “땅바닥에 살아 있는 생물이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함부로 뜨거운 물을 버리냐”고요. 그 시절 할머니들은 다 이러셨던 것 같아요. 미생물 하나도 절대 함부로 죽이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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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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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꼭 자기 방을 찾아야 해요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드로잉이 있어요. 여자가 엄마를 한 손으로 안고 있는 모습이에요. “너무 가벼워서 답삭 안아 올렸더니 난데없이 눈물 한 방울 투투둑”이라고 쓰셨어요.

 

윤석남 저희 어머니가 동네에서 키가 제일 컸어요. 그런데 점점 작아지더니 저보다 작아지셨어요. 마치 어린 아이처럼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자주 그랬어요. “엄마, 너무 작아졌어. 음식 좀 많이 드시라”고요. 그랬더니 “이제는 안 먹어도 된다. 걱정하지마. 난 살만큼 살았어요”라고 하셨어요. 뭐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일 수도 있고, 인생이 이러하기도 해요.

 

작가님 어머님께서 95세까지 장수하셨다고 들었어요. 하늘에서 이 그림책을 보고 계실 텐데요. 어떻게 감상하셨을까요?

 

윤석남아마 흐뭇해하지 않았을까요? ‘내 딸이 나를 알아줬구나’ 하셨을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저는 엄마랑 참 잘 통했어요. 자랑하는 것 같지만, 우리 딸아이에게도 엄마가 늘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네 엄마 때문에 살았어”라고요.

 

남편과 손을 잡고 있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는 그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중년 부부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은데요.

 

윤석남이 그림을 그렸을 때가 2000년이니까, 15년 전쯤 이야기예요. 제가 얼마 있으면 여든이 되는데, 지금 남편을 바라보는 시각은 또 달라졌어요. 남편이 있어서 참 고맙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마 지금 드로잉을 새롭게 그리면 또 다른 부부상이 나올지 몰라요.

 

한성옥지금 제가 그래요. 결혼한지 32년째가 됐는데 남편만큼 참 좋은 친구가 없는 것 같아요. 최고의 친구예요. 남편과 동갑내기 친구라서 그런지 결혼했을 때부터 반말을 하는 사이였거든요. 너 그랬니? 라고 물을 정도로 허물 없는 친구예요.

 

윤석남난 60대 때는 그걸 못 느꼈어요. (웃음) 우리 부부도 고등학교 동창인데, 60대 때만해도 자기 일에 바빠서 서로 보살필 시간이 없었어요. 이제는 피차 같이 늙어가는 처지잖아요. 남편이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다정해서’ 편에는 작가 윤석남의 이야기가, ‘다정한’ 편에는 남편과 딸, 엄마와의 관계, ‘다정씨’ 편에는 세상 이야기를 담았어요. 작가의 ‘방’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요. 여자에게 ‘내 방’이라는 공간은 드물고 귀한 것 같아요. 윤석남 선생님은 오래 전부터 「핑크 룸」, 「블루 룸」 등 ‘룸 시리즈’ 작품을 선보이셨어요.

 

윤석남지금 제 방은 커요. 하지만 내 방을 갖게 된 건 마흔이 넘어서예요. 그 전까지 내 방은 식탁의자였어요. 시어머님방도 있고 딸 방도 있는데, 내 방은 부엌에 있는 식탁의자였어요. 의자에 앉아 책도 읽고 편지도 쓰고 했으니까요. 제가 미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거예요. 하지만 무엇이 됐든 간에 모든 여성이 자기만의 길을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느질을 좋아한다면 바느질을 꾸준히 했으면 좋겠어요.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장소라면, 그것이 내 방이 될 수 있고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는데 꼭 자기 방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뭐 그냥 이렇게 살지’ 이러지 말고,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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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런 그림책을 만들자고 하면, 겁날 것 같아요

 

이 책을 두고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평한 리뷰를 보았습니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모든 이야기 속에 ‘모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성옥맞아요. 윤석남 선생님의 작품은 모성이 본 세계, 모성이 가는 길을 아울러요. 모성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진화하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결핍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모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의 자리를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요.

 

윤석남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남의 자식까지 포옹할 수 있어야 진정한 ‘모성’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희 어머니 세대는 요즘 젊은 엄마들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학교에 가서 맞고 돌아왔을 때 “왜 너만 맞았냐. 너도 때려라”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어요. 하수구에 뜨거운 물을 버리지 못하게 한 할머니 세대도 그래요. 작은 생명도 바라볼 수 있는 게 사랑이잖아요. 이게 모성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전세계에 여성 정치가가 많아지면 전쟁이 없어질 거야.” 그랬더니 남편이 “웃기지 마. 여자들이 더 잘 싸워”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여자들은 자기 자식을 품어 봤잖아요. 모성은 많은 걸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은 아직도 모성을 희생 정신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지만, 모성애의 진정한 뜻은 희생이 아니에요. 항상 희생만 하고 양보만 하고 참다 보면, 언젠가 독이 나올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는 성찰이 필요해요.

 

드로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고독감도 많이 느껴져요. 여자의 손은 때때로 가시가 돋아 있어요.

 

한성옥선생님 작품을 보면 늘 어느 한 쪽 부분은 비쭉비쭉 가시가 나있기도 하고, 뭔가 불완전해요. 온전함으로 있지 못하는 쓸쓸한 한 부분이 머뭇거리고 있어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다 그렇잖아요. 어떤 것을 지향하지만 항상 머뭇거리게 하는 부분이 있죠. 이런 감정을 찾고 느껴보는 것도 좋은 그림책 감상이라고 생각해요.

 

윤석남여자의 팔을 보면 굉장히 길어요. 어딘가로 가고 싶은 욕망이에요. 도달하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아쉬움, 주저함을 팔을 통해 표현했어요. 그래서 손에 가시가 돋았어요. 여기엔 약간의 독도 들어가 있어요. 욕망, 욕심이니까요.

 

그림책을 보고 주변 또래 여성들에게 소개했어요. 굉장히 공감하더라고요.

 

한성옥아무래도 여성 독자들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엄마가 된 사람, 모성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특히 더 공감할 거고요. 책을 만들면서 출판사 편집팀장과 “이 책은 정말 한 번 만들 그림책이다. 그러니까 진짜 집중해야 한다”고 했어요.

 

드로잉 그림책을 또 펴낼 계획은 없으신가요?

 

윤석남다시 이런 그림책을 만들어보자고 하면, 겁날 것 같아요. 자신도 없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아요. 자신이 없다는 게 재미가 없다는 뜻일 텐데요. 나는 새롭지 않은 건 못하는 성질이라서요. 이런 종류의 책이 또 나오기는 힘들 것 같아요.

 

“소장 욕구가 생기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도 좋지만, 나를 위해 선물하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특히 어떤 독자들이『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를 보면 좋을까요?

 

윤석남 30대 이후 가정 주부들이 많이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여자들이 자기한테 이 정도는 투자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엄마들이 자녀를 위한 책을 많이들 사지만 본인을 위한 투자는 잘 안 하잖아요. 좀 이기적으로라도 나를 위한 투자를 했으면 좋겠어요. 책이 많이 팔렸으면 하는 소망보다도 그래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한성옥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하잖아요. 육체도 건강해야 하지만 정신도 건강해야 하는데, 브런치 먹는 횟수를 조금만 줄여 책을 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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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루, 이연희 “에서 핀란드를 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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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유쾌한 대화였다. 이 분위기, 책을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막걸리집 주인과 단골 손님으로 만나 친해진 사이라는 두 사람, 따루 살미넨과 이연희는 제대로 된 핀란드를 보여주자는데 의기투합해 2014년 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핀란드 곳곳을 여행한다.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축제를 즐기고, 핀란드의 제주도라는 올란드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고, 산타가 있는 라플란드에서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설경에 매료된다. 그 여행의 거의 모든 순간, 둘을 이어준 술이 등장하고 덕분에 독자는 핀란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멋진 하우스 맥줏집까지 발견할 수 있다. 이 여행은 핀란드 사람 따루 살미넨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핀란드의 평범한 가정에서 나무 사이에 핀 버섯을 따는 장면이나 근처 호수로 뛰어들어 신나게 수영하는 장면을 다른 여행기에서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볼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핀란드 항공권 검색을 했다. 직항 노선이 있고, 의외로 비행시간도 길지 않다. 이 책 한 권이면 현지인 친구를 둔 사람처럼 여행할 수 있을 테니, 이제 필요한 건 결심뿐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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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유럽

 

핀란드라는 곳이 물리적 거리보다는 심리적으로 먼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목처럼, 의외로 가까운 곳이더라고요. 

 

연희: 저도 몰랐으니까요. 저는 여행을 많이 했어요. 런던에서는 방 잡아놓고까지 여행한 사람인데요.(웃음) 왔다 갔다 하는 비행기 값이 너무 아까워서 그랬어요. 런던이 저가 항공이 제일 많이 다니는 허브거든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방 잡고 간 곳이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같은 북유럽이었어요. 사실 그때도 핀란드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따루 살미넨: 아는 분이 제가 핀란드 책 쓴다고 하니까 ‘친구가 갔다 왔는데 볼 게 없다고 하더라’라는 거예요. 물론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어요. 패키지 상품으로 가면 광장 가서 사진 찍고, 밥도 대충 먹고 그만이거든요. 재미있게 핀란드에 가려면 정보가 필요해요. 그런 것 때문에 책에도 맛집 같은 걸 일부러 많이 설명해 놓았어요. 쇼핑 정보나 감동 받을 수 있는 장소들도 많이 찾았고요. 그걸 보고 다녀오면 ‘핀란드도 볼 게 많다더라’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겠죠. 그런 목표도 있었어요.

 

저도 책을 가만히 읽고 있기가 힘들었어요. 너무 가고 싶어서요. 보니까 직항 노선도 있더라고요. 한국에 제대로 핀란드를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거죠?

 

따루 살미넨: 언니(이연희)와 책 이야기를 나누기 전부터 저는 핀란드 사람이기 때문에 핀란드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한국 사람들은 분명히 핀란드에 관심이 되게 많은데도 막상 얘기해보면 정보 찾기도 어렵고 해서 잘 모르고, 잘못 알고 있는 정보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알리고 싶은 마음이 원래 있었죠. 알고 보면 비행기 거리도 가깝고, 사계절도 있고, 볼 것도 많은 게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마지막에 가게 되는 게 북유럽이죠. 멀고 비싼 이미지 때문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은 있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책을 통해 ‘가볼까’ 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싶었어요.

 

언니는 저희 가게 단골이고, 술 먹다가 친해졌는데요.(웃음) 그렇게 2~3년 지내다가 언니가 원래 여행을 좋아하고, 핀란드도 그 전에 이미 두 번 정도 다녀왔다고 해서 책 한 번 쓰는 게 어떨까 의논하게 됐죠.

 

아이디어는 이연희 저자가 먼저 냈군요?

 

이연희: 따루가 한국과 핀란드를 워낙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따루 있을 때 함께 여행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2014년 봄부터 시작이 된 거예요. 4월 30일 바뿌(Vappu, 노동절) 축제 전날 도착했어요. 책 첫 장면이 바뿌 축제인데요. 책이 저희 여행 시간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 2015년 겨울에 끝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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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장면이 노동절 축제라는 것마저 괜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어요.(웃음) 핀란드가 워낙 겨울이 긴 곳이니 5월정도는 돼야 봄을 시작하는 느낌이 있다는 대목도 눈길을 끌었고요.

 

이연희: 축제로 시작한다는 게 저도 들뜨고 기분이 좋았죠. 한국에서 노동절은 그냥 하루 쉴 수 있는 날 정도지만 말이에요.

 

따루 살미넨: 사실 핀란드는 사람도 얼마 안 살고 그래서 일 년 내내 거리가 한산해요. 그런데 그날은 가면 진짜 달라요. 만약 그날 하루만 찍고 핀란드에 가면 핀란드에 대한 이미지가 확 바뀔 거예요. 정말 다른 나라 같은 느낌일 것 같아요. 핀란드에도 사계절이 있지만 겨울이 길다보니까 그래요. 또 좀 어둡거든요. 2~3월쯤은 점점 봄으로 향하면서, 날이 길어지고요. 그때부터 계속 햇빛이 쨍쨍해지면서, 사람들 얼굴에 웃음도 피고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돼요. 그게 5월 초부터죠. 그때부터 여름을 기다리고요. 또 6월 되면 백야가 시작하거든요. 사람들이 기분 되게 좋고 그런 분위기죠.

 

이연희 저자는 그런 활발한 기운, 핀란드의 봄을 만난 첫 느낌이 어땠나요?

 

이연희: 전에 핀란드에 혼자 갔을 때는 진짜 한산했어요. 무슨 수도가 이렇지(웃음) 했어요. 그랬는데 바뿌 때 가니까 온 핀란드 사람들이 다 밖에 나온 것처럼 너무 활기차고 다르더라고요. 일정 때문에도 그때 가긴 했지만 시작을 축제처럼 재미있게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핀란드 하면 조용하고,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이라고 흔히 생각하니까요.

 

따루 살미넨: 날짜를 잡으면서 제가 언니한테 얘기를 한 것 같아요. 이때 가면 축제도 있으니까 이왕이면 맞춰서 오면 좋겠다고요. 4월 30일부터 1박 2일 동안 난리 나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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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청춘> 핀란드편을 원한다

 

핀란드와 한국의 공통점을 몇 가지 짚었어요. 사람들이 활발하고, 술 좋아하고, 교육열이 대단한 점 등을 들었는데요. 그것도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을 것 같아요.

 

따루 살미넨: 맞아요. 은근히 먼 것 같으면서 비슷한 나라예요. 차이점도 물론 있지만요. 한국에 살면서 공통점을 많이 느꼈어요. 이런 건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알 수 있는 거잖아요. 그동안 느꼈던 것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일단 음주 즐긴다는 점이 정말 비슷해요. 그 다음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비슷하죠. 물론 교육열이 나타나는 현상은 조금 다르지만요. 핀란드도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제대로 못 먹고 산다는 공감이 있어요. 천연자원도 부족하고요. 가장 뚜렷한 공통점은 작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하다는 점이에요. 한국은 제가 볼 때는 엄청 큰 나라예요. 5천만 인구잖아요.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보면 항상 더 큰 나라에 민감한 것 같아요. 일본 지배를 오래 받았잖아요. 핀란드도 스웨덴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서 그런 게 있어요. 스웨덴과 아이스하키 같은 거 하면 난리가 나요.

 

문화라는 게 참 신기한 것 같네요. 지금 한국에서는 북유럽에 대해 관심이 무척 높잖아요. 다만 핀란드에 대해서는 더 깊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때요?

 

따루 살미넨: <꽃보다 청춘>에서 핀란드를 가야 해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들이 못 찾는 곳까지 제가 다 찾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1년에 한 번 ‘모기 잡기 세계 선수권 대회’를 하거든요. 거기에 출연자들과 함께 참가하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시간을 정해놓고 그 안에 최대한 많은 모기를 죽이는 사람이 이기는 대회예요. ‘개미집에 오래 앉아 있기 대회’도 있어요. 바지 벗고 개미집 위에 누가 더 오래 앉아있나 겨뤄요. 그런 대회에 참석하면 재미있겠죠. 프로그램 측에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아이디어를 아직 못 팔았어요.(웃음)

 

이연희: 그런데 한국에서는 ‘북유럽스타일’이라고 해서 집 안에 뭐 하나 들여놓고, 사진 찍어 SNS에 올리고, 이런 식이잖아요.

 

이연희 저자는 핀란드가 부럽다는 말을 종종 하고 있어요. 독자 역시 비슷한 감상을 가질 것 같거든요. 어떤 점이 가장 부러웠어요?

 

이연희: 우선은 양심적이라는 점이에요. 한국은 원산지를 속이거나 사기 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곳 중 하나잖아요. 핀란드 여행을 갔었지 살았던 것은 아니니까 핀란드에도 사기꾼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곳이 참 양심적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원산지가 핀란드면 꼭 국기가 붙어 있다는 점이 되게 신기하더라고요. 하다못해 껌에도 작게 핀란드 국기가 붙어있는 식이거든요. 또 아이 키우기 참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으니까요. 거의 공짜거든요. 한국은 아이 키우기가 힘들어서 결혼을 안 하거나 아이 낳기를 포기하는 부부들이 많잖아요. 무엇보다 유기견, 유기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동물을 워낙 사랑하다보니 그런 게 진짜 부럽더라고요.

 

배 한 켠에 동물이 배변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놓은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인식 차이가 그렇게 크구나 생각했어요.

 

따루 살미넨: 핀란드는 동물도 사람과 어떻게 보면 똑같은 거예요. 사람의 소유라기보다 동반자예요.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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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질문을 따루 살미넨 저자에게 드릴게요. 한국에는 핀란드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핀란드 사람 입장에서 어떻게 느끼나요?

 

따루 살미넨: 좋은 면만 봐서 그래요.(웃음) 저는 꼭 그렇게는 안 생각해요. 핀란드에 가서 공부하는 한국 사람이나 직장 때문에 발령 나서 가는 한국 사람을 많이 봤거든요. 어떤 사람은 정말 좋아해요. 특히 아이가 있는 가족은 핀란드를 안 떠나려고 해요. 그런 건 확실히 있는데요. 혼자 가는 남자는 죽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직장도 칼퇴근이고, 끝나고 술 한 잔 하거나 이렇지 않거든요. 그냥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요. 그러니 혼자 있으면 정말 외롭고 놀 곳이 없는 거죠. 모든 한국 사람에게 맞는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좀 조용한 삶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맞을 수 있다고 봐요. 집 꾸미는 걸 좋아하거나 정원 가꾸거나 하는 가정적인 분위기의 사람에게는 참 좋아요. 핀란드 사람도 학생 때는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놀지만 가족이 생기면 무척 가정적이거든요.

 

어느 사회나 저마다 장단점은 있는 거겠죠.

 

따루 살미넨: 핀란드도 문제가 많아요. 지금 경제가 가장 큰 문제예요.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고령화 문제도 크거든요. 사실 지금도 출산율은 OECD 상위권에 속하는데요. 핀란드도 2차 대전 이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거든요. 그 베이비붐 세대가 이제 은퇴를 하는 시기예요. 그래도 복지는 유지를 해야 하고, 그래서 뭔가 앞뒤가 안 맞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가 굉장히 큰 문제로 남아 있어요. 핀란드도 나름대로 그 안에는 그런 고민들이 많아요. 천국이라고 얘기하기는 좀 그렇죠.

 

한국 생활을 오래 한 입장에서 보는 한국 문화나 한국 사회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따루 살미넨: 많죠. 일단은 사람들이 좋아요. 제가 인복이 있어서 그런지 나쁜 사람 많이 안 만나봤어요. 덕분에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많이 받았고요. 또 이렇게 음식이 맛있는 나라는 없어요. 제가 볼 땐 최고예요. 또 역동적인 모습이 있어요. 사람들이 정말 생활력이 강하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요. 세계 어딜 가든 한국 사람들은 성공하잖아요. 그런 추진력은 확실히 있어요. 저도 핀란드에 살 때는 이렇게 말도 안 빠르고, 24시간 일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여기 오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웃음) 저는 오히려 핀란드 가면 ‘뭐하지’ 싶고 되게 힘들어요. 한국에 있는 게 더 편해요. 확실히 한국은 아주 재미있는 나라죠. 물론 돈이 있어야 재미있다는 부분이 있지만요.

 

핀란드 교육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이연희: 핀란드는 학원이 없다고 해요. 사교육이 없고요. 따루 어머니께서 선생님으로 작년에 퇴직하신 분인데요. 어느 날은 집으로 채점할 것을 가져오셨어요. 그걸 구경을 하는데 문제가 다 주관식이더라고요. 초등학교 꼬마들 시험지였는데 다 서술형이거나 주관식 문제였어요. 우리는 ‘찍기’에 익숙해 있잖아요. 엄청난 차이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는다는 건 말이에요. 그러니 학업 성취도가 한국이나 핀란드나 높긴 하지만 실상은 많이 다르겠죠.

 

따루 살미넨: 또 상대평가가 없어요. 다 절대평가예요. 이것도 아주 중요한 건데요. 친구와 경쟁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경쟁하는 거예요. 교육의 목표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한국이 진학을 위해서 공부하거나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거라면 핀란드는 시험도 당연히 있고, 진학도 해야 하지만 그런 목적보다는 인생을 위해서 공부하는 게 더 중요한 목적이에요. 어떤 시험에서 떨어지고, 대학에 못 들어간다고 해서 실패한 것도 아니고요. 그런 문화 차이가 있어요. 낙오자가 없도록 교육하려고 하는 원칙이 있죠. 물론 그래도 낙오자는 생길 수밖에 없지만 비교적 적은 편이에요.

 

교육 문제에 대해 얘기 안 할 수 없는 게, 이것이 사회 전체의 교양이랄까 상식, 평균적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핀란드를 얘기할 때 교육 얘기를 늘 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따루 살미넨: 그런데 막상 핀란드 사람은 그걸 모른다는 것 아세요?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좋은 것도 모르고 그냥 그런가보다 해요.(웃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상대적이라는 거죠. 핀란드도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고요. 저도 대입시험 앞두고는 스트레스 받고 그랬거든요. 지금 한국에 살다보니 절대적으로 여기에 스트레스가 더 많다는 걸 알게 됐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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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맺은 인연

 

저자 두 분이 술집 주인과 단골로 친해졌다고 했는데요. 함께 여행을 가고 책을 내기까지 참 재미있는 인연이에요.

 

이연희: 제가 <미녀들의 수다>에서 처음 따루를 봤어요. 우연히 봤는데 뒷줄에 앉아서 한국말을 너무 잘하는 거예요. 발음도 너무 좋고, 말까지 빠르고요. 게다가 술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급 호감이 생긴 거죠. 제가 언어에 관심이 많은데다가 술도 좋아하니까요. 금상첨화잖아요. 그때 박사논문 준비를 하던 때라 스트레스도 많을 때였는데 따루가 주막을 한다는 걸 알고 한 번 와봤어요. 진짜 저녁 7시쯤 되니까 앞치마를 두르고 막걸리를 나르고 있더라고요.(웃음) 그렇게 하다 제가 여기에 자주 온 거죠. 술도 한 잔 나누고 하다가 친해졌어요.

 

따루 살미넨: 특이했던 게 언니가 친구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거예요. 이상했어요.(웃음) 왜냐하면 일부러 저와 친해지려고 그렇게 오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것에 좀 거부감이 있어요. 친구 되고 싶다고 해서 제가 친구 되어 드릴 순 없거든요. 뭔가 통해야 친구가 될 수 있는 건데 말이에요. 어쨌든 언니는 그렇게 자주 와서 친해졌어요. 매상도 엄청 올려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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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으로 통하는 게 있었겠죠.

 

따루 살미넨: 함께 여행하자는 결정이 쉬운 건 아닐 수도 있거든요. 친한 친구랑 가도 안 맞으면 힘들잖아요. 제 경우 여행할 때 맛있는 거 먹는 걸 좋아하고, 쇼핑하는 건 싫어해요. 쇼핑 좋아하는 친구라면 여기선 친해도 함께 여행은 못 가요. 여행 가서 싸울 수도 있고요. 그런데 다행히도 저희는 싸우지도 않고 잘 다녔어요.

 

이연희: 함께 술 마시면서 제가 핀란드 가봤다고 얘기했었어요. 그러다 본격적으로 핀란드의 봄, 여름, 겨울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거예요. 사실 저는 배낭여행으로 혼자만 여행을 다녔어요. 친구들과 싱가폴, 홍콩 이렇게 두 번 정도만 가보고 따루와 여행을 함께 하게 된 건데요. 각자 여행의 목표가 있겠지만 자기주장만 하면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 걸 이해해주고, 포기할 건 포기하면 별로 문제될 게 없겠죠. 저희는 다행히도 그런 문제는 없었어요.

 

그냥 여행이 아니라 핀란드를 소개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더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따루 살미넨: 원래 쇼핑을 좋아하지 않지만 쇼핑 좋아하는 분들이 워낙 많으니까 일부러 다니기도 했는데요. 그러면서 새롭고, 좋기도 했어요. 수공예품 파는 곳도 재미있더라고요. 책을 준비하면서 완전히 자비로 했는데요. 돈이 하도 많이 들어서 어차피 본전은 못 찾을 거니까 그냥 편한 마음으로 준비한 거예요. 재미있게,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다니자고 생각하고요. 돈 벌 목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니까요.

 

이연희: 세 번을 왔다 갔다 한다는 게 보통일은 아닌데요. 솔직히 따루 부모님 댁이나 동생 집에서 신세를 많이 져서 비용을 아끼기도 했어요. 겨울, 라플란드(Lapland)는 조금 비쌌고요. 헬싱키(Helsinki)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네고, 물가도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비싸다보니까 그렇지만 그때 아니면 언제 가겠어요. 라플란드 엄청 좋았어요. 렌트해서 따루가 운전을 했는데요. 진짜 하늘과 땅이 구분이 안 되더라고요. 온통 하얘서 표지판이 안 보일 정도였어요. 책에도 사진을 실었지만 사진으로는 정말 부족해요. 진짜 평생 볼 눈은 다 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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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에서 온 따루

 

다녀온 곳 중 가장 좋았던 곳은 어디예요? 제일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 있다면요?

 

이연희: 라플란드에서 광산으로 가는 길이 참 좋았어요. 그 풍경을 잊을 수가 없어요. 올라가서도 너무 좋았고요. 동물원도 좋았는데요. 그 설원에 흩어진 동물을 찾는 거거든요. 그것도 특이했어요. 기본적으로 즐겁게 있었던 건 따루의 고향인 코리아(Koria)예요. 그곳에서 따루 부모님 댁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고 좋았죠.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먹고요. 엄마가 ‘연희’(웃음) 하면서 워낙 잘해주셨어요. 진짜 내 집처럼 지냈거든요. 따루 덕분이죠. 누가 그런 경험을 하겠어요. 제가 안구 건조증이 있어서 서울에 있을 땐 늘 인공눈물을 넣어야 했었는데요. 핀란드에 있을 땐 한 번도 안 넣었어요. 공기가 정말 좋은가 봐요.

 

따루 살미넨: 올란드(Åland) 자전거 여행을 추천하고 싶어요. 더 추천하자면 핀란드뿐 아니라 헬싱키에 기지를 두고, 올란드 갔다가 스톡홀름(Stockholm, 스웨덴 수도)도 갔다가 에스토니아(Estonia, 에스토니아 공화국)도 갔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러시아 북서부)도 갔다가 다니는 경로도 좋죠. 저희도 그렇게 갔었고요. 헬싱키에서 기차 타고 두 시간이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요. 또 한국 사람은 러시아를 무비자로 갈 수 있어요. 핀란드 사람은 비자가 있어야 해서 거기는 언니만 갔어요. 귀찮아서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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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루 살미넨 저자의 고향이라는 ‘코리아’는 지명 때문에도 눈길이 가더라고요.

 

따루 살미넨: 코리아는 사실 관광지는 아니에요. 물론 책에 소개했듯 관광할 곳은 많죠. 그렇지만 사람이 붐비고 이런 곳은 아니고요. 헬싱키와 가까워서 그곳에 출퇴근 하는 사람들도 있으면서 조용하고, 그런 동네예요. 나무도 많고요. 만약 아이를 낳아 키운다면 저도 그런 곳에서 키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저도 마음대로 뛰어 놀고, 흙도 먹고 했거든요. 소도 만지고, 돼지도 만지면서요. 자연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이라 좋은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핀란드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 같아요. 도시에 있어도 자연이랑 가까운 느낌이 있어요.

 

한국의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은퇴하면 전원 생활하는 것을 꿈꾸고 애써 자연을 찾아 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네요. 도시에 살아도 자연이 곁에 있다는 게 참 이색적이에요.

 

따루 살미넨: 도시마다 그렇고, 헬싱키에도 빌릴 수 있는 정원이 있어서요. 거기서 당근 같은 것 심고 자기가 관리하면 돼요.

 

호수도 많고요. 핀란드에 워낙 호수가 많아 핀란드 사람들에게 수영은 당연한 건데 한국은 그렇지 않아서 놀랐다고 했어요. 이연희 저자도 수영을 못해서 구경만 하는 장면도 나오죠.

 

이연희: 배워야 할 게 많아요.(웃음)

 

따루 살미넨: 맞아요, 되게 놀랐어요. 또 책에 쓰진 않았지만 한국 와서 받은 재미있는 질문이 뭐였느냐면 ‘자전거 탈 줄 아느냐?’는 질문이에요. 오히려 전 ‘못 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했죠. 제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질문이지 싶었어요. 한국에서는, 특히 서울에 살면 자전거 안 배울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핀란드에서는 당연히 배워야 하는 거거든요. 수영해야 되고, 스케이트 타야 되고, 스키 타야 되고, 자전거 타야 해요. 네 가지는 기본으로 해야 돼요.

 

체력이 좋을 수밖에 없겠네요.

 

따루 살미넨: 핀란드 사람들 운동을 많이 좋아해요.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어릴 때부터 동호회도 해요. 

 

여러 계절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역시 겨울이 인상적이긴 한데요. 어느 계절이 핀란드를 여행하기 가장 좋을까요?

 

이연희: 겨울도 좋지만 여름이 여행하기엔 아무래도 좋아요. 책 좀 팔리면 저도 여름에 가보려고요.(웃음)

 

따루 살미넨: 7월이 제일 좋아요. 확실히 좋죠. 모든 축제가 그때 있고요, 모든 식당과 커피숍이 문을 열고요. 핀란드는 7월이 휴가철이거든요. 날씨도 제일 좋고, 백야도 볼 수 있어요.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다니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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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핀란드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따루 살미넨: 저도 물론 전에 산타 할아버지 만나러 라플란드에 갔었지만 이렇게 많이 여행한 건 처음이었어요. 제 고향 코리아는 라플란드처럼 눈이 많이 안 오거든요. 저도 그렇게 많은 눈 보긴 처음이었어요. 올란드도 처음이었고요. 올란드는 엄청 좋다고 항상 얘기만 들었거든요. 진짜 눈으로 보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올란드 갔을 땐 저도 말은 통하지만 똑같은 관광객이었어요. 휴양지기도 하고, 거긴 스웨덴어를 사용해서 느낌도 달랐어요. 올란드는 국기도 다르고, 자동차 번호판도 달라요. 자연도 다르고요. 한국의 제주도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많이 배웠죠.

 

이연희: 올란드에서 간 첫 번째 숙소가 한국 사람으로서 인상 깊었어요. 보통 호텔이나 비행기 예약하면 가장 먼저 여권 보여 달라 하고, 카드 결제부터 하잖아요. 그곳은 열쇠부터 주고 주인이 가버렸어요.(웃음) 저희가 퇴근 시간을 지나 도착했거든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요. 한국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되게 신기했어요.

 

술로 맺어진 인연이고, 책에도 하우스 맥주집 정보도 많이 나와요. 따루 주막 주인장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엿볼 수 있어 또 재미있었어요.

 

따루 살미넨: 다음으로 하고 싶은 게 한국의 맛집, 막걸리 맛집 책을 내고 싶어요. 외국인 대상으로 할 수도 있을 거고요. 정보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책 같은 가이드북을 말이에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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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유럽, 핀란드따루 살미넨,이연희 공저 | 비아북
한국인보다 더 한국 문화에 정통한 핀란드인 따루 살미넨과 그녀의 친구 이연희. 이 책은 두 사람이 1년여에 걸쳐 핀란드 구석구석을 누빈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사회학자이자 자칭 ‘여행중독자’인 이연희가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고, 듣고, 느낀 핀란드 여행기와 핀란드인 따루가 오랜 노하우와 경험으로 집대성한 정보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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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방준석 백현진 “음악에 태도가 없으면 다 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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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석-백현진 콤비는 백현진 솔로 앨범이나 공연에서 꾸준히 함께 해왔다. 하지만 새로 발매한 앨범은 연주 규모나 제작 방식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방백'이라는 새로운 문패를 걸고, 앨범 <너의 손>을 내놓았다.

 

19년 동안 함께 음악을 했다는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할 때도 호흡이 참 잘 맞았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날숨과 들숨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한 사람이 정리하거나 설명을 채워나갔다. 둘은 무엇보다 <너의 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참으로 즐겁고 좋았단다. 제작 당시를 곱새길때마다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토록 행복하게 가꿔진 음악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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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손>이 발매 예정일보다 열흘 늦게 발매되었다. CD 발매가 연기된 이유가 있나?

 

: 저희 성에 안 찼어요. 사실 뭐가 달라졌을까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성에 차게 만들자 싶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밸런스를 조금씩 만지기도 하고요.

 

: 전시회에 액자를 걸었는데 약간 삐뚤어진 거에요. 그런데 이것을 못 참는 거죠. 아주 미세한 부분이긴 한데 그래도 한번 나오면 끝이잖아요. 대대적으로 뭔가를 바꾸고 이런 건 아니고 약간의 수정, 보완을 했어요. 그래서 수정 전과 후 앨범 두 가지를 놓고 들어도 뭐가 바뀐 거지? 하고 마치 숨은그림찾기 같을 수도 있습니다.


<너의 손>은 그동안 두 사람이 한 작업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 그렇대요. (웃음)

 

: 많이들 그렇다고 하네요. 저흰 좋아요.

 

사실 두 사람의 작업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렇게 '방백'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 문패를 다시 달고 새로운 마음으로 일해보자 그런 게 있었어요.

 

연극의 '방백'과도 관련이 있나?

 

: 처음에는 전혀 그런 의미가 없었어요. 소리로 이렇게 하다가 방백 예쁘다 하길래. 그러다가 연극의 방백도 있구나 싶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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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백방'보다는 '방백'이 어감도 좋고 멋지다. 방백의 탄생은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 예전에 저희가 같은 소속사였어요.

 

: 송홍섭 대표님이 만든 소속사였는데 당시에 삐삐밴드가 있었고 유앤미블루, 어어부 프로젝트가 있었죠.

 

: 막상 회사 안에서는 서로 부딪힐 일이 없다가 홍대의 '블루데빌'에서 만났어요.

 

: 거기가 뮤지션들의 구락부(클럽) 같은 곳이었는데 주인 누나가 밴드들을 잘 챙겨줬어요.

 

: 거기서 오가며 보긴 했는데 본격적으로는 1997년 어어부 프로젝트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친해졌죠. 그때부터 동네 친구처럼 지냈어요.

 

이번 방백 앨범은 두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했다. 어떻게 작업이 이루어졌나?

 

: 보통은 제가 흥얼거리면서 끼적거린 곡에 준석이 형이 기타를 입혀요. 그렇게 어느 정도 모양이 잡히면 공연을 하면서 오늘은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면서 노래를 완성해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사람들이 붙기 시작한 거죠.

 

사람들이 붙게 된 계기는 뭔가?

 

: 이것에 대해서는 준석이 형과 3년 이상을 얘기했어요. 두 사람이 같이 어떤 물건을 만들까를 고민했죠. 사실 그동안처럼 쭉 한 번에 기록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소위 음악을 좀 까다롭게 듣는다는 친구들한테 '어이 뭐 재밌네.' 하는 드라이한 물건이 나왔겠죠.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 다른 식으로 가보자 이런 얘기를 하면서 서로 덜 갸우뚱거릴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둘의 합은 나와요. 그동안 합이 없었던 게 아니니까. 그러다가 얘기가 나온 게 '대상'이라는 거예요. 원래는 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가 좋으면 땡'이었는데 말이죠. 처음에는 대상을 어떻게 고려할까 어떻게 맞출까 고민을 하다가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구나 싶었어요. 뭔가를 맞춘다는 건 난 이만큼 잘났는데 너한테 맞춰줄게, 하고 잘난 체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이 든 게 누군가를 위해 밥을 차릴 때 마음이라는 게 있잖아요.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고 정성도 있어야 하는 건데…. 하면서 둘이서 쭉 음악의 방향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앨범에 참여한 사람들이 거의 재즈 쪽의 슈퍼밴드다. 어떻게 모이게 되었나?

 

: 일부러 재즈 쪽 사람들을 초점에 맞춰서 모은 건 아니었어요. 우선 구조를 만들자고 해서 드럼과 베이시스트 얘기를 하다가 서영도씨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영도 형을 만났죠. 그때 한 이야기가 '연주 잘하는 사람과 함께 하자'가 아니라 '편한 사람들하고 함께 하자'였어요. 그랬더니 신석철도 편하고 윤석철도 편하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렇게 하나둘씩 사람들이 붙었어요. 손성제, 김오키, 최선배 선생님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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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굉장한 프로 연주자들인데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녹음했는지 궁금하다. 라이브를 하듯 자유롭게 소리가 부유하는데 그것이 산만하지 않고 정돈되어 있는 게 놀라웠다.

 

: 저희는 '이 노래는 어떤 이야기며, 우리가 원하는 그림이 이런 방향이다.' 정도만 설정하고 나머진 굉장히 열어놓고 작업을 했어요. 초반에는 연주하러 오시는 분들이 '내가 뭐를 해줘야 하지'하는 세션 마인드로 연주를 하다가 점점 '뭘 같이 어떻게 하지'로 바뀌었어요.

 

: 한번은 시간이 없어 온종일 열 시간 넘게 열 곡 정도를 녹음했는데 굉장히 혹사하는데도 너무 좋대요. 악보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와서 계속 만들어 나가니까요. 앨범 나오면서 회사에서 연주자들에게 소감문을 받아서 보여 줬는데 그걸 보고 마음이 참 좋았어요. 그런 마음들이 앨범에 다 묻어있겠죠.


작업 과정 자체가 워낙 재밌고 좋았던 것 같다?

 

: 저희가 가끔 공연하면 같이 작업한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서울시향에 있는 '임가진'이라는 친구도 자기 일 끝나자마자 달려오겠대요. '윤석철'이라는 친구도 함께 공연하면서 무언가 말로 하긴 힘들지만 울컥하는 게 몇 번 있었대요. 영도 형도 '야 우리 공연 언제 하냐' 이러고요.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면서 방백이 우리 둘의 합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요.

 

: 형도 저도 음악을 오래 했긴 하지만 악사들끼리 이렇게 모여 작업을 하는 게 음악의 원형이었을 텐데 싶어요. 와 이런 경험을 내가 맛보는구나 싶어요.<너의 손> 작업하면서 느끼는 게 많았어요.

 

앨범을 듣는데 특히 백현진 씨가 코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마치 라이브를 듣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보컬 녹음은 원테이크로 이루어졌나?

 

: 나이 먹어서 호흡이 불안해요. (일동 웃음) 저는 보통 그렇게 녹음해요. 라이브 하는 것처럼 슥 불렀어요.

 

: 어떤 분들은 노래를 저렇게 해도 되나 할 거예요. 그래도 저는 그게 좋아요. 저희와 신석철, 서영도 넷이서 기본 틀을 만들면서 녹음을 했거든요. 이걸 가이드라고 하잖아요. 근데 나중에 보면 그 에너지와 느낌이 너무 좋은 거예요. 실제 녹음 때는 이걸 재현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리고요.

 

: 그래서 이번에 다시 발매되면서 보컬을 가이드 버전으로 교체한 곡이 하나 있어요. 하지만 그게 뭔지는 비밀입니다. (웃음)


다시 들으며 찾아봐야겠다. 수록곡 제목들이 모두 '두 자'다. 일부러 두 글자로 지은 건가?

 

: 제목을 짓다 보니 우연히 몇 곡이 두 자씩 나오기에 '에이 그냥 이번에는 다 두 자씩 하자' 그렇게 되었어요.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언제부턴가 제목도 그렇게 안 중요하게 되더라고요. 옛날에 '어어부프로젝트' 때는 제목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몇 개월 걸리고 그랬는데.

 

'아송'을 보면서 이거 일부러 글자 수를 맞춘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웃음)

 

: '아송'은 형이 A 코드라고 해서 'A Song'이었는데 결국 나중에 코드가 바뀌었어요. 근데 형이 'A Song'이라고 보냈는데 이게 '아송'이라고 읽혔어요. 아송, 이 발음이 예뻐서 형한테 나 아(我)에 소나무 송(松), 아님 두려울 송(悚)을 해서 '나의 소나무', '나의 두려움' 이것도 재밌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아송'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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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배치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어떤 스토리가 있는 건가?

 

: 텍스트에 많이 집중해서 배치한 것은 아니고요. 사운드를 이렇게 하면 무리가 없으려나 하면서 쭉 이었어요.

 

: 저도 나중에 보니까 흐름이 말이 되긴 한 것 같아요. (웃음) 들으시는 분들이 각자 스토리를 가지고 해석을 하시는데 말이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앨범 커버 뒷면에 'LOVE'라고 적혀있다. 앨범의 주제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을까?

 

: 친구가 포도를 다 먹고 가지를 갖고 'BYE'를 써놓았어서 저도 이것저것 만들며 놀다가 'LOVE'를 만들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어요. 'LOVE'는 쉬운 낱말이고 좋은 단어니 뒷면에 쓰면 어떨까 해서 넣게 됐어요.

 

: 앨범의 주제를 생각해보면 결국 세상에 대한 얘기인 것 같아요. 살고 있는 이 시점의 우리 얘기고요.

 

: 그죠. 결국 인간에 대한 얘기죠

 

앨범을 만들면서 두 사람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3년 넘게 했다고 하는데, 분명 방백의 음악이나 가사를 들으면 예술의 본질적인 자세, 근본적인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 요즘은 음악이나 작업 이야기를 할 때 점점 '태도'에 대한 이야기들이 빠지죠. 그런 것들이 올드하다고 치부하고. 그런데 정말 그럼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스타일? 웃기지들 말라고 해요. 그럼 뭐에요. 장르에요? 몇 년 전 기준으로 하면 런던에서 유행하는 덥스텝이에요?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계속 잔가지들을 쳐나가다 보면 뭐가 남을지를 생각해봐야 하죠. 저희의 지금 수준에선 '마음'이나 '태도' 이런 낱말들을 쓰게 되는데요. 누군가는 정말 싫어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인사동에서 막걸리 마시면서 하는 소리를 왜 저렇게 하고 있어' 하겠지만 미안하지만 정말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군요' 하는 말처럼 평범하지만 꼭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 저도 할 얘기가 딱 그거에요 기본인 것. 어떤 면에서 음악에 태도와 마음이 없이는 다 껍데기라고밖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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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그렇고 이전 인터뷰들에 음악을 '물건'이라고 표현하는데, 이유가 있나?

 

: 언제부턴가 그냥 작업하는 것들을 일이라고 표현하고 사물, 물건이라고 하는 게 편해요. 그러니까 아마 '작업을 한다', '이 작품은' 이런 말들이 다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거겠죠. 그렇다고 어르신들이 '이 녀석 이거 물건이네' 그런 의미는 아니고. (웃음) 저는 대중문화라는 건 공기처럼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막 갖다 쓰면 되는 거죠. 사람들이 슬플 때 갖다 쓰고, 기쁠 때 갖다 쓰고, 아님 멍 때릴 때 갖다 쓰고요.

 

이즘 독자분들께 질문을 받았는데, 방준석씨 건강이 괜찮으신지 여쭤보는 분이 계셨다.

 

: 정말 고마운 분이시네요. 건강 얘기가 나온 게 제가 암 진단을 받았었거든요. 이제 3월이 되면 만 4년이 되는데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암이란 제게 큰 신호였어요. '변신'이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암은 제 인생에서 '변할래 죽을래' '어떻게 변할래'하는 '변신'이라는 화두를 던졌어요. 지금은 편안해요. 방향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건강한 것 같아요. 그분에게 잘 있다고 전해주세요. (웃음)

 

계속 이렇게 '방백'으로 활동을 하는 건가? 방준석씨는 영화 음악 작업을 하고 있고, 백현진씨는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다.

 

: 둘 다 바쁘긴 하지만 방백 활동은 저희가 움직일 수 있는 만큼은 움직일 것 같아요.

 

: 바람이 있다면, 방백으로 가능한 공연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건 정말 '너의 손'에 달린 거예요. '너의 손'에 안 달린 것은 형이랑 저랑 클럽 가서 둘이 하는 거죠. 이건 '나의 손'에 달린 건데, 신석철 씨부터 윤석철, 서영도, 임가진, 김오키 등이 붙으려면 이건 진짜 '너의 손'에 달리게 되죠.

 

: 공연이든 음반이든 어떤 경험을 같이한다는 것이 참 중요하잖아요. 방백 1집을 만들면서 재밌었던 경험을 했어요. 그게 어떤 식의 기운, 에너지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인터뷰 : 김반야, 정민재, 홍은솔
정리: 김반야, 정민재
사진 : 이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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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엄마는 꿈이 뭐야?”로 시작된 세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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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다인. 19살. 친구들은 이제 고3이 됐다. 하지만 그는 아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삶의 정체가 궁금해 엄마에게 던진 질문 “엄마는 꿈이 뭐야?”로 시작된 세계여행 덕분이다. 엄마는 그가 직접 세상을 겪으며 공들여 생각할 시간을 갖길 바랐다.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냈으면 했다. 고민은 짧았고 결심은 빨랐다. 여행은 곧 시작됐다. 과감한 좌충우돌 여행이었다. 이 도전적인 선택에 대해 엄마 박민정은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한 번도 공들여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인생의 가장 큰 화두를 진지하게 시간 들여 오랫동안 고민해보지 못한 거죠. 그 정도 시간을 들일 거면 세상을 보면서 생각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세계 여행을 생각한 거니까요.”

 

딸의 나이 17살에 떠나 그렇게 2년. 지금 변다인은 걱정이 많다면서도 웃는다. 불안할 법도 한데 표정이 해맑다. “지금도 걱정은 많지만 해보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요. 여행에서 많은 걸 배운 것처럼 일상에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라는 말이 무척 성숙하다. 여행은, 딸과 엄마, 모두를 성장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여행은 ‘잠깐 휴식’이 아니라 ‘치열한 공부’ 쪽에 더 가까웠던 것. 그나저나 궁금하다. 변다인은 꿈을 찾았을까? 사실 아빠는 꿈을 찾지 못해도 전혀 상관없다고, 못 찾을 가능성이 100배는 더 크다고, 단지 고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행을 걱정하는 딸에게 말했었다. 변다인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녹음기를 켜고 꿈에 대해 묻고 다녔었다. 그러니 꿈을 찾았는가 하는 질문은 어쩌면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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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다인

 

 

3천만 원 대출을 받아서 시작한 갑작스런 여행

 

갑자기 떠난 여행인 만큼 일정을 소화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순간의 감정을 잘 담아냈어요. 기록은 어떻게 했나요?

 

변다인: 일기를 썼죠. 되게 힘들었어요.(웃음) 아침에 일어나서 밥 차려 먹고, 나가서 밤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 돌아다니다가 숙소 들어와 씻고, 밥을 또 해먹고, 그렇게 여행을 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일기까지 쓰려면 진짜 힘들었어요. 나갔다 오면 밤 9시 정도 됐고요. 씻고 정리하면 더 늦으니까 일기 쓰기가 힘들었죠.

 

박민정: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다인이가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는 다 녹음을 해야 해서 기록은 일기를 쓰는 것으로 했죠. 일기까지 쓰고 나면 12시 전에는 자기가 힘들었어요.

 

여행지에서 밥을 해먹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박민정: 밥값이 저렴한 곳은 사먹으면 되니까 그 부분이 해결되면 좋았을 텐데 사먹을 만큼 저렴한 곳이 많이 없더라고요. 매 끼 사먹을 여유는 없었으니까요. 여행하면서 먹는 걸 대충 해결했어요. 아침도 못 챙겨 먹을 때가 있었는데 점심도 거의 대충 지나갔으니 두 끼 이상을 거의 못 먹었죠.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웃음) 갑자기 여행을 간 거라 저희는 경비가 문제였어요. 3천만 원 대출을 받아서 시작한 거거든요. 가기가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고민하면 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무조건 질러보자고 해서 간 거예요.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평범한 가정에서 그만한 돈을 쌓아놓고 살진 않잖아요. 그렇게 간 거라서 식비를 많이 아껴야 했어요. 

 

변다인: 배고플 때 밥 먹고 싶은데 엄마가 밥을 안 사줘서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보통 해먹었는데 그게 제일 힘들더라고요. 저는 평소에 하루 세 끼 꼭 챙겨먹고 간식까지 먹고 그랬었거든요. 일단 여행 나가는 첫날 엄마가 “먹는 건 아예 생각도 하지 마” 하는 거예요. 먹는 여행이 아니라면서요. 근데 정말 이렇게까지 안 먹을 줄 몰랐어요. 

 

다인 씨의 질문, ‘엄마는 꿈이 뭐야?’에서 시작된 충동적 여행이었잖아요. 이 여행을 책으로 담겠다는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나요?

 

박민정: 일단은 일기는 계속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책이 나오든 안 나오든 간 것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 뭔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책이 출간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책을 위해서 여행을 한 건 아니었어요. 다만 기록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니까 할 수 있는 건 하자고 생각한 거죠.

 

보통은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고 떠나는데, 세계 여행을 이렇게 떠났다는 게 참 대단해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을 텐데요.

 

변다인: 여행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니까 이런 여행을 한 것만으로도 정말 좋았고, 모든 게 다 새로웠어요. 처음에 러시아 갔을 때도 건물들만 봐도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계속 만져보고 그랬거든요. 딱히 장점이라고 꼽을 게 없이 다 정말 좋았고요. 워낙 준비 없이 떠났기 때문에 그런 게 힘들었죠. 긴 여행을 위해서는 체력도 길러야 한다는데 제가 정말 체력이 없거든요.(웃음) 그런 대비를 못 했던 게 아쉽죠. 사실 여행에서 힘든 과정이 많았어요. 배를 놓치거나 위험한 도시에 밤에 떨어지는, 문제라 생각할 수 있는 상황들이 많았는데요. 엄마가 추진력 있게 하기도 했고, 저도 헤치고 나가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좀 생겼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 문제들이 있어서 여행이 재미있기도 했어요.

 

박민정: 제 경우 어떤 결정을 오래 끌면 하지 못하거든요. 뭐든 과감하게 하려고 하고, 결정은 하루 이상 끌지 않아요. 일단 결정한 건 다른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여행하면서 느낀 게 다인이는 신입 사원이고 저는 사장 같다는 거였는데요.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이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잘 가르쳐서 사회에 내보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여행을 단순히 놀다 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저는 일단 힘든 걸 많이 겪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예기치 않은 상황들에 대처하는 일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그것을 겪으면서 자기 수정을 많이 하게 될 테니까요. 그건 우리 둘 다에게 큰 장점이었다고 생각해요. 단점이라면 시행착오 때문에 돈을 허투루 쓴 경우가 많았다는 거예요. 헛돈 썼다는 것, 실수가 많았다는 것이 아쉽긴 해요.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그건 아마 준비를 했어도 비슷했을 것 같아요.

 

떠나기로 결심하고 얼마 후에 여행을 시작한 거예요?

 

박민정: 다인이가 학기 중에 그 질문을 한 거라 바로 떠날 순 없었고요. 한 4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하지만 그때도 다른 일이 많아서 여행에 대해 알아볼 상황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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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의례 같은 여행

 

각 나라의 시작 부분에 ‘소소한 팁’을 적어뒀어요. 그 부분이 아주 중요한 장면이라 생각했는데요. 거기 적은 팁의 대부분은 실수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이었거든요. 많은 배움이 실수를 통해서 일어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박민정: 다인이를 정말 많이 힘들게 해서 그걸 통과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 여행이 통과의례 같은 느낌도 있는 거죠. 요즘은 사실 배고플 일도 별로 없고, 사고 싶은데 못 사는 일도 많지 않고, 뭔가 좀 참을 일이 없잖아요. 참아 보고, 고생하고 싶었던 거예요. 또 여행하며 느꼈던 건 많이 알고 준비를 하면 여행이 조용해진다는 거였어요. 사건 사고가 일어날 일이 없더라고요.

 

변다인: 페루 마추픽추를 갈 때 사진을 많이 보고 갔어요. 워낙 유명하니까요. 정보도 많이 찾아보고 갔는데 막상 좀 실망스러웠어요. 많이 알고 가니까 진짜 그곳의 생생한 느낌이 줄어드는 것 같았어요. 이후로는 어딜 가도 정보를 많이 갖지 않고 찾아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놓치는 부분도 많지만요.

 

예측하지 못한 것에서 일어나는 생생함은 또 여행의 묘미기도 하겠죠.

 

박민정: 처음엔 정보도 좀 찾고 했어요. 어쨌든 돈을 들여 평생 한 번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하는데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엔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하다 보니 초보인 저희가 고수처럼 여행할 수는 없더라고요.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며 다녔어요. 같은 곳을 갔을 때 저희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의 방식과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어요. 저희만의 방식을 찾아내려고 노력한 거죠. 특히 다인이는 이게 정말 시작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성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먹는 건 포기했지만 미술관이나 박물관, 이런 다양한 것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부분은 아끼지 않고 쓴다는 생각이었고요. 그런 구분을 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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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다인

 

세계 곳곳을 다녀왔는데요. 두 번째로 다시 간다면 어디를 꼽을까요? 그건 아마 가장 좋았던 곳이기도 하고, 아쉬웠던 곳이기도 할 것 같아요.

 

변다인: 러시아요. 일단 제일 처음 간 곳이어서 가장 인상 깊었고요. 모스크바랑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만 갔으니까 다음엔 주변의 공국들도 가보고 싶어요. 엄마는 아프리카를 다시 가보고 싶어할 거예요. 아프리카 전체를 다 돌기로 했었는데 제가 겁이 나서 몇 군데만 돌았거든요. 그런데 그곳도 너무 좋았거든요. 다른 곳도 가보고 싶어요. 페루나 멕시코, 볼리비아 같은 곳 중 원주민들이 사는 데를 집중적으로 여행하고 싶기도 해요. 관광지만 다녔는데 다시 간다면 원주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가보고 싶어요.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한달 씩 길게 잡고 있었거든요. 소도시에 오래 있으면서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그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요. 그렇게 있으면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잖아요.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생각할 시간도 많아지고요.

 

박민정: 남미가 좀 아쉬웠어요. 유럽, 남미 다니면서 제일 좋았던 곳이 볼리비아, 페루였거든요. 그래서 더 길게 머물며 있고 싶어요. 러시아도 그렇고요. 다음에 어떤 여행을 간다면 더 길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작은 도시가 좋았는데 사람들이 덜 바쁘니까 저희에게 더 관심을 보여줬거든요. 그래서 작은 도시 위주로 오래 있어보고 싶어요. 큰 도시에 보고 배울 게 많다면 작은 도시는 우리가 녹아들기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여행의 계기가 꿈에 대한 질문이었잖아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계속 인터뷰 했다고 했는데 다인 씨가 찾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어요? 원하는 걸 찾았나요? 

 

변다인: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정말 뚜렷한 게 없었어요. 미래를 생각하면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이었고요. 막연한 생각들만 했었는데 한두 살 먹으면서 뭘 하고 싶은지 제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거든요. 그냥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고, 학교에 공부하는 게 좋고 그래서 딱히 꿈이란 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는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하는데 엄마가 여행을 떠나자고 하니까 일단 간 거예요. 글이나 그림 보는 걸 좋아하니까 여행 가면 그런 것도 보고,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꿈을 물어보면 저도 조금 아이디어를 얻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시야를 넓힐 수도 있고요.

 

하고 싶은 걸 찾은 것 같긴 해요. 여행을 가서 꿈을 찾았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고요. 여행을 가서 생각할 시간을 가졌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구나 하고 생각을 정리하게 해준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동화책 읽는 걸 좋아해서 동화작가를 해보면 어떨까 막연히 생각은 했었거든요. 지금은 동화작가가 되고 싶어요. 언제 바뀔지는 또 모르겠지만요.(웃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여행 더 다니면서 더 배우고 싶어요.

 

박민정: 꿈에 관한 인터뷰가 좋았던 건 각 나라의 사람들의 삶이 보인다는 거였어요. 꿈에 대해 얘기하면 왜 그 꿈을 못 이뤘는지도 알게 되고, 꿈을 꾸고 찾는 모든 과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돼요. 여행의 초점은 그것이었으니까요. 확실한 성장의 동력은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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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다인

 

 

여행으로 변화한 것들

 

친구들은 이제 고3이잖아요. 잠시 다른 길을 다녀온 기분은 어떨까요?

 

변다인: 저는 되게 평범해요. 여행을 가서 좋았고, 많은 걸 봤고, 정말 행복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쨌든 다시 일상이거든요. 지금 이 일상도 좋아요.

 

박민정: 가기 전과 후, 뭐가 변했냐고 물어본다면 일상은 변한 게 없어요. 일상은 같아요.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얼마 전 인사동을 갔는데 다인이가 조계사 대웅전을 보면서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거예요. 그게 변화 같아요. 그런 데 관심이 없었고, 여행도 안 좋아했는데 말이에요. 보는 눈이 달라진 건 확실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싸우는 장면이 정말 많이 나오거든요. 그 과정에서 관계도 조금 달라졌을 것 같아요.

 

박민정: 저희는 원래 가족이 친해요. 뭐든 얘기를 잘하고요. 엄마 아빠를 되게 좋아하는 아인데 그래도 싸워요. 어쩔 수 없잖아요. 안 싸울 수는 없어요. 그런데 싸우면 정말 좋은 걸 봐도 기분이 너무 나빠서 그 좋은 게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걸 몇 번 겪고 나니까 좀 달라져야겠더라고요. 전 또 화가 나면 밥을 못 먹거든요. 한 번은 멕시코에서 정말 오랜만에 비싼 음식을 먹으러 갔는데요. 별 것 아닌 걸로 싸우고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못 먹었어요.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조금만 시간을 두면 괜찮다는 걸 알았어요. 서로 기분이 나쁘면 말을 하지 않기로 했죠. 4개월쯤 되면서부터는 점점 소모적인 싸움을 줄여가기는 했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 방법이 통하던가요?

 

변다인: 돌아오자마자는 사실 많이 싸웠어요.(웃음) 아빠한테 하소연하면서 말이에요. 투닥투닥 싸우기도 했는데 어쨌든 여행하면서 지켜왔던 게 있으니까 다시 화해가 됐던 것 같아요.

 

박민정: 다인이는 이렇게 얘기하는데요.(웃음) 부모 입장에서는 어쨌든 시간과 돈을 들여 남들보다 특별한 경험을 시켜준 거잖아요. 어쩔 수 없이 기대하는 게 있어요. 집에 돌아와서 다인이에게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길 바랐어요. 그런 욕심을 부릴 만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니까 화가 많이 나더라고요. 다인이가 제 기대만큼은 못하는 거예요. 그게 너무 저를 속상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다인이가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이런 걸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사실 저도 제 내부는 변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잖아요. 다인이도 그랬을 거예요. 아침에 파자마 입고 뒹굴거리고 게으른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안 변한 건 아니잖아요. 생활과 변화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떠나기 전에 아빠가 다인이에게 꿈을 못 찾아도 괜찮다고 얘기했는데요. 그런데 저는 노력하고, 시간을 할애했다고 뭔가를 보상받으려 했던 거죠. 그건 또 아닌 것 같더라고요. 다인이와 저의 관계는 단순해요. 제가 바뀌면 다인이가 바뀌어요. 그냥 여행 때 한 것처럼 다인이가 잘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하는 대로 지켜보니까 다르더라고요. 다인이의 좋은 점을 제 욕심 때문에 보지 못 했던 것도 많더라고요.

 

제목의 화자가 다인 씨잖아요. 책을 읽기 전에 가지는 기대도 다인 씨의 성장에 관한 내용일 거고요. 그런데 그 속에서 엄마도 성장을 했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박민정: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식은 늘 불안해요. 믿음을 보여주지 않죠. 그런데 여행지에서의 다인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쨌든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확실한 건 제가 욕심을 낼수록 다인이에게 화가 난다는 거예요. 그 욕심이 되게 무섭단 생각이 들거든요.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떠났을 때 했던 가장 큰 생각은 네 스스로 꿈을 찾아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학교와 집을 왔다 갔다 하면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까요. 일단은 시간을 주고 싶었는데 돌이켜보니 우리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한 번도 공들여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인생의 가장 큰 화두를 진지하게 시간 들여 오랫동안 고민해보지 못한 거죠. 그 정도 시간을 들일 거면 세상을 보면서 생각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세계 여행을 생각한 거니까요. 일상의 모습은 같지만 그 안에는 다른 아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아이를 믿어보는 거죠. 모든 사람에게 한 부분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에 한 여행이었네요.

 

박민정: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스스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또 여행할 생각도 분명히 있겠죠?

 

변다인: 엄마는 지금도 얘기하는 게, 나중에 대학교 가고 해도 또 같이 여행 가자고 해요. 저도 그렇게 가고 싶어요.

 

인생의 어떤 순간들에 둘만 가지는 공통의 기억이 있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니까요.

 

박민정: 물려줄 게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물려줄 게 저희의 삶의 가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부자도 아니고요. 그냥 이 가치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박민정: 그럼 정말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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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해보는 것

 

혹시 후회한 순간은 없었나요?

 

변다인: 전 걱정이 정말 많은 애예요. 갔다 오면 고등학교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수업은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됐어요. 여행은 계속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다른 애들은 공부하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걱정은 많지만 해보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요. 여행에서 많은 걸 배운 것처럼 일상에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후회하긴 아직 이른 것 같아요. 아직 모르잖아요. 

 

박민정: 저는 인생을 길게 봐요. 이 1년, 고3, 이렇게 생각 안 하고 그냥 길게 보면 여유가 좀 생기거든요. 그런 식으로 보면 훨씬 현재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실수로 배우는 건 있지만 후회해서 배우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다니면서 나빴던 곳이 거의 없었어요. 훨씬 세상을 인간으로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는데요. 그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다인 씨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에 대해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변다인: 큰 테두리가 변한 것 같아요. 소소한 건 똑같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전에는 시도가 부담스러운 일이었어요.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선택을 하는 걸 좋다고 생각했어요. 온실 속 화초처럼요. 그런데 나가서 부딪쳤잖아요. 해보니까 세상과 부딪치는 일이 중요하고 뭐든지 일단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실패하면 다음에 또 잘하면 되고요. 생각만 했던 것들을 일단 행동으로 옮겨보자, 이런 생각을 배우게 됐어요. 자신감이 많이 생겼죠. 이런 말을 다른 분들에게도 하고 싶어요.   

 

서로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박민정: 어떤 일을 하든, 꿈꾸는 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지만 그 길을 가려면 어떤 일이든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장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일의 즐거움도 있지만 단점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것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지 각오해야 한다는 거죠. 편한 게 좋고, 그런 단점을 감수하긴 어렵다고 한다면 그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바라는 건 같이 친구처럼 늙어갔으면 하는 거예요. 성격은 안 맞지만 취향은 잘 맞아서 정말 좋은 친구인 것 같아요.

 

변다인: 여행하면서 엄마의 깊은 속내를 알게 되고 감동한 일이 많았거든요. 진짜 우리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요. 그런 엄마가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가 앞으로도 엄마의 생각을 더 많이 얘기해주고 대화를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여행에서 했던 것처럼 일상에서도 그런 대화를 많이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엄마가 변하고 있으니까 저도 엄마한테 맞춰서 변하고 있어요. 엄마한테 더 바라는 건 많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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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떠나길 잘했어박민정,변다인 공저 | 마음의숲
이제 막 청춘이 시작되는 감수성 풍부한 17살 딸과 습관처럼 살지 않길 바라는 청춘이 끝나가는 41살 엄마. 모녀가 같지만 다른 시선으로 그려가는 이 여행기는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 같다. 일 년 동안 좌충우돌 티격태격 세계여행을 하며 꿈을 찾고 꿈을 이룬다는 ‘꿈’을 주제로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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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우 “새로운 가게를 여는 이유는 ‘결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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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우식당’은 생각할수록 묘한 공간이다. 하나뿐인 테이블에 메뉴는 매일 바뀐다. 아무리 소문난 맛집이라도 ‘합석’은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기꺼이 곁을 내준다. 항상 같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장진우식당’은 단순히 맛과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예측 불허의 순간이 안겨주는 설렘이 있다. 오늘의 메뉴에 담긴 주인 장진우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와 함께 음식을 나눌 사람들은 누구일까… ‘장진우식당’은 예기치 못한 만남을 준비해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진우식당’으로 간다. 이태원의 한적한 골목길, 주차도 쉽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까다롭지만 굳이 시간을 내어 찾아간다. 그 정성스러운 걸음이 더해져 경리단길은 떠오르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골목을 따라 자리 잡은 장진우의 가게들도 늘어갔다. ‘장진우식당’을 시작으로 ‘그랑블루’, ‘마틸다’, ‘문오리’ 등의 음식점들이 생겨났고, 빵집 ‘프랭크’, 카페와 바로 이루어진 ‘칼로 앤 디에고’, 실내포차 ‘방범포차’까지 문을 열었다. 경리단길은 ‘장진우거리’라는 애칭을 갖게 됐다.

 

‘장진우’라는 세 글자는 경리단길의 동의어이자 성공의 대명사가 된 듯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성공 비결을 궁금해 했고, 일부 사람들은 그가 타고난 금수저쯤 될 거라 넘겨짚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장진우 안에 쌓인 수많은 이야기들에 비하면 배경이니 결과니 하는 것들은 그저 작은 조각일 뿐이다. 『장진우식당』을 들여다보면 그 사실이 더욱 명징해진다.

 

“이 책은 정말 솔직한 일기 같은 거예요. 그냥 식당을 하는 어떤 30대 남자의 일기 같은 거죠” 그의 말은 옳았다. 『장진우식당』에는 거짓 없는 고백이 담겨있었다. 친구들과 음식을 나누던 서재가 ‘장진우식당’으로 변모하게 된 과정과 그 안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들 사이에 머물렀던 이야기, 음식에 대한 단상들, 가게마다 숨어있는 사연들, 개인적인 취향에 이르기까지 장진우를 이루는 순간들과 생각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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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단길이 뜨면서 욕을 좀 먹었죠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거주하셨다고 들었어요. 경리단길이 핫플레이스가 되기 전부터요. 예전에는 평범한 골목길이었는데, 이제는 많이 달라졌죠?

 

그래서 욕을 조금 많이 먹었던 거죠.

 

주민 분들께서 싫어하셨던 건가요?

 

주민들은 욕을 안 해요. 다들 저랑 오래 살았는데 면전에 대고 욕할 게 뭐가 있겠어요. 같이 오랫동안 살았는데. 대개 실질적으로 여기 살지도 않으시는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세요.

 

이 거리가 번잡해지는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신 걸까요?

 

그냥 번잡해지는 게 싫은 사람들도 당연히 있겠죠. 그런데 모든 게 과도기를 겪고 나서 더 좋아지잖아요. 제가 봤을 때 지금은 거리가 되게 조용해요. 그렇게 시끄럽거나 번잡하지 않아요. 처음에 시작했을 때는 조금 시끄러웠죠. 원래 10명이 다니던 거리에 100명이 왔으니까요. 그때 조금 많은 불만을 들었는데, 꾸준하게 지역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고 어르신들이랑 소통하려고 하다 보니까 지금은 완전 좋아하시죠. 그들이 ‘장진우 거리’라고 불러요. 제가 그러는 게 아니고요. 오히려 그 분들은 제가 장진우인지 모르세요. 어제도 부동산에 갔는데 ‘혹시 장진우 거리에 나온 집도 괜찮으세요?’ 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이사 준비 중이세요?

 

이사를 하려고 해요. 계약이 끝나가지고요.

 

이렇게 많은 가게를 운영하시는데, 아직도 반지하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반지하에 너무 오래 살았어요.

 

이제 지상으로 올라오시려고요?(웃음)

 

그게 아니고 직원들이 그 집을 물려 달라고 해서요.

 

집터가 좋다고 생각하나 봐요(웃음).

 

그 집이 좋아요, 그냥. 남산 밑이어서 공기도 좋고, 일단 싸요. (직원들이) 사장님은 자기보다 돈이 많으니까 조금 더 좋은 데 가는 데 경제적으로도 맞다고, 자기들한테 이렇게 좋은 터를 줘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님이 돈을 엄청 많이 벌었을 거라고, 그래서 삶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빚이 늘었죠, 빚이.

 

사업 확장 때문인가요?

 

사업을 확장한 것도 있고, 직원도 많고, 직원들한테 줘야 될 돈도 많죠. 나라에 내야 될 세금도 더 많아졌고요. 그런데 경기는 계속 안 좋아지고… 그렇죠.

 

사람들이 장진우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도 있겠죠?

 

오해하는 것도 있고 욕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죠. 매체에 나와서 욕을 안 먹는다는 게 쉽나요. 아마 아무도 없을 거예요. 포털 사이트 기사 같은 걸 봐도, 몇 억을 기부했다고 해도 그 아래 달린 리플들이 가관이죠. 저에 대한 오해는… 모르겠어요. 저는 너무 많이 나온 것 같아요. ‘계속 나오니까 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죠. 꽤 오래 나왔잖아요.

 

요리를 정식으로 배우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요식업으로 성공하실 수 있었나요?

 

그건 뭐, 백종원 아저씨도 요리를 정식으로 전공하지는 않으셨잖아요.

 

경리단길이 지금처럼 인기를 끌게 된 원인으로 항상 ‘장진우 거리’가 손꼽히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 중에 하나인 게, 제가 가게를 시작했을 때는 여기에 뭐가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리고 초창기에는 가게를 오픈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우리 식당에 모여서 저녁을 먹었어요. 가게를 보고 공사를 하면서 다 친하게 지내고 그랬어요. 그런 점에서 일조는 했지만 저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건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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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에게 주고 싶었던 건 ‘조금은 다른 경험’

 

『장진우식당』을 보면, 직원을 뽑는 기준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그냥 아무나 다 뽑아요. 저희는 누구를 뽑는 기준이 없어요. 무조건 3개월 동안 수습을 해내면 그때 정직원으로 계약을 해요. 옛날에는 진짜 이상한 애들이 많이 있었어요. 처음에 가게를 시작할 때는 (직원들이)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이 골목에 와서 누가 일하려고 했겠어요. 가로수길이나 압구정 같은 좋은 곳에서 유명 셰프 밑에서 일하려고 했죠. 그러니까 그때는 자연스럽게 ‘왜 왔냐’ 이러니까 ‘열두 번 면접을 봤는데 다 떨어져가지고 왔다’ 이런 이야기가 많았어요. 대기업 다니다가 오는 사람도 있고, 되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바보죠. 대기업 그만두고 오면 바보인 거예요. 그리고 면접에 열두 번이나 떨어졌는데 아직도 꿈을 잃지 않는다는 것도 바보인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바보라는 건 그런 거예요. 멍청이들이 온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가장 불안하고 겁먹은 사람 위주로 뽑는다”고 쓰셨어요.

 

그렇죠.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옛날에는 조금 그랬어요. 너무 당당하고 너무 멋진 사람들은 안 뽑았어요.

 

직원들의 처우에도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으로 유명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100명이 넘는 직원이 있겠죠. 그런데 제가 직원들에게 잘 해주지 못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회사가 크는 건 직원이 많아지니까 가능한 거거든요. 굉장히 간단한 경제관념이잖아요. 회사가 커지고 가게가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뽑아도 사람이 오니까 가능한 건데, 그걸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대우가 안 좋으면 왜 여기에 와서 일하겠어요. 저희는 요식업계 최초로 주5일 근무를 시작했어요. 제가 처음에 가게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일주일에 5일 동안 근무하는 데가 없었어요. 하루 8시간 근무하는 데도 없었고요. 그래서 낮에는 영업을 안 했어요. 돈이 없으니까 두 명을 쓸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 식으로 노동법이 정한 것대로 4대 보험 다 들어주고, 수습 기간 때도 4대 보험을 다 들어주는 이상한 회사였죠.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많아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냥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이른바 ‘장진우 사단’이라고 불리는 직원들이 곁을 지키고 있는 건, 근무 조건 때문만은 아니겠죠. “욕을 먹더라도 사장이 욕먹고 사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닐까요?

 

다른 곳이랑 다른 게, 모든 고객들한테 장진우라는 사람이 너무 가까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욕해도 되고 화나면 집어 던져도 되고, 그런 게 맞다고 생각해요. 직원들한테 하는 것보다. 보통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면 누가 사장인지 모르잖아요. 저는 그게 약간 싫었어요. 매니저 불러서 욕이나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알바생들한테 화를 내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조금 가까이 있으니까, 장진우한테는 안 좋은 점도 말을 많이 할 수 있으니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만큼 올 수 있지 않았나 싶고요. 칭찬만 받다 보면 사람이 도태되잖아요. 그런데 매일 욕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만큼 저를 좋아해주고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분들이 더 많기는 하지만, 진짜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되게 많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면서 하는 말이고 그게 정말 진실이면 ‘아, 고쳐나가야겠다’라고 하는데, 한 번도 안 와보고 잘 모르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되게 많죠. (저를 보고) ‘집이 부자였나 보다, 든든한 빽이 누가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국이라는 곳이 작은 아이한테 모든 책임을 묻고 싶어 하는 곳이구나, 라는 걸 많이 느끼죠.

 

이제 장진우라는 이름은 성공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돈이 없었어요. 집안이 좋지가 않아요. 학연, 지연, 이런 게 하나도 없어요. 서울 사람도 아니고 학교도 중퇴했고, 답이 없는 사람이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되니까 답이 있는 사람들이 너무 싫은 거예요. 자기는 돈도 있고 뭐도 있으면서 왜 내가 더 성공했다고 하는 거예요? 최소한 제 목표는 직원들이 잘 돼서 좋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런 마인드로 살았어요. 제가 반지하 집에 살아도 차라리 그걸 오픈하고, 내가 얼마 버는 지도 오픈하고, 직원들한테 돈이 없을 때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이렇게 해야 되잖아요. 이제는 직원들이 독립을 해서 다 성공을 했는데, 그래서 제가 성공한 사람인 것 같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제 밑에서 일하다 나가서 가게를 냈는데 다 잘되잖아요. 그건 진짜 성공한 거죠. 그 친구들이 매일 찾아와서 같이 밥을 먹고, 서로 응원하고, 장난을 치고… 그러면 나름 성공하지 않았나 생각하죠.

 

장진우의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주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나요?

 

‘조금 불편하고, 찾아가야 되고, 주차도 어렵고, 그런데 그렇게 나쁘지 않다’ 이 정도 느낌만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손님들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게 되게 민망했어요. 미안했어요. 그런데 사람들한테 ‘오늘은 조금만 다르고 싶다’는 감정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왜냐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은 너무 똑같이 살거든요. 매일 똑같은 회사에 갔다가, 똑같은 동료에, 똑같은 밥집에, 똑같은 옷에, 똑같은 동네에.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는 조금 불편하고 어려워도 일상에서 여행하듯이 탈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매일 오는 레스토랑보다 여기에 와서 경리단길의 투어를 한다든지 여행을 한다든지, 이런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 거예요? 그 감정을 조금 더 느끼게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게를 크게 안 내는 거예요. 다 작잖아요. 콩알만 한 가게에서 성공해봤자 얼마나 성공하겠어요. 벌어봤자 얼마나 벌겠어요. 그런데도 큰 가게를 열지 않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장진우의 취향 때문에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겠죠.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많지 않아요. 그냥 음악이 흐르나 보다, 조명이 달려있나 보다, 하는 거죠. 그런데 굳이 가치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런 게 좋은 거예요. ‘내가 제일 아끼는 걸로 손님을 맞이해야겠다’는 마인드인 거죠. 비싼 접시를 내놓으면서 ‘식당에서 쓰다가 깨지면 어떡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깨지면 열심히 벌어서 다시 사면 되지’ 하고 생각했어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걸 갖다 놔야 된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걸 알아 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혼자서 되게 신나 하죠. 그 사람하고 친구가 되고요. 그래서 ‘장진우 사단’이 생긴 거예요. 그런 사람들과 동업을 하는 식이 됐고요. ‘와, 이거 멋지다’라고 했을 때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하다 보니까 빨리 빨리 발전할 수 있었죠. 처음에는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사업도 공유를 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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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게를 여는 이유는 ‘결핍’

 

『장진우식당』을 읽다 보면 성공한 사업가치고 셈에 밝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셈에 하나도 안 밝죠. 셈이라는 건 저한테 별로 중요한 가치가 아니에요. 돈 많이 벌어서 뭐하겠어요.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그냥 ‘we are the world’, 다들 즐겁고 행복하고 재미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산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판타스틱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오늘 이 맛있는 음식도 먹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계속해서 새로운 사업 분야에 뛰어드시는 이유가 있나요?

 

‘이게 부족하니까 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결핍이죠. ‘이게 없으니까 너무 불편해’ 이런 거예요. 빵집이 없으니까 빵을 사러 매일 다니는 게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그러면 빵집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해서 빵집을 만든 거고요. 빵집이 있는데 커피가 없으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커피숍을 만들어야겠네’ 해서 커피숍을 만들었어요. 매일 파스타를 먹으니까 너무 지겨워서 소줏집을 만든 거고요. 제주도에 제가 좋아하는 음식점이 있는데 매일 갈 수 없으니까 ‘그냥 제주도 음식점을 하나 만들자’ 했던 거예요. 없으니까 만들어 나간 것 같아요.

 

식당을 통해서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으셨습니다. 배우 공유 씨도 그 중 하나고요.

 

공유 형은 제가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멋있어요, 사람이.

 

『장진우식당』에서 함께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도 들려주셨는데요. 굉장히 각별한 사이이신가 봐요.

 

우연히 같이 가게 된 거예요. 저랑 각별해서 간 건 아니고요.

 

두 분은 마이큐(싱어송라이터) 씨를 통해서 만나게 되신 거죠?

 

네. 여행도 셋이 같이 가게 된 건데, 마이큐 생일날 계획하게 됐어요. 그 날 지철이 형(공유)이 마이큐 생일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제가 전화해서 ‘지철이 형, 오늘 마이큐 형 생일이래’ 그래가지고 모였어요. 모여서 밥을 먹다가 마이큐 생일 선물로 독일 행 비행기표를 사서 줬는데, 지철이 형이 ‘그럼 나도 갈래, 이번 촬영 끝나고 바로 갈게’ 그래서 가게 된 거예요.

 

<장진우식당>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배우 공효진 씨는 마이큐 씨 앨범에 피처링을 해주셨더라고요.

 

맞아요. 저희 식당에 오셨는데, 마이큐도 그 날 처음 공효진 씨를 만났어요. 그래서 서로 팬이었다고 이야기하고 피처링 참여해달라고 해서 참여해주셨고, 제가 그 앨범의 사진을 찍었어요. 그때도 공유 형이 있었어요. 네 명이 같이 모여 있었죠.

 

배우 박상원 씨는 “모든 취향을 만들어 준 선생님”이라고 하셨어요.

 

맞아요. 아빠 같은 사람이에요. 서울의 아빠. 그런데 약간 날라리 아빠 같은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받으셨어요?

 

멋있어요. 선생님은 사진도 잘 찍으시고, 그림도 잘 그리시고, 글도 잘 쓰세요. 사람들한테 베푸는 것도 좋아하시고요. 봉사활동도 많이 하시잖아요. 학생들 교육하는 것에도 굉장히 열의가 있으시고요.

 

창업학교 프로젝트는 사회 공헌의 일환으로 하고 계신 건가요?

 

사회 공헌의 일환이기도 하고, 저도 같이 발전하더라고요. 가르치면서 조금 더 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요. 100% 사회 공헌이 처음의 목표였지만 하다 보니까 제가 더 도움을 받는 것 같은 느낌도 들더라고요. 잘 돼서 좋아요.

 

“장진우 회사의 가장 큰 목적은 사회 공헌, 사회 환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살다 보면 모든 것에 항상 가치가 있잖아요. 예전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까?’라고 생각해서 돈을 많이 벌어봤어요. 엄청 많이. 그런데 별로 안 행복하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구조를 짜는 게 행복할까?’ 했는데 그것도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제일 재미있는 건 뭔가를 해서 좋은 영향을 받는 일인 것 같아요. 되게 유기적인 거죠. 뭔가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고용 창출도 되고 지역 발전도 되면서 수익도 높아지는 거예요. 제가 원하는 건 무조건 사회 봉사가 아니에요. 사회 산업이에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이 생각인 거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하다 보니까 일단 즐겁잖아요. 더 큰 명분이 생겨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죠. 똑같은 국밥을 팔아도 ‘이 국밥이 뭔가 나에게 돈을 가져다 줄 거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파는 거랑 ‘사람들이 지치고 힘든 몸을 녹일 수 있고, 저렴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고, 먹고 더 힘을 내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국밥을 만들겠다’라고 하는 거랑 굉장히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 사장의 마인드가 중요하잖아요. 제가 원하는 삶은 소외되고 낮고 힘들고 멍청하고 이런 곳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나의 신념이 다하면 그때 말없이 떠나는 거예요. 그게 제일 제가 하고 싶은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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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를 닮은 음식, 라자냐

 

넓은 인맥의 비결이 무엇인가요? 책에 쓰셨듯이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제가 원래 운동을 했었고 국악을 전공한 음악인으로, 그리고 포토그래퍼로도 살았잖아요. 지금은 셰프이기도 하고요. 일단 남들보다 경험한 일이 네 개가 더 있는 거니까, 그래서 조금 더 넓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죠.

 

『장진우식당』을 이야기하면서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그 중에서도 라자냐는 “식감, 온도, 본질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닮은 음식”이라고 하셨어요.

 

‘라자냐’라고 말만 해도 조금 짠한 느낌이 있어요. 라자냐가 원래 한 번 식혔다가 먹어야 더 맛있거든요. 그게 사람 관계 같더라고요. 사람도 처음에는 되게 뜨거운데 점차 식어 가잖아요. 뜨거운 건 무조건 식을 수밖에 없죠. 계속 끓여주지 않으면. 그런데 라자냐는 한 번 식고 나서 다시 데워 먹었을 때 완벽한 형태와 맛이 있어요. 그리고 사람 관계는 같이 나눴던 시간, 추억, 말들을 잘 쌓아 올려도 식을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라자냐는 겹겹이 쌓아 올린 재료가 식어도 다시 뜨겁게 해서 먹었을 때 오목한 맛이 나는 것 같아요. 둥근 맛이 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라자냐를 되게 좋아해요. 옛날에 ‘장진우식당’에서도 라자냐를 많이 팔아서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정성들여서 많이 만들었어요.

 

식당에서 만난 손님들과 밤늦게까지 음식과 술을 즐기실 때도 있잖아요.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기분이 너무 좋을 때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 순간에는 어떤 요리를 해주세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죠. 술을 많이 먹으면 배가 고프니까요. 일단 그 전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요. 계속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없고 저도 술을 마셨으니까 대단한 요리를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짜파게티를 만들어서 먹을 때가 많아요. 제가 만든 짜파게티가 정말 맛있어요.

 

『장진우식당』에서 실제 레스토랑의 레시피도 공개하셨습니다.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메뉴가 있으세요?

 

책에서 레시피를 공개한 것들이 다 맛있는 메뉴들이에요. 그래서 다 맛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제일 쉬워 보이는 음식부터 만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일 중요한 건 어떤 요리를 만드느냐 보다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만드느냐 하는 거예요. 제 경우에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만들었던 요리가 지금까지 온 거예요. 그 요리들이 ‘장진우식당’을 만들었고요. ‘장진우식당’은 정말 좋아했던 친구들이 놀러 오는 곳이었고 정말 사랑했던 여자가 오는 곳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기대됐던 거죠. 그런 친구를 생각하면서 ‘맛있게 만들어줘야 될 텐데’라는 마음으로 만들면 웬만하면 다 맛있어질 거예요. 그리고 요즘에는 레시피가 너무 잘 정리되어 있잖아요. 책도 많고 인터넷 방송도 많이 하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걸 만들어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요리하시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장진우식당’은 원래 서재였잖아요. 책을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주로 어떤 책을 고르시나요?

 

일단 자기 지침서 같은 건 안 보고요. 시를 되게 좋아하는 데 시는 너무 어렵고, 소설을 좋아하는데 시간을 내기가 약간 힘든 부분이 있어요. 제일 많이 읽는 건 에세이나 소설인 것 같아요. 여행책도 잘 안 보는 스타일이이에요. 여행 가기 전에 먼저 책을 읽기보다 ‘내가 가서 보면 되지 뭐’ 하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이 사람 진짜 재미있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구나’ 싶은 책들이 좋아요.

 

『장진우식당』에서 좋아하는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겨울이면 피천득 아저씨의 시가 좋고 배가 고프면 백석 아저씨가 생각나요. 백석 시인의 시에는 음식이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함경도 음식이요. 그건 저희가 안 먹어봤으니까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리고 뭔가 힘들고 일이 잘 안 될 때는 도종환 시인이 생각나죠. 그 분의 시가 대부분 힘내라는 이야기잖아요.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은 없었다, 어떤 길은 피해갔어야 했다, 그런 글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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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뒤처질 거란 고민은 하지 않아요

 

성공과 관련해서 독특한 시각도 보여주셨어요. “집어치워야 할 것은 선택과 집중”이라고 하셨죠. “잘하는 걸로 돈 벌고 좋아하는 걸로 즐기는 걸 다 해야 성공”이라고요.

 

선택과 집중을 해야 성공한다는 건 옛날 말인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은 사진을 찍는 거예요. 그런데 사진 찍는 것보다 요리하는 게 더 행복하기 때문에 요리를 했어요. 그래서 더 잘 된 거예요. 사진을 찍을 때는 정말 잘 찍는다는 소리만 들었어요. 클라이언트도 많았고요. 그런데 안 행복했어요. 저는 활동적인 사람인데 매일 스튜디오에만 있으니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더 이상 이걸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사진을 계속 찍고 있지만 취미로 찍고 있어요. 정말 좋아하는 요리도 하면서요. 그때는 사진을 잘 찍고 요리를 못 했던 사람이었는데, 좋아하면 잘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선택과 집중만 강조하는 건 별로인 것 같아요. 일단 여러 가지를 해보는 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 더 중요한 건 안정성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식당을 하면서 사진도 찍었어요. ‘식당을 할 거야, 사진은 그만두자’가 아니었어요. 매일 사진을 찍으러 가고 저녁에는 요리를 했어요. 먹고는 살아야 되잖아요.

 

성공하는 식당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인이 앞장 서 있으면 다 성공해요. 국밥집 같은 경우도 주인 아줌마가 직접 하고 주인 아저씨가 계산대에 앉아있는 데는 무조건 성공해요. 그런데 대부분은 가게가 조금 잘 되면 매일 골프만 치러 다니고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가게는 금방 망해요. 프랜차이즈 가게가 왜 잘 안 되냐 하면, 가게에 가면 주인이 없어요. 가맹점주가 있어야 되는데 없어요. 다 직원이 하고 있어요. 주인이 가게에 있으면서 손님들과 소통할 줄 알고 열심히 하면 다 잘 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주인이 제일 머슴 같이 일을 해야 돼요. 저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직원들보다 주인이 무조건 더 많이 일을 해야 돼요. 그러면 성공할 수 있어요. 망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운영하시는 가게들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새롭게 생긴 고민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삶 자체가 너무 많이 노출이 돼 있으니까요. 사람들의 잣대라고 할까요, 그런 게 너무 날카로울 때가 있죠. 저는 약간 엉망진창인 인간인데 자꾸 정직하게 살라고 하고 정의롭게 살라고 하죠. 제가 신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런 게 약간 스트레스이긴 하죠. 그리고 가게가 너무 많아지니까 그만 두고 떠날 수가 없어요. 직원들이 실직자가 되잖아요. 그것도 약간 잘못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떠날 수 있을 때 쉽게 못 떠나니까요. 원래 여행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데 요즘은 짧게 짧게 떠날 수밖에 없어요. 이제는 결정해야 될 일들도 많고 그 규모도 커졌어요. 한 번의 결정으로 옛날에는 10만 원이 날아갔다면 이제는 1000만원 날아갈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규모라는 게 참 무섭구나’ 그런 생각을 하죠.

 

요즘에는 음식점도 유행의 하나로 소비되잖아요. 그렇게 가볍게 소비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는 않으세요?

 

 

그런 건 없어요. 저희 식당 중에 유행에 맞는 레스토랑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상관이 없어요. 파스타는 전 세계적으로 몇 백 년 된 음식이고 전골은 한국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먹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유행이에요. 저희는 아이템이 핫한 데가 없어요. 그냥 이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기 오는 거죠. 그게 그들의 삶이 될 수 있게 노력을 하는 거고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칼로‘에서 위스키 한 잔 정도 먹으면서 좋은 음악 들으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생겨나고 있어요. 그리고 저희 식당은 이제 단골손님 체제로 바뀌고 있어요. 늘 보던 사람들이 거의 매일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 온 친구들이 있고요. 그래서 정말 좋죠. 트렌드에 도태되거나 트렌드 때문에 힘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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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우식당장진우 저 | 8.0(에이트 포인트)
그 식당은 테이블이 하나다. 의자는 여덟 개. 그날의 공기와 내음, 햇살에 따라 매일 달라지는 메뉴. 어디에도 없고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작은 식당은 2011년 이태원 경리단길 주택가 골목에 불을 밝혔다. 책 『장진우식당』은 한 사람의 인생과 우리들의 문화를 바꾼 한 식당의 기록이자, 기억하고 싶은 모든 설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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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현 지휘자 “대중의 입장에서 클래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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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지휘자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없으면 뭔가 문제가 생기니까 앞에 세워 놓았겠거니 짐작할 뿐, 아는 지휘자 이름을 대 보라면 금난새와 정명훈 이후로 막히기 일쑤다. 잘 모르는 세계이자 어렵게 느껴지는 클래식을 대중에게 친절한 클래식으로 만들기 위해 젊은 나이로 열심히 활동 중인 안두현 지휘자를 만났다.

 

안두현 지휘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러시아로 유학길에 올랐다. 차이콥스키 음악원 지휘과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마제스틱 청소년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 신한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 등을 거쳐 현재는 양평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를 맡고 있다. 지휘 외에도 클래식 해설가,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 중이다.

 

인터뷰 진행을 함께한 정은현 대표는 현재 클래식 연주자 매니지먼트사 툴뮤직을 설립, 안두현 지휘자 외에도 넓은 인맥으로 클래식계의 대중화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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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두현 지휘자(왼쪽)와 정은현 툴뮤직 대표(오른쪽)

 

 

지휘를 하기로 결심하다

 

한국에서 지휘자가 되는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처음에 지휘를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요?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을 좋아하긴 했는데, 전공으로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라는 책을 봤어요. 대중적인 책도 아니고 클래식 애호가들이 볼 만한 책이었어요. 게오르그 솔티(1912년 출생,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가 베토벤 교향곡 지휘를 하는데 10년 전 지휘랑 10년 후 지휘의 녹음 본을 비교해 보면 녹음 시간이 다른 거예요. 10년 동안 이 사람의 음악적 변화가 어땠는지를 그 녹음 길이로 설명하는데, 그 순간부터 지휘자가 막연히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휘자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굉장히 인상이 깊게 남았어요. 그 책 보고 지휘자 되어야겠다 결심했어요, 진짜로. 결심한 뒤부터 작곡 레슨을 받았죠.

 

그럼 고등학교는 인문계로 들어가신 거예요?

 

네, 인문고등학교 나왔어요. 지휘과를 들어가려고 했는데 사실 우리나라에 지휘과가 거의 없어요.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시는 분이 제가 음악 하겠다고 하니까 한국에서 배우지 말고 그냥 외국으로 바로 가서 배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시는 거예요. 워낙 지휘과는 자리도 없고 하니까. 막연하게 러시아 음악을 좋아해서, 유학은 러시아 쪽으로 알아보게 됐죠.

 

유학생이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요?

 

그 당시 저도 빨리 외국에 유학 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날씨가 좋아서 창가를 본다고 고개를 들었는데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포즈로 똑같이 앉아서 똑같이 공부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엄해서 졸지도 못하던 수업이었거든요. 색깔있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고, 개성이 존중되는 곳에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바로 차이콥스키 음악대학으로 들어가신 건가요?

 

차이콥스키 음악원은 아예 엄두를 못 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열망하는 학교였지만 제가 지휘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 가서 작곡시험 치고 합창지휘과에 들어갔어요. 솔직히, 크게 많은 걸 배우지는 못해서 이러다 내가 제대로 된 지휘를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년차 됐을 때 등록만 해 놓고 안 나갔어요. 다른 도시에 유명한 교수님들 찾아다니면서 지휘를 배웠어요.

 

그러던 차에 우연하게 블라디미르 심킨이라고, 러시아 모스크바 필하모닉 부지휘자님을 알게 됐어요. 원래 제자를 둬 본 적이 없는 현직 지휘자였는데, 제가 지휘하는 걸 보시고는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모스크바 필하모닉 리허설에 참가해서 볼 수도 있게 해주시고, 그러면서도 레슨비는 한 푼도 안 받으셨어요. 그분한테 많이 배우면서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시험을 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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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한국 클래식 전공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예중, 예고 순으로 밟는 정규 코스들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땠나요?

 

거기서 제가 만난 한국 학생들은 거의 다 말씀하신 예중 예고 코스를 밟는 사람들이었고, 저 같은 사람들은 간혹 몇 명 있었죠. 

 

차이점이 있을까요?

 

좀 다른 거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하는 친구들은 부모님에 의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친구들은 굉장히 잘해요. 하지만 부모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흘러가다 보니 음악을 하게 된 친구들도 많아요. 확실한 건 인문계나 음악이 아닌 계통을 하다 온 친구들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요.

 

같이 다닌 동문 중에는 누가 있나요?

 

피아니스트 임동혁 씨,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씨랑 다녔어요. 동혁이는 2살 어렸는데 열여섯에 대학에 들어가서 저보다 선배였고, 혁주는 학년이 저보다 높긴 했는데 저랑 같이 수업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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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마제스틱 청소년 오케스트라

 

 

모스크바에서의 생활

 

모스크바에서 학교를 다니시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뭔가요?

 

거긴 모든 게 힘든 곳이에요, 정말 열악해요. 모스크바에서 한 번 유학하면 어느 나라를 가도 편할 거예요. 2000년대 중반부터 모스크바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가면서 런던보다 물가가 높은 적도 있었고, 언어도 힘들었는데, 러시아 시험을 치고 일단 학교에 들어가도 외국인들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 러시아어 시험을 봐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어요. 졸업 시험이 『안나 까레리나』를 읽고 그거에 대해서 쓰고 심사위원 앞에서 줄거리를 설명하는 거였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웃음).

 

좋았던 점은요?

 

그거 외에 나머지는 다 좋았어요. 항상 음악이랑 같이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했어요. 학교에 홀이 있는데,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홀이에요. 예술의전당이랑 학교랑 같은 건물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세계적인 연주자들, 오케스트라가 다 거기서 연주를 하는데 학생들은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혜택이 있었어요. 간혹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들어가면, 학교 구조를 아니까 연습실로 들어가는 뒷문으로 들어가 화장실 같은 데 숨어 있어요. 한두 시간 있다가 몰래 공연장으로 들어가고 그랬죠. 낮에는 막는 사람 없으니까 들어가서 리허설 하는 것도 보고요.

 

공연은 보통 얼마나 봤어요?

 

1,2학년 때는 거의 하루에 하나씩 봤어요. 그때 듣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공부가 되었죠. 교내 말고도 기숙사하고 학교 사이에 미술관도 많고 공연장도 많았어요. 러시아에서는 어느 예술가가 한 명 살았다 하면 그 건물이 박물관이 되고, 하우스콘서트나 살롱콘서트를 할 수 있게 피아노가 비치되어 있어요. 길을 걷다가 들어가서 바로 콘서트를 감상하는 거예요. 예술적인 환경이었죠.

 

워낙 학교에 세계적인 교수들이 많았어요, 로제스트벤스키(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1931년 출생, 스톡홀름 필하모니, BBC 교향악단 등 폭넓은 지휘 경력과 발레, 오페라, 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도 학교에 있었어요. 소련 시절 때 러시아 오케스트라를 과시하려고 유럽에 보낼 때 같이 보내는 지휘자가 로제스트벤스키였어요.

 

중국에서 판다 들여오듯이 지휘자를 보냈네요(웃음).

 

그렇죠, 판다네(웃음). 그 시절은 어쩔 수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까 나는 그 정도까지는 못 해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계속 뭔가 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있었어요. 지휘를 어떻게 하면 잘할까, 테크닉을 어떻게 하면 더 늘릴까 이런 생각보다는 왜 작곡가가 이렇게 썼을까 하면서 관련 역사랑 문학도 찾아보는 환경이었어요. 교수님들 자체가 학구적이셔서 구사 언어가 다섯 개에 복싱 선수도 하시고 물리학 박사까지 따신 분도 있고, 환경이 그러다 보니까 지휘도 철학적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많이 했어요.

 

모스크바에는 몇 년 동안 계셨어요?

 

8년 정도 있었는데 중간에 군대를 가서 3년 휴학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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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의 직장

 

군악대에 지원하셨죠?

 

지휘로 가려면 장교가 되어야 하거든요. 그렇게 할 순 없으니까 악기를 배운 뒤 시험을 쳐서 군악대로 들어갔죠. 유포니움 같은 경우에는 전공자가 거의 없어서 작곡과랑 지휘과 사람들이 이 악기로 지원을 많이 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악기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시킬 수 있겠구나 싶어서 뽑힌 것 같아요. 군항제, 군대 축제 같은 거 하면 국군방송에 생방송으로 나갈 때가 있어요. 그럼 저는 중계차 들어가서 카메라 무슨 악기 나옵니다, 몇 번 카메라, 지금 저 악기 비춰 주세요, 이런 거 하고 그랬죠.

 

모스크바에서는 세계에서 유명한 지휘자 다 만나고 다녔는데 군대 와서는 중계하고 있었네요(웃음). 국내에서 음악 하신 적이 없었으니 인맥도 없으셨을 텐데요, 러시아에서 오신 뒤로 어떻게 일을 구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정은현 대표님도 클래식계의 마당발이다 어쩌다 하고 놀리시는데 처음에는 진짜 인맥이 없었어요. 군대에서부터 걱정을 엄청나게 했죠.

 

졸업하고 나서 집에 있는데 친한 군대 후임이 청소년 오케스트라 오디션 공고가 났다고 지원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어딘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넣었어요. 상임지휘자 한 명 뽑는데 지원자가 스무 명이었어요. 최종 면접에 들어갔는데 저 빼고 두 분은 나이도 많으시고 활동도 많이 하셨던 분이었어요. 저는 무조건 이 오케스트라를 최고로 만들겠습니다, 아이디어를 총동원해서 해보겠다고 막 얘기를 했죠. 그게 처음 시작이에요.

 

요새 취직하기 어려운데 한 번만에 됐네요.

 

어머니가 기도를 많이 해주셨어요. 너는 잘 될 거라고 해주셨는데 저는 ‘엄마가 음악에 대해 뭘 알아.’ 하며 불안해했죠(웃음). 이 오케스트라를 최고로 올려놓겠다는 각오로 열정을 많이 쏟았어요. 청소년 오케스트라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마추어 청소년 오케스트라로는 최초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선 오케스트라가 되었고, 처음 뵙는 지휘자들도 마제스틱 얘기하면 다들 아세요.

 

그걸 시작으로 다른 오케스트라도 섭외가 들어왔어요. 오케스트라가 매일 연습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지휘를 여러 개 맡을 수도 있거든요. 작년까지만 해도 제일 많이 했을 때는 여섯 개 하다가 집중하고 싶어서 이번에 몇 개를 놓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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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제스틱 청소년 오케스트라

 

한국에 온 지 한 4년 됐죠. 요새 젊은 지휘자가 많긴 하지만 대중들한테 안두현 지휘자 나이 대의 지휘자가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지휘자가 음악만 잘해서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원들과의 심리전도 해야 하고. 연습할 때는 저랑 다른 페르소나를 바꿔 끼고 가야 해요. 청소년 오케스트라 할 때는 제압을 해야 하니까 소리를 지를 때도 있어요. 프로페셔널 같은 경우에는 호칭은 정중하게 서로 선생님으로 하되 이끌어나가는 처지에서 따끔하게 이야기를 해야죠.

 

단원과의 심리적 싸움도 학교에서 배우나요?

 

정식으로 배우진 않아요. 선생님이 지휘를 직접 시키고 이런 상황이라면 이러면 안 된다는 식으로 예를 드는 게 있긴 해요.

 

지휘가 가르쳐주고 싶어도 가르쳐주기가 모호한 직종의 하나에요. 아바도(클라우디오 아바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 베르디의 작품과 이탈리아 오페라 레퍼토리에 탁월한 지휘자로 평가된다) 가 배웠던 사람이 스와로브스키(한스 스와로브스키, 1899년 출생, 비엔나 오페라 종신감독 역임. 비엔나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 교수를 맡아 주빈 메타와 클라우디오 아바도, 이반 피셔 등 내노라하는 지휘자를 배출했다)인데, 아바도는 그 교수에게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고 얘기를 했어요. 사실 저도 학교를 나와서 지휘를 해보니까 제가 해왔던 걸 싹 바꿔야 하는 순간이 와요. 배운 것과 저랑 안 맞는 순간이 있어요.

 

 

한국에서 지휘를 한다는 것

 

클래식은 어렵다, 아는 사람들만 즐긴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대중화에 있어서 공연만으로는 클래식 대중화를 감내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는 클래식 연주자의 개개 공연은 애호가들 사이에서야 좋지만 대중화에 힘을 미치는 공연은 조성진 쇼팽 콩쿨 우승 같은 폭발력 있는 이슈 정도지, 많은 사람을 포괄하려면 공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클래식을 아는 사람들만의 울타리를 쳐내고 열려있는 사고가 확산이 될 때 대중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그런 생각이 확산되고 있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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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위한, 사람을 위한 음악

 

‘대중을 위한 공연’을 여러 번 진행하셨습니다. 설명과 함께 듣는 클래식이라든지, 그런 공연은 어떠셨나요?

 

제가 봤을 때도 그냥 나와서 말만 하는 해설 공연은 지루하더라고요. 제가 해설했던 것 중에는 <하루키,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나다>라는 공연이 있었는데, 새로운 감각, 젊은 해설을 해보고 싶어요. 저는 영상이랑 사진을 많이 써요. 클래식과 연관되는 영화의 멋진 장면을 같이 보여준다거나, 그러면 사람들의 호응도 좋아지고 하죠. 하지만 보수적인 분들은 이런 시도나 렉처 콘서트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우들도 있죠.

 

그만큼 울타리가 좁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울타리를 넓히려는 이유는 뭘까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저는 자신 있거든요. 클래식은 접하기 어렵지만 정말 특별한, 기쁘고 슬픈 이 미묘한 감정들을 다 표현해 낼 수 있는 음악이에요. 이게 들리는 순간 정말 황홀한데, 많은 사람이 이런 음악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더 많은 사람이 이런 좋은 음악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해요.

 

앞으로 클래식 음악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유명한 인물을 꼽고 싶은데, 그게 안두현 지휘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휘자로서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얼마나 성공적일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음악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라 사람들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추천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입장에서 좋아하는 방식으로 알려줘야 한다는 거죠. 지금 유행하고 트렌드가 되는 건 이용해보고 싶어요. 미디어랑 SNS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고,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미디어파사드처럼 영상을 건물 외벽에 쏴서 음악 표현을 한다든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죠.

 

이제까지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클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베토벤이 200년 훨씬 전에 쓴 걸 연주하고 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연주도 계속 변해요. 베토벤이 처음 교향곡을 작곡했을 때보다 지금은 오케스트라 편성도 더 많아지고 훨씬 감각적이고 세련됐거든요. 그런 변화가 있는 것처럼 클래식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보수적으로 안 좋게 보시는 분들이 꽤 많죠. 일부는 지휘자가 방송에 나오고 해설콘서트 여는 게 딴따라 같다고 싫어하지만 레너드 번스타인은 클래식 지휘자이면서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나오는 노래를 작곡했지만 욕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금난새 선생님의 시도를 높게 평가해요. 한국 클래식 대중화의 가장 큰 일조를 한 분이죠.

 

제 생각으로는 다양한 시도를 안 좋게 보는 건 클래식의 가치가 훼손되기보다는 일종의 우월성 같아요. 우리의 음악은 너희 음악과는 달라, 우린 우월하다는 느낌인 거죠. 클래식이 다른 음악이 보여주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건 사실이지만, 음악이 다를 뿐이지 우월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맡고 계신 양평 필하모닉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죠.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작년에 정식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로 출범했고, 7월에 취임 연주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됐어요. 양평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양평군을 통해 양평문화원이 직접 운영하고 있어요. 군에서 시립교향악단같이 운영하는 오케스트라로는 거의 최초라고 알고 있고, 국가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립 오케스트라인데다 실력 있는 단원들이 모여서 애정이 많고 더 잘 만들어 보고 싶어요.

 

협연자들도 굉장하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협연할 협연자들이 피아니스트 유영욱 선생님,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나오신 김정원 선생님,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 권혁주 씨, 그 외에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협연자분들이 많아요. 3,40대 젊은 나이의 대학 교수님들도 흔쾌히 협연을 허락해주시고 있어요.

 

양평 필하모닉에서 구상하는 시리즈가 있나요?

 

지금 하는 시리즈는 하우스 콘서트가 있는데, 보통 하우스 콘서트 하면 피아노 독주나 트리오 정도지만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우스 콘서트 규모로 하고 있어요. 170여 명 들어가는 공간에서 큰 공연장 가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협주곡 공연을 바로 코앞에서 들려드리는 공연이죠. 양평문화원이 보유한 호송홀에서 진행합니다.

 

팝 피아노 콘서트 시리즈는 지금 구상 중에 있어요. 금년은 양평 필하모닉을 대외적으로 많이 알리는 게 목적이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리즈를 만들어서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 말고 개인적인 올해 계획은 뭔가요?

 

10월에 대구 MBC교향악단과 같이 공연할 예정입니다. 클래식 입문서라고 할 만한 책도 출판을 준비하고 있고요. 진 빠지는 책 말고, 다른 사람들이 했던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출판사도 잡혀서 빠르면 올해 안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휘자님에게 음악이란 뭘까요?

 

<라디오스타> 식으로 대답하면 음악은 인생이에요. 저를 살아있게 하는 친구 같은 존재이자, 제가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거울 같은 존재. 그러면서도 음악이 사람을 넘어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먼저죠. 만약 저한테 가족이 생긴다면 가족을 항상 먼저로 놓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 음악을 하는 건 자기만족이면서 과시거든요. 자신만 원하는 걸 만들고 있으면 그게 자기 만족이지, 그런 중심을 가지고 음악을 해야 결국에는 주변 사람들도 그 음악을 사랑해주는 것 같아요.

 

안두현 지휘자의 그런 인간적인 향기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렇게 마당발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휴머니스트 음악인이자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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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연 “우리 부부는 ‘여전히’ 연애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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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7년 결혼 3년,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연애 중입니다” 책 표지에 적힌 문장에 시선이 머문다. 연애에 대한 우리의 로망이 얼마나 짙은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뒤이어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결혼은 연애의 반대말일까?’ 아마도 듣고 싶은 대답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결혼한 후에도 연애는 끝나지 않아’라는 말.

 

그러나 우리에게는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말이 더 가까운 탓에, 책을 펼치며 애써 기대를 감추기로 한다. 연애하듯 살아가는 부부라는 건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되뇌면서.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결혼은 아직도 연애 중』안에는 여전히 연애중인 부부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는 결혼을 위해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하다 보니 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라고 말한다. “부부라는 이름이 하나 더 생긴 것일 뿐” 결혼을 전후로 관계가 변한 것은 아니라고.

 

『결혼은 아직도 연애 중』의 저자 최지연은 ‘리듬의 달콤쌉싸름한 책방’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5년째 네이버 책 분야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녀는 예스24의 작가 블로그에 연애와 사랑, 결혼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2014년 당시 ‘사랑이 시작되면 방법은 생긴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큰 사랑을 받았던 글들은 『결혼은 아직도 연애 중』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엮였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 사람이 내가 찾던 반쪽이 맞는지 끝없이 질문을 하면서,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부부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과정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그래서 더 깊게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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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옳다고 믿는 사랑이 정답이에요

 

블로그 연재 당시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쪽지나 비공개 덧글로 고민을 털어놓으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어떤 분은 자신의 연애담을 길게 써서 메일을 보내주기도 하셨는데, 그 분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메일을 받고 나서 저도 고민을 했었거든요.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얽혀있으니까 제가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남편한테도 보여주면서 남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답장을 보내드렸죠.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옳다고 믿으면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정답이다”라고 쓰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정답을 찾으려고 하죠. 작가님께 상담을 요청하셨던 분들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마 그 구절은 김혜나 선생님의 책에 나왔을 거예요.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게 정답이라고요. 저도 부모님의 결혼 반대에 부딪히면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정말로 정답을 아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 남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잖아요. 그리고 사실 주변에서 조언을 해주니까 힘든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도 보면 친구들한테 상담 받은 대로 하면 늘 싸움이 나고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친구들에게 상담을 해줘도 결국 자신들이 생각했던 대로 하잖아요.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한다는 게 어렵지만 정답인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는 오래된 연인에 대한 편견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뜨겁지는 않을 거라거나 정 때문에 만나는 걸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질문을 많이 받기는 했죠. ‘아직도 좋아?’ 같은 질문들이요(웃음). 특히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은 신혼이니까 즐거워야 하는데, ‘너희는 연애 오래 했으니까 뭐...’ 그런 반응들도 있었고요. 게다가 저희는 결혼하고 한 달 후에 아이가 생겼거든요. 그럴 때도 ‘연애 오래 했는데 뭐, 괜찮아’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주변 친구들이 다 연애를 오래 해서 그게 더 좋아 보였어요. 연애 기간이 길어졌다고 해서 퇴색되는 것도 아니고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것만의 장점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결혼 후에도 여전히 연애 중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려고 노력하는 거죠, 사실(웃음).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거고요.

 

그렇지만 결혼을 해서 달라진 부분도 있겠죠?

 

저희도 서로 맞춰가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아무리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해도요. 샤워를 마친 후에 수건을 가지고 나올 것이냐, 다음 사람을 위해서 걸어 놓고 나올 것이냐, 이런 사소한 부분부터 부딪히는 게 있긴 하죠. 그런데 어쨌든 이 사람과 평생 살아야 하는 거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면서 지내야 되는 것 같아요. 그 외에도 많은 부분들이 있죠. 각종 경조사에, 돈 관리도 해야 하고... 아이가 태어나니까 아무리 남편이 많이 도와준다고 해도 여자가 책임을 져야 되는 부분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서운하기도 해요. 그런데 말을 잘 안 하죠. 하나 둘 말하기 시작하면 서로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열 번 말할 걸 참았다가 한 번 말하는 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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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아직도 연애 중』을 읽기 전에 속단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저 깨가 쏟아지는 이야기, 읽다 보면 배가 아파지는 이야기’일 거라고요(웃음).

 

그렇게 시작했던 건 아니었어요. 예스24 작가 블로그에 연재할 때 제목이 ‘사랑이 시작되면 방법은 생긴다’였는데, 제가 힘들 때 책에서 보고 굉장히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이었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사랑을 시작하면 방법은 생길 거야’라고 생각을 했죠. 그렇게 연재를 시작했던 거고, 그런 이야기들 위주로 들려주고 싶었어요.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이야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쓴 부분도 전혀 없고요. 독자들의 반응도 공감 간다는 말이 많았던 것 같아요. 부럽다는 이야기는 거의 못 들어봤고요(웃음).

 

남편 분이신 ‘S’가 너무 멋있다는 반응은 없었나요(웃음)?

 

가끔 제 글을 읽은 분들이 '멋진 남자랑 살아서 좋겠다'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바로 이 남자가 바로 어떤 여자에게는 최악이었던, 그래서 버림을 받았던 남자거든요. 마찬가지로 제 남편이 평생 연애하고 살자며 약속해 결혼한 저도 다른 남자에게는 이기적이고 너와 연애한 것이 후회된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최악의 여자였고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최고의 아내 혹은 남편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본인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도 마세요.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그 상대의 모습이 최고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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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인 걸 어떻게 확신하죠?

 

남편 분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둘 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된 건데,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남편은 가장 열렬한 구독자였고요. 그 안에서 제가 하지 못했던 말들을 알아채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 관계에 있어서 윤활유가 되었을 수도 있죠. 사실 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잖아요.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해’라는 말도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그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되면 앞뒤 맥락이 있고 정제되어 있으니까, 상대방이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구나, 내가 그 부분을 몰랐네’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은 제 글을 보면서 저를 이해해 주고, 저는 남편에게 이해 받고, 그런 부분이 있었어요.

 

“사실 난 널 이해하지 못해. 그저 인정하려고 노력할 뿐이지”라는 문장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도 이해 못하는 게 굉장히 많아요(웃음). 그리고 남자는 이해하기 힘든 동물이라서요(웃음).

 

남자에게도 여자가 그런 대상이겠죠(웃음)?

 

네, 그렇겠죠(웃음).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건 진짜 많은데, 어쨌든 같이 살기로 선택했고 사랑하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끌어안아야 되는 것 같아요.

 

인정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아요.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려 해도 가끔씩 화가 날 때가 있지 않나요?

 

그렇죠. 그런데 남자들도 다 아는 것 같아요. 이해하지 못하지만 넘어가주는 게 고맙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본인이 한 번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면 더 많은 걸로 되돌려주더라고요. 물론 연습이 필요하죠. 저도 처음부터 됐던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연애한지 몇 년이 지나고, 그 사람을 조금 알게 되고, 내가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어느 정도 인정해 줘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와 20~30년 동안 다르게 살아온 사람이고 그 생각이 나로 인해 한 번에 바뀌지 않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 같은 게 필요한 것 같아요(웃음).

 

여행을 가면 진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꼭 같이 여행을 떠나보라고 조언하고요. 작가님께서도 여행을 통해서 남편 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셨나요?

 

저희가 처음 여행을 간 곳이 상해였는데, 그때 굉장히 더웠어요. 그리고 상해 날씨가 습하니까 샤워를 하고 나오면 바로 몸이 끈적끈적해지는 상황이었는데, 저희 남편이 더운 걸 정말 못 참거든요. 저 역시도 여행 도중에 길도 잃고 한참 걸어야 돼서 짜증이 났고요. 게다가 남편은 중국어를 할 줄 모르고 저는 조금 할 줄 알아서, 제가 다 해줘야 하니까 짜증을 낼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한 번도 그러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여행 기간 동안 더운 것도 참고 내가 짜증을 내는데도 다 참고 옆에 있어준 것만으로 정말 고마웠어요. 같이 여행을 하다 보면 힘든 순간도 오고 그럴 때 그 사람의 밑바닥을 보게 된다고 하는데, 남편은 진중하게 버텨줬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인 걸 어떻게 확신하죠?”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뭉클했습니다. “내게는 그 사람에 대한 확신보다는 ‘내가 그를 위해 평생 무언가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더 중요했다”고 하셨죠.

 

부모님의 반대를 겪으면서 그 부분을 더 많이 생각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결혼을 했다면 저도 바라기만 했을 것 같은데, 그때 남편이 버텨주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한 거죠. ‘나는 그 이상으로 이 사람한테 더 갚으면서 살아야겠다’, ‘이 사람이 나한테 무엇을 해줄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해야겠다’ 싶었어요. 그 시기가 저를 더 성숙하게 만들기는 했죠.

 

첫 번째 소설 『12월 16일, 그가 돌아왔다』는 남편 분을 위한 선물이었다고요.

 

그때 기자 분들이랑 편집자 분들이 모여서 소설을 만드는 데 참여하게 됐는데요. 로맨스소설을 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소설 작법을 배워본 적도 없고, 제가 읽었던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 쓰다 보니까 경험의 한계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희 둘만 알 수 있는 코드들이 많이 들어가게 되더라고요. 딱히 저희 이야기를 다뤘던 건 아니었는데, 소설을 읽으면 남편이 분명히 알 만한 것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 소설을 쓰면서 치유가 되는 걸 많이 느꼈어요. 저희 사이에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소설 전반에 그게 녹아났고, 남편이 그걸 알더라고요. 제가 출간 전까지 원고를 보여주지 않다가 책이 나온 후에 읽어보라고 했는데, 다 읽고 나서 남편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울더라고요. 그 날 처음으로 남편이 우는 걸 봤어요. 저는 그걸 알아봐준 남편한테 너무 고마웠고 위로를 얻었어요. 저희 둘 사이에는 엄청난 계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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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블로그를 통해 책 이야기를 들려주셨잖아요. 결혼 혹은 사랑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자학의 시』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 만화에는 매일같이 밥상을 뒤엎는 남편이 나와요.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날씨가 덥다고, 도박으로 돈을 다 잃었다고 매일 같이 다른 이유를 대면서 밥상을 엎죠.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아내는 오늘은 내 옷이 더렵혀지지 않게 옆으로 엎었다고, 그래도 과일 사올 돈은 남기고 도박을 했다며 남편을 위해 또 밥상을 차려요.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부죠. 그런데 뒤로 가면 이들 부부의 과거가 나오면서 비로소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요. 사실 아내의 인생은 남편에게 구원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이들에게 밥상 엎기는 애정의 표현이고, 관심이고, 소통의 방식이었어요. 사랑도, 결혼 생활도 그런 것 같아요.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 남들이 바라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둘만의 방식이 통하고, 둘이 행복하면 그게 최고인 거죠.

 

『결혼은 아직도 연애 중』에서도 사랑, 연애, 결혼과 관련된 좋은 구절들을 들려주셨는데요. 특히 결혼에 있어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으셨나요?

 

살림지식총서 500번째 책의 주제가 『결혼』이에요. 이 책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고 공감했던 책인데, 그 안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좋은 결혼이 극히 적은 것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위대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다-몽테뉴" 그러니 내 결혼 생활이 가끔 삐끄덕거려도, 조금 불안정해 보여도, 덜 완벽해 보여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원래 결혼 생활은 어려운 거니까요. 지금 그 정도의 고민, 그 정도의 갈등은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정도면 잘 살고 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최근 블로그에 쓰신 내용 중에는 같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더라고요.

 

확실히 아이를 낳고 나서 흰 머리가 확 늘었어요. 그걸 남편이 뽑아주면서 언제 이렇게 흰 머리가 늘었냐고 하는데, 그때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인상적이었어요. 언제 네가 이렇게 변했니,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도 요즘에 그런 걸 많이 느껴요. 남편이 워낙 운동을 좋아하고 체력이 강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가끔 짠할 때가 있어요. 그 감정을 뭐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뭔가 슬프더라고요.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순간은 언제였나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걸 텐데 시댁과 관련해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죠. 사실 저희 시부모님이 굉장히 좋은 분이시거든요.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친정)엄마가 하실 때랑 시어머니가 하실 때 조금 다르게 들리기도 해요. 어떤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모르지만요. 그리고 명절 때 시댁에 있으면 조금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 말고는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있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

 

책 속에 ‘결혼해서 나쁜 점’을 정리해 놓기도 하셨어요. 그 중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의 영역이 늘어난다는 건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서운했던 것들을 다 말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예전에는 했던 말이라도 하더라도. 같은 공간에 계속 있어야 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연애할 때는 서운했다고 말하고 나서 떨어져서 지내게 되니까 그 동안은 상대방의 변화를 보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대화를 하면 그 사람도 피드백을 줘야 하고, 그 일로 인해서 상대방이 고민하는 과정도 봐야 하는데,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리고 폐쇄된 공간에서 싸움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하고 상대방의 밑바닥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생각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말을 못하는 게 많죠.

 

출산과 양육을 경험하면서 ‘내게도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남편은 채워줄 수 없는 남자친구만의 영역’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생활에서의 힘든 부분이 있거나 불만이 있을 때는 남편한테 이야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너무 힘든 순간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남편한테 하소연해봤자 해결책이 없잖아요. 이 사람도 똑같이 힘든 상황이니까요. 그럴 때는 이런 일들과 전혀 무관한 진짜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무작정 공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 거예요. 남편한테는 이야기해봤자 ‘그럼 이 부분은 내가 더 해줄게, 너는 어떤 부분이 힘드니?’라고 말할 텐데, 사실 그걸 바라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그 사람도 또 힘들어지니까요. 그래서 남편한테는 말을 못하는 거예요. 남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 또 다른 사랑을 갈구한다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힘든 부분들을 털어놓고 공감 받고 싶은 거예요. ‘잘하고 있으니까 괜찮아’라는 말도 듣고 싶고요.

 

“이 책에 담긴 에피소드들이 연애하듯 결혼생활을 꿈꾸는 모든 세상의 연인들에게 조금이라도 공감과 힘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연애하듯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버려야 한다기보다는 노력해야 되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연애도 마찬가지잖아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안 되죠. 게다가 결혼은 생활을 맞춰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내려놔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이상형의 집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이상형의 집은 분명히 다를 거예요. 그걸 내 쪽으로만 맞추려고 하면 매번 싸움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상대에게 맞춰주고 내려놓는 부분들이 있어야 알콩달콩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대부분의 싸움들이 그런 부분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니까요. 저는 두 사람이 노력하면 연애하듯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연애할 때보다 결혼한 지금이 더 좋으세요?

 

이제는 같이 뭔가를 만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연애할 때는 한계가 있잖아요. 법적으로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그런데 이제는 아이도 있고, 둘 사이에 공통의 뭔가가 생기기도 했고, 같이 꿈을 꿀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니까, 저는 지금이 더 좋더라고요.

 

특별히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겠죠. 여자들은 그때가 제일 불안하잖아요. 특히 사랑이나 연애에 관해서는 ‘이 사람이 변하면 어떡하지?’ 혹은 ‘이 사람이 정말 내 짝이 맞나?’라는 질문들을 하잖아요. 그리고 결혼은 인생이 변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심각한 변화가 아니고, 그냥 같이 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눌 남자를 고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런 부분이 서로 맞다면 결혼해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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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아직도 연애 중최지연 저/최광렬 그림 | 라이스메이커
결혼 후에도 연애할 때처럼, 아니 더 연애하는 것처럼 살 수는 없을까? 《결혼은 아직도 연애 중》은 결혼과 연애의 기존 관념을 뒤집게 해주는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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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가 이승욱 “눈맞춤보다 중요한 육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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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책은 많이 봐도 문제, 너무 안 봐도 문제다. 적절하게 보고 부모와 아이에게 맞는 육아 노하우를 선택하는 태도가 현명하다. 정신분석가 이승욱이 근간에 펴낸 『천 일의 눈맞춤』은 ‘0~3세 아이를 위한 마음 육아’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왜 3세까지의 육아에 집중했냐”는 물음에 “태어나서 3년까지, 인간은 정신 구조의 기초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승욱 저자는 20년 동안 정신분석가로 훈련 받고 일하면서, 수많은 내담자를 만나던 중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성장기 때,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겪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부모와 전혀 관계 없는 일들로 고통을 호소했지만, 분석하다 보면 부모에 대한 애증과 원망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대부분 부모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부모를 사랑하되 부모의 ‘욕망’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아이로 키우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육아 핵심은 세 가지다. “따뜻한 응시와 안정적인 수유, 엄마의 품.” 굉장히 평범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책을 읽다 보면 진짜 아이를 위한 육아가 무엇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뉴질랜드에서 정신분석을 전공하고 오클랜드의 정신병전문치료센터에서 정신분석가, 심리치료실장으로 일한 이승욱 저자는 현재 경복궁 옆 서촌에서 ‘닛부타의 숲 정신분석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또 팟캐스트 <이승욱의 공공상담소>를 통해 정신분석과 심리학을 알기 쉽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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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응시에 의해서 조각된다

 

그간 대개 성인의 심리, 정신분석을 다룬 책을 썼는데, 『천 일의 눈맞춤』은 0~3세 자녀를 둔 부모를 위한 육아서다. 육아서를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인간의 발달은 굉장히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20년 동안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많은 내담자를 만나오면서, 그들이 성인이 돼서 겪는 여러 갈등의 연원을 찾아보면 어렸을 때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기초를 형성했다. 사람이 자기 삶의 변화를 꾀하려면, 최초의 경험이 나에게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정확히 자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각한다면 이후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도 다른 관점과 태도로 삶을 운영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도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상담을 하면서 더 절실히 체감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처음부터 잘 경험해나갈 수 있다면 성인이 돼서 조금 더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다.

 

‘마음 육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육체적인 발달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은 감정과 정서에 지배 받는 동물이다. ‘마음 육아’라고 카피를 뽑은 건, 태어나고 몇 년 후 구성되는 인간의 정신의 기초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0세 아이에게는 어떤 감정이 있는지, 부모는 알 수 없다. 더운지 추운지, 배고픈지, 배부른지도 잘 알기 어렵다. 그럴 때, 아이에게 가장 좋은 육아 태도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바로 ‘공감’이다. 어른들도 공감을 항상 원하지 않나? 아이도 마찬가지다.

 

특히 0~3세 육아의 중요성을 지적한 까닭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가장 취약한 시기가 0~3세다. 납득되는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닐 수 있는데, 이유를 모르면 납득할 수 없다. 엄마가 화를 낼 때, 아이는 왜 화를 내는지 모르니까 혼란스럽다. 이를 테면, 아이는 내 몸의 일부로 똥을 자연스럽게 배출했는데, 엄마가 화를 내면 당혹스럽다. 0~3세 때 하는 경험은 모든 게 최초다. 걷고, 말하고, 대소변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때가 3세 전후다. 3세가 지나면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 구별을 할 수 있다. 만 4세부터는 그간 경험했던 일들이 반복된다. 4세부터는 인생에 아버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엄마와 나, 2자 관계였다면 3세 이후에는 아버지와 3자 관계가 된다. 물론 형제가 있는 경우는 4자 관계가 된다. 3세까지는 엄마와의 스킨십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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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하기 위한 세 가지 육아 원칙으로 ‘따뜻한 응시, 안정적인 수유, 엄마의 품’을 꼽았다. 3년간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아이의 자아가 어떤 형태로 형성될지 결정된다고 했다.

 

아이가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기 전까지, 아이와 엄마의 가장 중요한 대화는 ‘쳐다봄’, 바로 응시다. 또 엄마가 아이의 몸을 어떻게 다뤘는지도 굉장히 중요하다. 기저귀를 갈아줄 때, 울 때, 젖을 먹일 때, 엄마가 아이의 몸을 어떻게 다뤘는가는 훗날 아이가 자기 신체 이미지와 자기 존중감을 형성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엄마의 눈길이다. 엄마가 진정한 애정을 담아서 다정하게 따뜻하게 아이를 쳐다보는 시간이 많을수록 아이의 자기인정감도 건강하고 튼튼하게 세워진다. 존재는 응시에 의해서 조각된다. 사실 엄마가 어떠한 신체언어로 아이를 다뤘는지는 성인이 된 아이도, 엄마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경험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기억은 사라져도 경험은 아이의 몸에 저장된다.

 

안정적인 수유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가장 좋지 않은 태도가 ‘일관성이 없는’ 수유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발달심리학 강연을 하고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깜짝 놀랐다. 한국 엄마들이 수유라는 행위에 대해 원칙이 없더라. 어떻게 수유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수유는 아이에게 굉장히 치명적인 행위다. 신생아는 거의 동물 상태다. 가장 원초적인 상태에서 최대 관심사는 ‘생존’이다. 포유류 동물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가? 바로 어미의 젖을 빠는 일이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수유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자기 삶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상태가 안전한가? 불안전한가?를 수유를 통해 감각한다. 감각된 행위는 몸 속에 각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수유 원칙은 일관적이어야 한다. 예측 가능해야 한다.

 

많은 엄마의 수유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아이가 울 때마다 주는 방법, 둘째는 시간 간격에 맞춰서 주는 방법이다.

 

두 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다. 울 때마다 젖을 주면, 아이가 자기 몸의 감각을 느끼고 몸에 대한 예민성을 기를 수 있다. 또 자기의 욕구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학습효과도 있다. 시간 간격에 맞춰 주면 아이의 생체 리듬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몸과 마음에 대한 통제력도 생기고, 양육자 입장에서도 계획적으로 안정적으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 수유 원칙일까?에 대한 답은 둘 다 맞다. 중요한 건, 절대 두 가지 방법을 섞어서 수유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두 방법이 모두 괜찮다고 해서 같이 쓰는 건 비교급으로 더 나쁘다 정도가 아니라 최상급으로 나쁘다.

 

일관성이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 어떤 상황이든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수유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위다. 수유 행위가 이랬다저랬다 일관성이 없으면, 아이는 몸에 불확실성과 불안함, 불신을 새긴다. 이는 성인이 된 뒤에 논리적으로 설득해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가 예측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느껴야, 엄마와 세상을 신뢰하게 된다. 일관성 없는 수유를 제공받은 아이는 부모와 세상만 불신하는 게 아니라 자신까지도 불신할 가능성이 높다.

 

엄마의 품에 대해 묻고 싶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아이가 일찍부터 독립적이면 뿌듯해 한다. 혼자 방에 들어가 잠을 자면, 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포대기 육아’의 장점을 강조했다.

 

11년간 뉴질랜드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심리치료를 하면서 서양 사람들이 독립적인 반면 정신적으로는 공허함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은 가족 관계가 너무 징글징글한데, 서양 사람들은 친밀감이 없어 공허하다. 개인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공허하다. 서양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고 1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아이를 따로 재운다. 요즘은 한국 부모들도 많이 따로 재우는데, 굳이 그래야 할까? 싶다. 진화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은 23개월 정도 엄마 뱃속에 있다가 태어나는 게 적합하다. 태어나자마자 걷지 못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 엄마 뱃속에서 1년을 더 지내면 좋지만, 그러면 엄마는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 완전하지 않은 생명체가 가장 익숙하고 안정적인 환경에 있어야 하는데, 엄마 뱃속과 가장 유사한 품은 엄마의 품이다. 엄마의 목소리, 심장 박동 소리에 아이는 안정감을 느낀다. 옛날 엄마들은 아이를 업고 다녔다. 업고 일하다, 아이가 울면 포대기를 돌려 아이를 달래주고 또 업었다. 물론 많이 피로한 일이지만 엄마와의 유대감, 스킨십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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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하면 덜 불안할 수 있다

 

책에서 아마존 예콰나족의 육아법을 다룬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를 인용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인간이 평생 사용하게 될 정신의 범위는 갓난아이 때 결정되는데, 외로움에 익숙할 경우 아기의 무의식은 외로움의 수준을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해 정신의 작용을 가동한다”고 했다. 저자 역시, 상담을 하면서 같은 예를 많이 봤다고 했다.

 

정신분석은 삶의 초기의 경험과 애착 관계가 어떻게 한 개인의 성격 구조 형성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본인 스스로 자각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는 태어나서 초기에 경험한 첫 세상을 가장 익숙한 상태로 느끼게 된다. 그것이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최초의, 비교할 선례가 없는 경험은 인간의 삶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다. 요즘 많은 상담실을 먹여 살리는 연령이 청소년이라고 한다. 상담실을 찾아오는 이유를 분석해보면, 대개 무기력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무기력에 빠져 부모들이 미치려고 한다. 왜 그럴까? 뿌리를 찾아보면 0~3세 때, 부모와의 관계에서 결핍이 있다.

 

사람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환경적 요인을 따져보다가도 ‘성향, 기질’을 뛰어넘지 못한다고들 한다. 정신분석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사람이 태어나 0~3세 때 발생하는 일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유가 아이의 성격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지 우리는 짐작하지 못했다. 우리가 어떤 현상을 말할 때 가장 쉽게 이야기하는 게 ‘기질’인데, 신체적인 영향도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기질화 시키는 많은 특성이 0~3세에 만들어졌다. 가장 결정적인 영향으로써 엄마의 성격(예, 꼼꼼한 엄마, 덜렁대는 엄마, 무딘 엄마, 예민한 엄마 등)이 아이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양육자 자신의 성격과 무의식적 행동 등이 어떻게 아이에게 전달되는지를 아는 것, 그 자체가 더 어렵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성격 형성에서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들을 그냥 '기질'로 분류해버리는 것이 편하기도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신경을 써서 설명했던 부분들이 이런 것들이다.

 
물론 생리적인 기질(예, 더 튼튼한 아이, 더 잘 먹는 아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아이 등)이 아이의 성격 형성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런 생리적 기질에 대응하는 부모의 성격과 태도가 아이의 성격적 근본(쉽게 기질이라고 단순화시켜버리는)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모성이 저절로 생기는데, 사랑과 함께 두려움도 무척 크다.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공포, 또 영유아의 경우 아이의 마음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다. 책에서 위안을 받은 문장이 있다. “아이가 울었을 때, 우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아이가 계속 불만족한 상태에 있더라도 부모가 그 순간 최선을 다하면 아이는 부모의 그런 태도를 배울 것”이라고 썼다.

 

어른들도 그렇지 않나? 누군가 사려 깊게 다가와 진실한 마음으로 위로를 건네면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고통에서 회복되는 듯한 마음의 에너지를 갖게 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의미는 사후에 주어진다’고 말한다. 어떤 사실적 경험을 했을 때, 그 일에 대한 의미는 경험 이후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막 울 때 부모가 젖을 물리면, 아이는 그냥 울었어도 ‘아, 내가 배가 고팠구나’라고 생각한다. 성인이 돼서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 사람들이 있는데, 연원을 찾아보면 부모의 행위에 영향을 받은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는 의미 없이 울었는데, 부모의 행위 때문에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 속에 기억된 형태로 스트레스를 풀게 된다. 부모가 최선을 다하면, 아이는 당연히 느낀다.

 

육아책의 독자는 대개 엄마다. 아빠들이 육아책을 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저자는 현재 두 아이(대학생, 고등학생)의 아빠다. 혹, 다시 아이들이 어렸을 때로 돌아간다면 아빠로서 어떻게 육아에 참여하고 싶나?

 

첫째 아이를 낳을 때, 아버지가 됐다는 부담감 때문에 너무 책임감을 느낀 나머지 아이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많이 하지 못했다. 아이를 더 많이 안아주고 접촉하고 스킨십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자는 부담감을 느끼면 그 현장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아이들의 살결을 느껴보면 아빠들도 안다. 얼마나 황홀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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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스마트폰 이야기가 빠져 있다. 아이가 12개월이 지나면 엄마들은 스마트폰에 많이 의지한다. 특히 식당이나 차 안에서 스마트폰 없이는 아이를 다루기 어렵다고 한다. 유아들을 위한 동영상 어플도 많이 생기고 있다.

 

0~3세 아이에게는 스마트폰을 줘서 안 된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아예 쓰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미친 짓이다. 절대로 안 했으면 좋겠다. 스마트폰 없이도 잘 살 수 있는데 너무 과용하고 있다. 대체로 만 2세가 지나면 뽀로로 영상을 보여주는 부모들이 많은데, 절대로 보여주면 안 된다.

 

이유는 무엇인가?

 

다 아시지 않나? 스마트폰을 보면 아이들이 그 네모난 기계 안에 사고가 갇힌다. 놀이도 창의적으로 해야 하는데, 다 갖춰진 놀이를 하니 그 작은 틀 안에서만 기능한다. 아주 험하고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놀이라도 아빠 엄마와 같이 규칙을 만들면서 놀이를 하는 게 좋다. 아이가 다 갖춰진 상자 안에 있으면, 엄마 아빠가 아무리 아이의 양성성을 위해 노력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스마트폰은 언급의 가치조차 없다.

 

부모들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로 ‘책 읽어주기’를 꼽았다. 움직이고 싶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앉혀놓고 글자를 짚어가며 책을 읽어주는 건, 아이에게 고문이라고 했다.

 

아이와 교감하며 좋은 자극을 주고 싶다면 책을 읽어주지 말고 들려줘야 한다. 엄마가 책의 이야기를 대략 외우거나 이해한 뒤 아이의 눈을 마주 보며 표정과 손짓을 동원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이의 발달에 훨씬 더 긍정적이다. 또 아이가 엄마의 이야기 중간에 개입하면 환영할 일이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가 자극 받고 반응하는 걸 응원해 줘야 한다.

 

아이가 돌이 지나면 떼가 는다. 배고프지도 않은데 간식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아이도 있다.

 

아이가 배고프지 않은데 뭔가를 달라고 하면, 엄마에 대한 사랑일 수 있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자판기 앞에서 떼를 부리는 아이들이 있다. 뭔지도 모르면서 “이거 먹고 싶다”고 떼쓴다. 옆에 있는 엄마를 보면 전화를 받고 있다. 아이는 화내고 엄마는 혼내고 있다. 아이가 뭔가를 요구할 때, 부모가 그 행위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갈등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 아이는 부모에게 끊임없이 반응을 원하고 자기에게 자극을 주길 원한다. 아이가 뭔가를 두고 떼쓸 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소재일 뿐 주제는 아닌 경우가 많다.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육아 방식은 꽤 고전적이다. 하지만 오랜 육아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할머니 세대의 육아 방식이 장점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0~3세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들이 치유 받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언제부터 상처를 받았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최초의 상처는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다. 제일 먼저 나를 좌절시킨 사람도 엄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는 아이에게 좌절감을 줄 수밖에 없는데, 엄마 또한 어렸을 때 동일한 좌절감을 겪었다. 그 시기를 기억해낼 수는 없겠지만, 아이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기억들이 행위로 드러난다. 엄마 자신의 깊은 좌절이나 부정적인 경험들이 아이를 통해 다시 되돌려질 수 있다. 요즘 엄마들을 보면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불안하다. 이 불안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패막이 될 수 있겠지만, 너무 과도하면 아이에게 많은 걸 좌절시킬 수 있다. 엄마들이 자신의 불안을 잘 자각하면 좋겠다. 자각하면 덜 불안할 수 있다. 또 아이 입장이 돼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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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일의 눈맞춤이승욱 저 | 휴(休)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부모들의 치열한 고민에 답하다! ‘따뜻한 응시, 일관적인 수유, 언제나 품어주기!’ 아기를 바라보고, 수유를 하고, 엄마 품에 안는 일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둔 부모, 아직 부모의 품이 필요한 3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둔 부모에게는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육아 행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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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소장 “한국에서 세금 내는 사람은 다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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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이야기가 연일 뜨겁다. 말은 무성하고, 당장이라도 다른 세상이 올 것처럼 갖가지 추측이 넘친다. 그나저나 ‘내일의 경제’를 이야기한 자리에서 왜 인공지능 이야기를 꺼냈나? 다름 아닌 ‘세대의 경험’을 짚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장년층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자. 전쟁과 가난부터 민주화, 가파른 경제 성장에서 디지털 세상까지, 한 명의 삶 안에 벌어진 일들이 참 놀랍다. 청년층의 안경을 끼면? 국가 부도와 구직난, 정보의 평준화와 인공지능 세상까지, 역시 다채롭다. 그러니 앞으로 얼마나 더 사회가 변화할지 짐작하기조차 힘이 든다. 그런데 가치, 패러다임은 좀처럼 바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199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시기의 가치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바로 경제, 경제, 또 경제다.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은 반복해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내일은 암울하지 않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다”는 것.

 

“삶의 방식은 생각을 조금 바꾸면 훨씬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일과 돈 버는 것과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 이런 것들을 은퇴 후가 아니라 지금부터 균형 있게 가지고 가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삶은 가능하죠. 많이들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지 않으세요?”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미래 세대가 리더십을 갖고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계속 이대로 하향하는 수밖에 없다. 연대와 협력의 가치, 지속 가능한 사회, ‘아들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대전환의 기로에 선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인터뷰가 힌트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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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암울하진 않다

 

2010년대 중반, 청년들은 패자의 줄에 서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빨간 화살표가 아래를 가리키는 ‘아들의 나라’와 파란 화살표가 위를 가리키는 ‘아버지의 나라’, 표지도 눈에 띄고요. 다소 서늘하기까지 해요.

 

지금 젊은 게 문제죠.(웃음) 20년 전에 젊었으면 계속 성장하는 사회에 살았으니까요. 그런 사회기 때문에 갖는 이점이 굉장히 많은 거죠. 그 이점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시각으로 다 설명 가능한 이점들이고요. 지금은 전통적인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암울한 시기죠. 그걸 표현하고자 한 거예요. 하지만 계속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렇게 암울하진 않다는 거예요. 암울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암울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더 재앙적인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암울하지 않도록 사회를 이끄는,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부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민들까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것은 전형적인, 우리가 과거에 많이 따르던 재테크와 자기계발로 대변되는 각자도생의 전략과는 다른 전략이에요. 다른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위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지금과 같은 전략으로 가면 우리는 앞으로 내려가는 사회에 살게 되는 거죠. 사회는 늙고, 고령화는 점점 진행되고, 경제 성장은 과거처럼 빠르게 진행되지 않고, 소득이 높아지는 속도도 빠르지 않고, 자산 가격 즉 우리가 갖고 있는 재산의 시장 가치는 높아지지 않고, 이렇게 되는 거니까요.

 

청년 문제, 사회가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한 담론이 많죠. 다른 전략이라 했는데 확실히 사회가 기로에 서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 담론을 떠나 지금의 현실을 본다면 그렇게 희망하기가 쉽지 않죠.

 

저는 세대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인데요. 베이비붐 이후 세대, 1955년에서 1963년생 이후 세대가 그전 세대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있는 세대죠. 베이비붐 세대는 각자도생의 전략에 굉장히 익숙하고 그걸 사회질서로 잘 만들어서 그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해왔어요. 그렇게 해서 성공한 게 산업화, 경제성장, 그리고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쌍을 이루어서 민주화였죠. 베이비붐 세대의 논리가 다음 세대까지 사실 충실하게 전파가 됐고요.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충실하게 쭉 따라온 게 한국 사회인데요. 이 세대 즉, ‘아버지 세대’는 그럴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밀려나면 진짜로 죽었거든요. 물리적으로 그랬어요. 굶어죽거나 사회적으로 죽거나 하는 절박함이 있는 세대였어요. 대학 진학률도 굉장히 낮았고, 사회는 소수의 엘리트가 교육을 받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끌고 가야 하는 체제였죠. 각자도생의 전략을 체화하고 먹고 사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있는 세대고요. 지금의 40대부터 그게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해서 20대는 훨씬 그런 면이 약해진 것 같아요. 밀려나면 죽는다는 생각은 덜한 것 같거든요. 물론 불안하고, 방황하고, 어려운 일이 많은데요. 그건 그전보다는 훨씬 덜한 거예요. 지금의 불안은 과거의 불안보다 훨씬 덜하다, 따라서 연대의식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의 불안이 과거의 불안보다는 덜하다고요.

 

OECD 조사 결과가 있어요. 10대에서 50대까지 세대를 나눠서 OECD 30여 개 국가 국민들한테 같은 질문을 던졌어요.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만한 친구나 친척이 있는가?’라고요. 한국의 경우 50대 이상은 압도적인 최하위고요. 10대, 20대는 다른 선진국과 거의 비슷했어요. 그래서 저는 주관적인 조건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멤버십 사회(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하고 합의하며 진행되도록 설계하는 사회 운영 원리)’라고 표현했는데요. 그 원리를 중심으로 사회 질서를 바꾸면 괜찮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다음 세대가 빨리 리더십을 갖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죠. 

 

그 부분에서 막차 문 닫기 게임에 비유한 고령자 지배체제, ‘제론토크라시’사회를 분석했어요. 한국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바로 젊은 세대가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한 건데요.

 

이제 의사결정은 미래 세대가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제 생각은 굉장히 단순해요. 각자도생에 익숙할 수밖에 없던 세대가 지금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인간의 역할을 창의적으로 찾아내야 하는데 그런 경험이 없잖아요. 또 자산 가격이 계속 높아지는 사회에 살았으니 자산 소유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전략으로는 이제 만족스럽게 살 수 없거든요. 그런 방식의 일자리 기회, 그런 방식의 소득 기회, 그런 방식의 자산 증식 기회가 줄어드는데 사람은 그대로 있고 경쟁은 더 심해져서 ‘헬조선’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거잖아요. 과감하게 미래 세대, 이것 말고 다른 질서를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대가 의사결정을 하게 하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사회 전체를 위해서 그래요. 연대와 협력의 가치 아래서 재편할 수 있는 세대가 결정권을 가져가는 게 좋죠.

 

그렇지만 공존해야죠.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도 발휘할 수 있는 ‘팔로워십’을 계발해서 미래세대가 의사결정을 하고 나이 든 사람들도 거기에 참여자로서 살 수 있는 그런 체제를 만들어야죠. 그게 안 되고 있는 게 문제예요.

 

이상적으로 들리기도 해요. 그것이 가능할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죠. 젊은 세대의 리더십이라는 방향을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까요?

 

정치 지도자를 젊은 사람 뽑으면 되잖아요. 하다못해 동호회에서 젊은 사람을 대표 시키면 되잖아요. 아파트 동대표, 젊은 사람 시키면 되거든요.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그걸 두려워하는 거예요. 깨뜨려야 돼요. 호칭 문화부터 바꿔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안 될까요? 안 될 것 같으세요? 그냥 내주면 돼요. 예를 들면 정당에서 지금 의사결정권 갖고 있는 분들 있잖아요. 그분들이 결단하면 돼요. 젊은 사람 위주로 공천하겠다고요. 또 유권자들은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 뽑겠다고 결정하고요. 그런 문제죠. 지금 정부 국무회의 이런 데 가면 50대가 완전히 애잖아요. 50대 여성 이런 분이 가면 비서 같은 분위기고요. 그래선 안 되죠.

 

33세의 안철수가 안철수연구소를 세우고, 30대 초반의 기업가들이 줄줄이 등장한 1990년대 풍경을 생각하면 확실히 비교가 되죠. 지금 30대 초반은 아직 사회진출도 하지 않았거나 이제 막 발 딛은 나이거든요. 시작 자체가 점점 늦어지는 거예요.

 

지금 같은 분위기로 가면 어느 조직에 들어가 팀장 정도의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한 50살이 돼야 하고(웃음), 대표가 되려면 70살이 돼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 다 같이 망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겠어요. 머리로는 다 알고 있거든요. 인생 5모작이니 10모작이니 하잖아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새로운 걸 배워서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 다 알고는 있어요. 그런데 두려워서 선택 못하는 거예요. 특히 가장 두려워하는 건 지금의 장년 세대, 베이비붐 세대예요. 놓지 못하고 쥐고 있어요. 놓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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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니까 도와달라?

 

그 세대의 선한 의지로 결정권을 놓고 물러나길 바라고만 있을 순 없을 거예요. 그래서 젊은 세대가 더 나서서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거겠죠.

 

나서서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부분도 사실 많아요. 저는 청년 세대, 특히 20대의 활동하는 분들의 문제점을 한 가지 짚고 싶어요. 우리는 불쌍하니까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자꾸 하거든요. 리더는 그런 이야기하지 않아요. 30대에 한국의 산업, 정치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있죠. 그들이 우리 30대를 대변하겠다고 한 적은 없거든요. 정당에서 청년 비례대표라고 나오는 분들이 청년 이야기하면 안 돼요. 대한노인회부터 찾아가야 합니다. 베이비붐 세대 중 아주 어려운 분들 많거든요. 그런 분들을 어떻게 도울지 이야기하고, 사회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죠.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한국을 주름잡던 벤처기업가들이 우리는 청년을 대상으로 사업하겠다, 이런 얘기 한 거 아니잖아요. 그때 만들었던 바이러스 백신, 전 국민이 다 사용하는 거고, 그때 만든 게임,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이끌고 가는 거고, 그때 만든 포털 사이트 같은 경우 모든 사람이 다 사용하는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 현대사와 경제 발전 맥락을 통해 세대의 차이를 설득력 있게 진단했습니다. 대부분 대학을 나오고, 도시에서 성장했으며, 신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힌 ‘불평등에 민감’한 세대가 지금 청년세대라는 것, 이런 진단 안에서 사회를 보니 좀 더 많은 것들이 해석되더라고요.

 

우리가 잘 인정하지 않는 사실은 지금이 사실 가장 평등 지향적인 때라는 거예요. 아주 역설적인데요. 불평등이 굉장히 커지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비슷해졌어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인터넷을 사용하고요. 전엔 그렇지 않았거든요. TV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었고, 레코드판 살 수 있는 사람만 들었고요. 뮤지컬을 보러 가야지 유튜브로 음악을 들을 수 없었잖아요.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지금은 아주 비슷해졌거든요. 그래서 폭발력이 있는 거죠.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많이 하게 되는 이유는 그런 측면도 있다고 봐요. 물론 현실적으로 소득격차가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이면에는 우리 모두 비슷해지고 있다, 라는 게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잘못하면 폭발하죠. 폭발해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죠.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주체 환경은 아주 평등지향적인데 객체 환경은 점점 불평등이 커져가는 방향으로 가면 이게 안 맞으니까요. 그러면 외국으로 나가든지, 폭동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절망하고 좌절해서 그냥 사회로부터 격리돼 살아가는 식이 되겠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객체 환경을 바꿀 여지가 있는데 그게 되려면 빨리 그런 세대로 의사결정권이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더구나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은 것 같지 않아요. 한국이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게 2017~2018년 이렇게 이야기하는데요. 거기서 몇 년 더 지나면 초고령사회가 되거든요. 평균치라 그렇고 서울과 몇 개 도시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지금 다 초고령사회예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요. 빨리 전환할 필요가 있겠죠.  

 

시간이 많이 없다고 했는데 경제와 사회적 차원에서 본다면 정확히 지금이 우리 경제에 어떤 순간이라고 봐야 할까요?

 

90년대 중반부터 우리가 선택한 하나의 길이 있죠. 이제 그 길의 한계를 명확하게 본 것 같아요. 경로의 한계죠. 90년대에 크게 전환을 한 거거든요. 80년대 말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민주화도 되고, 중산층도 형성되고 하면서 미국식 시장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전환을 했죠. 그런데 완전히 미국식은 아니었어요. 소수 특권층은 남아 있었고요. 결과는 앙상해요. 격차도 커지고요. 이제 다시 전환을 해야죠. 어디로 전환할 거냐, 논쟁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논쟁을 안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데요.(웃음)

 

방향은 두 가지겠죠. 충분히 미국화하지 못해서 그렇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훨씬 더 시장주의적으로 가면 다시 성장할 거라고 생각하는 측이 있을 거고요. 다른 방향은 국가가 좀 더 역할을 많이 하고, 복지를 늘리고,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형태로 더 가야 한다, 이런 방향이겠죠. 제 얘기는 제3의 방향인데요. 공동체의 힘을 기본적으로 키워야 한다, 이런 방향이죠. 지속가능한 발전, 사회적 경제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는 방향이에요. 개인들은 자유롭게 모험할 수 있도록 하되, 노후나 기초생활을 보장하고 안전망을 잘 다지는 거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켜서 삶의 패턴 자체, 너무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을 좀 바꿔보자는 거예요. 소프트웨어 중심, 콘텐츠 중심으로 말이에요. 이런 여러 방향을 놓고 논쟁을 하는 게 정상이죠. 전환해야 할 시기기 때문이에요.

 

본격 선거철이잖아요. 투표의사 묻는 설문에 20대의 70% 이상이 반드시 하겠다고 답했다는 뉴스도 있었어요.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있겠죠?

 

대표자가 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젊은, 젊은 척이라도 하는 사람을 뽑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이번 선거를 앞둔 한국 정치는 다 늙은 척을 하는 분위기거든요. 우리는 이렇게 빵빵한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좀 기묘한 분위기예요. 퇴행적인 분위기죠.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투표를 잘 해야죠. 저는 이번 선거에는 가치를 가지고 투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옹호하는 가치가 있거든요. 그걸 가지고 우리 지역에 나온 후보가 누구고, 정당들이 어떤 공약을 냈는지 볼 생각이에요. 그런 식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의외로 다른 가치들이 있거든요. 그걸 보고 나서 투표하면 좋겠어요.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노동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자유롭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좀 생각해야 해요. 결국 그런 걸 유권자들이 생각해야 정치인들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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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세금을 내는 사람은 다 부자

 

반복해서 새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뭘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왔었거든요. 그런데 듣다보니 결국 모든 방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네요.

 

나의 접점에서 일단 뭔가를 해야죠. 회사에서는 젊은 리더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을 하고요. 젊은 사람은 좀 두려워도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가지고, 포지션이 생기면 획득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연습을 해야 하고요. 그 다음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패러다임의 내용은 다섯 가지예요. 청년에게 투자해야 한다, 죽을 때는 평등하게 죽어야 한다, 격차가 줄어야 한다, 세금을 많이 내고 복지를 늘려야 한다, 시민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예요. 청년에게 투자하고, 노년을 보장하고, 격차를 줄이는 것은 정부와 정치가 해야 할 일이죠. 이것은 반드시 풀려야 해요. 거시 환경이 우리를 제압하고 있는 그 장악력은 생각보다 굉장히 커요. 사람의 마음 속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제도를 바꿔야 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국민연금은 내 돈을 빼앗기는 거야, 재벌은 돈 안 내는데 나는 왜 세금을 내야 해’ 이런 얘기 하면 안 돼요. 한국에서 세금을 내는 사람은요, 다 부잡니다. 소득공제 후 낸 세금이 더 많다면 ‘나는 부자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세금 내는 사람이 그만큼 적어요. 내고 더 받아야 하는 거죠.

 

내고 더 받아야 한다, 아주 중요한 말처럼 들려요.

 

작년 연말정산 논란이 있었죠. 자녀 공제가 줄어든 이슈가 있었어요. 어린 자녀 있는 사람이 세금을 더 내게 된 거죠. 그런데 보육이 무상으로 제공된 게 몇 년 안 됐잖아요. 그게 일 년에 몇 백만 원 되거든요. 그러니 나는 십만 원 더 내고 백만 원짜리 복지를 받겠다, 이렇게 생각해야죠. 또 사람들은 대기업이 비정규직 채용한다고 막 욕해요. 자기 아파트에서는 고용주 입장에서 비정규직을 쓰죠. 경비원, 청소 노동자 임금 천 원 올려주기도 아까워해요. 그럼 안 되는 거죠. 자기와 접점 있는 곳에서 먼저 실천해야 하는 거죠. 그런 다섯 카테고리를 책에서 말씀드렸어요.

 

‘우리는 99%다’대신 ‘우리는 20%다’ 라고 한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상상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복지는 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금을 더 내야 한다면 무척이나 부당하게 느끼죠.

 

사람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복지를 늘려야 하니 세금을 올려야 한다고 하면 흔히 듣게 되는 반론이 부정부패를 먼저 척결하고, 지하경제를 먼저 끌어내야한다, 재벌들이 빼먹는 것만 잘 걷어도 충분히 된다는 이야기예요. 가장 황당한 이야기예요. 그게 없다는 말이 아니고요. 그러면 나머지는 세금 안 내도 되는 거예요? 그게 옳은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이들이 용돈에서 일주일에 천 원 씩 모으면 1년에 오만 원이니까 아빠가 십만 원 보태 십오만 원을 만들어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놓자, 이렇게 얘기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죠. 아빠 숨겨놓은 돈 있죠, 그것 가지고 어떻게 하세요,(웃음) 이거는 가능성이 훨씬 떨어지죠. 그런데 이런 얘기하면 화내죠.

 

다들 정말 살기가 힘들다고 얘기하거든요.

 

네, 정말 힘들더라고요. 양가 부모님 모시고 일 년에 한 번 해외여행 가야하고, 자동차도 몰아야 하고, 영어 사교육 시켜야 하고, 보딩스쿨 보내야 하고, 주상복합 살아야 하는데 관리비는 너무 많이 나오고요. 그런데 삶의 방식은 생각을 조금 바꾸면 훨씬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일과 돈 버는 것과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 이런 것들을 은퇴 후가 아니라 지금부터 균형 있게 가지고 가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삶은 가능하죠. 많이들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지 않으세요?

 

네, 특히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란 생각을 못하는 상황에서는 더 그런 방식을 택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바로 그 관점에 반대하는 거예요. 이렇게 사는 게 더 ‘나은 거’예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다니까요. 지금은 평생 일해서 잘 되면 아파트 한 채 건지고 은퇴 후에 할 일 없이 등산 다니는 게 제일 잘 된 인생이잖아요. 그게 오늘이고요. 그게 안 되니까 내일이 낫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잖아요. 저는 하지만 내일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일하는 시간도 줄이고, 일과 삶 사이에 균형을 맞춰 살다가 어느 시점에선 약간 여유가 생기면 자원 봉사도 하고, 또 돈을 벌며 살기도 하고, 이렇게 말이죠. 노후에도 재산 가지고 놀러 다니는 게 아니고 늦게까지 조금이라도 보람 있는 일을 일주일에 다섯 시간이라도 계속 하면서 80살까지 지내는 것, 그게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일이 더 나은 거예요. 명백하게요. 이렇게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너무 불행해져서 못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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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가장 덜한 세대가 나서야

 

모두의 마음속에 공포가 있다는 말, 참 공감했어요. 공포 때문에 각자도생은 강화되고, 변화는 허황되게 느껴지죠. 건물주가 장래희망이라는 설문에서도 엿볼 수 있잖아요. 세대를 막론하고 공포가 만연해 있어요.    

 

그런데 그 공포가 가장 심한 분들이 누구 같으세요? 가스통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죠. 너무 공포스러운 거예요. 진짜 공산당이 자기를 잡아죽일까봐. 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나이가 젊을수록 공포가 덜할 수밖에 없어요. 구조적으로 그렇죠. 경험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공포가 가장 덜한 세대가 나서야 하는 거죠. 물론 말씀드린 대로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요. 실패해도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요. 궁극적으로는 노후보장이에요. OECD 국가 중 한국이 가장 낮은 편이고 그래서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아요. 그건 일단 없애줘야죠. 또 근로 빈곤율을 없애야 해요. 그러려면 청소, 경비, 편의점 알바 등 저임금 일자리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할 거예요. 정책수단은 한 가지가 아닐 수도 있어요. 최저 임금을 올리는 방법, 복지 혜택을 더 주는 방법, 이런 것들은 국가에서 만들어줘야 하는 거죠. 그걸 안 해요, 근데. 그걸 안 하는 게 지금의 가장 큰 문제예요. 이대로는 공포가 더 심해지는 거죠.

 

스스로 중산층이라 믿는 계층이 빠르게 줄고 있잖아요.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성장해야 한다’보다 ‘어떤 성장인가’라고 했어요.

 

저는 세대가 바뀌어야 한다는 게 그런 개념이 다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중산층이 줄어든다, 이런 기사도 많이 나오는데요. 저는 탐탁치가 않아요. 소득만 갖고 따지는 것 자체가 중산층에 대한 과거의 정의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소득, 자산이 얼마나 되느냐, 이것만 보는 거죠. 중산층이란 원래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지식수준이 어느 정도 되고, 공동체 네트워크를 어느 정도 갖고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 이렇게 정의하잖아요. 그 정의가 베이비붐 세대에는 그렇게 체화되지 않았죠. 그 반성을 젊은 세대는 처음부터 가지고 가면서 실천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부가 1%에 몰려있으니까 나눠야 한다, 라고 하는데 나누면 문제가 해결 되느냐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자산을 똑같이 나눠 가졌는데 좋은 환경도 없고, 일도 재미가 없고, 노동 시간도 길고, 문화예술 인프라도 전혀 없고, 이건 나쁜 삶이거든요. 다양한 가치가 반영된 대안이 나와야 해요.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 화끈하고, 확산성 있어 보이진 않는데요.(웃음) 그래도 그게 답이죠. 세대를 바꾸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하는 틀 자체가 바뀔 필요가 있어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채현국 선생이 이런 말을 했어요. “정권을 탓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잘못 뽑은 것이다, 찍은 놈이 우리들”이라고요. 저자 역시 거대한 악이 이끌었을 것 같은 이 패러다임은 사실 모두가 함께 선택한 것이라고 했죠. 탓하는 게 편리하니까 쉽게 그렇게 하길 택한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평생 한 번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한테 다 덮어씌우는 게 가장 편하죠.(웃음) 그렇지만 결국 따져 보면 우리 엄마, 아빠 때문일 수도 있고 나 때문일 수도 있는 거예요. 더 미시적으로 가면 한국에서 IMF 구제금융 이후 시장 만능 주의, 재테크, 자기계발 붐을 누가 이끌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모두가 그렇게 한 거 아니에요? 아파트 투기하고, 재테크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도 다 평범한 회사원들이죠. 그런 가운데 이명박 현상도 있었고요. 우리가 만든 거예요. 현실 비판하는 건 좋은데 주체를 너무 빼놓고 이야기하면 바꿀 수가 없게 돼버려요. 그러니까 아파트 주민들이 무언가 결정하는 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내가 아파트 주민회에서 하는 결정과 살고 있는 지역 공동체에서 하는 결정의 질과 국가 공동체 전체의 결정의 질이 특별하게 다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대통령이 하는 결정이나 동대표가 하는 결정이 비슷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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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디캡이 적은 세대

 

책을 쓰면서 가장 염두에 뒀던 건 뭐예요?

 

첫째가 중학교 1학년 됐어요. 걔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썼어요. 저는 그냥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지만 한 번도 체계적인 스토리를 접하지 않으셨던 분이 읽어도 좋도록 썼어요. 그런 문체를 가지려고 노력했고요. 그런 숫자와 비유를 쓰려고 노력했어요. 사회 문제 인식하는 데 몇 가지 단계가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 미디어를 통해 ‘문제구나’ 생각하는 단계가 있고요. 다음에 주변에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단계가 있고, 공부하는 단계가 있을 거예요. 그 다음은 참여하는 단계가 있죠. 이 책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있는 단계의 분들이 보면 좋을 책이란 생각을 했어요.

 

지금 청년 세대라고 하는 젊은층보다 더 어린 세대, 자녀 분 또래의 세대가 가지는 사회에 대한 감각도 궁금하네요.

 

모든 중1과 이야기 한 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요.(웃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2014년에 미국에서 6개월 동안 지냈어요. 첫째를 데리고 가서 현지의 공립학교에 그냥 보냈거든요. 이야기를 하다가 잘 사는 나라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그랬더니 한국은 좀 잘 사는 나라인 것 같다는 거예요. 미국에 와 있는 상태였잖아요. 그런데 “미국은 뭐, 잘 사는 나란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한국과 미국이 대등한 거예요. 실제 경험을 했잖아요. 똑같은 초등학교라는 곳과 친구들을 경험했죠. 그런 아이 생각에 한국이 뒤지지 않는 거죠. 굉장히 자신감이 있어요. 핸디캡이 없는 거죠. 사실 세대가 높을수록, 나이가 많아질수록 핸디캡이 큰 것 같아요. 젊을수록 적은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긍정적이죠. 그 긍정적인 힘을 우리 사회가 잘 받아들여야 하는데 거기서 불협화음이 많은 거죠. 자신감이 있는 건 아주 좋은 거예요.

 

 

경제나 사회 구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한 책이에요. 이 책을 통해 경제와 사회의 미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런 분들에게 더 읽어보면 좋을 책을 몇 권 추천해주세요.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도 괜찮은 것 같고요.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도 좋은데(웃음) 제 책이라서요. 제 생각에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가 최고인 것 같아요. 정책 대안에 관심이 있는 분은 앤서니 앳킨슨의 『불평등을 넘어』를 보시면 좋아요. 이 책이 참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요. 앳킨슨이 피케티의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이 책도 참 좋죠. 우리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데이터가 많이 필요하시면 장하성 교수님 최근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를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그게 더 데이터가 많고 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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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2016년)이원재 저 | 어크로스
저자는 아버지 세대가 굳게 믿고 있는 성장 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절망하는 대신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약속을 쓰고자 한다. ‘좋은 삶’을 함께 정의내리고, 그런 삶을 창출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함께 그려내기 위한 ‘희망의 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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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낯선사람들’ 차은주, “이제는 즐겁게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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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많은 결과물이 나오길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20년을 바라보는 활동 기간에서 차은주의 음악과 만날 수 있었던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5인조 보컬 밴드 '낯선사람들'에서 낸 음반 하나, 혼자서 낸 음반 넷이 정규 앨범 이력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으니. 게다가 작품 활동 사이의 시간 간격도 작지 않다.

 

사람들은 차은주라는 아티스트를 잊지 못한다. 차은주의 발걸음은 우리나라의 많은 대중이 사랑을 보냈던 1990년대 중반서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퓨전 재즈, 새로운 싱어송라이터 붐과 결의 방향을 같이 한다. 그 발자취가 비록 뜸하다고는 해도 결코 얕거나 가볍지 않기에 사람들은 기억의 자락에서 그를 놓지 못한다.

 

얼마 전 차은주는 4집 앨범<다시 위로>를 통해 '다시 위로' 올라가자고 위로를 다시 건네는 대화를 스스로 나누었다고 한다. 활동 시기 간에 있었던 굴곡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조금은 더 활발히 움직이기 위해. 그리고 아티스트는 실제로 최근 활력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음악 인생의 여러 장면을 운이 좋게도 이즘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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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이 궁금하다.

 

지난달 29일에 싱글 나왔다. 오랜만에 노래하는 거라 연습도 하고 있고 틈날 때 마다 곡도 쓰고 있다.

 

이번에 신곡 'Goodbye love'가 나왔다. 만난 과정이 독특하다고 알려져 있다.

 

강의 나가는 학교 기말시험 채점 중에 전공 학생이 부른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울컥할 정도로. 창작곡이었던지라 작곡가를 소개해달라고 했고 이후 그 친구와 얘기해 노래를 부르게 됐다. 한 곡 더 같이 작업하기로도 예정돼있다.

 

크레디트를 보니 세션도 다 학생들이었던 것 같다.

 

학생도 있고 졸업생도 있다.

 

데뷔 때부터 굵직한 세션들과 작업하다 이번에 어린 세션들과 함께 작업했다. 작업은 어땠나?

 

작곡가가 편곡하고 작곡가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녹음하는 게 재밌었다. 곡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 연주까지 하니 상승효과가 발생했다. 정성이 들어간 작업이라 마음에 들었다. 이런 느낌을 일찍이 1집 만들 때 조동익 선배랑 같이하면서도 경험했다. 조동익 선배는 일에 늘 정성을 들인다. 편곡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데다 수정 작업도 상당히 많이 한다. 디테일적으로는 조금 다를 수 있으나 연주력 뛰어난 분들과 하는 것에서도, 젊은 친구들과 하는 것에서도 늘 많은 걸 배운다.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가?

 

편곡한 음악을 넘겨받았을 때 너무 좋았다. 당시 내 마음 상태와도 닮았던 곡이라 특히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난 지금 이걸 불러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늘 앨범 포맷을 내놓다 이번에는 싱글로 내놓았다.

 

얼마 전 소속사를 옮기기도 했고 그 전까지는 잠깐 혼자 작업할 때도 있어서 현시점에서 작업할 수 있는 곡 세 개를 싱글 포맷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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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가. 고등학교 때는 EBS 청소년가요제 대상, 아남 델타 가요제 금상을 받지 않았나.

 

EBS 청소년가요제 무대 영상 아직도 돌아다니더라. 그때 걔 보면 때려주고 싶던데. (웃음) 부모님께 처음으로 인정받았던 건 EBS 청소년가요제가 끝나고 나서, 노래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건 내가 기억이란 걸 하는 순간부터였다.

 

활동의 시작이 상당히 빠른 편이다. 낯선사람들로 본격적으로 데뷔한 게 2집이 나온 1996년이니 스물이 될 즈음에 시작한 셈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쯤 가수에 대해 확고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어렸을 때는 워낙 수줍음이 많아 주변에 노래하겠다는 얘기는 못 했다. 괜히 “성우 하겠다”, “디제이 하겠다”며 돌려 말하고 다녔고, 노래에 크게 자신도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수업시간에 교실 앞에서 노래 부르다 수줍어서 중간에 끊고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계속 듣고 싶었는데 왜 들어왔냐며 얘기를 해줬다. 그 한 마디가 내 인생을 바꾼 거 같다.

 

낯선사람들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1994년 아남 델타 가요제 때 낯선사람들이 게스트로 왔다. 그쯤 이소라 언니가 나간다고 얘기해서 팀원 보충을 고민하던 차였는데 내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더라. 이후 팀에서 제일 나이가 많았던 신진 오빠가 전화를 해줬고. 솔로로 하자는 제의도 있었지만, 내가 낯선사람들 팬이었던지라, 들어가겠다고 결정을 했다.

 

사실 EBS 청소년가요제에서 불렀던 창작곡 '모두에게'는 중간에 색소폰 솔로만 빼면 재즈, 알앤비 등의 흑인음악과는 거리가 먼 발라드 또는 팝이었다.

 

맞다. (웃음) 그랬다.

 

낯선사람들의 음악이 재즈, 알앤비로부터 출발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해당 음악 장르에 관심이 많았나.

 

재즈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많이 들었다. 맨해튼 트랜스퍼나 배리 매닐로우 같은 아티스트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들어왔지만 사라 본부터 얘기하는 옛날 재즈는 조금 나중에 접했다. 사실 재즈는 좀 공부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나는 퓨전 재즈 쪽을 더 좋아한다. 알 자로 음악 같은. 어스 윈드 앤 파이어 느낌의 재즈도 좋아하고.

 

두 번째 정규 음반을 끝으로 낯선사람들이 긴 휴지기에 들어가고 조금 지나 솔로 데뷔 음반이 나왔다.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나.

 

그 무렵에 몸이 많이 안 좋았다. 팀에 있던 (고)찬용이 오빠도 많이 아팠고. 솔로를 하겠다고 얘기하면서 낯선사람들에 들어간 것도 있긴 하지만, 낯선사람들 자체도 활동하기 힘든 상황에 있었다. 그러다 첫 솔로 음반이 나왔다. 몸 상태 때문에 집에서만 지내며 쓴 곡들로 채운 작품이다. 앨범에도 당시의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느끼는 흐린 분위기. '흐린 아침'이 그걸 얘기한 노래고.

 

솔로로 출발하면서 가졌던 주안점이나 계획이 궁금하다.

 

좋은 곡을 쓰는 게 내 꿈이다. 작사, 작곡하고 그게 완성물로 나올 때 기분이 정말 좋다. 유명해지겠다 하는 꿈은 없었다.

 

곡을 쓸 때의 원동력은 어떤 것인가.

 

사랑이 1번이다. (웃음) 사랑을 하고 있는 나.

 

싱어송라이터임에도 상당히 많은 작곡가, 프로듀서들과 협업해왔다. 최성원, 장기호 등이 프로듀싱을 했었고 박성식, 이규호, 정원영 등으로부터 곡을 받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나.

 

2집 때 곡을 특히 많이 받았다. 스스로 쓴 것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장)기호 오빠가 프로듀싱 해주면서 앨범 콘셉트가 많이 바뀌어 노래를 받게 됐다. 박성식 씨에게서도 곡을 받고 (이)규호 오빠한테서도 곡을 받았고. 원래 내가 쓴 곡들로는 조금 리드미컬한 느낌을 낼 계획이었다. 가수이기도 해서 그런가, 좋은 노래를 들으면 불러보고 싶다는 욕심도 많이 난다. '나는 내가 쓴 곡으로만 내 음악을 해야 해' 싶은 고집은 없다.

 

차은주의 보컬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낯선사람들 2집과 솔로 1,2집, 그리고 그 중간에 인기를 끌었던 김현철의 '그대니까요'에서의 힘 있고 기교 있는 알앤비, 재즈, 보컬을 기억한다. 이러한 보컬 스타일은 언제서부터 어떻게 만든 건가.

 

'나는 특출 나는 게 없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 와서, 잘 부르고 싶은 욕심, 잘 하고 싶은 욕심이 많이 크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노래를 어렸을 때부터 불러봤던 것 같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 음악 찾아 따라 부르고 그러다 보니 힘 있는 보컬 스타일도 얻었던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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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2008년 3집 <스마일 인 유어 아이스>에선 상당히 힘을 뺀 보컬 스타일을 보여줬다. 또 그 기초에는 빈티지 어쿠스틱 사운드를 입힌 부드러운 재즈팝 사운드가 있었고. 당시에 어떤 구상을 그리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변화가 나올 수 있었나.

 

그 무렵에도 아팠다. (웃음) 직전에 5, 6년 간 웨이브 밴드에서 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밴드가 깨져버렸다. 재결합 시도도 못 했던, 조금 무기력한 상태에 있어 아예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실용 음악 학원을 차렸다. 그런데 이건 이거 나름대로 내 적성과는 맞지 않은 일이더라. 학원 운영, 행정에도 신경 써야 하니까. 몸에 안 맞는 걸 하다 부작용이 생겼는지 봉와직염이 왔다. 게다가 오진도 많이 받는 바람에 길게 앓기까지 했다. '이러다 내가 죽는구나' 싶었다. 주변 의사들도 스트레스받지 말고 아예 푹 쉬고 놀라고 하고. 그 상황에서 '내가 해놓은 게 뭐가 있을까'하는 말이 머리에 먼저 들었다. 그러더니 2집에 싣지 못했던 그 곡들이 생각났다. 그걸 그대로 완성했다. 힘 빠진 상태에서 그런지 음악이랑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고. '죽기 전에 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낸 앨범이다.

 

사실 앨범 활동 순간 간의 시간 격차가 크다.

 

그렇다. 어쩌다 보니 아플 때가 많아서. 앨범 작업도 오래 걸렸고 홍보도 잘 못 했다.

 

창작 활동에 있어 호흡이 긴 편인가.

 

아니다. 길진 않다. 곡 쓸 땐 전화도 안 받고, 나오라 그래도 안 나가고, 순간에 집중해서 끝을 보는 스타일이다. 도저히 안 될 때까지. 얼추 정도라도 완성하게끔.

 

반면 시작한 2014년의 4집 다시 위로에서는 다시 파워풀한 사운드를 들려줬다. 심지어 보다 로킹하고 또 스타일도 다채로웠다.

 

그쯤 시규어 로스랑 콜드플레이, 에드 시런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록적인 스타일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몽환적인 느낌도 같이 잘 났고. 프로듀싱을 해줬던 기타리스트 오정수 씨와도 많이 얘기 나누며 같이 작업했다.

 

그 무렵부터 다시 음반, 음원 활동에 박차를 가했던 거 같다. 게다가 요즘에는 거의 매해 결과물을 보인다. 계기가 있나.

 

아, 3집을 내고서 점점 건강이 살아났다. 학원도 그만뒀고. 4집이 활력적인 이유도 이 때문이고 좀 더 곡을 자주 내놓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다시 위로>의 뜻은 무엇이었나. 상실과 치유의 음악이라 소개하기도 해 힐링이라는 의미의 '위로'로도 다가왔지만 상승이라는 의미의 '위로'로도 다가왔다.

 

둘 다다. 위로가 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전체적으로.

 

근래 활발히 활동하며 주변 사람들도 반가워할 것 같다. 주변 반응들은 어떤가.

 

내가 가진 우울감 때문에 내 노래를 오래 못 듣겠다는 얘기도 좀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좀 편안해서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편한 마음이 음악에 담겨서 그런 건가 싶다. 이번 노래가 처절한 당장의 슬픔을 다루기보다는 슬픔이 지나간 후의 잔상을 이야기한다. 덕분에 우울 감성에 빠져서 노래하지 않아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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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음반은 전작들보다는 조금 빨리 만날 수 있는 건가.

 

지금 작업은 계속하고 있다. 날짜를 딱히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 방향을 잡아보자는 얘기를 해놓은 상태다.

 

이번 신곡은 부드러운 팝 발라드였다. 향후 발매될 신보나 음악의 방향도 비슷한가.

 

아름다운 느낌으로 흘러가는 곡으로 하나 준비 중이다. 발설하듯 막 얘기하면 안 될 거 같다. (웃음)

 

이번 곡들도 학생들과 작업했듯, 대학교에 출강하면서 학생들로부터 여러 영향을 받을 거 같다.

 

좋다. 정말 좋다. 가르치는 처지에서 다가가긴 하지만 배우는 것도 많고 감동하는 일도 많다. 덕분에 이렇게 작업도 하게 되지 않았나. 특히 서로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얘기하는 게 즐겁다. 늘 좋은 영향을 받는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이번엔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그간 겁도 많이 냈고 부끄럼도 많이 보였고 자신도 없었는데 그런 걸 이번에 많이 내려놨다. 이제는 즐겁게 하려 한다.

 

한편으로는 고민도 많을 것 같다. 특히 중견 아티스트들에 있어 지금의 우리나라 음악 환경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오랫동안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신을 표현해왔던 사람들마저 텔레비전 무대에 올라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지 않나. 차은주라는 싱어송라이터도 그 점에 있어 사실 포지셔닝이 쉬운 아티스트도 아니고.

 

오랫동안 고민이 많았다. 대중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미로 쓴 곡도 있다. 비록 작업하진 않았지만. 곡을 내놓을 때마다 매번 독백하는 기분이었다. 또 공연하거나 앨범을 내면 손해를 끼쳐 소속사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딱히 유명해지고 싶진 않지만, 결국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버리지 않나. 나 좋자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 아닌가 많이 생각했다.

 

음악적으로 방황을 많이 했겠다.

 

그렇다. 삶에 있었던 일만큼이나 내 음악에도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원인을 스스로 찾는 편인가.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원래 우울감이 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중에 내가 변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밝게 생각하려고 매번 노력했고. 늘 그늘에서 시들어있는 화분 같다고 스스로에게 느껴왔다. 그러다 계속 이렇게 있으면 까미유 끌로델처럼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은 많은데 결국 우울함에 빠져 아무것도 못 하는 생으로 끝나겠다 싶어 이번에는 바꾸고자 했다. 긍정적인 빛을 주고자 힘썼다. 사실 음악이란 게 창작자의 당시 감성을 담은 결과물이다. 그 탓에 예전에는 혼자서 어둡게 중얼거리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은 많이 밝아진 편이다.

 

끝으로 차은주의 음악 인생에 영향을 끼친 음반 세 장을 말한다면.

 

유재하 선배의 앨범이 1번. 그 다음으로는 휘트니 휴스턴의 <Whitney Houston>다. 옐로자켓츠(Yellowjackets)와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이 함께 했던 <Dreamland>도 좋다. 꼭 들어보길 권한다. 아, 하나 더 하고 싶다. (웃음) 알 자로(Al Jarreau)앨범. 그 중에서도 <Breakin' Away>.

 

인터뷰 : 임진모, 이수호, 이택용, 정민재
정리 : 이수호
사진 : 이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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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재미작가 이혜리 “14년 만에 번역된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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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정말 몰랐어요." 14년 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모은 이혜리 작가의 『아들이 있는 풍경』이 이제야 한국 독자를 만났다. 1997년에 실제로 벌어진 외삼촌의 탈북기를 다룬 에세이. 작가는 북한의 독재와 그 치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을 조명하고자, 자신의 가족사를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 책의 주인공은 작가도, 6.25 전쟁 때 큰아들과 생이별을 한 외할머니도, 외삼촌의 탈북을 도운 북한 가이드도 아니다. 2016년에도 똑같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혜리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4세 때, 미국으로 이민했다. UCLA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MTV, NBC, CBS 등에서 작가와 PD로 활동하던 중, 1996년 실화소설 『할머니가 있는 풍경』을 펴냈다. 현재는 한국과 미국에서 탈북인 인권을 주제로 강연하며 서울예술대학교 로스앤젤레스 분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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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Absence of Sun

 

꽤 오랫동안 한국어판 출간을 시도했다고 들었습니다. 14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보았을 때, 어떤 심경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무척 기쁘다는 이야기로밖에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모국어로 이 이야기를 알리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흥분되고 좋습니다. 그간 한국과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나 출판사의 여건이 적절하지 않아 한국 독자를 만나기 어려웠어요.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지금이라도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고 기뻐요.

 

500쪽이 넘는 에세이인데, 한 호흡으로 읽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책이었어요.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요. 쓰기까지의 과정은 너무 어려웠지만, 사람들이 이 스토리를 아껴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정말 감사해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책이 나왔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좋은 타이밍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사이에 저도 엄마가 되면서 할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을 더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시간과 함께 깊이가 더 커졌으니까요.

 

『아들이 있는 풍경』의 원제는 ‘In the Absence of Sun’입니다.

 

북한이 빛(Sun)이 없는 어두운 곳이라는 뜻과 함께, 또한 할머니가 아들(Son)을 잃어버린 고통의 시간을 뜻해요. 제게 이 책은 한국에서 펴내는 두 번째 책입니다. 먼저 1996년에 미국에서 『할머니가 있는 풍경(Still Life with Rice)』를 펴냈고, 이것 역시 실화소설이었어요. 이번 책에도 이야기가 나오지만, 『할머니가 있는 풍경』을 썼을 때, 북한에 있었던 친척들 이름이 실명으로 나가면서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아들이 있는 풍경』을 쓸 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촌과 그의 가족들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줬어요. 이 책은 꼭 써야 한다고요. 결국 탈고를 한 후, 6개월 동안 두드러기 증상이 심해 약을 먹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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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정작 미국에서 더 화제가 됐어요.

 

제가 미국에서 책을 발표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국어판 출간이 오래 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북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대개 세상에 알려지는 북한 소식은 정책과 관련된 이야기잖아요. 미사일 발사 뉴스가 가장 많죠. 지금 북한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많이 속상합니다. 이 책을 통해 북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그런 쪽으로 영향을 받는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아들이 있는 풍경』은 현재 미국 전역의 학교와 교육기관에서 한국에 대한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냥 묻힐까봐 고민하던 때가 있었어요. 꼭 알려야 하는 이야기였으니까요. 할머니가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되는 걸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책 판매가 부진했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할머니를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로부터 출연 요청을 받았고 이후 여러 방송 매체와 대학기관에서 강연을 청했어요. 급기야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초청으로 워싱턴 DC에 가서 이민법 관련 청문회에서 탈북민의 현실을 증언했고요. 할머니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주셨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고요.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제게 역할과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고 있어요.

 

통일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통일은 올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5년 후쯤은 통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5년이란 시간을 굉장히 짧게 느끼는 분도 계실 거예요. 하지만 북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그 5년이란 시간 안에 굶주리고 죽을 수 있어요. 우리 국민들이 북한 사람들을 생각해줬으면 해요. 제가 북한을 다녀온 게 1997년이에요.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요. 그런데 그들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게 없어요. 송환을 두려워 하는 수많은 탈북자가 중국, 러시아, 몽골 등에 숨어 지내고 있으니까요. 과연 누가 저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한 가족이, 한 사람이, 하나의 행동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요. 저희 할머니가 아들을 위해 그 험난한 여정을 보내신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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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평화가 있는 곳에서 살기를

 

삼촌의 탈북을 직접적으로 도운 가족은 작가님의 아버지였어요. 할머니께는 사위죠. 자신의 형제도 친모도 아닌데, 이렇게 헌신적일 수 있었을까. 읽는 내내 놀라웠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장모님을 위한 희생일 수 있잖아요. 그렇게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도 한 번도 아버지는 포기하자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요. 진짜 희생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이 단순히 탈북기만이 아닌 이유이기도 해요.

 

탈북, 가족애를 다루는 동시에 예기치 않은 로맨스도 등장합니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외삼촌 가족의 탈북을 도운 ‘가이드’의 근황도 궁금할 것 같습니다.

 

(웃음) 책을 읽은 많은 분이 제게 물었어요. “부끄러웠을 텐데 왜 가이드와의 에피소드를 책에 썼냐”고요. 사실 창피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의 이야기도 이 책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더 멋지게 쓸 수 있었지만 솔직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들어가야, 진심이 전달될 수 있잖아요. 영웅은 다른 게 아니에요. 전 외삼촌 가족의 탈북을 도운 저희 아버지와 책에 나오는 북한 동포 '가이드'가 영웅 중의 영웅이라 생각해요.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탈북 가이드를 하고 있어요. 각자 동기가 다를 테지만, 순수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용기 있는 분이 많아요.  저희 아버지와 가이드가 그 분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연극을 기획하고 계세요.

 

『아들이 있는 풍경』이 나왔을 때, 이제 제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끝이 아니더라고요. 미국에는 한국 역사를 소재로 한 연극이 거의 없어요. 역사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소재이고, 영화가 됐든 연극이 됐든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북한은 권력을 내세우기 위해 정보를 숨기지만, 작가는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알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된 일이 자랑스러운 건,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거예요. 연극은 관객들과 같은 공간에서 냄새와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요. 더 특별한 감성을 나눌 수 있는 매체예요. 다양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독자에게 특히 『아들이 있는 풍경』을 소개하고 싶으신지요?

 

전 세대가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전쟁을 직접 겪으셨잖아요. 당신의 이야기를 우리가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거라 생각해요. 지금 젊은 세대는 직업, 미래, 돈, 연애에 몰두하고 있지만, 역사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잖아요. 얼마나 중요한 미션인지 꼭 알았으면 해요. 세대 간의 격차가 크고 나름의 다양한 경험이 있지만, 내 조상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세대를 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안에 있으면 저도 몰랐을 거예요. 밖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진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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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책을 한국에서 출간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으신가요?

 

예전에 룸메이트였던 흑인 친구와 함께 '김치'와 '콘브레드'를 소재로 책을 쓴 적이 있어요. 콘브레드는 미국 남부 지역을 상징하는 음식이고, 김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식이죠. 서로의 문화, 다양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도 소개하면 좋을 거라 생각해요. 서로의 문화를 안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문제니까요.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제 쌍둥이 아이가 올해 6살이 됐어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생각해요. 이 아이들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꿈꿔요. 좀 더 평화가 있는 곳에서 살기를 원해요. 그들이 자랐을 때, 자연에서 나오는 자원이 부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장 심각한 문제예요.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동시에 함께 사는 이웃, 서로를 배려했으면 해요. 우리 할머니 세대 때는 정말 그랬어요. 다같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굉장히 초보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모두의 꿈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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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있는 풍경이혜리 저/노은미 역 | 디오네
1997년 4월 18일. 미국에 사는 86세의 할머니는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서울과 베이징(北京)을 거쳐 드디어 옌지(延吉)에 도착하였다. 47년간의 생이별 후에 드디어 남한 엄마가 북한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할머니는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도착하는 이 힘겨운 여정을 버텼다. 그 길에 손녀딸인 이혜리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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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형석 “직장 동료 탓하기, 너무 죄책감을 느끼진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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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심리 백과』는 구급상자 같은 책이다. 마음이 베이고 데여서 아플 때,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듯 펼쳐 보아야 한다. 응급조치를 해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를 위한 방법도 제시해준다. 그러니 『가족 심리 백과』를 상비해 놓고 있는 것은 주치의를 곁에 두고 있는 것과도 같다. 마음이 통증을 호소할 때마다 목차를 펼치고 자신의 증상을 찾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밥을 안 먹어요”, “아이가 저한테서 떨어지려 하질 않아 너무 힘들어요”, “아무리 공부를 시켜도 따라가질 못해요”, “사춘기 자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이가 온종일 게임만 해요” 같은 육아와 양육에 대한 고민부터 “왜 자꾸 나쁜 남자만 만나게 되는 걸까요”, “거절이나 싫은 소리를 못하겠어요”,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힘들어요”, “짜증이 많아지고 화가 나면 분노조절이 안 돼요” 등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에서 겪는 문제들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심리 처방전’이 실려 있다. 노화와 죽음, 치매에 대한 두려움 등 노년 세대가 호소하는 괴로움에도 귀를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불안, 우울, 중독 등 다양한 정신적 심리적 증상과 부부 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제목 그대로 ‘마음을 위한 백과사전’인 셈이다.

 

그러니 정신과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을 끌어안고 있을 이유도, 자신의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는 지인이나 네티즌에게 상담을 요청할 필요도 없다. 『가족 심리 백과』 안에는 10명의 정신과 전문의들이 토론을 거듭하며 이끌어 낸 ‘객관적이고 실효성 있는’ 해결 방법들이 담겨 있다.

 

『가족 심리 백과』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채널예스가 만난 주인공은 송형석 정신과 전문의였다.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그는 이미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위험한 관계학』, 『위험한 심리학』, 『까칠하게 힐링』을 통해 마음과 정신의 이야기를 쉽고도 재미있게 들려주었고, <무한도전>의 ‘정신감정 편’에 출연하며 족집게 의사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 10일, 서교동의 작은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가족 심리 백과』에 수록된 “촌철살인 심리 해법”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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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이 될 때까지 어린이집에 보내지 마라? 정답은 없습니다!

 

책이 묵직합니다. 이렇게 많은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럼에도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많은 분들이 (책을 통해) 의견을 내놓으시지만, 저희가 보기에는 너무 딱딱하게 쓰인 것 같거나 일생의 한 순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은 책들도 있었어요. 소아기에 대한 책들 중에는 『가족 심리 백과』와 형식이 비슷한 책도 많지만, 소아기의 문제만 가지고 인생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많이 겪게 되는 가족 문제가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가족 전체의 삶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고민거리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어요.『가족 심리 백과』를 통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고민들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려 10명의 정신과 전문의가 모여서 쓴 책입니다.

 

보통 공동으로 집필을 하면 각자 파트를 맡아서 쓰게 되잖아요. 그런데 전문가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서로 다르거든요. 그래서 제가 처음 출간을 제안했을 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대답을 내보고 그걸 다 섞자’고 이야기했어요. 같이 회의를 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평가하고, 잘못되었다거나 사견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다 잘라냈죠. 그러면서 원고도 몇 번씩 다시 썼어요. ‘이 정도면 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견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은 없다’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만 남기려고 했던 거죠.

 

대부분의 심리 서적들은 하나의 시기 혹은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 연애, 결혼, 중년 등을 주제로 집필되었죠. 그런 점에서 『가족 심리 백과』는 차별화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심리학의 모든 요건이 상호작용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아이가 왜 이렇게 말썽을 부리죠?’라고 이야기하는 엄마가 있다면, 사실은 부모의 문제도 같이 봐야 해요. 부모의 양육 방식에 대해 듣다 보면 그들의 조부모와 시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 엮여있어요. 그런 부분을 동시에 보지 않으면 어느 한 쪽 편만 들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육아 문제와 관련해서 부모의 탓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면 잘못된 거죠. 그런데 저자는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각 나이대에 대한 고민들을 종횡무진 하면서 계속 연결을 할 필요가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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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에 있어서 ‘애착’을 맺는 게 중요하다는 건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데요. 그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분들은 ‘세 살까지는 아이 곁에 있는 게 좋다’는 이야기도 하시고요. 정답이 있을까요?

 

정답이라고 말하기가 참 애매한데요. 어린이집에 보내기 좋은 시기라는 게, 대개는 많은 선생님들이 평균적으로 관찰하면서 ‘이 정도 나이가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저도 예전에는 3세 이후의 아이들만 (어린이집에) 보내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 전에 보내면 아이에게도 결핍이 생기니까요. 그런데 지금 사회 자체가 그게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1세라도 보낼 수밖에 없는 환경들이 너무 많죠. 그래서 요즘은 그때그때에 맞춰서 하시라고 말씀을 드려요. 엄마가 너무 힘든데 아이를 돌볼 수는 없으니까,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시면 된다고요.

 

너무 이른 나이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면 애정 결핍 또는 분리불안이 생기지 않을까요?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그 책에 보면, 애착 이론이 좋고 맞는 이론이지만, 애착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쓰느라 어른이 가지고 있을 권력을 모두 아이에게 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저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저자인 다비드 에버하르드가 이야기하는 건,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치유력이나 스스로 재건해 가는 능력을 믿어야 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아서 그런 능력들이 형성되지 못하는 게 아니고, 어른들이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 오히려 잘 안 될 정도라는 거예요. 공감이 가요.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전업주부로 살아야 하는 건가’ 하고 고민하는 엄마들도 많은데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네요. 

 

언제까지 아이 곁에서 애착을 형성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요즘과 같은 경우에는 1세 이후에도 가능하다고 보이고요. 18개월 이전에는 아이가 자기 의사 표현도 전혀 안 되고 너무 어리니까 불가능하고요. 3세냐 4세냐를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봐요. 만약 분리불안이 일어났다면 그 시기가 지난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거고요. 분리불안이 생기고 있는 상황이라면 조금씩 떨어져 있는 시간을 늘리시는 게 좋아요. 분리불안을 보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점진적으로 해야 되는 거거든요. 어린이집도 그런 식으로 이용하시면 아이들한테 큰 문제가 없어요. 아이의 심리적 반응을 무시하고 룰대로 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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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산만한 우리아이, ADHD일까요?

 

사회성이 뛰어난 아이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회성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타고난 거예요. 대인관계 지능이 따로 있거든요. 다만 평소에 아이와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맺고, 그래서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다면 대인관계를 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요. 그리고 떼를 쓰거나 힘을 써서 상대를 조절하는 게 아니라, 항상 대화와 올바른 행동으로 인해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몸에 익어 있어야 돼요. 제가 대인관계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건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무조건 착해라’예요. 공격적으로 굴지 말고, 괴롭히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으라는 거죠. 그렇게만 해도 다른 사람과 척을 지진 않죠. 그런데 착하기만 하면 바보로 볼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두 번째는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포인트에서는 자기 의견을 조리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라’라는 거예요. 이 두 가지만 하면 대인관계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도 사회생활 하는 데 큰 문제가 없어요.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무리 공부를 시켜도 따라가질 못해요”라고 걱정하시는 부모님들도 많습니다. 이럴 때에는 지능 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는 걸까요?

 

아이들이 교과 과정을 따라가지 못할 때, 저희가 꼭 검사를 받아보시라고 말씀 드리는 경우는 정말 뚜렷하게 (징후가) 보이는 경우예요. 예를 들어서 수학은 100점인데 국어는 0점이라거나, 그런 식으로 누가 봐도 (징후가) 뚜렷하다고 생각되시면 진료를 받으셔야 하고요. 그리고 아이가 초등학교 2~3학년 정도 되면 정신과 검진을 한 번 받아보시는 것도 괜찮아요. 이건 심각하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에요. 소아과나 내과에서 건강검진을 받는 게 괜찮은 것처럼 똑같이 생각하시면 돼요. 정신과 검진을 받는 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이가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서 지능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건 잘못된 거고요. 분명하게 특징이 보일 때는 빨리 진료를 받으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검사를 해보시면 지능 문제나 산만함, 언어 장애 같은 걸 발견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4~5학년 때까지 미뤄두시면 많이 늦을 수 있어요.

 

요즘에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져서, 아이가 산만하면 ‘혹시 ADHD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병원을 찾아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죠. 부모는 아이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드니까요.

 

전체 아이들 중에 ADHD 아동은 5% 정도예요. 정신분열증이 1%니까 굉장히 높은 비율이죠. 보통 우리는 정신과적 문제를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감기처럼 흔한 거예요. 우울증만 보더라도 그렇죠. 그래서 이런 부분은 어릴 때 체크를 해 두는 게 좋은데요. ADHD 검사를 해보면 모든 항목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한두 개 정도에 해당되는 아이들이 15%예요. 그렇다 보니 의사들 사이에서도 ‘ADHD가 과연 병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많죠. 정말 심각한 수준의 ADHD 아동들은 누가 봐도 병적인 증상을 보인다고 알 수 있거든요. 수업 시간에 책상 위에 올라가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니까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예전에는 그냥 말썽꾸러기로 여겨지고 말았어요. 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죠. 하지만 현대 사회는 20~30대까지 꽉 죄어놓고 못 움직이게 만드니까, 산만하고 집중을 잘 하지 못하는 문제가 병인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ADHD를 병으로 불러야 되느냐, 사회가 만든 병인 것 아니냐, 라는 이야기들이 있는 거고요. 한편에서는 이미 사회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 어떻게 하냐, 라는 이야기들도 계속 오고 가는 거죠.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해야 할 일들도 알려주셨어요. 그 중에 “아이의 태도를 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아이의 관심사를 공유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가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한테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자꾸 하시죠. 저도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같은 말을 하겠지만, 사춘기에 해야 할 일은 공부만이 아니거든요. 10대 때 갖춘 취향이 평생을 지배한다는 건 정설에 가까워요. 그런데 많은 부모님들이 그걸 방해하고 있죠. ‘이건 해도 돼’라고 범위를 정해주실 필요가 있어요. 공부만 열심히 해서 사회 제도권에 들어간다고 해도, 사회 제도권이 원하는 직장에 가기에만 유리한 거지, 제도권 이외의 직업을 갖는 데에는 쓸모가 없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 지금 청소년들이 살게 될 미래에는 소규모 경제들이 계속 발생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의미가 없어지죠. 그런 세상이 오기까지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다 막아서는 안 된다고 봐요. 자기 정체성 형성을 해야 되는 시기에 정체성을 파괴해 버릴 수 있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아이를 만들 수 있거든요.

 

비슷한 문제로 병원을 찾는 청소년, 청년들도 많이 만나셨겠어요.

 

10대 후반~20대의 환자들 중 절반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은 경우예요. 명문대를 가야 한다, 대기업을 가야 된다, 의사 변호사가 돼야 한다, 그런 생각들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면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을 해요. 그들의 부모님과 이야기 해보면 그런 생각 밖에 없으세요. 대안이 별로 없어요. 자기 취향도 별로 없고요. 청소년기가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인데, 정체성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내가 무엇을 더 좋게 여기는지, 무엇이 더 나의 것이라고 느끼는지를 알아가면서 나라는 사람의 개성을 만들어가는 거거든요. 문제는 한국 사회가 그런 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자꾸 쓸데없는 걸 하냐고 말하죠. 그러다 보니까 주류의 것들만 소비해야 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인생 전반에 걸쳐서 형성이 되어 있고요. 그런 사람들은 최고만 추구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 최고가 무엇인지 개념이 없는 거예요. 결국은 지금의 40대, 50대들도 그런 식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사람들이라 아이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건데,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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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스트레스, 나에게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심리적으로 아기가 처음 엄마를 만나서 성장하는 과정을 반복”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가 연인을 만날 때의 기본적인 감정이 사실은 부모나 가족 같은 애착 대상자들한테 바라는 감정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내 요구를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부모와 있었던 감정 중에서 나와 해결이 안 된 감정을 상대방한테 해결해 놓으라고 하기도 하죠. 무의식적으로요. 예를 들면, 매일 남자친구한테 사과하라고 우기는 여자가 있을 수도 있고, 밖에서는 점잖던 남자가 집에 가면 아이처럼 칭얼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린 시절에 결핍된 걸 지금 이 관계에서 해결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문제는, 처음에는 상대가 해결해줄 것처럼 보이는데, 자신이 욕망하는 것 또는 결핍된 감정이 클수록 상대방이 들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요.

 

또 다른 갈등의 원인도 있을까요?

 

아니면 서로가 욕망하는 게 정반대인 경우가 있죠. 한쪽은 자기만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데, 한쪽은 혼자서 아무 문제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소망하고 있다면, 만나서 매일 싸우겠죠. 그건 자신들의 부모에게 요구했어야 될 문제들인데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연인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감정들이 적절한 비율을 갖고 있어야 돼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결핍을 상대가 메워준다고 생각하면 운명의 짝으로 여기겠지만, 그로 인해서 상대가 피해를 입을 것 같으면 내가 물러나야죠.

 

『가족 심리 백과』는 직장생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정서중심 대처’와 ‘문제중심 대처’인데요. ‘정서중심 대처’는 자신의 스트레스가 “다른 사람이나 환경 등의 외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언뜻 ‘남 탓하기’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요?

 

그건 누구나 하고 있는 거죠. 급할 때 제일 쉽게 사용하는 스트레스 해소법이고, 하지 않으려고 해도 누구나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가 없어요. 문제 상황에서 ‘정말 내가 잘못한 걸까’ 하고 생각하면 너무 괴롭잖아요. 그럴 때에는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하지만 저 사람도 참 예의 없이 이야기한다’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다면 괜찮다는 거죠. 그런 다음에 균형을 잡으세요. 문제 중심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를 생각하는 거예요(‘문제중심 대처’). 그러면 문제를 일으킨 데에는 나의 역할도 있고 상대방의 역할도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어느 한쪽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그리고 자신의 몫을 알게 됐다면 그 부분만 고치면 돼요. 그렇게 해서 문제 상황이 해결됐다면 잘한 것이고, 그런데도 변화가 없다면 상대방이 문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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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이루어놓은 게 없다는 자괴감, 자기 처지에 대한 모멸감”이 들면서 스스로 고립되기도 하죠. 『가족 심리 백과』는 이들을 일컬어 “정체된 중년”이라고 말하는데요. 이들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건가요?

 

50~60대가 되었는데 이뤄놓은 것도 없는 것 같고 잘 사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여겨지면 굉장히 허무하죠. 지나온 삶이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거예요. 각자가 바라는 기준은 모두 다른데, 많은 남성들이 경제적인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알고 있어요. 많은 여성들은 자식들의 성공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요. 그런 사람들은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그런 것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청소년기의 정체성 문제와도 비슷하죠.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그 사람을 이루는 건데, 이런 분들과 이야기해 보면 ‘최고’ ‘좋은 것’이라는 말 외에는 자신을 설명하는 게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런 분들께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이 있구나’라는 걸 이해하게 해드려야 돼요. 그걸 하나씩 하나씩 깨닫고 나면, 그제야 가족의 유대감이라든지 자식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했어야 할 역할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리고 자신이 전달해줄 수 있는 것에 돈만 있는 게 아니라 지식과 감각까지도 포함된다는 걸 알게 돼요.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고, 그걸 볼 눈이 없었다는 걸 깨닫는 거죠. ‘지금이라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됐으니 내가 그렇게 나쁘게 산 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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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심리백과송형석 등저 | 시공사
정신과의사 10명이 수십 년간 진료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내담자들의 다양한 고민거리들을 생애 단계별로 나누어 구성한 책이다. 일찍이 ‘우울’ ‘불안’ ‘감정조절’ 등 단편적인 주제를 다룬 심리서는 많았지만, 이렇게 사람의 전 생애를 좌우하는 모든 심리 문제를 집대성한 책은 없었다. 그야말로 국내 최초로 시도된 ‘심리서의 완결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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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초밥왕’ 안효주 셰프 “아직 내 초밥에 만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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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 이 수식을 가장 앞에 놓아야 할 것 같다. ‘미스터 초밥왕’

 

안효주 셰프는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신라호텔에서 근무하고 같은 해 청담동에 ‘스시효’를 열어 지금까지 국내 초밥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식어 ‘미스터 초밥왕’은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작가 테라사와 다이스케가 그를 찾아오면서부터 시작됐다. 셰프를 찾은 작가가 일본에 없는 초밥, 한국에만 있는 초밥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안효주 셰프는 특유의 ‘탐구심’으로 단 하나의 초밥에 도전했다.

 

그렇지만 이 극적인 일화는 안효주 셰프의 초밥 인생에 그저 지나가는 한 점일지 모른다. 시종 담담하게 뱉은 셰프의 이야기는 그 모두가 밑줄 긋고 싶은 말들이었으니까. 그는 화가 나면 손끝에서 독이 나온다고 했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요리로 보여줘야 한다고 했으며, 손님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한다고도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칼을 가는 ‘검객’ 같았다.

 

셰프의 머릿속 한 구석엔 늘 요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호텔 시절, 꿈에서 본 요리를 다음날 만들어 ‘꿈의 냄비’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적도 있었다. 그 기운은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 손님이 그를 향해 요리가 아니라 예술을 한다고 말하도록 했다. 요리에 끝이 없듯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틈을 메우기 위해 ‘초밥왕’ 안효주 셰프는 지금도 노력한다. 안효주 셰프의 초밥을 맛본 사람은 이해 못할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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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식재료에 대한 철학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시장 나가서 생선 사고, 지점도 한 번 씩 가봐야 해요. 할 일이 매일 있어요. 수시로 남대문 시장에서 그릇이라든지 도마도 보고요.

 

직접 그릇이나 도마까지 보러 가신다고요?

 

공산품처럼 규격화되어 있는 것은 주문해서 쓰면 되는데요. 용도에 따라서 ‘저 그릇은 어떤 요리를 담아야겠다’ 생각하면서 사야하기 때문에 시키지를 못하는 거죠. 전화로는 불가능하고요. 채소 담는 그릇을 사야하면 가서 보고 채소가 어떤 색깔이니까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아야겠다, 이런 걸 구상하면서 사요.

 

생선 역시 매일 새벽시장에 직접 사러 간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날그날 생선이 다 다르기 때문에요. 기본적으로 광어, 도미 이런 활어는 다 똑같은데요. 선도는 매일 달라요. 산지도 다르고요. 또 철따라 나오는 생선들도 있고요. 시장 상황이라는 것이 생물이기 때문에 공산품처럼 규격화된 게 없단 말이에요. 잘 나오던 것이 오늘은 안 나오는 것도 있고, 쭉 안 나오다가 오늘 나오는 것도 있고요. 가령 봄 전어는 작아요. 그런데 이 시기가 지나버리면 자라서 값어치가 없어요. 그러니 잘 보고 사야해요.

 

전어라면 가을을 떠올리기만 했는데 봄 전어라고요.

 

원래 초밥용은 봄 전어가 맛있어요. 작은 거요. ‘싱꼬(新子)’라고 부르는데요. 출세어(出世魚)라고 하죠. 작을 때, 중간일 때, 컸을 때 부르는 이름이 다른 걸 출세어라고 해요. 전어도 그렇죠. 작은, 손가락만 한 걸 ‘싱꼬’라고 해요. 중간만큼 성장을 하면 ‘고하다(こはだ)’라고 하고, 가을전어처럼 큰 걸 ‘고노시로(子の代)’라고 하죠. 부르는 이름이 다 달라요. 그중 초밥용은 작은 것일수록 맛있고 값어치가 있어요. 이 시기에 이걸 못 구하고 성장해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을 만나기 위해 시장을 가는 거고, 시장 조사가 필요한 거고, 생선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거예요.

 

휴일은 있으시죠?(웃음) 거의 쉬는 날도 없이 다른 식당에도 가보고 늘 연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옛날에는 안 쉬고 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더라고요. 체력도 많이 떨어지고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씩은 쉬어요. 쉬는 날도 특별하게 일이 있으면 일도 보긴 하지만요. 주로 일본으로 많이 가는데요. 평상시에 요리라는 것이 머릿속에 항상 있으면 어디 가서 외식을 하더라도 그게 다 공부예요. 평상시 관심이 없으면 색다른 식자재를 봐도 ‘저것으로 뭘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안 들어요. 머릿속에 뭔가 갈구하는 것이 항상 자리 잡고 있으면 새 식자재를 보는 순간 저걸 가지고 뭘 해보자는 새로운 생각이 들죠. 작곡가가 논두렁을 걷다 악상이 떠오르면 팔에다 쓴다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야 그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요리에 대한 갈구가 여전하단 말씀이시군요.

 

일주일 전부터 달팽이를 쓰고 있어요. 우연히 TV를 봤는데 국내에 달팽이 양식을 하시는 분이 있더라고요. 달팽이 점액질이 굉장히 좋다고 해요. 무기질도 풍부하고요. 그래서 여성분들 화장품으로도 쓴다고 하는데 그걸 요리에 접목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일식에 접목하긴 사실 좀 무리가 있지만 바로 그곳에 전화를 해서 달팽이를 받아 테스트를 해봤어요. 굉장히 식감이 좋더라고요. 맛도 좋고요. 손님들한테 달팽이라고 얘기 안 하면 몰라요. 한식 같으면 고춧가루 무쳐 쓰면 되는데 일식은 담백한 맛을 내야 하잖아요. 저는 데리야끼 식으로 해서 쓰고 있어요. 일단은 먹어서 맛이 있으니까 고기를 쓰다가 그걸로 교체를 했거든요. 그런 생각은 요리에 대한 갈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냥 지나가요. 자꾸 변화를 줘야 하기 때문에 더 좋은 식자재가 없는가, 어떤 것이 없는가, 계속 추구를 해야 해요. 계란을 하나 쓰더라도 산 속에서 닭을 방사해서 얻은 계란을 쓰고요. 일반 계란보다 10배는 비싸거든요. 그래도 그런 걸 갖다 쓰죠. 어디에 뭐가 좋다고 하면 어디라도 가서 사오려는 마음이 있어야죠. 그래야만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거지 현실에 머물러 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좋은 식재료에 대한 철학이기도 하겠죠?

 

쌀부터 시작해 물도 산 속에 미네랄이 풍부한 물을 길어다 밥을 짓거든요. 그런 부분은 손님들은 모르죠. 수돗물로 씻든 그 물로 씻든 그런 것까지 알 정도의 미각을 갖는다는 건 사실 어렵잖아요. 그렇지만 요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철학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아무래도 수돗물보다 조금이라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는 거고요.『미스터 초밥왕』이라는 만화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잖아요. 진짜 맛있는 밥을 지으려면 벼가 먹고 자란 물, 예를 들어 강원도 철원쌀을 쓴다면 철원에서 물을 길어다 밥을 해야 진짜 맛있는 밥이 된다고 하잖아요. 참치를 녹일 때도 소금을 물에 풀어서 거기 담가 해동시키는 경우가 있거든요. 참치가 살았던 환경을 만들어 재료 준비를 하면 더 좋다,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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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말이 나온 김에 소금 얘기를 좀 해주세요. 초밥을 비롯해 요리에 있어 특히 소금을 빼놓을 수 없겠죠.

 

소금은 요리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기둥맛이니까요. 오미(五味, 신맛, 쓴맛, 매운맛, 단맛, 짠맛)라는 게 있잖아요. 일본 사람들은 거기에 감칠맛까지 더하는데요. 모든 요리의 기둥은 짠맛, 거기서부터 시작돼요. 그래서 소금을 제일 좋은 것을 쓰려고 노력하는 거죠. 지금 쓰고 있는 소금보다 더 좋은 소금이 있다면 어디라도 가서 구해다 쓰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세계의 소금을 다 써봤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천일염만큼 감칠맛 나는 소금은 없었어요. 지금 쓰고 있는 소금은 15년 된 거거든요. 그 소금은 일본 손님들도 먹어보고 진짜 맛있다고 해요.

 

“자기만족을 하면 거기서 끝이다” 이런 말씀도 하셨는데 최고의 자리에 있지만 안주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당연하죠. 저도 처음부터 요리가 좋아서 시작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지금 세대들은 어릴 때부터 요리가 정말 좋다고 시작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친구들과 저를 비교하면 저는 또 비교도 안 돼요. 그 친구들은 정말 열정적으로 좋아서, 즐기면서 요리하는 친구들이란 말이에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요리지만 어차피 시작했고, 잘할 수 있는 게 요리밖에 없으니까 이거라도 평생 업(業)으로 삼고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한 거고요.

 

‘장이’라고 하죠. 요리도 마찬가지고 이런 손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요. ‘장이’들이 특히 그렇죠. 자기만족을 하면 그 순간에 끝이에요. 간혹 자기만족에 도취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것은 오래 못 가는 거죠. 거기서 끝이란 말이에요. 자기가 어떤 일을 했을 때, 만들어놓은 걸 봤을 때 항상 긍정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거든요. 부정적인 시각으로 봐야 부족한 점, 개선할 점이 발견된단 말이에요. 해놓고 ‘와, 잘했다’ 하면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초밥을 하고 있지만 만족을 못해요. 가운데가 빈 초밥을 만들고, 손님들이 맛있다고는 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마스터를 못했단 말이에요. 손님들은 감동을 하고, 만족을 하지만 저는 뭔가 부족한 걸 느껴요.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요. 아직 부족한 이만큼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아직도 나의 초밥에 만족하지 못하신다고요.

 

일부러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또 일본에 계신 스승님이 보시면 부족함이 보일지도 몰라요. 계속 하는 거죠, 계속.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하는 거예요. 장인정신이라는 게 다른 게 없어요. 하다보면 싫증날 때도 있지요. 그 싫증나는 부분을 그냥 참고 또 하고, 또 하는 게 장인정신이지 다른 게 아니에요. 한계를 넘으면 또 한계가 있는 거고요. 그래서 고수가 돼도 만족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진짜 ‘장이’들은 그럴 거예요. 학문여역수행주(學問如逆水行舟)란 말이 있잖아요. 강물에 흐르는 돛단배처럼 노를 안 젓고 가만히 있으면 뒤로 쓸려 내려간다는 말이죠. 올라가지는 못할망정 계속 노를 저어야 거꾸로 안 떠내려가지 쉬는 순간 떠내려가 버리니까요. 제자리라도 있으려면 계속 노를 저여야 해요. 10년 전에 비하면 저도 지금은 노력을 안 하는 편이지만 새로운 식자재, 조리법에 대한 추구하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체력은 어쩔 수 없지만 생각만큼은 젊은 사람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아 계속 활발하게 움직여요. 육신에는 세월이 있을지 몰라도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으로 꼽으세요?

 

마음이죠, 마음. 정성이라고 하잖아요. 어느 순간 ‘나는 이걸 최우선으로 삼아야겠다’ 하고 딱 떠올랐던 게 위생이었어요. 굳이 순서를 정한다면 첫째가 위생, 두 번째가 정성, 세 번째가 맛입니다. 삼각형이나 마찬가지예요.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어요. 우선 깨끗해야 해요. 정말 의사들보다 더 철저한 위생관념이 있어야 해요. 아무리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도 그걸 먹은 손님이 배탈이 났다, 아무 가치가 없는 거죠. 개인위생은 물론이고 쓸고 닦고 위생적으로 해야 하고요. 그렇게 하다보면 정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맛은 저절로 나온다고 생각해요. 정성이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만들면 상대방한테 충분히 전달이 된다고 확신하고, 믿어요. 보이진 않지만 강력한 교감이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화가 나면 아예 요리를 안 하는 게 좋죠. 안 그러면 ‘으쌰’해서 최면을 걸어서 손님과의 기분에 동화된 다음에 요리를 해야죠. 화가 나면 손끝에서 독이 나온다고 생각을 해요.

 

가장 기본적인 동시에 놓치기 쉬운 마음 자세예요.

 

몇 년 전에 프랑스 손님이 왔어요. 제가 서브를 못했어요. 일곱 분까지밖에 못하고 나머지는 다른 직원들이 하니까요. 그 일행이 다 먹고 디저트를 먹으면서 저를 불러요. 갔더니 프랑스 손님이 저더러 요리사가 아니라고 했대요. 예술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저는 서브에 정신 팔려서 했는데 그 모습을 본 거죠. 그건 보여준 게 아니고 그분이 느낀 거예요. 손님과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한다고 얘기하는데요. 내가 만들어준 요리를 손님이 만족 못하면 내가 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렇다고 맛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실례기도 하고, 위생적인 측면도 있으니 해선 안 되죠. 요리사는 말이 필요 없어요. 일본의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요리로 보여주는 거지 세일즈 하는 것처럼 말을 해서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고요. 요리로써 표현을 해서 교감이 이뤄져야 한다고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해요. 말보다는 행동으로, 요리로 보여주자는 걸 많이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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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게 중단 없는 노력을 해야


복싱 선수, 해병대, 지금은 최고의 일식 셰프, 삶의 궤적에서도 성정이 느껴져요. 그렇다면 왜 일식이었을까 궁금증도 생기고요.

 

운동을 하면서 큰물에서 놀아보자고 무작정 상경을 한 거예요. 먹고 잘 데가 없으니까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들어간 것이 식당이에요. 시골 뒷집 살던 선배가 있던 곳인데 그 선배가 한식당에 있었다면 한식 요리사가 됐을지도 몰라요.(웃음) 그게 계기가 돼서 요리사가 된 거지 처음부터 일식 요리사가 돼야겠다, 이런 건 아니에요.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일식이라는 게 분명 마음에 닿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일식은 하다보니까 저하고 적성이 맞는 것 같았어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써야 하는 부분 같은 것이요. 단칼에 썰어야 하잖아요. 이런 부분이 저와 좀 맞는 것도 같아요. 다 장단점이 있어요.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죠. 그저 여러 가지가 맞았던 것 같아요. 하다보니까요. 제가 맞춘 건지 일이 맞은 건진 몰라도요.

 

힘든 순간도 있었겠죠?

 

많이 있죠. 슬럼프라는 게 다 있잖아요. 그런 걸 겪고 잘 넘어서면 도약을 하고, 못 넘어서면 거기서 끝나죠. 모든 사람이 그래요. 저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안 해야겠다, 이런 생각 가졌을 때도 있었고요.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인내했던 것이 오늘날의 저를 있게 만들었던 거겠죠. 선배와의 관계라든지 이런 것들이 자극이 돼서 인내심을 더 유발시킨 효과도 있었을 거고요. 그때 인내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겠죠. 당시엔 몰랐죠. 참으면 더 좋은 일이 있겠지란 생각을 가질 수가 없죠. 그런 혜안은 없어요. 사람이 앞날은 모르잖아요. 내일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그러나 그냥 일단 참자, 내가 지금 참지 않으면 스승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되는 거다, 이런 일념으로 참은 건데 지금 생각하면 인내했던 것이 참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런 생각도 들죠.

 

이런 이야기는 후배나 제자 분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는 내용이에요.

 

많이 해주는데요.(웃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죠. 그 의미를 모르니까요. 10년, 20년 후에 알게 되죠.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죠.

 

재능이 없다고 느끼고, 내일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힘든 거잖아요. 아무리 열심히, 꾸준히 해도 안 될 것 같아 불안하고요. 그럴 때 ‘인내심’이란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들릴 거예요. 받아들이기 힘들만도 하고요.

 

성실하게 중단 없는 노력을 해야 해요. 그게 어떻게 보면 장인정신이죠. 인내를 해야 하는데 어려운 난관이 닥치면 포기하고 쉬운 길로 돌아간단 말이에요. 그걸 깨고 나가야 하는데 말이죠.

 

누구나 그 어려움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다 깰 수 있죠. 다만 시간이 좀 길고, 짧을 뿐이지 다 합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못 당하는 거예요. 터득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간다는 자체가 굉장한 고통의 연속이에요. 최고가 되려면 싫증이 나도 계속 해야 한단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최고가 될 수 없잖아요.

 

제가 색소폰을 배운지 4년 째 되는데요. 실력은 초보자 수준이지만 선생님과 약속을 했어요. 대중가요 같은 걸 불고 싶지 반음스케일을 계속 연습하는 것은 지루해요. 똑같은 걸 반복해야 하잖아요. 그러니 잘 안 해요. 하지만 그걸 마스터 해야만 연주에 도움이 된단 말이죠. 저도 싫증이 나니까 연습을 안 하고 새로운 노래만 자꾸 불렀어요. 그러다 한 달 전에 TV에서 손목이 없는데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을 봤어요. 그걸 보는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선생님과 약속한 거죠. 올해 안으로 반음스케일을 선생님만큼은 아니어도 자유자재로 할 때까지 하겠다고요. 지금은 가면 싫증이 나도 계속 해요. 갈 때마다 똑같은 걸 계속 반복하는 거죠. 나중엔 손이 저절로 가더라고요. 그렇듯 요리도 마찬가지예요. 가운데가 빈 초밥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해야죠. 어떻게 하면 더 부드럽게 만들까, 계속 고민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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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초밥왕의 탐구심

 

가운데가 빈 초밥, 셰프님의 초밥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예요.

 

초밥이라고 다 같은 초밥이 아니에요. 같은 모양이어도 하나는 속이 비어있고, 하나는 꽉 뭉쳐놓은 거란 말이에요. 먹었을 때 느껴져요. 속이 빈 초밥은 싹 풀어지고, 다른 것은 밥알이 씹히고요. 이걸 저 역시 자유자재로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계속 하는 거예요, 될 때까지. 칼잡이가 눈을 감고 떨어지는 낙엽을 삼등분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얘기를 제자들은 이해하기 힘들죠. 산 넘어 산이거든요. 그걸 아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계속 올라가는 거고 그걸 모르면 거기서 끝이에요. 더 올라갈 수가 없어요.

 

무서운 선생님이세요?(웃음)

 

그렇진 않아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법도 달라야 해요. 리더상도 달라야 하고요. 선배한테 맞아가며, 야단맞으며 배웠지만 지금은 그걸 답습하면 안 되겠다 생각해요.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거죠.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지 보여주고요. 그래야 이해를 하고 따라와요. 직접 보여줘야 해요. 이렇게 해야 어떤 면이 좋다는 것까지 얘기를 해줘야 해요. ‘이렇게 하라니까 왜 안 하냐’ 하면 나는 알아도 제자들은 모르잖아요. 방법을 이제는 달리해야 하는 거죠. 무섭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말을 물 먹는 곳까지 데려갈 순 있어도 억지로 먹이면 다 토한다고 하잖아요. 억지로 그렇게 하진 않아요.

 

『미스터 초밥왕』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제안이 왔을 때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을까요?

 

그것도 탐구심이 없었으면 안 했을 거예요. 그분이 일본에 없는 초밥, 한국에만 있는 초밥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해서 알았다고 대답을 했어요. 답을 하고 나서 생각하니 막막한 거예요. 일주일 후에 오겠으니 만들어 달라 해서 머리를 쥐어 짠 거죠. 생선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똑같고요. 생각 끝에 우리나라에 인삼이 유명하니까 이걸로 초밥을 만들면 어떨까 싶어 여러 테스트를 한 거죠. 삶아도 보고, 생으로도 해보고, 조려서도 하고요. 그러다 접점을 찾은 게 삶지 않고 90도 정도의 양념장에 하룻밤 재우니까 아삭한 식감도 유지가 되면서 양념맛도 스며들고 인삼의 쓴맛도 빠진 거예요. 먹어보니 깍두기처럼 아삭하게 씹히고 쓴맛은 없고 단맛도 나더라고요. 그렇게 만들어서 줬더니 인삼이 사포닌 때문에 쓴데 그렇지 않고 식감도 좋고 좋다, 이걸 책에 올리면 안 되겠느냐 하더라고요. 특별한 것도 아니니까 올리라고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그렇게 된 건데 그분도 탐구심이 있고, 저도 탐구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탐구심’이 핵심이네요.

 

창작 능력이죠. 열정이 있어야 해요. 열정이 없으면 몰입도 안 되고요. 요리, 운동, 음악 모두 그렇죠. 항상 자기 콘텐츠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만 새로운 것을 봤을 때 링크가 딱 되는 거죠. 관심이 없고 머릿속에 이게 빠져있으면 아무리 좋은 식자재를 발견했다 해도 바로 링크가 안 돼요. 머리 가장자리에 요리가 항상 자리 잡고 있으면 호박이든 죽순이든 어떻게 요리로 풀어볼까 바로 바로 링크가 되는 거예요. 등산을 하다가도 갑자기 날씨가 더우니까 샐러드를 어떤 걸 해볼까, 하고 순간적으로 떠오를 때가 있어요. 알로에를 국수처럼 썰어서 해보면 어떨까, 해보는 거예요. 맞는 경우도 있고 안 맞는 경우도 있지만요. 그러니 요리하는 꿈도 가끔 꾸죠.

 

꿈이요?

 

호텔에 있을 때 꿈속에서 요리했던 재료로 해서 요리를 낸 적이 있어요. ‘꿈의 냄비’라고 이름 붙여서 판매한 적도 있었죠. 꿈속에서 요리를 하면 맛도 다 느껴져요. 어떤 것에 확 집착하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어차피 요리를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요리를 해야 해요. 요리에는 끝이 없으니까 관에 못질할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생각하고 페이스를 조절하게 됐어요. 10년 전만 해도 열심히 해서 빨리 결승 테이프를 끊고 좀 쉬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결승선은 죽을 때가 결승선이거든요. 지금은 그걸 깨달아서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하려고 해요.

 

10년 전이라면 호텔에서 나와 ‘스시효’를 열었을 때 말씀이시죠?

 

네, 그때는 진짜 3년 동안 한 번도 안 쉬고 일을 했어요. 그것도 새벽 5시부터 나와서 밤 12시까지요. 손님들 가시면 문을 잠그고 갔으니까요. 그때는 긴박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랬죠. 이걸 오픈해서 문 닫으면 끝이라는 각오로 했기 때문에 몇 년을 안 쉬어도 피곤하지가 않은 거예요. 지금은 그렇게 하면 쓰러지죠.

 

영감이라는 게 사람들이 보기엔 한 순간 딱 떨어지는, 내려오는 것 같지만 계속 생각하고 연구해야 꿈까지 꾸게 되고 영감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머릿속에 항상 있어야 해요. 관심이 있어야 영감도 생기고 그러는 거죠. 또 구상한 것을 금방 실천해봐야 해요. 생각만 하고 실천을 안 하면 의미가 없어요. 부뚜막 소금도 넣어야 짜지, 소금 한 가마니 갖다 놓아봐야 아무것도 안 하면 의미가 없는 거죠. 실천해보고 안 되는 게 있으면 뭐가 안 되는지 보고 계속 해야 해요. 뭘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죠. 최선을 다하고 하늘에서 천명을 바라야지 70~80%밖에 안 해놓고 좋은 성적이 나오길 바라선 안 되죠. 권투선수도 시합 전에 이미 게임은 끝난 거예요. 시합 날짜를 받아놓고 정말 뼈를 깎는 고통으로 노력하면 계체량 끝나고 이미 승부는 끝난 거예요. 99%를 했으면 내가 이길 거고, 80%만 했으면 질 거고요. 이미 끝난 거예요. 경쟁자가 있기 때문에요.

 

저희 주방장들은 어떤 특급 호텔과 비교해도 안 떨어질 정도의 실력이에요. 그러나 잘한다고 제가 얘기할 순 없어요. 제게는 항상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위생적인 측면이나 디테일하게 요리하는 것 보면 어떤 특급 호텔 요리사와 일을 해도 안 떨어질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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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온 요리법

 

장래희망이 요리사인 학생들도 많다고 하고, TV에서도 요리가 많이 나와요. 그런 것 보면 어떠세요?

 

좋다고 생각해요. 여기에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일은 초밥왕’이라고 해서 TV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왔던 친구가 있어요. 지금 스물여섯 살인데요. 지금은 아주 베테랑 수준이죠. 그런 친구들이 있듯이 지금 학생들이 요리사를 꿈꾸는 건 좋은 일이고 어렸을 때부터 관심 있는 분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에요. 그러나 너무 어렸을 때부터 하는 건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저는 고등학교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100세 시대라면서요. 70, 80살까지 일을 해야 하니까 그때까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야 행복하죠. 의사도 적성이 안 맞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사람은 명의가 안 되잖아요. 정말 불행한 거예요. 진짜 병을 고치고 의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명의가 탄생하죠.

 

물론 TV에 나오는 스타 셰프를 보고, 그 단면만 보고 요리를 한 사람은 다 도중하차예요. 요리사라는 직업이 만만찮은 직업이에요. 체력도 좋아야 하고, 손도 많이 데어봐야 하고요. 사람들과 다른 생활 패턴이기도 하죠. 남들 쉴 때 일하고, 밤늦게까지 해야 하고요. 여러 제약사항이 많아요. 그런 것을 간과하고 화려함만 보고 요리한 사람은 금방 포기를 해요. 그런 사람이 많죠. 여기 와서도 하루 나오고 안 나오는 사람도 많아요. 정말 만지고 요리하길 좋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어쨌든 저는 관심이 높아지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책에 담긴 요리들을 보면 아무래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요리법은 아니에요. ‘도미머리는 50도 물에 담갔다 씻어 비늘을 제거한다’처럼요. 온도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저온 요리법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시는 중이라고요.

 

일본에 저온 요리를 연구해놓은 분이 계세요. 그분 연구를 토대로 검증을 하면서 요리하고 있는 거거든요. 한 가지 요리를 하기 전에 재료들을 밑처리, 기본 요리를 먼저 하는 거죠. 저온찜을 한 다음 그 재료를 가지고 요리한다는 개념이에요. 굉장히 번거로울 수가 있어요. 저희는 전용 찜통이 있고, 온도계가 있기 때문에 당근은 몇 도에서 몇 분 쪄서 내놓고, 샐러리는 몇 도에서 몇 분, 이렇게 할 수 있지만요. 다 찌는 시간, 온도가 다르거든요. 좀 번거롭죠, 아무래도.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요리 자체가 굉장히 격이 높아지고, 맛있는 요리가 돼요. 위생적으로도, 맛으로도 한 단계 높아지는 그런 요리가 돼요.

 

일본에 소개된 저온 요리법에 관한 책을 번역할 계획이라고 들었어요.

 

번역은 다 해놓은 상태예요. 내년 정도에 책을 한 권 쓰려고 일본 요리사 분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저온 조리법에 관한 책인데 그대로 요리를 한다면 굉장히 획기적이고 맛있는 요리가 될 거예요. 그 요리법이 더 확산되면 많은 분들이 더 좋은 요리를 맛볼 수 있겠죠.

 

이곳, ‘스시효’에서도 저온 요리법으로 조리되는 요리가 있나요?

 

채소는 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표고버섯도 그냥 쓰지 않고 다 쪄서 사용하고요. 훨씬 맛있으니까요. 요리는 상상만 가지고는 안 돼요. 해서 먹어보고 내가 했던 기존 요리 보다 훨씬 맛있구나 느끼면 그렇게 하는 것이죠. 해보고 훨씬 맛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책에도 그 요리법을 쓴 거고요.

 

아직도 자신의 요리에 만족하지 못한다고도 하셨고, 다 마스터하지 못했다고도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자신 있는 요리, 권할 만한 요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꼽을 수 있을까요?

 

초밥을 완성을 못했는데 어떻게 자신 있는 요리라고 할 수가 있어요? 제 초밥을 드시는 분이 평가할 일이죠. 내가 자신 있다, 해서 내놓는다는 것은 안 맞는 말이에요. 손님이 그것에 대한 가치를 논할 자격이 있는 거죠. 아무리 자신 있다고 해도 손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건 아닌 거예요. 평가를 내가 할 수가 없어요. 너무 자만이죠, 그거는. 물론 다 할 줄은 알죠. 그러나 자신 있다는 얘기는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자만은 금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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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셰프들 이종임,안효주,박효남,여경옥 공저/이길남 편저 | 생각정거장
각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요리 명장 네 명이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한 데 뭉쳤다. 본인들의 삶을 통해, 그리고 거기서 얻을 수 있었던 음식 철학을 통해 업계 후배들은 물론 우리나라 음식문화 전반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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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석 백현진 “음악에 태도가 없으면 다 껍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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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석-백현진 콤비는 백현진 솔로 앨범이나 공연에서 꾸준히 함께 해왔다. 하지만 새로 발매한 앨범은 연주 규모나 제작 방식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방백'이라는 새로운 문패를 걸고, 앨범 <너의 손>을 내놓았다.

 

19년 동안 함께 음악을 했다는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할 때도 호흡이 참 잘 맞았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날숨과 들숨처럼 자연스럽게 다른 한 사람이 정리하거나 설명을 채워나갔다. 둘은 무엇보다 <너의 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참으로 즐겁고 좋았단다. 제작 당시를 곱새길때마다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토록 행복하게 가꿔진 음악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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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손>이 발매 예정일보다 열흘 늦게 발매되었다. CD 발매가 연기된 이유가 있나?

 

: 저희 성에 안 찼어요. 사실 뭐가 달라졌을까 하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성에 차게 만들자 싶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밸런스를 조금씩 만지기도 하고요.

 

: 전시회에 액자를 걸었는데 약간 삐뚤어진 거에요. 그런데 이것을 못 참는 거죠. 아주 미세한 부분이긴 한데 그래도 한번 나오면 끝이잖아요. 대대적으로 뭔가를 바꾸고 이런 건 아니고 약간의 수정, 보완을 했어요. 그래서 수정 전과 후 앨범 두 가지를 놓고 들어도 뭐가 바뀐 거지? 하고 마치 숨은그림찾기 같을 수도 있습니다.


<너의 손>은 그동안 두 사람이 한 작업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 그렇대요. (웃음)

 

: 많이들 그렇다고 하네요. 저흰 좋아요.

 

사실 두 사람의 작업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렇게 '방백'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 문패를 다시 달고 새로운 마음으로 일해보자 그런 게 있었어요.

 

연극의 '방백'과도 관련이 있나?

 

: 처음에는 전혀 그런 의미가 없었어요. 소리로 이렇게 하다가 방백 예쁘다 하길래. 그러다가 연극의 방백도 있구나 싶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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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백방'보다는 '방백'이 어감도 좋고 멋지다. 방백의 탄생은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 예전에 저희가 같은 소속사였어요.

 

: 송홍섭 대표님이 만든 소속사였는데 당시에 삐삐밴드가 있었고 유앤미블루, 어어부 프로젝트가 있었죠.

 

: 막상 회사 안에서는 서로 부딪힐 일이 없다가 홍대의 '블루데빌'에서 만났어요.

 

: 거기가 뮤지션들의 구락부(클럽) 같은 곳이었는데 주인 누나가 밴드들을 잘 챙겨줬어요.

 

: 거기서 오가며 보긴 했는데 본격적으로는 1997년 어어부 프로젝트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친해졌죠. 그때부터 동네 친구처럼 지냈어요.

 

이번 방백 앨범은 두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했다. 어떻게 작업이 이루어졌나?

 

: 보통은 제가 흥얼거리면서 끼적거린 곡에 준석이 형이 기타를 입혀요. 그렇게 어느 정도 모양이 잡히면 공연을 하면서 오늘은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하면서 노래를 완성해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사람들이 붙기 시작한 거죠.

 

사람들이 붙게 된 계기는 뭔가?

 

: 이것에 대해서는 준석이 형과 3년 이상을 얘기했어요. 두 사람이 같이 어떤 물건을 만들까를 고민했죠. 사실 그동안처럼 쭉 한 번에 기록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소위 음악을 좀 까다롭게 듣는다는 친구들한테 '어이 뭐 재밌네.' 하는 드라이한 물건이 나왔겠죠.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 다른 식으로 가보자 이런 얘기를 하면서 서로 덜 갸우뚱거릴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둘의 합은 나와요. 그동안 합이 없었던 게 아니니까. 그러다가 얘기가 나온 게 '대상'이라는 거예요. 원래는 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가 좋으면 땡'이었는데 말이죠. 처음에는 대상을 어떻게 고려할까 어떻게 맞출까 고민을 하다가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구나 싶었어요. 뭔가를 맞춘다는 건 난 이만큼 잘났는데 너한테 맞춰줄게, 하고 잘난 체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이 든 게 누군가를 위해 밥을 차릴 때 마음이라는 게 있잖아요.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고 정성도 있어야 하는 건데…. 하면서 둘이서 쭉 음악의 방향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앨범에 참여한 사람들이 거의 재즈 쪽의 슈퍼밴드다. 어떻게 모이게 되었나?

 

: 일부러 재즈 쪽 사람들을 초점에 맞춰서 모은 건 아니었어요. 우선 구조를 만들자고 해서 드럼과 베이시스트 얘기를 하다가 서영도씨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영도 형을 만났죠. 그때 한 이야기가 '연주 잘하는 사람과 함께 하자'가 아니라 '편한 사람들하고 함께 하자'였어요. 그랬더니 신석철도 편하고 윤석철도 편하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렇게 하나둘씩 사람들이 붙었어요. 손성제, 김오키, 최선배 선생님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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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굉장한 프로 연주자들인데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고 녹음했는지 궁금하다. 라이브를 하듯 자유롭게 소리가 부유하는데 그것이 산만하지 않고 정돈되어 있는 게 놀라웠다.

 

: 저희는 '이 노래는 어떤 이야기며, 우리가 원하는 그림이 이런 방향이다.' 정도만 설정하고 나머진 굉장히 열어놓고 작업을 했어요. 초반에는 연주하러 오시는 분들이 '내가 뭐를 해줘야 하지'하는 세션 마인드로 연주를 하다가 점점 '뭘 같이 어떻게 하지'로 바뀌었어요.

 

: 한번은 시간이 없어 온종일 열 시간 넘게 열 곡 정도를 녹음했는데 굉장히 혹사하는데도 너무 좋대요. 악보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와서 계속 만들어 나가니까요. 앨범 나오면서 회사에서 연주자들에게 소감문을 받아서 보여 줬는데 그걸 보고 마음이 참 좋았어요. 그런 마음들이 앨범에 다 묻어있겠죠.


작업 과정 자체가 워낙 재밌고 좋았던 것 같다?

 

: 저희가 가끔 공연하면 같이 작업한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서울시향에 있는 '임가진'이라는 친구도 자기 일 끝나자마자 달려오겠대요. '윤석철'이라는 친구도 함께 공연하면서 무언가 말로 하긴 힘들지만 울컥하는 게 몇 번 있었대요. 영도 형도 '야 우리 공연 언제 하냐' 이러고요.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면서 방백이 우리 둘의 합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요.

 

: 형도 저도 음악을 오래 했긴 하지만 악사들끼리 이렇게 모여 작업을 하는 게 음악의 원형이었을 텐데 싶어요. 와 이런 경험을 내가 맛보는구나 싶어요.<너의 손> 작업하면서 느끼는 게 많았어요.

 

앨범을 듣는데 특히 백현진 씨가 코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마치 라이브를 듣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보컬 녹음은 원테이크로 이루어졌나?

 

: 나이 먹어서 호흡이 불안해요. (일동 웃음) 저는 보통 그렇게 녹음해요. 라이브 하는 것처럼 슥 불렀어요.

 

: 어떤 분들은 노래를 저렇게 해도 되나 할 거예요. 그래도 저는 그게 좋아요. 저희와 신석철, 서영도 넷이서 기본 틀을 만들면서 녹음을 했거든요. 이걸 가이드라고 하잖아요. 근데 나중에 보면 그 에너지와 느낌이 너무 좋은 거예요. 실제 녹음 때는 이걸 재현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리고요.

 

: 그래서 이번에 다시 발매되면서 보컬을 가이드 버전으로 교체한 곡이 하나 있어요. 하지만 그게 뭔지는 비밀입니다. (웃음)


다시 들으며 찾아봐야겠다. 수록곡 제목들이 모두 '두 자'다. 일부러 두 글자로 지은 건가?

 

: 제목을 짓다 보니 우연히 몇 곡이 두 자씩 나오기에 '에이 그냥 이번에는 다 두 자씩 하자' 그렇게 되었어요.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언제부턴가 제목도 그렇게 안 중요하게 되더라고요. 옛날에 '어어부프로젝트' 때는 제목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몇 개월 걸리고 그랬는데.

 

'아송'을 보면서 이거 일부러 글자 수를 맞춘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웃음)

 

: '아송'은 형이 A 코드라고 해서 'A Song'이었는데 결국 나중에 코드가 바뀌었어요. 근데 형이 'A Song'이라고 보냈는데 이게 '아송'이라고 읽혔어요. 아송, 이 발음이 예뻐서 형한테 나 아(我)에 소나무 송(松), 아님 두려울 송(悚)을 해서 '나의 소나무', '나의 두려움' 이것도 재밌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아송'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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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배치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어떤 스토리가 있는 건가?

 

: 텍스트에 많이 집중해서 배치한 것은 아니고요. 사운드를 이렇게 하면 무리가 없으려나 하면서 쭉 이었어요.

 

: 저도 나중에 보니까 흐름이 말이 되긴 한 것 같아요. (웃음) 들으시는 분들이 각자 스토리를 가지고 해석을 하시는데 말이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앨범 커버 뒷면에 'LOVE'라고 적혀있다. 앨범의 주제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을까?

 

: 친구가 포도를 다 먹고 가지를 갖고 'BYE'를 써놓았어서 저도 이것저것 만들며 놀다가 'LOVE'를 만들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어요. 'LOVE'는 쉬운 낱말이고 좋은 단어니 뒷면에 쓰면 어떨까 해서 넣게 됐어요.

 

: 앨범의 주제를 생각해보면 결국 세상에 대한 얘기인 것 같아요. 살고 있는 이 시점의 우리 얘기고요.

 

: 그죠. 결국 인간에 대한 얘기죠

 

앨범을 만들면서 두 사람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3년 넘게 했다고 하는데, 분명 방백의 음악이나 가사를 들으면 예술의 본질적인 자세, 근본적인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 요즘은 음악이나 작업 이야기를 할 때 점점 '태도'에 대한 이야기들이 빠지죠. 그런 것들이 올드하다고 치부하고. 그런데 정말 그럼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스타일? 웃기지들 말라고 해요. 그럼 뭐에요. 장르에요? 몇 년 전 기준으로 하면 런던에서 유행하는 덥스텝이에요?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계속 잔가지들을 쳐나가다 보면 뭐가 남을지를 생각해봐야 하죠. 저희의 지금 수준에선 '마음'이나 '태도' 이런 낱말들을 쓰게 되는데요. 누군가는 정말 싫어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인사동에서 막걸리 마시면서 하는 소리를 왜 저렇게 하고 있어' 하겠지만 미안하지만 정말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군요' 하는 말처럼 평범하지만 꼭 사용할 수밖에 없어요.

 

: 저도 할 얘기가 딱 그거에요 기본인 것. 어떤 면에서 음악에 태도와 마음이 없이는 다 껍데기라고밖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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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그렇고 이전 인터뷰들에 음악을 '물건'이라고 표현하는데, 이유가 있나?

 

: 언제부턴가 그냥 작업하는 것들을 일이라고 표현하고 사물, 물건이라고 하는 게 편해요. 그러니까 아마 '작업을 한다', '이 작품은' 이런 말들이 다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거겠죠. 그렇다고 어르신들이 '이 녀석 이거 물건이네' 그런 의미는 아니고. (웃음) 저는 대중문화라는 건 공기처럼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막 갖다 쓰면 되는 거죠. 사람들이 슬플 때 갖다 쓰고, 기쁠 때 갖다 쓰고, 아님 멍 때릴 때 갖다 쓰고요.

 

이즘 독자분들께 질문을 받았는데, 방준석씨 건강이 괜찮으신지 여쭤보는 분이 계셨다.

 

: 정말 고마운 분이시네요. 건강 얘기가 나온 게 제가 암 진단을 받았었거든요. 이제 3월이 되면 만 4년이 되는데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암이란 제게 큰 신호였어요. '변신'이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암은 제 인생에서 '변할래 죽을래' '어떻게 변할래'하는 '변신'이라는 화두를 던졌어요. 지금은 편안해요. 방향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건강한 것 같아요. 그분에게 잘 있다고 전해주세요. (웃음)

 

계속 이렇게 '방백'으로 활동을 하는 건가? 방준석씨는 영화 음악 작업을 하고 있고, 백현진씨는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다.

 

: 둘 다 바쁘긴 하지만 방백 활동은 저희가 움직일 수 있는 만큼은 움직일 것 같아요.

 

: 바람이 있다면, 방백으로 가능한 공연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건 정말 '너의 손'에 달린 거예요. '너의 손'에 안 달린 것은 형이랑 저랑 클럽 가서 둘이 하는 거죠. 이건 '나의 손'에 달린 건데, 신석철 씨부터 윤석철, 서영도, 임가진, 김오키 등이 붙으려면 이건 진짜 '너의 손'에 달리게 되죠.

 

: 공연이든 음반이든 어떤 경험을 같이한다는 것이 참 중요하잖아요. 방백 1집을 만들면서 재밌었던 경험을 했어요. 그게 어떤 식의 기운, 에너지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인터뷰 : 김반야, 정민재, 홍은솔
정리: 김반야, 정민재
사진 : 이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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