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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태 “배우와 감독, 균형 있게 작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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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하면 인터뷰는 덜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웃음).”<마이 라띠마>개봉을 앞두고 만난 유지태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5일 동안 매일 세 차례씩 인터뷰를 하며 <마이 라띠마>의 홍보에 힘을 쏟고 있는 일상. 비슷한 질문에 매번 답을 하는 일이 지칠 만도 한데, 연신 미소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 라띠마>는 유지태가 대학생 시절부터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꿈꿨던 작품이다. 유지태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정식으로 개봉하게 된 것 자체가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마이 라띠마>는 태국 말로 ‘새로운 삶’이라는 뜻인데, 이 영화는 내게도 인생의 꿈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태국 이주민 여성과 암담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남자의 사랑, 그리고 인생을 다룬 <마이 라띠마>는 대한민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주변의 이웃들에게 시선을 주게 하는 작품이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성장 영화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유지태 감독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소재만 보면 독립영화일 법 하지만<마이 라띠마>는 상업 장편영화. 하지만 마케팅 비용이 보통 상업영화의 30분의 1을 채 넘지 않았다. 유지태가 많은 인터뷰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6월 6일 개봉한 <마이 라띠마>의 목표 관객수는 20만 명. 모두가 행복해지는 숫자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모두’란 영화 제작에 참여한 막내 스태프까지 포함한다. 유지태는 <마이 라띠마>를 연출, 제작하면서 배우, 감독에게 국한된 인센티브제도를 막내 스태프까지 확대했다. 영화를 하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확신을 세워주고 싶었단다. 현장에서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는 유지태는 “촬영장에서 감독이 화를 내면 배우가 긴장하게 되고 감정이 날라가 버린다. 화를 내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지태는 언제 부아가 치밀까. 그는 “차별 받을 때, 텃세를 부릴 때, 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화가 난다”고 했다. 대한민국 톱 배우가 차별 받는 순간이 과연 있을까. “보이지 않는 차별이 많죠. <마이 라띠마>를 제작하면서도 ‘배우가 만들면 얼마나 만들겠어?’ ‘돈 많은데 우리가 왜 지원을 해줘’라는 말도 들었고, 편견이 많았어요. 투자도 무척 힘들었고요.”유지태는 <마이 라띠마>에서 제작, 각본, 연출을 맡았지만 비용을 일절 받지 않았다. “그럴 만한 작품이었다”는 게 그의 답변이지만, 유지태의 꿈은 ‘누구의 희생 없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는 것’이다. <마이 라띠마>는 과연 유지태에게 어떤 작품이길래 이토록 할 말이 많은 걸까.




내가 왜 영화를 찍어야 할까, 이런 생각 많이 해요

지난 5월 24일에 있었던 <마이 라띠마>언론 시사회. 유지태는 아침 일찍 영화관을 찾아 행사를 준비하며, 배우로서 갖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느꼈다. 그는 ‘감격에 가까운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어떤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에 애착이 없겠냐 마는 <마이 라띠마>는 유지태에게 남다르다. 15년 전, 대학생 시절부터 꿈꿨던 시나리오이자 첫 장편영화 연출작으로 제작기간만 2년이 넘게 걸린 영화다.

“개봉이 된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실감나지 않아요. 무엇보다 많은 관객들과 소통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 <마이 라띠마>가 좋은 사례를 만들어서 저예산 영화가 계속해서 투자 지원을 잘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평소에 ‘내가 왜 영화를 찍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동기 부여가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마이 라띠마>가 초기 시나리오에서 조금 달라졌지만 이주여성에 대한 관심은 예전부터 있었고 성장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영화, 소설, 다큐멘터리, 전문서적도 많이 찾아 봤고 이주여성센터에 직접 방문해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요. 시설장님의 바람도 들어봤고요.”

유지태는 <마이 라띠마>를 준비하며 구경미 작가의 소설 『라오라오가 좋아』를 읽었다. 이 소설은 국제결혼으로 한국사회에 편입된 라오스 여성과 중년 남자의 도피 행각을 다룬 작품으로 현대인의 씁쓸한 자화상을 그렸다. 유지태는 “보통 이주여성의 이야기를 그리면 피해자 중심으로 그리게 되는데, 『라오라오가 좋아』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여성으로서 자아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캐릭터가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마이 라띠마>의 주인공 라띠마(박지수)가 포항에서 경찰에게 잡히기 직전에 립스틱을 바라는 행위나 수영(배수빈)과 함께 도망을 치기로 결정하는 행동 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는 여성상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수빈 씨가 맡은 ‘수영’이라는 인물은 원래 19살 설정이었어요. 수빈 씨가 맡게 되면서 바꾸게 된 거죠. 사실 <마이 라띠마>첫 시나리오는 다른 어린 배우한테 줬었는데 2주가 지났는데도 답변을 안 주는 거예요. 그 사이에 수빈 씨에게 시나리오 모니터를 부탁했는데 ‘감독님, 저도 캐스팅 안에 넣어주면 안돼요?’라는 거예요. 순간 깜짝 놀라고 4, 5초 동안 ‘어떻게 각색해야 가능하지’라고 뇌세포가 빠르게 움직였죠. 아벨 페라라 감독의 <배드 캅>, 안토니오 감독의 <정사> 같은 작품이 떠오르면서,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덜 성장한 어른의 모습, 도덕성을 회복하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각색을 하면 더 깊이가 생길 수 있을 거 같아서 머리를 쥐어짜서 각색을 했죠.”

유지태는 오랫동안 <마이 라띠마>의 제작자를 찾았다. 3년 전, 제작자가 나타났는데 약속만 해놓고 연락이 두절됐다. 한동안 박탈감과 상실감, 모멸감까지 느꼈다는 유지태는 ‘이 작품을 계속 잡고 있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함께 활동하며 인연을 맺은 배수빈이 덜컥 역할을 자청했을 때, 순간 기뻤지만 감독으로서 부담도 만만찮았다. 물론 결말은 ‘고마운 결정’이다.




모델 출신 배우, 트라우마 많았다

아직 흥행 성적은 점칠 수 없지만, <마이 라띠마>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을 받아 관객 및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제15회 도빌 아시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 받았다. 유지태는 최근 영화 연출 제안을 여러 차례 받고 있다. 배우 유지태보다 감독 유지태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건 아닐까.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하는 작품도 있었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제안 받았어요. 어떤 작품은 거절했고 다른 작품들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고민 중이고요. 감독 활동에 더 치중하겠다 그런 생각은 없어요. 연기와 연출을 균형감 있게 하고 싶죠. 제가 <바이 준>으로 데뷔했잖아요. 그 때도 영화를 찍고 있었어요. 물론 사람들에게 보여주진 않았지만. 언제나 배우와 감독을 병행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20대에 ‘도전하는 영화’를 했다면 30대 후반인 지금, ‘배우 유지태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한다. 유지태는 “나의 성향이 사람들이 호응하는 성향만은 아니다. <러스트 앤 본>, <셰임> 같은 영화같이 내 예술성과 감성이 부합하면서 신체적인 조건과도 잘 맞는 그런 영화를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감독으로서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내가 만들고 싶은 취향들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영화는 장르로 승부를 봐야 하고 엉뚱한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사회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사회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요. 그렇다고 공익사업으로 영화를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철학적인 이야기를 더 깊이 있게 다루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죠.”

<마이 라띠마>외에도 단편 영화 <초대>, <나도 모르게>,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자전거 소년> 등을 통해 메가폰을 잡았던 유지태. 다큐멘터리 장르에 대한 욕심도 있지 않을까 물으니, “독특한 시선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며, “자본 논리로 인해 내 색깔을 내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나만의 독특한 감성을 작품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존경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는 <송환>, <다섯개의 시선>을 연출한 김동환 감독을 꼽았다.

1998년 영화 <바이 준>으로 데뷔한 유지태는 언제나 ‘모델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달고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지금은 모델 출신 배우들이 당당히 연기력을 인정 받고 있지만, 당시 영화판에서는 ‘모델 출신 배우는 연기는 못하지만 비주얼은 괜찮다’는 인식이 컸다. 유지태는 ‘모델 출신’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가 꺼려졌고, 스스로의 말이 깊이 없이 여기지는 상황을 겪었다. ‘의도하지 않게 인생이 꼬여갈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고.

“사람이 보상심리가 크잖아요. 자기가 당한 것을 어떠한 위치에 올라갔을 때, 똑같이 행하곤 하니까요. <마이 라띠마>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에 데뷔한 박지수 양에게는 그런 비뚤어진 경험을 하지 않게 하고 싶었어요. 아마 본인은 모를 수도 있어요. 사실 신인이랑 호흡을 맞추면 딜레이도 길어지고, 심지어 남의 대사를 내가 해놓고 우기는 게 신인이거든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어떤 스태프들도 지수한테 큰 소리 한 번 안 냈어요. 디렉션을 해야 하면 나한테 하라고 했죠. 지수가 좋은 선배들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마이 라띠마>가 좋은 발판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관객들이 영화 속 배우를 보는 재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어떤 테크닉을 썼냐도 중요하고 재밌지만 80, 90%는 배우를 보고 영화를 따라 가요. 배우의 연기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수 양이 이번 작품에서 호연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많은 선배들이 조언을 했지만 결국은 본인이 한 거죠.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배우들이 곧 저의 배우에요. 지금의 제 배우들이 앞으로의 제 작품에도 출연해줬으면 좋겠어요.”




배우, 감독하지 않았더라면 소설가 됐을 것

유지태는 인생의 목표를 ‘사회복지사’라고 말할 만큼, 다양한 NGO를 통해 나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부터 가정폭력 아동들을 지원하는 서울YWCA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홍보를 위해 마주한 자리였지만 사회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더욱 또렷해졌다. “현행법상 가정폭력 때문에 쉼터에 왔더라고 6개월이 지나면 쉼터에서 퇴소해야 해요. 갈 때가 없으니 아이들은 다시 폭력 가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죠. 자립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중간 쉼터의 필요성이 시급한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현재 150개 가구 정도가 지원을 받게 됐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의도가 순수하다 싶은 일에는 끌리게 돼요. 물론 시작했다가 아닌가 싶으면 얼른 빠져 나오고 그러죠(웃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특별하지 않아요. 그냥 제 본성이에요.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싶어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주셨어요. 나의 존재 가치나 자존감, 정체성을 확립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사회활동에 무관심한 동료들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무관심하지 않을 거예요. 생각하는 기준이 달라서 그렇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사회공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남 모르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한국 배우들만큼 뜻이 깊고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드물다고 생각해요.”

“정도상 작가의 『찔레꽃』을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는데, 소설 한 권을 쓰기 위해 5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했다고 하더라고요. 표현이 디테일하고 섬세해서 책에 금방 빠져들었던 기억이 나요. 감독으로서 영화화하고 싶은 소설도 물론 있어요(웃음). 아마, 영화를 안 했으면 소설가가 됐을 것도 같아요. 책을 내자는 제안도 종종 듣는데 지금은 영화 만드는 게 좋아요. 다른 거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영화와 배우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유지태는 올해 하반기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를 통해 관객들을 만난다. 천재 테너 ‘배재철’ 역을 맡은 그는 1년 동안 성악가에게 훈련을 받으며 8개 아리아를 외웠다. “성악가로 데뷔시키고 싶다”는 선생님의 칭찬도 받았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성악, 해볼 만 하더라고요(웃음). 관객들에게 연기자로서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서 선택했어요.”메가폰 대신 악보를 든 배우 유지태의 모습은 어떨지. 유지태는 이미 관객들과 만날 채비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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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열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저는 늘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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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열의 새 앨범 < V >에는 시작부터 알베르 까뮈의 문제작 『이방인』의 구절이 흐른다. 소설의 첫 문장(‘오늘 엄마가 죽었다’)만큼이나 강렬한 첫 곡 「Minotaur」는 이번 앨범의 중심이 주변적이고 이질적인 변두리 존재들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곡의 제목도 반인반수의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이는 아티스트 자신이 음악에 또렷이 부각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방인’은 이승열을 가장 투명하게 은유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미국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스스로의 주변인적 기질을 언급하며 “이 곡을 첫 트랙으로 두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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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의 소설을 평한 사르트르의 문투를 빌리자면, 이승열의 신보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방인’이다. 음악적 틀을 허물고 관습을 배제하며 은폐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내면을 발현해냈고, 이는 앨범 전체에 낯설고 생경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파격감은 언제나 독창성과 이질성을 동전의 양면처럼 동반한다. 앨범에 대한 음악 팬들의 반응이 감탄과 당혹으로 양분되는 것도 독창성과 이질성의 갈래를 두고 서로 다른 줄기에 무게를 둔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반응을 예감한 듯 그도 앨범 부클릿에다 수록된 음악들로 인해 ‘즐겁거나, 혼란스럽거나 혹은 무감각해지길’ 바란다고 썼다.

이즘과는 두 번째 만남이다. 인터뷰는 이승열의 음악을 지금의 모습으로 이끈 매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그는 그간 자신에게 손을 뻗어 준 우연과 인연, 영감과 생각들을 가만히 풀어내며 네 번째 앨범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찬찬히 짚어 나갔다. 한 시간 반가량 ‘작가의 말’을 듣고 난 후 이르게 된 결론은, 이번 앨범이 이승열에게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홍대 벨로주 공연이 이름만 공개된 블라인드 티켓 방식으로 진행됐다. 어떤 이유로 이런 기획을 하게 되었나. 신곡 발표를 위한 복선은 아니었나?

제 의도는 없었어요. 순전히 마케팅. 저는 처음에 ‘블라인드 티켓이 뭐예요?’라고 물어봤거든요. 어둠속에서 뭐 쓰고서 공연하는 건가?(웃음) 팬들에게는 가격이 할인되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케이했죠. 작년 4월의 벨로주 공연은 제가 그전에 했던 공연 셋과 변한 게 많았어요. 랩탑을 들고 올라가고, 3집 곡을 재해석하는 느낌으로 가져가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 모습은 새로웠을 거예요.

그렇잖아도 공연이 다소 색다르고 아방가르드해 보였다는 후문이다.

제가 하던 것에서 열 발짝 앞으로 나간 느낌이죠. 아방가르드하게 느끼셨다면 저는 제 미래를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거예요. 지난해 1월에 카입과 함께한 뷰직 세션 공연에서 처음으로 제가 잘 쓰지 않던 테크놀로지를 쓰게 됐어요. 그걸 준비하면서 랩탑과, 앨범으로 보여 주지 않았던 사운드스케이프를 만들어서 실제로 보여주고 싶어졌고요. 그러니까 슬슬 시작을 한 거죠. 카입과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그전 해 11월부터 구상하다가 자연스럽게 흘러와서 뷰직 공연이 끝난 후부터 랩탑은 저와 계속 붙어 다니는 요소가 됐고, 그걸 최초로 쭉 나아갔어요. 그렇게 시작한 작업이 작년 말에 완성이 된 거예요.

벨로주 공연에서 선보인 신곡들이 이번 앨범에 담겼는데, 벨로주에서 녹음한 ‘라이브 앨범’으로 알려지면서 정규 앨범이 맞는지에 대해 긴가민가하는 반응들이 있다. 정규 앨범이 맞는 건가?

정규 비정규를 나누는 기준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히 설명을 드리자면 네 번째 < V >앨범이면서 라이브 실황은 아니고 저희가 풀 밴드와 함께 즐겁게 연주하는, 특이하게 녹음된 앨범이죠.(웃음) 라이브 앨범은 환호와 박수 소리도 넣잖아요. 그런 식으로 라이브 앨범의 티를 내는데, 그런 건 없습니다.(웃음)

< V >라는 타이틀의 의미는.

최근에 조용필 선생님도 19집을 내셨지만 캐리어가 많은 선배님들은 앨범이 열 몇 장씩 되고 저도 아마 음악을 계속 하면 10장이 넘어가는 날이 올 텐데, 그러면 그렇게 앨범 숫자로 언급되는 게 저는 개인적으로 싫었어요. 물론 기사화하는 입장의 기자분들은 그렇게 써야겠지만, 저는 그게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반 장난식으로 회사랑 얘기하면서, “그럼 네 번째 앨범이니까 어차피 4집이라고 얘길 할 테지만, 브이로 합시다” 했죠. 다섯 번째.(웃음) 간단한 예로 어떤 엘리베이터는 4층이 F로 돼 있잖아요. 그것과 비슷한 경우예요.

1집부터 3집까지는 4년 간격으로 나왔는데 이번 신보는 2년 만에 나왔다. 그간의 리듬을 봤을 때 비교적 빨리 나온 앨범 같은데.

4년 걸쳐 나올 때마다 심적 압박은 늘 있었어요. 회사나 제가 게을러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고 과정이 그만큼 있었던 건데, 과정 중에서 뭐가 불필요하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느냐를 생각해 보니 몇 가지가 있더라고요. 빨리 내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4년은 길다 싶었어요. 그렇다고 곡이 없는 상황에서 앨범을 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앨범을 위해 곡을 쓰는 것도 웃기고요. 이번 앨범은 곡들이 지난 앨범에 비해서도 비교적 쉽고 자연스럽게 나와서 일이 쉬워졌어요. 녹음방식에 있어서도 스튜디오에 개별적으로 와서 몇 번씩 연주하고 영어로 나온 가사를 한국말로 개사하는 일들을 제작과정에서 확 들어내 버렸어요. 라이브 앨범을 내고 싶었다기보다는 스튜디오가 아닌 공간, 울림에 대한 중요성도 염두하고 있었고요. 그게 시간을 절약해 주는 일등공신이었을 거예요. 마지막 트랙들인 「Bluey」는 2009년에 나온 곡이었고, 「Cynic」도 3분의 1만 완성돼 있던 과거의 곡이었는데 이걸 집에서 완성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어요. 그것 외에는 시간이 그렇게 들지는 않았네요.

원 테이크가 어떻게 보면 옛날 방식이지만 하는 입장에선 매력이 있을 것 같다.

희열이 있죠. 원 테이크를 섣불리 못하는 이유가 핸디캡들이 있거든요. 소리가 샌다든가 분리가 안 되는 단점이 있는데 그걸 장점으로 바꿔 보자는 게 의도였어요. 스튜디오에서 개별적으로 연주할 때 느낄 수 있는 희열은 아주 적어요. 그래서, 객석에 관중이 없더라도 공연을 준비할 때나 연습실에서 합주할 때 느꼈던 희열을 상상하면서 재현을 한 거죠. 그걸 엔지니어가 기술적으로 최대한 단점을 보완하면서 잡아 줬고요.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는?

우려되는 부분이 두드러진 곡도 있었어요. 앨범을 들을 때 보컬이 잘 들려야 되잖아요. 보컬이 안개 너머에 있는 듯 들린다든가 의도된 선을 넘어서 희미할 때는 난감하잖아요. 녹음된 소스 자체가 그렇다면 더 그렇고요. 몇몇 곡에서 그게 살짝 보이는 부분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완을 할까 하다 몇몇 곡은 집에서 제가 덧댔어요. 그렇다고 바꿔치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질감을 좀 더 두껍게 만들어 주는 작업을 한 거죠.

앞의 여섯 트랙은 벨로주에서 녹음했고 뒤의 네 트랙은 스튜디오 녹음이다. 어떤 기준으로 벨로주 녹음과 스튜디오 녹음을 나눈 건가?

「Who」라는 곡을 두 번 한 이유는, 저는 괜찮은데 회사에서는 이 곡이 좀 더 좋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었어요. “왜요?” 했더니 “혹시 알아, 이게 주요 곡이 될 수도 있잖니.” 그렇게 들은 말은 한번 더 생각을 하게 되고, 스튜디오에서 라이브 한번 더 하는 건 힘든 게 아닌데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플럭서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싶어서 아래 곡들을 녹음한 건 아니에요. 단지 편리에 의해서. 마지막 두 곡은 밴드를 소집하고 다시 녹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제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거예요. 9번곡 같은 경우는 베이스를 다른 분이 치셨지만요.


곡 길이가 전반적으로 더 길어졌다. 짧은 싱글 위주의 요즘 음악 추세와도 거리가 있는 방식인데, 자연스러운 결과물인가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나.

글쎄요. 그건 ‘넌 왜 이렇게 키가 크니?’라고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캔버스 사이즈를 이만한 걸 쓰고 싶어 라고 할 수는 있는데, 저는 처음부터 캔버스를 상상하고 곡의 그림을 그려 나가는 입장은 아니에요. 일단 템포라는 게 있잖아요. 곡이 원하는 템포가 있으면 그걸 끝까지 가져가야 되잖아요. 물론 사족 같은 부분을 들어내야 하는 건 맞는데, 이번 작업에서는 그런 걸 느낀 적이 없어요. 유일하다면 「Fear」라는 곡에서 1절과 2절의 베레이션이 뭘까라는 고민을 살짝 한 적은 있지만 그 외에는......, 이건 호흡과도 같은 것 같아요.

이번 앨범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자주 듣게 되는 곡은 1번과 6번. 골고루 좋아해요.

베트남 전통악기인 단보우는 어떻게 넣게 됐나.

음악에 대한 구상과 관계없이 일상을 보내다가 운전을 하던 중 라디오에서 국악 오케스트라 협연을 듣게 됐어요. 마지막 부분에 솔로 협연자가 무슨 악기를 연주하는데, 엠프로 증폭이 되고 비브라토도 많이 들리고, 기타처럼 하모닉스가 들리는 스트링 악기인데 아무리 추측해도 이 소리는 무슨 악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이 연주자인 펑(Le Hoai phuong)을 수소문 끝에 찾아내서 만났어요. 국악을 공부하면서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더라고요. 레슨을 하느냐, 얼마나 받느냐 그런 것들 물어보기도 하고.(웃음) 연주를 같이 해 보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작년 7월 올림픽홀 뮤즈 라이브에서 처음으로 협연을 하게 됐죠.

앨범에 참여한 모로코인인 오마르 스비타르(Omar Sbitar)씨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

단보우를 하고 나니까, 왜 상상만 했던 욕심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아랍인의 남자의 목소리. 모스크에서 기도하듯이 노래하는 그런 아라빅한 요소에 대해 그간 동경이 있었고, 한동안 제3세계 음악을 찾아 듣기도 했는데, 이왕 이렇게 갈 거면 더 밀어붙여도 되지 않을까 싶어진 거죠. 그래서 펑에게 그대로 설명했어요. “아랍사람인데 한국에 있어야 되고 노래를 잘 해야 해. 그런 뮤지션 있어?” 그랬더니 있대요.(웃음) 모로코에서 왔고 한국에 산 지 좀 됐고 영어도 잘하고. 공연에 초대해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이야길 했죠. 편곡적으로 생각했을 때 「Who」와 「Minotaur」라는 곡에서 오마르가 뭔가를 해 줬으면 좋겠다는 밑그림이 그려져서 그렇게 작업을 했고요. 녹음은 실시간으로 참여하진 않았어요. 그 친구가 스케줄이 안 되서 후반에 더빙을 한 거예요.


원래 하던 음악에 베트남 풍도 섞이고 아랍 풍도 섞이게 된 건데, 처음부터 제3세계 음악에 대한 콘셉트를 잡고 시작한 건 아니었던 건가?

의도가 분명하면 편하긴 한데 그게 과격한 시도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작위적일 수도 있고. 우연을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건, 오마르에 대한 물음도 캐쥬얼하게 던진 질문이 우연처럼 단추가 맞아서 이렇게 된 거고. 단보우를 넣게 된 것도 그렇고, 단보우 위주로 곡을 써보자 해서 「We are dying」이라는 곡을 쓰게 된 것도 그렇고, 연출의 콘셉트가 초반부터 딱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아랍풍의 제3세계의 월드뮤직을 하겠다는 전제는 없었어요. ‘내가 왜 이런 쪽으로 가고 있는 걸까’ 정도의 고민은 초반엔 하게 되죠. 나오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니까요. 근데 어느 순간 그냥 자연스럽게 믿게 됐어요. 공연을 해 보면 나름대로 관객의 반응도 있고. 근데 그 반응이 “우아!” 이건 아니었어요.(웃음) 아시다시피 “어?”하는. (웃음)

그렇다면 이번 앨범을 만드는 데 영감이 되어 준 대상이 또 있다면?

과거에는 제가 영미권의 영향을 받은 느낌이 묻어나는 음악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음악에 흥미를 잃고 안 듣기 시작한 지가 좀 됐고요. 이 모든 작업들이 시작되기 전에 <브로큰 플라워>라는 영화를 봤어요. 거기서 ‘물라투 아스탓케’라는 이디오 재즈의 거장이 만든 음악을 접하고 나서, 새로운 그림을 보게 된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심지어 라틴의 영향도 있고, 학업은 버클리 음대에서 마쳤고, 고향인 에티오피아에 돌아가서 고유의 것들을 접목하고 있고. 2000년대 초반에 했던 모던재즈 팀과의 협업도 놀랍더라고요. 보컬 곡이 보컬 멜로디 위주의 곡은 아니고, 계속 반복되는 부분에서는 보컬이 악기처럼 들려오는 곡이었어요. 그때 내가 너무 제한된 음악을 했다는 생각을 한 거 같아요. 물라투 아스탓케 음악을 3개월 동안 술친구로 삼았죠. 굉장히 행복했어요.

원래 앨범을 만들 때마다 의도적인 콘셉트보다는 우연의 작용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인가?

음. 3집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2집 끝나고 망한 뮤지컬이 있었어요. 그때 그 음악을 하면서 거기서 받은 영감이 있었고, 그 상황에서 3집 작업에 대한 생각도 정리가 되고 3집 곡들을 쓰게 되면서 박자가 순조롭게 가해졌어요. 곡은 나오는 대로 연주하고 싶잖아요. 빨리 나와서 테스트를 해 보고 싶고, 그래서 공연이 잡히건 페스티벌이 잡히건 그냥 했어요. 곡이 나오는 족족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해 왔던 음악들 들어보면 3집부터 단순히 장르적 차원을 넘어서 더 넓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번 앨범도 그 연장선으로 봐도 될까.

잘 보셨어요. 시간이 지나도 3집이 전환점이 됐다고 말할 것 같아요. 3집부터 마음을 좀 고쳐먹고 ‘자유를 얼마만큼 더 누릴 것인가’를 더 생각하게 됐어요. 앞을 더 내다보고 나니, 좀 더 자유로울 수가 있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대중의 어떤 리셉션을 받을 것인가 하는 현재적인 걱정보다는, 앞으로 10년 20년 이후의 내가 되어 돌아봤을 때는 이게 맞는 것 같아요. 여기서 이걸 시작 안하면, 그때 가서 제 자신에게 묻겠죠. 너 왜 그걸 안했냐.

그렇잖아도 3집부터 이 뮤지션이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편해졌다는 인상도 받았다.

그 편함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한테는. 어느 순간 무대에 올라가건 이렇게 인터뷰를 하건 간에, 뭔가 ‘내가 잘난 모습을 보여야 겠다’ 하는 걸 포기했어요. 내가 하는 일, 내가 만든 음악에 대해 필요 이상의 칭찬도 거부하고요. 물론 필요 이상의 혹평도 화가 날 것이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다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야길 하는 거나 연주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니까 그걸 계속 버릇처럼 느끼게 되더라고요. 근데 옛날 버릇 누구 못 준다고(웃음), 어느 순간 ‘이걸 더 멋있게, 좀 더 잘’ 하는 생각이 침투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 일이 틀어져요. 그건 확률적으로 맞는 것 같아요. 다들 경험하셨을 거예요. 글을 좀 더 잘 써야겠다 거나. 그렇게 되는 순간 없어지는 게 있더라고요.


2집에서는 지선, 3집에서는 한대수, 이번 앨범에는 장필순이 피처링에 참여했다. 고정적인 기획으로 피처링 트랙을 넣는 건가?

앨범 만들다가 여유가 생기면 그런 공상을 하나 봐요. 곡을 계속 모니터하면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들의 블루스」는 혼자 하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오십되는 거야~’가 굉장히 익살스러웠으면 좋겠는데. 이게 누가 제 꿈을 꿔 줬어요. 지인 친구 분이 “꿈속에 이승열이 나와서 방안에서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데 가사가 이렇더라~” 하고 얘기해 준 것 중에 ‘그러다 오십되는 거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모티프가 됐죠. 그런데 저 혼자 ‘그러다 오십되는 거야’ 하기에는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 그래서 그 맛을 살려 줄 목소리의 소유자가 누굴까 하다가 한대수 선생님이 생각났고요. 이번 「Bluey」 곡 같은 경우는 가사가 영어로 쭉 나가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푸른 꽃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걸 가장 ‘푸른 꽃’스럽게 불러주시는 분은 누굴까, 여자였으면 좋겠다 하다 유일하게 떠오르는 분이 장필순 선생님이었어요.

영어 가사가 많이 들어가는 앨범은 이번이 처음인데, 이승열에게 한국어 가사를 쓰는 것과 영어 가사를 쓰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영어가 2차적이지 않고 원래의 모습에 더 가까워요. 거의 90퍼센트는 영어로 중얼거리니까, 그리고 그것의 반 이상은 이걸 가사로 써도 되겠다는 판단이 서요. 그러면 곡과 가사가 동시에 나오는 거죠. 그것의 장점은 안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제가 하려는 말이 ‘진짜’로 나오는 거거든요. 설령 멋이 없거나 말이 안 될지라도 그건 1차적인 거기 때문에 그것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만약 예전처럼 영어를 한국어로 개사를 하면 이 곡을 적어도 몇 십번을 들어보면서 해석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제가 곡들에 지쳐버려 도대체 뭔 얘길 하는지 모르게 돼요. 애초에 지껄였던 묘한 뉘앙스의 말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왔지? 무슨 말일까? 하면서도 말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제는 소설을 쓰는 것처럼 한국말로 글짓기를 하는 거니까 의미가 변하는 부분이 있죠. 노래함에 있어서도 원래 나왔던 가사대로 노래할 때 소리의 느낌들이 발음이 달라지니까 변하게 되기도 하고. 고음부에서 그 단어를 써야만 아름답게 나오는데 그걸 포기하기 싫어서 그 단어를 끝까지 유지하는 방법으로 주변의 가사를 조절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또 무엇보다 저한테는 이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시간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2차적인 걸 포기하면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그런 것 고려 안하고 가보자 했어요. 실제로 예전엔 레이블과 이견이 있었어요. 2집의 「곡예사」나 「새벽, 아침의 문」 같은 경우는 제가 전부 영어로 부르겠다고 했는데 안 된다고.(웃음) 근데 결과적으로는 좋은 가사가 나왔어요. 고생한 만큼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곡예사」의 원래 가사가 살짝 생각나기도 해요.

그렇다면 이번 앨범이 이승열의 가장 1차적인 내면이 담긴 음반이라고 봐도 되나.
그렇죠.

첫 번째 곡인 「Minotaur」 같은 경우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구절이 삽입됐는데, 어떻게 넣게 된 건가.

저는 중간 부분에 나온 것만 해 달라고 요청을 했거든요. 근데 오마르가 이곡을 듣고서는 인트로 길이가 있으니까 첫 부분부터 자기가 내레이션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 왔어요. 그래서 제가 이방인의 텍스트를 줄 테니 네가 모로코 출신이니까 불어로 하자. 묘하지 않아? 이게 아랍인을 쏴 죽인 장본인의 이야기를 아랍인이 이야기하는.(웃음) 그런 장난스러운 마음도 좀 있었어요. 그때 제가 영미문학관이라는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방인』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뇌리에 박혀 있던 상태였어요. 근데 아주 기가 막히게 여기서 맞아떨어져서 쓰게 됐죠.

「Minotaur」뿐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상징이 앨범 전체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앨범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도 이와 비슷하게 읽어도 되는 건가.

그렇게 봐 주셨다면 감사합니다. 메시지는, 말보다는 음악인 것 같고요.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저는 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출신이 걸쳐져 있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이질감은 늘 느끼는 사람이어서요.

경계에 존재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양한 것 같다. 경계를 낳는 기준이나 규정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경계 지점을 추구하거나 즐기는 사람도 있다. 본인의 경우는 어떤가.

음. 성향이 파이터면 체제 전복이 목적일 수 있는 거고, 경계에 서서 머뭇거린다면 뭔가 애착이 남아서 그런 거겠죠. 저는 애착은 아니고, 사람에 대한 애정은 있는 것 같아요. 결국은 인간에 대한 얘길 하는 거니까. 그게 유일하게 저를 경계에 머물게 만드는 요소예요. 서울사람 어디사람 그런 구분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아이디어 자체, 그래서 특정 언어를 써야만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풀어도 이야기가 통할 거라 생각을 한 거죠.
또 다수가 있고 소수가 있는데, 저는 늘 소수의 입장인 것 같았어요. 소수일 때 더 편하고. 그렇다고 소수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낸 적도 없고 개인적인 사람이지만. 음악을 하는 게 적어도 개인적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음악을 통해 그걸 초월했으면 하는 거죠. 제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달변가도 아니고 글재주가 뛰어나서 매니페스토를 써서 ‘이렇게 합시다’라며 선봉에서 리드할 수 있는 의지도 없고, 단지 제 무기는 제 음악인데, 음악은 식상한 말이지만 초월적인 미디어인 것 같아요. 어차피 상업적인 시스템에서 이러고 있지만 비상업적인 마인드로 하다 보면 그런 어젠다나 경계가 우스워 보이게 되더라고요.


새 앨범도 발매됐고 디제이도 하고 해외 공연 준비도 있고 앞으로 더 바쁠 듯하다.

저는 일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워커홀릭일 수도 있어요. 쉬는 것도 즐기는데 일하는 것보다 멋지게는 못 쉬어요. 어느 날 전화했더니 로밍돼 있고 “엇, 하와이야?” 그런 적 한번도 없고.(웃음) 쉰다 해 봤자 경기도에서 혼자 음악 들으면서 술 한잔 하는 게 전부예요. 전 할 일이 있다는 것에 연연하는 것 같아요. 스케줄이 있다는 건 안정감을 줘서 좋아요. 내가 이 시간에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즐겁고요.

음악적으로 뮤지션 이승열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나. 지금까지의 행보를 스스로 평가한다면?

음. 제가 작가로서 많이 읽히고 많이 들려지고 팬이 엄청나고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제 자리를 가지고 있긴 한 것 같은데, 또 절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되고. 근데 그게 10년 됐어요. 제 위치를 잡으면서 오래 하다 보니까 시간이 해결해 주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한테 전달하면서 번져나가는 식으로.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 나간 건 음악적 행보로 봤을 때 잘한 거란 생각이 들어요. 만약 지금 좀 서두르는 감이 있다면, 그래봤자 2년이지만. 탄력을 받는 시기랄까, 작업이 많이 나오는 시기가 있는 것도 같고요. 또 우린 인간이기 때문에 나이에 대한 부담은 어떻게든 느끼는 것도 같아요. 음. 스스로 내가 뭘 쓰고 싶어 하는지를 포착해 낸 건 다행인 것 같아요. 내가 이런 작품을 기록하고 남기려는 구나라는 걸 잊고 살 수도 있는데, 10년 지나고서 그걸 다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런 맥락에서는 음악적으로 성실하게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 윤은지 이수호
정리 : 윤은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마종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취미를 갖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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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부쩍 다가왔음을 체감하던 날, 시인 마종기와 마주했다. 인터뷰 장소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6월 30일까지 ‘책으로 남은 아동문학가 5인5색 전’이 열리고 있는데, 시인의 아버지인 마해송의 개인문고 대표작품과 유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 날은 전시회 개막을 기념해 마종기 시인이 기념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시인은 자신의 새 책 출간보다 아버지의 전시회를 더욱 뜻 깊어 하는 듯 했다. 『우리 얼마나 함께』에도 기록한 아버지 마해송 작가에 관한 추억을 곱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학생 때였던가,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던 때인데, 어느 날 아버지가 원고료를 많이 받았다고 ‘르네상스’라는 다방을 데려가셨어요. 어떤 맛있는 음식을 사줄까 기대를 하고 갔는데 따끈한 우유를 사주시며 고전음악을 들려 주셨죠. 그 때 들었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쇼팽의 피아노 곡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이제는 아들 셋에 손주도 여덟,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가장 익숙하지만 한국에 오면 어김없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여지없이 찾아온다.

시인 마종기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유년기, 청년기를 보냈다. 동화작가 마해송과 여성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어릴 적부터 예술에 남다른 취미를 보였고, 대학 재학 중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해부학교실」, 「나도 꽃으로 서서」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문학에 탐닉했지만 과학을 공부해보라는 친지의 조언을 듣고 의학의 길에 들어섰고, 의예과 공부를 하면서도 꾸준히 시를 발표했다. 모교 ‘연세문우회’ 활동을 하던 중에 첫 시집 『조용한 개선』으로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했고 군의관 시절 두 번째 시집 『두번째 겨울』을 출간했다. 1966년, 많은 의학도들의 선택이 그러했듯 미국으로 건너가 수련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된 마종기 시인. 2002년 의사생활을 은퇴한 후 영구 귀국을 계획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매년 봄은 꼭 한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종기의 시를 추억하고 궁금해하는 지우, 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시작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시집 『하늘의 맨살』이후, 3년 만에 산문집을 펴낸 마종기는 『우리 얼마나 함께』는 조금 굴곡졌던, 그러나 별 것 없는 내 삶의 생활잡기”라고 말했다. 시인은 자신의 글을 잡기로 표현했지만, 모국어를 사랑하는 시인의 이야기는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내 희망사항 가운데 하나는 언젠가 내 아이들 중 누구든 내 글을 한 편이라고 읽고 평생 글을 쓴다더니 이런 글도 썼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헛된 희망사항은 버리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이뤄질 가능성이 없고, 내 생을 뒤돌아보고 이해하고 느껴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직도 내 글을 아껴주는 분들이 있어 내게 용기를 준다. 바로 그들이 결국 내 정신의 인연들이자 내 감성의 친구고 조카들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행복하다. (p.10~11)



한국에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봄을 맞아 한국을 찾은 마종기는 요즘 모든 일상이 감사하다.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출근길 지하철도 고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딜 만 하다. 며칠 후, 미국에 있는 둘째 아들 가족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라, 시인은 손꼽아 그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미국에 한국관광회사가 운영하는 고국 여행 프로그램들이 제법 있어요. 둘째 아들 막내가 11살인데, 이제 고국을 조금 알만한 나이가 돼서 며느리랑 같이 제주도를 시작으로 부산, 경주까지 한국 여행을 하기로 했죠. 할아버지가 시인이라고 해도 잘 모르는데 이번 기회에 좀 알려줄까 봐요(웃음). 아들 셋은 모두 문학에는 문외한이었는데 그래도 손주들은 글 쓰는 걸 제법 좋아해요.”

손주들이 쓰는 스토리 북을 볼 때 유년 시절을 추억한다는 마종기. 아버지와 함께 갔던 고전음악감상실, 창경궁 돌담을 넘어 우걱우걱 씹어먹었던 아카시아 꽃송이, 아버지의 낡은 라디오, 가장 아껴 읽었던 오 헨리의 단편 소설『마지막 잎새』를 떠올린다. 한국에서 봄을 만끽할 때면 마냥 행복하다는 시인은 손주들의 귀국과 『우리 얼마나 함께』의 출간 기념 북 콘서트를 기대하고 있었다.

“낭독회 같은 행사는 해봤지만 북 콘서트는 어떤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좋아하는 신경숙 작가, 이병률 시인이 와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죠. 함께 서간집을 냈던 루시드폴도 공연을 해준다네요. 외국에 오래 머문 노시인한테 이런 관심을 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제가 은퇴를 좀 일찍한 편이잖아요. 한국 시인으로 살고 있는데 외국에서만 살고 있으니 어쩔 때는 창피하기도 하고 그래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왜 영구 귀국을 하지 않냐’는 건데, 자식들이 모두 미국에 있으니까 아내가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도 매년 봄 한국을 찾고 있어요. 비행기를 18시간 정도를 타야 하지만, 한국에 오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을 수 없어요(웃음).”

시인은 “모국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는 게 내 평생의 한”이라고 말했다. “인생에 있어서 후회하는 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 나이가 되어 가만히 보니까 한 가지 실수를 했어요. 한국을 너무 오래 떠났다는 거예요. 언제라도 원할 때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모님한테도 죄송하죠. 대를 끊어 버렸으니. 그런 거에 대한 죄책감이 커요.”

고국을 떠난 지 이십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내 시가 나도 모르게 고향 그리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국과 고향 땅이 아니라 내 자신 속을 파고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속에서 고국과 고향을 다른 색깔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이 지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어차피 모든 이의 고향은 같은 곳이 아니겠는가. (p.256)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취미, 정말 중요해요

40년간 의사로 환자들을 만난 시인은 지난 2002년부터 6년간 모교 연세대학교 초빙교수로, ‘문학과 의학’ 수업을 통해 예비 의사들에게 문학과 인문학의 관심을 독려했다. 의사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고자, 2010년 뜻 있는 의사들과 문학인들을 모아 문학의학학회를 창립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있고, 현재 문학의학학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는 개인주의가 발달해서 주변 이웃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의사들이 많이 실패하고 사라지죠. 의료사고로 인해 의사 생활이 끝나고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하는 경우도 많고.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사라지는 건 무척 쉬워요. 그런데 실패한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경우 취미가 없어요. 음악을 좋아해 콘서트를 가고 미술을 좋아해 미술관을 가는 그런 취미는 있지만, 자기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극히 드물어요. 대개 의학, 과학을 지상 최고의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 삶의 의지가 단번에 꺾여요. 다른 취미가 없이 외골수로 살아가면 인생에 있어서 큰 일이 닥칠 때 쉽게 이겨내기가 어렵죠.”

미국 의과대학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문학과 인문학 강의를 해왔다. 하버드, 존스 홉킨스, 시카고 대학 등이 앞장서서 <문학과 의학> 같은 잡지도 출간하고 의료 문학을 소재로 한 강연회도 자주 열고 있다. 마종기 시인은 “의대생에게 문학과 예술,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건, 의료 시술을 하는 과학자로서의 의사에서 벗어나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전인격적 의사로 태어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내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취미를 갖고 그것을 즐기면, 의사로서 좌절하고 봉변을 겪게 될 때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많은 경우 의사들은 생명 앞에서 결정권을 갖게 되잖아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할 때, 어떤 예술이 주는 힘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줘요. 제가 무난하게 의사 생활을 무난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시를 계속해서 썼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만약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됐다면 문인의 길을 포기했을 수도 있어요. 늘 공부를 해야 하는 바쁜 의사의 일상만으로도 힘에 부쳤을 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괜찮은 의사가 되어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낯선 이국 땅에서 시는 내게 유일한 위로였으니까요.”

의사와 문인. 내게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때로는 분초를 아껴 허둥대며 살아왔지만 되돌아봐도 나는 한 점의 후회가 없다. 나는 내가 시인이었기에 외국에서 힘들다는 의사생활을 잘 이겨냈고 오히려 동네 의사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의사였기에 오랜 세월 한 해도 그치지 않고 모국어로 시를 써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낙오되고 잊혀진 시인이 아니고 이 나이까지 현역 시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렇게 이상하고 복잡한 내 삶은 생의 끝까지 틀림없이 이어질 것이고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은 채로 이 기구한 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리라고 약속할 수 있다. (p.248)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일, 어찌 행복하지 않은가

“몇 년 전 제 등단 50주년을 기념해서 후배 문인 권혁웅, 정끝별, 김경주, 이병률 시인 등이 소극 장을 빌려서 낭독회를 열어준 적이 있어요. 함께 자리한 친구가 ‘한국 문단에서 이런 자리를 받은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냐고’ 하더군요. ‘아마 나를 동정해서 그렇겠지’라고 답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내가 그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 소통이 된다는 일이니까요. 마종기라는 사람은 굉장히 외로운 시인으로 여겨졌는데, 이렇게 후배들과 지내는 걸 보면 행복한 시인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종기 시인은 미국 현대시의 대부, 의사이자 시인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다. 윌리엄스는 1963년에 언론과 문단의 엄청난 각광을 받으며 장례식을 치를 떼서야, 많은 이들이 그가 세계적인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일화가 있다. 윌리엄스를 회상하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친절한 의사였고 동네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가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기자가 ‘당신은 근사한 집에 살고 유능한 의사인데다 친구도 많은 행복한 사람인데, 시는 왜 그리 외롭냐’고 물었더니 ‘외로움을 모르는 자는 시인이 될 수 없다. 가슴에 큰 구멍을 가지고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지 않으면 시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시인이기 때문에 외롭다’고요. 베토벤도 ‘내 종교는 외로움’이라고 말한 것처럼, 내게도 태생적으로 외로움이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요.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 생활을 했으니 표피적으로 상당히 외로운 상태에 있었지만, 문학을 종교로 외로움을 이겨낸 게 아닌가 싶어요.”

노시인이 된 지금, 마종기는 언제 펜을 들어 시상을 적을까. 시인은 “특별한 변화는 없지만 부쩍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옮기게 된다”고 말했다.

“5월 달인가 <현대시학>에 발표한 ‘나이 든 고막’이라는 시가 있어요. 내가 언젠가 귀가 잘 안 들린다는 걸 느꼈을 때가 있었어요. 정확하게 안 들리는 건 아니고, 집사람이 가끔 ‘당신 기억 안 나’라고 말할 때 문득 느꼈어요. 나이가 드니까 그게 별 일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잘 안 들린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않나, 싶은 거죠. 싫은 소리 안 듣고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요. 소리라는 게 다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 내게 들리는 소리가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의사를 은퇴하면서 앞으로 2년에 한 번씩 책을 내자고 다짐했지만, 쉽지만은 않다는 시인. 그는 시인이란 마라톤 주자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단다. 다만 시인에게는 결승점도, 완주를 알리는 화려한 테이프도 없다. “되도록 적게, 단지 빛나는 보석처럼, 그리고 따뜻해서 몸을 기대고 싶은 말을 글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하는 마종기 시인. 어느덧 그의 얼굴에서 서정적인 아우라가 풍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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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얼마나 함께마종기 저 | 달
이 책은 시인의 시집이나 다른 산문집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세세한 일상과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심(詩心)이 되었던 맑고 투명한 마음은 사랑하는 가족과 여러 인연들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화작가 아버지, 현대무용가 어머니를 비롯하여 동생들과 세 아들, 친구들, 문단의 지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정 깊었는지도 우리는 새삼 느낄 수 있다. 오십 년 세월 꾸준히 시를 써온 시인이 눈을 감고 되돌아보는 풍경에는 필연적으로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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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아버지에게도 20대 시절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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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역사, 25권의 책으로 남다

고경태 기자에게 아버지는 스물다섯 권의 책으로 남았다. 34년이란 시간동안 아버지가 직접 신문 기사와 사설, 만평들을 가려내어 오려붙인 스크랩북이었다. 그 시간의 조각들 옆으로 아버지는 코멘트를 덧붙여놓았다. 때로는 탄식과 일갈이 담긴 시로써 대신했다. 그 고독한 작업들이 어떤 이유와 목적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미처 묻기도 전에 아버지는 곁을 떠났다. 그리고 2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제 아들은 중년의 가장이 되어 아버지와 다시 마주 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물었다. 아버지의 스크랩 안에 담긴 것은 무엇입니까. 말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손때 묻은 스물다섯 권의 책이 대답한다. 자신이 품고 있는 역사를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지나간 시절 한국의 역사인 동시에 아버지의 역사였다.

『대한국민 현대사』를 내며 역사를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를 발견했다. 스크랩에 적힌 볼펜 글씨의 기록을 통해, 20대 중반의 청춘에서 50대 후반으로 늙어갈 때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 변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가 역사다! 나의 아버지가 역사다! 아버지라는 프리즘으로 본 한국 현대사는 훨씬 입체적이었다. (p.7)
고경태 기자가 아버지의 스크랩 안에서 발견한 것은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현대사’였다.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일상으로 기록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들을 목격한 것이다. “최소 단위인 ‘나’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때 역사는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풍만하게 다가온다고 믿는” 그에게 이것은 곧 새로운 역사의 발견이었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낯선,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역사의 기록을 마주한 것이었다. 그는 이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어 놓기로 결심한다. ‘고경태의 아버지의 스크랩’이라는 이름으로 2011년부터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그를 바탕으로 『대한국민 현대사』를 펴냈다. 고경태 기자에게 『대한국민 현대사』의 출간은 오래전부터 꿈꿔온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줄곧 ‘언젠가 아버지의 스크랩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면 쓰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그는 <채널예스>에 칼럼 연재를 제안했다. 그리고 54년 전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은 아버지가 스크랩한 자료들을 토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흩어져 있는 사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버지, 당신에게도 20대 시절이 존재했군요

“‘내가 역사다, 모든 것이 역사다’라는 생각에서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가 역사의 주체로 선다는 건, 생활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거든요. 거대한 큰 줄기의 역사가 아니라 작은 줄기의 역사들을 같이 관찰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사회 정치적인 것에만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에도 역사가 있어요. 우리가 의미를 두지 않았던 역사들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안에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되고요.”

아버지의 역사 안에도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무수하게 많았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아버지의 스크랩북은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고경태 기자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통치 시대와 한국전쟁, 독재정권 시절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한국 정치사의 격변기,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아버지는 어떻게 걸어왔을까.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청년은 아버지가 되었을까. 스크랩북 제1권이 시작된 1959년, 아버지의 나이는 만 스물넷이었다. 마흔여섯의 아들이 바라본 스물넷 청년 시절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언제나 말이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던 기억 속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새로운 역사의 발견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기성세대로만 존재하잖아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고,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죠. 그런데 스크랩북을 보니까 아버지에게도 어린 시절의 치기와 유치함, 이런 것들이 있었더라고요. 지금 내가 아주 어린 아이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들을 아버지에게서 느끼게 된 거죠. 그런 게 가장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새롭게 드러난 아버지의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스크랩북을 펼쳐보기 전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토록 정치와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단 한 차례도 아들들과 정치적 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없던 아버지셨다. 그런 아버지가 스크랩북 안에서는 4.19 혁명 이후 넘쳐난 데모대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1971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맞수’라는 제목의 시를 적어 정세를 논한다. 권력을 움켜쥔 자들의 부조리와 위협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가 하면,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두고 ‘무조건 대답하지 말라’로 끝을 맺는 시를 남겼다. 아버지의 감추어져 있던 면모를 발견한 아들은 “당신에게도 정치적 관심으로 피가 뜨겁던 20대 시절이 존재했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생전 이미지와 영 어울리지 않는다.”(p.71)고 적었다.

“71년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통해 당선됐을 때, 아버지가 스크랩하신 신문 기사를 봤어요. 기사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 사진에 만평을 붙여놓으셨더라고요. 얼굴을 보기 싫다고 가리신 거죠. 그런 것들은 굉장히 재치도 있고 ‘아버지한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생각이 드는 새로운 발견이었죠.”


이것은 부자간의 한판 게임이다

하지만 고경태 기자가 아버지의 코멘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놀라움으로만 가득 차 있지도 않다. 그는 “이것은 부자간의 뒤늦은 대화다. 동시에 한판 게임이다. 나는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시비를 걸겠다”(p.16)고 선언한다.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아버지와 진보적 언론인 아들 사이의 뜨거운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80년대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시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를 향해 “에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애교어린 비아냥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같이 그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의 보수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정부가 선동하는 반공주의의 바람에 휩쓸린 것을 어찌 무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두고 폭도들의 반란이라고 외치기만 하는 목소리들 속에서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었겠는가.

“4.19 혁명 이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갑자기 군사독재 정권이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감이 있었을 거예요. 한 두 번은 그래도 좋게 봐줄 수 있는데 3선 개헌을 하면서 집권이 계속되니까 거부감이 깊어졌겠죠. 그런데 그런 정국이 계속 이어지니까 그냥 순응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 세상이란 게 변하지 않는 것인데, 세상이 이런 거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게 되었겠죠. 그걸 보수화라고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려면 반공 입장을 취해야 됐고, 공산주의 좌파와는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보수화가 된 건 당연한 것 같기도 해요.”




시대의 아픔, 언론은 무엇을 했나

고경태 기자와 아버지 사이에는 쉽사리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그것은 역사적 경험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고 들은 정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입과 귀를 막고 눈을 가려버린 시대에서 아버지 세대가 ‘진실’이라고 알았던 것들이, 아들 세대에게는 ‘왜곡과 은폐’라는 이름으로 학습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비극과 혼란을 초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지난날 언론의 과오다. 그 사실을 아버지의 스크랩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에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안 했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알 수 없는 시대였죠. 지금은 진보와 보수가 싸우기는 해도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그때는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신문밖에 없었어요. 물론 방송 뉴스도 있었지만 신문의 영향력이 더 강했던 시대였죠. 오로지 신문을 통해서만 정부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터득하는 시대였는데, 그 때 신문이라는 게 언론 자유의 한계가 있었잖아요.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한 사실들이지만 당시에는 뭐가 진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거예요.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그렇고, 사북 사태도 마찬가지였고요.”

사북 사태는 1980년도에 탄광 노동자들이 신군부의 공권력과 정면충돌한 사건이다. 사건의 이면에는 탄광 노조 지부장이 불법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실과 함께, 그가 광업소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동 환경을 열악하게 만든 사실이 감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단순히 광부들이 임금 인상과 지부장 개선을 요구하며 난동을 피웠다고 보도되었다. 진실은 너무나 먼 곳에 있었던 시절이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와 유사한 사례들이 아버지의 스크랩 속에는 넘쳐났다. 20년 동안 언론인으로 일해 온 고경태 기자에게 그것들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이었다. 그리고 뼈아픈 교훈이었다.

“그 당시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예요. 민주 인사들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런 의식이 전혀 없는 그냥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말도 못하는 대접을 받았어요. 누명 쓰고 가서 그냥 두들겨 맞고 감금당하고,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잡범 취급당하다가 요절하는 시대였던 거죠. 그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했던 거예요. 박종철과 같은 민주 인사들이 고문당하고 90년대에 대학생들이 분신했던 것도 시대의 아픔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의 희생도 시대의 아픔으로 봐야 해요.”

『대한국민 현대사』의 후반부에서는 고경태 기자의 아버지가 스크랩한 사회면 기사들을 살펴볼 수 있다. 어쩌면 당시를 살았던 평범한 시민들에게 정치 뉴스보다 더 강렬하게 체감됐을, 평범한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들이다.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아프고 슬픈 이야기다. 친구들의 놀림과 교사의 질책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장애인 학생부터 경찰의 가혹한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거짓 진술을 한 무고한 시민들까지, 아픈 시대를 살다 간 힘없는 자들의 기록이다. 당시의 신문들은 그들의 속내를 듣기보다 경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를 보도하는 데 급급했다. 심지어 범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피의자의 얼굴과 실명을 그대로 노출시키기도 했다.




60, 70년대 최고의 저널리스트는 ‘두꺼비’

분명 아버지의 스크랩, 그리고 『대한국민 현대사』에는 언론의 어두운 한 페이지가 담겨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언론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진실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권력의 날 선 감시 속에서도 한 마디 바른 소리를 전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돌아왔을 화살이 염려될 정도로 놀랍기까지 하다.

“예전에는 언론이 한국사에서 지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죠. 권력에 대해서 진실을 밝혀야 된다는 사명감이 컸으니까요.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건’이 있던 시기에 아버지께서 스크랩하신 신문을 보면, 독자들의 격려 메시지로 채워진 광고란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먼 훗날 내 아들이 나에게 1975년도에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새마을 운동보다 자유언론 수호운동에 앞장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겠다”고 적어 보냈어요. 이런 걸 보면 독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서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죠. ‘이런 간절한 마음의 응원을 받는 매체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정의에 목마르다는 것, 진실에 목마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죠. 진짜 감동적이에요. 지금 기자들 중에 과연 저런 응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기사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독자들이 응원하는 매체에서 일할 수 있다면 기자로서 정말 행복할 거예요. 우리는 그 뜨거운 시대를 견뎌냈던 분들을 존경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나이 먹고 보수화된 것에 대해서 욕을 하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저런 선배들한테는 경의를 표해야죠.”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한 시대를 이겨내 온 그들은 언론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고 자유의 빛을 견인해 주었다. 서늘했던 시절에 스스로 하나의 불빛이 되기를 자처한 이들이었다. 고경태 기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언론인으로 만평 <두꺼비>를 그렸던 안의섭 화백을 꼽았다. 안의섭 화백은 1955년 경향신문의 <두꺼비>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시사만화가로서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만평을 그렸다. 어린 시절 고경태 기자는 그 안의 숨은 뜻을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두꺼비>를 비롯해 <고바우 영감>과 같은 만평들을 보기 위해 아버지의 스크랩을 펼쳤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스크랩을 봤던 이유 중에 하나는 만화를 보기 위해서였어요. 정치 뉴스 같은 건 잘 모르니까 보지 않았고, 어린 애의 눈높이에 맞는 게 만화였던 거죠. 당시에 아버지께서 한국일보를 가장 많이 보셨는데 한국일보 만평은 <두꺼비>였어요. 그 때는 정치 사회적인 함의는 전혀 모르고 그냥 우스개로만 봤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기사를 보고 그것과 연관된 만화를 보니까 ‘이 사람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시절에 어떻게 이런 만화를 그렸을까’ 싶기도 하고요. 제가 생각할 때 안의섭 화백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저널리스트였어요. 특히 안의섭 화백은 엄청난 독재정권의 억압과 압박에 시달렸잖아요. 86년에는 안기부 끌려가서 1년 7개월 동안 만평을 못 그린 적도 있었고, 70년대에 중정에도 많이 끌려갔고요. 그 살벌한 시절에도 정말 비판 수위가 높은 만화를 그렸고, 굉장히 직설적이고 풍자적이면서도 어떨 때는 슬프거든요. 그런 면에서 한국의 모든 기자를 다 포함해서 안의섭 화백이 최고의 저널리스트였다고 생각해요.”




34권 스크랩의 이유, 외로움

아버지와의 한판 게임을 위해 스크랩북을 펼쳤을 때부터 고경태 기자가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아버지는 왜 스크랩을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34년이란 긴 시간동안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쏟으셨던 걸까. 스물다섯 권의 책 속에서 아버지의 지난 시간을 목격한 후, 그는 조심스레 짐작해 보았다. 아마도 외로움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무척 외로우셨던 것 같아요. 스크랩도 외로움 때문에 하신 것 아닐까요. 자기 존재를 뭔가 더 증명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까 스크랩을 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가 스크랩에 남긴 것들을 보면 정치적 관심이 나름대로 있으셨던 것 같아요. 단지 표출 안 하셨을 뿐이죠. 그걸 스크랩에 표출하신 것 같아요. 만약 아버지께서 『대한국민 현대사』를 보시면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다니’(웃음) 하고 좋아하실 것 같아요. 본인이 가장 아끼시던 물건으로 뭔가 작품을 만들었으니까요. 최고의 효도 상품이라고 하실 것 같아요.”

『대한국민 현대사』는 아버지가 짜 놓은 날실 위로 아들 고경태 기자가 씨실을 질러 넣어 만들어낸 역사 이야기다. 그것은 어떤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그리고 많은 이들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역사의 조각들이다. 평범한 한 국민의 삶 속에 녹아든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역사의 구석구석을 비춰준다. 『대한국민 현대사』를 통해 고경태 기자가 아버지의 역사를 새롭게 발견했듯이, 독자들은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모습과 만나게 될 것이다. 고경태 기자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고경태의 자서전 스쿨: 모든 인생은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를 강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역사이듯, 누구나 책 한 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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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 현대사고경태 저 | 푸른숲
아버지가 남긴 34년간의 신문 스크랩을 재료로 아들인 저자가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내놓은《대한국민 현대사》는 권세 잡은 이들만의 역사를 좇는 일반적인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특별함이 깃들어 있다. 위세 등등하던 그들과 함께 그 시절을 살아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인 일상에 관한 역사책이다. 이승만의 공과,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 전두환과 민주화 시위 등등 현대사의 굵직한 단면들에서 당시 일상을 지배한 각종 재난과 사건사고까지 한 사람의 국민이 바라본 시선으로 역사를 담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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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엽 “현대무용은 다른 차원의 예술과 교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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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엽 예술감독의 신작 <개와 그림자>가 오는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2010년에 창단한 ‘국립현대무용단’ 초대예술감독으로 3년간 활동한 홍승엽 감독은 오는 7월 임기를 마친다. <개와 그림자>는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작품으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받은 영감을 이솝우화 ‘개와 그림자’로 연결했다. 공연 개막을 2주 앞두고 홍승엽 예술감독을 국립현대무용단 연습실에서 만났다.

홍승엽 감독은 국내 현대무용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용계에서는 ‘독립군’, 스스로는 ‘외딴 섬’이라고 불릴 만큼 주류에서 벗어난 무용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국립현대무용단의 장을 맡게 됐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무용가 홍승엽의 태생은 남달랐다. 홍승엽 감독은 대학에서 평범한 공대생으로 섬유공학을 전공하다가 스물이 넘은 나이에 현대무용에 입문, 데뷔 2년 만에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 ‘대한민국무용제(현 서울무용제)’ 등 국내 최고 권위의 무용 콩쿠르를 석권하며 주목 받았다. 좀 더 전통적인 무용을 배우겠다는 생각에 유니버설발레단에서 3년간 활동했고 무용가로 데뷔한지 7년이 되던 1993년, 민간 최초의 전문무용단 ‘댄스시어터 온’을 창단해 다수의 무용인을 발굴했으며 국내 안무가로는 최초로 ‘프랑스 리옹댄스비엔날레’에 초청되는 등 성공적인 유럽무대 진출을 이끌어냈다. 국립현대무용단에서는 2011년 창단 공연 <블랙박스>를 비롯해, <수상한 파라다이스>, <호시탐탐>, <아Q>, <벽오금학> 등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오는 7월, 창단 3년 만에 무용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공연을 펼친다. 지난해 발표한 홍승엽 예술감독의 공연 <호시탐탐>을 7월 8일 뷔츠부르크 시립극장 초청 공연을 시작으로 바트홈부르크 극장, 베를린 축제극장 등에서 세 차례 무대에 올린다. 홍승엽 감독은 임기를 마친 뒤 곧바로 개인 활동에 들어간다. 독일 올덴부르기쉐 주립극장의 초청을 받아 신작 공연을 펼치는 것. 홍승엽 감독은 8월 3일, 독일로 출국해 연말 공연을 준비할 계획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많은 공연의 오픈 리허설 행사를 열었다.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풍토이고 무용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관객들을 리허설 무대에 초청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티켓 세일즈를 위한 측면과 좀처럼 현대무용을 접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 현대무용을 소개하고 싶어서다.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아예 현대무용이라는 예술 장르를 볼래야 볼 수 없는 그런 환경들이 많다. 무용수들이 땀에 흠뻑 젖어가면서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진지하게 열심히 하는구나. 새로운 걸 만들어가는 구나’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진실한 에너지를 경험하면 예술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질 거라 생각한다.

<개와 그림자>의 경우 13명의 무용수가 출연한다. 군무도 있지만 대부분 무용수들의 동작이 단독적이다. 안무를 만들 때, 작은 동작 하나하나까지 안무가가 만드는가? 아니면 무용수 개인이 자신의 동작을 창작하는 경우도 있나?

5년 전까지만 해도 안무의 95% 정도를 무용수에게 일일이 다 만들어줬다. 하지만 국립현대무용단원들은 경험이 많고 자기 표현이 충분히 되는 무용수들이기 때문에 개인의 아이디어, 변형을 존중해줬다. 말하자면 완벽하게 내 것도 그들의 것도 아닌, 함께 만들어진 작품이다.

안무가로서 <개와 그림자>공연을 소개한다면?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받은 영감을 이솝우화 ‘개와 그림자’로 연결한 작품이다. 우화는 개울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입에 문 고기를 빠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개와 그림자>에서 그림자는 껍데기 혹은 ‘허상적 자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개가 거울을 보면 그 모습이 자신이라는 걸 모르지만, 사람은 항상 거울을 보며 그것이 자기 본질로 착각할 수 있지 않나. 자아를 볼 때 내가 보는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는 그 자아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대무용은 ‘어렵다,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안무가 입장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서 에너지를 전달하고 이미지를 전달하는 작업’이 현대무용이다. 우선 공연을 부담 갖지 말고 보러 왔으면 좋겠다. 처음부터는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작품에 빠져들다 보면 호기심이 생기고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벽오금학>, <아Q>, <호시탐탐> 등 홍승엽 감독이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들은 안무의 밀도가 굉장히 높다. 매우 까다로운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일 것 같다. 프로젝트 단위로 오디션을 보고 무용수를 선발했는데,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나.

나는 무용수들에게 내 동작을 철저하게 요구하는 안무가다. 한국 현대무용계가 때때로 게으름 작업들을 하는 걸 볼 때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새로운 안무를 창조하는 것보다 기존에 발표된 좋은 안무 여러 개를 엮어 무대에 올리는 걸 보면 답답하다. 오디션을 볼 때 내가 만든 기준은 없다. 대학 입시의 경우 80, 90%가 규격화 되어있는데 나에게는 그 기준이 50%도 해당되지 않는다. 심사를 할 때 이미 작품을 완성해놓고 무용수를 뽑는 게 아니다. ‘이런 작품을 하고 싶다’라는 윤곽이 잡힌 채로 오디션을 보는데, 어떤 무용수를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에너지를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런 무용수를 뽑게 된다.

신체적인 기능이 기본 조건이 되겠지만 무용수의 예술적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기질이 얼마나 깊이 있게 들어가 있나,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 더 요구하는 건 진실성의 문제다. 자기 표현에 있어서 얼마나 진실한가와 상통한다. 표현의 깊이라 던지 테크닉의 수준을 말할 때 진실성이라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지만 모두 묶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실된 표현을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것, 더 깊이 있는 진실을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예술적 스킬이다.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스킬이다.

현대무용 전공자들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선 무척 소탈하다는 점이다(웃음). 발레 전공자들이나 다른 분야 사람들을 보면 어쩜 그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현대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다 떨어진 트레이닝복도 아무렇지 않게 잘 입고 다닌다. 하지만 정작 공연 연습에 들어가면 집중하는 에너지가 차원이 다르다. 발레공연에서 주역 이상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뽑아 낸다.

대개 안무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

보통 6, 7월 즈음에 공연하면 5월 쯤에 안무가 완성된다. 신작 공연이 올라가기 전까지 나는 불안하다. 머릿속에 깡통이라서(웃음). 연극은 텍스트가 있고 그것을 연출자가 연출하면 되지만 현대무용의 경우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한다. 알갱이를 찾기 위해서 계속 채집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머물게 되는 곳이 있다. 현대무용 창작에 있어서는 어떤 걸 소재로 하는 것보다 어떤 방식의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전과는 다른 표현 방식을 찾는 것이 안무가로서의 역할이다.




현대무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무용수들에게 음감은 어떤 의미인가.

제대로 된 무용인들에게는 몸 안에 음악이 있다. 몸 자체에서 음악을 만들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무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모르는 무용인들도 의외로 많다. 박자만 아는 경우다. 음악을 춤추는 공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몸에 음감이 없는 거다. 하지만 뒤늦게 무용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엄청난 사람들이 많다. 클래식의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지만, 현대무용은 자기 기질을 누르다 누르다 참지 못하고 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

평범한 공학도에서 스물이 넘은 나이에 무용계에 데뷔했다. 당시, 남자 무용가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무용을 하게 되었나.

30년 전에는 남자가 무용을 한다는 생각을 감히 쉽게 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수준이었을 거다. 꽂히면 벗어나기 힘든 게 예술이다. 특히 음악이나 무용 같은 장르는 교육받고 훈련 받아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사람에게 기질이 있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는 거다. 환경적인 면 때문에 모르고 지내다가, 어떤 동기에 의해서 꿈틀대고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접속이 되면 다른 것을 하기 힘들다. 내가 생각하고 찾는 게 아니라, 점령되어버리는 거다.

유니버셜 발레단으로도 활동했는데 발레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무용을 시작하고 1년도 안 지나서 발레와 함께 배웠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이 생기면 발레를 배웠다. 나에게는 현대무용과 발레, 두 분야를 다 했다가 아니라 춤의 기초가 되는 부분을 가지고 있겠다는 개념이다. 국립현대무용단도 1주일에 현대무용 수업을 세 번, 발레 수업을 두 번 진행하고 있다. 외국 현대무용단의 경우를 살펴봐도 우리와 비슷하게 수업을 하고 있다. 아마 내가 무용을 좀 더 잘 알았다면 발레를 먼저 배우고 창작을 했을 거다. 막연하게 무용은 어릴 때부터 해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대무용을 시작했는데, 뒤늦게 발레를 시작한 남자 무용수도 많더라. 내가 원하는 춤을 잘 추면 되는 거지, 굳이 배타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1993년에 민간 최초의 전문 무용단 ‘댄스시어터 온’을 창단했다. 현대무용에 입문하면서부터 줄곧 안무가 역할도 겸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찍부터 창작자의 역할을 맡은 것이 도움이 되었나?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동작을 따라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군무 같은 경우에는 안무가가 만들어준 동작을 습득했지만, 남자 무용수가 많지 않았던 터라 개인적인 동작 같은 것은 거의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무용수일 때부터 이미 안무자로서 훈련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경험은 아니다. 내가 무용수로 활동할 때 부러웠던 것은 외국 무용수들이 안무가와 서로 교감하며 작업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선배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 사람들의 예술성을 받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 아쉬웠다.




2010년 국립현대무용단이 창단되며 초대예술감독으로 임명됐다. 초대 감독이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욱 막중했을 것 같다. 3년간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초대예술감독의 자리를 수락한 것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다는 생각 만으로 뛰어든 게 아니고 내가 이 분야에서 꼭 할 일이 있겠구나, 라는 예감을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을 꾸리면서 어떤 일의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의미 있는 작업과 성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본다. 예술의전당 서예관에 국립현대무용단 연습동이 만들어진 게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 이뤄졌다. 현대무용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가지를 치게 된 거다. 또 해외 및 국내안무가 초청공연, 기획 공연, 안무가 베이스캠프 등 의미 있는 작업들이 많았다.

현대무용은 순수 예술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처럼 다수의 관객과 소통할 기회가 없다. 아쉬운 마음은 없는지?

현대무용은 다수의 예술이 되지 못한다. 이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예술로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이미 상업예술로 넘어갔다. 어떤 예술은 어떤 시대라도 순수 예술일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로 가기보다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에 도전하려면 소수의 팬 층밖에 확보하지 못한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평생의 업보인데, 현대무용은 그 업보가 가장 큰 분야다. 현대무용은 검증되지 않은 창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예술이 된다는 건 모순이다. 대중적인 시장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무용이 국제적인 시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외국에서도 이런 예술에 대해서는 대중화를 접목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극장과 극장 간에 연계가 서로 잘 되어 있다. 순수예술 분야는 페스티벌, 투어를 자주 하게 되는데, 관객이 많지 않기 때문에 무대를 옮겨 가며 관객들을 만나야 한다.

처음으로 현대무용 공연을 접하는 관객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공연장에 오면 느낄 것이다. 현대무용은 난해하고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숙제가 아니라, 관객들 스스로 호기심이 발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걸 느끼는 순간 알게 되는 예술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예술을 향유하는 것보다, 내 안목에서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현대무용과 소통할 수 있다. 현대무용을 대중화 시키겠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모든 객석이 무용인으로 채워지는 공연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함께 섞여서 공연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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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번역가 이미도 “창조적 상상력을 키우면 식스팩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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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쪽이 넘는, 마치 사전 같은 묵직함을 가진 『똑똑한 식스팩』. 무겁겠다 싶은 마음으로 책을 들어 보니 생각보다 가볍다. 자기계발서라고 분류되어 있으니 촘촘한 행간을 예상했는데, 총천연색의 삽화에 여백의 미도 상당하다. 각 장의 제목들은 마치 영화 스크린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편집되어, 독자들에게 부담을 갖지 말라며 속삭인다. 곳곳에 영어 활자가 눈에 띄지만 영어학습서가 아님은 분명하니, 호기심을 갖고 책장을 폈다. 외화번역가 이미도가 2012년 12월 26일부터 올해 1월 1일까지, 단 7일 만에(!!) 초고를 완성한 『똑똑한 식스팩』은 표지부터 겉장까지, 예사롭지 않다. 책의 탄생 비화를 묻자, 쉴 틈 없이 에피소드를 쏟아내는 이미도 저자. 삽화를 그린 작가 헌즈는 이미도가 직접 섭외한 오랜 지인이며, 제목 ‘똑똑한 식스팩’은 집필 전부터 생각해놓은 이름이란다. 자기계발서이지만 깊이 따져보면 ‘자기발견서’라는 이름이 적확하며, 독자들이 책을 읽다가 메모를 할 수 있도록 시원시원한 레이아웃을 콘셉트로 했다고 썰을 풀었다. 도무지 이야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른 질문으로 노선을(?) 바꾸려던 찰나, 이미도 저자는 “인터뷰를 기다리며 ‘YES24’의 의미를 재구성해보았다”며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YES의 ‘Y’는 그대로 ‘YES’. positive attitude, 긍정적인 태도죠. 짐 캐리가 주연한 <예스 맨>에서 주인공 칼 앨런은 처음에는 ‘No Man’이었잖아요. 칼을 딱하게 보던 친구는 그에게 ‘Live your Life’라고 말하죠. 직역하면 너의 삶을 살아라, 네가 행복한대로 살라는 말인데, YES24가 좋은 인터넷서점이 되려면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지요. 두 번째, E는 ‘entertainment’의 ‘E’입니다.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 자체가 재미라는 의미를 품고 있잖아요. 제가 강연을 하러 가면 늘 받는 질문이 ‘어떻게 창의력을 키울 수 있습니까’라는 말이에요. 답은 이렇습니다. 제1조건은 재밌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맨 앞에 ‘좋아하는 일’을 두어야 한다는 점이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빠지게 되고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면 더 재밌고 싶고, 그 순간부터 창의력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 ‘S’는 무엇일까요? 바로 ‘story’입니다. 좋아하고 재밌으려면 스토리가 좋아야 합니다. 책이든 영화이든 개인의 삶이든 스토리가 좋아야 우리는 감동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긍정적인 사람이 재밌지 않을 수가 없고, 긍정적인 사람이 스토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죠.”




『똑똑한 식스팩』을 보니 카피라이터 능력이 대단하다. 일부러 글자 수를 맞추려고 편집한 노력도 보이고 문장도 디자인한 느낌이 든다. 일주일 만에 초안을 완성했다니, 그것도 연말을 한창 즐길 때인데.

(웃음). 일주일 만에 원고지 950매를 썼다. 2012년 12월 26일부터 올해 1월 1일까지. 연말이니 중요한 약속은 없으니 책 쓰기 좋은 시간 아닌가. 부산 해운대 앞 카페에서 주로 썼는데 집중이 잘 되더라. <문화일보> 칼럼에 소개한 영화 중에 필독영화 19개를 골랐는데 모두 창의력과 관련된 내용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식스팩’이라는 단어만 보면 운동법을 소개한 책인 것 같은데, ‘똑똑한’을 붙이니 뭔가 다른 의미가 있어 보였다.

내가 쓴 모든 책의 제목은 직접 지었다. 자랑하려는 게 아니고(웃음) 제목을 잘 짓고 싶다는 의지가 반영된 거다. 책을 쓰겠다고 생각하면 먼저 제목부터 정한다. 다 써놓고 제목을 정하면 굉장히 힘들어진다. 너무 많은 걸 넣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쿨하게 심플하게,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독자들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제목을 짓고 싶었다. 언어유희를 해가면서 제목을 만들다 보면 훨씬 수월해진다. 건강미가 느껴지는 식스팩은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나? 그걸 머리에 만들면? 스마트 식스팩이 될 텐데, 모두 영어를 사용하기보다는 한글과 조합하고 싶어서 ‘똑똑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제목을 정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리서치를 했는데, 3:7로 나눠지더라. 3은 ‘운동 관련 책인가요? 아닐 것 같은데’라는 반응이었고, 7은 ‘식스팩이 딱딱한 거니까 머리? 두뇌가 똑똑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똑똑한 식스팩’으로 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제목을 먼저 정하면 내용을 채우기도 훨씬 쉽다.

1,2부 총 36장에 모두 삽화가 있다. 내용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내 책들에 삽화를 그려준 일러스트레이터 헌즈의 작품이다. 글에서 느끼는 상상력을 떠나서 그림을 통한 상상력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렇게 총천연색 삽화가 들어간 자기계발서를 본 적은 없을 거다(웃음).

표지도 직접 아이디어를 냈나?

원래는 출판사 디자인팀에 제목을 두 줄로 써서 드렸다. 그런데 유능한 디자이너께서 내가 강의를 할 때 설명했던 ‘트리플 A 피라미드’를 보고 피라미드 모형을 응용해서 제목을 디자인했더라. 무척 마음에 든다.




창조적 상상력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듯 하다. 책에서 ‘트리플 A’가 성공 피라미드의 요인이라고 소개했는데, 언어를 조탁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물론이다. 영화 번역이나 포스터 카피 작업을 할 때도 언제나 재밌고 즐겁게 하려고 노력한다. 책은 ‘상상력을 BOOK돋는 매체”라는 말도 만들었다. 어떤가? 말 되지 않나? 트리플 A는 AA 위에 A를 하나 더 쌓은 모양이다. Amusement, Ability, Accumulation을 의미한다. Amusement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나를 재밌게 하는 일의 상징이다. Ability는 내가 그 일을 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능력, 즉 재능이다. Accumulation는 땀과 노력과 훈련의 결실인 ‘경험 축적’을 뜻한다. AAA 무기를 가지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VIP다. Very Imaginative Person, 상상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고, Very Important Person, 당연히 리더가 되는 사람이다.

외화번역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강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문화일보>에 매주 연재하고 있는 칼럼 ‘이미도의 인생을 바꾼 명대사’는 4년이 넘게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4년 3개월째 진행 중이다. 지난주까지 222개 칼럼을 썼는데 매주 마감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쓰고 있다. 이제 5년차로 가게 됐는데 칼럼에서 내용을 조금 발췌해서 쓴 책이 2010년에 나온 『이미도의 영어선물』이고, 이번 『똑똑한 식스팩』에서는 필독 영화 부분에 칼럼 내용을 넣었다.

강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가? 번역가가 이렇게 달변가라니 놀랍다.

2009년인가, 법제처에서 강연을 하게 됐다. 부산에서 서울로 KTX를 타고 가고 있는데 전 법제처장이었던 이석연 변호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내 첫 책부터 즐겨 읽었다고 하면서 ‘창조적 상상력’을 키워드로 법제처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보지 않냐고 했다. 이석연 변호사님이 굉장한 독서가인데 공직 사회에서 창조 혁신의 바람을 만든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강연 요청을 수락하고 정성껏 준비했는데, 이미지 중심의 강연을 하니 새롭다는 반응이었다. 법제처도 언어를 다루는 곳 아닌가. 글을 쓰는 나도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고. 언어는 창의성을 키우는 도구이기 때문에 서로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창조적 상상력을 키우는 게, 왜 중요한가.

Change, 우리는 변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 수많은 영화들, 그 영화들이 가진 주제들을 쫙 펼쳐놓고 공통된 주제를 뽑아내면 바로 ‘Change’다. 주인공은 갈등. 투쟁, 발견, 성찰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 사회, 국가를 변화하게 한다. 창조적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는 나부터 변하기 위함이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볼 때, 저자 이미도가 변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어릴 적에 굉장히 소심했던 아이였다. 발표력도 떨어지고 무척 내성적이었다. 그런 나를 바꿔 놓은 게 스토리다.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됐든, 캐릭터가 됐든 막 이야기해주고 싶더라(웃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E.T> 캐릭터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아나? 두뇌와 감성이 모두 뛰어난 E.T는 과학자 아인슈타인, 미국 시인 칼 샌드버그, 퍼그 강아지의 얼굴을 모두 합성해 만든 캐릭터다. 스필버그는 E.T 캐릭터에 이미 미래형 창조적 인재의 모습을 투영한 거다. 30년 전에 이미 영화로 예측을 했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 난 그렇게 생각한다. 재밌는 영화를 보게 되면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오래 전부터 한글, 영어를 혼용해 글을 쓰고 있는데 『똑똑한 식스팩』에서도 다양한 변주로 영어 단어를 활용했다. 추상적인 주제일수록 독자들이 재밌게 이해하고 쉽게 기억하도록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독가로 알고 있다. 책에서도 ‘독서’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디자인은 창조의 상징이고 디자인을 잘하려면 책을, 글을 읽어야 한다. 여기서 디자인은 Design. Sign은 고정관념, 통념, 상식의 상징이고 de는 파괴하다(destruct)의 접두어다. 창의력의 모든 적들은 상징이다. 그걸 파괴하는 사람이 상식 파괴자이다. 상식을 파괴하려는 사람이 되려면 R&D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Read and Design이다. 책을 읽으면 상식을 파괴할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하는 훈련을 즐기면 창의력의 핵인 독창성을 키울 수 있다. 강연을 가면 항상 듣는 질문이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다. 좋아하는 놀이가 ‘독서’가 돼야 한다.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이리스 머독은 ‘인간에게 언어가 없다면 어떻게 사고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언어 능력을 쌓지 않으면 창조적 상상력을 키울 수 없다. 언어의 한계가 곧 당신의 한계가 될 수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은 “Word can change the world.”라고 말했다. 언어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창의력 증진을 위한 언어 공부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독서다. 10세 이상의 우리나라 국민 중 하루에 10분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은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성인이 순수하게 독서를 위해 읽는 책이 한 사람 기준 일 년에 한 권이 안 되는 게 현실이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언어 실력을 쌓기 위해 저자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매일 세 종의 신문을 매일 두 세 시간씩 읽고 있다. 신문은 세계와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창이기 때문이다. 종이 신문 읽기는 굉장히 훌륭한 언어 공부 수단이다. 포털에 올라오는 인터넷 뉴스는 쪼가리 정보만 제공할 뿐이다. ‘통’ 정보를 얻고 ‘덩어리’ 지식을 습득하려면 종이 신문을 읽어야 한다. 종합 일간지 하루 치엔 원고지 900매쯤의 활자가 들어 있다. 원고지 300매는 산문집 단행본을 예로 들면 100쪽 분량. 그러니까 900매를 담은 하루 치 신문은 300쪽 분량의 단행본 한 권인 셈이다. 종이 신문을 열심히 읽으면 매달 스물네 권의 단행본을 읽는 셈이다.




예비 독자들에게 『똑똑한 식스팩』을 활용하는 법을 말해준다면.

1부는 창조적 상상력을 빨아들일 수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창조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가’에 집중했고, 2부는 창조적 상상력을 ‘더’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들여다보았다. 호기심과 창의력이 무엇인지 깨닫고 도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경청하고 실천한다면 어느새 창조적 상상력의 식스팩이 당신에게 생겼을 것이다. 검색은 자기계발이고, 사색은 자기발견이다. 자기계발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발견이다.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사람들은 얼굴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거울을 사용하지만, 영혼을 들여다보려면 예술작품을 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계발이 사교육이라면 자기발견은 공교육이다. 자기발견을 해야만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그것을 위해서 어떤 재능을 키워 나가야 할지 알 수 있다. 책에 실린 38개 꼭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필독 영화도 감상하며 자기 발전적 사색을 하다 보면 창조적 상상력은 덤으로 따라올 거다.

세 권의 책을 집필 중이라고 들었다. 제목도 벌써 정했던데, 추진력이 대단하다.

‘고독의 테크닉’, ‘이영애 영어책’, ‘나의 영어는 그림책에서 시작됐다’를 쓰고 있다. ‘고독의 테크닉’은 산문집인데 내가 어쨌든 혼자 살면서 혼자 일하고 있으니 솔로로 살면서 재밌게 살 수 있는 나만의 테크닉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이영애 영어책’은 영어학습서다. ‘이영애’라고 하면 1차적으로 배우를 떠올리겠지만 ‘이번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다’, ‘이래도 영어가 애먹으시나요?’, ‘이미도의 영화 사랑 애(愛)’의 준말이다. 배우 이영애 씨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탁월한 영어 실력을 뽐내기도 했지 않나. , ‘나의 영어는 그림책에서 시작됐다’는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의 후속작이기도 한데, 그동안 성인들을 위한 책을 썼다면 초등학생들을 위한 그림이 많은 영어 학습서를 내고 싶어서 쓰고 있는 책이다.

1993년부터 20년째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잭 리처>, <식스 센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비롯해 <크루즈 패밀리>, <뮬란>, <니모를 찾아서> 같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번역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

다음달에 개봉하는 <캐리바안의 해적> 제작진과 조니 뎁이 주연한 <론 레인저> 번역을 최근에 마쳤다. 굳이 단어의 뜻을 풀이한다면 ‘고독한 방랑자’ 정도가 될 텐데, 열차 강도들을 상대로 정의를 지키는 이야기다. 그리고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달팽이가 카레이싱 경주에 나간다는 <터보>라는 애니메이션 번역을 하는 중이다.

번역, 강연, 집필 활동을 꾸준히 병행할 계획인가.

물론이다. 세 가지를 출동 없이, 일에 치어가는 게 아니라 즐기면서 하려고 한다. 또한 잘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 배분을 효율적으로 하려고 한다. 『아웃라이어』라는 책에 ‘1만 시간 법칙’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누구나 좋아하는 대상을 하루 세 시간씩 10년 동안 연습하고 훈련하면 1만 시간이 되며, 그걸 실천한 사람에겐 반드시 성공의 기회가 온다’는 법칙이다. 나는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능력을 연결해서 20년째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번역으로만 2만 시간 법칙을 실천한 셈이다. 또 2003년부터 10년째 글쓰기를 하고 있으니, 창작으로 1만 시간 법칙을 실천한 셈이다. 노력하고 실천하면 이렇게 멋진 기회들이 찾아온다. 일로도 영화를 보지만, 평상시 취미도 영화를 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일을 할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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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식스팩이미도 저/헌즈 그림 | 디자인하우스
저자는 이 책의 분야가 자기발견서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꿈이 무엇이며, 왜 그 꿈을 꾸는가?" 등의 질문에 해답을 준다는 것이다. ‘창조적 상상력 근육’은 최고의 식스팩이다. 이 근육은 똑똑할 뿐만 아니라 막강하다. 다르게 생각하는 훈련을 즐기면 창의력의 핵인 독창성을 키울 수 있다. 독창성을 더 키우려면 껑충껑충 넘나들기를 해야 한다. 학문의 영역을 넘나드는 건, 일을 놀이처럼, 놀이를 일처럼 넘나드는 건 모두 재미있다. 이 모든 노력과 재미의 결과가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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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정석? 공모전의 여왕 박신영에게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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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0대에 갓 접어든 나이지만 그녀가 쌓아온 경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은 대학시절, 광고계에 수위를 다투는 제일기획과 LG애드 기획서 부문 대상을 비롯해 크고 작은 공모전을 휩쓴 그녀에게 붙은 별명은 ‘공모전의 여왕’이었다. 대학시절 무려 23관왕을 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 공모전 상금으로 혼수 준비를 다 마칠 정도. 이후 그녀는 대학시절부터 특강을 하거나 ‘대학생이 만나고 싶은 대학생 1위’로 꼽히는 진기록을 연이어 세워나간다. 그 무렵 처음 그녀가 출간한 책이 바로 『삽질정신』이다. 기획의 ‘ㄱ’자도 몰랐던 그녀가 넓고 깊은 삽질을 통해 성취를 맺기까지의 노하우를 담은 것이었다. 졸업 후 그녀의 무대는 제일기획으로 바뀌었다. 쟁쟁한 학벌과 스펙으로 무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철저한 전문성과 디테일을 바탕으로 웃음의 미학과 여성적 감성을 활용한 그녀의 방식은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마치 물 만난 고기마냥 삼성그룹, 삼성전자, 대한항공, 아모레퍼시픽, 신한금융그룹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기업들이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브랜드의 전략기획 및 경쟁 PT를 담당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일하는 틈틈이 대학시절부터 시작했던 세미나와 특강도 놓지 않았다. 그 즈음 출간한 책은『렛츠 그루브』였다. 빡빡한 삶 속에 삶의 이유에 대해 새삼 고민을 해 본 시기였다.

그리고 3년 후 그녀는 폴앤마크 연구소장으로 변신했고 새로운 책 『기획의 정석』을 내놓았다. 대학시절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삶의 과정에서 뭇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부침을 겪으면서, 삽질정신으로 빡세게 살고 인생의 방향을 다시금 고민하며 내 놓은 정제된 결과물인 셈이다. 덕분에 책의 알맹이는 『삽질정신』보다 훨씬 전문적이고 디테일해졌고『렛츠 그루브』와는 또 다른 준비된 자의 여유가 느껴진다. 호기심이 생기게 만드는 삶을 살아온 여자, 박신영 저자와의 인터뷰는 생각보다 더 큰 유쾌함으로 채워졌다.




이번이 3번째 책으로 알고 있는데요. 왠지 책 출간과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비슷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네 맞아요. 그렇게 볼 수 있겠는데요. 우선 『삽질정신』은 할 줄 알아서 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깊고 넓은 삽질로 결과물을 모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동안 그런 삽질 정신으로 살다보니 제 자신이 너무 각이 지고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그런 탓에 두 번째 책인『렛츠 그루브』를 낼 때는 ‘너무 폼 잡지 말고 그루브하게 살자’는 생각을 했어요. 책을 내고 너무 이중적이라는 욕 좀 먹었죠(웃음). 그렇게 삽질 정신을 외치더니 난데없이 그루브하게 살자고 하니 그럴 만도 하죠. 아무튼 그렇게 볼 수도 있을 만큼 당시는 아등바등 살다가 문득 ‘인생이란 뭔가, 왜 살아야 되는가’를 고민하며 그루브한 삶을 지향하던 시점이죠. 이 두 과정을 다 겪고 나서 좀 더 정돈돼서 나온 게 『기획의 정석』인 것 같아요. 너무 감성만 있었고, 너무 이성만 있었던 와중에 마침내 치우치지 않는 밸런스를 찾은 셈이죠.

3년 전과 비교해 현재는 폴앤마크 연구소장 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제일기획 다닐 때는 제가 했던 일이 제품 브랜딩이라면 지금은 교육이라는 사람 브랜딩을 하게 있다는 점이죠. 하지만 본질은 같아요. 수많은 경쟁 상황에서 제품의 매력과 강점을 최대화해서 부각시켜주는 것은 사람에게 적용해도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제가 교육에 둔 가치는 그런 사람들 각각의 핵심 가치가 뭔지를 찾아 최대의 강점으로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저도 많이 바뀌더군요. 예전에는 굉장히 완벽함을 추구하는 탓에 꽤나 까다로웠거든요. 그런데 사람을 대하면서 가치가 달라진 것 같아요. 조금 더 유연해지고 조금 더 따뜻해졌다고 할까요. 이 전까진 내 자신이 완벽하고 군더더기 없이 빛나 보이는 게 중요했다면, 교육으로 분야를 옮기고 나서부터는 저보다는 교육 받으시는 분이 더 중요해지더라고요. 그런 변화는 3년 전에 특강을 하는 저와 지금 강의를 하는 저를 놓고 봐도 알 수 있어요. 어쩌면 옛날에는 그저 ‘나 잘났지’하는 식의 그야말로 특강일 뿐이었던 거죠.

이번 책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보면 『삽질정신』은 ‘감’에 의지한 책이었어요. ‘이렇게 해봤더니 이렇게 됐더라’ 처럼 딱히 구조화됐다기보다 ‘이런 것도 있어’란 느낌이었다면, 지금 『기획의 정석』은 제일기획의 현장 실무경험이 더해지고 또 미국 등을 방문해 받은 실질적인 이론 교육들, 그리고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쳤죠. 그러면서 좀 더 구조화된 기획을 알려드릴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는 독자가 저와 필이 안통하면 ‘아 네가 열심히 한건 알겠는데 나도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품게 했다면 지금은 스텝 바이 스텝으로 따라올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에 굉장히 초점을 맞췄어요. 이것도 제게 있어 달라진 부분이죠. 과거에는 ‘내가 이렇게 했어’였다면 지금은 ‘당신도 이렇게 한 번 해 보세요’가 됐다고 할까요(웃음).




공모전의 여왕에서 기획의 여왕으로

분야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기획’은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가장 난감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회사의 자잘한 업무를 챙기다보면 하다못해 회식을 준비해도 ‘기획력’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프로젝트 하나가 팀에 부여됐을 때 머리를 쥐어뜯어도 떠오르는 건 없고, 회의 한답시고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서로 공허한 소리만 쏟아놓고 있었던 경험. 그러다 결국 이래저래 짜깁기해 낸 기획서가 퇴짜 맞았던 경험. 직장인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대학시절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획을 파기 시작했다. 그야 말로 ‘삽질정신’으로 파고 또 팠다. 꽤 오래 전부터 그녀의 닉네임이 된 ‘공모전의 여왕’, 그 시작이 궁금했다.

오래 전 대학에 갓 입학한 어린 나이에 어떻게 기획에 눈을 뜨게 된 것인지 궁금하네요.

솔직히 시작은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사실 전 대학교 시절 뭐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에 가까웠죠. 한동대학교를 간 이유도 무전공 입학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정말 딱 학교를 갔는데도 뭘 해야 될지 모르겠더군요. 단지 좋았던 건 전공이 없으니 듣고 싶은 강의를 골라 들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정말 이런 저런 강의를 다 듣다가 문득 동아리도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꿈이나 그런 것도 없었고 그저 그냥 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제일 인기 많은 동아리, 선남선녀가 있다는 아카펠라 동아리 오디션을 봤어요. 근데 떨어지더라고요. 그때까지 사랑받는 막내딸로 컸던 탓인지, 충격이 컸어요.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어 두 번째 동아리를 남성 중창단 반주자로 지원했어요. 그런데 또 떨어지더군요. 세 번째 아나운서 동아리, 네 번째 뮤지컬 동아리 역시도 족족 떨어졌죠. 그때는 너무 절망적이어서 ‘나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나’ 싶을 정도였어요. 그때 한 친구가 오디션이 없는 광고학회를 추천한 거예요. 왜 사람이 그렇잖아요. 뭔가 쉽게 주어지면 감사한 줄 모르는데 당시 저는 뭔가 하고 싶은 열정이 억눌러져 있다가 폭발한 거예요. 광고학회에서 선배들이 ‘신영아 아이디어 생각해와’ 저 혼자 최소 20개씩 생각해 가곤 했죠. 그렇게 공부하게 됐어요. 정말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그래도 공모전 23관왕은 대단한 기록인데요. 그렇게 집중한 이유가 있나요.

당시에는 상을 정말 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번은 공모전 작품을 20개나 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겨우 1개가 입선을 하더군요. 그때 ‘진짜 열심히 하면 되는데, 그저 열심히만 하면 안 되겠구나’를 느꼈어요. 제게 절대적인 실력이 없으니까 겨우 턱걸이로 붙은 거잖아요. 그 후로 절대적인 실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정말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일등이 되보고 싶다는 욕심이죠. 처음 제일기획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한번은 운이 좋아 됐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2년 연속이면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2년 연속 대상을 받은 거고요. 다음에는 다른 공모전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LG애드 공모전에 대상을 받는 식이었어요. 그리고 사실 정말로 공모전 자체를 재미있게 즐겼던 것 같아요. 경영전략 수업 같은 걸 듣고 있으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거 이렇게 써먹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더 생각하게 되고 다시 그걸 현실적으로 공모전에 적용해보고 했던 재미가 컸던 거죠.

그 절대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저자는 제일기획에 입사해 브랜드 전략기획을 맡게 된다. 이후 삼성 신입사원의 창의력 교육을 비롯해 하나 같이 쟁쟁한 130여 개 기업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게 된다. 그 안에서도 그녀의 독특함과 감성은 빛났다. 또 핸디캡은 오히려 강점이 됐다.

제일기획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아는데, 혹시 학벌에 관한 편견을 접한 경험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주변 선후배들의 학벌이 사실 너무 좋기는 했어요. 가장 평범하게 서울대 나오시고 카이스트 졸업 아니면, 해외에서 석?박사를 하신 분들 많으셨으니까요. 그런데 학벌차로 인한 편견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분들은 저를 약간 특이한 애로 보신 거 같아요. 제가 있던 곳이 전략기획팀이었는데, 다들 진지하게 기획을 하시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와 달리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강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농담조로 제가 존경하는 상무님은 늘 저보도 ‘이 예체능 자식’이라고 부르시곤 하셨죠(웃음). 사실 서울대 나와서 똑똑하다는 소리 듣는 건 너무 당연해서 재미가 없잖아요. 그런데 아닌 사람이 잘 해냈을 때는 오히려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고 이야기 거리가 되죠. 그게 오히려 제 강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서울대 나와서 잘한다’보다 ‘얘는 진짜 절대적인 실력이 있는 애구나’란 인정을 받을 수 있었죠. 전 그런 것을 즐겼던 것 같아요.

그런 제일기획에서 현재 폴앤마크로 이직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실 제일기획은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장이기도 한데요.

제일기획 다닐 때도 교육 특강 의뢰가 오더라고요. 저는 너무 하고 싶은데 맡은 일 때문에 가지 못하고 때론 주말을 이용해 할 때도 있고요. 예를 신라호텔 16시간 강의 의뢰 같은 거죠. 회사 일을 하면서 어렵게 한 강의에서 교육의 맛을 느꼈다고 할까요. 제가 16시간 교육을 하고 나올 때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어요. 처음 교육을 갔을 때 ‘저 사람이 잘할 것 같다’, ‘저 사람은 별로 관심 없어 보이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없는 편견이죠. 결국 16시간의 강의가 끝나고 나서 최종 발표를 했는데 제 예상과 너무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오히려 시크하게 있던 분이 진짜 깊이 있는 아웃풋을 냈고, 잘할 것 같았던 분들은 딱 그 정도 모범답안이더군요. 그때 전 정말 크게 부끄러웠고 감동을 느꼈어요. 그 후부터 사람의 가능성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 경험 덕분에 더욱 강의를 하고 싶다, 교육을 하고 싶다는 열정을 느꼈어요. 그래서 폴앤마크를 택한 거죠.




여성, 껍질을 깨라

이직 이후 한 동안 적응을 하는데 몸살을 겪었지만 그녀는 다시금 바닥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수천 명 앞에서 특강을 하는가 하면, 에콰도르 정부와 코이카가 함께 한 ‘에콰도르 교육 혁신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자신보다 경험이나 연륜이 훨씬 많은, 쟁쟁한 명사들이 모인 청와대 특강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가 꿈꾸고 지향했던 절대적인 실력 앞에 여성이나 학벌을 꼬투리 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많은 직장 여성들이 부딪히는 고민에 대해 물어봤다.

책에서 깊이와 전문성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혹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문성에 의심을 받은 경우는 없었나요.

앞서 이야기 한 학벌의 경우처럼 저는 오히려 그런 걸 즐기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 경쟁 PT에 들어가면 진짜 분위기가 심각한데 저는 웃으면서 부드럽게 해요. 남자들이 하기 쉽지 않죠. 무의식적으로 군대 문화라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제일기획에 있을 때는 오히려 제가 PT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다른 것이 제 강점이 됐죠. 논리와 똑똑함으로 대적하면 싸우기만 할 거 같은데 항상 감성적으로 풀어냈으니까요. 제 삶의 가치관 중 하나가 약점의 보완보다는 강점의 최대화거든요. 경직되지 말고 즐겁게, 하지만 디테일과 전문성이 없이 웃기기만 한 건 아니고요. 저의 내공과 절제력은 확실히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거죠. 그런 경우 인정을 해 주신 거 같아요.

사실 많은 여성들이 직장 내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인데요. 때론 지쳐 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사실 저도 최종적인 아웃풋은 여성적인데 프로세스는 남성적이기는 해요. 우리가 너무 나다운 것만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요. 문화가 남성적이라면 그런 부분도 오픈해 놓고 강점을 최대화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가 봤을 때 제일 최악은 약점의 보완만 하다가 팔로우만 하는 거예요.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 분명히 있어요. 그걸 믿어야 해요. 저게 부족하지만 이게 강하니 이걸 키워야겠다. 그러면 판도가 달라질 수 있거든요.

태도에 대한 부분도 많이 공감이 됐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자기 자리에 자신의 업무에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이 참 많은데요. 저자의 경우는 어땠나요.

저는 약간 태생적으로 자존심이 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공모전을 할 때부터 팀원들이 모이면 항상 ‘우리는 정말 우주 최강의 드림팀이야’ 자화자찬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최고의 팀이라는 것을 계속 인식시키니까 결과물도 그에 맞춰 나오더군요. 하지만 짜증나서 못 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는 항상 나쁘게 결과가 나오고요. 제일기획을 다닐 때도 매일 아이디어를 까고 또 까요. 보고를 드리면 고치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그럼 또 회의를 하는 거예요. 그게 쉽지가 않잖아요. 한 번은 한 3개월 프로젝트가 지연되고 너무 힘들 때였는데, 제가 당시 회의하는 빨간 식탁에 팀원들과 앉아 ‘앉기만 하면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마법의 식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너무 피곤하고 우울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나서 정말 사람들이 그 식탁에 앉으면 신기하게도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거예요. ‘말해봤자 안되겠지’ 하면서 말한 게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였던 거죠. 우울하게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은 끝이 없어요. 저는 ‘뭐 때문에 안 돼요’ 보다는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스타일이에요. 우리 뇌는 주인이 주는 정보만 받아들인다고 하잖아요. 짜증난다고 하면 정말 짜증으로 받아들여요. 하기 싫은 것도 ‘마법을 내야겠다’, ‘한 번 해봐야겠다’ 그러면 정말 그런 쪽으로 작용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약간 습관화 되어있지 않았나 싶어요.

책에서는 ‘그분’이라고 하셨는데요. 상대가 상사든 클라이언트든 간에 그 스타일을 파악하는 자신만의 비결이 있나요.

정말 진심으로 대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배우게 된 팁인데, 진심을 조금 더 오해 없이 전달 기술 중 하나가 ‘미러링’이라는 거예요. 상대의 말투, 행동, 습관을 따라하는 것이죠. 끝말 따라 하기 같은 것도 포함이 되고요. ‘아~ 그래서 그러셨군요’라고 맞장구를 쳐주는 거죠. 그것도 비슷한 목소리 톤과 표정으로, 전 심지어 호흡도 비슷하게 맞춘 적이 있어요. 내가 교양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편하게 느끼게 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전 밝은 사람들하고 있으면 엄청 밝고, 조용한 사람과 만나면 조용해지는 것 같아요. 단, 가식적이고 전략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해야 해요. 상대와 소통하고자 하는 진심에서 효과를 보는 팁이죠.

앞으로도 저자의 삽질정신은 끝없이 이어질 듯 한데요. 현재 추구하고 있는 목표, 그리고 장기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인생의 목표를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 전까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부였어요. 공모전을 처음 시작한 것도 꿈보다는 그냥 재미있어서였고요. 그런데 최근 청년위원회 자문위원을 하면서 좀 많이 바뀌었어요. 사실 저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던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새로운 역할을 맡다보니 너무 가슴 아픈 상황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저의 재능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일 때 더 기쁘다는 걸 느꼈죠. 얼마 전에 멘토 중 한 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데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순간도 과거가 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또 미래를 계속 맞이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육이 이 미래를 바꿔주고 있다고 하셨죠. 그분은 교육을 ‘한 영혼의 영원을 바꿔주는 것’이라 정의하셨어요. 최근에는 그 것이 제 목표가 됐어요. 책을 낼 때도, 청년위원회에서 자문위원을 할 때도 ‘한 영혼의 영원을 바꿔줄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것’이 요즘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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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정석박신영 저 | 세종서적
저자는 대학교 때부터 1년에 수십 개의 기획서를 쓰고, 직접 현장 강의를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집대성하여 지난 10년간의 기획 필살기를 [기획의 정석] 한 권으로 담아냈다. 이 책은 단지 취업 준비생이나 공모전 참가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강의 중 만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학습자들의 고민을 듣고 해답을 제시하는 과정을 통해, 그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방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눈에 보고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렇게 다 보여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조목조목 기획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청춘, 우리들의 얘기니까요 - 딕펑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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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이 나왔는데 신보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김태현 : 반응이 중박 정도?
김현우 : 그래도 주위에서 많이 알아주시죠. 잘 모르셨을 것 같은데.
박가람 : 행사 같은데 가면 「Viva 청춘」에 많이 환호해 해주시고.
김재흥 : 많이들 따라 불러주시고요.

매우 바쁠 것 같은데 요즘 어떤 활동을 하며 지내나요?

태현 : 최근까지는 계속 방송하면서 고정되어있는 프로그램 나가고 있고요, 3일 전부터는 저녁에는 대학 축제를 다니면서 청춘 여러분들과 같이 보내고 있습니다.

인기보다 인지도를 높이고 싶다는 말이 있던데.

태현 : 사실 <슈퍼스타 K>를 나가게 된 이유가 1등을 해서 상금을 받자 이런 것 보다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리자는 마음이었어요. 생방송에 오래 나가고 싶었던 이유도 첫 라운드부터 떨어지면 한번밖에 못 나오고 말잖아요. 최대한 오래 나오려고 했죠.
현우 : 그전에는 앨범 내도 그냥 낸 거였죠. (웃음) 소장용으로요.
태현 :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차트에도 올라가고. 그만큼 인지도가 올라간 거죠.

소속사(TNC 컴퍼니)에 대해 얘기해보죠. 밴드만의 색을 낼 수 있는 회사를 원해 선택한 소속사라고 들었어요. 다른 회사들과는 다른 점이 있나요?

재흥 : 일단은 저희 앨범을 제일 빨리 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태현 : 그게 가장 큰 이유에요. 다른 회사들은 강압적으로 대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잘은 모르지만 어렴풋이 접한 얘기로는 그랬는데, 여기로 오면 저희가 하고 싶은 의견 조율이나 의사소통이라든지 그런 게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많이 작용했죠.
재흥 : 대부분 수직적으로 일을 많이 하잖아요. 여기는 수평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매니저도 안 거치고 대표님께 바로 얘기해요. (웃음) 그 정도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거죠. 앨범도 빨리 내고 싶었어요. 다른 회사들과 미팅을 해도 그 부분이 관건이었고요. 저희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표명이라고 생각 했어요 그 부분은. 또 다른 기획사에는 다른 가수들이 많이 있잖아요. 앨범 발매 순서에서도 제약이 있을 것 같았고요.
태현 : 실제로 이때쯤 낸다던 가수들 앨범도 많이 안 나왔어요.

의견 반영이 잘 된 편 인거죠? 이번 앨범은.

태현 : 그렇죠. 이번 앨범 작업하면서 느꼈어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어요.
재흥 : 물론 하고 싶은 걸 다 한다는 건 아니죠. 그래도 대화를 통해서 조정할 수 있었어요. 서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제시할 것은 제시하고. 조율을 잘 할 수 있었죠.

소속사에서 활동 방향이나 스케줄, 밴드 성격에 대해 두는 제약이 있나요?

태현 : 딱히 없어요.
재흥 : 현재까지 느낀 적이 없어요. 저희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밴드가 울타리 안에 갇힌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밴드가 대중성을 갖게 되는 방향, 한 아티스트로서 사람들에게 인식을 심어주는 게 맞다고 서로 생각하니까 활동에 제약을 두고 있진 않죠.


딕펑스는 메이저 신과 인디 신에서 모두 활동을 했어요. 달라진 점이 무엇인가요?

태현 : 예전에는 클럽 공연하다가 ‘저희가 신곡 하나냈어요 들어 보실래요’ 하면서 신곡 불러보고 반응을 반영해서 앨범에 싣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어요. 새로운 곡은 앨범에 실어야하니까요. 그런 게 크게 바뀐 부분이죠.
현우 : 그 전까지는 사실 별거 없었는데 지금은 스케줄도 많아지고 저희가 해보지 못한 걸, TV에서 봐왔던 것들을 몸소 체험하다보니까. 힘들다면 힘들지만 사실 재밌어요. 이렇게 산다는 것 자체도 재밌고요. (SNL에도 출연하지 않았나.) SNL 나갈 줄 전혀 생각 못 했죠. TV 보면서 ‘아 재밌다’ 이러고만 있었는데. (웃음)

메이저 신과 인디 신 둘 다 신경 써야 했을 것 같아요. 크게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나요?

현우 : 저희가 음악적인 부분에서 고민했던 점은 없어요 사실. 저희 음악을 대중적으로 봐주시는 부분이 있는데 저희는 멜로디 라인을 짜는데 있어 원래 대중적으로 접근해요. 이번엔 이렇게 해보자, 이번엔 저렇게 해보자 식으로 음악 자체로 신경 썼던 적이 없죠. 전부터 저희가 이렇게 해왔으니까요.
태현 : 대중적이라는 것이, 대중적인 멜로디나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들어주시면 그게 대중적인 음악이라 생각해요. 예를 들어 십센치(10cm)분들의 「아메리카노」도 원래는 인디 성향의 노래잖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러주시면서 대중적이라는 얘기가 나왔거든요. 같은 맥락이라 생각해요. 여기는 대중적이다, 저기는 아니다 이렇게 나누는 것 자체가 이상해보여요.

예전에 Ep 만들 때처럼 하고 싶은 음악을 한 건가요?

태현 : 네. 그런 식이었죠. 빨리 내려고 했던 것도 있고, 프로페셔널한 분들에게 도움도 받아보고 싶었던 마음도 컸어요. 그래서 강현민 씨와 심현보 씨랑 작업을 한 거고요. 가능성들을 열어 놓고 작업했어요.

강현민 씨와 심현보 씨와는 어떤 계기로 같이 작업을 하게 되었나요?

태현 : 말이 잘못 전달된 면이 있어요. 톡식이랑 심현보 씨랑 작업했던 게 좋아보여서 딕펑스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말이 나갔거든요. 사실 그게 아니에요. (재흥 : 그게 아니야?) (태현 : 아니야. 난 둘이 작업한 것도 몰랐어.) 그게 아니고 앨범 작업하기 전부터 대표님에게 프로듀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대표님이 심현보 씨 얘기를 꺼냈고 심현보 씨 말고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제안하셨거든요. 그렇게 얘기하다가 정해진 거예요.
재흥 : 저는 어땠냐면, 왜 다 다르지 얘기가. (웃음) 저는 톡식 작업하는 걸 옆에서 봤거든요. 가사를 (김)정우가 다 쓰더라고요. 그런데 전문작사가가 아니다보니 써놓고 보면 어색한 부분이 생기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해결하나 보니까 써놓은 가사를 심현보 씨한테 맡기더라고요. 그렇게 수정된 가사를 처음에 만든 가사와 같이 비교하면서 봤는데, 이게 단어 하나만 바뀌었는데도 깔끔하게 변하더라고요. 한 번에 딱. 그 때 계기로 현보 형 얘기 나왔을 때 바로 좋다고 했죠.
태현 : 대표님이 한 명 한 명한테 따로 물어본 거였죠. 그래서 서로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몰랐죠.

강현민 씨도 그렇게 작업을 같이 한 거죠?

태현 : 예. 한곡 해주셨어요. 곡 주시고 프로듀싱도 해주셨죠.

다른 아티스트들과 작업하면서 딕펑스 스스로 했을 때와는 어떤 차이를 보였나요?

태현 : 일단 많이 배웠어요. 밴드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 예를 들어 악곡이라든지 연주라든지 이런 것에만 중점적으로 신경 썼다면, 보컬에 대한 멜로디 라인이라든지 다른 악기가 들어와서 현악을 어떻게 편곡하는지, 이런 곳에까지 시선을 더 넓힐 수 있었죠.
재흥 : 곡에서는 세곡을 편곡해주셨고 가사 작업은 전곡을 다 봐주셨어요. 톡식의 「페로몬」이라는 곡처럼 저희가 기존에 썼던 가사들을 좀 더 말이 되게. 그 전에는 말이 안됐다고 보면 되요 (웃음) 이런 부분을 더 매끄럽게 하는 작업들을 전곡에 해주셨죠.
태현 : 어휘가 부족해 전달하지 못했던 의미들을 단어를 넣는다든지 아니면 정제를 한다든지 해서 보완해주셨어요.

앨범 콘셉트가 청춘이에요. 어떻게 나온 이야기인가요?

태현 : 저희가 청춘이니까요.
재흥 : 우리들의 얘기니까요.


앨범의 인트로라 할 수 있는 첫 트랙 「별」이 마이너 풍이에요. 어떤 의도에서 나온 곡 배치인가요?

재흥 : 글쎄요. 전체적으로 보면 메이저 풍의 곡들이 있잖아요. 발라드도 있고 기존에 했던 신나는 로킹한 곡들도 있고. 모든 걸 잘 버무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나온 결과고요.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에요. 계산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다보니 이렇게 나왔어요.

「Newyorker」에서는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특히 십센치 노래처럼 부른 「아메리카노」 부분이 재밌게 다가왔거든요. 곡을 만들면서 곳곳에 포인트를 넣고자 했던 건가요?

가람 : 아 이 곡에 대해서 말 안한 게 있는데 아이디어는 사실 태현이 거였어요. 그걸 재흥이가 가져다 작사, 작곡을 한 거고요.
재흥 : 요즘 아메리카노를 많이 들고 다니는 모습이 떠올라서 그 부분에서 포인트를 살리고 싶었어요. 십센치 노래에서 아이디어를 따왔고요.
가람 : 「Viva 청춘」보다 「Newyorker」를 더 좋다고 하는 팬 분들도 많아요.
태현 : 이거 여름에 노려봐야죠. 후속곡으로. (웃음)

기타가 없다는 것이 딕펑스의 주요한 특징인 것 같아요. 이 편성을 유지하는 이유가 있나요?

태현 : 처음 시작이 그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초심이죠. 기타 없는 밴드라는 것이 저희의 초심이었고. 기타가 싫어서 넣는 건 절대 아니고요.
현우 : 저희에게는 타이틀이에요 이게. 또 생각해보면 이 팀에는 기타가 들어가는 게 안 어울리는 거 같기도 했고요.

기타에 대한 아쉬움이 생기진 않을까요? 세션으로 활용해보는 건 어떤가요?

현우 : 딱히 없어요.
재흥 : 세션을 쓰는 건 좋긴 한데 기타에 대해 딱히 아쉬움이 없네요.
현우 : 기타의 공백에 대해서는 솔직히 개인적으로 작업을 하거나 합주를 할 때 절실히 느꼈어요. ‘록밴드에서는 기타가 진짜 있어야 하는구나’하면서 밴드 생활을 해왔고요. 그래도 기타에서 쓰이는 사운드나 테크닉들을 건반에 많이 적용하니까 특유의 사운드를 풍성하게 내볼 수 있었어요. 사실 이점을 많이 고민했거든요. 힘들었고. 어떻게 하면 우리 사운드가 더욱 커질까, 댐핑이 잘 걸릴까하면서요. 신스도 놓고 같이 쳐보고 이 친구(재흥)도 베이스에 드라이브 걸어 봤어요. 다양한 방법을 적용해보고 있죠.
태현 : 킨(Keane)도 기타가 없잖아요. 실험을 많이 해보고 있죠.

다른 가수들과 콜래보레이션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프로젝트 밴드 오케이 펑크!(OK PUNK!)처럼요.

모두 : 걸 그룹.
가람 : (홍)대광이 형이 씨스타 소유 씨랑 했잖아요. 「굿바이」 그게 부러웠어요.
태현 : 다른 밴드랑은 하고 싶지 않아요. (웃음) 밴드와 걸 그룹의 만남 이거 빨리…
현우 : 얼마 전에 십센치 형들도 오렌지 캬라멜이랑 하고…
재흥 : 유행 사라지기 전에 빨리 해야 되요.

한다면 어떤 팀과 해보고 싶은가요?

현우 : 저희는 포미닛. 「Muzik」을 했으니 명분도 있고.
태현 : 포미닛을 실제로 만났어요. 알아봐주고. ‘뮤직 했잖아, 뮤직’(웃음) 이러면서.
현우 : 생방송 때 TV로 봤다고 들었어요. 신사동호랭이 분과 같이.

아이돌 그룹 말고 선배랑 하는 건 어떤가요? 주현미 씨와 국카스텐이 했던 것처럼요.

태현 : 좋죠. 재밌어 보여요. 같이하고 싶은 선배님은.. 저는 산울림. 저희가 산울림 선배님 곡을 커버한 적이 있었거든요. 어렸을 땐 멀게 느껴졌는데 요즘에 밴드도 계속 하시고 헤드라이너에도 꾸준히 서시니까 가까이 듣게 되었거든요. 노래가 진짜 좋아요. 멜로디 라인도 급작스럽게 확 들어가고 사운드도 당기는 부분이 있고 되게 좋았어요.
가람 : 산울림 선배님들도 정말 좋은데 갑자기 생각나는 선배님은 봄여름가을겨울. 구성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오랜 경력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도 있고. 같이 해보고 싶어요.


이번 앨범에서 가장 수월하게 작업한 곡과 가장 힘들었던 곡을 꼽는다면?

현우 : 수월했던 건 솔직히 「Newyorker」였어요. 바뀐 것 없이 쉽게 진행했고요.
가람 : 저는 잘 모르겠지만… 연주가 어려웠던 건 「Answer me」 같은 곡들. 작업하면서 업그레이드가 되었거든요. 훨씬 더 재밌어졌는데 그만큼 어려워졌죠.
현우 : 「Answer me」랑 「별」과 같은 경우는 연주적으로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갔죠. 심지어 녹음을 하고 나중에 따로 연습해야할 정도였어요.
가람 : 작업할 때는 막 어렵거나 그런 건 없었는데 합주 맞출 때가 되니 힘들어 졌어요.

각자 애착이 가는 곡은 무엇인가요?

재흥 : 「Newyorker」
태현 : 「Viva 청춘」. 부르는 것도 재밌고요, 이 곡 부르면서 색다른 경험을 많이 했어요. 라디오 나가서 MR 틀어놓고 부르고 (현우 : 솔로가수죠 (웃음)) 음악방송 나가서 핸드싱크에도 부르고요.
현우 : 저는 최근에 쓴 「약국에 가면」이라는 곡. 몸이 너무 아플 때 쓴 거였어요. 당시에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응급실을 두세 번 다녀왔어요.
가람 : 저는 「난시」.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사실 녹음 다 완성됐을 때 듣고 놀랐어요.(소녀감성이 느껴진다.) 제가 원래 발라드나 가사 좋은 노래, 멜로디 좋은 노래를 좋아해요. 「Viva 청춘」도 좋아해요.

신보를 접하면서 팬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특별한 부분이 있나요?

태현 : 이런 얘기는 들었어요. ‘딕펑스 바뀌었다’, ‘엄청 신나는 음악 할 줄 알았는데 「Viva 청춘」 같은 곡 들고 나왔다’ 저희 스타일을 버렸다는 이야기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저희가 갖고 있던 스타일은 방방 뛰는 음악이 아니에요. 다만 그런 노래들을 큰 무대에서 몇 번 보여드려서 그렇죠.
재흥 : 좋은 음악을 하려고 해요. 색깔 변화의 유무를 따지려는 데에는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프로듀싱해주신 한승오 씨, 심현보 씨, 강현민 씨 언급하면서 왜 이러 사람들이랑 작업했나하는 얘기도 들어봤거든요. 사실 이런 분들 없었으면 이번 앨범이 안 나왔을 거예요.
현우 : 앨범에서 비바 청춘만 미드 템포 스타일이지 세곡은 빠르고 남은 두곡은 아예 발라드예요. 이런 게 원래 저희 스타일이죠.
태현 : 저희는 1집에서도 <Viva Primavera>에서와 같은 노래들 했었거든요. 사실 그러고 보면 슈스케에서 불렀던 「떠나지마」도 저희 스타일이 아니에요.


특별히 좋아하는, 혹은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나 음반이 있나요?

재흥 : 비틀즈. 4인조라는 형식도 그렇고 네 명이 밴드 음악에 어우러지는 것도 좋더라고요. 비틀즈는 앨범으로 안 듣고 음악 펼쳐놓고 랜덤으로 돌려 들었어요.
태현 : 제목을 봐도 무슨 곡인지 몰라서…?
재흥 : 아니 들어봐. (웃음) 곡마다 변별력을 가지고 들으려고 그렇게 들었어요. 장르가 정말 많잖아요. 딕펑스도 다양한 장르로서 접근을 해보자, 네 명이 만드는 음악에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게 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앨범을 꼽자면 <Revolver>.
태현 : 저는 퀸이요. 왜냐면 저희가 하는 음악이 퀸과 비슷한 느낌들이 많아요. 코러스도 있고 오페라적인 느낌도 있고, 장르도 그렇고요. 저희가 따라가면서 비슷해지는 것도 있어요. 혼자서 많이 듣는 노래는 「Love of my life」인데 밴드 차원에서 접근을 해보면 「Bohemian rhapsody」나 「Killer queen」을 더 선호해요. 앨범은 베스트 앨범이랑 <A Night At The Opera>를 좋아하고요.
현우 : 개인적으로 시저 시스터즈(Scissor Sisters)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아요. 기타가 있지만 피아노도 많이 쓰고, 음악적인 코드도 많이 맞고요. 많이 배우죠.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하면서요. 보컬이 가성을 많이 쓴다는 것도 비슷해요. 시저 시스터즈 음악을 많이 들으면서 태현이가 이런 식으로 부르면, 또 우리가 음악을 이런 식으로 하면 잘 어울리겠다고 느껴요. 앨범은 <Ta-Dah>. 「I don't feel like dancing」이 들어있어요.
가람 : 저는 항상 말하는 미카(Mika). 가요에서는 윤종신 베스트를 좋아하고 미카의 경우에는 쇼적인 부분도 음악적인 부분도 다 좋아해요, 그래서 「Big girl」도 커버해보고 있고요. 「We are golden」 들어있는 <The Boy Who Knew Too Much>처럼 초기 스타일을 더 좋아해요.
태현 : 그런 곡을 쓰려다가 망했지. (웃음)
가람 : 막상 써보려니 되게 힘들더라고요.

가람 씨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들었어요.

가람 : 예 저 할 거에요. B급 시트콤을 좋아해요.
재흥 : 개인적으로는 정극하면 좋겠어요. 자기는 사이코 연기나 B급 시트콤 같은 거 하고 싶어 하는데 사실 아침드라마나 아니면 사랑과 전쟁이 더 어울려 보이거든요.
태현 : 그래 아침드라마, 차라리 거기서 사이코 연기해. (웃음)
가람 : 아니 그게 아니고, 얼마 전에 이경규 선배님 인터뷰에 그런 문구가 실려 있더라고요. 개그맨은 직업이고 영화감독은 꿈이다. 되게 마음에 와 닿았거든요. 저도 비슷해요.
재흥 : 저희는 취미였음 좋겠는데 꿈이라고 하니까. 걱정되네요. (웃음)

딕펑스 음악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까요?

재흥 :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에 느낀 건데요, 장르적인 것은 언제 어떤 스타일로 내더라도 항상 우리 스타일대로 갈 것 같아요. 상당히 많은 장르들을 담았던 1집 때처럼 다양하게 가고 싶어요. 어쩌면 메탈도 할 수 있겠고요. 그런 모든 장르를 저희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Viva 청춘이라는 타이틀처럼, 그 곡들에 대한 내용과 얘깃거리, 주제를 정하는 것은 계속 얘기해봐야죠.
태현 : 어떤 기자분이 탈장르 밴드라고 얘기해주셨는데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장르에 대해 목매지 않고, 록밴드긴 한데 아닌 거 같고.


인터뷰 : 조아름, 이수호, 이기선
정리 : 이수호
사진 : 김한수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영자 “아침고요수목원, 고생길 보였지만 싫지 않은 모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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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고요수목원은 지난해 최고 연관람객 95만 명을 찍었다. 하기야 데이트 코스로 수목원 만한 곳이 있으랴. 숨 막히는 도시의 공기를 피해 산과 나무, 꽃을 만나기 위해 수목원을 찾은 사람들. 역시 표정이 달랐다. 그렇다면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꽃, 나무 부자인 이영자 아침고요수목원장의 얼굴은 어떠할까. 최근 『아침고요 정원일기』를 펴낸 이영자 원장은 타고난 느긋함이랄까, 주변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선이 상대의 바쁜 시선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아침고요수목원과 함께한 지 어느새 18년, 이영자 원장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는 숲과 정원 속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꿈을 꾸고 나니 그 곳에 내가 있었다

“어릴 적, 방학숙제 외에는 일기라는 걸 써본 적이 없어요. 수년 전, 아침고요수목원을 처음 개장했을 때는 매표소에서 표도 받아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니, 좀처럼 쉬는 여유도 부릴 수 없었고요. 그러다 몇 년 전부터 간간히 정원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아침고요에서 만나는 자연의 변화들을 눈으로만 보고 잊기는 너무 아쉽더라고요. 올 봄은 유난히 늦게 왔잖아요. 나무들이 힘이 없는 것 같아 안쓰러웠는데 어느새 새순이 나는 걸 볼 때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매일 아침, 꽃을 보며 눈을 뜨고 나무에게 인사를 건넨다는 이영자 원장. 식물들의 안부는 그에게 일기예보만큼이나 중요하다. 아침고요수목원의 태생은 20년 전 남편과 함께 방문한 캐나다 빅토리아 섬의 부차트 가든(Butchart Gardens)에서 시작된다. 당시 원예미학을 공부했던 남편은 대한민국에 제대로 조성된 정원이 없다는 것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 그러던 중 세계 유수의 정원들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부차트 가든을 본 순간 막연히 아침고요수목원을 구상했다. 아침고요(Morning calm)는 두 부부가 일찍부터 지어놓았던 이름이다. 여유 자금 하나 없이 오로지 열의로 시작한 아침고요수목원. 하루 관람객이 단 100명이라도 채워진다면 평생 하나님께 감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정원이다.

잣나무_ⓒ아침고요수목원

“정말 막연한 꿈이었어요. 남편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처음에는 농담처럼 수목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그 때만해도 한국에 수목원이 많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국립수목원으로 이름이 바뀐 광릉수목원 정도나 있었을까요. 그런데 남편은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준비도 없이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거든요(웃음). 엄청난 고생이 눈에 보였는데 이 모험이 싫지만은 않았어요. 남편의 의지가 워낙 강했으니까 적극적으로 반대는 안 하고, 가는 데까지는 가보자고 했죠. 그러다 땅을 보러 축령산 자락에 왔다가,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눈에 반해버렸죠. 꿈을 꾸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말 수목원 앞에 제가 서있더라고요.”

지금은 10만 평 부지이지만 개원 초창기에는 5만 평으로 시작했다. 설립자 한상경, 이영자 원장 부부는 화초를 키우는 비닐하우스를 일곱 동을 짓고, 나무를 심는 일에서부터 청소, 매표까지 직원 4명과 함께 고요한 아침의 수목원을 만들어갔다.

“1996년 미완성의 상태로 개원을 했는데 정말 사람이 이렇게나 안 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수목원 오는 길에 팻말 몇 개 붙인 것밖에 없으니 바깥 세상과는 동 떨어진 느낌이었죠. 정말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들어온 사람 몇 명이 전부였으니까요.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 남편이랑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신문사를 찾아가는 일이었어요. 나름의 보도자료를 만들어서 직접 기자들을 찾아갔죠. 자리에 없으면 자료랑 메모를 남겨 놓고, 꼭 한 번 방문해달라고 청을 했죠. 그런데 며칠 뒤, 조선일보 기자 한 분이 취재를 오셨어요. 사진도 찍고 갔는데 신문에 날 거라고는 기대를 안 했어요. 완성된 수목원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당시에는 인적도 드물었거든요.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매표소에 앉아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보니까 모두 신문 한 장을 오려서 들고 오더라고요. 기사가 났던 거죠.”

처음으로 관람객 100명을 넘은 날, 1996년 6월 6일 현충일이었고 총 관람객은 666명이었다. 이영자 원장에게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하루다. 이후 아침고요수목원은 점차 유명해졌고 영화 <편지>의 배경이 되면서 젊은 관람객들까지 줄지어 수목원을 찾았다. 2006년부터는 야간 조명 점등 행사 ‘오색별빛정원전’을 열어 겨울밤의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하경정원_ⓒ아침고요수목원

6월, 9월 수목원이 가장 아름다워요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영자 원장. 물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일기예보를 보는 일이다. “TV 프로그램 중에 가장 즐겨보는 게 일기예보에요. 식물들 건강을 챙기려면 부모로서 꼭 봐야지요. 날씨가 궂은 날에는 얼마나 신경이 많이 쓰이는지. 영어 단어 ‘care’라는 말은 돌봄도 되고 염려의 의미도 있잖아요. 딱 그런 것 같아요. 애정을 갖고 돌보는 대상인 만큼 염려도 큰 거죠.”

아침고요수목원에는 현재 자생식물, 외래식물을 포함해 총 5천여 종의 초본, 목본, 수생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야생화 정원과 무궁화동산에는 우리나라 자생 야생화 1천여 종이 있고, 5월 말과 6월 초에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품종인 독일계 아이리스 800여 종이 피어난다. 그 밖에도 백두산의 희귀 야생화 300여 종과 고산식물 230여 종, 무궁화 200여 종을 포함해 1천여 종의 다양한 수목들이 정원을 아우르고 있다.

“수목원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6월 초, 실록을 눈으로 볼 수 있을 때에요. 늦게 나오는 잎도 피고 잔디도 풍성하고 나무들에 하얀 꽃이 피는 계절이 참 아름다운 것 같아요. 『아침고요 정원일기』에도 썼지만 정원에서 위로를 많이 받아요. 일이 손에 안 잡히고 걱정 거리가 있고 화가 날 때, 산책을 하다 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걸 느끼죠. 때때마다 어울리는 식물들이 말을 걸어와요. 위로의 메시지를 주고 기운이 없을 때는 힘도 주고. 잔뜩 찌푸리는 일이 있어도 꽃이 나를 보고 웃어주니까 잊는 거죠(웃음).”


지금처럼 방문객이 많지 않은 시절, 이영자 원장은 아침고요수목원을 찾아주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말을 걸었다. 가끔 어두운 표정으로 수목원을 거니는 사람들을 마주치면 특히나 미소로 화답했다. “초창기 때 정말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었어요. 목사님이셨는데 이름은 잊어버렸네요. 교회에서 뭔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려운 일을 겪고 있었는데 일주일 넘게 여행을 하면서도 해결이 안 돼서 무거운 마음으로 수목원을 찾으셨대요. 힘 없이 터벅터벅 걷던 중에 성서산책로에서 십자가를 보는 순간, 그동안 마음 고생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녹아지고 용서가 되고 평안을 얻으셨다며, 눈물을 쏟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곳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면서 한 시간을 넘게 이야기했는데 이후에 지인들을 데리고 자주 오시곤 했어요. 이런 관람객들을 만날 때, 수목원을 하는 보람을 느껴요.”

치유의 장이 되는 곳. 아침고요수목원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비전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식물을 보러 오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안을 주기를, 이영자 원장을 바라고 있다.

“많은 분들이 아침고요수목원을 사랑하고 또 자주 찾아주시는 건, 이 정원이 품고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정원, 즉 자연의 울타리가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거대한 정원 속의 정원, 이게 아침고요수목원의 정의가 아닐까 싶어요. 어디를 봐도 그림이 되잖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 속에 수목원이 자리할 수 있었다는 게 저희에게는 큰 혜택이고 축복인 거죠.”

대학에서 교육심리를 전공하고 상담심리학을 강의한 이력이 있는 이영자 원장은 5년간 경기도 남양주시 청소년상담센터에서 소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상담을 전공한 탓인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들어주는 능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늘길_ⓒ아침고요수목원
 나의 꽃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미 내 가슴속에
 피어 있기 때문이다
                                                                     아침고요수목원 설립자인 남편 한상경이 아내 이영자 원장에게 고백하는 시


“시골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남편을 따라 결혼해서 정원사가 되고 또 수목원장이 된 지도 이제 곧 20년이에요. 요즘은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마음이 많이 쓰여요. 이렇게 아름다운 수목원을 선물해준 남편인데, 회복되길 기도하고 있죠. 아침고요수목원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는 정원을 큰 그림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하나 식물을 찬찬히 보시라고 말씀해드리고 싶어요. 찬찬히 음미하고 관람하다 보면 식물의 아름다운 특성이 눈에 들어오고 알아져요. 식물들의 세밀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죠(웃음). 지금은 무덥지만 9월 중순쯤, 쑥부쟁이 같은 가을꽃이 피면 그렇게나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10월에는 사람이 많아서 구경을 잘 못하시거든요. 9월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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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고요 정원일기이영자 저 | 샘터
1996년 경기도 가평군 축령산 자락에 문을 연 아침고요수목원. 10만여 평의 대지에 약 5천여 종의 식물들이 함께 어우러진 이 ‘낙원을 꿈꾸는 정원’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수목원이다. 아침고요수목원 이영자 원장이 출간한 《아침고요 정원일기》에는 20여 년 가까이 아침고요의 수많은 꽃과 나무들을 가꾸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응하며 울고 웃으며 함께한 소박한 일상이 담겨 있다. 아침고요수목원에 자리 잡은 20여 개의 정원과 그곳에 담긴 꽃에 대한 소소한 일상 이야기는 도시에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에 진심이 담긴 생생한 자연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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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19금 소설? 내숭 떨지 않는 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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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의 작가로만 김려령을 기억한다면, 앞으로 나올 그의 작품에 다소 놀랄지 모른다. 2007년에 데뷔해 마해송문학상(『기억을 가져온 아이』)과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창비청소년문학상(『완득이』)을 수상하며 어린이책, 청소년소설을 꾸준히 발표한 김려령 작가가 이제부터 성인소설, 아니 일반소설을 본격적으로 발표할 태세다. 김려령 작가는 “동화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가장 마지막에 찾아온 장르다. 동화로 데뷔를 하게 됐는데 독자들에게 ‘한 번 쓰고 마는 작가’로 인식되고 싶지 않았다. 늦게 찾아온 장르지만 끝까지 할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청소년소설과 성인소설을 구별하여 작업하지 않았다”는 김려령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10대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작품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대학 시절, 습작을 하며 주인공들을 하도 많이 죽여서 교수님으로부터 “살벌한 김려령이 청소년소설을 써서 의외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김려령 작가. 그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일반소설 『너를 봤어』는 작가가 오랫동안 애착을 가지고 쓴 작품이다. 그리고 또한 살벌하다.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폭력을 말하고 죽음을 이야기한다. 영화감독 변영주는 『너를 봤어』를 읽는 내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가 떠올랐단다. 두 작품 모두 인간 스스로의 죄의식, 그 안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를 봤어』는 중견소설가 정수현과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죽음을 선택한 그의 아내, 수현이 사랑한 후배작가 서영재의 이야기다. 표피적으로는 평탄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와 형의 폭력 속에 끔찍한 자의식을 갖고 있는 수현은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결혼하고, 그녀를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랑을 논하는 작가이지만 스스로에게는 사랑이 없다고 자시하던 수현. 영재를 만난 뒤, 변하는 자신을 깨닫지만 또한 변할 수 없는 본성에 고통스럽다. 김려령 작가는 “풋풋하고 설레는 연애 소설이 아니라 30,40대 인생을 아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숭이 아니라 저절로 손이 가는 사랑,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그런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너를 봤어』는 소설 속 영재와 도하가 쓴 단행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는 “누군가를 처음 봤을 때의 설렘을 담고 싶었다. 아픈 설렘일지라도 놓고 싶지 않은 감정, 어떤 사람을 보고 시선이 간 그 순간. 그게 관계의 시작일 수 있다”고 했다. ‘너’는 수현이 본 영재일수도, 어쩌면 수현의 형이 저수지에서 본 수현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이인칭 대명사보다 ‘봤어’에 방점을 찍는 게 소설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다는 것.




참 예쁘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가만히 보면 참 예쁘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이나 어떤 행위들로 힘들어지고 망가지는 모습을 볼 때 안쓰러웠어요. 한 사람만 놓고 보면, 건드리지 않으면 자기 할 일 하면서 잘 살 사람인데 옆에서 건드려서 망쳐버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소설 속 수현도 잘 사려고 애썼던 사람인데 예기치 않게, 의도적이든 아니든 우발적인 사건을 겪고 그것을 평생 지고 살아가게 돼요. 죄의식에 짓눌러 싫어도 싫다는 말을 못하고. 자신을 끔찍하게 만든 현장을 봤을 때, 그게 본인에게 나온 악의인지, 누구한테 씌어서 한 행동인지,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수현은 폭력을 당하는 소년이었다가 성인이 되어 어느 순간, 폭력의 주체가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김려령 작가는 과거에 끔찍할 정도로 맞는 아이를 본 적이 있다. 당시 그와 또래였던 아이인데, 아이를 보며 작가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못된 생각을 품은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어른이 되어 ‘내가 잘못했던 일이구나’라고 생각이 되면 상처가 되지 않지만, 이해 못할 폭력은 여타 다른 데서 받은 폭력보다 더 심한 관계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려령은 작가의 말에서 “내가 처음 소설을 쓴 동기는 매우 불온하다. 나와 직접 관련 있든 없든, 죽이고 싶은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죽여야 했다. 미운 놈 처치하고 일생을 피 말리며 살 수 없으니 펜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작품을 쓸 때, 미운 사람 한 사람에게 악의를 몰아주는 성향이 있다는 김려령 작가. 모든 사람이 나쁜 건 싫어서 자신도 모르게 한 사람에게 몰아주게 된다고 한다. 마치 그 사람만 사라지면 세상이 평안해질 것일 마냥. 하지만 『너를 봤어』의 인물들 중 온전히 악의로만 가득 찬 사람은 없는 듯 하다.

『너를 봤어』속 중요한 배경은 출판계, 대부분의 인물은 작가다. 수현도 성공한 작가고 그를 따르는 후배 도하와 영재도 꽤 인정 받는 신예작가다. 김려령 작가는 2006년에 초고를 쓰면서 건축가를 주인공을 했지만, “서사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직업을 바꿨다. 인물 중에 자신과 가장 닮아 있는 캐릭터는 서영재. 집필과정도 비슷하고 원고를 썼다가 또 버리는 습관도 닮았다. 김려령 작가는 “배고프면 밥을 먹듯이 나에게 소설은 밥 같은 거였다. 소설에 허기질 때가 있었다. 그러면 일상으로 썼다. 발표하려고 쓴 게 아니라 허기져서 썼고, 불필요하게 많이 썼다 싶으면 버렸다. 화가 나서 버리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문단에 나왔을 때는 다소 실망했단다. 아니, 환상의 세계가 확 깨져버렸다.

“뭔가 고아하고 깊이 있는 곳이 문단이라고 생각했어요. 막연하게 거대한 장벽 같았던 곳이었고 그 안에 들어가면 깨달음을 얻고 성숙할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습작생이 가지고 있는 환상이었을 뿐, 사는 모습은 똑같았어요. 오히려 그 안에 들어가서 상처를 받기도 했고요. 일반인이었을 때는 전혀 듣지 못했던 말들도 듣게 되고,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힘이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청소년문학과 일반소설, 구분하지 않고 쓰겠다

그동안 주로 청소년소설, 동화 등을 발표한 김려령 작가. 청소년문학 작가로 대표된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떤 장르든 문학성이 좋으면 좋은 작품이지 않나. 청소년문학이 일반문학보다 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작품성이 떨어지는 일반문학도 많다”고 말했다. 작가는 『완득이』를 집필할 때도 성장소설이라고 한정 지어 작품을 쓰지 않았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딸이 다문화가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보고, 아이들도 읽을 만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완득이』를 썼다. 일반 소설로 공모하면 청소년들이 읽기 어려우니, 청소년문학상에 지원한 것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완득이』는 60만 부 이상 팔리며 청소년을 비롯해 일반 독자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청소년소설이었기 때문에 저평가 받았다는 그런 이야기는 사실 체감하지 않아요. 문단에서 하는 이야기니까 맞기도 하겠지만, 작품 자체가 그렇다기 보다는 장르에 대한 편견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청소년소설로 데뷔를 했으니, 주력해온 글을 최대한 성실하게 쓸 생각이었고 『너를 봤어』는 발표할 때가 되어 선을 보이게 된 것 같아요. 당분간은 일반소설에 집중할 것 같아요. 물론 동화가 제게 온다면 동화를 써야겠죠.”

『너를 봤어』에서 김려령 작가와 가장 닮아 있다는 인물 ‘서영재’는 한 팬의 이름에서 따왔다. 작가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한 블로거가 ‘김려령 작가가 내 이름으로 소설을 써주면 소원이 없겠다’고 쓴 글귀를 보고 인물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어쩌면 작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팬 서비스일지 모른다. 김려령 작가는 “학생인 것 같았는데 『너를 봤어』를 읽을 수 있을까요? 고등학생이라면 읽어도 될 법 싶기도 한데”라며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어느 언어 천재가 조어 하나 만들었으면 싶을 정도로 진부한 저 사랑이라는 말이 내 글로 들어왔다. 때로는 터무니없고 미련하고 살벌한 사랑마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수많은 당신을 죽이며 갈망했던 것이 결국 사랑이었나 보다.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그러면 안 되는 사랑. 그것으로 이제 독자를 만난다. 이 책을 펼친 당신이 한번쯤 웃었으면 좋겠고 한번쯤 울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작은 사랑이 당신에게 가 닿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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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김려령 저 | 창비
이 책은 사랑과 폭력을 주제로 벼린 매혹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정수현’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공히 인정받는 중견 소설가이자 유수한 출판사의 편집자이다. 모자랄 것 없어 보이는 삶이지만 그에겐 폭력으로 얼룩진 지옥과도 같은 과거와 충격적인 비밀들이 있다. 가족과의 끈질긴 악연과 자신의 이중성으로 나락에 빠져들게 되는 수현에게 어느날 마주한 후배 작가 ‘서영재’의 존재는 유일한 희망과 설렘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진정으로 느낀 사랑은 커다란 행복임과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을 안기는 굴레가 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진명 “대중소설가, 의미 있고 자랑스러운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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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 시대라고 한다. 특히, 한국소설은 일부 마니아 독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진명 작가는 이런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작가로 불리며 사랑 받고 있다. 물론, ‘수백만의 독자를 가졌지만 단 한 명의 평론가도 갖지 못한 작가’라는 평이 보여주듯 그는 문단에서 논의 되는 작가는 아니다. 문단 바깥에서 갑자기 출현해 문단 바깥에 머무는 김진명 작가는 긴 시간 적극적으로 대중들과 살을 부대끼며 호흡해왔다. 최근 김진명 작가는 대하소설 『고구려』의 다섯 번째 권을 출간했다. 이번 신간은 단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김진명 작가의 힘을 보여주었다. 필자는 문득, 그의 소설이 가진 힘과 작가가 보여주려는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해가 쨍쨍 내리쬐던 초여름 어느 날, 궁금증을 잔뜩 안고 작가 김진명을 만났다.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어제’가 있기 때문

이번에는 본격적인 역사소설이다. 『고구려』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중국의 『삼국지』와 고구려의 미천왕은 같은 시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미천왕 을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면서 관우, 조조, 하우돈은 외우고 있다. 지금 중국은 (고구려에 대한) 내부적 역사 조작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외부적으로 퍼트리는 단계에 있다. 고구려는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를 미국 의회에 보냈고 이미 미국의회에서 의결을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별다른 자각이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고구려』다.

『고구려』 1권은 미천왕에서 시작한다. 미천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천왕은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비로소 실현한 첫 번째 왕이다. 한은 중국을 통일하면서 고조선에 한4군을 설치하고 지배권 아래 둔다. 이후 망해버린 고조선의 동포들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다. 때문에 고구려의 건국이념은 한4군을 회복하고 중국인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미천왕은 처음으로 중국을 몰아내고 한4군 중 한 지역인 낙랑을 회복한 왕이다. 고조선의 옛 땅과 사람의 회복이라는 고구려의 국가적 목적을 가장 잘 수행해낸 최초의 왕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 굉장히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중국이 빼앗아 갔던 우리 고조선을 회복한 왕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가져가는 시점에서 그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를 되찾아야 된다는 자각과 인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미천왕을 첫 번째 인물로 설정했다.

『고구려』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고구려의 정신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앞서 말했듯 고구려에는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국가적 목표가 있었다.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서로 양보하고 역경 속에서도 대동단결했다. 한4군을 몰아내고 이민족 사이에서 나라를 키울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마디로 ‘큰일을 당하면 나를 죽이고 대동단결해서 목적을 이루어 낸다’는 것이 오랫동안 한인들을 통해 내려온 ‘고구려의 정신’이다. 나는 이 정신이 있기 때문에 4대 강국이 아무리 남북통일을 반대하더라도 통일은 꼭 이루어질 거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힘도 있지만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흐르는 힘과 맥이 있다. 고구려에서 시작된 정신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힘이 있다.

소설을 읽어보면 고구려를 좋은 국가로 만들겠다는 같은 목표 아래 등장인물마다 다양한 의견을 펼친다. 특히, 고국원왕과 왕자 무의 이야기에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사유를 통해 독자들이 어떤 것을 느끼기를 바라는가?

『고구려』 1,2,3은 을불이 낙랑을 몰아내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다. 미천왕 을불은 고구려에 가장 잘 맞는 인물이고, 가장 고구려다운 인물이다. 고구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전쟁에 대해 강조하기 때문에 흔히들 고구려를 ‘전쟁의 제국’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만 계속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이기 어렵다. 『고구려』4권, 5권에 나오는 고국원왕 사유는 세계 역사상 드물게 좌파 왕이다. 백성을 살피되, 아량이나 동정으로 살피는 게 아니다. 정말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에 가치를 두는 왕이다. 내가 보는 고구려는 아주 다방면으로 펼쳐져 있는 나라인데, 전쟁의 제국으로 내몰리는 경향이 있다. 고국원왕이나 소수림왕은 전쟁과 전혀 다른 방면에서 힘을 쌓았고 이런 힘이 모여 광개토태왕 시절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는 고구려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우리민족이 고조선부터 가져온 사상이 ‘홍익사상’이다. 모두가 널리 다 같이 행복하자는 생각. 전쟁이 아니라 바로 이 홍익정신을 발현한 왕을 보여주고 싶었고, 고국원왕 사유가 제일 적합한 인물이었다.

역사에 대한 의식이 남다르다. 역사를 특별히 중요하게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흔히들 역사를 지나간 시간의 기록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어제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다. 과거와 현재는 단절되는 게 아니고 같은 거다. 그래서 역사를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이미 현실에 대한 파악 능력이 없어진다. 과거를 잘 기억해야 현실을 보고 대처할 수 있다. 또, 현재를 잘 살아야 좋은 미래가 만들 수 있다. 그러니 과거, 현재, 미래는 구분되는 게 아니다. 몸체가 같다. 내가 역사를 연구하자고 하는 건 과거를 공부하자는 게 아니라 오늘을 잘 살자는 의미다.

일부에서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이야기 한다. 이런 시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에 대한 세상의 평판과 평가는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내가 처음 쓴 책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인데 당시 우리 문단 풍토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 문단 풍토라는 건 작가들이 유명 작가나 비평가 또는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파를 이루는 방식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단에 진입을 못했다. 그런데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다. 게다가 책을 5천 권, 1만 권을 팔기도 힘든데 600만 부를 팔았다. 자연히 그 분야의 모든 질시와 오해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그 당시 평가들은 냉정하고 정확하다고 하기 어렵다.

그보다 더 핵심적인 건 우리사회가 가진 문제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정체성의 회복’이 필요한 나라다. 사회가 너무 빨리 변화를 겪다 보니 문화가 서지 않고 곳곳이 황폐화가 되었다. 이래서는 선진국과 경쟁할 수 없다. 단순히 기술이나 상술이 좋고, 물건을 잘 만드는 걸로는 부족하다.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다. 외국의 괜찮은 나라들을 보면 자신들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또, 자기 나라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애정이 있다.

우리나라는 사회, 나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다. 문화가 없고 맥이 잘려있어서 그렇다. 자랑스러운 역사가 꾸준히 계속되어 나고 있으면 어려울 때마다 떠올리면서 힘을 얻을 수 있다. 힘든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나이 70에 전쟁에 나가서 싸운 이야기가 그렇다. 이런 전통이 살아있으면 역사를 배우면서 ‘내면의 힘’이 생길 텐데 한국에는 이런 전통이 없다. 우리가 앞으로 선진강국 지위에 올라서려면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된 정체성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부분을 쓰는 것이다. 일본에 빼앗긴 문화제를 가져오고, 중국에 빼앗긴 역사를 찾자고 이야기 한다. 나에 대해 국수주의라고 하는데, 국수주의는 우리나라 것을 최고라고 주장하며 그 힘으로 상대나라를 억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주변나라를 괴롭힐 힘이 없다. 5천년 동안 침략만 당해온 나라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기 위한 정신적 노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작업을 하는 나를 국수주의라고 몰아세운다. 가장 가치중립적이면서 철학적인 시각도 결국은 그 사회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세계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냥 돈을 따라 현실적으로 움직이기만 한다. 어떤 가치를 창출하려면 과거의 자기 것을 잘 정비를 하고 거기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점도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의 문제를 이야기하면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일본과의 문제를 지적하면 일본과 관계가 좋아야 하는 사람들이, 반대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생존조건을 탐색하고 주변국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저항은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면의 힘을 갖기 위해서 세상을 바라보라

외적인 것들이 중요하게 평가 받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이 ‘내면의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내면의 힘의 반대는 외면의 힘이다. 공부를 잘한다, 인물이 예쁘다, 지식이 높다, 지위가 높다. 이런 것들이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그걸 위해서 달려간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 오히려 외면의 힘을 얻을수록 내면은 깨져간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때로는 과장되게, 때로는 거짓되게 살게 된다. 보통 이렇게 해서 외면의 힘을 얻는다. 내면의 힘은 그 반대다. 성실함, 진지함, 착함, 효도, 정의. 이런 것들은 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내면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각을 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외면의 힘과 내면의 힘의 장단점을 보고 인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갈 길을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부유하지 못하더라도 옳다고 믿는 걸 밀고 나가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런 인생을 살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스스로 세상을 읽고 판단하는 인식능력이 필요한데, 이건 오로지 독서에 의해서만 키워진다. 그러니 내면의 힘을 키우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독서다.

작가 김진명만의 특별한 독서법이 있다면 추천해 달라.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문리가 트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밑으로 내려가면 그 뿌리는 같다. 모두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경지에 오르면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도 그 맥을 읽을 수가 있다. 이걸 문리가 트인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독서법을 말하지만 나는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글과 친해지는 거다. 글을 보고 싶고, 책을 읽고 싶으면 성공이다. 그 길을 가다 보면 문리는 자연스럽게 트인다. 어떤 글을 읽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과거에 나쁜 책으로 분류되던 음란 소설이나 만화도 상관없다. 그냥 글을 읽는 게 좋으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본인이 좋아하는 책을 아주 많이 읽으면 된다. 그러면 천천히 문리가 트이고 다른 분야의 것들도 통찰할 수 있게 된다.

꾸준히 역사나 현실적인 문제들에 상상을 버무려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이런 작업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면?

내가 쓰는 소설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란 여러 사람들, 서로 다른 조직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있다. 나는 그 속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뽑아내서 글로 쓴다. 사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각각의 분야에서 다루어져야 할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각 분야의 문화가 서 있지 않다 보니 내가 쓰는 것들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구려』는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빼앗아가니까 자각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고, 『천년의 금서』는 우리나라의 한이 어디서 왔는가를 다룬 것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우리가 과거 핵개발에 어떻게 대처를 해왔고, 한반도의 핵을 두고 주변국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문제다. 모두 너무 중요한 문제다. 다른 사회 같으면 당연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루고 분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각 분야의 질서정연한 문화가 없다 보니 그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대하소설을 쓰는 일은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알고 있다.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오랜만에 출판사 왔더니 야위었다고 한다. 아침에 좀 걷는 산책을 하는 걸로 체력을 보존하고 있다.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옳은 것, 진리에 대해 고민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예민한 인식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대해 다양한 문제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 사회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핵 문제를 접하면서 반응한 셈이다. 20년 전, 북한이 핵개발을 했다는 정보가 미국을 통해 흘러나왔다. 핵탄두를 10개 가지고 있다고 미국 CIA국장이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하지만 이익을 위해 사실을 조작하는 일은 어디에나 있다. 그보다 더 나쁜 사회는 한 가지 논리만 존재하는 사회다. 당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는데 남한 사회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그 나름대로 두 가지 이상의 논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있으니 폭격을 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논리, 이 사회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이야기에 반대 목소리가 없었다. 나는 이 사회가 병든 사회라 생각했고, 무언가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쳐 주기 위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있으니 북한을 폭격해서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남한과 북한이 함께 핵개발을 하는 건 어떤가, 그 과정에서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이런 고민을 해보는 건 무턱대고 처음부터 틀렸다고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결국 우리 사회의 일방논리에 대한 형식논리적 고찰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소설은 ‘공동체 사회의 현실과 방향을 확인해보는 것’

오랫동안 글을 쓰다 보면 소설 쓰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쓰는 소설은 문학적 향기가 강하다거나 작가 개인의 무한 상상을 가지고 쓰는 예술성 높은 작품은 아니다. 한 개인의 의식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의 현실과 나아갈 방향을 확인해보는 소설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고구려』까지 굉장히 일관된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글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는 죽고 싶다(웃음). 보통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신 다음, 새롭게 다시 시작해 본다.

소위 대중소설가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중’ 이라는 말이 붙으면 질이 낮다고 보는 건 이미 틀린 생각이 되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대중은 어떤 것에 대한 추구나 전문성이 많이 떨어지는, 독서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이 대중들이 자기 돈을 내서 책을 사보게 한다는 건 마니아 작가가 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대중소설가라는 건 오히려 의미 있고 자랑스러운 호칭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취미가 맞고 계층이 맞고 의식이 맞는 사람끼리 공유되는 작가들을 편협하다고 볼 수도 있다. 문학적 귀족주의에 빠져서 대중소설을 격이 낮은 것이라 보는 시선도 문제다. 물론, 불륜이나 섹스만을 다루는 대중소설에 대해 가지는 정당한 반감은 당연하다. 하지만 외교나 정치, 역사 같이 골치 아픈 이야기들을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들려주는 것, 이를 통해 의식을 깨우쳐 주는 것. 이 모든 게 대중소설의 좋은 면이다. 충분히 훌륭하고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대중소설가가 의미 있는 칭호라고 생각한다.

김진명 작가에게 글쓰기란?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인류가 존경하는 인류의 스승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석가 모두 지금 이 사회가 동경하는 부를 차버린 사람들이다. 인류의 스승들이 그런 길을 걸었다는 건 우리 인간의 정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짐승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도 바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살아가려면 더 높은 세상을 인식하고 거기에서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 글쓰기라는 건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역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는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하는 생각을 깊이 갈고 닦아서 세상에 내놓는 거다. 나한테 글쓰기는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의미를 주변 사람들과 같이 나누는 자아실현의 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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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김진명 저 | 새움
낙랑을 정복한 미천왕 을불의 두 아들 사유와 무.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의 고구려를 이끌어 갈 왕은 강한 무여야 한다고, 그가 태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을불은 왕의 재목이라 일컬어지던 동생 무가 아닌, 형 사유를 택했다. 굳세고 용맹한 무가 아닌 유약하기만 했던 사유를 태자로 세운 것이다. 미천왕의 죽음 이후 왕이 된 사유는 과연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형태 변호사 “용산참사, 천안함... 사건으로 배우는 게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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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에게 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하고 전화를 걸었다. 번호가 011로 시작한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냐고 물으니,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할 당시 받았던 휴대폰 번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단다. 이전에 사용했던 전화기는 없다. 김형태 변호사에게는 생애 첫 휴대폰이 지금의 전화기다. 친구들로부터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김 변호사는 
현실과 밀착해 있는 학문이라서 법이 좋다고 한다. 양평 생매장 사건,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 용산 참사, 송두율 사건, 인혁당 민청학련 재심, 천안함, 황우석 교수, MBC <PD수첩> 광우병 보도 등 대한민국을 뜨겁게 한 사건 뒤에는 모두 김형태 변호사가 있다.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토록 논쟁이 많은 사건을 맡았다고 말하기엔 그가 보여준 진심이 너무 깊다.

책의 서문에 부쳐 김형태 변호사는 ‘이 세상은 좀 좋아하고 있는 걸까’ 의문을 던진다. 따뜻한 봄이 시작되나 싶었더니 금세 여름이 찾아오고, 추운 겨울날이 손짓한다. 궂은 날이 있으면 개는 날이 있고, 화창한 날이 있으면 또 안개가 자욱한 날이 찾아온다. 다만 무수한 사건들 속에 김형태 변호사가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다. 깨닫고 배우자는 것. 인간의 본성, 사회의 무관심, 연이어 터지는 비슷한 범죄들, 그 속에서 사회가 반성을 하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하거늘, 사람들은 인터넷기사 속 검색어만 열심히 클릭하고 있다. 0.1초의 클릭으로 보는 세상은 0.1초로 잊힌다. 김형태 변호사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줄 알았던(?) 사건들은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에서 소개하면서 그 반응에 놀랐다. 무죄로 판명된 사람들의 이름이 대중에게는 여전히 범죄자로 기억되고 있었다. 책을 봄에 펴냈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고 말했으나, 겨울에 책이 나왔더라면 순서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이 시작됐고 또 다시 칼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을 만나야 했을지도. 곽병찬 〈한겨레〉 대기자는 발문에서 김형태를 ‘씻김이’라 표현했다. ‘구부러진 것을 곱게 펴고, 덧씌운 것들을 벗겨내고, 더럽혀진 것을 본래대로 닦아낸’ 변호사 김형태. 그는 집단적 광기와 폭력을 보여주는 세상 속에서 홀로 인간의 존엄성을 끊임없이 외치는 사람이다. 날카로운 눈빛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을 것 같은 푸근한 인상. 법정에 들어선 모습은 다르겠지만, 1시간 남짓 인터뷰이 김형태가 보여준 표정은 청명할 뿐이었다.

나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만났다. 가장 최근에는 2009년 용산 망루 여섯 죽음을 만났고, 1990년대, 1980년대, 1970년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민주화 투쟁 과정의 죽음이나 의문사를 숱하게 보아왔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억울한 죽음들도 60년 세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되고 있다니.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참으로 무섭단 생각이 들었다. 새삼 겁이 더럭 났다. 2008년 봄, 울산보도연맹 유족회 김정호 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형사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고 국가로부터 민사손해배상을 받은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거였다. 아, 이제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6ㆍ25와 해방정국 때 사건까지 맡게 되었구나. 나는 국가가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은 우익 북파공작원 사건들도 맡았으니, 좌우를 막론하고 내가 무슨 무당처럼 억울하게 죽은 이들 푸닥거리 하러 태어났나 싶기도 했다. (p.323~324)


영화에서 소비되는 실제 사건, 오해 받으면 안타깝다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이 첫 책입니다. 2012년 1월부터 1년간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을 묶은 책인데, 내지가 얇은 편인데도 꽤나 두툼합니다. 칼럼에서 공개하지 못한 이야기도 들어있나요?

중요한 부분을 뺐다가 다시 넣은 것도 있고 살짝 고친 부분도 있습니다. 내용 자체는 많이 다르지 않고요. 비망록이라는 게 ‘아직은 말할 수 없다’는 거더라고요. 사건 관계자가 살아있는 경우도 있고 또 가족들도 있고.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쓸 수 없는 게 많죠. 사실은 상당 부분을 빼거나 말을 하지 못한 부분도 꽤 있습니다.

사건에 집중해서 책을 쓰셨더라고요. 회고록의 느낌보다는요.

필자의 사견보다는 사건 자체가 드러나도록 노력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견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요. 우리 사회, 인간들의 모습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사건들을 우리가 알아야 할 이유가 뭐겠어요.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건데, 모두들 자극적인 내용에만 치중해서 보도하고 또 그것만을 보고 있으니, 되풀이되는 현실이 착잡합니다.

출간을 기념해 독자들과 만나기도 하셨는데요. 어떤 것을 궁금해하던가요.

사건 자체에 대해서 많이 물으시더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시고. 저는 다 아시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모르는 사건들이 많으셨어요. 보도연맹 사건의 유가족 분들도 오셨어요. 70, 80대 노인네들이 어떻게 행사를 하는 줄 아시고 서울까지 올라 오셨더라고요. (보도연맹 사건: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좌익으로 몰린 사람들 수만 명이 군과 경찰에게 갑자기 끌려가 재판도 없이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서 총살 당한 사건)

인터넷에 ‘김형태 변호사’를 검색하면 두 영화의 주연으로 소개가 되어있습니다. 용산참사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과 <마이 스윗 홈-국가는 폭력이다>인데요.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다룬 영화 <경계도시>에서도 많이 등장하셨죠.

안 그래도 이번에 책이 나오고, 인편으로 송 교수님한테 책을 보냈어요. 오늘 책을 부탁했던 지인이 한국에 도착했는데, 저한테 이러더라고요. 송 교수님 말씀이 ‘한국 사람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모국어를 잃어버릴 것 같다’고요. 예전에는 진보든 보수든 독일에 가면 모두들 교수님을 찾아 눈도장을 찍고 갔는데, 이제는 모두들 피하는 것 같다고 하셨대요.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한창 이슈가 될 때는 관심을 받지만, 최종 판결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죠.

책에도 소개됐지만, 송두율 교수를 비롯해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도 그렇고. 재판이 길어지다 보면 최종 판결이 묻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언론에 보도되고 이슈가 될 때만 관심을 보이니, 안타까운 생각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가장 반응이 컸던 사건이 ‘양평 생매장’ 사건이었어요. 포털 사이트에 실시간으로 검색어가 한 번 올라갔나 봐요. 신문사에 막 전화가 오고 그랬다 네요. 워낙 기구하게 죽었으니까요. 하여튼 언론이 문제인 게, 검찰이 발표를 하면 그걸로 취재를 끝내요. 외국 언론사 같은 경우는 재판 과정을 열심히 보도하거든요. 검찰 측 주장에는 큰 의미를 안 둬요. 어차피 자기네 주장인 거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검찰이 발표하면 그것으로 끝나고, 법정에서 수많은 증언이 나오고 쓸만한 이야기가 계속 나와도 기자들이 하나도 안 와요. 반박 증거가 나오면 확인을 해야 하는데 검찰 측 주장만 쓰고 있는 실정이죠. 지금 제가 천안함 사건 관계자 재판 중인데 <미디어 오늘> 기자 한 명만 열심히 취재하고 이외에는 없어요. 이러니 송두율 교수는 아직도 최대 간첩이고 치과의사를 범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거죠. 지난 번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서도 계속 사건에 대해 질문을 하시는데, 다 이야기를 하려면 한 사건당 적어도 두 세 시간이 걸려요. 그러니 모든 이야기를 못하는 거죠.

2004년 7월 고등법원은 사건의 핵심이었던 후보위원 부분과 책과 글을 쓴 부분, 남북 학술행사 주선 부분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잠입ㆍ탈출죄, 그리고 노동당 가입 사실을 숨기고 황장엽에게 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소송사기죄 두 부분만을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송두율 교수의 완승이었다. 이런 대형 보안법 사건에서 무죄를 받은 나는 법정에서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니 거짓말쟁이니 온통 나라가 망할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세력과 언론들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 무죄판결에는 관심도 없었다.( p.286)
최근에 개봉한 <노리개>, <공정사회>, <부러진 화살>도 그렇고 영화계에서 법정물은 여전히 인기가 있는데요. 변호사 입장에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칼럼 연재하면서도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왔습니다. 일단 영화화가 진행되면 내 손을 떠나는 거잖아요. 감독의 시각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이고, 또 흥행하려면 흥미적인 요소도 들어가야 하고요. 내용과 결말이 바뀔 가능성이 많아서 대부분의 제안들은 거절합니다. 피해자, 가해자가 다 살아있는 경우가 많고, 영화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니 왜곡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다큐멘터리도 사실 팩트를 가지고 접근하지만 감독의 시각이 들어가 있잖아요. 편집본을 보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있죠. 제가 직접 영화를 만들면 모를까, 대부분은 거절해요.

혹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있으신가요? 책에서는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헤피엔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처음에 영화 제안이 왔을 때는 거절했던 사건이죠?

피고인에게나 죽은 처의 친정 식구들에게 상처가 될 게 분명하니까, 거절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나왔더라고요. 영화를 보고 정말 가슴이 탁 막혔어요. 어렵게 1심을 뒤집고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 시점에 영화가 나왔을까.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이 사건을 또 떠올리고, 대법관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죠. 아마 이 사건은 TV에서 드라마는 아니고 재연 배우를 써서 어떤 시리즈로도 소개된 적이 있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세월이 지나서 새우젓이 삭듯이, 어떤 편견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쯤 영화가 나오면, 약간 시각이 다르더라도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시간적, 공간적으로 너무 가깝게 붙어 있으면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요.

사형폐지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사형제 위헌심판도 제소했고, 치과의사 모녀살해 사건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남편이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고요. ‘그럼에도 사형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최근 극악한 사건들이 많이 터지면서 사형 존치론에 대한 여론도 큰 것 같습니다.

이미 세계 102개 나라가 사형제도를 법률상 폐지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사형집행을 안 한 지 15년이 됐고요. 2010년에 헌재가 공개변론을 열었어요. 재판관 5대 4로 사형 합헌결정을 내렸죠. 그런데 합헌 쪽에 손을 든 대판관 2명이 국회에서 폐지를 검토해보라는 의견을 냈어요. 사실상 재판관 9명 중에 6명이 사형제도에 문제점을 제기했으니, 그렇다면 결과는 거꾸로인 거죠. 모두 신념은 폐지에 기울지만 이권이 없으니까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는 거죠. 죄는 밉지만 사람을 죽이면 안 되죠. 사형폐지는 절대적 종신형제도의 도입과 살인 피해자 가족들을 돕는 사회적 부조체계가 함께 이뤄져야 해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격리해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우리에게 없어요. 생명권은 모든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잖아요. 범죄자들의 생명을 존중해야 모든 사람의 생명이 존중될 수 있고 그래야 사회 전체가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사형제가 필요하다는 여론은 대개 60%에서 아래위로 왔다 갔다 한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중략) 이 60%를 기준으로 흉악범죄가 일어나면 70% 가까이로 올라가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같이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나오면 50%대로 떨어진다. 그 영화는 살인범이 잘생기고 동정심을 가지게 할 만한 캐릭터에다, 살인행위도 우발적으로 일어나 어느 정도 변명거리가 있으니 그랬다. 그 영화는 우리에게 사형제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했다는 점에서는 큰 수확이었지만, 사형의 본질에 정면으로 마주 서지 못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살인범에게 억울하고 불쌍한 면이 있으니 사형은 안 된다’를 넘어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가지고 사형제도에 정면으로 마주서는 게 필요하다. 저 흉악한, 금수만도 못해 보이는 저 사람을 국가 손으로 죽일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안 된다’고 말할 것인가. (p.98-99)


사람 죽이는 법, 잘 활용하면 살릴 수도 있지 않나

법대생 시절, 법학 강의보다는 문학과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법대를 가게 되셨나요?

그랬죠. 고등학교 때는 현대 문학 소설을 수십 권 읽고 그랬는데. 법대에 가서는 학부 때 정말 공부 안 했어요. 소설 강의 들으러 인문대 들어가고 종교 수업만 찾아 듣고 그랬죠. 내가 법대를 왜 왔나 싶을 정도였어요. 당시 학교에서 성적대로 대학을 입학시켰거든요. 다른 과 가기에는 점수가 아까우니까 그냥 다들 가라니까 갔죠. 사법시험도 턱걸이로 겨우 붙었는데(웃음). 법을 공부하다 보니, 장점이 보이더라고요. 대개 법은 사람을 죽이는데, 그 법을 활용하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더라고요. 법은 현실에 밀착해서 뜬 구름 잡는 이야기는 안 하잖아요.

사생활에서는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법을 좋아하는 이유는 현실에 밀착해 있기 때문인 거네요.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변호사 생활을 30여 년 가까이 하고 있는데 정치 입문 제의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정치만큼 효율적인 수단이 없죠. 정치는 직접 생산할 수 있고 최전선에서 일하니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고요. 가끔 너무 답답할 때는 ‘저거 내가 하면 금방 처리할 수 있는데’ 싶을 때도 왕왕 있죠. 하지만 정치인들은 즉자적으로 반응하면 안 되고 깨지더라도 끝까지 생존해서 정치를 해야 하잖아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살짝 건드리면 제풀에 쉽게 무너지기 일쑤에요. 그런 사람들은 정치를 하면 안 돼요. 자신에 대해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죠.

현재 격월간지 <공동선>의 발행인으로도 활동하고 계신데,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요?

<공동선>은 어쩌다 보니 이름을 빌려줬다가 맡게 된 거고요(웃음). 편집인들이 많이 바뀌면서 아예 내가 맡는 게 낫겠다 싶어서 10년 전부터 발행인을 하고 있어요. 평소 다독가는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는 편이죠. 아내랑 대학교 캠퍼스 커플로 만났는데 지금도 일요일 아침에는 각자 책을 보고 토론도 하고 그래요. 아내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거든요. 진화론, 생물학 같은 과학 책을 주로 보고 저는 종교 쪽 책을 많이 봐요. 예전에 애니어그램 테스트를 하면, 내가 3번 같기도 하고 1번 같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보면 내가 5번이구나 싶어요. 아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뭔가 알고 싶은 게 많아요. 궁금한 게 있으니까 책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책이 아직도 재밌어요.

종교나 에세이 쪽으로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이번에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을 내면서 제목 때문에 출판사랑 많이 싸웠어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팔리는 제목을 만들어야 하는데, 제가 자꾸 긴 제목을 내놓고 그러니까(웃음). 결국 제 뜻대로 되기는 했지만 미안한 마음도 있어요. <한겨레>에 칼럼을 쓸 때는 원고지 9장 정도 분량으로 축약을 해서 굉장히 힘들었는데, 책 작업을 하면서는 한 사건당 40장, 50장 정도를 썼어요. 엿가락 늘리는 걸 배운 셈이죠. 축약은 고통스러운데 길게 쓰는 건 오히려 낫더라고요. 사실 창작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있는 것 같아요. 창작에 대한 허영이 제일 크죠. 하지만 그런 욕심을 낸다는 게 쉽지만은 않고요. 제가 종교에 관심이 많으니까 앞으로 과학, 종교, 문학 이야기를 짬뽕한 그런 시각을 볼 수 있게 되고 힌트를 얻게 된다면 종합적인 책을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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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김형태 저 | 한겨레출판
《한겨레》 토요판에 인기리 연재되었던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을 본 사람이라면 김형태라는 이 인간적인 변호사에 대해 호기심을 갖지 않기가 힘들 것이다. 정이 많고 웃음도 눈물도 많지만, 법정에서는 예리한 분석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진실의 증거를 한번 물면 쉽사리 놓지 않는 변호사의 모습이 『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Love Love Love 로이 킴 "더 잘 되어야지 하면서 노래를 쓰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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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고 싶은 게 많고 뽐내고 싶은 게 많을 스무 살이다. 또한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려 하는 것도 많을 스무 살이다. 허나 우리가 만난 이 앳된 청년은 20대에 막 들어선 보통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욕심 많고 패기 넘칠 20대의 열정을 겸손하면서도 차분하게, 때로는 능숙하게 조리해가면서 말해 나갔다. 상반된 매력이 공존했다. 나이 스물의 상쾌함과 풋풋함, 설렘을 얘기하면서도 목소리에는 성숙함과 깊이가 묻어났으니 말이다. 라디오 방송을 막 끝낸 로이킴을 여의도 MBC에서 만났다.




앨범 전곡을 다 직접 썼다. 작곡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했어요.

앨범의 타이틀곡 「Love love love」의 경우 「봄봄봄」보다 악센트가 있고 후렴구도 자연스럽게 들린다.

「봄봄봄」을 부를 때 너무 예쁘게 부르려고 노력했던 게 사실 아쉬웠거든요. 「Love love love」를 작업할 때는 예쁘면서도 신나게 부르면 좋겠다 싶었죠.

싱글 「봄봄봄」에 이어 첫 앨범도 반응이 좋을 것 같다. <슈퍼스타K> 끝나고 난 뒤 이 정도의 존재감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나.

아니요. 그런 생각을 했으면 오히려 안됐을 거라 생각해요. ‘난 잘 될 거야’라는 생각하고 ‘난 잘 되어야지’라는 생각은 다를 것 같아요. 저는 더 잘 되어야지 하면서 노래를 쓰기 시작했고 슈퍼스타K(이하 슈스케) 시절부터 노래를 하고 내려왔을 때 부끄럽지 않은 무대를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만족했던 무대들은 대중들도 만족해주셨고요.

앨범 만드는 작업은 처음이다. 어떤 느낌으로 임했는가.

슈스케 때는 다른 분들의 음악을 재해석했잖아요. 앨범만큼은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은 매일, 매년 늘 바뀌는 거 같아요. 우선 스물한 살의 로이킴이 하고 싶은 음악은 청년이 풀어내는 그 감정들을 솔직하게 담은 것이라고 할까요.

「할아버지와 카메라」에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

「봄봄봄」 나왔을 때 쯤, 라디오 방송 끝나고 집으로 가고 있었어요. 한 할아버지께서 디지털 캠코더로 자기랑 주위 풍경을 찍으시면서 여의나루역을 지나가시더라고요. 매니저 형이 보고 진짜 멋있다고 해서 봤는데 이건 노래로 써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장면에 남은 인생의 흔적을 조금씩 기록해가는 모습과 몸이 아파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봄 날씨를 찍어 보여주려는 모습을 상상해 덧칠했죠. 원래 기획은 「할배와 카메라」였는데 주위에서 그 말은 안 된다고 해서…(웃음)

「그대」라는 단어가 가사에 자주 등장한다. 20대에 막 들어선 젊은이의 감성과는 거리가 있는 용어 아닌가.

작사 면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제가 느꼈던 감정을 옛 감성으로 풀어내고 싶어서 그렇게 쓴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매력도 느꼈고 제 노래에도 잘 맞을 거 같고요.

1993년생에게는 힙합이나 R&B와 같은 흑인 음악이 더 가까울 텐데 표현영역이 과거의 음악이라고 할 포크, 컨트리 쪽이라는 게 놀랍다.

어렸을 때 이문세, 김광석, 김현식, 안치환 같은 선배 분들의 노래를 들었어요. 어머니가 좋아하셨거든요. 아무래도 디지털화된 음악들은 제 적성에 맞지 않더라고요. 포크 음악을 좋아하기도 더 좋아했고 듣기도 더 많이 들었고요. 환경적인 영향도 있었고 제 취향에도 어울렸죠.

포크, 컨트리 음악, 어떤 게 매력인가.

기교부리지 않은 그대로의 목소리가 좋아요. 노래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느낌이 특히 좋죠. 물론 포크와 컨트리만 들은 것 아니예요. 듣기는 이것저것 다 들어봤어요. 그린 데이(Green Day), 오아시스, 뮤즈도 들었고 비틀즈랑 존 덴버까지도 거슬러 올라갔고요. 제임스 모리슨, 제임스 블런트를 접하면서 브릿 팝 쪽으로도 넘어갔다가 제이슨 므라즈와 데미안 라이스까지 듣고 나서 제 노래가 나온 것 같아요. 흑인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브라이언 맥나잇도 좋아해요.

한편 「나만 따라와」는 로킹(Rocking)한 스타일이다. 록 음악에 대한 경험이 있나.

중학교 때 밴드를 했어요. 링고 스타라는. (밴드 이름을 왜 그렇게 정했나?) 모르겠어요. (웃음) 친구들이 정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그린 데이 노래도 불렀고 YB 「나는 나비」도 자주 연주했죠. 사실 그 때는 그린 데이 광팬이었어요. 죽기 전에 안 보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밴드를 해보고 싶진 않은가.

해보고 싶죠. 밴드에 대한 매력을 분명히 느꼈고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 록만 하는 밴드보다는 재즈도 하고 여러 음악을 아우를 수 있는 풀 밴드 스타일로 해보고 싶은 거죠.

한창 밝다가도 「도통 모르겠네」에 이르러서는 비애감도 느껴진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성격이 어떤가.

마냥 상쾌하고 기분 좋은 성격은 아니에요. 싫어하는 것도 분명히 있죠. 생각이 많으니 잠에 쉽게 못 드는 경우도 많고, 외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어요. 부담감도 느끼고요. 이 세상에서 “나는 기분 좋게 살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이번 앨범에도 좋은 기분만 넣었다면 제 모든 모든 면을 다 보여드리지 못 했을 것 같아요. 역효과가 났겠죠.

음악도 괜찮지만 로이킴에 대한 높은 관심에 외모도 작용할 것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의 노래가 좋게 들릴 수 없을 거예요.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을 볼 때는 성격도 보면서 외모도 보잖아요. 사람을 좋아하다보니 음악을 접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음악을 먼저 듣고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죠. 외모를 먼저 좋아해주신 팬들은 사람 로이킴을 먼저 좋아해주시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로이킴을 두고 팬들이 여러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 중에서 실제와 괴리가 있는 이미지를 꼽는다면.

재벌 2세. 괴리라기보다는 과대평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붙여주신 이미지들이 물론 다 좋은 것들이에요. 자극제라 생각하면서 음악하고 있죠. 다만 그런 부분들이 음악성을 가리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음악을 반대하지 않았나. 음악과 공부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반대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만 당시의 시기에서는 공부를 더 가까이 해야 하지 않냐고 말씀하셨지 음악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시진 않았어요. 지금은 음악만 하고 있죠. 공부만 해야 하나, 음악만 해야 하나하는 고민은 일단 필요 없는 것 같아요. 할 수만 있으면 둘 다 하는 게 좋죠. 고민하고 있어요. 지금은 경영 쪽으로 대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계속 공부하면서 음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요.

프로듀서 정지찬은 어떻게 만났나.

원래는 <나는 가수다> 음악감독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사실 어떤 음악을 하시는지는 잘 몰랐죠. 그러다 라디오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음악도 공유하고 많은 얘기를 했어요. 성격도 잘 맞았고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대상 출신이기도 해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마침 주변에서 추천도 있었구요. 대중적이라는 특성을 굉장히 잘 파악하시는 분이었어요. 사실 처음 부탁드렸을 땐 (프로듀싱 하는 것에 대해) 되게 조심스럽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뮤지션 로이킴보다 사람 로이킴을 먼저 만나려고 하셨고요. 다행히 잘 맞았죠.

앨범의 곡 전반에서 좀 잦다 싶을 정도로 가성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별한 의도가 있나.

아뇨. 딱히 의도한 것은 없었어요. 목을 써서 진성을 내는 것보다 목에 무리가 안 가게 하면서 가성을 내는 것이 더 편했어요. 부르는 제가 편하니 듣는 사람들도 편하실 것 같았고요. 목을 긁거나 세게 내지르는 트랙은 「나만 따라와」밖에 없어요. 그런 스타일에 목이 또 쉽게 잠기기도 하고요. 편한 것을 추구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멜로디가 강점이다. 이 강점이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익숙함이라는 단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봄봄봄」이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비교되었던 것처럼.

아무래도 영향이 있는 거죠. 어려서부터 김광석 노래를 들어왔으니까요. 그런 풍이 묻어나오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Love love love」도 제가 자연스럽게 흘려냈던 멜로디를 담은 것이고요.

앞으로의 행보가 대중적인 방향과 실험적인 방향 둘 중 어느 쪽으로 진행될 것 같은가?

대중적인 쪽으로 갈 거예요. 더 많은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음악가의 목표는 자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늘리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번 앨범의 곡들도 대중적인 관점에서 전에 썼던 곡들을 다듬고 다듬어서 골랐어요. 그렇다고 실험하는 쪽으로 두려움은 갖지 않을 거고요.

가수에게 중요한 첫 앨범으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기분 좋아지는 음악. 그게 전부인 것 같아요. 실험적인 음악은 가끔 호불호가 갈리잖아요. 그보다 전 듣기에 편하고 불편한 자극이 없는 느낌을 담고 싶었어요. 남녀노소가 들었을 때 미간 안 찌푸리고 들을 수 있는, 그런 느낌이 중요한 것 같았고요. 편안하게 흘러가는 음악인 거죠.

이승철, 김예림과 활동 시기가 겹친다. 슈스케 출신으로 어떻게 보면 멘토, 선배와 함께 하는 것인데 기분이 어떤가?

「봄봄봄」 때도 굵직하게 겹쳤잖아요. 조용필, 싸이. 사실 그런 것 생각하면 잘 안 될 것 같아요. 누구누구 나온다고 해서 등장 시기를 미룰 수도 없고.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내 인생을 결정한 최고의 음반을 꼽는다면.

먼저 아까 말씀드렸던 그린 데이의 < American Idiot >이에요. 그리고 김광석 <다시 부르기>앨범은 1편과 2편 둘 다 좋아해요. 사실 다 김광석 작사 작곡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노래를 자기 목소리로 자기화하는 힘에 놀랐고 또 중요성을 느꼈죠. 마지막으로는 데미안 라이스의 < O >를 꼽을게요.

인터뷰 : 임진모 윤은지 이수호 김근호
정리 : 이수호
사진 : 위수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고미숙 “읽기만 하는 고전은 소용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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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저자를 만난 것은 장마철 와중, 무척이나 무덥고 습한 날이었다. 충무로에서도 한참을 걸어 서서히 오르막길로 접어들면서 더위는 한층 심해졌다. 저자가 강연과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는 감이당, 남산 강학원이 있는 깨봉빌딩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땀방울이 얼굴을 모두 적시고 난 뒤였다.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듣는 다는 것, 또 배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니,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이처럼 고즈넉한 곳이 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일면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인사를 건네는 고미숙 저자의 모습은 그가 머무는 공간과 다르지 않았다. 수수한 옷차림에 학자적인 풍모를 느낄 수 있는 꼿꼿함, 그리고 간간이 내비치는 여유에서 남다른 내공이 느껴진다. 여성학자가 많지 않은 고전인문학 분야에서 저자는 10여 년이 넘게 파고 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해 허준의 『동의보감』, 다산과 임꺽정, 윤선도 등을 재해석했다. 또한 사주명리학으로도 영역을 넓혀 인간의 몸과 마음, 운명에 관해서도 깊은 고찰을 이어갔다. 정작 그 모든 작업을 이어 온 본인은 자신의 자취를 ‘리라이팅’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각각의 결과물들은 여성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고전의 새로운 이면, 디테일한 인물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전혀 다른 스타일로 고전 이야기하는 저자의 필체와 위트는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고전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키우게 했고, 또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런 저자가 최근 자신의 역량을 집대성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했다. 바로 다산과 연암의 극명하게 교차되는 삶과 작품을 다룬 평전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가 그것이다. 수많은 저서를 집필해 온 저자였지만 작품이 영글기까지 쏟아야했던 고민과 갈등의 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듯했다. 앞으로 수년 간 간격을 두고 이어질 작품이기에 그 시작은 무엇보다 중요한 탓이었으리라.




유쾌한 노마드 연암, 치열한 앙가주망 다산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조선의 마지막 황금기를 살았던 두 선인은 우리 시대에까지 그 명망이 이어지고 있는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는 이는 드물다. 더구나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는 것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고미숙 저자의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바로 이 점에 집중했다. 특히 저자는 사주명리학적으로 두 사람의 타고난 운명을 알아보고 그 삶의 궤적을 짚어보는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 본 두 인물의 모든 것은 놀랍게도 정 반대의 성향을 드러냈다. 저자는 이를 마치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한 평행선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사주명리학상으로도 다산은 불과 같지만 연암은 물에 해당됐다. 그 삶 역시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보통의 인문학적 접근과 다르게 위트 넘치는 필체와 관점으로 두 인물이 어떻게 삶의 파고에 대처했는지를 풀어낸 것이다. 두 인물의 삶 속에서 발견해 낸 새로운 흔적들 이야기하는 저자의 눈빛에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이유다.

이번에 펴낸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2017년까지 이어질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데요. 집필을 결심하신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10년 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를 썼을 당시 마지막 부록이 연암과 다산의 이야기였어요. 그러면서 문득 연암과 다산이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죠. 그렇게 화두가 생겼지만 한 동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났어요. 그런데 지난해에 OBS와<신新 열하일기>라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다산과 연암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준비를 했는데 처음에는 시리즈로 쓸 생각을 못하고 그저 모든 걸 종합해 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곧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깨달았죠.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고 그걸 압축한다는 건 결국 이미 알고 있는 내용만 반복하게 되거나 많은 걸 버려야 한다는 의미였거든요. 그런 식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진정한 그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탐사를 하며 느끼는 감흥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렇게 하려면 시리즈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굳힌 거고요.

연암과 다산을 물과 불, 우도와 효제, 유목민과 목자, 포스트모던 지식인과 근대적 혁명가풍 지식인, 유쾌한 노마드와 치열한 앙가주망으로 풀이하셨습니다. 굉장히 새로우면서도 재미있는 비교인데요.

근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두 사람이 똑같이 보여요. 차이가 나는 것들을 미봉할 수 있는 장치가 여러 가지 있는 거죠. 그런데 큰 그림을 다르다는 것으로 전제로 하고 시작하니까 디테일하게 비교하면 할수록 깜짝 깜짝 놀라게 되더군요. 말 하나, 눈짓 하나에도 두 인물이 전혀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근본적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 학문을 대하는 태도, 주변 관계, 심성까지 모든 것이 달랐죠. 그걸 알게 되니 두 인물의 전 생애를 두고 대칭게임놀이에 빠질 정도로 발견이 계속 되었어요.

책 서두에서 지난해 겨울부터 올 봄까지 이번 책을 집필하면서 아주 특별한 신체적 감응을 맛볼 수 있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경험이었는지요.

처음에는 심적으로 짓눌렸어요. 심지어는 가위에 눌리기까지 했죠. 연암의 자료는 많지는 않은데 비해 그 사유는 굉장히 유동성이 강해 그걸 장악하는 게 힘들었고, 다산은 너무 압도적으로 자료의 양이 많았어요. 그걸 완전히 읽고 쓴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쓸 수가 없겠더군요. 처음에는 ‘내가 이정도 갖고 써선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아는 것만큼이라도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요. 그 갈등을 신체적으로 느꼈어요. 포기했다가 절망했다가 다시 일어섰다가 하면서 전체를 세 파트로 나누고 아는 만큼이라도 말하자는 결심을 했죠. 그 다음부터는 신기하게도 내가 아는 만큼 즐거워지는 거예요. 그 전에는 내가 이만큼 알아야 하는데 요것 밖에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싹 버리니까 아주 디테일한 걸 발견할 때마다 즐거워지더군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자료를 찾고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가 어떤 수행을 하는 구도자와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정말 전문가라도 해도 두 인물의 삶에 디테일한 곡면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는데, 그런 걸 알았을 때의 오는 감격이 컸죠. 새삼 글쓰기란 기가 막힌 작업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내 책을 읽어주세요’가 아니라 ‘이런 글을 써보세요’라고 권하고 싶어지더군요. 그 시대의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그 인물들을 만나는 느낌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 것을 느끼면서 ‘아, 이걸 진정한 지성의 기쁨이라고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연암과 다산의 삶을 비교하며 저자께서도 글 쓰는 사람, 학자로써 그들과 같이 공명하신 듯 하네요. 저자 본인은 두 인물의 스타일 중 누구와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정말 외람된 생각이에요(웃음). 저는 다산 식으로 절대 살수도, 글을 쓸 수 없어요. 연암 식으로도 마찬가지로 외람되고요. 그럼에도 굳이 말하자면 저에게 많은 감발을 주는 건 연암이죠. 하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연암처럼 빛나려면 다산식의 공부가 뒤에 있어야 함을 느껴요. 저는 다산 식으로 공부를 할 수 없지만 대신 다산 식으로 공부하시는 분들, 박학다식하고 박람강기(博覽强記, 동서고금의 서적을 널리 읽고 내용을 기억하는 것) 하신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분들이 없으면 연암식 글쓰기로 굉장히 치우치게 될 뻔 했죠.

다산과 연암 외에도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인물의 성격 외에 새롭게 발견하신 부분이 많을 듯 한데요.

동의보감이 그래요. 사람들은 단순히 의학서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배울 생각을 안했는데 의대를 안 나온 사람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올해 초까지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몸과 인문학』등 3권의 책을 통해 이야기했죠. 아직도 강의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와요. 저는 의대를 나온 것도 아니지만 몸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걸 얘기해 주면 사람들은 참 열심히 들어요. 제 글 작업은 교과서적인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텍스트나 인물에 대해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오늘날의 현상과 접목시키는 것이에요.




배움과 깨달음으로 이어진 삶

스스로 칭하듯 유일한 고전평론가로서, 또 학자이자 작가로서 저자가 추구하는 것은 역사 속 인물의 삶을 디테일하게 바라보며 새로운 발견을 이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교육이 부실한 요즘 상황에서 사극마저도 퓨전을 표방하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작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어, 분위기를 조금 바꾸어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과 함께 개인적인 이야기 속에 녹아 든 학자의 열정을 들여다보았다.

요즘 사극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요. 인문고전학자이자 작가로서 우려되는 부분이 있으실 듯 합니다.

사실 사극이 모든 진실을 담을 수 없고 대체로 조작된다고 보는 게 맞는데, 문제는 어떻게 조작되느냐는 거죠. 요즘 사극에서 제일 문제는 현대적 멜로물에다가 단순히 인물들에게 옛날 옷을 입혀 놓았다는 거예요. 인물들의 성격이나 정서가 현대인하고 똑같아요. 문명권이 다르다는 건 삶의 양식이 다른 거고 그러면 감정의 흐름이 다른 것이거든요. 옛날엔 일부다처제고, 15, 16살이면 혼인이 이뤄졌어요. 그런 때에 지금처럼 연애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을 리는 없잖아요. 요즘 멜로드라마에서 보듯 오늘날은 너무 연애하기 힘들어요. 일종의 문명이 주는 재앙인 셈이죠. 게다가 그렇게 힘주어서 결혼하고 곧 왕창 깨지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사극에다가 옮겨놓고 시기, 질투, 첫사랑을 덧입히는 것은 우리의 과거를 너무 질곡 시키는 거예요. 다른 시대를 엿본다는 건 지금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삶에 대해서 뭔가 탐사할 수 있어야 되요. ‘역사적 사실에 맞나, 틀리냐’가 아니에요. 역사적 사실로는 디테일한 부분을 알 수 없으니 다 틀리다고 봐야죠.

중요한 건 그렇게 재구성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줘야 하는데 요즘 사극은 너무 답답할 정도로 똑같은 패턴이라는 거죠. 자기가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면 남성들도 순결을 지킨다는 설정은 범국민적 사기극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그 시대에 그런 남자가, 그것도 왕이 그럴 수는 없거든요. 완전히 20세기 핵가족의 순결 이데올로기를 저 중세의 왕에게 씌운 셈이죠. 그렇게 했을 때 결국 ‘성’에 대한 엄청난 도덕적인 검열이 생기는 거예요. 그건 정말 폭력이죠. 그래서 저는 멜로 사극이 세상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금지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사회적 적응력을 키우는데도 방해될 뿐이고요. 밖의 현실은 포르노인데, 드라마에서는 금욕을 강요하는 상황이죠.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식의 연애가 가능하지도 않고 좋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퓨전 사극은 몸의 논리도 아니고 운명이나 풍속의 논리에도 맞지 않아요. 제대로 된 사극을 만들려면 사극의 상상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문고전 분야는 대개 여성들의 관심사와는 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인데요. 저자께서는 어떻게 입문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우연하게 시작했어요. 대학원을 갈 때 지도교수님을 보며 ‘저 선생님처럼 글을 써야 돼’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배우고자 했더니 선생님의 담당이 고전문학이셨던 거죠. 그 전까지 저는 준비가 없었어요. 선생님께 배우려면 고전문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죠. 그 밑에 있는 선배들 역시 고전으로 승부를 내겠다고 각오가 대단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쟁쟁했던 선배들은 간곳없고 저와 한 회 위의 여자 선배만이 남더군요. 고전공부는 끈기가 있어야 되거든요. 고전분야에 여성이 없다는 말은 맞는 소리에요. 여성은 시나 소설 쪽으로 관심을 두는게 보통인데 전 그런 것은 영 관심이 없었어요. 이미 그 분야에 여류작가는 많기도 했고요. 저는 그저 꾸준히 지속적으로 공부했을 뿐이고 어느 순간부터 재미를 느꼈죠. 그러면서 고전을 재미있게 쓰고 사람들과 소통한다면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박사 학위를 마칠 때 『고전문학 이야기 주머니』라는 대중 고전 문학서를 냈고, 그 뒤에도 고전문학을 통해 자립한다는 생각을 하며 ‘열하일기’를 만나게 된 거죠. 그렇게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남들도 고전문학을 좋아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 온 거고요.

오늘날 고전문학은 현대인들이 다시 배우고 알아야 할 지혜가 담겨있다고 하지만 사실, <열하일기>나 <동의보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로 읽어 본 사람 드물 듯 한데요. 고전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해 볼만한 일은 지성을 통해서 세계와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공부고, 수행이고, 구도이자 진리에 대한 열정이죠.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먹고 살기 힘들고, 가족을 부양한다고들 했죠. 하지만 지금은 이유가 점점 없어지는 시대가 아닐까요. 어쩌면 전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진리의 구도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것 말고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가 없거든요.

오히려 전 요즘 부자들이 안됐어요. 어떻게 자기를 표현해야 되죠? 어떻게 해야 이 가난한 사람과 달라져요? 요즘에 달라지는 건 감옥에 가는 거 말고는 없을 것 같은데요(웃음). 부자들이 차별화했던 그 화려한 것이 스마트폰에 다 들어가 버렸잖아요.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진짜로 나만의 고유한 인생을 사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다산과 연암은 학문과 지성을 통해서 자기 인생을 구원한 인물들이에요. 그들 역시 자기 운명의 코스를 바꾸지는 못했어요. 유배지에 가는 걸 막을 수 없었죠. 사람들은 운명을 개척하는 걸 길흉을 바꾸는 거라고 착각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다산이 유배를 가지 않으려면 주변 인간의 삶이 다 바뀌었어야 했어요. 그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걸 통달한 사람도 자신에게 오는 인연은 단 하나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걸 어떻게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달린 거죠. 유배 생활 18년을 현명하게 사용한 것이 다산을 만든 거예요. 누군가는 분통이 터져 죽고 누군가는 사약을 받고 누군가는 폐인이 됐어요.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이때 비로소 학자로 거듭났어요. 연암 역시 그 무엇도 평생의 가난함을 바꿀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연암 자신은 그 가난을 수행의 장으로 삼았죠. 당시에는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됐어요. 누구도 불가능하지 않죠. 이제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 고유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여부는 스스로가 얼마나 진리를 열망하는가에 달렸어요.



사주어택 이벤트

본 기사에 댓글을 달아주시면, <채널예스> 독자 2분을 선정해 『갑자서당』의 저자인 류시성, 손영달 선생님이 사주 풀이를 해드립니다. (행사 날짜: 7월 23일(화) 저녁 7시 30분~8시 30분) 장소는 당첨자 분들께 개별 연락해 드립니다. (7월 21일까지 올라온 댓글 한에서 당첨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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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고미숙 저 | 북드라망
이 책은 고미숙이 다산과 연암을 주인공으로, 정조를 주연급 조연으로, ‘문체반정’과 ‘서학’(천주교)를 중심 사건으로 삼아 쓴 새로운 형식의 평전이다. 평전이되 인물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리지 않고, 두 인물의 사유와 글쓰기가 부딪치고 흩어지는 지점들을 포착해 다산과 연암의 스타일 대별해 구축해 내고 있다. 연암이 좁쌀 한 알에서 우주적 징후를 간파하고자 한다면, 다산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담아내겠다는 결기로 충만하다.” 고 말한다. 연암과 다산, 그리고 18세기 조선을 ‘함께’ 읽을 때 만날 수 있는 별들의 지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 이제, 읽는 이들의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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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은 90년대에 전하는 안부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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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소설을 쓰기 위해 산다고 믿었던 정이현 작가. 『안녕, 내 모든 것』를 쓰면서 비로소 ‘나는 살기 위해 쓰는 사람’임을 느꼈다. ‘마감과 압박’이 동력인 작가가 펜을 들 수 있는 시간은 넉넉하지만은 않았다. 두 아이의 엄마, 아내, 생활인으로서 삶을 동시에 살아내야 했다. 작품만을 위해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일, 어떤 작가라도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정이현에게 최근 4년은 당황스러우리만치 막막한 심정이기도 했다. 강제성이라도 가져야 쓸 수 있을 것만 같아, 덜컥 연재를 시작했다. 소설의 배경은 일찌감치 1990년대로 점찍었다. 스스로를 ‘90년대 아이’라고 부르며, 단편 「삼풍백화점」에서 이미 소비자본주의가 개인에게 준 상처를 되짚어봤지만 아직 꺼내놓을 이야기가 많았다. 정이현은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생으로 자율학습을 꾸역꾸역 견뎌냈던 18살, ‘언젠가 이 시시한 순간들을 기록하게 되겠구나’ 싶었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안녕, 내 모든 것』에서 90년대의 대한민국, 18살 세미와 지혜, 준모를 호출했다.

『안녕, 내 모든 것』의 원제는 ‘내 모든 것’이었다. 정이현 작가가 가장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는 서태지와아이들 1집 앨범의 수록곡 제목이기도 하다. ‘내 모든 것’이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작가는 ‘내 모든 것? 어떻게 이런 강렬한 말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단다. 개작을 하면서 ‘안녕’을 붙이게 됐는데, Hello와 Good Bye가 하나로 표현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90년대는 ‘안녕’이다. ‘안녕’의 의미를 전자로 읽든 후자로 읽든, 그것은 독자의 마음이다.




소설을 쓰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사는 삶

『사랑의 기초』가 지난해 5월 8일에 나왔는데, 『안녕, 내 모든 것』연재도 때마침 같은 날 시작됐어요. 주변에서 ‘네가 에너자이저냐? 두 개를 어떻게 같이 하냐’라고 했는데, 『사랑의 기초』집필이 끝나자마자 준비에 들어갔거든요. 지난해 3월부터 준비했고 연재를 시작한 거죠. 사실 저는 ‘압박’이 동력이에요(웃음). 압박이 없으면 일을 못해요. 지금 뭐라도 쓰지 않으면, 어쩌면 강제로 하지 않으면 쓰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으니까요. 스스로를 강제성 안에 옭아매고 싶은 심정이랄까요?”

지난해 봄부터 올해까지, 정이현은 집과 작업실만 오가는 생활을 했다. ‘밤 외출이 뭐야?’라고 되물을 정도로 바빴고, 그만큼 열심히 펜을 들었다. 예전에는 ‘삶은 곧 소설’이라고 생각했기에 열심히 놀고 여행을 다녔지만, 문득 소설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맞닥뜨리며 기어코 책상에 앉았다. 그러다 불현듯, ‘소설을 쓰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생활인의 삶을 잘 몰랐던 거 같아요. ‘작가의 말’에도 썼듯이 ‘쓰기 위해 산다’는 선언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뒤늦게 알게 됐어요. 어떤 소설도 삶보다 귀하지 않다는 것, 또 내가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도요. 아이에게는 일하는 엄마라는 죄책감을 갖고, 소설에게는 모든 걸 쓰지 못한다는 미안함이 있는 거죠. 『안녕, 내 모든 것』은 스스로 뭔가를 열심히 했다는, 그 시간에 대한 기록 같은 느낌이에요.”

2002년에 등단한 11년차 작가 정이현. 지난해 한 언론에서 데뷔 10년차 작가들의 근황을 리포트한 기사가 있었다. 48명 중 한 권 이상 단행본을 펴낸 작가는 30명, 4권 이상은 3명이었다. 그리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는 단 3명의 작가 중 1명이 정이현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등단, 『달콤한 나의 도시』, 『오늘의 거짓말』, 『작별』,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등 정이현은 단편과 장편, 산문집 모두를 넘나들었다.




1990년대 소비자본주의 가족의 몰락

“우리가 1960, 70년대를 복고라는 키워드로 소비하듯이, 90년대도 X세대라는 대중문화, 특정한 음악으로 소비하잖아요. 그런 것들은 유행으로 잊혀질 수 있다는 건데, 그게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제 청춘은 삼풍백화점으로 무너졌어요. 언니들의 청춘은 아직 거기 있지만, 나의 청춘, 우리 세대는 폭삭 무너져버려서 흔적도 없이 다른 게 들어서버렸다는 것에 되게 울컥하는 미안함, 안쓰러움 같은 게 있어요. 이제 시간의 거리가 많이 떨어졌잖아요. 제 나름의 안부인사라고 할까요? 잘 지냈니? 잘 있어? 그런 담담한 인사요.”

『안녕, 내 모든 것』은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1978년생 세미, 지혜, 준모의 이야기다. 김일성이 죽은 해인 1994년부터 소설은 전개된다. 강남 반포에서 함께 중학교를 다니며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인 세 친구는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는, 각자의 고민을 갖고 살아간다. 부모의 불화로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된 세미,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특별한 기억력을 가진 지혜, 틱장애인 ‘뚜렛 증후군’ 때문에 반복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준모. 이들은 어른과 아이, 모범생과 아웃사이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며 부모 세대와의 괴리를 감내한다. 세 사람에게 일탈이란, 캔맥주를 사와 마시지는 않고 컵에 따라만 놓는 것일 뿐이다. 소설은 세미, 지혜, 준모 세 명의 시점으로 교차 서술되지만 시작과 끝은 지혜의 시점으로 맺는다.

“세 친구의 이야기인 동시에 세미의 가족으로 상징되는 90년대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몰락이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세미의 인칭으로 주로 서술되지만, 소설의 처음과 끝은 지혜의 시선으로 열고 닫았어요. 지혜는 기록하는 자인데, 투명한 연필로 기억하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지혜가 가장 진보하는 발전하는 인물일지도 몰라요. 성장의 무언가를 치르고 나서야, 자기 안에 어떠한 기록들이 차곡차곡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거죠. 그 친구가 꼭 소설가나 시인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 세대가 그렇지도 않고요. 현재의 이야기는 꼭 지혜의 시점으로 쓰고 싶었어요. 그 시절을 끝까지 담아두고 있는 인물이 지혜였으니까요.”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세미의 가족사는 1990년대 중산층의 삶을 대변한다. 사업이 망한 세미의 아버지는 이혼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새 여자를 데리고 세미 앞에 나타나고, 유일하게 세미가 이해할 수 있는 존재였던 고모는 예상치 못한 인물과 결혼한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한남동 부촌을 떠나 세미와 단둘이 살게 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세미는 갈등하지만 방황하는 모습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부모가 속물임을 아는 세대. 그러면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요. 우리 부모가 얼마나 속된 사람이고 그게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알지만, 또 나를 먹여 살리고자 안간힘을 쓰는 부모잖아요. 온전히 사랑할 순 없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존재죠.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묻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것 같아요. 연민은 있지만 부모 세대와 반목하는, 화해는 할 수 있지만 묻어야 하는 세대죠. 부모 세대의 공과 과를 똑똑히 알고 인지해야만 우리의 길을 갈 수 있잖아요. 지금 30대를 어떤 이름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386세대 이후는 그런 것 같아요. 소설을 쓰면서도 부모 세대 이야기가 더 나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었어요.”

세미를 두고 이혼하는 부모, 지혜에게 가혹한 입시 공부를 강요하는 교수 부모, 준모에게 자퇴를 권유하고 유학을 보내는 부모. 작가는 소설 속 부모들에게 행동의 근거에 대한 해설을 보태지 않는다.




정이현 소설에서 유일한 ‘사랑에 관한’ 소설

할머니에게 비밀을 선물한 대가로, 우리 셋은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리만의 완벽하게 은폐된 비밀.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는 친구들과 꼭 나누고 싶었는지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지켜졌고, 나와 지혜와 준모는 다시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안녕, 내 모든 것』 (p.228)
세미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세 사람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비밀을 갖게 된다. 세미의 한 마디, ‘할머니를 조용히 보내드리고 싶어’ 때문이었다. 준모는 지혜에게 말했다. “지혜야, 너는 그냥 가.” 세미와 준모는 지혜까지 휘말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지혜는 혼자만 배제되긴 싫었다. 결국 함께했다.

“가장 애틋한 인물이 지혜에요. 지혜는 되게 저 같아요. 준모는 장애가 있고 또 세미는 복잡한 가정사가 있는데, 지혜는 단지 입시공부를 강요하는 부모가 싫고 부담스러울 뿐이잖아요. 준모나 세미는 갖고 있는 상처가 커서 오히려 10대 또래들과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자기 안의 상처를 응시할 줄을 알았지만 지혜의 세상은 좁았어요. 부모를 싫어하고 욕하지만 어쨌든 순응하고 살았으니까요. 마지막 순간까지도요. 지혜의 구덩이는 그렇게 살았던 데에 대한 대가일 수 있어요. 그리고 나서 지혜는 변했죠. 준모나 세미는 그런 일을 겪고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알았지만, 지혜는 자발적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거죠.”

훗날 30대가 된 지혜는 학원 강사가 되어, 세미는 여섯 살 아이의 엄마가 되어 마주한다. 세미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아챌 수 없다. 작가는 그녀의 30대가 암흑으로 남겨지길 바랐다. 세미의 할머니 사건 후, 오히려 정상적으로 세상에 편입된 인물이 세미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비정규직 학원강사가 된 건, 부모 세대로부터 독립한 후 현실적으로 찾을 수 있었던 직업이었던 까닭이다.

“세미와 지혜가 30대가 되어 만났을 때, 지혜가 세미한테 ‘너는 어떠니?’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지혜한테 처음으로 주도권을 주고 싶었어요. 지혜는 외부의 무언가로 일어난 일을 내부의 동력으로 바꿔서 혼자 조용히 견디는 삶을 택한 거잖아요. 나이가 든다는 건, 닳아간다는 걸 깨닫는 일이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사는 사람이 성공한 거 아닐까요. 단단한 사람이 된 거죠. 세미보다요.”

준모의 30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린란드에서 혼자 살고 있는 한 동양인의 사진을 보고 준모와 눈매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준모는 열려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에선가 평범하게 살 수도 찌질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죠. 언젠가 뚜렛 증후군이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너무 미안해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나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고 병이 있을 뿐이라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훈련이 되어 있었던 거죠. 사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욕이 세상에 대한 욕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의 고통을 내가 가늠할 수는 없지 않나, 라는 생각. 대상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그에 대한 진심이 빚어낸 인물이에요. 제가 특히 애정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준모는 세미를 좋아했지만 세미는 준모의 과외선생인 성우를 마음에 담았다. 성우는 고등학생 세미를 그저 귀여워하는 평범한 대학생. 준모는 세미가 성우에게 삐삐를 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지만, 세미와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 유일한 애인 아닌, 남자친구가 된다.

“그동안 쓴 소설은 연애에 대한, 연애에 관한 소설이었어요. 작은 따옴표 속의 연애였죠. 세상이 말하는 연애에 대한 소설. ‘과연 사랑이 그러니?’ 라고 묻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을 읽는 것, 누군가에 대한 진심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준모 부분을 연재하면서 문득, 누구를 막 좋아했던 감정을 오랜만에 되살리는 느낌을 가졌어요. 내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죠. 나의 유일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 아닐까, 그게 버거우면서도 좋았어요. 준모는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세미는 준모가 아닌, 과외선생 성우를 보고 ‘양파냄새처럼’ 다가왔다고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껍질을 까다가 별안간 들이닥친 매캐한 기운에 컥, 목울대가 꺾이는, 그런 찰나.” 작가 정이현은 말한다. “양파를 썰다 보면 고통스러운 냄새와 함께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내가 울고 싶었구나, 난 항상 울고 싶은 준비가 되어 있구나’ 그런데 양파를 그렇게 자주 썰면서도 썰 때마다 그 느낌을 잊어버려요.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 이거였구나’ 싶은. 참으면 된다는 것도 아는 그런 느낌이요.”소설을 쓰는 것도 다르지 않다. 힘들 걸 알면서도 자꾸만 펜을 들게 되는 작가의 모습. 고통스럽지만 그 이상한 카타르시스 때문에 정이현 작가는 오늘도 책상 앞에 앉을 궁리를 한다.


정이현 작가 향긋한 북살롱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 2013년 8월 5일 (월)
시간 : 오후 7시 30분
장소 : 홍대 앞 KT&G 상상마당 카페
초대인원 : 30명 (1인 동반가능)
신청 : http://ch.yes24.com/Culture/SalonEvent/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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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저 | 창비
1994년,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인 열일곱살 세 친구가 있다. 복잡한 가정사를 지닌 채 부자인 조부모의 집에 사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숨기고 있는 세미, 통제할 수 없이 반복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뚜렛 증후군에 시달리는 준모,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지혜. 셋은 서로를 감싸주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켜왔지만, 또한 서로 나눌 수 없는 자신만의 상처와 비밀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들이 보내는 힘겨운 십대의 마지막 시절,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커다란 비밀이, 그들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안성기 “무표정한 13세 소녀에게 미소를 선물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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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인터뷰를 하면서 연기, 작품 활동 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건, 실례일 법도 하다. 인터뷰 대상자인 배우 역시, 무척 쑥스러운 일이다. KBS <2012 희망로드 대장정>의 여정을 담은 에세이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의 출간을 앞두고 안성기를 만났다. 빼곡한 스케줄 속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면 단연코 거절하는 법이 없는 배우 안성기. 그는 알록달록한 이야기보다 진흙 속에 묻힌 이야기를 꺼내 놓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근사한 표현으로 자신이 성취한 일에 대해 말을 보태는 법이 없다. 1992년에 유니세프 특별대표 임명되어 현재까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안성기는 올해 ‘제4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설된 사회공헌상을 최초 수상하기도 했다.

‘희망로드 대장정’과 함께하며 소외된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이 순간에도 지구 저편의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살아가곤 한다. 그러나 굶고 아프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어도 그때만큼은 지구 저 먼 곳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 그 아이들을 돕고 희망을 전할 다른 방법이 없을지 찾아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 p.10)



조금 더 아이들에게 예민해지길

“매년은 아니고 20년 동안 13개국 정도 다녀왔어요. 1년 반에 한 나라를 방문한 셈이죠.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에서 참 아름다운 도시이고 가장 잘 사는 넉넉한 곳이었는데, 내전 때문에 모든 게 망가진 나라에요. 서아프리카 적도 바로 위에 위치했는데 25시간만에 호텔에 들어갔던 게 기억납니다.”

지난해 5월, 안성기는 KBS <희망로드 대장정>을 통해 코트디부아르를 방문했다. 한때는 ‘아프리카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흥부국으로 떠올랐지만, 2002년 남북 간 갈등으로 시작된 내전으로 폐허가 된 코트디부아르.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생사도 모른 채 헤어진 수많은 가족들이다. 안성기는 25시간이 걸려 코트디부아르에 도착해 난민수용소가 있는 두에쿠에로 갔다. 내전으로 집을 잃은 4,500여 명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서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였어요. 그동안 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줄리아나라는 13살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부모도 잃고 다리도 잃은 탓인지 전혀 웃지를 않더라고요. 보통 아이들은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있는데, 줄리아나는 ‘어떻게 어린 아이가 이렇게 무표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희미한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어요. 두 시간쯤 지났을까, 점심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꺼내 주자 그제서야 눈빛을 반짝이더니 빵을 정말 순식간에 우걱우걱 먹더라고요.”

20년 동안 많은 나라의 아이들을 만나왔지만 줄리아나처럼 무뚝뚝한 아이는 처음 만났다. 아무리 못 입고 못 먹어도 아이는 아이다웠고 알고 보면 모두들 개구쟁이였다. 안성기는 줄리아나에게 미소를 되찾게 해주고 싶어, 주머니에 있던 연필을 꺼내 줄리아나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이내 자신의 얼굴이 궁금했는지, 스케치북을 힐끗 보던 줄리아나는 안성기가 완성작을 보여 주자, 잇몸을 드러내면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함께 있었던 현지 NGO 직원이 줄리아나가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겨우 말문을 튼 줄리아나에게 무얼 하고 싶냐고 물으니,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돌아갈 집이 줄리아나에게는 없었죠.”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설립자인 배우 신영균은 안성기가 코트디부아르로 떠나기 전, 그에게 5,000달러를 내밀며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해달라고 청했다. 안성기는 유니세프에 직접 기부하는 것이 나을 거라며 거절했지만, 신영균은 꼭 거듭 간청했다. 줄리아나와 헤어지는 날, 안성기는 이 돈을 현지 직원에게 전달하며 줄리아나를 위해 사용해달라고 말했다. 줄리아나는 의족을 갖게 됐다.

“유니세프를 통해 해외에 갈 때는 기부금을 전달하러 간다거나 기부물품을 주러 가는 일은 없어요. 그 지역의 어려운 상황을 직접 보고, 한국에 와서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리고 기금을 모아 유니세프 본부에 보내면, 일괄적으로 조율해서 지원을 하죠. 물론 어느 쪽에 집중해달라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에요.”


안성기는 타국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면 일부러 한국에서보다 많이 먹곤 한다. 스스로가 힘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 에티오피아에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몸이 부자연스러운 아이를 보고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제 어떠한 상황에도 놀라는 법이 없다. 그의 낯섦이 아이들에게 거리감으로 느껴지면, 손을 내밀기가 어려워진다.

“매일 밤 모기한테 뜯기고 쪽잠을 자야 하니, 인간적으로는 많이 힘이 들죠. 부끄럽긴 하지만, 집의 편안함이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많이 해요. 본능이니 어쩔 수 없는 거죠. 하지만 힘들게 가더라도 개구쟁이 같은 아이들을 만나면 또 괜찮아져요. 힘듦 가운데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보면 미래가 밝아질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스스로 조금쯤 슬픔에 무더졌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안성기.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정체된 나라들을 보면 ‘이렇게나 희망이 없을까’ 싶지만, 그간 아프리카에 세워진 아동보호센터, 학교들을 방문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아이들을 잊을까, 함께 찍었던 사진도 꺼내 보며 글을 남긴다. 함께했던 동료 배우 배종옥, 송일국, 고수, 양동근, 한혜진, 윤은혜, 보아와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를 쓴 것도 아이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이 책의 인세 수익금 전액은 세계 어린이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쓰여질 예정이다.

“누구나 어려운 나라를 직접 가서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좋은 곳에서 사는지를 알겠지만 모두가 그럴 순 없잖아요. 다만 비행기로 열 몇 시간만 가더라도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 이렇게 같이 지구촌에 살고 있지만 어떤 나라의 아이들은 아직도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겪고 많은 나라들이 도와줬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도리니까요. 지난해 유니세프 기금 모금 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36개국 중에 4번째로 기금을 많이 보낸 나라에요. 우리 국민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많은 손길을 보내주고 있고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를 통해 소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는 사람들이 조금 더 아이들에게 예민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유니세프가 내게 함께 봉사활동을 하자고 했을 때, 나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참이었다. 병원에서 작은 아들을 품에 안는 순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아프다면 부모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될는지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유니세프와 일하는 것을 더욱 당연하게 여겼다. 내 아이가 아프면 내가 아프듯 먼 땅의 아이가 아프다면 그 아이의 부모는 얼마나 아플 것인가. 그리고 만약 내 도움으로 그 아이가 살아남는다면, 부모는 얼마나 커다란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될까. 다시 상상해본다. 전쟁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의심하며 눈을 들었을 때, 만약 거기 나의 가족이 있다면 나는 의심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함께 집을 지을 것이다. (『다행이야, 이제 만나서』 p.201)


감독? 작가? 영화로도 에세이 쓸 수 있어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안성기의 스케줄표는 언제나 여백이 없다. 항상 후순위는 ‘가족’이라며 미안함 마음이 많다는 그. 올해 하반기에는 세 작품을 촬영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후배 배우 박중훈의 감독 데뷔작 <톱스타>에서 ‘국민 배우’ 안성기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무슨 역할이라도 출연한다고 했는데 국민 배우 역을 주더라고요(웃음). <톱스타> 주인공이 엄태웅인데, 태웅이한테 선배 배우랍시고 충고하는 장면을 찍었어요. 엄태웅은 뒤돌아서 ‘국민 배우면 다야?’라고 말해요(웃음). 8월에는 <찌라시>라는 영화를 찍어요. 조연이라서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고요. 바둑영화 <신의 한수>는 8,9월에 주로 찍을 계획이에요. 10월부터 12월에는 김훈 작가의 단편 『화장』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찍고요. 키리야 카즈아키 감독의 <더 라스트 나이츠>는 촬영은 다 끝났는데, 개봉은 내년쯤에 할 것 같아요. CG가 많이 들어가서 후작업이 많다고 하네요.”

5세 때 아역배우로 시작해 올해로 연기인생 56년을 맞은 안성기. 대한민국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그는 2011년, 일본 작가에 의해 평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가 출간됐다. 임권택 감독은 안성기를 두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과장하지도 않으면서 이순을 바라보는 여태도 왕성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는 배우. 그는 도사이거나 곧 신선이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추천평을 남겼다.

“자서전 이런 거 너무 싫어서 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다 준비를 하신 상태라서 거절을 할 수 없더라고요. 다행히 작가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쓴 평전이라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보신 분들도 내용이 충실하다고 만족해 하셨어요. 아마 임권택 감독이 도사로 표현을 해주신 것은(웃음) 워낙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하다 보니까, 다시 어른이 되어서 시작했을 때도 ‘어떻게 가는 것이 좋은 길인가’에 대한 답을 알았으니까 실수가 적었던 것 같아요. 큰 실패나 실수 없이 무던하게 걸어왔지만 젊은이다운 기개가 부족했죠.”

젊은 시절, 날마다 책을 한 권씩 다독했던 안성기. 요즘은 책상에 쌓인 시나리오를 읽기만도 바쁘다. 웬만한 시나리오가 중편 소설 정도의 분량이니, 여전히 다독을 하는 셈이다. 모든 배우들의 로망은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안성기가 좋아하는 멜로의 색깔은 분명하다.

“단순하게 어떤 관계 설정에 의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뚜렷한 주제가 있고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이야기가 좋죠. 2010년 작 <페어러브>는 색다른 느낌을 주는 멜로 드라마지만 상투적인 내용이 아니라서 출연했던 작품이에요. 생각보다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는 건 굉장히 힘들어요. 1년에 한두 편 정도 ‘아 좋다’ 싶은 시나리오가 오고, 그 다음에는 ‘이 작품은 어떻게 찍힐까’ 모호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완벽한 시나리오보다는 현장에서 촬영을 하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죠.”

최근 박중훈, 정우성, 하정우 등 많은 배우들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고 있다. 안성기에게 감독 욕심은 없냐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반드시’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배우’로 살아갈 계획이라고. 그렇다면 저자로의 욕심을 없냐고 채근하자, 안성기는 현답을 내놓았다.

“책을 쓸 시간이 있다고 하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영화로도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거니까요. 내가 굳이 책으로 하려는 것보다 영화로 모든 걸 표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안성기가 지금까지 쓴 에세이는 영화뿐이 아닐 것이다. 코트디부아르에서 만난 줄리아나, 세드릭, 밤바, 에누크, 에스텔에게도 안성기 방식대로의 에세이를 선물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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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야, 이제 만나서
안성기,KBS 희망로드 대장정 제작팀 외 공저 | 중앙북스(books)
8개국으로 떠난 여덟 명의 스타가 KBS 희망로드 제작진과 해야 할 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대로를, 과장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길 위의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온 그들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도 계속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래야 조금이라도 많은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에는 그들이 먼 곳에서 울고 웃었던 이야기들,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자는 그들과 아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행복해질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오렌지 캬라멜 “이태원, 삼청동, 한옥마을 맛집 함께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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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캬라멜이 선택한 대한민국 여행지는 어딜까. 바쁜 스케줄 속에 여유를 찾아 떠난 리지, 나나, 레이나는 서울과 전주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로 했다. ‘청춘 여행’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20대 또래들이 가보면 좋을 서울 삼청동, 이태원, 가로수길부터 전주 한옥마을까지. 『오렌지 캬라멜의 청춘 여행』안에는 서울 강북, 강남의 핫 플레이스와 전주의 숨은 맛집이 오렌지 캬라멜의 감성으로 소개되어 있다. 리지, 나나, 레이나의 예쁜 화보는 부록이자 본론(?)이다.

“‘청춘’이라고 하는 시기에는 누구나 싱그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안정적일 수는 없는 시기이겠죠. 저희 또한 마찬가지이니까요. 하지만 마음이 불안하고 쳇바퀴 같은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땐 저희처럼 훌쩍 여행을 떠나보세요.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풋풋한 싱그러움을 꺼내어 볼 수 있을 거예요. 청춘 여행으로 우리나라의 숨은 매력도 찾고 내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나의 모습도 찾아보시길 바라요.”




화보집인 줄 알았는데, 여행 에세이네요. 바쁜 스케줄 때문에 여유롭게 여행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오렌지 캬라멜의 청춘 여행』을 펴내게 되었나요?

사실 저희가 데뷔를 하고 난 후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어요. 항상 바쁜 스케줄 탓에 잠깐씩 틈을 내어 쉬는 것이 전부였죠. 그러다 보니 멤버들이 모두 항상 똑 같은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는 것을 느꼈어요. 새로운 활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활동을 잠시 쉬는 시기에 ‘우리끼리 마음껏 일탈을 즐겨보자!’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떠나게 되었어요(웃음).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가 지금 살고 있지만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서울의 다양한 곳을 구경해보자!’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여행이 꼭 어딘가 멀리 떠나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서울이 가진 다채로운 매력을 직접 느껴봤습니다. 그리고 삼청동에 갔을 때 우연히 한옥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가장 우리나라다운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전주 한옥마을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두 번째 여행지로 전주를 택하게 되었죠. 두 군데를 여행하면서 우리나라의 멋과 문화, 또 환상적인 매력을 깊이 알 수 있었고, 저희가 느낀 것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에세이를 출간하게 되었어요(웃음).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후 첫 여행이었던 건가요? 멤버들 모두 평소에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었는지 궁금해요.

리지: 저는 워낙 활발해서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해요. 혼자 길거리 구경도 하러 다니고,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집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가수가 된 후에는 시간이 없어 많이 돌아다니지 못했어요. 아마 3-4년 만인 것 같아요(웃음).

나나: 많이 돌아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어딘가 목적지를 정해서 떠나는 여행을 좋아해요.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 여행을 하면서 무언가 느끼고,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아요. 저도 마찬가지로 가수 데뷔 이전에 간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해외에는 공연하러 참 많이 다녔지만요.

레이나: 가보고 싶은 곳이 정말 많은데 가수 데뷔 후엔 한번도 여행다운 여행을 떠나지 못했어요. 해외여행도 좋지만 저는 우리나라 전국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해보고 싶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에도 들르고, 자연과 함께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요. 상상만 해도 좋네요(웃음). 그래서 이번 서울과 전주 여행이 저에겐 정말 오랜만의 힐링 타임이었어요. 정말 여유로운 여행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여행을 떠날 때 각자 꼭 지참하는 아이템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리지: 카메라에요. 사진 찍는 것과 찍히는 것, 둘 다 굉장히 좋아해요. 특히 찍히는 쪽을 더 선호합니다(웃음). 카메라는 여행의 필수품이죠. 그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남는 게 사진밖에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카메라를 꼭 챙기고 사진을 최대한 많이 찍어요. 나중에 사진 보면서 ‘아~ 이땐 이랬지’, ‘이 때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하면서 추억을 되새길 수 있잖아요.

레이나: 편한 신발을 꼭 챙겨요. 여행은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저기 둘러보려면 편한 신발을 신는 게 아주 중요하죠.

나나: 휴대폰을 꼭 챙겨요. 연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웃음) 음악을 듣기 위해서요. 여행과 음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 같아요. 좋은 곳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상쾌해져요. 그래서 휴대폰에 담긴 음악을 꼭 챙겨가곤 해요.




서울과 전주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꼽는다면요?

나나: 전주요! 전주 한옥마을에도 가고 작은 골목길에 있는 예쁜 가게들도 들렀었는데 고즈넉하고 평온한 전주만의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한가로운 곳에 있다 보니까 복잡한 생각도 정리되고,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

레이나: 서울 삼청동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경복궁 옆에 자리해서 그런지 아기자기한 골목들이 많았고 분위기도 고풍스러웠어요.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죠. 서울의 색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정말 즐거웠어요.

리지: 이태원이요! 이태원을 다녀온 후 그 곳의 이국적인 매력에 완전 푹 빠졌어요. 거리도 멋스럽고 없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다음에 더 구석 구석 자세히 구경하고 싶어요(웃음). 아! 그리고 이태원에서 우리 멤버들끼리 칵테일도 한 잔 했었던 게 기억에 남네요.

여행지에서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레이나: 츄러스요(웃음). 원래 달콤한 걸 굉장히 좋아해요. 활동할 때는 식이요법 조절을 하느라 단 걸 많이 못 먹는데 한남동에 위치한 ‘커피츄’에서 바로 만든 따끈한 츄러스를 보니 정신 못 차리고 많이 먹게 됐어요. 그래도 맛있는 걸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리지: 전주에서 가장 유명한 ‘전주 비빔밥’이에요. 확실히 전주에서 먹으니 정말 맛있던데요? 산뜻한 나물들과 고기, 달걀이 이루는 환상적인 조화! 정말 맛있었어요. 지금도 맛이 생각나요. 또 먹고 싶네요(웃음).

나나: 북촌에서 한옥체험을 했는데, 그 때 온돌방에서 먹은 밥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한옥 체험을 할 기회도 흔치 않은데 그 안에서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을 먹으니 몸의 독소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제대로 된 힐링이었죠.

『오렌지 캬라멜의 청춘 여행』을 보니 서울도서관, 헌책방도 다녀왔던데요. 평소 독서를 즐기는 편인가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추천해준다면 무엇인가요?

나나: 스케줄이 바빠서 책을 볼 시간이 많진 않아요. 그래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잡지를 주로 봐요. 패션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공부도 할 겸 다양한 잡지를 읽는 편이에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 인상 깊었어요. 삶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유익한 책이라서 꼭 추천하고 싶어요.

레이나: 요즘은 책을 잘 읽지 못하는 편인데 시간이 나면 틈틈이 보려고 해요. 소개하고 싶은 책은 다카하시 아유무의 『LOVE & FREE』에요. 저자가 남극에서부터 북극까지 2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을 엮은 책인데 책을 보며 저도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 책으로 인해서 여행 에세이를 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리지: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읽었는데 정말 인상 깊었어요. 살면서 힘들고 지칠 때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구절마다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게 만들고, 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는 좋은 책이어서 추천하고 싶어요.




‘청춘 여행’이 제목인데, 오렌지 캬라멜의 ‘청춘’은 어떤 단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리지: ‘봄 내음’이라고 생각해요. 푸릇푸릇한 새싹과 노란 꽃들이 풍기는 향기처럼 산뜻하고 풋풋한 그런 향이요.

레이나: ‘음악’이요. 오직 음악을 하기 위해서 어렸을 적부터 노력해왔고, 지금 제 ‘청춘’에 그 꿈을 이루어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의 청춘은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나나: ‘첫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청춘은 지나가면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잖아요. 첫사랑도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경험할 수 없으니까 둘이 묘하게 닮은 것 같아요(웃음).

현재 애프터스쿨 활동 중인데, 노래 ‘첫사랑’이 인기가 많아서 기분이 좋겠어요.

레이나: 사실 리지와 제가 연습 도중 부상을 입었고, 나나도 방송 활동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부상을 당해 굉장히 속상했어요. 정말 열심히 컴백만을 위해서 준비했는데 제대로 다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래서 힘든 걸 느낄 새 없이 더 연습에 몰두했어요. 그래도 팬 분들이 저희가 한 노력을 많이 알아주고 저희에게 과분한 사랑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늘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죠.

올 여름 휴가는 갈 수 있나요? 10일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어디를 여행하고 싶나요?

리지: ‘첫사랑’ 활동이 끝나면 바로 일본 활동 계획이 잡혀있어서 휴가는 가지 못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만약 열흘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족들과 집에서 시원한 수박 먹으며 뒹굴 거리고 싶어요.

나나: 가족들과 조용한 곳으로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맛있는 것도 먹고 시원한 바람도 쐬고. 한적한 바닷가면 좋을 것 같아요.

레이나: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떠나고 싶어요. 너무 많긴 하지만, 일단 저도 바다를 보고 싶어요. 푸른 빛깔의 파도를 보면서 시원하게 발 담그고 놀고 싶어요.

다음 여행지는 누구와 함께 떠나고 싶나요?

리지: 애프터스쿨 멤버들과 함께 떠나고 싶어요. 다 같이 여행을 가본적이 없거든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레이나: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가수 준비하면서 친구들을 많이 못 만나 속상했는데 기회가 된다면 친구들과 꼭 떠나고 싶어요.

나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요. 오붓하게 가족끼리 이야기도 많이 하고 좋은 곳에서 경치도 구경하고. 그런 여행 가보고 싶어요.

여행할 때 들으면 좋을 오렌지 카라멜의 노래를 한 곡 추천해준다면요?

‘상하이 로맨스’를 추천하고 싶어요! 여행을 떠날 때 설렘과 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렘이 비슷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상하이 로맨스’가 그 심장 콩닥콩닥한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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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캬라멜의 청춘여행리지,나나,레이나 공저 | 낭만북스
이십대의 어느 날, 갑자기 떠난 일탈같은 여행. 지나치기만 한 서울의 뒷골목과 전주의 한옥마을. 걷다가, 구경하다, 차 마시다, 맛있는 것도 먹고… 한류 아이돌이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소소한 여행거리를 책으로 옮겼다. 리지, 나나, 레이나. 그들의 나이는 모두 이십대로 어릴 적부터 시작한 이른 연예인 생활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들에게 딱 이틀만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디를 다녀올까? 그들은 반나절의 서울과 1박2일의 전주를 선택하였고 그 안에서 지금 남기고 싶은 촉촉한 감성으로 예쁜 휴식과 추억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얀, 아직도 섹스가 거창한 것이라 말하는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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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김얀 작가는 행복하지 않아서, 여기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떠났다. 태국과 일본으로, 프랑스와 독일로, 크고 작은 도시로의 길고 짧은 여행들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 끝에서 서른을 맞은 그녀는 생각했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가볍고 작은 것들을 덜어내고 나니 여행과 책, 섹스가 남았다. 그 세 가지를 한 데 엮어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안에 지난 10년간의 여행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는 서른의 문턱 앞에서 한 여성이 겪은 성장통에 대한 기록이자, 그녀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소설과 닮은 글이다. 동시에 우리가 여행에 대해 꿈꾸는 모든 것이다.

13개국의 낯선 도시와 13명의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
그 중에는 정말 사랑했던 남자가 있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상상 속의 남자도 있습니다.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가 있고,
꿈에서조차 가본 적 없는 도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방황하던 이십대 때의 내가
만나고, 듣고, 상상했던 나의 이야기입니다. (에필로그 중)
낯선 공기 속에서 전혀 다른 풍경과 일상을 바라보고 그들과 교차되는 순간을 자신의 시간 속에 새기는 것, 어쩌면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짧은 순간 강렬하게 다가오는 사랑에도 그곳에서라면 눈 질끈 감고 뛰어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 까지도 여행일지 모른다. 김얀 작가의 여행에세이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녀의 몸을 감쌌던 생소한 대기와 냄새와 그것을 품었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하다 떠난 낯선 남자들에 대한 기억. 작가는 그 이야기들을 너무도 담담하게, 조곤조곤 들려준다. 여행과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것들만큼이나 섹스를 좋아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여성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같은 이유로 여행지의 낯선 음식과 사람들에 대해 적고 있는 책들은 많지만,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에 대해 적은 책은 드물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은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다. 그런데 과연 이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책을 읽은 사람들이 다들 궁금해 하시는데 모두 다 사실은 아니에요. 물론 어떤 파트는 온전히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전적인 부분이 많고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또 픽션적인 부분도 많고...... 허구를 배제하고 온전한 본인의 이야기로만 글을 쓴다는 프랑스 여류작가 아니 에르노도 소설가라고 불리고, 김중혁 작가가 어느 팟캐스트에서 좋은 에세이는 본인과 허구 속에 사람이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해보자면 정말 제 글을 어디로 분류해야할 지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에필로그에서 밝혔지만, 13개 나라 중 어느 한 도시는 제가 사진으로만 보고 상상해서 쓴 글도 있어요. 대신 저와 연애했던 사람을 그 상상 속의 나라에 넣어두고 글을 썼죠. 반대로 어떤 나라에선 아무도 만나지 않았지만, 혼자 게스트하우스에 누워 상상 속으로 만들어냈던 인물을 그 장소와 섞기도 했고요. 그런데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제가 여행지에서 만나고, 여행지를 떠돌며 상상했던 이야기라 그냥 말 그대로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라고 부르는 게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어쨌든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는 제목처럼 야한 글이다. 섹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것을 점잖지 못하다거나 불경스럽다고까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그 이야기를 글로 적는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우습지만 그것은 용기까지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글로 적어도 괜찮을까, 괜스레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김얀 작가 역시 처음 블로그에 섹스 칼럼을 연재할 때는 ‘사람들이 욕하지는 않을까, 혹시 잡혀가는 건 아닐까’ 걱정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라카미 류의 작품과 만나면서, 우리가 흔히 불온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 역시 책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찾다가 그 옆에 있던 무라카미 류의 책을 집어 들었어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죠. 그 책을 보고 진짜 문화적인 충격을 느꼈어요. 마약에 찌든 청춘에, 집단 섹스. 엉망진창이더라고요. 그때까지 저는 책이란 게 교훈을 주거나 감동을 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이야기도 책이 될 수 있구나’ 싶었던 거죠. 그러니까 책이 더 좋아졌어요. 책 속에선 누구도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구나.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이구나. 그러고 보면 섹스라는 것도 다들 내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항상 접하고 사는 삶의 일부분이잖아요. 얼마 전에 쇼펜 하우어의 에세이 『사랑은 없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사랑의 근원은 사실 에로스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족 번식의 본능을 좋게 포장한 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요. 어쨌든 사랑과 섹스는 좋은 건데 다들 섹스는 쉬쉬하다보니 더욱 음지로 숨게 되고 사실 그게 더 위험한 거라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인 생각도 에로틱과 로맨틱도 사실 한 뿌리라고 생각해요. 둘 다 상상력이 중요하고, 남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을 생각해 낼 때 더욱 깊어지거든요. 그러고 보면 저는 항상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를 해오면서 자랐고, 그래서 그것이 나쁘고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생명력을 포함한 건강함이라고 생각해요.”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섹스를 하지는 않잖아요?

그녀가 옳다. 섹스는 사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껴입는 것처럼, 섹스가 하고 싶을 때 합의된 누군가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에 따르는 것뿐이다. 이 책에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라는 부제를 붙여야만 하는 우리의 시각이 야하고 이상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김얀 작가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섹스가 대단히 거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섹스가 아무런 의미 없는 ‘행위’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섹스란 단순한 행위, 그 이상이다. 사랑과 연애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을 앞에 두고 섹스를 맨 마지막에 두는 것 같아요. 사랑해야 연애하고, 연애한 다음에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 섹스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섹스가 엄청 큰 거라고 거창하게 생각하는데, 사실 사랑이라는 마음이 제일 큰 거죠. 그래서 사랑이 모든 것의 맨 끝에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섹스도 절대 가벼운 것은 아니죠. 우리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행위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섹스를 할 때 매번 새 생명을 탄생시키려고 하지는 않거든요, 그렇죠?(웃음) 그래서 연애랑 섹스는 사랑보다는 훨씬 앞에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섹스는 사랑으로 가는 길의 하나의 정거장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곧 섹스다? 이것도 아니란 말이죠. 사랑이야말로 이 모든 걸 포함하고 있는 거창한 것이니까요.”

‘이 사랑에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섹스를 할 수 없다’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사랑 없는 섹스는 안 돼’라는 선언을 함으로써 정숙함을 인정받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 말은 사랑의 결실이 곧 섹스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섹스로 귀결되는 사랑만이 로맨틱하고 고결하다는 거짓된 환상 속에서 살아왔던 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섹스는 사랑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없다. 사랑에는 분명 섹스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니 작가의 말처럼 섹스는 사랑의 마지막이 아닌 앞에 놔두어야 하는, 결말이 아닌 과정이다.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을 통해 보여지는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를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도, 비난할 이유도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저 역시 호기심에서 섹스를 선택한 적은 있지만, 그건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었어요. 꼭 사귄 다음에 두 달 뒤에는 키스하고 다시 두 달 뒤에는 잠을 자야 된다, 이렇게 선을 긋는 것도 웃긴 것 같아요. 그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단순히 욕구와 욕망만을 위해서 섹스를 선택한 적은 없어요. 섹스를 하고 나면 더 친밀해지니까, 그 사람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어서 섹스를 선택했던 거예요. 그런데 상대는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못해서 사랑까지 이어지지 못한 경우도 많았죠. 사실 가장 대담하게 사색하는 사람일수록 사회적인 규칙엔 가장 잘 복종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저는 제 나름의 선은 있어요. 항상 그 선은 지키려고 하죠.”


이병률 시인, 김얀 작가는 성애 묘사에 있어 천재적이다

그녀가 쾌락을 위해서, 혹은 그 순간에 대한 환상을 채우기 위해 섹스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에 묘사된 섹스 순간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활자로 남은 그 순간들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서로의 어깨와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그 순간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낮의 섹스는 처음이었다. 빛은 모든 걸 숨김없이 내보였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너. 목 아래로 작은 점 두 개가 보였다. 그 아래론 탄탄한 가슴근육과 옅은 커피색 유두. 그리고 조용히 숨어 있던 배꼽과 그 옆에 난 작은 상처도 보였다. 거친 숨소리와 신음과 떨림이 엉킨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누웠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너를 봤다. 한 낮의 해가 비추는 너의 적나라한 몸과 얼굴을. 너 역시 내 모든 걸 보았을까? 뭉클하게 네 손에 잡혀 있던 가슴, 너는 그 안에 있던 내 마음까지도 볼 수 있었을까? (p.90)
작가는 마치 제3자의 눈으로 목격한 순간인 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안의 자신을 묘사한다. 그 온도는 미적지근하고 공기는 바스락 소리가 들릴 만큼 건조하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독자의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객관적이다. 가장 주관적인 순간을 이렇듯 무심하게 그려내는 그녀만의 방식이 놀랍다.

“배우려고 배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면서 자란 것 같아요. 여행을 다녀오거나 섹스를 할 때 ‘이 분위기를 써야지, 기억해야지’하고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그 때와 비슷한 상황이나 공기를 느끼면 그 순간이 생각나요. 그래서 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3인칭적인 시점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쓰게 됐고, 조금 더 객관적이면서도 묘사가 강하게 쓰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그러면서 낯선 공간에 가서 관찰하는 듯이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었나 봐요.”

김얀 작가에게 ‘성애 묘사에 있어서는 과연 천재적이다’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이병률 시인은 작가의 감성 위로 자신의 감성을 덧대었다. 김얀 작가의 여정을 따라 직접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을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에 함께 실은 것이다. 이름 모를 연인이 함께 머물렀음직한 공간의 손 때 묻은 문고리와 소파와 욕조, 그리고 그들이 바라봤을 창밖의 풍경 등이 이병률 시인 특유의 시선으로 되살아났다. 덕분에 독자들은 두 작가의 감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김얀 작가의 글 속에 잠자고 있던 순간들이 시각적으로 깨어나 더욱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책 읽기와 연애

여행과 책과 섹스. 작가가 사랑하는 세 가지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떠나 발 디딘 낯선 곳에서 비로소 그녀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여행을 좋아했던 이유는, 낯선 나라에 가면 진짜 내가 원하는 나로 지낼 수 있기 때문이죠. 한국에서 사는 서른두 살의 여자가 해야 될 역할들이 있잖아요. 부모님의 착한 딸로, 직장을 다니는 사회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요. 그런데 낯선 나라에 가면 나는 그냥 나인 거예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더라도 아무도 날 간섭할 수 없죠. 그래서 여행을 좋아했나 봐요.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적지 않은 월급 받으면서 잘 지냈지만, 한 번도 진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여행밖에 답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현실 도피하듯이 여행을 했던 것 같아요.”

김얀에게 섹스는 연애의 동의어다. 그녀는 연애를 통해 상대가 아닌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저는 대학 다닐 때도 책 읽는 거랑 연애는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 두 가지를 열심히 했다는 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 같고요. 연애는 두 사람이 하는 건데, 결국 연애를 하면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나한테 이런 찌질한 부분이 있었구나, 이렇게 이기적인 부분도 있었구나,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거죠. 빅토르 위고가 이야기했던가요? 사랑에 빠지면 온 우주가 그 사람을 향해 모이게 되는 거라고요. 그런 경험도 해보게 되고, 연애는 진짜 색다른 경험인 것 같아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떠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연애를 시작했던 작가가 자신을 찾아 떠돌았던 지난 10년간의 기록,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 그녀는 책 속에서 20대 시절의 지난 시간들을 본 후 “상처투성이로 웅크린 내가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며 그녀는 읊조렸다. 이제 자신을 안아주러 가려 한다고. 행복을 찾지 못해 생겨난 상처는 이제 아물었을까. 그녀는 『낯선 침대 위의 바람』을 쓰면서 치유를 경험했다고 했다. 이번에는 여행도 섹스도 아닌, 그녀가 사랑했던 책이 자신을 찾도록 도와준 셈이었다.

“다 쓰고 나니까 20대 때 방황했던 내 스스로가 조금 가여워 보였어요. 그때는 내 스스로가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마음대로 연애도 하고, 자기 주도적이고,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늘 사랑을 꿈꾸고 찾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책을 보니까 너무 서툰 모습들이 보이면서 가엽기도 해요. 항상 사랑을 쫓으면서 낭만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꼭 사랑을 피해서만 가게끔 가볍게 행동했더라고요. 여행을 가더라도 늘 그곳에서 겉돌고요. 나를 위한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지만 결국에는 굉장히 겉돌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20대 때 나는 이렇게 아프고 상처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방황하면서 지냈었구나’ 라는 걸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어요. 글쓰기를 통해서 치유는 확실히 했어요. 심리학이나 정신학에서도 일기나 글을 쓰는 행위가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엄청 도움이 되는 행위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진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성숙해졌다는 생각도 들어요.”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여자 주인공은 말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요? 저 여자랑 똑같아요.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웃고 인생을 즐기고 싶은 그런 평범한 사람.” 작가 김얀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그 자체로 사랑해주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믿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생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그녀는 지금 열애를 꿈꾸고 있었다. 거침없이 섹스를 말하고,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섹스 칼럼니스트라고해서 조금도 다를 것은 없었다. 섹스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덧없는 시도를 계속하는 이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머리와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언제나 솔직하게 반응해 왔다는 사실 뿐이다. ‘나를 알아가는 데만 시간을 쏟아도 인생이 짧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원하는 것을 결코 과장하는 법이 없다. 자신이 선택한 섹스에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스스로까지 속이는 거창한 변명 따윈 둘러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이 품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한없이 담백하다. 멋스러운 젊음의 방황기를 쓰겠다는 욕심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솔직한 매력에 빠져든 독자들이라면 김얀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섹스 칼럼을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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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김얀 저/이병률 사진 | 달
서른번째 여름, 그녀는 여행을 떠났다. ‘나의 문제’는 뭘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글을 썼다. 자신이 떠난 13개국의 여행지과 13명의 남자들의 이야기를. 책에는 작가 김얀이 여행지에서 만난 도시와 남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방콕에서 온몸에 문신을 그린 남자를 만난 일,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서울까지 이어졌던 인연,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알 수 없었던 의문의 남자 그리고 지금 사랑하고 있는 ‘너’까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승철 “지금 세대에 어필하려면 예전 이름을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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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 < My Love >는 여러모로 이승철답지 않다. 곡부터 실험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거친 목소리가 흘러 나왔던 몇몇 곡에서도 그런 느낌을 준다. ‘마치 예전의 이승철이었다면 이런 노래는 안 부르지 않았을까’, ‘예전의 이승철이었다면 이렇게는 안 부르지 않았을까’ 같은… 약 2주 전, 이번 앨범에 이즘이 내린 키워드는 ‘변화’였다. 이승철 역시 “지금은 이승철이 아닌 모습으로 가는 것보다 이승철인 모습으로 가는 게 더 위험하다”고 했다.

인터뷰 날은 비가 한창 내리던 지난 7월 12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철 서울콘서트 당일이었다. 현장에는 앨범의 대다수 곡을 쓰고 편곡하고 프로듀싱까지 한 전해성도 있었다. 주인공을 만나기 전에 그의 새 이야기를 함께 써낸 작곡가에게 제작 일화를 먼저 들었다.




처음에는 캐나다 작곡가가 참여했다. 어떻게 만났나?

전해성(이하 전) : 하와이를 갔다가 우연히 식당에서 캐나다 사람을 만났어요. 형수님이랑 그 사람 여자친구랑 그 자리에서 대화하다가 서로 직업을 물어봤는데, 이쪽은 가수였던 거고 저쪽은 작곡가였던 거죠. 헤어지고 나서 나중에 작곡가가 승철이 형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보니까 이름이 쫙 뜨더래요. 유명한 가수란 걸 안 거죠. 그러면서 곡주고 싶다고, 10곡 정도를 보내왔죠.

결과적으로는 캐나다 작곡가가 빠진 게 되었다.

: 승철이 형이 녹음해보러 캐나다로 넘어갔죠. 그런데 캐나다 사람이 만든 곡이다 보니 가사가 다 영어잖아요. 이걸 우리말로 바꿔보니까 영어로 불렀을 때의 그 맛이 안 살더라고요. 한마디로 번안가요 같은 거예요. 작사 잘하는 후배들에게 맡겨놔도 답이 안 나오고. 결국엔 “야. 이거 엎자”가 됐죠.

곡을 엎고 이승철 씨와 재정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는 무엇이었나?

: 트렌드를 가지면서도 대중을 따라가진 말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걸 만들어보자는 것이 승철이 형 의견이었고. 제 입장에서는 지금 승철이 형한테는 지위나 포지션 같은 게 있으니 어떻게 하면 한 발 앞설 수 있는지, 동시에 어떻게 하면 대중성을 보이게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어요.

이번 기간에 쓴 곡이 총 몇 곡인가?

: 네다섯 곡 정도를 새로 썼어요. 「My Love」도 그렇고 「Run way」도 그렇고. 「Run way」 같은 경우는 작업 후반부에 쓴 거예요. 앨범을 다 만들고 보니 액티브한 면이 떨어져서 그 부분을 채우려고 만든 노래였죠. 마지막에 쓴 곡은 「Beach voice」인데 이건 승철이 형 여름 콘서트 기획에 맞춰 썼고요. (용산 전쟁기념관 공연 타이틀이었다) 예전에 쓴 곡은 「사랑하고 싶은 날.」 일 년 전 쯤 만든 곡이에요.

이승철의 강점을 꼽는다면.

: 곡 소화력과 곡 연출력. 작업을 시작했을 때 전 처음에는 별말 안 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봐요. 그럴 때 대개의 가수들은 제 말이 필요하거든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가이드가. 그런데 승철이 형은 그게 필요하지 않아요. 대중적인 감도 굉장히 좋아서 곡을 골라내는 선구안도 상당하죠.

작곡가의 입장에서 신경 써서 들어주었으면 하는 곡은?

: 「My Love」에요. (편곡이 팝적이고 세련됐다고 하자) 그렇죠. (웃음) 작업 막바지에 문득 타이틀로 할 만한 곡이 없는 거예요. 다른 작곡가한테 노래를 받아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오늘은 안 풀리는 것 같다, 접자하는 마음으로 새벽 4시에 문을 닫는데 갑자기 후렴구 ‘사랑해~’ 부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예요. 자리로 다시 돌아가 부랴부랴 만들었죠. 또 중간을 만들어 놓으니 앞뒤는 쉽게 붙더라고요. 완성해놓고 보니까 아침 7시인가 8시였어요. 승철이 형한테 바로 전화해서 들려주니까 괜찮다고 바로 녹음 시작하자고 했죠.




이승철 인터뷰

< Mutopia >이후 4년 만이다. 신보에서 중요시한 것은?

리듬. 저는 리듬이었어요. 확 잡을 수 있는 리듬이 필요해요 요즘엔. 우리 큰 애한테서 느꼈어요. 피아노만 초반에 두세 마디 나오면 바로 돌려요. 인트로에서 못 잡으면 끝이에요. 마룬파이브 「Sad」처럼 피아노 발라드 하나에도 리듬이 있어야 해요. 「사랑하고 싶은 날」도 그래서 그렇게 편곡한 거예요. 리듬감 있는 피아노 연주로. 예전과는 다르죠.

전해성 씨도 언급했지만 캐나다 작곡가의 곡들을 다 엎었다고 했다.

가요로 변환하니까 너무 지루했어요. 파트 2 앨범이 나오면 그 곡들을 쓸까하는데 쓸지도 고민 중이에요. 입에 붙지도 않고 번안가요 같기도 하고. 사실 캐나다 작곡가가 보내준 대여섯 곡이 정말 좋았어요. 죽이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가사를 우리말로 해보니 이렇게, 너무 아니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외국 곡 잘못 받으면 번안가요 되는구나, 외국 곡 함부로 받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죠. 아내도 듣고 “아닌데”라고 했죠.

전해성을 택한 이유는?

작곡가 친구들을 많이 알죠. 같이 작업했던 사람도 있고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는데 해성이 실력이 탁월해요. 음악 막 시작했을 때부터 (김)수철이 형이랑 워낙 오래했잖아요. 기초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영화음악도 했었고 올림픽 같은 굵직한 무대에서도 음악 했었어요. 감각도 좋고 듣는 귀도 좋아요.

가수와 작곡가가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컨디션도 좋았을테고.

주문제작 형 작곡가였어요. 달라는 대로 팍팍. (웃음) 만나보니까 일 하나도 안 하고 애기랑 놀고 있었어요. 완전 푹 쉬었죠. 그렇게 휴식기를 가지니까 좋은 곡들이 나온 것 같아요. 아이돌 몇 곡 히트 친 것은 있어도 대박은 없었잖아요. 해성이랑 작업한 게 여러모로 라이트하고 깨끗했어요. 깔끔하고. 둘이 잘 맞았죠. (이 대목에서 전해성은 “1년 반 정도를 쉬었어요. 결혼하고 11년 만에 딸이 생겨 아이랑 놀았죠. 전에는 쉰다 하면 불안해했는데 이번엔 길게 쉬면서도 불안을 못 느꼈어요. 쉬는 게 컨디션에 결정적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앨범에서는 ‘이승철적’인 느낌이 많이 빠지지 않았나?

사실 그러려고 만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위험한 일이죠. 이승철적이라는 것을 빼는 일이. 제 음악들을 구분해보면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에서 한 번 나뉘고 그 이후에는 「아마추어」에서 한 번 더 작게 나뉘어요. 세대 이야기를 해보면, 저희 때는 6년에서 8년을 한 세대로 잡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한 세대가 2,3년 만에 끝나요. 텀(term)이 바로바로 바뀌죠. 그래서 요즘 세대로 오면 ‘무슨 이유로 쟤가 <슈퍼스타 K> 심사를 하나’하는 생각까지 해요. 그냥 옛날 사람으로 바라보죠. 예전 세대에 어필했던 것처럼 지금 세대에 어필하려면 예전의 이름을 버려야 해요. 지금은 이승철이 아닌 모습으로 가는 것보다 이승철인 모습으로 가는 게 더 위험하죠.

평소의 이승철과는 어떻게 달랐나?

(전해성은 “굉장히 열심히 하셨어요. 전에는 한번으로 끝냈는데 이번엔 열 테이크, 스무 테이크 씩 녹음해서 잘 나온 걸 뽑았다”고 말했다) 사실 전 한방주의예요. 노래도 한방에 가는 게 많았고요. 손 자주 가는 게 싫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방식을 살짝 바꿔봤어요. 데모를 여러 개 만들어 본 것도 처음이에요. 그대로 불러보고 서너 테이크 만들어서 잘 된 부분 뽑아다가 한 테이크 만든 다음에 그 모양대로 다시 불러보고. 그렇게 해서 2,30번 부른 곡도 있어요.

「그런 말 말아요」는 보컬이 조금 거칠게 들린다. 이승철이라면 그냥 안 넘겼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잘하지 않았어요? (웃음) 예. 러프하죠. 목소리 안 좋은 날을 골라서 녹음했어요. 사실 그런 걸 추구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죠. 워낙 미성이라 가끔은 깔끔하고 쫀득하게 붙는 느낌이 맘에 안 들 때가 있거든요. 술 먹은 다음 날에 데모 녹음하듯 불렀어요. 작업 시작한다 하면 2,3주 전부터 술 안마시고 관리하는데 그날은 그냥 그렇게 가고 싶었어요. 필 오는 대로 느낌 가는 대로 그렇게 간 거죠.




이번 열 곡 중에서 한 곡을 꼽는다면?

「사랑하고 싶은 날」이요. 그 곡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는 것 같아요. 흔치 않게 그런 노래들이 있어요. 정말 잘 나와서 두 번은 못 부를 것 같은 노래들이요. 평생에 딱 두 번 경험했었는데 한 번이 「마지막 콘서트」였고 이번 앨범 「사랑하고 싶은 날」인 것 같아요. 필 오는 대로 한 번에 불렀는데 부르는 사람이랑 듣는 사람이랑 동시에 전율이 왔어요. 편곡 상으로는 피아노 하나 밖에 안 들어가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는 느낌이에요. 이 노래를 1번으로 넣을 수밖에 없었죠.

새 앨범을 왜 4년 만에 낸 건가?

보통은 2,3년에 한 번씩 나왔죠. 그런데 그렇게 내기에는 중간에 히트곡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OST들이 터져서 앨범으로 또 하기에는 그런 감이 있었죠.

옛날 같으면 드라마 OST를 안 했을 텐데….

싱글의 시대가 왔잖아요. 방송 프로그램에 삽입되긴 했지만 사실 그 곡들도 싱글의 개념으로 봐야 해요. 잠깐 하고 싶은 말은 앨범을 내는 입장에서 앨범을 낸 가수와 싱글을 낸 가수가 같은 차트에서 비교된다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웃기죠. 앨범은 앨범 차트로 따로 가고 싱글은 싱글 차트로 따로 가야하는데 말이죠. 싱글은 팬덤으로 오래 버티고 10트랙짜리 음반을 낸 사람들은 자연스레 맥이 빠지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버티기 힘들어요.

앨범 반응은 상당하다.

폭발적이죠. 전에도 이런 적이 없었어요. 지금 「My Love」랑 「사랑하고 싶은 날」이 1,2위로 붙어있어요. 들리는 말로는 스트리밍과 벨소리 차트에서도 1위래요.

<슈퍼스타K>의 영향도 있지 않나?

그렇죠. 목욕탕 가면 초등학생 애들도 절 알아볼 수 있도록 유명하게 만들어주었죠. 그러면서도 매번 할 때마다 초심을 느끼게 해주고요.

앨범에 담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면?

요즘 세대에는 이승철이라는 이름이 잘 안 먹히잖아요.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어딜 봐서 보컬의 신이라는 거냐?’. 그 답변을 해주고 싶었던 부분도 있어요 사실. 또 저는 대중가수면서 선배가수잖아요. 영화배우가 흥행으로 말하듯이 가수는 판매량으로 말해야 해요. 그런데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가수들이 의외로 히트곡이 적어요. 모순이라면 모순인데, 이걸 깨보고 싶었어요.

조용필 선풍이 터진지 얼마 안 되어 앨범을 냈다. 위험한 것 아니었나?

그래요? 오히려 그게 더 좋게 작용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앨범 차트 상위권에 올라있는 건 용필이 형의 영향, 덕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뚜렷하게 히트가수가 없는 무주공산에 길을 딱 깔아놨잖아요. 전 그 뒤에 딱 붙어서 가는 거죠. (웃음) 아니 저도 그렇고 누구도 절 용필이 형 라이벌이라고 안 봐요. 후계자고 후배잖아요.

파트 2 앨범은 나오는 건가?

맞아요. 아까도 말했듯이 캐나다 작곡가 곡들을 쓸까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말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여러모로 계획을 잡고 있어요. 일단 나온 콘셉트는 디스토션 세게 넣고 거기에 일렉트로니카 곡도 넣어보고. 다프트 펑크처럼 해보려고요. 술 마시다 나온 얘기긴 하지만 진지하게 구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음악 인생에 전기(轉機)를 만든 곡을 꼽는다면.

「희야」랑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Never ending story」 그리고 「My Love」. 앨범은 <색깔 속의 비밀>이죠. 그런 접근은 앞으로도 계속하려고 해요.

인터뷰 : 임진모 이수호 윤은지 홍혁의
정리 : 이수호
사진 : 엄광용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코치D 남세희 “간헐적 단식? 칼로리 총량 줄여주는 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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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을 전공했지만 강의실보다는 체육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코치D. 『다이어트 진화론』의 저자 남세희는 체대생들이 듣는 강의를 청강하고, 본과 강의실보다는 체력단련실에 출석 도장을 찍는 특이한 학생이었다. 운동, 건강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지인들의 다이어트 식습관, 운동을 조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다이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 사촌동생이 다이어트에 번번히 실패하는 것을 목격한 후, 그는 다이어트에 관한 정보들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라 올바른 지식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원칙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는 것. 또 진정한 의미의 다이어트는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아우르는 총체적 변화가 수반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이어트 진화론』집필을 결심했다.




다이어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보고 분노했다

트위터에서는 본명을 밝히지 않고 ‘코치D’로 불리고 있다. 다이어트를 코치해준다는 의미인데, 전공은 문화인류학을 공부했고 이번에 펴낸 『다이어트 진화론』은 실용서이자 인문서다. 코치D의 정체는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코치D는 급조된 캐릭터다. 평소에 취미인 운동을 위해서 식이조절이나 영양섭취에 남들보다 조금 더 신경 쓰는 정도였다. 가끔씩 공부한 내용으로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주변 지인들에게 조언을 하는 정도고, 트위터도 단순한 친교의 도구였다. 그러다 갑작스런 계기가 찾아왔다. 트위터 상에는 봇(BOT)이라는 이름으로 정보성 트윗을 송출하는 계정들이 있는데, 개중엔 다이어트나 피트니스를 주제로 삼는 봇들도 여럿 있다. 그 중 하나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너무나 황당했다. 식사 중에 물을 마시면 인슐린 분비가 늘어나 살이 찌니까 다이어트 중에는 물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건 뭐라고 반박할 내용조차 없는 그냥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슐린이라는 그럴듯한 용어 하나만 넣었을 뿐이지, 기전에 대한 설명도 없고 검증된 바도 없는 망상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이런 게 정보라며 떠돌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믿는 눈치였다. 처음엔 허탈했고 그 다음엔 분노가 솟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계정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거다. 자칭 트레이너를 표방하던 봇은 피트니스 월간지 하나를 그대로 베껴서 올리고 있었다. 광고주와 사주의 이해관계 때문에 간접광고나 다름없는 기사들 가운데 옥석 구분도 못하면서, 자기가 ‘전문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묘한 자부심까지 내비치더라.

거짓 정보를 올리는 트위터리안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나.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문제 계정들의 운영자들과 온라인 상에서 설전을 벌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나오더라. 차라리 네가 해보지 그러냐? 그래? 그럼 내가 한다. 그래서 거의 우발적으로 ‘코치D’로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참 멋없는 시작이었다.

직접 만나보니 트위터 프로필 사진의 느낌과 사뭇 다르다. 차갑고 딱딱할 것 같은 이미지를 예상했는데 실물은 훨씬 부드럽다. 

코치D는 일종의 페르조나(Persona)다. 모티프는 애니메이션 건버스터의 등장인물 ‘오오타 코치’인데 프로필 사진부터 일종의 패러디 내지는 오마쥬로 볼 수 있다. 오오타 코치는 작중에서 주인공이 소속된 사관학교의 훈련 교관인데 초반엔 굉장히 차가운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 주인공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미래와 성장을 걱정하는 따뜻한 스승이다. 딱딱하고 직설적인 트윗은 이런 ‘오오타 코치’의 성격을 반영한 거다. 그리고 사실 직설화법을 구사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엔 트위터라는 매체의 특성 탓이 크다. 140자라는 제한된 분량 때문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달하려면 뼈만 남겨야 한다. 그래서 불친절하다, 퉁명스럽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분들도 계신데 전적으로 오해다. 매수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단행본을 읽어보시면 트윗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라는 걸 알 거다.

『다이어트 진화론』는 어떻게 쓰게 된 건가? 기존 다이어트 서적과는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

시중의 다이어트 서적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무작정 독자를 의지박약이나 게으른 뚱보로 매도하는 ‘자기 계발서’류. 아무리 노력해도 더 열심히 하라는 메아리만 돌아온다. 둘째, 과학적 원리나 객관적 증거는 덮어 두고 일단 믿고 따를 것을 주장하는 ‘전도서’류. 이들은 특히 잘못된 정보에 바탕을 둔 경우가 많아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셋째가 타당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지만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선 무관심한 ‘실용서적’류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역시 불합격이다. 다이어트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총체적 변화다. 이를 설명하려면 지금까지 존재한적 없고 이들 세 부류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이어트 진화론』를 쓰게 됐다.

책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이 ‘기존에 갖고 있었던 다이어트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고 한다. 저자가 직접 소통하고 있는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궁금하다.

‘실용서의 탈을 쓴 인문서’ ‘화보 한 장 없이 활자만 가득한 다이어트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단 독자들의 후한 평가는 정말 고맙다. 뿌듯하면서 쑥스럽기도 하고, 노력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원고를 정말 여러 번 고쳤다. 출판사에 교정쇄를 만든 과정뿐만 아니라 혼자 원고를 기획해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몇 번이나 콘셉트를 통째로 갈아치우고 목차를 수정했는지 모른다. 일단 트위터나 블로그 같은 SNS를 통해 자기만의 DB를 축적한 사람들은 이걸 편집해서 책으로 엮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원고작업을 시작하면서 단순히 온라인 상의 글을 묶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애초에 출간을 결심한 이유 자체가 SNS라는 매체의 한계에 가로막혀 못다한 이야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인데, 트위터나 블로그의 짜깁기가 된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지 않나.




간헐적 단식? 칼로리 제한 뿐!

최근 간헐적 단식이 유행하고 있는데, 저자는 일시적으로 적용하긴 좋은 테크닉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방법은 아니라고 했다.

간헐적 단식을 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다 말랐다. 간헐적 단식을 하는 사람들은 식사 주기를 강조하는데, 16시간에 한 번, 24시간에 한 번이라며 주기를 강조한다. 세 끼의 신화를 깼다며, 마치 이노베이터라고 포장하는데 간헐적 단식의 단지 칼로리 섭취 총량을 줄여주는 일종의 ‘꼼수’다. 총량을 줄이기 위해 횟수를 달리 했을 뿐이다. 성공 사례도 있지만 실패 사례도 많다. 하루에 한끼라는 규칙만 지키면 마음껏 먹을 수 있다니까 이를 그대로 믿고 진짜 폭식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간헐적 단식이 아니라, 간헐적 폭식이 되면서 살이 찐다. 사실 간헐적 단식의 올바른 이름은 칼로리 제한법이고 이는 장수를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사실 노화는 성장의 이면이다. 노화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필연이다. 이 때 일부러 성장을 억제하는 방법이 칼로리 제한, 곧 간헐적 단식이다. 못 먹어서 덜 자란 건데 그걸 회춘이나 노화 방지라면서 추켜세운다. 대단한 발견처럼 자랑하지만 사실 눈가리고 아웅이다. 


책의 핵심이 ‘원시인처럼 운동하라’는 것이다. 구식기인처럼 먹고 움직이고, 유산소 운동보다는 고강도 운동이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살 빼려면 최소 30분 이상 움직여야 한다’ ‘달리기보다 걷기가 살 빼는데 좋다’ ‘기상 직후 공복 상태일 때 유산소의 체지방 분해 효과가 가장 좋다’ 이런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하나같이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이야기다. 유산소 이론에 기반을 둔 운동 지침은 애초에 잘못된 지점에서 출발했다. 인체의 대사 순서에 따르면 탄수화물이 연소된 후 지방이 연소되므로 글리코겐이 모두 소진되는 30분 이상 운동해야 체지방이 분해된다고 말하는데, ‘탄수화물 연소 시간 30분’은 일종의 조삼모사다. 비우는데 30분이 필요한 탄수화물 창고를 바닥내야 몸의 유산소 스위치가 켜진다면, 한 번에 비우든 여러 번에 나눠 비우든 스위치는 똑같이 켜져야 한다. 중간에 별도의 음식물 섭취가 없다면, 10분 운동하고 한 시간 쉬고 다시 10분 움직이고, 두어 시간 다른 볼일을 봐도 누적 시간 30분만 채우면 결과는 같아야 한다. 운동 강도만 받쳐 주면 30분이 아니라 3분만에 체지방 분해는 시작된다. 살을 빼고 싶다면 느슨한 걷기보다 숨 막히는 달리기의 효과가 더 크다. 굳이 공복에 유산소 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

과일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밥보다야 덜하겠지만 일반인들은 과일도 달기 때문에 살이 많이 찐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단 음식은 쉽게 살이 찐다고 알려졌지만 과당 자체는 특별히 혈당을 올리지 않는다. 사실 결정적인 것은 포도당이다. 포도당이 많은 포도, 바나나는 쉽게 살이 찌지만, 과당 함량이 많은 사과, 딸기, 수박은 단 맛이 많아도 생각보다 살은 안 찐다. 과일을 이야기할 때 주로 예를 드는 게, 채식주의자인데 수명을 다하고 땅에 떨어진 낙과한 과일만 먹는 극단적인 과식주의(fruitarianism)도 있다. 무르익어서 떨어진 과일과 견과류, 씨앗 같은 것만 먹는데, 먹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 칼로리를 보상해준다는 차원에서 양을 많이 먹는다. 그런데 열에 아홉은 굉장히 마른 몸매다. 과일은 칼로리가 높고 견과류는 지방도 많은데, 왜 이 사람들은 앙상하게 마를까. 이건 생식과 화식의 차이 때문이다. 대부분 과일이나 견과류는 생식으로 먹는데 소화 흡수가 제대로 이뤄지지가 않는다. 단순히 칼로리가 높다고 무조건 살찌진 않는다. 단순 섭취량보다 소화흡수량이 관건이고 여기에는 식이섬유 함량, 조리 형태, 포만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바나나와 군고구마를 놓고 봤을 때 군고구마가 훨씬 살찌기 쉬운 음식이다. 흰쌀밥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이어터를 위한 단권화 교재가 되길 바란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것도 도움이 됐겠다. 책을 보니 참고로 한 도서 목록이 많더라.

집필을 결심하고 일단 도서관에 가서 실용 및 취미로 분류된 각종 다이어트 서적들을 모조리 훑어봤다. 그러니 일정한 틀이 보였다. 연예인, 모델, 의사, 몸짱, 보디빌더, 칼라화보, 운동법, 체험수기. 그래서 이런 기존의 다이어트 실용서들과 차별을 두기 위해 처음 잡은 콘셉트는 ‘자습서’ 였다. 입시나 수험 준비할 때 다들 ‘단권화 교재’를 만들지 않나. 내심 내 책이 다이어터들을 위한 단권화 교재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트위터를 하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다이어트 정보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목격하게 됐다. 그래서 ‘비평’이라는 형식을 도입해볼까 방향을 잠시 바꾸기도 했다. 마치 영화잡지에서 개봉작 평점 주듯 시중에 유통되는 수많은 다이어트 방식들에 대한 리뷰를 작성해 실제로 평점도 주고, 좋은 건 추천하는. 그래서 중간 콘셉트는 ‘다이어트 오딧세이’ 혹은 ‘세상의 모든 다이어트’에 가까웠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대안 없는 비판은 너무 공허해 보였다. 다이어트를 찾는 사람들은 사실 살을 뺄 수 있다는 희망과 구체적인 해답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제3자의 입장에서 뒷짐지고 평점만 주고서 끝낸다면 허탈한 일이지 않나. 그래서 최종적으로 ‘이보(EVO)다이어트’라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저자 서문을 보면 자습서, 비평, 대안 제시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 모습이 읽혀질 거다.

인류의 진화과정을 살펴보고 찾아낸 것이 ‘이보(EVO)다이어트’인데, 구석기인들이 가장 건강했고 강인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본능과 건강을 찾기 위해서는 구석기 선조들의 식습관과 생활방식을 복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환경은 변했지만 인간의 몸은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이보(EVO)란 진화(Evolution)를 뜻하는 영어 단어의 첫머리를 딴 신조어다. 인류학적 참여관찰, 고고학적 유물발견 결과를 취합해보면, 우리 몸은 약 1만년 전인 후기 구석기로부터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이어트 진화론』에서는 이 때를 기준으로 진화적으로 잘 적응한 먹을 거리와 그렇지 못한 먹을 거리 사이의 차이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흔히 비만이 만연화된 원인을 ‘산업화’ 혹은 ‘문명의 이기’ 탓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농경의 시작에 있다. 인류가 수렵 채집을 포기하고 곡물중심의 식생활을 시작한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 비만과 성인병(대사증후군)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생 인류와 유전형질상 차이가 없는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은 약 20만년 전, 그 조상 격인 ‘원인’들의 출현은 약 400만년 전부터 시작됐다. 거기에 비하면 농경의 시작, 목축의 시작, 설탕의 정제, 합성조미료와 가공식품의 등장은 굉장히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셈이다. 보다 길고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겪은 인체가 이들 새로운 먹을 거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게 이보 다이어트의 진단이다. 앞으로 한 2만년쯤 뒤에는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실컷 먹고도 살 찌지 않는 우리의 후예들이 지구상에 출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비만과 성인병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현대인이 점차 뚱뚱해지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게을러서가 아니다. 전 세계적인 식량생산 구조, 식품회사들의 이윤 추구, 정책 입안자들의 실수가 겹쳐지면서 비만 권하는 사회가 조성됐고, 그 분위기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수렁에 빠져드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한 다이어트 방법은 투표라고 말한다. 농담이 아니다. 생활수준이 높고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한 유럽의 국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비만율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반대로 비만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미국이다. 의료보험, 사회보장제도에 구멍이 뚫려 있고 빈부격차 때문에 늘 소개되는 미국이다. 더불어 브라질과 같이 이제 막 경제개발이 시작된 개도국들의 비만율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 비만은 단순히 ‘풍요의 병’이라고 인식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선 경제적 취약계층일수록 더욱 쉽게 비만에 노출되고 있다. 반대로 유산계급일수록 굉장히 날씬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올바른 건강정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교육수준, 좋은 식자재를 소비할 수 있는 금전, 규칙적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가시간까지, 살을 빼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이 경제적 요인과 맞물려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닌가. 성인 비만뿐 아니라 소아 비만까지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급식비 지원을 받는 결식아동들 사이에서 비만율이 오르는 현상을 들 수 있다. 학교 급식 이외에도 이들에겐 식권 형태의 ‘바우처’가 지급된다. 그런데 경제적 취약계층일수록 맞벌이나 편부모, 조손가정이 많아서 영양이나 식단에 대한 지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때 결정권이 생긴 아동들은 같은 식권으로도 정크푸드나 가공식품을 선택하기 쉬운데 이는 비만으로 이어지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비만인구와 비만이라는 현상 자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게을러서 탐욕스러워서 살 찌는 게 아니다. 시대와 환경이 우리를 살찌기 쉽게 몰아가고 있다. 더 이상 살찌기 쉬운 사회로 전락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정부나 기업을 압박해서 필요한 바를 얻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비만 없는 삶, 다이어트에 혈안이 되지 않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저녁이 있는 삶’이 되야 한다. 적은 노동시간으로도 임금과 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되고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한 복지사회라면 운동과 여가활동을 가지기도 쉽고 각종 정크푸드나 가공식품을 이용 빈도도 줄어들게 된다.


코치D가 말하는 원포인트 다이어트
하얀 가루를 피하라


흰색가루란 소금, 설탕, MSG, 밀가루를 말한다. 밀가루는 이보 다이어트에서 비만의 주범으로 꼽는 ‘녹말’의 일원 가운데 특히 많이 먹게 되는 음식이다. 밀가루에 함유된 식물성 단백질 ‘글루텐’의 특성상 국수, 빵, 과자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변용되는데, 이는 과식을 유발하기 쉽다. 설탕과 소금은 그 맛을 더 자극적으로 변하게 만들어 과식을 돕는다. MSG는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MSG는 미각중추를 둔화시켜 더 많은 설탕이나 소금을 먹게 하는 영향을 미친다. 알게 모르게 암약하는 다이어트의 적이다. 일상에서 의식적으로 하얀가루들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코치D가 권하는 『다이어트 진화론』과 함께 읽으면 좋은 추천도서


불량헬스

최영민 저 | 북돋움라이프

상업주의와 금지약물에 찌든 현대 피트니스 업계는 일종의 거대한 금융사기와 같다. 이들 금융사기단과 이들에게 속아 몸짱과 식스팩만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시원한 돌직구. 현대 피트니스 산업의 상술과 치부를 거침없이 고발한다. 다이어트 진화론에서 운동법으로 제시하는 ‘원시인처럼 움직여라’와 연결해 읽어보면 서로 뜻이 맞는 내용이 많다.





구석기식 처방

보이드 이튼 | 신일(신일북스)

인류 본연의 식성을 찾으려는 이보 다이어트에 많은 영감을 제시해준 책. 제목처럼 구석기 시대 원시인들의 식생활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책이다. 신일북스 자체가 약학전공 대학교재를 전담하는 출판사이며 책 자체가 논문 형식을 띄고 있어 읽는 재미는 떨어지지만 ‘다이어트 진화론’의 뿌리를 엿볼 수 있다. 단 80년대에 처음 쓰인 책이라 마가린을 식물성 지방이라는 이유로 건강식품으로 추천하는 등 현실정과 동떨어진 면도 있으니 다소 비판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운동 미니멀리즘

이기원 저 | 올림

‘도심속의 정글, 빌딩속의 동굴’이라는 독특한 콘셉트의 체육관을 운영중인 저자가 자신의 운동철학과 방식을 소개하는 책이다. 보여주기 위한 몸이 아닌 실제로 달리고 움직일 수 있는 몸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기존의 ‘헬스’에 지쳤던 사람들에겐 청량제와 같은 내용일 것이다.





남자는 힘이다

맛스타드림 저 | 씨네21북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보디빌딩과 육체미 일변도였던 국내 피트니스 산업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새로운-그러나 결코 새롭지 않은 방법을 제시한 맛스타 드림의 칼럼 모음집. 이미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을 것이다. 처음 운동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제 필독서와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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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진화론남세희 저 | 민음인
이 책은 역사 속에서 인간 본성 속에 감춰져 있던 진정한 건강과 아름다움의 해답을 찾아냈다. 뿐만 아니라 칼로리부터 유산소 운동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상식들을 뒤집으며 다이어트의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이보 다이어트(EVO Diet)다. 까다로운 식이 요법이나 화학 약품, 지나친 운동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본성에 가장 가까운, 자연스러운 다이어트 법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고통스러운 다이어트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면, 이 책을 펼쳐라. 이보 다이어트는 분명 당신의 ‘생애 최후의 다이어트’의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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