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하면 인터뷰는 덜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웃음).”<마이 라띠마>개봉을 앞두고 만난 유지태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5일 동안 매일 세 차례씩 인터뷰를 하며 <마이 라띠마>의 홍보에 힘을 쏟고 있는 일상. 비슷한 질문에 매번 답을 하는 일이 지칠 만도 한데, 연신 미소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 라띠마>는 유지태가 대학생 시절부터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꿈꿨던 작품이다. 유지태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고 정식으로 개봉하게 된 것 자체가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다. <마이 라띠마>는 태국 말로 ‘새로운 삶’이라는 뜻인데, 이 영화는 내게도 인생의 꿈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태국 이주민 여성과 암담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남자의 사랑, 그리고 인생을 다룬 <마이 라띠마>는 대한민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주변의 이웃들에게 시선을 주게 하는 작품이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 성장 영화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유지태 감독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소재만 보면 독립영화일 법 하지만<마이 라띠마>는 상업 장편영화. 하지만 마케팅 비용이 보통 상업영화의 30분의 1을 채 넘지 않았다. 유지태가 많은 인터뷰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6월 6일 개봉한 <마이 라띠마>의 목표 관객수는 20만 명. 모두가 행복해지는 숫자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모두’란 영화 제작에 참여한 막내 스태프까지 포함한다. 유지태는 <마이 라띠마>를 연출, 제작하면서 배우, 감독에게 국한된 인센티브제도를 막내 스태프까지 확대했다. 영화를 하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확신을 세워주고 싶었단다. 현장에서도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는 유지태는 “촬영장에서 감독이 화를 내면 배우가 긴장하게 되고 감정이 날라가 버린다. 화를 내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지태는 언제 부아가 치밀까. 그는 “차별 받을 때, 텃세를 부릴 때, 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화가 난다”고 했다. 대한민국 톱 배우가 차별 받는 순간이 과연 있을까. “보이지 않는 차별이 많죠. <마이 라띠마>를 제작하면서도 ‘배우가 만들면 얼마나 만들겠어?’ ‘돈 많은데 우리가 왜 지원을 해줘’라는 말도 들었고, 편견이 많았어요. 투자도 무척 힘들었고요.”유지태는 <마이 라띠마>에서 제작, 각본, 연출을 맡았지만 비용을 일절 받지 않았다. “그럴 만한 작품이었다”는 게 그의 답변이지만, 유지태의 꿈은 ‘누구의 희생 없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는 것’이다. <마이 라띠마>는 과연 유지태에게 어떤 작품이길래 이토록 할 말이 많은 걸까.
내가 왜 영화를 찍어야 할까, 이런 생각 많이 해요
지난 5월 24일에 있었던 <마이 라띠마>언론 시사회. 유지태는 아침 일찍 영화관을 찾아 행사를 준비하며, 배우로서 갖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느꼈다. 그는 ‘감격에 가까운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어떤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에 애착이 없겠냐 마는 <마이 라띠마>는 유지태에게 남다르다. 15년 전, 대학생 시절부터 꿈꿨던 시나리오이자 첫 장편영화 연출작으로 제작기간만 2년이 넘게 걸린 영화다.
“개봉이 된다는 사실이 아직까지도 실감나지 않아요. 무엇보다 많은 관객들과 소통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 <마이 라띠마>가 좋은 사례를 만들어서 저예산 영화가 계속해서 투자 지원을 잘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평소에 ‘내가 왜 영화를 찍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동기 부여가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마이 라띠마>가 초기 시나리오에서 조금 달라졌지만 이주여성에 대한 관심은 예전부터 있었고 성장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영화, 소설, 다큐멘터리, 전문서적도 많이 찾아 봤고 이주여성센터에 직접 방문해 인터뷰도 하고 그랬어요. 시설장님의 바람도 들어봤고요.”
유지태는 <마이 라띠마>를 준비하며 구경미 작가의 소설 『라오라오가 좋아』를 읽었다. 이 소설은 국제결혼으로 한국사회에 편입된 라오스 여성과 중년 남자의 도피 행각을 다룬 작품으로 현대인의 씁쓸한 자화상을 그렸다. 유지태는 “보통 이주여성의 이야기를 그리면 피해자 중심으로 그리게 되는데, 『라오라오가 좋아』의 경우에는 주인공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여성으로서 자아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캐릭터가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마이 라띠마>의 주인공 라띠마(박지수)가 포항에서 경찰에게 잡히기 직전에 립스틱을 바라는 행위나 수영(배수빈)과 함께 도망을 치기로 결정하는 행동 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는 여성상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수빈 씨가 맡은 ‘수영’이라는 인물은 원래 19살 설정이었어요. 수빈 씨가 맡게 되면서 바꾸게 된 거죠. 사실 <마이 라띠마>첫 시나리오는 다른 어린 배우한테 줬었는데 2주가 지났는데도 답변을 안 주는 거예요. 그 사이에 수빈 씨에게 시나리오 모니터를 부탁했는데 ‘감독님, 저도 캐스팅 안에 넣어주면 안돼요?’라는 거예요. 순간 깜짝 놀라고 4, 5초 동안 ‘어떻게 각색해야 가능하지’라고 뇌세포가 빠르게 움직였죠. 아벨 페라라 감독의 <배드 캅>, 안토니오 감독의 <정사> 같은 작품이 떠오르면서,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덜 성장한 어른의 모습, 도덕성을 회복하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각색을 하면 더 깊이가 생길 수 있을 거 같아서 머리를 쥐어짜서 각색을 했죠.”
유지태는 오랫동안 <마이 라띠마>의 제작자를 찾았다. 3년 전, 제작자가 나타났는데 약속만 해놓고 연락이 두절됐다. 한동안 박탈감과 상실감, 모멸감까지 느꼈다는 유지태는 ‘이 작품을 계속 잡고 있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함께 활동하며 인연을 맺은 배수빈이 덜컥 역할을 자청했을 때, 순간 기뻤지만 감독으로서 부담도 만만찮았다. 물론 결말은 ‘고마운 결정’이다.
모델 출신 배우, 트라우마 많았다
아직 흥행 성적은 점칠 수 없지만, <마이 라띠마>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을 받아 관객 및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제15회 도빌 아시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연출력을 인정 받았다. 유지태는 최근 영화 연출 제안을 여러 차례 받고 있다. 배우 유지태보다 감독 유지태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건 아닐까.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하는 작품도 있었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제안 받았어요. 어떤 작품은 거절했고 다른 작품들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고민 중이고요. 감독 활동에 더 치중하겠다 그런 생각은 없어요. 연기와 연출을 균형감 있게 하고 싶죠. 제가 <바이 준>으로 데뷔했잖아요. 그 때도 영화를 찍고 있었어요. 물론 사람들에게 보여주진 않았지만. 언제나 배우와 감독을 병행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20대에 ‘도전하는 영화’를 했다면 30대 후반인 지금, ‘배우 유지태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한다. 유지태는 “나의 성향이 사람들이 호응하는 성향만은 아니다. <러스트 앤 본>, <셰임> 같은 영화같이 내 예술성과 감성이 부합하면서 신체적인 조건과도 잘 맞는 그런 영화를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감독으로서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내가 만들고 싶은 취향들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영화는 장르로 승부를 봐야 하고 엉뚱한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사회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사회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그래요. 그렇다고 공익사업으로 영화를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철학적인 이야기를 더 깊이 있게 다루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죠.”
<마이 라띠마>외에도 단편 영화 <초대>, <나도 모르게>,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자전거 소년> 등을 통해 메가폰을 잡았던 유지태. 다큐멘터리 장르에 대한 욕심도 있지 않을까 물으니, “독특한 시선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며, “자본 논리로 인해 내 색깔을 내는 게 쉽지만은 않지만, 나만의 독특한 감성을 작품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존경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는 <송환>, <다섯개의 시선>을 연출한 김동환 감독을 꼽았다.
1998년 영화 <바이 준>으로 데뷔한 유지태는 언제나 ‘모델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달고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지금은 모델 출신 배우들이 당당히 연기력을 인정 받고 있지만, 당시 영화판에서는 ‘모델 출신 배우는 연기는 못하지만 비주얼은 괜찮다’는 인식이 컸다. 유지태는 ‘모델 출신’이라는 트라우마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가 꺼려졌고, 스스로의 말이 깊이 없이 여기지는 상황을 겪었다. ‘의도하지 않게 인생이 꼬여갈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고.
“사람이 보상심리가 크잖아요. 자기가 당한 것을 어떠한 위치에 올라갔을 때, 똑같이 행하곤 하니까요. <마이 라띠마>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에 데뷔한 박지수 양에게는 그런 비뚤어진 경험을 하지 않게 하고 싶었어요. 아마 본인은 모를 수도 있어요. 사실 신인이랑 호흡을 맞추면 딜레이도 길어지고, 심지어 남의 대사를 내가 해놓고 우기는 게 신인이거든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어떤 스태프들도 지수한테 큰 소리 한 번 안 냈어요. 디렉션을 해야 하면 나한테 하라고 했죠. 지수가 좋은 선배들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마이 라띠마>가 좋은 발판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에요. 관객들이 영화 속 배우를 보는 재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어떤 테크닉을 썼냐도 중요하고 재밌지만 80, 90%는 배우를 보고 영화를 따라 가요. 배우의 연기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수 양이 이번 작품에서 호연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많은 선배들이 조언을 했지만 결국은 본인이 한 거죠.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배우들이 곧 저의 배우에요. 지금의 제 배우들이 앞으로의 제 작품에도 출연해줬으면 좋겠어요.”
배우, 감독하지 않았더라면 소설가 됐을 것
유지태는 인생의 목표를 ‘사회복지사’라고 말할 만큼, 다양한 NGO를 통해 나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부터 가정폭력 아동들을 지원하는 서울YWCA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홍보를 위해 마주한 자리였지만 사회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더욱 또렷해졌다. “현행법상 가정폭력 때문에 쉼터에 왔더라고 6개월이 지나면 쉼터에서 퇴소해야 해요. 갈 때가 없으니 아이들은 다시 폭력 가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죠. 자립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중간 쉼터의 필요성이 시급한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현재 150개 가구 정도가 지원을 받게 됐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의도가 순수하다 싶은 일에는 끌리게 돼요. 물론 시작했다가 아닌가 싶으면 얼른 빠져 나오고 그러죠(웃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특별하지 않아요. 그냥 제 본성이에요.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싶어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주셨어요. 나의 존재 가치나 자존감, 정체성을 확립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사회활동에 무관심한 동료들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무관심하지 않을 거예요. 생각하는 기준이 달라서 그렇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사회공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남 모르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한국 배우들만큼 뜻이 깊고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드물다고 생각해요.”
“정도상 작가의 『찔레꽃』을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는데, 소설 한 권을 쓰기 위해 5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했다고 하더라고요. 표현이 디테일하고 섬세해서 책에 금방 빠져들었던 기억이 나요. 감독으로서 영화화하고 싶은 소설도 물론 있어요(웃음). 아마, 영화를 안 했으면 소설가가 됐을 것도 같아요. 책을 내자는 제안도 종종 듣는데 지금은 영화 만드는 게 좋아요. 다른 거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영화와 배우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유지태는 올해 하반기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를 통해 관객들을 만난다. 천재 테너 ‘배재철’ 역을 맡은 그는 1년 동안 성악가에게 훈련을 받으며 8개 아리아를 외웠다. “성악가로 데뷔시키고 싶다”는 선생님의 칭찬도 받았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성악, 해볼 만 하더라고요(웃음). 관객들에게 연기자로서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서 선택했어요.”메가폰 대신 악보를 든 배우 유지태의 모습은 어떨지. 유지태는 이미 관객들과 만날 채비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