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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 “먼저 대접해야 행복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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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만난 이해인 수녀는 막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수녀님이 심부름하세요?” 놀라 물어보니, 손님 맞이, 편지 쓰기, 외출하기 등 모두가 심부름이라고 했다. 하기야 수녀는 「심부름」이란 시에서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심부름은 제일 기쁘다”고 썼다. 인터뷰를 하러 이해인 수녀가 집필하는 공간 ‘해인글방’에 들어섰다. 책상에는 이미 수녀가 준비해놓은 선물 보따리가 있었다. 찬찬히 수녀의 안색을 살폈다. 2008년 대장암 판정을 받은 뒤,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한 그였다. 긴 시간 대화해도 괜찮을지 안부를 물으려다 이내 입을 닫았다. 위독설이 무색할 만큼 수녀는 활기찼다. 올해로 72세가 됐지만, ‘명랑구름수녀’라는 별명이 여전히 어울렸다.

 

2016년은 수녀의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출간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출판사는 특별판을 만들며 그에게 시 탁상달력을 묶어보자고 제안했다. ‘이해인 수녀가 매일 보내는 작은 위로의 시’ 365개는 『모든 순간이 다 꽃으로 필 거예요』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이해인 수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1월 24일 달력에 적힌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못다 한 웃음까지 다 웃고 가려면 한순간도 우울할 틈이 없습니다. 눈만 뜨면 발견하는 조그만 기쁨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어떤 결심 하나」) 수녀는 마치 자신이 쓴 시를 증명하기라도 한 듯했다. 소박한 기쁨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눈빛에서도 손짓에서도 쉴 새 없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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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긍정하게 하는 시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수녀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러니까요. 저를 잊을 때가 됐는데 아직 관심을 가져주는 걸 보면 신기해요. 제가 이제 70세가 넘었으니 나름 원로잖아요. 사랑받는 데에 대한 책임을 느껴요. 지난해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성인품에 올랐을 때, 23년 전 수녀님을 뵀을 때가 생각났어요. 수녀님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서 선물하기도 했어요.

 

동료 수녀분들로부터 “시는 예민하게 잘 쓰는데, 고통에 대한 감각은 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신다고요. 투병 후 ‘여장부’로 불리시고요.

 

제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잖아요. 제 안에 뭔가 강한 힘이 잠재해 있었나 싶어요. 8년 동안 투병하면서 내 아픔과 슬픔 때문에 울지 않았어요. 아픔을 즐겼다고 할까요. 노을이 지거나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까치집을 볼 때는 감동이 막 전해오면서 눈물이 나는데, 방사선 치료를 받고 약을 먹을 때는 운적이 없어요. 저도 놀랐다니까요. 언제는 한 시인이 제게 정식으로 편지를 썼어요. 또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이렇게 썼던 것 같아요. “수녀님, 당신이 체면 때문에 울지 못한다면, 아무도 없을 때는 혼자 우셔라. 그래야 독소가 빠진다.” 제가 이 편지를 읽고 문장이 참 아름답고 고마워서 그렇게 해보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무도 없는 시간에 성당에 가서 성모상 앞에 앉았어요. 나도 실컷 울어보자 하고요. 그런데 눈물이 좀처럼 나지 않더라고요. 노력을 했는데도요. 체면 때문에 그동안 못 운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감사했어요. 수도 생활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심부름을 많이 하신다고요. 요즘 가장 즐겁게 하는 심부름은 무엇인가요?

 

모든 일이 의미가 있지만 정신과 환우들과 함께했던 자리가 기억이 나요. 서울시 은평병원에서 주최한 행사인데, 제 시 일곱 편을 택해서 각 정신병동에서 노래로 만들었어요. ‘송 라이팅’(song writing)이라고 음악치료의 한 방법이라고 해요. 종종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부산, 울산 등 경남의 청소년들을 그룹으로 만나요. 시 낭송도 같이하고 성당에 가서 수녀들이 기도하는 모습도 보는데, 어떤 아이들은 이 경험을 통해서 문제행동이 많이 줄었다고 해요.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작지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이 제겐 참 고마운 일이죠.

 

수녀님의 시 365개를 묶은 달력이 나왔어요. 『모든 순간이 다 꽃으로 필 거예요』는 수녀님의 시 「물망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출판사에서 팀을 나눠 제 시를 묶었어요. 아마 저에게 뽑으라고 했으면 애를 먹었을 거예요. 출판사 분들이 절기에 맞게 참 잘 뽑았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어떤 시는 내가 이런 문장을 썼나 싶을 만큼 새롭더라고요. 처음에 5,000부 정도를 찍었는데, 독자 분들이 선물로 많이 샀나 봐요. 반응이 좋다고 하니 반갑고 고마워요. 초판본 사은품으로 컵받침을 만들었는데 인기가 좋아서 저도 겨우 다섯 개밖에 못 얻었어요.(웃음)

 

매일 하루를 여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시예요. 시를 사진으로 찍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보내도 좋을 것 같아요.

 

생활 속에 시가 밀착되면 참 좋죠. 사람들이 많이 모여 말을 하게 되면, 뒷담화를 많이 하게 되잖아요. 뒷담화를 많이 하면 그때만 잠깐 기분이 풀릴 뿐이지 마음이 찜찜해요. 그럴 때 ‘말을 위한 기도’ 같은 시가 적힌 엽서를 나눠주면 좋은 뒤끝을 맺을 수 있어요. 종종 해인글방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시를 읽혀요. 문장들이 책에서 튀어나와서 내 것이 되면 눈물을 글썽이게 돼요. 눈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목소리로 읽으면 시는 다르게 다가오는 법이에요. 또 치매 예방에도 좋고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시낭송을 하다가 시의 매력에 빠져서 시를 쓰는 사람들도 많이 봤어요.


지금도 시를 쓰시나요?

 

청탁이 오면 쓰지만, 스스로 창작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는 좀 벗어났어요. 제 문학은 위로의 편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필요하신 분들이 있다면 물론 쓰고 싶고요. 말하자면 맞춤형이라고 할까요. 어느 날, 약을 먹는데 제 앞에 앉은 팔순 수녀님이 수십 알의 약을 드시는 모습을 봤어요. 저는 기껏해야 아침에 7알, 저녁에 3알 정도거든요. 내가 그동안 너무 습관적으로 약을 먹은 게 아닐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을 먹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어 ‘약을 먹을 때 드리는 기도’를 썼어요. 후에 양로원에 가서 이 기도를 읽어주니까, 너도나도 기도문을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일종의 맞춤형 기도인데, 내가 글을 쓸 몫은 여기에 있지 않나 싶었어요. 앞으로 그런 시를 써야겠다 생각했죠.

 

수녀님께 좋은 시란 어떤 시인가요?

 

읽고 나면 진실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라고 할까요. 인생을 긍정하게 되고 삶에 감사하게 되고, 좀 더 선한 사람으로 살기를 갈망하게 만드는 시라면 좋은 시가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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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대접해야 행복이 밀려옵니다

 

해인글방 안쪽 방을 보니, 40여 년간 독자와 주고받은 편지 꾸러미가 한가득 쌓였어요. 지금도 편지를 받으시죠?

 

여전히 많이 와요. 한 초등학생이 받는 사람 주소를 ‘부산시 민들레의 영토 수녀원’이라고 적었는데도 편지가 도착해 무척 기뻤던 적이 있어요. 책에 추천사를 쓰거나 신문이나 잡지에 글이 나오면, 편지를 많이 보내줘요. 이제는 정리하기도 벅찬데 항상 고맙죠.

 

그래도 꽤 정리하신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모은 건 1986년부터예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문인, 수녀나 신부님, 장애인, 미지의 독자 등으로 구분해서 모았는데, 언제 제가 답장했는지도 일일이 다 메모했어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분들도 많아요. 더 정리하고 싶었는데, 소임을 하다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마 지금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우정사업본부에서 편지쓰기 주간이라는 행사가 매년 열어요. 유명인사들의 편지가 필요하다고 연락이 오면, 고 박완서 작가나 최인호 작가, 법정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빌려줘서 전시를 여러 번 했어요. 편지를 주고받으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데, 요즘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드물어져서 안타까워요.

 

최근에 받은 편지 중에 인상 깊었던 편지가 있나요?

 

얼마 전 김제동 씨가 책을 내서 추천사를 써줬어요. 90세 노인이 그 글을 읽고는 김제동 씨 연락처를 모르니까 저한테 편지를 쓴 것 같아요. 자기 남편은 95세라면서 안부를 전하시는데, 그 할머니께는 답장을 하려고요. 너무 감동적이잖아요. 또 지난번 생일날, 중학생 때부터 제 독자이신 분이 그동안 모으신 제 자료를 스크랩북으로 보내줬어요. 이제는 아들 둘을 키운 엄마가 되셨는데, 아들이 제대하는 날 저한테 인사를 오기도 했죠. 저도 가끔 답장을 보냈는데 제 편지 봉투도 안 버렸더라고요. 우표가 110원짜리니 정말 오래됐죠. 원년 독자들이 보내주시는 편지를 읽으면 저도 모르는 제 자료가 많아요. 이런 독자들의 기도와 사랑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언젠가 ‘이해인 수녀의 편지문학’을 정리하셔야겠어요.

 

생각을 아주 안 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도저히 정리할 틈이 없더라고요. 너무 많이 받아서 보내주신 분께 돌려준 것도 있어요. 왜냐면 그분들에게 더 귀할지 모르잖아요. 자기의 인생을 돌아볼 수도 있고요. 요즘은 다들 손편지를 안 하고 이메일만 쓰는데, 편지는 영혼의 메아리 같아요. 요즘 편지 꾸러미를 보면서 ‘언젠가 나도 죽어야 할 텐데, 이것들이 부담되어서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책상 위에 스티커, 색연필이 잔뜩 있어요.

 

독자분들이 보내준 거예요. 제가 책에 사인할 때, 색연필로 꽃도 그리고 스티커도 붙여요. 그걸 아는 분께서 보내주셨어요. 이번에 나온 달력에는 각자 특별한 날짜 옆에 사인을 해주려고 해요. 아무 데나 사인받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삶과 시」에서 “시를 쓸 때는 아까운 말들도 곧잘 버리면서, 삶에선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고 하셨어요.

 

부끄럽죠. 몇 주 전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보러 부산시립미술관에 다녀왔어요. 이중섭 선생이 무척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생계가 어려워 게를 잡아먹어야 할 정도였는데, 게에게 미안한 마음에 게를 그림으로 그렸어요. 시대적인 상황이지만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현대사회는 참 풍요롭게 사는데도 끊임없이 욕심을 부려요. 또 관계들이 너무 깊지 못하니 화를 내고 미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내가 자기한테 어떻게 했는데’ 하면서 서로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해요. 기대를 조금만 낮추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내가 대접받고 싶은 걸 상대에게 해주면, 행복이 밀려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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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걱정만 돼서 오히려 기뻤어요

 

투병하실 때 힘들지 않으셨나요?

 

손발을 움직이기 어려울 때가 있었으니, 지금 이렇게 잘 걷고 말할 수 있는 게 황홀해요. 일상의 황홀함인 거예요. 뭐든지 마음껏 살아가야지, 배려해야지 싶어요. 쫓기듯이 사는 건 의미가 없어요. 요즘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아졌잖아요. 너무 아프지만, 나만 아픈 게 아닌 것을 깨닫고 내 아픔을 좀 쿨하게 거리를 두고 느껴야 할 것 같아요. 아픔과 시련은 울고 짠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축복의 기회로 삼는 게 나아요. 사람들이 “수녀님은 어떻게 그렇게 투병을 하면서도 명랑한가요?” 물으시는데, 큰 게 없어요. 사소하고 작은 마음가짐이죠.

 

아픈 분들로부터 편지도 많이 올 것 같아요.

 

이 편지 한 번 읽어줄까요? 12월 7일에 온 편지인데 읽고 너무 감동했어요. 한 번 들어보세요.

 

“수녀님, 안녕하세요. 밥 한 끼 마음 편히 못 먹고 잠 한 번 제대로 푹 못 자면서 이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야. 천사 같은 마음이 있어야지. 가정에 도움도 되잖아, 나를 위로하며 간병인 일을 쭉 5년을 넘게 해온 저에게, 주님께서 소풍을 보내주셨습니다. 급성간염, 그동안 수고했다 이 작은 침대에서 편히 좀 쉬려무나. 비몽사몽 어제와 다른 오늘이 반깁니다. (중략)”

 

저는 이 편지가 곧 문학이라 생각해요. 2016년이 『민들레의 영토』출간 40주년이었어요. 얼마 전에 성당을 방문한 한 여중생이 그동안 낸 책 중에 어떤 표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냐고 물어서, 『민들레의 영토』라고 답했죠. 40주년이어서 그랬는지 그때 편지를 참 많이 받았어요. 한 장 한 장 읽으면서 분발하게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했어요. 몇 년 전, 좋은 시 읽기 모임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기회를 놓쳐 정기적으로 하기는 어렵지만, 사람들이 모이면 꼭 시를 함께 읽으려고 해요. 시를 읽으면 그 글이 내 몸으로 들어와요. 육화가 돼요. 글방에 작은 주사위가 있어요. 한 번씩 돌아가면서 굴리면, 마음에 담아둘 좋을 글귀가 나와요.

 

수녀가 되지 않았더라도 시는 쓰셨을까요?

 

썼을 것 같아요. 수녀가 되지 않았더라도 글을 쓰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국어 선생이나 방송작가, 연극을 했거나 성우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죠. 저는 입회 후 52년간 지역 성당에 따로 파견돼서 선교한 일은 없지만, 시가 저 대신 나비처럼 국내외로 날아다니며 사랑의 문서 선교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종교를 갖는 사람이 줄고 있어요. 수녀님께 종교의 쓸모에 대해 여쭙고 싶어요.

 

아무래도 종교가 있으면 해당하는 믿음 체계 안에서 자신을 절제할 수 있어요. 반대로 교리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면 왜곡해서 해석하게 되고, 제대로 된 종교심을 가질 수 없어요. 타 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도 필요해요. 스님들을 만날 때, “점심 드시고 가실래요?”라고 말하는 대신 “공양하고 가실래요?”라고 청하면, 그렇게 기뻐하세요. 개신교 신자분을 만날 때도 “심방 가실까요?”라고 인사하면 자연스레 우정이 싹터요. 저는 모태신앙이었기 때문에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는데, 비교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열려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언젠가 친구들이 말하더라고요. “종파를 초월해서 네 건강을 위해 기도를 해주니,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고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나요?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수도자로서 시인으로서,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서 삶의 작은 위로를 줬고, 시를 통한 위로 천사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이제는 종이가 아닌 일상의 삶 속에 시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어요.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 한 편의 시로 익어가는 수녀 시인이 되고 싶어요.

 

“내 삶을 시로 정리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한 번 할까 하다가, 수도자인 사람이 무엇을 남기는 일이 옳은 걸까 싶어 마음을 접었어요. 법정스님이 자주 하신 말씀 중에 “사람이 죽으면 물건에도 혼이 빠져나간다”는 말이 있어요. 누구를 주려면 살아 있을 때 주라고요. 얼마 전 부산에 지진이 났잖아요. 글방에 있는 책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우리 성당 리모델링을 17개월에 걸쳐서 했는데, 그게 무너질까 봐 너무 걱정되는 거예요. 내 한 몸 걱정은 안 하고 공동체적 걱정만 하는 걸 보고서, 오히려 좀 기뻤어요.

 

선뜻 책 추천사를 먼저 써주시기도 하시고 여전히 책장에 책이 빼곡합니다.

 

언젠가 서재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마법의 성’ 같은 곳이라고 답한 적이 있어요. 글을 쓰는 작업실이기도 하고 좋은 책을 읽는 독서실, 취미생활도 하는 놀이터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계속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책들은 쉬이 버리기 어려운 것 같아요. 흔한 말이지만,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친하게 지내다 보면,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행복에 이를 수 있어요.

 

최근 인상 깊게 읽으신 책이 있었나요?

 

요즘은 쓱 보는 책이 많아요. 그래도 『감옥으로부터 사색』이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같은 책은 계속해서 읽는 책 중 하나예요. 얼마 전 『파산 수업』이라는 책을 인상적으로 보았는데, 힘든 시절에 인간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주는 건 책밖에 없어요. 책에서 만난 한 구절이 경우에 따라서는 구원의 역사가 되기도 하니까요. 예전에는 책에 나오는 글귀를 참많이 외우고 필사도 했는데요. 외우는 일까지는 못해도 가까이 여겼으면 해요.

 

‘2017년은 이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할 때, 소개하시고 싶은 시가 있다면요.

 

1월 6일 자 달력에 실렸는데요. 「새해 덕담」이라는 시예요. ‘복덕방’이 복 복(福), 큰 덕(德)을 써요. 서로에게 복을 짓고 복을 나눠서 선을 쌓고, 서로를 축복해줬으면 해요. 전문을 한 번 읽어줄게요.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이야기만 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라고
우리 서로
새해의 덕담을 주고받지만
삶의 길에는
어둡고 아프고
나쁜 일도 너무 많아서
조금은 불안하고 두렵지요.
그럴수록
우리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서로
복을 짓고
복을 받아
복을 나누는 가운데
선업을 쌓고 덕을 닦는
아름다운
‘복덕방’이 되어야지요.


 

 

모든 순간이 다 꽃으로 필 거예요이해인 저 | 톨
이해인 수녀님의 시 중에서도 가장 힘이 되는 시를 모아 엮은 365일 시 달력이다.거실이나 책상,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매일 보면서 잠시 동안 마음에 휴식을 주줄 수 있다. 특히 바쁘고 힘든 날에 보면, 내일을 살아갈 기운과 희망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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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희 “한 살 더 먹어도 여전히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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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살. ‘그 나이’가 되면 여자는 당연히 결혼하고 애가 있으려니 한다. ‘그 나이’에 맞게 금색으로 반짝이는 비싼 립슬로스를 사야 하고, 가방도 진중하고 고급스러운 가방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온다. 부모님은 언젠가부터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데, 막상 결혼의 압박이 사라지니 초조함과 좌절감이 밀려온다.


나이 먹은 여자의 서러움과 진솔함이 매력인 에세이,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tvN 최장수 시트콤 드라마 프로그램 <막돼먹은 영애 씨>의 작가 한설희의 이야기가 담겼다. 드라마에서 ‘영애 씨’가 대한민국 평균 외모를 가진 평균 나이의 여성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면,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에서는 현실적이다 못해 ‘이거 진짜야?’ 싶을 정도의 솔직한 면모를 드러낸다. 내 모습 같지만 마냥 웃을 수 없는 현실에 독자들은 어느새 책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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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솔직했다고 생각 안 해요


새해가 되었습니다. 한 살 더 먹은 기분은 어떠세요?

 

한 살 더 먹은 기분이 바로 들지 않는 것 같아요. 계속 부정하게 되니까요. 생일 지나고 나야 한 살 먹은 거라고 우기다가 한 해가 지날 때쯤 되어서야 그간 일어났던 일, 안 좋았던 일을 생각하면서 그때야 한 살 또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년 연말에는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아요. 프롤로그에 책을 쓰다 보면 삶이 조금은 정리될 거라는 마음이 있었다고 쓰셨어요.


제목이랑 다르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정신이 없었어요. 이제 다 끝났으니 차분하게 정리하고 생각을 해 봐야죠. 세월이 약인 것 같아요. 못 견딜 것 같은 순간이 누구나 인생에 있는데, 그래도 참고 견디니까 지워질 건 지워지고 남을 건 남더라고요. 괴로운 일이야 또 생겨나겠지만, 다 견뎌야 할 몫이겠죠.


제목이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데, 다른 제목 후보가 있었나요?


처음에는 ‘올라(Hola) 40’이라는 가제로 시작했었어요. 40대를 맞이하면서 슬픈 내용도 있지만 밝고 웃긴 내용이니까, 40대를 맞이하면서 밝게 안녕이라고 인사하며 맞이한다는 의미로요. 제목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인데 작년에 <막돼먹은 영애 씨> 메인 작가로 선 일도 있고, 개인적으로 일이 겹치면서 제목과는 반대의 한 해를 보냈어요.


어머니도 책을 보셨나요?

 

책에 ‘형경옥 여사님께 바친다’라고 써 놓고 책 나온다고 이야기를 안 했어요. 나 같은 사람한테 이렇게 쉽게 책을 내주나 싶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대본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 책이 덜컥 나와버린 거예요. 동생이 사다 줬는지 어머니한테 너 책 냈냐고 문자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알 거 없어, 읽지도 마!’ 하면서 또 불효녀 시바이(장면, 상황설정, 연기 동선 등을 뜻한다. 드라마나 영화 제작 환경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은어)를 만들어 버렸어요.


어머니 말고 주변 반응은 어때요?


깜짝 놀랐어요. 제 입으로 책 나왔다고 안 떠들었는데, 의외로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읽고 연락이 많이 오더라고요. 출판사 관계자분들도 제가 울적해 있으려니까 증쇄 찍었다고 기운 내라고 하시고요. 기왕 냈는데 아무도 안 읽는 책이면 나무에게 미안하잖아요. 그래도 나쁘지 않게 읽히고 있다고 해서 다행이에요.


술 먹고 저지른 일이라든가, 1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를 잊어버리고 전화해서 누구냐고 물어본다든지, 굉장히 솔직하게 써주셨어요.


다들 에세이 쓰면 그 정도 써주시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까지 솔직했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그래도 자신의 삶이 들어가는 거잖아요. 부담은 없으셨나요?


꺼려지는 부분이 있죠. 전 남자친구 이야기나 사생활이 나오는 거니까요. 사실 책이 나올 줄 몰랐어요. 그래서 아마 더 솔직하게 썼던 것 같아요. 방송을 하다 보면 찍어놓고도, 편성 잡히고도 일이 엎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출판사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일러스트레이션은 마음에 드셨어요?


네, 처음 보고 놀랐어요. 저랑 만나서 작업하신 게 아닌데 닮게 그리셨더라고요.


책에서 살 이야기도 많이 나와서 실제로 보면 더 통통하실 줄 알았어요.


지금 많이 빠져 있는 거예요. 예전에 한창 쪘을 때는 집에서 누워서 TV를 보는데 뱃살이 제 눈앞에 이만큼 툭 튀어나와 있더라고요. 이렇게 살다가는 죽겠다 싶어서 그 길로 바로 나가서 헬스장에 회원으로 등록했어요. 너무 살이 쪄 있으니까 부끄러워서 애 있는 아줌마라고 거짓말하고 헬스장에 다녔어요. 아마 트레이너 선생님은 되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셨을 거예요. 애가 있다는데 맨날 술 먹고 다녀서. (웃음)


술 에피소드도 많이 나와요.


헬스장 트레이너한테 제가 다른 건 다 할 수 있는데 술만은 못 끊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한숨을 푹 쉬시면서 그럼 맥주 말고 소주를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변 작가들이랑 소주를 먹는데 의외로 잘 들어갔어요. 그런데 문제가, 개가 되더라고요. (웃음) 몇 번 사고를 치니까 주변에서 맥주를 콸콸 따라주면서 ‘야, 맥주 마시면서 돼지가 되는 게 소주 먹고 개가 되는 것보다 낫다. 맥주 마셔’ 이러더라고요.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어요


40대가 된 여성의 에세이입니다. 여러 불안한 요소가 나와요. 결혼하지 않은 독신인 상태, 젊지 않은 나이, 모아둔 돈이 없고 불안정한 직종 등. 제일 불안하게 생각하시는 건 뭔가요?


아무래도 불안한 노후가, 이 나이 되도록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다는 게 제일 불안하죠. 늙어가는 것도 불안해요. 여자들이라면 다 그렇지 않나요? 20대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점점 피부도 탄력이 없어지고요. 거울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게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사소하게 살면 될 것 같은데, 주변에서는 자꾸 생애 주기에 맞춰서 살라고 강요하잖아요.


20대, 30대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결혼 안 할 줄 알았는데, 막상 40대가 되고 보니까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단계가 되더라고요. 스스로 안 하기로 한 것과 못 하게 되는 건 느끼는 감정이 다르잖아요. 독신인 상태가 갑자기 불안해지는 때가 오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나이가 50 넘었는데 독신이고 잘 살아가는 선배가 있으면 귀감으로 삼고 갈 수 있을 텐데, 제 나이에도 정말 일부 크게 성공하는 사람들 빼고는 현역으로 작가 생활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방송 작가는 특히 빨리 교체되니까요.


나이가 들고 점점 외곬 기질이 되는 것도 불안함의 한 요소일 것 같아요.


그게 커요. 자꾸 후배들에게 잔소리하게 돼요. 별거 아닌데도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이 모르는 사이에 자꾸 튀어나오는 거예요. 남들보다는 덜한 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잔소리가 튀어나와서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깜짝깜짝 놀라요.


술 먹지 마라, 같은 잔소리인가요?


그런 잔소리를 술자리에서 하니까 술 먹지 말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죠. (웃음)


‘혼술’도 좀 하세요?


30대 초반까지는 혼자 마셨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게 안 되더라고요.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면서 마시면 많이 마시게 되는데, 그나마 혼술을 안 해서 알코올중독자가 안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혼자 사는 여자, 나이 있는 여자가 술을 먹으면 사회에서 더 낙인을 찍는 것 같아요.


그렇죠. 제가 봐도 건너편에 제 또래 여자들이 술 마시고 있으면 당장 아이들은 어디다 맡겨두고 마시나 싶은 생각이 드는걸요. 저도 과음하는 스타일이라 흐트러져 있을 때가 많은데……. 할 말이 없네요.


‘흑역사’가 점점 많이 쌓이잖아요. 잊고 새로 시작하는 타입이신가요?


잊어버려도 생각나죠. 제가 올바른 성격도 아니고, 실수도 잦고 까먹는 것도 많고 게다가 감정적이다 보니까 남들보다 흑역사도 많이 생겨요. 엄청 쪽팔린 데 힘들어하고 술 마시고 다시 잊고… 살아가는 건 수치의 연속이구나 생각하기도 해요.


주변하고 비교했을 때 그래도 성격이 낙천적인 편이신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가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한결같대요. 엄청 괴로워하는데 다음 날 보면 웃고 있대요. 여러 번 보다 보니 제가 아무리 힘들어해도 저러다가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책임을 진다는 것


주변에서 다들 결혼하고 대화에 끼기 어렵지 않나요?


직업군이 특이하다 보니 남들보다는 덜해요. 방송 작가 선배 중에서는 결혼 안 한 분이 많거든요. 남들보다는 소외감을 덜 느끼는데, 저번 시즌의 작가들이 하나같이 한꺼번에 결혼했어요. 막내 작가까지 결혼하고 나니까 저만 남아서 충격이 생각보다 심하게 몰려오더라고요.


결혼하거나 아이가 있는 분한테 부러움도 느끼나요?


부러움은 없어요. 부러움까지는 안 가고 가끔 좋겠다고 느끼는 정도요. 외로운 건 결혼해도 있더라고요. 결혼한 친구들도 옆 방에 남편 있고 앞에 아기가 울어도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니까요. 외로움은 결혼이나 육아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기혼자가 아이를 가지고 화제로 삼으면 독신은 요새 고양이나 강아지를 주제로 삼으시더라고요.


초면이나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요. 아무래도 저만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대신 같이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통하니까 반갑죠.


개와 고양이가 요새 시대의 ‘아가들’이 아닐까 싶거든요. 고양이 미오 씨와 같이 살고 계시잖아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어릴 때 무료 입양으로 들여왔어요. 지금은 여덟 살이고 엄청 커졌죠. 책에도 썼는데 미오 씨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거기 있던 여성분이 미오 씨를 보고 너무 커서 기겁을 하시더라고요. ‘이거 고양이예요?’ 물어보시고요. 그래서 고양이 맞다고 했더니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서 ‘야, 너 지금 내려와 봐, 여기 호랑이만한 고양이 있어. 빨리 내려와 봐’ 이러는 거예요.


많이 먹겠네요(웃음). 반려동물을 기르는 건 어딘가 책임을 지고 싶다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미오 씨가 사료를 무시무시하게 먹고 있으면 저걸 먹여 살려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들어요.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일단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더 있는 거니까요. 사실 고양이 기르면서 할 일이 제때 사료 부어주고, 화장실 갈아주고, 인간 아기에 비해서는 할 일이 없잖아요. 그래도 그런 일이 있다는 게,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요새 너무 책임을 안 지고 있어서 안타까워요. 동물을 데려와서 파양하고 유기하는데, 고양이나 강아지 키우고 싶은 분들은 펫샵에서 찾지 말고 무료 입양으로 하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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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 받아드는 기분


김현숙 배우가 ‘진짜 ‘영애 씨’는 한설희 작가다!’라는 추천평을 써 주셨어요. 실제 겪었던 경험이 <막돼먹은 영애 씨>를 쓰는데 녹아나기도 하나요?


많이 들어가요. 저 말고도 작가들이 회의하면 서로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쏟아놓거든요. 배우들이 말이 되냐고 했을 때 작가가 실제로 겪은 일이라고 하면 바로 수긍이 되니까요. 누구 경험인지 다 밝힐 순 없지만, 시즌 초반에 ‘영애 씨’가 노상 방뇨한 이야기라든가, 그런 소재는 기존에 방송에서 다루지 않던 솔직한 소재잖아요. 경험이 많이 들어가죠.


<막돼먹은 영애 씨> 작가를 맡은 지 꽤 오래되셨어요.


시즌1부터 시즌4까지 하고, 시즌5에서 시즌8까지 쉬었다가 그 이후로는 계속하고 있어요. 거의 저를 먹여 살린 프로그램이죠. 작가 커리어에서도 중심에 있고요.


아이디어 짜는 데도 어려움이 많으시겠어요.


시즌15 들어오면서 식상하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거기서 거기인 드라마 내용을 어떻게 참신하게 풀 수 있는가는 저희 과제가 맞아요. 하지만 초심을 잃었다면서 악의적인 기사가 나오면 속상하죠. 고생하는 스텝들, 연기자들 생각하면 제가 여기서 프로그램을 대표해서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더 노력해야 하지만 나름 스텝과 배우가 애써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니까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으시죠?


시청률 나오는 날이면 성적표 받아드는 기분이에요. 시청률이 저희 성적표가 되니까요.


방송작가로 들어선 계기가 천리안 시절 온라인 게시판 글쓰기였다고요.


유머 게시판에 웃기는 이야기를 쓰고 있었어요. 제가 겪은 웃긴 이야기, 이런 걸 쓰고 있었는데 마침 시나리오 작가 구하던 방송사에서 아이디어 작가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돈 준다길래 좋다고 했는데 나중에 아이디어 회의에 참석하면 5만 원 더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얼떨결에 시작하게 됐어요.


애니메이션 학원도 잠깐 다니셨다고 나와요.


애니메이션을 워낙 좋아했어요. 그런데 첫날 가니까 의외로 성실하고 꼼꼼한 사람이 적성에 맞는 일인 거예요. 계속 앉아서 하루에 열 시간씩 그림 그려야 하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받는 직종도 아니고요. 그래서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생각하던 참에 마침 방송 아이디어 작가 제안이 들어와서 덥석 문 거죠. 어쩌다 보니 이 길로 들어서서 생각지도 않은 직업을 오래 하게 됐네요.


방송 작가 중에서도 시트콤 작가는 희귀한 편이에요.


시트콤이 없으니까요. 워낙 시국이 뒤숭숭하고 점점 더 가벼운 걸 찾으니까 시트콤이 다시 유행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는 하고 있어요. 후배들이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판이 짜였으면 하죠. 저 할 때만 해도 시트콤 하고 싶어 하는 작가가 많았어요. 우리 세대만 해도 <프렌즈>를 보고 자란 친구들이 많아서 그걸 보고 시트콤에 대한 꿈을 키우는 친구들이 있었죠. 지금도 많아요.


<막돼먹은 영애 씨> 시즌16에도 메인 작가로 가시나요?


어떤 작가가 어떻게 끌어갈지 확정된 건 아직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까지 해 왔던 작가들이 남을 의지가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요청이 들어올 것 같긴 한데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몰라요.

 

 

그냥 솔직하게, 살아온 이야기


어머니는 요새도 결혼하라고 하나요?


선 자리도 책에서 쓴 것처럼 무산된 마당에 이제는 포기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요. 만약 제가 경제적으로 일을 안 한다거나 하면 더 염려하실 것 같은데, 어쨌든 돈은 벌고 있으니 은연중에 걱정을 좀 덜 하시나 봐요. 요새는 결혼하라는 소리 안 하세요.


형제자매 중 결혼한 사람이 있으면 그래도 부채감이 덜하잖아요.


남동생이 있는데 장가를 안 갔어요. 저도 구시대적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둘 다 안 가니까 엄마가 짠하기도 하고 그래요. 외가 쪽에 아무도 결혼 안 한 집은 우리집밖에 없어요. 얼마 전에 아줌마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자식들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결혼해서 남들처럼 살면서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인데 어떻게 보면 그걸 뺏은 거잖아요. 효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이 들죠.


‘어머니 사위’를 찾는 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가요?


바쁘면 인연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더라고요. 이제 <막돼먹은 영애 씨> 시즌15도 끝났으니 또 집에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겠죠? 하지만 영애처럼 만약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한다면 결혼할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별생각 없어요.


책을 누가 읽으리라고 생각했나요?


비슷한 또래가 읽게 되지 않을까요? 처음에 책을 기획할 때 사람들에게 해결책이나 정답은 절대 제시해 주지 못한다고 했어요. 제가 그럴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솔직하게, 공감 갈 만한 내용을 써 주면 된다고 하길래 그 정도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생각보다 많이 공감해주셔서 고맙고, 이런 사람도 있으니까 힘들고 불안하더라도 우리 같이 열심히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요새 건강은 괜찮으세요?


그러게요. 엉망으로 살아서 이미 몇 번은 죽었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튼튼해요. 부모님께서 잘 낳아주셨나 봐요.


프리랜서라 아무래도 건강검진 받기 힘드시잖아요.


그래서 안 받았어요. 안 받아도 별 이상 없던데요. 그래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아픈 데 있으면 가는 거 아니에요? (웃음)


 

 

나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설희 저 | 허밍버드
이 책은, “그 나이 먹고……”, “결혼은 안 하냐”, “애는 언제 낳으려고 그러냐” 등 쓸데없이 참견 많은 무례한 ‘오지라퍼’들에게 보내는 위트 있는 반격이자, 나 자신으로서 당당하겠다는 작은 고백이다. 동시에 세상의 모든 영애 씨에게 바치는 가장 평범하고 따뜻한 위로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 “관습적인 것은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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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팬들이었다. 영화 <아가씨>에 열광한 팬들은 급기야 각본집 출간을 요청한다. 그 요청이 흥미로워 『아가씨 각본』을 정식 출간한 것이 2016년 8월, 영화 개봉 두 달 만이었다. 막상 책을 받아보자 “손에 딱 잡히는 그런, 작은 책이 귀여워서 더 내고 싶어”진 박찬욱 감독은 정서경 작가와 작업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친절한 금자씨>의 각본집을 모두 책으로 냈다. 12월, 팬들을 위한 선물 같은 책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친절한 금자씨>, <박쥐>를 가리켜 ‘정서경 3부작’이라고 했지만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의 작업은 3부작으로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시간이 맞는 한” 계속될 것이다. 어떤 대사가 누구의 것이라고 구분 짓기 무색할 만큼 완벽한 공동의 작업. 『친절한 금자씨 각본』‘작가의 말’에서 박찬욱 감독이 묘사한 둘의 작업이 아주 인상적이다. ‘컴퓨터 하드는 공유하면서 모니터와 키보드를 각자 한 벌씩’ 가지고 ‘한 사람이 자판을 두드리면 상대 모니터에도 글자가 쳐’지는 식이다. ‘감독이 쓰면 작가가 지우고, 작가가 주어를 쓰면 감독이 목적어를 쓰고.’

 

인터뷰 말미에 서로에 대해 한 마디 씩 해주기를 청했는데 박찬욱 감독은 어색한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답은 듣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다. ‘내 영화에도 여성성, 아이다운 천진함, 동화적인 아름다움, 낙관주의, 설레임, 감사하는 마음, 쓸데없는 공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면 그건 정서경에게서 비롯한 것’이라는 감독의 말은 그 자체로 무한 신뢰와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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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내 각본을 위해서는


책날개 저자 소개 부분을 보면 네 권 모두 정서경 작가님을 먼저 소개하고 있어요. 어떤 의도로 봐도 좋을 것 같은데요. 각본집이기 때문에 감독보다 작가에게 더 무게를 둔다는 의미일까요?


박찬욱: 네, 맞아요.


정서경: 아마 쓰는 순서 때문일 거예요. 제가 조사 작업을 먼저 시작하니까요. 초고를 제가 쓰는 경우가 많아서요. 

 

무엇보다 극과 글이 대단히 다른 느낌을 줘서 놀랐습니다. 영화와 각본, 말하자면 아주 가까운 친척 같은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서경: 반대되는 작업을 한 것 같아요. 일단 각본을 쓸 때는 머릿속에 이미지가 있고 제가 그것을 지문이나 대사로 쓰죠.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반대예요. 각본을 읽으면서 이미지를 떠올려요. 그렇게 생각하면 독자 입장에서는 또 다른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궁금해요. 각본을 쓸 때는 이것이 출판될 거라 생각도 못했고 일단 영화를 찍을 때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공통의 설계도를 가지고 만들도록 염두에 두고 쓴 건데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읽어서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때 어떨지 궁금하죠.

 

박찬욱: 각본을 쓴다는 것은 투자자나 일을 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쓰는 것이죠. 그들이 읽고 돈을 대고 싶다,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게 첫째예요. 둘째는 읽고 영화를 결심했을 때의 느낌과 영화가 완성되어 나왔을 때의 느낌이 너무 다르면 안 된다는 건데요. 이런 영화를 상상하고 돈을 댔는데 엉뚱한 영화가 나온다면 곤란하죠. 그건 좋고 나쁜 문제와 다른 거고요. 결국 가급적 최종 완성된 영화에 가깝게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도록 쓰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고, 무슨 색깔이고, 이런 것까지 다 쓸 수는 없는 거니까요. 적당하게 어느 수준으로 쓰느냐, 그게 좀 어려운 문제죠.

 

각본이 책으로 출판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요. 출간 결심은 어떻게 하시게 됐나요?

 

박찬욱: <아가씨>의 팬들이 각본을 책으로 내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래서 책을 냈는데요. 출판사에서 판형을 참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손에 딱 잡히는 그런, 작은 책이 귀여워서 더 내고 싶어지더라고요.

 

정서경: 사실 저는 좀 거리꼈었어요. 처음부터 출간을 생각했다면 다르게 썼을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한 시나리오의 목적이나 독자와는 너무 다르잖아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쓴 거고 그렇게 있었으면 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고 하니까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막상 책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어보고, 책이 나온 것을 보니까 새로웠어요. <친절한 금자씨>는 각본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책으로 다시 봤거든요. 다시 보니 스스로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감독님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영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더 잘 썼으면 좋았을 텐데요.(웃음)

 

각본 자체로도 굉장히 문학적이에요. 그건 분명해요.


정서경: 영화를 본 사람들이 대부분 대사가 문어체라고 하는데, 막상 책으로 나왔으니까요. 오히려 더 나아보일 수도 있겠죠? 

 

박찬욱: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쓰진 않았는데 그래도 문장을 정련하는 것은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정서경: 그런 의미에서 보람 있다는 생각은 했어요. 왜냐하면 감독님이 작업 시작하기 전에 교정부터 보시거든요.(웃음) 이것이 문장으로써 부족한 점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에요. 그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문장 자체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거든요. 띄어쓰기, 행간도 엄청 고민하시고요. 저희만 보는 시나리오라도 감독님은 언제나 아름다움과는 약간 다른 의미에서 완벽함을 추구하세요. 이번 기회에 그런 걸 보여주게 됐어요.

 

대단히 인상적인데요. 그런 작업 비화가 흥미롭기도 하고요.


박찬욱: 저는 심지어 페이지의 레이아웃까지 생각해요. 기존의 시나리오와는 판형이나 폰트 모든 게 다 바뀌어 책이 나왔기 때문에 전혀 다르지만요. 그냥 내가 쓰는 내 각본을 위해서는 한 페이지 전체 모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런 것을 신경 써요. 한 눈에 봤을 때 모양이 좋아야 하니까 거기에 시간을 많이 쏟죠.

 

정서경: 마치 이런 일이 있을 거란 듯이 말이에요. 감독님은 만약 직업이 다섯 개 정도라고 한다면 그 중 하나는 편집자일 거예요. 엄청 만족하셨을 거예요.

 

박찬욱: 작가와 많이 싸웠을 거예요.(웃음) 후배나 동료가 시나리오 봐달라고 하면 그것부터 보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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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잘하세요”는 실제 경험

 

두 분의 영화에 특히나 화제가 된 대사들이 많잖아요. <아가씨>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도 그 중 하나죠. 이런 뇌리에 박히는 대사들은 어떻게 탄생하는 걸까요?


정서경: 그건 제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세주’라 해놓고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구원자’로 바꿔주셨어요. 그래, 내가 쓰려고 한 게 이 말이었다 싶었어요. 그런데 그 말이 저 혼자 썼으면 끝까지 안 떠올랐을 거예요. 대부분 이렇게 써왔어요.

 

박찬욱: 어떤 한 문장을 누가 썼느냐가 별로 의미가 없어요. 같이 만드는 부분이 많아서요. 처음에 이야기를 많이 나눈 다음 초고를 서경 작가가 쓰고요. 또 이야기해서 그 다음 쓰거나 초고를 놓고 같이 쓰거나 해요. 마지막 손질을 같이 하고요.

 

여러 작품을 꾸준히 함께 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렇게 호흡이 잘 맞았던 이유도 컸겠죠.


정서경: 제가 맞춤법을 많이 틀리지 않는다는 게(웃음).

 

박찬욱: 그게 중요했죠.(웃음) 
 
대사들의 탄생 비화를 조금 더 듣고 싶은데요.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하세요”는 어떤가요?

 
정서경: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거기 다른 대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영 마음에 안 들어 하셨죠. 그러다가 감독님이 쓰신 거예요. 그냥 “너나 잘해”라고 쓸 수도 있었지만 “너나 잘하세요”가 된 거예요. <친절한 금자씨>의 어떤 대사들은 그렇게 뭔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집에 가셔서 뚝딱 써오신 경우가 있었어요.

 

박찬욱: 제가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대사는 있어요. “가불은 불가” 이거예요. 번역 불가능한 대사라서 아주 만족하죠. “너나 잘하세요”는 제 실제 경험에서, 제 입에서 나온 말인데요. 충무로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거절당하는 생활을 해서 생활도 힘들고 그럴 때예요. 친구가 당시 저보다 현실 감각이 좋아서 돈을 잘 벌었어요. 그 친구가 저한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투자자가 좋아할 만한 걸 써야 한다고, 그랬을 때 제가 한 말이었어요. 거의 절교 선언 비슷한 거였죠. 나만큼 그쪽도 그 말을 강력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굉장히 무거운 말이었군요.


정서경: 네 권 각본을 다 읽고 깨달은 가장 큰 부분은 감독님이 그 친구의 충고를 절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거예요. 단 한 번도 투자 받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는 걸 이번에 읽으면서 강하게 느꼈어요. <친절한 금자씨>같은 영화는 결론이 진짜 애매했는데요. 그럴 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관습적인 결론이 있거든요. 감독님은 그게 너무 싫었던 거예요. ‘이거야’ 하는 게 없을 때도 절대로 그렇게 돼선 안 된다고 하는 게 그때도 읽혔어요. 새로우면 좋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요. 감독님처럼 거절당한 경험도 많고, 몇 개의 영화를 상업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그렇게 하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되게 놀라웠어요. ‘가불은 불가’의 느낌이죠.(웃음)

 

박찬욱: 후에 투자 받기 어려워지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래요. 관습적인 것은 금지. 가불은 불가 식으로 말하자면, ‘지금은 금지’예요.

 

특히 어떤 이야기가 자극이 되나요? 어떤 장면들이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지 궁금해요. 


정서경: 사람들이 박찬욱 감독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을 말할 때 속죄, 복수,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저는 뭔가 꿰뚫는 하나가 있다면 그게 인간의 품위라는 생각이 들어요. <박쥐><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최근의 <아가씨>까지 이 사람들이 어렵고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그냥 패배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다면 품위가 아닐까 해요. 금자씨가 속죄하는 게 유가족 관련된 것일 수도, 제니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문제잖아요.

 

박찬욱: 그렇지만 <아가씨>에서 백작이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라고 한 건 그런 것은 아니에요.(웃음) 그건 그냥 한심한 소리일 뿐이에요.

 

품위, 지금 들으니 아주 새롭네요. 개인이 품위를 지켜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때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정서경: 우리 주인공들이 늘 극단적 상황에 처하거든요. 그럴 때 많은 영화들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목표에 이를 것인가’ 하는 식의 질문을 하죠. 그 와중에 감독님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품위를 지키고 끝나는 식인 것 같아요. 품위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러나 이들이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방향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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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렬한 장면은 없어야겠다


창작자로서 자신의 작업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정서경: 저는 관습적인 건 괜찮아요.(웃음) 요즘 생각하는 것은 기계를 손보는 것처럼 늘 최선의 컨디션으로 날마다 일해야겠다는 생각이거든요.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가 될지 늘 연구하고 있어요. 원래 인생 전반기가 그렇지 않았거든요.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시나리오를 쓰는 게 어렵더라고요. 한 사람의 에너지를 최대로 가동해도 힘들더라고요.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써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거예요.

 

박찬욱: 한심한 걸 안 한다는 게 중요해요. 지난 영화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요. 어떤 멋있는 장면을 더 만들어서 그것이 자랑스러울 때보다는 그 영화에 포함된 부족한 장면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압도적이에요. 때문에 그것이 나는 더 중요해요. 고만고만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대단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데요. 졸렬한 장면은 없어야겠다는 그것이 목표고요. 글을 쓸 때도 문장 중에 그런 게 있으면 안 되니까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것이야말로 쉽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박찬욱: 어려워요. 영화를 찍을 때 훌륭한 장면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쉬워요. 영화 전체에서 한심한 장면을 하나도 안 만드는 것보다 쉬워요. 영화는 많은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 요소 중에 뭔가 하나가 빠질 수 있거든요. 음악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이 배우가 좋은데 저 배우가 안 좋을 수도 있고요. 요소가 워낙 많으니까요. 그런 게 있죠. 그런 면에서는 <아가씨>가 그런 장면이 가장 적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아가씨>, <친절한 금자씨>,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모두 여성의 이야기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남성 중심 서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단연 돋보이죠. 


정서경: 저는 공교롭게도 여자라 어려움이 적은데 감독님이 대단하신 거죠. 영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게 성별의 문제였어요. 제 직업은 작가지만 킬러다, 회사원이다, 이런 건 극복하기 쉽거든요. 그런데 남자라고 생각하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쓸 때마다 매번 벽을 실감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감독님은 대단하죠.

 

박찬욱: 제가 일하는 곳에 여자 동료들이 많고요. 친한 남자 동료 중에도 남성성이 강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송강호 씨가 좀 남성적인데 점점 안 그렇게 돼가고 있고요. 나는 내가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고요. 그냥 한 개인의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해요. 그것뿐이에요. 내가 남자로서 여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너무 어려워지니까요. 그냥 개인이라고 생각해요.

 

박찬욱 감독님은 얼마 전 <씨네21> 영화계 내 성폭력 대담에 참여하셨어요. 기사가 큰 화제였습니다. 솔직한 고백이나 반성의 말도 많았고요. 일련의 문제들은 결국 권력 문제기도 한데요. 이와 관련해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박찬욱: 모든 성폭력 문제가 권력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고요. 개인의 일탈에서 벌어진 일일 때도 있겠죠. 그러나 다른 모든 범죄라든가 차별 등과 다르게 이것이 진짜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인 거죠. 권력 관계 때문에 벌어지는 것 말이에요. 좌담 제안을 하는 <씨네21> 측에서 섭외가 힘들다고 했어요. 그 이유를 나중에 저도 알게 됐는데요. 하겠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다 말리더라고요. 그런다고 저도 안 할 수는 없고, 좌담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아가씨>를 만든 사람으로서 회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거고요. 그 전부터 좌담이 나올 때마다 전부 읽었어요.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학생들, 여학생들이 지레 겁먹고 현장에 진출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과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겪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였어요.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죠. 하고 싶은 얘기는 거기서 다 했어요.

 

정서경: 첨예한 갈등이 있는 느낌인데요. 저는 낙관적으로 생각해요. 아주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처럼 여성의 권익이 올라온 적이 없었죠. 남성의 시각에서 보면 위기감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첨예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동등해질 수밖에 없고 또 더 많은 갈등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학교 학생 시절 술자리에서 어떤 선생님이 저한테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는 시나리오 작가를 하면 안 돼, 왜냐하면 따먹히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말에서 그 사람의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긴 해요. 그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남성이었나 보죠. 다른 사람의 진입을 그렇게 잠깐이나마 시험하는 느낌이었겠죠. 어쨌든 그렇게 해서 막아질 문제도 아니니까요. 앞으로는 더 여성의 입장이 강력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쓸 때 자아가 달라지는 면이 있지 않나요? <아가씨>, <친절한 금자씨>,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중 어떤 이야기를 쓰는 자아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들려주세요.


박찬욱: 다 다른 이야기라 꼽을 수는 없는 건데요. <박쥐>는 오랫동안 생각했던 작품이라 그런지 그 작품이 제일 커요. 그 안에 내 인생의 삽화가 들어있는 것은 아닌데 성장 배경에서의 천주교의 영향이라든가 하는 식이죠. 어떤 장면은 일부러 좀 비슷하게 한 게 있기도 해요. 신부가 화장실로 쳐들어와서 태주(김옥빈)한테 내가 흡혈귀라서 싫으냐, 그런 이야기를 할 때의 그런 모습은 제가 부부 싸움할 때(웃음)와 비슷하고요.

 

(분을 참는 상현, 손에 쥔 세면대 귀퉁이가 빵 떼어지듯 뚝 떨어진다. 눈이 커지며 벌벌 떠는 태주, 문고리를 잡는다. 상현, 태주 손을 간단히 떼어내더니 구석으로 밀어붙이며)


내가 뱀파이어인 게 뭐가 중요해요? 태주씨, 내가 신부라서 날 좋아했어요? 아니잖아요, 거봐요… 신부라는 건 그냥 직업이잖아요. 그런 거처럼 뱀파이어인 것두 그냥… 그냥 식성이나… 뭐… 생활 리듬의 문제 같은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런 게 뭐 중요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뱀파이어라서 싫어요? 응? 내가 뱀파이어가 안 됐으면 태주씨랑 잤을 거 같아요? (『박쥐 각본』, 56쪽)

 

정서경: 이런 이야기를 감독님은 싫어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모님에 대한 애정의 형태와 <박쥐>에 표현된 애정의 어떤 것이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에피소드가 흡사한 건 아닌데요. 온도나 질감, 이런 거겠죠? 저는 <친절한 금자씨>가 재미있더라고요. 각본을 다시 읽으니까 코미디였구나 갑자기 깨달았어요.(웃음) 그렇게 생각하니 재미있었어요.

 

정서경 작가님 처음 뵙지만 말씀도 시원하게 하시고, 밝은 면이 느껴졌어요.


정서경: 제가 원래 코미디를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게 <아가씨>를 쓰기 직전이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하면서 코미디에 재능이 없다는(웃음) 걸 깨달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는 못하지만요. 다만 영화가 20-30% 정도 코미디가 아니면 못 쓰겠더라고요. 전에 감독님이 끔찍한 장면이 포함된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코미디가 들어갈 수 없잖아요.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절한 금자씨>는 매번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노력하고 있었다는 게 보였어요.

 

박찬욱: 코미디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데에서 그걸 끌어내는 게 진짜 능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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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주 하는 말


<채널예스>에 이경미 감독님이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데요. 두 분은 영화, 각본 작업과 별개로 글을 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정서경: 저는 아까 말씀 드렸는데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이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거예요. 서문도 안 쓰면 안 될까, 엄청 생각했어요. 쓰면 시나리오를 못 써요. 다년 간의 경험으로 깨닫게 된 건데요. 엄청 절약해야 하더라고요.

 

박찬욱: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 세 번째 영화인데요. 처음으로 흥행에 성공할 조짐이 보였을 때 가장 먼저 한 생각이 ‘이제 글 안 써도 되겠다’는 거였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 먹고 살기 위해 하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악몽 같은 기억인 거죠.

 

박찬욱 감독님은 사진집 『아가씨 가까이』도 내신 바 있잖아요. 한 인터뷰에서 “나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지 않는다면 사진작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사진과 관련한 특별한 계획도 있나요? 


박찬욱: 그것은 글 쓰는 것과 다르죠. 좋아서 하는 일이죠. 일단 배우들을 현장에서 찍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한참 나중 계획이지만 전시를 해볼 생각이 있고요. 그 밖에 풍경은, 아직 계획은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느 도시에서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 전시를 하려고 해요. 사실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집 아니면 현장에 있는 게 제일 좋은데요. 영화제나 홍보 때문에 여러 도시를 다녀야 하죠. 사실 글 쓰는 것보다 훨씬 하기 싫은 일인데요. 그나마 어느 도시든지 가면 하루나 이틀 자유 시간을 내서 사진도 찍고 음악회도 가는 낙으로 견디는 거죠.

 

좋아해서, 여러 번 읽은 책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세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서경: 최근 토니 모리슨을 발견했어요. 대학교 때도 읽었던 것 같은데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페이지가 안 넘어가서 끝까지 못 읽었거든요. 요즘은 엄청 잘 읽히더라고요. 최근 어머니의 어떤 면에 관한 드라마를 쓰고 있는데요. 자식을 키우는 심정에 관한 문학 작품을 떠올려보려고 하는데 정말 떠오르지 않았어요. 고민하던 차에 토니 모리슨을 발견하고 이게 내가 찾던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에 겐자부로의『읽는 인간』에서도 비슷한 것을 발견했는데요. 작가가 아들을 삶의 중심에 놓는 과정이 감동적이더라고요. 몇몇 장면도 그랬는데요. 밤새도록 아들이 아파할 때 곁에서 시를 읽어요. 그러면서 세상에 고통을 표현하는 단어가 이렇게 많다는 것과 아들이 느끼는 고통을 발견해나가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박찬욱: 반복해서 읽은 책은 별로 없고요. 번역 소설을 많이 읽어요. 필립 로스 좋아하고요. 커트 보네거트 좋아하죠. 에밀 졸라(웃음) 좋아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는 존 르 카레예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같은 작품이요. 제가 미국인이었다면 한국 소설을 좋아했겠지만 저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큰 것 같아요. 외국 사람이 쓰거나 혹은 미래의 세계를 쓴 작품들에 더 관심이 있어요. 그나마 많이 읽었던 것이 있다면 아마 필립 K. 딕의 단편들일 거예요. 그의 사고방식이 독특해서 자꾸 읽어도 재미가 있죠. SF 소설 많이 읽어요. SF 아주 좋아해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나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질문 드려요.


정서경: 저는 양치 잘하라고 해요.(웃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보면 엄마가 양치 잘하라고 하잖아요. 얼마나 좋은 습관이에요. 저희 아이가 사랑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첫 번째가 뽀뽀해주는 것, 두 번째가 양치하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하도 양치하라고 하니까요. 잘 때도 입 벌려서 양치를 시켜요.

 

박찬욱: 글쎄요. 남한테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는 편인데요. 소주 많이 먹지 말라는 얘기는 하죠.(웃음) 젊을 때 너무 많이 마셔서 안 좋다는 걸 알아요.


 

 

아가씨 각본정서경,박찬욱 공저 | 그책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각본을 책으로 엮었다.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의 공동 집필로 쓰인 이 각본은, 섬세하고 울림이 있는 대사로 다시 한 번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화의 디테일한 결을 만들어낸 지시문과 해설을 읽는 재미 또한 남다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교육학자 이은주, 심리학자 황상민“도대체 공부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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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I는 ‘한국인의 성격 및 라이스프타일을 진단해주는 도구’로 심리학자 황상민 박사가 개발했다. ‘자기평가’와 ‘타인평가(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를 통해 개인의 성격을 다방면으로 진단하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총체적으로 알려”준다. 황상민 박사는 “대부분의 심리학에서 나온 성격 검사가 재료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라면 WPI는 재료가 섞여서 어떤 요리로 나오는가를 밝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WPI에서 분류하는 성격 유형은 ‘리얼리스트’, ‘로맨티스트’, ‘휴머니스트’, ‘아이디얼리스트’, ‘에이전트’ 의 다섯 가지 유형이다. 교육학자 이은주 박사는 WPI를 교육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공부, 삽질하지 마라!』에서 저자들은 자녀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맞는 공부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인간은 평균을 내릴 수 없는 존재”다. 그 천차만별인 개인을 한 공간에서 하나의 목표로 교육시킨 것을 두고 황상민 박사는 ‘사기’라고까지 표현한다. 자기주도 학습, 창의성과 다양성 존중 등 지금까지 말만 무성했던 교육현장에서 벗어나 공부의 본질을 이해하고 새롭게 접근해야 할 때가 왔다. 저자들은 “아이가 진짜 잘살고 있는 것인지,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자해하는 마음으로 고통스럽게 공부하며 사는 것인지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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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성격에 초점을 맞춰야


공부의 핵심을 ‘나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가 공부의 시작이라고요. 그동안 들어온 공부법과 조금 다른 이야기예요.

 

이은주: 공부한다는 걸 흔히 지적인 활동으로만 생각하고 머리가 좋다, 나쁘다부터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나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부뿐만 아니라 일을 한다는 것,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등 모든 영역에서 사람의 성격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성격이라는 부분을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은 굉장히 복잡한 존재예요. 정신적인 작용과 육체적 작용이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거든요. 성격에 따라 같은 일도 굉장히 다르게 받아들이죠.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공부할 때의 태도, 공부에 대한 인식, 공부 방법 등에서 성격에 따라 차이가 나요. 이제는 성격에 초점을 맞춰야 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아이와 부모가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어요.

 

공부 때문에 갈등을 겪는 분들 너무 많죠.


이은주: 아이는 불안해서 공부를 안 하는 건데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한다고 얘기하면 더 상처가 될 수 있어요. 흔히 지능은 유전적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잖아요. 이때 재미있는 건, 부모님들이 나 닮아서 공부 못하는 꼴은 못 보신다는 거예요.(웃음) 나 닮아서 공부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 짜증을 내는 악순환이 생기는데요. 공부도 성격적인 면이 아주 크게 작용하므로 아이의 성격을 이해하고 나면 일단 서로 여유가 생기게 돼요. 개인을 그 인간 자체로 이해하고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거예요.

 

이와 같은 접근은 시대정신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아요. 과거의 공부가 정답 찾기와 암기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개인의 창의성이나 능력이 더 중요한 요소잖아요. 개인에 집중하는 거죠.


이은주: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는데요. 방학 동안 현직 교사 분들과 스터디 그룹을 하고 있어요. 저희가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게 도대체 공부란 무엇이냐는 거였어요. 많은 부모님들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 창의적이고 통합적인 사고가 필요해요. 스스로 자기 공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과거에는 전체나 평균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인간은 평균을 내릴 수 없는 존재잖아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개인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보자는 거예요.

 

먼저 WPI 성격 진단 도구부터 알아야 할 텐데요. 여러 성격 진단 도구가 있죠. MBTI 등의 도구와 WPI는 어떻게 다른가요?


황상민: 대부분의 성격 검사는 사람의 심리 요인이 각각의 특성별로 얼마나 나타나는가를 점수로 보여줘요. 국어 몇 점, 수학 몇 점, 과학 몇 점, 이런 식의 점수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요. 그런데 공부를 잘하는 게 뭘까 하면 국어, 수학, 과학이 몇 점이고, 평균이 얼마라고만 하기는 부족해요. 성격에 대한 것도 그 문제가 있죠. 심리학에서 성격의 기본 요인으로 개방성, 성실성, 정서안정성, 친화성 등을 이야기하는데요. 그것의 점수가 얼마, 라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격 검사예요. 그러니까 점수는 아는데 정작 내 성격이 어떻다는 것인지 알기 쉽지 않아요. 어떤 부분에서 내 장점이 나타나는지, 공부할 때 무엇이 문제인지 같이 내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거나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대부분의 성격 검사로는 크게 도움이 안 돼요. 그에 비해 WPI는 각각의 심리적 특성이 섞였을 때를 봅니다.

 

섞였을 때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요?


황상민: 우리가 음식을 만들 때 재료와 재료를 이용해 만든 요리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하잖아요. 대부분의 심리학에서 나온 성격 검사가 재료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라면 WPI는 재료가 섞여서 어떤 요리로 나오는가를 밝히는 것이죠. 버터, 밀가루, 우유 등으로 빵을 만드는데 만드는 사람에 따라, 숙성과 오븐 온도에 따라 다양한 빵이 나오잖아요. 사람의 성격은 그렇게 나온 각기 다른 빵과 같은 것이지 빵이 되는 재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닌 것이죠. 내가 바게트인지 식빵인지 단팥빵인지를 아는 것이 진짜 중요한 거예요.

 

책에는 WPI를 공부에 활용하는 방법이 굉장히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요. 시간관리, 마음관리, 환경관리 등 종합적이고 다층적으로 다루고 있죠. 책을 쓰실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무엇인지 궁금해요.


황상민:사람들은 공부의 비법을 찾아요. 마치 궁극의 비법이 있고, 그것을 알기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그게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을 베끼기만 하면 모두 예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마음과 똑같은 상황이죠. 성경을 다 외운 목사도 천하의 나쁜 놈으로 살 수 있고, 성경의 시옷도 모르는 분도 얼마든지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는 거거든요. 진짜 효과가 있는 공부법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부분을 분명하게 알리려는 의도가 가장 크죠.

 

실제 사례와 함께 서술하고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WPI 유형 공부법을 적용했을 때 목격한 변화도 있었겠죠?

 

황상민: 어떤 것을 가장 극적인 변화라고 생각할까요? 보통은 성적 향상이겠죠. 그런데 반에서 20등을 하던 아이가 자기 공부법을 알고 나서 1등을 한다, 이것을 기대한다면 1등을 한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에 관한 질문은 안 던지거든요. 그렇지만 그것은 고통이 있는데 일시적으로 진통제 한 대 맞은 것에 불과해요. 그것이 아이의 삶에 있어 어쩌면 더 불행한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걸 부모님이 생각하셔야 해요. 아이 스스로 왜 성적이 좋아졌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1등에서 5등으로, 10등으로 떨어질 일밖에 없거든요. 당장 아이가 한 학기에 성적이 몇 점 올라 몇 등이 오르길 기대하는 부모님이라면 이 책을 읽지 마셔야 해요. 그런 부모님 밑에서 아이가 공부를 잘할 수도 없고요. 아이는 공부를 잘하게 될수록 부모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이 더해질 확률이 높아요.


이은주: 책에 소개한 사례들이 아이가 갑자기 성적이 올랐다거나 하는 것보다 부모님이 아이를 이해하고 거기서 최선을 방법을 찾아나가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는 이야기들이잖아요. 그런 과정을 보면서 함께 하시면 좋지 않을까 해요.

 

그렇다면 어떤 부모님에게 책을 권하고 싶으세요?


황상민: 아이가 진짜 잘살고 있는 것인지,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자해하는 마음으로 고통스럽게 공부하며 사는 것인지 알고자 하는 부모님에게 권하겠죠. 공부가 아이에게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지 알아야죠. 성적보다 그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어요. 자기 삶을 자기가 만들어간다고 느끼는 그런 공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해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성장해야죠. 공부란 그것을 연습하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부모님한테는 이 책이 나름대로 공부의 비법이 될 수 있어요. 


이은주: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부모님이면 좋겠어요. 공부를 통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죠. 식물을 키울 때도 다독이며 키우잖아요. 무조건 빨리 자라고, 큰 열매가 맺도록 할 수 없어요. 나무가 병충해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고 튼실하게 자라서 많은 사람에게 그늘을 만들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봐주셨으면 해요.

 

책에서 한 문장을 꼽는다면 ‘“어떻게 하면 개천에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나” 그 방법을 찾는 것’일 거란 생각을 했는데요. 방금 하신 말씀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요.


황상민: 부모님도 좋지만 특히 학생들, 중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어요. 다들 공부 잘하고 싶죠. 그런데 어떻게 공부하는지 아는 학생은 참 드물어요. 대부분은 주워들은 방법을 따라하려고만 하는데요. 대개 그 방법은 ‘로맨티스트 유형’에 잘 맞는 방법이고, 심지어 그 유형의 학생들도 그 방법을 자기한테 사용하는 것을 괴로워해요. 때문에 공부법을 자기 성격과 함께 이야기하면 학생들의 얼굴이 확 밝아지거든요. 공부법의 어떤 부분이 자기와 맞고, 안 맞는지를 알게 되니까요. 더 이상 공부가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생각이 안 드는 거죠. ‘자기주도 학습’을 많이 이야기하는데요. 정작 자기주도 학습이란 공부하는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는 개념이 가장 기본이에요. 왜 공부가 재미없는지 조금이라고 고민하는 학생이라면 이 책을 읽어봐야 해요.

 

로맨티스트
상징 캐릭터: 고양이
기본 욕구: 감정, 감성 등 사적인 영역을 침해 당하지 않는 것
강점: 감성적, 세심함, 겸손, 자제심, 협조적, 강한 자기 확신, 완벽 추구
약점: 비사교성, 의존성, 감정 표현에 서투름, 민감하고 불안정한 감성, 사춘기 소녀 같은 두려움, 걱정이 많음(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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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가장 많은 유형, 로맨티스트


개인은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사회마다 특히 많은 유형이 존재할 것 같거든요. 구분이 가능한가요?

 
황상민: 그럼요, 한국에 가장 많은 유형이 로맨티스트예요. 자라면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게 ‘리얼리스트 유형’이고요. 그래서 많은 로맨티스트가 조금씩 그 성향을 버리고 리얼리스트로 변신해간다는 표현을 많이 써요.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감정적인데 생활하면서 많이 참고 때때로 그게 안 되니까 다양한 방식, 이상한 행동으로 분출해요. 그 때문이에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한(恨)과 억울함이 쌓이게 되는 상황인 거죠. 로맨티스트 성향이기 때문에 음주가무에 강하고(웃음) 노래방이 골목마다 있어요.

 

리얼리스트
상징 캐릭터: 강아지
기본 욕구: 안정된 현상 유지, 진실한 관계, 타인을 돕고 지원하기
강점: 원만한 인간 관계와 배려, 공감, 인내, 수용성, 안정, 준비 및 조직화
약점: 우유부단, 개방성 부족, 변화에 저항, 타인 의존성(40쪽)

 

다른 사회는 어떤가요?


황상민: 중국에 많은 유형은 ‘휴머니스트 유형’이에요. 어울리고, 북적북적하죠. 그게 리얼리스트 성향과 자연스럽게 결합이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미국 사회 전체적으로 보이는 건 ‘아이디얼리스트 유형’과 리얼리스트 유형이에요. 일본은 ‘에이전트 유형’과 리얼리스트가 아닐까 하고요. 이런 식으로 제 나름대로 이해를 하기 시작했어요.

 

휴머니스트
상징 캐릭터: 원숭이
기본 욕구: 재미있는 활동, 사회적 인정과 관심, 사소한 것으로부터의 자유
강점: 사교성, 친화력, 설득력, 유머, 낙천적, 감정 풍부, 개방적, 자유로운 관계
약점: 지나친 자유분방, 충동적, 디테일에 약함, 말이 많음, 일에 관심이 적음(46쪽)

 

이은주:그것은 어떻게보면 그 사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억누르지 않고 북돋아 키우는 성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국 같은 경우는 어릴 때부터 너의 생각이 무엇인지 묻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게 교육시키잖아요. 아이디얼리스트처럼 튀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해주고요. 반면 한국 사회는 튀면 안 돼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까지 있으니 아이디얼리스트가 살아남기에는 참 척박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에이전트
상징 캐릭터: 꿀벌
기본 욕구: 질 높은 과제 완수, 자율적으로 일할 시간
강점: 일에 집중, 계획성, 분석적, 철저함, 정확함, 우수한 품질, 자율성
약점: 비판적이고 감정 표현이 무딤, 일을 해내는 데 시간이 걸림(52쪽)

 

앞서 시대정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아이디얼리스트로의 성장을 방해하는 한국 사회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시대와 조금 어긋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황상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말은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죠.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리얼리스트가 많은 대표적 특성이에요. 오죽했으면 ‘창조 경제’를 이야기하는 분들이 가장 창조적이지 않은, 통념적인 틀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겠어요. 한국 사회는 어쩌면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세우지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이디얼리스트
상징 캐릭터: 곰
기본 욕구: 자유로운 아이디어, 도전적인 과제, 새로운 결과 성취
강점: 상상력, 창의력, 주도적, 자유로움, 깊이(전문성)
약점: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음, 공동체 의식, 배려(49쪽)

 

그런 차원에서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제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교육적인 면에 한정해서요.


이은주: 일단 개인의 특성을 존중해줘야죠. 하나의 기준, 하나의 틀에 맞추는 것을 너무 강조하잖아요. 학교에서 이상한 질문을 하면 선생님한테 미움을 받고, 다른 아이들에게 불편을 준다고 하고요. 하지만 엉뚱한 질문을 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기회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런 생각의 전환이 없기 때문에 다양성을 억누르게 되는 것 같아요. 교육이 왜 필요하고, 교육이 뭘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을 좀 더 발현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져야 해요.

 

무엇보다 이런 교육이 공교육, 학교 현장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네요.


황상민: 공교육 현장에서 이런 경험이 없었다는 건 우리는 교육을 받은 게 아니라 사실은 사육을 당했다는 표현이 맞는 거죠. 학생의 개별적 특성을 교사가 파악해야 한다는 건 모든 교사가 가장 먼저 듣는 이야기거든요. 개인의 소질과 개성을 키우는 걸 교육이라고 하잖아요. 재미있는 건 한국의 어떤 교사 양성 기관에서도 다른 사람의 소질과 개성을 파악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해요. 그러면서 학생의 소질과 개성을 키운다고 하죠. 이것을 ‘사기’라고 해요.(웃음) 그래서 사교육이 나오는데 그것은 어쩌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부분이 있죠.

 

이은주:선생님들을 만나보면 학생들을 이해를 못하세요. 그러다가 WPI를 배우면서 학생들의 문제적인 행동에 대한 이해가 생기는데요. 그것을 학생들과 이야기하면 학생은 자기에 대해 아무도 그렇게 얘기해주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그 부분을 건드려주니까 그것만으로도 다시 문제 행동을 하지 않게 돼요. 뿐만 아니라 공부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죠. 담임선생님들이 면담을 하잖아요. 이때 할 얘기가 없대요. 그러다 WPI를 배우고 학생과 이야기하니까 할 얘기가 너무 많아진다는 거죠. 학생도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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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아는 것, 관계의 핵심


두 분은 어떤 유형인가요? 자녀와의 관계에서 그 유형의 특성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도 궁금해요.


이은주: 황상민 박사는 아이디얼리스트예요. 저는 에이전트, 아이디얼리스트, 휴머니스트가 같이 있어요. 때문에 저는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밀어붙이고 다 해야 하는 면이 있어요. 휴머니스트 성향이 있어서 급한 것도 있고, 아이디얼리스트 성향이 있어서 생각이 정해지면 해내야 하는 것도 있고요.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서, 힘들었을 거예요. 저는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거든요. 시간이 안 지켜졌을 때면 아이한테 스트레스를 준 거죠. 셋째 아이가 로맨티스트예요. 꼼꼼하다보니 조금 느려요. 늦었다고 야단을 치면 애를 썼는데 엄마가 자기 마음도 몰라주니 서운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것 때문에 계속 속이 상한 거예요. 오래 가죠. WPI를 알고 난 뒤에는 아이의 그런 성향을 아니까 ‘네 사정 아는데 엄마가 마음이 급했어, 미안해’라고 얘기를 해줄 수 있게 돼요.

 

결국 공부뿐 아니라 관계 차원에서 자기와 상대의 성향을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황상민: 특히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이 가장 핵심인 것 같아요. 학생뿐 아니라 직장인도 그렇죠. 전부 조직 안에서의 관계 문제잖아요. 회사 일이 힘들어서 그만 두는 사람은 없어도요. 관계가 힘들어서 그만 두는 사람은 많죠. 사실은 그럴 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내가 어떤 특성 때문에 저 사람과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다음부터는 그걸 문제로 잘 안 느끼게 돼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죠. 워크샵을 해보면 그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어요.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요.

 

공부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라고 할 만한 조언이 있을까요?

 

이은주: 아이가 실수로 틀려온 문제를 부모님은 실력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실수거든요. 그걸 실력이라고 생각해서 그 공부만 끝도 없이 시키죠. 계속 하면 좋아질 거란 생각일 텐데요. 그 결과 아이는 공부는 재미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돼요. 아이가 덜렁거리는 성격이거나 시험 볼 때 불안이 너무 높아서 실수를 한 경우일 수 있거든요. 억지로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니라 아이를 이해하고 모르는 문제 앞에서도 긴장감을 푸는 방법을 알려준다든지 검토하는 습관을 키워준다든지 하는 게 서로에게 더 좋아요. 틀린 문제를 반복시키기보다는 왜 틀렸는지 아이의 마음 상태를 먼저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제 경험담이에요.(웃음) 

 

부모라고 자녀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에요. 그걸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이은주: 부모님의 틀에서만 다 아시는 거예요. 부모님을 위한 워크샵을 하는데요. 그때 고민을 써서 달라고 하면 완전히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아이가 학원에 간다고 하곤 안 갔어요. 부모님은 아이가 거짓말쟁이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는 학원이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곳이라 무서워서 못 간 거예요. 부모님과 아이도 성향이 다르거든요. 그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공부, 삽질하지 마라!이은주,황상민 저 | 들녘
WPI 성격 유형에 따라 자녀가 다섯 가지 유형 중 어떤 성향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부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면, 여러분의 자녀는 학업은 물론 실생활 면에서도 큰 변화와 성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라는 과업에 당면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CCM 아티스트 송정미 “노래가 생명이 될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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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라면 친숙하게 한 번쯤 불러 보았을 노래다. 「축복송」을 노래하는 가수 송정미는 6장의 정규앨범과 여러 영화의 OST, 컴필레이션 음반 작업 등에 참여하며 ‘CCM 계의 대모’, ‘CCM 계의 디바’ 등으로 불린다. 2015년에는 카네기 홀에서 단독공연을 열어 전석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울러 크리스마스마다 진행하는 <크리스마스 인 러브> 공연은 송정미의 대표 공연으로 꼽힌다. 작년 12월 진행한 <크리스마스 인 러브>만 해도 15회째, 내년이면 데뷔한 지 30년 차 베테랑 가수다.


찬송가의 형식에서 벗어나 다른 장르의 음악을 포용하면서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친숙한 음악이 되었다. CBS 음악방송 JOY4U 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가수 송정미를 만나 그가 생각하는 CCM이란 무엇인가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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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곧 사랑


<크리스마스 인 러브>가 송정미의 대표적 공연으로 손꼽힙니다. 무슨 내용의 공연인가요?


일반 공연의 2/3가 연말연시에 나와요. 하지만 정말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나누는 크리스마스 콘서트는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의미를 나눌 수 있는, 가족과 다른 세대가 같이 크리스마스를 즐거워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어요.


일 년 동안 안식년으로 외국에 있었을 때 빼놓고 2000년부터 열다섯 번을 진행한 공연이에요. 외국에 살 때 프로듀서들이 하는 음악회를 갔는데, 정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면서 크리스마스 음악회를 했어요. 쉬는 시간에 아프리카 아이들 후원을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너무 충격을 받고 한국에 와서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하기 시작했죠.


작년에는 앵콜로 콘서트를 한 번 더 하셨어요.


공연 관련 기사를 보시고 싱글맘 단체에서 전화가 왔어요. 이번에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고 해서 너무 기대했는데 한 번 더 해주시면 안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공연을 이분들을 위해서라도 해야겠다 하고 공연장을 급하게 찾아서 앵콜 공연을 했어요. 결국 적자가 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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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크리스마스 인 러브> 공연 중

 

이 공연에는 ‘러브 시트’라는 상징적인 자리가 있습니다. 좌석의 10분의 1을 탈북자나 미혼모 등을 위해 남겨놓는 자리인데요.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일반 콘서트로 따지면 제 공연이 그렇게 비싸진 않을 거예요. 7, 8만 원 정도 하는데 아시다시피 10만 원 넘는 자리도 이제까지 기업이 많이 사서 진행했잖아요. 하지만 개인이 사기에 뮤지컬 공연이 아닌 바에는 그렇게 싼 가격이 아니죠. 기독교인은 십일조라는 개념이 있잖아요. 저희는 자리의 십일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자리가 귀한 자리이지만 정말 오고 싶은데 올 수 없는 사람들, 해외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편찮아서 한국에 오셨거나, 미자립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이 자리를 내어드리는 거죠.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기본 정신인 ‘박애’나 ‘나눔’ 등과도 연관이 될 텐데요.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교회의 목사님들은 한 달에 100만 원, 어쩌면 50만 원도 못 받으시고 사역하시는 분들이거든요. 정말 귀하게 사역하시는 분들을 초청하는 자리인 거죠. 미혼모도 평생에 한 번 배 속에 있는 아이와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고요. 올해 특히 주목한 건 외국인분들이었어요. 유학생이나 노동자분들이요. 외국인들은 연말연시가 가장 외로운 때예요. 어떤 면에서는 한 번도 음악회에 오지 못했던 외국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그런 친구들한테도 한국의 따스한 크리스마스를 맞게 해주고 싶었어요.

 


제목도 ‘크리스마스 인 러브’입니다.


처음부터 크리스마스는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어요. 사랑을 나누는 게 크리스마스라고요.

일일이 초대할 분을 찾는 것도 일이겠어요.


15년 동안 하다 보니 좋은 기관을 많이 알게 됐어요.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단체나, 미혼모만 해도 재단이 많아요. 그런 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고 오신 분들에게 피드백을 받아서 다음 공연에 참고하기도 하죠. 이번 공연은 1,000석짜리 공연장에서 했지만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일주일 동안 할 때도 있어요. 그러면 하루는 탈북자를 위한 콘서트를 열어서 그분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게스트로 모시고 공연하는 거죠.


2013년에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더 축복송>이라는 브랜드 콘서트도 하셨었죠. 내년이면 30년 동안 노래를 하신 거네요.


직업은 다들 가지고 있지 않나요? (웃음) 그전에도 노래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불려 제 이름으로 노래한 게 30년이 된 거겠죠. 그냥 그 일을 계속 하다 보니 30년까지 온 것 같아요.

 

 

약한 목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대표곡으로 「축복송」이 떠오릅니다. 이 곡에 남다른 마음이 있을 것 같아요.


대학교 때 선교사가 되길 원했어요.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음악을 전공하게 됐죠. 그러던 와중에 성대에 혹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노래는커녕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어요. 이야기할 수도 없고, 노래할 수도 없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어요. 노래를 못하니 피아노 앞에 앉아 하염없이 피아노만 치고 있는데 그때 귀에다 대고 불러주듯이 이 노래를 작사, 작곡했어요.


지금도 목이 안 좋은 상태인가요?


남들보다는 조금 약한 편이에요. 하지만 오히려 목이 약하니까 더 구조에 대해 공부하게 됐고, 어떻게 목을 써야 할지 더 연구하나 보니 약한 목이 저한테는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약함 때문에 오히려 소중한 걸 알게 됐고요. 산소가 잠깐 없을 때 우리가 산소가 얼마나 필요한지 느끼는 것처럼, 저한테 목소리가 얼마나 귀한지, 또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오늘은 쓰지만, 내일 제가 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요.


그 전에 작곡을 연습하셨다거나 했나요?


피아노를 치면서 습작은 했었죠. 하지만 그 곡이 30개 국 넘게 번역되어 불릴 줄은 몰랐어요. 일전에 중국에 갔을 때 중국어로 이 노래를 부르는데 사람들이 다들 따라 부르는 거예요. 정말 놀랐죠. 제가 곡을 잘 짓는 사람도 아니고, 영감이 올 때만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이죠.


「축복송」 이후에도 다른 곡을 만드셨어요. 이 외에도 마음에 남는 곡이 있나요?


「오 대한민국」이라는 곡이요. 누구나 나라를 걱정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게 또 있는 것 같아요. 매주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에서 큰 지도에 손을 얹고 다 같이 기도하는 와중에 이 노래를 그냥 주셨어요. ‘오 대한민국 하나님의 사랑 / 이제 일어나 네 삶을 드려라 / 오 대한민국 하나님의 나라 / 이제 일어나 네 빛을 발하라’. 아주 간단한 노래예요. 누가 후렴구만 적은 거 아니냐고 그러더라고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남과 북이 하나 되어서 지도에 있는 젊은이들이 일어나 함께 손을 잡고 나가는 상상을 하고 불러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카네기홀 공연에서도 「오 대한민국」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카네기 공연장이 그렇게 좋은 공연장은 아니에요. 하지만 상징적이죠. 중극장은 요청하면 되지만 대극장은 개인 콘서트로는 허가가 잘 나지 않아요. 일반 팝 가수들도 카네기에 섰다고 하면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도 신청을 하면서 당연히 안될 줄 알았어요. 이제까지 한국 가수는 패티김, 조용필, 이선희, 인순이, 김범수 다섯 명만 섰던 무대였거든요. 그중에 매진된 사람이 김범수밖에 없어요. 제가 카네기 무대에 선다고 하니까 미국 이민 간 지 오래되신 분들도 말리시더라고요.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콘서트를 통해서 보여드리고 싶은 우리의 음악도 있었어요. 국악으로 노래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서, 기타리스트 함춘호 씨부터 시작해 국립 국악원의 솔리스트들 다 모시고 가서 콘서트를 했죠. 당시 유엔 오준 대사님도 공연을 보러 오셨는데, 이렇게 감동적으로 애국적인 마음을 주는 노래와 공연이 카네기 콘서트홀에서는 처음이었다고 너무 고맙다고 그러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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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카네기홀 콘서트.


기독교 음악이 콘서트장에서 불리긴 쉽지 않았을 텐데요.


CCM이라고 하지만, 기독교 음악이라고 해서 종교적인 노래라고 보기보다는 사랑이 베이스로 된 노래를 하는 거죠. 가요, 팝송, 동요 무엇이든 부를 수 있어요. 영화음악이나 뮤지컬 넘버를 부를 수도 있고요.

 

 

CCM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CCM 장르 특성은 메시지의 문제지 형식의 문제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모든 장르가 이 안에 다 있죠.


그렇다면 차별성을 가진 게 결국 메시지일 텐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게 있나요?


글쎄요. 크리스천들이 교회만 다니는 건 아니잖아요. 밥 먹으러 식당도 가는데, 식당도 기독교인 집만 찾아서 가나요? 맛있는 집에 가죠. (웃음) 기독교인이라서 기독교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CCM은 사랑과 화해와 용서가 들어간,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노래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모든 시를 종교적으로 풀지 않듯이, 스님이 설법하실 때 모든 걸 종교로 환원하지 않듯이, 무엇을 통해서든 그분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는 거잖아요. 저는 노래도 똑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제가 CCM 가수인지 아닌지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콘서트에 오신 분들에게 어떻게 제 메시지를 노래를 통해 전달할까, 이 노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말로 설명하지 않아요. 누군가 콘서트에 왔을 때 노래를 통해 감동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 진실을 말로 풀지 않고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해 감동을 주는 건 중요해요. 미술 작품에 해설이 쓰여 있어서 감동이 오는 건 아니잖아요.


누군가 앨범평에 ‘일렉과 드럼 소리가 너무 많다, CCM 음악에 전자음은 별로다’라는 평을 남겨놨더라고요.


얇은 생각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피아노보다 기타를 먼저 잡고 ‘문학의 밤’ 같은 행사에 다니면서 노래했던 사람인데, 클래식 성악을 배운 이유는 오페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기 위해 기본을 배우고 싶었던 거였어요. 어떤 사람은 CCM을 음악 장르로 생각하지만, CCM에는 락, 헤비, 레게, 모든 게 있어요. 제가 국악도 부르고 재즈도 부르지만 장르 구분 없이 음악 자체가 소중해요.


특히 이번 크리스마스 공연에 「그 푸른 날에」라는 곡을 불렀어요. 세월호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 그 나라에서 만난다면’이라는 가사로 시인과 촌장의 노래를 부른 이후에 이 곡을 불렀어요. 개인적인 신앙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아픔, 우리나라가 겪은 상처를 노래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우리가 시청광장에서도 노래를 부르지만 제 무대에서도 그들과 함께 촛불을 나눌 수 있는 게 뭘까 제 나름대로 고민하고 부르는 거죠. 세태가 세태인 만큼 작년처럼 크리스마스가 크리스마스 같지 않은 날이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야말로 더 크리스마스가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성악과 나오셨는데, 학생 때는 알토 음역이었나요?


소프라노예요. 하지만 마이크를 들면 발성을 완전히 바꿔서 낮은 톤의 노래로 불러요. 마이크에 가장 적합한 소리를 찾는 거죠. 노래에 따라서도 창법을 바꾸고요.


소프라노 식의 화려한 음색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런 게 편하게 다가가서 인기의 비결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크게 외쳐야 할 곡은 외쳐야 하겠지만, 한 사람을 놓고 말할 때는 웅변하듯이 말하지 않잖아요. 어떤 노래는 읊조리듯이 혼자 불러야 하고요. 제 노래는 말하는 게 노래하는 것 같고 노래하는 게 말하는 것 같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좋은 노래를 들으면 노래를 듣는다 생각이 안 들고 내 인생에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추억 속에 잠기게 되잖아요. 그건 좋은 노래가 될 수도 있고, 좋은 설교가 될 수도 있겠죠.


찬송가랑 비(非)찬송가랑 구분하지 않고 들으시는 편인가요? 다른 인터뷰에서는 양희은 선생님의 곡을 많이 듣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어릴 적에 해금가요를 들었거든요. 「그 날」을 듣는데 ‘싸움터엔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 오늘이 그날일까 / 그날이 언제일까’, 이런 가사가 너무 충격이었어요. 또 노래 중에 「연못」도 ‘깊은 산 오솔길 옆 / 자그마한 연못에’로 시작하잖아요. 그 연못이 밥그릇 가지고 싸우다가 썩었다는 거죠.


대학 다닐 때도 데모 때문에 학교가 많이 쉬었어요. 예전에는 크리스천이 했을 법한 고민을 가요에 많이 심어서 노래했어요.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 같은 노래도 있었잖아요. 자신만을 위했던 사람들과 다르게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해서 희생을 당하는 게 기독교 리더십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내 것을 챙기고 말씀을 우리를 위해 인용하는, 우리의 입맛에 맞게 쓰면 뱉고 달면 먹는 메시지가 생겼죠.


역시 기독교의 근본 정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하나님이 말씀한 메시지는 그게 아니었을 거예요. 고아와 과부를 위한 거였고, 작은 자를 위해 울라는 말씀이 가장 중요했거든요. 하지만 철창을 치고 그 안에서만 노래하는 거죠. 적자가 나면서도 콘서트를 하는 이유는 세상 속으로 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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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생명이 될 수 있는 곳


콘서트로 시작했는데 다시 콘서트로 돌아왔네요. (웃음) 사실 교회가 위기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공격적인 선교라든가, 목사들의 성폭력 문제도 불거졌고요. 그런 위기 상황에서 음악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실 것도 같아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이제까지는 무례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빚진 자라서 먼저 한 사랑을 나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주체가 나라는 교만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진실은 통하고 진심은 나눠진다고 믿어요. 하지만 진심이 그냥 나눠질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진심은 표현할 때만 나눠져요. 100년 전에도 선교사가 와서 뭔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삶을 던지며 우리 민족이 필요했던 교육과 의료를 나눴을 때 순수한 열매가 일어났잖아요. 지금도 빚진 마음으로 제3세계 가서 그런 음악회를 하고 있어요. 가수들은 소속사도 있고 연결된 게 많아서 하고 싶어도 못 가지만, 저는 그냥 저 혼자 가서 하면 되니까요.


지금도 1년에 삼 개월 정도는 외국에 나가 계신다고요.


체첸 같은 나라는 예전에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때 파병해서 도와준 나라예요. 하지만 그 나라는 지금도 전쟁의 폐허가 느껴지죠. 그런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나눠줬던 사랑을 고마워하면서 노래를 통해 제가 사랑을 나눠주면 그들 최고의 찬사가 자기 몸에 있는 장식을 빼주는 거래요. 자신의 영혼을 나눠주는 의미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장신구를 나눠주면서 이렇게 위로받은 적이 없다고 하실 때 제일 행복하죠. 난민촌이나 아이들에게 가서 사진찍고 보여주는 거, 저는 그런 자료 별로 없어요. 순수하게 나눌 때 순수하게 받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릴 통해서 불가능한 일을 행하신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는데, 누군가는 기자님이 쓴 글을 보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을 수 있는 것처럼 제가 부른 한 소절이 버려진 것 같은 누군가에게 너를 잊지 않고 있다고 손잡아 줄 수 있는 손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꿈이 있으시다면요?


지금 다 얘기한 것 같아요. (웃음) 지금 CBS에서 생방송을 하면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데, 청취자분들 중에는 정말 나를 위한 방송이었다고 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게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그걸 계속 하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저를 부를 수 있는 교회나 사람들은 저에게 비용을 지급할 수 있어서 부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저를 부르고 싶지만 차비도 줄 수 없는 곳, 하지만 노래가 생명이 될 수 있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노래가 너무 많아서 홍수 같은 이 시대에 그 노래가 다 그 노래 같잖아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손길 같은, 엄마의 품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선재 스님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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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선재 스님이 물었다. 오래 전, 부처님께서 남기신 물음 그대로다. 시대는 달라도 두 수행자가 설파하려는 진리는 똑같다. “음식은 곧 삶의 문제”이며 “음식은 우리의 삶과 사상, 몸과 마음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너무 거창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면 오늘 하루, 그리고 지나간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 되돌아보자. 시간에 쫓겨 대충 한 끼를 때우거나 강렬하게 혀끝을 자극하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지는 않았나. 그러는 동안 ‘내 몸을 살리는 음식’에 대한 고민은 뒤로 밀려났을 것이고, 감사한 마음과 충만한 감정을 느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잘’ 먹으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40여 년간 선재 스님이 만들고 알려온 사찰음식에는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기별로 몸이 필요로 하는 식재료들, 그 본연의 맛을 살리는 조리법, 음식을 통해 깨닫게 되는 세상살이의 이치가 맛있게 버무려져 있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헤아리다 보면 자타불이(自他不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다’는 연기(緣起)의 법칙과도 닿아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밥상을 마주하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 밥을 먹고 ‘나’라는 생명이 다른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어떤 음식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먹느냐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 곁에 있는 아픈 이들이 건강해지고 삶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라는 마음으로 사찰음식을 알려온 선재 스님은 지난 2016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불교조계종단으로부터 최초로 ‘사찰음식 명장’을 수여 받았다. 이미 1994년에 사찰음식에 대한 최초의 논문(「사찰음식문화연구」)을 발표했던 스님은 자신에게 찾아온 큰 병(간경화)을 이겨내는 데에도 사찰음식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음식 수행자’로 살겠다는 결심으로 학교, 종교기관, 기업 등에서 4천여 회의 강연을 이어오면서 사찰음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르 꼬르동 블루를 비롯해 세계를 무대로 한국의 사찰음식을 알리고 있으며, 어린이 뮤지컬 <그거 알아요? 음식은 생명!> 제작에 참여하는 등 아이들의 음식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앞서 『선재 스님의 이야기로 버무린 사찰음식』, 『선재 스님의 사찰음식』을 집필했고, 새롭게 출간된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에는 지나온 삶과 사찰음식을 전하며 겪은 소소한 이야기들, 불교에서 전하는 음식에 대한 지혜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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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몸에 필요한 건 ‘해초, 무’

  

스님, 건강은 괜찮으세요?


보시다시피요(웃음).

 

다행입니다(웃음). 간경화는 완치 판정을 받으신 건가요?


그렇죠.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건 아니고요. 유지하고 살아요.

 

스님께 사찰음식을 배우러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는 본인이나 가족이 아프신 경우도 있을 텐데요. 어떻게 하면 스님처럼 나을 수 있는지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뭘 먹으면 좋으냐고 물어보시죠. 그런데 한 마디로 ‘무얼 먹으면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그걸 먹는다고 해서 낫는 것도 아니거든요. 병이라는 건 오랜 세월의 잘못된 식생활과 생각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같이 다스려야 해요. 서서히 음식을 바꿔줌으로써 내 몸의 에너지를 바꿔줘야 되죠. 그러려면 몸에 좋은 걸 먹어야 하는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버리는 거예요. 제가 ‘몸에 안 좋은 음식은 먹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잘 안 먹어요’라고 말씀하시곤 하는데, 저는 ‘아예 드시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해요.

 

인터뷰 전에 스님께서 수업하시는 모습을 봤어요. 오늘은 어떤 음식을 만드셨나요?


계절의 변화에 의해서 우리 몸도 변화가 됩니다. 겨울이 되면 동물도 잠을 자고 나무들도 나뭇잎을 떨구고 자기 안에 에너지를 만들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 움직이죠. 이럴 때는 움직이는 에너지의 음식이 필요해요. 바다에 있는 해초와 계절을 머금어서 말려놨던 것들을 꺼내서 먹어줘야 할 시기죠. 그래서 무말랭이, 고춧잎, 무를 가지고 요리를 했어요. ‘겨울 무는 산삼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이, 무는 다른 음식을 해독해주고 몸에 잘 흡수되게 만들어 주거든요. 그리고 겨울에 먹어야 될 나물 중에는 바다 나물도 있지만 집에서 물을 주고 키울 수 있는 것들, 숙주나 콩나물 같은 것들도 있어요. 오늘은 이런 재료들을 가지고 요리를 했습니다.

 

파래 무침도 만드신 것 같더라고요.


파래와 숙주로 전을 부쳤고요. 생미역 무침, 몰(모자반) 무침, 무 조림을 만들었어요. 콩나물과 가을 야채를 다져서 유부 속에 넣기도 하고요. 오후에는 호두를 넣어서 만두를 만들 거예요. 스님들은 육식을 안 하시니까 만두소에 고기 대신 호두를 넣는 건데요. 우리 뇌에 필요한 영양이 당과 산소인데, 겨울에는 햇빛도 많이 못 보고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서 산소도 많이 공급이 안 돼요. 그래서 건뇌식(建腦食, 뇌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식품)인 호두를 넣어서 뇌에 필요한 영양을 흡수하게 도와주는 거예요. 또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생강으로 엿을 만들 건데요. 생강차보다 가지고 다니기도 쉽고, 조금씩 먹으면 몸이 따뜻해져요.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에서도 각각의 계절에 먹으면 좋은 사찰음식을 소개해 주셨어요. 겨울 메뉴 중에서 추천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무 조림, 무말랭이 같은 것도 좋고요. 배추된장찜도 맛있어요. (지금) 배추가 굉장히 맛있어서 된장 하나만 넣어도 되거든요. 배추를 씻어서 아무것도 넣지 않고 은근하게 익혀요. 그리고 배추가 다 익으면 뚜껑을 열고, 마지막에 된장만 넣고 한 번 볶아서 내놓는 거예요. 찢어서 먹으면 굉장히 달고 맛있어요. 배추는 수분이 많고 섬유질이 풍부해서 대장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잖아요. 된장은 발효음식이니까 장을 편안하게 해주고요.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장 운동을 도와주는 거예요. 그리고 열을 식혀주거든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열도 있지만 위로 솟는 열도 있는데, 그 열을 내려줌으로써 몸의 순환을 시켜주는 역할을 해요. 특히 아토피가 있는 아이들한테 굉장히 좋음 음식이죠. 비타민도 많고요. 음식은 맛으로도 먹고 영양으로도 먹지만 ‘이 계절에 이 음식을 먹으면서 어떤 에너지를 받을 것인지, 몸 안의 독소를 어떻게 빼줄 것인지’도 살펴서 음식을 만들어야 해요.

 

스님께서 만드시는 음식은 많은 재료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만드는 과정도 복잡하지 않아요. ‘이렇게 만드는 것만으로 스님과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을까’ 의아하기도 해요.


수업에 오시는 분들 중에서도 절에 다니시는 분들은 고기나 생선, 파, 마늘이 음식에 안 들어간다는 걸 아세요. 그런데 다른 종교의 분들은 이 재료들로 무슨 맛을 낼 수 있을까 의아해 하시죠. 그리고는 맛을 보고 깜짝 놀라세요. 저는 무말랭이를 만들 때도 물에 담가놓지 않아요. 그러면 맛과 비타민 D 같은 것들이 빠져나가거든요. 그냥 물에 씻어서 잠시 놔뒀다가 만들어요. 그래도 달고 맛있어요. 본래 가지고 있는 맛과 에너지를 살려서 먹는 거죠.

 

많은 재료를 넣어야 맛있어지는 건 아니네요. 


무언가를 많이 넣고 손이 많이 가야만 요리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런 요리도 있어요. 그렇지만 요즘 같이 바쁜 시대에 간단하면서도 맛있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거든요. 우엉, 연근, 고춧잎, 무말랭이는 물에 담가놓지 않고도 먹을 수 있어요. 시금치도 데친 후에 씻지 않고 찬 데 내어놨다가 무쳐먹으면 굉장히 달고 맛있어요. 별 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재료 자체의 맛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맛도 영양도 함유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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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져요


‘가르쳐주신 대로 만들었는데, 스님이 만들어주신 그 맛이 안 나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안 계세요?


있죠. 간장, 된장, 고추장이 달라서 그래요.

 

역시 ‘제대로 만든 장’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음식의 전통은 발효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한국 음식을 안 먹고 살아요. 저는 요리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장과 김치를 담글 줄 아냐고요. ‘그 두 가지를 하지 못하면 요리사라고 말하지 마라, 한국 사람이라면 어느 나라 요리를 하든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은 지켜야 된다, 그 간장과 된장을 가지고 서양 음식을 만들어 봐라’라고 말하죠. 우리 음식은 발효된 장을 가지고 채소가 가지고 있는 독도 해독하고, 맛도 중화시키고, 우리 몸에서 거부반응 없이 잘 흡수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음식이라는 것은 남의 생명이잖아요. 남의 생명을 나의 생명과 합할 때 중화시켜주는 역할이 바로 발효된 장과 김치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장과 김치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제 수업에서는 직접 담근 장으로 음식을 만들어요.

 

음식이 몸뿐만 아니라 정신과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건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예요.


경상도 사람들은 성격이 어떤 것 같아요?

 

불 같은 것 같습니다(웃음).


경상도 사람들은 짜고 맵게 먹잖아요. 전라도는 산과 들과 바다가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식 재료가 굉장히 풍부하죠. 그래서 음식 인심이 좋아요. 음식 인심이 좋으면 마음에 여유가 많거든요. 그래서 예술인들이 많이 태어나잖아요. 충청도는 심심하고 덤덤하게 먹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충청도 사람들은 순하다고 이야기하죠. 답이 나왔잖아요.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그 지방 사람의 성품을 이야기하듯이, 우리도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 마음이 주어지는 거예요. 음식이 우리 마음과 영혼을 평화롭게 해줄 수도 있는 거죠. 스님들은 음식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수행을 이룰 수가 없어요. (사찰에서) 파와 마늘을 안 먹는 것도, 익혀 먹으면 음력(陰力)이 나고 날로 먹으면 화가 난다고 해서 못 먹게 한 거예요.

 

책 제목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는 부처님께서 물으셨던 질문이기도 하다고요. 부처님께서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잖아요. 행복 하려면 건강한 몸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평화로워야 하죠. 스님들은 영혼이 맑아야 돼요. 그러려면 맑고 건강한 음식이 토대가 되어야 하거든요. 음식이 맑고 건강 하려면 좋은 땅, 좋은 물, 좋은 공기, 좋은 햇빛이 있어야 하잖아요. 좋은 땅, 좋은 물은 나에게 좋은 음식 재료를 주는 거니까 자연의 생명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음식 속에서 느끼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배려하고 먹어야 된다는 거고요. 발우공양도 마찬가지예요. 음식 찌꺼기를 땅에 버리지 않음으로써 공해를 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그 땅이 너와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음식을 소홀하게 대해요.

 

그런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돼야 할 것 같아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야 되고 음식을 어떻게 선택해서 먹어야 되는지 가르치지 않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꿈을 이루고 났는데 몸이 망가져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러기 전에 어릴 때부터 아이들한테 음식을 어떻게 선택해서 먹어야 되는지, 왜 음식을 만들어야 되는지, 그 음식 속에서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을 알게 해줘야 해요. 그럼으로써 삶이 방식이 달라지게 만들어줘야죠. 그러면 풀 한 포기 공기 한 모금이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낸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실 수가 없죠.

 

어린이 뮤지컬 <그거 알아요? 음식은 생명!>의 제작에도 참여하셨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음식 교육을 꾸준히 이어오고 계신데요. 이유가 있나요?


‘음식 수행자’로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유치원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좋은 음식을 먹는 문화를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서 아토피 아이들, 자폐증 아이들을 음식으로 치유하게 됐어요. 정말 음식을 통해서 많은 변화가 오더라고요. 성격에도 변화가 오고, 자폐증 아이들도 (증상이) 많이 완화가 되고, 아토피는 음식만 바꿔주면 낫고는 했어요. 이걸 더 활성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한테 요리를 가르치게 됐죠. 그래서 뮤지컬도 만들게 된 거예요. ‘쌀 미(米)’에는 8이 두 개가 있잖아요. 농부의 손이 88번 가야 쌀 한 톨이 나온다는 건데, 그 내용을 각본으로 써서 뮤지컬을 만들었어요. 

 

뮤지컬을 본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학교에서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저희가 집간장만 넣고 끓인 감잣국을 만들어줬는데, 처음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먹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아이들이 야채볶음밥도 안 먹는데 소고기도 안 넣고 양파도 안 넣은 국을 먹겠느냐고요. 그리고 애들이 나물도 안 먹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걸 다 먹은 거예요. 김치도 다 먹고,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요. ‘나는 앞으로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은 무조건 감사하게 먹겠습니다, 자연에 감사하겠습니다, 환경운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깜짝 놀랐죠. 그 이야기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어요. 그래서 당시에 메르스 때문에 난리가 났었는데도 불구하고 스물다섯 군데의 학교와 유치원에 가서 5천 명의 아이들 앞에서 공연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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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맛으로만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


스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기에 아이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걸까요?


아이들한테 이 음식이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 이야기해줘요. 얼마나 고마운 음식인지 말해주고요. 당근 하나를 가지고도 ‘이 당근을 500원 주고 사왔는데, 이건 500원짜리가 아니란다’라고 말해주죠. 당근이 자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면 아이들이 다 대답해요. 땅도 있어야 하고 물도 있어야 하고 농부도 있어야 한다고요. 그러면 당근을 생으로 썰어서 아이들한테 하나씩 주면서 이야기하죠. ‘눈을 감고 당근을 씹으면서 이 속에 있는 햇빛도 보고 땅도 보고 물도 보고 바람도 보거라, 그리고 농부의 수고로움도 생각해 보고, 스님이 어떻게 요리를 했는지도 생각해 봐라’ 그러면 아이들이 너무 감사한 표정으로 앉아있어요. ‘자유롭고 조화롭게 먹고 나면 우리 몸이 저절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튼튼하고 지혜로워진다’고 말해주면 아이들이 다 먹죠. 자기 몸에 좋다는데 왜 안 먹겠어요(웃음).

 

사찰음식을 먹으면서 불교 철학을 접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말씀에서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럼요. 아이들에게도 ‘이건 그냥 당근이 아니라 수많은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해줘요. 당근을 뽑는 사람, 당근을 담는 박스를 만든 사람, 그 박스를 싣고 온 운전사 아저씨, 아저씨가 타는 차를 만든 사람, 그 모두의 손을 거친 거라고요. 내가 돈을 주고 샀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니고, 많은 인연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알려주는 거죠. 그러니까 각자가 행복해야지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땅도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내가 행복해야 물도 행복한 거죠. 제가 아이들한테 요리를 가르치는 것도 자연의 생명이 나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예요.

 

‘먹방 시대’라고 불리는 요즘,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잘’ 먹는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지금 우리의 음식문화에 문제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혀의 맛으로만 먹는다는 거죠. ‘이것이 과연 나와 나의 생명, 내 몸에 얼마만큼 좋은지’, ‘음식이 약이라고 했는데 진짜 나한테 약이 되는지’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내가 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닭이나 돼지한테 우리가 무엇을 해주고 먹느냐는 거예요. 한 스님은 이 책을 읽고 울면서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자신이 왜 이걸 깨닫지 못했는가, 하고 통곡을 했대요(웃음).

 

프랑스의 르 꼬르동 블루 등 해외에서도 다수의 강연을 해오셨어요. 사찰음식을 처음 맛본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반응이) 대단합니다. ‘자연의 생명이 나와 둘이 아닌 하나이고, 자연의 재료를 쓸 때는 꿀벌이 꽃을 해치지 않고 도움을 주면서 꿀을 가지고 오듯이 해야 한다’고 하면 기립박수를 쳐요. 지금까지 서양음식이라는 것이 자연을 배려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르 꼬르동 블루도 옥상에 텃밭을 만들었고, 에꼴페랑디도 그렇게 키우고 있어요. 거기(에꼴페랑디)에 오랫동안 저한테 요리를 배운 프랑스 친구가 있는데, 저한테 ‘사찰음식은 어떻게 만듭니까?’하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어떤 답을 들려주셨나요?


어떻게 한 마디로 이야기해줄 수 있겠냐’고 하면서도 ‘네가 한 마디로 물으니까 나도 간단하게 설명할게’ 하고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오늘 이 배추를 2000원 주고 샀는데 우리는 2000원짜리라고 말하지 않아, 이 배추가 내 손에 오기까지는 수많은 농부의 손길을 거쳐야 하고 배추가 자라기 위해서 모든 자연계의 생명이 함께했어, 그러니까 이걸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해야 돼’라고요.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올려주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듯이, 배추를 보고 부족한 것과 장단점을 살펴서 필요한 재료를 찾고 요리라는 수행을 통해서 음식을 만든다는 거죠. 그건 배추가 자기 안의 생명을 이룬 것이고 그렇게 요리를 해야 된다고 했어요. 그 친구가 제 말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고, 프랑스에 가서 그렇게 열심히 했더니 명장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고 프랑스에서 인사를 하러 왔었어요.

 

스님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고, 더 쉽게 사찰음식을 접하면 좋겠다는 의견들도 있어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사찰음식과 관련해서 어떤 사업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어요.


수행자니까요. 제가 할 일은 사람들의 의식을 바꿔서 입맛을 바꿔주는 일이죠. 제가 만약 어떤 분과 사업을 하게 되면, 그 분이 저한테 기대하는 바가 있잖아요. 수행자가 돼서 그 분의 기대치를 모른 체 할 수 없잖아요. 그 일에 매진해야 되죠. 그러면 돈을 벌고 노후에 편안하게 지낼 수는 있겠지만, 제가 수행자로서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잖아요. 좋은 음식문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생명들이 함께 행복하고 건강하도록 이바지해야 하는데, 거기에 매진할 수는 없죠.

 

사찰음식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싶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어요. 현실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한 일인데, 사업을 시작하시는 것도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 않나요?


사찰음식을 통해서 그 분들(투자자)한테 돈을 벌게 해준다는 것은 양심을 조금 팔아야 되는 일이에요. 사찰음식은 돈 버는 수단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그 부분이기도 해요. 사찰음식을 통해서 돈을 벌 수가 없어요. 정직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돈을 벌려면 음식이 고가여야 하는데, 그것이 누구를 위해서 필요하냐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장을 담가 먹고 제철음식을 먹으면 돈이 많이 들지 않잖아요. 그런 운동을 자꾸 해 나가야죠.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선재 스님 저 | 불광출판사
이 책은 선재 스님이 ‘음식 수행자’로 살면서 그동안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 일상에서 당장 해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레시피를 담았다. 이를 통해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 음식과 생명의 가치, 곧 모든 생명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음식은 곧 생명, 먹는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승오, 홍승완 “전환기를 거치면 인생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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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과 가정, 인간관계에서 지칠 때, 하는 일에 흥미와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인생이 한 번에 변할 전환점을 기다린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때, 예전에 살던 모습과 딴판으로 변화한 사람을 볼 때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운석에 꽝 하고 맞은 것처럼 특별한 계기로 전환점을 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절한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위대한 멈춤』은 먼저 ‘하던 것을 멈추’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저자 박승오, 홍승완은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에서 만나 오랫동안 ‘인생의 전환기’라는 주제를 연구했다. 예술이나 학문,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전환기를 겪은 18명의 사례를 정리하고 저자가 실제 겪은 전환기의 체험을 솔직하게 적었다. 수녀원의 삶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온 카렌 암스트롱, 직장인이었다가 1인 기업가가 된 구본형 등 평범한 사람들, 혹은 자신과 맞지 않은 길을 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전환기를 거쳐 자신의 틀을 깨고 나왔는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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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내용

 

집필하는 데 꽤 오래 걸리셨을 것 같아요. 분량 자체가 많아요.

 

박승오 기획까지 하면 거의 2년 가까이 썼어요.


홍승완 출판사 다섯 곳에 제안했는데 그중 두 군데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일 먼저 연락이 온 게 열린책들이었죠.


기존의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나오던 책과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박승오 저희도 많이 의외였어요. 열린책들은 주로 번역서를 많이 내니까요. 좋아하는 출판사라는 이유로 별 기대 안하고 제안했었거든요.


홍승완 실제 독자 투고를 받아서 책으로 나온 게 출판사에서 거의 없던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꿈이 없어도 괜찮아』, 『시계를 멈추고 나침반을 보라』등 예전에도 공저 작업을 하셨어요.


박승오 저희 둘이 작업한 세 번째 책이에요. 2월에 책이 하나 더 나오는데 그것도 공저로 작업할 거예요.

 

일을 같이하면 틀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잖아요. 합이 잘 맞으셨던 건가요?


박승오 처음부터 잘 맞은 건 아니지만 가치관이 맞았어요. 성격은 또 아주 달라요. 예전에는 승완이 형이 외향적인 사람이었고,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었죠.


홍승완 재능은 상호보완적이었어요. 방점이 어디 찍혀있나에 따라 다른데, 콘셉트나 목차를 잡을 때 서로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승오 목소리가 많이 들어가요. 그 안에서 어떤 사례를 쓰고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 제목 등은 제 의견이 더 많이 들어가는 편이에요.


혼자 책을 쓰기보다 둘이 쓰는 데 장단점이 있을 것 같아요.


박승오 많은 분이 오해하시는 게 공저를 하면 n분의 1로 노력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실제로 작업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오히려 공저자 간의 톤 세팅이라든지, 생각이 안 맞는 부분을 조율하는 게 힘들어요. 쉽게 책을 쓰려고 같이 쓰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어서 혼자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책이 나오겠다 싶으면 공저를 하죠.


홍승완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공저가 혼자 쓰는 것보다 어렵지는 않은데 복잡해요. 둘이 한 공간에서 서로 소통하면서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시간도 조율해야 하고요.


글을 쓰는 방식이 ‘나’를 주어로 하고 괄호로 이름이 들어가요. ‘나’가 두 명인 셈인데요.


박승오 평범했던 사람이 비범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은 책이었거든요. 독자들 입장에서는 이미 책에 나온 사람들은 비범한 위인이고 자신과는 뼛속부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랑은 다르다는 상반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이 간극을 메꿔 주는 다리로 저희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저희는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전환기를 통해 삶이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환기는 존재가 우선하는 시기


‘전환점이 아니라 전환기’라는 말을 해주셨어요. 극명한 사건보다는 특정 기간이 사람을 더 바꿔준다고 하셨는데요.


박승오 하나의 사건에 의해 사람이 바뀐다면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바뀌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간디가 인종차별 때문에 일등석 표를 가지고도 삼등석 칸으로 밀려난 수모를 겪고 변화가 시작되는데, 그 당시 비슷한 수모를 당한 사람은 엄청 많았을 거란 말이죠. 간디는 전환점으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의 의미에 대해 곱씹고 반추하면서 자기 삶의 목소리를 듣는 기간을 통해 바뀐 거예요. 그렇게 놓고 보니, 많은 인물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바뀌어야겠다는 마음이 촉발되지만 그 이후에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공통적인 패턴이 보이더라고요.


사람마다 인생의 전환기가 다 다르잖아요.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부터가 내 변환기의 시작인지 궁금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홍승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일단 사건이 자기를 압도하는 경우가 있어요. 임사 체험 같은 커다란 사건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사건이 자신을 바꿔요. 하지만 그런 케이스보다는 대부분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그 사람이 마음이나 태도로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 사건과 공명하면서 사건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고민을 시작하게 돼요. 내가 회사를 떠나야 하나? 이 스승 밑으로 들어가야 하나? 어떤 일이든 고민을 하게 되는데 그 순간 소명이나 부름이 오는 걸 보통 사람들도 대부분 알아채요. 중요한 건 그 순간 결단을 내리고 모험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생계의 이유나 가족의 이유 등으로 못 떠나느냐. 그 차이가 있죠.


박승오 방법 중 하나가 최근에 겪었던 사건을 곱씹어 보는 건데요. 저희는 삶의 계기를 네 가지로 구분해 봤어요. 첫 번째는 익숙한 장소나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경우예요. 이민을 갔다거나 친한 사람이 돌아가셨다거나 하는 사건이 있겠죠. 두 번째는 기존의 역할을 잃어버렸을 때도 해당돼요. 팀장이었는데 파면됐다거나, 자녀가 독립해서 부모 역할이 없어진 경우도 있겠죠. 세 번째는 우상에 대해 환상이 깨지는 경우예요. 존경하는 사람의 부패한 모습을 보았다거나 했을 때요. 마지막이 방향감각을 잃어버렸을 때예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목표를 성취했는데 막상 보니까 내가 원하던 게 아닌 거죠. 그런 경우들을 1,2 년 내에 겪었다면 한 번쯤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는 거죠. 이 사건이 그저 불운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전환기가 시작됐다는 걸 알려주는 삶의 메시지일 수 있다는 거예요.


유사전환 이야기도 하셨어요. 전환인데 전환이 아닌 경우도 있나요?


박승오 전환기의 핵심 단어는 실험과 성찰이에요. 성취, 속도, 효율성은 전환기와는 거리가 있어요. 책에도 비유를 들었지만 비료는 금비와 퇴비가 있죠. 금비는 화학 비료고 퇴비는 자연적으로 썩힌 비료인데, 효율성으로 따지만 화학 비료가 훨씬 빠르고 효과적일 거예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쓰면 땅을 훼손시키잖아요. 한 번쯤은 느리고 멈추더라도 퇴비를 써서 땅을 회복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속도나 성취감에 어울리는 걸 유사 전환이라고 표현했어요.


홍승완 다른 비유를 써 보자면 전환기는 시추의 기간이에요. 여러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1만 시간의 법칙, 10년의 법칙, 심층 훈련 등으로 불리는 직업적 전문성은 한 군데 정해서 깊게 파서 이루어지는데, 파기 전에 어딜 파야 할 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인생이 땅이라면 어느 정도 넓게 파 보다가 공유하는 지점을 만나게 되면 직업적 수련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넓게 파는 게 전환기에 이루어진다는 거죠.


땅이 남아나질 않겠네요. (웃음)


박승오 그래서 내면에 집중해야 해요. 내면의 나침반을 잘 보고 공명하는 지점을 파 보고, 아니라면 다른 데를 파 보고요. 그러면 땅이 좀 온전하겠죠. (웃음)


홍승완 내면의 방향성과 외면의 방향성이 다를 수 있는데, 외면의 방향성이라면 직업이나 관계를 생각할 테고, 내면이라면 소명이나 자기 가치관, 믿음이 바뀌는 걸 거예요. 믿음이 바뀌는 것도 큰 영향이거든요. 의사결정의 기준이 달라지는 거니까요.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결국 걸리는 게 밥벌이잖아요. 전환기는 ‘존재가 우선해야 하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금전적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홍승완 당연히 밥벌이는 힘들죠. 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전환기를 보낸다고 모두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람마다 달라요. 직업을 가지고 전환기를 거칠 수도 있어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신이 선택해서 월든 호수에 들어가 전환기를 보냈는데, 원하지 않아도 세상과 은둔하게 되는 케이스도 있어요. 중요한 건 전환한다고 해서 돈을 벌지 말아야 한다거나 가족을 버려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가족 분들은 전환기를 보내겠다고 하자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박승오 결혼하고 나서 두 번의 전환기를 거쳤는데, 다행인 건 아내가 가치관에 동의해 다니던 회사에 휴직 신청을 했어요. 회사에서 욕은 많이 먹었는데 개인적으로 잘했다고 생각해요. 제 밑에서 일하던 친구도 저 때문에 힘들었다고 욕하다가 나중에 찾아와서 부러웠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찾아보면 그런 식으로 가족의 동의를 얻거나, 아예 굶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전환이나 성찰을 모색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폴 고갱도 직업을 유지하면서 그림을 그렸고요. 가능하면 그런 방법으로 안전하게 연착하는 게 제일 낫죠.


홍승완 삶의 흐름이나 운명이 그렇게 안 가기도 해요. 저는 전환기에 들어간 외부적 계기가 직장 생활 번아웃이었어요. 직장 다니면서 책을 세 권씩 쓰다 보니 다 소진된 거죠. 그렇게 5년을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인생 계획이나 목표를 세울 수는 있지만,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열려 있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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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넘어서는 의미


책을 읽는 방법을 세 가지로 제안해 주셨어요. 꼭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고요.


박승오 책도 두껍고, 인물들도 대단해 보이잖아요. 대단한 사람과 평범한 우리 사이를 잇는 게 이 책의 목적이었으니, 발췌해서 읽어도 괜찮아요. 전환에 쓰이는 아홉 가지 도구를 나열했지만 그 아홉 가지를 모두 써서 전환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대개 한두 가지, 많아야 세 가지를 시도했으니 부담 가지지 마시고 선택해서 읽으셔도 돼요. 중요한 건 적용이죠.


전환은 ‘경험의 크기가 아니라 깨달음의 크기’라는 말이 있는데, 그럼 어떤 경험이든 깨달음을 크게 얻으면 되는 건가요?


홍승완 여기서 말하는 사건은 상징적 사건이에요. 남들이 봤을 때의 강한 사건이 아니라 본인에게 강한 감정을 주는 사건이어야 해요. 예를 들어 저는 꿈을 하나 꿨는데, 그 꿈은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 있거든요. 제가 꿈을 분석한다거나 점을 보는 사람도 아닌데 너무 강렬해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본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사건들은 생각보다 자주 와요. 우리가 복권 당첨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사건을 기다리는데, 그 사건이 무수히 오는데 사건에 대해 성찰하지 않거든요.


박승오 극명한 사례가 제 경험인 것 같아요. 3일 동안 녹내장 때문에 실명해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당시 의사들이 6개월은 실명 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저한테는 큰 사건이었단 말이죠. 하지만 이 사건이 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기까지 3년 반이 걸렸어요. 아무리 사건의 크기가 크더라도 스스로 의미를 파악해보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능력이 안 되면 그냥 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해요. 사건 자체나 크기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건을 어떻게 곱씹는가가 중요한 거죠. 크든 작든 삶이 분명히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요.


전환기를 거쳤다고 생각되는 18명의 사례를 들어주셨어요. 사례를 뽑은 기준이 있나요?


박승오 날 때부터 천재였던 사람은 일단 배제했어요. 모차르트나 피카소, 아인슈타인, 이런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으로 주목을 받았거든요. 그런 사람들 말고 평범했지만 삶의 어떤 지점에서 도약한 사람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뽑았어요.


홍승완 저와 승오가 이제까지 공부했던 사람들을 쭉 뽑아서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본 거죠. 전환기가 뚜렷한지, 평범함에서 비범한 인생으로 변화했는지 등이요. 모든 사람이 다 전환기를 거쳐야지만 위대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자연법칙이라기보다는 전환기가 맞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을 찾다 보니 18명이 된 거죠.


박승오 소개하는 전환기 도구는 9가지인데 도구당 두 사람씩을 소개하다 보니 책이 두꺼워졌어요. 자칫 잘못하면 ‘책 읽기’라는 도구에 조셉 캠벨만 넣는다면 사람들이 조셉 캠벨처럼 읽어야 한다고 오해하실 것 같았거든요. 조셉 캠벨과 카렌 암스트롱이 책 읽기를 통해 전환기를 거쳤지만, 둘이 전환기를 맞은 계기도 다르고 책을 읽은 방식도 달라요. 차이점을 보여줘서 그 안에서 독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뽑은 거였어요.


9가지 도구 중 두 분에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전환기의 도구는 무엇인가요?


박승오 저는 두 번의 전환기를 겪었는데, 첫 번째 전환기에는 스승이었던 구본형 선생님이 가장 큰 도구였어요. 처음에는 구본형 선생님이 쓴 책이 좋아서 찾아갔다가 스승으로 모시고 지내는 시기가 오래되면서 구본형 선생님의 사소한 몸짓 하나, 말 한마디 이런 게 정말 큰 배움이다 싶었어요. 두 번째 전환기에는 책과 글쓰기였죠.


홍승완 저도 첫 번째는 스승이었어요. 서른 네 살부터 시작된 두 번째 전환기에는 독서랑 글쓰기, 여행 등을 겪었죠. 오랫동안 전환기를 겪어서인지 도구를 다양하게 써봤던 것 같아요.


전환기를 거치면 과업을 이루게 된다고 하셨잖아요. 두 분께 전환기 이후 과업은 책 쓰기였던 건가요?


홍승완 책 쓰기와 취업이요. 제가 들어가고 싶었던 컨설팅 회사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 학력이나 경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어요. 취업했는데 다 명문대 출신이고, 모두 석박사 학위가 있었고요. 컨설팅이라는 업종에서 적응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과업이었어요.


박승오 저는 책이었죠. 원래 공대생으로 책은 거의 읽지도 않았었는데, 어떻게 책을 쓰는 프로젝트에 제 운명이 걸린 거죠.

 

대담한 과업이라고 하지만, 그게 꼭 인류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든지 하는 성취는 아닌 거네요.


홍승완 전환기 이후 프로젝트의 특징이 세 가지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엄청나게 거대한 건 아니지만 본인을 넘어서는 의미나 가치를 지향한다는 거예요. 아주 큰 업적은 아니지만 아주 도전적인 과제죠. 대개의 자기계발서가 이런 행동을 하면 위대해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너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다 정도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박승오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과업이 되는 거죠. 정답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40명 정도 인물을 보면서 어느 정도 패턴은 보였지만 A를 하고 B를 하면 C처럼 성공한다는 공식은 없었거든요. 이 책은 창문에 불과해요. 내가 길을 떠나기 전에 한 번 쓱 보고 내가 무슨 일을 겪을 거라는 간접 체험을 하는 거고, 결국 목적은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문을 열었을 때 참고할 만한 사항으로 여러 사례를 드린 거죠.


홍승완 여기서 말하는 전환은 개인적인 전환이지만, 전환하고 나면 개인한테는 전후가 확실해요. 제자였던 사람이 스승이 되기도 하고, 직장인이었던 사람이 전문가가 되거나 1인 기업을 시작하기도 하고요. 모방했던 사람이 창조자가 되기도 해요. 그 사람이 달라지면 그 사람의 가족과 그 사람이 몸담은 조직이나 분야도 결국에는 달라지겠죠.


전환기 도구 중에 글쓰기도 있었어요. SNS 글쓰기하고 전환기의 글쓰기는 다르다고 적어주셨는데요.


홍승완 보통 글을 쓸 때는 표현하기 위해, 드러나기 위해서 글을 써요. 보고서나 기획서, SNS 글쓰기 모두 설득하거나 주장하는 밖을 향한 글쓰기인데 전환기는 안으로 들어가는 글쓰기예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전환기의 글쓰기는 자기성찰적 글쓰기인 것 같아요. 외부 사건이나 사람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겪은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 곱씹는 내향적 글쓰기인 거죠.


박승오 글쓰기를 통해 인생을 전환하고자 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건 블로그나 SNS 글쓰기라고 봐요. SNS에 올리는 글은 대개 결국 자신이 이렇게 잘살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과시하고 싶은 거거든요. 그게 강해지면 안으로 곱씹는 과정이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글쓰기와 연관해 개인사를 작성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쓰면 되나요?


홍승완 자기 과거를 돌아보면 돼요. 일기하고는 다르게 자기 이야기를 써 보는 거예요. 특정한 질문을 가지고 20페이지 정도 써본다든지 하는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쓰면 도움이 될 거예요. 실제로 써보면 효과가 확실해요. 내가 나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면 다시 자기를 알게 되거든요.


박승오 자서전이라고 하면 유명한 사람들이 쓰는 거잖아요. 그 사람의 이야기는 역사, 즉 히스토리가 되죠. 하지만 그의 이야기 말고 미(me)스토리, 내 이야기도 한 번 써보자는 거죠. 그러면 나를 발견하는 폭이 훨씬 더 크게 돼요. 글을 안 써 봐서 부담스러우시면 연보로 작성하셔도 돼요. 몇 년도에 뭘 했는데 어떤 느낌이었는지 적는 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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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대로 살아야 한다


그 모든 전환기를 거쳐서, 결국에는 세상으로 귀환해야 될 텐데요. 앞에도 질문 드렸지만 귀환해서 어떤 식으로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홍승완 시대가 맞아서 운이 좋다면, 전환기를 통해 얻은 보물을 세상에 내놓으면 반응이 좋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대체로 그렇지 않거든요. 그럼 세상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포기할 건 아니라는 거죠. 틈새시장을 찾아보든지 일부라도 나눌 수 있는 모임을 운영할 수도 있고요. 예로 들었던 조셉 캠벨도 20대 후반의 고학력 백수였지만 전환기를 거치고 5년 정도 지나서 박사 학위 없이 교수로 귀환해요. 처음에는 교수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르치면서 그 자리에서 전환기로 깨달은 천명인 신화를 공부해서 책을 내는 거죠.


박승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면 쉬워요. 하지만 예를 들어 헤비 메탈 장르를 하고 싶던 음악가가 시대를 못 맞춰서 댄스 음악을 했어요. 나중에 유명해져서 자기가 원하는 장르를 할 수도 있지만, 한 번 변질된 자기 색채를 되돌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 같아요.


홍승완 다른 이야기지만, 예를 들어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게 힘들다고 말하면 저는 반대로 물어봐요. ‘그럼 꿈이 없는 채로 사는 게 쉬우냐?’ 그것도 아니거든요. 단순 비교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면 둘 다 쉬운 인생은 없는 건데 자신한테 기회를 줘 볼 수는 있는 거죠.


두 분 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에서 만났다고 하셨는데, 홈페이지를 찾아 보니 ‘책으로 세상에 공헌하기 위해’ 연구소를 운영한다고 나와 있더라고요. 세상에 공헌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홍승완 기본적으로 책은 세상과 나누려고 쓰는 거니까요. 자기의 이득만을 위해 책을 쓰는 저자나 작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식이나 정보 차원에서 도움이 되는 차원의 책이 있을 거고, 또 어떤 책은 작가의 개인사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용기나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박승오 책을 읽고 누군가 바뀐다면 책의 의무는 다한 거죠. 책을 읽기 전보다 따뜻해졌거나, 생각이 깊어졌거나요.


이 책으로는 어떤 결과가 나왔으면 하나요?


박승오 목표를 두고 쓴 책은 아닌데요. 누구나 자신을 너무 잃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특히 직장인들은 일만 하는 것 같고요. 하지만 쉴 수도 있어요. 쉰다면 그 시간 동안 그냥 놀게 돼서 후회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클 거예요. 그래도 내가 쉬면서, 멈춰서 얻을 수 있는 게 질주를 해서 얻는 것보다 많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래도 용기를 내서 멈출 수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고 한 번쯤 했으면 좋겠어요.


홍승완 책을 읽고 성찰하고 실험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됐으면 하고요. 또 하나 바람은 읽으면서 자신을 탐험하고 알아갈 수 있는 도구를 한두 개라도 깨달았으면 해요. 책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더 연구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더 바랄 게 없죠.


박승오 거기다 책까지 잘 팔린다면 더욱 바랄 게 없죠. (웃음)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이 있나요?


박승오 전환기 전에는 정말 계획적인 인간으로 살아왔거든요. 두 번째 전환기를 거치고 나서 영성에도 관심이 생기면서 내 생각과 계획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로막고 있지 않았나 하는 각성을 겪었어요. 앞으로 계획을 물어본다면 앞으로 계획이 없는 게 제 계획이에요.


홍승완 제 의지와 화두는 ‘쓴 대로 살아야 한다’ 예요. 이제까지는 멋모르고 말하고 쓰고 책을 냈는데 이 책 쓰면서 다른 의미로 자기검열이 심해졌어요. 제가 자격이 있는지, 제가 못하는 걸 사람들한테 하라고 말하는 게 아닌지 고민이 들었거든요. 이제는 그러지 않고 말하는 것과 삶 사이의 간격을 줄여봐야죠. 그렇게 말해야 진정성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삶이 펼쳐지겠죠. 삶이 질문을 주면 저는 제 대답을 갖고 가는 거죠. 정답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제가 답을 만들어가면 되니까요.


 

 

위대한 멈춤박승오,홍승완 공저 | 열린책들
『위대한 멈춤』은 자신의 인생에 의문을 품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들은 예술ㆍ학문ㆍ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18명의 평범했던 인물들의 전환기를 탐구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저자 본인들의 전환기 체험을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녹여 냄으로써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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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가장 철학적인 동물은 인간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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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진중권 교수가 고양이 책을 쓴다고 밝힌 후, 독자들의 반응이다.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는 진중권의 저서이지만, 진짜 저자는 따로 있다. 바로 진중권의 반려묘로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 ‘루비’. 루비는 서문에서 “고양이는 인간의 자식이 될 수 없다”며 고양이중심주의를 선언한다. 루비의 발도장이 찍힌 책을 읽노라니, 미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곰곰 반추하게 된다. 고양이가 좋아서, 진중권의 글이 좋아서, 이 책을 꺼내든 사람은 이제 퇴근길 동네 어귀에서 만나는 길고양이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루비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지 못하고 꼭 ‘인간화’했던 삶을 반성해.”

 

연남동 골방에서 산책냥 루비와 동거 중인 4년차 집사 진중권을 만났다. 아쉽게도 루비는 집사와 동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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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질문을 던지는 동물

 

책 주인공이 ‘루비’잖아요. 루비의 표지 데뷔를 기대했는데요.

 

(웃음) 촬영이 어려워요.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엄청 발버둥을 칠 거예요. 우연히 찍히는 건 괜찮지만, 완벽히 포즈를 잡고 찍는 건 불가능해요.


대한민국에 루비 팬이 정말 많아요.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도 루비의 존재는 알 정도니까요. 본격적으로 책을 쓰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리서치는 작년 3월부터 시작했고 집필에 들어간 건 8월쯤이에요. 원고를 마무리 지은 건 11월 말경이고요. 자료는 계속 모으고 있었어요. 노트에 필기도 하고 사진자료도 계속 모으고요. 논문들 살펴보고 서지까지 살펴본 상황이라 초안을 크게 안 잡았어요. 크게 역사학, 문학, 철학으로 나누면 좋겠다 싶었고, 쓰다 보니 역사학이 가장 큰 범위를 차지했어요. 책을 쓰기 시작할 땐 저도 어떤 책이 나올지 몰라요. 들어가봐야 알죠.

 

가제가 따로 있었나요?

 

처음부터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였어요. 고양이 관련 글을 찾다가 우연히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글을 접했어요. 데리다의 강연 제목이 <L’Animal que donc jesuis>인데 우리말로 ‘고로 내가 그것인 동물’쯤 됩니다. 이 문장으로 데카르트의 느낌도 나게 하면 좋겠다 생각해서 지은 게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였죠. 부제목 ‘지혜로운 집사가 되기 위한 지침서’도 T. S. 엘리엇의 책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요. 원래대로 하면 ‘Old Possum이 들려주는 고양이들에 관한 실용서’ 뭐 이런 얘기인데, Old Possum(주머니쥐)이 T. S. 엘리엇의 별명이죠. 원제와 너무 다른데 나쁘지 않았어요. 저는 슬쩍 ‘집사’로 바꾼 거예요.

 

올해로 4년차 집사 생활을 맞이하셨다고요. 루비의 충직한 집사가 되기까지 시행착오도 있으셨을 텐데요.

 

선배 집사들이 말하는 온갖 경험담을 다 들어봤죠. 고양이 카페에서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고요. 궁금한 점의 대부분은 인터넷에 다 나와 있어요. 문제는 자기 고양이에 맞는 진리가 없다는 거예요. 고양이는 각기 식성도 다르고 모래에 대한 선호도도 달라요. 루비만 해도 먹는 취향이 대단히 까다로워요. 한 시리즈로 나오는 간식에서도 먹는 게 있고, 안 먹는 게 있을 정도니까요.

 

19세기 중반 고양이는 시인들의 소울 메이트였습니다. 교수님은 “고양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철학적 물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던질 줄 알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양이를 키우기 전에는 동물의 권리를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관계를 맺으면서 완전히 다른 체험을 했어요. 고양이는 개와 확연히 달라요. 개는 아기 같지만, 고양이는 다 자란 사람 같아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난 너의 모든 걸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동물이에요. 개는 우리가 보호해줘야 할 존재라고 한다면, 고양이는 독립된 인격이라고 할까요? 또 다른 윤리적 주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어요. 가끔 화장실에서 루비의 시선을 느낍니다. 왠지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면, 루비가 서랍장 가장 꼭대기에서 저를 보고 있어요. 당혹스러운 느낌과는 또 달라요.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줄 때가 많아요. 고양이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항상 어딘가 멀리 있는 듯한 언캐니uncanny한 존재예요. 그래서 마녀화의 대상이기도 했고, 19세기에는 예술가들에게 찬양의 대상이 된 거죠.

 

고양이 자료를 찾아보면서 충격적이었던 역사도 있었나요?

 

사실 책에 안 쓴 이야기도 많아요. 캣맘, 캣대디들이 너무 상처를 받을까 봐 덜어낸 부분이 있어요. 이집트에서는 신전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제물로 바쳤어요. 고양이를 영속화한다고 하지만 결국 죽이는 거죠. 엄청나게 많이 죽였어요. 미라를 만들기 위해 신전에서 고양이를 키웠으니까요. 한 마리를 죽여 미라를 세 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고양이에 대한 책이 은근히 많아요. 반려견만큼은 아니지만요.

 

고양이 책들의 문제가 뭐냐면요. 다들 우리 고양이 예쁘다로 경쟁만 하고 있다는 거예요. 고양이를 키우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와 있지만, 하나가 없어요. 고양이는 질문을 던지는 동물이라는 사실, 즉 인문학적인 존재라는 점이 빠졌어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이 체험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쓴 거예요. 누가 제게 강아지 버전을 쓰라고 한다면, 저는 못 씁니다. 경험이 없으니까요. 고양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어서 나올 수 있었던 책이에요. 처음에는 ‘훈민정음’으로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인간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루비묘제 훈인정음’이라고 해서 “고양이 말씀이 인간에 달아”라고요.(웃음)

 

문학작품에 등장한 고양이 이야기도 흥미롭더군요. 특히 인상적인 작품이 있었을 것 같아요.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이 현대문학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인상적이더라고요.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보면 주인공 고양이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이런 말을 해요. “세상에 고양이로 태어나 산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나만 한 식견 있는 고양이는 달리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일전에 무어라는 동족이 느닷없이 나타나 기염을 토하는 바람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최근에 고양이 무어의 삽화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루비와 너무 닮은 거예요.(웃음) 이번 책을 쓰면서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도 새롭게 다가왔어요. 이야기에만 빠져서 책을 읽었는데, 고양이를 중심에 놓고 읽으니 모든 게 다르게 읽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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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루비

 


대선 후보를 정하는 기준은? ‘집사’

 

고양이 이름은 총 3개라는 이야기도 재밌더라고요.

 

T.S. 엘리엇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고양이 이름 짓기」예요. 사람들이 고양이 이름을 짓는 방식은 다양해요. 색깔이나 모양에 착안하기도 하고 청각적 인상이 예쁜 말을 고르기도 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에서 따오기도 하죠. 사르트르의 고양이는 무(無), 데리다의 고양이는 ‘로고스’, 푸코의 고양이는 ‘광기’, 카뮈의 고양이는 ‘이방인’이에요.

 

‘루비’는 교수님께서 좋아하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서 따온 이름이고요.

 

오래 전 출판사에서 비워준 주택에서 책 작업을 할 때, 아침마다 나타나 참치통조림 하나를 비우고 가던 삼색 고양이의 이름은 ‘뒤샹’이었어요. 그 고양이를 만날 때 제가 마르셀 뒤샹에 관해 쓰고 있었거든요. 재작년 동네에서 만난 고양이는 ‘베냐민’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요. 지금은 좋은 데로 입양을 가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요.

 

가끔 고양이의 삶이 부럽기도 하시나요?

 

그렇죠. 집사가 다 해주니까요. 하지만 가끔이에요. 동네를 떠도는 길냥이를 보다 보면, ‘내가 루비를 데려온 것이 잘한 일일까’ 생각해요. 인간과 같이 살면 고양이는 밖으로 나가질 못하잖아요. 나가도 반경 30m 안이에요. 루비는 산책냥인데, 30m 이상은 안 나가요. 나가게 하면 불안해해요. 산책을 할 때도 철저히 자기 중심으로 움직여요.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차들이 막 오잖아요. 자동차가 와서 확 한 번 멈춰서면 그 뒤로 방향을 못 찾고 집에 못 들어와요. 그게 두려워서 집 밖을 잘 못 나가죠.

 

‘루비’ 집사로서의 진중권 에세이를 기대한 독자들도 있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전혀요. 저는 인문학 저자이기 때문에 사적인 이야기를 책에 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오글거리잖아요. 프롤로그랑 에필로그를 쓰면서도 오글거려서 힘들었죠. 제가 만약 사적인 에세이를 썼다면, 고양이 사료부터 꼼꼼하게 소개했겠죠? 그런데 대한민국 캣맘, 캣대디의 섬세함을 제가 못 따라가요. 저도 사료를 신중하게 고르긴 하지만, 애지중지 키우진 않아요. 가끔 놀아주긴 하지만 대부분이 따로따로. 서로 쿨해요. 쿨하게 있다가 자기가 보고 싶을 때 오는 거죠. 목숨 걸고 키우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고백하자면 프롤로그랑 에필로그가 가장 재밌었어요. 진 교수님 글 같지 않은 느낌도 있어서요.

 

제가 견딜 수 있는 오글거림의 최대치예요.(웃음)

 

루비에게 동생을 만들어줄 계획은 없으신가요?

 

힘들어요. 단독주택을 갖고 있으면 모를까, 지금 환경에서는 어렵죠. 가끔 ‘고양이에게 가장 좋은 삶은 뭘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길냥이처럼 지내게 해주다가 가끔 병원에서 건강 체크만 해주는 게 제일 이상적인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고양이를 품종별로 가격을 매기는 일은 분명 ‘고양이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행동일 겁니다.

 

품종묘를 선호하고 높은 값에 고양이를 사고 파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고양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천 5백 만 원짜리 고양이가 막 뉴스에 나오곤 하잖아요? 정말 화가 납니다. 저는 그냥 길냥이를 키우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고양이 하나 하나마다 다 희귀하고 독특한 존재이니까요. 희귀묘를 자랑하는 사람은 절대 고양이를 키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잖아요. 반려묘가 늘어가는 이유 중의 하나예요.

 

예전에는 ‘Dog Person’이라고 불렀잖아요? ‘Cat Person’이라고 하면 재수없고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고 인식되고요. 이제는 사회가 민주화되고 자유로워지면서 자기 독립성이 강한 사람들이 사랑을 받는 측면이 생겼어요. 개는 외로움을 굉장히 많이 타지만, 고양이는 훨씬 잘 견뎌요. 이런 측면에서 고양이가 계속 사랑 받는 게 아닐까 싶어요.

 

책을 다 읽고 보니, 고양이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재밌게 읽겠다 싶었어요.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를 의외의 독자에게 추천하신다면요?

 

의외일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안희정 충남지사에게는 책을 보냈어요. 그 분이 고양이를 키우시거든요. “하늘이 아빠에게, 루비 아빠가”라고 적어서 보냈는데 아직 봤는지는 모르겠네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게도 책을 보내야 하는데, 지금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서 아직 안 보냈어요. 제가 대선 후보를 고르는 기준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인가’예요.(웃음) 고양이가 청와대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영국 수상관저에는 수석 수렵 보좌관이 있어요. 관저에 출몰하는 쥐를 잡는 그 고양이 이름이 ‘쥐잡이 수석보좌관’이에요. 우리도 경비대장이나 명예직으로 고양이를 뒀으면 해요. 유엔사무총장처럼 1대부터 역대 초상화도 좀 걸고요.

 

동물의 권리를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제가 동물들에게 동일한 권리를 주자, 혹은 선거권을 주자라고 급진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는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동물에게 잔혹하게 하는 사람은 인간에게도 잔혹하다라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논리란 말이에요. 히틀러가 개를 얼마나 좋아하고, 레닌도 고양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동물에게 잔혹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런 방식의 철학적 논의들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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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아쉬우면서 아쉽지 않다

 

최근에는 단독 저서를 많이 안 쓰셨어요. 공저로 나온 책은 꽤 있고요.

 

공저로 나온 책은 제 책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본의 아니게 나오는 경우가 많고요. 강의를 했는데 1년 후쯤 그 강의를 책으로 묶자고 하면, 거절하기 좀 어렵잖아요. 간혹 여러 명이 쓴 책을 낼 때, 제 이름을 앞세우면 스트레스가 좀 심해요. 그래서 되도록 안 내려고 해요.

 

출간 기획안을 많이 받으실 텐데요.

 

받긴 하지만 의미가 없어요. 수락해서 책을 쓴다고 해도 완성될 때 보면 기획한 내용이 아닐 때가 많아요. 완성될 때 보면 기획한 내용이 아닐 때가 많아요.  책은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 쓸 준비나 마음이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쓰기 시작하면 문장을 만드는 게 힘들어요. 즐겁지가 않으니까요.

 

그럼 교수님의 책은 편집자의 역할이 조금 작겠네요.

 

그렇진 않아요. 제가 구성을 다하고 책을 쓰지만, 단행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꽤 어렵잖아요.만들 때 호흡이 굉장히 중요해요. 교정을 보고, 틀린 내용이나 정보를 찾아내는 것도 편집자의 역할이니까요. 꼼꼼하게 자료를 찾아주면 저자가 작업하기가 훨씬 수월해요. 책을 여러 권 같이 만든 편집자라면 중요한 것을 딱딱 집어내죠. 이미지 같은 경우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은 서핑하는 수준이 다르잖아요. 훨씬 좋은 이미지를 찾아주니까 책이 더 탄탄해질 수 있어요.

 

지금까지 낸 책 중에 저자로서 좀 아쉬웠던 책은 없나요?

 

글쎄요. 뭐든 끝나면 아쉬운 법이니까요. 하지만 아쉽다고 생각했으면 책을 안 냈겠죠. 모든 책은 아쉬우면서 아쉬운 점이 없어요.

 

채널A 예능 프로그램 <외부자들>에 출연 중이세요. 방송이나 외부 강연을 수락할 때 기준이 따로 있나요?

 

그런 거 없어요. 사람들은 편집의 왜곡 같은 걸 두려워하는데, 저희는 쉽게 말하면 디지털 배우예요. 생방송에 출연하는 방송인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한다면, 저희는 편집기 앞에서 데이터를 제공하는 사람이에요. 편집을 하는 사람들이 방송을 만들어내는 거지, 누구의 분량이 적고 많았다를 따질 수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을 했는데, 방송에 안 나갔다고 화를 낼 수는 없어요. 그런 건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가 녹화를 하면 기본 5시간을 해요. 방송은 1시간이고요. 이런 프로그램은 편집의 예술로 받아들여야 해요. 그게 싫으면 생방송만 나가면 되고요. 그런데 출연료는 녹화가 훨씬 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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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가장 궁극적인 미디어

 

작년에 트위터를 접으셨잖아요. 복귀할 가능성은 제로인가요?

 

사람 일은 모르지만, 굳이 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웃음)

 

2013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언론 보도가 후지다. 나는 풍자하고 패러디를 하는데 정색을 하고 보도한다. 이게 문제다”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속된 말로 ‘농담했는데 다큐로 받는다’고 하잖아요. 언어 능력들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기자들마저도 섬세한 표현을 못해요. 잘 못 받아들이고요. 우리나라가 문맹률은 낮지만, 독해 능력은 바닥이에요. 사실상 문맹인 경우가 많은 거죠. 언어도 너무 정치적으로 씁니다. 맥락을 보는 게 아니라, 자극적인 말만 표제로 때려 버려요. 왜냐, 사람을 때리는 걸 좋아하니까 모든 걸 정치화해 버리는 거예요. 법정화한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을 대하는 다수의 태도가 검사 같아요. 지나치게 공격적이에요. 저 사람을 까서 유죄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어요. 제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이에요.

 

말꼬리를 잡는 사람은 트위터에 항상 있잖아요?

 

말꼬리를 잡고 공격할 순 있어요. 패러디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건 너도나도 법정화예요. 넌 이렇게 말했으니까 나쁜 놈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거죠. 다 자신만의 이유와 상황이 있는 건데, 이 단어를 사용하면 너는 무조건 좌파, 우파, 빨갱이, 파쇼, 나치라고 주장해요. 저는 이런 사람들이 현대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봐요. 열린 사회의 적들인 거예요. 맥락은 안 보고 죄목이 될 수 있는 것들만 보니까 모든 게 공격 패러다임으로 흘러가요. 문명사회의 IS인 거죠. 저는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게 했으면 좋겠어요. 자신들이 얼마나 이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지 몸소 체험을 해봐야죠.

 

트위터 마지막 인사가 “이제는 이 짓하는 것도 지겨워요. 하던 일도 최소한으로 정리하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고 싶네요”였어요. 지금 그렇게 살고 계신가요?

 

사실 옛날부터 하고 싶은 일만 했어요. 가끔 하기 싫은 일도 좀 하고요.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학교도 조직이라 행정적인 일이 많아요. 편의를 많이 받는 편인데도 조직에 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만약 책이 너무 잘 팔려서 인세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어휴, 생각만으로도 환상적인데요?(웃음) 사람들을 만날 필요도 없이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 보고, 여행이나 다니면 좋겠네요. 책도 종종 쓰면서요.

 

이번 책은 약간 보너스 같은 느낌도 있어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잇는 대작을 기대하는 독자가 있을 텐데요.

 

지금 써야 할 책이 있죠. 미학사와 서양미술사를 썼으니까 그 다음에 남은 건, 철학서예요. 학술서로서의 미학사를 2년 전에 쓰다가 중단했는데, 지금 다시 쓰고 있어요. 철학사도 곧 시작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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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나 칼럼집을 쓸 계획은 없으신가요?

 

마지 못해서 낸 경우도 있는데요. 대부분 다 거절해요. 칼럼은 그냥 사라지는 글이에요. 사람들이 카피를 하는 것도 오케이. 무조건 퍼 날라도 되는 글이에요.

 

책의 미래, 책의 가치는 어떻게 보시나요?

 

책은 언제나 궁극적인 미디어입니다. 그렇잖아요. 모든 이미지 아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텍스트 코드가 깔려있어요. 영상으로 본다고 해도 원리는 텍스트에서 시작되죠. 지금처럼 무한한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는 필터링이 필수에요. 인포그래픽처럼 시각화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워해요. 하지만 이런 정보만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 순간 인어공주가 되는 거예요. 거품이 돼서 해체되는 거죠. 자기정체성 안에서 자기 사유를 가지려면 텍스트를 통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책은 굉장히 중요해요.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진중권 저 | 천년의상상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는 루비가 구술하고 진중권이 받아 적어 펴낸 책이다. 그 목적은 인간중심주의 집사 문화를 버리고 새롭게 ‘고양이중심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 고양이의 창세기부터 현대, 그리고 동서양을 아우르며 고양이에 관한 역사, 문학, 철학에서의 재미난 이야깃거리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장훈 “쪽팔리게 살 이유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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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장훈이 첫 번째 에세이 『나를 도발한다』를 출간했다. 책장을 펼치기 전 생소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26년 동안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그가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의아했고, ‘김장훈은 어떤 사람이지?’ 질문해 봐도 또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놀라웠다.

 

뮤지션으로서 무대 위에서만큼이나 무대 밖에서 많은 목소리를 내온 탓에 여러 논란에 휘말리기도 한 그였다. 대중들은 ‘독도지킴이’ 김장훈의 애국심은 높게 평가했지만, 광화문에서 세월호 단식 투쟁을 하는 김장훈에게는 정치적 입장을 확인 받고 싶어 했다. 누군가에게 그는 ‘기부천사’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열정만 앞선 오지라퍼’였다. TV 예능프로그램 속의 김장훈은 유쾌하고 입담 좋은 연예인이었지만, 신문의 사회면에서 만난 그는 세상을 향해 날 선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모난 돌’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미리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김장훈은 책의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살려면 적당히 눈감고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진즉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나는 세상과 타협을 거부했고, 타협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아서 차라리 나의 유전자로 대변함이 가장 쉬울 듯하다. 나의 유전자는 무기력함보다는 차라리 불편함을 감내하고 언제나 떨쳐 일어섬을 택했다. 그 뒤에 무엇이 오든…. (『나를 도발한다』 8쪽)

 

300페이지에 달하는 긴 고백을 읽고 2시간가량의 인터뷰를 마친 지금, 김장훈의 ‘유전자’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뜨거움이라 답하겠다. 가슴의 열기가 공연장 너머의 세상으로 흘러 들었고, 그것이 때로는 선행으로 때로는 분노로 표출되었을 뿐이다. 김장훈이 마음을 나누는 방식이란 그런 것이다. “나눔의 궁극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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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말고는 음악 할 힘이 없어요


“제 인생 자체가 정리가 안 되는 인생이거든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삶의 고비도 많이 넘겼고, 예전 일을 생각하다 보면 고개를 가로젓게 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책을 쓰니까 어쩔 수 없이 정리를 하게 되더라고요. 사실은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정리가 안 된 채로 하루만 살다가 간다는 마음으로 살거든요. 저한테 하루를 산다는 건 하루를 죽는 거예요.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는 거죠. 그 극단적 허무주의가 저를 열심히 살게 한 원동력이기도 해요. 내일, 모레, 글피를 꿈꾸기에는 오늘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오늘을 잘 사는 것 말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두려움도 없어졌어요. 그런데 책을 쓰면서 나름대로 정돈이 되기는 했는데, 그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나를 도발한다』에서 김장훈은 유년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자신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고독한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늘 바빴던 어머니,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된 3년간의 투병 생활, 외로움을 친구 삼아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았을 뿐”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하루를 버티는 목적이자 수단”으로 ‘소리 지르기’가 시작됐고, 당시의 절규는 그를 가수의 길로 이끌었다.

 

“쓸쓸하지 않은 사람 없잖아요. 저도 고독하죠. 그런데 고독한 거 되게 좋아해요. 이제는 그거 말고는 음악 할 힘이 없어요. 예전에 <무릎팍도사>에서 발레리나 강수진 씨가 ‘예술가에게 고독은 친구’라고 하는 걸 봤는데, 그때 진짜 많이 울었어요. 전적으로 동감하거든요. 저는 노래하기 위해서 제 자신을 학대하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렇게는 못해요. 저는 상관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고 피해를 보잖아요. 제 노래는 진짜 벼랑 끝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인데, 그러려면 벼랑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결혼을 안 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서 무대에 올라갈 때는 외로워진다는 게 잘 안 될 것 같거든요. 그리고 노래를 위해서 절대 고독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고독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다가 공황장애도 온 거예요.”

 

2003년, 승승가도를 달리던 김장훈은 돌연 미국으로 향했다. 더 이상 노래가 설레지도, 무대가 간절하지도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번에도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그였다. 돌아온 것은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공황장애였다.

 

“저는 한국을 하루만 떠나도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미국에 가서 1년을 있었으니 돌아이가 안 되겠어요? 저한테 외국을 가는 건 유배예요. 바닥을 치러 가는 거예요. 여기에서 더 이상 음악이 설레지 않기 때문에 가는 거죠. 그때 미국을 갔던 것도 저를 도발했던 거예요. 그렇게라도 도발을 해서 무언가가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간 거죠. 결국 공황장애는 축복이었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황당했지만 ‘하나님이 나한테 제대로 주셨네’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바닥을 쳤으니까 한국에 돌아가면 필(Feel)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좋아지기는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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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각자의 이유


왜 그렇게 어려운 길로만 돌아서 가는 거냐고, 이제 좀 쉬운 길로 가도 되지 않느냐고, 물을 법도 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기어이 “벼랑 끝에 걸쳐진 외줄 위”로 올라서고야 마는 것은 타고난 ‘유전자’ 때문일까.

 

“그렇기도 하고, 제가 좋으니까 하는 거예요. ‘행복은 각자의 이유’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행복의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지어요. 아직도 여자는 몇 살이 되면 시집을 가야하고, 남자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가야 된다고 하잖아요. 행복이 그것밖에 없어요? 한 사람에게도 행복은 수백 수천 가지가 있는데, 어떻게 몇 백만 명의 행복을 몇 가지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누구도 함부로 ‘아프리카는 죽음의 땅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비루하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저도 직접 가서 보니까 다 가치가 있는 삶이고 동정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김장훈은 중국과 케냐, 남수단을 오가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중국 내륙의 사막화 방지를 위해 나무를 심은 곳에는 ‘김장훈숲’이 조성됐고, 케냐에서는 유소년 희망 축구단을 함께 만들었다. 스포츠를 통해 희망과 자부심을 심어주는 활동은 남수단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의 ‘공개된 선행’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지난 1월에 벌어진 ‘거짓 기부 논란’처럼 좋은 일을 하고도 상처 받는 일이 다시 생기지는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나눔을 하면서) 어떤 것들에 대한 틀이나 경계가 더 허물어진 건 확실해요. 비난과 칭찬, 나눔과 나누지 않음, 음악과 세상, 무대와 무대 밖 같은 것들이요. 누가 칭찬한다고 해서 으쓱하지도 않고 비난한다고 해서 크게 흔들리지도 않게 되더라고요. 저도 그게 조금 신기했는데, 내 양심은 내가 아는 거잖아요. 나 자신과 이야기했을 때 ‘나는 부끄러운 짓 한 거 없어, 양심적으로 걸리는 거 없어’라고 결론이 나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고, 몰라도 그만이야’ 하고 생각해요. (그런 일에 대한) 저의 결론은 그냥 ‘감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보는 거죠. ‘너무 고맙다, 더 잘해야지’ 생각하고요.”

 

‘기부천사’라는 별명이 드리우는 그림자도 있을 터였다. 그가 기부한 금액의 액수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본인 소유의 집도 없으면서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자신을 지켜보는 대중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법도 했다.

 

“저는 소박한 사람도 아니고 검소한 사람도 아니거든요. 다만 집을 가져야 된다거나 그런 욕심은 없어요. 아내와 아이가 있으면 또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혼자 사는 자유로운 영혼이 굳이 집을 살 필요 없잖아요. 강변에서 2년 살다가 산에서도 2년 살고, 그러다가 어느 날은 펜트하우스에 살기도 하고 또 논길에서도 살고, 좋잖아요. ‘집을 살 돈으로 그냥 맛있는 거 먹지’ 하는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에요. 얼마 전에는 제가 사무실에 살면서까지 기부를 한다는 기사가 났는데, 언론이 집도 못 사게 만들어 놓고 이제는 사무실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웃음). 그런 건 아니거든요. 사무실 럭셔리한 데예요(웃음). 연습을 하려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해야 하는데 연습실이 따로 있으면 그게 잘 안 되고, 그렇다고 연습실에서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사무실이랑 공간을 합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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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당연히 짐작했었죠


『나를 도발한다』는 세상이 김장훈을 향해 묻는 거의 모든 질문들에 답한다. 문제적 현장을 찾아 다니며 목소리를 내는 이유에 대해 물으면 “공인이라서 싸우는 겁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제법 유명하다는 내게 이 정도면 힘없고 소외된 일반인들에게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갑질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가수면 노래나 하라’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울고 있는데 노래만 하는 건 모순”이라고 일갈한다. “나는 지금 이 시대를 노래해야 할 이 시대의 가수이므로” 부조리한 세상에서 눈감은 채 노래만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이유로, 그는 아직도 촛불집회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후 중국에서 예정됐던 공연까지 취소하며 귀국한 그는 그 해 여름을 광화문 광장에서 보냈고,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현재는 전국의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있다.

 

“세월호 이후에 ‘다음 세대’라는 단어를 처음 생각해 봤어요. 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오늘 사는 것도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세월호 때 광화문에서 처음으로 ‘내가 일개 가수 나부랭이지만, 정말 이런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건 죽어도 못하겠다, 정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단식 농성에 돌입했던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치적 행위로 간주하는 시선들과 마주해야 했고, 이후 방송출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외압’을 견뎌야 했다.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오른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김장훈은 더 일찍 감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전 정권부터, 블랙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건 있었죠. 국립극장 대관을 안 해줘서 갈등이 있어가지고 뉴스에도 나오고 했었잖아요. 그때는 리스트까지 있는 건 아니었겠으나, 알아서 눈치를 보도록 만들려고 불이익을 주는 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광우병 사태 때도 제가 본의 아니게 주동자처럼 됐잖아요. 그때 청계천 집회에 갔었는데, 이전까지 시민들이 몇 천 명 정도 참여하다가 그 날은 십만 명 정도가 왔어요. 그게 네이버 같은 데에 기사가 너무 세게 나오고 다 (뉴스) 메인에 걸리고 그랬죠.”

 

그에게 쏟아졌던 따가운 시선들의 뒤에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지난해 공개된 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통해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 투쟁 당시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지도”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김장훈은 소식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원래 그런 사람들인 줄 알았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배후에서 조작하는 세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제가 최순실, 차은택과 관련돼 있다는 찌라시만 해도 그래요. 원래 찌라시라는 건 돌고 도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이틀 만에 카톡으로 전국에 다 퍼졌어요. 하나는 아예 보수 언론에서 디자인까지 해서 퍼트리더라고요. 그게 무슨 찌라시예요? 제가 그걸 보고 ‘이걸 이렇게 빨리 퍼뜨리고, 이 사람들 홍보 진짜 잘하네. 홍보팀으로 써야겠는데?’ 했다니까요. 정말 고마웠던 건, 기자들이 처음에는 기사로 안 썼어요. 카톡으로 받고 확인 차 저한테 전화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문화융성위에 확인해 보라고, 이건 아니라고 말하기도 뻘쭘하다고 했죠. 결국 문화융성위에 전화해 보니까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요.”

 

그는 세월호 이후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부당함 앞에서도 “난 그걸 외압이라고 인정하지 않아. 시련이라고 생각 안 해. 외압이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담지 않아. 내가 인정 안 하면 그뿐이야”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김장훈이 불의를 견디고 저항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에게 물었다.

 

“대중들을 대할 때는 비난을 해도 ‘그럴 수도 있어, 그럴 만한 (오해의) 소지를 내가 제공을 했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는 ‘해명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그냥 안 할래’라고 결론을 내리는 거죠.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 그런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변명 같은 사실을 이야기하느니 정면 돌파하는 게 낫다’고요. 그게 제 스타일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인 것 같아요. 변명하는 건 구차하고 치사한 것 같아서 하기 싫어요. 그런데 정부나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대항하죠. 당시에도 바로 기자간담회를 열어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정부가 자신의 아버지 때에 하던 일들을 지금 21세기 민주사회에서 하고 있다고요. 기사에는 ‘김장훈, 박근혜 이렇게 무능할 줄 몰랐다’라는 식으로 나왔는데 실제로는 더 세게 이야기했죠. 당시만 해도 지금과 분위기가 달라서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고독한 어린이’가 맞는 것 같아요


인터뷰 도중 김장훈이 자주 언급한 단어 중에는 ‘가족’과 ‘팬’이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동의어일지도 모르는 말들이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팬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어졌고, 그건 가족에 대한 사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팬들을 사랑하는 것도 매년 진화해요. ‘뭘 해서 더 행복하게 해줄까’ 생각하면서 공연비도 더 낮추려고 하고, ‘이렇게 하면 더 행복해하겠지’ 하면서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이벤트를 생각하죠. 팬들이 좋아하는 건 음악과 함께 뒤안길을 보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음 주에는 연습실을 오픈하기로 했어요. 연습실에 놀러 오라고 해서 제가 어떻게 연습하는지 보여주기도 하고 같이 밥도 먹고요. 그때가 설 연휴니까 각자 싸온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저는 어느 날부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믿고 지지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비난하는 이야기들까지 신경 쓸 새가 없는 것 같기도 해요.”

 

그는 팬들과 만날 생각에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2월에 예정된 『나를 도발한다』의 북콘서트 (가제)‘김장훈의 책 읽어주는 남자’ 공연장을 섭외하러 갈 계획이라며 미리 귀띔해주기도 했다. 이번 북콘서트에서는 동료 가수들을 초대해 책 속 내용에 어울릴만한 노래를 청해 듣고, 이후 시간은 밴드와 함께 공연을 선보일 생각이라고.

 

동시에 앨범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3월부터 25주년 전국 투어를 시작한다. 평소 “관객 입장에서는 가수가 잘 보이는 소극장 공연, 즉 공연장이 작을수록 큰 공연”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 그는 이번에도 최대한 많은 곳에서 팬들과 만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문화 소외 지역 없이 다 찾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거니까, 의미로 보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공연일 수도 있어요. 제가 처음 공연(전국투어) 장소는 울릉도로 정했었는데 가는 길에 파도 때문에 회항했었거든요. 두 번째는 영월에서 했었어요. 다 찾아가겠다는 거죠. 인터넷상에서만 문화를 누리고 오프라인에서 아무것도 못 누리는 지금의 상황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지자체와 협조를 해서 지원을 조금 받고, 저는 티켓값을 낮추려고 해요. 그 대신 양질의 공연으로 김장훈의 퀄리티를 가지고 가고요. 저는 이게 나눔이라고 생각해요. 제일 좋은 나눔은 공연에서 하는 거고요. 촛불도 나눔이에요. 왜냐하면 나눔의 궁극은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거잖아요.”

 

천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인터뷰를 준비하며 떠올렸던 질문을 상기했다. ‘김장훈은 어떤 사람일까’ 자연스레 책에 실린 타인들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가수 바다와 이소라, 작사가 박주연, 디자이너 지춘희가 바라본 김장훈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다가 저를 두고 ‘고독한 어린이’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가 되게 와 닿았어요. ‘어린이’와 ‘고독’은 잘 안 어울리는 단어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제가 정말 나이만 먹었지 약간 철이 없는 것 같고요. 어린이인데 고독하니까 뭔가 해줘야 될 것 같은 생각도 드는 게, 제가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작사가 박주연 씨는 저를 ‘화전민’이라고 했는데 ‘역시 작사가라서 이렇게 기가 막힌 표현을 하는구나’ 싶었어요. 예전에는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항상 안테나가 가족을 향해 있기 때문에, 저한테 그런 성향이 있겠으나 그렇게 살지는 못하죠. 불을 지르는 것까지는 맞는데 그곳을 떠나지는 않고 불을 질러서 토양을 좋게 만드는 거예요. 거기에서 가족들을 돌보고요. 사람이 어려워져 보면 옥석이 가려진다는 장점이 있더라고요. 남는 자와 떠나는 자가 가려지죠. 지금 저는 제 곁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안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용의도 있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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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리게 살 이유가 없죠


김장훈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 『나를 도발한다』에서 유일하게 발견할 수 없는 주제가 있다면 ‘사랑’이다. 극한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유전자’ 때문에 사랑까지도 밀어낸 것인가 싶었지만, 성급한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출판되고 나서 보니까 여자 이야기를 하나도 안 썼더라고요. 이제 저한테 여자는 없나 봐요(웃음). 얼마 전에 누가 소개팅을 해준다고 해서 농담으로 ‘좋지’라고 했는데, 그러다가 ‘그냥, 귀찮아’라고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괜찮은 사람을 만나도 연애할 생각을 하면 ‘됐어, 그냥 연습이나 하고 바둑이나 두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결혼은 못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치열함이 있는 한은 못할 것 같아요. 그리고 현식이 형(故 김현식)의 영향도 컸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전설이면서도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또 형수의 모습도 보니까, 제가 결혼을 하고도 계속 치열하고 외롭고 방황을 하면 조금 아내에게 미안할 것 같더라고요.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지금은 다 이해해줄 것 같지만, 이해해 주길 바라지도 않고 이해를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자유인이라고 해도 결혼한 후에 ‘나는 그런 놈이니까’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 놈이라고 해도 (배우자를) 만나면 묵계적으로 집에도 꼭 들어가야 되고 안정도 추구해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기부하는 것도 조금 조절해야 되고 정치인을 욕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되겠죠. 저는 결혼하면 여자한테 죄 짓는 거예요.”

 

처음으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책 속에 담은 그에게 물었다. 대중이 김장훈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없는지. 그는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답하면서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은 김장훈의 감춰진 모습’을 묻는 질문에는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지금까지 책을 내지 않으려고 했던 게, 굳이 글로 써서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서였어요.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튀고 누구보다 우뚝 서고 싶어요. 그런데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냥 평범하게 사람들하고 섞여서 어울리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도 평범해지지는 않겠으나, 그런 바람이 있어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김장훈은 ‘쪽팔리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예인(藝人)으로서 그가 몸을 사리지 않고 극한으로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이유도, 모난 돌이라고 눈총 받아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이유도, 모두 알 것 같은 이야기였다.

 

“지금보다 살 날이 많이 남았을 때도 제 생각대로 안 한 게 없거든요. 그런데 살 날이 훨씬 줄어든 지금 그렇게 안 살 이유가 없다는 거죠. 책에서 ‘공인이라서 싸운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이가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예요. 보통은 나이가 들면 둥글어져야 된다고 하는데, 왜 그래야 되냐는 거죠. 지금 제가 삶의 2/3를 살았다면, 저는 1/3만 더 살고 가고 싶어요. 줄기세포 같은 거 싫고, 100년은 지겨워서 못 살아요. 그렇게 따지면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쪽팔리게 살 이유가 없죠.” 


 

 

나를 도발한다김장훈 저 | 쌤앤파커스
이 책은 꾸미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조금 부끄럽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말하는 김장훈의 속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그늘에서 소외되며 방황했던 성장기,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사연, 음악관과 공연 철학, 그리고 나눔과 참여에 대한 단상 등을 진솔하게 펼쳐놓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기준 “우리는 왜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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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 이기준의 첫 산문집 제목을 포털사이트에 입력했다. 웬걸. 고민상담 게시글이 수두룩하게 먼저 보인다. “저, 죄송한데요.” 아, 우리가 이 말을 이렇게 많이 하고 있었나? 새삼스러웠다. 『저, 죄송한데요』를 일찌감치 읽은 독자들은 한줄평을 남겼다. “엄청난 문장들이 많다.”, “심심풀이용.”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이 책의 속살이 궁금했다. 200쪽이 채 넘지 않는 가벼운 책, 시집 판형보다 작은 책은 저자의 한 마디로 시작한다. 오른쪽 말줄임표를 없애고 보면 꽤 단호한 어조입니다. 어눌하게 말한다고 해서 흐리멍덩하게 사는 건 아니랍니다.”책을 다 읽고 나니, 이 문장이야말로 제대로 된 한줄평이 아닐까, 싶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자리한 독립책방 이후북스에서 이기준 디자이너를 만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책방에는 이기준 디자이너가 작업한 책이 꽤 많았다. 『저, 죄송한데요』의 주인공은 책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주변 어눌한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 준다 생각하시고 넉넉한 마음으로 읽어 주시길...” 슬며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간단한 일을 결코 간단히 넘기지 못하는 ‘쫀쫀한’ 주인공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자분자분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이기준 디자이너는 책 속 화자와 당황스러우리만치 똑같고, 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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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게 튀어나오는 글을 어떻게 하지?


왠지 곧 책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했어요. 그간 출간 제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몇 년 전, 책이 한 번 나올 뻔했어요. 시기상조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때 불발된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요. 이후 열심히 다듬고 해서 그 때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그 때 쓴 글 중 몇 편은 살렸어요. 일부는 다른 책으로 넣고 싶어 준비하고 있고요. 대학 다닐 때부터 책을 몇 권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혼자 글 쓰는 연습은 쭉 했어요. 꾸준히 성실하게는 못했지만 지금도 머릿속에는 몇 권이 있어요. 자꾸 시작만 되풀이하곤 했는데, 작년에 반 년 정도 여행하면서 이 책 마감은 반드시 하자고 생각했어요. 원래 일정대로라면 여행을 가기 전에 원고를 완성해야 맞는데, 좀 늦게 나왔어요.

 

산문집 제목이 독특해요. 계속 되새김질하게 되는 말이에요.


책 제목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표현이에요. ‘죄송한데요’가 아니라, ‘저, 죄송한데요’잖아요.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표현인데요.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고, 책이 독자에게 말 거는 표현일 수도 있어요. 또 생활 속에서 느낀 부분이기도 하고요. 왜 이렇게 죄송해하지 않는 거야? 같은 상황도 많고, ‘나라도 좀 죄송해야 할 땐 죄송하자’는 다짐이기도 해요.

 

‘목차’가 없는 책이에요.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검색했는데, ‘목차가 없는 상품입니다’라고 뜨더라고요. 뭔가 표현이 재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북 디자인을 하면서 ‘이 책에는 꼭 목차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아요. 그래서 출판사에 제안한 적도 있는데, 받아들여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래서 저한테 결정권이 있을 때, 목차 없는 책을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제 책이니까요.

 

디자인도 직접 하셨어요. 디자이너의 책이라고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에요.


직접 할 생각은 사실 없었어요. 늘 다른 사람의 책을 디자인했기 때문에 제 책이 다른 디자이너 손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어요. 물론 제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겠지만 원고만 딱 주고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결국 제가 하게 됐지만요.

 

좋은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제 책이 아닐 때는 책에 관한 어떤 제안이 선뜻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요. 그래서 제안을 못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 책이니까 목차도 없애고 빈 페이지도 내버려둘 수 있었죠. 오른쪽 페이지는 여백으로 남기면 절대 안 된다는 출판사도 많거든요. 제 책은 그런 제약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어서 가장 좋았어요. 민음사에서도 흔쾌히 받아주셨고요. 그간 디자이너 입장에서 제안했을 때, 거절 당한 아쉬움이 많았기 때문에 누군가 제 책을 디자인한다면, 누가하든 절대 손대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다음 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장점이 컸다고 생각해요.

 

거꾸로 저자의 입장을 생각한 계기도 됐을 텐데요.


국내 저자의 책을 디자인할 때, 수정 요청이 굉장히 많아요. 10교 이상 볼 때도 있고요. 조사를 이렇게 붙였다가 다시 전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고요. 교정지를 보는 일이 끝이 안 나니까, 하다 보면 힘들거든요. 그래서 내 책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만들다 보니 정말 표현 하나 놓고 갈팡질팡 고민되는 거예요. 하하하. 예전에는 ‘한 번 마음먹었으면 그냥 놔두지’ 싶었는데,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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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페이지는 ‘주석’ 같은 글이 실렸어요. 오른쪽에 있는 글을 읽다가 왼쪽을 또 읽어야 하고. 산만하면서 재밌는 책이에요.


처음 원고를 쓸 때는 괄호로 각주처럼 썼다가, 디자인하면서 분리를 시켰어요. 본문은 오른쪽에 넣고 잡다한 이야기는 왼쪽으로 몰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림도 나중에 그렸어요. 글로만 책을 만들고 싶었는데 계속 고치다 보니 생각이 바뀐 거죠. 생뚱맞게 튀어나오는 글을 어떻게 하지? 생각하다가 이런 형식이 나왔어요. 그림을 곁들이자는 제안은 편집자가 줬고요.

 

117쪽에 “배려일까요? 소심함일까요?”라는 문장이 나와요. 셔츠를 맞추려고 옷 매장에 들린 주인공이 매니저의 식사 시간을 챙기는 장면이죠. 독자들이 퍽 공감할 대목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참히 두드려 맞으면서도 가해자의 손에 피 묻을까 봐 걱정하는 격”이라는 표현도요. 주인공 캐릭터가 매력적인데요. 피곤한 성격이기도 해요.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서 썼어요. 딱 저를 닮은 인물보다는 어떤 캐릭터를 설정하면 더 재밌을 것 같았어요.

 

많은 독자는 ‘이기준 디자이너’를 상상하면서 책을 읽었을 텐데요. 나를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는 없었나요?


그런 걱정은 안 하는 편이에요. 어차피 모든 독자에게 “저 사실은 이런 사람이에요” 설명할 수도 없잖아요. 또 저라는 사람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영역이고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책에서 몇 편의 글은 현실일 수 없는 내용이에요. 일종의 장치인데, 그 장치를 발견할 때 읽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진짜 이 사람은 어디서 만나기 무섭다’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하하하.

 

혼자만 알고 싶은 식당 이야기도 쓰셨잖아요. 어딘지 엄청 궁금했어요. 사람들이 많이 물어보지 않았나요?


몇 번 들었는데 말을 안 해주고 있어요. 하하하. 말해주면 나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 깨지는 거잖아요. 한 번 깨지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퍼질 수밖에 없고요. 제가 처음 갈 때만 해도 줄을 서지 않고 먹었는데, 지금은 줄을 서야 해요. 속상해요.

 

동네라도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하하하.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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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준 디자이너가 작업한 책들

 

 

희한하고 좋은 경험


2012년부터 유유출판사의 책을 디자인했어요. 전속 디자이너라고 불릴 정도인데요. 작은 판형, 간결한 디자인 덕분에 출판사 고유의 독자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유유출판사는 제 판단을 웬만하면 쳐내지 않고 많이 받아들여주는 편이에요. 그래서 다른 책을 작업할 때보다 제 색이 많이 드러나요. 처음 유유출판사에서 책을 냈을 때, 대표님이 주변으로부터 우려의 목소리를 많이 들으셨다고 해요. 책 디자인이 뭐 이러냐, 하고. 하하하. 그런데 그 때도 대표님은 흔들리지 않더라고요. 굉장히 용기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로서 고마운 마음이 커요. 큰 행운인 것 같아요. 어떤 전략을 가진 것도 아니었던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데서 경험을 쌓다가 우연히 만나서 작업하게 됐거든요. 유유에서 지금 50권을 넘게 책을 냈는데, 3권 빼고 모두 제가 디자인했어요. 유유가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 제가 추구하는 조형언어와 잘 맞았는데, 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요. 출판사가 자리잡은 후에는 디자인을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는데, 그런 것도 없었고. 좀 희한한 일이고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작업 중인 책이 있나요?


이번 주에 새 책 시안을 보내줬어요. 그간 유유에서 시도한 것과 좀 다른 분위기를 내보려고 해요. ‘문구의 과학’이라는 번역서인데, 2월쯤 나올 것 같아요. 유유 책은 두 달에 3권 꼴로 작업하고 있어요.

 

디자인을 하기 전에는 디자이너도 한 책의 독자잖아요. 작업하면서 참 좋았던 책은 무엇인가요? 두 권 정도 꼽아주신다면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사회학공부의 기초』가 생각나요. 제가 정말 뼛속까지 개인주의자거든요. 막힌 구석도 있고요. 심지어 사회문제가 많은 것도 개인이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니까 그렇지 않구나 싶더라고요. 되게 재밌게 봤어요. 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은 언제든지 좋고, 장세이 작가의 『후 불어 꿀떡 먹고 꺽!』도 좋아요. 장세이 작가의 전작 『서울 사는 나무』도 제가 작업했는데, 자기만의 문장이 있더라고요. 다른 저자에게서는 본 적 없는 토속적이면서도 독특한 멋이 있어요.

 

평소에 즐겨 읽는 책은 어떤 장르인가요?

 

소설을 많이 봐요. 디자인 관련 책은 거의 안 보고요. 이탈로 칼비노를 좋아해요. 『반쪼가리 자작』을 무척 재밌게 봤는데, 내가 이런 책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테드 창 책도 좋아해요.

 

저자 소개글의 첫 문장이 “그래픽 디자이너, 첫 직장은 두 달 만에 그만뒀다”예요. 일찍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디자인회사에 들어갔는데 제 관심사에 맞지 않은 일을 맡게 됐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갔으니, 허드렛일부터 배우는 게 맞는데 당시에는 ‘내가 하는 일이 고작 이런 거야?’ 생각했어요. 회사에서는 “이거 몇 년 동안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면서 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차라리 책 만드는 일을 하면 좋을 것 같아, 두 달 만에 나와서 출판사에 들어갔어요.

 

출판사에는 오래 계셨나요?


1년 만에 그만뒀어요. 입사하자마자 새로 꾸린 팀에 들어갔는데 편집자 3명, 디자이너 1명인 팀이었어요. 선배 디자이너 없이 혼자서 만드니까 좀 불안하더라고요. 아직 배울 게 많은데 제가 뭐든지 결정해야 하니까 너무 발전이 없을 것 같았죠. 계속 책만 파다 보니까, 이러면 진짜 책만 만드는 사람이 되나, 음반도 만들고 싶은데 생각하다가, 나왔어요. 이후에 디자인회사를 몇 군데 더 다녔는데, 조직생활이라는 형식 자체가 저하고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5,6년 회사를 다니다가 혼자 일하기 시작했죠. 혼자 일한 지 11년쯤 됐어요.

 

프리랜서는 일을 계속 선택해야 하잖아요. 선호하는 일이 있나요?


일단 시간이 되면 가능한 하려고 하는데, 아동물은 잘 못하겠더라고요. 교육 관련 일도 그렇고요.

 

교육은 왜죠?


일단 한국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시장에 손을 얹고 싶지 않아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제가 아이가 없으니까 아는 것의 한계가 있을 테니, 뭔가를 만들어낼 자신이 없어요.

 

후배들이 북디자인과 관련해 조언을 물어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나요?


디자이너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어서요. 그런 경우가 없어요. 강연을 가끔 하긴 하지만, 특별히 조언을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 제가 어제 건축가 황두진 씨가 진행하는 영추포럼에 갔어요. 매년 주제를 정해서 두 달에 한 번씩 연사 강연을 하는데, 어제는 황두진 씨가 직접 했어요. 한국 근현대 건축에 관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제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더라고요. 한 건물이 세워질 때는 그 건물이 거리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우리는 건물의 정면만 유심히 보지만, 측면으로 봤을 때도 도로라는 맥락에서의 흐름이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책도 그런 것 같아요. 텍스트를 떠나, 그 책을 쓴 저자의 상황, 그 책을 선택한 출판사의 환경이 또 있잖아요. 디자이너로서는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하는 의무도 있지만, 여러 상황을 같이 보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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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박자로 지냈으면 해요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하루는 어떤가요? 예상이 되면서 또 궁금하네요.


특별할 게 없어요. 아침 식사를 한 후 작업하고, 점심을 먹고 또 작업하고. 하하하. 물론 틈틈이 밖을 나가기도 하지만 보통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편이에요. 약속도 거의 없고요. 저녁을 먹고 나서는 일을 안 하려고 해요. 사실 저녁 먹기 전부터 작업을 접는 경우가 많죠. 『저, 죄송한데요』 표지를 보면 오른쪽 위에 시계가 하나 있잖아요. 바늘을 보면 4시 30분을 향해 있어요. 사실 이게 제가 생각하는 퇴근 시간이에요.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편이신가 봐요.


보통 7시 전후에 일어나요.

 

좀 지나가는 질문으로요. 하지만 책과 연결되는 질문이기도 해요. 제가 만약, 인터뷰 시간을 30분 정도 늦었는데 “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인사치레로 건성건성 사과했다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하기 불쾌하셨을까요? ‘뼛속까지 개인주의자’라는 표현이 인상 깊어서 드리는 질문이에요. (웃음)


아마 20대였더라면 불쾌했을 것 같아요. 먼 훗날 제가 발표하고 싶은 소설에서도 1분, 2분 때문에 예민해지는 사람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지금 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요. 개인주의자로 오랜 시간을 살다 보니,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옆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혹시 내가 실수하지 않았나?’만 생각했는데요. 요즘 시국이 안 좋다 보니, ‘나도 되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말해주지 않으면 제가 문제를 모를 때가 있더라고요. 학습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구나, 느꼈어요.

 

평소 ‘지금 참 좋다’하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비가 많이 와서 출근길 혼잡이 예상되는 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일 때, 좋아요. 뭔가 살짝살짝 어긋나는 순간이 있잖아요. 조금만 타이밍이 달랐으면 겪었을 불편을 피했을 때, 참 좋죠. 저는 복잡한 출퇴근길이 싫어서 사무실을 알아볼 때도 걷거나 자전거로 이동이 가능한 곳을 찾아요.

 

디자인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있었나요?


11살 때쯤, 록 음악을 듣기 시작했어요. 외국 가수들의 앨범 자켓을 매일같이 따라 그리고, 가상의 밴드를 상상해서 로고도 만들었어요. 멤버들 복장, 기타 모양 같은 걸 그리면서 놀다가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가게 됐어요. 처음에는 뭘 배우는 지 모르고 들어갔는데, 다행히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곳이더라고요. 실기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해서 입시 미술을 공부하긴 했지만, 학원을 다니면서 오히려 그림을 못 그리게 된 것 같아요. 입시라는 틀에 맞춰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창작이 자유롭지 않게 된 거죠. 그 때 좀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싶어요.

 

16년차 그래픽 디자이너시니, 강의 요청도 꽤 들어올 것 같아요.


가끔 오는데요. 고정적으로 하는 건 없어요. 예전에 대학에서 다섯 학기 정도를 가르쳐봤는데,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일 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하하하. 지지난주에는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요청이 와서 갔는데, 디자인과 전공자들이 아니라 어문학 계열을 공부하는 학생들 대상이었어요. 부산에 내려간 김에 3일 동안 부산 여행을 하면서 작업했는데요. 제 작업은 부산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내 직업은 참 좋다’ 그런 생각을 다시 한 번 했어요.

 

개인의 삶에 있어서,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지금처럼 쭉 지낼 수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아요. 계획하는 책들을 꾸준히 잘 내면 좋겠고, 너무 사회에 흘러 들어가지 않고 약간 엇박자로 지낼 수 있었으면 해요. 요컨대 현재처럼 잘 지내면 좋죠. 지금은 생계라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렵지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클라이언트 일을 줄이고 제 작업을 좀 더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 죄송한데요』를 누구에게도 선물할 수 있다면요. 어떤 사람에게 주고 싶나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에게는 안 건넬 것 같고요. 왜냐면 훅 던져버릴 것 같아서인데, 이것도 편견의 작용이겠죠? 아무래도 인상이 좀 마니악하게 보이는, 자기 세계가 있을 것 같은 분에게 줄 것 같아요.

 

아까 소설 이야기도 하셨잖아요. 소설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제가 글쓰기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끝까지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소화할 수 있는 형식과 분량을 찾아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우선 여행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쓰고 있거든요. 그 글들을 좀 정리해서 책으로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 죄송한데요이기준 저 | 민음사
『저, 죄송한데요』는 우리 이웃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친근성, 그리고 주변에 없다면 주변에 두고 싶은 친근성이 새삼 매력으로 다가오는, 에세이의 정통적인 미덕을 잘 보여 주는 산문집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순원 “가장 사실에 가까운 사임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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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어머니, 현모양처, 산수화에 능한 화가. 신사임당은 친근하면서도 정체를 온전히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그런 그가 『은비령』의 작가 이순원을 통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정본 소설 사임당』은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조명해 온 이순원 작가가 “가장 사실에 가까운 사임당을 그리자고 생각”해 철저하게 고증한 후 재현한 작품이다. 여기에 극적인 반전이나 자극적인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삶은 그 자체로 소설이었다. 드물게 여성에게도 교육을 시킨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단정하고 사색적인 어른으로 성장한 신사임당,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과 가정교육 등 익히 알려진 이야기와 전혀 알지 못한 이야기가 신사임당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조명한다. 한 사람의 일생이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 이 한 권의 소설은 그것마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신사임당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한다.
 
“여성군자예요. 정말 공명정대했고요. 여성군자로서 예술적 재능을 다 발휘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

 

시대에 따라, 필요에 따라 색을 입혀 호출되었던 신사임당. 이제 그의 진짜 모습을 탐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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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잡지 못한 걸 문학이


왜 신사임당이었을까요? 신사임당을 소재로 소설 집필을 결심한 시작점, 그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많이 알려졌죠. 더 알려질 게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요. 신사임당 너무 잘 알잖아요. 율곡 이이의 어머니고요. 우리나라 모성성의 대표적 인물이죠. 그런데 말이죠, TV에서도 잘못된 정보를 말해요. 교양 프로그램마저도 신사임당의 이름을 ‘신인선’이라 부르더라고요.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그렇고요. 자료를 한 번 찾아봤어요. 보니까 과거 문학에서 처음 시작을 했더라고요. 그야말로 문학적 호명인데 그것이 인터넷 백과사전에까지 올라가고 그 인용이 인용의 인용을 거듭하다 잘못된 거예요. 그 외에 얼마나 더 많은 내용이 잘못 전해지고 있는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본명 외에도 신사임당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꽤 많잖아요.


신사임당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런 건 정말 말이 안 돼요. 우리나라 보물인 율곡 선생의 남매들이 부모님의 재산을 나눠 가진 ‘분재기(分財記, 보물 제477호, 이이 남매 화회문기)’ 내용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재산 목록을 보면 결코 가난하다 할 수 없거든요. 우리가 비서 한 명만 있어도 얼마나 여유롭나요. 그런데 율곡 남매들이 부모한테 물려받은 노비가 120명 가까이 돼요. 사임당 역시 그 자매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노비가 많고요. 노비뿐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가난하다, 가난해서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고 해요. 당시 그림을 팔아 생활한 사람은 없습니다. 도화서 화공들도 정승 판서들, 돈 있는 벼슬아치들의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받았지 산수화를 그려서 팔진 않았어요. 그런 것을 학자들도 가난하다는 점을 바탕에 깔아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문제가 많은 거예요.

 

이런 오해들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기록들을 보면 정사(正史)의 느낌을 주거든요. 기록에 ‘율곡이 죽었을 때 너무 가난해서 다른 사람의 수의를 빌려 입었다’는 식의 내용이 있어요. 이런 것들이 정사처럼 자리를 잡은 거죠. 또 사임당의 할아버지는 신숙권이고, 영월군수를 지낸 분인데요. 그보다 앞서 세종 때 신숙근이라는 사람이 영월군수를 지냈어요. 신숙근이 지은 매죽루에 훗날 단종이 ‘자규시(子規詩)’를 읊은 후 그곳이 자규루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이것을 사임당의 할아버지가 지은 거라는 잘못된 자료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런 자료들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역사가 잡지 못한 걸 문학이 잡아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소설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사임당의 삶과 그 시대의 이야기들을 바르게 말해주는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최대한 역사에 가깝게 쓰겠다는 선생님의 목적이 이해가 되네요. 소설 앞에도 ‘정본’이라고 수식하고 있어요.


사건들은 최대한이 아니라 아주 정사에 맞게 기록했어요.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왜 처가에서 물려받은 집으로 왔는가. ‘기묘사화’가 있을 때까지는 과거 시험을 계속 봤었거든요. 그러다가 조광조가 붙잡히고 그것 때문에 나흘 간 옥고를 치르고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에 이름을 올리죠. 이런 건 사실로 두고 그 틈에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한 거예요. 과거 시험은 어떻게 봤는가, 서당에서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어떻게 말하는지는 상상이지만 실제 그들이 공부한 방식은 풍속사에 나온 그대로예요.

 

공부가 대단했어야 할 것 같은데, 자료 찾기에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자료 찾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웃음) 어떻게 그런 자료를 찾았느냐고 학자가 놀란 경우도 있었고요. 자료 찾기는 수사와 비슷해요. 이쪽과 저쪽을 비춰보는 거죠.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빈 조각도 나와요. 그러나 군데군데 맞추다 보면 빈 조각도 학의 날개가 들어가겠구나, 구름이 들어가겠구나, 알게 되잖아요. 또 하나는 묘비예요. 실제 사람들의 행적을 묘비에 쓰인 내용으로 알 수 있거든요. 그것을 또 문서로 남기기도 하고요. 조선시대에 웬만한 벼슬을 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거의 묘비와 묘갈(墓碣)에서 따온 것들을 정리한 것들이거든요. 그것을 찾으면 생몰년도까지 확인할 수가 있는 거죠.

 

집필 기간이 얼마나 되었나요?


자료 찾는 것과 쓰는 것을 포함해 거의 2년 정도 걸렸어요. 쓰는 중에도 계속 자료를 찾아야 했고요. 강릉에 계신 향토 사학자 분께 끊임없이 자문을 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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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


그렇게 조사 하시는 중에 미처 밝혀지지 않았던 신사임당에 관한 새로운 사실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신사임당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였어요. 생각해보세요. 사임당과 안견은 80년에서 90년 정도 간격이 있어요. 거의 백 년 가까운 동안 그림을 그리는 사람, 특히 도화서에는 얼마나 많은 화공들이 있었겠어요. 그럼에도 중종 때 어숙권 같은 ‘패관잡기(稗官雜記)’를 쓴 사람이 율곡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나중에 띄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기록으로 ‘사인(士人, 선비) 이난수(이원수)의 처(妻) 신씨가 산수화로는 안견 다음이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사임당의 산수화가 없어요. 사임당이 자기의 인장을 찍은 산수화는 지금 없어요. 그런 것들이 왜 없어졌는지 안타깝죠.

 

짐작되는 부분은 있겠죠? 소설 안에도 관련한 내용을 적으셨는데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면요. 후부인(중국 북송 대유학자 정호, 정이 형제의 어머니)과 율곡의 어머니를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어요. 후부인은 여자가 필체를 남기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어쩌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작업이 아닐까 해요. 지웠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런 생각까지도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자신이 종주로 받드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가 중국의 후부인처럼 집안에서 바느질이나 하고 좀 더 나가 자수 정도나 하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면 두 분의 부인을 바로 일치시키고 율곡 선생도 정호?정이 형제와 바로 일치시킬 수 있는데, 어머니는 시문만 남긴 것이 아니라 부인의 몸으로 집 바깥으로 나가 세상을 두루 둘러보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산수화를 그렸다는 게 무엇보다 못마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였던 백년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백년 후의 모습으로 송시열이 가장 앞에서 이끌어 가는 조선 성리학이 예전보다 더 강퍅하게 집안에서 부녀에게 강압하고 있는 질서인지도 모릅니다.(384-385쪽)

 

사임당이 살아 있던 당대에는 사임당이 자식 교육을 잘 시켰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열세 살 된 셋째 아들이 초시에 장원한 것은 물론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만 보고 사임당이 죽었는데 그런 어머니에게 자식 교육을 잘 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러니 당시에는 사임당을 있는 그대로, 예술가로 평가를 한 거예요. 사임당이 죽고 백 년이 지난 다음에 동인과 서인, 노론과 서론이 싸우면서 율곡을 받들기 위해서 사임당을 받들다 보니 생긴 일 같아요. 현숙한 여인, 율곡을 낳은 어머니로서만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시대 요구에 따라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이 이용당한 측면이 있잖아요. 이에 대해서는 ‘작가의 말’에도 길게 언급하셨어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장지연도 사임당을 군국의 어머니라고 얘기를 했고요. 해방 이후에도 그랬죠. 제가 아홉 살 때 오죽헌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그곳은 건물 하나뿐인 퇴락한 곳이었어요. 한 십 년 사이 다시 갔더니 굉장히 넓어졌어요. 지금 사람들이 오죽헌 경내에 가서 어느 건물이 오죽헌인지 못 찾는 경우도 있어요. 아산 현충사와 함께 오죽헌을 성역화 시키는 작업이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사임당이 ‘현모양처’가 된 거예요. 당시는 육영수와 사임당을 동일시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 작업 속에 지금까지 현모양처 이미지로 이어져왔어요. 그러다가 입시전쟁을 지나면서 ‘교육의 어머니’로 변모했고요. 

 

실제 신사임당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사임당이란 인물은 다 알아요.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진짜 면모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사임당을 만들어낸 과정, 사임당이 자란 오죽헌의 학풍이랄까 이런 것도 대단했거든요. 사임당을 교육의 어머니라 하면서도 사임당이 일곱 자녀를 서당에 안 보내고 직접 교육시켰다는 이야기를 잘 모르죠. 그냥 교육의 어머니기만 한 거예요. 그러나 조선 전체에 집에서 공부한 사람은 있어도 어머니가 자녀에게 직접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교육시킨 건 유일해요. 초, 중학교 전 과정을 서당에 안 보내고 직접 교육시켰다는 건 율곡의 기록에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특히 드라마와 책 등 지금 그를 시대가 적극적으로 호출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맹목적으로 현모양처라고만 했던 건 잘못했다, 는 교훈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자유사상을 넣는 거예요. 연애라는 상상도 하고요. 그러니까 더 나쁘게 또 한 번 왜곡이 이루어진다고 봐요. 살아온 삶과 예술적 재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연애까지 포함한 왜곡을 더하는 거죠. 지금 시대가 원하는 바람을 덧씌워요. 이것은 연구가 안 이루어져서 그래요. 달리 봐야 하는데 어떻게 달리 봐야 할지 모르는 채로 달리 보니까 손쉽게 왜곡을 하는 거죠. 가부장제의 사슬을 풀었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러나 실제 가부장제의 사슬을 풀진 못했어요. 그러나 그 시대에 아녀자가 그림과 글을 한 것도 대단한데 바깥에 나가서 산수화까지 그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거예요.

 

기존의 통념과 관습을 깬 선구자적 면모가 있네요.


지금의 판단으로 ‘결국은 가부장제를 인정했네’라고 볼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율곡의 ‘선비행장(先?行狀, 이이가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적을 기록한 글)’에도 ‘가군께서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여쭤서 바르게 잡고 자제가 잘못하면 호되게 질책했다’고 적혀있거든요. 이런 것만 봐도 당시에 여인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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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본명, 신인선?


신사임당을 둘러싼 큰 오해 중 대표적으로 본명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입을 통해 이런 오해에 대한 항변을 듣고 싶습니다. 


종이에 인쇄된 사전에는 사임당의 본명이 신인선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어요. 그런데 사전들이 인터넷으로 작업화 되면서 보강되듯 이 내용이 들어가요. 그러다보니 학자들도 그것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건데요.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못 불렀어요. 스승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못 불렀죠. ‘기휘(忌諱)’라고 하는데요. 지금도 부모님 이름을 말하면 어른들이 야단을 치잖아요. 명체, 이름과 몸이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 학자라면, 이름이 나올 수가 없는 건데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해 해야죠. 조선 시대를 이끌어온 충효의 기본적 사상인데 말이에요. 후학이라면 기본적으로 살펴봐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소설에서는 신인선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계시잖아요. 그 이유는 뭔가요?


그렇다고 다른 이름을 쓰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먼저 많은 문인들이 이루어놓은 이름을 쓴 거죠. 그대로 쓰긴 하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그 이름인 것은 아니다, 라는 거예요. 이름은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었어요. 그렇다면, 신인선이라는 이름을 만든 것도 문학이 한 일인데 새롭게 만들기보다 많은 작가들이 쓴 그 이름을 문학에서는 이대로 쓰자, 라고요. 그러나 이것은 학문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소설을 쓰시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무엇인가요?


자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여러 학자 분들에게 자문을 많이 받았고요. 가장 사실에 가까운 사임당을 그리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그려도 대단한 인물이니까요. 오히려 그렇게 그리니까 진짜 모습이 드러나요. 왜 교육의 어머니인지 몰랐지만 이 소설을 보면 진짜 사임당이 교육의 어머니였구나, 알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죠.

 

소설 작업을 하면서 제일 경계했던 점도 그렇다면 사실 왜곡이었겠네요.


그것도 있고요. 특히 경계했던 게 있어요. 내가 사임당에 대해서 쓰면 나도 모르게 사임당을 받들고 싶어지죠. 배우들이 역사 인물을 연기하면 배우 자신도 자기가 맡은 인물에 빠지듯이 말이에요. 연구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작가도 누구의 삶을 쓴다고 할 때 받들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제가 쓰면서 가장 경계했던 부분들이죠. 없는 이야기들을 여기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단정하고 담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 같아요.


쓰면서 참 힘들었어요.(웃음) 노론들이 훼손을 했을 것이라는 몇 줄을 단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소설이지만 왜 자료가 없을까 하는 것은 그저 독자들이 생각할 부분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어요. 사임당의 산수화가 없다는 것은 참 안타깝죠. 사임당의 산수에 대해서는 어숙곤 한 사람뿐 아니라 그가 당대에 전해들은 세평을 쓴 것일 텐데요.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작품이 없어진 것은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에요. 

 

신사임당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떨까요?


정숙하고 현숙하죠. 학문에 대해서도 자녀 교육을 통해 재능을 발휘했고, 예술에서도 재능을 다 발휘한 거죠.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게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요. 여성군자예요. 정말 공명정대했고요. 여성군자로서 예술적 재능을 다 발휘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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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


등단 30년, 이순원의 작품 세계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자기 색깔대로 글을 쓰잖아요. 이것은 역사 소설이니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썼고요. 제 작품 전체로 보면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어요. 작품 세계가 원형질적이고,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게 내 몫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작품의 주제와 소재의 폭은 넓어도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작품에도 사임당의 아들 이우의 입을 통해 그것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따뜻함보다는 그리움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따뜻하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도 있으신 건가요?


모질어도, 모진 것을 안 보여주고 따뜻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진 것을 바탕해서 장차 있어야 할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것은 지금 현실이 따뜻한가 안 따뜻한가를 떠난 거예요. 모질수록 제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모진 삶을 말씀하셨는데요. 게다가 지금은 워낙 실용성과 효율이 강조되고 있잖아요. 이런 세상에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기뻐할 일도 있지만 세상일에 낙담할 일이 참 많잖아요. 낙담할 일이 더 많죠. 문학은 낙담하는 이 세상에 마지막 보루와 같아요. 문학의 효용성은 즐거움이죠. 제일 큰 것이 즐거움이고요. 그 안에서 배우죠. 역사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적 지식이 역사 소설에 있잖아요. 철학자의 말 속에 나오지 않는 철학적인 아우라가 문학에서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이 바로 문학적 사명이 아닌가 싶고요.


‘나는 문학이 없어도 살아’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없어도 안 될 것이 바로 문학이에요. 이런 인터뷰, 드라마, 모두 문학이죠. 문학 없이도 산다는 사람들이야말로 문학이 없으면 가장 심심해질 사람들 같아요. 그것은 효용성의 문제를 떠나는 거고요.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죠.

 

강의를 하거나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뭔가요?


문학이 새롭게 어디서 온 건 줄 알아요. 그러나 내 삶, 내가 살아온 삶 안에 문학적 텍스트가 있는 거예요. 제가 사임당을 본 것도 강릉 사람으로 살아왔던 나의 성장 환경 안에서 본 거고요. 『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역시 내가 보아온 내 삶 안에서 그린 거거든요. 그런데 문학이 내 삶이 가리켜서 나온 거라는 걸 종종 잊어요. 그냥 문장 공부만 하면 문학이 다 된 걸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요. 자기 삶 안에서 텍스트를 끄집어내는 게 문학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본 소설 사임당이순원 저 | 노란잠수함
사임당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과 기록을 외면한 빈곤한 시선으로 탐구되어 전해져 왔다. 현모양처, 교육의 어머니, 군국의 어머니 등 시대의 요구에 따라 500년이 넘게 왜곡되어 온 인물로 우리 역사에서 사임당만큼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언급되는 여성은 흔치 않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임당은 과연, 얼마만큼 진실인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다 요지로, 작업으로 눈부신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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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의 대흥행과 함께 다시 한 번 비약하고 있는 뮤지션이 있다. OST 참여로 인해 덩달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밴드 래드윔프스(RADWIMPS)의 이야기다. 유튜브 1억뷰를 돌파한 주제곡 '前前前世(전전전생)'이 담긴 사운드트랙은 이미 3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안 그래도 2000년대 이후 최고의 록스타라 불리는 이들의 인기는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는 중이다. 더 올라갈 곳이 있을까 싶었던 그들에게 찾아온 ‘개화’의 시즌은 청명한 겨울하늘 아래 내리쬐는 햇빛처럼 그렇게나 눈부시다. 미친 듯이 음악만을 만들며 이를 삶의 전부라 여겨온 한 사내와의 두 번째 만남. '너의 이름은' 바로 노다 요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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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드윔프스(RADWIMPS), 왼쪽부터 타케타 유스케(베이스), 쿠와하라 아키라(기타), 노다 요지로(보컬, 기타)


요즘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대히트와 함께 OST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에 대해 실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금까지 몰랐던 분도 알아봐주시고, 원래 저희를 아시는 분들도 영화 전면에 음악이 나오는 것을 기뻐해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굉장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계기로 <너의 이름은.>의 OST를 담당하게 되었는지요.


3년 전 쯤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습니다. 프로듀서인 카와무라씨가 감독분과 원래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감독님이 전부터 저희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던 걸 듣고는 두 분이서 “래드윔프스와 작업하고 싶다”라고 종종 이야기하셨던 것 같더라고요. 그것을 계기로 세 명이 만나게 되었고,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밴드로서는 첫 OST 작업이었는데, 새로운 영역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는지요.


처음이다 보니 얼마나 힘들지 조차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일정한 한계 없이, 좋은 것들을 계속 만들어가자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새 밴드 활동도 10년이 훌쩍 넘어갔죠.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좋은 타이밍에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스텝과 같은 감각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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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합니다.


드문드문 작업하긴 했지만, 거의 1년 반 정도 걸렸어요. 작화가와 동시에 진행했는데, 곡이 완성되더라도 그 장면이 바뀌면 다시 음악을 바꿔야 했기 때문에, 오고 가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 같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과는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셨는지요.


감독님은 굉장히 과잉된 것을 하고 싶어 하셨어요. 저는 역시 이야기를 보조하는 BGM의 감각으로 작업에 임했었는데, 좀 더 이야기의 전면에 음악이 들렸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계속해서 받았습니다. 이 정도로 음악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좀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계속 했었어요. 하지만 감독님 마음에는 음악이 신을 끌고 간다라는 확실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음악을 만들어 갔습니다.

 

참고한 영화나 앨범이 있었다면요.


카와무라 프로듀서께서 미국 SF 영화와 같은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셨었어요. 그것을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기반으로 귀에 맴돌 수 있는 쉬운 멜로디의 곡을 쓰고자 했습니다. (밴드 초기에도 피아노를 자주 사용했냐고 묻자)아니에요. 5~6년전, <絶體絶命(절체절명)>(2011)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아무래도 기타만으로는 좀 질리기도 하고, 새로운 장난감이 있으면 한번 만져보고 싶어지잖아요. 요즘은 피아노가 작곡하는 게 가장 잘 맞아요. 기타로는 치지 않는 코드를 사용하게 되니 좀 더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달까요.

 

밴드로서 음악작업에 임할 때는 비교적 자유로운데 비해, OST는 목표가 명확한 작업이라 약간 다르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밴드의 정규작과 비교해 가장 신경 썼던 점은 무엇인가요.


하지만 밴드로서 작업을 할 때도 룰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뭐든지 해도 좋아”라고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참 어려운 거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신카이 감독님이 심판자(Judge)가 되어주신 것이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제가 결정해야만 했고 제가 무언가 판단해야만 했거든요. 선이 그어지니까 거꾸로 더 자유로워지는 그런 감각이 있었어요.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 있다면요.


오케스트라 편곡은 완전히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즐거웠습니다. 기계 상으로 여러 가지 실험이 가능하기 때문에, 각 현악기들을 몇 개씩 뺐다 넣었다 하면서 작업을 했죠. 악보를 그리는 대신 어느 정도는 그렇게 데모를 만들었어요. 그 데모를 실제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해 주시고,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즐겁고 기뻤습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 느낀 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는지요.


1년 반을 매달려 있었어요. 물론 제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지만. (웃음) 그 반동으로 손을 마음껏 쫙 피고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그래서 바로 인간개화와 솔로(illion) 작업에 착수했죠. 작년엔 계속해서 레코딩을 진행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10월, 11월 두 달 동안에만 <너의 이름은.>, <P.Y.L>, <人間開花(인간개화)>이렇게 세 장의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창작력의 근원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저는 사실 음악 이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어요. 음악을 하다 지치면 전혀 다른 음악을 만들면서 치유 받는 거죠. 음악을 만드는 일이 지칠 때도 있지만, 결국 음악을 만들면서 활기를 되찾는 거죠. (그것이 래드윔프스와 일리언을 병행하는 이유라고 묻자)네, 아무래도 그렇죠. 궁극적으로는 그 두 갈래의 음악을 하나로 섞어나가고 싶습니다.

 

영화보다 OST를 먼저 접했는데, 솔직히 약간 걱정했습니다. 특히 보컬 곡의 경우 기존 래드윔프스의 모습이 많이 묻어나오는 탓에 영화로 볼 때 감독의 자아와 충돌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영화관에 가서 보니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이 정도로 완벽히 영상과 부합하는 것을 보면, 밴드의 세계관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세계관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카이 감독님은 처음부터 이야기하셨어요. 본인의 작품과, 랏도의 세계관이 가까운 곳에 있다라고요. 저도 과거 작품으로 미루어 보면 '과연 통하는게 있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신카이 감독님이 저희보다 훨씬 로맨티스트이고 센티멘탈리스트시지만요.(웃음)

 

가장 애착이 가는 곡, 그리고 작업하면서 가장 고생했던 곡이 있다면요.


아, 어렵네요. 우선 피아노 연주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컴퓨터로 만들 때는 제 실력과 상관없이 어려운 부분을 넣어버리고선, 실제로 해보면 연주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 뭐야” 싶었죠. (웃음) 네 번째 트랙인 'はじめての, 東京(처음, 도쿄)' 이야기인데, 타키와 몸이 바뀐 미츠하가 처음으로 도쿄의 거리를 보는 장면엔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저는 도쿄 태생이긴 한데요. 그런 기분은 누구든지 있잖아요. 시골에서 올라와 도시를 처음 봤을 때 생기는 동경이랄까. 기쁨과 불안, 설렘과 걱정이 마구 뒤섞이는 느낌. 그 감정이 영화의 키(Key)가 되지 않나 싶어 감독님과 계속 다퉜습니다. 어떻게든 제 뜻대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최종적으로는 감독님이 이해를 해주셔서 제가 원하는 대로 가게 되었죠.

 

역시 하이라이트는 'スパ-クル(Sparkle)'이 아닌가 싶습니다. 클라이막스로 이보다 더 어울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곡의 전개와 영상의 고조, 가사의 초현실적인 부분과 유성이 떨어지는 장면의 싱크로율이 대단했는데요. 이 곡에 대한 고민이 굉장했을 것 같은데. 곡의 제작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장면은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그 장면에 대한 길이, 끊어가야 하는 곳,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되는 곳들은 정해져 있었고요. 단지 9분 이상이 되는 길이라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리지널 버전과는 동떨어져, 대사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여러가지 실험을 하면서 그렇게 반년을 매달려 있었습니다.

 

처음 자신들의 음악이 입혀진 완성본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고 싶습니다.


1년 반 동안 사실 죽 불안했습니다. 솔직히 어떤 작품이 될지 알 수가 없어서.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싶었어요.(웃음) 하지만 시사회가 끝나고, 역시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죠.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중성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의 결과를 낳을 줄은 정말 몰랐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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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활동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8번째 정규작인 <人間開花>를 듣고 '이제까지의 래드윔프스가 압축되어 담겨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이상을 꾸준히 활동해왔기에 나올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어떤 감각으로 만든 작품인지, '인간개화'란 타이틀은 어떤 의미로 정하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지난 10년간 미니멈하게, 외부와의 접촉 없이 네 명만으로 음악을 만들어왔어요. 때론 괴롭기도 했지만, 굉장히 즐거웠어요. <너의 이름은.> OST 작업을 결정했을 당시도, 이제 다음 스테이지로 나가자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음악을 만들다 보면 언젠가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사토시가 지금 드럼을 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다들 쫓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음악 자체가 고통으로 여겨지는 시기가 있었을 겁니다. 이젠 그런 괴로움 속으로 우리를 몰지 말고, 가진 것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사랑해가면서 음악을 만들자는 것이 이번 작품에 담겨있는 마음입니다. 긍정적으로, 다음으로 나아가자라는 것이 '개화'라는 단어로 표출된거죠.

 

재킷 사진을 봤을 땐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웃음)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요.


평범한 걸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좀 더 강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싶었죠. 스태프와 상의해 최근 활약하고 있는 모델 분을 섭외할 수 있었습니다.

 

'前前前世(전전전생)'와 'スパ-クル(Sparkle)'도 OST와는 다른 버전으로 실려 있는데,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OST에서와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어 '前前前世'의 경우, OST에서는 타키와 미츠하의 이야기라면, 앨범에서는 'トアルハルノヒ(어느 봄날)'과 이어지며 밴드와 팬 간의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이 두 곡을 재차 실은 이유를 말씀해주신다면요.


'前前前世'의 경우 OST에는 수록되지 못한, 영화 안에서만 들을 수 있는 가사가 있습니다. 약간 면목이 없다고 생각해 오리지널 버전으로 정규작에 수록하게 되었고요. 'スパ-クル'은 굉장히 길잖아요. 동시에 굉장히 멋진 곡이라고 생각해 한 곡의 사이즈로 만들고 싣고 싶었죠. 처음부터 영화와는 관계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너의 이름은.>으로 인해 신규 팬 층이 대거 유입된 느낌이에요.


약간 저희들이 영화음악 뮤지션으로 다뤄지고,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핵심은 아니잖아요. 유행은 변하기 마련이고, 저희는 멈추지 않을 거고요. 계속 우리의 것을 만들어 나갈 겁니다. 저희만의 것을 파내고자 하는 팬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이번에 처음 밴드를 접한 주위분들이 '어떤 앨범을 가장 먼저 들어봐야 하나요', '무슨 곡을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까요' 라는 질문도 종종 해오곤 하는데요. 이들에게 어떤 앨범이나 노래를 추천하고 싶은지. 래드윔프스 초심자들에게 창작자로서 약간의 가이드를 주신다면요


굉장히 기쁘네요 그런 질문들이 많아졌다는 게. 개인적으로는<人間開花>가 인트로덕션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나 싶네요. 최근 앨범들에 비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 진입하기 쉬운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주년 공연으로 실시된 첫 합동 공연인 <RADWIMPSの胎盤(RADWIMPS의 태반)>의 라인업이 굉장했습니다. 밴드로서도 첫 합동 공연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섭외 밴드는 어떻게 선정했는지, 섭외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알고 싶네요.


반 년 정도 전부터 기획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당시에는 저희도 될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가능한 사람에 한해서 해보자 라는 느낌이었죠. 5회 공연 정도. 원 오크 록의 타카와 한번 더 해보자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고, 거기에서 시작해 게스노키와미오토메, 크리프하이프 등 제 아래 세대의 밴드들에게 섭외요청을 보냈죠. 모두 오케이 해줘서 점점 참여하는 팀 수가 늘어갔습니다. 스피츠로부터 참여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두 “오오”라는 반응이 되었고, 미스터 칠드런은 저희가 합동투어를 하는 도중에 결정이 됐어요. 정말 기적같은, 호화스러운 라인업이 되었죠.

 

이와 함께 에메(aimer), 사유리(さユリ)와 같은 여가수들의 프로듀싱을 맡기도 했는데요. 앞으로 밴드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혹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프로듀싱은 정말 즐거운 것 같아요. '내가 이런 목소리라면 이런 노래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굉장히 발현되니까요. 앞으로도 죽 해보고 싶은 일이에요. 영어 곡을 써나간다던가, 일리언과 랏도를 융합해 나간다던가. 여러 가지 할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한국 팬들이 내한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밴드의 팬들에게, 그리고 <너의 이름은.>을 응원해주는 관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한국으로부터는 애정을 다이렉트로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올해 라이브 계획이 있으니 그때 꼭 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너의 이름은.>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보러 오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기쁩니다. 은혜를 갚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웃음) 몇 년 후에도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 황선업
사진 : 이기찬
정리 : 황선업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혜란 “쿨하면서도 따뜻한 관계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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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꿈이 뭐예요?” 얼마 전 칠순 파티를 한 박혜란에게 한 젊은 엄마가 물었다. “아이들한테 당신의 꿈을 투사하지 말고 엄마 자신의 꿈을 꾸라”는 말에 대한 물음이었다. 순간 움찔한 박혜란은 여든 살까지 하고 싶은 일을 빛의 속도로 떠올렸다. 그렇게 태어난 일흔 살의 버킷리스트가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기, 연극 무대에 서기, 캐리커처 배우기, 손주들이 읽을 는 동화책 쓰기, 제주도 올레 일주’ 등이다.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은 박혜란이 칠순을 맞이하고 쓴 책이다. 그답게 하루하루의 일상을 담박하게 썼다. 50대 초반 『나이 듦에 대하여』를 쓰고, 60대가 되어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를 썼던 그는 70대가 돼서야 비로소 ‘노인인증서’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아리송한 기운으로 썼다”는 14번째 책. 한데 지금까지 박혜란의 책 중에 가장 가볍고 유쾌하다. 호모헌드레드 시대에 즐겁게 나이 드는 비결이 있을까. ‘여성학자, 대한민국 육아 멘토, 칠순 할머니, 이적 엄마’로 사는 박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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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너그러워지면 상대에게도 너그러워져요


1992년부터 책을 쓰시기 시작하셔서 벌써 14번째 책입니다. 표지가 참 귀여운데요. 후루룩 재밌게 읽었습니다.

 

점점 마음이 가벼워져요. 잘 쓰겠다는 생각도 없고. 마음에 부담이 없어요. 이제는 아무리 스스로를 포장해도 정체를 숨길 수 없거든요. 예전에는 멋있게 쓰려고 하는 생각이 5% 정도 있었다면 이제 1%밖에 없는 거예요. 좋게 말하면 자유로워진 거고 제대로 말하면 뻔뻔해진 거죠.

 

‘내가 할머니가 되면 어떨까?’ 기대감이 생기더라고요.


나이가 들어도 똑같아요. 할머니가 된다고 달라지는 건 많지 않아요. 본질은 그냥 있잖아요. 얼굴이 좀 쭈글쭈글해지고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이구나’ 느낄 뿐이지 머릿속 생각은 거의 똑같아요. 단지 큰 기대, 욕심 같은 게 없어지니까 마음이 좀 평안해지는 것, 그 차이죠.

 

나이가 들면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지잖아요. 여유도 생기고.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요.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러워지는 거예요. 더 이상 ‘나는 왜 이거밖에 안 될까, 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니까요.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딱 이거 같아요. 도가 터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갖고 싶어해봤자 남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죠. 이 세상에서 내가 차지할 수 있는 몫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걸 알면, 마음이 편안해지잖아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니까 남을 보는 것도 똑같아요.

 

책 카피가 ‘박혜란 세대 공감 에세이’예요. 젊은 독자가 읽고 나서 부모에게 건네도 좋겠다, 싶었어요.


항상 궁금한 게 젊은 사람들 생각이에요. 내가 글을 쓸 때, 젊은 사람들, 나이든 사람을 의식하고 쓰지 않거든요. 내가 쓰고 싶은 걸 쓰는 거죠. 그런데 젊은 사람이 공감, 위로를 받았다고 하면 도대체 어디서 위안을 받았을까, 그런 게 궁금해요.

 

편안하게 썼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읽는 내내 편안했고요. 86쪽에 상냥한 호의를 베푼 청년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전화를 잘못 걸었는데 전혀 불쾌해하지 않고 친절히 응대한 청년이요. 몹시 따뜻한 전화를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책을 읽는데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를 하러 오는 길에 번거로운 문자가 왔는데, 친절하게 답신을 했어요. (웃음) 아침이니까 기분 좋게 시작하시라는 의미로요.


와, 좋은데요. (박수) 내가 기분이 좋으면 다른 사람에게 기분 좋게 대할 수 있어요. 일상 속에 작은 행동들이 너무 중요한데, 젊을 때는 잘 몰라요. 저도 나이 들면서 깨친 거죠. 젊었을 때는 누군가 선의를 베풀어도, ‘왜 이렇게 착한 척 해?’하면서 삐딱하게 보는 면이 있잖아요. 그런 마음이 없으면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데. 이것도 젊을 때는 잘 모르죠.

 

책 제목은 한번에 정하셨나요? 제목만으로도 의미가 전해집니다.


2% 부족한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는데 나오고 보니 좋아요. 책을 쓸 때마다 더 좋은 제목이 없을까 고심하게 돼요. 이번에는 가족들한테 공모를 받았어요. 아무래도 젊은이들의 머리를 빌리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재밌는 제목도 있었는데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이 다들 좋다고 하더라고요. 책 제목은 긍정적인 느낌이 좋아요.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도 긍정적이잖아요. 이번 책 제목은 사실 중립인데, 뭔가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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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그렇잖아요’ 그 말이 제일 싫어요

 

가족들이 선생님의 책을 읽나요?

 

읽죠. 나오자마자 금방 읽어요.

 

이번 책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들이 “어머니, 여전히 발랄하시네”하던데요.(웃음)

 

손주 이야기가 꽤 많이 나와요. 손주를 6명 두셨는데, 요즘은 ‘할머니, 할아버지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잖아요. 가끔 부담스러울 때는 없으신가요?


내 능력에 따라 해주면 되는데, 왜 부담스러워요? 할머니라면 이만큼 해야 한다, 이런 게 어디 있나요? 전 그런 생각이 잘 이해가 안 가요. 왜 가족이 서로 부담스러울 정도를 기대하고 당연하게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조그만 거라고 주면 고맙고, 안 주면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해야죠. 부모자식 간에 능력대로 하는 게 맞지 않나요? 나는 “세상이 그렇잖아요”란 말이 제일 싫어요. 자식 신혼 여행 가는데 얼마를 해줘야 한다는 정답이 어디에 있나요?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 되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정말 그렇네요.


직업도 마찬가지에요. 남 보기에 멋진 게 무슨 소용인가요? 인생은 혼자 사는 거잖아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 것도 없어요. 기대가 없어야 원망도 없는 거 아니겠어요? 조금 잘해주면 고맙고, 안 해주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예요. 왜 남의 눈치를 그렇게 봐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들이 내 일에 돈을 쓰는 거. 본능적으로 마음이 걸린다”고 쓰셨어요. 효도를 받고 싶다는 기대를 전혀 안 하시는 것 같아요. 그냥 잘살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실 뿐이고.


그렇잖아요. 잘 살아주면 얼마나 고마워요? 그러다 가끔 호의를 베풀면 과분한 거죠. 과분한 거예요.

 

그래도 자식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지 않나요?


전혀 없어요. 아이들이 다 잘살아줘서 고맙고, 그래서 저도 되도록 잘해주고 싶고 그런 거예요. 며칠 전에 우리 막내 손주 생일이었어요. 막내 아들이 미역국을 끓여줬다고 하더라고요. 일요일이라서 엄마는 늦잠 자고. 전 이런 이야기 들으면 되게 좋아요. 요즘 젊은 아빠들은 요리 잘하잖아요. 참 보기 좋아요.

 

며느리도 셋을 두셨습니다. 시어머니로서는 어떠신가요?


아들보다 며느리들이 더 안 됐죠. 요즘 남자들이 육아에 많이 참여한다고 해도 아직 여자들의 몫이 더 많아요. 남자는 애 낳는다고 직장을 그만둘 생각은 안 하지만, 여자는 다르잖아요. 먼저 산 입장에서 여성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며느리들을 보면 안쓰럽고 그래요. 그래도 인생은 기니까 열심히 살다 보면 자신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다, 그렇게 말해줘요.

 

“가장 좋은 가족 관계는 쿨하면서도 따뜻한 관계다. 지킬 건 지키되 최대한 서로 보살피고 베푸는 관계”라고 하셨는데, 이게 참 어려워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요.


그렇죠. 우리나라처럼 끈끈한 정이 발휘되는 나라가 없으니까요. 화끈하면 쿨하다고 하는데, 동시에 인정머리 없다고 하잖아요. 모든 가족의 비극은 기대가 크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해요. “형제인데 이것도 못해줘?”라고들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그만하면 잘해주는 거거든요. 고부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기대가 너무 커요. 자기가 며느리였던 시절을 생각하는데, 그건 이미 지난 시대거든요. 가족으로 맺어진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에요. 그거 자체로 정말 고마워해야 해요. 요즘 가족 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들으면, 정말 무섭죠.

 

저출산을 넘어 비혼률이 높아지고 있어요. 물론 결혼을 안 해도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비혼이 많아지는 건 안타까워요.


결혼을 해서 이익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요. 일자리가 많아지고 주택도 좀 싸지고, 남녀가 좀 더 수평적인 관계가 되야 하는데, 지금 현실은 거꾸로잖아요. 엊그제 읽기 시작한 책이 우에노 지즈코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예요. 일본도 정말 우리나라와 똑같더라고요. 결혼이 정말 여러 요인에 의해서 사라지고 있어요. 사회적으로도 비혼을 이해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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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살의 버킷리스트


이번 책에도 ‘대충대충 살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청소도 요리도 대충대충 하신다고요. “아이 셋도 최선을 다해 키우려 하지 않고 대충대충 키웠기 때문에 지들이 스스로 컸지 않냐”고 하셨습니다.


우리 시대 여성들은 슈퍼우먼 콤플렉스가 많아요. 요즘은 여성이 일하는 게 당연해졌잖아요.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빠지면 누구라도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우리 집이 더러운 건, 천하가 알아요. 하하. 언젠가 TV에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사실이니까 뭐 기분이 나쁘거나 그러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엄마 흉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보냐”고. 재밌어 하는 것보다 저를 안쓰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없는 이야기를 했으면 몰라도 사실인데 뭐, 괜찮다”고.

 

자녀교육 강연을 많이 하시잖아요. 가장 요청을 많이 받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아이들 키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이 가장 많고, 나이 듦에 관한 강연도 종종 해요. 지금은 백세시대잖아요. 자녀 인생에 올인하지 않고 내 인생을 새로 디자인하라는 말을 많이 해요. 여성과 교육은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함께 다루기도 하고요.

 

한 독자의 이야기가 생각나는데요.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간병하는 60대 여성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하셨어요.


글을 쓰면 진짜 치유돼요. 저는 평소에 “이렇게 살아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글 써보라”는 말은 자주 해요. 사람들은 글 솜씨가 없다고들 하는데, 자기 마음을 그대로 적으면 되는 거예요. 남이 어떻게 볼까, 너무 유치하지 않을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솔직히 쓰면 돼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은 누구도 갖지 못한 콘텐츠잖아요.

 

30, 40대 젊은 엄마들을 볼 때, 언제 가장 안쓰럽나요?


애 키우는 일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 때, 안쓰러워요. 목숨을 거는 것까지도 좋은데 너무 비장해요. 우리 좀 가벼웠으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쓸데없는 정보에 너무 휘둘리니까 엄마 노릇에 너무 자신이 없어요. 자기 능력의 120%를 아이 키우는 데 쓰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애가 잘 자라는 거 아니거든요. 아이에 대한 집착만 늘고 나중에는 고부관계도 생기죠.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 1996년에 나왔어요. 초기 독자의 자녀들도 이제 많이 장성했을 텐데요.


가끔 강연회에서 만날 때가 있어요. 책에 나온 대로 아이를 키웠다며 간증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마치 제가 심어 놓은 사람처럼. (웃음) 그 분들과는 이제 나이 듦에 관한 이야기를 하죠. 같이 나이를 먹고 있으니까요.

 

‘여성학자 박혜란’보다 ‘아들 셋을 모두 서울대에 보낸 엄마’, ‘가수 이적 엄마’로 불릴 때가 많으세요. 서운하거나 싫을 때는 없으신가요?


강연을 가면 현수막이 붙어 있잖아요. 항상 제 이름 앞에 ‘이적 엄마’라고 써있어요. 요즘 서울대는 지위가 많이 격하됐잖아요. 서울대 나온다고 다 잘사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가수 이적은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잖아요. 작년에는 아들이 드라마 OST로 부른 「걱정 말아요, 그대」가 일년 내내 들리더라고요. 듣고 싶든 아니든 강제로라도 들리니까, 이적이 누군질 아는 거예요. 만약 가수 이적이 「달팽이」만 내놓고 비실비실했다면 저를 ‘이적 엄마’라고 부르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아들에게 고맙죠. 이적한테 종종 “너 팔아먹고 산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몇 년 전, 여대 총학생회에서 저를 부르면서 ‘이적 엄마’라는 현수막을 건 거예요. 여대생들이 주체적으로 살겠다면서 강연을 요청했는데, 내 앞에 ‘누구누구의 엄마’를 붙이는 걸 보고서 여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이 참 크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2년 전부터 페미니즘 책이 쏟아지고 있어요. 우리나라 1세대 여성학자로서 반가운 마음이 드실 것 같아요.


긍정적이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잖아요. 그 때는 투쟁의 대상이 법과 제도였어요. 제도를 고치기 위해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호주제 폐지가 됐잖아요. 여성가족부도 생기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착시 현상이 생겼어요. 이제 한국은 더 이상 여성을 억압하는 요소가 없다는 측면이에요. 예전에는 대학교에 여성학 강좌가 많았는데 1990년대 말에 싹 없어졌어요. 여성 차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서요. 강의가 사라진 건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 진입해보니 현실은 아닌 거예요. 제도적으로는 여성 차별이 없어진 것 같지만, 취업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거예요. 현실에서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뿌리는 너무 깊다는 걸, 이제야 자각하기 시작했죠. 결국 강남역 사건에서 터진 거고요. 해방됐다는 건 착각이었던 거예요. 이제 또 시작인 거죠.

 

버킷리스트도 발표하셨어요. 마음에 드는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 보기, 연극 무대에 서기, 캐리커처 배우기, 손주들이 읽을 동화책 쓰기, 제주도 올레 일주 등. 실현 가능성이 가장 빠른 리스트는 뭘까요?


얼마 전에 캐리커처 책을 한 권 샀어요. 제가 배우러 다니는 건 잘 못해서 책으로 한 번 해볼까 해요. 연말쯤이면 사람 얼굴은 쓱쓱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꿈에 부풀어 있어요. 뱃살 빼는 것도 목표인데, 이건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올레 일주는 가을쯤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70세가 돼서야 “드디어 노인이 되었다고 느꼈다”고 하셨어요. 가장 행복한 죽음의 모습을 떠올려보시기도 할 것 같아요.


하죠. 자주 해요. 농담처럼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비행기를 자주 타고 여행을 다녀야 한다.” 그런데 사실 비행기에서 사고가 날 확률은 적잖아요. 또 젊은 승객들도 있으니까 민폐를 끼치는 거고요. 사고가 나면 미안한 일이죠. 얼마 전 폐미니스트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다시 봤어요. 의지가 굳은 한 여성이 주체적으로 농장을 일구고 가족을 만들어 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온 가족을 불러 모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평화롭게 눈을 담아요. 이게 최고의 죽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많은 사람이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을 걱정해요. 가장 싫은 건, 치매에 걸려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죠. 논쟁적인 주제지만 죽음을 선택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평소에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은 언제세요?


따끈따끈한 신간 서적을 볼 때, 손자들을 볼 때, 봄이 와서 새싹을 볼 때 행복해요.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살아갈 날이 자꾸 짧아지니까요. 일흔이 넘어서니, 이 사실이 확실하니까요. (웃음)

 

아무래도 선생님보다 젊은 사람들 이 인터뷰를 읽을 텐데요.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우리는 젊었을 때 평균 수명이 60세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70, 80세를 넘어서 100세 시대가 됐어요. 노년이라는 걸 생각을 못해본 세대예요. 우리가 그랬으니까 자식이 당연히 부양한다고 생각했죠. 노년 준비 없이 장수시대를 맞이하니까 다들 너무 힘들어 해요.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 노인빈곤률 1위잖아요. 행복한 노인이 너무 드물어요. 젊은 사람들은 지금 이 비참한 노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잖아요. 자기가 100세까지 살 거라는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자식들에게 너무 올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 일 없이, 하는 일 없이 세상을 원망하면서 죽으면 너무 속상하잖아요. 노년을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더 길게 인생을 그렸으면 좋겠어요.


 

 

오늘, 난생처음 살아 보는 날박혜란 저 | 나무를심는사람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로 대한민국에 육아 신드롬을 일으킨 여성학자 박혜란이 진솔하게 써내려 간 노년의 일기와 같은 『오늘, 난생처음 살아 보는 날』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장철영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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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 장철영. 그가 미공개 사진과 함께 끝내 부치지 못한 52통의 편지를 엮어 한 권의 책을 펴냈다.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에는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모습이 그득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흠모하는 ‘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던 한 사람, 장철영 사진사의 기억과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의 회상 속에서 되살아난 사진에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인간 노무현이 거쳐 온 시간과 그 안에서 단단해진 진심, 대통령 노무현이 짊어졌던 고뇌와 지키려 했던 원칙들이 되살아난다.

 

장철영의 눈에 비친 노무현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생각,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열린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 “잠들어 있는 시민을 깨어나게 한” 대통령이었다. “지식 너머에 있는 지혜가 세상에 올곧게 쓰이도록” 가르쳐준 스승이었으며, 자신을 ‘행복한 사진사’로 만들어준 주인공이었다. ‘님’이라는 정갈한 부름 속에는 그 아름다웠던 한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경, 그리움과 미안함이 담겨있다.

 

어쩌면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는 ‘노무현의 재발견’이 아닐지도 모른다. 퇴임 이후 봉하마을에서 보여줬던 그의 모습,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노무현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노무현의 재발견’이 될 지도 모른다. 가식 없는 그의 언행을 두고 ‘대통령으로서 체통을 지키라’며 비난했던 사람이라면 미처 보지 못했던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가 고개를 숙일 때 그 앞에는 시민이 있었으며, 그가 키를 낮출 때 그 앞에는 어린 아이가 있었고, 그가 날 선 말을 내뱉을 때 그 앞에는 사법 권력이 있었고, 그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때 그 앞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언론이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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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뼛속까지 ‘친노’예요


52통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궁금해요. 행복하셨을 것 같기도 하고, 서글프셨을 것 같기도 해요.

 

연속으로 세 통 정도 쓰고 나면 쓰기 싫었어요. 마음이 힘들어서요. 편지라는 게 감정이 확 올라와야 되는데 어느 날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힘들어서 쓰기도 싫은 거예요. 마음도 머리도 차가울 때는 새벽에 조용한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또 한 통을 쓰고... 사실 책에 적지 못한 이야기도 많아요. 사진과 매치되는 편지를 실어야 하니까, 적어놓고 나서 ‘이 사진이 있었나?’하고 찾아야 될 때도 있었어요.

 

대통령 전속 사진사로 일하시면서 찍으신 사진이 50만장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이번 책에는 50여 장의 미공개 사진이 수록됐는데요. 사진을 선정하시는 것도 쉽지 않으셨겠어요.


연속 사진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사진을 뽑아낸 거거든요. 지금까지는 결과물(사진)만 보여졌지, 중간의 준비 과정은 아무도 몰랐잖아요. 이번 책에서는 그 과정을 기록해서 보여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이런 과정이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됐을 텐데, 그렇게 알리는 게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사진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림을 볼 때는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을까’ 궁금해 하는데 사진은 보고서 그냥 ‘좋다’ 하고 끝이잖아요. 사진도 문화를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요. 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 과정이 나와야 사진이 값어치가 있다는 거예요.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을 법한 책이에요. 판매량을 생각하면 대중들의 입맛을 두루 만족시키는 편이 유리할 텐데, 그럴 의도는 없으셨던 것 같아요.


네, 그런 부분은 신경 안 썼어요.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한테 굳이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아요. 노무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보게 되면 더 좋고요.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땠을까’ 그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보시겠죠. 노무현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소장하겠다고 할 거고요. 저는 그걸로 만족해요.

 

책에 쓰신 것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죠. 처음 노무현 대통령에게 끌린 순간은 언제였나요? 이유가 있으셨어요?


제가 대구 출신이기 때문에 끌린 게 있어요.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도 보면 2000년 부산 북ㆍ강서을에 출마하셨잖아요. 그때 다 미친놈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박수 쳤어요. 저런 분이 나와야 된다고요. 경상도에서 진보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으로 출마한 걸 보고 감동 안 받을 수가 없었어요. 워낙 핍박을 당했었으니까요. 저런 사람이 나오길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저 사람이 영웅이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너무 멋있는 거죠. 기분이 되게 상쾌했어요.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그때부터 ‘노사모’라는 게 시작이 됐어요. 저 같은 사람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든 거예요. 경상도에서 울분을 당했던 사람들이 토해낼 데가 없었는데 노무현으로 토해낸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로 일하게 되셨을 때, 엄청 기쁘셨겠네요.


‘이제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같이 근무하게 됐으니까요. 예전에는 인터뷰 할 때나 행사할 때만 사진을 찍었는데 이제는 매일 찍을 수 있잖아요.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다양한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죠. 좋기도 했지만 부담감도 컸어요. 사진 찍는 사람으로서 좋아하는 사람을 찍는데, 남들보다 사진이 더 좋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잖아요. 보도사진도 더 좋아야 되고요. 그런데 행복했어요. 행복한 부담감, 행복한 긴장감, 그런 마음이었죠. 즐거우니까요.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대통령이 직접 “장철영이 사진 찍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공식 지시를 내리셨다고요. “‘기록’이 ‘역사’가 된다는 믿음” 때문에 그러셨겠지만,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성격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맞아요. 어떻게 보면 피곤하실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죠. 어떤 정치인은 자기 비밀, 자기 과거를 감추려고 하잖아요. 그 분은 그런 게 없으셨어요. 그냥 하라고 하셨죠.

 

자신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크게 개의치 않으셨던 것 같아요.


한 번도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신 적도 없거든요. 똑같은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은 볼 테고 싫어하는 사람은 안 보겠지’, ‘(사진사가) 나를 좋아하니까 잘 찍겠지, (내가) 미우면 이상하게 찍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웃음). 명쾌한 사람이에요. 명쾌한 답이었고, 저는 행동으로 답을 봤어요. 책에 쓴 것처럼 저는 ‘청와대학교’를 다녔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 시간 동안 정치 사진과 지도자에 대한 학문까지도 배운 거예요. 그래서 더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보고 ‘친노’라고 이야기하면 저는 ‘뼛속까지 친노야’라고 말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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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한 인간으로서 완벽했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잖아요.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신 적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완벽했어요.

 

누군가를 완벽하다고 말하는 게 선뜻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요.


아뇨, 완벽했어요. 한 인간으로서 완벽했어요. 돌아가실 때 마음이 되게 아팠는데, 3년이 지나고 나서 ‘아, 우리를 살리셨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이 살려고 하신 게 아니라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자기 몸을 던지신 거구나, 대단하신 분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그냥 완벽했던 것 같아요. ‘살아계셨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죠. 그런데 그 때 몸을 던지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더 노무현을 공부했고 ‘내가 노무현이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게 성공한 거라고 봐요. 그 점에서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봐요.

 

인간적인 모습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세요?


정책 같은 부분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되게 많잖아요. 저는 그쪽 학문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시에 최선을 다했다고 봐요. 그 당시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부분에 있어서는요. 이라크 파병 문제만 봐도 그렇죠. 저도 처음에는 오해했다가 판단을 보고 감탄했어요. 미국과 UN의 압박으로 무조건 파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전투병 보내라고 했는데 그걸 우회적으로 비전투병을 보냈어요. 현명한 판단이었죠. 대한민국의 군인들, 젊은이들이 다치지 않고 죽지 않게 하면서도 세계적인 명분은 생기도록 파병을 한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일부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어요.


일부가 아니라 전부 다 그랬죠. <오마이뉴스>, <한겨레신문>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그랬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당시 언론이 이야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에 대해 책에서 시원하게 일갈하셨더라고요. “그들이 말하는 권위와 위엄은 특권의식일 뿐”이라고요.


신뢰라는 게 내가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남이 나를 신뢰해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노무현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셨던 것 같아요. ‘내가 리더야,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리더라는 걸 (남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계속 귀를 열고 대화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 분을 나의 주군으로 모실 수 있겠구나’라고 판단했던 거죠.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한 마음이 드실 것 같습니다.


정책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건 저 사람 의견이지’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요. 그런데 인간적으로 나쁜 놈이라거나 돈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 정말 화가 나죠.

 

가장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만든 건 무엇이었나요?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촬영하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너무 많이 울었어요. 너무 힘들었고요. 제가 그 분을 알기 시작했던 게 북ㆍ강서을에 출마하셨을 때인데, 그 영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다 보니까 너무 애틋해지는 거죠. 그래서 애착을 갖고 시작하게 된 거고, 생각했던 걸 풀어헤치기 시작했던 거예요.

 

서거 이후에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다시 꺼내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나요?


돌아가시고 나서 3일 만에 죄송한 마음에 비공개 사진을 공개한 적이 있었어요. ‘청와대에 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이랬어’ 하고 공개한 건데, 그게 난리가 났었어요. 그걸 보고 ‘이제야 이 분의 진정성을 알아봐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봉화에 계실 때의 모습 그대로, 옷만 정장으로 갈아입으면 청와대에서의 모습이었거든요. 그때부터 3주기 때 출간할 책을 준비했었고, 그게 『노무현입니다』였어요. 그 책도 처음에는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와 같은 형식으로 기획했던 건데 대선 준비 과정에서 내용이 바뀌었어요. 그렇다 보니까 아쉬움이 남았었고, 10주기 때 다시 준비하려고 하다가 이번에 책으로 내게 된 거죠.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에 다시 본 사진은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보기 싫었죠. 한참 뒤에 다시 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이걸 사람들한테 알려줄 수 있을까,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죄송하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죠. ‘어르신(노무현 대통령)께도 한 번도 안 보여드렸는데, 보내드리면서 내가 마무리를 해야겠다’라는 중압감은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이 사진을 가지고 매듭은 짓고 가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이 역사를 모를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래서 그냥 제가 했던 거죠.

 

책에는 흔들린 사진도 실려 있어요. 전문가 입장에서 보시기에 그냥 B컷일 뿐일 텐데, 차마 지울 수는 없으셨겠죠.


못 지우죠. 양치하시는 모습은 빠른 속도로 찍는데 (인물이) 흔들리니까 사진이 그렇게 나왔고요. 여사님과 같이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거든요. 그 모습에서 세파에 흔들렸던 5년이 보이는 것 같은 거예요. 여사님께서 기대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아마 두 분은 사진 찍는 줄도 모르셨을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의 뒷모습을 촬영하면서 슬프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고 적으셨죠.


항상 그랬어요.

 

가장 가슴이 아프실 때는 언제였나요?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이후였나요?


청와대를 떠나실 때가 가장 마음 아팠던 것 같아요. 떠나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외로우셨는데 또 다른 무거운 걸 들고 가시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봉화마을로) 따라가지 못하는 제 마음이 또 무거웠고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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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마지막 모습, 절대 안 찍을 거예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1년 동안 청와대에 머무르셨어요. 참여정부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던가요?


완전 다르죠. 완전 달라요. 참여정부 때는 다 노무현을 바라봤다면 MB정부 때는 MB를 바라본 게 아니죠. 파벌이 조금 심했어요. 저도 5년 동안 청와대에서 정치 사진을 찍으면서 귀가 열려있고 분위기도 알고 있잖아요. 말하는 워딩이라든가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 사람 대통령을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바라보는 게) 돈이구나’라는 게 보이죠. 참여정부는 사람들이 되게 젊었어요. 그리고 하나같이 노무현만 쳐다봤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지자체 단체장을 맡고 있는 것도 젊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요.

 

청와대에서 촬영된 사진을 보시면 내부의 분위기가 간파되시겠어요.


그렇죠.

 

박근혜 정부의 분위기는 어떤 것 같으세요?


경직되어 있어요. 전혀 자연스러움이 없어요. 짜여진 틀이 굳어져 있고, 그 틀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없는 모습이에요. 집무실에서 사인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통령 혼자 앉아서 사인하고 있고 옆에 (참모진이) 도열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잖아요. 어떤 사진사도 그런 사진을 찍으면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거예요.

 

‘내가 이런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사가 됐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겠네요(웃음)


네(웃음). 사진사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찍고 싶죠. 다 준비된 상태에서 찍으라고 한다거나 ‘그렇게 찍지 말고 이렇게 찍어’라고 하면서 검사를 하면 좋아하지 않죠.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은) 딱 검사 받은 사진이에요.

 

이번 책에 실린 사진 중에서 가장 좋아하시는 사진은 무엇인가요?


노무현 대통령이 손녀랑 자전거 타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어요. 청와대 안에서의 모습인데요. 손녀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시면서 엉덩이 아프지 말라고 수건을 깔아주셨었어요. 그건 대통령이 아닌 그냥 할아버지의 모습이잖아요. 이 분은 그냥 내 이웃이고 내 옆에 계셨던 분인 거지, 그 모습을 권위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잖아요? 패권주의는 말도 안 되고요. 봉화에 가셨을 때도 똑같은 행동을 하셨어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하면서 사진을 찍었죠. 그런데 청와대에서부터 그랬다는 건 아무도 몰랐던 거예요. 이 사진을 조금 더 일찍, 목숨 걸고 공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 공개했다면 아마 ‘일은 안 하고 손녀하고 자전거 타고 놀러 다닌다’고 했을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은 손녀와 장난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가장 좋아하셨다고요. 손녀에게 과자를 주려다가 본인 입으로 가져가시면서 놀리시는 순간을 포착하신 거죠?


네, 그 사진밖에 안 보여드렸어요.

 

유일하게 보신 사진이었나요?


그 사진하고 첫 친손녀, 첫 외손녀 둘이 한복 입고 잔디밭에 앉아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어요. 그 사진을 좋아하셨었죠.

 

노무현 대통령과 마지막 촬영을 한다면, 어떤 모습을 찍고 싶으세요?


마지막 촬영인 걸 알고 있다면 안 찍습니다. 절대.

 

차마 못 찍으실까요?


절대 못 찍죠. 그걸 어떻게 찍어요? 마지막 모습인 걸 안다면 못 가시게 막았겠죠, 어떻게 해서든지. 촬영이 문제가 아닐 것 같아요. 사진에만 욕심이 있다면 찍겠죠.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안 찍어요.

 

미공개 사진을 공개하시고 책으로 엮으시면서 사진의 의미, 사진사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셨을 것 같아요.


기록에 충실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이건 대통령님에 대한 기록이거든요. 잘 찍고 못 찍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역사적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써 그때 그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에 실린 사진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찍은 거예요. 누구나 제 위치에 와서 카메라를 들었다면 찍었을 거예요. 저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과 느낌을 전달하는 거고, 판단은 독자가 하는 거죠. 제가 찍은 건 흔히 말하는 역사 기록 사진이에요. 옛날의 서울 모습을 찍은 사진처럼 대통령의 그 당시 모습을 찍은 거죠. 역사 기록 사진이라는 건 그때 그 느낌을 그대로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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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성공한 대통령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찍으신 사진은 북한 백화원 초대소에서 촬영한 것뿐인가요?


네. (그 외에는) 없어요. 제가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 사진에 찍힌 것 말고는요. 심지어 대통령님 손도 한 번 못 잡아봤어요.

 

악수를 청하신 적도 있었을 텐데요.


다들 악수는 했죠. 그런데 저는 그 모습을 찍기 바빴죠. 한 번도 대통령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어요. 사진 찍고 나서 악수 한 번 했을 것 같은데요, 그냥 ‘잘 찍혔나’ 하시면 ‘잘 찍힌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드리고, 그러면 대통령님이 ‘어, 됐네’ 하고 끝이에요. 이게 경상도예요(웃음). 사진을 같이 찍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찍힌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죠. 같이 사진 한 번 못 찍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저는 영광이죠.

 

노무현 대통령이 가끔 농담처럼 하셨던 말이 있었다고요. ‘별 걸 다 찍네, 이런 것도 찍나’ 하고요.


(임기) 마지막에 남북정상회담 때만 해도 많이 바뀌었어요. ‘남는 게 사진 밖에 없더라, 찍으라’, ‘우리 사진사 어디 있노, 찍어 봐라’ 하셔서 계속 기념사진 찍었어요.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보신다면 같은 말을 하시지 않을까요? ‘별 걸 다 찍었네’라고요(웃음). 


‘고놈, 참’이라고 이야기하셨을 것 같아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겠죠?


경상도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에요. 긴 말 필요 없고, 칭찬한다고 길게 말 할 필요도 없고 ‘고놈, 참’ 하고 씩 웃는 거죠. 그게 끝이에요. 결국은 ‘열심히 했다, 수고했다, 고생했다’는 말이거든요. 웃으면서 ‘고놈, 참’ 하고 말씀하시면 그게 다인 것 같아요. 딱 그 분이 말할 수 있는 워딩인 것 같고요.

 

많은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거라고 적으셨어요. 아직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의 진면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직까지도 뭔가 씌워놓고 보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은 모든 게 가식이다, 거짓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보수 쪽에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것도 가짜야’라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언론에서는 그렇게 말해놓고 돌아서면 또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좋다고요. 그게 답답한 거예요. 정치적, 정략적으로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평가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요?


20년 정도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70대~90대 어르신들 가운데 어버이연합이나 박사모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보면, 무조건적인 자존심을 내세우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본인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게 무너질까 봐 끝까지 고집하시는 거죠. 그런 부분이 꺾여야만 제대로 평가 받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나중에 나이 들어서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나요. ‘내가 일흔이 됐을 때, 계속 믿어왔던 게 바뀌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게 가장 힘든 일일 것 같기도 하고요.

 

현 시국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띕니다. 촛불집회, 세월호 참사, 대통령의 기자간담회 모습 같은 것들이에요.


너무 화가 나서 언급을 안 할 수가 없었죠.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단과 등산 갔을 때 사진을 보면 다들 환하게 웃고 있잖아요. 기자들이 농담도 했어요. 용비어천가는 안 해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그게 아니잖아요. 질문하는 기자들도 긴장을 하고 있고, 뭔가 주눅이 들어있어요. ‘이상하다, 왜 저렇게 하지?’ 하고 이해를 하면서도 답답한 면이 있어요. 촛불집회 이야기를 해보면, 집회에 참여한 분들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집회’ 때 나오셨던 분들도 상당수 있어요. 그 분들이 지금은 탄핵 찬성을 외치고 있어요.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그리고 지금 모든 언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된 부분을 이야기할 때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기록과 비교하잖아요. 그러니까 시국에 대한 이야기도 쓸 수밖에 없었죠.

 

촛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한 가치와 꿈꿨던 세상을 발견하기도 하셨나요?


시민들이 깨어있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발적으로 나와서 평화 집회를 하고 있잖아요. 그게 가장 원했던 거였거든요. 평화적으로 우리의 요구를 이야기하고, 조금 힘들더라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저도 11월부터 시작해서 지난주까지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이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하고 감탄했어요.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의 독자들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꿈을 꾸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그 분들에게 어떤 책으로 기억되길 바라세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계실 때 뉴스에서 이야기했던 명제가 있잖아요. 이 책에는 그게 아닌 진실을 담았으니까, 그걸 떳떳하게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실패한 대통령이 아니라 승리하신 분이라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책에도 썼듯이 노무현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이에요. 실패한 대통령이 아니에요.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돼요.

 

실패한 대통령이란 어떤 대통령일까요?


더 이상 내 입에 올리기 싫은 사람이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봐요.

 

 

 

사진가 장철영이 찍은 노무현 전 대통령 미공개 사진

 

36쪽 2007년 4월 28일 대관령 휴양림.jpg

36쪽 2007년 4월 28일 대관령 휴양림

 

39쪽 2005년 6월 14일 녹지원.jpg

39쪽 2005년 6월 14일 녹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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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2007년 9월 13일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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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쪽 2007년 9월 22일 저도 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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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쪽 2007년 9월 13일 청와대 본관 앞

 

138쪽 2007년 9월 13일 청와대 본관 앞.jpg

138쪽 2007년 9월 13일 청와대 본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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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쪽 2007년 2월 23일 녹지원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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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쪽 2007년 2월 23일 본관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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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쪽 2007년 9월 13일 청와대 본관 앞 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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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쪽 2007년 9월 23일 귀빈정_강금원 회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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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쪽 2006년 1월 14일 청와대 관저 대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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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쪽 2006년 2월 26일 출입기자단과 북악산에서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장철영 저 | 이상media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담긴 미공개 사진과 함께 쓴 52통의 편지를 엮은 것이다. 전속 사진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하지 못한 마지막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명기 “세대갈등이 집단 게으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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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후줄근한 실내복을 입고, 머리는 엉망인 상태로 바닥과 한 몸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런 게으름과 TV나 스마트폰은 언제나 친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을 열렬히 하고 있는 이런 게으름 내면에는 그러나 불안, 예민함, 분노, 절망, 외로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자리한다. 때문에 정신과전문의 최명기는 『게으름도 습관이다』을 통해 이 게으름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한 상태에서 게으름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과감히 모든 일에 손을 떼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싫어하는 직장 상사가 시킨 일 앞에서 게으름을 피울 때 해결 방법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만큼이나 직장 상사에 대한 분노가 게으름을 부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게으르지만 사실 깊은 좌절에 빠져 있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질책이 아니라 위로와 응원이다.


‘결석보다 지각이 낫다’


결국 이 한 문장이 남는다.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며 게으름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한 문장. 하다가 그만두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이 생각만으로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게으름도 습관이다』는 당신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는다. “당신은 게으른 게 아니라 화가 나 있어요, 당신은 게으른 게 아니라 슬퍼요, 당신은 게으른 게 아니라 외로운 겁니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부지런해질까요?’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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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이유


게으름이 심리, 성격, 감정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은 조금 낯설게 들리기도 해요.

 

현대사회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TV를 보든 스마트폰을 하든 무언가를 하죠.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게으름은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거거든요. 그런 의미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이제 없어요. 막상 게으르다면서 오시는 분들을 만나보면 다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죠.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하기도 하고요, 해봤자 소용이 없어서 못하기도 해요. 결국 게으름에는 나름대로의 감정적 이유가 있는 거예요.

 

게으름이 불안, 예민함, 분노, 외로움 등 여러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무엇보다 자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겠어요.


맞아요, 만약 어떤 사람이 해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게을러져요. 그렇다면 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게으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안 되는 일을 그만두는 거예요. 그만두고 될 것 같은 일을 하는 게 더 낫지요. 해도 안 되는 일을 해서 게을러진다면 게으름이 잘못이 아니에요. 그 게으름은 굉장히 합리적인 거예요. 오히려 그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 비합리적이죠. 또 너무 불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면 더 부지런해질 것이 아니라 좀 쉬어야 하는 게 맞고요. 혹은 일하는 족족 빚을 갚아 돈이 하나도 없을 때 게을러지잖아요? 이 경우도 억지로 부지런해진다 해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요. 결국 게으름은 절망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이유가 있는데요. 그 이유를 해결하지 않고 게으름을 해결하려고 하면 계속 자신만 탓하게 되는 거죠.

 

책을 쓰신 이유도 거기에 있겠네요. 


왜냐하면 게으르다고 오는 환자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은 보통 ‘어떻게 하면 부지런해질까요?’라고 질문해요. 그런데 그건 올바른 질문이 아닌 거예요. 그럼 제가 설명을 해드리죠. 당신은 게으른 게 아니라 화가 나 있어요, 당신은 게으른 게 아니라 슬퍼요, 당신은 게으른 게 아니라 외로운 겁니다, 이렇게요. 그러다보니 이것을 책을 통해서도 알려드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런 분들이 많군요?


이런 경우도 있어요. 너무 부지런해요. 하루 열두 시간 일만 해요. 그런데도 돈이 부족해요. 이런 분들은 진짜 부지런한데 자기가 게으르다고 생각해요. 이때는 지금도 충분히 부지런하다고 알려드려야죠. 그런 분들에게는 차라리 게으름이 필요하거든요. 물론 가난 앞에 장사가 없어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한 건 맞죠. 그렇지만 한편으로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거죠. 물에 빠져 허우적대도 못 빠져나올 때는 누가 던진 끈을 잡든지 해야 하는 거예요. 일단 부지런하게 살려고 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지만 방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성과가 나는 방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죠.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게으름만 탓하는 분들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해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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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는 게으름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


많은 분들이 공감할 대목이라면 SNS가 아닐까 싶어요. ‘SNS에 시간을 빼앗기지 마라’라고 한 챕터를 두고 강조하기도 했거든요. SNS와 나의 대결에서 내가 주도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종의 규칙을 제안해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은 안 하는 게 제일 나아요.(웃음) 유혹의 대상을 앞에 두고 참기란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대결을 하면 안 돼요. 피해 다녀야 해요. 그게 정답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못해요. 그렇다면 그때부터 필요한 전략 역시 가급적 사용을 어렵게 만드는 거예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면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어놓고 보관함에 잠가 두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돼요. SNS를 안 하려고 계정을 없앴다가 다시 만들기도 하는데요. 저는 그것도 좋은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계정을 없애고 일주일 안 했다면 그게 안 한 거거든요. 계정을 없애고 만들기를 반복하더라도 절반은 안 하는 효과가 있는 거지요. 

 

SNS를 안 하기가 도저히 어려운 데에도 여러 원인이 있을까요?


네, 지루함을 못 참는 게 원인이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해 계획을 짜면 돼요. 집중력이 40분을 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이 40분도 굉장히 재미있을 때고, 대부분은 20분에서 30분을 안 넘어요. 이미 20분을 앉아 있었고 집중력이 달아났는데 한 시간을 앉아있어야 한다면 그때부터 딴 짓을 하는 거거든요. 그럴 땐 차라리 20분마다 해야 할 일을 바꾸는 게 현명하죠. 지루함을 없애면 SNS 할 일도 없거든요. SNS를 해서 시간이 없어진다고 하는데요. 지루함을 못 참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집중하지 못한 시간은 없어져요.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게 원인이라면 대인관계의 폭을 적절하게 줄여야죠. 흔히 SNS를 많이 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밖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SNS도 많이 해요. 밖에서 마당발로 다니는데 SNS만 줄이는 건 불가능한 거죠.

 

SNS를 자기표현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해요.


그런 분들은 SNS를 통해 자기 존중감을 유지하는 건데요. 그러다보니 현실과 미래의 균형에 문제가 생겨요. SNS에서 사람들이 막 ‘좋아요’를 하면 현재의 자기 존중감은 유지되지만 그 때문에 다른 걸 못하고, 업적이 없다보니까 미래의 자기 존중감은 손해를 보게 돼요. 그런 경우는 당장 SNS를 끊지 못하더라도 현실에서 사람들이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면 SNS를 자기 존중감의 도구로 사용하는 게 줄어들겠죠. 결국 SNS는 그 자체가 원인이 아니라 하나의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게 중요해요.

 

저자는 SNS를 안 하세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아서 할 수가 없어요.(웃음)

 

저자 역시 게으름 때문에 고민스러운 경우가 있지 않았나요?


매일 고생하죠. 책을 쓰다가 생각이 잘 안 날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컴퓨터 켜고 음반 쇼핑몰에도 들어갔다가 TV도 돌려봤다가 한참 이것저것 하죠.(웃음) 그게 사실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뇌는 힘이 들어도 눈에 안 보이잖아요. 몇 시간 운동을 하면 더 이상 지쳐서 못 하는 건 당연한데 정신노동은 무한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해요. 그러나 정신노동을 하다 게으름을 피울 때는 이미 안 될 때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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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존감을 깎는 사람과 거리를 둬라


몇 가지 주요 대목을 짚어보고 싶어요. 먼저 자존감 이야기예요. ‘내가 잘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한다고 했거든요. 이것이 게으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자존감 자체가 어떤 효용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인간은 대부분 잘하는 걸 할 때 부지런해져요. 게으름을 벗기 위해서는 내가 가급적 잘하는 것을 해야 해요. 세상을 내가 못하는 것들로 쌓아 놓으면 막연히 계속 게을러져요. 나는 게으른데 노래방만 가면 점수도 잘 나오고 다들 가수 해보라는 소리를 해요. 그럴 때 뭐든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아지잖아요. 그런 게 한두 가지 쯤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을 직업에 연관시킬 수 있으면 더 나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금전적으로도 힘들고, 외모도 별 볼 일 없고, 잘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리 연습해도 자존감은 안 올라가요. 아무리 책을 읽어도 자존감은 안 올라가죠.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서는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조금이라도 올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현실이 조금씩 올라가서 ‘나도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 때 게으름도 조금씩 줄어요.

 

현실이란 경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요. 현실을 개선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다 좌절하고 다시 게을러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고요.


가난하면 자존감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가난해서 자존감이 떨어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가난하고 무능력하다는 사실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예요. 부모님이 흔히 ‘우리 아이는 공부도 못하고 자존감이 너무 낮아요’라고 하죠. 그러나 아이는 공부를 못해서 자존감이 낮은 게 아니에요. 공부를 못한다고 야단치니까 자존감이 낮아지는 거예요. 마찬가지죠. 현실은 바뀌지 않을 수 있어요. 이때 내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급적이면 내가 능력이 없다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해요. 보통은 그게 부모죠. 나의 현재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더 비참해져요. 때문에 나를 괴롭히고 나의 자존감을 깎는 사람과 거리를 둬야 해요.

 

자존감을 깎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일 경우에 거리 두기가 참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만약 나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그 사람으로부터 조금씩 독립하는 방법을 찾는 게 좋아요. 그러다보면 자존감도 올라가거든요. 딜레마죠. 의존하면서 무시를 당해 자존감을 낮출 것인가, 현재 조금 힘들고 괴로운 선택을 하더라도 자존감을 유지할 것인가 사이에서 말이에요. 결국 나의 경제적 상황은 바뀌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나의 심리적 상황은 일정 부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요. 물론 거기에는 불안과 시련이라는 희생이 따르지만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서는 내 자존감을 깎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어요.

 

부모님과 거리를 두고 지내는 걸 도무지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시겠어요?


사실은 덜 보는 것만으로도 훨씬 편해져요. 우리가 일을 하면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것도 부모님 눈치를 안 보니까 자존감이 올라가는 이유가 상당히 크거든요. 가끔 진짜 불행한 결혼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부모님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도구로 결혼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런 분들은 결혼이 불행해도 이혼 결정을 하기가 어려워요. 원가족도, 현가족도 지옥이니까 이 결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죠. 그렇지만 부모님도 자식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게 현대사회에서는 맞아요. 자식도 마찬가지고요. 어르신들도 ‘자식 리스크’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부모가 자식에게 무한 지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잖아요. 대신 자식도 부모를 무한 존중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된 거예요. 지금은 그 거리를 확보해가는 세상이죠. 부모님을 좀 덜 봐도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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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석보다 지각이 낫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책 속의 문장 하나가 떠올랐어요. ‘결석보다는 지각이 낫다’ 라는 말인데요. 


그럼요, 진짜 현실적인 거예요. 우울증에 걸리면 아침에 아무것도 못해요. 아무리 일찍 자리에 누워도 새벽이 돼야 잠이 오거든요. 가만히 누워 있으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게임을 하는 거죠. 어찌 보면 게임을 해서 늦잠 자는 거지만 우울증 환자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게임이나 인터넷, SNS도 하기 싫어지잖아요? 그때가 죽고 싶어지는 때예요. 그런데 부모님들은 우울증인 아이들을 어떻게든 일찍 깨워서 학교에 보내려고 해요. 하지만 우울증 때문에 오후 한두 시까지는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그러다가 서너 시가 되면 좀 할만 해요. 그때는 학교를 갈만 하지만 서로 싸우다가 결석하게 돼요. 학교의 탓도 있죠. 학생이 두세 시에 와서도 출석부에 도장을 찍을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지각하면 안 돼, 라고 하면 결국 학교를 그만 두게 돼요. 부모도, 학교도 학교에 나오기만 하면 돼, 라고 하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어요. 지각을 했다는 건 그만큼 노력했다는 의미기도 하니까요.

 

여러 대목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었어요.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하다가 그만두는 게 낫다는 말이요. 꽤 중요한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든지 그래요. 그나마 하려고 했던 거니까요. 그런데 주변에서는 게을러, 끈기가 없어, 라고 해요. 한 것을 칭찬하지 않고 그만둔 걸 탓해요. 물건 훔치는 아이가 있었어요. 육 개월을 안 훔치다가 다시 훔쳤어요. 이 아이는 육 개월이나 참은 거거든요. 처음 한두 달은 칭찬했어요. 그런데 육 개월 정도 지나면 칭찬을 안 해주거든요. 그러다가 물건을 훔치면 난리가 나죠. 비슷하게 며칠 부지런했다가 어느 하루 게으름 부리면 주변에서 막 야단을 치거든요. 그럴 때 당사자는 생각하죠. 이왕 버린 몸 그냥 막 나가자, 가 되는 거예요.

 

매순간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럴 수 없기도 하고요. 그 사실을 모두가 주지하면 좋겠어요. 


연탄을 때던 시절에는 절대 연탄불을 꺼뜨리면 안 됐어요. 연탄을 계속 갈아야 하죠. 어떻게 보면 이것도 했다가 저것도 했다가 하는 것은 연탄을 가는 걸로 볼 수 있어요. 대신 불은 안 꺼져요. 나의 꿈을 쟁취할 때까지, 인생 목표를 찾을 때까지 열심히 준비만 해야지, 라고 하면 그 사이 연탄불이 꺼져버려요. 하다가 그만두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 나아요. 하루를 일하다 그만둬도 하루 일당은 벌잖아요. 만약 엄청나게 돈을 투자하거나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거나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뭐든지 해보고, 안 되면 그만 두는 게 제일 현명한 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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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데 게으르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책이 꼭 필요할까요?


자신이 불행한데 게으르다고 착각하는 분들이요. 가끔 환자 분들을 보면 너무 불행해요. 제가 그 입장이면 죽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찾아오는 이유가 ‘죽을 것 같이 괴롭다’가 아니라 ‘난 게을러서 문제다’예요. 저는 그런 분들이 이 책을 꼭 봤으면 좋겠어요. 게으른 게 아니라 불행한 거였구나, 왜 불행한지 보니까 외로워서 불행했구나 혹은 억울해서 불행했구나, 슬퍼서 불행했구나, 너무 괴롭힘을 당해 절망에 빠져서 불행했구나, 하는 것을 안 다음에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게으름을 해결하셨으면 좋겠어요.

 

병원을 찾는 환자 분들에게서 특히 요즘 많이 보게 되는 특징적인 면도 있나요?


세대갈등이요. 이 갈등은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거예요. 부모님 시대는 고성장 시대였거든요. 도박판에서 밑천이 두둑하면 무조건 이긴다고 하잖아요.(웃음) 1970년대에는 용기를 밑천으로 이겨낸 사람들이 굉장히 많죠. 그분들은 지금 젊은 세대가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용기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에요. 그때는 차가 100km로 쌩쌩 달리니까 용기만 있으면 추월해 가면 되는 거였고요. 가다가 사고 나도 죽지만 않으면 또 달리면 됐어요. 지금은요, 차가 전부 10km로 달려요. 여기서는 70km로 달리면 사고가 나죠. 20km 달리는 것도 굉장히 빨리 잘 달리는 거거든요. 그런데 부모 세대가 보기엔 너무 답답한 거예요. 그런 갈등에 놓인 분들이 되게 많아요. 자식이 나보다 잘 안 됐을 때 자식에게 필요한 건 위로예요. 위로가 아니라 채찍질을 하시는 부모님들이 많죠.

 

그런 분들이 너무 많은데요.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이런 세대갈등이 많은 사람들을 집단 게으름 상태로 만들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열심히 노력하거든요. 일이란 그래요. 죽을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일이 삼사 개월 마다 바뀔지언정 평생 쉬지 않고 일을 했으면 그 사람은 정년까지 평생 일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걸 일로 안 보죠. 그러다보니 본인들조차도 그걸 일로 안 보고요. 결국 전부 일하기 싫고 게을러져요. 지금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주는 태도가 필요해요.

 

그 모든 걸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할 거예요.


그러나 게으름을 일으키는 성격의 일들이 있어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일에는 틀림없이 재미있는 일과 재미없는 일이 존재해요. 먼저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은 힘들어요. 이 일이 끝난 후 미래를 위해 다른 걸 준비해야 이 단순한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단순노동을 열 시간 하고 나잖아요? 그 다음엔 아무것도 못하고 쉬어야 해요. 또 어떤 사람은 한 군데 오래 머무는 게 자기에게 맞고, 어떤 사람은 한 군데에서 일고여덟 시간 있으면 답답해서 못 견디죠. 그런데 자기에게 안 맞는 일을 하면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또한 일은 재량권이 주어지는 게 좋은데요. 재량권이 주어지지 않으면 힘들죠. 그러니까 이 조건들이 맞는 일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일을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가는 거죠.

 

모두가 그런 일을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한국의 상황은 참, 요원해 보이거든요.


소득의 불공평보다 사회를 더 힘들게 하는 건 기회의 불공평이지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훌륭한가요. 그런 이해가 필요할 거예요.

 

책 후반부에 게으름을 극복할 방법 중 하나로 평생 계획을 세워보라고 했어요. 저자의 평생 계획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해야 돼요.(웃음) 언젠간 되겠지요. 삶에는 몇 개의 절정경험이 있죠. 절정경험이 많을수록 더 나은 삶이 될 텐데요.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붙었을 때 그것을 절정경험으로 갖고 있어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을 때, 진짜 좋아하는 회사에 입사했을 때, 승진했을 때, 처음 내 가게를 열었을 때 등 몇 가지 종류의 절정경험이 있는데요. 삶이 조금 재미없어지고, 게을러지고, 어떤 의미에서 비참해질 때는 내 인생에는 더 이상 절정경험이 없겠구나, 할 때예요.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다 알만한 책을 하나 내는 건 이런 절정경험이 되는 거겠죠. 기왕이면 절정경험을 하나 더해보고 싶은 거고, 일단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편한 것도 있는 거고요.(웃음) 그 후에 또 다른 걸 생각해보게 되겠지요.


 

 

게으름도 습관이다최명기 저 | 알키
이 책은 게으름을 부르는 이런 문제 감정 9가지를 소개하며, 각각 이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이는 곧 지긋지긋한 게으름에서 탈출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지성 “가장 비참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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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뜻에 따라 진학한 교육대학교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부모의 빚보증으로 20억이 넘는 빚을 떠안고 젊은 시절 내내 빈민촌에서 살았다. 꾸준히 책을 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십여 년의 무명작가 세월을 거쳐 출간한『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꿈꾸는 다락방』등의 성공은 단숨에 이지성 작가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이번에 이지성 작가가 자기계발적으로 주목한 인물은 클레오파트라다. 어린 나이에다 여성이었던 빈소국의 지도자였지만 뛰어난 지성과 불굴의 의지로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를 발판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인터뷰 내내 이지성 작가는 나눔과 꿈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책이 끝까지 읽히는 책, 사람을 살리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질문과 대답이 종종 엇갈렸지만, 답변은 충실했다. 말마다 자신감과 자부심이 넘쳐 흘렀다. 강렬하게 꿈꾸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고정관념을 버리고 클레오파트라를 보라’는 말에, 마찬가지로 선입견을 버리고 이지성 작가를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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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20대에게 전하는 누군가 힘들었던 이야기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이 개정판으로 같이 나왔습니다. 개정판을 내는 기분은 어떠세요?

 

유독 피곤하게 개정판을 내는 것 같아요. 『리딩으로 리드하라』개정판 때도 내용을 바꾼 건 없지만 인터뷰를 추가한다거나 주석을 한 번 손보는 과정이 있었고,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은 원고의 5분의 2 정도를 다시 썼어요. 그러다 보니까 전면 개정판이 되고, 새 책을 쓰는 만큼은 아니지만 새 책 쓰는 절반만큼의 에너지가 들어간 것 같아요. 우여곡절이 많아요. 나중에는 편집자가 너무 힘들다고 나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떠내려가는 이모티콘을 보내시더라고요. (웃음) 직접 찍은 사진도 여러 번 넣을까 말까 고민했어요.


개정판을 낼 때 시의성을 염두에 두고 글을 바꾸시나요?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이 히트를 했을 때라 출판사에서는 비슷하게 여성 독자들을 위한 책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대신 이지성이라는 작가가 20대 때 어떻게 견뎌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20대에게 에너지를 주는 메시지로 나갔어요. 시의성이라기보다 콘셉트 자체가 새롭게 설정된 거죠.


20대 무렵 쓰신 글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스물 일고여덟 살 때부터 서른 서너 살 때까지 쓴 글이 많아요. 책에도 나오지만 스물일곱 살 때 창고를 개조한 옥탑방에서 눈물 나게 살던 사람이었고, 부모님 사업 보증 빚을 20억 넘게 지고 있었거든요. 과연 이 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 도시 빈민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이 있었어요. 요즘 20대가 힘든 건 알지만, 지금의 20대가 봐도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의 황량한 사막 같은 시절을 보냈어요. 지금 힘든 20대에게 누군가 힘들었던 이야기가 도움되겠다는 생각으로 썼던 것 같아요.


『스무 살 클레오파트라처럼』은 아무래도 타깃을 여성 독자로 좁히신 것 같아요.


저도 클레오파트라를 20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알게 됐어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가 달라졌다든지, 너무나 예뻐서 가질 건 다 가지고 교만한 여자였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하지만 공부를 했더니 일단 못생겼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역사학자들이 기록을 보면 피부도 거무칙칙하고, 치아는 다 깨져 있고, 키는 작은 데다 굉장히 통통한 여자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러자 의문이 생긴 거죠. 이렇게 못생긴 사람이 어떻게 카이사르랑 안토니우스라는 당대 최고의 남자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었을까? 예를 들자면 오늘날의 평범한 20살 여자가 미국에 가서 할리우드 최고의 유명 배우 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이상의 일이잖아요.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의 비결을 자기계발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계속 미뤄오다가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개정판이 나오는 참에 20대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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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버려야 클레오파트라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전작 『여자라면 힐러리처럼』과 비교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번 책에서는 어떻게 하면 강력하게 원해서 자기가 원하는 남자를 얻는가에 내용이 많이 할애되어 있어요. 요즘 여성상에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고대시대에 대한 오해일 것 같아요. 고대시대에는 왕이 곧 국가예요. 클레오파트라는 남자가 아니라 로마라는 국가를 움직인 거예요. 이집트에 사는 한 여자와 로마에 사는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와 전쟁과 경제가 결합된 외교였던 거죠. 외교 대사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에요. 늘 나이가 많고 세상 경험이 많은 최고의 사람이 외교를 해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이에요.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고대 세계에서 망해가고 있던 이집트라는 나라를 외교 하나로 성장을 시켜요. 우리가 그런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힐러리보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죠. 당시 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는 너무나 유명한 바람둥이고, 누구도 여성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해요. 책에서는 일관되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다 버려야 진짜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남자들을 이끌 줄 알아야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어쨌든 남자를 통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려서 충격이었어요.


이상적인 이야기만으로 책을 쓰는 건 현실과 괴리된 거죠. 유토피아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나쁘진 않은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요?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면 여자도 얼마든지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국회의원, 최고 경영자, 모든 걸 봤을 때 남성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남성이 모든 걸 가지고 가는 사회예요. 평범한 여자로 산다면 상관이 없지만, 자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판에서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활용해야 한다는 거죠. 당장 회사에 취업해서 부장 이상으로 올라가면 사내 정치가 있는데, 사내 정치라는 게 결국 남자들이 누구한테 줄을 잘 서느냐이잖아요. 남자의 심리를 모른다면 그 여자는 이용만 당하다 끝나게 될 거예요. 현실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강한 척하지만 어리고 엄마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언급도 있었어요. 남성들이 책을 보고 발끈하지 않을까요?


제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여자들의 심리를 알았냐며 너무 잘 써줬다는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남자는 울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 남자들이 술을 제일 많이 마시고 제일 많이 울어요. 왜 그럴까요? 제일 약하니까요. 한국은 유교 국가잖아요. 제일 약한데 문화적으로 강한 척을 해야 하는 거죠.


예상한 독자층이 있었나요?


20대 초반의 여대생 분들이요. 아직 세상에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분들. 제가 만난 분들의 사례를 많이 넣었던 게,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거든요. 여자들이 살기 힘든 사회에서 자기중심을 잘 잡고 남자들에게 영향력을 주면서 끌고 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넣었어요. 실제 사례를 접하게 되면 조금 더 용기를 내게 되지 않을까 하고요.


20대랑 상관없이 전체 연령에게 해당하기도 해요. 클레오파트라는 떠돌이 여왕이었잖아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찾아왔는데 현실적으로는 너무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걸 이길 힘은 결국 자존감이 아니겠어요? 20대 클레오파트라는 자존감과 자신감의 결정체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처럼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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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 있어야 자기계발


어떻게 보면 클레오파트라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헤쳐나가는 용기와 지혜라는 면을 가공해서 독자들에게 들려준 거잖아요. 이렇게 ‘떠먹여 주는 게’ 자기계발의 본질이 아닐까도 생각했거든요.


자기계발의 본질이라고 하긴 어려워요. 그렇게 안 하는 자기계발서가 많고요. 제가 늘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는 이유가 뭐냐면, 그렇게 해야 책을 끝까지 읽더라고요. 저는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는 두 번째고, 제 책을 끝까지 다 읽어야 작가로서 자존심이 생기는 사람이에요. 누군가 제 책을 비싼 돈 주고 샀는데 결국 그 책과 그 사람의 만남이 끝을 맺지 못하면 작가로서 너무나 자존심 상하고 치욕적인 느낌이 들어요. 싫어하는 분도 있는데, 책을 손에 잡으면 쭉 넘어가서 어쨌든 다 읽고 에너지를 받는 작가가 되는 걸 오랫동안 목표로 삼고 훈련했기 때문에 제 특성이라고 볼 수 있겠죠.


책을 잘 안 읽는 분들을 예상 독자층으로 상정하고 쓰신 것 같아요.


책을 잘 읽는 분들도 책을 끝까지 읽는 경우가 많지 않더라고요. 8년 전부터 독서운동을 하고 팬카페에서도 독서모임을 전국적으로 하는데, 거기 참여하는 분들이 우리나라에서 책 정말 많이 읽으시는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도 책을 끝까지 안 읽으세요.


폴레폴레, 차이 에듀케이션 등 교육 쪽으로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하시는데, 이것도 사람들이 책을 가까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인가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갈 일이 없고 점점 안 좋아지는데, 국민 독서량과 관계가 있어요. 책을 읽지 않으면 그 시간에 뭐 하겠어요. 티비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술을 마시겠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저도 술 마시고 다 해요. 하지만 책 한 권을 읽는데 서너시간 걸리는데 일 년에 생각하는 시간이 일년에 세 시간, 네 시간도 안 된다는 거고, 그건 자기가 바보라는 거예요. 국민 전체가 바보다 보니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최순실 씨가 국정농단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져요.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한다는 거고, 생각한다는 건 나를 돌아보고 발전시키는 시간이 있다는 거예요. 국민 전체가 일 년에 서너 시간만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그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어요. 언제 어디서든 지배 계급의 직업은 독서예요. 조선시대 양반은 책을 읽고 피지배계급은 일했어요.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국민이 주인인 시대인데, 주인들이 생각을 안 하고 살면 안 되죠.


해외에 학교를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작년까지 스무 개 정도 지었어요. 학교 백 개 짓는 게 목표예요. 폴레폴레 회원들이 직접 가서 보수하고 벽화 그리기 활동 같은 걸 해요.


작가를 꿈꾸시던 때가 있었잖아요. 그 때도 자신이 이렇게 성공할 거라는 강한 열망이 있었나요?


그때는 지금 하는 해외 학교 프로그램 같은 건 몰랐죠. 미국 같은 나라는 자기계발서 쓰는 분들이 사회적 나눔이 활발한데, 우리나라의 경제 경영, 자기계발서 저자는 나눔이 없어요. 너무 이상해요. 자기계발이라는 건 결국 사회 개발, 국가 개발, 인류 개발로 이어지는 연장선이에요. 내가 나를 관리하지 못하고 스스로 일어서지 못했는데 사회에 나눔을 하자고 하면 누가 따라오겠어요. 지금에야 많이들 저와 함께하시지만, 무명작가 때는 나누자고 하면 ‘너나 잘해’라는 대답이 따라왔으니까요. 내가 사회를 새롭게 만들고 싶은데 나한테 힘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자기계발을 하는 거예요. 열심히 살아서 내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내가 속한 부분에서, 잘할 수 있는 영역에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거, 저는 이게 정치라고 생각해요. 꼭 국회의원이 되는 게 정치가 아니잖아요. 국민이 자기 분야에서 바꿔나가는 게 정치죠.


자기계발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인터뷰에서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게 우리나라 자기계발에는 그게 없어요. 종교적 용어를 붙이자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자기계발은 이단이라고 봐요.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면 끝나는 게 무슨 자기계발이에요. 그건 자기 개인적 욕망의 충족이에요. 사람들에게 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고 돈을 벌려고 하냐고 물어보면 다들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싶고, 고급 외제차 몇 대 가지고 싶고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지고 싶다고 대답해요.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가 능력껏 할 수 있는 걸 가지고 비난하는 건 잘못된 거죠. 하지만 그건 인생의 한 부분인데 그게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면 그건 아니죠. 그래서 나눠야 한다고 말로만 하면 제가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먼저 보여주자는 생각을 했어요. 요새는 너무 과도하게 해서 힘든데, 사람들한테 학교 짓자고 그러면서 돈 내라고 요구하기보다 제가 먼저 10개 이상 짓고 나서 독자들에게 같이 참여하자고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찌 됐든 제대로 된 자기계발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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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길


해외에 학교를 짓고 봉사를 나가는 게 힘들진 않으세요?


저도 사람인데 즐기고 싶고 놀고 싶죠. 해외 학교 짓는데 기본적으로 5, 6천만 원 들어가면 마음속으로 갈등이 생겨요. 처음에는 사회적 나눔은 좋은 일이고 선한 일이지만 그런 건 예순 넘어서 하자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기독교인인데, 어느 날 주님이 제 마음에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왜 20년 뒤에 걸으려고 하냐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때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죠.


앞으로도 계속 하실 생각이시죠?


삶의 소명이자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한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는 못 되는지라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늘 소수예요. 현실적인 장애물이 많은데, 올해부터는 현실적인 전략을 많이 짜고 있어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었는데 이걸 평생 추구해 나가야 제대로 살 수 있는 거겠죠.


기독교인의 ‘주님이 주신 사명’과 자기계발의 맥락이 맞닿을 수 있다고 봅니다.


자기계발은 기독교가 시작한 거예요. 칼뱅의 종교관은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곳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거였죠.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빵을 인간에게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거고,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어요. 자기계발의 개념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그러다가 벤저민 프랭클린이 기독교적 요소를 빼고 인격 수양으로 많이 이끌어 나갔는데,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특유의 나만 아는 자기계발이 시작됐죠. 그 당시에는 국가고 뭐고 내가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 넘어온 정신은 기독교적 자기계발도, 벤저민 프랭클린의 사회적 메시지도 아니라 대공황 이후의 ‘나만 잘살면 돼’가 넘어온 것 같아요. 나중에 기독교적 자기계발이라는 게 들어왔지만 그것도 성경으로 보자면 백 퍼센트 이단이었죠.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돈을 벌어서 회사를 세웠나요? (웃음) 예수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쉽게 말해서 사회적으로 최악의 실패자인데, 제자들도 다 그랬잖아요. 우리나라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교회의 성장 때문에 성서 메시지가 아니라 자기계발적 메시지를 전달해요. 성서적 자기계발은 분명히 있어요. 자기 삶이 예배가 되려면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선 최상의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죠. 하지만 깨끗한 방법으로 결과를 내야 하고, 교회는 헌금을 과부와 아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선교를 위해, 그리고 남은 걸 교회 운영에 써야 해요. 그게 청교도적 자기계발인데,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재미도 없고 무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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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읽을 책


자기계발서 쪽에 중점을 두고 계시잖아요. 다른 쪽 장르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이제까지 시집, 소설, 인문서, 교육서 다양하게 냈는데, 지하 100층 불구덩이 같은 현세의 지옥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이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해주는 건 자기계발서밖에 없었어요. 철학서에도 문학서에도 그 어느 것에도 고통받고 있을 때 나는 할 수 있고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책이 없었어요. 이후에 제가 비참한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다른 비참한 사람들에게 자기계발서를 줬을 때 그들이 다 성장하고 성공했다는 거죠. 자기계발서를 중점적으로 쓰는 건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고 봐요. 저도 20대 때는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으니까 알아요. 저는 잊어도 좋아요. 절망에 빠진 사람이 우연히 제 책을 만나서 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요.


자기계발서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들 중에 저와 같은 지옥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 있는지, 자기계발서 독서를 통해서 극복하고 성장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묻고 싶어요. 없으면 감히 비판하지 말라는 거죠. 지금도 짓밟혀서 집 밖에도 못 나오는 비참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본 적이 있나, 그 사람들의 손을 잡고 여기서 절망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 네 길을 개척하라는 말을 한 번이라도 같이 울면서 말해본 적 없다면 감히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알지 못하면 말하지 말라’는 말이군요.


어느 정도 가진 사람들은 안 통하더라고요. 그런 힘듦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연히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죠. 연대보증제도 때문에 저도 20년 전에 빚을 졌어요. 그때 사회 구조가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고 한 그 누구도 내 곁에 온 사람이 없었어요. 당연히 사회적으로는 바뀌어야 되겠지만 그당시 거대 담론에만 빠져 있었다고 한다면 저는 여전히 그러고 살고 있었을 거예요. 사회를 바꾸는 부분에서는 학자, 정치가, 많은 분이 노력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개인이 스스로 지옥을 빠져나오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자살하려던 사람이 자기계발서를 보고 새 힘을 얻고, 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자기계발서를 떠나서 또 다른 책을 읽어요. 밑바닥에서 가장 정신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영원히 정신적으로 함께하겠다는 게 작가로서의 뚜렷한 주관이고 제 상이에요.


비판의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이지성이 맨날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어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해외에 학교도 지어야 하고 제 책도 써야 하고 인도 갔다 와서 선교사 이야기도 써야 해요. 제 길을 가고, 거기에 대해서 누가 가장 진실했고 욕심을 초월했는가는 하나님께서 판단해야겠죠. 이상한 작가예요. 자기 책 이야기보다 이런 내용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는 게.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에 아버지와 불화한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요새 가족들과는 잘 지내고 계시는가요?


빚을 다 갚고 통장을 보여드린 순간 해피엔딩이 됐죠. (웃음) 지금은 늘 행복해요. 그래서 개인적 성취와 성공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가족 문제가 한 번 성공하니까 다 풀리더라고요. 결혼도 그래요. 마흔세 살에 결혼했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마흔 살 때까지 결혼을 못하니까 이제 큰일 났대요. 아무리 유명해도 마흔 살 넘으면 아무도 시집 안 온대요.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고 했죠. 진심으로 믿으니까 이루어졌잖아요. 인간이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주셨기 때문에 신앙과 상관없이, 믿으면 이루어지게끔 구조를 만들어놓으셨어요.


이건희, 힐러리, 클레오파트라 등 롤모델을 세워주시잖아요. 다음 롤모델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생각은 있는데, 독자님들의 반응도 봐야 하고요. 저는 대중 작가이기 때문에 지금 독자에게 필요한 게 롤모델이 아니라고 한다면 독자들의 마음을 살펴야 할 것 같아요. 때가 무르익으면 쓰게 되겠죠. 지금 계획하고 있는 책도 많아서, 집필 계획이 내년까지는 꽉 차 있어요.


 

 

스무 살 클레오파트라처럼이지성 저 | 차이정원
스테디셀러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등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워너비 시장’을 개척했던 이지성 작가의 신작이 『스무 살 클레오파트라처럼』으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홍주영 “다이어터들이 이 식단에 열광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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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 살을 빼는 데, 그리고 건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해 9월, MBC 스페셜 <지방의 누명>에서 소개된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는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한편에서는 ‘저녁에 삼겹살을 마음껏 먹고도 살을 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려를 나타내며 반박 자료를 발표했다. 이에 제작진은 12월에 방영된 <지방의 누명 3부>를 통해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는 15% 이하의 탄수화물, 50% 이상의 지방 섭취를 권장한다. 고기, 버터, 치즈 등을 통해 전체 칼로리의 절반 이상을 지방으로 채우는 것이다. 방송은 많은 논문과 임상실험 결과를 근거로 제시하며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가 비만과 대사질환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는 시선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방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탓이다. 이 해묵은 오해는 왜 생겨났으며 지방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묻고 싶었던 질문에 『지방의 누명』이 답한다.

 

저자 홍주영은 <지방의 누명>을 집필한 방송작가로 EBS 다큐프라임 <엄마도 모르는 아이의 정서지능>, <놀이의 반란>, <화산> 등의 제작에 참여했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 SBS 스페셜 <이영애의 만찬>, MBC 스페셜 <밥상, 상식을 뒤집다> 시리즈 등 다수의 건강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며, 그 결과 전문가에 버금가는 의학지식을 자랑한다. 이번 책 『지방의 누명』에서도 1년여에 걸쳐 취재한 각국의 연구 결과와 방송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정보를 소개한다.

 

프로그램 <채식의 함정>을 준비하면서 비건(엄격한 채식주의자, 이들은 고기는 물론 우유, 달걀도 먹지 않는다)에게 발생하는 여러 질환을 알게 된 저자는 채식과 육식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에 관한 논문을 수집하면서도 쉽게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직접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의 효과와 원리, 구체적인 방법과 원칙들은 『지방의 누명』안에 모두 담겼다. 저자가 직접 개발한 ‘식단 레시피’와 함께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정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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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만에 뱃살이 빠지더라고요


<지방의 누명>이 들려준 이야기는 일반 상식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인데요. 취재 과정에서 의문이 들기도 하셨어요?

 

네, 많이 들었죠. 처음에 일본의 와타나베라는 의사를 만났는데, 그 분 병원에서 다양한 환자들을 만났어요. 방송에는 당뇨병 환자의 사례만 나왔지만 비만, 류마티스 관절염, 심지어 암 환자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버터, 치즈, 달걀, 고기를 마음껏 먹으면서 병이 나았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죠. 그런데 방송에 내보내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제 스스로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의사 말로는 ‘우리 몸의 세포를 구성하는 성분의 70%가 지방이니 세포가 망가졌을 때는 지방을 먹어야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많은 의사들이 지방을 먹지 말라고 한 건지, 심혈관 질환이 발생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죠.

 

납득할 만한 근거를 찾으셨나요?


계속 취재를 하면서 미국의 진화의학자와 여러 의사들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알게 된 거죠. 현대인의 밥상의 70~80%가 전부 가공된 음식인데 그것보다는 천연 지방이 100배 낫고, 그래서 건강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례자들을 모아서 방송을 만들었을 때, 진짜 그들의 주장대로 살이 빠지고 건강이 좋아질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죠. 제가 직접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해요.

 

직접 체험하신 결과는 어땠나요?


저도 약간 만성질환이 있었거든요. 늘 피곤해서 한 달에 1~2번은 링거를 맞으러 갔었고, 1년에 8~9번은 헤르페스 바이러스 때문에 고생했었어요. 중증은 아니었지만 족저근막염도 있었고, 급성 위염도 있었죠. 40대 중반을 넘기다 보니 뱃살도 생기고요(웃음). 그런데 2주 만에 뱃살이 빠지더라고요.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족저근막염이 없어지고요. 급성 위염이랑 생리 전후로 생기던 뾰루지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가 효과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제 변화를 보고 스태프들도 식이요법을 시작했어요.

 

식습관을 바꾸는 게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탄수화물의 경고>를 집필하면서 탄수화물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서 탄수화물 섭취량을 많이 줄인 상태였거든요. <탄수화물의 경고>를 할 때 많은 의사들이 이야기했던 게 ‘탄수화물을 먹은 만큼 운동을 해야 된다, 운동을 할 시간이 없으면 탄수화물을 적게 먹어라’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탄수화물 섭취를 많이 줄였기 때문에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는 어렵지 않게 시작했어요.

 

책에서 설명해주신 것처럼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 초기에 부작용을 겪기도 하잖아요. 무력감, 두통, 변비 혹은 설사, 피부 발진, 근육통 같은 것들인데요. 부작용은 없으셨나요?


저는 없었어요. 제 주변의 경우를 보면, 탄수화물을 많이 먹던 사람일수록 부작용을 심하게 겪더라고요. 저는 이미 탄수화물을 많이 줄인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었고요. 탄수화물 섭취량을 단계적으로 줄인 사람들도 부작용을 덜 경험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식이 요법을 지속하고 계세요?


네, 저 뿐만 아니라 저희 남편과 아이도 하고 있어요. 제가 <탄수화물의 경고>를 할 때 탄수화물을 줄여야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아침에 밥을 조금씩 줬거든요. 그러다가 지방을 많이 먹는 게 좋다는 걸 알고 밥 대신 양질의 지방이 있는 자연 식품을 듬뿍 차렸어요. 그랬더니 저희 남편도 뱃살이 빠지기 시작한 거예요. 원래 뚱뚱한 편은 아니었는데 3개월 만에 몸무게 앞자리가 바뀌었고요. 허리 사이즈가 4인치 정도 줄더라고요. 본인이 직접 변화를 목격하니까 스스로 공부를 시작하고, 혼자서도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로 챙겨먹게 됐어요.

 

자녀 분의 경우는 어떤가요?


아이들은 활동량이 많기 때문에 탄수화물을 먹어도 되거든요. 그래서 탄수화물을 철저하게 제한하지는 않는데, 저희 식단에 밥만 한 그릇 더 주는 거예요. 사실 지방이 아이들 뇌 발달에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호르몬 균형이 맞아야 성조숙증도 안 와요. 성조숙증의 가장 큰 원인이 당분이에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에서 철저하게 줄이는 두 가지가 있다면 당분과 가공식품이에요. 그러니까 아이에게는 소세지나 햄 같은 가공식품 전혀 먹이지 않고요. 집에서는 과자, 초콜릿, 사탕 같은 당분을 주지 않아요. 단맛에 익숙해지게 만들면 안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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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을 참지 않아도 되는 다이어트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의 전제 조건은 탄수화물을 줄이는 건데요. ‘탄수화물이 그렇게 몸에 안 좋을까’ 의문이 들기도 해요.


사실 100년 전에는 탄수화물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그때는 육체노동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활동량이 많았잖아요. 탄수화물을 먹으면 에너지원으로 다 써야 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활동량이 많이 줄었죠. 그리고 옛날에는 간식이 없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먹는 모든 간식이 탄수화물이에요. 떡, 떡볶이, 과자, 감자튀김, 사탕, 콜라, 음료수... 다 탄수화물이잖아요. 다 당분이 들어가죠. 뿐만 아니라, 제가 다큐멘터리 <이영애의 만찬>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한식에 설탕이나 꿀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식에 설탕 안 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없죠. 지금 우리는 활동량은 엄청 줄었는데, 그에 비해서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먹는 거예요. 그게 문제가 되는 거죠. 건강한 사람은 탄수화물을 적당히 먹고 몸을 많이 쓰면 돼요. 그러면 나쁠 게 없어요. 움직이지 않는데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먹는 게 문제인 거죠.

 

탄수화물과 당분이 문제가 된다면, ‘저탄수화물 고단백 식단’은 어떤가요? 꼭 ‘고지방’일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누누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는 여러 가지 다이어트 방법 중 하나라는 거예요. 미국 당뇨협회에서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6가지의 다이어트 식단이 있는데 그 중 하나예요. 나머지는 지중해 식단, 저칼로리식, 저탄수화물 고지방 등이고요. 가이드라인의 가장 위에는 ‘본인의 대사적 목적과 취향에 맞춰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되어 있거든요.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죠. 만약 지방이 너무 느끼해서 못 먹겠다면 다른 걸 택해도 돼요.

 

다양한 다이어트 식단 가운데에서 ‘저탄수화물 고단백 식이’가 환영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다른 식단에 비해서 배가 안 고프거든요. 닭가슴살만 먹으면서 저칼로리식을 하면 배가 고프잖아요. 지방이 주는 포만감이 없어서 그렇거든요. 그래서 폭식을 하게 되고 요요가 오기도 하는 거예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를 하면 배고픔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런 섭식 장애가 오지 않아요. 그게 저는 다이어터들이 열광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배고픔을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인 거죠. 그런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열광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음식들이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탄수화물을 제외하고 나면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남나?’ 싶기도 해요.


다들 탄수화물 빼면 먹을 게 없다고 이야기해요. 이 책을 쓰면서 레시피를 넣은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그리고 ‘어떻게 탄수화물을 안 먹고 살아?’라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데요. 정말 신기한 게, 어느 순간 탄수화물이 땡기지 않아요. 저는 원고 쓸 때 달달한 비스켓을 달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3~4개월 정도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를 하니까 과자가 너무 달아서 못 먹겠더라고. 속이 쓰린 느낌도 있고요. 그래서 (탄수화물을) 끊게 된 거예요. 몸이 예전보다 민감해진 거죠. 이건 저만 느끼는 게 아니고요. 이 식단을 경험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 탄수화물을 먹으면 속이 쓰리거나 몸이 안 좋아지는 걸 느끼니까 자연스럽게 안 먹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유지를 하는 거죠. 너무 힘든데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방의 누명>이 방송된 뒤에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를 다이어트 방법으로만 인식하신 분들도 많았어요. 아쉬움이 남지는 않으세요?


맞아요. 이건 그냥 다이어트 식단이 아니라 건강식이거든요. 사실 외국에서는 당뇨 질환자들에게 제일 많이 쓰여요. 말씀 드린 것처럼 미국에서는 당뇨협회의 가이드라인 6가지 중에 하나이고, 대학교수들이 당뇨 환자들에게 제일 적용을 많이 해요. 일본에서도 ‘당질제한식이’로 당뇨 환자들을 치료한 지 10년이 넘었고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를 하면 당뇨약을 엄청 빨리 끊거든요. 대사 질환은 다 좋아진다고 할 수 있어요. 호르몬이 안정화되기 때문이에요. 우리 몸 안에 수만 가지 호르몬이 있는데, 탄수화물을 많이 먹어서 인슐린이 과도하게 나오기 시작하면 다른 호르몬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그런데 탄수화물과 당분을 적게 먹으면 인슐린이 안정화 되면서 다른 호르몬들도 활발해지고, 몸의 대사가 안정화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후폭풍이 너무 거셀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뇨보다는 다이어트로 접근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폭풍이 있었어요. 가장 많이 제기된 반론은 무엇이었나요?


사실은 처음부터 각오를 했었어요. 그런데 방송이 나가고 3주 정도는 의외로 잠잠했어요. ‘왜 이렇게 조용하지?’라는 생각도 들었죠. 심지어 방송에 출연했던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자신도 해보고 싶다고 말하신 의사 선생님도 많았고요. SNS에서 저를 지지해주는 의사 선생님도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방송이 나가고 3~4주 지나고 나서 후폭풍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한 거예요. 버터가 엄청나게 팔리고, 삼겹살 가격이 오르고, 쌀 소비량이 줄었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성명서를 내기 시작했어요. 너무 열풍이 거세지니까 반론이 제기된 거죠. 제일 많았던 성명서의 내용은 ‘심혈관 질환을 야기한다’는 게 첫 번째였고요. 두 번째는 ‘영양 불균형이 온다’, 그리고 세 번째가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없다, 요요가 올 것이다’라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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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끼, 탄수화물을 끊어 보세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를 하면 콜레스테롤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된다는 견해도 있어요.


콜레스테롤의 누명은 이미 많이 벗겨지고 있는데요. 중요한 건 좋은 콜레스테롤과 나쁜 콜레스테롤의 비율이거든요. 그런데 일단 포화지방을 먹어야 좋은 콜레스테롤이 높아져요. 불포화지방은 아무리 먹어도 좋은 콜레스테롤이 높아지지는 않아요. 그리고 콜레스테롤이 직접적으로 심혈관 질환에 영향을 주거나 심근경색을 일으키는 게 아니에요. 콜레스테롤 자체가 위험한 게 아니고, 혈관 염증이나 고지혈증이 있는 사람이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을 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혈관 염증과 고지혈증을 잡는 게 더 중요하고요. 사실 혈관 염증과 고지혈증을 높이는 건 정제된 당이에요. 설탕이 제일 최악인 거죠. 그걸 줄이는 것만으로 고지혈증과 혈관 염증이 개선되기 때문에 콜레스테롤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거예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는 지방을 50% 이상 섭취하는 거잖아요. 영양소 불균형이 우려되기도 해요.


우리가 대부분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만 생각하는데 우리 몸을 움직이는 데 제일 중요한 건 미량 영양소예요. 흔히 생각하는 미네랄, 비타민, 요오드, 인, 칼슘, 철분 같은 것들이죠.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은 에너지원이에요. 탄수화물이 없다면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쓰고, 지방이 없으면 탄수화물을 에너지원으로 쓰면 돼요. 장이 건강해지고 항산화작용을 하고 세포가 건강해지려면 미량 영양소를 먹어야 되고요. 책에 실린 레시피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식단에 포함된 채소 양이 정말 많아요. 저도 이 식단을 하면서 이전보다 채소를 훨씬 많이 먹게 되거든요. 그리고 고기에도 비타민이 엄청 많고요. 지용성 비타민 같은 경우에는 지방과 같이 먹었을 때 제대로 섭취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영양 불균형이 일어나지 않는 거죠.

 

채식주의자들도 달걀, 버터를 이용하면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건 같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는 예외이지만요.


그렇죠.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죠. 달걀은 엄청난 영양소가 들어있는 재료거든요. 생명이 응축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왕이면 조금 더 비싸더라도 건강한 달걀을 먹으라고 이야기해요. 저는 고기보다 달걀을 선호하는 편이고, 달걀과 버터를 가장 애용하는데요. 버터는 꼭 풀을 먹고 자란 소의 젖으로 만든 걸 드시는 게 좋아요. 오메가 3가 많거든요. 몸 안에 있는 환경 독소를 배출하려면 오메가 3가 있어야 돼요.

 

직접 개발하신 ‘식단 레시피’도 알려주셨는데요. 가장 애용하시는 메뉴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시금치 토마토 오믈렛’을 제일 많이 만들어 먹고요. ‘프리타타’도 많이 먹어요. 계란으로 만드는 요리들이죠. 그 두 가지 메뉴가 만들기 편하니까 아침 식사로 많이 먹고요. 사실 저는 한식을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한국인은 아무래도 한식이잖아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이 한국인의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꼭 그렇지는 않아요. 국을 끓일 때 재료를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거든요. 사태보다는 조금 더 기름기 많은 차돌박이를 넣고, 미역국을 끓일 때 들깨가루를 넣는 거예요. 저는 시금치를 무칠 때 호두나 잣을 빻아서 넣기도 해요. 대두유(콩기름)가 아닌 올리브오일로 만든 마요네즈를 사용하고요.

 

‘고지방 식단’이라고 해서 아무 기름이나 먹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책에서 유채꽃유, 올리브오일, 코코넛오일, 들기름 정도로 제한하셨는데요. 이유가 있나요?


쉽게 생각해서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는 천연 식품을 먹는 거예요. 지금 마트에 있는 기름의 대부분은 공장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아주 오래 전에 먹던 기름이 아니에요. 그런데 올리브유는 천 년도 넘게 먹어왔던 거고, 들기름도 옛날부터 먹었던 방식이죠. 콩기름이나 포도씨유 같은 대부분의 기름은 최근 들어서 나오기 시작한 거고요. 올리브유나 들기름은 압착으로 뽑아낼 수 있는 데 반해서, 최근에 나온 기름들은 화학처리를 해서 뽑아낸 거예요. 그래서 압착유를 먹는 게 좋고, 그 중에서도 엑스트라 버진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거죠. 그리고 모든 식물성 기름은 산패하는데, 마트에 진열해 놓고 판매하는 기름들에는 산패를 막기 위한 첨가물이 들어가 있어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을 드시면서 너무 느끼하다는 생각은 안 드셨어요?


저는 꼭 김치랑 같이 먹어요.

 

김치와 젓갈은 마음 놓고 먹어도 되나요?


네. 탄수화물을 먹을 때는 음식을 짜게 먹는 게 몸에 안 좋아요. 인슐린이 몸 안에 염분을 붙잡아 두거든요. 그런데 인슐린 분비가 낮아지면 염분이 급속도로 배출되기 때문에 염분이 필요해져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로 다이어트를 하면 2~3일 만에 3kg이 빠지기도 하는데요. 이때는 지방이 아니라 수분이 빠지는 거예요. 염분을 배출하니까 삼투압 현상 때문에 수분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거죠. 수분을 붙잡아두려면 적절한 염분이 필요해요. 그래서 저는 싱겁게 먹지 않아요. 오믈렛을 먹을 때 꼭 김치를 얹어서 먹고요. 약간 짭짤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간을 해요. 김치 중에서 물김치, 깍두기, 겉절이에는 설탕이나 사이다가 들어가니까 조금 피하셔야 되고요. 그 외에는 다 괜찮아요. 시중에 판매되는 김치 중에도 설탕이 들어간 제품이 많으니까 조심하셔야 하고요.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를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제대로 하려면 꼭 공부가 필요한 식단이기는 한데요. 저는 처음 시도하는 분들께 ‘일단 하루에 한 끼, 저녁만이라도 탄수화물을 먹지 마라, 그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설탕이 있는 것들을 절대 먹지 말라고 하죠.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돼요. 그러면서 살이 빠지고 건강이 좋아지는 게 보이기 시작하면 좋은 지방을 찾아서 먹게 되거든요. 그 때는 지방을 먹는 만큼 탄수화물 양을 줄이시면 되고요. 몸이 좋아지는 걸 경험하면 식이 요법에 대한 공부는 저절로 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너무 급격하게 바꾸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하루 한 끼 탄수화물을 먹지 않는다, 절대 설탕은 안 먹는다, 가공 식품을 안 먹는다’라고 생각하고 시작하면 되고, 그 뒤부터는 조금씩 공부해가면서 완성해가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지방의 누명홍주영 저/정명일,이영훈 감수 | 디케이제이에스
MBC 스페셜에 방송되며 숱한 화제를 모았던 지방의 누명이 책으로 출간됐다. 책은 내가 먹는 지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내 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좋은 지방, 나아가 건강한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국어학자 남영신 “쉬운 문장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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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걸렸다. 꼼꼼히 살펴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닐 수도 있겠다. 부록까지 총 1,746쪽 『보리 국어 바로쓰기 사전』을 본 소감이다. 사전이 맞나 싶은 산뜻한 표지와 장정, 가독성을 높인 큰 활자는 사전을 읽지 않는 세대에게까지 이목을 끈다. 사전을 만든 이는 국어학자 남영신. 그는 1987년에 첫 사전을 만든 후, 국어문화운동본부 대표로 활동하며 평생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보리 국어 바로쓰기 사전』은 틀린 낱말로 찾아도 바른 낱말이 나오는 사전이다. 습관적으로 잘못 쓰는 말도 올림말로 올려, 바른 올림말과 비교하고 왜 틀렸는지를 설명해준다. ‘들르다’외 ‘들리다’, ‘부스스’와 ‘부시시’, ‘덮이다’와 ‘덮히다’, ‘치르다’와 치루다’ 등 일상 생활에서 자주 헷갈리는 낱말들의 정확한 활용법을 알기 쉽게 소개했다. 복합어, 관용 표현 등 한 낱말의 다양한 쓰임새를 두루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록에 ‘용언 활용표’를 붙여 용언의 활용 유형을 쉽게 익힐 수 있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부터 맞춤법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은 독자들까지, 두고두고 봐도 좋을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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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어보다 욕설이 더 큰 언어 파괴


벌써 2쇄를 찍는다고요. 반응이 좋습니다.

 

사전이 나왔을 때 만족했어요. 깔끔하잖아요. 편집을 기막히게 잘했어요. 보기가 참 편해요. 조금 넣어야 할 걸 못 넣어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아주 좋아요.

 

사전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으셨을 때, 바로 수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가 먼저 제안했어요. 저야 원래부터 해왔던 작업이니까, 어떤 어휘를 담아야 할지 알고 있었고요. 그동안 사전들이 갖고 있었던 불편함을 조금 보완하면 좋겠다, 생각했죠. 요즘 사전 보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요. 이런 추세를 알면서도 종이사전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척 반가웠죠.

 

‘과연 일반 독자들이 사전을 살까?’ 하는 우려는 없었나요?


읽히리라고 믿었어요. 제 느낌이 있으니까요. 『보리 국어 바로쓰기 사전』는 실용성이 있는 사전이에요.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어휘의 다양한 쓰임새를 두루 살펴봤어요. 조사와 어미를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조사와 어미 관련 정보를 충실히 실었고, 낱말 간의 의미 차이와 용법 차이도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습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는 등 국어 생활의 기반이 단단해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우리말을 어법에 맞게 사용하는 걸 어려워해요. 비문법적인 문장, 낱말의 쓰임새에 맞지 않는 표현, 외국어 직역투 어법이 넘쳐나고요. 혼탁한 국어를 바로잡기 위한 마지막 무기로 만든 셈이에요.

 

아무래도 사전은 글 쓰는 사람,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수요가 많을 텐데요.


글을 쓰다 보면 어떤 어휘가 막히는 순간이 있잖아요. 선택한 단어가 어떤 용례로 쓰이는지 확신이 안 설 때도 있고요. 그럴 때 도움이 될 만한 사전이에요. 어려운 단어보다는 쉬운 단어, 기초 어휘에 중심을 두고 사전을 만들었어요. 기초 어휘를 다양하게 사용하는데 엇나가지 않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뒀죠.

 

‘드디어’, ‘마침내’ 같은 단어도 쓰임새가 다르더군요.


‘드디어’는 일이 진행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을 제시할 때 사용합니다. 대체로 그 결과가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그렇게 될 경우가 대부분이죠. 마땅히 그렇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마침내’는 ‘드디어’처럼 일이 진행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을 제시할 때 사용하는데, 진행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음을 암시해요. 우여곡절이 있은 뒤에 그 결과에 이르렀다면 ‘마침내’가 ‘드디어’보다 더 알맞죠. 

 

‘아는 체’와 ‘알은체’ 용법도 잘 몰랐던 내용입니다.


두 낱말은 동사 ‘알다’에 의존 명사인 ‘체’와 ‘척’이 붙은 형태입니다. 문법적으로 이런 경우는 ‘아는 체’, ‘아는 척’으로 쓰는 게 옳아요. ‘알다’의 관형사형은 ‘아는’이지 ‘알은’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아는 체’, ‘아는 척’은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을 뜻해요. 그런데 사람이나 사물에 관심을 보이는 의미로 쓸 때는 ‘알은체’, ‘알은척’이라고 해요. 이는 독립한 낱말로 보고 있어요.

 

조사와 어미를 중요하게 다룬 것도 사전의 특징입니다.


국어에서는 조사와 어미를 바르게 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조사 ‘가’와 ‘는’은 사용법이 상당히 다른데, 흔히 아무렇게나 사용해요. 어미 ‘-어’와 ‘-어서’가 같지 않고, ‘-고’와 ‘-며’가 같지 않아요. ‘-고’는 앞선 행동이 끝나고 그 상태에 있을 때 다른 동작이 일어나는 경우에 씁니다. ‘-며’는 앞선 행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동작을 시작할 때, 즉 함께 진행될 때 사용해요.

 

평소 문자나 이메일을 주고 받을 때, 비문이 너무 심하면 지적해주시나요?


물어오면 대답해주지만 먼저는 아니죠. 대개 틀릴 만하다고 생각해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기대감이 큽니다. 그런데 이 정도 맞춤법은 알 것 같은데,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언어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언어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하죠. 부모의 언어 생활, 학교에서 배운 언어도 그렇고요. 언어적 감각이 없어서일 거예요. 또 한 가지는 사회적인 문제죠. 우리가 글자로 보는 대부분의 것은 공공 표지물입니다. 일반인들이 자기가 쓴 글을 붙여 놓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공공 표지물이 틀린 경우는 강력하게 이야기해요. 정부 문서나 지하철 표지물도 바로 써야죠.

 

최근 손석희 JTBC 앵커가 뉴스 클로징으로 “감사합니다”가 아닌 “고맙습니다”를 사용하는 습관이 네티즌들에게 화제가 됐는데요. “고맙습니다”가 더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나요?


‘감사하다’는 기본 용언이 동사고, ‘고맙다’는 형용사예요. ‘감사하다’라는 동사를 ‘고맙다’라는 형용사로 쓰기도 하죠. 뜻이 확장됐다고 볼 수도 있어요. “감사하다”고 할 때, “고맙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예요. 일부 사람들이 ‘감사하다’는 한자어니까 우리말인 ‘고맙다’로 쓰자고 하는데, 그 뜻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감사하다’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이건 이해할 필요가 있죠.

 

우리말 이야기를 하면 신조어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결국 생명력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오래 살아남는 신조어도 있지만, 한 두 해 짧게 쓰이고 사라지는 신조어도 많습니다.


신조어는 언어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이에요. 신조어와 관련해서는 민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신조어를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 간에 소통의 문제가 있을 순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신조어를 쓰는 젊은 세대에게 그 말을 쓰지 말라는 건 난센스예요. 새로운 아이는 새롭게 이야기하고 싶은 게 당연한 이치예요. 소통이 안 되는 건 서로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냐?’라면서 남을 탓할 일은 아니에요.

 

‘쉼포족’의 뜻을 아시나요?


쉼을 포기한 사람 아닌가요?

 

맞아요. 휴식을 포기한 사람, 휴가를 포기할 정도로 바쁜 직장인을 뜻합니다.


좋잖아요.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소통하는 걸 시비할 필요는 없어요. 언어라는 건 항상 새롭게 만들어져요. 생명력이 있는 단어만 살아남고 금방 사라지는 단어도 많죠. 여러 사람이 젊은 세대들의 인터넷 언어를 규제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데요. 저는 “당신이나 잘하세요”라고 합니다.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언어를 만드는 거잖아요. 일종의 그 세대 문화로 이해하는 게 현명해요. 중요한 건 공적인 영역에서의 언어 생활입니다. 기성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욕 좀 줄이라는 말이에요. 외계어 사용보다 욕하는 버릇이 훨씬 큰 언어 파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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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문장이 가장 좋다


1987년에 『우리말 분류 사전』을 처음으로 만드셨으니, 사전을 만드신 지는 꼬박 30년이 되셨습니다.


그 때는 아마추어 수준이었죠. 처음 프린터가 생겼을 때였으니까요. 당시에는 레이저 프린터가 아니라서 감광지를 사용했어요. 인쇄 수준이 한참 떨어졌죠. 30년을 지나 보니, 인쇄 기술이 엄청 발달했어요.

 

국어문장사를 육성하고 계시죠? 대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분들인가요?


거의 그렇죠. 공부한 후 편집자나 교정교열자를 하는 경우도 많고요. 출판사 대표로 계신 분도 있어요.

 

글을 고칠 때 유의할 점이 있다면요? 어떤 것을 강조하시나요?


교정교열자는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의 역할은 필자가 쓴 글을 다른 독자가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문장을 잘 고쳐주는 거죠. 필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드러내게 도와주는 사람이 교정교열자예요. ‘내가 몰랐던 걸 당신 때문에 알았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는 체 하지 마라, 뭘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고 해요. 우리는 글을 고칠 때, 원 문장과 비교할 수 있도록 괄호를 사용해요. 괄호 안에는 우리가 고친 문장을 쓰고요. 두 문장을 비교해서 보라는 거죠. 우리가 고친 걸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거예요. 알아서 판단하라는 겁니다.

 

요즘 혼자 책을 만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아무래도 공부를 깊게 하면 좋죠. 국어와 관련된 책은 많아요. 교정교열까지 직접 한다면 그에 관한 책도 읽으면 좋아요. 좋은 글은 문맥이 살아있어요. 맥락이 잘 파악돼야 하기 때문에 구성이 참 중요해요. 너무 어려운 책을 파고들려고 하기보다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문법책을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기사의 경우, 구어체를 살리려다 보니 비문이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쓰는 것이 현명할까요?


큰 따옴표를 표기하고 옮기는 건 상관 없어요. 하지만 따옴표를 없애고 풀어 쓰면서, 그 사람이 한 말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하였어요”를 “하였다고 말했다”로 쓰는 사람이 많죠. 원래 말해진 그대로 인용됨을 나타낼 때에는 앞말이 직접 인용되는 말임을 나타내는 격 조사 '라고'를 써야 합니다. 인터뷰 기사에서 일반적인 가벼운 구어체를 쓰는 건, 오히려 더 좋아요.

 

기사에 ‘(웃음)’이라고 쓰는 게, 일본어 잡지식 표현이라는 의견이 있더라고요. 좋지 않은 표현인가요?


괄호 안의 단어는 문장의 내용이 아니에요. 설명 부분이죠. 문장 성분도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도 되지만, 다만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괄호를 친절하게 넣어줘도 되고, 안 넣어도 무방해요. ‘하하하’라고 쓰면 ‘(웃음)’을 안 써도 되잖아요? ‘(웃음)’을 쓴다면 독자가 여러 상상을 할 수 있겠고요. 알아서 판단해도 될 문제예요. 우리나라 문화를 보면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어 전해온 게 많아요. 물론 우리나라가 먼저 시작한 것도 많고요. 하지만 근대문화의 많은 부분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어요. 우리가 안 하던 것, 이용하지 않았던 것들이 일본에서 전해져 왔을 때, 그게 좋다면 써먹으면 돼요. 남들이 다 하는 걸 본받으면서, 일본 거라고 굳이 안 쓸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어떤 걸 이미 쓰고 있는데 바꾸려고 한다면, 가치 판단을 해야겠지만 무조건 일본에서 넘어왔다고 쓰지 말자는 건, 좋은 태도라고 보기 힘들어요.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쓸 필요가 있나, 없나’를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비자주적인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자주 듣는 질문이실 텐데요. 좋은 문장은 어떤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쉬워야죠. 아무리 좋은 문장도 어려우면 안 됩니다. 물론, 어려운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해요. 그러다 보면 어려운 낱말이 필요할 수 있고요. 하지만 어구 자체를 어렵게 하면 쓰는 건 좋지 않아요. 영어투나 피동 표현, 우리에게 낯선 어투를 사용할 필요는 없죠.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문장이 가장 좋아요. 사실 이게 가장 어렵죠. 생각을 해야 하니까요.

 

공무원, 언론인 대상으로 국어 강연도 많이 하시지요? 국어학자로서 언론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언론인은 매일매일 많은 사람에게 모국어를 던져주는 사람이에요. 언론인이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언어 감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언어철학이 드러나요. 그런 의미에서 언론인들의 사명감이 크다고 생각해요. 선생, 교수, 공무원도 물론 중요하지만, 언론인들이 상대하는 독자는 절대 다수예요. 공적으로 자기 생각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해요. 모국어를 가장 품위 있게, 정확하게, 쉽게 사용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평상시 대화할 때, 쉽게 말하고자 노력하는 부분이 있으시나요?


노력을 한다는 느낌은 못 받아요. 특별히 이 단어를 쉽게 써야지, 하고 바꾸는 경우는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말을 조금 어렵게 한다”라는 말을 들어요. 어느 부분이 어렵게 들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제 말에 조금씩 어려운 단어가 섞일 가능성은 있어요. 만약 제가 인식한다면 바꿔 쓰려고 노력하죠. 문제는 대화하다 보면 그런 인식을 잘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하.

 

말을 참 잘한다고 평가하는 언론인이나 문장이 참 좋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손석희 앵커의 말이 좋아요. 쉽게 하고 정확하죠. 이 정도로 말하는 아나운서가 언제 또 나올지, 모르겠는데요. 훌륭한 아나운서예요. 작가는 글쎄요. 사람들로부터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질문을 종종 듣지만, 추천해본 일이 거의 없어요. 저 자체가 책을 읽을 때, 문장이 어떻고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요. 물론 조금 걸리는 작가는 있어요. 문장 표현을 봤을 때, 왜 이렇게 꼬아서 썼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성을 가미해서 써야 한다는 원초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요. 만약 제가 그 문장을 쉽게 풀어 쓴다면 “너무 평범하다, 비문학적이다”라는 말을 들을 거예요. 그러나 외국소설을 보면, 언어를 꼬아서 특별한 표현을 하려는 경우가 많진 않은 것 같아요.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데 좋은 예를 든다든지, 생각을 좋게 한다든지, 뭔가 특별하게 내용을 취하는 방식을 취하죠. 의도적으로 문장을 비틀고 그런 노력은 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지만,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죠. 또 많은 독자가 그들의 문장을 좋아하고 베스트셀러가 되니까, 제가 또 할 말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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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큰 작업이 끝났어요. 앞으로 또 다른 사전을 만들 가능성도 있을까요?


이제 사전은 안 만들 거예요. 이 사전에 만족하니까요. 다른 사람이 만들겠죠.

 

전작 『4주간의 국어여행』, 『글쓰기는 주제다』등과 이어지는 집필 계획은요?


생각 중이에요. 책이 끝났으니까 좀 놀아야 하잖아요.

 

일상에서 즐거울 때는 언제인가요?


책 읽는 재미죠. 시간이 좀 나면 산에 가서 바람도 좀 쐬고요.

 

안색이 좋으세요. 건강하신 느낌이 들어요.


아, 머리가 좀 비어있어서 그런 가봐요. 하하

 

사전을 만드신 분이 머리가 비어있다고 하시니까, 생소한데요. 끝으로 책을 좋아하거나, 글을 잘 쓰고 싶은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글쎄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글 쓰는 것도 일종의 표현 욕구잖아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을 자주 보는데, 본인들이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해요. 그건 아마 안 써봐서 일 거예요. 글쓰기와 친한 생활을 했으면 크게 어려움이 없을 텐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를 고민하면서 두려워해요. 제가 서울시나 <경향신문>에서 글쓰기를 오랫동안 가르치고 있는데요. 수강생들을 보면, 글을 쓰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만 해요. 뭐든지 그렇지만, 스케이트를 배워서 타나요? 타면서 배우죠. 글을 쓰고 싶다면 우선 써야 해요. 쓰다 보면 이력이 생겨요. 뭐가 부족한 지를 저절로 파악하게 돼요. 일단 뭔가를 쓰고 싶다면 깊이 생각해보고, 관련된 자료를 모아 한 번 써보세요. 그 다음은 원한다면 글쓰기 강좌를 들어도 좋고요. 그러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처음부터 글쓰기를 시험 보듯 준비하면 절대 안 돼요.

 

어느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비밀글만 쓰면 글은 늘지 않는다.”


그렇죠. 사람들에게 보여야죠. 바람을 좀 쐴 필요가 있어요. 요즘은 글쓰기 모임이 많잖아요. 혼자 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모임을 꾸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보리 국어 바로쓰기 사전남영신 편저 | 보리
이 사전은 엮은이 남영신이 평생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사람들이 손쉽게 상황에 알맞은 말을 골라 정확하게 쓸 수 있도록 이 『보리 국어 바로쓰기 사전』을 만들었다. 엮은이는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종교 등 모든 부문이 우리 말글을 바르게 사용하는 바탕 위에서 확립되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수민, 조선희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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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애증의 거리가 있다. 연세대학교 학생에게는 신촌 대학약국 골목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골목마다 서려 있는 회한과 철없음, 실수들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추억에 잠겨 아름다웠던 청춘을 회상하고 미화하는 사람이 있다.


“이 가게 몇 년도에 시작했어요 사장님? 한 번인가 두 번 왔던 기억이 나요. 아직도 대학 친구들 여기서 만나거든요. 3차까지 가서 이 앞에서 술 먹고 울고 그랬어요.”


신촌 인근 술집 ‘서른즈음에’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조선희 작가는 추억을 꺼내 들었다. 아련함이나 후회는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신촌에 왔다던 서수민 PD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를 담백하게 바라본다는 건 현재를 잘살고 있다는 증거다.


전 KBS 예능국 서수민 PD와 사진작가 조선희는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 동기다. 대학에서 만나 연탄을 갈아야 하는 반지하 방에서 룸메이트 생활을 하던 ‘촌년’ 둘은 각각 KBS에서 11년 만에 뽑은 여자 PD이자 <개그콘서트>를 이끈 예능 프로그램의 주역, 패션계와 광고계를 넘나들며 무수한 연예인의 사진을 찍어 온 유명 사진작가가 되었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둘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풀어놓은 책이 『촌년들의 성공기』다.


인터뷰 내내 투닥거리는 모양이 진짜 친구구나 싶었다.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서로에 게 믿음과 애정이 있었다. 사회적 성공이나 자아실현 말고도 저런 친구를 둔 게 성공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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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만난 ‘절친’


동기 중에 사진작가나 PD처럼 전공과 전혀 상관없이 직무를 택한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요?

 

서수민 선희가 이렇게 사진을 하게 된 것도 특이하고, 저희 둘이 다른 분야로 가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것도 특이하죠.


대학교 다닐 때 같이 방을 쓰셨다고요. 그 정도면 서로의 장단점은 잘 아시겠어요.


서수민 장점은 모르고 단점만 알죠. 같이 살면 장점을 보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부부 사이도 그렇고요.


조선희 너무 부정적이다. 나는 장점도 많이 봤는데.


서수민 같이 살 때도 친하게 산 건 아니에요. 선희랑 별로 친하고 싶지 않았어요. (웃음) 같은 과에 세련되고 예쁜 애들하고 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얘가 저한테 말을 시키고 그런 게 부담스러웠어요. 대학 오리엔테이션 때 다들 예쁘게 원피스 입고 왔는데 우악스럽게 생긴 애가 초록색 파카에 초록색 양말, 초록 귀걸이를 하고 누가 봐도 ‘나는 의생활학과다!’ 라는 세팅으로 나온 거예요. 그게 조선희였어요. 오리엔테이션 일일대표 맡은 사람의 말을 안 들으니까 얘가 ‘모이라 이 가시나들아-!’ 소리를 질러 대는데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게 됐어요.


예전에 같이 살 때랑 다르게 나이가 들어서 또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도 하잖아요.


조선희 똑같은 것 같아요. 예전보다는 조금 세련되어지고 조금 더 풍요로워진 거지 사람은 똑같아요. 심지어 머리 모양도 대학 때부터 수민이는 늘 앞머리를 내리고 쪼매서 묶고 다니고요. 둘 다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덜 늦으려면 뛰어가야 하니까 아침부터 일어나서 나가기 바빴죠. 치장하고 화장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네요.

 

말 그대로 촌 스타일이었던 거네요.


조선희 촌 스타일이라고 느끼진 못했는데, 지나 보니 그랬다는 거죠. 그 당시 초록색 귀걸이도 저 나름대로는 나름 멋을 낸 거였어요.

 

원래 의생활학과 지망이 아니었다고 책에 나와요.


조선희 1지망은 공대 시험 봤었어요. 무슨 과였는지 기억도 안 나요. 2지망 쓸데 없다니까 지나가던 선생님이 연대 의생활학과 괜찮다더라 해서 그냥 썼어요.


서수민 우리 둘 다 과에서는 꼴찌였어요. 학사 경고를 면하는 게 항상 이슈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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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


둘이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책을 구성했어요.


서수민 교정지를 보는 데 저 자신이 좋더라고요. 그 당시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방황하던 때였는데, 저보다 빨리 야생의 길을 걸었던 친구가 저한테 해주는 말이 있는 거예요. 물론 독자들이 보시기에는 자기들끼리 서로 덕담하고 끝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몰랐던 저의 면을 가까이 봤던 친구가 얘기해주는 게 좋았고, 읽으시는 분들도 한 사람의 일방적인 이야기보다는 서로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방식이 조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싶었어요.


PD님은 첫 책이라 부담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서수민 얘는 책을 여섯 권째 내지만, 저는 처음 낸 책이거든요. 책을 낸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어요. 제가 한 말에 책임져야 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내고 싶지도 않았고요. 아직도 부담은 많아요. 그래서 솔직히 홍보를 적극적으로 못하겠어요.


조선희 혼자 내면 인터뷰 두세 번 하고 말았는데 친구와 같이 낸 책이기도 하고, 서로의 민폐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홍보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책을 낸다는 기회로 학교 다닐 때 이후에 제일 자주 만나고 있으니 좋은 일이죠.


사진과 방송이라는 자기 분야를 내려놓고 글을 쓰는 건 어떠셨어요?


조선희 평소에도 글 쓰는 걸 재밌어하는 편이에요. 글쓰기는 자기와의 대화의 일종이어서, 저는 오히려 글을 쓰기 위해 책 계약을 해요. 계약하면 언젠가는 써야 하니까 간간이 쓰게 돼요.


서수민 글을 쓰고 싶어요. 작가도 되고 싶고요. 그런데 글을 못 써요. 만약 젊었다면……. 하지만 그것도 핑계인 것 같아요. 지금부터라도 글을 쓸 수 있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라 힘든 거죠.

 

조선희 옆에서 볼 때 잘 써요. 글 쓰는 게 습관이 안 돼서 어려운 거지. 너도 나중에 미리 계약을 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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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


90학번이면 IMF 때는 아닌 거죠? 취업이 엄청나게 어려운 세대는 아니었네요.


서수민 취직 자체가 어려웠다기보다 의생활학과를 나와서 방송 PD를 하겠다고 해서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복수전공을 해서 학교 2년을 더 다녔죠.


조선희 한 번도 취업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3학년 때부터 사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는 원서를 내 본 적이 없어요. 사진 하기가 어려웠던 거지 취직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지는 않아요.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보다 취직을 먼저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먹고 사는 일을 하는 게 취직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데 반대가 된 거죠.


서수민 문화업계 종사하는 사람으로 봤을 때 90년대가 우리나라에서 문화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예요. 음반이나 영화 시장이 드라마틱하게 커졌잖아요. 앨범 하나 터지면 몇십억씩 현금으로 쌓아서 들어올 때였으니까요. 그런 시기에 같이 자라서 시장화되어 있을 때 그 업계에 들어가서 이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건 진짜 큰 행운이었죠. 그래서 후배 PD들을 보면 지금은 터졌던 문화가 굳어지면서 앞뒤가 답답해진 그런 시기거든요.


조선희 사진작가로서 나도 그런 게, 처음 사진가가 됐을 때 여자 사진가가 거의 없었어요. 그게 사람들이 마이너스로 생각하지 않고 장점으로 봐주는 인식이 있었고, 그 당시 연예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연예인을 찍으러 왔는데 이상한 여자애를 본 거죠. 목소리도 크고 행동도 큰 사진기 든 이상한 애.


사진 찍는다고 페인트 뿌리고, 쓰레기통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나와요. (웃음)


조선희 얼마나 신기해요. 모델 보고 물에 들어가라 그러고 막 소리 지르고요. 저 이후에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진 작가가 별로 없어요. 제가 사진을 잘 찍고 실력이 있었다기보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마침 많은 브랜드가 유명한 배우를 쓰기 시작했고, 마침 제가 배우를 많이 찍고 있었던 거죠. 그런 점에서는 수민이 말이 맞아요. 우리는 혜택을 본 사람들이죠.


이 업계에서는 다른 지망생들에게 롤모델로 비춰질 텐데,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서수민 많이 부담돼요.


조선희 부담스럽진 않아요. 나를 롤모델로 삼은 사람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 내가 강요한 건 아니잖아요? 책임감은 조금 더 따르겠죠. 꼭 그들만을 위한 건 아니지만 그들에게 50대의 사진가, 60대의 사진가라는 모델을 보여주긴 해야겠죠. 우리나라에서 40대 후반, 50대 사진가가 할 수 있는 게 사실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고민이 돼요.


책이 젊은 친구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어요.


서수민 저도 막막했거든요. 전공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자 했던 여대생이었고, 얘도 정말 보장받을 게 하나 없이 답답한 여대생이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 길에 있는 친구들이 봤을 때 도움받을만한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 헤맸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누군가 말해준다면, 가려는 길이 틀린 게 아니라는 확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잖아요. 반성도 하고 후회도 했지만 지나보니 남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걸 했을 때 더 잘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후배들에게 하고 싶으면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조선희 제 어시스턴트도 20대 중반인데, 지금 너무 아름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암흑의 길에 있어요. 지금 내가 하는 길이 맞는 건지, 여기서 시간을 쓰고 있는 게 맞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요. 지나고 나면 무엇을 해도 맞았고, 그게 정말 아름다운 시기였는데 모르고 지나가요. 지금 어떤 고민을 하든,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든 다 정답인 거예요. 이 길이든 저 길이든, 너무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가면 돼요. 그걸 놓쳐버리는 게 더 나쁜 거거든요.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어요. 워킹맘에게 던지는 시선도 부담스러우셨을 것 같고요.


서수민 내적 갈등이 더 컸어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으면서도 일은 또 해야 하고요. 다행히 제가 만드는 게 예능 프로니까 딸이 좋아할 수 있는 거여서, 그것도 저한테는 행운이었죠. 그렇지 않은 워킹맘들이 많잖아요.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요. 주변에서 사연을 들어 보면 다 결혼할지, 결혼하면 애를 낳을지, 애를 낳고 나서는 일 할지 말지, 이런 고민을 많이 물어봐요. 저는 하라고 그래요. 하다 보면 길이 생겨요.


워킹맘이 아니라 워킹 부모잖아요. 남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을 텐데 여성들에게만 책임이 주어지는 것 같아요.


서수민 그게 논리적인데, 살다 보니까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어쨌거나 학원 선생님과 학교 선생님은 엄마에게 전화하고, 학부모 회의도 가면 엄마들만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절반씩 나누자고 남편에게 하는 순간 결과적으로는 싸움이 되더라고요.


‘자기만의 방’을 얻은 이야기에서는 여성이 자기만의 공간과 자기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서수민 물리적인 공간에 대한 만족감도 표현하고 싶었지만, 제 인생에서 저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유라고 생각했어요. 지위가 없어도 할 수 있는데 왜 못했을까 하는 후회도 있고요. 직장에서 내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과 같이 일하는 거잖아요. 다 지나 보니까 나만의 방을 만들어서 나를 신경 쓴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 나만의 방을 스스로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파마도 해봤고요. 미용실에서 그렇게 돈을 써본 적이 없었어요. 돈이 없었던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 저에 대한 만족감을 늘 뒷순위에 놨던 거예요. 일에서는 성과가 나오는 게 중요했는데 나에 대한 성과는 그다음이었던 거죠. 지금 20대한테 하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여유를 가지면서 나를 안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썼어요.


방송과 비교하면 사진은 사진가의 주관이 조금 더 들어갈 수 있지 않나요?


조선희 비슷해요. 클라이언트, 아트 디렉터, 매니저, 헤어디자이너 등 관련된 사람이 많죠. 100%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그저 의견을 조금 더 넣는 거죠. 결국 셔터를 누르는 건 나니까요.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어요. 다 좋은 사진 찍기 위해서 모인 거 아니냐고, 다 나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일이기 때문에 그냥 하는 건데,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거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안지 얼마 안 됐어요. 더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려운 방법을 선택해서 했던 거예요.


두 분이 같으면서도 다르네요.


서수민 선희는 꿈을 좇아 갔어요. 저도 꿈을 좇았죠. 하지만 저는 안정된 직장에서 꿈을 찾는 월급쟁이의 길을 갔다면 선희는 무모하게 자기 꿈만 좇은 거예요. 이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과자를 만들고 싶은데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에 취직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고 쳐요. 가게를 차려도, 대기업에 들어가도 둘 다 괜찮지만, 안정된 길과 무모한 길을 걸어온 사람을 보고 과감하게 질러도 괜찮다고 해주고 싶은 거예요.


조선희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고 친구라서 책 내 보자고 한 건데, 우리가 참 괜찮은 기획을 했다. (웃음) 수민이와 내가 다른 목표로 다른 길을 갔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성공한 여자의 지점에서 만난 거잖아요. 그중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던 거고요. 나 같은 방법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을 선택해서 하고 싶은 것에 도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이 조금 해보다가 포기하면 좀 답답해요.


서수민 근데 그건 아냐. 나도 20대에 대한 공부 많이 하는데, 안쓰럽게 생각하는 게 뭐였냐면 우리는 실패해도 그게 경험이 되는 세대였어. 지금은 하나 틀리면 격차가 너무 커지는 세대야. 수능부터 해서 모든 평가 단위가 하나 틀리면 인생이 갈리는 거야. 나도 우리 후배한테 엎어져도 괜찮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선희 사회가 그렇게 말하는 거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잖아.


서수민 왜냐하면 우리가 그 세대랑 다른 잣대로 살고 있잖아.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안 되더라고요. (한숨)


조선희 아니 왜 한숨을 쉬고 그래. (웃음)


서수민 (웃음) 그게 쉽지 않죠.


조선희 옛날에는 누가 젊음을 줄 테니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하면 절대 안 내놓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내놓을 의향이 있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으세요?


조선희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연애하고 사랑하고, 더 저지르고 살고 싶어요.


서수민 내가 가진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겁을 덜 내는 거죠. 겁을 덜 내고 그 시간을 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돌아가면 감정에 헤퍼지고 싶어요. 감정을 되게 많이 아꼈어요. 좋아한다는 마음도 아끼고, 누가 다가오면 받아들이기만 했지 그걸 키우질 못했어요. 감정을 아낀다는 건 인간관계나 모든 것에 있어서 아끼고 안 쓴다는 이야기거든요.

 

조선희 내가 안 다가갔으면 우리가 친구 되기도 어려웠을 거야.


서수민 다칠까 봐,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후회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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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새로운 걸 해야 해요


꼰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으세요?


조선희 있죠. 늘 있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서 거울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해요. 그리고 잔소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요. 그런데 가자마자 잔소리를 해요. 생각해보면 나도 그때 실수를 하고 그랬을 텐데 왜 여기서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나, 싶죠.


처음에는 매너가 없었다는 얘기도 쓰셨어요.


조선희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가 매너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냥 더 좋은 사진을 찍고 싶던 욕심이 많았던 거지 매너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닌 거죠. 뭐가 더 우선순위에 있는가 하는 문제 같아요.


서수민 저도 매너 많이 없거든요. 회사에서 업무 관계로 타부서랑 얘기할 때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럼 저는 늘 억울해했죠. 지금 일 이야기를 하는데 왜 자꾸 나한테 태도를 이야기하냐, 애교라도 떨어드려요? 이러면서요. 참 현명하지 못했던 거죠.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냥 한 번 굽히고 부탁한다고 말 한 번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걸 하기 싫어서.


조선희 근데 그게 하기 싫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고 지금의 네가 있는 거야.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은 없어.


예전 인터뷰에서 ‘욕심과 열정의 차이에 대해 고민한다’(채널예스 인터뷰 : http://ch.yes24.com/Article/View/24127)고 말씀하셨어요. 지금도 고민하시나요?


조선희 지금은 같다고 생각해요. 욕심이 있어야 열정이 있는 거예요. 욕심을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저는 긍정적으로 봐요. 욕심이 있다는 건 에너지원이고, 내가 뭔가 더 잘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게 있어야 열정이 생기는 거죠. 욕심이 없다면 지금 사진 안 찍고 돈 안 벌어도 잘 먹고 잘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과연 잘 먹고 잘사는 걸까? 내 속은 아직도 좋은 사진을 죽을 때까지 찍고 싶은데, 그럼 그 방법을 고민하는 게 결국에는 내 욕심인 거잖아요. 이제까지 충분히 했으니까 안 한다 그러면 내 삶이 얼마나 무의미해지겠어요.


두 분 다 해당하는 얘기지만,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면서 기존에 했던 방향이 더 이상 먹히지 않잖아요.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옮겨가기도 했고요. 시대가 급변하는 것에 위기감은 없나요?


조선희 디지털카메라로 바뀐 게 2005년 즈음인데, 그때 위기감이 많이 들었죠. 지금은 나이 들어가는 거에 대한 위기감이 있어요. 아직 20대 같은 청춘인데, 사람들은 나를 작가님,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우리나라 사회가 존칭 사회라 높여서 대하잖아요. 그러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해요. 유럽이나 미국 가보면 사진가들이 80대가 되어서도 서로 이름 부르면서 사진을 찍어요. 얼마나 부러운 일이에요. 한국에서는 기자들 나이는 점점 어려지고 나만 나이를 먹는 것 같은 거예요. 그걸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하는 게 제 숙제죠.

 

PD님은 어때요? 모바일 환경이나 MCN처럼 방송 플랫폼 자체가 바뀌는 시대잖아요.


서수민 예능이라는 콘텐츠가 힘들어지는 시대라고 느껴요. 처음 예능PD를 시작했을 때는 예능이 홀대받고 관심도 없었는데 지난 5년간 예능이 주목받으면서 문화도 만들어지고 파워도 생겼잖아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 웃어야 힘을 받을 수 있는데 이제는 취향의 시대가 된 것 같아요. 각자가 재밌지만 전체가 다 즐거울 필요는 없는 콘텐츠요. 문화적으로 봤을 때 그게 좋은 방향일 수 있죠. 그런 시장 변화에 저희가 대처해야 하는데, KBS는 이미 공룡으로 시작했잖아요. 각자의 취향에 각개격파할 제작형태부터 고민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몬스터유니온이라는 별동 부대를 만들었는데,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할지, 아니면 취향을 맞춰야 할지 하는 딜레마가 있어요.


지금 몬스터유니온에는 몇 명이 있나요?


서수민 드라마는 좀 있지만 예능 파트는 저랑 유호진 피디 딱 두 명이에요. 둘이 맨날 회의하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세상 걱정과 콘텐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을 것 같아요.


서수민 애써 새로운 거라고 들고 나왔는데 새롭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부담감이 있어요.


조선희 나이 들어서 새로운 걸 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아니라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죠. 우리는 늘 새로운 걸 해야 돼요. 조선희답지만 또 새로운 걸 늘 기획하고, 새로운 시각과 사진 톤을 늘 찾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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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성공


두 분 다 연예인 옆에 있는 직업이잖아요. 어쩌다 보니까 연예인처럼 유명해졌고요. 유명해지는 기분은 어떠세요?


조선희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어요. 나는 아무렇지 않아요. 그들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거지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내가 하는 일은 똑같잖아요. 유명하기 때문에 조금 더 이익 보는 게 있고 또 피해 보는 게 있겠죠.


서수민 저는 유명하지 않아요.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요. 선희는 그렇게 해서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데, 저는 사실 불편하기만 해요. 모르는 사이 누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잘 모르겠어요.


제목이 ‘촌년들의 성공기’예요.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이 있다면요?


조선희 그렇게 보면 20년 전에도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거.


서수민 저도 그래요. 중요한 건 지금 이 상태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 번 더 한다고 했을 때 나에게 판이 주어지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가장 큰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요새 계획은 뭔가요?


서수민 새로 옮긴 몬스터유니온에서 예능 코미디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어요.


조선희 올해는 여행을 많이 할 생각이에요. 프리랜서니까 걱정도 많죠.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내년이나 내후년은 어떻게 할까, 그래서 일 년 내내 다니지는 못하고 상반기 3개월, 하반기 3개월 정도 다닐 생각이에요. 50대를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해야죠.


책에 패션 전시회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할 생각 있으신가요?


조선희 할까? 재밌겠네. 해볼까? 그 생각은 못 해봤네요.


서수민 하자. 아까 선희랑 잠깐 얘기했는데 50살까지 계속 일하면서 50대에는 아틀리에를 같이 만들자고도 했거든요. 그림을 배우고 싶어요. 몇 년 후에 그림 전시회를 같이 하면 어떨까요?


조선희 그래, 같이 하자. 나는 사진 할게.

 


 

 

촌년들의 성공기서수민,조선희 저 | 인플루엔셜
KBS 〈개그콘서트〉의 황금기를 이끌고 ‘용감한 녀석들’의 “못생겼다”라는 공격을 통편집으로 받아쳐낸 바로 그 PD 서수민. 패션계, 광고계, 잡지계는 물론이고 영화 포스터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는 바로 그 유명 사진작가 조선희. 이러한 두 사람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단한 인생 이야기를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풀어놓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현진, 김나리 “여성들의 벽장 속에는 해골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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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인연으로 두 여자가 만난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짧은 연애만 하다 서둘러 헤어지는 여자와 9년을 한 사람만, 그것도 관계의 회색지대에서 버텨온 여자가 늦은 밤마다 카톡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들의 대화는 연애로 시작해 섹스, 가정폭력, 성폭력의 기억, 자존감, 우울, 일그러진 가족 관계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뻗어나간다. 솔직하고 도발적인 이야기, 고통으로 꽉 채운 이야기가 내내 불안하게 나부낀다.


무엇이었을까, 이들을 말하게 했던 힘은.


『육체 탐구 생활』, 『가장 사소한 구원』(공저) 등의 저자이자 여러 매체에서 예민하게 세상을 말해온 칼럼니스트 김현진은 이번 소설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에서 “누구한테도 못했던 이야기를 완전한 타인한테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종의 폭로전”이었다. 하찮다고, 사소하다고,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하는 ‘큰’ 목소리들 앞에서 내내 지워졌던 여성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고 했다.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의 두 저자 김현진과 김나리는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말하길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말해도 된다고, 이런 이야기도 한다고 응원하기 위해 더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 보였다. 이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를 사는 모든 여성들에게 그 자체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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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자, 저런 여자의 이야기


무심코 책을 훑어보고는 오해를 좀 했어요. 작가 소개에 ‘페이지 터너’라는 말도 있고 해서요.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책장이 쉽게 안 넘어가던데요. 밀도가 있었어요.

 

김현진: 김나리 작가와 저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에요. 페이스북에서 알게 됐는데요. 저는 열린 결말 진짜 싫어하거든요. 꽉 닫아야 해요.(웃음) 반면 김나리 작가 글을 보면 굉장히 문학적이죠. 글을 정말 잘 쓴다, 나와 섞어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거의 삼 년 전부터 꼬드기고 꼬드겨서 함께 글을 쓰게 됐어요. 결론적으로는 둘이 적당히 잘 섞인 것 같아요. 저 혼자 썼으면 완전히 엽기였을 텐데 말이에요.

 

알던 사이가 아니었군요?


김현진: 친한 친구의 대학 동기예요. 엄청 가까운 사이는 아니죠. 그런데 페이스북에 쓴 글들과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감정을 쓴 글들을 보면서 이 친구는 나와 굉장히 반대구나, 생각했거든요. 속도는 느리지만 저보다 정교하고요. 그러면서 함께 작업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작업 제안을 받았을 때 김나리 작가님은 어떠셨어요?


김나리: ‘이게 소설이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는데요. 내가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 단상들을 사람들이 읽고 싶어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균형이 잘 맞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이런 여자, 저런 여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처음에는 형식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그렇다면 이 형식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정말 잘 써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많았어요. 그래서 좀 머뭇거렸어요.

 

카톡 대화로 구성된 형태를 말씀하시는 거죠? 의구심은 다 해결이 되었나요?


김나리: 쓰면서 좀 해결이 된 것 같아요. 말 자체가 이야기가 되고, 그 사람이 내뱉은 말이 그 사람의 캐릭터가 되는 거라 이것을 독자가 신뢰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의심들은 쓰면서 오히려 해소되었어요. 말하자면 나를 내가 관찰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과잉될 수 있는 부분들도 이런 방식 안에서 잘 풀렸던 것 같아요.

 

공동 작업인데요.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나요?


김나리: 단문으로 주고받은 대사들은 실제로 그렇게 바로 대화를 주고받았고요. 장문의 이야기가 필요할 때는 원고를 주고받는 식으로 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글의 호흡은 작품 속 시간과 비슷하게 진행되었어요.


김현진: 약간 롤플레잉, 실제 이 역할을 맡아 연기한다는 느낌으로 썼어요. 짧은 이야기는 바로 주고받고, 긴 이야기는 이메일로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김나리 작가는 직장인이라 낮에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 나중에는 원고 달라고 제가 독촉하기도 했죠.(웃음)

 

롤플레잉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실제로 수미가 누구인지, 민정이 누구인지 짐작이 되거든요. 인물과 작가가 꽤나 가까운 느낌인데요. 때문에 인물에 대한 감정이 남다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김나리: 살면서 겪는 일들에 대한 단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요. 어떤 상황을 만들어야 하기도 하지만 실제 내 이야기들이 좀 더 증폭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초반에는 그런 두려움이 많았어요. 완전히 나의 일기 같이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그러면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공감 받지 못하지 않을까, 이런 두려움이 있었어요. 글을 쓰는 중반까지는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를 모르는 사람들만 이 책을 읽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책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많이 있었죠. 그렇지만 책이 완성되고 나서는 그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들어가서 이야기를 쓸 때는 거리두기가 힘들었는데 완성된 후에 더 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요. 캐릭터를 캐릭터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김현진: 제 얘기도 있고, 전해들은 이야기도 있죠. 사실 쓰면서는 ‘이거 화자와의 거리 0cm 아냐?’(웃음) 하면서 걱정했었는데요. 저희가 결말을 가장 많이 썼거든요. 여러 버전으로 써보면서 주인공과 내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확신하게 됐어요. 결말을 쓰면서 얘는 소설 캐릭터다, 라고 감정 정리가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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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도 못했던 이야기


소설 구성이 독특하잖아요. 시작과 끝 부분은 기존 소설 형식을 그대로 따랐지만 대부분은 대화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어요. 이건 처음부터 정해두고 작업한 건가요?


김현진: 네, 처음부터 ‘카톡소설’ 한 번 써보자고 했던 거예요. 아직까지 이런 건 아무도 안 해봤잖아요. 전혀 모르는 여자 둘이서 새벽에 ‘자니?’ 이러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면 되게 흥미롭지 않을까 했어요. 누구한테도 못했던 이야기를 완전한 타인한테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죠.

 

애초에 한 구상과 다르게 진행된 부분도 있었겠죠?


김현진: 소설을 쓸 때 캐릭터가 알아서 간다고 하잖아요. 저희는 처음에 분명히 이 여자 둘이 아주 친한 친구가 될 거라고 예상했어요. 같이 술도 마시면서 친해질 거라 생각했는데요. 의외로 끝으로 가도 이 둘이 안 친해지더라고요. 그게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저는 항상 제 이야기를 쓰니까 캐릭터가 움직이거나 이런 것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경험을 한 거죠.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대부분 밤이잖아요. 밤이라는 이미지와 대화 내용이 잘 어울리기도 해요.

 
김나리: 밤이 작품 안에서는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가 돌아오는 공간, 그 시간, 그때 말이에요. 나 혼자 생각하고 정돈하는 시간, 그런 시간이 밤 같아요. 오히려 밤이 되어서야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때는 이미 혼자 있는 시간이잖아요. 그 시간을 두드리는 이야기인 거죠.  

 

주인공들 이름 말인데요. 수미와 민정, 굉장히 흔한 이름이에요. 아주 가까운 이름이고, 이것이 이야기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해요. 실제로 이 사회의 여성이라면 공감할 이야기들이 정말 많거든요.


김현진: 제가 김민정 시인을 좋아하기도 하고요.(웃음) 그냥 정말 보통 여자들의 이름을 쓴 거예요. 지영이, 지혜, 이런 이름처럼 말이에요. 처음에 이름 이야기를 할 때 수미는 ‘숨이 막히게 살아, 숨이 막히게 연애를 해, 숨이 차’ 이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김나리: 민정도 그랬어요. 우스개로 세상 남자들한테 오만정이 다 떨어져서(웃음) ‘만정’이라고 할까도 했었죠. 좀 순화시켰어요.

 

주로 질문하는 사람은 민정이고 고백하는 쪽은 수미예요. 민정은 계속해서 묻거든요. 그 남자 어디가 좋냐, 어디가 모자라냐,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하고요. 무엇이 그렇게 질문하도록 만든 걸까요?


김현진: 주로 제가 민정 파트를 썼는데요. 그냥 진짜로 수미에게 너무 궁금한 거예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요. 소설을 쓴다기보다 편지를 교환하는 느낌이었죠.


김나리: 작품을 시작할 때 결말과 중간에 할 이야기, 아버지라든지 연애 이야기라든지 하룻밤 섹스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은 어렴풋이 생각해두고 시작한 건데요. 민정의 질문이 적절했던 건 항상 당장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들에 대해 적재적소에 물었다는 점이에요. 시간 간격을 두고, 곱씹은 뒤에 대답해도 어색하지 않을 질문들을 던져주었던 거죠.

 

공감해요. 질문이 거침없기는 하지만 가볍지 않거든요. 근본적인 물음이었으니까요.


김현진: 사는 곳이 워낙 멀어서 몇 번 안 만났는데요. 넣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날 때마다 카톡으로 대화 나누면서 그것을 적어두고 썼어요. 할 얘기가 많더라고요. 이를테면 거의 모든 여성들의 첫 경험은 준강간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다른 여자와 나눈다는 것, 그런 경험이 좋았죠. 저는 거의 에세이, 제 이야기만 쓰다가 소설을 썼잖아요. 캐릭터를 만들어서 캐릭터가 말하도록 하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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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작가의 말에서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어’라고 하지만 여성의 삶에는 ‘그런 일’이 있다고 했어요. 그 대목에 많이 공감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일을 서로 말하는 게 중요해요.


김현진: 세상에 ‘그런’ 여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니까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죠. 한 작가 분께서 ‘나쁜 아버지들이 딸을 어떻게 망치는가에 대해 잘 나와 있다’고 하셨어요. 작가의 말에서도 “‘그런 일’들이 여성들의 삶에는 억지로 닫은 서랍 속에서 금방이라도 삐져나오려고 하는 잡동사니처럼 가득 차 있다”고 썼는데요. 20대-30대 여성들이 실제 부딪치게 되는 것들을 그대로 쓰고 싶었어요.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 같지만, 있거든요. 일종의 폭로전처럼 썼어요. 가시화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때론 왜 저런 연애를 하느냐, 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연애가 또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 부분은 김나리 작가가 여리면서도 강한 캐릭터를 섬세하게 잘 표현해준 것 같아요. 그래서 이메일을 받는 게 굉장히 기대가 됐었어요.


김나리: 저희 어머니께서 읽으시고는 다 네 얘기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렇지 않다고 했더니 앞으로 할 말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하시는 거예요.(웃음) 좀 슬픈 마음도 들었죠. 어쨌든 비장하게 ‘오늘은 꼭 고백을 할 거야’ 라는 투가 아니라 무심히,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었거든요. 매일 하는 생각들이니까요. 다들 말하다 멈추고, 참고, 넘겼던 이야기들을 되도록 말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말하기가 중요한 건 청자가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과거나 기억을 정리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정체를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김현진: 라종일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요. 고통은 말하는 순간 사라진다는 거였어요. 말하는 것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는 말씀이셨는데요. 그 말씀이 이 작업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리뷰를 보니 의외로 많은 분들이 자신과 닮은 점을 찾아내시더라고요. 다들 벽장 속에 해골이 있는데 아무도 그걸 가시화하지 않고, 호명을 안 해주니까 묻어두었던 거구나 생각했죠. 흔히 20대-30대 여자들이 굉장히 꽃 같이 살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쓰면서 깨닫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텐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새로 깨달은 것들이 있었나요?


김나리: 내가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것도 사랑이야, 라고 넘겨 짚어버린 지난 일들 같은 것은 선명히 떠올랐어요. 그건 나한테 나쁜 일이었지, 이런 식으로요. 나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자존심 상하고,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런 일을 외면하기 쉽잖아요. 쓰면서 오히려 차분하게, 그때처럼 격렬히 슬프지는 않지만 선명하게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나쁜 행동이었고, 그는 나한테 나쁜 사람이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걸 받아들여도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 같은 게 생겼죠. 


김현진: 여자들이 자기 얘기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검열을 굉장히 많이 하잖아요. 저는 그런 한계를 좀 해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여기까지 가도 되나, 싶었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진행이 되더라고요. 저도 쓰면서 그것을 고통으로 인정 안 하다가 이건 고통이야, 하고 인정하게 되는 게 있었어요. 뭐랄까, 이런 이야기는 여자들끼리도 너무 못나서 못하는 얘기잖아요. 너무 못나서 호명조차 안 되는 것들을 한 번 끄집어내보자 했던 결과죠. 저희 편집자가 보도자료에 ‘만일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듯이 그런 솔직한 말을 해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두 분이 생각하는 사랑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작품 안에서 수미와 민정도 같은 듯 무척이나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수미의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현진: 저는 연애 간격이 짧은 편이라 9년이나 누구를 좋아하는 건 정말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정말 그런 궁금함으로 물어본 거예요. 사채 썼니?(웃음) 이러면서요. 누군가를 9년이나 좋아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누군가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간 아닌지 그런 의심까지 들었죠. 대합실에 앉아서 차가 오면 갈 사람은 가는 식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전 아직까지 진정한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계속 물어본 거예요.


저는 쓰면서 제 사랑의 원형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깨닫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상처 받지 않으려고 연애를 길게 하지 못했던 면이 있구나, 새삼 깨달았죠. 원래 훨씬 더 쿨하게 써보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됐어요.


김나리: 수미와 제가 겹치는 부분 같은데요. 수미는 열렬히 빠지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24시간 내내 열렬히 그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이죠. 자기 확신이나 자기애가 없기 때문에 빈 공간을 사랑의 열정으로 소진하려고 하고요. 끝내는 걸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요.

 

술이 필요한 이야기네요.(웃음)


김현진: 원고를 쓸 때는 술을 안 마셨는데요. 나중에 다시 보면서 왜 이렇게 술이 생각나는지 말이에요.(웃음) 이 책 읽고 술이 당긴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알코올이 많이 필요한 소설이라고요. 맞는 것 같아요. 푹 적셔져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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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어디에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


요즘 두 분을 지배하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김현진: 차기작 고민이요.(웃음) 초고 두 개를 출판사에 보내놓고 답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너무 초조해서 어제도 술을 먹었어요. 그것도 여자들의 이야기예요. 찜질방 같은 곳에 모여서 ‘병신 올림픽’(웃음)을 하는, 그런 이야기요. 저는 계속 여자들에게 말을 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캐릭터에게 말을 하게 해주자, 이 캐릭터에게 이야기를 하게 해주자, 그런 생각으로 쓰고 있어요.

 

계속 소설 작업을 하시는군요? 

 
김현진: 네, 예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어째 자꾸 에세이로만 가게 됐었어요. 소설 쓰고 싶어서 문예창작과까지 갔는데 말이에요.(웃음) 사실은 등단을 하지 못해서 콤플렉스가 좀 있었는데요. 주변의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등단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계속 쓰는 놈이 이기는 거다, 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나올 책은 또 나오고요. 저는 앞으로는 계속 소설을 쓰려고 해요.

 

김나리 작가님은 어떤가요?


김나리: 저는 수미 같은 연애를 끝내고 새로운 연애를 2년 째 하고 있는데요. 너무 열렬히 푹 빠져 있어서 계속 그 사람 생각뿐이에요. 지금의 마음을 많이 기록해두려고 해요. 매일 그 마음을 글로 쓰고 있어요. 사랑할 때 나오는 고통이나 슬픔 혹은 정말 날아갈 것 같은 마음, 전부 다 모조리 남김없이 써놓고 싶어요. 항상 그 사람이 질문이죠. 늘 신기하고요.

 

아마 민정의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요. 계속해서 ‘너를 아껴라’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반감을 보였어요. 이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자존감이라. 어디 마트에라도 팔면 대용량으로 사올 텐데. 자기 자신을 소중히 대하라고요? 웬걸, 나는 나를 무성의하게 대하고 싶어요. 인생이란 게 너무 무서워서, 마귀를 어깨에 올려놓고 사는 게 무거워서, 나는 좀 더 나를 함부로 대하고 싶어요. 그리고 나에게는 나를 함부로 대할 자유가 있다고요.(166쪽)

 

김현진: 특히 여자들한테 그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너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라고요.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렴. 그 안에 이중적인 메시지가 계속해서 와요. 그 이중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 말은 누구한테나,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밥 한 번 먹어요, 처럼 성의 없는 말이죠. 세상에 자기를 안 아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끼느라 그러는 거죠. 아끼다보니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아끼는 방법을 모르고, 누가 아껴준 적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더 아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수미와 민정이 마지막에 헤어지고 돌아가는 게 드디어 자신 아끼기를 시작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이들이 앞으로 조금은 바뀐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 언론사 리뷰에는 이 책을 남자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었어요. 쓴 입장에서 어떠세요? 이 이야기를 꼭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김현진: 남자들이 읽으면 너무 싫어할 것 같은데요.(웃음) 남자들은 읽어도 절대 자기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 라고 하겠죠. 자기한테도 그런 점이 있으면서 말이에요. 계속 말씀 드린 것처럼 너무 못나서 친구한테도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걸 호명하는 작업을 했던 거니까요. 여자들의 고통이라는 게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많이 찌그러져있는지를 보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빙산의 일각처럼 아직 가려진 부분이 너무 많거든요. 쓰면서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이런 괴로움이 있었다, 하는 공감을 독자들과 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솔직히 남성 독자를 전혀 상정하지 않았죠.


김나리:이 남자를 같이 욕할 수 있는 남자들은 있겠지만 나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할 것 같아요. 어떤 남자가 읽었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은 많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 이야기를 읽은 여성들의 반응은 거의 반반으로 나뉘더라고요. 한쪽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라고 하고 한쪽은 나도 그래, 라고 하는데요. 그 모든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래서 처음에는 공감을 얻지 못하지 않을까,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두려움이 있었던 거고요.


김현진: 너무 특이한 이야기가 아닐까 했는데 결국은 어디에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또 내가 바보였어, 가 아니라 그 놈이 나쁜 놈이었어, 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많이 달라지잖아요. 그렇게 바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혹시 이렇게 못난 연애를 하냐, 난 절대로 이런 연애 안 해야지, 한다면 그것도 수확이라고 생각하고요.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김현진,김나리 공저 | 박하
『말해봐, 나한테 왜 그랬어』는 지금 가장 뜨거운 여혐, 메갈리아, 문단 내 성추행, 문화계 성폭력 등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당한 성적 층위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세태 소설이다. 수미와 민정으로 대변되는 30대 여성들이 살면서 겪는 일상 구석구석에 숨겨진 차별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고질적인 남성 중심의 이기와 폭력을 자세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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