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재 삼국지』가 개정판으로 완간됐다. 2002년에 출간된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를 토대로, 나관중의 원작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벗어난 부분을 살피고,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에피소드를 일부 보탰다. 1800여 년 전 고대 중국의 이야기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만화가 이희재는 『삼국지』를 두고 “세상살이를 읽는 책”이라고 말한다. 수백 호걸들의 이야기 속에 삶의 지혜, 인간사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희재는 대한민국 대표적인 사실주의 만화가로서 특유의 역동적이고 유려한 그림체를 선보인다. 원작의 진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작화의 매력을 살렸다. 『삼국지』에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독자들이라면 입문서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만화다.
이희재는 20살 무렵 만화판에 들어와 1981년 『명인』, 『억새』를 발표하며 40여 년 동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어린이 만화 『악동이』를 비롯해 『한국의 역사』,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을 그렸다. 지난해에는 서울역 고가를 넘나들며 살아온 서울시민의 일상을 ‘서울 만화경 展’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헌책방을 순회하며 문학, 사회학, 철학 책들을 쉬지 않고 탐독했던 그는 “전세계 독자들이 고전을 사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를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를 10대, 20대에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그것이 항상 아쉽다”고 말했다.
10대, 20대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삼국지』
개정판이 나왔다. 예전 책보다 훨씬 읽기 편하다.
휴머니스트가 책을 잘 만들지 않나. 예전 책과 크게 다름이 없으면서도 또 다르다. 책이 막상 나온 걸 보니 참 좋다. 휴머니스트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13년에 걸쳐 만든 출판사 아닌가. 작가도 힘들지만 기다리는 출판사도 힘든 일이라, 동료 작가로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희재 삼국지』 개정판을 내면서도 같은 느낌이다.
2002년에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를 출간했으니 벌써 15년이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고 독자층도 넓었다. 개정판 서문을 보니 “부모가 자녀에게 추천하면 좋을 책”이라고 썼다.
『삼국지』는 동양의 정서를 가득 품은 고전이다. 동양의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다 모였다. 1,800년 전 중국의 역사를 우리가 지금 왜 알아야 하나? 그건 지금도 여전히 난세이고 지혜와 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국지』는 싸우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 군상을 다룬 작품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헤아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을 이끄는 작품이다. 고리타분한 고전이 아니라 세상살이를 읽는 책이다.
한 권에 수백 쪽이 넘는 활자책을 200여 쪽의 만화로 구성했다. 나관중 원작의 흐름을 살리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곁가지들을 솎아내고 간결한 그림체로 표현하려고 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함께 읽는 만화이기 때문에 그림을 지나치게 약화하거나 간결하게 표현하면, 작품이 지루해진다. 『삼국지』가 갖고 있는 알맹이를 적절한 선에서 잘 풀어나가고자 했다.
리뷰를 찾아보니, ‘보물 1호’로 『삼국지』를 꼽는 아이들도 있더라. 요즘 아이들에게 멀어진 고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고전을 읽을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더 어린 나이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삼국지』를 10대, 20대에 읽었더라면 사람을 보는 눈이 더 깊어졌을 것 같다. 『이희재 삼국지』가 10권인데,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10권을 읽을 생각을 하면 좀 부담스럽다. 소설이라면 더 큰 마음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옛날처럼 느린 삶이 아니다. 뭐든지 빨리 변하고 유행도 자주 찾아온다. 고전을 봐도 무척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고전은 고전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이름이 오르내린 건 이유가 있다.
편집부에서 부록으로 『삼국지 고사성어』를 만들었다. 일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삼국지 고사들을 엮었다. 『이희재 삼국지』를 그리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고사성어가 있나?
여러 가지가 인상 깊지만, 한 가지를 말하자면. ‘삼고초려(三顧草廬)’다.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돌아보라는 뜻인데, 내가 얻고자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고사다. 유비는 제갈공명보다 스무 살이 더 많지 않았나? 아직 실력이 증명되지 않은 제갈공명에게 큰 절을 하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의 존재를 낮추면서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대통령은 과연 누군지, 과연 있는지. 덕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적 덕목이다. 삼국지는 용맹한 것, 지혜도 보여주지만 삶의 방향성도 알려준다. 30대에 『삼국지』를 처음 읽었는데 ‘왜 더 일찍 보지 못했을까’, 지금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능하고 지혜로운 참모를 물색하고 있던 유비에게 서서는 제갈량이라는 선비를 천거한다. 제갈량은 아우 제갈균과 더불어 초야에 묻혀 글을 읽으며 지내고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기 위해 융중 와룡강 기슭에 있는 초가의 사립문을 찾는다. 하지만 숨어 사는 제갈량을 불러내는 일은 쉽지 않았고 결국 세 번째 찾아갔을 때야 비로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신분과 지위를 버리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제갈량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다. 유비의 지극한 인내와 겸손으로 인해 와룡강 외진 기슭에 숨어 살던 제갈량은 영웅들이 다투는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삼국지 고사성어』 35쪽)
곧 대통령 선거다. 『삼국지』를 빗대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인물은 누굴까.
유비의 모습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삼국지』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의 경연장이다. 인간사의 흥미로운 모습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장비는 용맹한 인물이다. 사나이의 세계에서 용맹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관우는 실력이 있는데 신의도 있다. 자기가 믿는 사람과는 끝까지 간다. 또한 사람이 점잖다. 장비가 흥분할 때마다 장비를 차분하게 이끈다. 그리고 장비와 관우의 의견이 대립할 때 중재를 하는 사람은 유비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의 지혜, 용맹함을 통제하고 또 십분 발휘하게 만든다. 지도자로서의 유비는 어떻게 보면 모자람이 없다. 독특한 캐릭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싱겁지만, 다른 사람들은 품는 인물이다. 동양에서 주로 내세우는 큰 틀의 그릇이다.
혹 만화가를 하면 잘했을 것 같은 인물은?
하하. 글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아마도 제갈공명이 잘하지 않을까. 만화는 상투적인 유머만 있어서는 그릴 수 없다. 기승전결과 사유,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만사에 대해 여러 모로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아마 장비가 만화를 그렸다면, 어느 한 장면을 잘 그릴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집어내긴 어려웠을 것 같다. 아, 방통도 만화가를 했으면 잘했겠다. 두뇌도 뛰어나고 유머러스 한 면도 많은 인물이다.
지금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그리고 있다고 들었다.
『사기열전』을 40대가 돼서야 읽었다. 읽는 내내 몹시 아쉬웠다. 20대에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출판용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웹으로도 연재하고 있다. 어시스트의 도움도 받으면 좋지만 내가 조직력이 약하다. 거의 혼자 작업하는 터라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나는 처음부터 출판사에게 좀 기다려 달라고 하는 편이다. 빨리 후려치듯이 끝내면 작품의 수명도 짧다. 오래 볼 수 있는 작품을 그리는 게 먼저다.
몸하고 같이 놀 때 예술은 작동한다
지금 세대는 “만화 = 웹툰’을 떠올린다. 후배 만화가들의 웹툰을 보기도 하나.
많이 본다. 워낙 많이 나오니까 안 볼 수가 없는데, 선택이 중요하다. 일반 문학이든 영화든 콘텐츠를 보려면 내 시간을 내야 하지 않나. 여가를 복되게 하려고 문화를 즐기는데, 간혹 시간을 낭비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지혜롭게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이왕이면 소모되지 않는 시간을 쓰는 게 좋으니까.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재밌는 만화 없어?”라고 묻는다. 추천 받은 작품을 보려고 하는데,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는 만화를 보면 때때로 엇비슷한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런 작품은 크게 볼 필요는 없다.
명랑만화가 이정문, 시대극화의 대가 김종래의 문하생으로 만화계에 입문했다. 『명인』으로 데뷔한 건 11년 후다. 습작 기간이 비교적 길었는데 만화가로 데뷔하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나.
우리 때는 공식적인 데뷔 같은 게 없었다. 책을 냈다가 또 다듬어서 다시 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습작기라는 게 따로 없다. 인생 자체가 습작기다. 지금도 만화를 그릴 때마다 ‘내가 이렇게 못 그리나?’, ‘이렇게 슬럼프가 오나?’ 싶다. 이럴 땐 조금 쉬면서 머리를 식힌 다음에 드로잉을 구성한다. 연필로 그리는 게 아니라 내 뇌를 정리해보는 거다. 구태의연하게 반사적으로 움직이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뇌라는 게 비단 정신의 문제만이 아니다. 몸뚱이 전체가 될 수 있다. 몸으로 많이 그려봐야 실전에서 실력이 나온다. 관우의 눈썹을 그린다고 치자. 머릿속에서부터 상상하면서 손끝까지 내 몸을 다해서 그려야 한다. 몸하고 같이 놀 때 예술은 작동한다.
만화 외길을 걸었다. 딴 길로 좀 가볼까 하는 생각은 없었는지.
글쎄. 아마 다른 길을 갔더라면 선생을 했을 거다. 국어나 역사 선생님. 역사에는 재미있는 인간사가 있다. 축적된 인생사의 의미를 찾아내는 게 재밌다. 국어 또한 언어를 다루는 학문 아닌가. 언어를 다루면서 동시에 창작도 할 수 있다. 세월호가 얼마 전에 인양되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올라와서 다행이지만 아직도 미수습자가 있다. 미수습자의 가족을 생각하면, 아.... 그건 살아있는 생이 아닌 심정이 아닐까. 온기가 사라진 부모들의 표정을 볼 때,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야 하나. 어떤 말과 글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2003년에 『십시일반』에서 다리가 불편한 여학생의 고군분투 학교 생활기를 그렸다. 사회적인 문제를 만화로 많이 풀어왔다.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다. 사회의 비주류들, 독특한 인물형들을 만화에 담고 싶다. 고은 선생은 『만인보』를 통해 만인의 이야기를 담지 않았나. 만화가 역시 내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악동이』를 추억하는 독자도 많다. 후속작 『아이코 악동이』는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한 작품이다.
새로운 시대의 악동을 그렸다. 악동이가 ‘아이코’를 만나 신비로운 모험을 하는 과정을 그린 만화다. 우리 전성기 때는 <보물섬>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20만 부까지 나갔던 잡지인데, 하이라이트는 <아기 공룡 둘리>였다. 지금은 어린이만화의 창구가 너무 작다. <개똥이네 놀이터>가 약 7천 부 정도 나간 걸로 아는데, 파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만화는 언제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매체다. 어린이들한테 들려줄 만한 인문학적 기초들, 이를 테면 한자 풀이도 만화로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재밌어 한다. 지혜로운 이야기를 읽다 보면 현명한 학습이 저절로 된다.
연재한 작품이 단행본으로 나오면, 잘 팔리는 만화가 있는가 하면 연재 때만큼은 관심을 못 받는 만화도 있다. 이유가 뭘까.
책은 보는 매체이면서 동시에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다. 애정의 밀도, 소유의 감도 같은 게 영향이 있지 않을까. 기억의 메모리로 저장하는 것과 구체적인 사물로 소유하는 것 사이에 마음의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윤태호의 『미생』, 주호민의 『신과 함께』는 연재 때도 사랑을 받았지만 단행본을 산 독자들도 많다. 웹으로 이미 봤지만 갖고 싶기도 한 책인 거다. 좋으면 소유하고 싶은 마음도 들기 마련인데, 이런 단계가 되려면 그래픽도 좋아야 한다.
눈여겨보는 후배 만화가가 있나?
공모전에서 발견한 ‘앙꼬’라는 친구의 만화를 봤는데 ‘이렇게 독특한 애가 있나?’ 놀랐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한 30대 중반일 거라 예상했는데, 아버지가 나랑 동갑이더라. (웃음) 시상식에서 그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 “여기까지 탈 없이 보내준 것 감사하다. 보통 재주가 아니”라고 말했다. 『나쁜 친구』로 제44회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새로운 발견상(Prix Revelation)’을 받았는데, 한국인 최초로 알고 있다. 굉장히 주목할 만한 만화가다.
좋은 만화를 그리기 위한 덕목이 있다면, 혹은 좋은 만화가가 되려면 꼭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일까?
글쎄, 나는 너무 일찍 선생의 지도를 받는 것에 반대한다.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자기 세계를 펼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앙꼬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목에 백지를 걸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자기 눈에 보이는 걸 끊임 없이 그린 거다. 머릿속에 상념만 가지고 있으면 발전할 수가 없다. 우리 몸이 움직여야 한다. 가끔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보석 같은 친구를 발굴하고서는 그 친구의 개성을 순식간에 깨버린다. 물론 기초도 중요하고 가르침도 필요하지만 어디까지나 방향을 잡아주는 데서 멈춰야 한다. 미술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항상 부모, 교사들이 방해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잠재력을 가둬두면 안 된다. 더 자유롭게 길을 열어둬야 고루해지지 않는다. 피카소가 왜 대단한가? 생각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희재 삼국지』를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어린이들부터 어른까지, 초등학생 3학년 이상부터는 모두 보면 좋겠다. 고전은 읽어놓으면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된다. 삶의 순간순간 화술로써, 이야기로써도 기초가 된다. 부모가 먼저 읽고 아이에게 권하면 좋겠다. 결코 지루하지 않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