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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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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구호 아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제의 혁명가는 오늘의 탄압을 피하지 못했다. 사회의 광적인 탄압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곳에는 오직 혁명만이 있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무려 10년 동안이나 중국을 지배한 ‘문화대혁명’ 풍경이다.

 

송범평의 목숨을 건 저항은 계속됐지만, 계단에 이르러 그만 발을 헛디뎌 구르고 말았다. 곧이어 여섯 붉은 완장들이 그를 짓밟아대면서 부러져 끝이 총검처럼 뾰족해진 몽둥이로 찔러대기까지 했다. 그때 끝이 뾰족한 몽둥이 하나가 송범평의 복부에 꽂혔고, 순간 송범평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자 그 붉은 완장은 몽둥이를 뽑아냈고, 송범평의 몸은 즉시 축 늘어졌다. (『형제 1』, 195쪽)

 

1960년 생으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위화 작가는 장편 『형제』에서 당시의 광기 어린 풍경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의 장면들. 작가는 이 같은 “불합리한 장면은 굉장히 흔했다”고 말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작가는 “어느 곳에서나 미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을 외면했고, 세상은 앞으로만 나아갔다. 혁명 구호가 무색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본과 권력을 좇았다. 이 놀라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또다시 미쳐갔다.


『허삼관 매혈기』, 『인생』, 『제7일』등 사회 부조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온 위화 작가는 현재의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대해 “우리 모두가 병자”라고 말했다.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한 입센의 말을 인용한다. 지금, 위화 작가는 의사 입장이 되어 병자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작품을 쓰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이제는 그 역시 병자의 입장에서 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했는데 저 혼자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웃기는 일’이라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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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의 입장에서 쓴다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에서 『형제』집필 당시 오래 휴대전화를 꺼놨던 일화를 전한 적이 있다.  『형제』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소설인가.

 

1996년, 『허삼관 매혈기』를 쓸 때부터 『형제』를 집필하기는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잘 써지지 않았고, 2003년이 되어서야 순조롭게 쓸 수 있었다. 96년 당시 중국은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이 되어 그때를 돌아보니 그 당시 겪었던 변화가 오히려 큰 변화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2003년에 와보니 진정한 변화는 그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기에 다시 『형제를 쓰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글에서 『형제』를 쓰게 된 이유를 ‘내가 병자이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사회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작품을 쓴다. 작품에서 사회를 비판할 때 작가는 의사의 입장이 되는 것 같다. 만약 1996년에 『형제』를 완성했더라면 의사의 입장에서 썼을 것이다. 그런데 2003년에 완성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병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문제가 있고 나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사회 문제에 각자 책임이 있다. 모든 사람이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모두가 병자이다.

 

모두가 병자인 동시에 의사일 수 있다고도 보나?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 역시 모두가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작가가 의사의 입장에서 쓴다고 했지만 지금은 병자의 입장에서 쓴다. 각도가 바뀌었다.

 

1부, 송범평의 적나라하고 불합리한 죽음 장면이 문제적이다.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장면인데, 이 장면을 솔직하게 날것 그대로 그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사의 그림자에 묻힌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마음이 궁금하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다 그랬다. 법도 존재하지 않았고, 법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 자체가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불합리한 장면은 굉장히 흔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느낀 것은 어느 도시를 가도 미친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곳에서나 미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이 미친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잡혀가고, 탄압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도 혁명을 계속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4-5년이 지나자 이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들을 사회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게 되었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을 중국 사회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작가의 시선을 중국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것인가?


젊은이들,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미 문화대혁명에 대해 흐릿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 자신은 문화대혁명을 잘 모르고, 부모나 사회를 통해 전해들은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선 정부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싫어해서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작년은 문화대혁명 50주년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원치 않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더 잊히는 추세다. 심지어 해외에서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조차도 50주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지만 나쁜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중국이 있을 수 있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통일된 의견이 없다보니 언급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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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은폐 시도는 큰 문제


쉽게 쓰인 장면은 없을 테지만 즐겁게 쓴 장면은 있을 터다. 어떤 장면일까.


2부에 많다. 고물 양복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게 썼다. 80년대에 고물 양복이 많이 수입됐다. 작품 중에 ‘여 뽑치’와 ‘왕 케키’가 반일 시위를 위해 동경에 가자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6년, 2007년은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장면도 들어가게 된 것인데 그 장면을 본 사람들에게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 고물 양복을 수입했다고 쓰지 왜 일본 고물 양복을 수입했다고 썼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일본 고물 양복뿐 아니라 한국 고물 양복도 수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일본 고물 양복을 쓴 것은 거기에 한자로 이름이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어느 집안 옷인가?’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재미있어서 쓴 건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웃음)

 

너무 쓰기 괴로웠던 장면도 궁금하다.


송범평의 죽음을 쓸 때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란이 상해 병원에서 송범평이 자신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는 장면을 쓸 때는 힘들더라. 이란이 하루 종일 송범평을 기다리다 결국 버스를 타고 고향에 왔는데 아이들이 거지꼴로 기다리고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는 장면은, 참 힘들었다. 또 송강이 자살하는 장면도 쓸 때 괴로웠다.

 

송강은 류진을 벗어나 철로가 지나는 곳에 이르러 기찻길 옆 돌 위에 마스크를 벗고 앉아 행복하게 저녁 무렵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사방으로 수확을 앞둔 벼들이 가득한 논을 바라보았고 멀지 않은 곳에 붉은 노을에 물든 작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중략)
그때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송강이 안경을 벗어서 닦아 다시 쓰고 보니 태양이 반쯤 저물었고, 열차는 반쯤 지고 있는 태양을 등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 인간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형제 2』, 420-421쪽)

 

창작의 고양감을 크게 느낀 장면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형제』를 쓸 때는 고양감을 많이 느꼈다.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썼다. 『허삼관 매혈기』가 평탄했던 것에 비해 『형제』는 계속 격앙된 장면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형제』가 한 권으로 묶여 출간이 되었는데 거의 600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그곳 평론가들이 평하기를 두꺼운 줄 모르고 한 번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한 번에 다 읽어버리는 책이다, 라고 하더라.

 

작가의 글에서 사회의 심각한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득 불균형, 문화 불균형 등이 꿈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진단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특히 작가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중국 사회의 변화를 꼽는다면.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먼저 환경 문제다. 땅과 물, 심지어는 공기까지도 오염이 되었다. 이것들을 복원하려면 오랜 기간이 걸린다. 큰 문제다. 두 번째는 정부 문제다. 중국 정부는 국가 운영에 대한 언급도 통제를 하고 있다. 비판을 피하는 것은 아주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 등을 회피하려는 입장이다.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는 더더욱 심하게 회피하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나 대약진운동 등은 소설 속에서라도 쓸 수 있지, 천안문 사태는 소설에서조차 쓸 수 없다. 출판을 금지한다. 역사에 대한 은폐 시도는 후에 큰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역사를 제대로 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어떤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 다시 오기를 바라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을 기다린다, 그 이유는?


문화대혁명은 반봉건, 반자본주의를 내세웠었다. 현재 중국은 고위직 공무원, 자본가 등에 대한 나쁜 감정이 많다. 만약 문화대혁명이 다시 오면 당시에 지주, 자본가를 때린 것처럼 다시 그들을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이번 방한에서 장강명 작가와의 대담이 있었다. 장강명 작가의 발제가 흥미로웠는데 그는 남한이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고,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그것을 남한이 일부러 외면한 결과라기보다는 그냥 말을 하지 않다보니 아무도 안 하는 분위기가 되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앞으로 이와 관련한 글을 발표하겠다고 했는데 흥미롭더라. 지금 장강명 작가 정도의 중국 젊은 작가들은 역사나 문화대혁명, 사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장강명 작가를 보니 중국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나 역사에 관심을 두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됐다. 대담 현장에 젊은 독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장강명 작가에게 질문을 했다. 북한 혹은 사회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의 관심이 독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좋은 표식이다. 중국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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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다.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이상한 일인데 『형제』출간 이후에는 변화가 빨라진 것 같지 않다.(웃음)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케케묵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서로 돕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미덕이라고 하면 동정심이나 연민이지 않을까 싶다. 동정과 연민은 아주 중요한 가치다.

 

한국에는 ‘알파고’ 이후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등 변화할 시대에 대한 담론이 무척 많다. 중국은 이런 급변하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없나? 변화가 빠르지 않다고 한 이유가 있나.


중국은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한국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인공지능, 생명과학 등의 분야는 계속 발전해나갈 것이다. 알파고와 이세돌 구단의 대국에 대해서 중국의 바둑 기사들도 이세돌 구단이 그렇게 빨리 처참하게 패배한 것을 처음 본다고 얘기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강(强)인공지능이 출현하면 인류를 위협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강인공지능이 출현하면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일자리 문제는 인간의 지력을 가진 인공지능이 개발되는 것보다 먼저 발생할 것이다. 그것은 우려할 만하다. 작년에 미국에서 관련 연구를 하는 과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연구를 방해하는 큰 장애물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저항이라고 하더라.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의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처음 작가가 됐을 때 소설가의 의무란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일을 잘하면 된다, 그것이 의무다, 라고 생각했다. 소설가로 살아온 지 30년이 되었는데 지금 드는 생각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만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용감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작가로서 중국 정부의 말을 따르게 되면 설령 정부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있더라도 작품이 그에 따라가게 된다. 작가의 현실감각은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소설과 현실의 공명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하다. 현실은 소설에 얼마나 영향을 주나.

 

소설과 현실은 가까울 수도, 멀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와 작품은 다르다. 한 작가가 여러 주제로 다른 작품을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이 현실과 가깝다고 해서 좋은 소설인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소설과 현실이 멀다고 해서 나쁜 소설인 것도 아니다. 가까워서 좋은 소설도 있을 수 있고, 멀어서 좋은 소설도 있다. 현실은 물론 소설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즉각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몇 년이 지나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 현실에 어떻게 작용하길 바란다고 하는 마음은 없나? 


문학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는 회의적이다. 그걸 믿지는 않는다. 다만 문학 작품에 효용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 작품이 한 사람의 시각을 변화시키는 정도의 효용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

 

위화의 소설에는 절망 속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고, 인간 삶의 다채로운 면을 조명한다. 그것이 큰 매력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독자에게 바라는 점도 있을까. 내 작품을 이렇게 읽어달라, 고 하는.


20년 전에 『인생』이라는 작품을 썼다. 솔직히 사람들이 그 작품을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웃음) 작년에 중국에서 130만 부가 팔렸다. 매년 100만 부를 찍는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늘 즐거운, 향락적인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비극을 읽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쓰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나.


구상이 다 끝난 것도 있고, 몇 년 더 구상이 필요한 이야기도 있다. 작품에도 발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소설을 계속 쓰기 위해 일상에서 지키고 있는 자기만의 규칙이 있다면. 글쓰기 시간을 정해놓고 쓴다는 작가, 좋은 글을 수집한다는 작가, 명상을 한다는 작가,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사소하나마 지키려고 하는 규칙이 있는지 궁금하다.


없다. 소설 쓰기뿐 아니라 평소 생활에도 규칙이 없어서 문제가 많다.(웃음)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를 갖고 있으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국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한국 독자는 나를 무척 가깝게 느끼고 계신 것 같다. 우호적인 느낌을 받는다. 거의 중국 독자가 나를 대하는 것만큼 호의적으로 대해준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형제위화 저/최용만 역 | 푸른숲
이후 개혁개방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작품의 배경인 류진이라는 소읍(小邑)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자신의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현 정부 청사 정문 앞에서 무기한 연좌 시위에 돌입한 이광두는 입에 풀칠이나 하기 위해 폐품 수집을 하다가 그 일을 기반으로 대형 사업체를 운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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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완 “영어 바보가 통역사 된 비결은 100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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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어 교재 부록이 테이프에서 CD가 되고 mp3파일 다운로드로 바뀔 동안 수많은 공부 방법이 떴다가 사라졌다. 단어를 묶어 외워라, 문화에 관심을 가져라, 패턴으로 외워라, 뉴스를 봐라, 신문을 읽어라, 동화로 시작하라…….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영어를 잘하는 방법을 찾는다.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 된 비법』은 기초 영어단어도 모르던 학생이 뒤늦게 영어에 도전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사는 삶을 담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책상도, 교재도 필요 없이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만 있으면 된다. 단 ‘100LS’, 즉 백 번 넘게 듣고 말하면서 영화를 봐야 한다. 책에서는 ‘100LS’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설명하기도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데 더 집중했다. 자신도 ‘영포자’였다던 편집자의 말마따나 책을 덮고 나면 ‘이미 절반은 한 것 같은 느낌’으로 한 번 더 영어에 도전하고픈 생각이 든다.


장동완 저자는 10대 시절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뉴질랜드 랭퀴지 스쿨로 갔지만 거기에서도 진짜 ‘통하는’ 영어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화로 듣기/말하기 훈련을 시작했다. 6개월 만에 영어를 구사한 후로 같은 방법으로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를 배워 외국어 능력 하나로 고액 연봉을 받으며 회사에 다녔다. 책에 나온 일대기는 저자의 성공을 자랑한다기보다, 이렇게 못했던 사람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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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


제목처럼 10대 때는 ‘9등급 꼴찌’였는데,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영어 시간에 주어와 동사를 배우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공식처럼 주어 다음에는 동사를 넣으면 된다고 해서 영어가 수학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영어랑 담을 쌓고 있다가 고등학교에서 자매결연으로 미군 학교 아이들을 초청한 적이 있어요. 전교 1등 친구도 영어로 말하려니까 버벅대고 긴장하더라고요. 그때 더 깊게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영어가 공부라는 인식에서 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인식으로 바뀐 거죠.

 

뉴질랜드에서 랭퀴지 스쿨에 다니다 영어를 어떻게 배울지 아이디어를 얻으셨다고요.

외국에만 나가면 영어 잘할 줄 알았어요. 일부러 한국인이 거의 없는, 남극에 가까운 지방으로 갔는데 랭귀지 스쿨에 들어가 보니 하는 말이 늘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하고 있다가 길에서 딱 한국인처럼 생긴 분이 있는 거예요. 자기는 선교사인데 설교 마치고 한국 음식 주니까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음식이나 먹자고 갔는데, 선교사님이 너무 영어를 잘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때 선교사님이 영어를 어떻게 잘하게 됐는지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영어를 시작하게 됐죠.


이후에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배우셨어요.


영어만 되면 프랑스에서 일할 수 있을 줄 알고 갔어요. 안 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공동묘지에서 땅 파는 일을 하면서 같이 일하는 세네갈 아저씨들한테 ‘100LS’한 문장을 물어보면서 프랑스어를 배웠죠.


일본어는 어쩌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일본 여행을 갔는데 기차에서 깜빡 졸아서 내릴 역을 놓친 거예요. 사람들을 붙잡고 영어로 물어봤더니 모두 ‘노 잉글리시’ 하면서 도망갔어요. 그래서 일본어도 해야겠다 마음먹고 같은 방법으로 훈련했어요.


듣다 보니 통역을 시작한 과정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보통 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이나 공무원을 준비하는데, 대기업 시험을 보니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인 거예요.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부산국제연극제에 통역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는데 2,000명 관객석에서 제가 통역한 내용으로 무대가 세워지고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고 희열을 느꼈어요. 이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거죠. 계속 통역을 해보고 싶던 차에 부산에서 열렸던 정상회담에 자원해서 레바논 외무부 장관 의전을 하다가 대사님과 연이 닿았어요. 취직이 안 돼서 고민하던 차에 추천을 통해 카타르 왕족 기업에 들어가게 됐어요.


기업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


중동에서 정부가 건물 수주를 주면 프랑스, 미국, 일본 등 디자인 회사, 설계 회사가 다 달라요. 그래서 시행하는 측에서 여러 파트를 점검하면서 조정하는 역할을 했어요. 예를 들어 땅을 파다 물이 나와요. 그럼 약속했던 기한에 건물을 지을 수 없으니까 독일의 방수 시멘트를 공수해서 막겠다는 해결책을 내면, 시행사 측에서는 최대한 빨리 끝내줘야 하고, 프랑스 기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럼 중간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니 이해해 달라고, 이유와 해결 방안을 중간에서 협의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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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가면 더 많은 행복의 기회가 있다


책을 보니 별명에 ‘외교관 가르치는 고교중퇴생’, ‘승무원 면접의 신’이라고 나와 있어요. 직접 별명을 지은 건 아니죠? (웃음)


편집장님이 쓴 문장입니다. (웃음) 외교관 중에서도 고위급공무원분들은 영어를 잘 못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는 대사님들께 제가 했던 방법을 가르쳐 드렸어요. 승무원 면접에서도 영어랑 제2외국어 실력이 중요한데, 면접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는 승무원’ 이런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외국어로 스토리텔링하는 법을 코칭해 줬죠. 책을 쓴 계기도 승무원 면접을 코칭하면서 희망을 주는데 제자들이 눈빛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 제자들 말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책에 영어를 잘 하면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동기 부여하는 내용이 많아요. 성공을 향한 열망이 영어를 배우는데 많이 작용했나요?


말씀하신 성공이 금전적 측면이 강한데, 해외 돌아다니면서 한국의 대기업 총수 2세, 3세 만나보면 제일 중요한 가치가 돈이에요. 하지만 해외 왕족이나 화교 부자들을 보면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더라고요. 돈이 아니라 그 가치를 위해서, 이만큼 당신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동기부여를 많이 했어요.


‘외국어 공부는 평생 공부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꿈꾼다면 말입니다.’(83쪽)고 하셨는데, 저자님에게 더 나은 인생은 ‘가치를 만드는 삶’인가요?


세상과의 연결이요. 요새 저가 항공은 왕복으로 비행기 표를 끊어도 30만 원밖에 안 돼요. 국경 장벽이 낮아졌어요. 그럼 해외로 가서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해외에서는 오픈 마인드로 누구나 눈만 맞추면 인사할 수 있어요. 그렇게 친구도 만들고 소통도 해 보는 가치를 위해서 사는 거죠.


요새 번역 프로그램을 쓰다 보면 너무 자연스럽게 번역해서 깜작 놀랄 때가 있어요. 이제 웬만한 소통은 기계로도 할 수 있으니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덜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영어 공부 관련 책도 계속 나오고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 된 비법』도 잘 팔리잖아요. 개인적으로 왜 그러는 걸까 궁금하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렸을 때는 비행기 탔다고만 하면 모두 부러워했는데 요새는 누구나 비행기 탈 수 있잖아요. 이제 수준이 높아지고 자기 행복에 집중하게 되면서 행복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생각해요. 행복해지는 방법의 하나가 외국 여행이에요. 외국에 나가면 더 많은 행복의 기회가 있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 책 독자분 중에서도 30대, 40대가 많아요. 예전에는 주입식 교육으로 영어를 배웠지만, 이제는 자기 인생을 바꾸고 자기 세상을 넓히는 도전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읽기나 쓰기보다 듣기와 말하기가 선행해야 한다는 건 이미 다들 알고 계신 것 같아요. 관련한 공부 방법을 제시한 책도 많고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교육 환경에서 듣기와 말하기 위주의 외국어 교육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누구나 듣기와 말하기가 중요하다는 건 아는데 방식이 체화되지 않아서 다시 문법이나 영어 회화 교재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다들 영화가 좋다는 건 알지만 잠깐 시도하다 체계화된 방법이 없어서 그만두게 되더라고요. 제 책에 나온 방법은 사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다른 점은 방식을 체계화해서 누구라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떠먹여 주는 시도였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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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LS, 이렇게 해 보세요


구체적인 방법으로 넘어가 볼게요. ‘100LS’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유학을 간다고 영어를 잘할까요? 아니에요. 무작정 외국으로 가 봤자 말을 못 하는 외국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래서 영어를 들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야 해요. 한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내 영어 그릇이 만들어지거든요. 1단계에서는 자막 없이 영화를 봐요. 처음에는 영화에서 울고 웃는데 왜 웃는지 몰라서 궁금증이 생겨요. 2단계에서 한국어 자막을 같이 봐요. 그럼 그제야 줄거리를 알 수 있잖아요? 3단계에서는 영어 자막을 같이 놓고 모르는 문장이나 단어가 나올 때마다 멈춰 놓고 노트에 적어요. 그리고 검색해요. 이미 한글 자막으로 봤으니 대충은 파악하지만, 신기하게 사전으로 보면 머리에 박혀요. 한 편의 영화에는 수많은 표현이 농축되어 있어요. 게다가 살아 있는 문장이 나와요. 그럼 문장에서 단어만 바꾸면 되거든요. 실제 원어민 속도로 말하는 영어를 한 개씩, 난생 처음으로 담아서 내 영어 그릇을 만드는 거예요.

 

100LS 5단계

 

1. 자막 없이 배우고자 하는 외국어 영화 한 편을 통으로 본다.
2. 한국어 자막과 같이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장면을 이해한다.
3. 원어 자막을 보면서 들리지 않는 구간의 표현을 노트에 받아 적고 의미를 공부한다
4. 들리지 않는 장면의 대사를 구간 반복한다. 떠듬거리지 않고 배우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듣고 말하기(LS)를 반복한다
5. 영화 한 편을 통째로 구간 반복했다면, 자막 없이 영화 듣고 말하기(LS)를 97번 해 100번을 채운다.

 

한 구간씩 모르는 표현을 떼서 공부하는 3단계가 중요할 것 같은데, 어디까지 몰라야 멈추고 받아적는 건가요?


이 표현을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받아 적어요. 완벽하게 내 걸 만들려면 상황 속에서 적절하게 쓸 수 있어야 하니까요.


절대 규칙으로 말하기를 잊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처음 시작하면 속도를 못 따라가잖아요. 그러면 정확하지 않더라도 일단 속도를 따라가야 할까요?


네, 그리고 하다 보면 영어 자막과 실제 배우가 말하는 대사가 다를 때가 있어요. 그럼 일단 적어놓고 넘어가요. 그리고 원어민을 만나면 노트를 들고 가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물어보면 완전히 머리에 집어넣을 수 있어요.


생각보다 외국어를 원어민 속도로 말할 때까지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요.


대부분 바쁜 사람들이잖아요. 100일 동안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기도 해요. 그럼 저는 10년 동안 영어 공부한 시간은 아깝지 않냐고 물어봐요. 살아있는 영어를 하려면 물론 처음에는 혀가 굳어서 잘 안 되거든요. 헬스장하고 똑같아요. 여름에 몸 좋아지려고 헬스장 가면 한두 시간 하고 거울 앞에서 얼마나 근육이 나왔나 보는데, 실제로 몸이 바뀌려면 적어도 100일은 해야죠. 공부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훈련을 하면 신기하게 내 혀와 입이 잊지 않고 기억해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계속 하다 보면 혀가 굴러가고 어느 순간 발음이 좋아져요.


‘외국어를 잘하는 방법은 머리가 아니라 인내심이다’라고 하셨어요.


훈련인 거죠. 그래서 제가 <노팅힐>을 보고 영어를 배웠다는 것 때문에 다른 분들도 <노팅힐>많이 보시는데, 항상 보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본인이 정말 천 번, 만 번 봐도 지겹지 않은 영화를 봐야 해요.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김민식 저자님을 만나셨다고 들었는데요.


정말 김민식 PD님에게 감사한 게, PD님과 독자가 만나는 장소에 가서 제 책을 홍보했거든요. 저는 무명작가에 홍보할 방법은 없고,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가 전하는 메시지랑 제 생각이랑 똑같다는 이유로 무작정 찾아갔는데 오히려 김민식 PD님이 소개하라고 자리를 만들어 주시더라고요. 되게 감동이었어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면 제 독자 만나는데 책 홍보하러 왔다고 하면 화났을 것 같아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10년쯤 지난 후에 젊은 친구가 찾아와서 똑같이 한다면 받아주실 수 있나요?


저 같으면 그런 큰마음을 못 가질 것 같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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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국어를 해야 시대를 리드하는 사람


성조가 있는 외국어를 배울 때는 더 유념해야 할 게 있을까요?


성조가 틀리면 다른 의미가 되니까 초반에 더 많이 들어야 해요. 무엇보다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말해야 하죠.


베트남어랑 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고 나와 있어요.


타이 마사지 받는 걸 좋아해요. (웃음) 마사지하는 분들에게 태국어로 인사하면 좋아하시더라고요. 모든 사람에게 영어로 말하기보다 그 나라 언어로 소통하는 게 하나의 배려잖아요. 당신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의미니까요. 완전 초보 단계긴 하지만 언젠가는 태국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걸 독자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럼 독자분들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되겠죠?


‘영어 하나 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3개 국어를 할 수 있어야 시대를 리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222쪽)고 하셨어요.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이 결국 사람과의 소통이고,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인맥이더라고요. 영국 사람을 만나서 영어 회화 교재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무엇을 먹을 거예요’, ‘나는 뭘 원해요’ 말해봤자 관계가 깊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들의 문화를 배울 수 있어요. 프랑스 사람이 유관순 누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감동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영국 친구에게는 제인 오스틴을 말하는 문화를 배우는 거죠. 외국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를 배우면 더 많은 기회가 와요. 기회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 기회는 또 언어로 만들어지니까요. 외국인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순간 기회가 열려요.


외향적인 성격이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영어를 하게 되면 그 나라 문화에 맞춰서 성격도 달라져요. 한국에서는 저도 윗사람이 말하면 눈을 마주치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이상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100LS’가 중요해요.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좋아하는 배우의 억양을 따라하다 보면 배우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돼요.


영화를 정말 잘 골라야겠네요. 갱스터 영화로 하면 갱스터처럼 말하게 될 테니까요. (웃음)


배우마다 발음 표현이 다른데, 꼭 그럴수록 더 따라 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흑인 영어에 꽂혀서 사람들한테 건들거렸던 적이 있는데, 정말 안 고쳐졌어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도 시도해 봤는데, 미국 군인이 쓰는 강한 영어가 나오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일상 회화에서 군인이 하는 영어 쓰면 안 되잖아요. (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면서 좋은 발음이 나오는 영화로 시작하셔야 해요.


마지막으로 영어를 잘하고 싶지만 아직 주저하는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영어는 공부가 아니라 훈련입니다. 내 입과 혀를 믿고 하는 거라고 전달하고 싶습니다. 머리로 외우면 잊어버리고 자기는 안 된다고 실망하는데 입과 혀로 외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면 됩니다. 운전 면허를 따는 이유도 운전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엔진을 어떻게 켜고, 옆에 상대가 있으면 어떻게 끼어든다는 걸 책상에서만 배우면 운전할 수 없어요. 실제로 끼어들어보고 욕도 먹어봐야 운전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영어를 공부가 아니라 훈련으로 생각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재미있죠. 조금씩 소통하는 능력이 생기고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표현으로 외국인을 만난다면 삶의 행복이 늘어날 겁니다.


 

 

9등급 꼴찌, 1년 만에 통역사 된 비법장동완 저 | 리더스북
기초 영단어도 모르던 영포자 꼴찌생이 19살 넘어 뒤늦게 영어에 도전해 1년 만에 통역까지 하게 된 드라마 같은 이야기와 외국어를 단기간에 습득하는 노하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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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문장에도 정답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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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20세기 작가’ 이응준은 스스로를 그렇게 이야기한다. 19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등단한 그는 20세기를 관통하며 문학을 시작하고 청춘을 보냈다. 새로운 시절에 이르러 작가와 문학의 위상은 이전과 달라졌다. 그러한 변화와 고민 속에서 이응준의 소설은 태어났다.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도 그 중 하나다. 2001년 세상에 나온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은 ‘소설향 특별판’으로 재출간되며 16년 만에 독자들과 다시 만났다. 앞서 중편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되살리고자 ‘소설향 시리즈’를 선보였던 출판사 작가정신은 그 가운데 5편을 모아 특별판을 기획했고,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를 비롯해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 정영문의 『하품』, 최윤의 『숲 속의 빈터』,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이 독자들 곁으로 돌아왔다.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은 베트남을 배경으로 몰락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베트남에서 감지했다는 어두운 기운은 인물들을 에워싼 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작품의 기저에 흐르던 암울한 분위기는 이제 그곳에 없다. 변화의 바람은 흔적을 밀어냈다. 소설가 이응준 역시 그 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거대한 고래의 배 속 같기도 했고, 아픔이 빤해서 만지거나 뒹굴기가 민망한 가시덤불 같기도 했”던 30대의 긴 터널을 지나왔다.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잔인한 어둠에 갇힌 한 사내의 몰락을 그리고” 있는 소설만큼은 조금도 낡지 않은 모습이다. “그저 인간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라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 또한 힘을 잃지 않았다.

 

지금까지 소설가 이응준은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영역에 머무르기를 거부해왔다. 시로 등단한 이후 소설가로 데뷔했으며 정치, 사회, 문화 비평도 시작했다. 시집 『나무들이 그 숲을 거부했다』,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애인』,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밤의 첼로』, 장편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국가의 사생활』, 논픽션 시리즈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등이 경계 없는 그의 창작 활동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은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됐으며,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 <Lemon Tree>는 ‘뉴욕아시안아메리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분, ‘파리국제단편영화제’ 국제경쟁부분에 초청받았다. 지난 1월에는 등단 이후 처음으로 산문집 『영혼의 무기』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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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의 다른 말이 운명인 것 같아요


오랜만에 작품을 다시 본 느낌은 어떠셨어요?

 

옛날 생각도 좀 나고요. 제가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 영감을 받아서 쓴 소설이라서 그곳의 당시 풍경이 들어있거든요. 그 시절의 제 모습이 생각나기도 하고, 감회가 새롭죠.

 

처음 만난 베트남은 어떤 공간이었나요?


최근에 베트남에 갔었는데 굉장히 많이 발전했더라고요. 외국 투자도 많이 이뤄지고, 한 달 만에 마천루가 생기고, 완전히 딴 세상이 됐더라고요.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공항이 우리나라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모습이었어요. 소설에도 썼듯이 베트남 전쟁이라는-피비린내 나고 화약 냄새 나는 역사가 있었던 곳이었고요. 그래서 그런지 공간 자체가 귀기 서린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두운 영적인 느낌 같은 거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상상력이 발동돼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된 것 같고요. 한편으로는 중간 중간 고급 호텔이 있었거든요. 소설에서 ‘효신’이 머물던 호텔 같은 덴데, 거기에서 밖으로 나가면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어요. 지금이랑 너무 달랐죠.

 

작가님에게 ‘효신’은 어떤 인물로 기억되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을 쓸 때는 정확히 몰랐는데, 도덕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쾌락에 빠져들면서도 즐거워하지 않잖아요. 자꾸 철학적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고요. 정말 뻔뻔하게 노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내면에서는 도덕적으로 살고 싶어 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어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때는 속마음은 잘 살고 싶고 도덕적 굴레에 빠져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자학과 자멸이 있는 거죠. 잘해보고 싶었는데 자꾸 꼬이고, 지저분해지고, 더러워지고, 얼룩이 남고, 그러니까 계속 엇나가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부분도 좀 있는 것 같아요.

 

주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의외로 저는 노력하면 운명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지만, 노력을 해서 삶의 변수를 만들어 나가면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편이에요.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건 운명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리석은 인간인 것 같아요. 우리가 다 어리석잖아요. 자신의 환경이나 생각을 깨고 변수를 새롭게 만들어서 개척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한계에 갇히잖아요. 그 안에 어리석음이 있는 거죠.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운명이라고 하면 대부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잖아요. 어리석음의 다른 말이 운명인 것 같아요.

 

탐미주의 작가로 호명되실 때가 많았어요.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은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품으로 손꼽히고요.


탐미주의를 밀고 나간 소설이 많지 않죠. 이 소설은 그 범주에 들어갈 텐데요. 탐미주의라는 게 선과 악을 넘어서 추악과 악함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데, 이 작품은 그걸 표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탐미주의 작가라고 이야기되는 건, 아무래도 저한테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에너지가 있는 편이죠.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을 상업영화로 만드는 준비를 하고 계시죠? 시나리오 집필은 시작하셨나요?


네, 앞부분을 조금 해놨어요. 각색을 많이 하고 있어요.

 

영화로 옮기면 원작보다 밋밋해지지 않을까요?


변화를 좀 많이 줬어요. 효신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고, 그렇지만 소설 속의 테마는 분명히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극이라는 건 2~3시간을 끌고 나가야 하는데, 소설대로만 하면 상업영화로는 너무 단선적이거든요. 이 소설만 가지고 찍으려면 아트필름이 돼야죠. 상업영화로 하려면 각색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런 방향으로 준비를 하고 있어요.

 

소설보다 더 큰 자본이 투입되는 작업이고, 그만큼 대중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런 작업이 힘들지는 않으세요?


안 힘들어요. 그건 그거대로 하는 거예요. 물론 제가 담으려고 하는 건 담겠죠. 그런데 소위 말하는 예술적인 욕심이나 욕망, 그런 거에 대한 갈증은 시 쓰고 소설 쓰면서 이미 해소했어요.

 

‘순수문학만 추구하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했었는데요. 편견이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그렇게 살 수도 없는 세상이에요. 그러려고 했던 때도 있었죠.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원하는 대로만 굴러가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변해가고,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는 거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서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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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는 게 보이고 문장이 보여요


작품을 쓰시기 전에 결말을 정해놓으세요?


아니죠. 원래 예상하거나 계획한 게 있기는 하지만, 그대로 끝나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예상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내 예상대로 끝나는 작품을 나는 믿을 수 없죠. 예상했던 것의 7/10 정도가 나오고 3/10은 모르던 게 나와서 발견해야 돼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살아있는 작업 같아요. (영화를) 연출할 때도 스텝들한테 그렇게 이야기해요. 어떤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회의를 하지만 그대로 나오면 그 작품은 실패한 거라고요. 모르던 것들이 나와서 서로 ‘이게 더 좋다’는 이야기가 오가야 되는 거죠.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은 전지적 시점의 작품이잖아요. 마치 신처럼 인물들을 내려다보면서 쓰셨을 것 같은데요. 


그건 좋은 작법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신이 아니잖아요. 그냥 글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일 뿐이죠. 원고를 메우려고 죽을 동 살 동 하면서 계속 고치는 거예요.

 

올해 『영혼의 무기』를 출간하셨어요. 등단 27년 만의 첫 산문집이다 보니 늦은 감도 있습니다.

다른 일들을 좀 많이 하기도 했고, 문단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나와 있었잖아요. 그런데 예전부터 김수영 산문집을 좋아해서 두껍게 한 권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이제는) 여한이 없어요.

 

말씀하신 대로 묵직한 책이에요(웃음).


웬만하면 사람들이 안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설마 이렇게 두껍고 비싼데 누가 읽겠어? 아무도 읽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했죠.

 

작가님을 있는 그대로 가장 많이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불편한 부분은 없으셨나요?


조금 불편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제가 한 일이고 정리를 해야 되잖아요.

 

왜 이 시점에 정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문학 외에 다른 인생을 살게 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정말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게 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거예요. 예전에 생각하기로는 그렇게 되면 굉장히 아쉬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내 삶이 원해서 여기에서 멈추게 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문학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다거나 치열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요즘도 글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쓸 거예요. 다만, 만약 내가 문학을 하지 않는 걸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지금까지 표현할 수 있는 만큼 많이 했고,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앞으로의 작업은 이전과 달라지겠네요?


그럼요. 새로운 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요. 기술적으로도 확실히 더 늘었어요. 사실 작가로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죠. 이제 좀 세상이 보이고, 사는 게 보이고, 문장도 보이고, 문법도 보이거든요. 이전에 했던 건 연습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해요. 제가 데뷔를 일찍 해서 20대 때 써야 될 건 20대에 썼고 30대에 쓸 건 30대에 썼어요. 그때만 쓸 수 있는 건 쓰고 지나가는, 그런 특권을 가지게 됐었단 말이죠. 말하자면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같은 소설은 지금 못 써요. 그리고 이제는 문학에 대한 속된 욕심 같은 게 없어요. 소설이 많이 팔려야 된다든지 문학으로 유명해져야 된다는 바람 없어요. 더 욕심을 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끝내 자신의 책 한 권을 가져보지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에 비하면 저는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운이 따랐다고 생각해요. 감사하죠.

 

요즘에는 어떤 화두를 붙들고 계세요?


‘전진’이요. 확 앞으로 나가고 싶어요. 그 동안 제 뒤를 잡는 것들이 많았는데, 경계를 넘어가 버리고 싶어요. 좀 무자비할 정도로 앞으로 나가버리고 싶고, 강을 건너가 버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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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도 정답이 있어요


연작 소설집의 출간도 예정되어 있죠? 『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이라고요.


어제 최종 교정을 봤는데요. 『밤의 첼로』처럼 작품들이 구조상으로 다 연결되어 있어요. 저는 모더니스트로서 소설을 이야기라고 보지 않고 이야기의 구조라고 보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소설이 어떤 이야기라면 ‘결국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은 사람이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안에서 방황하고 모색하고 성장하는 걸 소년이라는 단어로 설정한 거죠. 소설집에 소년이 나오지는 않아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소년이라는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거죠. 모든 방황하는 사람의 안에는 소년이 있는 것 같아요.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이전에도 재출간된 작품들이 있었는데요. 원고를 다시 보시면서 고치고 싶다는 생각도 하셨어요?


문장이나 표현을 고치기는 해도 내용을 크게 고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내용을 고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어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것도 제 모습이잖아요. 그리고 고쳐서 잃어버리는 것도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원래 색깔이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앞으로도 내용을 고칠 생각은 없어요. 이번에 재출간을 하면서도 문장, 표현을 정확하게 정리하는 작업만 했고요. 문장이라는 게 정답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문장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수학처럼 정답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근사치를 하느냐 정답까지 가느냐,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 이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좋은 문장에 대한 정의를 갖고 계실 것 같아요.


네, 있을 것만 있는 게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퇴고를 하다 보면 ‘이게 맞아, 이게 정답이야’ 할 때가 있어요. 어쨌든 그걸 발견하는 거죠. 바둑을 생각해 보면, 많은 수를 뒀어도 나중에 복기하는 게 가능하잖아요. 문장도 똑같아요. 지우고 다시 써도 똑같은 문장을 쓸 수 있어요. 그냥 쓴 게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고친 거니까요. 바둑판을 다 허물어도 똑같은 기보가 나와야 되는 것과 같은 거예요.

 

20세기 작가로서 21세기의 생존법을 찾으셨나요?


네, 지금 하고 있죠.

 

시, 소설, 영화 등 다양한 텍스트 사이를 오가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가요?


그것도 그렇고요. 『국가의 사생활』, 『내 연애의 모든 것』같은 경우는 겉은 장르소설이지만 그 밑에 또 다른 게 있거든요. 문학 이론으로 보면 다 해석이 가능해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쓴 거고, 대부분은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지만, 그거에 대해서 불만은 없어요. 그리고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처럼 정통소설을 쓴 경우도 있죠. 대중소설이라고 말씀하시는 소설도 쓸 수 있는 거고요. 정치 칼럼처럼 여러 가지 장르의 글도 쓰고, 영화도 하잖아요. 그러면서 영역을 넓힌 거예요.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 해보는 거죠. 그게 제 나름의 생존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이응준 저 | 작가정신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편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되살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스토리텔링을 다시 선보이고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5편을 골라 특별판으로 출간하였다. [소설향 특별판]으로 출간된『전갈자리에서 생긴 일』은『국가의 사생활』,『내 연애의 모든 것』등을 통해 문단과 대중으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아 온 작가 이응준의 중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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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스님 “사는 것 자체가 애쓰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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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비울수록 가득하네』이후 4년 만에 정목스님의 새로운 에세이가 출간됐다. 『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에 실린 100여 편의 이야기는 “세상 모든 애쓰는 이들에게” 수행자가 보내는 편지이자 기도이다. 걱정과 번민의 허깨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한과 미움에서 놓여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한다.

 

“가장 고귀한 사람으로, 가장 가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대우하세요”라는 한 마디는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고, “지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라는 진리는 죽비처럼 마음을 내리친다.

 

많은 이들은 ‘따스하고 정갈한 음성, 그 속에 담긴 위로의 메시지’로 정목스님을 기억한다. 국내 첫 비구니 MC로 활동하며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해 왔을 뿐만 아니라, 10년째 인터넷에서 ‘유나방송’을 진행하며 명상과 마음공부를 돕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방송대상 사회상’,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진행자상’을 수상한 스님은 지금도 BTN 불교TV <정목스님의 나무아래 앉아서>, BBS 라디오 <책 읽어 주는 스님 정목입니다>를 통해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산 속에서 홀로 수행하기보다 세상 한 가운데에서 대중과 호흡하기를 선택해 온 스님의 또 다른 이름은 ‘소외된 이들의 어머니’이다. 20년째 아픈 어린이 돕기 운동인 ‘작은사랑’을 이끄는 한편, 청소년들이 여행을 통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길 위의 메아리 학교’를 운영하고,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모임(아노모)’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과 이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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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모든 이들이 나의 거울입니다


계절의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들이에요. 지난 한 해 동안 쓰신 건가요?

 

1년도 훨씬 더 됐지요. ‘유나방송’ 회원들을 위해서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었는데, 책으로 낼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회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일상사를 들려줬던 거지요. 그런데 출판사 대표님께서 원고를 모아서 가지고 오셨더라고요. 그냥 묻어두기에는 아깝다면서요. 몇 년 동안 ‘유나방송’ 홈페이지에 썼던 글들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도 모았어요. 출간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쓴 글들도 같이 묶고요.

 

제목은 직접 지으셨어요?


김재진 시인께서 ‘유나방송’의 대표를 맡고 계신데, 이번에 책을 내게 됐다고 하니까 제목을 지어주셨어요. 제가 강연할 때마다 ‘저마다 살아가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는 제목이 떠올랐다고 해요. 책이 나오기 전에 같은 제목의 시를 쓰기도 하셨지요. 요즘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요.

 

많은 분들이 스님을 찾아와서 삶의 괴로움을 토로할 텐데요. 무엇을 위해 애쓰면서 살아가는 것 같으세요?


사는 것 자체가 애쓰는 거예요. 우리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도 다 애쓰는 일이거든요. 먹고 사는 문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는 일, 사랑하는 일, 미워하는 일, 다 애써야 되는 일이에요. 인연 맺어져서 사는 인연법 자체가 전부 애쓰면서 이어가는 거예요. 그 안에서 이런 저런 사연도 생기고, 우여곡절도 생기고, 좋은 일 힘든 일도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애쓰는 일을 통해서 성장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다 걸어 다니는 거울들이에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란 어려운 일인데, 상대라는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거지요. 애쓴다는 것은 관계 맺음 속에서 성장하는 거예요.

 

말씀을 듣고 보니, 애쓰며 살아가는 모두를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당신도 애쓰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요.


그럼요. 바로 그거예요.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당장 화부터 내거나 지적을 하기보다는 ‘그래, 당신도 애쓰면서 사느라 그러지’ 한 마디 한 다음에 이야기를 하면 말씨부터 달라지죠. 상대에게 가해지는 충격파도 훨씬 덜하고요. 그렇게 서로 이해해가면서 사는 거지요.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용서가 필요한 순간이 있어요. 그런데 말처럼 쉽지는 않거든요. 그럴 때 ‘당신도 사느라 애쓰고 있구나’ 생각하면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부하직원이 실수를 했어요. 상관이 ‘너 이렇게밖에 일 못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너도 더운데 일하느라 애쓴다’ 하고 나서 야단을 치면 상대가 수긍할 수 있겠지요. 용서가 말처럼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해보지 않아서 그래요. 용서도 습관을 들이고 반복해서 훈련해야 돼요. 사랑하는 것도 태어나자마자 바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사랑을 배우는 거예요. 용서하는 일도 학습하듯이 훈련을 하다 보면 쉬워질 수 있어요. 그런데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여행지에 간 것처럼 낯설어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여행지가 낯설다고 해도 그곳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이잖아요.

 

SNS에서도 꽃 사진을 많이 공유하시더라고요. 꽃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으시는 순간이 많은가요?


불가에서 꽃은 굉장히 중요한 공양물이에요. 꽃은 개화하는 순간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널리 향기를 전하잖아요. 그것이 깨달음을 상징해요. 그리고 꽃이 주는 무언의 법문은 굉장히 깊지요. 꽃은 진리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해 주는 아포리즘이에요. 우리가 그냥 꽃씨로 있으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꽃씨는 꽃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거거든요. 씨앗 중에도 자기 노력에 의해서 발아가 되는 것들이 있고, 그러려면 환경과 조건도 알맞아야 해요. 흙, 수분, 빛 등 모든 조건들이 맞아야 발아가 되잖아요. 그 가운데에서도 비바람, 풍상, 낮과 밤, 강렬한 더위와 추위를 견뎌낸 것만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고요.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아요. 성장하기까지 엄청난 공력이 들지요. 세상에 어떤 향기를 내뿜는 사람이 될 것인지, 그것이 저마다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나방송’과 라디오, TV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계신데요. 가장 많이 들으시는 고민은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가장 많이 토로하는 건 왜 자신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거지요.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요.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이 피곤해지고 지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나는 남을 괴롭힌 것 같지 않은데 항상 남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니까 견디기 힘든 거지요. 그 고통을 감당하기 어렵고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어떠하다’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싸움과 분쟁이 끝나지 않아요. 부모님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자식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핑계거리로 불러들이면 자신은 운이 나빠서 이런 일을 겪게 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자신의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볼 기회가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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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우주’, ‘아이의 우주’는 움직일 수 없어요


거듭 강조하신 것 중에 하나가 ‘분별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거예요. 분별심이란 무엇인가요?


쉽게 이야기해서 옳고 그름, 싫고 좋음을 구별하는 거지요. 자신이 사랑하는 건 욕망하고 끌어들이고 싶고, 싫어하는 건 저항하고 밀어내고 싶은 거예요. 여기에서 분별심이 생기지요. 자신의 위치에서 보면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건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렇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상대방에 대해 짐작하게 되거든요. 내 방식대로 판단하고 해석하다 보니까 오해하게 되고, 비판하게 되고, 비난하게 돼요. 그러니까 분별심이라는 것은 ‘나는 전혀 바꾸고 싶지 않고 저 사람이 바뀌어야 된다, 바깥세상이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내 방식대로 짐작해서 오해하고 해석하면 멀쩡한 사람도 괴물이 돼요.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군요.


세상은 세 가지의 우주가 결합해서 돌아가요. 나의 우주, 타인의 우주, 나와 타인을 제외한 물질 우주예요. 이 세 개 중에 내가 다스릴 수 있는 건 ‘나의 우주’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의 우주는 내가 못 움직여요. 그게 내 부모, 내 자식, 내 배우자라고 해도 원하는 대로 이끌어갈 수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보기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판단하는 거지요. ‘나의 우주’의 방식으로 ‘타인의 우주’를 끌어오려고 하니까 거기에서 갈등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지는 거예요. 그렇게 모든 원인을 밖으로 돌리면 상대방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드는 거지요.

 

분별심 없이 상대와 세상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누군가를 보고 싫은 생각이 들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향해서 정화를 해야 돼요.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향해서 ‘미안해요, 용서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네 마디를 건네는 거예요. 오래 전부터 하와이의원주민들은 이 문구를 가지고 정신을 치유하고 상처를 보듬어왔다고 하는데요. 어떤 사람을 보는 순간 싫다는 생각이 들면 내 기억에서 저항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향해서 정화를 해야 하는 거지요. 분별심에 대한 모든 정화는 자신을 정화하는 거예요. 상대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내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을 못 봐주겠다고 하는 건 내 기억이 불러온 거거든요. 기억의 창고도 정리가 필요해요. 과거의 기억이 현재 나의 발목을 붙들면 현재도 살지 못하고 미래로도 나가지 못해요. 분별심을 내려놓으려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기억을 정화해야 돼요.

 

‘미안해요, 용서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네 마디만으로 변화가 생길까요?


정화의 문구를 읊조리다 보면 기억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해요. 나와 상대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것이 맑은 유리처럼 바뀌면서, 모든 존재를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지요. 분별심을 내려놓으면 자신이 편안해져요. 내가 바뀐다고 해서 상대가 달라지는 게 아니에요. 예전과 똑같이 행동해요. 그런데 내가 편안해지니까 더 이상 문제로 보이지 않는 거지요.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정화는 매일 매일 해야 돼요. 우리가 매일 청소를 하고 몸을 씻는 것과 똑같아요. 기억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청소하듯이 계속 반복해서 해야 되고요.

 

최근 미니멀라이프 열풍이 불었습니다. 불가에서는 오랫동안 ‘비움’을 중시해왔는데요. 사람들이 이제야 그 가치에 눈을 뜬 것 같아요.


우리가 물질의 충분한 풍요를 누리고 살아왔다면 그렇게 가지려고 애쓰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봐도 아무것도 가져본 게 없었고, 국토조차 빼앗겼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에 급격히 발전할 수밖에 없었어요. 언제 빼앗길지 모르니까 쌓아놔야 했고요. 아픈 기억이 있는 것이죠. 그러다가 어느 정도 형편이 나아지니까 많이 가진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아졌어요. 예전에는 많이 가지면 행복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조금 비워내고 여백이 있는 공간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싶어진 거지요. 그리고 많이 가지는 것이 피곤해진 거예요. 물건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지겨워지잖아요. 비싼 옷을 사고도 한 번 입어보지도 않고, 시간이 지나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 되니까 입고 싶은 마음도 안 생기지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수업을 받은 거예요. 많이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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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


책에서 스님의 기도문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무척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종교가 있건 종교가 없건,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도를 하지요. 자식을 낳게 해 달라거나, 자식이 잘 되게 해 달라거나, 돈을 벌게 해 달라거나, 좋은 직장을 갖게 해 달라거나... 다 소박한 소망들이지요. 그런 것들은 인간 사회에서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그것을 얻었을 때 기쁨이 오니까 능히 바랄 수 있지요.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면 신이든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이든 나보다 우위에 있는 어떤 대상이 무언가를 줘야 하는 거잖아요. 이럴 때는 기도가 지쳐요. 언제 올지 기약이 없거든요. 내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 언제 나에게 당도할 수 있을지, 오기는 오는 건지, 기약도 없는 거예요. 그런 기도는 사람을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기도에 대한 맥락도 사라지고 효험이 없어져요. 불가에서 기도는 변화하는 거예요. 내가 변화되는 순간 기도는 다 이루어진 거지요. 내가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기도를 해봐야 와서 닿을 리가 없어요.

 

오랫동안 해 오신 나눔도 기도의 일환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픈 어린이 돕기 운동인 ‘작은사랑’은 20년째 이어오고 계시죠?


1년에 40명씩 아픈 어린이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해왔어요. 이 운동을 계속 하는 이유는 아픈 아이를 돌보는 일이 부모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가 함께 해야 돼요. 세상이 같이 돌봐야 하지요. 작은 힘이지만 함께 가자는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게다가 대부분의 부모들이 20~30대예요. 사회에서 아직 자리도 못 잡았는데 무슨 수로 혼자서 버티겠어요. 그래서 아픈 아이들을 같이 키워가자고 하는 활동이지요.

 

‘길 위의 메아리 학교’의 취지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생 아이들도 부모만의 힘으로 키울 수 없어요. 세상이 같이 키워야지요. ‘길 위의 메아리 학교’는 아이들이 길 위에서 배우기를 바라면서 여행 경비를 지원하는 거예요. 한 달에 한 번씩 20여 명의 아이들에게 지원해 주는데, 절에 있는 ‘미래탑’에 등불을 켜는 기도비를 모아서 전달해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경비만큼 모으는 건 쉽지 않고, 부족한 부분은 제가 부담해서 계속 지원을 해주고 있어요.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모임(아노모)’도 이끌고 계시잖아요.


서로 돌봐주면서 같이 늙어가자는 거지요. 돈으로써 보험을 드는 게 아니라 인간 보험을 드는 거라고 할까요. 제 역할은 서로 보듬고 사랑해줄 수 있는 벗들을 묶어주는 거예요. 서로 이해관계가 없이 만남을 가지니까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올해 7월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병원’을 개원하려고 준비 중인데, 그것도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활동의 일환이에요. 노인성 질환 중에 치매, 파킨슨병 같은 뇌질환과 척추, 뼈와 관련된 질환이 많거든요. 이런 병을 치료하는 병원은 많이 있지만, 정말 환자를 아끼고 존중해주는 병원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지도법사를 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정형외과 의사와 같이 개원을 준비하고 있어요. 아픈 노인들을 방치해 둬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자식들이 병간호에만 매달릴 수도 없잖아요.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그들을 대신해서 돌봐줄 수 있는 시설과 사람들이 필요한 거지요.

 

‘잘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아름답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 멋있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나무에 비유해서 이야기하고는 해요. 사과나무는 고사할 때가 오면 2~3년 동안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지요.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세상에 더 많은 열매를 주는 거예요. 불교 용어로는 나이 들어가는 것을 회향한다고 하는데요. 되돌려준다는 의미예요. 우리는 노인이 되면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때문에 불만을 갖지만, 그건 육체적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육신은 마음이 의탁하고 있는 자동차예요. 쓸 만큼 쓰고 난 후에는 부속품을 교체해가면서 써야지요. 완전해지기를 바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베풀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지요.

 

늙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노인은 지혜를 나눠줄 수 있어요. 그런 노인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이 노인을 바라보는 눈도 얼마나 귀하고 소중해질까요. 젊은이들과 청소년,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어른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기쁘지 않을까요. 노인이 되어가는 것,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은 큰 안목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못 봤던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통찰력을 가지고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이고, 껍데기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것이고, 그러면 조금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자녀 문제로 속상한 엄마에게”, “스트레스로 피곤한 직장인에게”, “쿨하게 살고 싶은 당신에게” 등 많은 이들을 위해 글을 써주셨는데요. ‘이 책의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불가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남섬부주라고 해요. 박복한 땅이라는 뜻이에요. 이런 곳에서 우리가 갖춰야 될 인격, 인품이 있다면 인내심이에요. 한 마디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모습 봐주는 것’이지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당돼요. 세상 돌아가는 현상을 참아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희망이 있어요. 남섬부주는 기회의 땅이면서 가능성의 땅이거든요. 사람은 언제든지 더 나은 길로 도약할 수 있어요. 물론 더 못한 길로 빠져들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인간은 완성품으로 끝난 게 아니라 인간이 되어가는 중이에요. 인간은 인간일 수도 있고 인간이 아닐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거지요. 더 나은 인간으로 진화해 나가는 데에는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해요. 세상의 모든 힘든 것들은 우리를 가르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오는 고통이에요. 견뎌내고 참아내면서 강하게 키우다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꽃이 자기 안에서 피어나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만이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허락된 땅이 남섬부주예요. 인내심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완성되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꽃도 꽃피우기 위해 애를 쓴다
‘지친 현대인의 위로자’ 정목 스님이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에세이. 엄마의 손길 같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정목 스님이 행복의 씨앗, 지혜의 씨앗을 움트게 할 햇살 같은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진짜 재즈 보헤미안, 마틴 젠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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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발매되는 재즈음반들을 관심 있게 듣는 재즈팬이라면 마틴 젠커(Martin Zenker)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3년 전에 발매된 <For The Years to Come>(에번스)은 국내에서 제작된 이 독일 출신 베이스 연주자의 음반이다. 혹시 서울 시내의 재즈클럽을 자주 다니는 재즈팬이라면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도 있다. 서울에 거주한 2008년부터 몇 년 간 그는 국내 재즈 동네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재즈 베이스 주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재즈계에서 나타난 그의 활동 이면에 그는 매우 다채롭고 오랜 경력을 지닌 연주자다. 그는 제임스 무디, 지미 캅, 에드 딕펜과 같은 전설적인 연주자들의 사이드맨이었고 콘트 캔돌리, 발레리 포노마레프, 빌리 하트와 같은 베테랑 연주자들의 음반에 참여했었다. 아울러 그는 한국과의 인연으로 한국의 재즈 연주자들을 해외 무대에 진출시키는데도 많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재즈가 급성장 하던 시기에 많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면서 한국 재즈의 모습을 여러 나라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인물이란 점이다. 그래서 8월 초 색소포니스트 제스 데이비스 사중주단의 일원으로 오랜만에 한국에 온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에는 제스 데이비스 쿼텟의 동료인 드러머 김민찬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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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몽골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지내는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재즈 학교가 설립되어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은 방학이라 울란바토르와 뮌헨으로 오가고 있다.

 

한국과는 처음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독일에는 '월드 오브 베이시즈'라는 전문 베이스 악기점이 있다. 그곳 사장인 토비아스 페스틸은 가까운 친구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매우 고가의 악기 하나를 서울 시향의 수석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구입했다. 그 악기는 배송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들고 가야 하는 악기였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할 겸 그 악기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맡아 악기와 함께 서울에 왔다. 2003년도였다. 악기를 전달한 뒤 서울에 있는 재즈클럽을 수소문해 그날 밤 그곳으로 갔다. 이태원에 있는, 지금은 이사 가기 전에 위치한 '올댓재즈'였다. 그곳에 가니 크리스 바가, 켄지 오메 등 한국에 정착한 외국 재즈 연주자들과 김지석 등 한국의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 바로 잼을 했고 그러자 크리스가 며칠 후 홍대 앞 팜이라는 곳에서 연주가 있으니 함께 하자고 했다. 며칠 더 서울에 머물며 팜에서도 연주하자 또 클럽 에반스에서도 연주할 기회가 생겼다. 이후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서울에 오게 되었다.

 

오, 그런가? 그런데 한국에 완전히 정착한 연주자처럼 클럽에서 당신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2008년도부터다. 2003년에 한국에 온 뒤로 일본 등지로 연주를 오면 한국에도 자주 오게 되었는데 한국에 드나들면서 임달균 교수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2008년에 자신이 일하는 경희대에서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 상수동에서 살았다.

 

그때 당신에게 배운 연주자 중에는 누가 있는가?


(옆에 있는 김민찬을 가리키며) 민찬, 그리고 베이스를 연주하는 김대호 등 당시 모두 학생이었다. 이제 그들은 직업 연주자가 되어서 내게 가까운 친구들이 되었지만. 특히 민찬은 내 한국인 동생이나 다름없다.

 

독일 음반사인 나겔 하이어에서 진푸름의 음반을 발매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젠커씨의 도움 아니었나?


맞다. 아울러 김지석의 음반도 나이겔 하이어에서 발매되었는데 그 역시 내가 그를 음반사에 소개시켜 주었다.

 

내 생각에 당신이 한국을 자주 방문하던 그 무렵에 한국 재즈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변화라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현재 한국 재즈계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내가 알고 있는 부분도 한국 재즈계 전체에서 극히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3년도에 처음 방문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에 비하면 연주자들의 숫자도 적었고 연주 실력도 훨씬 낮았다. 그럼에도 연주자들의 대부분은 당시에 가장 앞서 나가는 연주자들의 스타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모두들 조 로바노, 브래드 멜다우의 새 음악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런 음악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생각은 조금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재즈의 전통을 인식하고 보다 깊고 폭넓게 재즈를 바라보고 있다. 아트 블레이키, 버드 파월로 돌아가서 그곳에서부터 오늘날의 재즈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터 그런 변화를 느끼게 되었나?


글쎄…… 그 점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스스로가 그런 변화에 함께 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그 점을 늘 강조했다. '브라이언 블레이드만 듣지 마라. 아트 블레이키부터 들어라' 그런 점을 젊은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줬다.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둘 2012년 무렵에는 그 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바람직하고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그 당시 어느 날이 기억난다. 그날 연주를 마치고 민찬의 연습실에 모두 들렀다. 그리고 존 콜트레인의 1961년 음반 한 장을 모여서 들었다. 모두 그 연주를 들으며 열광했고 빠져들었다. 10년 전 서울이었으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5년 전이라면 어땠을까? 확신할 수는 없다. 아무튼 그러한 변화 속에서 연주자들은 최근의 음악을 그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재즈의 풍부한 내용을 자신의 음악 속에서 통합시켜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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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생활하기 전 당신의 음악활동을 소개해 달라


1991년에 난 뮌헨 음악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이후 25년 간 프리랜서 베이스 주자로 계속 활동했다. 물론 그 사이에 몇 년은 내 밴드를 이끌기도 했는데 '우게츠'라는 이름의 밴드였다. 이 밴드로 다섯 장의 음반을 냈다.

 

'우게츠'? 시더 월턴의 곡 말인가?


맞다. 그 곡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 기간을 제외하면 나는 여러 밴드의 사이드맨으로 활동했다. 제임스 무디의 유러피언 밴드, 트럼펫 주자 발레리 포노마레프 밴드에서도 여러 해 있었는데 그는 '70년대 아트 블레이키와 재즈 메신저스의 트럼펫 주자로 그와 함께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투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러머 지미 콥의 녹음에도 참여했는데 뉴욕의 아바타 스튜디오에서 녹음이 진행되었다. 나로서는 대단한 경험이었다. 또 내 경험에서 잊지 못할 순간은 명 드러머 에드 딕펜의 생애 마지막 밴드에서 연주했던 때였다.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빌리 하트와도 함께 연주하면서 녹음도 했고 현재도 기회가 되면 함께 연주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명 드러머와의 연주가 많았다.


빌리 하트, 지미 콥, 에드 딕펜....... 그리고 민찬(웃음). 베이스 연주자에게 드러머는 가장 중요한 존재다. 드러머에게 베이스 주자도 마찬가지지만. 서로는 형제같은 존재다.

 

서울에 오기 전에는 어느 도시에 주로 있었나?


1990년부터 2006년까지 나는 뉴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살았다. 그때 난 트럼펫 주자 발레리 포노마레프의 사이드맨이었다. 아울러 그와 함께 미국과 남미, 유럽, 아시아, 호주의 여러 도시들을 투어할 수 있었다.

 

미국, 남미, 유럽, 아시아, 호주.......당신에게는 재즈 오디세이 한 권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재즈 연주자들이란 모두 긴 투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서울에서도 다양한 음악회에서 연주할 수 있지만 재즈 연주자로서 더 많은 무대에서 연주하려면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서 연주하는 투어 스케줄을 잡아야 한다.

 

다양한 도시를 경험했을 텐데 그 중에서 왜 서울이 당신에게는 특별했는가?


서울은 이제 현지 재즈 연주자들의 실력이 굉장히 센 도시 중 하나다. 훌륭한 연주자들이 많고 나는 그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맨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아니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켄지 오메 같은 뛰어난 연주자가 서울에 있었고 난 그를 통해 여러 연주 기회를 잡았다. 그 무렵 김지석도 알게 되었는데 그 역시 훌륭한 연주자였고 미국에서 공부 중에 한국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연주자들이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곧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켄지, 지석, 달균과 함께 연주하는 것은 대단히 즐거웠다. 그리고 그러한 실력의 연주자들이 빠르게 계속 늘어갔다. 서울은 정말 흥미로운 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은 재즈 연주자라면 뉴욕에 가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재즈의 많은 일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꼭 뉴욕에서 살아야만 위대한 재즈 연주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재즈와 교류할 수 있는 다른 나라에 한국 재즈 연주자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유럽도 그런 지역 중에 하나다. 나는 독일에 있는 한국 문화원과 접촉해서 한국의 재즈 연주자들이 독일에서 연주하는 작은 축제를 몇 년간 기획했다. '재즈 코리아'라는 이름의 축제인데 매해 계속되고 있다. 임달균, 김지석, 진푸름, 김민찬 등이 참여했고 그 중 몇몇은 독일에서 음반도 발매했다.

 

독일 정부는 재즈를 적극 지원하는가?


바라는 것만큼 많지는 않다. 클래식 음악에 지원하는 금액에 비교하면 그 액수는 보잘것 없다. 그래서 난 정부에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다양한 연주를 해오면서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재즈를 적극 지원하면 이런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간섭하려는 것 말이다. '당신은 꼭 독일적인 재즈를 연주해야 하오', '당신은 반드시 한국적인 재즈를 연주해야 하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재즈는 음악일 뿐이다. 내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의 즐거움, 나의 기쁨을 위해서 연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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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제 재즈의 미래가 불안하다, 재즈는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 점에 대해서 많은 도시를 다니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나는 재즈가 본질적으로 언더그라운드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재즈는 초창기에 오락음악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연주자들은 그 음악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새로운 컨셉트를 찾으려고 계속 노력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 그러니까 1960년대 말이 되었을 때 재즈는 너무 어려운 음악, 더 이상 재미가 없는 음악이 되었다. 만약 마크 터너가 새 음반을 냈다고 하자.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음반이 나오면 하루 만에 모든 사람들이 새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 이틀이 지나면 새롭다, 멋지다, 여러 평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옛날처럼 많은 사람들이 재즈를 즐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재즈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던 시절의 작품에서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같은 곡을 2~3년 간 계속 연주하고 싶다. 연주할 때 마다 새롭게 연주하면 연주자의 기량은 발전하고 관중들도 새로움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마일스 데이비스도 그렇게 했다. 우리가 이번에 함께 연주한 제스 데이비스도 좋은 보기다. 그는 스탠더드를 연주하지만 매번 새롭게, 신선하게 연주한다.

 

몽골에서의 일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한국에서 사는 동안 몽골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역시 방문을 해보니 재즈클럽도 없었고 교육기관도 없었고 재즈 신(Jazz Scene)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의 음악대학에 한 사람을 만나니 재즈교육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몽골에 있는 독일 문화원에서도 재즈교육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래서 몽골 음악대학 내에 '괴테 뮤직 울란바토르'라는 과정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줄여서 'GMUB'라고 부른다. 2014년부터 시작되었고 현재 30명의 학생이 있다. 이제부터 몽골에서의 재즈는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인데 나는 그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김민찬씨도 그곳에 간 적이 있나?


김민찬 : 마틴이 그곳에서 학교를 설립했을 때부터 여러 번 참여하고 연주도 여러 번 했다. 그곳은 우리로 말하자면 한국예술종합대학교와 같은 가장 큰 국립 예술대학이다. 그 학교 내에 재즈 전문 과정을 만든 것이다. 여담이지만 몽골 사람들은 중국인, 일본인 보다 한국 사람과 외모가 거의 똑같다. 나도 구분 할 수가 없다. 그 사람들도 나를 보면 몽골 사람인 줄 안다. (웃음)

 

가급적이면 몽골에서 오래 머물 생각인가?


몇년 동안 나는 몽골에서 내 노력의 거의 100%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강의 시간도 줄이고 학교의 조언자, 컨설턴트로 내 시간의 50% 정도만을 쓸 계획이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 문화원, 대사관을 잘 연결해 몽골에서 몽골과 해외 재즈 연주자들의 교류를 만들 생각이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점점 줄일 것이다. 그 다음해엔 25%....... 그 다음에도 절반으로 줄이고, 그리고 나면 언젠가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웃음)

 

끝으로 몽골에서의 교육 말고 오로지 아티스트로서 계획이 있다면 이야기 해달라.


재즈 베이스 연주에 관한 책을 쓸 계획이다. 여러 해 동안 학교에 있었던 경험을 책으로 완성하고 싶다. 새로운 음반 녹음 계획 같은 것은 아직 없다. 단지 한 멤버들과 오랫동안 꾸준히 연주하면 앨범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마틴 젠커 쿼텟의 음반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우리는 스튜디오에서도 아무런 편집 없이 마치 라이브 녹음하듯이 원 테이크로 녹음을 마쳤다. 재즈 음반은 그렇게 녹음해야 한다고 본다.

 

인터뷰 당일 마틴 젠커가 속한 제스 데이비스 쿼텟은 마리아 칼라스 홀에서 연주를 했고 그 다음 날 아침 또 다른 연주를 위해 그들은 통영으로 떠났다. 통영 연주 뒤에 마틴은 다시 뮌헨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마틴 젠커가 몇 장의 사진을 촬영할 때 김민찬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저 사람 역마살 낀 진짜 재즈 보헤미안이에요.”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고 건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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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 작가 특집] 박성신 “『제3의 남자』는 결국 피해자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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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진 골목, 낡은 책방을 한 평생 지켜온 아버지(최희도). 아들(최대국)은 무능력하고 무뚝뚝한 아버지를 잊고 산지 오래다. 이미 제 삶 하나 건사하기도 부친다. 아내는 딸과 함께 떠났고, 빚 독촉은 끝을 모르고 그를 괴롭힌다. 꼬인 인생을 한탄하며 죽음을 생각하던 순간, 낯선 이의 방문을 받은 최대국. 자신을 아버지 거래처의 김 부장이라고 소개한 그는 아버지가 총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고 말한다. 어딘가 삐걱대는 이야기다. 최대국은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달라는 김 부장의 의심스러운 제안을 받아들인다. 다름 아닌 그가 제시한 3억 때문이다. 그렇게 열어젖힌 최희도와 수첩이라는 비밀의 문. 그 뒤에는 책방 주인의 삶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놀라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1회 대한민국 콘텐츠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갤럭시탭-텍스토어 디지털 콘텐츠 공모전 대상 수상으로 선 굵은 이야기를 선보이며 큰 주목을 받은 박성신 작가가 장편 『제3의 남자』를 기획했을 때 작가가 떠올렸던 장면은 명확했다. “한쪽에는 70년대의 명동 한복판에 아버지가 서 있고, 2017년의 명동 한복판에 아버지(과거)를 추적하는 아들이 서 있는 장면”이었다. 『제3의 남자』는 현재와 과거가 숨 막히게 교차하며 마찰음을 낸다. 간첩, 고문, 비리와 음모, 소설은 한국 사회가 살아낸 불합리한 세상을, 어쩌면 현재진행형일 그 세상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긴장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간다. 아버지와 아들 외에도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권력의 복판으로 들어간 가수 ‘윤숙희’, 이리의 시선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폭주하는 형사 ‘서중태’,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끝내 실패한 ‘문자’까지. 생생한 캐릭터과 이야기의 힘이 느껴지는 이 소설은 마치 이야기의 힘을 증명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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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와 2017년의 명동


다 읽은 후, 새삼 표지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마음에 드세요?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처음 표지 시안을 보내주셨을 때, 소설을 참 잘 이해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소설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중심축을 담당하는 이야기는 또한 사랑 이야기이거든요. 때문에 남자 안에 여자의 모습이 있는 표지 이미지가 굉장히 소설을 잘 표현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가득 찬 이야기란 생각을 했어요. 장면이 꽉꽉 차 있거든요. 인상 깊은 장면도 많고요. 풍성한 책읽기가 되었는데 쓰면서는 어땠나요? 힘들진 않으셨는지 궁금했어요.


실은 더 썼는데 많이 덜어낸 거예요. 욕심 같아서는 다 넣고 싶었지만 진행을 고려해 많이 뺐죠. 아깝긴 해요. 원래 시나리오와 드라마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장면을 쓰는 데에는 그렇게 어려움이 많진 않았어요. 다만 힘들었던 건 감정 부분을 쓸 때였어요. 가령 후반부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하는 장면에서 독자가 큰 울림이나 공감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부분을 쓰는데 애를 많이 썼죠. 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 사랑을 독자가 믿지 못하면 소설을 따라가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부분도 쓰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그랬어요.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걸 표현하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고심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취재도 많이 하셨죠? 이번 작품에 도움이 된 것도 있나요? 가령 어떤 뉴스나 참고한 책이 있었을까요? 


모티브가 된 사건들은 있었어요. 윤숙희 실종 사건 같은 경우는 ‘정인숙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실제로 정인숙 사건은 1970년대에 일어난 일인데요. 정인숙 씨가 총에 맞았고, 오빠가 범인으로 밝혀져 형을 살다 나왔어요. 그런데 형을 살고 나와서는 범행 일체를 부인했거든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은 사건이죠. 그런 부분을 모티브로 삼았고요. 나머지 거리 풍경이나 이런 것들은 사진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거리 사진과 CF가 도움이 됐죠. CF가 의외로 시대상을 많이 알려주더라고요. ‘다이알 비누’도 그랬고요.(웃음)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저한테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맞아요, 다이알 비누. 그 세대 분들에게는 또 새로운 공감 요소가 될 거예요.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감사한 일이에요. 비누라는 것 자체는 또한 후각에서 오는 감각도 깨우잖아요. 그런 점에서 어떤 느낌을 가지시게 된다면 정말 좋겠죠.

 

공간이나 배경이 세밀하죠. 시각적인 부분을 꼼꼼하게 담아내려고 한 것 역시 “독자가 큰 울림이나 공감을 느꼈으면” 했다는 앞의 말씀과 같은 의미겠네요. 


이 소설을 기획하고서 생각했던 장면 중 하나는 한쪽에는 70년대의 명동 한복판에 아버지가 서 있고, 2017년의 명동 한복판에 아버지(과거)를 추적하는 아들이 서 있는 장면이었어요. 아버지와 아들은 닮았을 거예요. 어쩌면 같은 모습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배경은 완전히 다르죠. 그런 다른 부분의 디테일을 살리고 싶은 의도가 있었어요. 열심히 썼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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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족의 이야기


아버지 최희도(월출)가 살던 세상, 그러니까 1980년 전후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소설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예요. 이것은 어쩌면 현재진행형일 이야기들이기도 하고요. 아들 최대국은 아버지가 살아낸 불합리한 세상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과연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는 화해할 수 있을까요?


소설 안에는 1970년대의 현대사도 들어갔고, 분단이라는 역사적 비극도 들어갔죠. 그런데 제가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 가족의 이야기였어요. 가족은 늘 서로를 오해하잖아요. 미워하고, 미워하지만 또 애증하고요.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도 마찬가지 같아요. 소설의 껍데기는 분단의 비극, 고통의 산물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가족 간의 오해와 화해라는 숙제가 있어요. 소설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건 희망이에요.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이 낚시하는 것도 희망을 상징하죠. 어쨌든 낚싯대를 던져야 낚을 수가 있잖아요. 그것처럼 무언가 시도를 해야 희망이든 뭐든 낚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작품에 앞서 한 줄 ‘모든 아버지들에게’라고 적은 부분이나 작가 소개글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가족이라는 테마에 천착하는 어떤 이유가 있나요?


취미가 프로파일러 분석 읽기, 관련 팟캐스트 듣기, 연쇄살인범 연구하기예요.(웃음) 보면 범죄자들이 공통적으로 어렸을 때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런 데서 오는 호기심도 있고요.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많이 했죠. 가족이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태어난 이상 싫든 좋든 그 가정 안에서 살아야 해요. 가족에게 영향을 받고요. 저는 가족이 사람의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부분을 늘 고민하고, 고심했죠. 그것이 제가 가족이라는 것에 천착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개인적으로도 그런데요. 어렸을 때부터 늘 했던 고민이 ‘내가 왜 태어났지’에 관한 것이었거든요. 또 살다 보니 좋은 사람도 물론 있지만 나쁜 사람도 너무 많은 거예요. 그들은 왜 이렇게 나쁘지? 사회는 왜 이렇게 더럽고 부조리하지? 그런 것을 계속 고민하다 보니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에서 이유를 찾아보게 된 것 같아요.

 

아들이 가진 아버지에 대한 오해가 참 안타까워요. 특히 정강이에 관한 기억은 해결되지 못한 치명적인 상처가 아닐까 싶거든요. 이런 마찰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일단은 오해죠. 가족 간에는 그런 오해가 많아요. 놀라운 것은 그런 거예요. 예를 들어 엄마가 예전에 했던 차가운 말 때문에 30년 동안 트라우마에 갇히는 경우를 봤는데요. 나중에 엄마한테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내가 언제?”라고 해요. 늘 이런 식이에요. 소설적 장치로 정강이 사건을 그리긴 했지만 이런 오해는 우리 일상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거죠. 부모님이 너무 심하게 싸워서 평생 방황하며 살았는데 정작 부모는 “싸울 수도 있지, 뭐.” 이러는 거고요. 1도 틀어졌던 각도가 점점 크게 벌어지는 거잖아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 그런 문제가 너무 많죠. 진심 어린 소통이 정말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지 않으면 답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었어요.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나의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예전에 범죄학자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부모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정말 공감했어요.


저도 정말 거기에 동감해요. 늘 그런 이야기를 지인들과 나누곤 해요. 왜냐하면 부모가 되는 건 누구나 처음이잖아요. 그런데 그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너무 커요.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초보자가 책임진다는 게 너무 무서운 일이죠. 이건 무조건 의무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최근 한 팟캐스트에서 ‘온보현 사건’에 대해 들었어요. 1994년에 벌어진 일인데요. 택시를 탈취해 여자를 태웠고요. 두 명을 죽이고, 네 명을 강간했어요. 그 사람이 자기 나이만큼 사람을 죽이겠다고 했거든요. 그 이유가 아버지에 대한 복수였어요. 아버지가 어렸을 때 자기를 때리고, 그 때문에 엄마가 음독자살을 했대요. 가족이 한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또 한 번 느꼈어요.

 

말씀하신대로 범죄란 가족 안에서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로 번진 결과로도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렇다면 가족 바깥, 즉 사회와 구조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은 어쨌든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피해자들의 이야기란 생각도 들어요. 서중태도 그렇고 문자도 그렇고, 물론 주인공도 역시 피해자들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당연히 사회가 해줘야 할 것들을 안 해줬을 때 이들은 더 고통을 받았죠. 소설 자료조사를 하면서 북파공작원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어요. 그들은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했어요. 거의 산속에 들어가서 살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일단 가족 문제로 접근한다면 그들 밑에서 자란 자녀들 또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었을 테죠. 그런데 무조건 그 아버지의 잘못인가, 그건 또 아니거든요. 나라에서 마땅한 보상 등을 해줬어야죠. 그런 게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구조적인 모순이나 불합리에 대해서는 저도 심각하게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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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여자들


북파공작원 이야기를 하셨는데, 항상 마음이 쓰이는 그런 사람들인 것 같아요. 상황이 나빠서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요. 자기 잘못이 아닌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서중태를 그리기 위해 고문기술자의 삶을 많이 찾아봤어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고문기술자들은 고문하는 상대가 진짜 잘못을 저질러서 고문하는 게 아니잖아요. 역사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죠. 아무 잘못도 없이 말이에요. 저도 그걸 보면서 그런 사람들이 정말 마음이 쓰이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 외에 특히 마음이 쓰이는 등장인물이 있을까요? 물론 주인공이 가장 그렇겠지만요.


주인공 외에는 문자라는 인물이 마음에 남아요. 문자라는 인물은 잘못이 없어요.(웃음) 어떻게 보면 사랑한 게 죄인 사람이에요. 자기 욕망에 너무나도 솔직한, 주체적인 여자인 거죠. 주체적이되 사랑에는 약했던 여자예요. 사랑의 피해자죠. 문자는 인간적이기도 해요. 그래서 정도 좀 가고 그래요. 한 남자를 너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사랑을 얻지 못하고 비극적 운명이 되어버려서요. 그런 점이 정이 가요.

 

문자의 비극은 척박한 세상을 억척스럽게 살아내야 했던 부모 세대 여성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도 여운을 많이 남겨요.


저희 어머니 경우도 가수가 되기 위해서 집을 나오셨었대요.(웃음) 밤기차를 타고요. 저희 어머니가 특별한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에는 누구나 탈출을 꿈꾸고 변화를 꿈꿨던 시기 같아요. 문자는 어찌보면 전형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문자의 집안 배경을 설명하며 ‘시집을 보내졌다’는 표현이 한 구절 나와요. 그 시절 가족 안에서 여성의 존재란 그런 거였죠. 특히나 우리 부모 세대의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 권력의 피해자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네, 가족 권력의 피해자죠. 그런 걸 쓰고 싶었는데 잘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저는 소설 속 여자들이 피해자이지만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자도 억척스럽게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불도 지르고 그러잖아요. 윤숙희는 더 강해요. 피해자이지만 권력자 혹은 가해자와 거래를 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그런 주체적인 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피해자이지만 발버둥치고 계속 노력하는 부분을 보여주려 했어요. 자세히 보면 등장하는 여자들이 한 명도 가만히 있지 않거든요.(웃음) 심지어는 형사 ‘오진복’의 잠깐 등장하는 여동생조차도 정말 주체적이고, 욕망에 솔직해요. 잘 보시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주로 어떤 장면을 보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나요? 특별한 순간들이 있는지 궁금해요.


이 소설은 길거리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봤을 때 떠올랐어요. 그 할머니는 비가 내려도 나와서 나물을 파셨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담배를 태우시더라고요. 심지어 비닐장갑을 끼고 담배를 태우셨어요. 정말 프로였던 거죠.(웃음)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정말 프로다, 저분의 과거가 궁금하다, 저분은 언제부터 나물을 팔았을까, 생각한 거예요. 할머니에게도 찬란하고 대단한 시절이 있었을 테죠. 그 정도 디테일이면 참 대단하셨을 것 같았어요. 그 할머니를 모티브로 삼은 게 ‘미스 박’ 캐릭터예요. 그래서 처음 기획했을 땐 미스 박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데요. 이야기를 덜어내는 바람에 많이 없어졌어요. 그렇게 어떤 장면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기도 하고요. 다른 소설의 한 문구에서 영감을 얻기도 해요. 번뜩 하는 순간들은 여러 순간인 것 같아요. 늘 메모하고요.

 

역시 작가란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많은 작가들이 혼자 있는 걸 좋아하잖아요. 만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요. 만나도 가만히 있으면서 사람들 관찰을 하죠.(웃음) 관찰하는 게 재미있어요. 그래서 프로파일러에게 관심이 가는 것일 수도 있고요.

 

쓰기 전부터 관찰을 좋아하셨어요?


왜 태어났는지 고민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럴 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인간이 어떤 사정이 있으니 나쁜 짓을 했겠지, 이유가 있어서 나쁘게 되었겠지, 하고 자꾸 이해하려고 하다보니까 그것이 관찰로 이어졌을 수도 있어요.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인간의 어떤 면도 있을 텐데요.


그런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보고 싶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럴까, 파보고 싶긴 해요.

 

그렇다면 끝내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해하려고,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이 너무 살아가기 힘든 곳이 아닐까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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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도피처이자 안식처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이야기는 뭔가요?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혹은 쓰기의 최종 목표랄까, 꼭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해요.


최종적으로는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소설은 일단 재미가 있어야 독자가 접근할 수 있잖아요. 재미가 있으되 읽은 후에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런 소설을 쓰는 것이 목표고요. 그래서 철학 분야에 관심이 많아요. 정유정 작가님이나 마쓰모토 세이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이런 작가들을 좋아하는데요. 그 이유도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나 철학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예요. 그런 것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부분을 좀 더 깊게 고민해보고 싶다는 생각인 거죠.


지금 쓰고 있는 것은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거운 주제지만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죽기 시작한다고 하잖아요. 늙음과 죽음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에 고민해보고 싶었어요. 지루한 주제지만 지루하지 않게 쓰는 것이(웃음) 저의 목표예요.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웃음)


이 이야기도 한 남자의 실종으로부터 시작이 돼요. 실종 사건을 추적하다가 거대한 조직과 음모, 진실이 벗겨지는 이야기죠. 재미있게 쓰고 싶은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제3의 남자』는 무엇보다 굵은 서사가 큰 매력이었는데요. 말씀하신 차기작 역시 기대되는 이야기예요. 앞서 재미를 말하기도 하셨는데 역시 서사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거겠죠?


사실은 문체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요. 소설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기도 하고요. 아직 부족하죠. 그런데 서사나 플롯, 이런 것들은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익숙한 면이 있어요. 첫 장면을 쓰면 자연스럽게 끝이 떠올라요. 끝과 클라이맥스가 떠오르거든요. 그것은 훈련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이것이 소설가로서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는 저만의 색깔이 있는 문체를 갖는 것이 중요한 숙제일 거예요.

 

드라마, 영화에서 소설이라는 도구로 자리를 옮겨왔는데요. 어떠세요? 소설이 주는 특별함이 있었나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 군상에 대한 것은 드라마로든 소설로든 영화로든 만들고 싶긴 한데요. 분명히 소설은 정말 큰 매력이 있어요. 영화와 드라마, 소설은 전혀 다르거든요. 저도 처음 소설에 도전할 때 정말 큰 장벽에 부딪치면서(웃음) 썼는데요. 앞으로는 소설 작업을 계속 할 예정이에요. 그만큼 매력이 있어요. 일단 소설은 혼자 하는 작업이니까요. 또 시나리오는 장면을 응축하는 작업이라면 소설은 풀어내기 같아요. 응축만 하다가 풀어내기를 하니까 자유로움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매력이 있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워낙 책이 안 읽히는 상황이잖아요. 고민도 있으실 것 같아요.


정말 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구조적인 문제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신인 작가들이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소설이 출간되거나 하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병행해야 하거든요. 소설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책을 한 권 낸다고 돈이 되느냐, 그것도 아니고요. 그런 건 사회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정말 절실히 생각해요. 콘텐츠를 생산하는 신인 작가들이 일어서야 이쪽도 두꺼워지고 발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야기에 대한 갈증은 분명히 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개발하려면 이런 부분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설이 반성할 부분도 있죠. 웹툰은 연재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주고, 작가들에게 보상도 적절하게 이루어져요. 그런데 소설은 등단이 아니면 힘들고, 플랫폼 자체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 것을 고려한 다양한 기회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인터뷰로 작가를 처음 알게 된 분들도 있을 텐데요. 독자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려요.


『제3의 남자』를 묵직하고 무겁게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안에는 흥미진진한 추격도 있고, 하나 둘 씩 드러나는 진실도 있고, 미스터리도 있으니까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어릴 때, 책이 제게는 도피처이자 안식처였어요. 세상이 아무리 진흙탕이고 아수라장이었어도 이불 속에서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거든요. 또 신기하게도 책을 보고 나면 그 아수라장이 좀 달라져있어요. 내가 달라져서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제3의 남자』가 읽는 분들께 잠시나마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제3의 남자박성신 저 | 황금가지
남북분단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배경으로 사십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세상과 가족,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한 사내의 이야기를 스릴러 장르로 풀어낸 박성신 작가의 장편소설 『제3의 남자』가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고민정 조기영 부부 “다른 길이란, 가지 않으면 없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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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이기고 짐이 없고, 당신과 나 사이에도 이기고 짐이 없는데, 이제 당신은 이기고 지는 것이 너무 선명하여 슬픈 세계로 가는구료.” 고민정이 문재인 캠프로 영입된 다음 날, 시인 조기영이 블로그에 남길 글이다. 어렵게 들어간 안정적인 직장, KBS에서 나와 청와대 부대변인(내정자)이 되기까지, 고민정의 결정에는 언제나 남편 조기영의 단단한 지지가 있었다.

 

지난 5월 22일 출간된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는 고민정, 조기영이 처음으로 함께 쓴 산문집. 고민정이 청와대 부대변인이 될지 예상하지 못한 터라, 두 사람은 당분간 책 홍보에 열중할 생각이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기로 했던 날, 고민정의 청와대 부대변인 내정 발표가 났고 간담회는 취소됐다. 수락했던 인터뷰까지 줄줄이 취소. 책을 엮으며 독자들과 깊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고민정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청와대로 출근했다. 어렵게 시간을 낸 주말의 한낮, 두 아이(은산, 은설)를 대동하고 나타난 고민정, 조기영 부부를 합정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조금 늦었다”며 인사를 건네는 조기영 시인, 오랜 외조의 탁월함이 여러 번 빛났다. 인터뷰 중 고민정은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고민정의 전작 에세이 제목이 떠올랐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 한 독자는 이 책을 읽고 “기분 전환용으로 읽었는데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를 읽은 독자들은 어떤 리뷰를 남길까. 짐작해본다면 “결혼, 해봐도 될 것 같아요”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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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두 사람의 글이 한 책으로 묶이지 않을까 예감했습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습니다.

 

고민정 편집자께 제안을 받은 게 2014년 봄이에요.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걸 실감해요. 잡지나 블로그에 썼던 글을 넣어도 된다고 하셨는데, 시인 아내이다 보니 스스로 엄격해지는 거예요. 그냥 넘기면 안 될 것 같아, 원고를 수정하다 보니 백지에 쓰는 것보다 어렵더라고요. 한편 한편 다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에세이 저자로는 고민정 씨가 선배잖아요.


고민정 (웃음) 남편이 제 글에 대해 웬만하면 칭찬을 잘 안 하거든요. 그래도 잡지에 썼던 글보다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라고 말해줬어요. 뿌듯했어요. 

 

함께 책을 쓴 소감은 어떤가요?


조기영‘올 것이 왔다?’ 그런 느낌이었는데요. 책을 쓸 때는 덤덤했어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평소 글이라는 걸 자주 접하잖아요. 오랫동안 글과 함께 살아서 그런지, 생각만큼 다른 사람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해요. 읽다 보면 뭔가 덜컹거리는 게 있어서 잘 안 읽게 되는데, 아내의 글은 종종 봐 왔으니까요. 친숙한 면이 있었죠.

 

고민정 그동안 저는 남편에 관한 글을 많이 썼지만, 남편은 저에 대한 글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남편의 생각이 궁금했죠. 또 아이를 키우는 관점은 엄마, 아빠가 같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다르고요. 저희 부부가 만난 지 20년이 되어가는데 남편이랑 같이 쓴 책이 나올 줄이야. (웃음) 제가 처음에는 글을 진짜 못 썼거든요. 남편 글을 책으로 보니까 역시 다르구나, 나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어요. 글이 확실히 탄탄하더라고요.

 

조기영아내가 워낙 바쁘니 글을 손질할 겨를이 상대적으로 없었죠. 저는 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상황에서도 글을 쓰는 게 숙련이 돼 있는 사람이니까, 다르죠.

 

“250년 전 괴테의 한마디(“큰일들에 매진해보고 싶다, 배우고, 교육받고 싶다, 마흔이 되기 전에”)가 날 마구 흔들어댔다”고 하셨어요.


고민정 괴테가 서른일곱 살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 말이에요. 궁정에서 보낸 11년의 생활을 뒤로 하고 이탈리아로 2년간의 여행을 떠난 뒤, 그는 자신이 문학을 위해 태어났다는 걸 분명히 인지해요. 이후로 그의 인생은 달라지죠. 굉장히 짧은 글이었지만 30대 후반인 제게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마음속 아우성이 들리기 시작했고 사춘기 소녀처럼 고민이 많아졌어요. 그 전까지는 나이로 인한 마음의 병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마흔을 목전에 두고 방황이 시작되더라고요.

 

조기영 아내의 고민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래서 새로운 길을 가게 됐구나’ 싶었어요. 캠프에 들어가기 전부터 해온 생각이니까요. 아내가 갖게 된 삶의 방향이 느껴졌던 대목이죠.

 

남편의 글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무엇인가요?


고민정 마지막 쪽에서 나왔던 것 같아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저희가 올해로 결혼 12년이에요. 결혼 10주년 때, 제게 시를 써줬는데 한 구절이 책에 나와요. “세월을 사용하기로 사랑만 한 것이 있으리오.” 많은 사람이 저희에게 ‘어떻게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사냐?’고 하는데, 저희도 때로 싸우고 실망하고 분노도 치밀어요. 제가 가출한 이야기도 책에 썼잖아요. (웃음) 그런데, 다만 노력하는 부부인 것 같아요. 이 노력 가운데는 서로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 같이 때문에 하는 노력도 있어요.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뭔가를 얻고 싶어 하잖아요. 사랑은 노력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들 하지만, 저는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부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을 때, 그리는 모습이 같아요.

 

조기영 아내랑 제가 10살 차이가 나잖아요. 여자들은 기대 수명이 더 길다고도 하고. 연애 초기 때만 해도 “나는 백 살까지 살 거야”라고 했는데, 지금은 노년이 더 길어졌어요. 외롭고 쓸쓸한 노년이 되지 않으려면 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꿈이 있는 상태에서 노년을 맞이하면 두렵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민정 씨도 글 쓰는 일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노년이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민정 씨가 소설도 시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글쓰기만큼 노년을 풍성하게 하는 건 없을 것 같아요.

 

시인으로부터 시를 써보라는 권유를 듣다니… 참, 좋네요.


고민정 (웃음) 확실히 글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쓸 때는 아주 농축된 스트레스를 받지만, 잘 완성됐을 때 오는 희열이 있어요. 그래서 글을 쓰는 게 아닌가 싶어요.

 

두 분의 글을 읽으면서, 이 책은 특히 남편, 아내들이 읽으면 더 좋겠다, 싶었어요. 서로에게 선물해도 좋을 것 같고요.


조기영 저희 사는 이야기를 종종 블로그에 올리기도 하는데요. 글은 아무리 솔직히 쓴다고 해도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크게 보일 수 있거든요? 책을 읽고서, ‘우리도 이렇게 살자’라고 하면 서로가 힘들어져요. 이런 삶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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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꽉 채운 시로 사랑 받으면 좋겠다


고민정 씨의 전작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는 제목부터 남편에 대한 사랑 고백이었단 말이에요? 이번 책에서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나오는데, 영화 같더라고요. 많이들 아시지만 대학교 동아리 선후배였잖아요.


조기영 반했죠. 아내한테. (웃음) 시를 쓰는 사람은 거짓말을 잘 못해요. 시를 쓰는 사람이 쓰는 소설은 대개 작가의 삶의 궤적, 현실과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고민정 저희 부부를 너무 특별하게 안 봤으면 좋겠어요. 11살 차이가 나는 시인과 아나운서, 이런 타이틀로 보면 조금 남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같아요. 남편 나이가 아무리 많으면 뭐해요. 정신연령은 보통 남편들이랑 똑같죠. 저희는 특별하지 않아요. 저희가 결혼할 때, 기자들이 취재를 왔어요. 저는 그게 너무 놀라웠어요. 누구나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하는데 저는 시인을 좋아한 거잖아요. 우리의 사랑도 사람들의 모습 속에 다 있다고 생각해요.

 

조기영 예술은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냐’인 것 같아요. 모든 사랑은 소중하고 아름답죠. 그런데 고민정이라는 사람이 좀 알려져 있다 보니, 좀 특별하게 봐주신 거죠.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직업을 특별하게 봐주는 면이 있지만,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웃겨지는 거잖아요. 여러 직업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기영 시인의 시가 궁금한 독자라면 책을 꼼꼼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몇 편이 실렸는데요. 평소 시를 다른 지면에 발표하지 않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조기영 2000년에 시집을 냈는데 지금은 절판했어요. 글 쓰는 사람이라면 등단을 준비하고 꿈을 꾸는데, 이 방식들이 좀 획일적이지 않나 생각해요. 좀 잘못됐다는 생각이에요. 시를 쓰는 삶 자체를 살면, 시인인데 어느 순간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게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서구 사회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시를 쓰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시인으로 불려지는 경우를 종종 봤어요. 개인적으로도 반성의 지점인데, 좋은 시는 많지만 생각보다 좋은 시집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호연지기일 지 모르지만, 저에겐 천 년 뒤에도 남을 시집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지금 대한민국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로는 생계가 어렵습니다. 물가는 오르지만 고료는 참 안 올라요.


조기영 그렇죠. 저는 고민정 씨를 만나서 경제적 기반이 해결됐잖아요. 문인들에게 이런 기반은 많지 않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좀 다르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평생이라는 시간 가운데 많이 고민하고 준비해서, 꽉꽉 채운 시로 사랑 받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어요. 문인들이 교단으로 많이 가는데, 저는 좀 비판적이에요. 삶의 어떤 안락한 기반을 갖고 시를 쓴다는 게, 타협하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고민정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 달라요. 이 사회가 시인들이 시만 쓰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세상이 안 되기 때문이니까요.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요. 일년에 시 한 편을 써서 생활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강연 같은 건 안 해도 되죠. 하지만 그런 사회구조가 안 되기 때문에 특강도 하고 칼럼을 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국가가 문화예술인에게 여러 가지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기영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민정 씨가 정치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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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죄책감 갖지 말아. 그럴 일 아니야


많이 바쁘시죠? 일상이 어떠신가요?


고민정 새벽 6시 반쯤 출근해요. 빠르면 8시, 보통 9시쯤 퇴근하고 회식까지 하면 12시쯤 들어와요. 아직 발령이 난 건 아니라서요. 언론에는 부대변인이라고 나왔지만, 아직 내정자예요. 공식적으로 발령이 나기까지는 한 달 정도 걸려요.

 

조기영 2월부터 저는 한 마디로 말하면 ‘독박 육아’예요. 대선이 끝나면 이 생활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장전에 돌입했어요. (웃음)

 

첫째 은산이 7살, 둘째 은설이가 4살이에요. 책을 보니, 민정 씨는 처음에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했다고요.


고민정 신혼 때는 생각이 없었어요. 둘이서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해서 둘이서만 살고 싶었어요. 은산이를 낳은 게 결혼 6년 만이었는데, 긴 시간 동안 남편이 저를 설득하려고 했다면 생각을 못했을지도 몰라요. 남편이 기다려줌으로 인해서 저 스스로 변화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낳자고 한 것도 제가 먼저예요. 저는 애들이 종이접기를 하다 낑낑대고 있으면 가서 도와주는데, 남편은 기다려요.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애들은 곧 하더라고요.

 

조기영 민정 씨한테만큼은 못 기다려줘요. 확실히 아들과 딸을 대할 때는 달라져요. 사내 아이는 확실히 남자 대 남자, 본능이 불꽃 튀는 순간이 있어요.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부드럽고 자상할 거라 생각하는데, 아들을 대할 때는 다르더라고요.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습니다.

 

일하는 엄마로서의 어려움, 민정 씨의 글만 읽어도 정말 실감이 나는데요.


조기영 초기에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래도 지금은 미안함, 죄책감 같은 게 많이 옅어진 것 같아요. 지금은 확실히 부담을 덜 갖는 것 같은데, 아마 저의 능력이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고민정 남편이 정말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육아나 살림을 도와주는 것뿐 아니라 아내에게 “당신 죄책감 갖지 말아. 그럴 일 아니야”라고 툭 한 마디 해주는 게, 정말 큰 힘이 돼요. 누군가에게 이해 받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남편에게 항상 고마운 점 중에 하나예요.

 

조기영 돕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죠. 제 할 일이니까요. 저희도 분명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어요. 이런 단단한 마음이 갑자기 툭 떨어진 게 아니에요. 꼭 투쟁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우리 안에서도 치열하게 싸워온 결과예요. 예술도 마찬가지잖아요. 과정이 있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부부 관계도 가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고민정 저희에게는 책이 큰 힘이 됐어요. 사람들의 조언도 많이 듣고 반성도 하고, 때로는 비판하기도 했는데요. 결국 제 인생관을 만들어준 건 책인 것 같아요. 이번 저희 책도 한 챕터마다 책 속 구절이 등장해요. 어쩌면 그 구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될지도 몰라요.

 

조기영 어느 사회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만 우리가 느끼는 건, 독서 총량이 많은 나라,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좀 더 사람다운 사회가 된다는 거죠. 간접 체험으로써 내 마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은 책이 아닐까 싶어요.

 

조기영 시인님은 프로필 소개에 ‘주부’라는 직업을 가장 먼저 적었어요. 작은 수치지만 아빠들의 육아휴직도 늘어나고, 주부 아빠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조기영 저는 모계사회가 맞다고 생각해요.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요. 우리나라가 조선시대, 봉건 사회를 거치면서 기형적으로 변화했는데 다시 제자리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남성들은 다소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사고방식이 강하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여성성이 수렴되는 사회가 옳은 방향이라 생각해요.

 

고민정 생각이 조금 다른데요. 저는 한편으로 남성들이 안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게 제일 좋잖아요.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자신의 꿈과 상관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을 배워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취미를 배우기보단 특기를 가르치는 거죠. 그래서 좀 짠한 마음이 있어요. 요즘 젊은 아빠들은 평일에는 야근하고 주말에는 애들이랑 놀아주기 바빠요.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들도 많은데, 너무 남자들이 혼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죠.

 

부부관계가 좋은 이유가 여기서 보이네요?


고민정 항상 그래요. 남편은 여자 편들고, 저는 남자 편들고. (웃음)

 

조기영 대한민국 평균치랑은 다르게 지내니까요. 아내는 남성화가 돼서, 퇴근하면 저에게 혼내죠. 왜 이렇게 집안일을 제대로 안 했냐고. (웃음) 저는 주부 입장에서 불합리한 거예요. 집에서 살림이랑 육아로 얼마나 힘들었는데, 화를 내니까. 웃기면서 또 당황스럽고. 이렇게 변화해 가는 것 같아요.

 

고민정 우리 부부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려요. 어쨌든 저희가 조금 알려진 사람이니까요. 저희가 하는 말 한 마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이 작은 사회 안에서 평균치와 다른 남녀 역할을 하면서 살 때, 어떤 좋은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드릴 수 있잖아요. 하나의 실험이라고 할까요. 여자와 남자를 너무 가르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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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확신이 있으면 한 번 가도 괜찮아


청와대 부대변인으로서 특히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고민정 너무 많지만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제가 시인의 아내이다 보니 문화예술인에 시선이 많이 가는 건 사실이에요. 다른 일반 직장인과 비교했을 때,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직종이기도 하고요. 꿈을 키워나가는 데 있어서 세상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게라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어요. 꼭 청와대에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방송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왔어요. 대학원에서도 미디어문화를 공부했고요. 시스템 때문에 눈물 흘리는 문화예술인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시스템은 한 두 사람의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어떤 문화예술적 코드가 사람들에게 흡수돼야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는 거니까요. 실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 당사자, 그리고 국민의 합의, 이 세가지 합이 맞으면 세상은 변할 수 있다고 믿어요.

 

조기영 새 정부의 출발을 좋게 보고 있어요. 아내가 문재인캠프에 합류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는데 시를 쓰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어요. 본인의 삶 자체가 시이기도 하고요. 음악으로 따지면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있잖아요. 문 대통령은 고전주의죠. 정해진 틀 안에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현실의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예술적 기질도 보여요. 사실 아내가 캠프에 합류하기 전에 약속을 하나 받을 생각이었어요. “대통령이 되면, 퇴임 후에 당신이 사는 집 앞에서 시 콘서트를 하자”는 거였죠. 제 개인적인 내면의 조건이었는데, 다른 말을 많이 하느라 정작 말은 못하고 나왔어요. (웃음)

 

조기영 시인이 쓴 글 ‘당신을 문재인으로 보내며’가 큰 주목을 받기도 했잖아요. 사실 두 분을 함께 영입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던 걸로 알아요.


조기영 그럼 소는 누가 키워요? 저는 아이들을 키워야죠. (웃음) 문재인 정부가 탄생하길 바랐고, 저는 직접적인 참여보다 지원하는 형태이고 싶었어요. 문재인 대통령은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분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갔어요. 안과 밖이 다르면,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설명하기 어려워요.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요.

 

고민정 우리는 늘 고민해요. 이 길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가보지 않은 길에 있어서는 두려움이 있어 망설이거든요. 그 때, 한 번 새로운 길을 가보라고 탁 건드려주는 사람이 제게는 남편이었어요. 아나운서의 꿈도 마찬가지였고요. 캠프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너무 많은 고민을 했어요. KBS는 안정적이고 정년이 보장된 곳이니 몇 년 뒤에는 후회하지 않을까, 안정적인 이 삶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어요. 그때 남편은 저를 탁 건드려주며 “당신에게 열정과 확신이 있으면 한 번 가도 괜찮아”라고 말했어요. 그 한 마디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캠프에 합류했을 때, 부대변인으로 내정됐을 때도 많은 분이 박수를 보내줬어요.


고민정 너무 감사했지만, 저는 이게 비단 인간 고민정이 예뻐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쩌면 저를 통해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흔을 앞둔 나이, 두 아이의 엄마, 가장이기도 한 워킹맘으로 저를 보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이 자리가 마냥 기쁘고 그런 마음은 없어요. 저의 실패는 저를 지지해주신 분들의 실패일 수도 있으니까요. 굉장한 책임감을 느껴요. 평범한 사람이 가난한 시인과 결혼해도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고,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정치적 감각 없이 굳은살 없이 정치를 하게 됐을 때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조기영 언론과 정치는 어쨌든 영역이 다르잖아요. 정치 영역에 들어서면 반은 적이 될 수 있는데,생각 보다 비난이 적었어요. ‘까방권’이라고 하세요? 까임 방지권의 준말인데, 언론계에는 두 사람이 있대요. 손석희 앵커와 고민정. 이해가 되는 말이기도 했어요. 어떤 실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훨씬 많아요. 저희가 잘해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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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고민 안 할 수 없잖아요. 안정된 직장에서 나오는 일, 뜻만 가지고는 어려운 게 현실이고요.


고민정 그렇죠. 2월부터 6월까지는 당장 저희한텐 월급이 없었어요. 물론 퇴직금이라는 좋은 제도 덕분에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지만요. 지금도 퇴직금으로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초조함, 불안감은 없어요. 올해로 제가 서른 아홉인데 아직은 상당히 젊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15년 동안 사회생활 하면서 만든 무기로 우리 아이들 밥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지금 세상은 직장이 전부가 아니에요. 하나의 도구인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너무 길잖아요. 한 직장에 올인하는 것보다 내 능력을 개발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글도 그래요. 적더라도 인세는 제게 큰 도움이 돼요.

 

조기영 시인으로서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저로서는 (웃음)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굉장히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민정 저희가 이렇게 달라요. (웃음)

 

조기영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봐도, 두 사람의 삶의 방식이 다르잖아요. 하지만 내용은 같기 때문에 궁합은 잘 맞았죠. 민정 씨가 경제적인 것을 고민하지 않은 건, 명품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가난에 대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을 만나서 직간접적으로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 실행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요. 이 친구가 명품을 계속 경험했다면 포기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특히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고민정 아이 엄마, 아빠들이 많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를 낳고도 결혼이 지옥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결혼한 사람들은 안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잖아요. 좋은 이야기는 바탕이 되고, 힘든 일은 툭툭 튀어나올 뿐인데 말이에요. 결혼을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해볼만한 일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결혼을 하고 싶다면, 어떤 상대를 만나면 좋을까요?

 

조기영 ‘이 사람과는 끝까지 가겠구나, 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상대를 만나는 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졌는지, 반대 의견을 냈을 때, 비판을 견딜 준비가 되었는지도 중요해요. 남자들은 소유 의식이 강하잖아요. 소유라는 개념으로 결혼을 보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꿈을 여쭤보고 싶은데요.

 

조기영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나가서 말했지만 전 이미 꿈을 이뤘어요. ‘시를 평생 쓰겠다, 멋진 사랑을 해보겠다’, 이 두 가지를 이뤘으니까요. 그래서 전 욕심이 없어져버렸어요.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우리 두 아이가 큰 통과의례 없이 사춘기를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중이병은 절대적인 질병이니까요. 아이랑 큰 파도 없이 지났으면 좋겠는데 인생이란 우리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고민정 씨는 항로를 잘 헤쳐나갈 것 같아요. 부부 중 누구 하나가 잘 나가고 그러면 질투한다고 하잖아요. 저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 꿈을 다 이뤄서 그런 것 같아요. (웃음)

 

독자 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고민정 힘든 시기를 겪는 분들이 많은 걸 알아요. 하지만 세상이 원망스럽기만 하진 않았으면 해서요. 한 번 부딪혀볼 만한 세상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왔고 이 책도 썼어요. 돈이 좀 없어도, 미래가 좀 불투명해도, 아이가 두 명이나 생겨도 한 번 부딪혀볼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조기영 책은 장식용으로 참 좋은 도구죠. 장식용으로 사놓았다가 어느 날에는 냄비 받침대로 사용해도 좋고요. 어쩌다 책을 폈는데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러시면 좋겠어요.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 고민정, 조기영 공저 | 북하우스
조건 없는 사랑 이야기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고민정, 조기영 부부가 3년의 준비 기간 끝에 시처럼 아름다운 언어로 써내려간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고희영, 에바 알머슨 “우리가 해녀에게 반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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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그리는 작가’로 유명한 세계적인 스페인 아티스트 ‘에바 알머슨’이 엄마는 해녀입니다』출간을 기념해 내한했다. 난다에서 출간된 엄마는 해녀입니다』는 영화감독 고희영이 제주 해녀 3대의 삶을 풀어낸 동화. 영화 <물숨>으로 인연을 맺은 고희영 감독과 에바 알머슨은 책 작업을 위해 지난해 9월, 직접 우도를 찾아 온종일 갯바다에 앉아 해녀를 그리고 글을 썼다.

 

제주에서 태어나 자란 고희영 감독은 전세계를 떠돌며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중 ‘행복의 조건’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됐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아이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고 감독은 ‘어떻게 아이의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동화책을 읽게 됐고, 해녀의 삶을 동화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에바 알머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미 사진을 통해 해녀의 삶에 매료됐던 에바 알머슨은 흔쾌히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재능기부로 삽화 작업에 참여했다.

 

엄마는 해녀입니다』의 주인공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다를 떠난 적이 없는 할머니, 도시에서 미용사로 일하다 해녀가 된 엄마, 두 사람을 지켜보는 소녀다. 고희영 감독은 말했다. “산다는 것은 숨쉰다는 것인데, 숨을 멈춰야 살 수 있는 해녀들의 은밀한 바다 속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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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성, 자신감,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특별한 책을 출간하셨어요. 펴내기까지의 과정, 소감이 궁금합니다.

 

고희영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일이 ‘걸어서 별까지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영화 <물숨>만 해도 촬영 7년 후반작업 2년, 총 9년이 걸렸어요. 동화책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동화책을 쓰는 건 그렇게 어렵게 닿은 별에 착륙한 느낌이었어요. 작업 기간은 영화보다 훨씬 짧았지만, 미지의 세계에 새싹을 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동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했어요. 제가 지금 중국 베이징에 살고 있는데, 바다와 먼 이 도시에서 동화가 써지질 않았어요. 그래서 이 동화를 쓰기 위해 제 고향인 제주 바다를 찾아갔어요. 바다 곁에서 바다와 눈을 맞추며 동화를 썼습니다. 동화의 그림은 세계적인 스페인의 아티스트 에바 알머슨이 그렸는데요, 외국의 화가가 해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억세고 강한 해녀의 이미지가 아니라, 한결 편안해진 우리 해녀의 캐릭터가 탄생돼 기쁩니다.

 

고희영 감독님으로부터 함께 책을 만들어보자는 이메일을 받고,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으셨다고요.

 

에바 알머슨처음으로 해녀들의 사진을 봤을 때 무언가 아주 강력한 느낌이 들었어요. 야생의 아름다움, 그리고 정직함이 제 마음속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었음을 행운으로 생각해요. 제주 바다와 해녀들을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해녀를 그리는 일은 제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출간된 책의 텍스트, 선물 그리고 그것들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은 정말 아름다운 경험이었습니다.

 

김형선 사진작가가 찍은 해녀 사진을 보고, 해녀에게 매료됐다고 들었습니다. 해녀들을 직접 보시고 해녀를 그렸습니다. 실제로 본 해녀들은 어떤 인상이었나요?

 

에바 알머슨 해녀들의 강함이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강건함도요. 그들의 존재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가치들을 상징합니다. 독립성, 자신감,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 자신의 한계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겸손함, 그리고 경이로운 공동체로서의 느낌까지요.

 

동화책의 실제 주인공과도 만나셨나요? 인상 깊게 나눈 대화가 있었나요?

 

에바 알머슨우도에서 만난 해녀들 중 한 분에게서 영감을 받았어요. 동화책 속 주인공이시기도 하죠.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끝없이 솟아나는 에너지가 대단했습니다. 또 다른 해녀 분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는데요. 그 때의 대화가 생각나요. 그 분은 바다에서 6시간 이상을 보내고 난 후 모두를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하셨죠. 자신의 일, 가족,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걸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전 부끄러웠지만 그분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분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는 걸 발견했어요. 이상하게도 그때의 감정은 동정보다는 강렬한 행복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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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께서 에바 알머슨 작가를 만났을 때, 첫 눈에 ‘쨍’ 했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인상을 말씀해주신다면요?

 

고희영 한 눈에 그녀와 제가 같은 곳을, 같은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녀는 상하이의 호텔에서 해녀 사진을 처음보고 외쳤대요. 난 이 여인들을 만나러 가야겠어!” 그렇게 해녀에 반해있던 그녀가 <물숨>영화 개봉 소식을 듣고는 <물숨>을 보고 싶다는 인터뷰를 모 일간지에 했고, 그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됐어요. 당시 저는<물숨>영화의 개봉 준비를 하고 있던 즈음이었는데 제가 배급사 몰래 에바에게 영화를 보여줬어요. 그러니까 에바가 <물숨>영화를 본 최초의 관객이었어요. 당시 영어 자막이 없는 영화를 보냈는데도 에바가 곧바로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어요. “자막이 없었지만 나는 다 보고 느꼈다. 해녀들의 강인함, 자연과의 정서적 일치, 그녀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바다로 가는 힘, 그리고 그녀들의 고독까지도. 나는 무엇이든 너를 도와주고 싶다”는 답장이 왔고, 저는 원래 에바 알머슨의 팬이었기 때문에 ‘함께 해녀 동화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어요.

 

그래서 함께 우도를 찾아가신 건가요?

 

고희영 맞아요. 저는 에바를 데리고 영화 <물숨>의 무대인 제주도 동쪽의 작은 섬 ‘우도’로 들어갔어요. 에바는 해녀들의 물질작업 모습을 갯바위에 앉아 스케치하고 저는 글을 골랐어요. 저녁이면 해녀들이 작업에서 돌아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물숨 영화의 주인공 해녀언니가 자신이 쓰던 물 때 낀 물안경을 에바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하더라고요. 그리고 이 동화책을 그릴 때 그 물안경과 그때 가지고 간 소라 껍데기를 작업대에 놓고 작업했대요. 그러니까 에바가 해녀를 보는 시선이 저와 같았던 거죠. 단지 해녀를 신기하게 보거나 극한 직업의 여성이라는 시선이 아니라, 정말 자연의 바다와 동화돼 살아가는 그녀들에 대한 존경, 경외심이 가득했어요. 그 마음이 첫눈에도 쨍 하고 느껴졌어요. (웃음)

 

해녀 분께 크눈이(물안경)을 선물 받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에바 알머슨감동했습니다. 선물 받은 물안경은 제 작업실 탁자 위에 항상 올려두고 보고 있어요. 그 물안경의 주인과 이 물건이 그분에게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큰 존경심을 느껴요. 그분들을 그리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그분들이 확고하게 지켜오고 있는 가치들을 제가 할 수 있는 한 잘 표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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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알머슨의 동화 작업 모습

 

사진집을 내셔도, 에세이를 내셔도 되었을 텐데요. 동화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동화책을 통해 해녀의 어떤 모습을 담고 싶으셨나요?


고희영 제가 다큐멘터리를 한지 30년이 됐어요.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항상 저의 궁금증은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오랜 시간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한 결과 한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바로 ‘아이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살다 보면 영혼에 때가 꼬질꼬질 묻게 되고, 마음은 사막 같고, 당최 어떻게 해야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찾게 된 극약 처방은 동화책을 읽는 것이었어요.

 

이상하게도 동화책을 펼치는 순간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상하고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인생의 진리며 철학은 다 동화책 속에 있더라고요. 그것이 동화책의 매력이었어요. 동화책을 통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한평생 바다와 함께 살아온 노장 해녀 분들이 초보 해녀들에게 맨 처음 가르치는 것은 전복을 따는 기술이나 소라를 찾는 기술이 아니라는 거예요. ‘바다에서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항상 당부합니다. 산다는 것은 숨쉰다는 것인데 숨을 멈춰야 살 수 있는 해녀들의 은밀한 바다 속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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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조차 제대로 줘보지 않은 엄마의 존재 같은 느낌


감독님께서 엄마는 해녀입니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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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영 원고를 쓰면서 에바가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 참 궁금했어요. 에바가 상상할 수 있는 창조적 여백을 많이 주고 싶었죠. 모든 그림이 다 예쁘고 아름답지만, 가장 어려웠을 부분이 바다가 싫어 도시로 떠난 딸이 도시생활에 지쳐 엄마의 바다를, 파도소리와 숨비 소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어요. 미용사인 딸과 엄마의 바다를 연결시키는 이 그림을 보면서 탄성이 나왔어요. 또 에바는 원고의 리듬까지 살려서 그림을 그렸더라고요. 아 역시 다르다, 싶었어요.

 

작가님께서는 글이 더해진 책을 읽으셨을 텐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어떤 내용인가요?

에바 알머슨제가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할머니가 손녀에게 자신은 바다를 정원처럼 생각하며 그 정원의 모든 부분들을 사랑하고 가꾼다고 설명해 주는 부분이에요. 할머니의 현명한 관점이 돋보이죠.

 

고희영 감독님은 영화 <물숨>연출을 비롯해 제주에 관한 작업을 꾸준히 하고 계세요. 반드시 고향이기 때문 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제주 그리고 해녀는 감독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고희영 저에게 ‘해녀’는 처음으로 오래 응시하게 된 엄마의 눈동자 같은 것입니다. 항상 곁에 있어서 그 소중함을 모르고, 눈길조차 제대로 줘보지 않은 엄마의 존재 같은 느낌이랄까요. 사실, 제주도는 저의 탯줄을 끊어준 섬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늘 수평선을 건너 떠나고 싶었습니다. 고향바다에는 늘 해녀들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너무도 당연해서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호시탐탐 제주를 떠날 궁리를 하다가 결국 고향 탈출해 서울, 그리고 지금은 중국 베이징에서 13년째 살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서 더는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그렇게도 지긋지긋 하던 고향바다가 너무도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휘청이며 찾아간 바다에서 해녀들을 봤어요. 그분들은 제가 어린 시절부터 늘 고향바다에 있었지만, 그날 처음으로 내 마음에 자맥질해 들어온 것이죠. 그때 해녀들의 숨비 소리는 ‘살아있다’는 소리였어요.

 

고희영 그로부터 7년동안 해녀들을 촬영했는데 그 해녀들의 바다 속에서 저는 저의 인생의 바다를 만나게 되었어요. 해녀 분들은 자신의 숨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숨이 남아있을 때 여유 있게 물 밖으로 나오시죠 그런데 꼭 숨이 다 돼서 나오려 할 때 전복 같은 게 딱! 보인대요. 그러면 그걸 떼서 나오고 싶어지죠. 그때 자기의 숨을 넘어버리는데 그렇게 물 속에서 쉬게 되는 숨이 ‘물숨’이고, 결국 ‘잘라내지 못한 욕망의 숨’..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전율이 왔어요. 그리고 저 자신을 봤어요. 너무 욕심만 부리다가 계속 ‘물숨’을 먹고 있었던 저를요.

 

작가님께도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해녀의 삶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에바 알머슨 우리의 삶을 좀 더 가치 있게 바라보게 되는 점이죠. 그 분들은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들을 알고 있습니다. 바다를 존중하고 또 사랑하며, 욕심을 컨트롤하고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는 일들이요.

 

“바다가 주는 만큼 가져오자는 것이 해녀들의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현대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해녀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것들을 느끼기 바라시나요?

 

고희영해녀들은 첨단수중장비가 있음에도 맨몸으로 바다에 들어갑니다. 해외영화제가 가면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저에게 던지는 질문이 그거예요. ‘왜 공기통을 매고 가지 않는가? 왜 저렇게 위험을 감수하며 바다에 가는가?’ 그런데 그 속에는 정말 아름다운 비밀이 있어요, 해녀들은 바다의 농부들이에요. 바다를 ‘바다밭’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죠. 바다에 흉년이 들면 해산물 씨도 뿌리고 불가사리는 잡고 바다를 날마다 가꾸죠. 해녀들은 바다의 것을 뺏어오지 않아요. 바다가 나눠주는 것들을 모으죠. 해녀들은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부터 지켜내려 온 약속이 있어요. 우리 바다에서 욕심내지 말고 우리 ‘숨’만큼만 있다가 오자. 왜냐하면 공기통을 매고 가면 숨이 자유로워지니까 욕심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바다가 금세 황폐화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바다와 인간이 어떻게 함께 사이좋게 살아야 하는 지를 이미 알고 실천해온 오래된 미래들인 것이죠. 그것이 제가 발견한 해녀의 가치이고 그래서 이 아름다운 약속을 어린이들에게 꼭 전하고 있었어요.

 

에바 알머슨의 그림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고희영 에바가 그러더라고요. ‘선을 단순화시키면 감정이 더 잘 보인다’고.. 에바의 그림은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다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단순하지만 편안함과 동시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도, 행복해지는 이유도, 그녀가 가진 편안한 선. 그러나 풍부한 감정의 표현인 것 같아요. 그녀를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작가님이 말하는 사랑, 행복은 어떤 것인가요?

 

에바 알머슨자신의 안에서 평화를 찾는 것, 혹은 큰 모순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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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개인적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고희영 저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도 바다의 농부 해녀들처럼 농사짓듯이 영화를 만듭니다. 씨앗을 심지도 않고 무언가 열매를 성급하게 따려고 들지 않습니다. <물숨>영화는 7년동안 촬영을 했으니까요. 지금 제작하고 있는 영화는 <불숨>입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뺏긴 조선 막사발을 70년 동안 매일 빚고 있는 한 사기장의 이야기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불을 제멋대로 다루겠다고 자만했던 사람이, 불 앞에 겸손하게 되는 이야기예요. 그러고 보면 저의 주제는 ‘사람아 자연 앞에 욕심내지 말라, 잘난척하지 말자’인 것 같아요.

 

에바 알머슨 저는 오랫동안 비행기를 그리고 싶은 꿈이 있어요.

 

『엄마는 해녀』를 선물한다면, 어떤 분께 드리고 싶나요? 읽었으면 하는 독자들을 말씀해주셔도 좋고요.

 

에바 알머슨저는 스페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제 스튜디오는 해녀들의 사진으로 가득하고, 고희영 감독님의 다큐멘터리를 오는 친구들에게 전부 보여준답니다. 모두 그 다큐멘터리를 사랑했어요. 책도 그렇지 않을까 해요.

 

고희영 열심히 노력하며 살지만 한걸음도 내디딜 힘이 없는 분들이 보시면 좋겠어요. 내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어느 날, 제가 해녀 분들에게서 받았던 위로, 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싱싱한 날것의 진리를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해녀들의 바다에는 자신의 숨의 길이에 따라 상(上)군 중(中)군 하(下)군의 바다가 정해져요. 누가 정하는 게 아니라 해녀들 스스로 어린 시절부터 바다에서 자라고 수영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바다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바다의 계급은 타협을 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바꿀 수가 없어요. 자연의 질서 속에 인간이 순응한 질서이니까요. 그런 해녀들의 바다를 보다가 문득 우리 뭍의 세계를 돌아보게 됐어요.

 

모두들 자신의 숨(능력)은 잘 알지도 못한 채 모두들 상군의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우리는 늘 숨이 가쁘고 더러는 숨이 막히고 제 숨에 숨을 헐떡거리며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행복해질 수 도 있는데 불행한 건 아닌가, 하는. 그리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자꾸 “최선을 다해라. 너는 할 수 있다”고 무조건 으쌰으쌰 독려하는 것도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아이들이 무엇을 잘 하는 아이인지, 그 아이의 숨은 어느 정도인지, 아이의 숨의 길이에 맞는 인생의 바다를 찾아주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이 동화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자신의 숨과 인생의 바다를 찾아갈 수 있는 동화책이 되었음 좋겠습니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엄마는 해녀입니다 고희영 글 / 에바 알머슨 그림 / 안현모 역 | 난다
난다에서 아주 특별한 그림책 한 권을 선보입니다. 앞으로도 가히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할까 싶은 기획 속에 선을 보이게 된 건 『엄마는 해녀입니다』라는 책입니다. 엄마와 해녀. 참으로 한국적이다 싶은 두 단어의 조합 속 한 문장의 제목에 먼저 눈길이 갑니다. 그러니까 엄마 얘기가 맞고 해녀 이야기도 맞는 그런 책.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여균동 감독 “나는 정답 없는 질문만 던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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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화감독. 저자 소개글 첫 줄에 적힌 표현이 재미있다. 여균동 감독은 1994년 영화 <세상 밖으로>를 시작으로 <미인>, <여섯 개의 시선>, <1724 기방난동사건>등을 연출했다. 그러나 감독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 출연해 청룡영화제 신인연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한 ‘연기파 감독’이다. 그뿐인가.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고, 그림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에 없던 화자의 목소리를 담은 그림책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출간했다. 곧 <영화의 시작>이라는 영화도 완성한다. 감독은 “여러 가지 관심이 지대한 것 같아요. 나는 아무런 벽이 없고, 넘나드는 데에 아무런 선입견도 없거든요.”라는 말로 이 궤적들을 설명한다. 그러니 ‘가끔 영화감독’이라는 저 수식은 정확한 것일지도.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는 마루야마 겐지의 『천 일의 유리』에서 시작되었다.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본 적 없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호명함으로써 세상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간다. 이곳에는 ‘눈물’도, ‘아파트’도, ‘물음표와 느낌표’도, ‘어?’도 화자가 된다.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하는 할아버지를 따라가는 시선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정답 없는 질문만 던지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여균동 감독. 그는 심심할 틈 없는 바쁜 세상, “심심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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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않으면 모르는 이야기들


흥미로운 작업을 하셨어요. 동화 같기도 하고, 그림에세이 같기도 한 독특한 책인데요. 귀여운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아니, 진짜 그림은 말이 안 되는 거죠. 요즘 웹툰이나 일러스트 등을 보면 장난이 아니에요.(웃음) 그 창의성과 상상력. 그 생각을 하면 이 작업은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요, 시간이 많았어요.

 

오래 전에 완성된 작업이라고 들었어요. 다른 출판사에도 갔던 원고라고요.


영화를 위해 써놓은 것들이 있어요. 장편도 있지만 단편도 많이 있거든요. 단편 써둔 것이 몇 개 있었을 거예요. 이런 영화는 시간이 되면 하면 좋겠다, 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단편을 만들려고 써둔 것들을 책으로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영화 안 만들 것 같은데, 해서 책 형식으로 썼죠. 거기에 한 장 씩 삽화처럼 그려 넣고 일단 완성을 해뒀어요. 그 원고가 몇몇 군데에 왔다 갔다 했어요. 보시다시피 얇잖아요. 좀 더 두껍게 몇 개를 묶어 내자는 제안을 당시 출판사에서 줘서 그러자고 했는데요. 잘 안 되더라고요.

 

이 자체의 완결성 때문인가요?


한 권의 책이라고 하는 것이 주는 어떤 중압감이 있었어요.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랬죠. 그것 때문에 2-3년 지나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계약했던 출판사에 계약금을 돌려줬어요. 못하겠다고 했죠. 묘한 경험이었어요. 머릿속에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라고 하는 그냥 사소한,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르는 이야기들 십여 개를 시리즈로 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한 권에 내자고 하니까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지금 출판사와 인연이 닿아서 책을 내게 됐죠. 그때도 조건을 달았어요. 한 권 분량이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딱 이 분량 밖에는 안 된다, 앞으로도 그렇다. 그래서 이렇게 내게 됐어요. 대충 서너 개 정도는 작업이 더 되어 있고요.

 

이야기 자체의 시작은 어땠나요? ‘끝말’에서 마루야마 겐지의 『천 일의 유리』를 언급하셨거든요.

『천 일의 유리』를 읽으면서 정말 탄복했어요. 천 개의 시선으로 한 개의 이야기를 짜 맞췄는데요. 전체적인 이야기는 간단해요. 어느 마을에 골프장이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개발업자, 깡패들도 오면서 마을 전체가 변하는 이야기죠. 그것을 한 쪽 씩 천 쪽을 썼어요. 그걸 보는데 야, 정말 대단하다, 만약 이런 걸 영화로 만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했죠. 시점이라는 게 있잖아요. 시선. 이를 테면 하나의 이야기를 여섯 명의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천 개의 시점 중에 시점이 될 수 없는 시점들이 너무 많았어요. 한숨, 구름, 간지러움, 그런 것들이에요. 영화가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머리가 핑 도는 거 있잖아요. 그것이 충격적으로 남아 있던 상태였죠. 그때 살던 아파트 뒤편, 매일 산책하던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그림과 똑같이 생겼어요.(웃음) 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 해봐야겠다, 해서 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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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재미있는 꼭지가 많아요. ‘아래’나, ‘어?’, ‘왕년에’ 같은 것들은 참 새로웠어요. ‘지렁이’가 좋았고요.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것도 있으세요?


즐거운 상상, 망상만 갖고 있는 상태에서 썼어요. 특별하게 기억나는 건 없는데요. 그런 게 있어요. ‘증후군’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 자기를 주인공과 일체화해요. 스스로 세상에 대해 공정하고 합리적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나쁜 사람에 이입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 좋은 편이에요.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대개는 그 드라마나 영화에 나온 주변인물에 가까워요.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에 맞아 죽는 엑스트라와 같은 거죠. 하지만 자기가 캡틴 아메리카라고 항상 생각해요.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을 해요. 당연할지도 몰라요. 어찌보면 그것이 자아의 출발점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세상이라고 하는 건 내가 있든 없든 굴러갈 거라고요. 그런 생각 자체가 흥미로웠고요. 이야기를 독점적으로, 혹은 ‘주인공 신드롬’처럼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생각들로 맞추어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여러 개의 시선이라는 게 의외로 큰 영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이런 식의 상상을 하면서 이야기 만드는 훈련을 하면 훨씬 더 자기를 포함한 주변을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늘 타인을 생각하는 삶, 공동체,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그게 뭔지 피부에 느껴지지 않거든요. 그런데 세상의 주인공은 너만이 아니란다, 지나가는 개도, 바닥도, 너의 한숨 소리도,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면 좀 다를 거예요.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되면서 생각이 독점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을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요.

 

여백이 많잖아요. 이 공간이 주는 풍성함이 있죠. 이야기 틈에 쉬는 공간이 존재함으로 해서 독자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되거든요. 바로 그곳에서 시선이 확장되는 경험을 해요.


이야기는 이래야 한다, 고 하는 것을 깨서 그럴 것 같아요. 주인공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일 수도 있고, 우연히 던져진 몇 개의 조각들이 주인공일 수도 있잖아요. 그게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고요. 여백은 아마 그걸 의도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 책은 뭘까요? 동화라고 생각하세요? 혹은 그림 소설일까요?


책이 늦게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예요.(웃음) 동화라고 해야 할까, 청소년물이라고 해야 할까, 하는 거죠. 말하자면 주소지가 없는 거였어요. 충분히 이해해요. 나도 이게 뭔지 모르니까요. 나는 내가 생각한 걸 쓴 거고 어디에 속하는지는 나중 문제니까, 이해했어요.

 

만약 영화로 모습을 갖춘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네요.


못할 것 같아요.(웃음) 하고는 싶은데요. 이런 이야기 방식 같은 것을 실험적으로 해볼 수는 있겠죠. 독립영화나 실험영화들이 사실은 영화 장르의 발전과 닿아 있잖아요. 돈이 안 드는 범위 안에서 그런 실험들을 해보면 좋을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아직도 그냥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예요.

 

시리즈를 생각하는 중이라고 하셨잖아요. 지금 많이 생각하는 시선, 단어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대여섯 개 정도가 있는데요. 어쩌면 남들이 보지 않는,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하게 생각하는, 혹은 주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시선인 것 같아요. 이를 테면 전깃줄에 새가 앉아 있는데요. 한 놈만 거꾸로 매달려 있어요. 그런데 그 녀석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잖아요? 그런 이야기죠. 아무도 모르는, 조약돌 같고, 먼지 같은 이야기들을 몽상하듯 몇 개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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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듯 없는 것


‘주인공 신드롬’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요. 이런 것에 고심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결국 보니까 별 게 없더라고요. 별 게 없다면 별 게 없는 진실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말하자면 한풀 꺾이는 시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잘난 체 하는 청춘은 잘난 체를 해야죠. 안 그러면 자신의 그 열정과 집중을 쏟아 부을 데가 없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꺾인 거죠. 하지만 그게 새로운 진실을 보게 한 것 같더라고요. 어느 순간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다음 영화 주제인데요. 없는 듯 있는 것, 그게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인터뷰도 마다했었는데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최근에 책을 한 권 읽고 있어요. 『드러내지 않기』라는 책이에요. 아마 그런 생각과 비슷한 것 같은데 지금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하겠어요.

 

책을 내고, 영화를 찍는 건 어떤 의미에서 ‘드러내기’에 가까운 행위잖아요. 그렇다면 드러내지 않는다는, 지금 말씀하신 주제와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해나가실지 궁금해지거든요.


그게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부분인데요. 책을 내는 것, 영화를 찍는 것, 인터뷰를 하는 것, 모두 드러나는 거죠. 그런데요. 있는 듯 없는 것과 이것이 모순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산으로 들어가거나 종교로 귀의한다, 그것은 단절이죠. 있는 듯 없는 게 아니라 없는 거예요. 중요한 건 있는 듯 없다는 거거든요. 있어야 하고, 없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 갖고 있는 주제예요. ‘사라져버릴 거야!’라는 표현을 적어도 살면서 십여 차례 안 써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 ‘사라진다’는 게 뭘까요? 거기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책도 원래는 안 내는 게 맞죠. 그런데 드러내지 않음은 그렇게 소극적인 건 아닌 것 같아요. 있는 듯 없는 건 좀 다른 것 같아요. 그것에 대해서는 이 인터뷰에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항목이 못 돼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어렵네요.


『드러내지 않기』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아이가 노는 모습을 엄마가 지켜봐요. 아이는 엄마가 보는 걸 몰라요. 그때 느끼는 즐거움이라는 거예요. 근데 아이가 엄마를 보는 순간 뭔가를 원하죠. 순수한 관계가 깨지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산다는 게 뭘까요. 하여간 코앞에 와 있는데 모르겠어요.(웃음) 기본적으로는 이게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닐 것 같아요. 항상 물음표만 있는 질문이죠. 지금은 그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다른 건 아예 관심도 없고,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런 감독님의 생각들이 영화가 되기까지의 구체적인 과정이 듣고 싶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이야기가 떠올라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겠다, 생각하고 그에 관계된 책들을 살펴보죠. 많이 읽진 못하고 구할 수 있는 한 일단 구해요. 그게 부자죠. 부자가 되어야 해요. 쌓아 놓고 읽으면서 메모를 시작하죠. 대사 같은 것들이요.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에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시간을 빌리는 거죠. 아까 이야기한 주제는 시나리오 단계고요. 나머지는 다 됐는데 스모킹 건이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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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꿈꾸고 있어야


영화를 위해 시작되었다가 책이 된 글이잖아요. 글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가끔 그런 얘기들이 있죠. 저는 시나리오가 영화보다 재미있다는 얘기를 가끔 듣고요.(웃음) 이 책도 그냥 읽으면 되지, 생각이 들었어요. 레제, 읽는 희곡 같은 게 그렇잖아요. 그런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시나리오 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시리즈’는 십여 권 정도 생각하는데요. 상상의 공간 같은 게 나는 좋아요. 이 시리즈가 다양한 형태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붉은 인주로 그린 그림을 전시한 ‘붉은 누드’, 돌그림을 전시한 ‘각인각색’ 등 다양한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이런 작업들을 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냥 뭐가 들어와요. 거기에 미치는 거죠. 미쳐서 하루 종일 돌만 깎고 있고 그래요. 한 번은 조각보에 미친 적이 있어요. 뭔가 있는 거죠. 하늘하늘하고, 몽환적이면서 말이에요.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꽂혔어요. 조각보를 그림으로 막 그렸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느낌이 사라져요. 표현할 길이 없는 거죠. 인간이 게으르고 모질지 않은지라(웃음) 어느 순간 아닌가보다, 하고 그만뒀어요. 저에게 ‘이게 더 낫지 않니?’는 무의미한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그걸 주장하기도 어렵고요. 내가 안 그러니까요. 불가능해요.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여러 가지 관심이 지대한 것 같아요. 나는 아무런 벽이 없고, 넘나드는 데에 아무런 선입견도 없거든요. 그래서 별 고민이 없는데요. 타인이 봤을 때 의아할 수는 있겠죠.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공상하기, 선입견 없이 몰입하기, 이런 것들이 어려운 세상이라 눈길이 가는 것 같아요.


하여간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놓치는 것도 많이 생겨요. 혼자 막 가고 있는데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거죠.

 

그런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으세요?


아쉽다기보다는 ‘어? 큰일났네?’ 싶어지죠. 하지만 ‘슈퍼마리오’가 앞으로 가다보면 먹을 것이 있듯이 뿅뿅뿅(웃음) 가는 거죠. 사실은 일정한 궤도 안에서 사는 게 정상이고, 바람직하다고 이야기를 해야 해요. 무책임하게 얘기할 수는 없죠. 그러나 최근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삶의 정도(正道)라는 게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 정도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말이죠. 깊이 생각을 해봤는데요. 무엇보다 기본 소득제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직장을 구해서 세상의 부를 축적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지만요. 일단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는 게 인권 아닌가요? 적어도 지금과 같이 삶의 패턴이나 인생의 기준이라는 게 의심되거나 붕괴된다면 기본 소득제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총선 출마 이력도 있으시잖아요. 정권도 바뀌었는데 정책 제안 욕심은 없으세요?


그런 제도적 개선에 관심이 왜 없겠어요. 물론 이런 저런 관심도 많아서 세상도 제도권 내에서 바꿔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최근 깨달은 바가 있어요. 최근에서야 정리된 생각인데요. 뭘 만드는 자는 거기 편승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것이 남의 일은 아니지만요. 만드는 사람, 자기는 길에서 꿈꾸고 있어야죠. 입장은 충분히 가질 수 있고, 주장도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의 역할과 그의 정신은 전혀 다른 거죠. 그 생각이 든 순간, 편해졌어요.

 

편해졌다면, 이전까지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는 의미인가요?


의무감도 있고요. 해야 할 것 같고 그랬죠. 잠도 안 오고요. 흔히 민주화 세대라고 하잖아요. 시대의 담론이 자기 삶의 의무가 되었던 시절을 보낸 자들이 갖고 있는 병리학적 증후군이 없다고 볼 수는 없는 거죠. 그런데 편해졌다는 건 홀가분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에요. 다르다는 거죠. 나의 영역에서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일이고, 차원이 다르다는 거예요.


촛불집회를 갔다가 선각 같은 게 왔어요. 나에게 촛불이란 영화를 찍는 것이다, 라고요. 그 전까지는 영화 찍는 것에 그리 큰 욕망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촛불집회를 가서 느낀 거죠. 영화도 찍었어요. 아무도 모르는 영화를 편집하고, 믹싱하고 있으니까요. 가을 쯤, 어디선가 보게 될 거예요. 제목은 <영화의 시작>이에요. 영화로 시작하자, 우리의 촛불은 영화다, 예요. 묘하게도 촬영 끝낸 날이 탄핵되던 날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어떤 상황의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심심한데 심심함의 거울이 뭘까를 생각하는 분들이요. 심심하다는 건 다른 걸 찾겠다는 의미겠죠.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할 때 그런 게 아닐까요. 심심한 아이들, 심심한 어른들, 심심한 청소년들에게 권해요. 그들이 한 쪽이건 두 쪽이건 관계없이 보면서 하나의 단어, 하나의 관념, 하나의 사물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심심해졌으면 좋겠어요. 심심해지고 싶은 사람이 읽어도 좋겠네요. 사소한 것 하나를 붙잡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같이 한 번 생각해보자고 권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앞으로도 이렇게 생각할 것들을 던지는 역할을 계속 하시려는 거죠?


그게 무엇을 만드는 자의 의무 아닌가요.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닌 것 같아요. 정답 없는 질문만 던지는 사람이죠. 정답 없는 질문을 계속 할 수 있는 에너지와 능력, 고민 같은 게 있는 사람들이 난 좋아요. 어차피 정답이 있는 질문은 질문이 아닌 거니까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여균동 저 | 사유
할아버지의 숲길 산책은 변함없이 계속되었고,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고 세월이 흘러 뒷숲에 사과가 열기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그가 사과나무를 심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이름도 없던 뒷숲을 할아버지의 사과나무숲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제현주 “자신의 선호를 이해하는 게 더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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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고 있자니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하고, 아무렇게나 살자니 또한 인생에서 아무것도 못 이룬 것 같아 좌절한다. 불안이 추동하는 사회에서 지식나눔 협동조합 ‘롤링다이스’는 일상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 팟캐스트 <일상기술연구소>를 시작했다. 미래는 멀리 볼수록 불안하고, 그럴수록 일상을 챙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일상기술연구소>가 필요했던 까닭은 누구도 실제로 ‘좋은 일상’을 꾸리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버는 돈은 빤한데 돈 관리는 어떻게 하지?’ ‘하루를 활기차게 보내는 데 필요한 체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나?’ 같은 뻔하지만 답하기 힘든 질문을 듣고 있자면 일상을 챙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작심삼일에서 벗어나는 ‘배움의 기술’, 직장 밖에서 내 몫의 경제생활을 꾸리는 ‘독립의 기술’ 등이 나왔다. 『일상기술연구소』는 그 연구를 종합한 출판 결과물이다.


롤링다이스 이사장이었던 제현주는 일상기술연구소의 ‘책임연구원’이다. 줄여서 ‘제책임’.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를 썼고 『경제학의 배신』,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등을 번역했다. 그 전에는 카이스트에서 디자인 경영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경영 컨설팅 업체, 투자은행, 사모펀드 운용사에서 기업 경제 및 투자 분야 전문가로 10년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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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자 섭외가 쉽지는 않아요


일상기술연구소를 처음 생각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인생’을 생각했는데, 인생은 다 살아봐야지만 알 것 같고 너무 큰 주제라는 부담이 있어서 일상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출발했어요. 그냥 노력한다거나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말보다는, 오늘을 잘 살고 만족감을 느끼는 삶을 위해 정말 작고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싶었어요. 또 학교로 이름 붙일까도 생각해봤지만, 학교는 들어온 사람이라면 배워야 하는 의무가 있잖아요. 하지만 연구소는 그냥 이런 기술이 있다는 걸 알자는 거죠. 모두가 다 그 기술을 익혀야 할 필요도 없고, 익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기술이 있다는 걸 아는 건 꼭 내 기술이 되지 않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흔히 기술을 생각하면 전문적인 지식이나 능력 등을 떠올리잖아요. 일상기술이라고 하면 독자들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기술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기보다 구체적이고 작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기술이라고 말을 붙였어요. 실제로 방송에서 기술자라고 칭하는 게스트 분들에게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뭘 하고 사는지 알려달라고 하고는 그걸 기술이라고 해요. 그럼 그분들은 ‘그게 기술이 되냐’고 하시죠. 하지만 그 사람이 일상을 잘 살아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순간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익힐 수 있는 게 되는 것 같아요.


금정연 평론가가 고문연구원, 즉 ‘금고문’으로 방송을 같이 진행했습니다.


금정연 작가님은 기술을 소개하면 ‘참 어려운 기술이네요’ 라고 말해줄 것 같아서 섭외했어요. (웃음) 방송은 저와 금고문 님, 조수석 님 셋이서 진행하는데 셋이 다 달라요. 금고문 님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단하다고 감탄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조수석 님은 쉽게 뭐든지 해보는 사람이라서 방송을 듣는 분들이 둘 중에 한 분에게는 이입하게 될 것 같았어요. 저는 정리하고 포장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다들 기술이 되냐고 하면 저는 무조건 기술이 된다고 뻔뻔하게 우기는 거죠.

 
구체적인 기술이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무엇이 구체적인지는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요.


‘구체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말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거였어요. 예를 들어 ‘일벌이기 기술’에서 일벌이기는 어떻게 보면 모호한 말이에요. 사업을 하는 사람과 프리랜서, 서점 주인의 일벌이기는 서로 다른 의미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초반에는 기술자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맥락을 구체적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두 번째는 명시적으로 어떤 걸 하면 일상에 좋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생활체육의 기술’에서 밥 한 숟갈을 덜어내라는 식으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 방법이 구체성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내일이라도 당장 해볼 수 있다는 느낌으로요.


기술자 섭외도 꽤 어려웠을 것 같아요. 일상의 숨은 고수를 찾아야 하니까요.


처음에는 뭔가 재밌는 분, 일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분을 찾고 그분을 조사해서 어떤 기술을 이야기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방식으로 접근했어요. 초반에는 궁금했던 분이 많아서 금세 섭외했는데 요새는 더욱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일상기술이 주제기 때문에 쉽지는 않아요. 아예 크고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해주실 선생님, 유명한 저자들은 많이 있지만, 일상적인 소소한 기술을 한 시간 동안 설명해주실 분을 찾는 게 어렵더라고요. 최근에는 청취자가 빨리 청소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해달라고 요청하셨는데, 그런 분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워서 항상 주변에 물어보고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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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선호를 이해하는 게 가장 우선이에요


구체적으로 기술을 질문해 볼게요. 처음 나온 기술이 ‘돈 관리 기술’이에요. ‘어디에 써야 옳은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사람들이 노후를 걱정하면서 저축을 하는데, 저축도 어떻게 보면 강박적인 소비라는 생각이 들고요.


기술자로 나온 박미정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같아요. 저축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확률 싸움이잖아요. 앞으로 노후에 아플 것인지, 질병에 걸릴 것인지,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도 다르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액수가 커지고 불안해지면서 현재의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하는 게 모든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도 환상 같은 거예요.


아무래도 돈 문제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미래는 막막하고 마음은 불안한 시대’에서 미래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돈을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가장 감동했던 독자의 소감이 있었는데, 본인이 『일상기술연구소』를 읽기 전에는 이러다가 가난하게 죽겠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는데, 요새는 ‘돈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네’ 이 정도로만 생각하게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되게 좋았어요. ‘미래는 막막하고 마음은 불안한 시대’라고 오프닝 멘트를 붙일 때 바랬던 상황이었거든요. 미래에 가난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수입은 자기가 생각한 보편적인 삶의 패턴 안에서 상상하게 되잖아요. 하지만 실제 최소한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거죠.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일상을 구상한 사람들을 보면서 절대적이고 표준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보다 보면 지금은 당장 저렇게 못 산다고 생각해도, 어떤 상황에 도달해서 그 방법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표준에서 벗어나 보이는 사람이 금욕적이거나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실 대부분의 기술자가 신나 보이는데, 그런 사례가 주는 안정감이 있어요.


‘손으로 만드는 기술’도 소개해 주셨어요. 실제로 알려준 기술을 시도해보나요?


아랑 님이 말해준 ‘손으로 하는 기술’의 핵심은 일상 속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의 중요성이었어요. 손으로 만드는 순간이 주는 해방감, 나 스스로 완전한 세계 안에 있다는 느낌이 있는 거죠. 그러면 행복을 느끼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 순간에 몰입해 있는 시간이 일상 속에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족적인 삶이 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요새는 대관령 집에서 나무에 물을 열심히 줘요. 손으로 만드는 기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수준에서는 그 정도로 시도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멍하니 물을 주면서 흙에 물이 스며들어가는 걸 보고 어제보다 변한 게 있는지 관찰해요. 그런 것들이 충족감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정리의 기술’을 소개하신 정철 선생님은 사전을 만들기도 하셨죠. 읽어보면 일반적인 정리기술보다는 강박적 축적을 겪는 사람의 생활 방법 같던데요.


제 생각에도 정리 방법 같진 않아요. (웃음) 축적에 방점이 찍힌 느낌이었죠. 오히려 자기 선호를 찾는 기술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깔끔한 정리보다는 본인이 찾을 수만 있다면 된다고 하시는데, 결국 자기가 무엇을 기준으로 찾는지 생각하는 방식이나 판단 기준을 파악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정리의 기본 개념을 확 바꿔준 느낌이었어요. 정리라고 하면 대개 깔끔하게 치우고 일목요연하게 보이는 상태를 생각하지만, 기술자의 정리는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내가 찾을 수 있게끔 구성하는 작업인 거죠. 그래서 이 정리 기술이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었어요. 


‘자신의 선호를 이해하는 기술’이 모든 기술의 핵심이라고 정리해주셨어요. 


 (기술자들이) 대부분 자기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분들은 대부분 왜 이 일을 하시냐고 물어보면 ‘해 보니까 좋더라’라고 대답해요. 나를 관찰해봤더니 나는 이런 일을 하면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는 거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면서 평균적이라거나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라이프스타일은 사회 보편의 방식이에요. 그건 내 선호와는 상관없는 거죠.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생각해볼 여지를 주지 않는 사회인 것 같아요. 자기 기준이 있지 않으면 당연히 보편이나 평균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 불안이 생겨요.


‘작고 가볍게 시작하는 기술’도 핵심 기술 중 하나였죠.


나 자신에 관한 데이터를 만들려면 뭔가 계속 시작해봐야 하잖아요. 마음 명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게 아니라, ‘이걸 해봤더니 좋았어’ 하면서 데이터를 쌓는 거죠. 나를 알기 위한 시도로 생각하면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 성공이나 실패가 있는 건 아닌 거예요. 데이터를 얻기 위한 시도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 다음 선택에 도움이 되고요. 지금 상황이 불만족스러울 때 거대하고 급진적인 전환을 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도 아니고 추천할 만한 일도 아닌 것 같아요. 거대한 전환을 한 것 같아 보이는 분들도 사실 중간과정에서 계속 시도를 했던 건데 바깥에서 보기에는 이전과 이후만 보게 되니까요. ‘함께 살기의 기술’에서도 처음에는 청소는 누가 할까, 힘들지 않을까, 질문이 끊이지 않았는데 석 달 정도는 그냥 같이 살아보면 되고, 살다 보니 좋아서 계속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시도해 보지도 않고 머릿속에 성을 쌓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롤링다이스는 ‘지식나눔 협동조합’이잖아요. 다른 분들도 롤링다이스에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다들 일하다 보면 싸우지 않냐고, 효율적으로 일이 되냐고 물어보세요. 저희도 처음부터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시작한 게 아니라 조그맣게 시작하다 보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끌고 왔거든요. 해 보니까 하게 되었다는 게 대부분의 시도에서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게 바로 기술자의 힘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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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노동 시간은 막다른 골목의 끝


내용이 젊은 세대, 비정규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의도한 청취자층이 있었나요?


기획한 사람들의 정서나 생각을 발신하면 비슷한 계층과 또래가 공명할 거라는 예상은 했어요. 방송의 기술자들이 대부분 일반적인 직장에 속해있지 않았던 이유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상에 관해 새로운 관점으로 돌아보는 기회가 직장 밖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더 많이 주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직장에 다니면 일상의 대부분이 정해지잖아요. 그러고 나면 일상 안에서 다른 시도를 하는 게 어려워요. 기술이 생기기 쉽지 않은 거죠. 기술이 있다고 한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섭외하기도 쉽지 않고요. 의도치 않게 퇴사권유 방송처럼 됐네요.

 

일상에서 불안이 덜해지는 느낌일까요?


나중에 대한 생각을 덜 하고 지금에 초점을 더 맞추게 되는 거죠. 지금 불안하다는 마음은 나중을 자꾸 생각해서 느끼는 기분이니까요.


팟캐스트에는 소개됐지만 책에 안 들어간 기술이 있어요.


책에는 ‘함께 살기의 기술’만 들어갔는데, 방송에서는 ‘혼자 살기의 기술’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재밌는 건 혼자 살기와 함께 살기에서 모두 일상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결국 독립된 개인으로 잘 사는 사람이 혼자 살든 같이 살든 잘산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어요.


‘함께 살기의 기술’ 중에 듣고 말할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직장을 다니는 분들이 일상의 기술을 찾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이 없다는 건데요.


노동시간이 길다는 건 언제나 총체적으로 갖게 되는 고민이에요. 항상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노동시간에 부딪치면 막다른 골목 같은 느낌이 들어요. 개인이 돌파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데, 그 안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시간의 블록을 만들어내고 우선순위를 만들어서 다른 가능성을 찾을 시간을 만드는 게 유일한 시도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다는 건 큰 장애물이에요. 노동시간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가 제일 큰 화두입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노동시간은 사회적인 차원의 해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상사가 늦게 퇴근한다고 꼭 같이 있으란 법은 없어요. 어떨 때는 꼭 그러라고 하지 않는데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일도 많잖아요. 하지만 모든 사람의 경우는 개별적이기 때문에 일반화해서 이렇게 하라는 말은 경솔한 말이죠. 말씀하신 그대로 사회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직장을 그만두는 것 같아요. 회사에 다니더라도 일상의 틈새를 만들어서 다른 걸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일 말고 도저히 다른 걸 할 시간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은 거죠. 회사에서도 안식 휴가를 주고 계속 놀게 해줘야 다시 회사에 다닐 힘이 생기고, 사람들도 안 그만둘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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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개별적이다


일상기술자들이 애쓰지 않는 느낌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작가님에게 그런 느낌을 받아요.


애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맞는 걸 거예요. 원래 되게 애쓰는 사람이거든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좋으니까 그런 사람들하고 자꾸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점 젖어 들면서 더 애쓰지 않게 되어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 일했던 직장에서도 내일이 불안했었나요?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좋아서 할 수 있을 만큼 평생 하겠다는 사람은 극소수잖아요. 오히려 그때가 더 불안했던 것 같아요. 금융업계 술자리에서는 늘 얼마 모으면 그만둘 거냐는 게 대화 주제였어요. 되게 서글픈 이야기죠. 저도 회사 생활을 나름 좋아했지만, 평생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면 아니었어요. 다음에는 뭐가 올까, 나는 뭘 할 수 있는 사람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컨설팅 업계에서는 큰 그림을 보지만, 회사를 나와서는 시각 자체가 미시적으로 달라졌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마지막 직장까지는 커리어 플랜이 있었어요.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계획을 세우는 게 되게 막막하더라고요. 어떤 면에서는 직장 자체도 좋아해서 그 뒤에 뭘 해야겠다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회사 다니는 동안 딴짓을 엄청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재밌어진 거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면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생기겠다는 자신감은 있었어요. 사실 내일부터 다시 회사에 출근하게 됐는데, 지금은 다시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일을 큰 덩어리로 보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기존 이력이 책을 내면서 계속 따라다니는데,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부담스럽다기보다, 전형적인 방식으로 조명될 수 있다는 걱정은 들어요. 금융업에서 돈 잘 벌다가 갑자기 엄청난 회의를 느껴서 직장을 그만둔다는 이야기는 되게 게으른 각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큰 전환은 맞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냐고 물으면 그런 건 없었어요. 기존에 했던 일들이 저한테는 또 중요한 맥락이에요. 그 덕을 크게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첫 번역 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력 때문이고 여전히 회사 이름이 많은 혜택을 준다는 걸 늘 인식해요. 그래서 제 경우도 많은 사례 중에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맥락이 중요한 게, 모든 사람은 개별적이기 때문에 일반화된 양식으로 이야기하면 잘못된 메시지가 될까 봐서요.


계속 번역과 출판을 하면서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는 것 같아요. 일이나 경제, 저성장 등을 주로 다루시는데요.


일단 ‘일’이 중요한 키워드예요. 양가감정이 있는데, 저는 일하는 걸 되게 좋아하고 뭐든지 다 일로 만드는 사람이거든요.


…굉장히 개별화된 사례네요. (웃음)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제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남편이 출근하면서 ‘오늘 잘 놀아’ 하면서 집을 나서는 거예요. 언젠가 발끈해서 ‘나 일 되게 많아’ 그랬더니 남편이 하기 싫은 일 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그건 또 아니고… (웃음) 과연 일이라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을 늘 가졌어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 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노동이라고 말하는 방식의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고 싶은 건 또 아니거든요.


또 하나의 키워드로는 ‘유능감’이 있어요. 유능하다는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것 같아요. 누가 나를 평가해서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나 스스로 유능함을 느낄 때요. 유능함은 꼭 외부적인 준거나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제일 먼저 느끼는 감각이거든요. 어제 할 수 없었던 걸 오늘 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절대적으로 기분 좋은 일이에요. 팟캐스트를 할 때도 처음에는 엄청 떨고 버벅거리다 어느 순간 평온해졌을 때 느껴지는 감각, 이전보다 불편하고 겁나는 환경이 적어지는 것도 유능함이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롤링다이스에서 진행했던 <여성의 일, 새로고침>도 인상 깊었어요.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일하는데 중요할 것 같아요.


회사 다닐 때에는 제가 여자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면서 살지 않았어요. 항상 남자들이 많은 환경에서 일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했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게 편하고, 처음부터 외국계 회사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본능적으로 한국계 회사에서 어떤 차별적인 상황이 있으리라는 걸 알았던 거죠. 작년에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 일어나고 차별적 상황을 피해올 수 있었다고 해서 차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이 나이쯤 됐으면 책임 회피라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지금도 말을 하거나 행동할 때 인식한 수준 안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요소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일해요. 주변에 예전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있기 때문에 지지와 공감을 얻기도 했고요.


세대나 나이듦도 키워드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주제의식까지는 아니지만, 이제는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됐다는 생각은 하죠.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남 탓을 하기는 어렵게 됐어요.


최근 여든의 여성 노동경제학자가 쓴 회고록 『Sharing the world』를 번역하셨다고요.


그 책을 번역하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으로서의 각성과 연결되어 있어요. <여성의 일, 새로고침> 행사에 첫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가 왔는데, 회사에 다닐 때는 한번도 나눠보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공감을 나누게 되면서 나중에 그 책을 저에게 보내줬거든요. 저자도 처음부터 페미니스트였다든가 남녀는 평등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 아니었는데, 계속 살다 보니 차별에 부딪히면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의식을 자기 연구에 접목시킨 거죠. 저 역시 그 과정 안에 있는 사람이고, 여든이 되어 돌아본 삶에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요.


요새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대관령에서 살면서 오전에 일어나 일을 하다가 서너시쯤 점심 해 먹고 놀다 여덟시쯤 책을 읽고 자는 생활이었는데, 이제 다른 일정이 생기겠죠. 꾸준히 번역을 틈틈이 하면서 책도 쓰려고요. <일상기술연구소> 팟캐스트도 계속 할 예정이에요.


 

 

일상기술 연구소제현주, 금정연 공저 | 어크로스
『일상기술 연구소』는 내일은 막막하고 마음은 불안한 시대에 좋은 일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팟캐스트 ‘일상기술 연구소’의 해법을 모은 책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오영욱 “영화 같은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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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좋을까?” 싶은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무작정 읽어도 좋겠지만 약간의 엉뚱한 생각을 하고 보면, 더 좋을 책. ‘오기사’ 오영욱의 『변덕주의자들의 도시』를 보고 든 생각이다. 이 책은 오영욱이 지난 20년간 위대한 생각이 담긴 도시들을 찾아다녔던 경험으로 서울 이태원의 녹사평 언덕 위에 ‘우연한 빌딩’을 지은 기록이다. “참 많은 변덕을 부리며 살아왔다”고 말하는 작가 오영욱. 그가 정의한 변덕주의(Capricism)은 “세상에는 정답이 없음을 전제로 무수한 답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과거에 피웠던 고집을 정당화하고 현재의 삶을 미완성형이 지속되는 상태로 보려는 경향”이다.

 

서울시 용산구 녹사평대로40나길 39. 이 곳에 오영욱이 지은 ‘우연한 빌딩’이 있다. 1,2층은 임대를 주었고 3,4,5층에 그의 건축사무소가 있다. 재밌는 건 1층이 8.9평, 2층이 12.8평, 3층이 13.9평이라는 사실이다.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이 그림 같은 빌딩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015년 9월 공사를 시작해 딱 1년이 지나 완공된 ‘우연한 빌딩’. 『변덕주의자들의 도시』는 1년의 시간을 골조로 20여년간 오영욱의 건축적 자세를 담은 하나의 건축물이다. 2014년 『인생의 지도』를 펴낸 후, 3년 만에 책을 쓴 오영욱을 우연한 빌딩에서 만났다. 시큰둥하기가 어려워지는 이 공간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즐거운 인생인가?’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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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훌륭하지 않은 사람의 자서전


가제가 ‘실패의 기록’이었다고요. 꽤 멋진 제목이었는데요.

 

(웃음) 건축 일을 시작한 지 벌써 20여 년이 됐어요. 그간의 기록을 모으면 성공보단 실패가 많겠죠. 이 책은 결국 꿈이 연착륙하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꿈을 꾼다고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마음 같이 잘 안 되고요. 1만 명이 꿈을 꾼다면, 1명 정도가 돋보이는 일을 했을 텐데. 그렇다고 9천 9백여 명의 삶이 잘못된 건 아니니까요. 제각각의 삶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하나도 훌륭하지 않은 사람의 자서전일지도 몰라요. 꼭 성공담을 읽어야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누군가의 실패의 기록을 통해 자기 삶을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았어요. 1996년 어지러운 간판으로 가득한 신촌 거리에 세워지는 상가 설계 프로젝트부터 시작해, 가장 최근에 지은 ‘우연한 빌딩’까지요.

 

건축을 보는 여러 시선도 곁들였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만 하면 재미가 덜할지 모르니까요. 지식적인 부분은 아니지만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부분을 넣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건축을 해온 생각들을 정리했어요.

 

‘우연한 빌딩’을 짓고 친한 친구로부터 “딱 너 같다”는 평가를 들으셨더라고요.


빌딩을 오픈하고 옥상에서 작은 파티를 했어요.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알죠. 작은 것 하나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고민했을지. 고생했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은 것 같아요.

 

우연한 빌딩에 들어서면서 느낀 감정은 “앗, 재밌다”예요.

 

그림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잠깐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10초라도 전경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공간, 이 건물은 사실 조각이에요. 건물은 1층 임대료가 가장 비싸기 때문에 1층을 크게 짓는 게 보통인데, 우연한 빌딩은 윗층으로 갈수록 더 넓어요. 차도로부터도 멀찍이 떨어져있고, 건물과 길 사이에 있는 배수구에는 재밌는 글자를 적었어요. 건물에 꼭 들어서지 않아도 보고 재밌어 할 수 있는 모습을 넣고 싶었어요.

 
책에 이렇게 쓰셨어요. “나처럼 변덕스러운 클라이언트는 처음이다.” 특히 어떤 부분에서 변덕이 가장 심했나요?

너무 많아요. (웃음) 모든 요소가 대여섯 번 이상의 변덕을 거쳤을 거예요. 창문부터 시작해서 바닥까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기본적인 형태부터 간단하지 않았어요. 일단 건축법을 지키면서 구불구불한 건물을 지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이런 건물을 짓겠다고 이 땅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이 장소가 좋아서 건물을 짓게 된 거라서요. 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경제적인 건물은 어떤 형태일까, 그 고민을 가장 많이 했어요.
 
클라이언트들 중에 가장 힘든 상대는 어떤 경우인가요?

 

가장 쉬운 답으로는 소통 의지가 없는 분들이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건물을 한 번 지어봤거나, 또는 건축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예요. 제가 약간 알려진 사람이니까 대중적인 제 이미지를 이용하려는 분들이 간혹 있어요. 조금 나쁘게 상대해도 다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힘들죠.
 
지금 주로 하고 있는 작업은요?


큰 프로젝트는 없어요. 자체적으로는 안식년인데요. 10년 동안 일한 후에는 1년 정도는 조금 쉬엄쉬엄 하려고 해요. 책도 그래서 묶은 거고요. 어쨌든 공간과 관련한 일을 할 때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돼요. 20년간 고마운 인연이 참 많았는데, 그분들이 사소한 것들을 부탁하시면 해결해드리기도 하고 그래요.
 
책의 편집 디자인을 북디자이너가 아닌, 건축사무소 디자이너가 담당하셨다고요. 프롤로그부터 시작해 꽤 독특합니다.


영화 같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책은 종이를 물리적으로 넘겨야 하기 때문에 영상미를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 속성이라도 넣어보려고 했어요. 프롤로그를 보면, 문단을 나누지 않았어요. 목차의 제목만 약간 큰 글씨로 넣었고, 다음 장인 목차를 보면 제목만 또렷하게 보여요. 페이드 아웃(fade-out) 같은 효과를 상상하면서 디자인했죠. 암전이 됐다가 크레딧이 나오고 인트로가 시작되는 영화처럼, 책을 펼쳐도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변덕주의자들의 도시』의 독자를 셋으로 나눠 표현하셨어요. 첫째, 건축이나 디자인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 둘째, 미래의 클라이언트. 셋째, 이미 세상의 소소한 재미를 알고 그것을 기꺼이 삶의 중요한 이유로 삼고 사는 사람들.  제 생각에는 마지막 독자층이 가장 넓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그렇게 되고 싶어요.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게, 맞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 했거든요. 소소한 재미를 아는 분들이 이미 많겠지만, 앞으로 더 많아지면 좋지 않을까요? 세상이 더 재밌고 즐거우려면요.
 
 
‘오기사’라는 별칭으로 이미 유명한 여행작가, 건축작가이신데. 결혼 후 ‘엄지원의 남편’이라는 타이틀이 커졌잖아요. 어떠세요?


전혀 상관 없어요. 누가 어떻게 부르든지요. 제가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콤플렉스라고까지 할 수 있는 ‘말하기’에 관한 문제도 있어요. 책은 제게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방식이거든요. 건축을 포함해 여러 활동을 하면서, 무대 앞에 서는 두려움이 계속 있었어요. 그러다 언젠가 정신과의사인 클라이언트를 만났어요. “아직도 무대에 서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세상의 모든 무대 공포증의 원인은 실제 자신보다 더 멋있게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이 말이 정말 정답이더라고요. 물론 답을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요. 내가 가진 모습을 온전히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물론 때때로 자존감이 사라질 때가 있지만 마음속의 원칙은 잡혔어요. 엄지원의 남편이 됐든, 입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든, 이 사람의 디자인은 잘 모르겠다는 평가를 듣든, 상관 없어요.
 
165쪽을 보면 “성공의 유일한 조건은 비굴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어요. 언제 떠오른 문장인가요?

비행기 안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평소 글을 빨리 쓰는 편인데 비행기 안에서 잘 써요. 어떤 멋있는 말을 굳이 생각하다가 나온 게 아니라, 그냥 솔직한 제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이 좋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냥 그렇게 살고 싶은 거죠.
 
‘낭만의 결여’라는 표현도 기억에 남는데요. 건축가에게 ‘낭만’은 어느 정도 있는 게 적합할까요?

 

앗,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선 개인적인 낭만은 최대치가 좋겠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에는 적절히 공유할 수 있는 낭만의 수치를 정해야겠죠? 답이 어렵네요. 패스요. (웃음)
 
“걷기 좋은 환경이 이뤄지면 알아서 좋은 것이 생긴다.” 이 문장도 기억에 남아요. 사람들이 공간에 관한 생각을 깊게 안 하는 것 같이 보여도, 잔디광장이 생기면 정말 벌떼처럼 몰려든단 말이에요. 자연과 친밀한 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요.

 

어떤 도시에 갔을 때, ‘공간이 이렇게 나를 바꿀 수 있구나’를 실감할 때가 있어요. 몇 백 년이 된 고풍스러운 건축물을 볼 때 우리는 기꺼이 몇 시간을 걷기도 하지만, 항상 무언가를 보기 위해 걷는 건 아니잖아요.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면 사람들이 행복한가? 편안한가?’라는 물음에 쉽게 답을 하긴 어렵지만요. 어쨌든 함께 나누고자 한다면 평등해야 합니다. 차가 많은 거리는 걸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힘든 공간이죠.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몸, 가장 기본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걷기’와 친화된 환경이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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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사고, 무뎌지질 않기를
 
요즘도 여행은 자주 다니시나요?

1년에 한 두 달 이상은 해외로 나가는 것 같아요. 출장을 겸해서 갈 때도 있고요. 최근에 다녀온 곳은 중국인데, 호사스럽지만 『중국인은 왜 시끄러운가』프롤로그를 쓰러 갔어요. 중국은 충분히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고요.
 
세계여행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잖아요. 증가세는 당연한 일인데, 직장을 관두고 떠나는 사람이 대다수란 말이죠. 우리나라 직장인의 특수한 상황인데요. 작가님은 2003년 돌연 사표를 던지고 15개월간 15개국을 여행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죠. 만약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직장 생활만 계속 했다면 어땠을까요?

글쎄요. 오랫동안 여행을 한 일은 제 인생에서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지만, 특별히 더 소중했다고 여기진 않아요. 결과론적으로는 덕분에 제가 여행작가가 되었지만. 인생을 조금 더 관대하게 바라본다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다 의미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선택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왠지 한 두 가지로 꼽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웃음)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선택이 없어요. 그런데 이건 사람의 성향 문제이긴 해요. 저는 여행지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다, 어떤 책이 좋았다, 같은 답변을 잘 못해요. 안 좋았던 것을 빼고는 각각의 의미로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최근 tvN <우리들의 인생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셨더라고요. 어떤 비결을 알려주셨나요?

영덕에서 촬영을 한다고 하길래 놀러 가는 마음으로 갔거든요. 사실 누구한테 어떻게 글을 쓰라고 말했던 적이 없었어요. 방송이니까 괜히 이상한 이야기를 해서 욕을 먹진 않을까 잠깐 고민했는데, 솔직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왔어요. 글쓰기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돈을 벌기 위한 글쓰기’와 ‘돈을 벌 필요가 없는 글쓰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전자의 경우는 글쓰기의 원칙이 있을 수 있지만, 후자라면 마음 편히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비결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방식을 찾아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내에게 청혼하기 위해 만든 책 『청혼』의 부제가 ‘너를 위해서라면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겠어’였잖아요. 어떠세요? 주말에 일 안 하세요?

거의 안 한다고 볼 수 있어요. 최근 3년 동안 가장 큰 변화는 강아지(비키)를 입양한 일이에요. 예전에는 하루 15시간 이상을 건축 일에 쏟았거든요. 친구들과 술을 마셔도 늘 건축 이야기만 했고요. 결혼 전에는 골방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아내도 있고 집이 넓어져, 집안일도 많아졌어요. 7시간 정도는 가정, 아내와 비키와 살아가는 일에 투자하는 것 같아요. 15시간에서 7시간을 빼면 제가 건축 일에 집중하는 시간은 8시간 정도인 것 같아요. 아마 위대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더 투자해서 훌륭한 일을 하겠지만, 저에게 더 중요한 일을 따져보니 아내, 강아지와의 시간을 포기하기 어렵더라고요. 우연한 빌딩을 짓게 된 것도 여유 있게 가는 게 맞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거고요.
 
건축작가로서 꿈이 있다면요.

이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는데 웃긴 건축, 웃게 만드는 건축을 하고 싶은 막연한 희망이 있어요. 제가 우연히 건축과를 선택한 후 유럽 답사를 갔는데, 프랑스에서 '르 꼬르뷔제'가 지은 수도원을 보고 무척 감동했어요. 거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수도원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울 것 같았어요. 물론 건축을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에서 감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멋있는 건축을 하겠다는 마음보다는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작은 요소를 만들고 싶어요.
 
한 달 간격으로 새 책이 또 나왔어요. 올해 세 권을 쓰시는 게 목표라고요.

『변덕주의자들의 도시』도, 『중국인은 왜 시끄러운가』도 정말 신나서 썼어요. 세상을 전복 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생각 같은 건 없지만, 10도 정도 곁가지로 벗어난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책들이에요.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어’라고 말하는 느낌이죠. 올해 말에는 반려견 ‘비키’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올 예정인데 이 책도 신나게 쓰고 있어요. 짧은 글과 만화, 사진들이 들어갈 것 같아요.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는 스타일이라고 하셨는데요. 우연한 빌딩도 장소가 좋아서 무작정 계약했던 거고요. 나이가 들면 어느 정도는 현실 감각이 생겨 달라질 수도 있을 텐데, 앞으로의 삶에서는 변화가 없을까요?

‘대책 없이’라는 말이 아주 순수한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저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이거 저질러야지’ 하는 순간, ‘이걸 어떡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거든요. 어릴 때 저지르는 사고와 지금 저지르는 사고는 좀 다른 거죠. 다만 제 소망은 이런 대책 없는 사고가 너무 없어지진 않았으면 해요. 어느 정도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 감당도 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변덕주의자들의 도시오영욱(오기사) 저 | 페이퍼스토리
건축설계를 전공한 작가 오영욱이 지난 20년 동안 만난, 세상을 바꿔온 위대한 생각들과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던 여정의 기록. 부제 ‘흔들리는 마음에 대처하는 건축적 자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수없이 많은 흔들림과 변덕, 좌절 속에서 자신만의 꿈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정명 “1987년은 2017년을 비추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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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인물 최민석은 운동권의 실세로 지목된,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신출귀몰한 사람이다. 신문 사회면에 그에 관한 기사가 실리고, 술자리에서 영웅으로 회자되면서 정보 당국은 최민석을 잡아들이기 위해 특별팀을 꾸린다. 팀장으로 발탁된 김기준은 젊은 연극 연출가인 이태주가 최민석이라 확신하고 그의 인생을 조종하면서 궁지에 몰아넣는다.


『선한 이웃』은 등장인물의 시점으로 격동의 시대인 1980년대를 돌아본다. 소설 속에서는 정보기관 공작원도, 무고하게 잡혀 들어가는 예술가도 ‘관리자’로 대표되는 권력 앞에서 장기판에 놓인 말처럼 이용당할 뿐이다. 과연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바람의 화원』, 『뿌리 깊은 나무』등의 전작에서 주로 역사적 배경으로 매력적인 이야기를 선보인 이정명 작가는 『선한 이웃』을 통해 1987년 직선제 전후 30년간 ‘정의’와 ‘선’이 정권에 의해 흐려지고 뒤바뀌는 과정을 묵직하게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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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그 분이 아닙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연극이 소재로 많이 나왔어요.

 

이제까지 제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행동과 그 행동을 추동하는 다른 하나의 매개체가 있는데, 『뿌리 깊은 나무』는 한글과 언어, 『바람의 화원』은 그림, 『별을 스치는 바람』은 시였죠. 연극은 80년대를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개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음악이나 철학, 역사 등 각 분야의 지식인들이 실질적으로 연극 무대를 통해 정권을 비판하고 현실을 풍자하면서 정권 쪽에서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심했기 때문에 연극판을 하나의 배경으로 삼으면 그 당시 사회에서 예술을 검열하고 압박하는 분위기를 더 절실하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 대학을 다닐 때 연극을 하신 적이 있나요?


직접적인 상관은 없었지만, 그 사건에 직접 가담하거나 연루되는 것과는 별개로 심정적으로 그 사건 혹은 인물에게 얼마나 동정심을 느끼는가가 더 그 사건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사건이나 그 이후 여러 사건에 내가 관련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어떤 식으로든 동시대의 사건을 겪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관련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제까지 소설에서 이야기나 재미가 중시되었다면 이번에는 주제나 메시지가 조금 더 나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80년대 이야기를 하면서 주제의식을 얕게 짚고 넘어갈 수는 없었어요. 이전의 조선 시대라든가 하는 배경에서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80년대 사건은 아직 우리 삶을 규정하기도 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를 우리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주가 ‘관객이 무엇을 좋아할 건가가 아니라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 건가’(37쪽)가 중요하다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작가가 한 말이 아닐까 싶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그런 대사가 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겠죠. 책을 쓰면서도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반전이 있는 소설입니다. 인물의 순서가 중요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기보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할지가 더 집중했던 부분이었습니다. 형식적으로 각각 인물의 눈으로 상황을 제시하고 그 인물들이 결국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큰 사건을 일으키게 되죠. 그 사건에서 다시 각각의 결론으로 도달하고요. 개념적으로 모래시계 형상을 생각했었어요. 각각의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다양하게 그 시대를 보여주는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과 ‘악’이 주요 모티프이기도 합니다. 선한 이웃일지라도 악한 일을 한다는 문제의식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나요?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사건 자체의 내용이라든가 그 사건의 법적인 판결보다는 항소 이유서에서 꿈많은 소년이 결국은 폭력배가 되어 법정에 서 있다는 구절이 귀에 걸렸다고 해야 할까요? 한 개인의 도덕적인 양심과 그 개인을 둘러싼 국가 또는 체제, 사회 전체가 지향하는 이상이 각각 괴리될 때, 개인의 선한 의도가 결국에는 권력과 결부되면서 선하지 못한 방향으로 왜곡되는 일들이 매우 많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경우를 흔히들 보고 있죠.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청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중

 

범죄자들이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고 결과적으로 잘못되어서 교도소에 왔다는 장면을 흔히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할 때 그 사람이 한 행위와 그 사람의 행위로 낳은 결과로 판단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선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변명 혹은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보통 사람으로 사는 개인의 선택이 권력과 결부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경각심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소설을 읽으면 떠오르는 실제 인물들이 있게 되잖아요.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항소 이유서도 유시민 씨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실제 인물을 겹쳐서 그리게 되는 부담감은 없으셨나요?


소설은 소설로 받아들여져야 하고 또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부담은 느끼지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소설 때문에 피해가 있다면 그런 부분에서는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주인공은 그분이 아니라고(웃음) 정확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항소이유서에는 전적으로 공감했는데, 불의한 권력이 개인의 도덕적 양심을 악으로 왜곡시켜서 전과자로 만든 상황이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개인을 탓할 것만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통해서 불의한 시스템 자체를 개선하고 제거해나가는 게 제대로 된 방법인 것 같아요. 『선한 이웃』이라는 제목도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죠. 개인의 선한 의도가 정의로운 사회와 부합하면서 선함이 선함으로 계속 지켜져 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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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이 2017년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인용문으로 소설이 시작합니다. 책을 관통하는 내용으로 봐도 될까요?


원고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넣은 구절인데요, 내용과는 상관없이 권력과 개인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서 넣었습니다. 적합하다고 생각한 첫 번째 이유로는 제가 쓴 이야기가 결국 개인과 권력의 마찰 또는 관계에서 개인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시민들이 권력의 억압을 견디지 못할 때까지는 견디는 것들이 어느 정도는 체질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1987년에 직선제를 획득하고도 민주주의의 질적 완성을 가져오지 못한 하나의 이유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항상 주의하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민의식이 계속 가동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이청준 선생께는 죄송스럽지만 그런 부분과 가장 부합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독자들께서 꼭 한 번 곱씹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었죠.

 

“…그 지배자가 최초에는 아무리 성실한 인간성과 선의의 명분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갇힌 인간의 무리가 아무리 그들의 지배자를 바로 경계한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다 함께 그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에 대한 깊은 각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다스리는 자는 결국 그의 무리를 일방적으로 조작해나가게 마련이며,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 또한 다스리는 자의 뜻을 재빨리 수락하고 그것에 봉사해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처음에는 ‘대통령 후보가 된 비밀 정보원’이란 소재로 집필을 시작하셨다고요. 초고에서도 선과 악에 관한 주제의식이 있었나요?


전반적인 주제는 비슷했지만, 처음 구상 단계에서는 조금 더 플롯의 전개에 충실하게 무게를 둔 방식으로 써나가려고 했고, 초고 단계에서는 주인공들의 물고 물리는 관계가 빠르게 진행하는 장면이 많았었죠. 이후 수정하는 과정에서 연극적인 요소가 강조되고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소설이 되었습니다.


‘1987년 6월이라는 시점이 2017년 6월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썼습니다.


처음 소설을 구상한 건 2012년 대선 전후 시기쯤이었던 것 같아요. 한 번 더 대통령이 바뀌면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획득했다고 하는 6월 항쟁에서 30년이 되는 시점이었죠. 30년이 한 세대를 상징한다고 봤어요. 한 세대가 넘어가는 동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어떤 방향으로 왔는지 생각해 보고 싶었고, 저 스스로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나아갈지 생각하는 계기로 삼고 싶었어요.


2012년부터 쓴 소설이었으면 꽤 오랫동안 집필하신 셈이에요. 세월호 사건 이후 원고 수정이 중단되기도 했다고요.


저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대한민국 전 국민이 거의 탈진상태에 마비 상태였어요. 넋을 잃고 거의 1년, 길게는 2년이 지나간 상황에서 저 자신도 역시나 쓴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상태로 보낸 거죠. 그 이후 작업이 더뎌지고 아예 작업을 중단했던 상황까지 갔었어요.


다른 문인들도 거의 그런 상황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세월호 이후 글쓰기가 달라졌다고 하는 분도 있었어요.


저도 이번 원고를 수정 과정에서 보충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이야기 자체로 나가기보다 생각할 수 있는 부분에 조금 더 무게중심을 두고 개고 작업을 했습니다.


수정은 어느 정도나 하셨나요?


작품마다 다를 것 같아요. 이 작품은 거의 1년 가까이 하지 않았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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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에 숨은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전작을 보면서 ‘소재가 다양한 소설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류 백제부터 시작해서 서양의 살인 사건을 다루기도 하고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싶다는 마음인가요, 혹은 다양한 주제를 다뤄야 한다는 당위인가요?


소재 자체를 탐닉하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아마도 기록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해요. 주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다 보니 역사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역사가 아니라 기록된 기록인 거죠. 지금 기자님도 제가 드린 말씀을 일일이 쓰지 않고 일정 부분은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삭제되기도 하고 관점이 삽입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기록은 모든 걸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록된 것보다는 기록되지 않은 이면의 이야기, 행간에 숨은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특히 역사에서 빈 부분을 호기심 또는 상상으로 채우는 과정 때문에 제가 역사 소설을 많이 쓰게 된 것 같아요.


역사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역사가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네요.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윤동주 시인에 관해 여러 가지로 취재한 내용과 판결문 등 꽤 많은 자료가 나와 있어요. 하지만 형무소로 체포되고 난 뒤에는 기록이 다 말소됐거든요. 그 비어 있는 부분이 오히려 저한테는 상상력을 펼치는 공간이 되었던 것이죠.


『선한 이웃』띠지에 ‘가장 한국적으로 압도적인 서사’라는 홍보 문구가 들어갔어요. 부담스럽진 않으셨나요? (웃음)


출판사에서 이렇게 써주셨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웃음)


왜 ‘한국적인 서사’일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의 거시적인 역사적 상황을 소재로 쓰시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거든요. 역사를 크게 보는 것도 어떻게 보면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아 보여서 그런 걸까요?


주로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안다고 해도 될 만한 이야기를 많이 그리는데요. 어떤 시대를 쓸 것인가, 어떤 시대의 어떤 인물을 쓸 것인가 보다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지 더 고민하는 편이에요. 세종을 다루면 사실 쓸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죠. 하지만 그 인물과 시대를 이제까지 바라봤던 관점과 다르게 봤을 때 그 상황과 인물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소재를 채용하는 데 제 나름대로 기준이 될 것 같아요. 물론 그 사람의 이면이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할지라도 이제까지 나온 기록에 근거해 개연성 있는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다면 그걸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게 흥미로워요.


이제까지 소설을 낸 걸 보면 1,2년에 한 권씩은 꼬박꼬박 나오고 있어요.


출판사에서는 저보고 과작이라고(웃음) 더 빨리 쓰라고 그러시는걸요. 이번 책은 제가 생각해도 중간에 작업을 중단한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꽤 시간이 걸린 편이었어요. 더 분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요새 생각하는 소재는 무엇인가요?


여러 소재를 두고 생각하는데, 소재가 작품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소재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방안이 서야 집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만 본다면 소재만 많은 셈이죠.


자료를 선택하는 방식이나 축적하는 방식, 작품을 발표하는 시기를 보면서 소설가라는 직업에 성실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직장인으로 10년, 15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인지 직장인의 생활 양식에 충실한 편이에요. 9시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사무실에서 일하고 6시가 되면 또 내일을 위해서 퇴근하는 게 저한테는 제일 편하더라고요.


직장을 다닐 때는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 소설을 쓰셨는데, 소설을 쓰는 일이 업이 되면서부터는 저녁에 다른 취미가 생겼나요?


주로 운동을 많이 해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러워지더라고요. 글을 열심히 쓰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하는 셈이죠.


직업 정신이 투철하시네요.


정신만 투철하고요. (웃음) 게으름도 사실 많이 피웁니다. 일이라는 게 하겠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 시간만큼은 충실히 하려고 노력하죠.


소설을 쓰기 전에는 기자 생활을 오래 하셨죠. 인터뷰를 하는 입장에서 받는 입장으로 바뀐 지 꽤 오래됐는데, 인터뷰이로서 많이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인터뷰 초기에는 새삼스레 무슨 이야기를 할 게 있나 생각하고 제 자리 같지 않았거든요. ‘웬만한 건 책 내용을 통해서 독자분들이 아시겠지’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간간히 독자들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의외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궁금증, 아니면 만나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또 있더라고요. 책만 불쑥 내놓고 알아서 읽으라고 하는 게 어떻게 보면 무심하고 불친절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최소한 어떤 부분이라도 보충해서 말씀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번역본도 많이 나왔다고 들었어요.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보면 기분이 어떤가요?


제 책 같지는 않지만 먼 친척뻘 정도 되는 느낌이에요. 직접 모국어로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감은 있지만, 나와 아주 가느다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약간의 감정이 생기죠. 먼 친척을 오랜만에 보는 감정이 들더라고요.


여러 책을 내셨는데, 독자에게 특히 사랑받거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못 받아서 안타깝거나 하는 책이 있나요?


모든 소설은 저한테는 소중하죠. 독자분들이 사랑해 주시느냐와는 별개로 그 시점에서 제가 쓸 이유가 있었고 또 썼기 때문에 모든 소설이 다 비슷한 비중으로 소중합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소설 자체에서 놓치고 지나간 부분, 혹은 과했던 부분이 나중에 발견되었을 때일까요. 그런 부분이 아쉬울 뿐이에요.


 

 

선한 이웃이정명 저 | 은행나무
선보이는 작품마다 마니아를 양산하며 대중을 끊임없이 매료시켜왔던 작가 이정명이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장편소설 『선한 이웃』이 출간되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정보기관 공작원과 권력의 타깃이 된 연극 연출가 간의 대립을 담은 『선한 이웃』은 생존을 위해 악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이 사회의 주변인들이 겪는 고뇌, 갈등 그리고 최후의 선택을 그린 작품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장르소설 작가 특집] 차무진 “한국적 소재로 한국적인 장르소설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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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내용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을 쫓아가는 미스터리 장편 『김유신의 머리일까?』로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였던 차무진 작가. 그의 두 번째 장편 『해인』은 세상을 구원할 단 한 명의 메시아, ‘아기장수’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이야기다. 아기장수를 낳을 운명인 ‘성모(숙지)’, 성모를 지키는 불사의 존재 ‘박마’, 다른 목적을 위해 ‘해인’을 훔치려는 ‘정만인’과 역사적 사실들이 절묘하게 하나를 이룬다. 이순신이 ‘박마’였다는 설정, 이성계가 쭉정이 아기장수라는 설정과 윤심덕이 ‘성모’라는 이야기의 다양한 설정은 묘한 몰입감을 준다. 시간을 넘나들며 모습을 바꾸는 인물들과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이 숨가쁘다. 후반부를 지배하는 진실의 반전은 독자로 하여금 재차 책을 다시 들춰보게 한다.


차무진 작가는 일본이 고전이나 괴담을 적극적으로 변용해 즐기는 것처럼 우리의 고전이 좀 더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에 담겨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고전이 될 수도, 밴드 ‘들국화’나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집필 중인 작품은 종말이 온 세상에 아버지와 아들이 서울에서 유일하게 청정지역이라고 알려진 대구로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한국적인 이야기, 차무진 작가가 생각하는 장르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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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멋진 소재가 많다


2014년 ‘창비장편소설상’ 최종심에 올랐던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출간까지의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2012년에 끝낸 작품이에요. 첫 책 『김유신의 머리일까?』를 쓰고 회사를 그만 뒀어요. 습작하던 중에 스토리가 나왔는데요. 원래는 이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그때는 ‘메시아’ 이야기였죠. 그런데 메시아 이후가 고민이 되더라고요. 메시아 주변의 인물들로 시선을 조금 바꿨고, 이 이야기로 끝낸 게 2014년 정도였어요. 대통령보다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더 할 말이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웃음) 창비장편소설상 최종심에 올랐을 당시 심사평이 대부분 사회적 의식이 결여되었다, 는 혹독한(웃음) 평이었어요.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중 정세랑 작가님의 평이 조금 달랐는데요.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고무적이었어요. 그러다 엘릭시르 출판사와 계약을 해서 이제 나오게 된 거예요.

 

많이 기다리셨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첫 책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책에도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입장에서는 지난했던 시간이 좀 있었고요. 어쨌든 책이 나왔으니, 자기 삶을 잘 살겠죠. 

 

소재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어요.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와 현재까지 아우르고 있는 작품이거든요. 전작에서도 그랬고, 무엇보다 소재가 눈길이 가요. 이른바 ‘한국적인 소재’인데요. 이런 재료가 작가님에게 어떤 매력을 주나요?


작가가 소재를 찾고, 이런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게 전적으로 우연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건 제가 이 분야에 자신이 있어서 그랬을 거고요. 역사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잘 다룰 수 있는 부분을 저도 모르게 선택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적인 소재라는 말에 의문이 있어요. 지금 구상하는 작품 중 밴드 ‘들국화’에 관한 것도 있거든요. 그것도 충분히 한국적인 소재죠. 꼭 『삼국유사』나 조선 시대의 사극 같은 것들만 한국적인 소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요. 한편으로는 이런 소재를 계속 고집하겠다는 생각도 있는데요. 과거 이런 것을 조금 기피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본의 경우 자기 나라 괴담들을 작품에 굉장히 많이 차용하고 즐기잖아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 『금오신화』나 이런 것들이 그냥 전래동화처럼 치부된 것 같아요. 예전에 『삼국유사』를 봤을 때 딱 생각이 바뀌었죠. 우리나라에 굉장히 멋진 소재가 많구나, 하고요. 사라진 책들이 아쉬울 뿐이고요.

 

일본에 비해 한국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즐기지 않았던 게 어떤 이유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하세요?

예를 들어 일본에 ‘요츠야(四谷) 괴담’이라고 있어요. 사위가 장인을 죽이고 아내의 얼굴을 상하게 하는, 그런 유령 이야기예요. 그게 다른 작품으로 전환될 때 사람들은 그게 요츠야 괴담인 걸 모르죠. 구조만 살짝 가져와서 드라마도 만들고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그런 작업들이 많지 않은데요. 『금오신화』의 ‘조신의 꿈’이라는 테마를 현대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려고 해도 주변의 반발이 거세지 않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일본은 누군가 그런 작업을 하려고 하면 출판 편집자든 영화 제작자든, 주변 사람들이 지지해주는 것 같은데 한국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분위기, 토대 때문인 것 같은데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일단 재미있으면 받아들여지겠죠.

 

이런 상황에서 작가님은 고전에 담긴 테마를 기반으로 한 작품 활동을 계속해나가려고 하는 거잖아요. 부담감이나 아쉬움도 있을 텐데요.


제가 설정한 허구에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히 끼워 완벽히 작동하게 하는 걸 제가 즐기기도 하고요.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데요. 이런 소재로 소설을 썼을 때 다른 소재로 쓸 때보다는 어려움이 많죠. 설정을 만들거나 세계관을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재미있어요. 앞으로도 뭐라도 계속 캐내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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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방금 ‘캐낸다’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자료를 보면 이야기가 찾아지나요?


『해인』에서 이순신이 등장하죠. 우리가 아는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메시아를 보호하는 가디언이라는 설정인데요. 원래 이 작품을 쓰면서 이순신 이야기는 쓸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순신이 ‘박마’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까지는 상상력으로 가능해요. 그런데 실제로 박마처럼 움직였던 근거가 역사 자료에 몇 줄이라도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야 넣을 수 있어요. 저는 일단 찾아봐요.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멀리 있더라도 건너 건너에 찾아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실제 이순신이 ‘정은부’의 머리를 벤 적이 있었고요. 노량해전도 굉장히 무모한 부분이 있죠. 그런 것들을 보고 제가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면 그 자료들만 가지고 와서 살을 붙이는 거예요.

 

이순신이나 대원군, 전봉준, 윤심덕 등이 등장하죠. 확실히 그런 부분이 읽는 재미를 줘요. 


윤심덕도 그랬죠. 배에서 바다에 빠졌다는 사실을 보고 왜 그랬지, 하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런 이유로 빠졌다면 하면 어떨까 하고 보니까 몇 가지 코드가 딱 맞는 게 있더라고요. 그렇게 건지는 거죠. 그런데 작품을 쓰다가 그런 이야기를 건져서 작품 안에 넣을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거의 불가능해요. 평소에 관심 있는 자료들을 잘 찾아두었다가 쓸 때 ‘아, 그거!’ 하고 올 수도 있고요. 이야기를 막아 두었다가 어딘가에서 자료를 보고 집어넣을 수도 있어요. 어떨 때는 어디 없을까, 해서 찾다보니까 갑자기 나올 때도 있죠. 그것은 전적으로 운인 것 같아요.

 

그 외에 『해인』을 쓰면서 많이 고심한 부분이 있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반전도 크고, 역사적 사실도 많아서 고심한 대목이 많을 것 같거든요.


전체 얼개를 잡고 살을 붙일 때 먼저 해야 할 일들은 역사적 사실이 정확하게 이야기 속에 부합되도록 설정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걸 쓸 때 주인공과 주적, 그리고 성모라는 세 인물들과 반전은 기본적으로 설계를 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요. 그보다는 주적, 주인공의 반대편에 있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반동인물)가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제일 고민이었어요. 저는 주인공은 별로 관심이 없거든요.(웃음) 적에 관심이 많고요. 적이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해인』도 적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야기일 텐데요. 주인공은 적이 펼쳐놓은 아이스링크에 스케이팅을 하는 것뿐이죠. 그 부분에 대한 평가를 잘 받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은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부분도 애를 썼지만 ‘정만인’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일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관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작가님은 스스로 장르문학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네, 그게 제 꿈이에요. 장르문학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한국적 소재로 한국적인 장르소설을 쓰고 싶어요.

 

장르소설가로서의 꿈이 있다면요? 좋아하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이것은 작가님이 지향하는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을 것 같습니다.


코맥 매카시 같은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저의 근본적인 꿈입니다. 저는 코맥 매카시 ‘빠’예요.(웃음) 아직 갈 길이 멀죠. 지금은 제가 쓰고 싶은 것이 조금 달라요. 야마모토 겐이치라는 작가가 『리큐에게 물어라』라는 작품으로 나오키상을 받았는데요. 같은 해에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이라는 소설과 경합하다 두 작품 모두 상을 받았어요. 저는 이 『리큐에게 물어라』를 열 번 이상 읽은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는 매카시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은 『리큐에게 물어라』처럼 세심한 이야기를 팩션화하는 데 좀 더 몰두하고 싶어요.

 

특별히 그 작품의 어떤 점에 매료되셨어요?


‘리큐’가 일본에서는 다도(茶道)의 신으로 추앙 받거든요. 거의 우리나라 이순신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 리큐 이야기가 안 나오는 데가 없어요.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자결을 명받았는데 왜 그랬는지는 여러 설이 있죠. 『리큐에게 물어라』에서는 리큐가 조선 여자를 사랑해서 그 여자가 건넨 향합, 향이 나는 작은 단지를 히데요시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와요. 쉽게 말하면 이순신이 일본 여자를 사랑해서 노량 해전 마지막 해전 때 일부러 총탄에 맞아 죽은 걸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사랑 때문에 도망간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버린 거죠.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열광했잖아요.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런 이야기를 쓰면 독특하다고 다독거림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는 아직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그런 판타지가 제가 생각하는 장르문학이에요.

 

코맥 매카시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코맥 매카시 소설이 순문학이다, 장르문학이다,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건 참 바보 같은 짓인 것 같고요. 그 또한 서부 역사라는 미국적인 소재를 썼죠. 자기 역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썼다는 점에서 존경해요. 여러 표현과 탁월한 문장력도 좋지만 매카시의 소설은 다 고독하거든요. 멋있다고 생각하고요. 코맥 매카시도 초반에는 문단에서 인정을 못 받았던 작가이기도 하잖아요. 『핏빛 자오선』이라는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천대 받는 느낌도 좀 있었고요. 서사나 내러티브, 기승전결 같은 게 없잖아요. 그나마 서사가 있는 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죠.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인데요. 저는 다른 작품도 다 좋아하지만 『국경을 넘어』가 진짜 좋아요. 매카시의 책을 어렵다고 받아들이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게임과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업 등 다양한 작업을 해오셨잖아요. 『똥 먹는 도깨비』에서는 그림을 선보인 적도 있고요. 소설 외에 이 같은 다른 작업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밥벌이로 한 거였어요. 그림책 작업이나 게임 시나리오,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등 많이 했었는데 그건 모두 밥벌이 때문이었어요. 소설로는 먹고 살 수가 없잖아요. 저는 장르문학을 하는, 그것을 고민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데 그런 밥벌이 이력을 많이 봐주시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거든요. 계산을 해본 적이 있어요. 한 달 동안 소설을 쓰는 시간이 8일 정도밖에 없더라고요. 8일도 많이 시간을 낼 때죠. 주말까지 포함하면요. 그럴 수밖에 없죠. 제 직업이니까요. 여러 가지 뭐라도 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요. 그래서 그런 일을 한 거예요. 계속 그렇게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8일 정도 되는 그 기간만이라도 집중할 수 있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업’이 힘든, 이것 역시 ‘한국형 소설가’의 솔직한 상황인 것 같아요.


저희가 후속을 기다리는 많은 작가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이 더 많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시고 후속작을 독자들에게 빨리 선보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먹고 사는 문제 등등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는 문제가 있죠. 소설 쓰는 사람들이 대개 비슷한 것 같아요. 제 주변에 저와 비슷하게 소설을 시작한 친구들 중 포기한 친구들도 많거든요. 저도 그런 생각이 있었고, 지금도 내일이 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밥벌이와 작업을 구분해서 계속 써야죠.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든 혹은 없든, 많든 그것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고요. 쓰고 싶은 책들이 있으니 그것이 하나씩 쌓이길 바라요. 첫 책을 내고 자만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후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런 생각은 다 사라졌어요. 지금은 책이 외부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밥벌이와 상관없이, 한 달에 8일 정도를, 계속 쓸 수 있는 원동력은 뭔가요?


쓰고 싶은 게 아직은 남아 있으니까요. 쓰고 싶은 걸 계속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거창한 건 절대 아니에요.(웃음) 어쨌든 아직까진 포기 안 했으니까요.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힘든데 마지못해 직장을 다니는 분들도 있고요. 힘든데 부모님을 봉양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그런 힘듦과는 다른 것 같아요. 그렇다면 힘든데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하시면 희열이 있기 때문이겠죠. 의무감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희열이 있습니다. 독자들도 같이 희열을 느껴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못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계속 했으면 좋겠어요. 저 같은 사람은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빛을 받겠지, 라는 것 외에 의지할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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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사이에 숨겨둔 것들


이 작품이 독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으면, 하고 기대한 바도 있으신가요?


독자 분들이 제 작품을 어떻게 읽어주실지 모르겠지만요. 돈을 내고 시간을 들여 콘텐츠를 소비할 때 유치하지는 않다, 공들여 만들었구나,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네,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트릭을 다 끝까지 알고 난 뒤에도 유치하게 만들지는 않았구나 하고 생각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큰 기대는 아닌 것 같은데요.


쓴다고 생각하면 날짜를 찾아봐야 하고, 자료를 비교해야 하고, 팩트 여부도 확인해야 하죠. 이것저것 하다보면 공력이 많이 들긴 해요. 그렇지만 읽는 분들이 소설을 한 권 읽으면서 자료를 찾아보는 경우는 없죠. 유치하지 않다는 표현 속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텐데요. 이런 장르 문학들이 트릭을 알고,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안 보게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사건 소설이니까요. 하나의 소비 형태가 되는 건데요. 코맥 매카시의 소설들이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스티븐 킹의 소설처럼 반복해서 읽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 작품들이 있잖아요. 그것처럼 행간 사이에는 여러 가지 숨겨둔 것들이 있거든요. 그냥 읽으면 지나가버리는 거지만 몇 번 더 읽었을 때 그것들이 발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숨겨둔 것들, 조금만 더 들려주세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이자춘은 이성계의 아버지잖아요. 이성계가 쭉정이 아기장수라는 설정을 했지만 이성계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거든요. 이자춘의 부인이 ‘숙지’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부인이 역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해와 행동이 그대로 들어가 있어요. 찾아볼 수는 있지만 독자는 그걸 찾아볼 필요도 없죠. 그런 것들까지도 정확하게 잘 맞춘 것이기 때문에 유치하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걸 알아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하죠.

 

곧 또 한 권이 출간될 예정이라고요?


『해인』은 박마에 관한 이야기고요. 가을쯤에 성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작품도 나온 후 반응이 어떨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요. 그냥 계단을 하나 씩 오르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독자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한국적인 소재를 쓰려고 하는 것이 사극이나 삼국유사의 어떤 것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말씀드렸지만 밴드 들국화를 주제로 해도 되고, 김광석을 주제로 해도, 이순신 동상을 주제로 해도 충분히 한국적인 소재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일본이나 유럽처럼 받아들여주셨으면 해요. 우리 이야기가 미스터리가 되고, 장르문학이 되고, 재미있는 서사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소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해인차무진 저 | 엘릭시르
『해인(海印)』은 팩션 스릴러의 특징과 더불어, 그것에 걸맞은 세계관의 설정과 미스터리적인 장치가 돋보이는 새로운 종류의 미스터리 스릴러다.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구축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신중현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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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비조'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의 선각자'로 불리는 신중현이 우리 범주를 넘어 미국 음악계로부터 위대한 음악가라는 공식 상찬을 받았다. 지난 5월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톤 소재의 위세 높은 버클리 음악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2009년 기타 명가 '펜더'로부터 맞춤형 기타를 헌정받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미국에 가지는 않았다. 버클리 음대 로저 브라운 총장은 박사학위 수여식(버클리 음대 졸업식)에서 펜더 제품전략가 리처드 맥도날드의 말을 빌려 신중현을 두고 '절대적 음악전설'이자 '끊임없이 발전하는 아티스트'라는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 “1970년대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견지한 '반정부'적 자세가 더욱 그의 위상을 드높였다”고 해 졸업식 현장에 있는 한국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신중현은 예상치 못한 버클리 명예박사 학위수여에 대해 “원래 상을 밝히는 체질은 아니지만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며 기뻐했다. 1938년생으로 80세인 신중현은 빠듯한 미국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체력과 음악을 향한 활활 타오르는 의지를 보였다. “음악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정신 건강, 몸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했다. 신중현은 어디서든 음악가의 면모를 조금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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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클리 음대의 명예박사 학위 소식은 언제 접하셨어요?


이미 소문은 들었다. '설마 날 주겠나?'하고 믿지 않았는데 1년 전에 버클리 음대 로저 브라운 총장이 직접 날 찾아왔더라. 그 전부터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하자 아들 신대철에게 연락해 행방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선 성의가 있었다.

 

총장이 만나서 뭐라고 하던가요


여러 가지를 물어봤고 내 이력을 쭉 살펴보더라. 아마 그쪽(버클리 음악대학)에서 충분히 내 신상파악을 했고 나한테 직접 확인을 하려고 온 것 같았다. 이력 때문에 학위를 주었다고 판단한다.

 

어떠세요, 학위를 수여받은 기분이. 막상 현장에서 받으시는 순간을 본 한국인 졸업식 참석자와 관계자들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 음악 하는 사람한테는 영광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상도 못했다.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기분이랄까. 내 음악만 묵묵히 해왔다. 그런데 내 음악이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조금은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기쁘다. 내 개인적으로도 하나의 계기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웃음)

 

공식 졸업식 하루 전에 버클리 음악대학은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모여 학교관계자와 학부모들에게 그간 배운 기량을 연주로 들려주는 졸업공연(Commencement Concert)을 한다. 이번은 5월12일 저녁 버클리 음대 근처 보스톤 유니버시티의 아가니스 아레나에서 진행되었다. 이곳은 아이스하키 구장으로 유명하다. 공연 레퍼토리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다섯 음악가의 명곡과 추천 곡이라서 팝스타 공연을 방불했다. 다섯 음악인은 신중현를 비롯해서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 토드 런그렌(Todd Rundgren), 루신다 윌리암스(Lucinda Williams) 그리고 그래미상 주관사 미국 레코딩 예술과학 아카데미(NARAS)의 회장 닐 포트나우(Neil Portnow)였다.

 

현장에서 라이오넬 리치의 코모도스 빅히트넘버 'All night long', 토드 런그렌의 'I saw the light'와 'Love is the answer', 루신다 윌리암스의 'Passionate kisses'를 듣는 기분은 각별했다. 라이오넬 리치가 (마이클 잭슨과 함께) 작곡한 'We are the world'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신중현의 곡은 '세 나그네' 시절의 앨범 그리고 1994년 <무위자연>앨범에도 수록된 '즐거워'를 시작으로 김정미가 노래한 '바람'과 '봄' 그리고 신중현이 밴드 '퀘션스' 시절인 1970년 아이언 버터플라이 것을 리메이크해 당대 가요계에 충격을 던진 기타 대곡 'In a gadda da vida' 등 네 곡이 거푸 무대에서 실연되었다. 신중현도 이 무대에 올라 펜더 기타로 미국 재즈 파퓰러 고전 'Autumn leaves'를 연주, 우레와 같은 객석의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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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Autumn leaves'를 선택하셨나요.


아무래도 미국이고 미국인들에 널리 알려진 곡이니까. 내 곡을 할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게 관객과 좀 더 소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펜더 관계자 리처드 맥도날드 표현대로 '고난도의 기타 기교'를 들려주셨는데 현장 연주가 맘에 드셨는지요.


분명히 버클리 음대 측에 내가 원하는 영국제 앰프를 요구했는데 리허설 현장에서 보니 아니더라. 좀 실망했다. 버클리 음대가 이러다니.... 당연히 내가 원하는 음색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다음 날 보스톤 거리에서 만난 많은 미국인들이 빼어난 기타연주를 들려줘 영광이라는 찬사를 보냈지요.


괜히 버클리 음대 콘서트 그리고 관계자들이겠나. 전에 미국공연 왔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들은 음악을, 연주를 들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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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전 리셉션 장소에서 라이오넬 리치, 토드 런그렌 등이 선생님을 직접 찾아와 인사를 건넸죠. 어떠셨나요. 라이오넬 리치 경우는 만약 자신의 내한공연이 성사된다면 꼭 무대에 나와 주십사 연신 부탁하던데요.


안 나갈 거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알 것 같다. (웃음) 그들이 내게 인사한 것은 예의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지 잘 몰랐겠지만 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웃음) 그리고 내 기타소리를 들었지 않나.

 

미국에서 연주한 적이 처음은 아닐 텐데요, 무대든 졸업식 현장이든 전부 외국인들이라 조금 편하지는 않으셨겠어요.


음악을 어디에서 하느냐 그 위치를 따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양인이라 생경했던 것은 사실이다. 좀 떨리기도 했다. 졸업식 현장에선 무려 3시간 반을 앉아 있었다. 왜 그리 졸업식이 길고 말들이 많은 건지….

 

졸업공연 현장에서 '즐거워', '봄', '바람'과 같은 선생님의 곡을 버클리 학생들이 연주한 것을 들으면서 평소에는 몰랐던 것을 확인했는데요. 록은 록이되 다른 미국 아티스트의 록과 뚜렷이 대조될 정도로 한국적인 냄새가 물씬했습니다. 서양 록과 한국 음악의 융합이라는 선생님의 업적을 비로소 절감했습니다.


그게 내 음악의 평생 과제였다. 우리는 우리만의 장단이 있고 흥이 있다. 그게 우리의 얼을 이룰 것이다. 내 몸속에 그게 있으니 내가 외국 록을 해도 우리 것이 되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오랜 신념이었다. 1974년 '엽전들'의 1집만 해도 한국적인 록, 우리의 대중음악을 만든다는 야망을 가지고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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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우리 후배 뮤지션들이 그 앨범을 통째로 리메이크해 헌정한 앨범이 나왔습니다. 들어보셨지요.


들어보고 놀랐다. 젊은 친구들이 잘 해석해줬다. 젊은이들의 음악성이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원곡 틀을 유지하면서 숨은 것을 찾아내면서 거기에 자기 개성을 부여했더라. 이게 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수요자들이 무리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현대화'되었다. 가히 '사운드 아트'랄까. 리메이크는 남의 작품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창의적 과정이자 도전이다. 명반으로 손색이 없다. 역사에 남을 거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들었으면 한다. 대중들이 이 앨범 계기로 후배들의 음악성 그리고 록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선생님은 록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데요. 세상을 떠난 재즈 뮤지션 정성조 선생님이 언젠가 신중현선생님이 재즈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말한 게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정성조)는 내가 미8군 음악활동을 하고 있을 때 고등학생(서울고) 교복을 입고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정말 열심히 불었다. 재즈 광이었다. 그의 얘기대로 나도 재즈를 통해 미국음악을 알게 됐다. 그 당시 디지 길레스피, 소니 롤린스, 찰리 파커, 자니 하지스, 스탠 게츠, 마일스 데이비스, 쳇 베이커 등을 부지런히 들었다. (이 얘기 도중 정말 쉴 새 없이 줄줄이 뮤지션의 이름이 나왔다) 오스카 피터슨은 블루스의 정체를 알려주었고 셀로니어스 몽크는 더 나아간 케이스라고 할까. 그 재즈감성이 내게 사라질 리 없을 것이다. 나도 어쩌면 재즈에서 록으로 전향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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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선생님이 남기신 명곡 얘기를 해보죠. 신중현사단의 대중적 시작을 만들었다고 할 펄시스터즈의 '님아'는 어떻게 탄생된 건가요.


펄 자매가 나를 찾아와 곡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다소곳이 공손하게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준비가 된 인물들임을 느꼈던 게 기억난다. 당시 이 작업 저 작업 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들에게 '떠나야 할 그 사람' '님아' '커피한잔' 등 다섯 곡만을 써주었고 LP 다른 한 면은 기존의 내 곡들을 우겨넣어 앨범을 만들었다. 솔직히 이 무렵 한국에서보다는 월남에서 내 뜻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 월남에 갈 생각에 계약까지 맺었다. 하지만 어느 날 새벽에 유니버설/킹, 신나라 레이블 대표 '킹박'(박성배)이 내 방문을 두드리며 “신형, 떴어! 떴어! '님아'가 떴어!!”하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만든 곡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곡은 뭔가요.


꼽지 못하겠다. 이런 질문이 참 부담스럽다. 다들 애써서 만든 곡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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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에게 음악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글쎄, 내 열정과 에너지의 원천일 것이다. 일찍이 음악을 운명으로 여겼다. 천직이고 최선을 다했다. 좋은 곡, 맘에 드는 곡을 딱 못 고르는 게 이 때문이다. 음악을 떠나서 나는 없다. 음악에서 내가 나온다.

 

선생님과 동격이 된 록이 무엇인가 정의하신다면요.


글로벌 문화교류의 장이다. 세계가 만날 수 있는 장르가 됐다. 결코 흘러가는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영원한 음악문법이다. 나의 경우도 우리 정서를 록에다 얹어 우리의 장단과 흥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려는 목표로 살았다. 록은 '리얼'이고 '라이브'가 중심이 된다. 지금 유행의 대세가 힙합과 EDM이란 것을 안다. 시대에 따라 환영받는 스타일이 있게 마련이고 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록은 흔들리지 않는다.

 

신중현은 인터뷰 도중 후대와 후배 음악인들을 향해 음악에 대한 여러 관점을 피력했다. 그중 몇 가지를 요약하면.


1 음악은 섞지 말아야 한다. 자기마다 오리지널을 지켜야 하고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등위(等位)를 이루면서 이른바 문화다양성이 나온다.
2 결국 순수함이 이긴다. 음악가는 음악지향, 돈, 명예와 관련해서 순수해야 한다. 대중들도 결국에는 순수한 것을 사랑하고 인정한다.
3 시키는 것을 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것을 하라.
4 음악가는 자기가 만든 곡을 설명할 정도의 전문성을 가져야할 줄로 안다.
5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말고 모두 듣는 것이 좋다. 음악 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듣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여기서 길이 잡힌다. 나는 클래식, 재즈, 각국의 민요, 우리 국악 심지어 트로트도 좋아했다.

 

인터뷰, 사진 및 정리: 임진모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재경 “연예계 생활에 위안이 되었던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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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바쁜 와중에 혼자 있는 반려동물이 안쓰럽다. 밥이라도 좋은 걸 먹이고 싶어 고급 사료와 간식을 찾지만 여전히 마음이 찜찜하다면, 이미 당신은 집사이자 부모의 마음을 가진 훌륭한 반려인이다.


걸그룹 레인보우로 데뷔한 9년 차 연예인이자 3년 차 강아지 엄마인 김재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3년 전 만난 반려견 마카롱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에 사료 급식이 아닌 자연식을 선택했다. 내 자식과도 같은 아이에게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 없는 사료 대신 먹는 즐거움과 영양을 놓치지 않는 ‘진짜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마카롱에게 하나씩 직접 만들어 먹였던 요리는 『개밥책』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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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은 ‘마카롱’


김재경의 첫 책입니다. 받아보고 기분이 어땠나요?

 

책을 내기로 한 건 오래됐어요. 2년 가까이 됐는데 실용서이다 보니 마음대로 쓴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정보를 수정하고 다듬는 과정을 거쳐서 출판이 많이 늦어졌어요. 가장 마지막 작업이 표지 디자인이었는데 그때 느낌이 되게 이상하더라고요. 인쇄 들어간다고 연락받았을 때 더 가슴이 뛰기도 했고요.


마카롱이 책의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강아지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어렸을 때 꿈이 수의사였을 정도로 동물을 좋아했어요. 데뷔하고 바삐 살다가 우울했다거나 힘든 건 아닌데, 열심히 살면서 보상이나 힐링이 필요하다는 기분이 들던 참에 친구가 키우는 강아지를 보게 됐는데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지금 마카롱과 같은 종의 강아지였는데, 뛰어다닐 때마다 에너지를 막 흘리고 다니는 거예요. 그 모습에 반해서 그때부터 이 종이 어떤 종이고, 강아지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등 공부를 시작했어요. 성인이 된 후니까 책임감 있게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었죠. 또 그때부터 매일 하루가 끝나고 침대에 누우면 오늘 하루 반려견이 있었다면 내가 얼마나 돌봐줄 수 있었을지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연예인 스케줄에 강아지 육아까지, 힘들었겠어요.


레인보우가 공백기가 되게 많은 팀이었어요. 때마침 공백기에 접어들었을 때 지금이면 강아지의 어린이부터 청소년 시기를 겪기 전까지 옆에서 돌봐줄 수 있겠다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아이도 그때 운 좋게 만나게 됐죠. 그 전에는 맨날 강아지가 있는 카페 가고, 개 있는 친구 만나서 놀고 그랬어요.


친구는 뒷전이고요. (웃음)


그런 식으로 계속 강아지들이랑 접촉하다가(웃음), 펫샵도 가보고 가정분양 하는 아이들도 만나봤는데 다들 이렇다 하는 느낌이 안 오는 거예요. 부서질 것 같이 작거나, 예뻐도 약해 보였고요. 근데 이 아이를 처음 안았을 때 엄청 무거우면서 건강한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이제까지 아픈 적 한번 없이 잘 컸어요.


꼬똥 드 툴레아라는 종인데요. 종 설명을 좀 해주세요.


종의 수명 자체가 길어서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평균 16년 정도 산다고 하니, 제가 노력하면 20년 넘게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브리더 분의 말에 따르면 유일하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종이라고도 해요. 보통 개 알러지는 개의 기름이 유발하는데 유분이 거의 없는 털이라 냄새도 거의 안 나고 되게 건조해요.


털이 많이 날리긴 하겠네요.


그렇게 많이 빠지진 않아요. 검정 옷 입으면 늘 돌돌이 테이프를 현관 앞에 하나, 거울 앞에 하나, 차에 하나 두고 살아야 하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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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건강한 식단은 자연식


여러모로 개를 잘 보살펴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을 텐데, 왜 하필 자연식이었나요?


개 카페에 놀러 갔을 때, 그때도 유난히 건강해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털도 빤질빤질하고 에너지도 흘러넘치고요. 견주에게 왜 이렇게 건강한지 물어보니까 사료를 안 먹이고 자연식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자연식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고 조사를 해 보니까 이미 외국에서는 자연식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와 있고, 우리나라에는 막 수입이 되려던 참이었던 거죠. 사실 너무 쉬운 원리예요. 개는 늑대과 동물이고, 늑대과 동물에게 가장 적합한 식단은 고기예요. 너무 당연한데 개는 사료만 먹고 살아야 오래 살고 건강하게 산다는 걸 당연하게 세뇌처럼 생각한 거죠. 어떻게 보면 사료는 만들어져 있는 가공식품 혹은 완제품이잖아요. 매일 인스턴트 식품을 먹기보다 엄마가 장 봐서 해준 음식이 맛있고 건강하다고 느끼듯이 제가 이 친구에게 해주면 되겠다 싶었죠.


사료보다는 자연식이 아무래도 공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만들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이 주에 한 번,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많이 만들어놓고 먹이고 있어요. 처음에는 고기부터 방울토마토까지 일일이 사서 만들었는데 요즘은 생고기를 원하는 만큼 소분해서 파는 사이트가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고기는 따로 주문하고 채소는 직접 사서 다듬고 큐브 형태로 얼려두고 그날그날 해동해서 고기랑 주고 있어요.


예전부터 레인보우 김재경 하면 손재주로 유명했어요. 핸드메이드 화장품, 은공예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셨는데, 그 재주 중에 요리도 있었나요?


한때는 베이킹에 꽂혀서 주로 베이킹을 많이 했어요. 요리는 샐러드 같은 거 해 먹는 등 주로 제가 먹을 음식을 만들었지만, 이 아이 키우고 나서는 조금 더 개에 초점이 맞춰졌죠.


어머니가 요리사라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어머니가 요리하는 모습을 많이 봐 왔으니까, 영향이 있었겠죠? 책에 나온 음식 촬영도 어머니 촬영 스튜디오에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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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이 책이 ‘카롱이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편지’라고 설명해주셨는데요.


일단 이 아이로 인해 저도 행복이 늘어났어요. 그 고마움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예전에 아침에 피곤하다고 찡그리면서 일어났다면 지금은 그럴 일이 없는 게, 일단 눈을 뜨면 이 아이가 꼬리를 막 흔들면서 나를 기다리니까 웃으면서 시작하고, 하루의 마무리도 웃으면서 하게 되고요. 헤픈 웃음이 많아졌어요. 가만히 있다가도 강아지만 보면 웃게 돼요.


제목이 ‘개밥책’이잖아요. 직접 제안하신 제목인가요?


네, 출판사 대표님이 반대하셨는데 제가 이 제목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했어요. 대표님이 ‘강아지 밥’이라고 하자고 했는데 느낌이 안 와닿고 이상한 거예요. ‘개밥책’이라고 하면 한 번에 와 닿고 들으면 안 까먹을 것 같았어요. 처음 책을 준비할 때부터 입에 붙은 이름이라,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개밥 만들기의 이론과 실제’ 같은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기본 지식이 많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공부하는 데 힘든 건 없었나요?


일단 국내 자료가 많이 없다는 게 힘들었고, 해외 자료를 번역해도 너무 어려운 말이더라고요. 그동안 쉽게 풀어쓴 책보다 전공서 같은 느낌의 책이 많아서 조금 더 많은 견주분들이 공감하거나 쉽게 실생활에 적용할 만한 책이 필요하겠다고 느꼈어요.


알레르기 테스트 방법 등 실생활에 적용할 만한 예가 많이 나와요. 제외 식이로 알레르기 여부를 판단한다고 하셨는데요.


하나하나 먹여보면서 강아지의 피부나 변을 점검하는 방법인데, 쉽게 말해 먹이던 사료에 소고기가 들어가 있었으면 거기 없는 단백질원을 찾아서 먹여보는 거죠. 두부나 고구마, 코티지 치즈 등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을 급여해보면 바로 반응이 나타나거든요. 긁는 횟수가 늘어난다거나 눈물이 많아지는 식으로요. 관찰하면서 보다가 제대로 알고 싶어져서 이번에 마카롱 생일선물로 병원에 가서 알레르기 검사를 했어요.


개한테도 알레르기가 다양하게 나타나나 봐요.


집에서 자주 키우는 화초나 식물에도 알레르기 항목이 있어요. 그런 식물에 반응이 있으면 어떤 화분은 키우면 안 된다는 식으로 실생활에 바로 적용이 되니까요. 자연식을 해도 아이 건강상태가 개선이 안 되고 눈물이 계속 난다고 하면 병원에 데리고 가셔서 정확한 검사를 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말을 들어보니 거의 육아를 하신 거네요.


정말 이게 부모 마음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처음 접해보는 식재료를 안 먹을 때가 있어요. 호불호가 있으니까요. 이 아이는 정말 확실히 고기를 좋아하고 채소만 주면 안 좋아해요. 날고기 좋아하고 우족 주면 종일 질겅질겅 씹고 있어요. 교묘하게 섞어줘야 먹는데, 안 먹으면 예전에 엄마가 ‘빨리 밥 먹고 학교 가!’ 이런 말을 왜 했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다 안 먹어도 되니까 한입만 먹어보라고 하시죠. (웃음)


그게 진짜 느껴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 아이가 밥을 먹으면 제가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 이게 그 느낌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강아지를 키우면서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커지고 내가 얼마나 철없는 딸이었나 반성도 하고요.


부모님이 강아지 키우는 걸 보면서 뭘 이렇게까지 키우냐고 하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게 심하진 않으셨어요. 이렇게 해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설령 수의사 님이 감수를 해주셨어요. 책을 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있었나요?


아무래도 제가 찾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는 인터넷에 있거나 서점에서 산 책인데, 수의사님은 영양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신 분이라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갖고 계셨어요. 저는 이 아이가 좋아하는 식단 위주로 많이 짰는데, 나중에야 이 재료는 뭐에 좋았는지 정보를 알 수 있었죠.


조미료를 만들어서 필요할 때마다 급여한다는 부분도 있었어요.


꼼수인 거죠. 급하게 빨리 만들어줘야 하는데 고기밖에 없다면 조미료를 토핑으로 얹어만 줘도 다양한 맛과 영양소를 줄 수 있으니까요. 고기가 떨어졌을 때 현미밥이 있으면 죽으로 끓여서 황태나 연어 조미료를 넣어 주는 거죠. 사람 음식 할 때도 활용할 수 있고요.


사람이 먹는 재료랑 같은 재료로 급여하시나요?


네, 같은 재료로 써요. 레시피를 보면 쿠키랑 저키류 빼고는 다 인간과 개가 함께 먹을 수 있게 레시피를 구성했어요. 사람이 먹을 때는 소금을 넣는 식으로요.


과일도 강아지가 많이 좋아해요. 설탕이 안 좋다고 하는데, 과일도 당이라 많이 먹이면 위험할 것 같아요.


자연식 먹일 때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우리가 늘 보는 식재료잖아요. 사람이 먹는 양이 눈에 익숙하기 때문에 강아지에게도 그 기준으로 주게 된단 말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람 몸무게의 10분의 1도 안 되는데 그만큼 주면 강아지에게는 매우 큰 양이에요. 줄 때는 항상 양을 생각해서 조금씩만 주는 게 중요해요. 별거 아니에요. 내가 먹는 양의 조금을 이 아이에게 주면 충분한 맛과 영양을 줄 수 있는 거죠.


어렸을 때는 자주 급여하다가 성견이 된 후에 급식 주기를 줄이셨다고요.


3개월부터 12개월까지 다섯 끼를 먹였는데, 끼니를 주는 시간 간격도 제 스케줄에 맞춰서 줬어요. 오전 10시에 첫 끼 시작해서 자정에 끝나는 일정이면 그 사이를 쪼개서 다섯 끼를 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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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위안이 됐어요


나중에 스케줄이 늘어나고 자연식을 급여하는 게 부담이 되진 않으셨나요?


대개 함께 다녔어요. 가수는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이 3분에서 4분 정도밖에 안 되니까 무대 하고 내려오면 다 대기밖에 없었거든요. 대기하는 동안은 늘 이 아이와 있고 무대에 설 때만 떨어져 있었어요.


여덟 번째 멤버였네요.


네. 그래서 멤버들이 제가 이 아이 챙겨주는 거 보고 ‘언니의 개가 되는 게 훨씬 편할 것 같아’ 하더라고요. 가만히 있으면 밥 주지, 똥을 싸도 칭찬해 주지, 그래서 다들 카롱이를 부러워했어요. (웃음)


연예계 생활이 힘들기도 하잖아요. 마카롱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뭔가 제 뜻대로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사회 나와서 처음 깨달았던 것 중 하나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더라고요. 어릴 때는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온다고 배웠고 실제로 그랬고요. 그런데 사회는 그것과 별개로 노력을 아무리 해도 100%의 성과가 항상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괴리감도 컸고 되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늪에 빠져있다기보다 딴 데 생각을 돌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취미를 많이 갖게 되기도 했고, 멤버들한테도 취미를 가지라고 권하기도 했고요. 이 아이가 온 이후로는 제 취미가 다 이쪽으로 쏠린 거죠. 요리도 이 아이를 위해서 하고 옷을 만들어도 이 아이 옷을 만들고요. 강아지가 온 후로 좋은 쪽으로 생각이 없어졌어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고요. 밥도 챙기고 뒷바라지하면서 몸은 힘들어질 수 있었지만, 훨씬 만족감이 커졌어요.


지금은 가수가 아닌 연기자로서 활동하고 있어요. 소속사도 바뀌고요. 지금의 재경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 건 딱히 없어요. 그 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요새 더 내 삶의 질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어떤 삶을 살면서 그 삶이 반영되면서 나라는 사람이 완성된 거잖아요. 좋은 연기를 하려도 해도 내가 좋은 사람이어야 내 몸과 나 자신이 좋은 연기에 쓰일 텐데, 내가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한다거나 매일 똑같은 패턴으로 살면 나는 딱 그만큼의 사람인 거죠. 그래서 많이 경험해보려고 하고 여행도 많이 가보려고 해요. 더 많이 다양한 걸 접하고 생각도 많이 열어두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에요.


책을 낸 것도 다양한 경험 중 하나인가요?


그렇죠. 이걸 하면서 새로운 직업군을 경험해보기도 하고, 엄마의 마음을 느껴보기도 하고, 개를 사랑하는 극성 엄마가 되어볼 수도 있고요.


여러 가지 집중하는 게 쉽진 않아요.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할 때도 하루에 한 권만 공부하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여러 과목 쌓아두고 하다가 집중이 떨어지고 질리면 덮고 다른 거 하는 식으로 반복하는 타입이어서, 지금도 그 습관이 묻어나는 게 아닐까요?


앞으로 계획이 있나요?


앞으로는 열심히 재밌게 살 예정이고요. 이전에는 무대를 통해서 좋은 에너지를 전달했다면 지금은 작품을 통해 대중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또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려면 제가 좋은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니까, 열심히 좋은 연기를 위해 연마하겠습니다.


다른 책이 나올 수도 있을까요?


꿈은 꾸고 있어요. 하지만 실용서는 아닐 것 같아요. 너무 어려웠어요. (웃음) 다음에 책을 낸다면 감성 에세이 서적이 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이 모든 게 이 아이를 위해서 시작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돌아서 생각해보면 나를 위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요리해 주는 것도 제가 행복해서 했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또 행복을 느꼈고요. 사람마다 본인에게 맞는 행복을 찾는 일이 중요하니까, 그게 강아지가 됐든 뭐가 됐든 모든 이가 찾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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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책 김재경 저 / 정설령 감수 | 21세기북스
저자인 김재경은 반려견과 행복한 시간을 오래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자연식을 급여하기 시작했고, 그 마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개밥책』에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맛있고 건강하게 먹는 일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반려견에게도 중요한 문제임을 고민한 흔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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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남씨 “고양이처럼 ‘캣썅마이웨이’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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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남성현, 필명 남씨(남see). 자신만의 시선을 담아 ‘복잡한 주제를 단순하게,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그는 2년차 집사다. 길 위에서 고양이 ‘탱이’를 만나 집사로 간택된 후, 인스타그램에 올린 고양이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작가의 숙명이 그러하듯 자신과 반려묘의 이름보다 작품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더 많은데, 카카오톡 이모티콘 ‘다혈질 고양이 탱고’를 필두로 ‘긴냥이’, ‘캣베이커리’, ‘냥넬’ 등이 대표작이다. 많은 집사들이 ‘고양이와 함께 사는 리얼한 일상’에 공감했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른바 ‘냥덕’들은 사랑스러운 고양이 ‘탱이’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작가 남씨 특유의 위트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요소다.

 

에세이 『고양이처럼 아님 말고』에는 집사 남씨와 반려묘 ‘탱이’의 일상이 담겨있다. 닝겐 오빠와 냥님 여동생은 “검은 옷이 (고양이 털로 범벅이 되어) 흰옷 될 때까지” 함께할 것을 맹세하며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각자의 온도”를 지켜주며 “평범한 일상이 드라마가 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탱이’에게는 고양이의 삶의 방식이, 남씨에게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 있다.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하고 싶은 건 꼭 하는 ‘캣썅마이웨이’ 정신으로 무장한 ‘탱이’와 달리 “화가 나도 말 한마디 못 하는” 집사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탱이'는 그를 대신해 세상을 향해 솜방망이 펀치를 날려주고, 때로는 앙칼진 하악질로 되갚아준다.

 

이 작은 고양이를 지켜보며 집사는 생각했다. “고양이가 사는 법 중에는 인간이 배워야 할 것들이 꽤 있다”고.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자신의 속도로 걷고 원하는 것을 하면서, 결과가 어떻든 ‘아님 말고’ 하면서 쿨하게 돌아서는 것. 생각보다 꽤 근사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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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산다면, 참 편할 것 같아요


‘탱이’에게도 책을 보여주셨죠? 반응이 어땠나요?

 

여느 고양이들처럼 긁고 찢고 그러죠. 아주 고양이다운 행동이었어요. 제가 상상하기로는 ‘이런 거 됐고, 그냥 간식이나 줘’라고 했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웃음).

 

인스타그램에서 출간 기념 이벤트를 열기도 하셨어요. 책 속에서 공감한 글과 그림에 투표해 달라고요. 가장 많은 반응을 얻은 작품은 무엇이었나요?


“마이웨이” 편인 것 같아요. 집사들은 다들 한 번씩 (고양이한테) 밟혀봤을 것 같아요.

 

참 희한하죠. 분명히 다른 길로 갈 수 있는데도 꼭 집사를 밟고 지나가요(웃음).


그러니까요. 그렇게 해야 뭔가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는 느낌이 드나 봐요(웃음). 그런데 얼굴 위로 털이 스치는 느낌이 싫지 않아서 ‘더 밟아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고양이들은 배를 만지면 싫어하는데, 자기 배로 우리를 훑고 가는 건 괜찮은가 봐요.

 

고양이들은 늘 하고 싶은 대로 하죠. 그게 ‘캣썅마이웨이’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삶의 태도를 보면서 배우게 되는 것도 있어요.


그럼요. 정말 갖고 싶은 성격이에요. 고양이들도 표정으로 싫은 티를 내는 것 같은데, 사람이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날 것 같아요(웃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거나 받으면 피곤한 일들이 생기잖아요. 고양이처럼 산다면 참 편하겠다 싶어요. 가끔 고양이가 싫어하는 것들, 예를 들면 목욕이나 빗질을 하자고 하면 ‘저리 치워’ 하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사람 관계에서도 그렇게 좋고 싫은 게 자연스럽게 표현되면 오히려 문제 생길 일이 적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렇게 사는 게 굉장히 어렵지만요.

 

‘고양이가 사는 법’을 보면서 바뀐 점도 있나요?


타고난 성격상 소심하고 낯을 가려서 잘 안 되기는 하는데요. 항상 ‘탱이’를 보면서 배우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어요. 고양이라는 동물이 애착을 갖기까지 진입장벽이 높은데, 한 번 그 벽을 넘어서게 되면 거의 무한대의 애정을 주잖아요. 강아지처럼 누구나 쉽게 좋아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서, 어렵게 좋아한 대상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집사님들이 그러실 것 같은데 저도 그 중 한 명이죠. ‘탱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너무 귀엽고 애착을 가지게 되니까 따라 하고 싶은 것도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도 반려동물과 함께 사셨어요?


어렸을 때 집에서 강아지를 기른 적이 있어요. 고양이를 접해본 건 ‘탱이’가 처음인데, 개하고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같이 사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고양이가 훨씬 잘 맞는 것 같고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라고 할까요. 피해를 주지도 않고 피해 받을 필요도 없이, 그냥 자기 할 일 하는 거죠. 저하고 '탱이'는 하루에 1시간 정도 서로가 필요한 시간이 있어요. 서로를 보듬어주는 시간이죠. 이후에는 각자 할 일 하는 거예요. 저는 그림을 그리고, '탱이'는 자거나 창 밖을 보고요.

 

고양이가 아닌 다른 동물과 함께 살았다면, 반려동물을 주인공으로 일러스트를 그리셨을까요?

 

아닐 것 같아요. 상상도 할 수 없고요. 제가 가진 개그 코드가 고양이하고만 맞을 것 같아요. 고양이들이 마이웨이 정신을 가지고 있고, 집사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 데에 코미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요. 고양이들은 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동물을 좋아해서 강아지, 햄스터, 토끼와도 함께 살아봤는데 그 아이들한테는 저의 개그 코드를 나눠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내가 돌봐줘야 할 존재라고만 생각했죠. 저는 ‘탱이’가 새침한 여동생, 다혈질 여동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친구처럼 웃긴 점을 발견해 가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탱이’를 모델로 만드신 캐릭터가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제작됐잖아요. ‘다혈질고양이 탱고’인데, 이름처럼 ‘탱이’는 다혈질인가요(웃음)?


제가 느끼기에는 그런 것 같아요. 고양이들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적극적이지도 않아서 다 알 수는 없지만, 집사 성격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것 같은데요. 제가 볼 때는 ‘탱이’가 사람이었다면 굉장히 개인주의적이고 다혈질에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아이였을 것 같아요. 사람이었으면 되게 밉죠(웃음).

 

고양이의 성격이 집사에 따라 달라진다면 ‘탱이’가 작가님을 닮은 모습도 있을까요?


비주얼적으로는 머리 스타일이 좀 비슷한 것 같고요(웃음). 내적으로 닮은 부분이라면, 잠을 많이 자는 것 정도가 될 것 같아요(웃음). ‘탱이’는 저와는 조금 다른 아이인 것 같아요. 사람이었다고 해도 저랑 굉장히 다른 성격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도 같은 게 있다면 각자의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데요. ‘탱이’는 제가 계속 집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오래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더 반겨주는 느낌이 있는데, 극적인 만남을 좋아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웃음).

 

많은 사람들은 고양이가 굉장히 시크하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진한 애정 표현을 해줄 때가 있죠.


그렇죠. ‘탱이’의 경우는 한정된 시간 동안만 짧고 굵게 하는 것 같은데요(웃음). 집사로서 그때만 반응해주면 되고, 그게 편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저도 항상 사랑을 줄 수는 없거든요. 집사들이 골골송이라고 하는 그르릉 거리는 소리가 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힐링이 되고 너무 좋아요. 저한테는 하루에 한 번만 들을 수 있는 소리니까 굉장히 희소가치가 있죠(웃음).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갔을 때 딱 한 번 들려주거든요. 그 시간 이후로는 각자 할 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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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변해가는 사람들


책에 쓰신 것처럼 고양이들에게는 ‘아님 말고’ 정신이 있잖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원하는 게 있으면 무조건 시도를 해보고, 실패하면 ‘그럼 말지, 뭐’ 하고 돌아서죠.


‘나는 좋아하는 것만 할 거야’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있는 것 같아요.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태어난 존재 같죠. 우리는 억지로 ‘더 이상 이런 생각하기 싫어’ 하고 떨쳐내려 하지만 고양이들은 ‘그런 생각이 뭐야?’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 안 하고 고민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현재를 사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네요. ‘욜로족’ 같은 거죠.

 

『고양이처럼 아님 말고』에 집사일기만 실려 있는 건 아니에요. 작가님께서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하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요. 때때로 ‘탱이’가 작가님을 대변해주기도 해요.


맞아요. 저도 같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맨날 나와서 울거나 징징대는 역할로만 나오고요(웃음). ‘탱이’는 위로해 주거나 혹은 다그치는 조력자 역할을 많이 하죠. 제가 그리면서 감정이입이 많이 됐던 부분은 ‘탱이’인 것 같아요. 사람인 제가 느꼈던 감정을 고양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풀어내는 거에 더 익숙하기도 하고, 그 방법이 더 좋은 것 같아요.

 

‘탱이’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한 부분도 있을까요?


우선 보는 사람들이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 속의) 제 캐릭터는 매력이 없는 아이이고, 정말 매력 있는 건 ‘탱이’ 캐릭터죠. 둘의 케미가 좋은 거고요. 팬 분들 중에 집사님이나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당연히 고양이로 이야기를 푸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 ‘탱이’가 제가 살고 싶은 태도를 대신 표현해 주니까 대리만족도 많이 느껴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사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잖아’ 하는 생각도 들면서 다짐을 많이 하죠. 다짐한다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글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타난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냥 피하기로 해. 참아내면 이로울 수도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싫은 것들을 억지로 마주하고 있다 보면 자칫 더 큰 재앙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라고 말씀하셨죠.


요즘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성이라서 공감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 중 한 명이고요. 사람들이 점점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될 때가 있는데, 고양이처럼 변해가는 거 아닌가 싶어요. 오지라퍼들을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굉장히 반기는 부분인데요.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변해간다면,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들이 다 고양이 같아진다면 말이죠.

 

“조금 서툴러도 이해해주세요. 우리 모두 처음 살아보잖아요”라는 글은 위안이 되어 주더라고요.


두 번 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기회가 한 번이라는 사실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위로를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마 다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대신, 나만 처음은 아니고 다 처음이니까요. 괜찮을 거예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항상 웃게 돼요. 끝에 달린 해시태그 때문인데요.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작가님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부분이에요.


유머는 무거운 주제도 사르르 가라앉게 해주고, 릴렉스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수단인 것 같아요. 그래서 유머 코드를 굉장히 좋아하고요. 그런 걸 표현하면서 저도 즐거워요. 되도록 아주 무거운 주제는 안 다루려고 하지만, 다루게 되더라도 한편에는 그런 요소가 있어야 나답다는 생각도 들고요. 해시태그도 그런 부분이 표현된 거예요. 팬 분들이 인스타그램에서만 제 그림을 보셨을 텐데, 책에서도 해시태그가 굉장히 좋은 수단으로 쓰였던 것 같아요.

 

30대 독자들이 격하게 공감할 만한 이야기도 있어요. “30대가 되면”이라는 글이에요.


예전에 생각했을 때는 30대에 엄청난 사람이 돼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 거죠. 정말 갖고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금수저가 아니라면. 저는 서른 살에 처음 사춘기를 겪었어요. 그때 마침 프리랜서를 시작하기도 했고, 인생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된 것 같아요. 생각이 변화하는 건 좋은데, 경제적으로나 삶의 다른 면에서도 조금 더 풍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서른이 넘어서야 깨닫게 되죠. 이 시기에 안정된 삶을 산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요(웃음).


그렇죠. 시간적으로도 대학교를 조금 늦게 졸업하면 스물여덟, 스물아홉이 되기도 하잖아요. 30대 초반에 안정적이라면 집에 돈이 많거나, 학생 때부터 천재적인 면을 발휘해서 사업을 시작했거나, 그런 경우들이 아닐까 싶어요. 오히려 이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것 같고요.

 

글의 마지막에서 “50대가 되면 좀 다르지 않을까?”라고 적으셨는데요. 50대에는 어떤 모습일 것 같으세요?


그때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직업에 대해서 딱히 정착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만 나중에는 음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냥 바람이고 상상이니까 부풀려져 있기도 해요. 그때 정말 음악을 하고 있을지는 저도 의문인데, 그림은 저에게 있어서 늘 취미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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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로 재탄생한 ‘짤방’ 속 고양이


처음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리실 때는 상업적인 의도가 없으셨죠?


그때는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생계와 상관없이 그림을 그려서 공유했던 거였어요. 그래서 아무 부담이 없었고, 반응이 없어도 꿋꿋하게 그렸던 거죠. 그런데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반응을 보여주셨고 거기에 힘입어서 계속 그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양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많이 물어보시는데, 딱히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는 날 어떤 사진을 올릴까 생각했는데 제가 셀카를 잘 찍는 사람도 아니고 음식 사진도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냥 노트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게 고양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셨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죠.

 

예전에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과 굿즈를 만드신 건 퇴사 후의 일인가요?


네, 회사 다니면서 일러스트페어를 준비했는데요. 다녀오고 나서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너무 재밌었거든요. 제 그림을 보신 분들이 귀엽다고 좋은 반응도 보여주시고요. 회사에서 일하면서 덜 행복하게 사느니,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재밌게 하면서 사람들한테 좋은 반응을 얻으면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탱이’가 작가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을까요?


그렇죠. 유머 코드를 담기도 좋아졌고 더 단단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탱이’가 옆에서 계속 코미디를 해주니까 직접 보면서 그리게 되는 거죠(웃음).

 

‘탱고’ 캐릭터와 사진, 영상을 결합시킨 콘텐츠도 구상하고 계시죠? 웹툰이나 영상 제작도 생각해 보셨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죠. 제 그림체가 매체를 크게 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애니메이션이라든지, 애니메이션과 사진의 조합이라든지,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웹툰도 제 성향과 맞다고 생각해요. 장기적으로는 다양하게 넓혀갈 생각을 하고 있어요.

 

대표작 중에 ‘긴냥이’가 있어요. 오랫동안 인터넷에서 짤로 사용되던 사진 속의 고양이가 모델이죠?


네, 냥덕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짤이죠(웃음). 회사 다닐 때 사무실에서 쉬는 시간에 잠깐 그려봤는데,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 몰랐어요. 아마 기존에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던 짤이었기 때문에 쉽게 공감하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비주얼적으로도 너무 귀엽잖아요. 굉장히 심플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어서 상품화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고요.

 

‘캣베이커리’, ‘냥넬’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캣베이커리’는 일명 ‘식빵 굽는 자세’라고 불리는 고양이의 특징을 잘 포착해낸 그림이고, ‘냥넬’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패러디가 돋보이는 작품이에요.


‘캣베이커리’는 현재 단종 된 상태인데 내년쯤 다시 선보일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그 그림을 활용해서 가방도 제작했었고 다른 업체와 콜라보를 해서 모자도 만들었었는데, 인기가 꽤 많았어요. ‘냥넬’은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이 가는 그림이에요. 패러디에 관심이 많거든요. 기존에 있는 것들을 끌어와서 작업을 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기존 제품을 좋아하는 분들이 더 쉽게 좋아하실 수도 있는 것 같고요.

 

아직까지 ‘탱이’를 모델로 제작된 굿즈가 없죠?


엽서하고 휴대폰 케이스가 있었는데 지금은 단종시켰어요. 굿즈로 표현되는 그림은 굉장히 심플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탱이’를 표현한 그림들은 자잘한 선이나 만화적인 효과가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 그림을 에코백이나 배지에 넣으려면 단가가 굉장히 높아질 수 있고,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 때문에 제작 자체가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탱이’를 모델로 굿즈를 만든다면 개량을 많이 해서 그림을 단순하게 바꿔야 하고요. 많이 시도는 해봤는데, 그러면 맛이 떨어지는 느낌이라서, 아직 굿즈로 만들기에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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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걸 좋아해줘서 고마워


『고양이처럼 아님 말고』에서 집사들이 가장 공감하는 글은 “고마워”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탱이’한테 ‘미안해’, ‘고마워’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항상 있고, 자유를 뺏은 거 아닐까 싶어서 미안하기도 해요. 같이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미안한 마음에 약간 울컥할 때가 있어요. 고마워서 울컥할 때도 있지만요. 집사님들이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나한테 와줘서 고맙다고요. ‘수많은 고양이,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네가 내 고양이가 돼줘서 정말 고마워’라는 건데요. 저도 참 많이 공감하는 이야기예요. 덩달아 ‘탱이’한테 고마워하게 되고요. 그런 이야기들은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내서 들려주고 해요. 고마워, 미안해, 하고요.

 

반려동물들은 조건 없이 무한한 사랑을 주죠. 하루에도 몇 번씩 표현해주고요. ‘탱이’의 경우에는 하루 한 번이겠군요(웃음).


네, 하루에 한 번인데요(웃음). 충분한 것 같아요.

 

사람들끼리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잘 표현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반려동물한테 더 큰 감동을 받는 것 같기도 해요.


저도 혼자 10년 동안 살다 보니까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아요. 제가 집에서 살가운 아들도 아니고 누군가한테 사랑을 주거나 받는 것도 어색한데, 반려동물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거든요. (고양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간에는 엄청 좋아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저리 가’라고 하는데, 얼마나 깔끔하고 아름다운 관계인지 모르겠어요(웃음). “고마워”라는 글에서 “나 같은 걸 좋아해줘서 고마워”라고 썼는데 ‘탱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좋겠어요.

 

“반겨동물”을 읽으면서 코끝이 찡했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이에요. 제목에서 약간 말장난을 가미한 부분도 마음에 들고요. 심플하게 메시지 전달이 되는 것 같아요.

 

지치고, 힘들고, 괴로운 날에도 반려동물이 반겨준다는 내용인데요. 해시태그에서는 어김없이 분위기가 반전돼요. “#우리집에놀러와 #집사방금나감”이라고 쓰여 있거든요(웃음).


저는 그렇게 해야만 뭔가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웃음). 끝에는 꼭 웃음으로써 정화를 시켜줘야 돼요. 약간 신파적인 걸 싫어하기도 하고요. 그런 소재를 아예 안 다루는 건 아니지만, 다루더라도 약간은 비틀어서 마무리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탱이’도 길고양이였잖아요. 아픈 아이를 구조해서 입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길고양이에 대한 관심도 많으시겠어요.


앞으로 전개하고 싶은 방향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어려움에 처해 있는 고양이들한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요. 그림으로 얻은 수익을 일부를 가지고 봉사, 후원, 기부 등의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바람이 있고요. 다른 작가들과 기획을 하고 있어요. 길 아이들을 비롯해서 아픈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제 작품 활동에도 더 좋은 의미가 생기고, 저도 더 많은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충인 자세로” 이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대충 살자는 메시지가 주된 주제인데, 자세부터 남다르게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상징적인 의미이기는 한데, 부담 갖지 말고 힘 빼고 보시라는 메시지를 담은 거예요.

 

“Stay lazy”라는 작품을 만드신 적도 있죠? 고양이처럼 우리도 몸에 힘을 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생각이 자세를 만들기도 하고 자세에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잖아요. 몸 전체에 힘이 좀 빠지면 생각도 유연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힘이 들어간다고 해서 더 잘되는 것도 아니고, 부담 없이 시작한 게 잘 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제 경우에도 일러스트레이트 작업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퇴사를 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인생이 조금 더 재밌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거였거든요. 그렇게 힘을 빼고 하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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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처럼 아님 말고남씨 저 | 시공사
길고양이였던 탱이를 만난 이후 남씨의 삶은 꽤 많이 바뀌었다. 탱이를 관찰하며 그림과 이야기를 만드는 동안 남씨 자신도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때로는 앙칼지게, 마이 페이스로 사는 법을 익혔고, 웬만한 고민거리는 툭툭 털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고양의 특유의 ‘캣썅마이웨이 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정애 “부모는 자기만의 우물에 갇혀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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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란과 영규 부부는 아들 민수가 걱정이다. 무슨 일이든 똑 부러지게 해내는 딸 민지와 달리 민수는 감도(感度)가 떨어진다. 매사에 느릿느릿 행동이 굼뜰 뿐만 아니라 “정보 해독을 야무지게 못 해” 친구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하고, 공부도 잘하지 못한다. “만화책 읽으면서 뒹굴뒹굴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아들을 보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 정란과 영규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도태되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며 민수를 바라본다. 영규는 ‘어떻게 해서든’ 아이를 바꾸어 놓겠다고 다짐하지만 정란은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부 사이에는 갈등이 지속된다.

 

가족소설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는 평범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가정 안에서의 소통과 단절, 사랑과 책임이라는 미명 하에 가해지는 강요와 억압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은 가족구성원 각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전개해 나가면서 “겉보기엔 다 같이 시뻘건 불안이지만 디테일에서는 다 다른 엄마의 불안, 아빠의 불안, 자식의 불안, 내 불안, 네 불안, 그들의 불안”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소설가 박정애는 네 명의 인물에게 골고루 발언권을 부여한다. 독백처럼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저마다 다른 경험이 있고, 그 안에서 공고해진 가치관이 있다. 그것은 가족을 비롯한 타인을 평가하고 바꾸려는 잣대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정란과 영규에게 민수는 걱정거리일 뿐이지만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민수는 “나한테는 내 속도가 있는걸” 분명하게 선언할 수 있는 야무진 아이고, “삼포세대 어쩌고 하는 기사를 읽었을 때 그게 바로 내 미래라는 걸 곧바로 깨달”을 만큼 현실감각이 발달한 아이다. 정란과 영규, 민지도 마찬가지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각자 다른 이유로 각자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고,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인물들이다. 문제라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임을 자부하면서도 실상은 서로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소설부터 청소년소설에 이르기까지, 소설가 박정애는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들과 소통해 왔다. 장편소설 『물의 말』로 ‘2001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소현세자빈 강씨의 이야기를 담은 『강빈, 새로운 조선을 꿈꾼 여인』으로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Herstory’를 복원했다. 청소년 소설 『환절기』, 동화 『똥 땅 나라에서 온 친구』등을 발표하며 폭넓은 작품 활동을 이어온 작가는 가족소설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를 통해 “제 불안에 눈멀어 자식을, 배우자를 짓누르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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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서’라는 이름의 억압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가족의 모습이 담겨있어요. 작가님의 개인적인 경험도 반영되어 있나요?

 

저 역시도 경험에 갇혀서 아이들을 판단하더라고요. 저희 부모님은 자녀 교육에 신경을 쓰실 여력이 없으셨거든요. 그저 먹고 사는 데 바빠서, 밥만 먹여주고 학교만 보내주면 다 될 줄 아셨죠.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잘 헤쳐 온 것 같은데, 저희 아이들도 그럴 줄 알았어요. 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 있기도 하고, 별로 신경 안 써도 잘 해나갈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공부를 잘하지 못하더라고요(웃음). 학습지도 시켜주고 도움을 줘 봤는데 시큰둥하고요. 이렇다 할 효과는 없고 오히려 트러블만 생기더라고요.

 

그럴 때는 부부 사이에도 갈등이 생기잖아요.


남편하고 서로 탓하는 거예요. 남편은 자식 교육에 대한 책임이 일차적으로 저한테 있다면서 직무유기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희 남편은 오기도 좀 있고 경쟁심도 있는 사람인데, 아이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아들, 딸이 다 그래요(웃음). 그렇다 보니까 남편은 ‘저렇게 해서는 사회에서 루저 밖에 안 된다’고 판단해 버리고, 자식 교육에 실패했다는 공포심과 불안에 갇혀서 아이들을 잡기 시작하는 거예요. 제가 못하면 자신이 하겠다면서요. 그런 게 가족의 삶을 파괴하더라고요.

 

소설 속 영규의 모습과도 흡사한 것 같아요(웃음).


비슷한데요. 저희 아들이 하는 말로는 영규가 아빠보다 훨씬 낫다고 하더라고요. 더 착하대요(웃음).

 

작품에 그려져 있듯이, 부모는 자신의 경험으로 아이를 평가하고 이끌죠.


자식한테 좋은 걸 해준다는 명분이 있죠.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그래서 너한테 제일 좋은 걸 위해서 내가 희생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아이를 억압하고 압박하는 거거든요. 아이 자신의 경험과 삶, 꿈이 있는 건데 그걸 무시하는 거죠. 저는 부모들이 자기만의 우물에 갇혀있다고 생각해요. 자식한테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건 맞지만, 그 맹목이 참 무섭다는 거죠. 눈이 멀어서 안 보이는 거잖아요. ‘이건 널 위한 거야’라는 생각에 눈이 멀어서 제대로 못 보는 거예요.

 

정란과 영규는 각자의 성장기를 떠올리는데요. 지금 민수와 민지가 살고 있는 환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에요.


일단은 조금 달라졌죠.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개별적으로 다 다르죠. 그런데 다 똑같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경험치를 적용하면 트러블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귀여운 아이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건 공동체가 살아있었던 농경사회에서 허용되던 이야기예요. 그때는 공동체 안에서의 예의범절이 굉장히 중요했고, 어른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그런데 그때의 경험치를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되죠.

 

민수는 뭔가 부족하고 걱정스러운 아이로 비춰져요. 그런데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혀 다르죠.


저도 그런 걸 느껴요. 예전에 아들을 볼 때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아이가 쓴 시를 읽고 놀랐던 적이 있거든요. 우리가 정말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자식을 키우면서 같이 성장을 한다고 하나 봐요.

 

어떤 시였나요?


나무 그늘 속에서 바라본 먼지가 아름다워 보인다는 내용이었어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예뻐서 손을 뻗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잡을 수가 없었고, 그냥 바라보니까 먼지가 스르륵 가라앉아서 자기한테 왔다고요. 그러면서 우리가 뭔가를 좋아할 때는 잡기 위해서 손을 휘두르고 강압적으로 하면 안 되고,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오고 싶을 때 오는 거라고 썼더라고요.

 

문학 소년이었네요(웃음). 재능을 키워주면 시인이 될 수도 있겠다, 하고 기대하지는 않으셨나요?

 
부모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하는 게 일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인이 되면 되는 거지, 하고 기대는 안 하려고 했어요.

 

아드님께서 ‘탈학교 청소년’으로 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고요. 딸은 중학교 때 그만뒀어요. 힘들었어요(웃음).

 

주위 학부모들이 ‘정말 큰 결정을 하셨다, 나라면 못 했을 것 같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그렇죠. 그런데 학교를 다니는 게 ‘잘 사는’ 것보다 우선순위는 아니잖아요. 학교를 다니는 일이 삶을 갉아먹는다면 관둬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상황이라면 학교를 그만두는 게 용기라고 생각해요. 직장을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러다 죽겠다’ 싶으면 관둬야죠. 그런데 사람들이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직장을 다니면서 죽음을 택하는 거죠. 제 우선순위는 ‘일단 살고 보자’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결혼생활을 유지하거나 직장을 끝까지 다니거나 학교를 졸업하는 게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죽을 것 같다고 생각될 때는 관둬야 되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한테도 관두라고 했고, 지금은 ‘잘 살고’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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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우물에 갇혀 있다


정란과 아이를 지켜봐 주자는 입장이에요. 그래서 영규와 갈등을 빚고요. 영규가 매정한 아버지로 보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란과 같은 선택을 하기가 더 힘들 것 같아요.


그럼요. 도 닦아야 되는 거죠(웃음). 정란도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렇게 혁명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회가 정해놓은 루트를 무리 없이 따라갔다면 그대로 밀고 나갔을 거예요. 그런데 아이들이 굉장히 힘들어하니까, 엄마는 그 힘듦에 공감을 하는 거죠. 그리고 ‘한계선을 넘어가면 안 되겠구나, 일단 살아야 되겠구나’ 생각하는 거예요. 공감력이 더 뛰어난 거죠. 그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밀어붙이면 여러 가지 비극이 발생하잖아요.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이 굉장히 높은 것만 봐도 그렇죠. 당사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가족이 필요해요.

 

정희성 시인의 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가 인물들 사이를 연결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평소 작가님께서 좋아하고 아끼는 시인가요?


네, 대학 시절부터 좋아한 시예요. 그때 처음 시를 봤을 때는 연애감정이 먼저 느껴졌어요. 제가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었거든요(웃음). 그런데 시의 의미는 언제 읽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더라고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시가 다른 의미로 와 닿았어요. (시 구절처럼) 모든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결국은 한 그리움과 다른 그리움의 만남이 아닐까 싶어요. 이 소설에서 포물선이 의미하는 바와도 연결되죠.

 

영규는 경험으로 알고 있죠. 우리 사회에서 민수 같은 아이가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 “많이 달라졌다지만 한국 사회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할 뿐이에요.


그러니까요. 그런 부분마저 없었으면 정란이 같이 안 살았을 것 같아요. 서로 방식이 많이 달라도 자식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마음은 똑같은 거죠. 그렇다 해도 아빠도 달라질 필요가 있는 거고요.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안 되잖아요. 파국에 이르기 전에 변화하는 계기가 와야 하는데, 이 소설을 읽는 행위를 통해서 그런 계기가 마련되면 좋겠어요.

 

많은 남편들이 소설을 읽고 위안을 받을 것 같아요. ‘내 마음이 바로 이런 건데’ 하고요.


그렇겠죠. 소설을 읽으시고 자기만의 우물에 갇혀있다는 걸 깨달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어요. 나의 불안과 공포가 100% 옳은 게 아니잖아요. 아이들도 자신만의 고민을 하면서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데, 그 사실을 알고 이제는 조금 믿고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요. 엄마들도 마찬가지고요.

 

이번 소설은 일부러 힘을 많이 빼고 쓰신 것 같아요. 어렵지 않게 쓰시려고 노력하신 것 같고요.


그럼요. 예전에 제가 쓴 역사소설을 읽고 어떤 친구가 ‘접근불가’라고 해서 조금 상처받았던 적도 있어요(웃음). 그런 데 이번 소설을 읽은 친구는 순식간에 잘 읽었다고, 자기와 아이들의 이야기 같았다고, 반성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소설을 쓴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사실 민수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인 것 같아요. 생각도 깊고, 허를 찌르는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해요.


어른들이 생각 있는 척하지만, 사실 이야기를 나눠보면 결국은 다 돈으로 귀결된다는 것도 알고 있죠. 삶의 본질과 자기 성격도 잘 알고 있고요. 어른들은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하지만, 사실 열심히 노력하는 게 헛일일 수도 있거든요. 민수는 그걸 간파하고 ‘나는 내 성격대로 나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거예요. 이런 아이를 사랑스럽다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어른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민수 같은 아이를 두고 루저라느니, 인생을 포기했다느니, 하는 식으로 낙인을 찍잖아요.

 

정란의 친구인 춘희는 네팔 사람 샤말과 결혼해요. 두 사람은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잘 소통하죠.


사실 우리도 틀리게 볼 때가 많거든요. 글자 하나도 잘못 읽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만 맞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는 맞게 이야기하는데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다’라고 말할 때가 많죠. 춘희와 샤말은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내가 보고 들은 게 맞아, 내 기억이 정확해’라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서로 부딪히는 거죠. 부모와 자식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언어는 항상 미끄러지기 때문에 아이들의 진심을 100% 전달하지 못해요.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경청하려고 노력하면서 들어야 돼요. 그런데 액면 그대로 언어를 듣고, 심지어 잘못 들을 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화내고 윽박지르는 경우가 많죠.

 

우리는 가족에 대해 ‘당연히’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더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요.


그렇죠. 특히 부모가 자식한테 그러잖아요. 자식 자신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해요. ‘내 속으로 낳았는데 내가 몰라?’라고 하면서요. 분명히 독립된 개체인데도, 그 자신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오만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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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계속되니까, 부지런히 씁니다


정란은 “선생으로서, 엄마로서, 내 좌표가 어디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합니다. 작가님도 같은 질문을 품을 때가 있으세요?


그럼요, 많죠(웃음). 엄마로서도 그렇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회에서 바라는 것, 살아남는 방법과 다를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지도를 해줘야 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죠.

 

전업 주부, 전업 작가가 아니시잖아요. 집필 시간이 많이 확보되지 않아서 힘드실 것 같아요.

 

네, 이번 소설은 작년 여름방학 때 객주문학관에서 썼는데요. 저한테는 그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천국이에요(웃음). 다른 어떤 리조트에 있는 것보다 좋아요. 그런데 제가 집필을 위해서 잠시 집을 비운다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식구들 밥은 어떻게 하고 가냐’고 해요(웃음). 저는 전업주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요.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 보여주는 대목이죠.

 

남성 작가들의 경우는 다르겠죠? 전업 작가라고 해도 더 자유로울 거고요.


자신이 전업 작가이고 부인이 생계를 책임진다고 해도, 어디 갈 때 ‘식구들 밥은 어떻게 하고?’라는 이야기는 절대 안 듣잖아요. 그런데 저는 전업 작가도 아니고, 생계도 책임지면서 글도 쓰는데, 그래도 밥은 어떻게 하냐는 이야기를 들어요. 웬만하면 다들 그 이야기를 해요.

 

작가, 엄마, 선생님의 역할을 다 하시는 게 쉽지 않잖아요. 하나의 역할에만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세요?


잠깐씩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흔들리면서 사는 게 글을 쓰는 데는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늘 고민하게 하니까요. 어떤 분들은 학교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글을 안 쓰는데, 저는 그래도 부지런히 쓴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고민이 계속 되니까 부지런히 쓰게 되는 거예요. 고민하고 생각하면 표현 욕망이 생겨서 글을 쓰고 싶거든요.

 

“소설을 쓰다 보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감정이입이 될 때가 있다. 이번에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하셨는데요. 아무래도 정란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끼셨겠죠?


정란과 제가 성격의 여러 단면들이 비슷해요. 청소년기에 겪었던 것도 비슷하고, 성격이 조금 우울한 것도 비슷하고요. 그런 모습들이 잘 투영이 되어 있죠(웃음).

 

아이들을 키우시면서 청소년 소설을 쓰기 시작하셨어요.


지금은 그래도 아이들이 다 커서 마음 편히 어디를 갈 수 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죠.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때는 그때예요. 아이들이 어릴 때요. 잠깐만 눈을 돌려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너무 불안하잖아요. 계속 아이들을 주시해야 하는데, 한편으로 저는 한 인간으로서 소설가로서 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는 짧은 시간 동안 집중해서 글을 써야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쓴 글을 아이들은 읽지 못하니까, 같이 소통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서 청소년 소설을 쓰게 됐죠. 그런데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안 쓰던 글을 처음 써보게 됐으니까요. 작품을 쓰다가 중간 중간 아이들에게 보여줬는데, 바로 반응이 오더라고요. 아이들은 재미없으면 도망가거나 TV를 켜요(웃음). 그러면 쓰던 글을 폐기하고, 재밌어하는 부분을 더 늘렸죠. 어떻게 보면 서로 도움이 된 거예요. 제가 혼란스럽고 힘든 시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죠.

 

“책이 사람에게 가장 영향을 미치는 시기는 청소년기다. 나도 청소년기에 읽은 책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꿨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작가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무엇이었나요?


하나만 꼽자면, 꼭 청소년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인에어』예요. 제인에어가 저의 롤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시골에는 그런 여성 롤모델이 없거든요. 제가 살았던 당시 청도에는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다, 라는 생각으로 사시는 여자 분들이 많았어요. 대구로 이사 간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요. 그런데 제인에어는 주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거든요. 그리고 저랑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는 것도 그렇고요. 『제인에어』에서 얻은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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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가슴에 그리움이 있기를


등단과 동시에 ‘새로운 페미니즘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으셨어요. 『물의 말』, 『에덴의 서쪽』, 『춤에 부치는 노래』, 『죽죽선녀를 만나다』, 『다섯 장의 짧은 다이어리』등 많은 작품 속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고요. 페미니즘이라는 틀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하세요?


여성에게는 페미니즘 자체가 삶이지, 제가 갇혀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제 성향이 그렇게 투쟁적이지는 않고 조금 타협적이라서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고요. 또 시골에서 농사짓는 집에서 소 키우면서 자랐기 때문에 원초적인 보수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어쨌든 아들도 딸도 같이 살아야 된다는 생각인데, 그럼에도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삶의 고민으로 평생 가져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건 어떤 주의가 아니라 내 삶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제 곧 방학이 시작되는데요. 다시 집필에 전념하실 수 있겠어요.


네, 방학 때 한 달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고요. 올해까지 객주문학관에 갈 거예요.

 

집필 중이신 작품이 있다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넓게 보면 테마는 사랑이고요. 『강빈, 새로운 조선을 꿈꾼 여인』을 쓰면서 조선왕조실록을 공부했는데, 그때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어요. 강빈이 사사되기 전에 아이를 사산했거든요. 그런데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 아이가 죽어서 태어난 게 아니고 한 비구니에게 맡겨져서 자랐다고 해요.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자신이 그 아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등장해요. 숙종 때 나타난 기록이 있어요.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의 결말은 집필 전에 정해놓으셨나요?


계획을 세워 놓고 소설을 쓰는 편인데요. 이 소설은 너무 슬픈 이야기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저와 제 친구들의 이야기도 들어가 있고,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도 있고요. 현실의 이야기니까 어떤 바람과 희망을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너무 슬프지 않게, 어쨌든 희망을 주고 싶어서 이렇게 결말을 맺었고요. 사실 이 소설은 몇 년 전에 발표했던 단편을 바탕으로 쓴 건데, 그때 많은 고민들이 잉태됐었어요. 소설 쓰면서 당시의 고민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부모의 입장을 쓰다가 눈물이 나기도 하고, 아이의 입장을 쓸 때도 그랬고요.

 

가족 안의 소통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좋을까요?


아집에 갇혀서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해요. 아빠도 엄마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나라는 자식 교육의 책임을 엄마한테 지우니까 호랑이 엄마가 되기도 하잖아요. 오히려 아빠가 너그럽고요. 그럴 때 엄마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자식한테 투사할 때가 있죠. 그게 유일한 기준인 것처럼 자식을 통제하려 하고요. 그러면 가족구성원 전체가 괴로워요. 자식의 입장에서도 부모를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눈을 너무 믿지 말고요. 그러려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야 되는데, 이 소설이 그런 계기를 제공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잘’ 살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설에서 민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슴에 그리움을 잃지 않고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삶에 쫓기면서 월급 받기 위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지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아무 그리움이 없고요. 제가 생각할 때 ‘잘 사는 것’은 어떤 간절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 역시 독자들과 제 자신이 감동하는 작품에 대한 그리움을 여전히 가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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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박정애 저 | 사계절
1998년 등단해 2001년 한겨레문학상을 받고, 소설부터 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아우르며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선보인 소설가 박정애의 가족소설 『한 포물선이 다른 포물선에게』가 출간되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용진 대표 “정권이 바뀌었다고 적폐가 사라질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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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와 <MBC>, 공영방송이 정권에 장악되고 권력 비판과 견제라는 언론의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난 9년. ‘진짜’ 뉴스를 찾아 헤매던 시민들만큼이나 진실을 전하고자 애쓴 언론인들이 있다. <뉴스타파>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KBS>와 <MBC> 등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이 모여 설립했다. 유튜브, 팟캐스트 등으로 뉴스를 내보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삼성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조세 피난처의 한국인들 등 기억에 남는 굵직한 탐사보도가 모두 <뉴스타파>의 것들이다.

 

『뉴스타파 포기하지 않는 눈』은 <뉴스타파>가 취재한 네 가지, 이명박 정부의 적폐와 국정원 대선 개입,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세금 사용 실태, 원전을 둘러싼 카르텔 등을 담아낸 책이다. 이 이슈들은 모두 과거인 듯 현재인, 미처 해결되지 않은 폐단을 안고 있는 중요한 이슈들. <뉴스타파>의 김용진 대표와 최승호 PD는 이 진실을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정권 교체는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며 “<뉴스타파>도 그 과정에서 하나씩 알리고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 다음 시대로 가는 첫걸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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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견제


MB 정부의 비리, 국정원 대선 개입, 세금, 원전 등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뉴스들이 있었잖아요. 이 네 가지를 선정한 이유가 있었나요? 가령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같은 뉴스도 기억에 남거든요.

 

김용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은 일단 내용이 너무 많죠. 그것으로만 충분히 책 한 권 분량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기회를 보려고 해요.


최승호: 이 뉴스들을 선정할 때 나름대로 임팩트 있던 것을 골랐어요. 취재 뒷이야기를 쓴다고 할 때 독자들이 흥미 있게 볼 수 있는 뉴스들이죠. 기자들이 취재한 것들 중에 써보고 싶다고 한 주제들을 모으고 회의를 거쳐 선정한 거예요.

 

보도 당시가 기억납니다. 이 뉴스들이 보도될 때마다 큰 파장을 일으켰죠.


김용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경우, 처음에는 대선 개입처럼 중대한 범죄가 연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2013년 3월 1일, <뉴스타파>가 조직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출범할 때 첫 보도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고민을 했어요. 사전에 준비를 많이 했었거든요. 당시만 해도 ‘국정원 여론 조작 사건’, ‘국정원 여직원 사건’ 정도로 규정했었죠. 박근혜 정부의 공식 출범을 앞두고 있었고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거든요. 때문에 이것이 <뉴스타파>가 본격적으로 다뤄야 할 이슈라는 판단으로 인력을 투입해서 다루게 된 것이에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취재 비화가 정말 많을 것 같아요. 


김용진: 처음에는 국정원 여직원의 행적을 집중해서 봤어요. ‘오늘의유머’라는 사이트에서 활동한 것들을 보다가 취재 범위를 넓혔고요. 과연 한 사이트에서만 활동했을까, 국정원 직원이 개입되었다면 보다 크게 여론 작업을 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 등에서도 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을 세우고 취재를 본격적으로 한 것이죠. 실제 취재를 해보니 어마어마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요. 지금 서울중앙지검장이 된 윤석열 검사가 당시 수사 팀장이었는데요. 그쪽에서 공식적인 수사에 들어갈 때 우리가 취재한 방법론들을 알려달라는 요청도 있었어요. 그것을 통해 당시 국정원장인 원세훈 씨가 기소되고, 끝내 구속되기에 이르렀죠. 저희들에게는 굉장히 애착이 큰 이슈였고 당연히 저희 기획을 모아 책을 낼 때 우선적으로 고려한 아이템이에요.

 

국정원 사건뿐 아니라 책에 다룬 주제들 모두 <뉴스타파>가 아니면 몰랐을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렇다면 두 분이 생각하는 <뉴스타파>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두 분의 역할의식을 듣고 싶습니다.

 
최승호: 기본적으로 <뉴스타파>가 생긴 이유가 <KBS>, <MBC>라는 공영방송이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망가졌기 때문이죠. 거기서 해고되거나 더 이상 그곳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만든 거잖아요. 때문에 공영방송이 해야 하는 권력에 대한 견제, 이런 비어있는 공간을 <뉴스타파>가 확실히 채운다는 생각이죠. 또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로서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는 게 우리의 소명의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김용진 대표를 비롯해 <KBS>에서 온 여러 기자들이 주로 <KBS> 탐사보도팀 출신들이 많거든요. <KBS>가 대한민국 최고의 탐사보도 기법들을 가지고 최고의 저널리즘을 구가하던 때가 있었는데요. 그들의 노하우가 <뉴스타파>로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뉴스타파>가 많은 부분에서 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고요. 세월호 보도, 조세피난처 보도 등 공영방송을 비롯한 큰 매체들이 할 수 없는 보도를 많이 했어요.  

 

김용진: <KBS> 탐사보도팀이 최고라고 하지만 진짜 최고는 <MBC>의 <PD수첩>이죠.(웃음) 저희는 공영방송의 탐사보도라는 두 역량이 합쳐졌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국정원이나 4대강 뉴스 같은 것들은 애써 <뉴스타파>를 찾아봐야만 했었죠. 그것은 이런 뉴스를 공영방송에서 다뤄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최승호: 그렇죠, 당시 <KBS>는 거의 박근혜 정권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였어요. 요즘 <공범자들>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요. 이 영화가 권력의 언론장악에 관한 이야기예요. 당시 <KBS>의 보도국장이었던 김시곤 국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때 국정원 댓글 사건 보도를 막으려고 길환영 사장이 굉장히 애를 많이 썼다는 거예요. 취재도 안 시키고 말이에요. 그런데 한 번은 <KBS>가 특종을 한 거죠. 그건 보도를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심지어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길환영 사장이 보도를 하지 말라는 쪽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런 정도로 <KBS>가 역할을 못했어요. <MBC>는 더 말할 나위도 없죠. 그나마 <뉴스타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들을 다 찾아냈다고 봅니다. 방대한 양의 트위터를 뒤져서 계정의 주인이 국정원 직원이라는 것까지 밝혀내고요. 당시 수사팀에 상당히 큰 도움이 됐죠.

 

‘taesan4’는 국정원 연계 의혹의 트위터 계정 65개 가운데 하나였다. 이 사용자가 쓴 트위터 글 1,700여 개는 리트윗을 통해 3개월 동안 487만여 명에게 전달됐다.(중략)
여러 정황을 볼 때 ‘taesan4’는 국정원 직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취재진은 ‘taesan4’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같은 방식으로 활동하는 다른 계정들도 국정원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취재 결과 100개의 계정들이 추가로 확인됐고, 다시 600개가 훌쩍 넘는 계정들이 밝혀졌다.(149쪽, ‘문제의 계정, taesa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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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사람들


침묵하는 공영방송이나 언론에 대한 자괴감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후배들에 대해 미안한 생각도 있었을 테고요.


최승호: 후배들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건 당연히 있었죠. 방송이 한꺼번에 너무 크게 무너졌기 때문에 방송인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미안함, 자괴감도 물론 있었는데요. 한편 <KBS>에서는 후배 기자들이 계속 뛰쳐나와서 <뉴스타파>로 계속 왔거든요. 일면으로는 신났던 측면도 있는 거죠.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니까요.(웃음) 다 우리 것이잖아요.

 

웃으면서 말씀하시지만 큰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에요.


최승호: 원래 탐사보도를 한다는 게 힘든 거예요. 굉장히 힘든 겁니다. 언론인이라고 하지만 탐사보도를 자기의 주 영역으로 삼아서 계속 탐사보도를 하겠다는 소명을 갖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죠. 그만큼 독한 사람들이라는 게 기본에 깔려 있는 거고요. 보통은 기자들도 정치부 출입하고, 좋은 데 출입하고 싶어 하지 우리처럼 누구 쫓아다니고 싶은 사람이 많겠어요? 그런데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요.(웃음) 원래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걸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 소명의식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에서 철저하게 징계당하고, 좌천당하던 상황 속에서 펼치지 못한 뜻을 김용진 대표가 대표직을 맡으면서 <뉴스타파>에서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이라고 봅니다.

 

김용진: 책에는 총 네 편의 기획이 있는데요. 보통 프로젝트 하나 당 3-4년씩 걸려서 취재하는 거거든요. 사실 <KBS>, <MBC>가 정상적으로 잘 작동한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 파헤치기 쉽지는 않아요. 특히 국정원 사건은 검찰 수사도 들어가고 전모가 밝혀지고 나니까 그 이후에야 기성매체가 받아쓰기 시작했거든요. 그런 부분은 나름대로 보람도 있긴 합니다. 진짜 안타까운 건 ‘MB의 유산’이에요. 4대강 문제, 자원외교 문제 등은 본격적인 수사가 안 들어가니까요. 국회나 검찰에 확인해서 전을 펼쳐주면 기성매체가 따라오는 수순인데요. 그런 부분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으니까요. 4대강 문제는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많거든요. 여전히 아쉽죠. 이제 정권도 바뀌었으니까요. 각 기관이 제대로 기능하면 조금씩 드러날 겁니다.

 

4대강 문제는 확실히 새 정부 들어서면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는 모양새예요.


최승호: 박근혜 정부 초기에 감사를 한 번 한 적이 있어요. 웬만큼 나왔는데요. 실제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데까지 가야 하는 거죠. 당시 감사 때도 이명박 대통령과의 연관성을 정황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도까지야 내놓았거든요. 그렇지만 책임은 장관한테 물었어요. 이번에는 진짜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거죠. 그러려면 우리 언론이 분발할 필요가 있어요.

 

책에서 다룬 이슈들을 쭉 쫓아가다 보면 정치가 보통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두 분은 이제 변화가 가능할 거라고 보시는 건가요? 대선 이후 짧은 기간이었지만 눈에 띈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한데요.


최승호: 많이 달라지겠죠. 우선 제일 큰 것은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감이 커졌다는 거고요. 사회가 실제로 많이 바뀌었다기보다(웃음) 심리적인 면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김용진: <뉴스타파>가 지금 ‘적폐 청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요. 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도 회원들에게 공지한 내용이 있어요. 정권 하나 바뀌었다고 해방 이후 수십 년간 쌓인 적폐가 사라질까 하는 질문이죠. 지금 정권을 바꾸었다는 성취감으로 그걸 놓치면 안 된다는 취지의 이야기였어요. 실제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기득권 세력들이 만만한 세력이 아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정권 교체는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고,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뉴스타파>도 그 과정에서 하나씩 알리고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주려고 해요. 실제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들 중에 바뀐 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려고 이런 기획을 하고 있는 거죠.

 

‘적폐 청산 프로젝트’에서 다룰 내용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김용진: 여러 가지가 있어요. 검찰의 경우도 그래요. ‘정윤회 사건’ 때도 검찰이 제대로 작동했으면 중요한 사실들이 묻히진 않았을 거란 말이죠. 법무부가 검찰에 장악되어 있는 부분, 각 국가기관 도처에 검찰이 파견 나가 있는 부분 등 적폐라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사실은 간첩 조작 사건 때도 핵심적으로 책임져야 할 게 검찰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수사 지휘를 검찰이 했으니까요. 검사가 국정원 대공수사국에 가서 한 일도 있고요. 게다가 검찰 적폐는 우리 국민들이 피부로 너무 많이 느끼잖아요. 노무현 정권 때 검찰이 한 행태를 보면 말이에요. 결국 그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뉴스타파>가 조금 더 명징하게 드러내면 해법도 찾아보는 일을 할 수 있겠죠. 시민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근거들을 제시해서 여론이 모이면 새 정부가 정책 방향을 마련할 거라 기대합니다. 각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하나씩 밝혀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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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9년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드릴게요. 언론의 역할이란 무엇일까요?


최승호: 만일 <KBS>, <MBC>가 제 자리에 있었잖아요? 그러면 첫 번째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기 힘들었을 거예요. 두 번째는 설사 당선됐다 하더라도 저 정도로, 최순실이라는 비선이 국정 곳곳을 농단하고 마침내 대통령이 탄핵되고 헌정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되는 이런 상황은 없었을 겁니다. 애초에 정윤회 사건 당시 단초들이 다 있었던 거거든요. 그때 제대로 보도를 했었다면 여기까지 안 왔을지도 모르죠. 결국 정권이 <KBS>, <MBC>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고요. 이후 <TV조선>이 보도를 하고 다른 방송에서 슬금슬금 따라 오게 된 것인데요. <JTBC>가 태블릿 PC 이야기를 하면서 전 국민이 폭발한 거잖아요. 그만큼 많이 눌러두었기 때문에 그 폭발력의 강도도 굉장히 셌던 거예요. 잘못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적절히 견제를 했어야 이런 일이 안 생기죠.


김용진: 박근혜 정부를 되돌아 봤을 때 그런 조짐은 초기부터 있었어요. 언론이 제대로 감시와 견제, 비판을 했으면 이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고요. 그것은 다른 신문들도 마찬가지인데요. 예를 들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갔다고 하면 ‘세계를 사로잡은 패션 외교’, 이런 말도 안 되는 보도를 하기 바빴죠. 대통령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정책을 움직이는 사람이 누군지 시스템을 계속 체크하고 문제가 있으면 경고음을 울리고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언론의 감시 기능을 전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가진 거죠. 결국 나라를 바로 세운 것도 국민이잖아요. 그 점은 결과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언론으로만 봤을 때는 굉장히 비참한 9년이었습니다.

 

종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종편이 돌아섰기 때문에 여론이 뒤집혔다는 이야기도 하는데요.


김용진: 거기에 대해서는 크게 동의하기 어려워요. 이번 대선이든 지난 총선이든 거의 일방적으로 거대신문과 방송이 여당 편향 보도를 했잖아요. 그럼에도 결과는 소위 말하는 주류 매체들의 의도와는 굉장히 다르게 나왔기 때문에요. 기본적으로 기성매체의 언론 장악력 같은 부분들이 이전에 비해서는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고 봐요. 현재 미디어 이용자들이 언론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어요.


최승호: 기본적으로 종편이건 조중동이건 총수가 지배하는 체제에 있는 재벌신문들은 한계가 분명하게 있어요. 매체 자체가 총수가 가진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거든요. 미국의 <뉴욕 타임스>처럼 오랫동안 언론에 대한 철학을 가진 가문이 경영과 편집을 철저히 분리해 가면서 해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요. 언제든지 지배하고 있는 총수가 자기 의지를 편집에 관철시킬 수 있는 구조죠. 그런 의미에서 뿌리라는 걸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고 봐요.

 

종편이 가지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김용진: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종편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 하반기에 일부 박근혜 정권과 각을 세웠던 측면이 있지만요. 그 부분은 대한민국 사회를 장악해온 일종의 이익동맹들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결과로 보아야 할 거예요. 종편 입장에서도 박근혜 편을 계속 들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어요? 어쨌든 정권 자체가 기득권의 이득을 보장해줄 능력이 떨어진 정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엄호를 해주고 정당성을 찾아주려고 하다보면 우리까지 망하겠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겠죠. 그러므로 종편의 뿌리가 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해요.


최승호: 이번에는 상업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어요. <KBS>, <MBC> 같은 공영방송은 사장의 재산이 아니잖아요. 그게 사장의 재산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운영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자기 재산이 아니고 당장 몇 년 동안만 사장으로 있으면서 해먹고 가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대통령한테만 충성을 다하면 어쨌든 임기는 보장이 되거든요.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한테 충성을 다하는 게 자신의 할 바라고 생각하는 거죠. 반대로 종편 같은 매체는 총수가 이익을 얻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젊은 사람들은 종편을 안 보고, 국민들이 이렇게 화가 나 있는데 박근혜 정부와 계속 같이 간다는 건 상업적인 자살행위였던 거예요. 더 이상 함께 갈 수가 없는 거죠. 그렇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시 돌아가고 있잖아요. 역시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한 쪽으로 가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다른 종편과 <JTBC>는 또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이건 어떻게 보세요?


최승호: 상업적인 선택을 <JTBC>는 약간 다른 쪽으로 설정을 한 거죠. <TV조선>이나 <채널A>, <MBN>이 오른쪽을 장악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쪽이 장사가 안 되는 곳이에요.(웃음) 대부분 고령의 인구가 보는 매체니까요. 광고도 그렇게 돈이 안 되고 적자가 계속 날 수 있죠. 그렇지만 이쪽은 공영방송이 망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블루오션이라고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고, 광고도 많고요. 그러니까 <JTBC>는 이쪽으로 가려고 할 거예요. 그렇지만 이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보장할 수가 없는 거고요. 그곳도 원래 뿌리는 <중앙일보>인데 그곳은 나름대로 보수적인 색채도 굉장히 많은 매체니까요.


김용진: 상업언론, 오너가 있는 언론은 어쨌든 지금 환경에서 최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최대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거예요. 최순실 당시가 그랬고,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그렇겠죠. 만약 그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 토대에 위해가 가해지거나 영향이 축소되는 부분들이 발생한다면 그 매체의 힘을 이용해서 또 최대한 방어를 하려고 하겠죠. 그건 합리적인 선택인데요. 웃긴 것은 정작 공영방송은 그런 합리적인 선택을 못한다는 사실이겠죠. 언론이란 기본적으로 신뢰를 먹고 사는 건데 스스로 신뢰를 망가뜨리면서 어떻게 하려는 건지 말이에요. 공영방송에 대한 의식이 없는 거죠.


최승호 PD “권력을 비판하기는 쉽다, 어려운 것은 진실이다”- ②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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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PD “권력을 비판하기는 쉽다, 어려운 것은 진실이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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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김용진 대표 “정권이 바뀌었다고 적폐가 사라질까”- ①에서 이어집니다.

 

“기성매체의 언론 장악력 같은 부분들이 이전에 비해서는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김용진 대표의 말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언론도, 시민도 이 변화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이제 언론인에게는 이런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최승호 PD는 이에 대해 “사실을 전달하는 방식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해야죠. 생각과는 다른 진실을 들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이 그것을 팩트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라는 최승호 PD. 이런 설득과 이해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고 그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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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의 본가가 되기 위해


미디어 환경이 변화했고,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 공부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뉴스타파>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고 계세요?


최승호: 어떤 사안에 대해 깊이 파헤쳐서 뿌리를 제대로 밝힌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기존 언론들이 설사 정상화 된다손 치더라도 그렇게까지 밝히기가 쉽지 않거든요. 탐사보도를 좋아하지도 않고요.(웃음) 그러니 탐사보도 전문가가 기성 언론 속에서 길러지기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탐사보도의 본가 같은 <뉴스타파>가 계속 인력을 양성하고 새로운 탐사보도 주제를 파헤쳐 나가면서 시대를 개척해 나가야죠. 그렇다면 <뉴스타파>의 미래는 굉장히 밝다고 봐요. 오히려 시민들이 뉴스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과거처럼 주는 것만 받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만큼 차별성 있는 콘텐츠, 깊이 있는 콘텐츠를 내놓는 매체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평가해주는 시대니까요. 자신이 있어요.

 

김용진: 미국 같은 경우 <뉴욕 타임스>니 <워싱턴 포스트>처럼 탐사보도 잘하는 기성 매체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근래 들어 탐사보도만 전문으로 하는 매체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시민들의 후원, 지지로 운영되는, 탄력적이고 유연한 형태이면서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매체들이 굉장히 빨리 생기고 있고 굉장히 성공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역할을 달리 하며 언론 생태계를 조화롭게 가져가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겠죠. 한국의 언론 시장도 그런 식으로 재편되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우리가 시작을 했고, 선두에 있으니까 이 모델을 잘 정착시키고 확산시켜 나가고 싶어요. 

 

두 분이 탐사보도를 해오면서 실제 경험한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김용진: 충분히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증거들을 100% 확인한 후 보도를 하는데요. 막상 기성 매체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을 때는 힘들죠. 가령 삼성 이건희 회장 성매매 동영상 방송을 하던 당시, 삼성 측에 공식 입장을 여러 번 요구했는데 답을 주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쪽을 출입하던 기자들에게 삼성이 문자를 보내서 <뉴스타파>에 오늘 뭐가 나오는데 받아쓰지 말라, 는 협조 당부를 한 거예요. 심지어 그 사실을 문자를 받은 기자들이 또 우리한테 연락을 줬고요. 그럴 때는 상당히 힘들죠. 실제 극히 일부 매체를 제외하고는 보도가 안 나왔거든요. 며칠 뒤 삼성 측에서 공식적으로 ‘유감으로 생각하는데 회장님의 사생활이니 할 말이 없다’는 내용으로 입장이 나오니까 그때야 비로소 삼성 측 공식 멘트를 받아서 ‘이런 게 있었다’는 식으로만 나왔어요. 그럴 때는 한국 언론의 모습들이 좀 암담하기도 하고 그랬죠.

 

최승호: 사실 요즘은 언론인으로서 대중들로부터 비판 받을 수 있는 지점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또 때로는 대중들이 원하는 스토리가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있는데요. 그런데 그때가 권력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오히려 모두가 싫어하는 권력을 강하게 비판하기는 쉬워요. 정말 어려운 것은 대중이 갖고 있는 특정한 방향으로의 믿음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할 때죠. 저는 처음 그걸 겪은 게 황우석 보도 때였는데요. 대중의 마음속에 대단한 신뢰가 있던 분이 줄기세포를 조작했다는, 치명적인 내용을 보도해야 했잖아요. 그런데 그때 심지어는 ‘그게 사실이라도 방송하지 말라’는 요구를 대중들이 서슴없이 했었어요. 그런 부분이 굉장히 어려운 부분인 것 같아요.

 

최근에 그런 어려운 점을 많이 느끼신다는 말씀인가요?


최승호: 정치 지형이나 이런 것들에 따라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시는 분들의 경우 그쪽에 대한 비판을 굉장히 싫어하시는 거죠. 그게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런 현상이 요즘 한국 언론을 많이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해야 한다는 언론인으로서의 기준이 있겠죠?


최승호: 그렇죠, 또 중요한 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 생각하는 부분인데요. 사실을 전달하는 방식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과거 ‘내가 이런 걸 밝혔다!’는 듯이, 뽐내듯이 통쾌한 느낌으로 보도를 했다면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듣는 사람 입장에서 해야죠. 생각과는 다른 진실을 들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이 그것을 팩트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또 다른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굉장히 겸손하게, 많이 생각하고, 아주 낮은 자세로 이야기 해야겠구나, 그래야 수용이 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최승호: 정말 어려운데요. 사실은 그걸 제대로 해낼 수 있어야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요. 대중이 적개심을 가진 대상을 꼬집기는 쉽지만 그런 것이 세상을 그렇게 바꾸는 것 같지는 않고요. 대중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저 사람 얘기가 맞는 것 같다’, ‘다른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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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공기, 공영방송


특별히 시민들에게 바라는 점도 있을 것 같거든요.


최승호: 언론 자체가 불신을 초래했기 때문에 언론인이나 언론사가 전체적으로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봐요. 굉장히 큰 책임이 있어요. 이 불신이 더 심해지면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정도까지 갈 우려도 있거든요. 다만 그런 부분에서 언론이 갖는 원초적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낮은 자세로, 정말 엄정하게 모든 것을 많이 생각해서 보도하고 실수를 줄여서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언론이나 시민 모두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승호: 공영방송이 대단한 신뢰를 구가할 때는 통상적으로 보도를 하면 사람들이 믿었거든요. <KBS>에서 저렇게 말했으니 맞겠지, 하고는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요. 어떤 사안에 대해 사회적으로 쉽게 여론이 형성되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십 년 동안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없어져버린 거죠. 찾아서 헤매는 거예요. 믿을 수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서 팟캐스트도 들어야 하고, <뉴스타파>도 와서 봐야 했죠. 말하자면 예전에는 마을 공동의 우물이 있어서 누구나 안심하고 물을 떠먹으면 됐는데요. 지금은 우물을 완전히 오염시켜서 각자 산골짜기에서 쫄쫄 흐르는 물을 찾아 먹는 거예요. 그만큼 공을 많이 들여서 쌓아놓은 뉴스나 생각이기 때문에 언론에서 하는 얘기는 믿을 수 없는 얘기가 되고요. 불신이 굉장히 크죠. 대체로 신뢰 있는 뉴스라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믿을 수 없다는 걸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요.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새로운 숙제기도 하겠네요.


최승호: 우리에게는 기회기도 해요. <뉴스타파>는 그래도 그 과정에서 신뢰를 많이 얻어온 매체니까요.

 

앞서 잠깐 언급했던 영화 <공범자들>, 이제 개봉 막바지 준비 중이죠? 영화 제작 배경이 궁금합니다.


최승호: 다른 분야는 정부가 주도해서 해결해 나갈 수 있어요. 물론 국회와의 관계가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공영방송은 유일하게 세상이 바뀌었는데 동토의 왕국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아주 지독한 사람들이 국가의 공기라고 할 수 있는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박근혜 정권에서 했던 식의 보도를 지금도 하고 있고요. 사실은 공영방송을 정상화시키는 게 우리 사회의 다른 많은 부분 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영화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어요. 그동안 권력이 어떻게 공영방송을 장악했는지, 공영방송 내부에 있던 권력 추종 세력들이 어떻게 방송을 농단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최승호: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방송이라는 게 이렇게 망가지는 거구나, 이렇게 방송이 중요한 거구나, 이건 고쳐야겠다, 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실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영화는 잘 만들어졌으니(웃음) 영화를 많이 보시도록 하는 게 남은 저희의 숙제죠.

 

그 전에 영화 <자백>으로 간첩 조작 사건을 깊이 다루었는데요. 이와 비교했을 때 <공범자들>은 어떨 거라고 기대하세요?


최승호: <공범자들>이 <자백>보다 대중성은 더 있을 거라고 보거든요. 방송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까요. <자백>은 그에 비하면 약간 장애물이 있잖아요. 그보다는 일상에서 다루는 방송 이야기기 때문에 <공범자들>이 조금 더 장벽이 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해요. 한편 <자백>을 개봉할 당시는 너무 엄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우리라도 도와야지, 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그런 부분은 좀 덜해졌죠.(웃음) 어쨌든 그런 것들을 잘 이야기해서 보여주면 <자백>보다 더 많은 관객 수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도 영화 작업이 계속 되나요?


최승호: 그렇죠, <뉴스타파>는 제 생각에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산실이 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 프로젝트들이 대부분 몇 년이 걸리는 프로젝트들이잖아요. 그걸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찍기 시작하면 영화 만드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자백>도 3년을 찍었어요. 보통은 그렇게 한 사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찍을 수가 없죠. 영화를 처음부터 만들겠다고 작심하고 한다면 3년이나 찍다간 굶어 죽어요. 그런데 우리는 3년 동안 작업을 할 수 있잖아요. 약간만 더 생각하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1년 정도는 취재를 하고, 하다가 얘기가 된다고 하면 영화 생각을 해보면서 할 수 있죠. 그렇게 되면 앞으로도 충분히 굉장히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가령 4대강 문제가 그런 이슈 중 하나겠네요?


김용진: 4대강도 그렇고요. 조세 피난처도 그렇고, 이건희 회장도 그래요. 영화적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은 굉장히 많죠.

 

마지막으로 동료나 후배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최승호: 과거보다 인정받는 언론인이라는 자격을 얻기가 굉장히 어려워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냥 언론사에 들어가서 기자나 PD를 하면 언론인이라고 대접받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안 그렇잖아요. 그때는 대중들이 믿어줬으니까 그것이 가능했던 거고요. 지금은 대중들이 언론인을 안 믿어요. 항상 기사의 배후에 무슨 음모가 숨어 있는지, 누구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는지 의심하고 보는 거거든요. 때문에 그만큼 더 우리 언론인들은 자기 자신이 하는 언론 행위에 대해 스스로가 객관적으로 보면서 노력해야 해요. 실력을 길러야죠. 그 실력으로 독자들을 설득하지 않으면 생존하기가 진짜 어려워질 거라고 봐요. 대신 실력만 있으면 대중들이 평가를 해주니까요.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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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포기하지 않는 눈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 저 | 책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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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정희 “마음껏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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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만 정리해야 했어요

 

“어느 날 그 비밀이 온 세상에 공개됐다”라고, 그녀는 적었다.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바람은 조각나 버렸고,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현실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15년 5월, 하나의 동영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아니란 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호수 위의 백조처럼 쉼 없이 물 아래 다리를 저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의 물살은 더욱 거세졌고, 물 아래 다리만으로는 부족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더 이상 우아한 백조가 아니란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희』 12쪽)

 

이후 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정희는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길도 끝이 보였고,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빛줄기도 만났다. 『정희』는 다시 세상을 향해 내딛는 그녀의 첫 걸음이다.

 

“이전에는 누가 뭐라 해도 제 삶에만 충실했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된 부분이 있었죠. 설명하고 살지도 않았고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아프지만 꼭 정리해야 될 부분이 있었어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매일 하던 일과가 글을 쓰고 묵상하는 거였어요. 그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막바지에 이르러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숨고 싶었어요, 영원히. 그런데 숨을 수만은 없었던 거예요. 버티고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순간들을 잊어버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많은 사람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어도 잊어버릴 테니까요. 그리고 인생 전반을 정리하고 새로 출발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어요. 저처럼 말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분들과 아픔을 같이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마음이 불붙이듯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녀 위로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위로의 목소리 사이에 힐난의 목소리도 섞여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다 가식이었냐고, 왜 참고 살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너무도 쉽게 뱉어진 말들이었다. 32년 동안 한 여성이 지켜온 삶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정희는 맞서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항변하지도, 당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정희』를 보며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유’는 짧은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유년 시절의 경험, 결혼 이후 벌어진 사건들, 엄마로서 느끼게 된 감정 등 수많은 요소들이 작용했다. 그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책 속에 담겼지만, 서정희에게는 ‘엄마’라는 한 단어로 귀결될 뿐이었다.

 

“가족에 대해서, 특히 남편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가장 좋은 남편으로 보여지기를 원했고, 그게 저의 자존심이자 제 가정을 지키는 하나의 힘이었다고 생각돼요.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계속 살았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끝까지 이야기 안 하고 살 수 있어요. 이 땅의 엄마들은 다 똑같아요.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 헤어졌을 거예요. 아니, 뛰쳐나왔을 거예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힘들면서도 왜 살았냐고, 그건 가짜 아니냐고 말씀하시잖아요. 제가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 가정을 지켜왔던 거예요. 여전히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게 가정을 지키고 있고, 저도 그래요. ‘엄마였기 때문에’라는 말 외에는 대답할 말이 없어요. 엄마의 입장이 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겨요. 제가 여자라는 입장으로 돌아가면 못 받아들여요. 그런데 엄마라는 입장으로 보면 감당이 되더라고요. 그게 엄마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엄마이기 때문에’ 그녀는 절망적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결혼 생활이 지속될 때에도 끝이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딸 동주는 “엄마가 이제 한 여성으로서 세상에 발을 내딛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하며 응원을 보냈다. “열여덟 살에 멈추어버린 엄마의 시간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며, 지금의 자신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여자 서정희’의 또 다른 시작을 기뻐했다.

 

“아이들이 항상 저를 위로해줬어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 ‘그래도 해야 돼’ 하고 밀어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제가 힘들 때 다독여줬고, 힘드니까 쉬라고 했고,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고 계속 격려해줬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정말 친구예요.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해요. ‘나는 엄마가 어른인 줄 알았어, 그런데 우리를 낳을 때 엄마도 어렸잖아’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면 짠한 마음이 드나 봐요.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나눌 때 친구가 되어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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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가 자기 안의 이야기를 삼키고 또 삼키는 동안, 대중의 오해와 편견은 공고해졌다. 서정희는 비로소 『정희』를 통해 입을 떼었다. 자신의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 결국 이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솔직하고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아직까지 비난이 일고 있는 ‘쇼핑몰의 전말’에 대해서도 밝혔다. 당시 가계 상황이 좋지 않았고, 그녀의 이름과 살림으로 쇼핑몰을 운영하라는 남편의 강요가 있었다.

 

어떤 물건을 판매할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는 내가 아끼는 살림을 내놓으라고 종용했다. 서정희가 쓰던 물건이라고 하면 잘 팔릴 거라고 말했다. (중략) 그의 속내를 알게 되자 나는 당장 쇼핑몰을 접고 싶었다. 역시 주도권이 없는 내 의견이 통할 리 없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직 열지도 않은 쇼핑몰이 망하길 빌었다. 화가 나 어쩌지 못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내가 생각하는 가치만큼의 가격을 매기자는 것이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일 수 있었다. 그러나 손때 묻은 자기 물건의 가치는 누구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희』 133~134쪽)

 

‘서정희 쇼핑몰 폭리’, ‘서정희 쇼핑몰 사기’ 등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대중에게 그녀는 ‘폭리를 취하는 사기꾼’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서정희는 “하나도 팔리지 않은 채 오픈하자마자 문을 닫아 실제 피해자가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고 말할 뿐, 비난의 화살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이혼 준비 중에 비밀을 보장 받으면서 따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개를 안고 가는 사진이 공개됐는데, 당시에 사진 속 강아지는 이미 죽고 없었거든요. 그런데 마치 제가 그 날 강아지를 안고 검찰에 조사 받으러 간 것처럼 된 거예요. 사람들은 ‘지금 강아지를 안고 갈 정신이 있느냐’고 했고, 법조계의 한 교수님은 ‘이 상황에서 개를 안고 조사를 받으러 가는 서정희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분석하는 인터뷰도 하셨죠. 그때와 마찬가지로, 쇼핑몰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도 저한테 물어본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대답할 기회도 없었고,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논란이 생긴 거죠. 쇼핑몰에 올려둔 제 살림에 대해서는 안 팔겠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비싸면 안사겠지’라는 생각으로 가격을 정했던 거고, 레깅스나 물 같은 건 국내에서 판매되는 가격과 동일하게 책정했었어요. 그런 이유에 대해서 확인하는 절차 없이 기사가 나갔어요. 시간이 지나가면 오해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계속 남아있는 상태에서 악플러들에 의해서 활용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명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에서도 언급한 거고요.”

 

유명인이 아니었다면 덜 상처받을 수 있었을까. 적어도 어딜 가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SBS <불타는 청춘>을 통해 방송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보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다시 방송 활동을 재개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딱히 방송 생활을 한 건 없어요.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없고 MC를 한 적도 없어요. 유일하게 한 건 광고와 특집 프로그램, 책 출간이에요. 오히려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시는 게 신기할 따름이죠. <불타는 청춘>에 나가게 된 건, 울릉도에 가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용기가 안 났었어요. 여전히 저는 혼자이기도 하고요. 친한 분들이 스태프로 계셔서 출연을 결심하게 된 것도 있고, (집 밖에서) 자고 오는 건 안 해봤으니까 혼자 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제가 세상에 나오면서 지금까지 안 했던 것들에 도전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였던 거예요. 방송 아닌 다른 일에도 저는 여전히 도전을 하고 있거든요. 지금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렇고요.”

 

쉰다섯의 나이, 서정희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마치 세상과 처음 만난 아이처럼 그녀는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즐겁게 배우는 놀이에 빠져있다. 그림을 그리고, 발레를 하고, 성악을 배우고, 운전을 익히면서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다.

 

“한동안은 해방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누군가의 코치를 계속 받아야 될 것 같은 느낌이 저를 지배하고 있었어요. 나보고 나가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나갈 수 있겠는가, 자라고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 매일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의 1년 넘게 밖에 나가지를 못했어요. 자유를 만끽하고 행복을 느낀 지 얼마 안 됐어요. <불타는 청춘>에 제가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고 많은 분들이 오버한다고 생각하시지만, 내 감정을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입에서 먼저 소리가 나가기 때문에 제가 다스릴 수가 없어요.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는 살아야 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소리가 나올 때 질러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마음껏 지르니까 재미가 붙어서 막 표현하는 건데(웃음), 이번에 울릉도 다녀와서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다 질러봤으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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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희니까!


어떤 일을 하든 특유의 감각을 발휘하는 그녀를 지켜보면서 지난 시간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고립무원’에 있었다는 그녀의 표현 그대로, 열여덟의 소녀는 재능을 펼쳐볼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채 갇혀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러나 서정희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밖으로 나갔다면 재능이 발견되거나 개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고립무원의 골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몰입할 것을 찾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다양한 일들을 했던 거예요. 살림을 하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죠. 저한테 재능이 많다고 하셨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건 지난 시간들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부터 능력이 있거나 똑똑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고 해도 인정할 만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꽃꽂이도 글쓰기도 인테리어도 배운 적이 없지만, 고립된 나를 일으키기 위해 싸웠던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것 같아요.”

 

“지금은 나를 사랑하는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서정희.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해주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 속에서 ‘정희’라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고, 자신만의 스타일과 꿈도 더욱 선명해졌다. 남편과 아이들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그녀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은 음식도 엉터리로 먹어보고 꾸미지도 않고 살아봤어요. 그런데 그건 제가 아니더라고요. 역시 제가 갖고 있는 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도전적인 모습이에요. 그것들을 포기하기 싫어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정희니까’ 하고 생각해요. 어떤 분들은 저한테 ‘보스베이비’, ‘미친 동안’ 같은 닉네임을 붙여주시는데, 예전에는 거부감이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정희니까’ 하고 받아들여져요. 옛날에는 서로 등 돌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마주보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저의 독특한 부분들을 공유하는 거죠. 그것들을 후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어요. 다시 일으켰어요. 그리고 더 예뻐지게 노력할 거고, 더 많이 도전할 거고, 1년을 10년 같이 살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용기를 내지 못하거나 꿈을 꾸지 못하는 분들에게 제가 그랬던 것처럼 같이 일어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자신과 같은 여자들의 조력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실패한 여자건, 성공으로 가는 여자건 쉰이 넘은 여성들의 뷰티, 패션, 삶의 모든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할 수 없는 부분 앞에서 무너졌었어요. 예전에는 ‘할 수 있어, 이겨내자’ 하면서 힘을 냈는데, 쉰이 넘어서니까 ‘안 되는구나’ 싶더라고요. 눈앞의 결과에 대해서 포기하면서 인생을 접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게 되고요. 아이들 시집장가 보내고 나니까 이제 할 거 다했다는 생각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느낌도 있었어요. 그리고 갱년기가 오고 여성으로서의 모든 것이 끊어진 상태에서 힘이 들기도 했고요. 무력감 때문에 외출하기도 싫고 폭식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패턴이 많이 달라졌죠. 들떠서 잠이 안 올 때도 많고요. 많은 일들에 호기심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처음 50대를 맞았을 때 가졌던 극단적인 마음과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포기를 하든 그러지 않고 자신을 일으키든, 결국은 내가 선택하는 거잖아요. 자신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와 함께 살 때는 커다란 구둣발에 밟혀 상처가 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멀쩡한 척했다. 이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든 지나칠 필요 없이 내 모습 그대로 내가 가진 만큼만 보여줄 수 있어서 편안하다. 해피엔딩을 꿈꿨던 시나리오는 폐기처분됐다. 결혼도 이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괜찮다. 인생이란 정해놓은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쉰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하게 호흡하는 법을 배웠다. (『정희』 86쪽)

 

한때 백조를 꿈꿨던 그녀는 이제 “하늘을 날며 노래하는 작은 새처럼 자유롭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는 다른 이에게 내 삶을 걸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해가면서, 그렇게 “진짜 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지금 저는 다시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서 도전을 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도전하고 싶어도 못 하는 시기가 있으니까, 그런 분들에게 ‘그 힘듦 속에도 뭔가가 있을 거예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직 발견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스쳐가는 것들 중에 나의 전문성이 드러나는 일들이 있을 거거든요. 남과는 또 다른 것들이 있을 거고요. 그걸 많이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서 강의도 많이 하고 싶고, 책 쓰는 일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어떤 방송이든 저를 필요로 하거나 원하면 출연할 거고요. 옛날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악플이 달렸으니까’ 하고 위축돼서 (방송에) 못 나갔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고 악플러들과도 함께 가는 거죠. 저한테 상처 준 사람과도 같이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저의 10가지를 미워했다가도 9개만 미워하게 되고, 점점 나아지겠죠. 다 미워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요.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미울 때가 있잖아요(웃음). 그러니까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극대화시키지 않고 같이 갈 거예요.”

 

“정희는 오늘도 도전합니다”라는 말로 웃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한 그녀. 마지막까지 그녀가 전하고 싶어 한 이야기는 ‘가족’과 ‘엄마’에 대한 것이었다.

 

“가정 공동체는 꼭 지켜야 하고 해체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엄마는 누가 뭐라 해도 엄마여야 하고요. 용기를 잃으면 안 되죠. 분명 어딘가에는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하면 저처럼 실수할 수 있고 아플 수 있으니까, 함께 방법을 찾고 치료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건강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과정을 같이 만들어 갔으면 좋겠고요. 제가 잘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 너무 못했기 때문에 아는 것들이 있거든요. 저는 이 땅의 엄마들이 엄마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엄마를 포기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엄마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에 『정희』라는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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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서정희 저 | arte(아르테)
『정희』에서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삶에 씌웠던 완벽이라는 가면을 벗고 3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힘들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그녀는 그 기간 동안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이혼 수속을 밟았으며,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 책에는 그 절망의 시간을 버텨낸 사람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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