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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행복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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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자들이 꾸뻬 씨의 여행 시리즈를 접하며 작가인 프랑수아 를로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꾸뻬 씨와 같이 작가의 직업 역시도 정신과의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도 있다. 꾸뻬 씨가 처음 여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행복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였다면, 그가 처음 책을 쓰게 된 것은 현대인의 정신질환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글을 쓴 것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의 글은 정신과 의사로서 전문적이고 어려운 접근방식이 아닌, 꾸뻬 씨라는 인물이 여행을 떠나 행복과 우정, 사랑, 시간 등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경험으로 독자들에게 울림을 줬다. 그 결과 그의 책들은 전 세계 16개국에 출간 되며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작가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새로운 책 『꾸뻬 씨의 사랑 여행』이 출간 됐기 때문이다. 중년의 작가는 푸근한 아저씨의 느낌의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푸른 눈에 큰 코를 가졌으며 회색 빛 머리카락의, 익숙지 않은 인터뷰이였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느껴진 것은 그러한 첫인상 덕분인 듯했다.

인터뷰는 빠르게 진행됐다. “서울에 오게 돼 기쁘다”“여름의 한국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 인천 공항에서 느껴지는 바다 냄새가 인상적이었다”는 그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첫 질문을 던졌다. 허락된 시간이 짧기도 했지만, 궁금한 것이 많았다.




꾸뻬 씨와 함께한 시간들

사실 그의 책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은 우리나라에 지난 2004년 출간 이후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얼마 전 한 TV프로그램에서 소개되며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됐다. 이는 그만큼 우리나라 독자들이 행복에 대해, 그리고 삶 속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감정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편으로는 일상에 쫓기듯 살며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실제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지금보다 힘들었던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과거의 행복 기준은, 이를테면 ‘부자가 되는 것’과 같이 명확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시련이 닥쳤던 시기, ‘부자 되세요’가 인사처럼 유행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오늘은 정작 부를 이룩한 사람들조차도 진정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에서 작가님 작품의 인기를 알고 계실 텐데요. 실제 작가님께서 직간접적으로 접한 한국을 통해 느껴지는 한국 사람들의 고민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 세대의 분들이 엄청난 노력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완전히 다른 세계와 시스템에 적응해야했고 지금은 과거와 전혀 다른 시스템 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앞 세대와 달리 빈곤이나 가난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부모 세대와는 삶의 목적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죠. 그 상황에서 행복에 대해서 의문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집필하신 것이 2002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작가님께 꾸뻬 씨는 꽤 오래 된 친구가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처음 책을 썼을 때는 책을 쓴다는 사실 자체에 굉장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꽤 빠르게 책을 써냈어요. 물론 책을 내면서 제 주변에 친구들은 이 책의 이야기를 좋아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줄은 상상하기 힘들었기에, 더욱 놀랍고 행복했어요. 특히 10년 넘게 이 책의 인기가 이어질 줄은 예상치 못한 부분이죠. 더구나 제게 한국은 꽤 먼 나라인데, 한국 독자들에게도 사랑받을 거라는 것은 더욱 예상하지 못했고요. 제 책을 사랑해주시는 독자들 중에는 꾸뻬와 저를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게 있어 꾸뻬라는 인물은 실제 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존재에요(웃음). 하지만 또 한편으로 아주 어린 남동생 같은 존재기도 하죠.

꾸뻬 씨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 작가님께 다가 온 변화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됐다는 거죠. 꾸뻬 씨의 이야기를 처음 쓴 이후로 저는 가장 행복했던 취미인 글쓰기를 직업으로 만들 수 있었거든요. 이제는 제 가장 중요하고 큰 활동이 되고 있고요. 또 여행을 하면서 큰 걱정 없이 살고 있다는 점이 달라진 것이죠.

꾸뻬 씨를 통해 작가님은 행복과 인생, 우정, 시간, 그리고 사랑 등의 여행 시리즈를 발표하고 계시는데요. 작가님께서 꾸뻬 씨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그 외에도 더 있을 듯 한데요.

다음 이어질 꾸뻬 씨의 이야기는 삶에서 겪는 인생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꾸뻬 씨도 나이를 먹기 때문이죠. 이 이야기는 이미 독일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는데요. 꾸뻬와 아내 클라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대학생이 되고 독립을 하게 되면서 꾸뻬 씨가 겪게 되는 새로운 문제들을 다뤘습니다. 아내인 클라라 역시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살아가고 있지만, 꾸뻬 씨는 문득 ‘내가 이렇게 늙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고민과 함께 중년의 위기를 겪게 되죠. 그러다 삶을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바꿀 것인지를 갈등하게 되는 이야기에요.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최근 그가 한국에 출간한 『꾸뻬 씨의 사랑 여행』과 함께 그는 이제까지 행복을 비롯한 우정과 시간 등 다양한 개념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꾸뻬의 치유여행 시리즈를 세상에 내 놓았다. 각각의 주제들이 모두 진지한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사실 이는 초기작인 『꾸뻬 씨의 행복 여행』에서 조금씩 다뤄졌던 것이기도 하다. 즉 그가 이제까지 다뤄온 많은 주제들은 국적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갈구하는 것이고, 한편으로 서로 크고 작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중 행복은 가장 상위의 개념이 아닐까 싶다.

이제까지 써오신 책의 주제들은 어쩌면 국적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처음에 꾸뻬 씨 이야기를 시작을 했을 때 이미 다른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한 것이 사실이에요. 처음 행복에 대한 이야기에서 꾸뻬 씨는 친구가 있었고 그런 관계에 의해 우정이라는 다른 주제를 생각하게 된 것이고요. 또 첫 책 안에서 사랑에 빠진 여러 관계를 통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됐죠. 하지만 시간에 대한 주제만큼은 첫 번째에 자주 등장하지 않은 데, 당시는 꾸뻬 씨가 굉장히 젊은 의사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오면서 또 그것을 느끼면서, 지나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었죠.

시간이나 행복, 사랑까지도 모두가 원하지만 그것을 갖기 위해 추구하는 방법은 또 저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행복을 돈이나 명예로 찾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로 인해 그들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저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책 속에서 늙은 노승의 말 중 ‘행복은 목적이 아니다’라는 교훈을 던집니다. 저는 때때로 행복이 폭정과 같이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우선 우리에게는 행복 뿐 아니라 괴로움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른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형태의 행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꽃으로 비유할 수 있죠, 사람 각자마다 다른 꽃을 가지고 있고, 진정한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그 다른 꽃을 하나의 꽃다발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다양한 행복의 비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혹이 작가님에게 행복은 어떤 것인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을까요.

개인적인 견해이긴 한데, 오늘날의 행복은 제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하면서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에는 행복이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예컨대 여행 같은 모험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지금에 비해 그때 저는 행복이 다른 사람, 다른 것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현대인을 위한 조언

신구 세대 간의 갈등을 비롯해 지역갈등, 정치적인 갈등 등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다양한 갈등에 포위돼 있는 듯하다. 점차 극심해지는 빈부격차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문제들은 결국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을 낳고 있다. 스트레스와 고민, 갈등 속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전문분야와 관련된 질문을 통해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한국은 좋은 점도 많지만, 한편으로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기도 합니다. 우울증이나 정신적인 문제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문화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기피하기도 하고요. 그런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요?

프랑스 역시 정신적인 문제는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고 숨겨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그런 문제들이 숨기는 경우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살을 했을 때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경우죠. 제가 상담을 했던 환자들을 중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것을 30년이 넘어서 알게 된 사람도 있었어요. 한마디로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프랑스도 같은 상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살예방은 좀 더 광범위 한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미디어의 영향이 큰데요.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할 때 도움을 청하고 상담 전화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디어를 통해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인식을 사람들 사이에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세계 각국은 비슷한 문제와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치열한 경쟁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경쟁을 피할 수도 없는 것이 현대인의 삶인데요.

굉장히 균형을 잡기 힘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는 국제적인 경쟁 시대에 살고 있어요. 모든 나라가 경쟁을 피할 수 없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성실이 일해야 하고 생산적인 나라가 되어야만 했죠. 산업혁명 후에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요즘 역시 한 나라가 얼마나 발전 했는지에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지위 역시도 좌우되는 상황이죠. 경쟁이 불가피하다지만, 다만 너무 과도하게 되면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되고 불평을 낳게 됩니다. 이런 것 때문에 균형을 잡기 힘들다는 것이죠. 정부로서는 적절한 안배가 필요해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의무가 있고 한편으로 국민들이 너무 힘겹지 않게 해야 하는 의무도 있으니까요.

사랑에 대한 주제로 새롭게 발표한 『꾸뻬 씨의 사랑 여행』도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여전히 사랑하면서 결혼을 원치 않는 행동은 무책임하게 여겨지지만, 또 한편으로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결혼에 대해 이전 세대들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향 때문이라 생각하시나요.

프랑스도 역시 결혼을 점점 하지 않는 추세에요. 그 중 한 가지 이유로는 1970년대 반문화 운동으로 전통적인 제도와 교육을 거부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결혼이라는 제도가 부르주아적이고 위선적이라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또 다른 요소는 이혼이 증가한다는 것이에요. 요즘 젊은 세대 중에는 부모가 이혼한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런 영향으로 결혼이 줄고 있기도 하죠. 세 번째로는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압박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런 압박은 과거에 비해 굉장히 줄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젊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분이 많이 경감됐죠. 과거에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부모와 갈등을 일으키고 심지어 부모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런 압박이 적고 결혼에 대해 좀 더 자유로워진 사고방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한국이 꾸뻬 씨의 여행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사실 꾸뻬 씨 이야기 중 우정 여행에서 한국이 잠깐 경유지로 등장한 적은 있어요(웃음). 아마도 다음번에는 한국이 주 무대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북한으로의 비밀 여행 같은 것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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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행복 여행프랑수아 를로르 저/오유란 역 | 오래된미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가 행복의 참된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저자는 정신과 의사이다. 늘 불안한 심리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심리학적 설명보다 한 편의 이야기가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환자들을 진료하며 얻은 경험과 생각들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현재 1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현대인의 복잡한 심리의 핵심을 짚어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그림책 작가 권윤덕 “우월해서 살아남은 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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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8월 15일 개봉하는 영화 <그리고 싶은 것>은 작가 권윤덕이 그림책 『꽃 할머니』를 펴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2007년, 한중일 작가들이 ‘평화’라는 주제로 그림책을 동시 출판하기로 했고 권윤덕 작가는 위안부 피해여성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그렸다. 대학 졸업 후 오랫동안 미술운동을 했던 권윤덕 작가는 대중과 소통하는 미술을 꿈꿨고, 그림책 작가가 됐다. 그림은 글에서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우고, 독자 나름의 상상력을 품게 한다. 권윤덕 작가가 그림책이란 장르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1995년 작 『만희네 집』으로 국내 그림책 작가 1세대를 연 권윤덕 작가는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시리동동 거미동동』『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일과 도구』등을 집필하며 옛 그림의 미감을 살린 동양화풍 그림을 선보였다. 민화 기법을 사용한 세밀한 묘사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하지만, 이야기의 깊이는 더욱 확장됐다. 『피카이아』에서 권 작가는 각기 다른 고민을 갖고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펼친다. 부모님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지만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민이, 친구들과의 경쟁 문화가 힘든 미정이, 아빠의 실직으로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는 채림이 등 여섯 명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는 좀처럼 말할 수 없는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 혁주로부터 여리고 작은 생명체 ‘피카이아’의 존재를 듣게 된 아이들은 자문한다. ‘나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걸까?’ ‘특별하지도 우월하지도 않은 피카이아가 살아남았듯이 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피카이아』는 독자층을 청소년으로 한정 짓지 않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른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또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존재에 대한 물음이 생길 때, 『피카이아』를 펼쳐봐도 좋겠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며, 치유하며 성장하고, 사회를 만들어간다. 인간은 동물이고 곧 자연이다.’ 『피카이아』속 6개 이야기의 제목을 이어 붙이면, 인간의 존재를 정의하게 된다.

‘스스로의 생명 활동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
아마도 생명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되었을 거야.’

‘우리는 어쩌면 함께 살아가도록 진화했을 것 같아, 엄마.
친구들과 경쟁하려고 할 때보다 서로 도우려고 할 때 마음이 따듯해지잖아.’


삶의 장소를 옮긴 후, 빈 마음으로 그린 작품

『피카이아』는 작가님이 3년 만에 펴낸 그림책이에요. 책 후면을 보니 고마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순천, 포항, 인천 초등학교 아이들을 적으셨어요.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실제 아이들인가요?

그건 아니고요. 2010년 봄 무렵에 『꽃 할머니』원고를 넘기고 나서 제가 집을 나갔어요. 언젠가 결혼 전으로 돌아가보고 싶은 게 꿈이었거든요(웃음). 그 때 아들 만희가 대학생이 됐을 때였는데, 남편과 아들한테 허락을 구하고 3달 만 혼자 살아보기로 했죠. 근 20년 넘게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하고 살림에 매여 있었으니까 한번쯤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어요.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어서요(웃음). 그래서 순천으로 갔어요. 순천기적의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 프로그램에 참관인으로 불러 주셔서요. 도서관장님이 한 번 내려와서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덜컥 수락했죠. 딱 100일동안 지내다 왔어요. 잠깐 삶의 장소를 옮긴 셈이죠. 순천 초등학교 친구들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났고요.

참관했던 독서 프로그램이 『피카이아』에도 등장하는 골든 리트리버 ‘키스’에게 아이들이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었죠?

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던 개 이름이 실제로도 ‘키스’였어요. 도서관 근처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살고 있는 개인데,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 와서 아이들을 만났어요.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아이들이 각 학교에서 선정한 독서활동이 부족한 아이들이었거든요. 처음에는 정말 산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는데, 점점 키스와 함께하면서부터 집중력도 늘고 책 읽는 것에 관심을 보였어요. 어른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키스한테 하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키스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나요? 개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다는 게 쉽게 상상이 잘 안 되는데요.

처음부터 아이들이 책을 읽어주진 않았고요. 우선적으로 아이들과 키스가 친해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후 책을 읽어줬어요. 키스는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 분이 어렸을 때부터 키운 개에요. 날렵하지만 살이 많이 찐 할머니 개죠. 4학년 아이들이 키스를 안으면, 개가 아이한테 안기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개한테 폭 안기는 셈이에요. 그 모습을 보면 굉장히 재밌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요. 키스가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한 건 그 때가 처음이 아니고, 몇 회 진행된 상태였거든요. 키스도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날이면 도서관에 가기 전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맹인견이 사람을 위해 책임을 다하듯이, 키스도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이 꼬리를 흔들고 장난치는 걸 모두 참아내요.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해요.

작가님도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를 집필하기도 했고, 『피카이아』에서도 고양이가 아이들의 친구로 등장하죠.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나면 개를 붙잡고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친엄마 아닌 것 같다’고 하소연도 하고(웃음). 지금은 ‘진주’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진주가 유일한 말동무죠. 순천기적의도서관에서 독서 프로그램을 참관했을 때는 매일같이 근처 동물병원에 출근했어요. 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찰하려고요. 산책도 시켜주고 동물병원에 있는 다른 개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키스 말고 세 마리의 개가 더 있었는데, 모두 유기견이었어요. 주인이 억압을 하니까 적응을 못하고 점점 포악해진 거죠. 개들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잘 살리면, 좋은 품성으로 자랄 수 있는데 아이들도 그런 것 같아요. 보살핌을 못 받고 장점을 인정받지 못하니까 어긋나기도 하는 거고요. 독서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낯설어하고 적응도 못했는데, 끝날 무렵이 되니까 표현력이 부쩍 늘더라고요. 책에서만 봤던 문제아들이 아니었어요.

그럼 『피카이아』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작가님이 ‘키스’와 아이들을 만나게 됐기 때문인가요.

기적의도서관에서 아홉 명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아이들 이야기를 그대로 끌어오기에는 내용이 풍부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라날 때,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텐데, 그동안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에 초점을 맞췄죠. 순천에서 100일을 살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남편이 묻더라고요. 도대체 뭘 얻었냐고요(웃음).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얻었다기보다는 다 버리고 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생각했던 것들이 다 회의스럽고 어떤 것도 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사느냐, 이런 본질적인 문제까지 들고 일어나더라고요. 이전에는 주로 철학, 인문학을 공부했는데 우연한 계기로 진화론, 물리학을 공부하게 된 기회가 있었어요. 진화론을 접하면서 이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세상이 운행되는 질서를 과학으로 입증하고, 미시적인 세계를 증명하는데, 인간의 기원이라고 하는 게 과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나라는 것은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인지를 묻게 됐어요. 그러면서 ‘피카이아’를 알게 됐죠. 피카이아를 알기 전까지는 아이들과 함께 진행했던 프로그램과 아이들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다가, 점점 본질적인 문제로 확장됐고,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간이 살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를 고민하다가 『피카이아』가 나오게 된 거예요.

‘피카이아’는 무척추동물인데요. 그림책에서 엄마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혁주가 이렇게 말하죠. 피카이아가 인간의 먼 조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고. 작가님의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요.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스티븐 J. 굴드의 저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을 읽게 됐어요. 책 맨 끝 쪽에 피카이아 이야기가 두 페이지 정도 실려 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마치 불온서적을 보다 들킨 것처럼 가슴에 뭔가 ‘쿵’ 하고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특별히 우월하지도 않은, 겨우 5cm 정도 되는 척색 동물이 살아남아서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쳤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지더라고요.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버제스 동물군이 폭발적으로 생겨났다가 어느 순간 한꺼번에 많은 종이 멸종됐는데, 피카이아는 그 힘든 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거예요. 버제스 산에서 화석이 발견됐으니 그 화석을 보고 가설을 낼 뿐, 누구도 증명할 순 없죠. 그런데 스티븐 J. 굴드가 만들어낸 생각이 제겐 이렇게 다가오더라고요. 지금 키스와 함께 도서관에 있는 아이들이 살아서 견뎌낸 작은 생물과 일치가 됐어요.

따뜻한 느낌의 그림도 있지만 불편한 그림들도 있어요. 생간을 먹고 피를 마시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나 구제역, 옹이 투성이로 자라는 가로수, 윤이를 괴롭히는 끈적이오빠 등. 원래는 더 불온하게 그리고 싶었다고도 말씀하셨는데요.

결국 생각보다는 착하게 그려졌지만, 일상적인 상황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싶었어요. 낯설게 표현함으로 인해서 인간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구제역 때문에 동물들을 생매장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시골에서 사는 아이들은 이런 사건을 알겠지만 도시 생활을 하는 애들은 잘 모를 거예요. 동물병원에서 개들의 털을 밀잖아요. 미용사 분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개들도 털을 밀 때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개가 털을 빡빡 밀고 나오면 살이 그대로 드러나잖아요. 마치 사람의 몸이 연상돼요. 온 몸의 털을 밀어버린 사람의 형상과 다름 없죠. 그렇게 사람도 새롭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번 그림책은 판형도 크고, 여백도 많이 살렸어요. 글 편집도 독특하게 배열이 됐고요.

보통 그림책의 경우에는 글과 그림이 한 페이지 안에 구성되어 있으니까, 그림을 보면서 동시에 글을 읽게 되죠. 『피카이아』는 글과 그림을 각각 다른 페이지로 배열했어요. 보통 동화책 같은 것은 부모가 아이에게 읽어주고, 아이는 그림을 보면서 마음껏 상상을 하잖아요. 하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는 누군가가 읽어주는 게 불편할 수가 있어요. 고학년,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음미하면서 읽고 싶고, 되새김질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그림 안에 글이 들어가는 형식이 아니라, 그림 따로 글 따로 작업했어요. 마치 그림뜨개질을 하듯이.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음미하면서 읽어 보세요

영화 <그리고 싶은 것>에 출연하셨어요. 작가님이 2010년 펴낸 『꽃 할머니』제작과정을 담은 작품인데, 광복절에 개봉한다고 들었어요. 위안부 피해자인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그림책인데 어떻게 작업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그림책 작가 활동을 하기 전에 미술운동을 하기도 했고, 많은 글 작가들은 작품 안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만, 그림책 작가의 경우에는 흔치 않거든요. 꼭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 말고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연령대가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작업하고 싶어요. 『꽃 할머니』는 2007년에 한국, 중국, 일본의 작가들이 각자 생각하는 ‘평화’를 그려내자는 취지로 기획된 책이에요. 제가 일본군 위안군 이야기를 그리기로 하자, 일본 출판사는 ‘무기한 출판 연기’를 통보하고 한동안 논란이 됐었죠. 영화도 거의 3년 동안을 계속해서 편집하고 후반 작업을 해서 이제야 개봉하게 됐어요.

대학에서는 식품과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광고디자인을 공부하셨어요. 그림책 작가가 되신 건 우연한 계기였나요.

학창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말리셔서 식품과학과를 가게 됐죠. 결국 졸업할 무렵에 다시 미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산업미술대학원을 가게 됐어요. 광고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글자 디자인, 표지 디지인 일을 하다가 1987년부터 안양미술문화운동을 하게 됐어요. 6,7년동안 만화도 그리고 데모 있으면 선전물도 그리다가 ‘그림책’ 장르를 알게 됐어요. 그림책 작가 활동을 하신 분들의 상당수가 지역에서 운동을 하며 민중미술을 하셨던 분들이에요. 전시장에서 만나게 되는 그림들은 한정적이잖아요. 주로 콜렉터들을 위한 전시니까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도 아니었고요. 그림을 가지고 어떻게 대중을 만나면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그림책 장르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피카이아』를 작업 하면서 가장 애착이 갔던 인물이나 그림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인물 중에는 윤이한테 감정이입이 잘 됐던 것 같아요. 글도 써놓고 나서 많이 고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사람보다는 자연물을 그릴 때가 좋아요. 나무를 그릴 때도 좋았고 흑두루미를 그릴 때도 좋았어요. ‘인간은 사회를 만들어 간다’ 편에서 채림이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으로 형상화된 흑두루미가 나는 장면이 있는데, 그림이 아니고는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잖아요. 저는 그림책이 참 좋아요.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니까, 쓰면서 그리면서 얼마든지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요. 매우 유연한 장르에요.

하지만 그림책은 동화책과 달리, 쉽게 접하긴 어려운 장르인 것 같아요.

대부분 부모나 교사의 추천으로 아이들이 그림책을 접하게 되는데, 쉽지 않죠. 좋은 그림책을 골라주는 것도 쉽지 않고요. 많이 사서 보기에는 비쌀 수도 있고요. 저는 개인적인 통로보다는 좀 더 사회적인 통로, 도서관 같은 공공시설에서 그림책을 자주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개인 사서가 있어서 아이들에게 맞는 책을 골라주는 시스템이 있으면 어떨까, 싶어요. 이번 독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아이들에게도 다양한 책들이 전달되면 참 좋은데, 그렇지 못한 사회구조가 안타까워요.

그림책 작가가 꿈인 독자들도 있을 텐데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일단 자기 일상을 아주 낯설게 보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매일 걷던 길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고 이상하게 보일 때가 있을 거예요. 착각이 들 정도로 낯설게 보는 연습이 필요해요. 그리고 아주 자세히 관찰하는 것. 사회가 됐든 사람, 자연이 됐든지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요.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쓰고 그려보는 거예요. 자기 손에 익을 정도로 훈련하는 게 필요하죠. 사회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는 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어요. 다른 사람이 본 대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입장을 취할지도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 『피카이아』를 만나게 될 예비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책에도 썼지만,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힘은 이미 우리 몸 속에 가지고 있어요. 과거에 엄청나게 힘든 일을 겪었어도 어느 순간, 그 힘들었던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서 내부 성장의 힘을 만들잖아요. 자신들을 들여다보고 믿었으면 좋겠어요. 잘 살아 남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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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이아권윤덕 글, 그림/전중환 감수 | 창비
『시리동동 거미동동』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 등으로 큰 사랑을 받아 온 작가 권윤덕이 3년 만에 새로운 형식의 그림책을 펴냈습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모여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닫고,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 가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이 가진 힘을 일깨우며 희망을 전합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윤성근 “그때의 청춘들은 누구나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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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속에 잠들어 있던 청춘들의 이야기가 깨어난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여주인공 후지이 이츠키는 한 권의 책을 통해 때늦은 고백을 받게 된다. 중학생 시절 그녀를 짝사랑했던 남학생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안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의 대출 카드 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두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랑은 책과 함께 남았고,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녀에게 가 닿았다. 결국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책이 가진 마법과도 같은 힘이다. 오랜 시간을 견뎌낸 책이 품고 있는, 시간을 붙들어 두는 능력이다. 책은 자신을 읽어 내려가던 눈길과 매만지던 손길을 기억한다. 그리고 빈 공간에 채워지던 새로운 이야기들을 비밀처럼 간직한다. 그 이야기와 마주하는 것은 다른 이의 손때 묻은 책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나보다 앞서 책과 만났던 사람들의 시간과 그 안의 감성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기도 하고, 새로운 화두를 얻기도 하며, 예상치 못했던 해답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가 헌책을 찾는 이유, 헌책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바로 그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의 옛 주인이었을 누군가가 남긴 메모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 말에 마음을 뺏겨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순간, 그리고 상상 속에서 이름 모를 그의 지난날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까지. 작가 윤성근은 지난 10년 동안 그 순간들을 기록해왔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의 주인이기도 한 그는, 헌책 속에서 의미 있는 글씨들을 발견할 때마다 직접 사진으로 찍고 자신의 감상을 적어 남겨두었다. 그 메모들 속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했고 누군가는 힘겹게 이별을 말했다. 자유와 고독에 대해 물어오는 이도, 현실의 무게 앞에서 이상에 대한 목마름을 토로한 이도 있었다. 작가는 그들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고민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때로는 감추어진 이야기들을 추측해 보기도 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얻은 커다란 즐거움과 깨달음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작가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안에 소중한 만남의 순간들을 담아냈다.

책 속에 남긴 문장이 편지이건 사랑고백이건 내가 보기에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내용이 모두 너무도 솔직하고 진심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때론 아주 짧은 문장을 보고서도 그 글씨를 쓴 사람에게 이끌려 깊은 상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경험을 한 적도 많다. 책 속에 글씨를 남긴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일은 셀 수도 없다. (p.15~16)


헌책방은 생명과 호흡이 느껴지는 공간

책 속에 남겨진 메모들 중에 작가님의 마음을 잡아끄는 글들은 어떤 것인가요?

읽어보고 진지한 내용일 경우에 사진으로 찍고 남기죠.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책들에는 그런 메모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니까요. 블로그나 SNS 같은 공간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쓰는 것과 블로그나 SNS에 쓰는 것은 성향이 무척 달라요. 블로그나 SNS에 남기는 글은 누군가 반드시 읽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쓰게 되잖아요. 그런데 책에 쓰는 글은 혼자서만, 아니면 그 책을 선물 받는 한두 명의 사람들만 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솔직하고 진지한 내용들이 많아요. 남에게 잘 할 수 없는 말들을 적어놓기도 하고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는 메모들을 보고 작가님이 느끼고 상상한 것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을 아끼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느꼈던 바를 쓰면서 ‘나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느끼시나요?’하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마 그렇게 썼더라면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줄어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상상했던 내용을 봄으로써 독자들의 상상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스포일러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웃음). 처음 썼던 원고에서 많은 부분을 덜어내고 짧게 줄였어요.

특히 작가님의 상상력을 자극했거나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글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황지우 시인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남겨져 있던 메모가 생각나요. ‘밥값으로 책 사다. 이틀간 밥 안 먹기. 책 읽기 두렵지만 그래도 읽고 싶다.’고 적어놨거든요. 그 옆에 ‘서강인’이라고 적어 놓은 것으로 봐서는 서강대학교 앞에 있었던 ‘서강인’ 책방에서 샀던 책이 아닐까 싶어요. 아마 서강대학교 학생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했죠. 당시 서강대학교에 다녔던 분들에게 들어보니까, 문학과지성사 책 한 권 값이면 학생 식당에서 밥 두 끼 정도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을 쓴 사람의 상황이 상상이 되더라고요. 저도 사실 그랬던 적이 많거든요. 이를테면 밥 먹는 것과 책 읽는 것 두 개 중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웬만큼 허기가 지거나 죽을 것 같지 않은 정도면 책 읽는 걸 선택할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70년대에 출간된 황석영의 『객지』에 헤어지자면서 보내온 편지가 쓰여 있는데, 책 안에 대여 학자금 신청서가 꽂혀 있더라고요. 책에는 다 싣지 못했지만 서너 장의 면지에 걸쳐서 편지를 써 놨어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경제력이 부족하니까 우리는 만나면 안 되겠다, 헤어지자, 하는 이야기죠. 내용에 알맞게 황석영의 『객지』를 함께 보낸 거예요.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에 대여 학자금 신청서와 연대 보증인 신청서가 들어가 있더라고요. 편지랑 같이 그 내용을 읽으면서 가슴이 짠했죠.


그런 순간에는 책의 주인을 찾아서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드실 것 같습니다.

정말 마음이 찡한 메모들이 있어요. 처음엔 그 책들을 다 가지고 있었죠.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게 아깝기도 하고, 메모를 쓴 분에게 미안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제 일이니까, 팔았죠(웃음). 그리고 책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이 메모를 보고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여지를 줄 수 있는 게 또 헌책방 일이니까요. 헌책방을 쓸모없는 책들이 모여드는 쓰레기장처럼 생각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저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돌아다니다가 헌책방에 다시 돌아온 책들에게서 어떤 힘을 느껴요. 모진 세월을 여행하면서 얼마나 위기가 많이 있었겠어요. 고물상에 넘어가서 파지가 될 수도 있었을 테고, 불타거나 물에 젖어서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결국 살아남아서 다시 돌아왔잖아요. 마치 역전의 용사와도 같죠. 그런 힘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헌책방은 죽어있는 책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엄청난 생명과 호흡이 느껴지는 곳이에요.




헌책방에서는 우연히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헌책방과 작가님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헌책방을 처음 다니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 때였어요. 그때 정릉에 살고 있었는데 저희 집 옆에 국민대학교 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어요. 그 형들이 헌책방을 많이 데리고 갔었죠. 그 무렵부터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 일명 빨간책이라고 하는 문고본을 모으려고 했죠. 당시에는 그 전집이 80권까지 나왔어요. 지금은 100권으로 출간됐고요. 그걸 모아보려고 했는데 새 책방에서 사면 한 권에 1500원~2000원이었거든요. 그 가격이 부담스러우니까 헌책방으로 갔죠. 거기에서는 한 권에 300원, 500원에 팔았으니까요. 그렇게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을 모으려고 헌책방을 많이 이용했죠.

‘책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헌책방에 모인다’고 하셨는데, 책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어떤 것인가요?

책을 사랑한다는 건, 책을 그냥 물건으로써가 아니라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생각하는 거죠. 헌책방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예전에 가지고 있다가 없어진 책이나 그 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 다시 열렬히 찾고 싶은 책들을 구하는 분들이 계세요. 어떤 분들은 몇 달에서 몇 십 년까지도 찾아다니는 경우가 있고, 그 물건을 찾았을 때 정말 헤어졌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눈물을 흘리시는 분도 있어요. 쿠라다 하쿠조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도 사연이 깊은 책인데, 처음에 그 책은 다른 헌책방에서 일할 때 인연을 맺었어요. 70세 정도 되신 할아버지께서 60년대에 나온 이 책을 찾아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사랑과 인식의 출발』은 유명해서 문고본으로도 많이 나왔는데, 반드시 60년대에 출간된 책을 구해야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유를 알고 보니까, 그 분이 젊었을 때 첫사랑에게 연애편지를 쓰면서 『사랑과 인식의 출발』의 한 구절을 베껴 쓰셨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대부분 그랬죠(웃음). 그래서 결국 몇 달 만에 찾아드린 적이 있었어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헌책방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책을 찾기 위해서군요.

그런 이유가 크죠. 헌책방의 최대 매력이라고 하면 우연적으로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우연한 산보』라는 일본 작가의 만화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산책이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새 책방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의도하는 책을 사러 가는 거잖아요.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도 원하는 책을 검색해서 사면 끝이죠.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책을 정보 습득의 의도로써 대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헌책방에서는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책이 나를 만나는 경우가 있어요. 헌책방에 오는 사람들은 자기가 찾는 책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찾는 책이 서가에 꽂혀있다면 그 책을 찾아서 기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주위에 있는 책들 중에 굉장한 연인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거든요. 그런 게 엄청난 매력이죠. 그리고 책이란 모름지기 그렇게 읽어야 되는 것 같아요. 정보 습득 차원에서 자기가 원하는 책만 읽어서는 지경이 그렇게 넓어지지 않거든요. 책이란 게 얼마나 많아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것을 우연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자기가 원하는 책을 쉽게 찾을 수가 없어요. 일부러 어떤 책을 찾아서 지경을 넓혀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죠.

작가님이 처음 책과 사랑에 빠진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 이후로 사람을 사랑하듯 책을 대하게 되셨나요?

고등학교 올라와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게 됐는데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이후로 ‘제대로 된 독서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좀 진지하게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저에게 책은 사람 이상이에요.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건, 그것이 한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만나다 보면 또 변하잖아요. 좋아해서 만났던 사람도 시간이 가면 변하기도 하고요. 변화무쌍한 게 사람이죠. 그런데 책이란 건 평생 변하지 않는 거니까요. 변했다면 내가 변한 거죠.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제가『변신』이란 책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을 때와 2학년 때 읽었을 때, 대학교 때 읽었을 때가 다른 거죠. 똑같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건 바로 책을 통해서 내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죠. 책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책은 그런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70~80년대에 쓰인 것들입니다. 작가님에게 그 시절 서점 혹은 헌책방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80년대에 저는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을 보냈어요. 당시 저에게 책방이란 꿈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자 삶의 일부분이었죠. 나중에 커서 헌책방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리고 대학교 앞에는 언제나 사회과학 서점이랄지 모임의 장소가 있었잖아요. 딱히 책을 사지 않더라도 그곳에 가서 게시판에 적힌 모임 공지를 보기도 했죠. 제가 90년대에 대학교를 다닐 때도 그런 문화가 남아 있었는데 ‘오늘 어디 술집에서 달리자’ 이런 게 써있는 거예요. 휴대전화나 호출기도 잘 없던 시절이니까요. 그리고 당시의 헌책방이나 사회과학 서점 같은 곳에서는 잡지를 만들어서 배포하기도 했어요. 신입생들이 읽어야 할 책들을 소개하는 팸플릿도 있었고요. 그런 문화적인 일도 굉장히 많이 했었죠. 그 시절에 저는 시간이 날 때면 거의 대부분 책방에 있었던 것 같아요.




헌책방을 찾는 이유는 삶의 여유

책에 쓴 누군가의 긴 편지를 읽을 때, 그것이 마치 내가 쓴 것인 양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손으로 쓴 글씨는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것은 마치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로 연애편지를 쓰는 게 좋으냐, 혹은 손으로 꾹꾹 눌러 쓰는 게 좋으냐 하는 문제와 같다. 누구라도 연인에게서 받는 편지는 손글씨이길 바란다. 이것이 바로 종이책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p.105)
헌책방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IT계열 대기업에서 근무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연봉과 직장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90년대는 벤처 열풍이 불 때였어요. 운이 좋게도 대학을 다니면서도 일할 수 있었죠. 그런데 아무런 가치관도 없었던 젊은 시절에 돈을 만지다 보니까 허랑방탕하게 썼던 것도 사실이에요. 돈을 많이 벌었던 만큼 빚도 많았어요. 많이 벌수록 씀씀이가 커지니까 그만큼 빚도 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영점(zero)으로 돌아가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까지 수집했던 책들도 처분하고, 헌책방을 시작했죠. 결정이 쉽진 않았어요. 특히 헌책방 초창기 시절에는 정말 돈이 없었어요. 저는 문 열어 놓으면 그냥 사람이 들어오는 줄 알았거든요(웃음). 사업이란 걸 처음 해 보니까 잘 몰랐죠. 헌책방을 시작하고 반 년 동안은 진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다시 회사 다니던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못 하겠죠(웃음). 몇 백만 원씩 월급을 준다고 해도 못할 것 같아요.

시간이 갈수록 헌책방들이 사라져가고,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기 때문일까요?

경제가 어려워져서 헌책방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것보다 헌책방을 찾는 이유는 삶의 여유인 경우가 많아요. 70년대, 80년대의 사람들은 굉장히 피곤하게 살았고 정치적으로도 구속된 상태였지만, 헌책방에 다닐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월급도 더 많이 받고, 삶도 풍요로워졌고, 책을 볼 수 있는 돈도 많이 있지만 헌책방을 찾지 않아요. 그런 걸 보면서 저는 ‘삶을 살면서 다른 데로 한 눈을 팔 수 있을만한 여유가 많이 줄어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더글러스 러미스가 쓴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이 있어요. 책 제목만 보더라도 얼마나 이율배반적이에요? 경제 발전이 많이 됐지만 지금의 삶은 전혀 풍요롭지 않거든요.

헌책방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필요한 변화는 무엇일까요?

일본의 경우처럼 전문적인 헌책방들이 많이 생겨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문 헌책방이라는 건 무시 못 할 경쟁력이거든요. 가끔씩 헌책방에 오셔서 책의 가격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분들이 계세요. 인터넷 중고서점 사이트에서 가격비교를 하는 거죠. 그런데 전문 헌책방에만 있는 책들은 가격 검색을 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사실은 가격 비교를 할 수 없는 걸 찾아야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 수 있죠(웃음). 헌책방은 책이 허투루 없어져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로써도 충분히 필요가 있어요. 외국의 경우에는 책이 한 번 태어나서 쓸모가 다하면, 곧바로 고물상에 파지로 팔려가는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출판사, 서점, 동네 서점, 헌책방, 도서관 이런 곳들이 다 연계되어 있어요. 일본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재고 서적이 많이 발생하면 고서 협회에서 구입을 해요. 그래서 협회원인 전문적인 헌책방들이 모여서 책을 거래하죠. 도서관에서 보관하다가 버리는 책들이 헌책방으로 가기도 하고요.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그런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차 갖춰나가면 좋겠어요.

헌책방에는 다양한 판본의 책들이 모여 있습니다. 특히 번역서의 경우에는 어떤 버전의 책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이 되는데요. 작가님만의 선택 기준이나 노하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일단은 많이 읽어보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위대한 개츠비』만 보더라도 김영하 번역본이 있고, 김석기 번역본이 있잖아요. 어떻게 번역하든 자기 취향에 맞는 게 좋죠.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려면 많이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막힘없이 잘 읽히는 책이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한두 장 정도 소리 내서 읽어보는 거예요. 눈으로 읽을 때하고 는 다르게, 소리 내서 읽다 보면 버벅 거리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눈으로 볼 때는 글자를 이미지화해서 읽기 때문에 그런 경우를 포착해 내기가 쉽지 않아요. 소리 내서 읽어 보면 문장의 완성도를 알 수 있죠. 뛰어난 번역가들이 번역한 글은 문장이 자연스럽고 쉬워요. 안정효, 이윤기, 김석희 같은 분들이 번역한 책들이 그렇죠. 세 분은 소설가이기도 하시잖아요. 소설가로 데뷔를 하고 소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문장을 잘 구사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고수들이 쓰는 방법은 또 따로 있는데요. 진정한 고수는 한두 장 정도는 원서로 읽어봐요. 그러면 실제 원작자가 어떤 식으로 문장을 구사했는지 알 수 있거든요.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지금 출판계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 같아요. 70~80년대만 하더라도 사회과학 책들의 출간이 활발했어요. 그때는 거의 운동의 개념으로 열정을 가지고 출판하시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그 시기에 진짜 좋은 책들이 많이 번역돼서 출간됐어요. 다시금 나와 줬으면 싶은 철학이나 사회학 책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돈이 안 되니까 못 나오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너무 돈에 좌지우지하는 출판계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출판사들이 더 이상 독자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 이유는 독자들이 예전보다 주체적인 독서를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대부분 언론에서 소개하는 베스트셀러 위주로 독서가 이루어지잖아요. 예전에는 정말 주체적인 독서를 하는 독자들이 많았어요. 자기가 읽을 책은 자기가 직접 선택했죠. 그렇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독자들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고요.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삶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청춘들을 위한 책 『마의 산』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에는 20~30년 전 청춘들의 감성과 시간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시대의 청춘 독자들에게는 어떤 책을 추천해 주고 싶으신가요?

대학생들은 여름 방학이 길잖아요. 이렇게 시간이 많을 때, 평소에는 읽기 부담스러운 분량의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거든요. 제가 추천해 드릴 책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입니다. 한스 카스토르프라는 20대 중반의 청년이 주인공인데요, 여름을 맞아서 스위스의 요양소에 있는 사촌을 만나러 가게 돼요. 원래는 3주 정도 다녀오려고 했는데 병이 옮는 바람에 몇 년 동안 기거하다시피 머물게 되죠. 그러면서 삶에 대해서 성찰해 보게 되는 내용이에요. 배경이 시원시원한 스위스의 요양소이기 때문에, 이 여름에 재밌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 『마의 산』은 을유문화사에서 완역이 나왔고요. 제가 추천해 드리는 건 예전에 삼중당 문고에서 문고본으로 나온 3권짜리 책이에요. 세로쓰기이긴 하지만 갖고 다니기도 편리해서 여행지에서도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마의 산』을 통해서 치열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는 어떤 것인가요?

책의 주인공은 별 고민 없이 살았던 청년이거든요. 그런데 요양소에서 병든 사람들과 죽어나가는 사람들, 시니컬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돼요. 그런데 요즘의 청년들은 ‘대학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취직해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이 거의 최우선이거든요. 취업에 대한 고민,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물론 해야겠죠. 그런데 사실 그런 고민은 우리의 한 평생이나 인간이라는 것의 커다란 면면을 봤을 때는 극히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사람이라는 게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 것인가, 나의 어떤 철학을 삼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것을 하든지 자기만의 철학이 밑바탕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그 밑바탕은 확실히 젊었을 때 마련해 두어야 하는 것 같아요. 나이 먹고 나서 철학이 바뀌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서 젊었을 때 많이 고민을 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안에 담긴 20~30년 전의 메모들이 오늘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게 될까요?

책에 실린 글을 남기신 분들은 아마 지금쯤 중년 이상의 나이가 되셨겠죠. 그분들 중에는 이 책에 썼을 당시의 마음과 고뇌를 그대로 간직하고 사시는 분들도 더러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많이 변하셨겠죠. 생각도 많이 달라지셨을 수 있겠고요. 그분들은 이 책을 보면서 ‘내가 그때 이런 진지한 고민도 많이 했었구나, 삶을 이렇게 애틋하게 살았구나’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면서 앞으로의 남은 삶을 다잡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고요. 젊은 세대는 ‘그 때는 선배들이 책 하나를 읽더라도 이렇게 진지한 고민을 하면서 삶에 열정을 가지고 살았구나’ 하고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지금보다도 훨씬 억압받던 시대에 선배들이 가졌던 고민과 고뇌를 들여다보면서, 휘발성 있는 시대에 진지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어떤 의미에서는 세대 간의 격차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을 통해서 젊은 세대는 선배들을 이해할 수 있고, 선배들은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하고 젊은 시대를 이해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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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윤성근 저 | 큐리어스
[응답하라 1997]에 열광하고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수첩』에 감동했던 사람이라면 반가워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1980, 90년대의 향수를 듬뿍 담은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가 바로 그 책. 독서 에세이를 출간한 저술가이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윤성근 씨(39)가 헌책 속에서 찾아낸 옛 주인들의 메모를 모은 책이다. 1980, 90년대를 청년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아, 이 책” 하고 무릎을 칠 만한 책들이 대부분이지만, 거기에 쓴 글씨들은 2013년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남녀들의 마음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성주 민국이 “에 유일하게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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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쏙 빼 닮은 ‘독서왕 민국이’ 


“민국이의 지금 모습이 저 어릴 때 얼굴과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돼요(웃음). 민국이 할머니는 민국이를 볼 때마다 놀라요. 저랑 너무 닮았다고. 저도 가끔은 깜짝깜짝 놀라요. 생김새는 물론이고 하는 행동도 많이 닮아서요(웃음). 보통 아빠들이 그렇잖아요. 나랑 똑 닮은 자식 보면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 민국이를 볼 때 그런 마음이에요. ‘내 DNA를 가진 나의 2세가 있구나’ 뭐 그런 마음이죠.”


<아빠! 어디 가?>의 맏형 민국이와 아빠 김성주가 예스24 모델로 발탁됐다. <아빠! 어디 가?>에서 책벌레로 불리는 민국이는 촬영이 있는 날에도 가방 한 가득 책을 넣고 다니는 열혈 독서왕. 민국이는 광고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 스태프들로부터 ‘진정한 인터넷서점 모델’이라며 찬사를 받았다. 


  

“민국이 같은 아들이 어디 하늘에서 툭 튀어나왔겠습니까? 저도 학창시절에는 책을 많이 좋아했어요(웃음). 물론 민국이 정도는 아니었지만요. <아빠! 어디 가?>촬영을 갈 때 유일하게 허용되는 게 책이라서 민국이가 좋아하는 책을 몇 권씩 꼭 챙겨가요. 그런데 바깥 활동하다가 숙소에 들어오면 조금은 쉬어야 하는데, 무조건 민국이는 책만 보니까 몇 번 혼낸 적도 있어요. 적당히 좀 하라고(웃음). 그래도 그렇게 좋아하는 책이니까 못 말려요.”


민국이가 요즘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민국이는 “제로니모라는 주인공이 여러 가지 모험을 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이집트를 가기도 하고 용도 만든다. 책은 두껍지만 정말 재밌다. 친구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은 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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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이가 읽는 걸 봤는데, 꽤 두껍더라고요. 그걸 열 몇 권을 읽는 게 신기할 정도에요. 거의 닥치는 대로 읽으니까요. 요즘엔 『태백산맥』같은 책도 아동용 만화로 나오잖아요. 그런 책을 읽고 역사에 대한 질문을 마구 쏟아내는데, 가끔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곧잘 해요. ‘민국아, 이 책은 좀 더 커서 읽어’라고 말할 정도라니까요.”


민국이는“독서가 좋은 이유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빠가 가장 좋을 때는“장난감을 사줄 때와 칭찬 해줄 때,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주문해줄 때”라고 한다. 김성주는 “일일이 책을 다 사러 가긴 어려우니까, 아내가 주로 인터넷으로 많이 구매한다”, “촬영 끝내고 집에 가 보면 박스가 쭉 쌓여 있을 때가 있는데 묵직해서 보면, 대부분이 민국이 책”이라고 말했다.


<아빠! 어디 가?>는 아빠들에게 좋은 자극을 주는 프로그램


올해 1월에 첫 방송을 시작한 <아빠! 어디 가?>는 김성주, 민국 부자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바쁜 스케줄 탓에 아이들과 오붓하게 여행을 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던 김성주. 그는 <아빠! 어디 가?>멤버들 중에 유일하게 직장생활을 경험한 아빠이기도 하다. 


“아빠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되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해요(웃음). 저도 직장생활을 했을 때는 주말엔 그저 푹 쉬고 싶었거든요. 아이들과 잘 놀아줘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만은 아니죠.<아빠! 어디 가?> 출연진 중에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은 저밖에 없잖아요. 다른 아빠들은 그래도 드라마 촬영이나 운동 경기가 없는 시즌에는 보통 아빠들보다는 시간을 여유롭게 낼 수 있는데, 직장인 아빠들은 오로지 주말밖에 시간이 없으니까요. 겨우 겨우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면 부모 욕심에서는 이것저것 많이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아이들은 마냥 놀고만 싶어 하고. 그러다 보면 화도 내게 되고 그랬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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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는 <아빠! 어디 가?>를 통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여행을 하게 됐다. 학습 효과까지 생각했던 여행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자연에서 뛰어 놀 수 있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된 것. 최근에는<아빠! 어디 가?>촬영 차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무인도 인천 사승봉도를 다녀왔다. “정말 오지더라고요. 홀랑 다 타고 왔어요. 세수할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아이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도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아이들이 무인도를 가볼 수 있겠어요. 색다른 체험이 됐을 거예요.”


민국이는 <아빠! 어디 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지로 숭어를 잡았던 전남 여수 안도의 동고지 마을을 꼽았다. 아빠들도 잡지 못한 팔뚝만한 숭어를 잡고서 너무 기뻤다며, 뿌듯한 미소를 보였다. 김성주는“나도 잡아본 적이 없는 커다란 숭어였다.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민국이가 정말 잡았더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빠! 어디 가?> 1회 촬영지 강원도 춘천 품걸리에서 가장 허름한 숙소를 선택해 울상을 지었던 민국이는 그 날 이후, ‘어린이 강태공’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갖게 됐다.


“요즘에 아빠들이 요리 대결을 자주 하잖아요. 은근히 부담이 되고 있어요(웃음). 사실 저나 아이들도 한 끼 정도 굶는다고 많이 힘든 건 아닌데, 엄마들이 절대 가만히 두질 않아요. 한창 성장할 때인데 끼니를 굶기면 되냐고요. 그래서 더 노력하는 것도 있고, 또 하다 보니 경쟁 심리도 생기더라고요. 한 번 하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해보면 재밌어요. 집에서도 몇 번 해줬는데, 아내와 대화할 기회도 많이 생기고 좋은 것 같아요. ‘이걸 만들어보니 어렵더라. 난 이 맛이 안 나던데’하면서 수다도 떨게 되고요. 본의 아니게 가사 일을 돕게 됐는데 좋죠 뭐(웃음).”


민국이가 먹은 아빠의 최고 요리는 역시 ‘짜빠구리’. 김성주 부자는 윤민수, 윤후 부자와 함께 짜파게티 CF를 찍기도 했다. 민국이는“엄마는 집에서 라면을 잘 안 끓여 주는데, 아빠랑 여행을 가면 평소에 못 먹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다”<아빠! 어디 가?>의 또 다른 재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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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가 방송된 다음 날이면 주변에서 ‘그 여행지 어땠냐? ‘캠핑 가기 좋은 장소를 알려달라’고 많이들 말해요. 큰 마음 먹고 캠핑 가려고 하는 아빠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아빠들은 다 비슷해요. 가족들한테 잘 해주고 싶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아빠! 어디 가?>가 아빠들에게 좋은 자극, 동기 부여를 주는 것 같아서 저로서도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개인적으로도 조금 변한 것 같아요. 예전 같았으면 벌써 큰 소리를 내면서 혼냈을 법한 일도 많이 참고, 아이 의견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보려고 하고요. 민국이가 이제 ‘여행을 가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에 제 눈치 안 보고 잘 놀아요. 처음 촬영했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변했죠.”


<아빠! 어디 가?>덕분에 김성주가 얻은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엄마를 세상의 전부’로 알던 둘째 민율이가 아빠한테 관심을 갖게 된 것. 김성주는“민율이는 엄마를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아빠랑 형이 여행을 가는 모습을 보고 아빠한테 관심을 갖게 됐다”“민율이가 아빠랑도 친해지려고 하는 것 같아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다섯 살 터울의 민국, 민율이는 방송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달리 우애 좋은 형제다. 김성주는“민율이가 형 민국이를 잘 따른다”고 말했다. 민국이는 “민율아, 아빠랑 형만 이렇게 여행 다녀서 미안해. 앞으로는 너랑도 여행 자주 가줄게”라며 형제애를 드러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바다 “지드래곤과 작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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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변화무쌍한 음악 퍼레이드다. '시나위의 김바다'라고만 각인되었던 우리 머릿속 이미지 반대편에는 친근한 발라드도 존재했고 낯선 전자음악이 번쩍였으며 그만의 록 사운드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저녁, 이즘이 만난 김바다는 녹음실 콘솔 앞에 앉아있었다. 솔로 활동 후속 앨범 작업이었냐고 묻자 그의 입에서는“레이시오스 음반 리마스터링 하고 있었어요. 재발매인데 신곡 하나 정도 들어갑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솔로 앨범 후속작으로 파트 2 앨범이 예정되어 있죠. 어떠한 기획으로 구상되고 있나요?


곡 작업은 지금도 계속 하고 있어요. 뉴웨이브적인 요소도 들어갈 거 같고, 단순히 러프한 것 보다는 프린스처럼 섹시한 느낌, 영국의 밴드 재팬(Japan)이나 듀란 듀란의 냄새도 같이 들어갈 것 같아요. 일종의 향수가 담긴 음악이에요. 제가 좋아했던 음악들에 대한 것이죠. 또 시나위 때 불렀던 「취한 나비」가 추가될 것 같아요. 저번 단독 공연 때 편곡했는데 되게 잘 나왔거든요.

 

김바다라 하면 여러 밴드들과 여러 음악들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음악을 한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시도라고 생각해요, 시도! 밴드로 할 수 있는 음악을 모두 시도해보고 있거든요. 워낙 무궁무진하잖아요.

 

'김바다만'의 커리어를 얘기해보려 합니다. 그 시작은 나비효과죠. 스스로 나비효과 1집을 '음악적 혼란기'의 작품이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들어봤어요. 그런데 끝까지 다 못 듣겠더라고요. 음악이라면 하나의 전체적인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소프트한 것도 해보자, 대중적인 것들도 해보자 이렇게 하다 보니 중구난방의 결과물이 나왔어요. 어떤 면에서는 아깝죠. 수록곡 「제발」은 훨씬 빈티지한 사운드가 나왔어야 했어요. 스트링이나 편곡의 면에서 실제로 연주가 된 사운드들이 있어야 하는데 컴퓨터로 처리를 했거든요. 곡에서 풍기는 냄새, 그 부분에서 아쉬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성과가 아닌가요?) 그렇죠. 그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거죠.


                              


2집에서는 노선이 확실해졌습니다. 뉴웨이브, 인더스트리얼, 일렉트로니카와 같은 여러 장르들이 보였죠.


어느 정도는 완성된, 조금은 더 만족된 음악이었어요. 장르를 급선회하게 된 계기도 있어요. 나비효과 1집을 내고 잠시 시간을 가졌을 때 패션쇼 음악을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전자음악을 본격적으로 만져보면서 대중음악 신에서 가졌던 갈증들을 당시에 풀었어요. 라이브로 직접 하면서 굉장하다는 생각을 가졌거든요. 막 끝내고 나니 소속사 대표가 이런 음악 왜 진작 하지 않았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랬죠. “이거 앨범으로 들으면 싫어하실 텐데.” 그래도 하자고 해서 앨범을 찍어냈더니 그제야 당황하더라고요. 이거 어떡하지 하면서. (웃음)

 

레이시오스에 가서는 더 강해졌지요. 


진화된 일렉트로닉, 진짜 일렉트로닉이었어요. 나비효과 2집에 했던 것보다 더 깊게 파보자 해서 시작했거든요. 원하던 소리를 더 냈던 거 같아요.

 

아쉽지만 앨범이 많이 묻혔죠.


완전 묻혔죠. 5년 전에 냈을 때는요. 주위에서 말씀하시기를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그런 음악 신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앨범을 냈는데도 공연하기가 되게 애매했어요. 록 페스티벌에서 하긴 했지만요. 이게 클럽에서 디제이들이 트는 음악하고도 다르고 밴드 차원에서 움직이는 음악하고도 다르잖아요. 결국에는 큰 공연 들어오는 것만 하자, 홍보는 접자라는 얘기가 나왔죠.


이후 레이시오스는 잠시 공백기를 가졌는데 얼마 전 다시 무대로 나섰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요? 나비효과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레이시오스는 한번 해체했어요. 그러다 아트 오브 파티스 단독 공연하면서 앙코르 무대에 레이시오스를 다시 올려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해보니 이제야 좀 할 만한 환경이 조성된 것 같아요. 음악 신이 이제 만들어졌나 봐요. 내일도 광주에서 < 난장 > 방송 있고 공감에서도 풀 라이브 공연하고 8월 14일에도 단독 공연을 가질 겁니다. 나비효과는 확실히 사라졌어요. 멤버들 중에는 지금 음악을 안 하는 친구들도 있죠.

 

아트 오브 파티스의 < Ophelia >는 상당한 수준의 앨범으로 평가를 받았죠.


그런가요? (웃음) 사실 진짜 열심히 했어요. 녹음실 한 프로, 세 시간 반을 작업하며 대 여섯 곡을 완성했죠. 개인적으로도 아주 만족하는 앨범이에요.

 

멤버 교체가 잦은 편입니다. 기타리스트만 이번이 세 번째인데 어떤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이유는 간단하죠. 하고자 하는 음악을 그려가면서 바뀌게 된 거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제가 구상했던 아트 오브 파티스의 그림이 완성된 상태예요. 원래는 그런지하면서도 헤비하고 뉴웨이브적인 느낌을 가진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앞서 말한 재팬의 색깔도 닮고 싶고요. 그런 식으로 밴드를 만들어가며 특이한 이미지를 구현할 줄 아는 기타 주자를 찾고 있었어요. (이)태훈이는 그런 기타리스트예요.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캐릭터죠.

 

아트 오브 파티스의 이름으로 지난 해 산울림 35주년 기념 음반 < Reborn 산울림 >에서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를 커버했었습니다.


편곡이 잘 나와서 만족했어요. 예전에 정말 좋아하던 1990년대 초중반의 그런지, 얼터너티브 음악에 대한 향수가 엄청나요. 리프가 있고 전주, 후주가 있고, 배킹이 탄탄히 들어가고... 그런 부분에 있어 잘 포장된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음악이 없잖아요. 대중적인 멜로디, 사비가 없고 클라이맥스가 없으면 힘들다는 강박관념마저 생긴 정도로요. 핑크 플로이드 같은 긴 음악이 나오면 사람들은 쉽게 지루해하죠.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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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 있어 < 나는 가수다 >에서의 경험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클라이맥스를 어떻게든 삽입해야하는 '나가수' 식 전개 방식에 불만은 없었나요?


불만보다는 대중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확실히 쇼맨십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어요. 방금도 말씀드렸던 클라이막스와 같은 것을 뜻하죠. 그게 없으면 하위권에 머물더라고요. 어느 면에서는 상당히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음악에는 설득력이 있어야하는데 그것을 제한 상태로 기술적으로만 접근하는 느낌이었죠. 동시에 느꼈던 점은 대중들 역시 편곡이라는 요소에 대해 인식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음악적 수준과 인지가 상향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죠.

 

여러 가지 시도들이 닿기에 음악 인생이 정반합을 닮아 있습니다. 그 정반합의 새로운 합에 솔로 앨범 < N. Surf >이 해당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날로그와 디지털 음악 사이에서 조율점을 찾은 모습입니다.


솔로 활동을 조율점이라고 생각해요. 아트 오브 파티스의 록 음악과 레이시오스의 일렉트로니카 사이에 있는 셈이죠. 솔로 활동으로 들어가면 조금 더 고민되는 부분은 있어요. 여기서부터는 대중음악의 영역이니 사람들에게 이걸 어떻게 더 노출시킬까, 더 친근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N. surf」와 「Searching」 이 두 곡에 더 의미가 부여됩니다.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은 사운드와 팝스러운 멜로디를 넣어보려 했어요. 그러면서 40이 넘은 제가 해고 싶었던 말들이나 경험, 슬럼프를 겪고 이겨낸 과정들을 풀어서 메시지로 담고 싶었죠. 편하게 쓴 곡들이에요. 


이후에 가졌던 JYJ의 김재중과의 작업은 김바다의 색깔에 대중성이 묻어났습니다. 그 점에서 새로운 모습도 보였죠. 어떻게 작업하게 된 건가요?


의뢰를 받았어요. 받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의뢰를 한 이유가 분명 있겠다 싶은 것이었죠. (김)재중이한테 준 노래는 대중적으로 쓰겠다고 쓴 노래였어요. 그러면서 귀여운 아이돌의 이미지를 벗은 남자다운 로커의 이미지를 만들어보고 싶었죠. 써준 곡은 제가 불러도 될 만큼 좋은 노래들이에요. 그 노래들이 타이틀 곡으로까지 쓰여서 기분이 좋죠. 게다가 일본에서도 1위하고 독일해서도 1위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대만 같은 나라에서도 반응이 좋고. 좋죠. 그런 소식 들려오면. 


문득 든 생각인데 빅뱅의 지드래곤과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최근 많은 아이돌 출신 가수들이 찾는 인디, 록 뮤지션들과 협업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본 거 아니죠? 잘 보셨어요. 사실 다른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거든요. 아이돌이 인디 뮤지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을 찾는 건 목마른 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해요. '다른'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죠. 지드래곤 같은 경우는 같이 만들어보고 싶은 이미지가 머릿속에 있어요. 기회가 되면 재미있는 음악이 나올 거 같아요. 아이디엠(IDM; Intelligent Dance Music) 같은 장르를 해보고 싶고 또 아방가르드하면서 팝스러운 이미지를 구현해보고 싶네요.

 

방송 전파를 타며 이제는 '더' 잘 알려진 김바다가 되었습니다. 대중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고 싶은가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남고 싶어요. 지금 알고 계시는 김바다로. 여러 음악을 하고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드리는 김바다인 거죠. 마침 또 밴드 세 개를 운영하는 지금이 제가 바라던 제 모습에 딱 맞아요. 해체됐다가 신이 생겨서 레이시오스를 이제 할 수 있고, 제가 그리던 그림의 최종 단계, 완성된 단계에 올라선 아트 오브 파티스를 할 수 있고. 솔로 활동도 하잖아요.

 

시나위와의 작업 계획이 있나요?


아직은 없어요. 저도 하고 있는 게 많고 일단은 (신)대철이 형이 시나위의 주인이잖아요. 불러주기 전까지 제가 기획하는 것은 없죠.

 

시나위의 보컬 경력을 바탕으로 한국 록 보컬리스트의 계보를 잇는 한 사람이 되었죠. 국내 최고의 보컬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전)인권이 형님. 소리가 진짜 희한한 것 같아요. 직진으로 뻗어나가잖아요. 형님께서 예전에 노래 연습을 하셨을 때 얘기를 들어보면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요. 목소리로 안 올라가는 부분이 있으면 연습을 통해서 억지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그걸 이미지화해서 마인드 트레이닝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저도 그런 편이거든요. 생각을 이용해서. 그런데 그게 맞는 거예요. 생각을 하면 거기에 맞춰 몸이 변하잖아요. 그러면서 목소릴 틔우는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지금까지는 김바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앞으로의 김바다라고 한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계획인가요?


저는 해외로 나가보고 싶어요. 한국 아티스트들이 감각적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더하면 상당한 강점이 생기는 거죠. 동양의 스케일이 팝적으로 풀리면 장난 아니거든요. 그래서 국악 밴드들에 대해서도 높은 가능성을 보고 있어요. 실험적인 음악으로 유명한 워프 레코드(Warp Records)와 같은 레이블들과도 계약해보고 싶고 궁극적으로는 외국 아티스트들과 같이 해보려 해요.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에서 푸 파이터스의 데이브 그롤이 이런 저런 뮤지션들과 같이 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부러웠어요. 


동양의 스케일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동양적인 음계를 조금씩 사용하고 있어요. 그걸 팝적으로도 풀고 싶고요. 외국에 블루스가 있다면 우리에겐 민요나 판소리가 있잖아요. 사운드는 팝적이면서 우리의 색깔을 담으려는 계획이죠. 크랜베리스나 시네드 오코너를 보면 아일랜드의 국민성을 담고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고 싶다는 거죠 저도. 우리의 것을 가져가려 해요. 노력하고 있죠. 외국에 나갔을 때 가사도 한국말로 할 생각이고요. 그렇게 해서 차트에 오르고 기록을 세우면 그거야 말로 진정한 성과가 아닐까요.

 

전반적인 이미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 같군요.


비녀나 한복, 이런 것들은 해외에 없잖아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피어싱이나 일본의 기모노 같이 이국적인 장치를 자신에 이식했던 뷰욕이 예시가 되겠네요. 한국의 이미지를 그렇게 조금 섞어서 나가면 어떨까 하고 있어요. 실제로 영국에서는 동양의 스케일이 상당한 인기라고 합니다. 스톤 로지스도 그런 쪽으로 했었죠. 뉴욕에서는 힐링이나 정신 건강을 중시하면서 동양의 명상과 문화를 주목하고 있고요. 음악과 맞아 떨어지면 결과는 확실하죠. 우리 문화를 정말 좋아해요. 시조도 탁 읊고 그러면 우리의 간지가 살잖아요. (웃음)

 

해외 활동에 대해 지금은 어떤 계획이 있는 건가요?


일단 일본이랑 독일에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의외로 독일에서 제 음악에 대한 반응이 좋더라고요. 아까 재중이 음악도 독일에서 차트 순위가 높았고 < 벤틸 오브 나이트메어 >라는 게임의 음악을 맡은 적 있는데 그 사운드트랙이 또 독일에서 인기가 있다고 들었어요. 고딕한 면이 끌리나 봐요. 아트 오브 파티스에도 그런 느낌이 확실히 있고요. 계약한다면 1년 정도 쭉 투어하고 해보고 싶어요.

 

이즘 공식 질문입니다. 내 인생의 음반을 꼽는다면


먼저 매드 시즌의 < Above >. 최고의 명반이라고 생각해요. 시애틀 그런지 신에서 핵심만 모아놓은 엘리트 밴드잖아요. 게다가 딱 한 장만 냈고요. 어 퍼펙트 써클의 < Thirteenth Step > 도 좋아했고 스톤 템플 파일러츠의 첫 앨범 < Core >는 예술입니다. 음...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 (이왕 나온 김에 더 얘기해 주세요) 프로디지의 < Invaders must die >도 좋아하고 앰비언트의 대가 브라이언 이노의 < Ambient 1: Music for Airports >도 상당히 좋아합니다. 꼽아보니 진짜 많네요. (웃음) 이쯤에서 너바나의 데뷔 앨범 < Bleach >를 마지막으로 하죠.


                            

 

변화무쌍한 커리어에서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요?


앰비언트 음악을 하고 싶어요. 앞서 언급했던 브라이언 이노와 같은.

 

인터뷰 : 신현태 이수호

정리 : 이수호

사진 : 이한수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영돈 PD “먹거리X파일 성공했지만 최종 꿈은 ‘개그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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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돈 PD의 연관 검색어는 시사, 고발, 다큐 등에 있지 않다. 신동엽이 패러디를 하면서 유행어가 된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가 이영돈 PD를 설명하는 타이틀이다. 개그맨들조차 갖기 어렵다는 유행어를 만든 이영돈 PD는 종편 채널A로 방송사를 옮긴 후에도 여전히 스타PD다. 종편이라는 한계를 넘어 2012년 2월에 첫 방송을 시작한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은 채널A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안착했고, 지난 5월부터는 <이영돈 PD 논리로 풀다>가 시즌2를 이어갔다. 1981년 KBS에 입사해 1991년에 SBS로 옮겨 <그것이 알고 싶다> <주병진 쇼>를 연출한 이영돈 PD는 1995년에 KBS에 재입사, <생로병사의 비밀> <술ㆍ담배ㆍ스트레스에 관한 첨단보고서> <마음> <추적 60분> 연출을 맡았다. 방송사 재입사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그는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채널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대표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현장을 누빈 까닭에 『생로병사의 비밀』 『미국 환상 깨기』『마음』『소비자고발 그리고 불편한 진실』『운명, 논리로 풀다』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최근 출간된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은 이영돈 PD가 대표 저자로 참여한 책이다.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이 방송(매주 금요일 밤 11시)되는 다음 날 아침, 프로그램에서 ‘착한식당’으로 소개된 식당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제작진이 때마다 “재료를 많이 준비해 놓으라”며 식당 주인들에게 코치를 할 정도. <먹거리 X파일> 제작진은 양잿물 해삼, 조미료 육수 냉면, 병든 돼지 바비큐 등의 정체도 밝히지만, 정직하게 음식을 만드는 ‘착한식당’을 선정하기 위해 며칠을 식당 근처에서 잠복하기도 한다. 끈질긴 취재와 검증으로 ‘착한식당’에 이름을 올린 식당들은 방송 후 소위 대박이 터진다. “정직하게 살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진실을 <먹거리 X파일>이 증명한 것.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는 ‘착한식당을 찾아서’에 소개된 33곳 중 15곳 주인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재배에서 조리까지 100% 토종을 추구하는 손칼국수와 콩국수, 식품첨가물 없이 만드는 냉면과 감자탕, 정통 방식을 그대로 살린 떡, 나물 밥상, 손두부 등이 주인공이다. 이영돈 PD는 “그야말로 저도 참 좋아하는, 그래서 여러분도 참 좋아할 만한 먹거리를 꼼꼼히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평소 강연회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 “과연 <먹거리 X파일> 제작진은 무얼 즐겨 먹냐”는 질문을 빠짐 없이 듣는다는 이영돈 PD. 그의 답변은 한결같다. “마른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을 제일 좋아하고 병어 등 생선구이를 좋아하고, 주식으로는 맨밥을 물김치에 말아서 달걀 하나 깨 넣고 참기름 뿌려서 비벼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영돈 PD가 생선구이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식당에서 첨가물을 사용할 가능성이 대체로 낮은 음식이기 때문. 역시 <먹거리 X파일> 수장다운 답변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영돈 PD의 집 주방에는 좀처럼 MSG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유행어보다는 히트 프로그램을 탄생시켜야죠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이 방송되는 날이면, 프로그램에 소개된 ‘착한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방송 초기에도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반응은 생각조차 못했어요. 하지만 진정성 있는 프로그램이니까 언젠가 빛을 보겠다 싶었죠. 방송사를 옮기게 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칭찬을 해주면서도 채찍질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착한’이란 개념을 도입하게 된 거죠. 사실 ‘착한’이라는 개념은 KBS <소비자 고발>에서 ‘착한 소비’란 아이템을 하면서 시청률과 자신감을 얻어서 이번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거예요.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은 ‘착한’과 현대인들의 영원한 숙제인 ‘먹거리’를 결합했다고 볼 수 있죠.

PD와 진행자의 역할을 함께하고 있는데 어려움은 없나요.

연출자는 다른 사람을 통해 현상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죠. 제가 진행을 하는 건, 잘나서도 아니고 말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어눌하지만 신뢰받는 이미지를 프로그램의 이미지로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방송이 인기를 끌면서, 이영돈 PD가 식당에 들어가면 주인들이 많이 긴장을 한다고 하는데요.

많이들 알아보시긴 해요(웃음). 피부로 느끼죠. 언젠가 친구들과 여의도 일식집에 번개를 했는데, 음식이 늦게 나왔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주인이 알아보고 음식에 좀더 신경을 쓰느라고 시간이 걸렸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국물에 조미료를 빼서 맛이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웃음). 친구들이 다음부터는 저랑 같이 음식점을 안 가겠다며 투덜거리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조미료를 넣지 않고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식당에서 감동을 받았던 에피소드는 없나요?

거제도로 촬영을 갔는데, 밤늦게 한 시골에 있는 치킨집을 갔어요. 주인이 저를 보더니, 아시는 척을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저희 테이블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을 시켰는데 20분이 지나도 치킨이 안 나오는 거예요. 후배 PD를 주방에 보냈더니, 글쎄 쓰던 기름을 다 버리고 새 기름으로 치킨을 튀기고 있었어요. 일행 모두 감동을 받았죠.

<SNL 코리아>에서 신동엽이 ‘이엉돈 PD의 먹거리 X파일’로 프로그램을 패러디하면서, ‘제가 한번 먹어보겠습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가 유행어가 됐습니다. 이 멘트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사실 제가 평소에 쓰는 말입니다(웃음). 어느 날 일반인들이 따라 하기 시작하고, 연예인들이 따라 하면서 매스컴을 타더니, 남희석 씨가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남영돈 PD의 북한 먹거리 X파일> 코너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신동엽 씨가 <SNL 코리아>에서 제 멘트와 섹스를 결합시키면서 완전 사회적 유행어가 되어 버렸죠(웃음). 이제는 제가 쓰기가 어색해져 버렸습니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진 못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요. 어떤 사람은 후속작이 없냐고 물어보는데, 글쎄요. 제가 개그맨이라면 후속 유행어를 만들어 내겠지만 저는 PD인지라 여전히 후속 히트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시급하죠. 물론 만들어내면 좋겠지만요. 은근히 유행어가 신경쓰긴 하거든요(웃음).




착한식당 선정 기준은 ‘음식에 대한 진정성’

지금까지 요리 전문가, 맛 칼럼니스트, 식재료 전문가, 향토음식 전문가 등 100여 명의 참여로 착한식당 33곳이 선정됐습니다(8월 5일 기준).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한 것 중 하나가 착한식당의 선정 기준이 아닐까요.

혹자는 착한식당의 선정기준이 ‘MSG를 넣지 않는 것이냐’ 라고 묻기도 하는데 MSG의 유무는 선정기준의 많은 부분 중 하나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선정 기준은 주인의 음식에 대한 진정성이죠.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밥상은 비록 초라할지는 몰라도 따뜻한 정성이 담겨있습니다. 무엇을 넣었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할 필요도 없죠. 무조건 신뢰합니다. 어머니가 음식에 나쁜 것을 넣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기준이 추상적인지는 몰라도 거의 대부분의 착한식당 주인이 음식을 만드시는 것을 보면 왜 이곳이 ‘착한식당’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없는 정성과 음식에 대한 열정. 돈 버는 것만이 목적인 많은 식당과는 차별되는 이유입니다. 궁금하면 가서 느껴 보세요. ‘맛집’ 과 ‘착한식당’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음식은 무엇인가요?

단연 병든 어린 돼지로 만드는 통돼지 바비큐에요. 통돼지 바비큐는 어린 돼지로 만들고, 어린 돼지는 병들지 않으면 키워서 파는 게 훨씬 이익이기 때문에 잡지 않는다고 해요. 즉 통돼지 바비큐를 만드는 어린 돼지는 모두 병든 돼지라는 거죠. 정말 구역질이 납니다.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을 녹화하면서 웬만하면 모든 음식을 맛을 봤는데 통돼지 바비큐는 먹기 싫더라고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을 본 것 같아 정말 씁쓸했습니다.

‘조미료 냉면육수’ 편은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아이템이었는데, 착한식당을 선정하기까지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다고요.

냉면 육수는 당연히 소고기를 끓인 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취재 결과 상당수의 육수가 소고기맛 조미료와 MSG를 섞어서 끓인 물이었고, 조미료 맛을 감추기 위해 매운 양념과 찬 얼음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고급 냉면전문점에서조차 MSG를 소량이라도 사용해야 손님들의 입맛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양반댁 함흥냉면이 정성을 다해 냉면을 만들었지만, 고명을 만드는데 빙초산을 사용한 것이 밝혀져 착한식당이 되지 못했어요. 이를 시정하자 이번에는 면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감자 전분에 폴리인산나트륨이라는 보존제를 사용한 것이 밝혀져 선정되지 못했고요. 그런데 방송 이후 양반댁 함흥냉면은 제분회사에 전화를 걸어 해당 첨가물을 빼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정말 착한식당이었던 거죠.

착한식당에 선정되면,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기 때문에 오히려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요. 수입은 늘겠지만 나름의 고충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방송이 나가기 전 날, 제작진들이 연락을 합니다. 내일 아침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니 재료를 잘 준비해 놓으시라고요. 그런데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부터 손님들이 엄청나게 밀어닥치면서 난감한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삼군리 메밀촌 주인 분은 방송 전에는 “닭백숙이 이익이 좀 더 많이 나서 닭백숙을 파는 게 재밌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손님들이 메밀국수만 찾아서 이전만 못하다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물론 이 노부부는 결혼 후 직장에 다닌다고 집을 떠난 아들이 방송 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착한 빵집은 평생의 꿈이었던 직접 농사 지은 우리 밀로 빵을 만드는 일을 실현했습니다. 전남 구례에 밀 농사를 짓게 된 거죠. 착한식당 주인 분들은 모두들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방송 전과는 다른 음식을 제공 하는 얕은 상술을 쓰지 않습니다. 좋은 음식을 같이 나누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니까요.

까다롭게 착한식당으로 선정했지만, 방송 이후 인증을 취소한 사례도 있습니다. 간장게장집이었죠? 제작진 입장에서 굉장히 난감했을 텐데요.

안타까웠죠. 간장게장을 먹은 10명이 넘는 손님들이 식중독에 걸리면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어요. 간장게장을 만들던 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식당 문을 닫아야 했는데 영업을 계속하면서 게장에 신경을 쓰지 못해 식중독에 발생했어요. 제작진 입장에서 시청자 분들에게 정말 죄송했죠. 제가 직접 피해자를 찾아가서 사과를 했고, 제작진은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더 이상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물론 ‘착한식당’ 인증도 취소했고요.

부득이하게 몰래카메라로 촬영을 할 때가 많은데, 방송 후 항의를 받은 적도 있으시다고요.

병든 통돼지 바비큐 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바비큐를 먹는 한 단체를 촬영했는데, 방송 후 “자신들이 먹는 걸 보고 왜 말리지 않고 촬영했냐”고 항의를 하셨어요. 무척이나 당황한 기억이 납니다. 몰래 카메라로 촬영 중이었는데, 방송을 위해서는 먹는 모습이 필요하니 병든 어린 돼지로 만든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가 없었던 거죠. 촬영윤리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면서 상당히 곤혹스러웠습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어요.

<먹거리 X파일>을 진행하면서 PD님의 식습관에 변화가 있었나요.

일단 절대로 통돼지 바비큐는 안 먹습니다. 되도록 냉동생선을 포함 냉동식품을 안 먹으려고 하고 조미료 등 식품첨가물은 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되도록 신선한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합니다. 마른 멸치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은 변함없는 식습관입니다. 생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나마 생선은 중간에 변성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인데요. 생선은 첨가물로 장난을 칠 가능성이 대체로 낮은 음식입니다.

제작진들과 회식을 할 때, 음식점을 까다롭게 고를 것 같은데요.

주로 가는 회식 장소가 청계천 광장에 있는 ‘영덕막회’입니다. 제철 생선을 쓰는 것도 있지만 조미료 사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돋보이죠. 조미료 편 촬영 때, MSG 선택제를 실시하기도 했고요. 이 외에도 여기 저기를 찾아 다니는데 크게 마음에 드는 곳은 없어요. 먹거리 팀이 가면 음식점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긴 해요. 지인들이 음식점 추천을 해달라고 하면 서울 여의도의 생선구이전문점 ‘다미’를 추천해요. 생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소금간만 한 생선구이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굽는 방법이 다른 곳과는 달라서 고소하면서도 타지 않게 하는 실력이 좋은 것 같아요.

우선 ‘착한식당’들이 늘어나야겠지만, 착한 소비자들도 생겨나야 할 텐데요.

물론입니다. 생산자 없이는 소비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KBS에서 만든 <이영돈 PD의 소비자 고발>의 캐치프레이즈는 ‘소비자가 웃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와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였습니다. 소비자는 생산자가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좋은 상품을 소비할 수 있다는 좀더 넓은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죠. 망한 기업의 땡 처리 물건을 사면서 좋아하는 것이 바른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는 정당한 가격을, 저는 이것은 착한 가격이라고 부릅니다만, 지불해야 마땅하죠. 여기서 말하는 정당한 가격이란, 상품가격에 적당한 이윤이 붙어서 생산자의 가족과 직원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그리고 기업의 미래가치인 연구개발 비용도 포함된 가격을 말합니다. 이런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소비자들이 궁극적으로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서비스 기업 10곳 중 8곳이 ‘블랙컨슈머’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블랙컨슈머는 적발될 경우 법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정당한 소비자의 불만 청구 행위가 블랙컨슈머로 오인돼 불필요한 분노를 자아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죠. 소비자의 요구는 정당할 경우 응당한 대우를 받아야 해요. 이를 위해서 소비자는 좀더 현명해 질 필요가 있어요. 틀린 것은 고치려는 노력이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행해져야 하고요. 이것이 제도화 되었을 때 더 많은 소비자들이 체계적으로 현명하고 착한 소비를 할 수 있게 되겠죠.




간헐적 단식 성공, 다이어트하는 도전자들에게 적극 추천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 이어 <이영돈 PD의 논리로 풀다> 시즌2를 진행하고 있고, 최근 방송을 위해 PD님이 직접 간헐적 단식에 도전을 했다고요.

간헐적 단식에 도전한 이유는 평소에 끼니를 거를 필요 없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한 끼를 안 먹으면서도 살이 빠진다는 사실 때문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때때로 한 끼를 거른 적이 많아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살을 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죠. 사실 식성이 좋은 편이라서 잘 먹는 편이거든요(웃음). 음식을 남기는 일이 별로 없고요. 그런데 막상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을 때, 16시간에서 24시간 사이를 물 빼고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그전에는 한 끼를 건너뛰더라도 뭔가를 조금씩은 먹긴 했거든요.

다이어트에 효과는 있었나요?

3주만에 1.5kg이 빠졌습니다(웃음). 놀라운 건, 단식 이후 정상적인 식사 패턴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살이 2kg 정도 더 빠졌다는 거죠. 간헐적 단식에서 중요한 점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끼니 때가 되면 먹어야 한다는 습관적 강박관념에서 탈피했다는 점과 불필요한 것을 먹지 않음으로 환경보호에 일익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독자 분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릴 적부터 장래희망이 PD셨나요?

뭐든지 ‘보는 것’에 대한 흥미가 많았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모르는 어른들 손을 잡고 극장을 많이 갔죠. 어른들에게 저 좀 데리고 들어가 달라고 부탁하면, 대부분 자기 아이인 것처럼 하고 들어가 줬어요(웃음). 영화나 서커스를 보는 걸 정말 좋아했고, 초등학교 때부터는 추리소설을 많이 읽었고요. 아직도 기억이 나요. KBS 입사 면접 때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추리 드라마 연출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추리물이 탐사와 고발 등으로 바뀌게 된 거예요. 하고 보니, 이쪽이 훨씬 현실적이고 박진감이 넘치는 것 같아요. 가끔 법정에 서게 될 때가 있어서 문제이지만요(웃음).

30년 가까이 시사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요.

세상을 바꾸는 힘을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방송은 세상의 그 어느 툴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 같아요. 그 점에 큰 보람을 느끼고, 30년 가까이 시사 다큐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동안 많은 압력을 받았지만 1999년에 방송된 6부작 <술 담배 스트레스에 관한 첨단 보고서>에서 간접흡연을 고발한 후, 그 다음날부터 공공건물 내에서의 흡연이 줄어들면서 급기야 금연법이 제정되어 실내금연이 전면 중지되기도 했죠. 많은 시사 다큐 프로그램에서 주장한 사안들이 제도를 바꾸거나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걸 목격할 때, 정말 큰 보람을 얻죠.

현재 채널A에서 제작담당 상무 직을 맡고 있습니다. PD라는 직책과는 또 다른 책임감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제작담당 상무는 보도를 제외한 프로그램의 제작을 총괄하고 책임을 지는 중책입니다. <먹거리 X파일>과 <논리로 풀다>는 제가 하는 많은 일중의 하나일 뿐이죠. <먹거리 X파일>의 시청률이 잘 나왔다고 좋아할 수 만은 없습니다. 예능을 포함 다른 프로그램들도 다 잘나와야 하니까요. 일부에서는 “상무가 무슨 제작까지 하느냐”라고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임원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줬다고도 합니다. 문제는 지금 종편이 한 가지 일만 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고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는 거죠. 최선을 다해서 PD와 진행 그리고 상무직을 수행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앞으로 PD로서의 꼭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면요.

<개그콘서트> 연출해보는 겁니다. 시사적인 개그 프로에서 성역 없는 비판과 패러디를 해보고 싶습니다. 하나 더 있다면 극장용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들어 상영관에 거는 거예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들을 현실과 비현실 속에서 고민하게 만들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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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돈PD의 먹거리X파일이영돈PD의 먹거리X파일 제작팀 저 | 동아일보사
《이영돈PD의 먹거리X파일; 착한식당을 찾아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착한 식당,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를 통해 소비자의 입장에서 먹거리에 관한 정당한 권리를 찾고 좋은 먹거리, 착한 먹거리의 참된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가 무심코 먹거나 당연시 여겼던 먹거리에 대해 안정성을 점검하고 단순한 고발에서 그치지 않고 먹거리의 생산부터 소비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와 시스템을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잉고 슐체 “문학은 물방울을 통해 세상을 보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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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과 ‘통일’. 두 개의 단어는 작가 잉고 슐체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동시에 그것은 잉고 슐체와 한국 독자들을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작가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듬해인 1962년 구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28살의 나이에 조국의 통일을 목격했다. 이후 소설가로 등단한 그는 『심플 스토리』『새로운 인생』『아담과 에블린』등의 대표작을 통해 통일 이후 독일인의 생활상을 문학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 작품들을 통해 한국의 독자들은 분단의 경험을 작가와 공유했다. 그리고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통일, 그 아득한 미래의 모습을 엿보았다. 이렇듯 잉고 슐체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소재들로 역사 속의 경험, 경험 속의 역사를 들려준 작가다. 이에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2013 만해대상 문학부문의 수상자로 잉고 슐체를 선정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이어지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명과 평화 사상, 사랑의 철학을 발견한 까닭이다. 작가 잉고 슐체가 펼쳐 놓은 인간과 그 삶의 이야기는 사랑과 평화를 어떤 모습으로 끌어안고 있는지, 그 깊숙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채널예스>가 직접 작가와 만났다.




독일 통일 이야기 안에 숨겨진 것은 인간의 삶

“문학에서는 항상 사회적인 역할이라든지 사회적인 사랑, 삶의 의미에 대해서 다루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이고요. 그리고 작가가 아니더라도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도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잉고 슐체는 사회 환경이 변함에 따라 인간 삶이 변화하는 모습을 작품 속에 그려왔다. 『심플 스토리』『새로운 인생』『아담과 에블린』에서는 통일을 전후해 달라진 사람들의 일상을, 『핸드폰』에서는 핸드폰으로 대변되는 기술의 발전이 바꾸어놓은 우리 삶의 속도와 그로 인해 야기된 문제점들을 이야기했다. 잉고 슐체가 생각하는 작가와 문학의 역할이란 사회 참여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사회 참여란 시민으로서 누구나 해야 하는 역할이지, 작가로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잉고 슐체의 작품 세계가 독일 통일에 대한 것으로만 한정되는 것 역시 경계했다.
“독일 통일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인간 삶에 대해서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들이 한 국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 인간 삶의 변화에 대해서 쓰고 있는 거예요. 독일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가 꾸준히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제 작품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의 이야기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일 통일에 함축돼서 얘기하기 보다는 일상, 삶, 그리고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잉고 슐체가 한결같이 주목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개인과 그들의 일상이다.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는 한 가운데에서도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여행을 하고, 직장을 잃는, 별다를 것 없는 우리들의 하루하루다. 그는 문학이 한 사회를 뒤흔들 수 있다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작품을 쓰지 않는다. 자신은 “항상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문학에 옮기는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은 모두 그가 경험했던 일들을 주제로 사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상호작용에 대해 다루었지만 그에 접근하는 방식은 언제나 일상적이었다. 삶에 변화를 가져온 거대담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그들에게 찾아온 변화를 보여주는 식이다. 이를테면 『심플 스토리』『새로운 인생』『아담과 에블린』의 세 작품은 모두 통일 전후 구동독인들의 달라진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식은 이데올로기의 변화나 사회 제도의 개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심플 스토리』에서는 각 장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독백이, 『새로운 인생』에서는 주인공의 편지가 그들 삶에 나타난 변화를 보여준다. 『아담과 에블린』의 주인공 연인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그들이 경험하는 갈등과 혼란이 드러난다.




사회주의 vs 자본주의,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그래서 잉고 슐체의 작품은 ‘분단과 통일, 그것에서 비롯된 삶의 변화와 사회문제’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독자들이 그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렇듯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이해될 수 있게 들려주는 작가의 능력은 ‘만해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다. 그를 수상자로 추천한 독일문학 디알로그 학회(DeLiDi)는 추천 이유서에서 ‘잉고 슐체의 문학은 단순히 밋밋한 역사기록이나 사회고발이 아니라 유머, 코미디, 아이러니 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기법을 통해 심각하고 민감한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인간적 사건 혹은 예술의 형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독자가 계속 읽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작품들의 경우에는 표면 아래에서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표면적으로는 굉장히 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들을 표면 아래에 담고 있는 구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해당되는 문제들이 밑에 깔려있는 것이죠.”

작가는 통일 이전 동독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와 같은 구동독인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경험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환경에 흡족해했다. 그 사이에서 작가는 균형을 잃지 않았다. 잉고 슐체는 ‘서독이나 동독의 어느 한쪽으로의 편향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거 동독이나 서독의 체제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통일을 통해 재구성된 현재의 새로운 사회와 인간들을 주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일 이후에 독일은 많은 성장을 이루었지만 공동의 삶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썼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 같아요. 민주주의는 인간이 자기 의사를 스스로 결정하거나 다른 사람과 같이 결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사회적인 평등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개인 소유를 보호하는 것이 현안이고 중요하죠. 그런데 저는 개인 소유뿐만 아니라 노동력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보호의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 소유뿐만 아니라 노동력도 같이 보호돼야 하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경험한 그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잉고 슐체는 이상적인 사회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상적인 환경이란 단지 이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는 어떠한 환경이든 구성원들은 다양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환경이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제대로 된 약속을 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인간이 행복하거나 불행한 환경이 결정된다고 했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는 장자크 루소의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는 강한 자의 권리를 말할 수 있겠죠. 자유를 누리니까요. 그 동시에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놓인 상황에서 정치적인 법이 아닌 좋은 법칙을 만들어내고 수행하는 것이, 우리의 상황을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만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의 역할은 ‘물이 어때?’라고 묻는 것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들만큼 통일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국민들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통일의 필요성 여부에 대한 공동의 합의조차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미래의 통일 한반도의 모습을 그리는 대표적인 작가를 꼽기도 쉽지 않다. 우리에게 그 날은 오기는 할 것인가. 아니, 그보다 앞서 우리는 통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통일에는 큰 비용이 따르는 등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분단보다는 통일이 결국 독일에는 선물이었다”고 말한바 있는 작가 잉고 슐체에게 물었다.

“저는 북한 주민들을 도와주려는 시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통일의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 이전 독일의 상황은 지금의 한국과 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동독에서도 사람들이 먹고 살 만큼의 여유가 있었고 각자 돈을 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북한의 상황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감당해야 하는 비용과 감수해야 되는 부분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은 통일 전의 독일 사람들보다 통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의 저는 독일의 재결합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당시의 저와 독일 주민들보다도 오늘날 한국 분들이 오히려 통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그는 독일의 통일 과정을 되돌아보며, 흡수 통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어느 한 쪽으로 힘과 무게가 쏠리는 것이 아닌 동등한 상태에서 새로운 국가가 탄생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독일은 서독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흡수 통일이 이루어졌다.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는 구동독인들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동독 출신의 작가들의 창작 활동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 두고 잉고 슐체는 ‘이제 문학도 이데올로기보다 자본에 대한 종속성이 심화됐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통일 이후의 상황은 이데올로기적인 타협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이 확실히 더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품 활동이 좋아진 작가들도 있고, 더 나빠진 작가들도 있죠. 그런 걸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스스로 끔찍하다고 여기는 것은, 세금이나 경제적인 성장은 계속 상승하고 있지만 인문학의 자리는 점점 낮아지고 좁아져가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언론 매체에서 인문학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오락과 같은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죠. 그런 현상이 교육 현장이나 일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출판 시장의 불황이 이어지는 상황은 독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디어가 앞 다투어 소개하는 베스트셀러 위주로 독서가 이루어지는 현상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독자들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인문학 서적 읽기가 한 때의 열풍으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잉고 슐체 작가는 그 요인으로 독일의 오랜 전통을 꼽았다. 생활 속에서 사색하고 철학하는 독일인들의 뿌리 깊은 역사적 전통은 국민성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들에게는 책을 통해 지식을 얻으려는 문화가 있고,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서점이 더욱 증가하는 추세다. 잉고 슐체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헤겔이나 쉘링 같은 철학자의 책은 많이 찾지 않는다”고 아쉬워했지만, 지속적으로 인문학 독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에서 희망을 찾았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헤엄치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더 나이많은 물고기 한 마리와 우연히 마주칩니다. 그 물고기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합니다. “안녕, 얘들아. 물이 어때?” 어린 두 물고기는 한동안 계속 헤엄칩니다. 그러다 마침내 한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를 보고 말합니다. “도대체 물이 뭐야?” (중략) 만약 의식적인, 즉 가치있는 삶을 누리려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자명함을 인식해야 하고, 우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물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잉고 슐체의 ‘2013 만해대상’ 수상소감 중)
잉고 슐츠는 ‘만해대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글에서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물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물고기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안의 우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의 기능은 자명함을 의식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꾸준하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거죠.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상대로 정치적인 사상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것을 의식하게 하고 계속 밝혀내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잉고 슐체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이 글을 읽는 이유와 같다고 말했다. ‘당신은 왜 읽습니까?’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처럼,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한 마디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흥미롭고 기쁘기 때문에”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읽는 행위는 경험을 전달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듯, 그에게는 작품을 쓰는 순간의 경험이 그와 비슷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에게 문학이란 물방울 속에서 세상을 보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어떤 소설의 인물이 한 ?단면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지루할 거라고 생각해요. 어느 하나만 특출 나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인물이 처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방울이라는 것 자체가 그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거잖아요. 단면만이 아니라 여러 면을 파악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제게 문학은 물방울 속에서 세상을 보는 행위입니다.”

[통역: 김경랑, 서장원 고려대학교 독일문화학과 교수]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만화가 강도하 “그림을 본능적으로 흡수하는 독자들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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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강도하 작가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아름다운 선』을 연재하고 있다. 연재 기간에는 대체로 인터뷰를 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선』단행본 출간을 기념해 오랜만에 인터뷰이를 마주했다. 평소 연재 중 인터뷰를 피하는 까닭은 “작품 이야기를 거론할 수밖에 없기 때문”.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캐물을 요량으로 강도하 작가를 찾아갔지만, 빽빽이 적은 질문지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한편 다행스러운 마음은 작품 못지않게 ‘만화가 강도하’의 일상이 궁금했다는 것. 작가에게 꼭 작품 이야기만 물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직 연재 중인 작품에 대해 해석의 잣대를 대기보다는 독자 나름의 상상력을 갖고 결말을 기다리는 것도 좋을 성 싶었다. 삭발을 한 강도하 작가는 ‘험악해 보일까봐’ 모자를 썼다고 했다. 『아름다운 선』의 주인공 ‘선’ 이야기로 인터뷰는 시작됐지만 연애, 결혼, 사람 이야기로 이어졌고 노출증에 걸린 사람들, 트위터 등 흥미로운 대화가 전개됐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휴식’이라고 말하는 강도하. 연재가 끝나면 낮술 클럽을 만들 작정이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참여자 모두는 테이블 위에 절대 스마트폰을 꺼내 놓아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선』은 강도하 작가의 2004년 작 『위대한 캣츠비』의 주인공이었던 캣츠비, 페르수, 선, 하운드 중 ‘선’을 화자로 한 작품이다. 철거촌에서 사는 20대의 삶과 사랑을 그린 『위대한 캣츠비』에서 선은 날백수 ‘캣츠비’를 사랑하는 새 연인으로 등장했다. 애당초 강도하 작가는 『아름다운 선』을 ‘청춘’ 3부작 중 하나로 기획했지만 『위대한 캣츠비』가 예상치 못한 큰 성공을 거두자 노선을 바꿨다. 『로맨스 킬러』『큐브릭』으로 3부작을 완성했고 이후 『바람개비 소년 하루의 꿈』『3m』『세브리깡』『연애 괴물 대백과』 등을 집필했다. 2000년대 강도하가 만화로 표현한 주제는 청춘과 연애다.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현실적인 사회 배경을 만나자, 독자들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위대한 캣츠비』를 읽은 독자들은 “내 20대를 뒤흔든 만화” “정말 끝내주는 만화, 아니 인생이었다”라고 말하며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선』을 두고는 “강도하 작가의 만화는 불편하지만 재밌고 아름답지만 슬프다”는 댓글이 달린다. 최근 강도하 트위터에서 한 만화가지망생이 “만화를 그리는 것은 천부적이어야 하냐”고 물었다. 강도하의 답은 “먼저 천부적인 생존이 필요하다”였다. 언제 어떻게 데뷔를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데뷔를 해서 어떻게 생존하느냐 ‘지속성’에 방점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트위터는 언젠가 계폭(계정 폭파)으로 결론 난다”라고 말하는 강도하. 그 역시, 계폭을 향해 열렬히 달려가고 있다. 『아름다운 선』을 보다가 작가의 근황이 궁금하면 트위터(@kangdoha)를 찾자. 날것 그대로의 흥미로운 글들이 가볍게, 때론 무겁게 꼬리를 이어가고 있다. 동조하냐는 어조는 없다. 근사한 말도 없다. 강도하 작가는 지나치게 덤덤한 표정으로 독자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댈 뿐이다.




결국 선을 아름다울 겁니다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아름다운 선』을 연재하고 또 월간지 <나들>, <더 딴지>에서 연재 중이시죠. 마침 오늘이 『아름다운 선』이 연재되는 날이네요. 연재 중에 인터뷰는 잘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작품 이야기를 거론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작가 스스로 기운을 빼버리는 거니까 피하는 게 맞죠.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출판사와 일을 하게 됐는데, 인터뷰 안 한다고 하니까 담당자 분이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라고요(웃음).

『아름다운 선』이 원래 『위대한 캣츠비』와 함께 청춘 3부작으로 예정했던 작품이잖아요. 그런데 9년 만에 나왔어요. 작품명도 예전에 써놓았던 제목 그대로고요.

책 서문에도 썼지만 캣츠비를 주인공으로 한 『위대한 캣츠비』가 1부, 선을 화자로 한 『아름다운 선』이 2부, 하운드를 3부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위대한 캣츠비』반응이 썩 괜찮았잖아요. 이미 3부작으로 진행할 거라는 걸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성공했다고 또 우려 먹냐는 해석이 싫었어요. 제가 이런 쪽에는 조금 아둔해서 피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다른 성향의 작품을 하고 나중에 쓸 생각을 했죠. 어차피 이미 이야기는 구축해 놓은 작품이니까, 변동은 없고 다만 시대적 변화는 생겼어요. 휴대폰 기종이나 버스 모양도 달라졌으니 그래픽적 변화는 당연히 있어야 하잖아요. 하지만 관계 설정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어요.

『아름다운 선』은 선과 캣츠비가 만나기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돼요. 재밌는 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순수함을 가진 ‘선’이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을 찾아가서 ‘나를 사랑했냐’고 묻는 거죠. 굉장히 특이한 경우잖아요. 과거 남자들을 일일이 찾아간다는 것이.

항상 작품을 할 때는 시대의 당대성을 생각하게 돼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작가가 아닌 거죠. 지금 이 시기에 당대성을 가지고 있냐, 유효한가를 생각해야죠.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30대 초반만 되도 지나간 인생이 너무 많아요.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도 있고 악몽도 있을 테고 사람마다 다를 거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내가 그를 사랑했나’ ‘사랑하긴 했나’라는 걸 문득 생각해보게 돼요. 그런데 그러고 말면 되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누구나 그렇잖아요.

선과 같은 여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연인에게 사랑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잖아요. 친구로라도 지내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

‘로라도’라는 건 관계가 끝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관계 설정만 살짝 바꾼 거죠. 서로 위장된 관계인 거예요. 헤어진 게 아니고 ‘자기’에서 ‘오빠’로 바뀐 거죠. 완벽하게 이성으로 헤어졌는데 다른 설정으로 유지가 된다?! 그건 불가능하죠. 사람들은 착각을 하곤 하는데, 싫어서 헤어진 게 아닌 거거든요. 필요 없어서 헤어진 거예요. 필요하면 헤어지질 않아요. 내 외로움을 메꿔 주는 사람하고는 헤어질 수 없는 거거든요.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허전함을 견딜 수 없다면 헤어질 수 없어요. 아주 양아치적인 발언으로는 ‘단물 다 빠졌어’ ‘약발 떨어졌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바꿔 말하면 내 삶에 그 사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거죠. 그런데 싫어서 헤어진다고 착각하니까. 잔인한 이야기죠. 그걸 인정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선’이라는 인물에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어요. ‘캣츠비’에게는 ‘위대한’이라는 타이틀을 걸었고요. 사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들이 아름답거나 위대하게 보이지는 않잖아요.

선은 굉장히 바보 같은 애에요. 바보 같은 캐릭터죠. 캣츠비도 사실 조금도 위대하지 않죠. 찌질하고 없어 보이고 주도적이지도 않은 인물이에요. 가는 여자를 잡지도 못하고 해내는 것도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요. ‘뭐가 위대한 거냐고’ 하지만 작품을 끝까지 보다 보면, 제목이 맞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아름다운 선』마저도 뭐가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많아요. 너무 청승맞고 비현실적이고 순진한 여자가 멀쩡하게 살고 있는 헤어진 남자를 찾아와서 갑자기 ‘너 나 사랑했냐’고 물으면 그건 분명 민폐잖아요. 그런데 캣츠비가 위대하지 않았지만 결국 위대한 것처럼, 『아름다운 선』도 결국 ‘아름답네’라는 한 마디가 나오면 된 거예요. 결국 제목은 반어가 아니에요.

만화가 강도하에게 아름답다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되게 오락가락하는데 태도가 분명한 게 아름답다고 느꼈던 적이 있어요. 내 취향이건 아니건 분명한 건 아름다워요. 취향이라는 게 너무 얄팍하고 폭력적이라서 그 외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제대로 된 공포 영화를 봐봐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또 할리우드 시스템을 충성하는 분위기에서 쏙 빠져 나온 블록버스터, 너무 확실한 블록버스터는 아름다워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콘텐츠를 볼 때 누군가가 “당신 작품은 작품성이고 나발이고 없잖아”라고 말할 때, ‘저도 있는대요’라고 말하는 건 멋진 태도가 아니에요. 누가 뭐라고 하든 태도를 분명하게 하는 게 미학이에요. 만화가 김성모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아무리 조롱을 받고 그래도 태도를 분명히 했어요. 작품에 마초성이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마초 그 자체로 멋있어요. 가장 싫은 건 “이건 뭐야?” 싶은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흐리멍텅한 미학도 느껴져요. 모호한 매력도 인정이 되는 거예요. 이도 저도 아닌 미학마저도 하나의 태도로 인정이 되고 있어요.

포용력이 생긴 걸로 이해해도 될까요.

내가 놓치고 있는 미학이 있지 않냐에 대한 섬뜩함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게 뭐야’라고 하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야’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뭔지 잘 모르겠어. 괜찮은 것 같아’ 싶을 때가 많아요. 광의적인 문화 섭취를 위해서라도 단언하면 안 될 것 같고요. 지금은 뭐라고 단언하는 것 자체가 무서워요. 반 템포만 앞서 지켜보고 싶은 생각이죠.




결국 작가도 사람을 다루는 직업

만화가들은 연재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나요?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무얼 하고 싶으세요?

제게 휴식은 사람 만나는 거예요. 어차피 저도 결국은 사람을 다루는 직업이니까요. 모든 창작물을 사랑을 받기 위한 행위에요. 찰리 채플린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싶어서 무대에 섰고 흥행을 한 거잖아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을 하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사랑 받기 위한 행위도 있어요. 글씨를 쓰더라도 조금 더 예쁘고 정갈하게 쓰고 싶듯이, 그 모든 행위들은 ‘나 잘하지, 나 잘 봤지, 나 정확히 판단했지’라고 인정 받고, 확인 받고 싶은 본능이 있는 거예요. 작품이 끝나면 매번 쪽지 시험을 본 느낌이에요. 메인 시험이 작품 전체라면, 연재를 하는 작가들은 매주마다 쪽지 시험을 보는 것 같은 심정일 거예요. 매번 평가는 다를 수 있잖아요. ‘이번엔 좀 아쉽다, 이번엔 좀 근사해’ 항상 달라요. 하지만 이런 거에 대해서 일희일비 하면 안 돼요.

연재물은 작품이 올라가자마자 댓글이 쏟아지잖아요. 수천 개씩 댓글이 달리는데 일일이 다 보세요? 일부러 안 본다는 작가들도 있다는데, 사실 엄청 궁금하지 않나요?

연재라는 게 정말 악마적인 시스템이에요. 다 완성된 작품을 딱 꺼내 놓는 게 아니잖아요. 영화는 3분 보고 평가하지 않잖아요. 최소한 1시간 반을 보고 평가하죠. 연재는 매회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오류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 시스템을 알면서도 작가들은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기뻐하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해요. 쓴 소리를 들으면 침울해지기도 해요. 하지만 가장 1차적인 평가는 독자들의 반응보다 내가 초안대로 작품을 완성했느냐에 있어요. 작품에는 메시지가 있고 테마가 있지만 꼭 그런 것들을 내세워야 좋은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 내가 본 것을 판단한 것을 잘 담아냈느냐가 중요해요.

반전 작가로도 유명하세요. “이번 작품은 반전이 없다”고 말해도 독자들이 쉽사리 믿지 않는다고요.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아니면 초안과는 다른 결말을 낸 작품은 없었나요.

마지막까지 시나리오를 쓰고 연재를 시작하니까 바뀌는 경우는 없어요. 『발광하는 현대사』의 경우에는 엔딩 장면에 대한 편집만 약간 바꿨어요. 후기 영상은 그대로 했는데, ‘좀 더 쉽게 가느냐’ ‘보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으로 가느냐’를 끝까지 싸우다가 친절하지 않은 방식을 택했죠. 워낙 내가 불친절한 작가라고 인지된 것도 있고요. 물론 그런 프레임을 만든 것도 나 일 거예요. 긴장하게 보게 하는 것, 어떤 복선의 계기를 만드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내가 만든 프레임이에요. 초기 작품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장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작가가 만든 프레임에 스스로가 갇히는 경우도 많아요. 이번 신작을 하면서도 ‘그런 장치가 있어야 하는 거야’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런데 완결성이 높다고 완성도 높은 작품은 아니에요. 독자들한테 ‘반전 없을 거다’라고 말해도 이 자체도 트릭으로 보는 독자들도 많고요. 이럴 땐, ‘뭘 해도 안 되는 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워요. 매회 오는 반응을 즐기는 게 훨씬 낫죠.

독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힘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연재물은 여러 가지 유혹이 많아요. 연재물을 보게 하는 힘은 여러 가지인데, 그림이 예뻐서 이기도 하고 연출이 좋아서, 또 스토리텔링의 짜임새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그런데 작가는 매회에 따라 붙는 포만감에 대한 싸움을 계속 해야 해요. ‘잘 봤다, 잘 먹었다’는 마음을 독자에게 줘야 하거든요. 50회를 연재한다고 했을 때, 독자들이 보기에 ‘32화는 꼭 있어야 했어?’ ‘재미 없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작가에게는 작품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반드시 필요한 컷이거든요. 매회 포만감과 싸워야 하는 스트레스가 연재물을 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클 거예요.

그림 스트레스가 크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세요. 글과 그림의 중요성을 딱 잘라서 말하긴 어렵겠지만, 작품마다 힘든 부분이 조금씩 다를 것도 같아요.

그림은 드라마를 잘 담는 정도로 족한 것인가, 아니면 그림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게 옳은가, 둘 다 아니면 서로 적절하게 타협하는 게 좋은 건가. 이 싸움은 매번 결론이 달라요. 어느 판단으로 진행하느냐에 따라서 강력한 미스테이크가 있을 수 있어요. 만화라는 건, 글과 그림의 이상적인 결합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치우쳐도 안 되고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이야기, 드라마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흥미 있는 이야기를 만드느냐는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제에요. 내가 뭘 바라보고 있냐가 작품을 만드는 데 밀접하다 보니, 작품을 쉴 때는 무조건 사람을 만나요. 독방에서, 또 책과 TV를 통해 세상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을 만나는 게 최고에요.




단언할 수 없다. 모호함을 즐겨야 한다

과거 인터뷰를 보니 ‘사람을 네 번 정도 만나면 다 파악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셨던 데요.

제가 그런 말을요? (웃음). 그런 시절이 있었나 보네요. 사실 ‘너 잘한다’고 할 때가 제일 조심스러워요. 그럴 때 인터뷰를 하면 안 돼요. 뭔가 단언적인 말 투성이거든요. 예전에 대학 강단에서 애들을 가르치다가 그만뒀는데, 교단이라는 게 학생들보다 10cm 정도 높은 곳에 서 있다는 이유로 단언적인 말들을 해야만 했어요. 나도 아직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사람인데, 마치 완성형 인간인 것처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공기가 대학이라는 공간에 있었어요. 자칫하면 오만 방자하기 딱 맞는 곳이죠. 수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어제 그랬냐? 어제 술 먹었나’ 이 정도의 능글능글함이 허락되지 않으니까요.

인터뷰할 때도 마찬가지 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을 말하다 보면 스스로 결론을 내고 있고. 묻는 사람은 뭔가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니까요.

그렇죠. 사실 작가 인터뷰도 피해야 하는 게, 그 모호함을 즐겨야 하는데 질문에 대한 답을 강요 받고 있다고 착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순간의 단언을 말해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어떠한 대답도 당연히 바뀔 수 있어요. 한 시간 전에 ‘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먹는 겁니까’라고 말했다가, 한 시간 후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거거든요. 그게 사람이거든요. 모든 건 찰나의 기록일 뿐이에요.

트위터 하고 계시잖아요. 생각을 좀 정리한 뒤 글을 올리는 편이세요? 아니면 즉흥적인 생각들을 즐기시나요.

(웃음) 구글을 폭파시켜야 해요. 트위터 멘션을 지워도 구글링에 다 남잖아요. 원래 작가들은 트위터를 하면 안 돼요. 결국 계폭을 향해 달려가는 거예요. 어차피 끝은 계정 폭파에요. 트위터를 5년, 10년 할 것 같아요? 10년이 뭐예요. 5년 이상 못해요. 만약 그 이상 한다면 자신에게 특정한 이익을 주기 때문일 거예요. 끊임없이 홍보를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로 돈을 벌어야 하거나, 책을 팔아야 할 때. 뭔가 이익이 있지 않는 한 온전한 소설네트워크서비스를 유지하는 건 어려워요. 단어 자체가 트릭이에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페이스북은 나 잘 살아요. 트위터는 나 병신이에요”라고. 얼마나 병력이 높은지, 개드립이 높은지 싸우고 있는 거라고요.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140자 단문을 꽤 진중하게 쓴다는 건 불가능하고, 또 어떤 취향, 지향, 논조를 가지고 무차별적으로 내 면전 앞에서 쏟아 내는데 방어할 기제도 없거든요. 온갖 흉학한 말을 해버리고 싹 사라지죠. 자신의 멘탈 게이지를 확인하는 데에는 유효한 부분이 있기도 하죠.

그런데도 작가들은 왜 트위터를 하는 걸까요.

보통 작가들은 트위터를 팬을 만나는 공간으로 착각하고 시작을 해요. “여기에도 내 팬이 있구나. 이렇게 소통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놀다 보면 그게 아닌 걸 알게 돼요. 개드립의 향연으로 빠지는 거죠. 팬들도 그래요. “트위터를 보니까 오히려 작품이 훼손된다. 내가 생각했던 작가와 트위터에서의 인물은 다르다”고.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해요. 페이스북은 그나마 그룹을 묶어서 놀잖아요. 그런데 트위터는 검색만 하면 볼 수 있고. 올바른 용례는 구독이라고 생각해요.

계정을 없애고 다시 만드는 사람도 많아요.

그건 중독이에요. 저도 언젠가 계정을 폭파하겠죠. 중독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제가 작품이 끝나면 낮술클럽을 만들려고 해요. 일단 멤버를 모집해서 멀쩡한 대낮에 술을 마실 건데, 조건은 휴대폰을 절대 테이블에 올려 놓지 않고 진동으로 바꿔 놓는 거예요. 낮술을 먹다 보면 좋은 소리가 나오겠어요? 신음이 더 많겠죠. 그게 그리운 거예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그 감정을 느끼고 싶은 거예요.




본능적으로 흡수하는 독자들이 무섭다

독자들은 작품을 보면서 때로는 작가의 입장, 심리를 상상해보잖아요. ‘이 그림 그릴 때, 작가는 이런 기분이겠다’ 하는. 반대로 작가들도 작품을 보고 있는 독자들의 표정, 심리 같은 걸 상상해 보기도 하나요. 예전에 “만화는 표정 있는 언어”라고 정의하기도 하셨어요.

하죠. 많이 해요. 독자들이 이 컷을 볼 때 웃고 있겠다, 허무하겠다, 오글거리겠다. 다 상상해요. 그런 게 다 느껴져요. 사실 컷 하나 그릴 때 3시간씩 붙잡고 그릴 때가 많아요. 독자들이 볼 때는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하겠지만, 작가들은 인물이 팔을 왼쪽으로 괼까, 오른쪽으로 괼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어요. 목이 녹아 내리면서까지 이랬다 저랬다 자세를 바꿔 가며 그림을 그려요. 그런데 독자들이 그 그림을 보는 시간은 0.2초도 채 되지 않거든요. 두려운 건 ‘내가 이렇게 공들여 그린 그림을 저렇게 짧은 시간에 지나쳐 버린다’는 게 아니라, 독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3시간을 투자한 그림을 그 짧은 시간에 흡수하고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게 무서운 거예요. 외형적으로 ‘그냥 지나가네’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흡수하고 지나가니까 투자할 만한 거예요.

웹툰은 스크롤을 올리며 보니까 보는 시간이 더욱 단축되지만, 그래도 단행본으로 책으로 보는 경우에는 좀 더 세심하게 볼 것 같은데요.

책으로 볼 때는 1분 이상을 볼 때도 있고 다시 되돌아 가서 보기도 하죠. 책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거예요. 역시 사람들은 드라마 위주로 보니까 그림은 최소화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작가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글과 그림의 이상적인 결합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거거든요. 어떻게 보면 책이 더 적확한 형식인 게, 응시를 하게 되거든요.

가끔 후배 만화가들 작품도 보나요.

예전엔 많이 봤는데 요즘은 잘 보지 않아요. 다들 너무 잘 그리고 보고 있으면 부러워요. 다 나보다 잘나 보이고 잘하니까 화가 나요. 질투는 나의 힘이에요(웃음). 간혹 후배들 작품을 평가해달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선배는 조금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일 뿐이에요. 뭐를 평가할 만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 거죠. 모든 작가가 진행형이라 완성된 작가라는 건 없어요. 이제 말해도 되는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을 하지 않는 작가죠. 그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말을 해도 돼요. 그런데 내년에 뭘 할지 모르는 작가를 특정한 카테고리로 규정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19세 데뷔해서 출판만화를 시작으로 지금의 웹툰까지, 25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하셨어요. 가끔 다른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적도 있을 텐데요.

‘다음 생에 어떤 인생이면 좋겠냐’는 질문에는 ‘아직 이번 인생의 결론이 나지 않아서 모르겠다. 답을 유보하겠다’고 말해요. 저 역시도 가끔 상상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아직 결론이 안 났으니까요. 펜을 딱 내려 놓았을 때는 못할 짓이었어요.

『아름다운 선』연재가 올해 12월까지죠. 출판만화에서 웹툰으로 넘어오면서 유독 ‘연애물’을 많이 하셨어요. 다른 장르의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 같아요.

출판만화 시절에는 가족, 사회 같은 좀 아픈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온라인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연애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게 됐어요. 그동안 연애물은 많이 했으니까 『아름다운 선』까지만 하려고 해요. 주변에 활극, 액션물을 보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 잘해요. 그런 거(웃음). 액션은 악당이 매력적이어야 재밌잖아요. 히어로들은 어차피 하는 짓이 뻔하니까, 어떤 악당이냐가포커스에요. 굉장히 세고 거친 그림을 그려 보고 싶어요. 작가 이름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몰라볼 정도로 타격감 있는 그림. 마치 홍상수 영화를 보다가 <퍼시픽 림>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사실 연애물을 시작한 것도 ‘너 연애 이런 거 못하잖아’라는 소리를 듣고 ‘엇, 나도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거예요. 다음 작품은 하드코어적인 느낌을 생각하고 있어요. 도끼 한 자루로 시작과 끝을 내릴 수도 있고요.

홍상수 영화를 보다가 <퍼시픽 림>을 보는 느낌이라, 무척 기대됩니다.

저도 제가 어디까지 극한으로 치달을지 궁금해서 못 참겠어요(웃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수영 “뮤지컬, 영화 제작, 탱고… 아직도 꿈꿀 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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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쟁이, 드림 멘토…. 어느새 김수영 대표에게 따라붙는 별명은 여러 가지가 됐다. 모두 꿈과 관련 돼 있고, 긍정의 기운이 샘솟게 하는 별명이다. 그런 그녀가 최근 요리책(?)을 냈다. 그간 쌓아온 자신만의 비법 레시피를 모조리 공개한 책은 바로 『드림 레시피』다. 보통의 요리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의 하나 뿐인 자신만의 꿈을 요리하는 비법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주재료는 꿈을 이루길 갈망하는 개개인이며, 양념은 김수영 대표 자신이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노하우들이다. 『드림 레시피』는 그녀의 3번째 책이기도 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첫 번째 책 『멈추지마 다시 꿈부터 써봐』가 자신의 수기였다면 두 번째 책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는 백과사전이었다고 한다. 같은 비유법으로 봤을 때 『드림 레시피』는 꿈을 실현해 내도록 돕는 요리책인 셈이다.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가 되기까지
지금은 꿈을 먹고 살아가는 나 역시 예전에는 꿈이 가난한 사람이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왜 열심히 사는지 모르니 불행했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가출 소녀, 문제아, 실업계라는 꼬리표, 거기에 작은 키워 못생긴 얼굴 등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콤플렉스였다.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기 바빴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해 점쟁이를 쫓아다녔다 -『드림 레시피』
오래 전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호칭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중학교 시절 ‘문제아’로 불리며 끝내 자퇴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마음 속 잠재해 있던 꿈의 씨앗은 다시 마음을 다잡게 했고, 그녀는 검정고시를 통해 1년 늦게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게 된다. 처음 그녀가 품었던 꿈은 ‘기자’였다. 우리나라에서 세손가락에 드는 대학을 목표로 삼고 공부하는 그녀에게 선생조차도 냉정한 조소를 보냈다. 실업계라는 현실은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야 할 교사에게도 이미 한계로 각인 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1999년 KBS ‘도전, 골든벨’ 최초로 실업계에서 골든벨을 울리는 주인공이 됐고, 끝내는 자신이 목표로 삼은 대학에 합격을 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스스로 확인한 이후 그녀의 삶은 한동안 평탄했다. 성공적으로 대학생활을 보냈고, 졸업 이후에는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입사했다. 하지만 시련은 또 한 번 그녀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본격적인 성공을 맛보려는 순간 몸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것이다. 대개의 경우와 달리, 그녀는 좌절하는 대신 인생에 새로운 반전을 준비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죽기 전 자신이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한국에서 살았으니 다음 3분의 1은 세계를 돌아다니고, 마지막 3분의 1은 가장 사랑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첫 번째 꿈을 비롯해 모두 73가지 꿈을 담은 리스트를 완성한 이후,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함을 더하게 된다. 무작정 런던으로 떠나 런던대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2007년부터는 세계 매출 1위 기업 로열더치쉘 영국 본사에 입사에 연 800만 달러의 매출을 담당하는 카테고리매니저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 꿈은 83개로 늘어났다. 그중 부모님께 집 사드리기, 킬리만자로 오르기, 발리우드 영화 출연하기 등 48개의 꿈을 70여 개국에서 이뤄 온 그녀. 그 과정을 통해 그녀는 꿈을 이뤄내는 자신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꿈을 응원하는 드림 멘토로 영역을 넓히게 된다. 수많은 강연을 통해,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꿈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 온 그녀는 결국 지난해 사회적 기업 ‘드림 파노라마’를 설립했다. 강연과 모바일 앱, 워크숍과 페스티벌, 퍼레이드 등 다양한 방법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꿈의 씨앗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녀 자신의 꿈을 이뤄나가는 일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모두가 꿈쟁이

『드림 레시피』출간기념회를 앞두고 준비에 분주한 김수영 대표를 만났다. 막 무대 리허설을 마치고 온 터였다. 매번 특별한 이벤트가 함께 진행되는 그녀의 행사, 이번에는 미리 『드림 레시피』에서 예고한 것처럼 춤과 노래를 선보일 생각이다. 다양한 소품과 함께할 사람들이 왁자지껄 오가는 공간에서의 인터뷰였지만, 할 말은 빼놓지 않고 다 하는 그녀. 뭐든 속성으로 해내는 것을 좋아한다더니, 인터뷰도 그랬다.

책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고 출간기념회에서 깜짝 공연을 하겠다고 했는데, 준비 기간은 얼마나 걸렸어요?

두 달 준비했어요. 처음 연습할 때 코치하시는 분이 “노래는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라고 그러더군요. 제대로 하려면 최소 6개월은 연습해야 한데요. 저도 해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가창력으로 안 되니까 재밌게라도 하자’는 생각에 여러 가지를 준비를 했어요. 마술 공연과 함께 연기도 하고 같이 춤도 추는 시간이 될 거예요. 저는 원래 그랬어요. 예전에도 1박2일로 워크숍을 가서 인도 춤을 가르쳐준다거나 아침에 요가를 한다거나 캠프파이어를 한다거나 할 수 있는 게 되게 많잖아요. 저는 단순히 서서 강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함께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재미없게 제 얘기만 할 필요는 없죠.

꿈을 이루는 과정, 목표로 하는 꿈을 스마트폰으로 기록하라고 권했는데, 혹시 지금 본인의 기록을 보여줄 수 있나요?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주며) 제가 만든 ‘버키노트’라는 애플리케이션인데. 내년에는 요트를 타고 세계 곳곳을 항해하려고 해요. 또 다시 한 번 여행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진행 중이기도 하죠. 이뤄야 할 꿈이 진짜 많아요. 뉴욕에서 뮤지컬 공부하고, LA에서 영화제작 공부하고, 남미에서 탱고를 비롯해서 여러 춤을 배우고, 그 다음에 아프리카 자원봉사와 태평양 항해…. 이 모두가 9월부터 진행할 꿈 목록들이에요.

세 권의 책을 내면서 수영 씨가 처한 상황과 위치도 많이 달라진 것 같네요. 많은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꿈 역시도 더욱 구체화했던 과정이었던 것 같은데요?

2007년부터 해외 취업과 관련 된 내용으로 블로그 글을 썼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에게 이메일을 받고 취업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과정에서 더 큰 문제를 알게 됐죠. 취업에 대한 고민 속에 진정한 문제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꿈과 관련 된 글을 쓰다가 영국취업박람회에서 초대를 받아서 강연하게 됐고, 그래서 『멈추지마 다시 꿈부터 써봐』를 쓰게 된 거예요. 예상을 뛰어넘어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시고 엄청난 일들이 있었었죠. 제 책을 읽고 자살하기 직전의 분들이 생각을 고쳐먹고, 아프셨던 분이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 걷게 됐다더군요. 그 후로도 많은 분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꿈과 관련 된 고민들을 받다보니, 결국 ‘드림 파노라마’를 창업하게 됐어요. 이번 책은 본격적으로 꿈에 관한 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쓰게 된 것이고요.

많은 사람들한테 실질적으로 도움 되기도 했지만, 책을 쓴다는 것은 수영 씨 자신에게도 영향이 컸을 것 같네요.

그 전까지는 단순히 저 개인의 꿈이었던 것이, 그동안 많은 분들을 접하며 모두와 함께 나누는 꿈이 된 거죠. 그래서 제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실제로 꿈을 찾고 이루게 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어요. 그 과정을 심층 분석하고 통계를 내서 나름대로 액션 플랜을 만들어 낸 것이죠. 이제는 각각의 단계를 통해 꿈을 찾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렸으면 해요.

자신의 꿈을 이뤄가면서 여러 가지 직업을 경험하셨잖아요. 지금은 꿈쟁이, 꿈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직업적으로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자신의 역할을 규정하자면?

굳이 규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웃음). 일단 제 명함에는 치프 드리머(Chief Dreamer), 그러니까 대표 꿈쟁이라고 써요. 하지만 그게 중요하진 않아요. 제가 드림파노라마라는 사회적 기업을 하고 있으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꿈쟁이거든요. 누가 사장이고, 과장이고 이런 거 하나도 없고 모두 꿈쟁이들, 다 각자의 꿈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니까요.

한편으로 수영 씨가 자신 꿈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 못 할 듯 한데요.

일단 전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걸 먼저 정한 후에 돈을 벌거나, 만드는 스타일이에요. 예전에 부모님께 집을 사드릴 때도 그랬죠. 번역 일을 하다가 시간과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혔을 때, 번역회사를 차린 것도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같은 경우는 강연이나 인세도 있고요. 예전에 운영하던 사업도 있어서, 경제적인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황이에요.




처음으로 꿈이 필요했던 순간

책에서 그녀는 인생의 길목에서 선택이 필요했던 순간을 언급했다. 열여섯 살, 함께 방황했던 친구들과 같은 선택을 했다면 그녀 역시 십중팔구 범죄자가 되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열여덟 살, 대학을 포기했다면 보통의 실업계학생들처럼 취업을 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평범한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스물다섯 살,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고 꿈 목록을 작성하지 않았다면 평생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상사 욕이나 하는 삶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선택은 모두 다른 이들과 달랐다.

책에서 인생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많았을 듯 하네요.

주어진 상황을 선택했으면 지금의 제가 없겠죠. 저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했고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을 알았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거예요. 가능성이 있든 없든 여부를 떠나서 다른 길을 가고 싶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삶을 먼저 바라보잖아요. 뭔가 꿈이 있어도 이건 나에게 주어진 삶이 아니고 나의 분수에 안 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면서 방법이 없다고 포기하는데, 사실 방법은 많이 있거든요.

중학교 시절 ‘넌 커서 도대체 뭐가 될래’라고 이야기하는 선생님들에게 보란 듯 사고를 치고 다녔다고 했는데, 나중에 그 선생님과 만난 적도 있었을 듯 한데요.

실제로 대부분 선생님들을 찾아가 직접 사과를 했어요. 그리고 오히려 그 분들이 먼저 연락이 와서 사과를 하신 적도 있고요. 선생님들도 지켜보고 있고 제 이야기를 지금 제자들에게도 많이 하신다더군요. 그 때는 미움이 너무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한 것 중 하나가 여러 선생님한테 혼이 났는데 진짜 무서운 남자선생님들한테 대들지 못하고 여자 선생님한테 좀 더 대들었다는 게 조금 비겁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혹독한 방황 덕분에 남들과 다른 선택과 도전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요.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두려움 없이 많은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닥을 쳐봤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대부분 사람들은 바닥까지 가보기도 전에 두려워하거든요. 사실 바닥이 그렇게 깊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꿈을 찾기 위해서는 ‘한 번쯤 바닥을 쳐도 되지 않을까. 좀 더 실패해도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사실 경험해 보면 별로 두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수영 씨로 인해 가족들의 변화도 컸을 듯 한데요. 책에서 아버지의 변화 사례를 설명하기도 했지만, 다른 가족들 형제들의 변화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저희 언니 같은 경우는 스위스에 살았어요. 형부가 스위스에 입양 된 한국계였는데, 계속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다고 얘길 했나 봐요. 언니의 입장에서는 형부가 한국말도 못하는 상황에서 안 된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제 책을 읽고 남편의 꿈을 이뤄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살고 있어요(웃음). 남동생도 조만간 저처럼 해외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캐나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고, 여동생은 저와 함께 많은 일을 같이 하고 있어요.




꿈을 찾는 이유, 그리고 생의 목표

2012년 드림 파노라마를 설립하기 이전 그녀의 상황은 사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자신의 꿈을 이뤄나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또 다른 꿈을 설정했다. 그녀가 계속 꿈을 지향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과연 그 끝에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로열더치쉘이란 직장은 부러워하는 곳이 아닐까 싶어요. 굳이 다른 꿈을 위해 그만둘 필요까지 있었나 싶기도 한데요?

드림 파노라마 역시도 제 꿈이었어요.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죠. 이전의 직장은 분명 좋은 곳이었지만 그건 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전 저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꿈의 파노라마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블로그에 올린 가상 인터뷰를 보면 발리우드 야시 초프라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꿈이 있었고 실제 <잡탁해잔>의 출연에 성공했는데요. 그런 꿈을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발리우드 영화를 즐겨보면서 어느 날 문득 한번 출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멈추지마 다시 꿈부터 써봐』에서도 쓴 꿈이었어요. 인도 최고 배우인 샤룩칸 뒤에서 웨이트리스 역할이라도 좋으니까 출연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죠. 실제로 이루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제일 힘들게 이뤘던 것 중 하나고, 사실 아직 완벽히 이뤘다기보다는 진행 중인 꿈이죠. 앞으로 좀 더 많은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니 기회가 오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야죠. 영화제작 공부를 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1회성 꿈이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이에요. 반드시 배우가 아니라 제작을 할 수도 있고요.

한편으로 수영 씨와 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누군가는 그야말로 배우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경우도 있는데, 수영 씨의 경우 상대적으로 쉽고 빨리 이뤄낸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기간은 좀 더 짧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시간동안 제가 겪은 정신적 고통과 노력의 크기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원래 특성이 모든 걸 속성으로 해요. 발리우드 뿐만 아니라 모든 걸요. 사람마다 성향이 달라서 10년 하는 걸 저는 한 달에 하는 것도 있고요. 그러니까 입장의 차이인 것 같다. 정말 평생 연기만 하겠다는 사람도 있잖아요. 반면 전 그 외에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거든요.

정말 놀랍고도 다양한 꿈, 그리고 그 꿈을 이뤄내는 과정 중에 사랑에 빠져 본 경험은 찾아보기 힘들었는데요.

그 얘기는 다음 책으로 쓸 생각이에요(웃음). 이번 책에서도 쓰려고 했는데, 편집장님께서 ‘이렇게 쓰면 시집 못 간다’며 말리시더군요(웃음). 앞으로 할 얘기가 많겠죠. 앞으로 겪을 일도 많을 거고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성상은 없어요. 막상 만나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남성상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스펙으로는 절대 아니에요. 아마 주어진 삶을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닐 거예요. 뭔가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면 좋겠죠.

끊임없이 꿈을 이뤄나가는 수영 씨를 보며 한편으로 ‘과연 이 사람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다양한 꿈을 이뤄나가는 근원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더 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고 그 과정에서 제가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꿈을 찾으면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저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 나아가 이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 있고, 의료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꿈을 이뤄낼수록 지원하는 지금 이 일이 제 길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 한데요.

많은 사람들이 꿈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제 책을 통해 요리책에서 레시피를 보고 바로 쓱싹쓱싹 요리 할 수 있는 것처럼 꿈을 이뤄나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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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레시피김수영 저 | 웅진지식하우스
대한민국 드림 멘토 김수영은 “이룰 수 없는 꿈은 없다”고 강조한다. 원하는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고, 목표로 했던 점수를 받고,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나만의 독특한 가게를 만들겠다는 등의 크고 작은 꿈들은 언젠가 분명히 현실이 될 수 있다. 꿈을 현실이 되는 ‘공통의 방법’만 알고 있다면 말이다.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를 통해 꿈쓰기의 힘을 알려주고,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꿈의 씨앗을 품게 했던,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드림 멘토’ 김수영. 그녀가 그간 25개국 365명, 150만 블로거, 200여 회 강연, 50만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 찾은 ‘꿈의 공식’을 이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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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머리 “트렌드를 좇는 음악은 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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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핫했다. 그리고 지금도 가장 핫하다. 첫 솔로 앨범 <Primary And The Messengers LP>로 작년에 대박을 치더니, 올해는 동료 힙합 아티스트들뿐만 아니라 아이돌 가수들에까지 프로듀서로서 지원 사격을 날리며 연일 상한가를 기록 중이다. ‘프라이머리’라는 네임 라벨이 붙었다하면 히트에 성공하는 작금의 대중음악 신에서, 스페셜 원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반론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매번 들었을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가면 디자인은 언제 했나요?

2006년쯤일 거예요. 프라이머리 스쿨(이하 피스쿨) 1집 앨범 준비하면서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음반을 수집하는 사람 입장에서 세월이 지난 앨범들 쭉 보고 있으면 간혹 어떤 앨범 자켓들은 사진이 촌스러워 보이거든요. (웃음) 거기에 캐릭터가 있으면 그게 덜 하더라고요. 나이가 들지 않는 느낌? 거기서 부터 캐릭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피티 아티스트 윤협이라는 친구가 당시에 정크 아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쯤 제가 빠져있던 음악 스타일하고도 매치되는 부분이 많아서 가면을 만들게 되었고요, 또 재활용적인 측면에 있어서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부분도 있었죠.

비둘기 디자인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원래 이게 오리지널 버전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영화를 찍는다고 빌려갔다가 그대로 먹어서(돌려주지 않아서)… 사진만 보고 다른 친구가 만들어줬죠. 그런데 만들수록 면적이 뚱뚱해지는 거예요. 원래는 비둘기 디자인인데 지금은 부엉이로 보시는 분들도 많고 코끼리로 보시는 분들도 많고.

앞이 뚫려 있나요?

뚫려 있긴 한데 잘 안 보여요. (웃음) 그래서 실제 연주를 할 때는 벗고 해요. 다프트 펑크나 데드마우스나 헬멧이 기술적으로 발달되었잖아요. 불도 들어오고 에어컨도 있고. 제 건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 되게 불편해요. 습한 날씨에 쓰고 오면 눅눅해져있고.

처음 음악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는 별 생각 없이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냥 음악을 좋아해서 시작한 케이스죠. 중학교 때 음악 시간에 기악 시험을 치르는데 왜 보통 리코더들 많이 하잖아요. 조금 특이한 악기로 연주하면 점수를 좀 더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사실 처음에 전 통기타로 조용필, 넥스트 이런 거 연주하는 걸 생각했거든요. 알고 보니 이게 클래식 기타더라고요. 가르쳐주는 건 「반짝반짝 작은 별」 (웃음) 그 때는 되게 하기 싫었어요, 진짜. 그러다 조금씩 재미가 들리더라고요. 그 때부터 음악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전자 기타도 잡았어요. 깊게 들어갔죠.

굉장히 많은 악기를 다루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죠.

악기 다루는 걸 좋아해서요. 원래는 어렸을 때 기타 연주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하다 보니 관심사가 퍼져서 건반도 치고. 또 비슷한 악기들은 운지법이 조금씩 비슷하잖아요. 베이스도 치고 시타도 치고, 색소폰도 조금 배워놓아서 관악기도 약간 하고 있고요.

처음에는 힙합이 목표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록 음악을 좋아했어요. 속주를 좋아해서 잉베이 맘스틴, 스티브 바이 같은 아티스트들을 좋아했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지금만큼 음악 교육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어요. 지금은 실용음악 학원도 많고 예술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학과도 잘 잡혀있지만 저 때까지만 해도 없었거든요. 그러다 고등학교 땐가 재즈 아카데미 이런 게 생겼던 거 같아요. 음악을 제대로 배운 게 그 때쯤이에요. 스무 살 때 재즈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갔어요. 이전까지는 무조건 속주만 파다가 재즈란 걸 처음 접하면서부터 래리 칼튼이나 로니 조단 음악에 엄청 빠졌었죠. 로니 조단의 경우에는 모달 재즈라 해서 힙합하고도 콜래보레이션을 많이 했고 구루나 디제이 크러쉬와도 같이 음반도 냈고요. 여기에서부터 제 음악이 확장된 것 같아요.

그보다 더 어렸을 때는 무슨 음악을 들었나요?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들었죠. 중학교 때는 팝 음악을 엄청 들었고요. 저희 때는 강남 타워레코드 가서 돈 없으니까 애들끼리 매일 음악 듣고 오고 그랬어요. 거기가 1층이 팝이고 2층이 중화권 음악, 월드 뮤직, 인도 음악으로 나뉘어있었거든요. 가서 그런 음악들도 듣고 악보들도 사오고 그랬어요.




연주한다는 방식이 신에서 상당한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요즘에 기술이 좋아지다 보니 홈 레코딩 시스템으로 많이 바뀌었잖아요. 어떻게 보면 저같이 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강점이 되는 시대가 온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보면 지금 이 시스템이 음악의 큰 신에 있어서는 좋지 않을 수도 있어요. 연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굉장히 힘들어요. 몇몇 에이급 연주자들만이 음반의 거의 모든 세션을 담당하다보니 다른 연주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상당히 적어진 거죠. 얼마 전에 유희열 형님이랑 얘기를 했었는데 예전에는 서울레코드로 웬만큼 연주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대요. 교류도 많이 하고, 이 친구가 기타 좀 친다하면 그 위에 형님들이 다 이끌어주는 기능도 있었는데 요즘엔 그렇지 않잖아요.

본격적으로 발을 담근 것은 프라이머리 스쿨부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예. 사실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여기저기 활동을 하긴 했는데 본격적인 건 피스쿨 때부터예요. 그러다 빅딜 레코드를 만들어서 한 장 내고 (레이블에서) 나오기도 했고. (빅딜에서는 왜 나오게 되었나요?) 그때는 다들 나이도 어렸어요. 생각해보면 취미로 접근했던 것 같고요.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중단하고 옮겼죠. 1집 앨범은 사기도 당했어요. 1원도 못 받았는데. 제작비도 많이 안 썼거든요 사실, 자켓도 친구들이 만들어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유통 과정에서 사기를 당한 거죠.

스스로도 컨템포러리 재즈라고 말했는데, 그 특유의 재지함이 상당히 특이했습니다.

그걸 좋아했고, 추구했고 지금도 좋아해요. 하고 싶고. 언젠가는 그런 형태의 앨범을 내고 싶어요. 내겠죠. 지금은 대중적으로 다가가려고 해요.

스코어(이관)랑 같이 프라이머리 스코어로도 음반을 냈었죠?

원래 기획된 건 그게 아니에요. 그런 형태가 아니었고 둘이서 하는 잼 형식이었죠. 아예 연주곡으로만, 가창인 노래도 있지만 연주가 대부분을 이루는 음반을 내려고 했어요.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같은 음반을 좋아했거든요 당시에. 작업을 막 시작하니까 투자자가 들어오게 되고 회사도 끼게 되면서 요구사항이 생기더라고요. 대학생이라 시간도 많지 않은데 데드라인이 주어지고요. 어떻게 하다 보니 한 달 만에 나왔는데 아쉬웠어요.

아쉬운 곡들이 많은가요?

음반 낼 때마다 항상 아쉬워요. 그래도 저는 완전히 제 욕심을 충족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예요. 물론 나오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노력을 하지만 자기만족은 100 퍼센트 채우려고 몇 년씩 음반 작업에 매달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차라리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죠. 만들고 1주일 뒷면 안 좋게 들려요. 그런 식으로 했다가 안 나온게 되게 많죠. 못 내고 쟁여두고 있는 트립 합 스타일도 많고 아무도 안 사겠다 싶은 레이드 백(laid back) 심한 스타일도 갖고만 있죠.

꼽아본다면 어떤 곡들이 아쉬움으로 기억에 남나요?

팔로알토 앨범에 있는 「줄넘기」랑 정기고 형이 피쳐링 한 「녀석들」이나… 일본 그룹 게이글(Gagle) 곡 중에 「Love note」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많이 안 알려진 곡들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워요. 맘에 드는 곡들인데.

스코어도 스쿨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형태의 음반을 내고는 싶은데 지금은 연주를 워낙 안 해서요. (웃음) 일주일만 안 해도 손이 굳더라고요.




첫 솔로 앨범 <Primary And The Messengers LP>에 대해 얘기해보죠. 만족도는 어느 정도였나요?

대중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음반이라, 어떻게 보면 앨범 전체의 색깔에 있어서는 크게 만족도는 없어요. 앨범 단위로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예전에 냈던 음반에 더 어울리죠. 하지만 지금 시장에서는 그런 형태를 거부하잖아요. 대중들도 그런 음반을 원치 않고. 하고 싶은 음악을 하려면 지금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죠.

2CD에다가 분량이 상당합니다. 스쿨이나 스코어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평소 작업량이 많은가요?

작업을 할 때 한 번에 많이 해요. 예전에는 사실 곡이 남아돌았거든요. 집중을 하는 대로 나오는 식이었는데 요새는 외부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밀린 것도 많아서. (웃음) 들어온 것만 끝내고 당분간 작업은 그만 받으려고요. 다음 앨범 준비 해야죠.

칼 같은 데드라인에 쪼는 작업, 닦달로도 MC들 사이에서 유명해요.

요새는 안 그런데 예전에는 혈기가 왕성해서 좀 심했어요. 할 게 있는데 잠에 드는 거, 이걸 해야 하는데 쉬는 거, 이런 걸 용납 못해요 저는. 슈프림팀 작업 한창 할 때는 전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옆에 붙어서 가사 쓰게 했죠. 물론 개인적인 차이라 집중력이나 작업 방식은 뮤지션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험상으로는 약간 아티스트 성향을 가지신 분들이 조금은 더 게으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놀기 좋아하고. 쪼이면 나오죠.

남겨둔 곡들이 상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죠. 얼마 전에 나온 범키의 「미친 연애」 같은 곡은 제 앨범에 들어가려 했어요. 이번에 나온 피타입의 「꿈의 해석」도 그렇고요. 아날로그 신디로 만든, 진보같은 친구들이 추구하는 그런 사운드의 노래인데 2008년 쯤 그런 식의 음반을 준비하면서 만든 피스쿨 시절의 곡이에요. 사실 피스쿨 2집이 잘 안 됐거든요. 2집을 내기 전에 약간 시장의 변화를 감지했던 것 같아요. 원래는 시장에서 음반이 팔려야 살아남는 시스템이었는데 그게 점점 바뀌더라고요.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안 되겠다’는 것도 실감했고요. 타협을 하지 않고 제 음악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일본 레이블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본의 아니게 대학교 졸업을 못 했거든요. 전공필수 과목을 미수강해서… (웃음) 한 학기를 더 다니면서 그 쯤 아메바랑 계약을 했어요.

솔로 앨범을 내면서 기억에 남는, 혹은 재미있었던 작업 에피소드가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리듬파워와 함께했던 「2주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이랑 작업할 때면 토크를 해요. 술은 잘 안 먹지만 술집에서 나올만한 얘기들이 나오죠. 한번 해보고 멜로디 입혀주고, 또 하고. 집에서 놀면서 했던 것 같아요. 리듬파워 새 앨범 작업도 들어갔고… 이센스랑 했던 「독」같은 경우에는 래퍼가 감정을 조금 이입해야하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시간이 걸렸는데, 작업은 새벽에 했어요. 그 친구는 야행성이고 저는 아침형인간이라. 스튜디오 불 다 끄고 촛불 켜놓고 전자레인지에 데운 와인 마시면서 녹음했어요. 곡에서 나오는 연필소리도 마침 녹음실에 철제 책상이 있더라고요. 볼펜으로도 해보고 나무 책상, 플라스틱 책상 여러 곳에 놓고 해봤는데 철제 책상이 가장 잘 나왔던 것 같아요. 「3호선 매봉역」은 굳이 3호선에 안 가도 되는데 3호선에 가서 녹음했어요. 매봉역까지 가긴 좀 그래서 남부터미널역에 가서 따왔고요.




자이언티 얘기를 잠시 꺼내볼게요. 「씨스루」를 통해 자이언티가 많이 알려졌고 프라이머리의 페르소나로도 자주 언급이 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경험상으로 그런 아티스트가 굉장히 많았는데 전에 작업을 많이 했던 빈지노도 잘 맞았고 다이나믹 듀오 개코 형도 잘 맞았어요. 자이언티 같은 경우는 저를 통해 잘 알려지고 홍보가 되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아요. 만약 빈지노가 그렇게 알려졌다면 빈지노가 그런 얘기를 들었겠죠.

최근에는 아이돌들과의 콜래보레이션도 많았어요. 인피티트H랑 엠블랙, 얼마 전에는 브라운아이드걸스와도 같이 했죠. 계기가 있었나요?

아이돌 작업 의뢰가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거기서 해야 하는 것만 했죠. 제 앨범이 나오기 전에 했던 인피니트는 에픽 하이랑 연결되었던 것 같아요. 엠블랙은 제 앨범에 도움을 줬던 게 이유였고, 브라운아이드걸스는 윤일상 형님이랑 얘기가 되어서 했고요.

혹시 같이 하는 기준이 있나요?

예전에는 욕심이 있어서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걸 준비하고 그러다 보니 다른 가수들과 같이 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다른 프로듀서들 예를 들어 퍼렐 윌리엄스나, 팀벌랜드 보면 누구 음반을 들어도 그 곡은 누구다 알 수 있는 색이 있잖아요. 저도 제 색깔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찬가지로 색깔이 센 다른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하면 합쳐진 색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요. 그 색깔들이 만나서 융화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런데 아이돌 같은 경우에는 모호한 면이 있다 보니 제 색깔만 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제시를 해주길 바리기도 하고요. 어떤 프로듀서랑 해도 마찬가지겠지만 디렉팅을 붙이고 이것저것 가이드를 잡다보면 결국 프로듀서의 스타일로만 가게 되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힘든 점을 느꼈죠. 사실 지금 개인적으로도 준비하고 할 게 많아서 기회가 되면 더 잘 해보고 싶어요.

뽑아내는 음악 바운더리가 상당히 넓습니다. 장르 구분 없이 음악을 들은 증거이기도 하겠군요.

다 좋아하고요. 사실 어떻게 보면 저도 팬이죠. 음악을 듣는 팬이고 좋아하고 듣고.

요즘 꽂힌 음악이 있나요?

요새는 좀 올드한 음악을 많이 듣는 것 같아요. 1930년대 조금 엣날 음악. 예전에도 듣기는 들었는데 최근에 다시 듣게 되네요.

평소 작업을 하면서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요?

여기저기 일상에서 얻죠.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것 하려 했었는데 요즘은 목적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 같아요. 목적도 없고 내지르는 스타일이었다면 이제는 전문적으로 하다 보니 목적이랑 범위를 가지고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프로페셔널하게 하려면 범위를 줄여야하는 면이 있는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있어요.

아예 예상치 못한 장르의 음악을 기대해볼 수도 있을까요?

그렇죠. 요새 좀 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미니멀한 것도 해보고 싶고 오케스트라 같은 것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요. 새 앨범에서 시도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혹시 최근 작업하고 있는, 구상하고 있는 계획이 있다면 말해줄 수 있나요?

장르에 틀이라는 게 존재하잖아요. 힙합 뮤지션이라고만 바라보지 않도록 하고 싶어요. 저도 그런 식으로 인식하려하지 않고 있고요. 그보다 조금 더 확장을 하고 있어요. 다른 장르를 콘셉트로 하고 있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힙합으로 가려고 있어요. 반반이죠. 비율을 절반 정도는 많이 확장을 하면서 남은 절반은 완전한 한 색깔로. 조금 분리를 할까 생각을 하고 있고요. 10월쯤으로 목표를 잡고 있어요.

라디오, TV와 같은 미디어 매체 출연에 사람들이 많이 반깁니다. 소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는 너무 말을 못해서. (웃음) 아주 조금씩은 괜찮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시크하다고, 너무 부담스럽다고 하던데요. 라디오 처음 할 때도 유인나씨 고정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갔거든요. 성향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 시간대 라디오 특성상 재밌어야하고, 막 목소리 연기도 하고 그래야하는데 그것 때문에 대본에도 없는 걸 자꾸 시키는 거예요. 여자 역할도 시키고. 생방송중에 노래 부르고 안하면 진행 안하고. 스트레스도 장난 아닌 거예요, 생각해보니. 지금 하는 애프터클럽 프로그램 하다 보니 조금씩 나오는 거예요.

진행은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엔 굉장히 긴장됐고 가보니까 또 대본이 없어요. (웃음) 그래서 처음엔 대본을 막 써놓고, 이걸 읽자 했다가 이것도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거 뭔가 얘기를 해야겠구나 싶어서 게스트를 데리고 왔죠. 한 시간을 어떻게 채울까 하다가 15분은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음악 트는 식으로 하자고 시작했는데 요즘에는 음악 얘기를 하다 보니 말이 점점 길어져요. 편집 때 녹음 분량을 매번 줄이고 있어요. 저번 주에도 메타 형님이랑 했는데 말이 또 길어져서 얼마 잘라냈고.

섭외는 어떻게 하시나요?

제 카톡으로. 다들 친해서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신보 나온 아티스트도 좋죠. 나올 얘기들도 많고.

같이 작업하고 싶은 MC가 있다면?

웬만한 아티스트랑은 작업을 다 해본 거 같아서 신인들이랑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여성 MC들과도 해보고 싶고, 했던 사람들도 좋지만 신 자체에 새로운 스타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다 한 번은 메일 주소 공개해놓고 데모를 보내 달라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 너무 많이 날아와서 메일이 아예 확인 불능상태가 되버렸어요. 보낸 사람이 또 계속 보내고.

힙합 신에서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같이 하고 싶은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로는 누가 있을까요?

엄청나게 많죠. 사실은 너무 많아서 누구라고 꼽아 말하긴 좀 그렇고, 국악하시는 분들하고도 해보고 싶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오케스트라 음악도 해보고 싶고… 저도 아이디어나 구상을 외국 뮤지션들에게도 많이 얻거든요. 그런 음악들을 듣다보면 굉장히 멋있게 여러 방식으로 작업을 많이 하더라고요.




슬슬 인터뷰가 막바지로 향해 가는데요, 이쯤에서 영향을 준 아티스트, 혹은 음악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너무 많은데, 진짜 어릴 땐 서태지였고요. 저희 나이 때는 다 그렇잖아요. 신이었으니까요. 중학교 때는 신해철 선배님이나 유희열 선배님이었고요. 커가면서는 로니 조단이나 마일스 데이비스, 래리 칼튼. 공부를 할 때 이 아티스트들 음악 들으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이즘의 공식 질문이죠. 내 인생에 영감을 준 음반을 꼽는다면?

로니 조단의 <Off The Record>앞으로의 음악에 대해 영감을 주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산타나의 <Supernatural>.

예전에 잠시 아티스트와 평론과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죠?

사실, 모르겠어요. 신 자체가 너무 좁은데 그 안에서 아티스트들이 타격을 굉장히 많이 입더라고요. 지금은 안 그런 경향이 있는데 몇몇 커뮤니티들 중심으로 신이 운영되었거든요. 모든 정보들이 그 쪽을 통해 나와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평론을 내놓으면 새 음반을 낸 아티스트가 쉽게 무너져버려요. 새로운 대중들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보고 공부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티스트들은 들려줄 권리를 잃어버리는 거죠. ‘이건 이래서 별로더라’ 식으로 올라오는데. 그 순간에 아티스트는 타격을 많이 받아요. 망가지기도 하고. 이게 왜 필요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을 듣고 즐기는 것은 대중들인데 정작 평가는 대중들이 아니라 커뮤니티 운영자들이 올리는 거잖아요. 사람들은 여기에 쉽게 휩쓸리죠. 물론 그 분야에 계신 사람들을 안 만나본 것도 아니에요. 저도 그 상황에서 많이 봤고 안 좋은 것도 마주쳐보고, 화해시키려고도 했죠.

공존할 방향이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죠. 하지만 가이드를 제시해주는 게 평론가라고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들어보면 뭐가 보일 것이다,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정도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인터뷰마다 오래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유행을 타는 음악, 트렌드를 좇는 음악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일렉트로닉이 핫하다고 하면 가요 전반이 그 쪽으로 향하고 디스코가 핫하다고 하면 또 그 쪽으로 향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걸 좀 피하려고 해요.

인터뷰 : 김반야 신현태 이수호 전민석
정리 : 이수호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손미나 “소설 쓰고 났더니 제 인생 끝났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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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두 권 쓰고 말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글 쓰는 모습이 기특하고 고마워요.” 손미나의 신작을 읽은 한 독자가 인터넷서점에 남긴 댓글이다. 2006년 『스페인 너는 자유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행작가의 길을 걷게 된 손미나.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미련 없이 버린 그녀의 결정은 방송계에서는 아쉬웠겠지만 출판계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서른이 되면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책을 한 권 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손미나는 어느덧 5권의 저서, 2권의 번역서에 이름을 올렸다. 작가가 본업이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지만, ‘여행작가’에 이어 이제는 ‘소설가’라는 타이틀로 불려도 어색하지 않다.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는 2009년부터 3년간 손미나의 파리 생활을 묶은 책이다. 대학 시절, 인상 깊었던 파리 여행을 뒤로 하고, 언젠가 파리지엔으로 살아보고 싶었던 손미나. 스페인, 도쿄, 아르헨티나 여행기를 쓰고 네 번째 도시 ‘파리’를 찾았다. 파리지엔이 되는 조건은 생각보다 아찔했다. 이웃 주민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은 물론, 프랑스어가 서툴렀던 초기에는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기도 했다. 손미나는 “스페인이 호탕하고 성격 좋은 친구 같다면, 파리는 참으로 근사한 외모를 지녔지만 알수록 성격이 까칠한 아가씨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도시인데, 왜 전 세계 여행자들은 언제나 ‘파리’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지 못해 안달일까. 생활여행자 손미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파리와 파리지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의문을 풀게 될지도 모른다.
파리는 내가 머물러본 그 어떤 곳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또한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 받는 삶이 흐르는 곳이다. 잠깐 스쳐가는 여행자가 아닌 파리지엔으로 산다는 것은 그 기운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어떤 빛깔을 지닌 사람이든 파리에서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는 것이다. 그러니 헤밍웨이가 말했듯, 젊은 시절 파리에 살았던 것은 크나큰 행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내가 앞으로 어디에서 어떤 삶을 빚어 가든지 움직이는 축제처럼 내 영혼에 빛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 p.423)



여행을 떠날 땐 꼭 테마를 정하세요

파리가 요즘 이슈잖아요. tvN <꽃보다 할배> 첫 여행지가 파리였고 지난해는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았어요. 파리는 언제나 여행자들의 로망 같은 곳이지만 유독 최근에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운이 좋나 봐요(웃음). 4년 전에 파리에 가서 3년 동안 체류했는데, 물론 파리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소설에 빠져서 소설을 먼저 썼잖아요. 올해 여름쯤에 파리 에세이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꽃보다 할배>가 인기를 얻는 바람에 파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어요. 나영석 PD는 제가 정말 좋아하고 아끼는 후배거든요. 나 PD가 처음 방송사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한 프로그램이 저와 같이 한 프로그램이었어요. <꽃보다 할배> 준비하면서 조언도 해주고 그랬는데, 책이 나왔으니 한 권 선물해주려고요.

언젠가 파리에 살고 싶다는 꿈을 오랫동안 꾸셨다고요. 22세 때 스페인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파리 여행을 한 경험이 무척 좋았다고 했는데, 파리는 굉장히 불친절하기로도 유명한 도시라서 여행이 아닌 생활자로서는 힘든 점도 많았을 텐데요.

파리 웨이터는 서러울 정도로 불친절해요(웃음). 그래서 처음 6개월은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파리에 있다가 잠깐 한국에 다녀왔을 때 백화점을 한번 갔거든요.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점원이 허리를 반쯤 숙이면서 저를 정말 친절하게 안내해주더라고요.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너무 놀라고 감동적이어서요. 3년을 파리 생활을 하고 돌아 왔을 때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파리는 모든 게 아날로그인데 한국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니까요. 인터넷 속도도 그렇고 사람들의 패턴이 굉장히 숨가쁘다는 생각을 했어요.

‘낭만의 도시’ 파리니까 곳곳에 낭만적인 추억이 가득할 것 같았는데요. 책을 보니 이웃주민에게 면전박대를 당한 에피소드로 시작해요. 놀랐어요. 아무리 파리라도 이 정도일까, 싶더라고요.

초콜릿을 들고 이사온 집 이웃에게 인사를 갔는데, 다짜고짜 원하는 게 뭐냐는 소리를 들었으니 정말 황당했죠(웃음). 혹독한 파리 신고식, 파리에 대한 환상에 한번에 깨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제가 낯선 문화였던 거예요. 결국 모두와 친해졌고 친구가 됐죠. 그런데 한 독자 분이 “이 에피소드를 하나 읽은 것 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파리의 속살을 보여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여행 에세이 『스페인 너는 자유다』『태양의 여행자』『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를 쓰면서 각각의 테마가 있었잖아요. 파리의 테마는 무엇이었나요.

소설이에요.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소설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를 썼으니까요. 이번 책에 소설을 쓰게 된 과정이 다 나와있잖아요.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는 소설을 쓰고 난 후 기록한 에세이라서 제게 좀 남달라요. 예전 에세이랑 호흡도 좀 달랐던 것 같고요. 저는 여행이든 만남이든 인생이든 모두 테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파리라는 도시는 1년에 몇 천만 명이 여행한다고 하잖아요. 그 많은 사람들에게 파리가 다 같은 모습으로 다가올 순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테마를 갖고 여행을 하라고 말해주곤 해요.

표지 사진이 무척 예뻐요. 일부러 콘셉트를 잡고 찍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제목과 참 잘 어울리고요. 특별한 사람이 찍어준 사진인가요?

의도해서 찍은 것도 아니고 표지로 쓰려고 했던 사진도 아니에요. 파리 생활을 하다가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놀러 오라고 했더니, 다들 파리가 싫다는 거예요. 예술 하는 사람들은 파리를 다 좋아하는데 왜 싫으냐고 물어보니,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싫다고 하더라고요. 파리의 깊은 모습을 보지 않으면, 파리는 너무 아름답고 완벽하게만 보이니까 그랬던 거죠. 이재용 영화감독님이 그랬던 것 같아요. 파리가 풀 메이크업이면, 런던은 내츄럴 메이크업이고, 베를린은 쌩얼이다. 제 친구는 내츄럴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파리가 싫었던 거죠. 그래서 억지로 꼬셔서 파리에 왔는데, 비웃는 느낌으로 사진을 한 번 찍어보자고 해서 찍게 된 사진이 표지 사진이에요. 일부러 에펠탑 앞에 서서 프랑스를 상징하는 바게트를 들고 파리지엔처럼 찍었어요. 책에 실릴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고, 편집자들 고생하는데 한 번 웃으라고 보내준 사진인데 덜컥 표지 시안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제목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제목은 직접 지었나요? 전작 소설에 나오는 ‘미모자’ 꽃과도 연관이 되면서 손미나 작가와도 잘 어울려요.

처음엔 다른 제목이었어요. ‘파리가 부른다. 낭만이여’였나. 여러 가지 후보가 있었는데 좋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100% 와 닿진 않더라고요. 사실 프랑스에서 살면서 스페인하고는 또 다른, 이런 거야 말로 영혼을 향기롭게 하는 참 자유를 주는 곳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프랑스, 너야 말로 자유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라고 우스갯소리도 했어요. 소설을 쓰면서 ‘아 그 분이 오셨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담당한 편집자가 제목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새벽 4시에 문득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가 떠올랐대요. 이 제목을 듣는 순간, 저도 강아지에게 주인을 찾아준 듯한 느낌이 들었고요.




여행은 하면 할수록 배려심이 늘어요

소설을 쓴 후의 에세이라서 일까요. 전작 에세이들보다 긴 호흡의 문장들이 많아요. 장면 묘사도 탁월하고요. 빨간색 노트북 에피소드도 재밌었어요.

훈남 소방관 이야기요? (웃음) 그러게요. 저한테 반한 줄 알았는데 제 노트북을 훔쳐보고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웃음이 나와요. 글 쓰는 건, 달리기랑 비슷한 것 같아요. 100m만 하다가 5,000m를 뛰고 났더니, 다시 100m를 뛰었을 때 아무래도 몸이 좀 적응하지 않았을까요. 소설을 쓰면서 버린 글만 해도 얼마나 많겠어요. 엄청난 분량을 소화하다 100m를 뛰니 조금은 편하긴 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방송도 하고 강연도 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온전히 글만 쓴 거잖아요. 어떤 결과물이 바로 바로 안 나와서 그렇지 뭔가 내면에서 성장하고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글 쓰는 건 정말 인내가 필요하잖아요. 소설은 더욱이 그렇고요. 좋아하지 않으면 정말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글 쓰는 일이에요.

고등학교 절친이 있는데, 제가 첫 책을 썼을 때 “드디어, 미나가 자기 길을 가고 있구나” 싶었대요. 고등학교 때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언젠가 책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나 봐요. 호기심이 많고 다행스럽게도 다양한 기회들을 많이 접하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전면적으로 이 꿈이 펼쳐지진 않았지만 인생 노선을 쭉 따라가다 보면 글 쓰는 걸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 『갈매기 조나단』같은 책을 읽고 번역도 했어요. 아나운서 시절에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여의도 강변 카페에 노트북을 가져 가서 일기처럼 글을 쓰기도 했고요. 물론 이게 업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사람 인생이 정말 알 수 없는 게 이렇게 여러 권의 책을 슬 거라고는 저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나운서들이 여행이나 유학을 다녀와서 책을 참 많이 써요. 그런데 손미나 작가만큼 화제가 된 책은 현재까진 없는 것 같아요.

선배들도 그렇고 동료, 후배들도 책을 많이 썼어요. 저도 많이 읽었고요. 제가 처음 여행 에세이를 썼을 때만 해도 막 블루오션이 시작될 무렵이었죠. 여행서 시장이 있었지만 얕고 넓은 여행이 아니라, 깊고 좁은 여행, 생활인으로서의 여행서는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유럽이라는 곳에서 오랜 시간 머무는 건 어렵잖아요. 유럽 여행이란 박물관이나 유적 등을 보고 오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고 그들과 뒤섞여 산다는 게 익숙하지 않고요. 저는 유학을 간 김에 자연스럽게 합류된 것 같아요. 마침 우리나라 독자들이 그런 여행에 대해 흡수할 준비가 됐을 때, 때마침 『스페인 너는 자유다』가 나온 거죠. 운이 좋았어요. 책도 처음 써본 거고 오로지 솔직하게, 진정성 있게 쓰자고 한 건데 패턴적으로 잘 맞아떨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여행자로 살아가려면 다양성을 잘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유학 생활을 한 경험도 있으니까 작가님은 조금 수월했을 것 같기도 해요.

학생 때 호주와 스페인에서 유학 생활을 했는데 처음 1년은 인종 차별이 너무 심해서 매일매일 상처 받았어요. 같이 살던 친구가 1년이 지나서야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할머니가 물려준 테이블을 보여주면서 ‘made by white’라는 메모를 설명해줬어요. 할머니라고 해도 길어 봐야 40년, 두 세대 차이인데, 흑인이 만든 제품이면 절대 구입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거죠. 제 동생이 생물학자인데 피부색, 인종을 달리 하는 건 정말 작은 염색체 하나가 달라서라고 하더라고요.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은 차이 때문에 금발머리 프랑스인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동양인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물론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서 다를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지만, 내면 깊은 곳으로 가면 정말 작은 사소한 차이만 존재하는 거라는 거죠.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 친해지기도 쉬운 것 같아요.

여행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여행은 하면할수록 배려심이 늘어요. 내 세상에서만 살면 이것만이 나의 세상으로 보이는데, 여행을 하면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정말 작다는 걸 깨닫잖아요. 나랑 부딪히는 사건이 생길 때도 ‘그럴 수 있겠구나’ 이해하게 되고요. 파리에서 이웃집에 살던 마르틴에게 제가 처음에 상처를 받았잖아요.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다시 다가갔을 때 친구가 됐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지’ 이렇게 마음을 닫았으면 친구가 되기 어려웠을 거예요. 차이를 인정하는 게 사람을 사귀는 첫 번째 지혜에요. 언어를 하는 것도 장점이고요. 아주 유창할 필요는 없지만 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언어를 다양하게 하는 건, 정말 축복이에요.

팟 캐스트 <손미나의 여행사전>도 인기를 끌고 있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청취자들이 많은 것 같아요. 시즌2가 시작된 걸로 들었어요.

제 목소리를 활용한 방송 매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영하 작가님도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작가님이 “미나 씨도 마이크 하나만 있으면 할 이야기 많을 텐데, 왜 안 하냐”고 하셨고, 제안을 듣고 보니 나에겐 ‘여행’이라는 테마가 맞겠구나 싶었어요. 한국 사회가 너무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잖아요. 일상의 휴식을 라디오로 듣는 느낌으로 방송을 만들고 있어요. 우연히 스토리텔링 회사 ‘봄바람’과 인연이 됐는데, 이 분들이 제작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주꾼들이세요. 첫 게스트로 윤종신 씨가 출연했고 희극 여배우들, 유희열 씨 등이 출연했는데, 친분 하나 붙잡고 수락해주셨어요(웃음). 아주 즐겁게 만들고 있고, 가을에는 오상진 씨와 함께 호주에 가서 찍고 올 계획이에요.




소설 쓰고 났더니, 제 인생 끝났대요

파리에 체류할 때 국내 작가들을 만난 에피소드가 책에 있더라고요. 독자와의 만남이었던 것 같은데, 무작정 찾아갔다는 용기가 대단해요. 다들 손미나 작가가 책을 쓴 사실은 알고 있었을 텐데요.

2006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을 했을 때,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여했거든요. 그 때 진행을 맡으면서 몇몇 작가님들과는 안면이 있었어요. 파리에 있을 때 황석영, 신경숙, 김영하, 이승우 작가님이 파리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쨌든 작은 안면이라도 있으니 용기 내서 한 번 가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유명한 작가를 만난다는 게 곧 내가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아마 작가님들도 제가 설마 소설을 쓰려고 한다는 건 모르셨을 거예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는데, 정말 사람이 뭔가를 절실히 원하면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별자리를 아주 믿지는 않지만, 사수자리거든요. 원하는 목표가 있으면 무조건 달려서가 활을 쏜대요. 그래서 체면 불구하고 갔던 거예요. 무작정 옆에 앉아 있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말씀을 드렸죠. 진짜 감사했어요. 제가 볼 때, 그 분들은 제가 아니었더라도 누가 와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조언을 부탁한다면, 진심으로 말을 들어주실 작가님들이셨어요. 같이 있으면 상대방의 성향이 느껴지잖아요.

아나운서로도 활약이 대단했는데 여행작가로 변신하고 또 소설까지 썼어요. 아나운서 지망생일 때도 이런 도전 정신이 있었을 것 같아요.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도 선배들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제가 아나운서가 됐을 때만해도 고려대학교 출신 여자 아나운서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계진 선배님을 찾아갔어요. 그 때 아마 선배님께서 아나운서 되는 법을 소개한 책을 한 권 내셨던 것 같아요. 무작정 학과 사무실에 찾아가서 조르고 졸라서 선배님 연락처를 받고 전화를 드렸더니, “책을 썼으니 읽어 봐라.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책도 읽었는데 꼭 만나 뵀으면 좋겠다”고 했죠(웃음). 그렇게 한참을 통화다가 결국 선배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학생이 나를 만나고 싶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내가 학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도대체 얼마나 당돌하고 끈질기게 물어봤으면 그러셨을까요(웃음). 선배님은 저를 만나시고는 “학생 눈빛 보니까 아나운서 될 수 있겠다”고 하셨어요. 그 때 70% 이상의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아요.

소설 집필에 들어가셨을 때는 김탁환 작가님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죠? 김탁환 작가님이 서평에 “이 여잔,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는 영혼”이라고 쓰셨는데 굉장한 극찬 아닌가요.

트위터로 인연이 됐는데 소설 집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폭풍우가 막 치는데 거둬주신 느낌이었어요. 의견도 많이 주셨지만 용기를 많이 주셨어요. 작품을 완성하고 작가님께 보여 드렸더니, “너 인생 끝났어” 이러시더라고요.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물으니까 “딱 보니, 소설가의 피가 끓고 있어 그건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해. 너 이제 소설 써야 해”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제겐 너무 기뻤어요. 이제 시작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고시 공부를 하듯이 10년 정도 쓰면 소설이 시작될 거다. 그 때가 시작이라고.”

보통 작가들이 소설을 한 권 완성하고 나면, 아이를 낳은 느낌이라고 하잖아요.

네, 딱 그런 기분이 들어요.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지만, 이런 건가 싶어요.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해”라고 하다가도 조금 있으면 기뻤던 순간들만 남으니까요. 소설가 분들의 표현에 의하면 마약 하는 것 같다고도 해요.

앞으로도 소설은 계속 쓰실 계획이시죠?

뭔가 떠오를 때마다 플롯을 정리한 파일이 몇 개 있어요. 올 겨울부터 써볼까 생각 중이에요. 틀은 한 두 달이면 되지만, 지난 번 소설은 호흡 조절을 잘 못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이번에는 그걸 잘해보려고요. 싹을 틔우는 건 빨리 하고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키워서 내놓고 싶어요.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가 여행 에세이로는 세 번째 작품이잖아요. 10권을 쓴다는 계획은 여전하신가요?

평생의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열 권을 채울 생각이에요. 그 때 그때 성향에 맞는 추구하는 것들이 달라질 때마다, 가는 곳과 말하는 것들이 달라질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나’라는 크기의 사람이 꼭 봐야 하는 곳들이 있지 않을 까요. 제 상황도 있을 거고 선택도 하겠죠. 30대에는 책을 쓰고 싶었고, 40대가 되면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항상 어렴풋한 생각들이 구체적인 생각으로 좁혀지고, 활을 쏘고, 또 만들어졌으니까 아마 이뤄질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단계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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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손미나 저 | 웅진지식하우스
이 책은 파리에서 3년 넘게 살면서 파리지앵의 삶과 철학과 스타일에 서서히 빠져드는 손미나 작가의 일상을 여러 감동적이면서도 눈물이 질끔 날 정도로 웃긴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와 습관, 교육, 사랑법 등 우리보다 한층 앞서나간 정신적 선진국으로부터 하나하나 삶의 방법을 배워가는 학습자로서의 모습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프로방스, 코트다쥐르 같은 프랑스의 아름다운 관광지와 봄레미모자, 이갈리에르, 아를 등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곳들, 세잔과 고흐의 삶과 고민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수준 높은 여행서의 느낌이 가득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장혁 “, 예능 버라이어티라고 생각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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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게 전성기를 논하는 일은 조심스럽지만, 누구든 인생 그래프가 가파른 상승세를 그릴 때가 있다. 1999년작 드라마 <학교>로 입지를 굳히고, 2010년작 <추노>에서 ‘대길’로 분해 노련한 배우의 이미지를 갖게 된 장혁은 군생활 2년을 제외하고는 쉼 없이 현장에 있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적절히 넘나들며 액션, 멜로, 코미디를 섭렵했지만, 대중에게 가장 강렬히 다가온 건 액션 연기를 할 때였다. 2010년,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는 영화 <그린호넷>과 <추노>를 두고 장혁은 사극을 선택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연기, 그리고 평소 명작으로 꼽던 <여명의 눈동자> ‘최대치’ 역이 연상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추노>를 선택한 건, 그가 겸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끊임없이 배우 장혁의 현재를 자문했던 터였다. 2013년 장혁은 또 다른 캐릭터를 입었다. 지난 5월부터 MBC <일밤> ‘진짜 사나이’를 통해 예능 프로그램, 첫 고정 출연을 시도했고 ‘열혈병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꿈에 나올까 두렵다는 군 입대를 두 번 경험하게 된 장혁. 그는 스스로 “<진짜 사나이>는 내게 힐링이 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감기>에서 장혁은 구조대원 ‘강지구’로 분했다.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소한 인연으로 만난 모녀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 장혁에게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 아니냐” 물으니, “반반”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충분히 ‘여지’가 있는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장혁은 ‘여지’라는 단어를 수십 번 언급했다. 작품에서건 현실에서건 장혁은 스스로에게 작은 ‘여지’를 주는 문제라면 언제나 골똘히 고민한다. 첫 에세이 『열혈남아』출간을 기념해 마주한 자리. 영화 <감기>홍보 차 수차례 인터뷰를 한 터라 지칠 법했지만, 장혁은 좀체 허투루 답변하는 법이 없었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스스로 정리되는 느낌”이라며 어떠한 질문에도 진중한 태도를 보였다. 튼실한 존재감을 빛내고 있는 요즘, 장혁은 언제든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준비를 되어 있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건 없어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결국 ‘장혁’이라는 사람이 기억되길 바랄 뿐이에요.”




<감기> 강지구, 충분히 여지가 있는 캐릭터

영화 <감기>가 꾸준히 흥행을 이어가고 있어요. <진짜 사나이>에서는 ‘열혈병사’로 활약하고 있고요. 이번에 출간된 『열혈남아』는 처음에는 여행 에세이로 기획했던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이라는 테마를 잡고 시작한 게 맞아요. 예전부터 메모하는 습관이 있어서 순간순간의 생각들을 정리해봐도 좋을 것 같았어요. 고향이 부산인데 홍콩이나, 오사카가 부산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예전부터 했거든요. 시기적으로 오사카가 맞아서 가게 됐는데, 여행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정보 전달로 많이 접근하게 되더라고요. 여행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일상에서 벗어난 거잖아요. 현재의 내 일에서 벗어난 생각들을 하다 보니, 옛날의 발자취를 많이 떠올리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여행에 관련된 어떤 책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에세이로 방향이 달라졌어요.

‘열혈병사’이면서 이번 책 제목이 『열혈남아』에요.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를 좋아하나 봅니다.

열정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그래서 영화 <열혈남아>도 좋아하고요. 영화를 보면 열정이 그대로 느껴지거든요. DVD를 모으는 게 취미인데, <열혈남아>도 손에 꼽는 영화에요.

책을 보니 좋아하는 작품 이야기도 많고, 배우 ‘장혁’의 진중한 모습들이 많이 담겨 있더라고요.

글을 쓰면서 배우 장혁의 인생을 정리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진로를 바꾸고 배우가 되면서, 군 생활을 했던 2년을 빼고는 계속해서 현장에 있었잖아요. 현장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게, 언제나 ‘배우’라는 포지션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배우는 어떻게 가야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고, 현장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말하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체육교사가 꿈이셨다고요.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책을 보다 보니, 액션에 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던데요.

운동을 미친 듯이 좋아했어요.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퇴근 후에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체육교사가 되고 싶었고요(웃음). <감기>다음 영화로 <딸기우유>를 검토 중에 있는데, 역할이 체육교사에요. <화산고>를 같이 했던 김태균 감독님 작품이에요.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고 싶었던 여지가 있어서 생각하고 있는 단계에요.

<감기>에서는 구조대원 ‘지구’ 역을 맡았는데, 김성수 감독님이 장혁 씨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였다고 말하셨어요.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김성수 감독님의 작품 중에 <무사>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감기>는 재난영화고 <무사>는 사극이지만,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맡은 ‘강지구’ 는 다소 영웅적인 의협심이 강한 캐릭터잖아요. 김성수 감독님이 “강지구 라는 인물에 장혁이라는 사람을 투영해서 연기해보라”고 말하셨어요. 제대했던 순간이 떠올랐죠. 제대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계속해서 고개가 뒤를 보게 되더라고요.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상황인데, 자꾸만 뒤가 밟히는 느낌이랄까요. ‘강지구’도 그런 인물이었다고 생각해요. 우연히 인혜를 만나게 되면서 호감을 갖게 되고, 그녀의 딸 미르를 만나게 됐는데, 재난 상황에 부딪히게 되고, 미르를 구하려다가 다른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구해주려고 노력하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명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렇게 깊은 관계라고 볼 수 인혜(수애) 모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해요.

지구의 선택에 있어서 관객들의 반응이 다 달라요. 현실적이지 않다는 분들도 많죠. 모른 척해도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보면 무모한 선택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구는 영화에서 이렇게 말하죠. “난 구조대원이잖아요. 사람들은 알지만 나는 알잖아요”라고. 지구는 구조대원이고 어떻게 보면 일반인들보다는 재난 상황에 경험이 있고, 또 지금 당장의 상황을 모면한 다음에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도 했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진짜 사나이>를 찍으면서도 군대라는 상황 속에서 모두 똑같은 훈련을 받고 생활하지만 너무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덜 힘들어 하는 사람, 포기하려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가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모두들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지만, 분명 지켜낼 사람도 있겠죠. 지구라는 인물을 이런 느낌으로 바라봤어요. 재난 상황을 조금 덜 힘들어하는, 헤쳐나가려고 하는 인물로요. 수애 씨가 맡은 ‘인혜’도 감염내과 전문의로 어떻게 보면 엘리트잖아요. 하지만 딸의 발병 사실을 숨기는 모습에서는 모성애가 강한 사람이고, 또 객관적으로 볼 땐 무척 이기적인 사람이죠. 지구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에요. 보는 시선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지만 최대한 덜 주관적으로, 객관화시켜서 보려고 했어요.

<감기>를 보는데, 정유정 작가의 소설 『28』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장면들이 보이기도 했어요. 혹시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를 하는데, 어느 기자님이 『28』이야기를 해서 그 때 알았어요. 아직 못 읽었는데 읽어보고 싶어요.




배우 장혁의 모토 ‘즐겁게, 자연스럽게’

시나리오만으로 완벽한 영화는 없다고 합니다. 신인들은 시나리오보다 자신이 맡을 캐릭터에 치중해서 배역을 고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는데, 장혁 씨는 어느덧 배우인생 20년을 바라보고 있어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졌는지 궁금해요.

시나리오는 도면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은 작품을 시공해야 하는 사람들이고요. 누구 하나 잘해서 되는 건 아니에요. 같이 앙상블을 이뤄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만들어지는 거죠. 도면 자체가 너무 아니면 당연히 선택하지 않아요. 하지만 완벽한 시나리오는 없죠. 각색이라는 게 있고, 현장과 작가가 상상했던 장면과는 괴리감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야구 경기를 한다고 했을 때, 투수, 외야수, 내야수 다 중요해요. 누구 한 명 잘한다고 해도, 앙상블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떤 배우라도 훌륭한 연기를 할 수 없죠. 데뷔 초창기 때는 저 역시, 캐릭터 때문에 선택했던 작품들이 있어요. 하지만 캐릭터가 아무리 좋아도 시나리오 안에서 매끄럽게 놀지 못하면 좋은 캐릭터라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그만큼 또 중요한 게 누구랑 함께하느냐이고요. 자신만의 독창적인 느낌을 갖되 그 안에서 함께 공감을 느껴야 되니까요.

책에서 ‘오디션을 보려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로 심사위원이 어떤 걸 원하는지 파악하고 연기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배우에게도 마찬가지일 거 같아요. 본인 욕심으로 작품을 선택할 수 있지만, 대중이 배우에게 원하는 것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요.

확실한 건, 제가 지금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저기 카페 벽에 달린 모니터를 보면서 이야기를 한다면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거예요. 배우는 이렇게 손바닥을 딱 한 번 치고, 관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내 이야기를 해야 해요. 오디션은 하러 가는 사람도 있지만 보는 사람, 심사위원의 목적도 있어요. 얼마나 독창적이어야 하는가에 집중해야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것을 하면 안 되는 거죠. 항상 경쟁을 해야 하는 레드오션이 있다면, 블루오션도 있어요. 뭔가 그 틈새를 가지고 가야 해요. 이만큼, 나름대로 했다고 해서 붙는 게 아니에요. 조금 더 절실하게 준비한 사람이 있다면 나름대로 한 사람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작품에 들어가면 여러 각도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나름대로’ ‘이 정도면 됐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 같고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신조는 없어요. 그때그때 바뀌는 편이에요. 어쨌든 즐겁게, 현장도 즐겁고 인생도 즐겁게 사는 게 목표에요. 어떻게 신념만 가지고 살 수 있겠어요. 자연스럽게 흘러가자는 게 제 원칙이라면 원칙이에요.

최근 수애 씨가 인터뷰에서 “장혁은 모든 여배우들이 탐내는 파트너”라며 극찬을 했어요. 상대 배우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이유에서였는데요.

잘해주려고 해요. 그런데 정도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도 안 되는 기 싸움을 굳이 할 필요는 없거든요. 촬영하기에도 부족한데 이런 데 시간을 쏟으면 안되죠. 서로 말을 안 하고 눈치만 보고 있으면 어색해서 연기를 할 수가 없어요. 상대가 다가오면 그만큼 더 잘해주게 되는 건 사실이에요. 상대도 나만큼의 여지가 있고 서로가 화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걸 느끼면, 더 다가갈 수 있는 거죠. 작품에 있어서 만큼은 먼저 다가가는 편이에요.

사적인 부분에서는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진 않나요.

정말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너무 조용해요. 뭐랄까, 낯을 많이 가려요. 예전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좀 그래요. 대화를 하다가 끊기는 무안함을 못 견디는 거죠. 그런데 말수가 적든 많든, 상대에게 오픈 되어 있는 사람하고는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예능에서 저를 보고 ‘수다왕’이라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요(웃음). <진짜 사나이> 같은 경우는 극단적인 상황에 같이 들어갔기 때문에 서로가 풀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정말 없어요. 군대에서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요(웃음).




<진짜 사나이>는 장혁에게 힐링이다

사실 장혁과 액션, 군대는 어울리지만, 예능은 낯선 느낌이었어요.

<진짜 사나이>가 예능 프로그램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저는 예능 버라이어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군대에 있으면서 느꼈던 바가 너무 좋았거든요. 한 달에 1주일 정도 <진짜 사나이>를 촬영하는데, 그 시간이 저에겐 힐링이 되고 있어요.

방송 분량이 실제 촬영 분량의 10%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열혈병사’답게 가장 무난하게(?) 훈련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장혁 씨가 먼저 <진짜 사나이> 출연 요청을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사실이이에요. 물론 제작진도 환영했고요(웃음). <진짜 사나이>가 첫 방송 때부터 화제가 됐잖아요. 첫 회를 보진 못했고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봤는데, 옛날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됐어요. 군대를 다녀온 사람으로서 그 시절의 추억들, 소소한 여러 가지가 떠오르더라고요. 지금 제가 서른여덟인데, 곧 앞자리가 바뀌잖아요. 이런 시기에 군대를 다시 가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안착이 되지 않은, 조금 떠 있는 상황에서 군대라는 상황에 있어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작품에만 집중하기도 바쁜 시간이잖아요. 주변에 반대가 있었을 법 해요.

가족들은 말리지 않았고, 사무실에서는 조금 생각해보자고 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죠. 하지만 제가 그 감정을 느낀 순간,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제 본업은 배우에요. 작품과 예능 스케줄이 겹치게 된다면 물론 작품을 선택하겠죠. 하지만 그 전까지 가능한 시기까지는 해보는 게 괜찮지 않나, 싶었어요. 시기적으로 이런 선택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죠.

실제 군대 생활을 할 때는 ‘정용준’이라는 본명을 사용했지만, <진짜 사나이>에서는 배우 장혁입니다.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떠나서도 개인적으로 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군대라는 인연이 왜 아직도 나에게 크게 남아 있냐고 묻는다면, 당시 제가 입대할 때 심정적으로 정말 바닥인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거예요. 사람이 정말 바닥에 내려간 상황에서 올라가는 순간이 있어요. 그러면 하루하루가 정말 생생해요. 어지간한 상태가 아니고서는 정말 다 해내야 했고, 그만큼 절실함도 많았어요. 저라는 사람이 20대에 데뷔를 해서 장혁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군대라는 공간에서는 ‘정용준’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잖아요. 그러다 보니, 내가 그동안 너무 배우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됐고, 그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도 너무 좋았어요. <진짜 사나이>도 촬영하다 보면, 정말 몸과 마음이 부딪히니까 서로 안 친해질 수가 없어요. 군대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게 되잖아요.

매달 <진짜 사나이>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 있나요.

처음 <진짜 사나이>를 출연하려고 했던 초심, 그 기본은 지키고 가자는 생각이에요. 운이 좋아서, 우호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처음 생각은 놓지 않으려고 해요. 그건 <진짜 사나이>를 떠나 모든 작품에 있어서도 같아요. 기본적으로 한 작품이 인형극이라고 했을 때, 배우는 인형을 위에서 컨트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배우가 스스로를 인형이라고 착각한 순간, 여기 저기 감정이 떠돌 수 있어요. 대중들은 인형이 곧 배우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배우들은 관객들의 반응을 모니터 하면서 인형을 잘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슬럼프에 빠지기 십상이죠.

40대를 맞이하기 전에 ‘군대’라는 공간에서 인간 장혁을 마주하고 있는데, 배우 장혁의 40대는 어떻게 기대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설정해놓고 가는 건 없어요. 지금 내가 어떤 걸 느끼느냐가 중요해요. 연기자라는 삶이 좋은 것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고 또 늘 새로운 것과 조우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선택한 작품에 내 상황의 기록들이 담겨 있는 거니까요. 지금까지 근 30여 개 작품을 했지만, 아직까지도 현장에 가면 떨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하고, 또 벽이 있다는 걸 느껴요. 기술은 늘었겠지만 앞으로 작품 안에서 만날 사람은 저도 몰라요. 그 사람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호흡할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초조함은 여전히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방법은 있는 거니까요. 현장에서 느끼는 극도의 즐거움, 흥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여지의 부분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고 생생하게 전달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것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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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의 열혈남아장혁 저 | 페이퍼북
‘열정’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남자 장혁의 삶의 방식이 공개된다. 브라운관 속의 그의 모습은 늘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브라운관 밖, 사람 장혁은 어떤 모습일까? 화면 밖의 그도 딱 그만큼 열정이 넘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란 질문에 그는 거침없이 살아가겠다고 답한다. 두렵고 힘든 순간, 허무한 순간도 있었지만 한번 더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장혁의 이야기를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경주 “연극 , 불면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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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아’ 라는 말은 지금 이 도시에서는 너무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단잠’을 꿈꾸는 시대, 도대체 단잠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언제부터 우리 곁에서 희미해져버린 걸까. 마지막 단잠의 기억, 그 끝은 언제나 어린 시절로 이어진다. ‘숙면’의 의미도 알지 못했고,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던 시절. 바로 그 지점에서 단잠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생애 첫 단잠이 시작되었던 순간에 다다르면 그곳에는 나 자신보다 더 익숙한, 그래서 사무치게 그리운 목소리와 리듬이 숨 쉬고 있다. 토닥토닥 어루만지는 엄마의 손길과 젖가슴 냄새를 품고 있는 ‘자장가’가 그것이다. 결국 엄마의 자장가와 단잠은 한 몸처럼 우리를 어루만지다가 어느 순간 아스라이 멀어졌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불면의 세계, 이곳은 자장가를 상실한 공간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시인 김경주는 자장가를 이야기한다. 그에게 자장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모성이 낳은 노래,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모성인 노래. 김경주 시인에게 자장가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자장가를 잃어버린 이곳은 시인의 눈에 너무나 위태로워 보인다. 모성이 사라져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흐릿해지는 그 감성을 되살리기 위해, 시인 김경주는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자장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극 <나비잠>을 탄생시킨 것이다. 9월 19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상영되는 이번 작품은 시인 김경주가 직접 대본을 쓰고, 미국의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연극 연출가인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가 협력연출로 참여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모성과 자장가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두 사람을 채널예스가 만났다.




시와 극이 한 몸인 듯한 연극, 시극 <나비잠>

“저한테 시와 시극은 한 몸에서 태어난 두 개의 가지 같은 거예요”김경주 시인은 자신에게 있어 시와 연극 작업은 쌍생아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극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관심 중 하나였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시극 운동을 해왔다는 사실은,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시극은 생소한 장르다. ‘시로 이루어진 연극인가?’ 짐작만 할뿐 쉽게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 막연한 짐작이 틀리지 않은 까닭이다. 시극은 연극의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한다. 산문이 섞여있기도 하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운문이다.

김경주: “T.S. 엘리엇의 『캣츠』도 시극이거든요. 열두 마리의 고양이에 대한 시집이에요. 그 이야기가 처음에는 시극으로 상연되다가, 후에 브로드웨이 제작자의 손을 거쳐서 뮤지컬이 된 거죠. 셰익스피어가 쓴 모든 극들도 사실은 무훈시라고 불리는 시극이고요. 요즘에는 시극을 마치 실험의 한 부분인 것처럼 취급해 버리는데, 시극의 시적인 느낌과 은유와 상징의 작업들은 오히려 연극의 가장 본질이라고 할 수 있죠.”

김경주 시인은 스토리텔링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시극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현상을 안타까워했다. 시극이 품고 있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작업들은 거세되고, 친절하게 모든 이야기들을 채워 넣어주는 이야기들에 밀려 무대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차원에서 연극 무대가 균형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시적인 연극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시와 극이 한 몸인 듯한 연극을 해보자”는 차원에서 출발한 시극 <나비잠>은 그러한 시인의 오랜 갈증을 해소시켜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경주: “시극은 멸종하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시심을 잃어가고 있어요.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시가 마치 사치나 감정의 산물처럼 노출되고 있죠. 그런 측면에서 시극의 멸종은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점점 시극이 상연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비잠>을 통해서 더 많은 소통이 이루어지고, 누군가 또 이런 시극 작업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촛불처럼 서로의 손으로 불씨를 옮기면서 살려가야 되는 작업인 거죠.”




모성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하다

시인 김경주의 시를 한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 그는 누구보다도 예민하고 섬세한 결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촘촘한 체로 단어들을 거르고, 그것들을 지독하리만치 꼭꼭 씹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킨다. “결국 시극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그 나라 모국어의 속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경주 시인 특유의 ‘언어를 대하는 방식’은 시극 <나비잠>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이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 ‘나비잠’을 작품의 제목으로 삼고, 모국어의 속살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자장가들을 찾아 직접 노랫말을 다듬은 사실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그가 ‘시인은 그 나라의 모국어에 가장 예민한 족속 중에 한 명’이라고 말한 것처럼, 어쩌면 김경주 시인에게 이 모든 작업은 지독한 것이 아닌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 감독에게도 우리 모국어의 질감이 그대로 전달되었을까.

데오도라: <나비잠>은 대단히 아름답고, 응축되어 있고, 의미가 깊은 이야기예요. 그래서 빨려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고통과 사랑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시가 아닌 대사를 통해서도 그걸 느낄 수 있었죠. 한국어는 알 수 없지만 그 리듬을 느낄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면서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저 아이는 누구지?(who is that baby?)’ ‘그 아이는 그 아이야(that is that baby)’ ‘우리가 버렸던 아이(that is the baby that we abandoned)’ 와 같은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리듬이 느껴지고 극적 긴장감이 느껴지는 거죠.”

시극 <나비잠>은 서울의 사대문 축성을 배경으로,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엄마(모성)를 그리워하는 두 형제의 엇갈린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 없이 남겨진 아이를 마을 사람들이 젖동냥을 해가며 기르고, 그렇게 자란 아이를 통해 또 다른 이가 잃어버렸던 모성을 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전통의 정서와 풍습을 담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 감독은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 안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신화적 보편성을 발견한 까닭이다.

데오도라: “한국의 역사라든지 여러 가지 디테일한 배경들은 알 수 없지만, 정서적으로 작품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 작품은 대단한 은유를 많이 포함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머리카락이 계속 길게 자란다든지, 어린 아이가 버려지고, 균형을 잃어버린 사회 안에서도 생명력을 지닌 초자연적인 존재가 자라는 부분들이죠. 그 이야기를 접했을 때 충분히 정서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해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어요.”




<나비잠>과 고대 그리스 설화는 결국 운명에 관한 이야기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 감독은 그리스계 미국인으로, 자신이 경험한 서로 다른 두 문화를 바탕으로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미국의 사회문제와 역사를 다루는가 하면 고대 그리스 고전에서 영감을 얻어 연극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수형자들의 역사를 다룬 <죄 많은 몸 Body of Crime>은 1997-8 시즌 Burns-Mantle 최고의 연극 10선에 선정되었고, 이듬해인 1999년에는 미국 최고 극작가상(The American Theater Wing Design)을 수상했다. 트로이 전쟁에 대한 3편의 연극 중 <이피게니아 Iphigenia>는 2006년 New York Innovative Theater Award를 2개 부문에서 수상한 바 있다. 특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그녀의 이해는 시극 <나비잠>을 연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경주: “데오도라 선생님은 동시대성의 측면으로 그리스 희랍 설화를 현재화시키는 작업들을 많이 하고 계세요. 저도 고대 희랍 서사를 좋아하다보니까 이야기 축을 만들 때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의견을 같이했죠. <나비잠>은 우리나라의 가상 설화이지만 희랍 설화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희랍 설화는 결국 운명에 관한 이야기예요. ‘인간은 운명을 이길 수 있냐, 못 이기느냐’에 희랍 설화의 모티프가 형성되어있죠. 그래서 이야기의 축을 짤 때도 데오도라 선생님과 함께 했고요. 구체적인 이미지나 장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상징적인 측면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렇다 보니까 소통하는 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어요.”

조각가이자 무대디자이너로서 연극과 처음 만난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 감독은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이 활동했던 라마마 극장에서도 인형극과 음악, 비디오,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를 활용해서 독특한 연극을 창작하며 주목을 받았다. 라마마 극장은 1961년 앨런 스튜어트가 설립한 이후 ‘제 3세계 예술을 전 세계에 알린 진보적 연극센터’로 자리 잡았다.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 감독이 <나비잠>에 협력연출로 참여하게 된 것도 라마마 극장에서 맺은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데오도라: “서울시극단의 김혜련 단장도 8년 전쯤 라마마 극장의 단원이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면서 ‘서로 협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앨런 스튜어트 선생님께서도 생전에 ‘김혜련하고 데오도라가 같이 하면 대단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둘이 꼭 같이 해라’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요.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올해 3월에 김혜련 단장에게서 콜라보레이션을 하자는 이메일이 왔어요. <나비잠>대본의 일부를 봤는데 느낌이나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한국에도 이런 작품이 있구나’ 하고 관심을 갖게 됐고 함께하기로 했죠. 김혜련 단장은 무대 언어로써 새로운 아이디어를 원했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제가 해 온 오브제 작업, 즉 인형이나 그림자를 이용하는 새로운 기법을 시어의 무대적 표현방법으로써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김경주: <나비잠>의 대본을 쓰면서 데오도라 선생님의 이미지 작업들을 영상을 통해 충분히 봤어요. 이미 이야기를 설정할 때부터 데오도라 선생님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과, 자칫 잘못하면 제 언어와 낯설게 충돌할 수 있는 부분들을 공유한 거예요. 저에게 중요한 건 ‘데오도라 선생님이 어떤 오브제를 쓰는가’ 하는 것보다 ‘그녀가 그런 오브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무슨 철학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냐’를 파악하는 것이었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 느낌표들을 가지고 온 후에 작업이 이루어졌어요.”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 감독은 한국을 처음 방문했지만 이전부터 한국에 대해 친숙하고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라마마 극장의 앨런 스튜어트 대표가 ‘한국은 대단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라마마 극장의 예술 감독을 맡고 있는 유미아 감독을 통해서도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 감독과 한국의 인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데오도라: “한국의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의 배우나 스태프들이 상당히 개방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아이디어를 서로 교류하고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데 있어서 편협적이지 않고 굉장히 오픈되어 있어요. 하나를 만들어서 보여주면 잘 받아들이면서 개방적으로 서로 터놓고 얘기해요. 다양한 미디어를 가지고 실험을 해보는 것에도 망설임 없이 개방적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자장가는 ‘달래는 노래’

시극 <나비잠>은 김혜련 단장의 서울시극단장 취임 후 첫 작품으로 ‘서울의 혼’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평소 김경주 시인의 작품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김혜련 단장이, 서울의 사대문 안을 배경으로 서울의 영혼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나비잠>은 탄생되었다. 시인 김경주의 눈에 사대문 안의 이 도시는 ‘모성을 잃어버린 불면의 세계’였고 그는 자장가를 통해 이곳에 모성을 되돌려주기로 했다.

김경주: “sleeping rhyme(나비잠)이라는 게 잠으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리듬이잖아요. 사람을 무의식에 도달하게 할 수 있는 노래라는 건 가장 편안한 노래라는 거죠. 그런 잃어버린 자장가도 복원하고, 그 자장가에 담겨있는 모국어의 속살을 가장 시적인 형태로 전달해서 보이고 싶은 게 이번 작품의 특징이에요.”

그는 자장가에 대해 모성이 가장 응축되어 있는 노래이자 ‘달래는 노래’라고 이야기했다. ‘달랜다’는 말, 그것은 시인 김경주가 <나비잠>을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키워드였다.

김경주: “‘달랜다’라는 단어가 줄 수 있는 질감이 굉장히 모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비잠>의 주인공들은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강한 인물들이에요. 잃어버린 모성을 그리워하는 그 인물들이 자장가를 통해서 모성을 찾아가고 극복해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사대문을 축성하는 과정 또한 모성성과 닿아 있다는 것이 작품 안에 녹아들어가 있고요. 저는 우리 시대가 모성을 회복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단순히 ‘엄마를 그리워하자’ 이런 맥락이 아니에요. 우리가 국어가 있고 모국어가 있잖아요. 국어가 그 나라에 필요한 언어를 사전화시키는 작업이라면, 모국어는 내가 선택할 수가 없는 거예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가 중얼거렸던 말이고, 태어날 때 이미 모국어를 갖고 세상에 나오는 거잖아요. 나라는 버릴 수 있지만 엄마를 부정할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모성이라는 건 그런 거죠. 굉장히 본질적이고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그리움의 한 지점에 닿아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 모성이 담겨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소리로 문학을 전달하다

시인 김경주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졌다는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어려워 읽기 힘들다’는 비난 아닌 비난을 듣기도 한다. 사실 그의 시가 읽기 쉽지 않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작가는 독자를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독자를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자기 안의 질서로 들어와 볼 것을 주문하는 그에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평이한 언어들을 들려 달라 말하는 것은 무리한 부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 작품 <나비잠>을 통해 자신이 대중에게 낯설거나 불편함만 주려고 하는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질감들을 고민하면서, 기존의 작품들보다 조금 더 따뜻한 질감으로 모성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시극이라는 낯선 장르를 선택한 이유도 대중에게 낯선 장르를 읽히겠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시적인 연극이 우리에게도 있어요’라는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시를 읽지 않는 시대와 사람들을 향해 ‘시적인 방식’으로 시를 들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김경주: “시를 읽는다는 건 다 설명하지 않고도 전달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야기는 채워가는 거잖아요. 시는 상징이고요. 결국 시에 대한 애정은 시극에 대한 애정과 같은 말이겠죠. 시와 시극은 결국 침묵을 만들어내는, 침묵의 질을 표현하는 작업이에요. 시라는 건 행간을 읽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행과 행 사이를 만들어내야 되기 때문에 침묵의 질을 표현하는 작업이에요. 시와 시극의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그 침묵의 질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방법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에게 시극이란 또 다른 방식으로 시를 만날 수 있는 무대인 동시에, 미디어와 영상의 시대에 시와 대중을 만나게 해주는 접점이다. 시인 김경주가 종이 위를 벗어나 무대 위에 서서 시를 이야기하는 이유, 관객들이 시극 <나비잠>을 통해 만나게 될 시의 모습은 무엇일까. ‘독자에게 소리로 문학을 전달해야 한다. 한국 문학이 살려면 소리가 살아야 한다’고 말해온 그의 이야기를 통해 대답을 대신한다.

김경주: “우리는 입시 교육과 제도권 교육으로 인해서 묵독에 익숙해요. 어떤 텍스트를 중얼거려 보거나 소리 내 보거나 체감해볼 수 있는 기회자체가 없는 거예요. 눈으로 읽고 다 안다고 생각해요. 인식은 고급화 되는데 몸으로는 하나도 못 만나는 거죠. 아무리 어려운 책도 소리 내서 읽어보면 작가의 호흡을 그래도 가져갈 수 있어요. 문학은 숨 쉬는 경험이에요. 숨 쉬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없고, 작가도 숨 쉬지 않고 글을 쓸 수 없어요. 모든 문장은 악보와 똑같이 호흡이에요. 그걸 소리 내서 읽는 순간 작가의 몸이 내 안으로 들어와 숨 쉬는 경험이 그대로 전달돼요. 낭독은 그걸 보여줌으로써 진화되고 발전된 시의 형태나 현대의 많은 텍스트들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화나(FANA) “평생 완벽하지 않은 뮤지션으로 남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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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음반으로만 따지면 <Fanatic>이후 4년 만의 복귀다. 자연스러운 일일까.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신보 이야기는 물론이고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전의 모습과 굵직한 움직임 없이 흘렀던 지난 4년, 소울 컴퍼니에서의 기억에 그가 최근 추진하는 디 어글리 정션(The Ugly Junction)의 활동까지. 오랜 만에 신으로 다시 나선 화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난 일들에 대해, 지금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찾아올 것들에 대해, 이즘이 들어보았다.




신보보다도 다이어트로 더 이슈가 됐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되게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 재밌어요. 저에 대한 이슈잖아요. 돌아다니는 사진은 한창 빠졌을 때예요. 그때보다 살이 쪄서 민망하기도 해요, 지금은. (웃음)

전작인 데뷔 앨범은 상당히 어두웠던 반면, 이번 앨범은 상당히 밝은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에요. 하나의 앨범 색채를 정해놓고 시작한 것은 아니고, 가사가 나와 있었어요, 이미. 여기에 선택적으로 비트를 맞추다보니 그런 색깔이 나온 셈이죠.

<Fanatic>이 막 발매되었을 당시, 심경이 반영된 음반이라고 다른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죠. 이번 앨범 역시 반영된 것인가요?

작업물은 당연히 심경을 반영하죠. 그런 생각들, 마음들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게 이번 앨범이 아닌가 싶어요.

앨범을 구상할 때 어떤 콘셉트로 잡으셨나요? 그 점이 비트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컨셔스 랩(conscious rap) 음반을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고 여기에 어울리는 곡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곡 위주로 생각을 했으면 더 많이 했지 음반을 이런 색으로 가져가자는 생각은 안 했어요.

화나의 음반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라임이 돋보이는 작사에 주목이 갑니다. 무지막지할 정도로 라임을 박아 넣은 1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진 면이 보이는데. 라임 구사의 측면에서도 달라 진 게 있나요?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들으시는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겠지만 <Fanatic>같은 경우에는 라임이나 랩의 방식에 있어서 폭력적이고 불안정할 필요가 있었어요. 반면에 이번에는 좀 더 여유가 있고 전달력이 있어야 했고, 디테일을 더 살려야 하는 부분이 있었죠. 차이라고 한다면 이 부분인 것 같아요. 이를 위해 음절 조절도 많이 했고 일부러 비우는 부분도 많았어요. 그렇게 했을 때 다이나믹함은 이번 앨범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마음에 드는 부분이죠.

랩 톤을 포함해 전반적인 랩 스타일도 조금 달라진 듯 합니다.

랩 톤이라면 <Fanatic>에서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앨범에는 컨셔스 랩이 중심이고 메시지를 중요시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쉬운 가사로 접근했어요. 뚜벅뚜벅 들리는 데 중점을 두어야 했죠.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반영이 된 것 같아요.

만족도는 어느 정도 인가요?

구상대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크게 만족하고 있어요.

이번 앨범의 주제라고 한다면 무엇이 될까요?

당연히 화나와 애티튜드죠.

「Full speed ahead」나 「Harmony」, 「내가 만일」 같은 곡들은 2010년부터 약 1년 간격으로 낸 싱글이었는데 이번 앨범에 수록되었습니다. 음반 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는 않았을까요?

싱글로 발표된 노래들은 각각 계기가 있어서 먼저 내보낸 곡들이에요. 「Full speead ahead」는 제가 기획하는 디 어글리 정션 라이브(The Ugly Junction Live; 이하 TUJL) 1, 2회 공연에서 반응이 좋아서 발표했고요, 「Harmony」도 TUJL 2회 공연에서 쇼케이스 식으로 선보였던 곡이에요. 그리고 「내가 만일」은 아시다시피 생애 만 번째 날을 기념해서 만들었고요. 그렇게 연유들이 있죠. 그리고 나머지 수록곡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가사를 다 써 놓은 상태였어요. 만들어진 순서로 따진다면, 1번 트랙부터 6번 트랙까지 순차적으로 가사와 비트가 함께 완성되었죠.

첫 번째와 두 번째 트랙 「Move again」과 「Remove again」은 의도적으로 연달아 배치한 건가요?

네. 그 두 곡은 동시에 받았어요. 원래는 이 두 곡이 아예 붙어있는 곡이에요. 한 번에 쭉 가면 음반으로 듣기에는 상관이 없는데, 음원 회사에서 음원 형식으로 리마스터링을 해보니 앞뒤가 조금씩 잘린다는 거예요. 그럼 아예 의미가 왜곡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서 아예 따로 자르기로 했죠.

그 다음에 등장하는 곡이죠. 「B.A.M」의 부제 ‘Brainstorming about money’에서는 예전 EP 앨범 <Brainstorming>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실 <Brainstorming>앨범의 작법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의도대로 되진 않았고요. (웃음) 지금 작법에 너무 익숙해져버렸어요. 애초의 생각은 그랬는데 결국 그렇게 되진 않았죠.

과거의 작법과 지금의 작법에 차이가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지금이 더 체계적이에요. 예전 같은 경우가 오히려 더 ‘나는 이런 식으로 작사를 해야 해’라며 기준점을 둔 게 많아요. 지금은 조금 내면화되었다고 해야 하나요. EP 때처럼 막 쓰고 싶긴 했지만 작법이 달라졌어요.




SNS에서 「신발끈 블루스」를 많이 언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가장 아끼는 곡인가요?

제일 아끼는 곡은 「내가 만일」이에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런 계기가 있으니까요. 「신발끈 블루스」도 물론 아끼는 곡이지만 여러 사람을 고생시켰고 제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마지막 프로듀싱은 김박첼라 형이 해주셨죠. 평소와는 달리 이 곡은 후렴구가 먼저 떠올랐어요. 그 콘셉트가 ‘신발 끈을 묶고’ 부분에서는 잠잠한 죽은 페이스를 유지하다가 ‘다시 일어나’ 하면서 다이나믹하게 폭발하는 것이었는데, 그 부분을 프로듀서들이 어려워하더라고요.

가사는 2010년에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도망간 프로듀서만 다섯 명’이라고도 밝히셨죠.

다섯 번째로 왔던 프로듀서가 지슬로우였어요. 두 곡을 받았는데 하나는 제프 백 스타일의 기타 리프 레퍼런스를 둔 곡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악기 위주로 가는 우울한 곡이었죠. 어쨌거나 둘 다 제 맘에 들진 않았어요, 그때는. (웃음) 시간이 지나면서 저도 지치고, 스스로도 이 곡에 타협을 하게 되더라고요. 녹음이 잘되면 되는 대로 앨범에 넣고 아니면 빼자는 식이었죠.

김박첼라와는 어떻게 작업이 이루어졌나요?

그러다 올해 초에 김박첼라 형을 소개 받았어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곡을 다시 살려보자며. 또 마침 만난 날에 「신발끈 블루스」라고 제목이 떠오르더라고요. 블루스의 속성을 이용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원래는 8마디, 16마디짜리 기본적인 힙합 곡 구성이었는데 12마디의 블루스 형태로 반복했고 또 블루스 음계도 사용했죠. 작업이 재밌었어요. 애초 그림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만족도에서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갔죠.

피쳐링을 많이 안 받는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에는 아예 없고요. 이유가 따로 있나요?

정규 작품은 온전히 제 자신의 작품이잖아요. 혼자 할 수 있는 파트라면 굳이 다른 사람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신발, 의류 브랜드 컨버스와의 콜래보레이션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똘배(석찬우 현 벅와일즈와 백앤포스 A&R)라는 친구를 얘기해야 해요. 지금은 에이전시를 준비하고 있고, 그 전에 제 학교 후배기도 하고 소울 컴퍼니 스태프기도 했죠. 과거에는 DJ Skip 형이랑 같이 킹더형 레코드도 했고요. 저는 음악은 해도 사업적인 역량은 떨어지잖아요. 같이 할 사람을 구하면서 다시 만났어요. 모든 걸 접고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에요. 제대하면서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저도 4년 만에 음반을 내는 상황이라 서로 배우자는 입장에서 출발했어요. 번 인텐스(에너지 음료 브랜드)랑 계약 한 것도 이 친구가 제안서를 써서 낸 거고, 컨버스의 경우에도 「신발끈 블루스」가 어느 정도 형태를 잡았을 때 들어보더니 이걸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며 제안서를 또 쓴 거예요. 제안서를 많이 썼어요.

앨범 이야기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작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전작은 가사 쓰고 가사에 비트를 맞추었죠. 이번에도 마찬가지 인가요?

제 기본적인 방식 대부분은 가사를 먼저 써놓고 곡을 주문하는 쪽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곡을 많이 받아둔 상태였어요. 「Move again」, 「Remove again」, 「B.A.M」, 「FANAttitude」의 중간 브릿지랑 「Show stopperS remix」, 이 곡들은 그렇게 곡이 있는 상황에서 가사를 썼죠.

비트가 없을 때는 어느 박자에 맞춰 쓰시나요? 작사용 비트가 따로 있나요?

듣고 쓰지는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제일 잘하는 BPM이 있어요. 80에서 100정도 사이인데, 무언가 떠올라서 가사를 쓰면 그 BPM에 맞춰서 쓰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요새 유행하는 트랩 비트, 60에서 70 사이에서는 제가 되게 약해요. 시도해보고 싶어요.

소재는 일상에서 따오는 건가요?

보통은 기본적으로 일상의 모든 것에서 가져와요. 구절이 떠오르면 확장시키거나, 언어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추상이 있으면 언어화시켜서 만들거나. 기본적으로는 그런 형식이죠.




가사를 쓰는 방식으로 ‘동일 자모음구조’라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 사람들 만나면 라임 말장난을 되게 많이 해요. 그런 것이 도움이 되죠. 실제로는 ‘동일 자모음구조다, 유사 자모음구조다’ 아니면 ‘자음은 이렇게 모음은 이렇게 맞춘다’라고 말하진 않아요. 작법도 몸에 익었을 뿐더러 습관적으로 쓰는 상태가 되니, 이론적으로 어떻게 쓴다며 언급할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요.

단순히 글자 짜 맞추기 놀이가 아니죠. 어휘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국어사전 세 번 정독의 진실에 대해서도 언급 부탁드립니다.

그렇죠. 국어사전 세 번 읽기는 실제로 했어요. 진짜 많이 받는 질문인데, 사실은 그건 어린 MC 지망생일 때의 객기였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도움이 되었건 안 되었건 간에 추천하고 싶은 방식은 아니에요. 자기 일상 언어를, 실제로 쓰는 언어를 가지고 랩을 쓰는 게 가장 멋있다고 지금은 생각해요.

화나의 음악을 얘기하면 아무래도 더 콰이엇을 빼놓을 수 없죠. 혹시 이번 앨범을 작업하며 오간 얘기는 없었나요?

실제로 제가 더 콰이엇 곡을 받고 싶기도 했고 실제로 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앨범을 본격적으로 작업할 당시에는 (더 콰이엇이) 곡을 많이 쓰던 시기가 아니었어요. 단지 그거였죠. 그래서 같이 못 했어요.

여담 격이지만 최적화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요?

최적화는 사실 계획이 없어요. 칼날도 음악을 안 하고요. 2003년 여름 한강 다리 밑에서 결성되어서 2008년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을 마지막으로 끝냈어요. 생각해보니 한강에서 시작해 한강에서 끝났네요. (웃음) 처음에는 서로 각자 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때 제가 하던 스타일에 매력을 많이 느꼈다 하더라고요. 칼날의 말로는 가장 최적화된 스타일이 아니냐고도 했고요. 저도 동의를 했고, 그렇게 시작을 했죠. 다만, 개인적으로는 제 스타일에 맞추기 전의 칼날 스타일이 더 좋았어요. 그보다 일찍 I.P.O.M이라는 그룹을 할 때의 칼날은 지금 찾아봐도 없는 스타일을 갖고 있었어요. 굳이 제가 하는 것에 따라왔다는 점, 저는 여기에 아쉬움을 느꼈죠. 현재는 캐나다에서 카센터를 하고 있어요. 잘 살길 바랍니다. (웃음)

소울 컴퍼니 해체 후 커넥션 같은 것은 없었나요?

사실 크게는 없어요. 그 안에서는 워낙 여러 일이 있었지만, 실제적이고 표면적인 것은 서로의 방향이나 색채가 크게 달랐다는 점이죠. 사실 처음 소울 컴퍼니 나올 때 저는 진짜 전투마인드였어요. ‘다 싫다’는 식이었죠. 제가 하는 인터넷 방송 프레쉬 애비뉴(Fresh Avenue)에서 대놓고 소울 컴퍼니 욕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시기가 지나고 나이가 들고 하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해보면 제 음악 인생 대부분의 기억은 소울 컴퍼니에서의 기억이에요. 많이 배웠고요, 그 안에서. 공연 같은 데서 마주치면 반갑고 그렇죠.

별명으로 사용했던 어글리 고블린의 몸집이 커진 거죠? ‘복합 문화 창작 활동’으로 소개된 디 어글리 정션(The Ugly Junction)에 대해서도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처음 구상한 때는 2009년이에요. 그 때부터 독립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소울 컴퍼니가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어요. 억대 매출도 올리고, 언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전설적인 사례들도 만들었고요. 어쩔 수 없이 레이블은 커져 가는데 제가 바라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거대한 것은 아니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해결 가능한 범주에서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구상을 시작했죠.

공연 소식이 자주 들립니다.

주로 공연을 기획하고 개최하고는 있지만 공연에만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게 시작점인 것이죠. 이번 음반이 나온 것도 디 어글리 정션 활동의 일환이고 여성 힙합 오디션도 한 적 있죠. 유투브에 영상도 올리고요.

어글리 정션이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인가요?

이 기획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슬로건이 있어요. ‘재미를 버는 사업’이에요. 말씀드렸다시피 비즈니스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돈을 벌자는 건 또 말이 안 된다 싶었어요. 스스로 재미를 얻고 재미를 벌자는 생각이었죠. 그러면서 기획을 향유하는 사람이 제가 느끼는 그리고 제가 느끼는 것 이상의 재미를 벌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여러 가지를 해보려고 해요. 딱 그거죠. 재미.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DJ Wegun과 라디오 방송도 시작했습니다. 다른 힙합 인터넷 라디오와 구별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유별난 특징이라고 한다면 무규칙성이랄까. 사실은 웨건(DJ Wegun)의 믹스 방송이 따로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시청률 자체가 너무 안 나와서 게스트로 참여한 그 날에 막말로 시청률이 터진 거예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몇 번 나가서 눌러 앉게 되었어요. (웃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6년 반 전이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당시엔 36 라디오 스테이션이랑 저희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많이들 하고 있죠. 프레쉬 애비뉴는 현재로는 음악에 기반을 두는 문화 크루가 되었어요. 저랑 웨건이랑 사진 찍는 부바, 이번에 제 앨범에 참여도 했던 프로듀서 비다 로까(Vida Loca), 이렇게 넷이 다니고 있죠.




<쇼 미 더 머니 2>무대에 올라섰습니다. 프로그램 자체가 힙합 아티스트들과 팬들 사이에 화두로 많이 오르내리는데요, 소감이나 느낀 점 같은 것이 있었나요?

방송국은 방송국대로, 제작진은 제작진대로, 경연진은 경연진대로, 멘토는 멘토대로, 피처링진은 피처링진대로, 소속사는 소속사들끼리 다 이해관계가 얽혀서 그 사이의 스트레스 같은 게 보이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되게 재밌게 봤어요. 제 일이 아니니까요. (웃음) 겪은 후에도, 겪기 전에도 변함없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힙합의 멋있는 모습이나 문화 전반을 완전히 보여주는 포맷은 아니라는 거예요. 눈요깃거리로서의 가치는 있다고 느끼는데. 물론 저도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는 사람이니 그런 입장에서는 배울 점도 있었어요. 동시에 이건 되게 아니다 싶은 점도 있었고요.

바깥 이야기지만, 예전 드렁큰 타이거 8집에서의 참여가 기억에 남습니다. 「주파수」가 상당히 좋았는데요 작업이 어땠나요?

(타이거) JK 형이 팔로알토 형하고 더 콰이엇 형을 통해 <Fanatic>을 들어보셨나봐요. 인상을 받으셨고요. 그렇게 찾아가서 들은 곡 주제는 외계라고 할까요, 다른 곳에서 온 화나라는 존재를 자기가 찾아내 보여준다는 것이었어요. 콘셉트를 직접 설정하셨고 설명하셨죠.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영광스러웠어요. 중학교 때부터 찾아 듣던 사람이니까요. 사실 제가 그렇게 들뜨는 타입이 아니라 전 조용히 있는데 저보다도 주변 사람들, 특히 동창이나 친구들이 더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하던 대로만 하자는 생각으로 임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나 해요.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갖는 후회죠.

앨범 간의 공백기가 넓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Fanatic>이후, 이 앨범 말고 다른 앨범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Fanalyze>라고 해서 저에 대해 더 분석해보는 앨범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연고가 길어요. 레이블 관련 이슈도 있었고, 독립 이야기도 있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어요. 디 어글리 정션도 기획하다보니 그러다보니 잡무도 많아졌죠. 아무래도 혼자 해야 했으니까… 그 와중에 부모님 부탁으로 2년 남은 학교도 졸업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음반 욕심이 사라졌어요. 여기서부터 간격이 굉장히 길어졌죠. 복합적인 상황이 맞물렸어요.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어떤 뮤지션으로 남고 싶으신가요?

이건 제가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인데, 불완전한, 평생 완벽하지 않은 뮤지션으로 남고 싶어요. (설명을 더 부탁드립니다) 누가 완전하겠어요. (웃음) 그런 빈틈들에서 소스를 많이 얻어요. 소재랄지, 추상들이랄지. 제가 가진 허점들을 통해 많은 것들이 나타나죠. 허점 많은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앨범을 전보다 더 자주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더 빨리 낼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같아요. 이전은 복합적인 상황이 맞물렸던 때였고, 음반 욕심 자체를 잃어버린 상황이었으니까요. 수많은 가사들이 이미 만들어져서 곡만 잘 만나면 좀 더 빨리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EP도 발매할 생각이 있나요?) 앞으로의 목표는 정규 앨범만 내자는 하는 거예요.

이즘 인터뷰 공식 질문입니다. 내 음악 인생에 결정타를 날린 음반들을 꼽아주세요.

여러 가지 계기를 통해서 지금까지 왔겠지만, 굵직하게 제가 처음 들은 힙합 앨범은 사이프러스 힐(Cypress Hill)의 <Black Sunday>였고 힙합 음반이라는 것 자체의 매력을 받았던 것은 푸지스(The Fugees)의 <The Score>였어요. 하나의 앨범이 작품으로서 가치를 발휘한다는 생각을 처음 했죠. 음악을 하게 되면서 제가 가장 질투 났던 거의 유일한 음반은 블랙칼리셔스(Blackalicious)의 <Blazing Arrow>였어요. 앨범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능력, 역량적인 면에서 질투를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앨범은 한영애 선생님의 <바라본다>앨범. 뭐랄까, 소위 말하는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욕심은 사실 없었어요. 그러다 이 음반을 접하고 나서부터 하나의 뮤지션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음반들이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 김도헌 이수호 전민석
정리 : 이수호
사진 : 이한수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석원 “4년 만에 첫 소설, 인생공부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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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탐험가 이석원을 만났다. 록밴드 언니네이발관 리더가 아닌, 『실내인간』의 작가 이석원의 모습으로. ‘가수 출신 작가’라는 타이틀을 유난스럽게 싫어하는 이석원이지만 언니네이발관의 곡(가사)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필시 그의 문장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석원은 최근 소수의 독자들과 빵집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실내인간』의 주인공 용휘처럼 이석원은 빵을 좋아한다. 독자들에게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소설 주인공의 모습에 작가가 많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이석원의 대답은 “저를 아는 분들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아요. 빵을 좋아한다는 사실도요. 그래서 굳이 주인공의 설정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어요.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어요.”다. 언니네이발관을 결성하기 전까지 팝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이석원, 2006년부터는 3년간 인사동 쌈지길에서 카페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을 운영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인테리어만 1년을 공을 들이고, 직원 매뉴얼이 작은 사전 한 권 분량일 정도로 열심을 다했다. 이석원은 어떤 일도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4년 만에 이석원이 펴낸 첫 장편소설 『실내인간』은 자기가 정해놓은 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는 소설가 김용휘와 그와 친구가 된 용우의 이야기다. 이석원의 두 번째 작품을 기다린 독자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소설을 읽고 있다. 빠른 속도로 가뿐히 읽을 수 있는 소설. 이석원은 의도했고 독자들은 반색했다. 스스로 결과지상주의자라고 말하는 이석원은 숱하게 고치고 또 고친 작품을 내놓으면서 편집자를 들들 볶았다. “나오자 마자 묻혀 버릴 거야.” “망할 거야.” 출간 한 달이 지난 지금, 그의 응석은 사라졌다. 이제 이석원은 팬보다 독자가 더 많은 작가가 됐다. 때론 “이석원 작품은 다 팬들이 사주는 거 아냐?”라는 힐난을 듣곤 했다. 사실인즉, 그만큼 많은 팬들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다행인 것은 그의 팬들은 “맹목적으로 좋다”고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아닌, “실망하면 어떡하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작품을 좋게 본 거겠지”라며 복잡하게 고민하고 그를 걱정해주는 팬들이라는 것이다. 이석원은 “항상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한다. 인터뷰 내내, 이석원은 자신의 글처럼 화려한 수사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이따금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매우 차분하게 스스로를 객관화했다. 이석원은 ‘보통의 존재’였지만 일상을 많이 의식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남다른 모습이 있었다. 자기연민에 빠질라치면 기어코 감정을 추슬러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 갔을 작가 이석원의 모습이 그려졌다.




소설을 쓰면서 인생공부 정말 많이 했어요

산문집 『보통의 존재』반응이 대단했잖아요. 독자들이 오랫동안 후속작을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단편이 아닌 장편소설을 썼어요.

처음에는 단편을 쓸까, 장편을 쓸까 고민을 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장편으로 결정했어요. 이왕 공들여서 쓰는 거니까 장편을 써야겠다 싶었죠.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에세이는 음악으로 치면 3분짜리 노래를 10곡 만드는 느낌인데, 장편은 100분짜리 한 곡을 만드는 기분이었어요. 산문집은 내 이야기니까 내 경험을 쓰면 되는 건데, 소설은 지어서 써야 하니 힘든 과정이었어요.

한 독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4년 동안 쓴 작품을 하루 만에 읽어서 미안하다고. 그런데, 칭찬 아닌가요? 단숨에 읽었다는 건 그만큼 금세 빠져들었다는 건데요.

(웃음). 미안하대요? 제가 미안하죠. 사실 감상이라고 하는 건 읽는 사람 자유잖아요. 작가가 무엇을 바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 같고요. 『보통의 존재』는 필체는 담담해도 주제가 가볍지 않아서 무거운 느낌이 있었잖아요. 이번에는 독자들이 두 세시간이면 휘리릭 읽을 수 있는, 턱에 걸리지 않는 책을 쓰고 싶었어요. “재밌다” “휙 읽었어” 이런 반응을 원했는데 너무 빨리 읽었다고들 하셔서, 제가 좀 죄송해서 책에 수록하지 않은 미발표 텍스트를 온라인 카페를 통해서 올리려고 해요. 소설을 읽으신 분들이 찾아오는 공간으로요.

4년간 한 작품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언니네이발관 앨범이 먼저 나오려나? 기대도 했어요.

소설을 쓰면서 인생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요. 집필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출판사한테 계약금을 받았는데, 몇 달 동안 안 써져서 당황했죠. 음반 작업은, 제가 멀티가 안 되는 스타일이라서요(웃음). 그리고 음악 작업은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작업인데, 저랑 곡을 같이 쓰는 친구도 작업이 잘 안 돼서 진행이 될 수 없었죠.

『실내인간』을 읽은 독자들이 주인공 용휘의 모습에서 작가님의 모습이 많이 비쳐진다고 이야기하지 않던 가요.

많이 들었어요. 빵을 좋아한다는 점이나 성북동, 서점을 좋아하는 것들을 눈 여겨 봤을 거예요. 저도 쓰기 전에 잠깐 고민을 했어요.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저를 아는 사람이 정말 별로 없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피해갈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어요.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어요. 단지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가가 중요했어요. 소설 속 용휘는 자기 책이 나오면 서점을 순례하잖아요. 저는 성격상 그런 거 절대 못해요. 용휘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그 모습을 누구한테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서 고립을 자처한 사람인데, 저는 관계에 갈증을 많이 느끼는 타입이에요. 알고 보면 되게 반대의 모습인데, 표피적인 코드만 보면 ‘어, 이거 이석원이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전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관계에 갈증을 많이 느낀다고 했는데, 블로그가 그 갈증을 해소하는 공간이 아닐까 싶어요. 블로그(http://blog.naver.com/dearholmes) 제목이 ‘글을 위한 글’이잖아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블로그가 도움이 되었을 것 같기도 해요.

큰 힘이 됐어요. 안 그래도 관계의 폭이 좁은 편인데, 소설 쓸 때는 집에만 있으니까 더더욱 사람들과 소통할 기회가 없었어요. 블로그에서 사람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대화하면서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블로그는 제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간이에요.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얻는 게 참 많아요. 그래서 제가 질문을 많이 해요.

『실내인간』에서 소설가 용휘는 작품을 쓰고 나면, 언제나 소영에게 먼저 글을 보여줬어요. 소영이 잡지사 편집장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뢰하는 사이였기 때문일 텐데요. 작가님에게도 이런 존재가 있었나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 그리고 일반 독자들의 반응도 보고 싶어서 일반인들에게도 보여 줘요. 글의 모니터를 주고 받는 건 굉장히 사적인 일이잖아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물어봐야 하고, 또 그 사람의 판단을 내가 판단해야 하고요. 이 사람의 말이 신뢰할만하다고 판단되면 수용해요. 인물 설정이나 글의 흐름 등 많은 곳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초고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초고가 1,800매였으니까요. 저는 일단 결과지상주의자에요. 과정이 어떻든 간데 사람들이 사서 읽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너무 많은 분들이 굉장한 도움을 주셨어요.

완벽주의 느낌이 있어요. 꼭 쓰지 않아도 될 수식어는 절대 쓰지 않으려는 강박이 있다고 할까요. 문장이 무척 간결하고 단정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 같은데요.

저한테 글쓰기는 만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쓰고는 싶지만, 아주 간단한 일기, 한 두줄 짜리 문장을 쓰더라도 뭔가 걸리는 부분이 없을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쳐요.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많지만 어려워요. 저한텐 글쓰기가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의외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는 휘둘리지 않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칭찬을 해도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무척 객관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려고 애를 많이 써요.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글 쓰면서 인생 공부를 많이 했어요. 힘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어요(웃음).

『보통의 존재』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사실인데요. 혹시 이런 반응이 없었더라도 소설을 썼을까요.

그건 장담 못하는 것 같아요. 글을 사랑해서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회사 다니는 일이랑 똑같아요. 주어진 일을 비정상적으로 남들보다 열심히 할 뿐이지, 글 쓰는 거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인생은 짧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되도록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해요. 사람들이 ‘넌 글 쓰는 건 아닌 것 같다’라고 판단해줬다면 장담할 수 없어요. 썼을 수도 있지만 접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간절함을 버리고 살 건 아니지

『실내인간』을 읽으면서, 작가가 이렇게 친절해도 되는 건가 싶었어요. “친절하네 친절하네, 어, 너무 친절해” 이런 느낌이었어요. 작가의 의도가 있겠다 싶었고요.

정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쉽게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소설이니까 저에게는 등단의 과정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다음 책을 써도 되냐, 아니냐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기도 했고요. 어쭙잖게 문학 흉내를 내기보다는 정말 쉽게 사람들한테 다가가고 싶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글을 슬 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렵다는 느낌을 주는 건 쓰는 사람의 미숙함 때문이라는 신조가 있어요. 물론 제가 이렇게 전개해서 풀어나간 방식이 최선이고 결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이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예상했던 반응과 독자들의 실제 반응이 비슷한가요.

너무 쉽고 친절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물론, 각자 훅을 두는 지점은 다르죠. 인물에 대한 이해는 워낙 친절하기 때문에 편차가 없어요. 마지막에 용휘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고백할 때,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많이 고민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용휘는 소음을 끔찍이 싫어하는 소설가에요. 작가님도 무소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들었어요.

시끄러운 곳을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글 쓸 때는 음악도 못 들어요. 사실 소설 쓰면서 이게 제일 힘들었어요. 아파트에 살다 보니 다른 집에서 나오는 소음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데, 나는 완전히 막아야겠고. 귀마개와 이사, 경찰서. 정말 수도 없이 다녔어요. 이사를 하려고 집도 여러 번 계약했는데, 막상 이사하는 날에 집을 가보면 들리지 않았던 소음이 들렸어요. 잔금을 다 치렀지만 이사는 못 가고, 월세는 나가고. 그렇게 반복됐어요.

산사의 절이나 창작촌은 그래도 소음이 덜했을 텐데요.

어머니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장이 좋지 않아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어야 하고. 또 저는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괜히 제가 없으면 서울에 큰 일이 날 것도 같고(웃음).

용휘가 ‘고통을 견디는 법은 그저 견디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뤄진다고 생각하잖아요. 물론 이뤄지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고요.

글쎄요. 꿈을 이뤄진다고 하지만 안 이뤄지는 게 90% 아닌가요. 예전에 어떤 큰 기업의 임원들이 모인 조찬 자리에 간 적이 있어요. 책을 내면 종종 강연 제의가 들어오는데 어쩌다 보니 함께하게 됐는데, 제가 거기서 이런 말을 했어요. ‘여기 사장도 있고 부사장도 있고 임원도 있을 텐데, 모든 사람들이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사장은 한 사람이다. 누구 하나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테지만 다 이뤄질 순 없다. 교과서적으로 말한다면 모두들 간절하게 원했으니 꿈이 이뤄져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글을 써야 한다면, 대부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최선을 다했지만 꿈이 이뤄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요. 그걸 그려나가는 게 내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 생각되고요. 제가 간절함이라는 걸 실제로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고 관심이 깊은 주제에요. 간절하게 원하는데 왜 이뤄지지 않는 거지? 그런 걸 끊임없이 생각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편이에요.

그럼 지금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다음 책을 낼 수 있고 소설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요. 간절함으로 따지면, 간절하면 이뤄지는 거니까 불안해할 이유는 없는 건데, 엄청 불안해하고 간절해요(웃음).

『실내인간』 예약 판매를 할 때, 이석원 연습장울 줬잖아요. 이런 문구가 있더라고요. ‘인생은 운동장이고, 청춘은 연습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함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었나요?

그건 제가 쓴 게 아니에요(웃음).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책을 쓰는 이유가 ‘이래라 저래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쓰는 거예요. ‘세상은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야 해요’가 아니라, 은근슬쩍 떠보는 거예요. 간절함을 버리고 살 건 아니지, 그 정도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종종 작가님께 음악이나 글에 있어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남에게 조언해주는 사람이 못돼요. 만약 그게 조언처럼 들리면 저한테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제가 아는 한에서는 말해주지만 일단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러면서 말을 꺼내요.

소설 속 용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목적의식이 생겼고 어찌됐든 소설가가 됐잖아요. 작가님은 어떤가요. 타인으로부터 온 동기로 인해 뭔가를 갈구한 적이 있나요.

작가로서 인정 욕구가 하나도 없고, 나만 만족하면 되고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타인의 시선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엄청 고민을 많이 했어요. 성격상 남을 의식하고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데, 대중 앞에 서는 사람이다 보니 그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해요. 어렸을 때는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깨준 게 버지니아울프의 『어느 작가의 일기』를 읽고 나서부터 에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소한 것에 상처 받고 신경을 쓰는 사람을 보면서, ‘이게 인간의 본성이구나’ 깨달았어요. 제가 전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용휘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도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세상 모든 일에 자신 있어 하지만, 알고 보면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겉으로 보면 완벽한데 안을 파보면 결점이 많은 사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걸 좋아해서 결국 그런 사람을 만들어낸 것 같아요.

‘고통을 견디는 법은 그저 견디는 것, 편안해지는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이라는 글귀가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모든 일이 그렇잖아요. 방법을 찾지만 해결이 안 되고 그저 견디다 보면 언젠가 끝이 나고.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던 여자와 헤어졌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방법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특별한 방법은 없는 거 같아요. 그런 게 하나도 소용 없다는 걸 아니까, 어쨌든 아프니까요.

4년 동안 슬럼프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글이 안 풀릴 땐 어떻게 하셨어요?

책상에서 쉽게 못 일어나는 편이에요. 그러다가 놓게 될 때는 머리가 방전돼서 더 이상 안 돌아갈 때, 그 땐 일어났어요. 다시 돌아갈 때까지 산책도 하고 TV프로그램도 보고 그랬어요. 일일 드라마, 예능 다 챙겨봤어요. 4년 내내 매일매일 몇 번씩 방전이 됐어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가 제일 잘 써지고 그러다 보면 방전되고, 또 아침 먹고 또 쓰고, 이렇게 완전히 방전될 때까지 반복하는 일상이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리 쉬어도 소용이 없는 단계가 왔어요. 그 때가 되면 대책이 없었어요. 쌀은 떨어져 가는데 글의 완성은 아직 멀었고. 정말 힘들었어요.

소설을 쓰다가 이제 정말 끝이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나요.

2년 반 정도 썼을 때 끝났다 싶었어요. 그런데 뭐야? 이런 반응이 오고 역시 결점이 발견되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러다 보니 정말 확신이라는 걸 못 믿게 되었어요(웃음).

전작을 썼을 때 ‘해방감을 느꼈다’고 표현한 적이 있더라고요. 『실내인간』을 쓰면서도 이런 해방감을 느꼈나요.

『보통의 존재』를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그 때는 들뜬 마음에 ‘내 천직이 글쓰기인가?’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실내인간』을 쓰면서는 글쓰기가 해방, 자유 이런 느낌으로 다가온 것 같진 않아요. 글쓰기에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계도 아니고요. 역시 힘들구나, 싶을 뿐이에요. 회사를 다닐 때나 음악을 할 때도 계속 힘들었던 것처럼요.




나이탐험가,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요

누군가 이석원 작가를 두고 ‘건조하게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저한테 그런 구석도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런데 『보통의 존재』가 에세이였지만 거기에 있는 게 꼭 저라고 볼 수도 없어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픽션이라고 생각하는 게 저라는 사람이에요. 사적인 부분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도, 제가 현실을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픽션으로 보는 부분이 있어서 이기도 해요. 독자들은 충분히 책 속의 사람과 저를 동일시할 수 있겠지만요. 희망을 건조하게 바라볼 때도 있는가 하면, 미치도록 간절할 때도 있어요. 『실내인간』을 쓰면서 매일매일 기도하고 잤어요. ‘제발 끝내게 해달라고’ 이런 면에서 보면 건조한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어요.

작품을 보다 보면, 문체가 작가의 성격과 굉장히 닮아 있는 경우가 있고 판이하게 다른 경우도 있어요. 작가님의 경우는 어떤가요.

후자 쪽이 더 재밌지 않나 싶어요. 작품과 작가가 동일시된다면 그건 내 이야기이든 아니든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예전에 어떤 유명한 분이 『보통의 존재』를 읽고서, 자기 인생의 획을 그었다면서 ‘자기도 이렇게 담담하게 살고 싶고, 이런 담담한 사람이 너무 좋다’고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안 만났어요. 저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스스로를 ‘나이탐험가’라고 칭하잖아요. 어떤 뜻인가요.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게 제 인생의 모토에요. 다음 생이 있더라도 지금의 자아로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 소용이 없는 거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마흔 셋이지만, 내 청춘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인생에서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나이탐험가라고 말한 거고, 지금 마음도 변함 없어요.

언니네이발관 새 앨범을 기다리는 팬들도 많은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다음 앨범이 마지막 앨범이에요. 저는 마흔을 넘기면 곡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요. 만약에 곡 작업이 풀린다면 모든 걸 제쳐놓고 앨범 작업을 할 거예요. 그런데 같이 음악 하는 친구가 곡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제가 지금 들어갈 시점은 아닌 거예요.

갑자기 곡이 잘 써져서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연락이 오면요? 소설의 흐름이 끊기진 않을까요.

글쎄요. 그건 끊겨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럴 것 같진 않아요. 왜냐하면 소설은 나이 먹어서도 쓸 수 있는데, 음악은 달라요. 나이 먹으면 작곡이 안 돼요.

왜 음악은 다른가요.

모르죠. 그건 조물주한테 물어봐야 해요. 비틀즈가 수많은 명반을 남겼지만 불과 3년 동안 나온 곡들이에요. 롤링스톤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살아남은 밴드지만 명곡을 들어보면 다 20대 때 만든 거예요. 오랫동안 내줘서 고마운 거지, 사실 들을 만한 건 없어요. 운동선수도 똑같아요. 정년이 짧잖아요. 서른 넘기면 노장 소리를 들어야 하고요. 호흡이 긴 일은 따로 있어요. 왜인지는 저도 모르겠는데, 각자 일의 정년이 있는 것 같아요.

소설 말고 다른 창작에 대한 관심은 없나요. 영화광으로 알고 있어요.

영화 좋아해요. 연출에도 관심 있고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서요.

모르는 거죠. 언젠가 시나리오를 한 편 쓸지도.

아니에요(웃음).

소설가 이석원의 모습은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건가요. 두 번째 소설, 궁금해요.

쓰고 있어요. 제 습성이 전에 만들었던 것과 다르게 가려는 습성이 있어요. 『보통의 존재』가 필체는 담당하지만 무겁고 깊게 들어가고 사람들을 먹먹하게 했다면, 『실내인간』은 요만큼도 스트레스를 안 주고 재밌고 경쾌하게 갔잖아요. 그래서 다음 작품은 완전히 다르게 가게 될 것 같아요. 소재는 밝힐 수 없어요. 제목인 다인 소설이에요. 제목이 여덟 글자인데, 나중에 한 번 보세요. 정말 여덟 글자인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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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인간
이석원 저 | 달
이야기는 실연의 상처를 간직한 채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간 용우가 앞집에 사는 한 남자를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 호기심 많고 활달하면서도 한편으론 유약한 성품을 지닌 용우는 매사에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친형처럼 따르게 되는데 실내인간은 바로 용우가 만난 사내 김용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소설은 용우의 시선을 통해 본 한 사람의 기상천외한 삶을 통해 자신이 쌓은 탑에 갇혀버린 한 존재의 허망한 모습을 속도감 있는 서사와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의준 국립오페라단장 “3만 원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공연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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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국립오페라단 김의준 단장은 독보적인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한국에 제대로 된 공연장이 거의 없던 1986년부터 공연장 경영에 발을 담갔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아시아태평양공연장연합회 부회장을 맡았고, 2010년에는 공연예술경영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예술 경영’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예술 경영을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김의준 단장 여전히 자신은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국립오페라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김의준 단장은 오페라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을까. 그가 바라보는 한국 오페라와 예술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이력이 독특하다. 건설회사에 입사해 예술의 전당 기초 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공연예술 쪽 일을 하게 되었나?

건설회사에서 일했지만 엔지니어는 아니었다. 토목이나 건축 쪽에서 일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안전, 구매, 해외 공사 수주 같은 일을 담당했다. 당시는 중동 붐이 일어날 때여서 건설 쪽 일을 하면 계속해서 해외로 나가야 했다. 중견 정도 되고 보니 안정적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마침 예술의 전당을 짓는 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집을 짓는 일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쉽게 접근했던 것 같다. 건물을 짓다 보니 일반 건물들과는 다르게 공연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게 공사가 마무리되고 집 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공연장을 운영할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건설 일로 돌아가면 계속해서 해외에 나가야 해서 이곳에 눌러앉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예술경영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 일을 시작했다. 어떻게 일을 꾸려왔는지 궁금하다.

세종문화회관이 유일한 공연장이던 시절이다. 예술경영 같은 개념은 전혀 없었다. 예술의전당은 콘서트 홀만 1986년도 먼저 개관했는데, 부장급이 없어서 직원들이 힘을 모아 일을 하는 구조였다. 부장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지원했다. 예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 지원을 했으니 경영팀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임자가 없었는지 내가 일을 맡게 되었다. 일을 시작하며 직원들을 살펴보니 다들 전문가였다. 처음부터 이쪽 일을 지향해서 시작한 사람들이라 일을 잘했다. 가만히 보니 일이 성사되지 않는 이유는 유일하게 돈 때문이었다. 그림은 잘 그리는데 지원되는 나랏돈으로는 원하는 일을 하기 어려웠던 거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주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건설공사를 하며 계약을 도맡아 했는데, 거의 천육백억 정도 되는 건축 계약을 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쌓인 인맥들을 동원했다. 밥 한번 사겠다는 사람들에게 밥 대신 표를 사라고 하고, 프로그램에 5백만 원, 1천만 원씩 광고를 실으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아직 협찬이나 광고 같은 개념은 없던 시절이다. 그렇게 돈을 받으니까 문제들이 많이 해결됐다. 그 뒤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나를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을 잘하다 보니 덩달아 좋은 성과들이 이어진 셈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쪽에서 일하는 내 또래가 없었다. 아주 엉성할 때다. 나는 직장인으로 와서 일을 맡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고 조직에 필요한 일을 했던 거다. 이제 와서 블루오션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나는 해외에 가지 않고 가족들과 서울에 살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했던 거다.

예술경영이 다른 경영과 달리 접근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일반회사에서 직원들은 다양한 직종을 소화하면서 일한다. 원래 하던 일과 다른 일을 맡아도 충분히 호환하면서 일을 한다. 하지만 예술 분야는 모두가 전문가다. 무대 조명 담당이 의상을 담당할 수 없다. 또 각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다. 이런 사람들과 일하면서 경영자가 지나치게 개입하거나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건 잘못이라 생각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격려하는 게 함께 일하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국립오페라단은 성악가나 안무가가 수장을 맡았다. 공연장 최고경영자 출신 단장은 처음이라고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예술을 했던 분들이 수장이 되면 자기가 했던 일에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연극을 연출했던 사람은 연극에, 무용을 했던 사람이면 무용에 더 많은 힘을 쏟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특별히 한 분야에 집중하지 않고 골고루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자세한 부분들을 잘 모르니까 일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믿고 맡기면서 힘을 내도록 격려한다. 대신 회사의 분위기나 방향 등 큰 그림을 그리는 게 내 일이라 생각한다.

한편의 오페라가 오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을 것 같다.

내가 왔을 때, 이 회사가 50년이 되었다. 캐치프레이즈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였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여건은 된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공연예술의 면에서 모든 게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있는 게 오페라다. 무엇보다 조화를 이루는 게 가장 어렵다. 가끔 오페라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지 세어보곤 한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공연은 적어도 250명에서 350명은 필요하다. 합창이나 무용, 오케스트라 같은 경우는 사람 수가 적기 때문에 소통하기가 편하다. 조화의 측면에서만 보면 훨씬 간단하다. 그런데 오페라는 오케스트라, 합창단, 연기하는 사람, 반다, 조명, 의상, 분장, 기획까지 물리적인 수부터 너무 많다. 게다가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편이다. 자기 세계에 대한 고집도 있고, 일종의 기 싸움도 있다. 연습시간 같이 사소한 것에서부터 갈등이 생긴다. 300여명을 놓고 이런 부분을 조율해야 하니 문제가 끊이질 않는다.

유럽 각국에 비하면 한국 오페라는 그 시작이 늦은 편이다. 현재 한국 오페라는 어느 정도 수준에 와 있는가?

한국의 싱어들은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유럽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의 오페라단들은 한국 싱어들 없이는 공연을 하기 힘들 정도다. 문제는 팀워크다. 각각의 기량은 뛰어난데 같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약하다. 기획이나 연출 같은 부분에서 종합적으로 조율하는 게 어렵다. 이 부분만 극복하면 우리 오페라 수준은 서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거다. 지금도 우리 작품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자는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진행될 만큼 발전한 상황이다. 작년에 정부에서 해외공연 예산을 받고 기획을 한 적이 있었다. 정부예산의 경우 사용처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다. 해외 공연을 위한 예산은 반드시 거기에 써야 한다. 그래서 해외 시작을 살펴봤는데 우리와는 공기가 전혀 달랐다. 일단, 스케줄부터 너무 차이가 났다. 외국에서는 공연 프로그램을 이야기할 때, 3-4년을 앞서 이야기한다. 유명한 공연장은 6~7년 앞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1년 단위로 내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말을 꺼내기가 어렵더라. 한국 오페라 발전을 위해서는 시스템의 문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창작 오페라 <처용>을 선보이며 세계 속에 한국 오페라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창작 오페라 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외국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사물놀이를 한다고 하면 우리 입장에서 신기하기는 해도 그다지 끌리는 공연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랑 교류하면서 <카르멘>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공연이 끝나면 세트를 보관해야 하는데,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다. 창고를 2개 정도 확보해서 보관하고 있는데 새 공연이 끝나면 새로운 세트를 보관해야 해서 이전 것을 폐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 공연했던 우리 작품들의 세트가 남아있지 않다. 이번에는 <처용>과 <천생연분>을 올리고 어떻게든 세트를 보존해서 한국 작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것을 제대로 만들어 소통해보려는 시도다.

현재 한국 오페라 시장은 얼마나 되나?

발레나 뮤지컬의 경우, 최근 시장이 꽤 성장했다. 발레는 오페라 한 편 만드는 것에 비하면 1/4이나 1/3의 비용이 들 거다. 최근 들어 해설도 하고 가족들끼리 보러 가는 문화도 생기고 있다. 겨울이 되면 <호두까기 인형>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나. 뮤지컬도 스타급 배우들이 생겨나면서 점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렇게 생긴 관객들이 점진적으로 오페라로 건너오는 중이다.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유입되는 관객이 많다. 사실 오페라를 보고 나면 다른 공연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아무래도 오페라가 조금 더 복잡하고 풍부한 장르이기 때문일 거다. 오페라를 자주 보면 다른 공연들이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다. 현재 오페라하우스에서 시야장애석 등 4천 석을 제외하면 전체 좌석이 1600석정도 된다. 보통 4회 공연이 가득 차면 괜찮은 걸로 생각한다. 지난 번 <카르멘>의 경우 4회가 끝나고 부족해서 1 회를 늘렸다. 점점 관객이 늘어가고 있다. 가능성이 있다. 물론 수지의 측면에서는 아니다. 사실 공연은 하면 할수록 손해다. 원래 이름난 공연장일수록 손해가 많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 하는 거다.

국립오페라단은 국립인 만큼 과거에 대표로 있었던 LG아트센터와는 다른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다른지,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궁금하다.

전에 일했던 LG아트센터는 조금 독특한 곳이다. 매년 공연할 예산이 언제든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돈이 항상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 하지만 국고는 이에 비해 유동적이다. 관객의 불평이 있거나 정책상 변화가 있으면 예산이 줄어들 수 있다. 애초에 예산을 줄여서 기획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주어지는 예산을 충분히 써도 작품을 올리는데 버거운 상황이다. 게다가 해외 다른 팀들은 2-3년 앞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뒤늦게 기획을 해서 오페라를 꾸리다 보면 이삭줍기를 하는 셈이다. 괜찮은 싱어나 무대 전문가들은 다 빠져나간 뒤에 시작하게 된다. 작업 여건이 어렵게 된다. 일정이 빠듯하게 정해지면 연습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다. 공연장을 빌려야 하는데 늦게 시작하면 아무래도 불리하다. 오케스트라나 합창단 확보도 마찬가지다. 앞선 프로그래밍이 중요한 이유다. 관객들 입장에서도 미리 기획된 상을 보여주지 않는 곳에 대해서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직원들이 전문가인데도 자신감이 없었다. 과거에는 수장들이 예술가였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 깊이 관여했었다. 그런 속에서 지시한대로 일을 하다 보니 전체적인 그림을 모른 채, 맡은 일만 했던 것 같다. 내가 와서 보니 직원들이 전문가인데 자신감이 없더라. 당신들이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말하는데도 잘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제는 조금씩 인식을 하는 것 같다. 나는 국립오페라단이 당신들 때문에 움직이는 거라고 말한다.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있어야 그 안에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올 수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전문가이기 때문에 고집이 더 셀 것 같다. 팀워크를 이루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과거에는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백지상태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내가 선발했다. 그래서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나는 소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일 뿐이고 실제로 일을 하는 당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분들이 일을 잘하기도 했지만 회사와 일에 대한 애정도 컸다. 하지만 여기 와서 보니까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국공립 단체들은 다른 조직과는 조금 다르다. 온전히 이 조직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모였다고 보기 어려웠다. 제도를 개선하거나 인사 문제를 다루려 할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게다가 과정이 중요하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지는 면도 있다. 사조직의 경우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편이다. 팀원, 팀장, 간부급 정도가 있으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빨리 결정해서 당장 시작할 수 있다. 공연을 보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당장 갈 수 있다. 하지만 공조직의 경우 절차가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누수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텐데 일을 처리할 때는 빠르게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국립오페라단을 이끌고 있다. 앞으로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

무엇보다 공연장이 필요하다. 또 합창단, 오케스트라, 그리고 싱어가 있어야 한다. 외국에서 보기에는 국립오페라단이 마치 페이퍼컴퍼니 같을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같은 경우는 3천명이 일을 한다. 발칸 산맥에 있는 오페라단도 850명이 일한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면 황당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공연장이 있느냐고 물으면 예술의전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입주해서 쓴다고 하고, 합창단이 있느냐고 물으면 국립합창단이 옆방에 있다고 하고, 오케스트라가 있느냐고 물으면 코리안 심포니에서 도움을 받는 다고 대답해야 한다. 싱어들은 그때그때 모아서 쓴다고 이야기하면 그들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눈치다. 아무래도 주눅이 들게 된다.

물론 우리는 유럽과 역사와 전통의 시간이 다르다. 예전에 독일에 방문했을 때, 안내하던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 2차 대전 이후 연합군이 초토화시킨 땅에 돌아온 독일 사람들이 제일 먼저 지은 게 무엇일까? 나는 학교나 집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다. 그런데 답은 공연장이었다. 당시에는 거짓말 같았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들은 공연장 없이는 못 사는 거다. 굶어도 공연은 봐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번에 <처용>에서 작곡을 맡아주신 이영조 선생님께서 독일에서 공부하실 때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집에 파이프가 고장이나 배관공을 불렀는데 이 분이 일을 하다 말고 내일 와서 마무리하겠다고 했다는 거다. 마저 해달라고 하자 오늘 이스라엘 필이 와서 공연을 하는데 그걸 보러 가야 한다고 했단다. 음반은 들어봤는데 실제로 봐야 한다며 바삐 가는 걸 보며 한국이라면 이럴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와는 아직 정서 자체가 많이 다른 셈이다.


오페라는 아직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르가 아니다. 오페라를 처음 만나는 대중들이 어떻게 오페라를 즐기면 좋을까?

나 역시 오페라를 즐긴 게 오래되지 않았다. 76년도에 건설회사에 있을 때였다. 세종문화회관을 짓고 나서 회사에 오페라 표가 왔다. 부인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갔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게 <카르멘>이었다. 예술 쪽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뭐 하는 건가 생각하며 보다 나왔다.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면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답답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리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고 가는 게 좋다. 하지만 조금씩 친숙해지면 발길을 끊기 어렵다. 관객들 중에는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분들도 있다. 캐스팅이 바뀌기 때문에 맛이 다르다고 한다. 대부분 오페라가 비싸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3만원이면 충분히 볼 수 있다. 다른 공연들과 비교해 절대 비싼 값이 아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발을 디뎌본다면 충분히 그 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유홍준 “일본, 욕하기 이전에 아는 것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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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누구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시리즈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아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것만큼 보인다”며 그가 보여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고찰은 단순히 옛 것 혹은 볼거리로 치부하던 우리 문화재와 문화유산의 격을 높였고, 한때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여전히 아쉬움은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을 대하는 태도는 과거에 비해 꽤 많이 향상됐다. 오늘날 한류 열풍이 세계를 휩쓰는 것은 어쩌면 그의 책을 통해 문화적 자긍심을 얻은 젊은 세대들이 우리나라의 불행했던 근대사에 영향을 받은 기성세대의 열등감을 극복한 덕분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최근 문제로 지목되는 중ㆍ고교의 부실한 역사교육 현실에서 그의 신간 소식은 더 없는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일본편이라니, ‘왜 요즘과 같이 한일관계가 민감한 시기에’라는 어리둥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리둥절함은 유홍준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내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었다. 그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일본의 망언과 끝없이 이어지는 정치권의 우경화 바람은 우리나라 정부는 물론 국민 모두의 민족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유홍준 교수는 격분하는 대신 학자로서, 또 냉정한 관찰자의 시각으로 양국의 문화에 깃든 갈등의 원인을 분석했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한일 간의 해묵은 역사논쟁의 이면에는 고대사 콤플렉스를 가진 일본의 입장과 개화기 강점의 치욕을 잊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유 교수는 이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을 통해 감정과 자존심 대결로 얼룩진 양국의 문화와 역사를 더 이상 어느 한 쪽의 편협한 시각에서 보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시야를 넓혀 더 큰 범위, 즉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양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해야함을 주문하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을 내면서

미술사학이란 어찌 보면 요즘 젊은이들의 관심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유홍준 교수의 강연에는 늘 학생들이 붐빈다. 신간이 나오면 반드시 읽는 충성도 높은 독자들 역시 그들이다. 물론 주부와 여성, 교사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인기는 여전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소탈한 그의 성품을 꼽을 수 있다. 더구나 역사라면 하품부터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의 강의 스타일은 시종 유쾌하고 위트가 넘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성품은 인터뷰 자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더하고 덜함 없이 간결한 답변은 마치 강연을 듣는 듯 했다.

이제까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시리즈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집필하셨습니다. 독자들은 교수님의 책 속에서 생생한 현장감을 느낀다고 하는데요. 비결이 있으신가요?

현장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죠. 책상에 앉아만 있어서는 그런 현장 중계가 안 되거든요. 답사를 가서도 버스에서 내려서 거기가 동서남북 중 어딘지도 모르고 보는 것 보다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많이 둘러보게 합니다. 내가 답사를 가면 상당히 많이 걸어요. 그러니까 현장감이 있겠죠. 또 글 속에서 그렇게 보여주려고 노력을 하기도 하고요.

단지 문화유산 이야기만이 아니라 전문가적인 평을 친절한 설명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또 그 주변에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교수님 글의 특징이 아닐까 싶은데요?

답사기는 답사했던 경험을 전달해 주는 것이니까요. 또 한편으로 현대사회 속에서 많이 잃어버린 것인데, 과정의 중요성이거든요. 어떤 목표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과정인데 나는 책을 통해 그 과정도 같이 보여주려 한 거죠. 단순한 옛날 얘기가 아니고 오늘날의 현실에서 그 옛날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겠다는 입장이다 보니 다양한 내용이 포함된 것이고요.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의 문물에 대한 관심은 높은 반면 우리가 살고 잇는 동북아 지역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나 싶습니다. 교수님의 책을 통해 그런 생각을 더욱 하게 됐는데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먼저 제대로 아는 것이 당연하죠. 우리 홀로 살아간 것이 아닌 함께 살아온 역사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인식을 해야 우리가 잘 보이고, 우리 역사인식이 올바로 되죠. 오랫동안 중국은 공산국가여서 왕래가 없었고 일본과의 관계는 내내 껄끄러웠잖아요. 특히 일본과는 겨우 1998년에 가서야 대중문화를 소통했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올바로 알아야 될 때가 됐죠.

규슈 편과 아스카ㆍ나라 편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시리즈의 시작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앞으로 이어질 일본편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또 독자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다음 편은 교토가 2권으로 그려질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오사카하고 대마도하고 동경이 남는데……, 그걸 내가 써야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내 전공은 미술사이고, 교토까지는 문화유적 중심으로 내가 갖고 있는 전문지식을 통해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 다음은 역사 이야기거든요. 또 한일 근대사 문제도 거기에 녹아있고요. 역사 전문가도 아닌 내가 그 이야기를 쓰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일단은 교토에서 끝내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해보려고요. 할 일은 많은데 나이는 먹어가니까(웃음), 일단은 70세가 넘어서도 여력이 있으면 그 뒤에 걸 쓸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교토까지만 생각하고 있어요. 또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규슈나 나라, 아스카, 교토와 같은 곳을 갔을 때 유적 속에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고 어떤 관점에서 그것을 보면 좋을지 미리 알게 됐으면 해요. 그러면 더 의미있게 다가올 거예요. 실제로 이미 이번 책 본 분들이 ‘그동안 난 일본 가서 뭘 본건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일본, 욕하기 이전에 아는 것이 먼저다

그는 이번 책을 집필하며 한국과 일본 어느 한편의 관점으로 문화를 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일 양쪽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굳이 책을 쓴 이유는 양국이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 좀 더 이상적이고 공존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우리 입장에서도 무턱대고 일본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우선 아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한일 관계가 민감한 시기에 일본 편을 집필하시면서, 또 책을 발표하기 전까지 심사숙고 적지 않았을 듯 한데요. 양국 쌍방에서 날아오는 독화살을 장풍으로 날려버리는 심정으로 쓰셨다고 이야기하실 정도였는데요.

한일관계는 여러 가지 껄끄러운 현황들이 많죠. 마치 진흙탕싸움처럼 서로 헐뜯고 또 생떼를 쓰고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이뤄지는데, 상대방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이전투구 이외는 아무것도 안 되고 미래도 없어요. ‘그들이 왜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가’를 살펴보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정략이 있어요. 그건 올바른 것은 아니고 또 대국다운 면도 아닌 거죠. 그들이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같이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조급하지 않게 ‘너희들이 좀 자숙하고 반성할 건 반성하고 덕을 길렀으면 좋겠다’는 입장으로 얘기하는 것이 더 어른스럽고 슬기로운 대처가 아닌가 생각을 해요.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왕까지 죽이면서 싸웠던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반면에 백제와 왜는 단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 (중략)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고 민족과 국가를 일치시켜 역사를 보아온 시각에 익숙해 있어서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한 민족으로 한편이고 왜는 외적이었다는 선입견이 있으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중략) 비약해서 말하여 4세기부터 6세기까지 당시 한반도와 왜의 상황을 보면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3국시대가 아니라 가야ㆍ왜까지 포함된 5국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 역사 전체 속에서 한국사와 일본사를 보아야 우리의 역사도 일본 역사도 제대로 이식할 수 있는 것이다.”
책에 언급하신 말씀처럼 일본의 역사왜곡도 문제지만 우리 스스로의 역사 왜곡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문화는 우리가 다 해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데, 그건 고쳐야죠. 그들이 받아가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발전시킨 것은 그들의 문화거든요. 그걸 인정을 안 해주면 동아시아에 문화사가 성립할 수 없어요. 유독 우리만 일본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 국제적으로 보면 오래전부터 서양 사람이 동양을 이해하는 건 중국과 일본이란 창구를 통해서 였어요.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성과도 있었고요. 어느 순간에는 일본이 우리보다 문화적 성취가 높았을 때도 있었거든요. 2천년 역사 속에 그런 때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거죠. 일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있는데 그런 고정과념으로 상당부분을 놓쳐버리면 결국 우리가 손해거든요. 일본이 잘해서 이룩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줄 줄 알아야한다는 얘기죠. 물론 일본이 요즘처럼 하는 상황에서 보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너희들 다 우리가 해준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죠. 하지만 최초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710년 나라시대 이후에 그들이 만들 낸 것에 대해선 ‘우리가 준 것’이라고 얘기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일단 역사적인 감정 탓에 일본이라면 무턱대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우선 일본을 잘 모르잖아요. 일본 역사를 배운 적 없고 열심히 연구한 적도 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일본을 알고 배우고 나서 말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야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저 들은 이야기 가지고 심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을 뿐인 거죠. 그런 선입견은 벗어야 해요.

양국 간 문화적 콤플렉스 역시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는데요. 요즘 우리나라 학생을 보면 앞 세대보다는 그런 콤플렉스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국사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화 역사 교육의 중요성은 말 하나 마나죠. 그리고 역사를 인식하는 것도 한반도에 이뤄진 역사만이 아니고 동아시아 전체가 어떻게 흘러왔는가에 대한 큰 맥락 속에서 봐야 해요. 그 안에서 우리를 보고, 자랑스러운 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반성할 건 반성하는 시각에서 역사를 봐야죠. 맹목적 애국주의로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없어요.

책에서 ‘20년 전 문 밖에서 철판에 직접 구워준 덴만궁 길목 우산집의 야키모치’에 대한 기억도 언급하셨는데요. 책을 읽다보면 교수님의 일본 연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듯 합니다. 최초의 일본 방문은 언제쯤이신지요?

답사는 1986년 아스카에 간 것이 처음이고요. 최초의 방문은 1982년인가 일본교과서 파동이 났을 때인데, 그때는 고려불화라는 책의 편집을 맡아서 필름을 대여받기 위해서 나라를 방문한 것이었죠. 당시 동경도 들렸죠. 그리고 책에도 언급했지만 1986년에 아스카에 답사 가서 자전거를 타면서 그때부터 우리에게 일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있었죠. 한국미술사 전공하다보면 중국미술사와 일본미술사를 같이 공부하게 돼있어요. 그 과정에서 일본 미술사의 내용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요. 또 어떤 면에서 참 훌륭하면서도 동아시아의 문화적 성취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 후 한 20년 동안을 일 년에 한 두 번 씩 꼭 찾아가 확인했어요.

그 당시면 우리나라의 일본 대중문화개방보다 훨씬 이전인데요. 양국 간 역사 인식이나 감정 역시 지금보다 덜하진 않았을 듯한데, 교수님께서는 어떤 선입견이 없으셨는지요?

공부하는 사람은 어쨌든 진실로 다가가기 위해 객관적일 수밖에 없어요. 선입견이야 다 똑같았죠. 일본사람들 못됐고 또 일본은 우리문화를 상당히 영향을 받았는데 그걸 왜곡을 하고 있고…. 하지만 그 감정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그런 선입견이 어떻게, 왜 나왔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면서 사실을 사실로서 확인하는 작업을 한 것이 이 책의 내용들이에요.




우리문화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일본 문화도 배울 것은 배워야

이번 책에서 유홍준 교수는 일본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문화적인 가치를 소중히 한 점을 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자기 문화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문화의 위대함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은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서 중용의 미덕이 느껴진다.

시마즈가 28대 당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일본의 운명을 바꾼 선각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 그런 이들을 때문에 당시 일본과 조선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문득 우리나라에서도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같은 노력을 한 인물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의 침략 때문에 그럴 기회를 잃어버렸죠. 예를 들면 그 이전에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위대한 분들은 있었지만, 그분들은 개인이고 학자였을 뿐인 반면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번주였다는 차이가 있어요. 사실 그가 한 일은 국가가 안하면 개인은 할 수 없는 일들이었죠. 당시 일본에서 번주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에 생각만이 아닌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나라로서는 실천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됐다는 것이 차이죠.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식민지가 된 우리로서는 역전을 당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책에서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도공 이삼평 등이 후한 대우를 받으며 일본 도자기의 새장을 열은 내용을 봤을 때, 두 나라의 운명이 갈린 것이 당시 문화를 대한 태도의 차이도 영향이 있을 듯합니다.

도자기만 갖고 얘기를 했을 땐 우리는 우리 역시 분원이 존재했으니, 나름대로 도자기 문화는 갖고 있었죠. 그러나 그걸 국제화하지 못한 것이 차이에요. 시도도 못했고 요구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일본은 그러한 요구가 밖으로부터 왔고 그걸 계기로 해서 도자문화가 융성했고요. 우리는 서구 세력이 들어왔을 땐 이미 자력으로 무엇을 해내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일본은 어쨌든 변화를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근대화를 해 나간 것이고, 우리에게 기회가 왔을 때는 이미 식민지로 가는 길목이었던 것이 근대사의 비극이죠.

일본 편은 국내 편 7권을 쓰신 내공과 우리문화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쓰셨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왠지 모르게 폄하하는 시각도 있는 듯합니다. 단순히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문제가 아닐까요?

그 점은 강연에서도 강조하는 것인데, 조선시대 문화가 굉장히 뛰어난 문화인데도 그 내용, 또는 그렇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노고와 위대한 정신이 국민들에게 잘 인식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욱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우리 문화의 뛰어난 점을 현장에서 전달을 해주니까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날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국민 전체가 노력 할 때 이뤄질 겁니다. 그런데 역사교육이나 역사저술은 어느 날 이게 필요하다고 해서 그때 딱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누군가는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하려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고요. 그런 노력이 이어진다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역사인식의 보강으로 이어지겠죠. 난 결국엔 되리라고 봐요.




포용으로 시작하는 미래지향적 관계 정립이 필요

일본의 우경화, 그릇된 역사 인식에 대한 유홍준 교수의 평가에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양심있는 일본 학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처럼 동아시아적인 관점에서 우리와 일본은 싫든 좋든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 이웃이기 때문이다.

강연에서 “일본이 총칼을 앞세워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를 시도했지만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고 하셨는데요. 현재 일본 우경화 모습을 보면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후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독일과도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요?

섬에 갇혀 살았던 습성이죠. 독일하고 비교는 해 본 일이 없어 잘 모르겠어요. 없고 잘 모르겠고. 독일은 바로 국경선 없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폴란드하고 붙어있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그 문제가 다가왔을 거예요. 그런데 일본은 일단 떨어져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국제사회 속에서의 폐쇄성이 있고, 그런 말을 했을 적에 바깥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인식의 배려가 적게 나타난 건 사실이죠.

역사적 상처 있는 우리나라 무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데요. 교수님께서는 이번 책을 발표하시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건 명백히 잘못했다고 얘길 해야죠. 하지만 서로 헐뜯는 말 보다는 이성을 회복하고 국제사회에서 공전과 공생을 할 수 있는 자세로 나올 것을 촉구해야죠. 또 현 일본 정권이 보여주는 태도가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일본에서도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호소를 해서 내부에서 시작되는 변화도 기대해 봐야죠.

향후 교토 편에 대한 관심도 높은데요. 구상을 말씀해주신다면?

교토는 일본문화의 꽃이에요. 교토 편은 일본이 어떻게 일본미를 완성했는가에 관한 얘기가 될 거에요. 아스카와 나라 편에서는 가야와 백제 사람들이 일본 고대문화에 끼친 영향이 얘기가 됐다면, 교토 편에서는 고구려 사람과 신라 사람들, 즉 도래인들이 했던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광룡사는 신라의 진씨들이 이룩했고 또 야마시로초의 고구려 절이 있던 터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얼마나 뿌리를 내렸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헤이안시대 이후 1천년동안 수도였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17개나 있는 곳으로서 교토를 조명해 볼 생각이에요. 일본미의 특질과 일본사람들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유산에 대한 내용을 내가 아는 한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어요.

책이 일본에도 번역돼 출간되는 것으로 아는데요. 일본 독자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듯 한데요?

일본어로 번역이 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일본 독자를 의식하고 쓴 것은 아니에요. 일본 독자를 생각했으면 너무 상식적인 얘기는 빼야 됐고, 한반도가 준 영향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다만 외국인이 쓴 그 나라의 이야기라고 하는 건 그 나름으로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를테면 비숍여사가 100년 전 조선에 대해 쓴 책은 외국인이 썼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 외국인들 눈에는 이렇게 비칠 수 있구나’하는 것 처럼요. 얼마 전 일본의 유력 일간지 서울특파원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분 얘기도 일본에도 불상이나 문학, 역사에 대한 책은 있지만 일반인들이 다 아울러서 볼 수 있는 책은 없었다며 일본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을 거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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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저 | 창비
1993년 제1권 ‘남도답사 일번지’를 시작으로 2012년 제7권 제주편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까지 20년 동안 330만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고 한국 인문서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기록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번에는 ‘일본 속의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정수’를 찾아 일본으로 떠난다. 그동안 펴낸 제7권까지의 국내편 ‘답사기’는 전국 각지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소개하면서 그 가치와 의의를 저자 특유의 입담과 안목으로 새롭게 조명해온바, 수준 높은 문화교양서이자 기행문학의 백미로 널리 알려져 ‘답사기’ 자체가 이미 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허수경 “완전히 다른 삶, 한번 꿈꿔볼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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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절반은 제주도, 나머지는 서울. 매주 ‘이중 생활’을 하는 방송인 허수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교통비가 굉장할 텐데” “체력적으로 가능해?” “아이한테 정말 좋을까?”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수경을 두고 ‘열혈 엄마’라고 칭하지만 그의 삶을 깊이 살펴보면 ‘느린 엄마’에 가깝다. 8년 전, 엄마의 고향 제주로 터를 옮긴 허수경은 제주 생활을 하며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2년 뒤 별이의 엄마가 됐다. 태어난 지 100일이 된 날부터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별이는 제주의 자연을 친구로 둔 덕분에 꼬마 시인이 됐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별이는 말했다. “엄마, 바람이 나를 자꾸 만져. 바람은 손도 발도 없는데.” 내년에 초등학생이 되는 별이는 가끔 서울에서 잠을 자게 되는 날이면 엄마에게 채근한다. “엄마, 서울에는 왜 별이 안 보여?” 서울 생활에 제법 흥미를 느낄만한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제주를 더 좋아하는 별이. 엄마 허수경은 행복하다. 그래서『왜 사느냐면, 제주도에』를 썼다. 제주의 행복을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별이를 명문 대학에 보내는 길이 학원보다는 자연 쪽에 더 가까이 있다는 판단에서 제주도의 삶을 선택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을 포함해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다양한 삶과 변화, 그리고 다채로운 색깔의 행복. 그것을 체득하는 과정이 없이는 어떤 것에서도 진정한 자기만의 것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문 대학은 그저 딸기 생크림 케이크의 딸기 한 톨쯤 될 뿐, 촉촉한 빵과 생크림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은 딸기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치즈 케이크도 맛있고 초콜릿으로 전체를 덮어도 맛있다. 인생은 자기가 좋아하는 케이크 만들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별이가 미래에 만들 별이만의 케이크는 타인이 인정해주든 그렇지 않든, 충분히 별이를 만족하게 할 것이다.


별이, 자연이 나에게 선물한 딸

“행복했어요. 책을 쓸 때, 별이가 항상 옆에 있었거든요. 예전에는 정말 상상해보지도 못한 그림이었으니까요. 별이가 자기랑 안 놀아준다고 투정을 부리다가도,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기만의 글을 쓰더라고요(웃음). 뭐라고 썼나 들여다보면서 ‘아 정말 이 상황이 꿈 같다’고 생각했어요. 별이가 쓴 문장을 찾아내서 지우느라 애를 먹었지만요.”

『왜 사느냐면, 제주도에』를 펴내며 엄마 허수경은 딸 별이에게 허락을 받았다. “별이야, 별이 사진을 책에 좀 실어도 될까? 마음에 들지 않은 사진 있으면 빼도 되고.” 별이는 흔쾌히 수락했지만 엄마의 사진만큼은 꼼꼼히 확인했다. 엄마의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는 나이, 어느덧 일곱 살이 됐기 때문이다.

“자기 사진은 다 좋대요. 그런데 엄마 사진을 그렇게나 유심히 보더라고요. ‘이거 예쁘게 나왔네’ ‘다른 사진은 없어?’라면서(웃음). 저는 별이가 예쁘게 나오면 좋은 건데, 우리 딸 입장에서는 엄마 얼굴이 중요한 거예요. 여자 애들이 크면서 엄마 외모에 대해 많이 관찰하고 관심을 갖잖아요.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하고 신기하고 뭉클하고 그랬어요.”

『왜 사느냐면, 제주도에』는 방송인 허수경이 아닌 ‘8년차 제주도민’ 허수경이 쓴 제주 생활 가이드다. 일곱 살 별이와 함께 보낸 제주의 2년을 담으며, ‘제주 이주’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까지 친절하게 소개했다. 기후를 고려한 집 짓기 노하우, 감귤 농사법, 제주의 보편적인 임대 방식 ‘연세’ 등 현지인만이 할 수 있는 세심한 조언들을 담았다.

“제주뿐만 아니라 귀농 귀촌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있잖아요. 제주도는 최대 수용 인구가 60만 명인데, 벌써 이 숫자를 넘어섰어요. 그만큼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오다 보니 많은 갈등이 빚어져요. 사람들은 대부분 ‘경치 좋은 땅을 사서 원하는 집 짓고 산이랑 바다랑 가까이에서 살아보자’ 이런 마음으로 오는데, 새로운 곳에 정착하면 그 지역에 흡수되어야 해요. 제주는 특이한 게 새로 이주해서 오는 사람들이 제주도민들을 이방인으로 봐요. 거꾸로 된 거죠. 젊은 부부들이 귀촌하는 경우가 많은데, 목적은 다 다르죠. 하지만 누구라도 새로운 곳에 오면 이 곳의 문화에 적응하는 게 맞잖아요. 현지인의 눈에서 본 제주 생활을 솔직하게 써보고 싶었어요. 덕분에 별이와 보낸 제주의 모습들도 담을 수 있었고요.”

8년 전, 허수경이 제주도 생활을 결심할 무렵 별이의 존재 가능성은 전무했다. 결국 제주의 자연이 별이를 만날 수 있게 허수경의 마음을 이끈 것이다. 삶의 터전을 서울에서 제주도로 옮긴 후, 허수경은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주는 엄마의 자궁처럼,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세상의 모든 걱정거리를 잊게 만들었다. 서울에서 지내는 3일은 방송인 허수경의 모습으로, 제주에서 별이와 함께하는 4일 동안은 ‘절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모토로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잊고 감귤 농사를 지으며 안빈낙도하는 삶, 그게 제가 처음에 꿈꿨던 제주도의 삶이었어요. 별이가 등장한 건 저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있어요. 놀라운 축복이었어요. 확실히 다르고 새로운 삶을 생각하자, 별이가 찾아온 것 같아요.”




그림책 즐겨 보는 별이, 읽지 않고 대화해요

만삭일 때도 허수경은 방송을 했다. 고맙게도 그를 찾는 일들은 끊이지 않았고, 제주와 서울을 넘나드는 이중생활을 하게 됐다. 두 모녀는 매주 이별을 해야 하지만 엄마 허수경도, 딸 별이도 어느새 짧은 이별의 시간들을 잘 소화해내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실감해요. 서울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야 할 때는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별이가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을 하루 더 양보할 만큼 많은가를 계산해요. 이제 별이가 엄마가 왜 서울에 가야 하는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잘 알아요. 동시에 자신이 왜 제주도에서 자라야 하는지, 왜 엄마가 자신을 서울에 데려가지 않는지를 궁금해하더라고요. 그래서 별이한테 생각할 시간과 선택할 환경을 주려고, 실험처럼 연습처럼 별이를 데리고 종종 서울 나들이를 했어요.”

별이는 처음에는 서울 생활을 즐거워했지만 곧 지루해하고 답답해했다. 엄마가 일을 하러 가는 동안 어디엔가 맡겨진 시간들을 괴로워했고, 서울은 재미 없다며 제주로 내려가자고 졸랐다. 별이는 엄마와의 3일간의 이별을 감내하더라도 제주에서 살겠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별이가 초등학생이 돼요. 저는 아이가 어디에 있든지 긍정적인 욕구를 느끼는 곳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제주 생활이 지긋지긋 해’라고 하면 물론 서울로 올라오겠죠. 그런데 어떤 넓은 것, 깊은 것, 양질의 것을 경험하면 그것보다 낮아지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고 했을 때, 도심의 아주 고급 교육시설에 가면 여러 가지 창의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를 사용할 텐데, 그게 아마 답답할 거예요. 책상에서 친구들 모두 똑같이 주어진 색종이, 가위, 풀을 가지고 놀기는 답답하겠죠. 부모가 강요하고 선택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이 중요해요. 자신의 취향이 생겨나니까요.”

제주의 자연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된 별이. 언젠가 삼촌네 식구들이 제주에 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별이는 “공항으로 가는 길이 오늘은 아주 아주 멀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매번 헤어짐이 서운해 울음을 찾지 못하는 별이지만, 이 날은 어쩐 일인지 울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끝까지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별이의 숙모가 “별아 공주님처럼 우아하게 손 좀 흔들어주세요”라며 말하자, 별이가 꺼낸 말이 과연 남다른 감수성을 여지 없이 드러냈다. “저는 눈을 감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떠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떠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계속 내 곁에 있다고 느낄 수 있어요. 난 그냥 이렇게 눈을 감고 있을래요.”

“별이 때문에 그 날 숙모는 물론이고 삼촌까지 펑펑 울면서 서울로 돌아갔어요. 별이가 종종 시적인 표현을 많이 해요. 한동안 적어 놓기도 했는데, 잊어버릴 까봐 전화통화를 할 때는 녹음을 하기도 해요. ‘우리 애가 이런 표현을 했어’라고 자랑하기보다는 이게 자연의 선물인 것 같아요. 자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섬세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자연 자체가 섬세하기 때문이에요. 아주 작은 변화도 너무 또렷하게 보여주니까 놓칠 수가 없어요. 아이들도 자기가 봤던 걸 상대방한테 그대로 전달하자면 표현력이 풍성해질 수밖에 없어요.”

별이는 책을 무척 좋아하지만, 허수경은 다독을 자제시킨다. 보통 부모들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그는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는 양질의 책을 골라서 읽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책을 읽었다는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느꼈느냐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주기보다는 별이한테 읽어 보라고 말해요. 글자를 몰랐을 때는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지어냈어요. 실제 글로 쓰여진 이야기랑 비슷할 때도 있고 전혀 다를 때도 있어요. 아마 읽는 시간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월등히 오래 걸릴 거예요. 그림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랑 모두 이야기를 나누니까요. 저는 별이가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상대방 역할을 해줘요. 전혀 다른 책 읽기를 하고 있어요. 별이는 자연에서 자란 아이라서 사람하고만 이야기하지 않고 벌레, 꽃하고도 이야기 해요.”

매일같이 꿈이 바뀌곤 하지만 요즘 별이의 장래희망은 발레를 할 줄 아는 배우다. 엄마 덕분에 손숙, 양희경의 공연을 최연소 관객으로 볼 수 있었는데, 무대에 선 엄마의 선배들이 신기했나 보다. 또 글 쓰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란 까닭인지 시인이 되고 싶다고도 한다.

“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종종 어르신들이 ‘네가 하는 말을 적으면 시가 되겠다’고들 하세요. 그런 말을 들으면 별이는 ‘엄마, 나는 시인이 되어 볼까?’라고 묻곤 해요. 별이를 보면서 가끔은 부러울 때가 있어요. 이 좋은 자연환경에서 그래도 주어진 조건에서는 최대치를 누리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어떤 때는 소중함을 모를 까봐, 도시에 한 번씩 데리고 나와요. 그러면 ‘엄마, 하늘이 너무 멀어. 왜 별이 안 보여’라고 말해요. 이럴 때, 소중함을 알겠구나 싶죠.”

“어머니가 아파서 제가 간병인 노릇을 해야 한 적이 있었어요. 병간호를 하느라 제주도에 자주 가지 못하니까 별이가 많이 서운해했어요. 그래서 제가 ‘별이야, 만약 엄마가 아프면 어떡할 거야?’ 그랬더니 별이도 엄마를 간호해줄 거래요. 제가 또 이랬죠. ‘별이야, 너한테 엄마가 소중하듯이 엄마한테도 할머니가 소중해. 이건 네가 양보해야 해’. 지금 건강한 엄마가 네 옆에 있다는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 이런 소중함을 놓치지 않고 환기 시켜주는 게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에요. 못해준 거에 대한 미안함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넌 축복 받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 아이처럼 자라는 아이들이 많아야 해요

제주뿐 아니라 귀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다만 부모들이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 때문이다. 돈이야 서울보다는 당연히 적게 들고, 더 큰 집에서도 살 수 있다. 부모와 아이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해 새로운 곳을 꿈꾸지만, 열악한 교육환경이라는 단점 때문에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과연 좋은 교육환경이라는 기준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모두의 목표는 같아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애쓰는 거예요. 그런데 ‘잘’에 대한 개념이 다른 거예요. 제 방식이 맞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한번 분석을 해보자는 이야기에요. 모든 부모는 아이가 행복하길 원하잖아요. 그러면 행복이 뭐냐, 여기에서 잘 키우기 위한 방식이 나오는데, 학군이 좋은 도심 지역에서 키우는 게 잘 키우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한번 설득을 해보고 싶은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별이처럼 자라는 아이가 많아야 해요. 한 가지 걱정은 언젠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함께 어우러질 때가 올 텐데, 분명 괴리가 있을 거예요. 별이처럼 큰 아이들이 잘 자라난다는 걸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니, 저에게도 이웃이 필요한 거예요. 저 혼자 만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모두 잘 자랄 수 있는 거니까요.”

허수경은 지금까지 쓴 책들의 판매 부수를 걱정해본 적이 없지만, 『왜 사느냐면, 제주도에』만큼은 “한 번 읽어보세요”라며 손에 쥐어주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다른 삶도 있다”며 제안해보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급물살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거랑 같아요. 그런데 이 물길이 어디로 가는 지는 안 보는 거예요. 급물살에 휩쓸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그 끝에 낭떠러지가 있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헤엄쳐 나와야 할지도 모르는 거고요. 이 책이 작은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허수경은 아이를 키우는 문제는 ‘80년을 내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부모가 아이의 운명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가 부모의 운명이 된다. 아이의 행로가 부모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게 된다. 때문에 아이가 80년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을 가면 뭐해요. 자녀 대학 입학 시킨 부모들 이야기 들어보면 취업 걱정하고 있어요. 취업 잘하면 뭐해요. 또 골치 아픈 일 생겨요. 결혼하고 나면 또 골치 아픈 일 생기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또 얼마나 힘들어요. 끝도 없이 골치 아픈 일은 생겨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거예요. 아이가 80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가 어린 시절이에요. 영어나 가르치고 한자나 배우게 하는 걸로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 이유에요. 이런 건 정말 어디 가서 강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우리 아이만 잘 자라면 뭐해요. 더불어 살아가야 아이들도 행복해야죠. 급물살을 빠져 나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정말 애를 써야지 나올 수 있어요. 어쩌면 이 책이 열 명 중 한 명에게라도 동기 부여를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나는 별이의 운명이다. 그리고 별이는 나의 꿈을 먹고 자란다. 엄마의 딸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세상에 나선 별이는 당분간은 엄마의 길을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별이는 엄마의 꿈을 따라 제주도에까지 왔다. 과연 내가 잘하는 것일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묻는 질문이다.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컸다고 제법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별이를 보면서 나는 별이의 의지에 따라 내 운명이 바뀔 날도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별이는 자라면서 조금씩 곁길을 만들 것이고 새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길은 점점 더 멀어져 어느 순간부터 별이만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제주도 오두막에서 그릇을 굽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딸이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는 일이 그리 까마득한 미래는 아니다. 내가 만든 그릇 위에 내가 키운 텃밭 채소를 올려 별이에게 주고 싶다. 별이는 제주도에 살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맛있게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참 좋았다고 말해줄 것이다. 꼭 그렇게 말해주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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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면, 제주도에허수경 저 | 중앙m&b
2012년 봄부터 1년간 월간지 [여성중앙]에 딸 별이와 함께 제주에서 사는 이야기를 풀어냈던 그녀는, ‘리얼 제주 라이프’와 함께 ‘제주 이주’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실질적인 조언을 더해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어렵사리 다시 찾은 행복을 조심스레 꺼내 보인 동시에, 도시에서 ‘꿀벌’처럼 사는 이들에게 그녀가 발견한 ‘완전히 다른 삶’의 한 단면을 소개한다. 제주에서라면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전혀 다른 깊이와 속도의 행복이 불현듯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 책 《왜 사느냐면, 제주도에》에 그 힌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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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정 아나운서 “남편의 첫 소설, 여주인공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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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세상은 희귀병 투병 중인 시인과 화려해 보이기만 한 아나운서의 결혼을 두고 흥정놀이를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이를 비교하고 수입을 비교하며 걱정스런 시선을 보냈다. 고민정 아나운서와 시인 조기영. 대학 선후배로 만나 8년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현재 결혼 8년차인 두 사람은 이제 누구의 시선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건강을 회복해서, 어차피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다. 둘의 사랑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한 모습’, 고민정 아나운서가 남편을 통해 배운 것들이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를 쓰면서 생각했다. ‘내가 남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만큼 한 사람의 사랑을 이토록 많이 받을 수 있었을까?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지금의 강인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남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답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질문들. 고민정 아나운서는 말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금 이 순간, 참 행복하다고.

난 B612에 살고 있는 새초롬한 장미꽃이었고 그 사람은 그 꽃을 무척이나 사랑한 어린왕자였다. 어린왕자가 그 꽃을 길들이기 전엔 그저 평범한 장미였듯 그를 만나기 전 난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 아나운서라는 꿈도 없었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특별한 고민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물을 뿌려주고, 꽃을 피울 수 있게 응원해 주고, 벌레와 바람으로부터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결국 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왜 더 큰 왕국을 거느리는 왕자를 만나지 않았냐고, 그 작은 소행성에서 살기가 답답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런 질문들에 어린왕자는 어른들이 왜 그렇게 숫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것이다. 나이가 몇 살인지, 몇 평에 살고 있는지, 얼마를 갖고 있는지가 왜 중요하고 그렇게도 궁금한지 말이다. 그것보다는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 무엇을 위해 내 삶을 걸 것인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글 쓰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어요

‘더 사랑한다’는 말, 요즘 잘 안 하잖아요.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제목만 들어도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들더라고요. 어떤 독자 분이 “기분 전환용으로 읽은 책인데 읽고 나니, 결혼하고 싶어졌다”고 리뷰를 썼던데요.

책을 내고 깜짝 놀랐어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고루하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모두가 조건을 원하고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로맨스를 꿈꾸고 사랑에 목말라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는 처음 썼던 책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의 1.5권쯤 되는 책인데요. 여행하면서 느꼈던 걸 쓰려고 시작했는데, 독자들은 ‘남편에 대한 책’이라는 반응이에요(웃음). 이런 반응들을 보면서 ‘아,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나한테는 남편이었구나’라는 걸 책을 쓰고 나서 알았어요. 제목은 처음 책을 냈을 때부터 제목으로 하고 싶었던 제목이에요. 계속 제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이번에 책을 새로 내면서 쓰게 됐어요.

책 쓰면서 남편 분에게도 보여주셨나요? 시인 남편을 옆에 두고, 글을 보여주지 않기도 어려웠을 텐데요.

한 챕터를 쓰고 나서 총평을 듣고 싶어서 보여줬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총평을 해주길 원했는데, 첫 단락부터 지적을 하더라고요. 단어가 식상하다, 중복된 단어를 사용를 너무 많이 사용한 거 아니냐 등등.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띄어쓰기, 단어까지 정말 너무 많은 지적을 했어요. 마치 빨간펜 선생님처럼요. 고쳤는데도 계속 지적을 하니까 저도 화가 나더라고요. “이렇게 내가 글을 못 쓰는 사람이라면 그냥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말하고 두 세 달을 글을 쓰지 않았어요. 이런 저를 보더니 남편이 어느 날, 그럼 네 마음대로 써보라고, 자기한테 보여주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부터 무엇을 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썼어요. 대신에 남편에게 들었던 내용이 있으니까, ‘단어가 중복되어선 안 되겠다. 신선해야겠다. 뭔가 처음에 흡인력이 있어야겠다’ 등을 유의했죠. 그렇게 혼자 한 권을 다 쓰고 출판사에 넘기고, 교정 교열을 마친 후에 남편한테 보여줬어요. 남편이 자기가 손을 안 댄 게 너무 다행이라고 했어요. 자기는 최선의 글이 나오길 원해서 도움을 주려고 했던 건데, 자기가 고쳤다면 이건 고민정의 글도, 조기영의 글도 아닌 글이 될 뻔했다고요. 유려하진 않지만 풋풋하고 신선하다고, 다 재단했으면 오히려 식상한 글이 될 뻔했다면서 칭찬해줬어요. 책 나오면 사람들이 분명히 ‘남편이 시인인데 좀 봐줬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면에서 떳떳해요. 대필가 의심도 받지 않아도 되고(웃음).

추천사를 이해인 수녀님과 시인 김용택 선생님이 써주셨어요. 김용택 선생님은 “고민정 아나운서의 글은 삶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풋풋한 들꽃처럼 깨끗하다”고 표현해줬는데, 기분이 어땠나요.

감히 제가 이런 평을 받아도 되나 싶었어요. 출판사로부터 두 분이 추천사를 써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짜 해주실까’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를 더 근사하게 만들어주셨어요. 저한테는 작가들이 대단한 존재거든요. 되게 어렵고 귀하고 소중하고 그래요. 저는 작가로만 사는 사람들, 본업이 작가인 사람들이 너무 존경스럽기도 하고 고결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아마 이해인 수녀님이나 김용택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면 떨려서 말도 못 걸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해요.

아나운서들이 책을 많이 쓰지만, 이렇게 사적인 연애, 사랑 이야기를 쓴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시인 남편을 두신 까닭도 있겠지만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을 것 같아요.

그냥 방송만 하는 아나운서 말고 무언가를 하는 수식어를 만들고 싶었어요. 아나운서는 5년차가 가장 피크거든요. 일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때에요. 그런데 소위 꺾이기 시작하면 힘이 들기도 하죠. 제가 벌써 10년차인데, 새내기처럼 무엇이든 맡겨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가 아니라, 고민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글 쓰는 아나운서가 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어요.

월간지에서 육아 에세이도 연재 중이시죠? 

안 그래도 오늘 마감해야 해서 인터뷰 끝나고 원고 써야 해요. 마감의 압박이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책을 쓰고 나서 기고만장해서, 여러 군데 기고 요청이 들어오면 신나게 쓰곤 했는데 힘들어요. 그런데 여행을 다녀오면 사진이 남듯이 글도 남는구나 싶어요. 쓰면 쓸수록 실력이 는다는 것도 알겠고요. 글은 마감의 압박이 없으면 안 써지잖아요. 에세이 제안을 받았을 때  오히려 잘됐다, 이 기회를 통해 글을 모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지금 둘째 아이 임신 중이신 걸로 들었어요. 입덧하면서 글 쓰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요.

힘들었어요. 두 달 정도 됐을 때 입덧이 가장 심했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계속 멀미가 나서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싶기도 했어요. 며칠 전에는 책에 사인을 해야 한다고 해서 출판사에서 종이를 천 장을 보내줬는데 그걸 본 순간, 숨이 탁 막히더라고요(웃음). 결국 신나게 썼지만요. 정말 글 쓰는 게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고요.




아나운서, 말과 행동이 같았으면 해요

고민정 아나운서만큼 맨 얼굴을 많이 공개한 아나운서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아나운서라고 하면 두꺼운 메이크업에 딱딱한 이미지가 있는데, 조금 달라요.

보여줄 게 없어서 그래요(웃음). 아나운서들 보고 있으면 화려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요.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그렇죠.

블로그(http://blog.naver.com/bosomi710)도 열심히 하고 트위터(@kbsminjung)도 열심히 하시잖아요. 글을 쓸 수 있는 또 다른 통로인 건가요.

블로그는 저에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탈출구인 거 같아요. 어떤 분들은 아나운서나 조금 유명한 사람들이 블로그를 하는 걸 이해 못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왜 사생활을 공개하냐 고요. 전 그 말 자체가 이해가 안 가요. 방송을 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 사람의 삶이 공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공개되는 경우가 있고, 저는 능동적으로 공개를 한 거예요. 공개할 수 없다, 싫다는 사람들은 본인의 직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의문이 들어요. 그렇다면 결국 누군가가 써준 원고만은 소화한다는 이야기인데, 저는 방송인으로서 말할 때 진심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 생각을 넣을 수 있는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음식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제가 만약 채식주의자라면 “저 감자탕 너무 맛있겠네요”라고 말하지 않아요. “사실 저는 고기를 못 먹는데,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좋아하겠어요”라고 말하죠. 명품백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맨날 사치하지 말자, 짝퉁 사면 안 된다고 하면서 본인은 그런 걸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말하고 글하고 똑같아야 하듯이, 방송이랑 생활도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비밀이 없는 직업이 되었는데 꽁꽁 싸매고 숨어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이 아팠던 일도 이야기한 거고,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글과 행동, 말과 행동이 같기가 정말 쉽지 않잖아요. 책에서도 나왔지만 물욕이 적은 편이라고 들었어요. 포털사이트에 ‘고민정 아나운서’를 검색하면 ‘명품백’이 연관 검색어로 뜨더라고요. 명품백을 들고 다녀서가 아니라, 방송 중 명품백에 대한 발언 때문인데요. 주위에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아나운서들도 많았을 텐데, 이 방송이 나간 후로 곤란하진 않았나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거 아니까, 제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명품백 사러 가자는 이야기도 안 하고요. 명품백을 사는 거 자체를 비난하고 싶진 않아요. 그만큼 형편이 되고 명품처럼 들고 다니면 인정하고 싶어요. 제가 들지 않는 건, 사실 KBS 아나운서 월급으로는 명품백을 여러 개 가지고 다닌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고 무리해서 사고 싶지도 않고요. 남들이 다 들고 다니는 똑같은 가방보다는 뭔가 다른 걸 들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가치관이 다른 거니까요. 저는 저대로 지켜나가고 싶은 거예요. 어떤 동료들이나 시청자들은 저의 그런 것들을 불편해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들의 몫인 거고요.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사실 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말하고 나면 더 지켜야 하잖아요. 그래서 더 말하려고 하는 것도 있어요.

고민정 아나운서는 ‘시인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있잖아요. 부담스러운 느낌도 있겠지만  ‘남편 덕분에 책을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책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시인의 아내로 산다는 게, 그저 낭만적이지만은 않아요. 현실적으로 살아갈 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힘이 들듯이 저 또한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다투고 화를 내기도 하는데, 결국 그런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글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평탄하게 살았더라면 글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남편은 저를 화나게도 하지만, 또 나를 찾기 위한 기재가 되기도 하고 동기 부여를 하게 해주는 사람이에요.

아나운서가 된 것도 남편의 적극적인 추천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대학 졸업할 무렵,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고,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보다는 뭔가 한 사람이라도 웃게 할 수 있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때 남편이 아나운서가 되면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할 수 있을 거라면서, 너만 제대로 살고 행동한다면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나운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방송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남편의 조언이 힘이 될 것 같아요.

남편은 자기 삶에 대해 아주 철저해요. 제가 부러웠던 부분이 자신한테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지만 남한테는 관대하다는 점이었어요. 남편이 시인이니까 가끔 강의 청탁이 들어오거든요. 저라면 할 것 같은데 안 해요. 강의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자기는 아니라고요.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갈 때도 있어요. 제가 방송생활을 하다가 힘들어하면 “왜 언론인이 되려고 했냐, 지금 당장은 이익이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 일이 화살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날카롭게 집어주는 사람이 남편이에요. 본인에게 철저한 것처럼 저도 철저하길 바라고요.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서 쓰는 글보다 정말 쓰고 싶은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잖아요. 누구나 그러길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저도 노력하는 거예요. 남편이 쓰고자 하는 글만 쓰게 하겠다고 말했는데, 순간순간 저도 욕심이 생겨요. 그런 유혹이 생길 때마다 이미 사람들에게 공개를 했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요. 뱉은 말이니까 지켜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점점 사람들의 시선들이 저를 엇나가지 않게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자꾸 이야기하는 지도 몰라요. 저 혼자 지키기엔 너무 힘들거든요. 이렇게 제어되는 제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도 제어되고, 말과 행동이 같은 모습을 만들어갔으면 해요.




서점 데이트가 가장 행복한 부부

첫째 아이를 낳기 전에 방송사를 휴직하고, 남편과 1년동안 중국에서 생활했잖아요. 여행을 싫어하는 남편과 함께한 1년은 어땠나요.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를 쓰면서 중국에서 지내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쭉 보면서 편집을 하는데, 사진 속 남편은 너무 해맑게 웃고 있더라고요. 제가 힘들고 지쳤을 때, 저를 웃게 해주려고 장난을 치고 쇼를 한 모습이 전부 사진 속에 담겨 있었어요. 그 사진들을 보는데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요. 남편이 누구보다 여행을 싫어하는 걸 제가 잘 알거든요.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고, 밥을 먹을 때도 꼭 한식, 밥과 국이 있어야 해요. 일주일 여행도 아니고, 한 달 두 달 여행을 그것도 오지를 다니면서 그 때는 한국음식점 찾으러 다니는 게 너무 스트레스고 싸우기도 많이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우리 남편 진짜 고생 많았겠다’ 싶더라고요. 이제서야 깨닫고 고맙다고 말했어요.

최근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데요.

아프리카를 너무 가고 싶은데, 남편이 아프리카는 절대 안 갈 거 같은 거예요. 그 때 한창 아프리카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케냐의 유혹』『아프리카 초원학교』를 읽었는데, 혼자서 가긴 싫고 남편이 안 갈 거 같으니까 아들이랑 가야겠다 싶었어요. 지금 첫째가 세 살인데, 우리 나이로 여섯 살 정도 되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아이가 저처럼 여행을 좋아할진 모르지만, 아직 꿈은 저버리지 않고 있어요. 배낭여행을 다녀오고 나니깐,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 싶더라고요. 용기를 얻어서 가겠다고 했는데 최근에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프리카에는 벌레가 너무 많은 거예요. 제가 날씨, 더러운 것, 혐오식품까지 모두 참을 수 있는데 벌레를 너무 싫어하거든요. 남편은 평소에 벌레를 잘 잡아주는데 과연 우리 아이가 벌레를 잘 잡을지 모르겠어요. 잘 잡으면 같이 갈 수는 있는데, 말이에요.

벌레 때문에 아프리카에 못 가게 된다면, 남편은 좋아하겠는걸요.

안 그래도 진지하게 말했어요. 아프리카에 벌레가 많으면 사실 두렵다고. 그랬더니 벌레 정말 많을 거라면서 너무 좋아했어요(웃음).

남편(시인 조기영)이 첫 소설(『달의 뒤편』)을 쓰셨는데 주인공이 고민정 아나운서라고요.

남편이 오래 전부터 ‘언젠가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를 쓸 날이 오겠다’는 생각을 했었대요. 남편이 아팠을 때가 소설의 주요 내용이 되는데, 정말 영화도 많고 드라마도 많지만, 우리의 삶이 더 영화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 때 우리 두 사람의 생활이 그랬던 것 같아요. 남편이 정말 많이 아팠고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고, 그래도 우리 꼭 이겨내자고 다짐도 했고, 결국 이렇게 병을 이겨냈고요. 아무래도 작가들은 아름다운 무언가를 글로 써서 남기고 싶은 느낌이 있어요. 남편 말로는 2008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대요. 첫 장면이 남편이 가장 아팠을 때 이야기인데, 10년 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눈물이 나와서 쓰지를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읽어 보는데 그 때 생각이 나서 도저히 못 읽겠더라고요. 단순히 시인과 아나운서의 사랑이 아니라, 아나운서가 되기 전의 제 모습과 시인인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한 축으로 96년 연대화 사태와 같은 학생운동, 현대사의 역사를 그렸어요.

남편이 유일하게 자신만을 위해 쓰는 소비가 책을 사는 일이라고요. 왠지 서점 데이트를 가장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책 고르는 취향이 비슷한 편이에요. 둘 다 공통적으로 역사, 사회과학 서적을 좋아하고 남편은 시집을 너무 좋아하고 저는 시가 아직 어려워요. 서점을 같이 가면 너무 좋아요. 얼마씩 정해놓고 책을 사가지고 오면 만족감을 느껴요. 생일 때도 무슨 선물해줄까 물어보면, 맨날 책이에요. 예를 들어 비싸서 못 샀던 책, 권수가 많은 책을 사달라고 해요. 남편은 88학번, 저는 98번이니까 80년대부터 나왔던 책들이 집에 쌓여있어요. 정말 잡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책도 많아요.

나중에 작은 도서관을 지어도 좋겠어요.

남편 꿈이 우리가 어딘가에 정착해서 집을 짓게 된다면,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책이 많아야 한다고 맨날 맨날 책을 사요(웃음).

종이 위에 남긴 글도 그를 별처럼 빛나게 한다. 단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여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의 글이 좋다. 화려한 글보다는 담백한 글이 좋고, 어두운 느낌보다는 밝은 느낌의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 책도 한 번에 후루룩 읽히는 것보다는 한 자 한 자 곱씹을 수 있는 책이 좋고, 비극적인 내용보다는 해피엔딩을 더 좋아한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좋아하는 건지, 원래 내 취향이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글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은 적어도 내겐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꽃향기로 가득하다. 자신이 쓴 글을 잘 보여 주지 않지만 조르면 정말 가끔 보여 주곤 한다. 그럴 때면 난 꽃잎을 먹을 때처럼 달콤하면서도 은은함을 느꼈고, 작은 촛불처럼 수수하면서도 따뜻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나만의 별이 아닌 모두의 별이 되길 바라면서 ‘별책불혹’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불혹의 나이에도 별과 같은 책을 쓰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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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고민정 저 | 마음의숲
이혼율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부부는 조금은 다른 사랑 방식을 이야기한다. 조금 힘들다고, 어렵다고, 아프다고 결국 서로를 상처로 몰아내는 요즘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모습이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랑을 택했다는 고민정 아나운서, 이 책에서는 매 순간 자신의 삶에 솔직한 그녀의 모습과, 곁에서 마치 화가처럼 그녀의 꿈과 행복을 그려 주는 남편 조기영 시인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그들에게 허락된 아이 은산을 향한 사랑도 담겨 있다. 꽃보다, 시보다 아름다운 고민정 아나운서의 치열한 삶과 사랑을 가슴에 새겨 보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백인천 “미칠 수 있다면, 4할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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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ack"> <center><img src="http://image.yes24.com/images/chyes24/9/7/8/3/9783042432d1eb20b921a0f919a569d8.jpg"></center><br><br> 1982년 우리나라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의 선수이자 감독으로 백인천 감독이 세운 4할1푼2리의 타율은 전설이 됐다.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1941년 테드 윌리엄스가 세운 4할 6리 이후 4할 타자 등장은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보다 오랜 야구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는 4할 타자의 등장 자체가 없었다. 이쯤 되면 백인천 감독의 기록이 왜 대단한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감이 잡힐 것이다. 정재승 교수를 비롯한 ‘백인천 프로젝트’ 멤버들은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자신의 저서 <a href="http://www.yes24.com/24/goods/250960" target="new"><span>『풀하우스』</span></a> 에서 제기한 ‘시스템의 진화적 안정화로 인해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이라는 가설을 우리나라의 상황과 데이터를 적용해 입증해 냈다. 하지만 그 가설에도 불구하고 백인천 감독이 세운 기록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덕분에 백인천 감독은 상식과 예측을 깬 ‘외계인’으로 규정됐다. 불가능한 것을 이뤄낸 사람에게 보내는 찬사(?) 치고는 좀 독특하다. 각설하고, 어쨌든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4할 대 타자의 출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가설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이유야 어찌됐든 프로젝트에 중요한 시발점이 된 백인천 감독의 생각은 어떨까?<br><br><br> <center><img src="http://image.yes24.com/images/chyes24/0/c/c/f/0ccfc30a1447777262f206165f63097d.jpg"></center><br><br> <span>노병은, 죽지 않았다!</span><br><br> 무시무시하게 배트를 휘둘렀던 전성기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眼光)의 기백만큼은 청년과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 된 것이 한 권의 책 덕분이라는 사실은 그 역시도 신기한 듯했다. 덕분에 가슴에 담아왔던 이야기를 쏟아낼 기회가 생겨 기쁘다고도 했다. 살아있는 전설을 보는 순간은 그렇게 시작됐다.<br><br> <span>최근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으신가요?</span><br><br> <span>1년2개월 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졌어요. 완전히 부러졌다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열흘 동안 걸어 다녔죠. 물론 아픈 건 있었지, 그래도 병원에 안가고 버티고 있는데 우리 딸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병원에 가보자고 해서 사진을 찍었더니 완전히 부러진 거예요(웃음). 처음 그 소리를 듣고는 ‘난 완전히 끝났구나’ 싶었지. 우리 나이에 뼈가 상하면 끝이거든(그는 70세가 넘었다) 부랴부랴 수술을 하고 철심을 3개 박았어요. 그러다 닷새 전에 철심을 뺐지. 의사는 나이가 있어서 그냥 둬도 된다고 했는데, 난 영 불편했어요. 신기하게 철심을 빼고 나니 절던 걸음걸이도 바로 잡히는 거야.</span><br><br> <table width="170"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6" align="right"><tbody><tr><td align="center"><a href="http://www.yes24.com/24/goods/9377569" target="new"><img src="http://image.yes24.com/goods/9377569/L" width="150" height="220" border="0"></a></td></tr></tbody></table> <span>‘백인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좀 어리둥절 하셨을 듯도 한데요?</span><br><br> <span>지난해 초쯤인가, 프로젝트의 누군가에게 전화가 와서 신촌의 카페에서 모임이 있다고 해서 알고 가보게 됐어요. 가서 얘기를 해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렇게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뭔가를 한다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신기하기도 했어요.</span><br><br> <span>감독님의 성함이 들어간 책을 봤을 때 소감을 말씀해주신다면?</span><br><br> <span>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책을 보니 고마움이 앞서더군요. 다만 누구도 무엇 때문에 4할이 가능했다고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서 테드 윌리엄스라는 선수가 4할을 쳤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들었어요. 근데 그 선수의 성격이 유별났다고 하더군요. 굳이 나와 공통점을 찾자면 그거인 듯싶어요. 내가 유별나다는 소리는 사실 내 스스로 생각한 것이기 보다 제자들이나 나하고 야구를 같이 한 사람들이 말한 건데, 아무튼 4할 타율이라는 건 나를 포함해 경험한 사람들도 설명하기 힘들어요. 미쳐야지만 가능한 것이거든, 사람들한테 ‘나같이 미쳐야 한다’고 말은 해도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경험해 보지 못하면 모르거든요.</span><br><br><br> <center><img src="http://image.yes24.com/images/chyes24/9/c/9/7/9c979fbef1e214e72f57d2d7154679cc.jpg"></center><br><br> <span>4할 타자, 어떻게 이뤄졌나?</span><br><br> 미쳐야 가능하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백인천 프로젝트팀’은 4할 타자의 재현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백인천 감독의 생각은 좀 다른 셈이다. 기록과 통계를 넘어선 그 무엇, 그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정신으로 꼽았다. 그렇다면 그의 4할1푼2리의 신화는 어떻게 쓰이게 된 것일까. 궁금증은 계속 이어졌다.<br><br> <span>책에서는 한국 야구에서 4할 대 타자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요. 감독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span><br><br> <span>야구 이전에 주위에 환경, 상상을 뛰어넘는 각오 같은 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좀 힘들다고 봐요. 미쳐야 한다고 했지만, 야구만 하면 미칠 수가 없거든요. 일종의 사명감이 있어야 되요. 내가 일본 프로야구선수로 스카우트 돼서 갈 때 상황이 특수했어요. 국교도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을 왜 가냐는 비난이 많았거든. 나로서는 힘겨운 순간이었고 쇼크도 받았지만, 덕분에 더욱 강한 신념을 쌓게 됐거든요. 그 정도의 신념으로 미친 사람이 나온다면 굳이 야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낼 거예요.</span><br><br> <span>4할 타자 불가능을 제기한 그 이유로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 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감독님이 보시기에 우리나라 선수들의 기량은 어느 수준이라 보시는지?</span><br><br> <span>모든 면에서 다 좋아졌죠. 우리때만해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한국 전쟁도 있고 해서 어려운 시절이었잖아요. 그때는 배트로 공을 치면 공이 찌그러지던 시절이었어요. 배트도 그렇고….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죠. 지금 후배들을 봤을 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경지를 지향하는 선수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에요. 진정한 프로페셔널은 지식은 물론 많은 경험, 단련의 경험이 필요해요. 특히 야구라는 스포츠가 그렇죠. 게임을 할 때는 머리가 필요하지만 단련을 할 때는 머리가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려면 상당한 인내도 필요하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氣)에요. 기가 생기려면 육체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단련해야합니다. 거기서 강한 신념이 생기고 거기서 강한 기가 생기거든요.</span><br><br> <span>4할1푼2리를 쳐내셨던 1982년 당시 감독님의 상황은 어떠셨나요?</span><br><br> <span>그때 내 나이가 42살이었어요. 감독을 같이 한 것은 남들 이 볼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더 좋았어요. 단순히 멀리 떨어져 코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가까이에서 상대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할 수 있었으니 최상의 코치를 할 수 있었죠. 상대 투수가 지금 뭘 던지려고 하는지가 딱 읽혔어요(웃음). 물론 시합이 끝나면 피곤하긴 피곤했어요. 그래서 당시 기자들이 오해를 많이 했죠. 피곤하니까 시합이 끝나면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기자들 중에는 나를 상당히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죠. 간혹 그런 기자들에게 ‘시즌이 끝나서 성적 나쁘면 그때 날도와 줄 거냐’고 묻기도 했어요. 그때 가서 당신들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까 지금은 두고 봐 달라고 했죠. 역시 성적 좋으니까 아무도 비난하지 않더군요.</span><br><br> <span>솔직히 실감이 안 되는 타율인데요.</span><br><br> <span>간단해요. 10번 나가서 4번 이상 치면 되는 거예요. 야구에서는 3할 정도면 공식적으로 A급 타자로 인정받아요. 나 역시 솔직히 말하면 4할을 친다는 목표는 세운 적이 없었죠. 단지 한국 프로야구가 자리 잡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개인적으로 프로야구 선수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죠. 4할1푼2리는 마지막 타석 전까지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상하게 마지막 시합을 하는데 유백만 코치가 ‘마지막이니 그냥 쉬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무슨 소리냐고 하고 무시했는데, 그때가 아슬아슬하게 4할이었던 거예요. 첫 번째 두 번째 안타를 치고 세 번째 못 치다가 마지막 타석을 가나는데 또 유 코치가 잡더군요. 나중에 기록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결국 마지막 타석에서도 안타를 쳤죠. 감독으로서 타율 관리가 쉬웠다고 하지만, 전 제 타석에서도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대타로 내보내곤 했어요. 확률적으로 봤을 때 내가 칠 확률이 높았지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죠. 개인적인 타이틀 생각은 시즌 내내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세워졌을지도 모르죠.</span><br><br><br> <center><img src="http://image.yes24.com/images/chyes24/4/9/a/5/49a5088659be88ea67c35c107d4f2cea.jpg"></center><br><br> <span>해외 진출 1호 선수 시절</span><br><br> 19세에 일본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닛폰햄 파이터스)에 스카우트 된 그는 곧바로 수퍼 루키가 되지 못했다. 2군 생활 1년 반 만에 1군에 오른 것이다. 한국 선수로서 해외 진출 1호였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존재했다.<br><br> <span>19년을 일본 프로야구 A급 타자로 살아오셨는데, 최고의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span><br><br> <span>역시 수위타자가 됐던 1975년 시즌이겠죠. 그때는 눈에 살기가 성성하던 시기였어요. 야구는 아웃 당하면 죽는 거라는 생각으로 했죠. 내가 아웃 당하면 상대편도 아웃시켜야 직성이 풀렸고요. 현역 한창 할 때는 주위사람들이 날 보면 얘기하기가 겁날 정도로 무서웠다고 하더군요(웃음).</span><br><br> <span>당시에는 일본과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던 시절인데 입단 초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이 심하지 않았나요?</span><br><br> <span>처음에는 어려운 게 많았어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을 경험한 아버님께서 편지를 써주셨는데, 그 내용이 아직도 기억나요. 절대 남한테 신세를 지지마라,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해선 안 되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네가 솔선해서 먼저 해라. 그리고 언제나 나보다도 상대편을 챙기라는 말들이었죠. 우선 내가 그들보다 야구를 못하니까 조금이라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때는 목욕탕에 물을 데우려면 불을 때야했는데 그 당번을 도맡아 했죠. 세탁을 할 때도 선배들 옷을 모두 세탁하고, 물론 미운 놈 옷은 빼먹기도 했지만(웃음). 깨끗이 빨라서 갖다놓으면 ‘이야, 이거 누가 했냐’는 말이 나왔고 그렇게 좋은 인식을 심어줬어요. 일본어도 열심히 배웠죠. 좀 지나니까 연습하면 도와주고 폼을 교정하는데 조언도 해주고 그러더군요. 당시에는 생존을 위한 방법이었죠.</span><br><br> <span>처음 2군 생활을 하면서 혈서를 쓰시기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하루 일과가 어떠셨는지 또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span><br><br> <span>당시에는 인간이 최초로 달에 갔다는 시절이었는데, 오죽하면 달을 친구삼아서 훈련했어요. 달이 비치면 달빛으로 훈련을 하고 안 비치면 훈련을 게을리 해서 달이 화났다고 생각하며 훈련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그렇게 밤새도록 훈련을 하곤 했어요. 예전에 박찬호를 만났을 때 ‘찬호야 너 많이 울었지’ 하고 물으니까 어떻게 아시냐고 하더라고. 나도 같은 경험을 했으니까 알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롱런할 수 있어요.</span><br><br> <span>감독님의 뒤를 이어 한참 후배들이 메이저리그와 일본으로 진출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도 있으실 텐데요.</span><br><br> <span>박찬호나 추신수는 고생을 했는데 비해 지금 해외진출을 한 선수들은 그런 과정이 없다는 것이 독일 수도 있어요. 그러다 야구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게 되면 무너질 수 있거든요. 주위에서 가만히 두질 않아요. 스스로를 경계하며 야구만 생각했으면 해요.</span><br><br> 현역 감독 시절 그는 독불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고집 세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로 인해 선수들과 트러블도 종종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곤 했다. 얼마 전 노장인 김응룡 감독이 현직에 복귀한 상황에서 그 역시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br><br> <span>현역 감독 시절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하셨습니다. 다시 감독이 되신다면 그때와 같을 까요?</span><br><br> <span>그건 희망사항이지만, 생각이 없지 않아 있어요. 지금까지는 정말 미치다시피 밀어붙였는데 이젠 많은 경험이 있으니까 좀 더 부드럽고, 좀 융통성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보죠. 하지만 결론은 역시 ‘그건 아니다’로 끝나더군요(웃음).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야구를 할 수 없거든요. 성공하려면 절대 편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즘 선수들은 그 단계를 넘기 싫어한다는 것이 문제죠. 어느 정도에서 적당히 하려는 것이 있어요. 적당히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오래 가지 못하거든요. 야구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아요.</span><br><br> <span>향후 우리나라에 4할 대 타자가 재등장할 수 있을까요?</span><br><br> <span>물론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요즘 선수들 봤을 때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어 쉽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가장 큰 문제는 프로선수 답지 않은 플레이가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야구 해설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해설위원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되는데, 전문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간혹 너무 아닌 이야기를 하는 해설위원이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야구를 보는 일반 팬이나 어린아이들은 그걸 믿을 거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을 야구 전문가, 즉 감독에게 일임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감독 스스로 목표치 성적을 말하게 하고 달성하지 못할 때는 그만 두게 하는 책임을 지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시즌 중에도 감독을 너무 흔드는 경향이 있어요.</span><br><br> 선수와 감독 시절, 그리고 그 후 찾아 온 뇌경색, 고관절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철학은 더욱 확고해진 듯하다. 하기야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 이상은 말해 뭐 할까. ‘우리나라에 4할 대 타자가 나올까’라는 질문은 ‘백인천처럼 야구에 미친 선수가 또 나올까’라는 질문으로 수정되어도 무방할 듯하다.<br><br><br> <span>[관련 기사]</span><span><br><br></span> <a href="http://ch.yes24.com/Article/View/22978" target="new"><span>-프로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span></a><br> <a href="http://ch.yes24.com/Article/View/23041" target="new"><span>-진격의 LG의 카리스마, 야생마 이상훈</span></a><br> <a href="http://ch.yes24.com/Article/View/22661" target="new"><span>-프로야구 나쁜 해설가 WORST 5</span></a><br> <a href="http://ch.yes24.com/Article/View/22425" target="new"><span>-[인터뷰] 박찬호 “게임이 안 풀리면 스스로에게 질문 던져라”</span></a><br> <a href="http://ch.yes24.com/Article/View/22193" target="new"><span>-송지선 아나운서 2주기, 그녀가 남긴 책에는…</span></a><br><br><br> </font> <div class="articleTemp3"> <div class="articleTemp3-cont"> <dl> <dt><a href="http://www.yes24.com/24/goods/9377569" target="_blank"><img alt="" src="http://image.yes24.com/momo/TopCate278/MidCate001/27703454.jpg" width="147" height="220"></a> <p><img alt="img_book_bot.jpg" src="http://image.yes24.com/images/chyes24/5/a/5/0/5a50969e322029ae11ceb97a2e2abdcf.jpg"></p></dt> <dd><a href="http://www.yes24.com/24/goods/9377569" target="_blank"><strong>백인천 프로젝트</strong></a> <span><font color="black"><b>정재승,이민호,천관율,윤신영,백인천 프로젝트 공저 | 사이언스북스</b></font></span><font color="black"><span><br></span> 이 책은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원년 MBC 청룡의 감독 겸 4번 타자로 활약한 백인천 선수를 끝으로 한국 프로 야구에서 사라진 4할 타자의 미스터리를 다뤘다. 하지만 오래된 야구 화젯거리를 다룬 단순한 야구학 책은 아니다. 야구학이나 통계학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없는 일반 시민들이 SNS를 통해 모여 야구학 미스터리에 도전한 공식 연구 논문이며, 과정이다. 한국 최초의 집단 지성 연구 프로젝트이자, 자발적 창단이기도한 시민 과학의 전개 과정을 추적했다. </font> <p></p></dd></dl></div></div> <p>&nbsp;</p><br><br> <div align="right"><span>‘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span><br><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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