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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희 “연애란, 제대로 된 행복을 위한 불합리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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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10년, 2012년 <작가세계>에 단편 「점심의 연애」 당선, 그림에세이 『수거물 폐기물』, 『『너는 네 인생이 마음에 드니?』, 『너는 네 인생이 마음에 드니? 2』출간. 신주희 작가의 흥미로운 약력이다. 이 궤적을 관통하는 하나를 꼽는다면 당연히 ‘연애’일 테다. 어째서 연애인가. 작가는 되묻는다. “연애를 왜 꼭 외간 남자와의 것이라고만 생각을 할까요. 다만 제가 새롭게 느끼면 되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TV에서 송중기를 보고도 연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웃음)”


『너는 네 인생이 마음에 드니?』에서 그는 연애와 이별, 오늘, 사회생활 등의 주제를 여러 방향에서 관찰했다. 특히 연애와 사랑이라는 주제는 신주희라는 작가가 늘 관심 두었던 만큼 재미있는 순간 포착이 빛난다. 연애는 하찮지 않다. 한 개인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치는 원동력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이 주제는 작가를 늘 설레게 하고, 지금을 살게 한다. 지금, 오늘, 여기에 집중하려고 한다는 신주희 작가. 신주희의 글쓰기가 바라보는 곳은 멀리가 아니다. 가까이에 반짝이고, 오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최대한 즉흥적인 것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실이다. 

 

 

반짝인다고 생각한 것들


구성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1권의 경우 연애의 시작과 이후라는 구성 자체의 스토리텔링이 눈에 띄어요. 이 구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처음에는 한 권으로 기획이 되었고요. 연애와 삶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의 조합이었어요.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을 주셨는데요. ‘연애’를 따로 묶으면 더 근사하게 집중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해봤더니 이야기가 또 되더라고요. 이를테면, 읽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그런 느낌도 있었고요.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들 수 있겠더라고요.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어요. 배열을 바꿔놓고 보니 자연스럽게 연애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도 좀 신기했고요.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1권을 구성하고, 나머지 이야기들을 2권에 묶은 거예요.

 

처음부터 이런 흐름을 구상한 건 아니었군요. 


책을 내야겠다고 쓴 글은 아니었기 때문이고요. 저는 매일 느낀 감상들을 짧게 쓰는 버릇이 있거든요. 출판사에서 우연히 그 글을 보신 거죠. 카피라이터 생활을 십 년 했는데요. 대부분의 카피라이터들에게 그런 버릇이 있을 거예요. 어떤 글귀를 보면 적어둬요. 글을 쓰는 분들의 습관이기도 할 텐데요. 그렇게 쓰던 것이 책이 됐어요.(웃음) 

 

짧은 글이고 잘 읽히는 글인데요. 사실 오늘, 사랑과 이별, 사회생활 등 모두 어려운 주제들이잖아요. 글을 보다보면 이 주제에 관심 가진 기간이 꽤 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고인 생각인가요?


이제 꽤 많은 숫자의 초가 생일 케이크에 올라와요.(웃음) 케이크의 면적을 잘 계산해야 초가 예쁘게 올라가죠. 아마 제 나이가 그 모든 상념들과 연관이 있을 거예요. 저는 제가 잘 알던 것들이 환경적인 이유로 흔들릴 때 보이는 풍경에 관심이 있거든요. 어떤 순간 새롭게 보이는 것들에 큰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요. 그럴 때 그걸 써요. 그러니까 실은 오랫동안 고여 있던 것을 쓴다기보다는 오래 봐오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짧은 순간을 포착한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좀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해보니까요, 오래 고민하지 않은 것일수록 더 획기적이고 더 새로운 발견이 가능한 것 같더라고요. 글이 짧은 이유도 그런 탓일 것 같아요. 전후 설명을 다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에 느꼈던, 나름대로 반짝인다고 생각한 것들을 쓰다보니까요.

 

관찰자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이야기네요.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장면을 놓치지 않는 거죠.


그 정도 까지는 아닌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어렸을 때는 잘 몰랐던 것들이 보이는 경우가 있던데요. 그렇지 않으세요? 여기서 이야기한 주제들은 제가 내내 관심을 뒀던 것들 같아요. 연애라는 주제도 그렇죠. 사실 되게 통속적이잖아요. 하지만 개인에게는 하나하나가 너무 특별해요. 어떤 남자가 여러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했어도 나에게만은 다른 눈빛이었다, 이게 되는 거죠. 한 개인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게다가 인생을 구성하는 결혼이나 출산 등도 그 씨앗은 연애잖아요. 연애를 하찮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아마도 사람들에게 연애는 큰 원동력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게 재미있고, 설레는 일이 많지 않아요. 심지어 짧거든요.(웃음)

 

한 권의 책으로 묶을 만큼 중요한 주제인 거죠!


어딘가에서 봤는데요. 사랑을 감정이라고 알고 있지만 뇌를 들여다보면 감정을 관할하는 부분이 아니라 행동을 관할하는 부분이 활성화된다고 해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면 만지고 싶고, 안고 싶은 거죠. ‘원동력’이라는 말에도 많이 동의하는 이유예요.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게’ 해요.

 

연애의 통속성과 개별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저자가 생각하는 연애의 정의를 내린다면 어떨까요? 연애란 무엇일까요?


연애 자체는 전혀 신선하지 않아요. 제각각 다른 연애를 경험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걸 관통하는 보편적인 통속이 있고요. 그렇지만 누가 나의 연애를 보편적인 감정들과 하나로 묶어버리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끄러운 연애가 없어요. 많이 울고, 잠 못 들게 하고, 혼잣말을 많이 하게 하는 연애일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더 오래 기억하고요. 기본적으로 연애는 그런 모순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사랑과 미움이 공존한다는 면에서 끝없는 미완의 애정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은 삶 속에서 아주 큰 힘을 발휘하잖아요. 그렇게 놓고 연애의 정의를 생각해보니까 연애란 ‘제대로 된 행복을 위한 불합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어른의 이별’ 같은 대목에서 많이 공감했거든요. 그것 또한 연애의 여러 결 중 하나잖아요. 연애를 반복한 후 깨닫게 되는 면이기도 하고요.


연애에서 만남도 중요하지만 이별도 중요하죠. 연애를 잘하는 것도 중요한데 헤어질 때 기왕이면 잘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헤어져서 슬픈데 오히려 오감이 확 열리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헤어짐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닌 거죠. 뭔가 어른이 된 것 같고요. 실은 그 글의 이야기는 연애와도 맞닿아 있지만 엄마와 헤어지면서 많이 느낀 거거든요. 엄마가 없다는 게 슬프고 힘들지만 한편으로 엄마가 내게 주고 간 것들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런 의미가 있는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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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즉흥적인 것


글과 절묘하게 공명하는 그림은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입니다. 어떠세요?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처음에는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보다는 조금 더 밝고 명랑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두 번, 세 번 보다보니 그림을 그려주신 전광은 작가님의 해석이 보였어요. 삽화의 개념이 아니고요. 캐릭터의 이미지, 컬러, 그림이 그대로 어떤 이야기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재미있었던 건 세 번, 네 번 보다보니까 또 의미가 달라지는 거예요. 책을 보는 분들이 그림을 제 글과 함께 읽어도 좋고, 따로 그림만 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으니까요. 여러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그림이 제공해주더라고요. 제가 미처 체험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새롭게 생겨난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생각보다 크고 강렬했어요. 고맙게도 마음이 많이 움직였죠. 처음보다 더 좋고, 더 깊은 방향으로요. 그리고 일단 예쁘잖아요.(웃음) 그림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 중 특별히 마음에 드는 글을 꼽아주신다면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 2권에 쓴 머리말이요. ‘인생의 최종 형태는 나, 지금, 오늘.’이라고 했는데요. 제가 정말 그렇게 살고 있어요. 열심히 저축하지도 않고요. 아마 제 주변의 몇몇 분들은 철이 없다고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또래의 누군가와 비교한다면 미래에 대한 대책이라는 게 좀 헐렁하다,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제 나름으로 철저하게 계산해서 내린 결론이에요.(웃음) 오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 최대한 즉흥적인 것, 그걸 해야 확실하게 ‘내가 살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거든요. 너무 가벼워 보여도 어쩔 수 없어요. 남들보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열하게 뛰어들지 않은 것에 대한 스스로의 자책이나 변명일 수 있겠지만, 그래요. 그러면 좀 어때, 라는 생각도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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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가장 잘 대변하는 글이기도 하군요.


그렇죠. 이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생각한다면 굉장히 머리 아픈 일이 될 거예요. 사실 그렇게까지 쿨하진 않지만 그렇게 보이고 싶고요.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고 계속 말하고 다니죠. 작년 12월에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거든요. 천천히 사라진 게 아니라 싹둑 잘려나간 느낌인데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도 지금, 오늘에 집중하는 쪽이 맞지 않나 생각해요. 일장일단이 있죠. 미래를 준비하는 삶은 훗날을 기약할 수 있을 테고, 저는 아마 그렇게는 할 수 없겠죠. 그렇지만 그에 비해 제가 생각하는 가치는 여기에 있고, 지금에 있어요.

 

구체적인 이야기도 몇 군데 엿보이죠. 어떤 사람의 걸음걸이에 관한 글도 있고요. 여기에 개인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녹아있나요?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모두 순수한 창작물이죠.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해요. 책에 담긴 이야기가 전부 저의 얘기는 아니지만 저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요즘말로 ‘이게 실화냐?’하고 물으시면(웃음) 매우 정중하고 형식적인 태도로 이렇게 말할 거예요. ‘본 책의 내용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인물, 장소 등은 실제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고요.(웃음)

 

우문이었습니다.(웃음)


물어보셔도 되죠. 제가 이렇게 답할 뿐이에요.(웃음)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자꾸 연애에 대해 쓰니까 사람들이 물어봐요. 사실은 궁금해요. 연애를 왜 꼭 외간 남자와의 것이라고만 생각을 할까요. 다만 제가 새롭게 느끼면 되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TV에서 송중기를 보고도 연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웃음)

 

그 중 특별히 저자님이 가장 많이 들어간 글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서 어머니의 이야기도 하셨는데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 매우 힘든 시간이 있었어요. 움직이는 것과 멈춘 것, 있는 것과 없는 것,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뭐 이런 것을 ‘생각’한 게 아니라 ‘겪은’ 시간이었으니까요. 분명히 제 일이 맞는데도 마치 실제가 아닌 것처럼 실감이 안 나는 상태로 지금까지 있어요. 엄마는 없는데 저녁이 되면 밥을 차리러 집으로 올 것 같고, 우리 가족들은 또 그걸 투덜투덜 받아먹을 것 같고 그렇죠. 낮에는 바쁘니까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한가해지면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슬픔이 불쑥 튀어나와요. 그러면 갑자기 높이 160센티미터에 무게 49킬로그램짜리 예민 덩어리가 되고요. 문이 닫히고 열리고, 불이 켜지고 꺼지고, 물건이 거기 있고 없고, 뭐 그런 것들이 낱낱이 의미가 있어요. 엄마가 이랬는데, 엄마가 저랬는데, 그 때는 왜 그걸 몰랐었나, 뭐 이런 거죠. 결론은 엄마는 이제 안 오는 구나, 한동안 나는 이렇게 살겠구나, 사람들이 이런 걸 다 견디고 사는 구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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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탄생하는 어떤 지점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은 뭔가요? 고심하고 있는 주제가 있을까요?


예전에는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일등은 못해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는데요. 너무 명백한 성공은 다음 생에 태어나서 하는 것으로 하기로 했고요.(웃음) 그보다는 흥미로운 패배랄까, 이런 것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저는 예술의 카테고리 안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요. 주변에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많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절벽에 세워두고 작업을 해요. 그들에게는 예술이 목숨 정도는 걸어야할 대단한 것이니까요. 저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벼운 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묶은 소설집이 가을에 나와요. 제목도 ‘모서리의 탄생’이고요. 예술이 탄생하는 어떤 지점 같은 걸 의미해요. 아무것도 잃을 것 없는 상태가 되는 것, 빈손으로 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보는 것,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무너져보는 것. 요즘 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요. 

 

또 하나의 어려운 주제예요. 예술이라는 것 말이에요.


너무 어렵게는 말고, 이걸 좀 더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생각하는데요. 그러다보니까 보는 것에서 뭔가를 포착하고 싶어 하고, 얻어가고 싶어 하는 거죠. 사람을 아무 목적 없이 만나더라도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삶, 그 사람의 행동과 말에 관심이 있거든요.

 

자연스럽게 이 질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요. 쓰고 싶은 글은 뭔가요? 카피라이터 생활을 오래 하셨고요. 소설도 쓰는데요. 이것들은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어떤 것을 쓰겠다는 결심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구분 짓기 좋아하는 분이 본다면 소설을 쓰는 사람이 왜 에세이를 쓰느냐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른데요. 무엇을 고정해두고 그것만 한다는 것도 아쉬운 일 같아요. 삶에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데요. 다만 뭔가를 쓴다면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지’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해요. 그런 걸 의식했다면 글쓰기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 같고요. 제가 쓰는 소설과 짧은 글은 간격이 굉장히 넓은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많이 다르지 않아요. 결국에는 글을 다양하게, 가리지 않고 쓰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가능성에 집중한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네요.


한 때 시를 썼어요. 고등학교 때에는 청소년 문학상 같은 걸 받은 적도 있고, 대학교 때는 문예지에 발표를 한 적도 있고요. 그러면서 다행히 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빨리 알아차렸어요.(웃음) 물론 소설이 덜 어려워서 택한 건 아니고요. 다만 살을 발라 뼈를 드러내는 것보다 뼈에 살을 붙이는 쪽이 제게 맞았을 뿐이에요. 그런데 시를 써본 경험이 있어 그런지 소설이 좀 시 같은 데가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고 바람이지만 제 모든 글이 시를 뼈대로 가지고 있었으면 해요. 그러면 의미도 깊고 넓은 글이 될 것 같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저는 아직은 신인 작가니까요.

 

가을에 출간 예정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첫 소설집이에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소설가라고는 하는데 소설집 한 권이 없는 거예요.(웃음) 민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이제 나오게 돼서 다행이죠. 아까 말씀드린 예술에 관한 제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소설로 쓴 게 있고요. 아마 읽으시면 조금 의아하실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너는 네 인생이 마음에 드니?』와 다르게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저는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이 책은 분홍색인데 소설집이 왜 이렇게 빨간색이냐고 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제목 ‘네 인생이 마음에 드니?’라는 질문을 저자에게 드리면 어떨까요? 어떤 답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네, 지금은 충분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어요. 흥과 망을 떠나 요즘 제게 벌어진 일들, 글을 썼고, 책이 됐고,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그 일들은 분명히 멋진 일이니까요.


이 질문을 한 건 실은 저희 아이를 보고 한 거예요. 아이가 엄마한테 혼나고 그래도 뒤돌아서면 또 웃고 그러잖아요. 방금 혼났는데 와서 안기기도 하고요. 그걸 보는데 묻고 싶더라고요. ‘너는 진짜 네 인생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하고요. 그러면서 매우 부러워졌어요.(웃음) 안타깝지만 아마 학교에 가고, 학원 다니다보면 그게 금방 사라지겠죠. 하지만 엄마가 이런 글을 꼭 너에게 남겨주고 싶다,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멋진 질문, 동시에 멋진 선물이네요.


아이에게 내가 사랑한다는 걸 이걸 보면서 생각해줬으면 했어요. 나중에라도 말이에요.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것이기도 한데요. 돌아가시기 전에는 몰랐다가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이렇게 주고 싶은 게 생기더라고요. 세상에 자기 혼자라고 느낄 때 열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게 뭐니, 취미가 뭐니, 이런 질문들은 굉장히 형식적이죠. 질문이긴 하지만 거리를 보여주잖아요. 아주 친한 친구한테 취미가 뭔지 안 물어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네 인생이 마음에 드니, 이 질문은 갑자기 훅 들어오는 거죠. 그 질문을 하는 상태는 ‘나는 이미 너한테 마음을 열었어’라는 전제가 있는 상태예요. 질문 자체에 감정이나 거리가 굉장히 좁아져 있고요. 그래서 이 질문을 제목으로 결정 했어요.


 

 

너는 네 인생이 마음에 드니? 신주희 저 / 전광은 그림 | 알레고리
사랑의 시작과 끝, 그 모든 과정에서 울고 웃고 외로워 하고 괴로워하는 ‘연애의 일대 서사’를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상화 “선천적으로 똑똑한 아이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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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혁이, 시훈이 아빠 이상화 씨는 ‘대한민국에서 사교육 없이 아이를 기른 배짱 두둑한 부모’다. 첫 아이 출산 이후 몸이 아픈 아내를 대신해 독박육아를 시작하게 됐고 일과 살림, 아내의 병간호까지 도맡아 하느라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이가 보여준 학습 결과는 놀라웠다.

 

첫째 이재혁 군은 만 4살 때 컴퓨터 국가자격증을 취득한 데 이어 한자, 영어 분야에서도 전국 최연소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한 번도 외국에서 생활해본 적 없지만 중국어, 불어, 일어를 독학했고 스페인어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국제중학교를 졸업하고 하나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동생 이시훈 군은 26,500여 권의 책을 읽고 400여 편의 외국 영화를 시청했으며, 초등학교 2학년 때 S보드를 독학하는 등 형에 버금가는 학습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평범한 아이를 공부의 신으로 만든’ 아빠 이상화의 육아법은 여러 방송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SBS <영재발굴단-아빠의 비밀 편>, EBS <부모>, MBC <기분 좋은 날> 등 15개 방송에서 세 부자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슈퍼대디’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상화 씨는 푸름이닷컴, 한솔교육나라, 기탄교육, 하이멘토 등 다수의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며 노하우를 나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평범한 아이를 공부의 신으로 만든 비법』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두 아이를 영재로 길러낸 경험과 공부법 메시지를 담은 ‘육아개념편’에 이어, 가장 많은 학부모들이 던졌던 질문 100가지에 대한 해답서인 ‘학업실천편’이 출간됐다.

 

예스24 중고서점 홍대점에서 만난 이상화 저자는 아들 이시훈 군과 함께였다. 방학을 맞아 아빠를 따라나선 아이의 손에는 수학책이 들려있었다. 요즘 한창 재밌게 읽고 있는 책이라고. 자신이 읽을 책을 직접 고른다는 아이는 ‘그래서 독서가 지루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꿈이 바뀌는 초등학교 4학년, 지금의 시훈이는 ‘사업가가 돼서 번 돈의 절반을 기부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독서 육아로 학업 성적과 인성 교육,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이상화 저자의 육아 내공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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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으로 똑똑한 아이는 없어요

 

‘대한민국에서 사교육 없이 아이를 기른 배짱 두둑한 아빠’입니다. 여건이 허락됐다면 사교육의 힘을 빌렸을까요?


그렇죠. 저는 아내의 권유로 육아서를 읽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어요. 제가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책을 읽다 보니 아이들을 그냥 키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직접 가르치게 된 거죠. 형편이 넉넉했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학원이나 좋은 선생님을 찾아서 맡겼겠죠. 그런데 저희는 돈도 없었고 사교육의 효과도 3~10% 정도 밖에 안 되니까, 차라리 직접 가르치자고 생각한 거죠. 당시에는 시간도 많이 허락됐고요.

 

직업적 특성상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99년 12월에 방문 학습지 교사를 했거든요. 오후 2~3시에 출근해서 밤 10~11시에 퇴근하고, 나머지 시간은 아이와 놀았어요. 책 읽고 놀이하고 운동하면서 놀아줬죠. 아내가 아파서 누워있던 시절이었어요. 큰 수술을 두 번 했는데도 의사는 아내의 몸이 회복되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저도 (아이들을 키울)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다행히 아내의 몸이 회복됐는데, 그때는 제가 주 양육자로 아이들을 키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어요.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들이 있잖아요. 그 중 하나가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에요. 부모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건데요. 그런 이야기에 흔들리신 적은 없나요?


‘옆집 엄마가 내 아이를 망친다’는 말이 있잖아요. 실제로 내 주위에 상위권 아이들의 엄마는 별로 없거든요. 100명 중에 상위권 아이의 부모는 단 세 명이잖아요. 그 세 명과 친하게 지내면서 교육 방법을 알게 되면 좋겠지만, 내 아이가 어울리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하위권 엄마의 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아이는 나의 영향만 받는 게 아니라 친구에게도 영향을 받죠. 친구의 좋은 점을 받으면 좋겠지만 나쁜 점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요. 그래서 ‘옆집 엄마가 내 아이를 망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상위권 아이의 엄마와 대화하면서 배울 점이 있다면, 흔들리기보다 참고하는 거고요.

 

물론 아빠의 노력도 좋은 영향을 미쳤겠지만, 아이들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아닐까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세요. 방송국에서도 저희 아이들이 선천적으로 똑똑하게 태어났다고 단정을 지었어요. 그래서 후천적 지능 검사를 한 번 받아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두 시간 동안 검사를 받았는데 결과를 보고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도대체 어떻게 아이들을 키웠는데 이렇게 후천적 지능이 높으냐’는 거예요.

 

후천적으로 지능을 발달시킨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중요하게 여긴 건 책이었고, 그 다음에 놀이가 수반돼야 한다는 거였어요.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열린 대화를 하고요. 대한민국의 85% 정도의 부모님들이 닫힌 대화를 하시거든요. 닫힌 대화는 창의력을 갉아먹어요. 저는 그 부분을 조심하면서 놀아줬고, 그 결과 아이들의 후천적 지능이 높아진 경우예요. 제 주변의 어머님들도 대부분 ‘우리 아이는 평범하게 태어났고 저 아이들(재혁이, 시훈이)은 선천적으로 똑똑하게 태어났으니까’ 하고 단정을 지어버리세요. 선천적으로 똑똑한 아이들은 없어요. 물론 DNA의 30% 정도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거지만, 저는 70% 정도는 환경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재혁이와 시훈이가 남다른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죠. 제가 작년부터 영어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재혁이나 시훈이보다 더 빨리 받아들이고 더 많이 책을 읽으려는 아이들이 많아요. 지금 시훈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1학년 때부터 스토리 영어책을 읽기 시작해서 6,500권 정도 읽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공부방에서 가장 많이 읽은 아이들 다섯 명을 꼽으면 그 안에 들지 못해요. 정말 잘하는 아이들이 많은 거죠. 저희 아이들만 가능한 게 아니라, 환경을 마련해 주면 누구나 책도 많이 읽을 수 있고 영어도 좋아하게 되고 잘하게 되는 거예요. 대부분의 엄마들은 ‘영어는 어려우니까 학원에 맡겨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EBS에도 나온 적이 있지만 묻지마 학원의 경우에는 그 효과가 3~5% 밖에 안 돼요. 독일에서도 몇 천 군데의 학원을 연구했더니 효과가 5% 안쪽이었다고 방송한 적이 있어요. 부모의 생각에 따라서 아이가 성장하는 게 달리지는 거죠.

 

사교육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의 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돈이 안 들잖아요. 그렇다고 사교육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아이가 스스로 필요를 느껴서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저도 보내줘요. 대신 바로 보내주지는 않죠. 학원에 왜 가고 싶은지 말해보라고 하고, 한 달 뒤에도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주겠다고 해요. 아이들이 즉흥적으로 학원에 가고 싶어 할 때도 있거든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학원도 따라갈 때가 있어요.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두는 거예요. 사교육이 효과가 있으려면 동기 부여가 돼야 해요.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 학원에 가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고 가야죠. 엄마가 가라고 해서 가면 효과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습 효과가 3~5% 밖에 안 되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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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빠의 6분 VS 유럽 아빠의 6시간


요즘은 맞벌이 부부가 많고, 그만큼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적잖아요. 그래서 『평범한 아이를 공부의 신으로 만든 비법』는 ‘퀄리티 타임’을 잘 활용하라고 이야기해요.


대한민국의 아빠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하루 중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평균 6분이에요. 유럽의 아빠들은 6시간이거든요. 6시간 동안 놀이와 운동을 하면서 같이 공부하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한민국의 시스템에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하루에 5분만 투자하면서 유럽의 아빠들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도 없어요. 그 대신, 아이와 함께하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죠. 예를 들어서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도 생활 영어를 써서 ‘It’s time to wake up’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정서적으로 안정을 시켜주는 게 좋으니까 안아주면서 스킨십도 하고요.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까지 그 시간을 하루에 30분~1시간 정도 가질 수 있는데, 1년 동안 축적되면 300시간이 넘어요. 공교육에서 초중고 영어 시간을 다 합해도 880시간이거든요. 아빠가 2년 동안 아침 시간만 활용해도 공교육 영어 시간과 맞먹는 거죠.

 

재혁이, 시훈이의 경우는 어땠나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영어 교육을 하셨어요?

 

재혁이가 태어날 때부터 형편이 어려웠어요. 아내 수술비와 병원비가 부담이 많이 됐고, 재혁이 분유 값이 없어서 쩔쩔매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상황이었지만 아이들 영유아 시절에 화이트보드를 구비해서 거실 바닥에 깔아줬어요. 그 위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을 적었죠. 제가 아이들에게 영어 표현을 가르쳐주고 싶으면 ‘Yesterday is~’, ‘Today is~’, ‘Tomorrow will be~’ 이렇게 쭉 써놨어요. 그러면 아이들이 ‘이게 뭐예요?’ 하고 관심을 가져요. 저는 ‘너희가 쓰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고 ‘아빠가 쓰는 거야’라고 말했어요. 부담을 주지 않는 거죠.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습득하려고 하기 때문에, 교육학에서는 이걸 ‘동일시 효과’라고 하는데요,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돼요.

 

의도치 않게 독박 육아를 하게 되셨잖아요. 아빠가 육아에 참여해서 좋은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엄마는 이론적으로는 많이 아는데 실천력이 약해요. 그건 제 아내도 똑같아요.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4년 동안 유치원 교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다 알거든요. 그런데 알고 있는 대로 다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실천력은 아빠가 더 강한 것 같아요. 여성들은 남자들하고 달라서 체력이 더 약하잖아요. 출산 후에 몸이 힘들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 이상으로 하라고 할 수도 없고, 엄마로서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야죠. 엄마들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아이들의 아빠로서 존재해주고 돈도 벌어주고,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죠. 나 혼자 독박육아 한다고 남편이랑 싸우면 아이들한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되잖아요.

 

“슈퍼맨 아빠는 없다. 자칫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기를 모든 엄마들에게 부탁한다”고 적기도 하셨어요. 부부가 각자 할 수 있는 영역을 맡아서 협력하는 게 좋겠죠.


그렇죠. 저도 아내와 역할을 분담했어요. 수학은 전적으로 엄마가 맡고, 그 외에 책 읽기와 영어, 한자, 컴퓨터, 미술 같은 건 다 제가 해주기로 합의를 본 거죠. 아내는 수학을 좋아해서 유치원 교사 생활을 하다가 3~4년 정도 눈높이 수학을 했거든요. 저는 전자, 컴퓨터 쪽을 공부했었고요. 엄마와 아빠가 각자 잘하는 부분, 잘하는 과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 책에서도 ‘독서를 통한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셨어요. 이른바 ‘책 육아’를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있었나요?


아내가 몸이 아파서 직접 육아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저한테 두 가지를 부탁했었어요. 아이를 제대로 키우려면 육아서 20권 이상은 읽어야 한다면서 책을 권하더라고요. 그리고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재혁이한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어요. 보육학이랑 아동학을 공부하면 아이 키우는 방법을 알게 되니까, 이왕이면 그 두 개를 전공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요. 아내와 약속한 대로 육아서 30권을 읽으면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자료를 수집하다 보니까, 미국 상위 3% 부모들의 교육법을 알게 됐어요. 자녀에게 3만 권의 책을 읽게 한다는 거였죠. 제가 가난한 부모이지만, 3만 권의 책을 읽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면 재혁이는 미국 상위 3%의 부모가 해주는 교육을 받는 셈이 되잖아요. 그때부터 재혁이한테 책을 읽어주려고 노력했어요.

 

3만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계산을 해봤어요. 어떻게 하면 3만 권을 읽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료를 수집해 보니까, 중학생이 되면 엄마나 아이나 한 달에 0.8권 밖에 읽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더라고요. 물론 상위권 부모들은 책을 많이 읽어요. 평범한 엄마들은 한 달에 0.8권이라는 거예요. 아무튼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까,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오롯이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시간을 10년으로 계산했을 때, 하루에 10권씩 읽으면 되겠더라고요. 그런데 6일 동안 하루 10권씩 읽어주고서 제가 지쳐버렸어요. 저는 책 읽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아내 병간호도 해야 했고, 아이도 돌봐야 했고, 일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포기했어요.

 

이후에도 아이들과 같이 책을 읽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내가 권해준 20권의 책 중에 『습관』이라는 책이 있었어요. 그 책을 보니까 ‘부모가 3만 권의 책을 읽어주는 게 아니라, 책 읽는 습관만 들여 주면 된다’고 나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부터 책 읽기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한테 읽어줄 책을 1권으로 정했어요. 아이의 나이에 맞춰서 한 살 일 때는 하루에 한 권, 두 살일 때는 하루에 두 권, 이렇게 읽다 보면 7살 때 누적 권수가 만 권이 넘거든요. 3년 동안 하루에 한두 권씩 읽었더니,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하루에 30권 50권씩 읽어달라고 하더라고요. 200권씩 가져오기도 하고요.

 

동화책을 읽어주신 거죠?


네, 그때 아이가 두 살, 세 살 때였어요. 하루에 200권을 읽어줄 때는 새벽 5시, 6시까지 책을 읽었어요. 너무 힘들었죠. 그런데도 계속한 이유가 있어요. 당시에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를 읽었는데 ‘아이가 책 읽기를 원할 때 부모가 힘들다고 멈추면 아이가 그 마음을 읽고 책 읽기를 멈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내가 해줄 수 있는 데까지 해주자고 생각했어요. 저희 부부도 맞벌이였기 때문에 아내와 번갈아 가면서 밤을 새워가면서 책을 읽어줬어요. 매일 그랬던 건 아니고요. 1~2주에 한 번 꼴로 100권, 200권을 읽어 달라고 가져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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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부모 나이 독서’를 보여주세요


<영재 발굴단>에서 아드님과 같이 도서관에 가시는 모습이 공개됐어요. 그런데 책을 읽으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냥 같이 밥 먹고 운동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던데요?


아내가 누워있는 동안에는 제가 주부였잖아요. 주부들이 다 그렇듯이 저도 밖에서 누군가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싶었어요. 그런데 좋은 식당에 가면 가격이 비싸잖아요. 도서관에 가면 1500원으로 한 끼를 때울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이를 책이 있는 환경에 노출시키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일단 식사를 해결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도서관에 갔어요. 그래서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이랑 같이 끼니 해결하고 놀았던 거죠. 그렇게 4주 동안 도서관에 놀러 갔는데, 그동안 아이는 책을 한 권도 안 읽었어요. 그런데 아이 눈에 보이는 게 다 누나, 형들이 책 보는 모습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4주가 지났을 때 ‘아빠, 저도 책 읽어도 돼요?’ 묻더라고요. 그래서 ‘그래? 읽어도 돼’라고 했죠. 그러면서 아이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 거예요.

 

많은 부모들이 ‘자녀의 독서를 어떻게 지도해줘야 할지’ 고민하는데요. 저자님은 어떻게 하세요?


좋은 책을 골라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요. 아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으면 손 인형과 복화술을 사용해서 구연동화를 들려줬어요. 그러면 1분도 안 돼서 아이가 관심을 보여요. 너무 재밌게 들으면서 ‘아빠, 이건 누구야?’하면서 대화를 하고요. 책 속의 인물들하고도 대화를 해요. 저는 성인이 읽는 단행본도 재밌게 읽어줬어요. 대부분은 ‘이건 엄마가 읽는 책이야’ 하고 덮어버리시는데, 저는 그렇게 안 해요. ‘와, 너무 재밌겠다’라고 말해주죠. 재미없는 책도 재밌게 읽어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추려고 노력했어요. 책을 골라주지는 않고요. 어떤 책이든 재밌다는 인식을 시켜줬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모든 과목을 좋아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앞서 말씀하셨듯이, 중학교 입학 이후부터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잖아요. 재혁이의 경우는 어땠나요?


재혁이도 줄어들었어요. 아이들이 생활기록부에 자신이 읽은 책을 기록하는데, 중학교 2학년이 되면 1학년 때 읽은 책의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요. 3학년 때는 더 줄어들고요. 이게 정상적인 거거든요. 갈수록 과목 수가 늘어나고 공부할 분량이 많아지니까요.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내신을 챙기지 않으면 대학을 갈 수가 없고, 학습 분량이 많아지니까 책 읽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대학교에 입학해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아지면 책을 일기 시작해요. 독서 습관이 몸에 밴 거죠.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책을 읽고 싶은데 지금은 공부 때문에 하지 못한다’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기간만 지나면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은 마련돼요.

 

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기가 자녀의 사춘기가 아닐까 싶어요(웃음). 현재 재혁이가 고등학생, 시훈이가 초등학생이잖아요. 사춘기의 시작과 끝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책을 많이 읽고 부모와 소통이 많이 된 아이들은 사춘기를 가볍게 지나가요. 재혁이는 3만 권, 시훈이는 2만 6,500권을 읽었거든요. 그 안에는 사춘기를 겪고 가출하는 이야기도 많이 있죠.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그런 경험해보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면 ‘집 나가 봐야 너무 고생한다’고 해요(웃음). 그리고 책 속에 다툼이 많이 등장하잖아요. 특히 친구들끼리 다툼이 있을 때 해결하는 방법들이 많이 나와 있고요.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고, 부모와 많이 놀이하고 운동한 아이들은 사춘기를 가볍게 지나가고요.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면 책을 적게 읽은 아이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이들에게 ‘안 돼’라는 말을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실수할 것 같지만 해 봐, 다칠 수도 있지만 해봐’라고 하시더라고요.


닫힌 대화와 열린 대화의 차이인데요. 대부분의 엄마들은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해요. 그리고 ‘안 돼, 위험해, 그만 해’라는 말을 많이 하죠. 그렇게 하면 아이를 주눅 들게 해요. ‘너는 그걸 못 해’라는 걸 아이가 받아들이고요. 자존감, 자신감하고도 연관이 있는 거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없나’ 싶은 거예요. 엄마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안 되니까요. 거기에서 창의력도 갉아먹게 되죠.

 

열린 대화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열어놓으셔야 돼요. 대화도 마찬가지예요. 제 경우에는, 아이가 무언가를 물어봤을 때 ‘안 되겠다’보다는 ‘힘은 들지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건 노력을 하셔야 돼요. 의식적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고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을 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계셔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 깊이 새겨야 될 좋은 책들을 끊임없이 읽어야 되고요. 부정적인 책들만 읽으면 그게 내 안에 쌓이고, 그렇게 안 좋은 쪽으로 아이를 대하면 부정적인 걸 아이가 받아들여요. 부모가 긍정적이면 아이도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늘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셨는데요. 최근에는 어떤 목표로 무엇을 공부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오늘 시훈이와 같이 왔는데요. 지금도 손에 들고 있지만, 요즘 수학책을 읽고 있거든요. 아이가 공부할 부분이 있으면 저도 그 분야의 책을 읽어요. 그래서 오늘도 수학책을 챙겨왔고요. 이동하는 중간에 기차나 버스 안에서 읽어요.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되면 집에 쌓아놓고 아이들과 같이 틈틈이 읽고요.

 

책의 마지막에서 “육아 너무 어렵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아가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아이한테 책 읽는 습관만 들여주면 되는데, 습관들이기가 상당히 어렵거든요. 저는 ‘부모 나이 독서’를 실천했어요. 1년에 제 나이만큼의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아이가 부모의 모습을 닮으려는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아이한테 계속 뭔가를 가르쳐주고 책을 골라주는 게 너무 힘든 작업이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보다, 그냥 내가 책을 좋아하면 돼요. 그러면 아이한테 책이 들어가는 거예요. 책 읽기를 강요하지 않으면 부담이 적기 때문에 행복하거든요. 너무 많이 넣어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인 거예요. 편하게 하시면 돼요. 저도 너무 편하게 하거든요. 강요를 안 하니까 편한 거예요. 아이한테 넣어주고 싶은 게 있으면 내가 그냥 하면 되거든요. 그렇게 하면 사실 육아는 쉬운 거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가 책을 읽는 건 진짜 필요한 준비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책을 들고 다니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고 쉬운 방법이에요.


 

 

평범한 아이를 공부의 신으로 만든 비법 - 육아개념편 이상화 저 | 스노우폭스북스
이 책은 부모의 올바른 행동만으로도 모든 아이가 훌륭히 자랄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아이 교육에 고민 중인 부모, 아이를 위해 감수하는 많은 희생에도, 아이와 관계가 좋지 않은 부모 누구라도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재천 “아이가 어려운 질문할 때 고민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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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도 말을 하나요?”, “동물에게도 지능과 감정이 있을까요?”, “동물원에서 동물을 키우는 건 좋은 일인가요?” 동물원에 함께 간 아이가 갑자기 질문을 쏟아낸다. 잠시 멍하니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답이 당연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선뜻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인터넷을 찾거나 백과사전을 뒤진다. 친절하게 설명이 돼있는 것 같지만 아이한테 설명해주려니 갑갑하다. 이럴 때 읽으면 좋을 책이 출간됐다. 어린이가 묻고 석학이 답한 책 『어린이 대학』이다.

 

『어린이 대학』을 기획한 창비 출판사는 초등학교 5, 6학년 어린이 150명에게 생물학, 역사학, 물리학, 경제학에 대해 무엇이 궁금한지 설문조사를 했다. 아이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각 학문과 관련된 현상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엉뚱한 호기심이 느껴지는 질문, 핵심을 꿰뚫는 질문 등 다채로운 400여 개의 질문이 모인 중에 높은 순위를 기록한 질문, 학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주효한 질문 등을 추려 석학에게 물었다. 생물학자 최재천, 역사학자 이만열, 물리학자 오세정, 경제학자 이정전, 4명의 석학이 질문을 꼼꼼히 살펴보고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답했다. 『어린이 대학』시리즈는 어린이와 석학 사이에 오고간 대화이자 지적 교류의 결과물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이은희 과학 커뮤니케이터와 생물 편을 썼다. 최재천 교수는 아이들의 소박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들으며, 생명을 사랑하는 따뜻한 생물학자의 탄생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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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물어줘서 고마운 질문

그간 60여 권의 책을 집필, 번역하셨는데요. 어린이를 위한 책을 처음 쓰셨어요.

 

평소 제가 책을 어렵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성인 독자를 위해 쓴 책을 나이 어린 친구들도 제법 많이 읽어요. 과학책을 쓸 때 출판사에서 늘 중학교 3학년생 수준을 목표로 해서 쓰라는 조언을 해주시는데요. 『어린이 대학』은 창비 출판사에서 직접 기획해 제안해주신 책이라서 작업하기가 아주 편했어요. 이은희 선생님이 탁월한 저술가라서 책이 정말 깔끔하게 나왔어요.

 

‘생명의 탄생과 진화, 생명의 노화와 죽음, 동식물의 이모저모, 생명 사랑의 길’ 등 4부로 나눠 총 20개의 질문을 선별했습니다. ‘최초의 생명체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나요?’, ‘왜 공룡은 멸종했나요?’, ‘동물도 말을 하나요?’ 등 흥미진진한 질문이 많아요.


아이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질문이 쏟아져요. 어른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과는 정말 다르죠. 그런데 이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은 없거든요. 모든 질문이 다 소중해요. 아이들이 때때로 답하기 민망한 질문도 하지만 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도 해요.

 

특히 인상 깊었던 질문이 있나요?


늘 어렵다고 생각하는 질문과 물어줘서 고마운 질문을 이야기할게요. 하나는 “최초의 생명체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나?”라는 질문인데요. 저는 답을 몰라요. 사실 모를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저만 없었나요? 아무도 없었죠. 대학에서 생물학 강의를 하면, 학기 중간쯤 생명의 기원을 다뤄요. 교수니까 답을 말해줘야 하지만 저는 말해요. “솔직히 나는 모른다. 그러니까 이 챕터 만큼은 각자 읽기로 하자. 각자 생각해보자”라고 하고 넘어가요.

 

학생들이 이 답변을 받아들이나요?


학교에서는 받아줘요. 하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는 이 대답을 받아주질 않죠. 그리고 굳세게 물어보시죠. (웃음)

 

『어린이 대학 : 생물』편에서는 두 번째 질문으로 등장해요.


화석 등 여러 증거를 통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최초의 생물은 지금으로부터 약 38억 년 전에 바다에서 생겨났을 거라 짐작해요. 하지만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바닷속에서 생물이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죠. 중요한 건 수십억 년 전에 태어난 최초의 생명체가 자기 자신을 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죠.

 

외계인의 존재 유무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요. 아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 중 하나일 것 같은 데요.


확률의 개념을 아이들이 이해할까 걱정했지만, 용어만 어렵게 느껴질 뿐 이해하기 힘든 건 아니지 않아 싶어요.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 광활한 우주에 지구 빼고는 생물이 사는 행성은 절대 없어, 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물론 지구 바깥에 생명체가 있을 확률은 높지만, 그 외계 생명체가 꼭 지구의 생물과 닮았거나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번식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자기 복제를 하는 방식이 인간과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들이 질문해줘서 고마웠던 내용은 무엇인가요?


세 번째 장이 ‘동식물의 이모저모’인데, “동물도 말을 하나요?”, “동물에게도 지능과 감정이 있을까요?”에 대한 답이 나와요. 제가 생명의 기원을 특별히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동물행동학자니까요. 이런 질문에 저에게도 가장 재밌는 질문이죠. 동물이 말을 하진 않지만 분명 서로 의사를 전달하면서 삶을 영위하니까요. 정말 신기하고 정교한 방법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는 생물들도 많거든요. 특히 곤충은 냄새, 즉 화학 물질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해요. 암컷 누에나방은 짝짓기 철이 되면 봄비콜이라는 화학 물질을 분비하는데, 수컷 누에나방들 사이에서 사랑의 신호로 통하죠.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봄비콜의 냄새를 맡고 날아올 정도니까요. 또 개미가 의사소통 하는 방식도 유명해요. 외분비샘이라는 곳에서 나오는 화학 물질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섞어서 신호를 보내는데, 여러 물질을 어떤 비율로 섞느냐에 따라 최종 혼합물의 종류는 거의 무한대로 가까워요. 개미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인간의 언어가 답답할지도 모르죠.

 

마지막 장의 주제는 ‘생명 사랑의 길’입니다. 생물학을 공부하는 법, 생물학자가 되는 법 등 진로에 관한 질문도 있어서 고학년 친구들이 눈여겨볼 것 같아요.


한편 걱정도 들었어요. 왜냐면 이 책은 주로 초등학생들이 읽을 텐데, 생물에 관심을 갖다가도 중고등학교에 가면 생물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야 하거든요. 입시 위주로 공부하다 보면 물리나 화학을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전략적으로 생물을 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나라 교육이 생물은 외워야 하는 과목으로 만들어 놓아서 막상 대학 생물학과에 오는 친구들을 보면, 성적에 맞춰 대충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굉장히 속상하고 화가 나는 부분이죠.

 

2018년도부터 문과, 이과가 사라지고 통합형 교육과정을 실시합니다. 교수님께서 오래 전부터 문, 이과 통합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변화를 기대하시나요?


기대는 전혀 없어요. 요즘 제가 새롭게 시작한 운동이 문과, 이과 통합 반대예요. 이유인즉 통합과정을 만들면서 교육부가 학부모들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는 거예요. 내 아이가 반쪽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왜 양쪽을 다 해야 하냐는 거죠. 문과 아이들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쳐주겠다고 해놓고 문과 아이들의 부모가 우리 아이들 힘들다고 하니, 과학에 물을 잔뜩 타는 거예요. 제대로 된 과학이 아니라 과학 냄새만 풍기는 거죠. 요즘 제가 돌아다니면서 대놓고 말해요. “문과, 이과 통합은 이과로 통합이다. 모든 학생이 이과 공부를 하자고 통합하는 거지, 이과 공부를 쉽게 해주겠다고 통합하겠다는 게 아니다”라고요. 지금 4차산업혁명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 서비스산업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나라는 반도체, TV, 배, 자동차를 잘 만드는 제조업 국가예요. 그런데 마치 제조업을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해요. 이공계를 제대로 키워내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어요. 통합과정 만들어놓고 어중이떠중이를 만드는 건 옳지 않아요. 이과를 전공할 학생을 골라서 확실하게 키우는 게 오히려 덜 위험한 일이죠. 지금은 100세 시대라 누구나 과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가져야 하는 시대예요. 모든 게 다 과학으로 이뤄진 시대니까 제대로 된 통합 교육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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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질문하고 같이 답을 찾아가는 사실이 중요해요


『어린이 대학』을 부모가 먼저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크면서 부모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데 선뜻 대답이 안 나와서 곤란한 경우도 많으니까요.

 

부모들이 질문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질문을 하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그런 질문을 못 했으니 대답하기가 어려운 거죠. 최근 신문 칼럼에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썼어요.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제임스 라이언 학장이 『Wait, What?』이라는 책을 썼는데 무척 인상 깊었어요. 이 학장님이 졸업식 축사를 하면서 ‘인생을 살면서 해야 하는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유튜브에 검색하면 영상이 나오는데요. “Wait, What?”은 미국 아이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에요. 부모가 쓰레기를 좀 버리라고 하면, 아이들은 “뭐요? 왜 그걸 내가 해야 되는데요?”라고 물어요. 제임스 라이언 학장은 이 질문을 아이들이 하게 하지 말고, 우리가 늘 하자고 말해요. 왜 이래야 하는지, 세상에 의문을 갖고,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하라는 거예요. 질문 다섯 개가 아주 멋있었어요. 한글판이 나온다고 해서 추천사를 썼는데요. 사람이 살면서 질문을 잘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책을 깊이 읽었다면 새로운 질문이 나와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렇죠. 아이랑 책을 읽다 보면 아이가 반드시 질문해요. 부모는 답해줘야 하는데 그게 꼭 정답이 아니어도 돼요. “글쎄, 이건 왜 이럴까?”하고 같이 고민해 보는 거죠. 아이의 질문에 겁먹을 필요가 없어요.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 칠 수도 있으니까요.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만 저도 최초의 생명체가 어디서 왔는지 몰라요. 같이 질문하고 같이 답을 찾아가는 사실이 중요해요. 부모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질문하면, 나를 괴롭히려고 얘가 그러나? 착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에요. 내가 정답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버려야 대화가 진전돼요.

 

“무식한 질문도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런 것도 몰라? 창피해서 질문을 안 하는데 분명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창피하더라도 질문을 하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거예요.

 

쉽지 않은 문제인데요. 예전에 제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연세대에서 출강을 해달라고 했어요. 너무 설득해주셔서 3학기를 진행했는데 서울대에서는 그렇게 안 되던 토론수업이 연세대에서는 되더라고요. 왜냐, 애들이 질문을 막 던지는 거예요. 그 때가 정운찬 전 총리가 총장을 할 때였는데 이 이야기를 했더니, 왜 서울대는 안 되냐고 하면서 교육개발연구에서 토론수업을 개발하고 했어요. 이제는 서울대도 토론 수업이 좀 되는데,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해봤더니 연세대 학생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게 좀 덜 해요. 서울대 학생은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고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으니 항상 주목을 받아서 이게 잘 안 되는 거예요.

 

하버드대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셨는데요. 어떻게 다르던가요?

 

하버드대에서는 시끄러워서 토론을 못해요. 워낙 말을 잘하는 애들이 모여 있으니까요. 서로 얘기를 하려고 난리가 나죠. 또 학생들이 몇 번 입을 열었느냐를 체크해서 점수를 매겨요. 그러니 더 아이들이 말을 많이 하죠. 그런데 제가 쭉 보니까 이게 그다지 효과가 없어요. 책도 안 읽고 떠드는 애들도 있고. 그래서 나는 횟수로 카운트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편안하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지침을 바꿨죠. 이게 애들한테는 신선했나 봐요. 학기 말에 수업 평가를 하는데 “정말 토론다운 토론을 했다. 교수가 전혀 압력을 안 줘서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환경과 인간’을 주제로 수업을 하고 계신데, 좋은 학점을 받기가 어려운 과목이라고 들었어요. 굉장히 빡빡하게 진행된다고요.

 

그래서 학생들이 잘 안 와요. 왜 이렇게 안 오냐고 조교한테 물었더니, 3학점인데 30학점으로 소문이 났대요. 각오하지 않으면 학점을 못 받는다는 거죠. 하지만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너무 좋아했어요. 제가 강의는 별로 안 하거든요. 대신 엄청나게 떠들어야 하고 글도 많이 써야 하고 현장도 뛰어야 해요. 힘들 수밖에 없지만 또 그만큼 얻는 게 많죠. 성적만 잘 받으려고 쉬운 수업만 들으면 그건 진짜 공부가 아니에요. 입사원서 쓸 때 학점 좋은지를 그렇게들 보는데, 성실하게 공부해서 학점을 잘 받은 아이들도 있지만, 쉬운 과목만 골라 들어서 학점 좋은 애들도 많아요. 그건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려는 얌체죠. 회사에 좋은 인재를 뽑겠다고 하면서 그런 얌체들만 뽑으면 회사는 발전 가능성이 없어요.

 

책에 “알면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와요. 평소 교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말씀이에요.

 

어쩌다 만든 말인데, 대학원생들은 싫어해요. 너무 권위가 없어 보인다고요. (웃음) 그런데 이게 사실 언젠가 한번 내뱉었다가, 곱씹을수록 괜찮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 좌우명이 됐어요. 안다는 말이 알아간다는 뜻이잖아요. 학문한다는 뜻도 되고요. 저 같은 사람은 평생 앎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가  작년에 내한했는데 그 분이 주장하는 게 “우리 인간사회에서 폭력성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이거든요. 왜 줄었냐? 이건 결과적으로 학문의 영향이에요. 많이 알게 되면 옛날 같은 무모한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거예요. 결국 나에게 손해니까요. 사실 그 분 책(『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너무 단순한 생각이라고요. 하지만 전 굉장히 고마웠어요. 우리가 학문을 왜 해야 하고, 서로를 왜 알아가야 하는지를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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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에 일을 마치면 마음의 평화가 있어요

 

다독가로 유명하세요. 책을 권해달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으실 텐데요.

 

종종 듣죠. 굉장히 구체적으로 요청하는 분도 계시고요. 지금까지 가장 많이 추천한 책은 『총,균,쇠』예요. 인류의 역사를 총과 균, 쇠로 다시 분석한 책이죠.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문명 발달의 차이가 있다는 거죠. 역사학 책인가 하면, 지리학, 경제학도 들어 있어요. 완벽한 의미의 통섭학자죠.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시대에 공부를 왜 두루 해야 하는지가 보여요. 『총,균,쇠』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1년 넘게 10위 안에 있었어요. 돈도 무지 벌었죠.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으리으리하더라고요. 그런데 대화가 진전이 안 돼요. 몇 마디 하다가 새가 우니까 “이 새는 남미에서 날아와서” 어쩌고저쩌고. (웃음)

 

『총,균,쇠』가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꼭 읽는 책으로 유명하잖아요.

 

대출 순위로 뜬 책이잖아요? 『총,균,쇠』가 국내에서 유명해진 게, 서울대학교 도서관 대출 1위 때문이었는데요. 얼마나 많이 빌렸냐 따져보면 18회였어요. 다른 책은 17회, 16회. 워낙 책을 안 빌리니까 1등을 한 거예요. 그런데 어떤 신문에서 1위로 이 책을 공개해서 사람들이 우르르 관심을 갖게 됐죠.

 

요즘은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

 

참 서러운 게 일을 많이 하다 보면, 정작 내 독서를 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제 서가에 책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물어요. 이 책을 다 읽었냐고요.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많지 않아요. 저는 주로 공격형 책 읽기를 해요. 내가 원하는 정보를 찾은 후에 다시 서가에 꼽아 놓죠. 오래 전에 <조선일보>에 서평을 쓴 적이 있어요. 네 명이 번갈아 가면서 쓰는 코너였는데, 중국 소설가 위화의 『인생』을 소개했어요. 원제는 ‘활착(活着)’이었는데, '활착'이란 원래 "옮겨 심거나 접목한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간다"는 뜻이죠. 저는 이 원제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 서평을 썼을 때가 아마 2008년이었을 거예요. 위화 작가가 국내에서는 아직 대중적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좋아하는 분들이 많죠.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작가예요.

 

2003년에 출간됐던가요?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를 인상 깊게 읽었는데, 이 책을 아동 도서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어요. 아이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할 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생물학자가 바라보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먼저 이해하면 페미니즘이 더 쉽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요청 받은 곳이 있는데요. 지금 하는 일이 많아서 진도가 잘 안 나가요. 최근 10여 년 동안 학계에서는 백과사전 열풍이 불고 있어요.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에서 동물행동학 총괄 편집장을 맡아달라고 해서 그 작품을 하고 있어요. 외국 출판사들 무섭거든요. 수락하자마자 사흘이 멀다 하고 메일을 보내 와요. 섹션 에디터도 나눠야 하고 아주 정신이 없어요.

 

시간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하시잖아요. 마감도 칼같이 지키신다고 알고 있어요.

 

안 그래도 시간관리에 대한 책을 내자는 출판사가 여러 곳 있어서요. 바빠서 좀 시간을 두고 있는데 쓰긴 써야겠네요. 언젠가 성공에 대한 질문을 받았어요. 당신이 약간의 성공을 했다면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 같냐고. 생각해보니 제가 특별히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니고 금수저도 아니에요. 그래도 하나 있다면 부지런한 것, 시간관리에요. 제가 하버드대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기숙사 사감을 7년을 했는데, 다음주까지 내면 될 숙제를 한 주 전부터 해요. 친구가 맥주를 마시자고 불러도 “NO”예요. 모든 걸 일주일을 앞당겨서 해요. 뭐 이런 애들이 다 있나 싶었는데 7년을 보니까, 얘네들이 왜 똑똑한지를 알겠더라고요. 1주일 전에 일을 마치면 마음의 평화가 있어요. 갑작스런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아요. 또 천천히 일을 다듬을 수도 있고요. 사람들이 가끔 제게 물어요. “교수님은 하는 일이 엄청 많으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여유만만하냐”고요. 실제로 여유로워요. 이번 주는 놀아도 그만이에요. 이미 다 끝내놓아서.

 

글도 여러 번 퇴고하신다고요.

 

만약 김훈 선생님과 제가 글짓기대회를 한다면 누가 이길까요? 3시간을 준다면 당연히 김훈 선생님이 이기겠지만, 1주일을 준다면 그래도 붙어볼 수준만큼은 갈 수 있어요. (웃음) 지금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는데 글자수가 1,000자밖에 안 돼요. 짧은 글이지만 거짓말 조금 보태서 50번을 고쳐요. 편하게 읽힐 때까지 고치는 거예요. 중복된 단어가 있으면 동의어를 찾아서 고치고요. 글의 재미가 떨어지면 뒷 문단을 통째로 가져와 앞에 넣어 봐요. 그러면 긴장감이 확 살아요.

 

평소 “아름답게 방황하라”는 말도 자주 하세요. 일찍 진로를 결정하지 말고 여러 가지를 경험한 후에 결정하라고 말씀이세요.

 

촛불을 한 번 들고 싶어요. 광화문에서 학부모들을 다 모이게 해서, “내일부터 우리 아이 학원을 다 끊고 무조건 팽팽 놀리자”고 선언하는 거예요. 이 의견에 찬성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어요. 문제는 옆집 아이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다 안 보내면 끝나는 거예요. 완전히 놀리면 죽냐? 안 죽어요. 방목해야 아이가 창의적으로 커요. 물론 이게 불가능할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고 싶어요. 제대로 된 공부는 대학에 와서 해도 돼요. 미국에 괜찮은 대학 아이들은 잠이 부족해요. 그래서 여름방학이 되면 며칠 동안을 잠만 자요.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아이들을 한 번 봐요.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에 싸매어 살아서 대학에 오면 팽팽 놀아요. 우리는 거꾸로 됐어요. 이러면 미래는 없어요.

 

“10살까지 놀았던 경험과 추억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말도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정말 맘놓고 놀기가 어렵죠.

 

제가 기가 막히게 성공한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거겠네요. 10살까지 저보다 더 잘 논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 나가서 노니까 통행금지를 어겨 경찰서에 가기도 했어요. 열심히 논 덕분인지 아직까지 공부가 재밌어요.


 

 

어린이 대학 : 생물 최재천, 이은희 글 / 김소희 그림 | 창비
초등학교 5, 6학년을 대상으로 직접 설문조사를 벌여 어린이들이 각 학문에 대해 궁금해하는 점을 받고, 해당 학문을 평생 연구해 온 석학이 어린이의 질문에 답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전호용 “강요되는 것들에 대한 반항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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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부터 못나디 못났지만 나와 만나는 그녀 또한 못나디 못났고, 글에 자주 등장하는 내 어미 또한 지독하게 못났을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시대를 살았었는지도 모를, 기억해주는 이 아무도 없는 못난 사람들이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한마디 남기고 싶었다.(7쪽)

 

『네 맛대로 살아라』『알고나 먹자』를 쓴 전호용이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칼럼 ‘어정밥상 건들잡설’을 묶은 책이다. <딴지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알고나 먹자』와 마찬가지로 책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글은 아니었다. 다만 생각나는 것들, 그 자신이 해야 한다고 여겼던 음식과 세상이 잊어버린 삶, 못나고 안타까운 삶을 쓰고자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만나온 ‘못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로부터 밀려나고, 소외당한 사람들. 전호용은 말한다. “그런 사람들을 제가 언급하거나 글에 쓴다고 그들의 삶이 좋아질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가령 책에 나오는 용숙이가 제가 무슨 얘기를 한다고 좋아지진 않겠죠. 하지만 기록되기를 바라요.”

 

어떤 삶을 못났다고 할 수 있을까. B급 인생은 A급 인생과 뭐가 다를까. 어쩌면 전호용의 글은 세상을 향해 이런 반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 맛대로 살아라』에서는 진하고 짠 땀 냄새가 난다. 

 

 

‘B급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


일찍부터 식당에서 일하기도 하셨고, 음식과 관련한 다양한 경험을 하셨어요. 맛, 음식 등에 매력을 느낀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환경 자체가 그랬죠. 할머니 식사를 챙겨드려야 했고요. 그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맛있게 만들어볼까 생각을 했던 거죠.

 

확실히 관심이 높았더라고요. 어린 시절, 계란 볶음밥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죠. 재미있었어요.


관심이라기보다는, 살려고요.(웃음) 시골에서 살면 식재료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제가 살던 마을은 산골도 있고, 산을 넘어 가면 바다가 나오는 곳이거든요. 강도 있고, 들도 있죠. 거기에서 굉장히 다양한 것들이 나오잖아요. 가령 조개 하나를 잡아요. 그걸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 고민을 하는 거예요. 구워 먹는 게 지겨우면 끓여도 먹고요. 봄에 잡는 조개와 가을에 잡는 조개 맛이 다르죠. 그런 식재료의 특징을 알아가다 보면 당연히 맛있는 때를 고를 수 있게 되고요. 그 시간이 지나 지금에 이르면 사람들한테도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거죠. 봄 바지락은 알이 없어서 잡아봐야 먹을 것 없다, 하고요. 이런 것은 공부를 해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알게 된 것들이에요. 제게는 당연한 것이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 생활을 하고요. 식재료에서도 계절감을 느끼기 힘들잖아요. 겨울에도 수박을 맛볼 수 있고요. 그 때문에 저자가 당연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죠.


‘서울발 지방통신’이라는 글이 있어요. 오히려 저는 도시생활에 대한 일련의 규칙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굉장히 힘들죠. 전철도 거꾸로 타고 말이에요. 친구와의 대화가 나오는데요. 그 친구는 시골의 고즈넉하고, 조용한 풍경이 지옥 같다고 해요. 사람 사는 곳이 아닌 것 같다고요. 반대로 제 입장에서는 홍대입구역에서 여기, 약속 장소까지 걸어오는 과정이 지옥 같죠.(웃음)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었는데요. ‘못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적기도 했잖아요.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전체적으로는 ‘B급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이죠. 못난 것들 말이에요. 만화가 최규석 씨의 초창기 만화 중에 『대한민국 원주민』이라고 있어요. 이 책에도 ‘대한민국 원주민의 여름’이라는 글이 있는데요. 물살이 크게 흐르고 나면 같이 물살을 타고 나가는 물고기도 많지만 한쪽에 남겨지는 물고기들도 분명히 있어요. 그 사람들, 모든 살아가는 개체들이 반드시 못나서 남아 있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죠.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저는 그 남겨진 것들, 그들의 생활방식들을 바라본 거예요. 지금 살아가는 방식들이 굉장히 세련되고 멋져 보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강요되죠. 거기에 대한 반항 같은 이야기들이 많아요.

 

말씀이 자연히 제목과도 연결되네요. ‘음식에 정답은 없다’는 대목도 떠오르고요. 이것은 어떻게 시작된 문제의식인가요?


주위의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어요. 살다보니 얘들은, 혹은 나는, 여자 친구는 왜 힘들까 싶더라고요. 뭘까? 복이 없어서 그럴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항상 잘 못살고, 무엇인가로부터 밀려나고, 힘겹죠. 그런데 대부분의 노동자들, 세상을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항상 괴로운 것 같아요. 빠져나가지 못하고요. 그런 사람들을 제가 언급하거나 글에 쓴다고 그들의 삶이 좋아질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가령 책에 나오는 용숙이가 제가 무슨 얘기를 한다고 좋아지진 않겠죠. 하지만 기록되기를 바라요.

 

용숙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건 지난봄이었다. 전단지를 돌려 밥을 먹고 사는 용숙이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지만 약간의 자폐가 있어서 열셋 같은 스물여섯으로 살아간다.(중략) 용숙이는 궁금한 것이 많다. 그렇지만 말이 어눌해 궁금한 것을 모두 물어보지 못하다가 어느 때건 방언처럼 말문이 터지면 묻기 시작한다.(68-69쪽)

 

힘든 삶일지언정 잊혀서는 안 된다, 기록하고 싶다, 라는 거군요.


여기 쓰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힘들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은 형이 한 분 계셔요. 그 사람은 평생 봉사하며 살았어요. 좌판을 깔고 때수건, 귀이개 같은 걸 팔아서 모은 돈을 크리스마스 때 구세군에 쾌척하고요. 주변 사람은 박수를 쳐줬지만 누구도 그를 기록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찾은 사람이 열 명도 채 안 됐죠. 이것은 기억의 문제도 아니고요. 그런 사람을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이 세상에 아무런 실질적 이득을 남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그렇게 잊어서는 안 되는 거죠.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뿐 아니라 누구든 그렇지 않겠어요?

 

어떤 끼니든 중요하지 않을 수 없죠. 2014년 한 해에 전국을 돌면서 직접 채취한 것만 먹는 실험을 하셨잖아요.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일 년을 다 못 채운 거의 실패한 여행이었어요.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는데요. 이 여행기도 책이 나올 거예요. ‘억울해서 그랬다’고 썼거든요. 스무 살에 집을 떠났으니 삶이 그랬겠죠.(웃음) 별 고생은 다 했고요. 그런데 제대로 쉬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또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지 못했던 거죠. 원하는 삶과 현실이 늘 부딪쳤는데요. 그 벽을 없애고 싶었어요. 정말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어떤 건가 고민을 하다가 땅을 구해 집을 짓고 농사해서 먹고 사는 삶을 일 년 정도 유지해보는 게 어떨까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건 재미도 없고, 우리 엄마가 평생 해온 삶이었던 거죠.(웃음) 그래서 몇 가지 물건만 챙겨 들로 나와서 뿌리 캐 먹고, 바다에 뛰어 들어 물고기도 잡고 그러면서 지냈어요. 그렇게만 살아진 건 아니에요. 그렇게 살자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사람들이 도움을 줘요. 처음 본 사람들이 밥을 주고요. 물론 너무 이상한 사람도 만났고요. 뭐, 그런 여행을 했어요.

 

그때의 감각, 신체적인 변화 등을 책에서도 살짝 엿볼 수 있었어요.


책에는 총론적으로만 썼는데요. 그 글에서 쓴 것은 ‘통증’에 관한 것이었어요. 원해서 겪는 통증은 목적이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별로 아프지 않은 통증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말한 통증은 그게 아니거든요. 돈을 벌겠다고 나와서 겪는 통증은 뭔가 다르겠죠. 고생을 하면 돈이 벌려야 하는데 그만큼 돌아오지 않고, 자존감은 떨어지고요. 그 글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른바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또 많아요. ‘너와 함께 먹기 때문에’ 음식 마련에 열과 성을 다한다고도 했거든요. 한편 요즘은 여럿이 함께 밥상을 차려 먹는 일이 많이 줄었죠. 이런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떤가요?


혼자 먹는 밥도 중요하고 함께 먹는 밥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생일에 나 혼자 미역국을 끓여 먹으며 쓴 글도 있는데요. 태어남에 대한 확인 차원에서 미역국을 먹는 일종의 의식을 하는 거죠. 그것도 아주 중요하고요. 또한 태어남이 의미 있는 것은 마주앉은 사람의 입에 내가 먹을 밥을 집어넣을 때잖아요. 그런 애정, 사랑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마음으로 밥을 나눠먹겠어요. 그런 이야기도 하는 거죠. 밥을 먹는 것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어찌 혼자 먹는다고 허튼 것이 될 수 있겠어요? 어떤 끼니든 중요하지 않을 수 없죠.

 

누군가는 ‘혼밥’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죠. 그게 또 여러 사람들에게 반발을 샀고요.


최근에 김규항 씨가 한 마디를 하셨더라고요. ‘성인’이라는 글이었어요. 읽어드릴게요.(웃음)“성인이란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이다. 여행이든 공연이든 산책이든 식사든, 함께 할 사람이 있든 없든, 혼자도 할 수 있고 그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성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이상하게 보지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정말로 저는 전적으로 동감해요.

 

‘와일드푸드’를 생각하면서,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비판적인 시선을 건네기도 했어요. 요즘에 눈을 두고 있는 장면은 어떤 것들인가요?


요즘은 고용 없는 성장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요. 점점 용역이 많이 늘어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퀵 서비스나 배달앱 등 직접 고용하지 않고 각자가 생존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사회가 더 커지고 있어요. 더 이상 정규직, 비정규직의 문제가 아닌 거죠. 제가 배달 음식점을 하고 있잖아요. 배달앱을 통해 판매를 해요. 주문이 앱을 통해 들어오면 퀵 서비스를 불러서 배달을 하거든요. 이때 퀵 서비스 업체가 퀵 서비스맨을 고용한 건지 내가 퀵 서비스맨을 고용한 건지 관계가 굉장히 애매하죠. 돈을 벌 때는 윈-윈이라고 하겠죠. 그렇지만 문제가 생기면 어떨까요. 가령 배달 중 퀵 서비스맨이 사고가 나서 죽었을 때 그 죽음을 누가 책임지나요? 제가 지나요? 아니면 퀵 서비스 업체가 책임을 지나요? 나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누구도 그 죽음을 책임지지 않아요. 그런 장면이 굉장히 많아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죠.


대왕 카스테라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그랬죠. 잘 된다고 하니 1억을 들여 매장을 차려요. 제 주변에는 개점 15일 만에 그 사태가 벌어져서 문을 닫은 사람도 있어요. 그 매장을 차린 사람이 모든 책임을 다 질 수밖에 없죠. 프랜차이즈, 그런 것도 일종의 용역인 거예요. 택배 기사 문제도 그렇고요. 그런데 고용이 불안정하니 해결의 기미가 안 보이죠. 최저시급이 7천원을 넘기니까 벌써 자동화 시스템 이야기가 나와요. 영화관에서 자동 티켓 발행기를 늘린대요. 티켓 판매 인원을 줄이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동 발행기보다 직접 사람에게 구매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하거든요. 기계가 사람 줄이는 명분은 되죠. 그런데 남은 사람은 일을 더 많이 해야 해요. 더 혹독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기계의 효율성과는 또 무관한 이야기잖아요.


기계나 시스템이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할 거라고, 유토피아를 꿈 꿔왔죠. 하지만 그 꿈을 꾸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지 않아요. 어렸을 때 만화책에서 보던 시절이 도래하긴 했는데요. 저 같은 사람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거죠. 아니, 오히려 그 훌륭한 시스템 때문에 더 힘들어진 거예요. 어디선가 누군가는 편안하게 앉아서 부를 축적하고요. 과학의 발전을 부정적 시선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 혜택을 보는 사람이 다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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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궁극적으로 이야기가 ‘순리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표현으로 모이는 것 같거든요. 저자의 생각에 ‘순리’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뭘까요? 


하지 말라는 게 좀 적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하지 말라는 것은 누군가가 피해를 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지만요. 각자 살던 방식도 있는 거잖아요. 아무리 좋은 보양식이 나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살던 방식이 따로 있거든요. 강제를 해서 못하게 하지 않아도 시간이 가고 사라질 것들은 사라져요.

 

금지라는 게 특히 약자들에게 더 많이 부여되는 면도 있고요.


그렇죠, 꼭 강자와 약자라는 대립의 형태로 재단할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죠. 때때로 그런 생각할 때가 많아요. 자꾸 이런 얘기 하는 게 ‘약자 코스프레’ 같은 게 아닐까 하는데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코스프레가 아닌 거죠. 사는 게 고단하면 피해자, 약자가 아닌가 싶어요. 

 

전주에서 식당을 하고 계시잖아요. 고민이 많이 읽혔는데 제일 힘든 건 뭔가요?


장사를 잘 못해요.(웃음) 대체로 음식은 잘 만든다고 생각하는데요. 장사는 음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손님이 있잖아요. 손님한테 친절하게 할 줄 몰라요.(웃음) 어떻게 하는 게 친절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많이 고민하지도 않고요. 그냥 음식 맛있게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인데요. 그러니까 장사가 안 되는 거겠죠? 처음에는 무엇을 포기하지 못해서 장사를 못하는 걸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장사에 필요한 기술 같은 것들을 체득하지 못한 것 같아요.

 

장사에 필요한 기술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매뉴얼을 체득한 게 없는 거죠. 주변 사람들, 호의를 가지고 만난 사람들과 관계 맺기는 잘하는데요. 나에게 뭔가를 지불하고, 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하는 이 관계를 잘 유지하는 방식들을 체득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것이 대체로 도시 생활이잖아요. 그걸 잘 못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3차 산업인데요.(웃음) 그게 안 되는군요.


맞아요.(웃음) 1, 2차까지는 되는데 3차에서 꽉 막힌 거죠.

 

역시 다시 또 남겨진 ‘원주민’이네요. 특히 한국사회가 워낙 빨리 변해왔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혼재된 사회잖아요. 한쪽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저자 같은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도 많고요.


심지어 1차 산업 같은 건 내가 1을 하면 1을 주거든요. 도시는 내가 1을 했는데 왜 -2가 되는 걸까요? 그것이 저의 지난 2년의 식당 운영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15시간, 20시간 일을 하는데 왜 빚이 더 늘었지? 모르겠어요. 설령 야만인이 되어 살아도 내가 1을 노력하면 1을 먹을 수 있는데 말이에요. 그건 너무 당연한 거예요. 게다가 운이 좋으면 내가 1을 일해서 나도 1을 먹고 너도 1을 먹을 수 있어요. 가을 같은 때가 그렇죠. 1이라는 힘을 줘서 나무를 쳤더니 열매가 우르르 떨어지잖아요.(웃음) 저축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여기는 그게 안 돼요. 자괴감도 많이 들어요.

 

어쩌죠? 식당이 잘 돼야 집 짓고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꿈을 이룰 텐데요.


글쎄요. 그러니까 이런 바보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민들을 좀 해요. 나 같은 바보도, 용숙이 같은 바보도, 부모님 다 잃고 살다가 한국을 떠난 내 친구 바보도 이곳에서 각자의 자본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요. 고민이 계속 돼요.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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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한 인생들, 해야 할 이야기들


글을 쓰는 건 저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요? 한 편도 쉽게 쓴 글이 없다고도 하셨잖아요.

 
<한겨레21>로부터 칼럼 제안을 받았을 때 마음과 다르게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그냥 음식에 대해 쓴 『알고나 먹자』같은 건 즐겁고 신나게 썼거든요. 이 책에 묶은 글은 안 그랬어요. 음식은 소재로만 다루고 내 인생과 지질한 인생들을 거기에 투영해보자고 생각했으니까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건 한 마디, 한 마디가 굉장한 부담도 있었죠. 게다가 되도록 재미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고통스런 인생이지만 또 즐겁게 표현해야 하는, 그 배반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썼어요.(웃음)

 

글도 그렇지만 삶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일부러 어려운 쪽을 선택하시는 것 같아요.


맞아요. 여자 친구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웃음) 반듯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자꾸 돌아간다고요.

 

계속 글을 쓰실 거죠?


모르겠어요. 장사가 좀 잘 되면 좋을 텐데요.(웃음) 어쨌든 이 사회, 자본의 웅덩이 안에서 살아가는 건데요. 돈을 못 벌면 머리가 굳어요. 무슨 말이냐면요, 자꾸 빚의 구렁텅이에 빠지다보면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돈을 어떻게 메워야 하지, 이 생각이 점점 더 커지는 거죠.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할 시간이 기계적으로 줄어드는 거예요. 고민을 많이 하게 돼요. 다만 이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길 바라요. 조금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요. 해야 할 이야기가 아직도 많아요.

 

해야 할 이야기요?


어떤 사람 이야기 말이에요. 참담하게 인생을 살다 떠난 몇몇 사람의 이야기도 떠오르고요.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들이 아닌데도 기록되어야 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그 기록에서 오늘을 다시 반추해볼 수 있고요. 그런 이야기들이 좀 있어요.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항상 고은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만인보』 1권부터 거의 10권까지가 제 고향 이야기거든요. 거기에 아주 좁은, 그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들이 나와요. 지금도 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예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만 아는 언어를 어떤 부연설명 없이 시를 써요. 그것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지역의 언어를 가지고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담았다는 것이, 그 이야기를 표준형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정말 감동이에요.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내 지역의 언어를 쓰는 게 창피한 거라는 강박을 학습 받았거든요.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요. 그런데 『만인보』를 읽고 달라졌어요. “그려, 우리 동네에서 쓰던 말이 좋지 넘의 서울말 써봐야 그것이 뭐 좋간디.”(웃음) 덕분에 제 언어를 찾을 수 있었어요. 내가 사용한 언어가 만인한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설득할 수 있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은 선생님을 통해 깨달았어요.


 


 

 

네 맛대로 살아라 전호용 저 | 북인더갭
맛이란 것 역시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 맥락을 되찾지 못하면 요리란 그저 맛있고 보기 좋은 음식에 머물고 말 것이라는 진단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강타 “중국 시장이 세계를 뒤흔들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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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서울 강남의 한 녹음 스튜디오 엔지니어는 에쵸티(H.O.T.) 출신의 강타가 가수들 녹음할 때마다 예고 없이 들러서 녹음현장을 주시하곤 했다면서 “음악적 관심이 상당했다”고 귀 뜸했다. 그가 단지 아이돌 그룹의 일원이라는 고정관념이 강했던 당시 전해들은 얘기는 의외로 놀라웠다. 강타 스스로도 “음악을 너무 하고 싶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 에쵸티에 들어왔다!!”고 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 외에 사실 에쵸티 빅히트 넘버 중 하나인 「빛」을 작사 작곡한 것은 예상 밖 행보였다. 강타는 에쵸티의 메인 보컬과 랩, 그리고 댄스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송라이터로, 프로듀서로 활동의 외연을 확대해나갔다.

 

「북극성」과 「스물 셋(My life)」를 알린 솔로 앨범활동을 비롯해서 프로젝트 그룹 에스(S)와 아이돌 국제 듀오 ‘강타 앤 바네스’ 등의 프로젝트 활동으로 그는 아이돌 아닌 아티스트로 페달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재즈 발라드를 써내기도 했다.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현재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 중인 그는 이즘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막힘이 없이 술술 풀어냈다. 빼어난 말솜씨였다. 에쵸티 시절의 음악열정, 한류에 대한 자평, 에스엠 비등기 이사 활동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그의 언급은 흥미로웠다.

 

작년 6월부터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고 있다. DJ 해보니 어떤가.


예전에 제가 KBS에서 2년 정도 라디오를 한 적이 있어요. 23살, 24살 때 했는데 그거랑 대비가 되더라고요. 20대 초반에 인생 경험도 별로 없고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쭉 스타로 살아왔던 제가 진행한 라디오와, 군대도 다녀오고 대중의 싸늘함도 느껴보고 이런 저런 일을 겪고 38살에 시작한 이 라디오는 굉장히 달랐어요. 모르는 걸 많이 얻어요. 지식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사는 판교에서 방송국까지 많이 막히면 2시간, 보통은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그러면 차 안에서 라디오도 듣고 막히는 것 때문에 힘들어도 보고... 그걸 일주일에 4일 정도 하니까 라디오부스 안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닌 거죠. 매일 무언가를 하고 매일 책임감을 갖고 뭔가 해야 하고 음악과는 다른, 사실 음악은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필(feel)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안하는 무책임하는 기간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직장인들의 애환을 모르죠. 지금은 대다수가 겪는 생활을 조금이나마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릴 때는 팬들이 사연을 보냈는데 지금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서 재미있어요. 스스로 반성을 할 때도 있고요.

 

에쵸티 팬덤은 대단하지 않았나.

 
사실 그런 팬덤이 이전에도 있긴 했죠. 서태지와 아이들, 그 전에는 소방차 선배들도 있었고 그 전에는 남진, 나훈아 선배님도 그런 팬덤이 있었는데 팬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인정을 받고 본인들의 목소리를 내는 팬클럽 문화의 시작이 H.O.T.가 처음인 것 같더라고요. 소속사에서 팬클럽을 만들고 회비를 걷고 풍선 같은 고유의 응원 방식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을 갖게 된 것이요.

 

팬들과 함께한 당시를 떠올린다면.

 
사실은 고맙고 이들이 저희를 좋아해서 응원해주러 온 건 아는데, 육체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힘든 부분은 어쩔 수 없었어요. 한 번은 희준이 형이 큰 귀걸이를 하고 나왔는데 그걸 잡아 당겨서 피가 난적이 있어요. 아무리 저희를 좋아해서 왔다고 해도 순간 화가 나잖아요. 그런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때 멤버들끼리도 그런 얘기를 나누면 결론은 비슷했어요. 다 취할 수는 없잖아요. 팬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좀 과격한 행동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가 좀 이해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섯 멤버 중에 강타는 팬들에게 잘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잘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건 팬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죠. (웃음)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금 그나마 좀 편안해진 상태의 팬들은 예전 제 모습을 떠올리면 무뚝뚝했다고들 많이 말씀을 하세요. (가끔 수식되었던 ‘도시남’이 맞았던 것 아니냐고 하자) 그러려고 한건 아닌 것 같고 (웃음) 약간 낯가림이 있고 어렸을 때라서….

 

에쵸티 다섯의 개별이미지가 문희준은 즐거움 담당 이미지, 토니안은 귀요미, 이재원과 장우혁은 각각 키 큰 막내, 카리스마. 뭐 그런 느낌 아니었나.


그런 이미지였죠. (웃음) 지금 팬들은 이해할 부분은 이해해주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팬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틀 안에 있기를 바랐거든요. 영원한 아이돌로서. 사실 팀을 할 때는 그게 잘 드러나지 않아요. 다섯 명이 어떤 음악을 하든 대체로 그들 구미에 맞는 음악이 나올 테니까요. 근데 제가 해체하자마자 1집에서 「북극성」이란 노래를 내고 재지(Jazzy)한 곡들과 느린 노래들로 앨범을 채운 걸 보자 팬들이 반기지는 않았거든요.

 

영원히 아이돌이길 바라는 것?


네, 아직도 화려한 모습으로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를 바라고 아직은 더 어려보이고 더 아이 같아 보이기를 바랐던 거죠. 근데 그때 저의 마음에는 “나 혼자 하면 나는 이런 음악을 할 거야” 그런 생각이 깊었거든요. 탈(脫)아이돌, 탈10대의 이미지.... 물론 지금은 잘 정리되었지요. 이제 기본적으로 15년 이상 같이 온 팬들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은 물론 제가 어떤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더 관대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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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에쵸티 21년이다. 같이 활동했던 젝스키스가 최근 컴백을 했고 에스이에스(S.E.S.)도 20주년 앨범을 냈다. 근래 들어 1990년대 아이돌이 복고 붐을 타고 귀거래(歸去來)하는 분위기다.

 
우선 문화 소비의 흐름이 30대까지 확장되어 복고 열풍이 일어나고 예전 것들을 꺼내서 사랑해주시고 그들의 시장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시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그런데 H.O.T. 멤버로서 팀의 컴백은 너무나 하고 싶은 마음이 반, 두려움이 반이에요. 에쵸티는 저 혼자 만든 팀도 아니고 멤버 다섯 명이 만든 팀도 아니거든요. 멤버들과 소속사는 물론이고 팬덤이라는 큰 문화가 당시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저희 자체의 매력보다도 그런 모든 것들이 결합해서 만든 문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싶네요.

 

어떤 두려움인가.

 
다섯 명이 뭉쳐서 무대에 다시 섰을 때 그 추억을 회상하며 1차로 감동할 수는 있죠. 근데 그리고 난 후의 2차가 두렵더라고요. 그 다음엔 뭘 해야 할까. 우리가 예전처럼 그렇게 화려한 춤을 출 수 있을까. 춘다 해도 그때 춤을 똑같이 추는 걸 보는 것 자체는 재미있어 하겠지만 요즘 나오는 화려한 춤사위, 요즘 트렌드의 음악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족할 수 있을까. 일단 그런 불안함.

 

에쵸티 시절로 돌아 가보자. 처음에 멤버들이 모였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나. 음악을 하려는 마음이었나.

 
지금과 비교하면 그런 마음은 60% 정도였어요. 반은 넘었죠. (웃음) 제가 음악을 처음 접한 게 힙합이나 흑인음악이 아니라 메탈리카나 건스 앤 로지스 같은 록이었거든요. 사이먼 앤 가펑클을 먼저 들었고. 그래서 저도 중학교 1학년, 2학년 까지는 록이 아닌 음악은 음악이 아닌 줄 알았어요. 그땐 다 그랬지만 교내 밴드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까 하고 싶었던 건 록이었고 처음 잡은 악기도 건반이 아니라 기타였어요. 중학교 때 아르바이트 한 돈 20만원을 모아서 낙원 상가에서 앰프랑 펜더 기타를 샀죠. 그게 처음 잡아 본 악기예요.

 

그럼 힙합, 흑인 음악으로 방향을 선회한 건 언제였나.

 
그 계기가 보이즈 투 멘(Boyz 2 Men)이었어요. 「End of the road」가 중학교 2학년 때 나왔는데 그걸 듣다가 내가 노래를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사를 한글로 적어서 한 번 불러봤어요. 근데 친구들이 그걸 듣더니 제가 노래와 잘 어울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흑인 음악을 더 찾아보게 됐죠. 그러다가 힙합도 들었고요. 너티 바이 네이쳐(Naughty By Nature)나 아이스 큐브(Ice Cube)로 시작을 했는데, 그걸 듣다 보니 갱스터 랩에 좀 꽂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춤이라는 문화에 빠지고... 그러다가 국내 그룹 중에 듀스를 보게 됐죠.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니고?

 
서태지와 아이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거대한 아이콘이었죠. 저희가 볼 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무조건 가장 인기 있는 사람. 신승훈이 발라드 아이콘인 것처럼요.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도 좋아했지만 듀스가 뭔가 좀 더 힙합스럽고 보고 배우고 싶은 게 많았어요. 신승훈 노래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승환 노래가 뭔가 우리하고 더 가까운 느낌이랄까 (웃음) 약간 그런 느낌이었어요.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캐스팅이 됐기 때문에.... 게다가 사실 처음 데뷔할 때는 발언권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기분 좋았던 건 첫 타이틀 곡 「전사의 후예」 데모를 받았는데 갱스터 랩인 거예요. 사이프레스 힐이 생각나는. 물론 그거 때문에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 그 데모를 받았을 때는 국내에선 그런 노래가 별로 없었잖아요. 좋았죠.

 

방금 말한 것처럼 당시에 표절 의혹이 있지 않았나. 일각에선 에쵸티가 은퇴한 서태지를 판다, 기댄다는 지적이 있었다. 「전사의 후예」가 나왔을 때가 막 서태지가 은퇴한 후 아닌가. 서태지가 ‘전사’인데 기획사에서 나온 에쵸티가 「전사의 후예」를 쓴다는 건 서태지의 공백기를 이용하는 마케팅 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당시에 갱스터 랩이나 힙합을 좋아했던 국내 인구는 갱스터 랩의 패턴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고 갱스터 랩이라고 불리는 닥터 드레, 워렌지, 사이프레스 힐, 좀 딥하게 가면 본 썩스 앤 하모니(Bone Thugs-n-Harmony) 이런 팀들이 있는 건데 대부분 그 라인들이 비슷해요. 그리고 그 몇 년 후에 미디를 접하면서 알게 됐는데, 사실 「Come back home」에 있는 베이스 루프랑 「전사의 후예」에 있는 베이스 루프가 회사는 달랐지만 당시 갱스터 랩 하는 뮤지션들이 많이 쓰던 샘플 시디에 있던 루프였어요. 몇 곡 안 되는 비슷한 곡들이 그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그게 트렌드라고 생각했고요. 노래를 처음 받았을 때 ‘서태지 선배랑 너무 비슷한 거 아니야?’ 이런 생각 보다는 ‘서태지 선배도 「Come back home」을 했는데 고등학생인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 음악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전사의 후예」가 마음에 들었던 거군요.


저흰 너무 좋았어요.

 

이후 에쵸티를 상징하는 히트송들 「캔디」, 「늑대와 양」, 「아이야」, 「열 맞춰!」, 「빛」, 「아웃사이드 캐슬」 등이 이어진다. 그 노래들은 더 이상 부모님의 지시에 신음하는, 교실의 수동적 10대가 아니라 자기 의견을 당당히 개진하는, 때로는 반항할 줄 아는 공격적 10대 정서를 대변했다. 그래서 에쵸티 음악은 상당히 하드(hard)했고 메시지도 거친 게 많았다. 3집의 「빛」은 좀 달랐다. 굉장히 양순한 가사에 아이들을 독려하고 용기를 주는 어떻게 보면 ‘호프 송’이다.


마침 영어 제목이 호프(Hope)예요. (웃음)

 

그때 ‘에쵸티는 진짜 이래야지’하는 호감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반항적 10대를 꼬드겨서 그 정서를 파는 게 아니라 진짜 10대에게 해주는 오빠, 형들의 이야기. 그게 「빛」 아닌가.

 
사실 당시에 팬들이 뭘 보고 우릴 좋아할까 생각해보면 「전사의 후예」, 「늑대와 양」, 「We are the future」 이런 걸 좋아했을 것 같았어요. 그건 비주얼이고 상품적인 가치로 봤을 때 특히나 여학생들, 혹은 좀 더 어린 남학생들이 좋아했을 것들이었죠. 자극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것들. 그런 걸 통해 우리가 강하게 보이고 10대 소년, 소녀들에게 전사로 보이고 그런 모습을 어필했다면, 저희가 즐거움과 위로도 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웃을 수 있는 것. 보면서 ‘우와 멋있다’하는 거,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 말고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것. 「아이야」는 들으면 자꾸 생각하게 되잖아요. H.O.T.에 호감이 있는 분이라면 화면도 보고 싶고. 「캔디」나 「행복」도 있었지만 「빛」은 우리 멤버들 손으로 만드는 듣기 편안한 곡을 만들자 하는 생각이 있었죠.

 

「캔디」나 「빛」이 지금까지도 남았지 않나. 솔직히 「전사의 후예」「아이야」「열 맞춰! 」보다도.


영광이죠. (웃음)
 
어떻게 멤버 강타가 쓴 「빛」이 타이틀곡이 됐을까 지금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수만 선생님은 “음악을 공부하는 건 좋다, 하지만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수라는 건 알아주길 바란다. 너희들이 좋은 곡을 쓰면 그 곡을 우린 무조건 앨범에 수록할 거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썼다고 해서 다른 작곡가 곡보다 나쁜데도 무조건 쓰진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이제 시작한지 1, 2년 밖에 안 된 너희들이 어떻게 전문 작곡가들보다 좋은 곡을 쓰겠니. 근데 난 다만 너희들이 연습하고 춤 연습, 노래 연습을 하고 너희가 무대에 서서 멋있게 보일 연습을 할 시간에 곡 쓰는 거에 빠져서 그 연습을 게을리 하고 무대 섰을 때는 멋이 없는데 너희 스스로는 너희들이 작곡한다고 멋있어져 있고 그런 마음만 갖지 않길 바란다. 음악은 너희들이 좋아서 하길 바란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음악작업을 하는 데에 지원을 하지도 않으셨어요.

 

그럼 어떻게 곡 작업을 시작을 하게 된 건가.

 
저희 멤버 모두가 1집 활동을 마치고 첫 정산을 받았어요. 1996년 11월 16일인가 그랬는데, 그 날짜와 그 돈이 아직도 기억나요. 9월에 데뷔했으니까 2달 만에 처음 수익을 받은 건데 그때 당시에 개인당 천만 원이 넘었어요. 엄청난 돈이었죠. 지금도 큰돈이죠. 그때 필요한 모듈, 미디 장비, 매킨토시 컴퓨터 등을 샀죠. 샘플러만 못 샀어요. 샘플러 전 단계까지 갖춰서 그걸로 처음에 곡을 막 쓰고 1년이 지나고 「빛」을 쓸 때쯤 정산을 더 받아서 샘플러를 샀죠. 처음 곡을 썼을 때는 선생님께서 관심 있게 듣지 않으셨어요. 저희가 곡을 써왔다고 하면 “그래 너희들이 썼다고 하니 들어볼게. 근데 어떻게 이걸 쓸 수 있겠니?” 이런 식으로. 그렇게 1년이 흘렀어요.

 

「빛」이 3집 이전에 쓴 곡이라는 얘기인데.


미리 썼어요. 2집 때 썼는데 이수만 선생님 입장에선 다 퇴짜였죠. 그땐 MD라고 미니디스크가 있었는데 MD에 몇 트랙 녹음해서 선생님 책상에 놓고 가고 그랬거든요. 어느 날 “오늘도 곡 하나 써온 거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하니까 평소처럼 “틀어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때 「빛」을 들으시고는 선생님께서 다시 한 번 틀어보라고, 이건 앨범에 실을 수 있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자꾸 들어보시더니 저를 따로 불러서 세세한 디렉팅을 하시고 그걸 토대로 데모를 다시 갖고 와보라고 하셨어요. 그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선율이 이 코드에 맞으니까 그걸 중간에 넣으면 이건 타이틀곡으로도 쓸 수 있는 노래라고 하셔서 다시 작업에 들어갔죠.

 

사장님이 어느 부분이 맘에 들었다고 생각하나. 코러스 아닐까.

 
네, ‘다 함께 손을 잡아요, 그리고 하늘을 봐요’하는 코러스에서요. 그래서 그 부분만 반복해서 들으셨대요. 노랜 좋은데 타이틀곡으로 가기엔 어딘가 좀 부족하다하고 들으시다가 후렴구만 계속 듣다 보니 그 위에 그 대선이 맞는다는 걸 알게 되신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오보에로 선율을 깔면서 대선을 다시 만들었더니 제가 들어도 그거 하나 들어갔는데 완전 다르더라고요. 깔린 파트를 랩 파트로 하나 늘려놓고 해서 중간에 파트만 하나 늘어난 건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빛」이 처음 선정이 되었고 그러자 선생님이 “야, 이러지 말고 내가 다른 멤버 애들 것도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어 봐야겠다!” 하신 거죠. 그렇게 3집에 멤버 전원의 곡이 들어갔어요. 저는 3곡을 실었죠.

 

자신이 쓴 곡이 라디오에 나왔을 때 기뻤겠다.

 
뭐랄까... 제 작업실에서 오락하듯이 막 뚱땅거리며 만든 거잖아요. 그게 매체를 통해서 나오는 걸 들으면 그 기분이 되게 어색해요. 좋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거 여기 나와도 되나’ 하는 느낌. (웃음) 심지어 무대에서 그 노래를 우리 다섯 명이 부르고 있고.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2년 동안 계속했어요.

 

화성이나 대위법은 언제 배웠나.

 
대위법은 오히려 솔로 데뷔한 다음에 배웠어요. 현악이 들어간 걸 많이 쓰기 시작하면서 배웠고 기본 화성과 코드 진행만 갖고 시작을 했죠. 어렸을 때 기타 학원에서 타브(TAB) 악보랑 코드 진행을 배운 적이 있거든요. 데뷔 직전에는 건반에 빠져서 건반 코드 진행을 배우고 화성을 익혔고요. 화성학을 따로 배우진 않았고 『파퓰러 음악 이론』 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게 기본적인 편곡부터 코드 진행을 관장하는 방식 등을 배울 수 있는 두꺼운 책인데 그걸 통해 배웠죠. 그러다가 에쵸티 데뷔하고 일년은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중단됐고 활동 쭉 하다가 중간 중간 장비 구입하고 『파퓰러 음악 이론』 한 번 보고 그렇게 된 거예요.

 

지금도 강타의 음악하면 먼저 「빛」이 떠오르는 것 같다.

 
네, 오히려 솔로 이후에 나왔던 노래들이나 다른 친구들에게 주었지만 제가 쓴 걸 모르는 곡들이 많죠.

 

이 기회에 강타가 써준 곡을 몇 곡만 소개해달라.

 
에쵸티 노래는 「빛」하고 「그래 그렇게」, 「빛」 이외엔 다 타이틀곡이 아니라 수록곡이었어요. 그러나 제 솔로 앨범에선 타이틀곡은 다 제가 했죠. 다른 가수들 노래는 보아의 「늘」, 이지훈이 신혜성과 함께 부른 「인형」, 이지훈이 불렀던 「천애」, 엔알지(NRG)의 「비」. 최근에는 SBS의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OST 중에 송 트랙 프로듀싱을 했고 태연의 「그리고 하나」를 만들었어요. 송 트랙 프로듀싱은 7곡정도 됐어요. 그 중에 제가 쓴 곡은 2곡이고.

 

그런 걸 지금 하고 싶은 거 아닌가


그렇죠. 
 
그 무렵 강남의 스튜디오에 그렇게 자주 갔던 이유가 뭔가.


에쵸티 시절에 제가 미디로 곡을 쭉 쓸 때는 연주 세션을 거의 쓴 적이 없어요. 부담이 있었거든요. 어린 마음에 세션을 쓰는 순간 누군가의 손을 빌린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음악 잘 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연주자를 쓰잖아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저희가 곡을 써도 우리 소속사 분들 말고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어요. 업계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써줬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한 번은 저희가 성인이 된 이후에 술을 마시러 갔는데 우연히 음악하시는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이 “「빛」 네가 쓴 거라며?”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 “멜로디만 정리한 거지?”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세요. 제가 미디 작업 다 했다고 하니까 시퀀서 뭐 쓰나, 드럼 뭐로 찍었냐, 샘플러 뭐 쓰냐 테스트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시험을 하고 나서야 아 정말 네가 한 거구나, 믿으시더라고요. 이런 경우가 많아서 3집부터 5집까지 3년은 세션 쓰는 것도 눈치 보였어요. 그러다가 세션 쓰는 게 전혀 작곡하는데 위배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어차피 제가 미디로 다 정리한 거를 들으시고 연주자 분들이 연주를 하시는 거니까. 한 번은 제가 아는 피아니스트 분이 피아노 앨범을 말씀하신 ‘리드(Lead)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데 거기에서 드럼과 포(Four) 리듬이 들어가는 작업, 퓨전 재즈곡을 녹음하셨어요. 그 분이 그날 오면 기본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그래서 갔더니 드럼과 베이스는 같이 녹음을 시작해야 하고, 악보는 어떻게 정리를 하고 이런 걸 배운 거죠. 갓 20살이 되었을 때.

 

세션에 대한 감각 외에 또 다른 건?


그런 것도 있고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배웠죠. 집에서 미디만 했으니까 이걸 현장에서 보고도 싶었고요. 에쵸티 때는 밴드 공연을 안 했지만 솔로 데뷔를 하면 밴드 공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그걸 녹음실에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 2달 정도는 제가 아는 분이 작업을 할 때는 시간만 맞으면 가서 보고 배우고 그랬죠.

 

에쵸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중학교 때부터 오디션을 보러 노래방에서 녹음한 테이프랑 친구들과 같이 춘 춤 비디오카메라로 녹화해서 여기저기 다녔어요. 지구레코드도 갔었죠. 왜냐면 듀스를 너무 좋아했으니까요. 윤상 형님도 그렇고.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죠. 중3 쯤 되니까 ‘아 우린 너무 어려서 안 되나보다’ 싶었어요. 그렇게 포기할 즈음에 길거리에서 명함을 받았는데 에스엠(SM)인 거예요. 그때 에스엠은 현진영 씨가 있던 곳이고 유영진 씨가 있었으니까 두근두근 했죠. 그리고 그때 당시만 해도 저희에게 이수만이란 사람은 연예인이잖아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MC. 그러니 믿을만한 회사였으니까 친구들하고 가서 오디션을 봤는데 저만 붙었죠. 사실 에쵸티가 다섯 멤버를 확정하고 연습한 기간은 1년 밖에 안 돼요. 캐스팅까지 합치면 1년 7, 8개월 정도. 가장 행복한 순간은 첫 앨범 받았을 때에요. 앨범을 받는 순간에 데뷔하기 전 3, 4년 고생했던 게 떠올랐거든요. 그 행복은 어떤 것하고도 바꿀 수가 없어요.

 

당시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은.


「아이야」를 가장 좋아했어요. 3집 까지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이다 사이프레스 힐이다 여러 그룹들의 모방, 모방을 넘어선 표절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잖아요. 저흰 다 챙겨봤거든요. 좋은 말보단 그런 것들이 어떻게든 많이 들리더라고요. 좋은 말은 팬들이 해주지만 나쁜 말은 되게 다양했거든요. 이 그룹이 이렇게 인기가 많아져서 우리 음악계를 끌고 가는 시스템이 맞느냐, 곡부터 표절인데 뭘 음악적으로 논하느냐, 심지어 어떤 방송DJ 분이 “굉장히 여러 그룹의 노래를 짜깁기 해놨네요”하는 말도 생방으로 들었죠. 그런 논란 중에 4집을 발표했는데 이 곡은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죠. 다행히 그렇게 됐고 원래 있는 방식이라고는 해도 하드코어와 힙합과 클래식을 굉장히 고급스럽게 잘 매치했다는 평가를 처음 받았어요. 그래서 그 곡이 제일 좋아요.

 

젝스키스를 라이벌로 여겼나.

 
아이돌 그룹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죠. 똑같이 젊은 애들이 거의 비슷한 음악으로 나오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땐 어린 나이라서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저 애들이 더 화려해 보이거든요. 음악적인 걸 떠나서 쟤들이 너무 멋있고 우리보다 키도 큰 것 같고 얼굴도 더 잘 생긴 것 같고. 그래도 솔직히 하나 저희가 자부했던 건 “랩 노래는 우리가 좀 낫지 않아?” 이런 거였죠. 근데 (강)성훈이 목소리가 너무 예뻤어요. 저는 목소리가 예쁘기보다는 테크닉으로 승부하려고 했는데, 성훈이는 믹스할 때도 보컬이 앞에 딱 나와 있었죠. 제 보컬은 뒤로 빼고 리버브를 먹여서 신비하게 만드는데 걔는 정말 차 안에서 들어도 듣기 편했으니까요. 당시엔 ‘저희는 동료라고 생각한다, 저희 경쟁자는 우리 스스로다’라고 얘길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되게 불안했어요. 지금도 아이돌 후배들은 항상 불안해요. 그건 평생 안 변하는 것 같아요.

 

솔로로 나와선 왜 발라드에 악센트를 뒀나. 음악성 때문인가.


데뷔하기 전에는 록을 좋아했지만 에쵸티 3집 때 발라드, 밝은 곡을 쓰고 4집과 5집에서는 러브 송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까 제 감성을 들여다보니 제가 굉장히 슬로우, 서정적인 곡들을 좋아했더라고요. 워런트(Warrant)의 「Cherry pie」를 좋아해도, 「Let it rain」이 있어서 그 그룹을 좋아했고, 콰이어트 라이어트(Quiet Riot)나 퀸을 좋아한 이유도 그렇고. 제 안에 그런 감성적인 게 있더라고요.

 

로맨틱하고 멜로딕한 부분?


네, 리드미컬한 부분보다도 그런 쪽이 있었어요. 그래서 솔로로는 내가 하고 싶던 걸 하자 그랬죠. 여기에 덧붙여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에쵸티는 해체했고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음악적으로 보일까 하는 고민을 해서 재즈를 앨범에 이용을 했죠. 재즈에 그렇게 조예가 깊지 않았고, 스탠다드 팝이나 조지 마이클의 「Kissing a fool」, <Songs From the Last Century> 이런 걸 좀 좋아했을 뿐이었죠. 앨범 타이틀은 재즈를 할 수 없으니 발라드로 가지만 수록곡은 음악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하자. 주위에선 엄청 반대했죠. 무슨 에쵸티가 재즈냐, 회사에서도 너무 한 거 아냐 등 얘기가 많았어요. 그때 정원영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재즈곡을 달라고 부탁드리니 당황하시더라고요. 왜 재즈를 하려고 하느냐, 재즈를 좋아하긴 하냐고 물으셨지만 그래도 예쁘게 보셨나 봐요.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제 의도는 불순했죠. 그때 정원영 교수님 곡 외에도 다른 분들의 재즈곡을 실었는데 보컬이 재즈라기엔 엉망이에요. 얼굴 붉어질 정도예요. 그 때는 재즈를 실으면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인정해주겠지 해서 담았는데 그 뒤로 진짜 재즈가 좋아지면서 굉장히 부끄럽더라고요.

 

이후 3집에서 상의 탈의 앨범 커버를 보고 놀랐다. 당시 복근 노출이 유행이었다.

 

그게 2005년이었는데 2004년쯤부터 복근 붐이 와서. 권상우 씨가 <말죽거리 잔혹사>를 하면서요. 2집까진 1집과 패턴은 같았어요. 그러다 3집이 됐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진짜 오만했던 거죠. “이정도면 나 음악적으로 인정받은 거 아닌가. 그러니 이번엔 좀 멋있는 걸 해보자!” 그렇게 해서 「가면」이란 곡을 하고 커버도 너무 감성적인 것 말고 진짜 멋있게 해보자 해서 운동 중독 수준으로 운동을 해서 몸을 키우고 김중만 선생님께 사진을 부탁드리고 그랬죠. (웃음) 발라드도 있지만 알앤비 베이스에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음악을 준비 했었죠. 「가면」, 「나비」 같은 곡들. 이때부터 활동이 좀 줄고 중국을 자주 가기 시작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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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활동은 어떻게 평가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투자라고 생각했어요. 음악인 강타로서의 투자가 아니라 엔터테이너로서 총체적인 투자요. 그리고 에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이사라는 직함을 가진 자로서의 투자였죠.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중국 진출하는 저희 후배들이 ‘에스엠 차이나’를 통해 그런 시행착오는 겪지 않게끔 선례를 밟아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비즈니스적인 측면인데.


그렇죠, 그건 무조건 있었죠. 그건 배제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중국에서 한창 활동할 때 멘탈 측면에서 흔들렸던 건 ‘난 과연 음악 하는 사람이 맞나’ 하는 고민 때문이었어요. 한 5년 동안 아무런 음악 활동이 없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중국 간 게 몇 년인가.


2001년부터 가긴 시작했는데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갔어요. 2008년에 입대하고 제대하고서도 많이 갔죠. 제대하면 사람이 급해지잖아요. ‘한국에서 이미 나는 대중적으로는 많이 잊혔어, 그럼 에스엠 이사로서 내가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선배로서 후배들이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제시해주는 게 내 위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 중국 시장이었죠. 중국에서는 아직도 저를 현역에서 뛰는 아티스트로 봐주니 그 쪽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자, 그리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에쵸티를 논하면서 2000년 2월, 국내외로 떠들썩했던 중국 북경 공인체육관 공연을 빼놓을 수 없다. 다름 아닌 그들을 ‘한류’의 시작자로 견인한 결정적 전기(轉機)가 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음 날 북경의 한 신문은 중국의 이른바 10대를 가리키는 ‘소(小)황제’들의 믿지 못할 광적인 무대 반응을 보고 ‘한류(韓流)풍폭!!!’이란 헤드라인의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사실 에쵸티의 음반이 이전 1998년에 이미 중국에 발매되었다.

이를 전제하면 중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에쵸티와 함께 본격 개시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후 안재욱, 베이비복스, 엔알지 등 우리 가수들이 중국 땅에 들어가면서 한류라는 말은 보통명사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1999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내 대중음악의 해외홍보를 위해 한류라는 말을 사용했다. 강타는 그 시절을 돌이키면서 후배 아이돌이 당연하게가 아니라 ‘절실하게’ 한류를 인식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중국 활동 통해서 얻은 것이 있다면.


음악적인 것도 있지만, 어쨌든 기둥이 음악이어도 엔터테이너로서 가지들이 펼쳐지잖아요. 중국에서 10년간 활동하면서 그 가지의 풍성함을 좀 발판으로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해요. 중국인들이 원하는 아티스트의 활동 성향이나 음악을 기반으로 뜬 아티스트들의 이후 행보, 예능이나 영화 등으로 뜬 아티스트의 궤적 이런 것들에 대해 중국 시장의 트렌드를 많이 관찰했어요. 어쨌든 제가 대형 소속사의 이사로 속해있기 때문에 저희 아이들에게 제시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죠. 그리고 지금 당장은 사드 때문에 경색되었다고 해도 중국시장의 선점이 세계를 뒤흔들 날이 적어도 15년 안에는 올 것이라고 믿어요.

 

중국은 이수만 사장의 최종 목표지 아닌가.


근데 가서 보니까 할리우드나 빌보드 쪽도 차트가 여기로 넘어오는 시기가 진짜 곧 생길 거라고 저는 봐요. 미국은 미국 차트대로 가치가 있지만. 그래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고민을 그 안에서 활동하면서 했죠.

 

한류는 음악의 측면에서 에쵸티의 2000년 중국 북경공연을 시작으로 꼽는다. 그 공연을 회상한다면.


이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2013년에 에스엠타운이 북경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 곳에 8~9만 명이 들어가는데 단순히 언론 발표용이 아니라 정말로 매진이 되어서 꽉 찼어요. 제가 무대를 하러 나가는데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우리의 경우 당시 북경 공인체육관이었는데 그때는 만석이 안 되었거든요. 7~8천 석 규모였어요.

 

공연한 체육관은 북경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나.


그때는 북경이 막 개발 되던 시기라서 큰 경기장은 허허벌판에 있었죠. 그래서 공연장이 좀 생뚱맞은 곳에 있었는데도 관객들이 7~8천명이 왔어요. 2013년에 에스엠타운 북경 공연 끝나고 저희 가수들에게 이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지금 8~9만 명 채우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나는 7~8천석 채우고도 너무 신기했다. 난 너희들이 대단하면서도 안타깝다. 이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알았으면 좋겠다.’ 그 8~9만 명의 관중과 공연을 보는데 2000년 수도체육관 공연이 생각이 났거든요. 그때 전 하나하나가 너무 신기했어요. 중국이란 곳을 처음 오는데 저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제 이름과 에쵸티를 연호하고, 한국말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잖아요. 한국인이 아닌데 저희를 아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죠. 한 번도 온 적 없는 나라에 우리를 알아보는 팬들로 인해 공항이 마비가 될 정도였죠. 이런 것들이 너무 신기했어요.

 

북경 공항에 내릴 때부터 그랬나.


네, 이미요. 그리고 그때 가방에 태극기 달려있는 걸 보는데 그게 너무 찡하잖아요. 태극기와 중국 국기가 같이 달려있고 가방에는 에쵸티 배지가 달려있고.

 

왜 태극기를 달고 왔을까. 아무리 좋다고 남의 나라 국기를 들고 와 흔들기는 쉽지 않은데.


저희도 신기해했어요. 그때 했던 생각은 ‘돌체 앤 가바나’라는 브랜드가 좋아지면 이탈리아 국기도 멋있게 보이고, 힙합이 좋아지면 성조기가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 문화를 좋아하는 거니까. 중국도 한국의 이런 것들이 좋은데 ‘태극기도 멋있네!’ 하고 생각한 게 아닐까 했죠. 당시에 실제로 캐스팅 팀에서 나가서 중국인들에게 물어봤대요. 그랬더니 ‘태극기 자체가 멋있다’는 얘기를 하더래요.

 

한류 전도사라는 자부심이 있겠다.


자부심도 있었고 후배들에게 좀 원망도 있었어요. 에쵸티 해체를 하고 그런 느낌이 있더라고요. 저희가 문을 열었는데, 저희도 들어가서 그 안에서 놀고 활동하고 싶었지만 저희는 바로 해체를 해버렸거든요. 북경에 에쵸티 다섯 명이 완전체로 간 건 2000년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한류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데…. 이후로 후배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열심히 활동하고 한류를 더 크게 만든 건 박수쳐줄 일이고 부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저희는 그걸 절실하게 원했고 신기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친구들은 당연하게 가서 당연하다는 듯 여기고 때로는 시니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寒)한류가 생기고 반(反)한류가 생긴 거죠. 그럴 때는 속으로 원망스럽더라고요.
 
현재 에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이사인데 회사에서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나.


저는 낯을 가려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로 확 바뀌는 걸 두려워해요. 그러다보니 (문)희준이 형이 에스엠을 나갈 때도 혼자 남은 건데, 다른 회사에서 제안을 받아도 어딜 가서 또 어떻게 적응하기가 좀.... 다른 데 가서 적응하고 거기서 둥지를 틀기 뭐하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 계속 있자 해서 남았는데, 회사와 이수만 선생님 입장에서는 속으로 그게 고마우셨나 봐요. 그러니까 강타라는 아티스트는 지금의 가치만으로 에스엠에서 볼 것이 아니다 뭐 그런. 계산기 두드려서 회사에 줄 이득을 계산할 존재는 이제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오래한 사람에 대한 예우 아니면 의리일 것 같다.


둘 다 공존을 했던 것 같아요. 오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요. 누굴 만나도 얕게 여러 명을 만나진 못하고. 저는 여기 계속 있으려고 마음먹었으니까, 이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요. 회사 모토에 맞춰서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이사로서 회사가 원하는 걸 해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제가 회사에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런 의미에서 비등기로 해주신 거거든요. 회사 방침이 아티스트들은 법적 책임은 없게 해야 한다는 게 있어요. 아무튼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동기부여’지요. 가장 가깝게는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 샤이니, 특히 슈퍼주니어에선 이특 같은 친구들에게요. ‘저 형이 회사에서 저렇게 움직이니까 회사 안에서 존중을 받고, 존중을 받으면 대외적으로 저런 힘이 생기는구나!’ 뭐 그런 거요. 행복한 생각이잖아요.

 

작년에 EP <Home> 챕터 1이 나왔는데 챕터 2는 언제쯤 나오나.


이제 나와야죠. 라디오를 하다 보니 요즘 실시간으로 인기 있는 곡들을 듣고 나는 무엇을 좇아야 하나 하는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기왕 냈으면 음원 차트에서 순위가 높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가능성은 사실 높지 않아 보이고. 그렇다고 유행을 빌려서 트렌디한 친구들이 피처링을 해서, 콜라보를 해서 그 친구들의 힘을 빌리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제가 음악을 ‘월간 윤종신’처럼 꾸준히 해온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한 스텝 더 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니 앨범을 하나 더 제작할 생각이에요. 챕터 2가 될 거고요. 공연은 제가 작년에 8회 정도 했는데, 이걸 소규모로 더 줄여서 가깝게, 소통하면서 여기저기 더 돌아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무엇보다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원조 아이돌로서 후배들에게 충고를 한다면.


내실이죠. 지금이 유리할 때에요. 아이돌이란 울타리 안에 있을 때가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거든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꼭 음악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때 본인이 나아갈 내실을 다져라. 특히 유리할 때 내실을 다져라. 또 이 말도 해주고 싶어요. H.O.T.란 그룹이 다섯 명이었을 때 10만 명의 팬클럽을 보유하고 있었으면 해체하고 솔로로 나오면 2만 명은 내 거겠지, 그중에 내가 인기가 솔직히 말해서 좀 상위권이었다고 치면 2만 5천, 3만은 될 거야, 아니에요. 5천으로 줄어요. 그걸 아이돌 그룹 아이들은 아무리 들어도 체감을 못 해요. 저도 그랬고요. 그래서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앨범, 좋아했던 앨범을 소개해 달라.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Appetite For Destruction>, 종전에 언급한 조지 마이클의 <Songs From The Last Century>, 그린 데이(Green Day)의 <Dookie>요. 건즈 앤 로지스의 <Appetite For Destruction>의 이유는 개인적이에요. 제 음악의 시작이었거든요. 여러분도 ‘내가 언제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했지’ 하는 그 음반은 항상 기억할 의미가 있다는 뜻에서 권하고요. 그린 데이의 <Dookie>는 굉장히 편하게 록을 접할 수 있는 앨범이잖아요. 록을 많이 권하고 싶어요. EDM이나 팝은 누가 권하지 않아도 잘 찾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쉽게 들을 수 있는 록의 재미를 그린 데이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권합니다. 조지 마이클은 돌아가셨지만 제 음악적 롤 모델이었어요. 되게 다양한 음악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이 사람이 지금 하고 있는 이렇게 많은 장르에 다 깊이가 있을까, 장르를 너무 남발하는 거 아닐까 하는 약간의 의심이 있었거든요. 그런 제게 뒤통수를 때린 음반이 <Songs From the Last Century>였어요. 예전 음악을 리메이크해서 이정도 퀄리티를 만들어 내면 다른 음악도 이 정도 할 능력치가 있다는 게 증명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제 롤 모델이에요.

 

인터뷰 : 임진모, 정민재
정리 : 임진모
사진 : 한정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상규 “독립운동가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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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예우를 다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국가가 안보 위협에 빠졌을 때, 누가 그들처럼 목숨을 걸고 우리와 우리 가족과 나라를 위해 싸우겠습니까?” 정상규 저자는 말했다. 평범한 한 청년이 독립운동가들의 빛 바랜 흔적을 찾아가면서, 그 정보들을 모아 앱을 만들고 책을 쓰게 된 이유였다.

 

그는 지난 2015년 ‘독립운동가’라는 이름의 비영리 앱을 개발해 배포했다. 이 앱을 설치하면 독립운동가와 순군선열의 서거일마다 알람을 받아볼 수 있고 해당 인물의 약력과 사진,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앱은 186명의 숭고한 삶을 증언하고 있고, 그 가운데 67명의 이야기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에 담겼다.

 

광복을 맞은 후 7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앞에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쌓여있다. “서거일이 역사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가 고작 186명”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삶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축적한 부와 지위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은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나올 법도 하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은 외면당하고, 자신의 안위만 추구한 이들은 호의호식하는 곳.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헬조선’이라 부른다. 모두가 탈출을 꿈꾸는 이 땅이 ‘자랑스러운 조국, 지켜야 할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기억돼야 할 사람들과 응당 비난 받아야 될 사람들을 가려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그 출발점에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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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주권 포기하고 ‘헬조선’으로 돌아온 이유


‘독립운동가’라는 앱은 어떻게 만들게 되셨어요?


2015년에 앱을 만들었는데, 당시에 가장 이슈가 됐던 게 국정화 교과서였어요. 왜곡되거나 획일화된 역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많았죠. 그런데 문제는 근현대사 교과서나 한국사 시험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독립운동가의 수가 너무 적다는 거였어요.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운동가가 2만 명인데, 교과서에는 채 20명도 안 나와 있는 거죠. 이 숫자가 계속 반복되고 있고요. 각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교과서들을 다 봤는데도 등장하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바뀌지 않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왜 이 사람들만 중요한 거지? 다른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은 건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그게 ‘독립운동가’ 앱을 만든 시작이었어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앱 사용자가 책 집필을 부탁한 적도 있다고요.


저학년 자녀를 둔 분이셨는데, 아이한테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들려주고 싶으셨대요. 그런데 앱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조금 한계가 있다고, 책으로 내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책을 한 권 썼었거든요. 『Ryan 정이 말하는 미국 유학의 모든 것』 이라고, 그 책을 쓸 때도 굉장히 오래 걸렸고 많이 힘들었어요. 책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은 과정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사실 망설였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를 쓰신 이유가 있나요?


그때 지하철에서 대학생 무리와 마주쳤어요. 하필 제 귀에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들렸고요. 무슨 소리인가 하고 듣다 보니까 다들 이민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나라냐고 하면서요. 그 말을 듣는데 굉장히 화가 나더라고요. 얼마나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얻은 나라인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그냥 얻어진 게 아닌데, 몇몇 소수의 인물들로 인해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젊은이들이 이민 간다는 소리를 하니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앱에 글을 남겼는데 많은 분들이 ‘앱이나 책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댓글을 남겨주셨어요. 그런 의견들이 모이면서 책을 출간하는 데 동기 부여가 됐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할 수만 있다면 헬조선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말해요. 저자님의 선택과는 정반대예요. 예일대 대학원에 합격한 상태에서 진학과 영주권을 포기하고 귀국하셨죠?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쓴 『Ryan 정이 말하는 미국 유학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 큰 원인이었어요.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나 교환학생들을 효율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제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모았던 자료들을 모아서 쓴 책이었는데요. 그 책의 서문에 ‘이 책을 읽고 성공적으로 유학생활을 마무리 지은 후에 미국에서 성공해서 국위선양 해 달라, 당신들이 대한민국의 가능성이다, 당신들은 미국 사람이 되려고 미국에 온 게 아니다, 그 초심을 잃지 말아라’라는 말을 적어놨거든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잊고 살았더라고요. 공부하면서 영주권이라든지 많은 기회에 노출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미국 사람이 돼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책을 다시 보게 된 거죠. 마침 한국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고요.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고요.

 

귀국 후에는 군에 자원 입대했어요.


급히 한국에 왔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버지 병세가 훨씬 더 안 좋았어요.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고 살았구나, 덜 중요한 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죄송했어요. 후회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군대에 가야 될 나이더라고요. 일반 병사로 갔다가는 매일 부모님을 모시기 힘드니까, 오래 걸리더라도 장교로 복무하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딱히 고민도 안 하고 공군 장교를 준비했죠. 지금도 ‘내가 만약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끔찍해요. 그래서 제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요. 한국에 와서 더 많은 걸 얻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군대라는 조직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많은 깨달음을 얻고 성장했어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오래된 역사가 아니에요. 제 아버지가 70대이시고, 친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를 겪으셨거든요?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예요. 옛날이야기가 아닌 거죠. 그런데 점점 개인주의, 이기주의, 자본주의가 팽배해지다 보니까 계속 경쟁만 하고 자신의 능력만 올리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겉으로 보이는 재주는 많은데 인문학적 소양이나 국가관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요. 점점 세계는 하나가 돼가고 있는데 자기 나라에 대한 역사라든지 최소한의 안보관, 국가관이 없으면 어떻게 국격을 갖추고 당당하게 세계를 무대로 나아갈 수 있겠어요. 좋은 학교를 나오고 외국어를 잘해도 국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거나,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대답도 못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국민들도 알아야 하지만, 사회에서 힘 있는 사람들이 더더욱 이들을 기억하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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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책을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많은데요. 그만큼 분노하게 되는 순간들도 있어요. 저자님도 그러셨겠죠?


보훈처에 등록돼 있는 독립운동가는 2만 명이나 되는데, 서거일이 확인되는 사람은 너무 적어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거죠. 제가 그 입장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씁쓸하더라고요. 똑같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누구는 기록에 남아서 후손들이 혜택을 입고 국가가 예우해주고, 누구는 생사도 모르게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거잖아요. 그들에게는 무슨 예우를 해주고 있을까요?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후손도 없는데, 무슨 예우가 있을까요. 후손이 없으니까 묘소를 관리할 수도 없을 거고 지원금도 없을 거잖아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화가 나더라고요.

 

관련 자료를 모으시는 과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자료가 너무 많으니까요. 국가보훈처에는 없지만 독립기념관이나 광복회 자료에는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 자료들에는 고문 과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보면서 소름이 돋거나 가슴 아프고 눈물 날 때도 있었죠. 제 입장에서는 그 내용들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계속 곱씹고 소화시켜서 다시 써야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감정 이입을 하게 됐고,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책을 쓰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앓이가 심해지고, 항상 힘들고 지치고,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결여돼 있는 사람한테는 저도 모르게 예전보다 비난의 수위를 높이게 되더라고요.

 

그만큼 어깨가 무거워지셨겠어요.


처음부터 사명감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런 사람을 계속 보고 옆에 두고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사명감 비슷한 게 생기더라고요. 그게 굉장히 무서운 것 같아요. 누군가 ‘독립운동가’ 앱에 등록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있다고 제보해주면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도 ‘집에 가자마자 이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제 일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저한테 생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렇게 2년 넘게 생활하다 보니까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아지고요. 저에게 힘을 주시고 같이 동참해 주시는 분들이 계속 생겨요. 그래서 저도 보람과 힘을 많이 얻었죠.

 

‘독립운동가’ 앱의 운영비용은 자비로 충당하신다고요.


앱을 혼자서 다 관리하다 보니까 어려운 부분도 있어요. 매달 10만 원 정도의 금액이 나간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앱과 관련된 일을 제가 다 조절하고 통제해야 하니까 다른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누군가는 앱에 광고를 실으라고 하더라고요. 회원이 10만 명쯤 되니까 광고 수입을 가지고 관리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독립운동가’ 앱에 광고를 싣는 게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독립운동가들을 알리기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광고를 실어서 돈을 번다는 게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따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운동가’ 앱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회원 분들께도 약속 드렸어요. 그 약속을 지키고 있고요.

 

기업들이 후원해줄 법도 한데요.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은 없으세요?


없었어요. 공신력 있는 기관이나 언론사에서 다뤄주지 않으니까 기업에서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언론에서 많이 다뤄주면 사회적인 책임이나 의의에 관심 있는 기업들이 나서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있어요.

 

독립운동가들이 굉장히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어요. 심지어 사회적 약자인 이들도 있었다고요. 그 사실을 강조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실제로 통계를 확인해 보니까 당시에 힘이 있었거나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더라고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직업을 보면 농부들, 천민들, 기생, 고아, 고등학생 같은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었어요. 거기에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이었죠. 항일의병도 정식 교육을 받은 군인이 아니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낫, 호미, 곡괭이를 들고 일본 군인들과 싸운 거죠. 평범한 국민들이 독립운동을 한 거예요. 결국 그 사람들은 가슴으로 대화한 거예요. 이성이나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한 게 아니라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내 자식에게는 절대로 이걸 물려주지 말아야겠다’ 그런 순수한 마음과 가슴이 움직이는 말들로 뭉친 거예요.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


보훈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를 생각한다는 것이 특정 계층들만 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 같은 평범한 국민들이 70년 전에는 독립운동가가 됐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나선 거였다고요. 그걸 알게 되면 독립운동가들과 거리감이 줄어들 거고, 만약 우리나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우리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거잖아요. 그런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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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윤세주 장군’


책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따로 다루셨어요.


책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10/1도 안 돼요. 훨씬 더 많죠. 당시에 여성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건 훨씬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가부장적인 사회였고, 여성은 군대를 갈 수 없었잖아요. 나랏일은 남자들이 하는 거라는 인식도 있던 때였죠. 여성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해야 했으니까 ‘독립운동 하러 가면 아이들은 누가 키우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여성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과부가 많아요. 남편이 독립운동 하다가 전사하고, 그에 영향을 받아서 본인이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거죠. 대표적인 경우가 남자현 열사예요.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 씨가 연기했던 인물이죠.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제가 자료를 조사할 때 약 400명 정도 있었어요. 그 중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분은, 제가 파악했을 때 200분 정도였는데요. 사진도 없고 글만 있는 경우가 많아요. 글이라고 해도 당시 신문 기사에 이름이 언급된 정도죠. 사진이 남아있는 경우는 정말 찾기 힘들어요. 이 책에서는 그 중 일부를 꼽아서 특집으로 다룬 거고요.

 

박열, 김상옥, 남자현, 김원봉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영화화됐습니다. 아직 조명 받지 못한 이들 가운데 ‘이 사람의 이야기는 작품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인물이 있나요?


너무 많아요. 지금 스토리펀딩을 통해서 열두 분 정도를 선정하고 있기도 하고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분은 윤세주 장군이에요. 의열단의 창립 멤버로 의열단장 김원봉과 죽마고무였던 분인데요. 의열단은 처음에 소수정예로 운영되다가 점점 조직이 커지면서 당이라든지 군대의 형식을 갖추게 돼요. 그때 김원봉 선생이 약간 정치 쪽으로 빠졌다면, 윤세주 장군은 실질적으로 군대를 이용해서 중국의 공산당과 합작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어요. 마지막에는 4천 명의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 40만 명과 전투를 벌이다가 순직하셨죠. 그 전투에서도 본인이 앞에 나서서 이끄셨고,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빨리 후퇴하라고 부하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어요. 마지막까지 ‘단결해서 적들을 사살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고요.

 

윤세주 장군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의열단과 관련된 자료들을 찾다 보면 윤세주 장군과 김원봉 단장은 정말 자주 등장해요. 지금 김원봉이라는 인물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윤세주 장군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이 분의 일대기가 굉장히 이슈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계속 전투만 하셨기 때문에 그냥 전쟁 영화 같거든요. 그런 점에서 얼마든지 영화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 중에서 유일하게 의열단에서는 단 한 명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정말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 멤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봐요. 윤세주 장군도 그런 역할을 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조국을 위해 기득권을 버린 위대한 가문’도 특집으로 다루셨어요. 대표적으로 이시영, 이회영 선생의 일가가 널리 알려져 있죠.


두 가지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부가 있는 상태에서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람들이 있고요. 당시 계급으로 천민이거나 백정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한 경우도 있어요. 양진여 선생의 경우가 후자에 해당하는데요. 그 분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서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너무나 감사했고요. 그런 분들 한 분 한 분이 의미가 있죠. 그런데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대로 된 사진도 남아있지 않아요. 이런 걸 보면 안타까운 부분이 많죠. 저는 이런 분들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당시에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인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런 분들이 더 재조명이 돼서 알려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진정한 명문가라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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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 ‘쉽게’ 썼어요


독립운동가의 약력과 함께 그들의 정신과 신념을 나타내주는 말들이 수록돼 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굉장히 많은데요.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분은 남자현 열사예요.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선생님도 떠오르는데, 그 분들은 잊혀진 영웅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고요. 남자현 열사는 돌아가실 때 이런 유언을 남기셨어요.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거든 너의 자손들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그런데 자손들이 그 말씀대로 해요. 실제로 광복이 되고 나서 김구 선생에게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지난해에 군에서 제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세요?


보훈과 관련해서 사회적 약자라든지 유공자들을 대변하는 인권변호사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보훈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녹록지 않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이제는 열정 외에 실력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관련 법 지식을 쌓아서 조금 더 현실적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국내에 많은 로펌들이 있는데 왜 사회적 로펌은 없는지 모르겠어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들의 로펌이 없는 거죠. 그런 부분에서 제가 앞장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 책의 수익금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실질적으로 독립유공자 후손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했어요. 막연하게 이분들을 십시일반으로 돕자고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것보다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재능 기부를 한다든지, 어떤 플랫폼을 갖춰서 사람들을 모으는 게 필요해요. 그렇게 해서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들에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런 부분부터 바뀌면 정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인명사전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집필한 게 아니고,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 쉽게 썼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어린 세대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이런 책을 통해서 어릴 때부터 국가관, 역사관이 생기면 애국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것들이 형성돼서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 사회의 기득권들 가슴 속에 국가관과 애국심이 지금보다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정말 영향력 있는 사람들까지 가슴 속에 국가관을 품어서 세계무대에서도 당당함과 자격을 갖췄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때 시민의식이 향상되고, 진정한 광복과 독립이 이뤄지고, 진정한 선진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정상규 저 | 휴먼큐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과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아들, 딸이었고, 한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였습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아은 “인생이 꿈처럼 피어나는 일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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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세태의 관찰자’라 불리는 소설가 정아은. 헤드헌터의 시각으로 학벌주의 사회의 이면을 포착하고(『모던 하트』), ‘잠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신분 상승 욕구가 투영된 교육의 현재를 발굴해낸(『잠실동 사람들』) 그녀가 대한민국의 성형외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갖가지 욕망들이 한 데 엉켜 꿈틀대면서 민낯을 드러냈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버리고 싶은 욕망, 그 위로 그럴싸한 가면을 덮어쓰고 싶은 바람, 그리하면 사랑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어쩌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 어지러이 늘어서 있는 감정들 사이로 세 남녀가 걸음을 옮긴다. 한 여자와 두 남자, 서경과 성환 그리고 재희. 모두가 외롭지만 누구 하나 제 속살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이곳의 우리와 꼭 닮았다.

이 시대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설의 제목은 『맨얼굴의 사랑』인데 공간적 배경은 성형외과예요. 맨얼굴을 바꾸고 지우는 공간이죠.

 

성형외과가 우리 생활에 굉장히 많이, 공격적으로 들어와 있잖아요. 마치 성형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것처럼 돼버렸어요. 자신의 발전에 관심이 있고 인생을 성의 있게 열심히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성형을 해야 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성형외과라는 공간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말해줄 수 있는 첨단적인 배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하철만 타 봐도 알 수 있죠. 환승 통로에는 엄청나게 큰 액자에 전신 성형 광고가 걸려 있고, 내부에는 성형외과 광고가 붙어 있어요. 우리 눈을 촉각적으로 찌르다시피 하죠. 성형만 하고 나면 인생이 다 바뀔 것처럼 보여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흥미가 생겼어요. 어느 날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장소로 성형외과가 알맞을 것 같았어요.

 

사랑 이야기와 성형외과 사이에 어떻게 접점이 생겼는지 궁금한데요?


사랑의 패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전자기기가 우리를 포위하는 듯한 세상이 아니었을 때는 사랑의 색깔도 분명히 달랐을 거예요. 고전 작품에 나오는 사랑을 보면 훨씬 더 단순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제는 온갖 종류의 전자기기가 우리를 포위하고 있고, SNS를 통해서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을 공유하잖아요.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시대인 거죠. 그런데 진짜 자기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거잖아요. 진짜 자기에 대한 상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거고요. 지금은 자연스럽게 타인과 관계를 맺었던 문화가 많이 소멸되고 이상한 형태의 자기애가 남은 것 같아요. 이런 시대에 사랑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서경, 성환, 재희의 관계를 보면 피상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성형외과에서 얼굴을 바꾸듯이 각자의 본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맺는 관계와도 닮아 있고요.


타인에게 가까이 가는 걸 막는 장치가 너무 많죠. 일단 전자기기들이 그렇고, 사실 SNS도 우리를 가까이 이어주는 것 같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제가 되죠. 요즘 우리는 만나면 각자의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외롭고요. 서경이라는 인물은 항상 외모로 평가 받는 환경에 있었어요. 원래 걸그룹이 되고 싶었던 아이이기도 하고, 연예계에서 일을 할 때도 늘 외향으로 평가 받았어요. 자기 역시 남을 외향으로 평가했고요. 그러다가 성형외과로 간 건데, 그곳은 더한 환경이었던 거죠. 서경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모 중심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측면이 있어요. 그런 상태에서 버림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참을성 있게 사람을 통찰하거나 깊이 다가가거나 꿰뚫어 보는 눈도 없는 거고요.

 

성형외과라는 공간과 연예계라는 작은 사회를 결부시키신 이유가 궁금했는데, 둘 사이에 그런 공통점이 있었군요.


연예계는 가장 찬란하게 반짝이는 곳이잖아요. 성형외과는 그런 문화를 생산해 내는 곳이고요. 그러니까 서로 맞닿아서 이루어지는, 우리 현 세태를 보여줄 수 있는 굉장히 상징적인 산업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예계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취재기가 재밌을 것 같아요.


처음에 생각했던 사랑 이야기가 있는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먼저 떠올렸었어요. 여자 쪽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와 남자 쪽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를 교차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막연하게 남자는 유명 인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제 안에서 계속 이야기가 자라면서 점점 연예계와 성형외과로 가는 거예요. ‘어떻게 연예인을 인터뷰할 수 있겠어, 포기해야지’ 했는데 이야기가 잊히지 않더라고요. 결국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쪽 방면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원래 연예계에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연예인을 만나지는 못했고요. 어떻게든 만나보려고 연예인 팬클럽에 다 가입했어요.

 

연예인 팬카페에 다 가입하셨어요?


그럼요. 팬들과 이야기하면서 연예계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어요. 그리고 연예인들이 쓴 책을 다 읽었죠. 그러다 보니까 연예계에서 조금 알 것 같더라고요. 그 상태에서 연예인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메이크업 아티스트, 매니저, PD, 드라마작가, 촬영감독, 작곡가 등 수많은 사람들의 책도 읽었어요. 그 자체로 재도 있었고, 누구를 인터뷰해야 될지 감이 오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읽었던 책을 중심으로 인터뷰할 만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서 연락을 했죠. 그 과정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 있겠나 싶었는데, 하다 보니까 정말 재밌더라고요. 제가 한 번도 접해보지 분야의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제 세계도 넓어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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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꿈처럼 피어나는 일은 없어요


서경이는 드라마 작가를 꿈꾸지만 계속 등단에 실패해요. 그 과정에서 열등감과 불안감에 휩싸이고요. 작가님도 등단 전에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나요?


그럼요.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꿈을 버리지 못하는 제가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죠. 우리는 꿈을 갖고 달려가면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꿈꾸지만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알죠. 그리고 지금도 그래요. 등단만 하면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등단을 하고 나서 제가 얼마나 많이 부족한지 알게 됐고요. 그러니까 그런 감정은 항상 갖고 있죠. 그런 점에서 꿈에 모든 걸 다 거는 것의 위험성, 꿈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뭔가 하나를 정해놓고 ‘이것만이 나의 전부야’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다양한 자아를 가꾸고 더 다양한 일상생활에 만족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해 가는 게 우리 삶을 위해서는 더 좋은 것 같아요.

 

한 순간에 삶을 바꿀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성형외과를 찾는 사람들도 ‘수술만 하면 인생이 180도 달라질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없겠죠. 결혼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맞아요. 제가 성형외과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고요. 영화를 봐도 결혼에 성공하면 거기에서 사랑 이야기가 끝나잖아요. 하지만 사실은 결혼한 이후가 더 중요하죠. 성형도 그래요. 성형하고 나면 인생이 바뀔 것처럼 광고하지만, 그 이후의 삶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야 하죠. 성형이든 결혼이든 꿈이든, 뭐든 다 걸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갑자기 인생이 꿈처럼 피어나는 일은 절대 없어요. 성형이 상징하는 게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절대라는 건 없잖아요. 우리 삶은 정말 다양한 순간순간으로 계속 흘러가는 거죠.

 

성형외과를 취재하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충격적이었을 텐데요.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수술 장면은 동영상으로 봤어요. 수술 현장에 참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었죠. 상담실장 분들을 인터뷰했었거든요. 저는 인터넷 동영상으로 수술 장면을 봤는데도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성형수술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형수술은 절대로 ‘1 1=2’가 아니에요. 수술 전과 후가 너무 달라지는 거죠. 이전의 나라는 사람의 외모를 잃어버리는 거거든요. 제가 성형수술에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성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는 성형의 홍수 속에서 ‘성형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성형을 외면하기 힘들어요. 그래도 자신이 뭘 하는지는 반드시 많이 알아보고, 그러고 나서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성형 이후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보고요.

 

성형외과를 찾아온 환자들의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외모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니에요. 정신적인 콤플렉스나 마음의 병을 외모로 해소하려는 경우도 있어요.


자신의 인생에서 관계로 인해 풀리지 않았던 부분이나 아팠던 부분, 자기는 사랑했지만 사랑 받지 못했던 부분, 혹은 버림받았던 기억들의 원인을 어떤 한 가지에서 찾고 싶은 거예요. 그걸 탓하면서 ‘이것만 해결되면 다 풀릴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죠. 사람들은 명쾌한 답을 원하잖아요. 특히 우리는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항상 외부에서 누군가가 ‘넌 이렇게 해야 돼’라고 말해주기를 바라요. 그러니까 외부 요인을 하나 찾아내서 ‘내 인생이 골치 아픈 건 다 이것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고, 그것만 해결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고 싶은 거예요. 그런 기제들 중 하나가 성형인 거죠. 그렇지만 성형을 하더라도 그런 문제들은 계속 이어진다는 걸 알아야 돼요.

 

외모를 통해서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망도 숨어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사랑 받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거나 미움 받는다고 느끼면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해요. 이유를 아는 것과 모르는 건 큰 차이거든요. 만약 잘 사귀던 연인이 갑자기 날 떠났는데 그 이유를 모른다면, 자기의 모든 게 싫어져요. 내가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서 싫었나, 큰 웃음소리가 싫어서 떠났나, 하는 식으로 자기의 모든 것에 뒤집어씌우게 되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유를 한정 짓고 싶어 해요. 내가 돈이 없어서 날 떠났을 거야, 라고 믿는 식이죠. 그렇게 믿으면 나는 ‘돈만 있으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외모만 바꾸면 사랑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범위를 한정시켜서 구체적으로 탓하면 훨씬 살기가 편해지는 거죠.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거예요.

 

성환과의 관계에서 서경이 보여준 모습도 다르지 않았죠.


그렇죠. 그게 유한한 우리 인간들의 한계이고 불쌍한 점이죠. 저도 그렇고 누구나 다 그런 것 같아요. 자본은 항상 그런 부분을 치고 들어오고요. 외모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성형 자본이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거죠. 제가 『잠실동 사람들』에서 교육에 관해 썼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건 좋은 학원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잖아요. ‘우리 아이가 왜 공부를 못하는지 모르겠어’ 보다는 ‘돈 많이 들여서 좋은 학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는 게 자기 마음이 편한 거예요. 부모의 경우에는 그런 지점에서 사교육 자본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거죠.

 

교육 사업과 관련해서 ‘불안 마케팅’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자본이 침투하는 방식이 다 그런 것 같아요. ‘돈만 내면 당신의 불안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하는 거죠. 거기에 익숙해질수록 ‘불안을 견디는 체력’은 점점 약해지고요.


존재와 관계의 문제, 거기에서 오는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끌어안는 법을 배우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잖아요. 그렇게 하는 방법을 점점 모르게 되고요. 그럴 때 사방에서 자본이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우리가) 어딘가에 불안을 느끼면 바로 다가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돈을 내고요. 그런 식으로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자본에 묶여서 잘못 투자한 것 때문에 더 끔찍한 결과가 올 수도 있는 거거든요. 성형도 그렇고 사교육도 그렇고, 다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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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개의치 않는다는 말, 위선 아닌가요?


서경과 성환, 재희의 관계에는 감정 외에 물질적인 것이 결부된 것 같아요. 우리는 사랑이 ‘숭고한 정신적 행위’여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물질적인 것이 끼어들면 속물이라고 하고요. 어쩌면 그게 환상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이미 자본이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는 상태에 살고 있죠. 우리 안에 수많은 자본주의적 욕망이 들어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끌어안아야 되고 속물적인 나를 인정해야 돼요. 그런 상태에서 상대의 속물성과 나의 속물성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죠. 그래야 더 큰 파탄에 이르지 않을 수 있어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파악하고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파악해야 돼요.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조금이라도 더 비자본주의적인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이상적으로 상정해 놓고 ‘나는 돈은 개의치 않아’라고 생각하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위선인 것 같아요.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셨을 때 “통속과 품위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셨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작가들마다 몫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쓰잖아요. 어떤 작가는 굉장히 초현실주의적인 걸 쓰고, 또 어떤 작가는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걸 쓰는데, 그렇게 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몫이 있는 것 같아요. 10년 후의 저는 형이상학적인 걸 쓸지 모르겠지만, 지금 제가 쓰고자 하는 건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거예요. 저는 제 삶과 맞닿아 있는,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과 맞닿아 있는 주제에 천착하고 싶거든요. 제가 끌렸던 소설들도 그랬어요. 박완서 작가님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데, 우리의 생활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우리의 생활사와 풍속사, 역사가 다 담겨있어요. ‘통속과 품위의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는데,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이 딱 그런 것 같아요.

 

작가마다 제 몫이 있다고 하셨는데, 소설가 정아은의 몫은 어떤 걸까요?


늘 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현실에서 손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어떤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시적으로 굉장히 아름답게 쓰는 작가들도 있죠. 저도 그런 작가들을 좋아해요. 동시에 현실에 기반을 두고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문제들에 천착해서 그 이면을 드러내는 몫을 하는 작가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쪽에 제 몫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일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이면을 파헤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현실을 그대로 쓰려고 노력하는 거고, 그 결과 ‘통속과 품위의 경계’에 있다는 평을 듣게 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잠실동 사람들』을 출간하신 후에 <채널예스>와 인터뷰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고 하셨는데요. 『맨얼굴의 사랑』이 달달하지만은 않은 것 같거든요(웃음).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은 이 소설 전에 쓴 작품이 있었어요. 1400매 정도 썼는데 너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버렸어요. 똑같은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였고 사랑도 훨씬 더 달달했어요. 서경은 더 자신감 있고 합리적인 여성이었고요. 그런데 제 스스로 설득이 안 된다고 할까요, 읽어봐도 몰입이 안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버렸고 『맨얼굴의 사랑』은 서경이라는 인물로 시작해서 서경이의 마음이 가는 대로 썼어요. 그 결과 소설에 그려진 건 아픈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랑하는 마음은 이번 소설이 훨씬 강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쓰면서도 서경이가 굉장히 사랑했던 마음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달달하지 않고 아플지라도, 사랑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제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이었어요. 서경이라는 인물은 가진 것도 없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인간관계에서도 번번이 실패했지만, 한 순간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영혼이에요. 남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살면서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법도 알지 못했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데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사랑하려 애썼어요. 지금 우리는 기술의 발달로 인한 삭막한 환경 속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본에 포위된 채 살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우리의 가장 핵심적인 본성인 ‘사랑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랑은 인간이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끈질긴 특성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죠.


 


 

 

맨얼굴의 사랑정아은 저 | 민음사 |
도시의 갖가지 군상과 인간의 비루한 감정을 절묘하게 캐치해 온 작가는 이번 장편소설 『맨얼굴의 사랑』에서 대한민국 성형외과의 안과 밖을 치열하게 그려 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상미 시인 “좋은 작가들은 양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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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으니 김상미 시인의 시력은 더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말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시인이 품은 작가들, 그들의 생과 죽음, 그리고 문학.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에서 시인은 카프카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프란츠 카프카 특급열차를 탄다. 사드와 마주 앉아 본래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르네 샤르의 집으로 가 큰소리로 그의 문을 두드린다. 잉게보르크 바흐만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고,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말한다. “아, 콜레트처럼 살고 싶어!”라고 했던 전혜린에 이끌려 콜레트를 찾아간다. 시인은 말한다. 이들 작가에게는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고. 어려워도 문학을 삶보다 우선했던 작가들 주변을 서성이겠노라고.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이후 14년 만에 네 번째 시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를 내고 “참 좋았다”는 김상미 시인은 그 마음이 반가워 머지않은 시기에 다섯 번째 시집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언어에 대한 신뢰가 더 많이 생겼고요. 글도 많이 쓰고 싶어졌어요.”라는 시인에게서 도리어 설렘을 전달 받은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가만히 서서 바람이 참 좋다, 살아야겠다, 하고 읊조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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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과의 데이트


제목에서 발레리의 시구를 차용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단번에 매료되었다고도 하셨잖아요.


제가 부산 출신이에요. 바닷가에서 태어났죠.(웃음) 발레리를 처음 보았을 때가 80년대 후반 정도였는데요. 그때는 전문이 번역되지 않고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하는 그 부분만 번역이 되어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굉장히 멋지게 느껴지더라고요. 바람이 부니까 살아야겠다, 정말 멋지잖아요. 또 보면 파도를 작은 돛단배에 비유했는데 그런 것이 참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발레리를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2-3학년 즈음에 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이 나왔거든요. 300원이었어요. 그걸 모으면서 시를 많이 좋아하고 읽었죠.


나이가 드니까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말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뜻으로 여겨져요. 그래서 또 좋고요.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라고 하면 더 적극적인 느낌이 들잖아요. 출판사에서 정해준 제목인데요. 참 마음에 들어요.

 

시인의 글을 모두 품는 느낌도 있어요. 제목이 글과 잘 어울려요.


화가 나서 지나가다가도 길가에 민들레가 예쁘게 핀 것을 보면, 그것도 시멘트 바닥에 피어 있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잖아요. 희망적인 느낌을 주잖아요. 제목도 그런 느낌이 들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네요. 책에서 다룬 11명의 작가들은 사실 힘든 삶을 살기도 하고, 여러 오해 때문에 세상과 갈등하며 지내기도 했잖아요. 시인은 그럼에도 그 안에서 삶의 경이, 희망 같은 것을 읽어내고 있어요.


이 글을 쓴 건 십 년 정도 됐어요. 문예지에 산문 연재를 했는데요. 아무거나 써도 된다고 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한 짧은 평전을 쓰면 어떨까 싶었어요. 일명 ‘유령과의 데이트’였죠.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서 작가를 만난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두 군데에 1년 씩 연재를 한 글이에요. 뒷부분에 있는 카렐 차페크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좀 다르죠. 이들은 시인의 기호에 대해 쓴 글이고요. 마르키 드 사드는 ‘에로티시즘과 문학’이라는 특별 코너에 썼던 글이에요. 그렇게 쓴 글을 묶은 거예요. 

 

그랬군요. 어쩐지 사드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어요. 흔히 ‘사랑한 작가’로 꼽는 작가라고 할 때 쉽게 떠올리는 작가는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역시 시인의 시선에 애정이 있죠.


사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읽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서였어요. 그때 관심을 갖고 읽었어요. 사실 사드는 너무 방대해서 제가 감히 다룰 만한 작가는 못 돼요. 특집을 맡으면서 그렇다면 내가 아는 사드를 대담하는 방식으로 써보자 생각하고 글을 쓴 거죠. 솔직히 사드의 작품은 너무 읽기 힘들어요. 그런데 사드가 갖고 있는 박식함, 통념이나 관습을 전복시키는 철학적인 부분 등은 굉장한 통쾌감을 주죠. 사드는 자신을 자연이라 생각했어요. 자연은 무차별적이잖아요. 또 그걸 계속 반복해요. 잔혹한 성행위를 계속 반복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면이 흥미진진했어요. 시지프와 이카루스가 합쳐진 괴물 같은 느낌이 많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유일무이하잖아요. 문학사에 이런 녀석(웃음)은 없으니까요.

 

다시 있기 힘들 것 같은 존재죠.(웃음)


인생도 참 처절하죠. 굉장한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생의 1/3 이상을 감옥에 갇혀서 살았어요. 그 안에서 작품을 써냈고요. 사드는 악을 다뤘잖아요. 누군가는 선을 추구하지만 사실 선과 악을 다 알면 훨씬 자유로워지거든요. 그런 이유로 사드나 로트레아몽 같은 작가를 좋아해요. 사드의 작품을 안 읽어도 돼요. 철학을 뒤엎는 이 사람의 서간문이나 산문을 보면 진짜 통쾌해지는 면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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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인이 사랑하고 사랑한 작가 11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잖아요. 이들 작가들을 관통하는, 이들의 삶과 문학이 주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시인이 이들 작가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거예요.


이 사람들은, 사드조차도 심중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어요. 사드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세상에 대한 복수의 글을 쓴다고 말했지만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악을 드러낼 수가 있는 거거든요. 자기가 좋아하는 선배 작가들의 모든 악적인 면을 모아서 로트레아몽이 『말도로르의 노래』라는 시집을 냈죠. 로트레아몽은 일찍 죽었는데요. 그 시집을 출간한 후 모든 선을 모아서 또 『시:미래의 서적에의 머리말』이라는 시집을 냈어요. 이런 것이죠. 또 이 작가들의 생이 저는 참 좋아요. 문학 때문에 삶이 망가지기도 했잖아요. 그럼에도 문학을 우선에 두었던 삶, 그런 삶들이 참 좋아요. 저는 그렇게 못 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구두 뒤축이 다 닳도록 그들 주변을 서성이는 게 좋아요. 

 

이 중 특별히 좋아하는, 여러 번 들여다보게 되는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역시 제일 처음에 소개한 카프카일까요? 카프카를 ‘점점 좋아지는 작가’라고도 표현하셨죠.


카프카는 문체가 참 좋아요. 참 간단, 단순하게 쓰는데 끔찍하잖아요.(웃음) 볼 때마다 새롭죠. 카프카는 평생 읽을 것 같아요. 제 글쓰기에도 도움이 되고요. 이 사람이 남긴 짧은 글이나 우화시 같은 것은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을 주더라고요. 계속 읽어야 하죠. 아직 다 읽지도 못했고요. 또 르네 샤르는 제가 시인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 커요. 책에 실린 11명 중에 시도니 콜레트나 니콜라이 고골 정도를 제외하곤 거의 시를 쓰거나 했는데요. 덕분에 이들이 제 시에 도움도 많이 줘요. 이들의 정신이 말이에요.

 

정신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 편이 갈려 있잖아요. 그럴 때 이런 작가들이 힘을 안 주면 우리 같은 사람은 못 버티죠.(웃음) 감히 이 작가들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이들이 저한테 좋은 기운을 주니까요.

 

시인의 쓰기에도 도움을 많이 준다고 거듭 말씀하시네요.


평생 배워야 하죠.(웃음)

 

작가 소개글에서 언제나 시인 곁에는 책이 있었다고 하고 있는데요. 그와 같은 배움에의 의지나 욕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읽는 걸 좋아해요. 쓰는 것보다 읽는 걸 더 좋아해요. 힘들고 그럴 때는 추리소설, 스릴러, 범죄소설을 잔뜩 빌려 놓고 봐요. 그러면 위로가 돼요.

 

추리소설이요? 의외예요.


추리소설은 심리학과 비슷해요. 인간 심리를 잘 다루고 있죠. 여러 인간형들이 나오잖아요. 게다가 요즘 외국 추리소설 작가들, 정말 잘 쓰더라고요. 굉장히 문학적이죠. 의사나 기자로 활동하던 전문가들이 쓰는 경우도 많고요. 덕분에 세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게 되고, 재미있어요.

 

결국 시인이 매료되는 것들은 삶의 이면, 일상의 바깥에 위치한 어떤 것들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기도 하지만요, 제가 매료되는 것은 삶 자체이기도 해요. 그들이 그들의 삶 자체에서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살았는가, 하는 것이죠. 글을 쓰면서 포기해야 했던 생활들이 있잖아요. 안타까움도 있고, 아쉬움도 있죠. 카프카에 대해서도 ‘밀레나와 계속 사랑을 유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했잖아요. 그런 삶 앞에서 작가들이 어떻게 했는지, 이런 것들을 지켜보는 것 역시 저한테는 도움이 많이 됐어요. 잉게보르크 바흐만 같은 경우도 그렇죠. 사랑에 계속 실패하잖아요. 파울 첼란과 사랑에 빠졌는데 잘 안 됐죠. 그래도 이 사람들은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바흐만의 유언에 따라 2025년까지 편지가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요. 개봉되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여러 작가의 삶을 생각하는 것이 많이 도움이 돼요.

 

작가의 삶을 엿보고, 상상하는 것이 시인의 문학이나 삶에도 바로 연결이 되나요?


네, 언어를 쉽고 간결하고 깊게 쓰는 데 굉장한 도움이 돼요. 이들의 문장에서 많이 배워요. 가령 ‘고독’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문장을 창조할 수 있는 발견도 주고, 재치도 주죠. 작가의 문장들은 저에게 지혜를 줘요. 사는 데도 도움을 주고요. 인간성을 잃지 않고 생각한 대로 사는 데 이들이 많은 힘을 주죠. 이들은 다 소신껏 살아왔잖아요. 남이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지 몰라도 본인들은 자기가 가진 그대로 살았잖아요. 결국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해도 그 삶 자체를 볼 때는 이해도 되고, 아름다워요. 아마 후회도 없을 것 같은 느낌 들어요. 그래서 나는 죽은 사람을 더 좋아해, 죽은 사람과 더 잘 놀아, 이런 말도 하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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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 시(詩)자와 사람 인(人)자


잉게보르크 바흐만이나 거트루트 스타인처럼 특히 여성 작가들의 삶에서 시인이 읽어내는 면들이 와 닿았어요. 이중의 고통이잖아요. 사는 동안 사회적 성공이나 명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맞아요, 거트루트 스타인과 시도니 콜레트는 같은 시기 파리에서 살았어요. 20세기 초, 전쟁이 두 번 일어날 동안 말이죠. 거트루트 스타인은 남자와 연애는 안 했어요. 그 주변에 참 똑똑한 여자들 많았는데 양성애자들이 많았죠. 그 시절이 성에 대해 많이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사회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그들 스스로 말이에요. 방종이 아니라 자유로움이었는데요. 멋있어 보이죠.(웃음) 시도니 콜레트는 방종하다고 할 정도로 성에 대해 굉장히 자유로웠는데요. 그러면서도 열심히 글 쓰고 해서 사회에서 인정도 받았어요. 프랑스에서 국장까지 치러줬을 정도로요. 이런 사회가 부럽죠. 우리 나혜석, 그렇게 죽게 내버려뒀는데 말이에요. 전혜린도 그렇게 못살게 했는데, 그러니까 그런 사회가 부러운 거죠.

 

자연스럽게 사회가 어떻게 다양성을 수용하느냐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가게 돼요.


모두 여걸들이죠. 파리를 중심으로 한 그 시대가 끝나고는 페기 구겐하임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예술가도 도와주고, 콜렉터로서 많은 역할을 하잖아요. 여성들의 그런 활동이 좋아요. 그들의 사생활이 어떠했든 상관없이 말이에요. 

 

책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나만의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나만의 작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예요. 그의 글도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 의식도 되게 좋아해요. 고흐의 편지가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 나왔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참 다정한 사람, 따뜻한 사람이었고요. 인생을 보는 눈이 인간적이더라고요. 그때 고흐가 좋아했다고 하는 것들도 찾아보고 그랬죠.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의 혁명 시인이에요. 집시들의 생활을 많이 노래했거든요. 로르카는 언어가 대단해요. 달의 시인 같아요. 시인으로서 많이 좋아하는데 삶도 흥미롭죠. 로르카가 마드리드 대학에서 살바도르 달리를 만난 이야기가 영화로도 나왔잖아요. 로르카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고요. 네루다의 자서전에서 로르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보면 그는 항상 주변을 환하게 해줬다고 해요. 그런데 저도 로르카의 글을 보면 참 아름답다고 느껴요. 어떤 것은 비단을 발밑에 쫙 펼치는 것 같아요.

 

국내 작가 중에서는 누구를 좋아하세요? 


우리가 좋아하는 백석이나 이상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이 나와 있죠. 만약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쓴다면 이승훈 시인과 김승희 시인을 쓰고 싶어요. 두 분은 제가 시 세계도 좋아하지만요. 그분들의 지적 탐구를 따라가도 재미있거든요. 정말 지적인 분들이에요. 


조세희 시인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엮어서 재미있는 것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액자소설 같은 것을 한 번 써보고 싶어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다른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카렐 차페크나 프란츠 카프카 등을 시인으로 말하기 좋아한다는 대목이 있거든요.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져요. 


시인은 꿈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때로는 악몽을 꾸기도 하고, 때로는 좋은 꿈을 꾸기도 하죠. 시인은 그것을 기록한다는 생각이 요즘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좋은 꿈뿐만 아니라 악몽까지, 이 모든 게 다 필요하죠. 차페크의 경우 문장이 거의 시예요. 한 부분만 살짝 가져와서 제가 발표하면 그대로 시가 될 거예요.(웃음) 그 정도로 문장이 시적이고요. 카프카는 우화시를 많이 썼잖아요. 책에는 짧은 시를 닮은 「인디언이 되었으면」을 소개하기도 했고요. ‘시인’은 시 시(詩)자와 사람 인(人)자잖아요. 그래서 시와 인간이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거든요. 인간은 별로인데 시만 잘 쓰는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해요. 이 사람들처럼 인생과 문학을 같이 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제 마음대로 생각해요.(웃음)

 

적어도 시인이라면 삶과 문학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중요하게 들리네요.


시인으로서 시를 안 쓰면 아무리 잘 쓴 것을 읽어도 공허해요. 감동이 덜 오기도 하고요. 그건 전해지는 것 같아요. 느껴져요. 하지만 너무나 기교가 뛰어나면 무시할 수는 없죠. 그것도 하나의 재주고, 그의 능력이니까요. 다만 어설프게 한 것들은 금방 탄로가 나요. 발레리는 굉장히 지적이잖아요. 그보다 지적인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할 정도인데요. 이 사람이 쓴 아포리즘 보면 참 대단해요. 그런데 이 사람은 불쑥 찾아오는 영감, 이런 것들이 자기를 무너뜨릴까봐 고민했잖아요. 그걸 보면 ‘그냥 시를 쓰지’(웃음) 할 정도죠. 하지만 다 제각기 자기들의 추구하는 형이 있으니까 이해해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런 것을 보면서 느끼거나 건지는 것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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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히지 않는 나비, 글자들과 함께 날아가다


과거를 살았던 이들 작가가 지금도 살아서 말을 건네요. 바로 문학의 위대함이기도 할 텐데요. 이들이 시인의 오늘에 어떤 말을 건네고, 시인은 이들에게서 어떤 응원을 받으세요? 


여기 나오는 작가들은 계속 번역이 되어 나오고 있잖아요. 좋은 작가들은 양파 같아요. 까면 깔수록 다른 게 나와요. 늘 새롭게 느껴져요. 독서를 하다보면 젊어서 읽어야 할 책, 늙어서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요. 이 작가들은 언제 읽어도 그만큼의 새로움을 주더라고요. 다시 읽는 것의 의미가 분명히 있어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책읽기 힌트를 얻을 수 있어요. 책과 더불어 바깥에 있는 작가의 삶, 세상과의 관계 등을 함께 읽으면 훨씬 풍성한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인 이상만 해도 난해하고 어렵잖아요. 그런데 이상이 폐결핵 환자였고, 당시가 일제강점기였고, 그가 청년으로서 좌절했었고, 어린 시절 양자로 살면서 부모의 사랑에 굶주렸다는 사실들을 알고 읽으면 이해가 돼요. 사드가 그렇게 잔혹한 것이라도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걸 이해하듯 말이에요. 이상도 죽음 앞에서 어떻게 했겠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죠.

 

카프카의 묘비 글을 보며 떠오른 질문인데요. 시인은 묘비에 어떤 말을 새겨 넣고 싶으세요?


세 번째 시집이 『잡히지 않는 나비』예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요. ‘잡히지 않는 나비, 글자들과 함께 날아가다’ 이렇게 해볼까요.(웃음) 잡히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냥 재미로 생각한 거예요. 제가 세 번째 시집을 참 좋아하거든요.

 

올해 오랜만에 네 번째 시집을 내셨죠? 무려 14년 만인데요.


시집만 늦게 냈지 작품은 계속 쓰고, 발표도 했어요. 사실은 갑자기 21세기가 되면서 시단 구조도 엄청 바뀌었어요. 대거 젊은 시인들도 등장했고요. 그러면서 약간 혼란스러웠어요. 그 사이에 연극도 했고요. 연극배우들, 여성 시인들과 같이 1년 가까이 연습하고 24회 공연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시집이 늦어진 거고요. 원래 저는 많은 시집을 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 네 번째 시집이 오랜만에 나왔는데 기분이 정말 좋은 거예요.(웃음) 원고가 아직 한 권 분량이 남아 있으니까 늦지 않게 다섯 번째 시집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에 있는 시들이 제가 살면서도 아팠던, 우울했던 시기의 시들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시집을 내니까 아픔이 좀 경쾌하게 변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언어도 저절로 익나봐, 생각했어요. 사람이 인생을 잘 극복하면 아플 때 쓴 언어들도 그 사람을 따라오는가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잘 견뎠더니 너도 잘 견뎠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되게 고마운 거예요. 네 번째 시집은 교정보고 책 나올 때까지 내내 행복했어요. 기분이 참 좋았어요. 그러면서 언어에 대한 신뢰가 더 많이 생겼고요. 글도 많이 쓰고 싶어졌어요.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 김상미 저 | 나무발전소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는 프란츠 카프카, 마르키 드 사드, 르네 샤르, 고골, 바흐만, 거투르드 스타인, 콜레트, 애드거 앨런 포, 폴 발레리, 카렐 차페크, 나보코프!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11인의 문학 연금술사들, 그들의 창작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시인의 에세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현경 “건강한 여성성과 남성성이 만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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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페미니스트 현경은 어느 날 출판사 소개로 30대 작가인 수진을 만났다.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릴 구원할 거야』『미래에서 온 편지』등 숱한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여성, 환경, 평화 운동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현경에게 수진은 색기라고는 하나 없는 어린 소녀로 보였다. 반면 수진은 현경이 ‘최상급 원두로 국보급 바리스타가 뽑아낸 최고급 에스프레소’라면, 자신은 ‘맹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둘이 만나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이라는 아메리카노가 탄생했다.


대화는 나라를 넘어 섹스와 평화, 살림, 먹을거리 등 모든 주제를 다뤘다. 세대 차이와 남녀 간 차이 등 모든 차이는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이다. 수진과 현경의 대화는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페미니스트의 길을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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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넘어


기존에 내신 책은 ‘여신 3부작’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 책에 다른 점이 있다면요.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은 처음부터 출판사가 기획한 책이에요. 페미니스트 세대 간에 겪어야 하는 모든 문제를 이야기해보자는 의도로 시작했어요. 서울에서 만나 뉴욕과 아프리카를 같이 갔다 다시 서울로 오면서 옷부터 먹는 것, 섹스, 우리들의 일, 정치, 사회 운동 등을 이야기했어요.

 

책 이름이 지명으로 되어 있어요.


각각 의미가 있어요. 서울이 우리가 태어난 곳,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면 뉴욕은 선택이었죠. 킬리만자로는 모든 것을 넘어 신적인 여성성으로 회귀해 우리의 가장 깊은 힘을 찾은 근원이었어요. 그다음에 다시 갈 곳은 일상이었어요. 한국의 여성으로서, 특히 의식 있는 여성으로서 한국은 살기 쉬운 곳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우리의 운명에 분노했고, 돌파구를 찾아서 선택했고, 킬리만자로라는 어머니 섬에서 치유 받고 일상으로 돌아와 내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 내 안에 있는 어머니 시대와 딸의 시대를 다 통합해서 살 수 있을지 고민한 게 우리들의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세대만 다른 게 아니라 성향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참 좋았어요.


여성들 세대의 멘토로 서는 게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고 하셨는데요.


누구의 멘토가 되는 건 참 어려운 이야기예요. 처음에 출판사에서 아래 세대 페미니스트에게 전해주고픈 이야기 콘셉트로 하겠다고 해서 그건 제가 못 하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이제 누구를 가르치는 사람보다 각자 안에 있는 걸 꺼낼 때 도와주는 산파 역할을 하고 싶거든요.


처음에는 수진과 안 맞는다고 느끼셨다고요.


네, 너무 안 맞았어요(웃음). 수진은 저보고 ‘오래된 것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디고 차일드(Indigo child)다’라는 말을 했어요. 제가 보기에는 수진은 크리스탈 차일드(Crystal child)예요. 지배자나 피지배자, 남녀 같은 이분법을 전혀 믿지 않고 삶을 그저 경험하는 놀이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래서 수진과 만나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서로 물들이기를 한 것 같아요. 수진은 점점 나와 비슷해져서 데모를 너무 싫어했던 사람이 촛불 집회 한 번도 안 빠지고 나가는 사람이 되었고, 저는 수진을 만나 조금 더 지금 이 순간의 기쁨, 이 순간의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또 이제까지 저는 많이 싸우면서 페미니스트의 길을 걸어왔잖아요? 그런데 이제 점점 싸우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1년으로 계획했던 여정이 4년으로 늘어났어요.


공동의 언어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예를 들면 강정 해군기지 반대 운동에 가서도 제가 보는 것과 수진이 보는 게 너무 다른 거예요. 저는 우리 시대에 비하면 강정 운동이 얼마나 평화적으로, 문화적으로 진화되었는가를 보는데 수진은 아직도 폭력성이 있다고 느끼고 버거워하는 거죠. 수진이 기존에 센 언니들, 기존의 운동권 사람들에게 아주 데이기도 했고요. 이런 걸 한다고 미군이 여기에 해군 기지 안 세울 것 같냐, 하는 젊은 사람들이 가지는 시니컬한 태도가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야 하느냐에 대한 가치관이 달랐던 거죠. 저는 나쁜 시스템은 부수고, 나쁜 대통령은 감옥에 가야 하고(웃음), 이런 식이었다면 수진은 깊은 내면의 변화, 의식의 진화만이 우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차이부터 좁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시간이 걸린 만큼 뿌듯함이나 이해하는 마음이 더 커지셨나요?


네, 처음에는 굉장히 조심했어요. 수진 세대의 여성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고요. 우리 시대의 사회 경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여성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 하면 꼰대의 카테고리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저는 수진의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수진이 현경을 보는 눈으로 책이 쓰여졌어요. 수진이 보는 현경은 어땠나요?

 

킬리만자로에서 제가 수진에게 ‘자기 책이라고 생각하고 연출을 해 봐라’라고 말했어요. 수진의 눈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현경이라는 검열을 빼라고 한 거죠. 결론은 수진 쪽으로 많이 가게 됐어요. 그게 옳은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진화를 믿고, 수진의 세대가 더 많이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수진의 눈으로 봐서 쓰는 게 더 미래적인 책인 것 같아요.

 

독자들이 책을 어떻게 읽어주었으면 했나요?


페미니스트 세대 간의 대화에 물꼬를 열었으면 했어요. 젊은 여성들이 우리가 겪었던 것을 맨땅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삶의 지혜를 가지고 훨씬 더 진보한 곳에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남녀 간의 대화 물꼬를 트는 아주 작은 씨앗이 되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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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이 같이 가려면


‘사람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어.’(64쪽) 이 말이 참 좋았어요.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곳에서 해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죠.

 

여자들이 싸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깃발 들고 나서서 앞서 싸우는 방법도 있지만, 정말 웃기는 것에는 에너지를 하나도 안 주는 방법도 싸우는 방법의 하나예요. 예를 들면 어떤 강사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다, 그럼 강의 듣다 그냥 나와요. 못 나오는 상황이라면 수동적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어도 돼요. ‘나는 네가 하는 말에 어떤 가치도 줄 마음이 없다’고 하는 거죠. 에너지라는 게 무서운 거예요. 가부장제는 여성들이 공범이었기 때문에 지속됐어요. 가부장제 안에서 큰 부스러기를 먹으려던 게 가부장적 여자들의 역사였었잖아요. 그걸 그만둬야죠.

 

관심도 주지 않고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울 가치가 없다면 아예 관심 주지 말고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좇으면 돼요. 관심도 주지 말고요.

 

한국에서 여성들의 분노가 참 큽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명제조차도 지켜지지 않는 세상이니까요.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정말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죽고 있는데. 그래서 저는 메갈리아 정당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페미니즘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으니까, 메갈리아처럼 그대로 비춰주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고, 우리처럼 보살 페미니즘 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상처받고 치유하지 못한 사람이 트라우마를 또 만들어 내거든요. 그 많은 남자가 다 거절당하고 억압당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데이트 거절당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이기까지 한다? 이건 굉장히 상처받은 사람의 심리상태거든요.


유니온신학대에서 오래 학생들을 가르치셨어요. 세대별, 인종별로 큰 그림이 보이나요? 이 세대는 이런 경향이 있다는 식으로요.


물론 세대별 차이도 크지만 개인차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나이, 국적, 성별, 성적 오리엔테이션을 다 지우면 결국 그가 누구인지가 결론이에요. 여성은, 남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일반화하기 어렵고 그 개별성과 다양성이 점점 받아들여지는 시대로 들어간다는 게 좋아요. 예전에는 ‘여자라면/남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당위가 많았잖아요.

 

요새도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의식이 있죠.

 

이 나이가 되니까 이제는 남자들이 아들뻘, 손자뻘이에요. 한국 남자들 너무 불쌍해요. 그 젊고 예민한 시절에 군대에 가서 가부장적 문화의 정점인 군대 문화를 배워야 하고, 일상 속에서 지배와 종속, 갑과 을의 문화를 체화해야 하고요.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된 조국이 되어서 남자들이 절대 군대 갈 필요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요.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웃음) 모든 젊은이들에게 군대가듯 2년 동안 해외여행을 가는 걸 의무화하고 싶어요. 남녀가 앞으로는 돈도 같이 벌고 아이도 같이 보고, 모든 짐을 같이 나누면서 자기 꿈도 같이 이루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도 누구 때문에 과도하게 자기를 버릴 때까지 희생하지 않게요. 약간은 이기적으로, 이기성 때문에 더 크게 나누고 베풀 수 있는 게 좋은 시스템이고 좋은 사회예요.

 

남성성도 ‘살림이즘’ 안에서 통합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건강한 남성성을 가지면서도 여성성을 가질 수 있다고요.


한 사람 안에도 건강한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어요. 둘이 만나 통합하면서 진정한 자기가 폭발되듯 나와요. ‘연약함의 힘’이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힘센 사람 앞에서 쫄지 않고, 힘없는 사람 앞에서 우쭐대면서 갑질하지 않고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삶이 21세기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여태까지 사냥의 문화로 살았다면, 이제는 정원을 가꾸는 문명으로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신학 대학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화시키는 분들을 만났다고 하셨어요. 한국은 군대 문제도 있을 텐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까요?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곳에서 내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좋아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제가 이번에 한국 와서 강남역 살인사건, 메갈리아 사태, 데이트 폭력 등등을 보면서 정말 여성혐오가 심하다고 느꼈어요. 여성혐오가 심하니 남성을 혐오하게 되잖아요.

 

꾸준히 비판이 나오지만 변하기 쉽지 않아요.

 

저도 여성학 박사 했지만, 보통 페미니즘 담론이 남자들이 얼마나 잘못하고 있나, 가부장제가 얼마나 나쁜가,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여자들을 말려죽이나를 말하잖아요. 그런 이야기 해야죠. 구조적인 면으로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과 남성을, 또한 모든 갑을 관계를 트라우마로 몰아넣는지 밝히고 비판해야 하는 게 맞아요. 그러나 많은 여성이 또한 이성애자예요. 세상의 모든 사회 운동 중에서 적과 동침하는 유일한 사회 운동은 여성 운동밖에 없어요. 결혼과 이혼과 몇 번의 연애를 거친 삶의 경험에 의하면 내 애인, 내 남편은 지적해서 바뀌지 않아요. 더 강화될 뿐이에요. 도리어 잘할 때 잘하는 걸 칭찬하면서 이 사람이 서서히 바뀌어요. 틱낫한 선생님도 우리 안에 좋은 씨와 나쁜 씨가 다 들어있다고 했어요. 나쁜 씨를 나쁘다고 말하면서 에너지를 주는 게 아니라, 좋은 씨에 물과 거름을 줘 나쁜 씨를 도태하라는 거죠. 저는 이 방법이 참 좋고 건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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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예술이 이끄는 21세기

 

‘옷보시’, 즉 옷을 입어 분위기를 살리는 것도 살림의 일종으로 설명해 주셨어요.

 

어느 날 선배 교수가 ‘현경 교수는 어떻게 옷보시를 이렇게 잘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나타나면 분위기가 확 산다면서요. (웃음) 어린 시절부터 세계를 다니고 강연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강연을 할 때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안 되는구나 깨달았어요. 비싼 옷을 입는 게 아니라, 그 날의 분위기에 딱 맞는 옷을 입고 가는 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요. 매일 아침 무슨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 게 제 명상이에요. 그 날의 할 일, 날씨, 만날 사람을 생각하면서 옷과 액세서리를 골라요. 남자들은 여자들이 남자 꼬시려고 옷 입는다 그러죠.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많은 경우 여자 옷을 기뻐하는 건 대개 여자들이에요.

 

섹스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신이, 우주가 허락한 가장 큰 놀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여전히 한국에서는 섹스를 터부시하는 풍조가 있어요.

 

그래요? 자기네 세대는 그래도 많이 개방되지 않았나요?

 

많이 바뀌었죠.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음성적으로만 쉬쉬하는 것 같아요.

 

성은 굉장히 소중하게 다루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정크 푸드 먹듯이 섹스를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예를 들어 집에서 유기농으로 사랑과 정성을 쏟아 지은 밥을 먹으면 그 밥이 치유예요. 섹스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답고 깨끗한 공간에서 서로 마음을 모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섹스를 해야 해요. 탄트릭 부디즘(Tantric Buddhism)에서는 섹스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말 건강하게 배워서 섹스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색기를 방출하기보다 다른 쪽에 관심을 많이 가지신다고요.

 

사람이 배워야 할 과목이 있잖아요. 저는 섹스라는 과목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 같아요. 이제는 전 우주와 섹스, 오르가즘을 하고 싶어요. 별을 봐도 초월과 합일을 느끼고, 섹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은 방법으로 완전한 소통과 완전한 합일을 할 수 있어요.

 

‘우주자궁교’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어요.

 

사람들이 내 종교 정체성이 뭐냐 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 우주의 자궁으로부터 나왔다는 걸 믿는 우주자궁교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지금도 열심히 교회 가면 예배드리고 불당에서는 불공드리고 힌두 사원에서는 명상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영성의 자리로 간 것 같아요.

 

진(眞)의 시대, 선(善)의 시대를 지나 미(美)의 시대가 온다고도 하셨죠. 미의 시대라는 건 무엇인요?

 

제가 보는 역사관이에요. 과학적 근거라기보다 직관적인 이야기인데, 19세기는 계몽주의 이후로 과학의 발전, 신의 권위에서 벗어나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에 집중했어요. 특히 자연과학 쪽 진리가 발전했죠. 20세기에는 굉장한 세계대전을 겪고 인권의 문제, 여성 해방, 흑인 해방, 그 모든 해방의 문제와 인간으로 산다는 윤리의 문제가 드러났던 시기라고 봤어요. 21세기는 결국 융합과 통합, 영성, 예술 같은 부드러운 에너지가 세상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근원이 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유니온신학교에 오는 학생들도 점점 탈종교화 되는 현상이 있어요. 종교 노(NO), 영성 예스(YES)예요. 제도적인 종교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지 질문을 열심히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를 위한 향후 계획이 있으신가요?


‘인터네셔널 살림 센터 오브 힐링 아트’ 같은 걸 세워보고 싶어요. 한국의 무속, 아트 테라피, 댄스 테라피, 카운슬링, 한의학, 자연치유가 다 들어와서 치유와 예술이 만나 영성으로 승화시키는 센터요. 그리고 살림이라는 말을 세계 브랜드화하고 싶어요. 한국 하면 ‘살림’이 떠오르고, 옥스포드 사전에도 ‘살림’이 등재되도록요. 넬슨 만델라가 ‘우분투’를 이야기하고 세계어가 됐잖아요. 그것처럼 살림도 세계적인 철학 개념, 미학 개념이 될 수 있어요.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 현경, 김수진 공저 | 샨티
이 책은 60대 여성 멘토 ‘현경’과 30대의 젊은 여성 ‘김수진’이 4년에 걸쳐 나눈 세대 간 대화를 김수진이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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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모른다는 건 바람직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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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오늘은 잘 모르겠어」

 

3은 안정감을 준다. 의자도 다리가 세 개면 서 있을 수 있고, 승부를 가르려면 삼세판은 해야 한다.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의 세 번째 시집도 안정감을 주지 않을까.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이미 대중과 문단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에서 화자는 안정적으로 자기 기반을 다지기보다, 그저, ‘오늘은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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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집중한 시집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집보다 더 두툼해졌다.

 

편 수로 치면 첫 시집보다는 적다. 장시나 산문시, 시라고 볼 수 없는 어떤 형식의 것들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이번 시집은 시를 모아서 낸다기보다 책을 엮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편지 형식의 시, 사진이 들어간 시가 있다. 다른 형식을 실험하고 싶었나?


조금 장난을 쳤다. 형식을 정하고 글을 쓴 게 아니라 글을 쓸 때 형식이 결정된다. 글을 쓸 때 상태나 마음이 가는 방식으로 인해 시 같지 않은 글이 나온다. 이미 많은 작가가 시도한 형식이라 실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오히려 만약 실험이라고 한다면 시집에 넣은 것 자체가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도 새로운 형태의 책을 내겠다기보다, 쓰고 나니 좋은데 어디다 발표하지? 발표할 데가 없네? 그럼 내 시집에 넣어야지 하고 넣었다. (웃음)


시집 제목이 ‘오늘은 잘 모르겠어’다. 화자가 자신 없어진 것 같기도 하다.


모른다는 게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한테는 바람직한 태도다. 모르겠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데 ‘잘 모르겠어’처럼 불확실성에 또 다른 불확실성을 더하고 싶었다. 그런 태도가 삶에도 적용된다.


‘첫 시집이 세상과 거리를 좀 두고 있었고, 두 번째는 슬픔이 좀 많아졌다’라고 이전 인터뷰에서 말한 적 있다. 유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세 번째 시집이 달라진 게 있나?


사후적으로 생각해 보면 등장인물이 다양해졌다. 물론 가족이나 연인 같은 고정 등장인물들은 있지만, 그 외에 허무의 인물, 실제로 만났던 사람, 말을 약간 한 사람, 영향을 미친 사람, 외국 사람 등 인물들이 많아졌다.


시에 가족이 나오면 가족들 반응은 어떤지?


쿨하게 받아들인다. 첫 시집은 진지하게 정색한 적도 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갈수록 서로 농담도 한다. 가족은 정서적으로 강렬한 경험이나 기억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여러 가지 감정이나 기억이 응축된 일종의 알 같은 거라, 그 알이 깨질 때 확장성이 오히려 강하다. 어떻게 보면 보편성도 있고. 일종의 패턴화가 되면 스스로 재미있기도 있다. 아버지 이야기는 죄송해서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은 있다.


낭독하면 좋을 법한 시가 꽤 있다. 시집을 펼치면 첫 번째 시 제목이 「들어라」다.


독자들과 만날 때 낭독을 통해 만나기도 하고, 낭독회를 기획하지만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진 않다. 낭독을 즐겨 하게 된 건 사실이다. 어떤 글이든 낭독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글이 소리가 되는 순간, 소리를 통해 만나는 현장이 흥미롭다. 시는 흔히 가장 세련된, 고급스러운 형태의 언어라고 말하지만 나는 시가 세련되고 세련되지 않고를 떠나, 모든 구별이나 위계를 떠나 소리라고 생각한다. 글로 쓰인 것이든 육성이든.


시인의 말도 ‘잊지 않으리/창밖의 기침 소리’로 시작한다.


인간의 말이 타인에게 다다르는 형식으로 소리를 생각했다. 듣는 사람은 독자이자 청자다. 청자라는 타인을 염두에 두면서 말을 거는 형태의 시들이 나왔을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사후의 의미부여긴 하지만, 묶어 놓고 보니 소리에 집중을 한 면이 보인다. 「혀 없는 것처럼」도 그렇고.


그렇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책이 없었을 때 이야기는 이야기꾼이 듣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근대문학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간체라고 하는 편지글도 계속 나오고. 문학의 기본이나 본질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닐까. 그게 두드러지거나 두드러지지 않거나 할 뿐이다.


천착하는 주제가 있나?


시집을 내면서 이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머릿속 디자인은 없다. 책이 알아서 진화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볼 때 회피할 수 없는 주제는 결국 하나다. 일종의 죽음이다. 예전에 첫 시집 냈을 때도 김소연 시인이 ‘너는 왜 죽음, 죽음 하니?’ 해서 내가 죽음에 관해 많이 쓰는구나 느꼈다. (웃음) 어떤 글을 쓰던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깔려 있다. 죽음을 수용하고 극복하는 기록이 나의 시쓰기가 아닐까 한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를 다룬 「갈색 가방이 있던 역」은 쉼보르스카의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을 빌려 쓴 시다. 원시의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라는 마지막 연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이 되었다.


쉼보르스카 시인의 단어에는 분노의 맷돌에 갈린 흔적이 없다고 쓴 적이 있다. 그분이 유머도 있고 표현이 온건한 편이다. 그래서 그 분을 두고 증오하시는 분 같지는 않다고 썼는데, 나는 조금 증오가 있는 것 같다. 그 시가 내 스타일로 써서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한다. 쉼보르스카 시인이 만약 그 사건을 썼다면 어떻게 나왔을까, 당연히 분노하고 증오하지 않았을까? 스타일의 차이라기보다 맞닥뜨린 사건, 그 시를 촉발한 사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사건이 바뀌었다면 오히려 쉼보르스카 시인이 더 격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을 향한 애정이 담긴 「심보르스카를 추억하며」를 재밌게 읽었다. 오마주로 봐도 되나.


그렇다. 쉼보르스카 시인의 시집은 『끝과 시작』밖에 모르고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시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 우연찮게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점도 그렇고 해서 생각하다 보니 굳이 ‘심’보르스카로 바꿔서 폴란드 고모님이라고 하는 썰렁한 농담이 떠오르더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그 농담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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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뭘 잊고 있는지 드러내고 싶다


계속 사회 이슈에 관해 발언하는 시인이다. 스스로 사회적 불합리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가?


사회라는 인과적 관계망 안에서 내가 한 행동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미에서 책임감은 있다. 하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시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결국 ‘우리’다. 이를테면 「스물세번째 인간」에서 스물세번째 인간이 너이자 나라고 하는 것. 「근육의 문제」에서 어느 순간 서로가 계급 밖으로 동시에 도약했다고 하는 것. 책임감을 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이 끔찍한 세계에 다 연루되었고 산 자와 죽은 자는 그러므로 하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산다.


다들 그 끔찍한 세계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부채감이 있는 게 아닐까.


살면 기여가 된다. 내가 바람직한 세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 별로 없다. 그냥 사는 거다. 누구나 일상을 살고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기억하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잊고 외면한다. 다만 우리가 뭘 잊고 뭘 외면하고 있는지는 드러내고 싶다.


2012년 『지금 여기의 진보』 를 펴낼 때 대선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상황이 좀 바뀌고, 요새는 희망적으로 보나?


전혀. 그때도 정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물론 정권이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고, 정권이 바뀌면 조금 더 일상을 살게 하는 힘이나 위로를 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인 문제는 사실 아주 오랫동안 만들어졌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현재 정권에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채용한 인사들이 보인 언행을 보면 진보와 어긋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사회학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사실 조직 안에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통 급여를 많이 보는데,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비정규직을 조직에서 대하는 태도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한다고 하더라도 조직의 관행이나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조직을 이야기하면 보통 군대만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일터, 기업, 학교, 일상의 조직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조직인가, 그렇게 질문하면 별로 그렇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그런 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분위기나 추진력은 조금 생기겠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조직이 바뀌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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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엮는 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499번째 시집이다. 시인과 시집은 점점 늘어나는데 독자는 그만큼 늘지 않는 것 같다.


예술계라는 게 결국 공급 과잉이고, 생산자 수가 향유자의 수보다 다른 데 비해 높다. 높은 이유가 있을 거다. 이유 중 하나는 등단 매체의 수가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를 생각하면 제도적인 기제가 다른 나라보다 한국이 조금 더 많고 다양한 것 같다. 그거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고, 어쩔수 없다. 잡지나 등단 매체가 많다는 것도 누군가 잡지가 많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이런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하나씩 만들면 비슷한 생각을 다른 생각이나 집단도 하게 된다.


독립출판 형식의 시집도 부쩍 늘었다.


한국은 제도적 실천이 빠른 속도로 확산한다. 예술계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고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시가 늘어나는 현상이 좋네 나쁘네 해도 그 부침의 흐름이 끊기거나 반전되지는 않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시가 세상에 많이 나온다고 할 때 결국 독자는 특정 출판사와 시인의 평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지가 아니더라도 다른 출판사에서 좋은 시집이 나올 수 있는데, 독자에게는 시를 접하는 채널이 너무 많이 온다.


상대적으로 독자들 입장에서는 좋은 시를 가려내기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과 독자가 만나는 여러 노력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어떻게 독자와 만날 수 있을지는 생각하고 있다. 다양한 시인이 만나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작은 독립서점이나 동네서점도 시집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도가 어떻게 될지는 조금 지켜봐야겠다. 내 작업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시의 독자를 실제로 보면 기분이 어떤가?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읽고 피드백을 주면 재미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저런 질문이 나온다, 그러면 재미있다.


다음 집필 계획이 있나?


이건 지금 그냥 드는 생각이다. 이번 책을 내면서 책을 엮는 재미에 관해 생각했다. 기존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엮으면 어떨까 싶다. 아까 이야기한 제도적인 관행과 구조 안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책을 만들면 독자와 시인이 만나는 방식도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 저 | 문학과지성사
새로운 희망을 상상할 수 있는 세계, 심보선이 시 언어로 지은 유예의 공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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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 “온기 없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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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네 가족이 여름휴가를 간 곳은 남쪽 끝 ‘부유도’라 불리는 플로팅 아일랜드였다. 떠다니는 이 섬은 전화도, 인터넷도 되지 않지만 이국적이고 잘 정돈된 풍경과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덕분에 강주네 가족은 기쁜 마음으로 휴가를 시작한다.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김려령의 신작 동화 『플로팅 아일랜드』는 은밀하고 악의적인 차별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섬’이라는 세계에서 분투하는 인물들을 통해 변화와 희망을 말한다. 희망은 명백하게 섬의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강주가 만난 초이와 초아, 수 등 섬의 아이들은 숨죽이는 어른들과 다르게 의연함과 강인함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작가가 목격한 아이들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차별, 정서적인 억압, 오로지 미래의 일꾼으로만 만들려는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멋지게 성장하고” 있던 것. 이들이 섬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이야기 속에 가득하다. 그 온기가 동화 바깥으로 퍼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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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참 자랑스럽다


오래 담아 두었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반짝 떠오른 이야기도 있잖아요. 이 소설은 어느 쪽이었는지 궁금했어요.

 

반짝, 하고 온 거예요. 그런데 발표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어요. 지금까지 발표한 동화 중에서는 가장 오래 걸렸죠. 이것은 단번에 쓰인 동화였거든요. 그런데 발표 시기가 고민이었어요. 이 이야기를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시기를 생각한 거예요. 처음에는 햇것이라 품고 있었고요. 몇 년 지나서는 성인 소설을 발표하느라 잠깐 밀렸는데요. 동화를 내려고 했을 때는 『탄탄동 사거리 만복전파사』와 이 작품을 두고 조율하다가 또 뒤로 밀렸어요.

 

공감할 수 있는 시기, 라면 무엇이었을까요? 짐작할 만도 하고요.


여행 동화잖아요. 기차도 타고, 배도 타요. 여객선 안에서 먹고, 놀고, 까불까불 하는 이런 모습이 모두 여행인데요. 발표할 때 다 삭제됐어요. 세월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요. 즐겁게 내보낼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모두가 그 상처를 안고 있고,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계신 생존자 분들과 유가족 분들이 계시는데 이런 이야기를 발표하는 것은 무책임해보였어요. 이 작품으로 힘든 세상, 어른들이 만든 엉망진창인 세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참 잘 버티고 있더라, 라는 말을 하고 싶었거든요. 아이들은 이런 세상에서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요. 그래서 너희들이 참 자랑스럽다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너무 위선적인 것 같았어요. 나의 책임을 미래 세대에게 미뤄버리는 것 같더라고요. 어른스러움을 보여준 뒤에 이 이야기를 해야지 무조건 희망을 던져놓는다고 될 일인가 싶었던 거죠. 발표가 계속 밀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제는 사회의 변화를 보신 건가요?


초고를 끝냈을 때는 계속 격변기였죠. 어른들도 우왕좌왕했을 때였고요. 지켜보자고 하면서도 무기력했어요. 그런데 작년에 무기력이 줄기차게 이어지다가 근사하게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해요. 축제 같았죠. 게다가 그 촛불 정국에서도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봤잖아요. 『플로팅 아일랜드』에서도 초이, 초아가 아버지 대신 쓰레기를 치워요. 어린 나이에 일을 하면서도 상당히 멋있어요. 세상에 대해 겁먹지 않아요. 의연함이 있죠. 그런 모습을 그때 본 거예요. 실제로도 그렇거든요. 광장에 모인 아이들 아니어도 똑같아요. 애초에 그런 모습을 보고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건데요. 우리가 엉망으로 만든 이런 온갖 차별, 정서적인 억압, 오로지 미래의 일꾼으로만 만들려는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멋지게 성장하고 있던 거예요. 참 의연하게 잘 자랐더라, 그것이 내게도 감지가 된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것은 실제 만난 청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한가요?


저희 아이 친구들도 그랬고요. 북콘서트에서 만난 청소년들도 그랬어요. 사인회를 하면 곁에 와서 살짝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자기는 시간이 없대요. 늘 뭔가를 하고요. 분명히 열심히 하고 있는데 눈 뜨면 다시 제자리래요. 아이들은 자기가 얼마나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아니야, 충분히 움직이고 있어’라고 말을 했었는데요. 그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아이 한 명 한 명을 하나의 섬으로 보는 거였어요.

 

플로팅 ‘아일랜드’ 말이군요.


감수성은 어렸을 때 자기도 모르게 쌓여요. 감성과 이성의 조화는 초등학교 때 읽은 많은 문학 작품, 균형적인 독서활동에서 나오죠. 이 책을 그냥 어떤 섬에 다녀왔어, 이렇게 읽잖아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참 뒤에 툭 올 때가 있어요. 아, 그 섬이 인생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당장은 몰라요. 당장은 아주 신기한 어떤 섬에 갔다 왔는데 이 섬에서 어떤 부당한 일을 봤죠. 우리 아이들한테 지금 현실이 이렇게 비루하다고 직접 이야기하기보다 어떤 섬의 상황을 보여주는 거예요. 결국 읽을 때는 내 얘기가 아닌 듯 읽히지만 책을 덮었을 때는 이것이 다른 세계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사실은 내 얘기 같다, 라고 확 오게 되죠.

 

내가 샘물에 냄비를 씻고 물을 받았다. 어린 초아에게 먼저 주고 다음으로 초이에게 건넸다. 하지만 초이가 나 먼저 먹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먹고 초이에게 주었다. 초이가 물을 마시는 동안 정육점 아저씨가 길을 건너왔다. 그리고 초이의 따귀를 때렸다.
“이 자식이 어디서 함부로 샘물을 마셔…….”(149-151쪽)

 

제가 어른들의 이기주의 중 가장 싫은 게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 굴욕감을 주는 거예요. 물 먹는 장면을 썼는데요. 급식 같은 거죠. 돈 있으면 먹어, 이거잖아요. 학교라는 곳에서는 돈이 지배하면 안 돼요. 금전적인 것으로 아이들을 자극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모두가 같잖아요. 세금이니 재원 마련이니 하지만 한 반에 그렇게 잘사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잘산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의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좋은 세상 만들었어’ 하면서 시치미 뚝 떼는 건 너무 파렴치해 보였어요.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해야죠.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요. 그러나 얘기는 해야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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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다


결코 어떤 섬의 이야기만으로 읽히지 않았어요. 우리 세계와 맞닿은 부분이 아주 많거든요.


이 책을 읽을 때 각자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다를 거예요. 심각성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겠죠. 그것들을 각자가 느끼는 문제들이 해결될 거라는 희망을 주는 그곳으로 오게 했어요. 당장 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로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거든요. 궁극적으로 언덕부터 허물어야 하는 거잖아요. 주인공 가족은 시작점을 주고 간 거죠. 희망, 딱 거기까지만 주었어요. 뒤에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다고 다 언급하고 싶진 않았어요. 게다가 외부에서 온 가족이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는 없는 거거든요. 다만 계기를 줄 순 있는 거예요. 타자가 타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근본적으로는 이 작품을 통해 희망을 말하고자 했던 거군요. 작품을 쓸 당시 현실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강주가 섬으로 다시 갔을 때는 또 다른 희망이 있겠지, 라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죠. 그런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일어나자. 어쩌면 그 염원이 모든 사람들한테 있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도 그 염원이 있었고요. 부당해, 뭔가 잘못됐어, 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이 이야기를 썼죠. 그리고 촛불 정국을 지나면서 지금이다, 발표를 할 때다, 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전에 써둔 작품인데도 이상하게 맞닿은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때의 열망이 수 년 뒤에 현실이 됐잖아요. 그것에 대단한 행복감이 있었어요. 너무나 바랐던 모습을 현실로 보는구나, 내가 그 안에 있구나, 하면서 깜짝 놀랐었죠. 이 원고를 출판사에 드린 게 지난 1월 즈음이었는데요. 지금이다, 생각했던 거예요.

 

주인공 외에 특별히 마음에 담았던 인물도 있나요?


글쓰기를 할 때 꼭 염두에 두는 것은 어떤 한 문장의 서술일지라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문단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문장력을 보이기 위해 어떤 문장을 쓰는 건 아니거든요. 낙엽을 가져왔으면 그 낙엽마저도 헛되이 쓰면 안 되죠. 하물며 인물도 그래요. 강주가 초이를 찾아 들판으로 갔을 때 엑스트라처럼 몇몇 어른과 아이들이 일을 하고 있잖아요. 현장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해서 서술했고, 잠깐 등장하더라도 사람을 사물화하면 안 되니까 약간의 움직임이라도 주고 끝낸 건데요. 그래도 미안하죠. 그들을 군중으로 표현해야 했던 게 굉장히 마음에 걸렸어요. 필요해서 넣었지만 배경 처리가 된 것 같아서요. 책이라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인데 어떤 건 귀하고 어떤 건 귀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악인도 아껴야죠. 제가 쓴 모든 작품에서 그랬거든요. 지나가는 사람마저도 뭔가 표현하기 위해 쓴 거예요. 그런데 이 밀밭의 사람들은 더 해주지 못해서 조금 마음에 걸리죠.

 

독자는 모르고 지나갈 이야기라 굉장히 흥미롭네요. 그런가 하면 희미하지만 뭔가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것 같았던 인물이 있었어요. 바로 ‘수’예요. 


철물점의 수 역시 그냥 물건을 팔고 빠지는 인물이 아니에요. 원래 낯선 곳에 가면 그런 사람이 꼭 한 명 있거든요. 낯섦이 주는 새로운 에너지가 있죠. 사랑을 하게 만들어요. 일단 언어부터 다르죠. 고백하자면 저는 사투리 쓰는 사람한테 약해요.(웃음) 그 낯섦에 해제가 되고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가 확 올라가요. 이것이 그냥 소설이었다면 수도 조금 달랐을 텐데요. 이들은 지금 설렘의 단계거든요. 수 역시 낯선 외부인을 본 건데 담백하게 대하죠. 수의 매력이 그거고요. 이들은 서로 호감을 느끼는 단계라 다음에 만나면 한 걸음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헤어졌어요. 강주는 아마 집에 와서도 수를 생각하지 않을까요.(웃음) 첫사랑은 다시 만나면 안 된다는데 이들은 나중에 다시 멋지게 만날 것 같아요.

 

마지막에 강주가 ‘나는 반드시 우리가 가진 열쇠로 그 방의 문을 열고 다시 들어갈 것이다’라고 다짐하잖아요. 꼭 다시 가라고 응원하게 돼요. 그때 수와도 꼭 만났으면 좋겠고요.


그때는 섬사람들이 바꾼 세상이겠죠. 그때의 초이는 지금보다 더 멋있어졌을 거고요. 초아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썼는데 들키면 안 되잖아요.(웃음) 지금 이 섬은 비정상적이고, 아이들이 그 안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지만 이들끼리 딱 모였을 때는 굉장히 예쁘죠.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래서 간절하게 어떤 동화보다도 이것을 어른들과 아이들이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 예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거예요. 작가의 말도 모두 어른들한테 한 거고요.

 

지금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오래전 내가 아이 때 꿈꾸던 세상은 아니었을까요? 아이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봐 주십시오. 우리 아이들이 지금 원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우리 아이들이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잘 버티고 있는지. 저는 아이들이 버티는 세상이 아니라, 즐겁게 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행복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194-195쪽, 작가의 말)

 

아이들은 그저 재미있게, 판타지 소설을 읽은 듯이 읽고 와야 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읽은 『톰 소여의 모험』 같은 것들을 우리 안에 이야기의 원형으로 갖고 있잖아요. 『플로팅 아일랜드』도 그러길 바라요. 신나고, 화도 나고, 멋진 섬에 사는 멋진 초이를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도 하고요. 그러다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고 성인이 되었을 때는 그 섬이 내 섬일 수도 있었겠구나, 그것이 곧 나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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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로 쓴 것들


소설, 동화 등 여러 방향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잖아요. 동화를 쓰는 작가는 어떻게 다른가요?


동화도 그렇고 모든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든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눈물이 철철 나도 재미있는 것을 봤다고 하잖아요. 너무 무서워하면서 보고도 재미있었다고 하죠. 동화, 특히 고학년 동화는 그림도 적고 서술도 더 많이 들어가다 보니까 최대한 서술도 간결하면서도 재미있게 쓰려고 애를 많이 써요. 동화가 그래서 어려워요.(웃음)

 

매년 꾸준히 책을 내셨어요.


제 안에서도 글쓰기에 대한 변화를 겪던 시기가 있어요. 쓸수록 겁나는 시기였거든요. 6-7년 정도 되니까 언제까지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이 나한테 계속 올까, 그런 게 오더라고요. 굉장히 쓰기가 두려워졌어요.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였느냐고 물으면 데뷔 후 6-7년 시기라고 할 정도예요. 그러면서 나한테 안식년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때 한 해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여기저기 발 닿는 곳 아무 곳이나 가고요. 온전한 휴식이 너무 필요한 거예요. 완벽한 혼자됨을 미치도록 갈망하는 거죠. 쉬면서 나를 다지게 됐어요.

 

어째서 그토록 두렵고 힘들었을까요?


아마 너무 잘 돼서 그랬던 것 같아요. 데뷔 때부터 말이에요. 오히려 지나치게 잘 됐던 걸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나는 하나인데 가짜인 내가 아홉이 생겨 얘들이 막 움직이는 것 같더라고요. 일 년 동안 쉬면서 많이 정리가 됐죠. 무언가를 획득하고, 그걸 잃는다고 해도 그것은 잃는 게 아니다, 생각했어요.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적어도 시작점일 때보다 지금 사정이 더 좋잖아, 이렇게 생각하니까 나아지더라고요. 지난 5-6년 동안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내 안에 지나치게 자만함이 있었나보다 깨달은 거죠. 이제는 가감 없이 내가 원래 했던 것들을 하자고 결심하게 됐어요.

 

원래 했던 것들이라고 한다면 소설을 말씀하시는 거죠?


저를 힘들게 했던 두려움은 아마도 소설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철저하게 감췄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소설을 먼저 썼고, 소설 공부를 했으면서 동화를 덜컥 썼는데 돼버렸고, 동화작가라고 세상에 나온 거예요. 무언가를 감추면서 사는 사람이 된 거죠. 숨겨 둔 게 많으니까 인터뷰 같은 것도 무서웠고요. 그런데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가장 솔직하게 다 보여주자고 생각했어요. 장르를 열어버린 거예요. 저한테 장르의 캐비닛이 있다면 그걸 다 해제시켜버린 거죠.

 

그 다짐 후 출간한 작품이?


『너를 봤어』예요. 이 작품도 한참 전에 써둔 작품이었어요. 동화를 쓰면서도 사실은 내 얘기, 내 공간에서 나한테 들어온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쓴 것들을 묻어뒀던 거죠. 결국 타인이 저를 힘들게 한 건 하나도 없었어요. 지금까지도 그래요. 독자, 동료, 누구도 저를 힘들게 한 적이 없어요. 심지어 기자 분들도 마찬가지인데요. 저 혼자 내면에서 계속 힘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안 열면 못 견디겠으니까, 열어버린 거죠. 소설이란 장르는 손에 먼저 붙은 이야기니까요. 허기진다고 하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저 작가를 따라온 독자들은 이런 갈등을 거의 몰랐을 텐데 굉장히 솔직한 말씀이네요. 안에 이렇게 치열한 고민이 있었군요.


스스로가 장르 이미지에 나를 가둔 거예요. 동화 작가라는 이미지에 말이에요. 누구도 뭐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없는데(웃음) 혼자서 그런 거예요. 그걸 다 여니까 새로운 이야기가 올 때 훨씬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소설로 풀 이야기, 청소년소설로 풀 이야기, 동화로 풀 이야기, 이렇게 되는 거죠. 요즘은 그래서 아주 좋아요. 저한테 오래 쓴 그릇 여러 개가 있는 것 같아요. 큰 전을 예쁘게 부쳤는데 작은 접시밖에 없어서 이걸 억지로 잘라서 놓으면 안 되잖아요. 큰 접시가 없으면 쟁반에라도 턱 놓고 찢어먹어야 하잖아요. 이 그릇이 이제는 저한테 딱 생긴 것 같아요.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는 거죠. 이제는 요리를 얼마나 잘하느냐만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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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망하는 세상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인터뷰를 하면서도 작가가 가진 어른으로서의 역할 의식이 많이 느껴져요.


세상의 모든 어른은 세상의 모든 아이를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내 아이에게 잘해주자고요. 그리고 친구가 놀러 오면 존중해야죠. 내가 남의 아이를 존중해야 내 아이도 남한테 존중을 받잖아요. 그러니까 모두가 옆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면 결과적으로 모두를 존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세상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어요. 『플로팅 아일랜드』는 그런 마음이 왔을 때 막 쓴 거예요. 그런데 아직 첫발도 내딛지 못한 것 같고, 어딘가 부끄럽고 그랬죠.

 

여러 모로 다행이네요.(웃음)


쓰이는 시기, 발표되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건 정말 쓰자마자 나오거든요.

 

집중해서 담고 싶은 나만의 주제 같은 것도 있나요?


아니요, 가훈처럼, 명언처럼 딱 정해두고 이 주제에만 천착해서 쓰는 건 없어요. 모든 것에 저를 최대한 열어두려고 해요. 글 쓰는 사람들의 숙명은 남이 안 보는 것을 봐야 한다는 건데 저를 자꾸 가두면 안 될 거예요. 너무 아파서 못 쓰는 것도 있죠. 그것은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것이고, 계속 단련이 필요하죠. 굉장히 좋아해서 수시로 보는 소설이 『소년이 온다』이에요. 얼마나 긴 시간 뒤에 이야기가 나왔겠어요. 길게 다지고, 숙성한 뒤에 편견 없이 사실적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서술이 되어야 하니까요. 삶에 목표를 세워놓고 사는 것처럼 힘든 삶이 없고, 저는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고 봐요. 격변하는 세계를 버텨야 하는 거고 어떤 것을 마주했을 때 극복해야 하지 자기만의 목표만 보고 외면하면 이 세계는 차단된 세계가 되겠죠. 글 쓰는 사람마저도 그러면 안 되죠.

 

지향점이라고 바꿔 질문하면 어떨까요?


지향점은 있죠. 저는 기본적으로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사람을 열망하니까 자꾸 누군가는 제 글에 할머니가 많이 들어온다고 하는데요.(웃음) 그 때문인 것 같아요. 결국 그것이겠네요. 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온기 때문이에요. 작품에 온기 없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아요. 어떤 장르라도 말이에요. 살인자에 관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어디선가는 온기가 느껴지는, 온기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 세상이 제가 열망하는 세상이에요.

 


 

 

플로팅 아일랜드김려령 글 / 이주미 그림 | 비룡소
뜰 부(浮) 자를 써서 ‘부유도’라고도 불리는 낯선 섬 ‘플로팅 아일랜드’로 부모님과 여름휴가를 떠나게 된 강주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섬의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모험의 여정이 펼쳐집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권도영 “롱보드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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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보드 열풍’이 뜨겁다. SNS를 통해 화제가 된 일명 ‘롱보드 여신’의 영상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TV 광고와 뮤직비디오에도 롱보드가 등장했다. 이효리, 황치열, 남규리 등 롱보드의 매력에 빠진 연예인들의 모습도 공개됐다. 낯선 스포츠였던 롱보드는 점차 트렌디한 취미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높아지는 관심에 비해 강습 커리큘럼은 부족한 상황, 이에 롱보더 권도영은 “입문자를 위한 테크닉부터 마인드까지” 모두 담아 책 『롱보드 라이프』를 출간했다.
 
보더들 사이에서 ‘갓도영’이라 불리는 저자는 국내외 롱보드 대회의 수상자이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로다. KBS 공익 광고, LG와 쏘카의 CF, XTM의 프로그램 등에 출연한 바 있으며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라이딩 영상을 공유하고 있다. “롱보드란 대체 무엇인지, 어떤 매력이 있으며, 어떻게 즐기고 타야 하는지” 소개하고 싶어 『롱보드 라이프』의 집필을 시작했고 “당신의 삶을 바꿔줄 롱보드의 매력”을 아낌없이 공개한다.
 
국내 최초, 유일의 ‘롱보드 가이드북’인 『롱보드 라이프』는 롱보드의 유래와 구성, 장르 등 기본적인 정보부터 국내외 38인 롱보더들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까지 알차게 담았다. 책에 담긴 큐알코드를 활용하면 권도영 저자가 직접 촬영한 영상을 보면서 라이딩 스킬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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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변화를 주고 싶을 때 롱보드를 만났어요

롱보드의 인기를 체감하시나요?

제가 2012년부터 롱보드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때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스팟에 가보면 보드를 타시는 분들의 숫자도 늘어났고요. 보드 씬이나 관련 카페에서 주최하는 축제나 대회에 참여하는 인원도 많아졌어요. 씬이 커졌다는 게 느껴져요.
 
 
주로 찾아가시는 스팟은 어디인가요?

원래는 반포 스팟을 자주 갔어요. 달빛 광장 옆쪽에서 보드를 탈 수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처음 보드를 시작하고 계속 탔는데, 지금은 주차장으로 바뀌어서 보더들이 반포대교 옆쪽에서 타고 있어요.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모가 있을 때 찾아가는 편이에요. 여전히 반포 크루에서 활동하고 있고요. 현재는 의정부 인근에 살고 있어서 집에서 제일 가까운 서울 스팟에서 타고 있고, 지인들이 있는 지역의 스팟들을 찾아가기도 해요.

 

롱보드를 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예전에는 딱히 취미가 없었고 스트레스가 많은 편이었어요. 삶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취미거리를 찾기 시작했고요. 마침 지인이 보드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려놨더라고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스포츠였지만 재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책에서 이야기했다시피 보드는 크게 스케이트보드, 크루져보드, 롱보드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처음에 저는 인터넷으로 관련 커뮤니티에 다 가입하고, 시승해볼 수 있는 크루를 찾아가서 한 번씩 다 타봤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롱보드가 제일 편하고 재밌더라고요.

 
처음부터 롱보드에 매력을 느끼셨어요?


네, 처음 탔을 때부터 너무 재밌었어요. 그때는 기술 같은 건 하나도 할 줄 몰랐고, 보드 위에 발을 올리고 앞으로 가는 연습만 했었어요. 멈출 줄도 몰라서 보드 위에서 뛰어내렸었죠. 그런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생각보다 속도감도 있고, 그러면서도 안정적이었어요. 크루져보드를 탔을 때는 무서웠거든요. 크루져보드는 사이즈가 작으니까 그 위에서 중심 잡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롱보드는 더 크잖아요. 그래서 시작하기에 부담이 없었어요. 그냥 앞으로만 가도 재밌더라고요.

 
최근 들어 롱보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SNS나 인터넷에서 여성 롱보더들의 영상이 화제가 됐잖아요. 그걸 보면서 ‘저게 뭐지?’ 하고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영상들을 보면 편하게 타는 모습들이 많이 보이잖아요. 스케이트보드처럼 위험해 보이는 트릭 위주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저 정도는 나도 해볼 수 있겠다’ 싶은 마음도 드셨을 것 같아요. 편해 보이고 자유로워 보여서 관심이 많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영상을 공유하시잖아요. 촬영은 어떻게 하세요? 다른 보더가 뒤따라가면서 찍어주나요?


맞아요. 제가 처음에 보드를 타기 시작했을 때는 서로 영상을 찍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관련 브랜드나 샵에서 특별히 잘 타는 사람들을 촬영한 영상들이 간혹 나왔었고요. 그런데 보드를 타다 보니까 ‘잘 타지 않더라도 영상을 촬영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시절부터 기록이 남으면 추억도 되고 좋잖아요. 저는 그런 기록을 제대로 못 남겼다는 아쉬움도 들었어요. 그래서 페이스북에 그룹을 만들어서 매주 영상을 업로드했고, 그걸 본 사람들도 촬영 영상을 올리게 했어요. 그러면서 촬영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서로에게 촬영을 부탁하는 일도 자연스러워지고요. 예전에는 조금 더 전문분야의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대중적으로 더 쉽게 다가오게 된 거죠.

 
셀프 촬영도 가능한가요?
 
같이 보드를 타는 사람이 뒤에 따라오면서 찍어주는 게 제일 좋기는 한데요. 그럴 수 없는 상황이거나 혼자 촬영하고 싶을 때는 셀카봉을 들고 찍는 경우도 많아요. 아니면 한 자리에 삼각대를 고정시켜 놓고 그곳까지 가는 모습을 찍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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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보드는 부수셔도 됩니다

롱보드를 타면서 세계여행을 하셨죠?

지난해에 7개월 넘게 아시아, 유럽, 남미, 북미를 여행했어요. 그 전 해에도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를 2주 정도 다녀왔고요. 올해도 유럽에 잠깐 갔었고, 10월에는 중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서 가게 됐어요. 2년 전에는 대만에서 초청해줘서 간 적이 있고요. 

 

보더들의 유대감이 끈끈한 것 같아요. 롱보드를 계기로 여행을 떠나거나 친구가 되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롱보드는 마이너하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서로 오픈 마인드인 것 같아요. 영상을 공유하면서 해외 보더들과 SNS를 통해서 연락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친해지면 실제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죠. 그 나라로 여행을 가게 됐다고 포스팅을 하면 연락해서 만나기도 하고요. 저는 해외에 갔을 때 보더의 집에서 묵기도 하는데, 그렇게 계속 어울리게 되는 것 같아요. 인터넷, SNS가 발달돼 있어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끈이 있는 거죠. 그 안에서 롱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쉽게 마음을 여는 거고요. 같은 걸 좋아하니까요.

 

크루를 찾아가면 보드를 직접 타볼 수 있나요?


네, 크루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보드의 종류도 다양하잖아요. 보더 분들이 자기 보드를 빌려주면서 다 타보라고 해요. 그러고 나서 자기한테 맞는 걸 찾으라고요. 각자 재밌게 느끼는 게 다르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보드를 샀다가 나중에 자신한테 더 잘 맞는 걸 찾으면 다시 사야 하잖아요. 저도 사람들이 ‘보드 타 봐도 돼요?’라고 물어보면 부숴도 된다고 해요(웃음). 편하게 타라고요. 실제로 부숴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저는 스폰을 받고 있으니까 다시 보드를 받으면 되고, 보드라는 게 아껴가면서 탈 수는 없는 거잖아요. 기술을 연습하다 보면 넘어뜨리기도 하고 바닥에 많이 닿기도 하죠. 그래서 마음 편히 타 보시라고 해요.

 

취미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유지비용도 중요한 부분인데요. 롱보드의 경우는 어떤가요? 비용이 많이 드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많은 비용이 드는 취미는 아닌 것 같아요. 사실 각양각색이긴 하죠. (보드의) 가격대가 다양하기도 하고, 장르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크루징(주행)만 한다면 하나의 보드를 가지고 평생 탈 수 있어요. 프리스타일이라는 장르 속에는 댄싱과 트릭을 하게 되는데, 트릭의 비중이 적고 댄싱 위주로 한다면 보드가 망가지지 않는 한 하나 가지고 쭉 타면 돼요. 제가 생각할 때 비용이 제일 많이 드는 장르는 프리라이딩이에요. 산에서 내리막을 타는 건데, 바퀴가 닳는 속도가 빨라요. 프리스타일은 바퀴가 닳을 일이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프리라이딩은 바퀴를 닳게 하면서 속도를 줄이면서 즐기는 거예요.

 

‘다운힐’이라는 장르와는 다른 건가요?


조금 달라요. 똑같이 언덕에서 타기 시작하는 건데, 다운힐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누가 빨리 내려가는지 겨루는 거예요. 그래서 얼굴을 다 덮는 헬맷과 수트를 착용하고 타야 다치지 않죠. 아무래도 보호 장비를 구비하는 비용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바퀴가 닳을 일은 없어요. 프리라이딩의 경우는 바퀴를 닳게 하는 기술을 쓰기 때문에 계속 바퀴를 갈아줘야 하고요. 바퀴 한 세트를 교체하는데 5~6만 원 정도가 드는데, 정말 많이 타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 달에 한 번 바꾼다고 해서 크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닐 거예요. 그런 점에서 롱보드는 돈이 많이 드는 취미는 아닌 것 같아요.

 

다수의 대회에서 댄싱/프리스타일 부문 수상을 하셨어요. 주력 장르가 댄싱/프리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치신 적은 없나요?


한 번 팔이 부러졌던 적이 있어요. 작년에 세계여행을 하면서 콜롬비아를 갔을 때였는데요. 거기에서 찾아갔던 스팟은 프리라이딩, 다운힐을 하는 곳이었어요. 제가 원래 타던 장르를 하는 데가 아니었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하려다 보니까 사고가 났죠. 팔꿈치 뼈 끝이 살짝 부러졌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입문자의 경우에는, 달리는 보드 위에서 발 동작을 바꾸는 데 두려움을 느낄 것 같아요.


그래서 스텝을 옮기는 것부터 배우지 않아요. 보드와 친해지는 것부터 배우다가 발을 옮기는 걸 배우는 과정으로 차근차근 넘어가죠. 발을 옮기는 게 무서우신 분들은 잔디밭 위에서 연습을 하기도 해요. 움직이지 않는 보드 위에서 시작하는 거죠. 그래도 저는 움직이는 보드 위에서 연습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속도를 최대한 낮춰서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환경에서 연습을 시작한 후에 조금씩 어려운 단계로 가시는 게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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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롱보드를 선택하는 방법


롱보드 입문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팁이 있나요?


어떤 목적으로 롱보드를 즐기고 싶은지, 각자의 목적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제 경우에는 보드 커뮤니티를 다 찾아갔었고, 그게 좋은 방법 같기도 해요. 말씀드렸다시피 크루져보드, 스케이트보드, 롱보드로 나눌 수 있는데 롱보드는 크루져보드나 스케이트보드에 비해서 안전하고 배우기 쉽다고 생각해요. 스케이트보드 같은 경우에는 알리(Ollie)라는 기술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 동안 동작을 반복해야 하고,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기술을 터득해야 더 어려운 기술을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성취감이 크기도 한데, 롱보드보다 더 많이 다치기도 하죠. 격한 맛이 있는 장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스케이트보드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기술들이 많거든요. 크루져보드나 롱보드 같은 경우는 장애물을 필요로 하지는 않아요. 스케이트보드는 장애물을 만들어서 가지고 놀죠.

 

크루져보드는 스케이트보드와 크기가 비슷한가요?


아뇨, 크루져보드가 확실히 더 작아요. 그런데 롱보드, 스케이트보드 보다 값이 낮아요. 초기 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는 거죠. 저는 가장 무서운 게 크루져보드였어요. 크기가 작아서 다리만 올려놔도 남는 공간이 없거든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요. 물론 잘 타시는 분들도 계시죠. 크루져보드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해서 처음에 접근하기는 쉬운데, 배우는 과정이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 있어요. 스케이트보드나 롱보드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데 비해서 크루져보드는 조금 더 제한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첫 롱보드를 선택할 때 눈여겨봐야 될 부분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이것저것 시도해볼 수 있는 무난한 보드를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40인치 초반에서 중반 사이, 42~44인치 정도의 데크(보드의 몸통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 판)로 양쪽에 킥(데크 양 끝에 솟아오른 부분)이 있는 걸 사시는 걸 추천해요. 트럭(데크와 휠을 연결해 주는 파트)과 휠(바퀴)은 샵에서 판매하는 제품 중에 가장 무난한 걸 사시면 될 것 같은데요. 조금 알려진 브랜드 제품을 사는 게 좋아요. 저렴한 제품들 중에는 안정성 테스트가 잘 안 된 것도 있거든요.

 

가지고 계신 보드는 몇 개나 되나요?


정확하게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20~30개는 돼요.

 

종류 별로 다 갖고 계신 거예요?


네, 제가 오늘 가지고 온 보드는 양쪽에 킥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트릭이 가능한 거고요. 댄싱을 많이 하는 분들에게는 48인치 이상을 권해드려요. 제가 가지고 있는 보드 중에는 데크가 길어서 댄싱을 할 수 있으면서도 킥이 있어서 트릭도 가능한 게 있고요. 트릭을 조금 더 많이 할 때는 조금 더 짧은 데크를 써요. 그리고 스케이트보드도 가지고 있고, 다운힐 용도로 만들어진 데크도 있어요.

 

책에서 다양한 ‘롱보드 축제’를 소개해주셨는데요. 직접 기획하신 이벤트도 있더라고요. ‘LDL Party’를 개최하셨죠?


네. 한국에서는 ‘롱보드코리아’라는 카페에서 개최하는 대회가 제일 커요. (LDL Party를 기획할) 당시에는 트릭 위주로 하는 사람들보다 댄싱 위주로 하는 사람들의 점수가 조금 낮은 편이었어요. 댄싱 위주로 하시는 분들 중에서 아쉬워하는 분들이 계셨고, 그래서 우리끼리 모여서 놀자고 ‘LDL Party’를 만든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경쟁하는 것과 순위 매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LDL Party’에 오시는 분들에게 그동안 해왔던 걸 다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각자의 스타일에 맞는 상을 정해서 모두에게 상과 경품을 줬고요.

 

화려한 기술을 뽐내는 것보다 스스로 즐기면서 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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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보딩 스팟’은…


롱보드를 자유자재로 타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셨어요?


저는 굉장히 느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보드를 타는 것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랑 같이 보드를 시작했던 사람들이 다 저보다 빨리 실력이 늘더라고요. 제가 제일 느리게 배웠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지금은 보드를 타지 않더라고요. 저는 그냥 꾸준히 탔고, 제가 재밌는 것만 했어요. 그런데 저처럼 타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저처럼 잘 타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요. 제가 재밌는 것 위주로 했더니 조금 특별한 사람이 돼 있었어요.

 

권도영만의 스타일이 생겼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말 그대로 스타일이 생겨서 그때부터 인정을 받은 편이죠.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트릭이나 기술이 비슷하거든요. 잘 타는 사람이 뭔가를 하면 그걸 보고 따라 하려고 하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초반에 다른 사람들보다 못 탔고, 계속 도전해도 실패했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상관없어, 내가 재밌는 것만 하자’, ‘어차피 잘 타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잖아, 재밌고 싶어서 탄 거지’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우와’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하세요?


다르게 타서요. 저 사람은 보드랑 진짜 친하고 다른 사람이랑 다르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것만 하다 보니까 그 기술들에 있어서 만큼은 숙련도가 높아진 거죠. 그러니까 잘 타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보드를 저렇게 타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많은 광고와 방송에 출연하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나요?


(아이돌 그룹) iKON의 「Airplane」이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었는데요. 다 찍었는데 저희가 안 나왔어요(웃음). 그때가 기억나는 이유는, 인천공항 활주로에서 밤에 촬영을 했거든요. 정말 좋은 스팟이잖아요. 한 번 활주로에서 타보고 싶었는데, 그때 촬영을 하면서 마음껏 탈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말씀처럼 정말 드문 기회예요. 그런데 당시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이번에 예스24에 게재된 영상도 활주로에서 촬영한 거예요. 독일 베를린에 있는 활주로가 배경이에요.

 

활주로에서 촬영이 가능했어요?


원래 그 자리에 공항이 있었는데, 다른 공항을 지으면서 이용하지 않게 됐더라고요. 그러면서 활주로를 시민들한테 개방하고 공원으로 쓰게 한 거죠. 거기에 가면 언덕도 있고, 활주로도 있고, 광활하니까 (보더들에게) 스팟이 돼버린 거죠.

 

보더들이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네요. ‘보딩 스팟’이라는 점에서 추천해주고 싶은 여행지도 있나요?


방금 이야기한 베를린의 활주로는 진짜 추천할 만한 곳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유럽에서는 그곳이 최고의 보딩 스팟인 것 같아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도 스팟이 많은데요. 바르셀로네타 해변도 정말 좋고요. 남미에서는 브라질 상파울로의 이비라푸에라 공원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전 세계에서 제일 좋은 스팟인 것 같아요. 일단 활주로만큼 굉장히 넓고요. 한 파트가 되게 길어요. 제가 보드를 조금 빨리 타는 편인데,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가는 데 10분 정도 걸리더라고요. 그리고 실외인데도 불구하고 천장이 설치돼 있어서, 비가 오거나 더울 때도 보드를 탈 수 있어요. 공간이 넓기도 하고, 밤에는 불도 켜지고요. 그래서 보딩 스팟으로만 보면 이비라푸에라 공원이 최고인 것 같아요.

 

보드 씬에서 ‘갓도영’이라 불리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많은 입문자들이 ‘어떻게 하면 권도영처럼 탈 수 있는지’ 물을 것 같은데요. 어떤 대답을 들려주고 싶으세요?


저도 처음에 보드를 배울 때 남과 비교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나랑 같이 시작했는데, 저 사람은 잘 타는데 나는 왜 늘지 않지?’ 하고 생각하니까 재미없어지는 거죠. 그런데 혼자 탈 때는 앞으로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재밌어했거든요. 이제 막 보드를 시작하셨다면 잘 타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보드 처음 배울 때 느끼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보드를 잘 탄다고 해서 그 즐거움이 커지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처음 배울 때 느끼는 재미가 더 클 수도 있어요. 새로운 걸 시작하는 거니까요. 그런 부분에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재밌게 했으면 좋겠어요.

 

『롱보드 라이프』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롱보드 가이드북’이에요. 그만큼 고민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집필하셨나요?


일단은 롱보드라는 취미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앞부분에 보드에 대해서, 그리고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어떻게 즐기는가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실으려고 했고요. 강의 영상에도 제가 쌓아온 노하우를 최대한 많이 담았어요. 보드를 배울 때 가장 기초적이고 쉬운 것부터 알려드리고 싶었거든요. 동시에 현재 롱보드 씬을 같이 즐기고 있는 보더들의 이야기도 넣고 싶었어요. 그래서 인터뷰가 많이 실려 있죠. 보드를 즐기는 사람들, 이 씬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담고 싶었어요.

 


 

 

롱보드 라이프권도영 저 | 보랏빛소
롱보드의 유래, 구성, 장르 등 기본 상식과 더불어 SNS나 여행, 축제 등 롱보더가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문화를 소개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웅종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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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인구 천만 시대. 이 숫자가 가리키는 곳은 어디인가. 천만 인구는 과연 반려견과의 행복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을까? 이삭애견훈련소 대표이자 연암대학교 교수, <TV 동물농장>의 ‘국민 반려견 아빠’ 이웅종 대표는 지금이 제대로 된 문화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거듭 강조한다. 남의 개를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밖에서는 목줄을 착용한다, 와 같은 기본적인 인식조차 미흡한 현실에서 천만이라는 숫자는 자칫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해마다 버려지는 개가 증가해 2016년에만 유기견의 수가 6만 3천 마리에 달했던 것이 지금 우리의 현주소다.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다』에서 이웅종 대표는 ‘가족도 유행을 탈 수 있을까’, ‘애완견인가, 반려견인가’, ‘개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당신이 진짜 준비된 반려인인지 묻고 있다. 반려견을 입양하기 전에 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개와 ‘평생’ 함께 잘사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 ‘준비된’ 반려인이 되는 첫걸음이라고, 개와의 행복한 공생은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다름을 인정하기, 제대로 소통하기, 이것들은 모두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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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지켜야 하는 것들


현장에 오래 계셨잖아요. 그만큼 변화도 많이 느낄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실제로 관심 양상이 많이 바뀌었나요?

 

요즘은 반려동물에 관련한 정책이 국회에 많이 발표되고 있죠. 아무래도 제가 이쪽 분야에서 활동을 많이 하다보니 정책에 대한 방향설정, 자문 역할도 많이 하고 있고요. 기관, 지자체 등에서 운영하는 동물 복지 관련 세미나 요청도 상당히 많습니다.

 

책에서도 ‘점진적이었지만, 분명 발전했고, 진보 했다’(44쪽)고 적었죠. 그럼에도 여전한 아쉬움도 읽혀요.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동물에 관련해 급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시장, 반려인구 등이 커지고 있지만요. 거기에 따른 문제점들이 또 많이 발생하고 있잖아요. 하나의 문화 차원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책이나 복지도 뒤따라야 해요. 예를 들어 반려동물이 많이 모이는 시설이라면 시설 이용 안전 수칙부터 이용 방향, 문제점 해결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이런 것들이 적절하게 뒤따르지 못하는 문제점이 크죠. 제도적인 부분이 함께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보다 근본적인 방향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개인 사유 시설이라면 입장료를 내고 이용하면 되겠죠. 하지만 요즘은 지자체에서도 반려 동물 운동장, 놀이공원을 많이 만들 거든요. 그런데 관리 체계나 홍보 등은 미흡해요. 제일 큰 문제는 올바른 문화를 이끌어 가기 위한 개인 대상 교육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거든요. 문화가 바뀌기 위해서는 나부터 변해야 하는 것이 현실인데 말이에요. 나는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못하는 분들이 실제로 많아요. 개를 좋아서 기르지만 개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모르죠. 책을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여러 번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죠.


반려 문화에 대한 것들이 자리 잡았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고, 나부터 지켜야 하는 것들인데 현재 그렇지 못해요. 그러다보니 사회적 이슈도 많고, 문제점도 많죠.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잖아요. 더구나 잘못된 정보들이 워낙 많습니다. 포털 검색을 해보면 너무 잘못된 정보들이 많아요. 최소한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어야 하겠죠.

 

반려견 인구 천만 가운데 진정한 반려인은 채 10%도 안 될 것이라고도 했잖아요.


아직 목줄에 대한 개념조차 미흡하거든요. 산책을 나갔을 때 목줄을 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거예요. 개를 싫어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이때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개의 문제가 아니라 보호자의 문제라고 봐야 해요. 중요한 것은 한 명의 반려인이 무책임한 행동을 하면 그로 인해 다른 많은 반려인이 함께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거예요. 과연 나는 ‘페티켓’을 지키고 있는지 반성하는 시간도 가져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혼자 산다면 간섭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개를 키우는데 ‘나 하나는 상관없겠지’라는 생각은 안 되겠죠. 나부터 실천하면 문화도 정착하게 될 거예요.

 

두 갈래에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집안에서 개와 잘 지내는 것이 한 갈래,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또 한 갈래예요.


맞아요, 제목으로도 표현했는데요. 개도 사람의 보호 아래에서 사는 거거든요. 사람 무리 속에 개가 들어왔기 때문에 규칙을 지켜달라는 거예요. 저는 훈련하는 사람이잖아요. 소형견도 훈련시켜야 한다고 하면 그걸 동물학대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목줄 하라고 하면 동물학대라고 하고요. 아직 개념이 완전하게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반려 문화가 잘 발달한 선진국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전쟁 때는 개도 잡아먹고 그랬죠. 결국 문화는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이 돼요. 문제 해결 방법도 그곳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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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람이 교육되어야


나부터, 우리 집에서부터, 라는 점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반려 동물을 기르다 문제가 생겨요. 그러면 죄의식을 느끼게 되죠. 잘해주지 못하면 죄인이 된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고요. 그러다보면 동물을 기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돼요. 개에게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하다가 이웃 간에 갈등이 생기고, 스트레스는 높아져요. 그러다가 개가 버려지기도 하고요. 문제 발생의 원인은 개에게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여기서 또 짚어야 할 것이 제대로 훈련시키는 것과 학대를 혼동한다는 점이에요.


네, 책에도 교육을 강조했는데요. 인간 사회도 문명이 발달하잖아요. 왜 교육을 받겠어요. 교육을 안 받으면 더 편하잖아요.(웃음) 그렇지만 그건 아니죠. 개도 마찬가지예요. 사람 무리 속에 들어왔으니 교육을 받아야 하죠. ‘훈련’이라고 하면 쉽게 오해를 하는데요. 훈련소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어린 강아지의 사회성을 기르고 교육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식은 어떤가요. 문제가 발생한 후에 버릇 고치러 가는 곳을 훈련소라고 생각하잖아요. 이미 나쁜 버릇이 생긴 후 고치려면 개도 사람도 피곤하거든요. 저희 캠페인 중 하나도 강아지를 기르기 전에 보호자 교육을 철저히 해달라는 내용이에요. 교육을 먼저 받고 입양을 선택한다면 버려지는 개도 줄어들 거라 생각해요.

 

앞서 정책 제안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현재 상황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여러 단체가 있고요. 각 단체별 요구 사항이 다 달라요. 담당 부처 이동, 번식장 규제, 반려 동물 운동장 증설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급선무 과제는 교육 프로그램이에요. 먼저 사람이 교육되어야 하고요. 반려 동물 교육이 되어야 하죠. 그러면 다른 문제점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부분들이 있어요. 분리 불안 같은 문제 행동들은 교육으로 잘 해결할 수 있잖아요. 문제 행동이 줄면 유기견도 줄 거고, 스트레스가 줄면 병원 갈 일도 줄 거예요. 이런 것들은 교육에서 시작이 되는 거거든요.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공감해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저희가 이번에 KSD(Korean Standard Dog)라고 한국의 모범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입양자 교육, 강아지 교육 프로그램을 구축했는데요. 사실 개 키우는데 무슨 자격증이 필요하겠어요.(웃음) 그런데 과도기에서 문화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거죠. 일본도 20년 전부터 개를 키우려면 소정의 교육을 받았어요. 입양 전 체험 프로그램도 있었고요. 그런데 2년 전쯤 일본에 가서 지금도 교육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걸 왜 해요?’라고 되묻더라고요. 완전히 자리가 잡힌 거죠. 반려견 카페를 가도 줄을 풀어놓은 개는 한 마리도 없었어요. 하물며 강아지 테마 파크에 갔는데 그곳에서도 일절 목줄을 풀지 않았더라고요. ‘도기존’에서만 풀어요. 이처럼 문화 의식이 완전히 자리 잡았기 때문에 교육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거겠죠. 하지만 우리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교육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 경험이 쌓이면 자연히 문화가 정착하게 되리라고 봐요.

 

현재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가 유기견 문제일 텐데 해결책을 따지다보면 결국은 교육 문제, 의식 변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강아지 사회성 교육이라고 하면 환경 적응을 뜻하거든요. 동족, 사람, 환경 등에 최대한 노출하라고 하는 건데요. 생후 3개월에서 4-5개월 안에는 사회성 교육을 끝내줘야 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시기에 질병을 우려해서 외출을 안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거예요. 강아지가 집과 주인밖에 모르다보니 문제가 커지는 거죠. 큰 문제 중 하나가 분리 불안인데요. 사회성 교육이 잘 된 강아지는 분리 불안이 없어요. 교육은 구속이 아니에요. 개도 편안해요. 개가 편안하면 나도 개에게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어요. 단지 비싼 사료 주고, 좋은 옷 입히고, 좋은 용품을 써서 개에게 잘해준다고 하는데요. 그건 정말 오산이에요. 개에게 잘해줄 수 있는 건 바른 교육이에요. 개 교육, 사람 교육을 통해 평생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해요.

 

만약 제대로 개를 키우고 그 개가 평생 동안 별 문제없이(이상행동)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3개월 정도만 투자하면 된다. 이 3개월도 모든 시간을 다 투자하란 것이 아니라, 평소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 마법과도 같은 3개월, 100일만 잘 지낸다면, 이후 15년 혹은 그 이상을 당신은 멋진 주인으로 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별 걱정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118-119쪽)

 

‘마법의 백일’부분에서 의문점이 하나 생겼어요. 최대 생후 5개월까지가 사회성 훈련의 중요한 시기라면 유기견의 재교육은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전문가 재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해요. 현재 우리나라 유기견 입양 시스템도 문제가 심각한 거죠. 유기견을 구조했으면 재교육을 해서 입양 보내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직 미흡한 상황이니까요.


생각해야 할 것은 또 있어요. 반려 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더 많나요, 유기견이 더 많나요? 반려 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월등히 많거든요. 유기견 문제만 강조하면 반려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외면 받는 문제가 또 생겨요. 관심이 유기 동물에만 집중될 것이 아니라 반려인에게 초점을 맞춰 교육을 통해 유기를 방지하는 것이 급선무거든요. 지금도 유기견이 계속 늘어나잖아요. 아파서, 문제가 있어서, 돈이 들어서, 시간이 없어서 자꾸 버려져요. 기본 교육이 안 됐기 때문인데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아주 중요해요.

 

중요한 지적 중 하나가 반려 동물을 생명으로 봐야 한다는 내용이었거든요. 반려 동물을 통한 과시는 자칫 그런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할 우려가 있는 부분이에요.


반려 동물과 관련해서도 산업이 있고 트렌드가 있거든요. 이것은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저는 근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해주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요. 해주되 기본 요인부터 해결을 해준 후에 하자는 거죠. 개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먼저 배우고,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자고요. 우리 개가 명견인데 포기하는 사람 없거든요. 문제없는데, 나한테 기쁨 주고 행복 주는데 왜 버리겠어요. 문제가 되다보니 병원비 때문에 병원 안 가고, 여차하면 버려지게 되는 거잖아요. 이 모든 것이 개의 건강, 삶과 연결이 된다고 보면 돼요.

 

유기견 재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계시죠?


‘유기견 입양 훈련 학교’를 만들었어요. 많은 수는 아니고요. 다만 몇 마리라도 최소한의 교육은 시켜 내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설계를 했어요. 이것이 정책으로도 잘 풀려서 전국 보호시설 안에 담당 훈련사가 배치되는, 일련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유기견도 사회성만 잘 들이면 입양 후 파양되는 일을 많이 줄일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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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의인화하지 말아야


포털 검색으로 잘못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앞서 했는데요. 반려인이 교육을 원하더라도 방법을 몰라 못하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더 많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문화 센터나 교육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야 해요. 앞으로는 사설 기관도 많이 생길 텐데요. 시작 단계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일원화된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교육 프로그램을 매뉴얼화 해서 그것을 사용한다면 문화가 쉽게 자리 잡을 수 있겠죠.

 

쉽게 다른 개를 만지는 것도 인식 부족으로 지적하셨어요. ‘애완견’으로 보기 때문이라고요.


처음 본 사람의 몸을 만지면 안 되잖아요. 똑같아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탔던 개들은 몰라도 주인 외에 다른 사람을 싫어하는 개들은 다른 사람이 오는 것 자체가 공포고 두려움이에요. 개도 사람과 같거든요. 성격이 다 다르고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개도 있어요.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개도 있죠. 결국은 주인과 개와의 소통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느냐예요. 예절교육이 잘 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다를 수 있어요.

 

개의 성격을 제대로 아는 것도 보호자의 중요한 역할일 거예요.


1번부터 10번까지 상담이 있다고 합시다. 모두 같은 말티즈예요. 사람을 문다는 문제도 동일하고요. 그래도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하나씩 들여다봐야 해요. 원인은 다양하거든요. 주인 때문에 무는 건지 개가 신경질적인 성격인지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게 싫은 건지 개의 행동은 제각기 달라요. 같은 품종의 같은 문제라도 경우에 따라 달라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고, 어떻게 개를 리드하고 있고, 어떻게 개와 접촉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 다르다는 거죠. 때문에 교정 방법도 달라지는 거고요.

 

문제의 원인 찾기, 내 개의 성격 파악하기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 같아요. 대개 상담을 청하는 경우는 문제를 어떻게 없애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사람을 보고 짖는지, 초인종을 향해 짖는지, 아이한테 짖는지 다 다르죠. 똑같이 짖더라도 강도가 달라요. 반응이 다르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 개를 어떻게 같은 방법으로 교육할 수 있겠어요. 최소한 내가 기르는 개는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내 개의 성격을 잘 알고 잘 소통하는 것이 보호자의 중요한 역할임을 알아야 해요.

 

부제를 ‘나의 개를 더 알고, 제대로 사랑하기 위한 개념 인문학’이라고 했는데요. 그 이유를 알겠네요. 훈련사들도 유아발달심리학 공부를 한다고 했잖아요. 이런 접근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겠네요.


‘개의 버릇을 이렇게 고친다’는 내용의 책들은 많아요. 하지만 잘 먹히지 않죠. 개체마다 견종마다 보호자 유형마다 제각기 다르니까요. ‘앉아’, ‘엎드려’, ‘기다려’ 교육하는 것은 거의 비슷하죠. 그 외에 보호자가 최소한의 이해를 갖고 교육을 시키고 공부를 한다면 다를 거예요. 이 책이 그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이것 하나만큼은 꼭 기억해줬으면 하는 내용이 있다면요?


개를 편하게 해주는 것만이 개에게 잘해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와 개, 단 둘이 외톨이로 살 건 아니잖아요. 사회, 무리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거니까요. 교육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강조했던 건 사람이 개가 될 수 없고, 개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점이거든요. 다른 종(種)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개를 의인화하지 말라는 거예요. 개는 동물이거든요. 되게 단순해요. 그것을 이해하면 돼요.

 

자극적인 질문인데요. 절대 개를 키우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을까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요. 충동적으로 개를 키우면 안 돼요. 이목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개를 키우면 안 돼요. 더 심하게는 동물 학대 유경험자는 절대 개를 키우면 안 되겠죠. 또 과하게 좋아하는, ‘애니멀 호더’도 문제고요. 좋아하고, 보호한다고는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의 개를 키우는 것 역시 동물 학대거든요.

 

달리 보면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를 키울 수 있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네요.


그렇죠, 충동구매를 했다가도 개를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분들도 있잖아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충동적으로 구매하지 않으면 좋겠고요. 사치로 개를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세요?


앞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물 복지, 특히 교육 부분을 확산시키고 싶어요. 반려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을 전국적으로 전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예요.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직 힘들죠. 단체별 의견 합일도 아직 미흡하고요. 반려 동물과 관련해서 이슈는 많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실질적인 프로그램 구축 같은 게 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다이웅종 저 | 쌤앤파커스
개와 인간은 명백히 다른 종이다. 언어가 다르고, 신체의 모습도 다르다. 좋아하는 환경도 다르고, 습성이나 문화도 다르다. 한마디로, 개에게 사람은 외계인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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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2>에서 장재인이 통기타를 들고 나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노래한 장면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들은 그 무렵 그런 각별한 느낌의 노래, 무대, 가수를 경험하지 못했다. 허각과 존박 다음의 순위였지만 장재인은 결코 그들 못지않은 시청자의 주목을 포획했다. 약간의 몽환, 순수, 섬세함, 떨림이 엉킨 드라마틱한 음색의 승리였다. 하지만 장재인의 이후 활동 궤적은 2012년 <여름밤>과 2015년 소속사 미스틱에서 낸 <Liquid>가 있었어도 펀치력이 두드러진 편은 못되었다.

 

지속적인 드라마 OST 활동으로 존재감을 유지해왔어도 그리 잘 보이지 않더니 지난 4월에 발표한 감성적인 싱글 <까르망>과 함께 '복귀'의 장을 열어젖혔다. 이즘과 처음 만난 그는 자신을 괴롭힌 근긴장이상증이란 병을 비롯해서 활동 스펙트럼, 음악적 비전과 앨범의 가치 등 전반에 대해 진솔한 얘기를 들려줬다.

 

노래 활동을 두고 보통은 삼가는 '일'이라는 표현을 수차례 동원한 데서 '의욕'이 드러났다. 자신의 음악을 록으로 규정한 장재인은 “내가 원하는 것은 히트곡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할 앨범!”이라고 말했다.

 

우선 건강상태가 궁금하다. '근긴장이상증'은 어떤 병인가.


근데 의외로 뮤지션들 중에 이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꽤 있어요. 뮤지션들이 걸릴 수밖에 없는 병 같아요. 기본적으로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니까요. 그리고 악기를 연주한다는 게 특정 근육을 계속 쓰는 거잖아요. 이 병이 생기기 쉽죠. (스트레스도 작용하지 않느냐고 묻자) 수면부족에 시달렸죠. 미디어에 노출된 것 말고도 사실 너무 바빴어요. 잠을 못 잘 정도로요. <슈퍼스타 K> 이후로 한 2-3년은 하루에 30분, 2시간 잘 때도 많았고. 외국 스케줄이 잡히면 정말 잠을 한숨도 못 잤죠.

 

그러니 발병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마음의 여유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이 일을 오래 한 사람이면 “이때는 일만 생각하고, 이때는 나만 생각하고, 이때는 휴식에 집중하고” 이렇게 분배가 되어야 하는데 당시엔 일을 막 시작했던 때잖아요. 누구에게도 이 직업이 어떤 건지 들어본 적도 없었고 무작정 닥치는 대로 하다 보니까 제대로 휴식을 하지 못했죠. 하지만 제가 아픈 게 너무 미디어를 통해 강조가 됐는데, 아파서 쉰 거는 고작 4개월 정도예요. 지나치게 강조가 된 것 같아요. 아프다고 머뭇거리고 멈춰있는 타입도 절대 아닙니다. 아파도 창작은 계속 하고 있었어요.

 

최근에 <복면가왕> 출연했던데...


방송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어요. (나가게 된 연유를 묻자) 소속사 '미스틱'이 원래 예능을 잘 하는 회사니까.. 제가 이런 거 저런 거,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겠다고 했어요.

 

방송 무대에 선 건 꽤 오랜만이었다.


오래 됐죠. 듀엣 무대가 개인적으로는 아쉬웠어요. 인디고의 「여름아 부탁해」를 불렀는데, 상대편 남자분의 키(key)에 맞췄거든요. 잘 할 수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론 너무 낮은 음역대로 하려니까 아쉽더라고요. 조율을 잘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자신의 보컬 특색을 평가한다면.


되게 섬세하다는 것? 이게 성격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감정이나 감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스타일인데, 떨림 불안함 그런 요소들이 분명히 보컬에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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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을 우위에 놓는다는 얘기인데....

 

그런 것 같아요. 스스로 만족하고 있거든요. 제 개인적인 주관과 자기의 감성이 들어갔느냐를 최고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추구하는 보컬 성향은 다르겠죠. 기술적인 것을 최고로 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저는 감성적인 걸 최고로 치거든요. 어려서부터 존 레논, 밥 딜런 같은 사람들의 보컬을 무척 좋아했어요.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보다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것 말인가.


그렇죠. 그냥 말하듯이요. 그냥 그 순간을 확실히 전달하는 보컬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물론 기술적인 걸 보완해야겠다고 느껴서 연습도 하고 있지만요.

 

최근 싱글 <까르망>은 그런 면에서 좋았다. 보컬의 맛이 느껴졌다.


<까르망>은 되게 담백하게 나왔죠. 기본적인 발성 자체를 밑으로 내렸어요. 보컬적으로 얘기하면 '흉성'이 나오는 건데, 결국 말하는 소리와 노래하는 소리 모두 한 발성이 적용되는 거라고 생각을 했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말하는 톤을 내려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항상 떠 있는 톤으로 말을 했는데 이걸 내려서 하는 쪽으로. 소리도 거기 맞게 바뀐 거죠. 듣는 분들은 안정적이고 편안하다고 느낄 것 같아요.

 

전체적인 색채는 어떻게 잡았나.


우선은 억지스러운 목소리가 전혀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들을 때 편안할 수 있게. 그리고 사실 저는 박자, 리듬을 굉장히 놓고 부르는 스타일이에요. 그런 걸 좋아하고. 근데 이 노래는 '박자를 칼 같이' 지키면서 불렀어요. 듣기 좋은 보컬, 편하고 거슬리지 않는 보컬로 결과물을 내보자 했다고 할까요.

 

결과물의 개수가 적은 편이다. 미스틱에서도 많은 작품을 낸 건 아니고.


작업물이 적은 거는 미스틱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아요. 가수도 많고.

 

거기에 동의하나.


저는 한 체계나 그룹에 들어오면 그 시스템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속해있는데 제 스타일대로 감정이 꽂혔을 때 “이건 무조건 내야해” 할 수는 없으니까요. 시스템 구조에 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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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게 있지만 상황을 고려해 목소리를 낮춘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스타일 같다.


그것 때문에 고민도 있어요. 의외로 제가 <슈퍼스타 K> 때문에 고집이 세다는 인상이 있는데요, 사실 저는 고집을 좀 더 피워야지 좋은 완성물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자아표출을 너무 안하고 있거든요. 제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 상황과 환경 때문에 그 목소리를 약간 낮추는 편이라고 봅니다.

 

'음악적으로 정확히 하고 싶은 것'을 이 자리에서 공개할 수 있나.


언제든 공개할 수 있어요. 저는 곡을 만들 때 처음부터 앨범을 생각하고 곡을 써요. 절대 다작(多作)을 하지도 않고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식으로.

 

콘셉트 앨범 말인가.


네. 그럼 그 앨범에 관한 곡들만 일 년 동안 계속 생각하면서 가는 거예요. 이제 이 앨범에 이런 얘기와 이런 스타일의 곡이 들어가겠다, 이제 무슨 곡이 들어가지? 어떤 얘기가 부족하지? 생각하고 채워 넣고 그런 스타일이에요. 항상 앨범 형으로 만드는 사람인데 사실 데뷔하고 나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죠.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어요. 상황을 보고 있어요. 앨범이라는 시스템을 주장하기 힘든 현실이기도 하고. 시대적으로.

 

지금 그런 앨범이 필요하지 않을까. 너무 오랫동안 앨범이 없다.


저도 그걸 해야 하는 사람인 걸 알아요. 그렇지만 미스틱만의 색깔, 생각이 있더라고요. 미스틱이 보는 장재인이 있어서 거기에 대한 앨범을 준비하고 있죠.

 

2015년 드라마 <킬 미 힐 미>의 삽입곡 '환청'을 고평하는 사람이 많다.


'환청'은 제가 이 직업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고집을 부린 작업물이에요. 잘 될 거라는 예상은 하나도 안 했어요. 원곡자(지그재그노트)는 리한나(Rihanna)처럼 노래를 뽑아주기를 원했어요. 에미넴과 함께한 「Love the way you lie」 같은 느낌으로. 가이드 보컬도 그렇게 왔고 디렉트도 그렇게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사실 웬만하면 저는 다 맞추거든요. 제가 제작팀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창작물이고 그가 원하는 그림이 있으니까. 근데 이건 진짜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장재인을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건가.


이런 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기술적인 보컬을 원하면 굳이 나를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감성에 훨씬 더 집중된 보컬인데 이걸 유지해야 되지 않나 싶었다.

 

꽤 많은 OST를 했다. 잦은 사운드트랙 참여로 소모되고 있단 생각을 한 적은 없나.


초반에는 했는데 지금은 그냥 '일'이라고 생각해요. 원래는 저는 창작물을 내는 아티스트니까 이런 게 소모적이지 않나 생각했는데 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것들이 다 쌓이는 콘텐츠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일'로 생각해야겠다는 거죠.

 

그럼 일로 생각해서 계속하다 보면 거기에 관록이 붙을 텐데 그렇게 해서 얻는 건 뭔가.


음... 커리어가 쌓이는 것. 그리고 뭐, 벌이가 되는 것… (웃음)

 

너무 솔직한 것 아닌가 .


저 되게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정말로 일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거기서 제게 “재인씨가 가사를 쓰세요”, “재인씨가 표현하는 걸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생각이 달라지죠. 그렇게 하면 내가 관여하는 창작물인 건데, 그렇지 않고 제게 보컬적인 것과 그런 걸 원하면 저는 그냥 일하러 가는 느낌인 거예요.

 

내 스타일을 담은 앨범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내가 원하고 내 스타일을 담은 독집은 아직 안 나왔다는 것?


안 나왔죠.

 

언제쯤 나올까. 올해 말 아니면 내년 초?


아뇨. 지금은 윤종신 피디님이 계획하는 방향대로 가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가사들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Liquid> 앨범 기점으로 가사가 한 단계 업 됐어요. 제가 가사를 썼는데 기회가 되면 이번 앨범에 한 두 곡이라도 제 곡을 넣으려고 하거든요. 근데 윤종신 피디님이 생각하는 장재인 앨범에 제가 쓴 곡이 안 맞으면 안 넣으실 수 있죠. 그건 프로듀서의 영역이니까.

 

장재인이 말하는 장재인의 진솔한 이야기는 어떤 것들일까.


저는 덤덤하고 담백한 사람인 것 같아요. 덤덤하게 얘기하는데 밝진 않죠. 항상 외롭고 쓸쓸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우선 밝은 이야기,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보다는 어떤 설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오히려 좀 샤이(shy)한… 개인적인 작업물들을 보면 그런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만든 곡 중에 가사 측면에서 마음에 드는 곡은.


아직 안 나왔죠. 제 아이폰, 구글 드라이브에 잠자고 있어요. 아, 개인적인 작업물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건 「반짝반짝」이에요. 그건 멜로디와 가사를 제가 직접 썼는데 멜로디나 스토리, 분위기, 뉘앙스 다 마음에 들어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 테이크 녹음을 한 거예요. 원 테이크인 척 하고 내는 곡들도 있지만 그 노래는 진짜 원 테이크예요. 그래서 보컬적인 게 아쉽긴 한데 작품성으로 봤을 때는 마음에 들어요.

 

「Love me do」는 어떤가.


그 노래도 좋은 곡이죠. 잘 쓴 노래였어요. 제가 녹음작업을 했다면 폴 매카트니 혹은 미카(Mika) 같은 스타일이었을 거예요. 근데 이걸 조규찬씨가 편곡하면서 더 나이스하고 젠틀하게 나왔어요. 그때 배운 점이 있는데 조규찬 씨가 굉장한 완벽주의자잖아요. 제게 코러스를 전부 시키셨어요. 저 보통 코러스 그렇게 안 하거든요. 조규찬씨의 코러스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겠어요. 그 화음들을 제가 다 한 거예요. 만족감은 굉장히 크더라고요. “내가 이런 라인을 해냈네” 이런. 그리고 그 곡의 기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제가 정말 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Liquid> 앨범은 어땠나.


「밥을 먹어요」 같은 가사는 지금 봐도 칭찬할 만하지 않나 생각해요. 「밥을 먹어요」「나의 위성」「클라이막스」이런 가사들은 잘 쓴 것 같아요. 언제 불러도 부를 수 있는 멋있는 노래. 그 앨범은 여성스럽고 프렌치(french)한 캐릭터를 생각하고 연기한 앨범이에요. 가사에는 제가 드러나 있지만, 미스틱의 캐릭터 프로듀싱인 거죠. 저와 미스틱의 합작이라고 할까요.

 

장재인의 음악을 정의한다면.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페일 블루(Pale blue) 음악이에요. 굉장히 창백한 파란색이에요. 이미지적으로 생각하거든요. 물론 아직 보여준 것이 없어서 대중에게 와 닿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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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왜 그런 창백함이 있는 걸까.


창백하다는 것 자체가 안정적이지 않고 불안하잖아요. 겉으로 보이는 저는 소속사 등 여러 가지 배려 덕분에 안정적인 행동을 취하지만 제 안은 절대 안정적이지 못 하거든요. 성향도 그렇고. 그래서 페일이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선천적으로 예민하게 태어난 것도 분명 작용을 하는 것 같고요. (외로움도 있지 않나 했더니) 맞아요. 외로워서 음악 하죠.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역할모델, 혹은 '이 사람 마음에 든다'고 할 아티스트가 있나.


이소라씨와 김윤아 씨요. 저와는 너무 다르지만요. 활동을 하면서 점점 더 존경심이 커진 게, 해보니까 여기서 자아를 지키는 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내 주장, 내 것만을 이렇게 단단하게 지킨다는 것이요. 여자로서 더 힘든 것도 있을 것 같고…. 근데 이소라씨와 김윤아씨는 오랜 시간 동안 자아를 단단하게 지켰잖아요. 저는 그렇게 하는 게 힘들었는데 그분들은 20년 이상 꾸준히 그렇게 해 오신 거죠. 절대 중심을 잃지도 않고. 멋있어요.

 

자신이 록을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팝 뮤지션으로 생각하는지..


저는 누가 뭐래도 록이에요. 제 뿌리는 누가 뭐래도 록이죠. 제가 포크를 부르더라도 록! 저는 포크 뮤지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으로, 제 안에는. 시작이 무조건 록이었으니까요.

 

<슈퍼스타 K> 한지 벌써 7년이 지났다. 그동안 배운 게 있다면..


세계랑 시야가 좀 더 넓어져서 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배웠죠. 지금 스무 살 때 한 거 보면 멋있지만 큰 바다 같진 않아요. 물론 그때의 저도 '리스펙트' 해요. 왜냐면 굉장히 강하게 자신을 표현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게 넓지는 않거든요. 지금은 훨씬 더 넓죠, 시야가.

 

장재인에게 필요한 것은 한 곡의 히트송 아닐까.


그래서 지금 미스틱과 하는 거예요. 회사에 믿고 맡기고, 프로듀서에 맡기고. 하지만 저는 원 히트 송 내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제가 원하는 거는 내가 내 이야기 할 앨범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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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내 음악하면서 소소한 행복 느끼며 사는 게 내 주의

 

예술가로서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위치를 위해서는 '원 히트송'이 결정적이지 않나. 싸이에게 '새'가 있고 김광진에게 '편지'가 있었듯이.


히트곡에 대한 생각도 없고 내 곡이 히트해야만 해 이런 생각도 별로 없어요. 내가 내 음악을 잘 하면서 즐겁게 내 소소한 행복을 느끼면서 살면 되지 않나 하는 주의인데, 제가 어른들 말을 잘 듣는 편이기도 하거든요. 어른들 말이 인생이 그렇지만은 않대요. 그래서 미스틱을 믿고, 윤종신 피디님을 믿고 따르는 거죠. 제 성향이나 음악적 세계관은 굉장히 폐쇄적인 것 같아요. 저 스스로 깨닫기는 대중과 먼 아이인 거죠. 그래서 이런 행보를 대신해 줄 사람으로 윤종신씨를 찾은 것 같아요.

 

건강하지 못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수확한 게 있다면.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았다는 것? 방준석 선배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눴어요. 결국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아서 병이 발병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충고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저를 들여다보고 사랑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봤더니 제가 원하는 건 '내가 생각한 앨범'을 만드는 거더라고요. 내가 생각한 이야기를 확실하게 이야기 하는 것. 그 병 덕분에 구별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이건 일, 이건 내가 할 것.

 

좋은 자신의 앨범이 나와서 대중에게 더 많이 사랑 받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저는 제 곡이 진짜 좋은데 대중이 그걸 사랑할지는 모르겠어요. 큰 사랑이 올 곡인지 말이에요.

 

나를 만든 앨범 몇 장을 소개한다면.


먼저 비틀스. 제가 17살 때 처음 접한 앨범이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였어요. 비틀스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서 '팝송 배우자'하고 부르던 'Let it be', 'Hey Jude'만 생각했는데 사실 이 사람들은 록이고 블루스였던 거예요. 정말 문화충격이었어요. 그 앨범을 순서대로 듣는데 두 번째 곡(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나올 때는 울었어요. “와, 어떻게 이러지? 진짜 이 앨범 미쳤다.” 심지어 링고 스타가 부르잖아요. 그 느낌도 너무 좋고. 한 편의 영화, 소설처럼 훌륭하게 만들었잖아요. 미치지 않고서야....

 

또 다른 앨범은.


비틀스의 <White Album>과 조니 미첼(Joni Mitchell)의 <Blue>... 그리고 피오나 애플(Fiona Apple)을 정말 열심히 들었어요. 완전 심취했죠. 1996년 1집 <Tidal>도 좋고 2012년에 나온 4집 <The Idler Wheel ...>도 정말 좋아요.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음계가 이해가 되고 왜 그런지 알겠어요.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거든요. 너무 생각이 많고 수많은 감정이 들고, 일상 생활하는 게 어떻게 보면 기적이에요. 근데 그 사람이 낸 곡에서 그게 느껴져요. 머릿속의 수많은 감정과 불안감, 그런 걸 다 토해내더라고요.

 

인터뷰 : 임진모, 정민재, 강민정
사진 : 홍은솔
정리 : 임진모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하유진 “나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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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생은 꿈을 말하기 전에 현실성을 가늠하고, 화려한 성공을 꿈꾸기보다 실패를 걱정한다. 열정은 열정페이가 되고, 낙관은 철없는 꿈으로 치부된다. 지금의 청춘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할 사람은 없다.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도 버거워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지 못한다.


쫓기듯 살아가는 청춘에게 길을 밝혀주는 사람이 있다. 심리과학연구소를 운영하는 하유진 저자. 얼마 전 방황하는 청춘을 위해 『나를 모르는 나에게』를 출간했다. 저자는 연세대학교에서 3년 동안 심리학을 강의하며 만난 청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를 이해하는 여정을 소개한다. 예스24 대학생 리포터들이 저자에게 “나를 들여다볼 시간”은 무엇인지, 청춘이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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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안다는 것

 

 『내가 이끄는 삶의 힘』에 이어 두 번째 책 『나를 모르는 나에게』가 나왔습니다.

 

『내가 이끄는 삶의 힘』은 ‘일의 의미’를 강조한 책이에요. 지위나 돈이 아니라 일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의 의미와 효과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심리학 연구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썼어요. 『나를 모르는 나에게』는 제가 만났던 고민하고 방황하는 청춘 이야기에요. 사회생활을 준비하고 있거나 막 사회에 처음 진출한, 20대에서 30대 초중반인 독자를 염두에 뒀어요. 빨리 취직을 하고 안정되기 위해서 조급해하고 방황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렇게 내실을 다져가며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아 썼어요. 빨리 취직하고 성공하려는 이야기보단 서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어요.


방황하는 청춘이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회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을 만나 ‘지금 일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라고 여쭤보면, ‘어쩌다 보니’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졸업할 때가 되면 마음이 급해져서 지원서를 막 내고 그중 면접 보라고 하면 ‘감사합니다’하고 가게 되고, 붙은 기업 중에 가장 연봉이 높은 곳에 취직하고....... 그러니까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날 선택한 곳에 가게 된 거죠. 하지만 ‘다시 돌아가면 어떤 일을 하시겠어요?’라고 여쭤보면 또 대답하지 못해요. 무엇을 하긴 해야겠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지금의 청춘과 똑같은 모습이라 생각해요. 주말에 잠도 아껴가며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온 거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해요. ‘그래도 괜찮게 살아왔어’라고 말하는 미래, 그게 ‘나’를 안다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어떻게 청춘의 시기를 지나왔나요?


참 철없이 지냈어요.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대학을 가야 하는구나, 하면서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겪었어요.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졌어요. 뒤늦게 저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지?’ ‘잘할 수 있는 건 뭐지?’ 이런 고민이 저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었어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하기 가장 좋은 건 현실적으로 여러분 나잇대인 20대예요.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취직을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누가 시키는 인생이 아닌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이때 고민을 해야만 해요.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하시며 많은 청춘을 만나셨을 것 같은데요.


청춘들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것 같아요. 일단 너무 급해요. 빨리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너무 심하고, 나와 나보다 잘 된 사람을 자꾸 비교하려고 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생 별거 없어’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해’라는 말을 따르거나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생 별 거 없어’라는 경향이 같이 보여요.


두 간극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20대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시기에요. 많이 읽고 움직여야 해요. 그런데 열심히만 하는 게 아니라 틈틈이 자기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인정해주고 보상도 해줘야 해요. 그 둘의 조화에 신경 썼으면 좋겠어요.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지 말고, 자기를 잘 세워서 열심히 해나가야 인정도 받아요. 열정, 휴식, 그리고 인정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어요. 자기에게 약간은 엄격하지만, 그러면서도 적당한 너그러운. 이 시기엔 ‘중심’이 필요하고, 그걸 고민해야 해요.


처음으로 ‘나’와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한 시기에 뭘 하면 좋을까요?


심리학에는 True Self와 Actual Self라는 개념이 있어요. True Self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진 않지만 정말 편한 나 자신을, Actual Self는 드러나는 자신을 의미해요. 청춘들은 어떻게 보이느냐를 더 고민해요. 세상의 평가에만 신경 쓰게 되면 둘 사이의 괴리가 커져요. 이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바깥 모습에만 치중하다가 ‘나’를 잃어버려요.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내가 무엇을 할 때 편안함을 느끼는지 고민해야 해요. 이런 문제는 한 시간 멍하니 앉아 있다고 알게 되는 게 아니에요. ‘뭔가를 찾았다’ 싶은 기분일 때 자신에게 기회를 주세요. 직접 해보고 ‘정말 해보니 이게 아니네’ 혹은 ‘이거야!’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자신에게 기회와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한 달이든, 6개월이든, 일 년이든 오롯이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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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라지 않는 내향적인 ‘나’에게

 

Actual Self를 말씀하셨는데, 요즘 청춘들은 정말 ‘쓸모 있기’ 위해,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도 더 잘하는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사회에서 거절당하며 힘들어해요.


잘하고 싶고, 쓸모 있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데 계속 거절을 당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존감을 지키느냐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죠. 거절이라는 건 누군가에게나 쉬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하지만 인생은 쉽지 않다는 마음을 처음부터 가져야 해요. 심리학 연구를 보면 목표를 갖고 노력하는 사람이 오히려 목표가 없는 사람보다 많은 걸 잃어요. 그 안의 어려움을 각오해야만 더 많이 얻게 돼요. 무언가에 도전할 때 ‘이 정도 어려움은 당연히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시작해야 해요. 몇 번의 거절을 인생 전반에 적용해버리면 헤어나올 수 없어요. 몇 번의 실패로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기엔 너무 빠른 시기에요.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이 많고, 지금의 실패를 너무 크게 보지 말아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도 자존감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청춘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어요. 자존감이 낮으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고민하는 거죠. 저도 자존감이 낮은 편이에요. 자존감을 높이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할 때 내가 편할까?’를 고민하는 편이 나아요.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에요. 저도 지금 떨리고 ‘대답이 별로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을 해요. 이럴 땐 ‘내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집중해서 이야기하자’라고 마음을 먹어요. 거기까지가 한계에요. 내가 나에게 기대를 어느 정도 만들어 주고 독려하는 거예요. 억지로 자존감을 높이지 말고, 남들과 비교해서 나를 낮추지 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야 해요.


책에 내향적인 성격으로 고민하는 대학생 사례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나요?


내향인 친구들은 성격으로 고민을 많이 해요.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외향을 요구하기 때문이에요. 면접을 보거나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을 원해요. 그래서 내향인 친구들은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인간관계도 좋고, 인맥도 넓어야 하고, 어디 가서 발표도 잘해야 하고, 어색한 상황에서 잘 나서야 하고......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러면 사회가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어요. 내향과 외향이 모두 필요한 거죠. 내향인 사람에게는 내향만의 장점이 있어요. 그걸 다 버리고 외향이 되려는 친구들이 많고 그러다 ‘나는 왜 안 되지?’를 고민해요. 하지만 그건 이도 저도 안 되는 결과를 낳아요. 내향인 나의 장점을 찾아야 해요. 내향은 느리지만 굉장히, 단단하고 신중해요. 자신의 성격을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외향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내향적인 성격이라는 말이 너무 포괄적으로 들려요. 내향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향과 외향을 가르는 것은 에너지를 회복할 때 무엇을 하느냐의 차이에요.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회복되면 내향인 거예요. 외향은 다른 사람과 있어야 에너지가 회복돼요. 주말에도 당연히 나가야 해요 나가도 친구 여럿과 사람이 많은 곳에 가요. 내향은 혼자, 조용히, 같이 가더라도 소수의 친한 사람과 가요. 관심이 안으로 향하는 지, 혹은 밖으로 향하는 지도 중요해요. 내향은 보통 외부세계가 변하는 일보단 자신을 성찰하는 편이에요. 책을 읽는 것처럼 혼자 하는 취미가 있어요. 내향은 안으로 향하다 보니 발표가 굉장히 어려워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필요한 거죠. 내향은 1:1이나 소규모 그룹에 훨씬 편한 사람이에요.


내향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은 다를 것 같아요.


맞아요. 소극적인 것과 내향은 분명히 달라요. 내향인 사람 중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적극적인 사람이 있어요. 이런 차이는 ‘본인이 원하느냐’에서 오는 거예요. 원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 건 좋아해요. 누가 시켜서 하면 못할 뿐이에요. 그래서 내향인 사람이 ‘이건 이렇게 해야 하니까’ ‘이렇게 해야 유능해 보이니까’라고 억지로 성격을 바꾸면 금방 에너지가 바닥나요. 사람은 누구나 ‘이건 내 일이야’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한 힘을 발휘해요. 욕심 가는 일을 찾으면 그때는 나도 모르는 힘이 솟아나고, 재미있고, 잘해요. 내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에너지를 쏟고 싶은 걸 찾지 못하는 게 문제인 거예요.


내향에 얽매여 갇히지 말고 자기만의 방을 나오라는 메시지인가요?


산속에서 주파수가 안 잡히면 핸드폰 배터리가 훨씬 빨리 닳는다고 해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내 것인지 모르겠는데 열심히 하라고 하면 지쳐요. 재미도, 보람도 덜하고요. 사람의 에너지는 무궁무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길을 내 속도로 갈 때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빨리 갈 수 있어요. 내 길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밀어줘도 결국 가다가 멈춰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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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아온 나를 위로하기

 

“며칠 전 빽빽한 플래너를 보며 엉엉 울었다.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부담감이 나를 누른다.” 이 구절이 절절하게 와닿았어요. 이런 청춘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시간 관리라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해요. 보통 빽빽하게 살아야 시간 관리를 잘 한다고 착각해요. 그게 아니에요.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보내는 게 시간 관리에요. 그러려면 에너지 관리가 중요해요. 쉬어서 에너지를 채워야 생각도 잘 돼요. 이걸 먼저 해야겠구나, 이건 꼭 해야 하는구나. 예민해지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러면 ‘나는 뭔가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떨어져요. 다시 지치게 되고, 에너지가 떨어지고. 악순환이죠. 문제가 있거나 게으른 게 아니라 삶이 버거운 거예요. 꼭 휴식에 집중하는 시간을, 선물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고, 정말 하고 싶었는데 늘 미뤄왔던 걸 신나게 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자신을 채우고 나서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생각이 명료해져서 계획도 잘 세워지고,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걸 할 수 있어요.


『나를 모르는 나에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생한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이야기가 나와요. 고생한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면 좋을까요?


정말 중요한 질문이에요. 에너지를 회복하는 몇 가지 방법을 가지는 게 중요해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편이에요. 멍하니 있는 게 뇌에도 정말 좋거든요. 어떨 때는 책을 읽기도 해요. 그냥 읽고 싶었던 편한 책을요. 가까운 곳으로 훌쩍 여행을 다녀오거나 마음을 터놓을 사람을 만나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너무 힘든 순간이 오면, 지금 나에게 어느 것이 좋을까 생각해요. 결국, 이 모든 건 ‘쉼’이에요. 어떤 일이 자신에게 에너지가 생기는 ‘쉼’인지 알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해요.


취미가 없는 것이 고민인 사람도 있어요. 내가 무엇을 할 때 좋은지 모르는 게 고민인 친구를 종종 만나요.


수업에서 각자 휴식 방법을 말하면 보통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거고, 어떤 친구는 해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못했던 것을 해보기도 했어요. 훌쩍 여행을 다녀오거나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거예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친구는 정말 자신을 몰라주고 혹사하는 상태예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해’만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 취미 없는데?’라는, 그 질문이 시작이에요. 사람이 취미가 없을 수 없어요. 본인이 ‘이거다!’라고 알지 못할 뿐이에요. ‘난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 질문을 스스로 던지지 않으면, ‘나’를 보지 않으면 무엇을 추천해줘도 맞지 않아요. 쉬는 시간에조차 남이 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돼요. 어떤 일이든 ‘나는 좋았어’라는 기분이 들면 되는 거예요.


청춘을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힘을 그리고 내면에 탄탄한 기반을 쌓아가야 할 시기”라고 하셨어요. 청춘에게 읽을 책을 추천해주세요.


우선 제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웃음) 정말 『나를 모르는 나에게』를 읽으면서 청춘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책에 몇 가지 예시를 들기는 했는데, 그중 박웅현 씨의 『여덞 단어』라는 책을 권하고 싶어요. 청춘들에게 한 강의를 묶은 책인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덟 가지 가치를 이야기해요. 또 하나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예요. 삶의 의미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사람의 본성과 존엄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만의 삶을 이끌어나가 완성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에요. 이 책이 아니더라도 서점을 둘러보다가 나에게 와닿는 책이 있으면 그게 내 책인 거예요. 중요한 건 책이라는 호흡이 긴 글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점점 더 많은 글을 읽고 써나가야 점차 내면에 많은 걸 쌓아갈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방황하는 청춘을 위해 한 마디 부탁드려요.


 ‘보이는 삶을 살려고 하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중심을 잡아라. 그러기 위해서 자기에게 시간과 기회를 많이 주어라. 자기에게 관심을 주어라.’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남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아요. 그러나 제일 관심을 주어야 하는 건 나 자신이에요. 20대에 자신을 잘 세우는 사람은 당장은 차이가 없겠지만 10년, 20년 후의 삶은 굉장히 차이가 난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나를 모르는 나에게 하유진 저 | 책세상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성인이 되었지만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자기만의 질문과 답을 갖지 못해 두려움을 느끼는 청춘들에게 ‘자기발견, 자기치유, 자기실행’의 3단계로 이뤄진 자기실현의 진입로를 알려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홍수 “좋은 문학은 거리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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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음사에 입사해 국내 출판계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고,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평론이 당선되며 비평 활동을 시작한 정홍수는 한결같이 영화와 문학 언저리에 있었다. 20여 년 동안 평론집 『소설의 고독』『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등을 내며 2016년 대산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정홍수 평론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수많은 작가의 작품을 존중하면서, 때로는 경탄하면서 읽어낸다. “문학이 얼마나 끈질기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힘들게 인간을 사랑하는지 단순한 단어 배열이나 소설 자체의 이미지만으로 전달”(2016년 대산문학상 심사평 중)되는 문체는 첫 산문집 『마음을 건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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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음에 남아 있는 글


창비 주간논평, <한국일보> 칼럼 등 여러 글을 모은 산문집입니다. 글 양이 적어서 평론보다는 쓰기 쉬우셨을 것도 같아요.

 

<한국일보> 칼럼은 3년째 쓰고 있고, 창비 주간논평은 훨씬 전부터 썼어요. 주로 3년 안쪽의 글이 담겼습니다. <한국일보>에 쓴 칼럼이 9매 정도 되는데, 매수가 적으면 짧은 내용 안에서도 기승전결과 수사를 나름대로 전개해야 합니다. 오히려 짧은 글이 쉽지 않습니다. 매번 쓸 때마다 일단 쓰고 매수에 맞게 줄여갑니다.


여러 책과 영화를 다뤄 주셨는데, 글감의 기준이 있었나요?


소설이든 인문과학이든 제 마음을 움직였던 책과 영화를 썼어요. 사실 원고는 마감 때문에 쓰는 거잖아요. (웃음) 마감이 닥쳐오면 그 시점에서 가장 제 마음에 남아 있는 글을 찾게 됩니다. 또 제가 절실해야 다른 사람도 제 글을 읽었을 때 느끼는 게 있으니까요. 글을 썼던 시기에 큰 영향을 준 책이 김현경 선생의 『사람, 장소, 환대』였어요. 세 번 정도 읽은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여러 글에 그 책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영화도 허우 샤오셴 감독 영화를 좋아해서 여러 번 언급하죠. 두 번째 평론집 제목(『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도 허우 샤오셴 감독의 <카페 뤼미에르>에서 여주인공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서 따왔습니다. 나중에 영화를 찍었던 장소도 가게 되어 그 이야기가 책에 나옵니다.


1부부터 3부까지 일상 이야기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제가 무슨 권리로 남을, 남의 텍스트를, 남의 세상을 평가할 수 있나, 그런 자문이 들어요. 그래서 일단 제 처지를, 제 입장을 드러내 놓고 비평으로 나아가는 게 저한테는 맞는 것 같아요. 문제에서 빠져 있고 아주 객관적으로 제삼자처럼 바라보는 시선의 자리는 저한테 안 맞기도 하고요. 그게 제 문학 평론의 기본 태도예요. 하다 보니 글 패턴이 자꾸 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결론을 말하는 형식으로 되돌아옵니다. 세상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는 거죠. 원래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닌데 문제를 대하는 태도나 자세가 그렇습니다.


평론인데 평론 같지 않고, 산문인데 산문 같지 않은 글이 나왔어요.


보통 신문 칼럼은 세상에 대한 의견을 내는 곳이에요. 특히나 시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지적한다든지 하는 칼럼이 많죠. 문화 일반에 대해 편하게 쓰는 지면이라 그랬지만, 스스로 시사에 대한 의견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요. 시사적인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이 많잖아요. 그럼 제가 할 수 있고 그래도 잘 아는 건 문학이 아닐까 싶었어요. 굳이 문학과 영화 이야기를 하겠다는 생각보다 글 쓰는 방식 자체가 세상을 향한 직접적인 언술은 자제하고 좋은 문학작품이나 생각을 빌려서 제 말을 조금 하는 식이었습니다.


머리말에는 ‘입장이나 주장으로 내세울 것은 별로 없’다고 써주셨는데, 글은 어쨌든 자기주장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다음 문장에서 태도나 자세는 있다고 했는데 그게 문학적인 것 같다고 썼어요. 입장이 없는 게 아니라 입장을 드러내는 방식 자체가 다른 거겠죠. 문학은 어떤 주장을 직접 하는 게 아니잖아요. 예술이라는 건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얹혀 있는 거죠. 숨어 있기도 하고요. 직접 대상을 추궁하고 비판하는 게 조심스러워요. 제가 비판하는 대상한테도 제가 모르는 측면이 반드시 있을 테니까요. 문학이 내 삶의 자리나 세상의 이면을 복합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그 태도가 저에게는 맞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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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어요


출판계에서 계속 책을 만드는 일을 해오셨어요. 자기 책과 남의 책을 만지는 기분은 다를 것 같아요.


많이 불편하죠. 대학 졸업하는 해에 첫 직장으로 민음사에 들어갔어요. 1987년 10월에 들어갔으니 근 30년을 편집자로 살아왔고, 늘 하는 일이 남의 원고 만지고 제목 달고 교정하는 일이었는데 제 책은 할 때마다 힘들어요. 남의 글은 거리가 있으니 지적도 할 수 있는데, 자기 글은 허점이 너무 많이 보여요. 이걸 쓸 때 어떻게 썼다는 걸 알기 때문에 글의 구멍이 보이는 거죠. 그 구멍을 다시 마주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래서 편집자들에게 맡기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민음사 다니던 시절을 얘기해주시면서 ‘편집학교’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글에 출판계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형도 시인을 실제로 보셨다고요.


등단한 게 1996년이니까 출판사에서 일한 지 10년이 지나고 평론가가 됐어요. 그 전에도 글 쓰고 싶은 욕심은 꽤 있었습니다만 생각만 있었죠. 기형도 시인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였다가 중앙 경제 신문 기자로 있었는데, 민음사가 종로에 있었고 중앙일보가 서소문에 있었으니 가까워서 자주 들렀습니다. 문화부 기자들에게 출판사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으니 특별한 일이 없어도 와서 신간 나온 이야기, 문단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요. 당시 편집장이었던 이응준 형이 기형도 시인의 연세문학회 선배기도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아침에 편집장이 전화를 받더니 넋을 놓고 있더라고요. 그때 기형도 시인이 돌아가신 걸 알았어요.


김수영 문학상 심사 에피소드도 나옵니다.


당시 김수영 문학상이 상당히 권위 있는 상이었습니다. 사장실에서 심사를 하는데 저 같은 말단 직원이야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없죠.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할 거 아닙니까. 베니어판으로 칸막이 되어 있는 방에 무슨 소리 하나 들으려고 귀를 대고 있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은 문학상을 심사하는 자리에 계시죠. 격세지감이시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심사하는 자리에 앉아서 의견을 내는 게 지금도 아주 멋쩍습니다. 편하지 않고요. 사실 그때가 더 좋기도 해요. 대단한 작가들의 작품을 평가하고 한 표를 행사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정홍수 많이 컸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아요.


편집 일도 민음사에서 처음 배우셨나요?


많이 배웠죠. 지금은 필름으로 뽑지도 않고 파일을 인쇄소로 보내면 인쇄기에서 바로 인쇄되지만, 취직했을 때는 활판 인쇄가 전산 조판으로 옮겨가는 시절이었어요. 출판 역사가 변화하는 과정을 목격했죠. 말단 편집자로서 지면에서만 보던 대단한 작가, 시인들을 먼발치에서 보면서 가슴 설레고 그랬는데, 문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죠. 그분들이 높게 보였던 시절이 좋았던 것 같아요. 더 많은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문학 작품 앞에 앉았던 것 같고요. 지금은 직업이 되어서 일로서 읽을 때가 더 많으니까요.


직장이 ‘출판학교’였다면 ‘그다지 괜찮은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스스로 평가하셨어요.


90년대 이후로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출판계가 양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어요. 영화도 그렇고, 문화면으로 그러한 고도성장이 앞으로는 잘 없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저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갔던 편집자 중 출판사 차리고 성공한 사람도 많습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지금도 제가 강출판사를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비즈니스 감각은 빵점인 것 같아요. 편집자로서 마케팅 감각도 중요한 덕목이고 자질인데, 그런 면에서 부족한 면이 상당히 많았고 좋은 학생이 아니었죠. 편집도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지 않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한테는 글 쓰고 싶었던 욕망이 하나 더 있었던 거예요. 물론 그게 있었다 하더라도 편집 일과 같이하면 될 텐데, 굳이 합리화하자면 생각이 그쪽으로 더 많이 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그 후>에서 강 출판사가 배경으로 나왔습니다.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예요. 출판사를 무대로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 나오는 아파트도 우리 집입니다. 주인공 보면 영화 평론하면서 출판사 일도 병행하고, 제 캐릭터 일부가 설정에 조금 들어갔죠. 제 캐릭터를 들고 와서 홍상수 감독이 자기 상상력을 펼쳐서 이야기를 만든 거죠.


출판사 홍보가 좀 되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관객이 많진 않아서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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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게 중요하다


1부 첫 글이 ‘어른 되기의 힘겨움’입니다. 황현산 선생의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으셨다고요.


전체적인 어른 되기의 어려움이죠.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들의 나이를 보면 대단하고, 세상에 대해서 웬만큼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어, 어, 하다 보면 밀려가듯이 어른이 되는 거잖아요. 어른 자리에 맞는 책임이라든지 태도, 자세를 누가 가지고 있나 물어보면 회의적이에요. 따져보면 그런 어른의 자리에 누가 도달했겠습니까. 그때그때 시대에 맞게 어른 역할을 하는데, 지금 우리 시대에서 어른 역할이 좀 더 어려워지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른의 영역까지는 아니겠지만, 문학계에서 계속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감회가 있으실 것 같아요.


문학계에서도 어른이라는 생각은 없어요. 제 위치에서 아직은 위층이 두껍습니다. 따지면 중간 정도에 와 있는 것 같아요. 저희는 그 유명한 386세대인데 비판을 많이 받잖아요. 사실 대학 시절에는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고 부정의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불운한 세대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저러해도 밥도 벌어먹었고 직장도 얻고 했는데 요즘 친구들은 그게 없으니까. 그런 거에 대해 해줄 말이 없는 미안함이 있죠.


요새 문학을 콘텐츠로 다루는 걸 보면서 삶에 대한 존중은 없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현 세태를 우려하는 부분이 있나요?


문학을 콘텐츠란 범주에 포섭시키려는 세태는 꽤 오래됐습니다. 실제로 국어국문과나 문예창작과 이름을 콘텐츠학과로 바꾸기도 하고요. 거기에는 충분한 시대적인 요청과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문학이 쓰임새를 갖출 수도 있겠지만, 문학에는 그렇게 당장 소비재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저희 세대가 정치와 문학을 상당히 긴밀하게 붙여 보려고 했던 세대에요. 시대가 실제로 운동으로서 문학을 요구하기도 했고요. 이처럼 문학을 콘텐츠나 정치로 환원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복잡한 측면에 대해 문학이 열려 있는 자세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런 질문을 어느 단계에서 멈추게 하는 건 문학의 틀을 오히려 가두는 행위라고 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문학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게 중요한 거죠. 화급한 요구에 문학을 연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거보다 조금 더 긴 지평 안에서도 문학을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쇄신의 일환으로 문예지도 여러 시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단편보다 더 짧은 길이의 소설을 실험하기도 하고요.


소설 작품이 짧아지는 건 제 감각으로는 이상합니다. 하지만 그건 제 일이고, 단편 소설의 길이가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관행으로 이어져 내려온 겁니다. 그럼 관행을 한 번 변화해 볼 수도 있는 거죠. 당연하게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형철 평론가가 이전 평론집을 평하면서 ‘내면이 있는 문장’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정홍수 평론가 문장의 특징을 스스로 꼽는다면요?


평론이 이론적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어요. 이론이 세계를 해석하는 큰 틀이니까 그 틀의 도움을 받아 문학 작품을 읽어나가는 건데, 1990년대 이후로 그 측면이 더 강화됐습니다. 저는 사실 공부를 많이 못 했어요.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게으르기도 하고요. 이론이 없으니까 작품 읽을 때도 작품 줄거리를 제 문장으로 요약하는 방식으로 글을 씁니다. 평론가는 대부분 학위를 받고 강단에 나가면서 평론 활동을 병행하는 게 관행이 된 지 오래인데, 저는 대학원도 안 갔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게 내면하고 문장밖에 없는 거죠. (웃음) 문장은 편집자로서 한 30년 살아왔으니 그래도 주어와 동사가 호응되게는 쓸 수 있는 터라, 그걸 좋게 써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간에서는 평론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론에 치중했기 때문에 평론이 자기 분야가 좁아졌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여러 사람이 동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에게도 이론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이론 자체가 작품보다 앞서는 건 문제가 있겠죠. 물론 이론 비평을 쓰는 사람들은 분명히 할 말이 있을 겁니다만, 일반적으로 볼 때 이론이 작품보다 너무 커 보이고 이론을 전기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넣는 비평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학 비평을 읽는 사람이 줄어들고 비평가들 안에서도 반성이 일어났죠. 말씀하신 신형철 세대는 비평을 쓸 때부터 그런 자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독자들과 호흡할 수 있는 평론가의 생각을 정리하는 게 상당히 중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예전 김현 선생 글은 지금 봐도 너무 아름다워요. 거기 왜 이론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잘 읽히잖아요. 그런 점에서도 반성할 부분이 있죠.

 

정홍수 평론가에게 ‘‘거리’는 문학성과 예술성의 핵심’이라는 평도 있었습니다.


허우 샤오셴 감독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나온 대목이었을 겁니다. 롱테이크는 시간이나 거리를 길게, 또 멀리 두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장면을 자세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그 확보해 놓은 거리 안에 감독의 세상에 대한 태도나 자세가 들어있는 거죠. 그걸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잖아요. 그 거리라는 게 정해져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제가 보기에 거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삶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인류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사람과 세상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떤 사건이나 사고도 바로 옆에서 일어난 것처럼 느끼고, SNS는 남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잖아요. 가깝게 붙어서 어떨 때는 일부러 그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기도 하고요. 

 
문학에서의 ‘거리’란 무엇일까요?


문학은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타인 속으로 들어가는 형식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죠. 하지만 상상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감정에 참여해보려고 하는 건 굉장히 윤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경우에도 문학은 무슨 권리로 당신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고 있어요. 우리가 타인에 관한 공감이나 유대를 촉구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타인을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거리가 우리 공동체를 조금 더 윤리적으로 만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인 거죠.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됩니다. 진짜 좋은 문학은 그 거리에 관한 질문을 항상 포함하는 것 같아요.


문학을 오래 하게 된 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다 보니 제 생활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런 욕망이나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올 수 있었겠죠. 평론가인 매쉬 아놀드가 ‘세상에서 생각되고 알려진 최상의 것’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말에 상당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생각하고 말해지는 것들 중 최선의 것들이 문학으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매체는 종이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겠지만, 세상이 많이 바뀌어도 문학으로 존재하는 이 자리는 많이 안 바뀔 것 같아요. 어쨌든 인간이 살아 있고 반성하는 능력관 생각하는 능력이 있고, 우리 삶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한 최선의 생각은 문학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정말 좋아하시는 게 느껴져요.


매번 드러내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정말 시간이 나면 좋은 문학작품을 읽고 싶어요. 대학 입학할 무렵에 도스토예프스키 단편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문학에 입문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최근에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을 다시 읽으니 지금도 너무 생생하고 재밌더라고요. 물론 이런 자산이 문학 말고도 영화나 미술 등으로 남아 있죠. 하지만 언어로 정렬된 오래된 문화유산이 문학으로 남아있다는 게 고마워요.


다른 출판 계획이 있나요?


당분간 출판사 편집 일을 하면서 지내겠죠? 어릴 때 고향 이야기 등 제 주변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가 들어가서 앞으로 이런 산문집을 또다시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마음을 건다 정홍수 저 | 창비
좋은 텍스트는 “언제든 무언가를 물어볼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하거니와 “세월로부터 세상을 버텨나갈 말과 걸음”이 되어주기도 한다. 좋은 텍스트를 만나 멈춰 선 순간만큼은 가장 고양된 상태이면서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일러스트레이터 김수현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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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에 스크래치 가실 날 없는 시대. 그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김수현은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고 외친다. 그녀의 선언은 ‘나를 나답게 살 수 없게 만드는 현실’과 ‘그 속에서 나를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이다.

 

‘노오오오력’ 하나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주입당하며 자란 세대는, 실상은 자신들이 저성장 시대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상과 판이하게 다른 현실과 마주했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빚을 잔뜩 안기는 사회”에서 어른살이를 하다 보니 “애매한 나이에 애매한 경력과 애매한 실력”만 남았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사람의 모든 걸 숫자로 환원시키”고, 미디어를 통해 완벽한 삶을 생중계하면서 “내가 뭘 잘못했을까” 자문하게 한다.

 

“어쩌다, 이렇게 애매한 어른으로 자라버렸을까” 김수현 역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는 개인이 왜 초라함을 느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세상이 나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길지라도 나는 나를 존중하고, 나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것.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그 깨달음 속에서 탄생했다. 우리를 초라하게 만드는 현실과, 그럼에도 꿋꿋하게 ‘나다움’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향해 “우린 잘못이 없다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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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개인으로서 온전히 독립하는 일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제목이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져요. ‘지금의 나는 나답게 살고 있지 않다’고 느끼신 순간이 있었나요?

 

대학 졸업 즈음에 첫 책을 냈었는데, 글을 쓰고 사람들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게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직업으로 생각하고 한 건 아니었어요. 대신 대기업에 가려고 두 번이나 인턴을 했는데 잘 안됐어요. 직장 생활을 하다가 재도전한 거였는데 말이죠. 나중에 ‘내가 왜 대기업에 가려고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졸업 무렵에 주변 사람들이 다 대기업을 준비하고 그게 좋다고 하니까 저도 열심히 했던 것 같더라고요.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지만 일단 대기업에 간 후에 생각하자’ 이런 식이었죠. 저는 꽤나 주체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사회가 정한 루트를 충실하게 수용했던 거고 ‘스스로 판단한 삶은 아니었구나’ 싶더라고요.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대기업 입사를 준비했지만, 회사에 들어가더라도 오래 일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열심히 했던 건, 그 ‘일’이 아니라 ‘타이틀’이 얻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대학도 취업도, 사실은 저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 같아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인정 욕구 투쟁에 매달려서 참 오랜 시간을 보냈더라고요. ‘남들처럼 살기 위해 썼던 노력과 시간을 글을 쓰는 데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타이틀을 얻으려고 한다거나, 남들한테 보여지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건 최대한 경계하려고 해요. 더 이상 거기에 힘 쏟으면서 살고 싶지 않거든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요. 그야말로 ‘집단 멘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현상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종의 정체성 유실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책에서 이 문제를 사회 문화 관점에서 접근했어요. 여기에는 여러 층위가 있을 수 있죠. 일단, 자신의 가치관을 스스로 세우는 게 아니라 삼강오륜 같이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를 수용하고 집단의 조화를 위해 개인을 수양하는 유교 문화가 베이스에 깔려있어요. 거기에 반공 이데올로기, 군대식 문화, 국가주의 같은 현대사의 모습이 획일화된 삶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봐요. 지금에 와서는 경쟁이 더해지니, 다들 몇 가지의 정해진 스펙을 달성하는 걸 통과의례처럼 여기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까요. 자신에 대한 감각은 자신만의 경험과 탐색으로 생기는 건데, 다들 똑같이 살았으니 나만의 감각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타인과 사회의 평가에 신경 쓰느라 자기 안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분명 그렇게 느끼는 면이 있죠. 가끔 결혼도 하고 직업도 잘 갖추신 분들이 부모님의 기대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면 깜짝 놀라요. 성적표에 부모님 사인을 기다리는 15살 아이처럼 구니까요. 나로 산다는 것,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건 개인으로서 온전히 독립하는 일이라 생각해요. 가족, 친구, 불특정 다수, 그리고 사회의 기대로부터 독립하는 거죠. 그걸 단절이나 배척으로 오해하시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텍스트예요. 예를 들면 제가 부모님의 뜻대로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고, 주변 사람들 시선에 휘둘리지 않으려 하지만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거든요.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서 벗어나는 것, 온전한 개인으로서 독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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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기 위한 첫 걸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


“사회 심리학을 읽기 편한 에세이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적으셨습니다. 실제로 책 속에는 개인에게 보내는 위로와 함께 ‘사회적 문제’, ‘사회 안에서 개인의 역할’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요.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신 이유가 있나요?


사람은 일정 정도는 환경의 결과물이라고 봐요.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는지가 한 개인의 내면에 평생 영향을 미치잖아요. 조금 더 크게 보자면, 어떤 사회에서 자랐는지도 분명 큰 영향을 끼쳐요. 특정 개인이 우울감을 느낀다면 그건 개인적인 일일 수 있지만, 한국인의 독보적인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은 사회가 전체적으로 병들었다는 방증이라고 봤어요. ‘왜 그럴까?’ 하고 이유를 생각하게 됐고요. 정신분석의 첫 번째 스텝은 문제의 객관화인데, 사회가 개인의 불안과 우울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면, 그걸 객관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사회학 서적을 많이 읽었는데, 의문들이 명료해지는 기분이었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얘기구나 싶었어요. ‘이 중요하고도 좋은 내용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러한 논의를 읽기 편한 에세이에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나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나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이 있었나요? 


나다움은 두 가지 축에서 고민해야 하는데요. 첫 번째는 타고난 기질이에요. 저는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과 한계, 재능, 욕구 같은 게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걸 이해해야 내가 어떻게 사는 게 자연스러운 인간인지 알게 된다고 봐요. 또 다른 축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신념과 가치관의 문제인데요. 이건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살 것인지 스스로 답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저는 이 두 가지 축에서 하위 질문들을 만들고 답해온 것 같아요.

 

프롤로그에 쓰시길, 많은 책을 읽으면서 “나를 존중하고 나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셨어요.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던, 혹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은 무엇인가요?


책의 마지막 ‘Thanks to’에서도 몇 권을 추천했는데요. 세 번 이상은 읽은 책들이에요. (이번) 책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던 책들이거든요. 특히 심리학자 김태형님의 『트라우마 한국사회』, 『불안증폭사회』, 김찬호 교수님의 『모멸감』,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강준만 교수님의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같은 책들이 그래요. 그리고 서은국 교수님의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은 개인적으로 제 삶의 큰 방향에 대해 답을 해준 책이었어요.

 

두 번째 장의 제목이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예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리스트의 가장 위에 위치해야 하는 항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우선인 것 같아요. 그건 자존감이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는 우월감을 자존감으로 알고 살잖아요. 물론 모든 게 우월하면 자존감이 흘러 넘칠 수도 있겠지만, 우월감이라는 건 상대적인 거라 지속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타인에게 외모나 직업, 환경으로 선별적인 존중을 보내선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무조건적인 존중이 필요하다고 봐요. 타인과 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지 않고, 손상되고 부족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견뎌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노력하고 있고요.

 

꿋꿋하게 마이웨이를 가다가 오지라퍼를 만날 때가 있어요. 자신의 기준에 비춰서 나의 삶을 평가하고, 걱정을 가장한 비웃음을 흘리기도 하죠. 작가님이라면 그들에게 시원한 일갈을 되돌려주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럴 때 어떤 말로 응수하세요?


사실 한마디면 충분하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만약에 제가 부모님 집을 담보로 돈을 펑펑 쓴다든가, 집에서 고성방가를 하면서 부모님한테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는 없죠. 그건 ‘상관’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건,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어요. 하지만 저도 사회적 인간인지라 ‘정말 못 참겠다’ 수준이 아니라면, 굳이 말로 응수하진 않아요. 대신 썩은 표정 정도를 보였던 것 같은데요. 잘 전달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자존감에 치명상을 끼치는 건, 부당한 대우 자체보다 부당한 대우에 굴복한 자기 자신인 거다. 그러니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은 이에게,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 이에게, 친절하려 애쓰지 말자. 상황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들에게 비굴해지지는 말자. 저열한 인간들로부터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에겐 최소한의 저항이 필요하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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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냉담한 현실에서 어른살이를 위한 to do list”라는 부제처럼 ‘어른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으신 건 언제였나요? 그때 어떤 기분이 드셨는지 궁금해요.


개인적으로는 30대가 되는 기점이었던 것 같아요. 10대와 20대는 비슷한 틀 안에서 존재하잖아요. 물론 그 안에서 분화되긴 하지만, 학생이나 사회초년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죠. 그런데 30대부터는 삶이 본격적으로 분화돼서 결혼을 하기도 안 하기도, 이혼을 하기도, 아이가 있기도 없기도 하죠. 또 다른 예를 들면 어릴 때는 친구들을 만날 때 다들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잖아요. 그런데 몇 년 후에는 누군가는 외제차를 타고 올 테고 누군가는 면허가 없기도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구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삶의 모습에서 차이가 벌어질 텐데 나는 그런 상황들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어요. 저는 제 주변 사람들 틈에서 우월감도 열등감도 느끼고 싶지 않았거든요. 잘 준비를 하지 않으면 휘둘리며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어른으로 사는데 여러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이런 상황들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봤어요.

 

책에서 “어른의 사춘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작가님은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나오셨나요?


글쎄요. 조금씩 인정하며 지나왔다고 해야 할까요? 삶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약간은 관조적 태도, 그리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썰미로 잘 지나왔다고 생각해요.

 

“어른의 숙제”는 잘 마치셨나요? 이제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네(웃음). 솔직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 선택들을 책임지고 있고, 주변 사람들도 챙기고, 공동체를 위해서 작지만 정기 기부도 꼬박꼬박하고 있고요. 나름 제 몫에 책임을 다하는 어른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100% 스무 살』, 『안녕, 스무 살』을 읽으며 20대를 지나온 독자들이 이제는 30대가 되었을 거예요. 독자들과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걸 체감하실 때가 있나요?


사실 이 전에는 독자 분들을 자주 만나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SNS를 한지도 얼마 안됐으니까요. 다만 제가 나이 들어가는 건 체감하는데요. 20대 때 쓴 글은 패기 넘치고 열정적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현실적이라고 할까요? 지금 보자면 풋풋한 글인데, 전 나이를 먹으면 창피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딱 그 나이 때, 그 나이의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감성이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제 나이대의 생각들을 담으며 독자들과 같이 나이 들어가면 좋겠어요.

 

『100% 스무 살』에서 “20대의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실패할 수 있는 자유”라고 하셨는데요. 30대는 어떤 시기인 것 같으세요? 30대의 특권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글쎄요. 20대 때는 막연한 미래를 생각하며 살잖아요. 직업이라는 삶의 기반도 다져야 하고요. 그러다 보니 현재의 일상에 충실하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걸 30대의 특권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막연한 미래가 아닌 지금의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평범한 어른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 어린 시절 내가 품었던 이상을 떠나보내는 지점, 어른의 사춘기는 그 지점에서 오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순간이 슬프고 씁쓸하기는 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환상과 기대감에서 벗어나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 어른의 숙제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어른의 사춘기는 자신의 평범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있을 때 종결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 순간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49~50쪽)


꼭 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최근 그림 에세이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사실 (제 책은) 대형 출판사에서 낸 게 아닌 터라, 초반부터 홍보가 엄청나게 된 책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조금씩 알려지더니 꾸준히 사랑 받고 있어서 정말 감사한 일이죠. 이유를 찾자면, 저는 결국은 콘텐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제 입으로 말하기에 조금 뻔뻔한 것 같지만, 독자 분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해결책을 주고 싶었거든요. 다들 많이 상처받았고, 지쳤고, 불안하고, 스스로를 깎아 내리면서 몰아세우니까요. 주로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답을 구했는데, 몇 몇 책들은 서너 번 읽고, 타이핑하고 출력해서 밑줄 그으면서 읽었어요. 제가 완전히 이해해야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저는 학자도 아니고, 엘리트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에요. 하지만 1년 6개월 동안 이 문제를 놓고 열심히 답을 찾아 헤맨 것 같아요. 물론 책의 내용이 진리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어떤 분들에겐 필요한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작가님은 글과 그림이라는 두 개의 언어로 이야기를 들려주시잖아요. 각각의 언어가 가지는 특성과 매력이 있을 것 같아요. 상호 보완되는 측면도 있을 테고요.


사실 처음에 책을 냈을 때는, 그림은 그냥 장식용이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그림을 너무 활용하지 못했더라고요. 그래서 짧은 메시지를 담는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중간 중간 지루함을 식혀주는 역할도 하고 책을 읽는데 부담을 많이 덜어주는 것 같아요. 둘을 비교하자면, 그림은 직관적이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예요. 반면 글은 느리고 덜 재미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깊게 머무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호 보완되는 측면도 분명히 있어서, 잘 활용하고 싶어요.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품을 공유하기도 하시고요. 최근에 올리신 글과 그림 중에서 인친 분들이 많이 공감했던 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을 때 가장 많이 공감하시는 것 같아요. 책에도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지 않을 것’,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는 거리를 둘 것’ 같은 글들이요. 다들 사람 때문에 많이 스트레스 받으시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죠.

 

다음 책의 집필은 시작하셨나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계획인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글은 자연스럽게 쓰고 싶거든요. 책을 쓰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책 한 권의 분량이 될 만큼 절실하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어요. 그래서 당분간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책도 읽으면서 지내려고요. 내년쯤엔 완성했으면 하는데, 억지로 쓰진 않으려 합니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작가님의 시선도 궁금한데요. 이와 관련해서 책을 쓰실 계획은 없으세요?


사랑과 연애에 있어서 저는 한결같이 사랑 신봉주의자예요. (그런 거에 비해선 연애를 못했지만요.)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 관심이 있는 건, 관계의 ‘시작’ 보다는 ‘지속’이에요. 어떻게 해야 설렘을 넘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유대를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많은 분량도 아니고 실전이 부족해서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제가 처음 책을 내게 된 건, 친구들에게 했던 위로의 확장형이었어요. 앞으로도 우정과 애정을 담아 글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독자들도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다지 성격이 좋은지도 잘난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진짜로 나를 생각해주는 친구로 말이죠. 저는 굳이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며 살고 싶진 않았는데, 좀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노력해 보려고 해요. 건강하고 괜찮은 인간이 돼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진실하게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책으로 인사드릴 때까지 저도, 이 글을 읽어주신 당신도, 꼭 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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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저 | 마음의숲
인생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상처받지 말고,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만의 문제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 나답게 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미나 박문규 부부 “금수저 아니라도 세계여행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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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했다. 우리의 20대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서른만큼은 그렇게 맞고 싶지 않았다. 늘 다른 곳을 꿈꾸고 여행 프로그램을 챙겨 보던 아내는 어느 날 툭, 남편에게 세계여행을 제안했다. 떠나지 않겠느냐고. 고등학교 동창인, 가장 친한 친구였던 김미나, 박문규 부부는 그렇게 스물아홉 가을에 3천만 원을 들고 세계로 떠났다. 823일의 여정이었다. 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히말라야 트레킹과 터키에서의 일 년,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시간은 여유로운 듯 빠르게 흘렀다. 그 시간을 쌓아놓은 『메밀꽃 부부 세계일주 프로젝트』에는 이들 부부의 여정이 꼼꼼하게 담겨있다. 떠나기 전 준비해야 할 사항들, 세계 각지에서 지출한 경비 내역까지 모두 담았다. 이들은 말한다. “생각보다는 돈이 많이 들지 않더라, 내가 금수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더라, 이렇게 세계여행 하는 사람도 있더라, 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현재 제주에 살고 있는 부부는 내년이면 다시 멕시코로 떠날 계획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다시 가봐야 할 곳도 많이 남았다. 여행 자체가 삶이 된 부부의 얼굴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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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으로 기억되는 평화롭고 작은 마을, 스리랑카의 하퓨탈레. 립톤이 앉아서 차를 마셨다던 립톤 싯

 

서른은 외국에서 나보자

 

막연하게 꿈꾸던 세계여행을 ‘가자!’고 결심한 그 순간, 어땠을까요? 조금 특별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자세히 들려주세요.

 

김미나: 20대에 힘든 일이 많았어요. 저희는 일을 일찍 시작했는데요. 돈을 모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가정환경이나 여러 일들 때문에요. 그때 유일한 낙은 여행이었어요. 국내 여행을 진짜 많이 했죠. 그러다가 제가 먼저 말을 꺼냈어요. 2년 반 정도 돈을 모아서 그 돈이 얼마가 됐든 다 쓰고 온다 생각하고 가보자고요. 그렇게 모은 돈이 4천만 원 정도 됐었어요.

 

박문규:저희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27살에 결혼을 했는데요. 저희가 21살부터 일을 했지만 둘 다 집으로 돈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결혼할 때 통장에 모은 돈이 딱 5백만 원 있더라고요. 회사에서 5백만 원을 빌려 작은 원룸을 구해 신혼생활을 시작한 거예요. 세계여행을 가자고 하고 이것저것 다 정리하고 나니 돈이 그 정도 되더라고요.

 

2년 동안 4천만 원이면 많이 모으셨는데요!

 

김미나:그렇죠?(웃음) 정말 열심히 모았는데요. 그마저도 사정 때문에 3천만 원만 들고 가야 했어요. 이 돈 다 쓰면 돌아오겠다, 했는데 여행하면서 벌기도 하고 그래서 여행 기간이 조금 늘어났어요. 작년 12월 말에 돌아왔죠. 저는 매일 퇴근하고 오면 여행 프로그램을 봤어요. 계속 꿈을 꿨어요. 저희가 매주 국내 여행을 했잖아요. 그런데 이 짧은 여행만 하다가는 죽을 때까지 유럽을 한 번도 못 가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대로라면 계속 회사를 다닐 거고, 월급이 조금 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희 둘 다 20대에 너무 일만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신랑이랑 하다 툭 얘기를 꺼냈죠. 그런데 신랑도 여행 생각이 마음에 있었던 거예요. 그때부터는 “진짜 해보자”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여행 계획을 세운 것만으로도 일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김미나:그때부터는 일하는 것도 기쁘더라고요. 이렇게 일하고 번 돈으로 여행을 갈 거니까요. 어느 정도 날짜를 세워두었거든요. 29살 가을에 떠났는데요. 서른을 한국에서 맞고 싶지 않았어요. 20대에 열심히 일했으니까 서른은 외국에서 나보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박문규:저는 결심하고 다음날 가서 회사 사람들한테 말했거든요. 2년 후에 세계여행을 갈 거고, 그때 퇴사할 거다, 라고요. 당시에는 다 미쳤다고 했어요.(웃음) 막상 시간이 다가오고 진짜 갔다 오는 걸 보니까 그제야 반응이 많이 달라졌죠. 지금은 저희가 제일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책에 아주 꼼꼼하게 지출 경비 내역을 적었잖아요. 앞부분에는 떠나기 전 준비한 내용도 자세히 적었고요. 책의 쓰임에 대해 생각하셨던 것 같거든요.

 

박문규:물론 저희보다 힘들고 어렵게 사시는 분들도 많지만요. 저희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아내가 많이 말을 했어요.

 

김미나:여행 중에 일기도 매일 쓰고, 가계부도 매일 썼기 때문에 그걸 정리하기는 어렵지 않았는데요. 책을 쓰면서 그 부분에 공을 많이 들였어요. 사람들은 건물을 갖고 있거나(웃음) 부모님 잘 만난 사람들이 세계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생각보다는 돈이 많이 들지 않더라, 내가 금수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더라, 이렇게 세계여행 하는 사람도 있더라, 라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인상적인 구절이 ‘여행이 길어지면 결국 이것도 생활이라 먹고 살기의 연속이 된다’(295쪽)는 부분이었어요. 먹고 살기의 연속이기 때문에 겪은 어려움은 뭐였어요? 미처 생각 못했던 어려움도 있었나요?

 

김미나:여행을 짧게, 휴가로 가면 볼 건 많은데 시간이 짧아서 항상 아쉽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시간이 많으니까 보고 싶은 것 보고, 더 오래도 보고 그랬거든요.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았어요. 어느 날은 아예 안 나가기도 하고요. 그런 생활이 여유롭고 좋은 부분도 있는데요. 어느 순간 설렘이 조금 떨어지더라고요. 생활이 되니까요. 뭐가 여행이고 뭐가 일상인지 약간 구분이 흐려지는 거죠. 특별히 어려움이라면 매번 숙소를 바꾸는 것도 그렇고요. 이동해야 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계속 찾아야 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또 가다가 내 마음대로 안 되기도 하고, 갑작스런 상황도 생기니까 그런 것들이 힘들었죠.

 

박문규:여행 마지막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어요. 아내가 그동안 여행 준비나 길 찾기를 다 했거든요. 저는 따라만 다녔고요. 근데 순례길을 걸으면서 아내가 지도를 안 봐도 된다는 것에 되게 편안해 하더라고요. 순례길은 노란 화살표가 인도를 해주니까 어디까지 갈까, 저녁에 뭐 먹을까, 이것만 걱정하면 됐거든요. 그게 은근히 스트레스가 됐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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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전해줄 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꿀팁’이 있다면요?

 

박문규:보통 장기 여행을 준비하실 때 유럽이나 미국 쪽을 먼저 가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희는 아시아 쪽을 먼저 여행했잖아요. 그게 좋더라고요. 물가도 저렴하고요. 똑같이 사기를 당한다고 해도 유럽이나 미국 쪽이 비용이 더 크니까 고려할 만한 부분인 것 같아요.

 

사기 당할까봐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박문규:사기 당한 분들을 진짜 많이 봤어요. 한국 사람들이 현금이나 좋은 카메라를 많이 들고 다니는 걸 알기 때문에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터키에 일 년 살면서도 너무 많이 봤죠. 제일 많이 당하는 사기가 술 사기예요. 보통 혼자 오는 분들이 표적이 되는데요. 자기도 혼자 여행 왔다고 하면서 접근을 해서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녀요.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구경도 하고요. 그리고 저녁에 아는 바에서 파티를 한다고 데리고 가서는 술을 먹다가 사라지는 거죠. 뒤늦게 명세서를 받아보면 그게 2천 유로 정도 되는 거예요. 그런 경우를 진짜 많이 봤어요.

 

김미나:위험한 일은 대개 밤에 술을 먹다가 많이 일어나더라고요. 조심하는 게 좋겠죠. 다행히 저희는 술을 안 해요. 해가 지면 항상 숙소로 돌아가 하루를 정리했어요.

 

아시아와 유럽 각지를 다녔잖아요. 누구에게 추천해도 실망하지 않을 지역도 꼽을 수 있을까요? 포르투를 ‘정말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적었죠.

 

박문규:여행지가 사람의 기분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추천하기가 어려운데요. 제가 좋았던 곳은 네팔이에요. 그 중에서도 포카라요. 그곳에서 굉장히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좋은 기운도 많이 받았어요. 포카라에서 한 달 정도 지냈는데요. 저는 정말 머리 아픈 게 하나도 없었어요. 스위스도 가고, 여러 산을 가봤지만 네팔의 그 산은 영험함이 있는 것 같아요.

 

김미나: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라는 호수도시가 있어요. 그곳은 가는 분들도 많지 않고요. 저희도 큰 기대를 하고 간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정말 예쁜 거예요. 사람들도 상냥하고, 물가도 저렴하고, 호수도 정말 크고 빛나고요. 호수변을 데크 따라 산책하는데 정말 좋았어요. 원래 그곳에 며칠 안 있으려고 했는데 계속 연장을 해서 오래 있었는데요. 그곳에는 한 달 렌트를 하는 집들이 좀 있거든요. 저도 거기에 계속 있고 싶었어요.(웃음) 언젠가 다시 갈 곳으로 꼽아두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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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일이 생길까

 

글 쓰는 아내와 사진 찍는 남편, 한 권의 책이 되기에 참 좋은 상황이었어요.

 

김미나:제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지 잘 몰랐어요. 신랑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지 잘 몰랐는데요. 국내 여행을 하면서 시작한 거예요. 하다보니까 신랑도 사진 찍는 게 진짜 재미있다는 거죠. 점점 카메라도 좋은 걸로 바꾸고요. 저는 그 사진들이 아깝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니까 블로그를 시작했죠. 그러면서 또 재미가 든 거죠. 그게 모여서 좋은 기회가 됐던 것 같아요.

박문규:확실히 블로그로 저희 인생이 많이 바뀌었어요.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요.(웃음)

 

블로그를 통해 새로운 인연도 많이 만났죠.

 

김미나:저희가 터키 안탈리아에서 일 년을 있을 수 있던 것도 블로그를 통해서였어요. 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친구를 블로그로 처음 알게 됐거든요. 블로그로 알게 된 친구를 우연히 인도에서 만나 한 달 동안 같이 지냈고, 그 인연으로 지금도 엄청 친하게 지내거든요. 블로그가 중요한 매개체가 됐던 거예요.

 

뿐만 아니라 여행 동반자라는 면에서도 서로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대개 여행하면 싸운다고 하잖아요. 그런 게 없어요.(웃음) 

 

김미나:서로 비슷한 점이 굉장히 많아요. 감정도 비슷하게 느끼고요. 저희는 잘 안 싸우거든요. 신랑이 착하기도 하고요. 연애 전에도 제일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요. 그래선지 싸울 일도 별로 없고 그래요.

 

박문규:마인드가 서로 그냥 잘하는 것 잘하자, 예요. 아내가 요리는 진짜 못해요. 저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요리를 같이 하면 꼭 안 맞더라고요. 여행할 때도 각자 잘하는 걸 했죠.

 

서로 여행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얘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박문규:제 경우, 좀 바보가 된 것 같아요.(웃음) 벌써 회사 그만 둔지 3년이 넘었으니까 그 시간 동안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내가 잠깐 외출한다고 해도 걱정이 돼요. 주변 사람들은 아내가 외출하면 좋다고 하는데 저는 안 그래요. 없으면 심심하기도 하고요. 저희는 서로가 배우자이자 친구이기도 하니까요.

 

김미나:항상 붙어있으니까 없으면 허전하고, 걱정되고, 심심하고 그렇죠. 제일 친한 친구예요. 다른 부부가 평생 할 대화를 저희는 지난 3년에 다 한 것 같다고 얘기했었거든요. 그게 좋았어요. 저는 여행 후에 엄청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원래 예민한 편이었거든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잘 울고 그랬는데요. 여행하면서는 바뀌었어요.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예 걱정 안 해요. 여행하면서 워낙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생기니까 그 과정을 겪으면서 바뀐 것 같아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죠. 위기의 순간들이라고 할까요.

 

박문규:그러니 긍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스위스 여행을 하다 벌금 50만원을 냈거든요. 여행 당시 어떤 블로그에서 불법 유턴 벌금으로 75만원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는 100만 원은 나오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50만원만 나온 거죠.(웃음) 그렇게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더라고요.

 

여행 전에 기대했던 것과 실제 가서 경험한 것이 많이 다르던가요?


김미나:사실 여행 전에 여행 이후의 삶을 기대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너무 힘들게 살았으니까요. 여행은 우리에게 주는 휴가니까 진짜 재미있게 놀자, 나중은 걱정하지 말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여행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여행을 하다보니 다른 기회도 생긴 거예요. 제주에서 살 기회도 생기고요. 이런 건 전혀 예상을 못한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더 재미있어요. 다음은 또 어떤 일이 생길까, 기대하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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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 한 시간동안 헐떡대며 올랐던 코토르 성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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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 포인트에서 한참 동안이나 오들오들떨면서 기다렸던 카파도키아 벌룬

 

 

늘 여행하는 것처럼 살겠다

 

여행 하면서 서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잖아요. 라오스 여행 중에 걸으면서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것인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적었거든요. 답을 찾으셨나요?

 

김미나:저는 여행하면서 답을 찾은 것 같아요. 여행 전에는 잘 몰랐는데요. 돈이 있으면 편리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걸 일단 여행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돈에 끌려가지 말자는 얘기를 서로 많이 했죠. 적게 벌면 적게 쓰고,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자고요. 대신에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자고 생각했어요.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여행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맛있는 걸 먹는 게 가장 큰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여행을 하는 동안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고 얘기를 했죠. 삶의 방향이 바뀐 거예요. 여행 전에는 돈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와서 일을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했다면 여행하면서는 계속 여행하는 삶을 살자, 이렇게 된 거죠. 어느 곳에 정착하는 게 아니라 늘 여행하는 것처럼 살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어요.

 

박문규:저희는 말의 힘을 믿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 내뱉어요. 우리는 잘 될 거야, 라고요. 제주에서 내년 3월까지 살고 이후에는 중미로 여행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내년 3월에 멕시코를 갈 거야, 이렇게 매일 얘기를 해요. 말을 하면 진짜 그렇게 되더라고요.

 

김미나:진짜 그랬어요.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우리는 스물아홉 가을에 무조건 갈 거야’라고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자꾸 말해야 가능하도록 우리가 움직이는 면도 있는 것 같고요. 상황도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늘 여행하는 것처럼 살기, 이 말이 낯설고 아름답게 들리네요.

 

김미나: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있어요. 20년 넘게 여행하는 분들도 계셨고요. 뉴스에서 본 노부부는 30년 넘게 여행을 하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요. 할아버지의 유언이 할머니에게 ‘당신은 계속 여행을 해’라는 거였대요. 실제로 여행을 하다보면 몇 년씩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여행하면서 일도 하고요. 그걸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 제주에서 지내고 있잖아요. 제주행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박문규:한국에 돌아올 때 정확히 수중에 3백만 원 남았더라고요. 고민을 진짜 많이 했어요. 이제 어떻게 할까, 하고요. 돈을 벌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아내가 먼저 제주로 가자고 말을 꺼냈어요. 제주에서 1년 살기가 저희 버킷리스트에 있었는데 지금이다 생각한 거죠. 돈을 벌더라도 제주에 벌 데 없겠어, 했어요. 그때 블로그에 제주에 간다고 올렸는데요. 블로그를 보고 마침 세계 일주를 준비하는 50대 부부가 연락을 주신 거예요. 6개월 간 세계여행을 할 예정이니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요. 지금 그 집에서 살고 있어요. 그분들은 지금 인도에 계세요. 

 

김미나:그분들은 저희에게 여행하시면서 궁금한 점이나 어려운 점들을 물어 오시죠. 최근에는 저희가 인도 비자도 받아드렸어요.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기회가 생기거나 이런 것들이 그냥 회사만 다녔다면 안 생겼을 것들이라서 무척 소중한 거예요. 제주에서의 일 년이 버킷리스트에 있기도 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지내는 곳이 서울이 아니었으면 했거든요. 제주에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다시 여행을 하고 돌아와도 제주로 오고 싶은 마음이고요. 그래서 제주에서 모임도 많이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있어요.

 

두 분의 선택이 어떤 면에서는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멋진 삶의 태도라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면도 있거든요. 현실적인 어려움 같은 것도 있겠고요. 이에 대해서는 어떤 답을 해주실 수 있나요?

 

김미나: 그런데 정말로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집도 없고, 살림도 없어요. 몸과 배낭만 있죠. 저희는 짐을 더 이상 늘릴 생각이 없거든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로 살자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요.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을 거예요. 대개는 저희처럼 하지 못하는 이유가 지금의 삶을 놓아야 하고, 이후의 삶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일 텐데요. 저희는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계속 여행을 할 수도, 여행을 그만두고 일을 하며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잖아요. 아직 우리는 어리고, 건강하니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고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박문규:저희 짐이라고는 부모님 댁에 있는 조그만 상자가 전부예요. 결혼 앨범 같은 게 들어있어요.(웃음) 아내와도 많이 얘기했는데 저희는 이렇게 가진 게 없어서 떠날 수 있는 용기가 더 난 게 아닐까 싶어요. 

 

정말로 걱정 안 되세요?

 

박문규: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는 진짜 걱정이 되더라고요. 순례길을 다 걷고 통장에 3백만 원밖에 없을 때는 정말 걱정이 많았어요. 작년 12월에 돌아왔는데 그때 한국에 미세먼지가 엄청 심했잖아요. 오자마자 감기 몸살이 걸렸거든요.(웃음) 비 맞으면서 순례길을 걸어도 감기 한 번 안 걸렸는데 말이에요. 그때 걱정 끝에 내린 결론이 제주행이었고요. 제주에 와서는 다시 걱정이 조금 줄어들었어요.

 

김미나:걱정은 항상 돼요.(웃음) 불안감이 있긴 하죠. 노후를 생각한다거나 하면 걱정이 막 돼요. 그런데 걱정을 하다보면 걱정이 꼬리를 물어서 되게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것에 대한 생각을 너무 하지 않으려고 해요. 지금, 오늘을 재미있게 살면 내일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고요. 안탈리아에서 일 년을 살게 될지 몰랐던 것, 책을 내게 될지 몰랐던 것, 제주에서 일 년 살게 될지 몰랐던 것처럼 또 다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게 정답은 아닐 수 있어요. 하지만 저희는 후회할 때 후회하더라도 일단은 이렇게 살아보려 해요. 만약 이렇게 지내다가 다시 일을 하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우울하거나 슬프지는 않을 것 같고요.

 

박문규:또 하나 저희의 자부심이 있는데요. 지금까지 보험비를 밀린 적이 없어요.(웃음) 저축은 못해도 보험비는 잘 챙겼어요. 빚도 없고요. 지금은 이 정도면 된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버킷리스트에는 무엇이 남았나요?

 

박문규:공동체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한 팀은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한 팀은 커피숍을 하고, 한 팀은 음식점을 하고,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한 팀이 여행을 가면 서로 봐주는 거죠.

 

김미나:그것은 꼭 같은 장소가 아니어도 돼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을 수도 있죠. 그래서 서로 집을 바꿔가며 산다거나 할 수 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지인들과 많이 하고 있어요. 그 밖에도 버킷리스트는 너무 많아요.(웃음)

 

지금,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어떨까요?

 

박문규:행복. 아내가 최근에 해준 얘기가 있어요. 행복은 결핍에서 온다는 말이었는데요. 거기에 동감해요. 결핍이 있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 같고요. 앞으로도 계속 결핍으로부터 행복을 얻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너무 많아요. 가볼 데가 너무 많아서 더 행복한 것 같아요.


김미나: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한 계속 여행할 것 같아요. 제게는 삶이 여행이고, 여행이 삶이에요. 이런 삶은 항상 부족하고, 불안하고, 결핍이 있겠죠. 그렇지만 그것에서 오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메밀꽃 부부 세계일주 프로젝트 김미나 저 / 박문규 사진 | 상상출판
네이버 블로그 연재 포스트 ‘메밀꽃 부부의 세계일주 프로젝트’를 책 한 권으로 담았다. 매일 여행하며 사는 메밀꽃 부부가 직접 걷고 만나고 느낀 여행 감성 에세이이며. 뚜벅이 여행자들의 세계일주 각종 경비자료 전격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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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커버스토리] 만화가 윤태호는 미생일까, 완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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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100권. 윤태호의 신작 『오리진(Origin)』의 계획이다. “1년에 10권을 내는 것이 가능할까?” 물으니, 윤태호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딱 봐도 기분 좋은 한숨이었다. 『오리진』의 타이틀은 ‘내러티브 교양만화’다. 『미생』의 성공으로 ‘완생’에 다다른 듯한 윤태호는 왜 후속작으로 ‘교양’을 택했을까. 그것은 그의 무식에 대한 공포, 학력 콤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스무 살 윤태호는 미대 입시에 실패하고 만화가 허영만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2년을 보낸 후,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만화가는 또래보다 나은 정도의 재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만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생각보다 정교하다는 사실이었다. 윤태호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균질함을 확보하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 이론서, 시나리오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나 낯선 내용과 단어는 쉽게 소화되지 않았다. 결국 지적 줄기를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독서의 세계로 들어갔다.

 

“흔히 교양이라고 말하는 단어를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윤태호가 『오리진』을 기획한 이유다. 그러니까 윤태호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로 우왕좌왕하는 독서에서 한 발 나아가고 싶었다. 『미생』에서 윤태호는 말했다. “기초가 없으면 계단을 오를 수 없다. 기초 없이 이룬 성취는 단계를 오르는 게 아니라, 성취 후 다시 바닥으로 돌아가게 된다.” 윤태호는 필시 완생으로 가기 위해 『오리진』을 그리기 시작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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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 없으면 배움 없이 성장한다


4년 만의 신작이다. 교양 만화라는 것도 놀랍고 100권을 목표로 한다니 더 놀랍다.

 

나는 지금 엄청난 심적 부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건 혼자 만드는 작품이 아니니까. 가장 성실한 편집자들과 함께하고 있으니 스스로도 기대가 크다.

 

왜 교양이었나?

 

내가 알게 된 지식들을 그냥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작품을 위해 취재하고 사람을 만나다 보면 새로운 정보, 지식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연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까먹는다. 왜냐하면 수집하듯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체계적이지 않은 지식이라 곧 휘발된다.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에서 30cm자 역할을 하는 게 빛의 속도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왜 빛의 속도를 잴 생각을 했을까, 빛이라는 건 그냥 있는데 왜 속도를 쟀을까를 따져보면 이 속에 엄청난 창의력이 있다. 상대성 이론이라는 게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는데,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항상 떠올리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저장이 돼 있으면 언제든지 지식을 끄집어낼 수 있다. 『오리진』은 5년 전부터 생각했던 만화다.

 

5년 전이면 <미생 시즌 1>을 연재할 때가 아닌가?

 

원고가 잘될 때는 쓸데없는 아이디어들이 나온다. 작두를 탄 것처럼(웃음). 물론 편집자에게 까이는 아이디어도 많다.

 

윤태호도 까이나?

 

물론이다. 많이 까인다. 그런데 『오리진』은 많이 아깝더라. 한동안 이야기를 안 하다가 위즈덤하우스 연준혁 대표를 만났는데, 자기랑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편집자들을 섭외해 팀이 꾸려졌다.

 

처음부터 100권 시리즈를 염두에 뒀나?

 

할 수 있을 때까지 한다는 게 목표였는데, 연 대표가 “100권 가죠”라고 했다. 허무맹랑했지만 안 할 이유도 없지 않나? 그래서 “그러죠”라고 했다.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런 주제는 주로 학습 만화나 과학서에 등장했던 것 같은데.

 

온 가족이 읽는 전 연령대의 교양 만화로 『오리진』을 작업하고 있다. 학습 만화와는 많이 다르다. 학습 만화는 정규 교육 과정을 기준으로 주제를 선정하는 반면, 『오리진』은 AI 로봇 ‘봉투’(Bong Two)가 21세기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100개의 주제로 그린다. 기본적으로 서사 만화지만 전문가의 논픽션을 결합했다. ‘내러티브 교양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로 이름을 붙였다. 쉽게 말해 서사와 정보를 결합해 지식과 정보를 더 쉽고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다.

 

1권의 주제가 ‘보온’이다. 정하기까지 고심했을 것 같다.

 

확정 짓기까지 2년이 걸렸다(웃음). 중간에 4개 주제를 갈아엎었고. 스토리를 썼다가 뒤집은 것도 꽤 많다. ‘보온’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하찮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보온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따뜻하게 하는 의미도 있지만, 따뜻함을 보존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보온은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다. 초기 인류의 멸종과 진화, 지구라는 계의 시스템 유지까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오리진』을 시작하는 주제로 적합할 거라 생각했다.

 

집필 과정은 어떻게 이뤄졌나?

 

주제를 정하면 편집자들이 관련 서적을 섭렵했고,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치열한 기획 회의를 진행했다. 1권 ‘보온’ 편은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님께 교양 원고의 집필을 제안 드리고, 편집자들과 함께 관장님의 강연을 들었다. 이후 강연과 집필해주신 원고를 바탕으로 만화 원고 기획 회의를 다시 했고 원고 작업에 들어갔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배경은 어떻게 정했나?

 

시트콤을 떠올렸다. 다가구가 사는 주택을 배경으로 ‘봉투’라는 로봇이 각 구성원들과 지지고 볶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쓰다 보니 너무 밝지만은 않은 느낌으로 시작됐는데,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진 개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더라. 등장인물은 모두 저마다의 개성, 역사, 욕망을 가지고 있다. 결격 사유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결핍을 ‘봉투’로부터 채우려고 한다. 이 욕망이 『오리진』의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 는 주요한 동력이다.

 

‘봉투’는 인류 멸망을 막아야 한다는 엄청난 사명을 품고 미래에서 21세기로 날아온 학습형 로봇이다. 1권에서 봉투는 자신의 기능으로 감기에 걸린 주인공의 아들 ‘봉원’의 체온을 떨어뜨린다.

 

봉투는 지식을 단순히 입력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고 체화해야 온전히 기억할 수 있는 로봇이다. 봉투가 봉원의 체온을 떨어뜨린 것도 봉원 엄마의 행동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봉투는 인류의 지적 유산 100가지를 학습한 뒤 미래로 전송해야 하지만, 타임슬립 도중 생긴 알 수 없는 오류 때문에 학습 목록이 백지가 된다. 콘센트만 보면 충전하려고 달려들거나, 일부러 농땡이를 부리는 아이 같은 모습도 있다.

 

만화를 재밌게 쭉 보는데 불쑥 의미심장한 문장이 나오더라. “배움이 없으면 배움 없이 성장한다.” 너무 무시무시한 말이 아닌가?

 

부모들이 맨날 아이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지 않나? 현실에서도 많이 보이고. 『오리진』은 지식과 정보 자체를 알려주는 작품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가 어디에 복무해야 하는가’에 포커스를 맞춘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으로 목표한 100권에 다다랐을 때 우리팀이 그려내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는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사랑’에 대한 것일지, 무엇일지 지금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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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공부가 되는 작품을 하는 게 목표


지난 5월부터 위즈덤하우스미디어그룹이 만든 플랫폼 ‘저스툰’에 『오리진』을 연재하고 있다. 댓글을 보니 “원화전을 해달라”는 요청도 있더라.

 

한다면 출력물전이 되지 않을까. 『미생』은 그림을 몇백 컷 만들어놓고 시작할 수 있었지만, 『오리진』은 매 권 주제가 달라지니까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집, 배경을 제외한 모든 장면을 새롭게 그려야 한다. 마치 만화 잡지에 연재하는 느낌이다. 힘들다(웃음).

 

그래도 쾌감을 느낄 때가 있을 텐데.

 

내가 생각해도 ‘앗싸!’ 하는 내용이 나왔을 때 행복하다. 예를 들어 1권 주제로 ‘보온’을 잡긴 했는데 이게 기능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니까, 달려가야 할 지점이 있어야 했는데 고심 끝에 ‘항상성’을 찾았다. 그때 쾌감이 컸다.

 

“나부터 공부가 되는 작품을 하는 게 목표”라는 말을 종종 했다. 『오리진』이 지금까지 윤태호 작품 중에 가장 공부를 해야 하는, 공부가 되는 작품이 아닐까?

 

물론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오리진』은 웹툰보다는 단행본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하는 만화다. 20권까지는 주제를 정했고 계속 소재를 찾고 있다.

 

2권의 주제는 ‘에티켓’이다. ‘보온’과 다소 거리감이 있는 소재로 느껴진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보온을 획득해야 한다. 보온이 깨지면 죽으니까. 아이는 맨날 엄마 아빠랑 얼굴을 맞대고 비비고 사는데, 낯선 사람이 와서 자기를 안으면 죽을 듯이 운다. 왜? 거리감 때문이다. 아이조차도 자신과 친숙하고 친숙하지 않은 걸 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전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내가 당신을 신뢰할 수 있으려면, 한 마디로 가까워지고 싶다면 거리를 유지해줘야 한다. 우리가 어릴 때 친구와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이유도 친숙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어릴 때 책상에 금을 그어놓고 짝꿍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나? 거리감은 성인이 돼서야 느끼는 감각이 아니다. 에티켓은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윤태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에티켓이 있다면?


거리를 지키는 것. 훅 들어오는 사람들은 별로다.

 

포털 <다음>을 통해 <미생 시즌 2>를 매주 화요일 연재 중이다. 1년가량 부상으로 쉬다가 지난 4월부터 재연재를 시작했다. 이미 인기를 크게 얻은 작품의 시리즈를 이어가는 것, 힘들지 않나?

 

힘들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중소기업이 너무 처절하니까 다시 쓰고 싶었다. 대기업은 표준을 만들기가 쉽다. 사회적으로도 계속 감시를 받고 누구나 욕해도 되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그런데 중소기업은 업체마다 룰이 다르고 개성도 다르다. 그래서 표준을 잡기가 힘들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쉽지 않고.

 

작가가 한 작품에 너무 오래 소진되면 지칠 수 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요즘 미디어는 한 사람이 뜨면 그 사람을 완전히 소진시켜버린다. 질려버리게 만든 다음 또 새로운 사람을 찾는다. 소진되지 않기 위해서는 애를 써야 하는데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는 기꺼이 소진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다른 하나는 평생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어 소진이 돼도 살 수 있게 만들어놓는 것. 그런데 이게 되나? 그럴 수 없으니까 소진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 『미생』연재할 때, 영화 <내부자들>이 개봉했다.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는데 피할 수가 없어서 한 달 동안 숨어 있었다. 가끔 방송사들을 보면 너무 집요하게 요구한다. 하물며 나를 보호해야 하는 사람도 필요에 따라 과한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는 정말 질려버린다.


한 주간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

 

일요일 저녁부터 <미생 시즌 2>를 그리고, 화요일은 한국만화가협회에 가서 일을 본다. 또 누룩미디어 일도 해야 하고. 수요일부터는 『오리진』을 그리는데, 『오리진』은 실제 작업하는 것보다 자료를 봐야 하는 시간이 더 길다. 개인 창작물이 아니고 기획 만화다 보니까 팩트 체크가 중요해서 자료 보는 시간이 굉장히 길다.

 

어깨와 팔꿈치 연골이 상했다고 들었다. 요즘은 어떤가?

 

아직도 안 좋은데 대책이 없어서 뭐, 그냥 지낸다.

 

연재로도 바쁜데 한국만화가협회장까지 맡았다.

 

안 한다고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일이 적잖이 많은데, 일주일에 한 번은 출근해서 주간 업무 보고를 받고 한 달에 한 번 이사회를 열고, 문화부 정책 간담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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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도 편집자가 돼야 한다

 

작업실 옆방에서 문하생들이 만화를 그린다. 모두 몇 명인가?


아르바이트 한 명까지 포함해서 6명이 함께 일한다. 가장 오래된 친구가 3년이 좀 넘었다.

 

문하생을 뽑을 때 기준이 있나?


1번은 선착순, 2번은 성격이다. 성실한지가 가장 중요하다. 재주는 이 바닥에 들어오기로 한 이상 거기서 거기다.

 

선생으로서의 윤태호도 궁금하다. 왠지 잔소리를 안 할 것 같다.


안 한다. “펜선을 가늘게 써라, 채도는 좀 높여라 낮춰라” 같은 말은 하지만 이건 업무적인 이야기니까 잔소리가 아니다. 뭐 청소하라는 이야기는 종종 한다. 하지만 짜증을 내거나 그런 건 없다. 나는 애들이 있을 때 업무를 다 본다. 특히 전화 통화 같은 거 일부러 들리게 한다. 내 선생이 어떻게 일하는지 애들도 배워야 하지 않나? 자연스럽게 보게끔 한다. 이를테면 통화할 때 상대방이 한 말도 내가 다시 정리해서 “이런 내용으로 질문한 거죠?”라고 묻는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끔. 작업 때문에 취재하다가 인터뷰를 하게 되면 녹취를 시킨다. 내가 어떻게 질문해서 이런 답변이 나왔는지, 애들이 녹취를 풀면서 이해한다. 재밌어한다.


편집자들과는 어떻게 일하나?


나는 편집자를 많이 신뢰한다. 편집자들은 1만 명의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편집자가 아주 그르지 않다면 대체로 그 사람의 판단이 옳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골방에 파묻혀 작품을 하는 작가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어떤 스타일의 편집자가 좋나?

 

신중한 사람이 좋다. 그리고 용기 내서 말해줄 수 있는 사람. 나를 존중하는 건 존중하는 거지만, 해야 할 말은 해줘야 한다. 그냥 술친구가 되면 서로에게 좋지 않다.

 

평소에도 편집자 마인드가 있는 것 같다.

 

데뷔에 실패하고 다시 데뷔했을 때 거의 ‘반편집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잡지사에 자주 갔다. 집도 잡지사 근처로 옮기고. 가제본이 나오면 잡지사 사람들이랑 같이 보고, 마감 끝나면 맥주 한 잔을 꼭 같이 했다. 그때 참 좋았다. 재밌고. 난 같은 종류의 작가를 만나는 것보다 다른 포지션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게 훨씬 재밌었다. 도움도 많이 됐고. 만화 문하생을 하면 그림을 배울진 몰라도 스토리는 못 배운다. 아무리 빛나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대부분 서너 작품을 하면 다 고갈된다. 그때부터는 발견되는 것들로 작품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편집자들은 파는 것에 대한 전문가 아닌가. 작가가 5~6년 정도 경력이 쌓이면 반편집자는 돼 있어야 한다. 창작자가 되면서 동시에 마케터가 돼야 하고 편집자가 돼야 한다. 이런 감수성이 없이는 그 이상의 작품을 해나갈 수 없다.

 

아까 편집자들에게 많이 까였다는 뜻이 이제 이해된다(웃음).

 

5년 이상 경력이 된 사람에게는 신인 작가의 것을 요구하진 않지 않나. 꽹과리보다는 더 원숙하고 울림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원할 텐데, 이게 자가 발전만으로는 굉장히 어렵다. 그렇다면 편집자의 안목을 넣어 내 머릿속을 휘저을 필요가 있다. 대 부분의 경우 작가들은 한 출판사와 일하기 시작하면 그 출판사와 계속 일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출판사와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담당하고 있는 편집자와 일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사람과의 신뢰 관계 때문에 일하는 경우도 많고. 편집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업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다. 내 첫 번째 독자가 편집자니까, 그 사람을 감동시키는 게 첫 번째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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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걸 꿈꿀 이유가 없다

 

일중독인 것 같다. 취미가 없어 보인다.

 

예전부터 딱히 없었다. 하지만 만화가라는 직업 때문에 남극도 가게 되고, 영상화가 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자연스럽게 사고도 넓어지고. 다른 걸 꿈꿀 이유가 없다.

 

『오리진』의 ‘봉투’ 같은 로봇을 가져볼 수 있다면, 어떤 기능을 넣고 싶나?

 

로봇은 필요 없다. 난 불편한 게 좋다.

 

이유가 있다면?

 

그래야 사는 게 아닐까. 영원히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책을 꾸준히 많이 읽는 것 같다. 한 작가를 알게 되면 그 작가의 전작을 파는 스타일이라고 들었는데, 『오리진』을 준비하면서 어떤 책들을 읽었나?

 

‘저스툰’이라는 플랫폼을 만들기 전에는 플랫폼에 관한 책들을 주로 읽었다. 또 인물 전기도 많이 보고. 애플이나 아마존, 픽사, 디즈니 같은 기업체의 히스토리를 많이 찾아 읽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가 쓴 『출판의 미래』도 읽었고. 이 업계가 궁금했다. 예전에는 순문학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잘 못 읽는다. 이문열, 조정래 작가 등의 연보를 쫙 만들어 읽곤 했다. 낱권으로 책을 읽으면 ‘어떻게 이 사람은 이런 세계관이 있지?’ 하고 놀라는데, 한 작가의 작품을 수필까지 다 찾아 읽어보면 하나의 줄기가 보인다. 결국 한 작가가 다루는 테마가 수십 개가 될 순 없더라.

 

후속작은 남극 만화라고 들었다.

 

『오리진』을 하는 사이사이에 하려고 한다.

 

나이가 더 들어서는 실버 만화도 그리고 싶다고.

 

실버 만화라는 게 내 또래 이야기를 하는 거다. 내가 50~60대가 됐을 때 10대, 20대 독자들을 탐하면서 그들을 향한 작품을 하면 이상하지 않나? 내 작품을 읽어온 독자들도 나이가 들 테니, 그 독자들과 함께 내 또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윤태호 작품은 단행본으로도 갖고 싶어 하는 독자가 많다. 신작을 기다린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리진』 1권 ‘보온’ 편을 보면, 만화가 되게 순하다. 『미생』때도 그랬지만, 나는 독자들의 기대치를 낮게 만들어서 올라가는 타입이다. 『오리진』을 하는 나도 근력이 생겨야 한다. 처음부터 무리하면 안 된다. 서서히 근력을 만들어야 하고 독자도 『오리진』의 문법에 적응해야 한다. 독자와 내가 같이 탄력이 붙어가면서 성장했으면 좋겠다. 『오리진』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굳이 악마가 나오지 않아도 갈등은 존재한다. 그걸 그리고 싶다. 내가 세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허블 망원경이 발견해 보여준 이상의 세계는 아직 알 수 없다. 내가 신경조차 못 쓰는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인지한다면, 우리는 감사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10년에 100권을 내려면 계속 달려야 할 것 같은데. 올해까지는 몇 권이 나오나?

 

2권 ‘에티켓’, 3권 ‘돈’까지는 올해 나올 것 같다.


 

 

오리진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1. 보온 윤태호 저 / 이정모 글 / 김진화 그림 | 위즈덤하우스
[오리진] 시리즈는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AI 로봇 ‘봉투’가 21세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윤태호 작가 특유의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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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윤제 “꿈과 이상을 쫓아가는 현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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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다. 2002년, 축구로 세계가 들썩이던 어느 여름이었다. 소설가가 발견한 사진 속에는 기이할 만큼 평온하고 눈이 맑은 예순여덟 살의 목동 네레오 코르소가 그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소설가는 이 사진이 실린 폴커 한트로이크의 기사가 ‘운명처럼’ 찾아왔음을 직감한다. 이후 이 목동은 오랜 시간을 견뎌 한 권의 소설 『바람을 만드는 사람』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개들의 왕』으로 개성 넘치는 인물과 새로운 분위기를 보여준 마윤제의 신작 소설 『바람을 만드는 사람』은 남미 파타고니아의 고원 지대와 바람, 외로움과 강직함이 그대로 신체에 새겨진 어느 목동의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네레오 코르소’,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우는 소년이자 바람 소리를 무서워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지혜로운 노인에게 바람을 만드는 존재 ‘웨나’ 이야기를 듣고 소년의 알을 깬다. 성실하고 배움이 좋은 소년은 능력 있는 목동으로 성장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고 웨나를 찾아 세상에 나선다. 그의 여정은 때론 혼란스럽고, 때론 따뜻하며, 때론 풍요롭고, 외롭다. 세상과 인간의 욕망, 고독, 이상향 등에 대한 넓고 깊은 네레오의 성찰, 구도자의 자세로 미지의 존재 웨나를 쫓는 네레오의 시선, 언제나 안주하지 않고 경계 바깥을 상상하는 이 주인공의 특별함만으로도 독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사색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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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연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책머리에 ‘브루스 채트윈과 폴커 한트로이크를 위하여’라고 적었어요. 알 수 없는 이름들을 궁금해 하면서 책 읽기가 시작되죠.

 

쓸 때부터 첫머리에 반드시 두 사람 이름을 넣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걸 안 넣어주면 책을 안 내겠다.(웃음) 폴커 한트로이크는 독일 기자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었는데요. 이 사람이 쓴 기사가 아니었으면 소설은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브루스 채트윈도 마찬가지죠. 그의 『파타고니아』라는 여행기를 바탕으로 소설이 쓰였으니까요. 이들 덕분에 소설이 쓰인 것이기 때문에 둘의 이름을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브루스 채트윈은 국내에도 책이 출간되어 있으니 아는 분들이 있겠지만 폴커 한트로이크는 잘 모르거든요. 저로서는 우연한 인연이 된 셈인데요. 이 사람이 기사를 통해 상상력의 씨앗을 심어준 거예요. 그의 기사가 오랫동안 남아 있다가 소설로 나타난 것이죠.

 

폴커 한트로이크의 기사와 거기에 실린 늙은 가우초의 사진 한 장이 그토록 오래 마음에 담기고, 소설까지 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요?


기사를 본 것은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었을 때예요. 우리나라 분위기는 난리였잖아요. 그러니까 늙은 목동 사진을 보고는 ‘이들은 도대체 이 높은 고원지대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싶었던 거예요. 전 세계가 축구 하나 때문에 난리법석인데 이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확산 되었어요. 그때 바로 소설이 된 것은 아니고요. 그러다 2010년 이후에 파타고니아가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됐고 다시 이 인물이 떠올랐어요.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 하나를 꼽는다면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69쪽)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 이야기를 써야 했던 작가로서의 이유도 있었을 거예요.


항상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늘 그 전제 하에 소설이 시작 돼요. 저는 그것을 확신하고요. 이 소설은 어찌 보면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쫓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앞부분에서 그 이야기를 명시하고 시작한 것일 수도 있죠. 사실 처음에는 소설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처음엔 그냥 단순하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정도의 이야기를 생각했죠. 중편 정도로 생각했어요. 가볍게 시작했어요. 반경 수백 킬로미터 내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노인이 죽어가고 있고, 그 노인을 한 사람이 만난다, 이 두 사람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밖에 없다, 라는 설정으로 시작한 거였어요. 당시에 이런 소설을 쓸 거라고 지인에게 말했더니 “그건 굉장힌 스릴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건 아닌데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조금 헤매기도 했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경계의 바깥, 같은 개념들이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잖아요. 시작은 단편적인 이미지였지만 결국 이런 이야기를 써내게 된 것은 이것이 작가의 내면에 깊이 담긴 생각이라는 증명이기도 할 텐데요. 


소설이 앞으로 안 나가고 지지부진 했다가 풀려 나가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야기에 저의 세계관이나 철학을 넣고부터 이야기가 진행이 되더라고요. 그때 이야기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거죠. 네레오 코르소라는 인물이 세상을 돌면서 보고, 듣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얻게 되는 이야기에 작가의 세계관을 넣으면서 이런 형태의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그 이야기들, 네레오 코르소가 만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 네레오의 생각과 그 생각이 변화는 과정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도 가볍지가 않아요. 책장이 무거운 소설이에요.


이야기가 쉽게 풀린 반면 읽는 분들은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 겪는 일이죠. 전혀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저는 또한 이 소설을 쓰면서 국내 소설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 싶은 욕심도 좀 있었는데요. 한국 소설의 시공간이 협소한 편이잖아요. 그걸 탈피하고 싶었어요. 가까운 예로 일본만 하더라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같은 소설은 중세 유럽 수도사를 주인공으로 15-16세기를 배경으로 하죠. 그 뒤에 나온 『장송』은 쇼팽이나 들라크루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단 말이에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쓸 때는 그런 부분을 확 벗어나서 공간을 확장하고 넓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좀 있었죠.

 

등장인물들의 이름부터 그렇죠.


이런 소설을 쓰고자 한 기저에는 사람의 욕망이란 피부색, 국적, 문화에 따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외국을 배경으로 소설 쓴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더라고요. 항상 저의 대답은 “삶의 보편성을 보면 이해될 수 있다”였어요. 세계 좋은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요. 딱 눈에 하나 들어오는 것은 ‘삶의 보편성’이었어요. 인간의 욕망은 같다. 인간 근원의 욕망은 똑같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았고요. 이 소설을 충분히 쓸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다행히 시공간은 넓혔는데 어렵다고 하니까(웃음) 걱정이에요.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그 중에서 ‘아나’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어요.


세 사람을 얘기할 수 있죠. 주인공 네레오의 대척점에 ‘발터’라는 장사꾼이 있어요.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데요. 발터는 가장 보편적인,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이죠. 네레오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에요. 한편 네레오와 발터의 가운데에 있는 인물이 아나라고 할 수 있어요. 아나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죠. 아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순수한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좋은 곳에서 태어나고, 완벽하게 죽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예요. 네레오는 아나를 만남으로써 세계를 보는 눈이 변하게 돼요. 단순하게 이상향을 쫓던 네레오가 아나를 만난 후에 자기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직시하게 되죠. 아나를 통해 네레오가 심리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거예요.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에요. 

 

아나는 비참한 죽음 때문에도 더 오래 남아요. 네레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내도 안 떠올리면서 말이에요!


아내 ‘루이사’는 이성으로 만나 결혼을 한 사이지만 아나는 자신의 이상을 이해해준 사람이거든요. 물론 아나의 생각은 좀 달랐지만, 짧은 시간에 네레오는 아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요. 그렇기 때문에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아나를 떠올리게 되는 거죠.

 

등장인물들이 꾸는 꿈 장면이 여럿 있거든요. 꿈인 만큼 환상적이고 암시적인데요. 이 장면으로 전하려고 했던 게 있었던 건가요?


특별히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네레오의 꿈은 어떤 극적인 전환의 시점이 되었을 때에 썼던 건데요. 특별한 암시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일종의 혼란과 불안 같은 것이죠. 네레오는 자신이 쫓고 있는 인물이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 단지 이름 하나만 갖고 찾아다니는데요. 그런 현실에 대한 고민, 끝없이 쫓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꿈으로 나왔다는 걸 표현한 거죠. 꿈을 어떤 의도로 쓴 것은 아니고요. 저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문장이 나오니까요. 나중에 써놓고 보면 내가 쓴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 경험이 굉장히 많아요. 특히 이 소설을 쓸 때는 그런 적이 많았어요. 무의식에서 나온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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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이상을 쫓아가는 현자들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달라질 것 같아요. 사색적인 면이 있어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전달 받는 것도 다르겠죠.


출간 전에 가제본으로 서평회를 한 적이 있어요. 젊은 독자들 서른 명 정도와 만났는데요. 주로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런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를 느꼈는데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현재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도 그렇고요.

 

네레오는 계속해서 다른 세계를 좇잖아요. 경계 바깥을 말이에요. 경직된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는 특별히 다르게 읽히는 면이 있어요. 


맞아요, 경계 안에서의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경계 밖으로 나가서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우리는 경계 바깥에 아예 나가지를 못하게끔 하죠. 철통처럼 담장을 둘러놓고 ‘나가면 죽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웨나를 찾아 다니는 네레오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거죠. 웨나는 일종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읽는 사람에 따라 웨나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을 거예요.

 

제목 ‘바람을 만드는 사람’이 가리키는 존재를 처음에는 당연히 웨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읽을수록 웨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람을 만드는 사람은 네레오일지도 몰라요.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요. 책 안에도 얘기했는데요. 따지고 보면 역사란 반드시 경계 밖으로 뛰어나간 사람들에 의해 영역이 확장되고, 그 뒤를 쫓아간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서 그 영역에서 살게 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네레오가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아흐간 족의 펠리페라는 노인 역시 그렇죠. 그 조상들이 동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 해협을 넘어 남쪽 19,000㎞ 정도 되는 거리를 이동했잖아요. 저는 인간에게 내재된 어떤 부분에는 꿈과 이상을 쫓아가는 현자들이 확실히 숨어 있다고 봐요. 생각해보세요. 누군가는 저 달에 가보자고 말한 최초의 사람이 있을 것이잖아요.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먼저 그 생각을 하고 이야기한 사람도 있겠죠. 항해자 마젤란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사람들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경계인이에요. 웨나는 경계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방향성을 가리키는 하나의 표석이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웨나의 존재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작가의 의도를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먼 과거가 아니고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잖아요. 지금은 말하자면 과학의 시대고, 발견되지 않은 것이 과거보다 적은 시대일 텐데 이런 시대에 경계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어떤 중요성을 가진다고 보세요?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위험하더라도 말이죠. 각 분야에서 자기만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 그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것이 반드시 산을 오르는 일이 아니라도 말이에요.

 

결국 처음에 얘기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과 ‘경계 바깥을 상상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모든 세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요. 두 가지가 맞닿아 있다는 말이 맞아요.

 

정말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사내’는 네레오의 아들인가요?


하하하.(웃음) 얼마 전에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들 모임에 초대 받아서 다녀왔는데요. 딱 한 분이 슥 오더니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냐고 묻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알았어요?”(웃음)라고 했었어요. 맞아요, 숨겨놓은 코드인데 잘 보셨네요.

 

인터뷰에서 얘기해도 되나요?(웃음)


뭐, 괜찮아요. 처음에 쓸 때는 선명하게 알 수 있도록 했는데요. 나중에 고칠수록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이런 형태가 됐죠. 그걸 아셨으면 책을 제대로 읽으신 거예요.(웃음) 실은 그게 핵심이에요. 왜냐,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거든요. 베링 해협을 넘어서 티에라델푸에고 섬까지 인류가 걸어갔듯, 우리의 꿈과 이상도 어느 한 곳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끝없이 이어져나간다는 함의가 담겨 있는 거거든요.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의미예요.

 

네레오가 숨을 거둘 때 그 사내에게 귀엣말을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죠. 하지만 짐작할 수 있어요. 무언가 사내에게 전달하고 떠난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사내는 노인의 말에 반문할 수 없었다. 먼 지평선에서 굉음이 들려왔지만 사내는 오직 노인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말은 점점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노인의 입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러나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던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지더니 긴 침묵이 찾아왔다.(304쪽)

 

하지만 그 순간 네레오는 사내가 아들일 거라는 건 몰랐죠. 다만 살아가는 길만 열어준 것이고요. 그렇지만 사내는 왠지 저 사람이 마음에 남아요. 제가 일부러 네레오의 기억과 사내의 기억이 엇갈리도록 하기도 했거든요. 사내가 어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부분이 네레오가 기억하는 아내와는 좀 달라요. 철저하게 다르게 해서 숨겨둔 거였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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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앞서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힐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작가에게 그런 소설은 무엇이 있는지 듣고 싶어요.


세계의 좋은 문학 작품들을 쭉 봤어요. 중앙아시아부터 시작해 터키, 유럽으로 갔다가 나중에는 미국으로 갔고요. 골고루 많이 읽었는데요. 제 경우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전 작품을 다 읽거든요. 끝없이 먹고, 취하죠.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는 필립 로스, 가즈오 이시구로, 이언 매큐언, 오르한 파묵, 이창래, 제발트, 미셸 우엘벡 같은 작가들이에요. 그들의 책이 나오면 별안간 쫓아가서 읽어요. 특히 필립 로스는 굉장히 좋아하죠. 국내에 번역된 책은 다 읽었어요.

 

다음 소설도 준비 중이신가요?


2013년 여름 무렵 네 달 동안 초고를 두 개를 썼어요. 하나는 지금 쓰고 있고요. 다른 하나가 이 소설이에요. 쓰고 있는 것은 분량이 좀 많아요. 2,400매 정도 돼요. 이 소설은 당시 700매 정도밖에 안 됐죠. 그래서 이 소설부터 시작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걸렸어요.(웃음) 지금 쓰고 있는 건 청춘 소설이에요. 국내에는 『바람을 만드는 사람』같은 소설도 드물지만 청춘 소설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뤄보려고 해요. 계획대로라면 연령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청춘이라는 말을 되새김질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 소설 역시 다른 사람이 안 가본 영역으로 가서 재미있게 써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시 경계를 넘는군요.


이 소설도 어찌 보면 경계를 넘어갔다고 할 수 있거든요.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도 너무 어려웠으니까요. 아까 얘기했듯이 삶의 보편성이라는 면이 없었다면 못 했을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서 ‘수많은 번민과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한 줄의 글이 우리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잠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333쪽)이라는 ‘작은 소망’을 적었는데요. 인터뷰에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너무 많은 책이 있죠. 그 중 한 권을 읽는다고 해서 인생이 획기적으로 달라지진 않아요.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지침은 될 수 있지만 자기를 바꾸는 것은 자기의 선택이지 성경은 아니거든요. 또 성경이 세상의 모든 지혜도 아니고요. 그렇듯 이 책을 읽고서도 대단한 변화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단순하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이 세 가지만 생각해볼 수 있다면 작가로서는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책이 많이 팔리건 팔리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죠. 숫자가 많으면 좋겠지만, 그렇진 않을 테고요.(웃음) 다만 몇 명이라도 읽는 분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책은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능을 하잖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바람을 만드는 사람마윤제 저 | 특별한서재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에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소통으로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길을 찾는 독자들에게 마윤제 작가만의 진중한 언어와 이야기로 위로와 격려,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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