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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귀한 책이라는 평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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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을 열자마자 “분노와 기쁨, 눈물로 썼다”는 이야기가 흠씬 이해됐다. 사전 같이 묵직한 두께의 책. 사진 한 장, 글자 한 줄에도 촛불의 기운이 뭉근하게 피어 올랐다. 2016년 10월 29일 첫 촛불집회부터 2017년 5월 정권교체까지, 7개의 국면과 45가지 테마, 그리고 484장의 사진으로 담아낸 『촛불혁명』. 1,700만 촛불시민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이 책 역시 촛불혁명의 광장에서 탄생했다.

 

저자 김예슬 나눔문화 사무처장은 1986년, 대한민국이 민주화의 첫걸음을 내딛던 해에 태어났다. 2007년 생애 첫 대선에서 ‘CEO 대통령’ 이명박이 당선되는 것을 목격했고, 설마 하던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2010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재학 중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며 ‘한국 최초의 사회적 대학 거부 선언’을 한 김예슬. 그는 “지난 10년, 나의 20대는 온통 분노와 슬픔이었지만,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촛불혁명’으로 내 삶의 혁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촛불혁명』을 일찌감치 읽은 한 부모 독자는 말했다. “제 아이에게 한국 현대사를 알려주고 싶어서 이 책을 샀어요. 부끄러운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으니까요.” 눈빛이 유독 맑았던 8살 소년은 말했다. “역사학자가 되는 게 꿈인데요. 나중에 커서 제 아이한테도 이 책을 보여주고 싶어요.” 후기를 듣고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김예슬과 촛불혁명을 사진으로 담은 김재현을 비롯한 나눔문화 연구원들. 이들은 1년 전, 눈발을 뚫고 주말마다 광장에 나왔던 1,700만 촛불시민에게 헌사하는 마음으로 『촛불혁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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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고 눈물 났던 촛불혁명의 기록

 

굉장히 무거운 책을 펴냈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힘들었지만 뿌듯하고 또 기쁘다. 올해 초 매주 촛불집회를 참여하면서 몇 십 년간 다시 없을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회가 혁명이라는 직감을 느꼈을 때,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찍은 사진만 3만 5천 장에 달한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 정세 분석, 각종 자료들을 따져보면 검토한 페이지가 약 3천 쪽은 되지 않을까 싶다.

 

출간된 지 2달이 되어간다. 촛불집회 1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책이 나온 셈인데, 그간의 소회를 말한다면.


대한민국의 최근 1년이 근 10년보다 나았지 않았나? ‘우리가 정말 나라를 구했구나’라고 생각한다. ‘촛불혁명이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아득하다. 지난 10년, 정치는 물론이고 사회 곳곳에 얼마나 많은 적폐가 가득했나? 어디까지 망쳐놓을 수 있는가를 실감할 정도였다. 방송도 모두 장악되어 있었고 설마 싶었던 국가기관 국정원, 검찰까지. 이런 상황에서 촛불이 아니었다면 대선을 어땠을까, 싶다.

 

딱 1년 전 일인데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나 역시 뭔가 어색하고 낯선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 많은 시민이 모인 걸 떠올려보면, 정말 대단했고 정말 감격스럽다. 어떻게 이 겨울에 매주 나올 수 있었는지, 대한민국의 희망이 사라질 수 없음을 느낀 현장이었다.

 

『촛불혁명』이라고 제목을 짓기까지 논의가 많았을 것 같다.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떠오른 제목이었고, 내는 순간까지 고민했던 제목이다. 촛불 1주년을 맞은 최근까지도 이것이 촛불항쟁인지, 촛불시위인지, 촛불집회인지, 그냥 촛불인지 이야기가 많았다. 학문적인 논의도 필요하겠지만 혁명이라고 불리지 않게 되는 것에 우려가 많았다. 책을 낸 데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이것이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정명으로 남기는 데 있다.

 

일반 독자들이 책을 사기엔 꽤 부담스러운 가격인데, 사서 읽었다는 지인이 많았다. 내 얼굴이 혹시라도 찍히지 않았을까, 궁금해하면서 본 독자도 있더라.


책을 내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이 하나 있다. 바로 “귀한 책”이라는 평가다. 우리가 좋은 책이라는 말은 많이 하지 않나? 그런데 “귀한 책”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들을까 생각해봤는데, 이 책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을 아신 것 같고,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인터넷서점 리뷰 중에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은 “표지는 눈부시게 예쁘고 내용은 눈물 나게 벅차다”는 글이다. 왜 와닿았을까를 생각해보니, 촛불혁명이 딱 이랬던 것 같다. 정말 눈부시고 정말 눈물 났던 혁명. 그 모습을 담고자 하는 마음을 독자 분들이 읽어주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기록의 의미도 크다.


무려 23주간의 촛불집회였다. 참여한 사람으로서 촛불혁명의 현장과 전모를 꼼꼼히 기록하고 싶었다. 첫 장 ‘이게 나라냐’를 쓸 때는 정말 경악하고 분노하면서 썼고, 세 번째 장 ‘국회는 탄핵’을 쓸 때는 첫 고지를 이뤄 내기까지의 긴장되고 절박했던 심정을 담아내려고 했다. ‘그 모든 것은 세월호로부터 시작되었다’를 쓸 때는 한 글자 한 글자 쓰기 힘들 만큼 눈물로 썼다. 촛불의 아이들이 이 혁명의 기억과 함께 자라나갈 수 있는 책이길 소망한다.

 

실린 사진이 총 484장이다. 사진 선별도 꽤 고심했겠다.


두 가지 기준이 있었다. 결정적인 정세를 보여주는 사진, 그리고 혁명의 심연이라고 할까? 표정이라고 할까? 특히 혁명의 주체로 나섰던 우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담고 있는 간절함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분노했고 기뻤고 놀랐고 서로 고마웠던, 그 혁명의 표정을 담고 싶었다.

 

첫 번째로 실린 사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촛불, 두 번째 사진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이게 나라냐”라는 피켓 문구다.


촛불혁명이 시작된 후 처음 나온 구호인데, 촛불의 심지가 됐던 한 마디라고 생각했다. 정말 경악하고 참담했던 국민들의 마음이 담긴 말이다. 이어 실은 세 번째 사진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에 찍은. 눈발에도 우뚝 서 있는 시민들의 얼굴이다. 이번 혁명은 유례없는 겨울 혁명이었다. 집회 당시 가장 추웠던 날이 1월 14일, 12차 집회였다. 최저 기온이 -11도, 체감 온도는 -17도였다. 눈발을 뚫고 모인 이 뜨거웠던 현장을 담고 싶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특검 연장 즉각 탄핵’, ‘이게 나라다 이게 정의다’, ‘적폐 청산 정권 교체’ 등 두 글자에서 열 글자 사이의 문구로 피켓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지금은 현실이 된 문구가 많다.


순간순간 낯설면서 또 기쁘고 뿌듯하다. 집회 첫 주부터 빨강 피켓을 만들어 나갔는데 더 많이 찍지 못해서 아쉬웠을 때가 많았다. 한 주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다음 주 피켓을 만들곤 했는데, ‘박근혜 하야’로 시작했던 외침이 ‘박근혜 탄핵’, ‘박근혜 구속’으로 이어지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정세에 맞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문구로 시민들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보통 하루에 2,3만 장, 규모가 컸을 때는 10만 장까지 제작했는데 나눔문화에서 만든 피켓을 자세히 보면, 다양한 시민을 형상화하는 아이콘이 그려져 있다. 정세가 고조되고 어떤 문제가 진전됨에 있어 아이콘의 표정이 바뀌는데, 이걸 알아보는 시민들이 있었다. 마지막 피켓까지 다 구했는데 하나만 없다며, 보내줄 수 있냐고 편지를 보내온 해외 동포도 있었다.

 

408쪽에 ‘잊지 말고 심판하자! 국정농단 관련자 명단’을 실었다. 특검과 검찰에 구속된 27명의 얼굴과 더불어 ‘국정법 불법 정치개입 및 여론조작 관련자’, ‘경찰 비리 및 폭력 진압 관련자’, ‘편향 및 왜곡 언론 관련자’까지. 마지막 장의 제목(‘마침내 승리, 혁명은 시작’)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결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혁명이 아닌가, 생각했다.


책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즉,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불의한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두 가지.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항쟁, 그리고 그 현장의 진실과 사상을 담은 한 권의 책”이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분서갱유, 서양에서는 나치가 금서 수천 권을 불태우지 않았나. 책이 두려운 건 기록으로써 남겨지고 이 기록이 또 다시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도 썼듯이, 촛불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이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 혁명은 한순간에 전복되는 방향보다는 점차 전환되어야 하는 줄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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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무엇인가.


마지막 사진을 꼽고 싶다. 이번 촛불혁명의 심장이자 광장이었던 광화문에서 찍은 30대로 보이는 여성의 사진인데, 촬영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게 촛불 시민들의 위엄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 혁명은 각계각층 다양한 세대가 모두 참여한 장이기도 했지만, 2030 여성의 참여가 유독 돋보였다. 시대의 유행을 만드는 2030 여성을 상징하는 어떤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오염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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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소수의 벗과 함께 사는 것

 

2010년에 『김예슬 선언』이 세상에 나왔다. 2010년 3월 10일, 고려대학교 교정에 붙인 대자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에 담을 수 없었던 물음, 생각들이 담긴 책이다. ‘한국 최초의 사회적 대학 거부 선언’을 한 김예슬의 삶도 궁금했다. 개인적인 생각이 담긴 후속작도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틈틈이 글은 쓰고 있다. 매일 한 줄이든 열 줄이든 쓰고는 있다. 하지만 책으로 묶을 수 있는 글인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첫 번째 책 『김예슬 선언』은 내 삶에서 나온 지도였다. 『촛불혁명』역시 내가 겪고 살아낸 책이고. 매일 같이 세계를 읽고 글을 쓰고 있지만, 어떤 것이 어떤 책으로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최근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 “학벌주의가 심해졌으면 좋겠다”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김예슬 선언’ 이후 7년, 대한민국은 여전한 느낌이다.


나 역시 그 글을 읽었는데, 처음 든 생각은 참 안타깝다는 느낌이었다. 대한민국의 대학 서열, 그 자체로 보면 1,2,3,4위에 드는 학교의 학생들조차 얼마나 길이 없다고 느끼면 자신들이 더 보장받는 사회를 이야기할까? 결코 모두가 원하는 대학을 나와도 보장되지 않는 불안감을 느끼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또 안타까웠던 건, 이 친구의 말대로라면 이 친구는 영원히 서울대 생의 아래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이 될 텐데, 전세계로 보자면 세계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고려대생 아닌가? 그 위에 있는 수많은 학벌의 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참 안타까웠다. 일본의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는 삶’을 말했다. 누구의 위에 서야만 자신의 높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고작 스무 살 남짓한 학생들이 어떤 대학의 이름 없이,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 없이, 자기 존재를 느낄 수 없게 돼버린 현실이 참 안타깝다.

 

대학을 꾸역꾸역 졸업했다면 김예슬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이 되는지.


너무나 확실하게 상상된다. 대개 우리들의 삶은 대학, 취업, 결혼, 육아 그리고 또 다시 아이의 대학, 취업, 결혼, 육아가 아닌가? 물론 훌륭하게 잘 살아가는 분도 많고, 이 분들의 삶을 내가 평가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원하는 삶이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인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남들 다 그렇게 살아”라고 말하지 않나? 이 둘은 같이 존재할 수 없는 말인데, 흥미로운 것은 주어가 모두 ‘남’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가 남겨놓은 신념의 말이 아닐까 싶다.

 

비영리사회단체 ‘나눔문화’에서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어떤 단체인가?


10년째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새롭고 매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싶고. 나눔문화는 진정한 나를 찾는 길, 지구적 생태 재앙, 심화되는 양극화, 전쟁과 기아질병, 영혼의 상실이라는 네 가지 위기를 직시하며 사회적 실천에 힘쓰고 있다. 예전의 운동들이 사회적 저항, 개인적인 영성, 대안적인 삶의 길 등으로 나눠져 있었다면, 나눔문화에서 활동한 경험은 ‘진정한 나를 찾는 길’ 안에서 사회적, 개인적 운동을 포함하고 있다.

 

정부 지원과 재벌 기부를 받지 않는 단체로 알고 있는데.


나눔문화에 처음 왔을 때 놀랐던 것 중의 하나다. 나눔문화의 다섯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가 정부 지원과 재벌기업 후원을 받지 않는 것, 둘째는 언론 홍보에 매달리지 않는 것, 셋째는 잘할 수 있는 일보다 꼭 해야만 하는 일에 주력하는 것, 넷째는 옳다고 주장을 앞세우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 다섯째는 좋은 일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이좋게 하는 것이다. 이 원칙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 지가 자연스럽게 보인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고 옳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고자 한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것만은 하지 않아도 나를 지킬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 김예슬에게 가장 큰 이슈는 무엇인가?


여전히 관심 있는 것은 적폐 청산이다. 10년의 권력을 쥐고 흔든 세력들이 정말 만만치 않다. 그 세력들이 언론도 장악하지 않았나? 이명박 정권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직후에 한 것이 방송 장악이었다. 언론은 한 사회의 공기라고 하는데, 마치 지난 10년은 미세먼지 속에 산 것과도 같다. “KBS, MBC, 안 보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은 언론을 장악한 그들의 승리적 결말이다. “현장의 진실을 제대로 보도한다”는 언론에 대한 신뢰, 이제는 회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만약 지금, 대한민국 절대 다수의 독자가 읽는 신문의 1면을 통으로 받았다. 어떤 글이라도 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질문만 있는 글? 나의 물음 100가지를 써보고 싶다. 지금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등. 나와 이 세상을 향해 물을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또 답변을 많이 들을 수 있다면 그것들로 다시 한 편의 글을 쓰면 좋겠다.

 

김예슬이 바라는 사회의 어떤 공기, 색깔이 있다면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삶을 생각하면, 내가 바라는 세상이 그려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야,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몸으로 사는 존재, 영혼으로 사는 존재, 사회적 존재인데 나뿐만 아니라 너무 건강하지 못하다. 건강할 수 없는 이유를 따져보면, 자연에서 거의 유배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터지는 먹을거리 불안을 보면, 삶의 질은 갈수록 나빠지는 것 같다. 몸과 영혼이 건강한 삶이 중요한데, 결국 또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건 관계가 아닐까 싶다. 아주 좋은 소수의 벗과 함께 사는 것, 이것을 확장시키면 좋은 사회가 아닐까 어렴풋이 꿈꿔본다. 색깔로 따지면 초록과 빨강? 가능하면 자연과 가까운 삶, 촛불의 불씨를 품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 바라본다.

 

 


 

 

촛불혁명 김예슬 글/김재현 사진/박노해 감수 | 느린걸음
혁명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영감을 주고 새로운 삶을 꿈꾸게 만드는 강력한 기억이다. 그리고 기억은 기록으로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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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빈 구멍을 찾아서 채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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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이 막을 내렸다. 2013년 네이버 웹툰에 연재를 시작한 후, 햇수로 5년 만에 본 결말이다. ‘마침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긴 여정은 6권의 단행본에 다시 담겼다. 까르푸 파업을 모티프로 탄생한 『송곳』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가 맞닥뜨리는 문제들, 노동 운동의 현실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노동 교과서’라 일컬어진 이유다. 이수인과 구고신, 두 명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다. 늘 곁에 있었지만 주목 받지 못했던 이들. 최규석 작가는 그들의 뜨겁고도 외로운 순간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어떤 이들은 만화가 최규석의 시선이 줄곧 ‘낮은 곳’을 향해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는 주류로 올라서지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가족이 있고(『대한민국 원주민』),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며 투신한 이들이 있다(『100℃』).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는 아이들이 있고(『울기엔 좀 애매한』), 돈 때문에 “욕망 앞에 선 가치의 초라함”을 느껴야 하는 청춘이 있다(『습지생태보고서』). 이 모든 이야기가 ‘빈 구멍을 찾아서 채우는’ 일이었다고, 작가 최규석은 말한다. 엄연히 존재함에도 포착되지 못했던 사람과 사건이 ‘여기 있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송곳』도 다르지 않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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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연재가 끝난 후에 독자들 댓글은 보셨나요?


끝나고 나서는 안 본 것 같아요.

 

결말에 대한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오래 돼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이렇게 끝이냐’ 이런 반응들도 있었던 것 같고, 잘 봤다는 반응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댓글도 있더라고요. 이수인은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한 것 아니냐는.


성과를 얻기는 했죠. 어쨌든 해고는 막았으니까요.

 

결국 이수인은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잖아요. 그런 점에서 ‘남 좋은 일만 한 것 아니냐’라는 식의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이수인 입장에서는 초기에 목표한 건 나름대로 달성을 한 거죠.

 

처음부터 본인을 위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라서 그런가요?


본인을 위해서 시작한 부분도 있죠. 직원들 다 보는 데서 갸스통한테 헤드락도 당했는데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직원을 자를 수는 없고, 버티고 있으면 계속 헤드락을 당해야 되고, 그만두고 나가면 창피하고... 자존심을 지키려면 반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죠. 그 반격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둔 거고요. 이수인 입장에서 돈은 조금 손해를 봤겠죠(웃음). 월급이 많이 깎여서 나왔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손해 본 게 크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연재 기간이 굉장히 길었어요.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댓글을 보면서 힘을 얻기도 하셨나요?


저는 댓글을 잘 안 믿어요(웃음). 인터넷 상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기도 하잖아요.

 

그렇죠. 또 다른 내가 될 수도 있고요.


없는 말을 만들어내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잖아요. 그래서 기분 좋은 댓글을 봐도 그냥 ‘베댓(베스트 댓글)이 되려고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깔려 있는데요. 그나마 의도가 조금 덜 보이고 왠지 진심인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들 중에는, 부모님이 노조 활동을 하시는데 뭘 하시는지 잘 몰랐다가 조금 이해하게 됐다는 댓글이 있었어요. 사실 그게 이 작품의 목표에 제일 가까웠던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댓글들이 힘이 되죠.

 

칭찬을 받아도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성격의 영향이 있는 건가요?


그런 것도 있는데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좋은 칭찬이면 바로 믿는데, 제 작품 같은 경우는 양이 적죠(웃음). 성격이 담담하기도 해요. 좋게 말하면 담담한 거고, 건조해요. 원래 그랬던 것 같지는 않은데, 제가 데뷔했던 때가 만화판이 망해가던 시기잖아요. 굉장히 척박한 시기였죠. 처음 상 받았을 때는 굉장히 기뻤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만화판이 망해가던 시기이다 보니까 상 받은 게 인생의 전환점으로 작동하지 않았어요. 상만 받았지 연재처는 없었던 거죠. 그런 경험들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까, 기쁜 일이 있어도 기뻐하는 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웃음). 기뻐하면 그만큼 기대감을 갖게 되니까, 그걸 스스로 제어했던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조금 냉랭한 인간이다 보니까 그런 것도 있고요. 제가 볼 때 좋은 장면, 스스로에게 인정받은 장면이 나왔을 때가 제일 좋죠(웃음).

 

『송곳』에서는 어떤 장면이 그랬나요?


지금 생각나는 건... 3부 엔딩인 것 같아요. 이수인이 “저는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군대 회상 장면부터 시작되는 그 씬을 좋아해요.

 

회상 장면에서 군대 동기 ‘윤수’가 등장하잖아요. 빗속에서 한 시간 동안 동기들을 깨우는데, 이수인은 알면서도 늦게 일어나요. 그 경험을 통해서 배운 걸까요?


그 친구의 태도에서 배운 바도 있을 거고요. 본인도 누군가를 실망시킨 인간이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죠. 자신도 어떤 순간에는 혼자 손해 보기 싫어서 일부러 게으름을 부린 사람이었잖아요. 모든 인간들이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시기를 살고 있는 건 아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텐트 속에서 자고 있었던 그 때를 살고 있을 수도 있죠. 이수인도 나중에는 그런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는 거고요.

 

작가님의 작품에는 항상 블랙유머가 있어요. 사회가 모순적인 곳이라는 걸 잘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송곳』이나 『100℃』같은 작품을 보면 희망을 믿으시는 것 같기도 해요.


모르겠어요. 캐릭터가 희망을 아직 안 버리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도 있는데요. 저도 그리면서 ‘이 사람들은 왜 이런 상황에서 계속 희망을 안 버리지?’ 하는 생각을 해요. 제가 그리는 캐릭터가 저와 많이 다르다는 생각도 하고요. 제가 동경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죠. 저는 그렇게 희망적인 스타일은 아니에요.

 

단적으로 여쭤보자면, 작가님은 염세주의자인지 이상주의자인지 궁금해요.


이상주의자가 염세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죠. 이상이 없는 사람이 염세주의를 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현실이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겠죠. 저는 염세적인 면도 굉장히 큰데 일상적으로는 굉장히 밝은 사람이에요. 긍정적인 스타일이고. 보통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을 봐도 표면적으로 밝은 사람들이 많아요. 우울증,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천성이 밝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힘든 일을 나서서 할 수 있는 거죠. 그만한 에너지가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시작도 안 하겠죠. 운동하는 사람들은 타고난 에너지가 큰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만나보면 다 엄청 웃겨요. 끝없이 개그를 치는 사람들이 많죠.

 

다들 조금씩은 나쁜 놈 아닌가요?


『송곳』을 보면서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웃음).

 

‘이렇게 타인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싶으면서 반성하게 되는 거죠. 작가님의 경우는 어떠셨어요? 취재 과정에서 이런 분들을 가까이에서 보셨는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셨나요?


나는 별로 훌륭하지 않구나, 싶었죠(웃음).

 

그게 제가 느꼈던 감정이에요(웃음).


그렇지만 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아요. 훌륭하지 않은 채로 사는 거죠, 뭐(웃음).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제가 조직 활동을 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조금 더 알리는 역할을 할 수는 있잖아요. 독자들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지 못하는가’라고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걸 염두 해두고 한 작업도 아니고요. 이런 일들에 대해서 알고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활동에 동의하는 면이 있다면, 활동을 지지해 주면 되는 거죠.

 

악플만 안 달아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노조 활동과 관련해서 기사가 나오면 ‘그냥 밥그릇 싸움일 뿐이다, 귀족 노조 아니냐’ 이런 댓글들이 달리잖아요.


아뇨, 달아도 돼요. 그 사람들의 인식에서 그러하다면 당연히 달 수 있죠. 우리는 너희가 싫어, 라고 말하는 건데요.

 

욕을 하더라도 알고 욕하라는 건가요?


네.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쁜 놈이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고 ‘이렇게’ 나쁜 놈이라는 걸 제대로 알려주는 거죠(웃음). 나쁜 놈이 아니라고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고, ‘나쁜 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닌 면도 많이 있고, 나쁜 면도 조금 있죠, 그건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어느 한 면이 나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다들 조금씩은 나쁜 놈이지’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끼리 모여 사는 게 세상인데, 어쨌든 침해되지 않을 선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나쁜 놈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아무나 죽이면 안 된다는 데에는 다 동의하는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저는 여기까지도 침해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동의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자세히 보여주는 거고요. 어쨌든 사람들이 접하는 건 제일 마지막 결과물이잖아요.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온 후에야 알게 되죠.


그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왔을 때, 경찰과 싸움이 붙고 회사를 점거하는 상황이 됐을 때 보기 시작하잖아요. 그 전에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는 보지 않고요. 문학이라는 것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고 해서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을 죽인 것도 맞고 나쁜 짓을 한 것도 맞지만 어떻게 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인간이 되었는지, 왜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거죠. 보여주고 이해시키잖아요. 저도 그런 거죠. 영웅이든 악당이든 이해시키는 게 문학의 좋은 기능이라고 생각해요.

 

연재를 마치고 허탈한 느낌은 없었나요?


별로 없어요. 늙어서 그런 건지, 별로 안 생기더라고요. 어릴 때는 그런 게 심했거든요. 한 작품 끝내고 나면 잠도 잘 안 왔어요. 마지막 마감 앞두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상황이라 바로 뻗어야 되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각성 상태로 있는 거예요.

 

왜 그러셨던 거예요?


연애 하다가 헤어진 거랑 비슷한 거겠죠?

 

자꾸 곱씹게 되는 건가요?


그런 것도 있죠. 거의 모든 장면이 다 기억나고, 잘못했던 장면도 기억나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싶기도 하고요. 모르겠어요. 나름 힘든 과정이다 보니까, 몸도 그렇지만 정신도 익숙하지 않은 거죠. 그러니까 특별한 경험이 되는 거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까 이미 해본 거잖아요(웃음). 힘든 경험도 한두 번 할 때나 힘든 거죠. 물론 여러 번 한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몸이 그 루틴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끝났으니까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감각이 둔해진 거죠. 원래 둔한데(웃음).

 

웹툰 연재는 8월에 끝났고, 단행본은 11월에 4~6권이 출간됐는데요. 작품을 웹에서 책으로 옮겨 오는 데 별도의 과정이 필요한가요?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저 같은 경우는 말 칸을 새로 그려요. 웹툰은 글자가 조금 크기 때문에 그림에 비해서 말 칸이 커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칸 밖으로 말 칸을 꺼내게 되죠. 단행본은 칸 안으로 말 칸이 들어가니까 새로 다 그려야 돼요. 그래서 있던 그림을 말 칸으로 가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웃음).

 

작업량이 은근히 많겠는데요? 한 컷 한 컷 다 보면서 수정해야 되잖아요.


네, 뚝딱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죠. 긴 단순노동이죠. 아까운 부분을 가려야 되는 고통이 있고 ‘어차피 가려질 거 왜 그렸나’ 싶기도 하고(웃음). 아깝죠. 그런데 이것도 성격 문제예요. 윤태호 작가님 같은 경우는 애초에 그려져 있는 말 칸을 그대로 쓰시거든요. 그런데 웹툰으로 볼 때는 꽉 차 보이던 말 칸이 단행본으로 보면 텅텅 비어 있으니까, 저는 그걸 신경 쓰는 편이라 사서 고생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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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길어지면 지겨워하는 단계가 오죠


연재 중에 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영됐습니다. 당시 제작진과 시놉시스를 공유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미 결말은 정해 놓으셨던 건가요?


사건의 흐름 정도는 다 정해져 있었죠.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으셨어요?


드라마로 만드는 결정을 내릴 때는 그 정도 부담감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지옥 맛을 봐야 지옥인 줄 아는 거죠(웃음).

 

뒤늦게 고민이 되셨나요(웃음)?


네. 나중에 ‘이러면 안 되는 거였구나’ 싶었죠. 처음에 결정할 때는 조금 고민이 됐어요. 그래서 친한 친구한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더니 ‘<왕좌의 게임> 원작 소설도 아직 완결 안 났어’ 그러는 거예요.  드라마가 앞서가기 시작했다고요. 그래서 ‘아, 그래? 별 거 아닌 거구나’ 했는데, 별 거 아닌 게 아니더라고요(웃음). 뒤에는 부담이 됐죠.

 

하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가자고 생각하셨어요?


일단은 독자들이 신선도를 잃은 거죠.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 독자들이 조금 많이 줄었고요.

 

그런 영향이 있었나요?


네, 드라마가 끝나니까 연재가 끝난 줄 아는 분들도 많았어요. 친구들도 끝난 줄 착각하고 ‘아, 그건 드라마였지’ 하는 식이었으니까요. 광팬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독자 수가 조금 줄은 부분도 있는데요. 어차피 뒷부분은 너무 우울해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도 조금 미안했어요(웃음). 후반부에 독자 분들이 조금 떨어져 나갈 거라는 예상도 했었고요. 왜냐하면 한 캐릭터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끔 하는 부분은 줄어들고 속도도 조금 빨라지거든요. 그리고 파업 시작할 때 이수인이 송 부장한테 욕하면서, 그때 이수인의 시각으로 따라오던 사람들은 많이 빠져나갔을 거거든요. 더 이상 이수인을 자신과 동일시해서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동의할 수 없는 행동을 했으니까요. 그 지점부터는 건조하게 사건 중심으로 짧게짧게 배치했어요.

 

독자들이 떨어져 나갈 걸 알면서도 그런 전개를 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패턴을 만화에서 재현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관심을 갖다가 싸움이 길어지면 디테일은 더 이상 보지 않고 ‘아직도 저러고 있냐’고 하고, 그 다음에는 지겨워하는 단계가 오거든요. 나중에는 미워하게 되기도 하죠. ‘뭘 저렇게까지 징징대냐, 그만 좀 하지’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거예요. 만화를 보면서도 그런 패턴을 똑같이 느껴보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스스로 무덤을 파는 방법이었죠. 알면서도 그냥 해봤어요(웃음). 원래의 목표는 사람들이 이수인을 보면서 ‘그만 좀 해라’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만드는 거였는데요. 그렇게까지 하기는 캐릭터한테 미안하더라고요.

 

뒤로 갈수록 노조 안에서의 갈등, 회사에 남았던 이들과 노조 조합원 사이의 갈등이 세세하고 비중 있게 다뤄지잖아요. 독자 입장에서는 ‘재미는 덜하다’고 느꼈을 수 있어요. 작가님은 꼭 보여주고 싶으셨던 모습인 것 같고, 양측의 입장을 균형감 있게 전달하려고 애쓰신 것 같아요.


그냥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봐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저는 끝까지 한 캐릭터를 따라가게 하는 종류의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람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고, 시선이 다른 데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런 방식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모습이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반대쪽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저 사람들이 그냥 회사의 개라서 저렇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저는 그게 궁금했거든요. ‘왜 자기 회사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할까, 기계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아마 그런 종류의 사람들 중에는 송 부장처럼 중간에 위치했던 사람들이 많겠죠.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가로서의 욕심이기도 한가요? 각각의 캐릭터를 이해하려는.


그렇죠. 작가는 어떤 캐릭터를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건데 ‘이 아이는 그냥 회사에 충성하게 타고났나 보다’라고 하면 그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잖아요. ‘원래 인간들이 이렇게 나쁜 거지’라고만 이해하고 넘어가면 작가로서도 불만족스럽죠. 정말 독특한 몇몇 종류의 인간들을 빼놓고는, 대부분은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행위 자체는 엄청 벗어나 보이지만, 그 행위를 하기까지의 과정은 보통 사람들도 선택했을 법한 일들이 쌓인 거라고 봐요. 그러면 도대체 어떤 선택들이 있었을까, 그런 걸 추적해 보고 싶은 거죠.


빈 구멍을 찾아서 채운다


푸르미 투쟁의 후반부에는 구고신이 개입하지 않아요. 그때부터 이수인이 싸우는 방식은 구고신과 달라진 걸까요?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과정을 보면, 이수인이 구고신보다 조금 더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헤어진 거죠. 구고신은 더 기다리라는 거였고, 이수인은 지금 파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는 오히려 이수인이 온건파가 됐죠. 구고신과 계속 같이 있었다면 아직 파업을 안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텐데, 그게 더 성공적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운 것 같기는 하네요.


‘될 대로 되라’ 하고 뛰쳐나갔는데, 나가고 보니까 자기보다 더 ‘될 대로 되라’라는 사람들을 만나서 정신을 차린 거라고 해야 되나요(웃음). 이수인이 구고신과 헤어질 때는, 이미 구고신 자체가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리고 있던 상황이었잖아요. 그래서 이수인이 구고신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었던 거고요. 그렇다고 해서 독자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또 아니었죠. 독자 입장에서는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는지 중요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런 순간에 이 인간들은 왜 이렇게 가는가’를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죠. 이수인은 옳은가 그른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고, 작가도 이수인을 생각할 때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결국에는 ‘이 순간에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인간들이 각자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중요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죠. 작가가 원래 그런 직업 아닙니까(웃음).

 

현실의 불편한 점들에 주목하실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취향이 그렇게 발달한 부분이 있고, 반골 정서가 같이 있는 것이기도 한데요. 취향은, 제가 굉장히 체제 순응적인 편이라서 그렇게 발달한 것 같아요. 어린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에 대한 폄하는 항상 존재하잖아요. 저희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이 안 됐었기 때문에 왜색에 젖어있다는 비난도 있었고, 아이들이 즐기는 문화는 폭력적이고, 가볍고, 어떤 의식도 없는 쓰레기 문화라는 식으로 주입을 했었어요. 보통의 애들이라면 그냥 무시할 텐데, 저는 굉장히 범생이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선생님 말씀이 옳다, 내가 나쁜 쓰레기 문화에 젖어있었구나’ 하고요. 실제로 제 작품들은, 굉장히 반골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작품에 가까운 거예요. 만화라고 해서 환상적이고 가벼운 것만 다루는 게 아니라 현실 비판적이고, 삶의 철학적 의미를 담으려고 애쓰는 거죠.

 

기존의 대중문화와는 다른 걸 해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런 꿈을 꾸게 만든 계기가 된 거죠. 사회 문제에 대한 반골 정서보다는, 내가 몸담고 있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장르에 대한 반골 정서라고 할까요. 메인 스트림이 놓치고 있는 지점들, 그 구멍을 제가 채우고 확인 받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죠.

 

어떤 확인을 받고 싶으신 건가요?


‘여기가 비어있다는 걸 당신들은 모르지 않았습니까?’라는 거죠. ‘여기 이런 종류의 재미가 존재한다, 그런데 당신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느냐,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라는 반골 정신인 거죠. 제일 잘 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메인 스트림이 될 텐데, 그런 마음이 별로 안 드는 거죠. 저기 비어 있는 걸 내가 채워야겠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거예요. 또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제가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을 텐데... 작품을 보면 그런가요(웃음)? 『습지생태보고서』에는 그런 부분이 없고 『대한민국 원주민』에도 딱히 없고요. 『울기엔 좀 애매한』은 힘들게 사는 고등학생들 이야기인데, 그건 정치적인 성향을 떠나서 다들 관심을 가질 만한 문제잖아요.

 

『대한민국 원주민』의 경우는, 사회에서 주류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작가님께서 항상 관심을 가지시는 건 어느 한 구석에 있는 것들, 사회의 모순이 낳은 사람과 사건들인 것 같아요.


그렇죠, 빈 구멍. 빈 구멍을 찾아서 채운다는 게 제일 일관된 것 같네요. 『대한민국 원주민』같은 경우는 잘 안 다루는 이야기죠. 도시로 이주한 전형적인 농촌 사람들이 아닌 거죠. 시대의 상황이 조금 어긋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거대 서사에서 주목하지 않죠.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데 저는 봤고, 그걸 ‘있다’고 말한 거예요.

 

‘당신들이 잘 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있다’는 건가요?


‘이런 게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송곳』도 그렇죠.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로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의 비율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권익을 위한 제도가 있고 그걸 위한 활동이 존재하고요. 그렇게 크게 존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노조 가입률이 10%란 말이에요. 전체 인구로 보면 굉장히 큰 덩어리거든요. 그런데 대중문화에서는 안 다루죠. 꼭 이걸 주제로 다루자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당연한 세상의 그림으로써 존재할 부분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게 빠져 있으니까, 대중문화 전체로 볼 때 균형이 안 맞는다는 거죠.

 

균형을 맞추시려는 거군요.


그렇죠. 제가 이걸로 트렌디한 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사람인데, 이해시켜줄 수 있는 능력은 어느 정도 있으니까요. 이런 종류의 사건이나 캐릭터를 사람들한테 어느 정도 이해시켜 놓으면 다른 창작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요소 중에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겠죠. 저는 대중문화를 보면서 접하는 세계와 실제 존재하는 세계가 어느 정도는 균형이 맞는 게 좋다고 봐요. 문화를 통해서 대리 경험을 하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실제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대중문화에서는 아예 비어 있는 부분이니까, 이걸 메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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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질식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 작품도 웹툰으로 연재하실 계획인가요?


장편을 하면 어쨌든 연재를 할 수밖에 없죠. 지금 연재를 한다면 사실상 웹툰이 아니면 없고요. 만화 잡지가 많이 죽었고, 그래서 독자가 거의 없잖아요. 잡지도 거의 다 웹으로 옮겨갔고, 지금 오프라인으로 나오는 잡지가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장편을 한다면 웹에 연재를 해야죠.

 

차기작은 장편이 될 것 같으세요?


『송곳』만큼은 아니고요. 웬만하면 앞으로는 1년 연재할 정도의 분량으로 맞출 생각이에요.

 

준비 중이신 작품에는 판타지, 액션 요소가 가미될 거라고 들었는데요.


연상호 감독이 시나리오를 써요. 그 친구 스타일이 원래 환상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잖아요. 배경은 현실 기반인데, 거기에 판타지 요소가 조금 섞여 있는 작품이에요.

 

왜 이번에는 스토리를 직접 쓰지 않으세요?


시나리오를 쓰기 싫어가지고요(웃음). 그림 작가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송곳』만드시면서 너무 지치신 거 아니에요?


그런 것도 있고요. 한계가 많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100℃』를 할 때도 그랬고요. 『습지생태보고서』도 짧고 웃겨야 된다는 한계가 있었죠. 『송곳』의 경우에도, 실제 취재한 이야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움직이다 보니까, 그게 나름의 울타리가 됐어요. 현실에서 실제로 이렇게 움직이는 인간이 있는 거니까, 제가 ‘이 인물은 이렇게 움직여야지’ 하는 게 아니라 ‘이 인간은 왜 이렇게 움직였을까’를 역추적 해가는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스스로의 재능이 있고, 그게 재밌죠. 다음 작품에서는 다른 사람의 스토리 자체를 해석하는 재미, 내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새로 상상하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어요.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과 작업하기는 조금 두려움이 있고, 연상호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아이디어를 공유해 오던 사이니까요. 남의 작품인 듯 내 작품인 느낌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송곳』안에서 ‘독자들이 오래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장면이 있나요?


유명한 장면들 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중요한 장면들이 있어요. 그런 걸 찾아 읽어 보시면 좋겠어요. 가령 소진이가 처음 구고신을 만났을 때 속으로 반발을 하죠. “이렇게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라고. 물론 나중에 변하기는 하는데요. 구고신 같은 인간을 처음 만나는 일반인의 시선이 그 짧은 말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자세히 찾아보시면 그런 걸 발견하는 재미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어요(웃음). 6권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장면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내 선택이 ‘나’를 지옥으로 만들게 놔둬서는 안 되잖아요”라고 하잖아요.

 

푸르미의 한 지점에서 근무하는 캐셔의 이야기죠? 유일한 조합원으로 로커룸에 남겨지는데, 혼자 청소를 하면서 그 시간을 버텨내잖아요.


네, 그 사람이 하는 말이에요.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취하게 됐을 때, 그동안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들이 다 문제가 되는 상황이 생겨요. 새로운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발전했다는 이야기인데,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발전이 손해가 돼버리는 거죠. 인생이 갑자기 불행해지는 거고, 지금까지 잘 지냈던 친구가 나쁜 놈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부분을 굉장히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괜찮았다면 사실 지금도 괜찮은 거예요. 내가 가진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이 괜찮음을 더 괜찮은 걸로 만들어야 되는 거죠. 내가 보지 못했던 사회 곳곳의 모순, 권리 침해 같은 문제를 더 낫게 만드는 도구가 돼야 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질식시키거나 거기에 잡아먹히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어요.

 

『송곳』의 독자들이 같은 경험을 할 수도 있겠네요.


네, 이 책을 읽고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이런 게 있는 줄 몰랐어요, 관심을 갖기 시작했더니 괴로워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괴로우니까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요.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건 당신한테도 안 좋고 세상에도 썩 좋지는 않다는 거예요. 아무튼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웃음). 제 작품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슬플 것 같아요.


 

 

송곳 1-6 세트 최규석 글그림 | 창비
평범한 직장인 이수인과 냉철한 노동 운동가 구고신이 대형 마트에서 벌어지는 부당해고에 맞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까지 이끌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종일 커넥팅랩 대표 “2018 모바일 트렌드는 무인과 무정부,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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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시장 선점 경쟁은 치열해질 뿐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18년은 새로운 통신기술을 누가 선점하는지 촉각이 곤두서는 해가 될 것이다. 특히 2018년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이 세계 최초로 5G 상용화의 시험장이 되면서, 한국 이동통신 3사와 통신기기 제조사들은 평창 올림픽을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삼고 5G 시장을 주도하려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모바일 서비스에서 변화는 시나브로 오는 게 아니라 어느 날 벼락같이 온다. 더욱 빨라진 5세대 이동통신 세상에서는 ‘실시간’ ‘무지연’의 속도에 도달해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클라우드 시대를 본격적으로 맞게 된다. 모두가 따라가는 모바일트렌드는 바꿔 말하면 세상의 모든 트렌드를 다룬다. 이용자들은 이내 당연한 것처럼 모바일 금융 서비스와 공유 서비스를 활용하게 될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곧 닥쳐올 현실이다. 『2018 모바일트렌드』에서는 이미 현실이 된 상황과 앞으로 변할 상황을 다룬다.


책을 공동 집필한 커넥팅랩은 ICT 산업에서 일하는 실무자들로 구성된 모바일 전문 포럼이다. 통신, 포털, 전자, 금융, 스타트업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정기적인 세미나를 진행하고 ‘모바일 트렌드’ 시리즈를 매년 펴낸다. 커넥팅랩 대표 박종일 저자는 KT, 대우증권 등을 거쳐 4년 전 IT 기기 유통기업 착한텔레콤을 창업했다. 대표로 『2018 모바일트렌드』에 밝힌 ‘무의 시대’에 관해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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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업 관계자가 파헤친 트렌드


‘모바일 트렌드’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5년째입니다.

 

2013년 처음으로 모바일 트렌드 시리즈를 냈어요. 같이 모여 있던 사람들끼리 책만 쓸 게 아니라 공부를 하자 해서 정기적으로 한 달에 두 번씩 만나는 포럼이 커넥팅랩입니다. 그중에서 책을 같이 쓰실 의향이 있으신 분들끼리 1년에 7~9명 정도가 모여 책을 출간하죠.


박종일 저자님은 어느 쪽으로 집필했나요?


매번 조금씩 다르긴 한데 올해에는 주로 단말기 자급제 장을 위주로 썼어요. 내용이 매년 조금씩 바뀌고 워낙 급변하는 산업이다 보니까 같은 주제를 매년 끌고 갈 수 없어요. 저자들도 50% 이상은 매년 바뀝니다.


언제부터 집필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나요?


4, 5월 즈음부터 멤버를 조직하면서 방향 설정을 합니다. 집필은 3개월 정도 하고요. 항상 추석 연휴가 마지막 편집 기간이었어요. 대부분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기 때문에 근무시간에는 못 하고 주말이나 명절에 집중적으로 쓰죠.


새로운 트렌드를 발굴하고 소개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책을 쓰기 위해 트렌드를 전망한다기보다 트렌드를 읽다 보니 책을 썼다는 게 맞을 거예요. 참여하는 저자가 다 현업에 종사하다 보니 자기 업을 열심히 하다 보면 당연히 트렌드를 알아야 합니다. 국내/해외 자료, 혹은 공개되지 않은 트렌드나 외부적인 이슈 등을 공유하고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트렌드 전망이 체득되는 거죠.


해마다 주제어를 정합니다. 2018년 주제어는 ‘무의 시대’ 인데요.


저희끼리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공통되는 부분을 찾아봐요. 매년 하나의 키워드를 잡았는데 올해는 콘셉트가 좀 바뀌어서 ‘무의 시대’라고 했어요. 이제 도저히 하나의 키워드로 정의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고 본 거죠. 축을 설정하고 그 축이 모든 산업과 연관한다는 콘셉트로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2015년이 옴니채널, 2016년이 온디맨드, 2017년 주제어가 컨시어지였습니다. 이런 경향은 계속 이어지는 건가요?


이어지면서 조금씩 진화합니다. 2014년 초반까지만 해도 옴니채널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는데 지금은 다 아는 단어죠. ‘온디맨드’도 그렇고요.


예측이 실제로 일어나면 뿌듯하시겠어요.


뿌듯하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해요. 너무 빨리 와서요. 2016년 키워드를 ‘온디맨드’로 하고 2015년 10월에 책을 냈는데 이주 후에 우버에서 온디맨스 서비스 ‘우버 러쉬’를 내놓으면서 영상이 공유됐습니다. 국내에서는 다음카카오가 2015년 11월에 온디맨드 전략을 발표하기도 하고요. 사실 내년에 어떤 현상이 발생할 거라는 예측을 하는 건데, 출판하고 바로 한두 달 후에 나오는 걸 보면 모바일 산업이 정말 빠르다는 걸 느껴요. 그만큼 우리의 전망이 신중해야 틀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전망이 틀어지면 시리즈로서 의미가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매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죠.


점점 상황이 빨리 돌아가면서 집필에도 어려움이 있겠어요.


집필하는 중에 이미 진행되는 트렌드도 있어요. 그런 건 과감히 뺍니다. 속도에 대해서는 계속 신경 써야 하죠.

 

무감각, 무인, 무소유, 무한, 무선, 무정부


‘무선’에서 중요한 이슈로는 5G서비스 상용화가 있었는데요. 독자들 입장에서는 정확히 5G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기도 합니다. 세대를 나누는 기준이 뭔가요?


국제 표준 기준이 있습니다. 어느 기준을 맞추면 몇 세대 이동통신이라는 기준이 있죠. 한국 기업이나 한국 정부가 표준화 작업에 참여해서 표준에 대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노력도 계속하고 있어요.


이동통신 세대에 따라 표준 역대를 다르게 씁니다. 표준 역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은 건가요?


주파수 역대를 도로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많으면 많을수록, 넓을수록 더 많은 용량과 더 많은 사람이 더 빠른 속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주파수는 공공재이기 때문에 한정적이에요. 어느 주파수를 잘 활용할 것인지 결정하고 국제 표준에 맞추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제 표준에 맞추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계 표준을 맞추지 않고 저희만 따로 간다면 수출의 기회가 없겠죠. 기본적으로 통신 인프라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를 봐야 하는데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고속도로가 없었다면 시속 100km 이상 달리는 자동차가 필요 없었겠죠.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자동차 산업, 정유업, 정비 산업, 자동차 금융 산업 역시 전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70년대 고속도로가 나오면서 한국에서도 자동차 산업이라는 게 열렸어요. 마찬가지로 한국은 2007년에 3세대 이동통신을 세계 최초로 전국망 서비스를 한 나라였어요. 당시에 전국에서 휴대폰으로 무선인터넷을 할 수 있는 나라 중 최초였고 그 당시 3세대 단말기를 만든 삼성과 LG가 그때부터 단말기를 세계에 수출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2011년 본격적으로 모바일을 통해 대용량 데이터를 사용해야 하는 영상 서비스가 가능해지면서 게임 시장이 열리는 계기가 됐죠. 그래서 한국에 있는 모바일 게임 회사나 콘텐츠 회사가 그때부터 기술을 가지고 전세계에 게임을 수출하는 기회가 열렸어요.


5G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무지연성’을 들었습니다. 무지연성으로는 어떤 변화가 생겨날까요?


무지연성은 얼마나 실시간에 가깝게 데이터를 처리하는가의 문제인데, LTE는 아직 지연이 조금씩 발생합니다. 최근 자동차 산업에서 모바일과 관련해 많이 주목하는 부분이 자율주행인데요, 무인 자동차는 계속 통신을 쓰면서 사고가 일어나면 속도를 조절하는데, 차가 얼마나 빨리 사고를 인지하고 멈출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기존의 LTE로는 실시간으로 대응한다고 해도 시속 100km로 달리면 80m에서 120m의 주행거리가 발생하는데, 5세대로 가면 그게 2.7cm로 줄어듭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 발생률이 줄어들겠죠. 원격 수술에서도 무선인터넷을 이용해 시술하면 거의 실시간으로 동작해야 하기 때문에 지연성이 중요한 영역입니다.


모바일 트렌드가 자율주행차에 영향을 끼친다니 놀랐습니다. 몇 년 정도면 자율주행 상용화가 가능할까요?


시범 서비스는 이미 다 나와 있고 각 나라의 규제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미국 버지니아주에서는 자율주행차를 합법화해서 많은 회사가 테스트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나주혁신도시와 제주도에서 테스트 환경을 만들고 있고, 안정성과 기술적인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된다면 향후 10년 안에도 충분히 상용화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무현금 현상도 ‘무인’ 키워드로 제시해 주셨어요.


가장 기본적으로는 현금 발행과 현금 거래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많이 줄어들 거예요. 이미 신용카드 사회를 통해서 현금을 많이 덜 쓰는 추세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현재 신용카드가 커버하지 못하는 청소년이나 취약계층도 모바일 송금 서비스나 모바일 결제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하면 현금을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전망이 들고요. 이미 중국은 알리페이와 위챗페이처럼 모바일 결제, 송금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정말 현금을 안 들고 다닙니다. 상점에서도 굳이 신용카드 결제 단말기를 쓰지 않고 바로 결제가 이루어지고요. 모바일 송금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공유형 서비스도 활성화됩니다. 무현금으로 인해 파생하는 산업이 생기는 거죠.


캐시리스 사회와 더불어 요새 제일 주목을 받는 이슈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가상화폐입니다.


블록체인은 화폐 인증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고, 가상화폐가 블록체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가상화폐 광풍은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에요. 가상화폐 때문에 오히려 블록체인의 기술성이나 확장성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국내 증권업에서도 여러 개의 증권사가 협력해 블록체인 기술로 기존의 공인인증서를 대체하는 방식을 준비하고 있어요. 한국 같이 보안과 인증에서 규제가 많은 나라에서는 블록체인을 활용하는 분야가 더 넓어질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블록체인이 도입되면 ‘무정부’에도 영향을 끼칠 거라고 하셨는데요.


아예 정부의 기능이 없어진다기보다 정부가 해왔던 역할이 상당 부분 대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존에는 각 나라의 중앙은행이나 금융기관에서 발행한 화폐로 거래 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가상화폐는 통제하는 주체가 없죠. 가상화폐뿐 아니라 인터넷 서비스의 규격화도 예전에는 정부 차원에서 과학기술부나 인터넷 진흥회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구글이나 애플 페이, 페이스북, 우버 등에서 보이듯 특정 국가나 기관에서 지정한 방식이 아니라 인터넷 서비스가 전 세계의 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의 역할이 변화되거나 축소될 수 있겠죠.


클라우드 서비스는 ‘무한’과 ‘무소유’ 성향을 지닌 서비스라고 짚어주셨어요.


예전 IBM에서 만든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은 하나의 컴퓨터가 체스를 두는 방식이었습니다. 알파고는 분산된 수백 대, 수천 대의 컴퓨터 연산 능력을 활용하고 있어요. 예전에 막대한 자금으로 커다란 장비나 서버를 이용했다면 지금은 전 세계에 흩어진 컴퓨팅 자원을 모아 쓸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마존에서 만든 아마존 클라우드 서비스가 될 거고요. 모든 서비스가 특정한 시간에 트래픽이 몰리는 걸 대비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많은 서버와 많은 회선을 확보해놓는데, 클라우드 서비스가 보편화되면 더 적은 비용으로 정보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컴퓨팅에서 공유형 서비스가 발현된 형태가 클라우드라고도 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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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람들이 소유하지 않고 공유하려는 ‘무소유’에서 한편으로는 공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과도한 수수료를 매기면서 플랫폼을 독점하리라는 비관적 전망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많이 나오는 서비스 중 하나가 가사 도움 서비스입니다. 예전에는 알음알음 ‘이모님’을 구했다면 지금은 검색해서 선택할 수도 있어요. 인력을 제공하는 분들도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요. 오히려 음성화되는 시장이 양성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우버 서비스 등이 기존 업자인 택시나 운송 업계의 이익을 침범할 수 있지만, 수십 년 된 기준에 의해서 신규 기술 상황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밤에 택시를 잡기 힘들다거나, 지방에서 택시나 운영되는 범위가 제한적이라면 승객의 입장에서는 대안이 필요한 거죠. 대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기존 규제만으로도 보충이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바뀌었으면 규제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모바일이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기술을 잘 못 다루는 사람은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모바일 소외 계층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90년대 인터넷 시대에서부터 정보화 격차라는 이슈는 어디서든 발생했습니다.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정보를 이용하지 못하는 폐해는 계속 있었죠. 반면 인터넷이나 모바일이 활성화되면서 기존의 정보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혜택은 더 커질 거라고 봅니다. 예전에는 주민자치센터를 가거나 전화 이용을 했지만 지금은 정부도 어떻게 하면 모든 행정 서비스를 모바일에서 접근하게 만들지를 고민합니다. 국내 스마트폰 보급률이 90%를 넘어갔기 때문에 노인이나 어린이들 등도 공공 서비스를 쉽게 사용하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게 사회적으로 더 좋다고 봅니다.


중국의 예가 자주 나옵니다. 한국 기업이나 연구자는 중국을 견제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5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이 한국보다 정보화 지수가 높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선 인터넷 보급을 하기 전에 이동통신 무선 인터넷을 훨씬 더 보편적으로 만들면서 모바일 인터넷 환경이 더 친숙하고, 거기서 산업적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모바일 서비스로만 본다면 한국이나 미국보다 중국이 제일 앞서 있어요. 그래서 한국의 사업자가 중국에 위기를 느낀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중국의 서비스를 더 잘 배워올까가 이슈인 것 같습니다.


 


 

 

모바일 트렌드 2018박종일, 커넥팅랩, 정근호, 김성진, 진현호 저 외 3명 |미래의창
만물이 모두 연결되는 시대, 5G는 이 모든 것의 원활한 통신을 가능케 한다. 2018년 시작되는 5G, 새로운 통신의 신세계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송정연, 송정림 자매 작가 “나만의 ‘설렘 시간표’를 짜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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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림(왼쪽) 작가와 송정연 작가

 

SBS FM <이숙영의 러브FM> 메인 작가로 활동하는 송정연 작가와 드라마 <여자의 비밀>, <미쓰 아줌마> 등을 쓴 송정림 작가. 자매 사이이자 가장 친한 동료이기도 한 이들에게는 둘만의 작업 공간이 있다. 회원이 오직 둘뿐인 온라인 카페다. 그곳에서 이들은 책도 같이 쓰고, 서로의 작업에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무엇을 해도 행복이 오래 가지 않던 시기의 송정림 작가가 언니 송정연 작가에게 제안해 완성한 책 『설렘의 습관』은 그 공간에서 시작된 자매의 세 번째 공동 집필 책이기도 하다.


설렘을 찾아내는 수십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는 책을 써놓고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인생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역경과 고난, 그것 자체가 인생”이라는 송정연 작가는 “역경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설렘을 찾는 거죠.”라고 말한다. 빵집을 순례하고, 좋아하는 철학자를 정해보고, 악기를 하나 배우고, 영화에 나오는 음식을 만들어 먹어보고, 나의 장례식 명단을 적어보는 일. 이들이 삶에서 건져 올린 ‘감성 버킷리스트’는 그 목록만으로 어떤 안도감을 준다. “울라고 태어난 존재들”이 인간이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설렘을 찾아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들에게서 놀라운 위안을 받는다. 삶의 무게를 아주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중이라면 여기, 아주 좋은 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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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사이가 정말 좋으세요. 이번 책 쓰면서도 서로의 글을 제일 먼저 읽고 의견 나누었다고요? 두 분만 활동하는 온라인 카페도 있다고 들었어요. 책에서도 느꼈지만 제일 친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두 분의 우정이 돋보이는데요.

 

송정연: 동생이지만 동생이 아니어도 친구하고 싶은 존재예요. 동생은 차분하고요, 침착해요. 진지하고요. 저와는 조금 다르죠. 저는 더 활발해요. 밝고요. 재미가 없으면 싫어요. 지루한 걸 별로 안 좋아하고요. 동생이 정(靜)이라면 저는 동(動)이죠. 어릴 때도 엄마와 동생이 책 읽으면서 얌전히 있으면 제가 가서 깜짝 놀라게 하고 도망가곤 했어요. 소리 꽥 지르고 오고 그랬죠. 


송정림: 언니는 개그 욕심이 있어요.(웃음) 언니를 다들 좋아해요. 언니가 있으면 화기애애해지잖아요. 그러니까 어딜 가나 언니를 찾아요. 방송 쪽에서는 저희가 자매인 걸 다 아시거든요. 저를 보면 항상 언니를 물어요.

 

전에도 함께 책 작업을 한 적이 있지만요. 특별히 이번에 책을 쓰면서 서로에게 새롭게 발견한 부분도 있었나요?


송정연: 이렇게 얌전하고, 항상 정도를 걷고, 방탕본능이 없는 청순 유전자가 어떻게 타투를 하고 싶어 하는지, 정말 놀랐어요. 그 글을 보면서 동생의 영혼이 굉장히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동생에게 이런 과감한 면이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느꼈는데요. 지금까지는 정말 안 그런 줄 알았거든요. 대학시절에도 그랬어요. 저는 바람만 불어도, 비가와도 수업 안 갔어요. 눈이 오면 더 안 가고요.(웃음) 하루 종일 폐업이에요. 그런데 동생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수업도 교수님과의 약속이라는 거죠. 드라마를 쓸 때도 단 한 번도 기한을 어기지 않은 작가예요. 그런 사람인데 타투를 하고 싶다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송정림: 글로 다 푸는 거예요. 연애도, 못하니까 글로 풀잖아요.(웃음) 내가 못하니까 드라마로 쓰는 거죠. 저는 또 반대로 언니의 새로운 면을 봤어요. 언니는 밝고 소녀 같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글을 통해서 언니 안의 외로움, 고독, 작가다운 내면의 깊이 같은 걸 느꼈어요. 언니도 이렇게 외롭구나, 생각했고요. 로맨틱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언니 글이 너무 좋더라고요.

 

워낙 다른 성향이라 서로에게 영향 받는 면도 많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송정연: 그럼요, 어떤 작가가 제 동생의 글을 보고 “원고지에 꽃잎이 내리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딱 그 표현이 맞다 생각했어요. 못 말리는 감성이 있거든요. 물기 가득한 문장이잖아요. 정말 누구도 못 따라간다고 생각해요. 쉽게 따라갈 수 없어요. 그 문장이 동생 자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이 항상 부럽고 그래요.


송정림: 언니는 감각적이에요. 작가에게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언니가 진짜 증명하죠. 젊은 분들도 못 따라갈 걸요. 새롭고, 발랄하고, 감각적인 언니의 글은 누가 보면 20대 작가가 쓴 것 같은 느낌이 있잖아요. 제 글은 저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거든요.(웃음) 그게 부럽죠.


송정연: 저는 10-20대 사이트나 유튜브 정말 좋아해요. 재미있어서 잘 봐요. 그래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다름 아닌 ‘설렘’에 대해 쓴 책이잖아요. 그런데 송정연 작가님은 워낙 설렘을 누릴 줄 아는 분 같네요.


송정림: 맞아요, 책은 제가 언니한테 제의를 했는데요. 어느 날 진짜로 가슴이 안 뛰더라고요. 언니는 항상 가슴 뛰게 사는데 저는 뭘 해도 행복이 오래 가지 않는 거예요. 친구들도 만나면 그렇더라고요. 행복을 잃은 느낌이랄까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던 시절은 사라지고, 아파트를 넓혀도 차를 바꿔도 그 행복이 오래 가지 않는 거예요. 자꾸 불행해 하고요. 하지만 우리 행복하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행복 찾는 방법을 고민했죠. 가슴이 언제 설레는지 생각해보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할 때였어요. 첫 경험이죠. 우리 나이에 경험하지 못한 게 어디 있어, 라고 할 테지만 너무 많거든요. 어느 날 버스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보기를 해봤어요. 정말 설렜어요.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찾아서 하나씩 해봐야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언니한테 제안을 했고요. 책에도 ‘감성 버킷리스트’라고 부제를 달았어요.


송정연: 저는 진짜 백 개도 쓰겠더라고요. 제가 독일에서 2년 넘게 지낸 적이 있는데요. 정말이지 너무 우울하고 고독한 거예요.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버스를 타고 베를린 시내를 다녔어요. 그게 정말 행복했어요. 그저 버스를 타고, 흔들리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저는 출근할 때 늘 큰 소리로 인사하고요. 절대 로비에서 문자하지 않아요. 로비도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잖아요. 인사할 수 있는 곳이죠. 최대한 많은 분들과 인사하려고 노력해요.

 

설렘이 나이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송정림: 20대라 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 분들이 많죠. 그런 분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 있고요. 그럴 때는 자꾸 스스로 돌아보면서 설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자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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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생각해봐야


서로의 글 중에 제일 좋았던 글을 하나씩 꼽아보면 어떨까요?


송정연: 저는 정말 하나하나 전부 좋았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도 좋죠. 아버지께 산문 읽어주기나 시 몇 편 외우기, 공연장 가기, 이런 그냥 평범한 건데도 울림이 있더라고요. 정말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도 전깃불이 켜지게 만드는 글이었어요.


송정림: 약간 눈물 난 글이 있었어요. 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꼽아본 글이 있었는데요. 정말 뭉클했어요. 생의 마지막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언니 글을 보고 저도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봤어요. 나의 묘비명도 생각해보고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해봐야 하는 거구나, 생각을 하게 됐어요.

 

죽음을 보통 슬픈 일로 생각해서 언급조차 잘 안 하잖아요. 그걸 설렘의 영역에서 바라본다는 게 저도 참 좋더라고요.


송정연: 그 순간을 떠올리니까 살아 있음이 너무 빛나는 거예요. 더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는 이름도 다 썼는데 너무 길어서 뺐거든요.(웃음)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굉장히 강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묘비명 생각해보는 것도 그렇고요.


송정림: 묘비명 써보기를 사람들이 꼭 해봤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이 모여 묘비명 회의를 했었어요. 의견이 다 다르더라고요. 엄마에 대한 느낌이 형제라도 다른 거죠. 그래서 나의 묘비명은 내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써보려고 하니까 의외로 어려워요. 그렇지만 타이틀을 정하면 그게 앞으로의 삶에 있어 하나의 테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묘비명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니까요.

 

두 분이 생각해둔 묘비명은 뭐예요?


송정연: ‘원 없이 웃었다’인데요. ‘원 없이 빵을 먹었다’(웃음)고 할 수는 없고요. 원 없이 웃었다는 말로 하고 싶어요. 그래야 남은 사람들이 슬프지 않을 것 같아요. 두고 가는 사람도 생각해야 하잖아요. 그런 마음도 있어요.


송정림: 저는 ‘원 없이 썼다’고 하고 싶네요. 쓰기(write)의 의미도 물론이지만 사용(use)의 의미로도 돼요. 내 몸, 능력, 사랑, 모두 원 없이 썼다는 뜻이죠.

 

나는 아들 재형이가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는 원 없이 일했고, 원 없이 사랑했으니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갔다고 추억하기를 바란다. 엄마는 멀리 떠난 게 아니라 가슴 더 가까이서 너를 지켜볼 거라고. 그러니 외롭지 않고 더 든든하다고 여겨주기를 바란다.(279쪽)

 

결국 두 분이 말하는 설렘이 무엇이냐, 생각하게 되는데요. 보통의 의미는 아니에요


송정연: 여유가 있어야 설렐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여유가 와도 설레지 않아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는 다르거든요. 목표는 갖되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설렘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바로 그 작은 설렘이 자신을 위로해요. 작은 것들에서 설레지 않으면 큰 게 왔을 때 넘어져요. 인생에 어떤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으면 조금만 힘든 것이 와도 쓰러지고요.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어요. 정말 그래요.


송정림: 책 제목에 ‘습관’이라는 말을 썼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연습인데요. 사람을 만날 때의 설렘도 연습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사람을 만나잖아요. 그때 인사를 나눠요. 정말 행복하죠. 어느 날은 아파트를 나서는데 어느 분이 “잠깐만요!”라며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분이 얼른 오더니 제 발치에 있는 달팽이를 가리키는 거예요. 제가 달팽이를 밟을까봐 부른 거였어요. 우리가 달팽이를 갈 때까지 배웅해줬는데요.(웃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산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사람과 자연에서 오는 설렘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아요.

 

설렘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필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하면 설렘을 더 잘 느끼게 될까요?


송정연: 자기가 가진 것을 써보라고 하고 싶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나는 운전을 할 수 있고, 차가 있으니까 운전을 할 때 꼭 한 번 기쁨을 주고 싶어요. 예를 들면 꼭 양보를 하고요. 신호 앞에서 서두르지 않아요. 항상 깜빡이 잘 켜고요. 운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거죠. 내가 가진 사소함으로 설렐 수 있으니 정말 좋은 거죠.


송정림: 가장 설렜던 때를 떠올려보고, 하루에 한 가지씩 안 해본 것을 해보면 좋겠어요.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집에서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일단 나가서 동네 도서관이라도 가보는 거죠. 요즘 동네 도서관 정말 좋거든요. 가서 책도 빌려보면 그것만으로 하루가 설레요. 안 해본 건 정말 많아요. 운동도 좋아요. 수영, 댄스, 다 좋죠. 설령 하다가 그만두더라도 말이에요. 한 번 해보세요.

 

송정림 작가님은 배움의 즐거움을 많이 적기도 하셨죠.


송정림: 아파트나 구민센터 같은 곳도 보면 엄청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요. 초상화 그리기, 수채화 그리기 같은 것도 있고요. 그런 일종의 ‘설렘 시간표’를 짜보면 도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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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것을 하다보면


‘익숙한 곳의 낯선 여행자’라는 말이 참 좋았어요. 두 분이 서울 시티투어 버스를 타기도 했다면서요? 익숙함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설렘의 순간을 만들기에 충분해요.


송정연: 버스를 탄 후에 이 글을 누가 쓸까 얘기했거든요. 너무 고민했는데 동생이 더 잘 쓸 것 같았어요.(웃음) 우리가 모델 놀이 하면서 음악도 입혀 동영상도 만들었거든요. 정말 좋았어요.


송정림: 매일 내가 사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죠. 동네도 그래요. 내가 다니는 길 말고 다른 길로 걸어가 보면 운동 효과도 더 있다고 하더라고요. 안 가본 곳도 가보는 거죠.

 

그 외에 정말 추천하고 싶은 설렘의 순간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송정연: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꼭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힘들더라도 그 힘듦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돕잖아요? 그럼 이상하게 나의 힘든 일도 풀려요. 이건 정말 제가 겪은 신비한 체험인데요. 타인에게 작용하는 무언가가 인생에 엄청난 선물을 주는 것 같아요. 할머니가 아플 때 ‘어떡하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서 할머니를 만져주는 거죠. 그러면 어릴 때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약손이 되는 거잖아요. 사람 사이에 그런 접촉이 중요해요. 다시 강조하지만 힘든 것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거든요. 많은 파도들이 왔지만 지나가요. 파도에 집중하지 말고 그걸 하나씩 넘다 보면 어느 새 지나가 있더라고요. 

 

힘든 게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 중요한 말씀이네요.


송정연: 제주에서 자랐는데요. 바다 수영을 전교생이 다 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출발점에서 도착점을 보면 정말 못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파도도 너무 많고요. 선생님이 가라고 하니까 가는 건데요. 그냥 눈앞의 파도만 넘다보면 도착점에 와 있더라고요. 그것 같아요. 뭐든 눈앞의 것을 하다보면 도착해 있는 거죠. 이건 제가 아들에게도 했던 이야기예요. 그러는 와중에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면 굉장히 설레는 것 같아요.

 

하루 중 가장 설레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송정연: 제게 새벽 시간은 선물 같아요. 드물게 지나가는 차 소리도 반갑고요. “굿모닝!” 하고 인사하고 싶을 정도죠. 비가 내려도 너무 반가워요. 그 새벽 시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정말이지 가득 찬 성찬을 받는 느낌이에요. 그 시간에 많은 일을 하거든요. 글도 쓰고요. 방송 원고도 보내요.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 하루가 아주 풍성해져요. 습관이 되니까 참 좋더라고요. 또 저는 일하러 갈 때 정말 설레요. 출근해서 청취자 분들에게 마음 다해 문자를 보내거든요. 청취자의 사연에 제가 되게 많이 성장해요. 그들의 일상이 체화되면서 많이 배우죠. 겸손해지고요. 그래서 저는 일요일에도 답장을 하는데요. 정말로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송정림: 저도 비슷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거든요. 매일 아침 에세이 한 편을 써요. 오늘은 컴퓨터를 켜놓고 바깥을 내다보는데 멀리서 동이 터오더라고요. 영화 <봄날의 간다>에서 죽을 때 한 가지 기억만 가져간다면 뭘 가져갈래, 라고 한 대사가 있잖아요. 저는 아마 이 기억이겠다, 싶었어요. 아침에 에세이를 쓰고, 바깥에 동이 터오는 시간, 이 시간이 정말 가져가고 싶은 기억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루가 선물처럼 배달됐다는 느낌이죠. 

 

설렘도 연습이라는 말을 상기해보면, 두 분이 일상에서 설렘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둔 규칙 같은 것도 있을 것 같아요. 나만의 설렘 규칙이 있다면요?


송정림: 일단, 퍼지지 말자. 저는 움직이라는 말을 하고 싶거든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가에게 살이 붙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했는데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돼요. 군살, 이런 게 아니고요. 설렘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거든요. 무엇 하나라도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을 자꾸 찾으면 하루가 알찰 수 있어요. 빽빽하게 시간표를 짜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여백의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조차도 뭔가 설렐 수 있는 여백으로 만들면 좋겠어요.


송정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첫째예요. 나 자신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죠. 설렘 유전자를 장착시키는 건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설렘의 조건은 자기의 매력을 절대 놓지 않는 거예요. 자신의 가치를 높게 바라봐야 하고요. 뭉크의 그림이 다르고, 피카소의 그림이 다르고, 르누아르의 그림이 다르잖아요. 어느 것이 더 예쁘다고 작품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듯 우리도 마찬가지 같아요. 그런 것을 남과 비교하고 불만을 가질 필요는 없겠죠. 일단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면 달라질 거예요. 남의 ‘좋아요’를 얻어야 행복한 게 아니게 돼요. 상관이 없어지죠. 내 자신에게 항상 엄청 큰 ‘좋아요’를 쏘니까요.

 

독자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송정림: 하루하루 설레며 살자는 말이요. 설렘을 찾아서 살자고 말하고 싶어요. 한 번도 안 해본 게 엄청 많아요. 그렇게 행복의 능력을 확장시키면 좋겠어요. 신화도 보면 그렇잖아요. 두 가지 전제가 있거든요. 첫째, 인간은 언젠가 죽고요. 둘째, 인간은 불행하게 태어났어요. 울라고 태어난 존재들이에요. 행복하면 신이 갖겠죠. 그러니까 이 불행, 이 일상 속에서 자꾸 행복을 내가 발견해내야 해요. 행복을 발견하는 건 엄청난 능력이에요. 어차피 불행하게 태어났다는 전제를 두면 사실 그렇게 불행할 일도 없어요. 신도 밀당을 한대요.(웃음) 그러니까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송정연: 갈구가 많으면 설레지 않아요. 너무나 요구가 많잖아요. 그러면 설렘이 거기에만 압축돼요. 그걸 어느 정도 조절해야 하죠. 언제 어떤 일이 내 뒷목을 낚아챌지 모르잖아요. 모든 게 다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작은 파도가 오더라도 ‘이게 인생이다’ 할 수 있어요. 역경과 고난, 그것 자체가 인생이에요. 인생은 평화가 아니거든요. 역경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설렘을 찾는 거죠. 우리가 항해를 하지만 그래도 잠깐 하늘도 바라볼 수 있고, 지나가는 바람도 느낄 수 있잖아요. 바람도 어제와 오늘 다르고요. 비록 가는 길에 괴물 같은 사람이 있을지언정 그 사람한테 집중하지 말고 좋은 걸 생각하면 좋겠어요.

 


 


 

 

설렘의 습관송정림, 송정연 저 | 박하
심장을 팔딱팔딱 뛰게 하는 설렘의 순간을 되살리기 위해 이제껏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인생의 첫 경험에 도전하라고 제안한다. 신나고 흥나는 감성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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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작가 특집] 이루리 “웃기든지 찡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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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리 작가가 다섯 번째 그림책으로 찾아왔다. ‘삶은 달걀’이라는 익숙한 농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그 제목부터 『삶은 달걀』이다. 『북극곰 코다 까만 코』, 『북극곰 코다 호』,『까만 코다』로 이어지는 ‘북극곰 코다 시리즈’와 『천사 안젤라』가 진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전해줬다면, 이번 책은 유쾌한 웃음을 안겨준다. 밤새도록 삶은 달걀에 대해 생각하는 곰, 그와 달걀 쟁탈전을 벌이는 닭이 등장해 미소를 자아낸다.

 

웃긴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예사로 넘길 수 없는 묵직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생각하는 곰’은 삶은 달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독자는 자꾸만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된다. 삶은 달걀인 까닭에 “따뜻하게 품으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것이고,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잘 삶겨진 달걀과 인생의 공통점이라고 해야 할까. 곰이 말했듯, 삶은 달걀은 “작지만 완전한 우주”다.

 

이루리 작가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북극곰 코다 시리즈’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10개 나라로 수출되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서른 살에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든 작가는 그림책 평론가와 번역가, 기획자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현재는 그림책을 쓰는 작가로, 출판사 북극곰의 편집장으로, 그림책 서점 ‘프레드릭’의 대표로 책 읽기의 즐거움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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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소자 관람가’ 그림책


이번 작품은 ‘삶은 달걀’이라는 농담에서 시작됐다고요.


알고 보면 오래 묵은 작품이에요. 한 번씩 SNS에 ‘삶은 달걀’이라는 농담을 올렸거든요. 우리말의 즐거움이잖아요. 우리말에서만 ‘삶은’이라는 말이 ‘life is’도 되고 ‘boiled’라는 뜻도 되니까요. ‘삶은 달걀입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야겠죠?’ 같은 농담을 SNS에 올렸었는데, 그게 제법 쌓였어요. 모아보니 하나의 작품이 될 것 같더라고요.

 

전작 ‘북극곰 코다 시리즈’나 『천사 안젤라』에 비해 유머러스한 요소가 많아졌어요. 변신을 시도하신 이유가 있나요?


일상생활에서는 제법 아재 개그를 많이 날리는 편이에요(웃음). 그런데 글만 썼다 하면 심각해지는 거예요. 제가 타고난 에너지와도 상관이 있는 것 같아요. 별자리 공부를 오래 하면서 나중에 알게 됐는데요. 제가 전갈자리인데, 전갈자리 시즌에 영향을 주는 별이 명왕성이에요. 명왕성은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일에 관련된 별이고요. 저도 어릴 때 처음 가졌던 꿈이 의사였거든요. 그 생각을 하게 된 자체가 삶과 죽음에 관심이 많다는 거죠. 작가도 ‘영혼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으로서 선택한 거예요. 책을 고를 때도 죽음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야기에 끌리는 것 같아요. 그걸 치유하는 데 관심이 많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남들을 웃기고 싶은 욕망이 늘 있는 거예요. 웃음만큼 탁월한 치료제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웃기는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었는데, 욕심으로 작품이 써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다행히도 SNS에 올렸던 농담들이 모아져서 이렇게 웃기는 작품이 됐고, 저도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만 넘길 수 없는 문장들이 많아요.


달걀이 메타포가 돼서 삶의 의미를 내포하는 문장들을 쓴 거거든요. 물론 그렇게 읽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농담을 던질 때도 농담 반 진담 반이었어요.

 

한편으로는 ‘이런 심오한 농담을 아이들이 이해할까?’라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이 책은 ‘연소자 관람가’ 그림책이죠. 그림책이 원래 어린이책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시죠? 그림책은 랜돌프 칼데콧이 발명한 예술 장르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린이책으로 치부되면서 하나의 예술로 존중 받지 못하고 있죠. 저 역시 서른 살에 그림책을 처음 봤을 때 어린이책이라고 생각하고 우습게 봤는데, 그러다가 큰 코 다치는 바람에 더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 후로 인생이 바뀌어서 그림책의 길로 걸어왔던 거고요.

 

『삶은 달걀』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쓰신 책은 아니군요.


모든 연소자 관람가 그림책이 어른과 아이가 같이 보는 거죠. 어른들이 그림책에서 더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거든요. 어린이가 책을 본다는 건 의미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거예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세계를 예술 작품을 통해서 간접 경험하는 거죠. 어른들이 책을 보는 건 전혀 다르죠. 이미 쓰라린 경험, 즐거운 경험, 아픈 경험을 수없이 했고 그 경험에 비추어서 예술가가 만들어 놓은 경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거예요. 두 개의 경험을 비교하면서 의미를 발견하는 독서를 하는 거죠. 어린이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독서를 하지 않아요. 어른들도 즐거움의 대상으로써 독서를 했으면 해요. 책이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면 고통이 되잖아요.

 

작가로서 또는 편집자로서 책을 만드실 때마다 ‘즐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제가 만드는 모든 책은 ‘책의 즐거움’을 전하기 위한 거예요. 읽으면서 웃든지, 짜릿한 쾌감을 느끼든지, 아니면 슬픔을 느끼든지, 그 경험을 통해서 책을 스스로 찾게끔 만드는 게 목표죠. 독자로 하여금 책의 행복을 전하고, 즐거움을 주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책의 본령이잖아요. 독자를 가르치거나 계도하는 건 작가의 순수한 목적이 아니죠. 아마 그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목적일 거예요. 무엇보다, 인간 스스로가 강요 받는 걸 원하지 않잖아요. 인간은 스스로 배우는 존재죠.

 

그림책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죠. 주요 독자는 어린이이고 ‘어른도’ 같이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그림책의 일차 독자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에요. 그림책 작가는 영화감독의 마음으로 책을 만드는 거죠. 물론 어린이 독자를 염두 해두고 만드는 경우도 있겠지만, 작가 자신이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에 어린이 예술이 될 수 없는 거죠. 처음부터 그림책은 어린이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그림책이 어린이책이 된 건 코메니우스라는 교육자 때문이에요. 그 분이 어린이 인권에 주목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어린이를 독자의 지위에서 교육 받아야 할 열등한 존재로 떨어뜨리는 역할도 같이 한 거거든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런 책을 사줘야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어린이를 무시하는 이야기예요. 어린이들이 어른보다 열등한 게 아니거든요. 어린이는 어른보다 순수하고, 어른은 어린이보다 경험이 많을 뿐이죠. 나머지는 서로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고, 열등하고 부족하고 가르치고 교화시켜야 될 대상으로 보는 건, 어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한 판 놀아보고 싶었다


그림은 나명남 작가님이 그리셨는데요.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알게 됐어요. 저희 북극곰 출판사는 매년 볼로냐 도서전에 전시를 하는데, 작가님이 더미를 가지고 찾아오셔서 미팅을 했죠. 결국 『달이 좋아요』는 창비에서 출간이 됐는데, 제가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으면 같이 작업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어요. 작가님도 흔쾌히 그러자고 하셨고요. 그래서 저희가 그림책을 만들 원고들을 보내드렸는데, 그 중에서 나명남 작가님이 선택하신 게 이 작품이에요.

 

나명남 작가님의 데뷔작 『달이 좋아요』를 떠올려 보면, 그림체가 상당히 다른 것 같아요.


작가님은 이 작품의 유머보다 철학적인 면을 더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굉장히 철학적인 방향으로 콘티가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말씀드렸죠. ‘이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독자들이 생각할 테고, 우리는 이걸 가지고 한 판 놀아봤으면 좋겠다’, ‘코미디로 만들면 작가님이 콘티를 짜고 그림책을 완성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요. 그리고 곰이 달걀을 먹는 데 어려움을 겪는 개그가 어떻겠냐고 제안 드렸어요. 그랬더니 작가님께서 닭 캐릭터를 발명하신 거예요. 사실 곰과 달걀만 나오면 이렇게 재밌는 그림책이 되기 어려운데, 닭이 곰의 상대역이 되어서 달걀 쟁탈전을 벌이게 된 거죠. 곰은 먹으려고 하고 닭은 뺏으려고 하고요. 자연스러운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완성도가 높아진 거예요. 이 책의 완성도에 대한 공은 순전히 나명남 작가님에게 돌리고 싶어요.

 

『삶은 달걀』은 이야기책 『지구인에게』에 수록된 작품이기도 하죠. 이번 책을 시작으로 『지구인에게』에 수록된 다른 이야기들도 그림책으로 만들어지나요?


네. 『꼬마 석수장이의 꿈』이 작업 중에 있고요. 그 밖에도 지구인에게』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작가가 정해져서 진행 중이에요.

 

『지구인에게』는 자전적인 이야기잖아요. 어린 시절 먼저 세상을 떠난 작은형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는데요. 편집자로서 작업하시면서 힘드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술가는 삶의 모든 주제를 다루잖아요.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그런데 탄생은 기쁘고 죽음은 슬프고 괴로운 건가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에요. 생로병사는 늘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생로병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경험하고 받아들일 것인가가 중요한 거죠. 만약에 어떤 작가가 탄생은 그릴 수 있는데 죽음은 그리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작가가 미성숙한 거죠. 비극에 대한 거부감은 삶에 대한 미숙한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다뤘잖아요. 작품의 주인공이 형제인데,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죽어버리는 동화는 그것밖에 없을 거예요. 얼마나 충격적이에요? 그런데 다음 세상에서 만났잖아요. 윤회라는 세계관을 믿든 안 믿든 삶에 있어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삶의 밀도나 깊이나 애정은 더 커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책 작가인 동시에 출판사 북극곰의 편집장이신데요. 작가로서 편집부 직원들과 일하실 때는 어떤가요? 수평적으로 소통하시나요?


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객관은 내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 밖에 존재하는 거니까요. 누구나 자기가 쓴 건 좋아 보이죠. 그걸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때 소통 능력과 전달 능력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조언을 받는 게 너무 중요한 거죠. 저는 거절을 거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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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든지 찡하든지


편집자로서 외국 도서를 선택하실 때 기준이 있나요? ‘이건 정말 한국에서 출간하고 싶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은 어떤 건가요?


국내 창작물도 마찬가지인데, 제 기준은 두 가지예요. 웃기든지 찡하든지. 인간에게 감정이 있다는 건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증거잖아요. 책을 영혼의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영혼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고요.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감정을 달래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술 작품은 우리 감정을 달래줘야 되고 건드려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못한다면 예술이 아니라 지식 그 자체인 거죠. 사실 지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미 증명됐듯이 지식으로 하는 일은 기계가 더 잘하고요. 지식 교육에 만 매달려봤자 행복한 인간을 만들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지도 못해요.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어떻게 더 사랑하고 살 것인가, 어떻게 더 행복해질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거죠. 영혼에 관한 일을 만들어야 하고 해야 돼요.

 

서른 살에 그림책의 매력에 눈뜨셨는데, 그 전까지는 소설가를 꿈꾸셨다고 알고 있어요. 소설과는 다른, 그림책에만 있는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도 그림책은 어린이책이라고 생각하고 봤었어요. 처음 본 작품이 지각대장 존이었고 두 번째가 『프레드릭』이었는데요. 두 작품 모두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이렇게 예쁘고 쉬운데, 이렇게 심오할 수가’ 싶었던 거죠. 전 세 대가 같이 보고 담론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놀랍잖아요. 그림책이 시각 예술이라는 것도 놀라웠고요. 대부분의 그림책이 연소자 관람가 책이기 때문에 짧은 분량 안에 더 쉽고 임팩트 있게 이야기를 담아 놓잖아요. 그런데 볼 때마다 다른 메시지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장르라고 생각했죠. 지금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서 소설과 그림책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면, 저는 그림책을 택할 것 같아요.

 

작가 입장에서는 ‘연소자 관람가’ 작품을 만드는 게 어려울 것 같아요. 짧고 쉽게 써야 하잖아요.


어렵죠. 그래서 저와 작업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1~2년에 걸쳐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거예요. 짧은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요. 가장 쉽게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운 거거든요. 어렵게 포장돼 있는데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거나 잘못 만들어진 책도 많다고 생각해요. 그 책들을 조금 더 쉽게 만들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의 정성과 노력,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수고가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정말 두꺼운데도 술술 읽히고 재밌는 책들이 많지 않거든요. 그건 시간의 문제와 애정의 문제와 돈의 문제 등 모든 것들이 얽혀 있는 거예요. 그걸 더 압축시켜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림책으로 만드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공들이고 애쓰면서 만들고 있고요. 이렇게 만든 그림책들이 독자들에 의해서 선택 받고 사랑 받아서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될 거라고 믿어요. 세상을 바꾸는 데에도 기여할 거라고 믿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게 행복하고 즐거운 거죠.

 

그림책 서점 ‘프레드릭’의 대표이기도 하시잖아요. 서점의 이름은 동명의 책 제목에서 따오신 거죠?


그렇죠.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서 가장 쉽고도 분명하게, 아름답게 완성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림책이 무슨 예술이냐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제가 하고 있는 그림책 예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의미가 있다고 느껴요. 그림책이라는 예술을 상징하는 게 바로 예술가 쥐 프레드릭이 아닌가 생각해서 같은 이름을 짓게 됐고요.

 

‘프레드릭’에서는 다양한 활동들이 이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이루리와 함께 그림책 여행’이에요. 그림책이 예술작품이고 행복을 전해준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이번 달에 다섯 번째 여행을 하고요. 그리고 저는 이 공간을 그림책과 관련된 사람들이 함께 썼으면 좋겠어요. 곧 서점 한 쪽을 갤러리 공간으로 바꾸려고 하는데요. 리모델링이 끝나면 정기적으로 원화 갤러리로써의 역할도 진행하려고 해요. 그림책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행사도 하고 그림책의 즐거움도 나누는 문화공간으로 활용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구든 그림책의 행복을 전하기 위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같이 협력하고 기꺼이 공간을 내어드릴 의사가 있습니다.


네 달걀은 완숙이야, 반숙이야?


『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에서 “책을 읽어주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과 아빠가 읽어주는 그림책 사이에 다른 점이 있을까요?


아뇨, 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엄마 아빠가 다 책을 싫어하면 안 읽어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책은 즐거움의 대상인데, 엄마 아빠가 책을 너무 싫어하고 읽기 괴로우면 안 읽어주는 편이 나아요.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 읽어주면 책이 고통을 전해주거든요. 모든 행복은 그 행복의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이 전해주는 거죠. 너무 재밌고 감동적인 책을 봤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이야기해주게 되잖아요. ‘이 책 봤어? 너무 좋아, 꼭 봐야 돼’ 하고요『아빠와 함께 그림책 여행』은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제가 견딜 수 없어서, 이 책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면서 쓴 책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저한테는 책 읽어주는 아빠가 없었죠.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아빠가 있었어요.

 

아버님께서 책읽기를 막으신 이유가 있었나요?


저희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셨어요.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교육, 학교 공부가 중요한 교육을 받으셨죠. 학교 공부를 하지 못한 데 대한 한을 가지신 분이었고요. 그래서 만화책을 보면 만화책 보지 말라고 하시고, 소설책 보면 소설책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그 가치를 모르시기 때문에 그러셨다고 생각해요. 만화책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소설책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죠. 그런데 저는 아버지가 보지 말라는 소설책을 보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어요. 우리 아버지가 저런 시대적인 상처를 가지고 있구나, 그래서 작은 세계를 갖고 있구나,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생각했던 거죠.

 

그림책을 읽어 주는 아빠는 없으셨지만, 대신 큰 형이 책을 읽어주셨더라고요. 그때의 경험이 작가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나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만화방에 갔다가 아버지한테 혼난 적이 있었어요. 그 경험 때문에 책 읽기가 몇 년이 늦어졌는데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작은 형이 사고로 죽었고, 그 뒤로 큰 형이 많이 심심했던 것 같아요. 작은 형이 가기 전에는 저한테 그렇게 신경을 많이 안 썼던 것 같은데, 둘 있던 동생이 하나가 되니까 그런 부분도 있겠죠. 형이 책을 읽어준 건, 아마 처음에는 자기가 읽어야 되는데 읽기 싫으니까 저한테 읽어준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어쨌든 『무기여 잘 있거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줬어요. 그 과정을 통해서 ‘어? 소설책 재밌네?’라는 걸 알게 됐고요. 저한테 책의 즐거움을 알려준 사람이 형인 거죠.

 

독자들이 『삶은 달걀』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저는 그런 바람이 전혀 없습니다. 이 책은 독자들이 마음대로 보시고 마음대로 상상하셨으면 좋겠어요. 다만 이 책 때문에 더 행복하고 즐거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작가로서의 자유를 다 누렸고요. 나명남 작가님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작가로서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셨을 거예요. 이제 독자들이 책 속에서 재미와, 마음껏 해석하는 자유와, 마음대로 발견하는 자유를 누리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책의 행복이 전해지고 나누어지면 좋겠어요.

 

책 속에서 곰이 물어요. “근데 네 달걀은 완숙이야, 반숙이야?”라고요. 작가님의 달걀은 어떤 것 같으세요?


저는 반숙도 아닌 것 같은데요? 아직 많이 미숙한 것 같아요(웃음).

 

아직 삶아지고 있는 과정인가요(웃음)?


네. 완숙되면 죽는 거 아닌가요?

 

삶의 완성이라는 게 그런 것일 지도 모르겠네요.


완성은 죽음이고, 죽음은 또 새로운 탄생이고, 그렇지 않을까요?

 

 



 

 

삶은 달걀이루리 글/나명남 그림 | 북극곰
곰은 밤새도록 생각을 하지요. ‘삶은 달걀’에 대해서요. 뜨거우니까 껍데기를 조심해서 까야 하고, 소금에 찍어 먹어야 더 맛있어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이현 “부담 없고 기쁘고 후련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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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이현에게 ‘도시기록자’라는 수식어를 덧붙이는 건 너무 게으른 표현이 아닐까. 하지만 정이현만큼 도시와 도시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양태를 성실하게 기록하는 소설가도 드물다. 여전히, 10년 만에 만나는 산문집『우리가 녹는 온도』에서도 서로 다른 온도 안에서 도시와 도시 안의 사람들을 그려낸다. 차가운 커피와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남자와 여자(「커피 두 잔」), 제주로 여행을 떠난 ‘하영’이 ‘동희’를 만나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일(「안과 밖」), 허리디스크 증상으로 재활센터에 간 ‘해미’가 본 눈(「눈 사람」) 등 어느 날 마주칠 법한 이야기들이다. 소설인 듯 에세이인 듯 흘러가는 이야기 10편 중 어떤 편이 독자들의 마음을 녹일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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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으로 본 에세이


『상냥한 폭력의 시대』이후 소설로는 1년, 산문집으로는 10년 만이에요.

 

그동안 산문을 안 썼던 건 아니에요. 보통 칼럼 제안을 받거나 여기저기 상황이 되면 써 왔는데, 단발적으로 쓰는 것과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일은 다른 일이더라고요. 여기저기 조금씩 쓴 글을 모아서 종합적으로 묶어 내는 산문집은 구태여 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출판사에서 처음 제안을 받은 게 5년은 넘은 것 같아요.


5년이면, 꽤 긴 시간이었네요.


처음에는 서울이나 춘천, 제주 등 각 도시와 사랑에 대한 소설과 산문이 섞인 무언가를 만들자는 막연한 계획이었어요. 5년이 지나는 동안 조금씩 스며들 듯 변해온 것 같아요. 어떤 글은 도시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막연하게 서울인가 싶은 글도 있어요. 또, 사랑이라는 게 모호하고 주관적인 정의라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도시에 사는 결혼을 앞둔 여성과 남성의 사랑 같은 걸 생각했는데, 그것만 사랑인 건 아니잖아요. 「화요일의 기린」처럼 반려동물과 키우는 사람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뭐라고 부를 것인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막상 원고를 모아 보니 사랑이라기보다 두 명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어요. 조금씩 사랑의 외연이 확대되면서 주제가 달라진 것 같아요.


이제까지 냈던 책 중에 가장 작은 크기 같아요. 매거진 <컨셉진>에서 찍은 사진도 들어가 있고요.


컨셉진 분들께서 정말 열심히 도와주셨어요. 처음에는 사진 찍는 분에게 연락을 부탁드렸는데, 직접 정리하고 수정도 많이 해주셨죠.


‘그들은,’과 ‘나는,’으로 글의 처음이 나눠서 시작돼요. 소설의 숨은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들은,’과 ‘나는,’이 서로 딱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어요. 예를 들어 『지상의 유일한 방』을 쓰고 ‘나는,’ 부분에 제가 부평 지하상가에 가서 동선을 알기 위해 옷을 사러 다니고 어디서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야기의 뒷면이라기보다, 조금 비켜나서 다르지만 어울리는 느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주 짧은 형태의 이야기가 모였는데요.


어디서부터가 소설이고 어디서부터가 에세이인지 반 가르듯이 나뉘지 않는 이야기예요. 워낙 준비 기간이 오래되다 보니 몇 년 전에는 출판사에서 독자들에게 사연을 받아 그중 몇 분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허락을 받아서 사연을 옮기기도 했어요. 어떤 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제 이야기를 바꾼 내용도 있고요.


이야기를 꽤 많이 들으셨겠어요.


어딘가에서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식, 다른 무게로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이 곁에 있었던 것 같아요. 교정본을 보면서 엽편 부분이 3인칭으로 본 에세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에세이라고 해서 장르 형식이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세상에 한 권쯤은 소설인 듯 아닌 듯 엉뚱한 방식의 에세이도 한 권쯤 있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소한 커피의 온도


작가님이 생각하는 ‘녹는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커피 두 잔』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온도의 커피를 마시잖아요. 저는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 녹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추운 날씨에도 차가운 얼음을 넣은 커피를 마셔야 녹는 사람이 있고요. 사람마다 온도라는 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가운 아이스크림이나 눈사람이 녹아 없어진다는 구체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녹는다는 건 은유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 눈사람이 녹아서 없어지는 상상, 하지만 그 자리에 눈사람의 흔적과 기억은 남아있다는 걸 기억하셔도 좋고요.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관계 안에서 녹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럴 수도 있어요. 여러 가지 의미가 ‘녹는다’에 들어 있고, 녹는다는 게 무엇인지 물으면 백이면 백 녹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한 감각이 다를 거예요.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시면 돼요.


작가님만의 온도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나면 어느 부분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이 끝나고 녹게 되나요?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한 성격 같진 않아요. 어색한 걸 못 견뎌서 그냥 풀어야 해요. 반면 아주 뜨거운 관계는 또 못 가져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 같아요. 처음에는 그게 콤플렉스였거든요. 왜 이렇게 밀착된 관계를 못 견딜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사람마다 체온도 다르고 온도가 다 다른데 겉의 온도가 차가워 보인다고 해서 속마음도 같으리라는 당연함은 없으니까요. 나름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걸 늦게 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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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후련한 느낌의 책


에세이는 소설보다 작가의 감정이나 콤플렉스가 더 많이 드러나요.


사실 글에서 저 자신이 많이 드러나는 걸 힘들어해요. 글쓴이가 맨 앞에 나오는 그런 글을 읽는 것도 힘들어하고요. 에세이의 작가도 분명 화자고, 에세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인이 아니라 화자의 화법으로 쓰인 글이라고 생각해서 날 것으로 드러내려고 하진 않았어요. 거의 마지막에 쓰인 산문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마 박쥐에 대하여」였는데, 그 글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글 같아요.


『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마 박쥐에 대하여』에서는 ‘소설 쓰는 일이 두렵다고, 점점 더 두려워진다’고 고백하셨는데요.


저를 잘 모르는 사람은 제가 되게 안정적인 사람으로 보인다고 하는데, 이유 없이 불안할 때가 많아요. 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가 안 와요, 그럼 어느 순간에 불안해져서 열 번씩 전화하고 인터넷으로 버스 사고 검색하는 사람이거든요.


<채널예스>에 작가님 이름을 검색하면 관련 기사로 여덟 페이지가 나와요. 책은 열한 권째 냈고요. 그래도 쓰는 일이 두렵나요?


쓴 기간과 상관 없이 누구나 그럴 것 같아요. 30년 쓴 작가도 완전 백지에서 시작하잖아요. 아무리 선생님이셔도 단편 원고 하나도 못했다면 불쌍하고, 그래서 평등해요. 아무리 오래 써도 같이 시작한다는 게 좋고, 또 힘들고요. 그런 힘든 매력 때문에 쓰는 것 같아요.


단편을 쓰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고 몇 번 말씀하셨는데요.


2009년에 장편 『너는 모른다』를 일일 연재로 쓰고 잠깐 육아하다가 바로 알랭 드 보통과 『사랑의 기초』 연작을 썼죠. 끝나고 계간지에 『안녕 내 모든 것』을 연재했었고요. 장편에만 몰입해 있던 시기라 단편에 대한 감을 놓치고 청탁을 받아도 못 쓸 것 같은 시간이 길었어요. 장편을 쓰고 있었으니 일을 안 한 건 아닌데, 저는 단편을 좋아하고 단편을 쓸 때 문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촌스러운 사람이라서요.


산문집 『우리가 녹는 온도』를 쓰면서 기존과 다른 점이 있었나요?


착점 자체가 아예 다르게 뽑힌 이야기들 같아요. 작가로서는 단편을 쓰려면 문학적으로 힘을 줘야 할 것 같고, 문학적으로 힘을 주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도 해보면서 힘들게 쓰거든요. 소설이 안 되어서 짧아진 게 아니라, 기존의 단편소설보다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보자는 마음으로 접근한 것 같아요. 만약 주제가 엽편으로 풀리지 않고 정식으로 각을 잡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단편이나 중편, 다른 방식으로 풀릴 수 있을 테고요.


단편소설보다는 어깨에 힘이 빠진 느낌이에요.


훨씬 후련하죠. 훨씬 재미있었고요. 단편은 재미의 종류가 다른데요, 저는 단편에서 변태적인 재미를 느끼거든요. 너무 힘들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천 번씩 읽으면서 고치고 그 안에 단 하나의 오점도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쓰는데, 그것보다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썼어요. 20매니까 아니면 다시 쓰지 하는 마음으로요.


『상냥한 폭력의 도시』를 읽으면서 힘들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식의 여운이 남길 바랐어요. 오늘 누군가 새 책 낸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서 열한 번째 책인데 이렇게 부담 없고 기쁘고 후련한 느낌의 책은 처음이라고 그랬어요. 작고 예쁜 책인데 공이 많이 들어갔어요. 책을 만들었던 사람 모두 연말연시에 선물처럼 독자들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우리가 녹는 온도』도 전작과 비슷한 도시의 생활을 그리는데, 이상하게 즐거웠어요. ‘나는,’으로 시작하는 에세이 부분이 더 희망적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정말요? 다행이에요. 제가 소설 속 인물보다는 더 따뜻한가 봐요. (웃음)


늘 ‘동시대인의 보폭으로 걷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여전하신 거죠?


등단 수상 소감을 쓸 때도 그런 말을 썼던 것 같아요. 항상 동시대인을 그리겠다는 게 유일하게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이에요. 제가 SF를 쓰든 조선시대 이야기를 쓰든, 현재와 그 세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거든요.


소설가분들은 다 비슷한 마음일 것 같아요.

 

달라진 게 있다면 기존에는 우리를 이렇게 만들게 하는 구조나 사회, 시대는 뭘까 이런 걸 더 궁금해했던 것 같아요. 초기작을 보면 사회학자도 아니면서 그걸 밝히고 싶었다는 게 보이는데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것도 궁금하지만 그건 또 다른 분의 몫이 아닐까 생각이 들면서 그 시대를 같이 걷는 저 자신, 제 뒷모습은 어떨까 하고 자연스럽게 관심이 변하더라고요.


독자들이 이번 책을 어떻게 읽어줬으면 하나요?


소소하고 작지만 반짝이는 뭔가를 하나씩 심어놓는 마음으로 썼어요. 그래서 반짝이는 게 무엇인지는 다 다르지만 나는 어디서 녹는 사람인가 질문을 던지고 반짝이는 걸 하나씩 찾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녹는 온도정이현 저 | 달
꽝꽝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도 아주 미세한 온기에 흐물흐물 녹아내리기도 하고, 작디작은 균열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와장창 허물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선아 “자신한테 너무 집중하면 안 행복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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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꼭 책으로 남아야 될까’ 의문을 품었던 작가는 자신의 책이 ‘하나의 아름다운 물건’, ‘재밌는 물건’으로 완성되기를 바랐다. 『어떤 이름에게』는 그 결과물이다. 서간집과 사진엽서집,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한 장의 겉표지에 감싸여 있다. 마치 선물의 포장지처럼, 스르륵 풀어지는 겉표지의 뒷면에는 손편지가 쓰여있다. ‘아빠에게’로 시작되어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로 끝을 맺는, 박선아 작가가 직접 쓴 손편지다.

 

다른 이의 편지를 훔쳐보는 은밀한 행위는 『어떤 이름에게』를 읽는 내내 이어진다. 작가는 베를린에서, 바르셀로나, 파리에서, 많은 이들을 향해 편지를 띄웠다. 그 대상은 때로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직장 동료였다. 그러나 수신인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까닭에, 독자들은 그 위로 자신의 이야기를 겹쳐본다. 작가가 바라보는 풍경과 경험한 사건, 당시에 떠올렸던 사람들이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에게도 비슷한 누군가와 비슷한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프리랜서 에디터이자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는 작가 박선아는 <나일론> 매거진의 피처 어시스턴트를 거쳐 <어라운드>와 ‘안그라픽스’의 에디터로 일했다. <어라운드>에서 힐링을 주제로 3년간 연재했던 글은 수필집 『20킬로그램의 삶』으로 출간됐다. 소박한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사진과 ‘작은 집에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으로 살기를 꿈꾼다’는 담백한 감성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어떤 이름에게』가 전하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 작가의 친구들은 말했다. “『20킬로그램의 삶』은 그냥 너 자신이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어떤 이름에게』는 더 너 같다”고. 자신과 꼭 닮은 두 번째 책으로 찾아온 박선아 작가를  ‘사적인서점’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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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선물처럼 느껴지길 바랐어요

 

표지부터 구성까지, 독특한 책이에요. 작가님의 아이디어인가요?

 

네, 2년 전에 퇴사를 앞두고 있을 때 음악 공연을 보다가 이런 책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여행을 가서 편지를 쓰고 그걸 책으로 엮어야겠다고요. 그래서 휴대폰에 메모해 놓고 있다가, 작년에 3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실제로 해본 거죠. 그것만을 위해서 간 여행은 아니었지만, 엽서를 써서 부치기도 했고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안그라픽스에서 일하게 되면서, 신간 계획할 때 이 책의 기획안을 제출했어요.

 

음악 공연을 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셨다고요. 이유가 있었나요?


잘 모르겠는데... 그 음악가 분이 제 첫 인터뷰이였어요. 스반홀름이라는 도시에 가셨을 때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셨었는데, 마침 공연에서 그 노래를 부르시더라고요. 그때 ‘스반홀름에 여행을 가서 이 분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다른 인터뷰이도 생각났는데, 그 분은 벨기에의 어느 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셨었어요. 그 분한테도 편지를 써볼까 생각하다가, 편지를 책으로 엮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공연에서 들었던 노래처럼 제가 쓸 편지들도 누군가한테 말하는 형식이 될 거니까요. 그런데 막상 여행을 가니까, 인터뷰이 분들께 쓸 말이 없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게 됐죠.

 

베를린, 파리, 바르셀로나를 여행하셨어요. 목적지를 고른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이전까지는 가고 싶은 도시들을 갔었는데요. 이 여행은 친구들을 만나러 간 거였어요. 베를린과 바르셀로나에 친구가 살고 있어서 만나러 갔었고요. 파리는, 거기로 휴가를 오는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서 갔었어요.

 

표지에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가 적혀 있어요. 손글씨로 쓰신 거죠?


네, 제가 쓴 거예요. 겉표지가 약간 포장지처럼 느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안에 담긴 책이 선물, 겉표지가 포장지, 그런 느낌이 되면 좋을 것 같았어요. 표지에 제목을 넣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고요. 또 뒷면이 여백으로 남아있는 것보다 손편지를 넣으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책 속의 편지 중에서 하나를 고른 건데요. 이 글은 지난 여름에 제가 좋아하는 친구한테 보내줬었어요. 제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를 담아서 보냈었죠. 원래 아빠한테 쓴 건데 바꿔서 보내도 말이 되더라고요(웃음). 그 친구한테 책을 선물할 때 이 편지가 안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겉표지에도 실었어요.

 

아버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빠는 영문을 모르시고, 그냥 아빠한테 편지 썼다고 좋아하셨어요(웃음).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이 편지가 실린 꼭지의 제목이 「기다림에 대하여」인데요. 기다림과 이 책의 성격이 참 잘 맞는 것 같아요.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건 기다림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또 책에 실린 사진이 다 필름 카메라로 촬영된 건데, 그것도 기다림이 필요한 작업이고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정작 저는 여름부터 지금까지 잘 기다리지 못했어요. 진짜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 편지는 작년 가을에 쓴 건데, 올 가을에는 또 다른 기다림을 배운 것 같아요.

 

어떤 기다림인가요?


사랑의 기다림.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거죠.

 

그 기다림이 즐거우세요? 괴롭지는 않으세요?


즐거울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는 것 같아요.

 

편지의 수신인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요. 편지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이야기인 줄 알던가요?


네, 신기하게 알더라고요. 친구들은 목차만 보고도 찾았다고 하고요(웃음). 그룹 채팅 창에서 서로의 편지를 맞추기도 해요. 그렇게 아는 척을 하는 친구들도 있고, 넌지시 돌려 말하는 친구도 있어요. 대놓고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는 친구도 있고요. 다들 찾더라고요.

 

친구 분들이 정말 기뻐했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책도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친밀하기는 했지만, 그들한테만 쓴 글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이번 책은 더 가깝게 느끼더라고요. 제가 에필로그에 가족들끼리 주고받는 ‘손 사인’에 대해서 썼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 엄마가 ‘오랜만에 손 꾹꾹 한 번 할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 자연스럽게 해야지.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하는 거 아니잖아’라고 했는데 ‘왜, 책에 썼던데?’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같이 여행을 가게 됐어요. 어린 시절부터 만나온 친구들은 서먹해진 게 사실이거든요. 살면서 모이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1월에 여행 날짜를 잡았어요. 친구들이 이 책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데, 서로 말은 안 해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은 한 친구가 사진을 보내줬어요. 그 친구가 책을 진짜 안 읽거든요(웃음). 그런데 제 책 들고 나왔다고 사진을 찍어서 보냈더라고요. 중고서점에 제 책을 팔러 간대요(웃음).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해 주는 게 재밌어요.

 

애정을 담아 찍을 땐 ‘필름 카메라’

 

일부 편지는 여행지에서 부치셨어요?


처음의 생각은, 실제로 보낸 엽서를 스캔해서 책으로 만드는 거였어요. 그런데 한 달쯤 됐을 때 보니까, 초반에 부친 편지들 중에 도착하지 않은 것들이 많더라고요. 아직까지 못 받은 친구들도 많아요. 그리고 실제로 쓴 편지랑 원고용으로 쓰는 거랑 내용이 약간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에 마음을 바꿨죠. 부칠 편지는 부치고, 책에 실을 편지는 따로 쓰자고요.

 

「병에 담긴 편지」가 떠오르네요.

 

실제로 그 편지의 주인공에게 보낸 편지가 두 통이나 실종됐어요.

 

편지의 운명인가 봐요(웃음). ‘병에 담긴 편지’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수신인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게요. 그 편지도 어딘가에 있겠죠.

 

『20킬로그램의 삶』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읽는다고 의식하는 순간, 끔찍한 기분이 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도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유는 뭔가요?


그러게요. 『20킬로그램의 삶』은 그렇게까지 멀리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작한 일이었어요. 그냥 잡지에 매달 하나씩 썼던 기사를 묶은 거라서 별 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피드백 받을 일도 많지 않았고, 그래서 의식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조금 고민이 되기는 해요. 제 이야기를 하는 게 저 자신이나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를 파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요. 나를 소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까지 생각 안 해도 되는 일인 것 같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어라운드>에서 힐링을 주제로 글을 쓰실 때, 공항 이야기를 하셨어요. 요즘도 가끔 공항에 가세요?


네, 여름에 갔다 왔어요.

 

“공항에 오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적어서 찢은 후 꼬깃꼬깃 접어 공항 휴지통에 버리고 가는 습관”이 있으시다고요. 이번 여름에는 어떤 걸 적으셨나요? 짝사랑하는 그 분(웃음)?


그 친구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썼는데요(웃음). 버리고 온다는 게 깜빡하고 주머니에 넣고 온 거예요. 그래서 굉장히 찝찝했어요. 며칠 후에 그 친구한테 ‘너 자꾸 이러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명단에 적을 거야’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미 적었었어요(웃음).

 

지금까지 적으신 건 어떤 것들이었나요?


기사 쓸 때 적었던 것들도 있는데요. 부모님은 거의 항상 적었던 것 같아요. 그때그때 다르기는 한데, 지난 여름에는 밤을 적었던 것 같아요. 이번 여름밤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부모님을 적으셨던 이유는 뭐예요?


항상 슬픈 것 같아요, 생각하면.

 

여행 가실 때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를 같이 가지고 가시잖아요. 이번 책에는 필름 카메라로 찍으신 사진만 실으셨어요. 이유가 있나요?


디카로 찍는 사진들은 취재용일 때가 많아요. 여행을 갔을 때 청탁이 들어올 때가 있어서 디카를 가지고 가기는 하는데요. 디카로 찍은 사진을 쓸 때는 잡지 기사 때문일 때가 많고요. 애정을 담아 찍는 사진은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 같아요.

 

디지털로 찍은 사진과 필름으로 찍은 사진이 서로 다른 맛이 있나요?


네, 완전히 다른 것 같아요. 일단 바로 볼 수 없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고요. 디카나 아이폰 카메라로 찍었을 때는 깔끔하고 쨍한 느낌이 있죠. 디카를 가지고 필름 느낌을 낼 수 있는 필터가 계속 나오기는 하는데, 아무리 해도 똑같이 안 나오더라고요. 신기해요.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의 차이도 있을까요? 서간집에는 흑백, 엽서집에는 컬러 사진이 실려 있잖아요.


서간집에서는 글의 언어로 전달하고 싶었고요. 사진집 형태인 엽서집에서는 사진의 언어를 그대로 쓰고 싶었어요. 원래 흑백 필름이 더 비싸거든요. 인화도 비싸고. 그래서 흑백 필름으로 찍지 않고, 컬러로 찍은 걸 흑백으로 전환했어요. 사진을 조금 단순화시켰으면 했어요. 글에 집중될 수 있게. 서간집은 글이 주인공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엽서집은 사진이 주인공이라서, 시선이 조금 더 사진에 갔으면 했어요. 그리고 제가 흑백 사진에 많이 빠져 있기도 해요.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바꿔서 보정하는 과정도 굉장히 재밌었어요.

 

흑백 사진만의 맛이 있죠? 필름 카메라의 맛과 비슷하다고 해야 될까요.


흑백 필름으로 찍어서 인화했을 때도 좋기는 한데요. 컬러 사진을 흑백으로 전환해서 보정하는 작업도 좋아요. 제가 본 것들은 분명 컬러였는데, 그게 흑과 백으로 다시 보이는 게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이 책을 만들면서 그런 작업을 좋아하게 됐고, 그래서 다음 달부터는 흑백 인화와 현상 수업도 들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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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근육’을 씁니다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아날로그적인 인간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요즘에는 기계 만지려고 하면 귀찮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뭘 배우는 것도 어렵고요. 그렇다고 기계를 싫어하지는 않아요. 익숙해지면 괜찮은데 새로운 걸 배우는 과정이 귀찮은 거죠. 아이폰도 익숙해지기까지 그랬고, 텔레뱅킹 같은 것도 그래요(웃음). 그렇다고 아날로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할 수 있으면 기계를 쓰죠.

 

『어떤 이름에게』에는 직접 써서 부치는 편지,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 담겨 있잖아요. 그래서 ‘아날로그적인 걸 지향하시는 분인가?’ 싶기도 했어요.


그런 것들이 전달해 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받았을 때의 느낌보다, 상대방한테 갔을 때의 느낌 있잖아요. 쪽지를 쓰더라도 메신저로 보내는 거랑 손으로 써서 보내는 거랑 다른데, 그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 제 삶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웃음). 책에 실린 편지도 아이폰 메모장에 있던 거니까요(웃음).

 

올해 책이 두 권이나 나왔어요. 의미가 남다른 해였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까 두 권이나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올해 쓴 것들은 없거든요. 『20킬로그램의 삶』은 3년 동안 찬찬히 썼던 것들을 모은 거고, 이번 책도 작년에 써 놓은 걸 정리하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책 때문에 바쁜 건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프리랜서로 받은 새로운 일들 때문에 조금 바쁘거나 아예 한가했던 것 같아요. 책이 나온 건... 그냥 신기했던 것 같아요. ‘누가 사 읽지?’ 싶었는데 첫 번째 책이 4쇄까지 찍었었거든요. 2쇄를 찍으면 괜찮은 거겠다 싶었는데 4쇄 찍은 걸 보고 ‘신기하네’ 했었어요. 이번 책도 ‘사람들이 사서 읽는다는 게 정말 신기하다’, 그런 정도의 느낌인 것 같아요.

 

『20킬로그램의 삶』도 표지가 독특했어요.


표지에 엄마아빠 사진을 넣고 싶다고 고집했었어요. 그 사진을 앨범에서 봤는데 너무 좋았거든요. 그래서 그걸로 꼭 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디자인은 <어라운드>의 편집장님이 해주셨는데, 처음에는 이번 책처럼 사진을 꽉 채워서 넣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편집장님이 사진을 떼어서 디자인 해주셨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뒤에 여백이 생겼고, 사람들에게 공간을 줄 수 있도록 의미를 넣다 보니까 그렇게 나왔어요.

 

왜 부모님 사진을 표지에 싣고 싶으셨어요?


모르겠어요. 그냥 그 사진이 좋았어요. 그 좋은 느낌이 다 전달이 될 것 같았고요. 또 부모님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밌을 것 같기도 했어요.

 

아트 디렉터로서 시각적인 작업을 많이 하시는데요. 대학에서는 문헌정보학을 전공하셨더라고요. 방향을 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전공을 잘못 선택했던 것 같아요. 고3 때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거기 나오는 도서관 관장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어릴 때부터 도서관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막연하게 꿈을 꿨던 거죠. 도서관에 가면 다 읽을 수 있으니까 그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진도 찍고 블로그에 일기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가서 배워보니까 전혀 다른 공부였어요. 미술관 아카이빙이나 큐레이팅에도 관심이 있어서 인턴도 해봤는데, 제 성향이랑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전공을 버리고 가고 싶은 쪽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는데요. 막상 가보니까 쓸모가 있더라고요. 다 정보가 필요한 일들이고, 책이랑 연관이 있었어요.

 

주로 매거진과 협업하시나요?


매체에서는 거의 에디터로 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매체에서는 거의 디자이너들이 아트 디렉팅을 총괄하는 경우가 많고요. 제가 디렉팅을 하는 경우는 브랜드 광고 이미지 촬영을 할 때, 아니면 뮤직비디오나 영상을 만드는 친구들이 작업할 때예요. 약간 PD로써의 아트 디렉터라고 할 수 있죠. 제가 하는 일은 대행사랑 조율하고 전체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조정하는 거예요.

 

아트 디렉터로의 감각은 어떻게 배우셨어요?


굉장히 오래 전부터 이어진 것 같아요. 저는 ‘눈의 근육’이라고 말하는데요. 잡지사에서 일할 때 후배들을 보면, 자신이 본 시각적인 것들을 못 믿는 경우가 있었어요. 자신 없어 하거나. 그런데 계속해서 보면 볼수록 쌓이고 쌓이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뭔가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고요. 천부적인 것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발레도 그렇잖아요. 자신이 천재라 하더라도 어느 단계까지는 연습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가능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눈도 똑같은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영화를 봐도 장면으로 끊어서 봤어요. 캡쳐해서요. 스토리를 떠나서 빛이나 장면 같은 걸 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 식으로 쌓아둔 것들을 계속 쓰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소진되고, 또 다시 봐야 되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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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너무 집중하면 안 행복한 것 같아요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니는 일이 유행인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어. 신발장에서 구두를 고르듯이 책장에서 책을 고르는 거야”라고 쓰셨어요. 오늘은 어떤 책이 어울릴 것 같나요?


오늘 같은 날은 안 될 것 같아요. 너무 추워서(웃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친구가 사진을 찍어서 보냈어요. 책을 들고 찍은 사진인데, 장갑도 안 꼈더라고요. 다행히 주차장인 것 같아서 ‘차 타고 가는 거지?’라고 물어봤어요. 그리고 이렇게 추운 날씨에 장갑도 안 끼고 책 들고 나오지 말라고 말했죠. 겨울에는 책을 들고 다니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요(웃음).

 

다른 계절은 어떨까요(웃음)?


그런 건 있어요.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한데요. 옷이 무거울 때는 작은 문고판이 좋을 것 같아요. 겨울에는 코트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책이 좋더라고요. 봄이나 여름에는 옷이 가벼우니까 양장으로 무거운 책을 들어도 좋은 것 같고요. 또 어느 거리의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 같아요.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날에는 시집 같은 책이 좋은 것 같고, 짬이 많이 나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을 때는 소설도 좋은 것 같아요.

 

책을 선택하실 때 표지 디자인을 많이 보시나요?


절대적인 건 아닌데요. 조금 그런 것 같아요. 요새는 책들이 다 너무 예쁜데, 오래된 문학작품이나 진짜 좋은 작가의 책인데 표지가 안 예쁜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냥 읽어요(웃음). 오래 되어서 예쁜 책들도 있으니까요. 최근에는 처음으로 연애 심리학 책을 읽었는데, 그건 들고 다니면서 읽기는 창피하더라고요(웃음). 한 번은 독일 소설을 읽었는데 그것도 표지가 안 예뻐서 책싸개로 감쌌어요. 이왕이면 아름다운 게 좋지만, 표지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 것 같아요.

 

책 속에 인상적인 구절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 중 하나는 이거였어요. “자신을 사랑하고,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겁지”라는 문장이요. 작가님은 ‘어떻게 해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지’ 알고 계신가요?


요새는 사실 안 행복한데요. 자신한테 너무 집중하면 안 행복한 것 같아요. 외롭거나 힘들 때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친구들이 아니라, 그냥 길 가는 사람들처럼 모르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거예요. 나 아닌 다른 것들에게 눈을 돌리면서 나를 잊게 될 때, 그때 뭔가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편지나 선물 같은 걸 전달할 수 있을 때, 행복한 마음이 들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것이 행복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체로 그런 과정에서 무언가가 오지 않나 싶어요. 나를 잊어버리는 과정을 거쳐서 편안한 상태가 됐을 때, 그 편안한 마음으로 누군가한테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을 때, 그 사이 어디에 행복이라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의 엽서집은 뜯어서 쓸 수 있게 되어 있는데요.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들어요.


엽서집 안에 흐름이 있어서 사진집의 형태로 보관해도 좋을 것 같아요. 진짜 뜯어서 편지를 써도 좋고요. 인테리어 소품으로 써도 좋아요. 액자에 끼워서 담아놓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고 받은 기억이 까마득한데요. 『어떤 이름에게』가 나비 효과를 일으키면 좋겠어요. 책 속의 엽서를 활용해서 누군가에게 손편지를 보내보는 거죠. 


『20킬로그램의 삶』원고를 쓸 때 동료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제 글을 읽고 주말에 공항을 다녀왔는데 좋았다고요. 그때의 기쁨이 책을 처음 쓸 때의 가장 순수한 마음이었어요. 이번 책도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편지를 쓰면서 기쁨을 찾았다고 말한 거거든요. 그걸 읽은 누군가가 편지를 쓴다면, 만약에 올 겨울에 유독 많은 편지가 오고 갔다면, 거기에 이 책의 영향도 있었다면 좋은 일 아닐까 싶어요. 재밌는 일이 될 것 같아요.

 

 



 

 

어떤 이름에게박선아 저 | 안그라픽스
그저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했던 따뜻한 순간들로 이동해 그것들을 어루만진다. 그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수철 “나는 지나간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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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한 방송을 통해 등장했으니 '작은 거인'의 음악이력도 어느덧 40년의 장구한 세월을 쌓았다. 김수철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40년 개인사를 '온리(Only) 자존심'으로 축약해 정리했다. 한창 때 빅 히트한 '못다 핀 꽃 한 송이'나 '내일' 같은 가요를 써서 스타가수로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미련하게도' 주류의 환대를 거부하고 돈 안 되는 국악의 길, 청년 시절의 포부였던 그 고난의 길로 내달려간 인물이다. '불림소리' '기타산조' '국악가요' 그리고 1993년의 대박 영화음악 < 서편제 >는 우리 기억 속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

 

40주년을 맞아 펴낸 다큐 자서전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이야기』 출간에 맞춰 이즘과 만난 그는 '40년을 그냥 넘길 수는 없어서..'라며 출간 이유를 전했다. 인터뷰에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구촌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고, 또 우리만의 혼과 숨결로 이뤄진 음악을 꼭 쓰겠다는 야망으로 지금도 정열을 불태우고 있음을 수차례 강조했다. 서양음악에 포위되어 고유의 문화가 척박한 실정이지만 '나라도 우리의 것을 세계에 알리자'는 게 꿈이자 자존심이며 그것 하나로 버틴다고도 했다. 진지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재미있게 자리를 이끌어 가만히 듣기 힘들 정도로 웃음꽃이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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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에서 김수철씨 책이 화제다. 책이라니 좀 갑작스럽다.


원래 떠벌리고 다니는 거 싫어한다.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나오지 않은 작업에 대해 미리 얘기하지 않는다. 정직한 게 최고다.

 

거의 모든 언론이 소개하고 있다.

 

40년의 세월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책을 썼는데 의외의 반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젊은 그대'나 '못다 핀 꽃 한 송이처럼' 제 작업 결과물을 좋아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1977년 첫 방송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꼭 40주년이다. 공연은 30주년에 한 번, 그 이후로 안 했다. 그렇다고 이번 40주년을 그냥 지나가자니 아쉬워서 좀 다른 걸 해보자 싶었다. 책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실은 전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곤 했다. 다들 내 나이 즈음엔 근황도 알릴 겸 책을 낸다며 꼬시더라. (웃음) 처음엔 계속 거절했다. 일단 글은 말과 달리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중 어느날, 오랜 지인인 까치 대표와의 만남중에 '책 낼래?' '아, 네. 그래요.' 이런 식으로 거침없이 진행됐다. 외골수에 잔재주 안부리고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흥행과 상관없이 한 길만 평생 걷는 내 스타일과 맞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가. 인간 김수철? 아니면 김수철의 음악세계?


구체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기보다는 나의 행적을 보여주고자 했다, 나야, 음악행적밖에 더 있겠나. 일종의 보고서 형식으로 썼다. (이 대목에서 대필 아니냐고 물었더니 온전히 내가 썼다고 답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제가 국악도 했고, 강의도 많이 했다. 1992년, 학전 소극장에서 < 김수철의 음악 이야기 >라는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열흘 동안 총 22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토크 콘서트라는 말이 없었으니 내가 효시 아닐까 한다. (웃음) 한 강의 당 게스트 한 명을 섭외해서 진행했다. 안성기, 배창호감독, 한영애 등등. 전회 매진이었다. 2010년 서울대학교 법대교수 대상으로 강의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대중 상대가 아닌 사회를 이끌어가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우리의 문화와 대중음악의 흐름을 알리고 싶었다. 다섯 번 기립박수를 받았다. 슈만 음악대학교에서 강의한 적도 있었고. 이번 책 출간과 함께 토크콘서트를 할 의향이 있다.

 

직접 다 쓰는데 힘들지는 않았나.


열 달 꼬박 걸렸다. 휴휴∼ 엄청 힘들었다. 이야기 앞, 뒤를 맞추려면 어떤 일이 언제, 몇 시, 어디서 있었는지 세세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자꾸 빠뜨리니까 출판사에서 뭐라고 한다. 오죽하면 1988년 서울 올림픽 전야제 음악을 맡았을 때 회의록까지 다 뒤졌겠나. 내가 자료를 남겨놓았으니 다행이지. 언제는 '그냥 이거 빼요.' 하니까 '이걸 왜 빼요?' 하며 야단치더라. 출판사가 갑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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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음악적 행보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해 알려 달라.


옛날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렸을 때 라디오 켜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평소에 들리지 않던 노래가 갑자기 확 귀에 들어오는 거다. 그러던 차에 흑백 티브이에서 그때는 그룹사운드라고 했는데 여러 밴드들이 나왔다. 가수보다 밴드 전체, 특히 기타에 관심이 가기 시작해서 기타리스트 손가락 모양을 외우고 아버지 없을 때 몰래 통기타를 건드렸다. 그 시절에 통기타 없는 집이 없었다. 장식용이든 뭐든. (웃음) 처음엔 소리가 안 났다. 몇 달 동안 소리가 날 때까지 치고 또 쳤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당시에는 기타교본 같은 것이 없으니 그냥 기타의 어떤 한 음을 내 마음대로 '도'라고 정했다. 거기서부터 음계를 맞춰갔다. 티브이를 보고 외운 것처럼 왼쪽에서 몇 번째 마디, 몇 번째 줄 이렇게 치기도 하고. 일일이 도레미파솔리사도를 쳐 가면서 노래의 다음 음을 찾아갔다. 어느 날 친구들 앞에서 연주했는데 친구들이 막 웃더라.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손을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연주를 하는데 나는 기타 처음부터 끝까지 건드리면서 왔다 갔다 하니까 이걸 신기해 했었다. 그제야 옥타브를 알게 됐다.

 

기타를 독학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통기타로는 한계가 있어서 이후 전자 기타를 잡고 CCR(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비틀스 위주로 연습했다. CCR이 코드는 단순한데 기타 애드립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는 때려치우고 거의 기타만 쳤다. 아버지께서 음악 하는 걸 싫어하셔서 들키지 않으려고 새벽에 이불 속에 들어가서 기타 줄에 종이 껴 놓고 연습했다. 그래서 한석봉 아닌 '김석봉'으로 통했다. (웃음)

 

그럼 청소년기는 오로지 기타로만 보낸 것인가.


고등학교 가서도 기타만 쳤다. 딥 퍼플의 'High way star' 솔로를 치니까 애들이 뒤집어졌다. 동네 여기저기에 내가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이 나니까 한 번은 명동성당에 불려갔다. 명동 성당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문화축제를 하는데 거기 청소년부 애들이 자꾸 신부님한테 나를 불러달라고 했다. 왜 시끄러운 록을 하는 나를 부르나, 싶었고 신부님도 성당과는 맞지 않는다고 하시길래 '그럼 안 할래요' 이랬다. 로커랍시고 반항한 거다. (웃음) 신부님께서 조용한 음악을 원하시길래 처음엔 블루스를 치다가 첫 곡만 조용하게 하고 그 뒤부터 슬슬 시동 걸고 시끄러운 하드록을 했다. 신부님이 깜짝 놀라시더라.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꽝꽝거리면서 소리 지르니까 거기 계신 분들이 다 벌떡 일어섰다. 근데 또 애들은 좋아하지 않겠나… 뭐라고 하실 수도 없는 거다. 한 5곡정도 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다. 무대가 다 끝나고 신부님이 부르시길래 '아, 죽었다.' 싶었는데 다음에 또 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거다. 가만히 못 있고 거기서 또 반항했다. '저희 2회는 안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냥 계속 할걸. (웃음)

 

대학 들어간 직후 1977년에 첫 방송을 탔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대학에 들어가서 퀘스천(Question)이라는 대학생 밴드를 만들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때 기타 좀 친다는 소문이 대학가에도 퍼지고 방송국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KBS TV <젊음의 찬가>에 나와서 연주 좀 해줄 수 없겠느냐고. 여의도까지 갔는데 악기가 전혀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낑낑거리면서 우리가 악기를 다 가져가고 세팅까지 했다. 옛날에는 뮤지션이 모든 악기 옮겼다. 그때 직접 작사, 작곡한 '내일', '야속한 사람아'를 불렀고 닐 영의 'Down by the river'을 버디 마일즈(Buddy Miles) 버전으로 연주도 했다. 이게 데뷔였다.

 

<작은 거인>으로 밴드가 바뀌게 된 이유는.


원래 퀘스천으로 <MBC 대학가요제>에 나갔다가 1차 예선에서 떨어졌다. 당시에는 고고음악이 유행했었는데 나는 기타로 소란스런 헤비메탈을 하니 심사위원들이 바로 나가라고 하더라. 딱 한 음밖에 안 쳤는데…. 며칠 뒤에 친구들이 한 번 더 도전해보자고 <TBC 해변가요제>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대학가요제에서 당한 경험이 있으니 명동성당에서 썼던 방법을 택했다. 도입부를 조용한 블루스로 연주하고 후반에 헤비메탈을 했다. 2차까지는 어떻게 붙었는데 결국 떨어졌고 퀘스천은 그렇게 끝났다. 그 이후 1978년 겨울에 작은 거인이라는 밴드를 만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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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TV에서 본 작은 거인의 연주 '일곱 색깔 무지개'는 잊을 수 없다. 그런 광포한 무대는 전에 보질 못했으니까.


맞다. 그 노래가 1979년 <TBS 대학축제 경연대회>에서 불렀던 곡이다. 해변가요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날 유심히 봤는지, 어느 날 연락이 와서 대학축제 경연대회에 참가하라는 제안을 했다. 대학가요제도 그렇고, 해변가요제에서도 1절까지만 부르고 탈락해서 조금 삐져 있었다. (웃음) 이번에는 2절까지 다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애초에 사전 심사로 진행되고 생방송 기회까지 준다고 하기에 냉큼 나갔다. 거기서 '일곱 색깔 무지개'로 동상을 받았다. 경연대회에서 떨어진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작곡에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동요로 작곡하고 편곡은 록으로! 처음부터 록을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어법으로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맞겠지만 색의 영원성을 담고 싶어 굳이 '색깔'로 한 것이었다. 젊은 층에는 어필했다.

 

1983년에 첫 솔로 음반이 나왔다. 밴드는 완전 해체된 건가.


대학축제 경연대회가 끝나고 나서 1979년 1집이 나왔고, 4학년 때 2집을 녹음했다. 다른 레코드사에서 2집을 내자고 제의가 왔을 때는 멤버가 드럼의 최수일, 나 이렇게 두 명뿐이었다. 베이스 치던 친구는 ROTC 훈련 때문에 빠지고, 건반 치던 친구는 집안에서 반대해서 밴드를 나갔다. 사람이 모자라니 내가 베이스, 기타, 건반… 뭐 다 쳤다. 거의 반 원맨밴드나 마찬가지였다. 1980년에 녹음을 마치고 이듬해 4월 <작은 거인 2>가 나왔다. 사운드도 획기적이어서 일각에서 회자는 많이 됐는데, 살아남은 곡도 없고 망했다. (웃음) 2007년에 경향신문이 뽑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28위를 하기도 했다.

 

안성기 이미숙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고래 사냥> 얘기를 해 달라.


그때가 안성기형이 조금씩 뜨고 있었을 시절이다. 대학 다니면서 <지옥의 묵시록>, <대부>, 이런 영화들을 보고 10분짜리 단편을 찍으면서 송승환, 성기형을 만난 거다. 졸업 후 2년간 방황하다가 일단 1983년에 대학원 행정학과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성기 형한테 전화가 왔다. '형, 이제 저 음악 안 합니다.'라고 하니 음악 얘기가 아니라며 한 다방으로 불렀다. 가게로 들어가는 입구에 문턱이 있어서 걸려 넘어질 뻔했던 순간 '병태다!'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배창호 감독이 <고래 사냥>의 '병태' 역을 찾고 있었고 성기형이 나를 추천했다. 병태같이 생겼다는 게 이유였다. (웃음) 바로 감독님이 영화 같이 하자고 하시길래 일단 거절했더니 당시 청년들의 영웅이었던 최인호 형이 나를 병태로 점찍고 같이 술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거다. 좋다고 따라가서 재미있게 놀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도장 찍게 됐다.

 

연기경험이 적이 없는데 카메라 앞에서 막막하지는 않았나.


욕 많이 먹었다. 한 번은 베드신 촬영이 있었다. 막말로 내가 겁탈을 해본 적이 없는데 배창호 감독님이 이걸 시키면서 잘 하기까지 원하셨다. 말로만 '막, 확! 이렇게 해!'라며 요구를 하신다. 상대 여성분을 침대에 거칠게 던져야 하는데 내가 살포시 놓으니 NG가 났다. 그래서 이번엔 확 던졌는데 배우가 침대 밖으로 튕겨나갔다. 정말 울면서 그분께 빌었다. 전문 배우가 아닌데 시켜서 그랬다고…. 연기도 너무 어려웠고, 대사가 생각이 안 나면 일부로 상대 배우를 깨물기도 했다. 성기형도 깨물었다. 컷 소리가 안 나오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렵게 촬영했다. 서울역 앞에서 새벽에 속옷만 입고 돌아다닌 적도 있다. (웃음)

 

그렇게 영화도 흥행대박 치고 솔로앨범도 매머드 히트를 기록했다.


1983년 8월 내 이름을 내건 <못 다 핀 꽃 한 송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솔로 1집에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다 넣었다. 록만 해왔으니 조용한 음악도 해보자 싶었고 특히 여기 수록한 경음악 '별리'는 한 번쯤 꼭 만들고 싶었던 곡이었다. 존 케이지 이전에 이미 나는 피아노를 뜯고 만지고 하면서 현대음악을 시도했다. 그러고 나서 그 해 겨울 영화 촬영에 들어가게 된 거다. <고래 사냥>에 집중하느라 '못 다 핀 꽃 한 송이'가 뒤늦게 히트했다는 것도 몰랐다. 영화 막바지에 온 사람들이 다 나를 찾는다는데, 당시 아직도 부모님께서는 음악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그때 최인호 선배가 날 응원해줬기 때문에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

 

'못 다 핀 꽃 한 송이'가 뜨고 '별리', '내일'가 줄줄이 사랑받았다.


'정녕 그대를'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에 발매한 앨범인데 1984년에 와서야 떴다. 영화 <고래 사냥>과 맞물려 매기가 증폭했다. 이 앨범 엄청 많이 나갔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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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영화뿐만 아니라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미술 전시를 다닌 지 40년이 넘어간다. 대학생 때는 송승환을 만나 뮤지컬, 국악 얘기를 나누었고, 성기형을 만나 영화를 공부했다.

 

갑자기 국악으로 선회한 것인가.


갑자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못 다 핀 꽃 한 송이'를 발표했을 때는 이미 국악을 시작한지 4~5년이 지나고 있었다. 솔로 앨범으로 번 돈을 국악 공부하는데 다 써버렸다. (웃음) 1980년대 시도했던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거다.

 

영화 <서편제>는 김수철에게 어떤 의미인가.


<서편제>는 내가 국악으로 돈을 벌게 해 준 최초의 음악이다. 이 안에 13년간 망했던 음악이 총망라되어있다. 최초로 백만 장을 넘긴 국악 앨범이고, 백만 장을 넘긴 최초의 영화음악 앨범이기도 하다. 내가 '최초'맨이다. (웃음) 랩도 최초로 시도했고 국악의 현대화도 그렇고 '기타산조'라는 말도 내가 만든 장르다.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 음악 '풍물'을 만들 때 기타 산조로 처음 공연했다. 이후 1987년 대한민국 무용제 음반을 냈는데 이게 국악 1집 앨범이다. 노래가 아니라 연주곡이다. <황천길>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1989년에 발매했다.

 

가요, 국악, 연주음악, 행사음악, 동요를 통틀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음악은.


'일곱 색깔 무지개'와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이름을 알리게 해준 곡이다. '치키치키 차카차카'는 어린이를 위해서 만든 노래고, 앨범 <불림소리>는 우리 소리가 서양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가능한가에 대한 실험이었는데 아주 성공적으로 끝나 뿌듯했던 앨범이다. 내 삶의 가장 보람된 작업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1988년 올림픽 전야제 음악, 빚을 갚게 해준 곡 '정신 차려'와 <서편제>, <팔만대장경>을 어찌 빼놓을 수 있겠나. <팔만대장경>은 평생 시리즈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젊은 그대'가 있지 않나.


세월이 흘러 2000년대 들어서니 '젊은 그대'가 나의 대표곡이 된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을 보면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몰라도 '젊은 그대'는 알더라. 세대 찬가라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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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은 음악가에 있어서 실험적 태도의 중요성을 알려준 인물이라고 본다. '최초맨'이자 '실험맨'이다. 동요 '치키치키 차카차카'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어린 친구들이 어린이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전까지는 나라를 위해 우리 국악을 알리는데 힘썼지, 정작 자신들 노래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한 일이 없었다. 막상 동요를 작곡하려고 보니 동요 쪽 환경이 부실했고, 규모도 작았다. 그 당시에 <꼴찌 수색대>와 같은 어린이 애니메이션 프로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연령대 별 음악취향을 분석하고 공부하면서 만든 노래가 '치키치키 차카차카'다. 마침 1990년 허영만 선생님께서 KBS <날아라 슈퍼보드>의 OST를 맡아달라고 부탁해서 본격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노래들을 만들었다. 이 노래는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국악을 하다가 1989년 '정신 차려'라는 가요로 다시 돌아섰다.


음반 회사에서 국악 앨범이 잘 안 팔린다고 싫어했다. 노래하면 돈이 되는데 왜 자꾸 국악 앨범을 내느냐는 거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대중성 있는 음악을 해야 되는지, 아니면 내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하는지…. 결론은 그래도 내가 해왔던 음악을 하는 게 맞다 생각이 들었다. 돈도 없었고, 더 나이 들면 하고 싶은 것도 못하겠다 싶어서 원맨밴드로 작품을 준비했다.

 

원맨밴드도 국내 최초 시도 아닌가.

 

이것도 내가 시초다. 근데 원맨밴드 정말 재미없다. 당시엔 디지털 기술이 없었으니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서 처음부터 끝까지 드럼 치고, 거기에 맞춰서 또 연주한다. 혼자서 원테이크로 진행하다 보니 정말 지루하고 다리도 아픈데 이걸 몇 달을 해야 한다. (웃음)

 

'정신 차려'는 사회풍자적인 메시지로 당시 회자되었다.


얘기는 많이 됐는데 망한 줄 알았다. 그러다가 친한 프로듀서한테 연락이 와서는 <화요일에 만나요>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정신 차려'를 불러달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언제나 타인' 같이 조용한 노래나 부르겠다고 하니 막무가내로 '정신 차려'를 하라는 것이었다. 생방송 전 날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힘들어 죽겠는데 방송을 취소할 수도 없어서 그냥 리허설 하러 갔다. 가만히 서서 부르니까 친구가 왜 가만히 있느냐며 좀 움직이라는 거다. 댄스를 할 수는 없어 그냥 무대 위를 걸어 다녔다. 너무 걷기만 하기도 이상해서 국민 체조 같은 것도 하고, 트로트 가수들처럼 가끔 손가락 뻗어 허공도 찔러줬다. 끊임없이 움직였다. (여기서 말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폭소 연발이었다) 겨우 노래 마치고 나니까 갑자기 방송국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거다. 웃긴 노래가 하나 나왔다고. 그거 춤 아니고 그냥 움직인 거다, 또 섭외가 왔길래 어떻게 했는지 생각도 안 난다고 했더니 방송국에서 녹화 본을 보내줬다. 그걸 보고 내가 나를 따라하며 연습했다. 같은 동작만 하면 재미없으니 다르게 걷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댄스가수가 되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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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의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음악가는.


한둘이 아니다. 먼저 기타리스트로 제프 벡, 지미 헨드릭스 그리고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닐 영 그리고 레게 밥 말리도 열광했다. 베토벤 음악은 궁극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도 그의 음악처럼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꿈이 있다. 교향곡 9번은 정말 오랜 기간 사랑받는 음악 아닌가.

 

요즘 K팝 슈퍼스타 '방탄소년단' 현상은 어떻게 보나.


아주 바람직하다. 세계로 나아가려는 계획을 갖고 오래 준비한 팀이다. 회사와 멤버와의 합(合)이 만들어낸 일종의 '작품'이다.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언론 인터뷰를 보니 아이유를 꽤 칭찬하던데....


아이유는 대중가수로서 성공했지만 '자기음악'을 하는 가수다. 히트곡만 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는 그 공부와 자세를 칭찬하고 싶다. “아이유씨, 이거 보면 저랑 밥 한번 먹어요” (웃음) 그리고 힙합에서는 도끼. 난 래퍼라고 꼭 욕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욕을 안 하면서도 반항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도끼의 마인드를 사랑한다. 그리고 도끼가 자기 노래에 '치키치키 차카차카'를 가사로 쓰기도 했고.. 그래서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고. 비와이, 타이거JK, 혁오, 자이언티도 좋아한다. 다들 자기 색이 분명하다.

 

자신의 어제, 오늘, 내일의 음악생활을 정의한다면.


이번에 책을 쓰면서 옛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난 사실 지나간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과 내일이 중요하지 어제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 60이 넘어 인생의 2막을 맞았다. 앞으로 우리의 음악이 나아가려면 먼저 음악 자체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우선 양이 많아야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 아닌가. 음악시장의 위축에도 뮤지션은 지속적으로 음악을 만들어내야 한다.

 

인생 2막의 꿈은.


언제를 1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1막이나 2막이나 꿈은 같다. 내가 개척해 온 장르를 공연으로 다져서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콘텐츠를 만들고 동, 서양 사람들 모두에게 감동을 전하는 것, 그게 영원한 목표이자 꿈이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고 또 우리만의 혼과 숨결로 이뤄진 음악을 꼭 쓰고 싶다. 그 야망이 내 에너지다. 꿈을 반드시 이루고자 한다. 서양음악에 포위되어 우리만의 문화가 척박한 실정이지만 나라도 우리의 것을 세계에 알리자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 자존심 하나로 버틴다.

 

 

인터뷰 진행: 임진모 정연경 박수진
사진: 박수진
정리: 임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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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작가 특집] 한태희 “창작도 논픽션도 즐거운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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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갔다가 한참을 쳐다봤다. 한 소년이 그림책 하나를 무척 집중해서 보는 모습을. 어떤 책일까 궁금해서 서가 쪽으로 갔다. 외국 도서로 보였던 큰 판형의 그림책. 우리나라 작가 한태희의 『지도 펴고 세계 여행』였다. 『구름 놀이』, 『휘리리후 휘리리후』, 『손바닥 동물원』, 『마음꽃 열두 달』등으로 유명한 한태희 작가는 1997년 첫 번째 개인전 '동화 속으로의 여행'을 연 이후, 그림책 작업을 하면서 학교와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행복한 그림 수업을 하고 있다. 『지도 펴고 세계 여행』『우리 땅 기차 여행』에 이은 두 번째 손그림 입체 지도 그림책이다. 그림책작가 인생 30여 년 만에 논픽션 작업은 첫 도전이었다. 입체그림책을 그려 보자는 편집자의 말에 선뜻 기획서를 받았지만 쉽지 않았던 작업. 하지만 독자들은 덕분에 멋진 그림책으로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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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 지도의 매력


출간 반응이 굉장히 좋아요. 아이에게 선물하려고 샀다가 부모가 함께 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린 책이라서요. 끝나고 나니 뿌듯하긴 하더군요. (웃음)  

 

책을 보니까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 상상되더라고요.


이 책을 기획하신 김성은 선생님이 어린이 그림책을 많이 만드셨어요. 사실 처음에 기획안을 받았을 때, 이게 가능한 작업일까 엄두가 안 났어요. 올해로 제가 그림을 그린 지 30년이 됐는데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이런 작업은 처음이었죠. 정말 내가 할 수 있을지 의구심도 들었는데, 힘들지만 재밌더라고요. 『지도 펴고 세계 여행』『우리 땅 기차 여행』까지 두 권이 나오기까지 5년은 걸린 것 같아요.

 

5년이요?


러프 스케치 작업까지 포함하면 그렇죠. 지도 감수는 중학교 사회 교과서를 쓰시기도 한 이응곤 선생님이 맡아주셨어요.

 

그림 작업은 글 기획 후에 그리신 거죠?


그렇죠. 기획자가 스토리텔링을 잡아준 다음, 그림을 그려요. 어느 정도 아웃라인이 잡히면 스케치를 하면서 글도 보강하죠. 어린이책이지만 전문 서적이니까요. 과정이 좀 길었습니다.

 

입체 지도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리기는 쉽지 않으셨겠지만 보는 재미는 배 이상입니다.


현재 아이들이 보는 지도는 수직 상공에서 보는 지도잖아요. 재미도 덜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죠. 입체 지도는 쉽게 조감도를 떠올리면 되는데요. 입체감도 살아날 뿐만 아니라 공간감도 느껴지죠. 이번 작업을 하면서 자료조사도 많이 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림지도를 많이 그렸더라고요. 대륙별로 보면 각각의 특징이 있어요. 어떤 대륙은 산이나 숲이 많고, 또 우리나라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경우도 있죠. 세계지도를 보면 너무 평범하게 그려서, 강인지 호수인지 구분이 잘 안됩니다. 기호를 꼭 봐야만 해석이 되죠. 입체 지도는 그림만 봐도 어떤 지형인지 눈에 확 들어오는 장점이 있어요.

 

독자 분들의 리뷰를 찾아봤는데, “여행을 많이 가보신 분이 그린 것 같다”는 글이 있었어요.


중국은 서너 번 다녀왔어요. 프랑스, 이탈리아도 도서전 때문에 가봤지만 잠깐이었죠. 모든 나라를 여행하고 그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평생을 그려도 쉽지 않겠지만 말이에요. 작업하면서 구글어스를 많이 참고했어요. 구글어스에게 가장 고마워 해야 할 것 같아요. (웃음) 또 세계 여행을 다니는 분들의 블로그도 많이 찾아봤는데요. 굉장히 구체적으로 자신이 간 곳들을 기록해 놓으셨더라고요. 남미 끝 푼타아레나스의 경우에는 특히 도움을 많이 받았죠. 기본 여행 서적들도 많이 봤고요.

 

지도만 보면 재미가 덜할 텐데, 이 책의 큰 흐름은 ‘가족과 함께 떠난 세계 여행’입니다. 주인공이 총 세 가족입니다. 우람이네, 예솔이네, 건이 온이네까지요.


아무리 입체 지도라도 스토리가 없었으면 지루했을 거예요. 우람이는 아빠와 기차 여행을 남유럽부터 베이징까지 가고, 예솔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유람선 여행을 떠나죠. 건이 온이네 가족은 북아메리카부터 아마존 열대 우림, 남아메리카까지 캠핑카 여행을 떠나고요. 현장감을 살리고 싶어서 각 지역의 맨 첫 그림은 지도가 아닌 풍경 이미지로 작업했어요. 여행 중에 경유하는 지역 전체를 조망하는 여정 지도까지 수록했고요.

 

특별히 즐겁게 그린 지역이 있었는지요?


유럽은 알다시피 인류가 남긴 유명한 건축물이 많잖아요. 그리면서도 참 재밌었는데, 너무 많은 걸 넣으면, 건물 중심으로 보이니 나중에는 덜어내기도 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지역은 베이징이에요. 중국은 그릴 게 너무 많은 나라라서 선택하기가 어렵더군요.

 

만리장성 그림은 정말 감탄했습니다.


시간이 특히 많이 걸렸어요. (웃음) 베이징 한복판에는 옛날 황제들이 살았던 자금성이 있습니다. 건물만 해도 800여 채, 방은 자그마치 9,000개가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답죠. 이번 작업을 하면서 덕분에 저도 공부를 많이 했어요.

 

혹시 이 지역은 꼭 넣자고 제안하신 곳이 있나요?


하나 있어요. 뉴욕 맨해튼섬이 초고에는 없었는데요. 미국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빌딩숲이잖아요. 제 생각에는 꼭 들어가야 할 것 같았어요. 고생은 많이 했지만 그리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또 정말 그리고 싶은 건 북한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땅인데 밟을 수가 없잖아요. 구글어스에도 특별한 건물을 제외하고는 나와있지 않아요. 우리 세대는 북한을 생각하면 심적으로 참 마음이 아프거든요. 전세계 지도를 그리면서 북한을 그리지 못하는 게 아쉬웠어요.

 

지금까지 창작그림책을 주로 그리셨는데요. 남다른 소회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논픽션 책은 저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앞으로 한국 어린이그림책이 도전해야 할 내용은 무궁무진하게 많죠. 그림책작가들은 창작 작업을 많이 하고 싶어 해요. 물론 창작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어떠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 사회성과 관련된 개념을 그림 작업으로 보여주는 일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서울 지하철을 기준으로 서울을 그리는 작업을 후속으로 하고 있어요. 내년에 나올지, 내후년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세 권이 쌓이면 또 다른 분야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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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도전해보면 소재도 무궁무진

 

이제 독자들이 그림책과 동화책은 분명히 구분하는 것 같아요.


많이 달라졌죠. 예전에는 동화작가, 일러스트레이터라고만 구분했지만 지금은 그림책작가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죠. 최근에는 성인들이 그림책을 읽고 감상하는 모임들이 많아졌어요. 나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연령을 넘어선 그림책 독자들이 많아질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그림책 평론도 많아졌어요.


좋은 변화죠. 평론은 평론대로 읽되,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는 너무 많이 알고 접근하는 건 오히려 피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아이는 자기만의 느낌으로 해석할 수가 있으니까요. 아이가 설상 글을 읽을 수 있더라도 부모가 음성으로 들려주는 게 무척 좋아요. 교감이 생기기 때문인데요. 아이의 눈과 귀가 함께 열리는 순간이잖아요. 이런 게 가장 좋은 독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직장 생활을 출판사에서 시작하신 걸로 압니다. 그림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신 건 1997년 첫 번째 개인전 ‘동화 속으로의 여행’을 연 이후라고요.


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했어요. 졸업한 년도가 1987년이니까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죠. 그 땐 그림책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어요. 교보문고에 갔는데 중철로 된 어떤 큰 책이 외서 쪽에 꽂혀 있더라고요. 유리 슐레비츠의 『Monday Morning』이었는데 아마 한국에서는 몇 년 후에 『월요일 아침에』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 같아요. 그 책을 처음 봤을 때 저로서는 좀 충격을 받았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광고 일러스트레이션을 좀 하다가 출판사에 들어가 삽화를 그렸어요. 전집을 많이 내던 때라 삽화 일이 매우 많았죠. 그러다 『솔미의 밤 하늘 여행』을 시작으로 그림책 작업에 집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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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구름 놀이』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됐고 『손바닥 동물원』도 어린이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모두 제 아이들이 어릴 때 쓴 작품이에요. 『손바닥 동물원』은 둘째 아이의 재롱잔치를 보면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든 그림책이에요. 아이들 전시회를 보는데 손도장으로 고니를 만든 거예요. 원생들이 30, 40명이 되니까 엄청 큰 작품이더라고요. 그 때 받은 인상으로 작업한 책인데 이게 30쇄를 찍었어요. 둘째 아이 대학 등록금을 이 책으로 낸 셈인데, 아이가 자기 밥그릇은 알아서 챙겼죠. (웃음)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학부모들이 그림책을 잘 사주는데, 고학년이 되면 학습서를 더 우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화책도 학습만화책을 주로 권하죠.


요즘 선생님들을 만나면 아이들이 책을 너무 안 본다고 걱정하세요. 어떻게 하면 책을 보게 할 수 있냐고 물으면, 전 그림책을 많이 권해요. 요즘 그림책은 글밥이 많아서 고학년이 읽어도 될 그림책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도 펴고 세계 여행』은 교과서랑 병행해서 읽어도 좋은데요. 딱딱한 교과서에서 어려워하는 부분을 입체 지도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또 자기의 경험을 갖고 지도를 읽어볼 수 있죠. 출판사에서 이 책을 유아교육전에 가지고 갔는데, 7세 자녀를 둔 부모들의 반응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요즘은 글로벌한 감각을 심어줘야 한다는 게 부모들의 숙제잖아요.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니까 커서도 볼 수 있고 성인이 돼서 다시 펼쳐볼 수도 있고요. 아이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걱정만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작가들도 출판사들도 고민을 갖고 여러 방안을 생각해야 합니다. 

 

강연도 자주 다니시죠?

 

초등학교에서 요청이 많아요. 일주일에 두 세 번 꼴은 가는 것 같아요. 물론 책 작업을 해야 할 때는 시간을 많이 내기 어렵고요. 이제 방학 때니까요. 당분간 좀 쉬어야죠. 그래도 아이들을 보러 가는 날은 즐겁습니다. 세계지도 원화를 꼭 갖고 가는데요. 아이들이 출판 전 원화를 볼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보여주면 무척 신기해 합니다.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시나요? 학교에서 원하는 내용이 있을 텐데요.


‘학교 가는 길’이라는 테마로 할 때가 많은데요. 강연을 한 다음에는 실습을 하죠. 초등학교 아이들이 지도를 그리는 건 아직 버겁죠. 세계의 지형이라든지 『학교 가는 길』같은 책을 보면서, 우리 마을을 그려보는 활동을 합니다. 개인별로 그리기도 하고 그룹별로 그리기도 하죠. 문자도 수업을 하기도 해요. 3학년 이상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죠. 아이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집중을 잘해요.

 

요즘 눈여겨보는 그림책작가가 있나요? 좋아하는 작가도 궁금합니다.


오는 길에 진수경 작가의 『짜장면 왔습니다!』를 봤어요. 짜장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해 쓴 책인데요. 그림도 좋고 재밌더라고요.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먹는 짜장면이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난 메뉴인지는 우리가 잘 모르잖아요. 그림책을 보는 색다른 재미가 있어요. 한국 그림책작가 중에 존경하는 선생님은 고 홍성찬 선생님이에요.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잡지 삽화로 시작해 무수한 그림책을 남기셨죠. 『백두산 사슴과 인삼』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가 참 좋아하는 그림책이에요. 외국 작가 중에는 『프레드릭』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작가 ‘레오 리오니’를 좋아합니다. 이 작가는 정말 모든 작품이 다 좋아요.

 

그림책작가 수업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내 그림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도 많아요.


이제는 그림책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림책협회도 생겼고요. 하지만 현실이 바로 좋아지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책을 출간해도 금방 베스트셀러가 되긴 어렵고요. 하지만 전망이 밝은 건 그림책을 향유하려는 독자층이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또 그림책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뮤지컬 등도 많아지고 있거든요.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소재의 폭을 넓게 보자는 말입니다. 논픽션도 도전해보면 소재가 정말 무궁무진합니다. 작가로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도 훨씬 높아지죠. 작가적 상상력도 꾸준히 갖고 가야 합니다. 관찰력은 특히 중요하고요. 외부의 관찰 없이 상상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여러 환경, 사람들과 자주 접촉해야 소통하는 그림책이 나올 수 있어요.

 

그림책을 특별히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그림책은 정말 모든 연령대가 볼 수 있는 책이에요. 그림으로만 봐도 좋고요. 글도 함축적이니까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죠. 요즘 미술관에 한 번 가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인사동도 일년에 한 번 가기 어려운데, 그림책을 자주 보면 미술관에 가는 것 이상으로 충분한 그림 감상을 할 수 있어요.

 

앞으로 몇 권의 작품을 더 쓰고 싶으신가요?


글쎄요. 한 서른 권 정도 더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제 나이가 칠순이 되려나요? (웃음) 일단 인문 지리 논픽션을 시작했으니까요. 제가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수학, 물리 이런 책들도 좀 보는 편이에요. 강연도 듣고요. 과학이든 생물이든 수학이든 학문을 통합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하루 3줄 영어 일기김성은, 이응곤 글/한태희 그림 | 책읽는곰 |
포르투갈에서 중국까지 대륙 횡단 철도로 여행하며 유라시아 대륙을 살펴보고, 인도양과 태평양을 유람선으로 여행하며 아프리카와 남부 아시아, 오세아니아를 살펴보고, 캐나다부터 칠레까지 캠핑카로 여행하며 아메리카 대륙을 살펴보는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일로 “만화같이, 만화답게 그리는 반려동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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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주인… 내가 지옥에서 온 대형견인 줄도 모르고…”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웹툰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극한견주>는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품이다. 대형견인 사모예드 ‘솜이’와 그를 키우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이 웹툰은 대형견의 치명력인 매력을 발산하면서 또한 대형견을 키우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지옥에서 온 대형견’ 반려인의 일상은 장단점이 ‘극한’으로 갈리기 때문이다.


마일로 작가는 초기작 『여탕보고서』로 이미 한 번 웹툰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목욕탕에 다닌 경험을 만화로 그릴 수 있나 싶은 처음 생각이 무색하게 일상을 만화로 끌어올리는 능력이 독보적이다. 두 번째 작품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했지만, 『극한견주』에서도 여전히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웃길 수 있다는 증명을 해보인다. 특히 ‘솜이’가 주인공인 『극한견주』는 독보적인 귀여움이 추가되었다. 솜이는 사진을 찍는 내내 뛰어다녔고, 여전히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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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 장편으로


단행본은 마음에 드셨어요?

 

엄청 마음에 들어요. 표지도 귀엽게 나왔어요. 출판사에서 ‘극한견주’ 글씨에다가 털을 입혀서 만들어 주셨더라고요. 웃기고 좋았어요.


처음 솜이가 나온 건 이동건 작가와 협업한 네이버 ‘멍멍 남녀’ 에피소드였어요. 솜이가 일부 나왔었죠.


네이버에서 로맨스 단편으로 기획한 코너였어요. 트위터에도 솜이 만화를 가끔 그렸는데, 케이툰에서 강아지 관련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트위터를 보고 저한테 연락을 주셨어요. 단편으로 먼저 참여했었죠.


‘진짜 멍’ 시리즈였죠. ‘제발 정기연재 해주세요’하는 댓글이 많았던 걸로 기억해요. 초기작 『여탕보고서』이후 차기작으로 반려동물 웹툰을 생각하진 않으셨을 텐데요.


시리즈 다 끝나갈 때쯤 케이툰에서 정기 연재를 제안해 주셨어요. 차기작으로 뜸을 들이던 와중에 단편과 정식 연재 제안이 들어와서 연재를 시작했죠. 마음속으로는 『극한견주』를 연재하면서 동시에 다른 작품을 준비해서 극화도 내야지 했는데, 생각처럼은 안 됐어요.


정기 연재를 하면서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건 어렵죠.


뭐 그릴지 고민하는 데 시간을 다 쓰는 것 같아요. 일상툰 장르는 작화가 오래 걸리는 건 아니거든요. 작업하다 보면 소재는 정해졌는데 그 소재를 한 화 분량으로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어쩔 때는 콘티랑 작화를 동시에 할 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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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인터뷰를 가장한 솜이 인터뷰


솜이는 세 살 사모예드, 여자아이죠.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강화도의 전원주택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개를 키워야겠다 생각하고 오래 알아봤어요. 솜이를 데려오기 전에도 다른 견종을 가정 분양 받으려고 애썼는데 이래저래 잘 안됐어요. 당사자가 분양 당일 취소한 적도 있고요. 솜이는 분양업체 구경갔다가 너무 귀여워서…. 그 과정과 상관없이 충동적으로 데려왔었던 것 같아요.


연재하면서 산책할 때 솜이라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나요?


서울에서 산책하면 가끔 알아보는 것 같아요. 만나서 인사하다가 ‘이 아이 솜이죠?’ 하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솜이한테 출연료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하지만 어차피 제 돈으로 먹고 사는 아이라. (웃음)


솜이의 장점을 ‘커다랗게 귀엽다’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어요.


외향적인 장점이죠.


귀여운 건 커다란 장점이니까요. 어렸을 때 귀여움과 지금 귀여움은 좀 다를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처음 보고 일주일 동안은 완전 천사처럼 귀여웠어요. 그다음에는 만화에 나오는 원숭이 시기, 개의 사춘기 시기라고 해서 ‘개춘기’라고 하죠. 생긴 건 귀여웠는데 그 당시에는 귀엽다는 감정을 못 느꼈었어요. 그때 사진을 보면 지금도 고생스러운 마음이 떠올라요.


‘개춘기’ 에피소드를 그릴 당시에는 이미 다 컸을 때인데, 어떤 식으로 에피소드를 고르게 됐나요?


솜이를 키우는 내내 이 과정을 만화로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개춘기’ 시절을 길게 그리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울화통 터지면 어떻게 하나 줄인 것도 있어요. 워낙 난리를 피울 때가 많았거든요. 좋아하는 분들은 솜이가 많이 난리 칠수록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개가 저러면 화가 날 것 같다고 해서 어려웠어요.


솜이가 부순 모든 것들을 그리진 않았어요.


만화로 웃기게 그려서 그렇지 그 당시에는 되게 심각했단 말이에요. (웃음) 옷 다 찢고요. 만화에서는 ‘재밌는 와장창~’ 하면서 가볍게 그렸지만 실제로 부서져 있는 걸 보면 한숨이 나오고 이걸 언제 다시 사지 했죠. ‘솜이가 영원히 이런 상태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제일 컸어요. 한창 ‘개춘기’일 때는 제가 나쁜 주인이고 개를 이상하게 키워서 이 아이가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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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털이 주요 소재로 나와요. 구름처럼 개털이 온 바닥에 깔리면서 만화적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었어요.


정말 그렇게 돼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요. 인터넷에서 사모예드를 검색하면 시각적으로 털이 많다는 건 느껴지지만, 실제로 같이 살면 모든 곳에서 털이 느껴져요.


지금 제 입에도 털이 붙어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


진짜 그래요. 이러다가 폐병 나는 게 아닐까 걱정할 때도 있었어요. 나름대로 털을 뗀다고 떼고 침대에 누우면 얼굴에 털이 묻고, 세수하고 수건으로 닦으면 털이 붙죠. 그게 제일 힘들어요. 많이 빠지겠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겪으면 느낌이 달라요. 저희 언니 컴퓨터에도 솜이 털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돌아간 적이 있어요.


하지만 독자분들은 털이 날리는 솜이 캐릭터를 좋아해 주시잖아요. 캐릭터 사업도 진행했었고요.


펀딩을 받아서 스티커랑 인형 등을 제작했었어요. 솜이 인형이 잘 나온 편은 아니었는데 원작의 느낌 때문인지 그걸 재밌어하셔서 다행이었죠. 다른 데였으면 인형 질이 나쁘다고 항의를 받았을 것 같은데, '눈이 몰렸어요, 털이 빠져요' 하면서 오히려 그게 웃기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정말 다행이죠. 솜이는 요새도 그 인형, 작은 솜이를 가끔 물고 다녀요.


솜이 장난감 비용도 꽤 많이 들어갔을 것 같아요.


점점 안 부서지는 장난감을 알게 됐어요. 대형견용 수입 장난감을 쓰면 정말 오래 가더라고요. 솜이도 나이가 들면서 이제 장난감을 부수지 않고 적당히 갖고 놀다가 놔두고 있어요.


키워가면서 정보를 얻으셨네요. 사람들이 『극한견주』를 보면서 대형견 키우기 정보를 얻어가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만화에 정보를 더 담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신이나 리드줄 같은 에피소드도 많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다음에는 중성화 에피소드도 그려볼까 싶어요. 사실 정보가 많이 필요한 부분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때가 많아서요.


대형견의 정보는 아무래도 적은 편이죠.


처음 솜이 데려왔을 때만 해도 정보가 많이 없었는데 2, 3년 사이 대형견을 많이 키우면서 대형견 전문 쇼핑몰도 생기고 정보도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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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작품에 부담이 많았어요


언니가 『모멘텀』의 지연 작가님이시죠. 두 분 다 만화 전공은 아니셨다고요. 항상 자매 만화작가라는 게 부각될 것 같은데, 각자 작업은 따로 하시나요?


언니가 법학과, 저는 패션디자인과 나왔어요. 각자 방에서 작업하는 편이에요. 지연 작가님은 작업해야 하는 양이 많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에 가서 종일 작업하고, 저는 엄청 산만한 편이라 제 방 갔다가 거실 가고, 언니 방에서 작업하고 돌아다니면서 해요.


흔히 자매가 만화가라고 하면 서로 도와줄 것도 같은데요.


예전에는 도와준 적 있는데 요새는 각자 따로 작업해요. 『여탕보고서』때는 제가 빨리 못해서 언니에게 어시스트를 시키고 언니도 『모멘텀』 그릴 때 마트 뒤에 매대에 있는 물건 그리라고 하는 식으로 시켰는데, 그 이후로는 딱히 같이하는 건 없어요. 애초에 언니가 스케줄 관리를 잘 하는 작가이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어시스턴트를 두고 작품을 빨리하면서 외주 작업도 하면 좋긴 할 텐데, 시도는 아직 안 해봤어요.


취미로 했던 만화가 직업이 됐어요. 즐겁게만 할 수는 없게 됐는데요. 만화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일이라는 게 어차피 힘든 거여서……. 일이어서 힘든 거지 취미가 일이 되어서 힘든 건 아닌 것 같아요.

대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입시미술 강사 아르바이트만 열심히 하다 졸업하면서 동시에 만화를 시작했어요. 5학년까지 학교에 다녔는데, 마지막 학기에는 수업을 하나 정도밖에 안 들어서 그때부터 준비했었죠.


『여탕보고서』가 첫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부담은 없으셨나요? 소포모어 징크스라든지요.


너무 부담이 컸어요. 그래서 더욱 오래 쉬고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 걱정을 다 극복하고 진짜 두 번째 작품 그리겠다고 결심하니까 또 『여탕보고서』로 부천만화대상을 받았거든요. 또 부담이 시작돼서 한동안 작품 못 하고 징징대고 있었어요. 오히려 사람들한테 잊히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첫 번째 작품 잘됐으면 편하게 두 번째 그리고 망해도 되는 건데, 괜히 너무 걱정을 많이 했다 싶어요.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극한견주』『여탕보고서』와는 또 다른 결의 즐거운 작품이에요. 만화적 그림체가 잘 어울려요.


그런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만화같이, 만화답게 그린다는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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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개그 말고는 못 그리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제 언니인 지연 작가만 해도 진지한 로맨스물로 영화적 연출을 하잖아요. 그런 건 못하겠어요. 안 나와요. (웃음) 개그를 많이 그리는 사람들은 그런 걸 그린다고 하더라도 그 컷이 왠지 웃기더라고요. 집중이 안 되는 느낌? 매일 나름대로 극화를 하겠다고 말은 하고 다녔어요. 극화체로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는데 캐릭터형 그림을 너무 오래 그리다 보니 점점 극화에 자신이 없어요. 노력은 해봐야죠.


그리면서 작가님 스스로 웃기도 하세요?


15화까지는 그리면서 제가 웃었는데, 점점 웃음을 잃고 있어요. 개춘기 편 마지막 그리면서는 저도 혼자 웃으면서 그려서 언니가 왜 웃냐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필명 마일로는 어떻게 정하셨어요?


의미는 따로 없고요. 본명보다는 필명으로 해야겠는데, 그동안 썼던 닉네임으로 데뷔하기는 그래서 데뷔용으로 새로 만들었어요. 성별을 숨기고 작업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중성적인 이름을 지었는데, 첫 작품을 『여탕보고서』로 해서, 아무 소용없게 됐네요.


『여탕보고서』를 웃기게 그렸지만, 민감한 소재이긴 하잖아요. 독자들 중에서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만화를 평가하기도 했고요. 민감한 주제도 민감하지 않게 그려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나름대로 신경을 쓰죠. 신경을 쓴다고 해도 가끔 놓치는 게 있어서 욕먹기도 하고요. 사실 신경 쓰는 게 힘들어요. 동물 키우기, 육아는 민감한 소재잖아요. 사람들이 댓글로 뭐라 하기 가장 쉬운 소재고요. 최근 개와 관련된 사건으로 여론이 안 좋아지니까 더 신경이 쓰여서 괜히 구구절절 더 설명하기도 해요. 옆집 개가 말뚝이 뽑혀서 나왔다, 그러면 마지막에 튼튼한 기둥에 묶였다고 추가로 설명을 해주고, 발뒤꿈치 무는 에피소드에서는 훈련법을 적어놓기도 하고요.


요새 『극한견주』소재로 생각한 게 있나요?


처음 짤 때는 소재가 많았는데 막상 그리면 재미없을 것 같은 것도 빠지고,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 것도 빠지고, 너무 소소한 에피소드라고 빠지고, 못 그리는 게 너무 많아요. 연재 시작하면서 시즌 1을 하다 솜이가 좀 크면 둘째를 데려와서 시즌 2를 하려고 생각했는데, 아직 엄두가 안 나요.

 

솜이와 둘째면, 파괴력도 두 배…….


으악, 안 돼요. (웃음) 소형견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고양이도 키우고 싶었는데 솜이 털로 너무 시달려서, 다른 동물 털이 합쳐지면 너무 심각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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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햄스터도 기른다고 들었어요. 이름이 뽀솜이라면서요. 햄스터 만화는 그릴 생각 없으세요?


『극한견주』를 휴재하거나 완결하면 번외편으로 그리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여름이 끝날 때쯤 데리고 온 것 같아요. 이태까지 햄스터는 꾸준히 키웠는데, 솜이가 좀 크고 나서야 키울 수 있었어요.


뽀솜이와 솜이는 잘 지내나요?


안 그래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데려올 때 엄청 난리를 피우고 종일 케이지 앞에서 끙끙대서 ‘저 아이가 평생 저러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또 했어요. 그 걱정은 늘 하게 되네요. 그러다 2주 정도 지나고 괜찮아진 것 같아요.


요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하신 적이 있어요. ‘조선시대 BL’도 해보고 싶으시다고요.


조선시대 BL은 할 거라고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서, 모든 사람이 제가 조선시대 BL물을 차기작으로 할 거라고 알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마일로라는 이름 아래 『여탕보고서』로 대중적인 만화를 그린다는 브랜드 가치가 생겼는데, 성인물을 그린다고 하면 또 완전 결이 달라지잖아요. 계속 고민하는데 답이 안 나오네요.


『극한견주』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까요?


50화 넘게까지는 할 텐데, 우선은 소재가 나오는 데까지는 최대한 연재해볼 생각이에요. 적어도 3권까지는 독자분들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극한견주 1마일로 글그림 | 북폴리오
지금 가장 핫한 반려동물 웹툰이다. 덩치는 우람하지만 터널과 작은 개를 무서워하는 귀여운 허당 솜이를 만나 보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성호 “우리는 배신감을 안고 있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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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수석 졸업’은 그 자체로 명함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 자신도 그런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치동에서 다섯 개씩 학원을 다니며 대학의 꿈을 키우던 ‘대치동 키즈’ 박성호는 자신의 최종 목표, 카이스트에 합격했으나 “꿈을 이룬 게 아니라 꿈을 잃은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곳에서의 그는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었고, 주변 사람들은 불행했다. 대학만 가면 행복할 거라는 말을 믿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벼랑 끝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다.


박성호는 호주로 떠났다. ‘지옥’이라고 불리는 바나나 농장에서 딱 천만 원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는 온갖 벌레가 우글거리는 컨테이너 한쪽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두고 돈이 생길 때마다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떠났다. 1년 동안 전 세계 90개 도시를 일주하고 돌아온 박성호의 이야기를 담은 『바나나 그 다음,』은 보장된 것보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는 한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다.


박성호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카이스트’ 타이틀도 얼마든지 이용하고 싶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바로 그 자신이 꼭 필요로 했던 말들을 전하기 위해서다. 좀 더 일찍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행복을 정의하기 위해 고민했더라면 그가 겪은 아픔은 덜해도 됐을 종류의 아픔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하고 살던 아이가 큰 경험을 겪은 후 달라진 세상을 살게 되는 이야기”, 이것이 박성호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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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 건 ‘그 다음’


“인생도 결국 여행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별에 대한 감상을 적은 글인데요. 여행으로부터 배운 것이 많이 담긴 책이에요. 여행 전에는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의외의 면이 있었는지 더 듣고 싶었어요.

 

군대에서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요. 군대 가니까 좋더라고요. 그전까지 계속 학원만 다녔으니까요.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게 좋았어요. 군대에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현실에서 문제를 겪고 있을 때 좋은 치료법이 될 수 있는 것은 더 큰 세상을 보는 일’이라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거죠. 여행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저는 그 말을 세렝게티에서 이해했어요. 사파리를 하는데 그게 진짜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에는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는 게 여행인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사람들한테는 동물들을 보는 게 여행인 거잖아요. 결국 내가 알고 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 여행이더라고요. 거기에서 여행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사실 ‘사파리’는 짐승들을 관찰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여행’이라는 뜻이다. 왜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바나를 돌아다니며 짐승들을 바라보는 행위를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중략) 그들에게 여행은 인간의 질서가 아닌 대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세계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188-189쪽)

 

더 큰 세상, 다른 세계를 보는 일의 의미를 깨닫게 된 거군요.


사파리를 하면서 느낀 게 사람이 되게 작다는 거였어요. 그 사실이 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게 아니고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여행을 하면서 느껴야 하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천동설을 믿고 있다가 지동설을 믿게 된 느낌이었죠. 우주를 더 크게 보고, 인간 존재를 작게 볼 수 있는 시선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역설적으로 든 거죠. 아무리 인간 사회에 대단한 사람도 많고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같은 존재고,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을까, 이 사실을 여행에서 느꼈어요. 또 사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혼자 떠나는 여행을 하면 사실 외롭고 힘든 순간이 더 많거든요. 그런데 여행이 끝나면 그게 아름다웠다고 느껴요. 힘든 기억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요. 삶이 딱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름다운 순간 몇 개면 결국 삶 전체가 아름다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를 들으니까 저자의 여행 이전의 삶이 더욱 궁금해져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해야 할 일들로 가득했던 생활이었잖아요. 그래서 여행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기도 했을 테고요.


크게 영향 받은 작품이 몇 개 있어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수레바퀴 아래서』, 그리고 『돈키호테』예요. 특히 <죽은 시인의 사회>『수레바퀴 아래서』는 비슷하죠. 규정되고 억압된 교육 체계 안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나 창의성을 억압 받는 내용인데요. 그 책을 보면서 여행을 많이 했어요. 제 삶과 비슷하게 느껴졌거든요. 아쉬운 건, 세 작품 모두 슬픈 결말이에요.(웃음) 감정 이입을 하고 작품들을 보니까 나도 이렇게 가다간 슬픈 결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나의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언급한 작품들과 달리, 억압을 받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죠.

 

제목에 ‘그 다음’이 들어간 이유가 거기에 있군요?


네, ‘바나나’가 그 이전의 이야기라면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 다음’ 내가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하는 것이었어요. 사실은 그걸 더 쓰고 싶었어요.

 

이 여행을 끝내고,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 후에 대한 확신이 책에는 없죠.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있지도 않고요.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다른 데에 있었네요.


20대에 세계일주 하는 이야기는 흔하죠. 제가 궁금했던 건 일주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후 이야기였어요. 어찌하다 보니 세계일주 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는데요. 의외로 달라진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오히려 세계일주 후에 체념을 한 사람도 많고요. 이상에 있다가 현실에 온 느낌인 거죠. 마치 돈키호테처럼요. 지금까지 꿈에 있다가 현실로 돌아왔는데 적응을 못하는 거예요. 저는 돈키호테처럼 되기 싫었어요. 세계일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하고 살던 아이가 큰 경험을 겪은 후 달라진 세상을 살게 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어요. 

 

그나저나, 군대에서 좋았다고요?


군대가 사실은 일정이 없는 시간이 되게 많아요. 그런 시간이 이전에는 없었던 거죠.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일정이 많았다는 게 아니고요. 일정이 없어도 바빴어요. 일정이 없으면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살았죠. 대학교에서 학점 관리를 하고 그럴 때는 시험이 끝나도 다음 시험을 걱정했고요. 그 시험이 끝나도 취직을 고민했는데요. 군대에서는 다음 일정을 고민하지 않잖아요.(웃음) 앞으로 다가올 일을 고민하기보다 지나온 시간, 살아온 시간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시간을 군대에서 처음 가져본 것 같아요. 제대하고도 이전의 삶을 반복하기가 싫었고요. 그래서 제대 후에 더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거예요.

 

이전의 삶을 반복하기 싫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제대하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고 공부를 포기하는 건 현실도피잖아요. 오히려 공부하는 모든 게 다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전까지는 진짜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한다는 생각이었는데요. 스스로 고민을 하고 나니까 오히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죠.(웃음)

 

퍼스트 펭귄이 되려면


저자의 글에서 눈에 띄는 건 무엇보다 솔직함 같아요. ‘고생 경쟁’ 같은 글이 그렇죠. 일부러 더 솔직하게 쓴 것 같기도 하거든요.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특히 학생들이었어요. 대학교에 막 입학한 사람들이 해당할 텐데요. 저는 중학생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어요. 어려운 생각도 최대한 쉽게 풀고, 솔직하게 쓰는 게 제가 원하는 방향과 더 맞을 것 같았고요. 전하고 싶은 말도 그런 것이었어요. 자기 철학이 없는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솔직하고 쉽게 썼어요.

 

그런 말을 나도 그 시절에 들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도 있었던 거죠?


그렇죠,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공부를 잘하면 다 잘될 줄 알았어요.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는데요. 친구가 저번 시험에 몇 점을 받았는지 다 외우고 다녔어요. 친구를 사귈 때도 부모님이 뭐하시는지, 어디 사는지는 궁금해도 다른 것에 대해 궁금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을 더 보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학생들이 자라니까 자기 인생이나 행복에 대한 생각을 쉽게 갖지 못하죠. 제가 작가가 되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인데요. 이런 이야기를 저 같은 비슷한 세대가 하면 더 와 닿을 것 같아요. 제 세대는 배신감을 안고 있는 세대라고 생각하거든요.

 

배신감이요?


어른들은 성장하는 사회에 살았죠. 기회도 많았고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아이들에게도 심어줬어요. 그런 교육을 받은 85-95년생 아이들이 막상 성인이 되고 보니, 아니에요. 배신감을 느끼는 거죠. 제 나이 또래는 기본적으로 어른들이 하는 말을 100% 수용하지 못하는 면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 또래의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퍼스트 펭귄 효과’를 생각했죠. 먼저 뛰어드는 사람이 있어야 다른 사람도 따라온다는 거잖아요. 저는 살면서 사회로부터 혜택도 많이 받았어요. 카이스트에서는 등록금도 안 내고 다녔으니까요. 그렇게 혜택 받은 사람이 자기가 가진 걸 조금 포기하고 뛰어들어야 다른 사람도 변화에 동참할 것 같아요.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거든요. 선택지가 많았으니까요. 그럴수록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확실히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이유 중에 ‘카이스트 수석’이 가장 크죠. 만약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세상이 들어줄 리 없잖아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저의 말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고민을 많이 했죠. 불과 다섯 달 전만 해도 치의학전문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포기하기가 힘들었어요. 특히 부모님 세대는 공부나 꿈에 대한 한이 많으신 것 같은데요. 경제성장 속에서 많은 걸 포기하셨고, 그걸 자식에게서 대신 이루고자 하는 소망도 있으시죠. 저희 부모님도 그러셨고요.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어요. 그럼에도 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여행을 통해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배운 것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제가 공부한 산업디자인과 지금 하는 글쓰기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안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의 삶과 삶의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큰 거군요.


가장 경계하는 건 저를 규정하는 거예요. 전에는 카이스트 학생으로 살았고, 그 전에는 대치동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살았죠. 하지만 그 프레임에 제 스스로가 가능성을 낮췄던 것 같아요. 세렝게티에서 다양한 동물을 보고, 인간이 작다는 걸 느끼면서 나의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았는데요. 그걸 보기 전에는 내가 학생으로 할 수 있는 것, 내가 카이스트 학생으로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어요. 제가 지금은 여행 작가로 살게 되었지만 글만 쓰고 살 거라고 확신하지도 않고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뭐든 찾아서 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특히 한 가지 직업이 아닌 사람들이 워낙 많잖아요. 그때그때 잘할 수 있는 걸 찾아갈 것 같아요. 물론 평생 글쓰기는 계속할 것 같지만요.

 

글쓰기에 매력을 느낀 건 언제부터예요?


쓰기 시작한 게 여행하면서부터예요. 혼자 여행을 다니니까 블로그에 일기처럼 남기기 시작했어요. 글쓰기라는 게 기록을 위한 것만이 아니잖아요. 글을 쓰게 되면 기본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대표하는 말들을 계속 고르게 돼요. 그러면서 내 생각을 정확하게 정립해주는 면이 있기 때문에요. 글 쓰는 건 작가뿐 아니라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점점 사회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세계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죠. 억압하고 규제해서 못하게 하는 게 아니고 단순한 행복을 줘요. 지금이 그런 것 같아요. 당장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고요. 긴 글은 점점 안 읽게 되고, 점점 자기 생각이 없어지게 돼요. 글쓰기는 그런 우리 세대한테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것, 생각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죠.

 

공부하던 시절에도 그런 자각이 있으셨나요? 사실 저자의 경우 비교적 엘리트 집단에 속해 있었잖아요.


카이스트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진짜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어요. 가장 심했던 건 카이스트 자살 사건 때였어요. 그건 저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회가 점점 자기 아픔을 숨기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자살률이 계속해서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우울증을 치료하는 세로토닌 약물 처방률이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래요.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데 고치려고 하는 사람은 제일 적다는 얘기죠. 진짜 복지국가나 행복지수가 높은 국가들은 오히려 우울증 처방률이 높거든요. 아스피린을 먹듯, 정신에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고치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경쟁사회다보니까 아픔을 드러낸다는 게 나한테 약점이 있다는 얘기가 돼요. 그러니까 아픔을 말하기를 꺼려하죠. 모든 사람들이 같은 아픔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내하고 살게 되는 거예요.

 

자신의 아픔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러면 사회는 점점 병들어요. 제가 그 아픔을 치료하지는 못하겠지만요. 저는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픈 친구들을 주변에서 많이 봐왔고, 그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니까요. 실은 저 역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무서웠어요. 죄책감도 있고요. 복합적인 감정이 있었어요.

 

무섭고, 죄책감도 있었던,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죽음이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친구들 이야기니까요. 그 아픔을 갖고 계시는 친구들의 부모님도 보시는 거고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저 역시도 좋아보이지는 않았는데요. 점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픔을 숨기려고만 하면 절대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월호도 똑같잖아요. 결국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야기하면 사회가 바뀌잖아요. 저도 큰 의미에서는 제 이야기가 그렇게 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글을 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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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죠


호주의 바나나 농장에서 너무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고된 시간들인데요. 그곳에서의 각오는 어떤 것이었나요?


사실 바나나 농장에서도 힘들긴 했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육체적으로는 당연히 힘들었지만요. 정신적인 고통을 전혀 받을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워낙 맑은 상태였기 때문에요.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기간이었어요.

 

“다시 꼭 올 곳이 많이 큰일이다”라는 대목이 있거든요. 몇 군데 인상적인 장소를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꼭 다시 간다면 어디를 가고 싶으세요?


사실 혼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고요. 제가 봤던 곳을 가까운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페루의 안데스 산맥 고지에 간 적이 있어요. 빙하로 덮여 있었는데 정말 예뻤어요. 그런 곳은 가까운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죠. 개인적으로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어요. 제일 먼저 가야겠다고 생각한 곳은 킬리만자로 설산인데요. 그게 6년 안에 다 녹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가서 보면 인류 전체에서 마지막으로 킬리만자로의 눈을 본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꼭 가보고 싶어요.

 

한편 위험한 순간도 많았는데요. 아프리카에서는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요.


그때는 무모했던 것 같아요. 바나나 농장에 있을 때나 강도를 당했을 때는 혹시 내가 어떻게 된다 해도 두렵지가 않았어요. 삶에 큰 의미가 안 느껴졌어요. 공허하다는 느낌이 많았죠. 너무 어릴 때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잖아요. 친구의 장례식장을 가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슬프지가 않았어요. 무엇을 이뤄도 감동도 없고요. 그러다보니까 많이 무모했던 것 같아요. 힘들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러다가 사고 당해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무모하게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렇게 돌아다닐 생각은 없어요. 그때는 다리 밑에서도 자고, 막 돌아다녔는데요. 그 상태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하죠.

 

아찔하네요.


진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카이스트가 인생의 거의 최종 목표였거든요. 운이 좋게 딱 카이스트를 들어가게 됐잖아요. 그런데 꿈을 이룬 게 아니라 꿈을 잃은 것 같았어요. 꿈을 이뤘는데 더 이상 성취할 게 없는 거예요. 막상 카이스트에 왔더니 주변 애들은 불행하고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여행을 하고 싶어서 떠났다기보다 여행이 꼭 필요했던 것 같아요.

 

불안해도 불행하지는 않아요


후반부에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잖아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불안이란 어쩌면 인생의 조건일지도 모르고요. 다만 불안을 대하는 태도는 좀 다를 것 같아요. 어떤가요?


불안하죠. 많이 불안한데요. 특히 밤에 불안해요.(웃음) 잠이 안 오니까 또 불안하고요. 그럴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사람은 진짜 약하잖아요. 진짜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하나의 생명체로만 본다면 너무 약해요. 사람이 강해질 수 있는 건 생각과 신념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생각과 신념이 강해지면 당장 불안해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계속 고민을 하면서 신념을 쌓아나가다 보니까 불안해도 불행하지는 않아요. 불안해도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게 있느냐 없느냐인 것 같아요. 불안한데 믿고 있는 것도 없이 막막하면 그게 불행으로 이어져요. 불안해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버틸 수 있어요.

 

책 전반에서 퍼져 있는 감각은 자유로움이었어요. 해방감뿐 아니라 어떤 선택도 할 수 있다는, 어떤 삶도 가능하다는 넓은 의미의 자유로움이었는데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유를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세요?


단기적으로는 쉽지 않겠죠. 수십 년에 걸쳐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되어 온 거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십 년 안에 이런 세태가 바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요, 제시해주는 사람이 생기면 언젠가 바뀔 것 같아요. 우리사회는 한 길만 옳다고 제시하잖아요. 교육에서부터 그렇죠. 그러면 서열이 생겨요. 사람이 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닌데 길은 하나니까요. 사회가 길이 여러 개 있다고 제시해주면 언젠가는 그 길이 모두 인정받는 길이 될 것 같아요.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인가요?


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 이야기마저 슬픈 결말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요. 말하자면 카이스트에서 퍼스트 펭귄으로 바깥에 뛰어들었는데 퍼스트 펭귄이 잘 되지 않으면 누가 계속 뛰어들려고 하겠어요. 제가 잘 되어야죠.(웃음)

 

슬픈 결말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금 많이 하는 고민은 뭐예요?


신념은 잡았고, 지향하는 방향도 있는데 스스로 아직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작가로 살기 시작했지만 아직 스스로를 작가라고 말할 순 없는 것 같아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요. 스스로를 훈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 어려운 글을 쓰는 건 아니긴 한데요.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으면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은 그게 제일 두려워요. 사람들은 늘 단편적인 것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잖아요. 제가 이걸 하고 싶어도 당장 글을 그렇게 잘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의지를 꺾으려는 경우도 많이 나타나겠죠. 제가 그걸 맞설 순 없지만요. 스스로 실력을 키우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해요.

 

작가로서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은 어떤 것인가요?


많은 삶의 경우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 내 삶의 걸림돌들이 작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은 삶의 경우를 보여주는 글을 쓰고 싶어요. 이번에는 그냥 저의 이야기였는데요. 다음에는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지금 한국 사회가 규정한 행복이나 성공만을 따르지 않게 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바나나 그 다음,박성호 저 | 북하우스
지금까지의 삶이 옳은 것이라고 믿으며 모두가 부러워하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는 깊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과감히 떠났고 결심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황보름 “책 때문에, 더 단단하게 덜 흔들리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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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겠습니다』에는 책을 읽는 53가지 방법이 실려 있다. 저자의 바람은 소박하다. “독자들이 책 읽는 재미에 살폿이 빠져들면 좋겠다”는 것. 그녀는 ‘책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고민했고, 결국 한 권의 다이어리 같은 책을 완성했다. 첫 장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1년 53주에 맞춰 각 꼭지와 함께 위클리플래너를 수록했다. 뒤편에는 독서감상노트를 덧붙여 놓았다. 덕분에 『매일 읽겠습니다』안에서는 일상과 책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읽기로 채워지는 하루하루가 기록된다.

 

누군가에게 책은 넘어야 할 산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장 즐거운 놀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종종 이 행위의 의미를 묻는다. 무엇을 위해 독서를 하는가. 저자는 ‘책의 쓸모’에 대해 명확하게 말한다.

‘너는 책에 무얼 바라니?’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게 이어진다. 책을 읽으며 단단해지길 바란다. 덜 흔들리고, 더 의젓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오만하지도, 순진하지도 않게 되길 바란다. 감정에 솔직해지길, 하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길 바란다. 거창하게는 지혜를 얻길 바라고 일상생활에서는 현명해지길 바란다.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을 알게 되길 바란다. (『매일 읽겠습니다』 121쪽)

 

당신 역시 같은 이유로 책을 읽고 있다면, 혹은 책 속에서 같은 것을 찾고자 한다면, 한 해의 시작을 『매일 읽겠습니다』와 함께해도 좋을 것이다. 한 주에 하나씩, 독서의 재미를 맛볼 수 있다.

 

황보름 저자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한다. “독서가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사람” 그리고 덧붙인다. 책에 관한 책과 이야기를 좋아해 책에 관한 책까지 쓰게 됐다고.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녀는 휴대전화를 만드는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회사를 그만뒀고, 가능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매일 읽겠습니다』에 담긴 일상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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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머앱과 함께하는 ‘틈틈이 독서’


다이어리처럼 쓸 수 있는 책이에요. 독자들의 감상이 덧붙여지기를 바라셨나요?

 

네. 처음에 제가 투고할 때 제목이 ‘책과 가까워지는 방법’이었어요. 제 글을 읽고 독자 분들이 책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생각했었거든요. 어떻게 하면 책을 더 가깝게 읽을 수 있을까. 거기에 출판사의 아이디어가 더해지면서 다이어리 컨셉으로 나오게 된 거예요. 책을 읽고 감상을 쓰는 습관이 들면 즐거운 독서 체험이 되는 것 같고, 그러면서 더 읽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1년 동안 갖고 있을 수 있는 책을 만들게 된 거죠.

 

두 가지 버전으로 출간됐어요. 민트와 핑크, 서로 다른 색의 겉표지를 가지고 있죠?


출판사 아이디어인데요. 대표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친구랑 한 권씩 나눠서 감상을 적고, 1년이 지났을 때 바꿔서 읽으면 좋겠다고요. 그런 생각이 표지에 반영된 것 같아요.

 

책에도 독서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다른 사람과 감상을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죠. 책을 읽다 보면 자신 안에 어떤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그걸 혼자 담고 있는 것보다는,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더 재밌는 것 같아요. 계속 책을 읽는 동력도 되는 것 같고요.

 

“생각의 부딪침”이 독서모임의 가장 큰 묘미라고 하셨어요. 때로는 상대에 의해 내 의견의 허술함이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두려운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사실 두려워요. 그런데 독서모임을 나가기 전에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토론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고, 모임에 가서도 말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요. 계속 하다 보니까 익숙해지더라고요. 사실 지금도 두려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지경이 넓어지는 효과도 있죠?


그렇죠. 혼자 생각하다 보면 그게 틀린 건지 맞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심지어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그 생각을 고수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 의해서 생각이 한 번 무너지면, 기분은 나쁘지만, 그것만의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쾌감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감상을 나누는 경험을 많이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책이 나오는 데 <채널예스>가 작은 영향을 미쳤더라고요(웃음).


엄청 큰 영향이죠. 제가 <채널예스>에 실린 김정옥 어떤책 대표님의 글을 읽었는데, 내용이 정말 좋아서 약간 울컥했었어요. “글 쓰는 일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고 쓰셨는데, 그 문장에 코가 시큰해졌어요. 그래서 투고를 했죠.

 

부제가 ‘책을 읽는 1년 53주의 방법들’입니다. 53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가장 좋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가장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 있는데요. ‘타이머앱’을 사용하는 거예요. 요즘에는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거든요. 예전에는 한두 시간 읽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었는데요. 최근에는 집중력이 부족하고, 또 연말이라 산만해지기도 해서, 거의 매일 타이머앱을 사용하고 있어요.

 

20분 단위로 사용하신다고요.


네, 20분 동안 앱을 켜놓고 책을 읽고 시간이 다 되면 끊어요. 짧게 텀을 갖고 다시 20분 동안 책을 읽을 때도 있고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집중력이 산만한 기간에는 잡생각들이 많으니까, 그럴 때는 타이머앱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내 독서의 팔 할은 ‘틈틈이 독서’”라고 쓰셨어요.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그렇죠. 보통은 한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야 책을 읽겠다는 마음을 갖잖아요. 평소에는 바쁘니까 주말이 되거나 여행을 갔을 때 책을 읽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일상에서 매일 읽지 않는 분이 주말에 카페를 간다고 해서 책을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여행지에서도 그렇고요. 틈틈이 시간 날 때 읽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시간이 10분이든 30분이든 큰 상관은 없는 것 같고요. 저는 시간을 믿고, 어떤 시간 동안 어떤 일을 하는 행위를 믿어요. 내가 지금 이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 것 같거든요. 크게 부담 갖지 않고 하루에 20분, 30분씩 틈날 때마다 읽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요.

 

머리를 말리는 동안에도 책을 읽으신다고 해서 놀랐어요. 가능한가요?


그냥 방바닥에 앉아서 머리를 말리는데요. 그때 앞에 책을 펼쳐 놓고 읽는 거예요. 방에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랄 때도 많아요.

 

‘이런 자투리 시간까지 활용해봤다’라고 말할 만한 게 있을까요?


그 이상의 독특한 틈틈이 독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저는 기다리는 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편이에요. 친구가 늦게 온다고 했을 때도 기다리는 거에 대해서는 별로 화가 안 나요. 책이 있으니까요. 물론 너무 자주 늦으면 화가 나겠지만요. 그런 식으로 틈날 때마다 책을 읽어요.

 

 

제가 변했다면 책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책 읽는 시간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뺏기는 경우도 많잖아요. 작가님도 이 두 가지를 멀리하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게 의지만으로 되나요?


우리 뇌는 더 좋아하는 걸 하게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의지로 방향을 틀려는 노력은 확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내버려 두면 편한 거, 좋아하는 거, 쉬운 걸 하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는 일에는 노력을 하잖아요. 책이 좋고 읽고 싶다면 어느 정도는 노력을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참아야 하는 것도 있고요. 제가 요즘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도 인터넷 때문이고, 최근에 시작한 SNS 때문에 더 집중력이 없어졌어요. 그러다 보면 책을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책을 안 읽고 인터넷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잖아요. 그런 상황을 유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노력을 해야 되는 거죠.

 

구체적으로 시도한 방법이 있었나요?


일주일, 이주일 정도 인터넷을 안 해보기도 했는데요. 오래 가지 않더라고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통제하는 쪽으로 간 거죠. 자꾸 마음을 다잡는 거예요. 그런데 ‘인터넷을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면 스스로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움베르토 에코가 한 이야기 중에 ‘완강한 무관심’이라는 개념을 좋아하는데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에 탐욕스럽게 달려들다 보면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몇 개에만 집중하고 관심을 가지고 나머지는 완강하게 다 무관심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 말 때문에 저는 일상을 조금 단순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밋밋할 정도로 단순하게 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는 거예요. 나머지는 일부러 관심을 끊는 거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읽으세요?


네, 일어나서 20~30분 정도 읽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침을 먹고요. 이후에도 말 그대로 ‘틈틈이’ 읽어요. 요즘에는 저도 한두 시간 동안 계속 읽는 게 잘 안 돼요. 그래서 30~40분 읽고 다른 일도 하다가 또 다시 읽어요. 자기 전에도 읽고요.

 

조금씩 끊어서 읽어도 앞부분이 기억나세요?


한 번에 다 읽어도 잘 기억이 안 나서(웃음)...

 

그건 맞아요(웃음)


어차피 제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전에 읽었던 걸 기억 못한다고 해서 두렵지는 않아요. 간혹 앞의 내용과 이어져야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거든요. 한동안 안 읽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볼 때는 앞에 밑줄 쳐 놓은 부분만 다시 한 번 읽어봐요. 그리고 오늘 읽을 부분부터 다시 읽어요.

 

독서의 의미에 대해서도 많이 성찰하신 것 같아요.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요. 저는 기억보다 중요한 게 변화라고 생각해요. 사실 책을 읽는 중간에 ‘나는 지금 바뀌고 있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제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낀 적도 없고요.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계속 ‘이 사람의 생각이 정말 마음에 든다,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 이런 삶은 어떨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좋은 책들을 저한테 자꾸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요. 제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질문을 받는 건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제 생각인 것처럼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아주 조금씩 삶이 변하는 것 같고요. 지금 제 삶이 과거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거니까요. 다만 제가 정말 변했다면 그게 책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조금 더 단단해지고 덜 흔들리면서 산다면 말이죠.

 

책을 읽을 때 옆에 항상 준비해 두시는 게 있나요?


연필만 있으면 돼요. 저는 연필이 없으면 책을 아예 안 읽어요.

 

외출하실 때마다 그 날 읽을 책을 고르신다고 하셨는데요. 깜빡하고 연필을 안 챙기신 날은 불안하시겠어요.


네. 그러면 책을 안 읽죠. 그렇다고 급하게 연필을 산 적은 없는데, 그냥 책을 읽지 않고 돌아와요. 그런 날은 마음이 계속 찜찜하죠. 굉장히 찜찜해요.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문장을 수집하시잖아요.


그렇죠.

 

『매일 읽겠습니다』의 위클리플래너에 적힌 문장도 직접 고르셨어요?


다 제가 수집한 것들이고요. 어떤 문장이 들어갈지도 거의 다 제가 골랐어요.

 

요즘 화두로 붙들고 있는 문장이 있나요?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이 있어요. 몽테뉴 평전인데요. ‘그는 어떤 충돌도 일으키지 않았다, 평생 출세하려 하지 않았고 그가 한 생각을 찬성해줄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몽테뉴를 설명했어요. 충돌하지 않았다는 말이 외적인 충돌만 의미하는 건 아닐 테고, 안에서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자신을 탐구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타인의 시선을 배제한 사람인 거죠. 그런데 저는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자꾸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을 괜히 미워하고 화도 내고요. 화내는 상황을 정말 싫어하는데, 요즘에 약간 그러고 있었나 봐요(웃음). 그래서 그 문장을 읽고 ‘충돌 일으키지 말자, 출세하려고 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밑줄 친 문장들을 모으는 작업도 따로 하시죠?


발췌해요. 에버노트에 키보드로 적고요. 급하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는 문장 옆에 점을 찍어서 표시해 놔요. 많은 페이지에 담긴 내용은 다 옮겨 적을 수 없으니까 카메라로 촬영해 놓고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문장들은 발췌하는 거죠. 손으로 다 옮겨놓는 거예요. 책에 점 찍어서 놓은 부분도 다 옮겨 놓고요. 안 그러면 읽은 것 같지 않고, 기억을 못할 테니까요.

 

오늘도 외출하실 때 책을 고르셨나요?


네, 오늘 읽기 시작한 책인데요.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요즘 사람들이 많이 읽는다고 해서요(웃음).

 

SNS를 보면서 다음에 읽을 책을 찾기도 하신다고요. 『산책자』도 그 중 하나인가요?


연말이다 보니까 ‘올해의 책’ 같은 걸 많이 선정하잖아요. 몇몇 목록에서 『산책자』를 본 것 같아요. 그래서 읽게 됐는데요. 번역을 배수아 소설가가 하셨더라고요. 제가 번역에 조금 예민한 편인데, 소설가 분이 번역했다고 하면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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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단에 기대어 책을 고를 것


“뒷부분 내용이 더는 알고 싶지 않으면 큰 고민 없이 책을 덮는 편”이라고요. 그러면서 ‘지금은 틀리고 나중에는 맞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셨어요. 예전에 볼 때는 별로였던 책을 다시 읽기도 하세요?


『월든』이나 『장미의 이름』이 그런 경우예요. 『월든』은 20대에 읽었을 때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앞부분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재미도 없었는데, 다시 읽으니까 너무 좋아진 경우예요.

 

『장미의 이름』은 100페이지까지 읽기가 힘드셨다면서요?


네, 그런데 사실 『월든』이나 『장미의 이름』은 워낙 뛰어난 책이니까 주위에서 많이 이야기되잖아요. 그래서 다시 읽게 된 경우인데요. 읽다가 그만둔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아요.

 

‘공대 아름이’ 출신이시죠(웃음)?


네, 공대 보름이죠.

 

그러네요(웃음).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시고 휴대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근무하셨어요.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싶지 않으셨어요?


그런 생각을 안 했었어요. 평생 책 읽고 글 쓰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진 건 5~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그냥 생각도 못 했어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어렸을 때는 영어가 싫어서 이과에 갔고, 취업이 잘된다고 해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친구들 따라서 원서 내다가 회사에 들어갔어요. 그렇게 사는 게 제 앞에 있으니까 작가가 되거나 출판사에서 일하는 거에 대한 생각을 잘 못했던 것 같아요. 뭘 좋아하는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 같고요. 그런데 회사를 다니면서 이 일이 너무 재미없고 의미 없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어요.

 

많은 직장인들이 고민하는 거죠. ‘여기가 내 자리가 맞나’ 싶고요.


그렇죠. 입사 2, 3년차에 정말 힘들었어요. 그 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 고민했던 것 같아요.

 

‘이건 나와 맞는 일이 아닌 것 같아’라는 걸 깨달으시는 데 영향을 미친 책도 있었나요?


딱 한 권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요. 책을 읽다 보면 너무 당연한 말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사람은 다 자기만의 개성이 있고 자기만의 길이 있다고요.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 그런 문장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내 삶이 문장과 너무 다르니까 자꾸 갈등이 이는 거죠. 그게 제 안에 계속 쌓인 것 같아요.

 

독서의 즐거움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그런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읽기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명사들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책을 읽는 이유’를 말하잖아요. 공감력, 사고력도 늘고 창의력도 키울 수 있고 주체적인 느낌도 얻을 수 있다고요. 독서법 책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런 이야기들이 자극이 되고 동기가 돼서 책을 읽게 되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 ‘내가 책을 읽는 이유’를 찾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 번 찾으면 그 다음부터는 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에 이끌려서 책을 읽었다면,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그 느낌을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순간을 의미 있게 다루는 능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도 다 느끼는 거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느낌에 의미를 부여해보는 거예요. 내가 왜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왜 감동 받았는지, 왜 공감했는지, 내면의 울림을 생각해 보시면 독서의 의미를 찾지 않으실까 싶어요.

 

얇은 책부터 읽기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책을 읽는 것도 좋고 집에 있는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건 나한테 맞는 책을 고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주말 같은 때 서점에 가서 한두 시간 정도 배회하다가 나한테 맞는 책을 고르는 것도 방법인데요. 평소에 책을 안 읽으시는 분들도 목차와 서문, 본문 몇 장을 읽어 보면 ‘이 책은 읽을 수 있겠다’ 싶은 책들이 있어요. 너무 두꺼워서 못 읽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느껴지면 나한테 맞는 책이 아닌 거죠. 내 판단에 계속 기대는 연습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책 선택에 실패했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그 다음 책도 내 기준에 따라서 고르는 것 역시 중요하고요. 저도 요즘에 얇은 책을 많이 읽어요. 동네 서점에 가면 150~170페이지 정도 되는 손바닥만 한 책들이 많더라고요.

 

‘책덕후’에게 추천하고 싶은 독서법도 있겠죠?


그 분들에게는 추천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웃음).

 

그 분들이 모르는 작가님만의 독서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책덕후 분들은 이 책을 공감하시면서 읽으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분이 쓰신 글을 보니까 발췌하는 게 정말 어려운데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의외로 타이머앱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사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도 타이머앱과 발췌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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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담아놓는 것


한 달 단위로 읽은 책의 목록을 작성하시죠? 독서의 양을 늘리는 것에도 욕심이 있으세요?


양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양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양이 질로 전환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욕심을 부리기는 하지만 일부러 빨리 읽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아요. 저는 굉장히 천천히 읽는 편인데요. 목록에 적을 책을 늘리려고 얇은 책을 읽는 꼼수를 부릴 때도 있기는 해요. 그렇지만 책을 빠르게 넘기면서 보지는 않아요. 30분 동안 한 권의 책을 읽고 300분 동안 10권의 책을 읽는 게 독서 양이 늘어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성들여 읽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양이 쌓이는 거죠. 어떤 분들은 한 권 한 권을 양이라고 생각해서 빨리 읽으려고 하시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질로 전환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목록만 채워질 뿐이죠.

 

‘언젠가 이 책을 읽고 말 거야’ 생각하면서도 아직 펼치지 못한 책이 있나요?


읽고 싶은 책은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아직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안 읽어서 읽으려고 사놨고요. 롤랑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도 읽고 싶어요. 읽고 싶은 책은 다 인터넷서점 카트에 넣어 놓는데요. 지금 카트에 200권정도 있어요. 읽고 싶으면 우선 다 넣어놔요. 그런 다음에 쭉 보면서 어떤 책을 읽을지 고르고 구입하거나 빌리죠.

 

새해에 만나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한국 소설가 중에서 조해진 소설가를 굉장히 좋아해요. 내년에 조해진 소설가가 책을 내시면 좋겠어요. 그 책은 꼭 읽고 싶어요. 그리고 올해 『랩걸』을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요. 호프 자런의 책 중에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게 『랩걸』하나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작품도 번역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 딱 한 작품만 번역된 작가들, 그 분들의 다음 책도 기다리고 있죠.

 

‘한 해의 시작과 함께하면 좋을 책’을 한 권만 꼽는다면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다시, 피아노』라는 책이 있어요. 가디언 편집국장을 지낸 저자가 쓴 책인데요. 엄청 바쁜 한 해를 보내면서 하루에 20분씩 피아노를 연습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워낙 글을 잘 쓰시는 분이라 당연히 읽는 재미도 있고요. ‘틈틈이’가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알게 돼요. 바쁜 아침에 딱 20분 동안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가진 힘, 그 20분이 이후의 시간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 매일 20분씩 1년을 하고 나서 이 사람이 성취한 결과, 이런 걸 볼 수 있거든요. 연초에 너무 부담스러운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20~30분 정도 내가 뭘 재밌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미로 이 책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내년에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54번째 책 읽는 방법’도 있을까요?


책에서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했었어요. ‘깊게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고요. 저는 아직 넓게 보고 있는 중인데요. 제가 좋아서 이렇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조금 깊게 들어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심리학이나 역사 같은 하나의 큰 학문일 수도 있는데요. 계속 하고 있는 생각이에요. 그게 내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책에 53개의 글이 실려 있어요. 1년 동안 한 주에 한 꼭지씩 읽어도 되지만, 꼭 시간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책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요?


우선 한 번 다 읽고 나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감상을 쓰실 때 한 꼭지씩 읽어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못 기다릴 것 같아요. 한 주에 한 꼭지만 읽는 걸 못할 것 같은 느낌인데요. 한 번 책을 다 읽으시고 어떤 책인지 느낌을 받으시면, 그 뒤에는 따라가시면서 재독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일주일에 한 꼭지씩만 읽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읽는 방법은 독자 분들이 결정하시는 건데, 한 번은 책 전체를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 안에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담아놓고 사는 게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책 한 권 한 권마다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하나씩 내 안에 담는다고 생각하시면 책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으실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이라는 책이 있어요.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가 독서를 통해서 성장하는 이야기예요. 그 소설에서 아이의 할머니가 아이의 엄마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는 은밀한 세계를 가져야 해, 그래야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해도 상상의 세계에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인데요. 제가 생각할 때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책이나 이야기를 우리 안에 담아놓는 게 내가 나를 위로하는 일인 것 같아요. 내가 내게 힘을 주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책 읽기가 덜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매일 읽겠습니다 (핑크)황보름 저 | 어떤책
타이머를 20분에 맞추고 책에 완전히 몰두하고, 머리카락을 드라이어로 말리면서도 책을 읽고, 밑줄 친 문장들을 두세 시간에 걸쳐 옮겨 적는 황보름 저자의 이야기가 책을 읽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책 읽는 이적, 노래 부르는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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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의 복귀, 신곡 작업을 하느라 여간 바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띄엄띄엄할 수 없었던 그림책 작업. 그림 작가도 놀랐고 편집자도 놀랐다. 하기야 이적은 오래전부터 그림책에 관한 애정을 드러내왔다. 책에 관한 유일한 인터뷰를 진행한 날은 이적의 신곡 「나침반」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3곡의 음원이 발표되는 시간, 그 정각에 시작된 인터뷰. 『어느 날,』이라는 그림책 제목처럼 잊기 어려운 날이었다. 이적은 여전히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책 이야기보다 ‘읽는 책’에 관해 말할 때, 말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침대, 화장실, 서재, 마루에서 읽는 책이 다른 만큼 서로 다른 층위의 매력이 가득 찬 이적의 작업들. 어쩐지 이적의 책을 읽은 후에는 그의 음악을 다시 들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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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다’라는 말에서 시작된 그림책

 

2005년 『지문사냥꾼』을 쓴 지 훌쩍 10년이 지났습니다. 두 번째 책이 그림책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

 

작년 여름쯤이었을 거예요. 어느 날 딸아이가 스테이플러로 찍은 빈 종이 묶음을 가져와 책을 만들어달라는 거예요. 쪽수도 정해져 있었어요(웃음). 어떤 걸 그려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별이 나왔으면 좋겠대요. 전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니까, 굉장히 단순하게 표정 위주로 ‘별과 혜성 이야기’를 그렸죠. 만들고 나니 아이가 참 좋아하더라고요, 식구들도 좋아하고. 그래서 두어 달이 좀 지났을 때, 제 페이스북 페이지에 사진을 올렸어요. 반응이 꽤 좋았죠. 수십만 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보자는 출판사분들이 계셨어요. 미팅을 하다가 웅진 편집자 분이 가장 설득력 있게 믿음을 줘서 함께 작업해보기로 했죠.

 

그런데 낸 책은 『어느 날,』이에요.


예전에 써놨던 이야기를 하나 보여드렸어요. 오래전에 쓴 글인데 나중에 그림책으로 내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야기거든요. 글만 모아놓으면 A4 한 장에 꽉 차는 정도지만, 그림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았죠. 다행히 출판사에서도 좋아해줘 내게 됐어요.

 

할아버지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이 글의 시작은 ‘돌아가다’라는 말에서부터 출발해요. 그림책에서는 마지막에 나오는 “그곳으로 돌아가셨대요”에서 나오는 말이죠. 어느 날 문득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누가 사망, 별세, 세상을 떠나면 돌아가셨다라고 말할까. 어디에서 온 사람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걸까?’ 우리가 어릴 때 품는 질문 중 하나가 누군가의 죽음이잖아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고 살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방식으로죽음을 이해하게 되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죽음을 슬퍼하고 허전해하다가받아들이는 모습에 대해 써보고 싶었어요. 행복한 그림책은 아닐 수 있지만,어릴 때 이런 그림책을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죠.

 

유년 시절에 읽은 책 중에 기억에 남는 책이 있나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유독 기억이 났던 책은 스웨덴의 동화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에요. 초등학교 3, 4학년 때 읽지 않았나 싶은데요. 판타지 동화인데 두 형제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마주하는 내용이죠. 어릴 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음 세상이 있다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겠네? 가면 다 만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마 종교가 있는 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해석할 텐데요. 당시 제게는 이 책이 중요한 열쇠였어요.

 

책 제목(『어느 날,』)만 읽으면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되지 않아요. 한 장을 넘기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라는 말이 나오면서 제목이 완성됩니다.


제목은 편집자의 아이디어예요. 처음엔 좀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왜냐면 제 노래 중에 「어느 날」이라는 되게 음산한 노래가 있어서, 이 노래가 연상되며 어색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자꾸 생각해보니 괜찮더라고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로 시작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로 끝나는 것보다는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시작하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역시 책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서 손해 볼 건 없구나, 생각했죠(웃음).

 

주인공 할아버지는 양장점 ‘로열나사’를 운영하셨던 양장사입니다. 할아버지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제가 쓴 글에서는 할아버지의 직업이 나오지 않는데요. 뭔가 옛 느낌이 나면서 품위가 있었으면 했어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있는 모두가 동경하는 그런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사실 이 책의 최초 버전은 할아버지가 유럽 신사 느낌이었어요. 조금은 한국적인 느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수정한 버전이 지금의 할아버지예요.

 

『여우모자』 ,『얀얀』, 『마음의 비율』 등을 펴낸 김승연 작가님이 그림을 그렸어요.


책을 준비하면서 작가님을 몇 번 뵀어요. 그림책으로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너무 좋더라고요. 디테일한 부분에서 의견을 내기도 했는데, 대부분 받아 들여주셨어요. 주장할 부분은 서로 대화를 통해 맞춰가면서 잘 풀어나갔어요.

 

가장 인상적이었거나 좋았던 그림을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일단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에 전면으로 펼쳐지는 부분이죠.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 외에도 소년을 멀리서 응시하다가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런 연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또 계절 감각이 이어지면서 변하는 디테일이 많아서 꼼꼼하게 보면 좋을 그림이에요. 글만 읽으면 1분 안에도 읽을 수 있지만 그림책은 그렇게 보는 책이 아니니까요. 숨은그림찾기까지는 아니지만, 그림의 작은 면면을 살펴보면 색다른 재미가 있을 거예요.

 

완성된 책을 봤을 때, 어땠어요?


녹음을 하던 중에 책을 받았는데요. 받자마자 “어, 되게 좋은데요?”라고 했어요. 사실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걱정이 좀 있었죠. 토도 많이 달았고요. 그런데 완전히 해소가 됐더라고요. 아이들 때문에 저희 집에 그림책이 정말 많은데, 그 그림책들 사이에 있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만듦새라고나 할까요? 굉장히 좋았어요. 뿌듯했고요.

 

‘웅진 모두의 그림책’ 여섯 번째 작품으로 나온 책이에요. 모두의 그림책이란, 어린이와 성인 구분 없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는 뜻으로 보여요.


맞아요. 실은 며칠 전 아는 아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이가 초등학생이니 아버지가 얼마나 젊겠어요? 제 또래겠죠. 마음이 너무 아팠는데, 이 친구에게 『어느 날,』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분이 있어서 제가 편지를 써서 책을 보내줬죠. 사실 책을 만들면서 딱히 누가 읽었으면 하는 특정 대상이 없었는데요. 왜냐면 지금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 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시기가 멀어졌고, 죽음이라는 사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를 지나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어렸던 나의 시절이 있잖아요. 이별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그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책이 됐으면 좋겠어요.


시와 가사는 시와 소설만큼 다르다

 

예전 인터뷰를 보니, 장편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아 그래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웃음)? 글은 꾸준히 써온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니까 생각이 좀 나는데요. 장편 소설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긴 이야기를 써보고 싶긴 했어요. 그런데 제 호흡이 작가들처럼 올인해서 한 작품을 쓰기가 어려워요. 음악도 하고 다른 작업들도 해야 하는데, 소설이라는 장르가 잔재주를 갖고 접근할 순 없는 거잖아요. 그래선 안 되고요. 몇 번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아직은, 아니면 영원히 어려울 것 같아요. 가사를 쓰는 사람에게 교향곡을 쓰라고 하면 ‘어, 이거 어떻게 쓰지?’ 하는 것처럼, 짧은 호흡으로 쓰는 글이 제게 맞는 것 같아요.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썼다는 「엄마의 하루」란 시를 보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나요. 아들이 본 엄마의 일상이 너무 가깝게 느껴졌거든요. 시를 종종 쓰진 않나요?


그때 이후로는 쓴 기억이 없어요(웃음). 몇 개는 더 썼을 텐데 크게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별로였던 것 같아요. 제가 가사를 쓰지만 시와 가사는 굉장히 달라요. 시와 소설이 다른 만큼, 다른 것 같아요. 두 장르 모두 운율이 있으니까 비슷한 게 아니냐고들 하는데, 굉장히 달라요. 노래는 곡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가사를 붙이거든요. 들어갈 수 있는 단어의 한계가 있는 셈인데, 곡의 흐름에 맞지 않게 가사를 쓰면 노래가 다 깨져요. 가사는 곡을 떠나서 쓸 수 없는 거죠. 도입이 서정적이더라도 후렴구에 들어가서는 폭발하는 것처럼. 그런데 시는 흰 백지 위에 쓰는 작업이잖아요. 굉장히 다를수밖에 없죠.

 

요즘 재밌게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최근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은 프랑스 소설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이에요. 책에 대한 책인데요, 자유로운 책읽기 교육에 관해 쓴 에세이죠. 왜 어렸을 때는 책을 그렇게 좋아했던 아이들이 학교에만 가면 책을 멀리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책을 읽게 되는가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쭉 써 내려간 책인데 정말 재밌어요. 또 며칠 전에는 서점에서 책을 여러 권 사왔는데, 미국 작가 ‘로스 맥도널드’의 『소름』을 이제 거의 다 읽었고 조선희 씨가 쓴 장편 소설 『세 여자』도 인상 깊게 읽었죠. 또 일본에서 나온 『90세, 뭐가 경사냐』를 읽었는데, 올해 일본에서 1위를 한 책이에요. 굉장히 유쾌한 할머니가 쓴 이야기인데, 늙는 걸 막 짜증 내시더라고요(웃음).

 

지금까지 한 질문 중에 가장 거침없이 답변한 것 같아요.


제가 좀 책을 중구난방으로 읽는 편이에요(웃음). 아, 그리고 지금 걸쳐서 읽는 책이 하나 더 있는데, 『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란 책으로 되게 재미있어요.

 

9세와 6세의 딸 둘을 둔 아빠니까, 그림책도 자주 읽어주겠죠?


자주 읽어주죠. 자꾸 읽어달라고 하고요. 사실 제가 라디오 DJ를 좀 오래 해서 콩트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는 극적으로 읽어주는 편이죠(웃음). 물론 피곤할 때는 툭툭 읽어줄 때도 있고요. 큰애는 초등학생이니까 이제 책을 수월하게 읽지만, 그래도 부모가 읽어주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완전히 성인처럼 책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혼자 읽기와 함께 읽기가 같이 가는 게 좋다고 들었어요.

 

딸들은 『어느 날,』을 어떻게 읽었나요?


아이들은 슬픈 이야기라고 말하더라고요. 등장인물과 실존 인물을 연결시키진 않는 것 같고요. 굉장히 슬픈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책 뒤표지에 있는 QR코드를 하루에 10번을 찍더라고요. QR코드를 찍으면 제 목소리로 읽어주는 책을 들을 수 있거든요. 둘째 아이가 집에 손님이 오면 “잠깐만요” 하면서 책을 가져와 이걸 들려줘요. 태어난 지 5년이 된 아이가 QR코드를 쓰는구나, 되게 신기하면서도 웃기기도 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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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에겐 ‘자뻑’이 필요하다

 

오늘, 음원이 공개되는 날이에요. 4년 만의 컴백이라 긴장이 좀 될 듯해요.


아무래도 조금은 긴장이 되죠. 망하면 어떡하나 싶고(웃음).

 

연말 공연은 이미 만석이던데요.


공연은 아무래도 오랜 팬들이 많이 오니까요. 그런데 음원은 모르겠어요. 제가 애초에 차트에서 막 1등 하는 가수는 아니니까요. 시간이 걸려서 사랑받는 걸 여러 번 겪어서, 다른 가수보다 여유는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자신감이 중요한데, 이번 노래들이 장기적으로는 제 중요한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차트가 높지 않더라도 마음이 크게 힘들진 않을 것 같아요.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주제곡이었던 「걱정 말아요 그대」가 지금까지도 많이 들려요. 드라마가 종영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말이죠.


아시겠지만 이 노래는 2004년에 전인권 선배님이 만든 곡이에요. 편곡을 하면서 제가 불렀는데, 워낙 히트해서 제가 4년 동안 곡을 발표하지 않은 걸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요(웃음). 저도 사랑받았고 전인권 선배님도 행복해졌고, 좋았던 곡이죠. 이 곡이 별 반응이 없었으면 새 앨범 작업에 더 속도를 냈을지도 몰라요. 그동안 곡은 계속 썼거든요. 어떻게 보면 쟁여놓은 셈인데, 이번 앨범은 시즌에 맞게 유사한 느낌을 가진 곡들끼리 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앨범을 내느냐, 싱글을 내느냐, 미니를 내느냐. 이것 사이에서 고민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이번에는 저로서도 처음 시도하는 거예요.

 

얼마 전에 JTBC <한끼줍쇼>에 출연해서 한 청년을 위해 「말하는 대로」를 불러줬잖아요. 이 노래에 특히 감정 이입을 깊이 하는 20대들을 많이 봤어요.

 

<무한도전> 때문에 만들게 됐지만 저한테도 참 좋았던 노래예요. 확실히 지금 젊은 세대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힘들 수밖에 없고요. 간혹 조언을 해달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저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어쨌든 제 세대에서는 부모 세대보다 더 잘 살 거라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세대는 그게 잘 안 보여요. 이전 세대의 누구도 맞닥뜨리지 않았던 절벽이 있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다만 응원할 수밖에 없죠. 이번에 발표하는 노래 「나침반」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쓴 곡이에요. 그래도 아직 우리 주변에는 가족과 친구, 동료가 있으니까 이 사람들을 붙잡고 가자는 의미죠.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있을까요?


자뻑이 좀 세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자뻑이 센 친구들이 음악을 오래 하더라고요. 저도 데뷔할 당시에는 자뻑이 있었거든요(웃음). 그래서 자신 있게 데뷔했는데, 막상 하고 나서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충격받았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자뻑이 없었더라면 데뷔를 못했을 것 같아요. 습작만 10년 동안 하다가, ‘내 갈 길은 이게 아니구나’ 했겠죠. 어떻게 보면 이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의 폐해거든요. 물론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상황도 있지만, 음악 같은 분야는 ‘내가 최고야’라는 마인드도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발라드든 록이든 힙합이든 어떤 장르를 넘어서도요. 갑자기 자뻑을 갖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 자기 음악에 있어서는 약간 건방져도 된다는 느낌 정도라고나 할까요?

 

꽤 오랫동안 심야 라디오를 진행했는데요. DJ로의 복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좋은 DJ가 되려면 충분히 감정적으로 청취자들과 밀착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심야에 음악을 듣는 청취자들과 깊게 소통해야 하는데, 저는 이 점이 좀 부족하게 느껴져요. 말하는 것부터 그렇잖아요. 정리하는 느낌, 말하자면 달변인데 이런 특징이 DJ로서는 썩 좋지 않아요. 더듬더듬하고 문장이 툭툭 끊겨도, DJ에겐 ‘아이고, 어떡해요~’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하죠. 제가 청취자로서 기대하는 DJ의 톤일 텐데요. 저는 좀 부족해요. 성격이 그렇지 않다면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힘들고요. 그래서 청취자들을 위해서라도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노래하는 느낌과는 좀 다르겠죠?


다행히 노래할 때는 다른 것 같아요. 감정적인 밀착이 느껴지거든요. 저부터 노래에 훅 빠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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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만 말고 늘기도 하자

 

예전에 박혜란 선생님을 인터뷰하면서 물은 적이 있어요. ‘여성학자’보다 ‘이적 엄마’로 더 자주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떤지?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아요. “이적이 지금까지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니, 기분이 좋다”고요. 가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는데요. 박혜란 선생님이 자녀 교육 강연을 하면 아직도 많은 분이 질문한다고 해요. 가수 이적을 서울대에 보낸 비법에 대해서요.


사실 묘한 게 있어요. 제가 지금 40대 중반이 되었잖아요. 너무 지난 이야기인데 아직까지도 회자가 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좀 부끄럽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웃음) 여전히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으니 물어볼게요. 부모님의 교육 방식 중에 가장 좋았던 게 있다면 뭔가요?


기본적으로 자유방임, 방목형으로 저희를 키운 점이에요. 일단 저희들을 믿어줬어요. 예를 들어, 공부하라고 저희한테 강요하지 않으셨죠. “네가 공부를 잘하면 네가 좋은 거지, 내가 좋을 건 아니야. 내가 좋은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네가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이건 네 일이야”라고 자주 얘기하셨어요. 사실 이 말은 지금 첫째 아이한테도 해주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가혹한 말이기도 하지만, 진짜 사실이잖아요. 하루는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아빠, 내가 시험에서 100점 맞으면 뭐 해줄 거야?”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네가 기분이 좋은 일이니까 그럼 아빠를 뭘 하나 사줘. 아빠가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 아빠가 너한테 뭘 사줄게”라고. 약간 독립적인 마인드가 있어요. 물론 스킨십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하고요.

 

어떤 부모가 그러더라고요. “내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내가 키운 방식으로 키우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고 보람이었다”라고요.


저희 어머니가 청소는 잘 못했어요. 지금도요(웃음). 그런데 항상 저희를 주체적으로 키워주셨죠. “이건 네 삶이고 네가 결정해야 할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또 집에 책이 워낙 많으니까 정리도 안 돼서 책이 막 여기저기 쌓여 있었거든요. 눈에 보이면 읽게 되잖아요. 세계 명작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제목도 작가도 알게 되는 거죠. 나중에 그 책 이야기가 나오면 ‘아, 맞다. 이런 책이 우리 집에도 있어’라면서 읽게 되고, 읽어보고 싶어지고 했던 것 같아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전자책은 꽂아 놓을 수 없어서 아쉽다고요. 되게 마음에 와 닿았어요. 사전도 그렇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자주 하신 말 중에 “사전을 늘 친구처럼 가까이 하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일단 미심쩍으면 무조건 사전을 찾아보라고 했는데, 전자 사전은 딱 원하는 단어만 찾게 되잖아요. 하지만 종이 사전을 찾다 보면, 앞뒤에 있는 단어나 찾아보지 않으면 모를 단어도 보게 되잖아요. 한눈팔기에서 오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들이 생기죠. 물론 이런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장점이 전자책에 있지만, 분명히 없는 것들도 있죠.

 

『어느 날,』을 읽을 미래의 독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신다면요.


책을 보실 때, 숨겨져 있는 여러 그림을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구석구석 찾아보면 재미있는 요소가 참 많은 책이에요.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끝으로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지에 관해 묻고 싶어요.


콘서트에서도 종종 하는 이야기인데요. 늙지만 말고 늘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노래는 하면 할수록 조금은 늘거든요. 그런 게 하나만 있어도 기분이 좋잖아요. 퇴화가 아니라 발전하는 것이 있는 사람, 그런 뮤지션이었으면 좋겠고 정말 좋은 곡을 쓸 수 있기를 바라죠. 아이들한테는 글쎄요? 뻔한 이야기 같지만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아빠였으면 해요.


 


 

 

어느 날,이적 글/김승연 그림 | 웅진주니어
돌아가셨다는 건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라고, 그래서 슬픈 거라고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아이는 잘 모릅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승한 “연예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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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의 저인 것 같아요.” 어영부영 TV를 보고 글을 끼적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0대 중반이 된 남자. TV칼럼니스트 이승한이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를 두고 한 말이다. 어떤 독자는 “깔깔 대고 웃었다”고 말했고, 어떤 독자는 “눈물이 엄청 났어요”라고 고백한 이 책. 제목만 읽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꾸 곱씹게 되는 말이다.

 

뮤지션 요조는 책을 먼저 읽고는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며 놀라운 위로의 공격성을 본다. 거리낌 없이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 위로. 끝끝내 읽는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 펜촉을 휘두르며 설득하고 또 설득하는 위로. 혹시 정말로 솔직한 감상을 적어도 된다면, 나 역시 그 위로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추천사를 길게 인용하는 이유는 책을 읽은 후, 이 글에 절절 동감했기 때문이다. 저자 이승한은 “나는 위로에 서툰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대한민국에 그보다 더 연예인을 한 사람,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언제나 보고, 언제나 듣고, 언제나 쓰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이제는 우리가 들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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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아군의 분투기

 

두 번째 책이다. ‘어느 TV 중독자가 보내는 서툰 위로’라는 타이틀이 달렸다.

 

(웃음) 서툴다. 위로를 잘 못한다.

 

하지만 큰 위로를 받았다는 독자들이 많다. 물론 나도.


굉장히 고마운 이야기다. 몇 분의 독자로부터 어떤 대목을 읽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 누구를 울리려고 쓴 책은 아니지만, 내 서툰 위로가 통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 특히 스타들의 열광 팬들이 이 책을 읽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여 더 바랄 수 있다면, 연예인 뒷담화를 좋아하는 사람,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미디어 관계자들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책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스타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이니 우리가 아껴줘야 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다만 스타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기전에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료 시민이기도 하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추천사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 가수 윤종신, 뮤지션 요조의 글이 책 뒷표지에 실렸는데 글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한참 정독했다. 직접 부탁한 글인지?


(웃음) 아니다. 출판사에서 섭외해 주셨다. 윤종신 씨야 내가 <월간 윤종신>에 글을 쓰니까 ‘없는 이야기는 안 하셔도 나쁘게는 안 써주시겠지’하는 생각이 내심 있었는데, 요조 씨와는 개인적인 인연이 전혀 없었다. 요조 씨가 추천사에 “이 지독한 아군의 분투기”라고 써주셨는데 이 문장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가 글을 쓸 때 가졌던 자세가 이런 거였지, 생각이 들어 무척 고마웠다.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 TV비평, 연예인에 관한 책인데 제목만 읽으면 감을 잡기 어렵다.


원래는 조금 딱딱한 제목으로 책이 묶일 뻔했는데, 편집자 분이 “글의 따뜻한 부분, 위로하려고 하는 부분을 살려보자”고 했다. 그래서 책의 방향이 달라졌다. 우리끼리의 표현인데, ‘낮에 읽는 책에서 밤에 읽는 책’으로 헤드를 튼 거다. 농담 삼아 ‘TV가 선생이다’ 이런 가제도 있었는데, 에세이집이기 때문에 직설적인 느낌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말랑말랑한 느낌의 제목은 왠지 거짓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러다 소녀시대 효연 씨를 다룬 챕터의 제목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이면 어떨까 싶었다. 정보 없이 제목만 읽으면, 무슨 ‘춤꾼 외길 인생 17년’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웃음)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되게 비슷한 제목의 책이 열흘 정도 뒤에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넌 너의 춤을 추면 돼』아닌가?


재밌었다. 이런 우연이 있다니. (웃음)

 

제목 이야기를 다시 덧붙인다면.


주변에 보면,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게 늘 멋있어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가끔 헛다리도 짚고 넘어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는데, 그 모든 게 당신의 춤이라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첫 책 『예능, 유혹의 기술』은 자기계발 분야로 책이 소개됐더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본 기획, 설득의 기술을 논한 책이었는데, 이번 책은 느낌이 확 다르다. ‘이승한’이라는 사람의 모습, 생각이 담긴 책으로 느껴졌다.

 

아시겠지만 이번 책은 2013년부터 <한겨레>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에 연재했던 글은 모은 것이다. 예전 책이 내 특정한 관심사, 생각을 담은 책이라면,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는 지난 5년 동안의 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내 분신 같다는 느낌도 든다.

 

들개이빨의 만화가 수록됐다. 공저인 셈인데 어떻게 진행됐나?


신문 칼럼을 쓸 때는 보도용이니까 연예인 사진을 써도 됐는데, 단행본 출간은 사진을 사야했다. 사진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일러스트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작가의 그림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목소리를 가진 그림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 들개이빨 작가를 추천했다. 평소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먹는 존재』로 ‘2014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터라, 노골적으로 잘된 친구 덕 좀 보자고 생각했다. (웃음) 계약도 인세를 나눠서 했다. 글에 귀속된 그림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명확하게 가진 만화니까 공저자로 참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들개이빨의 에필로그가 특히 좋았다. 사실 처음에는 혼자 써도 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에필로그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책의 서문을 다시 읽게 된 계기도 됐고.


나도 에필로그를 참 좋아한다. 약간의 스포일러성이 있어서 “이런 장면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안타까운데, 들개이빨 작가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여운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 같다. 출간하고 북 콘서트를 여는데 독자 분들이 “들개이빨 작가님도 오시냐”고 많이 물었다. 아쉽게도 작가님이 은둔 지향의 삶을 살고 계신다.

 

수록한 글은 어떤 기준으로 골랐나?


어떤 한 사람의 재능을 칭찬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글은 배제하려고 했다. 어쨌든 독자들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한 번 투사해볼 수 있는 글을 고르려고 했다. 또 세 번째 장에서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이야기, 한국 사회의 편견에 맞서는 이야기를 넣으려고 했다. 처음 책을 기획할 때 준비했던 성격이 남아있는 챕터인데, 아픔 마저도 진정성을 증명해야 하는 지금, 동시대인들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무척 크기 때문이다. 또 내가 부족했던 부분, 이를 테면 가수나 배우라고 이야기하면 되는 것을 굳이 여가수, 여배우 등으로 성별을 지칭했던 내용을 수정했다. 어떤 문제를 의식하고 조심하다보면, 다른 한 쪽은 무신경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한 쪽에서 안도하느라 미처 살펴보지 못한 부적절한 용어들이 있었다. 교열을 봐주신 선생님이 굉장히 잘 잡아 주셨다. 편집자 분이 “이 정도면 비문이 거의 없었다”고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는 아직 멀었구나’ 생각했다.

 

연예인을 주제로 쓰는 글은 굉장히 흥미롭기도, 조심스럽기도 하다. 호감 가는 행동을 포착해 글을 썼는데, 몇 달 후 굉장히 실망스러운 행동을 하기도 하고. 아무리 구체적으로 촘촘히 보려고 해도, 어떤 매체를 통해 볼 수밖에 없으니까 포장된 모습일 때도 많다.


그래서 요즘 누구를 칭찬할 때 망설이게 되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 개그맨 장동민 씨의 장점을 칭찬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는 당시 그가 출연한 팟캐스트를 전혀 듣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몇 개월 뒤, 내 글에 대해 사과하는 말로 또 다른 글의 서두를 쓴 적이 있다.

 

곤혹스러운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종종 그렇다. 그런데 연예인의 언행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보는 것도 다르지만, 행동마다 다르게 보는 측면도 있다. 요컨대 최근 유아인 씨가 벌인 SNS 설전에 대해서 나는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유아인 씨의 섬세한 연기에 대해 쓴 내 글이 무효가 되는 건 아니다. 이를 테면 내가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칭찬했는데 알고 봤더니 되게 이상한 사람일 때가 있는데, 기회가 닿으면 정정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니까 완벽할 수는 없지 않나? 이런 종류의 사각지대가 드러나는 것에 우리는 위험 부담을 갖고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칭찬이 틀린 말이 아니라면, 이 사람이 다른 범주에서 이상한 일을 하더라도 크게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되도록이면 칭찬이든 비판이든 신중하게 하려고 한다.

 

어떤 중견 기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연예인 칼럼을 쓸 때, 젊은 연예인들에 대해 쓰는 건 염려스럽다. 나중에 너무 새로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끼리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요즘 말로 쉴드를 칠 수 없는 일을 내 최애(최고로 애정하는)가 했을 때, 이 괴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 결론은 “작고한 지 오래된 사람의 팬이 되는 게 그나마 안전하다”였는데, 요새는 또 그렇지만도 않다. 사후에 밝혀지는 에피소드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분야든 비슷하지 않을까? 정치인이든 작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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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에 쌓아놓은 걸 채굴하면서 산다

 

요즘 칼럼 연재 일정은 어떻게 되나?


월간으로 쓰는 칼럼이 2개, 격주간이 2개, 주간으로 쓰는 칼럼이 1개 있다. 1월부터 시작하는 방송이 하나 있는데, 고양이를 키우는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다. 원래는 팟캐스트로 하던 방송인데 CBS에서 만든다. 한창 일할 때보다는 일이 좀 줄어서 출판사에서는 좋아한다. 단행본 작업에 좀 집중할 수 있으니까.

 

TV평론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TV칼럼니스트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글 쓰는 걸 직업으로 삼게 된 건, 어떻게 하다 보니까 된 것 같다. 한 커뮤니티에 쓴 글이 여러 통로로 퍼지면서 칼럼을 쓰게 됐는데, 대중문화에 관심은 늘 있었지만 용돈 벌이를 한다는 정도였다. 내가 늦둥이로 태어났다. 그래서 누나들이 이미 선취해 놓은 문화적인 콘텐츠들이 집에 많았다. 자연스럽게 내 또래들이 즐기는 것보다 내 윗 세대들이 즐겼던 문화를 먼저 배우고 익힌 편인데, 이를 테면 박인희 선생님이나 엘비스 노래를 들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도 노래 듣고 책 읽는 걸 좋아하셨고, 그에 따른 영향이 있었는지 나 역시 바깥에서 뛰어노는 일보다는 책을 보거나 TV, 만화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친구들과 농담 삼아 이런 얘길 한다. 유년기에 쌓아놓은 걸 채굴하면서 산다고. (웃음)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한 건 올해로 몇 년이 되었나.


2007년 1월에 <채널예스>에서 ‘땡땡의 요주 인물’이 처음으로 돈을 받고 쓴 글이니까, 중간에 군 복무 기간을 빼면 대략 10년 정도가 되는 것 같다.

 

기자로도 잠시 일하지 않았나?


<텐아시아> 초기 때, 특채로 들어갔다가 9개월 만에 나왔다. 강명석, 최지은 위근우 선배들이 우르르 퇴사하기 전의 일인데. 선배들께는 굉장히 죄송한 마음이 있다. 칼럼을 어느 정도 쓰니까 스트레이트 기사도 조금만 교육하면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는데, 내가 어떤 정보를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서 산출하는 데까지는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회사에서 바랐던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다 보니 서로 좀 당황했다. 적응을 못하고 헤맸는데, 선배들과 이야기해본 끝에 기자보다는 칼럼을 쓰는 게 더 낫다고 판단돼서 퇴사했다. 어떻게든 기자를 만들어보겠다고 선배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다.

 

10년간 목격한 댓글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글이 있다면.


“얼마를 받아야 이 정도로 써주냐”는 댓글을 자주 읽었다. 칼럼 코너 제목이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서 필자 사진 위에 터번을 그려 놓았는데, 모바일에서 기사를 보면 필자 사진이 굉장히 크게 보인다. 네이버 뉴스에서 본 댓글이었나? “이 알라딘 새끼, 또 지 사진 크게 넣었네”도 있었다. 재밌자고 했던 건데, 사진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을 덜 진지하게 보는 것 같아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터번을 쓰는 문화권에서 보면 희화화로 느껴 불쾌해 할 수도 있는 문제니까.

 

쓸데없는 이야기가 주지만, 안 보기는 어려운 게 댓글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안 보려고 하는 편이다. 왜냐면 스타를 다룬 글은 글 자체보다는 ‘자기가 이 사람을 좋아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평가가 많이 갈린다. 내 글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저 스타가 좋아서 내 의견에 공감했을 뿐인데, 내 글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위험하니까. 그래서 되도록 댓글은 안 보려고 노력한다.

 

꼭 챙겨 읽는 글들이 있나?


일단 강명석, 위근우, 최지은 기자가 내 사수들이니까. 그 분들의 글은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김혜리 기자의 글도 좋아하고, <한겨레> 칼럼을 쓰시는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 글도 열심히 본다. 나와 동년배 글쟁이 중에서는 김민하 씨의 글을 챙겨보려고 한다. 가장 저평가된 글쟁이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필가로서 가장 힘들다고 느껴질 때는 언제인가?

 

 

글 값이 안 오르는 게 아니라 점점 싸질 때. 회사 직원인 경우는 조직이 개편된다고 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단계는 아니지 않나. 갑자기 해고당하지 않는 이상. 하지만 프리랜서는 다르다. 사전에 통보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개편 때문에 코너가 사라졌다며 다음 주부터는 글을 보내지 말라는 연락을 갑자기 해올 때가 있다. 다들 바쁘고 어려운 상황이니까 이해되기도 하면서, 글 값이 이렇게 싸지는 건 ‘TV를 진지하게 다루는 콘텐츠를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이 업계가 10년 뒤에도 존재할까? 자주 걱정하고 있다. 

 

TV 출연은 거의 안 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종종 했는데 요즘은 안 하고 있다. 몇 번 이런 경우가 있었다. 내가 잘 안 보는 프로그램이라서, 또는 일정이 바빠서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는데 섭외 전화를 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대체 뭐가 전문 분야냐”고. 그 분은 별 생각 없이 이야기하신 걸 수도 있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공짜로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들이 하대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매체가 코멘트를 따 놓고는 대게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섹시해 보이는 발언만 잘라서 쓴다. 나머지 부분은 자기 의견인 것처럼 기사에 녹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 한 번 더 언급되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걸 느낀다. 요즘은 코멘트만 따간다고 연락이 오면, 죄송하지만 돈이 안 되는 일은 안 하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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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느긋하게 바라봤으면

 

<채널예스>에서 ‘이승한의 얼굴을 보라’를 격주 월요일마다 연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긴 글을 주로 썼는데, 이 칼럼의 경우에는 호흡이 짧다.


이 코너에서는 되도록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려고 한다. 짧은 글에 너무 많은 내용을 눌러 담으려고 하면 읽는 사람도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받는 것 같다. 읽어보신 독자 분들은 아시겠지만 너무 깊게 들어가진 않으려고 한다. 좀 더 함축적으로 쓰려고 노력하는데, 그래서 좀 재밌다. 고민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상쾌한 느낌으로 쓰고 있다.

 

일 때문에 보기 싫은 프로그램도 많이 봐야 할 텐데, 지금은 어떤가? 적응이 돼서 괜찮은지?


예전에 비해서는 조금 덜 본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힘들지 않나? 하지만 역으로 TV가 지긋지긋하고 꼴 보기 싫다고 여겨지면서도, 결국에 내가 위안을 받는 꽤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가 생각보다 괜찮네?’, ‘이런 예능은 생각보다 건전하네? 재밌네?’ 싶을 때, 쾌감을 느낀다. 물론 상황이 급변하면 ‘답이 없구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애증인 것 같다.

 

만약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를 다 읽을 시간이 없어서, 두 꼭지 정도만 볼 수 있다면, 어떤 내용을 추천하고 싶은가.


‘소녀시대와 <다만세>의 10년’이랑 ‘버티는 이에게 기회는 온다 - 황정음’ 편이다. 내가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의 굉장히 많은 부분이 두 꼭지에 함축되어 있다. 황정음 편은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사람이 예기치 못했던 기회를 잡고, 세상에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은 이야기라서, 아무리 실패투성이라도 자신의 값어치를 낮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소녀시대 편은 아이돌 팝이 어떻게 10년을 버티고 버텨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게 됐는지, 그것을 해석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서 대중문화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새 책도 준비 중으로 알고 있다.


두 권이 있는데, 하나는 TV나 영화를 매개 삼아 지난 20년의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책이다. 사회 이슈에 관한 글을 SNS에는 종종 썼지만 단행본은 처음이라 나로서는 새로운 도전이다. 나보다 훌륭하게 쓸 수 있는 작가님들이 많을 텐데, 내가 이런 걸 써도 되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끙끙거리면서 작업 중이다. 50% 정도 썼는데 나머지 50%가 힘들 것 같다. 그래도 2018년 초에는 내려고 한다. 다른 한 책은 TV를 비판적, 혹은 주체적으로 보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쓰고 있는 원고를 마무리 짓고 들어갈 계획이다.

 

앞으로 어떤 칼럼니스트, 어떤 작가로 살아가고 싶은지 궁금하다.

 

글을 쓰면서 하는 생각은 두 가지다. 첫째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내가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사람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사회적인 편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고 노력한다. 이 두 가지를 한 문장으로 이으면 ‘저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방향이 옳은 것 같은데, 한 번 같이 걸어가 보시겠습니까?’ 정도가 될 텐데, 이런 글을 꾸준히 지치지 않고 쓰는 글쟁이가 되고 싶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글이 아니라 나 자신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전제에 두고, ‘하지만 이 쪽이 맞지 않겠습니까?’라고 권유하는 글을 계속 쓰고 싶다.

 

종종 생각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이런 비평은 어렵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한다면.


정보가 유통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니까, 평가도 빨리지는 것 같다. 한 번 평가가 내려진 것에 대해서는 다시 평가를 안 한다는 느낌이 든다. 연예인들은 그걸 더 심하게 겪고 있는 것 같고. 꼭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러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지금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같지 않나요?’라는 물음이 들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즉 ‘연예인을 보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라는 마음으로 묶은 책이다. 너무 빨리 판단하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진득하게 느긋하게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 물론 이래서 내가 늘 핫한 이슈를 놓치고 살지만. (웃음)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이승한 저/들개이빨 그림 | 한겨레출판
그들의 애환과 분투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어느새 그와 닮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하게 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타일러, 김영철 “책 속 표현, 절대 외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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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는 SBS 라디오 <김영철의 파워 FM>의 ‘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 코너에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진미영’으로 불리는 이 코너에서 김영철은 매일 청취자가 보내온 사연을 바탕으로 타일러에게 영어 표현 한 마디를 배운다. ‘인상 좀 펴세요’, ‘근육이 뭉쳤어요’, ‘완전 붕어빵이네요’처럼 간단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법한 표현들을 대화의 맥락과 의도에 맞게, ‘진짜 미국식 영어’로 찾아가는 과정은 좌충우돌, 흥미진진 그 자체다. “미국 사람들은 간략한 표현을 선호”한다는 타일러는 자신이 제시한 표현들을 보면서 독자 역시 “영어를 공부하면 사고가 바뀌게 된다, 하는 경험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책에 등장하는 표현들을 절대 외우지 말라고 한 당부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영어를 오래 공부했어도 한 문장 마음껏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난 어차피 미국인이 아니고, 진짜 미국식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편해지죠.”라는 김영철의 한 마디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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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를 살리는 표현


서두에 타일러 씨가 “가장 미국적인 맛이 두드러진 표현”을 담았다고 적었잖아요. 이 ‘미국적인 맛’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타일러 : 어떻게 보면 ‘그냥 흘러나오는 말’로 표현하려고 애쓴 것 같아요. 한국에서 하는 국어 교육을 보면, 틀에 잡힌 표현들을 많이 쓰거나 문법을 되게 중시하고 올바른 철자나 단어의 유래까지 따지면서 가르치는데요. 영어는 그런 게 별로 없어요. 특히 미국은 그런 게 거의 없어서 그냥 흘러나오는 표현, 그리고 웬만하면 간단한 단어들로 구성된 표현들을 선호했던 것 같아요. 미국 사람들은 괜히 복잡한 말을 별로 안 쓰거든요. 그런 식으로 미국 정서를 살리면서 간단한 표현을 선택했어요. 미국 사람들은 간략한 표현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김영철 : 타일러와의 방송으로 영어가 다시 너무 재미있어졌어요

 

간단한 표현, 중요한 점이겠네요. 방송에서도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어요.


타일러 : 저희가 라디오에서 청취자 분들의 사연을 받고, 그 상황에 맞는 표현을 찾아주는데요. 그 상황 자체를 상상해보고 ‘이게 미국이라면’, ‘이게 미국 사람들이라면’이라는 것들을 생각해놓고 표현을 고민했어요. 맥락의 문화적인 요소를 생각하면서 단어를 선택했죠.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 때문에 표현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었나요?


김영철 : “거의 한국 사람이 다 됐다”라는 표현이 있었는데요. 찾아가기가 어려웠어요. 결국 “You're so Korean.”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타일러는 그랬어요. 한국 사람이 다 됐다는 말이 미국 사람 입장에서는 칭찬도 아닌 것 같고 애매하다고요. 문화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인 거죠. 그래서 결국 ‘so’라는 부사를 사용해서 ‘너 정말 한국적이다’라는 뉘앙스로 “You're so Korean.”이 됐어요. 그렇게 찾아가는 건데요. 찝찝할 때도 있어요.(웃음) 그런데 영어는 그렇게 접근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영어랑 한국어는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저는 이제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를 좀 알 것 같아요.  


타일러 : 그런 게 많았어요. 사회적인 분위기가 반영되는 말일 때 그랬던 것 같아요. 미국 맥락에서는 그런 말을 바로 옮겨서 말하다가는 큰일 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한국 사람이 다 됐다’는 표현도 그렇죠. 그 말을 미국 사람이 들으면 ‘네가 우리 것이 됐다, 네 것이 사라졌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거든요. 미국에서 “You're such an American.”이라고 하면 되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까 어떤 표현을 그냥 옮기면 되는 게 아니에요. 맥락과 의도를 파악해야죠. 의도를 살리는 표현을 찾아가는 거예요. “You're such a Korean.”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어감이 강하니까 그걸 “You're so Korean.” 즉, “아주 한국스러운 면이 있다.”라는 식으로 표현을 바꿔야 하는 거죠. 그런 게 굉장히 어려울 때가 있어요. 미국은 차별 관련해서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많고 하니까요. 그런데 방송을 계속 하면서 간격이 많이 좁혀졌어요.


김영: “그게 말이니 막걸리니?”도 그랬어요. 자꾸 “rice wine.”이 나오니까요.(웃음) 제가 이건 말이 안 되는 경우에 쓰는 표현이니까 “I think it is ridiculous.”라고 해봤어요. 그랬더니 타일러가 좋은 시도인데 그것보다는 “wait, what?”이 더 어울릴 거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여기에도 호흡과 연기가 필요해요. 단조로운 톤으로 하면 그건 또 아니니까요. 저는 그래서 타일러와의 방송으로 영어가 다시 너무 재미있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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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차피 미국인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 정말 영어 공부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공부하는 양에 비해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김영철 씨를 예로 들어 한국 사람들이 고질적으로 하는 실수 같은 것을 꼽아보면 어떨까요?


타일러 : 사실 영철 형은 영어를 굉장히 잘하세요. 그런데 잘한다고 제가 말할 때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말할 때의 기준이 다른 거예요. 한국에서 언어 교육의 기준은 숙달도예요. 얼마나 외웠느냐, 얼마나 숙지했느냐, 하는 거죠. 어휘와 문법을 쫙 나열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거의 채점할 수 있는 정도, 게임에서 포인트를 쌓아가는 것처럼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언어는 활용하는 거죠. 중요한 건, 덜 알고 있어도 그걸 얼마나 다양하게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느냐, 예요. 영철 형은 그걸 다른 분들보다 잘하시는 편이죠. 왜냐하면 실수를 해도 상관없어 하시고.(웃음) 그러니까 실수하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되고요. 이 표현을 했을 때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김영철 : 저도 예전에는 남한테 보여주기 식의 영어를 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시작했어요. 될 때까지 시도하고요.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확실히 한국 사람들은 실수를 많이 두려워하는 편이긴 해요.


타일러 : 한국 사회에서 틀리면 안 된다고 워낙 가르치니까요.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틀에 갇혀서 알고 있는 것들을 다양하게 활용하지 못해요. 정답부터 알고 진행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건 언어에 맞는 게 아닌 거죠. 이게 한국 사람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김영철 : 우리 모두 학원에서 쭈뼛쭈뼛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다음 시간에 얘기해야지, 생각하고요. 근데 다음 시간이란 없는 것 같아요. 틀려도 괜찮아요. 다음에 또 틀려도 괜찮아요. 실수를 줄여가는 거니까요. 저도 분명 타일러가 가르쳐준 표현인데 비슷하게 또 틀릴 때도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거죠. 또 네이티브 스피커가 안 된다는 마음을 갖고 하면 더 편해져요. 난 어차피 미국인이 아니고, 진짜 미국식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편해지죠. 가령 제 영어를 들은 미국인이 “You're english is good.”했을 때 “Thank you.”하면 끝이에요. “No, I don't think so. my english is poor. because...”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웃음) 그걸 타일러한테 배웠어요.

 

타일러 씨가 “콩글리시도 영어다”라고 한 적이 있잖아요.


타일러 : 한국은 ‘국립국어원’이 있잖아요. 영어는 그런 게 없어요. 나라마다 영어가 다르니까요. 영국은 모르지만 미국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더라도 공식적인 ‘국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어요. 주(州)마다 알아서 하는 거고요. 아예 주어(州語)가 없는 곳도 있고, 불어나 스페인어도 같이 주어로 정한 데도 있어요. 영어란 융통성이 있는 거예요. 문법에 맞게 쓰지도 않는 게 미국식 영어고요. 그러니까 콩글리시도 한국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간 영어라고 볼 수 있겠죠. 저는 그것도 영어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적인 맥락이 있을 때 그래요. 제가 맥락을 계속 강조하는데요. 어떤 문화적 맥락은 미국식 문화에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선배’나 ‘후배’ 같은 단어들이 그렇잖아요. 영어권에서 온 유학생들도 그 말을 그대로 쓰거든요. 옮길 수 있는 말이 적당히 없어요. 그런 식으로 말이나 표현을 빌려 쓰는 건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김영철 : ‘진미영’은 진짜 제작진의 승리예요. 이 코너를 만장일치로 타일러와 하자고 결정했거든요. 타일러와 방송하면서 깨우쳤어요. 제가 자꾸 콩글리시로 접근하더라고요. 처음 6개월은 접근 방식이 너무 달랐어요. 가령 식당에서 “여기는 뭐가 맛있어요?”라고 할 때 예전의 저라면 “What is special food here?”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타일러가 미국 영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고 했어요. 미국식 영어는 의외로 간단하다고요. 타일러의 표현은 “What's good here?”였어요.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죠. 보니까 제가 그렇게 해왔더라고요. 장황하게 설명을 했던 거예요. 표현을 줄이는 연습도 덕분에 많이 하고 있어요. 타일러가 그래요. 말이 많아서 그렇지, 형은 어떻게든 한다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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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맞춰서 코너 없어지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여전히 바꾸기 힘든 것, 잘 고쳐지지 않는 건 뭐가 있어요?


김영철 : 문화적 차이 때문인 것 같은데요. 사실 저는 “발품을 팔았다.” 같은 표현을 이제는 방송에서 덜 다루고 싶어요. 한국식 표현 있잖아요. “눈치가 없네요.”라는 표현도 그렇죠. 우린 이런 표현을 잘 쓰지만 타일러는 이에 대응하는 표현은 없대요. 결국 ‘sense’, ‘오감’을 다 고려해서 “You're so dense.”라고 한 거죠. “너 좀 멍청해.” 이렇게 된 거예요. 너무 한국적인 표현을 그대로 옮기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같은 표현 있잖아요.(웃음)

 

처음 코너를 진행할 때보다 많이 두 분의 간격이 좁아졌다고 했잖아요. 지금, 방송을 하면서 신경 쓰고 있는 건 뭔가요?


김영철 : 무엇보다 계속 쉽게 하려고 하고 있어요. 어차피 설명이 어렵거나 제가 전달하기 어려우면 청취자도 어려울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또 철자를 항상 짚으려고 해요. 예를 들어 “small”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방송은 모든 분들이 다 들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예전에 한 PD님이 방송 대본에 ‘화곡’ 같은 지역명이 있는 걸 보시고는 별로 중요한 것 아니니까 ‘마포’나 ‘신촌’처럼 더 잘 알 수 있는 지역명을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기억에 남는 청취자 반응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김영철 : 양희은 선생님이 이 코너를 정말 좋아하세요. 선생님 생신이어서 송은이 누나가 연결해준 적이 있는데요. 선생님이 “영철아, 라디오 너무 잘 듣고 있어. 매일 들어. 너무 재밌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디부터 들으시냐고 물었더니 “타일러. 진짜 미국식 영어.”라고 딱 말씀하시더라고요. “내 흉내도 잘 듣고 있어.”(웃음) 라고 하시면서요. “타일러한테 격한 안부 전해줘.”라고 하시고요. 선생님도 미국에서 6년 정도 사셨거든요. 그런데 이 코너를 좋아하시는 걸 보니, 미국에서 좀 지내셨던 분들도 좋아할 만한 표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또 부담스럽지 않잖아요. 하루 한 표현 정도고요.

 

오늘 방송은 어떤 내용이었어요?


김영철 : “이제 두 다리 뻗고 푹 잘 수 있다.”는 표현이었어요. 제가 바로 “two foot”은 안 나오겠지, 했어요. 맞대요. 저의 시도는 “I can sleep like a baby.”였죠. 그랬더니 타일러가 시도가 너무 좋았다면서 놀랐어요. 그런데 ‘baby’는 아니래요. 아기처럼 잔다는 건 기능적인 면을 말하는 것 같다면서요. 그러면서 타일러가 “잠은 보통 언제 자죠?”라고 묻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I can sleep at night.”이라고 해서 맞췄어요. 타일러가 또 유연함이 있어요. 정확하게 따져서 깐깐하게 하지 않거든요. 거의 90% 되면 맞춘 걸로 해줘요. 거기에 “I can sleep at night.”에 ‘now’를 하나 더 붙이면 좋다고 알려주는 거죠. 아마 그 정도도 맞춘 걸로 해주니까 제가 계속 재미있어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계속 안 된다고 하면 영어가 재미없을 수 있겠지만 안 그러니까요. 그 약간이 또 저를 더 자극시키고요.

 

방송을 위해서 일부러 못 맞추는 척 하는 건 아니죠?


김영철 : 얼마 전에 김지은 아나운서가 다 알면서 안 맞추는 거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근데 진짜 있는 그대로예요. 사실 요즘 자꾸 맞춰서 코너 없어지는 거 아닌가(웃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진짜 맞추면 맞추는 대로 해요. 일단 제 대본은 정답이 없는 페이지가 오거든요. 정답을 안 줘요. 리얼로 하는 거죠.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기가 쉽지도 않고요. 

 

이 책을 그런 방식으로 활용해도 좋겠네요. 타일러의 표현이 항상 뒷장에 배치되어 있으니까 독자도 스스로 한 번 말을 해보는 거죠. 김영철 씨 입장이 되어서요.


김영철 : 맞아요, 그리고 독자가 저처럼 1차 접근을 하지 않아도 돼요. 한 번에 맞출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게 녹록치가 않아요.(웃음) 쉬운 것도 있지만 중간에 어려운 것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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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하면 늘 수밖에 없어요


타일러 씨는 한국어 공부를 주로 어떻게 하셨어요?


타일러 : 무엇보다 책 읽는 걸 일찍부터 시작했어요. 보통 사람들이 언어를 배울 때 중급 정도는 돼야 책을 읽기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안 그랬어요. 아예 초급부터 책을 읽었어요. 왼쪽에 만화 나오고 오른쪽에 스토리 나오는 책들이 있잖아요. 그런 책을 한국어 2급부터 시작했어요. 2급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문법을 모르는 상태거든요. “무엇 한다고 하라고 한다.” 같은 것도 모르는 수준인데 일단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배워지더라고요. 힘들긴 하지만요. 또 사전을 찾지 않았어요. 사전이 언어에는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언어란 습득하는 과정인데 그건 답을 알려줘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깨달아가는 거거든요. 깨달음의 순간들이 있어야 하니까 잘 모르는 걸 들여다봐야 해요. 모르는 단어도 어떤 상황에서 반복이 되면 어떤 내용인지 딱 깨닫게 되거든요. 언어는 그렇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라디오, 팟캐스트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한국어에 어떤 매력을 느꼈던 건가요?


타일러 : 제 세계관을 바꿔줬죠. 일단 어순 때문에 사고의 순서가 뒤집혀야 해요. 어휘 구성 방식도 보면,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도 다르고요. 세계를 보는 시야도 다르잖아요. 조선시대 때는 폐쇄적이었고, 동양 중심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죠. 그런 시선을 서양권에서는 잘 접하기 힘들잖아요. 저는 그걸 언어를 통해 접하다보니 새로운 사고나 세계관이 추가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이 책으로 많은 분들이 영어를 공부하면 사고가 바뀌게 된다, 하는 경험을 하셨으면 해요. 사물을 이렇게 다르게 인지해도 된다는 점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게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인 것 같아요.

 

김영철 씨의 경우는 어떠세요? 영어공부는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김영철 : 2003년, 영어를 제대로, 재미있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3년, 5년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영어를 평생할 거예요. 영어를 친한 친구로 만들기로 했는데요. 영어로 누린 혜택이 너무 많아요. 일단 어느 공항엘 가도 두렵지가 않고요. ‘too much’라는 말을 들을지언정(웃음) 궁금한 건 다 물어봐요. 이게 영어로 인한 저의 가장 큰 힘이죠.

 

지금도 매일 아침 전화 영어를 하신다면서요?


김영철 : 영어가 두 번째 언어이긴 하지만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말하게 됐으면 해요. 전하고 싶은 걸 100%는 전달하지 못하더라도 영어로 나의 생각을 바로바로 말할 수 있게 되길 바라죠. 통역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말하려고 계속 공부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생활화시키고 있어요. 전화 오면 트럼프 얘기 20분 정도 하고, 그러는 거죠. 제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운지 1년이 조금 안 됐을 때였는데요. 어느 날 영어 하는 친구와 말다툼을 했어요. 제가 버벅거리지 않고 탁탁 말을 받아내더라고요. 유치하게 싸웠죠. 그런데 그 날의 쾌감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잊히지 않는 날이에요.

 

방송을 들으면 김영철 씨가 영어를 정말 즐거워하는 게 느껴져요. 그게 인기의 한 비결이기도 할 것 같아요.


김영철 : 제가 힘들게 배웠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청취자 사연을 받으면 제가 옛날로 돌아가게 돼요. 쓰지도 않는 표현을 배우려고 하잖아요. 힘들게 배우고요. 저도 그랬거든요. 하지만 그걸 안 해도 돼요. 아까 말했잖아요. “What's good here?”만 하면 된다니까요. 이걸 배우는 더 나아요. 우리가 너무 문법적으로 해왔잖아요. 그건 정말 제가 너무 너무 많이 팁을 알려주고 싶어요. 15년 동안 영어 공부를 한 선배로서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요. 잠도 많이 자면 늘고, 밥도 많이 먹으면 살이 찌듯이 영어도 계속 하면 늘 수밖에 없어요. 이 책도 사놓고 또 안 보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저는 정말 이 책을 믿고 끝까지 읽으면 대단한 변화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김영철 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요? 이 책의 사용법을 직접 들어보고 싶어요.


타일러 : 이 책이 독자의 생각을 깨뜨렸으면 해요. 책에 수록된 QR코드를 찍어서 팟캐스트도 꼭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이 책을 통해 사고를 바꾼다, 생각을 배운다, 이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이 표현을 꼭 외우라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도 옮길 수 있구나, 이렇게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구나, 라고 깊이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이건 직역한 내용이 절대 아니니까요. 맥락에 따라 표현을 옮긴 건데 그건 또 다양하게 옮길 수도 있는 거거든요. 단어를 보고 그냥 외우면 절대 안 돼요. 이 책을 통해 맥락을 이해하고 맥락 옮기는 방법을 배운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그게 이 책의 제일 큰 덕일 것 같아요.


김영철 : 정답이 있는 책이 아니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타일러 말을 듣고 무조건 이렇게만 표현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언어는 수학과 다른 거니까요. 이 책은 문화에 대한 접근 방식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본 적이 없는 책이에요. 늘 콩글리시로 공부했고, 상황별로 암기해서 봤고요. 그런데 이 책은 영어로 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고 생각해요. 영어 공부를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생각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 책을 통해 영어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요.

 

영어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김영철 : 본인의 한국말을 먼저 점검하라고 하고 싶어요. 한국말을 잘하면 공부했을 때 영어도 잘할 거예요. 언어는 같이 오더라고요. 과묵한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영어를 배운다고 유창해지겠어요. 언어 습관이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영어도 ‘too much’예요.(웃음) 많이 해보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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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모종린 “소상공인 영웅을 골목길로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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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이태원, 성수동에는 정체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은 대표적인 골목상권이 있다. 주말마다 사람이 물 흐르듯 넘쳐나고, 기꺼이 시간과 돈을 쓰면서도 좁은 골목 가게마다 줄을 서는 경험을 즐기고자 한다. 사람과 돈은 왜 넓은 강남으로 가지 않고 좁은 골목으로 모일까? 골목의 어떤 점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가?


모종린 교수는 국제정치경제와 세계화 등을 연구하면서 매력적인 골목길 문화에 대한민국 도시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경험을 모아 『골목길 자본론』을 썼다. 여러 도시의 사례를 비교한 결과 골목상권의 경쟁력의 특징은 ‘C-READI’라는 모델로 수렴했다. 문화 인프라(Culture), 임대료(Rent),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접근성(Access), 도시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 등 여섯 가지 조건이 성공한 상권의 공통 요인이었다. 디자인과 접근성, 임대료 등 가시적인 특성에 기업가 정신, 장인 정신, 정체성, 공동체 정신 등 지역사회 내부의 혁신 의지와 역량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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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 되려면


브런치에서 연재한 내용이 묶였습니다.

 

작년 4월부터 10월까지 글을 올렸고, 지금도 브런치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론 연재도 생각했었는데, 분량을 자유롭게 쓰고자 해서 브런치를 선택했어요. 독자층의 반응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뿌듯했습니다.


그간 『작은 도시 큰 기업』, 『라이프스타일 도시』등 전작에서도 라이프스타일을 다뤘습니다.


『골목길 자본론』도 라이프스타일 연구에 해당합니다. ‘라이프스타일’ 3부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나라에서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인지하면서도 대응이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의 미래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기술 트렌드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왜 라이프스타일은 대응하지 않느냐 이거죠.


3부작이라면,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마지막 내용인가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전체 차원으로 보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라이프스타일 강국’ 정도의 책을 또 내겠죠. 처음에는 지방 소도시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나라 도시가 공통으로 가진 문제를 보려고 했어요.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가치 변화를 감지하는 장소가 골목길이거든요. 도시 라이프스타일의 ‘전시장’으로서 골목길을 다루면 이미 골목길을 좋아하는 애호가층으로부터 호응이 나오지 않을까 했어요.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히는 게 초기부터 의도했던 목표였어요. 사람들은 문화강국을 이야기할 때 보통 문화 예술만 생각하는데, 골목길 라이프스타일이야말로 소비자들의 삶의 수준을 윤택하게 하고, 가치 추구와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기업을 만들어내거든요.


문화경쟁력이라는 말보다 ‘라이프스타일 경쟁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젊은 세대는 라이프스타일의 중요성을 인식하는데 기성세대는 딱딱한 생활 모습을 보이죠.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성공기준과는 좀 다르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단어로 분석해보고자 했어요. 라이프스타일은 또한 도시와 국가경쟁력에 중요하기도 하고요.


다른 나라 도시의 예시도 많이 들었습니다.


바람직한 골목길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준으로 선정했어요. 각 성공 요인이 가장 잘 부각된 골목길을 선정해서 C-READI 모델을 뒷받침할 사례를 넣고자 했어요. 제가 골목길을 좋아하고, 직접 즐겨 가기도 하다 보니 여행을 떠나면서 관찰했던 골목길이 중심으로 들어갔습니다.

 

건물주와 상인은 같은 배를 탔다


골목 상권을 말할 때 즉각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떠오르는데요, 젠트리피케이션보다 듀플리케이션을 우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도시, 재개발, 뉴타운이 듀플리케이션이에요. 강남 모델을 복제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도시 재생은 반대 개념이죠. 박원순 시장이 방향을 바꿔 도시 생활 중심으로 발전시킨다는 게 듀플리케이션 저지 정책입니다. 물론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 때문에 사회적 반감이나 저항은 당연히 발생합니다. 하지만 2016년을 기점으로 임대료 상승율이 둔화됐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도 하강세를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대기업 가게가 독립 가게를 밀어내고 임대료가 상승하고 독립 가게는 내쫓긴다는 개념이잖아요. 익선동이 거의 마지막일 것 같은데요, 삼청동 상권이 확장되면서 북촌, 서촌을 지나 익선동까지 퍼진 현재 상태가 거의 말기이고, 전체적으로 보면 진정되는 과정입니다.


한국에서는 임대업자를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서가는 건물주들은 이미 건물에 투자를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콘셉트의 가게를 찾아서 입점을 시키고요. 건물주도 트렌드를 알고 경쟁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워요. 2015년 이후 부동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건물 하나의 승부가 아니라 골목상권 전체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건물주도 상인도 장인이 되어서 협력하고 공동체를 구축해야 해요. 역설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피해가 골목상권 브랜드의 이해도와 경각심을 높여서 오히려 협력의 가능성을 키워줬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같은 배를 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보다는 시장 환경이 우호적이에요.


정부 차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으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는데요.


2015년에 이미 서울 종합대책이라는 발표를 합니다. 지금은 아주 영세한 세입자만 보호를 받는데, 중간 규모의 업자도 10년 동안 영업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법안이 계류 중이에요. 이미 보호를 받는 쪽에 추가로 보호를 한다고 해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대책은 소상공인이 협상력을 높여야 하는데, 건물주가 갑으로 행세하고 있지만 모든 가게가 내몰리는 게 아니라 경쟁력 있는 가게는 버티거든요. 그러니 소상공인들이 경쟁력을 기르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제보다는 경쟁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인가요?


골목상권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는 게 제 주장입니다. 골목길을 저부가가치, 생계형 산업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실업 구제 차원의 시혜성 지원, 복지 정책으로만 해결책을 바라보는데, 골목 산업을 우리나라 산업의 성장 동력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업 창업만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소상공인 창업은 시혜적으로 지원해요. 소상공인이 많이 나와서 중소기업, 대기업이 되는 것이 이상적인 기업생태계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 많은 대기업이 다 소상공인에서 출발했죠.


소상공인이 경쟁력을 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상공인 영웅을 골목길에 많이 투입하자는 게 제 의견이에요. 일본도 소상공인의 힘이 강하잖아요. 웬만한 규모의 도시에 홍대 같은 골목상권이 들어가는 걸 안 좋아하는 도시가 어디 있겠어요. 골목 장인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못 만드는 거죠. 지역 잡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결국에는 지역 정체성에 관한 고민으로 수렴하는 거죠. 소상공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 즐길 수 있는 소상공인 가게가 늘어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창조적인 가게가 필요하지요.


장인 기획 모델도 소개해 주셨습니다.


직업 학교나 마이스터고등학교의 교육이 자격증 중심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쓸 기술은 못 가르치고 있어요. 장인도 부족하니 장인에게 직접 교육을 받기는 어렵고, 음식점뿐만 아니라 모든 골목상권 업종이 그렇죠. 셰프뿐만 아니라 갤러리나 옷가게들도 모두 장인이 필요합니다. 골목 산업을 창조 산업, 문화 산업으로 인정하면 골목길에서 스타가 나와요. 연예기획사에서는 연예인을 키우고, 출판사는 작가를 키우는 데 골목 스타를 키워주는 기획사가 없어요. 장진우 학교와 같은 골목 상인 기획은 비공식적으로 존재하지만, 장인을 발굴해서 세계적으로 진출하는 기획사는 존재하지 않아요. 헤이그라운드나 루트임팩트 등의 민간 기관들이 가장 기획사에 근접한 모델인데, 지원 대상을 소셜 벤처에서 일반 골목 업종까지 확대하면 조금 더 재능 있는 소상공인들이 기회를 얻지 않을까 합니다.


기획사를 꾸린다면 정부차원인가요? 민간차원인가요?


선진국에서도 소상공인 창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이 나오지만, 이제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수익성 문제가 있기도 하고 하니 민간이 바람직하지만 정부도 지금보다는 체계적으로 지원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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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의 문화를 전시하는 장소, 골목길


골목상권마다 각자 다른 특징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는데요.


홍대, 이태원, 삼청동 등의 대표 상권이 있고, 성북동이나 봉천동 등의 지역거 점상권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는 동네 근린상권이 있겠죠. 세 번째라면 정겹고 따뜻한 추억의 골목상권이어도 상관없지만, 제가 생각하는 골목은 새로운 한국의 경쟁력이 되어 줄 첫 번째 의미에서의 골목이에요. 홍대, 삼청동-북촌, 남산-해방촌, 성수동은 이미 준비되어 있어요. 이미 글로벌 중심의 골목상권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소규모 골목 정책과는 달라져야 해요. 변두리는 생활환경 개선으로 가고, 대표상권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야죠. 시부야와 경쟁했을 때 건물 경쟁력이 없어요. 건물 투자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 골목 상권 중심으로 첫 번째 골목을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당황하는 거예요. 2012년에 연남동 30평 가게를 월 30만 원에 임대했어요. 이 가게 임대료가 지금은 월 200~300만 원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래도 가로수길이나 타국 관광도시에 비하면 40%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입니다. 서울 골목상권 중에는 가로수길만 도쿄 평균 수준이 접근했죠.


기존 관광자원을 활용해 도시여행 인프라 구축을 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생활 자체를 관광 자원화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도시나 외곽에서 축제하지 말고, 한국의 라이프스타일을 체험하도록 생활공간을 인프라화 해야 한다는 것이죠.


고령화 사회에 맞춰 콤팩트 도시 모델도 소개해 주셨는데, 콤팩트 도시란 무엇인가요?


다운 타우너는 도시에 거주하면서 놀고 직장 다니려고 하지, 신도시에서 한 시간씩 출퇴근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자동차를 소유하기보다 공유하죠. 콤팩트도시는 환경문제와 고령화 문제가 겹치면서 복지 전달 시스템이 한 곳에 모일 필요가 있어 만든 모델입니다. 성장 시대에 우리가 필요했던 모델이 신도시 모델이었다면, 저성장 저인구 시대에는 다시 압축도시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수도권 집중의 영향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 집중은 둔화됐어요.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큰 요인입니다. 도심이 공동화되니까 고 폐가가 많이 생기는 상황에서 신도시와 임대주택을 짓고 있어요. 오히려 도심지역의 기존 주택을 재생하든지, 주차장 없는 주택을 주상복합으로 만들어서 도심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학교와 병원을 만드는 게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랑 맞아요. 공간이 정 필요하면 신도시로 나갈 수 있으나, 차 없어도 도시에 살고 싶어 하는 세대와는 맞지 않아요.


다른 저작에서 각 도시만의 특색을 언급하면서 지역발전론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골목길 자본론』의시각으로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가 나아갈 방향이 있을까요?


고유의 문화를 전시하는 장소로 골목길을 활용해야 합니다. 도시 자체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패션 기업이 팝업스토어를 열고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콘셉트 스토어를 열어서 브랜드를 체험하게 하듯이, 도시도 도시 문화의 경험을 위한 장소가 필요하고, 그 문화가 유지된 골목길이 좋은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라이프스타일이 먼저냐, 골목길 형성이 먼저냐, 닭과 달걀의 문제 같은데요.


이미 골목길은 형성되어 있어요. 카페 거리와 고서점 거리 등 모든 지자체는 특징적인 골목길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단지 정체성에 소홀하다는 것이 문제죠. 가식적이고 진정성 없는 축제보다는 생활 속에 문화가 스며들어야 해요. 예를 들어 인삼이 특산품이다, 그럼 인삼 소비문화가 좀 더 활성화되어야 해요. 인삼가게와 삼계탕에서 그칠 게 아니라 인삼찻집을 만든다든지요. 경주는 불교도시니까 채식을 장려해도 될 텐데 한우를 홍보해요. 자동차 도시에는 자동차가 없습니다. 일과 생활을 분리하다 보니 그런 거죠. 모두 대형 마트와 강남식 아파트 단지를 원하니까 지역 문화가 지역 산업으로 연결되지 않아요.


현재 골목길 문화는 긍정적으로 보시나요?


이름부터 보면 부정적이에요. 경리단길은 경리단길로 남아야죠. 모든 골목길이 ‘OO단길’로 부르면 골목길다운 거리가 될 수 없어요. 수제 햄버거, 수제 맥주집, 독립서점, 타코 등의 상가 구성으로 정해져 있어요. 그래도 골목길이 쇼핑센터보다는 낫죠. 골목길은 창의적인 사람이 들어가면 바뀔 수 있으니까요. 대형 마트가 들어오면 지역 시장은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골목 상인이 되려는 도전자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어렵더라도 창업을 하고 자기만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지역 특색을 살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지역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민하고 그에 기반을 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면 오랫동안 지역의 자산이 될 수 있죠. 소상공인이나 프랜차이즈로 만족하지 말고 제조업을 확대할 방안을 고민해 보길 추천합니다.


서울시 미래서울자문위원회, 충청남도 경제비전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테마 여행 10선 총괄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해오셨어요.


문체부 테마 여행 10선 총괄 프로젝트 매니저는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기여하려는 노력이었어요. 거기서도 주요 도시의 골목 상권에 투자하는 게 가장 교화적인 지역관광 활성화 방안이라고 이야기했었죠. 기성세대는 관광을 역사문화유적지와 자연경관이라고 생각해요. 정부는 그래서 경주의 문화재를 복원하겠다고 하고요. 젊은 세대는 도시문화를 즐기겠다는 개념이 있어요. 장인을 키우고 교육해서 쇼핑할 거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문화재만 복원하면 관광사업이 자라날 수 없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연희동에 관해, 우리나라 지역산업 활동에 관해 좋은 글도 쓰고 싶어요. 국제관계가 전공이니까 국제관계 관련 연구도 하겠죠. 한국적 라이프스타일을 빨리 개발해서 수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문화경제 시대에서 한국이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자기 것에 관한 고민이 많이 부족해요.

 

 

 

 


 

 

골목길 자본론모종린 저 | 다산3.0
젠트리피케이션 대책부터 라이프스타일 제안까지 철저히 사람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 사람을 지원하고 교육하는 데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관희 교수 “사상가, 실천가, 문헌학자 루쉰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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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가 늙은이를 위해 기념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내가 목도한 수많은 청년들의 피가 층층이 쌓여 숨도 못 쉬게 나를 억눌러 이런 필묵으로 몇 구절의 글을 쓰게 했으니, 진흙 속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간신히 숨을 쉬며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어떤 세계일까? 밤은 바야흐로 깊어가고, 길 역시 한참 멀다. 나는 차라리 망각하고 말하지 않는 게 낫겠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아니라도 미래에 그들을 기억해낼 것이고, 그들의 시대를 다시 이야기할 것이라는 것을.(335쪽)

 

『후통, 베이징 뒷골목을 걷다』, 『소설로 읽는 중국사 1, 2』,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등을 쓰고 루쉰의 『중국소설사』와 데이비드 롤스톤의 『중국 고대소설과 소설 평점』 등을 번역한 상명대학교 중문과 조관희 교수는 신작 『청년들을 위한 사다리 루쉰』에서 루쉰의 생애를 따라가며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루쉰을 재발견했다. 시간을 따라서 총 6부로 나누어 루쉰의 행적과 글을 통해 그의 사상을 톺았는데, 루쉰의 삶을 통째로 조명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 흔히 『광인일기』, 『아큐정전』을 쓴 문학가로만 알려진 루쉰이 실은 평생을 타협하지 않은 실천가로, 청년을 호명한 시대의 사상가로, 고대소설사를 총망라해 정리하는 작업을 해낸 문헌학자로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조관희 교수가 ‘루쉰의 싸움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싸움이야말로 루쉰의 존재 이유였던 걸까?’라고 적었을 만큼 루쉰의 삶은 투사의 삶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안정된 삶도 번번이 포기했다. 그리고,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희망과 신념이 향한 곳이 다름 아닌 청년들이었다는 점이다. 한 세기 전 중국의 루쉰이 21세기 한국의 청년들에게 건네는 말도 물론,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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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이 지향하려고 했던 바


왜, 지금 루쉰일까요? 지금 루쉰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 것도 같아요.

 

저는 루쉰 전공은 아니에요. 사실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아 시작했는데요. 시작하고 보니 루쉰을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더 나더라고요. 루쉰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어요. 루쉰이 초기에는 중국 고대소설 연구를 많이 했고요. 소설사도 썼죠. 그 소설사를 제가 번역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아요. 전체적인 것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면서 보니 저도 공부가 많이 되더라고요. 

 

새롭게 알게 된 루쉰은 어떻던가요?  


루쉰이 여러 일을 많이 했지만 크게 보면 다 글 쓰는 것이죠.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소설이고요. 그런데 루쉰의 전체적인 글쓰기로 볼 때 소설은 굉장히 일부분이에요. 루쉰 소설의 의의나 영향력이 깊기 때문에 사람들한테는 소설가로 많이 알려져 있는 건데요. 그것 외에, 루쉰은 문헌학자이기도 하고요. 중년 이후에는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현실과 밀접한, 당시 중국이 안고 있던 문제점들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 사람은 글쓰기를 선택한 거죠. 이번 책 작업을 하면서 산문가로서의 루쉰을 새롭게 알게 됐어요. 또, 현실에서 굉장히 치열하게 싸웠던, 투사로서의 면모를 많이 발견했고요.

 

역시 사상가로서, 실천가로서의 면모가 인상 깊더라고요. 시대와 긴밀하게 호흡했기 때문이겠지만 특히 과학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나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했던 루쉰의 말들은 그야말로 사상가 루쉰의 재발견이었습니다.


왜 글을 썼는지를 생각해보면 될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자신의 목표가 있어서 썼거든요. 생계를 위해 글을 쓰기도 했죠. 생활인으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당시 중국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점을 타개한다는, 구체적인 목표로써의 글쓰기를 했다는 점이에요. 사회 문제 타개를 위해 어떤 사람들은 교육 현장에 나가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군인이 되어 현실의 적과 싸우기도 했겠죠. 그런데 루쉰은 글을 써서 사람들을 계몽시키겠다는 것을 확실한 하나의 글쓰기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요. 이 사람의 글 하나, 하나가 각각 지향하는 바가 있어요. 그것을 읽어내는 게 루쉰 읽기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어려운 면도 있고요. 이 책의 후속으로 루쉰의 소설선, 산문선이 나올 예정이거든요. 그 중 산문 선정이 꽤 어려웠는데요. 루쉰이 지향하려고 했던 바에 대해 현재를 사는 우리한테 적용시켜보자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작업했어요.

 

20세기 초, 한 세기 전에 루쉰이 살았던 시대와 21세기의 한국은 시간과 공간에서 모두 거리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루쉰에게서 찾아낼 수 있는 보편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루쉰이 고민했던 몇 가지 화두가 있었겠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우매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의식이에요. 중국이라는 나라가 외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잖아요. 그 상황을 해결하려면 사람들이 중요한데요. 사실 이것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거죠. 정치적으로 굉장히 많은 편향들이 있잖아요. 최근 몇 년의 일들을 보면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차라리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죠.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벌어진 것은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 과연 지금 이 사회가 루쉰이 살았던 당시 중국 사회보다 나은 게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죠. 물론 없다고는 볼 수 없어요. 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청년들을 위한 사다리’라는 부제가 더욱 의미 깊어요.


루쉰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기성세대에게 희망이 없다, 하는 것이에요. 루쉰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청년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네. 나로서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이기도 하지. 후배들이 이 사다리를 딛고서 더 높이 오를 수만 있다면 설령 내가 짓밟힌다고 한들 무엇이 아쉽겠는가!(중략) 실패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기만을 당하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뛰어난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없어지지 않더군.(297쪽)

 

교수님은 현직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계시잖아요. 교수님이 직접 보는 지금의 청년들은 어떤가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후학이라는 게 없거든요. 인문학을 하지 않아요. 그것은 왜냐하면, 희망이 없어요. 저희 세대 같은 경우에는 공부해서 박사까지 받으면 대학교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적으로 생활을 할 수가 있다, 이런 희망이 있었거든요.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그런데 지금은 박사를 받은들 대학에 자리 잡기가 어렵죠. 인문학은 점점 위축되고 있고요. 정규 교수보다는 비정년으로 해서 열악한 환경에 놓이기 마련이잖아요. 요즘 학회를 가면 신진 학자들이 안 들어와요. 결국 시간이 지나면 고사가 되겠죠. 그런 면이 안타까운데요. 한편으로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인문학 역시 고답식의 접근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의 접근이 돼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그게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아직 저는 모르겠어요. 다만 과거처럼 책 읽고, 논문 쓰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 같아요. 

 

루쉰이라는 사람의 탁월함


문학가로서의 루쉰에 대해서도 꼭 짚어야 할 것 같아요. 비교적 많지 않은 작품량에 비해 『광인일기』, 『아큐정전』등 문학사적 의의가 큰 작품들이 많잖아요.


루쉰은 소설 분야에 있어서는 일단 독보적이에요. 지금도 이걸 넘어서는 작품이 많지가 않아요. 그것은 어찌 보면 루쉰이라는 사람의 탁월함도 있겠고요. 또 운도 있었겠죠. 처음 했으니까요. 이 사람이 워낙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이후에 하는 사람은 뭘 해도 빛이 안 나잖아요. 또 저는 루쉰이 일찍 죽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루쉰은 56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잖아요. 만약 이 사람이 더 오래 살아서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를 살았다고 한다면, 글쎄요. 그때 중국은 격변기였어요. 50년대 ‘반우파투쟁(1957년 시작된 사건. 공산당과 마오쩌둥(毛澤東)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우파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하고 학대했다.)’, 60년대 ‘문화대혁명’ 같은 것들을 루쉰이란 사람이 비켜갈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것 같아요.

 

굉장히 역설적인 이야기네요.


또한 루쉰은 마우쩌둥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중국이라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루쉰을 좋아한 거죠. 그러니까 루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많은 사람들이 루쉰에 대해 알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덕을 좀 본 것 같아요. 루쉰의 의도는 아니었지만요. 일례로 문화대혁명 시기는 모든 게 다 멈춘 시기죠. 대학도 문을 닫고, 학문도 없었어요. 논문도 쓰이지 않았고요. 그때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던 게 딱 두 가지라고 하잖아요. 마우쩌둥 어록과 루쉰 책이라고요. 사실 책날개에는 위화가 루쉰에 대해 한 좋은 말을 실었는데요. 위화는 루쉰을 싫어했대요.(웃음) 어려서 가장 감수성 풍부할 때 다양한 책을 읽지 못하고 루쉰만 읽었다는 거예요. 위화의 얘기가 루쉰의 시대성을 폄하하는 건 아니고요. 그런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다는 거죠. 만약 루쉰이 오래 살았다면 심하게 핍박 받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결코 쉽게 타협하지 않았잖아요. 개인에게 이로운 선택도 번번이 소신에 따라 포기하고요.


우리가 루쉰을 문학가, 사상가로서 그에 대한 페르소나를 씌우고 보지만요. 만약 루쉰을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알았다고 생각하면 어땠을까요.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워낙 괴팍했고요. 성질도 고약하죠. 편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만나도 사귀기 힘든 사람이었을 거다(웃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 『광인일기』를 통해 루쉰이 창작 실천의 훌륭한 본보기를 제공했다고 평가하셨거든요.


루쉰을 이야기할 때 『광인일기』『아큐정전』을 많이 얘기하는데요. 『광인일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어요. 첫 번째는 최초의 현대소설이라는 점이에요. 그러면 자연히 고대소설과 현대소설의 차이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죠. 그런데요, 거기에 대한 논문을 쓴 사람이 없어요. 상투적으로 다 그렇게만 얘기할 뿐이죠. 그래서 그것도 논문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는데요. 제 생각에는 이런 것 같아요. 내면의 문제를 다루는가 하는 것이죠. 고대소설은 그렇지 않잖아요. 『삼국지』를 보세요. 관우의 심리가 나오나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사건만 있을 뿐이지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는 없어요. 그 외에도 몇 가지 다른 점이 있고요. 또 하나는 『광인일기』라는 작품이 던져준 파문이 굉장히 컸다는 점이에요. 기왕의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죠.

 

<신청년> 발표 당시 대중의 호응이 엄청났다면서요.


루쉰이라는 사람이 처음 문단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광인일기』예요. 당시는 필명을 썼거든요. 궁금증을 자아냈죠. 『아큐정전』도 마찬가지고요. 『광인일기』에서 촉발된 궁금증이 『아큐정전』에서 정점을 찍는데요. 이 작자에 대한 궁금증이 루쉰이라고 밝혀지면서 대단히 유명해지는 거예요. 당시 루쉰은 소설만 쓴 게 아니고요. 생계를 위해 교육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대학에서는 소설사 강의를 한 사람이에요. 소설은 어찌 보면 자기의 주업은 아니었는데 그게 오히려 파문을 일으킨 거죠.

 

당시 지식인들이 사회 문제를 제3자의 입장에서 비판하던 것에서 벗어나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문제가 결국 나 자신과도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자각을 드러냈다고 짚어내셨는데요. 이 대목에서 또 생각할 것은 루쉰의 자기 점검의 태도예요. 시사점이 많아요.


그것은 루쉰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작가가 쓰는 글이란 결국 작가 내면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객관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저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봐요. 결국 자기 내면의 세계가 거기에 투영이 되어 있는 거죠. 이를 테면 제가 역사책을 엮었어도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 있는 건 아니에요. 행간에 작가의 생각이 들어 있어요.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서술은 물론이고 선별하는 것 역시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작가의 생각이 투영된 것이라고 봐야 해요. 루쉰 개인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에필로그에 ‘루쉰의 싸움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싸움이야말로 루쉰의 존재 이유였던 걸까?’라고 적기도 하셨는데요.


한 마디로 말하면 좌충우돌이죠.(웃음) 그게 어떻게 보면 루쉰의 강점이죠. 이 사람이 존경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상황을 전혀 생각 안 하잖아요. 신념만 생각했죠. 옳다고 생각한 것만 생각한 거예요. 그러한 주관이 있었기 때문에 좌가 됐든 우가 됐든 자신과 안 맞으면 싸웠던 거죠. 쉽지 않죠. 가장 큰 게 생계문제예요. 그 사람이라고 해서 왜 돈이 필요하지 않았겠어요. 당시도 대학교수, 괜찮았어요. 루쉰은 마음만 먹었다면 대학에서 지낼 수 있었어요. 중산대학, 그곳이 어떤 데예요. 지금 중국 10대 대학 가운데 하나예요. 당시 ‘4.12 쿠데타(1927년 장제스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 공산당과 좌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다.)’라고 하는 사건이 있었고, 루쉰이 학생들이 탄압 받으니까 항의하는 의미에서 사표를 냈는데요. 그렇게 하기 힘들죠. 그리고는 월급 받은 게 그게 마지막이에요. 이후에는 글로만 살았어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글을 썼죠. 원고료가 필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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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이 살았던 곳


교수님께서 생각하는 루쉰의 탁월함은 뭔가요?


저는 고대 중국소설을 전공했기 때문에 루쉰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한계가 있어요. 다만 재미난 건 제가 이번에 책 작업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게 있다는 점인데요. 루쉰은 엄밀하게 따지면 현대 문학가잖아요. 그런데 루쉰이 해놓은 것 가운데 일부가 고대소설에 관한 것이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고대소설사도 루쉰이 쓴 적이 있잖아요.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것을 능가할 만한 소설사가 나오지 않았어요. 일종의 경전이 된 건데요. 거의 백 년이 됐는데도 루쉰의 소설사를 능가하는 게 없거든요. 그런데 루쉰 연구가 대개 현대문학에서 진행이 되었잖아요. 그러다보니까 고대소설을 전공한 제가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계속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헌학자로서의 루쉰에 대한 일종의 연구 공백인데요. 중국 학계 사정도 비슷한가요?


중국은 워낙 루쉰 연구가 많기 때문에 없지는 않아요. 그런데 비슷한 것 같아요. 현대문학 쪽에서 바라보는 루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죠. 없지는 않지만요. 다만 저도 처음에는 루쉰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을 했는데요. 21세기 들어서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논문이 나한테는 의의가 있지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작업을 해야겠더라고요. ‘지역학’도 그중 하나예요. 의외로 한국 사람들이 지역에 대한 이해가 낮아요. 예를 들어 중국 베이징에 대한 책을 한 번 찾아보세요. 다 관광서예요. 베이징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없더라는 거죠. 있더라도 번역서고요. 그래서 제가 베이징 골목, 골목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쓴 게 『베이징 800년을 걷다』예요. 이런 작업을 앞으로 계속 하려고 해요.

 

문학과 역사에 대해 좀 더 문턱을 낮추는 작업들을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중문과 교수잖아요. 학생들은 중국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잘 모르는 게 있어요. 중국어를 배운다는 것을 단어를 배우고, 표현을 배우는 것으로만 알아요. 물론 그게 기본이 되지만 중국어를 잘하려면 문화를 알아야 해요. 중국이라는 곳을 알아야 하거든요. 언어란 결국 사상의 집이니까요. 더구나 대학에서는 다양한 것을 배워야 하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역사예요. 제가 학교에서 중국 역사 수업을 개설해서 가르치고 있는데요. 수업을 하려고 보니 교재가 마땅치가 않더라고요. 사학과 선생님이 쓰신 것은 너무 어렵고요. 강의를 4년 정도 하다가 책을 내가 쓰겠다고 생각해서 대중들을 위해 쉽게 또 책을 썼어요. 그것이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조관희 교수의 중국 현대사 강의』죠.

 

앞서 후학이 없어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런 면에서 봐도 대중이 진입하는 문턱을 낮춰주는 작업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게다가 논문처럼 자세히 알 필요도 없죠. 큰 줄기만 찾아가서 교훈만 얻으면 되잖아요. 저는 강의도 그런 식으로 하고 있거든요. 자세한 내용은 필요 없어요. 그건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고요. 과거의 사건에서 말 그대로 귀감이 될 만한 것들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뜻하지 않게 방송 출연도 하고, 역사 이야기를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어요.(웃음) 

 

책을 쓰시면서도 일본 센다이, 중국 사오싱 등을 직접 답사하셨다면서요? 사진 자료도 많이 수록되었어요.


저는 현장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책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사람이 살았던 현장을 가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루쉰이 살았던 곳을 한 번 가본 거죠. 다행히도 루쉰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진 않았어요. 중국도 중국이지만 루쉰은 일본에서 유학을 했잖아요. 지금 루쉰의 흔적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일본 센다이예요. 그가 공부했던 하숙집도 남아 있고요. 강의실도 보존이 되어 있더라고요. ‘환등기 사건(1906년 루쉰이 일본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강의실에서 환등기를 통해 중국의 현실을 목격하고 학교를 자퇴한다.)’이 일어날 때 수업을 들었던 강의실 말이에요. 현장에 가보면 조금이나마 더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물론 저는 관광객으로 현장을 보는 것이지만요. 저는 현장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루쉰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어떨까요?


이 사람은 정말 사심 없이 평생을 살아간 사람이라고 봐요. 개인적인 것에 끌려간 사람이 아니죠. 루쉰이 ‘입인(立人)’이라는 말을 썼잖아요. ‘사람을 세운다’는 건데요. 그건 결국 주체성의 문제라고 보거든요. 이 사람은 자기 줏대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에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은 사람이죠. 한 마디로 자신의 주체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정리를 하고 싶어요.

 

 

 

 


 

 

루쉰조관희 저 | 마리북스
우리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오늘의 서’이자 ‘미래의 서’이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청년들이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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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현 “파페와 포포를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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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와 포포를 만난 지도 15년이 훌쩍 지났다. 2002년 『파페포포 메모리즈』로 시작된 둘의 이야기는 『파페포포 투게더』, 『파페포포 안단테』, 『파페포포 레인보우』, 『파페포포 기다려』로 이어졌다. 아직은 사랑에 서투른 모습, 그래서 더 풋풋하고 담백했던 파페와 포포의 마음은 400만 독자를 사로잡았다. 파페포포 시리즈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고, 그들의 추억 안에서 함께 자랐다. 가끔씩 두 사람을 떠올릴 때면 ‘지금쯤 파페와 포포는 어떤 모습일까? 조금은 사랑을 알게 됐으려나?’ 궁금해지곤 했다.

 

한동안 뜸했던 소식이 다시 들려온 건 지난 11월이었다. 5년 만에 재회한 파페와 포포. 두 사람의 새로운 이야기에는 『사랑까지 딱 한 걸음』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부제는 ‘여전히 사랑이 어려운 나와 당신에게’다. 사랑이라는 게 여전히 달콤쌉싸름하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건, 파페와 포포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말한다. “언제나, 영원히 사랑할 순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사랑할 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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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파페포포 시리즈’는 2~3년 간격으로 찾아왔었어요. 『사랑까지 딱 한 걸음』은 5년 만에 출간됐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5년 동안 이 책만 쓴 건 아니에요. 2014년 12월부터 2015년 1월까지 파페포포 애니메이션이 방송됐거든요. 『파페포포 기다려』가 2012년에 나오고, 이후 2년 동안 애니메이션 기획에 참여했어요. 시놉시스를 쓰고 캐릭터를 그리고 배경, 색감, 음악 등을 기획했어요. 프리 프로덕션을 맡게 된 거죠. 애니메이션은 SBS에서 방영됐는데 평일 오후 4시에 편성이 됐어요. 그래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그 작업이 끝난 후에 『사랑까지 딱 한 걸음』을 쓰기 시작해서, 2015년부터 2년 정도 준비했어요. 그러고 보면 2년이나 3년에 한 번씩 책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이번 책의 제목에는 ‘파페포포’가 빠져있어요.


출판사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새롭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시리즈가 시작된 지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파페포포 앞에는 항상 ‘추억’이라는 수식어가 붙고는 하잖아요. 그래서 이번 책에서는 과감하게 제목에 파페포포를 넣지 않기로 한 것 같더라고요.

 

리부트(reboot) 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표지에 그려진 캐릭터가 포포라는 건 많은 분들이 알기 때문에, 굳이 파페포포를 제목에 넣지 않아도 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책의 부제는 직접 지으셨나요?


아뇨, 편집자 분이 지어주셨어요. 제목도 마찬가지인데요. 제가 마음에 드는 걸 고를 수 있도록 리스트를 만들어 주셨어요. 그 중에서 『사랑까지 딱 한 걸음』이라는 제목과 ‘여전히 사랑이 어려운 나와 당신에게’라는 부제가 좋아서 고른 거죠.

 

부제에 공감하세요? 여전히 사랑이 어렵다고 느끼세요?


네. 20대에는 연인의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모든 것을 통틀어서 봤을 때, 사랑이란 모든 것에 다 들어있더라고요. 프롤로그에 썼듯이 “인생을 잘 견디며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삶의 모든 순간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던 건 삶의 곳곳에 사랑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그게 힘이 된 것 같아요. 너무나 흔한 사랑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책을 만들게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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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들과는 스타일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지금까지 파페포포는 여백이 많고 짧은 글이 실려 있었는데요. 의도적으로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추억의 파페포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그림도 많이 넣었고요. 색감에 있어서도 예전에는 약간 무채색이었는데 조금 더 다채롭게 넣고 싶었어요. 삽화 같은 느낌의 그림들도 많이 싣고요. 그런데 영화 포스터나 사람 얼굴 같은 경우에는 저작권 문제로 빠진 부분도 있어요. 그런 건 그림으로 대체했죠.

 

『파페포포 기다려』에서도 사진과 그림의 결합을 시도하셨어요. 레고를 활용하셨었죠?


네. 그때는 레고 코리아에 직접 문의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이번 책에는 찰스 디킨스의 사진이나 영화 <그녀에게> 포스터를 싣고 싶었는데, 외국 저작권이다 보니까 승인을 받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걸로 대체하는 방법을 썼어요.

 

직접 서점을 찾아 다니면서 사인회를 진행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서점에 들러서 『사랑까지 딱 한 걸음』을 보고 계신 분께 그림 사인을 해드렸는데요. 의도한 바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공식적인 사인회를 따로 마련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서점에서 제 책을 구입하시는 분들에게 사인본을 선물하고 싶었던 거예요. 2주 정도 시간을 두고 5군데 서점에 가서 사인을 하고 왔는데요. 처음에는 서점 관계자 분들께 말씀을 드렸어요. 책에 사인을 하면 어떻겠냐고.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인한 책을 매대에 올려놓는 것만 하려고 했는데, 마침 책을 보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어요. 그래서 이 책을 구입하시면 제가 직접 사인을 해드린다고 말씀드렸던 거죠.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파페포포를 모르는 분도 계셨어요. 한 아주머니께서 아들을 위해서 책을 고르고 계셨는데 『사랑까지 딱 한 걸음』을 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권유를 했었죠. 또 어떤 분은, 그 분도 파페포포를 모르셨는데, 친구한테 메시지를 보내서 파페포포를 아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런데 친구 분이 안다고 하시면서, 자신도 책에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셔가지고, 그때 2권인가 3권을 사인해드렸던 기억이 있어요. 직접 독자 분들을 만나면서 인연이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랑까지 딱 한 걸음』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소심한 파페에게 포포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 있다’고 말해요. 저도 이번 경험을 통해서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열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찾아가는 사인회’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시작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지금까지 소통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파페포포가 활성화 됐을 때는 카페 회원이 12만 명 정도 있었거든요. 그때는 자연스럽게 생각됐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 분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이었는지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소통에 조금 더 적극적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만화가나 창작자들에게는 잘 그린 그림과 잘 쓴 글도 중요하지만, 독자들의 공감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걸 통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부족하니까 제가 직접 가게 된 거죠. 다른 이유는 없었고요.


파페포포의 인기,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작가님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더라고요. 요청을 많이 받으셨을 텐데, 거절하셨던 건가요?


쑥스러워서 많이 거절했었어요. 창피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 자신을 보이는 것보다 파페포포 캐릭터를 많이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파페포포가 JTS(기아, 질병, 문맹 퇴치 비영리단체), 구로구 홍보대사도 하고 있는데요. 그게 곧 저이기 때문에 앞에 나서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원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으셨어요?


네, 20대에 군대에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했었어요. 결론은 글과 그림이었고, 관련된 일이 어떤 게 있을까 찾았었죠. 그때 친구 중에 한 명이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면서 꿈이 생긴 거죠. 그런데 당시에는 하청 업체가 대부분이었거든요. 애니메이션을 직접 만드는 게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의 작품을 받아와서 그림만 그리는 작업을 했던 거예요. 창작적인 부분은 전무하고요. 저도 그 작업을 했는데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이었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이야기와 콘티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때 짬짬이 그린 이야기들이 모여서 파페포포가 됐어요. 그런데 애니메이션화 되지는 않았고요. 2001년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주는 공모전이 있었는데, 거기에 당선이 되면서 파페포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죠.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를 하기도 하셨잖아요.


그 이후의 일이에요. 먼저 다음에 카페를 개설했고요.

 

카페는 직접 만드신 거였군요.

 

네.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만든 거였어요. 처음에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더니 아무도 안 받아주더라고요. 그래서 카페를 개설한 뒤에 사람들의 반응을 보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카페를 찾아와 주시는 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거예요.

 

공모전에 당선된 후에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셨던 거예요?


출간 제의를 했었죠. 공모전에 당선됐다고 해서 책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었거든요. 책을 만들 수 있는 천만 원의 비용을 주는 거였어요.

 

출간 제의를 거절당하신 적도 있나요?


그렇죠. 그때는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만화가 단행본으로 나오는 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였어요.

 

만화 잡지에 연재되다가 완결된 작품들이 단행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소장용이라고 할까요.


맞아요. 그런데 저는 만화 잡지에 연재를 했던 것도 아니고, 알려진 작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다 거절했었어요. 당시에는 만화 출판사에서만 단행본으로 만화책을 내기도 했고요. 결국은 다음 카페가 활성화 되면서 홍익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됐고, 인터넷에서 파페포포를 보시던 분들이 직접 책을 구매하는 독자층이 됐죠.

 

처음 카페에 연재하실 때는 웹툰이 생기기 전이었죠. 이후에는 웹툰 연재 제안도 받으셨나요?


제안은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웹툰에 적응하기가 조금 힘들더라고요. 카페에 연재를 해보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스케줄에 맞추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저에게는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그때가 『파페포포 메모리즈』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은 상태였거든요. 완전히 기가 다 소멸된 상태에서 다시 연재를 하려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책이 한 권씩 나올 때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는 것도 스트레스였고요. 그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몸이 굉장히 안 좋아졌었어요. 지금은 건강해졌는데 당시에는 압박감이 심했죠.

 

파페포포 시리즈가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났잖아요. 작가님에게는 가장 달콤하고 즐거운 시기였을 것 같은데, 스트레스가 크셨군요.


저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책이 큰 인기를 얻었고 많이 판매됐지만, 저한테는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부담감이 너무 컸나요?


네, 제 능력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감당해내기가 되게 힘들더라고요.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될까’라는 불안감도 있으셨어요?


그렇죠. 그랬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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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죠


파페포포 시리즈가 세운 기록들이 있죠. 『파페포포 안단테』는 『남한산성』, 『향수』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기도 했어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몇 달간 계속 1위를 한 책으로 출판인협회에서 뽑은 적도 있었어요. 군부대에 파페포포가 배포되고, 초등학교 학급도서로 비치되기도 했고요.

 

카페를 가도 마찬가지였어요. 대부분 책꽂이에 파페포포가 꽂혀 있었죠. 그렇게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처음 파페포포를 만들었을 때는,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을 담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안에 있지만 끄집어내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공감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초등학생부터 군 장병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죠. 그게 인기의 한 요소였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20대 초반 여성을 목표로 썼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리트머스처럼 퍼져서, 초등학생부터 40대 아저씨까지 다 보게 된 것 같아요. 책에 실린 에피소드 중에서 적어도 하나씩은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파페’, ‘포포’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캐릭터를 만들려고 할 때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를 봤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ㅍ’ 어감이 좋아서 파페랑 포포라는 이름을 지었죠. 파페는 남자 주인공, 포포는 여자 주인공으로요. 파페는 저랑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고요. 포포는 제가 스무 살 때 짝사랑했던 친구를 상상해서 그린 거예요. 보통 대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파마를 하잖아요. 그 친구가 그런 모습이었거든요. 처음에는 파페와 포포의 사랑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점점 넓어져서 부모님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세상의 모든 사랑 이야기를 담게 된 것 같아요. 특히 이번 책에 그런 부분이 많이 표현된 것 같고요.

 

시리즈가 이어지는 동안 작가님에게도 변화가 있었죠. 20대 청년이 가장이 되기도 했고요. 그런 모습들이 반영된 것 아닐까요?


그런 것 같아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첫째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있었던 일도 실려 있고요.

 

「나는 보았지」라는 제목의 에피소드죠? ‘정우’와 ‘수지’의 이야기가 너무 귀여웠어요.


네, 그때 제가 느낀 감정들이 들어간 거죠.

 

‘정우’가 첫째 아드님이죠?


맞아요. 둘째 연우의 이야기도 있어요. 「기특하다는 말」에 보면 숫자 5를 뒤집어서 쓰는 이야기가 나와요. 첫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고 둘째는 1학년인데요. 둘째는 한창 인간관계를 넓힐 때라, 친구들하고 노느라 정신 없이 바쁘더라고요.

 

부모님께 받았던 사랑에 대한 생각도 담겨 있어요. 직접 부모가 되어 보니 알게 된 것일까요?


지금까지 파페포포 이야기가 다섯 권이 나왔는데,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쑥스러운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 어렸을 때 남한테 놀림 받았던 이야기들인데요. 그런 것들이 이 책에는 있어요. 전에는 ‘이 이야기는 안 쓸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보니까 창피해서 숨기려고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들만 했죠. 그런데 이번 책에는 아버지의 직업과 한때 그걸 창피해했던 일, 저의 원래 이름,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야기하고 나니까 편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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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와 포포를 기억하는 방법


파페포포 시리즈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새로운 캐릭터와 주제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은 없으세요?


써놓은 시놉시스가 몇 개 있는데요. 파페포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게 파페포포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서서히 해야 될 시기인 것 같더라고요. 한 가지 예를 들면 ‘클리너’라는 시놉이 있어요. 이 세상에는 인간과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가 있다는 설정으로, 그 존재를 파헤치는 클리너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인데요. 자극적인 19금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독자들이 파페포포와 작가님에게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것과 전혀 다른 작품을 보여주셨을 때 반응이 어떨지, 걱정이 되기도 하시겠어요.


네, 그래서 필명으로 써야 되나 생각도 들고요(웃음).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룹의 이름으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저 혼자 작업했는데, 앞으로는 협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스토리창작센터’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창작자들을 위해서 제공해주는 작업실이에요. 저 같은 만화가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의 스토리 작업을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요. 거기에서 공동 작업이 이뤄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파페포포 기다려』에는 '파페포포 10주년 기념 베스트 컬렉션'이 실려 있어요. 전작들을 대표하는 에피소드를 꼽으셨는데요. 『사랑까지 딱 한 걸음』의 베스트 에피소드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세 개 정도가 있는데요. 하나는 「낚시 대회」고요.

 

아버님과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에피소드죠?


네, 그 작품 같은 경우는 제가 정말 창피해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예요. 아버님이 노동일을 하셨는데, 항상 까만 얼굴을 하고 계신 모습을 보면서 어렸을 때 느꼈던 것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커서 아이가 생겼잖아요. 제 아이들을 보면서 ‘이 아이들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희 아버님은 대어를 낚는 훌륭한 낚시꾼은 아니셨지만, 지금 아버님의 모습을 보면서 살아계신 것 자체로 저한테 큰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낚시 대회」 이야기를 그리면서 가장 좋았고요. 두 번째 에피소드는 「세자리아 에보라」예요. 세자리아 에보라는 제3세계 음악을 하는 가수예요. 영화 <위대한 유산>의 OST를 통해서 알게 됐는데, 굉장히 좋아하는 가수예요.

 

이 에피소드를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2011년에 세자리아 에보라가 죽었는데요. 세자리아 에보라는 아주 험난한 삶을 살았는데, 결국 노래를 통해서 자신의 힘들었던 삶을 노래했어요. 저도 힘든 삶을 살았지만, 세자리아 에보라에게 음악이 있었다면 저에게는 만화가 있는 거겠죠. 그런 점에서 세자리아 에보라를 되게 좋아했어요.

 

마지막으로 꼽으신 에피소드는 뭔가요?


「죽공이」예요.

 

죽음의 공포를 의인화한 이야기였죠?


맞아요. 제가 네 살 때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요. 그때부터 저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홀연히 사라졌어요. 내가 죽어도 나와 또 다른 내가 세상을 살아간다면 영원한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죽음의 공포가 멀어지더라고요.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공포나 슬픔이 있잖아요.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 때문에 「죽공이」 에피소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독자로서 ‘파페’와 ‘포포’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해요.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여전히 사랑하는 중일까요?


그런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좋아했던 사람을 나중에 커서 만나게 될 경우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둘의 뒷이야기는 직접 확인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담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우리가 파페와 포포를 기억하는 방법 같아요.


 

 

사랑까지 딱 한 걸음심승현 글그림 | 예담
‘여전히 사랑이 어려운 나와 당신에게’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사랑에 서툴고 마음을 전하는 데 애를 먹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니시하라 켄이치로, 패션쇼 음악감독에서 재즈힙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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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잘 몰라도 음악엔 왠지 모를 친숙함이 어려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도토리 먹던 옛 SNS의 생태계에서 꽤나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였으니. 네오 시부야계 혹은 라운지 신이라 겨우내 이름 붙인 일련의 흐름 안에서 파리스 매치, 다이시 댄스, 하바드 등과 함께 언급되며 많은 국내 마니아를 보유하고 또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뮤지션 니시하라 켄이치로. 패션쇼 음악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지금은 세상을 뜬 누자베스를 잇는 재즈힙합의 한 축으로 우뚝서기까지. 내한을 앞두고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의 궤적을 되짚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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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팬들에게 간단하게 인사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서울은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 지역이며, 또 한국은 제 아시아 활동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의미로 무척 특별한 마음으로 라이브에 임할 생각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활동을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처음 '내가 음악을 해야겠다'고 느끼게 된 계기나 사건이 있다면요. 그리고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셨는지요.


중학교 진학 시 명문교에 들어가서 갑자기 성적이 최하위가 된 것을 계기로, '음악을 하는 것 말고는 살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앨범을 내기 전부터 이미 도쿄 콜렉션이나 파리 콜렉션과 같은 패션쇼의 음악감독으로 오랜 기간 활동을 해오셨는데, 처음에 어떤 계기로 디렉터 일을 맡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때 후지와라 히로시씨의 패션 쇼 음악을 담당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패션쇼나 이벤트 음악 디렉터로 오래 활동을 해오셨는데, 가장 중점을 두는 측면이 무엇인지요.


감정입니다. 제 생각에 음악은 방법이나 장르 등이 아니라, 감정을 읽어내고 교환하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디렉터의 일은 디자이너가 어떤 감정으로 그 말을 고르고, 어떤 음악을 원하는 지 알아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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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YAB YUM 쇼를 위해 제작한 음악들을 모아 낸 시디를 누자베스가 듣고 맘에 들어 그가 운영하던 매장에서도 판매했다는 일화를 들었는데, 그때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누자베스에게 직접 전화를 받은 것이 오히려 제게는 그를 알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누자베스도 지명도가 높은 아티스트는 아니었어요. 교류가 시작되고 나서 오랜 기간 동안 그의 가게에서 레코드를 가장 많이 산 손님으로서 공헌한 것 같아요. 그가 처음으로 제 스튜디오에 놀러 왔을 때 피아노나 기타, 그때 만든 곡을 선보이고 코멘트를 받은 것은 좋은 추억입니다.

 

그러던 중 2007년 < unprivate >가 설립, 다음 해에 테노리오 주니어의 곡을 커버한 'Nebulosa'가 발매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 unprivate >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본래 설립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원래의 계기는 레코드나 CD 유통을 위해 회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회사에 좀 더 많은 의미와 가치가 있지만, 출발점으로서는 그렇습니다.

 

'Nebulosa'가 큰 인기를 얻은 후, 그 해 말에 첫 작품인 < Humming Jazz >가 발매되었는데, 'Nebulosa'의 히트로 인해 제작을 결심하게 되신 것인지요. 듣기로는 호소노 하루오미(細野晴臣)씨의 이야기도 앨범을 만들게 된 큰 계기로 작용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떤 이야기였는지요.


'Nebulosa'는 원래 앨범의 싱글 컷으로, 앨범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발매했습니다. 그때까지 10년 동안 발매하지 않고 계속 앨범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때 길에서 우연히 호소노 씨와 만나서, 빨리 앨범을 내는 게 좋다는 조언을 받은 것이 결심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 Humming Jazz >엔 앞서 언급한 테노리오 주니어 뿐만 아니라, 프랭키 너클즈, 질 스콧 헤론과 같은, 하우스와 힙합의 기원이라고 할만한 뮤지션들의 커버곡이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음악에 대한 기원을 찾고자 했다는 느낌이 강한데요. 당시 해당 앨범을 만들 때 특히 신경을 썼던 점 혹은 특별한 콘셉트가 있었다면요.


그때까지 10년 동안은 계속해서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기에, 완성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의 뿌리가 된 다양한 음악을 하나로 묶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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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리듬과 서정적인 건반소리의 조화야말로 니시하라 켄이치로 씨의 장점이라고 생각되는데, 이처럼 건반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유가 있으시다면요.


피아노가 좋기 때문에. 그 한 마디 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금번 함께 내한하는 마바누아(Mabanua)씨와는 지난 < Jazzy Folklore >부터 호흡을 맞춰오고 계신데, 처음 'My leaving'을 접했을때 그 특유의 몽환적인 감성이 니시하라 씨의 음악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니시하라 켄이치로 씨의 발자취를 더 넓은 영역으로 옮겨 놓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작업 당시 그를 섭외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Mabanua는 예전에 제가 'Wax Poetics'라는 블랙 뮤직 잡지의 크루로 DJ를 할 때에 처음 만났습니다. 만났을 당시에는 드러머라고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유례없는 재능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가 노래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꼭 함께 곡을 만들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이전에도 내한하신 적이 있어 체감하셨겠지만, 국내에도 두터운 팬층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한때 유행했던 미니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열에 셋 정도는 니시하라 켄이치로 씨의 'Consider my love'나 'Now I know'가 들려오곤 했는데요. 당시 한국에서의 인기를 전해들으셨었는지, 만약 들으셨다면 듣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었는지요.


한국에서의 제 인기를 실감한 것은 처음 한국에서 DJ를 했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제 곡을 듣고 있다는 것은 제 활동 중에서도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기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말에 발매된 최근작 < Sincerely >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이전과 동일한 선상에 있되, 어느 때보다 비트가 곡의 선두에서 러닝타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사운드에서 느껴지는 질감에도 각 트랙마다 굉장한 차이가 있고요. 에스노(ESNO)로서의 커리어, 타 아티스트를 프로듀싱하면서 쌓여진 경험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Sincerely >의 제작방향과 콘셉트를 알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앨범부터 마스터링을 일본의 덥 플레이트의 중심인 'WaxAlchemy'에게 부탁한 것, 또 평소부터 그와 함께 작업하고 서로 영향을 준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WaxAlchemy'는 세계에서도 주목 받는 베이스 뮤직의 선두 주자이기도 하므로, 비트에 대한 집착이나 베이스의 질감 등의 에센스가 자연스럽게 약화된 상태로 주입된 것은 아닐까요? 또 Jazzy Hiphop의 비트가 취약하거나 멜로디에 치우친다는 인상을, 저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장르 자체를 다음 차원으로 끌어 올려서 더 많은 리스너에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누자베스, 이노 히데후미씨에 이은 재즈힙합의 아이콘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지워진 이러한 짐이 때로는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는지, 그럴 때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짐이라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만 제 음악은 다른 재즈힙합 아티스트와 그렇게 비슷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가요? 제 감각으로는, 장르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 그대로, 보다 많은 분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고, 결과적으로 재즈힙합이 더 널리 퍼지는 것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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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하셨던 한 인터뷰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흥미있는 것은 얼마만큼 본인이 얼마나 프로페셔널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는 것'이라는 답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프로페셔널함은 제가 생각하기에 결국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7년이 지난 지금 자신에 대한 프로페셔널을 어느 정도 증명해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음악 제작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직도 성장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페셔널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디렉터 일에 대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한 디렉터 일에 대해서는 이미 20년간의 실적이 있고, 늘 프로페셔널한 일을 남기고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한국팬들이 니시하라 켄이치로 씨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공연에 대한 기대감, 각오 및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구체적으로 공개를 한 적은 없습니다만, 내년 2018년은 데뷔 앨범인 < Humming Jazz > 에서 딱 10년이 지난, 데뷔 10주년의 해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내년에는 더 활발하게 앨범 발매, 라이브 등을 전개하고 10주년을 북돋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그런 저 자신의 10년을 지탱해 준 많은 리스너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내한 공연도 그런 여러분께 보답이 될 만한 무대로 만들고 싶습니다. 꼭 기대해 주세요.


 

진행, 정리 : 황선업
취재 협조 : J-Box Entertainment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독립출판물 저자를 만나다] 커피와 음악이 흐르는 책 - 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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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짝이 맞는 것들이 있다. 독립출판물은 독립서점과 어울리고, 잔잔히 흐르는 음악은 카페에 어울린다. 향긋한 커피는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책과 잘 어울린다. 독립출판물을 낸 작가가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커피를 내린다면? 안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다. 카페 모모뮤에서 커피를 내리면서 독립출판물 『남김없이 시들고 나면』과 『우리가 사랑이라면』을 낸 북씨 작가를 만났다.


“계속 커피 관련한 일을 했어요. 북바이북에서 생선 김동영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친분이 생겨서 카페 모모뮤를 같이 운영하게 됐죠. 독립출판물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부천의 오키로북스에서 수업을 듣고 그 해까지 책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첫 책을 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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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낸 『남김없이 시들고 나면』은 20대 때 썼던 글을 모았다. 자기 경험이 들어간 에세이를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속을 다 내보이는 게 되지 않을까 불안했지만, 이제는 많이 편해졌다. 책에 언급한 지인들에게 선물로 책을 건네기도 한다.


“인디음악을 좋아해요. 노래 하나에 꽂히면 한 달 내내 같은 노래만 듣기도 해요. 밤에 음악 들으면서 감정이 많이 가라앉을 때 글을 많이 쓰잖아요. 어떤 글을 보면 생각나는 노래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글을 읽고 음악도 들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책에 노래 제목을 넣었어요. 추천 BGM으로 생각하셔도 좋겠어요.”


『남김없이 시들고 나면』은 페이지마다 어울리는 노래, 생각나는 노래를 적었다. 한 독자는 ‘남김없이 시들고 나면’이라는 폴더를 만들어 책에 소개된 음악을 넣고 듣는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첫 번째 책은 사진이 들어가 있지만 흑백으로 찍었어요. 딱 떨어지는 숫자로 책 가격을 매기고 싶어서 만 원으로 정했는데, 색상이 나오게 인쇄하면 단가가 만 원이 되더라고요. (웃음) 사람들이 이 돈을 주고 사기 아까워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많이 했어요.”


두 번째 낸 『우리가 사랑이라면』은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살 수 있게 하고 싶었기에 단가를 더 줄였다. 사진을 빼고 페이지 수를 줄였다. 글은 더 많아졌다. 조금 더 ‘독립출판물의 느낌’을 내고 싶었다.


“처음 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반응이 없어서 그만둘까도 생각했어요. 집에 책이 박스채로 쌓여 있을 때는 너무 많이 낸게 아닌가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결국 다 나간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요. 책을 내고 잘 되면야 좋지만, 잘 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처음에 제일 힘들었던 건 서점 입고였어요. 일일이 서점 양식에 맞춰서 요청 메일을 보내야 하는데, 책 소개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하라니까 못하겠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입고 거절당하는 것도 많이 상처가 됐던 것 같아요. 서점에서 모든 책을 다 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보내준 메일을 보고 판단하는 건데, 내 책이 부족하거나 내 소개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속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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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책은 입고 요청 메일만 50통 넘게 썼다. 입고 거절 메일이 와도 이해는 했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 번째 책은 10군데 정도만 입고했다.


“나중에 서점을 하게 된다면 서점 이름을 북씨로 하려고 했어요. 책이라는 뜻의 ‘북book’에 커피의 ‘C’를 합해서요. 책을 내면서 본명을 쓰기가 싫었는데, 마침 제 별명 꼬북씨라 북씨를 필명으로 써도 맞겠다 싶었어요. 북씨 이름으로 출판사 겸 서점을 하려는 계획은 아직 가지고 있어요. 빠르면 올해가 될 수도 있겠죠.”


『남김없이 시들고 나면』을 낼 때만 해도 출판사 등록은 안 했다. 재인쇄를 하면서 계속 독립출판물을 내겠다는 다짐의 의미로 출판사업자 등록증을 필명과 같은 ‘북씨’로 냈다.


“출판사 북씨는 제 책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책 작업도 같이할 계획이에요. 내년에는 제 글보다는 다른 사람의 책을 만드는 일을 더 하고 싶어요. 주위에 공예나 드로잉, 목공이나 북아트 등 다양한 개인 작업하시는 분이 많아요. 공간을 나눠서 같이 작업하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많이 받아서 요새는 모카 포트로 커피 내리기를 열심히 연습해요. 공간을 얻어도 에스프레소 머신을 못 놓을 것 같아서요. 첫 직장생활에 데여서 다시 회사생활을 하고 싶진 않아요. 모모뮤 카페를 그만둬도 결국 또 다른 카페나 서점을 하면서 하고 싶은 걸 계속할 것 같아요.”

 

북씨는 1년 남짓 회사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모모뮤 카페 일을 잠시 쉬고 있지만, 카페 일을 그만둬도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한다. 독립출판물을 내고 커피를 내리는 일이 생계유지가 안 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먹고 사는 생각이 안 들 수는 없죠. 유명한 작가님도 주변 사람들이 밥은 먹고 사냐고 많이 물어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작가님은 “나는 조금만 먹기 때문에 조금만 벌어도 된다”고 했다고 해요. 저도 밥벌이 걱정은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게 제 모토예요. 물론 어떻게 벌까 지금도 생각은 많이 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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