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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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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매년 한국을 찾았던 유키 구라모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충북 음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콘서트의 티켓 가격이 누리꾼 사이에서 바이럴을 타면서 덩달아 그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린 것. 사람들은 지방 공연장에서 유키 구라모토처럼 유명한 음악가를 섭외했다는 것에 놀라고, 가격에 또 한 번 놀랐다.


유키 구라모토는 뉴에이지 열풍이 불던 2000년대 피아노 학원에 다닌 사람들에게 통과의례 같은 작곡가다. 1998년 정식으로 음반이 수입되면서 음악 팬들에게 알려진 후 「Lake Louise」 「Romance」 「Reminiscence」 등의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곡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들으면 ‘아!’ 하고 금방 알 만한 곡들이다. 20개 넘는 앨범을 냈고, 콘서트를 열면 늘 매진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 신지아,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디토 오케스트라 등 활발한 한국 협연 전적이 있다.


최근 출간한 악보집 『유키 구라모토 피아노 컬렉션 완전판』은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완벽한 방향을 제시’한다는 소개가 붙었다. 세 개의 테마로 대표작 중에서도 31곡을 소개한다. 악보 작성, 감수, 편곡을 모두 본인이 맡았다. 출간을 기념해 한국에 온 유키 구라모토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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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gWook Lee

 

 

악보는 기본적인 설계도

 

유키 구라모토 피아노 컬렉션 완전판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Love&Emotion’ ‘Nature’ ‘Story’라는 테마로 나눴습니다. 각 악보집의 콘셉트는 무엇인가요?

 

정확함은 당연하고, 실용적, 실제적인 것을 중시했습니다. Nature, Romance, Story는 유키 구라모토 음악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각 곡이 어느 하나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각 곡에 이 요소의 분배량은 다릅니다. 어느 악보집이든 연주하시는 여러분의 취향에 따라 고르시면 좋을 듯합니다.

 

편곡, 기보, 감수를 직접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준비하셨나요?


자작곡이므로 작곡이 곧 편곡입니다. 즉 곡을 발표한 시점에 이미 악보는 완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레코딩 때에는 음표가 연주용으로 기입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멜로디, 코드, 베이스음 등은 썼지만요. 따라서 출판악보를 위해서는 새로운 꼼꼼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기간은 다른 일과 병행해서 했기 때문에, 상당히 긴 시간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내악곡 형식의 곡을 피아노 솔로로 편곡했습니다. 앙상블 버전과 솔로 버전을 함께 실은 곡도 있고요. 같은 곡을 다른 버전으로 실은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요?


CD의 실제 녹음에서 사용하는 앙상블 악보를 피아노 1대로 연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스트링이 있는 것이 원래 모습인 곡도 있습니다. 이러한 곡도 편곡에 따라서는 피아노 솔로로 할 수 있습니다. 악보집은 악보집을 구입한 분들이 피아노 1대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해야만 합니다. 즉 각 악기의 에센스를 잘 골라 정리하는 작업이 앙상블 악보에서 피아노 솔로로 바꾸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연주자의 편의를 위한 편곡’입니다. 어떠한 스타일의 곡이라도 피아노 솔로로 원곡에 상당히 가까운 수준으로 연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음악팬 여러분이 알고 계실 겁니다. 원래 다른 스타일을 목표로 한 편곡도 실었습니다. 실내악곡 형식을 솔로로 편곡한 편의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말씀하시는 버전의 차이는 스타일의 차이, 즉 다른 맛을 가진 곡이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악보집을 편찬하신 이유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음악을 그 구조를, 설계를 통째로 후세에 전달하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연주하는가(피아노의 경우 양손의 배분), 어떠한 화성구조인가를 알리는 것입니다. 시간적 추이도 공간(악보의 지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이점 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악보가 필수적입니다. 악보는 듣는 것만이 아니라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또는 피아노 악보를 보면서 앙상블 곡을 들어보는 ‘적극적으로 음악을 즐기는 문화적 활동’을 위한 기본적인 설계도입니다. CD나 파일 등의 음원만으로 보존하면 불완전합니다. 악보가 없다면 그 음악은 언젠가 들을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주제(질문)에 정확하게 답변을 드리기 위해서는 장문과 긴 고찰이 필요합니다.

 

운지법 설명도 있습니다. 악보의 필요성으로 보았을 때 운지법도 악보에 표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기재한 운지보다 연주를 하기 쉬워질 가능성이 높은 곳에 붙였습니다’. 다만 각자의 기량, 손의 크기, 방침에 따라서 실제 운지는 연주자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운지를 기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 기재했습니다. 다만 운지는 원칙적으로 참고만 하라는 것입니다.


운지는 연주가에게 모두 맡긴다는 방침도 당연히 가능합니다. 쇼팽의 연습곡 중, 예를 들어 <넓은 아르페지오의 Op.10-1 및 화음을 동반한 반음계 10-2> 등에서는 그 이전 시대의 피아노곡에 비해 비약적인 진보성이 느껴집니다. 운지도 표기되어 있습니다(후세 사람이 추가한 버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한편 드뷔시의 연습곡에는 ‘운지에 대해서는 일부러 쓰지 않겠다’라는 재미있는 주의 문구가 있습니다. 이 ‘운지’에 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하면서 깊은 주제라서 정확하게 답변을 하려면 역시 긴 문장과 고찰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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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gWook Lee

 

마음에 스며드는 음악

 

유키 구라모토는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로 소개됩니다. 스스로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작곡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주도 하고 있고, 최근 실력도 좀 더 나아져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뉴에이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에이지 뮤직은 넓은 의미로 ‘듣기 쉽고 편안한 연주곡’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지금 하시는 음악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요?


뉴에이지 뮤직의 작곡가, 피아니스트로서 알려진 것에 대해 이견은 없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너무 단순하지도 않고, 난해한 부분도 없고, 마음에 스며드는 음악은 중요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른 장르의 음악도 연구는 하고 있습니다.

 

협연으로 대중음악에서 시너지 효과가 있는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클래식 음악 이외에 영화음악, 뮤지컬 등에서 가장 마음이 편한 분야는 어느 쪽인가요?


일본에서는 극반주음악, 뮤지컬 등, 주로 90년대에 많은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그쪽 일은 안 해봤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웃음)

 

클럽과 바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시면서 경험을 쌓아 35세 때에 메이저 데뷔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클럽과 바에서 연주한 것은 제가 20대 했던 ‘수많은 일 중 하나’입니다. 피아노와 관련된 모든 장르의 일을 했습니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주로 파퓰러 음악, 재즈음악, 또는 원곡과 편성이 다른 세미 클래식 음악, 악보(음표)가 없는 또는 존재하지 않는 음악을 연주(또는 편곡)했습니다. 클래식 피아니스트처럼 (모든 것이 악보에 기록된) 역사적인 명곡을 연습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일입니다.


CD데뷔처럼 화려한 것은 전혀 없었으며, 음악가로서 일의 내용은 예전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종종 ‘학교를 졸업한 후, 35세까지 대체 무엇을 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씁쓸한 웃음이 납니다.

 

만약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셨을 것 같나요?


음악 일을 시작해서 50년 가까이 지났고, 인생도 많은 부분을 지나왔기 때문에 이제는 상상도 안 됩니다.

 

최근 인터뷰에서 ‘다시 피아노에 미치도록 빠지고 싶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뭔가에 미치도록 빠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그 인터뷰 취지의 일환으로 ‘미쳤다’는 표현을 썼나 봅니다. 저로서는 어떤 시기, 집중해서 그 일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대학교 1학년 1년 동안은 ‘피아노를 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특히 피아노 연습을 열심히 했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에도 꼭 연주실력을 더욱 향상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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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gWook Lee

 

 

작곡가와 음악을 소중히 여겨주시길

 

2009년부터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콘서트: 유키 구라모토와 친구들>시리즈는 전석 매진입니다. 주로 어떤 곡을 연주하시나요?


자작곡 중, 우선 게스트 연주가(주로 솔리스트)와의 협연에 맞는 곡, 두 번째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곡에 적합하거나, 오케스트라를 전제로 한 곡입니다. 이밖에 크리스마스송, 또는 스탠더드곡을 피아노 솔로용으로 제가 편곡한 것도 연주합니다.

 

크리스마스, 화이트데이 등 주로 연인과 가족을 위한 기념일에 콘서트를 하시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뭔가 기념일인 편이 공연장에 오기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획을 짜기 좋은 날이죠. 저로서는 기억에 남는 좋은 연주회를 해야만 합니다.

 

콘서트에서 한국어로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신 지 어느 정도 되셨나요? 좋아하시는 한국어 단어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상당히 많이 방한했습니다만, 그때마다 통역하시는 분에게 짧은 시간동안 배우는 정도라 진도가 느립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할까요.

 

콘서트 전후의 징크스나 습관이 있나요?


명상이라고 하면 오버지만, 4, 50분 정도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쉽니다. 그냥 누워서 쉽니다.

 

짧은 일정동안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 전국 각지에서 콘서트를 합니다. 추억이 있는 도시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콘서트 전후로는 일정 면에서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서 관광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주도, 경주, 서울의 유명한 곳을 잠시 관광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나 좋은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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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gWook Lee

 

 

콘서트가 없을 때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시나요?


이 질문의 의미는 휴일에는 무엇을 하며 지내시나요? 라고 생각합니다만, 콘서트가 없는 날이라고 놀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일을 합니다. 콘서트를 위해서는 프로그램, 편곡, 연습, 스케줄 조정 등, 많은 업무, 잡무가 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어느 정도 긴 휴가를 낼 수 있을 때 유럽을 방문합니다.

 

피아노 이외에 흥미가 있는 악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음악가지만 음악을 즐기는 한 사람이므로 다양한 악기에 흥미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편곡을 위해서는 악기 및 음악이론의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한 적도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젊은 음악가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음악가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텔레비전 등에서 음악을 이용해서 방송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에게 ‘작곡가와 음악을 소중히 여겨주기 바란다’고 요즘 생각합니다. 일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뉴스 프로그램 등에서 아나운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필요 이상으로 BGM(아쉽게도 좋은 음악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많다)이 나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가요? 피아니스트로서 손 건강에 유의할 것도 같습니다.


손가락이 상한 적은 여러 번 있습니다. 작년 3월 13일, 한국 투어를 한창 할 때, 사실은 왼손에 통증이 생겨서 많이 힘들었던 적도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특별히 하는 것은 없습니다만, 폭음, 담배는 파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유키 구라모토 피아노 컬렉션 완전판 Love&EmotionYuhki Kuramoto 저 | SRMUSIC
오선지에 담기 힘든 곡에 대한 코멘트도 별도로 추가하여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완벽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임옥상 화백 “거리 자체가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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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개의 캔버스, 가로 16미터의 대작 <광장에, 서>는 임옥상 화백이 2016년 촛불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담아낸 그림이다. 청와대 본관에 전시되기도 해 큰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을 가리켜 임옥상 화백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담았다고 말했다. 해 같기도, 달 같기도 한 촛불의 이미지는 광장에 들꽃처럼 흐르고, 그 아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표정은 ‘이게 나라냐’, ‘탄핵’과 같은 거친 언어와는 달리 평화롭고 단정하다. 임옥상 화백은 언제나처럼 가장 지금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발언했다.


이 <광장에, 서>를 표지에 담은 『벽없는 미술관』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임옥상 화백의 작품을 화백의 글과 함께 담아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격랑의 시기, 엄혹했던 시대를 몸으로 살아낸 한 작가의 고민과 분노, 무엇보다 희망을 향한 열정이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독재와 비리에 대한 비판, 사회 그늘을 향한 직시를 당국의 감시와 억압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임옥상 화백의 신념이 따갑게 다가온다. 그리고, 현실을 인식하고 두려움 없이 발언하던 화백의 시선은 이제 대중에게로 향한다. “작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중심 이동을 해야”한다는 임옥상 화백은 이것이 분명한 시대의 화두라고 말한다. 미술관은 거리 그 자체여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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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하나의 들꽃이 되면 좋겠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살아오는 동안 지금처럼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정치과민이라고들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내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스트레스가 제일 컸던 것 같아요. 그런 스트레스가 작업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쳤거든요. 이상할지 모르겠는데, 좀 쪽 팔리잖아요.(웃음) 태어나 살고 있는 자기 나라, 자기 땅이 이렇게 유치하고 불의와 부도덕, 부정이 난무하는 곳이라니 말이에요. 그 속에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에요? 그 창피함이 굉장히 컸었어요. 어디 외국에 나가서도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 거북하고 창피스러웠죠.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 또한 그랬고요. 연민과 비아냥거림 같은 것도 많이 받았는데요. 그런 데서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았나 싶어요. 비로소 말이에요. 아직 어처구니없는 일도 종종 있지만요.

 

책머리에 글에서 ‘촛불 전과 후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는데요. 촛불 이후 1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했어요. 


나도 감히 한 공동체의 일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공동체 안에 많은 동지들이 있구나, 하는 건데요. 그것은 큰 위안이 아닌가 생각해요. 내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과 뜻을 같이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은 큰 위안이죠.

 

표지에 실은 <광장에, 서>는 바로 그 촛불 당시를 잡아낸 작품인데요. 선생님은 이 작품을 가리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그렸다고 설명하셨잖아요. 현재는 청와대 본관에 전시중이고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세상의 더러운 꼴을 다 겪으면서 지냈다고도 할 수 있죠. 시위를 하더라도 시위가 되질 않았었고요. 최루탄을 비롯해 온갖 폭력이 난무했고, 그런 속에서 시위가 진압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역사였기 때문에요. 그런 것을 체험했던 저로서는 광장에 앉아 촛불을 들 때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은 정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죠.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평화적으로 시위가 됐잖아요. 그처럼 아름다운 광경이 이 지상에 어디 있겠어요. 수많은 다수가 하나로 모이고 그러면서도 각각의 독립성을 가졌던, 이건 정말 아름다운 거죠. 우리가 만발한 들꽃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그것을 보면서 ‘나도 하나의 들꽃이 되면 좋겠다’는 느낌을 갖잖아요. 그런 느낌을 거의 그대로 받았었어요.

 

그 순간을 작품으로 증언하고자 하셨던 거군요.


증언까지는 아니고요. 현장에 있었으니 작가로서 이런 걸 제대로 못 그리면 내가 작가가 되겠느냐(웃음) 생각했어요. 하지만 작가로서의 자의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기보다 그냥 솟아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연스럽게 분출된 것이죠.

 

작업 기간은 얼마나 됐나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구상하는 데 오래 걸렸고요. 사실 어떤 표상, 사건, 경치, 이런 것이 있으면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들잖아요. 하지만 재현해놓고 보면 막상 굳이 왜 저런 걸 재현했는가, 싶어요. 게다가 이 촛불은 얼마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어요? 아마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의 역사 가운데에도 가장 많은 축에 속할 거예요. 그걸 내가 그림으로 한다는 게 부담이 됐어요. 그래서 아예 영상이나 사진처럼 재현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고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렇게 되면서 작업을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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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발언’


1970년부터 2000년까지, 30년의 시간을 한 권의 책에 묶었어요. 개정판이라고 하기엔 수록 작품수나 내용면에서 전혀 새로운 책이고요.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아주 기분이 좋았었어요. 지난날의 자신을 보면서 오늘의 나를 다시 한 번 되짚을 수 있는 시간이 됐고요.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내가 할 작업들이 아니겠어요? 그런 와중에 저의 예전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옛날에도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것들이 발견이 되더라고요. 그것으로 좀 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됐죠.

 

한 자리에 모인 선생님 작품을 보니 과연 ‘현실과 발언(1987년 발족한 민중미술 동인명)’이라는 말이 그 자체로 작품들을 수식할 수 있겠더라고요. 이에 대해 ‘나는 그림 그린다. 숨쉬기 위해, 살기 위해’라고 하셨죠.


현실 인식, 현실에 대한 의식이 그림 그리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현실 인식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좌우될 수밖에 없거든요. 하물며 예술이야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현실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작가한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가장 큰 전기는 대학원 논문 쓸 때였어요. 이전까지 내가 이상한 것을 했다는 첫 깨달음이 있었죠. 그것을 계기로 제가 추상적인, 소위 현대미술이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은유의 은유로 하는 작업이 시대 변혁을 시키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실과 발언’에서 시대 현실을 조금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나갔던 거예요.

 

그렇게 건져 올린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때는 엄청나게 돌아가는 때였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조심스럽긴 한데요. 적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적 비슷한 것을 보여주고 그게 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적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즉, 시대의 부조리와 독재 권력, 경직된 정치체제, 분단과 분단의 원인을 제공하는 미국 등에 대해서 가급적이면 조금 더 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박정희 시절에는 더 위험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는 보다 상징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제 자신을 숨겼죠.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즉흥성의 작가’라고 평한 성완경 평론가의 글에 공감했습니다. 표지 작품뿐 아니라 성수대교 사고를 보자마자 만든 <자동차 시대>, 광주를 얘기한 <얼룩>, <종이호랑이> 등이 그렇죠. 2016년 촛불 때는 광장 한 복판에 계셨고요. 선생님의 작품에서 ‘현재성’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탁 떠오르면 딱 작업을 해야 하는 거죠. 직관을 통해 얻어진 것을 그냥 나 혼자 느끼고 말면 그건 작품이 안 되잖아요. 바로 할 수밖에 없는, 해야 하는, 하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는, 그런 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것을 한 선배는 ‘임옥상은 번개 치듯 작업한다’고 했는데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많이 한 말도 그런 거예요. “그림이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잠이 오냐?”고 했었거든요. 시작을 했으면 빨리 끝을 봐야죠. 아니면 집어넣든가 말이에요. 특히나 이 작품을 하는 이유에 따라 더 빨라야 하는 것도 있죠. 어떤 건 정말 시간이 급박한 것도 있잖아요. 여유 있게 서서히 하는 것도 있겠지만요.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런 시대에 있지 못했단 말이죠. 그 속에서 여유를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사는 시대에서 사실상 여유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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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는 마침 아침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식사를 더 이상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자동차 시대, 추락하는 자동차! 그냥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주위에 있는 이것저것을 주섬주섬 모아 땅 위에 육필로 쓴 비망록이다. 그냥 정신병자처럼 만들어 낸 작품이다.(254쪽)

 

 

격랑 속에 있는 물고기


그런가 하면 아크릴부터 시작해 종이부조, 포스터, 컴퓨터그래픽, 설치까지 선생님은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해오셨거든요. 그건 기존의 것을 끊임없이 깨는 과정이었을 텐데, 계속해서 형식과 내용의 변화를 꾀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나의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보는 각도에 따라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요. 저는 한편 이런 생각도 해봐요. 내가 좀 익숙한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고요. 비슷한 것을 가지고 계속 다듬는 게 아니고 자꾸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 해야 풀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본래 작품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작품은 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흘러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시대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니까요. 계속 변하는데 작품이 하나의 목소리로 어떤 한 가지만을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에요. 나는 중심을 도처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심지어는 사람 중심에서 사물 중심, 미물 중심으로까지도 시점을 바꾸어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하죠. 그것을 오히려 나는 상상력, 창의력의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보거든요.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계속 쳐다보면 그게 뭐겠어요? 뻔하잖아요. 역지사지로, 계속 남의 입장에서 중심을 바꿔가며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또 나를 쳐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객을 정해놓고 사는 삶은 굉장히 정체적인 삶이라고 봐요. 주객을 계속 바꿔가며 봐야죠.

 

‘시대의 전위에 서야 한다’는 믿음이 도리어 작품 활동을 어렵게 한 적은 없었나요? 붉은 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압류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80년대처럼 엄혹한 시절을 지내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신념이라기보다, 저는 약간 푼수기가 있는 거예요.(웃음) 동료들이 다들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고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그걸 무섭게 생각하지 않고, ‘할 테면 하라고 해’라는 생각으로 한 거예요. 전들 앞뒤 안 따지겠어요? 따질 수밖에 없는데요. 왜 그렇게 그랬는지 말이에요. 하여튼 저도 좀 미스터리한데요. 한 개인이 활동하는 데 가족의 성원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사사건건 아버지가 불러 야단을 치거나 당국에 본인이 아니라 가족이 끌려갔다면 신념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겠죠.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셨어요. 지금 102세인데요. 그냥 “조심해라” 정도셨거든요. 그러니까 ‘나 하나 정도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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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조선’이란 말을 써도 관계없다. 귀빈을 모시기 위해 펼친 붉은 카펫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노동자가 두른 붉은 머리띠는 위험하고, 내가 칠한 붉은 황토색은 ‘좌경 용공’이 된단 말인가. 붉은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은 압류되고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저들의 ‘안보적 상상력’을 누가 말리겠는가.(84-85쪽)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너무 힘든 순간도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있었죠. 작품 빼앗기고, 재직하던 대학의 총장이 계속 지나가면서 한 마디 씩 하고 그럴 때는 힘들었죠. 이상한 교육에 자꾸 저를 보내고 그랬거든요. 블랙리스트가 되니까 늘 최우선 감시 대상이었어요. 자꾸만 호명되고, 몸으로 때워야 하고, 불편했죠. 하지만 이런 격랑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떻게 보면 더 싱싱하고, 힘도 세고, 건강하고 그렇지 않겠어요? 폭포 밑에서 노는 물고기와 계속 폭포를 치고 올라가려고 도전하는 물고기는 다르겠죠.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임옥상은 평화로운, 안정된 시기에 있었으면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웃음) 라고요.

 

 

모두가 건강한 미적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들


우울하고, 실망스러운 90년대 끝에 인사동 거리에서 ‘당신도 예술가’ 활동을 하며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경험하셨다고 하셨죠.


화랑과의 전속 계약이 끝나고 나서 경제적으로 험난한 시기를 보냈는데요. 그것이 저를 다시 변화시켰어요. IMF 직후였거든요. 공공미술에 눈 뜨게 된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냥 ‘이번 주에는 어떤 것 갖고 사람들과 놀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그럴 때였는데요. 연평도에서 싸움이 또 있었죠. 그 두 개를 엮어서 사람들과 같이 놀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그곳에 온 사람들이 박찬호가 되는 거죠. 그런데 뒤에는 폭탄이 터지는 설치미술을 해놓고 같이 논다든가 하는 식이었어요. 부시가 미사일이니, MD체제니 해서 한글날에는 한글로 사람들과 디자인 전시를 하기도 했고요. 재료에도 항상 변화를 주었어요. 안 써봤던 재료들을 막 쓰는 자유도 느껴봤는데요. 지금 하는 작업도 다 그 경험의 연장이에요. 그때 사람들에게 미술이 굉장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사람들이 미술을 참 좋아하는데 우리가 너무 전문가 입장에서만 보지 않았나 싶었어요.

 

이른바 ‘미술의 대중화’이군요.


우리가 사람들을 찾아가고, 같이 무엇을 해볼 생각 안 하고 미술을 모른다고 했던 거예요. 이런 것들을 반성하면서 사람들과 같이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요. 그때부터 공공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미술의 사회적 가능성을 좀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미술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보세요?


미술이란 것이 기회가 닿았고, 전공했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미술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또 생활 속에 미술이 존재하고 있고요. 그런 것들 사람들이 재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 속에서 모두가 스스로 건강한 미적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어디 가서 사람들이 ‘경치 좋다’고 할 때 반박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대부분은 다 비슷하거든요. 지나가는 사람이 진짜 멋있게 잘 입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알잖아요. 이 미감은 다 같이 공유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의 총화가 잘 정제되어 나오는 것이 작품인데요. 이걸 못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아예 미적 안목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는 얘기죠. 반대로 이들이 갖고 있는 미감을 토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해요.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건강하게 미적 실천을 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에요.

 

그 토대 위에서 미술 역시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겠죠.


공공 미술이라는 게 그거잖아요. 생활 속에서 미술을 향유하는 거죠. 유통 개념으로, 소유의 개념으로 미술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 예술을 자꾸 집어넣어서 그 안에서만 예술의 가치를 논의하려고 하면 안 돼요. 이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아니, 이걸 가지고 얘기하는 건 예술의 길이 아니죠. 어떻게 보면 예술을 파괴하는 거예요. 오늘날의 화랑 시스템, 경매 시스템은 어떻게 보면 금융 시스템과 똑같거든요. 예술이 이런 시스템을 방조하거나 따라가는, 그런 것으로부터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지켜야 해요.

 

지금 공공미술에 뜻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작가 개인이 가지는 꿈과 이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죠. 지자체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되어 있어요. 최근에 어느 놀이터 공모에 당선이 되었어요. 그런데 디자인비만 주고 끝이었어요. 시스템이 전혀 받쳐주질 않아요. 그러면서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셈이에요.

 

그렇다면 앞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공공미술이란 어떤 모습으로 진행이 될까요?


내 작품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인간답게,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문화적 요소를 갖추게 하는 데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재작년에 창신동에 ‘소통공작소’라는 것을 공모해서 했는데요. 제 작품으로 동네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거였거든요. 그때 공모를 하면서 ‘내 작품을 버린다’고 했었어요. 대신 컨테이너로 집을 지었어요. 사람들이 와서 숨겨져 있던 재능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사람들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창신동이 서울에서 단위 면적당 고용 지수가 제일 높은 곳이에요. 거기에 도시재생이라고 해서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사람들은 다 쫓겨나고 결국 집값만 오르겠죠. 저는 그 창신동의 사람들이 그대로 거기에 살면서 계속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도시재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려면 저 같은 예술가들이 개입해서 그들의 잠든 예술성을 깨우고 북돋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생활로 들어오는 장면, 생각만으로도 참 의미가 깊어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한때 일본에서도 1일 2-3취미를 얘기했었는데요. 이제 우리도 그런 사회로 진입해야죠. 취미 하나 정도가 아니라 취미 두세 개를 가지고 자기를 발현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할 거예요. 예술도 작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중심 이동을 해야 하고요. 저는 이것이 분명한 이 시대의 화두라고 믿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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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로소 출발


책에 담기지 않은 책 이후, 그러니까 2000년대 이후의 임옥상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작품의 공공성’이겠죠. 공공미술이 될 거예요. 제가 1999년에 ‘당신도 예술가’를 할 때만 해도 저를 이상하다고 했었어요. 전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요즘은 지자체마다 그렇게 안 하는 곳이 없을 정도잖아요. 저는 거리가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미술관을 가야하고, 화랑을 찾아 가야 하는 게 아니라 거리 자체가 미술관이 되고, 문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책 마지막 부분에 ‘새 천년은 시민의 사회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과 잘 조응하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사람의 사회, 시민의 사회예요. 촛불의 사회라 볼 수 있겠죠. 이 책을 관통하는 것도 어떻게 인간으로서 인간 정신을 훼손당하지 않고 나의 자유 의지로 사회에 공헌하고, 더불어 즐겁게 세상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이 촛불로 다소 이루어졌죠. 저는 이제 비로소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두 손으로 촛불을 들었었잖아요. 이제는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나머지 손은 또 다른 일을 해야죠. 화가인 저는 그림을 그리고요. 공히 모든 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라면 나머지 한 손에 책을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즉 인문 사회적인 지식이나 스스로의 철학과 성찰이 없이는 이 촛불은 그냥 타고 말아요. 그런 점에서 책이 촛불과 같이 들려짐으로써 출발점에 선 우리 사회를 앞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비로소 출발’이라는 게 아주 중요할 것 같아요.


저는 어떤 권력도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반하는 것은 모두가 적이죠. 그렇게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권력이 제대로 가지, 우리가 조금만 놓쳐 봐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거예요.

 


 


 

 

벽 없는 미술관임옥상 저 | 에피파니
암중모색의 1970년대, 광주의 핏빛으로 얼룩진 1980년대, 산업화로 우리 전통들이 희미해져가는 1990년까지, 한 개인의 시선을 넘어 1970~1990년대 대한민국 현대사를 살아낸 이들을 위한 생의 기록화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장석남 시인 “시는 절대 어려워서는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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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古代)의 융융한 세계”를 꿈꾼다는, ‘꽃 밟을 일을 근심’하는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1987년 등단한 이후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온 장석남 시인. 그가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이후 5년 만에 여덟 번째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을 냈다. 등단 30년 되는 해(2017년)에 출간된 시집이기도 해 더 의미가 깊었던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떠나온 자리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떠나온 자리란 곧, ‘고대(古代)’다. 시인은 대장간을 지나면서도(「대장간을 지나며」), 기차를 타면서도(「검표원」), 고대를 탐구했다. 그에게 고대는 ‘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녹슨 솥 곁에서」)이며, ‘조용한 흥얼거림’(「햇소금」)이 들려오는 곳이었다. 즉, 고대란 우리가 떠나온 동시에 가 닿을 곳일 터. “우리의 과거는 우주에서 왔지만 또 우리의 미래도 우주로 가는 것”이라는 시인은 올 겨울 절에 머물면서 온 존재가 합일 되는 세계를 상상한다. 시인의 절에서의 하루를 떠올리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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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할 수 없는 부분들


5년 만에 여덟 번째 새 시집을 내셨어요. 한 권의 시집에 많은 시간의 무게가 담겼다는 느낌입니다.

 

5년 전에 시집을 냈다고 해서 그 5년 동안의 이야기는 아니겠죠. 살아온 이력의 전체가 다 담기는 걸 텐데요. 5년 동안 조금 전개된 것이 있다면, 어떤 축적된 것이 있다면 있겠죠. 굳이 얘기해서 그 전의 시들이 사는 이야기에 관점이 더 많이 있었다면 보다 떠나온 자리, 개인이든 공동체든 인류든, 떠나온 자리에 대해서 굉장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떠나온 자리요.


이제 나이가 꽤 됐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연로하신 나이가 됐고요. 그러다보니 어디로 가는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 것일 텐데 말이에요. 편의적으로 그것을 ‘고대(古代)’라는 이름으로 붙이기는 했으나 이름 붙일 수 없는 데죠. 말이 없던 자리, 그런 자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말이 생기기 이전의 저 고대(古代)의 융융한 세계를 꿈꾸어본다.
삶이 덜 모순적이었으리라.
훨씬 넓었으리라.

다시 한살씩 어려지기로 하자.
말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로 가자.
그저 울음으로만 말하는……(114쪽, 시인의 말)

 

고대라고 하면 이전의 시간인데요. 굉장히 먼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시의 제목은 「고대에 가면」이기도 하죠. ‘가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이 흥미로워요.


시간적으로는 과거인지 모르지만요. 우리가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죽음도 ‘돌아가셨다’고 말하고요. 결국 그것으로 향하는 것이겠죠. 전 우주가 되는 것일 테고요. 우리의 과거는 우주에서 왔지만 또 우리의 미래도 우주로 가는 것이죠. 합일 되는 것, 그런 세계를 상상해본 거예요.

 

말씀에서도 느끼지만 시 전반에도 불교적인 감각이 많이 느껴져요.


지금도 절에서 왔는데요.(웃음) 화엄사에 며칠 있다가 오늘 온 거예요. 다시 가서 있어볼 예정인데요. 불교 공부를 깊이 한 건 아니지만 조금씩 해 나가다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네 번째 시집의 「번짐」 같은 것들은 생각해보면 그렇죠. 오두막이 나비가 되기도 하고요. 여름이 가을이 되고, 또 삶은 죽음이 되죠.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을 환하게 비쳐주고요. 죽음이라는 것도 삶 밖으로 나가는 것일 테죠. 말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들이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것이 불교적이라면 불교적일 수 있겠죠.

 

이번 시집에서 그런 생각이 특히 많이 담긴 시를 꼽아주신다면요?


2부 제목이 ‘한 소식’인데요. 한 소식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야기해요. 시집 제목도 한 소식이라고 할까 했는데 너무 큰 말 같아서 그러진 못했고요. 「눈사람의 스러짐」 같은 시도 실은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우리가 자유 이야기를 하잖아요. 대자유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요.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세계에 가고 싶다는 걸 텐데요. 우리 삶이 눈사람의 스러짐과 같지 않나 생각했어요. 눈사람이라는 건 본인이 형성된 게 아니라 만들어놓은 것이죠. 또 만들어놓고 가버리잖아요. 그러면 그 눈사람의 외침이 녹고, 흘러서 수로를 따라 가는데요. 녹아서 스러지는 게 자유를 얻은 것인가, 하는 한계 같은 것들을 얘기했다고 볼 수 있어요.

 

시라는 것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최대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말 이전의 것들, 즉 고대의 정체를 찾아가는 시인의 노력은 더 의미가 깊은 것 같습니다.


한 소식을 한다고 하는데요. 순간적인 것이죠. 「바람과 대와 빛과 그릇」도 그런 거예요. 제 방 이야기인데요. 방 앞에 대나무가 있어요. 대나무가 바람 불면 눕잖아요. 그러면 컴컴했던 방이 일순간 잠시 환해져요. 구석에 그릇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 그릇도 그 틈에 환해지고요. 그 환해진 틈에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상에서 사용하려고 둔 그릇은 아니죠. 근데 그 그릇이라는 것도 인간이 빚은 거잖아요. 그것이 순간 환해졌고, ‘이게 뭐지?’라는 느낌이 오면서 나는 바람 족속이었고, 대와 그릇과 일가였다,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다시 환해지길 기다리니까요. 물론 바람은 유동체니까 인간의 삶과 비슷하겠죠. 빛도 그렇고요.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릇과 빛과 대나무와는 일가였던 거예요. 그렇죠?(웃음) 그 관계들이 재미있죠. 그동안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불교적 인식이죠. 봄으로써, 관계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에요. 원래는 없었던 것인데 말이죠.

 

감씨 한 알에 감나무 전체가


너무 큰 말이라 제목 삼지 못했던 ‘한 소식’ 대신에 제목에 사용한‘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입춘부근」의 시구예요.


이런 저런 제목을 놓고 얘기하다가 정한 건데 괜찮았어요. 보니까 꽃 얘기가 꽤 많더라고요. 이전 시집들에도 그렇고요. 전 몰랐어요. 잘 몰랐는데요. 우리가 나무 입장이 돼보지는 않았지만 꽃이라는 것은 식물로서는 청춘이잖아요. 꽃이 필 때는 식물들의 연애기간일 테고요. 열매로 가는 과정이죠. 한편 봄이 오는 것(입춘)은 다시 나이테 하나를 보태는 일인데요. 마침 그때가 저의 인생에서는 꺾여서 후반 쪽으로 가고 있다는 인식 같은 것들도 있었죠. 「입춘부근」은 홀로 밥 먹는 이야기인데요. 꽃을 밟는 일은 사실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근심스럽기도 한 거죠. 과연 제대로 열매를 맺을 것인가, 생각한 거예요. 또 우리는 꽃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고요. 거기에 기러기 소리와 우리 내면의 시끄러움 같은 것들이 동시에 무안하게도 ‘너 혼자 밥 먹니? 살려고?’라고 한 것 같은 그런 게 있던 거죠. 그런 면들을 얘기한 거예요.

 

전해주시는 이야기들이 쉬운 얘기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시인의 언어는 그렇지 않죠. 무척 자연스러운, 일상의 언어예요. 그런 시어가 주는 울림이 참 특별하더라고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생을 쉽고 간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요. 굉장히 공감하게 됐어요. 공부를 했는데 인생이 더 복잡해지면 공부의 목적에 맞지 않죠. 역시 시라는 것은 농담 삼아 얘기할 때도 쉽고도 간편한 언어로 인생의 깊이를 얘기하려고 하는 건인데요. 그게 왜 어려워야 하나요? 절대 어려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좋은 시, 오래 읽어서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시들은 공통적으로 또 그런 거죠. 말들이 꼬인 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가 왜 짧겠어요? 짧으라고 시죠.(웃음)

 

나는 일말의 유보도 없이 감탄한다. 쉬운 문장들이 차근차근 모여 전체가 깊어지는 좋은 사례다.(중략) 물론 이런 매혹적인 애매함이 시 내부에 넓은 사유의 공간을 열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103-104쪽, 신형철 평론가 해설 부분)

 

감 씨앗 같은 것 보세요. 얼마나 간단해요? 그런데 그 감씨 한 알에 감나무 전체가 들어 있잖아요. 그 자체가 감나무예요. 시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말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 아닌 행간 속에 감의 씨앗 같은 핵이 들어 있어서 그것을 들여다보면 그것으로부터 전체가 다 나오는 거죠. 그런데 감씨가 어려워서야, 말이 안 되죠. 꽃도 그렇잖아요. 알기로 치면 꽃처럼 어려운 게 없죠. 하지만 그냥 전체가 쫙 오는 거잖아요. 시가 어려워서는 안 돼요. 꽃처럼 쫙 온 다음에 그 의미가 보는 만큼 보이는 것이에요.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만들어서는 생명이 되지 않잖아요. 어려운 것은 만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드니 어렵죠. 낳아놓으면 안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시를 낳는다는 건 어떤 걸까요?


굳이 찾아온 단어들이 어렵죠. 자기 생각으로 영글어진 것, 체험이나 느낌으로 영글어진 것이 낳은 시일 거예요. 사실은 쉬운 시를 쓰는 게 더 어려운지도 몰라요. 살아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어려운 시들을 보면 삶이, 인생이 느껴지지 않아요.

 

지금 시인 안에서 영그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지네요.


우리가 작년에 유래 없는 체험들을 했잖아요. 일련의 사회 현상들을 보면서 저의 일과 결부시킨 것이 있었어요. 촛불이라는 도구로 말하자면 무혈혁명을 이룬 것인데요. 혁명은 빨리 죽는 거예요. ‘혁’자가 ‘가죽 혁(革)’자거든요. 빨리 죽고 다시 나는 건데요. 사실 시라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던 것,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빨리 쳐내 새 가지가 나도록 갱신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시를 읽으면 갱신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살고 싶다는 에너지를 주는 시도 있고요. 쓰는 입장에서도 그렇거든요. 무서운 말이긴 한데 내가 죽어야 내가 난다, 는 말도 있고요. 시라는 것도 그런 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빨리 의심하고 빨리 묻어버리고 새싹을 돋게 하고 그것이 굳어지면 또 빨리 묻고요. 갱신하고, 갱신하면서 조금씩 나이테가 늘어나는 것이죠. 그 한 칸 늘어나는 게 쉬운 게 아니죠. 그렇죠?(웃음) 그런데 우리는 비로소 나이테 하나가 조금 늘어난 거죠. 죽음으로써 말이에요.

 

연작시를 많이 쓰시잖아요. 여러 편인 듯, 한 편인 듯 뻗어나가는 시들인데요. 함께 읽는 재미가 있어요. 여기에는 쓰는 입장에서의 즐거움도 있는 거겠죠?


그럼요. 맨 앞에 수록한 「소풍」과 「불멸」도 제목이 연작은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대화를 하고 있어요. 사실 크게 보면 다 연결이 되죠. ‘수묵정원’ 연작은 의도적으로 10편을 쓴 것이지만 「마당에 배를 매다」, 「배를 밀며」, 「배를 매며」 같은 시들은 한 편이 나온 후에 자매편처럼 같이 나온 거예요. 세 편이 앞뒤를 구성하죠. 이 시집에 있는 「문을 얻다」와 「문을 내려놓다」 같은 시도 그렇고요. 그것은 한 면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면이 있고, 측면이 있잖아요. 측면이라고는 하지만 그쪽 가면 또 그것에 정면이고요. 그런 면들을 보게 되니까 서너 개가 짝을 이루는 경우도 생기더라고요.

 

시를 쓸 때는 물론이고 한 권의 시집에 묶었을 때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도 있을 것 같아요. 쓸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떤 시가 따로 떨어져 있던 다른 시의 질문에 답을 하기도 하고요.


차례대로 써지는 게 아니잖아요. 수년 동안 쓰인 시들을 배열하다보면 2년 전에 쓴 시와 지금 쓴 시가 호응하기도 하고 그렇죠.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비슷한 것끼리 묶어 놓으면 이 시로 질문하고, 이 시로 답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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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 자체가 새로움


교단에 계시는데요. 학생들에게 많이 하는 말이 있으세요?


우리도 그런 나이를 겪어서 알긴 하지만 잘 쓰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이해는 할 수 있죠. 등단하고 싶고, 이름도 좀 나고 싶다,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요. 그러다보니까 자꾸 시를 쓰는 거죠. 인생을 안 쓰고요.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거예요. 자기를 봐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시를 써서 즐거워야 하는데 마치 숙제처럼 해요. 시의 즐거움을 알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인데 그것을 마치 입시 도구처럼 대하는 거죠. 학생들이 그런 걸 통과해서 오니까요. 기준점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데 바깥 어딘가에 있는 거예요. 어떤 선생님은 그렇게 가르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래서는 절대 좋은 예술가가 되긴 어렵겠죠.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인이 지겨워서 못 쓰겠죠. 재미가 없으니까요.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잘 안 먹히죠.(웃음) 그게 좀 안타까워요.

 

시인의 30년 시 삶도 되짚어보고 싶어요. 시는 어떨 때 시인에게 오는 건가요?


사는 건 비슷하잖아요. 안 쓸 뿐이지 쓰는 사람과 사는 건 다 비슷한 것인데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 안 보이는 것에 대한 궁금증 같아요. 제게 그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온 거죠. 안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사진에서 ‘아이레벨숏(eye level shot)’이라고 하잖아요. 서서 사진을 찍으면 똑같아요. 남들 보는 것 나도 보는 거죠. 그런데 카메라를 바닥에 놓는다든가 높이 놓으면 다르죠. 정보적인 것을 뛰어넘는 게 있어요. ‘주역’을 보면 ‘겸괘(謙卦)’라고 있어요. 이 겸 자가 ‘겸손할 겸’인데요. 64괘 중 아주 선호하는 괘예요. 산이 땅 속에 묻혀 있는 이미지인데요. 낮은 자리죠. 안 보던 것, 못보고 지나친 것을 보는 거고요. 시 쓰는 사람들은 좀 모자라잖아요.(웃음) 부적응자고요. 그러니까 그런 게 보일 수밖에 없고요. 시는 그런 걸 보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런 면들을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거죠. 걱정스러운 인생이에요.(웃음) 개두릅나물과 비슷해요.

 

개두릅나물을 데쳐서
활짝 뛰쳐나온 연둣빛을
서너해 묵은 된장에 적셔 먹노라니
새장가를 들어서
새 먹기와집 바깥채를
세 내어 얻어 들어가
삐걱이는 문소리나 조심하며
사는 듯하여라
앞산 모아 숨쉬며
사는 듯하여라
(70쪽, 「개두릅나물」 전문) 
 
시, 그리고 시인을 볼 때면 경외감이 드는 동시에 걱정도 함께 들거든요. 종종 시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 때가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명이, 기술이라는 것이 발전해가는 건 맞는 것 같아요. 달에도 가고, 핵도 만들죠. 그런데 궁극적인 것으로 가서 문명을 내다보면 참 야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또 한편으로는 그런 질문도 하고요. 과연 발전이라는 게 있을까? 저는 학생들과 그런 토론을 할 때도 있어요. 모더니즘, 현대성을 이야기하고, 시라는 것에도 새로운 게 있다는데 뭐가 새로운 것일까, 라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거든요. 형식이 새로운 게 새로운 것일까요? 그렇다면 1930년대의 새로운 시 형식 실험 같은 것들, 이상의 시를 넘어설 새로움이라는 게 있을까, 그런 생각할 때가 있죠. 저는 회의적이에요.

 

시는 기술과는 다른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시란 끝없이 발전하는 게 아니에요. 한 개인에 있어 발전은 가능하죠. 못 보던 세계를 계속 봐야 하니까요. 그렇지만요. 정경화의 바이올린 기술을 그대로 받아서 가면 좋지만 아니잖아요.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또 하는 거잖아요. 미당이나 보들레르의 시력을 이을 수 없어요. 예술은 걸음마부터 다시 하는 거예요. 예술은 개인이 하는 것이고, 개인의 삶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명이 발전해가듯 사다리를 이어가는 게 아니죠. 자기 독립성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이미 낡은 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일종의 강박을 갖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는 거죠. 예술은 발전하는 게 아니고 또 다시 쓰는 거예요. 거기에 내가 있으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새로움이죠. 나라는 인생이 세상에 없던 거니까요. 내가 있으면 나라는 이름의 지문이 새로움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절에서 지낸다고 하셨잖아요. 시인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이제 얼마 안 됐어요. 가니까 너무 좋아서 방학 내내 있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절 체질인 것 같아요. 딱 맞아요. 목탁 소리, 새벽 예불 소리도 좋고요. 절에서 재미있는 체험을 했는데요. 지금 묵고 있는 절에 일제 때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소녀 시절 절에 올라온 할머니가 있었대요. 거기서 일생 지내신 거예요. 해방 후에도 말이죠. 70년 정도 됐겠죠. 그 절에서는 아주 전설 같은 할머니예요. 그 수행만으로도 부처가 된 거죠. 그런데 그 보살님이 돌아가시고 선한 귀신이 되셨다는 거예요.(웃음)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님처럼요. 그런데 어제 절에서 자는데 문득 문을 툭 치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바람도 안 불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쭈뼛했죠. 그게 그 할머니라고 하더라고요. 다음에 또 그러면 그 할머니니까 문을 열어주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재미있죠?

 

이런 일화마저도 말 이전, 고대의 어떤 것으로 느껴지네요.


그런 거죠. 전설화된, 신화화된 거죠. 그분의 한(恨) 같은 것이 예쁜 이야기가 된 셈인데요. 그 이야기가 뭔가를 생각하게 하잖아요. 고대적인 것이지만 말이에요.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도리어 안 먹히죠. 사실은 설명처럼 미개한 게 없어요. 가장 낮은 수준의 말하기가 이해래요. 설명과 이해요. 그러고 보니 또 그래요.

 

올해 에세이도 출간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절에 대한 글들이 꽤 있어요. 글이 조금 부족해서 더 써서 마무리할 계획이에요. 지금 절에 간 김에 써보려고 하는데요.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장석남 저 | 창비
일상에서 정성스레 길어올린 사유와 특유의 아름다운 시어를 여전히 간직하면서도, 독특한 선적(禪的) 철학과 시적 뿌리의 탐구인 고대(古代)라는 새로운 화두를 선보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PD “저는 ‘낭만적 인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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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PD가 첫 책을 썼다. 에세이의 제목은 『낭만적 인간과 순수지속』. 그는 “이 책은 나의 삶과 음악, 내가 경험한 사람과 사건이라는 종유석의 종단면”이라고 적었다. 단순히 ‘시간의 조각들’을 나열한 게 아니었다. ‘생각의 조각들’을 담아둔 것에 가까웠다. 가수 조PD를 포함하는 인간 조중훈이라는 존재, 그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매우 다양해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당신이 생각하고 있던 조PD의 모습과는 사뭇(혹은 몹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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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요?


첫 책을 쓰신 소감이 궁금해요.

 

저는 책은 못 쓰겠더라고요(웃음). 너무 어려워요. 글발이 조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죠.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자다가 가위에 눌릴 정도로 너무 힘들었어요.

 

가사를 쓸 때와는 또 다르던가요?


완전 다르더라고요. 초등학생이랑 대학생의 차이인 것 같아요.

 

가사를 쓰는 게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한데요. 함축적으로 전달해야 하잖아요.


함축적으로 쓰는 노하우는 조금 필요해요. 노래랑 같이 들려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 외에, 필력이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차이가 크더라고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많이 느꼈어요(웃음).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닌가요(웃음). 책에 담긴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속도감 있게 읽히고요.


저도 놀란 부분이었어요. 친구들한테 책을 선물했는데 두 시간 정도면 다 읽더라고요.

 

인터뷰어가 돼서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셨어요.


목차를 정하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요. 그때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서 인터뷰 포맷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책을 빌미로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섭외할 수 있으니까 좋더라고요(웃음).

 

첫 번째 인터뷰이가 ‘험온’의 최병익 대표예요. 허밍만으로 작곡을 해주는 앱을 개발한 분이시죠. AI가 음악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민하시는 것 같아요.


음악 산업뿐 아니라 비즈니스 전반, 경제 전반에 있어서 중개 역할을 없애는 거니까 당연히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의 제작부터 소비까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 없어지는 것과 새로 생길 만한 게 뭐가 있을지, 그런 부분에서 관심이 시작된 거죠.

 

혁신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세요?


전문가들과 접촉을 해볼수록 확고해지는 진실이 있다면, 현재는 AI가 걸음마 단계라는 거죠. 지금 이걸 가지고 뛰고 나는 이야기를 하는 건 거짓말인데, 그렇다고 그런 시기가 안 오지는 않을 거라는 거예요. AI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늦은 시점은 아니고요. 또 하나는 윤리죠. 윤리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서 인류에게 굉장히 큰 변화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됐어요.

 

처음으로 인터뷰어가 되어본 느낌은 어땠나요?


음... 잘 맞는 것 같아요.

 

호기심이 많으시니까, 즐기면서 하셨을 것 같아요.


성격상 뭘 하나 들으면 가지 치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해요. 그러다 보니까 잘 맞더라고요.

 

윤일상 작곡가와는 굉장히 친밀한 사이잖아요. 인터뷰 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나요?


되게 어색했죠(웃음).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어요. “대중은 아티스트와 상업 음악가를 구분하잖아”,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같은. 스스로에게도 화두가 아닐까 싶어요.


사실 저희는 그 질문들에 대한 정의를 굉장히 일찍 내렸어요. 특히 일상이 형 같은 경우는, 비판하려고 하면 그럴 거리가 많아요. 상업 작곡가라고 할 수도 있고 맞춤 작곡가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게 어떤 대상에 딱 들어맞는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인데, 항상 사람들은 반대로 비꼬아서 비판하잖아요. 실제로 일상이 형은 초기에 많은 압박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정도 이슈를 가지고 저희가 심각하게 소주를 기울인다거나 하지는 않아요(웃음). 이제 그럴 정도의 상태는 많이 지났죠. 어떤 음악가로 남고 싶으냐는 것도 조금 넘어선 것 같아요.

 

초연해지신 거예요?


네(웃음). 다 때가 있더라고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다 보니까 ‘거기에 연연하던 때도 있었구나’ 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거예요. 그리고 일상이 형을 보면 매일 바빠요. 항상 일에 치여 있죠. 늘 그렇게 사니까 이상할 것도 없고 감상적일 것도 없어요.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아요


에세이를 통해서 대중이 잘못 알고 있는 걸 바로잡거나 편견을 부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럴 생각은 별로 없어 보여요.


그렇죠. 이 책을 쓴 데는 다른 목적성이 없어요. 진짜 제 이야기이고, 그걸 친한 사람들한테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쓴 책이에요. 평소에 제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저희 어머니도 책을 보시고서 ‘아, 우리 아들이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셨대요(웃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담아낸 거죠.

 

『낭만적 인간과 순수지속』이라는 제목이 딱딱하고 무겁지 않나요? 판매에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어요(웃음).


사실 저는 앨범을 낼 때도 홍보를 많이 안 해요. 그런 버릇이 들었어요. 데뷔할 때부터 PC 통신에서 반응을 얻으면서 홍보가 됐잖아요. 그런 배경이 있다 보니까 앨범을 내면 어느 정도 팔리는 아티스트로 안착이 됐고, 홍보에 그렇게 열을 올려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게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좋게 만들자, 그러면 어떤 계기가 생겨서 빛을 보게 될 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거였고요. 책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2년 넘게 음반 활동을 안 했는데,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조금씩 더 알려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들여 만든 앨범도 홍보가 부족해서 묻힐 수 있잖아요. 초조하지 않으세요?


초조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너무 느긋하신 거 아닌가요(웃음).


음... 될 때는 또 되더라고요(웃음).

 

‘조PD는 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 이미지가 잘 안 바뀌어요.

 

그런 선입견을 깨고 싶다는 생각 안 드세요?


중간에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요.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한 번 생긴 이미지를 바꾸는 것도 정말 힘들지만, 그걸 만드는 것도 굉장히 힘들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저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이미지를 얻은 셈이죠. 마케팅으로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으면 광고를 얼마나 많이 해야 했겠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다행히도, 타이밍이나 여러 가지 여건이 잘 맞아서, 확고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거잖아요. 그게 원하는 것이었든 원하지 않는 것이었든. 그러니까 굳이 그걸 부수거나 변명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계속 해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대중에 비친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괴리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나요?


싸이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 이미지가 참 편한 것 같다고요. 사실 저희는 X세대 래퍼, 세기말 래퍼라는 이미지 때문에 많은 걸 용서받았죠(웃음). 면죄부가 주어졌죠. 그래서 편하게 다녔어요. 잘하면 칭찬 받고, 못하면 생긴 대로 논다는 이야기 듣고(웃음). 그래서 나쁘지는 않았어요. 

 

직접 뵈니까 굉장히 부드러운 이미지인데요? 이렇게 잘 웃으시고 상냥하신 분인지 몰랐어요. 비즈니스와 일상생활이 너무 다르신 거 아니에요(웃음)?


이중적이라는 이야기는 초반부터 많이 들었어요. DJ DOC처럼 실생활에서도 악동으로 살아야 된다고도 하는데, 저는 DOC 형들이랑 친하지만 사고방식이 달라요. 하늘이 형이나 창렬이 형이 그래요. 너는 너무 이중적이야.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제 음악이 더 세다고 말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다짐을 해도 총각 시절과 똑같은 감성을 내기가 쉽지는 않다”고 쓰셨어요. 이것 때문에 고민하신 적도 있나요?

 

20대 초반의 열정으로 하는 에너지는 나중에 재생이 안 돼요. 그런 부분이 있는 건 맞아요. 물론 기승전결 정리가 세련되지 않고 톤도 조금 이상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네 마디 여덟 마디의 아이디어는 그때만 나올 수 있는 거거든요. 총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50대, 60대에게는 원숙미가 있다고 하지만 20~30년을 해왔는데 원숙미가 있는 건 당연한 거죠. 그건 자연스럽게 세월에 따라오는 거잖아요. 프로듀서는 20대의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를 잘 취합해서 자신이 가진 원숙미랑 버무리고, 그렇게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계속 새로운 것과 소통해야 하고 자기를 갈고 닦아서 (기량을) 잘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 하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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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이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죠


직관을 믿으신다고요. 음악을 만들 때 대중이 좋아할지, 지금의 유행에 맞는지, 그런 건 생각하지 않으세요?


트렌드를 해법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초기에는 그걸 너무 싫어했고, 지금도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차트 중심으로 만드는 음악은 잘하지도 못하고, 제 길도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제 음악을 하고 싶은데,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차적으로 차별화되는 음악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는 거라면,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아이돌 제작을 하실 때는 어땠나요?


사실 아이돌 음악은, 아주 유명 브랜드가 있지 않으면 음원 차트 100위권에 안 들어가요. 그런데 회사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성과를 내야 하잖아요. 팬 카페 가입률도 높여야 하고 실시간 검색에도 올라야 되고 여러 가지 팬을 늘리기 위한 활동들을 해야 하는데요. 제가 택했던 방법은 트렌드를 따를 게 아니라 아예 차별화하자는 거였어요. 그래야 방송을 한 번 나가도 실검 1위를 해요. 같은 지점에서 경쟁하면 엑소가 1위를 하지, 우리가 1위하지는 못하거든요. 그런 것처럼 아이디어로 해야 돼요. 돈으로 하려고 하면 안 되고요.

 

‘매직 모멘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일 텐데요. 자주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시즌에는 자주 와요(웃음).

 

성수기가 있군요(웃음).


네, 성수기가 있어요(웃음). 그때는 자주 와요.

 

20대 때는 작업실을 떠나지 않으셨다면서요? 그 순간을 놓칠까 봐. 요즘에는 어떻게 하세요?


요즘은 아예 안 해요. 지금은 제가 그럴 때가 아니에요. 20대에는 그걸 할 때라고 생각해서 한 거예요. 다시 안 올 시간이기 때문에. 서른 이후에도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시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았고, 그 다음부터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고, 경험도 쌓고, 사업도 해보고요. 그러니까 20대 때는 어설프게 어디 나갈 필요가 없었던 거죠. 나중에 실컷 나갈 테니까. 지금 그렇게 하면 손해가 커지죠. 만날 사람도 많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작업하고 있으면 안 되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매직 모멘트’가 찾아오면 메모를 하나요?


멜로디가 나올 때는 그냥 휴대폰에 녹음하면 되는데요. 가사는 그런 식으로 안 나와요. 고민을 해야 나오는 거거든요.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면, 잘하면 한 곡 정도는 나와요. 어제도 그렇게 해서 두 곡을 썼어요.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다”고 쓰셨잖아요. 그래도 ‘그 경험은 안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게 있지 않나요?


어제 쓴 두 번째 곡이 그 내용이에요. 후회할 만한 경험을 여자로 비유해서 썼는데요. 간주까지는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쁘다’는 내용이 나오다가, 코러스에서는 ‘애당초 안 만났어야 됐다, 다시 태어나면 유유히 옆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가사가 나와요. 그런데 어떤 경험을 함으로써 보완을 거쳐서 더 좋은 성과를 이뤄낼 수도 있잖아요. 그걸 액땜이라고 하죠. 그 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자빠져버리면, 그건 나를 죽이는 경험이니까 안 하는 게 낫겠죠. 그게 아니라 더 잘 될 자신이 있거나 가능성이 있다면 언제든 상황을 좋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경험은.

 

“힙합 정신이란 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최근의 힙합 문화와 아티스트를 볼 때 아쉬운 점이 있나요?


그렇죠... 힙합이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죠.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너무 인스턴트화 됐죠. 정통을 추구하고 무대 하나를 만들어도 영화를 연출하는 것처럼 하고, 그런 게 이제 없어졌죠. 사실 그럴 만한 투자를 안 하죠. 어떻게 보면 이제는 다 클립으로 가는 음악이 돼버린 거예요.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봤는데, 호흡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라이브를 하더라고요. 그냥 팬이 한 명 무대에 올라와서 하는 거나 똑같았어요. 작년에 제일 히트했던 뮤지션 중 한 명이었는데도요. 물론 켄드릭 라마나 드레이크처럼 현상 유지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올해의 신인이 끊긴지가 너무 오래된 거죠. 그냥 소비되는 사람들, 한 곡만 히트시킨 원 히트 원더들만 있죠. 그런 걸 봤을 때는 장르가 퇴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새로운 장르가 넘겨받겠죠.

 


모두가 아빠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블락비와의 결별에 대해서도 쓰셨어요. “사건의 배후에는 멤버들을 선동하고 부추긴 이들이 있었다”는 표현도 있는데요.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굳이 꺼내신 이유가 있나요?


이미 다 기사로 나왔던 이야기예요. 법정 공방이 있을 때요. 또 멤버들이 스스로 조작했다고 하면 블락비한테 더 안 좋은 거잖아요. 나쁜 어른들이 그렇게 했다고 밝히는 게 그 아이들한테 더 낫지 않나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쓴 거고요. 만약 반대의 경우였다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 이야기는 쓰지 맙시다’라고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아직도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당시 소속사에서 블락비를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고요.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소문이 무성한 업계이기도 하고, 거기다 우리는 거의 언론재판을 한 거예요. 모든 기자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요. 그러니까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고 싶으면 어떤 언론사든 발췌해낼 수 있는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게 그렇게 헤드라인 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3~4년 전의 철 지난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어떤 계기로든,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앞에 있었던 족적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굳이 ‘한 번 더 들어봐 주세요, 그런 일 아니었어요’ 하고 확성기 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방송계와 음악 산업의 문제점이라고 할까요. 아쉽게 느끼는 부분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유 중 하나였나요?


힘든 건 극복할 수가 있고, 또 어지간히 극복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한 번 잘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인데, 그걸 다음으로 이어가면서 계속 지속하는 게 되게 힘들어요.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그리고 시장 논리가 바뀌어 버리면 일개 회사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기획사의 한계를 본 거죠. 만약에 제가 블락비와의 사이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 뒤에 만든 이블이랑 탑독이라는 팀이 다 잘 됐을 수도 있을 거예요. 어느 정도 실력과 브랜드가 바탕이 된 상황에서 앨범을 출시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업계 4~5위 정도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하게 됐다면, 그래도 결국에는 딜레마에 봉착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4~5년 지속할 걸 10~20년으로 늘릴 뿐이겠죠. 그렇게 살았으면 오히려 더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전이 있는 거죠.

 

음원 수익이 분배되는 과정의 문제도 있잖아요. 책에 쓰신 내용을 예로 들면, 지난해 상반기에 ‘볼빨간사춘기’가 받은 음원 수익이 7000만원이라고 해요. 스트리밍 횟수가 2억 건이 넘는데 말이죠.


기사에서 발췌했던 수치인데요. 사실 가수 인세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죠.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몇몇 스타플레이들처럼 자기 비즈니스로 하지 않는 한, 순수한 창작자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이잖아요. 이런 관행이 굉장히 널리 퍼져 있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저희가 앞서 AI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AI나 블록체인 같은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하면 중개자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유통사나 기획사 없이 창작자와 시장이 바로 만나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런 시기가 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련된 플랫폼을 만들고 싶은가요?


블록체인을 플랫폼이라고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물론 정리 정도는 하겠죠. 창작자와 시장이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대한 지형은 만들어질 텐데, 거기 일조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요.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시는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요. ‘아빠를 아는 사람들이 전부 아빠를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한 적이 있으시다면서요? 부모로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한테 ‘우리는 다 친구’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기사에서 보셨다는 이야기도 그런 발상의 연장인 것 같아요. 다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했던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그때 약간 주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첫째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거든요. 예를 들면, 제가 조금 튀는 차를 타고 학원에 데리러 가면 일부러 선생님들하고 다른 길로 가요. 그리고 혼자 다시 돌아와서 차에 타는 거예요. 그런데 둘째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어도 옆에 앉아서 ‘우리 아빠 조PD예요’라고 말해요(웃음).

 

 사람한테 착착 감기는 아이에요. 그래서 대화를 하다가,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사람들이 아빠를 알 수는 있는데, 아빠를 아는 사람이 다 아빠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건 알고 있어’라고 말한 거예요.

 

아이가 이해하던가요?


당시에 저희에게는 당연한 분위기였어요. 아내는 이야기 잘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이들이랑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시네요. 보통 어른들은 ‘아이가 이걸 이해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잖아요.


아이들이 그렇게 이해가 부족하지 않아요. 전혀 안 그래요. 아이들을 너무 애 취급할 필요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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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인간


촛불 집회 무대에 오르셨었어요. 윤일상 작곡가와 음원도 발표하셨고요.


우연치 않게 한 일이었어요.

 

윤일상 작곡가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죠?


네, 그 형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요.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고요.

 

음원 발표를 제안한 건 윤일상 작곡가였나요?


제안을 주고받은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작업을 했던 거예요. ‘할래?’라고 안 하고 ‘하자!’라고 했던 거죠.

 

그 전까지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잖아요. 어떻게 함께하게 되셨어요?


정치의 문제가 아니죠, 이건. 강남에 최순실 같은 아줌마들 많이 있잖아요. 안하무인에 갑질하는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 보면서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그런 생각이 많이 쌓여있기도 했고요. 최순실이 대통령이랑 관계가 있다는 걸 보니까 ‘돈으로 과시할 만하고 청와대까지 접수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겠구나’ 생각되더라고요. 그렇다고 저 아줌마가 나라를 좌지우지할 만한 사람인지 생각해보면,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나라 꼴이 말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우리 애들이 살아갈 세상인데’라는 생각도 하셨어요? 그게 촛불집회에 함께하는 이유로 작용했나요?


안하무인을 만나면 저는 싸우거나 협상을 했을 테지만, 아이들한테까지 그런 걸 물려주기는 싫은 거죠.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그런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고 있으면, 이건 아니잖아요. 그런 걸 비판한 거죠.

 

콜라보했던 뮤지션들에 대한 이야기도 쓰셨어요. 후배 중에서는 라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는데, 최근에 지켜보고 있는 뮤지션이 있나요? 러브콜을 보내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음... 요즘 ‘예지’라고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디제잉하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외의 친구들은 만나기 싫은 게 아니고, 요즘은 기회들이 너무 많잖아요. 라디만 하더라도 악기가 필요해서 저를 찾아왔던 거였거든요. 악기를 지원 받고 싶다고요. 그런데 요즘은 소프트웨어가 다 있고 음악을 발표할 수 있는 창구도 많기 때문에, 그런 수준의 도움은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예지는 일단 뉴욕에 있고, 한국과의 접점을 찾을 때는 제가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디는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하는 데 쓴다면서요? 그 부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셨던 것 같아요. 후배들을 볼 때, 재능보다도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네, 노력하는 것만 봤어요. 제가 음악을 열심히 할 때는 컴퓨터 바로 앞에 침대를 놓고 지냈어요. 작업하다가 지치면 바로 자고, 또 일어나서 작업하고, 그런 거였죠. 그런데 라디가 딱 그랬어요. 집에 가봤더니 구도가 똑같더라고요. 그런 거야말로 밥 먹고 음악만 한다는 이야기가 절로 나오는 거죠. 그게 좋았죠. 그런데 의외로 그런 경우가 드물어요. 많지 않아요.

 

데뷔 초기의 앨범을 들을 때도 있나요?

아뇨, 못 들어요. 못 듣겠어요.

 

왜요?


너무 이상해서(웃음). 가끔 음악 하는 동생들이 오면서 형 노래 들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해요(웃음).

 

음악적으로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음악적인 건 많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다행인 거죠. 말씀드렸던 것처럼 젊을 때의 감성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런데 세월에 따라서 더 좋아지는 것들이 있잖아요. 톤이나 딜리버리, 저만의 호흡 같은, 그런 건 좋아졌죠.

 

‘조PD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면 뭘까요? 책에서 꼽는다면요?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에요. 낭만적 인간.

 

어떤 의미인가요?


그냥 풍류를 좋아한다고 할까요.


 

 

낭만적 인간과 순수지속조PD 저 | 스리체어스(threechairs)
청각 기관은 음표 단위로 분절된 소리 자극을 순서대로 감지하지만 앞선 음과의 조화, 지속이 곡의 전체 분위기를 결정한다. 지속하는 동시에 변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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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말하기ㆍ듣기ㆍ쓰기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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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는 사람에게 재능은 늘 골치 아픈 주제다. 나는 재능이 없는 것만 같고, 옆 사람은 다 나보다 잘 만드는 것 같다.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소설가 김중혁의 이번 에세이집은 선언 같아 보이는 제목(『무엇이든 쓰게 된다』)에다 부제는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다. 음식점에서도 마지막 비법의 가루는 안 보여주거늘, 이렇게 비밀을 밝혀도 되는 걸까. 하다못해 펜과 아이패드까지 보여주는데,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읽어두면 무엇이든 쓸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담았다. “나도 당신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 같은 건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다면 이제부터 당신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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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품을 완성한 순간의 희열


도구 소개, 창작을 시작하는 법, 그림 그리기 등 여러 꼭지를 모아 책을 펴냈는데, ‘글쓰기’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네요.

 

다양한 장르의 창작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죠. 많은 분이 글쓰기를 실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보면 글쓰기의 비법이나 팁 같은 구체적인 방법은 없어요. 실용적이지 않게 쓰는 게 목표였어요. 이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건질 게 없네 싶겠지만, 글쓰기 책보다는 창작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어요.


창작을 독려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면 몇 시간 동안 집중해서 선을 그어도 재밌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 모르잖아요. 밤새 뭔가 만들어보는 재미, 자신이 노동을 하거나 공을 들여서 창작품을 완성한 순간의 희열 같은 게 있어요. 그런 걸 소개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제가 소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책 읽기, 음악 듣기, 이런 거죠.


제목이 주문 같아요. 정말 무엇이든 쓰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제가 낸 책 중에 제목이 ‘ㅁ’으로 시작하는 게 많아요.  『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모든 게 노래』…. 운이 맞은 것 같아요. 또 물건 사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돈을 쓰게 된다’ 이런 농담도 할 수 있게 됐어요.


사소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무슨 펜을 쓰는지까지 소개했는데요.


늘 에세이를 쓸 때면 사소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어떻게 글을 쓰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은 작가에게 비법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데, 사실 찾아낼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작가에게 24시간 카메라를 붙여서 관찰해도 비법을 알 순 없겠죠. 작가로서의 제 정체성은 물건을 사 모으고 분위기를 조성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무슨 펜을 사고 어떤 식으로 생활하는지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작가도 별거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세상을 보는 리듬


창작에 관한 책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가 처음이죠?


매년 나름대로 테마를 정했어요. 예를 들어  『메이드 인 공장』을 쓸 때는 공장 탐방기를 일 년 동안 연재했고,  『바디 무빙』을 쓸 때는 몸에 관한 에세이를 여러 군데에 썼어요. 작년에는 창작이 테마였죠. 원래는 더 나이가 들어서 창작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저도 창작이 뭔지 찾아가는 과정인 지금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인 팁이 없다고 했지만, 읽으면서 유용한 팁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똑같은 단어가 여러 번 들어간 건 글쓰기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같은 문장도 있었고요.


비문을 쓰지 않는 방법이라든지, 문장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방법 같은 기술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제가 글을 쓸 때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거든요. 제 목표는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문단 위주로 쓰고 문단에서 제일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으로 써요. 책을 읽는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나도 나의 기준을 따로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글에서 정제되지 않는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어떤 사안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모든 걸 너무 많이 말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메모도 비슷해요. 저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머릿속에 메모하는 것 같아요. 메모를 들여다보고 이 메모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고요. 어떤 메모는 쉽게 날아가버려서 잊어버리기도하고, 어떤 문장은 계속 생각나서 그 문장으로부터 글이 완성되는 것 같거든요. SNS도 막 떠오르는 생각을 즉각적으로 올렸을 때 즉시성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하면 생각이 좁아지는 사람이라 SNS를 안 해요. 저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혹시 SNS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의문을 한번 제기해보는 거죠. 어렵네요, SNS를 말하면 SNS를 쓰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작가들을 만나면 SNS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게 되더라고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매일 농담처럼 ‘SNS를 하지 않는 이유는 원고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게 진실이기도 하거든요. 저는 활자로 제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활자가 곧 제 정체성이에요. 글을 쓸 때는 좀 더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더 많이 생각하고 오래 묵혀둔 다음 내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혼자 해서 좋은 것이지만, 혼자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라는 내용이 있었어요. 과거와 비교했을 때 사람들이 더 혼자가 된 느낌을 받나요?


과거와 현재를 떠나 글쓰기가 늘 그랬던 것 같아요. 혼자서 정말 엄청난 걸작을 쓰고 발표할 수도 있죠. 하지만 새벽에 감정적인 글을 쓴 다음에 그 글을 온전하게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자세도 필요하거든요. 작가들에게는 ‘감성적인 나’와 ‘이성적인 나’가 필요한 것 같아요. 양쪽의 균형을 잘 맞춰야죠.

 

“가언을 만드는 일과 표언을 찢어버리는 일 사이에 글쓰기가 있다”는 말도 했는데요.


문자로 쓰인 걸 말로 들으니까 다르네요.


지금 좀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부끄럽고 민망하죠. 말과 글을 많이 하고 쓰는데, 말하다 보면 텁텁할 때가 많아요. 더 정돈된 말, 완성된 말을 하고 싶은데 잘 안 되고, 글은 좀 더 즉각적으로 쓰고 싶은데 그것도 잘 안 되고요. 글을 쓰면서도 최대한 말에 가깝게 쓰고 싶고, 말을 할 때는 최대한 글에 가깝게 쓰는 균형을 잡고 싶어요. 끝끝내 쓰고 싶은 글의 롤모델은 어머니의 글이거든요. 어머니의 글에는 맞춤법이나 문장은 엉망이어도 이상한 리듬이 있어요. 이 리듬이 대체 뭘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게 어머니의 리듬이고 세상을 보는 리듬인 것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리듬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세상을 바라보는 리듬을 찾는 게 어쩌면 글쓰기의 완성일 것 같아요.


그래서 대화에도 집중하는 것 같아요. 대화를 상상하는 힘이 개성을 만드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고요.


소설 쓸 때 대사 쓰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어떤 캐릭터를 처음에 만들 때는 이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겠다가,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대화하는 걸 보고 있으면 자기만의 말투로 이상한 환청 같은 게 들려요. 모든 사람이 말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을 하면 거기에는 매우 많은 게 녹아 있죠. 어릴 때 기억, 읽었던 책, 수많은 기억이 말하는 방식을 결정했을 텐데 다 다른 게 너무 재밌고, 글로 그 모든 사람의 리듬을 보여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소설에서도 말의 맛을 살리려고 대사 부분은 정말 많이 고치거든요. 하지만 여기서 말의 맛이라는 게 구어체는 아니에요.


‘문장 대화체’인 건가요?


문장에 들어 있는 대화는 또 다른 말의 맛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읽으면 어색한데 눈으로 봤을 때 말의 맛이 살아나는 문장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문장으로 잘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편에서 문장을 거칠게 세 가지로 나누었어요. ‘~이다’, ‘~라고 생각한다’, ‘~라고 들은 적이 있다’로 끝나는 문장인데, 이 중 작가님은 어떤 축에 가깝나요?


그것도 말하기 톤과 상관이 있는데요. 예전부터 고쳐야지 하는데 안 고쳐지는 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것 같아요”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이게 대체 어디서 온 건가 생각해보면 모든 걸 단언 내리기 싫어하고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회의가 계속 들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또 이렇게 말했네요(웃음). 글에도 단언하는지, 회의하는지, 묻고 싶은지 중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타일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고요.


어느 순간  ‘이런 스타일로 말하고 있구나’  깨달으면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 순간이 있을 텐데요.


말은 고정화되고 고착화될 수밖에 없어요. 자기 스타일의 말투가 굳어지면 그걸 지각하는 순간 말하기 너무 힘들어지잖아요. 글은 그렇지 않거든요. 글은 교정하고 퇴고할 수 있어요. 회의하거나 반성하거나 돌이키는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에 저에게는 더 강력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이라 느껴져요. 글을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스타일인지, 논리가 뭔지 다 보여요. 어지간해서는 글로 자신을 속이기 힘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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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보다 글쓰기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와 함께 <이동진의 빨간책방>, <영화당>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어떤가요?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어요. 소설 쓸 때 영화가 많이 도움되기도 하고요. 짧은 시간 내에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아요. 영화 시작 전에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영화 끝나고 난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해볼 수도 있고요. 영화 보는 김에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생계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얼굴을 비추고 말을 하는 일을 많이 맡게 되었는데요.


말을 잘한다는 생각은 아직 못 하고 있고요. 익숙해져서 떨리지는 않는데 여전히 말하기보다는 글쓰기가 훨씬 좋아요. 처음에는 방송을 하고 나면 집에 와서 매일 술 마셨어요. 제가 했던 말들이 문장이 되어서 머릿속을 떠다니더라고요. 말할 때 쾌감이 있지는 않아요. 초반에는 정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말을 하다가도 이게 아닌 것 같으면 다시 수정하는 방식으로 다듬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직 저는 글쓰기가 한 300배 좋습니다.


올해 계획은 무엇인가요?


소설을 쓰려고요. 2017년에는 정말 소설을 단 한 자도 안 썼어요. 자료를 모으고 생각은 했지만 한 줄도 쓰지 않은 건 2000년에 데뷔하고 나서 처음이었어요. 안식년 같은 느낌으로 활시위 당기는 시간 같은 걸 즐겼어요. 2018년은 다른 활동을 약간 줄이고 소설을 많이 쓰려고 합니다.


글쓰기 강연은 못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글쓰기 수업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많이 받았는데, 농담하거나 진행할 수는 있어도 글쓰기를 강의하라고 하면 할 말도 없고 가르쳐줄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하겠어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보필하면서 중간중간 빈 자리를 채우는 쓸데없는 멘트나 농담은 잘할 수 있어요. 이 책도 비슷할 것 같아요. 빈 구석을 하나하나 메우는 거죠. 이 책은 다른 글쓰기 책을 보실 때 곁가지로 보기 좋지 않을까요? 모든 글쓰기 책과 1 1로 붙어서요.

 

 


 

 

무엇이든 쓰게 된다김중혁 저 | 위즈덤하우스
“지금 무언가를 만들기로 작정한, 창작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당신을 존중하며, 그 결과물이 엉망진창이더라도 기꺼이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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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줄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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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가까이 작가로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산문집을 썼다. 반백 살을 한참 넘기고 나서야 어른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말한다. “이제 겨우 알 것 같다. 삶과 죽음, 가난과 배부름, 행복과 통곡에 대해서” 그 고백의 끝에서 에세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은 시작됐다. 책을 쓰는 동안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됐고, 자신을 관통했던 순간과 사람을 떠올렸다. 흔들리고 무너졌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삶을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늘 곁에 있었다. 태양과 별과 달이 그러했고, 책이 그러했다. ‘꼭 필요한 만큼의 힘’으로 생을 견디는 사람들도 함께였다. 덕분에 작가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낼 수 있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버스 정류장 나무가 말해 주고 있다.

날 보세요, 춥다고 울고만 있지는 않았어요.

사무실 창 너머 새들이 알려 주고 있다.

날 보세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날개를 접지 않았어요.
아이들도 전해 주고 있다.
우리를 보세요. 추운 겨울에도 이만큼 키가 컸어요. 매서운 바람에도 한 살 더 먹었어요. 어른들이 힘들다고 한숨 쉴 때에도 새 이가 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 25쪽)

 

 

노경실 작가는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누나의 까만 십자가』로 등단했다. 이후 『상계동 아이들』, 『복실이네 가족사진』, 『할아버지는 여든 아기』, 『어린이 인문학 여행』등 동화와 청소년을 위한 소설 창작에 애써왔다. “힘들었던 시절 내가 찾은 희망의 빛은 책이었다”고 말하는 작가는 누구보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직접 번역한 외서들까지 포함하면 지은 책이 삼백여 종에 이른다. 전국 도서관을 무대로 독서 강연을 이어가면서 ‘책 전도사’로 활동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책을 쓰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자 소명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오목렌즈」가 당선되었고, 어른들을 위한 소설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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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말하게 한 건 죽음이었어요


첫 번째 수필집입니다. 작가로 살아오신 세월을 생각하면, 늦은 감도 있어요.

 

그렇죠. 오랫동안 동화와 청소년 소설에 천착하느라 그랬는데, 이제는 소설도 쓰려고 해요. 시는 20대에 소설은 70대에 쓰는 거라는 말도 있잖아요. 시는 천재가 있어요. 랭보처럼. 그런데 소설은 웬만해서는 천재가 나오기 힘들어요. 깊은 인생의 맛을 다 봤을 때 나오는 거거든요. 물론 젊은 천재도 있지만요. 그래서 이제 저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은사이신 최인호 선생님께서도 일흔이 넘으면 동화를 쓰겠다고 하셨었어요. 사람들이 동화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우리 어르신 작가들이 동화를 쓸 수 있을까’ 싶어요. 동화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있어요. 그런데 소설가는 동화 쓰기 힘듭니다. 그런 아이러니가 있어요.

 

어디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일까요?


제 경우에 비춰보면, 동화는 결국 인생과 사람의 이야기거든요. 동화를 쓰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해요. 동화 속에 아이만 등장하는 게 아니죠. 악인, 선인, 배신자, 어른도 다 나와요. 그런데 소설만 쓰게 되면 이 세계를 단절시켜 버려요. 자전적 작품이거나 특별하게 어린이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어른들의 배신과 선과 슬픔을 다루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단절되는 거죠. 동화를 쓰는 작가는 어른과 아이를 같이 무대에 놓고 생각해요. 동화의 주제는 소설과 똑같아요. 거의 살인만 안 나올 뿐이지, 이혼 문제나 죽음 문제 같은 것도 다 나오죠.

 

유년 시절의 이야기도 있는데요. 막냇동생의 죽음이 작가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동생이 병원에서 앓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제 품에서 죽었잖아요. 제가 안은 상태에서. 하필 집에 아무도 없을 때였어요. 아이가 마지막으로 부른 것도 저였고요. 그 일을 고1 때 겪었으니... 제 마음속에는 평생 아이가 있는 거예요. 그 아이 때문에 늘 가난하고 힘 없고 약한 아이들한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어요. 생명에 대해서 늘 생각하게 되고요. 죽음을 늘 의식하다 보니까, 그게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더라고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거죠. 저한테 동생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생명의 아름다움, 고귀함, 소중함을 알게 해준 거예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변절하지 않게끔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악착같이 자신을 챙기고 부를 탐하게 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감사한 거예요. 제가 지금처럼 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저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만나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동생의 죽음도 이야기해줘요. 제가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을 위해서 점자책과 소리책도 만들고 있는데, 그 아이들한테도 그렇고 비장애인 아이들한테도 이야기해주는 게 있어요. 일단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거예요. 그 눈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해줘요. 당장 눈앞에 엄청난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많은 아이들에게 변화의 씨를 심어줬다고 생각해요. 위로와 변화의 씨앗이죠.

 

당시의 경험 때문에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게 되셨을까요?


맞아요. 원래는 퀴리 부인 같은 과학자가 꿈이었는데, 그 아이 때문에 완전히 바뀌었죠.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네 명의 동생들을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줬었어요. 어느 날부터는 그 중에 동생 한 명 없었던 거고요. 그런데 내가 큰 언니니까, 내가 울면 다 우니까, 울지도 못하고 또 이야기를 들려줬죠. 거듭 하는 이야기지만, 죽음이 오히려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거예요.

 

「꼭 필요한 만큼의 힘」이라는 글을 보면, 두 차례나 수해를 겪으셨더라고요.


네. 1984년과 1987년에 망원동에서, 그 유명한 물난리를 겪었죠. 그때는 물에 휩쓸려 내려갈 뻔했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삶에 대해서 생각했죠. 물이 빠지고 난 뒤에 집에 돌아오니까 천장까지 진흙이 다 찼었더라고요. 온통 진흙이 묻어있고 바닥에는 미꾸라지들이 있었어요. 그걸 두 번이나 겪은 거예요. 그런데 하늘이 괜히 겪게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아픔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헤쳐 나왔잖아요. 이겨 나왔잖아요. 그런 자만이 말할 거리가 있는 거거든요. 어쨌든 산을 넘고 들을 건너고 계곡을 넘어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고, 그런 자만이 승전보를 울릴 수 있는 거예요. 지나온 길에서 있었던 일을,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할 수 있는 거죠. 성공을 했든 안 했든 뚫고 나온 자만이 전해줄 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어려움을 헤쳐 나오신 분 중 한 분이 어머님이신 것 같아요.


요즘의 젊은 엄마들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제 또래의 엄마들은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엄마만큼만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와 딸은 애증 관계이고 서로 부딪힐 때도 많잖아요. 그럴 때 저는 나이를 환산하는 법이 생겼어요. ‘우리 엄마가 스물셋에 날 낳았는데, 나는 그때 뭐했나’, ‘막냇동생을 낳았을 때 엄마가 40대였는데, 그때 나는 뭐했나’ 싶은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 할 말이 없는 거죠. 나는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가서 잠드는 것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엄마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잘 살지도 못했고 남편도 없었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 말 못하죠.


 

사는 데 필요한 힘, 사람마다 달라요


홀로 빈집에 돌아갈 때마다 고독과 두려움을 느끼신다고요.


지금도 적응이 안돼요. 처음에는 가자마자 TV를 켰었어요. 소리도 크게 키워놓고. 공포도 있고 적막감도 있죠. 여전히 힘들어요.

 

작가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좋을 것 같기도 해요.


혼자 있는 시간을 이겨내지 못하면 작가가 될 수 없죠. 혼자 있는 걸 즐기고 그 시간을 마음껏 활용해야 돼요. 작가는 혼자잖아요. 뮤지컬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연주도 독주가 아닌 이상은 다 같이 하는데,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작가는 혼자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혼자 있는 걸 즐길 줄 모르면 안 되죠. 작가들 중에도 사람이 그리워서 계속 사람 찾아다니고 같이 어울리면서 술 마시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러면 주변에 사람은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은 없어요. 철저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작품이 남아요.

 

혼자만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세요?


책 읽고, 글 쓰고, 음악 좋아하니까 음악 듣고요. 그거 외에는 없어요. 책, 글, 그리고 산책이죠.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고흐가 걷는 걸 너무 좋아해서 나중에는 집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얼마나 걸었는지, 돌아올 힘이 없었다는 거죠. 저도 산티아고까지는 못 가더라도 끊임없이 걸어요. 틈만 나면 걷는데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효과가 있어요. 눈도 정신도 맑아지거든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버려야 될 생각들은 버리게 되기도 하고요.

 

매일 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일기를 쓰시는 건가요?


하루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기록해요. 새벽 4시에 일어나자마자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고 어떻게 잘 해낼 건지 쓰고요. 밤에 자기 전에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쓰고, 잘하지 못한 일들은 반성하고 다음에는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적고요. 하루 동안 느낀 점이나 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 같은 걸 다 기록해요.

 

기록하시는 데 쓰시는 시간도 꽤 많겠어요.


그럼요. 꽤 되죠. 그런데 그걸 잘 하니까 글 쓸 때 훨씬 부담이 없는 것 같아요. 발레리나가 아침 저녁으로 끊임없이 스트레칭을 해야 본 무대에서 잘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정신적인 스트레칭 같은 거죠. 이완 작용이고요.

 

제목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 이에요. 살아가려면 얼마만큼의 힘이 필요한 걸까요?


사람마다 그 분량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간장 종지만큼 작은 양의 힘만 있어도 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큰 고무 대야만큼 있어도 쩔쩔 매고요. 누군가에게는 물질의 힘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힘일 수 있겠죠. 힘은 저마다의 환경, 위치,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주어진 만큼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더 원하면, 그건 힘이 아니라 재앙이 되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힘인 것 같고요.

 

꼭 큰 힘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다섯 살 아이에게 5kg의 물건을 들으라고 했을 때, 아이가 못 든다고 해서 ‘너는 힘이 없니?’라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작은 것만 들어도 ‘힘 세네!’하고 칭찬해주죠. 그 사람에게 맞는 분량이 있는 거죠.

 

말씀을 듣고 제목을 다시 보니까, 욕심 없는 마음이 느껴져요.


그렇죠. ‘꼭 필요한 만큼’의 힘이에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족하는 거죠. 그거라도 제대로 지키고, 거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제가 『유리 구두를 벗어 버린 신데렐라』라는 그림책에서 쇠똥구리 이야기를 쓴 적이 있어요. 쇠똥구리를 보면 열심히 먹이를 굴리면서 가잖아요. 그때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어요. 개미도 있고, 파리도 있고, 인간도 지나다니고, 바람도 불고, 아이가 빵을 먹다가 떨어뜨리기도 할 거예요. 그런데 쇠똥구리는 자기 먹이만 밀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저장하는 거죠. 만약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쳐다보고 땅에 있는 것들을 계속 붙인다면, 결국 탈진해서 쓰러질 거예요. 쇠똥구리를 보면서 그걸 알았어요. 가지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제대로 지키고, 자족해야 한다는 걸요.

 

“어른들 눈치 보느라 무게 잡는 글을 쓴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라고 쓰셨어요. 글을 쓸 때, 힘을 들이는 것보다 빼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비유나 은유 같은 걸 잘 쓰지 않고, 인용도 잘 안 해요. 톨스토이에게 영향 받은 바가 있는 건데요. 톨스토이가 러시아 우화집을 내게 된 배경이 있어요. 어떤 농민이 톨스토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자신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글로 된 책을 써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편지에서 톨스토이가 깊이 깨닫고 민중을 위한 책을 쓰게 된 거죠. 그걸 통해서 저도 ‘그래,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면서도 그것이 나의 문체가 될 수 있게 글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비유나 상징, 은유는 되도록 빼게 됐고요. 인용을 하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을 고르게 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다 보니까 오히려 저는 편해요. 저만의 글과 목소리로 지면을 채워야 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오랜 세월을 그렇게 써왔기 때문에 편해요.

 

이런 문장도 있어요. “나에게 글 쓰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쭐대거나 남을 무시하는 힘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경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쉽지 않죠. 각을 세우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그 사람 인생이죠. 저는 ‘절대 겸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글을 쓴다는 이유 하나로 선생님 소리를 듣고 대우를 받잖아요. 강연이 끝나면 저보다 훨씬 많은 재원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놔요. 그런 걸 생각하면 겸손할 수밖에 없죠. 보통 예쁜 사람들을 보고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다고 하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예쁜 건 나라를 한 번 구한 거고, 제가 글 쓰는 건 열두 번은 구한 것 같아요(웃음). 게다가 어린이도 읽을 수 있는 글, 엄마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으니까 축복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거만하고 우쭐댈 수 있겠어요. 절대 그럴 수 없죠.

 

스스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엄격한 게 아니고요. 그래도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남에게 뭔가 가르치려고 한다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수도 매일 두 번씩은 하잖아요. 그런데 왜 얼굴만 세수해요? 마음도 생각도 똑같아요. 음식을 썩게 하는 방법은 그냥 놔두는 거잖아요. 사람의 마음도 그래요. 닦지 않고 놔두면 다 부패해요.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고 욕심으로 물들게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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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줄 대상이에요


작가님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정말 많아요. 작가, 번역자, 강연자, 점자책 편집자, 소리책 나눔터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등 책과 관련해서 많은 일들을 하고 계세요.


말씀하신 일들도 하고 있고, 노숙인 대상으로 글쓰기와 인문학 지도와 강연도 하고 있어요. ‘거리의 아빠들’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합창제, 문화제를 하고요. 그렇다 보니 노숙인 제자들이 정말 많아요. 또 이주 여성들과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데요. 1월 중에 책도 나올 거예요. 또 고양시 도서관 정책위원장이라서 도서관 일도 하고 있고요. 연애만 빼고 다 하고 있어요(웃음).

 

지금까지 내신 책이 300여 권이에요.


37년째니까요.

 

긴 세월이기는 하지만 정말 왕성하게 활동하시면서 다작하시는 작가로 유명하시잖아요.


그 중에 번역된 책, 유아책 같은 것들을 빼고 나면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십 수 년 만에 한 편씩 작품을 쓰는 작가도 있는 거고, 저처럼 부지런히 계속하는 사람도 있는 거죠. 저는 직장인과 비교하곤 해요. 직장인이 힘들다고 출근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매일 출근하잖아요. 심지어는 휴일에도 근무하고 야근도 하죠. 그 삶의 기록이 작가의 책의 기록과 똑같은 것 같고요. 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순교자는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해요. 매일 만원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고, 때로는 가족 안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직장에서 겪는 갈등도 있잖아요. 그걸 이겨내고 자식 때문에 참고 또 하루를 보내고 또 웃고... 진정한 순교자는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정규직이 아닌 사람은 더하죠. 정말 육체의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괴로움이라고 하잖아요.

 

내 안의 이야기가 소진되는 것 같다는 불안감, 느끼실 때 없나요?


없어요. 매일 나를 채우니까요. 강연도 낭비라고 생각 안 해요. 수많은 생명과 사연을 만나는 거예요. 누가 저한테 그 많은 이야기를 가져다주겠어요. 그리고 저는 술을 마시지 않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고 여러 가지를 보면서 충분히 채워요. 나에 대한 기록도 결국은 나를 채우는 거거든요. 비우면서 채우는 거죠. 그래서 고갈이나 방전 같은 건 한 번도 느낀 적 없어요. 오히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으니까, 홀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까 삶이 점점 단순해지고 절제가 되는 거예요. 열 사람 만날 거 두 사람 만나니까 삶이 단순해지죠. 저절로 절제가 되는 거예요. 제가 잘나서가 아니고요.

 

이번 수필집을 보면 태양, 별, 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것들을 보면서 힘을 내시는 것 같은데요. 항상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기 때문인가요?


그렇죠. 그리고 그것들이 위에 있잖아요. 우리가 하늘을 보고 우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보면 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 보느라 고개 숙이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요즘은 다 고개 숙이는 사회예요. 그런데 저는 하늘을 보는 순간, 지상의 문제들에서 조금 벗어나는 느낌이 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달과 별과 태양 같은 것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죠. 내가 눈을 들어서 바라보면 늘 나를 보고 있어요. 내가 못났다고 해서, 아니면 못생겼다고 해서, 그 어떤 이유로든 고개를 돌리거나 나를 떠나거나 잊은 적이 없어요. 인간은 늘 변하잖아요.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그냥 사랑해줄 대상이잖아요. 믿은 사람이 바보죠. 사람은 그냥 사랑해줘야만 되는 대상이에요.

 

“이 책은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싶은 나의 작은 바람이다”라고 쓰셨어요. 그늘이 필요할 때 떠올리는 책이 있나요?


그럼요. 일단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있어요. 이번에 라틴어 완역판이 나와서 세 번째 읽고 있고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에요. 지금은 그런 소설이 없어요. 쓰지도 않고요. 반 고흐에 관한 책들은 다섯 번째 읽고 있어요. 편지 모음집 같은 책들이고요. 또 하나는 성경책이에요.

 

어른들을 위한 소설도 쓰실 계획이세요?


네, 이제 쓸 거예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짤막짤막한 글들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정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요. 현대인들의 불행의 원인은 자신이 가진 게 너무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미디어는 계속 세련되고 새로 나온 물질과 삶의 위장된 모습들을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정작 내 삶은 대학 때부터 학자금 융자를 받아야 하고, 모든 게 빚 없이는 안 되는 거죠. 결혼도, 출산도, 주택 마련도, 모든 게 그래요. 심지어 장례비용까지도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거죠. 그런데도 끊임없이 구입을 하잖아요. 그런데 생각을 바꾸면 훨씬 간결해져요.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가진 건 별로 없는데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게 자족하는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그런 내용을 스토리에 담아서 쓰고 싶어요.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노경실 저 | 다우
지나온 시간과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을 애석해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슬러 생의 한가운데를 우직하게 통과하려는 저자의 모습에서 나약하지만 생명력 강한 한 인간의 초상이 엿보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미셸 조너,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로 한 발 더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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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서 태어나 필라델피아에서 자란 미셸 조너(Michelle Zauner)는 2011년 사이키델릭-펑크 록 밴드 리틀 빅 리그(Little Big League)를 통해 음악 씬에 데뷔했다.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내며 활동을 이어가던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이 들려왔다. 허무하게 너무나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미셸은 필라델피아와 멀리 떨어진 오레곤에서 새로운 감정의 싱글을 발표하면서 새 프로젝트의 이름을 알린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다.

 

개인적인 비애와 치유의 과정을 담은 데뷔작 <Psychopomp>는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주목을 동시에 획득하며 원 소속 밴드의 성과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보다 확장된 사운드를 들려준 차기작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은 미셸에게 더 큰 세계를 선사했다. 팝 매거진 <롤링 스톤 (Rolling Stone)>이 선정한 '2017 최고의 앨범' 순위 39위에 오르는 등 평단의 일치된 호평을 받았고, 120회 월드 투어를 진행했으며, 내년에는 최대의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인 코첼라(Coachella) 페스티벌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월드 투어의 마지막을 지난 2017년 12월 14일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고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셸을 홍대에서 직접 만났다.

 

한국에 온 지 2~3주쯤 되어간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나.


즐겁다! 주마다 한국어 수업도 듣고, 친구들도 만나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예지를 참 만나고 싶었는데 직접 만나게 되어 좋고, 무라 마사 공연도 봤다. 다른 한국 뮤지션들과 프로듀서들과도 많이 만나고 여러 가지를 공유해보고 싶었는데 다양한 분들과 재미있는 시간 보내고 있어 정말 좋다. 방이 좀 좁긴 하지만(웃음)

 

지난해 29일 예지의 첫 한국 무대를 함께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부터 연락하던 사이였는지.


나도 그 사진 봤다 (웃음). 예지와는 한국에 와서 처음 연락했다. 미국에서는 알지 못했다. 굉장한 재능을 지닌 멋진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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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Japanese Breakfast Instagram(@jbrekkie)


 

한국서 새소년, ADOY, 파라솔 등 신진 밴드들과의 만남도 활발하다. 한국 밴드들은 어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새소년과 파라솔의 기타리스트들은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들이다. 파라솔의 음악을 틀어 놨더니 '얘네 누구야? 완전 짱인데!'하고 모두가 감탄했다. 새소년의 소윤 나이를 알고 나선 완전 쇼크, 1997년생이라니!(웃음) 이 두 팀의 기타리스트들은 정말 최고다. 오프닝 쇼를 장식한 아도이가 플레이할 때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한국어로 말했다.). 좋아하는 한국 음악은 많지만 좋아하는 팀을 물어보면 떠오르는 팀이 없었는데 이 팀들은 정말 인상 깊었다.

 

공연에도 직접 오셨던 '큰 이모'는 잘 계시나. 한국의 가족들과는 어떤 사이인지.


큰 이모는 항상 내게 '직장은 다니는지, 돈은 잘 벌고 있는지'를 걱정해준다. 할머니는 7년 전, 작은 이모도 5년 전 세상을 떠났고 3년 전에는 엄마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사촌 오빠와 큰 이모가 남아있는 유일한 친척 분들인데, 함께 상실을 공유하고 나를 응원해주는 소중한 분들이다.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도 큰 이모와 인연이 있는 노래다. 김밥레코즈의 존이 남편 피터에게 알려준 곡인데, 큰 이모에게 얘기했더니 엄마가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엄마의 추억을 다시금 새긴, 뜻깊은 곡이다. 언젠가 커버도 할 생각이다.

 

어릴 때 내 주위엔 99% 백인 아이들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회로 빨리 들어가고픈 마음에 한국어를 배우는 데 반항심이 있어서 '그런 거 안 배워도 상관없어!'했는데 큰 이모가 영어에 능숙지 않으셔서 후회가 된다. 늦게라도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한글학교'도 다니고, 연세대학교에서 한 달 정도 수업도 들었다. 지금도 한국어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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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회 월드 투어의 마지막이 12월 14일의 한국 공연이었다. 마지막 공연은 어땠나?


120번보다 훨씬 많이 한 느낌이랄까? 미국에 있는 내 친구는 공연 200번도 했는데 뭐. 월드 투어를 매조지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번 한국 공연은 정말 내게 특별했다. 큰 이모와 이모부가 공연장에 왔는데, 내 장래에 대해 항상 궁금해하시고 백수는 아닌지 걱정하시던 분들이라 많은 관객들이 온 걸 보고는 놀라셨다. 한국 관객들은 더 호응도 많고, 감정적으로도 열려있다는 느낌이 들어 내 이야기들을 더 깊게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리틀 빅 리그 시절 길고 힘든 활동을 했지만 2장의 앨범도 그렇고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 그 와중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주 개인적인 작업물을 담고자 솔로 프로젝트 <Psychopomp>를 낸 것이다. 상실을 달래기 위해 만든 앨범이라 작은 레이블 데드 오션스(Dead Oceans)에서 발매했고, 아무도 안 들을 줄 알고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반응이 이어졌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프로젝트로 10년 만에 다시 한국에 와서 공연도 하고, 코첼라(Coachella) 페스티벌에 초대도 받았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마지막 공연이라 더욱 고맙고 행복했다.

 

상실을 담은 데뷔작과 달리 지난해 발매한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을 '치유'의 과정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두 작품의 차이가 있다면.


1집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내 상실감과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다룬 앨범이고, 2집은 어느 정도 갈무리가 된 상태에서 만든 명상적인 레코드라 할 수 있겠다. 데뷔작이 성공하면서 좀 더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슬픈 감정이든 분노의 감정이든 남들에게 분출하는 대신 나 스스로 풀어내고, 소화하면서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마음이랄까.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은 엄마의 죽음같이 슬픈 일이 일어나면 그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 모든 것들을 기계적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기계적인'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전작과 달리 전자음을 도입하고 1970년대 크라우트 록 풍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맞다. 'Diving woman'을 예로 들자면 그 곡은 제주도의 해녀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곡이다. 노래 가사에도 제주도가 등장한다. 매일같이 일어나서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해물을 캐고, 다시 바다로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그런 기계적인 일상을 이어가는 독특한 그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오토튠을 쓴 'Mechanist'는 로봇과의 사랑을 상상해본 곡이고.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자 쓴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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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The Body is a blade'처럼 트라우마가 느껴지는 곡들도 있다.


원래 나는 밝고 명랑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일이 없어도 다크한 사람이었다. 스물다섯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엄마랑 같이 다니는 것만 봐도 화가 치밀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곤 했다. 나쁜 일이 생기면 그 나쁜 일대로, 어두운 감정으로 헤쳐나가고자 하는 내용을 담았다.

 

'Till death'는 밴드의 기타리스트이자 남편인 피터 알렉산더(Peter Alexander)에게 바치는 러브송이고, 앨범 크레딧에도 남편이 없었더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 적었다.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도 엄마를 위한 마음이 컸다. 엄마가 병원에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결혼 소식을 들려드리면 기뻐하시면서 건강을 되찾지 않을까 싶었다. 원래 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는데 남편에게 결혼하자고 내가 졸랐다. 엄마는 병원 밖으로 나오기도 힘든 상황에서 드레스, 장소 모든 걸 2주 만에 준비했다. 엄마는 결혼식에 오고 그다음 주에 코마 상태에 빠졌다. 피터는 그런 힘든 상황을 모두 곁에서 발맞춰주고,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나와 함께 해준 사람이다. 항상 고맙다. 결혼할 때 '진심으로 사랑하자'는 약속을 했다.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프로젝트인데 그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아주아주 초반 단계라 생각한다. 음악 듣고 책을 읽고,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듣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노트에 기록했다. 그걸 토대로 가사를 썼고 기타를 치며 멜로디를 붙였다. 낙서하듯이 만들어놓고 나중에 완성하는 방식이라 엔지니어링 부분에서 맘에 차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번 앨범 같은 경우는 굉장히 예전에 막 녹음해 놓은 데모에서 아이디어를 끌어 오기도 했다. 인생에 있었던 많은 것들을 압축해서 풀어놓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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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하는 이상향의 아티스트가 있다면?


내가 하는 음악과 비슷하진 않지만 비요크를 제일 좋아한다. 이 세상의 음악이 아닌 것 같다! 항상 새로운 걸 추구하고, 비주얼적으로도 놀라운 광경을 선보인다. 내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비요크처럼 혁신적인 것들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리틀 빅 리그 밴드 시절에는 멤버들이 있으니 의견 충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나(웃음). 비요크처럼 하고 싶다.

 


매거진 <롤링 스톤(Rolling stone)> 등 다양한 매체가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을 올 해의 앨범으로 꼽았다. 코첼라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한다. 성공적인 2017년이 된 셈인데 기분이 어떤가?


<롤링 스톤>에서 35등 했는데 내년엔 10등은 해야 되지 않겠나(웃음). 당연히 너무 좋은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작년엔 650명 정도 들어가는 곳에서 공연을 해도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웠는데, 지금은 '좀 더 공연장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2000명, 6000명! 근데 현실에서 잘 느껴지진 않는다. 좁은 버스를 타고 달려도 달려도 사막뿐이던 미국 투어 시절도 얼마 되지 않았고, 공연하고 호텔에서 죽치고 앉아있고 하다 보니 실감하지는 못했다.

 

<아이즈(Ize)>의 특집 기사에선 예지와 제이 솜(Jay som), 미츠키(Mitski)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를 묶어 '아시안 팝이 미국 대중음악에 라틴 팝 같은 새로운 흐름을 제기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어릴 적 예 예 예스(Yeah Yeah Yeahs)의 카렌 오(Karen O)를 우상으로 삼으며 자랐다. 카렌 오도 한국 혼혈 아닌가. 그의 퍼포먼스를 보며 난 두 가지 생각을 느꼈다. 첫째로 카렌의 온갖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보며 '우와! 한국 사람들은 저렇게 절대 못할 텐데'하는 경외였고, 둘째로는 '카렌 오도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야?'라는 자신감이었다. '내가 아시아계 미국인이야'하고 매일매일 주입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인터넷이 계속 발전하면서 그런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타나고 다양한 취향과 흐름이 주류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아 뿌듯하다. 지난해 미츠키와 제이 솜과 같이 공연할 때 참 놀라웠다. 세 명의 아시아계 여자들이 미국에서 투어를 돌다니. 말이나 되나. 흥미롭고 어메이징 하다. 어렸을 땐 생각도 못해본 일이다.

 

최근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을 커버하기도 했다. 향후의 음악 계획과도 관련이 있는지.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물론 향후의 작업과도 관련이 있고.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왕가위 감독의 열렬한 팬이다. <중경삼림>은 내 인생 영화다. 왕가위의 영화 같은,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트위터 프로필의 'I'm a Korean'이 인상 깊다.


프로필 소개는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는 이름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는 잘 알고 있지만 그거랑은 전혀 상관없고. 미국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가 코리안 브렉퍼스트보다 떠오르는 게 더 많지 않나. 그래서 택한 이름이다. 누구도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식 아침도 안 먹는 사람이다 (웃음). 프로젝트 이름일 뿐이다.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서 가끔 '한국인인데 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냐?' '일본인이 되고 싶나' 등등 문화적으로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트위터 프로필은 그런 오해를 대하는 방법이다.

 

 

인터뷰 : 김도헌, 이택용, 박수진
통역 : 휴키이쓰(Hughkeice)

정리 : 김도헌
Live Photo Credit : 김도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병민 “아빠 김근태, 먼저 돌다리를 놓으면서 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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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거기는 따뜻한가요? 등이 시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던 이곳과는 다른가요? 발걸음은 좀 가벼워졌나요? 이젠 떨리는 손을 슬그머니 붙잡아 숨길 필요 없겠지요? 우리를 보고 있어요? 짝꿍 인재근 엄마가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나요?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도 보이나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요. 아빠.(5쪽)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된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투옥된다. 2년 10개월의 투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다시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간다.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는 김근태가 감옥에 있던 시기에 아내 인재근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고문 피해자 이전에 실천적 민주주의자였던, 가족을 사랑하는 다감한 사람이었던 인간 김근태의 모습이 편지에 그대로 담겨있다.


“너무 남영동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었던 김병민은 이 편지가 김근태의 다른 면을 알려주게 되기를 바랐다.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인재근에게 미안하다 진심을 다해 말하고, 남녀차별 문제에 대해 김병준과 김병민에게 긴 편지를 적어 보낸 김근태는 새롭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김근태 아빠, 인재근 엄마). 서로를 친구로 대한다. 김근태는 원한다면 김병준과 김병민이 인병준과 인병민이 될 수도 있다고 자녀들에게 말한다. 여러 의미에서, 이 편지들이 현재의 텍스트로 읽히는 것은 비단 김병민뿐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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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가족들의 이야기


인재근 엄마가 편지 공개를 쑥스러워 하셨다고 했는데요. 책이 나왔잖아요. 반응이 어떻던가요? 여전히 쑥스러워 하세요?

 

의외로 좋아하시더라고요. 좀 쑥스러워 하는 느낌은 여전하죠. 사적인 거라 그런 느낌은 갖고 계신데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족들의 이야기를 알려야겠다는 데에는 공감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전히 쑥스러워 하고는 계세요.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와 출간 후의 반응이 달랐나요?


처음의 계획은 인재근 엄마의 편지가 포함되는 게 아니었어요. 김근태 옥중 편지가 다시 세상에 나와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책을 계획한 거였거든요. 그 과정에서 편지를 추리다보니 인재근 엄마의 편지도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인재근 엄마의 편지는 저도 본 적 없던 거예요. 엄마가 편지를 썼었다는 이야기만 알고 있었고, 꼭꼭 숨겨두었던 거거든요. 본 것처럼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본 적은 없었던 거고, 그걸 저도 준비하면서 깨닫게 된 거죠. 마치 구전처럼 알고 있었다는 걸요.(웃음)

 

인재근 엄마는 편지를 다 보관하고 계셨던 거군요.


네, 본인 침대 밑 서랍에서 편지가 나오더라고요.

 

프롤로그 격인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라는 글에서 “인재근 엄마의 편지들을 찾아 읽고 나니 김근태 아빠의 글들이 완성되는 느낌”이라고 했잖아요.


김근태라는 인물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이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민주화운동 할 때보다 정치인으로 활동할 때의 평가들이 저는 안타까웠거든요. 우유부단하다든가 대중성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평가들 말이에요. 제가 자라면서 본 걸 떠올리면 특히 대중성이라는 면에서 안타까운 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번 책도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죠. 옥중에서 쓴 편지니까요. 그런데 인재근 엄마의 글이 들어가면서 약간 대중성이 확보되었다고 할까요?(웃음) 평범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누구한테나 해당할 수 있는 가족적 이야기가 완성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엄마의 편지를 보고 하게 됐어요.

 

두 분의 톤이 완전히 다른데요. 거기서 오는 리듬감이 있어요.


아빠는 문어체에 가까운 말을 쓰는데 엄마는 거의 구어체로 쓰잖아요. 실제로도 그랬거든요. 김근태 인생을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김근태에게 다소 부족한 대중성을 가지는 부분이 엄마에게는 있어요. 너무 슬프거나 사색적이거나 시적인 것으로부터 탁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느낌, 그리고 다시 가는 느낌이 엄마의 편지에는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을 좀 채우는 것 같았어요.

 

막상 직접 편지를 보고도 꽤 놀라셨을 것 같아요.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르잖아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우선 엄마 편지가 아빠의 편지보다 더 많았거든요. 왜냐하면 김근태는 옥중에서 쓴 편지라 규격봉투에 일주일에 한 번, 이런 제한이 있었으니까요. 또 가족한테만 보내는 게 아니라 동지들한테도 보내야 하잖아요. 아주 계획적인 분이라(웃음) 수신인을 나눠서 쓰셨는데요. 엄마는 면회도 금지된 상태였으니까 아빠가 편지를 많이 기다릴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바쁜 와중에도 편지를 많이 쓰셨던 거예요. 새벽에도 쓰시고요.

 

새벽에 쓰다 중단한 편지를 아침에 이어 쓰기도 했어요. 인재근 엄마의 편지는 기록 시간까지 적어두셨더라고요.

 

저도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노래 가사라든지 시구도 많이 써서 보냈더라고요. 책에 많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편지를 대체한 유행가 가사 같은 것도 많이 보냈어요.

 

편지가 전부 검열되어야 했으니까 그랬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저항시 같은 건 다 까맣게 지워지고 그랬더라고요. 편지 실물을 보면 완전히 달라요. 검열 때문에 지워진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저는 이 편지들이 한 가족의 역사 같은 느낌이면서도 민주화운동을 한 가족들의 얘기라는 생각도 했어요. 워낙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계셨으니까요. 이게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구나, 하고 느꼈죠. 당시 민주화운동 하던 분들의 가족과의 교류가 지금도 있거든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1983년 9월 30일 결성)’을 조직했을 때 아빠 나이가 거의 가장 많았기 때문에 2세들 나이가 대부분 저보다 어려요. 이 편지들을 보면서 그 친구들도 생각하게 됐어요. 편지에 담긴 어린 병민이의 얘기가 모두 동생들의 얘기죠. ‘민청련 2세’라고 하는데요. 동생들의 이야기도 담겨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책으로 편지를 묶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겠죠?


제가 가장 잘 아는 저의 부모님과 제 얘기를 하는 동시에 잊힐 수 있는 민주화운동 가족들의 얘기를 생각하게 됐어요. 책을 만들면서 그런 면을 많이 생각하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고요. 제가 미술사를 전공하고, 전시 쪽 일을 했었어요. 추모 전시를 몇 번 했는데요. 김근태 텍스트를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그것에서 영감을 받도록 하려다 보니까 책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책이 없으니까 자료를 복사하고, 제본 떠서 드려야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제대로 하려면 책도 만들고,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출판사에서 제안을 해주셔서 만들게 된 거죠.

 

 

포스트 트라우마


저는 딸 김병민의 글이 참 좋더라고요. 흑백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컬러사진이 등장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저자의 글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가슴 아픈 부분이 있어요. 김근태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인데요. 저한테는 정말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어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런 면보다는 투사, 고문 피해자, 라는 면이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말하자면 포스트 트라우마인데요. 그런 게 약간 진절머리 나게 싫은 거예요. 제가 아는 그 사람의 진가는 그게 아니니까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일어서려고 했던 사람이고, 사람을 사랑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이거든요. 일화가 있거든요. 한 번은 아빠가 택시를 탔는데 합승했던 어린 친구들이 “이근안 씨 아니세요?”라고 했다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죠. 제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김근태 관련 전시를 준비할 때도 한 가족이 와서 “이 분, 그 분이잖아. 이근안.”이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충격이네요.


물론 이근안 본인이라고 한 게 아니라 이근안과 관련이 있다, 이런 뜻이었지만요.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뭔가 그걸 이겨낼 수 있는 대중적인 텍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런 데서 제 글을 시작된 것 같아요.

 

인간적인, 다른 면모를 좀 더 보여주고 싶었군요.


그런데 요즘 또 다시 그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거예요. 영화 <1987>도 인기고요. 저는 그게 조금 괴로워요. 그 시절을 알리는 데에는 대중적으로 폭발력이 있으니까 좋은 일인데요. 개인적으로는 힘들죠. 기사화 되는 부분도 ‘박종철 열사와 같은 곳에서 당한 김근태’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요. 기사 읽을 때 조금 힘든 부분이 있어요.

 

1호선 남영역에서 보이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도 못 가봤다.(중략) 어느 날 1호선을 타고 지나가다가 건물과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1초 만에 스쳐 지나갔는데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트라우마의 극복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 보다.


김근태 아빠가 반인륜적 고문에도 한 번도 정신을 잃지 않고 날짜, 시간, 사람을 기억하고 기록한 이유는 악행의 고리를 끊기 위함이었다. 비인간적인 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가까이 갈 생각이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지 않겠다.(214-215쪽, ‘김병민의 글’)

 

책 후반부에 영화 <남영동 1985>를 아직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적으셨잖아요.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목소리를 내고 전시, 출판 등 여러 활동을 하신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돼요.


사람들이 그런 쪽으로만 연관 짓잖아요. 김근태라는 사람의 삶이 고문 때문에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그것 자체에만 집중되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옳지 않죠.

 

당연히 한 개인에게는 복합적이고 중첩된 면이 있는데 그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에만 두고 한 면만 보는 건 그를 제대로 보는 게 아닐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가족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비극적이고요.


그런데 이걸 하다보니까요. 가족이 먼저 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히거나 그렇게 굳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가족의 역할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일찍 돌아가신 다른 열사 분들도 그렇고요. 제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보니까 예술가도 그런 경우가 많더라고요. 미술사를 전공한 것도 아빠의 영향이 있고, 책을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아빠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숙명처럼(웃음) 저절로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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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텍스트


부모님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게 하고, 김병민을 엄마의 성을 붙여 ‘인병민’으로 부르기도 했던 것을 보고 꽤 놀랐어요. 거기에는 많은 함의가 있잖아요. 두 분은 무엇보다 평등에 대한 의식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저희 집에서 이름 부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어요. 김근태 아빠, 인재근 엄마, 라는 말이 저한테는 자연스러웠는데요. 이게 우리만의 전통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되더라고요. 아빠는 엄마에게 대해서도 누구의 아내가 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말로도 많이 했었어요. 국회의원을 하실 때 ‘사모님 인재근’이 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하셨고요. 지금 저희는 그렇게 아까워하더니 후계자로 만들었다고(웃음) 얘기를 하지만요. 아내가 본인의 이름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그 사랑이 그대로 딸한테도 왔던 거죠. 살면서 부딪치게 될 사회의 남녀차별에 행여 딸이 좌절할까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렸을 때는 너무 유난이라고 생각도 했었는데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다르더라고요. 아빠가 뭘 걱정하셨는지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이 편지들이 정말 현재의 텍스트로 읽혀요.

 

김근태 아빠의 걱정이 너무 맞아 떨어지는 환경이니까요. 아직도 말이에요.


아빠의 말이 거의 그래요. 정치인으로 살려면 반 보 앞서 가야 하는데 다섯 발자국 정도 빨리 말씀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복지나 평화도 그렇고요. 5년이나 10년 후 이슈가 되는 말들이었거든요. 그것처럼 여성문제, 남녀차별의 문제도 그랬어요. 저는 호주제 철폐 얘기할 때 ‘새삼스럽게?’ 약간 이런 느낌이었어요. 아빠는 학교나 사회에서는 ‘김병민’으로 사니까 너희가 하고 싶을 때는 ‘인병민’으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아빠는 ‘인병민’이라고 부르겠다, 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거든요. 우리가 아빠만의 아들, 딸이 아니라고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굉장히 소중할 수밖에 없는 아빠였어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그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죠.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사랑스럽고, 또 애기들을 귀여워하고 잘 돌봐주기도 하는 병민이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아빠는 잔뜩 긴장하였다.(중략) 학교와 같이 제도로 되어 있는 곳, 법이 요구하는 때에는 불가피하게 김병민, 김병준으로 하되 자유스러운 곳, 예를 들면 어디 놀러 가서든지, 혹시는 학원이나 교회 같은 곳에 다닐 때 인병준, 인병민이라고 해도 이 아빠는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너희들이 그것을 진실로 헤아리고 마음으로부터 이해하여 그렇게 한다면 나는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134-137쪽, 김근태의 편지)

 

자신의 냉소주의를 고백하기도 했잖아요. ‘틀렸다 부정하고 싶어졌다. 우리 가족의 삶도 하찮게 느껴졌다’고요. 그리고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 2016년 촛불이 있었어요.


솔직히 너무 놀랐어요. 6월 항쟁은 어렸을 때라 다 기억하진 못해요. 엄마를 따라 농성장에 많이 다녔기 때문에 최루탄 냄새 정도는 기억하는데요. 특히 2011년 아빠가 돌아가시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는 너무 많이 좌절했었어요. 모든 시간이 부정되는 느낌이었죠. 그해 12월이 정말 많이 힘들었었어요. 그 다음에도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정말. 이민을 가겠다, 여기서 아이를 못 낳겠다, 하면서요. 그때 남편이 “너랑 나는 전두환 시절에 태어났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런 식으로 정신없이 지냈었는데요. 아빠의 글 중에 ‘익명의 다수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민주주의, 평화, 평등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올 때 세상이 바뀐다’고 했던 글이 있었거든요. 2016년 촛불 때 그걸 목격한 거죠.

 

정말 많은 분들이 그랬던 것 같아요.


87년을 겪어본 분들은 그걸 믿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아이들과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촛불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죠. 이런 거구나, 그렇게 민주화에 헌신했던 분들이 먼저 가셨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너무 슬프죠. 이걸 못 보셨잖아요. 1985년 남영동에 가셔서 1987년에는 감옥에 계셨거든요. 생각해보면 6월 항쟁도 보지 못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도 촛불을 못 보셨잖아요. 이걸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민중들이 일어날 시기에 옆에서 함께 가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먼저 돌다리를 놓으면서 가는 사람이라고, 옆에 없는 걸 자위하게 됐어요. 먼저 가시는 분이구나, 옆에 있을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요즘에 많이 하는 생각이에요. 너무 애달파하지 말자, 이렇게요. 

 

이제 그때의 부모님 나이가 되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면들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더 느끼는 것도 있고요.


아기를 낳고 편지들을 읽으니까 달랐어요. 감옥에서 별을 보면서 나의 목소리가 전해지기를 기도하겠다, 고 한 이야기 같은 걸 볼 때 그 감정이 오롯이 나의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나는 거예요. 어떤 일을 선택하는 데에 우리가 얼마나 가시 같았을까, 얼마나 가슴 한 켠에 있었을까, 싶은 거죠. 어렸을 때는 우리보다 그 일이 더 중요했겠지, 그냥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민청학련 사건 때 사형 선고를 받고 “영광입니다”라고 얘기해서 아주 유명했던 故김병곤이라는 분이 있어요. 그 분에게 딸이 두 명 있는데요. 어느 글에서 ‘이런 군부독재 시대를 딸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했거든요. 이제는 그런 생각에 대한 공감이 생긴 거죠. 우리도 그런 선택을 하겠다, 이건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더 좋은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 아이를 낳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받았다, 라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부모님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만큼 우리가 부모님과 보낸 시간은 많지 않았죠.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랑 받고, 다른 방식으로 보상 받았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고요. 그런 감정이 아이를 낳은 후에는 더 절실하게 와 닿았어요. 그냥 다른 방식으로 사랑 받았다, 정도가 아니라요. 그 순간, 맨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남영동으로 끌려갔던 그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걱정됐을까, 이런 생각들이 크게 다가와요. 번뇌하고 망설였을 그런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지점이 굉장히 아팠어요.

 

저자가 추억하는 김근태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어요.


굉장히 편안하신 분이죠. 글처럼 말씀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고, 강하게 어필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동지들 의견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고 하지 않고 “심정적 동의가 일어나지 않는다”(웃음)라고 에둘러 말씀하는 식인데요. 저한테도 그랬어요. 대학 다닐 때 놀러 다니고 하면 “병민아, 사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도로만 말씀하셨어요. 구구절절 설명 안 하시고요. 말씀이 많진 않았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건 실천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겁죠. 그런 면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곁에 인재근 엄마가 있었고요.(웃음)


맞아요.(웃음) 아빠의 친구들인데 엄마한테 와서 말을 전해달라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두 분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던 것 같아요. 경찰청에서의 일화가 있어요.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직후였는데요. 고문당한 후에 감옥으로 가죠. 감옥에 가면 아주 차가운 곳에서 몸이 다 망가져요. 실제로 하혈도 하고 굉장한 두통에 시달리시고 살도 다 빠지고 그랬거든요. 면회는 못하고요. 그런데 사라진지 20일이 지나면 경찰청으로 송치된다는 걸 엄마가 아시고 그곳에서 2-3일을 진치고 계신 거죠. 거기서 어렵게 만났는데 아빠가 인재근 성격을 아니까 귀에 대고 고문당한 일을 다 말씀하셨어요. 엄마는 뭐든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거고, 실제로 엄마는 열심히 하셨죠. 그 얘기 듣고 바로 그날 기독교회관에 뛰어가셔서 고문 사실을 폭로했고요. 그런 행동력이 있는 걸 아니까 믿고 본인은 정신적인 치유에 애썼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아빠를 살렸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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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앞으로 자신의 과제처럼 염두에 두고 있는 일들이 있는 것 같아요. 김근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도 앞으로 계속 할 예정이라고요?


학부에서 역사를,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어요. 아빠가 자료를 정리하거나 자서전을 쓸 틈도 없이 돌아가셨잖아요. 남겨진 자료들을 보면서 내 역할이 이런 것에 있나보다, 생각하게 됐어요. 일부만 알고 있는,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면 외에 다른 모습도 보여줘야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한 거예요. ‘따뜻한 밥상’이라는 추모전을 지난 12월 29일까지 했거든요. 세 번째로 한 추모전인데 하다 보니 점점 발전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김근태 자료만 생각했다가 아내와 가족들 자료로 확대가 됐어요. 사실 민청련 활동을 하신 분들은 다 85년부터 감옥에 끌려가시고 막상 6월 항쟁에 참여하신 분들은 가족들이었거든요. 엄마들이 띠 두르고, 피켓 들고 있는 사진들이 있어요. 그렇게 가족들, 자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남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계속 해나갈 예정이에요.

 

여러 목소리, 그 자체가 또한 민주주의잖아요. 사회적으로도 꼭 필요한 일이에요.


아빠 추모전을 준비하다보니 제 이야기가 나오게 되잖아요. 첫 추모전 전시 때는 막 울면서 준비했거든요. 그런데 한 번 활자화되고, 사람들한테 보이게 되니까 많이 해소가 되더라고요. 치유 받는 경험이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제가 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본인이 살았던 얘기가 남겨지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민청련 2세들과도 엄마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우리도 책을 엮어볼까 하고 얘기 나누고 있어요. 거창하지 않더라도 그런 일을 하나씩 하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차원에서 이 책도 다양하게 해석되면 좋겠네요.


이 책은 남영동에서 나온 이후 감옥에서의 편지들이잖아요. 저는 그 사건보다 김근태라는 사람이 그 이후에 어땠는지 좀 더 알려지길 바라요. 얼마나 본인을 치유하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고, 가족들이 거기에 어떻게 힘을 더했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너무 남영동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저는 박종철 열사의 이야기를 알게 될수록 아빠의 남영동 이후의 삶이 기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성장한 이후 이야기인데요. 어렸을 땐 다시 아빠가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 이제야 돌아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다 큰 다음에는 약간 보너스 같은 삶이었다는 걸, 나에게만 찾아온 행운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 시간이 더 소중하고요.

 

사랑이 짙은 책인데요.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줬으면 하세요?


저는 딱 제 또래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어요. 특히 여성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남녀차별에 관한 이야기도 꽤 있고 그래서요. 김근태와 인재근을 어렴풋이 안다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고요. 너무 무거운 내용, 민주화 운동이나 고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특수한 상황이지만 평범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와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나누는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런 공통점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근태의 특수한 상황만 너무 부각되는 것 같은데요. 잘 몰랐던 사람들, 젊은 분들이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김병민 저 | 알마
해맑은 웃음과 따뜻한 손을 기억하는 김병준, 김병민 남매는 그런 김근태 아빠에게 받은 ‘무조건’인 사랑을 다시 돌려주려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유미 “『홀딩, 턴』은 연대에 가까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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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기혼자들은 으레 이런 말을 한다. “결혼, 안 해도 되는데 왜 사서 고생하냐.”라고. 농담이 반쯤은 섞인 이 말 속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랑하고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한 결혼 생활이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은 현실 말이다. 그래서 일부는 이혼하고, 또 다른 일부는 법적으로 결혼을 유지하더라도 각방이라든지 별거라는 형태로 견딘다.

 

『끝의 시작』, 『틈』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서유미 작가가 이번에 천착한 주제는 바로 결혼이다. 이번 장편소설 『홀딩, 턴』은 단 두 사람에 집중했다. 주인공 영진과 지원이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갈라서는 과정을 담았다. 제목 ‘홀딩, 턴’은 스윙 댄스 용어로 ‘홀딩’은 파트너와 만나 손을 잡는 동작, ‘턴’은 돌면서 춤을 도는 동작이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갈등을 극복하고 홀딩하며 살아갈지, 아니면 차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턴해서 각자의 길을 걸어갈지를 두고 소설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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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에 관한 소설이 사랑에 관한 소설로 변하기까지

 

『끝의 시작』, 『틈』을 2015년에 발표한 뒤 『홀딩, 턴』을 냈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글쓰기 수업을 하고, 애를 키우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네요. 15~30매 정도의 짧은 소설을 몇 편 썼고, 두 번째 소설집 원고와 첫 에세이 원고를 다듬으며 지냈어요. 에세이는 임신 출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홀딩, 턴』보다 먼저 나왔어야 했는데 어쩌다보니 뒤로 밀렸네요. 아이가 여섯 살이 되었는데...(웃음) 올 하반기쯤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다른 소설도 그렇겠지만 이번 작품도 처음에 쓴 뒤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이혼’이라는 테마를 제안받고 쓸 때는 포커스가 좀 더 이혼 쪽에 진하게 맞춰져 있었어요. 그래서 연재 당시의 제목도 ‘테이블’이었고요. 그때의 소설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던 공동의 공간인 테이블이 이혼 얘기를 꺼내면서 어떻게 협상의 테이블로 변해가는가, 에 중점을 뒀어요.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까 감정의 대치, 말다툼, 후회, 고민이 길게 이어지니 읽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쓴 걸 읽는데도 재미가 없었어요. 이들이 테이블에 앉아 협상을 하기 전까지의 과정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자, 왜 헤어지려고 할까, 이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던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이야기를 좀 더 넣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도 사랑 이야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랑이 어떻게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 결혼 생활에 어떻게 균열이 생기는지의 과정에 대해 쓰게 되면서 그쪽 분량이 늘었어요. 쓰고 보니 소설 속에 사랑이 본격적으로 나온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기다리고, 같이 걷는 이야기를 쓰는 동안 즐겁고 따뜻했어요. 

 

‘테이블’도 좋은 제목인데요. ‘홀딩, 턴’은 어떤 의미인가요.

 

스윙댄스를 추는 분들에게는 익숙하고 기초적인 용어인데 다른 분들에게는 알 듯 말 듯한 단어인 것 같아요. ‘테이블’ 은 상상의 여지가 없는 제목이라 좀 아쉬웠어요. 출간을 앞두고 책 제목을 ‘테이블’로 했다가 소설책이 서점의 가구 코너에 꽂히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잠깐 했고요. (웃음)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니까 제목은 이런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사랑에 관한 제목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저도 모르던 용어인데 이번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된 단어에요. 스윙댄스에서 파트너와 만나서 손을 잡는 것이 홀딩, 돌면서 춤을 추는 동작이 턴이에요.

 

 

연대에 가까운 이야기

 

주인공 부부가 별다른 이유 없이 이혼하잖아요.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궁금해요.

 

이혼에 대한 소설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정한 부분이 외부 요소에 의한 이혼으로 가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두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없는 부부로 정했고 현실적인 선 안에서 양가 부모와 가족들 부분을 줄이려 했어요.

 

결혼 5년 이상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언제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느냐고 묻곤 했는데 엄청난 사건 때문에 이혼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더라고요. 대부분 상대가 저런 사람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앞으로도 바뀌지 않겠지, 우린 정말 다른 사람들이구나, 라는 걸 깨달을 때 였다, 는 답이 많았어요. 그중에서 신랑이 발을 안 씻는 걸 참기 힘들다는 얘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소설이 사소한 것에서 균열이 생겨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이야기로 나아가게 됐어요.

 

결혼을 주제로 한 사회학 책 등 논픽션은 꽤 있는 듯한데, 한국 장편소설 중에 결혼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은 드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결혼을 앞두거나 결혼을 유지하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정말 결혼이나 이혼, 부부 자체를 조명한 소설은 별로 없는 것 같네요. 저는 『끝의 시작』『틈』, 『홀딩, 턴』 을 지나면서 부부라는 관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어요.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고요. 『홀딩, 턴』 은 이혼 장려 소설이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웃음) 결혼이나 이혼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다거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배우자의 어떤 면 때문에 힘들 때 읽으면 나는 무엇 때문에 상대를 사랑했고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든지 같이 얘기 나누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원 주변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은 지원의 이혼에 힘을 실어주잖아요. 이 소설의 주제는 어쩌면 자립일까요.
 
그렇진 않고요. 지원의 주변 인물로 친구들과 언니가 나오는데 미혼 여성, 이혼한 여성, 아이를 키우는 여성 이렇게 각각 삶의 형태가 달라요. 이렇게 설정한 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어요. 미혼을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을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고요. 뭐가 옳다기보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는 걸 인정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설정했어요.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립보다 연대 쪽에 더 가깝습니다.

 

남자 주인공인 영진은 자신의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데요. 끝에 한 마디 하잖아요. 답답했다고.
 
전체 분량에서 영진의 이야기가 적은 편인데 그게 좀 아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요. 영진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건 노동하는 인간의 고단함, 피로 같은 부분이었는데요.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을 갖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보고 공무원이 되었지만 노동의 정년, 그 이후의 노동의 무게에 눌려 답답해하고 출근길에 차도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다고 생각해요. 그런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배부른 사람인데, 직업이 번듯하고 평탄한 것 같은 사람들도 억압받고 강요당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걸 영진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는데 거기에 집중하면 소설에 다른 색채가 끼어들 것 같아서 줄였어요. 앞으로 그런 억압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얘길 좀 더 쓰고 싶어요.
 
몸은 가장 뚱뚱했던 순간, 제일 많이 나갔던 몸무게를 기억한다고 한다. 틈만 나면 그때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요요 현상이 생기고 다이어트에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원도 불행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마음속에 불행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올라가 보았다. (190쪽)

 

몸무게의 요요 현상과 감정의 요요를 유비한 문장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런 적확한 문장은 어떻게 준비하나요.

 

감정이나 비유에 대한 문장은 소설을 쓰는 동안 나오기도 하지만 평소에 써 두는 경우가 많아요. 일상 속에서 되게 슬픈 감정에 빠지거나 좌절할 때, 어떤 일을 지나갈 때 그것에 대한 감상을 메모해둬요. 소설 속 인물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장이 잘 안 풀리면 다이어리의 메모들을 꺼내서 읽어봐요. 그들이 제가 아니고 그들이 겪는 사건이 저의 것은 아니지만 저를 통과한 세계이기 때문에 제 삶 속에 있는 것들과 닿아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옷장 문을 열고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넘겨보다가 마땅한 것을 꺼내 그들에게 건네는 기분으로 문장을 가져와요. 그리고 소설의 인물에게 맞는 톤으로 고치지요.

 

부부 이야기라면 둘 사이에 아이를 넣고 싶을 만도 한데요.

 

그 부분을 일부러 뺐어요. 아이가 들어가는 순간 부부만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부부는 피의 얽힘이 아닌 서로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관계인데 그런 면에 비해 주변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아요. 그것에 따른 변수도 많이 작용하고요. 그래서 지원과 영진 외에 다른 요소는 과감히 빼려고 노력했어요.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아이를 키우면서 인간과 본능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돼요. 아이를 낳는 건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일인가 충실한 일인가. 예전에는 사건을 바라보는 인간, 사건에 휘말리며 변하는 인간에 관심이 있었다면 요즘은 인간 자체, 근원적 인간을 그려 보고 싶어요. 그리고 대를 이어가는 가족의 이야기도 써보고 싶고요. 아무래도 큰 이야기가 될 테니까 시간이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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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작품을 낸 비결이라면

 

생활 밀착형 이야기를 쓸 때 많이 들으실 질문인데요. 이야기 중에서 실화는 어떤 부분인가요?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어요. 시어머니의 반찬이 맛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희는 남편이 저보다 잘 씻어요. (웃음) 고등학교 때 포크댄스 부분은 실제 장면을 몇 개 가져왔어요. 실제로 선배들이 학교 축제 때 스윙댄스를 췄거든요. 그런데 되게 운이 없는 게 제가 2학년이 됐을 때는 폐지됐어요. 나중에 후배들에게 들으니 몇 년 뒤에 다시 부활했다고 하더라고요. 지원과 영진만의 예외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되도록 보편적인 부부의 생활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집이나 아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차를 바꾸고 싶어하고. 
 
등단한 지 10년이 넘었고, 그 사이에 7권을 내셨어요.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했는데, 비결이 있을까요?

 

요즘은 다들 부지런히 쓰고 출간하는 분위기라 좀 더 열심히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소설 쓰는 걸 놓지 않고 꾸준히 해나갈 수 있는 건 제가 예술가보다 생활인이나 노동자에 가깝기 때문일 거예요. 하나의 소설을 다 쓸 때쯤이면 다음엔 이걸 쓰고 싶다는 게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얘기한 것 같은데 취미가 별로 없는 인간이라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고 영화 보는 것 말곤, 이것도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충분히 즐기지 못하지만요.(웃음) 비교적 글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특별하게 시간을 쏟는 게 없어요. 자연스럽게 글 쓰는 시간이 많죠.

 

초기작과 『끝의 시작』이후부터의 작품들이 약간 느낌이 다른 듯해요.

 

초기작인 『판타스틱 개미지옥』 , 『쿨하게 한 걸음』은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한두 사람에게 집중해보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꾸준히 들었어요. 그때는 똑 같은 사건이 여러 사람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상황, 같은 사건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사람들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는데 관심이 있었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인 큰 흐름을 바라보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혼란스럽기도 했고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개인적인 일과 여러 사건들이 겹치면서 밖으로 향했던 시선이 가까이로, 한 사람의 손끝이나 표정으로 옮겨오게 된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또 자연스럽게 시선과 관심의 이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마음에 맺히는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소설, 에세이 수업을 하면서 학생, 독자와 만나잖아요. 글 쓰는 데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제 시선에 갇히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요.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걸 사람들과 다시 나누고 작품과 연결해서 이야기하는 순간 새롭게 확장되는 경험을 하는 게 즐거워요.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앉아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같이 얘기하는 순간이 있다는 게, 그게 제 일이라는 게 참 감사해요. 게다가 책 이야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글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수업을 들으러오잖아요. 그들이 쓴 소설도 함께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이 될까 이야기하고 고민하는 순간 많은 것을 배우게 돼요. 그들의 작품이 나아지는 걸 보는 것도 즐겁고요. 

 

등단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글 쓰고 발표하는 환경이 바뀌었잖아요. 요즘은 온라인 연재 플랫폼이 많고, 독립출판물도 늘어났고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보나요?
 
수업을 하면서 느끼는데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책은 이전보다 덜 팔리지만 사람들의 표현 욕구는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책이 나오는 건강한 창구와 활로가 많이 늘어가는 걸 보며 읽고 쓰려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는 생각, 어떤 방식으로든 책을 읽고 만들 거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시장에 대한 비관 때문에 글쓰기가 위축되지는 않을 거 같고요.

 

2018년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올해는 두 번째 단편집과 첫 번째 산문집이 나올 거예요. 짧은 소설집도 계획하고 있고요. 그 사이에 단편을 쓰려고 두 편 정도 구상하고 있어요. 계획에 대해 생각하면 늘 많이 쓰고 더 쓰고 싶어집니다.


 

 

홀딩, 턴서유미 저 | 위즈덤하우스
‘사랑’이라는 감정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연애의 과정을 통과한 연인이 예식장을 떠난 이후 겪게 되는 ‘결혼생활’을 섬세하고도 진솔하게 보여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손미나 “우리 모두는 여행자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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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를 지나 여행작가, 소설가, ‘손미나앤컴퍼니’ 대표이자 인생학교 교장,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인. 손미나의 이력은 점점 늘어난다. 예스24 작가파일에는 ‘인생 3막’을 살고 있다고 나와 있지만, 본인도 현재 인생에서 몇 번째 막을 지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고 “조급함을 갖기에는 너무 넉넉하고, 평생 있을 것처럼 착각하기엔 유한”한 인생을 이야기하며 오늘을 성실하게 채울 뿐이다.


인생은 여행에 곧잘 비유된다. 끝이 없고 목표보다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수식하는 업(業)은 계속 바뀌지만, 손미나는 여전히 자신을 ‘여행자’로 정의한다. <인생학교 서울>의 2018년 새로운 학기를 앞두고 작가 손미나, 교장 손미나가 아닌 여행자 손미나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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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여행자


이제 손미나 하면 ‘아나운서’보다는 ‘여행’을 떠올리게 돼요.


여행이 굉장히 대중화됐어요. 어렸을 때만 해도 해외여행 가는 건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학생도 쉽게 가요. 손쉽게 접하는 문화 향유 방식이 됐는데, 앞으로도 더 넓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수명도 길어지고, 교통이 발달하고, 정보가 많아지잖아요. 여행을 비즈니스로 한다기보다 여행으로 인생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여행을 잘할까, 여행에 철학이 있지 않을까, 여행 문화는 어떻게 진화되나 하는 게 궁금해요. 어떻게 하면 여행 소비자나 노동자가 되지 않고 진정한 여행자가 되어 단 한 번 여행 하더라도 전환점을 제대로 만나 성장하고 변화하는 걸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어요.


인터뷰 전에 스페인 관광청과 미팅하셨다고 하셨죠?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나요?


앞으로 10년은 큐레이션의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절이 있었죠. 이제는 그게 아니라 대상에게 맞는 정보를 적절하게 맞춰서 제공하는 능력이 많은 결과를 좌우할 거라고 생각해요. 여행도 마찬가지예요. 스페인에서 봐야 할 건 몇천만 가지지만 제한된 시간과 비용으로 모든 걸 다 경험할 순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에 따라 거기에 맞는 여행을 추천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 그걸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하던 참에 스페인 관광청과 만나서 사람의 상태와 인생의 단계에 맞춰 여행 콘텐츠를 내보이는 작업을 올해 하려고 해요.


싹(SSAC) 여행연구소에서 하는 일이 될 것 같은데요, 소개를 해주시자면.


싹(SSAC)은 sonmina social alliance community의 약자인데요, 사회적 동지의 모임이죠. 여행을 매개채로 하지 않더라도 내면에 뜨거움이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헤쳐모여’를 외친 건데, 정말 많은 사람이 계속 찾아와요. 우리는 모두 여행자일 뿐이거든요. 길 위에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걷고 있죠. 이런 자기 독자성에 맞춰 변화하고 성장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도 곳곳에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사회에 더 멋있는 변화를 추구하고 우리가 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을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일을 해요.


어떤 프로그램이 있나요?


싹이 여행을 둘러싼 무거운 주제나 철학만을 다루는 건 아니에요. 사실 저희 연구소 오시는 분들을 보면 진짜 다양해요. 프로파일러, 농부, 카지노 딜러, 펜션 주인, 의사는 반마다 다 있고요.(웃음)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오신 이유도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여행 친구를 얻고 싶고, 어떤 사람은 여행에서 위로를 받고 싶고, 여행을 가장 좋은 소비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는 분도 계시죠. 패턴처럼 얼마 만에 한 번은 꼭 여행을 가야 한다는 분도 있고요. 저는 그 어떤 것도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싹’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여러 가지 활동이 있어요. 말씀하신 싹 여행연구소도 있고, 싹수다방, 싹 여행선물도 있고요.

 

오프라인 활동은 한정적이라 싹수다방이라는 미디어를 만들었어요. 이것도 역시 시대 흐름을 반영한 건데, 지금은 1인 미디어 시대잖아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정보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눌까 하다 방송을 만들었고, 싹 연구소나 싹수다방에서 만들어진 수익이나 도움을 가지고 여행을 보내는 여행선물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싹이라는 프로젝트가 완성됐어요. 올해부터는 업그레이드를 시켜서 명실상부한 연구소가 되기 위해 콘텐츠 아카이브 작업을 시작했어요. 싹수다방도 비디오 버전을 만들거나 브랜드 콜라보 등이 생겨날 것 같고요. 아까 말씀드린 큐레이션 여행 프로그램으로도 뻗어 나갈 것 같아요.


일의 키워드와 개인의 키워드가 ‘여행’으로 만나네요.


이렇게 살 줄 몰랐는데 돌아보니까 그런 키워드가 있더라고요. 저도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발자국을 남기고 보니 전체 그림이 된 거죠.

 

손미나를 설명하는 말이 많아요. 지금 꼽자면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인생학교, 팟캐스트, 대표, 소장, 편집인, 강사, 작가, 방송인. 너무 많아서 정신을 못 차려요(웃음). 뭘 제일 하고 싶은지 하나를 고르라고 할 때마다 저는 여행자라고 이야기해요. 뒤에 무슨 타이틀이 붙어도 저는 손미나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이름에 제일 무게를 두고 살고 있어요. 아무리 훌륭한 타이틀을 달아도 그 사람이 별로라면 호칭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죠. 저는 여행자로 살고 있고, 하는 일이 다양해 보이지만 제가 가는 여행길 위에 놓인 일들일 뿐이에요. 달라 보이지만 한 길 위에 있어요.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요. 저는 말로 소통하다 글로 소통했고, 지금은 인생과 여행이라는 단어로 소통하고 있어요. 밖으로 눈이 향해있는 사람으로서 남보다 빨리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걸 활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고 소통하는 역할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손미나의 여행 방법이 있다면요?


가벼워야지 여행이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물건뿐만 아니라 마음도 비워야 하고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기 전에 좋은 곳으로 갈지 아닐지 결정할 때 심장을 꺼내서 깃털과 재봤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우리가 가볍게 살 수 있나 늘 고민하는 편이라 여행을 떠날 때도 짐도 조금, 갈 때도 마음을 비우고 올 때도 보고 들은 걸 미련을 두지 말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요.


잘 노출되지 않은 곳들, 진짜 체험 위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회는 굉장히 좁은 의미의 행복이나 성공을 기준으로 누군가 정해 놓고 거기를 통과하라고 하는 것 같아요. 꾸역꾸역 모여서 힘들게 달리기를 하는데 끝이 없어요. 대학만 들어가면 다 편할 것 같아서 고3 때 힘을 내면 대학에 들어갔는데 허들이 더 높아요. 그리고 직장 들어가면 좋을 줄 알았죠. 더 심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어요. 책을 쓰면 편할까 했는데 책에도 베스트셀러 순위를 매겨요. 끝없는 경쟁 속에 나라는 사람이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서 사는 여유가 없어요. 정말 인간답게 살고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내 삶이 매일매일 다르게끔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책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창구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 책만 읽을 수는 없잖아요. 좀 더 살아있는 경험을 얻으려면 여행이 좋다고 생각해요. 낯선 사람이 내 스승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를 건드려서 내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답을 발견하게도 해주고 그러잖아요.


최근 읽은 책이 있나요?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잠』을 읽었어요. 예지몽을 꾸고 꿈을 이어서 꾸는 사람이 나오는데 저도 그러거든요. 너무 재밌었어요.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백년을 살아보니』도 읽었는데 오래 살다 보면 기본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라, 정직하게 살아라,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닌데 뭔지 모를 울림이 있어요. 아, 『아라비안 나이트』도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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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행복을 고민하는 시대


인생학교 이야기를 해 보죠. 몇 년부터 시작하신 활동인가요?


2015년 말에 오픈했고요. 오픈하기 전 1년 동안 알랭 드 보통과 정말 많은 대화를 했어요. 우리한테 과연 이게 적합한 일인가, 인생학교 콘텐츠가 한국에 도움이 될까, 기존의 콘텐츠를 문제없이 전달할 수 있을까 등등 고려하는 시간이 길었어요.


알랭 드 보통이 처음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들었어요.


2년 동안 진행하면서 알랭 드 보통이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래도 팬이었지만 같이 일하면서 너무 좋은 친구가 되었고, 너무 똑똑해요.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너무 재미있고 재치있고 통찰력이 깊어요. 처음에 인생학교가 연 건 2008년이었으니까 이미 연구한 지 10년 넘게 된 프로젝트예요.


분기별로 진행하나요?


지금까지는 회차별로 하나씩 들어도 되고 쿠폰 사서 한꺼번에 들을 수도 있었어요. 이번 봄부터는 학제로 하려고요. 예를 들어 올해 인생학교의 봄학기를 듣고 싶다 하면 등록해서 정해진 기간 안에 계속 수업을 같이 하는 거죠. 어느 단위로 학기를 구성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직장이다 뭐다 해서 다들 바쁘잖아요. 한꺼번에 몰아붙인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쓰는 시간과 비용, 노력 같은 걸 감안해서 구성할 예정이에요.


어른을 대상으로 한 인생 교육 기관이 많아졌어요. 인생학교가 시대를 조금 앞서서 생각한 게 아닐까 싶고요.


너무 당연하게 필요한 일이고 앞으로도 더 커질 거예요. 그만큼 이 일이 사회에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그렇지 않아도 교육의 기회가 넘쳐나는데 잘 만들어진 좋은 콘텐츠를 가지고 누군가 제안할 필요가 있어요. 학교에서 아무리 교육을 잘 받아도 연애를 한다거나 매일 직장 생활하면서 동료와 문제가 생긴다거나,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거나 하면 인간은 정말 한계에 부딪히거든요. 이제 우리 영혼의 행복, 영혼의 빈곤함을 고민하는 시대가 온 거죠. 고민이 실제로 필요하고요. 교육 자체가 의문이 들면서 저희도 절대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올해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요.


올해 새로 만든 콘텐츠가 대거 업데이트돼요. 열심히 번역하고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고요. 확실히 알랭 드 보통과 그의 팀이 원래도 좋았지만 개선하니까 더 좋은 게 나오더라고요. 한 번 더 고민하니까 또 발전된 콘텐츠가 나오는 걸 보니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요. 어떤 사람은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을 삶에 대한 물음표를 계속 떠올려야 하고,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삶에 대한 비전이 넓어지죠.


이제까지 인생 학교를 거쳐 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작년 봄에 통계를 냈을 때 만 명이 넘었어요. 장소가 제한적이라 20여 명씩 듣게 되는데, 그래도 많이 왔죠. 큰 이벤트를 연 적도 있고요.


인생학교에서 변하는 사람들을 보면 뿌듯할 것 같아요.

 

보람차죠. 저희 직원들은 제가 봤을 때 그 보람으로 일하는 것 같아요. 저희가 대기업도 아니고, 근무조건이 뻔하잖아요. 하지만 평생 한 번이라도 당신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 듣기 힘든데 보약 챙겨주고 볼펜 챙겨주면서 고맙다고 하시는 분들 때문에 힘이 나죠.


다음 학기는 언제 시작되나요?


지금 새로운 콘텐츠를 번역하고 있어요. 5월 초에 시작하고 신청은 3월부터 받을 것 같아요. 2018년에는 좀더 많은 분이 오셨으면 해요.

 

 

불안함을 끌어안고 사는 법도 알아야 한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많은 일을 하시잖아요. 사실상 아나운서였을 때보다 더 바빠졌을 것 같아요.


대신 여러 가지 일을 해볼 수 있으니까 좋지 않아요? 그런 장점도 있지 않을까요?


바쁘다고 해서 꼭 지치는 건 아니죠?


끝이 안 보일 때, 아무리 해도 결과가 안 나올 때 지치죠. 꼭 경제적인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한 일에 피드백이 튀어나오고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때 사람들은 보람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저는 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보기에 근사하니까 너무 좋다고 하지만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희생정신으로 일할 때가 많아요. 그래도 버티는 이유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 때문일 거예요. 명확한 목표가 없이 왜 이걸 하고 있지 반문하면 답이 없어요.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 모르고 뭘 하면 행복한지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 안타까워요. 그러면 되게 안타깝거든요. 그걸 찾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 한 발짝을 내미는 게 어려워요.

 

어떤 게 제일 어려울까요? 경제적인 이유? 용기? 남들이 다 가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


아마도 안전망이 없다는 불안 때문이겠죠?


안전망이 있는 삶이 역사상에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요? 물론 예전 같으면 정년퇴임할 때까지 갈 수 있는 직장이 많았다는 차이는 있어요. 그러나 한 마디로 이 길로 가면 앞으로도 계속 안전할 거라는 건 누구한테도 없었고, 그런 불안은 저도 가지고 살아요. 물론 이런 이야기 들으면 화낼 분이 있겠죠. 제가 주장하는 건 불안함을 끌어안고 사는 법도 조금은 알아야 한다는 거죠. 문제는 내가 꼭 이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있어야 해요.


그럼 첫 번째 발을 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꼭 외국이 아니더라도 계속 떠나고 많이 걸으면서 생각하고, 의외의 사건을 만났을 때 피하지 않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적으로 실패하면 안 된다는 걸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젊은 세대뿐 아니라 모두에게요. 모두가 성공해야지만 인간다운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요. 첫발을 내디뎌서 잘못하면 두 번째로 하면 되는데 마치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죠. 늘 강조하지만 실패하면 다시 하면 돼요.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가 그 용기를 못 내죠. 조급함을 갖기에는 남은 인생이 너무 넉넉하고, 평생 있을 것처럼 착각하기엔 유한해요. 조급할 필요도 없고, 언제까지나 미루면 안 되는 딜레마가 있는 게 인생인데, 앞에 놓인 일을 열심히 하고 결과는 신에게 맡기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인생학교 ▶ http://theschooloflifeseoul.com/

싹 여행컴퍼니 ▶https://www.ssac.company/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문정 “나도 무례한 사람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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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시원하다’, ‘유용하다’, ‘너무 필요한 책이었다’


모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에 달린 독자리뷰다. 이 책, 심상치가 않다. 출간 직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며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더니 출간 2주 만에 9쇄를 찍었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인가. 사람들로 하여금 구매 버튼을 누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인가.


<대학내일> 콘텐츠팀 부팀장 정문정 저자는 어떤 일을 당하면 그것이 자기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는 저자는 가슴 탁 막히게 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글로 푼다. ‘갑질의 낙수효과’, ‘체념할 줄 아는 용기’ 등은 사회의 불편한 장면을 날카롭게 잡아낸 저자의 통찰이 빛나는 대목이다. 저자는 말한다. 어떤 무례함도 나를 망칠 수는 없다고, 타인에게 조금 둔감해도 된다고.


검정치마의 ‘Antifreeze’라는 노래 가사,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를 읊으며 정문정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통해 조금 더 씩씩해지기를 바란다며 응원의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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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 씩씩하며


출간 2주 만에 9쇄를 찍었어요. 대단한 반응인데요. 예상하셨어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글을 작년 6월쯤 썼었는데 그 글이 작년 한 해 <대학내일> 디지털과 매거진 통합 3위 안에 들었어요. 텍스트로 된 것은 이 글이 유일했죠. 그만큼 많이 반응한다는 걸 알았어요. 모든 곳에 메인으로 올라갔거든요. 출판사에서도 그걸 보시고 연락을 주신 것 같은데요. 2017년 가장 큰 이슈는 ‘갑질’과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두 개도 떨어질 수 없고요. 그래서 이 두 이슈를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가 글을 쓴 거였어요.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만 사실 책이 이 정도로 잘될 줄은 몰랐죠.(웃음) 솔직히 에세이 10위 안에는 들겠다, 정도 예상은 했는데 종합 순위까지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글은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우선 제목부터가 대단히 직관적이에요.


저는 기본적으로 뭔가에 탁 막히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어요. ‘노룩패스’를 봤을 때 진짜 일주일동안 그 사람만 생각했거든요.(웃음) 이 답답함이 어디서 온 건지를 계속 생각했죠. 그걸 생각하며 쓴 글이었어요. 쓰고 나니 좋더라고요. 그 한 장면뿐 아니라 내 안에 오랫동안 있던 소재를 풀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저처럼 탁 막혔으니까 그 영상을 많은 사람들이 봤을 텐데요. 그게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제목만 보고 샀다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우리 사회에 스스로 약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책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뒤가 당기더라고요.


갑질, 대단히 한국적인 문화죠. 이 단어를 따로 번역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Gapjil’이라고 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사회만 갖고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에 유독 두드러진 문제인 것 같긴 해요.

 

<라디오스타>에 출연했던 김숙을 바라보면서 글이 시작돼요.


프롤로그나 첫 문장이 중요하잖아요. 독자와 처음 만나는 곳이니까요. 독자를 끌어당기려고 생각하다보니 나온 건데요. 사람들이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김무성과 홍준표라면 반대로 요즘 한국 여성들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김숙과 이효리라고 생각했어요. 이들에게 시원함을 느꼈다면 어떤 부분에서 나온 걸까, 싶더라고요. 아마 나도 저렇게 받아치고 싶다고 생각하게 했던 것 같아요. 가령 한 예능에서 이경규가 어떤 아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더니 이효리가 “그냥 아무나 돼.”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 두 분을 글에 모셔온 거죠. 여러분, 이렇게 센스있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여러분도 그걸 원하시죠, 그렇다면 이 책을 사세요(웃음), 라는 의도였는데요. 편집자 분이 좋아하셨어요. 이 의도가 틀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책의 포인트는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에요.


네, 단순히 미소를 짓는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페이스에 내가 말려들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어요. 상대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지 그 사람이 나를 망칠 수는 없는 거죠. 저는 그 생각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어떤 부정적인 일을 당하면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이 망쳐졌고, 상대가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던 나의 치명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어요. 그냥 웃으면서 ‘똥 밟았네’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저를 미워하지 않고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잖아요. 조금 씩씩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웃으며, 씩씩하며, 이것이 제 기본 생각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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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면 출세해라?


글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본문 일러스트가 눈길을 끌어요.


‘키미앤일이’라는 작가님인데요. 제가 이 작가님과 1년 전부터 같이 작업을 했어요. <대학내일> 칼럼 때 그림을 그려주셨거든요. 책에 담긴 것들이 대부분 그때 그려주신 것들인데요. 키미앤일이 작가님 그림을 처음 받아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죠. 이 작가님은 제 글을 완전히 이해하셨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시고 그림을 그리신 거죠. 관성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었어요. 그때 정말 감동해서 작가님 연락처를 받아서 감사 문자를 보냈어요. 작가님의 그림을 받기 위해서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진다고 보냈죠. 작가님이 남해에 계셔서 일부러 가서 만나기도 할 정도로 좋아했어요. 그래서 저희 편집자님한테 책 작업을 꼭 이 작가님과 하고 싶다고 얘기한 거예요. 편집자님도 저를 잘 이해해주셔서요. 정말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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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의 입장으로 살아볼 순 없지만, 상대를 이해해보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고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순 있다.

 

 

갑질의 낙수효과’라는 말에 많이 공감했는데요. ‘참는 게 미덕인 시대는 끝났다’고 하셨어요.


어릴 때 불이익을 되게 많이 당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화가 났었어요. 어른들이 항상 그랬거든요. “억울하면 출세해.”라거나 “네가 힘 센 놈이 되면 돼.”라고요. 그래서 어릴 때는 출세해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죠. 대학교 때는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요. 서비스업에 있다 보니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하도 당하니까 제가 어디를 갔는데 종업원이 안 친절하면 화가 나더라고요. 그때 저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어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대로 하면 이 사회가 더 나빠지는 거구나, 그 얘기를 그만 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계속 했죠.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무례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도 무례할 수 있다고요.


연차가 낮을 때, 대표님이 힘들다고 하시면 “대표님, 그만 두시면 되죠.”(웃음)라고 말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농담하던 방식으로 후배에게 말을 했더니 상처를 받더라고요. 그때 또 깨달았죠. 저는 항상 늦게 깨닫는 것 같은데요. 사람마다 말의 무게가 다르구나, 대표님이나 팀장님한테 관두라고 하는 농담은 아무 타격이 아니지만 후배한테는 전혀 다른 문제였구나, 그렇다면 나는 새로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나 또한 무례한 사람일 수 있다, 생각한 거죠.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했고, 승진도 빠른 편이다보니까 스스로 망가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덜 망가질까, 어떻게 하면 저 무례한 사람들이 무례한 행동을 그만두게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을 한 거죠. 어쩌면 저 사람들도 나처럼 그런 기회를 못 받았기 때문에 아직 무례한 게 아닐까 싶은 거예요. 당신이 무례했다는 사실을 웃으면서 알려줄 수도 있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망가진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예요?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죠. 보면 리더의 자리에 가자마자 급속도로 망가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자리가 주는 위엄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는 말을 듣는 척 하는 것인데 그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말이 다 맞다, 는 착각에 빠져요. 그런 착각을 하다 보면 조직원들이 우습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너희는 왜 이것밖에 못해?”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런 걸 보면서 나는 저렇게 안 돼야겠다, 생각을 많이 했어요. 너무 비참하잖아요.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우리 서로 좀 덜 망가지자, 라는 얘기를 계속 하고 싶어요. 무례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 무례했을까요? 아무도 자기한테 말을 못하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누군가에게 무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지점이 슬퍼요. 저도 후배들이 저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 얼마나 많은데요.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거슬리겠어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무례한 사람일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덜 무례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고 ‘너는 무례해,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무례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 무례하지 못한 사람도 세상에는 굉장히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무례할 기회가 없던 사람도 어떤 위치에 가면 무례해질 수 있죠.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계속 하고 싶고요.

 

 

나의 아픔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자


사실 무례함에 웃으면서 대처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저자도 연습을 많이 했다고요.


우선 하나 마나 한 말을 하기 싫었고요.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다가 저의 이야기를 하게 된 거예요. 자기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게 가장 힘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스스로가 하나 마나 한 말을 싫어하니까 이런 형태의 글이 됐어요. 독자 서평 중에 좋았던 말이 ‘실질적이다’라는 거였거든요. 말씀드렸듯이 어떤 경험을 하면 저는 그게 저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멍청해서 이 일을 당했겠지, 내가 문제겠지, 라고 생각하기보다 이게 나만 당하는 일일까,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이야기를 쓰려다보니까 아무래도 좀 더 그렇게 느끼실 것 같아요.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다,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다, 상대를 눈치 보게 하자, 등의 조언을 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둔감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요.


둔감하다는 말이 좀 부정적인데 저는 그게 맞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민하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다보면 남들이 조금 우습게 보이거든요. 제가 많이 경험한 건데요. 내가 너무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남들이 얕아 보이고요. 내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니까 남이 힘들다고 하면 화가 났어요. 그러면서 나를 예민하게 두면 남을 미워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병문안 온 친구가 힘든 이야기를 하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힘든 얘기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스스로 괴물이 됐던 거죠. 그게 지금도 참 슬퍼요. 저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너무 예민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의 아픔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자고 많이 생각해요. 저는 누군가가 미워지려고 하면 ‘저 사람도 상처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에요. 저를 위해서요.

 

말씀도 그렇고, 책 전반에 체념의 정서가 깔려 있어요. 작가의 현실 인식에 대해 듣고 싶어요.


맞아요, 인생은 시궁창이죠.(웃음) 저는 기본적으로 삶이 되게 힘든 거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지적을 받고 자랐고요. 여자라고 무시당한 경험도 많아요. 안 된다, 포기해라, 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럴 거면 왜 태어난 거지, 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다가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괴로워만 하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인생은 시궁창이지만 나 좋으라고 하는 것을 찾아봐야겠다, 이것이 제 기본 정서예요. 세상엔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갑질도 많고요. 세상이 하나도 안 바뀔 것 같다는 비관이 들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최소한 나라도 바뀌면 주변을 바꿀 수 있다고요. 큰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주변은 바꿀 수 있겠죠.

 

특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세워둔 규칙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어렸을 때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될 텐데 그 말을 안 해요. 저는 팀원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좋더라고요. 또 저는 회식을 거의 안 해요. 회식이 너무 괴로웠거든요. 매일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으니까요. 제가 리더가 되고 제일 먼저 회식을 없앴어요.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회식비가 있어서 두 달에 한 번만 하죠. 진짜 좋더라고요. 사원 때는 그걸 바꾸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리더가 되니까 쉽게 바꿀 수가 있었죠. 저는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리더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리더가 되면 변화를 이끌어내기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쉬워지거든요.

 

여러 이유로 조직에서 아직까지 여자가 살아남기 힘든 분위기가 있잖아요. 안타깝죠.


반짝반짝 빛나는 후배들이 회사를 관둘 때 너무 안타까워요. 상대를 너무 곱씹을 필요도 없거든요. 사회는 무균실이 아니니까요. 한 번은 제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종일 표정이 안 좋았는데 그걸 한 후배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한참 뒤에 와서 “저 때문에 그때 기분 나빴죠?”라고 하는데 정말 그게 아니었거든요. 자기 마음에 지옥을 갖는 거죠. 작은 일을 크게 생각해서 생채기를 계속 내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회사를 오래 못 다니고요. 저는 그게 너무 아까워요. 회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하는데요. 사실 회사니까 그런 거죠.

 

저자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어릴 때 책만 읽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어른들은 자꾸 제가 현실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 현실이 뭘까 궁금했어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거기서 1년, 영화관에서도 2년, 대학생활 내내 이런 식으로 조직 생활을 빨리 시작했던 거예요.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 같아요. 한 번은 함께 일하는 언니가 ‘양상추’를 자꾸 ‘양상치’라고 해서 제가 사람들 있는 앞에서 정색하면서 “그러면 ‘배추’는 ‘배치’인가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왕따를 당했거든요.(웃음) 너무 많은 것에 예민했고, 너무 많은 것을 곱씹었구나, 를 느꼈어요. 내 스스로가 마음의 지옥을 만드는구나, 하고요. 그런 고민들을 많이 했던 상태에서 회사 후배들을 보니까 보이더라고요. 나이에 비해 일찍 사회생활을 했고, 승진을 빨리 하다보니 그 사이에서 이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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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됐어도 다시 하면 돼요


결국 나를 위하는 법, 이네요. 타인이나 나의 아픔에 너무 집중하지 않으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거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특히나 어른들은 아랫사람한테 자꾸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 해요. 자기도 그렇게 못 살았으면서요. 너는 이런 사람이야, 이거 말고 저거 해라, 라고 하는데요. 그 말을 자꾸 믿다 보면 진짜 그런 것처럼 되어 버리거든요. 그런 말을 믿지 말고 네가 너 스스로 대답하려고 해봐, 이런 의미에서 집중을 하라는 말이었어요.

 

또한 앞서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에 대한 자기 점검 역시 필요한 일이고요.

 


저는 제 자신이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쓰기 때문에 마감이 있을 때는 항상 새벽에 글을 쓰거든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다이어트를 성공한 적이 없어요. 원했던 몸무게까지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게 누군가에게는 의지박약으로 보이겠죠. 저는 의지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라 의지의 분야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려고 애써요. 그렇게 생각하면 남에게 충고도 덜하게 돼요. 저도 입이 근질거릴 때가 있죠.(웃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거죠. 너는 다이어트도 못하잖아, 라고요.

 

‘씩씩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적었잖아요.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선물하고 싶으세요?


대학생 친구들을 정말 많이 보는데요. 착한 친구들을 정말 많이 봐요. 착하고, 싫은 소리 못하고,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그러면 필연적으로 인간관계가 망가지게 돼요. 내가 이만큼 참아주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요. 인간관계도 건전할 수 없고, 그걸 이용하는 사람만 많아지죠. 저는 그런 친구들한테 이 책을 주고 싶고요. 아까 말했던 곱씹는 친구들에게도 책을 주고 싶은데요. <짠내투어>에 박나래 씨가 나왔어요. 한 번은 그날따라 불운이 겹쳤던 거예요. 그런데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편집이 그랬을 수도 있는데요. 저는 그게 조금 불편했어요. 어떤 말을 하면 진짜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 생각을 해버리면 자기는 언제나 불운을 몰고 오는 사람이 되어버리고요. 진짜 불운이 오면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버려요. 저는 곱씹으면서 자기를 지옥에 넣는 분들한테 이 책을 주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게 제 과거의 모습이니까요.

 

역시 젊은 분들을 많이 만나니까 그들의 입장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네요.


그런가 하면 의외로 중년 독자들의 피드백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40대, 50대의 독자 분들에게서도 감상을 많이 받았거든요. 이게 그냥 20대에 잠깐 겪는 문제가 아니구나, 깨달았어요.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벗어던지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본인이 깨닫지 못하면 평생 착한 사람으로 살면서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것들을 만나지 못하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그게 너무 안타까운 거죠. 저는 제 주변이라도 좋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만난 좋은 것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불행한 존재라는 걸 믿지 않음으로써 바뀐 것들이 진짜 많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작은 긍정적 경험이라도 하나씩 쌓인다면 달라질 거예요. 모두가 겪어보면 좋을 텐데요.


헬스장을 한 달 다니다 선생님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진짜 열심히 했는데 살이 안 빠진다고요.(웃음) 선생님이 “문정 씨, 몇 살이시죠?”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평생 안 빠진 살이 한 달 만에 빠지겠어요?”라고 하는 거죠. 그 말이 너무 좋았어요.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어요.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됐는데요. 20년 동안 착한 사람이 되고자 살았고, 그동안 거절을 못했는데 당연히 한 번에 안 되죠. 한 번에 되는 거면 이렇게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저도 십 년 동안 깨달은 거거든요.(웃음) 안 되는 건 당연하고, 안 됐어도 다시 하면 돼요. 다이어트와 똑같다고 생각해요. 관심이 많아서 관련 책도 많이 읽었는데요.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해요. 꾸준히 해라, 갑자기 먹을 수도 있지만 포기만 안 하면 괜찮다, 라고요. 저는 이 말이 마음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정문정 저 | 가나출판사
어떤 인간관계는 유지하는 그 자체만으로 지나치게 에너지가 들 때가 있다. 내 속마음을 말하고 싶지만, 오해받을까 봐,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일까 봐,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삭이게 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흥수 “시베리아 횡단열차, 묘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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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박 19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에서 막을 내린 여정이었다. 그는 줄곧 ‘인간이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걸음 내딛는 곳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사람들이 있었고 위대한 자연의 민낯과 만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누군가는 영문도 모른 채 황무지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던졌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그러했고, 억압받는 소수자를 위해 그러했다. 그 시간을 더듬으며 가슴이 텁텁해질 때쯤이면 그 크기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들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의 길이란 무엇인지’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은 철도 기관사 박흥수의 유라시아 대륙 횡단기다. 2015년 8월부터 2016년 3월까지 <한겨레21>에 연재됐던 ‘박흥수 기관사의 유라시아 기차 횡단기’를 엮었다. “잊혀 가는 역사적 인물들을 되살리는 것은 후대를 사는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라 말하는 저자는 독립운동가와 이주 한인들의 흔적을 되짚으며 뒤를 따라 걸었다. 희미해져 버린 그들의 삶은 우리를 오래지 않은 과거로 이끌었다가, 현재를 곱씹게 하고, 미래를 그리게 한다. 제목이 말해주듯 ‘시간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올해로 23년째 열차를 운행하고 있는 박흥수 저자는 첫 책 『철도의 눈물』을 펴내며 철도 민영화 계획을 비판하고 철도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전한 바 있다.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 연구위원이기도 한 그는 철도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해 왔다. 두 번째 저서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에서는 철도의 역사를 통해 ‘근대’를 설명하며 ‘책 덕후’, ‘철도 덕후’의 면모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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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열차, 묘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2015년에 떠나신 여행이었죠?

 

네, 그해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한겨레21>에 연재하신 기간은 상당히 길었어요.


분량이 많아서 매주 연재할 수 없었고요. 2주에 한 번씩 연재했었어요.

 

이전에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셨었나요?


3박 4일간 맛보기로 갔다 온 적이 있었고요. 이 여행을 다녀온 후에 너무 좋아서,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다녀오기도 했어요. 같이 갈 사람을 찾아서 떠난 적도 있고, 노조에서 조합원들과 떠나는데 가이드를 해줄 수 있느냐고 해서 가기도 했어요. 그런 식으로 갔다 온 게 여섯 번쯤 돼요.

 

책에 실린 여정에서는 전 구간을 여행하신 거죠?


네, 횡단열차의 전 구간을 간 건 그때 한 번이에요. 18박 19일 동안.

 

그 뒤에도 또 떠나신 이유는 뭔가요?


처음에 생각하기로는 전 구간을 여행하고 나면 ‘이제 안 가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갔다 오고 나니까 횡단열차가 주는 묘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게다가 아주 멀지 않은 시간대의 한국인들의 사연이 녹아 있으니까 계속 가고 싶은 거죠. 횡단열차를 한 번 탔다고 해서 횡단열차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열차를 운전할 때도 계절이나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다 다르거든요. 그런 부분들까지 조금 더 넓게 보려고 하다 보니까 시간을 내서 가게 되는 거죠.

 

한동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시베리아 여행 이야기만 하셨다면서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같이 다녀온 친구들도 사람들만 만나면 시베리아 이야기를 한대요. 한 친구는 저한테 전화를 해서 ‘네가 애 망쳐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술만 마시면 여행 이야기를 한다고요.

 

요즘도 그러세요?


래퍼토리가 계속 바뀌는데, 요즘은 더 이야기하죠. 남북이 조금 화해 모드가 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원래는 서울역이 국제역이었거든요. 국제선 표를 파는 창구가 있어서, 거기에서 베이징 가는 표를 사고 그랬어요. 지금도 경의선만 연결하면, 아침 일찍 서울에서 떠나서 저녁쯤 베이징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철로는 아니지만, 육로 경의선으로 북한 방문단이 온다고 해요. 서울역에서는 KTX를 타고요.


그래서 요즘에 제가 점쟁이 소리를 듣고 있어요(웃음). 1월 초에 남북 직통전화가 연결됐다는 뉴스를 보고 <프레시안>에 기고를 했었거든요. 북한 대표단이 서울역에서 평창 가는 KTX를 타는 상상을 해본다고요. 그리고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썼었는데, 일이 급진전되더니 실현이 됐어요.

 

감회가 남다르시죠?


네. <프레시안>이 저한테 북한과 내통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하더라고요(웃음). 제가 말한 대로 되고 있다고요.

 

경의선 철로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으신 것 같던데요?


개성공단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때는 임진강역이나 도라산역도 없을 때여서 선로를 놔야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완전히 중무장이라서 도로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선로가 놓인 끝 지점에 자재를 갖다 놓고 조금씩 연장시키는 중이었어요. 그때 자재를 실은 화물열차를 몰고 갔었죠. 어느 날은 임진강을 넘어가는데 ‘아, 이게 경의선이었지. 신의주랑 만주까지 갔던 노선이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장동료 두 분이 여행에 동행하셨어요.


네. 한 명은 지금 해고 생활을 하고 있어요. 철도민영화 반대 관련한 파업에 참여했다가 해고당해서... 아마 올해 복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죠.

 

해고자가 되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가장 오래된 분들은 15년 됐어요. 15년 전에 해고된 제 친구 기고나사는 가끔 기관차 운행하는 꿈을 꾼대요. 가슴이 너무 아프죠. 그리고 여행을 같이 다녀온 이만호라는 친구는 9년 정도 됐어요. 올해 복직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부풀어 있어요.

 

그동안 너무 힘드셨을 텐데, 견뎌낸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도 많이 황폐해지고, 조울이 계속 반복되는 거죠. 이 세계에서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삶인 거잖아요. 한 때는 정말 당당한 철도노동자였는데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수도 없고, 그런 삶이죠. 그래서 쌍용차라든지 다른 해고노동자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해고 노동자 치유 프로젝트’로 친구들을 시베리아에 데려갔는데, 치유가 많이 됐어요. 120% 치유된 것 같아요.

 

치유에 도움이 된 건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세계라는 창을 보면서 다시 내가 존재하는 세계를 보면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땅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다른 곳에서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는 굉장히 이상하고 문제가 되는 것들이 다른 세계의 창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다른 세계를 본다는 건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굉장히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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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

 

독립운동가, 이주 한인들의 흔적을 되짚기도 하셨어요.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계획하셨던 건가요?


네, 사전에 공부를 많이 했고요. 열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 우수리스크, 연해주 지방은 굉장히 많은 한국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이더라고요. 그 분들의 발자취나 흔적들을 찾아가 보자고 생각했어요. 그 현장에서 대해서 어떤 기분을 느낄지 궁금했고요.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중요한 흔적들은 남아있어요. 세울스카야 같은 거리의 이름도 그렇고요. 그런 의미에서, 발터 벤야민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 공간에 살았던 사람들과 저의 은밀한 약속 같은 걸 찾는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김 알렉산드라,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야기도 인상 깊었어요.


한편으로는 그 두 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어요.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면서 네 달 차이로 죽음을 맞이했고, 거의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당해서 똑같이 강물에 내던져졌죠. 이들의 삶을 보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출신의 이주자였고 여성이었고 장애인이었어요. 소수자 중의 소수자였던 거죠. 김 알렉산드라도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여성이었고 조국이 아닌 이역만리 땅에서 살았어요. 두 여성에게는 자신들이 사랑했던 인간과 그 인간들에 대한 해방의 생각들이 있었고 그래서 혁명가로 나섰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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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취들을 따라가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어요? 씁쓸할 때가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건 강제 이주 열차에 타신 분들이에요. 상상을 해보면, 10월 말의 시베리아는 되게 춥거든요, 그럴 때 널빤지로 만들어진 화물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이주 당하면서 얼마나 열패감을 느꼈겠어요. 저는 직접 기차를 운전하다 보니까, 이주 열차의 운행 과정들을 세심하게 들춰볼 수 있었는데요. 너무 힘겨운 과정이었어요. 그 험한 땅에서 새 삶을 일구는 것도 그렇고요. 또 많은 한인 혁명가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는데, 그 심정이 어땠을까 싶기도 한 거예요. 내가 반대하는 체제에 의해, 혹은 전투하다가 적에 의해서 죽는 게 아니잖아요. 자신이 숭고하게 여겼던 가치들을 수호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쳤고 아직도 그 가치는 내 삶의 전부인데, 그걸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형장에 끌려갔던 거예요. 그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죠. ‘인간은 무엇인가’를 계속 되물어보게 하는 현장들이었어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찾으셨어요?


굉장히 열악한 상황 속에서 소수자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인간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걸어갔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들 때문에 역사는 이어져왔고, 그래서 삶은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돼요.

 

마지막 여행지로 베를린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원래는 손기정이 갔던 길을 따라가 보겠다는 의미도 있었는데, 단순히 손기정으로 대별되는 건 아니고요.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전쟁의 큰 상처와 분단을 겪었잖아요. 그런데 베를린은 분단을 극복한 땅이고, 이주라든지 여러 가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고, 그러면서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은 것 같아요. 적대시하고 악마화하고 단절할수록 공포는 더 확대되고, 열고 만나고 소통할수록 오해마저도 이해로 바꿀 수 있는 길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한국사회도 더 많은 것들에 관대해졌으면 좋겠어요. 소수자들도 그렇고, 종교적 이념적 성적 배제를 뛰어넘는 걸 가르치는 게 사랑이 아닌가 싶어요.

 

열차 안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신 기간은 얼마나 되나요?


최대 오래 있었던 건 4일이고요. 짧게는 8시간, 평균적으로는 15~20시간 이상씩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긴 시간이 아니고요, 러시아에서는 그 정도가 기본적인 거예요.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 것 같은데요.


그래도 사람들이 같이 있어서 좋아요. 문제는 더위였죠. 냉방이 되는 차도 있고 안 되는 차도 있었는데요.

 

냉방이 안 되는 열차가 있었다면서요?


네. 되는 차도 있고 안 되는 차도 있었는데요. 처음에 4일 동안 탔던 차는 냉방이 안 됐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랑 더 친해졌어요. 제가 콜라를 주면서 ‘동무, 미제의 쓴 물을 마셔 보라우’ 그러면 ‘남조선 동무가 농담도 잘 하시네’ 하면서 마셨죠.

 

말씀하신 것처럼 열차에서 우연히 북한 노동자들을 만나기도 하셨어요. 서로 기념품도 교환하셨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시는 게 있나요?


로어회화책이요. 오늘 가지고 와서 직접 보여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러시아어 회화책을 교환하셨던 거죠? 그런데 북한 노동자는 남한의 책을 돌려줬더라고요.


그 친구랑 같이 연결 통로에서 마주보고 서 있었는데, 책을 돌려주겠다는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거나 기념품을 하나 건네 주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저도 기념품을 하나 더 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갔었고요. 그런데 책을 돌려주는 거예요. ‘아, 이게 아닌데...’ 싶었죠.

 

그 분의 입장이 짐작되기도 해요. 남한의 책을 가지고 있으면 본인이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요.


책 한 권 가지고 곤란해지는 일이...

 

북한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 안타까웠어요. 그리고 그 책을 주변 동료들이 너무 부러워했거든요. ‘나도 한 번 보자, 너 너무 오래 보지 마라’ 하면서.

 

남한의 회화책이 신기했나 봐요.

 


로어회화책을 보셨다면 왜 그랬는지 아셨을 거예요. 종이 질도 좋지 않고 인쇄도 조악하거든요. 그런데 제 책에는 상황에 대한 그림도 그려져 있고, 인쇄도 깨끗하고, 빳빳한 종이에, 표지는 코팅돼 있어서 물을 흘려도 안 젖을 것 같잖아요. 제가 그 입장이었어도 그런 회화책이 있으면 너무 갖고 싶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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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자들과 한 객실에 머무르신 거잖아요. 같이 사진도 찍고 잘 지내셨는데, 나중에 관리자가 와서 사진을 지워달라고 했죠?


진짜 관리자들은 4인실 고급 객실에 탔고요. 현장 관리자 중에 한 명이 감시 아닌 감시를 계속 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와서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그 뒤로 북한 노동자들의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그들도 알고 나도 아는 게 있었어요. 그들이 우리를 경계하면서도 ‘우리 본래 마음이 이게 아닙니다’라는 게 보이는 거예요. 그걸 저도 알고, 또 그 사실을 그들이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열차 안에서 침대가 바로 마주 보고 있는데 그 마음이 안 통하겠어요? 지금 우리처럼 가까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바이칼! 바이칼!


열차 내에서, 더위만큼 힘든 문제가 화장실이었던 것 같아요.


네, 특히 6인실은 방문도 없고 파티션이 9개 정도 있어요. 사실 옆 6인실도 고개만 돌리면 대화가 돼요. 그래서 12명이 같이 모여서 밥을 먹기도 하는데요. 복도 양 끝에 화장실이 있어요. 54명 정도가 두 개의 화장실을 쓰는 거예요. 특히 아침 식사 후가 제일 문제죠. 그때는 생체 리듬에 의해서 신호가 오는 시기잖아요(웃음). 또 씻어야 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화장실에서 시작된 길이 객실까지 쭉 이어지는 거죠.

 

러시아 열차가 우리나라보다 열악하지 않나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한국 전체 선로가 3,700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데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노선 하나가 9,288킬로미터거든요. 그 엄청난 선로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게 벌써 100년이 넘은 거잖아요. 그건 나름대로 노하우와 기술이 있다는 거거든요. 낙후된 면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철도가 더 뛰어나가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한국의 고속철도도 뛰어나지만, 러시아도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다니는 고속철도는 훌륭하거든요.

 

풍경이 가장 아름다웠던 구간은 어디였나요?


바이칼이죠.

 

여름에 가셨으니까, 녹음이 드리워진 호수를 보셨겠네요.


네, 훌륭하죠. 초록의 나뭇잎들이 계속 빛을 반사하고,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다 보니까 ‘저거 호수 맞아? 호수에 웬 파도가 쳐?’ 싶기도 하죠(웃음).

 

3박 4일의 짧은 일정으로도 바이칼호수를 보고 올 수 있을까요?


이르쿠츠크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인아웃을 한다면 3박 4일 코스나 4박 5일 코스로도 갈 수 있는데요. 그래도 4박 5일 정도는 갔다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더 추천을 하자면 바이칼 안에 알혼섬이라는 데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요. 거의 모든 관광객들이 알혼섬에서 후지르 마을을 가는데요. 거기는 18세기 말의 서부와 유사한 분위기가 있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걸어 나올 것 같고, 문 열고 카페를 나서면 갑자기 보안관이 나타날 것 같은 거죠. 그리고 조금만 걸어가면 바이칼의 부르한 바위와 토테미즘도 볼 수 있어요. 봉고차를 타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북부투어’도 멋지고요. 저녁에 보드카 한 잔 마시고 여름의 바이칼에 쏟아지는 별을 보면 너무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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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을 이야기하셨어요. 시베리아 여행이 곧 시간 여행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데요.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중소 도시든 대도시든 규격화된 삶이 있잖아요.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를 타고, 저녁에 술을 한 잔 하고, 아니면 토익 학원에 가고, 여러 가지 정해진 삶이 있는데요. 시베리아라는 공간에 가면 굉장히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한국의 1970~80년대처럼 차장이 버스 안에서 돈을 받고 표를 끊어줘요. 그리고 한국에도 1960년대까지 트램이 있었다고 하는데, 시베리아에는 아직도 트램이 다녀요. 그렇게 예전의 한국과 같은 모습도 볼 수 있고,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00년 전의 건물도 그대로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더 노력하면 그 안에 있는 사연들을 캐낼 수도 있죠. 베를린까지 가다 보면 첨단화된 곳도 있어요. 또 바이칼 같은 대자연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도 경험할 수 있고요. 대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겸허해지거나 왜소해지잖아요. 이렇게 아웅다웅 살 필요가 있나 싶고. 물론 돌아오면 또 아웅다웅하게 되지만요(웃음). 시베리아는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볼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해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값이 싸요(웃음).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이죠(웃음).


이 여행에서는 제가 미리 다 예약을 하고 갔는데요. 같이 간 친구들도 놀랐어요. 거의 20일 동안 여행하면서 1인당 270만 원을 썼거든요. 그렇게 많이 아끼지도 않았어요. 술도 많이 마시고 밥도 맛있는 거 사 먹었는데 항공권이랑 열차, 호텔 이용 비용 다 합쳐서 그 정도 금액이었어요.

 

왕복 비행기 값이 포함된 금액이에요?


네, 들으면 사람들이 놀라죠(웃음). 여행사에 맡기면 금액은 더 높아져요.

 

유럽 여행은 교통비가 많이 들잖아요. 그런데 러시아는 교통비가 싸고, 또 열차가 안전하다면서요?


그렇죠. 저는 유럽의 열차만큼 좀도둑 스트레스가 큰 데가 없는 것 같아요. 러시아는 안전해요. 타보시면 왜 안전한지 알게 되실 거예요. 또 다른 승객들과 알게 되면 훨씬 더 안전하거든요. 거의 20시간씩 같은 열차를 타고 가는데, 처음엔 서로 모른다고 해도 초콜릿이라도 하나 나눠먹게 되고 눈인사라도 하게 돼요. 그러면 훨씬 더 안전해지는 거죠. 저는 카메라도 자리에 놓고 다녔어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어떤 사람들에게 가장 권해주고 싶으세요?


어떤 분들이라도 가셨으면 좋겠는데요. 여러 가지 이유로 상처 받은 영혼들이 열차에 몸을 싣고서 그곳을 치유의 공간으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낯선 사람이 되어 보면 세상을 한 번 낯설게 볼 수 있고, 낯선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 기회도 가질 수 있잖아요. 저는 사람이 끊임없이 낯선 사람, 이방인이 되어 보는 경험이 좋다고 생각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을 때의 고독과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으면 내가 주류인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 이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더 우호적이거나 친절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책에서 추천 명소도 소개하셨어요. ‘이곳만은 절대 놓치면 안 된다’ 하는 장소가 있나요? 세 곳만 꼽으신다면요?


세울스카야 같은 곳이 그렇죠. 지난 해 언론보도를 보니까, 재건축을 하는지 개보수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다 헐고 있더라고요. 그 거리는 비싼 주택 단지도 아니고 버려진 창고 거리예요. 그곳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지만 그 거리에 집 한 채가 간판을 걸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특히 러시아나 상해 임시정부 같은 곳의 유적들은 우리가 조금 더 찾아보고 보존을 했으면 좋겠어요. 또 세울스카야 거리가 한적하고 좋아요. 그리고 바이칼을 빼놓을 수 없죠. 마지막으로 한 곳을 더 이야기하면, 모스크바일 것 같아요. 지하철도 역 하나하나가 다 깊으면서도 웅장하고요. 유명한 관광 명소가 다 있지만, 이즈마일로보 시장 같은 곳도 한 번 구경을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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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시간여행박흥수 저 | 후마니타스
인문서로나 여행서로나 손색없는 전방위한 이 책을 들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다보는 여정을 시작해 보길 바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금주 “어느 한 사람도 배제하지 않는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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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사전적 정의는 ‘온갖 종류의 도서, 문서, 기록, 출판물 따위의 자료를 모아 두고 일반이 볼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도서관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는, 조용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조금주 저자가 방문한 도서관은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시끄럽게 뛰어노는 공간, 커다란 모니터로 게임을 하는 공간이 있는가 하면 로봇을 세워놓고 직접 컴퓨터를 조립하거나 분해하는 공간도 있었다. 자료 기록과 보존에 충실한 도서관, 마을을 살린 도서관과 사람이 찾지 않아 잊힌 도서관까지. 이 책은 ‘지난 수년간 찾아다녔던 도서관들에 바치는 일종의 연서’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곳이다. 시간에 따라 낙후된 도서관, 이용자의 성장과 교육을 지원하며 자료를 갈무리하는 전통적인 도서관은 미래 세대와 달라진 환경에 맞춰 변해가는 지식정보 사회에 대응하는 첫 번째 보루로도 기능한다.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 에 소개된 유럽, 미국, 영국, 일본, 바티칸과 태국, 싱가포르 등 전 세계의 도서관 모습을 보면 자연히 우리나라의 도서관의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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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도서관이 할 일


세계 도서관을 방문한 기록이 실렸습니다. 도서관을 여행한 계기가 있나요?

 

미국에서 일할 무렵 샌프란시스코로 휴가를 가면서 중앙도서관에 갔었어요. 건물이나 인테리어가 멋있는 것도 있겠지만, 저는 거대한 책 분류 기계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한국 도서관에서 일할 때는 휴관한 다음 반납한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어요. 그다음 날 이용자가 들어오기 전에 사서가 모두 정리해 놔야 해요. 그런데 이 기계가 있으면 책의 태그를 읽어서 자동으로 분류가 되는 거예요. 그럼 사서가 이동 서가만 가지고 가서 꽂으면 되죠. 그 기계를 보고 너무 신나서 우리도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게 다른 도서관도 봐야겠다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지역하고 밀접한 연관을 맺는 도서관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도서관을 소개해주셨어요. 덴마크의 도켄(Dokk1) 도서관에서는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으면 도서관 전체에 종소리가 퍼지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한다고요.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 에는 지역과 도서관이 어떻게 상생하는지 상대적으로 적은 사례가 들어있는 편이에요. 첫 번째 책인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 도서관』에서 주로 다뤘어요. 2012년 뉴저지에서 카트리나가 덮쳤을 때 사람들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다 도서관에 모였어요. 빵과 커피, 전기를 제공하면서 지역 사회 사람들을 돌보는 역할을 한 거죠. 미주리 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한 명밖에 없는 도서관 사서가 스스로 결정해서 차별 없는 피난처로 문을 열었어요. 도서관이 지역 주민의 위로의 장소가 된 거죠.


도서관이 지역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말씀도 해주셨는데요.


샌프란시스코 도서관이 수기 시스템에서 전자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책 뒤에 붙였던 도서목록 카드가 필요 없어졌어요. 다 버리려고 하다가 어떤 시민이 그 카드 자체가 역사이자 문화이기 때문에 버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 거죠. 그래서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벽면 전체에 벽지처럼 도서목록카드를 붙였어요. 사서들이 100년에 걸쳐 쓴 기록이 전시되고 보존되는 거죠. 특별실에는 샌프란시스코 출신 그림책 작가의 원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요. 이런 것들이 바로 공공도서관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건물, 인력, 장서가 해결되어야 미래 사회로


도서관 중에는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만드는 창작 공간인 ‘메이커 스페이스’가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도서관을 자료 보존의 장소로만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창작의 장소로 사용하는 게 인상 깊었어요.


도서관이 정보를 보존하는 곳이 아니라 정보를 생산하는 곳이라는 거죠. 물품을 생산해서 창업의 공간이 될 수도 있고요. 미국의 채터누가 도서관은 한 층을 전체로 메이커 스페이스로 쓰고 있었어요. 웨스트포트 도서관에서는 로봇을 두 대 가져다 놓고 12살 아이가 컴퓨터를 분해해서 조립하고 있고요. 도서관에 로봇을 둔 이유를 물으니 담당자가 아이들에게 코딩을 가르쳐주려고 한다고 답했어요. 당시 저는 코딩이라는 단어조차 몰랐을 때였는데 도서관에서 아이들한테 가르친다는 거죠. 공공도서관에서 이게 가능하다는 걸 보고 너무 놀라웠어요. 하지만 한국에 이런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려가 들기도 했어요.


우려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채터누가 도서관 등 성공사례의 기반에는 탄탄한 기초가 있어요. 건물 공간 자체가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해요. 우리나라 도서관에는 ‘메이커 스페이스’를 만들 만한 공간이 없어요. 책만 놓기에도 부족합니다. 물품을 만드는 기계를 살 만한 예산도 없지만, 그 기기를 관리하고 보수하고 유지할 인력이나 예산이 없어요. 우리나라에서도 ‘무한상상실’이라고 도입했지만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고 끝이에요. 외국에서 성공했다 하면 다 도입하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도서관은 대부분 이런 환경을 도입하면 안 되는 상황이에요. 정말 가슴 뛰고 이상적인 서비스지만 현실은 정말 어렵다는 이야기죠.


‘건물, 인력, 장서’를 도서관의 3대 요소로 꼽으셨어요.


그게 바탕이 되어야 창의적인 공간, 가족 놀이터, 공공시설로서의 도서관이 가능해져요.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4차 산업혁명이니, 창의적인 공간이니 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어요. ‘메이커 스페이스’는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거기까지 가기가 힘들죠.


제대로 운영되지 않은 도서관도 소개해 주셨어요. 방콕의 재래시장에서 시도한 올드마켓 도서관 프로젝트라든지요.

 

작은도서관을 생각하면서 쓴 부분인데요, 도서관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것은 조국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동네 작은도서관”이라는 빌 게이츠의 말이에요. 우리는 작은도서관이라고 하면 건물 규모가 작고 장서수도 작은 도서관을 생각하죠. 미국에서 작은도서관은 봉사인구 수 기준으로 2만5천 명 이하일 때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는데, 장서 수나 건물의 시설 규모를 생각했을 때 우리나라의 작은도서관하고는 아주 달라요.


우리나라의 작은도서관의 문제점은 뭔가요?


해마다 작은도서관은 많이 생기는데, 정부나 지자체의 지속적인 지원이 수반되지 않기 때문에 3년에서 5년 안에 문 닫는 곳이 너무 많아요. 경기도에서만 최근 3년간 230개소가 폐관했죠. 장서가 1만 권이 채 안 되고, 인력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너무 힘들어요. 작은도서관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공도서관의 규모가 너무 달라요. 비교하자면 우리나라의 도서관은 구멍가게고 다른 나라의 공공도서관은 쇼핑몰인 거죠. 작년에 찾아간 일본의 이와키 도서관은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닌데 장서가 55만 권이었어요. 게다가 10년 전에 지어진 도서관인데도 자동창고시스템(Automated Storage and Retrieval Ststem)을 갖추고 있었어요. 이용자가 자료를 검색해서 신청하면 로봇이 꺼내서 갖다 주는 데 3분 걸려요. 큰 투자비용 대신 인건비를 절약한 거죠. 한국의 어느 공공도서관도 그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어요. 어떻게 보면 매번 한국의 도서관 현장에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손으로 도서를 정리하고 배가하면서 인력이 없다고 힘들어하는데, 그런 인력 비용은 생각하지 못하고 초기 투자를 무서워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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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회원 카드는 ‘매직 카드’


책에서 도서관이 지역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우리나라 도서관을 보는 인식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나라의 도서관을 다니면서 어떻게 이렇게 도서관이 살아나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어요. 지역 사람들의 도서관에 대한 자부심도 굉장하고요. 보니까 학원이나 사교육 기관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공공도서관에서 모든 지원이 가능해요. 그게 다르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 이용방법을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어떻게 자료를 활용하는지 훈련을 시키는 거죠. 도서관에서는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고, 아이들이 도서관 이용이 몸에 익숙해지면서 모든 걸 도서관에서 해결할 수 있어요. 한국의 아이들은 문제집을 풀고 외우기 위해서 도서관에 와요. 다른 나라의 성공한 도서관에서는 자료를 찾아서 분석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간다는 게 차이점이죠. 한국 도서관에는 흔히 좌석예약 키오스크가 있는데, 미국의 공공도서관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오는데 좌석을 예약하는 기기가 없어요. 좌석 예약 시스템이 왜 한국에서만 중요할까요? 도서관이 개인 학습 공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용자가 열람실을 요구하기 때문에 한국의 도서관이 열람실 위주로 돌아가기도 할 것 같아요. 이용자의 관점에서는 도서관이 ‘공부하는 곳’이니까요.


아시아의 공통적인 특성인 것 같아요. 일본이나 중국의 도서관에서도 같은 고민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료실 외에는 ‘사회인 전용석’이라고 붙여놓기도 하고요.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블룸의 분류법으로 인간의 학습 수준을 6개의 단계로 나누거든요. 기억, 이해, 응용, 분석, 평가, 창의의 순서로 학습 수준을 매겼는데, 현재 우리 도서관에서 하는 공부는 기억하고 이해하는 수준이에요. 조금 높게는 응용과 분석까지 가능한데, 이것에서 더 나아가려면 평가와 창의까지 가야 해요. 우리나라 도서관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 어린이실에서 부모님이 수학 문제 풀어주고 영어 암기시키는 모습이거든요. 그렇게 아이들이 커서 지금 열람실에서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는 거죠.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아이들에게 도서관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놀면서 접근하는 도서관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도서관마다 영화 프로그램, 영어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지만, 사교육과 크게 다를 게 없어요.


공공학원처럼 운영하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아이들이 정말 신이 나서 도서관에 오는 게 아니라, 학원에 가는 것처럼 도서관에 온다는 거죠. 책에 소개한 트윈 세대를 위한 도서관은 문을 열기 전부터 아이들이 줄 서서 기다려요. 문이 열리면 막 뛰어들어가요. 너무 오고 싶어했던 거죠. 평일 오전에도 아이들이 앉아있고요. 미국의 한 도서관에서는 80인치 스크린이 두 대 있는데 거기 와서 게임을 하는 거예요. 아이들만의 환경, 그 나잇대만의 전용 공간을 만들어주고 하고 싶은 걸 뭐든 마음대로 하게 만들어줘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 아이도 학원 아니면 PC방에 다녔어요. 그럴 거면 PC방보다는 도서관이 안전하다는 거죠. 게임하고 만화책을 보더라도 소프트웨어를 지원하고 인도할 사람이 있으면 돼요. 랩퍼 초청해서 강연도 하고요. 우리 환경에서는 허용되지 못하지만 가능하게 해줬으면 하는 거죠.


도서관이 할 일을 서점이나 사교육이 담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도서관 회원 카드는 ‘매직 카드’가 되어야 해요. 도서관 회원카드로 책을 대출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온갖 걸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프린스턴 공공도서관에서는 거주인구는 3만 명에 불과한데 80종의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해요. 음악 CD, 영화 DVD 대출도 가능하고요. 시골 마을에 살아도 도서관에 가면 온갖 외국어를 배울 수 있어요. ‘메이커 스페이스’도 고가의 기구를 도서관에서 무료로 제공하잖아요.


도서관이 정보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거네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도서관 회원 카드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가는 게 아니라 제대로 기능하는 도서관 하나를 주는 일이에요.


‘어느 한 사람도 배제되지 않는 곳이 도서관이어야 한다’는 말이 감명 깊었어요.


그게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인종, 종교, 교육에 상관 없이 어린이거나 어르신이거나 상관없이 누구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일본의 기타큐슈 도서관에서 머리가 하얀 노인이 자료를 쌓아놓고 연구를 하는데 너무 부럽더라고요. 그 연세까지 연구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공공도서관이 지원할 수 있다는 모든 부분이 부러웠어요. 공공도서관이 정말 좋은 점은, 모든 이에게 동등한 기회가 제공된다는 점이에요. 학원을 가지 않고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공공도서관의 자료만으로도 교육과 성장이 가능해요. 공공도서관의 기본이 튼튼하고 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야지만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어요.


마지막에 소개한 도서관은 독일에 있는 땅속 ‘매장 도서관’이었어요. 도서관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될지 보여주는 사례 같았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하는데, 유럽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는 노력은 어느 나라나 다 계속해 왔어요. 하지만 아이들을 설득해서 오라고 할 게 아니라 도서관이 변해야 한다는 게 좋았어요. 미래를 위해서는 아이들과 사람들이 조금은 도서관을 사랑해줬으면 좋겠어요. 도서관이 오고 싶고 들어가고 싶은 모습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은 아직 도서관에 그런 설렘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방문했던 마을 도서관에 지역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투자가 많이 일어나고 바뀌어서 ‘오고 싶어 하는 도서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정부의 투자를 바란다는 말씀인가요?


공공도서관에 대한 투자는 국가 미래에 대한 투자예요. 미국에서는 주민의 세금으로 도서관이 운영되고, 주민이 도서관에 얼마나 세금을 쓸지 결정해요. 그래서 잘사는 동네에서는 도서관이 정말 잘 돼요. 기부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거든요. 도서관 이용률을 높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는 비법은 결국 매력적인 건물과 인테리어만이 아니라 소장 자료를 충분히 사고 도서관을 운영하는 인적 자원을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도서관 투자를 제대로 하는 거예요.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도서관들조금주 저 | 나무연필
도서관은 그 지역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이며,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린 공간이기에 그것 자체가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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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김숨, 나와 인연이 닿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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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공간을 확보해 읽고 싶은 소설이 있다. 김숨의 『너는 너로 살고 있니』가 그랬다. 공간에 따라 독서의 리듬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어떠한 소설은 내가 있는 공간의 공기까지도 바꿔버린다. 김숨은 오래전 출판사와 산문집을 쓰기로 약속했다. 장편과 단편을 꾸준히 쓰고 있었지만 어쩐지 산문은 쉬이 써지지 않았다. 약속한 날짜를 넘기고 넘기다 문득 ‘편지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서둘러 편집자에게 편지를 썼다. “서간체 소설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요?” 편집자로 일했던 경험이 있는 김숨은 출판사와 조화를 이루며 책을 만들고 싶었다. 김숨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나와 찰나로라도 눈빛을 나누었던 모든 존재에게, 자복하는 마음으로.” 어쩐지 그의 책을 들자마자 나는 자별한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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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간의 작품과 조금 다른 결이에요. 편지 소설이기 때문일까요?

 

사실 이 소설은 예상에 없던 작품이에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편지를 쓰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에겐 글쓰기가 소설로만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편지도 그렇고 일기도 그렇고 욕구만 갖고 있던 와중에, 작년 늦봄부터 간절히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요. 굉장히 자연스럽게 쓰인 소설이라 어쩌면 자연 발생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림과 함께 보는 소설이니 ‘그림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출판사에서 임수진 작가님의 목판화를 보여주셨어요. 색감도 좋고 느낌이 좋았어요. 저는 사실 어떤 이미지가 들어가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아요. 소설이기 때문에 이미지를 최소화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이 책은 편집자를 믿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맡기게 되었어요.

 

만들어진 책을 봤을 때 어땠나요?


낯설면서도 좋았어요. 내 책이지만 어쩐지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어요. 마음산책에서 내는 책들에 대한 신뢰가 있는데요. 아마 다른 작가들도 그럴 거예요. 마음산책만의 어떤 독특한 편집 방식이 있다고 느꼈어요.

 

소설을 읽다 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요. 굉장히 강렬한, 어떤 특별한 감정이 들었어요.


아… 실은 저도 소설을 쓰고 나서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 같아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완전한 타인에게라도 편지를 쓰고 싶은 충동을느낄 때가 있어요, 저도.

 

소설의 주인공은 무대에서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본 적 없는 무명 배우입니다. 주인공은 11년째 식물인간 상태인 생면부지의 한 여자를 간호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난생처음 경주로 내려와요.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털어놓죠. 일기 같기도 하고요.


예전에 단편을 하나 썼는데 소설 속 화자가 간병인이었어요. 간병을 하는 사람이 식물인간이었고요. 잠시 잊고 있던 소설인데 저를 찾아온 것 같아요. 경주는 『바느질하는 여자』 를 쓸 때 바느질을 배우러 다니면서 인연이 닿았던 곳이에요. 그때 눈에 들어왔던 배경들이 이번 소설의 배경이 됐어요.

 

주인공의 직업을 ‘배우’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대개 소설을 쓸 때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아요.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소설이라는 게 흘러가면서 만들어지는 부분이 큰데요. 『너는 너로 살고 있니』 는 이런 부분이 더 크지 않았나 싶어요. 무대라는 곳이 저에겐 생소한 공간인데요. 어쩌면 무대 위에서 그녀와 주인공이 펼쳐 보이는 한 편의 연극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2인극 같은 느낌도 있고요.

 

악역이 없는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인물들이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느낌이었어요.


인물들의 성격 역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악한 사람은 없는 것 같기도 해요.


배우 생활을 했던 주인공은 타인의 말을 자주 곱씹습니다. “한선희 씨는 자신이 배우라고 생각해요?”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습니다”(226쪽)라고 회고하죠. 사람의 말이라는 건 유통 기한이 없는 것 같아요. 평생 잊히지 않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렇죠. 제가 덜 예민해서 스스로 놀랄 때가 있어요. 후회하거나 반성할 때가 있죠. 소설을 쓰니까 말에 예민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려워요.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간병을 한다면 아픈 사람에게는 참 힘든 일이겠구나 싶어요. 주인공은“숨소리의 변화로, 그에 따라 달라지는 동공의 변화”(78쪽)로 상대의 안색을 짐작하잖아요. 어쩌면 환자에게는 의사보다 더 귀한 사람일지 몰라요.

 

그래서 그녀와 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그녀라면 주인공 같은 간병인이 저를 돌봐주면 좋을 것 같아요. 안심이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지 못하지만 주인공의 마음은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교감하고 있으니까요.

 

단독하게 서 있는 느낌을 주는 문장을 많이 만났어요. 그래서 좋았고요.


아무래도 편지이자 일기를 쓰는 듯한 느낌을 갖고 썼기 때문일 거예요. 쓰면서도 치유와 위안을 주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간절함이 스미면서 시간, 나이 듦, 여자와 여자, 행복 같은 것들에 관심이 생겼어요. 소설을 쓰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요. 덕분에 시간에 관해 생각하게 됐어요.

 

96쪽에 나오는 문장이네요. “내 안에 고여드는 감정이 혹시 행복이라는 감정이 아닐까요. 행복은 ‘탁월한 행위’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지요. 그러니까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비슷한 생각을 저도 종종해요. 우연히 주어지는 것도 있겠지만요.

 

주인공은 말했어요. “나는 타인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158쪽)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아요. 알면 내가 어떤 책임감을 느껴야 하니까요. 작가님은 어떠신가요?


누군가의 비밀은 알고 싶지 않고, 알자마자 망각하고 싶지만 누군가의 비밀은 제게 영감을 주죠. ‘비밀’보다는 ‘누구’인가가 제게는 중요한 것 같아요. 5년 전 친구가 어떤 비밀 하나를 제게 들려주었는데, 그날 이후 그 비밀에 대해 그 친구도 나도 입에 올린 적이 없어요. 아, 개들에게도 저마다의 비밀이 있어요. 개들의 어떤 비밀은 오래 지켜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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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확장된 느낌

 

몇 달 전 출간된나는 염소가 처음이야』는 동물을 테마로 한 여섯 작품을 모은 단편집인데요. 『투견』 , 『노란 개를 버리러』등 동물을 소재로 한 소설을 많이 쓰셨습니다.


동물을 좋아해요. 요즘은 새를 너무 기르고 싶어요. 길을 가다 비둘기를 만나면 반갑고 좋아요. 문득 개나 새, 고양이를 위한 기도가 저절로 나올 때가 있어요. 동물은 저에게 특별한 영감을 줘요. 제가 글자를 배우기도 전에 영감을 준 게 있다면 아마 동물일 거예요.

 

반려견이 있나요?


두 마리가 있어요. 개를 키우면서 다른 동물들도 좋아하게 되었어요. 개들이 제게 준 것이 많아요. 개마다 기질이 다른 것도 알게 됐고요. 개들한테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한결같은 것이 있어요.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나무처럼요.

 

기질이 많이 다른가요?


같으면서도 또 굉장히 달라요. 그래서 저도 똑같이 대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관계를 맺을 때, 타인의 기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개의 기질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질을 알면 행동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새들도 그렇겠죠? 스무 마리의 참새가 있다면 저마다의 특별하고 독특한 기질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이번 소설을 펴내고 독자들과 한 차례 만났다고 들었어요.


낭독 위주로 진행한 행사였는데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분이 오셨어요. 너무 반갑고 좋았어요.


3~4년 정도 뵙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 제 소설을 낭독해주셨어요. 그림을 그려주신 임수진 작가님도 만나게 되어 반가웠고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는 어떤가요? 좀 어려운 자리일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출간된 뒤에야 못다 한 이야기들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편집이 끝나고 이미 인쇄에 들어갔는데, 계속 소설을 쓰고 있는 거예요.『L의 운동화』가 특히 그랬어요. 출간된 뒤에야 떠오르는, 못다 한 이야기들 때문에 애가 탈 때가 있어요. 이미 부친 소포 속에 못 넣은 물건이, 그런데 아주 중요한 물건이 있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랄까요.

 

영화 <1987>을 보셨나요?

 

보았어요. 『L의 운동화』 를 써서 그런지, 고 이한열 열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됐어요. 이한열 열사는 시대에 대한 성찰도 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하신 분이잖아요. 아주 귀한 분이죠. 영화가 만들어져 반가웠어요. 독자분들도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17년에 소설을 세 권 내셨는데, 출간 시기는 작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니 좀 버거우셨을 것 같아요.


아마도 약간은요. 『당신의 신』 은 결혼과 이혼을 주제로 한 소설을 묶은 소설집이에요. 작년 새해에 쓴 작품인데 어쩐지 이혼에 대해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이혼」을 쓰고 났더니 「새의 장례식」은 자연히 쓰게 되었고요. 두 권의 단편집은 편집자분이 애써주신 덕분에 같이 나올 수 있었어요.

 

편집자를 각별히 신뢰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것 같아요. 제 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분들이니까요. 『당신의 신』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를 만들어주신 편집자의 경우, 저와는 다른 어떤 문학적 감각을 갖고 계셨어요. 처음에는 저랑 겉도는 느낌이 들어 낯설었는데 교정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분의 낯설고 독특한 감각이 저에게 어떤 영감을 줬어요. 흥미로웠죠. 『너는 너로 살고 있니』 같은 경우는 편집자와 오랜 인연이 있어요. 아주 귀한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귀하게 가져가고 싶은 인연인데요. 편집자와 작가로 책을 통해 만난 거잖아요. 인연이 확장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한 단계 뭔가 더 상승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등단하기 전에 편집자로 일했을 땐 어땠나요?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편집자 시절에 만난 선생님들이 보여준 어떤 태도들이 저에게 교훈이 된 것 같아요. 겸손하고 너그러운 마음, 편집자의 실수를 품어주신 마음이 있었는데요. 그분들이 쓰시는 글들도 그랬던 것 같아요.

 

일찍 등단한 편이에요. 20대 초반에 하셨으니까요. 소설을 쓰고 발표한 지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요. 소설을 쓰는 삶은 어떤가요? 어렵지만 동시에 큰 만족감을 주는 일일 텐데요.


소설을 쓰면서 살 수 있어서 감사해요. 소설을 쓰는 동안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감당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로 압축되는 대신, 그 압축된 것들이 크게 다가와요. 감당해야 하는 것들 중 가장 큰 것은 고독인데, 제가 그걸 원하는 것도 같고….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일상에서 절대적인 나만의 시간이 보장되어야만 살 것 같아요.

 

소설만 내셨어요. 산문은 거의 안 쓰시는 것 같아요.


소설도 그렇지만, 산문은 함부로 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더 조심스러운 글이기 때문에 피하려는 면이 있어요. 우선 소설을 쓰는 데 기울이는 시간, 에너지가 많은 데다 지치는 것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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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동안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읽은 책은 『정신분석과 기독교 신앙』 이에요. 프랑스 정신 분석가 ‘프랑스와즈 돌토’가 쓴 책인데요. 이분이 아동 정신 분석의 대가라고 해요. 신앙, 욕망,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인데 흥미로워요. 거의 다 읽어가는데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어려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작가님이 수다스러워지는 순간이 있을지.


친구들과 쓰고 있는 시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읽고 있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제 친구들 중 수다스럽다고 하기보다는 말을 아주 잘하는 친구가 몇 있어요. 변호사를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이나요. 그 친구들을 만나, 그 친구들이 지치지 않고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 자신이 수다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어요(웃음).

 

만약 지금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쓰고 싶나요?


송재학 선생님께 쓰고 싶네요. 지난 12월에 경주에서 뵐 일이 있었는데 ‘풍경의 비밀’ 하나를 저와 제 친구들에게 알려주셨어요. 경주의 잘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장소를 소개해주셨고, 이튿날 저와 친구들은 그곳을 산책했어요. 그곳의 빛, 그림자, 공기, 바람 소리가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리운 장소가 되었는데, 그리운 장소를 갖게 해주신 송재학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못 드렸어요.

 

소설을 읽고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제목을 자꾸만 곱씹어보게 된다는 거였어요.


일찍부터 지어놓은 제목이긴 했어요.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를 아는 건 너무 중요하잖아요. 나를 잘 모르면 타인의 존재도 알기 어려운 것 같아요. 나를 알기 위해 노력하면서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지고, 알게 된 것 같아요.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을까요? 계속 알아가는 중이겠죠. 다만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나를 좀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바라보는 자세인 것 같아요. 거리를 두고 어떤 틈을 만들어 나를 바라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 저는 다른 소설을 쓰고 있지만, 계속 이 소설이 생각나요. 그러면서 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고요.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제가 쓰고 싶은 소설, 제가 쓸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사람 사이에만 인연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쓴 소설들은 저와 인연이 닿아서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와 인연이 닿는 소설들을 쓰고 싶어요. 허망하게 흘려버리지 않고요.

 

편지 소설은 어떤가요? 또 쓰고 싶은가요?


원고를 넘기고 편집하고 있을 때였어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머릿속에서 이미 편지를 쓰고 있더라고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쓰고 싶어요. 쓰고 싶은 욕구가 차오르다 넘치면 쓰게 되겠죠.

 

소설가 김숨은 소설가 김숨으로 살고 있나요?


소설 쓰는 사람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너는 너로 살고 있니김숨 저/임수진 그림 | 마음산책
살아 있어도 죽은 듯 삶을 영위했던 ‘나’와 죽어 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그녀’가 교감하는 이야기들, 병원을 둘러싼 그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들이 작가 특유의 문체로 촘촘히 수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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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 저자를 만나다] 즐거운 소비, 가능한가요? – 박미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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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많으면 내가 가진 불안이 해결될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식 투자를 하고 가상 화폐를 사나 보다. 그러나 돈이 많아도 적어도 우리는 늘 돈 걱정을 한다. ‘욜로’, ‘탕진잼’을 외쳐도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아끼면서 살아도 과연 노후까지 충분할지 불안하다. 이런 이들에게 경제협동조합 푸른살림 박미정 대표는 ‘적정한 돈 쓰기’, ‘행복한 돈 쓰기’를 주제로 여러 이야기를 해왔다. 전작 『적정 소비 생활』을 이은 『적정 소비 노트』는 가계부를 써보려 해도 작심삼일, 소비 내역을 보면 마음만 아픈 사람을 위한 특별 처방이다. 다이어리 형태의 가계부이지만, 다이어리라고 해서 1월부터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새해 계획에 실패했다면 굴하지 말고 다시 2월부터 시작해보자.

 

『적정 소비 생활』 을 아시는 분이라면 쉽게 다가갈 책이지만, 처음 보시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소비 습관을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올해 처음부터 시도해보시라는 뜻으로 다이어리 형식으로 책을 냈어요. 3년 정도 준비하면서 여러모로 수정했는데, 앞으로 일 년에 한 번씩 나이대와 결혼 여부에 따라서 내용을 나눠 출판할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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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 소비 노트』 에서는 현재 가진 돈과 빌린 돈을 정리해 경제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소비 예산을 만들고 예산안을 토대로 한 달의 씀씀이를 살펴본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망해 라이프 플래닝까지 거치면, 기존의 금융 상품 중심의 저축 계획에서 삶 중심의 저축 계획을 생각하게 된다.


“송송책방의 김송은 씨가 전작 『적정 소비 생활』의 편집자였어요. 제 책이나 적정 소비와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편집자죠. 누가 먼저 제안했다고 할 것 없이 매년 같이 내기로 했어요. 편집자는 고정적으로 필자를 확보하고, 푸른살림에서도 매년 편하게 작업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죠.”


기획부터 집필, 디자인, 배급 등 여러 분야를 한꺼번에 한 명이 맡는 독립 출판과 다르게, 『적정 소비 노트』 는 전작에서 만난 인연을 바탕으로 저자와 편집자가 서로 협업해 만들어졌다. 저자는 내용에 조금 더 집중하고, 편집자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만들고 싶었다.


“대량으로 인쇄해서 재고 때문에 고민하고 싶지 않았어요. 독자들도 후원으로 시작하면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돈 관리 상담을 받으면 자발성이 떨어지거든요. 저만 해도 그럴 것 같아요. 간섭당하는 느낌이 들고, 자기 관리 못해서 야단맞는 느낌도 들 거고요. 그런 기분을 조금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적정 소비 노트』 는 텀블벅에서 후원을 받아 자금을 마련했다. 후원 금액에 따라 『적정 소비 노트』 와 함께 저자 직강, 책갈피, 일대일 상담 등을 받을 수 있다.


“왜 돈을 쓰는데도 불행한지 생각해보면 심리 문제가 나오더라고요. 『피로사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에게 너무 혹독한 사회 같아요. 과소비하지 말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라고 말이 많지만, 그렇게까지 과소비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살면서 예쁜 구두 한 번쯤 살 수도 있죠. 그런데 남과 미래를 위해 먼저 쓰고 그다음 자기를 위해 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있어서 스스로 불편해해요. 남이 소비하는 걸 보면 생각이 없다고 비판하고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니 남을 욕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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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를 쓰다 보면 자신의 삶이 생각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계부에 나타난 부모님 용돈은 생각과는 다르다. 옷을 너무 많이 샀다고 느끼면 죄책감에 의류비 대신 생활비로 넣는다. 가계부를 쓰면서도 ‘분식 회계’를 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사람마다 상황은 전부 다르니까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보게 될까 고민하다가 가계부 양식을 생각했어요. 지출 내역만 쓰면 돈이 없어졌다는 인식만 있어서 죄책감만 들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얼마만큼 써도 된다는 한도를 정해주는 게 중요해요. 아무리 아껴 써도 생활비로 이 정도는 써야 한다는 기준이 있어야 아끼거나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이 줄어들거든요. 30만 원이 한도라면 10만 원을 3번 써도 되고 1만 원을 30번 써도 된다는 거죠. 특히 청년들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박미정 대표에게 소비 만족도는 액수의 문제가 아니다. 액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오히려 잘못 썼을 때 오는 불행이 훨씬 크다. 『적정 소비 노트』 를 쓰는 이유는 단순히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산 안에서 자신이 어떤 곳에 돈을 쓸 때 행복한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용을 쓰면서 수입과 지출 간 균형 맞추기에 집중하시는데, 그 안에서 소비의 질과 자신의 성향, 내가 뭘 할 때 좋아하고 뭘 할 때 아까워하는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에 대한 경제적 관찰 일기를 쓰는 거죠. 잘했다 못했다 하지 말고 일단 있는 그대로 보면서 경제적인 성향을 발견하는 거예요. 누구도 나한테 어떻게 하면 행복하다고 조언할 수 없어요. 푸른살림에서도 재무 상담을 진행하지만, 상담만으로는 재무 상태를 통제하기 어려워요. 『적정 소비 노트』 를 시작으로 적정 소비를 실천해보시면 좋겠어요.


소비를 무서워만 하면 돈과 잘 지낼 수 없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지 않는 경제 생활을 하다 보면 ‘소비는 즐거운 행위’라는 마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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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특집] 유현준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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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건축이란 사람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교수님이 경험했던 도시에서 이 기능에 가장 부합한 건축물을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저한테 많은 가르침을 준 거리가 보스턴의 뉴베리스트리트예요. 간척사업으로 만든 땅이라 건물을 반 층쯤 들어서 지었어요. 계단을 한 8개쯤 올라가서 1층을 만들었는데 우리로 치면 반지하가 있는 거죠. 그 거리가 주택으로 있다가 상업가로 변형이 되면서 재미난 시도를 한 것이 반지하 아래 선큰을 파서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들었어요. 선큰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 1층 서점에서 책을 읽는 사람, 거리를 걷는 사람 다양한 시점이 공존하고 또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 참 좋아요.

 

도시인들은 매일 일상의 건축물인 집과 사무실이 있는 일터, 공공의 건축물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각각의 공간이 꼭 갖추었으면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사적인 외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게 불가능 하다면 아파트의 테라스나 발코니 같은 곳이라도요. 우리나라는 발코니 확장법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 때문에 발코니를 다 실내 공간으로 만들었잖아요. 일터도 비슷해요. 역시 외부 공간이 부족해요. 일 하다가 바깥 공기를 쐬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옥상 밖에 없잖아요.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자연을 만나는 곳이 거의 없어요. 그런 공간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공공의 공간은 어떨까요?


공공 건축은 다른 거 없는 거 같아요. 접근성이 좋아야 해요. 우리 나라는 공공 건물이 너무 커요. 예를 들어 국립 도서관이 있다고 하면 ‘백만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이라면서 사이즈를 점점 키우잖아요. 하지만 접근성 없이 백만 권짜리 장서가 있는 도서관 보다 10만 권짜리 10개가 분산 되어 있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아요. 공공건축물이라는 건 작게 쪼개져서 우리의 실생활 속에 침투를 해야 의미가 생기잖아요.

 

사적인 외부 공간이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인간은 유전적으로 자연 속에서 진화돼 온 동물이거든요. 자연을 만나는 외부 공간이 없다는 건 유전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것 같아요. 자연은 1년 열두 달 변하잖아요. 계절과 날씨와 해의 입사각도 달라지고. 근데 그런 게 없는 실내 공간에서만 산다는 건 변화가 부족한 데서 산다는 얘기고, 변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스마트폰을 더 많이 쳐다보고, 텔레비전을 더 많이 보고, 사람끼리 단절이 되는 거죠. 그만큼 서로의 다양성도 인정해주지 않고요. 제가 볼 땐 대한민국 사회가 자연과 분리되어 산 게 20~30년 밖에 안되는 거 같은데 좀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집 공간에서 달라졌으면 하는 건 없나요?


방에서 거실 쪽으로 창문을 뚫었으면 좋겠어요. 이게 가족을 더 행복하게 하고 집도 더 넓어 보이게 하는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안방에 있는데 거실 쪽으로 창문이 있어서 그걸 열어 놓으면 5평짜리 안방인데 거실이 10평이면 15평으로 보일 거 아니에요. 심리적으로도 그런데 시각적으론 연결 되어 있지만 몸은 못 가잖아요. 완전히 단절되지도 완전히 오픈 되지도 않은 채 다른 가족과 느슨한 연결 관계를 주죠.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면 르 코르뷔지에의 파리 설계를 예로 들며 “자연을 바라보는 대상으로만 이해했을 때 건축 디자인은 실패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공간을 설계할 때 자연을 체험의 대상으로 바꾸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발코니, 테라스, 좁은 마당, 이런 것들이에요. 대문을 열고 나가지 않더라도 바깥 공기와 햇볕을 쬘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삶이 훨씬 더 퀄리티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가려주는 공간도 필요하겠죠?

 

그렇죠. 가벽 같은 거라도 세워서 가려줘야 사생활보장이 되니까요. 그런 걸 굉장히 잘 한 사람이 안도 다다오에요. 야외공간인데 거의 실내공간처럼 벽에 둘러 싸인 공간을 잘 만드는 건축가죠. 그의 교회도 좋아하고 주택도 좋아하는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정말 기가 막히게 풀어 논 것 같아요.

 

좋아하는 건축가가 안도 다다오인가요?


학부 때는 안도 다다오 굉장히 좋아했고요. 대학원 가서는 루이스 칸을 제일 좋아했어요. 루이스 칸의 건축은 연구실이건 도서관이건 딱 들어가면 사람을 영적인 상태로 만들거든요. 솔크 연구소라고 태평양 지역에 있는데 서 있으면 자연과 나 둘만 존재한다는 느낌을 줘요. 그가 지은 도서관도 천장의 아치에서 떨어지는 빛 때문에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성당 안에 있는 것 같죠.

 

공간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공간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지금의 주거 형태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뭐가 있을까요?


가장 큰 건 소통이 단절되는 거죠. 도시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자기랑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할 때 생각의 시너지가 생기는 거예요. 저는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진 이유 중 하나가 다 서울로 상경해서라고 보거든요. 전라도 광주 사람이랑 대구 경북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얘기하고 그러면서 다양한 시너지가 발생한 거라고요.

 

집 볼 때 가장 중요하게 볼 건 뭘까요?


채광과 통풍이죠. 하하. 채광 좋고 통풍 잘되고 건축의 기본이라고 봐요. 언젠가 풍수지리 전문가와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있는데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어떤 공간에 가서 “기분 좋으면 된 거다”라고요. 산을 배경 삼고 눈 앞에 물이 흐르고 볕 좋고 시원하면 누구나 기분 좋잖아요. 사실 제가 관심 있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 공통점이에요. 그걸 만족시켜 주는 것이 좋은 건축이고요. 인종과 시대를 떠나서 공통분모를 건드려 주는 건축이 100년 뒤 천 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안도 다다오나 루이스 칸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들이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거든요.

 

건축가가 되길 잘 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럼요. 내가 하는 모든 경험을 하나로 응집시켜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직업 중 하나거든요. 공간을 설계할 때 다양한 상상과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제가 살아서 경험하는 모든 게 거기에 녹아 들고 영향을 미쳐요.

 

자신의 삶 전체를 일로 응집시켜 결과물을 내는 건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 분야가 뭐가 되든지 간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인간하고 연동되기 시작했다는 거 같아요. 사람이 중심이 된 거죠. 법을 하든 금융을 하든 뭘 하든 그 중심에 사람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체험이 거기 들어갈 수 밖에 없어요.

 

공간에 대한 통찰, 공간을 이해했을 때 얻어지는 기쁨은 무엇일까요?


공간은 거울이에요. 사람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에 그걸 만든 사람이나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그 공간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거고요. 내가 어느 공간에 들어가면 공간의 반향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되고요. 이게 대화가 될 수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해석하지 못할 뿐이지 무의식으로는 느끼거든요. 공간을 이해한다는 게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같아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유현준 저 | 을유문화사
자신들이 만든 도시에 인간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과연 더 행복해지는지 아니면 피폐해지고 있는지 도시의 답변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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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한, 장재열 "우리가 쓰는 퇴사 사유는 진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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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입사 후 3년 미만 퇴사자는 84%에 육박하는 지금, 모두가 퇴사를 말하고 퇴사를 꿈꾼다. 퇴사자를 향해서는 걱정과 충고, 부러움과 축하가 동시에 뒤따른다. 어디라도 들어가면 좋겠다는 취업준비생과 퇴사를 추구하는 직장인은 모순 같아 보이지만, ‘더 나은 삶’ ‘살만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다.


‘퇴사학교’의 장수한 대표, ‘좀놀아본언니들’의 장재열 대표도 삼성 입사 후 퇴사의 길을 걸었다. 이후 장수한 저자가 교육 플랫폼 ‘퇴사학교’에서 직장인의 연착륙을 도와준다면, 장재열 저자는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에서 20, 30대 사람들의 고민을 상담하고 청년 마음 건강의 데이터베이스를 쌓아 왔다. 둘의 접점이 퇴사라는 화두에서 만나  『사직서에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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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한 저자

 

 

퇴사 담론은 이제부터 시작


두 분 다 기존 저서가 있었어요. 장수한 저자는 『퇴사의 추억』 ,『퇴사학교』등을 냈고, 장수열 저자는 『오늘도 울지 않고 살아갈 너에게』를 냈었죠. 두 분이 같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장수열 :만난 것도 책 쓰는 것도 제가 먼저 연락했어요. ‘좀놀아본언니들’ 상담소를 찾아온 내담자들이 퇴사와 관련한 고민을 말하면서 ‘퇴사학교’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돈을 받고 사람들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단체에 불신이 있었는데,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공통점이 많았어요. 퇴사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요. 2016년에 퇴사 관련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방송사 PD님이나 작가님이 매번 부르는 게 장수한 대표 아님 저였어요. 퇴사 담론이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 청년 당사자 연배에 속하면서 이 담론을 논할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느꼈죠. 책을 낸 건 매체의 한계성에서 벗어나서 조금 더 분명하게 메시지를 형성해보자는 시도였어요.


장수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소가 맞아떨어지면서 ‘퇴사학교’가 초반에 많이 조명을 받았어요.퇴사학교 창업한 게 5월이었는데 장수열 저자를 만난 게 7, 8월쯤이었으니 창업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죠. 지금도 사업 시작한 지는 아직 1년 반밖에 안 됐어요.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네요.


장수한 :초창기 회사죠. 일 년 반 동안 함축적으로 경험을 쌓으면서 느꼈던 갈급함이 장수열 저자랑 맞았던 것 같아요. 첫 번째로는 우리나라 교육업이나 진로 관련 코칭을 봤을 때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창업을 안 해본 강사나 교수가 창업을 가르치면서 극소수의 성공 사례만 제시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죠. 두 번째로는 사회적으로 퇴사를 공론화하면서 건강한 퇴사 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영리 산업을 하다 보니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러던 와중에 장재열 대표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한테 없는 공공 영역을 보완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수한저자의 전작은 항상 ‘퇴사’가 키워드였어요. 전작과 연장선으로 보면 책을 내면서 점점 더 사회학적인 시각이 들어간 것 같아요.


장수한 : 첫번째 『퇴사의 추억』 은 회사 생활을 회고하는 개인 에세이였고, 두 번째 낸 『퇴사학교』는 퇴사학교의 철학적인 인문 실용서였어요. 이번에 낸 『사직서에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는 처음으로 개인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담론을 다룬 거라, 세 책에서 말하는 바는 다 달라요.


책에 충분히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겼다고 생각하나요?


장재열 : 처음에는 서울시와 퇴사학교, 좀놀아본언니들이 공동 연구한 연구보고서로 시작했어요. 퇴사를 감수성으로 풀어내는 작업, 상사의 나쁨에 관해 공감하면서 웃어넘기고 월요일을 맞이하는 느낌의 책도 물론 필요한데,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퇴사를 다루는 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두 단체의 상담 사례를 합해 11,000명의 실질적인 현상 분석 데이터를 가지고 연구의 관점으로 들어가 본 책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봐요. 이 책이 완벽할 거라고 말씀드릴 수 없는 이유는 퇴사 담론이 아직 도입부기 때문이에요. 책을 읽고 어떤 방향으로 퇴사해야 할지 알게 되는 것보다는 퇴사에 대해 더 논의하고 토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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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열 저자

 

도망이 아니라 피난


퇴사를 둘러싼 갈등 중에는 세대 간 갈등이 제일 클 것 같아요.


장재열 : 퇴사하는 이유도 다 다르고 근무 환경, 성격 다 달라요. 하지만 재미있는 건 부모세대의 메시지는 다 똑같아요. ‘나가서 뭐 하려고 그러냐’ ‘부모도 설득 못 시키면서 밖에 나가서 어떻게 하냐’ ‘마음대로 해라. 대신 집을 나가라’. (웃음) 처음 한두 번 사례자를 접했을 때는 부모님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례가 쌓이면서 모두 같은 패턴으로 반응하는 걸 알게 되니까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살펴보니 세대 간에 잘산다는 개념의 인식 차이가 핵심이었어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장재열 : 부모님 세대가 살아왔던 사회초년생 시기로 돌아가면 지금의 개념과 현격히 다른 거죠. 경제적으로만 봐도 고용 형태에 파견직이 없었고 물가 상승률만큼은 임금이 상승하던 시기, 돈을 불리는 부동산과 예금 체계가 있었던 시기의 기억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게 제일 안전한데 왜 회사를 나가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거죠. 그 세대 사람들에게 퇴사는 돌출 행동인 거예요. 하지만 지금 세대는 꾸준히 있다고 해서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사실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 삶을 형성할 수 있는 곳으로 피난하려는 움직임인 거죠.


세대 갈등도 있지만 동세대에서도 같은 관점으로 퇴사를 바라보지는 않잖아요. 회사를 나간다고 하면 걱정을 하기도 하고요.


장수한 : 회사로 보면 크게 세 부분의 퇴사 포인트가 있어요. 첫 번째는 신입사원 1, 2년 차에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조직문화도 힘들고 롤모델이 보이지 않으니 퇴사하는 시기가 있고요. 두 번째는 5년, 10년 차가 되고 대리, 과장 달았을 때 분기점이 또 와요. 경력도 쌓이고 돈도 모았으니 이직과 창업에서 고민하게 되고요. 저는 두 번째 케이스였는데,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위험이 적은 상태에서 창업을 시도했었어요. 마지막 포인트로 40, 50대 부장님이 되면 경력과 돈은 있지만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지죠. 남느냐, 나가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새로운 걸 선택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이야기한 것처럼 회사 안에 롤모델이 잘 보이지 않거든요.


장재열 : 아까 말했던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경제적 성장의 생애 주기적인 차이라고 본다면, 동 세대의 시선 차이는 미디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퇴사를 축하해주는 유형을 보면 자신은 용기가 없어서 못 나가는데 저 사람은 용기 있고 멋있다는 말을 해요. 그런 것들이 어디서 형성됐나 보면 미디어를 통해 동 세대나 반 세대 위의 성공 사례를 접하거든요. 방송에서는 퇴사하고 망한 사람 잘 안 나와요. 늘 회사 다니다 때려치고 정반대의 일을 해서 성공한 사례만 나오죠. 반면 퇴사를 비난하는 경우는 자기 삶을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제시한 공교육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무언가 얻을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받고 사회에 입성했는데, 누군가 퇴사하면서 자신이 어렵게 쟁취한 무언가를 놓아버리는 심리를 공감하지 못하는 거죠. 그런 와중에 동 세대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기업에서 현실적인 역량을 제시해야 한다


계속 데이터베이스로 말씀해주셨는데, 저자들의 개인적인 경험도 궁금해요. 사직서를 냈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장수한 : 딱히 특별할 건 없었고요. 회사에서는 왜 퇴사하냐고 해서 창업하려고 한다고 하고 나왔어요. 부모님이나 주변에서도 걱정은 많이 하셨지만 믿고 지지해주셔서 오히려 주변의 반응보다는 스스로 결단하면서 내적 갈등이 많았죠.


사직서에 회사의 불합리함에 대해 쓰고 싶지는 않았나요?


장수한 : 쓴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떠나는 입장에서 굳이 말해야 할 필요도 못 느꼈어요. 기존 조직이 싫어서 떠난다기보다 저와 안 맞다는 걸 알아서 떠난 거라, 회사에 대해 신경쓰기에는 퇴사 이후 제가 뭐 먹고 살지 가장 중요하니까 그런 걸 할 겨를이 없었죠.


장재열 : 남의 눈치를 보느라고 사직서에 진실을 못 쓴다기보다, 우리가 아무도 퇴사의 진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퇴사 사유가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제목을 썼어요. 가장 미지의 영역이고, 미지의 상태가 계속됐을 때는 가장 많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장재열 대표님은 꽤 일찍 회사를 그만두신 걸로 나와요.


장재열 : 저는 자의적 퇴사도 아니었고, 창업하겠다는 마음도 전혀 없었어요. 우울증 때문에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라 사표를 쓴 거였죠. 그때까지 학생 시절과 취준생 시절에 늘 1등으로 달려왔었기 때문에 순진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애써서 남들보다 열심히 하면 잘살 거라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회사에 들어가보니 저는 수직구조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죠. 사실 제 경우는 명확히 조직부적응자가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기업이나 그때 당시 조직원에 대해 비판을 하고 싶진 않아요.


장수한 : 5년, 6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퇴사가 드문 사례로 보였는데, 점점 보편화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십대중반 신입사원을 받으면 그 친구들은 30대가 하는 일이 꼰대처럼 보이는 거예요. 조직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장재열 : 예전에는 멋모르고 무조건 대기업으로 갔다면, 지금은 자신이 기업과 안 맞다는 걸 아는데 대안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원서를 넣는 느낌이에요. 대기업 아니면 스타트업인데 스타트업은 너무 돈이 안나오거나 일을 너무 많이 시키고요.


회사 쪽에서도 채용 시스템에 관해 가치관 정립이 안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어떻게 채용할지 아이디어가 없는 상황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장수한 : 제가 채용할 때도 그렇지만, 서류 접수하고 면접 한두 시간 보고 결정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면접 보는 사람하고 구직자하고 합이 맞았다고 해도 실제 배치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하게 되잖아요. 중간 허들을 거치기 때문에 채용 적합성에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고, 큰 조직에 배치되어도 원하는 직무를 하기 어렵죠. 회사 차원에서도 구직자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어요. 기본적으로는 인사담당자가 판을 더 많이 깔고 더 많은 정보를 줘야 하는데 지금 공채 구조에서는 어렵죠.


장재열 : 회사 다닐 때 채용 담당자였는데, 이상적으로 채용하면 채용담당자가 죽어나요. 채용 단계 자체가 유연해지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이상하지만 채용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는 계속하잖아요. 바이킹 면접이니, 등산이니 하면서요. 채용 방법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원자들이 멋모르고 지원하는 걸 방지할 필요가 있어요.


어떤 식으로 방지해야 할까요?


장재열 : 30대 기업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인재상이 똑같아요. 도전하는 인재, 협력하는 인재, 창의적인 인재, 몇 가지 좋은 단어가 돌려막기로 쓰여 있어요. 그 인재상대로라면 S그룹에 맞는 인재는 H그룹에도 맞아요. 그래 놓고 지원자가 너무 많으면 영어 성적으로 올려버리는 형태적인 허들을 높이는 거죠. 적어도 인재상이나 직무 소개 말고 직무에 필요한 사람들의 역량이 현실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지원자도 로또처럼 찔러넣고 보는 구조가 되거든요. 그게 채용 시스템을 바꾸는 것보다 비용이나 시간 면에서 훨씬 적고 빠르게 적용할 수 있어요.

 

현실적인 역량은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요?

 

장재열 : 이를테면, 채용담당자는 냉철한 사람이어야 된다는 걸 일하면서 처음 느꼈어요. 교육담당자가 보모의 역할이라면 채용담당자는 문지기의 역량이 필요해요. 인사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급여 담당자, 인사배치 담당자, 교육 담당자는 완전히 성격이 달라요. 단순히 창의적인 인재라고 써 놓으면 멋있죠. 하지만 기업이 멋있어 보이지 않더라도 실제 일하는 직군마다 필요한 현실적인 역량을 오픈해 줄 필요가 있어요.


미디어에서 퇴사를 좋게만 포장하고 미시적인 걸 보여주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어요. 퇴직자의 고민과 실제 사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장수한 : 기성 매체가 놓친다기보다, 그냥 대중 매체의 속성인 것 같아요. 대중 매체는 정해진 시간에 모든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잖아요. 뉴미디어나 개인 미디어, 저희 같은 사람이 활동하는 걸 봤을 때 그것도 일종의 미디어가 되는 거죠. 그런 다양한 매체가 생겨나면 보완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장재열 : 사람은 누구라도 다면적 정보를 주면 자기 나름대로 가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 편이에요. 정보가 주어지지 않아서 편향성이 있을 뿐이죠. 퇴사하고 망한 사람과 잘된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갓 퇴사하고 기초 단계에서 애쓰는 사람들의 정보가 제일 부족한 것 같아요. 성공이나 실패의 과정은 재미없고 지지부진하기 때문에 날려버리고 성공한 모습만 보여주는데, 실제 퇴사자에게는 그런 정보가 필요하잖아요.


장수한 : 그래서 퇴사학교에서 그런 정보를 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웃음)


장재열 : 사업가들은 이렇게 노출의 포인트를 놓치지 않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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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고민을 덜할 수 있는 환경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 퇴사 욕구를 대입한 그래프가 흥미로웠어요. 자기 욕구를 안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성공한 퇴사에 도움이 되나요?


장재열 : 정말 못 살 정도로 일을 시키거나 월급을 너무 조금 주기 때문에 퇴사한 사람도 다들 나만의 길을 창조하는 쪽으로 가려고 해요. 다들 그렇게 하니까요. 하지만 월급을 많이 안 줘서 퇴사한 사람이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면 자리 잡을 때까지 돈이 안 나와요. 그런 사람들은 퇴사를 후회하고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죠. 자기가 어떤 욕구가 있냐에 따라 퇴사 이후 대비책이 달라요. 욕구에 따라 정말 급여가 적거나 쉴 시간이 없는 직장이라면 퇴사 이후 급여가 다른 곳을 가거나, 근무 시간이 적은 곳으로 이직해서 자기 가치가 일정한 소득으로 올라왔을 때 다른 곳으로 뛰어드는 게 필요하거든요. 결핍된 욕구를 확실하게 생각하지 못하면 타인의 방정식을 끌어오려고 시도하고 패착을 두게 된다는 거죠.


직무와 맞는 코어 핏(core fit)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자기 역량을 찾는 과정은 어렵고 힘들잖아요.


장수한 : ‘코어 핏’이라고 표현했지만 큰 범위에서는 커리어 관리의 영역인 것 같아요. 조직에서 채용을 신경 써야 한다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적성과 맞는 걸 찾아서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는 거예요. 회사 생활 자체가 퇴사 이후를 준비하는 학교라고 생각하거든요. 자기가 하고 싶고 잘하는 일만 하는 게 회사생활이 아니잖아요.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요소의 퍼즐을 한두 개만 찾아가도 된다는 거죠. 열 가지 일 중에 한두 가지는 재미있는데 나머지 여덟 가지는 재미없고 안 맞을 수 있어요. 그래도 한두 가지 일로 실력을 쌓고 월급을 벌면서 최대한 많이 경험해보면 자신의 핵심 역량이 늘어나겠죠. 그런 퍼즐이 충분히 쌓였을 때 퇴사해서 창업이나 창직으로 나오는 걸 조언해요.


정작 퇴사학교에서는 퇴사하라고 안 한다면서요?


장수한 : 준비되지 않으면 퇴사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죠.


퇴사학교에서 집중하는 건 뭔가요?


장수한 : 70%는 회사 안에서, 30%는 회사 밖에서 승부를 봐야 해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전자라면 타이밍이 올 때까지 핵심 역량을 준비하라고 전해요. 30대나 40대도 자기 타이밍 따라 일찍 퇴사해야 할 때가 있으니 세대와 상관없이 메시지는 똑같아요. 퇴사 이후 1, 2년은 수입 없이 고생하면서 역량을 쌓으면 2, 3년 차부터 수입이 조금씩 올라오죠. 성공적인 퇴사를 위해서는 흔히 풀타임으로 3년, 파트타임으로는 거기에 4를 곱한 기간이 필요하다고 전해주고는 해요.


퇴사학교나 좀놀아본언니들 모두 청년층에 메시지를 집중하는 것 같아요. 저자들의 경험을 담다 보니 그런 건가요, 아니면 어느 세대보다 청년층에게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인가요?


장수한 : 퇴사학교는 30대가 중심이고, 그 이유는 제가 30대기 때문이죠. 제 철학은 해보지 않거나 경험하지 않은 걸 말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대신 저는 40대나 50대 선생님을 섭외해서 그분들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죠.


장재열 : 상담소에서는 주로 20대가 많이 와요. 퇴사학교는 퇴사로 주제를 잡고 나잇대를 다르게 둔다면, 좀놀아본언니들은 20, 30대 연령에서 퇴사나 연애 등 다양한 문제를 상담하죠. 두 집단의 수직 수평이 맞는 지점이 청년층의 퇴사인 것 같아요. 중년의 퇴사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건 똑같지만, 왜 일어나는지는 다 알잖아요. 하지만 청년의 퇴사는 상사도, 부모도, 심지어 자신도 왜 자기가 퇴사했는지 몰라요. 그만두는 친구도 왜 다른 사람들은 버티는데 자신은 못 버티는지 힘들어하고요.


앞으로도 두분 다 접점 안에서 활동 계획이 있나요?


장재열 : 퇴사에 대한 담론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볼 일이 생길 거예요. 아마 궤적이 조금씩 달라지고 넓어지면서 주기적으로 만나지 않을까 싶어요.


퇴사학교의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요?


장수한 : 책으로 소개하는 콘텐츠와 퇴사학교의 방향성이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초반에는 개인의 고민과 퇴사 이후 자아 탐색에 집중했다면 그다음 단계로 구체적인 해결 방법으로 넘어가겠죠. 퇴사학교 선생님들을 공개 오디션으로 모집하는데, 수업 개수를 늘려가는 만큼 롤모델이나 퇴사 이후 시대에 대한 대안을 갖춰나간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올해는 한 명이라도 더 퇴사 이후 성공사례를 많이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좀놀아본언니들은 어떤가요?


장재열 : 저희도 같아요. 처음에는 청년들의 고민에 대해 멘토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다가, 지쳐있기 때문에 멘토링보다는 공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했었죠. 이 책을 기점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어딘가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할 것 같아요. 작년 말까지 31,000명 정도를 상담했는데,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까 청년의 마음실태에 대해 이만큼 데이터베이스를 가진 조직이 없더라고요. 청년들이 고민을 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앞으로 가야 할 시민단체로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사직서에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장수한, 장재열 저 | 스노우폭스북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사회적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시스템 보완을 지적하고 개인에게는 미처 깨닫지 못한 퇴사에 대한 막연한 꿈에 현실적 잣대를 제시하고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고정욱 “벼랑 끝에서 더 잘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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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우리 형』 , 『가방 들어주는 아이』 , 『까칠한 재석이』시리즈의 고정욱 작가가 청소년 에세이 『열정을 만나는 시간』을 펴냈다. 270권 이상의 저서, 연 300회 이상의 강연을 통해서도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작가 스스로 “홀딱 벗은 느낌”이 든다고 말할 정도로 가감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열정을 만나는 시간』은 ‘고정욱을 만나는 시간’이라 할 만하다. 고정욱과 열정이 등치되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열정을 빼놓고는 그가 살아낸 시간을 말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어린 시절 뇌성마비를 앓았던 그는 1급 지체장애인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등하교를 해야 했고, 의사가 되어 장애인을 돕고 싶었던 꿈은 “장애인은 의학을 전공할 수 없다”는 말 앞에 좌절됐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지만 등단까지 12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영욱은 “휠체어 탄 통쾌한 사나이”가 됐다. 비장애인과 함께 공부하며 박사 학위를 받았고, 등단 이후 매년 10여 권 이상을 집필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주어지지 않은 것 앞에서 좌절하기보다 이룰 수 있는 것에 치열하게 매달린 결과다. 어렵게 얻은 결실이건만 독식하지 않는다. 꾸준히 인세를 기부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고 실현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란 사람들이 좀처럼 보지 못하는 세상을 발굴해 보여주는 존재다. 고영욱 작가도 그러하다. 그의 작품에는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안에서 비장애인들은 지금껏 눈여겨보지 않았던 이들의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것보다 더 강하게 빛나는 “형형한 삶의 의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은 『열정을 만나는 시간』에서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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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딱 벗은 느낌이 들어요


이번 책에는 기존에 쓰신 에세이와 새로운 글들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작가들은 원고 청탁을 받는 일이 많아요. 그때마다 써서 발표한 글들을 많이 모아놨어요. 그 중에서 시대에 맞춰서 추려내기도 했고, 편집팀의 요청을 받고 쓴 글도 있어요. 사실 공로의 반은 편집팀에 있어요. 무작위로 써 놓은 원고 중에서 감동적인 걸 골라내고 엮은 건 다 편집팀의 노력이니까요. 저는 편집하는 권한을 굉장히 존중해요. 그 분들이 최고의 고급 독자들이잖아요. 그 분들의 시각과 의견은 거의 다 따르는 편이에요. 그게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청소년 독자들이 많이 찾는 책이 될 것 같아요.


요즘에는 대상 독자의 의미가 크지는 않지만, 일단은 청소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생각했죠. 제가 청소년기에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야기해주고 싶었고요. 강연을 가면 한두 시간 밖에 이야기를 못하잖아요. 다 못 한 이야기들을 아이들이 궁금해 하는데, 물론 질문 시간에 말하기도 하지만 다 대답을 해주지는 못해요. 그래서 이런 책을 통해서 조금 더 깊이 저를 알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게 된 책이기도 한데요. 홀딱 벗은 느낌이 들어요. 꺼풀이 많이 벗겨졌다고 할까요. 제 본 모습에 다가가는 책이 된 것 같아요.

 

기대하시는 독자들의 반응도 있나요?


마음에 울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하게 제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이 감동 받는 걸 보면 ‘내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구나, 그런데 참 잘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통해서 남들에게 이야기할 정도까지 됐다는 게,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죠. 보통은 자신의 아픔을 잘 드러내지 않잖아요. 아픔을 뛰어넘을 정도의 자신감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만 드러내지, 그 안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잘 이야기 안 하죠. 그런 걸 볼 때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컸다는 거구나’ 싶어서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도 느껴지고요. 더 성장해야겠다는 각오도 하게 돼요.

 

『열정을 만나는 시간』 이 몇 번째 책이죠?


274권 째 책이에요.

 

다작의 비결이 있을까요?


이야기가 생각나면 휴대폰 음성인식 기능을 이용해서 녹음이나 입력을 해요. 그런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는 게 하나의 요소고요. 두 번째로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독서와 경험을 쌓은 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이과였거든요. 자연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교 때부터 문과 공부를 하면서 또 다른 세계관도 갖게 됐죠. 그리고 장애가 갖고 있는 아픔과 갈망이 있죠. 그 모든 것들이 제 안에서 융복합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작은 실마리만 있어도 거기에 이야기들이 막 붙어요.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죠. 녹음을 하는 것도 그래서예요. 손으로 쓰려고 하면 이미 늦거든요.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풀어놓는 건데, 나중에 보면 이야기가 어마어마하게 나와요.

 

장애가 가져다 준 갈망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사회가 준 편견과 차별의 아픔 때문에 생긴 갈망이죠. 예를 들면 너는 수학여행 가지 마라, 너는 의대에 가지 마라, 그런 아픔들이 갈망을 준 거죠. 공부하고 싶다, 작가가 되고 싶다, 결혼하고 싶다, 아이를 낳고 싶다, 그런 갈망을 갖게 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할 이야기들이 되게 많아진 거죠.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의 갈망, 고통, 아픔 같은 것들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거고요. 제가 작가로서는 굉장히 혜택 받은 사람이에요. 아픔도 있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아울렀고, 책도 많이 읽었고, 신기술도 장착했잖아요. 그러니까 많이 쓸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죠.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죠. 결론적으로는 불행을 코스프레하는 거죠. 가끔 지적 장애인 엄마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그 아이들은 말을 잘 하지 못하니까 저는 엄마들과 대화를 나누죠. 그러다가 제가 ‘어머니, 저도 장애인이에요’라고 말하면 그 분들이 ‘선생님이 무슨 장애인이에요?’ 그래요. 장가도 갔고, 공부도 다 했고, 돈도 잘 벌고, 신나게 살고 있는데 뭐가 장애인이냐고요. 걷지 못한다고 하지만 휠체어 타고 차 타고 다 다니잖아요. 그러면 제가 ‘맞아요, 제가 장애인인 척 했네요’ 그래요. 할 말이 없어요. 그 분들이 말씀하시길 ‘우리 아이는 엄마가 누군지도 몰라요, 내가 매일 데리고 있는데도요’ 하세요. ‘내가 죽으면 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이런 애가 장애인 아니에요?’ 하시죠. 맞는 말씀이에요. 저는 장애인 코스프레하고 다니는 거죠. 장애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스스로 강해지고 멋있는 삶을 사는 건 장애와는 별개라는 거죠.

 

작품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신 일들 중 하나가 그게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부수고 제도를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고 싶으시죠?


어렸을 때는 장애의 아픔을 겪으면서 ‘내가 왜 장애인이 됐나’ 원망하기도 했어요. 나 자신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운명을 원망하고 저주했었어요. 그런데 작가가 돼서 작품을 쓰고 강연도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내 작품을 사랑해주고 찾아줬을까, 싶은 거죠. 역으로 생각하면 제가 장애인이라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거기에 내가 장애인이 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없애라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장애인으로 태어난 거구나’ 싶었죠. 숨기고 싶었던 장애가 널리 드러내야 할 빛나는 보석이 된 거예요. 그런 묘한 경험을 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 수 있다는 거고요. 쥐구멍에도 볕들 수 있다는 거예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낼 수도 있고요.

 

서문에서 말씀하신 “통쾌한 순간”이군요.


통쾌함이죠. 저는 통쾌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누구도 안 가본 길을 가니까요. 항상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뵈니까 정말 밝고 열정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읽으면서, 그 안의 수많은 인물들을 보면서 배운 거예요. 장애를 가졌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서 배운 거죠. 부모님이 잘 길러주신 덕도 있고요. 남들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공부를 하고 경쟁을 거쳐냈기 때문에 당당해질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당당하게 내 힘으로 해낸 거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거예요. 장애인도 똑같은 기회를 가지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애인이 우울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빨리 만들고 싶어요. 제가 할 일은 조금 더 밝고 당당하고 명랑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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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서 있었기 때문에 더 잘한 것 같아요


집필 속도도 굉장히 빠르시더라고요. 『가방 들어주는 아이』 는 한 시간 만에 쓰셨다면서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침대 머리맡에서 해준 이야기예요. ‘아빠가 어렸을 때 가방 들어주던 아이의 이야기를 해줄게’ 하고 녹음기를 켜놓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걸 동화로 옮겨 적은 거죠.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가수나 작곡가들도 짧은 순간에 떠올라서 작곡한 곡들 중에서 빅히트 친 게 많대요. 1~2년씩 멜로디를 다듬었다고 해서 대박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작가들에게는 하늘의 문이 가끔 열린다’고 표현해요. 그때 잽싸게 하늘에 있는 보화를 빼 와야 돼요. 『가방 들어주는 아이』도 그렇게 빼온 거라고 할 수 있죠.

 

『가방 들어주는 아이』이야기를 하자면, MBC 프로그램 <느낌표>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의 선정도서가 됐었잖아요. 그때 방송의 영향이 엄청났었죠?


엄청났죠. 우리나라 동화책 중에 거의 유일하게 100만 권 넘게 판매가 됐어요. 저의 인생을 바꿔준 책이 됐죠. 기부의 기쁨을 알게 해줬고, 동화책을 쓰는 보람을 느끼게 해줬으니까요.

 

판매 수익을 ‘기적의 도서관’ 건립에 기부하셨죠?


그렇죠. 두 달 동안 판매된 수익이었어요. 인세를 거의 1억 원 가까이 기부했어요. 너무 기뻤죠.

 

이후에도 계속 나눔을 실천해 오셨어요. 인세를 기부하신 책이 스무 권 이상 되죠?


지금쯤 서른 권이 넘었을 거예요.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나눠서 계속 기부하고 있어요.

 

그래도 사람인지라(웃음), 때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실 법도 한데요.


기부할 때는 계약서에 써놔요. 인세 중의 일부를 어느 기관에 줘야 하는지 적어놓는 거죠. 그 기관도 출판사와 계약하는 거예요. 출판사는 두 명의 계약자에게 인세를 나눠서 주고요. 저를 거쳐서 돈이 전달되지 않으니까, 돈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별로 없어요. 그렇게 해야 제가 신경을 안 써도 되죠. 좋은 일 하는데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티 낼 필요 없잖아요. 자동으로 기부가 되면 되는 거죠. 저도 조금 바쁜 사람이에요(웃음). 일일이 신경 못 써요(웃음).

 

『희망을 주는 암 탐지견 삐삐』 는 인세 전액을 기부하셨더라고요. 2차 저작권, 번역권까지 넘겨주셨고요.


모든 권리를 통째로 줘버렸죠. 재능으로 봉사하고 기부한 거예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에요.


괜찮아요, 저는 작품을 많이 써서(웃음). 비유하자면 빌딩을 200채 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한 채 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한 채 밖에 없으면 못 주겠지만요(웃음).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셨어요. 등단까지 12년이 걸리셨죠?


그렇죠.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작가의 꿈을 가졌으니까요.

 

포기할 법도 한 세월 아닌가요?


거의 포기했죠. 대학원 다닐 때는 더 그랬어요. 박사 과정 들어가면서 공부하기 바빴으니까요. 사실은 등단도 얼떨결에 된 거라고 할 수 있어요. 박사 논문을 쓰는데, 계속 논문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너무 답답한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 신문에서 신춘문예 공고를 봤어요. 써 놓은 작품들은 많이 있었으니까, 그 중에 하나를 골라서 다듬어가지고 보내보자고 생각했죠. 논문 쓰다가 머리가 복잡해지면 그때마다 조금씩 다듬었어요. 작품을 고치는 게 일종의 리프레쉬(refresh) 용이었던 거죠. 그런데 그 작품이 당선된 거예요.

 

당선은 기대 안 하셨던 거예요?


네, 전혀. 잊어버리고 있을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박사 논문 심사가 막바지에 다다라서 한창 열심히 하고 있는데 신문사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당선됐다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작가 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10년 이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공부하고 글 쓰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어요. 취직을 할 수도 없잖아요. 저는 절벽에 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했던 것 같아요. 절벽에 서 있지 않았다면 딴 짓을 했겠죠.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일을 알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과 논문 쓰는 것밖에 없구나, 이거나 열심히 하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하고 생각했던 거죠. 하다 보니까 결과가 좋게 나왔고, 그래서 지금까지 한 사람의 가장으로 살 수 있게 된 거예요.

 

주로 청소년 소설과 동화를 집필하셨어요.


원래 소설로 등단했는데, 1999년에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을 쓰면서 직업이 동화 작가로 바뀌었죠. 그 뒤로 20년 가까이 동화를 쓰는데, 한 5년 전부터는 시장에 변화가 생겼어요. 아동물 시장이 많이 위축되고, 출산율도 낮아지고. 그래서 지금은 주 직업이 강사처럼 되어버렸어요. 강의를 많이 하고, 작품도 쓰고 있죠. 살면서 5개 정도의 직업을 가졌던 것 같은데요. 저는 그걸 굉장히 긍정적으로 봐요. ‘내가 비록 장애가 있지만 오히려 비장애인보다 더 탄력적이고 변화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새로운 기회가 오면 새롭게 변신하자고 늘 마음 먹고 있어요.

 

동화 작가가 되신 데에는 자녀들의 영향도 있었죠?


거의 100%죠.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들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때가 20년 전이니까 아동물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였거든요. 서양 동화들을 어설프게 번역한 작품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읽을 동화는 내가 써야겠다’ 싶었어요. 원래는 한 편 정도 쓸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쓴 작품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인데 반응이 좋았죠. 출판사에서 다음 작품에 대한 요청이 들어왔어요. 『안내견 탄실이』 ,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의 일기』 , 『가방 들어주는 아이』 가 다 그랬어요. 독자들이 많이 좋아해주시니까 출판사에서 계속 다음 작품을 써달라고 한 거예요. 그런 시기가 5~6년 이어지니까 이제는 소설을 쓸 수가 없는 거예요. 동화 작가로 직업이 변한 거죠.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소설도 쓰실 계획인가요?


나중에 쓸 생각이에요. 시장이 무르익고 쓸 내용이 생기면. 예전의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저한테 아주 와 닿았는데 ‘본업을 버리면 망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본업만 해도 망한다’는 말도 했어요. 본업은 절대 버리지 않으면서 다양한 분야의 기회가 올 때는 해야 된다는 의미죠. 사업도 그럴진대, 작가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뭐든지 기회가 오면 해보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30년 가까이 작가로서 독자들을 만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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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친구만 있어도 장애인은 죽지 않아요


강연 현장에서 아이들과 많이 만나시는데요. 최근의 독서 실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몇 천 권씩 읽던 아이들이 중학교 이후부터는 독해력이 조금 떨어지지 않나요? 스마트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대부분은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해력 좋은, 책 많이 읽은 똑똑한 아이들도 많아요. 글을 쓰거나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힐 정도의 아이들도 분명히 있어요. 모든 아이들을 일반화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전반적으로는 아이들의 독서 능력이 떨어지고 스마트폰을 좋아하는 게 문제이긴 하죠. 그건 세계적인 추세예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세계적인 문제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걸 기회로 이용할 수는 있다’고요. 예전에 저희 어릴 때는 모두가 책을 읽었거든요. 웬만큼 똑똑하지 않으면 두각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만 책을 읽으면 똑똑한 아이가 될 수 있어요. 책을 안 읽는 아이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지금이 찬스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읽을거리도 많고, 좋은 책도 많잖아요. 책을 사서 보기도 쉽고요. 도서관도 많죠. 읽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강연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서요? 대학은 ‘들이대’를 나와야 한다고요(웃음).


그렇죠. 세계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에요. 비장애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고요. 항상 독자들에게 ‘여러분 들이댑시다’라고 말해요. 들이댄다는 건 나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지만, 내가 상대방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고등학교 이름도 있던데요?


‘아니면말고’ 예요. 들이대 보고 안 되면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생각하라는 거죠. 그러려면 실력을 쌓아야 되니까 중학교는 ‘열공중’을 나와야 돼요. 실력이 있어야 어디를 가더라도 능력을 보여줄 수 있잖아요. 초등학교는 ‘인동초’예요. 고통을 이겨내는 힘,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야 된다는 거죠.

 

자녀들의 책 읽기는 어떻게 지도하셨어요? 책 읽으라는 잔소리는 안 하셨나요?


별로 안 했어요. 책은 읽으라고 말해서 읽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항상 책만 읽고 있어도 아이들은 안 읽을 때도 많았어요. 그래도 책 읽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그걸 하라고 했지,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읽지 말라고 해도 읽었거든요. 그런 거죠. 읽고 싶으면 읽는 거예요. 책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한테 압력을 가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 책에 막내 따님과의 일화도 실려 있는데, 읽는 동안 마음이 아팠어요. 아빠가 가진 장애에 대해서 아이에게 설명하셔야 했잖아요.


그게 참 가슴 아픈 이야기 중에 하나예요. 제 삶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집 밖에서 장애를 가진 아빠로 인해 겪은 일도 많았을 텐데, 저한테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가끔 조금이나마 들을 때가 있는데, 들어보면 굉장히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더라고요. 그런데 아이들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저도 물어보지 않았죠. 그냥 넘어간 거예요. 이야기 해봐야 나아지는 게 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한 마디씩 들으면 작품의 소재가 되는 거죠.

 

그런 작품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 중에 차별이 담겨있는, 폭력적인 것들도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 부분들을 계속 작품으로 쓰고 있어요.

 

잘못인 줄 몰라서 계속 반복하는 말들도 있죠.


그래서 알려줘야 돼요. 저는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어요. 이번 책도 그래서 낸 거예요. 읽다 보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열정적으로 사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잖아요. 자신도 그런 열정을 본받을 수 있고요. 덩달아서 장애에 대해서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조금은 영양가 있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글은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셨다고요. 작가로서 지키고 있는 또 다른 원칙이 있을까요?


글쎄요. 원칙이라기보다 조금은 교훈을 주는 책을 쓰고 싶어요. 읽고 나면 뭔가가 남는 책, 교훈이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잘못 이야기하면 꼰대처럼 보일 수 있는데, 작가에게는 약간 그런 기질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깨달음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오로지 재미만 주는 작품도 틀린 건 아니지만, 저는 재미 안에 삶의 깨달음을 담아내고 싶어요.

 

사인하실 때마다 ‘장애인의 친구가 돼주세요’라고 쓰시죠?


장애인에게 있어서 친구는 재활 수단이기도 하고요, 멘토이기도 해요. 장애인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친구예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함께 강남에도 갈 수 있죠. 함께 싸워줄 수도 있고요. 친구 하나만 있으면 그 장애인은 절대 죽지 않아요. 목마르면 친구가 물 떠다 줄 수 있고, 영화 보러 가면 친구가 데려가 줄 수 있잖아요. 여행 가자고 하면 같이 가주고요. 그건 국가 시스템으로 할 수 없어요. 시스템의 빈틈을 메우는 건 가족과 친구예요. 그래서 제가 장애인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장애인 한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 달라는 거죠. 꼭 장애인과 친구가 되세요.

 

더 나이가 든 뒤에 자서전을 쓰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더 늙으면 쓰고 싶어요. 조금 더 많은 걸 이루고 나서요. 장애인이 완전히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든 다음에 써야죠. 아직은 이룬 게 별로 없어요. 모자라요. 더 영향력을 키우고, 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시점이 됐을 때 써야죠.

 

왜요?


선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선한 영향을 미치고 싶어요.


 

 

열정을 만나는 시간고정욱 저 | 특별한서재
쇼윈도를 지날 때 다리가 흐느적대는 모습이 보기 싫어 외면했고, 죽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등의 솔직한 표현들로 무너지는 그의 민낯을 그대로 바라보게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교육학자 김선 “교육이란 학교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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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간 한국의 교육과정은 20번이나 개정되었다. 똑같은 내용이 3학년 2학기와 4학년에 1학기에 중복되는 오류도 발생했다. 겨우 2년 터울의 자녀끼리도 참고서를 함께 쓸 수 없었던 것은 도무지 웃을 수 없는 일이다. 교육이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은 지금 그저 수사에 불과하다.


한국의 교육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옥스퍼드 대학에서 비교교육학 석ㆍ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하는 교육학자 김선은 『교육의 차이』에서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실천적 영역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고민 아래 독일과 영국, 미국, 싱가포르, 핀란드의 교육을 비교해보았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교육에 대한 논의가 ‘학교 안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학으로써의 교육, 한 사람의 삶에 불을 지피는 교육을 고민했다. 공동체를 위한 독일의 교육이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영국의 교육,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는 미국의 교육 등은 그런 저자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중요한 가치들이다. 교육은 삶에 관한 것이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정치적 프레임으로 교육 제도를 재단하는 사회에도, 위기감에 사교육에 의존하는 가정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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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엄마라는 타이틀을 갖고 난 후 교육문제에 더 진지하게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어요. 체감이 확연히 달랐던 거죠? 계속 교육 분야에서 공부를 하셨음에도 말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죠. 비교적 외국 생활도 많이 하고, 학자로서 연구도 해왔는데요. 교육이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작업이잖아요. 막상 제 아이가 생기고 나니까 다르더라고요. 비교교육학을 공부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걸 굉장히 거시적인 측면에서 봤거든요. 각 나라의 교육 제도, 교육 철학을 공부했었고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까 어떻게 미시적으로 내 아이한테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됐어요. 다른 학부모나 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더 실천적으로 학문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여태까지 스스로를 위해 살았다면 이제 우리 아이를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하고, 어떤 연구를 해야 하고, 어떤 삶의 청사진을 세워야 할까, 하는 생각이 많아졌어요. 그러면서 오히려 학문을 대하는 태도, 이 책을 대하는 태도, 더 나아가 이 책의 독자를 대하는 태도까지도 굉장히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일상에서도 고민이 많아졌겠군요.


네, 저는 학자로서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요. 그럼에도 이런 책을 쓰고자 한 이유는 그거였어요. 저를 포함해 주변에 아이가 있는 분들의 고민에서 시작한 거거든요. 제가 공부한 것들과 경험한 것들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었더니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자녀 교육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요. 학문적, 경험적으로 제가 쌓은 것을 더 많은 분들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책을 쓰게 된 거예요.

 

저자 자신이 현재의 삶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다룬 책은 독자에게도 훨씬 깊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워킹맘이잖아요. 주변 지인들을 보니 한국에서 워킹맘이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두 가지 선택을 하더라고요. 부모님 옆에 살기, 혹은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육아하기. 저도 어떤 선택이 우리 아이한테 가장 좋은 선택이 될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쓰는 게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독일에서 1년을 남편과 살았는데 살면서 느낀 게 많았거든요. 그곳 아이들은 진짜 옷도 허름하게 입고요. 놀이터도 팬시한 곳이 아니에요. 나무통, 드럼통 같은 거 몇 개 있고 그렇거든요.(웃음) 참 희한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 책을 쓰면서 독일 교육 철학을 정리하다 보니까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왜 독일의 학부모와 선생님이 그 시기에 그런 공간에서 아이를 키우는지 말이죠. 그러면서 저도 다짐을 했어요. 반드시 돈을 많이 들여야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요. 지금 저희는 부모님이 계시는 횡성 시골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버려지는 시간과 자원들’이 필요하다고 했던 책의 내용이 떠오르네요.


책을 쓰며 그걸 많이 느꼈어요. 아이들이 성장하고, 인생을 배우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여유라는 거거든요. 영어로 ‘margin’이라고 하는데요. 공백이죠. 그냥 뒹굴 거리고, 생각하고, 게으름도 피우고 할 수 있는 공백의 시간을 많이 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버려지는 시간과 자원을 이야기한 친구는 정말 엘리트거든요. 실리콘밸리의 투자가인데요. 그런 친구가 도전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버려지는 시간과 자원을 꼽은 거죠.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굳이 빽빽하게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어요.

 

두려움이 많은 것 같거든요. 부모님이 매순간 애쓰고, 투자하지 않으면 뒤처지게 될 거라는 마음 같은 게 한국에는 있잖아요. 그게 사교육으로 연결이 되고요.


저도 이제 한국에서 지내니까 휩쓸릴 수 있는 환경이에요. 어찌 보면 이 책으로 저 스스로에게 말을 건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학부모에게도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성장하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원이 생길 거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불을 지피는 일


독일, 영국, 미국, 싱가포르, 핀란드, 모두 다섯 나라의 교육을 짚었는데요. 저자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국가나 교육 제도는 무엇이었나요?


독일을 첫 챕터에서 다룬 이유는 지금 시점에서 전할 이야기가 많은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다시 제 아이 이야기를 하자면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독일의 ‘빌둥(Bildung)’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느껴졌거든요. 비교교육학 공부를 하면서도 알고 있던 거지만 이렇게 깊이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어요. 이 말 자체가 교육을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본다는 건데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행복한 순간, 타인과의 관계 등을 찾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찾는 과정에서 분명히 어려움이 많이 생길 거고요. 그런데 지금 한국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두려워하고,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냥 내버려두는 시간, 알아서 해볼 기회를 두려움 때문에 못 갖게 하는 건 아닌지 독일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교육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네요. 한국의 교육은 ‘입신양명의 도구’라고 진단하기도 하셨잖아요. 반면 독일이나 영국 등의 교육을 보면 삶 자체에 대한 철학을 깨달아가는 과정으로 교육을 보는 것 같아요.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니고요. 솔직히 미국도 그렇고,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직장에 갈 확률도 높아지죠. 그런데 한국은 좀 더 심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또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젊은 선생님들, 지인들, 교육 하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는 걸 느껴요. 자녀가 꼭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거든요. 이런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한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한 책이고요. 교육을 본질로 접근하려고 하는 분들한테 어떤 사례를 들려줄 수 있을까 해서 독일, 영국, 미국, 핀란드, 싱가포르의 사례를 살펴본 거예요. 정말 좋아하는 말이 ‘교육은 양동이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불을 지피는 일이다’라는 예이츠의 말인데요. 저도 옥스퍼드 가기 전까지는 교육이란 지식을 머리에 채워서 시험을 잘 보고 점수를 잘 받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아니란 걸 알죠.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했잖아요. 그리고 진학한 옥스퍼드 대학에서 힘들게 적응하던 이야기가 책에도 있어요.


그곳에서는 굉장히 철학적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진리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인가와 같이 근원적인 것들을 생각하도록 훈련 받았거든요. 더 나아가 이런 사고 훈련을 통해 예이츠가 표현한 ‘불을 지피는 일’, 그러니까 내가 언제 불이 지펴지는가를 생각해보게 된 거죠. 내가 언제 발동이 되는지, 언제 용기가 생기고, 언제 희망이 생기는지, 그것이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지를 배우게 된 것 같아요.

 

각 나라의 제도와 교육문화를 다루면서 장점과 함께 반드시 단점도 있다는 점을 언급해요. 다만 이것만큼은 배우자, 라고 말하고 싶은 제도나 교육문화를 꼽는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를 딱 꼽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나라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사람들이 다 다르듯 나라도 생김새가 다 다르고 일반화하기 어렵더라고요. 한국은 비교적 미국의 교육 정책을 제일 많이 따랐는데요. 사실 한국과 미국은 너무 달라요. 미국은 굉장히 무서운 곳이거든요. 세계 최강대국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미국에서 살기도 했고, 친구도 많고, 교육 하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미국이야말로 최대와 최고의 기회를 주지만 그만큼 요구하는 게 많은 곳이라는 거예요. 다른 선진국도 비슷해요. 많이 주는 만큼 많이 요구해요. 영국도 그렇잖아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많이 가졌으니까 많이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아니에요. 영국 사립학교에서는 많이 가졌으니까 절제하라고 가르쳐요. 우리가 선망하는 선진국은 학생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가능한 기회를 많이 주죠. 하지만 그렇게 많이 받아 성장하면 정말 기부도 많이 하고요. 선순환이 이루어져요. 

 

미국 교육을 다룬 부분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선순환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말했는데, 그게 한국에는 부재한 거죠.


책에는 ‘청빈’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 청빈정신이 한국에는 아직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요.

 

나라가 사람 같다는 말씀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제도를 수입한다고 그게 잘 정착하는 게 아닌 이유도 거기에 있잖아요. 가령 책에서 언급한 ‘마이스터고등학교’ 같은 사례가 그렇죠.


예를 들어 한국에서 얘기하는 ‘장인’과 독일에서 얘기하는 ‘장인’은 완전히 달라요. 독일에서 ‘마이스터’는 사회적으로 엄청 존경 받아요. 그런 배경이 있는데 이름만 바꾼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한국이 워낙 압축 성장을 해서 수입과 수출이 빨랐죠. 그만큼 많이 실험해본다는 면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요. 진짜 얘기하고 싶었던 건 모든 교육이나 장치가 생겨난 데에는 배경이 반드시 있고, 숨겨진 가치가 있다는 거였어요. 한 나라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 말이에요. 그런 고민 없이 피상적으로 제도를 가져온들 부작용만 낳는 거죠. 게다가 우리나라에도 굉장히 좋은 가치나 배경이 많거든요. 차라리 그런 요소를 가지고 먼저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어떤 가치를 우리가 중요시하고 그걸 배경으로 어떤 것이 생성되어야 하는지를 봐야죠. 순서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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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은 점진적으로


이 책이 새로운 논의를 위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면 한다고도 적으셨죠. 그렇다면 한국 교육이 가지는 가치, 문화적인 전통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비교교육학 박사를 할 때 남북 교육제도를 비교 연구했어요. 지금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있는 이유도 그건데요. 남북 교육을 비교하고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정말 많이 느낀 게 공통적으로 교육열이었어요. 우리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죠. 저는 그것이 굉장한 자산이라고 보거든요.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교육에 투자하려는 마음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의 선순환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요. 사교육은 나빠, 자사고는 폐지해야 해, 이런 거 말고요. 자본주의에는 단점도 많지만 미국은 그것을 선순환 구조로 만들면서 발전해나갔잖아요. 저도 솔직히 제 아이가 공립학교와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면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보낼 것 같거든요. 다만 그런 여건을 갖지 못한 학생들을 어떻게 비슷한 환경에 노출시키고 더 많이 교육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게 아니고요. 저도 한국 현실에 맞는 방법을 더 고민하고 있어요.

 

자사고나 특목고에 대해 재논의 필요성을 강변하기도 했어요.


정치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자사고, 특목고를 보면 폐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부모로써 누구나 자원이 있다면 자녀를 그곳에 보내고 싶겠죠. 인지상정이에요. 부모들은 자녀에게 좋은 환경, 좋은 교육을 주고 싶어하잖아요. 그런데 단순히 정치적 프레임으로 접근해 문제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 같아 많이 아쉬워요.

 

싱가폴 교육을 다루면서 “교육은 정치가 아니다”라고 한 인터뷰이의 말을 전하기도 했잖아요.


물론 그것도 사회적 배경이 있죠. 독재정치였잖아요. 그러다보니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육 정책이 일관성 있게 지속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핀란드 교육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핀란드도 교육부장관이 20년 동안 바뀌질 않았거든요. ‘에르끼 아호’라는 분이 “핀란드의 교육개혁은 점진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함부로 안 바꿔요. 한국은 안 그렇잖아요. 그런데 저는 진짜 마음이 아픈 게, 교육이 자주 바뀔수록 손해 보는 사람들은 사회 경제적 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바뀐 정책에 맞게 돈 있는 사람들, 네트워크가 있는 사람들은 발 빠르게 대응을 하는데 이 부모들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평준화를 이야기하고, 교육의 변화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옹호하려던 계층이 결과적으로는 가장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거죠. 교육 정책에 관해서는 굉장히 숙고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의 ‘알트스쿨’ 같은 경우 디지털 기술의 질적, 양적 팽창에 따라 그에 맞는 모습으로 교육 형태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어요. 한국에는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담론은 많은데 실제로 교육 현장은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거든요.


4차 산업혁명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주변에 물어보면 딱 부러지게 대답하시는 분이 많이 없어요. 그만큼 그 실체가 아직은 굉장히 흐리다는 거죠. 저는 기본적으로 4차 산업혁명도 아직까지는 일종의 프레임이라는 견해에요. 그 실체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만큼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저도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할 듯해요. 코딩 교육, 필요할 수 있어요. 워낙 인터넷이 발달했고, 그 산업이 발전해 있으니까 직업적인 측면에서 배울 수 있죠. 그렇지만 모든 아이들이 코딩을 배워야 할까요? 그건 모든 아이들이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 같아요. 각자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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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또한 가정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이 가정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육적인 태도는 뭘까요?


영국을 다루면서 많이 강조한 건데요. 대화를 많이 나누라고 말하고 싶어요. 옥스퍼드에 워낙 상류층이 많아 그들과 교제를 많이 했는데요.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되게 검소해요. 겉모습으로 상대를 결정하지 않고, 나누는 대화로 상대를 판단하거든요. 대화를 통해 상대의 역사, 가치를 알 수 있잖아요. 그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고요. 독일을 다루면서도 교육이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한국은 교육이라고 하면 학교 안에서의 교육을 많이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학력 파괴의 징후들이 많이 보이죠. 저는 젊은 세대 분들이라도 교육이 학교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셨으면 해요. 교육은 삶에 관한 거잖아요.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또한 가정이고요. 가정 안에서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노력하려고 하는 것은 우선순위를 가정에 두겠다는 거거든요.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대화를 하려고 노력해요.

 

대화를 많이 하면 좋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은 굉장히 능동적인 교육 태도라 학부모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거기에 제가 정답을 드릴 순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의 발달단계에 맞는 태도를 가지면 된다는 거예요. 저희 아이는 만2세를 향해 가고 있는데요. 단어가 트이는 시기라서 저는 이 시기에 맞게 최대한 말을 많이 들려주고 있어요. 책도 보고, 사물도 하나씩 가리켜 영어로 들려주고요. 이것이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교육이죠. 아이에게 비싼 퍼즐을 사주는 것보다 훨씬 큰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이것은 저도 여러 공부를 하면서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 거예요.

 

해외 유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내야 할까요?


일단 학부모님들한테 공부를 엄청 많이 해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유학을 그냥 보내지 마시고요. 이런 책도 사보시고, 염두에 둔 나라가 있으면 그곳에 대한 공부도 진짜 열심히 해보세요. 혹시 바라는 직업이 있다면 그 직업군의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해보고 하셨으면 좋겠어요. 자녀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도 기다려주면서 동시에 학부모님들이 공부를 많이 해보셔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충분히 대화를 하고요. 막연한 로망이 아니라 충분한 대화와 충분한 공부 이후에 결정을 하시면 좋겠어요.

 

첫 책으로 교육에 관한 넓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실 예정인가요?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대학의 차이’라는 가제인데요. 세계의 대학을 살펴보려고 해요. 이번 책이 거시적으로 교육 정책이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면 다음 책은 각 나라의 대표적인 대학을 살펴보려고요. 그 대학의 문화라든지 대학이 추구하는 인재상이나 그 인재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를 리드하고 있는지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려고 하고 있어요. 동시에 융합교육을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요. 저는 옥스퍼드에서 정치, 철학, 경제를 같이 통합하는 과정을 공부했거든요. 지금은 과거보다 훨씬 사회가 복잡해져서 다면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융합교육이 많이 필요하죠. 국내에서도 학제 간 교육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요. 이런 관점에서 어떻게 세계의 대학들이 교육하고 있는지 공부하고 있어요.

 

융합교육이라는 맥락에서 한국의 현재는 어떻게 진단하고 계세요?


서울대학교에서 자유전공학부가 설치되어 있고요. 여러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다만 그냥 학과를 통합한다고 융합은 아니거든요. 엔지니어가 사고하는 법이랑 역사학자가 사고하는 법, 교육학자가 사고하는 법은 완전 달라요. 남편은 역사학자인데요. 맨날 싸워요.(웃음) 사고방식이 너무 다르니까요. 과를 통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들어가서 각 학과가 바라보는 인식론이 무엇이고, 그 틀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는지 먼저 봐야 하고요. 그걸 통합했을 때 어떻게 시너지가 날 수 있는가, 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죠. 그런 연구가 지금 많이 되어가고 있거든요. 저도 같이 공부를 하면서 대학을 바라보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한다고 나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거든요.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 말이에요. 다른 방법도 있는 거니까요.


 

 

교육의 차이김선 저 | 혜화동
먼저 우리 아이들이 진정 행복해지기 위한 최고의 교육이란 무엇인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는 어떤 교육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여울 “5년 전에는 못 썼을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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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러운 것들을 한 데 모으고 싶었다. 그래서, 잡지였다. 의도만큼이나 이름도 담백하다. 『월간 정여울』 . 모양도 빛깔도 제각각인 재료들이 하나의 그릇에 담겼다. 어떤 고민은 파랗고 어떤 사유는 노랗고 어떤 감정은 붉다. 그런 다채로움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콜록콜록’ 아파하고 ‘와르르’ 무너지고 ‘와락’ 끌어안으며 이어지는 삶, 그 속의 이야기를 일 년 동안 펼쳐 보일 계획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와서 정여울과 당신의 마음을 가만히 두드릴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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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는 못 썼을 책이에요


오래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하신 책이 아닐까 싶어요.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10년쯤 전이었어요. 『월간 정여울』 은 잡지의 형식을 반 정도 빌려온 거고, 수필집에 더 가까워요. 단행본처럼 하나의 주제가 있는 게 아닌 잡스러운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 글들이 왜 한 권에 실렸지?’ 싶을 정도로 안 어울리는 글들도 섞어 놓고 싶었던 거죠. 그게 잡지의 성격이잖아요. 저는 ‘잡’이라는 글자를 너무 좋아해요. 잡스러운 것이 우리의 본성인 것 같아요. 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욕망들이 있잖아요. 그건 하나로 연결되거나 일관되게 정리되는 게 아니죠.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들이지만 조화롭게 담아내고 싶었어요. 아직은 처음이라, 수줍은 마음에 과감하게 다 넣지 못한 것 같은데요(웃음). 점점 더 과감해질 예정이에요. 새로운 글을 많이 써보려고 해요.

 

수필은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잖아요.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5년 전만 해도 못 했을 것 같아요. 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많았거든요. 내 이야기는 별로 재미없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런데 저를 솔직하게 보여줄수록 독자들이 더 많이 공감하더라고요.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첫 번째 에세이집인데, 그때부터 독자들과 더 친밀해졌어요. 새로운 독자도 많이 생겼고요. 저를 드러낸 이후에 생긴 변화인 것 같아요. 상처나 부끄러운 부분도 이야기하면서 저도 자유로워졌고요. 독자들도 저를 편하게 여겨준 것 같아요. 마음이 편해졌고 글을 쓰는 보람을 느꼈어요. 생각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공통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공감대를 찾는 게 훨씬 더 쉬워졌어요. 그게 에세이의 힘인 것 같아요.

 

‘이것까지 드러내도 될까?’라는 자기검열을 하셨던 건가요?


많이 했죠. 그게 오히려 나를 제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많이 엷어졌어요. 자기검열을 낮추니까 글쓰기가 더 자유로워졌고요. 매일 조금씩 자기검열을 낮추려고 노력해요. 『월간 정여울』 1월호에도 저의 흑역사에 대해 썼지만, 2월호에서는 첫 챕터부터 나오는데요(웃음). 그런 걸 쓸 때는 정말 힘들어요. 별 거 아닌 이야기 같아도 거기에 얽혀있는 사람들이 있고, 나만의 이야기는 아닌 거니까요. 그런데 막상 써놓고 나면 상처와 거리두기가 되면서 객관화되더라고요. 그때 잘못했던 것들이 조금 더 잘 보이는 거죠. 치유는 대면을 통해서만 가능한 거예요. 일단 나 자신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해야 되죠. 상처로부터 일단 도피하는 건 제일 안전한 방법이지만, 치료는 안 되더라고요.

 

단행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을까요?


단행본의 경우에는 조금 묵혀놓은 글이 들어가게 돼요. 2~3년 전에 썼던 글이 들어가기도 하고. 정리하고 고치는 과정에서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월간 정여울』 은 3~4일 전에 쓴 글도 실어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며칠 전에 쓴 글들을 제일 많이 넣어요. 예전에 썼던 글 중에서 단행본으로 묶기 힘들거나 저의 소중한 부분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도 넣기는 하지만요.

 

잡지인 만큼 시의성을 놓칠 수 없겠죠.


네, 그런데 시의성이라는 게 트렌디함이 아니고요.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 지금 같이 고민하고 싶은 걸 넣고 싶은 거예요. 그럴 수 있다는 게 스릴 있고 좋았어요. 지금 여기의 생각이나 고민들을 담는 게 『월간 정여울』 만이 할 수 있는 글쓰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재밌어요.

 

 

마음의 빗장을 열고 싶어요


열두 권의 제목이 이미 정해졌더라고요. 다 의성어, 의태어인데 이유가 있나요?


글의 느낌에서 뽑아온 거예요. 제 글 속에 의성어나 의태어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의성어는 글인데 음악 같고, 의태어는 글인데 그림 같잖아요. 그래서 의성어, 의태어를 좋아해요. 그림을 그린 듯이 말하고 음악을 듣듯이 글을 쓰는 게 너무 좋아요. 저를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도 해요. 어떤 주제에 함몰되지 않고 느낌만 비슷하면 되는 거죠. 아주 느슨한 어울림인 거예요. 1월호에 실린 글들만 봐도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아요. 어떤 건 에세이 같고 어떤 건 칼럼 같죠. 인터뷰도 들어가 있고요. 다 달라요. 통일성이 있는 단행본과 달리 훨씬 더 자유롭죠.

 

1월호 제목이 ‘똑똑’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소통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되지?’라는 고민을 하면서 정한 거예요. 처음 만나면 서먹한 분위기를 깨고 더 친밀해지려고 다양한 시도들을 하잖아요. 농담을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농담은 잘 못하고(웃음), 단도직입적으로 저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 빗장이 있는데, 내가 열어야 다른 사람도 열거든요. 그러니까 ‘똑똑’은 제 마음의 빗장을 여는 소리이기도 하고, 독자들의 마음의 빗장을 여는 소리이기도 하죠. 그런데 꼭 열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열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똑똑’ 두드리기만 한 거니까요. 응답은 독자 분들이 해주시면 되는 거죠.

 

안진의 화가의 그림이 함께 실려 있고, 작품에 대한 글도 쓰셨어요.


안진의 화가님에 대한 작가론을 짧게 써 놓은 게 있었어요. 그게 책에 실린 글인데요. 해설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제가 그림을 보는 방식과 느낌을 썼어요. 쓰는 게 힘들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 굉장히 즐겁더라고요. 이런 글도 계속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문적인 미술 평론이 아니라, 미술을 사랑하는 평범한 감상자의 입장에서 쓰고 싶은 거죠. 지금 고흐에 대한 책도 준비하고 있어요. ‘고흐로 가는 길’이 가제인데요. 『헤세로 가는 길』처럼 고흐에게 가는 길도 한 번 걸어보고 싶어요.

 

매 호마다 화가들의 그림이 실리나요?


그림과 글이 대화하는 모습이 됐으면 좋겠어요. 잡지는 광고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런 잡지는 저랑은 조금 안 맞는 것 같아요. 광고는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들잖아요. 더 욕망하도록 자꾸 부추기죠. 그렇게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를 쉬게 하고 사유하게 만들고 영감을 자극해주는 그림을 싣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창조적인 영감이 있거든요. ‘똑똑’이라는 제목에는 예술의 입김, 글쓰기의 따뜻함이 일상에 활력이 되고 영감을 불어 넣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담겨 있어요.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건데요. 그림이 그런 역할을 해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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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쓰임을 찾지 못했을 뿐이에요


2월호 표지는 남경민 화가의 작품이죠?


네, 고흐의 방을 살짝 엿보는 듯한 느낌의 그림이에요. 고흐는 자신의 아픔을 담아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게 최고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됐잖아요. 2월호는 ‘고통과 아름다움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은 책이 될 것 같아요. 당신이 앓고 있는 고통이 결코 혼자 앓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공감한다면 제3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창조하는 이유는 ‘고통을 통한 승화’인 것 같아요. 고통을 승화시켜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굉장히 강한 거죠.

 

‘콜록콜록’이라는 제목이 고통과 관련 있는 것 같아요.


아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나타낸 거예요. 제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예요. 아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제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처음에는 제가 아파서 글을 썼어요. 그런데 지금은 저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 비슷하지 않아도 혼자 아파하고 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글을 더 써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과 치유라는 길로 가기 위해서 글도 있는 것 같거든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상처를 통해서 더 많이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겪어봤기 때문에 치유하는 방법도 알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콜록콜록’은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한 몸짓을 담은 책이에요. 상처를 통해서 예전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로 비상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 됐으면 좋겠어요.

 

“판단은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지만 사유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판단적으로 되어 버렸어요. ‘이게 쓸모 있는 건가, 쓸모없는 건가’라고 생각해요. 그건 판단이지 사유가 아니거든요. 거기에서 이야기가 끝나 버려요. 쓸모없는 거라고 판단되면 생각을 안 해요. 예전에 과학자들이 ‘쓰레기 유전자’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모든 유전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쓸모없는 유전자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쓰임을 찾지 못한 유전자, 아직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신비로운 유전자인 거죠. 그걸 쓰레기 유전자라고 이름 붙인 과학자들의 폭력성이 굉장히 황당했어요. 저는 그게 판단이고 인간의 성급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판단이 아닌 사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쓸모 있다고 생각해야 돼요. 세상의 모든 생각이 다시 한 번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되고요.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실수를 덜할 수 있어요. 어떤 사물의 가치, 존재의 가치, 생명의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고요. 그래서 판단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유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건 유죄야, 무죄야’라고 판정하는 건 생각을 끝내버리는 거예요.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던지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고,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있을 때도 있잖아요. 회색의 수많은 스펙트럼 속에서도 다 농도와 채도가 다른 거죠. 그 농도와 채도를 밝히는 게 글쓰기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판정될 수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게 글쓰기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월간 정여울』 이 개인적으로 미친 영향이 있다면요?


예전에는 글을 써놓고도 잊어버리거나 어디에 뒀는지 모르고 한참 찾을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글을 쓰면서 ‘이건 『월간 정여울』 열두 권 중에 어디에 넣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마음속에 커다란 방이 생긴 거죠. 열두 개의 방이 딸린 거대한 저택이 생긴 거예요. 부자가 된 느낌이에요. 방에 어울리는 가구를 배치하듯이 ‘이 글은 어느 방에 어울릴까’를 생각하면서 글을 써요. 그런데 그 집은 저 혼자만 사는 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집이에요. 누구나 와도 되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집이에요.


 

 

콜록콜록정여울 저 | 천년의상상
어디에선가 아프다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깊고 넓은 ‘마음의 안테나’를 드리워, 우리 안의 비밀스러운 감정, 꾹꾹 눌러 참아도 터져 나오는 응어리들을 감싸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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