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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해 “얼굴 있는 커피를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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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란 무엇인가?


한 과학자는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커피나무와 커피콩의 특징, 커피의 역사와 커피의 향 성분을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로스팅의 원리와 로스팅 과정에서의 미세한 변화까지 꼼꼼하게 공부한 이 과학자는 이러한 접근이 밝혀내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 커피에 있음을 깨닫는다. 『커피 과학』을 쓴 일본의 미생물학자 탄베 유키히로의 이야기다.


이 책을 번역한 후지로얄코리아의 윤선해 대표는 번역을 출판사에 먼저 제안하기도 했지만 책을 번역한 후 “저자가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커피는 무엇보다 ‘맛’이며 커피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윤선해 대표. 그는 지금 국내의 커피 상황을 “과도기”라고 진단했다.

 

“지금 커피가 맛있어져 가는 단계인 것 같긴 하거든요. 워낙 붐이라 전 세계의 좋은 기계들이 다 한국에 들어와 있고, 써볼 기회도 많아요. 지금은 얕고 넓게 경험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일본에서 15년을 지내는 동안 전공 공부보다 커피 공부를 더 열심히 한 윤선해 대표는 2010년부터 일본 후지로얄의 커피 기계를 판매하고 있다. 역사가 깊은 일본의 커피를 오랫동안 마셔왔던 경험이 행운이라는 그는 『커피 교과서』의 저자 호리구치 토시히데, '카페 바흐'의 타구치 마모루로 같은 스승이자 지인들과 교류하며 일본 커피의 다양성을 체험했다. 자신의 소중한 커피 이야기를 많이 알리고 싶다는 윤선해 대표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동네 로스터리샵의 단골이 되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인들한테 추천할 카페가 없다는 건 슬픈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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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보이지 않는 세계


‘커피’와 ‘과학’, 의외의 매칭이죠.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는 것은 좀 더 감각적인 영역일 텐데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일도 의미가 있더라고요. 여기에 더해 “과학만 가지고는 결코 좋은 상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저자가 몸소 실험한 결과로 반증해내는 과정이 내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라고 역자 후기를 썼어요.

 

맛이니까요. 요리할 때도 그렇잖아요. 대부분 경험에서 와요. 햅쌀은 자체에 수분이 많으니 물을 조금 적게 넣고 묵은쌀은 수분이 적으니 물을 조금 더 넣는다, 이건 경험이죠. 커피콩을 봐도 그래요. 경험으로 구분이 되는데요. 기계, 프로그램에 의존한다고 과학이 아니거든요. 그건 단지 숫자인데 그것을 과학적인 로스팅, 과학적인 추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또 커피를 내리면 맛을 봐야 하잖아요. 자기가 내린 커피를 손님이 어떻게 느끼는지 자기도 느껴야 하는데요. 모든 과학적 기준으로, 숫자에 맞췄기 때문에 이걸 맛있게 느끼지 않으면 당신이 이상한 거다, 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이 책은 커피에 대한 과학 이야기지만요. 장사하는 사람에게 커피는 서비스고요. 집에서 마시는 사람에게 커피는 기호예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는 건데 커피를 하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보이는 것에만 관심두면 안 된다는 말이 날카롭게 들려요.


어떤 콩인지, 콩이 어떤 맛을 내는지 평가하는 능력 없이 기계 놓고 하면 카페를 쉽게 할 수 있잖아요. 또 쉽게 관두고요. 고민하는 시간이 없는 거죠. 기술을 터득하기에는 너무 짧은 주기인 것 같아요. 2년 정도 해보고 할 만큼 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이런 전반적인 것들이 안정되지 않으니까 커피도 성숙할 수가 없고, 기술도 성숙하지 못하죠. 게다가 원료가 되는 커피가 수입되는데요. 이것도 농산물이기 때문에 좋은 원료가 계속 들어오기 힘들거든요. 중국이 커피를 더 마시기 시작하면 지금의 조건으로 커피를 국내에 들여오기 힘들 거예요. 와인이 그랬어요. 좋은 와인 가격이 조금씩 비싸진 이유가 중국에서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커피가 그럴 거예요. 지금도 조금씩 그렇게 되고 있어요.

 

책의 저자 탄베 유키히로는 일본의 미생물학자예요. 동시에 커피 마니아로 유명하고요. 무엇보다 일본 커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던데요.


일본은 전쟁 전에 이미 커피를 마셔왔고요. 전쟁을 겪으면서 커피가 부족한 시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대용 커피라고 해서 대두를 볶아 커피의 쓴맛을 내는 노력을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러면서 기술이 발달했어요. 좋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커피의 맛을 내는 고민을 엄청 한 거죠. 지금 우리는 스페셜티가 일반화되어 있잖아요. 비싼데도 좋은 커피를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비싼 기계 사두고, 커피콩만 좋은 것 사다 넣으면 기본은 하거든요. 그러니까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요. 자기가 볶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콩이 어떤 맛을 가지는지 평가하는 능력도 없고요. 일본은 책도 없고, 정보도 없던 시기에 잘 가르쳐주지도 않는 선생님 밑에서 계속 맛을 보고 스스로 맛 공부를 해야 했어요. 그렇게 기억한 맛이 있으니까 자기가 로스팅을 하거나 추출해서 먹을 때 맛 차이를 알죠. 저자도 지금 로스팅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게 자연스럽게 커피를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하기도 했고요.


앞서 중국 얘기를 했는데요. 커피를 들여오던 좋은 생산지를 중국에게 뺏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본은 과거 커피가 없던 시절을 겪었고, 좋은 원두가 없어지더라도 좋은 커피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거든요. 고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일반 커피를 잘 볶는 기술이 있는데요. 우리는 고민했던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우리는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보고 있어요.

 

책의 번역을 먼저 제안하셨다고요.


저자는 20-30년 전부터 커피에 관한 글을 썼어요. 블로그라는 세계가 일본에 처음 태동했을 때부터 커피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올리는 글이 보통이 아니니까 팬들이 생겼었나봐요. 제 지인들 중에도 저자를 아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과학자니까 실험실에서 일과 시간 외에 커피 분석 연구를 해서 그 결과를 블로그에 공유했죠. 책에도 카페 바흐의 타구치 마모루 선생님이 나오는데요. 그분과 저자가 또 교류를 해요. 저자는 커피를 과학적으로 다 분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못했거든요. 그렇지만 타구치 선생님은 하죠. 특히 로스팅에서 더 그랬어요. 찰나의 순간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데 로스터는 연기의 모양과 속도, 수증기의 모양, 콩 색깔의 변화, 로스팅 소리, 냄새 등으로 전에 로스팅 한 것과 똑같이 만들어 내는 거예요. 결국 이건 사람이 하는 거라고 저자는 얘기해요. 저자는 로스팅을 ‘작은 우주’라고 말했는데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거죠.

 

 

소비자는 맛있는 것만 골라 마시면 되죠


이미 국내에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 같은데요. 프랜차이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계속 확장이 될까요?


우리나라 인구가 많지 않으니까 프랜차이즈를 하지 않으면 타산이 안 맞아요. 자영업자들도 분점을 내잖아요. 그런데 전문가가 아니니까 경영 기술 등의 부족함 때문에 어렵죠. 커피와 사업은 별개거든요. 커피로 성공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프랜차이즈 사업을 해서 성공한 거예요. 지금 그런 혼돈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커피만 하겠다고 하면 커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해요. 또 앞으로는 프랜차이즈도 다양화 될 거예요. 카페에 웹툰이나 옷, 꽃 등이 같이 들어가는 형태도 생길 거고요. 지금도 작은 매장들 중에는 그런 곳들이 있거든요. 그게 점차 프랜차이즈로 번질 거라고 봐요.

 

현재 국내 프랜차이즈의 커피에 대한 대표님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소규모 프랜차이즈가 있는데요. 요즘은 대기업이 되게 잘해요. 돈을 많이 주니까 인재들도 몰리고요. 실제 공장 같은 곳의 설비도 훨씬 좋죠.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마음먹고 투자하면 게임은 끝나요. 자영업자들이 해낼 수가 없어요. 일본은 가업으로 대를 잇거나 하잖아요. 반대로 우리는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기 싫다면서 안 가르쳐요. 특징을 살릴 수가 없고, 역사도 없죠. 그러니 대기업 프랜차이즈와 비교할 때 이길 만한 게 하나도 없어요. 쉬운 게임이 아닌데요. 물론 그럼에도 잘하는 사람들은 있겠죠.


얼마 전에 동대구에 갔는데요. 커피를 샀는데 오래된 냄새가 나서 버렸어요. 그래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가서 마셨거든요. 너무 맛있는 거예요. 이렇게 커피 질이 꾸준히 유지되면 다른 자영업자들 커피는 경쟁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프랜차이즈 카페도 종종 가세요?


가긴 가요. 저희 고객 중에 대기업 프랜차이즈도 있고 하니까 안 갈 수는 없죠. 하지만 가서 가급적이면 커피를 안 마셔요.(웃음) 카페라떼나 계절 과일 주스 같은 것 마시고요.

 

출산지보다 원두의 크기나 함수율 같은 물리적 특징이 커피의 특징을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책의 내용도 있었는데요. 대표님은 어떤 커피를 좋아하세요?


지금 카페를 가보면 케냐AA, 탄자니아, 에티오피아처럼 단품만 쭉 적혀있어요. 그런데 커피를 오래 한 사람들한테 단품은 너무 밋밋하죠. 요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블렌딩을 하는데요. 그것도 그냥 섞는 건 아마추어죠. 전에 ‘문블렌드’라고 해서 화제였잖아요.(웃음) 그건 하나의 마케팅으로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블렌딩은 요리의 소스처럼 소재를 아는 사람이 각각의 소재를 활용해서 원하는 맛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게다가 소스를 얹어 먹는 메인 요리에 따라 변주가 가능한 작업이잖아요. 그게 블렌딩이거든요. 그냥 이 커피만 마실 건지, 어떤 계절에 가장 즐겨 먹는 음식과 같이 마실 건지, 와인을 마신 다음 입가심으로 마실 건지,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해야 해요. 저는 제 것을 고를 수는 있어요. 선택지를 많이 두고 있고, 그렇지만 질리지 않는 매일 마시는 커피도 하나 만들어두고요.

 

대표님은 블렌딩을 요청하는 ‘프로’가 있다고요.


네, 저는 프로한테 요청할 때 원두 무엇과 무엇을 섞어달라고 하지는 않고요. 어떤 맛, 어떤 맛이 어떻게 나게 만들어주세요, 라고 해요. 그렇게 만들어주시면 맛을 보고 “여기에는 케냐를 조금만 더 볶아주세요”라는 식으로 조금씩 조절을 하죠. 그것이 저한테는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비율은 없어요. 가지고 있는 콩이 늘 똑같지 않으니까요. 지난 주 로스팅 원두와 이번 주 로스팅 원두의 함수율이 다르잖아요. 어떤 콩이 떨어지면 다른 콩으로 그 뉘앙스의 맛을 내도록 할 수도 있고요. 이게 커피 프로들이 하는 일이거든요. 그걸 누군가에게 비율로 얘기한다고 같은 맛이 나진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맛은 질리지 않고, 바디감 있으면서 깊이 있는 맛이에요. 그것은 가령 에티오피아일 수도 있고,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을 섞은 것일 수도 있죠.

 

책에서도 느낀 거지만 원두의 산지나 크기 같은 것 못지않게 로스팅 자체가 커피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것 같거든요. 


그럼요. 하지만 그걸 소비자는 몰라도 돼요. 소비자는 맛있는 것만 골라 마시면 되죠. 어떻게 볶았는지, 그것까지 알면 로스터들 먹고 살기 힘들어져요.(웃음) 중요한 건 같은 콩을 가지고 어떤 로스터가 어떻게 볶았는지에 따라, 어떤 맛을 표현하고 싶어 했는지에 따라 엄청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거예요. 로스터가 얼마나 맛의 경험을 많이 가졌느냐가 결과를 크게 좌우하죠. 그래서 맛의 경험을 많이 가진 로스터가 잘 볶는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맛을 볶아내는 거죠. 그렇지 않고 로스터가 특정 맛만 맛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맛만 만들어내겠죠. 여러 맛을 낼 수 있는 로스터가 트렌드에 맞는 맛을 선택해서 하는 것과 그 맛만 할 줄 아는 사람이 그 맛을 하는 것은 천지차이잖아요. 그런데 아직 한국은 후자인 것 같아요. 지금은 그 맛이 인기가 있고, 트렌드고, 장사가 잘 되니까 그게 맞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커피를 잘 모르는 분들이 그렇게만 쫓는 경향이 있어요.

 

맛의 취향, 선호하는 맛이라는 것도 계속 바뀌게 마련인데요.


그러니까요. 트렌드는 바뀌어요. 와인 비유를 종종 하는데요. 와인 잘 모른다는 분에게 주면 무조건 맛있다고 하는 와인들이 있거든요. 약간 달고, 산미는 적고, 탄닌도 약하고, 목 넘김이 좋은(웃음), 칠레 와인 같은 건데요. 그것만 먹다보면 질리죠. 그래서 다음 단계로 가요. 그렇게 도는 순서가 있어요. 식력(食歷)이라는 말이 참 와 닿았는데요. 식력이 어느 정도 쌓인 사람들이 음식을 잘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충분한 식력을 가진 민족이기 때문에 커피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어요. 커피도 발효음식이니까요. 또한 로스팅, 구워 먹는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이미 있고요. 다만 아직은 유행이라는 것 때문에 다소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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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필요하지 않을까


좋은 커피란 어떤 것일까요?


좋은 커피는 식어도 맛있어요. 식어도 액체가 깨끗해요. 혹시 어떤 게 좋은 커피인지 잘 모르겠다면 커피를 식혀서 보세요. 위에 하얀 막이 끼어 있으면 절대 드시면 안 돼요. 몸에 나빠요. 커피에는 기름 성분이 있어서 산패가 되거든요. 맛도 없고요. 또 로스팅이 적절하게 잘 된 것이어야겠죠. 덜 볶이지 않고요. 로스팅을 할 때 불 조절을 잘못하면 겉은 타고 안은 안 볶일 수 있거든요. 그건 나쁜 커피인 거죠. 또 결점두는 그 자체로 나쁘고요. 그러니까 원래 커피가 가진 좋은 맛이 아닌 것들은 다 나쁜 거예요. 탄 것, 덜 볶인 것, 기름이 나온 채로 오래 돼서 산패된 것, 잘못 볶여서 풋내가 나는 것 등이 그런 것이죠.

 

말로 들어서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 것 같고요. 결국 직접 마셔보고, 차이를 느껴야 알 것 같아요. 


커피에는 기름이 있어서 그 맛이 잘 표현되면 바디감 있는 좋은 커피라고 하거든요. 맛을 경험하면 딱 와 닿을 텐데요. 그걸 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곳이 많지 않아요. 실은 커피도 배울 수가 있죠. 그런데 아직 그렇게 배울 만한 곳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마셨는데 시고 못 먹겠다 싶으시면 버리시면 돼요. 우리는 된장, 김치 같은 발효의 세계에서 미각이 훈련되어 있거든요. 물론 둔한 분도 있지만 우유, 두부 같은 거 쉬었는지 아닌지 알잖아요. 이미 다양한 식문화를 체험한 사람들이라 프랜차이즈든 개인 카페든 자기 입맛에 맞는 커피가 있다면 그게 그 사람에게 맞는 커피인 거예요. 물론 더 좋은 커피를 경험하면 미각은 또 달라지는 거고요. 그게 미각의 재미있는 점이죠. 그렇게 미각에 자신이 생기면 덜 볶인 것, 탄 것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된다고 봐요.

 

지금은 그것을 정교하게 구분하지는 못하는, 경험을 쌓는 단계라는 거군요.


아직은 안 탔는데도 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요. 덜 볶였는데 신 커피가 트렌드라고 생각하고 참고 마시는 분들도 있어요. 잘 모르니까요. 또 아주 뜨거울 때는 산미가 덜 느껴지니까 괜찮게 마시다가 식으면 강하게 느껴지는 커피가 있거든요. 뒤가 당길 정도로 신 커피는 잘못된 거예요. 우선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커피를 식혀서 마셔보세요. 저도 가끔 유명하다는 곳의 원두를 사다가 하룻밤 커피를 식혀서 맛봐요. 그럼 알 수 있어요.

 

대표님은 국내에 안심하고 찾는 카페가 있나요?


아니요, 오늘은 맛있어도 내일 맛있으리란 보장이 없어요. 아직 한국이 과도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거예요. 우리는 기술이 있고, 머리가 좋거든요. 금방 배우죠. 좋은 점을 잘 가져오잖아요. 현재 일본에서 유행하는 카페 스타일, 인테리어 같은 것도 그 모양새는 흉내를 잘 내요. 그런데 깊이는 아직 다 쫓아가지 못한 것 같아요. 역사가 짧으니까 다 알기도 힘들고요. 안다고 해도 우리는 속도가 중요하잖아요. 빨라야 되는데 이런 환경에 깊이를 더하려고 시간을 투자한다고 한들 누가 거기 돈을 더 내겠어요. 저희 기계가 주문 제작이거든요. 45일 걸려요. 그런데 못 기다리시죠. 주문 제작이 저희의 차별점인데 그걸 현재 한국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어요. 키가 작은 사람에 맞는 높이, 눈이 나쁜 사람이나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에 맞는 조건을 만드는 게 저희 특기거든요. 그런데 할 수가 없어요.

 

주문 제작이 되레 단점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네요.


커피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는 보통 기계를 산 후 커피를 배우잖아요. 일본은 그렇지 않아요. 우선 책부터 사죠. 강연 같은 곳에 가서 먼저 한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요. 그렇게 해보고 한 2년 뒤에 기계를 사요. 우리도 시간이 조금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커피가 맛있어져 가는 단계인 것 같긴 하거든요. 생두 관련해서는 직접 무역도 하고요. 워낙 붐이라 전 세계의 좋은 기계들이 다 한국에 들어와 있고, 써볼 기회도 많아요. 지금은 얕고 넓게 경험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고요. 일단 마시기는 하는데 잘 모르지만 맛없는 것 같아, 정도 수준에서 멈추거나 조금 듣기는 해서 어디 커피 요즘 유명하더라, 라고 해요. 하지만 그 커피도 매일 맛있진 않아요. 매일 잘 볶지도 않고요. 그렇다고 매일 맛없지도 않거든요. 아직 그렇게 브랜드에 좌우될 만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아요.

 

책에서도 맛있는 커피는 주관적인 영역이지만 좋은 커피냐 나쁜 커피냐는 객관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고 있어요.


제가 제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예요. 사람들이 커피는 취향이라고 많이 얘기하잖아요. 다른 사람은 맛없다지만 나는 맛있다고 할 수 있잖아요, 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요. 취향을 논하는 건 어느 정도 기본 퀄리티가 갖춰진 이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퀄리티가 안 갖춰진 곳도 있어요. 좋은 커피인데도 맛없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나쁜 커피, 질이 나쁜 커피는 맛없을 확률이 100%예요.

 

 

동네 로스터리샵의 단골이 되세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영역, 감각으로만 느끼는 면이 커피의 매력이자 어려운 점이기도 할 거예요. 25년 커피 덕후로(웃음) 살아온 입장에서 커피에 대해 아직도 어렵다고 느끼는 점은 뭔가요?


어떻게 이렇게 볶았을까.(웃음) 똑같은 커피인데 어쩜 이렇게 잘 볶았을까 싶을 때가 있어요. 절대 따라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일기일회(一期一會)라고 하죠. 딱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게 커피 맛에 있어요. 그 맛을 저장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게 커피의 신비함이죠. 서랍에 담을 수 없는 맛이 있거든요. 맛은 경험한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한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어요. 책에서도 저자가 커피의 쓴맛, 신맛 등을 내는 성분을 다 조사했잖아요. 그리고 그 성분을 다 섞어봤어요. 똑같이 했는데도 그 맛이 안 나는 거죠. 지나치게 쓰거나 했대요. 과학적으로 분석은 되지만 그 수치대로 해도 맛을 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맛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로스팅으로 그 맛을 만들어내요. 로스터는 성분을 몰라도 만들어 낸다는, 그 감각과 예술의 세계가 커피에 있죠. 과학은 절대 할 수 없죠.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고요. 저는 번역을 하고 이 저자가 너무너무 좋아졌어요.

 

로스팅이 커피 맛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데 정작 주문 제작 기계는 기다리지 못하는 지금의 국내 상황에 대한 고민도 많으시겠어요.


현재는 커피를 하는 사람과 사먹는 사람의 수준 차이가 크지 않다고 봐요. 이렇게 말하면 오랫동안 커피 하던 분들은 기분 나빠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문화라고 하기에는 기반이 약한 것 같아요. 유행이라고 볼 수 있고요. 이 붐이 한 번 꺼져야 거기서 살아남은 싹들이 서서히 꽃을 피울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운 좋게 그 과정을 볼 수 있는 시기에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죠. 지금은 엄청 과도기라고 봐요. 처음엔 화도 났어요. 맛이 이상한 걸 모르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저도 기껏해야 25년 마셨는데, 생각했죠. 나도 5년 마셨을 때 다 안다고 생각했어(웃음)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 같아요. 커피가 상한 줄도 모르고, 덜 볶인 것도 모르고 집에 과테말라, 케냐AA, 이런 것 다 갖춰놓고, 딱 그 맛이 과테말라인 줄 알고 그런 과정을 다 지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전반적으로 커피에 대한 이해 정도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좋은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실 계획이시죠?


좋은 커피는 장사를 하는 사람의 기본이죠. 그런데 이걸 못 지켰지만 엄청 정성스럽게 한다면 그 정성이 마음에 들어서 단골이 될 수도 있어요. 정말 정성스럽게 한다면 좋은 커피를 가르쳐줄 수도 있을 거고요. 제가 그냥 소비자라면 맛있는 커피만 사서 마시면 될 텐데 이제 저는 이런 책도 번역하고 그랬잖아요. 번역한 책이 네 번째인데요. 책을 낼 때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의 커피 안에서의 역할을 느껴요. 자기만족의 영역이 있긴 하지만 내가 아는 정보를 잘, 좋은 방향으로 필요한 사람들한테 전달할 수 있고 경험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희 회사에서 하는 세미나도 있거든요. 이런 책을 쓴 분들이나 책에 등장하는 선생님들을 초대해서 이야기도 듣고 해요. 한국에서 고민하는 로스터들의 의문점을 듣고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그게 제 역할처럼 느껴져요. 지인들한테 추천할 카페가 없다는 건 슬픈 일이잖아요.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커피를 좋아하는 분들이 커피를 좀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먼저 자신의 입맛에 자신을 가져야 해요. 유행에 끌려 다닐 필요 없어요. 맛없는 건 마시면 안 돼요. 그리고 프랜차이즈보다는 동네에 있는 카페를 가보시면 좋겠어요. 정말 정성을 다해 볶는 분들이 있을 거거든요. 동네 로스터리샵이 있다면 그곳의 단골이 되시면 좋아요. 필요할 때 바로 걸어가서 사올 수 있는 곳을 찾아두세요.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취향을 설명해주면 실패하지 않죠. 절대 얼굴을 알고는 사기 못 쳐요.(웃음) 좋은 커피를 얻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인터넷보다는 동네에서 사시면 좋겠어요. 공생이잖아요. 커피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매개체로 생각한다면 관계가 중요해지죠. 조금 커피 맛이 떨어지더라도 얘기 나누고, 다음에는 좋은 커피 더 얻기도 하고요. 이것도 커피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단골이 50%만 되면 절대 망하지 않거든요. 저는 동네 카페들이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얼굴 있는 커피를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커피 과학탄베 유키히로 저/윤선해 역 | 황소자리
나처럼 커피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 이과가 좋은 사람, 지적 모험을 즐기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커피가 좋은 사람들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주는 한 권의 책이 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임옥상 화백 “거리 자체가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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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개의 캔버스, 가로 16미터의 대작 <광장에, 서>는 임옥상 화백이 2016년 촛불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담아낸 그림이다. 청와대 본관에 전시되기도 해 큰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을 가리켜 임옥상 화백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담았다고 말했다. 해 같기도, 달 같기도 한 촛불의 이미지는 광장에 들꽃처럼 흐르고, 그 아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표정은 ‘이게 나라냐’, ‘탄핵’과 같은 거친 언어와는 달리 평화롭고 단정하다. 임옥상 화백은 언제나처럼 가장 지금의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발언했다.


이 <광장에, 서>를 표지에 담은 『벽없는 미술관』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임옥상 화백의 작품을 화백의 글과 함께 담아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격랑의 시기, 엄혹했던 시대를 몸으로 살아낸 한 작가의 고민과 분노, 무엇보다 희망을 향한 열정이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독재와 비리에 대한 비판, 사회 그늘을 향한 직시를 당국의 감시와 억압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임옥상 화백의 신념이 따갑게 다가온다. 그리고, 현실을 인식하고 두려움 없이 발언하던 화백의 시선은 이제 대중에게로 향한다. “작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중심 이동을 해야”한다는 임옥상 화백은 이것이 분명한 시대의 화두라고 말한다. 미술관은 거리 그 자체여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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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하나의 들꽃이 되면 좋겠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살아오는 동안 지금처럼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정치과민이라고들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내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스트레스가 제일 컸던 것 같아요. 그런 스트레스가 작업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쳤거든요. 이상할지 모르겠는데, 좀 쪽 팔리잖아요.(웃음) 태어나 살고 있는 자기 나라, 자기 땅이 이렇게 유치하고 불의와 부도덕, 부정이 난무하는 곳이라니 말이에요. 그 속에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에요? 그 창피함이 굉장히 컸었어요. 어디 외국에 나가서도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 거북하고 창피스러웠죠.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 또한 그랬고요. 연민과 비아냥거림 같은 것도 많이 받았는데요. 그런 데서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았나 싶어요. 비로소 말이에요. 아직 어처구니없는 일도 종종 있지만요.

 

책머리에 글에서 ‘촛불 전과 후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는데요. 촛불 이후 1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했어요. 


나도 감히 한 공동체의 일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공동체 안에 많은 동지들이 있구나, 하는 건데요. 그것은 큰 위안이 아닌가 생각해요. 내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과 뜻을 같이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은 큰 위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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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에, 서 Tide of Candles_360x1620_캔버스위에 혼합재료_2017

 

표지에 실은 <광장에, 서>는 바로 그 촛불 당시를 잡아낸 작품인데요. 선생님은 이 작품을 가리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그렸다고 설명하셨잖아요. 현재는 청와대 본관에 전시중이고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세상의 더러운 꼴을 다 겪으면서 지냈다고도 할 수 있죠. 시위를 하더라도 시위가 되질 않았었고요. 최루탄을 비롯해 온갖 폭력이 난무했고, 그런 속에서 시위가 진압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역사였기 때문에요. 그런 것을 체험했던 저로서는 광장에 앉아 촛불을 들 때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은 정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죠.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평화적으로 시위가 됐잖아요. 그처럼 아름다운 광경이 이 지상에 어디 있겠어요. 수많은 다수가 하나로 모이고 그러면서도 각각의 독립성을 가졌던, 이건 정말 아름다운 거죠. 우리가 만발한 들꽃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그것을 보면서 ‘나도 하나의 들꽃이 되면 좋겠다’는 느낌을 갖잖아요. 그런 느낌을 거의 그대로 받았었어요.

 

그 순간을 작품으로 증언하고자 하셨던 거군요.


증언까지는 아니고요. 현장에 있었으니 작가로서 이런 걸 제대로 못 그리면 내가 작가가 되겠느냐(웃음) 생각했어요. 하지만 작가로서의 자의식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기보다 그냥 솟아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연스럽게 분출된 것이죠.

 

작업 기간은 얼마나 됐나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구상하는 데 오래 걸렸고요. 사실 어떤 표상, 사건, 경치, 이런 것이 있으면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들잖아요. 하지만 재현해놓고 보면 막상 굳이 왜 저런 걸 재현했는가, 싶어요. 게다가 이 촛불은 얼마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어요? 아마 전 세계적으로 지금까지의 역사 가운데에도 가장 많은 축에 속할 거예요. 그걸 내가 그림으로 한다는 게 부담이 됐어요. 그래서 아예 영상이나 사진처럼 재현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고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렇게 되면서 작업을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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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발언’


1970년부터 2000년까지, 30년의 시간을 한 권의 책에 묶었어요. 개정판이라고 하기엔 수록 작품수나 내용면에서 전혀 새로운 책이고요.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아주 기분이 좋았었어요. 지난날의 자신을 보면서 오늘의 나를 다시 한 번 되짚을 수 있는 시간이 됐고요.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내가 할 작업들이 아니겠어요? 그런 와중에 저의 예전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옛날에도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것들이 발견이 되더라고요. 그것으로 좀 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됐죠.

 

한 자리에 모인 선생님 작품을 보니 과연 ‘현실과 발언(1987년 발족한 민중미술 동인명)’이라는 말이 그 자체로 작품들을 수식할 수 있겠더라고요. 이에 대해 ‘나는 그림 그린다. 숨쉬기 위해, 살기 위해’라고 하셨죠.


현실 인식, 현실에 대한 의식이 그림 그리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현실 인식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좌우될 수밖에 없거든요. 하물며 예술이야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현실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작가한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가장 큰 전기는 대학원 논문 쓸 때였어요. 이전까지 내가 이상한 것을 했다는 첫 깨달음이 있었죠. 그것을 계기로 제가 추상적인, 소위 현대미술이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돼요. 은유의 은유로 하는 작업이 시대 변혁을 시키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실과 발언’에서 시대 현실을 조금 더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나갔던 거예요.

 

그렇게 건져 올린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때는 엄청나게 돌아가는 때였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조심스럽긴 한데요. 적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적 비슷한 것을 보여주고 그게 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적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즉, 시대의 부조리와 독재 권력, 경직된 정치체제, 분단과 분단의 원인을 제공하는 미국 등에 대해서 가급적이면 조금 더 밀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박정희 시절에는 더 위험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는 보다 상징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제 자신을 숨겼죠.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서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즉흥성의 작가’라고 평한 성완경 평론가의 글에 공감했습니다. 표지 작품뿐 아니라 성수대교 사고를 보자마자 만든 <자동차 시대>, 광주를 얘기한 <얼룩>, <종이호랑이> 등이 그렇죠. 2016년 촛불 때는 광장 한 복판에 계셨고요. 선생님의 작품에서 ‘현재성’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탁 떠오르면 딱 작업을 해야 하는 거죠. 직관을 통해 얻어진 것을 그냥 나 혼자 느끼고 말면 그건 작품이 안 되잖아요. 바로 할 수밖에 없는, 해야 하는, 하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는, 그런 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것을 한 선배는 ‘임옥상은 번개 치듯 작업한다’고 했는데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많이 한 말도 그런 거예요. “그림이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잠이 오냐?”고 했었거든요. 시작을 했으면 빨리 끝을 봐야죠. 아니면 집어넣든가 말이에요. 특히나 이 작품을 하는 이유에 따라 더 빨라야 하는 것도 있죠. 어떤 건 정말 시간이 급박한 것도 있잖아요. 여유 있게 서서히 하는 것도 있겠지만요.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런 시대에 있지 못했단 말이죠. 그 속에서 여유를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사는 시대에서 사실상 여유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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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는 마침 아침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식사를 더 이상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자동차 시대, 추락하는 자동차! 그냥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주위에 있는 이것저것을 주섬주섬 모아 땅 위에 육필로 쓴 비망록이다. 그냥 정신병자처럼 만들어 낸 작품이다.(254쪽)

 

 

격랑 속에 있는 물고기


그런가 하면 아크릴부터 시작해 종이부조, 포스터, 컴퓨터그래픽, 설치까지 선생님은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해오셨거든요. 그건 기존의 것을 끊임없이 깨는 과정이었을 텐데, 계속해서 형식과 내용의 변화를 꾀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나의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보는 각도에 따라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요. 저는 한편 이런 생각도 해봐요. 내가 좀 익숙한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고요. 비슷한 것을 가지고 계속 다듬는 게 아니고 자꾸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 해야 풀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본래 작품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작품은 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흘러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시대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니까요. 계속 변하는데 작품이 하나의 목소리로 어떤 한 가지만을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에요. 나는 중심을 도처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심지어는 사람 중심에서 사물 중심, 미물 중심으로까지도 시점을 바꾸어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하죠. 그것을 오히려 나는 상상력, 창의력의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보거든요.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계속 쳐다보면 그게 뭐겠어요? 뻔하잖아요. 역지사지로, 계속 남의 입장에서 중심을 바꿔가며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또 나를 쳐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객을 정해놓고 사는 삶은 굉장히 정체적인 삶이라고 봐요. 주객을 계속 바꿔가며 봐야죠.

 

‘시대의 전위에 서야 한다’는 믿음이 도리어 작품 활동을 어렵게 한 적은 없었나요? 붉은 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압류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80년대처럼 엄혹한 시절을 지내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살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신념이라기보다, 저는 약간 푼수기가 있는 거예요.(웃음) 동료들이 다들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고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그걸 무섭게 생각하지 않고, ‘할 테면 하라고 해’라는 생각으로 한 거예요. 전들 앞뒤 안 따지겠어요? 따질 수밖에 없는데요. 왜 그렇게 그랬는지 말이에요. 하여튼 저도 좀 미스터리한데요. 한 개인이 활동하는 데 가족의 성원이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사사건건 아버지가 불러 야단을 치거나 당국에 본인이 아니라 가족이 끌려갔다면 신념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겠죠.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그렇지 않으셨어요. 지금 102세인데요. 그냥 “조심해라” 정도셨거든요. 그러니까 ‘나 하나 정도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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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조선’이란 말을 써도 관계없다. 귀빈을 모시기 위해 펼친 붉은 카펫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노동자가 두른 붉은 머리띠는 위험하고, 내가 칠한 붉은 황토색은 ‘좌경 용공’이 된단 말인가. 붉은색을 많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은 압류되고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저들의 ‘안보적 상상력’을 누가 말리겠는가.(84-85쪽)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너무 힘든 순간도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있었죠. 작품 빼앗기고, 재직하던 대학의 총장이 계속 지나가면서 한 마디 씩 하고 그럴 때는 힘들었죠. 이상한 교육에 자꾸 저를 보내고 그랬거든요. 블랙리스트가 되니까 늘 최우선 감시 대상이었어요. 자꾸만 호명되고, 몸으로 때워야 하고, 불편했죠. 하지만 이런 격랑 속에 있는 물고기가 어떻게 보면 더 싱싱하고, 힘도 세고, 건강하고 그렇지 않겠어요? 폭포 밑에서 노는 물고기와 계속 폭포를 치고 올라가려고 도전하는 물고기는 다르겠죠.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임옥상은 평화로운, 안정된 시기에 있었으면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웃음) 라고요.

 

 

모두가 건강한 미적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들


우울하고, 실망스러운 90년대 끝에 인사동 거리에서 ‘당신도 예술가’ 활동을 하며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경험하셨다고 하셨죠.


화랑과의 전속 계약이 끝나고 나서 경제적으로 험난한 시기를 보냈는데요. 그것이 저를 다시 변화시켰어요. IMF 직후였거든요. 공공미술에 눈 뜨게 된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냥 ‘이번 주에는 어떤 것 갖고 사람들과 놀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그럴 때였는데요. 연평도에서 싸움이 또 있었죠. 그 두 개를 엮어서 사람들과 같이 놀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그곳에 온 사람들이 박찬호가 되는 거죠. 그런데 뒤에는 폭탄이 터지는 설치미술을 해놓고 같이 논다든가 하는 식이었어요. 부시가 미사일이니, MD체제니 해서 한글날에는 한글로 사람들과 디자인 전시를 하기도 했고요. 재료에도 항상 변화를 주었어요. 안 써봤던 재료들을 막 쓰는 자유도 느껴봤는데요. 지금 하는 작업도 다 그 경험의 연장이에요. 그때 사람들에게 미술이 굉장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사람들이 미술을 참 좋아하는데 우리가 너무 전문가 입장에서만 보지 않았나 싶었어요.

 

이른바 ‘미술의 대중화’이군요.


우리가 사람들을 찾아가고, 같이 무엇을 해볼 생각 안 하고 미술을 모른다고 했던 거예요. 이런 것들을 반성하면서 사람들과 같이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요. 그때부터 공공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미술의 사회적 가능성을 좀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미술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보세요?


미술이란 것이 기회가 닿았고, 전공했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미술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또 생활 속에 미술이 존재하고 있고요. 그런 것들 사람들이 재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 속에서 모두가 스스로 건강한 미적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어디 가서 사람들이 ‘경치 좋다’고 할 때 반박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대부분은 다 비슷하거든요. 지나가는 사람이 진짜 멋있게 잘 입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알잖아요. 이 미감은 다 같이 공유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의 총화가 잘 정제되어 나오는 것이 작품인데요. 이걸 못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아예 미적 안목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는 얘기죠. 반대로 이들이 갖고 있는 미감을 토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해요.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건강하게 미적 실천을 할 수 있게끔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에요.

 

그 토대 위에서 미술 역시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겠죠.


공공 미술이라는 게 그거잖아요. 생활 속에서 미술을 향유하는 거죠. 유통 개념으로, 소유의 개념으로 미술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 예술을 자꾸 집어넣어서 그 안에서만 예술의 가치를 논의하려고 하면 안 돼요. 이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아니, 이걸 가지고 얘기하는 건 예술의 길이 아니죠. 어떻게 보면 예술을 파괴하는 거예요. 오늘날의 화랑 시스템, 경매 시스템은 어떻게 보면 금융 시스템과 똑같거든요. 예술이 이런 시스템을 방조하거나 따라가는, 그런 것으로부터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지켜야 해요.

 

지금 공공미술에 뜻을 두고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작가 개인이 가지는 꿈과 이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죠. 지자체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그런 것들이 거의 안 되어 있어요. 최근에 어느 놀이터 공모에 당선이 되었어요. 그런데 디자인비만 주고 끝이었어요. 시스템이 전혀 받쳐주질 않아요. 그러면서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셈이에요.

 

그렇다면 앞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공공미술이란 어떤 모습으로 진행이 될까요?


내 작품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인간답게,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문화적 요소를 갖추게 하는 데에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재작년에 창신동에 ‘소통공작소’라는 것을 공모해서 했는데요. 제 작품으로 동네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거였거든요. 그때 공모를 하면서 ‘내 작품을 버린다’고 했었어요. 대신 컨테이너로 집을 지었어요. 사람들이 와서 숨겨져 있던 재능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사람들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창신동이 서울에서 단위 면적당 고용 지수가 제일 높은 곳이에요. 거기에 도시재생이라고 해서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사람들은 다 쫓겨나고 결국 집값만 오르겠죠. 저는 그 창신동의 사람들이 그대로 거기에 살면서 계속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도시재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려면 저 같은 예술가들이 개입해서 그들의 잠든 예술성을 깨우고 북돋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생활로 들어오는 장면, 생각만으로도 참 의미가 깊어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한때 일본에서도 1일 2-3취미를 얘기했었는데요. 이제 우리도 그런 사회로 진입해야죠. 취미 하나 정도가 아니라 취미 두세 개를 가지고 자기를 발현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할 거예요. 예술도 작품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중심 이동을 해야 하고요. 저는 이것이 분명한 이 시대의 화두라고 믿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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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로소 출발


책에 담기지 않은 책 이후, 그러니까 2000년대 이후의 임옥상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작품의 공공성’이겠죠. 공공미술이 될 거예요. 제가 1999년에 ‘당신도 예술가’를 할 때만 해도 저를 이상하다고 했었어요. 전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요즘은 지자체마다 그렇게 안 하는 곳이 없을 정도잖아요. 저는 거리가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미술관을 가야하고, 화랑을 찾아 가야 하는 게 아니라 거리 자체가 미술관이 되고, 문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책 마지막 부분에 ‘새 천년은 시민의 사회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과 잘 조응하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사람의 사회, 시민의 사회예요. 촛불의 사회라 볼 수 있겠죠. 이 책을 관통하는 것도 어떻게 인간으로서 인간 정신을 훼손당하지 않고 나의 자유 의지로 사회에 공헌하고, 더불어 즐겁게 세상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이 촛불로 다소 이루어졌죠. 저는 이제 비로소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두 손으로 촛불을 들었었잖아요. 이제는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나머지 손은 또 다른 일을 해야죠. 화가인 저는 그림을 그리고요. 공히 모든 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라면 나머지 한 손에 책을 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즉 인문 사회적인 지식이나 스스로의 철학과 성찰이 없이는 이 촛불은 그냥 타고 말아요. 그런 점에서 책이 촛불과 같이 들려짐으로써 출발점에 선 우리 사회를 앞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비로소 출발’이라는 게 아주 중요할 것 같아요.


저는 어떤 권력도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반하는 것은 모두가 적이죠. 그렇게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권력이 제대로 가지, 우리가 조금만 놓쳐 봐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거예요.

 


 


 

 

벽 없는 미술관임옥상 저 | 에피파니
암중모색의 1970년대, 광주의 핏빛으로 얼룩진 1980년대, 산업화로 우리 전통들이 희미해져가는 1990년까지, 한 개인의 시선을 넘어 1970~1990년대 대한민국 현대사를 살아낸 이들을 위한 생의 기록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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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인 “시는 절대 어려워서는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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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古代)의 융융한 세계”를 꿈꾼다는, ‘꽃 밟을 일을 근심’하는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1987년 등단한 이후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온 장석남 시인. 그가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이후 5년 만에 여덟 번째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을 냈다. 등단 30년 되는 해(2017년)에 출간된 시집이기도 해 더 의미가 깊었던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떠나온 자리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떠나온 자리란 곧, ‘고대(古代)’다. 시인은 대장간을 지나면서도(「대장간을 지나며」), 기차를 타면서도(「검표원」), 고대를 탐구했다. 그에게 고대는 ‘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녹슨 솥 곁에서」)이며, ‘조용한 흥얼거림’(「햇소금」)이 들려오는 곳이었다. 즉, 고대란 우리가 떠나온 동시에 가 닿을 곳일 터. “우리의 과거는 우주에서 왔지만 또 우리의 미래도 우주로 가는 것”이라는 시인은 올 겨울 절에 머물면서 온 존재가 합일 되는 세계를 상상한다. 시인의 절에서의 하루를 떠올리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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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할 수 없는 부분들


5년 만에 여덟 번째 새 시집을 내셨어요. 한 권의 시집에 많은 시간의 무게가 담겼다는 느낌입니다.

 

5년 전에 시집을 냈다고 해서 그 5년 동안의 이야기는 아니겠죠. 살아온 이력의 전체가 다 담기는 걸 텐데요. 5년 동안 조금 전개된 것이 있다면, 어떤 축적된 것이 있다면 있겠죠. 굳이 얘기해서 그 전의 시들이 사는 이야기에 관점이 더 많이 있었다면 보다 떠나온 자리, 개인이든 공동체든 인류든, 떠나온 자리에 대해서 굉장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떠나온 자리요.


이제 나이가 꽤 됐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연로하신 나이가 됐고요. 그러다보니 어디로 가는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 것일 텐데 말이에요. 편의적으로 그것을 ‘고대(古代)’라는 이름으로 붙이기는 했으나 이름 붙일 수 없는 데죠. 말이 없던 자리, 그런 자리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말이 생기기 이전의 저 고대(古代)의 융융한 세계를 꿈꾸어본다.
삶이 덜 모순적이었으리라.
훨씬 넓었으리라.

다시 한살씩 어려지기로 하자.
말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로 가자.
그저 울음으로만 말하는……(114쪽, 시인의 말)

 

고대라고 하면 이전의 시간인데요. 굉장히 먼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시의 제목은 「고대에 가면」이기도 하죠. ‘가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이 흥미로워요.


시간적으로는 과거인지 모르지만요. 우리가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죽음도 ‘돌아가셨다’고 말하고요. 결국 그것으로 향하는 것이겠죠. 전 우주가 되는 것일 테고요. 우리의 과거는 우주에서 왔지만 또 우리의 미래도 우주로 가는 것이죠. 합일 되는 것, 그런 세계를 상상해본 거예요.

 

말씀에서도 느끼지만 시 전반에도 불교적인 감각이 많이 느껴져요.


지금도 절에서 왔는데요.(웃음) 화엄사에 며칠 있다가 오늘 온 거예요. 다시 가서 있어볼 예정인데요. 불교 공부를 깊이 한 건 아니지만 조금씩 해 나가다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네 번째 시집의 「번짐」 같은 것들은 생각해보면 그렇죠. 오두막이 나비가 되기도 하고요. 여름이 가을이 되고, 또 삶은 죽음이 되죠.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을 환하게 비쳐주고요. 죽음이라는 것도 삶 밖으로 나가는 것일 테죠. 말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들이잖아요. 그런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것이 불교적이라면 불교적일 수 있겠죠.

 

이번 시집에서 그런 생각이 특히 많이 담긴 시를 꼽아주신다면요?


2부 제목이 ‘한 소식’인데요. 한 소식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야기해요. 시집 제목도 한 소식이라고 할까 했는데 너무 큰 말 같아서 그러진 못했고요. 「눈사람의 스러짐」 같은 시도 실은 그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우리가 자유 이야기를 하잖아요. 대자유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요.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세계에 가고 싶다는 걸 텐데요. 우리 삶이 눈사람의 스러짐과 같지 않나 생각했어요. 눈사람이라는 건 본인이 형성된 게 아니라 만들어놓은 것이죠. 또 만들어놓고 가버리잖아요. 그러면 그 눈사람의 외침이 녹고, 흘러서 수로를 따라 가는데요. 녹아서 스러지는 게 자유를 얻은 것인가, 하는 한계 같은 것들을 얘기했다고 볼 수 있어요.

 

시라는 것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최대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말 이전의 것들, 즉 고대의 정체를 찾아가는 시인의 노력은 더 의미가 깊은 것 같습니다.


한 소식을 한다고 하는데요. 순간적인 것이죠. 「바람과 대와 빛과 그릇」도 그런 거예요. 제 방 이야기인데요. 방 앞에 대나무가 있어요. 대나무가 바람 불면 눕잖아요. 그러면 컴컴했던 방이 일순간 잠시 환해져요. 구석에 그릇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 그릇도 그 틈에 환해지고요. 그 환해진 틈에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상에서 사용하려고 둔 그릇은 아니죠. 근데 그 그릇이라는 것도 인간이 빚은 거잖아요. 그것이 순간 환해졌고, ‘이게 뭐지?’라는 느낌이 오면서 나는 바람 족속이었고, 대와 그릇과 일가였다,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다시 환해지길 기다리니까요. 물론 바람은 유동체니까 인간의 삶과 비슷하겠죠. 빛도 그렇고요.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릇과 빛과 대나무와는 일가였던 거예요. 그렇죠?(웃음) 그 관계들이 재미있죠. 그동안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불교적 인식이죠. 봄으로써, 관계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에요. 원래는 없었던 것인데 말이죠.

 

감씨 한 알에 감나무 전체가


너무 큰 말이라 제목 삼지 못했던 ‘한 소식’ 대신에 제목에 사용한‘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입춘부근」의 시구예요.


이런 저런 제목을 놓고 얘기하다가 정한 건데 괜찮았어요. 보니까 꽃 얘기가 꽤 많더라고요. 이전 시집들에도 그렇고요. 전 몰랐어요. 잘 몰랐는데요. 우리가 나무 입장이 돼보지는 않았지만 꽃이라는 것은 식물로서는 청춘이잖아요. 꽃이 필 때는 식물들의 연애기간일 테고요. 열매로 가는 과정이죠. 한편 봄이 오는 것(입춘)은 다시 나이테 하나를 보태는 일인데요. 마침 그때가 저의 인생에서는 꺾여서 후반 쪽으로 가고 있다는 인식 같은 것들도 있었죠. 「입춘부근」은 홀로 밥 먹는 이야기인데요. 꽃을 밟는 일은 사실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근심스럽기도 한 거죠. 과연 제대로 열매를 맺을 것인가, 생각한 거예요. 또 우리는 꽃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고요. 거기에 기러기 소리와 우리 내면의 시끄러움 같은 것들이 동시에 무안하게도 ‘너 혼자 밥 먹니? 살려고?’라고 한 것 같은 그런 게 있던 거죠. 그런 면들을 얘기한 거예요.

 

전해주시는 이야기들이 쉬운 얘기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시인의 언어는 그렇지 않죠. 무척 자연스러운, 일상의 언어예요. 그런 시어가 주는 울림이 참 특별하더라고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생을 쉽고 간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요. 굉장히 공감하게 됐어요. 공부를 했는데 인생이 더 복잡해지면 공부의 목적에 맞지 않죠. 역시 시라는 것은 농담 삼아 얘기할 때도 쉽고도 간편한 언어로 인생의 깊이를 얘기하려고 하는 건인데요. 그게 왜 어려워야 하나요? 절대 어려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좋은 시, 오래 읽어서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시들은 공통적으로 또 그런 거죠. 말들이 꼬인 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가 왜 짧겠어요? 짧으라고 시죠.(웃음)

 

나는 일말의 유보도 없이 감탄한다. 쉬운 문장들이 차근차근 모여 전체가 깊어지는 좋은 사례다.(중략) 물론 이런 매혹적인 애매함이 시 내부에 넓은 사유의 공간을 열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103-104쪽, 신형철 평론가 해설 부분)

 

감 씨앗 같은 것 보세요. 얼마나 간단해요? 그런데 그 감씨 한 알에 감나무 전체가 들어 있잖아요. 그 자체가 감나무예요. 시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말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 아닌 행간 속에 감의 씨앗 같은 핵이 들어 있어서 그것을 들여다보면 그것으로부터 전체가 다 나오는 거죠. 그런데 감씨가 어려워서야, 말이 안 되죠. 꽃도 그렇잖아요. 알기로 치면 꽃처럼 어려운 게 없죠. 하지만 그냥 전체가 쫙 오는 거잖아요. 시가 어려워서는 안 돼요. 꽃처럼 쫙 온 다음에 그 의미가 보는 만큼 보이는 것이에요.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만들어서는 생명이 되지 않잖아요. 어려운 것은 만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드니 어렵죠. 낳아놓으면 안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시를 낳는다는 건 어떤 걸까요?


굳이 찾아온 단어들이 어렵죠. 자기 생각으로 영글어진 것, 체험이나 느낌으로 영글어진 것이 낳은 시일 거예요. 사실은 쉬운 시를 쓰는 게 더 어려운지도 몰라요. 살아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어려운 시들을 보면 삶이, 인생이 느껴지지 않아요.

 

지금 시인 안에서 영그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지네요.


우리가 작년에 유래 없는 체험들을 했잖아요. 일련의 사회 현상들을 보면서 저의 일과 결부시킨 것이 있었어요. 촛불이라는 도구로 말하자면 무혈혁명을 이룬 것인데요. 혁명은 빨리 죽는 거예요. ‘혁’자가 ‘가죽 혁(革)’자거든요. 빨리 죽고 다시 나는 건데요. 사실 시라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던 것,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빨리 쳐내 새 가지가 나도록 갱신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시를 읽으면 갱신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살고 싶다는 에너지를 주는 시도 있고요. 쓰는 입장에서도 그렇거든요. 무서운 말이긴 한데 내가 죽어야 내가 난다, 는 말도 있고요. 시라는 것도 그런 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빨리 의심하고 빨리 묻어버리고 새싹을 돋게 하고 그것이 굳어지면 또 빨리 묻고요. 갱신하고, 갱신하면서 조금씩 나이테가 늘어나는 것이죠. 그 한 칸 늘어나는 게 쉬운 게 아니죠. 그렇죠?(웃음) 그런데 우리는 비로소 나이테 하나가 조금 늘어난 거죠. 죽음으로써 말이에요.

 

연작시를 많이 쓰시잖아요. 여러 편인 듯, 한 편인 듯 뻗어나가는 시들인데요. 함께 읽는 재미가 있어요. 여기에는 쓰는 입장에서의 즐거움도 있는 거겠죠?


그럼요. 맨 앞에 수록한 「소풍」과 「불멸」도 제목이 연작은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대화를 하고 있어요. 사실 크게 보면 다 연결이 되죠. ‘수묵정원’ 연작은 의도적으로 10편을 쓴 것이지만 「마당에 배를 매다」, 「배를 밀며」, 「배를 매며」 같은 시들은 한 편이 나온 후에 자매편처럼 같이 나온 거예요. 세 편이 앞뒤를 구성하죠. 이 시집에 있는 「문을 얻다」와 「문을 내려놓다」 같은 시도 그렇고요. 그것은 한 면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면이 있고, 측면이 있잖아요. 측면이라고는 하지만 그쪽 가면 또 그것에 정면이고요. 그런 면들을 보게 되니까 서너 개가 짝을 이루는 경우도 생기더라고요.

 

시를 쓸 때는 물론이고 한 권의 시집에 묶었을 때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도 있을 것 같아요. 쓸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떤 시가 따로 떨어져 있던 다른 시의 질문에 답을 하기도 하고요.


차례대로 써지는 게 아니잖아요. 수년 동안 쓰인 시들을 배열하다보면 2년 전에 쓴 시와 지금 쓴 시가 호응하기도 하고 그렇죠.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비슷한 것끼리 묶어 놓으면 이 시로 질문하고, 이 시로 답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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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 자체가 새로움


교단에 계시는데요. 학생들에게 많이 하는 말이 있으세요?


우리도 그런 나이를 겪어서 알긴 하지만 잘 쓰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이해는 할 수 있죠. 등단하고 싶고, 이름도 좀 나고 싶다,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요. 그러다보니까 자꾸 시를 쓰는 거죠. 인생을 안 쓰고요.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거예요. 자기를 봐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시를 써서 즐거워야 하는데 마치 숙제처럼 해요. 시의 즐거움을 알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인데 그것을 마치 입시 도구처럼 대하는 거죠. 학생들이 그런 걸 통과해서 오니까요. 기준점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데 바깥 어딘가에 있는 거예요. 어떤 선생님은 그렇게 가르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래서는 절대 좋은 예술가가 되긴 어렵겠죠.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인이 지겨워서 못 쓰겠죠. 재미가 없으니까요.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잘 안 먹히죠.(웃음) 그게 좀 안타까워요.

 

시인의 30년 시 삶도 되짚어보고 싶어요. 시는 어떨 때 시인에게 오는 건가요?


사는 건 비슷하잖아요. 안 쓸 뿐이지 쓰는 사람과 사는 건 다 비슷한 것인데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 안 보이는 것에 대한 궁금증 같아요. 제게 그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온 거죠. 안 보이는 것은 어떻게 보는가. 사진에서 ‘아이레벨숏(eye level shot)’이라고 하잖아요. 서서 사진을 찍으면 똑같아요. 남들 보는 것 나도 보는 거죠. 그런데 카메라를 바닥에 놓는다든가 높이 놓으면 다르죠. 정보적인 것을 뛰어넘는 게 있어요. ‘주역’을 보면 ‘겸괘(謙卦)’라고 있어요. 이 겸 자가 ‘겸손할 겸’인데요. 64괘 중 아주 선호하는 괘예요. 산이 땅 속에 묻혀 있는 이미지인데요. 낮은 자리죠. 안 보던 것, 못보고 지나친 것을 보는 거고요. 시 쓰는 사람들은 좀 모자라잖아요.(웃음) 부적응자고요. 그러니까 그런 게 보일 수밖에 없고요. 시는 그런 걸 보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런 면들을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거죠. 걱정스러운 인생이에요.(웃음) 개두릅나물과 비슷해요.

 

개두릅나물을 데쳐서
활짝 뛰쳐나온 연둣빛을
서너해 묵은 된장에 적셔 먹노라니
새장가를 들어서
새 먹기와집 바깥채를
세 내어 얻어 들어가
삐걱이는 문소리나 조심하며
사는 듯하여라
앞산 모아 숨쉬며
사는 듯하여라
(70쪽, 「개두릅나물」 전문) 
 
시, 그리고 시인을 볼 때면 경외감이 드는 동시에 걱정도 함께 들거든요. 종종 시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 때가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명이, 기술이라는 것이 발전해가는 건 맞는 것 같아요. 달에도 가고, 핵도 만들죠. 그런데 궁극적인 것으로 가서 문명을 내다보면 참 야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또 한편으로는 그런 질문도 하고요. 과연 발전이라는 게 있을까? 저는 학생들과 그런 토론을 할 때도 있어요. 모더니즘, 현대성을 이야기하고, 시라는 것에도 새로운 게 있다는데 뭐가 새로운 것일까, 라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거든요. 형식이 새로운 게 새로운 것일까요? 그렇다면 1930년대의 새로운 시 형식 실험 같은 것들, 이상의 시를 넘어설 새로움이라는 게 있을까, 그런 생각할 때가 있죠. 저는 회의적이에요.

 

시는 기술과는 다른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시란 끝없이 발전하는 게 아니에요. 한 개인에 있어 발전은 가능하죠. 못 보던 세계를 계속 봐야 하니까요. 그렇지만요. 정경화의 바이올린 기술을 그대로 받아서 가면 좋지만 아니잖아요.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또 하는 거잖아요. 미당이나 보들레르의 시력을 이을 수 없어요. 예술은 걸음마부터 다시 하는 거예요. 예술은 개인이 하는 것이고, 개인의 삶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명이 발전해가듯 사다리를 이어가는 게 아니죠. 자기 독립성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이미 낡은 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일종의 강박을 갖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는 거죠. 예술은 발전하는 게 아니고 또 다시 쓰는 거예요. 거기에 내가 있으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새로움이죠. 나라는 인생이 세상에 없던 거니까요. 내가 있으면 나라는 이름의 지문이 새로움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절에서 지낸다고 하셨잖아요. 시인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이제 얼마 안 됐어요. 가니까 너무 좋아서 방학 내내 있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절 체질인 것 같아요. 딱 맞아요. 목탁 소리, 새벽 예불 소리도 좋고요. 절에서 재미있는 체험을 했는데요. 지금 묵고 있는 절에 일제 때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소녀 시절 절에 올라온 할머니가 있었대요. 거기서 일생 지내신 거예요. 해방 후에도 말이죠. 70년 정도 됐겠죠. 그 절에서는 아주 전설 같은 할머니예요. 그 수행만으로도 부처가 된 거죠. 그런데 그 보살님이 돌아가시고 선한 귀신이 되셨다는 거예요.(웃음)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님처럼요. 그런데 어제 절에서 자는데 문득 문을 툭 치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바람도 안 불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쭈뼛했죠. 그게 그 할머니라고 하더라고요. 다음에 또 그러면 그 할머니니까 문을 열어주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재미있죠?

 

이런 일화마저도 말 이전, 고대의 어떤 것으로 느껴지네요.


그런 거죠. 전설화된, 신화화된 거죠. 그분의 한(恨) 같은 것이 예쁜 이야기가 된 셈인데요. 그 이야기가 뭔가를 생각하게 하잖아요. 고대적인 것이지만 말이에요.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도리어 안 먹히죠. 사실은 설명처럼 미개한 게 없어요. 가장 낮은 수준의 말하기가 이해래요. 설명과 이해요. 그러고 보니 또 그래요.

 

올해 에세이도 출간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절에 대한 글들이 꽤 있어요. 글이 조금 부족해서 더 써서 마무리할 계획이에요. 지금 절에 간 김에 써보려고 하는데요.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어요.(웃음)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장석남 저 | 창비
일상에서 정성스레 길어올린 사유와 특유의 아름다운 시어를 여전히 간직하면서도, 독특한 선적(禪的) 철학과 시적 뿌리의 탐구인 고대(古代)라는 새로운 화두를 선보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PD “저는 ‘낭만적 인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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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PD가 첫 책을 썼다. 에세이의 제목은 『낭만적 인간과 순수지속』. 그는 “이 책은 나의 삶과 음악, 내가 경험한 사람과 사건이라는 종유석의 종단면”이라고 적었다. 단순히 ‘시간의 조각들’을 나열한 게 아니었다. ‘생각의 조각들’을 담아둔 것에 가까웠다. 가수 조PD를 포함하는 인간 조중훈이라는 존재, 그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매우 다양해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당신이 생각하고 있던 조PD의 모습과는 사뭇(혹은 몹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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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요?


첫 책을 쓰신 소감이 궁금해요.

 

저는 책은 못 쓰겠더라고요(웃음). 너무 어려워요. 글발이 조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죠.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자다가 가위에 눌릴 정도로 너무 힘들었어요.

 

가사를 쓸 때와는 또 다르던가요?


완전 다르더라고요. 초등학생이랑 대학생의 차이인 것 같아요.

 

가사를 쓰는 게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한데요. 함축적으로 전달해야 하잖아요.


함축적으로 쓰는 노하우는 조금 필요해요. 노래랑 같이 들려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 외에, 필력이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차이가 크더라고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많이 느꼈어요(웃음).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닌가요(웃음). 책에 담긴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속도감 있게 읽히고요.


저도 놀란 부분이었어요. 친구들한테 책을 선물했는데 두 시간 정도면 다 읽더라고요.

 

인터뷰어가 돼서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셨어요.


목차를 정하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요. 그때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서 인터뷰 포맷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책을 빌미로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섭외할 수 있으니까 좋더라고요(웃음).

 

첫 번째 인터뷰이가 ‘험온’의 최병익 대표예요. 허밍만으로 작곡을 해주는 앱을 개발한 분이시죠. AI가 음악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민하시는 것 같아요.


음악 산업뿐 아니라 비즈니스 전반, 경제 전반에 있어서 중개 역할을 없애는 거니까 당연히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의 제작부터 소비까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 없어지는 것과 새로 생길 만한 게 뭐가 있을지, 그런 부분에서 관심이 시작된 거죠.

 

혁신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세요?


전문가들과 접촉을 해볼수록 확고해지는 진실이 있다면, 현재는 AI가 걸음마 단계라는 거죠. 지금 이걸 가지고 뛰고 나는 이야기를 하는 건 거짓말인데, 그렇다고 그런 시기가 안 오지는 않을 거라는 거예요. AI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늦은 시점은 아니고요. 또 하나는 윤리죠. 윤리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서 인류에게 굉장히 큰 변화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됐어요.

 

처음으로 인터뷰어가 되어본 느낌은 어땠나요?


음... 잘 맞는 것 같아요.

 

호기심이 많으시니까, 즐기면서 하셨을 것 같아요.


성격상 뭘 하나 들으면 가지 치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해요. 그러다 보니까 잘 맞더라고요.

 

윤일상 작곡가와는 굉장히 친밀한 사이잖아요. 인터뷰 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나요?


되게 어색했죠(웃음).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어요. “대중은 아티스트와 상업 음악가를 구분하잖아”,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같은. 스스로에게도 화두가 아닐까 싶어요.


사실 저희는 그 질문들에 대한 정의를 굉장히 일찍 내렸어요. 특히 일상이 형 같은 경우는, 비판하려고 하면 그럴 거리가 많아요. 상업 작곡가라고 할 수도 있고 맞춤 작곡가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게 어떤 대상에 딱 들어맞는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인데, 항상 사람들은 반대로 비꼬아서 비판하잖아요. 실제로 일상이 형은 초기에 많은 압박을 받기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정도 이슈를 가지고 저희가 심각하게 소주를 기울인다거나 하지는 않아요(웃음). 이제 그럴 정도의 상태는 많이 지났죠. 어떤 음악가로 남고 싶으냐는 것도 조금 넘어선 것 같아요.

 

초연해지신 거예요?


네(웃음). 다 때가 있더라고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다 보니까 ‘거기에 연연하던 때도 있었구나’ 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거예요. 그리고 일상이 형을 보면 매일 바빠요. 항상 일에 치여 있죠. 늘 그렇게 사니까 이상할 것도 없고 감상적일 것도 없어요.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아요


에세이를 통해서 대중이 잘못 알고 있는 걸 바로잡거나 편견을 부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럴 생각은 별로 없어 보여요.


그렇죠. 이 책을 쓴 데는 다른 목적성이 없어요. 진짜 제 이야기이고, 그걸 친한 사람들한테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쓴 책이에요. 평소에 제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저희 어머니도 책을 보시고서 ‘아, 우리 아들이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셨대요(웃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담아낸 거죠.

 

『낭만적 인간과 순수지속』이라는 제목이 딱딱하고 무겁지 않나요? 판매에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어요(웃음).


사실 저는 앨범을 낼 때도 홍보를 많이 안 해요. 그런 버릇이 들었어요. 데뷔할 때부터 PC 통신에서 반응을 얻으면서 홍보가 됐잖아요. 그런 배경이 있다 보니까 앨범을 내면 어느 정도 팔리는 아티스트로 안착이 됐고, 홍보에 그렇게 열을 올려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게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좋게 만들자, 그러면 어떤 계기가 생겨서 빛을 보게 될 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거였고요. 책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2년 넘게 음반 활동을 안 했는데,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조금씩 더 알려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들여 만든 앨범도 홍보가 부족해서 묻힐 수 있잖아요. 초조하지 않으세요?


초조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너무 느긋하신 거 아닌가요(웃음).


음... 될 때는 또 되더라고요(웃음).

 

‘조PD는 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 이미지가 잘 안 바뀌어요.

 

그런 선입견을 깨고 싶다는 생각 안 드세요?


중간에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요.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한 번 생긴 이미지를 바꾸는 것도 정말 힘들지만, 그걸 만드는 것도 굉장히 힘들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저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이미지를 얻은 셈이죠. 마케팅으로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으면 광고를 얼마나 많이 해야 했겠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다행히도, 타이밍이나 여러 가지 여건이 잘 맞아서, 확고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거잖아요. 그게 원하는 것이었든 원하지 않는 것이었든. 그러니까 굳이 그걸 부수거나 변명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계속 해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대중에 비친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괴리 때문에 힘든 적은 없었나요?


싸이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 이미지가 참 편한 것 같다고요. 사실 저희는 X세대 래퍼, 세기말 래퍼라는 이미지 때문에 많은 걸 용서받았죠(웃음). 면죄부가 주어졌죠. 그래서 편하게 다녔어요. 잘하면 칭찬 받고, 못하면 생긴 대로 논다는 이야기 듣고(웃음). 그래서 나쁘지는 않았어요. 

 

직접 뵈니까 굉장히 부드러운 이미지인데요? 이렇게 잘 웃으시고 상냥하신 분인지 몰랐어요. 비즈니스와 일상생활이 너무 다르신 거 아니에요(웃음)?


이중적이라는 이야기는 초반부터 많이 들었어요. DJ DOC처럼 실생활에서도 악동으로 살아야 된다고도 하는데, 저는 DOC 형들이랑 친하지만 사고방식이 달라요. 하늘이 형이나 창렬이 형이 그래요. 너는 너무 이중적이야.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제 음악이 더 세다고 말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다짐을 해도 총각 시절과 똑같은 감성을 내기가 쉽지는 않다”고 쓰셨어요. 이것 때문에 고민하신 적도 있나요?

 

20대 초반의 열정으로 하는 에너지는 나중에 재생이 안 돼요. 그런 부분이 있는 건 맞아요. 물론 기승전결 정리가 세련되지 않고 톤도 조금 이상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네 마디 여덟 마디의 아이디어는 그때만 나올 수 있는 거거든요. 총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어요. 50대, 60대에게는 원숙미가 있다고 하지만 20~30년을 해왔는데 원숙미가 있는 건 당연한 거죠. 그건 자연스럽게 세월에 따라오는 거잖아요. 프로듀서는 20대의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를 잘 취합해서 자신이 가진 원숙미랑 버무리고, 그렇게 좋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계속 새로운 것과 소통해야 하고 자기를 갈고 닦아서 (기량을) 잘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 하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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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이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죠


직관을 믿으신다고요. 음악을 만들 때 대중이 좋아할지, 지금의 유행에 맞는지, 그런 건 생각하지 않으세요?


트렌드를 해법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초기에는 그걸 너무 싫어했고, 지금도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차트 중심으로 만드는 음악은 잘하지도 못하고, 제 길도 아니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제 음악을 하고 싶은데,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차적으로 차별화되는 음악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는 거라면,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아이돌 제작을 하실 때는 어땠나요?


사실 아이돌 음악은, 아주 유명 브랜드가 있지 않으면 음원 차트 100위권에 안 들어가요. 그런데 회사를 유지하려면 어쨌든 성과를 내야 하잖아요. 팬 카페 가입률도 높여야 하고 실시간 검색에도 올라야 되고 여러 가지 팬을 늘리기 위한 활동들을 해야 하는데요. 제가 택했던 방법은 트렌드를 따를 게 아니라 아예 차별화하자는 거였어요. 그래야 방송을 한 번 나가도 실검 1위를 해요. 같은 지점에서 경쟁하면 엑소가 1위를 하지, 우리가 1위하지는 못하거든요. 그런 것처럼 아이디어로 해야 돼요. 돈으로 하려고 하면 안 되고요.

 

‘매직 모멘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일 텐데요. 자주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시즌에는 자주 와요(웃음).

 

성수기가 있군요(웃음).


네, 성수기가 있어요(웃음). 그때는 자주 와요.

 

20대 때는 작업실을 떠나지 않으셨다면서요? 그 순간을 놓칠까 봐. 요즘에는 어떻게 하세요?


요즘은 아예 안 해요. 지금은 제가 그럴 때가 아니에요. 20대에는 그걸 할 때라고 생각해서 한 거예요. 다시 안 올 시간이기 때문에. 서른 이후에도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먼저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시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았고, 그 다음부터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고, 경험도 쌓고, 사업도 해보고요. 그러니까 20대 때는 어설프게 어디 나갈 필요가 없었던 거죠. 나중에 실컷 나갈 테니까. 지금 그렇게 하면 손해가 커지죠. 만날 사람도 많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작업하고 있으면 안 되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매직 모멘트’가 찾아오면 메모를 하나요?


멜로디가 나올 때는 그냥 휴대폰에 녹음하면 되는데요. 가사는 그런 식으로 안 나와요. 고민을 해야 나오는 거거든요.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면, 잘하면 한 곡 정도는 나와요. 어제도 그렇게 해서 두 곡을 썼어요.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다”고 쓰셨잖아요. 그래도 ‘그 경험은 안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게 있지 않나요?


어제 쓴 두 번째 곡이 그 내용이에요. 후회할 만한 경험을 여자로 비유해서 썼는데요. 간주까지는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쁘다’는 내용이 나오다가, 코러스에서는 ‘애당초 안 만났어야 됐다, 다시 태어나면 유유히 옆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가사가 나와요. 그런데 어떤 경험을 함으로써 보완을 거쳐서 더 좋은 성과를 이뤄낼 수도 있잖아요. 그걸 액땜이라고 하죠. 그 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자빠져버리면, 그건 나를 죽이는 경험이니까 안 하는 게 낫겠죠. 그게 아니라 더 잘 될 자신이 있거나 가능성이 있다면 언제든 상황을 좋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경험은.

 

“힙합 정신이란 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최근의 힙합 문화와 아티스트를 볼 때 아쉬운 점이 있나요?


그렇죠... 힙합이 예전만 못한 건 사실이죠.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너무 인스턴트화 됐죠. 정통을 추구하고 무대 하나를 만들어도 영화를 연출하는 것처럼 하고, 그런 게 이제 없어졌죠. 사실 그럴 만한 투자를 안 하죠. 어떻게 보면 이제는 다 클립으로 가는 음악이 돼버린 거예요.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봤는데, 호흡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라이브를 하더라고요. 그냥 팬이 한 명 무대에 올라와서 하는 거나 똑같았어요. 작년에 제일 히트했던 뮤지션 중 한 명이었는데도요. 물론 켄드릭 라마나 드레이크처럼 현상 유지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올해의 신인이 끊긴지가 너무 오래된 거죠. 그냥 소비되는 사람들, 한 곡만 히트시킨 원 히트 원더들만 있죠. 그런 걸 봤을 때는 장르가 퇴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새로운 장르가 넘겨받겠죠.

 


모두가 아빠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블락비와의 결별에 대해서도 쓰셨어요. “사건의 배후에는 멤버들을 선동하고 부추긴 이들이 있었다”는 표현도 있는데요.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굳이 꺼내신 이유가 있나요?


이미 다 기사로 나왔던 이야기예요. 법정 공방이 있을 때요. 또 멤버들이 스스로 조작했다고 하면 블락비한테 더 안 좋은 거잖아요. 나쁜 어른들이 그렇게 했다고 밝히는 게 그 아이들한테 더 낫지 않나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쓴 거고요. 만약 반대의 경우였다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 이야기는 쓰지 맙시다’라고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아직도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당시 소속사에서 블락비를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고요.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소문이 무성한 업계이기도 하고, 거기다 우리는 거의 언론재판을 한 거예요. 모든 기자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요. 그러니까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고 싶으면 어떤 언론사든 발췌해낼 수 있는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이게 그렇게 헤드라인 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3~4년 전의 철 지난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어떤 계기로든,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앞에 있었던 족적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굳이 ‘한 번 더 들어봐 주세요, 그런 일 아니었어요’ 하고 확성기 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방송계와 음악 산업의 문제점이라고 할까요. 아쉽게 느끼는 부분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유 중 하나였나요?


힘든 건 극복할 수가 있고, 또 어지간히 극복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한 번 잘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인데, 그걸 다음으로 이어가면서 계속 지속하는 게 되게 힘들어요.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그리고 시장 논리가 바뀌어 버리면 일개 회사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기획사의 한계를 본 거죠. 만약에 제가 블락비와의 사이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 뒤에 만든 이블이랑 탑독이라는 팀이 다 잘 됐을 수도 있을 거예요. 어느 정도 실력과 브랜드가 바탕이 된 상황에서 앨범을 출시하는 상황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업계 4~5위 정도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하게 됐다면, 그래도 결국에는 딜레마에 봉착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4~5년 지속할 걸 10~20년으로 늘릴 뿐이겠죠. 그렇게 살았으면 오히려 더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전이 있는 거죠.

 

음원 수익이 분배되는 과정의 문제도 있잖아요. 책에 쓰신 내용을 예로 들면, 지난해 상반기에 ‘볼빨간사춘기’가 받은 음원 수익이 7000만원이라고 해요. 스트리밍 횟수가 2억 건이 넘는데 말이죠.


기사에서 발췌했던 수치인데요. 사실 가수 인세 논란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죠.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몇몇 스타플레이들처럼 자기 비즈니스로 하지 않는 한, 순수한 창작자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이잖아요. 이런 관행이 굉장히 널리 퍼져 있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저희가 앞서 AI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AI나 블록체인 같은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하면 중개자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유통사나 기획사 없이 창작자와 시장이 바로 만나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런 시기가 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련된 플랫폼을 만들고 싶은가요?


블록체인을 플랫폼이라고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물론 정리 정도는 하겠죠. 창작자와 시장이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대한 지형은 만들어질 텐데, 거기 일조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요.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시는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요. ‘아빠를 아는 사람들이 전부 아빠를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한 적이 있으시다면서요? 부모로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한테 ‘우리는 다 친구’라고 이야기하는데요. 기사에서 보셨다는 이야기도 그런 발상의 연장인 것 같아요. 다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했던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그때 약간 주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첫째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거든요. 예를 들면, 제가 조금 튀는 차를 타고 학원에 데리러 가면 일부러 선생님들하고 다른 길로 가요. 그리고 혼자 다시 돌아와서 차에 타는 거예요. 그런데 둘째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어도 옆에 앉아서 ‘우리 아빠 조PD예요’라고 말해요(웃음).

 

 사람한테 착착 감기는 아이에요. 그래서 대화를 하다가,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사람들이 아빠를 알 수는 있는데, 아빠를 아는 사람이 다 아빠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건 알고 있어’라고 말한 거예요.

 

아이가 이해하던가요?


당시에 저희에게는 당연한 분위기였어요. 아내는 이야기 잘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이들이랑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시네요. 보통 어른들은 ‘아이가 이걸 이해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잖아요.


아이들이 그렇게 이해가 부족하지 않아요. 전혀 안 그래요. 아이들을 너무 애 취급할 필요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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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인간


촛불 집회 무대에 오르셨었어요. 윤일상 작곡가와 음원도 발표하셨고요.


우연치 않게 한 일이었어요.

 

윤일상 작곡가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죠?


네, 그 형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요.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고요.

 

음원 발표를 제안한 건 윤일상 작곡가였나요?


제안을 주고받은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작업을 했던 거예요. ‘할래?’라고 안 하고 ‘하자!’라고 했던 거죠.

 

그 전까지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잖아요. 어떻게 함께하게 되셨어요?


정치의 문제가 아니죠, 이건. 강남에 최순실 같은 아줌마들 많이 있잖아요. 안하무인에 갑질하는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 보면서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그런 생각이 많이 쌓여있기도 했고요. 최순실이 대통령이랑 관계가 있다는 걸 보니까 ‘돈으로 과시할 만하고 청와대까지 접수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겠구나’ 생각되더라고요. 그렇다고 저 아줌마가 나라를 좌지우지할 만한 사람인지 생각해보면,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나라 꼴이 말이 아니구나’ 싶었던 거죠.

 

‘우리 애들이 살아갈 세상인데’라는 생각도 하셨어요? 그게 촛불집회에 함께하는 이유로 작용했나요?


안하무인을 만나면 저는 싸우거나 협상을 했을 테지만, 아이들한테까지 그런 걸 물려주기는 싫은 거죠.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그런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고 있으면, 이건 아니잖아요. 그런 걸 비판한 거죠.

 

콜라보했던 뮤지션들에 대한 이야기도 쓰셨어요. 후배 중에서는 라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는데, 최근에 지켜보고 있는 뮤지션이 있나요? 러브콜을 보내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누구인가요?


음... 요즘 ‘예지’라고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디제잉하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외의 친구들은 만나기 싫은 게 아니고, 요즘은 기회들이 너무 많잖아요. 라디만 하더라도 악기가 필요해서 저를 찾아왔던 거였거든요. 악기를 지원 받고 싶다고요. 그런데 요즘은 소프트웨어가 다 있고 음악을 발표할 수 있는 창구도 많기 때문에, 그런 수준의 도움은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예지는 일단 뉴욕에 있고, 한국과의 접점을 찾을 때는 제가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디는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하는 데 쓴다면서요? 그 부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셨던 것 같아요. 후배들을 볼 때, 재능보다도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네, 노력하는 것만 봤어요. 제가 음악을 열심히 할 때는 컴퓨터 바로 앞에 침대를 놓고 지냈어요. 작업하다가 지치면 바로 자고, 또 일어나서 작업하고, 그런 거였죠. 그런데 라디가 딱 그랬어요. 집에 가봤더니 구도가 똑같더라고요. 그런 거야말로 밥 먹고 음악만 한다는 이야기가 절로 나오는 거죠. 그게 좋았죠. 그런데 의외로 그런 경우가 드물어요. 많지 않아요.

 

데뷔 초기의 앨범을 들을 때도 있나요?

아뇨, 못 들어요. 못 듣겠어요.

 

왜요?


너무 이상해서(웃음). 가끔 음악 하는 동생들이 오면서 형 노래 들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절대 그러지 말라고 해요(웃음).

 

음악적으로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음악적인 건 많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았으면 다행인 거죠. 말씀드렸던 것처럼 젊을 때의 감성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런데 세월에 따라서 더 좋아지는 것들이 있잖아요. 톤이나 딜리버리, 저만의 호흡 같은, 그런 건 좋아졌죠.

 

‘조PD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면 뭘까요? 책에서 꼽는다면요?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에요. 낭만적 인간.

 

어떤 의미인가요?


그냥 풍류를 좋아한다고 할까요.


 

 

낭만적 인간과 순수지속조PD 저 | 스리체어스(threechairs)
청각 기관은 음표 단위로 분절된 소리 자극을 순서대로 감지하지만 앞선 음과의 조화, 지속이 곡의 전체 분위기를 결정한다. 지속하는 동시에 변화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중혁의 말하기ㆍ듣기ㆍ쓰기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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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는 사람에게 재능은 늘 골치 아픈 주제다. 나는 재능이 없는 것만 같고, 옆 사람은 다 나보다 잘 만드는 것 같다.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소설가 김중혁의 이번 에세이집은 선언 같아 보이는 제목(『무엇이든 쓰게 된다』)에다 부제는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다. 음식점에서도 마지막 비법의 가루는 안 보여주거늘, 이렇게 비밀을 밝혀도 되는 걸까. 하다못해 펜과 아이패드까지 보여주는데,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읽어두면 무엇이든 쓸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담았다. “나도 당신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 같은 건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다면 이제부터 당신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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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품을 완성한 순간의 희열


도구 소개, 창작을 시작하는 법, 그림 그리기 등 여러 꼭지를 모아 책을 펴냈는데, ‘글쓰기’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네요.

 

다양한 장르의 창작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죠. 많은 분이 글쓰기를 실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보면 글쓰기의 비법이나 팁 같은 구체적인 방법은 없어요. 실용적이지 않게 쓰는 게 목표였어요. 이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건질 게 없네 싶겠지만, 글쓰기 책보다는 창작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어요.


창작을 독려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면 몇 시간 동안 집중해서 선을 그어도 재밌고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 모르잖아요. 밤새 뭔가 만들어보는 재미, 자신이 노동을 하거나 공을 들여서 창작품을 완성한 순간의 희열 같은 게 있어요. 그런 걸 소개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제가 소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책 읽기, 음악 듣기, 이런 거죠.


제목이 주문 같아요. 정말 무엇이든 쓰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제가 낸 책 중에 제목이 ‘ㅁ’으로 시작하는 게 많아요.  『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모든 게 노래』…. 운이 맞은 것 같아요. 또 물건 사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돈을 쓰게 된다’ 이런 농담도 할 수 있게 됐어요.


사소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무슨 펜을 쓰는지까지 소개했는데요.


늘 에세이를 쓸 때면 사소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어떻게 글을 쓰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은 작가에게 비법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데, 사실 찾아낼 수 있는 게 없거든요. 작가에게 24시간 카메라를 붙여서 관찰해도 비법을 알 순 없겠죠. 작가로서의 제 정체성은 물건을 사 모으고 분위기를 조성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무슨 펜을 사고 어떤 식으로 생활하는지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작가도 별거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세상을 보는 리듬


창작에 관한 책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가 처음이죠?


매년 나름대로 테마를 정했어요. 예를 들어  『메이드 인 공장』을 쓸 때는 공장 탐방기를 일 년 동안 연재했고,  『바디 무빙』을 쓸 때는 몸에 관한 에세이를 여러 군데에 썼어요. 작년에는 창작이 테마였죠. 원래는 더 나이가 들어서 창작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저도 창작이 뭔지 찾아가는 과정인 지금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인 팁이 없다고 했지만, 읽으면서 유용한 팁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똑같은 단어가 여러 번 들어간 건 글쓰기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같은 문장도 있었고요.


비문을 쓰지 않는 방법이라든지, 문장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방법 같은 기술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사실 제가 글을 쓸 때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거든요. 제 목표는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문단 위주로 쓰고 문단에서 제일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으로 써요. 책을 읽는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나도 나의 기준을 따로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글에서 정제되지 않는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는데요.


어떤 사안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모든 걸 너무 많이 말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메모도 비슷해요. 저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머릿속에 메모하는 것 같아요. 메모를 들여다보고 이 메모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고요. 어떤 메모는 쉽게 날아가버려서 잊어버리기도하고, 어떤 문장은 계속 생각나서 그 문장으로부터 글이 완성되는 것 같거든요. SNS도 막 떠오르는 생각을 즉각적으로 올렸을 때 즉시성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하면 생각이 좁아지는 사람이라 SNS를 안 해요. 저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혹시 SNS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의문을 한번 제기해보는 거죠. 어렵네요, SNS를 말하면 SNS를 쓰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작가들을 만나면 SNS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게 되더라고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매일 농담처럼 ‘SNS를 하지 않는 이유는 원고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게 진실이기도 하거든요. 저는 활자로 제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활자가 곧 제 정체성이에요. 글을 쓸 때는 좀 더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더 많이 생각하고 오래 묵혀둔 다음 내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혼자 해서 좋은 것이지만, 혼자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라는 내용이 있었어요. 과거와 비교했을 때 사람들이 더 혼자가 된 느낌을 받나요?


과거와 현재를 떠나 글쓰기가 늘 그랬던 것 같아요. 혼자서 정말 엄청난 걸작을 쓰고 발표할 수도 있죠. 하지만 새벽에 감정적인 글을 쓴 다음에 그 글을 온전하게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자세도 필요하거든요. 작가들에게는 ‘감성적인 나’와 ‘이성적인 나’가 필요한 것 같아요. 양쪽의 균형을 잘 맞춰야죠.

 

“가언을 만드는 일과 표언을 찢어버리는 일 사이에 글쓰기가 있다”는 말도 했는데요.


문자로 쓰인 걸 말로 들으니까 다르네요.


지금 좀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부끄럽고 민망하죠. 말과 글을 많이 하고 쓰는데, 말하다 보면 텁텁할 때가 많아요. 더 정돈된 말, 완성된 말을 하고 싶은데 잘 안 되고, 글은 좀 더 즉각적으로 쓰고 싶은데 그것도 잘 안 되고요. 글을 쓰면서도 최대한 말에 가깝게 쓰고 싶고, 말을 할 때는 최대한 글에 가깝게 쓰는 균형을 잡고 싶어요. 끝끝내 쓰고 싶은 글의 롤모델은 어머니의 글이거든요. 어머니의 글에는 맞춤법이나 문장은 엉망이어도 이상한 리듬이 있어요. 이 리듬이 대체 뭘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게 어머니의 리듬이고 세상을 보는 리듬인 것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리듬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세상을 바라보는 리듬을 찾는 게 어쩌면 글쓰기의 완성일 것 같아요.


그래서 대화에도 집중하는 것 같아요. 대화를 상상하는 힘이 개성을 만드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고요.


소설 쓸 때 대사 쓰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어떤 캐릭터를 처음에 만들 때는 이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겠다가,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대화하는 걸 보고 있으면 자기만의 말투로 이상한 환청 같은 게 들려요. 모든 사람이 말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을 하면 거기에는 매우 많은 게 녹아 있죠. 어릴 때 기억, 읽었던 책, 수많은 기억이 말하는 방식을 결정했을 텐데 다 다른 게 너무 재밌고, 글로 그 모든 사람의 리듬을 보여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소설에서도 말의 맛을 살리려고 대사 부분은 정말 많이 고치거든요. 하지만 여기서 말의 맛이라는 게 구어체는 아니에요.


‘문장 대화체’인 건가요?


문장에 들어 있는 대화는 또 다른 말의 맛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읽으면 어색한데 눈으로 봤을 때 말의 맛이 살아나는 문장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문장으로 잘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편에서 문장을 거칠게 세 가지로 나누었어요. ‘~이다’, ‘~라고 생각한다’, ‘~라고 들은 적이 있다’로 끝나는 문장인데, 이 중 작가님은 어떤 축에 가깝나요?


그것도 말하기 톤과 상관이 있는데요. 예전부터 고쳐야지 하는데 안 고쳐지는 게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것 같아요”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이게 대체 어디서 온 건가 생각해보면 모든 걸 단언 내리기 싫어하고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회의가 계속 들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또 이렇게 말했네요(웃음). 글에도 단언하는지, 회의하는지, 묻고 싶은지 중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타일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고요.


어느 순간  ‘이런 스타일로 말하고 있구나’  깨달으면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 순간이 있을 텐데요.


말은 고정화되고 고착화될 수밖에 없어요. 자기 스타일의 말투가 굳어지면 그걸 지각하는 순간 말하기 너무 힘들어지잖아요. 글은 그렇지 않거든요. 글은 교정하고 퇴고할 수 있어요. 회의하거나 반성하거나 돌이키는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에 저에게는 더 강력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이라 느껴져요. 글을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스타일인지, 논리가 뭔지 다 보여요. 어지간해서는 글로 자신을 속이기 힘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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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보다 글쓰기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와 함께 <이동진의 빨간책방>, <영화당>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어떤가요?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어요. 소설 쓸 때 영화가 많이 도움되기도 하고요. 짧은 시간 내에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아요. 영화 시작 전에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영화 끝나고 난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해볼 수도 있고요. 영화 보는 김에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생계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얼굴을 비추고 말을 하는 일을 많이 맡게 되었는데요.


말을 잘한다는 생각은 아직 못 하고 있고요. 익숙해져서 떨리지는 않는데 여전히 말하기보다는 글쓰기가 훨씬 좋아요. 처음에는 방송을 하고 나면 집에 와서 매일 술 마셨어요. 제가 했던 말들이 문장이 되어서 머릿속을 떠다니더라고요. 말할 때 쾌감이 있지는 않아요. 초반에는 정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말을 하다가도 이게 아닌 것 같으면 다시 수정하는 방식으로 다듬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직 저는 글쓰기가 한 300배 좋습니다.


올해 계획은 무엇인가요?


소설을 쓰려고요. 2017년에는 정말 소설을 단 한 자도 안 썼어요. 자료를 모으고 생각은 했지만 한 줄도 쓰지 않은 건 2000년에 데뷔하고 나서 처음이었어요. 안식년 같은 느낌으로 활시위 당기는 시간 같은 걸 즐겼어요. 2018년은 다른 활동을 약간 줄이고 소설을 많이 쓰려고 합니다.


글쓰기 강연은 못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글쓰기 수업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많이 받았는데, 농담하거나 진행할 수는 있어도 글쓰기를 강의하라고 하면 할 말도 없고 가르쳐줄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하겠어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분들을 보필하면서 중간중간 빈 자리를 채우는 쓸데없는 멘트나 농담은 잘할 수 있어요. 이 책도 비슷할 것 같아요. 빈 구석을 하나하나 메우는 거죠. 이 책은 다른 글쓰기 책을 보실 때 곁가지로 보기 좋지 않을까요? 모든 글쓰기 책과 1 1로 붙어서요.

 

 


 

 

무엇이든 쓰게 된다김중혁 저 | 위즈덤하우스
“지금 무언가를 만들기로 작정한, 창작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당신을 존중하며, 그 결과물이 엉망진창이더라도 기꺼이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경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줄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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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가까이 작가로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산문집을 썼다. 반백 살을 한참 넘기고 나서야 어른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말한다. “이제 겨우 알 것 같다. 삶과 죽음, 가난과 배부름, 행복과 통곡에 대해서” 그 고백의 끝에서 에세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은 시작됐다. 책을 쓰는 동안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됐고, 자신을 관통했던 순간과 사람을 떠올렸다. 흔들리고 무너졌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삶을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늘 곁에 있었다. 태양과 별과 달이 그러했고, 책이 그러했다. ‘꼭 필요한 만큼의 힘’으로 생을 견디는 사람들도 함께였다. 덕분에 작가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낼 수 있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버스 정류장 나무가 말해 주고 있다.

날 보세요, 춥다고 울고만 있지는 않았어요.

사무실 창 너머 새들이 알려 주고 있다.

날 보세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날개를 접지 않았어요.
아이들도 전해 주고 있다.
우리를 보세요. 추운 겨울에도 이만큼 키가 컸어요. 매서운 바람에도 한 살 더 먹었어요. 어른들이 힘들다고 한숨 쉴 때에도 새 이가 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 25쪽)

 

 

노경실 작가는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누나의 까만 십자가』로 등단했다. 이후 『상계동 아이들』, 『복실이네 가족사진』, 『할아버지는 여든 아기』, 『어린이 인문학 여행』등 동화와 청소년을 위한 소설 창작에 애써왔다. “힘들었던 시절 내가 찾은 희망의 빛은 책이었다”고 말하는 작가는 누구보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직접 번역한 외서들까지 포함하면 지은 책이 삼백여 종에 이른다. 전국 도서관을 무대로 독서 강연을 이어가면서 ‘책 전도사’로 활동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책을 쓰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자 소명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오목렌즈」가 당선되었고, 어른들을 위한 소설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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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말하게 한 건 죽음이었어요


첫 번째 수필집입니다. 작가로 살아오신 세월을 생각하면, 늦은 감도 있어요.

 

그렇죠. 오랫동안 동화와 청소년 소설에 천착하느라 그랬는데, 이제는 소설도 쓰려고 해요. 시는 20대에 소설은 70대에 쓰는 거라는 말도 있잖아요. 시는 천재가 있어요. 랭보처럼. 그런데 소설은 웬만해서는 천재가 나오기 힘들어요. 깊은 인생의 맛을 다 봤을 때 나오는 거거든요. 물론 젊은 천재도 있지만요. 그래서 이제 저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은사이신 최인호 선생님께서도 일흔이 넘으면 동화를 쓰겠다고 하셨었어요. 사람들이 동화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우리 어르신 작가들이 동화를 쓸 수 있을까’ 싶어요. 동화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있어요. 그런데 소설가는 동화 쓰기 힘듭니다. 그런 아이러니가 있어요.

 

어디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일까요?


제 경우에 비춰보면, 동화는 결국 인생과 사람의 이야기거든요. 동화를 쓰면서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해요. 동화 속에 아이만 등장하는 게 아니죠. 악인, 선인, 배신자, 어른도 다 나와요. 그런데 소설만 쓰게 되면 이 세계를 단절시켜 버려요. 자전적 작품이거나 특별하게 어린이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어른들의 배신과 선과 슬픔을 다루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단절되는 거죠. 동화를 쓰는 작가는 어른과 아이를 같이 무대에 놓고 생각해요. 동화의 주제는 소설과 똑같아요. 거의 살인만 안 나올 뿐이지, 이혼 문제나 죽음 문제 같은 것도 다 나오죠.

 

유년 시절의 이야기도 있는데요. 막냇동생의 죽음이 작가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동생이 병원에서 앓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제 품에서 죽었잖아요. 제가 안은 상태에서. 하필 집에 아무도 없을 때였어요. 아이가 마지막으로 부른 것도 저였고요. 그 일을 고1 때 겪었으니... 제 마음속에는 평생 아이가 있는 거예요. 그 아이 때문에 늘 가난하고 힘 없고 약한 아이들한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어요. 생명에 대해서 늘 생각하게 되고요. 죽음을 늘 의식하다 보니까, 그게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더라고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거죠. 저한테 동생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생명의 아름다움, 고귀함, 소중함을 알게 해준 거예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변절하지 않게끔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악착같이 자신을 챙기고 부를 탐하게 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감사한 거예요. 제가 지금처럼 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저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만나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동생의 죽음도 이야기해줘요. 제가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을 위해서 점자책과 소리책도 만들고 있는데, 그 아이들한테도 그렇고 비장애인 아이들한테도 이야기해주는 게 있어요. 일단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거예요. 그 눈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해줘요. 당장 눈앞에 엄청난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많은 아이들에게 변화의 씨를 심어줬다고 생각해요. 위로와 변화의 씨앗이죠.

 

당시의 경험 때문에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게 되셨을까요?


맞아요. 원래는 퀴리 부인 같은 과학자가 꿈이었는데, 그 아이 때문에 완전히 바뀌었죠.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네 명의 동생들을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줬었어요. 어느 날부터는 그 중에 동생 한 명 없었던 거고요. 그런데 내가 큰 언니니까, 내가 울면 다 우니까, 울지도 못하고 또 이야기를 들려줬죠. 거듭 하는 이야기지만, 죽음이 오히려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거예요.

 

「꼭 필요한 만큼의 힘」이라는 글을 보면, 두 차례나 수해를 겪으셨더라고요.


네. 1984년과 1987년에 망원동에서, 그 유명한 물난리를 겪었죠. 그때는 물에 휩쓸려 내려갈 뻔했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삶에 대해서 생각했죠. 물이 빠지고 난 뒤에 집에 돌아오니까 천장까지 진흙이 다 찼었더라고요. 온통 진흙이 묻어있고 바닥에는 미꾸라지들이 있었어요. 그걸 두 번이나 겪은 거예요. 그런데 하늘이 괜히 겪게 한 것 같지는 않아요. 아픔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헤쳐 나왔잖아요. 이겨 나왔잖아요. 그런 자만이 말할 거리가 있는 거거든요. 어쨌든 산을 넘고 들을 건너고 계곡을 넘어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고, 그런 자만이 승전보를 울릴 수 있는 거예요. 지나온 길에서 있었던 일을,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할 수 있는 거죠. 성공을 했든 안 했든 뚫고 나온 자만이 전해줄 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어려움을 헤쳐 나오신 분 중 한 분이 어머님이신 것 같아요.


요즘의 젊은 엄마들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제 또래의 엄마들은 대부분 많이 배우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엄마만큼만 살아보자’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와 딸은 애증 관계이고 서로 부딪힐 때도 많잖아요. 그럴 때 저는 나이를 환산하는 법이 생겼어요. ‘우리 엄마가 스물셋에 날 낳았는데, 나는 그때 뭐했나’, ‘막냇동생을 낳았을 때 엄마가 40대였는데, 그때 나는 뭐했나’ 싶은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 할 말이 없는 거죠. 나는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가서 잠드는 것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엄마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잘 살지도 못했고 남편도 없었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 말 못하죠.


 

사는 데 필요한 힘, 사람마다 달라요


홀로 빈집에 돌아갈 때마다 고독과 두려움을 느끼신다고요.


지금도 적응이 안돼요. 처음에는 가자마자 TV를 켰었어요. 소리도 크게 키워놓고. 공포도 있고 적막감도 있죠. 여전히 힘들어요.

 

작가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좋을 것 같기도 해요.


혼자 있는 시간을 이겨내지 못하면 작가가 될 수 없죠. 혼자 있는 걸 즐기고 그 시간을 마음껏 활용해야 돼요. 작가는 혼자잖아요. 뮤지컬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연주도 독주가 아닌 이상은 다 같이 하는데,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작가는 혼자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혼자 있는 걸 즐길 줄 모르면 안 되죠. 작가들 중에도 사람이 그리워서 계속 사람 찾아다니고 같이 어울리면서 술 마시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러면 주변에 사람은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작품은 없어요. 철저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작품이 남아요.

 

혼자만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세요?


책 읽고, 글 쓰고, 음악 좋아하니까 음악 듣고요. 그거 외에는 없어요. 책, 글, 그리고 산책이죠.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고흐가 걷는 걸 너무 좋아해서 나중에는 집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얼마나 걸었는지, 돌아올 힘이 없었다는 거죠. 저도 산티아고까지는 못 가더라도 끊임없이 걸어요. 틈만 나면 걷는데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효과가 있어요. 눈도 정신도 맑아지거든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버려야 될 생각들은 버리게 되기도 하고요.

 

매일 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일기를 쓰시는 건가요?


하루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기록해요. 새벽 4시에 일어나자마자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고 어떻게 잘 해낼 건지 쓰고요. 밤에 자기 전에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쓰고, 잘하지 못한 일들은 반성하고 다음에는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적고요. 하루 동안 느낀 점이나 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 같은 걸 다 기록해요.

 

기록하시는 데 쓰시는 시간도 꽤 많겠어요.


그럼요. 꽤 되죠. 그런데 그걸 잘 하니까 글 쓸 때 훨씬 부담이 없는 것 같아요. 발레리나가 아침 저녁으로 끊임없이 스트레칭을 해야 본 무대에서 잘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정신적인 스트레칭 같은 거죠. 이완 작용이고요.

 

제목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 이에요. 살아가려면 얼마만큼의 힘이 필요한 걸까요?


사람마다 그 분량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간장 종지만큼 작은 양의 힘만 있어도 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큰 고무 대야만큼 있어도 쩔쩔 매고요. 누군가에게는 물질의 힘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힘일 수 있겠죠. 힘은 저마다의 환경, 위치,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주어진 만큼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더 원하면, 그건 힘이 아니라 재앙이 되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힘인 것 같고요.

 

꼭 큰 힘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다섯 살 아이에게 5kg의 물건을 들으라고 했을 때, 아이가 못 든다고 해서 ‘너는 힘이 없니?’라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작은 것만 들어도 ‘힘 세네!’하고 칭찬해주죠. 그 사람에게 맞는 분량이 있는 거죠.

 

말씀을 듣고 제목을 다시 보니까, 욕심 없는 마음이 느껴져요.


그렇죠. ‘꼭 필요한 만큼’의 힘이에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족하는 거죠. 그거라도 제대로 지키고, 거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제가 『유리 구두를 벗어 버린 신데렐라』라는 그림책에서 쇠똥구리 이야기를 쓴 적이 있어요. 쇠똥구리를 보면 열심히 먹이를 굴리면서 가잖아요. 그때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어요. 개미도 있고, 파리도 있고, 인간도 지나다니고, 바람도 불고, 아이가 빵을 먹다가 떨어뜨리기도 할 거예요. 그런데 쇠똥구리는 자기 먹이만 밀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저장하는 거죠. 만약 길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쳐다보고 땅에 있는 것들을 계속 붙인다면, 결국 탈진해서 쓰러질 거예요. 쇠똥구리를 보면서 그걸 알았어요. 가지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제대로 지키고, 자족해야 한다는 걸요.

 

“어른들 눈치 보느라 무게 잡는 글을 쓴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라고 쓰셨어요. 글을 쓸 때, 힘을 들이는 것보다 빼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비유나 은유 같은 걸 잘 쓰지 않고, 인용도 잘 안 해요. 톨스토이에게 영향 받은 바가 있는 건데요. 톨스토이가 러시아 우화집을 내게 된 배경이 있어요. 어떤 농민이 톨스토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자신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글로 된 책을 써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 편지에서 톨스토이가 깊이 깨닫고 민중을 위한 책을 쓰게 된 거죠. 그걸 통해서 저도 ‘그래,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면서도 그것이 나의 문체가 될 수 있게 글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비유나 상징, 은유는 되도록 빼게 됐고요. 인용을 하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을 고르게 된 거예요. 그런 식으로 글을 쓰다 보니까 오히려 저는 편해요. 저만의 글과 목소리로 지면을 채워야 된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오랜 세월을 그렇게 써왔기 때문에 편해요.

 

이런 문장도 있어요. “나에게 글 쓰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쭐대거나 남을 무시하는 힘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경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쉽지 않죠. 각을 세우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그 사람 인생이죠. 저는 ‘절대 겸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글을 쓴다는 이유 하나로 선생님 소리를 듣고 대우를 받잖아요. 강연이 끝나면 저보다 훨씬 많은 재원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놔요. 그런 걸 생각하면 겸손할 수밖에 없죠. 보통 예쁜 사람들을 보고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다고 하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예쁜 건 나라를 한 번 구한 거고, 제가 글 쓰는 건 열두 번은 구한 것 같아요(웃음). 게다가 어린이도 읽을 수 있는 글, 엄마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으니까 축복을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거만하고 우쭐댈 수 있겠어요. 절대 그럴 수 없죠.

 

스스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엄격한 게 아니고요. 그래도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남에게 뭔가 가르치려고 한다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수도 매일 두 번씩은 하잖아요. 그런데 왜 얼굴만 세수해요? 마음도 생각도 똑같아요. 음식을 썩게 하는 방법은 그냥 놔두는 거잖아요. 사람의 마음도 그래요. 닦지 않고 놔두면 다 부패해요.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고 욕심으로 물들게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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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줄 대상이에요


작가님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정말 많아요. 작가, 번역자, 강연자, 점자책 편집자, 소리책 나눔터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등 책과 관련해서 많은 일들을 하고 계세요.


말씀하신 일들도 하고 있고, 노숙인 대상으로 글쓰기와 인문학 지도와 강연도 하고 있어요. ‘거리의 아빠들’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합창제, 문화제를 하고요. 그렇다 보니 노숙인 제자들이 정말 많아요. 또 이주 여성들과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데요. 1월 중에 책도 나올 거예요. 또 고양시 도서관 정책위원장이라서 도서관 일도 하고 있고요. 연애만 빼고 다 하고 있어요(웃음).

 

지금까지 내신 책이 300여 권이에요.


37년째니까요.

 

긴 세월이기는 하지만 정말 왕성하게 활동하시면서 다작하시는 작가로 유명하시잖아요.


그 중에 번역된 책, 유아책 같은 것들을 빼고 나면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십 수 년 만에 한 편씩 작품을 쓰는 작가도 있는 거고, 저처럼 부지런히 계속하는 사람도 있는 거죠. 저는 직장인과 비교하곤 해요. 직장인이 힘들다고 출근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매일 출근하잖아요. 심지어는 휴일에도 근무하고 야근도 하죠. 그 삶의 기록이 작가의 책의 기록과 똑같은 것 같고요. 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순교자는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해요. 매일 만원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고, 때로는 가족 안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직장에서 겪는 갈등도 있잖아요. 그걸 이겨내고 자식 때문에 참고 또 하루를 보내고 또 웃고... 진정한 순교자는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정규직이 아닌 사람은 더하죠. 정말 육체의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괴로움이라고 하잖아요.

 

내 안의 이야기가 소진되는 것 같다는 불안감, 느끼실 때 없나요?


없어요. 매일 나를 채우니까요. 강연도 낭비라고 생각 안 해요. 수많은 생명과 사연을 만나는 거예요. 누가 저한테 그 많은 이야기를 가져다주겠어요. 그리고 저는 술을 마시지 않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고 여러 가지를 보면서 충분히 채워요. 나에 대한 기록도 결국은 나를 채우는 거거든요. 비우면서 채우는 거죠. 그래서 고갈이나 방전 같은 건 한 번도 느낀 적 없어요. 오히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으니까, 홀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까 삶이 점점 단순해지고 절제가 되는 거예요. 열 사람 만날 거 두 사람 만나니까 삶이 단순해지죠. 저절로 절제가 되는 거예요. 제가 잘나서가 아니고요.

 

이번 수필집을 보면 태양, 별, 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것들을 보면서 힘을 내시는 것 같은데요. 항상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기 때문인가요?


그렇죠. 그리고 그것들이 위에 있잖아요. 우리가 하늘을 보고 우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보면 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 보느라 고개 숙이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요즘은 다 고개 숙이는 사회예요. 그런데 저는 하늘을 보는 순간, 지상의 문제들에서 조금 벗어나는 느낌이 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달과 별과 태양 같은 것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죠. 내가 눈을 들어서 바라보면 늘 나를 보고 있어요. 내가 못났다고 해서, 아니면 못생겼다고 해서, 그 어떤 이유로든 고개를 돌리거나 나를 떠나거나 잊은 적이 없어요. 인간은 늘 변하잖아요.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그냥 사랑해줄 대상이잖아요. 믿은 사람이 바보죠. 사람은 그냥 사랑해줘야만 되는 대상이에요.

 

“이 책은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싶은 나의 작은 바람이다”라고 쓰셨어요. 그늘이 필요할 때 떠올리는 책이 있나요?


그럼요. 일단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있어요. 이번에 라틴어 완역판이 나와서 세 번째 읽고 있고요.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에요. 지금은 그런 소설이 없어요. 쓰지도 않고요. 반 고흐에 관한 책들은 다섯 번째 읽고 있어요. 편지 모음집 같은 책들이고요. 또 하나는 성경책이에요.

 

어른들을 위한 소설도 쓰실 계획이세요?


네, 이제 쓸 거예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짤막짤막한 글들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정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요. 현대인들의 불행의 원인은 자신이 가진 게 너무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미디어는 계속 세련되고 새로 나온 물질과 삶의 위장된 모습들을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정작 내 삶은 대학 때부터 학자금 융자를 받아야 하고, 모든 게 빚 없이는 안 되는 거죠. 결혼도, 출산도, 주택 마련도, 모든 게 그래요. 심지어 장례비용까지도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거죠. 그런데도 끊임없이 구입을 하잖아요. 그런데 생각을 바꾸면 훨씬 간결해져요.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가진 건 별로 없는데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게 자족하는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그런 내용을 스토리에 담아서 쓰고 싶어요.

 


 

 

사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노경실 저 | 다우
지나온 시간과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을 애석해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슬러 생의 한가운데를 우직하게 통과하려는 저자의 모습에서 나약하지만 생명력 강한 한 인간의 초상이 엿보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미셸 조너,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로 한 발 더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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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서 태어나 필라델피아에서 자란 미셸 조너(Michelle Zauner)는 2011년 사이키델릭-펑크 록 밴드 리틀 빅 리그(Little Big League)를 통해 음악 씬에 데뷔했다.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내며 활동을 이어가던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이 들려왔다. 허무하게 너무나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미셸은 필라델피아와 멀리 떨어진 오레곤에서 새로운 감정의 싱글을 발표하면서 새 프로젝트의 이름을 알린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다.

 

개인적인 비애와 치유의 과정을 담은 데뷔작 <Psychopomp>는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주목을 동시에 획득하며 원 소속 밴드의 성과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보다 확장된 사운드를 들려준 차기작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은 미셸에게 더 큰 세계를 선사했다. 팝 매거진 <롤링 스톤 (Rolling Stone)>이 선정한 '2017 최고의 앨범' 순위 39위에 오르는 등 평단의 일치된 호평을 받았고, 120회 월드 투어를 진행했으며, 내년에는 최대의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인 코첼라(Coachella) 페스티벌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월드 투어의 마지막을 지난 2017년 12월 14일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고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미셸을 홍대에서 직접 만났다.

 

한국에 온 지 2~3주쯤 되어간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나.


즐겁다! 주마다 한국어 수업도 듣고, 친구들도 만나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예지를 참 만나고 싶었는데 직접 만나게 되어 좋고, 무라 마사 공연도 봤다. 다른 한국 뮤지션들과 프로듀서들과도 많이 만나고 여러 가지를 공유해보고 싶었는데 다양한 분들과 재미있는 시간 보내고 있어 정말 좋다. 방이 좀 좁긴 하지만(웃음)

 

지난해 29일 예지의 첫 한국 무대를 함께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부터 연락하던 사이였는지.


나도 그 사진 봤다 (웃음). 예지와는 한국에 와서 처음 연락했다. 미국에서는 알지 못했다. 굉장한 재능을 지닌 멋진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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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Japanese Breakfast Instagram(@jbrekkie)


 

한국서 새소년, ADOY, 파라솔 등 신진 밴드들과의 만남도 활발하다. 한국 밴드들은 어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새소년과 파라솔의 기타리스트들은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들이다. 파라솔의 음악을 틀어 놨더니 '얘네 누구야? 완전 짱인데!'하고 모두가 감탄했다. 새소년의 소윤 나이를 알고 나선 완전 쇼크, 1997년생이라니!(웃음) 이 두 팀의 기타리스트들은 정말 최고다. 오프닝 쇼를 장식한 아도이가 플레이할 때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한국어로 말했다.). 좋아하는 한국 음악은 많지만 좋아하는 팀을 물어보면 떠오르는 팀이 없었는데 이 팀들은 정말 인상 깊었다.

 

공연에도 직접 오셨던 '큰 이모'는 잘 계시나. 한국의 가족들과는 어떤 사이인지.


큰 이모는 항상 내게 '직장은 다니는지, 돈은 잘 벌고 있는지'를 걱정해준다. 할머니는 7년 전, 작은 이모도 5년 전 세상을 떠났고 3년 전에는 엄마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사촌 오빠와 큰 이모가 남아있는 유일한 친척 분들인데, 함께 상실을 공유하고 나를 응원해주는 소중한 분들이다.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도 큰 이모와 인연이 있는 노래다. 김밥레코즈의 존이 남편 피터에게 알려준 곡인데, 큰 이모에게 얘기했더니 엄마가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엄마의 추억을 다시금 새긴, 뜻깊은 곡이다. 언젠가 커버도 할 생각이다.

 

어릴 때 내 주위엔 99% 백인 아이들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회로 빨리 들어가고픈 마음에 한국어를 배우는 데 반항심이 있어서 '그런 거 안 배워도 상관없어!'했는데 큰 이모가 영어에 능숙지 않으셔서 후회가 된다. 늦게라도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한글학교'도 다니고, 연세대학교에서 한 달 정도 수업도 들었다. 지금도 한국어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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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회 월드 투어의 마지막이 12월 14일의 한국 공연이었다. 마지막 공연은 어땠나?


120번보다 훨씬 많이 한 느낌이랄까? 미국에 있는 내 친구는 공연 200번도 했는데 뭐. 월드 투어를 매조지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이번 한국 공연은 정말 내게 특별했다. 큰 이모와 이모부가 공연장에 왔는데, 내 장래에 대해 항상 궁금해하시고 백수는 아닌지 걱정하시던 분들이라 많은 관객들이 온 걸 보고는 놀라셨다. 한국 관객들은 더 호응도 많고, 감정적으로도 열려있다는 느낌이 들어 내 이야기들을 더 깊게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리틀 빅 리그 시절 길고 힘든 활동을 했지만 2장의 앨범도 그렇고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 그 와중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주 개인적인 작업물을 담고자 솔로 프로젝트 <Psychopomp>를 낸 것이다. 상실을 달래기 위해 만든 앨범이라 작은 레이블 데드 오션스(Dead Oceans)에서 발매했고, 아무도 안 들을 줄 알고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반응이 이어졌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프로젝트로 10년 만에 다시 한국에 와서 공연도 하고, 코첼라(Coachella) 페스티벌에 초대도 받았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마지막 공연이라 더욱 고맙고 행복했다.

 

상실을 담은 데뷔작과 달리 지난해 발매한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을 '치유'의 과정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두 작품의 차이가 있다면.


1집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내 상실감과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다룬 앨범이고, 2집은 어느 정도 갈무리가 된 상태에서 만든 명상적인 레코드라 할 수 있겠다. 데뷔작이 성공하면서 좀 더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슬픈 감정이든 분노의 감정이든 남들에게 분출하는 대신 나 스스로 풀어내고, 소화하면서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마음이랄까.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은 엄마의 죽음같이 슬픈 일이 일어나면 그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 모든 것들을 기계적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기계적인'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전작과 달리 전자음을 도입하고 1970년대 크라우트 록 풍이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맞다. 'Diving woman'을 예로 들자면 그 곡은 제주도의 해녀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곡이다. 노래 가사에도 제주도가 등장한다. 매일같이 일어나서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해물을 캐고, 다시 바다로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그런 기계적인 일상을 이어가는 독특한 그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오토튠을 쓴 'Mechanist'는 로봇과의 사랑을 상상해본 곡이고.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자 쓴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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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The Body is a blade'처럼 트라우마가 느껴지는 곡들도 있다.


원래 나는 밝고 명랑한 사람이 아니다. 나쁜 일이 없어도 다크한 사람이었다. 스물다섯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엄마랑 같이 다니는 것만 봐도 화가 치밀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곤 했다. 나쁜 일이 생기면 그 나쁜 일대로, 어두운 감정으로 헤쳐나가고자 하는 내용을 담았다.

 

'Till death'는 밴드의 기타리스트이자 남편인 피터 알렉산더(Peter Alexander)에게 바치는 러브송이고, 앨범 크레딧에도 남편이 없었더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 적었다.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도 엄마를 위한 마음이 컸다. 엄마가 병원에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결혼 소식을 들려드리면 기뻐하시면서 건강을 되찾지 않을까 싶었다. 원래 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는데 남편에게 결혼하자고 내가 졸랐다. 엄마는 병원 밖으로 나오기도 힘든 상황에서 드레스, 장소 모든 걸 2주 만에 준비했다. 엄마는 결혼식에 오고 그다음 주에 코마 상태에 빠졌다. 피터는 그런 힘든 상황을 모두 곁에서 발맞춰주고,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나와 함께 해준 사람이다. 항상 고맙다. 결혼할 때 '진심으로 사랑하자'는 약속을 했다.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프로젝트인데 그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아주아주 초반 단계라 생각한다. 음악 듣고 책을 읽고,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듣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노트에 기록했다. 그걸 토대로 가사를 썼고 기타를 치며 멜로디를 붙였다. 낙서하듯이 만들어놓고 나중에 완성하는 방식이라 엔지니어링 부분에서 맘에 차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번 앨범 같은 경우는 굉장히 예전에 막 녹음해 놓은 데모에서 아이디어를 끌어 오기도 했다. 인생에 있었던 많은 것들을 압축해서 풀어놓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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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하는 이상향의 아티스트가 있다면?


내가 하는 음악과 비슷하진 않지만 비요크를 제일 좋아한다. 이 세상의 음악이 아닌 것 같다! 항상 새로운 걸 추구하고, 비주얼적으로도 놀라운 광경을 선보인다. 내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비요크처럼 혁신적인 것들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리틀 빅 리그 밴드 시절에는 멤버들이 있으니 의견 충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나(웃음). 비요크처럼 하고 싶다.

 


매거진 <롤링 스톤(Rolling stone)> 등 다양한 매체가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을 올 해의 앨범으로 꼽았다. 코첼라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한다. 성공적인 2017년이 된 셈인데 기분이 어떤가?


<롤링 스톤>에서 35등 했는데 내년엔 10등은 해야 되지 않겠나(웃음). 당연히 너무 좋은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작년엔 650명 정도 들어가는 곳에서 공연을 해도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웠는데, 지금은 '좀 더 공연장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2000명, 6000명! 근데 현실에서 잘 느껴지진 않는다. 좁은 버스를 타고 달려도 달려도 사막뿐이던 미국 투어 시절도 얼마 되지 않았고, 공연하고 호텔에서 죽치고 앉아있고 하다 보니 실감하지는 못했다.

 

<아이즈(Ize)>의 특집 기사에선 예지와 제이 솜(Jay som), 미츠키(Mitski)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를 묶어 '아시안 팝이 미국 대중음악에 라틴 팝 같은 새로운 흐름을 제기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어릴 적 예 예 예스(Yeah Yeah Yeahs)의 카렌 오(Karen O)를 우상으로 삼으며 자랐다. 카렌 오도 한국 혼혈 아닌가. 그의 퍼포먼스를 보며 난 두 가지 생각을 느꼈다. 첫째로 카렌의 온갖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보며 '우와! 한국 사람들은 저렇게 절대 못할 텐데'하는 경외였고, 둘째로는 '카렌 오도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야?'라는 자신감이었다. '내가 아시아계 미국인이야'하고 매일매일 주입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인터넷이 계속 발전하면서 그런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타나고 다양한 취향과 흐름이 주류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아 뿌듯하다. 지난해 미츠키와 제이 솜과 같이 공연할 때 참 놀라웠다. 세 명의 아시아계 여자들이 미국에서 투어를 돌다니. 말이나 되나. 흥미롭고 어메이징 하다. 어렸을 땐 생각도 못해본 일이다.

 

최근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을 커버하기도 했다. 향후의 음악 계획과도 관련이 있는지.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물론 향후의 작업과도 관련이 있고.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왕가위 감독의 열렬한 팬이다. <중경삼림>은 내 인생 영화다. 왕가위의 영화 같은,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트위터 프로필의 'I'm a Korean'이 인상 깊다.


프로필 소개는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는 이름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관계는 잘 알고 있지만 그거랑은 전혀 상관없고. 미국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가 코리안 브렉퍼스트보다 떠오르는 게 더 많지 않나. 그래서 택한 이름이다. 누구도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식 아침도 안 먹는 사람이다 (웃음). 프로젝트 이름일 뿐이다.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서 가끔 '한국인인데 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냐?' '일본인이 되고 싶나' 등등 문화적으로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트위터 프로필은 그런 오해를 대하는 방법이다.

 

 

인터뷰 : 김도헌, 이택용, 박수진
통역 : 휴키이쓰(Hughkeice)

정리 : 김도헌
Live Photo Credit : 김도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병민 “아빠 김근태, 먼저 돌다리를 놓으면서 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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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거기는 따뜻한가요? 등이 시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던 이곳과는 다른가요? 발걸음은 좀 가벼워졌나요? 이젠 떨리는 손을 슬그머니 붙잡아 숨길 필요 없겠지요? 우리를 보고 있어요? 짝꿍 인재근 엄마가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나요?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도 보이나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요. 아빠.(5쪽)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된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투옥된다. 2년 10개월의 투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다시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간다.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는 김근태가 감옥에 있던 시기에 아내 인재근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고문 피해자 이전에 실천적 민주주의자였던, 가족을 사랑하는 다감한 사람이었던 인간 김근태의 모습이 편지에 그대로 담겨있다.


“너무 남영동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었던 김병민은 이 편지가 김근태의 다른 면을 알려주게 되기를 바랐다.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홀로 고군분투하는 인재근에게 미안하다 진심을 다해 말하고, 남녀차별 문제에 대해 김병준과 김병민에게 긴 편지를 적어 보낸 김근태는 새롭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김근태 아빠, 인재근 엄마). 서로를 친구로 대한다. 김근태는 원한다면 김병준과 김병민이 인병준과 인병민이 될 수도 있다고 자녀들에게 말한다. 여러 의미에서, 이 편지들이 현재의 텍스트로 읽히는 것은 비단 김병민뿐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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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가족들의 이야기


인재근 엄마가 편지 공개를 쑥스러워 하셨다고 했는데요. 책이 나왔잖아요. 반응이 어떻던가요? 여전히 쑥스러워 하세요?

 

의외로 좋아하시더라고요. 좀 쑥스러워 하는 느낌은 여전하죠. 사적인 거라 그런 느낌은 갖고 계신데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족들의 이야기를 알려야겠다는 데에는 공감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전히 쑥스러워 하고는 계세요.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와 출간 후의 반응이 달랐나요?


처음의 계획은 인재근 엄마의 편지가 포함되는 게 아니었어요. 김근태 옥중 편지가 다시 세상에 나와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책을 계획한 거였거든요. 그 과정에서 편지를 추리다보니 인재근 엄마의 편지도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인재근 엄마의 편지는 저도 본 적 없던 거예요. 엄마가 편지를 썼었다는 이야기만 알고 있었고, 꼭꼭 숨겨두었던 거거든요. 본 것처럼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본 적은 없었던 거고, 그걸 저도 준비하면서 깨닫게 된 거죠. 마치 구전처럼 알고 있었다는 걸요.(웃음)

 

인재근 엄마는 편지를 다 보관하고 계셨던 거군요.


네, 본인 침대 밑 서랍에서 편지가 나오더라고요.

 

프롤로그 격인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라는 글에서 “인재근 엄마의 편지들을 찾아 읽고 나니 김근태 아빠의 글들이 완성되는 느낌”이라고 했잖아요.


김근태라는 인물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이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민주화운동 할 때보다 정치인으로 활동할 때의 평가들이 저는 안타까웠거든요. 우유부단하다든가 대중성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평가들 말이에요. 제가 자라면서 본 걸 떠올리면 특히 대중성이라는 면에서 안타까운 점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번 책도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죠. 옥중에서 쓴 편지니까요. 그런데 인재근 엄마의 글이 들어가면서 약간 대중성이 확보되었다고 할까요?(웃음) 평범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누구한테나 해당할 수 있는 가족적 이야기가 완성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엄마의 편지를 보고 하게 됐어요.

 

두 분의 톤이 완전히 다른데요. 거기서 오는 리듬감이 있어요.


아빠는 문어체에 가까운 말을 쓰는데 엄마는 거의 구어체로 쓰잖아요. 실제로도 그랬거든요. 김근태 인생을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김근태에게 다소 부족한 대중성을 가지는 부분이 엄마에게는 있어요. 너무 슬프거나 사색적이거나 시적인 것으로부터 탁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느낌, 그리고 다시 가는 느낌이 엄마의 편지에는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을 좀 채우는 것 같았어요.

 

막상 직접 편지를 보고도 꽤 놀라셨을 것 같아요.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다르잖아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우선 엄마 편지가 아빠의 편지보다 더 많았거든요. 왜냐하면 김근태는 옥중에서 쓴 편지라 규격봉투에 일주일에 한 번, 이런 제한이 있었으니까요. 또 가족한테만 보내는 게 아니라 동지들한테도 보내야 하잖아요. 아주 계획적인 분이라(웃음) 수신인을 나눠서 쓰셨는데요. 엄마는 면회도 금지된 상태였으니까 아빠가 편지를 많이 기다릴 걸 알잖아요. 그러니까 바쁜 와중에도 편지를 많이 쓰셨던 거예요. 새벽에도 쓰시고요.

 

새벽에 쓰다 중단한 편지를 아침에 이어 쓰기도 했어요. 인재근 엄마의 편지는 기록 시간까지 적어두셨더라고요.

 

저도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노래 가사라든지 시구도 많이 써서 보냈더라고요. 책에 많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편지를 대체한 유행가 가사 같은 것도 많이 보냈어요.

 

편지가 전부 검열되어야 했으니까 그랬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저항시 같은 건 다 까맣게 지워지고 그랬더라고요. 편지 실물을 보면 완전히 달라요. 검열 때문에 지워진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저는 이 편지들이 한 가족의 역사 같은 느낌이면서도 민주화운동을 한 가족들의 얘기라는 생각도 했어요. 워낙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계셨으니까요. 이게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구나, 하고 느꼈죠. 당시 민주화운동 하던 분들의 가족과의 교류가 지금도 있거든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1983년 9월 30일 결성)’을 조직했을 때 아빠 나이가 거의 가장 많았기 때문에 2세들 나이가 대부분 저보다 어려요. 이 편지들을 보면서 그 친구들도 생각하게 됐어요. 편지에 담긴 어린 병민이의 얘기가 모두 동생들의 얘기죠. ‘민청련 2세’라고 하는데요. 동생들의 이야기도 담겨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책으로 편지를 묶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겠죠?


제가 가장 잘 아는 저의 부모님과 제 얘기를 하는 동시에 잊힐 수 있는 민주화운동 가족들의 얘기를 생각하게 됐어요. 책을 만들면서 그런 면을 많이 생각하게 된 거예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고요. 제가 미술사를 전공하고, 전시 쪽 일을 했었어요. 추모 전시를 몇 번 했는데요. 김근태 텍스트를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그것에서 영감을 받도록 하려다 보니까 책이 필요하겠더라고요. 책이 없으니까 자료를 복사하고, 제본 떠서 드려야 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제대로 하려면 책도 만들고,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출판사에서 제안을 해주셔서 만들게 된 거죠.

 

 

포스트 트라우마


저는 딸 김병민의 글이 참 좋더라고요. 흑백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컬러사진이 등장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저자의 글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가슴 아픈 부분이 있어요. 김근태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인데요. 저한테는 정말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였어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런 면보다는 투사, 고문 피해자, 라는 면이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잖아요. 말하자면 포스트 트라우마인데요. 그런 게 약간 진절머리 나게 싫은 거예요. 제가 아는 그 사람의 진가는 그게 아니니까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일어서려고 했던 사람이고, 사람을 사랑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이거든요. 일화가 있거든요. 한 번은 아빠가 택시를 탔는데 합승했던 어린 친구들이 “이근안 씨 아니세요?”라고 했다는 거예요. 너무 충격적이죠. 제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김근태 관련 전시를 준비할 때도 한 가족이 와서 “이 분, 그 분이잖아. 이근안.”이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충격이네요.


물론 이근안 본인이라고 한 게 아니라 이근안과 관련이 있다, 이런 뜻이었지만요. 그런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뭔가 그걸 이겨낼 수 있는 대중적인 텍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많이 생각했어요. 그런 데서 제 글을 시작된 것 같아요.

 

인간적인, 다른 면모를 좀 더 보여주고 싶었군요.


그런데 요즘 또 다시 그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거예요. 영화 <1987>도 인기고요. 저는 그게 조금 괴로워요. 그 시절을 알리는 데에는 대중적으로 폭발력이 있으니까 좋은 일인데요. 개인적으로는 힘들죠. 기사화 되는 부분도 ‘박종철 열사와 같은 곳에서 당한 김근태’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요. 기사 읽을 때 조금 힘든 부분이 있어요.

 

1호선 남영역에서 보이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도 못 가봤다.(중략) 어느 날 1호선을 타고 지나가다가 건물과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1초 만에 스쳐 지나갔는데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트라우마의 극복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 보다.


김근태 아빠가 반인륜적 고문에도 한 번도 정신을 잃지 않고 날짜, 시간, 사람을 기억하고 기록한 이유는 악행의 고리를 끊기 위함이었다. 비인간적인 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다시금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가까이 갈 생각이다. 좋은 기억만 간직하지 않겠다.(214-215쪽, ‘김병민의 글’)

 

책 후반부에 영화 <남영동 1985>를 아직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적으셨잖아요.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목소리를 내고 전시, 출판 등 여러 활동을 하신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돼요.


사람들이 그런 쪽으로만 연관 짓잖아요. 김근태라는 사람의 삶이 고문 때문에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그것 자체에만 집중되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옳지 않죠.

 

당연히 한 개인에게는 복합적이고 중첩된 면이 있는데 그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에만 두고 한 면만 보는 건 그를 제대로 보는 게 아닐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가족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비극적이고요.


그런데 이걸 하다보니까요. 가족이 먼저 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히거나 그렇게 굳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가족의 역할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일찍 돌아가신 다른 열사 분들도 그렇고요. 제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보니까 예술가도 그런 경우가 많더라고요. 미술사를 전공한 것도 아빠의 영향이 있고, 책을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아빠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숙명처럼(웃음) 저절로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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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텍스트


부모님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게 하고, 김병민을 엄마의 성을 붙여 ‘인병민’으로 부르기도 했던 것을 보고 꽤 놀랐어요. 거기에는 많은 함의가 있잖아요. 두 분은 무엇보다 평등에 대한 의식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저희 집에서 이름 부르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어요. 김근태 아빠, 인재근 엄마, 라는 말이 저한테는 자연스러웠는데요. 이게 우리만의 전통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되더라고요. 아빠는 엄마에게 대해서도 누구의 아내가 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고, 그래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말로도 많이 했었어요. 국회의원을 하실 때 ‘사모님 인재근’이 되는 것에 대해 굉장히 미안해하셨고요. 지금 저희는 그렇게 아까워하더니 후계자로 만들었다고(웃음) 얘기를 하지만요. 아내가 본인의 이름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그 사랑이 그대로 딸한테도 왔던 거죠. 살면서 부딪치게 될 사회의 남녀차별에 행여 딸이 좌절할까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렸을 때는 너무 유난이라고 생각도 했었는데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다르더라고요. 아빠가 뭘 걱정하셨는지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이 편지들이 정말 현재의 텍스트로 읽혀요.

 

김근태 아빠의 걱정이 너무 맞아 떨어지는 환경이니까요. 아직도 말이에요.


아빠의 말이 거의 그래요. 정치인으로 살려면 반 보 앞서 가야 하는데 다섯 발자국 정도 빨리 말씀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복지나 평화도 그렇고요. 5년이나 10년 후 이슈가 되는 말들이었거든요. 그것처럼 여성문제, 남녀차별의 문제도 그랬어요. 저는 호주제 철폐 얘기할 때 ‘새삼스럽게?’ 약간 이런 느낌이었어요. 아빠는 학교나 사회에서는 ‘김병민’으로 사니까 너희가 하고 싶을 때는 ‘인병민’으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아빠는 ‘인병민’이라고 부르겠다, 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거든요. 우리가 아빠만의 아들, 딸이 아니라고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굉장히 소중할 수밖에 없는 아빠였어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그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죠.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사랑스럽고, 또 애기들을 귀여워하고 잘 돌봐주기도 하는 병민이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아빠는 잔뜩 긴장하였다.(중략) 학교와 같이 제도로 되어 있는 곳, 법이 요구하는 때에는 불가피하게 김병민, 김병준으로 하되 자유스러운 곳, 예를 들면 어디 놀러 가서든지, 혹시는 학원이나 교회 같은 곳에 다닐 때 인병준, 인병민이라고 해도 이 아빠는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너희들이 그것을 진실로 헤아리고 마음으로부터 이해하여 그렇게 한다면 나는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134-137쪽, 김근태의 편지)

 

자신의 냉소주의를 고백하기도 했잖아요. ‘틀렸다 부정하고 싶어졌다. 우리 가족의 삶도 하찮게 느껴졌다’고요. 그리고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 2016년 촛불이 있었어요.


솔직히 너무 놀랐어요. 6월 항쟁은 어렸을 때라 다 기억하진 못해요. 엄마를 따라 농성장에 많이 다녔기 때문에 최루탄 냄새 정도는 기억하는데요. 특히 2011년 아빠가 돌아가시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는 너무 많이 좌절했었어요. 모든 시간이 부정되는 느낌이었죠. 그해 12월이 정말 많이 힘들었었어요. 그 다음에도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정말. 이민을 가겠다, 여기서 아이를 못 낳겠다, 하면서요. 그때 남편이 “너랑 나는 전두환 시절에 태어났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런 식으로 정신없이 지냈었는데요. 아빠의 글 중에 ‘익명의 다수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민주주의, 평화, 평등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올 때 세상이 바뀐다’고 했던 글이 있었거든요. 2016년 촛불 때 그걸 목격한 거죠.

 

정말 많은 분들이 그랬던 것 같아요.


87년을 겪어본 분들은 그걸 믿었을지 모르겠는데 저는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아이들과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촛불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죠. 이런 거구나, 그렇게 민주화에 헌신했던 분들이 먼저 가셨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너무 슬프죠. 이걸 못 보셨잖아요. 1985년 남영동에 가셔서 1987년에는 감옥에 계셨거든요. 생각해보면 6월 항쟁도 보지 못하신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도 촛불을 못 보셨잖아요. 이걸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민중들이 일어날 시기에 옆에서 함께 가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먼저 돌다리를 놓으면서 가는 사람이라고, 옆에 없는 걸 자위하게 됐어요. 먼저 가시는 분이구나, 옆에 있을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요즘에 많이 하는 생각이에요. 너무 애달파하지 말자, 이렇게요. 

 

이제 그때의 부모님 나이가 되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면들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더 느끼는 것도 있고요.


아기를 낳고 편지들을 읽으니까 달랐어요. 감옥에서 별을 보면서 나의 목소리가 전해지기를 기도하겠다, 고 한 이야기 같은 걸 볼 때 그 감정이 오롯이 나의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나는 거예요. 어떤 일을 선택하는 데에 우리가 얼마나 가시 같았을까, 얼마나 가슴 한 켠에 있었을까, 싶은 거죠. 어렸을 때는 우리보다 그 일이 더 중요했겠지, 그냥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민청학련 사건 때 사형 선고를 받고 “영광입니다”라고 얘기해서 아주 유명했던 故김병곤이라는 분이 있어요. 그 분에게 딸이 두 명 있는데요. 어느 글에서 ‘이런 군부독재 시대를 딸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했거든요. 이제는 그런 생각에 대한 공감이 생긴 거죠. 우리도 그런 선택을 하겠다, 이건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더 좋은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 아이를 낳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받았다, 라는 말이 마음에 남네요.


부모님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만큼 우리가 부모님과 보낸 시간은 많지 않았죠.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랑 받고, 다른 방식으로 보상 받았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고요. 그런 감정이 아이를 낳은 후에는 더 절실하게 와 닿았어요. 그냥 다른 방식으로 사랑 받았다, 정도가 아니라요. 그 순간, 맨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남영동으로 끌려갔던 그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걱정됐을까, 이런 생각들이 크게 다가와요. 번뇌하고 망설였을 그런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지점이 굉장히 아팠어요.

 

저자가 추억하는 김근태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어요.


굉장히 편안하신 분이죠. 글처럼 말씀도 그렇게 하시는 분이고, 강하게 어필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동지들 의견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고 하지 않고 “심정적 동의가 일어나지 않는다”(웃음)라고 에둘러 말씀하는 식인데요. 저한테도 그랬어요. 대학 다닐 때 놀러 다니고 하면 “병민아, 사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도로만 말씀하셨어요. 구구절절 설명 안 하시고요. 말씀이 많진 않았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건 실천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겁죠. 그런 면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곁에 인재근 엄마가 있었고요.(웃음)


맞아요.(웃음) 아빠의 친구들인데 엄마한테 와서 말을 전해달라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두 분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던 것 같아요. 경찰청에서의 일화가 있어요. 남영동에서 고문당한 직후였는데요. 고문당한 후에 감옥으로 가죠. 감옥에 가면 아주 차가운 곳에서 몸이 다 망가져요. 실제로 하혈도 하고 굉장한 두통에 시달리시고 살도 다 빠지고 그랬거든요. 면회는 못하고요. 그런데 사라진지 20일이 지나면 경찰청으로 송치된다는 걸 엄마가 아시고 그곳에서 2-3일을 진치고 계신 거죠. 거기서 어렵게 만났는데 아빠가 인재근 성격을 아니까 귀에 대고 고문당한 일을 다 말씀하셨어요. 엄마는 뭐든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거고, 실제로 엄마는 열심히 하셨죠. 그 얘기 듣고 바로 그날 기독교회관에 뛰어가셔서 고문 사실을 폭로했고요. 그런 행동력이 있는 걸 아니까 믿고 본인은 정신적인 치유에 애썼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아빠를 살렸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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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앞으로 자신의 과제처럼 염두에 두고 있는 일들이 있는 것 같아요. 김근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도 앞으로 계속 할 예정이라고요?


학부에서 역사를,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어요. 아빠가 자료를 정리하거나 자서전을 쓸 틈도 없이 돌아가셨잖아요. 남겨진 자료들을 보면서 내 역할이 이런 것에 있나보다, 생각하게 됐어요. 일부만 알고 있는,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면 외에 다른 모습도 보여줘야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한 거예요. ‘따뜻한 밥상’이라는 추모전을 지난 12월 29일까지 했거든요. 세 번째로 한 추모전인데 하다 보니 점점 발전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김근태 자료만 생각했다가 아내와 가족들 자료로 확대가 됐어요. 사실 민청련 활동을 하신 분들은 다 85년부터 감옥에 끌려가시고 막상 6월 항쟁에 참여하신 분들은 가족들이었거든요. 엄마들이 띠 두르고, 피켓 들고 있는 사진들이 있어요. 그렇게 가족들, 자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남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계속 해나갈 예정이에요.

 

여러 목소리, 그 자체가 또한 민주주의잖아요. 사회적으로도 꼭 필요한 일이에요.


아빠 추모전을 준비하다보니 제 이야기가 나오게 되잖아요. 첫 추모전 전시 때는 막 울면서 준비했거든요. 그런데 한 번 활자화되고, 사람들한테 보이게 되니까 많이 해소가 되더라고요. 치유 받는 경험이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제가 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본인이 살았던 얘기가 남겨지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같은 것들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민청련 2세들과도 엄마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우리도 책을 엮어볼까 하고 얘기 나누고 있어요. 거창하지 않더라도 그런 일을 하나씩 하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차원에서 이 책도 다양하게 해석되면 좋겠네요.


이 책은 남영동에서 나온 이후 감옥에서의 편지들이잖아요. 저는 그 사건보다 김근태라는 사람이 그 이후에 어땠는지 좀 더 알려지길 바라요. 얼마나 본인을 치유하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고, 가족들이 거기에 어떻게 힘을 더했는지를 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너무 남영동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저는 박종철 열사의 이야기를 알게 될수록 아빠의 남영동 이후의 삶이 기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성장한 이후 이야기인데요. 어렸을 땐 다시 아빠가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 이제야 돌아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다 큰 다음에는 약간 보너스 같은 삶이었다는 걸, 나에게만 찾아온 행운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 시간이 더 소중하고요.

 

사랑이 짙은 책인데요.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줬으면 하세요?


저는 딱 제 또래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어요. 특히 여성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남녀차별에 관한 이야기도 꽤 있고 그래서요. 김근태와 인재근을 어렴풋이 안다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고요. 너무 무거운 내용, 민주화 운동이나 고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특수한 상황이지만 평범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와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나누는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런 공통점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근태의 특수한 상황만 너무 부각되는 것 같은데요. 잘 몰랐던 사람들, 젊은 분들이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김병민 저 | 알마
해맑은 웃음과 따뜻한 손을 기억하는 김병준, 김병민 남매는 그런 김근태 아빠에게 받은 ‘무조건’인 사랑을 다시 돌려주려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유미 “『홀딩, 턴』은 연대에 가까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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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기혼자들은 으레 이런 말을 한다. “결혼, 안 해도 되는데 왜 사서 고생하냐.”라고. 농담이 반쯤은 섞인 이 말 속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랑하고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선택한 결혼 생활이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은 현실 말이다. 그래서 일부는 이혼하고, 또 다른 일부는 법적으로 결혼을 유지하더라도 각방이라든지 별거라는 형태로 견딘다.

 

『끝의 시작』, 『틈』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서유미 작가가 이번에 천착한 주제는 바로 결혼이다. 이번 장편소설 『홀딩, 턴』은 단 두 사람에 집중했다. 주인공 영진과 지원이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갈라서는 과정을 담았다. 제목 ‘홀딩, 턴’은 스윙 댄스 용어로 ‘홀딩’은 파트너와 만나 손을 잡는 동작, ‘턴’은 돌면서 춤을 도는 동작이다. 주인공인 두 사람이 갈등을 극복하고 홀딩하며 살아갈지, 아니면 차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턴해서 각자의 길을 걸어갈지를 두고 소설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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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에 관한 소설이 사랑에 관한 소설로 변하기까지

 

『끝의 시작』, 『틈』을 2015년에 발표한 뒤 『홀딩, 턴』을 냈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글쓰기 수업을 하고, 애를 키우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네요. 15~30매 정도의 짧은 소설을 몇 편 썼고, 두 번째 소설집 원고와 첫 에세이 원고를 다듬으며 지냈어요. 에세이는 임신 출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홀딩, 턴』보다 먼저 나왔어야 했는데 어쩌다보니 뒤로 밀렸네요. 아이가 여섯 살이 되었는데...(웃음) 올 하반기쯤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다른 소설도 그렇겠지만 이번 작품도 처음에 쓴 뒤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이혼’이라는 테마를 제안받고 쓸 때는 포커스가 좀 더 이혼 쪽에 진하게 맞춰져 있었어요. 그래서 연재 당시의 제목도 ‘테이블’이었고요. 그때의 소설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던 공동의 공간인 테이블이 이혼 얘기를 꺼내면서 어떻게 협상의 테이블로 변해가는가, 에 중점을 뒀어요. 쓰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까 감정의 대치, 말다툼, 후회, 고민이 길게 이어지니 읽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쓴 걸 읽는데도 재미가 없었어요. 이들이 테이블에 앉아 협상을 하기 전까지의 과정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자, 왜 헤어지려고 할까, 이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던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이야기를 좀 더 넣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도 사랑 이야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랑이 어떻게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 결혼 생활에 어떻게 균열이 생기는지의 과정에 대해 쓰게 되면서 그쪽 분량이 늘었어요. 쓰고 보니 소설 속에 사랑이 본격적으로 나온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를 기다리고, 같이 걷는 이야기를 쓰는 동안 즐겁고 따뜻했어요. 

 

‘테이블’도 좋은 제목인데요. ‘홀딩, 턴’은 어떤 의미인가요.

 

스윙댄스를 추는 분들에게는 익숙하고 기초적인 용어인데 다른 분들에게는 알 듯 말 듯한 단어인 것 같아요. ‘테이블’ 은 상상의 여지가 없는 제목이라 좀 아쉬웠어요. 출간을 앞두고 책 제목을 ‘테이블’로 했다가 소설책이 서점의 가구 코너에 꽂히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잠깐 했고요. (웃음)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니까 제목은 이런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사랑에 관한 제목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저도 모르던 용어인데 이번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된 단어에요. 스윙댄스에서 파트너와 만나서 손을 잡는 것이 홀딩, 돌면서 춤을 추는 동작이 턴이에요.

 

 

연대에 가까운 이야기

 

주인공 부부가 별다른 이유 없이 이혼하잖아요.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궁금해요.

 

이혼에 대한 소설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정한 부분이 외부 요소에 의한 이혼으로 가지 말자는 것이었어요. 두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이가 없는 부부로 정했고 현실적인 선 안에서 양가 부모와 가족들 부분을 줄이려 했어요.

 

결혼 5년 이상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언제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느냐고 묻곤 했는데 엄청난 사건 때문에 이혼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더라고요. 대부분 상대가 저런 사람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앞으로도 바뀌지 않겠지, 우린 정말 다른 사람들이구나, 라는 걸 깨달을 때 였다, 는 답이 많았어요. 그중에서 신랑이 발을 안 씻는 걸 참기 힘들다는 얘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소설이 사소한 것에서 균열이 생겨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이야기로 나아가게 됐어요.

 

결혼을 주제로 한 사회학 책 등 논픽션은 꽤 있는 듯한데, 한국 장편소설 중에 결혼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은 드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결혼을 앞두거나 결혼을 유지하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정말 결혼이나 이혼, 부부 자체를 조명한 소설은 별로 없는 것 같네요. 저는 『끝의 시작』『틈』, 『홀딩, 턴』 을 지나면서 부부라는 관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어요.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고요. 『홀딩, 턴』 은 이혼 장려 소설이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웃음) 결혼이나 이혼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다거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배우자의 어떤 면 때문에 힘들 때 읽으면 나는 무엇 때문에 상대를 사랑했고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든지 같이 얘기 나누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원 주변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은 지원의 이혼에 힘을 실어주잖아요. 이 소설의 주제는 어쩌면 자립일까요.
 
그렇진 않고요. 지원의 주변 인물로 친구들과 언니가 나오는데 미혼 여성, 이혼한 여성, 아이를 키우는 여성 이렇게 각각 삶의 형태가 달라요. 이렇게 설정한 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어요. 미혼을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을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고요. 뭐가 옳다기보다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는 걸 인정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설정했어요.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립보다 연대 쪽에 더 가깝습니다.

 

남자 주인공인 영진은 자신의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데요. 끝에 한 마디 하잖아요. 답답했다고.
 
전체 분량에서 영진의 이야기가 적은 편인데 그게 좀 아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요. 영진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건 노동하는 인간의 고단함, 피로 같은 부분이었는데요.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을 갖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보고 공무원이 되었지만 노동의 정년, 그 이후의 노동의 무게에 눌려 답답해하고 출근길에 차도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다고 생각해요. 그런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배부른 사람인데, 직업이 번듯하고 평탄한 것 같은 사람들도 억압받고 강요당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걸 영진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는데 거기에 집중하면 소설에 다른 색채가 끼어들 것 같아서 줄였어요. 앞으로 그런 억압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얘길 좀 더 쓰고 싶어요.
 
몸은 가장 뚱뚱했던 순간, 제일 많이 나갔던 몸무게를 기억한다고 한다. 틈만 나면 그때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요요 현상이 생기고 다이어트에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원도 불행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마음속에 불행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올라가 보았다. (190쪽)

 

몸무게의 요요 현상과 감정의 요요를 유비한 문장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런 적확한 문장은 어떻게 준비하나요.

 

감정이나 비유에 대한 문장은 소설을 쓰는 동안 나오기도 하지만 평소에 써 두는 경우가 많아요. 일상 속에서 되게 슬픈 감정에 빠지거나 좌절할 때, 어떤 일을 지나갈 때 그것에 대한 감상을 메모해둬요. 소설 속 인물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장이 잘 안 풀리면 다이어리의 메모들을 꺼내서 읽어봐요. 그들이 제가 아니고 그들이 겪는 사건이 저의 것은 아니지만 저를 통과한 세계이기 때문에 제 삶 속에 있는 것들과 닿아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옷장 문을 열고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넘겨보다가 마땅한 것을 꺼내 그들에게 건네는 기분으로 문장을 가져와요. 그리고 소설의 인물에게 맞는 톤으로 고치지요.

 

부부 이야기라면 둘 사이에 아이를 넣고 싶을 만도 한데요.

 

그 부분을 일부러 뺐어요. 아이가 들어가는 순간 부부만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부부는 피의 얽힘이 아닌 서로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관계인데 그런 면에 비해 주변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아요. 그것에 따른 변수도 많이 작용하고요. 그래서 지원과 영진 외에 다른 요소는 과감히 빼려고 노력했어요.

 

소설의 내용과 별개로 아이를 키우면서 인간과 본능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돼요. 아이를 낳는 건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일인가 충실한 일인가. 예전에는 사건을 바라보는 인간, 사건에 휘말리며 변하는 인간에 관심이 있었다면 요즘은 인간 자체, 근원적 인간을 그려 보고 싶어요. 그리고 대를 이어가는 가족의 이야기도 써보고 싶고요. 아무래도 큰 이야기가 될 테니까 시간이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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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작품을 낸 비결이라면

 

생활 밀착형 이야기를 쓸 때 많이 들으실 질문인데요. 이야기 중에서 실화는 어떤 부분인가요?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어요. 시어머니의 반찬이 맛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희는 남편이 저보다 잘 씻어요. (웃음) 고등학교 때 포크댄스 부분은 실제 장면을 몇 개 가져왔어요. 실제로 선배들이 학교 축제 때 스윙댄스를 췄거든요. 그런데 되게 운이 없는 게 제가 2학년이 됐을 때는 폐지됐어요. 나중에 후배들에게 들으니 몇 년 뒤에 다시 부활했다고 하더라고요. 지원과 영진만의 예외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되도록 보편적인 부부의 생활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집이나 아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차를 바꾸고 싶어하고. 
 
등단한 지 10년이 넘었고, 그 사이에 7권을 내셨어요.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했는데, 비결이 있을까요?

 

요즘은 다들 부지런히 쓰고 출간하는 분위기라 좀 더 열심히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소설 쓰는 걸 놓지 않고 꾸준히 해나갈 수 있는 건 제가 예술가보다 생활인이나 노동자에 가깝기 때문일 거예요. 하나의 소설을 다 쓸 때쯤이면 다음엔 이걸 쓰고 싶다는 게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얘기한 것 같은데 취미가 별로 없는 인간이라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고 영화 보는 것 말곤, 이것도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충분히 즐기지 못하지만요.(웃음) 비교적 글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특별하게 시간을 쏟는 게 없어요. 자연스럽게 글 쓰는 시간이 많죠.

 

초기작과 『끝의 시작』이후부터의 작품들이 약간 느낌이 다른 듯해요.

 

초기작인 『판타스틱 개미지옥』 , 『쿨하게 한 걸음』은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한두 사람에게 집중해보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꾸준히 들었어요. 그때는 똑 같은 사건이 여러 사람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상황, 같은 사건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사람들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는데 관심이 있었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인 큰 흐름을 바라보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혼란스럽기도 했고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개인적인 일과 여러 사건들이 겹치면서 밖으로 향했던 시선이 가까이로, 한 사람의 손끝이나 표정으로 옮겨오게 된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또 자연스럽게 시선과 관심의 이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마음에 맺히는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소설, 에세이 수업을 하면서 학생, 독자와 만나잖아요. 글 쓰는 데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제 시선에 갇히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요.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걸 사람들과 다시 나누고 작품과 연결해서 이야기하는 순간 새롭게 확장되는 경험을 하는 게 즐거워요.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앉아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같이 얘기하는 순간이 있다는 게, 그게 제 일이라는 게 참 감사해요. 게다가 책 이야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글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수업을 들으러오잖아요. 그들이 쓴 소설도 함께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이 될까 이야기하고 고민하는 순간 많은 것을 배우게 돼요. 그들의 작품이 나아지는 걸 보는 것도 즐겁고요. 

 

등단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글 쓰고 발표하는 환경이 바뀌었잖아요. 요즘은 온라인 연재 플랫폼이 많고, 독립출판물도 늘어났고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보나요?
 
수업을 하면서 느끼는데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책은 이전보다 덜 팔리지만 사람들의 표현 욕구는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책이 나오는 건강한 창구와 활로가 많이 늘어가는 걸 보며 읽고 쓰려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는 생각, 어떤 방식으로든 책을 읽고 만들 거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시장에 대한 비관 때문에 글쓰기가 위축되지는 않을 거 같고요.

 

2018년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올해는 두 번째 단편집과 첫 번째 산문집이 나올 거예요. 짧은 소설집도 계획하고 있고요. 그 사이에 단편을 쓰려고 두 편 정도 구상하고 있어요. 계획에 대해 생각하면 늘 많이 쓰고 더 쓰고 싶어집니다.


 

 

홀딩, 턴서유미 저 | 위즈덤하우스
‘사랑’이라는 감정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연애의 과정을 통과한 연인이 예식장을 떠난 이후 겪게 되는 ‘결혼생활’을 섬세하고도 진솔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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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과학의 대중화? 대중의 과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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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추측과 미신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과연 그런가?’라는 물음을 한 번 더 곱씹는 일이자 수많은 가설과 실험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더 나은 논의를 위해 나아가는 행위다. 확실히 과학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을 보고 위안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도 과학을 어려워한다. 그렇기에 서울시립과학관장 이정모는 ‘과학의 대중화’보다는 ‘대중의 과학화’를 더 바란다. 쉬운 게 아닌 과학을 쉽게 접근하려면 본질을 놓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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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밀착형 과학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은 여러 편의 글이 모인 책이에요.

 

일 년 반 정도 쓴 글을 모았어요. 작년 대통령 탄핵 즈음까지 썼던 것 같고요. 살아가는 이야기를 모은 책이라 과학책이 아닌데 제목에 ‘과학’을 붙이면 사람들이 헷갈릴 것 같아서 처음에는 제목을 반대했었어요.

 

안 그래도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책 리뷰가 있었어요. 과학책인데 계속 정치를 이야기한다면서요.


첫 번째 쓴 책이 「달력과 권력」이었는데 그때도 과학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문서라고 생각했어요. 달력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산수 계산이 조금 들어갔는데,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과학책이라고 여겨주더라고요. 그만큼 세상 사람들이 과학을 거리가 멀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생활 밀착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집필 당시 생활에서는 정치가 가장 생활과 밀접한 관계였겠네요.


2016년 3월 13일은 알파고와 이세돌의 네 번째 게임이 열린 날이자 인류가 인공 지능을 이긴 마지막 날이었거든요. 그쯤 되면 2017년 3월 13일에는 과학자들이 모여서 심포지엄도 열고 그래야 하는데, 한 건도 없었어요. 바로 3일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과학자들도 그 문제에 매몰되어 있던 거예요. 평상시 못 보던 교수들을 다 광화문에서 만나던 시기였으니까요.(웃음) 그다음 관심을 가진 게 육아 문제예요. 딸만 둘이거든요. 육아와 출산, 여성의 경력 단절 같은 이야기를 동물과 연관 지어 생각하죠. 새끼를 키우지 않는 수컷은 주로 파충류고, 조류와 포유류는 수컷이 육아에 참여하거든요. 그런 이야기가 생활 밀착형이 아닐까 싶었어요.

 

대개 과학 인문서의 내용은 생활하는 데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사실 생활과 관련 없는 건 하나도 없어요. 옛날에 헤르츠가 전자기파를 발견했을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 라디오, 텔레비전, 전자레인지, 휴대폰 모두 전자기파로 작동해요. 현대 물리학의 최고 성과라는 상대성 이론도 말만 들으면 어려워 보이지만, 상대성 이론이 없으면 내비게이션을 쓸 수 없어요. 지구에서 흐르는 시간과 우주에서 흐르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을 가지고 인공위성이 자동차의 위치를 보게 되거든요. 중력파도 지금은 먼 이야기지만, 얼마든지 생활과 연결할 수 있을 거예요.

 

 

과학자들은 실패에 익숙한 사람들

 

쉽게 쓴다고 해서 과학의 대중화는 아니라는 말씀이 있었어요.


1980년대에 운동권이 확산하면서 자연대에서도 과학 대중화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사람들이 과학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니까 과학을 쉽게 설명해보자는 역할을 많이 하는데, 완전히 실패한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이유는요?


처음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쉽게 설명하려다 보니까 어려운 걸 빼요. 예를 들면 부력을 설명하면서 부력의 원리는 빼고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 하면서 뛰쳐나오는 것만 알려주는 거죠. 과학 대중화를 하면서 과학의 변두리, 과학의 일화와 과학자의 이야기를 할 뿐 실제 과학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과학 주변의 이야기가 과학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의 대중화 운동뿐만 아니라 대중의 과학화 운동도 필요해요.

 

대중을 향한 과학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사람들에게 과학자만큼 지식을 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다만 이 세상의 과학자들이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 삶이 어떻게 바뀔지 이해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강의를 나가도 제가 말하는 시간은 한 시간 내로 줄이고 최대한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해요. 과학자와 직접 만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실제로 과학자들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과학자들은 엉덩이가 무겁고 실패에 익숙한 사람일 뿐이에요.

 

"과학관은 실패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과학을 보기만 할 게 아니라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몇몇 과학관에서 학습 프로그램,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어요. 체험 행사는 1에서 10까지 정해져 있고, 그대로 따라 하면 실패할 일이 없어요. 제가 관장을 맡고 있는 서울시립과학관에서는 보고(see) 배우는(learn) 것에서 하나 더 나아가서 실제 해보는(do) 일을 하고 싶어요. 과학을 한다는 건 자기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거예요. 지난겨울에는 DNA를 추출해서 증폭시키고 그걸 분석하는 실험을 했어요. 물론 가설을 세우다 실패하고, 가설 따라 관측하고 실험하다 실패하고, 실험 결과를 분석하다 실패해요. 하지만 괜찮아요.

 

실패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반발이 있었을 것 같아요.


처음 서울시립과학관을 만들 때도 과학이 신나고 쉬운 거라고 알려주는 과학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받았어요. 그래서 과학이 재미있을 수는 있는데 결코 쉬울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자꾸 쉽게 하려다 보니 본질을 빼는데, 그러지 말고 과학이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가되 최대한 재밌게 접근하자는 거죠. 과학만 어려운 게 아니라 역사도 예술도 경제도 어려워요. 하지만 평소 사용하는 자연어로 되어 있으니 어쨌든 책을 읽어낸단 말이에요.

 

그 어려운 과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과학이 우리 삶을 규정하는 부분이 있고, 잘 모르면 혹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속지 않으려고 과학을 이해해야 하는 거죠. 과학이 지식은 아니거든요. 지식이라면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는 변하지 않아야 하잖아요. 진화론도 세세한 부분은 처음 다윈의 주장으로부터 다 달라졌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다윈이 틀렸다고 이야기하진 않죠. 갈릴레오가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꾼 결정적인 증거 하나가 목성에서 달 네 개를 발견한 거였는데, 제가 배울 때는 목성의 달이 예순일곱 개까지 늘어났거든요. 작년 10월에는 예순아홉 개로 늘어났어요. 과학이 지식이라면 틀린 걸 배운 거죠. 하지만 과학은 옳은 걸 찾는 게 아니라, 어떤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맨 처음에 과학책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계속 들어보니 결국 과학 이야기인데요.(웃음)


그럼 과학책이 맞나 봐요.(웃음) 과학을 믿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해요.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느냐고 물어보는데 진화론은 믿는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 지구와 우주와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가장 합리적인 안이라고 받아들이는 거죠. 하지만 만약 삼엽충이 나온 지층에서 토끼가 같이 나왔다든지, 공룡의 배 속에 사람이 있는 단 한 개의 화석만 나온다면 이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진화 이론을 다 버릴 수 있어요. 내가 아는 것들이 조만간 틀렸다고 밝혀지고 다른 차원으로 가길 원해요.

 

자신이 아는 것을 의심하는 태도도 포함된 거네요.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잖아요. 경제학자는 경제학자의 눈으로, 일반 시민은 장바구니 물가를 보죠. 과학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분석하다 보면 자신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돼요. 내 주장이 충분히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는 것이 과학자의 태도거든요. 자신이 아무리 훌륭하고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라도 갓 박사를 받은 젊은이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는 거죠. 그런 게 과학적인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다음 과학을 하다 보면 우주가 얼마나 장엄한지,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이 차지한 역사가 얼마나 작은지 알게 돼요. 의심하고 겸손해지는 게 사람이 과학을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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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작을 쓰지 않는다

 

과학도 저마다 전문 영역이 있어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자신을 소개하시는데, 다른 영역의 과학을 이야기하는 게 힘들진 않나요?


다양한 수준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분야만큼 하는 거죠. 전문가만 설명해야 된다고 하면 우리나라에 과학 커뮤니케이터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해야 하지만, 과학자들은 아무래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요. 또 비판받는 데도 익숙하고요. 강연 가서도 틀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누가 잘못했다고 지적하면 잘못했다고 하면 돼요. 그 비판을 안 받으려고 시도를 안 하는 건 오히려 과학적이지 않은 태도죠.

 

글쓰기는 어떤가요?


안 힘들어요. 다른 분들은 글을 청탁받으면 일주일 전부터 고민하는데 저는 마감 두 시간 전에 고민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원칙이 ‘절대 불후의 명작을 쓰지 않는다’예요. 완벽한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가볍게 쓰는 거고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전해지면 그걸로 된 거죠.

 

주로 언제, 어떻게 쓰세요?


SNS에서 글감을 많이 얻어요. 훌륭한 SNS 친구들이 중요한 논문을 찾아서 번역해서 올려놓을 때도 있고요. 저널 검색 시간이 훨씬 줄어들죠. 그다음에 책도 많이 읽어요. 50대가 넘어가면 호르몬이 바뀌면서 갑자기 잠이 줄어들더라고요. 노인이 부지런해서 일찍 깨는 게 아니라 새벽에 저절로 깨져요. 어느 순간 하루에 네 시간 정도만 자도 되더라고요. 젊은 사람들한테 잠 많이 자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저도 그때는 많이 잤어요. 호르몬이 원래 그러더라고요. 읽다 보면 갈수록 쉬워지고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있더라고요.

 

다음 집필 계획이 있나요?


다음 달에 나오는 책이 『공생, 멸종, 진화』의 후속 편 정도가 되는데요. 번역서도 몇 권 계획하고 있어요. 길게 잡고 계획하는 책은 『다윈 사상사』예요. 제 집필의 삶을 한 번 더 마무리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이정모 저 | 바틀비
작은 꽃들이 큰 꽃보다 먼저 피는 전략으로부터는 빽도 없고 힘도 없는 자들의 연대를, 자신의 것을 버리면서 빛을 발하는 원자와 태양을 통해서는 낮아지는 것의 어려움을 논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명우 “부모님 나라로 떠난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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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인생을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든다면, 극본은 누가 쓸 수 있을까. 사회학자 노명우가 쓴 『인생극장』 으로 들어가보자. 2016년 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날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았다.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어머니를 위해 아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평범한 아내, 부모로만 살아온 어머니의 인생 속에서 어떤 응어리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  아들은 ‘가족 호칭에 가려져 있던 한 여자의 일생’을 기록하며, 부모의 심정(心情)을 한국 현대사와 마주치게 했다.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영상사회학’ 강의실에서 출발해, 한국고전영화를 함께 보는 프로그램 ‘세상물정극장’을 거쳐 사회학자 아들이 대신 쓴 자서전으로 완성된 『인생극장』 . 기록도 자료도 없는 보통 사람의 삶은 과연 복원될 수 있을까. 당대의 대중영화 속으로 들어가 만난 이름 없는 필부들의 이야기. 이 생경한 자서전은 이상하리만치 측은하고 냉정하고 또 따뜻하다.

 

저자는 말했다. “나의 부모가 인생극장의 무대에 올랐다가 퇴장했고 나는 그 무대를 물려받았다. 무대 장치가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부모를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고, 무대 장치 또한 투덜댄다고 바뀌지 아니하니 그것을 원망하며 째려보기보다는 찬찬히 살펴보는 편을 택하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부모가 살아온 생애를 기록하면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미래를 떠올린 아들, 사회학자 노명우의 이야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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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노스탤지어가 되어선 안 된다

 

책을 읽기 전에 북트레일러를 봤어요. 울컥하신 느낌이었어요.

 

조금 그랬던 것 같아요. 인터뷰하다가 강연하다가 보면,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순간이 있어요. 얼마 전 팟캐스트 녹음을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목에서 울컥했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생기더라고요. 이런 건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감사의 말’부터 책이 시작됩니다. 이후에는 머리말, 차례, 프롤로그가 이어지고요. 1부가 열리기까지 꽤 긴 글을 읽어야 하는데, 참 좋았습니다. 기대를 갖고 책을 읽게 만든다고 할까요.


감사할 분이 많았어요. 정말 길게 썼잖아요. 이 책은 제가 썼지만 제 부모님과 관련된 책이기도 하니까요. 초판 1,000부에 사인을 했는데요. 저자의 어떤 진심, 흔적을 전달하고 싶어서 독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사인했어요.

 

‘사회학자 아들이 대신 쓴 부모의 자서전’입니다. 사회가 읽히는 동시에 사람도 읽히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읽혔어요.


초고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따져보면 2년이 걸린 책이에요. 처음에는 아버지에 관한 책으로 기획했는데, 전체 원고의 1/3 정도를 썼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병세가 나타났어요. 병원에서 병을 알게 됐을 때가 2월이이었는데 길어도 6개월 밖에 못 사신다고 했어요. 결국 4개월 후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기면서 책 콘셉트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영화로 치면 남자 주인공이 단독 주연을 맡았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더블 캐스팅이 된 거죠. 제가 대신 쓴 자서전인 동시에 부모님의 나라로 떠난 여행기이기도 해요.

 

살아 생전 부모님께서 직접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두 분의 방식은 많이 다르셨다고요.


아버지의 경우, 제가 이런 책을 쓸 거라는 걸 모르시는 상태였어요. 책을 쓰기로 결정했을 때 아버지는 치매 증세가 시작됐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이 좀 엉뚱했어요. 진위를 알 수 없는, 그러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들이 많았고 그래서 어머니께 부탁을 드렸죠. 어머니께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가 생각하는 자신의 여러 가지 인생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어머니와 이야기를 녹음한 분량이 10시간 가량 돼요.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아버지의 새로운 이야기가 꽤 있었는데요. 두 분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남자와 여자의 의사소통 방식이 꽤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아버지는 자기 인생을 회고할 때도 대개 정보 중심이었는데요. 어머니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감정, 정서를 주로 이야기했어요.

 

아버지는 집에서만큼은 ‘동굴 속의 황제’셨다고요.


가끔 아버지께서 가위에 눌리시곤 했어요. 그러면 각종 욕을 동원하여 가장 끔찍했던 기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고하셨죠. 내세울 것 없는 아버지였지만, 최소한 집에서 만큼은 아버지는 그저 그런 남자가 아니셨어요. 평범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밖에서는 심정을 내지르지 못했지만, 집에서는 감정을 억누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죠. 기쁨과 애정의 표현은 드물고 서툴렀지만, 보통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분노는 다스릴 필요가 없었죠.

 

반대로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예민했지만 사려 깊었고 섬세했지만 까탈스럽지 않았다”고 쓰셨어요.


어머니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전이 속도가 빨랐어요. 어머니의 병은 어머니를 닮았던 것 같아요. 슬그머니 찾아와 야금야금 어머니의 몸을 휘저었으니까요.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았던 어머니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병을 꼭꼭 숨기고만 있었어요. 인생극장의 막 또한 어머니의 성품처럼 요란하지 않게 살며시 내려왔죠.

 

후반부를 갈수록 이 책의 주연은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이 어머니의 삶, 한 여자의 삶을 이렇게 깊이 들여다본 책이 있었나, 궁금해졌습니다. 책은 계속해서 주어를 ‘사회학자 아들’로 명명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부모를 객관적으로 보는 데서 따라오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썼으면 이렇게 못 썼을 거예요. 6월 말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름방학이 시작돼서 원래는 방학 때 글을 써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마무리가 되지 않아 아무 것도 못 쓰는 지경이 됐어요. 어떤 날은 이런 책을 쓰는 게 맞냐 싶었고, 어떤 날은 그냥 가슴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서 못 썼어요. 결국 8월 말쯤 당분간은 쓰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책만 읽었어요. 저도 책을 쓰다 보니까, 항상 책을 읽을 때는 이유가 있거든요. 서평을 위해서라든가, 내 책을 쓰기 위해서든가. 그런데 이 때는 목적 없이 책을 읽었어요. 중구난방으로 두어 달쯤 소설, 자연과학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그렇게 1년을 보냈죠. 그러다가 아버지 고향인 충청남도 공주시 송곡리도 가보고, 어머니가 사셨던 서울 창신동 꼭대기도 가보면서 책을 쓸 수 있게 됐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공간이 주는 흔적, 기억은 작게라도 존재했을 거고요.


어머니의 회고를 들으면서 제가 생각한 키워드가 ‘심정’이었어요. 그래서 일종의 상상을 했죠. 어머니, 아버지의 삶에 감정 이입을 해서 상상을 하면서 심정을 이해해보려고 했어요. 13세 소년이 학교를 다니면서 걸었던 그 긴 거리는 어떤 거리였을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오갔을까, 만주에 갈 때는 어땠을까, 청년기로 접어들어 가족을 꾸린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8세 소녀가 산동네에서 내려와서 하필이면 이화장을 자주 지나야 했고, 공부는 잘했지만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모자이크처럼 이어서 조각나있는 조각보를 이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통해 부모님을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것도 같아요.


아직도 밤에 자려도 누우면 부모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요. 슬프니까 잊어야지 했는데 이건 잊히는 게 아닌 거예요. 그리움은 그림자 같은 거라서, 잊는 게 아니라 갖고 사는 거죠. 그렇다면 기억해야 하는데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다만 노스탤지어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살아온 생애에는 분명 시대적 한계가 있었지만, 그걸 어떤 한으로써만 기억해서는 안 되죠. 한계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대적 한계를 중지할 수 있는 방법, 그런 환경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되는 어떤 조건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즉 미래에 대한 상상이 있어야 해요. 부모가 살아왔던 생애를 기록하면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미래를 떠올렸어요. 과거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고아가 되어도 서럽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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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마음이 완전히 달랐던 책

 

책을 쓰면서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나요?


이게 과연 얼마만큼의 보편성을 띨 수 있느냐의 문제였어요. 그런데 원고를 검토해주신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남의 이야기 같지만 읽다 보면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의 삶과 연결되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고 했어요. 어떤 공통분모가 느껴진다는 반응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로부터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무엇인가요?


“우리 아들 장하다”, “엄마는 기분이 너무 좋다”, “우리 아들이 이래서 엄마는 기분이 참 좋다”, 이런 말을 많이 하셨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해봤어요. 한 가지는 이거더라고요. 제게 좋은 일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부모님께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말씀 드렸는데, 이제는 내 좋은 일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진 거예요. 작은 일에도 물개박수 급의 반응을 보여주신 분이 사라지니까 너무 허전한 거예요. 아버지는 근엄하고 무뚝뚝한 편이셨지만 제 책이 나오고 서평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말 없이 신문을 들고 나가서 한 시간 뒤에 코팅해오는 분이셨어요. 내 일에 대해 무한히 응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들어도 잘해보자는 힘이 생기잖아요. 그게 사라진 거예요. 지금은.

 

전작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조카들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하셨는데, 이번 책의 경우는 어떤가요?


어떤 연령대나 성별을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냥 부모의 자식인 어떤 한 사람? 부모가 생존해 계시든 이별을 했든, 사람이 태어나면 누군가의 자녀가 되잖아요. 나이가 들면서 ‘부모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고요. 불현듯 내 부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 그런 분들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 책은 개인적인 마음이 완전히 달랐어요. 예전에는 책을 낼 때, 잘 팔렸으면 좋겠다, 반응이 좀 있으면 좋겠다는 어떤 백일몽을 꿨는데요. 이번 책은 백일몽을 꾸는 과정이 전혀 없었어요.

 

프롤로그에서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이나 부모가 물려준 유산과 씨름해야 한다”(25쪽)고 하셨어요. 유산은 대개 받는다고만 생각하는데, ‘씨름’이 맞는 것 같아요. 받는 자세에 따라 유산이 이어질 수도 있고 커질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죠.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태도 중 하나는 부에 대한 사유 방식이에요. 과도한 부에 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남에게 굴복 당하지 않을 만큼의 돈이 있어야 하는데요. 부로 인해 인간의 품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하죠.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세계관이 바로 그거예요. 저희 부모님은 1950년대 미군 부대 앞에서 일하면서 달러를 쉽게 버셨어요. 하지만 그 부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모르시지 않았어요. 돈은 어떤 행위들에 대한 결과물이기도 하잖아요. 부모님이 버신 돈에 담긴 컨텍스트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떳떳하지 않을 수 있어요. 어릴 때부터 늘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돈이 없다고 남을 업신여겨서도 안 되고, 남들이 업신여길 정도로 돈이 없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었어요. 어릴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죠. 그런데 돌이켜보면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말과 행동들이 제 세계관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죠. 어머니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소중한 가치들, 그런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40대 이상의 독자들이 이 책을 가깝게 받아들일 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의외로 20대 후반부터는 충분히 읽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독자는 스물 셋 남학생이에요. 사실 전 큰 기대를 안 했어요. 너무 옛날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친구가 책을 읽으면서 세 번을 울었대요. 독자들의 리뷰를 들어 보니,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이 책이 굳이 나이의 장벽이 느껴지는 것 같진 않아요. 물론 가장 즉각적인 반응은 50대인 분들로부터 받았는데요. 왜냐면 50대들은 자신이 부모로서의 정점에 도달했고, 부모와의 이별을 겪은 분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이에요.

 

다른 형제 분들도 이 책을 읽었나요?


읽었죠. 형제들은 저보다 더 감정이입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책에 대해 코멘트를 하기 어려워 하더라고요. 저는 쓰는 과정에서 ‘사회학자 아들’이라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돈할 수 있었지만, 가족들은 그냥 우리 엄마, 아빠를 이야기한 책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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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이어질 수 있구나

 

편집자에게 감사의 말을 적으셨는데요. 유독 눈길이 갔어요.


어떤 한 원고에 애정이 가장 많은 사람은 글쓴이일 테지만, 글쓴이 못지않게 원고에 애정을 갖고 읽는 사람이 있다면 편집자일 거예요. 저자와 편집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긴장감과 갈등은 기본적으로 애정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논문 심사 과정을 보면 보이지 않는 적과 갈등하는 것 같아요. 편집자와 저자 사이도 물론 이 긴장 관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고요. 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어요. 어떤 책이 나오든 편집자와는 약간의 살얼음을 걷는 듯한 긴장 관계를 거치는데, 『인생극장』 같은 경우에는 편집자와 저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긴장감이 가장 적었던 것 같아요. 초고를 쓰고 여행을 다녀와서 피드백을 받았는데, 여행 중 제가 원고에 대해 생각했던 이야기와 완벽하게 맞았어요. 싱크로율이 99%에 가깝더라고요. 원래 초고는 여러 번 수정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한 번 수정한 원고로 끝까지 갔어요.

 

출판사에서 가제본으로 독자들의 서평을 받았잖아요. 굉장히 평이 좋더라고요.


세상에 진심이라는 게 통하는 것도 있구나, 생각했어요. 서평을 보는 순간 제 마음속에 정리된 게 또 하나가 있어요. 책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이 독자 서평만으로도 됐다는 마음이었어요. 책을 쓴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기쁜 평 중 하나가 “부모님의 인생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만나면 부모님께 여쭤보고 싶은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였어요. “막연하게 품고 있었던 부모에 관한 원망과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는 글을 읽고 참 고마웠어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이어질 수 있구나,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줘서 굉장히 고마웠어요.

 

책을 많이 쓰셨는데 강연은 거의 안 하시는 것 같아요.


많이 안 해요. 특히 돈을 받고 하는 강연은 좀 피하려고 하는데요.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학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어느 정도 급에 오른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미디어에는 여전히 관심이 많지만, 방송은 제게 편집권이 없잖아요. 제 성격이나 말들을 방송용으로 재구축해야 한다면 피하고 싶은 거예요. 방송이 어떻게 나갈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거나, 이 방송을 통해 독서의 세계를 넓힐 수 있다면 재고의 여지가 있겠지만요. 어떤 방송에 출연했다는 타이틀로 책을 쓰고 싶진 않아요. 물론 제가 월급쟁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거고요.

 

인기, 유명세를 얻고 싶어 하는 교수도 많은데요.


강연을 가면 사람들이 막 박수를 쳐주잖아요. 학교에 가면 학생들은 다 졸고 있고요. 그러다 보면‘아, 너희들은 내 진가를 몰라’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유명세는 무서워요. 유명해져서 망하는 경우도 많고요.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유명해진 케이스라면 괜찮겠지만, 부족한 컨텍스트를 가지고 나왔다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면, 그건 문제죠. 『세상물정의 사회학』 이 나왔을 때 저도 쉽지 않았어요. 만나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처음 거절할 때는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러다 이거 위험하겠다 싶었죠.

 

유명해진 후 책을 못 쓰는 저자들도 있죠.


결국 쓴다고 해도 강연의 녹취를 풀었거나 팟캐스트에서 한 이야기들을 풀었거나. 문장으로 읽었을 때 그 사람의 문체도 안 느껴지고, 특유의 깊이도 안 느껴진다면. 독자로서는 좀 아쉽죠. 글 쓰는 입장에서 인물평으로 소비되는 건 최악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쓴 텍스트가 읽혀야 존재의 의미가 있는 거죠. 소설가 타이틀을 갖고 있는데 그 사람의 소설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출판을 살펴보면, TV에 나와야만 책이 화제가 되고 팔리잖아요. 저자의 본업과는 관계 없이 셀렙이 돼야만 주목을 받아요.


그래서 이게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에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의 말에 대한 권위는 점차 작아지고, TV에 나오는 유명인사가 하는 말들은 그대로 진리가 돼요. 요즘 아이들은 독서의 경험이 적잖아요. 뭐든지 시각적으로 물질적으로 확인하는 게 익숙한 세대예요. 그래서 유명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TV에 나온다고 생각해요. 어떤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기준이 TV에 나왔는지 아닌지로 평가되는 세상이 됐죠.

 

생각하고 계신 후속작이 있나요?


지금 구상 중인 건 의식주를 주제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 그러나 성찰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써볼까 해요. 타협하자는 건 아닌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책을 많이 못 읽으니까요. 3시간 내지 4시간을 투자하면 일을 수 있는 분량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SNS에 있는 글을 옮긴 책은 아니고요. 밀도가 있으면서 좀 짧은 분량으로 정리하려고 해요. 또 다른 책으로는 예술사회학 강의를 다뤄보려고 해요. 『세상물정의 사회학』 의 미술 판 같은. 그림을 통해서 인생의 중요한 키워드를 살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노명우의 인물조각보’도 흥미롭게 보고 있는데요. 책으로도 나올까요?


아마 나올 것 같아요. 한 편 한 편보다는 다 모았을 때 의미가 있는 글이라서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다는 걸 펼쳐 보이고 싶어요.

 

 


 

 

인생극장노명우 저 | 사계절
식민지배,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산업화 등 현대사의 큰 줄기가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면밀하면서도 매우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사월, 가사를 전하는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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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막하다.' <7102>를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감상이었다. 공연장의 소리를 그대로 담은 이 앨범엔 마른 나무 같은 기타와 나른한 보컬, 그리고 깊고 짙은 결핍이 느껴졌다. 김사월X김해원의 작품이나 솔로앨범 <수잔>과는 어딘가 달랐다. 더 깊어진 우울에는 사막의 황량함과 설원의 막막함이 공존했다. 바로 그 감수성이야말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여성 싱어송라이터 김사월이 사람들을 끌어당긴 지점이었다.

 

궁금한 것들이 산더미였다. 왜 '라이브'인가부터 왜 '지금'이어야만 했는지. 이런 가사는 도대체 어떤 마음과 생각에서 나온 건지. 어떤 사람이고 싶기에 이런 음악을 만들었는지. 김사월에게 음악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수잔'을 넘어 인간 '김사월'은 어떤 사람일지 알고 싶었다. 강추위가 유달리 매서웠던 어느 겨울날 김사월을 만났다. 그는 <7102>처럼 마냥 우울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따뜻하고 진솔한 이야기가 가득했던 인터뷰는 계절을 잠시 잊을 만큼 포근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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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후 다음 앨범이 나오게 되면 정규 단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미니멀한 라이브 앨범으로 돌아왔습니다.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곡들을 가지고 라이브를 냈다면 모르겠는데, 새로운 곡이 10곡이나 담긴 <7102>는 사실상 신보죠. 왜 라이브로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 역시 정규 2집에 대한 열망이 있고요. 준비도 조금씩 하고 있어요. 다만 작년에 <7102>를 발매한 이유는 '지금'에 대한 감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어요. 신곡들을 정제하고 편곡하고 가다듬으면 들어가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내가 지금 느끼는 걸 가장 빠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게 라이브인 거죠. 그리고 제가 라이브에 겁이 많았어요. 예전처럼 미친 듯이 떨지 않게 된 게 작년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어 하던 학생이었어요. 그러다 김사월X김해원을 하게 됐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혼자서 조용히 살던 사람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니 약간 제 자신도 모르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게 된 거죠.

 

뭔가 큰 세계로 노출된 느낌이었나요?


네. 부담이 돼서 떨렸어요. 라이브를 할 때마다요. 그걸 극복하려 했던 때가 작년이었어요. 극복하면서 라이브를 4-5번 했어요. 언제 잘할지 모르니까(웃음). 제가 좋아하는 시공간을 담고 싶었고, 그중에서 앨범에 들어갈 곡을 고른 셈이죠.

 

통기타랑 키보드만 놓고 하더라도 녹음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공연장과 사전에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부분이었을 텐데요. 그러려면 관람객들의 협조도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관람객들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한 것인가요?


모르는 상태에서 한 거는 하나 정도이고요. 나머지 공연은 매니저와 함께 기획을 했고, 공연장 측에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공연 포스터에도 이 공연은 녹음을 하는 공연이라고 공지했죠.

 

그렇다면 하우스 엔지니어가 아니라 녹음 엔지니어와 별도로 계약을 한 건가요?


각 공연장의 하우스 엔지니어님들과 작업했습니다. 제가 하우스 엔지니어님께 아무리 어떻게 해달라고 해도 결과물은 결국 '그분이 만드신 저'일 테기 때문에 그 부분도 인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우스 엔지니어의 개성을 간직하려는 의도였겠죠?


네.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 장소에서 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봤어요.

 

앨범이라면 일정한 퀄리티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작업은 조금 불안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모든 공연 다 하기 전까지 앨범의 세트 리스트랑 콘셉트를 못 잡았어요. 이것저것 뒤집다가 다 하고 나서야 잡았죠.

 

그렇다면 이번 라이브 앨범의 미학이라 할까요. '김사월만의 개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요.


편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좋아했던 시간들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여름에 녹음을 하고 다녔는데요. 저는 그 때를 좋아해요. 앨범 커버도 그때 여름에 찍은 사진입니다.


제가 지금 지내는 시간과 공간들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젠트리피케이션(도시가 상업적으로 발달하면서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현상) 투쟁이 있는 곳에서 공연을 하면 언제 이곳이 없어질지 몰라요. 그런 곳에서 공연을 하는 저 자신도 언제 음악을 그만둘지 모르니까, 그런 불확실한 시기를 보내면서 지금의 시공간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개인적으로 어떤 걸 보여주고 싶었냐는 측면에서는... 그저 '가사를 전하는 사람' 외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참 좋은데요. 어느 인터뷰에서 얘기한 것처럼 지금을 기록한다는 건 아티스트의 특권이죠.


1집, 2집 사이에 있는 조각들로 새 앨범을 만든 거죠. 그래서 오히려 <7102>에서 엄청나게 우울한 얘기를 하고, 2집은 “산뜻하게 가자!” 이럴 수도 있어요.

 

사실 음반을 내는 건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현재로 봤을 때는 정말 자기애가 강한 음악인데,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바라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좀 서투르게 음악을 시작했어요.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도 김사월x김해원으로 주목을 받았잖아요. 그때는 좋고 달콤한 것도 있고, 너무 무서운 것도 있었어요. (인정을) 많이 받고 싶은 동시에 우울했던 것 같아요.

 

의외의 답변이네요.


저는 인정 욕구가 많은 사람이에요. 제가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은 편입니다. 인정 욕구가 많고 행복을 원한다면 뭔가 만족할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 만족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인정을 받기에는 스스로가 갖고 있는 게 부족하다는 이야기인가요.


지금까지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인정받는 일 자체가 좋았던 거 같아요.

 

그럼 지금부터는요?


지금은요. 불완전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게 목표거든요. 근데 거기에 인정욕구도 분명 있어요. 제가 어느 정도를 원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처럼 뭘 바라는지도 모르고 많이 원하기보다는 '내가 했던 만큼의 인정이 온다면 받을 준비는 되어 있다!' 이런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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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경솔했던 나의 삶에 꾸준했던 것이 오직 고통 하나뿐이었다면...', '전화'에서는 '즐거운 일은 내게 없어', '8월 밤의 고백'에서는 '저는 그날 다 헤어졌기에 더 슬프진 않았어요' 등에서도 고독에 대한 처절한 응시가 나타납니다. 어떤 성장 배경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표현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삶 자체를 외로움, 고통, 상처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나요.


음... 우선 이 노래들은 저를 비추는 거울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 노래들이 '저'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곡에서 아무리 행복하게 써도 제가 처절할 수 있고, 처절하게 곡을 써도 제가 행복할 수 있는 거고요.


성장 배경을 말씀드리자면, 집이 굉장히 가부장적이었어요. 그래서 제 의견을 표현할 수 없었고, 제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틀 안에 있어서 자유를 느낄 수 없었어요. 그런 점에 있어서 스스로 덜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어른이 되니까 모든 것이 결핍이고 부끄러운 거예요.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자신, 부끄러운 자신을 표현하는 게 '악취'에서 표현됐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악취'에서 '그대를 더럽힌 나를 잘라내고 싶다' 이런 말들도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되는 거죠.

 

그런 캐릭터(페르소나)와 실제 김사월을 일치시키려 하는 작업들에 대해 창작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수잔'이 '김사월'인가에 대해서... 저는 그게 관심이라 생각해서 좋았어요. 제가 <7102>에서 우울한 노래를 불렀지만, 사실 저는 매일 우울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건 감정의 모음집이죠. 그런데 그 캐릭터와 저를 같이 보고 계시다는 건 그 캐릭터를 제가 잘 연기했다는 의미 아닐까요(웃음).

 

결말에서 우울하면서도 인상적인 표현이 있어요. '사랑하는 미움을 멈추고 싶어/스스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 달아' 이 부분은 어떤 심적 배경을 갖고 쓰게 됐는지요.


생각보다 저의 깊숙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웃음) 그렇지만 얘기가 너무 즐겁습니다. 고독하고 우울한 건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쭉 이어져 오는 것인데, 그 사이클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음 앨범은 밝을 수 있잖아요(웃음).

 

미움과 사랑이라는 개념은 혼재되어있고 동의어일수도 있죠.


'향기'에서 얘기한 것처럼 저는 세상을 사랑하고 제 미움도 사랑해요.

 

'젊은 여자' 가사를 보면 '춤추는 여자 아이돌을 봐/젊은 여자의 시절이 지나면/두렵지 않겠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아이돌을 기계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마음을 담은 거예요. “젊은 시절이 지나면 슬프지 않을까? 이 시절만 지나면 안 슬픈 걸까?” 오히려 이런 물음인 거죠.

 

'젊은 여자'를 들으면서 명백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무언가를 발산하면서 불렀다면, 지금은 그 노래를 부르면서 강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면, 우리가 살면서 페미니즘이든 전쟁과 핵에 대한 반대든 여기에 첫 번째로 들어야 하는 정서는 분노라고 생각해요. 자아 성찰의 첫 단계가 자기 학대이듯이, 세상을 보는 첫 번째 시선이 분노거든요.


저는 분노를 빼앗긴 것 같습니다. 누구한테 빼앗긴 건지는 모르지만, 저희 세대들은 분노를 빼앗겨서 분노할 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속에서 참고, 결국 곪아버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사에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위한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앨범에서 시간과 공간을 담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떤 호텔'은 내가 진짜 머무는 곳보다 임시 거처하는 곳이 내게 더 나은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담겼어요. 집에 대한 불안함이나, 편의점 이야기라거나. 제 세대에는 붙박이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경쟁을 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발을 딛고 서있어야 하나. 그런 불안이 담겨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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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나른하고, 사색적이고, 처절하고, 또 무미건조한 느낌도 드는데 멜로디가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런 지점에서 김사월만의 스타일이 있는데, 멜로디와 가사와의 조화가 만족스러운지요.


지금까지는 만족스러워요. 특히 받침을 잘 넣지 않고 툭툭 던지듯 말하는 걸 좋아해요. '아니 그냥' 이런 것처럼 멜로디랑 가사랑 어울리는 부분들을 계속 맞춰보기도 하고요.

 

김사월 음악에는 김사월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이 많아요. 김사월 씨에게 좋은 글, 가사란 어떤 걸까요.


좋은 글에 대해서 제가 말할 자격은 없는 것 같아요. 가사를 열심히 전달할 수 있는 정도라고는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글을 쓰는 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전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언어들을 좋아합니다.

 

김사월 음악의 핵심은 가사라고 봅니다. 언어의 배열, 발굴, 배치도 너무 좋습니다. 시적이고 감성적인 내용들이 아주 훌륭하게 배치돼있어요. 그런 언어는 어디서 비롯된 건가요. 책을 많이 읽은 건가요.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저는 책을 많이 읽고 싶어도 못 읽고 영화도 잘 잊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다독을 하지는 못했어요. 오히려 저는 노래 가사 보는 걸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 누구를 예로 들 수 있을까요.


저는 한글 가사를 되게 많이 보는 편입니다. 저는 2000년대 인디 음악을 좋아해서 홍대로 오게 된 사람이라, 그때 재밌는 가사가 많다고 생각했어요. 가사 내용도 영향을 받았지만 멜로디가 진행될 때 '어떤 음과 발음으로 이어갈 수 있는지'에서 예쁨을 많이 느꼈어요. 저는 어릴 때 (웃음) 언니네 이발관이랑 스웨터를 좋아했어요. 가사도 좋고, 한국어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발음이 참 좋았어요.

 

한글 가사가 아닌 노래 중에서는요?


저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요. 정말 좋아합니다. 자신을 드러냄에 있어서 너무 솔직하고 처절하게 표현했죠.

 

가사를 떠나서 가장 좋아하고 또 영향 받은 작품을 세 장만 꼽자면?


세르쥬 갱스부르(Serge Gainsbourg)의 'Ballade De Melody Nelson', 프랑스와즈 아르디(Francoise Hardy)의 <La Question>도 좋고,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Back To Black>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김사월 씨를 음악으로 직접적으로 이끈 뮤지션은 누군가요.


언니네 이발관이요(웃음). 앞서 말씀 드린 것과 더불어서 이석원 님이 자연스러운 흡인력이 있으시잖아요. 그런 것마저도 기획으로 다가올 정도로 매혹적이었어요.

 

다시 앨범 이야기로 돌아가서, 1집과 2집 사이 가장 진실한 연결 다리인 <7102>를 발매했는데요. 2집은 긍정적 정서를 품은 앨범이 될 거라 하셨죠. 어떤 느낌으로 만들 예정인가요.

 


2집의 이야기에 지금의 제 모습도 넣고 싶은데요. 그것을 편곡으로 어떻게 배치할지도 고민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스토리텔링을 어떤 방식으로 할지도 생각중이에요. 인물로 전개되는 것도 해봤고, <7102>에서는 시간을 역순으로도 해봤고... 2집은 어떤 서사로 해볼까 고민 중입니다.

 

'좋은 음악은, 좋은 예술은 언제나 용감하게 결핍을 마주한다'는 IZM의 <7102> 리뷰 끝말처럼, '완성'보다는 '결핍'이 김사월 음악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한편으로는 과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음악을 만들다 보면 날것을 그대로 드러낼 것인가 혹은 날것을 세련되게 만드느냐의 고민에 직면할 것 같습니다.


제가 고민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셨어요. 2집을 세련되고 멋있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고요. “내가 다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도 데모를 만들거든요. 세상에 내놓은 적도 몇 번 있고. 결핍은 음악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제가 쓰는 글에도 배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사월의 음악을 아주 짧게 정의한다면요?


어떤 비유를 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가사를 전하는... 음... 표현이 생각 안 나네요. 모르겠네요(웃음).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정효범, 조해람
정리 : 조해람
사진 : 박수진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미애 “실제 사건은 훨씬 더 흉측하고 잔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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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은 따로 있다’

3년 전 아이를 잃고 껍질만 남은 채 살아가고 있는 ‘우진’에게 또 하나의 비극이 닥친다. 아내의 자살. 우진은 생의 의지를 모두 잃고 마지막을 준비한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휑한 집에 돌아와 망연히 있던 그가 발견한 것은 쪽지 한 장이었다. ‘진범은 따로 있다.’ 쪽지를 본 우진은 다시 움직이기로 한다. 사건을 복기하고 주변을 뒤지며 하나씩 드러나는 사람들의 민낯을 마주한다. 그곳에는 우진이 미처 깨닫지 못한 비밀들이 그득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의 빈방을 담은 사진에서 시작된 소설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에서 서미애 작가는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오로지 ‘왜’를 추적하는 우진의 눈을 통해 사람들의 슬픔과 욕망, 잔인함을 관찰하며 과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범죄는 그 시대 사람들이 가지는 욕망의 결정판”이라고 말하는 서미애 작가는 분노로 촉발되는 지금의 범죄가 단절되고 왜곡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잘 자요, 엄마』, 『인형의 정원』, 『반가운 살인자』, 『아린의 시선』등에서 현실감 강한 사건과 존재감 있는 인물들을 선보였던 그는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에서 다시 한 번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은 가족이란 어떤 것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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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더 끔찍하다


읽는 내내 슬펐어요.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처음부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써보자, 하고 시작했어요. 후기에도 썼지만 그것은 단원고 학생들 전시를 보면서 시작된 거고요. 사회적 이슈나 집회 등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저희 언니조차도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집회에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정말로 온 국민이 많은 상처를 받았구나, 생각했어요. 그 집회를 하는 내내 울었거든요. 어느 날 가족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이 어떤 것이겠구나, 라는 것을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듣는 저도 너무 힘들고 아픈데 당사자들은 어떻겠어요. 그것도 일종의 살인이잖아요. 그곳에 다녀온 게 많이 남아서 그 얘기를 써보자고 생각해서 시작한 거예요.

 

다 읽고 작가의 말을 보니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더라고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갑자기 오빠가 돌아가셨어요. 그 바람에 훨씬 더 그런 감정들을 많이 느끼게 된 거죠. 직접 겪으면서요.

 

쓰기 너무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한 일 년은 손을 못 대겠더라고요. 힘든 상황에서 힘든 이야기를 써야 하니까요.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오빠한테 힘을 달라고 하면서 썼어요.

 

‘작가는 잔인한 직업’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제 경우 더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저는 조금이라도 제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못 쓰겠더라고요. 사소하게는 집회 현장에서 사람들의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책이 나오듯이 제가 봤던 책, 영화도 모두 경험일 텐데요. 전철 안에서 어떤 사람을 봤을 때도 제게 영향을 주면 나중에 에피소드로 하나 나오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오로지 상상만으로 쓴 것보다 어떤 것을 보고 자극이 돼서 점점 만들어지는 거죠. 뜨개질로 설명하자면 처음 한 코, 한 코 정도가 그런 경험이라면 나중에 문양을 넣고 하는 것들은 제 상상력이 되는 거겠죠.

 

전작들도 마찬가지지만 소설을 시작했던 순간이 강렬해요. 이번 작품은 세월호였는데요. 주로 소설은 어떨 때 시작이 되었나요?


제 경우 특히 장르 쪽이니까요. 실제 벌어지는 사건 같은 걸 많이 보게 되거든요. 취재도 하고요. 관계자도 만나요. 최근에는 수사극을 준비하면서 경찰 분들 인터뷰도 하고 있는데요. 그러면 제가 소설에 담았던 얘기보다 훨씬 더 센, 강렬한 사건들이 너무 많은 걸 알게 돼요. 현실이 더 충격이라는 말이 맞더라고요. 저는 거기서 ‘왜’를 꺼내서 작품을 만들지만 실제로는 왜 살인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그냥 저지르고 보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저는 그걸 보고 파헤치는 거죠. 그런데 그러다보면 실제 사건을 가져오기엔 너무 흉측하고 잔혹해서 오히려 순화시킨 경우가 더 많아요. 지금 작품도 강렬하다고 얘기하시지만 그것보다 현실은 더 끔찍하니까요.

 

이번 작품도 취재과정에서 순화시킨 것들이 있어요?


많죠. 청소년 범죄 사건들, 보면 이들의 범죄가 어른들에 비할 바가 아니죠. ‘인천 여아 살인사건’을 취재하러 법원에 갔었는데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보지 못하고 다른 재판을 봤어요. 마침 다른 청소년 범죄 사건이 있더라고요. 친구들이 다른 친구를 성매매 시킨 사건이었어요. 법원에는 가해자들의 부모도 와 있었는데요. 가해자들 집단에 남녀가 섞여있는데 자기네끼리 눈짓, 손짓을 해가며 말맞추기를 하는 거예요. 곁에 있던 교도관이 남학생들과 여학생을 떨어뜨려 놓으니까 한 엄마가 자기 아이에게 오더니 “쟤네 무슨 얘기 하는지 가서 좀 알아봐”라고 하더라고요. 자기 아이가 그렇게까지 끔찍한 짓을 했으면 이곳에서 반성을 시켜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보통의 사고라면 내 아이가 바른 길로 가도록 노력을 할 텐데 그게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모면하게 하려고 하는 거죠.

 

너무 충격이네요. 실제로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더 컸겠고요.


그러니 권력이 있고, 능력 되는 부모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책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의 부모 모습은 절대 과장이 아니에요. 오히려 아주 순화시켜 말한 거죠. 책에 병원 관계자가 ‘우진’에게 딸 목숨값으로 얼마를 더 줘야 하느냐, 라고 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사람들이 했던 말들이죠. 어떤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댓글들을 남기고, 누구도 그것에 제재를 가하지 않고, 그 댓글이 그냥 포털에 노출되어 있었잖아요. 그걸 보는 청소년들은 또 뭘 느끼겠어요. 우리는 그냥 몸값으로 치부되는 삶이구나,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거의 집단 트라우마로 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쓰면서 정혜신 씨의 칼럼을 봤는데요. 실은 우리 국민이 정신적인 치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이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내재된 것들이 지금 다 폭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시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세월호 같은 사건이 터져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고요.

 

정신적인 상처를 돌아보는 사회가 아니었던 거잖아요.


만약 인간다운 삶을 같이 고민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악플 다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거침없이 돈 앞에서, 권력 앞에서 비인간적인 태도를 보여요. 이것이 우리 사회가 정신적인 부분을 간과해버리고 왔던 결과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은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고요.

 

 

좋은 부모 아래에서 사는 것?


책에 나오는 대사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계속 질문하게 되는 이야기였거든요. 방금 말씀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작품으로 꼭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었나요?


돈 많이 벌어야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많이 벌어서 뭘 하죠? 저 사람보다 더 큰 집에 살아야 돼, 더 좋은 차를 타야 돼, 하지만 큰 집에서 살아도 자는 건 똑같고 큰 차를 타도 어딘가 이동하는 건 똑같아요. 우진 정도면 딱 행복한 삶이죠. 인간에게 필요한 건 그 정도면 돼요. 나머지는 다 욕심이에요. 그런데 욕심 부리지 않고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하나 갖고 있는 것을 99개 가진 사람이 100을 채우고 싶어서 빼앗아요. 이 사람은 하나면 충분한데 말이에요. 책에 등장한 가해자도 실은 가해의 이유가 대단하지 않거든요. 취재를 해보면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게 소외감이에요. 사회 구성원이 못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죠. 100억이 없어서, 같은 게 아니라요. 보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굉장히 큰 사건으로까지 가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청소년기에 부모의 역할이 제일 중요한데 지금 집에는 아이들을 키울 부모가 없어요.

 

부모의 정서적 지원이 부재한 상황 등에 관한 문제의식이 크신 거군요. 가족 관계도 워낙 파편화되어 있고요.


지금은 아이들의 정신을 담당하고 있는 게 매체뿐이에요. 폭력에도 쉽게 노출이 되죠. 심한 범죄 사건을 보고 마치 해도 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거고요. 친구 불러다 성매매를 시키고 그 돈을 유흥비로 쓰는 일이 상상이 되느냐고요. 그런데 너무 자세히 뉴스에서 설명해주거든요. 그걸 마치 흔히 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거죠. 울타리가 자꾸 허물어지는 거예요. 제재를 가할 어른도 없고요. 미국에서 범죄가 급증하던 때가 핵가족이 되던 때였다고 하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가면 안 되는 길이야, 하면 안 되는 행동이야, 라고 하는 걸 가르쳐주고 인도해줄 어른들이 집에 없어요. 저는 무엇을 위해서 어린 아이들을 그렇게 방치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잘 자요, 엄마』도 그랬고요. 좋은 부모 아래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계속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그렇게 밖에서 열심히 돈 벌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사실 우리 가족, 아이들과 알콩달콩 잘살고 싶은 거 아닌가요. 우진처럼요.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살 수 있는데 자꾸 누군가와 비교하게 만들죠. 그 비교하는 걸 아이들이 배워요.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아파트 평수를 구분한다는 거잖아요. ‘재강’이 그룹의 애들처럼요. 이들은 나머지 아이들을 다 자기네 노예로 봐요. 이렇게 성장하면 어떻겠어요. 지금 방영 중인 <리턴>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요. 얘네가 성장하면 그 드라마 인물들이 되는 거예요. 무면허 운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어차피 부모들이 해결해주고, 그러니까 10년 후에는 더 심해지는 거죠. 심지어 실제 사건으로 그런 걸 보잖아요. 대기업 아들이 누구를 때리고, 이런 것들 말이에요.

 

작품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문제가 더 커지는 것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보이거든요. 심지어 우진조차도 3년이 지나서야 딸의 죽음을 제대로 살펴보는데요.


그런데 우진과 같은 일반 소시민은 보통 어떻게 할 수 없죠. 이미 아이는 죽었고, 그 이후에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범의 심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검사를 믿고, 이 사회의 시스템을 믿고 맡기는 거죠. 그런데 그 검사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삶을 위해서 권력을 이용해버리는 거고요.


우진은 생을 끝내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쪽지 하나로 다시 일어서잖아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촛불의 경험 같은데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경험을 통해 세상은 내가 움직이면 바뀌는구나, 라고 깨달았던 것 같아요. 한 개인은 힘이 없지만 내가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으면 주변으로부터 힘이 모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진도 그냥 계속 가만히 있었으면 결국 밝히지도 못하고 생을 포기했겠죠. 하지만 작은 하나의 동기가 생기니까 다시 해볼 힘을 얻는 거잖아요. 


어느 때로 돌아가든 답은 같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중략) 우진이 수정을 잃고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목까지 차오른 슬픔에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수정이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어두운 우주를 떠돌다 사라졌을 것이다.(377쪽)

 

우진이라는 인물을 차분한 캐릭터로 잡은 이유가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려던 거였어요. 이 작품은 범인 찾기도 중요하지 않고요. 다만 ‘왜’가 중요해요. 왜 당신들은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쓴 작품이에요. 마지막 장면도 그런데요. 사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우진은 딸과 바른 작별 인사를 못했어요.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몰랐고요. 아버지로서 어떤 행동도 안 했죠. 그런데 아버지로서 어떤 행동을 다 하고 나서야 비로소 딸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쓰면서 제일 힘들었던 장면은 뭔가요?


거의 다 그랬는데요.(웃음) 개인적인 경험 때문은 아니고요.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우연히 어떤 아이를 데리고 다니게 되는데 그 아이가 자기 딸을 죽인 장본인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과연 이 아버지는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부분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 인물이 되어서 생각하는 게 힘들었죠. ‘세영’이는 왜 집을 두고 낯선 사람의 자동차에 올라타게 될까 하는 부분도 그랬고, 독자의 공감을 얻게 만들어야 하니까 어렵더라고요. 아주 세밀하게 쓸 필요가 있었고요. 작위적이지 않고 개연성 있게 쓰려고 애썼어요. 그렇지 못하면 나중에 ‘왜 복수하지 않지?’가 되니까요. 더구나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품에는 가차 없이 죽이고 그러잖아요.(웃음) 하지만 저는 그런다한들 우진의 분이 풀릴까, 생각했어요. 게다가 우진은 본인이 남겨진 입장이 되어봤잖아요. 그런 면에서 우진은 되게 이성적인 사람이에요.

 

특별히 마음 쓰이는 인물은, 역시 우진일까요?


우진이죠.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었어요. ‘앞으로 이 남자는 어떡하냐’고 하셨더라고요. 저도 사실 그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지만 끝맺음을 잘 한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지막에 우진에게 작별 인사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한 거고요. 약간 힌트도 있는데요. ‘기영’에게 우진이 “네가 나를 살렸다”고 하잖아요. 내가 포기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지켜보았던 사실도 알게 됐으니까요. 이제 그들을 힘 삼아서라도 살아나가게 될 거라고 봐요. 가족은 없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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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라는 걸 갖는 순간


정확히 중반 부분, 10부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말 ‘우리는 모두 악마를 품고 있기에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를 인용하셨어요. 인간 본성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어떤 사람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도 미안한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작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괴로워해요.


놀랍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작은 잘못에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양심이 있으니까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나만 최고고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재강 같은 인물은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하찮게 취급하잖아요. 감정노동 하는 분들의 자료를 찾아봤는데요. 왜 이렇게까지 사람을 대하지, 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상담 전화 녹음 내용을 들어보면 너무 심각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대부분 대학교수, 이런 사람들이거든요. 겉으로 교양 있는 척하지만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너무나 천박하게 쏟는 사람들이죠. ‘인분 교수’도 있었잖아요. 이럴 때 그 사람의 양심은 어디에 있나,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해요. 권력이라는 걸 갖는 순간 양심이라는 건 없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완장을 채워보라는 말이 있잖아요. 1그램의 권력만 줘도 달라지는 거예요.

 

그런 경우가 너무 많죠. 권력을 휘두를 기회가 생기는 순간 돌변하는 사람들 많이 볼 수 있어요. 소설이나 영화에서 늘 눈길이 가는 건 그런 인물들이고요.


자기 삶이라는 것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다면 그렇지 않을 거예요.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 권력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겠죠. 살면서 끊임없이 멈춰 서서 내가 지금 올바로 살고 있는가, 나한테 올바름이란 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그냥 권력이니 하는 것에 눈이 벌개져서 흘러가게 되는 것 같아요.

 

다시 교육 이야기를 하면, 교육 현장에서 삶의 철학과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요.


심지어 학교에서 권력 구조를 가르치죠. 공부 잘하는 애들은 잘못을 해도 그냥 넘어가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판례 중에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이 있어요. 가해자들이 의대생이라는 이유로 ‘이들의 미래’와 같은 얘기를 했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가해자들이 한 짓만 봐야죠. 그 논리라면 가진 것 없고 희망 없는 아이들의 장래도 생각해줘야 하잖아요. 왜 누구는 가차 없이 처벌하고, 누구는 안 그러느냐고요.

 

작품에서도, 수정이는 죽었는데 가해자들은 자신들 걱정만 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그 얘기는 안 하잖아요. 죽은 수정이는 지금 우리 자식들에게 작은 걸림돌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우진의 이야기를 할 때 자꾸 수정이라는 아이에 대해 감정을 부여한 이유가 ‘얘도 사람이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사건의 잔혹함이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게 아니고요. ‘너희들이 죽인 이 아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알아? 그 가정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알아? 너희들은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린 거야’라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해 수정의 이야기를 많이 넣은 거예요.

 

『잘 자요, 엄마』 말씀도 하셨는데요. 한 사람의 삶에 가족이 주는 영향이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같은 것들을 계속 생각하시는 거죠?


보통 추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어요. 트릭이나 반전을 좋아하는 셜록 홈즈 쪽과 애거서 크리스티 쪽인데요. 애거서 크리스티는 사람들의 삶이 나오고, 사회 속 사람들의 관계들을 보여주거든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인 건데요. 물론 트릭도 있지만요. 저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또 범죄소설을 쓰는 이유가 인간의 어두운 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크기 때문이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도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이렇게까지 가는구나, 를 보는 것에 관심이 갔어요. 장편을 쓰면서는 더욱 어떤 인간의 성장과정을 보게 되더라고요. 취재를 하고 범죄자들의 삶을 볼 때도 그런 지점들이 많이 보였고요. 인간은 사회와 떨어질 수 없잖아요. 저만 해도 사회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너무나 직접적으로 영향 받아요. 제 소설은 그것을 표현하는 거니까요. 사회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어요.

 

드라마 시나리오도 쓰시는데요. 소설 작업의 매력은 뭔가요?


단순 노동이라면 숙련이 되잖아요. 어느 정도 되면 쉬워지는데 소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매번 처음 같아요. 0에서 시작해요. 그래서 초반이 너무너무 힘들거든요. 오히려 많이 했기 더 어려운 부분도 있고요. 그렇지만 정신적인 보상이 굉장히 커요. 책은 작가의 의도가 오롯이 독자에게 전달되잖아요. 그게 참 좋아요. 물론 지금은 책이 너무 안 팔려요. 소설가가 책을 써서 생계를 잇기가 너무 힘든 상황인데요. 제 경우는 어쩌면 그래서 소설은 좋아서 하는 일, 드라마나 영화는 열심히 하는 일, 이렇게 마음을 굳히기도 했어요. 그나마 저는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 판권이 팔려 작업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또 이따금 제 블로그나 이메일로 잘 읽었다는 말을 전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혼자 만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잘 써야지, 생각하게 돼요. 

 

이번 작품도 영화화 되나요?


이야기 중이에요.(웃음) 『잘 자요, 엄마』도 판권이 팔려서 감독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고요.

 

마지막으로 다음 작품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잘 자요, 엄마』 후속을 많이 기다리시더라고요. 아이가 어떻게 크는지 궁금하다고요. 그게 구상이 되어서 3부작을 해야겠다, 생각하다가 출판사에 얘기를 했는데요. 좋다고 하셔서요.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을 내고 바로 작업하기로 했어요. 이 작업은 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준비하고 있는 중이에요.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서미애 저 | 엘릭시르
안정적인 문장력과 탄탄한 구성, 흡입력 넘치는 서스펜스로 ‘추리의 여왕’이라 불렸던 그는 이제까지와 비슷한 결을 갖고 있지만 조금쯤 다른 느낌의 서스펜스 스릴러를 선보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허대석 “때로는 내려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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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연명의료, 거부하시겠습니까?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당신은 말기 환자다.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면 생존 기간을 늘릴 수 있다. 물론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다. 완치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고, 다만 살아있는 시간을 수일에서 수개월 연장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당신은 중환자실로 옮겨질 것이고, 하루 한두 번 가족과의 짧은 면회가 주어질 것이고, 그 시간마저도 온몸에 부착한 의료기기 때문에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죽음을 맞고 싶은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는 거부하고, 최대한 통증을 다스리면서, 천천히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면 어떨까. 당신의 가족이 말기 환자라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찰리 가드’는 생후 8주차에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의료진은 회생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판단 하에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했다. 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현재 실험 단계에 있는 치료법을 적용하면 생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SNS와 언론에 도움을 요청했고 법정 공방을 시작했다. 법원의 최종 판결은, 찰리를 호스피스로 옮긴 후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한 결과였다.

 

‘찰리 가드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찰리의 부모를 응원했고, 교황과 트럼프 대통령도 찰리에게 기회를 주기를 바랐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해보지 않았을 때, 남겨진 사람들은 평생 죄책감을 떨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통증을 경감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것인데, 문제는 법적으로 이 선택이 제약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던 환자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퇴원을 원했고, 의사는 ‘퇴원하면 환자가 사망할 수 있다’고 알렸다. 보호자는 퇴원을 강행했고 결국 환자는 사망했다. 법원은 환자의 아내에게 살인죄를, 담당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적용해 실형을 선고했다.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이다.

 

환자 본인이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2009년, 당시 78세였던 김 할머니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중환자실에 1년 이상 입원해 있었다. 가족은 ‘환자가 평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했다. 병원이 이를 거부하면서 법적 분쟁이 시작됐고, 대법원은 가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 사회에 존엄사 논쟁을 일으켰던 ‘김 할머니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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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모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세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환자 본인의 의사’다. 그것을 확인할 수 없을 때는 가족을 비롯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과 절차를 거쳐 이들의 뜻을 따라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이와 관련된 확고한 원칙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지난 4일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안’(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을 전면 시행했다. 환자 본인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을 경우, 의료진이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가족 2인의 일관된 진술이 있다면, 이미 연명의료가 시행되고 있는 경우라도 인공호흡기의 중단 및 제거가 가능해졌다.

 

연명의료결정법의 시행으로 죽음과 관련된 자기결정권은 더욱 커졌다. 연명의료와 관련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고 싶은가, 무엇이 품위 있는 죽음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의료 현장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삶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끊임없이 목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의 허대석 저자는 30년 넘게 서울대학교병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세부 전문 분야는 종양내과학으로, 진행기 암 환자를 항암제로 치료해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말기 암 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상담 모임을 시작했고, 12년간 서울대학교병원 호스피스실 실장을 맡았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창립에 기여했으며, 블로그 ‘사회 속의 의료’를 통해 의료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책에는 의사로서 저자가 목격한 죽음의 순간들, 연명의료와 관련된 사례들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사회가 함께 생각하고 새로운 규범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제 죽을 것인지는 의료진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모습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미리 준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혹은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다.



가족과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세요


책의 제목이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 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여야 한다는 의미인데요. 우리는 죽음과 삶을 대척점에 두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생로병사가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죠. 산파가 찾아와서 출산을 도왔고, 임종도 집에서 맞았잖아요. 그런데 몇 십 년 사이에 이 모든 일들이 의료 기관으로 넘어왔어요. 그러면서 출산이나 질병 치료에 있어서는 크게 갈등이 없는데, 임종의 문제는 삶과 동떨어져 버렸어요. 생로병사라는 것이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고 죽음이라는 게 우리 삶이 완성되는 사이클 중의 하나인데도, 죽음이 의료 문제로 분리되고 기술 중심으로 흘러간 측면이 있는 거죠. 그렇게 됨으로써 얻어진 것들도 많이 있죠.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이 82세가 넘었으니까, 미국이나 영구보다 더 오래 사는 거거든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대부분 병원에 와서 사망하는 현실이 하나의 사회적 요인이라고 생각해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음으로써 놓치게 되는 부분들이 있을까요?


사람이 한 생을 마감한다는 게, 단지 환자로서 죽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가족 내에서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있었을지 모르고, 평생을 같이 살아온 아내의 남편으로서 무언가를 마무리하는 과정도 있을 수 있어요. 직장 상사 또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을 거고요. 그런데 임종이 의료 기관으로 넘어오면서 그런 부분의 중요성이 없어져 버렸죠. 환자로서 투병하다가 죽는 모습만 남았다고 할까요. 병원에서 죽음을 맞으면서 절대적인 생존 기간이 늘어난 부분이 있겠지만요. 확대 해석하면, 우리 사회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행복 지수가 떨어지고 갈등이 많은 원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어요. 또 병원이라는 환경에서는 무리하게라도 방어 진료를 하기도 하고, 그런 현상들이 연명의료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자리 잡고 있기도 하죠. 그런 것들이 한 번 바뀌어야 되는 시점이 왔다고 봅니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고 싶은가’와 관련된 대화는 가족 안에서도 잘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진료 과정에서 힘든 순간들도 있을 것 같아요.


30~40년 전만 해도 암 같은 질환은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걸 금기시했는데요. 그런 부분은 많이 개선됐어요. 그런데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인공호흡기를 달 것인지, 중환자실에 갈 것인지, 혹은 죽음의 장소로 집을 선호하는지 병원을 선호하는지, 이런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오가야 되거든요. 그런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죠.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도 그런 말을 직접 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대부분 의료진이 가족한테 이야기하죠. 회생 가능성이 없으니까 준비를 하시고, 가족끼리도 대화를 하시라고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가족 관계 역학 조사를 했는데, 스무 가족 중에서 대화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지는 가족은 일곱 가족이었어요. 열세 가족은 전혀 대화가 없었고요.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언제였나요?


옆에서 관찰해 보면 임종하시기 약 2~3일 전에 가족끼리 이야기를 하고, 또 가족이 의료진을 찾아와서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는 대부분 환자의 의식 상태가 많이 떨어져 있을 때거든요. 대화가 잘 안 되는 거죠. 죽음과 관련해서 환자 본인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게 제일 좋은데, 가족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측면이 강하죠. 우리 사회가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통의 문제도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환자에게 직접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하시는 경우가 드물죠? 보호자가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죠. 보호자들이 대부분 막아서죠. 이론적으로는 의사가 왜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느냐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이 곧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아요. 대부분 환자의 가족, 보호자들이 못하게 하기도 하고요.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그 분들이 나쁜 뜻으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대부분 분위기 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거든요. 뭔가 나쁜 상황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걸 굳이 환자한테 가서 이야기하는 건 불필요한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면 ‘환자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해할지도 몰라요, 자살할지도 몰라요, 제발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라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의료진이 가족의 의견을 무시하고 환자한테 가서 ‘당신 곧 죽을 건데 어떻게 할 거냐, 의향서에 서명해라’라고 할 수가 없어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커졌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우리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 자기결정권을 너무 강조했어요. 유럽이나 일본만 해도 죽음을 앞두고 의사 결정을 할 때 자기결정권만 전부로 보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서양의 경우에도 본인이 의향서에 서명하는 비율은 30%를 넘지 못해요.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제도를 만들 때 가족이 대리 결정하는 걸 다 허용하는 거죠. 때로는 그게 더 타당할 수도 있어요.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발휘할 때, 그 선택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흔한 상황을 예로 들면, 가족한테 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죽게 해달라고 서명할 수도 있어요.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환자의 상태가 나쁘지 않은데도요. 그런 경우에는 보편적인 가치에 의해서 판단하는 게 더 맞는 거죠.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요?


국가 지침을 아주 단순하게 만들었어요. 첫째, 본인이 명확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면 그에 따르는 것이 옳다. 둘째, 본인의 의사가 명확하지 않아서 결정하기 어려울 때는 환자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의료진과 가족이 상의해서 결정한다. 그렇게 간단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법을 만들어서 혼란에 빠져 있고요.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에서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봐요. 꼭 본인이 결정을 하지 않아도 ‘환자 입장에서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가’를 생각해서 결정할 수 있게 한 거죠. 그런 점도 고려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자기결정권 중심으로 법을 만들어서 스스로 발목이 잡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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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무의미한’ 의료 행위인가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 이전의 상황은 어땠나요? 사전에 의향서를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없었나요?


이전에도 그런 결정을 해왔는데요. 법정 양식이 있었던 게 아니고, 병원마다 임의 양식이 있었어요. DNR이라는 ‘심페소생술금지동의서’가 있었고요. 사전에 써 놓은 의향서가 현장에 반영되는 일은 활성화 되어 있지 않았어요. DNR 양식도 반드시 본인 서명만을 요하지는 않았고요. 본인이나 가족이 대리 서명하면 작동을 했죠.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기 전에도 대부분의 상황은 그걸로 다 해결을 해왔던 거예요. 새로 뭔가가 달라진 건 없어요. 법제화 됐다는 의미가 있는 거죠.

 

‘보라매병원 사건’을 떠올려 보면, 이제 의사들이 사법적으로 부당한 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줄어든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대부분 이미 부착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과정(이런 경우를 ‘연명의료 중단’이라 한다?필자 주)에서 법적인 문제가 생겼거든요. ‘보라매병원 사건’도 그렇고 ‘김 할머니 사건’도 그렇고요. 그 부분은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서 정리하는 게 훨씬 명확해졌어요. 어떤 절차를 밟아서 제거할 수 있다고 명시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법은 ‘연명의료 유보’와 관련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아요. 병원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이 1년에 약 20만 명 정도인데, 그 중에서 연명의료 중단을 논의해야 될 환자는 3~5만 명이에요. 15~17만 명은 아예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았던 거거든요. 대표적인 예가 故 김수환 추기경이에요. 그 분도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셨다면 며칠 내지는 몇 달까지도 생명을 연장하실 수 있었는데 달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연명의료결정법’ 대로 하면 불법이에요.

 

왜 그런가요?


본인이 서명을 하지 않았고, 대리서명도 다른 신부님이 했거든요. 지금의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본인이 서명을 안 할 경우, 대리서명은 가족관계증명서에 나타나 있는 친족 외에는 할 수 없어요. 그런 모순이 있는 거죠. 실제 현장에서 더 큰 문제는 ‘연명의료 유보’인데 말이죠. 아예 연명의료를 하지 않고 빨리 호스피스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이 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혼란해진 거죠. ‘연명의료 중단’ 부분은 많이 정리가 됐어요.

 

책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대중에게 더 익숙한 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거든요.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한 논쟁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연명치료’라는 말을 썼죠. 영어로는 그냥 ‘Lifesustaining treatment’인데, 치료라는 말은 가치중립적인 용어가 아닌 거예요. 뭔가를 고쳐서 환자를 좋게 하는, 일종의 선행이라는 뉘앙스가 있잖아요. 그걸 하지 않는다고 하면 악행을 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현장 상황을 잘 모르시는 많은 분들이 단어 자체 때문에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세요. 왜냐하면 임종이 임박한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를 부착하는 일에는 양면성이 있거든요. 기계적인 생명을 연장하는 선행이 될 수도 있지만, 고통 받는 기간만 연장하는 악행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택해야 된다는 논의가 있었던 거고요. ‘연명치료’라는 표현은 가치중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연명의료’라고 하는 게 옳다고 의견이 모아져서 만장일치로 통과가 됐죠.

 

어떤 의료 행위가 ‘무의미한’ 것이냐, 라는 판단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쉬운 판단은 아니죠. 무의하다는 건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잖아요. 관점에 따라 다른 거죠. 예를 들어서, 말기 암 환자에게 호흡 곤란이 왔을 때 인공호흡기를 다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의사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고통 받는 기간만 연장하는 거지, 실제로 의미 있는 삶이 연장되는 건 아니라고 보니까요. 그런데 환자의 가족들은 끝까지 의료 행위를 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조사를 해봤더니, 동일한 환자를 놓고 의료진과 환자 가족 사이에 의견이 일치할 확률이 40%가 안 돼요. 의미가 있다 없다는 굉장히 가치적인 판단인 거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충돌하는 거죠. 환자와 의사 사이에도 생각이 다르고, 환자와 가족 사이에도 다르고, 또 가족 내에서도 의견이 다를 수 있어요.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거죠. 그런 데에서 갈등이 많이 생기고요. 그런 걸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주요한 쟁점입니다.

 

지금까지는 연명 의료를 중단할 경우 법적 처벌을 받았잖아요. 의사 입장에서는 연명의료를 중단해 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니까,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을 법해요.


책에서도 이야기한 경우인데요. 의사들이 볼 때는 회생 가능성이 없었어요. 그리고 환자의 주 보호자인 부인이 말하길 환자가 평소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의료진과 상의 하에 연명의료를 중단하기로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가족관계증명서를 확인해 보니까 호적상에 아들이 있는 거예요. 가족 내력을 보니까, 환자 분이 이혼을 하시고 지금은 후처와 살고 계신 거였어요. 아들과는 한동안 연락도 안 한 상황이었고요. 그런데 평소에 문병도 잘 안 오던 아들이 나타나서 우리 아버지를 끝까지 살려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 연명의료 행위는 의미가 없는데, 가족 간에 의견이 일치가 안 됐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끝까지 연명의료를 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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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료결정법, 현장과의 괴리 크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간병’”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건강보험 재정을 어떤 순서로 쓸 것인가를 결정할 때 간병 부분에 먼저 써요. 그 다음에 검사, 치료의 순서로 나가고요. 그런데 우리나라 제도에는 ‘간병은 가족이 하는 것’이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어요. 검사와 치료를 하는 데 드는 비용만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거죠.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간병을 하려면 가족 중에 누군가가 직장을 그만두고 직접 하거나, 아니면 돈을 주고 간병인을 고용해야 돼요. 그게 모순이죠. 40년 전에 우리나라에 건강보험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지금과 상황이 달랐죠. 대가족 제도였고, 그 중에 누군가는 시간을 낼 수 있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가족 구성원도 적고, 그 중에 안 바쁜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집안에 중증 질환자가 한 사람 있으면 나머지 가족들의 생활은 다 마비가 되는 거예요. 이제는 보험 재정도 커지고 시스템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간병에 주로 투자해야 되는데 여전히 첨단 기술, 첨단 검사에 대부분의 돈을 쓰고 있어요. 개선돼야 될 부분이에요.

 

호스피스 이용을 희망하시는 분들은 많은 것 같은데요. 호스피스 서비스와 기관을 확충하자고 하면 일부에서는 ‘그거 다 세금이잖아’라고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나라의 경우 중증 질환인 경우에는 환자들이 수도권에 있는 대형 병원으로 다 몰려와 있어요. 그러면서 임종하기 직전의 한두 달 사이에, 평생 사용하는 의료비의 거의 절반을 써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쓰는 건데,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에요. 그 돈의 절반이 아니라 1/10만 쓰면 호스피스 잘할 수 있어요. 이건 수도권 대형 병원 중심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모델이고요.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돼요. 집과 가까운 곳에 호스피스 시설이 있어서 심하게 아플 때는 시설에 갔다가, 조금 좋아지면 집에 와서 간호사의 방문을 받는 거죠. 지난 40년간 우리의 의료는 기술 중심, 수도권 대형 병원 중심으로 발전해 왔어요. 이 기본 틀이 바뀌어야 돼요. 비용 면에서 보면, 호스피스를 가는 게 건강보험 재정을 훨씬 아끼는 겁니다. 호스피스에 갈 기간에 중환자실에 가서 인공호흡기를 달면 훨씬 더 많은 돈을 써야 되거든요.

 

품위 있는 죽음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대답은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데요. ‘어떤 게 바람직하지 않은 임종인가’ 하고 반대되는 부분을 생각하시면 비교적 정리가 된다고 봐요. 육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가족의 죽음을 경험할 때, 특히 불행하고 고통적인 사람들을 보면 시신을 못 찾은 경우예요. 세월호도 그렇고 천안함 사태도 그렇죠. 시신을 찾아서 편안하게 자고 있는 모습처럼 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기를 원하죠. 고통스럽게 임종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있으면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는 거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죽음의 모습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영적인 측면에서는 어떤가요?


환자들을 상담 해보면, 대부분 인간적인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가족과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들이 끝까지 남아 있고, 그걸 죽기 전에 풀고 싶어 하는데요. 임종 전의 두서너 달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기예요. 중환자실에 가서 인공호흡기를 달거나 의식이 없어진 상태에서는 할 수가 없는 거죠. 조금은 의식이 남아 있어야 되고,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야 하니까요. 삶에서 마무리하고 가야 할 부분들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떠나면, 본인한테도 한이 남지만 남은 사람들한테도 굉장히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면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 그 이미지가 평생 남거든요. 편안하게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중환자실에 가서 연명의료를 하지 않으면 뭔가 최선을 안 한 것처럼, 혹은 포기한 것처럼 느껴요. 그게 아니에요. 때로는 어느 시점에서는 내려놔야 해요.

 

어느 시점에는 내려놔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게 환자를 위한 길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보호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죠.


사회 전체적인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봐요. 이제는 사회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더 발전했으니까 분명히 어딘가에 치료할 수 있는 약이나 의료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그걸 찾지 못했기 때문에 죽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거죠. 때로는 죽음이 불가항력적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래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고, 어떤 약을 쓰다가 부작용이 생겨서 응급실에 오기도 하고, 중환자실에 왔다가 돌아가시기도 해요. 그때서야 아차, 싶은 거죠. 이럴 줄 알았으면 못 했던 이야기도 하고 정리할 시간을 가질 걸 하고 후회하는 거예요. 때로는 내려놓고 받아들여야 된다는 걸 수용하고, 한 인간으로서 떠나기 전에 정리해야 될 부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돼요. 그게 필요하다는 게 사회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고, 우리가 새로운 임종 문화를 정립해야 될 시가가 온 거죠.

 

‘연명의료결정법’과 관련해서 아쉬운 부분도 있으실 텐데요. 어떤 점이 개선되면 좋을까요?


우선, 어떤 형태로든 법이 시행됐다는 건 굉장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주변 국가에 비해서 제도화가 대단히 늦었지만, 그나마 시작한 건 굉장히 긍정적이에요. 그런데 너무 이상적인 법을 만들었어요. 너무 서식도 많고 현장과는 괴리가 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거죠. 이상적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건 다 이해를 하는데, 현장에서 그걸 지킬 수 없으면 범법자가 된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어떤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요?


누구도 고통스러운 임종을 원하지 않아요. 여러 조사 결과를 봐도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는 답변이 90%가 넘어요. 그런데 법에서 요구하는 양식을 완성할 수 있는 환자는 10%가 안 되거든요. 그러면 80%는 제도상의 문제가 생기는 거죠. 제도가 너무 까다로워서 서식을 완성 못할 수 있는데, 그게 곧 ‘당신은 서식을 작성하지 않았으니까 고통스러운 임종을 원한 것이다’로 해석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현재의 법에서는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모순점이 생기는 거죠. 저는 법이 최소한의 것만 정리를 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머지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규범을 정해서 할 수 있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법으로 모든 걸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한 측면이 있어요. 그 점이 조금 아쉽죠.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허대석 저 | 글항아리
잘못된 결정과 잘된 결정, 그리고 누구든 확신할 수 없는 애매한 결정들이 현장의 복잡함과 급박함 속에서 펼쳐지며, 거기 얽힌 사람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파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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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김보통, 다같이 천천히 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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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보통’인데 하는 말들은 보통사람 같지 않다. 사실 그가 하는 말을 곰곰이 따져 보면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다. 이를 테면 사회생활하면서 반말하지 않기, 회식 강요하지 않기, 관계를 핑계 삼아 불성실하게 일하지 않기. 지극히 평범한 문장으로 묶은 두 권의 수필집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는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다. 책을 읽는 순간순간 목이 따끔거렸다. 어른이 되기 싫은 한 소년의 오랫동안 고여 있었던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따뜻함을 숨기려고 일부러 시니컬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수필가 김보통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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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다

 

수필로는 두 번째 책을 썼다. 어쩐지 두 책의 제목이 이어지는 느낌이 있다.

 

“행복합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안 읽어보지 않겠나? (웃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계피맛 사탕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어른이 되면 왜 달콤한 사탕보다 쌉싸름한 계피 맛을 좋아하게 되는지, 어쩐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책 날개에 적은 프로필 문구가 굉장히 짧다. “만화가 / 수필가 / 부정할 수 없는 어른”. 전작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에서는 일대기를 실었다. “2008년 입사 / 2013년 퇴사 & 만화가 전업 / 2015년 수필가 겸업 / 2017년 아직 불행하지 않음.”


저자 소개를 길게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첫 만화 『아만자』 를 출간할 때도 그랬다. 출판사에서는 출신학교, 회사 등 약력을 써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 설득했지만, 나는 만화가로서 내 만화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나온 대학, 다닌 회사 이름을 꼭 써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보 문구로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다행히 출판사에서 받아들여줬다. 그래서 만화책에는 “30대 / 만화가”라고만 썼다.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을 싫어하나?


김보통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은 거다. 유명한 누군가의 글이 아니라 내 수필을 소비하게 만들고 싶다. 김보통이 누군지 몰랐던 사람이 내 책을 읽었다고 할 때가 제일 좋다. 내 수필을 읽고 내 만화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이 방향이 나는 좋다. 『아만자』 , 『D.P: 개의 날』을 그린 만화가의 책이라서 소비되는 것은 크게 반갑지 않다.

 

‘부정할 수 없는 어른’이라는 문장에 어른이고 싶지 않은 욕망이 읽힌다.


나이가 들면 달라질 것 같았는데, 정신은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면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서글프기도 하고 무섭고 피하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미성숙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면 안 되는 나이니까.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5백 원짜리 장난감을 선물 받은 일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어른이 된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상황을 이해한다. 이해해야 하고. 

 

“쉬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 결심의 동기에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작은 외삼촌이 있었고.


부모님이 작은 칼국수집을 하시던 시절, 나는 대학생이었다. 홈페이지를 하나 만들어놓고 혼자 끄적끄적 글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삼촌이 뜬금없이 내 글을 읽었다며, 글이 너무 쉬워서 술술 읽혀서 좋다고 했다. 외삼촌은 평생 책 한 권 안 읽었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외삼촌에게 칭찬을 받아 좋았다. 그 후 글을 쓸 때마다 작은 외삼촌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글 쓸 때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더 좋은 표현이 있을까’가 아니라 ‘외삼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인가, 내가 괜히 꼬아 놓은 문장은 없을까’다.

 

글은 주로 언제 쓰나?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쓴다. 일부러 정신줄을 놓고 쓴다. 집중해서 말짱한 정신으로 쓰면 글이 안 나온다. 이성적인 판단을 제대로 못할 때 워밍업 하는 기분으로 쓴다.

 

스트레스를 글로 푸는 것인가?


지금 따로 하는 여가 활동이 없다. 집에서 턱걸이는 계속하고 있지만. 글을 쓰는 시간이 오히려 내게 휴식 시간이다. 만화는 상황을 구체화 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그리면 안 된다. 하지만 글은 혼자서 쓰는 거니까. 큰 부담은 없다.

 

전작을 읽고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을 읽은 독자가 많더라. 리뷰를 살펴 보니 “공감대가 많았다”는 글이 압도적으로 많더라.


사실 내 하루 일과는 리뷰 읽기부터 시작된다. 많이 하시는 이야기가 “글을 너무 쉽게 쓴다”는 평이다. 내 책에 그럴싸한 사건은 없다. “평범한 문장이 이어지지만 여운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 내가 가장 바라는 바다.

 

즐기면서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업인 만화보다 편한 작업인가?


편한 거야 물론 글을 쓰는 일이다. 이건 혼자 해도 되니까. 만화는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작업이라 좀 더 신경 써야 한다. 내가 본격적으로 하는 작업은 만화지만, 만화가로서의 김보통과 수필가로서의 김보통을 굳이 정체화 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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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통의 글을 쓸 뿐이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 인터뷰할 때마다 ‘고독이’ 탈을 쓴다. (탈은 트위터에서 제작해줬다) 데뷔한 지 벌써 6년이 되어 가는데, 얼굴을 계속 감추는 일이 수월한가? 수필집에 등장하는 악독 상사들이 연락을 해온 적은 없는지 궁금하다.


전혀 없다. 내가 만화가 김보통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인이 거의 없다. 친척들도 모른다. 본명도 밝히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나오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실명을 넣으라고 해서 아무거나 넣었더니 가입이 되더라. 내가 만화를 그린다는 사실은 친구 세 명 정도만 안다. 책에 등장하는 직장 에피소드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사건들이라, 책을 보고 연락이 온 동료들은 없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살면서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타인도 당연히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을 왜 못하냐고 종용하는 것 역시 안 하려고 노력한다.”(58쪽)


무의식적으로 나도 강요하는 게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이 문제로 너무나 긴 시간 동안 고통 받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으려고 매사 노력한다. 솔직히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자신은 없다. 나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재주가 없어서, 가능한 인간관계를 줄이고 있다. 친구들도 많지 않은 뿐더러 어시스트 분들께도 가능한 간섭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어디까지나 내 일을 도와주는 파트너이지 내 부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부분은 해주고 싶다. 이번 설 연휴 때 긴 휴가를 드린 것도 내가 회사를 다닐 때, 원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조심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지금 어시스트는 모두 몇 명인가?


정규직으로 일하는 분이 세 명이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분이 한 분 계신다. 호칭은 성은 붙여서 ‘어시님’이라고 부른다.

 

어시스트 채용 공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떤 기준으로 채용했나?


그림만 봤다. 이력서도 없이 포트폴리오만 받았고, 작업실에서 1시간 동안 그림을 그려보도록 했다. 친구나 동아리를 뽑는 게 아니니까. 우리 관계가 돈독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일을 잘하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약속대로 회식은 한 번도 안 했나?


안 했다. 어시스트 분들의 업무 시간이 12시부터 6시다. 보통 아점을 드시고 오시니까 같이 점심을 먹을 일이 없다. 일부러 업무 시간을 이렇게 조정했다. 물론 중간에 휴식 시간은 있다. 지키려고 하는 것은 퇴근 시간이다. 최대한 개인 시간을 보장해주려고 한다.

 

예전에 활동하던 만화가들은 보통 문하생을 모집하지 않았나?


요즘은 많이 사라지고 있다. 아예 채용 사이트에 ‘문하생 모집은 금지’라고 기재되어 있다. 구시대 악습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점점 더 없어지지 않을까.

 

기상 시간이 어떻게 되나.


대개 7시쯤 일어나는데 오늘은 인터뷰가 두 개 있어서 6시에 일어났다. 어제는 11시에 일어났고.

 

마감은 잘 지키나?


믿기 어려우실 지 모르지만, <한겨레>에 『D.P: 개의 날』을 연재할 때 단련이 돼서 마감은 잘 지킨다. 간혹 늦을 때는 있지만, 빵꾸를 낸 적은 없다.

 

작업 의뢰를 요청 받을 때, 승낙하는 기준이 있나?


아시겠지만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림 실력을 요구하는 분은 없다. 다만 김보통의 그림을 원하는 분들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김보통의 글을 쓸 뿐이다. 그래서 김보통의 그림, 김보통의 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내게 연락한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작업은 거절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아만자』 를 이용해서 제약회사를 홍보하려는. 이런 일은 거절하지만 상황이 맞는 일이라면 대개 수락한다.

 

SNS에 “반말을 하는 사람과는 일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래서 반말을 듣는 경우가 희박하다. 반말을 쓰는 사람들은 아예 내게 일을 의뢰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노동부, 민주노총, MBC노조와도 일했는데, 이런 작업을 계속 노출하는 이유는 내가 하는 일들이 껄끄러운 사람은 아예 내게 연락하지 말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일들이 들어오고 있다.

 

의뢰할 때, 이것만은 좀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첫 번째는 한글 프로그램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화가들은 업무 중에 한글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한글 문서를 보내주면 네이버 오피스에서 변환해서 파일을 열어야 한다. 미칠 것 같다. 제발 워드로 보내 달라. 워드는 지메일에서 바로 열린다. 두 번째는 마감 일정과 고료를 정확히 알려줬으면 좋겠다. 내 작품에 대한 감상, 칭찬은 다 필요 없으니까 부디 일정을 정확히 명시해주면 좋겠다. 고료를 보고 거절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고 싶은 작업이고 마감 일정이 넉넉하면 고료가 적어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지금 스케줄을 보고 승낙하겠다는 뜻인데, 내 작품의 팬이라면서 일정을 두루뭉실하게 이야기해주면 답이 없다. 결국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줄 뿐이다. 일정 안에서 협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제발 마감 당일 날 연락해서 “작가님, 원고는요?”라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기적인 일이 아니라면, 일주일 전에는 최소 작업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확인해줬으면 좋겠다. 그 외 나머지는 작가에게 달려 있는 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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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의적인 이상주의자다

 

대기업을 다니다 퇴사한 이력이 있다. 강연을 하면 퇴사 준비생들이 그렇게 많이 온다고.


심지어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가도 퇴사 관련 질문을 받는다.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를 쓸 때, 퇴사를 부추기는 책이 되지 않길 바랐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 퇴사한다고 해서 잘 풀리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이 사회에 병든 조직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지, 한숨이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든 회사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고통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때 나와야 하는 반응은 “세상에 네 고통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라는 말이 아니다. “이 고통도 없애고 다른 고통도 없애자”고 말해야 한다. 대기업의 악행은 여전하다. 인식하고 있다면 부디 자성하길 바란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조직 구성원의 의식이라도 변해야 하지 않나 싶다. 퇴사는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책에도 썼듯이 퇴사 후 나는 몹시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죽고 싶은 만큼 힘들다면 벗어나는 게 맞다.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는 퇴사 준비생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관리자들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물론 관리자들이 이 책을 읽을 가능성은 전무하겠지만.

 

두 권의 수필집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김보통은 낙관주의자, 혹은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이다. 텍스트만 읽으면 비관론자로 보이지만,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비관적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나는 회의주의자일 뿐이다. 굉장히 회의적인 이상주의자다. 나는 세상이 더 나아지길 바라고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곧이곧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계속 의심하고 불평한다. 내 오랜 별명이 ‘투덜이 스머프’인데, 사회학자 오찬호 선생님의 책을 읽으니 이 분이야말로 전문가시더라.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의 추천사에도 썼지만, 인류 역사는 늘 불편함을 느낀 자들에 의해 진보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이 사람들이라고 본다. 요즘 여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지금 이렇게 여성의 인권에 대해 발언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바뀔 거라고 본다. 지금은 고통스러워도 지나가야 할 길을 지나면, 분명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때 도서관을 만들고자 몇 천 권의 책을 사 놓지 않았나? 지금도 이 소망은 버리지 않았는지.


내가 마지막 직업을 갖는다면 아마도 도서관장이지 않을까. 도서관은 일종의 병이다. 사실 만들고 싶은 건 많다. 카페도 만들고 싶고 작업실도 만들고 싶다. 우선 작업실을 만들어서 그 옆에 ‘보통 카페’를 열고, 또 그 옆에 ‘보통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 보통 시리즈를 운영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만화를 그리는 건 내게 소명 같은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일의 가치에 대해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해서 하는 일이다. 글도 삽화도 마찬가지다. 평생 만화를 할 거다,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욕망이 없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이 없다. 스쳐 지나가는 명함 중 하나가 수필가일 뿐이다.

 

2014년 11월 인터뷰에서 “내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앞으로의 인생은 덤이라고 생각한다. 더 잘되면 보너스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의 김보통은 어떤가?


덤으로 살고 있는 인생, 맞다. 만화가로서 더 바라는 건 없다. 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큰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이대로만 가도 좋다.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어시스트 분들의 월급을 잘 올려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좋겠다. 정점은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인정받는 일에 관심 없다.

 

수필가 김보통이 쓰고 싶은 책의 주제는 무엇인가.


아직도 공개하지 못한 소소한 흑역사가 많다. 흑역사를 모은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고, 군대 때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D.P: 개의 날』 는 픽션이니까 다르고. 또 “너는 안된다”고 얘기한 사람들과 그래서 정말 안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학창시절 김보통에게 망언을 퍼부은 선생님들이 총출동하는 책인가?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 나아가 서울에 있는 대학도 갈 수 없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지만 나는 간당간당 대학에 들어갔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제게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한다고 말해 주신 송모모 선생님, 저는 얼마 전에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내가 만화를 그리기 시작할 때, 의문의 시선을 보낸 사람이 있었다. 그 분께도 편지를 쓰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는 데뷔 6년차에 지금까지 단독 저서 11권을 썼고 공동 저작까지 포함하면 17권을 썼습니다. 올해도 책이 5권 정도 나올 것 같습니다. 20권을 채웠습니다”라고.
 
회사 이야기는 언제쯤 만화로 나올까?


2,3년 후가 되지 않을까? 『미생』 이 직장인 히어로물이라면, 내가 그리는 만화는 안티 히어로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조직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무척 어두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김보통의 실물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더라. 대신 밝혀주고 싶은데, 유쾌한 기운이 넘친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웃음)


만화가 최규석 작가님이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해줬다. “충분히 삐뚤어질 수 있었는데, 희한하게 밝게 자랐다.” 나는 무게를 잡거나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다만 사람들을 웃기고 싶은 욕망은 있다. 강연을 가면 두 시간 내내 웃기는 이야기만 하고 온다. 물론 진지한 이야기를 바라는 청중도 있기 때문에 10분 정도는 진지하게 말한다. 개똥철학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이 진실일 때도 있으니까.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걷자는 이야기까지는 안 할 테니, 다같이 천천히 좀 뛰면 좋겠다. 뒤에서 자꾸만 북 치고 총을 쏘면서, 1등하면 상 준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나쁜 사람들이다. 그 밑에서 더 빨리 뛰라고 재촉하는 사람들도 나쁘고. 이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다같이 천천히 뛰는 일이다. 지금처럼 죽자 사자 뛰면서 뛰는 와중에 옆에 있는 사람 다리 걸어 넘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각자의 길로 각자의 속도로 뛰었으면 좋겠다. 인생이 꼭 마라톤은 아니지 않나? 어떤 한 방향으로만 어떤 한 코스로만 달려야 하는 경기가 아니지 않나? 국가의 역할은 이 코스를 넓히는 일인데, 코스에서 이탈하면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이건 비정상이지 않은가?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께 사회학자 오찬호, 엄기호 선생님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2016년에 나온 엄기호 선생님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너무 좋은 책이다.

 

김보통 작가의 독자들에게는?


5년 전에 내게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이 지금의 김보통을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만화가, 수필가를 떠나 김보통의 독자로 지켜봐주셨으면 좋겠다. 기대에 보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김보통 글그림 | 한겨레출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뭐든지 다 해봤던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저자는 때론 농담을 던지듯 때론 고백하듯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독립출판물 저자를 만나다] 나만 만들 수 있는 책 – 고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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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oh』 편집장으로 주로 소개되고 있는데,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The Kooh』는 2014년에 창간된 잡지고요. 매호 흔히 말하는 덕후라는 사람들의 습성을 가지고 기획해요. 현재 8호까지 나와 있고 10호까지 나오면 폐간하려고 해요. 두 개밖에 안 남았으니 조금 신중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화요리책』도 『The Kooh』에 실렸던 주제를 엮어서 냈다고 들었어요.


7호에서 '만화 레시피'라는 주제를 다룬 적이 있어요. 단행본으로 만들고 보니 잡지 말고 단행본도 또 다른 재미가 있구나 싶어 ‘The Kooh’라는 레이블로 단행본을 몇 개 만들었어요. 파생해서 시리즈로 내면 재밌겠다 싶어 『만화여행책』을 냈고요. 덕후문고라는 단행본을 계속 낼 예정이에요. ‘.txt’라는 레이블도 운영하고 있어요. 현재 ‘.txt’로는 5권, 『The Kooh』로 8권, ‘덕후문고’로는 3권을 제작했어요.


『만화요리책』과 『만화여행책』 인쇄 부수가 궁금해요.


『만화요리책』은 2,000부 찍었어요. 1,200부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나가고 700부 정도 독립 서점을 통해 판매했어요. 현재 100부 정도 재고가 남았어요. 『만화여행책』은 1,000부 정도 발행해 200부 정도 남아 있죠.


『만화여행책』을 낸 뒤 반응은 어땠나요?


생각만큼은 많이 팔리지 않았어요. 요리는 보고 바로 만들 수 있지만 여행은 도쿄라는 한정적인 구역을 다뤘기 때문에 그 지역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냥 보고 가시더라고요. 다른 지역으로도 제작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일본 만화에서 도시를 많이 다뤄서 주로 일본 도시를 주제로 잡을 것 같아요.


잡지와 단행본을 만드는 데 차이가 있나요?


잡지도 단행본 형식으로 만들어서 제작 방식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요. 다만 잡지는 크라우드 펀딩을 받을 때 회차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마케팅 방법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단행본은 사람들이 구매하거나 후원하는 데 부담이 적다는 게 장점이고, 잡지는 계속 만들면 브랜드화되면서 인지도가 높아지지만 같은 포맷과 기획이 계속될수록 안 팔린다는 게 단점이에요.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비슷한 디자인의 표지지만 『만화요리책』은 유광지로, 『만화여행책』은 무광지로 제작했어요. 가격 때문이었나요?


처음에는 요리하면서 뭐가 묻으면 닦아내기 쉽도록 유광 재질로 만들었고요. 같은 시리즈면서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기도 했고, 사실 제가 무광을 더 좋아해서 두 번째는 무광 재질로 만들었어요. 가격은 비슷한 것 같아요. 다른 책을 제작할 때도 가격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그때그때 가지고 있는 돈에 따라 만들어요. 자금이 넉넉하면 여유 있게 인쇄하고, 여유가 없으면 흑백으로 제작하기도 하고요. 비용에 따라 디자인이 달라지기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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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낸 책들은 어디서 만날 수 있나요?


책방에 많이 들어가 있진 않아요. 서울 인근에 저와 교류가 있던 책방에만 주로 넣었고, 다른 책방에서 오면 사입을 권해서 파는 형태로 수수료를 좀 더 드리는 게 편하더라고요. 관리도 안 되고, 갑자기 폐업해서 책을 못 받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사입을 한다면 정말 구매하고 싶은 분들이 어떻게든 팔려고 하시니까 서점 주인분들에게도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물론 주인 입장에서는 부담이니 권하기는 그렇지만, 저 역시 서점 관리가 힘들어서요.


혼자 서점 관리를 하는 게 어려울 텐데, 회계는 어떻게 하세요?


그래서 회계를 안 해요. (웃음) 하나씩 내면 독립서점에서 돈을 받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통장 번호를 알려드리고는 확인을 못 하죠. 지방 서점에 넣기 힘든 또 하나의 이유기도 해요.


『The Kooh』를 창간했던 2014년부터 지금까지 독립 출판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현재의 독립 출판과 독립 서점 붐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는 꾸준히 제가 하는 걸 하고 있는 거라 위기감을 느끼진 않아요. 제가 만들 수 있는 책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책과 다르다는 자신감도 있고, 오래 해오면서 저만의 노하우가 있다고 생각해요.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좋은 현상이죠.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히 시장도 커질 테니까요. 아직까지는 독립 출판을 보는 것보다 만드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데, 추세가 계속 이어지면 장기적으로 만드는 분도 늘어나면서 전문가도 생기고, 그걸 수집하는 사람도 늘어나지 않을까요?


독립 출판 중에서도 이미 기성 출판만큼 잘 내는 분이 많아졌어요. 독립 출판과 기성 출판의 차이는 뭘까요?


겹치는 점도 있지만 차이를 보자면 기성 출판에서 안 팔려서 못 만드는 책을 만드는 게 가장 클 것 같아요.

『만화요리책』도 개인적인 팬심으로는 만들 수 있지만 기성 출판에서는 여러 걸림돌이 있겠죠. 제가 아는 분 중에서도 기성 출판으로 시집을 냈을 때는 잘 안 됐다가 독립 출판을 하면서 오히려 팬층이 두꺼워지고 잘된 분이 있어요. 규모가 작고 주제 선정도 개인적이고 공감을 살 만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게 장점이에요.


여러 가지 일을 해왔어요. 책 외에 보드게임을 만들고, 홀리데이아방궁이라는 공간을 운영한 적도 있고요.


자리가 할 만한 공간도 아니었고, 제가 공간을 운영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계속 사람이 오지 않더라도 문을 열고 거기 앉아 있는 게 저랑 안 맞았던 것 같아요. 작업이라도 하면 될 텐데 작업도 안 되고, 공간 비용은 나가는데 소득이 없는 상태라 아예 없애는 게 낫겠다 싶어서 지금은 정리하고 작업실을 따로 구해서 쓰고 있어요.

1인 출판을 하면 할 일이 자잘해지면서 회사에 다닐 때보다 스케줄 관리가 더 어렵지 않나요?


가끔 기업에서 SNS 콘텐츠 관련 자문을 하는 일 외에는 다른 사람들 일을 받아서 하는 게 거의 없어요. 오로지 책을 제작하고 판매하는 일과 책 만들기 수업이 지금 제가 수익을 내고 있는 방향이에요.


수업에서 주로 조언하는 내용이 있다면.


트렌드에 편승하기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 자신이 경험한 것들 중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걸로 책을 만드는 게 제일 좋다고 해요. 어떤 분들은 수업 첫 시간에 오면 어마어마한 디자인과 편집을 이야기하시는데, 실제로 책을 만들려면 생각보다 많은 기술을 다뤄야 하거든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이 자기도 만족하고 읽는 분도 만족하는 책이 될 수 있어요. 뭔가 억지로 지어내려고 하면 읽는 분들도 바로 알아차리거든요. 거의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앞으로도 덕후 콘텐츠를 가지고 책을 만들 예정인가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 제가 좋아하는 것들, 덕질이라는 문화를 가지고 계속 만들 것 같아요. 그게 저하고도 맞고, 제가 만들었을 때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책일 것 같아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삼식이’ 이재명의 아내 김혜경 “이제는 밥 먹고 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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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SBS의 <동상이몽>을 통해 이재명 성남시장 부부의 일상이 공개됐다. ‘정치인 최초 지상파 예능프로그램 출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거침없는 발언과 빠른 추진력으로 ‘사이다’라고 불리는 이재명 시장은 이 방송을 통해 색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아내에게 수시로 애정표현을 하는 ‘사랑꾼’이었고, 삼시 세끼 집밥만 먹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집밥 애호가’였다. 이로써 이재명 시장에게는 ‘삼식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시청자들은 아내 김혜경 씨의 비결을 궁금해 했다. 얼마나 맛있고 정갈한 음식이기에 남편이 ‘아내표 밥상이 최고’라고 추켜세울까.

 

김혜경은 한 권의 책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목은 『밥을 지어요』 . 남편과 아이를 위해 준비했던 66품의 집밥 레시피를 담았다. 천연 조미료를 만드는 방법부터 철따라 달라지는 밥상 풍경까지, 27년 경력의 전업주부가 들려주는 노하우를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조리법만 소개한 책은 아니다. 주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때로는 달달하고 때로는 쌉싸름한, 삶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김혜경은 말했다. “요리에는 그 집만의 사연이 담겨 있다”고. “똑같은 메뉴도 집집마다 맛이 다르듯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고. 그런 까닭으로 『밥을 지어요』 에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두 아들의 엄마로서, 한 집안의 딸이자 며느리로서, 김혜경이 걸어온 시간들이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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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 후에도 밥 찾는 남편 “이제는 밥 먹고 싸워요”


인터뷰를 위해 자택으로 찾아뵈었는데요. 이렇게 집으로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작년에 방송 촬영을 하면서 집이 공개가 됐지만, 그 전에는 찾아오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특히 공무원들은 더 그렇고요. 시장 취임한 이후부터 저희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이재명 시장님께서 싫어하시는 거죠? 일과 관계된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는 걸요.


네, 싫어하죠. 조금 병적이었어요. 전임 시장들 중 비리로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실 것 같아요. 그런 쪽으로는 문제가 안 생길 테니까요.


그렇죠. 그런 면에 있어서는 믿고 맡기죠.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시정 정책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누세요?


같이 정책을 짜거나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고요. 지방자치단체장이라는 위치가 살림을 하는 거잖아요. 아이들 키우는 일, 어르신 모시는 일, 청소나 시설 등 모든 부분을 포괄해야 되죠. 그렇다 보니까 특히 엄마들, 주부들, 어르신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야 하는데요. 제가 아이들 키우면서 한 동네에 오래 살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돼요.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남편이 염두에 둔 정책이 있으면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해?’ 하고 툭 던져 봐요. 그러면 제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죠.

 

이재명 시장님이 강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갖고 계시잖아요. 아내로서 조언을 하셨을 법도 해요. 조금 부드럽게 해보라고요.


그건 조금 억울한 일인 것 같아요(웃음). 사실 이 사람은 저보다 눈물도 더 많고,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거든요. 표현도 저보다 더 부드럽게 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촛불 정국에서 갑자기 부각이 되면서, 국민들이 센 면만을 접하신 것 같아요.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로 다가오니까 오해를 조금 하시지 않았나 싶어요.

<동상이몽> 출연이 좋은 기회가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방송을 통해서 사랑꾼의 면모, ‘삼식이’로서의 모습이 드러났잖아요.


처음 출연 제의가 왔을 때는 절대 안 한다고 했어요. 살림하는 걸 다 공개해야 하는데, 절대 못한다고 했죠. 그런데 지난 경선 때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분들이 이 사람에 대해서 오해를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솔직하게 보여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 마음이 조금 더 커서 출연을 하게 된 거죠.

 

남편의 감춰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으셨나요?


촬영할 때는 정신이 없었죠(웃음). 관찰 카메라를 설치한 상태에서 생활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몇 번 하다 보니까 카메라가 있다는 걸 잊어버리게 되기는 하는데, 그래도 긴장 되죠. 끝나고 나서 후련했어요(웃음).

 

‘삼식이’ 이재명 시장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남편이 평일에는 출근을 하니까 저희는 주말에만 촬영을 했어요. 그래서 남편이 집에서 밥 먹는 모습이 방송에 많이 나오게 된 건데, 본인은 세상 억울해하죠. 평소에는 집에서 하루 한 끼 먹으면 많이 먹는 건데, 자기가 집 밥만 찾는 ‘삼식이’로 보여졌으니까요.

 

책을 보면, 억울해 하실 수 없을 것 같던데요(웃음). 부부싸움 후에도 밥을 찾으신다면서요?


네. 처음에는 제가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싸우는데 밥이 넘어가나?’ 싶고(웃음). 그런데 밥을 안 주면 그것처럼 화내는 일이 없었어요. 전날 싸워도 아침은 꼭 줘야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안 줬는데, 그러면 싸움이 너무 커지더라고요. 싸움의 이유가 사라지고 밥 안 주는 걸로 다투게 되니까요(웃음). 그래서 ‘안 되겠다, 밥은 주고 싸우자’ 생각해서 이제는 밥 먹고 싸워요(웃음).

 

용감한 남편이라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똑같이 선거 운동을 할 때도 집에서 밥을 먹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때는 정말 화가 나셨었죠?


화났죠. 아직도 그때가 생각나는데, 제가 화가 나서 다시 전화를 했어요. 나도 이렇게 힘든데 밥상을 차리란 말이냐고요. 그런데 본인이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라면을 먹더라도 집에서 저랑 편안하게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선거 때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김밥을 먹거나 행사장에 가서 대충 때우거든요. 그런 게 계속 이어지니까 너무 힘들었던 거죠. 집밥이 먹고 싶었다기보다도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집에 일찍 들어오겠다는 뜻으로 했던 말인 것 같아요.

 

선거운동 기간에는 대화하실 시간도 별로 없으시죠? 너무 힘드니까요.


그렇죠. 그리고 같이 다니면 시간이 아까우니까 서로 다른 일정으로 떨어져서 다니거든요. 말할 시간이 거의 없죠.

 

그런 면에서 정신적인 허기가 있으셨나 봐요. 가까운 사람과 대화하면서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셨겠죠?


그렇죠. 편하게 같이 밥 먹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선거 때는 예민해요. 아니라고 해도, 저도 예민해지고 그 사람도 그래요. 올해도 선거가 있는데, 이럴 때는 희한하게 해가 바뀌면서부터 예민해지더라고요.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솔직하게 썼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기인데요. 이때 출간을 하신다는 게 부담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네. 사실 작년에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그 생각을 못했어요. 해가 바뀌고 선거 국면으로 전환이 되면서 ‘괜한 일을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 책이 전문 요리책이라기보다는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책이잖아요. 솔직하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책 뒤에 ‘남편의 레시피’가 실려 있어요. 이재명 시장님이 쓰신 글인데요. 처음 읽으셨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예전에 오색약수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였는데, 등산을 하면서 재미로 점을 한 번 봤었어요. 거기 고양이 할매라고, 점보는 할머니가 계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밖에 나가서 활동을 해야 되는 사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제가 연년생 남자아이 둘을 키우느라 지쳐 있었는지, 그 말이 너무 반가웠어요. 그래서 ‘이것 봐, 나는 밖에 나가야 돼’라고 했었거든요(웃음). 남편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고마웠죠. 조금 감동했어요.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거니까요.

 

평소에는 그런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시나 봐요.


그렇죠. 부부가 살면서 그런 말을 잘 안 하게 되죠(웃음).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살죠.

 

글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셨어요?


안했죠(웃음). 저는 표현을 많이 안 해요(웃음).

 

이재명 시장님은 어떠세요? <동상이몽>에서는 애정표현을 많이 하시던데요.


많이 하죠. 그런데 ‘낄끼빠빠(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진다)’를 잘 못하죠(웃음).

 

일부 시청자들은 가부장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했어요. 이후에 이재명 시장님도 인터뷰를 하시면서 자신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 건 인정한다고 하셨고요. 그런 이유로 다툰 적은 없으세요?


남편이 경북 안동 출신이에요. 저희 어머님은 대구 분이시고요. 집안에 전통적인 분위기가 있는데, 이 사람은 노력을 많이 한 편이에요. 아이들 키울 때도 저는 주말에 친구들이랑 쇼핑을 가거나 공연을 보러 갔어요. 그때 남편은 변호사 일을 하면서 주말에는 시민 모임 활동을 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행사를 갔거든요. 저한테는 친구들이랑 시간 보내라고 휴가를 주고요. 그때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더라고요.

 

첫 책입니다. 받으셨을 때 느낌은 어떠셨어요?


처음에는 책을 못 보겠더라고요. 떨렸고 긴장됐어요. 책이 나오기 전에 수정 작업을 하면서 내용을 다 봤는데도, 펼쳐보기가 조금 두렵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이 먼저 봤어요. 보고 나서 ‘괜찮아, 책 잘 나왔어’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책을 펼쳐봤는데, 보고 나서는 ‘참 예쁘게 나왔다’ 싶었어요(웃음). 사실 요리책은 전문가들이 주로 쓰잖아요.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책을 준비하면서 걱정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제 책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물론 레시피도 중요하지만, 제가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 이야기도 궁금해 하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쓰자고 생각했어요. 제 책을 보시면서 ‘김혜경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살았구나, 이럴 때는 이런 마음이었겠다’ 하고 공감해 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단순히 레시피만 실려 있는 게 아니라, 음식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주방 도구에 대해서도 쓰셨는데, 한 번 사시면 굉장히 오래 쓰시더라고요.


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살림하는 주부님들이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특별하게 기회가 되지 않는 한 살림을 다 바꾸는 일이 드물 것 같은데요. 이제는 냄비 바닥이 다 떨어져서 ‘바꿀 때가 됐나 보다, 한 번쯤 바꿔볼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주방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단출한 느낌이에요. ‘혹시 검소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분들도 계시겠어요.


이 정도면 꽤 잘 사는 거 아닌가요? 아닌가(웃음). 저는 그냥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저희가 이사를 갔거나 어떤 변화가 있었으면 모르겠는데요. 이 집에서 21년째 살고 있으니까요. 바꿀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고,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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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아내로 산다는 것


간혹 남편들이 ‘우리 엄마 음식’을 찾을 때가 있잖아요. 시어머님의 음식 중에서 가장 비슷하게 만드실 수 있는 건 뭔가요?


저는 자라면서 한 번도 콩가루를 먹어보거나 구경한 적이 없었는데요. 어머님께서 콩가루로 국을 끓이시더라고요. 그게 생각보다 만들기 까다로워서, 처음에 끓일 때는 콩죽처럼 돼요. 그런데 이제는 거의 비슷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지난번에 끓였을 때 남편 반응이 좋더라고요(웃음). 조금 몽골 몽골하게, 냉이에 콩가루가 붙어 있게 끓여야 되는데,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니까 흉내는 조금 내는 것 같아요(웃음).

 

다식은 어떠세요? 시어머님의 다식판을 갖고 계신다면서요?


만들어 봤는데, 모양을 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사실은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했어요. 자랑하려고요. 그런데 남편이 보더니 ‘안 되겠다’ 그러더라고요(웃음). 다식을 만드는 게, 송홧가루에 꿀을 개어서 반죽하는 것도 힘들지만, 모양을 예쁘게 내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님의 손맛과 추억 거리를 소환하는 데는 실패했어요.

 

이재명 시장님께서 아내의 요리를 냉정하게 평가하시는 편인가요?


그러면 밥을 못 얻어먹지 않을까요(웃음)?

 

다식을 보고 이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콩가루국도 ‘이제 제법 만드네?’라는 반응을 보이셨잖아요(웃음).


그러네요(웃음). 그래도 반찬 투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똑같은 반찬을 계속 상에 올려도 투정을 안 해요. 어떤 사람은 갓 지은 밥만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 사람은 냉장고에 있던 밥도 데워서 잘 먹어요. 그런 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여러 가지 차리는 걸 싫어해요. 가짓수 많은 거 싫어하고요. 딱 먹을 것만 차리는 걸 좋아해요. 트레이 하나에 다 담을 수 있는 정도면 되고요. 그 이상 되면 왜 이렇게 많이 했냐고, 먹을 게 너무 많다고 해요.

 

까다로운 ‘삼식이’는 아니시군요(웃음).


까다롭지는 않아요(웃음).

 

가장 좋아하시는 메뉴는 뭔가요?


제가 만든 건 다 잘 먹어요. 심지어 제가 사다주는 것도 잘 먹어요. 저도 바쁘니까 매일 집에서 준비한 음식만 먹지는 않거든요. 사서 먹기도 해요.

 

반찬가게를 이용하실 때도 있으세요?


그럼요. 집 앞 시장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요(웃음).

 

재래시장을 자주 이용하신다고요. 사람들이 다 알아볼 텐데, 불편하지 않으세요?


집 바로 앞에 시장이 있어서 장보러 가는데요. 사실 이 동네는 저희 아이들 아주 어릴 때부터, 유모차에 태워서 다닐 때부터 살던 데예요. 남편이 시장이 된 후에 만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시장에 가면 ‘동호 엄마’, ‘언니’ 이렇게 불러요.

 

그래도 제약이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을 못 하실 때도 있을 거고요.


아무래도 신경 써야 되겠죠. 그리고 방송이 나간 뒤로는 알아보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공영 방송의 힘이라는 게 대단하더라고요. 밤에 집 앞 공원에 나갈 때도, 모자 쓰고 둘이 손잡고 지나가는데 알아보시고 인사해 주세요(웃음). 깜짝 놀랐어요. 많이들 알아보세요.

 

정치인의 아내로 사시면서 가장 힘드신 건 뭐예요?


가장 힘든 건.... 가족들이 피해 받는 거죠. 사실 남편은 직업 정치인이고, 저는 그 아내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주변 가족들이 신경 쓰게 되고 오해 받게 되는 부분들이 있으니까 죄송하죠. 그런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남편이 처음 시장선거에 출마했을 때, 이혼을 생각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이혼 서류에 제 도장 찍고서 남편한테도 도장 찍으라고 그랬어요.

 

정치를 시작도 하기 전이었는데요. 왜 그러셨어요?


정치를 하다가 잘못되면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정치를 한다는 게 돈 문제도 얽혀있는 거고, 개인 생활이라는 것도 없고요. 그리고 남편이 정치를 하리라는 건 예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힘들기는 하지만 ‘이 사람처럼 정치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싶더라고요. 무지 힘들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재명 시장님처럼 정치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음... 금전적으로 투명하고, 주변에 떳떳해야 되고, 어디에 줄을 서지 않아야 되고, 소신을 지켜야 되고, 처음 생각이 변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 되죠. 누구나 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참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옆에서 보기에 남편은 ‘아, 정말 대단하다’ 할 정도로 잘 지켜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정도면 뭐,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괜찮아’ 싶은 마음이 들면서 이해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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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이재명은 ‘솔직한 사람’,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


모든 전업주부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요리가 즐거우세요?


저도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고 싶죠(웃음). 제일 맛있는 건 남이 해주는 밥이에요(웃음). 그런데 음식도 하다 보면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기 싫어서 안 하게 되면 점점 더 안 하게 되는 것 같고요. 한 번 장을 봐와서 요리를 하면 계속 만들 게 생기더라고요.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도 다 다른 맛이 난다는 게 요리의 재미인 것 같아요. 이 집 음식과 저 집 음식의 맛이 다르고, 소스나 조리 시간만 바꿔도 다른 맛이 나잖아요. 저는 음악을 공부했는데, 요리에도 음악처럼 변주가 있는 것 같아요. 요즘 TV나 인터넷을 보면, 예전에 배웠던 음식인데도 변형시켜서 새롭게 만들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재밌어요. 계속 배울 게 생기고요.

 

‘오늘은 정말 요리하기 싫다’ 싶은 날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세요? 밖에 나가서 먹자고 하세요?


사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사람을 데리고 나가서 밥 먹기가 쉽지 않아요. 저희 남편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일하는 분들이 정말 힘들잖아요. 지쳐서 집에 들어온 사람한테 따뜻한 밥을 해서 주고 싶죠. 그럴 때 저는 솥밥을 만들어줘요. 무밥, 톳밥, 연근밥, 우엉밥 등 계절에 맞춰서 조금씩 달라지는데요. 재료가 없을 때는 그냥 콩나물밥을 해요. 따뜻하게 지어서 양념장이랑 김치랑 차려주면 밥 맛있게 먹었다고 해요. 무쇠솥이나 돌솥, 냄비에 끓여주고요. 휴일 같은 때 그마저도 하기 싫으면 그냥 양푼에 밥 푸고 소금, 참기름 쳐서 짠지 같은 거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서 손으로 입에 넣어줘요(웃음). 한 상 차려서 먹을 때도 있지만 귀찮으면 그렇게도 해요.

 

조미료나 육수도 직접 만들어 쓰시잖아요. 항상 떨어지지 않게 준비해 두시나요?


가끔은 떨어질 때도 있는데요. 새우가루나 멸치가루, 다시마가루 같은 건 만들기 쉽잖아요. 그런 건 넉넉하게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놔요. 조금씩 꺼내두고 먹어요. 맛간장, 엿간장 같은 것도 냉장고에 몇 달씩 보관할 수 있으니까 넉넉히 만들어 놓고요. 조림 같은 걸 만들 때 그냥 진간장을 쓰는 것보다 훨씬 맛이 좋거든요. 멸치육수도 냉동실에 소분해서 보관해요. 그때그때 금방 해동해서 쓸 수 있으니까요.

 

이재명 시장님이 프로포즈 하실 때 어릴 때 쓴 일기를 주셨다면서요? 굉장히 의외예요.


저도 의외였어요. 저라면 안 줄 것 같거든요. 잠결에 쓴 부분은 글씨를 알아보기도 힘들어요. 민망한 이야기, 누구한테 보여줄 수 없는 내용도 있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걸 왜 주지?’ 싶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까,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때는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고 읽었던 것 같아요.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으세요?


본인의 인생을 솔직하게 다 보여준 거잖아요. 저라면 숨길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고등학교 때 사진도 안 보여줬거든요(웃음). 그런 면에서 보면 너무 솔직하지 않아요? 지금도 그래요. SNS에서도 그렇고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할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제가 ‘그 말을 왜 해? 굳이 할 필요가 뭐 있어?’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러면 ‘어차피 알게 된다, 누군가에 의해서 공개가 될 거면 내 입으로 내가 밝히는 게 낫다’고 해요. 그런 주의예요. 저는 조금 조마조마한데, 이제는 믿는 마음이 더 커요. 국민들도 그런 면을 많이 인정해 주시는 것 같아요.

 

솔직하고 시원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시장님 못지않으세요(웃음).

 


인터뷰가 있을 때 남편한테 물어봐요. 무슨 말을 해야 되냐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냐고. 그러면 솔직히 말하라고 해요. 거짓말하면 절대 안 된다고요.

 

거짓말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신 적은 없나요?


거짓말을 해서 싸운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거짓말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그래서 넘어갔나 봐요. 너무 솔직해서. 첫 날 만나서 밥을 먹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기는 있는 상황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요. 그리고 형제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다 이야기해줬어요. 그때 누님은 식당에서 일하셨고 큰 형님은 탄광에서 일하실 때였어요. 작은 형님은 씽크대 도색을 하셨고요. 그런 걸 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실 저도 깜짝 놀랐는데, 그런 솔직함이 좋았나 봐요. 반대로 숨겼다면, 제가 안 만났을 것 같아요.

 

정치인으로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오셨어요. 곁에서 지켜보시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드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대충 눈 감고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들춰서 말하고, 꼬집어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을 앞장서서 이야기하고, 그런 것들이 안타깝기도 하죠. 그런데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잖아요. 처음에는 그런 게 싫었는데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걸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어요. 특히 촛불 정국을 지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잖아요. 지난 대선 경선을 같이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통령 후보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때 이 사람만의 역할이 있었다고요. ‘세상에 태어나서 이 정도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그것도 대단한 일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이혼한다고 협박하지 말고(웃음), 응원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성장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으셨잖아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시고, 공장에서 일하다 상해를 입기도 하셨어요. 돌이켜 보면 짠한 마음이 드시죠?


지금처럼 인터뷰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렇죠.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 그런데 생활하다 보면 그런 게 전혀 안 느껴지거든요.

 

전혀 그림자가 안 느껴지세요?


네. 그런 면이 제가 이 사람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해요. 사실 개천에서 난 용인데, 그런 사람들 중에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거나 아예 외면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게 콤플렉스인 사람도 있고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없어서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때를 잊지도 않고, 나와 내 가족만 챙기는 것도 아니고, 그런 면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보면서 짠하다는 생각을 할 때는 없어요(웃음). 이렇게 인터뷰를 하거나 찬찬히 생각을 해보면 ‘그런 면도 있었구나’ 싶은 거죠.

 


정치를 그만두길 바란 적도 있어요


이재명 시장님은 늘 에너지가 넘치고 강한 분처럼 보여요. 힘들 때 아내에게 기대는 일도 없으실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음... 힘들어할 때도 있죠. 그런데 본인이 해야 되는 일에 대해서 ‘힘들어, 안 할래’라고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말한 적은 있어요. 이제 그만하라고. ‘그 정도 했으면 됐어, 그만해’ 하면서 꼬신 적은 있죠. 남편이 ‘이제 그만 할까?’라고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가장 강하게 말리신 적은 언제였어요?


우리 시누이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의 비화가 공개되었을 때였어요. 당사자들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까지 언급돼 오해를 받는데, 나서서 자세히 해명할 수도 없고... 그때는 정말 정치를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장님은 어땠나요?


자기가 넘어야 될 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업’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있는 걸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그렇죠.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진실이 있고,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하면, 언젠가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는 믿음. 너무 진부한 표현이지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인 거죠. 또 대중을 속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몇몇 댓글이나 영상, 방송 한두 개 가지고 대중을 속일 수는 없다고 믿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처음에는 조금 걱정됐어요. 종북으로 몰릴 때는 이러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거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한 고비, 한 고비 넘어가면서 ‘안 되면 그만두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편해졌어요. 한창 시장 재선 선거할 때는 ‘잘 돼서 당선되면 당신 소원 이루는 거고, 당선 안 돼서 정치를 안 하게 되면 내 소원 이루는 거야. 안 되면 나는 더 좋지’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원래 성격이 대범하신 거예요? 아니면 선거를 같이 치르시면서 달라지신 거예요?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달리 어떻게 하겠어요(웃음).

 

‘김혜경’이라는 한 사람보다 ‘이재명의 아내’로서 이야기하실 때가 더 많잖아요. 아쉽거나 속상하실 때는 없으세요?


젊었을 때는 오로지 나 자신으로 보이고 싶었죠. 내 이름으로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김혜경’보다 ‘이재명의 아내 김혜경’으로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편이 더 효과적이잖아요. 그래서 내 이름이나 얼굴을 내세우는 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책에서 이재명 시장님은 “내 아내도 대명천지에 “나 이런 사람이오”하고 얼굴 내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쓰셨어요. 남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나 봐요. 항상 ‘이재명의 아내’로만 소개되니까요.


그랬었나 봐요.

 

시장님의 바람처럼 ‘나 이런 사람이오’라고 말씀하신다면, 김혜경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것 같으세요?


‘이재명의 아내’, ‘이동호, 이윤호의 엄마’인 김혜경이겠죠.

 

세 사람을 빼고 이야기한다면요?


저희 큰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앓아서 제가 많이 속상했었어요. 자기 인생은 자기 거라고 주장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네 인생까지 포함해서 내 인생이야’라고 말했었는데,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웃음).

 

우문현답입니다(웃음). 책에 보면 이른바 ‘재명표 메뉴’가 실려 있어요. 시장님이 직접 만드시는 국수, 배추전의 레시피인데요. 실제로 맛이 있나요?


국수는 꽤 그럴 듯해요. 책에 실린 사진을 보시면 국수 위에 달걀 지단이 올라가 있는데, 사실 그것 때문에 촬영 중에 조금 다툼이 있었어요(웃음). 이 사람이 지단을 빼야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자기가 언제 지단을 부쳐 넣었느냐고요, 이건 리얼이 아니라면서 굳이 빼야 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재명표 메뉴’에 점수를 매기신다면, 몇 점을 주시겠어요?


음... 90점? 생각보다 만들기가 어렵지 않은데 희한하게 맛이 나요. 특히 배추전은 묘한 맛이 있어요.

 

이재명 시장님이 요리에 소질이 있으신 걸까요?


요리보다는 행정이나 정치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그 사람은 정치를 하고 저는 요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웃음).


 

 

밥을 지어요김혜경 저 | 김영사
오래된 손때 묻은 물건에는 요리에 얽힌 추억과 사연들이 소록소록 묻어있고, 도구나 그릇을 활용해 센스를 더하는 살림 노하우는 감각적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병호 기자 “우리는 서방 매스컴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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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을 위한 변명』 , 『올리가르히』, 『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의 슬픈 운명』등을 쓰고 현재 매일경제신문 차장 기자로 있는 김병호 저자는 2016년 8월부터 1년간 해외연수의 기회를 갖는다. 그가 선택한 곳은 카자흐스탄. <연합뉴스>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2004-2007)을 지내기도 했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러시아를 전공했던 그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캅카스, 더 나아가 동유럽 등에 관심을 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김병호 기자는 연수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헝가리, 몰도바, 벨라루스, 루마니아, 터키 등 18개국을 다니며 각 나라가 처한 정치와 경제 상황을 살펴보았다. 광장의 시민들과 인터뷰를 하고, 정치인, 교수, 기자 등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유럽 변방으로 가는 길』은 “서방 매스컴의 시각”이 아닌 바로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본 ‘유럽 변방’의 맨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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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도 운명이 있는 것 같아


‘해야만 한다는 심정’으로 책을 집필했다고 적었습니다. 이 사명감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2016년 8월부터 1년 간 해외연수를 가게 됐어요. 대부분 미국, 중국, 일본 정도를 가는데요. 저는 러시아 쪽 전공도 했고, 관련 책도 쓰고 해서 중앙아시아 쪽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그래서 카자흐스탄에 가기로 한 것이고요. 카자흐스탄만으로는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변 가까운 국가들을 봤죠. 대개 이쪽 국가들을 많이 모르는 것 같아요. 국내에도 여행기 정도는 있지만 그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사정을 다룬 책들은 많이 없는 것 같고요. 특히 아쉬운 게 이런 지역을 다룬 서적을 보면 외국 서적을 번역했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예요. 직접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평가한 책이 적었어요. 결국 이것을 내가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직접 사람들을 만나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소개하면 좋겠다고요. 또 직업이 기자다보니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에게도 그런 책이 필요하다면 기회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내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힘들었어요. 인터뷰 섭외를 하고, 만나고 하는 일정들이 많아서요. 사람 찾느라 힘들었는데요. 제가 간 많은 국가들이 언론 자유가 많지 않은 곳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인터뷰에 사람들이 익숙하지가 않아요. 인터뷰를 해야 하니까 대사관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기도 하고, 구글에서 연구 논문을 검색해 해당 연구자 연락처를 수소문하기도 했어요. 정말 맨바닥에서 했죠.

 

개중에 협조적이었던 취재국은 어디였나요?


헝가리 같은 경우는 냉전 시대 때 소련 블록 중 하나였다가 가장 먼저 뛰쳐나온 국가 중 하나인데요. 헝가리 사람들은 연락을 하면 답변이 다 돌아왔어요. 다른 곳은 메일을 보내도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헝가리는 인터뷰가 안 될 때도 이러한 사정으로 인터뷰가 어렵다, 고 답변을 다 해주더라고요. 요즘 기사를 보시면 알겠지만 헝가리가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 1998년-2002년, 2010년-현재까지 헝가리 총리직을 맡고 있는 인물) 총리라고 해서 철권통치를 하는 사람 밑에 있거든요. 그래서 아무래도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현장에서도 그랬죠. 지식인들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없이 말하더라고요. 인상적이었어요.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취재하기 쉽지 않은 나라들인데요. 다만 과거 소련 사회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가고 있는 곳들이라 변화는 있는 것 같아요. 제도적인 한계는 있지만 말이에요.

 

책에서 다룬 여러 국가들의 언론 자유 문제, 독재나 정치권 부패 문제 등 각 나라마다 안고 있는 사회문제들을 지켜보면 한국 사회에 대한 시각까지도 넓어져요.


기성세대로서, 젊은 분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취업도 어렵고, 집구하기도 힘들고, 기본부터 어렵잖아요. 얼마나 화도 나고 짜증나요. 다 이해하죠. 그런데 이 나라들을 돌아다녀보니까요. 우선 한국을 잘 알더라고요. 많이 좋아하고요. 내부에서는 비판을 하지만 바깥에 가보면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구나 생각했죠. 이런 면도 있어요. 카자흐스탄은 국민의 85%가 ‘행복하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10%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우리의 기준으로 카자흐스탄을 보면 ‘이 나라가 행복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민주주의 수준도 그렇고, 인프라도 그렇고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거든요. 그만큼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책에서 짚기도 했지만 한국은 공교롭게도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잖아요. 이러한 지리적 속성도 있겠죠?


그럼요, 한국은 따져보면 큰 나라예요. 일본, 중국만 생각하면 그렇지만요. 한편으로는 그런 안타까움도 있어요. 작년에 외국에 있을 때 계속 한국에서는 ‘최순실 사태’ 때문에 시끄러웠잖아요. 그때 북한은 계속 미사일 쏘고 그랬거든요. 한국의 에너지를 다른 좋은 데 쓸 수도 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거기에 쓸 에너지를 다른 데 돌리면 좀 더 해볼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나라에도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작지 않은 나라지만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잖아요. 저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조상들이 고구려 시대 같은 때에 좀 더 위로 땅을 넓혔으면 어땠을까 하고요.(웃음) 영토라도 크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건데요. 우리는 사실은 뻗어나갈 데가 별로 없잖아요. 책에 나온 나라들과 우리의 공통된 숙명이지만 주변 국가들 안에서 생존과 안보를 고민해야 하겠죠.

 

이 국가들을 지켜보면서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이 국가 안보의 중요성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셨잖아요.


소련이 무너진 후, 동유럽 많은 국가들이 유럽에 편입되고, 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면서 안보 우산이 튼튼해졌죠. 그러니까 그 힘을 경제나 사회 발전에 더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고 있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안보 불안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어요.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잃고 있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어요.

 

국가 안보라는 면에서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주었던 나라가 있었다면 어느 곳이었나요? 


루마니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과거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잖아요. 24년을 지배하다가 황망하게 죽었죠. 그 비극적인 부분만 생각하는데요. 공부를 해보니 그 나라가 나름대로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취했더라고요. 미국, 중국과 수교하는 과정에서도 소련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차우셰스쿠라는 사람은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어요. 차우셰스쿠는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핍박했지만 대외적으로는 나름대로 국가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독립적인 활동을 많이 했더라고요. 소련의 지배에 있었지만 미국과도 외교를 하고 말이죠. 현재도 마찬가지예요. 루마니아는 나토와의 협력에서 가장 교두보가 되는 곳이거든요. 그것을 빌미로 다국적 기업도 많이 유치했고요. 외교적 자주성을 통한 그런 긍정적인 면이 보였어요. 우리도 그런 면이 필요할 것 같긴 한데요. 상황은 다르죠. 북한이라는 존재도 있긴 하고요.

 

 

부분적으로 배울 것들


공통적으로 ‘다변화’라는 점이 중요하게 읽혔어요. 외교관계는 물론이고, 경제 문제에 있어서도 다변화는 위기관리에 아주 중요한 요소예요.


헝가리 사람들은 자기네 정부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하더라고요. 소련에서 비슷하게 먼저 탈출한 폴란드나 체코에 비해 경제도 뒤져있고, 정부는 독재고, 기업을 억압하고 그렇다고요. 하지만 오르반 총리가 유럽 무대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러시아와도 균형을 유지하지 않느냐고 제가 반문하기도 했거든요. 저는 나라의 당당함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점이 있다고 봐요. 우리도 주변국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을 텐데 다소 수동적이랄까요. 기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전통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어려움은 있을 수 있겠죠. 비교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책에 등장한 나라들의 모델을 차용할 수 있는 면은 별로 없을 거예요. 다만 부분적으로 배울 것들은 있을 겁니다.

 

안보위기,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같은 대국과의 외교적 관계 등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주는 대목들이 많이 있어요.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보고 참 놀랐어요. 1992년 즈음까지는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싸우고 그랬어요. 몰도바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그 악령 때문에 러시아와 멀어지려 했고요.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여전히 러시아 사람들이 많으니까 러시아와 협력하려고 했죠. 그래서 전쟁도 하고 했는데요. 지금은 서로 왔다 갔다 하기도 쉽고요. 서로에 대해 체제 강요도 안 해요. 굳이 통일하려고도 하지 않고요. 그걸 보면서 남북 사회의 통일 문제를 생각하게 됐어요.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어떻게든 해야 하고, 주변국에 맞서 큰 나라로 도약해야 하지만 괜히 서둘러서 부작용을 만들 필요는 없겠다, 싶더라고요. 물론 사정은 다르지만 서로를 인정하면서 지내는 것도 생각만큼 큰 문제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가서 보니 참 편안했거든요. 평화롭게 지내고, 왕래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몰도바-트란스니스트리아와 상반된 사례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사례죠.


그곳은 지금도 전쟁을 해요.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요. 제 판단에 그 지역은 아르메니아의 전통적인 땅이었어요. 아르메니아의 고문서에도 등장하거든요. 그런데 소련이 나라를 병합하면서 편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 떼어준 거죠.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 사람이 90% 이상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그것에 굉장히 불만이 있었고, 폭동도 일으키고, 소련에 항의문서도 전달하고 그랬어요. 그것이 다 묵과되었다가 소련 해체 후에 분쟁지역이 된 거죠. 당시 국제법은 소련 시절의 국경으로 나라를 유지한다고 되었었거든요. 그래서 아제르바이잔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계속 전쟁을 했죠. 하도 피해가 많으니까 1994년에 국제 사회의 중재로 휴전 상태가 되면서 이 지역이 아르메니아가 됐어요. 그런데 지금도 아제르바이잔은 자기들 땅이라고 얘기하면서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이고요.

 

그곳과 더불어 터키를 중심으로 한 중동 정세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하셨어요.

 

터키가 당분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시리아 내전을 틈타 IS 지지자들의 충성 테러가 빈발한 탓도 있지만 반감이 커진 쿠르드인들의 활동도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중략) 터키 동남쪽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까지 합세한다면 터키와 그 밑단(캅카스, 시리아, 이라크)은 여전히 휘발성이 강한 대규모 폭발 지대로 남을 것이다.(487쪽)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대통령이 서민을 위한 정책이기도 한 이슬람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어요. 그래서 유럽과도 멀어졌죠. 또한 지정학적으로도 굉장한 요충지에 있잖아요. 유럽으로 가는 관문에 있기 때문에 난민 문제도 있어요. 테러도 많이 발생하고요. 에르도안이 철권통치를 하면서 소수민족을 탄압했거든요. 쿠르드 사람들을 축출해내면서 갈등이 빚어지고 테러 위험도 많죠. 미국이나 유럽과도 계속 각을 지고 있으니까 위험 요소가 워낙 많아요. 예컨대 터키가 이 상태로 러시아나 이란, 중국과 새로운 연대를 구축하면 국제사회에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여러 면에서 터키 변수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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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뛰고, 직접 만나는 책


‘유럽 변방’이라고 통칭한 이 나라들, 저마다의 사회적 맥락이 물론 있습니다만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어떤 점일까요?


책에 나오는 18개국을 관통할 수 있는 제목이 나와야 해서 제목 정할 때도 출판사와 상의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결국 ‘변방’이라는 단어가 나온 건데요. 이 나라들은 정통 유럽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서유럽 중심의 본류에서는 떨어져 있는 동유럽 국가들이죠. 중앙아시아 국가 역시 유럽은 아니지만 유럽과 어떻게든 협력해보려고 하는 국가들이고요. 러시아, 터키, 이란도 마찬가지예요. 유럽과 대립하는 면도 있지만 여전히 유럽과의 협력을 원해요. 터키도 여전히 유럽 연합에 들어가려고 하고요. 러시아는 자기들을 유럽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람들조차 그렇게 말하거든요. 이란도 미국에 맞서 유럽과 협력을 해보려고 하고요. 그런 면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이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에 영향 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요.


그 책을 읽었을 때 굉장히 신선했어요. 미국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의 나라들을 다니면서 현지인과 자유롭게 인터뷰하는 모습이 말이죠. 로버트 카플란의 저서가 몇 권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는데요. 대부분 그런 식이더라고요. 우리에게도 필요한 시각이라고 생각했어요. 발로 뛰고, 직접 만나는 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한 개인적인 관심도 있었죠. 러시아 전공을 했고, 모스크바에 3년 정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국내에 대중이 읽을 만한 러시아 책들이 별로 없다면 나라도 쉽게 써보자는 생각을 한 거죠. 지금까지 쓴 책들은 거의 그런 생각으로 쓴 책들이에요.

 

이번 취재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가 있나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사이가 안 좋잖아요. 아제르바이잔 먼저 갔다가 아르메니아를 나중에 갔는데요. 아르메니아에서 취재 섭외를 할 때 그 나쁜 감정을 이용했어요.(웃음) 아제르바이잔을 갔더니 당신네들 욕을 너무 하더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라고요. 그랬더니 인터뷰할 사람을 엄청 많이 보내왔어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분쟁지역이어서 들어가기가 어려운데 정부에서 가이드까지 붙여줬고요. 통역까지 구해줬죠. 그걸 통해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적대감, 울분 같은 것들을 더 크게 느끼기도 했어요.

 

이런 작업을 한 번 더 해보라면 선뜻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으신가요?


사실 이런 스타일의 책을 많이 쓰고 싶어요. 직접 다니면서 보고요. 하지만 직장인이라 시간적인 여력이 많지 않아요. 쉽지 않죠. 또 여러 곳을 다니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는데 그것도 힘들고요. 당장 쉽지는 않은데요. 이런 방향으로 다니면서 쓰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어요. 요즘은 극동 러시아에 관한 책을 구상하고 있거든요. 현 정부에서도 ‘북방경제협력위원회’라고 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고 있잖아요. 4강국 중 러시아와의 협력이 제일 뒤처지니까요. 러시아와 관계가 썩 만족스럽지 못한데 이것에 대해 원인 분석을 해보려고 해요. 러시아와 협력을 추진했던 사람들도 만나고,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만나고 하면서요.


우리가 진출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경제 영토는 극동 러시아 지역인 것 같아요. 그곳을 우리 기업이 진출하고, 국가 자본이 진출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지역을 만들면 우리의 국부를 늘릴 수 있는 면이 있거든요. 그래서 요즘 이쪽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어요.

 

그 문제에서는 북한이 큰 요인 중 하나일 것 같아요.


북한이 한국-러시아 협력에 큰 걸림돌이죠. 예전에 러시아 천연가스를 북한 땅을 거쳐서 들여오려는 계획도 있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전부 북한이라는 불확실성 때문에 장애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죠. 그러니까 북한 변수는 우리가 늘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주변 국가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책이 독자에게 어떤 도움이 되길 바라세요?


요즘 해외여행 굉장히 많이 하시죠. 세계 구석구석을 다니시고요. 이 책에 소개한 나라들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게 될 거예요. 여행을 가기 전에 블로그도 많이 참고하고, 여행 책도 참고하게 되겠지만요. 이런 책도 참고하고 가면 좋을 거예요. 단순한 여행 정보뿐 아니라 지금 이 나라가 고민하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알고 가면 현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또 이 책에도 여행 정보가 있거든요. 제가 이동한 경로도 표기해두었고요. 책에서 다룬 나라들이 가기 어려운 나라가 아니에요. 또한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이 보시면 좋을 책이에요.

 

마지막으로 꼭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책에 등장하는 나라들을 우리는 서방 매스컴의 시각으로 보고 있거든요. 독재 정권이고, 민주화가 안 된 곳이다, 라고요.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아요. 나라마다의 사정이 분명히 있고요. 민도가 낮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권에 대한 불만도 생각보다 크지 않아요. 국민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요. 벨라루스 같은 경우도 바깥에서는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라면서 비판하지만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Alexander Lukashenko) 대통령은 소련 공화국 출신 국가들 중 부정부패가 제일 적은 지도자예요. 단지 오래 근무했다는(웃음) 이유로 비판을 하고 있거든요. 이곳은 급격한 민영화도 별로 없었어요. 다른 국가들은 민영화 과정에서 지도자와 주변인물들이 재산을 늘렸지만 벨라루스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니 빈부격차도 적죠. 그런 것은 긍정적으로 봐야할 거예요. 다 다르다, 서구 매스컴의 시각에 좌우될 필요는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유럽 변방으로 가는 길김병호 저 | 한울
유럽 변방국들의 모습이 주변 4대 강국 및 북한에 둘러싸인 한국의 지정학적 숙명과 닮았다고 지적한 저자는 유럽 변방국들이 찾은 생존법에서 한국이 나아갈 길을 찾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심야, 한국 힙합씬의 주목받는 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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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X의 도발은 새로웠고 손대현과의 작업은 허망하고도 당돌했다. 이센스의 <The Anecdote> 앨범 유일한 피쳐링으로 주목받은 김심야는 두 장의 작업으로 한국 힙합 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루키가 됐다. '아직도 내게 인정받을 앨범 그건 한국엔 없으니'라 선언하며 그간의 회의감을 날카롭게 도려낸 <Moonshine>으로 그는 2017년 말을 서늘하게 관조하면서 여타 래퍼들이 쓰지 않은 가사를 썼고, 하지 않던 말을 했다. 허무한 클럽에서의 하룻밤을 스토리로 엮어낸 <KYOMI>로부터 더 직설적인 데카당스의 세계를 끌어낸 재능은 확실히 흔치 않았다. 지난 1월 중순 합정동 비스츠 앤 네이티브스(BANA)에서 만난 김심야의 눈빛은 허허실실 하면서도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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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이 밝았다. 근황이 어떻게 되나.


요즘 운동만 하는 것 같다. 피쳐링 위주로 음악 작업도 틈틈이 한다.

 

올해는 XXX의 새 앨범 <Language>가 예고되어있다.


이미 앨범은 작년에 다 완성했고, 올해 중순 정도 발매할 예정이다. 뮤직비디오 촬영 정도가 남은 정도다. 사실 <Moonshine>보다 일찍 다 만들었다.

 

<KYOMI> 와 비교해서 정규 앨범은 어떤 작품이 될 것인지 들을 수 있을까.


만든지 오래 전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웃음) 내가 막 '싸지르고', 진수형(FRNK)이 정리한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랩 했다는 건 아니다. 특정한 스토리 없이 그때 그때 느끼는 감정들을 일기처럼 쓴 것이다. 그걸 음악으로 엮어내는 일은 진수형이 다 했고.

 

프랭크와의 작업 과정은 어떤가?


내용상으로 터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나도 편곡 부분은 안 건드린다.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결과물에 맞춰가는 식으로 작업한다. 이를테면 메시지가 좀 다른 의도로 나오면 진수형이 그에 따라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진수형 비트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내가 그 느낌에 맞춰서 새로운 가사를 쓰는 식이다. 진행 방향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만 작업에 들어가면 중국에서 아이폰 만드는 사람들처럼 착착착. 이렇게 만든다.

 

XXX의 스타일을 생각하던 이들에겐 <Moonshine>은 다소 의외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Language>가 먼저 나오길 바랐다. 스토리라인 상으로는 <KYOMI>의 나, <Language>의 나, 그리고 <Moonshine>의 순서대로 들어야 맞다. 회사의 아이디어로 <Moonshine>을 먼저 발표했다. 회사의 방침을 신뢰한다.

 

그렇다면 <Moonshine>이 마지막 이야기가 되는 건데, 다소 허무하고 자조적으로 마무리가 된다.


<Language>는 '허무한 것인가?'에 대한 작품이라 보면 된다. <KYOMI>는 '와! 내가 드디어 래퍼가 됐다.'고, <Language>에선 '어? 래퍼가 별거 아닌가?', 그리고 <Moonshine>에서 '별거 아니군...' 하고 결말이 난다.

 

힙합LE와의 인터뷰에서 '짜치지 않는 사랑 노래'를 하고 싶었단 얘기가 있는데.


악행으로 이어지는 관습 같은 거랄까. 음악계를 둘로 나눠서 잘 나가는 매체들에서 다루는 음악과 소위 말하는 '소수가 좋아하지만 무브먼트 있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나눈다고 치면, 그 언더에 있는 사람들이 좀 뻔한 대중적인 사랑 노래를 '짜친다'라 표현했다. 뭐랄까...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까지 가져다가 다 먹여주는 느낌이라 보면 되겠다.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 <시네도키, 뉴욕>같은 느낌이 '짜치지 않는다'와 유사하다.

 

'사랑 같은 건'이 대표적인 곡일까.  '나중에 해, 뭐 그리 급해'라는 건조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안 짜치는 사랑 앨범을 만든다고 했을 때는 진짜 드레이크(Drake)의 <Take Care>같은 앨범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하다 보니 아티스트의 성격, 자라온 환경을 보면 '나는 이런 사람은 아니구나'를 느껴서 다른 사랑을 말해보고 싶었다. 근데 사실... 사랑 앨범은 아니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웃음)

 

'Dance'도 그런 '짜치지 않는 사랑 노래'랄까. 조금 튀는 느낌이 있지 않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노래도 좀 짜치는 것 같다. 사실 'Dance'는 제작년 말에 만든 노래고 나머지 곡들은 작년 말에 만든 노래라 결이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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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랑 얘기는 그만하자 (웃음). 앨범을 듣고 나서 '심야가 XXX때 못한 말이 정말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KYOMI> 발매 후 느낀 점들이다. 사실 음악 하다보면 귀찮을 때도 있었는데, 지어내서 쓰기보다는 평소에 생각하고 느끼는 걸 본능적으로 풀어내는 습관을 들이면서 할 말이 더 많아진 것 같다. <Moonshine>을 만들 때 '이런 내용을 담아야겠다'를 미리 정하진 않았다. 원래 내 성격이 누굴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짜증도 많이 낸다. 만약 내가 엄청난 부잣집에 태어나서 비싼 옷 입고 돈 많이 쓰고 차도 한 세 네 대 갖고 있는 상황에서<Moonshine>을 만들었다면 아마 세련된 팝 앨범이 나왔을 거다. 평소에 하는 생각, 느낀 점,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시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작품이다. 의도는 딱히 없었다.

 

'힙합 앨범' 대신 '대중음악'으로 봐달라는 말도 그런 의도인가.


힙합 음악보다 대중음악이 돈을 더 많이 벌지 않나(웃음). 단순한 뜻이다.

 

레드 벨벳의 'Dumb dumb'과 'Ice cream cake'로 살짝 끼기도 하지 않았나(웃음).


가이드 곡이 먼저 오고 그 바탕으로 가사를 입힐 때도 있고 랩 메이킹을 할 때도 있고... 기획사와의 협업은 회사에서 전담하는 일이라 잘 모른다.

 

다시 앨범으로. 디 샌더스(손대현)가 TDE(Top Dog Entertainment) 소속이라 그런지 비트 스타일이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DAMN.>앨범과 비슷하기도 하다.


디샌더스가 찍은 비트를 들어보면 무조건 켄드릭이 랩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업하면서 신경 쓴 부분이긴 한데, LA 프로듀서에게 멤피스 스타일, 더티 사우스를 찍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딱히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KYOMI>가 본능적인 분노나 공격이라면 <Moonshine>은 냉소적이고 패배, 허무주의다.


<Language>를 잘 만들었다면 아마 그 앨범을 통해 <KYOMI>가 <Moonshine>으로 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겠다. 그래도 대충 얘기를 하자면, <KYOMI>를 내고 많이 힘들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정신상태도 불안정해서 안정을 취하려 이리저리 노력하다 베스트셀러 한 권을 읽었는데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 였다. 되게 뻔할 수도 있는데 그 철학대로 살아보려고 하니까 화를 계속 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해봤다.

 

'Moonshine'과 'Money flows'에서는 결국 잘 팔리는 건 돈, 어차피 아무도 듣지 않을 음반이라는 등 자조적인 메시지가 강하다.


<KYOMI> 내고 나서 그런 걸 많이 느꼈다. 처음으로 낸 앨범, 래퍼의 꿈을 이뤄준 앨범이고 외국에서 연락도 많이 오고 공연도 하고 하니까 진수형과 같이 '우리가 정말 미친 걸 만들었나 봐!'하는 생각도 했다. 근데 외국과 한국의 반응이 너무 달랐다. 처음에는 한국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려면 이게 팔릴지 안 팔리지 정도는 계산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XXX 활동으로 해외 매체의 주목을 받았을 때는 어땠나.


진짜 신기했다. 나는 뭔가 새로운 것을 접하면 되게 신나 하고 되게 멍청해진다. 분석을 못하고 우와우와 하다가 빨리 질리는 편이랄까. <KYOMI>와 <Moonshine>사이의 인터뷰가 그런 멍청해진 시간을 지나서 어느 정도 계산을 했을 때다. 뭐 근데 내가 정말 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면 지금 한국에 있을 이유가 없다. 외국에 있었겠지. 방탄소년단을 보면서 외국에서의 관심과 한국에서의 관심이 그렇게 다른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한국 스케일로 따져서 내가 한국에서 받는 관심과 외국 스케일로 외국에서 받는 관심은 똑같았다. 정말 잘 됐을 거라면 방탄소년단 정도는 됐어야지.

 

'Manual'과 같은 트랙들에서 힙합 씬 전체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도 견지된다.


이제 스물넷밖에 안돼서 제대로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7년 정도 지켜보니까 우리나라는 문화의 씨앗 자체를 심을 수 없는 땅 같다. 좋은 땅에 뭔가를 심으면 뭐든 잘 자라겠지만, 한국같이 아무 양분 없는 땅에는 건물을 올리기가 너무 좋다. 환경을 파괴한다는 느낌도 잘 안 들지 않나. 한국에서 문화 운운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계속 움직이고 바쁘고 쓸모 없으면 버려지는 문화랄까... 떨어지기 싫어서 뭐라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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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듣다 보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래퍼들 상당수를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


가장 큰 건 취향 차이다. 예를 들면 나는 제이지(Jay-Z)를 영웅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영웅으로 여기는 래퍼가 다른 거다. 이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나 내고자 하는 사운드가 내 스타일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거기도 개인이 노력하고 능력이 들어간 결과물이지만...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항상 가난한 사람이 화나 있지 않나. 내 상황을 따지면 가난한 상태인 거다.

 

<쇼 미 더 머니>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나는 거기 나간 래퍼들이 가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가짜'였었다'라고 생각하지. 힙합을 한 게 아니라 유행에 맞춰서 흘러가는 거다. 사실 내 잘못이 크다. 5~6년 전 소위 '진짜'라 불리던 음악을 보고 저게 진짜인가보다 하면서 가사를 다 믿고 하다가 갑자기 변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던 거다.

 

<쇼 미 더 머니> 얘기가 나왔는데, 심야의 개인적인 생각은 어떤가.


일단 힙합이 유행인 게 아니라 <쇼 미 더 머니>가 유행인 건 확실하고, 방영을 안 하니까 힙합의 영향력이 작아지는 것도 확실하다. 그럼 <쇼 미 더 머니>가 나쁜 건가? 나는 그 프로그램을 욕하던 사람들이 거기 나가서 성공을 하고 그 후광을 얻어서 '나는 진짜 음악을 한다’라고 말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뒤가 다른 사람이나 말을 잘 바꾸는 사람을 싫어한다. 특히 힙합은 가사에서 쓴 대로 행동하지 않거나 어기거나 하면 욕을 먹는 문화인데,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비판을 했다면 그걸 지키는 게 소위 말하는 '간지' 아닐까.

 

사실 <쇼 미 더 머니>를 하고 나서 제대로 된 앨범을 낸 래퍼도 없고 그 전의 커리어보다 뛰어난 앨범을 낸 사람도 별로 없다. 그 사람들은 예전에 그냥 그런 가사가 유행을 했기 때문에 가사를 쓰고 랩을 한 거다. 그리고 유명해진 다음엔 한국 힙합 씬 전체보다는 자기 앞가림만 하려고 하니 나나 내 회사 같은 사람들만 문화를 계속 유지해가는 거다. 그래서 그들이 가짜였었더라고 말한 거다.

 

맘에 드는 한국 힙합 앨범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좋아하거나 인정하는 아티스트가 있을 텐데.


자이언티의 <Mirrorball>은 우리나라 최고의 R&B 앨범이다. 빈지노는 뭐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 중 한 명이고. 사실 항상 내 마음 속에선 버벌 진트가 내 영웅이었다. 트로트 앨범을 내도 응원할 거다. 버벌 진트가 좀 더 많이 보여줬으면 좋겠다. 센스 형(이센스)은 굳이 얘기 안해도.

 

<The Anecdote>에 유일한 피쳐링을 했고 '한국에서 김심야가 제일 랩을 잘한다'라는 칭찬도 받았다. 이센스의 후광이 있다는 얘기에 부담은 없나.


센스 형이 저를 대한민국 1등이라고 하는 걸 거품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아무래도... 센스 형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닐까?(웃음) 거품이라는 것도 사실 잘 모르겠고... 만약에 거품이 꼈다고 하면 다른 래퍼들처럼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많아야 하지 않을까. 적당히 알바 하는 대학생 정도만 버는데 그것마저 거품이면 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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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가 말하는 이센스라는 사람은 어떤가.


진짜 생각이 엄청 많고, 염세적이거나 짜증 많이 내는 거 보면 나랑 비슷한 점도 많다.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의리 있는 사람이다.

 
'Bitch'단어를 많이 써서 장인이라는 별명이 있다.


나는 그 단어가 발음이 예뻐서 쓰는데 요즘에는 자제하고 있다. 다른 한국 래퍼들에 비해 발음이 좋다고 생각해서 많이 쓴 것도 있다. 그런데 해외에서 공연을 하는데 좀 부끄러웠다. 동양에서 온 어떤 애가 '개년 개년'하는데 얼마나 웃겼겠나.

 

단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직도 가사 한영혼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 있다.


내 가사에서 영어를 다 뺀다면 한국 느낌이 안 나는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싶다. 영어를 써야 내가 원하는 음악의 느낌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딜레마는 느끼고 있다. 가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한국에서 음악을 파는 입장이면 당연히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하는데... 어렵다.

 

릴 우지 버트, 포스트 말론 등 멈블 랩이 유행하면서 한국에서도 멈블이 유행할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변화돼서 들어오는 것 같긴 한데 멈블 랩을 제대로 하려면 한영혼용을 꼭 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한국에서 멈블이 유행한다면 그걸 한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진짜 인정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섞어서 하는 거라면 그걸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긴 하다.

 

정확한 딜리버리가 강점인 심야는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난 죽어도 안 듣는다. 멈블 특유의 리듬감을 좋은 랩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요즘 걸 들을 필요가...(웃음)

 

XXX, 디 샌더스와의 프로젝트 이후 심야가 추구하는 음악 방향은 무엇일까.


일단 생각이 읽히는 음악을 할 것 같다. 일단은 음악 하는 것 자체에 흥미가 좀 떨어져서 그걸 다시 불러일으키는 게 필요할 듯싶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이즘의 공식 질문이다. 김심야가 꼽는 인생의 3대 앨범?


현재로는 클립스(Clipse)의 <Hell Hath No Fury>, 제이지(Jay-Z)의 <Magna Carta... Holy Grail>, 빅 데이터(Big Data)의 <2.0>.

 

 

인터뷰 : 이택용, 김도헌
사진 : 김도헌
정리 : 김도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나은 “마음을 다 써야 새로운 마음을 넣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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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드라마 최초로 1억 뷰 이상을 돌파한 화제의 작품 <전지적 짝사랑 시점>이 책으로 찾아왔다. 드라마를 직접 쓰고 연출한 이나은 작가의 글과 함께 일러스트레이터 명민호의 그림이 담겼다. 책 『전지적 짝사랑 시점』 은 드라마의 내용을 되풀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화면에 담긴 순간 너머의 감정과 시간들을 그려냈다. 짝사랑이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뒤척이며 잠 못 들던 수많은 밤들과 그 밤을 까맣게 채웠던 고민들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래서일까. 이나은 작가는 『전지적 짝사랑 시점』 이 드라마보다 더 일기 같고 한층 내밀해진 이야기라고 말했다.

 

“너에게 들키고 싶은 내 마음”은 책의 부제다. 이보다 더 짝사랑을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싶다. 섣불리 꺼내 보일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상대가 알아채 주기를 바란다. 고백은 늘 입속에서 맴돌고 세상 무엇보다 궁금한 게 상대의 마음이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하고 ‘내 마음이 너에게 들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꾼다. 웹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 안에서는 이 모두가 현실이 된다. 짝사랑에 빠진 남과여의 진짜 속마음이 생생하게 들려온다. 시청자는 전지적 시점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조금도 낯설지 않은 감정과 순간들을 발견했다. 어느 하나 내 이야기 아닌 것이 없었다. ‘전짝시 폐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했고 격하게 공감한다는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른바 ‘전짝시 신드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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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다 더 노골적으로 쓴 것 같아요


작가님은 ‘짝사랑의 달인’이 아니실까 생각했어요(웃음).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아시니까요.

 

짝사랑 너무 많이 했어요(웃음). 저는 짝사랑의 범위를 조금 넓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연애하는 중에도 짝사랑을 하는 경우가 있고, 헤어지고 난 후에도 짝사랑을 하는 것 같아요. 친구 사이에 또는 가족 안에서도 짝사랑이 있을 수 있고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저는 짝사랑을 많이 해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여고를 다녔기 때문에 학창시절에는 주변에 아예 남자가 없었고요(웃음). 대학에 간 후에는 1순위가 사랑이 됐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사랑했던 때가 아닌가 싶어요(웃음).

 

서로 마음의 크기가 다르면 짝사랑일 수 있다는 거죠?


그렇죠. 항상 두 사람의 마음이 똑같을 수 없잖아요. 그리고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고요. 말을 통해서 들어도 그 마음이 온전하게 들리지는 않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 마음이 식을 때도 있고, 상대적으로 더 많아질 때도 있는 거죠. 저는 그런 기울기 자체를 짝사랑으로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고민하게 된 거죠. 저 사람은 무슨 마음일까, 어떤 생각을 할까. 내 마음은 어떤 걸까. 그렇게 계속 고민했던 것들이 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의 내레이션에 담긴 것 같아요.

 

그런 과정 속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짝사랑을 바라본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군요.


맞아요.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속 시원하게 듣고 싶었던 거예요.

 

연애하면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할 때가 많으셨어요?


저도 표현을 너무 못하거든요. 원래 실수를 많이 하고 실패를 많이 한 사람들이 말이 많잖아요(웃음). 제가 연애를 잘했으면 그런 고민도 많지 않았을 텐데, 실수도 많이 했고 결국은 실패를 많이 했기 때문에 계속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아쉬움이 드라마에서 많이 드러난 것 같고요.

 

드라마의 내용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드라마에서는 캐릭터를 통해서 보편적인 상황에서의 감정들을 많이 이야기했는데요. 책은 조금 더 사적이고 내밀화되어 있어요. 드라마에도 공감 가는 대사들이 몇몇 있었는데, 책에는 더 세밀함 감정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처음에는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저의 개인적인 감정들도 너무 많이 담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일기장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책이 나오고 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많이들 공감하더라고요. 양혜지라는 배우하고 되게 친한데, 그 친구도 책 읽고 나서 자기 이야기라고 하더라고요. 다행이다 싶었죠(웃음). 내 이야기만은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드라마 속 상황 너머에 있는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사실 드라마에서는 조금 더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너무 나쁜 마음은 잘 쓰지 않았거든요. 많이 순화를 시켰던 거죠. 그런데 책에는 조금 더 적나라한 마음들이 담겨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입장도 있지만 사랑을 받는 사람의 입장도 있거든요. 「너의 의미」라는 꼭지를 보면 “날 좋아해주는 사람”을 단지 “자존감 충전소”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마음을 드라마에서는 잘 담지 못했는데, 책에서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쓴 것 같아요.

 

시즌 3의 ‘변우석’이 떠오르네요. 사랑 받기만을 원하는 인물이잖아요.


그렇죠(웃음).

 

드라마 <전지적 짝사랑 시점>을 보면, 한 회가 끝날 때마다 남녀 배우가 내레이션을 하잖아요. 그때 읊은 문장들이 많이 회자가 됐어요. 짧은 두 개의 문장으로 짝사랑의 감정이 압축되어 있잖아요. 쓸 때 힘들지 않으셨어요?


저는 처음부터 드라마 작가로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원래 짧은 글을 쓰는 걸 좋아했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어요. 말씀하신 부분도 아예 드라마 속에 카피를 배치한 거예요. 드라마라기보다는 조금 더 광고처럼 만들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긴 글보다는 짧은 글을 쓰는 게 더 편하고 쉬워요.

 

이전에는 마케팅 업무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일하시다가 <전지적 짝사랑 시점>의 제작사 대표님과 인연을 맺으셨다고요.


엔미디어라는 방송 외주 제작사의 콘텐츠실에서 에디터로 일했었어요. 그때 실장님으로 계셨던 분이 지금의 대표님이시고요. 저는 방송과 관련된 카드뉴스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을 준비하고 계셨던 실장님께서 제안을 하셨어요. 그래서 와이낫미디어의 창립멤버가 된 건데요. 그때 제가 스물셋의 어린 에디터였는데, 초반에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처음 기획했던 게 <전지적 짝사랑 시점>이었는데 당시에는 선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겠냐’고 하셨어요(웃음). 그래서 보류가 됐던 기획안이었는데요. 다른 단편들을 한 편씩 만들다 보니까 반응이 좋아서 <전지적 짝사랑 시점>을 재검토 해주셨어요. 저는 PD나 작가를 꿈꾼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갑자기 작가라는 직업도 갖게 되고 PD라는 직업도 갖게 된 거예요.

 

예상도 못했던 길 위에 서 있는 건데요. ‘어쩌다 여기에 와있는 거지? 앞으로도 이 길을 계속 갈까?’라는 생각도 하세요?


직업이 꿈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죽기 전까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작가와 PD라는 직업을 갖게 된 건데, 또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흥미로운 일이 생기거나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일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그래서 불안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지금 가지고 있는 웹드라마 PD, 작가라는 직업도 그렇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웹드라마 초기였기 때문에,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한테 작품을 설명하는 게 어려웠어요. 단편영화도 아니고, 웹드라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이가 짧고, 광고라고하기에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까 어떤 작품인지 설명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런데 1~2년 사이에 하나의 포맷으로 자리를 잡고 트렌드가 되면서 저도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된 거죠. 그런 것처럼 직업이라는 게 바뀔 수도 있고 새로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시즌 3에는 ‘양혜지’가 없었다?


웹드라마 최초로 1억 뷰 이상을 기록했어요. 기분이 어떠셨어요?


가장 많은 뷰 수를 기록한 게 ‘술의 신’ 편이었는데요. 페이스북에서만 천만 뷰가 넘었어요. <전지적 짝사랑 시점>을 확실히 알린 편이었죠. 그때 친구랑 같이 술을 마시러 갔다가 중간 중간 휴대폰으로 반응을 봤는데, 속도가 이상할 만큼 빠른 거예요. 트래픽이랑 좋아요 수가 너무 빠르게 올라가는 거죠. ‘이상하다, 왜 이러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실감이 안 났고요.

 

‘술의 신’ 편은 웹드라마 중에서 가장 많이 조회됐다고 하는데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면서요?


각색이 되기는 했지만 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는 맞아요. 저희 집 오피스텔 1층에 편의점이 있었는데, 제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갈 때면 편의점에 들렀었어요. 맥주 두 캔은 꼭 사고요(웃음). 드라마에서도 양혜지 배우가 취한 채로 편의점에 와서 맥주를 사가잖아요. 그게 제 모습이었어요(웃음). 그런데 편의점 알바생이 조금 잘생겼었거든요. 취해도 그건 생각이 나더라고요(웃음). 한 번은 제가 요구르트 같은 걸 계산하는데 1 1 제품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 더 가지고 와서 알바생한테 주면서 드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유제품은 안 먹어서요’ 하면서 엄청 시크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웃음). 그게 조기성 캐릭터의 탄생이었어요. 드라마에서 조기성이 굉장히 시크한 사람으로 나오잖아요. 그렇게 캐릭터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됐었죠.

 

편의점 알바생과는 썸이 없었나요(웃음).


어느 순간부터 그 분이 안 보이시더라고요(웃음). 조금도 썸 같은 게 없었고요(웃음). 그 분이 ‘술의 신’을 보셨다면 본인 이야기인 걸 아실까요? 전혀 모르실 걸요.

 

시즌 4도 준비 중이세요?


아직 진행되고 있는 건 없고요. 지금은 <전지적 짝사랑 시점> 장편 드라마 대본을 작업 중이에요. 제목이나 감성은 <전지적 짝사랑 시점>을 그대로 이어갈 것 같아요. 짝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같지만, 호흡이 길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깊어진 이야기들을 쓰고 있어요. 웹드라마에서는 한 편 한 편이 짧은 에피소드처럼 흘러갔는데, 그걸 조금 더 몰입도 있게 풀어나갈 것 같아요. 멀리서 보면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예요. <전지적 짝사랑 시점> 특유의 마무리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엔딩 멘트가 나오면서 한 편을 마무리했었는데요. 아마 장편도 그런 방식의 구조를 띌 것 같아요. 그렇지만 기존 드라마와는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응답하라’ 시리즈가 다른 드라마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던 것처럼, 새로운 포맷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드라마 종영 후에 시즌 4를 볼 수 있을까요?


시즌 2, 3까지는 너무 신나서 이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제가 지치더라고요(웃음). 시즌 3.5까지 쓰다 보니까, 이야기를 이어가는 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부담감이 생기더라고요. 기존 캐릭터를 살리면서 진행하다 보니까 새로운 스토리를 짜기 힘들어진 부분도 있었고요. 이번에 장편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쓰는 것도, 저를 잠깐 환기하는 듯한 느낌도 있어요. 똑같은 이야기가 계속 반복될까 봐 걱정했었거든요.

 

‘웹드라마 사상 최초, 최다’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니까요. 부담이 되실 것 같기도 해요. 


맞아요. 너무 새롭게 다가가면 변했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고, 그렇다고 기존대로 가자니 바뀐 게 없다거나 질린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 중간을 찾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최근에는 다양한 웹드라마들도 많이 나오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까 잠깐은 쉬어가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즌 3.5까지는 쉬지 않고 달렸거든요. 시간이 더 흐른 뒤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와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요.

 

시즌 중간에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다음 회의 대본을 쓰시잖아요. 생각하셨던 스토리가 바뀐 적도 있었나요?


시즌 2 엔딩에서 기성이가 다시 수인이랑 잘 됐잖아요. 그래서 시청자들의 불만이 엄청 많았어요(웃음). 헤지가 상처를 받아서요. 그래서 시즌 3가 혜지를 위한 시즌으로 재탄생된 부분도 있어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죠. 사실 시즌 3를 처음 구상했을 때는 혜지라는 인물이 없었거든요. 혜지가 아닌 새로운 여자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었어요. 조기성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시즌 3에도 혜지 캐릭터를 가져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쭉 연결된 거죠. 원래 시즌 2와 시즌 3가 연결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시즌 2와 혜지 캐릭터가 워낙 큰 사랑을 받기도 했고,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쉽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연결을 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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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드라마는 더 촘촘하게 파고드는 것 같아요


처음 <전지적 짝사랑 시점>을 만드실 때, 이렇게 시즌이 계속 이어질 줄 아셨어요?


아뇨, 시즌 1도 21편까지 찍을 수 있을지 몰랐어요. 처음에는 하루에 4편씩 찍어서 올렸었고, 3번째 편이 올라갈 때쯤 반응이 괜찮으면 또 나가서 찍어오는 식이었어요. 특히 시즌 1은 옴니버스식으로 한 편씩 잘려져 있잖아요. 그때는 생각나면 대본 쓰고 나가서 찍어오고 그랬기 때문에 시즌 1이 몇 부작이 될지도 몰랐어요. 21편에서 마무리를 한 건, 이제 이야기를 한 번 이어나가 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있어서였어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한 편씩 보여주고 싶었던 건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져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주 시청자층이 10대 후반~20대 중반이에요. 이들이 <전지적 짝사랑 시점>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기존 드라마와 다른 점이 있었던 걸까요?


아무래도 TV 드라마는 시청자층을 조금 넓게 잡아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조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가져오게 되는 것 같고요. 거기에 한국 드라마가 좋아하는 막장 코드, 재벌 코드, 판타지 코드도 가져오다 보니까 시청자가 자신의 이야기하고는 멀어지는 느낌을 받지 않나 싶어요. 반면에 웹드라마는 TV와 같은 스케일로 제작을 할 수 없다 보니 조금 더 촘촘하게 파고든다고 할까요. 내가 일상에서 실제로 쓰는 언어가 나오고 전남친이나 썸남, 남사친 같은 사소한 소재들도 나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다루다 보니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이건 진짜 내 이야기랑 비슷한데?’ 싶었던 거죠. 초반에 정말 신기했던 게, 메시지가 진짜 많이 왔었어요. 물론 댓글도 많이 달렸지만 메시지가 엄청 왔어요. 그리고 남자 팬들이 많아서 신기했어요. 특히 군인들이 장문으로 편지를 보내서 ‘이건 정말 제 이야기예요’ 그러는 거예요. TV 드라마를 보면서도 그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메시지를 보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웹드라마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옆에서 들려주는 듯한 이야기를 담다 보니까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기존의 드라마나 영화를 떠올려 보면, 여성 인물은 감성적인 면이 많이 부각됐던 것 같은데요. 상대적으로 남성 인물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몇 가지 행동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구구절절 토로하지는 않는 거죠. <전지적 짝사랑 시점>에서는 남녀의 감정이 똑같이 독백으로 처리되잖아요. 남성분들이 공감했을 법하네요. 


시청자의 70%가 남자일 때도 있었어요. 특히 시즌 2 때 많이 그랬어요. 여사친도 등장하고 전여친도 등장해서 그랬는지, 많은 남자들이 공감하더라고요. 아직까지 군대에서 편지를 보내오는 팬도 있어요. 많은 남자 팬들이 진정성 있게 공감해줘서 너무 신기했어요.

 

일상적인 상황과 장소 때문에 공감도가 높아진 측면도 있을 것 같아요. 일례로, 조기성은 끊임없이 알바를 하잖아요. 재벌만 등장하는 드라마들과는 다르죠.


알바왕 조기성 캐릭터는 저한테서 나온 거예요. 제가 알바를 많이 했었어요. 기성이가 했던 모든 알바는 다 제가 했던 일들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그렇거든요. 알바하고 학교 다니고, 그러면서 연애도 하고. 그런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조기성 같은 캐릭터가 등장하면 훨씬 더 현실적일 거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TV 드라마에서는 많이 보여지지 않는 이야기잖아요. 여자 주인공들은 알바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남자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 알바를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그런 점에서는 남자 시청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요. 뭔가 남자들에게는 경제력이 기본인 것처럼 비춰지는 거죠. 저는 어마어마한 재벌 친구를 만나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왜 그렇게 재벌들만 계속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대학생들의 자취방도 너무 호화스럽잖아요. 그러면 진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죠.

 

거의 모든 편이 원테이크로 촬영됐잖아요. 제가 듣기로는, 작가님께서 연출을 배우신 적이 없어서 편집이 필요 없는 방법을 찾다가 원테이크로 촬영하게 되셨다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시즌 1을 시작했을 때도 현장에 나가서 연출을 하는 경험은 없었거든요. 영상을 배워본 적도 없고 편집을 할 줄도 몰라요. 그런데 처음에 워낙 작게 기획을 했던 작품이다 보니까, 선배들이 네가 직접 해보라고 해서 하게 된 거예요. 최대한 편집을 안 하는 방법을 찾다가 원테이크 기법을 보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한 편이 2분 내외의 분량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컷을 나눠봤자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또 다큐멘터리를 보면 원테이크로 인물을 따라가면서 촬영하잖아요. 그게 전지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확실히 몰입도도 더 생기는 것 같고요. 그래서 원테이크로 찍기 시작했어요.

 

시즌 1 이후에도 계속 원테이크로 촬영할 계획이셨어요?


처음에는 전부 원테이크로 갈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한두 편 만들다 보니까 사람들이 좋아해주더라고요. 이것도 나름대로 포맷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즌 1을 전부 원테이크로 끌고 갔죠. 그러다 보니까 마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서 시즌 2, 3도 계속 그렇게 간 거고요. 나중에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안 좋은 점들도 많이 있었어요. 한 공간 안에서만 움직여야 되니까 연출에 한계가 생기는 거죠. 스토리도 그렇고요. <전지적 짝사랑 시점>은 계속 대화를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걸 통해서 한계가 보완되는 측면도 있어요. 처음에는 제가 편집을 못하니까 꼼수로 시작한 방법이었는데, 의외로 시청자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계속 원테이크로 촬영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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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을 끝내야 할 때


박보검 씨와 같이 웹드라마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셨었어요. 결국 소원 성취하셨죠(웃음)?


예전에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질문을 받았어요.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가 있느냐고요. 딱히 떠오르는 분이 없어서 제 친구가 좋아하는 박보검 씨를 이야기했는데요. 제 친구가 박보검 씨랑 제가 같이 촬영을 하면 밥차를 보내주겠다고 했었거든요(웃음). 그 이야기가 생각나서 이야기했던 건데, 인터뷰에서는 밥차 이야기가 빠졌더라고요(웃음). 이후에 저는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를 잊고 있었는데, 박보검 씨랑 촬영을 마치고 나서 회사 동료가 기사 링크를 보내줘서 알았어요. ‘아, 그랬었구나’ 하고요(웃음).

 

그래서, 친구 분은 밥차를 보내주셨나요?


안 보냈어요(웃음).

 

촬영 현장에는요? 오셨나요?


오지도 못했죠(웃음).

 

제가 다 안타깝네요(웃음).


그때는 친구가 취준생이었기 때문에 밥차를 보내주기에는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었어요. 촬영도 극비로 진행이 돼서 외부인 출입이 힘들었고요. 사진도 거의 찍지 못했어요.

 

다음 작품을 함께하고 싶은 배우는 누구인가요?


너무 너무 같이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한 분 계세요. 강하늘 배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웃음). 내년 5월에 제대하시는데 복귀작으로 채가고 싶을 정도예요(웃음). 사실 이번 장편 드라마의 주연 캐릭터 이름을 강하늘로 지었어요. 나름의 메시지라고 할까요(웃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한데요. 좋아하는 배우 강하늘 씨랑 같이 촬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을 쓰시면서 가장 좋으셨던 부분은 어디였나요?


책이 세 파트로 나뉘는데요. 혼자 짝사랑을 시작하고,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순서대로 되어 있어요. 저는 마지막 파트를 좋아하는데요. 조금 더 개인적인 시점에서 많이 이야기를 해서 그렇기도 하고요. 지금 제가 세 번째 파트의 끝쯤에 위치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부분이 가장 진실 돼 보이더라고요. 첫 번째 두 번째 파트는 설렘설렘하고 몽글몽글한 느낌들을 많이 살렸는데, 사실 지금의 저는 그 마음들과 많이 떨어져 있어서요(웃음). 반면에 세 번째 파트는 술술 써졌던 것 같아요. 쓰면서도 제일 재밌었고요. 가장 가깝게 위치한 마음이라 그런가 봐요. 마지막 파트에는 미련이 많이 남아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찌질한 감정들이 많은 건데, 제가 굉장히 찌질한 사람이라 그런가 봐요(웃음).

 

지금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제가 짝사랑할 때를 생각해 보면,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무리 주변에서 이야기를 해도 결국에는 제 마음 가는 대로 했던 것 같은데요. 사실 짝사랑 이야기를 쓰면서 굉장히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있었어요. 혹시나 제가 한 발 떨어져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3자로서 코치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조심스러웠어요. 그래서 글을 쓰면서 저를 외로운 상태로 많이 만들었어요. 제가 행복하면 뭔가 독자들을 기만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저도 외로워지면서,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많이 썼고요. 그냥 이런 사랑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어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사랑이 절대 틀리지 않았다고, 그런 사랑도 있을 수 있고, 너랑 비슷한 사람이 여기 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 그런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양한 사랑들을 많이 넣었어요. 이 중에 하나쯤은 자기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게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렇게 공감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썼던 것 같아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죠. 상대보다 마음이 클수록 힘들다는 이야기일 텐데요. 그럴 때도 사랑을 계속해야 할까요?


짝사랑을 하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을 때는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을 때까지는 계속 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해보고 다쳐봐야 후회가 안 남고 미련이 안 남는 것 같아요. 다 표현하지 못하고 쏟아내지 못해서 미련이 남잖아요. 그러면 저처럼 말이 많은 사람이 되는 거죠(웃음). 남은 마음을 꾸역꾸역 담아서 책으로까지 써내는 거잖아요(웃음). 그렇지 않고 마음을 다 쏟았을 때는 후회도 미련도 안 남더라고요. 어느 정도 마음의 양은 정해져 있다고 봐요. 마음을 다 써야 새로운 마음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파괴하는 정도만 아니라면요. 그 정도가 돼서 끝내야 할 때는 끝내야죠.

 

 


 

 

전지적 짝사랑 시점이나은 저/명민호 그림 | 나무의철학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 안 할 수도 없는 이 시대 청춘남녀들에게 이 책이 가장 큰 위안과 치유, 휴식이 되어줄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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