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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희 “지금 이 상태로 병과 함께 살아가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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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류머티즘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20대는 이 지독한 병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다. 하지만 ‘아픈 건 아픈 거고 청춘은 청춘’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삶은 계속 됐다. 순간순간 즐거움도 있었다. 고통스러운 통증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꼭 나야아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병과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했다. 독서지도사로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았고, 지금은 삶과 하나가 되는 공부를 하며 지낸다.


『아파서 살았다』 를 쓴 오창희는 스물한 살부터 지금까지, 4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따라온 류머티즘이라는 병을 마침내 긍정한다. 공부에 대해,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깊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창희. ‘아프면서’가 아니라 ‘아파서’ 살았다는 말은 그러니까 꼭 사실이다. 그는 “꼭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만이 아니라 되풀이해서 나를 찾아오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말 걸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은 ‘저마다의 류머티즘’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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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떻게 살까, 와 연결되는 문제


제목의 의미를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아프면서’도 아니고, ‘아파도’도 아니고, ‘아파서’ 살았다, 거든요.

 

처음에는 당연히 아파서 힘들었죠. 스물한 살 때부터 병이 왔는데요. 십 년 정도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서른한 살 때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했거든요. 그 전까지는 아예 서지를 못했었으니까요. 잠깐 전기 침대를 세워서 일 년 좀 못 되게 걸어 다닌 적이 있는데요. 다시 염증이 재발하고, 못 걷게 된 기간이 꽤 오래 돼요. 힘든 20대를 보냈죠. 그때는 당연히 아파서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떤 약을 써도 안 나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꼭 나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순간적으로요. 이렇게 지내다가는 평생 그냥 병 낫는 노력만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는 그냥 같이 살자, 같이 살면서 아픈 채로 뭔가를 해야지 이러다가는 평생 이 상태로 살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일을 열심히 했어요.

 

독서지도사 일을 시작하신 거였죠?


네, 사실 고민을 한 게 칠 년 쯤 되고요.(웃음) 일을 시작한 것은 서른아홉 살이었는데요. 그때부터 십 년 정도는 열심히 일을 했어요. 아프면서 살아도, 되더라고요. 그러다 다리가 부러져서 이 년 정도 다시 못 걷게 됐고요. 2008년 즈음이었는데 경제 위기였고, 제가 많이 불안했어요. 얼마쯤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나, 하면서요. 그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돈을 덜 쓰고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돈에 초점이 맞춰져있던 건데요. 돈에 있어 제일 부담이 되는 게 건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건강을 스스로 관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요, 그때서야 의문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책도 읽고, 공부도 했는데 왜 이런 데 아무 도움이 안 되지? 하고요. 결국 공부와 삶이라는 게 따로 놀아서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연히 ‘수유너머’를 알게 됐고, 제도권 바깥에서 소장학자들이 공부를 한다는 게 신선해서요. 그런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됐어요.

 

‘감이당’에 오게 된 이유가 공부와 삶의 합일을 고민하면서였던 거군요?


공부가 뭘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감이당에 오게 된 이유는 집에서 제일 가깝고, 엘리베이터가 있어서였는데요.(웃음) 관심을 갖고 찾아봤더니 『동의보감』이나 역학 공부도 하더라고요. 이런 것을 공부하면 내 몸을 알고,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공부를 하면서 생각한 것은 병을 관리한다는 것이 삶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병을 어떻게 관리할까, 라는 게 결국 어떻게 살까, 와 연결되는 문제더라고요. 그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살면서 또 다른 장벽을 만날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러면서 이런 게 공부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됐어요.

 

이런 삶의 궤적이 ‘아파서’ 가능했다는 생각이신 건가요?


저는 노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되게 좋아해서요. 아마 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류머티즘이 끝까지 저를 안 놓아주니까 거기서 길을 찾다가 공부라는 것을 하게 된 거죠. 인생 공부라고 할까요.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많이 느꼈는데요. 어머니는 공부는 안 하셨지만 삶에 중심이 딱 있으셨거든요. 그런 부분이 아픈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됐는데요. 나이가 많이 드시고, 몸에 힘이 빠지니까 어머니가 자꾸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평소에 뭔가를 쌓아놓지 않으면, 체득시켜놓지 않으면 되게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됐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공부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과정을 겪으면서는 공부란 누구나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것이 아픈 것이었기 때문에 ‘아파서 살았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삶 안으로 ‘공부’와 ‘아픈 상태’를 끌어들여 왔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게 들려요.


병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후에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자신감도 생겼었어요. 도중에 다리 골절상을 입었지만 다시 걸을 수 있게 됐고요. 스스로에게 만족했다고 할까요. 이 정도면 살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긴 했었는데요. 감이당 처음 와서 ‘마음 세미나’라는 걸 했거든요. 네 번 에세이를 쓰는데 마지막이 ‘일상의 힘’이라는 제목이었어요. 저의 글에 ‘이 정도면 됐어’라는 생각이 드러났었나 봐요. 고미숙 선생님이 ‘일상에 구원이 있는 건 맞는데 일상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일상에 구원이 되는 순간이 있다’는 코멘트를 주셨어요.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계속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거죠. 일상이 다 구원이 되는 건 아니고, 순간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 다시 길을 가는 거구나, 하고요. 이번에 책을 쓰면서도 그랬는데요. 지나온 일상이 재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공부는 마무리 되는 게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 되는 거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됐죠. 

 

 

나의 삶을 중심에 놓고


병이 나은 후를 골몰하는 동안 “시나브로 내 삶이 증발해 버렸다.”(10쪽)라고 적으셨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해냈어요. 그 자체로도 “저마다의 류머티즘을 안고 살아가는”(14쪽)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면이 있는데요. 하나는 경험이었어요. 아픈 게 안 없어지니까요. 정말 낭떠러지에 다다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아무리 해도 안 되고, 병에는 변화가 없고요. 이대로밖에는 안 되는 건가, 하면서 막다른 골목에 섰다고 느꼈을 때 질문이 어디선가 확 날아왔어요. 다른 하나가 공부이고요. 경험으로 삶의 마디를 넘는 방법도 있고, 공부를 하면서 거기에 비춰진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나를 계속해서 막다른 골목에 일부러 몰아넣을 수는 없잖아요.(웃음) 그래서 공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 같고요. 그 공부라는 것은 나의 삶을 중심에 놓고 하는 게 진짜 공부라는 생각을 해요.

 

책을 쓰면서도 삶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있었나요?


있더라고요. 책을 쓰면서 지금과 그때가 만나잖아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제 안에 들어와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데요. 글이라는 것을 쓰면서 쓸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이것이 그것이었구나, 그것이 내게 힘이 됐었구나, 깨달았어요.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한 것도 글을 쓰면서였어요. 엄마가 힘이 되긴 했었는데 어떤 점이 힘이 됐는지 잘 몰랐거든요. 쓰면서 알게 된 게 많아요.

 

어머니에 대해 “두고두고 새롭게 읽을 더 없이 소중한 텍스트”(236쪽)라고 하셨죠.


타고난 기질도 대범하시고요. 삶에서 배운 경험을 많이 갖고 계신 분이셨어요. 중심이 있으셨고요. 매일을 규칙적으로 사셨죠. 저희는 방학이라고 늦게 일어나본 적도 없고요. 아침 식사 시간이 늦어본 적도 없어요. 부모님은 매일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일정한 시간에 주무셨어요. 생활 자체가 담백했죠. 모든 물건에는 제 자리가 있어서 제가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데에도 편안했어요. 지나고 보니까 해가 뜨고 달이 뜨는 리듬에 따라 생활하셨던 부모님의 삶이 제게 큰 힘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늘 규칙적으로 일상을 살아낸 것, 그것이 아마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하나의 큰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을 쓰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된 부분이죠.

 

규칙적으로 일상을 보내는 것은 달리 말하면 성실함이기도 할 테니까요. 몸에 집중하기 위해 고통을 참으면서 ‘활원운동’을 하는 장면에서도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었어요.


마무리를 안 하면 찝찝해요.(웃음) 활원운동을 할 때의 마음은 기억이 나요. 여름이었는데요. 도장 창문을 다 열어놓고 운동하는데 제가 너무 아파서 펑펑 울었거든요. 그랬더니 지도하시는 분이 창문을 다 닫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울면서도 움직일 수는 없었어요. 움직이는 순간 지금까지 참았던 게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에요. 이것 이상 내게 적합한 운동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던 거죠. 이걸 포기하면 다른 무엇을 찾아야 하나, 이게 너무 암담했으니까요. 나중에 관련해서 활원운동 책을 읽었는데 몸이 스스로 움직여서 몸을 치유한다는 게 매력적이었거든요. 그런데 때로는 이런 생각도 해요. 제 첫 주치의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인데요. “이 세상에 꼭 해야 하는 것은 없다는 걸 명심하고 살아라.”라는 말이에요. 때로는 포기할 줄 아는 게 용기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요. 아마 제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겠죠. 다른 상황의 사람에게는 다르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아버지와의 ‘이상한 담판’을 벌이던 일화도 재미있었어요. 저자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솔직함이라는 면을 중요한 삶의 태도로 여기고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아부지가 큰오빠가 엄마한테 잘못하실 때가 있는데 사과하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
나는 아버지가 대답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다.
“나도 신이 아닌데 잘못을 하제.”(중략)
그날의 이상한 담판의 경험은 뜻하지 않게 그 이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상대에게 어떤 불만이 지속될 때, 그 사람이 다시는 안 볼 사람이 아니며, 그 불만이 도저히 혼자서는 삭여지지 않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 솔직하게 내 생각을 털어놓는다는 원칙을 갖게 된 것이다.(68-69쪽)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사주를 공부해보니까 제게 ‘금(金)’기운이 많아요. 정리하고, 쳐내는 기운인데요. 어릴 때는 집안 분위기가 엄격해서 그런 기질을 눌러뒀던 것 같아요. 그때는 속에 있는 말을 다 하고 그러진 못했는데요. 놀 때는 했던 것 같네요. 어릴 때 고무줄놀이를 하는데 남학생들이 친구의 고무줄을 끊으면 제가 가서 따지고 그랬어요.(웃음) 아버지와의 이상한 담판이 도움이 됐어요. 그 이후에도 부당하다고 생각이 들면 상사에게도 수정해달라고 말하고 그랬거든요.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마음에 갖고 있으면 감정이 쌓여서 사람과의 관계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말을 좀 하는 편이에요. 그러면 상대도 편하게 말을 하더라고요. 아버지도 그랬어요. 아마 가족 중에서 제가 아버지와 가장 편하게 말을 했을 거예요. 제가 더 편하게 아버지를 지적했죠.(웃음) 아버지를 통해서 인간관계에도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그 밖에도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부모님뿐 아니라 형제, 조카 등 많은 가족들이 등장하는데요.


진짜 가족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워낙 부모님이 중심을 잡고 살아가시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어릴 때는 모든 가족이 다 그렇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처음 느낀 건 부모님을 떠나 큰오빠가 가자는 서울의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죠. 1983년이었는데요. 그때만 해도 간병인 제도가 없어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결혼을 한 달 앞둔 셋째 올케 언니가 평일 낮 간병을 담당했고, 밤이 되면 오빠들이 번갈아서 왔어요. 주말에는 큰 올케 언니와 둘째 올케 언니가 왔고요. 저는 그때 팔다리에 추를 매달아놨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거든요. 2인실이었는데 옆 침대에 계신 분들이 이런 오빠, 이런 올케들은 없다는 거예요.(웃음) 신문에 날 일이라는 말씀까지 하셔서 이게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된 거죠.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웃음)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웃음) 심지어 오빠들 집마다 다니면서 살았거든요. 큰 오빠 집에 제일 많이 살았고요. 둘째 오빠나 셋째 오빠 집에 일 년 정도 살았는데요. 그러면서 조카들과도 친해지고요. 둘째 오빠 집에서 살면서는 오빠보다 올케 언니와 더 친했어요. 여자라서 그런지 여자 입장이 이해가 되고요. 오빠한테 싫은 소리도 하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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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


말씀을 나눠보니 책에서 느낀 것보다 밝으셔서, 물론 매순간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때때로의 일상을 편안하게, 잘 지내오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옛날 사진을 보니까 되게 우울한 얼굴이더라고요. 그늘이 있어요.(웃음) 어렸을 때 엄마가 고랑에 가서 같이 죽자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는 가끔 울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제 눈치 보시던 기억도 나거든요. 하지만 이후에는 순간순간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지냈던 것 같아요. 활동적인 걸 좋아해서 놀이도 하고, 좋아하는 조용필 노래를 들으면서 지내기도 하고요. 주로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요. TV는 한쪽으로 시선을 고정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많이 아프거든요. 온 관절이 다 아프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만 있기는 되게 힘들어요. 그래서 음악을 많이 들었죠. 한 채널에 고정해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요부터 팝송, 동요, 가곡까지 모든 노래를 들었어요. 따라 부르기도 하고요. 게다가 늘 누가 찾아왔었어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잘 갔고요. 책을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또 덜 심심했죠.

 

책에 엄청 몰입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아프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답답하니까 길을 찾게 되더라고요. 다른 건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요. 책에서 뭔가를 찾아보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원에 갔을 때 저의 독서를 정리해본 적이 있는데요. 시기마다 읽은 책 종류가 다르더라고요. 어떨 때는 수기를 읽었어요. 어떻게 병을 극복했는지 보는 거죠. 거기서 내가 나을 방법을 만나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하지만 나와 딱 맞는 조건이란 없잖아요. 거기에서 그 사람들의 태도 같은 걸 읽어서 도움이 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안 된 거죠. 위인전을 한참 읽을 때는 이런 삶도 의미 있는 삶이구나, 깨달았고요. 명작을 읽을 때도 도움이 많이 됐죠. 그 모든 게 다 소일거리가 됐던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책 읽으세요?


요즘은 감이당에서 책을 읽죠. 금요일은 제가 ‘금요대중지성’을 하는데요. 주역과 불교 관련된 책을 읽어요. 니체 세미나를 하면서 니체를 읽고 있고요. 니체는 지금도 뭔지 모르지만요. 니체가 많이 아팠다는 것에 공감이 많이 가는데요. 니체를 읽으면 아프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의 느낌이 좀 있어요. 머리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는 느낌인데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요. 니체는 몸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그렇게 접근해서 세상을 보는 이야기도 많아서 그런 면이 재미있어요. 언젠가는 나도 니체처럼 아픈 몸을 통해 무언가를 볼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죠.(웃음)

 

아프면서 살아간다는 깨달음이 더 일찍 왔더라면 어땠을까요?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그러던 1989년 봄,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택시가 동작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 건강해지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나? 과연 다시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꼭 그래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나? 지금 이 상태로 병과 함께 살아가면 안 되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순간, 무언가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이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길을 찾아보자.(97쪽)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다 때가 있다는 것이에요. ‘시절인연’이라고 하는데요.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져야 깨달음 하나가 오는 것이지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때 책을 더 읽고, 공부를 했다고 알게 됐을까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요. 병을 고치려고 십 년 동안 애를 쓰다가 인공 관절 수술을 하면서 ‘계속 이렇게 수술을 하면서 살아야 해?’라는 생각에 허탈해졌는데요. 그 막막함 앞에서 뭔가가 딱 왔던 거죠. 이걸 삶으로 확장시켜보면 하나의 고민이 있을 때 그걸 끝까지 밀어붙여야지만 거기서 다른 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우리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잖아요. 힘드니까요. 샛길로 빠질 수도 있고, 거기서 다른 걸 만날 수도 있긴 한데요. 어떤 점에서는 하나의 고민이나 질문이 있을 때 그걸 끝까지 밀고 갔을 때 전환이 오지 않나 생각은 들어요. 그것을 저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웃음)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는 류머티즘을 만난 거고요.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행운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한 거고요. 그나마 아파서 삶이 뭐지, 죽음이 뭐지, 이런 걸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요.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제가 정말 생각이 깊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웃음) 아프지 않았다면 생각 깊지 않게, 즐겁게 살다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이게 아닌데’(웃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40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아프긴 했지만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고 내 나름의 삶을 일궈간다고 했던 그 시절에 잠깐만 틈이 나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너무 자주 올라왔거든요. 사실 그게 되게 힘들었어요. 그게 뭔지 끝까지 잡고 가보고 싶은데, 질문을 이어가고 싶은데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놓고, 놓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집에 있을 때 그걸 해보게 된 거예요. 그 끝에 내 몸을 내가 몰랐다는 깨달음이 왔던 거고요. 그런 걸 보면 내 안에서 질문이 나올 때는 그걸 잡고 가보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특별히 어떤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세요?


책을 쓰면서 이것들이 아프지 않았더라도 겪을 고민이었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류머티즘을 안은 채 겪었다는 게 달랐을 뿐이지 나만 특별히 겪은 거라고 생각할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마다의 류머티즘’이라는 것도 그런 의미인데요. 이 책은 반드시 류머티즘일 필요도 없고요. 더 나아가서 꼭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만이 아니라 되풀이해서 나를 찾아오는 문제를 고민하는 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만날 것이며 그것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고민하는 태도에 초점이 있는 책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거든요. 고민을 떨칠 수는 없지만 고민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할 때는 다르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결국은 제가 공부를 삶으로 가져온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또한 그건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동시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질문과도 연결된 문제라고 봐요. 죽음에 임박해서 ‘이게 아닌데’라고 하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아파서 살았다오창희 저 | 북드라망
아파서 살았노라고. 공부와 책읽기를 손에서 놓지 않은 저자의 타고난 명랑함과 지성, 그리고 가늠할 길 없는 어머님의 사랑이 엮어 낸 특별한 류머티즘 동행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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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특집] 박성우 “내 아이의 마음을 읽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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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감정을 모른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2017년 올해의 어린이책’으로 선정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아홉 살 마음 사전』의 후속작 『아홉 살 함께 사전』 이 출간됐다. 마음을 표현하는 80개의 단어를 담았던 『아홉 살 마음 사전』 은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번에 출간된 『아홉 살 함께 사전』에는 ‘관계와 소통’에 필요한 단어 80개가 실렸다. 학교 안팎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더 큰 사회와 만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의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홉 살 함께 사전』 은 각 표현의 의미를 짚어주는 동시에, 언제 어떻게 그 말이 사용되는지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보여준다. “이불을 자꾸 차 내는 동생이 잘 자도록 이불을 덮어주기”, “새로 나온 입체 스티커를 사 주지 않으면 구구단을 외우지 않겠다고 버티기”, “친구에게 비밀 이야기하기” 등 아홉 살 무렵의 아이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과 감정을 담았다. 어린이 독자들은 책 속 이야기에 공감하고 몰입하면서, 표현의 사용법을 쉽고 확실하게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어냈을까. 어쩌면 이렇게 고운 표현으로 받아 적었을까. 『아홉 살 마음 사전』 『아홉 살 함께 사전』 을 읽으며 떠올랐던 물음표는 박성우 시인의 이름 앞에서 느낌표로 바뀌었다. 시집 『가뜬한 잠』 ,  『자두나무 정류장』, 『웃는 연습』등으로 한결같이 따스한 시선을 보여줬던 시인. 동시집 『불량 꽃게』와 청소년 시집 『난 빨강』 , 『사과가 필요해』를 통해 아이들에게 마음을 전했던 시인. 딸과 함께 쓴 그림 동시집  『우리 집 한 바퀴』, 『동물 학교 한 바퀴』를 선물처럼 안겨줬던 시인. 박성우라면 어린이를 위한 마음과 소통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준비할 법했다.

 

“2014년 초에 연락을 받았어요. 아이들의 마음에 관한 사전을 같이 만들고 싶다고요. 마침 저희 딸아이가 여덟 살이었어요. 그때 아이가 했던 질문을 떠올려 보면, 일곱 살 즈음까지는 주로 눈에 보이는 걸 물어봤는데, 그 단계가 지나면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을 물어보더라고요. 이를테면 ‘아빠, 과학이 뭐야?’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사전에서 찾아서 뜻을 읽어주면 어려우니까 이해를 못하죠. 그럴 때는 ‘과학은 전구가 어떻게 켜지는지, 공룡이 왜 사라졌는지, 별은 왜 뜨는지 알아보는 거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금방 알아들어요. 『아홉 살 마음 사전』 , 『아홉 살 함께 사전』 도 그런 과정이에요. 그래서 처음 『아홉 살 마음 사전』 제안을 받았을 때, 시기가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됐다 싶었죠. 처음부터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책,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의미 있는 책을 만들자고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아홉 살 마음 사전』 을 준비하다가 연계선상에서『아홉 살 함께 사전』 도 쓰게 됐고요.”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예사로 오간다. 하물며 아이들은 오죽할까. 아직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아이들은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홉 살 마음 사전』 『아홉 살 함께 사전』 으로 이어진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게 진짜 중요하잖아요. 예전에는 표현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죠. 요즘 아이들은 ‘싫어’, ‘짜증나’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말하는데, 그게 굉장히 안 좋은 거거든요. 자기 감정을 모른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어른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감정이라는 게 사물의 이름처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항상 복합적으로 와요. ‘시원섭섭하다’는 말처럼요. 특히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런 감정을 분명 느끼지만 무슨 감정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로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건데, 그런 점에서 마음을 표현하는 말을 알려줄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아홉 살 마음 사전』 , 『아홉 살 함께 사전』 은 두 명의 시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의 유병록 시인이 편집을 맡은 것. 앞서 『우리 집 한 바퀴』 『동물 학교 한 바퀴』 를 같이 만들었던 두 사람은 눈빛만 봐도 통할 정도로 마음과 뜻이 잘 맞았다. 예민한 감각으로 단어를 가려 고르는 것까지도, 똑 닮았다.

 

“저는 ‘함께’라는 말도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책을 쓸 때는 ‘관계 사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목으로 쓰기에는 뭔가 부족하게 느껴졌어요. 공부를 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유병록 시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단어들이 나왔어요. ‘더불어’, ‘친구’, 같이 비를 피한다는 의미에서 ‘우산’까지, 별별 이름을 다 생각했어요(웃음). 그러다가 유병록 시인이 ‘함께’라는 말을 했는데, 듣는 순간 전율이 오더라고요. 저는 ‘함께’라는 말을 쓰면서도 책의 이름표로 달아줄 생각을 못했거든요.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혼자 하면 뭔가 우울해지고, 가라앉고, 낮아지고, 쓸쓸하고, 고요하고, 이런 기분이 드는데 ‘함께’라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들뜨고, 뭔가 기쁜 일이 있을 것 같죠. 뭘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고요.”

 


언어와 생각의 폭이 달라질 거예요


박성우 시인의 작품에서는 늘 온기가 느껴졌다.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 안에,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전해줄 수 있는 체온이 담겨 있었다. 『아홉 살 마음 사전』 『아홉 살 함께 사전』역시 예외가 아니다. 누구도 상처 받지 않도록, 그 어떤 편견도 스미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책 속 깊숙이 ‘배려’와 ‘공존’이 자리를 잡았다.

 

『아홉 살 함께 사전』 을 쓸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관계와 관련된 내용이니까 쉽게 쓸 수 없었어요. 예를 들면 용서라는 단어에 대해서 쓸 때 ‘어느 선까지 용서라고 봐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다투는 상황을 쓸 때도, 사실은 아이들이 다툴 때 과격하게 밀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지만, 그런 표현은 쓰지 않았어요. 책에 실린 표현 중에 가장 과격한 게 ‘동생을 밀어서 넘어뜨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부정적인 의미의 표현들, 이를테면 ‘끼어들다’나 ‘잡아떼다’ 같은 말을 설명할 때는 인물들의 이름을 다 뺐어요. 혹시라도 같은 이름의 아이가 책을 읽고 상처 받으면 안 되니까요. 또 모든 아이들이 엄마아빠랑 사는 건 아니잖아요. 아빠하고 아이로 이루어진 가정도 있고, 엄마랑 또는 할머니랑 사는 아이들도 있어요. 책에 입학식 날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때도 할머니가 참석하시는 걸로 했어요. 나름대로는 보이지 않게 배려하려고 한 거예요.”

 

어쩌면 지극히 사소한 부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박성우 시인은 책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도 다듬고 고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가능한 세심하게 배려하고 싶었고, 고민이 끝없이 이어졌다. 한없이 진중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원고 위에 ‘발라하게’라고 적어두었을 정도다.

 

“예전에는 가정 안에 가부장적인 모습이 있었잖아요. 지금은 젠더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이 이어지고 있는데, 사실 그런 운동이 있다는 자체가 어떻게 보면 저희가 잘못 살아왔다는 이야기죠. 이 책에서는 외할머니, 이모와 함께하는 모습도 보여주려고 했어요. 외할머니 생신 때 식구들이 다 같이 외할머니 댁에 가서 식사하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배우다’에서도 ‘나는 피아노를 잘 못 치지만 엄마랑 같이 치고 있어’라고 쓸 수도 있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요. 그래서 종이접기로 바꿨어요. 어떻게 보면 너무 소심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저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아홉 살 함께 사전』 의 또 다른 미덕은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런 말하면 못 써’, ‘그런 마음은 미운 마음이야’라고 다그치기보다 ‘그런 말은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는지’ 올바른 예를 보여준다.

 

“‘거절하다’ 같은 말에 대해서 우리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사실 그건 언어를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의 개념이에요. 그런 걸 보면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편협하게 언어를 쓰는지 알게 되죠. 거절하는 건 중요한 거잖아요. 거절할 건 거절할 줄 알아야 되죠. 예시로 ‘모르는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기’를 썼는데, 저희 딸아이한테도 교육시키는 부분이에요. 또 다른 예가 ‘물놀이는 어른이랑 같이 가야 한다’는 건데요. 친구가 우리끼리 물놀이 가자고 하니까 거절하는 거예요. 이런 걸 보면 거절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죠. ‘울려’라는 부분도 마찬가지예요. 울린다고 하면 무조건 ‘나쁜 거야, 화낼 일이야’라고 하는데 따뜻한 눈물, 행복한 눈물, 아름다운 눈물, 기쁨의 눈물도 있잖아요. 책에 나온 것처럼, 전학 가서도 잘 지내라는 친구의 편지를 받았을 때도 눈물을 흘릴 수 있죠. 눈물의 의미와 울림이 얼마나 큰지 알아가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언어의 폭, 상상의 폭, 생각의 폭, 행동의 폭 자체가 달라질 거라고 봐요.”

 

박성우 시인은 두 권의 사전 속에 예쁜 말, 착한 말만 넣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는 그대로 실었다고 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책이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일 거라고, 시인은 덧붙였다.

 

“책에 ‘요구해’도 나오잖아요. 나한테 필요한 게 어떤 건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예전에 저희가 자랄 때는 무조건 참으라고 했죠. 그건 정말 안 좋은 교육이에요. 혼자서 ‘내가 뭔가 잘못된 건가?’ 생각하게 되잖아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도 필요하죠. ‘숨기다’라는 것도 좋지 않은 개념으로 생각되고는 하는데, 책에 그런 예가 나와요. 엄마 생일을 모르는 척하면서 선물도 사고 깜짝 파티도 준비하는 거예요. 요즘은 엄마들도 자기 일을 가지고 있잖아요. 바쁘게 일하는 엄마가 직장에 다녀와서 그런 장면을 본다면, 그 어떤 에너지보다 클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 작가 김효은은 『아홉 살 마음 사전』 에 이어 『아홉 살 함께 사전』 에서도 함께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시인이 쓴 글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황을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담백한 그림체와 고운 색감이, 마치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김효은 작가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를 테면 ‘삐쳐’에서 세 명의 아이들이 다투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아이들이 ‘화해하다’에도 똑같이 나오거든요. 아이들이 같이 어울리다가 삐치기도 하고 또 화해를 하잖아요. 그런 과정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김효은 작가는 글을 해석하는 능력이 정말 빼어난 작가예요. 시를 써도 잘 쓰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고, 왜 쓰는지를 알고, 하나하나 접근하면서 그림을 그린 것 같아요. 이런 작가와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얕보다’의 그림에 나왔던 아이들도 ‘인정하다’에 다시 나오는데요. 앞에서는 한 살 어린 옆집 동생이 나보다 줄넘기를 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나오고, 뒤에 가면 그 동생이 나보다 줄넘기를 잘하는 걸 보고 인정하는 내용으로 이어져요. 이런 걸 보면서 얕봤다가도 인정할 줄 아는 걸 배우는 거죠.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인정했을 때 함께 갈 수 있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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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에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


『아홉 살 마음 사전』 , 『아홉 살 함께 사전』 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박성우 시인의 딸 규연 양이다. 집필부터 교정에 이르기까지, 부녀는 끊임없이 소통하며 책을 완성했다. 공저자이자 감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홉 살 마음 사전』 은 거의 딸아이하고 같이 썼어요. 책의 1/3 정도는 아이가 말한 내용이에요. ‘불쾌해’라는 단어의 예시에도 실려 있는데요. 불쾌하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이야기해줬더니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두꺼운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짝꿍이 ‘너 그림만 봤지?’ 그랬다는 거예요. 그때 비슷한 마음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마지막 교정도 같이 봤어요. ‘아빠, 이거는 조금 이상한데?’라고 말하면 뺐어요. 아이가 정확히 모르는 단어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주는데, 그래도 모른다고 하면 그건 분명히 잘못된 거니까요. ‘예쁘다’라는 부분을 보면 예문에 고구마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딸아이가 고구마를 캤었는데 그게 예뻤대요. 예쁘다고 하면 우리는 곰 인형 같은 것만 생각하는데, 사실 고구마도 예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의 말을 듣고 추가했어요. 조금 더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아이랑 같이 책을 쓰면서 저도 많은 공부가 됐고, 무엇보다 같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사실 박성우 시인은 문단 내의 소문난 ‘딸바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함께 산책을 하고,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집에 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꼭 산책을 같이 해요. 뒷산의 낮은 곳으로만 걷는데, 이제는 날다람쥐처럼 산을 잘 타더라고요(웃음). 사실은 엄마한테 쉬는 시간을 주려고 산에 가기 시작했어요. 도서관도 마찬가지고요.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엄마의 쉬는 시간을 위해서 갔어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지금은 엄마한테 하지 못한 이야기도 아빠한테 다 해요. 비밀이 없어요.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만의 비법이라면, 방학 때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딸의 방에 놀러가요. 그리고 같이 그림을 그려요. 어떤 걸 그리든 간섭하지는 않아요.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리게 해요. 강요는 하기 싫거든요. 스스로 하는 게 중요하죠. 그림을 그리고 난 후에는 서로의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요. 다른 일을 하더라도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의외로 딸이 좋아하더라고요. 책읽기도 아이한테 강요하지 않고요. 웬만하면 똑같이 책을 읽어요. 지금은 아이가 조금 컸으니까 따로 읽는데요. 책을 읽고 5분이든 10분이든 생각을 나누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봐요.”

 

아마도 진짜 ‘비법’은 따로 있는 듯했다. 박성우 시인은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는 태도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내한테 항상 강조하는 세 가지가 있어요. 가훈 대신 ‘우리 집 마음’이라고 부르는데요. 첫 번째가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가족끼리는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는 거죠. 분명 아이들은 실수를 많이 해요. 그런데 어른들도 실수하잖아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같지만 엄청 많이 해요. 사실은 작은 실수를 반복하는 동안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결국 큰 실수도 막아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실수 한 번 했다고 해서 화내고 그러면 절대 안 되죠. 아이들이 그냥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일 때도 분명히 이유가 있어요. 몸이 아프다거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엄마아빠한테 서운한 마음이 있다거나,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투정부리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을 꼭 표현하게 해주고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시인이 정한 ‘우리 집 마음’의 두 번째는 배려하는 마음, 세 번째는 사랑하는 마음이다. 특히 첫 번째로 손꼽히는 ‘존중하는 마음’은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성우 시인은 절대적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줘야 한다고, 중간에 말을 끊거나 혼내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한 번은 딸아이와 문구점에 갔다 오는 길에 둘이 싸웠어요. 딸아이가 ‘아빠, 나 삐쳤어. 먼저 갈 거야’ 하고 막 뛰어가더라고요. 저도 속상하고 화가 나서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가다 말고 멈춰요. 그러더니 ‘아빠, 빨리 와. 우리 가족이니까 같이 가야지’ 하는 거죠.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우연히 아이가 쓴 일기를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는데요. 자기는 서서 구구단을 외우는데 아빠는 편하게 앉아서 검사를 했대요. 너무 불공평하다는 거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아빠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고요. 아이들 말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귀를 기울여서 끝까지 들어줘야 돼요. 절대적으로 많이 들어주고 존중해주고, 그렇게 하면서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게 아주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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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한테 풍선 불기를 가르치면 되겠어요?


부녀의 공동 집필은 그림 동시집 『우리 집 한 바퀴』 , 『동물 학교 한 바퀴』 에서도 이루어진 바 있다. 특히 『동물 학교 한 바퀴』 는 두 사람의 놀이가 고스란히 책속에 담긴 경우라고.

 

“아이들이 성장기마다 특징이 있는데요.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역할극을 제일 좋아해요. 선생님 놀이, 병원 놀이 같은 걸 엄청 좋아해서 같이 해줘야 돼요. 『동물 학교 한 바퀴』 는 선생님 놀이를 하다가 쓴 책이에요. 딸아이가 자기는 항상 선생님을 하고 저는 학생을 시켰어요. 시험도 봐야 되고 엄청 힘들었죠(웃음). 그런 거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어서 제가 질문을 했어요. ‘토끼는 키를 잴 때 귀까지 재나요, 머리까지 재나요?’, ‘캥거루는 목욕하고 몸무게를 잴 때 아기 캥거루를 빼고 재나요, 안고 재나요?’ 그러면 아이가 재밌어 해요. 자기도 정답은 모르겠는데 재밌다는 거죠. 그리고 저한테 시간표도 짜라고 했어요(웃음). 그래서 코알라의 시간표를 썼죠. ‘1교시 잠자기, 2교시 잠자기, 3교시 잠자기, 4교시 잠자기, 급식 먹기, 5교시 잠자기...’ 이런 식으로요. 코알라는 잠자는 게 공부거든요. 그렇게 딸아이랑 이야기하면서 놀다가, 아이가 재밌어하는 내용은 메모를 해놨어요. 학교 간 사이에 정리를 하고요.”

 

동시 「고슴도치」는 당시의 경험으로 쓰게 된 작품이다. “선생님, 저는 가시 때문에 / 풍선 불기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 그렇지만 엉덩이로 풍선 터트리기는 니가 최고잖아 / 그러면 됐어.”라는 내용의 시다. 딸과 함께 학교 놀이를 하는 동안 시인의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슴도치한테 풍선 불기를 가르치면 아무리 열 시간, 만 시간을 시켜도 잘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한국 교육은 일괄적으로 풍선 불기만 시켜요. 아이가 풍선을 불고 못 불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너는 풍선 불기만 해야 돼’라는 건데, 이를테면 그게 공부라는 거죠. 그런데 반대로, 고슴도치한테 풍선 터트리기를 시키면 1등이잖아요.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죠. 우리 아이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분명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뭘 할 때 즐거워하는지를 잘 보면 장점도 발견할 수 있고요. 이왕이면 아이가 남들이 볼 때 좋아 보이는 삶보다 스스로 행복해하는 삶을 사는 게 좋잖아요. 그게 훨씬 아름다운 거고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름다운 거잖아요. 엄마아빠가 유심히 살펴보면 아이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성우 시인과 권지현 시인은 문단에서 보기 드문 부부 시인이다. 당연히 딸 규연 양 역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박성우 시인은 “항상 엄마아빠가 글 쓰는 모습을 봐서” 영향 받은 바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일찌감치 꼬마 작가의 남다름을 눈여겨 본 안도현 시인은 “엄마아빠보다 더 뛰어난 글을 쓸 것 같다”며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기보다, 엄마아빠가 글 쓰는 걸 항상 봐서 그런지, 어디를 다녀오면 기록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이들이 진짜 재밌게 놀고 온 뒤에는 기록하고 싶어 해요.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하죠. 처음에는 방법을 모를 수 있는데 ‘오늘 놀았던 일을 한 번 그려볼까? 한 번 써볼까?’하고 몇 번 이야기하면 ‘그럴까?’ 하면서 그리고 써요. 그때 한 줄을 쓰든 두 줄을 쓰든 ‘이것밖에 못 쓰냐’고 하면 안 돼요. 자유롭게 쓰게 하고, 한 가지 정도만 주의하면 돼요. 단순히 ‘재밌었다, 신났다’가 아니라 뭐가 신났는지, 뭐가 재밌었는지, 조금 구체적으로 쓰게 하는 거예요.”

 

지난달에는 박규연 양이 직접 쓰고 그린 책 『아빠, 오늘은 뭐하고 놀까?』 가 출간됐다. 열 살 무렵부터 아빠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다.

 

“<학교도서관저널>에서 독후감 꼭지에 글을 써달라고 연락이 왔었어요. 규연이가 쓴 글들이 많으니까, 저 대신 딸아이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는데,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딸이 써서 보냈는데 너무 좋다는 거예요. 연재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2년 동안 연재를 했어요. 그 글들이 이번에 책으로 나왔는데요. 원래는 출간을 안 하려고 했었어요. 처음에 연재할 때부터 책으로 묶지 않겠다고 했고요. 그런데 <학교도서관저널> 측에서 꼭 내야 된다고 하고, 이 글들은 창작품이라기보다는 생활글이니까 괜찮겠다고 생각이 돼서 출간하게 됐어요. 규연이 꿈이 작가인데, 저도 딸이 작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동시나 동화를 써보라고 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해요. 많이 경험하고 생각하다 보면 안 쓰고는 못 배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쓰라고 말해요. 그리고 작가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뭔가를 꿈꾼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가 꿈꿀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고, 엄마아빠는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면서 함께하는 거죠.”

 

박성우 시인은 『아홉 살 마음 사전』 『아홉 살 함께 사전』 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홉 살 마음 사전』 이나 『아홉 살 함께 사전』 은 독서로서의 힘보다는 대화로서의 힘이 더 큰 책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그리고 가장 큰 특징이라면, 지식을 습득하는 책이 아니라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라는 거예요. 자신이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책이에요. 지식을 습득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함께 생각을 나눌 줄 아는 공부가 정말 필요하다고 봐요. 이 책은 공부하는 자세로 읽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편하게 펼쳐서 오늘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찾아보고, 모호하게 알던 단어들의 뜻을 찾아가고, 비슷한 경험을 떠올려 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아이가 혼자 읽는 건 권하고 싶지 않아요. 꼭 가족이 같이 읽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함께하는 삶의 가치, 함께 살아가는 기쁨도 알게 되면 좋겠고요. 재밌고 즐겁게 읽으면서, 많이 교감하고 공감했으면 좋겠습니다.”


 

 

아홉 살 함께 사전박성우 글/김효은 그림 | 창비
저학년 어린이들이 학교라는 사회를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는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표현을 그림과 함께 사전 형태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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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꿈이 없었다면 며느리 사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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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잘’ 읽어야 할 책을 만난다. 책이 말하는 내용을 곡해하지 않고, 핵심을 잘 이해해야 하는 책. 『며느리 사표』가 그렇다. 책이 나온 과정도 궁금했지만, 출간 이후가 더 궁금했다. 제목만 읽고는 소설로 착각했던 에세이 『며느리 사표』 . 지난 설 명절에 이 책을 읽고는 슬쩍 내 주변의 어머니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삶도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며느리 사표』시작은 이렇다. 대가족 장손의 아내로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며 23년을 살아 온 여자가 2012년 추석 이틀 전, 시부모님께 ‘며느리 사표’라고 적힌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더 이상 며느리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만 있을 뿐이었다. 버럭 화를 낼 거라 예상했지만 시부모님은 사표를 받아들였다. “아무 때든 네가 편안히 오고 싶을 때 오라”는 시부모님의 말을 듣고 여자는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에 시댁을 가지 않았다. 친정 가족들에게 ‘며느리 사표’를 말하자 원성이 들렸다. 그래도 여자는 남은 인생을 온전한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이후 여자는 남편에게 이혼 선언을 했고, 대학을 졸업한 아들과 딸에게는 독립을 요구했다.

 

열렬히 사랑해 결혼했는데 여자는 왜 결혼 생활이 불행했을까. 여자는 스스로 나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혼해서도 여전히 아이처럼 의존적이고 무지해서 부당함이 뭔지 몰랐고,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부딪쳐 해결해나가야 하는지 몰랐다.”(53쪽)고 밝힌다. 여자는 꿈 공부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혼을 거부했고, 대신 여자의 세 가지 제안을 받아들여 2년간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이들은 짧은 졸혼 기간을 거쳐 지금,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때를 보내고 있다. 『며느리 사표』단순히 한 여자의 독립 권유서가 아니다. 나 자신, 그리고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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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투고한 책이라고 들었다. 책이 나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2012년 여름, 제러미 테일러 선생의 꿈 워크숍을 수강했다. 내 꿈을 들은 제러미는 내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고 했다. 강한 저항과 강한 울림을 동시에 느꼈고 결국 지금의 책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 매일매일 일기를 썼고 2017년 봄쯤 『며느리 사표』초고를 완성했다. 어떤 출판사에 투고해야 할지 찾아보는 중에 딸아이가 ‘사이행성’을 추천해줬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를 출간한 출판사였는데, 책을 읽어본 후 다른 책 리스트를 쭉 보니까 신뢰가 갔다. 물론 다른 출판사에도 투고했는데 사이행성이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지난 설 명절에 <한겨레21>에 기사가 크게 나왔다. 한동안 크게 이슈가 됐다.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간 날, 연락을 엄청 많이 받았다. 인터뷰, 특강 요청도 많이 왔고. 책에 대한 반응이 아직도 조금 믿기지 않다. 2월 중순 이후 정신이 좀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쓸 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50대 주부의 이야기,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기대하지 못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고 제목도 『며느리 사표』나?


그렇다. 사실 책을 낼 때는 제목을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적절한 제목을 찾지 못했다. 조금 위험한 단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며느리 사표’를 쓰게 된 과정, 계기, 이후를 쓴 책이니까 써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주’는 필명인가?


원래는 가명으로 쓰려고 했다. 사적인 이야기들이 너무 많으니까. ‘꿈로바’라는 이름으로 블로그 글을 써왔기 때문에 ‘로바’로 쓸까 하다가, 성을 제외한 이름으로 정했다. 50년을 살다 보니, 그동안 나는 아버지의 모습 반, 어머니의 모습 반으로 살아온 느낌이 들었다. 본래의 나로 살고 싶은 마음에 이름을 썼다.

 

가족사가 많이 들어갔다. 남편, 두 아이들에게 초고를 미리 보여줬는지.


물론이다.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면 안 되니까. 너무 사적인 이야기는 뺐다. 책이 나온 이후에 아들이 “내 분량이 제일 적다”고 하니까, 딸아이가 “오빠, 이 책은 언급이 덜 될수록 좋은 거야”라고 했다. 남편은 “책에 나온 이야기들이 사실이니까 괜찮다”고 했다. ‘나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니까 그냥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대가족 장손의 아내로 수많은 친척, 손님들을 맞이하며 ‘며느리’로 23년을 살았다. 8년을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분가를 한 후에도 매주 주말마다 시댁을 가야 했다. 남편에게 외부 약속이 생기는 날에도 아이들과 함께 시댁을 갔다.


우리 가족 모두 시부모님에 대한 의존이 뿌리 깊게 있었다. 분가했다가 다시 들어간 집은 시부모님의 아랫층이었다. 시댁에 함께 살 때 남편에게 집안일은 다른 행성의 일이었다. 신혼 초 남편이 집안일을 해보도록 여러 번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나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결혼 생활을 했다.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몰랐기에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던 거다.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나의 결혼 생활은 ‘좋은 시부모님 밑에서 풍족하게 살고 있는 복에 겨운 며느리’였지만, 나는 답답하고 힘들었다. 어떠한 시간, 장소에도 나는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며느리 사표』를 쓰기 전, 이혼을 선언했을 때, 남편은 변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결심을 지켰다. 2년간 부부 상담도 받았고.


1년 약속했던 부부 상담을 남편은 2년을 다녔다. 처음엔 어쩔 수 없다는 듯 응했던 상담이지만, 남편은 차츰 부부 문제만이 아니라 직장의 어려움도 풀어내고 다른 관점으로 상담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 1년 정도 상담을 했을 무렵, 평행선을 달리던 우리의 대화에 문이 열렸다. 우리는 상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주 1회 부부의 날을 가졌고 각자를 존중했다. 상담이 필요한 건,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요구한 제안(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생활을 존중하고 며느리라는 의무감 없이 살겠다 등)이 일찍부터 이뤄졌다면 ‘며느리 사표’를 쓸 일도 없지 않았겠나.


그렇지만 이 역시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나도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남편은 내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거다. 그 전에 했던 이야기들은 귀담아듣지 않다가 그제야 현실로 받아들였다. 남편이 내게 함부로 대한 게 아니었다. 남편은 부부는 한 몸 같은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라고 여겼다. 『며느리 사표』를 읽으면서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아내를 한 개인, 한 사람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스스로가 판단하지 않고, 내 입장에 대해 한 번씩 생각해준다. 모든 걸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각자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있다.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

 

꿈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꿈 공부를 하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일찍부터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1987년도에 내 발로 성당에 찾아갔고, 부모교육 강의를 하면서 심리 공부도 했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치유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부분이 있어야 했는데, 꿈 공부를 해오면서 내 인생을 더 정확히 보게 됐다. 꼭 전문가만 꿈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최소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관계 속에서 힘들어 하는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꿈을 해석하면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긴다. 꿈의 언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내가 꿈을 몰랐다면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면, 며느리 사표까지 가지 못했을 거다.

 

무의식 속의 나를 아는 것, 꿈이 해답을 줄 때가 있다.


꿈의 목적은 자신의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마음, 영성적 건강함으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다. 융이 말하는 자기실현, 즉 온전한 본래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또한 꿈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그림자, 뒷모습과 자신의 내적인 힘을 볼 수 있게 한다. 즉 진정한 나를 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책을 낸 후 꿈을 꿨는지.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내가 어떤 바닷가마을에 은둔하며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문을 열고 해안가로 갔더니 엄청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으니까 친정엄마가 내가 있는 쪽을 알려주더라. 이 책을 통해 내 삶이 드러나게 된 사건을 꿈을 통해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는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없다.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 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만큼 꿈이 많이 기억난다.

 

가족꿈심리작업소를 운영하고 있다. 어떤 곳인가?


부모와 자녀,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꿈 심리 강의와 거울 작업을 한다. 꿈 작업은 치유 차원을 넘어 일인분의 온전한 자신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한다. 가족과 인간관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실제적인 작업을 안내한다.

 

6년 전, 작업실을 얻어 개인 공간을 만들었다. 전업 작가가 아닌 이상 어려운 선택이지 않나.


어느 날 신문을 보다 한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다. 작가는 집에 자신의 연구실도 있고 집에 혼자 쓰는 방도 있는데, 고시원을 얻어 글을 쓴다는 이야기였다. 한 달에 16만 원만 내면 고시원을 빌릴 수 있고 그 곳에서 글만 쓰고 나온다는 거다. 당시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내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집 가까이 새로 지은 원룸을 1년만 미친 적 지내보자고 덜컥 계약했다. 3~4평짜리 원룸이었는데 10개월간 매일 집에서 이 공간으로 출퇴근했다. 낮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책도 뒤적이다가 꿈으로 내면 작업도 하고 글도 쓰기에 이르렀다. 나를 방해하는 것이 없으니 집중이 잘 됐다. 집의 에너지와 나만의 공간의 에너지가 다름을 확연히 느끼게 됐다. 이곳은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시댁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필요한 베이스캠프가 됐다.

 

부모교육 강사는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나?


결혼하고 3년 만에 아이를 낳는데, 사공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부터 고모님, 어머님까지. 한 아이를 두고 수많은 교육 지침이 흘러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김인자 '부모 효율성 훈련(Parent Effectiveness Traning)’ 강의를 들었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둔 후, 30대부터 직업을 가지려고 여러 시도를 했다. 찾아보니 강사 과정이 있었다. 39살에 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부모교육 강의를 시작했는데, 딸아이의 사춘기를 경험하면서 중단했다. 내 삶이 먼저 안정된 후에 교육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심리 공부를 하면서 내 안에 죄책감이 많다는 걸 느꼈다. 내 자식이 나처럼 상처받지 않고 자라길 바랐기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이든 욕구든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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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밀착을 친밀함으로 착각하고 산다

 

두 자녀에게는 어떤 엄마인가?


솔직한 사람? 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말해주곤 한다.

 

미래에 아들이 결혼한다면 어떤 시어머니가 되고 싶은가? 며느리를 어떻게 대하고 싶은가?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식구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문득 아들이 “엄마, 나 결혼하면 아내한테 ‘며느리 사표’ 쓰고 결혼 생활 시작하자고 할 거야”라고 했다. 내가 시어머니가 된다는 상상을 하지 못해 잠시 멍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고부 갈등이 생기면 아들이 아내 편을 들 거라고 했다. (웃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서로가 행복해진다. 좋은 며느리, 좋은 시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관계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여줘야 건강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적절한 거리감에서 오는 편안함이 가족 간에도 있다.


물론이다. 거리 두기는 소외가 아니다. 너무 가까운 관계는 예의를 지키기 어렵다. 배려와 존중을 찾기 힘들다. 우리는 밀착을 친밀함으로 착각하고 산다. 서로에게 선을 두면 자연스럽게 존중이 나온다.

 

이번 명절은 어떻게 보냈나?


며느리 사표를 낸 후, 가족 모임을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고민 끝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혼한 것도 관계를 끊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정기적으로 밖에서 가족 모임을 한다. 밖에서의 식사 모임은 누가 누구의 식사를 준비할 것도 없고, 시중을 들어줄 필요도 없다. 함께 모여 함께 먹는다. ‘~해야만 하는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가족의 일원으로 만나고 있다. 불과 1~2년 만에 새로운 관계가 바뀐 것이다. 제사와 명절도 간소하게 지낸다. 제사를 성묘를 가는 것으로 대신하고, 차례상 대신 우리 가족들이 먹을 음식만 한다.

 

“제목만 읽고도 뭔가가 해소된 느낌이 있었다”는 독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을 선택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 얘기를 온전히 혼자 쓴 첫 책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해 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힘들고 고달플 때 스스로 질문했다. 내가 어떤 부분이 힘든지,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질문하고, 작은 것부터 바꿔 나갔다. 처음부터 사표부터 시작한 게 아니었다. 하나씩 해결하고 찾아가고 행동할 때, 그만큼의 힘이 내 것이 됐다. 살아보니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장 힘들다. 부부 간, 연인 간, 형제 간 내가 무엇이 힘들고 어려운지 작은 것부터 생각해보면 해답은 멀리에 있지 않다.

 

내 삶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도 됐을 것 같다.


정말 그렇다.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 한편으로는 내 자식들에게 이 책을 물려줄 수 있겠다는 감사함이 있다. 최소한 내 아이들은 내 삶을 되풀이하지 않을 거니까.

 

『며느리 사표』는 잘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각으로 이 책에 접근하면 좋을까.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자식들에게는 독립을 권하고. 그래서 혼자만 잘 살겠다는 건가? 오히려 반대다. 나 자신을 찾아야 모두가 수평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서로 존중하고 풍요로운 관계가 되려면 내가 행복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 먼저 최선을 다하는 건 이기적인 삶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다. 이 이야기를 독자에게 꼭 하고 싶다.


 

 

며느리 사표영주 저 | 사이행성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힘겨운 결혼생활을 보냈던 대한민국의 어느 평범한 여성이, 어떻게 그 견고하고 두꺼운 벽을 혼자 힘으로 깨고 나와 새로운 삶을 만들어갔는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재즈평론가 남무성 “재즈, 결코 만만한 음악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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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무성은 재즈를 말한다. 전문 잡지를 만들고, 책을 쓰고, 음반을 프로듀싱하고, 영화를 제작한 것은 모두 재즈를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남긴 자취는 재즈와 대중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가장 초입에 놓인 것은 『재즈 잇 업(jazz it up)』이라는 한 권의 책이다. 여느 만화처럼 술술 넘기다 보면 재즈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재즈 잇 업』은 출간 후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고, 절판 후 독자들의 애를 태워왔다. 그리고 출간 15년을 맞아, 드디어, 개정증보판으로 돌아왔다. 남무성은 다시 재즈를 말한다.

 

지난 3월 2일, 송파구 방이동에 자리한 재즈카페 ‘재즈잇업’에서 남무성 평론가를 만났다. “재즈는 변주의 음악”이라고 말한 그는 새로 출간된 『재즈 잇 업』또한 기존의 초판본을 변주한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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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재즈 잇 업』


다시 쓴 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개정판에서 많은 부분이 바뀌었어요.

 

15년 전에 책을 썼을 때는 많이 어렸던 것 같아요. 30대 초반이었으니까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의욕이 더 앞섰다고 할까요. 제가 전문 만화가도 아닌데다가 『재즈 잇 업』에서 만화를 처음 그렸어요. 이렇게 반응이 좋을 거라는 예상도 못 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성에 차지 않는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쉬움이 많은 채로 냈던 책이고, 늘 빨리 개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일들을 하느라 뒤로 미뤄졌고, 아예 절판을 시킨 거예요.

 

절판의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작가 입장에서는 아쉬운 점이 보이더라고요. 전날 밤에 쓴 편지를 다음 날 아침에 봤을 때의 느낌 같은 거죠. 그런데 책은 계속 보여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출판사와 계약기간이 끝날 때 이야기를 했어요. 일단 절판을 시키기로 한 거죠. 그게 3~4년 전의 일이에요. 이번에는 작심하고 미뤄왔던 개정을 한 거고요.

 

중고책이 굉장히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고 들었어요. 한 권 가격이 10만 원정도 됐다고요. 작가로서 기분이 좋았을 것 같아요(웃음).


저도 초판본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사려고 찾아봤어요. 그런데 너무 비싸더라고요(웃음). 조금 비싸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비싸서 안 샀어요(웃음). 2권에 15만 원정도 하더라고요. 더 낮은 가격으로 중고 장터에 나올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가보면 이미 팔리고 없더라고요. 몇 번 기회를 놓쳤죠. 그러면서 생각한 게, 개정판이 나오면 가격 거품이 조금 빠질 것 같았어요. 요즘도 가끔 검색을 해요. 저한테는 초판본이 못난 자식이지만, 그래도 갖고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요. 개정판이 나오니까 중고거래가가 살짝 내려가기는 했더라고요. 조금 더 가격이 떨어지면 사려고 해요. 아마도 조만간에 사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독자들이 책을 선물할 수도 있겠는데요?


아마 이런 상황을 모르실 거예요. 당연히 제가 초판본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이번에 『재즈 잇 업』이 나오고 나서 페이스북으로 출간소식을 알렸는데요. 많은 분들이 ‘좋아요’도 눌러주시고 자신이 갖고 있는 책을 사진 찍어서 올려주셨어요. 그런데 2003년에 출간된 버전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더라고요. 갖고 싶은 마음은 들었지만 달라고 할 수는 없었죠(웃음). 2003년 초판본은 진짜 찾기 힘들거든요. 그 책은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만든 인재진 형이랑 같이 미니북으로 만든 거였어요. 1년 동안만 판매를 하고 그 뒤에는 출판사에서 책이 나왔는데요. 그 때 만든 책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더라고요.

 

독자들이 책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거잖아요. 작가에게 더 기쁜 일은 없겠죠.


너무 송구스러워요(웃음). 『재즈 잇 업』 은 운이 좋은 책이에요. 재즈를 만화로 그린 책이 없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봐주신 거죠. 그리고 요즘에는 젊은 학생들이 실용음악에 관심이 많잖아요. 음악을 하려면 재즈를 배우고 들어야 한다는 인식도 많아졌고요. 그러면서 입소문이 난 거라고 생각해요.

 

『재즈 잇 업』이 출간되던 시기만 해도 대중에게 재즈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 특별한 사람들의 고급문화 정도로만 인식되던 때였다”라고 적으셨어요. 지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재즈의 저변은 그때보다 훨씬 넓어졌죠. 공연장 입장료가 조금 비싸도 기꺼이 지불하고 즐기시는 분들도 많아졌고요.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이나 ‘서울재즈페스티벌’을 봐도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 많은 분들이 찾아오시잖아요. 사실 재즈 문화가 자리를 잡으려면 먹고 사는 일에도 여유가 생겨야 하거든요. 살기 힘든데 어려운 음악까지 듣는다는 게 쉽지 않죠. 이전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재즈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이 생긴 것 같고요. 재즈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훨씬 많아졌어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그래요. 수준 있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공급과 수요가 잘 맞고 있죠.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아요.


편중된 측면이 있기는 해요. 잘 나가는 재즈 뮤지션은 정해져 있거든요. 뮤지션이 많아졌지만 방송에서 비춰주지도 않고 연주할 무대도 별로 없어요. 유럽은 재즈 뮤지션들이 클럽 활동만 해도 지원금이 나와요. 일본도 그렇고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연주자가 늘어났고 대중적인 인식도 생겼고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그걸 수용할 만한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 같아요. 다양한 장르가 골고루 발전하려면 무대도 많이 생겨야 하고 일단 매체에서 비춰줘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재즈는 아는 만큼 들리는 음악”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음악을 듣는 데 꼭 공부가 필요할까요? 그냥 들었을 때 좋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맞는 말이에요. 음악(音樂)은 음학(音學)이 되면 안 돼요. 쉽게 말해서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에요. 들었을 때 행복하면 되는 거죠. 음악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추상화도 그릴 수 있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재즈는 조금 노력이 필요한 음악이에요. 만만한 음악은 결코 아니에요. 예전의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알고 보면 재즈 쉬워,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음악 중에도 재즈가 많아’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건 재즈의 입구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냥 간판만 보여주는 거거든요. 아무리 달콤하고 무드가 있다고 해도, 그런 곡만 서너 곡 들으면 질려요. ‘이게 재즈의 전부인가’ 싶은 거죠. 사실 재즈라는 음악은 들으면서 사색도 할 수 있고, 그 골격을 들여다보면서 매력을 느끼게 돼요. 그 정도까지 가려면 조금 노력이 필요해요. 보통의 음악은 처음에는 쉬운데 좋아해서 파고들다 보면 어려워요. 재즈는 반대예요. 처음에는 어려워요. 그런데 그걸 참으면 점점 더 들리는 거죠.

 

처음에 공부해야 하는 건 뭔가요? 『재즈 잇 업』에 실려 있는 재즈의 탄생과 변화 과정, 대표적인 뮤지션과 음반, 그런 것들인가요?


일단은 그 말도 맞아요. 대개 그렇게 하죠. 그런데 누가 옆에서 팁을 주면 좋잖아요. 우주처럼 많은 음악 중에서 정말 좋은 걸 콕 집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게 필요해요. 왜냐하면 명반과 감동이 비례하는 건 아니거든요. 본인이 들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자료 조사도 많이 해야 돼요. 그러면서 신중하게 하나하나 컬렉션해가는 것도 필요해요. 보통 우리가 스탠다드라고 하는 곡들이 있는데, 그걸 먼저 듣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스탠다드라는 게 말하자면 올드팝이에요. ‘Over the Rainbow」, 「Moon River」, 「Fly Me to the Moon」 같은 곡들은 한 번쯤 들어봤던 멜로디잖아요. 흔히 재즈가 변주의 음악이라고 하는데, 어떤 악기로 연주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고 장르 스타일에 따라서도 맛이 바뀌어요. 스탠다드 곡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제가 볼 때는 20곡정도 되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적은 숫자예요.


그 정도만 알고 있어도 뮤지션이 어떤 곡을 변주하는지 알 수 있어요. 멜로디의 메인 테마는 나오거든요.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의 재즈 뮤지션들이 공연에서 스탠다드를 해요. 재즈는 작곡이 중요한 음악이 아니거든요. 쉽게 말하면 기존에 있던 테마를 가지고 새롭게 요리하는 거예요. 요리하는 부분의 앞뒤로는 테마를 하게 돼있어요. 일종의 룰 같은 거예요. 처음에는 밴드 전체나 솔로, 듀오가 똑같은 테마를 해요. 우리는 이런 음악을 한다고 제시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돌아가면서 솔로를 해요. 변주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끝날 때는 다시 테마로 돌아가서 같이 연주를 해요. 다른 형식들도 있지만, 이 정도의 재즈 감상법만 알아도 지금 어떤 테마를 연주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거기에서 더 나가면 즉흥 연주를 들으면서도 원래 곡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고요. 그런 재미가 재즈에 있는 거죠.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아야 한다


재즈를 쉽게 알리기 위해서 만화라는 형식을 택하셨는데요. 실제로 많은 위트가 담겨 있는 책이고, 일부러 고상한 척하지 않으려고 하신 것 같아요.


네, 그렇게 하고 싶었고요. 처음 『재즈 잇 업』이 나왔을 때만 해도 재즈를 비틀어서 말하는 문화가 아니었어요. 재즈는 고상하고 멋있는 음악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요. 저는 고우영 선생님의 『삼국지』를 너무 좋아했어요. 그 만화에 담긴 해학, 자유로운 비틀기, 풍자를 흉내 내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난이도 조절에 대한 고민도 하셨겠어요.


『재즈 잇 업』은 일종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책이에요. 쉽게 읽을 수 있는 재즈 입문서로 알려져 있는데, 읽으면서 어렵다고 느끼실 수도 있어요. 완전히 입문기초자 분들에게는 쉽지만은 않다는 거죠. 대신에 오래 두고 볼 수는 있을 거예요. 한 방에 확 볼 수 있는 입문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책을 쓰면서 마니아들도 보게끔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균형감을 잘 지키는 게 힘든 부분인 것 같은데, 그게 좋은 책인 것 같아요.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되고 쉬우면서 가볍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밸런스가 무척 중요하다고 봐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전공하셨어요. 졸업 후에는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셨고요. 독특한 이력이에요.


어렸을 때는 그림 낙서를 하는 정도였지만, 손재주는 있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화실을 다녔고요. 음악은 어디까지나 취미였죠. 어릴 때부터 들었고요. 음악과 그림을 다 좋아했어요. 그런데 음대를 가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요. 저희 형도 음악을 했고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음악을 너무 많이 들으면 수준만 높아져서, 자기가 직접 하다 보면 ‘이건 아니야, 난 안 돼’라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웃음). 그래서 저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계속 그 길로 갈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음악은 계속 들었죠. 음반도 모으고 뮤지션들과 교류도 하고요.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도 재즈 클럽에서 했어요.

 

당시에 DJ를 하셨죠?


네, 방배동에 있던 클럽이었는데 그때는 거기가 명소였어요. 1988년 즈음이었는데, 가게에 재즈 원판이 만 장 정도 있었거든요. 벽을 다 채울 정도였다고 보시면 돼요. 그게 다 미국에서 수입한 오리지널 판이었어요. 거기에 무대도 있어서 뮤지션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어요. 이정식 씨도 거기에서 데뷔를 하셨고, 신관웅 선생님 같은 우리나라 재즈 1세대 분들도 연주를 하셨어요. 가요계에서 재즈풍 음악을 하고 싶었던 사람들도 다 모여 있었죠.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한영애, 장필순 같은 분들이요.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버는 것보다 거기에서 음악을 듣는 게 너무 좋았어요. 정말 열심히 들었죠. 그때부터 재즈 뮤지션들과 교류가 있었어요. 그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도 만들 수 있었고요.

 

재즈 전문 잡지도 창간하셨어요.


대학에서 공부할 때 맥킨토시로 책을 편집하는 일에 빠져있었어요. 당시에 무가지가 유행했었는데, 후배들을 모아서 재즈 무가지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작업실에 모인 사람들이 다 음악을 좋아하고 디자인과를 나온 사람들이었어요. 우리가 편집하고 우리가 쓰자고 이야기가 됐죠. 그렇게 만든 잡지가 지금의 <MM JAZZ>예요. 창간 당시의 이름은 <몽크뭉크>였어요. 화가 뭉크와 재즈 피아니스트 몽크의 이름을 따와서 지었어요. 그 잡지가 창간된 지 벌써 20주년이 됐어요.

 

재즈와 관련해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해 오신 것 같아요.


재즈 분야에 있어서는 젠체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 봐요(웃음). 고등학교 때는 같은 지역에서 음악 좀 듣는다고 하는 아이들끼리 어울리잖아요. 서로 음반을 빌려주기도 하고 잘난 척도 하고요. 그때 제가 재즈 이야기를 하면 다른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지곤 했어요. 당시에는 재즈를 열심히 들었던 이유가, 솔직히 말하면 잘난 척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다른 아이들은 모르니까 ‘재즈는 내 분야다’라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들었어요. 일본어를 모르면서도 <스윙저널>을 사서 모으기도 했어요. 읽지는 못하니까 사진만 보는 거죠. 나중에는 제가 『재즈 잇 업』을 <스윙저널>에 연재하게 됐는데, 정말 영광이었어요.

 

처음으로 재즈의 매력을 느꼈던 음반, 뮤지션이 있다면요?


‘스틸리 댄’이라는 인기 많은 팀이 있어요. 저는 록을 듣다가 재즈로 넘어와서 그런지, 어릴 때는 올디즈(oldies)한 메인 스트림 재즈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록킹한 것, 퓨전, 재즈락을 들었어요. ‘스틸리 댄’이라는 팀을 너무 좋아했고요. 지금 돌이켜 봐도 퓨전이라는 단어를 쓰려면 그렇게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즈와 블루스와 록을 황금비율로 완벽하게 조합했거든요.

 

재즈 평론가, 감독, 작가, 편집자로서 활동해 오셨는데요. 가장 재밌었던 일은 뭔가요?


지금은 작가라고 불러주는 게 제일 편하고요. 녹음실에서 프로듀싱을 할 때 가장 재밌어요. 음악 프로듀서라고 하면 제작자라고 생각하시기도 하는데, 재즈는 그렇지 않아요. 영화로 치면 감독이에요. 곡 선정, 뮤지션 섭외도 하고요. 이 부분에서 어떤 악기를 어떤 사람이 연주하도록 하는 게 좋을지, 곡 디자인도 해요. 뮤지션들과 같이 의논을 하면서, 한 곡을 음원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각본부터 감독까지 맡는 거예요. 재밌는 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걸 볼 때가 많아요. 훌륭한 연주자들도 모두가 스타일리스트는 아니에요. 자기 음악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수도 있거든요. 음반 프로듀서는 같이 의논하면서 방향을 바꿔주기도 하고 스타일을 만들어주기도 하는데요. 그런 작업들이 재밌어요. 어릴 때 조금씩 취미로 악기를 연주했던 게 프로듀싱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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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자라면 현대 재즈부터 감상하세요


『재즈 잇 업』에서는 재즈를, 『페인트 잇 록(paint it rock)』 에서는 록을, 『만화로 보는 영화의 역사』에서는 영화를 만화로 그리셨어요. 항상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시는 것 같은데요. 이유가 있나요?


평소에도 후배들을 가르쳐주는 걸 좋아하는데요. 어떤 책들은 자기 잘난 척만 하다가 끝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책을 쓰는 목적이, 이걸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거잖아요. 저도 어릴 때 봤던 재즈에 관한 책들을 생각해 보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어요. 지금 다시 보면 틀린 내용들도 많아요. 번역의 오류죠. 자신도 모르는 말을 써놓은 거예요. 진정으로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망가지더라도, 그래서 일부 비난을 받더라도,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더 많은 독자에게 알려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봐요.

 

어려운 걸 쉽게 말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하잖아요.


맞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항상 고민하는 거죠. 이 부분을 어떻게 풀어야 독자들이 이해할까. 계속 독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거예요. ‘이건 독자가 알아서 공부해야 돼, 어쩔 수 없어’라는 태도로 넘어가고 싶지 않은 거죠. 그럼에도 『재즈 잇 업』 안에는 독자들이 알아서 해야 될 것들이 있기는 해요(웃음). 중간에 어려운 대목이 있어요.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재즈 잇 업』같은 책이 나온 적 없다면서요?


월간지 편집장을 오래 했던 경험이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이 됐어요. 그 경력이 없었다면 아마 저도 쓸 수 없었을지 몰라요. 이렇게 방대한 역사를 단행본으로 낼 때는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버려야 되는지’,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통사를 다 알고 있어야 되잖아요. 음악도 많이 들어야 되고요. 그림만 잘 그려서는 안 되는 거죠. 아무래도 그런 문제들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에서 이런 책이 안 나왔던 것 같아요. 어설프게 내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재즈 잇 업』을 내놓고 보니까, 일본의 반응을 보면, 빠진 부분들도 많지만 가져가야 할 건 다 가져갔다고 하더라고요.

 

초판의 1~2권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3권은 따로 봐야 할 텐데,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3권은 지금도 판매가 되고 있어요. 그 책은 걸작선인데 내용이 좋아요. 이번에 출간된 책에도 2권의 모든 내용이 실려 있지는 않아요. 60% 정도 포함된 것 같아요. 나머지 부분 중에 한국 재즈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건 나중에 따로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냥 놔뒀어요. 다른 에피소드들도 있기는 한데, 한 권에 다 담기에는 흐름이 산만해질까 봐 포함시키지 않았어요.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의 제작비용을 『재즈 잇 업』의 인세로 충당하실 계획이셨다고요. 예상대로 진행됐나요(웃음)?


네. 저는 영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제작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당시에 한 인디영화가 2~3천만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그 비용으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나?’ 하면서 멋모르고 시작을 했어요.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죠. <브라보! 재즈 라이프>는 제가 감독뿐만 아니라 제작도 같이 했는데, 영화 찍다가 비용이 부족하면 출판사에 전화를 했어요. 그렇게 제작비용의 일부를 인세로 충당했고요. 나머지는 제가 그때 운영하던 재즈카페에서 얻은 수익을 가져다 썼어요. 그 영화의 출연진이 천 명쯤 돼요. 우리나라 재즈 뮤지션들이 거의 다 나왔는데, 다 무료로 출연을 해줬어요. 여기에도 감춰진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뭔가요? 궁금한데요(웃음).


그때 박성연 선생님께서 건강이 안 좋으셨고, 여러 가지 상황상 출연료를 드려야 했어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었고, 제작비용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박성연 선생님을 촬영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즈파크’의 신흥순 고문님께서 몰래 저를 부르셨어요. ‘그래도 박성연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재즈 1세대 중에 유일한 여자 보컬이신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선생님께 출연료 드릴 때 보태라’ 하시면서 돈을 주셨어요. 그 사실을 박성연 선생님도 아직까지 모르세요. 신흥순 고문님은 정말 한국 재즈계의 오아시스 같은 분이에요. 매월 섬유센터에서 ‘재즈파크’라는 무료 공연을 여시는데, 뮤지션들에게는 출연료를 다 주세요. 기업의 협찬을 끌어와서 공연을 이어가고 계신 거예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배순탁 작가님이 추천사를 쓰셨어요. “이미 완독한 나 역시 다시 책을 펼쳐봐야 했다”고 적으셨는데요. 기존의 『재즈 잇 업』을 읽은 독자들도 개정판을 볼 필요가 있을까요?


다시 읽어주시면 감사하죠. 그때 책을 읽으셨던 분들은 지금 어느 정도 재즈를 들으셨을 테고 다시 공부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정성들여 많은 부분을 바꿨거든요. 조금 거칠고 어색한 부분들도 많이 다듬었고요. 새로 나온 『재즈 잇 업』을 사셨다면, 그냥 소장용으로 간직하지 마시고,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럴 정도의 내용이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구성을 체계적으로 바꿨거든요. 재즈의 변주처럼, 『재즈 잇 업』도 같은 책이지만 다르게 변주했다고 볼 수 있어요. 어떻게 변주했는지 찾아보시는 즐거움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다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재즈 잇 업』과 처음 만나는 독자들도 있을 텐데,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일단은 만화처럼 보시는 게 좋아요. 조금 어려운 대목이 중간 중간 있는데, 이해가 안 될 때는 그냥 넘어가면서 스토리 위주로 보시면 돼요. 그리고 한 번씩 생각날 때, 두고두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린다면, 이 책을 읽으시면서 유튜브로 음악을 찾아서 들으시는 분들도 계신데요. 초기의 재즈들은 오히려 듣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1900년대 초기부터 1940년대까지 나온 음반들은 녹음 상태가 너무 안 좋거든요. 그걸 먼저 듣게 되면 재즈를 싫어하게 되실 수도 있어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거죠.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는 청각적으로 만족을 못 주는 거예요. 재즈의 역사는 흐름대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지만 음악까지 그렇게 들을 필요는 없어요.

 

어떤 것부터 듣는 게 좋을까요?


시대에 관계없이 현대적인 재즈를 듣는 게 좋다고 봐요. 굳이 시대별로 들어보겠다고 하신다면, 물론 그럴 수도 있고 그걸 말리는 건 아니에요.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는 거죠. 『재즈 잇 업』은 책이지만, 재즈는 결국 음악이잖아요. 이 책을 통해서 음악을 좋아하게 돼야죠. 그런 점에서 말씀드리면, 너무 초창기의 재즈를 먼저 듣는 건 피하시는 게 좋아요.

 

다음 책도 준비 중이세요?


3월 중에 출간될 예정이고, 지금 교정을 보고 있는데요. 『팝 잇 업(pop it up)』이라고 화성에 관한 책이에요.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시작해서 작곡까지 이어지는 내용을 만화로 그렸어요. 강아지도 이 책을 보면 코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어요(웃음). 저로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나오는 신간인데요. 혼자 쓴 건 아니고 ‘빛과 소금’의 장기호 씨와 함께 준비했어요.


 

 

재즈 잇 업 jazz it up남무성 저 | 서해문집
뮤지션들만의 개성, 예상을 깨는 빵 터지는 대사 등 저자의 위트가 빛을 발하는 부분들은 재즈에 다가서면서 느낄 수 있는 부담감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시원하고 통쾌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솔 “회사에서는 나쁜 사람이 집에서는 좋은 아빠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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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 미국에 본사를 둔 무기 공장의 폐쇄 결정이 내려진다. ‘마카로니 프로젝트’는 공장 폐쇄를 앞두고 이로 인한 직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운영진이 은밀하게 준비한 사전 작업의 이름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각 부서의 팀장들은 죄책감과 안도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비밀 유지 노력이 무색하게 프로젝트를 알게 된 누군가는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리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회사와 거래를 한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사람들에게 분노와 좌절, 놀람, 슬픔, 두려움은 매 순간 자리를 바꿔가며 덮쳐온다. 선한 사람들의 악행도, 어떤 결정이 의도치 않았던 또 다른 파장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과연 마카로니 프로젝트는 계획대로 진행될 것인가.


2012년 등단 이후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 , 『망상,어語』와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 , 『보편적 정신』등을 펴낸 작가 김솔은 신작 『마카로니 프로젝트』 에서 공장 폐쇄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버려진 사람들의 다양한 선택과 고민을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상황, 어느 배경 속에 넣어봐야만 드러나는 것이고요.”라고 말하는 김솔 작가. “완성된 것,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서만 인간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작가는 관계와 구조 안에서의 인간이라는 문제에 천착한다. 우리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마카로니 프로젝트』 는 이러한 작가의 고민이 밀도 높게 담겨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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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감을 두고 시작하는 이유


‘마카로니 프로젝트’라는 제목에 여러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특별한 의미는 아니에요. 소설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요. 등장인물도 각기 다른 국가의 사람들이죠. 흔히 외국인들이 이탈리아에 관한 특징적인 것을 말할 때 가볍게 파스타와 피자, 마카로니 등을 떠올릴 거라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의외로 가벼운 작명이었네요?


그냥 외국인 입장에서 생각한 거죠. 한국에 대해 외국인들은 김치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GM(미국 자동차 제조회사 제너럴모터스)이 이와 똑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하면 ‘김치 프로젝트’처럼 연관성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나라를 충분히 반영할 이름을 붙일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마카로니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굳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설정하신 이유는요?


똑같은 이야기를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면 재미도 없겠지만요.(웃음) 서울에 대해, 제가 사는 곳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야기자체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곡해해서 읽을 것 같기도 했어요. 나름의 필터링을 할 것 같거든요. 사실 저도 이탈리아를 잘 모르지만, 이런 곳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하면 읽는 분들도 일단 거리감을 두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그것이 실은 내 주변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될 거라는 생각으로 항상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외국인을 많이 쓰고요. 장소도 그렇죠. 이런 장치를 통해 진입장벽을 낮추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다른 공간, 다른 인물을 쓰는 게 작가에게도 수월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와 제 주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힘들어요. 사실 관계가 엮일 수도 있고요. 제3의 인물,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인물과 환경을 설정해놓고 이야기를 하는 게 덜 힘든 것 같아요. 결국 제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하고 있는 것은 저의 작은 환경 안에 있기 때문에 다 투영이 되게 마련이지만요. 이 방식을 사용하면 자유롭게 조합이 가능한 것 같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2012년 등단을 했는데요. 회사에서 발령이 나서 4년 간 벨기에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시간도 있고, 야근도 줄고, 술 먹는 일도 줄어서 글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도 그 시기에 쓰셨어요?


어느 기간 동안에 온 건 아니고요. 회사 생활을 하고, 외국 생활을 하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계속 생각해왔고, 하나씩 에피소드를 모으다가 글이 됐어요. 3개월, 6개월 안에 쓰인 것 같진 않고요. 긴 시간을 두고 완성된 겁니다.

 

 

인간은 특별히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소설의 시작이 궁금했거든요. 오래 담고 있던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도 함께 묻고 싶습니다.


한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상황, 어느 배경 속에 넣어봐야만 드러나는 것이고요. 그것이 또한 그 사람의 본성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상호 관계를 통해서 반영되고, 왜곡되는 과정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 다른 상황에 놓일 때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가령 회사에서는 나쁜 사람이 집에 가면 좋은 아빠일 수 있죠. 과연 그것이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저는 가능할 것 같거든요. 인간이란 특별히 대단한 존재가 아닌 것 같아요. 이 글을 쓸 때도 그랬습니다. 어떤 상황에 인간을 집어넣고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까, 를 지켜본 거예요. 이 사람의 윤리적인 판단, 개인적인 성향 보다는 말이죠. 나의 아버지라면, 나라면, 내 누이라면 특별한 죄책감 혹은 사명감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것 같진 않았어요. 늘 하던 일을 할 것 같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선의가 항상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거나 어떤 선택이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거나 하는 식의 철학적 고민이 많이 담겨 있어요.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질문만 있고요. 답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답이 없는 것을 불친절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셔서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습니다.

 

혹시 내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답은 없으세요?


없습니다. 답은 없고, 질문만 있어요. 사실 답이라는 것에도 의문이 있죠. 동화책도 보면 ‘잘 먹고 잘살았다’로 끝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건 결론이 아닌데 말이에요. 그저 한 에피소드가 끝난 것일 뿐인데 그게 ‘영원히 잘 먹고 잘살았다’가 되면 오히려 기만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마지막은 열어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질문은 어쩌다 하게 되신 거예요?


일단 대학에 들어가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다보니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방황을 했어요. 그 돌파구를 찾아보자 했던 게 독서였고요. 독서가 지나니 글을 써보자, 해서 천천히 진행된 건데요. 결국은 제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조직에 속해 있잖아요. 회사를 다니면서도 이런 고민들이 있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써 기록하자는 생각으로 소설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도 제가 회사에서 어떤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잘 몰라요. 내가 하는 짓은 잘 안 보이고요. 남이 하는 것이 보이는 거죠. 직장에서, 가정에서 제가 무언가 하고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선의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할 수도 있는데요. 그것이 그렇게 전달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세상은 그래요. 그런 의구심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 하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작가님처럼 여기에 천착해서 쓰기까지 하는 데에는 더 큰 동력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심지어 작가님은 공대 출신에, 오래 조직 생활을 해온 직장인이시니까 좀 더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뭐랄까요. 자기 점검을 하려고 애쓰는 거죠.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하는 건데요. 이 이야기는 저한테 벌어질 수도 있고, 인지하지 못했지만 벌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을 해요. 하는데요, 제가 쓴 것과 저의 행동은 또 다를 테니까요. 그것이 항상 고민이고, 걱정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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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비극은 진행형


배경 요소도 그렇지만 등장인물도 각기 다른 국가의 사람들이라는 점이 특이할 만해요. 이로 인해 서로가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요. ‘다국적’이라는 설정에도 의도가 있었겠죠?


유럽에서 4년 정도 지내보니까요. 일단 공용어가 필요한데 영어가 다들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노력하거든요. 천천히 말하고, 쉬운 단어를 썼어요. 그런 배려가 없으면 어려움이 있죠. 처음 만나는 사이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인물 설정을 그렇게 했고요. 또 한 가지는 이 회사가 무기 회사인데요. 사실 이 회사가 없어지는 것이 직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좋은 소식일 수 있어요. 무기가 없어지는 거니까요. 희생자가 줄어들 수도 있고요.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여력도 없는데다가, 선량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이들이 피해를 보는 거죠. 이것을 바깥에서 보면 나쁜 의도를 가진 무기 회사가 없어지는 거니까 좋게 볼 수도 있고, 하지만 한 지역 사회로 보면 아수라장이 되는 거죠. 그런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그런 반면 시간 배경은 현재잖아요. 2017년인데요. 공간이나 인물과 달리 시간에는 거리를 두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이런 일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고요. 과거에도 일어났고, 오늘도 일어났고, 내일도 일어날 것 같아요. 시간에 대한 생각은 저도 못했었는데요. 퇴고하면서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과거에 일어났다 한들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과거의 경험과 노하우가 그다지 현재의 불행을 막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항상 비극은 진행형일 것 같거든요. 미래에도 마찬가지고요. 이 사건을 현재에 놓든 과거에 놓든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초고 때는 시간 배경이 달랐나요?


이 작품을 2016년 <문예중앙>에 일 년 간 연재했거든요. 그때 기준으로 하면 2015년이 현재였겠죠? 그것을 책으로 만들면서 2017년으로 바꿨는데요. 연도를 그냥 숫자만 바꿨습니다. 사실 이걸 쓸 때만 해도 한국GM 사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지금 상황이 그렇게 되면서 걱정을 좀 했죠. 한편으로는 씁쓸하고요. 그런 면이 부각되는 게 부담스럽고, 그렇습니다. 한국GM 사태에 대해 저한테 질문을 하시니까요. 저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답을 저한테 구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저는 답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고요. 깜냥도 안 돼요.

 

“비극은 진행형”이라는 말씀은 정말 진실입니다. GM 사태가 워낙 뜨겁긴 하지만 이런 일은 쌍용자동차 때도 있었고, 한진중공업 때도 있었죠.


갈수록 한 지역에서 결정이 되고, 해결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전 세계적으로 분산 되어서 운영되는 회사들은 똑같은 구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판단하는 쪽과 판단되는 쪽, 경영하는 쪽과 생산하는 쪽, 피해를 보는 쪽과 소비하는 쪽이 다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분명히 한쪽의 결과가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칠 거고요. 어떤 쪽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미국 본사는 공장 하나를 없앰으로써 이익을 가져갈 수 있지만 한쪽은 분명히 손해를 볼 거고요.

 

누구도 결과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그 구조의 복잡성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고 계시잖아요. ‘나비효과’에 대한 언급도 두어 번 나오고요.


네, 그렇습니다.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소설 시작 부분에서 감정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죠. 작품 전반에는 특히 분노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데요.


분노 같은 감정은 즉각적인 반응이고, 상황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일차적인 반응일 것 같은데요. 분노 자체가 궁금한 건 아니었어요. 그 분노가 어떻게 개인별, 시간별로 수용이 되거나 배척되는지 하는 것들이 궁금했습니다. 감정이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앞부분에 넣은 이유도 그런 건데요. 어떤 상황에서 누군가는 바로 분노를 느끼고, 누군가는 회의하는 등 여러 양상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전이된 감정일 테죠. 다만 앞뒤가 있을 뿐이지 크기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구조가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운영하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잖아요. 결국 도구 자체가 사람이에요. 결정하고, 결정을 실행하고, 피해를 보는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사람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정이라는 게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요. 이런 상황에서는 죄책감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조직 운영 양태를 이야기할 때 보통은 합리성이나 과학성, 통계, 수치 등을 근거로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비합리도 굉장히 많고, 감정적인 이유도 분명히 존재해요. 소설이 바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는 거고요.


맞습니다, 합리성이라는 게 누구를 위한 합리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데이터의 정합성, 합리성이 상부의 결정에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이외의 것들에 그 합리성은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방에 가둬놓고, 아수라장을 만들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사람만 구제해주는, 그런 구조겠죠.

 

그 빠져나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을 쉽게 악마적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소설은 그렇지 않아요. 다면성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직이라는 것도 신뢰하지 않지만 이념 같은 것도 신뢰하지 않는 것 같고요. 심지어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리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인간 자체의 기본적인 선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의 언어나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 있고요. 그럼 점을 제 스스로도 냉소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 언어가 최선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정말로 그런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어떤 경우 좀 더 악역을 맡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의미인가요?


그렇겠죠. 네. 하지만 그 행동을 두둔하려는 건 아니고요.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 놓으면 똑같은 짓을 할 거라는 냉소를 말씀드린 겁니다.

 

아무리 진창인 곳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려는 노력도 보였거든요. 냉소인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말씀드렸듯 모든 인간에게 선의는 있다고 봅니다. 심지어 악당들한테도 자상함과 선함, 인간성은 분명히 있다고 보거든요. 하지만 인간이 언행을 할 때 그런 본성이 작용하느냐를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어떤 상황에 들어갔을 때 똑같은 사람이지만 누구는 이렇게 반응하고, 누구는 저렇게 반응하잖아요. 똑같은 피해자이면서도 어떤 사람은 가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어떤 사람은 피해자로 남아요. 이런 복잡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보고,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상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게 저의 냉소고요. 분명히 인간은 다른 것보다는 위대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고요. 다수는 아니지만 말이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다수가 그렇지는 않아서요. 저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인사팀장 ‘니코’의 일화가 참 슬펐어요. 해고자가 딸을 데리고 찾아와 사과하는 장면인데요. 상황에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고, 니코가 느끼는 복잡한 심정도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니코는 자신의 딸과 같은 또래의 소녀까지 차마 물리칠 순 없어서 머뭇거리면서 유리창을 내렸다.

“아빠가 영어를 못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사과하러 왔어요. 지난번 공장에서 아저씨 바지에 페인트를 묻힌 일에 대해 정말 사과하고 싶대요, 아빠가.”

(중략)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수백여 명의 동료들을 절망시켰다는 비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아까 그 남자는 인사팀장의 바지에 페인트를 묻히고도 사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해고된다고 생각했고, 정식으로 사과한다면 다시 기회가 생겨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이었다.(105-107쪽)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니코의 바지에 페인트를 묻혔다는 것 외에는 잘못한 게 없거든요. 진짜로 그랬을 겁니다, 아마. 하지만 그 남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아무 데도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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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조감도로 봐야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고심한 것은 뭔가요?


감정 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갈게 될까봐 걱정했어요. 그래서 5장이 탄생한 건데요. 원래는 진짜 원고지 2매 정도로만 써서 5장을 넘길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더 내용을 넣은 거예요. 작품을 쓸 때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에 매몰되다 보면 슬픔 속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면을 의도적으로 줄이려는 생각을 했었죠. 그렇지만 혹시라도 제가 이 슬픔이나 분노를 사탕과 같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해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적인 것들을 끼워 넣은 거예요. 5장의 ‘최종본’은 그런 생각으로 최근에 쓰여진 겁니다.

 

고인이 된 작가의 논픽션처럼 구성이 되어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네, 심지어 작가조차도 이 땅에 살고 있지 않다는 설정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이야기가 아니니까 한 번 읽어보자’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고요. 후에는 결국 ‘그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다’라는 쪽으로 돌아오길 기대해서 작가마저도 죽은 것으로 설정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작품 속 상황보다 한국 사회가 더 나쁘다는 생각도 들어요.


더 심하다고 봅니다. 우선 사회 보장 수준이 잘 갖춰져 있지 않고요.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뿐만 아니라 회사도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제대로 된 프로세스라는 게 없다는 겁니다. 퇴직을 한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재취업을 하게 된다든지, 취업을 하면 어떤 과정을 거친다든지 한다는 것들이 공무원 사회조차도 없는 것 같아요. 심지어 어떤 동아리에도 프로세스가 없죠.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한 사람의 결정이 전부예요. 거침이 없고, 검증이 없죠. 대기업 총수가 한 번 결정을 하면 아무도 반발을 못하고요. 결정을 검증하는 프로세스가 어디에도 없고,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모르고, 사회적 합의도 없어요. 사회적 보장 장치도 없는데 말이에요. 한국 사회는 양적으로만 팽창했지, 질적 팽창이 없다보니까 어느 지역, 어느 사회나 그런 면이 결핍된 거죠.

 

솔직히 작품을 읽으면서 ‘그래도 한국보다는 낫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거든요. 적어도 회사가 해고와 공장 폐쇄 과정에서 애를 쓰기는 하잖아요. 직원의 처우나 정신적인 대비책도 고민하고 말이죠.


같은 일을 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수백 명이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은 일이 있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런 장치들이 없고, 장치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없어요. 과정을 검증하는 사람들은 없고, 시작과 끝만 보는 거예요.

 

상황에 따라 한 인간도 다른 모습이 된다고 한다면 인간에게 조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그것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인간이 혼자 존재하는 경우란 거의 없을 거예요. 수도승조차도 규율, 공통의 목적, 이해관계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잠시 존재할 때만이, 고독해질 때만이 순수해질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관계 맺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역할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고요.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조직에 들어가서 역할을 맡게 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생계나 생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좋아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말이에요.

 

오히려 조직이나 관계를 떠난 인간이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서 자꾸만 배경과 관계 같은 것들이 눈에 밟히는 거고요. 한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은 아닐 것 같거든요. 밖으로 나와서 자꾸 조감도로 봐야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있지, 안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길을 더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계속 질문을 던지는 건데요. 결국은 방심하지 않게 하고 싶어요. 가령 자선단체에 있는 사람들이 오늘은 자선활동을 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다른 짓을 하고 있을 것 같거든요. 방심하지 않으려면 자기 갱신이 되어야 하죠. 그렇지 않은 건 인간이 가진 오만 같아요. 뭔가 완성된 것, 영원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저는 그런 건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필요악이라는 게 생겨날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자꾸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의 이야기이고, 저의 누이와 아버지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가 결국 우리들의 공통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발목을 잡고, 태클을 걸고, 못 가도록 싶은 마음이 있어요.

 

오만이라는 것, 자기 갱신의 필요성이라는 것, 이것이 특히 지금 같은 때에 더 중요하게 들리네요.


사람들은 오해하는 거예요. 그 힘, 그 권력이 자기한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실은 거기에 잠깐 배경을 두고 실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에요. 그런 고민을 자꾸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괴로운 질문이지만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변화는 쉽지 않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변화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저도 그렇고요. 이것은 저에게도 중요한 질문이에요.


 

 

마카로니 프로젝트김솔 저 | 문학동네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회사란 무엇인지, 이 세계에서 온전하고 현명하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윤리가 아닌 생존의 영역에서 날카롭게 묻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시인 특집] 문태준 “자연에 마음을 입히면 표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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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은 일곱 번째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를 비우고 덜어낸 시로 엮었다. 남겨진 자리는 ‘사모’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삼라만상의 몫이다. 낮고 여린 목소리로 여전히 강물과 돌, 어머니 등 서정적인 소재를 이야기하지만, 시에 나타난 단어들은 정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행동하고 애쓰는 자연으로 나타난다.


1994년 등단해 『수런거리는 뒤란』 , 『가재미』등 꾸준하게 시집으로 독자들과 교감하고, 불교방송 PD로서 매일 성실하게 밥벌이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시 세계를 더 깊이, 더 멀리 보고 싶다는 마음은 조용하고, 또 우직하다. ‘신비로운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는 돌을 노래한 시인은 또한 그 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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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고 있는 봄이 다 저를 설명하는 것


이제까지 낸 시집 중에서는 제일 제목이 길어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긴 제목을 달아보지 않아서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젊은 편집자분들이 괜찮다고 하셔서 감각을 믿었습니다. 앞으로 다른 제목을 짓는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되겠죠. 자꾸 들여다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관계에 대한 시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이번 시집은 어떤가요?


이번 시집에서도 관계에 대한 걸 생각했어요. 제가 있게 되는 것은 저 혼자의 덕택이 아니라 주변에서 저를 따르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에요. 주변의 존재로 인해 제가 설명된다는 거죠. 나라는 존재는 다른 존재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도 하고요. 다소 불교적인 생각이기도 해요. ‘내가 너다’라는 것이요.


요새 문태준 시인을 설명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요. 뭐가 있을까요. (웃음) 휴일에는 물통에 담아오려 찾아간 샘도 있을 것이고, 그 길을 찾아가는 산등성이, 백건우의 피아노 연주도 있고요. 지금 오고 있는 봄들이 다 저를 설명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이 나려 하네
심지어 여러 갈래 진 나뭇가지도
양옥집 마당의 묵은 화분도
- 「다시 봄이 돌아오니」 중

 

곧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오겠네요.


이제 막 꽃이 올 때죠. 그래서 화조절(花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꽃이 피는 시기가 이제 막 오겠죠.


실린 시 중에서 「입석」은 문학동네시인선 100호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 봐』에 소개했었어요. 짧은 산문 「상응하다」와 함께요.


햇살과 새의 울음, 바람, 꽃가루 이런 것들이 가서 돌 위에 표정이 생겨나게 하는데, 이게 결국은 상응하는 것 같아요. 주고받는다는 거죠. 모두가 다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예요.


불교방송 PD로 일하는 경험이 세계를 보는 관점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아요.


일이 시를 쓸 수 있는 시심(詩心)을 많이 만들어 줘요. 제가 만난 스님, 법문이나 경전이 새로운 시 세계로 이끌어주기도 하고요.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느낌이 있어요.


시에서는 인간하고 인간 사이의 영향보다, 자연과 인간 관계에 집중한다는 느낌인데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다른 생명 존재 간에도 마찬가지예요.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존재들의 관계가 다 서로 상응하는 거죠.


‘세계는 노동한다’는 시인의 말이 생각나네요. 세계가 관계를 맺으려 노동을 하는 걸까요?


애씀 같은 거죠. 애씀이라는 건 몸과 마음을 다 쓰는 거고요. 모든 생명 존재들이 움직이는 몸뿐만 아니라 교감하는 능력으로 정신노동을 한다고 해야 할까요? 모두가 애씀이 있고 활동하고 끊임없이 교환하고 주고받는 관계를 생각하고 있어요.

 

시가 누군가에게 가서 질문하고 또 구하는 일이 있다면
새벽의 신성과 벽 같은 고독과 높은 기다림과 꽃의 입맞춤과
자애의 넓음과 내일의 약속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에게 올 봄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다시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세계가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니, 세계는 노동한다.
- 시인의 말 중

 


안온한 서정을 넘어서


문태준, 하면 서정을 떠올리잖아요. 서정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지금 사람들이 서정을 원해서일까요?


서정은 그동안 계속 강처럼 흘러왔어요. 물론 잠시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동안 흐름은 계속 있었죠. 근 몇 년 동안 새로운 시의 흐름이 우리 시단에 유입됐잖아요. 하나의 큰 흐름이 생겼는데, 다시 서정적인 힘이 주목받는 느낌은 들어요. 물론 그 서정이 예전의 서정하고는 또 다르죠. 이미 바뀐 서정이고, 시가 서정을 통해 표현하려는 것도 달라졌어요. 서정도 나름대로 갱신을 하면서 새로움을 추구했는데, 어쨌든 한 2년, 3년 전부터 다시 서정의 흐름에 주목하는 시기인 것 같긴 해요.


달라진 점이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들 수 있을까요? 기류가 어떻게 감지되나요?


확연하지는 않은데, 안온한 서정에만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안온하기보다 활달하고 시적 상상이 좀 더 들어간 서정이 아닌가 싶어요.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해설이 있었어요. 도시에 살면서 도시의 서정을 다룬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도시 공간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기보다, 제가 생활하는 공간의 이야기가 들어온 것 같아요. 서류가 들어 있는 캐비닛 같은 공간이라든지요.


「어떤 모사」에서 ‘물 따르는 소리’나, ‘저염식 식단’도 도시의 풍경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 단순한 생활로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겨울에 마른 풀잎이 빛이 있는 동안에는 제 그림자를 보여주는데, 그 그림자의 선이 굉장히 간소하거든요. 그런 생활 방식을 닮아도 좋겠다는 생각이요. 캐비닛 서류 더미 속에서, 아주 무표정한 도심에서 사는 것과는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이 이번 시집에 들어갔어요.


시집을 읽으면서 자연물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어요. 도시에서는 자연물이 아니라, 자연을 흉내낸 것들만 보게 되잖아요.


도시라고 하더라도 산이 가까운 곳에서 계속해서 살게 돼요. 제가 어렸을 때도 바로 뒷산이 있었고 작은 대숲이 있었거든요. 지금 사는 곳도 화원과 산이 옆에 있어서 퇴근한 이후에 생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산길을 걸어요. 회복 받고 싶다는 생각에 수시로 시골에 가기도 하고요. 자랐던 고향에 가서 저수지까지 걸어갔다 오거나, 대숲을 보러 가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으면서 저를 좀 회복시키려고 해요. 자연이 그렇게 멀리 있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아요. 자연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어요. 예전에는 평화롭고, 사건이나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 큰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자연을 보는 시선이 처음에 제가 쓴 것과는 달라졌어요. 생태 공간으로서의 자연, 여러 존재가 함께 사는 공간으로서의 자연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유기적으로 된 거죠.


가만히 있는 자연이 아니라 움직이는 자연을 생각하신 거군요.


예를 들면 호수나 연못이 굉장히 정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이번 시집에서는 정적인 공간이 활동하는 공간으로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달빛이 연못을 비추는 장면이 ‘밟는다’는 행위로 표현된다든지, 달빛이 내리는 게 중량감이나 무게라고 생각해서 ‘야생의 흰 코끼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요. 사실 달빛이 내리는 물결은 정적이고 고요하죠. 그런 것들이 대체로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생명이 활동하고 운동하는 공간으로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내적인 에너지가 계속해서 생겨나는 공간이요.


「사귀게 된 돌」에서도 그러한 이미지를 표현했어요. 돌에서 움직임을 봤을 때, 그것은 돌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시인이 돌에서 포착해내는 이미지잖아요.


「입석」 「사귀게 된 돌」 두 편에서 모두 돌을 이야기했어요. 돌이 서 있으면 살아 움직이지 않는, 정물로서의 돌이죠. 사실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충분히 됨에도 불구하고요. 제 마음이 가서 돌에게 전달되면 돌에 표정을 입혀요. 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정물을 봤어요.


그래서 요새 취미로 수석을 하시나 했어요. (웃음)


아뇨, 수석은 안 하고요. (웃음) 글 쓰는 공간에 자꾸 무언가 두려고 해요. 예를 들어 지금은 책상 위에 레몬을 두고 있어요. 생화나 돌을 둘 때도 있고요. 새벽에 작업을 하면 가까이에서 시선을 둘 데를 찾는 거죠. 마음을 입힐 곳이요. 제가 흰 종이에 마음을 입히듯이 정물에도 마음을 입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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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쌓이면서 무르익는 시


2000년에 첫 시집을 내고 시력(詩歷)이 쌓였어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세월이 빨라요. 시인도 근육을 단련시키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자기 영혼을 단련시켜야 하는 것 같아요. 한 시인은 시를 영혼의 노동이라고도 이야기했는데, 계속해야 어떤 감각이나 생각의 탄력이 유지되니까요. 저보다 오랜 세월 동안 쓰신 분 중에서 아직도 탄력 있는 상상력을 보여주는 분을 보면 놀라워요. 그만큼 시에 대해 고심하고 언어에 관해 고심한다는 뜻이죠.


나이에 따라서 발언할 책무가 달라지잖아요. 상을 타면서도 짐이 또 늘어나고요.


억지로 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절로 두드러져 생겨나야 하고, 생겨나서 또 두드러지는 거겠죠. 짐이나 책무도 감당할 수 있는 부분에서 역할을 해야겠죠.


시인 문태준이 짐을 감당하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시 쓰기일까요?


지금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시를 쓰는 거죠.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좋은 시를 소개하는 사람의 역할도 하고 싶어요. 제가 읽은 좋은 시를 나름대로의 눈으로 설명을 보태서 시가 생소하다고 느끼신 분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요. 양주에 장욱진 미술관이 있어요. 거기서 그림을 보면 아이의 마음 같은 것들이 그려지고, 아이의 관점으로 공간을 해석해요. 장욱진이 늘 했던 말이 ‘나는 심플하다’는 말이었어요. 그 사람이 그림을 통해서 유일하게 증명했던 말이죠. 그림을 그리면서 늙고, 끝내 그림이 자기의 일생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건데, 저도 그 이상 바라지 않고 시를 심는 사람으로서 계속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미술관에도 자주 가시는 편인가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가요. 시집에 소개한 전혁림 화가의 그림도 좋고, 유영국의 추상미술도 좋았고요. 아이의 눈으로 그린 그림을 좋아해요.


시집에도 동시를 세 편 실었어요.


동시를 싣긴 했는데, 제가 저를 돌아보건대 아이의 마음을 잘 유지했는지 염려가 돼요. 아이의 호기심과 엉뚱한 질문을 하는 능력, 회복력, 슬픈 구석에서 밝은 쪽으로 마음을 돌려세우는 능력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동심, 아이의 마음이 계속 남아있으면 좋겠어요. 동심을 유지하는 것도 시 쓰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것 같아요.


“다양한 유행, 다양한 스타일을 내 시 안에 구현해낼 수 있다는 건 욕심”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한 시인이 모든 걸 다 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일생 동안 시를 써서 말하려는 건 단 하나여도 족해요. 그것이 깊어지면 더 좋겠죠. 여러 가지로 경향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저절로 세월이 쌓이면서 시의 생각 혹은 사상이 깊고 무르익는 시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달항아리를 만드는 사람이 달항아리만 만들면서도 그것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점점 더 깊어질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검색하다 보니, 고향에 문태준 생가로 가는 푯말이 생겼다고 하던데요.


아니에요. 생가는 작은 포도밭으로 바뀌었어요. 예전에 살던 집터에 부모님이 사실 수 있게 집을 새로 지었어요. 아마 도로변에 ‘문태준 시인의 집’이라는 푯말이 하나 서 있는데 그걸 보고 누가 이야기한 모양이에요.

 
이름이 붙은 푯말이 세워졌다니, 소식 들었을 때 기분이 이상했겠어요.


동네 어른들이 마음을 써 주신 거겠죠. 찾아오는 분들이 물으니까 안내하는 차원에서 세우신 것 같아요. 가끔 어떤 분들이 찾아서 들어 오시나 봐요. 집을 둘러보고 집안에 오셔서 커피도 한 잔 하고 가신다고 하더라고요.


독자들이 시를 읽고 도시가 아닌 곳에 살고 있을 거라 짐작하는 게 아닐까요?


행신동에 살고 있는데, 지금 사는 곳이 편해요. 날이 밝아오는 걸 보는 것도 좋고 눈 오는 아침도 잘 보이고요. 새 소리뿐 아니라 농가에서 기르는 짐승들의 소리가 많이 들려요. 일요일에는 교회의 종소리나 군부대에서 잠들기 전에 부는 나팔 소리도 들려요. 독특한 공간이죠.


요새는 어떤 시를 쓰고 계시나요?


최근에 시집을 내고 짧은 시를 여러 편 쓰고 있어요. 섬광의 느낌이랄까, 어쩌면 다음 시집은 2행이나 3행에 그치는 시, 시행이 많지 않은 시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태준 저 | 문학동네
그의 시를 닮아 하루해가 변하며 만들어내는 하늘 색, 구름이 만들어내는 무늬, 계절이 바뀌어갈 때 물들어가는 잎처럼 천천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시인 특집] 김현, “또 하나의 필터를 거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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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면서 입술을, 그의 말을 주목해서 보게 되었다. 이번 시집 제목이 『입술을 열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이제까지 “뽀뽀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혐오와 차별에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시인 김현은 소수자로서 경험한 일을 글로 밝히면서 변화를 바랐고, 글 바깥에서는 직접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는 304낭독회와 한국여성의전화 자원봉사, 청소년 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자원봉사 등에 참여했다. 침묵을 깨고 입술을 열어 발언하는, 시인이자 시민의 이야기. 입술을 연 그곳에서는 ‘슬픔의 송곳니가 빛나’지만, ‘가만히 흰 말이 가만히 기쁜 말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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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로 꾸려지는 세계


이전 시집 『글로리홀』은 서브텍스트가 많았었죠. 『입술을 열면』은 또다른 느낌이에요.

 

시집을 꾸릴 때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이번 시집에서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야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다른 방법으로 썼어요.


항상 그게 신기해요. 따로 발표한 시가 시집으로 묶이면 어떤 세계가 그려지더라고요.


처음부터 시집으로 엮이는 세계를 그리면서 쓰는 편이에요. 어떤 시집을 묶을까 염두에 두고 다음 시를 쓰거든요. 이를 테면 『글로리홀』뒷표지에 적힌 「인간」은 『입술을 열면』 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들게끔 하고 싶어서 일부러 각주 모양만 넣고 각주 내용을 달지 않았어요. 『입술을 열면』에도 다음 시집과 연결되는 구절을 넣었고요.


영화 마지막에 다음 편을 예고하는 장면이 들어가는 것처럼요?


맞아요. 하나가 끝났다고 해서 이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기보다, 어쨌든 한 작가가 쭉 자기 작품세계를 끌고 가는 거니까 마치 시리즈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입술을 열면』에서도 각주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데, 각주의 모양이 다 달라요. 텍스트로 만든 일러스트라고 해야 할까요.


시하고 잘 어울릴 만한 기호를 바꿔가며 달았어요. 직관적으로 넣은 기호이긴 한데, 제목 앞에 어떤 기호가 붙느냐에 따라 시로 진입하기 전에 톤이 바뀔 것 같더라고요.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맞을 것 같아요.

 

 

글로만 아름다운 건 아니다 싶어요


『질문 있습니다』 와 『아무튼, 스웨터』등 산문집이 비슷한 시기에 나왔어요.


다들 한꺼번에 책을 내니까 제가 성실하게 글을 쓴다고 이야기하시지만, 제가 거절을 잘 못해요. 산문 청탁이 들어오면 다 받는 편이에요. 너무 쫄보여서 원고 펑크도 못 내고요. 그러다 보니 원고가 차츰차츰 쌓이기도 하고, 옆에서 편집자 분들이 으쌰으쌰 독촉과 응원을 잘 해주셔서 빨리 쓸 수 있게 됐던 것 같아요.


산문도 즐겨 쓰시나요?


산문 쓰기에 대한 욕망이 있어요. 외국 작가들이 등단이나 특별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시나리오나 그림책 등 다방면으로 집필하는 게 멋있어 보이거든요. 시인이라고 해서 시만 쓰고 싶진 않아서 긴 글이나 산문 쓰기에 대한 욕망이 있었는데, 청탁이 왔을 때 그 욕망이 발현된 것 같아요.


시에 나온 등장인물, 시를 쓰던 상황 등이 산문에 나와요. 시의 뒷배경을 소개한 느낌이었어요.


예를 들어 『걱정 말고 다녀와』 에서는 문학적인 산문을 쓰고 싶지 않았어요. 켄 로치라는 감독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쓰는 산문인데, 켄 로치라는 감독의 스타일을 제가 멋진 문장이나 아포리즘으로 가리면 안되겠다 싶어서 김현이라는 사람의 민낯과 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주려고 했어요. 자연히 시를 어떻게 쓰고, 뭘 쓰게 됐는지가 자연히 녹아들었죠..


‘생활의 가까이에서 생활에 가까운 것을 경계하며’ 시를 썼다고요.


시는 또 하나의 필터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커피를 내려마실 때 원두 가루를 갈아서 채워넣고 물을 부으면 필터에 걸러 나오는 것처럼요. 산문은 재료만으로도 무슨 맛인지 말할 수 있지만 시는 그 재료를 어떻게 추출해내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아요. ‘예술가의 광기는 남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쓴 이유도, 최근 예술가의 광기나 자유를 방패 삼아서 폭력을 일삼았던 분들이 계속 드러나잖아요. 그분들한테 생활이 그렇게 만신창이인데 글로만 아름다운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분들이 이야기하는 예술가의 자유와 광기와 혼은 안에 있어야 하는 거지 밖으로 빼내서 본인 입으로 이건 예술가의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맞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잘 돌려 깎아서 썼어요. (웃음)


이 시집의 시들은 생활의 가까이에서 생활에 가까운 것을 경계하며 쓰였다. 예술가로서 나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더 웃고 더 잘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에게 맞는 평화가 이어지길.

- 시인의 말 중


말씀하신 대로 생활이나 사회문제를 직접으로 드러내지 않고 ‘돌려깎는’데, 그런 중에도 해학이나 웃음,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는 감정이 있었어요. 제일 좋았던 문장은 ‘언제까지 부채춤을 추게 할 거야’였는데요. 부채춤을 추면서 ‘동성애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말을 가져왔어요.


전복시키고 싶었어요. 그 말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든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들이 있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고」에서 썼던 여성을 지칭하는 말, 꽃이나 동굴 같은 고정관념을 거부하겠다는 말도 어쨌든 전복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 거죠. 그들은 혐오의 말로 썼는데 그 말을 제 시로 빼앗아와서 혐오하지 않는 말로 바꾸고 싶더라고요. 그들이 그 말을 뱉었을 때는 너무 혐오적인데 그걸 다른 시적 방식으로 쓰니까 우리 말이 된 것 같다는 분도 있었고, 많이들 통쾌해 하세요.


원래 제목을 ‘조선마음’으로 생각하셨다고 들었어요. ‘조선마음’이 제목이었다면 의도했던 전복의 의미가 더 강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막상 교정지를 받아서 다시 보니까 ‘조선 마음’이 이 한 권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묶고 보니 입술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더라고요. 원래는 마음을 앞에 내걸고 싶었는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제 시가 마음보다 더 적극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조금 더 능동적인 제목을 달아보자는 생각으로 ‘입술을 열면 미래가 나타나고’로 했는데, 편집부에서 제목에서 독자들의 몫이 없는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셔서 ‘입술을 열면’ 하고 나머지를 남겨뒀어요.


‘조선마음’에서 조선은 ‘헬조선’에서 나온 말인가요?


조선이라는 말이 특이하잖아요. 왜 ‘헬대한민국’이 아니고 ‘헬조선’이었을까요? 여러모로 찾아보니 변영로 시인이 『조선의 마음』이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더라고요.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혼과 정기를 잃지 말고 조선인으로서 독립에 힘쓰자는 내용이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조선의 얼, 혼, 정기가 뭘까? 싶은 생각이 들고, 실은 헬조선이 그 조선의 얼과 혼을 가져다가 비꼬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도 조선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전복시키고 싶었어요. 포르노 배우가 등장하는 시에 조선마음, 게이나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시에도 조선마음을 붙여보고요. 일부러 가져와서 이런 것들 것 조선의 얼과 혼이 아닌가? 묻는 거죠. 그렇게 제목을 붙여놓으면 끝났다는 마음이 드는데, 뭔가 조선 마음을 가지고 또 쓰고 싶어져서 연작으로 몇 편을 썼어요.


사회적 이슈에 따라 글도 달라질 것 같아요. 시집에는 박근혜 전대통령 퇴진운동이 일어났던 2013년부터 2015년 즈음까지 쓴 시가 묶였는데, 요새는 어떤 글을 쓰게 되나요?


최근에는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시를 주로 쓰고 있어요. 세월호 사건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런 시가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월호 사건 이후 돌아오지 않는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304낭독회를 오랫동안 같이 하면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다 보니 호명하는 시가 자연스럽게 쓰이더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사회 문제에 따라서 글도 다르게 쓰이는 것 같아요. 충남인권조례 폐지와 미투 운동도 있고요. 지금은 성소수자 인권이 첨예한 이슈인데, 그런 문제를 자연히 글로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시 안에 사회적 쟁점을 넣으면 생기는 효과가 있어요. 예를 들어 시 안에 ‘박근혜 하야’ 같은 말을 넣으면 시가 생뚱맞아지면서 시적으로 바뀌거든요. 서정적이다가 갑자기 아주 비서정적인 게 들어가면서 시의 분위기가 활발해져요. 그런 분위기가 좋기도 하고, 에너지가 느껴져서 일부러 그런 말을 쓰려고 하고 있어요.


생뚱맞아 보이는 사회 참여의 말이 서정의 일부라는 생각을 해요. 이게 소수자의 서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맞아요. 『글로리홀』 도 사람들이 늘 야하고 전위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너무 서정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웃음) 한 편의 시 안에 서정적인 면, 참여적인 면, 전위적인 면 모두 있는 게 개인적으로는 저한테 맞는 형식인 것 같아요. 아주 서정적인 사랑의 시 안에, 들어가면 안 되는 말이 결합하면 그것도 나름의 서정인 거죠. 한 편의 시를 놓고 노동시와 서정시, 참여시, 여러 가지 갈래로 읽히는 건 아주 좋은 일이에요. 『입술을 열면』 에서는 다양한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싶어서 디졸브라는 설명을 붙여가면서 장면을 겹치는 것처럼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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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팔짱을 끼는 사람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시인 김현을 호명할 때는 ‘문단 내 성폭력’과 ‘미투 운동’을 주제로 말하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이름을 걸고 이야기하는 데 부담은 없나요?


문단을 고발하는 ‘질문 있습니다’를 썼을 때는 이 정도로 퍼질 줄 몰랐어요. 계간지를 읽는 사람들만이라도 문학장 안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대상화, 폭력의 문제를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많이 읽히면서 그 때는 부담스러웠었죠. 이후에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던 작가들의 응원도 있었고, 연대의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부담감을 떨쳐낸 거고요. 계속해서 재조명 하고 발언하는 것은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제가 지정성별이 남성이기도 하고, 문지라는 곳에서 시집을 냈던 사람이잖아요. 여러 가지를 겹쳐 보면 어쨌든 이 안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발언권을 독점하지 않을지 경계하고는 있어요. 더 오랫동안 고민해 온 여성주의 기반의 선생님들, 실제로 문제를 증언한 생존자분들도 많고요. 그래서 거절할 것들은 거절하고, 기획보도에서 남성 문인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참여하고 있어요.


성폭력 사건이 재점화 되면서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하지만, 언제 여론이 뒤집힐지 알 수 없어요. 피해자가 얼굴을 나타내면 또 가해가 일어나는 상황이잖아요.


문단 내 성폭력이 터졌던 초반에 어떤 분들이 문단을 도매급으로 묶어서 욕 먹게 하지 말고 피해 당한 바가 있으면 실명을 밝히라고 한 적이 있어요. 너무 충격적이었죠. 대다수 성폭력 문제에서 실명을 밝히면 반짝 했다 금방 잊히고 명예훼손과 무고 등으로 피해자 삶이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그런 쉬운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질문 있습니다’를 쓸 때도 제가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 서술하고, 이런 피해들로부터 여성주의를 알게 되면서 용기 있게 생존했다는 걸 밝힌 이후에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어요. 그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했고요. 젠더나 위계, 폭력 같은 것들을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고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여 소화한 이후에야 문제와 관련한 청유가 나올 수 있다고 봐요.


본인의 투쟁을 ‘겁먹은 투쟁의 방식’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지만, 거의 최전선에 서 계신 느낌이에요.


저는 최전선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가장 앞에 계신 분들은 고발하는 분들이고, 저는 그분들이 중심에 서서 팔짱을 내면 같이 팔짱 끼고 대오를 만드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처럼 가끔 팔짱 끼고 같이 구호도 외쳐 주고,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최전선에 있는 분들도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만 하더라도 남자 페미니스트들은 버리고 간다, 성소수자 이슈는 성소수자들이 해결하라는 주장이 있어요. 여러모로 복합적인 위치라고 생각하는데요.


예전 같으면 ‘왜 그렇게 운동 하냐’ ‘그게 말이 되냐’ 하면서 발언 했을 텐데, 지금은 내 운동 방식이 옳고 너의 운동 방식은 잘못됐다는 대립은 피하려고 해요. 이것 역시 쫄보기 때문이겠죠. 그렇다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아니에요. ‘잘하세요, 저도 여기서 이렇게 잘할게요.’ (웃음) 이런 거죠. 결과적으로 성소수자 운동, 장애인 활동, 전부 생각하는 지점이 다를 텐데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상이 그려질 거라는 생각이 있어요. 너무 나이브하죠?

 

모든 일에 첨예하려면 힘들죠.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도 필요해요. 그런 첨예함을 거치고 나면 여러모로 상처가 되고, 잠시 멈추게 되기도 하고, 그 이후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 주저하게 될 때가 있죠. 그 과정을 통해서 또 여러모로 성숙해지기도 하고요. 그 과정을 다 거쳐온 건 아니지만, 작은 마음으로 제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에요.


김현 시인에게 ‘제 일’은, 결국 문학이 되는 걸까요?


문학이 될 수도 있겠고요.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를 나누지 않겠다는 운동의 방식일 수도 있고요. 그런 방식이 자연히 시적으로 녹아들기도 하니까 그게 어쩌면 시를 쓰는 행위가 될 수도 있겠죠.


사회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부대낌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예술로서 피해자가 있는 사건을 소재로만 다룰 수 있다는 위험까지 비롯해서요.


그건 정말 경계를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직접적으로 가져다 쓰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아까 시는 필터가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그게 표현적인 검열뿐만 아니라 애초에 어떤 토대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도 포함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상화하거나 소재로 쓰면 안 된다는 검열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요. 다 드러내고 구호적으로 쓰는 것도 의미와 가치가 있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에두르거나 필터를 하나 거쳐서 나오는 게 제가 하고자 하는 예술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예술로 다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있어요. 자아분리까지는 아니지만, 시로 할 수 있는 건 시로 하고 시민으로서 할 일은 시민으로서 하는 거죠. 굳이 시민으로 한 일을 예술로 또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서, 생각보다는 덜 힘들어요. (웃음)


 


 

 

입술을 열면김현 저 | 창비
낮과 밤처럼 연속되는 우리의 사회현실에 대한 시인의 담대한 저항이자 이 상황을 함께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민낯을 오래 바라본 다정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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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토리코, 변박으로 만드는 극한의 유니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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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뒤엎는 전개와 끝 간 데 없이 변하는 박자, 여기에 광란에 가까운 밴드 사운드까지. 한번이라도 들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토리코는 어떤 팀도 흉내낼 수 없는 극한의 유니크함을 지닌 팀이다. 5년 전 <Rock in Japan>을 찾은 필자의 달팽이관에 균열을 가했던 그들이, 그간의 진화를 인정받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작년 선보인 3번째 앨범 <3>(2017)은 새 드러머를 맞아들여 완성한, 자신들만의 감성을 좀 더 파워풀하면서도 친숙하게 담아낸 작품. 보컬 나카지마 잇큐는 “좀 더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곡을 만들어야하나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라고 말하며, “그래도 결국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정답임을 알게 되었다.”며 이전보다 확고해진 밴드관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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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내한인데,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나카지마 잇큐(이하 나카지마) : 아시아 투어는 몇 번 진행했었는데요. 일본에서 한국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아서 한국의 문화를 자주 접하기 때문에 굉장히 영광이라고 생각했어요.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잠비나이의 초청으로 오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카지마 : 2014년에 처음으로 유럽투어를 갔었는데요. 대부분이 페스티벌 출연이었습니다만, 거기서 두 군데 정도 잠비나이와 같은 날에 라이브를 하게 되었었어요. 그 페스티벌에 출연한 아시아인이 저희랑 잠비나이 뿐이어서, 특별한 만남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올해도 영국의 페스티벌에 같은 날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때 오퍼를 받았습니다.

 

각자 어떻게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뮤지션이 있었는지요.


나카지마 : 저는 주로 제이팝을 듣고 자라서요. 가장 좋아했던 것은 모닝구 무스메였어요. 그 전에 스피드도 굉장히 좋아했었고요.


키다 모티포(이하 키다) : 시이나 링고, 넘버 걸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마침 집에 아버지가 취미로 치고 계시던 기타가 있어서, 한번 쳐보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히로미 히로히로(이하 히로미) : 한 살 많은 친구가 밴드부였는데, 공연에 초대를 받았었어요. 진짜 멋지다고 생각했죠. 와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고. 그렇게 그 학교 밴드부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베이스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그 선배가 베이스를 치던 게 멋있어 보였어요. 그리고 베이스는 좀처럼 인기가 없잖아요. 기타나 보컬에 비해서(웃음) 오히려 더 연습에 집중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고르게 되었어요.


요시다 유스케(이하 요시다) : 저는 폴리식스요. 폴리식스를 보고 밴드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음계를 모르니 드럼을 치자! 싶었죠.(웃음)

 

밴드의 결성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나카지마 : 저와 기타(키다 모티포)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고요.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었어요. 베이스(히로미 히로히로)는 옆 동네에서 밴드를 하고 있었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밴드생활을 시작했는데, 얼추 비슷한 타이밍에 각자 하고 있던 팀이 해산되었죠. 저의 권유를 통해 20살 즈음 지금과 같이 팀이 결성되었습니다. 드럼(요시다 유스케)은 작년에 오디션을 통해 합류, 1년 정도 서포트를 해주다가 작년 11월에 정식 멤버가 되었고요.

 

처음 토리코의 음악을 들었을 때 굉장히 독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변박이 많아 항상 예상외의 전개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음악스타일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나카지마 : 저희가 활동하고 있던 교토의 밴드신에선 변박자를 활용하는 팀이나 인스트루멘탈 밴드가 많았어요. 그래서 이런 음악이 '보통'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유행이기도 했고 멋도 있었고. 생각해보면 도쿄에는 그런 팀들이 별로 없었어요.


히로미 : 교토에는 '교토 신'이라는 것이 확실히 존재하죠. 다만 대단한 음악들을 하면서도 그렇게 인기가 많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연주와 멜로디가 반대편에 있어,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내는 에너지야말로 밴드의 매력이 아닌가 싶은데요. 가만 들어보면 인스트루멘탈을 먼저 만들고 후에 멜로디를 붙인다는 느낌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식으로 작업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나카지마 : 아, 맞아요. 거의 전부 스튜디오에서 반주를 만들고, 뒤에 노래를 붙이는 작업을 거칩니다. (그걸 바꿔보려고 한 적은 있나요라고 묻자) 한두 곡 정도 노래를 기반으로 만든 결과물들도 있는데요. 하지만 아무래도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게 이미지화하기가 용이한 것 같아요. 모두 모여 음을 내가면서 만드는 것이 좀 더 쉽게 느껴지네요. 보통 가사는 멜로디랑 같이 나오는 편이고요.

 

합주 난이도가 높아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나카지마 : 타이밍이라던지, 함께 있지 않으면 연습 자체가 불가능한 곡들이 많아요. 그래서 자주 모여서 연습하죠. 스튜디오에 있는 시간이 꽤 길지도 모르겠어요. 그만큼 개인적으로 연습을 하냐고 하면 그건... 음... 어때?(웃음)


키다 : 만들고 있는 시점이 연습 같은 느낌이에요.


나카지마 : 아무래도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저희들끼리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꽤 시간이 필요한 느낌입니다.(웃음)

 

그건 팬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전원 : (웃음)

 

한참 앨범을 반복해 들은 후 토리코의 음악을 이제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앨범을 들으면 또 새로운 것 투성이라 '아, 팬으로서 더 노력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나카지마 : 죄송해요.(웃음)

 

아, 아니에요(웃음). 혹시 본인들에게도 연주가 힘들었던 곡이 있다면요.


나카지마 : 이번 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18, 19'라는 곡이 있는데요. 보통은 드러머한테 어렵다던가, 이 곡은 기타의 이 부분이 힘들다던가 하는 편인데. 정말 이 곡은 멤버 전원에게 어려운 곡이었어요. 합을 맞추는 것이 진짜 힘들었죠.


키다 : 후렴 들어가자마자 리듬을 놓친다던가(웃음).

 

가장 최근에 발매된 앨범 <3>은 어떤 테마를 가지고 있는지요.


나카지마 : 요시다 씨가 들어오면서 오랜만에 고정 드러머와 작업을 하게 됐어요. 이를 통해 축이 단단하게 잡혀 더욱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처음엔 특별히 생각한 테마같은 게 없었지만, 즐겁게 하자는 마음가짐만큼은 확고했어요.

 

말씀하신대로 요시다 씨와의 풀앨범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그로 인해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있을까요.


나카지마 : 이번에는 확실히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만들어간다, 같이 목표를 향해간다라는 의식이 강했던 것 같아요.

 

전작인 <AND>(2015)에서는 여러 뮤지션과 작업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카지마 : <AND>를 만들기 직전 드러머가 팀을 나갔어요. 그 땐 새로운 멤버를 찾기보단 당분간 세 명이 활동한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였죠. 대신 드러머가 없으면 공연을 할 수 없으니 누구라도 일단은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좋아하는 드러머들에게 오퍼를 보내기 시작했고, 모두 흔쾌히 승낙해주었죠. 그렇게 5명의 드러머와 하나의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저희보다 경력이 있는 선배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저희가 좋은 공부가 되는 경험이었어요.

 

요시다 유스케 씨는 멤버 모집을 통해 <KABUKU EP>(2016)애서 처음 토리코와 작업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지원하게 되었는지요.


요시다 : 토리코는 이전에도 팬으로서 보러 간 적도 있었어요. 당시 이런저런 팀의 서포트 뮤지션으로서 활동 중이었는데, 정식적으로 밴드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어요. 그때 드러머를 모집한다는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제 친구이면서 히로미 씨의 친구이기도 한 분에게 말이죠. 그 길로 응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KABUKU EP> 녹음했던 곡이 '?い壁(파란 버릇)'였죠. 긴장되진 않았는지, 다른 서포트 멤버들도 있었기에 경쟁의식이 있다거나 하진 않았는지요.


요시다 : 아무래도 제가 서포터를 주로 하던 사람이다보니 제 자신을 보여준다는 느낌보다는 하나라는 일체감을 부여하고 있는가에 대해 신경을 더 썼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시다 씨를 정식멤버로 가입시키게 된 이유가 있다면요.


나카지마 : 첫인상이죠. <KABUKU EP>에 참여한 드러머 네 명 중, 처음부터 함께 하고 싶다고 느낀 게 바로 요시다 씨였습니다. 다만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려, 대신 당분간 서포터로 기용해 함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어요. 함께 지내보니 곡을 제작할 때는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고, 라이브에서도 안정감이 생기는 느낌이었죠. 가지고 있는 센스가 지금의 토리코에게 필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전 드러머와는 타입이 달라 재미있기도 했고요. 어쨌든 동료가 늘어나는 것 자체가 플러스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멤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전작들보다 팝적인 느낌이 많이 난다는 일부 평단의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카지마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멜로디가 잘 녹아들었구나, 곡을 잘 살렸구나 싶어서 다행이라고 느꼈죠. (이때 작업하면서 주로 들었던 앨범이 있었냐고 묻자) 뭐 들었더라... 아 그러고 보니 함께 페트롤즈의 라이브를 보러 갔다가 'よそいき(외출)'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저희는 시디로 듣는 것보다 라이브로 보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공연에서 받은 감상을 곡에 반영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TOKYO VAMPIRE HOTEL'은 소노 시온이 감독을 맡은 동명의 드라마 주제가로 사용되었습니다. 해당 곡을 만들게 된 과정이 궁금한데요. 감독님으로부터 직접 요청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나카지마 : 제안을 받기 1년 전 쯤 소노 시온 감독님과 대담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시디를 건넨 것이 인연이 되었죠. 그러고 나서 1년 정도 지나 연락이 왔어요. 곡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요. 멤버 모두 소노 시온 감독님 팬이기도 해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드라마 촬영 현장에 초대도 해주시고, 2~3화 정도를 미리 보여주시기도 하면서 곡을 만들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를 가지고 세션을 거쳐 노래가 만들어졌죠.

 

결과적으로 전작과 비교해서 구사하는 음악의 범위가 넓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떤 부분이 변화 혹은 진화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나카지마 : '조금은 관객분들에게 전해지기 쉬운 곡을 만드는 것이 좋을지도'라는 생각을 멋대로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를 거쳐 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정답이라고 느꼈죠, <KABUKU EP> 때부터요. 그 과정에서 모두의 힘을 받다보니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유롭게, 즐기면서 하자라는 마음가짐을 최우선으로 한 덕분인지, <3>을 만들 때에는 유연하게 여러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이 많이 반영되지 않았나 싶어요.

 

해외 라이브 스케줄이 많은 편입니다. 해외에서의 경험이 쌓임과 동시에 공연에 대한 태도에도 변화가 있지 않나 싶은데요.

 


나카지마 : 일본에 있을 때는 MC를 통해 분위기를 재미있게 만들고 친밀감을 자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해외에서 라이브할 때는, 저희 영어가 능숙하지 못하니까 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자라는 감각이 되어서요. 그 마음가짐이 일본에서도 많이 반영된달까. MC란게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라이브에서의 말수가 많이 줄었어요.

 

세계적으로 그렇지만 교토는 한국에서도 굉장히 인기 많은 곳입니다. 쿄토 출신 밴드라는 것에서도 주목 받기도 할 것 같은데, 해외에서는 어떠신지요.


나카지마 : 교토라고 이야기하면 반응이 꽤 오죠. 하지만 '토리코는 교토 출신 밴드다'라는 인식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부 대중들에겐 토리코의 음악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페스티벌이 중요한 일본 음악시장이기에 '페스티벌에 어울리는 음악'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팀들도 늘어나고 있기도 합니다. 본인들 역시 페스티벌에 어울리는 일정한 리듬의 곡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신지요.


나카지마 : 저희들에겐 이제 일정한 리듬을 가진 곡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수준까지 와버려서요. 하지만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좋은 곡을 만들어낸다면 그게 정답이 아닐까 싶어요. 다만 페스티벌을 위해서 4박자의 곡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밴드가 설 곳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본인들이 느끼기에 교토의 밴드 신, 나아가 일본 록신은 어떤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키다 : 최근 전자음악이 많이 유행하는 걸 느끼긴 합니다만, 밴드는 밴드대로 썩어날 정도로 있는 것 같아요.(웃음)


나카지마 : 페스티벌을 비롯해 밴드가 주최하는 페스티벌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늘어나면 일본의 밴드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죠.

 

그러고보니 토리코도 다음달부터 <MUNASAWAGI>라는 밴드 주최 이벤트가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콘셉트인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나카지마 : 각자가 좋아하는 밴드를 초대해 한 달에 한 번씩 네 달 연속으로 개최하는 공연이에요. 각 멤버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공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각 어떤 팀들을 초청했는지요.


히로미 : 저는 로스테이지(LOSTAGE)와 바쵸(bacho)와 함께 합동공연을 꾸밀 예정입니다.


키다 : 밴드는 아니고요. 세부히로코(sebuhiroko)라는 영화음악을 하시는 분과, 워즈니악이라는 밴드인데요. 멋있다고 생각해 이번에 같이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나카지마 : 키노코테이코쿠(きのこ帝國)와 도미코(ドミコ)요.


요시다 : 역시 폴리식스죠.

 

여담이지만 나카지마씨는 요즘 음악예능 프로그램인 <Bazooka!>의 프로젝트 밴드 제니하이의 보컬로 활약하고 있으십니다. 누군가 만들어주는 곡을 부르는 것은 스스로 만든 곡을 부르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둘 간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나카지마 : 정말 달라요. 이제 한 곡 녹음했는데, 그 곡도 제가 토리코의 연주를 들으면서 만드는 멜로디와는 전혀 다른 타입입니다. 제가 만들면 저 자신이 부르기 쉽도록 만드는 측면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렵게 느껴졌어요. 굉장히 공부가 되기도 했고요. (프로듀싱을 맡고 있는 카와타니 에논의 스타일은 어떠냐고 묻자) 레코딩 중 디렉션 같은 것도 저와는 완전 달랐어요. 토리코의 경우에는 제가 만드는 멜로디가 정답 혹은 종착지가 되니까, 크게 문제가 없는 이상 뭔가 크게 디렉션을 들을 일은 없죠. 하지만 카와타니 씨의 목표랄까, 타인에게 이끌려가는게 꽤 힘들더라고요. 서로 의지하며 골인 지점을 향해 가는 작업은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결성한지 벌써 햇수로 8년째입니다. 내후년이면 10주년인데, 혹시 그때 해보고 싶은게 있으신지요.


나카지마 : 아직 실감이 안 나네요.(웃음) 정말 크게 축하하고 싶어요. 한 번뿐이니까요.


토리코(tricot) : 나카지마 잇큐(기타, 보컬), 키다 모티포(기타, 코러스), 히로미 히로히로(베이스, 코러스)의 세 명의 구성으로 2010년 9월에 결성. 종잡을 수 없는 변박과 트리키한 기타 사운드, 대중성을 갖춘 멜로디의 삼박자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교토 출신의 밴드다. 일본을 넘어 영국의 NME와 미국의 롤링스톤에 게재되고 북미 및 유럽 투어 또한 꾸준히 실시하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팀으로 거듭나고 있다. 작년 11월엔 요시다 유스케(드럼)가 정식으로 가입, 현재 4인조로 활동 중.

 

 

진행 : 조아름, 황선업, 김도헌
정리 : 황선업
협조 : 더 텔 테일 하트(The Tell-Tale Heart)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고준석 “소득절벽이 곧 은퇴다, 은퇴에 초점을 두고 투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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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94년부터 부동산 시장을 들여다보고, 은행원으로는 처음으로 PB겸 부동산전문가로 자리매김한 바 있는 고준석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장. 강의로, 칼럼으로 부동산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소개하고 이른바 ‘부자되는 비결’을 전하며 대중과 만나온 그는 사실 대기업 회장, 유명 연예인들의 ‘부자 멘토’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생민. “실전 이론을 겸비한 부동산 전문가를 멘토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고준석 센터장은 결정 후에 신속하게 행동한다는 점, 끊임없이 공부한다는 점, 배우자와 합심한다는 점 등을 부자들의 공통점으로 설명했다. 특히 강조한 것은 종자돈을 만들기 위해 지출 관리부터 하라는 조언. 이것은 <김생민의 영수증>에 자주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은퇴부자들』 , 『경매부자들』등으로 여러 부자들의 사례를 들려줬던 저자는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만나라』 에서 오피스텔, 상가, 다세대 주택 등에 투자 했다 실패한 사람들이 이후 어떻게 공부하고 마침내 부자가 되었는지 자세히 소개한다. 은퇴 준비로써 부동산을 공부할 것, 언제나 소득이 지출보다 많게 할 것, 임대수익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수익이라는 점을 알고 투자할 것, 분위기에 편승하지 말 것 등 이제 막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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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에 편승해서 투자하지 말아야


책에 등장하는 ‘부자’들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하나같이 실패의 쓴 경험이 있었다는 점인데요.

 

책의 부자들은 재산을 물려받은 부자가 아니죠. 자수성가한 부자들의 이야기고요. 이들은 모두 자수성가의 과정에서, 특히 부동산 투자에 있어 실패를 다 경험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라고 스스로 느끼고, 공부를 한 다음에 투자에 나선 분들이죠. 이제는 과거처럼 누가 찍어줘서 부동산을 사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직접 공부를 해서 투자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찍어준 것에 투자해서 1-2억은 벌 수 있겠죠. 그렇지만 찍어준 것만 가지고서는 그 이상의 부자는 못 돼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부동산 공부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책에서는 투기와 투자의 차이도 정확히 짚고 있어요.


공부의 기본은 부자가 되기 전에 자산관리를 하던 습관, 생각 등을 바꾸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을 바꾸지 않으면 부자가 안 된다는 거죠.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가야 해요. 공부가 그거죠. 바꾸지 않으면 똑같아요. 요즘 맞벌이 부부 많잖아요. 각자 벌어 각자 생활비 내놓고, 따로따로 지출하고 따로 모으면 정말로 부자가 될 수 없어요. 수입은 단돈 1원이라도 배우자와 공유하고, 지출은 1원 한 장이라도 통제해야 하는 거죠. 수입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이 한정된 수입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거든요. 여기에는 또 방점을 주식과 같은 금융자산에 두느냐, 부동산에 두느냐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이제는 은퇴 후가 워낙 길어졌잖아요. 어떻게 보면 은퇴 전보다 은퇴 후가 더 길거든요. 어떻게 은퇴 이후를 살아갈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자산관리인 것 같아요.

 

공부하지 않고 하는 투자 사례가 워낙 안타까우셨던 거죠?


여행을 갈 때 어디를 갈지 미리 보고 가는 것과 그냥 가보자 해서 가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장단점이 있겠지만 돈이라는 것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주워 담기가 힘들거든요. 정확히 알고 투자하는 것이 중요해요. 무작정 분위기에 편승해서 투자하지 말아야죠. 그런 경우가 제일 안타깝거든요. 청약 경쟁률이 몇 대 몇이다, 어느 모델 하우스에 몇 만 명이 다녀갔다, 이러면 ‘어? 나도 투자해야 하는 것 아냐?’라면서 투자에 나서잖아요. 그런 것들이 문제라는 거예요.

 

이 말씀은 각자의 상황에 맞는 투자가 존재한다는 의미일 거예요.


내가 1억을 가지고 있는데 소득수준 등을 생각하지 않고 대출을 엄청 받아서 다른 사람들이 투자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되겠죠. 그렇게 무리해서 투자하는 경우가 안타까워요. 그 투자가 잘 되면 모르겠지만 생각처럼 안 됐을 때 곤란을 겪으니까요. 임대수익률도 안 나오고, 임차인도 안 들어오고, 이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또 오피스텔에 투자했는데 주변에 소형 아파트가 많이 들어와서 임차인도 못 구하는 위험도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사전에 착실하게 공부를 했다면 방지할 수 있는 요소들이거든요. 주변에 소형 아파트가 얼마나 들어오는지 미리 점검을 해봤다면 그 오피스텔에는 투자하지 않았겠죠.

 

잘못된 투자를 하는 분들이 특히 많이 하는 실수는 뭔가요?


돈이 3억에서 5억 정도 있으신 분들이 실수를 많이 하세요. 이 돈이 있으면 왠지 부동산에 투자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시나 봐요. 3억에서 5억이 적은 돈이 아니거든요. 그 연령대가 은퇴를 앞두고 계신 분들이 많잖아요. 은퇴 후에 50만원, 100만원 월세라도 받기 위해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건데요. 이런 분들이 실패를 많이 해요. 그때까지의 자신의 경험을 믿고 투자하는 거죠. 아파트 계약 몇 번 해보고, 전세 계약서 몇 번 써보면 부동산 전문가인 것처럼 투자에 나서는데요. 그래선 안 돼요. 부자일수록 멘토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거든요. 왜 그 사람들은 부동산 투자로 많은 돈을 벌었는데도 혼자가 아니고 왜 곁에 항상 멘토가 있는지, 이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네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 분야의 전문가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동행해요. 자기 과신이 가장 위험합니다.

 

자기 과신이요.


지금까지 사회생활도 너무 잘했고, 집 산 것도 괜찮았으니 상가에 투자하는 것도 잘 될 거야, 라는 생각이죠. 그런데 상권은 변하거든요. 지구가 매일 돌듯 상권도 변해요. 그런데 자기 과신 때문에 그걸 간과하게 되는 거예요. 지구가 도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경험은 다르거든요. 상권이 변한다는 사실을 그 시장을 쭉 관찰해오지 않았던 사람은 못 느껴요. 그걸 모르고 덥석 투자했다가 주변에 대형 마트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요. 예를 들어 영등포에 ‘타임스퀘어’가 들어왔잖아요. 그 전에 투자한 사람들이 있어요. 사지 말라고 말렸는데 말이죠.

 

타임스퀘어는 경방의 대작품이다.(중략) 이쯤 되면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영등포지역의 상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비문화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단순한 구매 위주의 소비가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한 곳에서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즐기면서 구매하는 소비문화로 바뀌었다.(236쪽)

 

 

매년 자산관리 계획 세워야


기억에 남는 상담 사례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그런 사례를 책에 담은 건데요. 책을 쓰면서 고민했던 게 이 책에 등장한 분들은 정말 조금 벌어드린 분들이라는 거였어요.(웃음) 많이 벌어드린 분들 너무 많은데 그분들 이야기를 쓰면 읽는 분들이 괴리감을 느끼게 될까봐서 담지 못했거든요. 오히려 책에 있는 사례들은 정말 적게 번 분들이에요. 부자가 되어가는 분들이죠. 이렇게 꾸준히만 하면 은퇴할 때 10억 정도는 벌 수 있겠다, 싶은 분들인 거죠.

 

책의 사례에서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공통점은 어떻게든 종자돈을 만들기 위해 소비를 극도로 절제하는 대목이었거든요. <김생민의 영수증>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김생민 씨의 소비습관을 만드는 데에 아주 오래 걸렸어요.(웃음) 부자일수록 멘토가 있거든요. 조언을 잘 듣는 게 굉장히 중요하죠. 또한 부자일수록 배우자와 함께 하는데요. 항상 상의하고 자산관리를 하기 위해 배우자와 같이 움직여요. 중요한 점입니다. 또 부자들은 의사결정 단계에서는 아주 신중하지만 결정이 끝난 후에는 신속하게 실행해요. 이런 점들이 부자의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부자들은 자나 깨나 자산관리를 하거든요. 하지만 부자가 안 되는 사람들은 자산관리에 그렇게 많은 신경을 안 쓰죠. 월급날 통장에 얼마가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정도잖아요.(웃음) 돈을 모아서 만기가 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안 해요.

 

실물자산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금융자산의 확보가 선행되어야 하잖아요.


책에 금융자산을 모으는 방법도 쓰려다가 안 했어요. 책의 주제에 벗어날 것 같아서 그랬는데요. 돈 모으는 방법도 중요하거든요. 월급에서 백만 원을 저축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매년 적금을 탈 수 있게 운용해야 해요. 매년 자산관리 계획을 세워야 하는 거죠. 이런 거예요. 직장 초년생은 처음 3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종자돈을 모아야 하는데요. 방법은 1년짜리, 2년짜리, 3년짜리 적금을 각각 드는 거예요. 백만 원을 가지고 3년짜리 적금을 드는 게 아니고 30만원, 30만원, 40만원을 매달 불입액으로 넣어두는 거죠. 그러면 1년짜리 적금으로 360만원을 만들잖아요. 그걸 다시 다음 해에 2년 모은 돈에 합쳐요. 또 1년짜리 적금을 모아서 다음 해에는 3년짜리에 들어가고요. 2년짜리 적금 탄 것은 3년짜리에 넣고, 이런 식으로 매년 적금을 타도록 해야 해요.

 

백만 원으로 3년짜리 적금을 들면 안 되는 이유는요?


중도 해약하게 되어 있어요. 1년짜리는 그럴 확률이 덜하죠. 1년 기다려서 모은 돈을 보면서 계획을 세울 수 있거든요. 3년째 되면 목돈이 되잖아요. 목돈을 가지고 이제 ELT(주가지수연계신탁)나 ELD(주가지수연동예금), MMF(단기금리연동제투자신탁) 등을 운용하면 적금보다 훨씬 금리가 높거든요. 돈은 합쳐야 해요. 흩어져 있는 돈을 합치자. 그렇게 매년 적금을 타는 시스템을 만들어두면 그 다음은 실물자산 투자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천만 원을 모았다면 그걸로 오피스텔을 청약하겠다, 하는 계획을 연초에 세울 수 있잖아요. 이런 계획은 종자돈이 있어야만 세울 수 있으니까 가용한 흐름을 먼저 만들어두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돈은 항상 수입의 한계가 아니라 관리의 한계 때문에 없는 거예요.

 

보통 ‘돈이 없다’고 할 때 수입이 적다고 생각하게 마련인데요.


300만원을 가지고도 경매로 땅을 살 수 있어요. 2년을 모으면 얼마를 모으게 되겠습니까. 천만 원이 넘어가게 되잖아요. 이렇게 돈이 보이면 돈을 안 쓰게 되어 있거든요. 모르면 자꾸 깨고 싶어요. 차 사느라고 깨죠.(웃음) 막연하게 적금으로 돈을 모으다 보면 그걸 깨기 쉽거든요. 중도해약해서 여행도 가고 말이에요. 하지만 눈덩이처럼 뭉쳐져서 가는 돈, 목적이 있는 돈은 내 돈이지만 함부로 못 써요. 꼭 투자를 하거나 내 집 마련을 하는 데 쓰죠. 그래서 저는 젊은 사람들이 돈 모으는 방법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서 꼽은 부자들의 특징 중에 배우자와 함께 움직인다는 내용을 좀 더 듣고 싶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부동산 투자에 실패하는 분들 중에 배우자가 반대해서 투자를 못하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해보려고 하는데 배우자가 “부동산 시장이 이런데 되겠어?”라고 하면 투자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는 부부들,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부들은 부자가 될 확률이 높고요. 실제로 부자가 돼요. 연예인들 중에서도 부부가 의견을 같이 해서 투자하고, 부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건 굉장히 중요해요. 더구나 혼자 하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분위기에 편승하게 되는 경우도 많거든요. 둘이 같이 고민을 하면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낫죠. 중요한 것은 이럴 경우에도 부부가 판단해서 투자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전문가를 찾아온다는 것이고요. 전문가한테 마지막 자문을 구한다는 점을 꼭 기억하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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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절벽이 곧 은퇴다


투자를 결심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것과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씩 짚어주시면 어떨까요?


부동산 투자는 은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이 중요해요. 당장 1년 만에 천만 원, 일억을 번다는 개념이 아니에요. 은퇴를 생각하면 투자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은퇴에 초점을 맞춰서 투자가 돼야지 그냥 일억 벌겠다, 이렇게 나서면 실패해요. 투자의 관점을 잘 파악하고 하자는 말씀을 우선 드리고 싶고요. 은퇴라는 것은 원래 50세 이후 퇴직을 의미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은퇴를 그렇게 안 봐요. 소득절벽을 은퇴로 봐야 합니다. 소득절벽은 시작도 안 해본 20대부터 올 수도 있고요. 30대에 올 수도, 40대에 올 수도 있는 거예요. 소득절벽이 곧 은퇴라는 생각으로 자산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은퇴 이후를 바라보는 자산관리는 세대 구분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이 의미심장하네요.


자산관리를 집안 대소사의 3순위나 4순위쯤에 두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건강관리를 그렇게 미뤄 두지는 않잖아요. 자산관리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대소사에서 1순위가 되어야 해요. 건강관리와 똑같이 해줘야 한다는 말이에요.

 

자산관리에 있어 부동산 투자의 강점도 거기에 있겠고요.


부동산은 실물자산이기 때문에 물가 상승률에 비례할 수밖에 없어요. 물가가 매년 2% 오른다면, 10년이면 20%가 오르는 거예요. 은퇴 전에 300만원 소득으로 살았다면 은퇴 후에도 300만원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놓는 게 은퇴 준비거든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300만원이 금융자산으로부터 나오도록 해둬요. 연금, 펀드 같은 것을 들죠.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지금의 300만원은 10년, 20년 뒤에 가치가 변하잖아요. 이걸 부동산으로부터 받도록 해놓으면 10년 뒤에도 같은 가치를 가지겠죠.

 

한편 자본수익과 임대수익을 구분해서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잖아요. 임대수익이 많이 강조되는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예요.


부동산 투자의 가장 큰 장점은 자본수익이에요. 아파트 투자를 할 때 전세 끼고 투자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파트를 월세 때문에 투자하는 게 아니잖아요. 5년, 3년을 갖고 있을 때 얼마가 오를 것인가를 보는 거죠. 금융자산 금리가 5%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자산이 아니라 부동산에 투자하는 이유는 자본수익 때문이거든요. 금융자산을 통해 매년 5%를 받는다 해도 5년 뒤 돈의 가치는 떨어지잖아요. 하지만 실물자산은 5%를 안 받더라도 5년 뒤 가치가 올라간다 즉, 자본수익이 난다는 거죠. 부동산 투자의 핵심은 자본수익이에요. 자본수익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2억에 오피스텔을 사서 매월 100만원을 받는다면 수익률이 6%거든요. 그렇게 3년을 받다가 일이 생겨서 팔려고 했더니 1억5천이라고 하면 어때요. 3년 동안 3,600만원을 가지고 세금도 내고 다 했는데 결국 그건 내 돈이었던 거죠. 이런 투자는 안 된다는 거고요. 이게 바로 임대수익에 꽂혀서 투자하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많죠?


너무 많아요. 상가나 오피스텔 분양 시장을 보면 ‘수익률 몇% 보장’이라고 하잖아요. 특히 상가가 그런데요. 편의점 입점 예정이라느니 수익률이 얼마라느니 해요. 하지만 절대 현혹되면 안 돼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상가를 가지고 있을 때 임대수익이 얼마인가가 아니라 몇 년 동안 보유하고 있을 때 몇 년 후에 얼마가 오를까가 고민이 되어야 한다는 거고요. 여기에서 답을 구했을 때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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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상권?


상권의 중요성을 상기했으니까 이른바 ‘슈퍼상권’의 특징도 설명을 부탁드려요.


해외든 국내든 그 지역만이 가지는 독특한 상권이 존재해요. 그것은 문화거든요. 문화가 형성이 되어야 하고, 문화가 유지되어야 해요. 압구정 로데오가 하루아침에 없어진 이유는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가로수길도 지금 그게 없어지고 있잖아요. 그곳을 걸으면서 살 수 있었던 독특한 것들이 없어지고 대형 커피숍이나 의류 매장이 들어서면서 점점 그렇게 됐어요. 이런 것들은 백화점 가면 살 수 있거든요. 상권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유동인구나 역세권 같은 것이 아니고요. 유동인구가 소비인구로 전환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또 소비수준이 높아야 하겠죠. 청담동은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대신 소비수준이 높아요. 경동시장은 소비인구가 많아도 소비수준이 낮죠. 그래서 투자 판단을 할 때 경동시장보다는 청담동이 낮다는 거예요. 하나를 팔더라도 마진율이 높아야 해요. 이런 곳이 좋은 상권이에요.

 

유동인구와 역세권에 속으면 안 되겠네요.


유동인구만 본다면 철원에 가야죠. 그 많은 군인들이 행군하는 곳에 상가를 놓으면 되잖아요. 역세권도 마찬가지예요. 서울에 역 없는 곳이 어디 있어요? 역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지하철과 버스가 교차하는 곳, 지하에서 올라와 지상에 머무르는 곳이 좋은 상권이죠. 사당역 같은 상권이 진짜 상권이라는 거예요. 지하로만 다니는 상권, 이건 의미 없어요. 나오질 않으니까요. 또 배후단지를 튼튼하게 끼고 있는 아파트 상권도 좋은 상권이에요. 이런 상권에 투자를 해야 해요. 이런 조건이 겹쳐 있으면 정말 좋겠죠. 홍대 같은 곳은 대학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있고, 젊은 사람들의 문화가 있기 때문에 좋죠. 강남역도 많이 겹쳐 있어요. 학원 문화가 있고요. 오피스 문화가 있고, 역세권이고, 뒤에 병풍처럼 아파트가 있고, 주변에 대형 쇼핑센터 같은 게 없어요. 게다가 독특한 술 문화까지 있잖아요. 그런 문화가 있어야만 상권이 흔들리지 않아요.

 

서울 외에 이런 장점을 갖고 있는 상권이 있나요?

 

해운대 같은 경우가 특수 상권이죠. 헤어져도 오고, 만나도 오고, 겨울에도 오고, 여름에도 오잖아요.(웃음) 항상 소비인구가 오는 상권, 이런 데가 좋다는 거예요.

 

혹시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상권도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북촌 올라가는 헌법재판소 앞길이 재미있어요. 보도를 좀 늘리고, 주차를 못하게 하면 그 상권이 좋을 것 같아요. 북촌이라는 문화가 있잖아요. 조금 넘어가면 삼청동이 나오고요.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상권이거든요. 인사동까지도 연결이 되고요. 저는 이곳을 주목하고 있어요.

 

곧 RTI(임대업 이자상환비율, Rent to income) 규제가 시행(3/26부터)된다고 하잖아요. 이런 정부 규제 정책들이 투자에 변수가 되기도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세요?


부동산 투자에서 나만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정부 정책보다는 스스로가 자산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일단 생각해야 할 것 같고요. 정책보다는 자신의 은퇴 스케줄에 맞춰서 준비를 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정부 정책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습니까. 이런 변화 속에서 부동산으로 자산을 갖고 있는 사람과 현금으로 갖고 있는 사람을 따졌을 때 누가 더 잘한 걸까요. IMF 때 부동산을 산 사람과 안 산 사람, 지금 어떤가요. 10년 전 금융 위기 때 부동산을 산 사람과 안 산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는 거예요. 정부 정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그런데 정부 정책만 고민하는 사람은 부자가 못 될 거예요.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만나야 하겠고요.(웃음) 제목처럼 말이죠.


책에 소개한 부자들의 부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시면 좋겠어요. 방만한 소비 습관을 고쳐가는 과정을 봐야죠. 사람들은 금리 0.1%라도 더 받으려고 이 은행, 저 은행 다니거든요. 그러려고 택시 타고 다녀요.(웃음) 1% 금리를 더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만 원 지출을 어떻게 줄이느냐가 더 중요해요.

 

그나저나 언제까지 지출을 줄여야 할까요? 언제가 은퇴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일까요? 책에 등장하는 부자들은 계속해서 다음을 준비하더라고요.


부자일수록 더 그만두지 않죠. 너무 잘 아니까요. 그때부터는 자식들 해주고요. 죽는 그날까지 하는 겁니다. 우리가 건강관리를 죽는 날까지 하잖아요. 부자들의 자산관리는 죽는 그날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나라를 세우는 것도 어렵지만 나라를 지키는 것도 어렵잖아요. 우리는 돈 버는 방법은 많이 배웠는데 번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는 안 배웠어요. 돈 버는 것보다 관리하는 게 더 힘들거든요. 관리가 중요해요.

 

저자의 자산관리 제1규칙은 뭔가요?

 

저는 주식 투자를 절대로 안 합니다. 은행원이면서 주식 투자를 안 해요. 펀드도 안 하고요. 펀드를 강권하지 않는 은행원이라고 기사가 나기도 했는데요. 저는 그렇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같이 공부하는 사이트에 동참해서 계속 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공부가 됩니다. 오프라인에서 교육 받을 기회가 있으면 교육도 한 번 받아보시고요. 그러면 자기에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더 중요한 것은 멘토를 잘 만나는 게 중요하겠죠. 실전 이론을 겸비한 부동산 전문가를 멘토로 만나는 것도 큰 행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부동산은 자산관리 측면에서 접근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특히 자산관리라면 은퇴 준비에 초점을 맞춰야 하니까요. 지출이 소득보다 많으면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언제나 지출보다 수입이 많아야 해요. 돈이 있다고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만나라고준석 저 | 길벗
그들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투자의 마인드를 재무장하는 것은 물론 실제 투자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과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하는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택규 “출판 번역가, 자격증 필수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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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되는 법』만큼 정직한 제목을 가진 책도 드물지 싶다. 부제는 ‘두 언어와 동고동락하는 지식노동자로 살기 위하여’다. 저자는 20년 이상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50여 권의 책을 옮긴 김택규 번역가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번역가가 사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곳에서 번역가로 산다는 것’으로 읽어도 좋다. 얇고 작은 책이라고 얕봤다가는 적잖게 당황할지 모른다. 이렇게 많은 정보들이, 이토록 빼곡히 담겨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는 까닭이다. 번역가의 현실에 대한 솔직한 고백,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문장의 매력 또한 이 책이 놀라운 이유다.

 

출판 번역가가 되는 법, 번역가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출판사와 계약이 이루어지는 과정, 인세를 책정하는 방식, 번역가의 생존법 등 『번역가 되는 법』 에는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번역가와 원작가의 관계, 좋은 번역에 대한 고민 등 깊이 있는 사유도 담겨있다. 번역가 지망생들이 가장 궁금해 할 부분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팁들을 모아 꾹꾹 눌러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번역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만한 책이다. 직업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늘 흥미롭다.

 

김택규 번역가는 1997년부터 중국어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에 있을 때  『죽은 불 다시 살아나』를 번역하면서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출판사 김영사, 웅진지식하우스, 글항아리의 중국 현대 소설 시리즈를 기획한 바 있고, 현재도 기획 번역가로서 자신이 매혹된 책들을 직접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아큐정전』 , 『사람의 세상에서 다시 죽다』, 『이혼지침서』, 『이중톈 중국사』 ,  『암호해독자』 ,  『논어를 읽다 』등 5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숭실대학교 중어중문과 겸임교수로 일하며 중국 소설과 인문서 번역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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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번역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할 뿐


“제가 번역한 책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닙니다”라고 쓰셨어요. 이제는 온전히 자신의 책을 갖게 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예전에 쓴 박사 논문이 책으로 나온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번역가 되는 법』 은 제가 쓴 두 번째 책인데요. 그렇게 큰 감흥은 없어요.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다 페이스북에 연재했던 것들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은 거거든요. 그래서 큰 기대나 감흥은 없는데, 지금까지 번역가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도와주신 분들에게 한 권씩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설레더라고요. 지난한 삶을 살아오는 데 있어서 참 바보스러운 짓을 한다는 눈길을 받을 가능성이 컸거든요.

 

바보 같다고요? 왜요?


대학원에 들어갔으면 교수가 되려고 해야 하고, 글을 쓴다고 했으면 빛나 보이는 창작자를 해야 된다는 일반적인 기대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도 대학 쪽에는 전혀 신경을 안 썼어요. 번역을 잘 하니까 소설을 써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내가 소설을 쓰면 누가 보겠냐고 했고요. 훌륭한 작가의 책을 번역해서 독자들한테 선보이면 제가 별 볼 일 없는 소설을 쓰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그렇게 번역가 생활을 해왔는데,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 분들이 있었어요.

 

『번역가 되는 법』 은 정말 막힘없이 읽혀요. ‘역시 베테랑 번역가가 쓴 책은 믿고 봐도 좋구나’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웃음).


그동안 번역, 번역학에 대한 사유와 짧은 글쓰기는 계속 했어요. 그것들이 쌓이다가 거의 최정점에 이르렀을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했고요. 그때부터 한 꼭지씩 페이스북에 연재를 했죠. 그리고 거의 7년 동안 대학원에서 중국어 번역학 수업을 했어요. 번역과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책을 보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생각했겠어요. 그게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거예요. 머릿속에서 굴리고 또 굴렸던 생각들이 많았기 때문에 끊김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번역하실 때도 ‘문장이 얼마나 매끄러운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책에서도 단어의 배열, 리듬감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이번 책도 그렇고 번역도 마찬가지인데, 글을 읽는 사람들의 호흡이 끊기면 안 되잖아요. 그러려면 어순과 리듬감을 계속 신경 써야 되고요. 번역을 잘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운율을 생각하지 않은 문장이 하나도 없어요. 운율 때문에 삭제하거나 덧붙이는 성분들도 있어요. 의미와 상관없는 부분에 한해서요.

 

“번역가는 작가보다 열등한 존재인가”라는 꼭지가 있어요. 번역가와 원작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처음에는 작가가 창조의 주체로서 번역가보다 앞선 존재, 더 중요한 존재라는 걸 인정했어요. 그런데 점점 생각이 변화했죠. 번역가와 작가는 서로 다른 영역,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일 뿐 양자의 행위에 대해서 어떤 우열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소설이나 시를 쓰고 싶다거나, 번역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없어요. 처음부터 스토리에 대한 욕망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요. 시를 쓰고 싶었어요.

 

시인의 길을 가지 않으신 이유는 뭔가요?


사실 작은 문예지에 등단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포기했어요. 시를 다섯 편정도 보내야 했는데, 두 번째 시를 올려야 될 때 포기했어요. 그래서 시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었죠. 한창 번역을 하면서 시와 점점 멀어질 때였거든요. 시인으로 등단한다고 해도 계속 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굉장히 오래 시를 읽었고 많이 쓰기도 했는데, 제가 소질이 없다는 건 계속 절감했어요(웃음). 그러면서도 ‘극복이 되겠지, 실력이 늘겠지’ 생각했죠. 그런데 창작에 있어서의 한계는 인력으로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더라고요. 번역가의 소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시인이 되는 것도 포기하고, 거의 수동적인 입장에서 번역을 하게 된 건데요. 그러면서 생각도 바뀌었어요. 번역, 번역가도 고유한 분야로써 창작을 질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옮겨간 거죠.

 

이 책을 읽다 보면 “얼마나 번역가가 부차적으로 취급 받는지” 알게 돼요. 인세 부분만 보더라도, 책이 많이 팔릴수록 작가의 인세 비율은 높아지는데 번역가는 낮아지잖아요.


어차피 우리 시대에 변할 사항은 아닌 것 같고, 앞으로 번역가를 위해 개선될 거라고 예측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요. 제가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번역가의 고갈이에요. 사실 그 부분도 별로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은 게, 출판 번역가들 중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베테랑 번역가들은 계속 줄거나 신인들이 출현하지 않는 상황이에요. 제가 다른 언어권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중국어권만 놓고 보면, 한 15년 넘게 신인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소설을 번역했던 게 2000년대 초반 이후로, 저보다 어린 나이에 오랫동안 소설을 번역해 온 베테랑 번역가는 세 명 정도 있는 것 같아요. 이 분들 가운데 전업 번역가는 한 명도 없고요. 저하고 또 한 분을 빼놓고는 한 명도 남자 번역가를 본 적이 없어요. 전통적으로 남자가 가정을 꾸리면 고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번역가는 가장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 거죠.

 

신인 번역가가 출현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생활이 불가능하니까요. 저는 1년에 4~5권 정도밖에 번역을 하지 않는데,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하려면 매달 한 권씩 번역해야 돼요.

 

그렇게 하면 자기 생활이라는 게 없을 것 같아요. 계속 소진될 것 같고요.


그렇죠. 한 권 정도만 번역해도 완전히 소진돼요. 그런데 쉴 시간이 없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걸 인정하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온 거예요. 상황이 이러하고 여기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된다, 하고 계획을 세운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죠(웃음). 번역을 계속 해서는 굶어 죽겠다 싶어서 자기계발을 해가면서 살아온 거예요.

 


다른 재주가 있는데 번역을 왜 해요?

 

책에도 ‘번역가의 아르바이트’라는 제목의 장이 따로 있어요.


번역가들이 쓴 책이 의외로 많아요. 자기 술회라고 할까요. 제가 그런 책들을 많이 본 건 아닌데, 저처럼 구질구질한 이야기, 처절한 현장을 다루지는 않았을 거예요(웃음). 조금 품위 있게 쓰셨을 것 같아요.

 

매달 한 권씩 번역을 하면 힘들지만 생계가 가능하다고 하셨는데요. 번역 권수를 줄이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시는 이유는 뭔가요?


요즘 나오는 책이 보통 원고지 700~800매 정도 되는데요. 4~5년 정도 번역한 사람은 원고지 한 매당 4천 원을 받아요. 그러면 한 권을 번역하고 320만 원을 받는 거죠. 여기에서 3.3% 세금도 떼고요. 두 가족이라면 한 달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모자랄 테고요. 혼자 살면 생활은 되겠지만 이렇게 무리한 스케줄을 짜지 않겠죠. 한 달에 한 권씩 번역하면 1년에 12권인데, 그만큼 계약을 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에요. 그런데 계약을 해도 문제죠. 압박감이 있잖아요. 보통 출판사에서 길면 6개월의 번역 시간을 줘요. 12권을 계약했다면 6개월 동안 6권을 번역하고 나서 나머지 6권에 대해서는 출판사의 독촉 전화를 어떻게 감내할까요?

 

번역가님의 경우, 동시 계약하시는 책이 몇 권 정도 되나요?


많아야 서너 권이에요. 어떤 분들은 열 권씩 하시는데, 저는 그걸 못 견뎌요. 그러면 매달 한 권씩 번역을 해도 서너 달 지나면 더 이상 일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열 권, 스무 권을 계약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렇게 많이 계약하면 독촉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한 달에 한 권씩 번역을 하는 건 힘들어요. 그렇게 많이 계약하는 건 권장하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내 번역 행위와 크게 이질적이지 않은 일들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을 보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번역가가 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으실 것 같아요.


맞아요.

 

『번역가 되는 법』 에 정답이 다 나와 있죠?


사실 책에서 말하지 않은 대답이 있어요.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한데 ‘번역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재주나 욕망이 없다면 그때 번역가를 해라’라는 거예요(웃음). ‘다른 걸 잘할 수 있는데 왜 번역가를 하니, 너는 다른 재주도 있는데’라고 말하죠.

 

번역가님도 다른 재주가 있으시잖아요.


제가 가진 재주라는 건 그냥 글을 다루는 거죠. 창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다루는 자체를 좋아해요. 그 재미를 느끼려면 번역가가 최적의 직업이에요.

 

시를 쓸 때 언어를 만지는 즐거움과 비슷한가요?


네, 맞아요. 윤문이나 편집을 하시는 분들도 언어를 많이 다루기는 하시는데, 번역가는 직접적으로 원어에 닿아 있잖아요. 물론 편집자는 전세계의 작가들에게 다 접근할 수 있지만, 저 같은 기획 번역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직접 발굴해서 번역하고 그 언어를 다룰 수 있어요. 마치 수집을 하듯이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만 번역할 수 있죠. 그래서 기획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제 저는 누가 던져주는 작품을 번역하고 싶지 않거든요. 직접 돌아다니면서 고르고 제가 심취했을 때, 그 작가의 책을 번역하고 싶어요. 번역가에게는 그런 재미가 있어요. 도 한국의 중국 소설이라는 분야에서 담론을 조정할 수도 있죠. 특정 작가를 소개하고 그 사람의 문학 담론을 옮겨 올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번역가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부분이고, 어떤 권력 의지 같은 게 만족되는 부분이에요.

 

주로 기획하시는 책들은 어떤 건가요?


거의 50% 이상은 중국에서 번역 지원금을 받아 오는 책이에요. 중국은 자국 문화의 세계화에 굉장히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어요. 1년에 전세계 출판사에 지급하는 번역 지원금만 천 억 정도 될 거예요. 제 경우에는 어떤 책을 읽고 정말 좋은 작가라는 확신이 들면 중국 출판사에 연락을 해요. 이 작가를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데, 번역비를 지원해 주지 않으면 힘들다고 말하죠. 출판사에서는 너무 좋아해요. 지원금을 주는 건 국가니까 자신들은 신청서만 쓰면 되거든요. 그렇게 해서 번역비를 받아오면, 우리나라 출판사로써는 번역비를 아낄 수 있죠. 전체 비용에서 번역비가 상당히 큰 금액을 차지하거든요. 그러니까 출간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죠. 책이 많이 안 팔린다고 해도 매출이나 출판사의 이미지 제고에는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출간하자고 하는 거예요.

 

출판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시는 건가요?


원래 저작권 에이전시가 할 일이죠. 그런데 저작권 에이전시가 못하는 일이 있어요. 작품을 고르는 거예요. 영세해서 인력이 부족하거든요. 계약을 맺는 책에 대해서 수수료를 얻는 상황이다 보니까 수백 권의 저작권을 동시에 핸들링해요. 그러니까 한 권의 책에 많이 신경을 쓸 수가 없어요. 저는 대부분의 일을 제가 처리하고 직접 저작권 계약을 하기도 하고요. 저작권 계약과 관련해서 자세한 부분은 에이전시에 넘기기도 해요.

 

기획 번역을 하면 일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즐기면서 오래 일할 수 있고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한테 기획하는 걸 권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번역가가 자신이 기획한 책을 번역해서 출판하는 경우에도, 출판사에서 기획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주는 데 인색하거든요. 그러면 기획을 하는 데 들인 시간과 노동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번역가가 큰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많이 공부하면서 기획하지 말라고 해요. 일주일씩 원서 찾아보면서 잘 될 것 같지도 않은 책의 기획서를 만들어서 출판사에 돌리다가 결국 실패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번역가는 무너져요. 그래서 반드시 잘될 것 같은 책, 그리고 기획서를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들 것 같지 않은 책에 한해서 기획하라고 이야기해요. 기획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거죠. 번역하는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는 선에서 요령껏 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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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번역가, 자격증 필수 아닙니다!


번역가가 되고 싶어서 찾아오는 분들에게 샘플 번역을 받으신다고요.


그것도 상대가 적극적일 때 해당되는 이야기죠. 자신의 실력을 평가 받고 싶다고 할 때요.

 

샘플을 보고 ‘이 사람은 번역가와 맞지 않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되실 때도 있죠?


대부분 그렇죠.

 

어떤 때 그런가요?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이유가 있나요?


글이 효율적이지 않을 때예요.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비효율적인 거죠. 이게 좋은 강박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언젠가부터 글을 쓰거나 볼 때 그냥 넘길 수 없는 부분이 생긴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한 문단에서 똑같은 단어가 두 번 출현할 때 있잖아요. 또 쓸모없는 어미나 조사가 얼마나 적은지, 대명사 같은 것들을 다루는 솜씨가 어떤지, 그런 것들을 보게 돼요. 너무 총체적이라서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운데, 보면 느낌이 있잖아요.

 

언어 감각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인가요?


그렇죠. 그런데 번역가가 되겠다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대부분 20대 중반 이상이에요. 만약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라면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겠지만, 이미 졸업하신 분들한테 이 부분을 조금 고치면 낫겠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요.

 

번역가가 되려면 통번역 대학원을 나와서 자격증을 따는 게 필수이거나, 가장 보편적인 루트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번역가 되는 법』 은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요.


통번역 대학원 출신으로 번역을 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아요. 특히 실용서 부문에 많은데요. 문학, 인문학에는 거의 없어요. 기본적으로 통번역 대학원 교수님들 중에 전문 출판 번역가 출신이 없거든요. 통역 전문가들이 많죠. 통번역 대학원의 커리큘럼 자체에 출판 번역에 대한 과목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통번역 대학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출판 번역으로 이어지지는 못해요. 이화여대 통번역 대학원 출신들이 번역가로 탄생하는 경우가 많던데, 제가 알기로는 2학기에 한 번 출판 번역 과목이 있었던 것 같아요. 출판 번역가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신경을 쓰는 것 같고요. 아무튼 ‘여기를 나오면 출판 번역가가 되는 데 유리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통번역 대학원은 없다는 거죠.

 

자격증도 마찬가지인가요?


자격증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실 제가 자격증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어요.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책을 번역하고 있을 때였는데요. 번역가 자격증 시험은 한국어를 외국어로 전환하는 것, 외국어를 한국어로 전환하는 것 두 경우를 다 봐요. 중국어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마 다른 언어도 그럴 거예요. 그런데 저는 한국어로 옮기는 전문가이지, 중국어로 옮기는 전문가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시험에 떨어졌어요.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현역 출판 번역가가 떨어지는 시험일세’ 하고 웃으면서 나왔어요.

 

그 뒤로는 자격증 시험을 안 보셨어요?


볼 일이 없죠. 한 번 해볼까, 하고 본 거였거든요. 서류 번역 같은 걸 주로 하는 번역 에이전시에 이력서를 낼 때는 번역가 자격증이 있다고 쓰면 일이 생겼을 때 연락이 와요. 단행본 번역 말고 서류 번역이요. 예를 들면 카탈로그, 영화 시나리오, 드라마 대본을 번역하는 거예요. 그런 일들은 에이전시를 통해서 맡게 되니까 번역가 자격증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예요.

 

책에서 조언하시길 ‘에이전시에는 첫 번째 작품을 번역할 때까지만 있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제가 말하는 건 단행본 번역 에이전시예요. 이런 에이전시는 번역가들에게서 큰 몫을 떼야 유지가 돼요. 50% 이상을 떼어가는데요. 거의 착취를 당한다고 봐야 돼요. 공정 비율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번역가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계속 끌려 다니면서 정말 형편없는 돈을 받고 번역을 하게 돼요. 한 건을 번역하고 100만 원 밖에 못 버는데, 그렇게 5년을 메여 있었던 분도 있어요. 그런 분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죠.

 

번역가 입장에서는 ‘나는 왜 항상 을이어야 하지?’라는 생각도 들 것 같아요. 출판사는 번역가의 인세 비율을 낮게 책정하고, 에이전시는 번역가의 몫을 떼어가니까요.


그렇죠. 겉으로 보면 번역가는 을이에요. 많은 출판사에서 외주자 혹은 외주 업체에 비용을 지출할 때, 가장 마지막으로 번역가에게 주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곳과는 일을 해본 적이 별로 없고요. 대부분 ‘좋은 퀄리티의 원고를 받으려면 역자 인세부터 챙겨줘야지’라고 생각하는 출판사랑 많이 일했어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번역 퀄리티가 안 좋은 원고가 들어오면 정말 골치 아파요. 특히 중국어는 더 그렇죠. 원어를 몰라서 고칠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역자한테 돌려보낸다고 해서 크게 나아지지도 않을 것 같고, 어쩔 수 없이 외주를 줘야 되죠. 그렇게 해도 원고가 나아지지 않으면 ‘이걸 포기해야 되나’ 고민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런 시간이 1년 넘게 이어질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돈을 적게 줘가면서 검증되지 않은 역자를 쓰는 것보다 어느 정도 번역비가 높더라도 검증된 역자를 쓰는 게 낫죠. 최대한 인건비가 더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거예요.

 

번역가로서 경력을 쌓고 인정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나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아요. 능력이 있는 역자라는 소문은 금방 퍼지거든요. 편집자들이 적극적으로 소개를 해주고요. 실력만 있으면 그런 문제는 별로 크지 않아요. 물론 안 좋은 출판사에 운 나쁘게 걸려드는 경우는 있죠. 저도 한 번 번역비를 떼인 경우가 있어요. 저자나 역자에게는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아마 누구나 경험이 있을 거예요. 인세를 3년 만에 받았다는 경우도 많고요. 역자들이 평소에 가장 스트레스 받는 경우가 인세가 늦게 나오는 거예요.

 


직접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세요


계약서에 ‘출간 후 일정 기간 안에 번역비를 지불한다’고 쓰는 경우가 있다면서요? 출간은 언제 될지 모르는 건데, 그 동안 번역가는 어떻게 생활을 하라는 건지... 너무 배려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문제를 갖고 있는 출판사 중에 유명한 대형 출판사도 있어요. 그런데 출판사 입장도 이해가 가요. 그런 곳은 출간할 책이 많이 밀려 있기 때문에 ‘2년 뒤에나 나올 책의 경비를 왜 미리 집행해야 되지? 출간될 때 집행해도 되잖아? 일찍 하면 우리 출판사가 손해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같이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편집자가 생각하는 것과 경영자가 생각하는 건 달라요. 경영자는 숫자만 보고 합리적인 선상에서 결정하려고 하거든요. 어떤 번역가들은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나 쓸데없는 생각이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번역비가 조금 적어도, 혹은 조금 늦게 인세를 받을 가능성이 있어도 여기랑은 꼭 계약할 거라고 생각해요. 더 따지지도 못하고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는 거죠. 저도 번역가 생활을 하는 동안 이력을 조금 치장하기 위해서 중요한 출판사들과는 한 번씩 계약을 맺어봐야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렇게 함께 일할 출판사의 배치를 생각하면서 계약을 하는 것도 필요한데, 그렇다고 해서 불리한 조건을 자청해서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번역가 지망생에게 추천하시는 방법은 ‘직접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인가요?


그렇죠. 물론 제일 좋은 건 아는 사람을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나 출판계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저처럼 번역가로 일하는 사람을 알아두면 좋아요. 현실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고, 출판사를 연결해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아무나 연결해 주시는 건 아니잖아요(웃음).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연락처를 가르쳐줄 수는 있죠. 그리고 편집자한테는 언질을 주죠. 이런 사람이 연락을 해올 텐데 나를 의식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라고요. 출판사에 부담이 되는 압력을 넣을 수는 없죠.

 

번역가님의 경우는 어땠나요? 먼저 출판사에 연락하셨나요? 


저도 다른 분을 통해서 번역을 시작하게 됐죠. 지금까지 50여 권의 책을 번역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책이 첫 번째 번역서였어요. 그 책이 여러 교수들에게 번역 의뢰가 갔었는데, 다들 책이 너무 어렵고 까다롭다고 거절을 한 거예요. 그 중 한 교수님이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이 있는데 한 번 시켜보실래요?’ 하고 출판사에 이야기하시고 저를 부르셨던 거예요.

 

그 책이 『죽은 불 다시 살아나』였죠?


네, 저는 ‘너무 좋은 책인데?’ 하고 맡았죠. 원래는 제가 하면 안 됐어요. 박사 1학기생이 맡을 책이 아니에요.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깊이가 있어서 그렇죠?


맞아요. 제가 그 책을 2년 동안 번역해서 200만 원을 받았죠.

 

여러모로 잊으실 수 없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는 그 책을 번역하면서 번역가가 된 거예요. 어디를 가도 ‘이런 책을 번역했어? 신뢰할 만하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제 자신감이죠. ‘이런 책도 번역했는데, 뭘 못하겠어’ 싶은 거예요.  『죽은 불 다시 살아나』 는 한 3년 전쯤에 <한겨레>에서 중요한 사회과학서로 선정하기도 했어요.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출판상 번역부문 후보에도 올랐었고요. 사실 후보에 오르는 것 자체도 굉장히 힘들거든요. 수많은 언어에서 번역된 책들이 다 후보가 되니까요. 대부분 선정되는 책들을 봐도 5권, 10권씩 되는 대작들이에요. 그런데  『죽은 불 다시 살아나』가 후보에 오른 거예요.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저도 책을 받았을 때부터 굉장히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판매량은 적었죠.

 

당시에 인세 계약을 하셨는데요. 판매량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면, 출판사에서는 인세로 계약하길 원하죠?


외서 저작권을 계약하고 나면 출판사는 항상 고민하는 거예요. 인세로 해야 되나, 매절로 해야 되나. 많이 팔릴 것 같으면 매절 계약을 하려고 하죠. 안 팔릴 것 같으면 인세 계약을 하고요. 판단이 서지 않으면 ‘역자한테 물어보지, 뭐’ 하는 거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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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감각’보다 중요한 건 ‘모국어 감각’


‘번역가를 준비해볼까?’ 생각하다가도 ‘현지에서 살다 온 사람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정말 많아요.

 

번역가님은 “확고한 모국어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독자가 읽을 언어를 잘 다뤄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책 독자들만큼 까다로운 사람이 없잖아요. 그들을 만족시키려면 번역가가 고급스러운, 품위 있는 문체를 갖고 있어야 되죠. 책을 본다는 건, 특히 인문서나 문학을 본다는 건 품위로운 시간을 누리기 위한 건데 번역가가 그에 합당한 고급 문체를 구사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려면 오랫동안의 훈련이 필요한데요. 사실 한두 해 훈련한다고 해서, 아니면 특정 교육기관을 다닌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절대로 이중 언어 구사자가 할 수 없죠.

 

모국어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 활동이 있었나요?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건 발제였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원 때까지 계속 독서 클럽에 있었는데, 거의 매주 두 모임에 발제를 해갔어요. 흔히 발제를 할 때 1번, 2번,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하는데요. 저는 다 완전한 문장으로 썼어요. 되도록이면 글 전체가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눠지게 독립적인 텍스트로 만들었고요. 발제문이라고 해도 내가 쓰는 글이니까 기본적으로 글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발제를 피하지 않았어요. 누가 하기 싫다고 하면 제가 하겠다고 했죠. 발제에 재미가 들리면서 체화가 되면, 발제를 하지 않으면 책을 안 읽은 것 같거든요. 어떤 이론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하면, 발제를 하면서 이론의 골자가 머릿속에 각인 돼요. 나중에는 굳이 모임이 없어도 자동적으로 발제를 해가면서 책을 읽고요. 지금도 책을 읽으면, 자기계발서나 소설이 아니면, 반드시 발제를 해가면서 봐요.

 

앞서 번역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해주셨는데요(웃음). 그럼에도 번역을 계속하시는 이유는 뭔가요?


아까 권력 의지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제가 글쟁이로서 가진 능력 내에서 권력 의지를 가장 충족시켜주는 것이 번역 행위예요. 그래서 계속 번역을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느끼는 권력 의지는 언어적인 것도 있고 사회적인 것도 있어요.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제가 존재하는 출판의 장, 독서의 장에서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요. 제 능력으로 저작권을 가져오고 번역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흥분시키고, 콘텐츠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수 있죠. 이건 제 관점에서는 굉장히 위대한 일이거든요. 번역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죠.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어떤가요? 


번역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번역의 제1원칙은 충실성인데, 충실성은 그냥 환상이에요. 번역가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원문을 그대로 전환하고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필터로 삼아서 완전히 다른 텍스트로 가져오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원작과 원작가의 환상을 안겨주는 거예요. 이것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역시 권력 의지의 충족과 관련이 있는 거죠.

 

“자, 드디어 이 책을 마쳤다. 곧장 다음 번역에 돌입하자”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책이에요(웃음). 지금 번역 중이신 책은 무엇인지, 곧 출간될 예정인지 궁금합니다.


유유 출판사에서 양자오의 고전 시리즈 두 권이 나올 거예요. ‘양자오의 전국책 읽기’, ‘양자오의 순자 읽기’인데요. 『번역가 되는 법』 처럼 작고 가벼운 책이에요. 양자오는 우리나라에서 그와 비슷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대중 강연자로서 김용옥 선생 정도가 비견될 것 같아요. 그런데 색깔은 달라요. 양자오는 동양의 사서삼경과 서양의 여러 책들, 예를 들어서 『꿈의 해석』이라든지 『종의 기원』처럼, 지식계를 뒤흔든 동서양 고전들을 하나하나 해설하는데요. 원전을 강좌하고 나서 그것을 녹취, 정리해서 책을 내고 있어요. 대만 저자인데요. 대만에서 출간된 책들이 호응을 얻고 나서 작년부터 중국에서 출간되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 양자오의 책은 적어도 동양 고전 쪽에서는 비교의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좋은 책이에요.

 

앞서 『논어를 읽다』 도 번역하셨죠?


네. 그 책에서도 양자오가 논어라는 두꺼운 책에서 몇 장만을 뽑아서 공자의 인간성, 논어라는 텍스트의 근본적인 성격에 대해서 해설하는데요. 정말 전체를 꿰뚫는 통찰력이 돋보여요. 요즘 동양 고전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드는데, 양자오의 책은 그런 세태를 조금 개선할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는 텍스트인 것 같아요. 너무 대단한 책들은 오히려 읽기 힘든데, 양자오는 굉장히 친절한 작가이기도 하고요.

 

 

 

 


 

번역가 되는 법김택규 저 | 유유
고분고분 죽기를 기다릴 수 없다면서,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말하고 살아갈 앞날을 그립니다. 그리하여 번역가를 꿈꾸는 이에게 현실적인 길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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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김진애, 덜 싸우며 더 사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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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관찰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면 현명하게 세월을 보낸다. 도시건축가 김진애는 어떤 일도 놀이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다. 오죽하면 매일같이 해야 하는 집안일도 놀이처럼 한다. 그에게 집이란 다채로운 놀이가 가능한 최고의 공간이다. 욕실은 때때로 주방이 되고, 마루에서는 새벽 정상 회담이 펼쳐지고, 식탁은 최고의 라운드 테이블로 변신한다. 집 놀이, 그 여자 그 남자의 는 24시간, 365일 할 수 있는 ‘집 놀이’를 소개한 공간 에세이다. 청소 궁합을 맞춰보고, 비움과 나눔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방에 틀어박히는 재미도 누릴 수 있는 공간, 바로 집. 우리는 그동안 어떤 집에서 살까만 궁리했지, 집에서 어떻게 잘 놀까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간의 변화가 자아내는 감정의 변화를 살펴보자. 지루했던 공간이 문득 산뜻하게 느껴진다.

 

“재미있고 신선하고 독창적인 집 놀이가 일어나는 집에서 우리는 훨씬 덜 싸우며 살 것이다. 쑥쑥 자랄 것이다. 온갖 궁리로 설레고 온갖 느낌으로 설레는 순간들이 더 자주 찾아올 것이다. 수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이 ‘의외로’ 멋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훨씬 더 자주 다가올 것이다. 집 놀이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넓혀 보자.”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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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의 순간이 중요한가

 

책 제목( 『집 놀이, 그 여자 그 남자의』 )이 재밌습니다.

 

5년 동안 곁에 두고 만지작댄 책이에요. 공간에 관한 책은 오랜만에 썼죠. 살아보니 집 놀이 만한 최고의 놀이가 없어요. 집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니까요. 집 놀이를 잘하려면 공간의 모습보다 삶의 순간을 먼저 떠올려야 해요.

 

삶의 순간이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순간들이 있잖아요. 커플이 함께 사는 집이라면 서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순간을 알 필요가 있죠. TV 없이는 살아도 책상은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각자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집 놀이를 하기 전에는 대화가 많이 필요해요. 요즘 사람들을 보면 대화 없이 결혼하고, 대화 없이 집을 꾸미는 것 같아요. 성급하게 결정하면 나중에 후회를 할 수밖에 없어요.

 

“인테리어 책보다 좋은 책”이라는 독자 평을 봤어요. 책을 읽고 나니 내 집이 새롭게 보였어요. 공간에 관한 생각도 많이 했고요.


지금 시대에 맞는 공간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총 세 권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책은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쪽으로 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집에 관한 책은 상당히 쓰기가 어려워요. 왜냐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은 문제가 많기 때문이에요. 또 제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책을 잘 못 써요. 차라리 자기계발서 같으면 어떤 조언을 했겠지만. 이 책은 자기 삶, 자신, 함께 사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뭔가 해보고 싶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게 목표였어요. 소재는 쉽게 찾았는데 톤을 잡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시원시원한 문체는 여전합니다.


제가 원래 유혹하는 글쓰기를 잘해요. 상대를 살짝 밀어서 뭘 하게끔 하는 일이 익숙하죠. 초고에서 한 번 수정한 후에는 거의 고치지 않았어요. 저는 말하듯이 쓰는 걸 좋아해요. 글에 투영하는 에너지가 굉장히 커요.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를 항상 생각해요.

 

건축가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쓴 책이라고 밝혔어요.


건축가라 해서 삶에 대해 특별히 더 잘 아는 건 아니에요. 다만 공간에 대한 훈련을 받았고 견문이 넓은 만큼 집에 대한 생각이 좀 더 깊을 수 있죠. 하지만 자칫하면 모범 답안에 치우치는 우를 범할 수 있어요. 집에 대해선 절대 모범 답안이 없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할 때마다 제 집이나 인테리어를 공개해달라고 하는데요. 저는 안 해요. 왜냐면 사람들은 사진을 보여주면 사진에 시선이 꽂혀요. 글로 읽으면 상상하고 자극 받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 사진은 사진으로 끝나죠. 전공 서적을 쓸 때는 사진을 종종 인용하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자기의 시각으로 읽고 흡수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첫 챕터의 제목이 ‘싸우며 정드는 집’입니다. 부부, 커플이 가장 흥미롭게 읽을 주제예요.


『집 놀이, 그 여자 그 남자의』를 쓰면서 네 가지 주제를 잡았어요. 첫 번째 주제가 ‘어떻게 하면 이 집에서 여자 남자가 덜 싸우며 살까’고요. 저는 우리 사회의 여자 남자가 훨씬 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경제적 성과에 비해 그리 행복해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남녀가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좀 심해요. 신데렐라와 왕자님 이야기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잖아요. 인생이란 수많은 부족함, 아쉬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야 하는 건데, 그에 비해 우리는 대처하는 법을 잘 몰라요. 남녀가 처음 만나면 호르몬이 들끓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에요. 결혼해서 같이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징그러운 일인지 살아본 사람은 알 거예요. (웃음)

 

그래서 집 놀이를 잘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죠. 행복감이란 얼마나 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느끼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집 놀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 빈도를 높이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커플이라면 자기들만의 특별한 놀이 한 가지 정도를 갖는 게 좋아요. 그 놀이 덕분에 자신들의 공간도 쓰임새도 달라질 수 있어요. 우리 부부의 특별 행사는 욕실에서 하는 김장이에요. 두어 달에 한 번씩 우리는 같이 김치를 담가요. 서로의 시간, 서로의 손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새삼 느끼죠. 이게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어요. 15년이 걸렸어요. 저는 남자도 여자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일에 훨씬 더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성의가 자연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에요. 사랑도 노력입니다.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는 게 사랑인데, 우리의 노력은 너무 부족해요.

 

“오래가는 남녀관계를 위해서 부엌은 남성 중심 시대가 되는 것이 옳다”고 하셨어요. 싱크대와 작업대의 키를 높이면 남자도 부엌을 자주 들어올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남자의 키와 남자의 미숙함을 배려해주는 부엌의 디테일은 무궁무진합니다. 저는 남자 키에 맞춘 싱크대가 옳다고 생각해요. 싱크대가 높으면 실내화를 신으면 되지만, 낮으면 허리를 구부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싱크대를 높이기 어려우면 작업대라도 높이는 게 좋아요. 부엌에서 자주 싸우지 않으려면 잔소리를 덜 해야 하고요. 서로가 미숙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줘야 스스로 하고 싶어집니다. 부엌 일이 괴로운 건, 혼자 하기 때문이에요. 둘이 할 수 있다면 부담이 안 돼요. 같이 사는 집을 만드는 데 중심을 둬야지, 깔끔하고 근사한 집에 살려는 데 목표를 두면 인생이 즐겁지 않아요.

 

신혼 부부가 집을 마련하기 전 조언을 구한다면요?


일단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해요. 커플이 궁합을 맞춰보려면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아가보라고 하잖아요. 각자가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를 알아야 해요. 가령 제 남편이 무지무지 깔끔을 떠는 사람이었으면 저는 못 살았을 거예요. (웃음) 집을 설계하기 전에 말을 많이 해야 해요. 가구를 사러 갈 때도 원하는 가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하고요. 우리 딸 부부는 소파 하나를 사는 데 6개월이 걸렸어요. 그런데 6개월 후에 정말 놀라운 소파를 들여놓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어떤 사람은 침대가 중요하고 어떤 사람은 식탁이 중요해요.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지켜줘야 해요. 벼락치기로 결혼해서도 안 되지만 벼락치기로 집을 꾸며도 안 돼요.

 

 

집 놀이를 잘하면 인생이 풍부해진다

 

아이를 낳게 되면 집은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요. “집은 어디까지나 커플이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지나치게 아이 중심인 집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라요. 어른들이 스스로 자라는 아이들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부모는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 있어서 약간의 자극을 주면 돼요. 보통 부모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 겪은 상처를 아이가 겪지 않기를 바라잖아요? 이런 것들이 트라우마로 작용하기도 하는데요. 아이는 부모랑 다를 수 있어요. 부모들이 애들을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 아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한 번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을 강요하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없어요.

 

‘아이를 위한 집으로 6가지 원칙’을 꼽으셨는데, 가장 의외인 원칙은 “방에서 자꾸 나오게 싶게 만들어야 한다”였어요.


아이 방의 디자인을 생각할 때, 부모들이 주로 고민하는 건 ‘어떻게 공부하게 만들까, 어떻게 집중하게 만들까’입니다. 그 방법은 대개 유혹의 차단이죠. 보통 조용하고 차분한 방을 원해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방은 ‘방에서 나오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방’이에요. 방 밖에 더 많은 유혹이 있는 집이죠. 아이의 방이 완벽한 천국이어서는 곤란해요. 어딘가 부족한 데가 있어서 그 부족함을 바깥의 유혹에서 채워야 해요. 뭐든지 같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키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자기 방에 틀어박혀 흠뻑 빠지는 건 때가 되면 해요. 그때까지는 방 밖으로 자꾸 나오게 하는 게 좋아요.

 

딸들의 방을 다시 만들어줄 수 있다면요?


전문가에게 듣는 아이 방 꾸미기 노하우 같은, 유도 신문일 텐데요.(웃음) 그런 이야기는 안 하고 싶어요. 가장 중요한 건 아이 스스로 꾸밀 수 있도록 결정권을 주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계속 변해요. 3,4살만 되도 자기 방을 놀이터처럼 만들어버려요. 가장 좋은 건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거예요. 벽에는 뭔가를 붙일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들어 놓으면 좋죠. 우리 큰딸은 공간 감각이 좋아서 4살 때부터 자기 집을 꾸몄어요. 공간 감각이 좋으면 상상력, 창의력에 자극을 줄 수 있어요.

 

두 딸, 남편과 함께한 식탁 제야 행사는 언제까지 하셨나요?


큰딸이 대학생 때까지 했어요. 큰아이가 둘째랑 6살 차이인데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까 못하겠더라고요. 식탁은 저희 집 최고의 라운드 테이블이었어요. 우리 식구들은 매년 연말 식탁에 앉아 서로에게 지적할 것 세 가지, 새해에 고쳐줬으면 하는 것 또는 바라는 것 세 가지를 말했어요. 한 사람이 세 사람에 대해 거론하니 총 36가지. 지적과 설명, 해명, 변명, 토론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제야의 종소리를 맞게 되죠. 왜 식탁이냐? 소파에 앉으면 자칫 나른해지기 십상이고 바닥에 둘러앉으면 드러눕고 싶어서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공간이 허락한다면 식탁은 가족 수보다 좀 큰 것이 좋아요. 너무 딱 붙지 않아야 소통의 공간이 생겨요. 약간의 공간적 거리감이 오히려 정신적 가까움을 불러일으키죠.

 

남편과 단둘이 하는 새벽정상회담은요?


그건 죽을 때까지 할 거예요. 최근 저희 부부의 이슈는 국정농단, 해피 다스 데이였어요. 우리는 사회에 대해 한이 많아요. 불합리한 사회에 관한 분노가 많아요. 공동의 적이 있으면 남녀는 잘 묶입니다. 사회를 말하다 보면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아요. 밤을 새도 부족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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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하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

 

1년에 한 권꼴로 책을 쓰고 계세요. 지난해는 『여자의 독서』를 쓰셨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여자의 독서』 를 쓸 때, 동명의 책이 있나 검색해봤는데 없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여자에게 책이 각별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세계였기 때문이에요. 좋은 책은 차별하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아요. 세상의 비밀을 아무 조건 없이 알려주죠. 책 읽는 여자는 힘이 셉니다. 스스로 세지고 싶은 여자는 책을 읽어요.

 

유년 시절에 책을 많이 읽는 것과 나이가 들어 책을 읽는 것, 어떻게 다를까요?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으면 빨리 어른이 돼요. 주체적인 사고방식이 생긴다는 건 참 좋은 일이죠.소설을 많이 읽으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기회가 많이 생겨요. 반대로 나이가 들어 책을 읽으면, 철이 없어져요. (웃음) 이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내가 아직 세상에서 배울 게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고 즐거워요? 그래서 저도 철이 없어요.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사놓고 4년을 못 읽었어요. 너무 겁이 나서요. 이번에 여행을 가면서 읽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아마도 작가가 뭐에 씌어서 쓴 책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한국 소설가 중에는 정유정 작가를 좋아해요. 『28』도 강아지에 대한 기억 때문에 사놓고 최근에서야 읽었어요. 페미니즘 책들도 챙겨 읽고 있어요. 몇 명을 언급하긴 어렵지만,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반가워요.

 

30년 이상 연배가 있는 모임 ‘디어 걸즈’는 여전한가요?


물론이죠. 올해 봄에는 화전 파티를 했어요. 우리는 항상 파티부터 시작해요.

 

좋아하는 능력이 많다는 건, 일상을 잘 누릴 있는 능력이기도 해요. 집 놀이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죠. 저는 제가 먼저 좋아하고 제가 더 많이 좋아해도 오케이입니다. 칭찬하는 능력, 고마워하는 능력도 열심히 키운 편이에요. 비판과 긍정이 같이 간다는 뜻이죠. 무엇보다도 저에겐 ‘놀 줄 아는 능력’이 있어요. 열심히 익힌 능력이죠.

 

말하듯 글을 쓴다는 평가를 많이 들으시는데, 말은 노력해서 잘하게 되신 건가요?


그럴 리 가요. 태어나서부터 말을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 고등학생 때까지 말주변이 없었어요. “네가 그 김진애 맞니?”라는 소리를 아직도 들어요. 어릴 적 저는 굉장히 부끄러움이 많고 내성적이었어요.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분노와 야욕이 있었죠. 제가 공대에 들어갔을 때 800명 동기생 중 유일한 여자였어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나? 하면 책을 통해 이미 간접 경험을 했기 때문이에요. 이미 면역성이 생긴 후였으니까요. 방송 PD들이 제게 워딩을 잘한다고 해요. 말이 빠르면서 귀에 쏙쏙 들어온다고 하는데, 강조해야 할 곳을 알기 때문이에요. 30대 중반 이후 독립하면서부터는 언제나 상대를 설득해야 했으니까요. 저도 엄청나게 훈련했어요.

 

서울대 ‘공대’의 전설, MIT 건축 석사와 도시계획 박사, <타임> 선정 21세기 리더 100인 등 따라붙는 타이틀이 많습니다.


결혼 안 했을 것 같고, 아이 없을 것 같고, 이혼했을 것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요. (웃음) 전 남들이 하는 이야기에 구애 받지 않아요. 30대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이 참 바보 같네?’ 생각하고 말아요. 국회의원 할 때도 별 소리들이 많았죠. 들으면 짜증은 나지만 별로 신경 안 써요.

『여자의 독서』 를 쓰고 나서 여성 독자들을 많이 만났는데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뭔가 같이 도모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라.” 남자들한테도 똑같이 말해요. “여성을 이성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같이 뭘 도모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세계가 넓어진다”고요.

 

비판에 대해서도 부드럽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요.


호의를 가진 비판일 때는 그렇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 딱 질색이에요. 우리 사회는 상대에게 꼬리표를 붙이려는 욕망이 커요. 그런 태도가 있는 비판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죠.

 

김진애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요?


놀 줄 아는 능력이죠. 타고났거나 환경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굉장히 노력했기 때문에 얻은 능력이에요. 여성들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면 어떤 전략과 전술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제 필살기는 남을 잘 웃겨요. 상대를 유쾌하게 만들어요. 물론 까칠한 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애랑 같이 일하면 재밌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코너를 맡고 있어요. “안녕~”이라는 끝인사가 요즘 화제던데요.


목요일 아침마다 재밌게 녹음하고 있어요. 도시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묻더군요. 어떤 이야기를 할 거냐고. 제가 생각하는 포지션은 김어준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거예요. 진행하는 사람의 흥미를 끌면 코너가 재밌어지거든요. 김어준이라는 사람이 공간이나 도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흥미를 끌면 청취자들에게도 통하는 거죠. 나름대로 성과가 있어요.

 

‘건강한 분노, 멋진 실수, 근사한 시행착오’는 앞으로도 김진애의 삶에 이어질까요?


물론이에요. 사람들이 제게 성공했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저도 무지하게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일단은 해보자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실패도 더 많죠. 진짜 일을 해본 사람은 알아요. 실수도 재밌다는 걸요.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가서 이불 킥하는 순간들이 모이면 근육이 붙어요.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 말해요.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지만 재미있게 해드리겠다.” (웃음)

 

 


 

 

집 놀이김진애 저 | 반비
행복감을 자주 느끼며 살아야 하는 곳은 지금 사는 바로 이 집이다. 바로 지금 사는 이 집에서 요모조모 궁리하고 이모저모 실행해보는 자체가 ‘집 놀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모아, 허남훈 “밴라이프, 일 년을 십 년처럼 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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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7일부터 2018년 3월 16일까지 꼭 일 년. 오직 밴에서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다. 2010년까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다 작가로 전업한 김모아와 브라운아이드걸스, 어반자카파, 남태현 등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뮤직비디오 감독 허남훈이다. 밴라이프 시작 6개월 전부터 코펠에 밥을 해먹고, 살림을 줄이고, 집을 없애며 밴에서의 일 년을 준비한 이들은 꼬박 네 번의 계절을 그렇게 밴에서 났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 “버킷리스트를 체크리스트로” 바꿔보자는 생각을 늘 해왔던 이들의 지난 일 년은 꿈을 향한 집중과 실천의 결과물이었다.


밴라이프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만큼 이들에게 질문은 아주 중요한 것. 두 사람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왜 이렇게 사는가, 원하는 것을 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왔다. 따라서 자신들의 삶의 형태가 남들과 조금 다른 이유는 질문을 조금 더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식을 하지 않은 것도, 밴라이프를 해본 것도 말하자면 굳이 커피를 손으로 갈아서 내려 마신다거나 다음 단계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의 생활 방식이 그대로 담긴 선택. “이런 질문을 저희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책을 읽으신 분들도 하셨으면 좋겠다”는 김모아 작가는 자신들처럼 삶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삶은 단 하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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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짠하고, 그래요


지금 인터뷰 하는 곳이 난지한강공원 야구장 주차장이에요. 서울에 계실 때 자주 이용하던 곳인가요?

 

허남훈 : 자주 이용하던 곳은 따로 있어요. 오늘은 교통 때문에 이쪽으로 정했는데요. 서울에 있을 때는 잠원지구를 많이 이용했어요. 서울에 오는 시간은 대부분 일 때문이고, 밴라이프를 하는 일 년 동안은 지방에 가 있는 편이었거든요. 일하는 곳들이 그쪽에 많아서요.

 

밴라이프가 거의 끝났어요. 어제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허남훈 : 저희 밴라이프는 2017년 3월 17일에 시작해서 2018년 3월 16일까지였어요. 365일 되는 날이 3월 16일이었고요. 오늘처럼 인터뷰가 있기도 하고 그래서요. 천천히 헤어지는 중이에요.(웃음) 저희한테는 굉장히 짠하고, 그래요.

 

요즘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했어요. ‘헤어지는 날 슬플 것 같다’는 대목도 있었거든요.


김모아 : 제가 많이 힘들어할 것을 둘 다 예상했어요. 6개월 때부터 ‘이곳은 우리가 계속 머물 곳이 아니다,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서로 많이 했어요. 그래서 사실은, 6개월에서 8개월 사이에 많이 울고요.(웃음) 지금은 조금 담담해진 편이에요. 물론 물리적으로 멀어지면 그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허 감독은 항상 무언가를 할 때 저한테 다음을 연습하게 해주거든요. 제가 그걸 잘 못하고, 가라앉는 스타일이라서 6개월 됐을 때부터 많이 준비를 시켰어요. 사실 밴라이프의 하이라이트는 여름이거든요. 그렇게 한창 밝고 화사할 때 헤어지는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허남훈 : 계획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밴라이프를 결심하고 일 년 전부터 준비를 했거든요. 6개월 전부터는 전에 살던 집에서도 코펠로 밥을 해먹고 그랬어요. 준비를 한 덕분에 밴에 들어오고 나서도 적응하기 수월했던 것 같고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밴라이프가 끝날 것을 준비 안 하고 떠나거나 새 집에 가면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아서 밴 안에서부터 준비를 했죠. 애초에 밴라이프를 할 때도 마지막 날짜를 정해놓았기도 했고요.

 

딱 일 년, 마지막 날짜를 정한 이유는요?


허남훈 : 사실 2년, 3년 더 살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도 마지막이라는 시간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 이유였고요. 또 다른 재미있는 삶을 계획하고 있어요. 밴라이프 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많은 교훈을 얻었거든요.

 

막상 지내보니 일 년이란 시간이 어떻던가요? 짧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김모아 : 이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일 년을 십 년처럼 산 것 같다고요. 물론 우리가 살 평생을 생각하면 일 년이 짧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 했던 건 하루하루를 엄청 꽉 차게 보냈기 때문이에요. 과장이 아니고요. 저희는 정말 십 년처럼 산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일 년이 짧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일 년이라는 시간 자체는 짧지만 다시 돌아가서 첫 페이지부터 보면 정말 많은 일과 여행, 삶의 흔적이 있어요.


허남훈 : 저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만 길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밴에 살면서 가끔은 일 년이 짧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저희가 일 년을 계획했을 때도 분명히 짧을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을 했고, 그래서 하루를 꽉 채워 살기도 했지만요. 짧죠. 길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아쉽긴 해요. 한 번 봄이 지나가면 그 봄을 다시 볼 수 없으니까요. 다시 한 번 계절을 맞이하면 우리가 아쉬워했던 걸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분명히 있어요.

 

이번 겨울이 너무 추운 겨울이었어요. 그 생각이 먼저 들던데요.


허남훈 : 그런데 정말 안 힘들었어요. 지금 바닥 엄청 따뜻하죠? 그래서 괜찮았어요. 여름과 겨울이 가장 궁금하실 텐데요. 둘 다 굉장히 잘 보냈어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책을 정리하고 보니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있었을까요? 그 순간에는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잖아요.


김모아 : 밴라이프 다이어리를 365일 썼어요. 뒷부분에 사람들한테 많이 받았던 질문을 정리했잖아요. 그런 걸 하나씩 보다 보니 너무 감사한 거예요. 안 그래도 이렇게 살아볼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는데 말이에요. 밴라이프를 할 수 있는 직업이었고, 밴라이프를 할 수 있게 도와준 부모님도 있었고, 지인도 있었으니까요.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저희가 휴게소에 서기만 하면 어느 곳이든지 들었던 말이 “나도 은퇴하면 밴에 사는 게 꿈이다”라는 말이었거든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많이 울었어요. 이렇게 젊은 시기에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죄송스러웠어요. 누군가는 평생 꿈으로 가지는 것을 지금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현실감을 가까이서 세세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어떤 건가요?


허남훈 : 버킷리스트를 체크리스트로 바꾼다는 생각은 꽤 오래 전부터 했어요. 바라는 것들을 미루지 말고 실천해보자, 시간을 앞당겨보자, 는 생각을 많이 했죠. 2013년 배낭여행도 그런 거였고요. 그때부터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를 써왔어요. 버킷리스트는 어떻게 보면 지금 당장은 하기 힘든 일이잖아요. 밴라이프도 그렇죠. 비싼 차를 지금 사서 갖고 있을 수도 없고요. 하지만 저희는 지금, 밴라이프를 하고 싶어서 방법을 찾기 시작한 거예요. 오래 고민하다가 각자 가진 능력을 활용해서 캠핑카 제조업체의 문을 두드려 협찬 받게 됐죠. 새 차를 공장에서 받은 날, 바로 주유소로 갔거든요. 주유를 하시는 분이 차를 둘러보시더니 샀냐고 말을 걸더라고요. 이후에도 많은 분들이 물어보셨어요. 꿈이라면서요. 그럴 때마다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 황송한 프로젝트일 수도 있고 그렇잖아요. 많은 분들이 너무 동경하는 프로젝트여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미루지 말고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준비했지만 우리가 운이 좋았다, 는 자각도 분명히 있는 거군요.


김모아 : 책으로 하고 싶었던 얘기도 이게 최선이야, 이렇게 살아봐,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보세요, 라는 권유는 아니었어요. 밴라이프를 하게 된 계기는 질문이었거든요. 이건 질문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어요. 특히 허 감독은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지금 하면 안 될까, 왜 해외여행만 다녔을까, 같은 질문이 섞여서 이 프로젝트가 된 거거든요. 무엇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스스로 자문하는 프로젝트였고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 ‘이것을 했으니 당연히 저것을 해야지’가 아니라 과연 진짜 이것을 하고 싶은지 물어야 하는 거죠. 그러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알아야 하고요. 이런 질문을 저희가 저희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책을 읽으신 분들도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삶의 다양한 면을 보여드리고 싶었고, 그런 분들을 더 많이 보고 싶은 것 역시 저희의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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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삶을 살기에 무엇보다 서로가 굉장히 좋은 파트너였던 것 같아요. 파트너로서의 장점을 서로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허남훈 : 굉장히 큰 장점이 있어요. 올해로 만난 지 15년 됐고요. 지금도 느끼는 것은 100이 있다면 서로가 딱 50씩이라는 건데요. 저희는 각자 역할이 분명해요. 일하는 방식도 그렇고요. 밴라이프도 그렇죠. 둘이 같이 운전면허를 땄지만 운전은 제가 담당하고요. 음식이나 빨래, 청소는 직접 담당하면서 완벽한 업무분담을 하게 됐죠. 각자 성향에 맞는 걸 자연스럽게 정한 것 같고요. 그런 것들을 서로 완벽하게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 무사히 365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모아 : 저는 여행, 음식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것을 하는 걸 많이 두려워하는 편이에요. 오래 걸리고요. 반면 허 감독은 돈보다 시간을 아끼자고 오래 전부터 얘기하던 사람이죠. 시간은 더 벌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거라고요. 일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서 보내는 짜투리 시간에도 여행을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질문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 파트너로서는 자꾸 정체하고, 안주하려고 하는 저를 움직이게 하는 큰 장점이 있는 사람이죠. 제가 모터가 없는 차라면 파트너는 모터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좀 더 많은 것을 보게 하고, 경험하게 하고요. 저희가 팀이라면 팀의 주춧돌 같은 사람이에요.


허남훈 : 제가 우리 팀의 리더인가요?(웃음)

 

글을 모두 김모아 작가님이 썼잖아요. 허남훈 감독님은 어떤 글이 제일 마음에 들던가요?


허남훈 : 마지막 글이 제일 좋아요. 우선 작가로서 김모아 작가의 필력을 사랑하고요. 그것들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어서요. 저는 오히려 이 책을 김모아 작가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숟가락을 얹었다고 생각해요.(웃음) 마지막 글은 실제로 제가 많이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물음표를 달고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물음표를 많은 분들에게도 던지고 싶어요. 밴라이프 좋아요, 가 아니라 저희는 이런 선택을 해봤는데 여러분도 각자 질문을 해보시고 거기서 나오는 몇 가지 답들을 실천해보시면 좋겠어요, 라는 거니까요. 

 

여행은 삶이었다. 삶이 여행이었다. 굳이 선 긋고 싶지 않았던 ‘여행과 삶’은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여행하고 자신을 사는 것이었다.(중략)

 

요즘은 우리 커플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달아두었던 물음표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돌릴 때가 많다. 느닷없이 왜냐고 묻고 싶을 때가 많다. 당신은 누구인지 당신은 왜 지금 그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하염없이 이야기 나누고 싶다. 특히, 이 책을 끝까지 읽어준 당신과 함께.
-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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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충분해

 

밴라이프를 결심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뭐였어요?


김모아 : 너네 미쳤다(웃음)였어요.


허남훈 : 왜냐하면 정말로 집을 없앴으니까요. 시작 전에는 다양한 계획을 하게 되잖아요. 저희도 베이스캠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분명히 했어요. 그러다가 집을 없애기로 결정했는데 이 이야기를 주변에 하면 대부분 미쳤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도 대단한 것 같다는 응원이 제일 많았어요. 해낼 것 같다는 믿음도 많이 주셨고요.

 

부모님의 응원을 보면서 마음이 참 좋았어요. 두 분이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지지가 가능했을 거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지지가 안 되는 가족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김모아 : 저희도 의외였어요. 허 감독 부모님께는 미리 알렸었고, 미리 차도 보셨는데요. 저희 부모님께는 얘기를 안 했었어요. 그러다가 부모님 집에 차를 갖고 간 거예요. 가서 설명을 했더니 의외로 엄마가 “너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집에 자주 오라는 말씀도 하시고요. 사실은 걱정했었어요. 부모님들이 아무리 지지한다고 해도 차에 산다는 게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니까요. 나이도 있는데 걱정하실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너무 많이 응원해주셨어요.


허남훈 : 꽤 오래 전부터 저희한테 익숙해져서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이해하시는 편이에요. 부모님들께 저희의 삶을 진지하게 이야기 드리기도 했고요. 막연하게 이거 재미있을 것 같아서 살아보려고요, 가 아니었던 거죠. 결혼식도 마찬가지예요. 남들 다 하니까 안 하고 싶어요, 가 아니었어요.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 될 것 같다, 꼭 필요할 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부모님들한테 하다보니까 조금씩 이해를 하시고,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혹시 저희처럼 밴라이프를 하시려는 분들도 시간을 두고 하시는 게 여러 가지로 탈이 없지 않을까 싶어요. 어찌 보면 꿈만 같은 거잖아요. 하지만 저희도 오래 계획하고 한 거니까요. 앞으로의 삶도 그럴 거예요. 저의 버킷리스트는 영화 같은 삶인데요. 지금도 그걸 실현하기 위해 여러 고민을 하고 있어요. ‘욜로’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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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라이프 전과 후, 생각이 달라진 부분도 있나요?


허남훈 : 일단 자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어요. 화장실만 해도 그래요. 보통 우리가 버리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지 않잖아요. 물도 그렇고, 안 보이게 다 사라지잖아요. 저희는 그런 것을 짊어지고 지냈던 거예요.

 

얼마나 소비하느냐를 확인하는 건 무엇을 소비하고, 소비하지 않느냐를 고민하게 되는 일과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삶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좋은 기회가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모아 : 가끔 저희끼리 “우리한테 이 공간 너무 충분해”라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하나도 안 불편한 거죠. 이만한 집이어도 될 것 같았어요. 물건을 들일 때도 잘 생각하게 됐고요. 원래도 그런 편이었지만 밴에 살면서는 공간이 제한적이다보니 이게 정말 필요한 건지 세 번 물을 것을 열 번 정도 물었던 것 같아요. 여기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해서 거의 일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있던 것들이에요. 장도 많이 볼 필요가 없었죠. 조금만 움직이면 또 장을 보면 됐으니까요. 한편 확고해진 부분은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정말로 여행과 일과 삶의 경계가 없는 삶이 앞으로도 저희가 원하는 삶이거든요. 그런데 밴에서 일을 하다가 산책할까 싶어 나가면 모래사장에서의 여행이 됐어요. 그런 순간들이 많이 쌓여서 진짜 이렇게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죠. 그게 가장 큰 결실인 것 같아요.

 

그 말이 너무 좋네요. “너무 충분해.”


김모아 : 사람들도 흔히 물어봤어요. 그래도 불편하거나 많이 싸우거나 하지 않았느냐고요. 저희는 싸운다기보다 삐치는 수준인데요. 가까이 있으니까 더 빨리 풀어요. 약간의 땐땐한(웃음) 공기를 가지면서 시간을 갖다가 또 풀고 그랬죠. 이 정도 공간, 이 정도 삶이 정말 충분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매일의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고도 했잖아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는 점에서 밴라이프가 굉장히 매력적이더라고요. 도시에 있다 보면 종일 바깥 날씨도 모른 채 하루를 보낼 때도 있잖아요.


허남훈 : 정말 좋았어요. 저희는 비를 좋아해요. 오는 순간 소리가 나죠. 곧바로 들려요. 한 방울부터 소리가 들려요. 타닥타닥하고요. 바람이 엄청 부는 날은 차가 흔들려요. 제주도 같은 곳에서는 약간 멀미가 올 정도였어요. 그런 점이 참 좋죠. 비 오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 그런 날은 바로 와인을(웃음) 땄죠.
김모아: 정말 이 공간 자체가 저희한테 낭만이었어요. 비 오면 비가 쏟아지고, 해가 쨍쨍하면 햇빛이 쏟아지고요. 첫눈 오는 날 썬루프를 열었더니 눈이 막 쏟아지는 거예요. 이 안에 누워서 눈 맞고 그랬어요. 자연과 가깝게 지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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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다는 깊이


국내 여러 곳을 다녔는데요. 특히 좋았던 곳은 어디예요?


허남훈 : 많은 분들이 엄청 많이 다녔겠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밴라이프를 계획할 때도 많은 곳을 다닐 계획은 하지 않았어요. 진짜 살아보는 것처럼 지내고 싶었거든요.


김모아 : 저는 원래 잘 우는데요. 경주에서는 매일 울었어요. 밴과의 헤어짐을 가장 많이 느끼던 곳이 경주였기도 했고요. 경주라는 도시가 참 이상했어요. 과거를 늘어놓고 지금을 돌아보게 하는 곳이었어요. 가족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제게 가장 가까운 가족은 허 감독이니까 허 감독 생각도 많이 하고요. 헤어짐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것이 경주에서의 5일이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이잖아요. 고분을 보면서 예쁘다고는 하면서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금은 없는 사람들을 보러 다니면서 마치 여행처럼 즐기고 있다는 것도 조금 독특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과거의 사람이 현존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뭔가를 남겨 놓은 것이 너무 좋기도 했고 그랬어요. 그래서 많이 앓았던 것 같아요.


허남훈 : 완도도 정말 좋았어요. 처음 간 곳이기도 한데요. 저희는 여름을 더 좋아해요. 따뜻한 곳, 남쪽을 좋아하거든요. 수목원이 정말 좋아요. 산책하기도 좋고요. 그곳은 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둘이 많이 얘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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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곳을 다닐 계획은 하지 않았던 이유는 뭔가요?


김모아 : 여행하듯 살고 싶다고 한 것은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말이었거든요. 그래서 관광지가 아닌 곳, 시장 같은 곳에 가서 뻥튀기 파는 분과 잡담 나누고 경운기 가는 것도 보고 그랬어요. 살듯 있고 싶었어요. 많이 보기보다는 깊이 보고 싶었어요. 그러기에는 일 년도 턱없이 부족했죠.


허남훈 : 일단 어느 곳에 갈 때도 면사무소 같은 곳을 찍고 가고 그랬어요. 지역 시장에 가고요. 관광지를 찾아가지 않았어요. 많은 분들이 환상적으로 생각하시는데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하지 않았어요. 멋진 곳, 멋진 전망, 아름다운 풍경을 생각하실 텐데요. 그런 게 없지는 않았지만 일 년 동안 엄청 여유가 있어서 여행만 하고 다닌 건 아니에요. 밴라이프는 저희의 삶이자 여행이고, 일의 터전이었으니까요. 밴라이프를 하면서 깨달은 건, 진짜로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였어요. 부딪치고 경험해보니까 느끼는 게 정말 달랐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이 경험에 대한 답을 다 드리고 싶진 않아요. 그것은 저희만의 답이니까요. 다만 추천하고 싶고, 중간에 포기해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행과 생활의 균형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죠.


김모아 : 일단 여행만 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요. 저희는 욜로는 또 아니에요.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고요. 그 균형을 잘 맞춰야만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살고 다음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이 삶을 저금도 열심히 했고요. 다음 여행, 다음 삶, 다음 챕터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많이 생각했죠. 밴‘라이프’잖아요. 밴에서의 ‘삶’이니까 이곳을 집으로도, 사무실로도, 때로는 숙소로도 삼는 삶을 살아보자고 생각했던 거죠. 정말 균형 있게 살고 싶었어요. 여행만 하거나 지금을 탕진해서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건 저희가 살고자 하는 방향도 아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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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밴라이프를 해볼 생각이 있으세요?


허남훈 : 그럼요, 일단 밴라이프 외에도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몇 개 있어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렇게 계속 재미있는 것들을 꿈꾸면서 살려고 해요.

 

이 순간, 삶의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허남훈 : 사실 모든 건 쉬운 것부터 시작해요. 영어 공부를 하려면 단어를 하나씩 외우면 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려면 티슈를 한 장만 쓰면 되고, 이런 건데요. 너무 뻔한 이야기예요. 저희는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들부터 실천하자, 거든요. 자연스러운 것, 쉬운 것부터 실천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저는 시간을 아끼는 거고요. 우리는 돈 아끼려고 최저가 검색하고, 그러잖아요. 하지만 퇴근해서 집에 오면 그냥 시간을 보내요. 저는 그 시간을 돈보다 더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철학이 버킷리스트를 체크리스트로 바꾼다는 개념이 된 거니까요. 저는 꿈만 꾸고 있는 것들을 실천하고 싶어요. 사소한 것도 기록을 해놓고 그것을 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고, 노력하고 있어요. 각자 그런 것을 찾아보시면 좋겠어요.

 

지금, 두 분이 하고 있는 질문은 뭔가요?


김모아 : 책과 밴라이프가 마무리 되면서 ‘가장 큰 수확은 뭘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지 조금 더 현명하게 질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죠. 지금은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살고 싶어?’를 더 심도 있게 질문하는 중이에요. 하고 싶은 것을 잡아채서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고르는 중이고요. 이 질문은 죽을 때까지 계속 하게 될 것 같아요.


허남훈 : 요즘 저에게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가 가장 큰 질문이에요.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도 밴라이프 경험을 담은 다큐 제작이거든요. 다양하게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면, 하고요. 그런 것들이 뭐가 있을까 계속 고민하는 중이에요. 저희의 프로젝트가 다른 분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행하는 집, 밴라이프김모아 저/허남훈 사진 | 아우름
이곳에서 정말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 슬쩍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좁은 밴 안에는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공간이 모두 갖춰져 있고, 이곳에서 이들은 꿈꿔왔던 새로운 삶을, 여행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독립출판물 저자를 만나다] 가게를 내기 전 읽어야 할 책 – 조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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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잡지를 내게 되었나요?

 

증권사 리서치 센터에서 일할 무렵, 단골로 다니던 카페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손님도 많고, 장사도 잘되고, 커피도 맛있는데 어느 날 휙 사라지더라고요. 사장님도 저렇게 열심히 했는데 망한다면 이 사업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정보가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죠. 현실적으로 회사에서 꿈꿔왔던 기업 분석을 하기 어렵다고 느끼던 차에, 회사 바깥에서 제가 좋아했던 커피숍, 빵집, 서점 같은 작은 가게들에 대해 분석하는 보고서를 써보고 싶었어요.

 

개업한 지 3년 이하 가게를 기준으로 동네 빵집, 서점, 제주도 이주민의 가게를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어요.


이미 자리 잡은 가게에 자영업의 어려움을 묻는다 한들 독자들이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려워요. 성공한 가게의 예시는 결과론적으로 흐르기 쉬운 것 같아요. 물론 사장님이 운영을 잘해서 성공하기도 했지만, 시기나 환경, 개인의 경력에 따라 잘된 걸 수도 있거든요. 로컬 숍을 이해하려면 자리를 잡아나가야 하는 가게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개업 3년 이하라면 건물 재계약을 앞두거나 재계약을 한 번 거치며 겪은 자영업자로서의 고민이 가장 잘 드러날 것 같아 기준으로 잡았어요.

 

3호 부제가 ‘솔직히 정말 책이 팔릴 거라고 생각했나?’예요. 자영업과 관련해 궁금한 점을 직접적으로 물어보는데요.


기존 미디어에서 퇴사 후 자영업의 긍정적인 면만 보여주니까 그것에 반기를 들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진행하다 보니 콘텐츠를 전달하려면 밝은 부분을 강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긴 해요.

 

인터뷰이는 어떻게 섭외했나요?


창간호 빵집 인터뷰는 오히려 쉬웠어요. 소비자들이 로컬 베이커리의 빵을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 가격이 합리적인지 알리고 싶다고 잡지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공감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인지도 없는 잡지라 오히려 사장님들이 더 적극적으로 인터뷰해주기도 해요. 거절할 수도 있는 매체인데, 나와서 이야기해준다는 건 이야기를 깊게 나눌 의지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인지도가 없는 게 오히려 콘텐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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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컬리』 를 만드는 사람들이 궁금합니다.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저 혼자이고요. 디자이너는 광고 회사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 도와주고, 사진작가는 프리랜서 하면서 도와주고, 편집자는 프리랜서 통번역사로 활동하면서 도와주고 계세요. 처음에는 예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번만 해보자고 간청해서 시작했는데, 다들 너무 일이 커져서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웃음) 인건비도 입지에 비해 적게 받고 시작했고요. 출판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 출판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가제본을 100만 원어치는 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컴퓨터 화면으로 본 색이 왜 인쇄를 하면 그대로 안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디지털 인쇄와 오프셋 인쇄 차이도 몰라서 허둥댔고요. 창간호는 고급스럽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엠보싱이 들어간 종이를 썼다가 잉크가 번져서 파본이 300부 넘게 나왔어요. 제가 만든 책이니까 허섭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자존심이었는데, 책의 역할을 하기에는 개인의 자존심만 세워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어려움을 뚫고 개정판을 냈습니다. 초판 판형은 컸던 걸로 기억해요.


처음 만든 책이고 인지도가 없으니까 판형이 크면 독자들 눈에 잘 띌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어요. 그리고 당시에는 제가 정말 열심히 만든 보고서니까 들고 다니면서 읽지 말고, 집에서 스탠드 켜놓고 진지하게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3호째 만들고 나서 생각을 바꿨죠. 내용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지 어떤 식으로 읽으라고 기획자가 요구하는 건 디자이너에게도 독자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어렵더라고요. 제가 할 일은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를 잘 담아내는 거고, 나머지는 독자가 만들어갈 영역인 것 같아요.

 

인쇄 부수는 어느 정도였나요?


창간호를 1,000부, 2호는 1,500부, 3호는 1,300부 찍었어요. 개정판으로 1호부터 4호까지 2,000부씩 다시 냈고요.

 

생각했던 것보다 제작 비용이 많이 나왔나요?


그것보다는, 훨씬 많이 팔 수 있을 줄 알았어요.(웃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건데 1,000~2,000부만 팔려고 내놓는 건 너무 억울하다 싶었던 거죠.

 

그래서인지 다른 독립 출판물보다는 많이 발행했어요.


독립 출판이라는 카테고리로 특별히 염두에 두고 시작한 건 아니라서요. 제가 만든 정보로 전업을 삼지 못하면, 어떻게 보면 취미 활동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좋아하는 일이긴 하지만 밥벌이가 되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생각이에요. 제작 단가를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에요. 취미 활동이라면 만들고 싶은 대로 비싸게 만들었을 텐데, 제가 이걸 업으로 삼았다면 제 경제 상황에 맞는 형태로 제작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마감도 최대한 빠르게 하려고 하고요.

 

다음 호 계획을 말씀해준다면.


머릿속에는 후보가 몇 개 있는데 말을 하기 조심스러워요. 금방 만들 거라고 말하고 나서 항상 늦었거든요. 전체적인 방향을 이야기한다면 자영업 관련 콘텐츠, 직장을 그만두고 가게를 내는 게 용기 있고 행복한 길이라는 편집보다는 자영업과 관련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한다는 마음으로 계속 해보고 싶어요.

 

어떤 잡지로 만들어나가고 싶나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서 꼭 행복한 건 아니에요.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는가도 중요하니까, 『브로드컬리』 가 그 관점을 짚어주는 잡지가 되었으면 해요.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을 하면 당장 예쁜 집에서 예쁜 가게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영업은 구덩이에 가까워서 실제 구덩이에 뛰어들어가 자신이 예쁜 집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거든요. 구덩이와 깊이와 모양새를 볼 수 있는 잡지가 됐으면 해요.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편집부 | 브로드컬리
서점 매출 다각화의 득실을 따져본다. 재정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전문성 확보에 부담은 없는지, 차라리 음료를 중심에 두지 왜 굳이 돈도 안 되는 책에 공을 들이는지 묻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뷰렛 문혜원’ 이후의 문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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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사춘기를 보낸 이들에게 뷰렛은 낯선 이름이 아니다. 2002년 결성 이후 가녀린 감성과 선 굵은 얼트 록을 교차하며 섬세하게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던 뷰렛은 선명한 바이올렛 빛으로 기억 속에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보컬 문혜원은 단 하루도 추억 속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국 공연장과 클럽을 통해 팬들과 실시간으로 호흡하고 '뷰렛은 영원하니까!'를 외침과 동시에 뮤지컬 배우로도, 단독으로도 그는 음악을 절대 놓지 않았다. 인터뷰 전 예상대로 '음악은 본능이고 천직이다!'라 말하는 목소리에는 당당함과 자연스러움이 공존했다.

 

음악 인생 15년 만에 솔로 앨범 <대항해시대>를 발매한 문혜원은 '옥으로 된 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새 이름 문정후로 활동을 시작했다. 섬세하고 진지한 메시지와 오케스트라 세션을 더한 앨범은 십 대 시절의 예민한 감성과 결혼 후의 성숙한 감성을 인생이라는 항해로 아우른, 개인의 인생을 모두와 나누고픈 문혜원의 새로운 도전이다. 부지런히 향후 활동을 계획하는 문정후를 홍대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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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쇼케이스 이후 다양한 공연으로 팬들과 만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먼저 듣고 싶다.


가장 가까이 있는 공연은 3월에 홍대 네스트나다와 판교의 커먼키친, 4월 22일 광화문의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의 일정이다. 앨범 기획 때부터 기획했던 콘셉트인 1인 음악극 형식도 준비하고 있고, 연말에는 팬들과 함께 하는 송년회도 마련할 예정이다.

 

1인 음악극을 꾸려보고 싶다고 하였는데 흔한 형식은 아니다.


뷰렛과 뮤지컬 활동을 병행하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한때는 내가 여러 모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뒤집어 생각해보니 글, 음악, 연기 등 다재다능한 부분에서 재능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더라.

 

결정적인 계기는 뮤지컬 <서편제>였는데, 판소리를 처음 접하고 한 두 달 정도 배우면서 그 형식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명창 한 명, 고수 한 명은 물론 대규모로도 구성이 가능하고, 국립극단과 길거리를 오가는 등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창작물이지 않나. 자유로운 방법으로 유연한 구성을 꾸려보고 싶은 열정이 생겼다.

 

<대항해시대>앨범은 언제부터 준비했는가.


20곡 정도의 예비 곡을 만드는 과정이 4~6개월 걸렸다. 공연을 하면서 앨범을 구상했고, 몇몇 곡들은 이전에 써놓은 소설이나 에세이가 노래와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앨범에 수록했다. 데모 작업을 마친 뒤 9월부터 본격적인 녹음을 했다.

 

앨범 발매 전에도 라이브 공연을 통해 수록곡들을 미리 부르기도 했다. 이때도 <대항해시대>타이틀과 콘셉트를 염두하고 있었나.


그렇지는 않았다. 공연을 하면서 꾸준히 곡을 썼고, 노래를 불렀다. 이후 어떤 그림이 나올지도 예상치 못했다. '항해'라는 테마를 정하게 된 것은 데모 작업이 끝나고 앨범에 들어갈 곡을 추리던 때였다. 뷰렛에서는 할 수 없는, 클래식과 오케스트라 스케일을 겸비한 컨템퍼러리 팝을 목표로 정했고, 기획 과정은 스타일리스트, 뮤직비디오 촬영, 디자인하는 친구들 등 앨범 제작에 관련된 모든 친구들이 함께 회의하며 진행했는데, 자켓 작업을 맡은 동료가 '누나하면 긴 머리가 상징이니까, 긴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휘날리는 걸 주제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줬다.

 

'항해'라는 표현, 콘셉트 등 웅장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앨범인데 앨범의 메시지는 소박한 면이 있다.


각자의 인생이나 여정이 대항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이 남들과 견주었을 때 크게 특별하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용기를 얻어 작업했다. 스케일도 큰데 메시지까지 무거우면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하고.

 

컨템퍼러리 팝이라는 표현처럼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나 토리 에이모스(Tori Amos)가 연상된다. 작업 하면서 영향을 받은 뮤지션이 있는지.


특정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이제껏 들어왔던 노래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결과라 하고 싶다. 가사 없는 'Intro'도 고등학생 때 만든 곡이고. 시네이드 오코너와 토리 에이모스는 물론 내가 살아오면서 들었던 음악이 자연스럽게 녹아나온 결과인 것 같다. 특히 학창시절의 감성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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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도 10대에 쓴 곡이라고 들었다. 결코 평범하진 않았던 학창시절이었을 것 같은데.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에 빠지게 되었는데, 홍대에 처음으로 간 클럽이 드럭이었다. 그 날 라인업이 아주 화려했다 ? 크라잉 넛, 옐로우키친, 노브레인, 위퍼 ?. 알다시피 드럭이 좁지 않나. 무대와 내가 서 있는 곳이 너무 가까워서 공연을 보며 '아, 내가 있을 곳은 여기구나!'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 같다.

 

진지한 메시지가 '이방인'이나 'Crying over u'처럼 슬프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곡의 분위기는 긍정적이다. 뷰렛 때부터도 단조가 드문데, 의도적인 방법인지?


특별히 그를 의도하고 만들진 않는다. 우선 노래를 먼저 만들고 가사를 입히는 스타일이다. 멜로디와 코드를 작업하고, 계속 노래를 들으면서 그와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고, 소재를 연결하면서 주제를 이끌어낸다. 메시지가 먼저는 아니다.

 

<대항해시대> 의 웅장한 스케일은 사실 '웃지 않는 공주' 등 뷰렛에서 동화 시리즈나 판타지로 먼저 발현된 바 있다.


'웃지 않는 공주'는 교원(뷰렛 기타리스트)이가 먼저 제목을 '웃지 않는 공주'였음 좋겠다고 얘기한 거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노래 내용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같아서 붙였고, '성냥팔이 소녀'도 사람들의 외로운 마음이 꼭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리게 하여 만든 제목이다. 어린 시절 동화를 정말 많이 읽었는데 그 순수한 감성이 작업할 때 묻어나는 것 같다. '뷰렛에서는 이렇게 해야지', '문정후에서는 이렇게 해야지' 등 구분지지는 않았다.

 

사춘기의 감성을 담고 있는 곡도 있는 반면 '유하'나 '오늘 밤 결혼해줘'는 결혼을 했기에 나올 수 있는 곡이라 생각한다. 결혼 후의 변화가 있을까.


다른 이와 삶을 함께하게 되니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을 하고 있더라. 무의식적인 부분에서 거부했던 사소한 여러 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일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뷰렛 시절에는 날 것의 감정이 그대로 표출되었다면, 결혼 후에는 곡이나 메시지를 한 차례 걸러서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잭 더 리퍼>, <노트르담 드 파리>, <헤드윅> 등 뮤지컬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초창기 뷰렛과는 사뭇 창법이 달라진 모습이다.


지금 이 목소리가 나의 자연스러운 목소리다. 예전에는 밴드 보컬이라면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변주를 줬는데, 사실 타고나기는 소프라노 스타일이었다. 만약 뷰렛 때처럼 계속 긁고 목을 혹사했다면 지금쯤 노래를 부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뮤지컬을 배우면서 나의 내츄럴 보이스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기교 없이 올바른 발성을 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80살 넘어서도 패티김 선생님처럼 계속 노래하고 싶다.

 

셀린 디온, 휘트니 휴스턴이 셜리 맨슨, 코트니 러브를 시도한 거랄까.


시절이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너무 맑게 부르면 또 내가 쓴 가사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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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에서 특히 표현이나 창법에서 신경 썼던 곡이 있나.


대부분 창법에서 신경을 썼는데 그나마 높지 않은 '대항해시대'를 가장 편안히 부르게 된다. 곡을 녹음할 때도 보통은 보컬 디렉터가 있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보컬을 잡아가느라 오래 걸렸다. 앞의 녹음과 뒤의 녹음본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 골라내는 과정도 모두 직접 했다.

 

문정후와 뷰렛 활동을 공존하고 있는데 향후 뷰렛의 활동에도 문정후의 색이 더해질지?


뷰렛과 문정후는 구별해서 갈 것이다. 뷰렛은 뷰렛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원이의 작업 비중이 점점 커지는 등 밴드 멤버들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로 방향을 잡을 것 같다.

 

문정후라는 이름은 언제 정한 것인가.


옥홀 정, 만날 후. 옥으로 된 홀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의미다. 중성적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지만 스스로 익숙하지 않았는데 2~3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제 2의 음악 인생을 시작하는 느낌으로 지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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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렛으로 데뷔한 지도 15년이고 뮤지컬 배우도 오래 했지만 솔로 앨범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금 늦은 출발이라고도 생각되는데.


오히려 적당히 잘 나온 것 같다. 좀 더 어릴 때 작업을 했으면 치기어린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대항해시대>는 거짓됨이나 군더더기 없이 진솔하게 만든 앨범이다. 뷰렛 활동을 할 땐 회사의 영향이나 외부 환경, 팬들의 기존 인식 등 다양하게 고려할 점이 많은 반면 솔로 앨범은 작업 단계부터 나 스스로 주도해서 만들었다.

 

2002년 데뷔한 이후 휴지기 없이 꾸준히 음악을 하고 있다.


내게 음악은 식사와 같다.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음악도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계속하게 된다. 밥을 안 먹을 순 없으니까. 하나의 노래를 만들고 그 곡을 구성하면서 마침내 하나의 결과로 나오는 과정, 그리고 그 완성본을 제일 처음 혼자 듣게 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다. 음악은 본능이고 천직이다.

 

뮤지컬, 뷰렛, 문정후가 각각 문혜원에게 어떤 존재인가.


뮤지컬은 다른 사람이 쓴 대본과 캐릭터를 이해하고 소화한다.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해야 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향한 고민을 하게 해준 작업이다.

 

뷰렛은 나의 20-30대 젊은 시절의 나다. <대항해시대>의 마지막 곡 '사춘기'가 십대 시절의 문을 닫고, 그 이후부터의 이야기가 뷰렛이다.

 

문정후는 지금의 나다. 그려왔던 것들, 아이디어, 다양한 장치와 실험 등 자유로운 운동장과 같다. 뷰렛은 기존에 잡힌 틀과 색깔을 유지해야 하지만 문정후는 온전히 내 의지와 생각대로 갈 수 있다.

 

마지막 이즘의 공식 질문. 인생의 앨범 3장이다.


펄 잼(Pearl Jam)의 <Ten> : 전성기 때 에디 베더를 만난다면....으!
뷰욕(Bjork)의 <Debut>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의 <Ani DiFranco>

 

뮤지컬 스코어도 꼽는다면?


<노트르담 드 파리>의 '불공평한 이 세상'
<대장금>의 '내가 가겠소'
<서편제>의 '원망'

 

 

인터뷰 : 김도헌, 정유나
사진 : 박수진
정리 : 김도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백희나 “그림책 작업이 나에겐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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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나 그림책은 언제나 얼빠진 표정으로 보게 된다. 애니매이션을 보는 마냥 혼이 쏙 빠져서 몰입하게 된다. 수공으로 인형과 소품, 세트를 만든 후 조명을 활용해 장면을 완성하는 백희나표 그림책. 『이상한 엄마』 , 『알사탕』에 이은 신작 『이상한 손님』 의 등장이 여간 반갑지 않다. 『이상한 손님』은 혼자 놀고 있는 소년에게 ‘천달록’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빵을 먹으려는 소년에게 ‘형아’라고 부르며 다가가는 주인공 ‘천달록’. 구름이를 타고 온 달록은 커다란 빵을 단숨에 먹어 치운 후 아주 요란한 방귀를 뀌고,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갑자기 달걀이를 쫓아가는 등 수상하고 이상한 행동을 이어간다. 이윽고 달록이는 잠투정을 부리다 또 다른 손님을 맞게 되는데.

 

해외에 있는 백희나 작가에게 이메일을 띄었다. 짧은 답변 속속들이 유머와 진심이 배어 나왔다. 그림책작가들과 인터뷰하면 공통점이 두 가지 있다. 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과대 포장하지 못한다는 사실. 좋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면, 이 덕목을 먼저 깨쳐야 하지 않을까. 날것으로 전하고 싶은 백희나의 이야기, 『이상한 손님』 의 뒷이야기를 들어보자.

 

 

음…… 마법입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봄을 보내고 계신가요?

 

작업을 끝내고 나면,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일상생활에서 구멍이 하나 둘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그 구멍들을 메우느라 바쁩니다. 저는 이걸 ‘생활의 복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작업에 집중할 때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면 우울증이 도지곤 합니다. 넋 놓고 있다가는 우울 구덩이에 빠지기 십상이지요. 그러지 않으려고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하면서 부지런히 일상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이상한 엄마』 , 이후 꾸준히 1년에 1권씩 작업하고 계세요. 『이상한 손님』은 어떻게 구상한 책인가요?


원래는 ‘ 『구름빵』의 구름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어쩌다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구름빵』  저작권이 제게 없어서, 그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궁리하다 보니, 『이상한 엄마』가 먼저 나왔고 이상한 손님』이 다음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천달록’의 얼굴이 호빵 같기도 만두 같기도 눈사람 같기도 해요. 어떻게 만들어진 캐릭터인가요?


천달록은 아기 도깨비입니다. 도깨비에 대한 조사를 해 봤는데, 남아 있는 기록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 패랭이를 쓰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었다고 하더라고요. 누렁이 냄새가 난다고도 하고요. 도깨비라지만 어린이들이 흥미로워 할 만큼만 무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호빵 같기도 만두 같기도 한 얼굴이 나왔나 봅니다. 아기이다 보니 바지저고리보다는 배냇저고리를 변형한 옷을 지어 입혔고요. 선녀님처럼 하늘에 사는 존재라서 소맷자락은 한삼자락처럼 길게 만들었어요. 이 긴 소맷자락을 아기 띠처럼 써서 하늘의 엄마가 달록이를 업어 주는 상상도 해 봤지요.

 

‘천달록’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하늘에 살고 있어서 ‘천’ 씨라고 지었습니다. 원래 도깨비는 ‘김서방’이라고도 불렸다는데, 김씨 성은 아무래도 이 존재를 지상에 묶어 놓는 느낌이었어요. 흔하지 않은 성을 붙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름은 알록달록한 하늘색 때문에 알록이와 달록이로 붙였고요. 워낙 도깨비가 알록달록한 알쏭달쏭 존재이기도 하고요.

 

“빗자루가 쓸데없이 고퀄이다”라고 트윗을 올리기도 하셨는데요. 이번 작품 역시 소품들의 디테일이 굉장합니다. 가장 힘들게 작업한 소품이 있다면요?


글쎄요. 집중해서 봐 주십사 할 만한 것은 따로 없습니다. 저는 독자의 감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업하는 편입니다. 그러자면 한 장면 안에서 주인공이건 배경이건 소품이건 텍스트건 저마다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지요. 그 어느 것도 맡은 역할 이상으로 튀어서 주의를 끌고 감정선을 파괴하면 안 된다는 소리입니다. 빗자루가 쓸데없이 고퀄인 건 어찌 보면 제 잘못인 거죠. (웃음) 공을 들인 것은 인물들, 특이 주인공인 달록이의 표정이었습니다. 달록이의 감정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한편 독자를 즐겁게 해 주는 요소니까요. 가장 힘들었던 건 동생의 얼굴이었습니다. 표정별로 다른 얼굴을 만들었는데, 같은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 좀 힘들었습니다. 만들다 보면 다른 사람이 되곤 해서요.

 

눈은 스폰지인가요?


음…… 마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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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면이 마음에 들어요


(웃음). 작가님께서 달록이처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화가 나 있습니다. 작가 역할과 주부 역할을 병행하다 보니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기가 힘든 데다,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것은 못 해 주고 있다는 생각에 쫓기며 사느라요. 어쩔 땐 얼굴에 스킨, 로션, 크림을 단계별로 바르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 구름빵』 저작권 문제가 아직도 뒷덜미를 잡고 있습니다. 정말 커다란 모래주머니를 사지에 매달고 마라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스크림를 먹는 달록이의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작가님은 무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시나요?


그림책 작업이 저에게는 달록이의 아이스크림입니다. 정말 피곤하고 짜증이 나 있다가도, 작업을 시작하면 마음이 진정됩니다. 담당 편집자님과 일에 관한 문자나 통화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진정됩니다.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잠시나마 고된 일상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지요.

 

그림책 작업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지점은 무엇인가요?


작업 도중에 손을 놓아야 할 때요.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르고, 햇빛도 적당하고, 아슬아슬하게 배치해 둔 세트도 완벽해서,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완성 컷이 나올 것 같은데, 주부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도래하면 정말…… 그렇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3개만 꼽아주신다면요.


뻔뻔하다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다 마음에 들어서 어느 한 장면을 꼽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굳이 꼽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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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야기 흐름에서 제 역할을 잘해 준 장면입니다. 주인공을 소개하는 장면이면서, 독자가 주인공과 함께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지요. 주인공의 감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라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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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록이가 화를 내면서 잔뜩 흐렸던 날씨가 쨍쨍 무더운 날씨로 바뀝니다. 이 장면은 그림처럼 예쁘게 나와서 마음에 듭니다.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쨍한 하늘도 잘 표현되었고, 후끈후끈한 열기도 잘 살았습니다. 햇빛 같은 조명도 마음에 들고요. 달록이의 얼굴, 누나의 트레이닝복 바지, 부엌의 찬장, 동생이 든 부채까지 여러 가지 색이 잘 배합되었고 콤퍼지션(composition)도 좋습니다. 처음으로 세 주인공의 마음 모아지는 순간이라 그럴까요? 모든 것이 잘 조화된 예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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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주인공의 감정과 연결된 날씨 변화가 키워드인 책인지라, 조명이 잘 표현된 장면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맑은 봄 햇살이 잘 표현되어 좋습니다. 솜사탕 할아버지 캐릭터도 마음에 쏙 듭니다. 오른쪽 장면은 완성하고 보니, 의도치 않게 길모퉁이에 서 있는 볼록 거울에 담긴 이미지 같은 느낌이 나서 기뻤습니다. 할아버지는 달록이 일행을 보고 놀란 듯도 하고, 독자와 눈을 맞추는 듯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오른쪽 페이지의 볼록 거울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을 쳐다보는 듯도 합니다. 이런 우연한 효과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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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이 나와서 경험담을 들려주듯 흥미진진하게


전작인 『이상한 엄마』 , 알사탕』리뷰 중에 기억 남는 평이 있었나요?


일하는 엄마인 데다 어리광부리며 기댈 대상이 없는 분이었는데, ‘이상한 엄마’가 절실하다는 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라도 가서 돕고 싶었습니다. 『알사탕』  리뷰 중에는 7년째 발달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 엄마의 글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들도 세상과 제대로 소통하는 날이 오기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고 쓰셨지요. 그림책 속 동동이처럼요. ‘더할 나위 없이 개성 있고 독창적이라서 강렬했던 구름빵』이 아니어도 새롭게 읽은 백희나의 이야기와 이미지는 여전히 나를 울리는 힘이 있었다. 예전만큼 이슈가 되느냐 아니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시처럼 멋진 리뷰에 저도 눈물이 났더랬습니다.

 

‘이상한’ 시리즈는 또 이어지나요?


일단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그림책은 그동안 나왔던 책에 등장했던 여러 캐릭터 중 하나가 주인공이 되어 나올 것 같습니다. 시리즈처럼 얽혀 있는 세상의 한 조각을 보여 드리긴 할 텐데 딱히 ‘이상한’이 붙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백희나 작가님 책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하는 독자가 많아요. 그림책 독자 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고맙습니다. 진심으로요. 저는 책을 만들 때 독자를 굉장히 의식하면서 만드는 편입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줄 때, 반응을 살펴가며 더 즐겁게 들을 수 있도록 신경을 쓰며 읽어 주는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 책을 내놓고 나면 독자 리뷰를 정말 샅샅이 다 찾아 읽어 봅니다. 리뷰에 달린 댓글까지도요. 책을 구매하는 독자라면 주로 성인 독자이실 텐데요, 아이들이 그림책을 즐기듯 편안하게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책에는 공부하듯 파고들어 파악해야 할 의미나 교훈 같은 건 없거든요.

 

작가님의 트위터를 보니 ‘책읽는곰 = 최고의 출판사’라고 하셨어요. 이유는 무엇인가요?


창작 그림책이라곤 구름빵』  한 권 달랑 내고 7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제 능력에 대한 많은 의심과 회의가 있었겠지요. 그 7년 동안 저는 당장 돈이 될 수 있는 하청 작업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암흑의 시절에 저를 믿고 기다려 준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의 믿음 덕분에 저 또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지켜갈 수 있었습니다. 『구름빵』 으로 처음 입문한 출판계는 저에게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내놓으면 그냥 빼앗기고 만다.’는 피해의식이 저를 지배했더랬습니다. 자신감도 많이 잃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그 누구에 대한 신뢰도 없었기에 1인출판사로 재기했습니다. 말이 1인출판이지, 그 뒤에서 궂은일을 도와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재활 치료’를 마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리며 손을 잡아 준 출판사가 책읽는곰입니다. 그림책 작업에 대해 제가 바라보곤 곳에 시선을 맞춰 주면서 책의 완성을 위한 정확한 피드백을 주는 출판사는 이곳이 처음이었습니다.

 

광속으로 늙어간다고 하셨는데요. 그림책을 계속 만들면, 늙음의 속도가 조금은 지체되지 않을까요? 그림책작가로서 나이 드는 것의 장점이 있다면요?


지체되지 않고 가속됩니다. 일단 육체적으로 고된 작업이니까요. 더더군다나 입체로 만들어서 촬영을 해야 하니 작업량이 엄청나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에 약해지고, 세련된 맛이 없어지겠지요. 타성에 젖을 테고 게으름이 익숙해질 테고요. 장점이라면 여유가 생기는게 아닐까 싶은데요. 힘을 줘야 하는 부분과, 힘을 빼고 여유를 남겨 둬도 되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요.

 

현재 작업 중인 책이 있나요?


『알사탕』  작업할 때 얻은 구상이 있는데, 발전시키는 중입니다.

 

만화책을 즐겨 보시는 것 같아요. 최근 인상 깊게 읽은 만화책 혹은 그림책을 소개해주신다면요?


『당신을 그렇게까지는』과 『프린서플』 작가 이쿠에미 료가 좋습니다. 특히 『프린서플』은 펜으로 슥슥 그려 나간 느낌인데도 안에 인물의 표정과 동작이 정말 잘 표현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이상한 손님』 을 어떻게 읽어주면 좋을까요?


코미디언이 나와서 경험담을 들려주듯 흥미진진하게 부탁드립니다. (웃음)

 

 


 


 

 

이상한 손님백희나 글그림 | 책읽는곰
둘이 힘을 모아 위기를 넘겼던 일만큼은 남매에게 오래도록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누나가, 동생이, 내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지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홍태화 “명예훼손이라는 말에 떨지 않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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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_내_성폭력, #미투, #갑질, #부당해고. 숨죽였던 과거를 떨쳐내고 가해자를 고발하는 단어가 늘어난다. 피해자들은 서로의 말 속에서 연대하고 힘을 얻지만,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역으로 가해자가 될까, 오히려 더 피해를 볼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부당한 일을 겪고 나서야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말할지, ‘누가’ ‘어디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지 찾는다. 사건의 바깥에서는 그러게 ‘왜’ ‘무엇을’ 위해 빌미를 제공했냐고 피해자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일은 용기 있고 공공선에 필요한 행동이지만, 되도록 피해자가 더는 고통받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알리면 더욱 좋을 것이다. 억울한 일을 알리기 전에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을 참조하기를 권하는 이유다.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에는 언론 제보 및 SNS 폭로 등 알리는 방식부터 시작해 도움을 주는 기관, 명예훼손과 모욕 등 가해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쓰는 형법과 관련 사례를 모았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모금을 시작해 ‘돈이 없어도 사야 하는 책’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모금액은 2천만 원에 육박했고, 목표액의 1987%를 달성하며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후원과 출간을 요구하는 문의가 빗발쳐 기성 출판으로 다시 새 옷을 입고 나온 책이다.


홍태화 저자는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디자인이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를 적합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면,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  역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디자인 작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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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내 달라고 한 책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먼저 책 프로젝트를 시작했었죠.

 

작년 12월에 처음 프로젝트를 올렸었어요. 가을쯤부터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죠. 김나연 디자이너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항상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셨었거든요. 펀딩을 통해 디자인 만드는 걸 독려하는 편이었어요.


후원 금액이 2000만 원 정도 모였더라고요. 예상했었나요?


원래 예상은 80만 원 정도였어요. (웃음) 텀블벅에서 책 콘텐츠는 다른 예술 콘텐츠보다 인기가 없고 금액이 적게 모이는 편이라서, 목표는 100만 원이었는데 다 안 채워질 것 같았어요. 나머지 20만 원 정도는 제 돈을 넣어서 성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후원 시작하고 둘째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까 후원액이 뛰기 시작했어요.


당황했겠어요. 제작도 그만큼이나 하게 될 줄 몰랐을 텐데요.


많이 당황했죠. 디자인을 주로 하다 보니 조판이나 인쇄 방법은 알았는데, 그래도 소통 관계에서는 많이 인쇄소에 갔었어요. 네댓 번은 간 것 같아요. 초반에 발송할 때 유실된 분이 꽤 있어서 그분들 하나씩 확인해서 등기로 다시 발송했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일도 하고, 발송도 해야 하고, 험난했었죠.


독립출판으로 냈다가 다시 한빛비즈에서 재출간했어요.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책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도 책을 사고 싶다는 메시지가 계속 왔어요. 제가 통신판매업자도 아니고 판매를 계속 할수는 없어서 출판사에 연락을 드렸어요.


디자인이 일부 바뀌어서 나왔어요.


기본 틀은 비슷하게 갔어요. 표지가 많이 바뀌었죠. 내지도 조금 달라요.


처음 냈을 때도 예상하지 못했던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있었어요. 기성출판으로 내는 감회는 또 다른 감회가 있을 것 같고요.


출판사에서 연락이 안 오면 POD(Print on Demand) 방식으로 사고 싶은 분들은 살 수 있게 내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막상 출판사에서 내겠다 하고 원고료를 받고 저자로 이름을 올리니까 기분이… 참 이상하네요. (웃음)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 되겠구나


‘안전하게’ 알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정보를 책으로 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들었나요?


처음 실린 사례는 훨씬 예전에 봤던 뉴스였어요. 몇 년 전 한 기업의 사내 성추행 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했는데, 회사의 고소가 원인이었죠. 다행히 피해자는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요. 나중에 형법 310조를 알고 나서 왜 이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잘 보니까 형법을 알았다면 무죄일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피해자는 그걸 몰라서 고통받았던 거예요. 거기서 화가 났어요. 사람들이 평소에 잘 알 수 있도록 교육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런 장치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족하지만 제가 정보를 적어서 만든 거죠.

 

① 제307조 제1항의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에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공익을 달성할 목적으로 진실을 적시해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엔 위법성과 공익성을 저울질해서 공익성이 더 크다면 위법하지 않은 명예훼손이 성립한다. 이를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표현한다. (중략)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일 때만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꼭 유일한 동기일 필요는 없다. 공익성이 알림의 주된 이유면 충분하다.
- 89쪽, 형법 제310조 위법성의 조각 중

 

공분의 느낌이었을까요?


이해가 안 됐다는 게 제일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화도 나도 짜증도 나는데, 무엇보다 왜 형법이 이렇게 되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자료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을 모아야겠다 싶어서 로스쿨에 다니는 사촌 형한테 물어보고 그때부터 발로 뛰었죠. 대한법률구조공단, 법학 교수님들, 변호사님에게 물어보고요. 메일도 많이 보냈었어요. 반려도 많이 당했죠. 변호사분들도 사건 담당은 괜찮지만 이렇게 알려주는 건 힘들다고 하시기도 하고요.


뒷부분 ‘도움을 주신 분들’에 이은희 변호사와 채널예스 엄지혜 기자 이름이 올라가 있어요.


엄지혜 기자님의 <채널예스> 특집 기사 (SNS 폭로, 피해자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를 보면서 쓴 내용이 있어요. 이은희 변호사님도 내용을 한 번 봐주시고요. 나중에 책을 다 쓴 뒤 김석진 변호사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자문해주셨죠.


사람들은 법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제작하면서도 법률 용어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법률 관련한 내용은 형법 제307조부터 311조, 정보통신망법 제70조만 본 거라서 단편적이었어요.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었는데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법이 이러니까 이렇게 하세요’라고 판단해서 말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인지 법 설명과 함께 판례는 적혀 있지만 가치 판단은 들어가지 않았어요.


사람마다 케이스가 다르잖아요. 매 상황이 다른데 비슷한 사례가 있었으니 이대로 하라고 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 전에 인터뷰하기가 저어된다고 말했어요. 어떤 우려였나요?


처음에는 책 제목으로 매뉴얼이나 지침서라는 단어를 썼었어요. 그런데 내용을 조사하다 보니까 절대 그런 표현을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종류의 피해자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책을 읽고 ‘이렇게 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방법으로 접근하기보다 이런 게 있구나,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 되겠구나 받아들이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목에 방법이라는 단어를 안 썼어요.


그래서 ‘사실들’이 되었군요. (웃음)


알면 좋은 사실, 팁 같은 게 되는 거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아직 알리지 않은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썼나요?


애초에 제가 당한 사람이 아니라 당했던 사람의 입장을 대변해서 쓸 수는 없어요. 그분들을 위해 뭐가 필요한지도 혼자 가늠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실제로 당했고 일을 진행하는 분들에게 필요한 건 ‘알면 좋은 사실들’이 아니라 매뉴얼이에요. 그분들은 바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아야 하고, 그건 전문가에게 가야 하는 문제죠. 이 책에서 할 수 있는 건 그 상황이 오기 전에 미리 어디서 도움받으면 좋고 이렇게 하면 좋지 않다 정도의 의식을 미리 아는 것에 불과해요.


최근 이슈를 봤을 때 아무래도 알리는 일에는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먼저 떠오를 것 같아요.


미투 운동은 텀블벅 프로젝트가 끝나고 터진 거라 겨냥하고 만든 건 아니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해 안 되는 상황에서 걱정 때문에 알리지도 못하는 게 화가 났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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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협박수단이 되는 게 문제


모욕죄보다는 명예훼손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어요. 둘의 차이점은 뭔가요?


모욕죄는 일단 욕을 해야 해요.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쁜 놈이다’라고 해야 모욕죄예요. 잘 들여다보면 명예훼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다고 적었을 때고, 모욕죄는 가해자를 욕해야 하더라고요. 피해를 호소하거나 알리는 일은 보통 전자에 해당하고, 모욕하면 법정에서도 용인되지 않는다고 해요. 모욕이나 허위사실은 일단 구제대상이 안 되고, 명예훼손 부분에서는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주로 적었어요.


무고죄로도 많이 걸리죠.


무고죄는 아예 안 다뤘어요. 결국에는 무고도 허위사실이기 때문에, 허위 사실로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아요. 최근에 어떤 연예인이 난방비 문제를 폭로하다가 중간에 허위사실을 섞은 일이 있었어요. 판결문을 봐도 취지는 참작이 되지만 결국에는 허위사실로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에 위법이라고 하더라고요. 책에서 알리는 일을 정의할 때 허위사실을 알리거나 비방이나 모욕을 주기 위한 알림은 제외한다고 말한 이유도 그런 차원에서예요.


SNS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언급했어요.


이은의 변호사님도 결국에는 SNS로 폭로하지 않는 걸 권하는 입장이었어요. 역효과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물론 SNS로 폭로해도 잘 끝나는 경우도 많고 어떤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는데, 후에 겪을 일을 생각하면 조심해야 하는 게 아무래도 본인을 위해 조금 더 나을 것 같아요. 감정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법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고 쓰게 되잖아요. 저도 일단은 언론사 제보 먼저 하고 안 되면 자문받으면서 폭로 내용을 다듬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미 겪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런 말이 도움이 되지 않죠. 지금 힘들고 죽겠는데 언제 기자를 찾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사전에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폭로하시는 분들은 워낙 답답한 마음이 있으니까 결국 SNS에라도 토로하는 거잖아요.


많이 이상한 일이죠. 쉽게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최근 ‘미투’가 터지면서 민주당에서도 그렇고 하나씩 법안을 발의했어요. 성폭력 관련 피해 호소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도 있었고요. 책 나오기 전에 상황이 좋아지고 책은 쓸모 없어지겠네 싶었는데, 아직 안 바뀌었어요.


마지막에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을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적었어요.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실제로 사실 적시에 의해 명예훼손을 당한 분들의 구제 방법이기도 하고, 법이 나쁘다고만 말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원래는 피해자를 보호하는 취지의 법이었다고 들었어요. 협박수단이 되는 게 문제인 거죠. 일단 민법으로도 명예훼손이 따로 있고, 구제를 받을 방법은 있는데 굳이 형법에서 다뤄야 할지는 조금 의심이 들어요. 범죄 당한 사실을 피해자가 스스로 밝히는 경우는 구제할 방법을 더 마련해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제가 법률을 다루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죠.

 

 

다른 사람을 바꾸는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식의 디자인을 생각하는 건가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메시지를 놓고 전달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책을 조판하는 것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이 책이 가진 메시지도 다르게 읽혔을 거예요. 사실들을 모아서 그걸 엮은 것도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어요.


사회 참여를 하는 디자인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김나연 디자이너님은 항상 ‘나의 디자인’이 아니라 ‘우리 디자인’을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요. 스스로 보기에 예쁘고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고, 다른 사람이 쓸 때 효용 가치가 높은 디자인을 하라는 거죠. 사회참여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디자인은 필요한 사람이 있고 필요한 사람한테 가면 좋을 것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뭔가요?


디자인 외주를 가끔 하기도 하고, 지금은 언론사 입사 준비 하면서 언론 관련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어요.


앞으로도 활동을 한다면 디자인 쪽 일일까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라면 지금 받는 수업도 그렇고, 글이어도 저는 상관 없다고 봐요. 요새는 닷페이스 같은 영상을 기반으로 한 매체도 생기고 있어서 일반적인 인쇄물, 영상, 뉴스 등 디자인의 벽이 많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메시지를 가지고 전달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회 현상을 보는 데 디자인을 했던 눈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눈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따라가면서 왜 이해가 안 되는지 보는 자세였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마음가짐을 바꾸는 걸로 끝난다면, 저는 다른 사람도 바꾸게 하는 단계까지 가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알리기 전에 알면 좋은 사실들홍태화 저 | 한빛비즈
피해를 호소하는 구체적인 방식, 그것의 파급효과, 언론 및 SNS의 활용 방식, 다양한 법률자문 기관 소개,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관련된 법규 등이 간결하면서도 단단하게 쌓여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영탁 “죽지 않고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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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의 그리움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즈음 어머니의 곰탕이 상에 올랐다. 작가는 생각했다. “아버지도 곰탕 참 좋아하셨는데. 시간 여행이라는 게 가능하다면, 살아 계셨을 때로 돌아가 이 곰탕 드시게 하면 좋겠다.” 소설 『곰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다시 2~3년이 흐르고, 이야기는 푹 고아져 세상으로 나왔다. 이제 막 마흔이 된 아들이, 꼬박 40일 동안, 쉼 없이 써내려 간 첫 번째 소설이었다.

 

아주 오묘한 맛이 나는 『곰탕』  이다. 가슴 뻐근해지는 이야기가 담겨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소설가 장강명의 말을 빌리자면 “레이저 총을 들고, 멋진 불량 여고생이 운전하는 뿅카를 타고, 광안대교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듯한 소설”이었다. 곰탕의 조리법을 배우기 위해 미래에서 온 인물이 등장하고, 그의 주변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이야기는 시간 여행, 범죄, 스릴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거침없이 내달린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이 진기한 소설의 매력에 빠졌다. 지난 해 11월부터 한 달 동안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됐던 『곰탕』은 연재 3일 만에 구독자 10만 명을 돌파하며, 최단 시간 랭킹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을 쓴 이가 영화감독 김영탁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헬로우 고스트>, <슬로우 비디오>를 통해 ‘웃음과 감동이 있는 이야기’를 선보였던 그가 서늘한 사건, 퍼석한 인물을 그려낸 것.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유머와 감성을 잃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냈다. 대중들은 『곰탕』  안에서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테지만, 이 만남은 의아함이 아닌 반가움과 기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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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나의 현재에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원래는 소설가가 되고 싶으셨다면서요?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고요. 그냥 50대쯤 돼서 소설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늦게 쓰려고 하셨어요?


영화라는 직업도 있고 일도 재밌고, 소설을 쓰는 게 어떤 목표가 아니었거든요. 살면서 한 번은 쓰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50대가 되면, 그때는 조금 철이 들지 않을까 해서, 철들면 조금 좋은 문학을 쓰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아직 철이 안 들었다고 생각하세요(웃음)?


철이 잘 안 들더라고요(웃음).

 

『곰탕』은 어떻게 쓰게 되셨어요?


<슬로우 비디오>가 끝난 직후였는데, 제가 원래 영화가 끝나면 한 번씩 여행을 가거든요. 저한테 주는 선물 같은 건데요. <슬로우 비디오>가 끝났을 때도 두 달 정도 길게 여행을 가려고 했었어요. 새로 계약한 영화 트리트먼트도 쓸 겸 떠나서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녔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조금 다운되더라고요.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까,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3년 정도 됐을 때인데, 그동안 저를 돌볼 시간이 없었나 봐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가 너무 충격을 받으셔서 곁에서 보살펴드려야 했고, 제가 가장이 됐으니까 책임감도 더 심해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행을 가서는 경제 활동과 관계없이 저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아내한테 소설을 써봐야겠다고 연락을 하고 40일 동안 썼죠.

 

40일 동안만 쓰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그것도 되게 유치한 발상이죠. 마흔한 살이었으면 41일 동안 썼을 텐데(웃음), 마흔이니까 40일 정도는 돈에 관계없이 글을 써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어요. 공교롭게도 그 마음을 먹었을 즈음에 여행이 40여일 밖에 안 남아있었고요. ‘곰탕’이라는 아이템은 그 전에 갖고 있었던 건데, 그것도 아버지 때문에 생각했던 이야기였어요. 그걸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진짜 매일매일 썼어요.

 

‘곰탕’이라는 소재를 떠올리셨던 계기가 있었죠?


제 영화나 이야기의 소재는 대부분 일상에서 나와요. 그걸 대중적인 포맷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를 더 키우거나 설정을 덧붙이는데요. 곰탕의 경우도, 어머니가 만들어서 보내주신 걸 서울 집에서 먹고 있었어요. 아내랑 아내 친구랑 셋이 같이 있었는데, 그때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도 곰탕을 좋아하셨는데 시간 여행이 가능하면 이걸 들고 아버지 살아계실 때로 가서 같이 먹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내 친구 분이 너무 재밌는 이야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옆방에 있는 작업실로 가서 스토리를 메모했어요. 그때 쓴 건, 가까운 미래에 시간 여행이 가능해졌을 때 저처럼 우울한 주방장이 과거로 가서 곰탕을 끓여서 아버지를 먹이는 이야기였어요. 과거로 가면 어린 아버지와 만나게 될 테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 거죠. 당시에는 거기까지만 정리를 해놨고, 나머지 부분은 여행 갔을 때 매일 이야기를 만들면서 썼어요. 나중에 다시 읽어 보니까 제가 마흔까지 살면서 힘들었던 감정들이 다 녹아있는 것 같더라고요.

 

초고를 완성하셨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울컥했죠. 이 감정들을 쏟아냈다는 것 때문에도 울컥했고, 소설을 처음 썼다는 데에서 오는 울컥함도 있었어요.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세계를 만난 느낌 같은 거죠.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이렇게 빨리 쓸 줄 몰랐거든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생각도 나고, 그러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나요.

 

카카오페이지 연재는 먼저 제안을 받으셨어요? 


제가 아는 출판사 대표님이 계신데, 원래 영화 일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그 분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책으로 낼 이야기 없냐고 하셔서, 대화를 하다가 『곰탕』  이야기를 한 거예요. 재작년에 소설을 쓴 게 하나 있다고요.

 

그 전까지는 초고를 그냥 가지고 계셨던 거네요?


그렇죠. 처음에 초고를 보여줬을 때 제 주변에서는 너무 폭발적인 반응이었어요(웃음). 빨리 책으로 내자고, 대박이라고, 그랬는데 주변 반응이라는 게 믿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웃음). 그래서 계속 가지고 있다가 그 출판사에서만 검토를 했었는데요.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공모전에 내면 당선이 될 것 같다고, 그러면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셨어요. 감사한 제안이기는 했지만 저는 굳이 그렇게 알리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냥 제 이름을 걸고 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출판을 안 하고 지나갔죠. 그런데 그 출판사 대표님이 카카오페이지가 되게 좋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시에 저는 카카오페이지를 몰랐는데, 관계자 분들을 뵈니까 에너지가 너무 좋으시더라고요. 정말 자신의 일처럼 다들 잘 해주셨어요. 아마 카카오페이지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책을 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는 개인적인 모습들, 고민들이 많이 담겼을 것 같아요.


캐릭터들 안에 조금씩은 제 감정들이 들어가 있죠. 이 소설을 보고 ‘너 그때 조금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설정에도 제가 힘들었던 일들이 들어있는데요. 이를테면 제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잘 적응이 안 될 때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솔직하지 않은 순간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때 ‘왜 이렇게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낯설지? 나 외계인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나처럼 자기 세계가 아닌 곳에 끼어들어서 사는 사람들이 많겠지?’라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다른 시간대에 와 있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공포들이 소설을 쓰면서 쏟아진 것 같고요.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그때 많이 했던 생각이 ‘왜 우리가 사는 현재를 정할 수 없느냐’는 거였어요. 당시의 저한테는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한 책임감이 큰 부분을 차지했겠지만 ‘내가 왜 이렇게 힘든 현재를 살아야 되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면 현재를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그런 시절이 와도 우리는 지금을 살아야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 저한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저는 일상에서의 삶을 계속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거든요. 제 영화를 보고 ‘그래, 살지 뭐’ 이런 느낌이 들면 좋겠어요. 『곰탕』에는 여러 가지 장르가 들어 있지만, 어쨌든 큰 이야기는 지금에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거거든요. 어떤 변화가 있었고 어떤 굴곡들이 있었으나, 결국은 자기 현재에서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죽지 않고 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40일 만에 초고를 쓰셨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이야기예요. 그 시간 동안 대강의 줄거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소설은 처음 쓰는 거지만, 어쨌든 시나리오를 10년 넘게 썼잖아요.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을 했어요. 작가가 되자마자 각색도 많이 했고, 당연히 제 연출작은 제가 다 썼고요. 어쨌든 영상도 언어의 일종인데, 저는 여전히 영상 언어보다 문장을 다루는 게 더 익숙해요. 그리고 모든 작가님들이 그러시겠지만 평소에 고민을 많이 하는 거죠. 정말 감사했던 게, 여행지에서는 진짜 제한된 공간에 있었잖아요.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고요. 그때 스스로한테 제약을 주려고 한 일이 있었는데, 매일 그 날 쓴 분량의 마지막 문장을 아내한테 카톡으로 보냈었어요.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아침까지도 써서 보냈고요. 처음으로 아내한테 파일을 다 보냈어요. 혹시라도 제가 비행기 사고로 죽으면 언젠가 유작으로 출판을 하라고(웃음).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하시면서 기록을 세우셨어요. 최단 시간에 1위에 올랐죠. 예전에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셨을 때 천만 영화는 못 만들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 정도면 천만 영화 가능한 거 아닌가요(웃음).


아, 천만 영화... 잘 모르겠는데요. 차태현 씨가 너무 확고하게 안 된다고 해서...

 

그때 작가님도 동의하셨던 거 아니었나요(웃음)?


네, 동의하죠. 저는 천만 영화 자체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곰탕』이 이렇게 큰 인기를 얻을 줄 아셨어요?


진짜 전혀 몰랐고요. 연재를 시작한 첫 날 몇 시간 지나서 1만 명이 보신 거예요. 그런데 저는 영화를 했기 때문에 그게 안 좋은 결과인 줄 알았어요. 영화는 개봉 첫 날 몇 십만 명의 관객이 들어야 괜찮은 거거든요. 그래서 담당자 분께 ‘우리 망했죠?’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니에요, 지금 잘 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카카오페이지에 계신 분들도 좋은 분들이구나’ 했어요(웃음). 영화 업계 분들은 감독들이 마음 다치지 않게 좋게 이야기해주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이미 결과는 나와 있는데 혹독하게 이야기해서 상처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괜찮아, 이렇게 위로해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어요. 그래서 ‘망했는데 안 망했다고 해주시는 거구나’ 하고 괜찮다고 말씀드렸죠. 내심 ‘그렇지, 뭐’ 하고 생각했는데 3일 만에 10만 명이 읽으신 거예요. 굉장히 좋은 결과라고 하셔서 그런 줄 알게 됐죠.

 

최근 몇 년 동안 타임슬립 소재가 쏟아져 나오다시피 했어요. 대중의 반응도 시들해진 것 같고요. 그런데 『곰탕』은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이유가 뭘까요?


제가 진짜 유명한 감독도 아니고, 제 영화가 아주 흥행한 영화도 아니고, 그래서 가끔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극장에 가면 ‘어쩌면 계속 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해요. 소위 천만 영화라고 부르는 작품들을 만드시는 감독님들과 저 같은 사람들은 보는 게 다른 것 같거든요. 굳이 차별점이 있다면, 저는 한 번도 소재를 먼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말하고 싶은 메시지나 이야기가 있을 때 그걸 다루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취할 뿐이지, 기획물처럼 ‘요즘 타임 슬립 영화가 잘 된다는데 그런 걸 해볼까’ 하는 식으로 접근해본 적이 없어요. 이 소설도 그래요. 아버지가 죽었고, 그 아버지한테 곰탕을 먹이고 싶고, 그러려면 시간 여행이 필요했던 거죠. 그런 생각에서 취한 거지, 타임 슬립물로 쓸 생각은 없었어요.

 

영화를 만드실 때도 그렇게 해 오신 거죠?


이를테면 <헬로우 고스트>도 귀신 이야기잖아요. 당시에 귀신 이야기가 신선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헬로우 고스트>를 귀신 이야기로 보지 않거든요. 정말 외로운 남자가 있는데 ‘이 사람의 외로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화적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보니까 ‘너무 외로워서 귀신들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해서 귀신이 나온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처음 생각했을 때 한국이 계속 자살률 1위를 차지할 때였어요. 사람들이 안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했어요. 그래서 한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사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많은 이야기들의 큰 전제가 ‘죽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투자사에 가서 ‘죽지 않고 사는 이야기를 할 거예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대중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다보니 그런 소재를 취하게 된 거죠.

 

돌아가신 아버님과 곰탕을 먹었던 기억에서 시작된 소설이잖아요. 감상적이고 슬픈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메시지는 묵직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나 리듬은 경쾌하죠. 그 점이 너무 흥미로운 것 같아요.


영화를 하면서 클리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돼요. 아주 새로운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보편성 있는 이야기가 좋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거든요. 영화는 규모가 큰 산업이다 보니까 더 그렇죠. 그래서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넣어야 된다는 강박이 늘 있었는데요.  『곰탕』을 쓸 때도, 이게 여러 명의 인물이 나오는 긴 이야기이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독자 분들이 잘 따라올까 생각했어요. 막연하게 범죄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범죄물은 굉장히 익숙한 클리셰잖아요. 그래서 범죄물이라는 외피를 입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양창근과 강도영도 우리가 많이 봐왔던 형사들이죠. 한 쪽은 드라이하고 한 쪽은 더 핫한 형사들이 콤비를 이루는 건데, 그러면 어떤 사건의 리액션들이 정해지거든요. 그게 재밌더라고요. 독자들도 조금 더 쉽게 따라올 수 있고요. 숨겨야 될 캐릭터들은 조금 숨기기도 했죠. 그리고 범죄물로 쓰자고 생각하는 순간 김화영이라는 캐릭터가 생긴 것 같아요. 김화영이 누군가를 죽이러 왔다고 하는 순간 범죄물이 시작된 거죠.

 

결코 짧지 않은 길이인데도 굉장히 빠르게 읽히는 소설이에요. 짧은 문장이 만들어내는 호흡도 한 요인인 것 같고요.


사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너무 묘사가 많고 소설 같다고 혼나곤 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시나리오를 쓸 생각은 못해봤어요. 대학에 들어와서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시나리오 작가가 됐는데, 영화판에 와보니까 생각보다 좋은 직업이어서 계속 있었던 거예요.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글을 쓸 때 제가 좋아하는 호흡이라는 게 있는 걸 텐데요. 그러다 보니까 시나리오를 쓸 때는 글이 아깝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지인들한테요(웃음). 시나리오는 어차피 독자들이 보는 게 아니니까, 우리끼리 보기는 글이 조금 아깝다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굳이 이렇게 쓸 필요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냉정하게 보자면, 지문이나 묘사가 너무 길면 감독과 배우 입장에서는 읽기 힘들 수 있거든요. 그런 게 시나리오 쪽에서는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데, 소설에서는 빠른 호흡으로 보이지 않나 싶어요.

 

시나리오를 쓰면서 갈증을 느끼셨을 것 같기도 해요. ‘한 번 원 없이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바람이라고 할까요.


『곰탕』 을 쓰면서 그걸 많이 푼 것 같아요. 이 소설을 보면 초반에 거의 30페이지 정도가 다 세팅이에요. 계속 인물들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게 저는 너무 즐거웠어요. 사실 더 길게 쓰고 싶기도 했는데, 쓰면서도 너무 재미없으면 안 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씩 타이트하게 가자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제가 현역 감독이다 보니까 어떤 단락은 영화의 씬처럼 넘버링을 하면서 썼어요. 그것도 약간 습관인 것 같은데요. 또 어떤 부분은 몽타주나 인서트 같은 컷으로 한 장면만 써놓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게 머릿속에 꼭 필요한 이미지라서 그렇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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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덩어리들을 써봐야겠다


‘김영탁은 따뜻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 이미지가 굳어질까 봐 걱정되기도 하세요?


조금 불편할 때가 있어요. <헬로우 고스트>, <슬로우 비디오>가 다 제가 쓰고 찍은 거니까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닌데요.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시는 것 같기도 해요. 『곰탕』도 결국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늘 일상에서 이야기를 찾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제 개인적인 일상에서 너무 큰 사건인 거죠. 사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다음 이야기도 아버지가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예요. 한동안은 그럴 것 같아요. 다 다른 이야기를 하겠지만, 저한테는 계속 아버지와 관련된 것들을 털어내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차태현 씨와 굉장히 친하시잖아요. 이번에도 인터뷰에서 『곰탕』홍보를 해주셨더라고요(웃음). 카카오페이지에서 1등하고 있는 소설이라고요.


저도 누가 보여줘서 봤는데요. ‘고맙구나, 어지간히 걱정되나 보다’ 싶더라고요(웃음).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화할 것 같은데 싫다고 말했지만 분명 하게 될 것 같다”는 말씀도 하셨던데요. 『곰탕』 의 영화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셨어요?


주변에서 영화화할 거 아니냐, 언제 할 거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일단 제가 현역 감독이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영상화 작업을 고민해 봤는데요.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봤을 때, 감독으로서 이렇게 사이즈가 큰 이야기를 연출하는 게 과연 순조로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실제로 곰탕에 대해서 아직 못다 한 이야기들도 많이 있고요. 그래서 차후에 드라마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앞으로도 영화와 소설,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를 쓰실 거죠?


그러고 싶어요. 저는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제일 먼저 시작해서 가장 늦게 끝내는데요. 그러면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4~5년, 10년까지도 걸려요. 감독님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요. 그리고 영화는 중간에서 홀딩되거나 여러 가지 외부 요인으로 중단되면 없던 일이 돼버려요. 그런데 『곰탕』 은 1년도 안 걸려서 결과물을 실물로 보게 됐어요.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내가 뭘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거니까요. 결과물을 빨리 볼 수 있다는 게 좋았고, 독자들 반응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곰탕』 의 인물들은 삶에 대한 의지, 욕구가 강렬한 것 같아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인데, 그것들이 서로 부딪히는 느낌이에요.


글을 쓸 때 어절 수 없이 캐릭터 안에 저랑 닮아 있는 부분들이 들어가게 되는데요. 저한테는 없는 부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할 거예요. 저는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의지가 약한 편이에요.

 

이우환이라는 인물은 “이렇게 사나, 그렇게 죽으나”라고 생각하잖아요. 비슷한 건가요?


그렇죠. 사실 우환이는 삶에 대한 태도가 저랑 비슷한 인물인데요. 그런 우환이가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해보자’라고 마음먹는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서 당연시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행복에 대해서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데, 예전에 저는 ‘꼭 살아야 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그러면 꼭 행복해야 되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거든요. ‘행복해야 되는 게 당연한 건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이 소설을 보면 행복에 대한 입장이 다 달라요. 그래서 우환의 주변 인물들을 보면 삶에 대한 의심이 아무도 없어요. 다 확신에 차 있는 거예요.

 

그들은 작가님과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제가 생각하기에 일면 존경하는 면들이 있는 캐릭터들이죠. 확고함이 있는. 저는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왜 사는지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답을 구하기 너무 힘들더라고요. 늘 생각하는 게, 확고한 일상이 있으면 그런 의심이 잘 안 든다는 거예요. 이 소설을 쓸 때 ‘나한테는 많이 없는 욕망 덩어리들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우환이 삶에 대한 욕구를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관계’인 것 같아요.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슬로우 비디오>, <헬로우 고스트>에서도 다루셨던 것 같고요.


그렇죠. <헬로우 고스트>에서도 계속 죽으려고 하는 인물이 ‘살아야지’ 하고 마음먹는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 하루가 보편적이지 않고 특별하면 오히려 힘이 빠질 것 같았어요. 관객들이 보고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잖아요. ‘저래야 사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가장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찾다 보니까 그들의 관계를 가족으로 만든 거죠. 물론 가족이 없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헬로우 고스트>의 주인공도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거든요. 알고 보니 가족들이 있었던 거죠. 제가 생각했을 때는 그게 ‘유별나지 않지만 계속 살아가게 지탱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계인 것 같아요. 결국은 친구, 가족, 그런 관계들이 단단해지면 쉽게 포기하거나 죽지 않거든요. 『곰탕』에서도 그런 관계의 모습을 그린 거죠.


 

 

곰탕김영탁 저 | arte(아르테)
반전의 반전을 따라가며 마지막 문장까지 정신없이 읽고 나면, 한 인간이 가진 ‘그리움’이 어떤 일을 감행하게 하는지,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차이(Chai), 제이팝의 새로운 아티스트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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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제이팝 신에 등장한 신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를 골라본다면, 아마 주저 없이 이 팀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눈이 아플 정도의 현란한 분홍색으로 무장한 인상적인 비주얼과 더불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리드미컬하면서도 직관적인 사운드. 그간 제이팝에서 느껴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타입의 아티스트가 탄생했음을, 이들을 보고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외모지상주의를 새로이 정의하는 '네오 카와이'의 캐치프라이즈 아래, 평단과 대중의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2017년 일본의 No.1 충격파로 명명된 그들.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초청 아래 한국에서도 이른 쇼케이스를 하게 된 밴드와의 인터뷰는 활기차고 왁자지껄하게 진행되었다. 두 장의 EP와 한 장의 정규작만으로 이미 음악 신의 대안이 되어버린 챠이의 색다른 가치관과 음악관을 누구보다 한 발 앞서 확인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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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직 CHAI를 모르는 분들에게, 간단히 '이런 팀이다!'라는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마나 : 쌍둥이인 트윈보컬 카나, 마나와 베이스 유우키, 드럼 유나로 이루어진 4인조 여성밴드입니다. '콤플렉스는 아트다(コンプレックスはアㅡトなり)'라는 테마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콤플렉스는 아트다(コンプレックスはアㅡトなり)'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마나 : 콤플렉스는 그 사람의 개성이다! 라는 의미에요.


유우키 : 저희 네 명도 콤플렉스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리고 모두가 하나 정도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을 테니까, 오히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귀여운 것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어요.

 

캐치프라이즈가 'NEO 카와이'인데, 여기로도 연결이 되는 건지요.


유우키 : 그렇죠. '새로운 개념의 귀여움'을 네오 카와이라 명명해, 귀엽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습니다.


마나 : 일본에서 쓰이는 '귀엽다'라는 범위가 굉장히 좁아요. 날씬한 사람, 얼굴이 작은 사람, 눈이 큰 사람들이 보통 여기에 포함되고, 그 외에는 못생긴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요. 더불어 칭찬을 들으면 '고마워'라고 대답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귀여워'라고 말하면 '고마워'라고 하면 되는데, '아니야, 그렇지 않아'라고 이야기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제 생각엔 귀엽지 않은 사람도 없고, 누군가가 귀여움을 정의하는 것도 이상해서요. 사실 저희들도 귀엽다고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귀엽고 안 귀엽고의 기준을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바로 'NEO 카와이'죠.

 

한국에서의 공연은 처음인데, 지금 기분은 어떠신지요.


카나 : 어제 처음으로 공연했는데, 관객 분들이 많이 와주셔서 호응을 열광적으로 해주셔서 굉장히 즐거웠어요. (일본 관객들과 다른 점이 있다고 묻자) 확실히 다르죠. 일본 사람들은 아무래도 샤이해서, 좀처럼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요.


유나 : 어제는 춤추고 소리치고 노래하고, 굉장히 즐거워 해주셨어요.

 

밴드는 어떤 과정을 거쳐 결성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마나 : 유나와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부를 했었는데 그걸 기반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밴드부를 했다고 하셨는데, 그때 주로 어떤 곡들을 커버하셨나요.


마나 : 그 때는 제이팝밖에 몰라서, 생각해 보면 도쿄지헨만 엄청 연주했었네요.(웃음)

 

유우키씨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왔는데, 어떻게 연이 닿으셨는지요.


유우키 : 저는 당시 밴드부는 아니었고, 그냥 친구였어요. 음악적인 취미가 맞는 친구. 옆에서 보면서 점점 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남아있는 포지션이 베이스라서 악기도 함께 시작했어요.

 

네 분이 챠이라는 하나의 가면을 쓰고 평소에 말로는 하지 못했던 메시지를 노래나 퍼포먼스로 전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밴드라는 형태를 메시지 전달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요.


카나 :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티스트라면 무언가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티스트로 계속 존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선 대중에게 무언가 발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유우키 : 콘셉트 전달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실제 성격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마나 : 뒤에서는 좀 어두울지도.(웃음)


유나 : 본질적으로는 네거티브죠. 각자가 가진 콤플렉스에 대해 계속 고민해왔으니까요.


유우키 : 하지만 밴드를 하면서 많이 밝아졌어요. 저희가 생각했던 것, 'コンプレックスはアㅡトなり'라는 캐치프라이즈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덕분이죠.


유나 : 저희가 지금 같이 살고 있는데, 서로를 자주 칭찬해줘요. 그 덕분에 나 자신도 귀여운 면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보통 어떤 과정을 거쳐 곡이 만들어지는지요.


마나 : 제가 멜로디를 만들고요. 카나가 코드, 유우키가 가사를 담당, 베이스 라인도 카나가 만들어요. 보통은 가사가 맨 마지막에 완성되죠. 편곡이나 다른 작업이 전부 마무리되고 나서요.(편곡은 함께 하시는지 묻자) 네! 컴퓨터 같은거 할 줄 몰라서, 아날로그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라는 식이에요.

 

작년에 드디어 첫 풀 앨범 < PINK >가 발매되었습니다. 많은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는데, 작업을 하며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무엇인지요.


마나 : 질리지 않게 하고 싶었어요. 보통 앨범 들을 때 트랙을 건너 뛰어 듣는 게 보통이잖아요. 10곡 중 좋아하는 곡만 듣는 식으로요. 그래서 건너뛰지 않게 하는 작품을 만드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러닝타임을 3분 이내로 했다던가, 각각 다른 바리에이션의 곡들로 앨범을 꾸미려 노력했죠.

 

앨범 타이틀 < PINK >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요.


마나 : 저희가 공연 때 분홍색 의상을 입는데요. 핑크는 어렸을 때 꽤 자주 입었는데도, 어른이 되면 좀처럼 입지 않게 되잖아요. 어울리지 않는 색이라 생각하죠. 그런 인식을 뒤집고 싶어서 거꾸로 분홍색을 입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도 핑크색을 입히고 싶고, 이를 통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요.


유우키 : 귀엽기도 귀여운 거지만, 진짜 멋있는 색이라고 생각해요. 확 눈에 띄면서도 힘이 있는 색이니까. 이 의상과 함께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면 핑크가 좀 더 멋있게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핑크라는 색을 평소에도 멋있게 입고 다니면 좋겠다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어요.

 

아이디어는 누가 내셨는지요.


마나 : 저요! 저는 어렸을때 분홍색만 입었었거든요. 카나는 하늘색이었고요. 옷에 있어서는 싸울 일이 없었어요.(웃음)

 

곡의 전개가 굉장히 리드미컬해서 듣고 있자면 라이브에 가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데, 라이브에서의 반응도 어느 정도 고려해서 만드시는지요?


마나 : < PINK >를 만들 땐 고려하지 않았어요. 음원으로서 좋은 작품이 목표였거든요. 요즘 만들고 있는 곡은 반대로 라이브에서 하고 싶은 곡을 이미지화 시키면서 작업하고 있죠.

 

실제로 라이브 현장에서 팬들의 분위기는 어떤지요.


유우키 : 일반적인 제이팝이랑 비교해보면, “어이, 어이”하고 합창하거나 하진 않는 것 같아요. 모두가 같은 행동으로 분위기를 달구는 게 그렇게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각자가 자유롭게 즐기는 것을 지향하는 편이죠.


카나 : 특정한 행동이라면 보통 아티스트가 제안하는 게 대부분인데, 저희는 제안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일본은 제안하면 반드시 하는 분위기라서... 그걸 안하면 '내가 틀렸나' 싶은 마음에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NEO' 같이 연주가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 곡도 있습니다. 혹시 라이브 할 때 어렵게 만든 걸 후회한 적은 없으신지요.


유우키 : 아, 그게(웃음). 라이브가 연습이 아닌데도, 라이브를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어요. 레코딩할때는 좀 어렵지 않나 싶었는데 말이죠.

 

'フライド(Fried)'처럼 캬리 파뮤파뮤가 밴드를 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곡도 있는데, 혹시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영향을 받거나 참고한 일본의 음악 선배들이 있으시다면요.


마나 : 일본에는 없어요. 대신 해외 뮤지션은 많습니다. 저스티스나, 베이스먼트 잭스, 엑스엑스, 패션 핏...


유우키 : 그렇다고 시대를 구분해서 듣지는 않아요. 저희는 90년대 음악은 어떻고 이런거 잘 모르거든요.


마나 : 제이팝을 듣고 음악을 만들면 제이팝이 되버리는 것 같아서... 같은 걸 하는 건 의미 없잖아요. 제이팝을 듣고 만드는 건 가급적 지양하고 있어요.

 

'ほれちゃった(반해버렸어)'는 부드럽고 멜로딕한 곡에도 강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곡 같습니다.


유우키 : 이 노랜 교자에 대한 사랑 노래에요. 러브 송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러브 송은 좀 어른스러운 노래고 마나의 음색과는 약간 맞지 않다고 느껴서, 실제로 지금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때 떠오른 게 교자였죠. 교자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어요.

 

가사를 쓸 때도 랩과 같이 라임이나 인토네이션을 굉장히 신경 써서 만드는 느낌인데, 평소 '말'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흥미가 있으신지요.


유우키 : 물론입니다. 우선은, 음악이 첫번째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거의 팝만 듣는 편인데, 영어를 잘 모르는데도 엄청 감동한다거나 멋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거든요. 의미를 강요하면 그건 단지 낭독에 그치고 말거에요. 어디까지나 멜로디가 가진 리듬에 맞도록. 저희가 이야기하는 '콤플렉스'의 의미도 너무 강조하면 시끄럽고 과하다고 여겨질 수 있으니, 일본어를 영어가 가진 뉘앙스로 말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그런 의도 하에 리드미컬한 단어를 고르는지도 모르겠네요. 의미보다는 흐름 및 전체적인 리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리듬을 소재로 하는 개그맨이 일본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기가 높은데, 'ぎゃらんぶㅡ(갸란부)', 'Sound &Stomach' 같은 곡을 들으면 그런 개그맨 들이 흉내내고 싶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센스있는 가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가사를 쓸 때 이런 개그맨들이 모티브가 된 건 아닌지요.


마나 : 지금 들으니까 왠지 그런 거 같다는 느낌도!(웃음)


유우키 : 저희 입장에선 개그맨 분들이 좀 따라 해주셨으면 좋겠다 싶어요.(웃음)

 

앨범에 대한 본인들의 만족도는 얼마나 되시는지, 그리고 혹시 이번에 해보고 싶었는데 부득이하게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다면요.


마나 : 지금까지 낸 작품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에요. 듣고 나서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못해봤던 건 뭐가 있을까...


카나 : 음... 근데 저희들은 어쨌든 그때 낼 수 있는 최대한을 내거든요.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했던 것 같아요.

 

재작년 논프로모션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스포티파이 UK챠트에 랭크인 되고 그 후 SXSW 출연, 아메리카 투어로 이어졌었죠. 굉장히 놀랐을 것 같은데.


마나 : 해외는 어디를 가던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역시 엔터테인먼트의 나라구나라는 걸 느꼈죠. 좋은 건 좋은 거, 나쁜 건 나쁜 거 확실히 이야기해주기도 하고요.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가 쉬웠어요.


유우키 : 해외 투어에서 정말 저희가 받을 수 있는 칭찬을 전부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카나에게 청혼하는 관객도 계셨고요.(전원 웃음) 반응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죠. 일본어 리듬에 흥미를 가지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같이 갔던 일본밴드들은 전부 영어로 노래하거나 했었거든요. 어떤 분이 “일본어로 노래하는 팀이 챠이 밖에 없어”라고 하셔서. 일본어로 제이팝이 아닌 음악을 한다는 것이 재미있게 여겨진 것 같아요.


유나 : 맞아요. 일본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좋아해 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올해 벌써 아메리카 투어 및 SXSW 등 많은 스케줄이 예정되어 있는데, 올해는 어떤 밴드로 발돋움하고 싶은지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유우키 : 좀 더 해외에 가고 싶어요. 다시 미국도 가게 되었고, 유럽 같은 곳도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누구도 본 적 없는,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밴드가 되고 싶어요. 새로운 자극을 주는 그런 밴드요.

 

챠이(CHAI) : 2012년 말 나고야에서 결성된 걸 밴드. 펑크(Funk), 랩, 사이키델릭, 일렉트로니카 등이 뒤섞인 자유로운 음악과 독특한 언어감각을 통해 작년 한 해 일본 록 신의 대안으로 단번에 부상했다. 스포티파이 UK 차트 진입 및 아메리카 투어를 통해 일찌감치 영미권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 중. 마나(보컬, 키보드), 카나(보컬, 기타), 유우키(베이스, 코러스), 유나(드럼, 코러스) 4인조 구성으로, EP < ほったらかシリㅡズ >(2016)와 < ほめごろシリㅡズ >(2016)에 이은 정규작 < PINK >(2017)를 최근 릴리즈.

 

 

진행 : 조아름, 황선업, 정민재
정리 : 황선업
취재협조 : 붕가붕가레코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하익 “쓰면서 제 안의 아이가 뛰어 노는 걸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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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지우는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한다. 사용 흔적도 없는 새것, 주인이 없는 듯한 스마트폰을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지우는 불안과 매력을 동시에 느끼며 정신없이 빠져든다. 게임도 하고, 동영상도 보며 스마트폰을 만끽하던 중 걸려온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도깨비친구. 그들의 초대를 받아 도깨비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된 지우는 허깨비 놀이도 하고, 꼭두각시 반려견 코리도 만나고, ‘술술술’앱으로 쌓인 숙제도 말끔하게 처리한다. 매일 신나는 나날을 보내던 지우는 그러나 도깨비폰의 해로움을 점차 깨닫게 된다. 어떻게 하나? 과연 지우는 도깨비폰의 엄청난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


2008년 「화면 저편의 인간」으로 등단해 장편 『종료되었습니다』 , 『선암여고 탐정단』  등 탁월한 흡인력의 추리소설을 써온 박하익 작가의 첫 번째 동화 『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는 늘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르는 자녀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다. 이 매력적인 물건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한 작가는 주인공 지우가 도깨비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들려주며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란 무엇인지 찾는다. 경계하는 마음,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고요한 시간은 어린이에게도, 성인에게도 꼭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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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쓸 때 너무 행복했어요


얼마 전에 볼로냐도서전 다녀오셨죠? 창비 ‘좋은 어린이책’고학년 부문 대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소식 듣고 기분 좋으셨을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네, 잘 다녀왔어요. 재미있었습니다.(웃음) 축하 감사드려요. 수상 소식을 듣고서는 기분도 좋았고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년에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좀 했거든요. 제 소설이 영화로 개봉이 되어서 그런 걱정도 있었고, 신작을 써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는데요. 수상으로 인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요. 위로가 됐었어요.

 

신작 부담이 있으셨군요.


둘째 아이를 낳고 거의 2년 정도 신작이 나오지 않았었거든요. 그러는 동안 영화가 개봉됐는데요. 영화 <희생부활자>의 원작 『종료되었습니다』 는 제가 거의 7-8년 전에 썼던 작품이고요. 그걸 이제 와서 재평가 받는다는 게 상당히 부담이 됐어요. 더구나 그 작품은 첫째를 가졌을 때 막달 한 달 동안 썼던 작품이에요. 제 경우 대중에게 알려진 이미지가 없는 상태인데 다시 그것으로만 알려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했었죠. 그러다가 마침 이 상을 받게 되어서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게 저한테 기쁨이었어요. 무엇보다 위로였고요.

 

첫 어린이문학 작품이에요. 추리소설을 써오시다 새로운 도전을 하신 건데요. 어떤 이유였나요?


두 가지예요. 첫째는 내적 요인인데요. 저는 추리소설에 대해 굉장히 큰 의미를 갖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겪어온 기독교적 분위기, 죄와 벌, 정의에 관한 의문과도 닿아 있어서요. 추리소설은 매우 사랑하는 분야거든요. 하지만 하필이면 아이 낳는 동시에 추리소설 작가로 경력을 시작하다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죠. 자료 읽는 게 힘들어요. 충격이 심했어요. 육아 부담이 커서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수한 아이들과 잔혹한 범죄 사례들을 병행해서 본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더라고요. 아이를 처음 낳은 엄마는 어린이 학대 뉴스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그 경험이 5년 반복되니까 내면이 너무 많이 상했어요. 트라우마를 겪었죠. 통계적으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저한테는 사건 하나하나가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저희 아이가 놀이터에서 30초만 안 보여도 비명을 지르듯 찾고 그랬어요. 이런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 아이들에 대한 걱정, 공포가 컸어요.

 

너무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그걸 치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치유, 어떤 면에서는 도피였을지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동화를 쓸 때 너무 행복했어요. 굉장한 위로를 받았고요. 두 번째 이유는 환경적인 한계점이었어요. 육아를 하면서 1,300매 이상이 되는 분량을 쓰기 힘들었어요.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야 하는데 아이는 깨잖아요. 집중하려고 하면 깨요.(웃음) 5-6년을 반복했어요. 무기력이 찾아와요. 굉장히 우울증이 심하게 왔고요. 그러다가 마침 첫째가 초등학교에,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게 됐고, 비교적 시간 여유가 생겼죠. 뭘 써보고 싶은데 완성될 수 있는 분량, 형식을 찾다보니 아동문학으로 와 있더라고요. 또 저희 아이가 항상 “엄마, 핸드폰 좀 사줘.”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쓰게 된 거예요.

 

친구들에게 핸드폰이 많이 있죠?


초등학교에 가면서 비율이 많이 늘더라고요. 또한 저학년 때까지는 어떻게든 ‘키즈폰’으로 버텨보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스마트폰이 많아져요. 또래집단에서 관계형성을 하다보면 메신저의 역할이 커져서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가게 되거든요. 아이들은 거의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알아가잖아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아무도 안 쓰셨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이 소재로 이야기를 쓰게 됐습니다.

 

자녀분은 이 이야기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웃음) 되게 행복해하고 있어요.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이 이야기를 쓰는 데 자기가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자기가 제 창작세계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주기도 해요. 이런 이야기를 써라, 빨리 써라, 이러면서요.

 

 

동화작가로서 도깨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무엇보다 도깨비 설화의 현대적 해석이 굉장히 재미있어요. 이런 해석을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거겠죠?


도깨비는 『서유기』의 ‘사오정’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해요. ‘손오공’이나 ‘저팔계’는 새로 쓰여도 캐릭터에 큰 차이가 없어요. 손오공은 유능하고, 모험적이고요. 저팔계는 비굴하고 먹을 걸 밝히죠. 하지만 사오정은 작가의 해석에 따라 굉장히 달라져요. 도깨비도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도깨비는 아직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진 못했죠. 이제는 도깨비에게 구체화된 형상을 부여해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요.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도깨비의 신적인 면을 강조했잖아요. 책에 참고문헌을 적었는데 도깨비 연구하신 김종대 분이 고대의 도깨비는 신이었을 것이라고 연구하셨더라고요. 한편 저는 동화작가로서 도깨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뿔을 달고 있지 않은, 그러면서도 동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보고 싶었고요. 마침 과학기술이 마술처럼 발달하고, 그것이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된 것 같아요.

 

꼭두각시라든지 ‘날대야’라든지 추석에 보름달이 더 밝은 이유 같은 것들이 정말 좋았거든요. 특별히 작가님 마음에 들었던 이야깃거리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굉장히 많은데요. 꼭두각시도 그래요. 희한하게도 도깨비 속 세상, 설화 부분과 현재의 과학기술 부분이 맞닿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우연이었던 것 같아요. 워낙 설화에 잠재된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고요. 마침 투명망토가 개발되고 있었는데 그게 도깨비감투와 같고요. 날대야도 드론과 닿아 있었어요. 날대야는 도깨비 설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건 아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UFO와 관련된 서술이 있는데 날대야 모양이었다고 하거든요. 여러 가지 시의적으로 맞았던 것을 운 좋게 집어 썼다고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빨리 쓸 수 있었던 게 행운이죠.

 

“도깨비 세계에도 택배가 있어?”
“응, 날대야들이 물건을 배달해 줘.”
“날대야가 뭐야?”
“물건을 운반하는 대야지! 날아다니는 대야!”(중략)
“사실 인간들이 목격하는 유에프오는 거의 우리 날대야인 걸. 도깨비들은 쇼핑을 진짜 좋아하거든.”(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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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지우’가 초등학교 5학년인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그 시기이기 때문에 따라오는 이야기들도 있었고요. 학업 스트레스, 부모와의 관계 등이 그렇죠.


우선 앞으로 서술하게 될 과학기술에 관한 것을 주인공이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요. 6학년이 되면 또 너무 이야기가 커져서 읽는 데 부담을 갖게 될 것 같았어요. 5학년은 한창 호기심도 왕성하고, 저학년들에 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용어를 써서 이야기해줄 수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 지우의 연령은 3학년 정도로 잡고 있는데요. 서술 상으로는 12살이 좋았던 거죠. 가상 독자로는 3학년 정도를 생각했었어요.

 

지우는 어떤 어린이를 상상했을까요?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성격이나 장점 등과 관련해 어떤 인물을 떠올리면서 쓰셨는지 듣고 싶어요.


사실 저희 동네에 사는 지우라는 아이의 이름을 딴 거예요. 전적으로 그 아이의 인격을 상상한 것은 아니지만요. 저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을 조금 어색해 하거든요. 그런데 지우라는 아이가 굉장히 밝고 배려도 잘하고 두루두루 잘 지내더라고요. 항상 눈여겨보고 있었죠. 만약 이 책을 내면 그 아이한테 제일 먼저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이름은 꼭 지우라고 짓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선물해줬는데요. 저는 정말 재미있게 썼다고 생각하고 책을 받으면 몇 초 만에 읽겠지 생각했거든요.(웃음) 하지만 확실히 아이들은 바빠요. 세상에 재미있는 게 많아서 책 읽는 데에는 며칠 걸리더라고요. 아직 읽고 있다는데 그래도 기뻐요. 걔한테 줄 수 있었다는 게 너무 기뻐요.

 

지우라는 친구는 정말 좋겠는데요.


성은 조금 다르게 했어요. 너무 부담을 느낄까봐서요.(웃음) 근데 정말 기뻐요. 걔는 모르겠지만 누군가한테 그렇게 줄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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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온전한 너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흥미로웠던 게 지우가 도깨비폰을 발견할 때 ‘불안과 매력을’ 동시에 느꼈다는 점이에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감정이란 생각을 했어요.


아이들이 어떤 것에 대해 즐거움과 불안을 느끼는 건 성숙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놀이가 100% 깔끔한 만족감만을 줄 수는 없어요. 자신의 과업, 해야 할 일에 대해서 항상 반성하는 자아는 가지고 있어야 하고요.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도 그거예요. 반성적 자아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거거든요. 만약 어떤 놀이를 하고 난 후 죄책감이 남는다면 그 놀이에는 뭔가 나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잠재되어 있는 거죠. 이미 마음을 빼앗긴 상태이기 때문에 네가 온전한 너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걸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어요. 불안과 즐거움은 항상 같이 가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반부에 들려주는 이야기도 그거예요. 생각하라는 것,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기독교 분위기의 집에서 자랐는데요.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신기하다고 생각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상(像)이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오랫동안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잖아요.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가장 강력하게 매력을 느끼는 인간의 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인간이 외부에 만들어놓은 초월적 자아가 자기에게 끊임없이 거룩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거잖아요. 왜 인간이 향상된 자아로 가기 위해 거룩성을 염두에 두게 만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요. 그러다보니 거룩한 상태, 자기 마음이 혼자 존재할 수 있는, 게임이나 연애, 돈 등에 지배당하지 않고 나의 초월적 자아, 외면적 자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를 인간 스스로가 생존에 있어 가장 강력한 상태라고 무의식중에 깨닫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생각이 이야기에 담긴 것 같아요.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은 작가님이 어린이들, 특히 자녀분들에게도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겠죠?


그렇죠. 왜냐하면 저는 굉장히 산만한 아이였고요. 저희 아이도 슬슬 조짐이 보여요.(웃음) 그런데 항상 그런 것들을 할 때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인 거예요. 이미 답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의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지우의 결핍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지우가 도깨비 친구들이 너무 좋아질 때 그 이유를 솔직함, 뒤끝 없음이라고 해요. 지우는 그런 관계가 목말랐던 거죠. 부모님과의 대화조차도 생각할 게 너무 많고요.


어떤 연구 결과를 읽었는데요. 인간이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투자해야 할 에너지가 굉장히 크대요. 그래서 어떤 집중의 과업을 크게 해야 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 부분을 많이 놓치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아이들이 그런 면에서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아이들에게는 숙련되어야 할 지식이 너무 많아요. 숙련되지 않는 노동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무섭게 말하기도 하잖아요. 단순 노동을 로봇이 대체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린 거죠. 그러다보니까 아이들은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복잡한 사람의 내면과 감정을 다뤄야 할 자리를 학업에 의해 많이 손상당한 거예요. 그런 아이들한테는 보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단순한 관계부터 필요하고, 부드럽게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죠. 요즘 아이들이 은유나 은근한 암시를 어려워하는 게 대중매체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인간관계는 어렵거든요.

 

도깨비들이 바로 그 부분을 채워주고요.


도깨비들은 단순하고요. 사람을 너무 사랑해요. 도깨비는 요즘 친구들에게 참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설화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했고요. 우리 도깨비들이 요즘 아이들에게 이야기되고 아이들에게 말 걸어줄 수 있는 좋은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도깨비들의 단순함과 장난스러움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특히 세계적으로도 신화, 설화가 많이 발굴되는 상태잖아요.

 

어린이들이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도 많이 느끼세요?


네, 저는 저희 아이를 보고 어린 시절의 저를 용서했어요. 저는 사람들과 노는 것보다 그들이 노는 걸 보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아이들과 노는 것도 때로는 좋았지만 소모되는 느낌이 많았고요.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떨어져서 관찰하는 게 정말로 행복했어요. 그런데 저희 아이도 무리 지어서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걸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깨달은 게 나의 어떤 결여된 면이 우리 아이에게 있구나, 이런 고민을 하는 아이들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더 공감이 갔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아무래도 형제도 더 적고요.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을 기회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거든요.

 

주인공 지우가 친구들과 시간을 정해서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하죠. 이런 장면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너무 불쌍해요. 더구나 미세먼지가 강력한 장애물이에요. 현재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은 지금부터 평생 맺을 대인관계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시기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안 그래도 해야 할 과업이 많고요. 학교나 학원 안에서만 대인관계를 형성해야 했었는데 심지어 미세먼지로 인해 자율적인 관계 맺음의 기회가 굉장히 많이 박탈됐어요. 특히 3세 미만의 영유아 경우 폐 자체가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거든요. 당연히 자율적인, 스스로 용기를 내서 맺는 관계가 아니라 보호자들이 만들어놓은 한계와 통제 속에서만 관계를 맺어야 하잖아요. 앞으로 십 년 뒤가 저는 너무 걱정 돼요. 지금은 놀이터에서 놀지를 않거든요.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

 

그러니까 스마트폰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온라인 놀이터, 온라인 광장인 거잖아요.


그렇죠. 정말 불행한 일이에요.

 

 

유쾌한 동화를 쓰고 싶어요


앞으로도 동화, 어린이의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아이들은 세상을 더듬더듬 알아나가는데요. 아이들에게는 순수한 기쁨이라는 게 있어서 이 소설을 그저 이야기로 받아들여주더라고요. 이야기의 구조나 캐릭터성, 이런 것 없이 말이죠. 그런 것을 보면서 제가 처음에 글을 썼을 때의 즐거움을 되살리게 됐어요. 글을 쓰면서 겪은 어려운 일들을 동화를 쓰면서, 아이들과 호흡하면서 많이 잊어버리게 됐거든요. 소생되는 걸 느꼈죠. 그래서 이왕이면 조금 더 쓰고 싶어요. 떠오르게 된 이야기가 몇 개 있어서요. 몇 가지 생각해놓은 것까지는 쓰고 싶어요.

 

더 쓰셔야죠.(웃음)


저도 이렇게까지 아동문학을 생각하게 될 줄 몰랐어요. 한국 아동문학에 대해서 잘 몰랐고, 공부를 특별히 한 것도 아니었어요. 국어교육을 전공하긴 했지만 그것은 중고등학생에 관한 일이었고요. 그런데 일단 이 작품을 쓰는 게 저한테 큰 위로가 됐어요. 추리소설 쓸 때와는 다르게 제 안의 아이가 뛰어 노는 걸 느꼈고요. 또한 아이를 키우면서 동화를 많이 읽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다시 읽게 된 동화가 로알드 달의 『내 친구 꼬마 거인』이었어요. 특히 좋았던 건 이야기가 로알드 달 자신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에요. 거인과 소피의 관계가 작가와 로알드 달 자신과의 관계와도 같다고 느껴졌거든요. 상처 받은 거인이 소피와의 관계를 통해 회복되면서 건강하게 자신의 장애물을 물리치는데요. 제가 동화를 쓰면서 그런 걸 느낀 거죠. 더 쓰고 싶어요. 쓰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즐거운 동화를 많이 쓰고 싶어요.

 

즐거운 동화요.


저는 유쾌한 동화를 쓰고 싶어요.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를 너무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아이됨으로써의 기쁨을 마음껏 영위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저는 좋은 부모란 천진함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부모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시기의 천진함을 놓치지 않게 하는 것이 부모란 생각을 했는데요. 계속 동화를 쓴다면 그런 동화작가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또 한 가지는 제 목표인데요. 정말 재미있게 써서 아무리 두꺼워도 두려움 없이 독파하게끔 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재미있는데 두꺼운(웃음) 책을 쓰고 싶어요. 아이들이 인생에서 제일 두꺼운 책을 열두 살 미만의 시기에 만나게 됐으면 좋겠고요. 그게 제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욕심이 있어요.

 

윤 진사가 처음부터 훈수를 두거나 하지 않잖아요. 질문을 해올 때에만 약간의 힌트를 주고요. 어른의 역할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화두도 주고, 그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충분히 자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른 같아요. 김지은 평론가의『거짓말하는 어른』서문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아이는 어른이 보지 않을 때 잘한다고요. 서문이 정말 아름다운데요. 삼촌이 여자친구와 통화하러 나갔을 때, 엄마가 시장 보러 갔을 때 그때, 어른이 보지 않았을 때 아이들은 잘한다는 거예요. 직접 경험을 통해서 잘하게 되는 거죠. 정말 공감했어요.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인이어도 좋을 것 같고요.


스마트폰으로 뭔가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들(웃음)이요. 저는 아이들이 자기 가능성을 너무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도깨비 설화 중에 참 재미있었던 게 도깨비들이 신기하게도 잠재력을 가진 어린 아이나 사람을 알아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하러 가는 데 꽃가마를 보내주고, 그 사람이 지나갈 때 “정승 지나가신다!”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너무 신기하죠? 그래서 저는 사실 아이들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귀한 존재라는 걸 조금 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박하익 글/손지희 그림 | 창비
최첨단 과학 기술과 도깨비가 살아가는 환상 공간을 연결한 기발한 판타지 동화로, 평범한 일상을 뒤흔드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길 바라는 어린이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만화가 이종범 “자존감의 뿌리에는 자기 이해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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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종범은 스스로 ‘참치형 인간’이라고 소개한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참치처럼 계속 무언가 도전하고 시도해왔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연세대 심리학과에 들어갔고, 네이버 웹툰에 <닥터 프로스트>를 연재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만화가 외에도 라디오 DJ, 팟캐스트 진행자, 재즈밴드 드러머 등 하나만 해도 모자랄 타이틀을 여럿 달고 청강대학교 만화콘텐츠 스쿨 교수로 학생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종범은 자신의 인생을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중 대부분은 도망 다니는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만화가를 준비하면서 보냈던 혹독한 기간, 누구에게나 있었을 지질한 시절을 그렇게 도망 다니면서 보냈다. 그렇다고 자신감과 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도망 친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도망 후에도 다시 숨을 고르고 도전할 수 있었다. 에세이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 는 ‘이겨내자’는 세상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도망치기를 권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이런 경우에 적합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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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무언가의 천재예요


에세이집은 처음 냈어요. JTBC 프로그램 <말하는 대로>에서 ‘도망가도 괜찮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책 제목은 거기서 나온 건가요?

 

<말하는 대로> 나오기 전에도 글 대부분은 나와 있었어요. 웹진 <아이즈>에 연재한 글이 쌓이면서 편집인들이 책으로 엮을 가능성을 봤던 것 같아요. 방송 출연이 방향을 명료하게 만들어 준 건 있어요. 일상처럼 글을 연재하다 보니 웹툰 작가로 산다는 것에 대한 글도 있었고, 어떤 글은 제 개인고백이기도 했고요. 방송하면서 말을 정리하다 보니 파편화된 글이 하나의 주제로 묶이더라고요.


창작의 도구로 계속 만화를 써 왔는데, 글은 또 도구가 달라요. 글 쓰는 건 어땠나요?


만화하고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긴 했는데, 저랑 만화가 편한 관계는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사명감으로 진지하게 했다면 글은 더 편하게 다루는 관계였죠. 하지만 만화는 어떤 이야기나 인물 뒤에 숨어도 글은 제가 전면으로 드러나다 보니까 숨을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정교하게 정리해야 했죠. 가장 편하고 쉬운 게 말이라면 가장 진지한 게 만화고, 말보다는 불편하지만 만화보다 편한 게 글인 것 같아요. 말처럼 휘발되지 않아서 좋아하기도 하고요.


휘발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곤경에 처하기도 하죠.


그렇죠. SNS에 쓴 말이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하고요. (웃음)


창작에 관한 문장이 많이 나왔어요.


에세이를 연재하던 기간에는 ‘창작하는 자신’이 최대 관심사였어요. 만화뿐 아니라 무언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하나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거든요. 작법서와 창작인이 쓴 에세이나 똑같이 작법과 창작론을 이야기하지만, 후자는 창작하는 자신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여러모로 창작하는 지망생에게 하는 조언같이 느껴졌어요. 혼자 스토리를 공부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알려준다든지요.


여러 지망생이 질문을 많이 했던 부분이었어요. 처음에는 에세이인데 너무 작법만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고민을 했는데, 편집자님이 귀농한 사람이 쓴 에세이는 농사법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무슨 글이든 글쓴이의 성분 중에 중요한 부분이 들어간다는 말씀을 하셔서 용기가 났어요. 제 생활이 창작과 관련되어 있으니 창작을 많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한 가지, 제가 쓰지 않은 느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원칙은 있었어요. 더 잘나가는 작가가 쓴 작법론과 제 작법론은 차이가 있어야 하니까요.

 

 

잘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나는 괜찮다


“만화가가 되는 데 특정한 재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재능을 써서 만화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문장이 재능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천재다”라는 말에서 천재라는 말을 너무 중시하는 것 같아요. 가치 있는 재능과 가치 없는 재능을 평가하고 나누는 세상이 가장 문제죠. 그건 월권이거든요. 다들 재능을 다각도로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천재가 맞는데, 이 사람이 가진 천재적인 분야가 스스로든 남에 의해서든 평가절하돼서 드러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봐요. 재능이라는 말이 가진 아름다움과 멋있음보다는 그 단어가 끼치는 해악이 우리나라에서는 압도적으로 커요. 그래서 재능의 무용론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죠.


사람들은 재능이냐 노력이냐, 혹은 ‘무엇을 말할까’와 ‘어떻게 말할까’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해요.


굳이 예를 들면 오른손과 왼손 같은 거랄까요.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표현은 조심하려고 해요. 하지만 일상처럼 반복했을 때 테크닉은 따라오고, 그래서 무게중심을 ‘무엇을 말할까’에 두는 것 같아요.


재능을 ‘불행배틀’의 일환으로 접근하기도 해요. 작가님은 만화가로 성공도 했고, 명문대 출신에, 여러 가지 취미가 많고, 그런 점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누군가 그런 싸움을 걸면 기꺼이 져 줘요. 그래, 네가 더 불행하고 네가 더 재능 없는 게 맞아, 하면서요. 하지만 대개 그렇게 불쾌하게 만들기보다 그냥 물어봐요. 저보다 더 불행하고 더 재능 없는 걸 원하냐고요. 그럼 비교를 꺼내 들었던 대화와는 다르게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있더라고요.


 ‘이종범은 에고이스트다’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어요. 자존감이나 자기애가 높으면 창작에 동력이 되지 않나요?


자존감이 높으면 편리하죠. 배구하는 데 키가 크다는 정도의 유용함일까요? 그것도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요.


자신감과 자존감의 차이는 뭘까요?

 

한국은 제가 보기에는 자존감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태 같아요. 핵폭탄 이후 멸망한 인류 수준으로 자존감이 기근에 들어 있어요. 과거 성취가 중요했던 시절에 쓰이던 자신감이라는 자리를 자존감이 채운 것도 있고, 자존감이라는 게 너무 많이 쓰이면서 피곤함을 느끼는 단어가 됐는데 그게 아쉬워요.

 

“나는 잘났어.”
이건 자신감이고,
“못난 것 같지만 괜찮아.”
이것이 자존감에 가깝다.
이쪽이 유통기한이 훨씬 길다.
- 36쪽

 

최근 ‘나를 알아야 한다’는 화두가 자주 들려와요.


자존감의 뿌리에는 자기 이해가 있다고 믿어요. 잘하는 게 있어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논리 속에서는 조건에 의해 자기 가치가 정해지는데, 자존감은 잘하고 못하고와 무관하게 자신은 괜찮은 존재라는 느낌이거든요. 자기이해가 많이 쌓여있는 사람에게는 자존감이 어렵지 않아요. 자신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잘 따라가고 파악하다 보면 어디서 자기 가치가 나오는지 선명하게 이해하거든요. 그럼 남들이 제시하는 조건에 자신을 달아두지 않게 되고요. 저도 20대 내내 온통 저 자신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쏟았던 것 같아요. 지금 그리는  『닥터 프로스트』 도 자기를 이해하고자 하는 남자의 이야기고,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도 결국 저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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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눈


핑크레이디 사건이나, 레진코믹스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SNS에 올린 글이 비판을 많이 받았었어요. 하지만 클로저스 성우 해고 사건 때도 목소리를 냈었고, 웹툰계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늘 방법을 고민하지만 무력감도 같이 들어요. 만화가 협회, 웹툰작가협회 양쪽에 이사로 있어서 만화 현안을 가장 빨리 접하지만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대부분 피해자인 제자와 동료를 상담하는 데 보내고요. 최근 벌어지는 여성 혐오 문제에서는 가장 소중한 동료와 제자와 지인이 전부 여성인데, 당연히 분노하고 속상하죠. 하지만 한국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첫 번째 옵션으로 일단 말을 아껴야 된다는 생각은 있어요. 젠더 이슈를 이야기할 때 뭘 이야기할까 고민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먼저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SNS에 무언가 말하는 게 압도적으로 줄었어요. 누군가 매일 이것저것 떠들다가 이 사안에 대해서만 침묵한다는 식으로 반응하면 억울할 수는 있겠지만, 차라리 그런 오해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취미를 이야기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회 이슈에 문제제기를 하는 의미로 ‘사회를 보는 눈’을 생각하고 있다고 느껴져요. 시즌 3에서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하기도 했고요.


지금은 사회를 보는 눈이 제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연재가 늦어지는 이유기도 해요. 새로운 시즌에서 혐오에 관한 내용을 그리려고 하는데, 2년 전에는 혐오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혐오의 정체가 뭘까 관심이 생기고, 혐오에 대해 생각하고, 혐오를 받아 보고, 누군가를 혐오하는 나를 관찰하면서 2년이 흘러가 버린 거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어떤 이야기가 발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넓어졌어요.


정치적 올바름이 시대의 정신이 됐으니까요. 하지만 계속 생각하다가는 휴재가 길어지겠는걸요.


어떤 사항이나 이슈에 발빠르게 의견 내는 건 논객의 역할이고, 작가로서의 역할은 일단 정리가 될 때까지는 봐야 한다고는 생각해요. 어느 지점에서는 끊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 놔야죠. 그게 작가로서의 직업적인 의무고요. 휴재한 지 2년 2개월 됐습니다. 온통 걱정이에요.


자존감과 휴재에 대한 걱정은 별개군요. (웃음)


왜 이렇게 휴재를 길게 했나 파악을 못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졌던 것 같아요. 지금은 초조한데 그렇게 무섭진 않아요. 그저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송구합니다.


『닥터 프로스트』 가 2010년에 시작했으니 웹툰 1.5세대에 해당할 텐데, 그동안 웹툰 생태계가 급격하게 바뀌었어요. 뒤쳐진다는 불안함이 있나요?


어떻게 변할지 알수 없으니 불안한 건데, 다시 뒤를 돌아보면 안정감이 생겨요. 웹툰이 어떤 모양을 띄더라도 만화의 형식을 활용해서 생각을 전달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고, 제가 만화를 사랑하고 할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독자가 있다는 점 때문에 불안하진 않아요.


연재가 끝나면 연재했던 만화를 다시 통독하신다고요. 자기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힘들 텐데요.


힘든 기간이 있죠. 지금은 내려놨어요. 학생들이 힘들어할 때 늘 제 데뷔작을 보여주거든요. 데뷔작은 정말 엉망이었어요. 학생들이 늘 효과 만점으로 용기를 얻어서 갑니다. 이것이 자존감일까요? (웃음)


팟캐스트도 진행합니다. 말을 편하게 하시는 것 같아요.


말하기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가장 길 거예요. 말을 도구로 적극적으로 쓰겠다고 마음먹은 거라, 계획적으로 쓰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발음이나 빠르기를 일부러 조절하기도 하고요.


향후 계획은요?


최근에는 다이빙과 다트에 빠져 있어요. 열심히 로그를 채우면서 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있죠.


취미인간이군요. 재즈에 빠져서 연주했다고 들었어요.


취미는 늘 저에게 중요해요. 자신을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가 좋아요. 제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자극받는지 잘 보여주죠. 연주도 예전에는 업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저를 위해 해요. 원고 작업하는 공간에는 무조건 피아노나 드럼 연습 패드가 있어야 해요. 연재하면서 마감할 때 힘들면 가끔 치고요.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하나요?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긴 한데,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방향은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타인의 평가나 생각을 직접 구할 용기는 없잖아요. 하지만 모두다 궁금해 하죠. 이 책은 저랑 닮아있으니 어떻게 읽힐지 궁금한 게 당연하고요. 하지만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말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말이기 때문에 선언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리뷰는 찾아봤어요?


아직 못 찾아봤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필자인 김혜리 기자님이 추천사를 써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김혜리 기자님의 글을 읽고 싶다면 사라고 홍보하고 있어요. 제 에세이는 부록이고요.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이종범 저 | 위즈덤하우스
부끄럽고 찌질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웹툰 작가의 삶까지 담담하게 풀어낸 그의 고백은 그 어떤 현답이나 건설적인 조언보다 따뜻한 위로와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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