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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희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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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는 홍승희의 이야기다. 306쪽에 달하는 더없이 솔직한 기록. 그러나 다 읽은 후에도 ‘홍승희가 누구인지’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그녀와 연관된 몇 가지 단어들을 나열할 수는 있겠다. 효녀연합, 권력 풍자 그라피티, 거리 예술가, 영페미니스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누군가를 설명하는 말들의 총합이 곧 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홍승희도 그렇다.

 

책 속에서 그녀는 말했다. “내가 나의 서사를 쓰지 않으면 읽히고 납작해지고 분류되어버린다는 걸 안다.” 또 이렇게 썼다. “정직한 무지가 서로를 가깝게 한다.” “내가 무엇을, 누군가를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권태와 오만,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홍승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섣부르게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아닌, 그녀의 서사를 말하는 일이어야 한다.

 

2008년 중증장애인 이동권 지원 예산이 삭감됐다. 그때 처음으로 홍승희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후에는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해, 세월호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왔다. 어버이연합 시위대 앞에서 ‘대한민국효녀연합’ 퍼포먼스를 했고, 대통령 풍자 그라피티를 그렸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기록한 책 『붉은 선』을 썼고, 여성주의저널 <일다>에 ‘치마 속 페미니즘’을 연재했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는 지난 2년간 홍승희가 쓰고 그린 이야기다. 스스로는 “전생의 책 같은 느낌”이라고 하니, 이 또한 홍승희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나눈 대화도 마찬가지일 터다. 이미 지나갔거나 여전히 흐르고 있는, 홍승희 안의 작은 이야기가 아닐까. 또렷하게 손에 잡히는 ‘뭔가’는 없을지라도,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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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로만 이야기될 수 있어요


대중과 미디어가 작가님에게 여러 이름을 붙이고 이미지를 덧씌워왔어요. 누군가는 ‘개념 있고 정의로운 청년’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종북 세력’이라고 하고, ‘영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꼴페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지켜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제가 원하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여러 이름들이 붙었는데, 처음에는 그런 이름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잖아요. 그 사람의 서사가 보이지 않을 때 이미지로 드러나면 이름 붙여지기 쉬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고요(웃음). 저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특히 여성이 목소리를 내면 관심 종자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 사회에 불만이 있는 사람으로 해석돼 왔잖아요. 제가 진짜 이상해서라기보다는 사회가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붉은 선』 에 대한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록이다 보니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이렇게 다 썼는데, 괜찮을까’라는. 어떤 분은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이런 내용을 다 알고도 만나주는 남자하고는 결혼해야 된다고. 여성이 자신의 성이나 가정사처럼 사적으로 치부되는 이야기를 공적으로 하면 걱정을 받는 거죠. 오히려 저를 잘 아는 분들은 걱정을 안 하는데, 애매하게 아는 분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말들은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아요.


맞아요. 예전에 예술행동을 같이 했던 선배는 ‘네가 이렇게 총대를 멜 필요는 없지 않느냐,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굳이 썼느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희생을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제 자신이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이야기들이거든요.

 

이번 책에서도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어린 시절에 가정 안에서 경험한 일이라든지, 자살을 시도했던 일에 대해서도 쓰셨는데요. 이런 이야기들을 털어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자유로워졌다고 느끼세요?


사실 전과 후가 다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걸 쓰지 않았을 때도 제가 병리적으로 해석되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판단하는 일들은 있어 왔거든요. 『붉은 선』에도 썼지만, 누구나 여성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비껴가면 더러운 여자라거나 문란한 여자라는 이야기를 듣잖아요. 어차피 써도 욕을 먹고 안 써도 욕을 먹는 거니까 이왕이면 자유롭게, 욕을 해도 상관없다는 느낌으로 쓰니까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영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가 불편하기도 하세요?


불편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요.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는 페미니스트가 당연해져야하는 단어라서 굳이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 말이 너무 특별해지는 분위기가 답답하기도 해요. 그래서 굳이 그런 수식어를 저에게 붙이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누구나 그렇듯이 저라는 존재도 페미니스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없는 거고. 그런 점에서 모든 이름들이 그런 경계에 있는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인터뷰 전에 질문지를 보내드리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 홍승희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무엇인지’ 여쭤봤어요. 지금까지 미디어와 대중이 일방적으로 이름표를 붙여주기만 했지, 작가님에게 발언권을 주지는 않았던 것 같거든요. 


키워드는 생각이 안 되더라고요. 어떤 서사로만 말해질 수 있을 뿐인 것 같아요. 어떤 단어가 되어버리면...

 

그 안에 또 갇혀버리는 건가요?


네. 제가 요즘 사주명리를 공부하고 있는데, 제 사주팔자 안에 가장 많은 기운이 나무, 불, 물이에요. 키워드라면 그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정된 키워드가 있다기보다는 물처럼 우울해지고 혼자 있고 싶고 감수성이 폭발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불처럼 타오르고 싶고 사람들과 만나고 싶고 굉장히 명랑하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고, 그런 바이오리듬이 있다고 할까요.

 

‘홍승희라는 사람은 조금 독특한 것 같아’라고 바라보는 시선도 있나요? 그런 걸 느끼실 때도 있어요?


책을 쓴 후의 반응들을 보면 저를 걱정하거나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용기 있게 했지? 너무 대단하다’라는 것들인데, 응원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저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어요.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섹슈얼리티든 자살이든 가정사든. 그런 것들이 더 아무렇지 않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특별하게 보는 시선들이 슬픈 느낌이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인터넷에 합성 사진이 돌아다니고 신상이 공개되기도 했다면서요? 어떻게 견디셨어요?


되게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그때 제가 스물한 살이었는데, 합성된 사진을 봤을 때 너무 충격이었어요. 반값등록금 집회에 나갔을 때였는데요. 그때는 페미니즘도 몰랐고, 늘 그래왔듯이 사소한 일이라고만 느꼈어요. 그런데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자리에서 겪었던 아픔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효녀연합 퍼포먼스 이후에는 ‘종북’으로 몰리기도 했잖아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진짜 무서웠어요. 그래서 ‘어떡하지, 내가 종북이 아니라는 걸 해명해야 되나’ 하는 고민들도 했는데요. 그때 제가 ‘~녀’로 자꾸 이름붙이는 것에 대해서 ‘이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글을 올렸더니 ‘꼴통페미니스트다’, ‘휴머니즘을 위하던 사람이 갑자기 페미니즘으로 빠졌다’, ‘대의를 위해 달라’는 식의 요청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걸 말할 뿐인데, 거기에 계속 이름을 붙이는 일은 끝나지 않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러면서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아요.

 

효녀연합 퍼포먼스를 지지했던 사람들 중에서, 페미니스트임을 밝힌 후에 지지를 철회한 경우도 있었나요? ‘네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든지.


네, 되게 많았어요. 그때 같이 예술행동을 했던 선배나 동료들도 입지가 좁아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휴머니즘은 더 대중적인 것이고, 마치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이 따로인 것처럼. ‘사람들이 등을 돌릴 거다, 너는 큰일을 해야지, 왜 여성만을 대변하려고 하느냐’라는 식으로요.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이 다르지 않은 건데.

 


전생에 쓴 책 같아요


채식주의자이고, 폴리아모리스트이기도 하시죠. 우리사회에서 비주류에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불편하거나 불쾌한 순간들은 없었나요?


불편함이 있기는 한데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기준도 주류의 것이고, 그 자체가 그냥 이름붙이기 놀이인 것 같아요. 채식을 한다는 것도 특별한 게 아니고, 폴리아모리도 마찬가지거든요. 그 이름을 알기 전에 우리가 이성 독점 연애만 주입받아 왔던 거지, 오히려 다양한 관계의 형태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굳이 이름 붙일 필요도 없는 당연한 상태일 수 있는 거죠. 저도 폴리아모리를 알기 전부터 ‘왜 독점을 해야 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고기를 먹어야만 영양소가 보충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외식하지 않고 집에서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지금보다는 고기를 덜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주류에 딱 속해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주류와 비주류라는 단어 자체가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구분 자체가 사람들이 교육 받은 대로, 혹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기존 질서에서 정상이라고 명제되어 있는 것들의 때가 묻은 것일 뿐이죠.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양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맞아요. 주류/비주류와 마찬가지로 ‘평범’, ‘보통’이라는 말도 폭력적이죠. 대체할 단어가 마땅치 않아서 쓰기는 하지만요.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존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도 결국은 그 언어로 쓰게 되잖아요.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글쓰기가 자신을 배신하는 일이 되기도 쉬운 것 같아요. 그건 진짜 끝이 없는 것 같고 되게 어려운 것 같아요. 날것을 쓰지 않으면 쉽게 나를 배신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를 쓸 때 되게 조심스러워져요.

 

‘예술행동가’라고 불리실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스스로는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하신다면서요?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달라요. 예술가나 운동가, 활동가로 구분지어 버리면 벌개인 것 같잖아요. 그런 구분이 필요한 맥락도 있지만요. 예술을 하는 것이 뭔가 사회와 동떨어진 것도 아니고요. 운동의 경우에도 기존에는 확신의 언어로 다수가 모이고 전략적으로 무언가를 달성하는 방식이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운동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저한테는 운동과 예술과 활동이 하나예요.

 

“일상과 예술, 관념과 물질, 몸과 감각을 분할하는 경계를 없애고 싶어서 그리는 그림”이라고 쓰신 문장이 떠오르네요.


확실히 예전과 달라진 것은 있어요. 예전에는 혼자 방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답답하고, 뭔가 비겁하게 느껴졌거든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나 혼자 이렇게 그리는 게 무슨 소용이지?’라는 느낌으로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들, 죽은 존재들을 애도하는 작업을 꼭 기존의 정치 언어 속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위 여의도 정치라고 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가 있잖아요. 그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나의 운동이고 정치이고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림도 마찬가지이고요.

 

예술가라는 말을 쓰는 것도 조심스러운가요?


모든 게 그렇지만 예술이라는 게 우리 사회에서 명패가 되는 부분이 있잖아요. 작가도 그렇고요. 예술가라고 하면 예술의 의미를 내가 독점하는 느낌이 들어서 조심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또 써야 되는 맥락들이 있으니까, 그래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요. 또 ‘예술이 뭘까’라는 고민은 계속 하게 돼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도 그렇고, 그 전에도 계속 느낀 건데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흔히 여성적이라고 말하는 남성, 혹은 감수성이 풍부한 남성이 그림을 그리면 예술이 되잖아요. 영적인 감수성을 이야기하면 종교인이 되고요.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예술도 종교도 정치도 다 제도화되어왔는데, 그런 점에서 여성인 제가 이야기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행위를 하는 것인 그 제도 안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고민이 많아요. 정말 예술이 무엇이고, 정치가 무엇이고,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계속 있고요. 아직은 저를 어떤 직업이나 이름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결국 이런 저런 단어들을 다 지워내고 나면 ‘홍승희’라는 단어밖에 안 남겠죠?


맞아요. 그래서 갈등이 계속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기존의 언어들은 대부분 소위 주류의, 남성 중심적인, 제도화되어 왔던 권력의 언어잖아요. 그런데 어쨌든 이 사회에서 상호작용하고 살아가려면 그 언어를 차용해서 소통해야 되는 순간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그 언어를 차용하되 다른 언어를 계속 쓰고 싶은 거죠.

 

이번 책은 홍승희가 어떤 사람인지 많이 보여줬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참...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저도 몰라서요(웃음). 책에 실린 건 2년 동안 쓴 글들이 대부분인데, 그 시간 동안의 저와는 완전히 달라진 부분도 있거든요. 물론 맥락은 같지만요.

 

책을 보고 ‘이때는 이렇게 생각했구나, 지금은 달라졌는데’ 생각하기도 하셨어요?


그런 지점들이 꽤 있었어요. 책이 나오면 전생에 쓴 책 같은 느낌이 들어요. 또 다른 이름의 나의 흔적 같은. 물론 이 흐름 안에 저도 있지만요. 그래서 잘 안 보게 돼요(웃음). 뭔가, 이 안에 제가 갇힐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누구나 그런 게 있지 않을까요?

 

독자들의 반응은 보셨나요?


조금 봤는데, 굉장히 위로가 됐다는 글들이 있더라고요. 아픈 몸이나 감추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은 이 사회에서 밀쳐지고 탈락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책을 보고 ‘이렇게 해도 살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다고 했을 때 감동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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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와 세상


첫 장에서 “그런데 아파도 돼. 아픈 건 이상한 게 아니야. … 이상한 건 네가 아니야. 너를 의심하는 세상을 믿지 마.”라고 쓰셨어요. 누군가 이런 말을 해주면 좋겠다고요. 스스로에게 해주실 때도 있나요?

그래서 계속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하기는 되게 어려운 거예요. 누군가한테 이런 말을 계속 듣고 확인 받고 싶어 했더라고요, 제가.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자신이 아픈 걸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걸 잘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게 힘들어요. 제가 그런 말을 듣지 않고서도 힘이 생길 때는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말을 할 때인 것 같아요. 나를 믿을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때, 공감 받지 못하고 살라고 압박받을 때 사람은 시들어간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어요. 흔히 부정적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감정들도 사람들과 편하게 나누시나요?


편한 건 아니에요. 나누려고 하면 더 힘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걸 나누고 같이 느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 나눠야지, 안 그러면 서로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웬만한 건 혼자서 글이나 그림으로 승화하기도 하고,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책에서 이야기한 가피라는 친구랑 제 짝꿍과 나눠요.

 

반값등록금 운동도 하셨고, 정권 비판 퍼포먼스도 하셨잖아요.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확고한 생각을 갖고 계실 것 같은데, 그런 생각 자체가 없으시다고요.


예전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세상이 변화하려면 경제적 구조, 정치적 구조와 일상적 상호작용이 바뀌어야 하고 그래서 조직화된 시민의 필요한 거고, 정당 활동을 하면서 그 정당이 집권을 해서 정책을 실현하면 좋은 세상이 빨리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런 언어 자체가 남성 중심의 반쪽짜리 언어라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거기에서 탈락된 것들이 너무 많죠. 그래서 기존의 정치 질서에서 행동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라는 고민이 되고요. 이 세상이 나아진다는 것은 환상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너무 오래전부터 탈락시켜오기만 했잖아요. 동물도, 장애인도, 아픈 몸들도, 결핍들도 다 탈락시키려고만 하잖아요. 하나의 어떤 정상성을 향해서 가는 동안 그런 사람들은 병들고 일찍 죽고.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 희망이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싶지는 않은 건가요?


그런 것도 있고요. 인간이 타인과 세상을 인식할 때 언어로 묶어버리고 덩어리 짓거나, 나 아니면 세상으로 이분화 해버리는 순간 타자도 다 대상화되는 거잖아요. 그런 인식과 사고방식이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라는 생각도 들어요. 미래 사회에도 비슷할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진짜 혐오가 사라질 수 있을까, 싶은 거죠. 이 사회에서 생산할 수 없는 쓸모없는 몸이라도, 말 못하는 동물 같은 존재라도, 존중 받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제가 원하는 사회인데요. 그런 게 가능하려면 지금처럼 생산 중심의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변해야 하잖아요. 그게 가능할까 싶어요.

 

다른 존재의 고통에 놀라울 정도로 둔감한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와는 반대로 작가님은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힘들기도 할까요?


건강한 사람들이 부럽기는 해요. 체력도 안 지치고, 피곤도 잘 안 느끼고, 뭘 해도 에너지가 넘치는 게 부러워요. 그런데 결핍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봐요. 다 아픈 데가 있는 거죠. 제가 예민한 것도 아프기 때문에 그런 걸 수 있어요. 자주 접촉을 하니까 더 아픔을 보게 되는 걸 수도 있죠. 그리고 제 언어가 생기면서부터 일부러 더 예민하게 아픈 것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이인증이나 조울증처럼 부정적이라고 느껴지는 정신적인 작동들이나 몸의 아픔들 같은 것들이요. 『붉은 선』에도 썼는데 ‘비체’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어떤 건가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탈락시켜온 결핍들이에요. 우울, 아프고 고장 난 몸, 말 못하는 존재들처럼 밝은 세상에서 언어화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내 안에 분명히 우물도 있는데 이 우물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배출할 수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우물과 결핍들을 ‘이건 내가 아니야’ 하고 밀쳐내는 순간, 그걸 지니고 있는 타자들도 혐오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그냥 수용하고 아픈 것에 대해서 써야겠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이번 책에서도 결국 이야기하는 게 ‘나는 이상한 게 맞고, 그런데 세상도 이상하고, 사실 누구나 이상하다’는 거예요. ‘다 이상하니까 이상한 걸 받아들이자’는 느낌인 거죠. 누구나 다 취약한데 그걸 자꾸 밀어내려고 하니까 다른 취약한 존재들도 밀어내게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 가장 많이 고민하시는 건 뭐예요?


계속 하고 있는 고민인데요. 죽음이나 결핍, 낡고 썩어가는 것들, 그런 것들을 완전히 수용해 버리고 그 상태로 계속 있으면 죽게 되잖아요. 어쨌든 살아가려면 그런 것들을 밀쳐내야 하고, 저도 그런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해요. 요즘 사주명리를 공부하면서 상담도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팔자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뭘까, 라는 생각도 하고요. 얼마 전에도 이사를 했는데, 저는 한 곳에 머무는 게 힘든가 봐요. 사주팔자에도 역마가 있다고 하는데요. 핑계일 수도 있지만(웃음), 되게 산만해요. 이런 특성을 그냥 받아들이고 다시 인도로 가서 더 떠돌고 집중하면서 생활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극복하고 안주하는 생활을 해나가는 게 좋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있나요?


요즘에는 쉬면서 인도에 다시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이러다가 또 안 갈 수도 있지만(웃음), 가게 되면 온라인 통해서 사주명리 상담도 계속 하고 싶어요. 진짜 힘든데 정신과에 가기도 힘들고 위로를 받고 싶은 분들이 상담하러 오시거든요. 온라인이라는 안전한 플랫폼 안에서 상담도 해드리고 그걸로 돈도 벌고. 글 쓰는 것도 계속 하려고요. 어떤 작업을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림도 그리고요. 요즘에는 꼬불거리는 움직임들을 부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어떤 순간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요?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는 입체적인 느낌들 있잖아요. 도저히 언어로 설명하기 힘들 때, 그것에서 툭 던져지는 날것의 느낌들을 표현하고 싶을 때 그려지는 것 같아요. 화날 때도 그리게 되고, 우울할 때도 그리게 되고요.

 

책에 열두 점의 그림이 실려 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가 있는 그림은 뭔가요?


다 의미가 있는데. ‘흐물흐물’이랑 ‘삐뚤빼뚤’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장 진심으로 잘 표현된 것 같거든요. 그릴 때도 재밌었고요. 뭔가 경계가 흐트러지는 느낌이잖아요. 나와 세상, 나와 타인의 경계가. ‘삐뚤빼뚤’은 손을 그린 건데, 나무 같기도 하죠.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해 보이지만 그만큼 어디로 갈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의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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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멀쩡히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글을 쓰는 이유와 관련해서 “내 서사의 편집권”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말하도록 놔두는 게 아니라, 내가 주도권을 쥐고 능동적으로 말하는 느낌이 들어요.


내 서사의 편집권이 있는 건 좋은데, 제 서사를 쓰고 나면 이상한 소외감이 들더라고요. 이 책도 제가 썼지만 ‘이게 나를 배반하는 글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계속 있어요. 내가 나에게 폭력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제 삶도 타인아 다 엮여있는 건데, 제 마음대로 해석해버리면 저한테 폭력적일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게 좋기는 해요.

 

글과 그림이 서로 보완이 되겠죠?


맞아요.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 입맛대로 해석되곤 하거든요. 이미지라는 게 그렇고, 퍼포먼스를 할 때도 그랬어요. 맥락을 이탈해서 누구나 자기 입맛대로 이름붙이는 게 되게 답답하더라고요. 그런데 글은 맥락을 구체적으로 건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그림으로 다 전하지 못한 시공간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게 정말 속 시원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쓰고 그리는 작업은 계속 하실 거죠?


네. 제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이 작은 틀 안에서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게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효녀연합 퍼포먼스를 하실 때, 외모가 부각되면서 ‘개념 있는데 얼굴도 예쁘네’라는 말들이 나왔잖아요. 그때 인터뷰를 하시면서 사진 없이 기사를 내달라고 요청하셨었어요. 메시지가 왜곡되는 문제 때문에 ‘이제 개인적인 인터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신 적도 있고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지셨어요?

 

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예전이랑 달라지기도 했고요. 물론 아직도 ‘우리의 애국 소녀’라고 하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걱정해주고요. 또 제가 어떤 활동을 하든 계속 이름붙이고 해석되는 일은 끝나지 않을 거니까요. 그냥 세상은 그런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글을 써서 그런 납작한 이미지들과 편견에 균열을 내고 싶어요. 이상해 보이고, 불행하게 살 것 같고, 그런 낙인이 찍힌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목격하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편견에 균열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대통령 풍자 그라피티를 그렸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으셨잖아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고, 개인적으로 노역도 하셨어요. 벌금 마련을 위한 모금도 이뤄졌고요. 이제 그 사건은 다 끝난 건가요?


사실 아직 벌금이 남았어요. 제가 사회봉사를 하다가 그만뒀거든요.

 

모금이 100% 달성이 안 됐나요?


모금이 됐었는데요. 사회봉사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하다가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서 70만 원 정도 남았는데, 그건 노역장에 가거나... 노역장도 한 번 가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고요(웃음).

 

책을 읽으면서 ‘무의미’, ‘허무’라는 단어가 자주 보였어요.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취해 있지 않은가. 왜 어떤 것에는 취해 있으면 안 되는 걸까.”라는 문장도 인상 깊었고요. 작가님은 어떤 것에 취해서 무의미와 허무를 견디고 계세요?


대부분은 취해있지 않겠다는 의지에 취해 있는 상태인데요. 요즘 삶의 낙은 사주명리예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마치 바코드처럼 인생의 흐름이 찍혀있다면 그건 왜 있는 걸까’에 대해서 공부할 때 재밌어요. 굉장히 무의미하고 그냥 툭 던져진 것이지만, 그럼에도 허무의 늪이 견딜만해지는 것 같아요. 운명학이라는 게 의미가 딱 정해져 있지는 않거든요. 그냥 별의 흔적처럼 박혀있는 기호가 있을 뿐인데, 그런 점이 좋더라고요. 조금 냉랭하지만 거짓말하고 있지 않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사주명리를 공부할 때 진실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편안해요. 거기에서 삶의 낙을 찾고 있고요. 누구나 취해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취해있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취한 줄 모르고 이것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취해있는 것에 무감각해지고 함부로 판단할 수 있잖아요. 다 견디기 위해서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취해 있는 것이고, 그걸 판단하지 않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순간에는 분별이 필요하겠지만.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붉은 선』을 쓴 뒤에 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런 글을 쓰고도, 이렇게 힘들고 아파보이는 사람도 멀쩡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계속 보여주고 싶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계속 글로 쓰면서 소통하고 싶고요. 동시에 실종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웃음). 소통하고 싶은 마음과 실종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충돌하는 건데...

 

내 안에 모순적인 생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걸 통제하려고 하는 데에서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거 아닐까요?


맞아요. 모순투성이인 나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허무하고 절망스럽고 혐오스럽고, 혹은 자기에게 도취되는 것 사이에서 정신 차리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인 것 같아요.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홍승희 저 | 김영사
세상이 정해주는 역할극을 거부하며 고민을 멈추지 않는 저자의 일상과 내면, 권력 풍자 그라피티와 퍼포먼스 이후 겪은 일들을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유시민 “『역사의 역사』 를 쓴 결정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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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본 아닌가요? 진짜 유시민 책 맞아요?” 돌베개에서 『역사의 역사』  표지를 공개하자 대다수의 독자가 놀라워했다. 역사책이긴 한데 어쩐지 예술책 같은 장정. 디자이너는 왜 이런 표지를 기획하고 출판사는 왜 이런 디자인을 수용했을까. ‘유시민 책’ 같아야 출판 시장이 더 반응할 텐데 말이다. 혹여 궁금한 독자가 있다면 책 제목에 숨겨진 힌트를 읽자. 역사’의’ 역사.

 

2013년 이후 전업 작가로 살고 있는 유시민은 2년 전, “높은 수준의 지적 긴장감을 갖고 써야 하는 책은 좀 덜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역사의 역사』를 쓴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유시민은 역사 교사인 아버지 덕분에 일찍이 많은 역사서를 탐독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부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에드워드 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 최근 그가 특히 즐겁게 읽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까지. 그는 흥미로운 역사의 사실을 읽는 일이 즐거웠고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쁨을 누렸다. 유시민에게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데(17쪽)”있었다.

 

유시민은 『역사의 역사』 를 ‘역사 르포르타주(reportage)’로 받아들여 주길 기대한다. 그는 “역사가 무엇인지 또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 보려는 의도는 없다. 위대한 역사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생각과 감정을 듣고 느껴봄으로써 역사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도움될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다”고 말했다. “훌륭한 역사는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위대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 작가 유시민을 파주 돌베개 출판사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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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를 여행하는 패키지 투어

 

얼핏 여행서를 쓰신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역사의 역사』는 왜 쓰셨나요?

 

생각은 종종 했었지만, 시작은 돌베개 대표님의 한 마디였습니다. 근 50년 동안 우리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역사서 중 하나가 에드워드 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잖아요. 제가 대학생 때 읽은 책이니 무려 50년 가까이 꾸준히 읽혔는데, 유럽사를 토대로 한 책이라 우리 독자들이 읽기엔 부담이 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대표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나 한국 독자에게 맞는 책을 쓰면 좋지 않을까, 의견을 나눴어요.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고 ‘역사가 무엇인가’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라, ‘역사가들이 본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역사책에서 찾아보자고 생각했어요.

 

발생사를 먼저 짚으셨어요.


역사가 뭔지 이해하려면 발생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에 관해 알려면,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공부를 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최초의 역사서라고 말하는 책부터 최근 관심을 받기 시작한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실제 역사가들이 서술한 역사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를 따라가 보는 일이 ‘역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가제도 ‘역사의 역사’였나요?


맞아요. 역사서에 관한 책을 쓰려니 저도 책을 다시 읽어야 했는데요. 역사가 입장에서 역사책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역사가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책을 썼는지를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역사책 자체에 대한 상세한 소개나 비평보다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해 그 역사책을 왜 주목해야 하느냐에 초점을 맞췄어요. ‘역사가들이 왜 역사책을 썼나, 왜 하필 그런 대상을, 왜 하필 그런 사건을 썼을까’에 감정이입을 해봤죠.

 

책의 타이틀이 ‘역사로 남은 역사가와 역사서를 탐사한 지식 르포르타주’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유시민이 바라본 역사서로 읽힐 텐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가장 큰 비중을 둔 부분은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이 감을 잡길 바랐고요. 정보를 압축해서 전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제가 역사책을 읽으면서 배운 것, 새롭게 느낀 것, 알고는 있었지만 중요한지는 미처 몰랐던 것들에 대해 썼어요. 역사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서술이 아니에요. 저자가 글을 쓰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살펴 읽어야 해요. 이 감정을 독자들과 나눠보고 싶었어요.

 

에필로그 제목이 ‘서사의 힘’인데요. 『역사의 역사』를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분들이 에필로그를 먼저 읽고 책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역사의 역사’를 여행하는 패키지 투어예요. 가이드가 있는 패키지 투어를 다녀보셨죠? 비행기를 타고 내리면 버스가 대기하고 있고, 호텔로 이동해서 짐을 풀고 나면 가벼운 차림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왕궁에 가고 박물관에 갑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니죠. 크게 준비하지 않고 따라가도 도시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와 설명을 들을 수 있어요. 『역사의 역사』는 이런 정도의 성격을 가진 책으로 볼 수 있어요. 아주 소소하고 자잘한 재미는 부족할 지도 몰라요. 어떤 한계가 있는 책일 수 있지만, 그 한계 속에서 어떤 유용성을 갖는 책으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출판사에서 예약 판매를 했는데, 예스24 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하셨어요. 예약 판매에 부담이 크셨다고요.


목차만 보고 책을 샀을 때, 독자의 예상과는 다른 책이 될 수 있잖아요. 부담스러웠지만 출판사의 결정이었으니까 따랐죠. 걱정이 되긴 합니다.


역사서를 읽다 보면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책들도 많지 않나요?


있죠. 많습니다. 그런 책들은 읽기도 힘들고 공감도 되지 않아요. 책에도 이런 제 감상을 솔직하게 썼어요. 어떤 책은 굉장히 훌륭하고 공감도 크지만 접근하기 어려웠어요. 도시로 치면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거죠. 정확한 지도도 없고, 안내문도 없고. 그런 책들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 나에게 맞는 역사서는 있거든요. 『역사의 역사』를 읽다가 그렇게 느끼는 책이 있으면, 긴 시간을 두고 도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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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전달하는 역사서라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책에 소개한 역사서가 18권입니다. 이 역사서를 소개하기 위한 공부도 다시 하셨을 텐데요. 좀 더 쉽게 소개하고자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요?


노력이라기보다 어떤 주안점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제가 많이 느낀 점은 역사책을 쓴 사람도 ‘사람’이라는 거예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사마천 등 그 옛날 2000년, 2500년 전 역사가들도 정말 똑같더라고요. 그들은 글을 파피루스에, 우리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쓸 뿐 크게 다른 게 없어요. 모두 ‘감정’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 쓴 책이죠.

 

역사가들도 어떤 감정, 욕망으로 책을 썼다는 의미인가요?


맞아요. 그들도 인간적인 욕망이나 소망, 감정을 갖고 역사책을 썼어요. 평소 자주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타인의 감정을 눈여겨보면 나와 타인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감정들이 역사책 속에도 있어요. 직접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지, 어떤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보고 있으면 제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수많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똑같이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나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아는 데 도움이 돼요. 우리는 유한한 존재잖아요. 초기의 역사가들을 보면 자기 존재를 남기고 싶은 욕망이 아주 강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여기서 눈여겨볼 건, 이들이 역사에 오래 남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욕망 때문이 아닌 ‘작업의 탁월성에 있다는 사실이에요. 역사가들이 역사 서술을 왜 했을까요? 잘 따져보면 자기 욕망, 갈망을 충족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어요.

 

예를 들어 주신다면요.


사마천의 저작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마천의 『사기』는 인간 혁명의 보물창고이자 결국은 평범한 얘기들인데요.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꼭 가치가 있거나 행복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동시에 그것이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도 드러나고요. 사마천이 묘사한 인간 군상을 보면 권력, 서열, 관계, 상속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요. 현대 시대에 가장 큰 권력은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있지만,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면 소소한 권력 관계가 엄청 많잖아요. 회사로 따지면 거래처도 있을 것이고 팀장도 있고 사장도, 고객도 있을 텐데 다 권력 관계예요. 내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상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상대가 있죠. 사마천의 저작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권력 관계에 대응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역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갑질을 할 수 없어요.

 

역사서를 통해 갑을 관계를 고민할 수 있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역사서를 꼭 읽어야겠어요.


『사기』를 읽고 나면, 내가 권력 관계에서 갑의 이미지에 있을 때 그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많이 느끼게 돼요.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한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권력 관계에 대처하는 법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사기 열전』을 경영자들이 많이 읽죠. 읽어야 하고요.

 

‘감정에 들어간 역사서’ 생각해보지 못한 정의입니다.


많은 역사가들을 살펴보면 굉장히 거만한 사람도 있었고, 사마천 같은 자애로운 사람도 있었어요.  역사서를 읽다 보면 역사가들의 성격이 느껴져요. 그 성격이 반영돼서 글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역사는 그냥 학문이 아니에요. 과학도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완성된 형태의 역사는 문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완성된 형태의 역사서는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전달해야 해요. 감정을 전달하는 역사서라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거든요.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가 “위대한 역사가는 위대한 예술가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잖아요. 토인비 역시 굉장히 많은 역사책을 읽고 나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거장의 말은 정말 허투루 해석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웃음)

 

유시민의 책이라서 이 책을 볼 독자가 많을 거라 예상됩니다. 어떠신가요? 방송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결국 본업은 ‘작가’시잖아요.


근 3년간 강연을 다니지 않았지만, 가끔 무서운 독자를 만나요. “유시민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분들이에요. 정말 무서워져요. 왜냐면 전 다 알고 있거든요. 어떤 책들에서 중복되는 이야기, 과거와 달라진 저의 시각. 이런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져요. 그래서 제 책을 모두 읽는 분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겁을 덜 내면서 살 수 있는데요. 다행히 제 책을 읽는 분들이 다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인문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 관심이 높은 분들도 계세요. 어떤 독자들은 자기계발 측면에서 제 책을 읽어주시고요. SNS나 블로그를 보면, 각자 좋게 읽어주신 책들이 다 달라요. 그래서 독자들이 제게 뭘 원하냐? 사실 잘 모르겠어요. 다만 “책을 계속 내달라”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데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계속 써야겠구나 싶어요. 굉장히 감사하죠.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지 않나요?


물론 그렇죠.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필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아요. 독서계나 출판 비평 같은 분야에서는 진지한 필자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요. 제게 『나의 한국현대사』는 굉장히 진지한 작업이었어요. 제가 역사학과 출신이 아니니까 인정을 못 받겠지만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좀 있다고 봐요. 또 인문학 책으로 『청춘의 독서』 도 꽤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대중성이 높은 형태로 쓰긴 했지만, 다분히 학술적인 면, 비평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받아들여 주진 않는 것 같아요. (웃음) 아마도 제 사실상의 첫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다이제스트 성격을 띄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지만요. 그래서 저는 다른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독자들에게 평가 받는 사람이니까, 미디어셀러 비슷한 취급을 받아도 연연해하지 말자,라고 생각해요. (웃음)

 

서운한 감정이 설핏 비쳐지는데요. 이번 책 『역사의 역사』로 어느 정도 상쇄되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있어 보이게 쓰고 싶었어요. (웃음) 멋들어진 현학적인 문장도 쓰고 싶었고요. 제가 글을 쓸 때 독자들을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이번 책만큼은 내가 쓰고 싶은 데로 한번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있어 보이는 문장을 잘 쓰는 필자들이 있잖아요. 사실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저도 그런 문장을 싫어하지 않아요. 좋아하는데, 책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생각할 수 없잖아요. 가수가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만 할 수 없는 것처럼요. 음원도 팔리고 행사 요청도 와야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거니까, 진짜 만들고 싶은 음악도 만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도 만들잖아요. 사실 제게도 그런 갈등이 없지 않았어요.

 

충돌하셨던 거네요.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쓰고 싶은 마음과 독자를 생각하는 마음이요.


비슷해요. 근데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쓰는 게 안 되더라고요. 오랫동안 그렇게 안 썼으니까 머릿속에선 가능할 것 같았는데 실제 써보니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다른 책에 비하면 문장이 그리 쉽게 읽히진 않을 거예요. 제가 단문을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긴 문장도 많이 썼어요. 저도 써보고 싶었거든요. (웃음)

 

『역사의 역사』를 읽고 나면, 내게 맞는 역사책 한 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자로서 기대하는 바가 아니실지요?


바라는 바죠. 이 책은 이미 역사에 어느 정도 호기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주로 읽지 않을까 싶어요. 역사책을 읽는 방법이 궁금했던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 주실 것 같고요. 모든 역사책이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저자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읽으면 훨씬 흥미롭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역사의 역사유시민 저 | 돌베개
역사가의 생각과 감정, 역사 공부의 재미와 깨달음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저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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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체어샷, 일보 후퇴는 있어도 현실 타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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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체어샷은 꾸준히 강력하다. 2011년 첫 EP <Chairshot>부터 이번 정규 2집 <IGNITE>까지 한국적인 색과 록을 결합하여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과시해온 그들에게 일보 후퇴가 있을지언정 현실 타협은 없었다. 기존 멤버의 탈퇴와 교체로 인해 3년이란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돌아온 그들이 들려주는 록 사운드는 그래서 더 거칠고 그래서 더 매끈하다.

 

6월의 어느 날 그들을 만났다. 평창의 폐교에서 녹음을 진행하게 된 계기부터 자체 프로듀싱을 결정한 이유까지 밴드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매듭짓지 않았다. 멋스러운 사운드가 나오지 않더라도 원하는 뉘앙스를 포기할 수 없어 직접 발로 뛰며 소리를 잡아냈다는 그들의 말에는 음악을 향한 열정과 자부심이 번뜩였다. 이들은 생각보다 유쾌했고, 생각 이상으로 진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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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용진(드럼), 황영원(보컬/베이스), 손희남(기타)

 


앨범 발매를 전후해 발매 기념 콘서트, 록 페스티벌에 이어 전국투어 중이다.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은가?


황영원 : 힘들기는 한데 즐겁다. 지방공연은 종종 해왔는데 이렇게 전국투어는 처음이다. 우리가 밴드를 좋아하면서 커온 세대라서 전국투어에 로망 같은 게 있다. 그걸 직접 기획해서 해본다는 게 신기하다.

 

이용진 : 대구 부산 쪽 공연을 했을 때 직접 공연장을 찾아와 주신 분들도 계셨고, 분위기도 좋았다. 힘든 것보다 재밌는 게 더 크다.

 

직접 기획한다면 현재 소속사가 없는 것인가?


황영원 : 그렇다. 장소 섭외부터 기획까지 직접 한다. 이번 투어 장소 중 강릉은 놀러 갔다가 게릴라식으로 공연을 하기도 해서 잘 알고 있었고, 양양 같은 경우에는 지인 서핑샵에서 진행한다.

 

손희남 : 특히 강릉 공연장 러쉬는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뿌리 깊은 곳이다. 일단 현지 팬들을 만나볼 수 있고 또 불특정 다수가 모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공연이다.

 

정규 1집 <Horizon> 이후 5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만족스러운가?


황영: 만족스럽다. 음악은 당연하고 실제로 제작해놨을 때 전체적인 앨범 실물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잘 나왔다. 그 밖에 아트워크나 이미지들도 우리가 상상한 100까지는 아니지만 아이디어 회의를 많이 했던 만큼 잘 표현됐다.

 

9개의 수록곡 중 절반에 뮤직비디오가 있다. 아트워크를 이야기했는데 동양과 서양의 특징을 뒤섞어 놓은 커버도 인상적이다. 직접 제작한 것이 있는가?


황영원 : 회사 없이 가는 팀이기 때문에 모든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결과물을 낼 수 없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어떻게든 제작해보려 했고 커버 등은 지인이나 지인의 지인들을 통해 만들었다. 예산 문제 때문에 전부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손희남 : '산, 새 그리고 나'의 뮤직비디오는 우리가 직접 찍었다. 내가 카메라를 잡으면 멤버들이 연주 했고 멤버 중 한 명이 카메라를 잡으면 나머지가 연주하는 식으로 말이다.

 

기존 멤버의 탈퇴 등으로 밴드 내적인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IGNITE>는 지난 음반에 비해 더 강렬한 감정이 느껴진다. 2분 30초짜리 '각성'이 현실에 대한 포효처럼 들리기도 하고.


손희남 : 그런 심정들을 많이 담으려고 했다. 그래서 프로듀싱이 중요한 건데 아무도 안 물어본다. (웃음) 이번 음반의 프로듀싱을 내가 했는데 정말 거의 처박혀있다시피 하며 만들었다. 작은 뉘앙스 하나부터 사소한 것까지... 진짜 갇혀있었다. 1집 프로듀서가 아시는 것처럼 제프 슈뢰더(스매싱 펌킨스의 기타리스트) 형님이셨다. 그때는 형님이 손대는 이펙트 하나하나 다 연습장에 적어놓으며 공부했다. 배우는 것이 많았고 머리 쓸 일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반면 이번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우리가 했으니까, 힘들기도 힘들었다.

 

황영원 : 그래서 시행착오가 정말 많았다. 다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해봐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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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희남

 


그런 점에서 희남에게 묻고 싶다. 음악을 듣다 보니 때로는 보컬보다 기타가 더 세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한데 의도한 것인가? 덧붙여 자체적으로 프로듀싱하게 된 이유도 알고 싶다.


손희남 : 기타가 잘 들린 건 멤버들의 의견을 항상 들으면서 프로듀싱 했기 때문에 의도한 건 아니다. 우리가 직접 프로듀싱을 한 이유는 남이 해주는 대로 계속하는 건 싫었다. 좋은 결과물이든 안 좋은 결과물이든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앞으로 음악 생활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멤버들이 믿어주기도 했고.

 

황영원 : 다른 프로듀서랑 다른 녹음실에서 녹음하기도 했는데 완성본이 잘 나오긴 해도 우리가 원하는 뉘앙스는 항상 아니었다. 어렵더라도 우리가 직접 해봐야겠구나 싶더라. 사운드 퀄리티가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뉘앙스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중간에 없어진 곡도 있고 두, 세 번 판을 엎고 다시 시작하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을 들여 녹음했다.

 

평창에서 생활하며 음반을 만든 거로 안다. 어쩌다 평창으로 가게 된 것인가?


황영원 : 2012년도인가 2013년도인가. 평창에 폐교를 개조해서 만든 복합 문화 공간에서 공연을 했었다. 그 이후, 그러니까 이 앨범 작업 전에 미국에서 녹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녹음할 곡이 없었다. 그래서 그 폐교에서 두 달 가까이 합숙하면서 음악을 만들었고, 그때 거기 운영하시는 분들이랑 많이 친해졌다. 이번에도 자유롭게 녹음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었는데 그곳만한 곳이 없었다. 한 달 정도 합숙하고 필요할 때마다 가서 작업했다.

 

그럼 학교였다는 건데 사운드를 잡거나 하는데 불편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손희남 : 우리가 좋은 스튜디오를 잡을 수 있는 여건이 솔직히 있었다. 그런데 그냥 해보고 싶었다. 직접, 해보고 싶었다.

 

이용진 : 밴드 오래 하다 보면 그런 게 있다. 좋은 스튜디오 가서 작업하면 좋은 사운드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금액을 지급해야 하는 거니까 시간적인 한계가 있다. 늘 이것도 해봤으면 좋았을 것 같고 하는 식의 아쉬운 점이 남는 거다. 이번에는 그냥 아예 과감하게 '시간제한 받지 말고 우리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 그랬다. 원하는 사운드 나올 때까지 부딪치자 그런 거다.

 

황영원 : 좋은 녹음실이면 그 공간의 세팅을 크게 바꾸지 못하지 않나. 마이크를 여기다 두면 어떻게 되고 왜 이런 사운드가 나오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다 하기 싫으면 쉬고. 아무 생각 없이 먼 산만 바라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번 음반의 만족도는 1-10까지 중에 몇 점인가?


이용진 : 저는 9.

 

황영원 : 이렇게 되면 9.1을 해야 하나 8.9를 해야 하나... (웃음) 표지 마감이 아쉬워서 8.9다. 원래는 왼쪽 옆면 마감을 동화책 묶는 것처럼 두꺼운 종이로 하고 싶었는데 해주는 데가 없더라. 어떻게든 우겨서 했어야 했는데...

 

손희남 : 이게 근데 내 속마음이 있고 내세우고 싶은 점수가 있다. 내세우고 싶은 점수는 9.5. 속마음은... 얘기 안 하겠다! (일동 웃음) 왜 그러냐 하면 나는 계속 뭐가 보인다. 들을 때마다 뭔가가 귀에 걸리고 눈에 치이고 하니까 이제는 듣기도 싫다.

 

황영원 :대부분 수록곡이 작업도 작업이지만 이미 2년 전에 완성됐던 노래인데 그걸 발매 안 하고 계속 붙잡고만 있었으니까. 중국집에서 2년 동안 요리만 한 느낌이다.

 

손희남 : 올드보이 영화처럼 군만두만 먹은 거다. 평창에서 군만두만 계속 먹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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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

 


새로 합류한 이용진에 대해 안 물어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합류하게 된 것인가?


이용진 : 박계완 형이 개인적인 이유로 나가시고... 그때 저는 밴드는 쉬고 있었고,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잘 맞았다. 때마침 밴드를 쉬었고 이 팀은 드러머가 필요했으니까. 이 사람들이 어떤지 알고 있었고, 멤버들도 제 성향을 잘 알았기 때문에 제의가 왔을 때 흔쾌히 수락했다.

 

이전에 활동했던 그룹 온달은 팝 록, 모던록 스타일의 밴드였다. 아시안 체어샷에 적응하는데 어려움 혹은 더 좋았다 하는 지점이 있나?


이용진 : 근데 그 이전에 했던 팀들은 오히려 더 사이키델릭하고 록킹한 밴드였다. 온달과 솔로 음반이 팝 감성을 극대화해 나타냈던 것뿐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그런 딥함이 그룹과 잘 맞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원래 록 음악 기반의 드러머였고 월드 뮤직에도 관심 많았는데, 그룹이 한국적인 음악을 하고 있으니까. 한국 장단이나 월드 뮤직 리듬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재밌게 활동하고 있다.

 

다른 멤버들에게 묻고 싶다. 이용진의 합류가 가져다준 변화는 무엇일까?


황영원 : 가장 긍정적인 부분은 앨범을 새로 준비하고 공연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설계해야 하는데 이 분이 일을 열심히 한다. 성실하다! (웃음) 그래서 우리끼리 합을 맞추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합이라는 게 단기간에 안 나오는 부분이지만 그거는 누가 와도 그래야만 하는 거고. 용진이가 록 드러머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는 하드한 드러머 원하고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잘 맞았다.

 

손희남 : 난 다 좋았다. 가명만 빼고...(이용진의 가명은 '시야'다) 농담이고, 원래 밴드에서는 누가 중요한 위치, 누가 중요하지 않은 위치 이런 게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드러머들이 뒤에 있으니까 별로 영향력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절대 아니다. 멤버 한 명이 바뀌면 엄청나게 밴드 색이 변한다. 아마 이번 2집도 용진이랑 어울리면서 좋은 방향으로 용진이만의 느낌이 많이 담기지 않았을까.

 

많이 받았을 질문이겠지만 아시안 체어샷은 '한국적이다'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밴드다. 그렇다면 음악에 한국적인 것을 녹여내기 위해서 특별히 신경 썼다던가, 레퍼런스로 삼은 것이 있을까?


이용진 : 나 같은 경우에는 밴드가 한국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형식적으로 그것들을 더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장구를 배워볼까 장단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게 오히려 더 벽을 만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트메이커니까 한국적인 어떤 게 몸에 있다고 생각한다. 젓가락을 친다든지 어깨를 덩실덩실하는 춤을 춘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걸 만들어 보자 했다. 처음에는 어떤 게 한국적인 국악 패턴일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런 걸 안 하다 보니 더 자연스럽게 나오더라. 그게 먹혀든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런 한국적인 것이 록 음악과 결합되었을 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황영원 : 록과 결합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콜라보다. 새로운 거다. 록이라는 음악 자체가 한국 음악이 아니니까. 동양음악도 아니고. 서양의 감정이나 그들의 생활에서 출발한 장르가 아닌가. 용진이 말에 동의하는 게 한국적인 것은 공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다. 우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을,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장르와 결합하는 것. 시너지가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또 첫 EP <Chairshot>(2011)은 한국성보다는 펑크 성향이 강했다.


황영원 : 당시는 그런 고민까지 못하던 시기였다. 음반 발매는 해야겠고... 팀을 결성하기는 했는데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정해지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럼 한국성을 소재 삼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황영원 : 이전의 앨범들은 나를 나타내기보다는 멋있게 생각되는 음악들을 표현하려고 했었다. 요즘 가장 멋있는 게 힙합이라 치면, 그걸 어떻게 하면 똑같이 따라 할까 하는 고민을 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결국에는 어떤 문화, 예술이건 간에 내 자신이 나는 어떤 사람인가 고민을 하고 표현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는 진짜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멋있다고 생각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 진짜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런 변화들이 자연스레 한국성으로 이어지게 된 거다.

 

손희남 : 외국의 경우를 보면 인도에는 시타르라는 악기가 록 음악에 많이 이용돼 왔고, 그런 게 일본도 있고, 중국도 있다. 우리나라도 그런 게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게 또 한국적이라는 게 자칫하면 촌스러울 수가 있다. 그것과 세련됨의 접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고민했고 처음에는 거기에 매몰되는 것 같아 부담되기도 했다. 이제는 우리가 자리를 좀 잡지 않았나 싶다.

 

황영원 : 나도 공감하는 게, 한국적인 것이 잘못 인식하면 속된 말로 구릴 것 같다는 편견이 있다.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라 본질적인 한국성을 표현한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나는 이런 수식어에 대한 부담이 아닌 거부감이 있었다. 한국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당장에 사람들이 영어를 해야 한다는 시대에 사는데... 우리 음악을 들어보지도 않고 느껴보지도 않는 분들이 우리 팀에 선입견을 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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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원

 


동감한다. 특히나 이번 음반은 한국 특유의 리듬감과 에너지가 강하게 담겨서 러닝 타임이 길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렬하고 세련되게 완성됐다.


황영원 : 희남이 형이 프로듀싱을 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걸 요구했다. 그중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제대로 된 록 음반을 만들고 싶다'였다. 우리가 록이 베이스인 음악을 하지만 이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건 다양하다. 이번에 중점을 둔 건 느낀 그대로 질러내는 록의 생동감이다. 그런 음반을 만들자 얘기했다. 기타를 세 번 인가 다시 녹음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고.

 

이용진 : '산, 새 그리고 나'라는 곡에서 굿판 느낌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사실은 이게 되게 쉬운 거더라. 우리가 풍물놀이를 많이 듣고 자라지 않았나. 그런 걸 연상했다. 또 시위를 나가서 거기 울려 퍼지는 여러 가지 비트들을 들어보니까 '저렇게 하면 되는 건데, 저렇게 연주하면 되는 건데' 싶더라. 패턴을 짜지 않고 본능적으로 풀어낸 부분이 많았다.

 

'빙글뱅글'이 타이틀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황영원 : 처음에는 '각성'을 타이틀로 밀었다. 그런데 방송 심의에 하나도 통과하지 못했다. '때려' '먹어' 이런 가사였는데 3사 방송국 전부 통과가 안 됐다.

 

이용진 : 멤버별로 주장하는 타이틀이 다르기도 했다. 나는 '빙글뱅글', 영원이는 '무감각', 희남이 형은 '친구여'를 선택했다. 결국 사전 투표를 했는데 '빙글뱅글'이 제일 높았다.

 

개인적으로는 혁명가 같은 '친구여'를 가장 좋게 들었다.


손희남 : 사실은 한창 광화문 시위 당시에 만들었던 곡이다. 촛불시위 할 때, 국민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대중가수나 아이돌은 안 나오지 않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들은 안 나오고, 록밴드들을 무대로 부르긴 부르는데 대중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뭔가 '다 같이 모여서 힘을 내자' 이런 곡을 만들어 보자 싶었고 멤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나오게 된 게 '깃발을 들어라 거친 바람 불어도'라는 가사였고, 후반부에 남, 여 성악과 영원이 보컬을 합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황영원 : 가사 같은 경우도 특히 검수를 많이 받았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곡 시작부터 센 기타 리프를 썼고 강렬한 분위기로 가자고 결정했다. 이런 얘기를 하다가 가사도 처음부터 딱 보여줄 수 있는 게 없나 고민하면서 몇 번씩 바꿔 보고 했었다.

 

손희남 : 그런데 지금 평화의 시대가 오고 있어서...

 

황영원 : 그래서 바꿨다. 통일을 얘기하고 있는 거다. (일동 웃음) 우리는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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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셨듯이 '친구여'는 성악을 가미했고, 과거 '완전한 사육'은 타령과 랩이, 'Butterfly'는 트립합이었다. 또 시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는가?


황영원 : 장르라고 하면 거의 반주로 나누지 않나. 우리는 그것을 중심으로 가는 밴드는 아니다. 느낌을 중심으로 가면 모든 장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앨범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록이라고 인식하지만 파고 보면 모든 장르가 다 들어있다. 우리의 기반만 있다면 모든 장르를 다 할 수 있다. '나'를 표현하는 게 중요한 거지,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록이 강성하던 시대가 무색하게 요즘은 그 관심이 줄고 있는 것 같다. 무대에서도 그런 변화가 느껴지는가?


이용진 : 우리도 음악가이기 이전에 음악 마니아다. 코첼라 페스티벌만 해도 록스타가 많이 없다. 요즘 20대 초반 친구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공연을 해보면 음악 듣는 배경이 다른 것 같다. 2-3년 전만 해도 록 밴드 좋아하고, 록 문화를 아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요새는 록, 밴드 문화 자체가 아주 생소한 접해보지 못한 거다. 우리가 악기를 배우러 갈 때 그 친구들은 디제잉 턴테이블을 배우는 시대다. 그게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고, 그래서 오히려 그 친구들 앞에서 공연하면 처음 듣는 거니까 더 열광하는 느낌도 든다. 희망적인 부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록 음악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멤버들에게 록이란?


이용진 :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록은 뿌리다. 셋 다 음악을 정말 많이 듣는다. 재즈, 일렉트로닉도 좋아하고. 그렇게 많이 듣지만 가장 처음 심취했던 게 록이니까 어쩔 수 없다. 록은 말 그대로 뿌리다.

 

황영원 : 오히려 요즘은 록 음반이 잘 안 나오니까 다른 장르 음악을 많이 듣는데 막상 하다 보면 결국 그게 다 록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한국적인 걸 갖고 있듯이 록은 내가 그냥 갖고 있는 거다.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록은 나의 한 부분이다.

 

손희남 : 인스타 라이브를 하다가 '록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까요' 물어보니 사람들이 전부 '아니요', '그럴 리 없어요'라고 대답하더라. 그런데 딱 한 명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부예요' 그랬다. 록은 나에게 삶의 전부다.

 

마지막 질문이다. 이번 <IGNITE>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멤버별로 한마디씩 부탁한다.


손희남 : 발화. 점화. 진화. 이그나이트 뜻 그대로다. 사람들에게 음반의 이미지를 잘 전달하려고 선택한 단어지만 나를 대변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영원 : 20만 원이다. (웃음) 정규 1집이 중고나라에서 10만 원에 팔린다더라. 얘는 2집이니까 20만 원 이상의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

 

이용진 : <IGNITE>는 인생이다. 내가 록을 좋아하는데 한동안 록 음악을 잊고 지냈다. 밴드에 들어오면서 다시 내 안의 어떤 본질 그러니까 록 감성을 다시 일깨우게 됐다. 이 음반은 내 삶의 라이브다.

 

 

 

인터뷰 : 박수진 정연경 정효범 강민정
사진 : 정효범
정리 : 박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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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 교수 “실체를 알 수 없는 ‘행복’을 알아채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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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아니 적어도 일부러 불행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한 세대 전과 분위기도 달라서 ‘성공에는 관심 없어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없다. 행복한 사람들만 사는 동네가 따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참 만나기 힘든 사람 중 하나가 행복하다는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왜 이토록 행복을 갈구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여기 『굿 라이프』라는 책이 한 권 있다. 이 책은 행복에 대한 독특한 단서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행복은 혼자 동떨어져 어딘가에 존재하는 고귀한 이데아가 아니다. 행복은 우리의 수없이 많은 작은 일상들이 모여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약간 바꿀 필요가 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운가, 무엇이 궁금한가, 무엇에 보람을 느끼고 무엇에 삶의 만족감을 느끼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행복을 별다른 것으로 보는 바람에 어쩌면 행복한 자신을 아직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 있어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진짜 ‘행복’을 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굿 라이프’를 찾아야 한다. 행복은 성공을 포기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즐거움을 외면해야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행복의 세계는 이분법도 아니고 모 아니면 도로 움직이는 장치도 아니다. 

 

이제 ‘행복’ 대신 ‘굿 라이프’를 누리자. 그 출발점에서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와 만나보자. 그리고 『굿 라이프』를 읽어 보고 자신의 행복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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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한 오해

 

처음부터 행복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니셨다고요. 이 책을 쓰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인가요?

 

행복 연구를 10여 년간 진행하면서 주요 연구 결과는 논문으로 발표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미 행복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와 있죠. 그럼에도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요즘 행복을 말하는 분위기가 균형을 잃어버려서 행복에 대해 오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행복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자신이 이미 행복한데도 ‘행복’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내가 별도로 경험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해진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진다는 거죠.

 

또 하나는 제목을 왜 『굿 라이프』라고 지었는지 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삶을 전체적으로 끊임없이 해석하고 재해석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요, 행복은 순간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전체 삶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 이상의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제일 중요한 것은 행복이란 이름의 감정이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다른 이름이 붙어 있는 좋은 감정들은 행복과 관계가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즐거움, 설렘, 뿌듯함, 자부심, 영감 이런 것들이 행복과 다른 감정이 돼 버리는 거죠. 그런데 사실 행복이라는 것은 이런 감정들의 조합이거든요. 뿌듯해서도 행복하고 뭔가 영감을 느껴서도 행복할 수 있는 거죠. 그럼에도 행복을 이와 같은 감정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보면 다른 좋은 감정들이 행복에서 배제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좋은 감정들을 아우르는 상위 개념이고 행복 안에 다양한 좋은 감정들이 들어 있다고 이해해야 행복에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되는 거예요. 나는 예술이나 문학을 좋아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다면 그냥 그것을 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좋아하거나 영감을 느끼는 것 말고 행복은 어떻게 느껴야 되나 고민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행복한 상태에 있어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네요.


그렇죠. 또 하나의 오해는 목표나 성공이나 성취는 행복에 반하고, 그런 것들을 포기해야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복을 특별한 목표를 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성공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되지만, 목표나 성공은 사람들이 행복감을 느끼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거든요. 심지어 ‘나는 아무 목표 없이 자연스럽게 살겠다’는 것도 일종의 목표예요. 그리고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큰 목표도 있지만 작은 목표도 있어요. 예를 들어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겠다’는 것도 목표예요.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죄책감도 들고 조금 덜 행복한 감정을 받을 수 있겠죠. 그렇게 생각해 보면 목표 없는 삶이라는 것은 행복을 느끼기에 불리한 것인데, 사람들이 목표를 출세하기 위한 목표처럼 큰 것으로만 생각하니까 목표를 버려야만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내가 뭔가 성취하고 싶은 사람은 왠지 행복해 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과 성취를 반대되는 것으로 보니까 행복해지고 싶으면서도 행복해지면 안 될 것 같은 경계심이 생기게 됩니다. 성취와 행복의 이런 관계도 오해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나중에 누릴 수 있는 큰 행복보다 작더라도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이런 시각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삶이 덧없고 짧다고 느낄수록 현재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하지만 반대로 한 번 사는데 뭐라도 남겨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때로는 순간적인 것을 추구할 때가 있지만 때로는 좀 의미 있게 사는 것을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에 다 고려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즉 ‘지금을 즐기자’는 의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여러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균형을 잡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한쪽만 추구하는 것은 반쪽짜리라는 거죠.


사람들이 쉽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맞습니다. 이분법적인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균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바로 그런 얘기입니다.


제목을 『굿 라이프』라고 한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행복’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두 가지 맥락으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 저 좀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그 때의 행복은 emotion, 즉 현재의 기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졸업한 제자가 찾아와서 ‘교수님, 제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지금 기분을 좋게 해달라는 말이 아니고, 삶을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영어로 feeling happy와 happy life에 있는 두 개의 ‘happy’는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happy가 첫 번째 happy보다 크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한자로 표현하는 ‘행복’이라는 말을 첫 번째 의미로 많이 쓰고 있어요. 그래서 삶 전체의 ‘행복’을 이 ‘행복’이라는 단어가 담아내지 못하니까 일부러 ‘삶’을 강조하기 위해서 『굿 라이프』라고 제목을 붙이게 된 겁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에 대한 오해를 벗어던지는 것 같은 의미가 담겨 있네요.


행복에는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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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말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


한자어에서 나온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실체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실체와의 괴리도 크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런 현상이 한자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언어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고 하니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행복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또는 각국의 행복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이미 많은 분들이 해 왔습니다. 그런데 한자의 ‘행복’도 그렇고 영어의 ‘happiness’나 독일어의 gluck, 프랑스어의 bonheur 등 모두 ‘우연’이나 ‘기회’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단어들이 모두 ‘우연’이나 ‘luck’ ‘chance’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가에 대해 관련 연구를 한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외부 환경의 변화를 어느 정도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아주 오래전의 삶이라는 것은 외부의 어떤 변화, 충격, 질병, 재해에 속수무책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그 때 살았던 사람들에게 행복은 운 좋게 재난을 피하고, 운 좋게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연’을 나타내는 말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로 인간이 여러가지 컨트롤 할 수 있는 기술이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행복이라는 게 외적인 요인으로부터 우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이죠. 그럼에도 말 자체는 예전의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우리의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제한하고 오해를 하게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행복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말이 ‘소확행’이라는 것입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죠.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어떤 말씀을 해 주고 싶으신가요?


책에는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에 관한 것이 10가지 소개되어 있는데요, 우선 일상에서 제일 자주 마주치는 행복에 관한 주제가 돈, 시간, 사람, 일과 같은 것들이잖아요. 따라서 도대체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주제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배워볼 만합니다. 먼저 돈은 최근 연구를 참고 해 봤을 때 두 가지만 실천해 보면 좋을 거 같아요. 하나는 돈으로 경험을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돈으로 소유와 함께 경험이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소유는 사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돈으로 경험을 사라는 말은 여행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많죠. 여행도 있고, 영화나 연극도 있죠. 그리고 산책을 할 수도 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건을 사는 게 아니고, 경험이나 생각을 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시간을 사는 겁니다. 자기 시간을 아껴줄 수 있는 서비스에 돈을 투자해서 자기의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시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삶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교수님은 주로 어떤 시간을 사는데 돈을 지불 하시나요?


시간을 산다는 게 효율을 높이는 것이잖아요. 효율을 높이면 남는 시간이 생기고, 남는 시간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효율적인 공간에 가면 효율성이 올라서 결국 시간을 사는 셈이 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책을 쓰거나 글을 읽을 때 집에서 잘 안 되면 동네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사 먹으면서 두 시간 일하면 엄청나게 시간을 아끼게 됩니다. 집에서 하면 몇 시간을 해도 안 될 때가 있거든요. (웃음) 그리고 또 하나는 운동이에요. 운동도 집 앞에 운동장 한 바퀴 뒤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체육관에 가면 운동장에서 혼자 할 때 보다 훨씬 더 강도 있게 효율적으로 운동을 하게 돼요. 그것도 내가 시간을 사는 셈이죠.

 


행복에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기술이 있나요?


사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어떤 행복의 기술이 있나요?


갈등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전문가가 아니에요. 다만 행복의 관점에서 말씀드리면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 것을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쉽지 않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롭다는 말도 하고요. 그런데 그걸 견디는 힘은 좋은 사람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안 좋은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도 고민해야 하지만 그럼으로 빼앗긴 행복을 어떻게 채울 것이냐도 고민해야 되거든요. 마치 아픈 곳이 있으면 그 부위를 치료하기도 하지만 주변 근육을 강화시켜서 이겨내기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미움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게 도움이 됩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우리가 추구하는 두 가지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고요, 다른 하나는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이라고 하는데요,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내시경을 하는 동안 실시간으로 고통의 정도를 이야기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A라는 환자가 B 환자보다 실시간으로 보고한 고통은 더 많았는데 나중에 끝난 다음 내시경 자체에 대해 평가할 때는 A 환자가 내시경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진 거죠. 그래서 왜 그럴까 했더니 우리가 어떤 일을 회상해서 내리는 평가는 순간의 경험에 대한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회상을 할 때 누락되는 부분도 있고 왜곡되는 부분도 있고 경험의 일부를 선택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결론은 경험의 마지막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시경이 굉장히 아픈 상태에서 끝났다면 너무 안 좋았다고 기억하고, 고통이 점점 줄어든 상태에서 끝났다면 괜찮다고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강렬했던 경험, 즉 ‘peak and rule’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자기가 나중에 기억해서 평가할 만한 일들을 염두에 둔다면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여행을 갈 때 일정을 짠다고 생각해 보죠. 보통은 마지막 날 정신없이 정리하고 짐싸서 오기 바쁜데 그 대신 가장 좋은 장소에 가서 가장 좋은 음식을 먹는 일정을 마지막 날에 배치하는 겁니다. 그래서 카너먼 교수가 하는 얘기는 우리가 행복을 얘기할 때 누구를 위한 행복을 얘기하는 것이냐는 걸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현재 경험하는 자신을 위한 행복이냐, 아니면 나중에 이 순간을 회상하는 자신을 위한 행복이냐, 이 두 가지가 같은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것이 이 책 『굿 라이프』에서 삶을 강조한 것과 연결되는 거죠.


많은 나라들이 국민의 행복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면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정책을 내놓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은 최근 ‘외로움 담당관’을 임명하는 등 인상적인 노력을 해서 관심이 가는데요, 영국의 이런 노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영국이 올해 loneliness, 즉 외로움이나 고독과 관련된 부서를 만들고 장관을 임명했잖아요. 시대가 변해서 그 사회에 어떤 중요한 이슈가 생기면 그런 부서가 공적으로 생기게 되는데요, 우리로 치면 ‘여성가족부’가 있겠죠. 중요하기 때문에 부서를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측정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로움’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를 중요한 국가의 어젠다로 삼아서 부처를 만든 경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건설, 교통, 환경과 같이 눈에 보이는 유형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죠. 물론 부탄이 국가총행복 (GNH)이라는 지수를 만들어서 관리하는 위원회를 두고 있는데요, 영국 같이 규모가 큰 소위 선진국이 개인의 내면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부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시도는 정말 좋다고 봅니다. 이제 어떤 일들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겠죠. 하지만 저는 이 노력이 일시적이 아닐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전부터 영국 통계청에서 국민들의 행복을 측정해 왔는데요, 다른 많은 나라와 달리 영국은 측정을 할 때 특별한 질문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여러 질문 속에 순간의 기분을 나타내는 감정에 관한 것도 물어보지만 삶을 전체적으로 보고 삶의 의미를 물어보는 문항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 질문은 행복을 균형 있게 보고 관리하겠다는 의지로 보여서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경제력에 비해 행복 지수가 낮은 나라라고 하는데요,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서 우리도 국가가 국민의 행복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 좋겠네요.


우리나라도 행복 지수를 측정하고 있는데, 사실 무슨 일이든 전담하는 사람과 기구를 만들어야지 일이 제대로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어떤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 일이 구체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행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만 가지고 있지 체계적으로 인력과 예산을 들여서 일을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 점이 아쉽죠.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야기한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인 덕스러움을 ‘품격있는 삶’으로 표현하시면서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삶’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이 책이 행복에 관한 책 중에서는 좀 심각한 편이라서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란 것에 정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감이 낮아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면 틀릴까봐 걱정하고, 맞춰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시험보는 것처럼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행복하지 않은 거죠. 행복에 대한 견해 자체가 너무 엄격해가지고 이것 만이 행복이고 저건 행복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모순이 생깁니다. 행복은 자유로움인데 행복에 대한 이론은 자유롭지가 않아요. 그리고 이 얘기를 후반부에 배치한 이유는 행복이 도덕이나 윤리는 아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방해가 돼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또 숙제가 되니까요. 그런데 상대방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것 중 하나가 지나치게 강한 주장을 가진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지나치게 심각하고요. 내 생각이 아니면 안 되고, 내 생각만 맞다고 하는 태도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것, 너무 진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진지하고 심각하지 않게 한 마디 해 주세요.


개인적으로 자작곡 같은 책이에요. 그래서 욕심이 나요. 어떤 욕심이냐 하면 사람들이 많이 읽어서 행복에 대한 생각이 더 넓고 균형이 잡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보통은 자기책을 많이 읽어달라는 게 민망한 일인데요, 이번에는 욕심이 납니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시고 제 생각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행복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굿 라이프최인철 저 | 21세기북스
심리학 교양서를 독보적인 스테디셀러로 만든 저자만의 강력한 글의 힘과 인문, 사회, 자기계발의 영역을 넘나드는 실천적 학문으로서 심리학이 가진 매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김금희,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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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니 허기졌다. 티 내지 않으려 꾸역꾸역 감춰뒀던 어떤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네게도 있는 마음이지?’라고 묻는 인물들에게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소설가 김금희는 첫 장편을 두고 “쓰이는 대로 썼다”고 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시작은 같은 상처를 지닌 두 남녀의 연애였지만, 두 주인공은 한 번 손을 포개어 잡는 것으로 인연을 마쳤다. 분명한 건 그들이 각자의 마음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사랑의 주체인 나 자신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는 변화다. 『경애의 마음』 은 우리에게 결코 잊히지 않는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한번 써본 마음, 잃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마음, 말하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그 어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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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아요. 첫 장편을 쓴 소감이 어떤지. 

 

완성하지 못할 것 같은 소설이었어요.

 

어떤 의미에서요?


늘 그렇듯 완성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불안을 안고 쓰는 것 같아요.

 

300명 독자에게 가제본을 보내, 사전 서평을 받았어요. 작가에겐 흔치 않은 일, 굉장히 떨리는 작업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잡지에 연재한 작품이지만 완전한 퇴고를 거치지 않은 소설을 무려 300분이 읽으시는 거잖아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어쩔 수 없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어요.

 

출간 전 리뷰가 이렇게 많이 달린 소설은 처음 본 것 같아요.


아직 떨려서 찾아보진 못했어요. 잡지에 발표했을 때보다 500매를 더 썼거든요. 혼자 작업한 시간이 길어서 힘들기도 했고, 퇴고하는 기간도 길었고요.

 

‘작가의 말’이 굉장히 짧아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해 썼다.” 독자 입장에서는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들었더라고요.


작가의 말이라는 게 작가 개인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글일 텐데요. 이 책을 읽은 사람이 가장 끝에서 들었으면 하는 말을 생각하다가 나온 문장이었어요. 개인적인 감회를 길게 쓰기보다 가장 작은 소리로 남겨두고 싶었거든요. 이 소설에 마음을 주신 분들에게 답장을 드리는 마음이었어요. 뭔가 더 보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애의 마음』 의 출발이 궁금해요.


3년 전인가 4년 전인가, ‘미싱(mishin)’이란 단어가 머신(machine)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국에선 사양 산업으로 저물고 있지만, 미싱이 기계를 대표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이 꽤 인상적이었어요. 마산에서 일했던 친척들도 생각났고,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을 젊은 사람들이 궁금해졌어요. 사양 산업으로 치부되는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특징은 무얼까 고민하다가, 연재 제의를 받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죠.

 

반도미싱의 팀원인 ‘경애’와 팀장대리인 ‘상수’, 두 사람이 굉장히 닮은 인물이라 여겨졌어요.


캐릭터가 먼저 잡힌 건 상수예요. 뭔가를 두고 고군분투하는 인물이 떠올랐고, 그와 짝패로 존재할 사람으로 경애를 생각했어요. 이 둘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요. 제가 인천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20대가 된 1999년에 저희 동네에서 호프집 화재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경애와 상수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했다면, 어른이 돼가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애도하고 견딜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싶었어요.

 

소설을 읽는 내내 경애(敬愛)는 이름의 뜻, 그리고 ‘마음’을 곱씹게 되더라고요.


‘경애의 마음’이란 제목은 초고를 쓰기 시작한지 두 달쯤 지났을 때 정했어요. 경애라는 이름을 짓고 나니 제목이 금방 따라왔죠.

 

경애의 너무 긴 아이디(frankensteinfree-zing)를 읽다가 웃음이 나버렸습니다. 상수는 이 이름을 읽고는 “자기가 인사과장이라면 이런 이메일을 쓰는 직원을 뽑지 않을 것 같았다. 간소하지 않다는 건 실용적이지 않다는 뜻이었고 회사에서 하게 될 ‘노동’이라는 데 감이 없다는 것(28쪽)”이라고 말해요.


첫 직장에 들어가서 이 메일을 정해야 했을 때가 생각났어요. 그전까지 제가 갖고 있던, 지금까지도 쓰는 메일 주소가 novelist79인데요. 직장에서는 이 아이디를 쓰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아이디는 소설가였지만, 그 때까지 전 소설가가 아니었거든요. 작가 지망생 김금희가 아닌 신입사원 김금희로 살아야 하니까 머뭇거려졌다고 할까요? 결국 회사 이름을 영문으로 쓴 다음 ‘79’를 보탰어요. 그래야 뭔가 떳떳하고 어른스러워지는 것 같았어요. 그때는.

 

상수는 고독사를 꿈꾸지만 누군가와 끊임없이 연결되고 싶은 욕망이 큰 사람으로 읽혔어요. 상수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는 어떻게 떠오른 이름인가요?


원래 이 제목으로 단편을 쓰고 싶었어요. 요즘 세대를 보면 관계를 필요로 하지만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저를 포함해서요. 온라인 세계가 등장하면서 분명 어느 정도 해소해주고 있지만, 결국 현실에서의 관계와 시소를 타게 되죠. 상수는 현실에서 아웃사이더, 고문관에 속해요. 상수가 왜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을지 생각해보면, 온라인에서 어떤 관계를 이어가는 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어떤 세계가 있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연애 상담 페이지가 생각났어요.

 

현실에서 사람들이 가장 슬플 때가 어쩌면 ‘네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듣지 못할 때인 것 같아요.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듣기가 너무 어려운 세상이니까요.


아마 현실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는 “네가 잘못했어”일지도 몰라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상수가 어떤 순정함을 지키려고 애쓴다고 여겨졌어요.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니까요.

 

델리스파이스, 민들레영토, 미투데이 등이 등장해요. 2000년대 초반을 청춘기로 보낸 사람이라면, 몰입이 분명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해요.


소설을 쓰면서 ‘요즘 젊은 독자들이 번개를 알까?’ 싶었어요. 저는 너무 자연스럽게 썼는데 아무래도 지금의 20대들은 모를 것 같아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봤죠.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약간의 해설을 보태기도 했어요.

 

진도가 나지 않아서 답답했던 장면이 있었나요?


단편 작업을 할 때, 저는 주로 인물들의 내면 심리에 집중해서 쓰는 편이에요. 그래서 장편을 쓸 땐 플롯 중심으로 쓰게 될 줄 알았죠. 그런데 후반부를 쓰는 중에도 제가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웃음) 경애와 상수가 은총의 집을 가는 장면을 쓸 때 비로소 느꼈어요. 쓰이는 대로 쓰는 게 내가 쓰고 싶은 장편이라는 마음에 이르게 됐죠. 그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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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이 어떤가 들여다보았거든요

 

독자 리뷰를 살펴봤는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장이 있더라고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176쪽)


상수가 경애 마음속에 들어가 이해에 다다른 게, 이 문단에서 확 드러나잖아요. 이 소설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 문장을 썼을 때, 비로소 찾은 것 같아요. 경애 역시 옛 연인인 산주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럿 있었을 텐데요. 현실에서 자기 마음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불필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박준 시인의 추천사가 유독 오래 기억에 머물었어요. “다채로운 서사를 통해 오래 울고 있던 숱한 마음들을 불러내놓고는 이내 가만가만한 문장으로 그 면면을 어루만진다.” 정말 모든 인물의 마음을 찬찬히 되짚어줬다는 인상이 있어요. 위무 받은 느낌이랄까요?


어떤 마음이 전달됐다는 느낌을 받으면, 가장 힘이 나요. 박준 시인이 소설의 어떤 리듬에 대해 이야기해줬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제가 그랬거든요. 어떤 큰 사건에 대해 말할 것 같다가도 갑자기 멈춰 서서 뒤돌아보고, 그 마음이 어떤가 들여다보았거든요.

 

막 친절한 소설은 아닌데, 결말에 도달해서는 ‘왜 끝이 이렇지?’라는 의문은 없었어요. 경애가 이렇게 말했죠. “상수의 그런 밀침이 물결 정도로 지나갈 수 있도록 마음을 축소해야 한다.”(271쪽) 이 말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관계가 좀 더 진전될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라고 산정하고 소설을 시작했는데요. 쓰는 과정에서 이 정도의 믿음, 애정을 확인하는 걸로도 충분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어요. 생생한 연애 이야기를 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무리해서 쓰고 싶지 않았어요.

 

상수가 말했어요. “한 개인에 대해서 그렇게 폭풍처럼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는 건 기이한 경험”(207쪽)이라고. 작가님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나요? 생각지도 못한 비밀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대처해요?

이런 문장을 쓴 기억이 있어요. “누군가는 비밀을 알게 돼서 오히려 사이가 멀어졌다.” 비밀을 들은 제 마음 때문이 아니라, 비밀을 전한 그 사람의 마음으로 인해 관계가 어려워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비밀의 상처가 치유되면 그 비밀을 청취한 제가 필요하지 않게 되잖아요. 그러면 비밀을 들은 관계에서의 거리 조절을 하게 되고요. 종종 어려워질 때가 있어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관계는 어떻게 다를까요?

 

온라인 공간을 두고 끈끈하지 못하다, 금방 허물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요. 전 생각이 좀 달라요. . 제가 오랫동안 트위터를 해서일지 모르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연대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맹점이 있긴 해요. 현실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른 질감이 있으니까. 중요한 건, 어떤 세계이든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작가님이 ‘언니는 죄가 없다’의 운영자라면요. 경애와 상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경애에게는 “산주를 믿어”라고 말하고 싶어요. 경애가 산주를 확실하게 밀쳐내지 못하는 건, 산주가 처한 어려움 때문이거든요. 경애는 자신만이 산주를 치유해줄 수 있다고 믿는데, 이건 바꿔 말하면 산주를 믿지 못하는 것이기도 해요. 저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우에 지나지 않는 상황들이 많죠. 상대방을 믿고 그대로 두었을 때, 분명 달라지는 것들 것 존재해요. 그리고 상수에게는 “좀 더 용기를 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상수는 감정을 많이 느끼는 인물이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요. 상수 역시 상대를 좀더 믿는다면, 고립감을 덜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읽은 것만으로도 어떤 위안이 된 문장이 있어요. “상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겨우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43쪽)


사실 며칠 전 제게도 위기가 왔어요. 지금 마무리해야 하는 단편이 있는데 도저히 못 쓸 것 같은 거예요. 작업하는 카페로 가는 길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늘은 그냥 밀크티나 한 잔 마시고 집에 가자고 발길을 돌렸어요. 그래서 다른 카페에 앉아있는데,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내 마음의 소리를 한 번 들어줘서 마음이 생각을 달리 했나? 그래서 작업하는 카페로 다시 가서 두 시간쯤 글을 썼어요. (웃음)

 

전작에서도 이번 작품에서도 시를 인용했어요.


신용목 시인의 「울음을 다 써버린 몸처럼」을 읽고 필사를 했어요. 특수하다 싶을 만큼 너무 좋아서 안 쓰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애가 정말 이 말을 했을 것 같았어요. 같은 문장이 두 번 나오잖아요. 그만큼 제겐 너무 중요한 문장이었어요.

 

누군가 이 소설에서 단 하나의 문장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이걸 고를 거예요. “한번 써본 마음은 남죠. 안 써본 마음이 어렵습니다. 힘들겠지만 거기에 맞는 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291쪽) 혹여 상대가 모르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달래는 문장이기도 했어요. 어떤 상황들을 볼 때 정말 별 거 아니었고 지나가는 마음일 때도 많아요. 제 마음을 상대가 몰라줬다고 해도 끝끝내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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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놓은 가장 내밀한 예술

 

요즘 주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뭔가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도 썼는데요.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나쁨이 그러데이션처럼 퍼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 그대로 농담(濃淡) 같은 거라, 없는 사람은 없다고 여겨져요. 불과 1,2년 전만 해도 누군가에게 거리감이 느껴지면 좁혀가려고 노력했는데요. 이제는 조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 농담의 짙고 연하기를 들여다보면서 극복하면서, 사람들이 진짜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나쁘고 안 좋은 결이 있음에도 그것을 동결해주는 어떤 장점을 발견하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정말로 나쁨 자체인 경우도 있으니까요.

 

눈치가 빠른 편인가요?


예민하긴 한데 정확하진 않은 것 같아요. 보고 싶은 결이 있으면 그 결대로 보려는 성향이 있어요. 어떤 감정이 들면 금방 흘려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도록 간직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타인의 감정을 잘 파악하지만, 저는 결론을 금세 내버리는 편이라. 예민하긴 하지만 핀트가 좀 안 맞는? (웃음) 그런 편이에요.

 

얼마 전 서점에 놓인 『너무 한낮의 연애』 를 보았는데, 13쇄였어요. 전작이 큰 사랑을 받아서 부담도 있지 않을까 궁금했어요.


단편집으로 만난 독자들이 이번 작품을 통해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런 소망은 있어요. (웃음) 장편을 쓰든 단편을 쓰든 어쨌든 한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달라지지 않는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다른데? 하는 의문은 없을 것 같아요.

 

“주변의 기척들에 관심이 많고 그것이 주는 자극으로 소설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추상적인 질문이겠지만 소설의 쓸모에 대해서도 묻고 싶어요.


소설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예술 중 가장 내밀한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읽는 순간에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이 내밀한 상태로 통한다고 느껴요. 삶이란 어떻게 보면 가치 판단의 반복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소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남긴 것이기도 하고, 국가나 장벽을 떠나 읽힐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내밀한 에너지를 얻는 데 소설 만한 것이 또 있을까 생각해요.

 

등단한 지 곧 10년, 한국의 젊은 작가를 호명할 때 선두에 서 계세요.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느끼세요? 어떤 책임감도 있을 것 같고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첫 작품이 5년만에 나왔고 그 5년이 참 길었는데요. 어느새 제 주변에는 후배작가들이 많아졌어요. 후배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제 모습이 보여요. 그럴 때 연차를 느끼지만 9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말 그대로 젊은 작가라고 생각해요. 다만 어떤 부조리를 느꼈을 때, 어느 정도의 액션을 취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직장에 다녔으면 과장 정도의 직책은 달았을 연차니까요.

 

소설가로 살면서 언제 가장 행복한가요?


퇴고하면서 원고를 매만질 때가 좋아요. 백지 상태일 때는 너무 공포스럽고요. 어느 정도 채워놓고 골라낼 때, 기분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지금 단편 하나를 막 마무리했기 때문에 향후 며칠간 기분이 좋을 거예요. (웃음)

 

독자와의 적절한 거리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글쎄요. 저는 기본적으로 위계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면 어떤 행사나 SNS를 통해서일 텐데요. 독자와 내가 평등하다고 느껴요. 작가라든가 나이가 많다거나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아요. 평행한 위치에 서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껴요. 작가가 갖고 있어야 할 마음은 어느 정도의 긴장감인 것 같아요. 독자는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내 옆에 평행하게 서 있는 독자들이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소설을 쓰고 싶은지 묻고 싶어요.


삶에서나 글을 쓸 때나 열의가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우는 소리를 할 때도 있을 텐데요. 그건 울음을 그치고 나가려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너무 부조리하고 허무할 때가 많죠. 하지만 이 세계의 허무함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글을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살자”라는 목소리를 내고 싶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생각해요. 우울한 이야기를 쓸 때도 다르지 않아요. 결국은 같이 살아보자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경애의 마음김금희 저 | 창비
미덥고도 소중한 소설을 곁에 둔다면 지난 세월 우리가 견뎌온 아픈 시간이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유머로 위로되고, 앞으로의 삶을 좀더 단단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무적핑크 “‘나는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제일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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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조선왕조실톡>의 작가 무적핑크가 세계사로 눈을 돌렸다. 새로운 역사만화 시리즈 『세계사톡』을 선보인 것. 웹툰 <세계사톡>은 지난해 10월부터 ‘저스툰’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으며, 그 중 구석기 시대부터 기원후 300년까지의 내용이 『세계사톡』  1권에 담겨 출간됐다.

 

조선시대 인물들과 메신저로 ‘톡’ 한다는 설정으로 딱딱한 역사를 재기발랄한 이야기로 풀어냈던 <조선왕조실톡>과 마찬가지로 <세계사톡>에서도 유쾌한 대화가 오고간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류는 이모티콘과 사진, ‘@!^#&’같은 기호를 사용해 ‘톡’ 하고, 문명을 발생시키고 제국을 건설했던 인물들은 SNS를 통해 생생한 현재를 공유한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은 시기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같은 시기, 서로 다른 땅에서, 비슷한 역사를 쌓아올렸던 인류의 흔적을 모아놓은 것.  『세계사톡』를 읽다 보면 인류문명의 발전사와 세계사의 흐름이 손에 잡힌다.

 

지난 6월 25일, 서교동에 자리한 ‘와이랩(YLAB)’에서 무적핑크(변지민)와 무적민트(박은아) 작가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핑크잼 레이블’ 안에서 『세계사톡』 을 비롯해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 개발하고 있다. 만화 전문 제작사 와이랩은 ‘세상의 모든 재미없는 것들에 재미(JAM)를 바르자’는 취지로 무적핑크 작가와 손잡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작가 레이블 ‘핑크잼’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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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른 일은 두 개밖에 없어요


『세계사톡』은 굉장히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잖아요. 자료조사부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무적핑크 : 핑크잼에서 톡 시리즈를 만들 때 첫 시작을 무적민트 작가님이 하세요. 저희의 브레인이자 CPU이자 실세라고 할 수 있죠(웃음).

 

그러면 무적핑크 작가님은 어떤 존재인가요(웃음)?


무적핑크 : 메인보드라고 할까요? 전기가 나가도 상관없는(웃음).

 

무적민트 작가님은 정말 많은 자료를 찾아보셨을 것 같아요.


무적민트 : 그렇죠. 사실 역알못(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보는 족족 흡수해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 과정이 너무 재밌는데, 처음에는 뭐가 중요한지 뭘 어떻게 다뤄야 되는지 감이 안 잡혔어요. 그런 부분에서 많이 힘들었죠. 무적핑크 작가님을 비롯해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저 혼자 해야 했다면 지금도 헤매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무적핑크 : 저도 못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핑크잼에 백기 들고 ‘도와주세요’ 한 거예요(웃음).

 

『세계사톡』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어땠나요?


무적민트 : 작업의 첫 번째 단계는 자료조사예요. 관련된 것들 공부 다 하고, 그 중에서 뭘 다루면 독자들이 재밌게 읽을까 생각하면서 꼭지를 정하고요. 거기에 맞춰서 시놉시스를 짜요.


무적핑크 : 무적민트 작가님이 꼭지를 정하시는데, 가령 ‘인류의 시작은 종교를 만드는 시점까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하시면 그 지점까지 이르는 수천 년을 쪼개서 꼭지를 50개 정도 만들어요. 각 문명의 탄생을 다루는 식이죠. 그게 반 년 동안 연재할 웹툰의 소재가 되고, 책 한 권에 실리는 분량이에요. 그 뒤에는 꼭지에 따라서 시놉시스를 만들고요.


무적민트 : 회의할 때 저는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던지는 수준이고요. 무적핑크 작가님이 다 해주십니다(웃음).


무적핑크 : 그리고 모지현 선생님께서 저희한테 과외를 해주셨어요. 분기별로 오셔서 마치 전공수업처럼 강의를 해주시는 거죠.

 

모지현 선생님께서 책의 해설만 쓰신 게 아니군요. 준비 과정부터 함께 하셨네요.


무적핑크 : 네, 선생님께서 가닥을 잡아주셔야 하니까요. 가령 중세시대는 사람들이 종교에 묶여 있는 게 골자라고 알려주시면, 저희가 그 안에서 내용을 뽑을 수 있잖아요.


무적민트 : 저희가 어떤 포인트에 맞춰서 작업해야 할지 알려주셨어요. 도와주신 덕분에 조금 더 쉽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웹툰 <세계사톡>의 연재를 시작하기까지, 준비 기간은 얼마나 걸렸나요?


무적핑크 : 1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조선왕조실톡> 연재 초기부터 이야기가 나왔었거든요. 세계사는 진짜 방대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초반에는 별의별 아이디어가 다 있었어요. 일단 <조선왕조실톡>이 인기 있으니까 ‘이순신과 넬슨이 이야기를 나누는 콜라보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인류의 탄생부터 다루면 문자가 없는 시기가 있는데 어떻게 ‘톡’을 할 것인지, 그런 논의도 몇 개월 이어졌고요. 그 뒤에 무적민트 작가님이 합류하셔서 뼈대를 잡아나가셨어요. <세계사톡>은 무적민트 작가님하고만 함께하는 게 아니고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레이아웃 짜시는 분과도 손발을 맞췄어요. 담당 PD도 보셔야 했고요. 족히 1년은 넘게 준비한 것 같아요.

 

‘핑크잼’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웹툰 작가가 레이블의 수장이 된 건 처음 있는 일 아닌가요?

무적핑크 :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웹툰 <세계사톡>, <조선왕조실톡>, <삼국지톡>까지 세 작품을 동시에 연재 중이시죠? 이렇게 많은 일을 시키려고 와이랩에서 따로 레이블을 만들어줬나 봅니다(웃음).


무적핑크 : 그렇죠(웃음). 그런데 재밌어요. 아직 만든 지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 <조선왕조실톡>을 연재하면서 너무 재밌었고 사랑도 많이 받았는데, 주2회 연재다 보니까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해야 될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거예요. 제가 예술사에 관심이 많은데, 관련해서 재밌는 소재들이 많잖아요. 고흐와 고갱이 살짝 문제아일 수도 있고, 테오가 형 굶어죽지 말라고 고흐한테 기프티콘을 보내줄 수도 있고요. 그런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저보다 능력 있는 분들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분들을 모시려면 마당이 필요하니까, 노지에 텐트 하나 쳐놓은 거죠(웃음). 웹툰을 연재하려면 안정적인 수익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보장해줄 만한 곳은 포털 같은 연재처거든요. 마침 위즈덤하우스에서 ‘저스툰’이라는 포털을 만드셔서 <세계사톡>을 첫 연재작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무적핑크 작가님은 데뷔작도 충동적으로 시작하셨잖아요. 이번에 세 작품을 동시 연재하시는 것도 충동적으로 결정하신 건가요(웃음)?


무적핑크 : 저지르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죠. 그런데 그렇게 많이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세계사톡> 하고 <삼국지톡>, 아직 두 개밖에 안 저질렀어요.

 

무적민트 작가님 입장에서는 겁나실 것 같아요. 또 어떤 일을 저지르려고 그러시나, 하고요.


무적민트 : 저는 뭐... 알아서 하시겠죠(웃음).

 

방금 무적핑크 작가님이 무적민트 작가님 팔을 지그시 잡으셨어요(웃음).


무적핑크 : 진심으로 큰 축복이죠. 팀플만 해도 지옥을 본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한 몸처럼 움직여야 되는 일이니까요. 처음에 무적민트 작가님도 그 부분을 많이 걱정하셨거든요. <조선왕조실톡>은 SNS나 메신저로 대화를 한다는 게 큰 틀인데, 그 포맷 안에서 제 말투가 있잖아요. 그걸 <세계사톡>에서도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하시는데요. 제가 작업하면서 알게 된 게, <세계사톡>은 무적민트 작가님 스타일로 하는 편이 훨씬 더 편하고 재밌더라고요. <조선왕조실톡>은 무적핑크의 글인데 <세계사톡>은 무적민트의 총괄하에 만들어지는 거죠. 처음에는 무적민트 작가님이 시나리오를 쓰시면 제가 유행어를 덧대거나 하는 식으로 편집을 길게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거의 터치를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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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적핑크

 


갈등이 있는 건 그나마 나은 거예요


<세계사톡>을 만드시는 데 있어서 큰 틀로 잡으신 건 뭐였나요? 두 분이 합의하신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무적핑크 : ‘재밌어야 한다’는 거였죠.

 

무적핑크 작가님에게 재미는 늘 1순위잖아요(웃음).


무적핑크 : 맞아요.


무적민트 : 몇 가지 내용을 제 책상에 적어놨는데, 가장 위에 적혀 있는 게 재미예요.


무적핑크 : 그 아래 사소한 것들도 있었는데, 그건 무적민트 작가님이 다 내재를 하셔서 따로 복기하실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어요. 대화가 너무 길어지면 좋지 않으니까 말을 주고받는 횟수가 5번을 넘지 않을 것. 그리고 ‘장문톡’이라는 설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풍선 하나에 들어가는 내용은 3줄 안에 담을 것.

 

<조선왕조실톡>을 그리시면서 터득하신 건가요?


무적핑크 : 그렇죠. 2년 동안 고생하면서 알게 된 건데(웃음), 무적민트 작가님은 그 고통을 또 겪으실 필요는 없으니까 최소한의 안전벨트만 드린 거예요. 그런데 터치할 이유도 없었어요. 핑크잼이 그렇거든요. 각자의 작업은 각자가 알아서 할 테니까 터치하지 말자고 생각해요.

 

무적핑크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웃긴 포인트들이 있어요. 블랙유머도 있고,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코드도 있고요. 실제로도 유머러스한 분인지 궁금해요.


무적민트 : 무적핑크 작가님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데요. 첫인상이 굉장히 센스 있고, 웃기고, 말도 굉장히 재밌게 하고, 뭔가 독특하면서도 똑똑한 작가인데 어딘가 허술하기도 하고. 그런 반전매력이 있으신 분이었어요. 어차피 팀플을 하게 될 거라면 이런 작가를 만나야 된다고 생각해요(웃음).

 

무적핑크 : 너무 감사합니다.

 

협업을 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무적핑크 : 혼자 일할 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혼자서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작가가 외로운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팀이 있으니까요. 웹툰이나 단행본 순위가 오르면 메신저에서 다 같이 이모티콘 파티를 한 시간씩 계속해요(웃음). 그런 게 즐겁죠. 작가의 최대 적인 외로움이 어느 정도 사라지니까요.

 

세계사를 시대별로 엮어서 정리했다는 게 이 책의 큰 특징인 것 같아요.


무적핑크 : 어떤 주제로 엮을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냥 단순하게 1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엮자는 의견도 있었고, 대륙별로 엮자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어차피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똑같으니까 어느 정도 공통되는 줄기가 나타나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서 문명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강가에서 이뤄지고, 원시적인 종교가 나타나고, 문자가 생기는 부분들이죠. 그러면 각 문명을 대표하는 왕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게 하자고 생각했어요. 챕터마다 앞부분에 ‘미니톡’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단체로 모여서 하나의 주제로 대화를 하는 거예요. ‘너도 종교 있니? 나도 종교 있어’, ‘너희도 가뭄 때문에 고민이니, 우리도 고민이야’, ‘너도 식민지 좋아하니? 우리도 그래’ 하는 식이죠. 그렇게 공통점으로 묶을 만한 소재를 챕터로 만들어서 분리를 하고요. 이게 정해졌을 때 정말 기뻤어요. ‘드디어! 쉽고 큰 줄기를 찾았다!’ 싶었죠.

 

작업하시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느끼셨을 것 같아요. 지금의 국내외 사정과 닮아 보이는 시기도 있었을 테고요.


무적민트 : 많죠. 원고를 쓸 때마다 ‘이건 정말 비슷하다, 지금의 내가 저곳에 가서 산다고 해도 크게 이질감이 안 느껴지겠다’ 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무적핑크 : 저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대륙이랑 섬나라에서 살 만하다 싶으면 한반도를 건드리는 게 지금과 똑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일본에 자위대가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있을 때 ‘왜 이렇게 똑같지?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이민 가야 되나?’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세계사도 똑같은 것 같아요. 망하는 나라는 망하는 이유가 있고 흥하는 나라는 흥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게 똑같아요. 모지현 선생님도 그 말씀을 하셨거든요. 망하기 시작하는 나라는 폐쇄적으로 변한다고요. 외침으로 망하는 나라들은 어디 가서 부흥 운동이라도 하는데,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폐쇄되고 양극화돼서 망하는 나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고요.


무적민트 : 아시리아도 굉장히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였는데요. 힘으로 밀어붙이면 다 될 거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망했어요. 반면에 페르시아는, 시대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관용주의 태도를 취하면서 종교가 달라도 인정해주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때는 엄청 부흥했어요. 관용과 포용으로 감싸고 이해하면 다 같이 살 수 있는 건데, 지금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잖아요. 그런 모습을 볼 때도 많이 이입이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의 습성은 어쩔 수가 없나 봐요. 꼭 민족적인 습성은 아닌 것 같아요.


무적핑크 : 낯선 걸 두려워하는 거죠. 아마 그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걸 텐데, 다양성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나랑 다른 존재를 덜 무서워하는 거잖아요. ‘그래, 네 이야기도 들어보자’라는 태도를 취하는 거고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겠더라고요. 부흥한 나라가 그걸 못해서 저물었으니까요. 인간의 습성을 이겨내면서까지 ‘그래, 네 이야기 들어줄게’라고 하는 나라들이 제국이 되고 부흥하고 대륙을 오고갔을 것 같아요. 그러다가 지킬 게 많아지니까 거만해지고, 결국 멸망한 걸 테고요. 그런데 참 재밌어요. 어떤 나라도 자기들이 멸망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 같거든요.

 

지금 우리나라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잖아요. 

무적핑크 : 제가 볼 때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그나마 나은 것 같아요. 염증 반응이 있는 거니까요. 그게 없어지고 조용해질 때가 제일 무섭죠. 경술국치 때도 그렇게 울지 않았다고 해요. 이미 이전에 다 울었고, 사람들이 허탈해할 즈음에 국권 피탈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무력하게.

 

역사만화를 그려서 좋은 점이라고 한다면, 소재가 무궁무진하다는 점 아닐까요?


무적핑크 : 예전에는 그래서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어쨌든 제가 그리는 건 웹툰이고, 웹툰은 재밌어야 되는데, 요즘 재밌는 웹툰의 테마는 공감이거든요. 공감할 만한 걸 뽑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 보니 요즘에는 무조건 반찬이 많다고 편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톡’의 문체 자체가 공감을 불러 일으켜요.


무적핑크 : 열심히 노력을 해보죠. 예를 들어서 『세계사톡』에서 상하수도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면, 이걸 어떻게 끌어오면 공감 가능한 요소가 있을까 생각해보는 거예요. 층간소음 이야기로 풀어볼까, 위층에서 물이 새는 걸로 해볼까, 하면서요. 그렇게 물길을 계속 이끌죠. <조선왕조실톡>을 할 때도 그 부분이 제일 힘들지만 보람 있었어요. <세계사톡>에서 무적민트 작가님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계세요. <삼국지톡>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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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적민트

 

 

<조선왕조실톡>은 고향이고 친정이죠


반대로 역사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힘든 점도 있겠죠? 일례로, 역사 덕후 분들이 ‘매의 눈’을 갖고 계시잖아요(웃음).


무적민트 : 역사 덕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드리면, 아무래도 웹툰에서는 깊게 다루지 못하는 내용들이 많거든요. 저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그 중에서 일부를 뽑아서 원고를 작업했는데, 역사 덕후 분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댓글을 남겨주실 때가 있어요. 웹툰 마지막에 역사 기록을 적어 놓기는 하지만, 그 부분에서도 내용이 너무 길어서 잘라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럴 때는 조금 억울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웃음), 독자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댓글 많이 달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독자들끼리 논쟁을 이어갈 때도 있잖아요. 댓글에 또 댓글을 달면서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실 때 뿌듯하실 것 같아요.


무적핑크 : 그렇죠. 


무적민트 : 클레오파트라 편을 연재했을 때, 그런 댓글이 있었어요. 클레오파트라의 인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피부색을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고 쓰신 거예요. 그런데 그 밑에 또 댓글이 달렸더라고요. 그건 하나의 설이고,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요. 관련 링크도 달아주셨는데, 보고서 감격했잖아요.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웃음).

 

무적핑크 작가님, 아직 대학교 재학 중이시죠? 이제 몇 학년이신 거예요(웃음)?


무적핑크 : 공식적으로 10학년입니다. 제가 08학번인데 지금 학교를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18학번이죠.

 

중간에 휴학을 하셨던 거예요?


무적핑크 : 그렇게 하기도 했는데요. 최대한 등록할 수 있는 16학기를 다 쓰고 있어요. 그런데 아마 한두 학기만 더 다니면 끝날 거예요. 안 그러면 슬슬 재적인지라... 고졸이 ‘힙’하기는 한데(일동 웃음), 엄마를 위한 마지막 효도입니다. 얼마 전에 조금 소름 돋는 일이 있기는 했어요. 미디어 관련된 전공 필수 수업을 듣는데, 어떤 학생이 <조선왕조실톡>을 가지고 레포트를 썼더라고요.

 

작가님이 같은 수업 듣는 걸 알고요?


무적핑크 : 아뇨. 저는 그냥 교실 뒤쪽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이니까 누군지도 몰랐을 거예요. 그걸 보고 조금 모골이 송연했죠. 이런 사람이라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웃음). 항상 잠도 안 자고 마감하다가 다크서클 생긴 채로 학교 가고 그러거든요.

 

초반에는 교수님이 면담하러 오라고 했겠어요.


무적핑크 : 아뇨, 일부러 그런 강의를 찾아 다녀요. 팀플 절대 없는 대형 강의. 교수님이 저를 못 보게 해주십시오, 라는 마음으로(웃음). 그런데 이제는 학교를 떠날 때가 됐어요. 등록금만 모아도 건물 하나 세웠을 것 같아요.

 

세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시면서 학교까지 다니시고... 그게 가능한가요? 


무적핑크 :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지난 학기는 정말 힘들기는 했어요. 지금 제일 작업량이 많은 건 <삼국지톡>이거든요. 연재 초기니까요. 그래서 <삼국지톡> 작업을 한 10시간 정도 하다가, 중간에 <조선왕조실톡> 하나 마감하고, 그 사이에 <세계사톡> 시나리오를 받으면 체크하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재밌더라고요. <조선왕조실톡>만 연재할 때는 진짜 싫을 때가 가끔 있었거든요. 갑자기 모든 창작욕과 의욕이 고갈되고 ‘내가 이것만 안 하면 살 수 있겠다’ 싶은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삼국지톡>을 하다 보니까 <조선왕조실톡>을 작업할 때 약간 힐링하는 느낌이 들어요. ‘고향에 돌아왔어’, ‘친정에 돌아왔다’, ‘그래, 이 맛이지’ 하는 기분. 물론 그렇다고 쉽지는 않은데요. 그렇게 작업해서 넘기고 나면 ‘내가 이걸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예전에는 작가라는 호칭을 어색해하셨잖아요. 웹툰 작가를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하셨고요. 그런데 벌써 데뷔 10년째예요. ‘이제는 그냥 웹툰 작가의 길을 가야하는구나’라는 생각 안 드세요?


무적핑크 : 그렇겠죠, 아마?


무적민트 : 숙명 같은 거 아닐까요(웃음).


무적핑크 :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죠. 그런데 웹툰 작가로 10년을 보내는 중에도 일의 내용이 계속 바뀌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기지로 아이디어로 살아남는 거였다면, 중간에는 그림을 많이 그려야 되는 사람이었어요. 글을 많이 써야 되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지금은 그걸 다 해야 되는 사람이에요.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죠. 세상이 하도 많이 바뀌니까요. 제 생각에는 작가는 혁명가라기보다 관찰자인 것 같아요. 세상이 바뀌면 또 따라가야겠죠. 나중에는 유튜브 같은 걸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닐까요? 팟캐스트라든가.

 

역사만화를 만들 때 ‘이 인물을 어떤 사람으로 그려야 될까’라는 고민도 클 것 같아요.


무적민트 : 그렇죠. 지금 <세계사톡> 근대 편을 작업하고 있는데, 나폴레옹을 두고 고민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폭군이라고 설명하고, 어떤 사람은 혁명가라고 표현하고, 다양한 시각이 있잖아요. 일단은 원고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캐릭터를 잡으려고 많이 노력하는데요. ‘사실 나폴레옹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아?’라는 댓글이 달리면 곤란해지니까, 지금 굉장히 고민하고 있어요. 하나의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캐릭터가 많으면 다루기 어렵죠. 대하소설처럼 방대한 양으로 풀어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무적핑크 : 사실은 폭군이라는 이야기에도 진실성이 있고, 혁명가라는 이야기에도 진실성이 있거든요. 세종대왕만 하더라도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요. 그래서 참 어렵죠. <조선왕조실톡>의 경우에는 중간 중간 에피소드가 들어가기 때문에, 성군 이야기를 했다가도 갑자기 폭군이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독자 분들이 ‘그런 일이 있었어?’ 하면서 좋아하세요. 그런데 <세계사톡>은 처음부터 플랜과 청사진을 가지고 시작한 거라 다른 면이 있는데요. 저희한테는 개정판이라는 치트키가 있으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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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무서운 거예요


<조선왕조실톡>은 1차 독자를 중학생으로 정하셨었다고요. 2차 독자는 선생님들로 상정하셨고요.

무적핑크 :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웃음).

 

<세계사톡>은 어땠나요?


무적핑크 : <세계사톡>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죠. <조선왕조실톡>을 중학생 대상으로 한 것도, 방송국 PD님이 말씀해주셔서 안 거예요. 중학교 2학년이 이해 가능한 어휘와 사고 수준을 쓰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세계사톡>을 작업하면서 초등학교 4학년으로 내렸어요.


무적민트 : 지령의 하나였어요(웃음).


무적핑크 : 초등학교 4학년이 이해 가능한 단어와 사고방식을 담자는 거였죠. 은유 같은 건 적극적으로 피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기쁘면 기쁘다고 말하고.

 

우리사회에 ‘엄숙주의’가 있잖아요. 작품을 보면서 ‘역사 속 인물들을 희화화해서 가볍게 다뤄도 되느냐’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말에 상처 받거나 고민하신 적도 있어요?

무적핑크 : 그건 <조선왕조실톡>을 연재하면서 다 극복했죠. 시작하기 전부터 제일 고민했던 게 그거였어요. 엄숙주의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와중에 이걸 던지면 폭탄 맞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반대였죠. 역사를 진짜로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게 알려지길 원하시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정수가 되는 내용이 알려지기를 원하신 거죠. 피상적으로 ‘1392년, 조선건국’ 이런 게 알려지기를 원하신 게 아니거든요. 임진왜란이나 의병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은 목숨을 던지면서, 가족들도 다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는 시대정신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분들인 거고요. 그러다 보니까 오히려 그 분들이 많이 도와주신 것 같아요.

 

<세계사톡>도 마찬가지였나요?


무적핑크 : 인간으로서 가치 있을 만한 이야기들, 공감 가는 이야기들을 하는 거니까 분명히 도와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반응이 좋고요. 어린 친구들이 봐도 좋아하고 ‘역알못(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봐도 좋아하고요. ‘역잘알(역사 잘 아는 사람)’이 봐도 ‘이걸 이렇게 표현했어?’ 하면서 깨알 재미를 느껴주시는 것 같아요.


무적민트 : 역사를 이렇게 다뤄도 되느냐는 댓글을 본 적이 있는데요. 저는 <조선왕조실톡>의 팬일 때부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역사를 조금 더 알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조선왕조실톡>에 달린 댓글 중에 ‘작가님, 저 오늘 역사 시험 봤는데 100점 맞았어요’라는 글이 있었어요. 그것만 봐도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무적핑크 : 사실 <조선왕조실톡>은 어느 정도 치트키를 가지고 시작한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어쨌든 나라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있고 ‘이 만화는 봐야 된다’라는 수사가 통하니까요. <세계사톡>은 조금 더 즐거워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모두가 이집트 미라, 그리스 신화, 진시황의 불로초, 삼국지,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고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훨씬 쉬울 거라고도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요즘의 난민 문제라든지 북한 이야기, 대중 외교, 대일 외교, 대미 외교, 인종 차별 같은 게 화제가 되면서 ‘이제 슬슬 세계사를 공부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이유가 뭔가요?


무적핑크 : 너무 모르잖아요. 사실 공포는 몰라서 생기는 거잖아요. 저만 해도 이슬람교랑 힌두교 구분을 못하고, 그리스정교회가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해요. 그러다 보니까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몰랐던 걸 알게 되고, 그러면서 편해지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세계사톡>을 연재하면서 세계사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먹게 됐어요. 역사를 알고 있다는 게 권위가 되는 게 아니라,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되면 좋겠어요. 역사라는 게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니까요.

 

지금 난민과 관련해서 뜨거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고, 한편으로는 남북미 사이에 화해의 기류도 흐르고 있죠. 현 시점에서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무적핑크 : 앞서 무적민트 작가님이 말씀하셨던 페르시아도 생각나고요. 로마제국의 몰락도 떠오르는데요. 큰 제국일수록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 때문에 무너졌기 때문에, 그런 사례들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로마제국 몰락의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지도층이 안일하고 방만했기 때문인가요?


무적민트 :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한데요. 저는 돈이 너무 많아서라고 생각돼요. 단정 지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이 가진 사람들 중에 누리고 즐기려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겠죠.


무적핑크 : 맞아요.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 ‘나는 그래도 된다’. 역사라는 게 옛날 사람들이 수만 년 동안 했던 실패와 성공, 그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있는 거잖아요. 약간 기출문제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공부하다 보면 ‘이럴 때 이것만은 안 하는 게 낫겠구나’ 싶기도 하고, 무엇을 선택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능성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죠.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역사는 공부하는 사람만 공부하니까요. 점점 더 쉽게 하고 싶어요. 점점 더 많은 분들을 만나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세계사톡』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무적민트 : 제가 처음 역사를 접할 때를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만 집중적으로 보는 성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세계사에서 유명한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고 아예 관심을 안 가졌던 것 같고요. 그런데 관심을 갖게 되니까 재미도 있고 더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한번쯤 세계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시면, 시각이 조금 더 트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기회를 조금 더 누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무적핑크 : 역사를 공부하는 건 ‘저비용 고효율 쾌락’인 것 같아요. 알면 그게 이야기가 되거든요. 얼마나 재밌는데요. 요즘은 깊어지기는 쉬운 세상이니까, 가끔은 넓히는 것도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어떤 아이가 이집트 편을 보다가 ‘난 이집트 학자가 될 거야’ 하면서 카이로로 날아갈지. 서른 살 어른이 그럴지도 모르고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문을 열어드리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세계사톡변지민, 핑크잼 저/모지현 해설 | 위즈덤하우스
방대한 세계사도 인물과 인물의 '톡'을 통해 접하면 쉽게 다가온다. 무적핑크 작가의 위트와 세계사 교사의 내공이 결합되어 좀 더 강력한 재미와 학습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시덕 “서울 정체성, 언제까지 ‘궁궐’에서 찾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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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 어색함이 감돈다. 누군가가 먼저 물어본다.


"집이 어디인가요?"
"서울이에요."
"고향도 서울인가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고향은 OO에요."

 

1,000만 명이 살지만 고향을 서울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서울, 하면 예전에는 조선 왕족이 살았던 곳이고 현대는 지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사는 공간으로 연상하는 게 지금 우리의 사고다. 과연 그럴까.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전쟁의 문헌학』 으로 통념과 다른 시선으로 역사를 해석해온 문헌학자 김시덕은 『서울 선언』에서 서울의 다채로운 면을 보여준다.

 

저자는 직접 서울 곳곳을 걸으며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공간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썼다. 골목, 동네, 도로 등 일상 공간이라 무심코 지나친 곳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사대문 밖 서울에 주목하며 그곳의 역사, 건물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바라보는 서울은 그 어떤 곳보다 다채로운 시층을 지닌 곳이다. 아쉬움도 베어난다. 조선 왕조, 식민지 시절의 문화재에만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결과, 해방 이후 건물이 무관심 속에 없어져버리는 세태에 대한 아쉬움이 그러하다. 식민지 시대와 대한민국 시대에 걸쳐 있는 역사 유물들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을 향한 따끔한 지적도 우리사회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 이 인터뷰는 『서울 선언』 98~102쪽에서 다룬 지역을 답사하며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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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없을 듯한 장소에서 의미 찾아내기

 

<채널예스> 인터뷰는 3년만입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2015년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를 낸 뒤, 일본에서 2010년에 냈던 연구서 『일본의 대외전쟁』을 번역했고 그 속편인 『전쟁의 문헌학』 을 썼습니다. 그러다 지난 해 직장에서 인사상의 사건이 있어서 한동안 낙담해 있다가, 이러면 안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일본 역사학자의 인문학적 걷기인 『고문서 반납 여행』을 번역하고 저 자신의 인문학적 걷기에 관한 책인 『서울 선언』을 썼습니다.

 

이전 책이 유라시아에 관한 책이었고, 인터뷰 때도 그 뒤로 연구하는 주제는 유라시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관한 책이 나왔어요.

 

유라시아 가운데 특히 러시아 문제는 손을 놓지 않고 있어요. 5월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 왔고, 장기적으로는 동부 유라시아의 관계사에 관해 쓸 거예요. 하지만 세상이 저를 연구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네요. 지난 해에 개인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걷기 시작했죠. 『서울 선언』에도 적었지만 아예 한국을 떠날 생각을 했고, 떠나기 전에 이제까지 서울에 대해 찍은 사진을 정리해서 책으로 털어내고 가자는 마음이었는데, 걷다보니 직업 정신이 발동해서 이런 책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서울 선언』이 제 출판 흐름 속에서 일탈적인 책이라고 하지만, 아니에요. 제 방법론을 서울에 적용한 것이고, 외국학을 연구한 사람의 한국 토착화 과정입니다.

 

러시아어는 지금도 공부 중이신가요?


여전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바로 얼마 전 러시아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유라시아주의니 비추린 등을 언급한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한편, 3년 전에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서 제가 지적했던 일부 한국 사람의 착각은 여전하다 생각해요. 그 착각이란게 어떤 거냐면, 여전히 한국을 세계의 중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죠. 전 세계 화물 유통이 대부분 배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북한이 변화가 보이면서 철길이 뚫리면 한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핵심적인 물류 거점이 될 것이라든지, 북한에는 세계적 규모의 자원과 가성비 좋은 인력이 있으니까 이를 활용하면 한국이 다시 경제적으로 도약하고 세계적 강국이 될 것이라느니 하는.

 

이번 책의 성격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헌학자처럼 서울 걷기'입니다. 건축가, 역사학자가 아닌 문헌학자의 서울 걷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문헌학이란 이런 겁니다. 제 앞에 책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는 우선 이 책의 물리적 성격부터 확인합니다. 종이의 재질과 책의 무게가 어떤지, 책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활자는 얼마나 큰지, 본문과 여백의 비율은 어떤지, 이 모든 물질적 요소에 저자와 출판인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책의 본문이 전달하는 내용은 책 전체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렇게 책의 물질적인 측면에서 스타트해서, 이 책이 어떤 사회적 컨텍스트에서 탄생했고 읽혔는지까지를 전부 다 해석해내려는 게 문헌학이에요. 문헌학적으로 접근하면 다른 책보다 특별히 귀한 책, 희귀본, 우월한 책, 이런 게 없습니다. 문헌학적으로 서울을 걸으면, 얼핏 보기에 아무 의미가 없을 듯한 장소, 도로, 골목, 건물에서도 모두 의미를 읽어낼 수 있어요.

 

제가 과문해서 그렇겠습니다만, 건축하는 분들은 건축학적으로 훌륭한 건물을 중심으로 해서 서울을 바라보시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훌륭한 방법이고 그 분들의 작업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그렇게 건물 하나 하나를 포인트 포인트로만 봐서는 메트로폴리스 서울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울에는 훌륭한 건물이 많이 선 구획도 있지만, 건축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건물들이 흩어져 있는 구획도 넓게 펼쳐져 있거든요. 한편, 조경이라든지 환경 쪽 연구자분들은 도시가 어떠한 방향으로 계획되어야 하는지를 많이 보시는 거 같아요. 도시의 변화를 본인들이 이끌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죠. 한편으로 많은 한국학 연구자 분들은 특히 조선시대 후기의 서울에 주목하거나 식민지 시대의 “아픈” 역사의 흔적을 찾는 경향이 강한 듯 합니다. 이렇다 보니 식민지 시대에서 현대 서울 초기 시기에 걸쳐 만들어진 평범한 공간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일본의 국제 전쟁에 대한 문헌을 연구할 때도, 사료 가치가 높은 문헌들 뿐 아니라 문학과 역사학 사이의 틈새에 놓여 있던 수많은 흥미로운 책을 발굴해서 그들 문헌의 계통을 정리한다는 나름의 연구틀을 만들었습니다. 그 방식을 서울에 적용해 보니, 건축학적 조경학적으로 주목받는 구획이나 건물,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해지는 장소 이외에도 수많은 장소를 제 연구방법론으로 유의미하게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유학 당시부터 일본과 한국의 관계사, 동아시아 속의 한국학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서 제 연구를 한국에 토착화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찾아왔는데요. 그 첫번째 성과를 담은 것이 지난해 출간해서 세종도서 학술부문 추천도서로 선정된 『전쟁의 문헌학』 이었다면, 이 책 『서울선언』은 두 번째 교두보를 근현대 서울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한국 사회에 보고하는 것입니다.

 

 

서울은 조선 왕족이 아니라 공화국 시민의 땅

 

'서울 선언'이라는 책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문헌학자처럼 서울 걷기'였죠. 그런데, 서울을 걷다 보니까 점점 화가 나더라고요. 최근 서울에 대한 책을 출간하신 어떤 문화유산 연구자 분께서 서울에 대해 말씀하신 걸 보면, "세계 어디를 가도 5개의 궁궐을 가진 곳은 서울 밖에 없다. '서울이 궁궐의 도시'라는 게 관광의 캐치프레이즈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나와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대문 안만 서울이 아니고, 대부분은 사대문 밖에 사는데 왜 우리는 언제까지 서울의 정체성을 사대문 안의, 그것도 이제는 망해버린 지배 집단의 거점인 궁궐에서 찾아야 하나요. 서울은 조선시대 후기 권력층만 살던 도시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내 친구가 사는 공간은 왜 서울 이야기를 할 때 비껴나가고 의미를 부여받지 못할까요?

 

얼마전 대치동 구마을이라는 곳을 걸었어요. 위성사진을 보면 바둑판처럼 구획된 강남 한 켠에 비뚤비뚤한 길이 보입니다. 한창 강남개발중이던 1974년 항공 사진에 찍힌 길하고 똑같아요. 강남이 개발되면서 옛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빌라와 아파트가 강남을 가득 채웠다는 이야기가 있죠. 이 말이 정말인가 확인해보고 싶어 갔죠. 가보니 이 지역은 계곡이어서 개발하기 곤란하다보니 예전 길이 남은 것이더군요. 강남 개발 전의 마을 풍경이 남아 있어요. 이런 곳을 걷다보면, 강남이 역사성이 없다 하지만 역사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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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구마을의 폐쇄된 교회 계단 아래에 새겨진 손글씨 성경구절. 한국경제신문 임락근 기자 

 

 

서울 곳곳을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재개발 예정지에 맞닥뜨립니다. 그곳의 주민들에게서는 불안감이 느껴집니다. 토지주가 아니라 임차인들이, 개발되면 그곳에서 쫓겨나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거죠. 그런 지역을 걸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노라면, 어디서 나오셨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사실대로 말씀드립니다. “한국학”을 다루는 대학 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고, 서울의 뜻깊은 공간인 이 지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러 하면, “알았다” 라고들 하시는데,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슬퍼요. 여기 뭐 볼 게 있냐고……. 그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곳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몰라요. 역사와 의미를 뺏긴 거죠.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애착감, 역사감을 잃어버리고, 저기 멀리 사대문안 조선시대 후기 지배 집단이 만든 궁궐과 정자를 자기 도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은 겁니다. 저는 이걸 일종의 역사 전쟁, 계급 전쟁이라 생각해요. 말하자면 헤게모니를 뺏긴 거죠. 그래서 서울에 관한 담론을 되찾아야겠다, 시민에게 다시 줘야한다, 지금 한국은 조선 왕족과 양반이 지배하는 땅이 아니라 공화국 시민의 땅이라는 선언을 하자. 그래서 『서울 선언』이라는 제목이 나왔습니다.

 

오늘 답사가 이뤄져야 할 장소에 관해 설명해주시죠.

 

3년 전 채널예스와의 인터뷰가 제게는 전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요. 지난 2017년 12월에 『서울 선언』  원고를 넘긴 후에도 역시나 걸어다니면서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 지역과 수도권 도시들을 많이 걷고 있습니다. 속편의 가제목은 『갈등 도시 ? 무엇이 서울과 경기도를 만드는가』입니다. 서울과 수도권의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어내는 핵심 개념 몇 가지를 파고들려 하는데요, 특히 주목하는 것이 종교, 군사, 문중(가문)입니다.

 

오늘은 서울과 경기도 경계에 있는 경계 비석을 볼 거고요. 서울 구로구 항동, 부천 옥길동, 광명 옥길동이 만나는 지역에 가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세 도시의 경계지점이고 대규모 공장도 있어서 개발이 미뤄졌던 곳인데, 최근들어 본격적으로 개발이 진행중이죠. 개발이 끝나면 서울 서남부의 중심이 될 것으로 봅니다. 여담인데, 『서울 선언』을 부동산 애널리스트나 이코노미스트 분들께서 많이 보시더라고요. (웃음) 그리고 부천의 개발 예정지인 소사 지역도 들릴 예정입니다. 저는 늘 답사를 할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갑니다. 실제로, 다음에 갔을 때 있던 게 없어지고 없던 게 생기는 게 서울과 수도권이니까요.

 

서울 답사책 중에서는 장소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여행서 느낌의 책도 있는데요. 이 책에도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선생님의 역사관이 강하게 담긴 장도 있습니다. 특히나 1, 4장에서 표현이 셉니다.

 

소송 걸릴 각오를 하고 원고를 썼고, 법률가 지인들에게 원고를 미리 보이기도 했어요. 어려운 문제들 피해가면서 편하게 서울 해설하는 책은 많잖아요. 굳이 저까지 그런 책을 쓸 필요는 없겠다싶었고, 한국을 떠날 각오로 쓰면서 제 삶이 서울 시민의 탄생이라는 대표성을 띌 수 있겠다 생각하면서 그간 살아온 이야기도 썼어요. 책이 저자 뜻대로 움직이는 건 아닌 게, 저는 3장과 4장에 힘을 주고 썼는데 많은 독자들은 2장에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아내는 제가 살아온 서울의 각지역을 소개한 2장 부분이 특히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거 같다고 하더군요. 제 책을 읽고는, 나도 여기 살았는데 여기는 어떤 곳이었고 나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주었다, 하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서울 시민들은 이제까지 자신의 고향인 서울에 대해 말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육이오 전쟁 체험자,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의 구술만 가치있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시민들의 경험도 훌륭한 구술사의 대상이자 역사의 한 조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답사서로써 제가 힘을 기울인 건 『서울 선언』의 3장이에요. 양반과 궁궐의 도시가 아니라 시민의 도시로 서울을 어떻게 걸을 것인지를 실제로 보여드린 부분입니다. 수도권 도시에 사시는 분들은 불편할 수도 있어요. 저는 이 책에서 서울시민이 바라본 서울과 주변 도시와 관계성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수도권의 각 도시들에 관해서는 수원, 인천, 광명, 과천 등의 시민분들께서 각각 본인의 입장에서 자기 도시는 어떤 도시이며, 자신의 도시와 서울과 경기도, 이 3자는 어떤 관계를 맺고있는지를 선언해 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원 선언』, 『인천 선언』, 『광명 선언』, 『과천 선언』을 기대합니다.

 

『서울 선언』에서 제 주장을 가장 세게 펼친 건 1장과 4장입니다. 1장에서는 서울은 다양한 시층(時層)을 띈 도시인데도 어떤 관점을 강요받고 어떤 관점을 빼앗겼는가를 말했고, 그러한 강제와 박탈이 일어난 결과 서울 곳곳에서 어떤 역사 왜곡이 발생하고 있는가를 쓴 것이 4장입니다. 4장에서 다룬 서대문 형무소 문제, 특히 예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을 넣은 건, 특정 시기의 특정 집단, 특정 성별을 띤 사람들이 서울 곳곳의 역사 만들기를 주도하면 서울 시민 전체가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한 남성들만 대표하는 곳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일반 남녀 서민 수형자들, 해방 후의 정치범들과 일반 남녀 서민 수형자들이 모두 갇힌 바 있는 공간입니다. 서대문 형무소 이퀄 독립운동의 성지는 아닙니다. 물론 어떤 지역이 정비될 때는 한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질 수밖에 없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독립운동의 거점이라는 중심이 서 있는 상태이니, 이제는 다양한 목소리도 함께 드러나는게 좋지 않을까요? 서대문 형무소의 투어를 안내하는 어떤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공간이 식민지 시대 이상으로 현대 한국 시기에도 형무소로 이용되었고,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정치범과 비정치범도 많이 수용되었던 곳이라고 안내 때 말씀하신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말씀을 드리면 관람객 분들이 싫어 하신대요. 특히 현대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에 대한 이야기 듣는 걸 싫어들 하신다고. 어떤 의미에서 근현대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된 교육의 결과가 시민들에게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저의 지인인 외국인 한국학 연구자도, 2010년대 초에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했다가 제가 말씀드린 편향성을 확인하고, 그 뒤로는 서대문형무소에 가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저에게 한 바 있습니다. 서울을 걷다보면, 역사전쟁은 중국, 일본과만 하는 게 아니라 한국 내부에서도 여러 진영간에, 세대간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경기도 안산의 청소년 강제수용시설이었던 선감 학원도 식민지 시대에 2, 3년 이용되었고, 나머지 30~40년 간은 현대 한국 시기에 운영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곳에 세워져 있는 작은 추모비에는 어느 시기 어느 정권이 선감 학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강제 수용했고 야산에 암매장했는지가 애매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안산시 차원에서 세우려던 위령비도 결국 세워지지 않았구요.

 

후기식민주의는 아프리카나 중동 쪽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아직 청산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형적인 후기 식민주의 모습들이죠. 한국 사람들은 자국 역사가 세계적으로 특수하다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깥을 안 보기 때문입니다. 주변 몇 나라의 역사만 살펴 봐도 그런 말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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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역사 의식이 아니라 과잉된 역사가 문제

 

저는 서울에 산 지 15년째인데 영동대교에서 '영동', 상도동에 있는 초등학교 이름이 '강남'인 이유를 이 책을 읽고 알았는데요. 지역사에 관한 교육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현대 한국은 역사 교육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라 생각해요.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이 말하지도 않은 격언을 인용하면서. 여하튼 과잉된 역사를 어깨에서 내려 놓고, 손 선생님 말씀처럼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을 찬찬히 살피는 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요즘 언론에서 줄기차게 조선시대, 그것도 조선시대 전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를 이야기들 하는데요, 저는 그 이유가, 현재의 한국 지배층으로 이어지는 핵심 집단과 지배 질서가 조선 후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부분은 저도 지금 한창 생각을 다듬고 있는 중이라 아직 논리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만, 저희 부모님을 포함해서 고도성장기 때 지방에서 서울에 온 분들에게는 사대문 밖 서울이 본인들과 큰 연고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이분들에게 본인의 고향과 현재 살고 있는 서울을 연결해주는 고리는 현대 한국이 아니라 조선시대이고, 현대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일부인 사대문 밖 대서울이 아니라, 조선시대 한양의 권역인 사대문안과 도성 바깥 십리인 거죠. 지금은 일시적으로 서울에 살고 있지만 정신적 고향은 여전히 지방에 있고, 근현대에 비로소 경성과 서울에 편입된 사대문 밖은 서울사람들의 관심사일 뿐 본인들과는 무관하다고 여기시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그분들의 자식인,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사대문 밖 서울을 객지가 아니라 고향이라 느낀다 말입니다. 저는, 서울은 고향이 될 수 없다, 강남은 고향이 아니다 하는 말을 자라는 동안 내내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책은 서울 답사책인데, 왕릉과 아파트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왕릉에는 원래 관심이 없을 뿐더러, 이미 많은 분들이 쓰셨죠. 글쓰기의 기본은 남이 말하지 않는 걸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아파트는, 시민들의 욕망의 분출구이니 완전하지 못한 거주시설이니 하는 식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출간된 정헌목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는 기존의 틀을 깬 훌륭한 접근이라 생각하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둔촌주공아파트나 과천주공아파트 1단지 같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고향으로 느끼는 분들께서 좋은 글을 남기고 계십니다. 저도 아파트에서 30여년 살고 있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제가 더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 나름의 아파트 철학과 아파트 답사 방법은 있기 때문에, 『서울선언』의 속편에서는 이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왕릉, 왕궁, 아파트를 빼도 서울에는 다른 분들이 말하지 않은 공간이 무궁무진합니다. 저는 이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우선시 했습니다. 왕릉과 왕궁 뿐 아니라 사대문 안에 대한 내용도 얼마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은 저에게 사대문 안을 안 좋아하냐고 묻기도 하시는데 그건 아니고요, 이 책의 2장에도 썼지만 사대문 안도 좋아합니다. 다만, 굳이 저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쳤습니다. 사대문 안에 관해 한 가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현대 한국 초기인 1950~80년대에 사대문 안에 만들어진 공간과 건물들이 안쓰러워요. 사람들은 사대문 안의 조선시대와 식민지 시대 유적 유물에는 관심이 있고, 20세기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고층빌딩에도 감탄하지만, 그 사이에 낀 것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거든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을지로 입구, 2가 같은 곳은 깨끗이 재개발되었죠. 최근에는 3가, 4가가 “힙한” 장소가 되어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숙박시설과 카페 바가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여기도 을지로 입구, 2가처럼 소리소문없이 재개발되지 싶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누군가는 애정 어린 시선을 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입니다. 『서울 선언』에서 제가 중요하게 이용한 개념인 삼문화광장을 사대문안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공간이 이곳이기도 해서 애착이 큽니다.

 

도심 재개발, 성곽길 복구, 그외에도 서울에서 다양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을 어떻게 만들고 기억해야 할까요.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안 쓰고 안 말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기억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찍고 끄적이자고 말하고 싶네요. 한국인이 스마트폰으로 음식 사진 찍는 게 한때는 외국에서 코미디 소재까지 되었지만, 찍다보면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최근 들어 나오고 있죠? 또 조금만 더 이 사진들이 축적되면, 21세기초 한국 음식 문화의 거대한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질 겁니다. 조선시대 음식만 한식이 아니라, 현대 한국 시민들이 먹는 음식이면 모두 한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한식이 탄생하는 시기에 살고 있고, 그 과정이 사진으로 모두 기록되는 운좋은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민이 무심코 찍은 사진 하나하나가 역사가 됩니다. 아무 의미없다는 생각하지 말고 모두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사진찍고 잘 저장해 두십시다.

 

 

한국에는 문화재가 풍부하지 않아, 그래서 소중히 해야 해

 

이 질문은 선생님이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일 듯합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연구하셨는데, 도쿄와 서울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서울 선언』  1장에도 적었지만 한국 사람은 도쿄하면 도쿄 23구 도회지 지역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23구는 도쿄의 일부일 뿐입니다. 도쿄는 동쪽으로 메트로폴리스 도회지인 23구, 서쪽으로는 농촌과 산촌, 남쪽으로 태평양의 어촌이 있는 복합적인 도시예요. 신주쿠, 하라주쿠, 긴자, 우에노 같은 23구 몇 군데만 보고는 도쿄를 다 봤다고들 생각하지만, 도쿄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매력이 있는 도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활동 영역이 모두 다 있는 도시이고, 그 다양성은 서울보다 더 큽니다. 서울은 일단 어촌이 없죠. 어촌의 흔적이 마포나 한남동 등지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활동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농촌 흔적도 개화나 내곡동 등 주변 도시들과의 경계 지역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많이 약해졌습니다. 산이 많다보니 산촌으로서의 성격은 어느 정도 활발합니다. 서울 곳곳에서 확인되는 이른바 “빈민촌”에 대해, 저는 이들 공간의 성격을 산촌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도쿄에서 도쿄를 기억하는 방식은 어떤가요.

 

도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쫓겨나면서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대문 밖 서울이나 노태우 정부 때 만들어진 분당이나 일산 같은 1기 신도시처럼 접근할 수도 있겠습니다. 계획도시로서 출발점이 명확하죠. 한편으로는 화재, 지진, 미군 폭격 등으로 파괴를 많이 겪으면서 생긴 상실감이 크죠. 그래서 도쿄 시민들은 자기 도시에 대해 필사적으로 기록을 남기려고 해요.

또, 도쿄는 기억하려는 역사의 시기가 서울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현대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가도로가 그렇습니다. 고도성장기 때 고가도로를 많이 지었는데,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에 청계천을 복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쿄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옛 하천과 운하를 복원하자는 거죠. 그게 정치적으로 유리할 거라고 판단한 거죠. 그런데 도쿄 시민 가운데에는 평지가 많은 도쿄에서 고가도로가 렌드스케이프 효과를 주고 있고, 이 자체가 현대 도쿄 시민들의 소중한 기억의 대상이니 철거하면 안된다는 운동을 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고가도로는 슬럼화의 원흉, 철거해야 할 흉물일 뿐인데, 도쿄 시민들은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현대에 만들어진 것도 추억의 대상이고, 아낌 받을 가치가 있다 생각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서울선언』의 앞날개에 실은 제 사진은 2014년 2월에 아현고가도로가 철거되기 직전에 찍은 것입니다.

 

철도도 비슷해요. 도쿄 시민들은 도쿄 한복판에 기차가 다녀도 큰 불만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여기 살기 전부터 철도가 있었고, 철도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존재라 여기니까요. 한국에서는 집값 떨어지니까 없애자, 이런 건데요. 일본은 부동산 값이 안정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도쿄는 타협점을 찾았고, 서울은 부동산 가격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시민들과 서울의 기억을 남기자는 시민들 사이의 투쟁이 여전히 진행중이죠. 서울도 언젠가는 적정한 지점을 찾을 거고, 그러한 적정한 지점들의 최근 사례가 박원순 시장의 도심재생, 서울로 7017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움직임을 큰 틀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도시는 오르락 내리락 굴곡이 있어야죠. 서울 시민들은 서울 곳곳의 산이 굴곡이라 생각하지만, 산은 자연지형입니다. 인간의 손을 거쳐야 도시이고 문명이죠. 고층빌딩도 올라가고 고가도로도 넣이고 중후장대한 다리도 놓인 게 도시 아닌가요. 철도 지하화처럼 시민들 눈에 안 보이게 뭘 자꾸 감추는 방식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에도 여러 번 강조하셨는데, 한반도는 원래 역사 유적이 별로 없으니 소중히 하자고 쓰셨는데요.

 

시흥향교 같은 역사적 건물은 식민지 시절에 파괴된 게 아니라 현대 서울이 확장될 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습니다. 철거된 게 겨우 수 십 년밖에 안되는데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겉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 안 남은 유적 유물이 무수히 많아요. 궁궐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서울 시민들의 평민 노비 조상들과 함께 했던 관청 건물이니 학교 건물이 다 의미가 있는 건데, 이런 걸 소홀히 여기다보니 기록 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죠. 그러고는, 모든 유적 유물은 임진왜란, 식민지 시기, 육이오 때 파괴되었다고들 말하니…… 참 편리한 사고 방식입니다.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유적 유물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에요. 이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많은 한국인과 충돌하는데, 한국인들은 한국에 남아있는 문화재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시민들의 최고 가치가 부동산이고, 부동산 값을 떨어지게 할 우려가 있는 건 전부 없애자고 하잖아요. 그래서 현대 한국 들어서 많은 유적 유물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도성장기의 개발 광풍을 뚫고 살아남은 유적 유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최대한 지켜야 합니다.

 

나찌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정복한 뒤에 이 도시를 무참히 파괴했습니다. 나찌로부터 해방된 뒤 바르샤바 시민들은 파괴된 건물을 실측하고, 남은 자재를 하나라도 살려서 복원하고, 그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바르샤바 재건 사무소 기록물(Archive of Warsaw Reconstruction Office)이 바로 그것이죠. 한국 시민들에게도 이런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 생각해요. 사대문 안 같은 특정한 공간에 자리한 왕궁같은 건물 뿐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사 오십년 된 공간과 건물도 조금만 지나면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겁니다. 조상 탓하고 남의 나라 침략 탓 할 시간에, 이것들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부동산 값만 생각하지 말고.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에서는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일반적인 한국인 인식과 맞섰고, 이번 책에서는 한반도에는 문화유산이 풍부하다는 인식과 각을 세우셨습니다.

 

일부러 각을 세운 건 아닌데요. (웃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고 한국과 비교하면 즉각 알게 됩니다. 한국이 문화재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답답한 거죠. 남 탓이 아니에요. 한 예로, 월정사는 육이오 전쟁 때 한국군이 파괴했어요. 전쟁이라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쳐요. 역사 의식이 그렇게 투철하면 육이오를 살아남은 공간이라도 소중히 여겼어야 하는데 아니잖아요. 제가 서울에서 좋아하는 길 가운데 하나가, 식민지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동대문과 뚝섬 광나루 사이를 운행하던 기동차가 다니던 옛 철길입니다. 이 기동차는 동대문의 동남쪽에 있던 역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발역(始發驛)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안 남아 있습니다. 항공사진에 작게 찍힌 게 두 어장 남아있는 게 전부죠. 기동차가 운행하는 모습은 미국인이 찍은 컬러사진 몇 장이 거의 유일합니다. 이게 뭡니까.

 

구와바라 시세이라는 유명한 사진가가 있습니다. 청계천 복개하기 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분인데요, 이런 말씀을 했죠. 필름 사진 시절에는 필름이 귀하니 가족사진같이 본인에게 귀중한 것만 사적인 이벤트와 인물사진만 많이들 찍었고, 정작 모두에게 친숙한 공간과 건물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이런 것들은 외국인이 찍어서 남겨놓은 경우가 많아요. 이제라도 우리 시민들이 열심히 찍고 기록했으면 좋겠습니다. 2002년 청계천 복개구간 지하를 걸었을 때 찍은, 화질도 별로 안 좋은 사진을 굳이 『서울선언』에 실은 이유가 그겁니다. 특히 사진 기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찬란한 역사 반만년이라 말해도 증거가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안 통해요. 중국 고전인 『중용』의 한 구절처럼, 비록 좋은 것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고,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습니다(上焉者, 雖善無徵, 無徵不信, 不信民弗從). 저 같은 평민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믿습니다.

 

『서울선언』  속편을 쓰고 계신데요. 최근 군산도 다녀오셨던데 혹시 서울 경기도 외 다른 지역을 문헌학자처럼 걸으실 예정은 없는지요. 그리고 쓰고 계신 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서울 선언』속편에서는 크게 세 방향으로 지리적인 관심을 넓힐 생각입니다. 우선, 대서울의 핵심인 경인지역의 서부인 광명, 부천, 그리고 부평을 포함한 인천. 다음으로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현재의 도시 모습이 형성된 경기 북부 도시들, 마지막으로 성남 분당과 용인 수지 같은 서울-경기 동남부 지역의 신도시들입니다.

 

이 세 지역을 넘어서서는, 말씀하신 군산을 비롯해서 목포, 대구, 부산처럼 식민지 시기와 현대 한국 시대에 걸쳐 크게 확장된 도시들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이들 도시들이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체성 뿐 아니라 근현대 시기에 처음으로 각각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지역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구도심에서 조선시대, 식민지 시대, 현대 한국 시대의 삼문화광장이 어떻게 시층(時層)을 이루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식민지 시대와 현대 한국 초기의 초라한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서 조선시대에서 곧장 오늘날의 화려한 상태로 계승된 게 아닙니다. 불쾌하고 초라한 시기도 모두 한국 역사, 도시 역사의 귀중한 한 컷입니다. 식민지 시대와 현대 한국 초기 시기에 대한 증오 때문에 자꾸만 조선시대로 눈돌리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합니다.

 

한편으로, 올 하반기에는 시리즈물인 『일본인 이야기』의 제1편을 출간합니다. 출판사는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를 냈던 메디치미디어입니다. 올해 3월에 『고문서 반납여행』 (글항아리), 6월에 이 책 『서울 선언』 (열린책들), 그리고 하반기에 『일본인 이야기』 제1편, 이렇게 세 권을 올해 모두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서울 선언김시덕 저 | 열린책들
경제 대국의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뿐 아니라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도 공존하는 도시다. 이 모든 것을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서울의 진정한 주인, 시민을 존중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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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환자를 살리고 싶다면, 간호사가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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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바로 저승사자와 싸우는 아이로구나.”

내 모습을 한참 동안 옆에서 지켜보단 한 할머니가 두 눈가로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고 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순간, 그동안 희망론자와 회의론자를 오가던 중심 없던 마음이 가슴 아래로 묵직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나는 내 환자들을 지키는 사람이었다.(85쪽)

 

그렇게 “내 환자”를 지키려 고군분투하던 간호사 김현아는 2017년 7월, 21년 2개월 동안의 간호사 생활을 마치고 병원을 떠난다. 치열한 메르스와의 싸움 한 복판에서도 환자 곁을 지켰던 그다. 그런 그가 끝내 병원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가슴 속에는 “오래도록 알게 모르게 쌓여온 자괴감”(15쪽)이 가득 차 있었다. 한 달 휴식 후 3개월, 김현아는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의 초고를 완성한다. “이름을 아는 큰 출판사 여덟 군데에” 투고했고, 하루 만에 연락이 온 곳과 계약했다. 담당 편집자는 “이 원고를 보자마자 최소 다섯 군데에서는 연락을 받을 원고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마음들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3개월 그리고 하루. 이 간절함은 무엇이었을까. 김현아는 거듭 “간호사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비판한다. 친오빠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간호사의 일이니 제대로 알리는 일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안하무인 환자 보호자들에게 멱살을 잡히는 간호사, 분실된 응급 비품을 사비로 채워야 하는 간호사, 병원 주최 건강 강좌에 머릿수 채우러 가는 간호사, 휴일을 반납하며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간호사.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는 21년,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환자 곁을 지켰던 간호사 김현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울음 같은 책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먼저 투고를 했고, 하루 만에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병원을 나와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게 저한테 1년 정도 휴식기를 주는 것이었어요. 3교대로 21년 2개월을 살아왔으니까요. 또 쉴 때 책을 쓰고 싶었고요. 누가 써보라고 한 건 아니지만 간호사에 대한 얘기를 한 번 쯤은 꼭 쓰고 싶었죠. 석 달 만에 원고를 완성했는데요. 출판사를 잘 모르니까 이름을 아는 큰 출판사 여덟 군데에 우선 투고를 했어요. 다음날 바로 쌤앤파커스에서 연락을 주셨죠. 이후로도 몇 군데 연락을 받았고요.

 

석 달 만에 원고가 완성되었다고요?


글 쓸 때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후배가 환자 보호자들에게 폭행을 당하는데 아무런 보호도 못 받는 걸 봤고요. 거기 계속 있다가는 제 자신도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그렇긴 해도 21년 다닌 직장을 그만 두기까지 결정은 너무 힘들었죠. 계속 병원에 있으면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도 할 것이고,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나중에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병원을 나왔는데요. 그래도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있었어요. 어쨌거나 백수가 된 거잖아요.(웃음) 딱 1년만, 많지 않은 퇴직금이나마 그걸 가지고 나한테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볼 시간을 주자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제일 먼저 책을 썼는데요.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자존감은 떨어져 있던 한편으로 석 달 만에 원고를 써낸 에너지, 그게 어떤 것이었을까 싶어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했어요. 보통 삶과 죽음 사이에 선 분들을 만날 일이 많지 않잖아요. 중환자실에서는 그게 일상이거든요. 제가 만난 환자분들은 제 인생의 가치관을 세워주셨고요. 환자분들에게 삶의 방향, 가치관 같은 것을 많이 배웠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환자 얘기를 쓰면서 간호사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간호사 얘기를 하면 병원 얘기를 또 안 할 수가 없고요. 그래서 간호사가 병원에서 겪고 있는 불합리함에 대해서도 쓰게 된 거예요.

 

인력 부족 문제, 병원 내 취약한 위치 문제, 사회적 인식 문제 등 간호사 처우에 관한 여러 문제제기를 하고 있죠. 쓰기까지 고민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솔직히 망설여지긴 했어요. 저도 병원에 애정이 있었고요. 떠나오긴 했지만 20년 넘게 일했던 곳이에요. 고민했죠. 게다가 선배들, 후배들도 다 그곳에 있잖아요. 그런데 글을 거의 다 써갈 때쯤 제가 다니던 병원의 간호사 처우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민망한 옷을 입고 장기자랑 한 일로는 국제적인 망신까지 당했죠. 올해 초에는 서울 아산병원에서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 있었잖아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에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밖에 나오니까 너무 잘 보이더라고요. 병원에 있을 때는 뭔가 불합리해도 “항상 그랬다”, “어디나 똑같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불합리하다, 고 하면서도 그냥 우리끼리 얘기하는 것으로 끝났었어요.

 

하지만 밖에 나와서 보니 더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었던 거군요.


더 정확하게 보였고요. 그래서 서문이나 맺음말을 일부러 더 독하게 썼어요. 그만 둔 후에도 병원에 애정을 갖고 있었는데요. 보통 퇴사 한 달 정도면 퇴직금 등 정산이 끝나거든요. 그런데 작년 12월에 갑자기 병원에서 돈이 들어온 거예요. 병원이 그동안 주지 않았던 시간 외 수당을 노동부 감사가 들어가니까 그제야 퇴직한 간호사부터 기존 간호사들한테 준 거죠. 아무 말도 없이 말이에요. 그걸 받고 너무 배신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더 독하게 썼어요.

 

말씀만 듣는데도 충격인데요. 말도 없이 뒤늦게 돈만 보내다니요.


모든 병원이 거의 그럴 거예요. 정당한 시간 외 수당, 노동 환경에 대한 보호가 없죠. 그래도 그 전까지는 병원을 믿었어요. 책을 쓰면서도 ‘괜히 내가 다니던 병원 이미지 안 좋게 하는 건 아닐까’ 계속 걱정했거든요. 한 병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했고, 동료들도 많고,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했는데, 배신감이 컸죠. 그러다보니 서문이나 맺음말에 제가 묻어뒀던, 하고 싶었던 말이 나오게 됐어요.

 

지금은 병원에 노조가 생겼어요. 이번에 파업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작년 12월에 받았던 시간 외 수당을 투쟁기금으로 기부했어요. 어떤 용기 있는 사람이 제보하지 않고, 이런 문제가 공론화 되지 않았으면 못 받았을 돈이잖아요. 지금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은 후배들, 앞으로 들어올 간호사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거고, 저도 병원에 남아 있었다면 그런 활동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희망을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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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직업이 아니라 사명


말씀하신 간호사의 자살이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 등으로 점차 이 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데요. 병원 바깥에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면, 지금 이런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일반인들이 간호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간호사의 인권 유린, 열악한 처우, 이런 이야기를 해도 기사에서는 몇 줄이거든요. 간호사는 정말 많은 일을 하는데 그 많은 일 중 한두 가지만 언론에 노출된 거예요. 저는 ‘열악한 처우’라고 할 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일까지를 말하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심지어 저희 오빠도 몰랐으니까요. “내 동생이 이런 일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고 했거든요. 가족도 모르는데 누가 알까, 싶었어요. 공감대가 있어야 바뀌잖아요. 돌이켜 보면 지난 20년 동안 간호사의 일은 사람들에게 공감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워낙 특수한 직업이고, 그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이겠죠. 상대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은 많이 보게 돼요. 언론으로, 드라마로 봐요. 그런 미디어에서 이득을 의사가 봤다면, 피해는 간호사가 본 거죠. 간호사들끼리 그래요. 의학 드라마 안 본다고요.

 

얼마 전 <닷페이스>에서 간호사 네 분이 인터뷰한 영상을 봤어요. 제일 먼저 얘기한 것이 바로 의학 드라마 속 간호사의 모습이었어요. 황당하다고요.


드라마 속 간호사들은 수동적이고, 환자 앞에서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 해요.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유니폼도 그렇게 붙는 것을 입지 않아요. 환자를 살리려면 뛰어 다녀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옷을 입겠어요. 장신구도 전혀 못하죠. 일하는 데 방해 되니까요. 항상 손을 씻고 환자를 다뤄야 하는데 반지 같은 거 못 끼워요. 그렇게 철저히 환자를 위해서 사는 게 간호사인데 미디어에서 다루는 모습은 너무 달라요. 심지어 할로윈 같은 때는 간호사를 성적으로 그리잖아요. 간호사는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라는 말이 진짜 맞거든요. 사명을 느끼려면 자존감이 있어야 해요. 내 일에 자부심이 있어야죠. 현재 병원 환경은 간호사에게 자부심을 주지 않아요. 어떤 환자들은 간호사를 폭행하기도 하고요.

 

간호사에 대한 왜곡된 시선, 오해가 여전히 존재하죠.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고는 해도 말이에요.


간호사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죠. 정말 많은 일을 하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그래서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하고 싶었어요. 드라마 극본 공부를 하고, 공모전 최종심까지 가면서 간절하게 원했던 건 간호사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죠. 내 환자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환자를 생사의 갈림길에서 삶으로 당겨 왔을 때 기뻐하고,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정말 최선을 다해 인간적인 예우를 하는, 그런 아름다운 직업을 왜 잘 모를까 생각했거든요. 그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드라마를 2년 넘게 공부했죠.

 

책이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단순히 드라마로도 만들어지는 기쁨 정도가 아니었겠어요.


제작사에서 대본을 제가 직접 써주길 원하셨지만 처음엔 망설였어요. 대본을 손에서 놓은 지도 오래 됐고, 전문 작가보다 잘 쓸 자신도 없어서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제가 써야겠더라고요. 아무리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오랜 시간 한다고 해도 저만큼은 간호사의 일을 모르잖아요. 진짜 현실은 모를 거예요. 책 내용을 각색해서 드라마로 쓰겠죠. 그런데 그게 정말 내가 오래전부터 원하던 드라마로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 되겠다, 내가 쓴 거니까 끝까지 마무리 해야지, 라고 생각했고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걱정이 돼요. 많이 울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냥 사실 그대로, 있는 대로 쓸 거예요.

 

인상적인 것은 ‘내 환자’라는 표현이에요. 책임감의 표현일 텐데요. 왜 그냥 ‘환자’가 아니라 ‘내 환자’인가요?


저희는 항상 “내 환자”, “네 환자”라고 해요. 나한테 맡겨진 환자는 어떻게든 내가 지켜야 한다는 거죠. 저한테는 당연해요. 삶으로 끌어와야 하지만 만약 놓쳤다 하더라도 끝까지 인간적인 예우를 갖춰야 할, 내 환자인 거죠. 간호사의 일은 돈이 안 돼요. 의사들은 찢어진 곳을 꿰매고, 치료하는 게 다 돈이 되지만 환자의 몸을 닦아주고, 환자의 의안을 갈아 끼워주는 간호사의 일은 당연히 돈이 안 되죠. 그렇지만 저는 그건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간호사는 절대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될 존재들이에요. 정말 환자를 살리고 싶다면, 간호사가 살아야 해요. 제가 죽겠는데 어떻게 환자를 살릴 수 있겠어요.

 

양치는 물론 얼굴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며 기관 절개 부위가 감염되지 않도록 소독하는 일 외에 때로는 위생이 불량한 환자의 손발을 따뜻한 물에 불려 두 손으로 박박 때를 밀 때도 있었다. 요로감염을 막기 위한 회음부 간호도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게다가 다른 근무 때와 마찬가지로 매 시간마다 투약을 하고 가래를 뽑아내고 환자의 증상에 따라 수시로 나오는 추가 처방을 확인하고(중략)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게 만드는 곳이 중환자실이었다. (188쪽)

 

저는 ‘백의의 천사’라는 말이 너무 싫어요. 숭고하고, 희생적인, 봉사하는 존재라는 프레임으로 간호사를 보면요, 희생만 요구하게 돼요. 현실을 얘기하는데 그 입을 틀어막는 거죠. 저희도 똑같은 사람이에요. 실수도 할 수 있고요. 고통도 느끼고, 좌절도 할 수 있어요. 저는 후배들한테도 얘기해요. 이제는 보이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노조 활동을 희망적으로 보는 거예요. 간호사가 살아야죠. 제가 책을 쓴 것도 그 일환이에요. 이런 것들이 하나씩 쌓이면 바뀌겠죠. 그런 희망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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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많은 간호사가 필요하다


2장은 메르스 당시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담고 있어요. 영화 같은 반전이 일어나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놀라게 되더라고요. 글의 힘을 체감하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이야기를 부탁드려요.

제가 사명이라는 걸 가장 크게 느낀 게 메르스 때예요. 당시 휴대전화에 썼던 일기는 오직 저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새벽에 써내려간 것이었고요. 오직 저만 보는 글이었죠. 당시는 일도 힘들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갇혀 있는데도 수시로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무시했어요.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도 많았고요. 방호복도 힘들었지만 마음이 더 힘들었죠. 그러다가 글이 신문 1면에 나갔고요. 그때 글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구나, 깨달았어요. 의료진을 욕하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응원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응원을 해주시니까 정말 믿지 못할 힘이 생기고요. 실은 앞으로도 어떤 질병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거든요. 책에 메르스 이야기를 자세하게 넣은 이유 중 하나도 그거예요. 또 어떤 질병이 와서 이런 상황이 되어도 그 안에 의료진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았으면 했어요.

 

응원과 지지만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최전방에 서 있는 의료진에게 힘을 실어줘야 해요. 메르스 때도 간호사가 제일 많았거든요. 자기 환자 지키려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곁을 지켰는데 지금 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또 다른 메르스가 왔을 때 자부심을 갖지 못한 간호사가 어떻게 사명감을 갖고 환자를 지킬 것인가, 생각해요. 너무 큰 문제예요. 병원의 반은 간호사거든요. 치료를 의사가 하기 때문에 의사가 부각되지만 환자의 생명을 간호사가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 사실에 공감해주신다면 많이 달라질 거라 생각해요.

 

선생님께 2015년 한 해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메르스와의 전쟁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어요.

바뀐 건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들 인식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왔어요. 메르스 당시에 2주는 문이 잠긴 채로 완전히 격리 됐고, 이후 1주는 자체 격리를 또 했어요. 그런데 딱 한 달 만에 중환자실 앞에서 싸움이 났어요. 쫓아가 봤더니 종교 단체에서 오셔서 입원실에서 예배를 하시겠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갓난아이를 안고 오셔서 면회를 하겠다, 하고요.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듣지를 않아요. 어머니가 이 아이를 좋아하시니 보면 힘을 더 내실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거죠. 계속 말리면 “너희가 뭔데 면회를 막느냐!”고 해요. 인식은 여전하다고 봐요.

 

밤 근무 때 급히 한 환자의 기관 절개술을 하는데 당황한 주치의 곁에서 노련하게 조치하던 선배 간호사가 있었잖아요. 이런 장면을 보면서 간호사의 역할과 전문성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환자의 목에서 마치 바람이 새는 문풍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환자의 가슴은 전혀 올라가지 않았고 산소포화도가 마침내 한 자리로 떨어졌다. 하지만 주치의는 뭐가 문제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중략) 갑자기 소독 장갑을 낀 손가락 하나가 쑥 들어오더니 공기를 뿜어내고 있는 목의 절개된 기관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사이즈도 딱 맞았다. 선배 간호사의 손가락이었다. 바람 새는 문풍지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77쪽)

 

경력 많은 간호사들이 그런 일을 해요. 하지만 병원은 돈이죠. 경력 많은 간호사가 그만 두면 환영해요. 머릿수만 채우면 된다 생각하는 거예요. 신규 간호사도 면허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간호사의 일은 단순하지 않고, 경험이 필요한 직업이에요. 경력 간호사 한 명이 신규 간호사 두세 명 역할을 하거든요. 특히 메르스 때도 느꼈지만 통솔하는 간호사가 있어야 해요. 정확한 판단으로 정확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간호사 말이에요. 저는 말씀하신 그때도 환자가 저러다 죽겠구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집어넣었죠. 의사에게도 노련한 간호사가 파트너로 곁에 있으면 서로에게도 좋고, 환자에게도 지대한 역할을 하는 거예요.

 

결국 근본 원인을 따지자면 간호사를 이익 창출의 도구로만 생각한다는 것이겠네요.


사용은 하되 보호는 해주지 않죠. 그게 너무 화가 나요. 인건비를 줄이려고 간호사에게 잡역부 일까지 시키거든요. 침대 청소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병원의 살림꾼이 간호사고요. 가장 많은 인원수를 차지하는 것도 간호사예요. 하지만 간호사는 환자를 간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춤을 추고, 병원 홍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메르스 당시에도 선생님의 외부 활동으로 병원이 유명해지자 병원 측에서 승진을 제안했는데요. 선생님은 거절하고 간호사 처우 개선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끝내 외면당했고요.


저는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승진은 필요 없었어요. 오히려 수간호사가 되면 힘들어질 것 같았죠. 병원 입장이 되어야 하거든요. 시스템이 그래요. 장기자랑 같은 것도 그렇죠. 기사를 꼼꼼히 찾아봤는데요. 병원 측 인사가 간호사에게 옷 벗고 추라고 한 적 없다고, 자기들끼리 경쟁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했더라고요. 그 말은 맞아요. 대놓고 옷 벗으라고 얘기한 적 없죠. 하지만 그 말은 맞으면서 틀려요. 다섯 개 병원에서 다섯 팀 장기자랑을 하면 늘 춤추는 간호사 팀이 대상을 받았거든요. 그러다보니 경쟁이 붙고, 더 노출을 하고,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됐는데 아무도 제지를 안 했죠. 보고 좋아하긴 했어요.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 자체가 책임이잖아요. 하지 말라고 얘기를 했었어야죠. 알면서도 묵과한 것은 인정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해요. 방관한 것은 인정한 거죠.


간호사는 전문가인데 전문 집단으로 인정을 못 받아요. 대학에서도 간호사는 전문직이라고 배웠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고요. 20년 동안 변하지 않았죠. 솔직히 저도 제가 병원에 기여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인정해주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요. 바보 같았던 거죠. 당시에 제가 칼럼도 쓰고, 외부활동을 많이 하면서 병원 이미지도 많이 좋아졌고, 환자도 많이 왔거든요. 나라도 얘기를 해야겠다는 책임감 같은 게 있었어요. 그래서 회식 자리에서 병원 고위 관계자에게 전부 말을 했죠. 승진은 바라지 않는다, 우리 간호사들이 너무 힘들다, 얘기를 했는데요. 외면하시더라고요. 병원은 안 바뀌는구나, 생각했어요.

 

 

눈앞의 이익만 봐서는 안 돼


그러니까 악순환이죠. 경력 간호사가 병원을 떠나게 되는 상황, 그래서 업무 강도가 높아지니 신입 간호사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안 되는 상황이 고리처럼 연결돼요.


서울 아산병원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설 명절 때였어요. 그때가 제 생일이라 기억이 나요. 처음엔 그렇게 놀라진 않았어요. 간호사의 자살이 드문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아산병원이라는 얘기에 깜짝 놀랐어요. 아산병원은 국내 병원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데예요. 하루 외래환자만도 2만 명이 넘는 곳이거든요.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 곳인데도 그곳 간호사가 그런 선택을 할 정도면 다른 곳은 오죽하겠느냐고요.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해요. 이대병원도 마찬가지예요. 의사를 구속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이건 경영진의 문제예요. 병원은 생명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엄격해야 해요. 그런데 병원은 돈 벌 생각만 하죠.

 

그런데 이런 구조적인 면을 보지 않아요. 아산병원 때도 언론은 이를 ‘태움’문제로만 접근했죠.


화장실을 못 가서 방광염에 걸리는 게 간호사예요. 그렇게 일이 많은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장의 간호사 교육이 맡겨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간호사를 제대로 교육할 수 있겠어요. 간호사는 가르친다고 되지 않아요. 일정 기간이 필요해요. 충분히 경험해야죠. 그런데 그 정도 기다리는 시간도 주지 않는 거죠. 아무에게나 신규 간호사 한 명 맡기고 “네가 오늘 봐라” 해요. 한 번은 중간 간호사가 너무 심하게 혼을 내는 것 같아서  불렀어요. 신규 간호사라 아는 것도 없을 텐데 왜 그러느냐, 했더니 눈물을 뚝뚝 흘려요. “선생님 저도 힘들어요. 저도 좋은 선배 되고 싶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자기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신경을 써야 하는데 후배까지 가르치다보니까 너무 힘이 드는 거죠. 이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신규 간호사에게는 체계적인 교육팀이 따로 있어야 해요. 그래야 결국 그 혜택이 환자한테 돌아가요. 눈앞의 이익만 봐서는 안 되잖아요.

 

선생님도 중환자실 간호사 입사 하루 만에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고 적으셨죠.


지금도 그 생각을 했을 때가 뚜렷하게 기억나요. 정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2시간을 뛰어다녀도 아침이 되면 안 돼 있는 것투성이예요. 환자를 돌보는 일이 정형화 되어 있진 않거든요. 다양한 상황이 있기 때문에 한 케이스에 집중하다보면 다른 일이 밀리고, 또 그 일을 허덕이며 하고요. 한 번은 저녁 근무를 하는데 시계를 보니 6시였어요. 미친 듯이 뛰어다니면서 두 환자 심폐소생술을 같이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11시인 거예요. 그제야 뒤에 출근한 다른 간호사도 보이고요. 하지만 그런데도 계속 못한 일들이 있어요.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요. 앞으로 책도 계속 쓰실 거죠?


원래는 올해 안에 책을 한 권 더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드라마 결정이 되어서 거기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다음 주에 유럽을 가는데요. 간호사를 하는 21년 동안 길게 휴가를 가본 게 딱 5일이었어요. 3교대라 한 달 일정이 미리 나오거든요. 그런데 누가 아프거나 하면 다른 간호사 일정이 다 바뀌어야 해요. 대체 인력이 없어서요. 최소한의 인원만 채용하니까요. 법으로는 간호사 한 명 당 환자를 80명까지 볼 수 있다고 하는데요. 화재가 났을 때 간호사 한 명이 80명을 어떻게 피신시키겠어요. 말이 안 되죠. 병원이 스스로는 절대 바뀌지 않아요. 간호사는 환자의 목숨과 가까운 존재예요. 법으로 보호를 받아야 해요.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단호하게 대처하고요. 개인의 사명감에만 의지해서는 안 돼요.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김현아 저 | 쌤앤파커스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간호사들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이자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를 잊은 채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우울한 단면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민정 기자 “고단한 여성 후배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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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매년 세계 여성의 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의 유리천장지수(glass-ceiling index)를 공개한다. 교육, 경제활동참여율, 임금, 양육비용, 육아휴직 권리, 간부직 내 여성 비율 등 10개 항목을 평가해 여성의 사회 참여를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인 유리천장을 수치화하는 것인데, 첫 발표를 시작한 2013년 이래로 한국은 줄곧 꼴찌였다. 우리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 그중에서도 불모지로 여겨지는 ‘스타트업 창업에 도전한 여성’의 삶은 아마 ‘고군분투’의 동의어일 것이다.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에는 이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히 스타트업 창업에 도전한 20~30대 여성 20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책의 저자인 서울경제신문 정민정 기자는 기자이기 이전에 일하는 여성 동료이자, 삶을 앞서 살아온 선배로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들의 창업스토리를 진정성 있게 전한다. 여성 CEO들의 열정과 근성, 진지한 삶의 태도가 담긴 책은 비단 창업을 꿈꾸지 않는 이에게도 유의미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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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창업기를 다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책의 토대가 된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는 서울경제썸의 2030W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연재된 기사입니다. 경제지에서 여성을 주제로 한 콘텐츠 프로젝트를 시도했다는 점이 신선했는데요.

 

2016년에 서울경제신문이 대대적으로 사이트를 개편하는 동시에 ‘서울경제썸’이라는 신규 디지털콘텐츠 채널을 강화해야 하는 시기였어요. 그때 제가 디지털미디어부에 1년간 파견이 되어 어떤 내용의 콘텐츠로 채널을 구성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됐는데요. 우선 큰 흐름을 읽는 기획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저보다 앞서 이 분야에 대해 고민했던 디지털콘텐츠 전문가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때 공통적으로 들었던 조언이 ‘타깃 독자’를 명확히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약한 독자층이 누굴까 생각하니 2030세대가 떠올랐고,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에게 가능성을 느꼈어요. 여성이 경제 주체로 점점 더 성장하는 시대이고, 기존의 남성 독자뿐 아니라 신규 여성 독자의 유입도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2030 여성을 타깃으로 여러 콘텐츠를 기획했죠. 창업, 쇼핑, 재테크, 취미, 연애 등 매주 여성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다루었던 프로젝트예요.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는 수많은 분야 중에서도 ‘창업’을 주제로 한 기사였습니다. 스타트업을 창업한 여성 대표의 인터뷰를 기획한 이유가 있나요?


디지털미디어부에 파견되었을 당시, 제가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전혀 해보지 않았던 분야의 일을 맡아야 했고, ‘혁신’이라는 키워드로 부서를 이끌면서 부담감이 컸죠.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에 막막했고, ‘과연 이 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에까지 다다랐던 시기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을 만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해의 10월 6일, 맑고 쾌청한 아침이었어요. 당시 5살이었던 작은 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우기 위해 아파트 입구로 나가면서 평소처럼 “오늘도 행복하게 보내렴.”이라고 인사를 했더니 아이가 제게 천진한 얼굴로 답을 하더라고요. “엄마도 오늘 하루 행복하게 보내고 저녁에 반갑게 만나요.” 그 말을 듣는데 철렁하고 가슴이 내려앉았어요. 저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지금 여기에서 주저앉는다면, 우리 아이들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힘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날만큼은 일에 대한 고민을 내려두고 출근길 내내 음악을 듣고 창밖을 보면서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지?’를 생각했어요. 그때 떠오른 것이 ‘여성’과 ‘인터뷰’였고 동시에 11년 전, 중소벤처기업을 담당하는 기자로 여성 CEO들을 인터뷰했던 경험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취재하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거든요.

 

당시 인터뷰는 2005년 『그녀들은 어떻게 CEO가 되었나?』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어요.


‘불황을 헤쳐 가는 여걸’이라는 테마로 14명의 여성 대표를 인터뷰한 책이에요. 일부 업체는 법인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지만, ‘선영아 사랑해’ 광고로 유명한 ‘로고나코리아’의 이진민 대표는 현재 화장품 기업 ‘아이소이’를 운영하고 있고 메디포스트의 양윤선 대표는 국내 제대혈 시장의 선두주자가 되었어요. 당시 책이 독자들에게 반응이 무척 좋았고, 10년 사이에 일어난 이러한 성장을 보면서 자연스레 여성 창업을 떠올리게 된 것 같아요. 나는 여성에게 애정이 많고, 나의 어머니이자 동료이자 딸인 여성에게 각별한 편이니 그때 감동을 주었던 여성 창업기를 다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녀들의 창업이 아름다운 이유


인터뷰 대상자는 어떻게 선정했나요?


일반적인 출입처인 여성벤처협회나 관련 기관을 통해서 찾으면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들 것 같아서 섭외에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던 중 몇 달 전, 지인에게 들었던 여성기업가네트워크 ‘위넷’이 떠올랐습니다. ‘아트벤처스’ 문효은 대표, ‘OEC’ 장영화 대표, ‘C-프로그램’ 엄윤미 대표 등 창업에 성공한 여성 CEO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커뮤니티로, 창업을 하고 싶은 여성 후배들을 위해 매달 강연을 하고 있는 단체예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강연에 참석했는데 그날 강연자가 책의 첫 순서인 ‘더 파머스’ 김슬아 대표였어요. 강단에 서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김 대표를 보는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제목이 떠오르면서 뚝심으로 버텨내는 열정과 근성이 가슴을 울리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명함을 교환하고 바로 섭외를 했죠. 첫 인터뷰였는데 4시간을 이야기했어요. (웃음) 

 

어린 시절부터 창업까지의 과정을 심도 있게 담고 있어서 인터뷰 시간이 무척 길었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김슬아 대표는 인터뷰 중간에 양해를 구하고 임원 면접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웃음)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CEO들과 기본적으로 3시간 정도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아요.

 

젊은 여성, 스타트업 창업이라는 것 외에 섭외를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이 무엇인가요?


기자 개인의 입장에서 사업의 혁신성이나 독창성을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사업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대하는지 보려고 노력했어요. 경제지에서 20여 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기업을 취재했는데 오래 살아남은 기업의 공통점은 CEO의 진정성이었거든요. 되도록 이기적이지 않고, 선한 의지를 기반으로 한 사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책에 등장하는 20인의 CEO를 취재하면서 발견한 특징이나 공통점도 궁금해요.


상당수의 CEO가 공공의 가치를 위해 창업을 시작했다는 거예요. 더 파머스의 김슬아 대표의 경우, 미국의 대표적 유기농 마켓체인 ‘홀푸드’의 비즈니스 모델을 지향하며 ‘마켓컬리’를 오픈했는데 운영 방식이 굉장히 선해요. 기존 식품관에서는 특정매입(유통업체가 상품을 외상으로 매입해 판매한 뒤 재고품은 반품하는 거래)을 해서 재고를 생산자에게 돌려보내는데, 마켓컬리는 직매입 방식으로 재고까지 떠안는 구조거든요. 좋은 상품을 제공하는 생산자에게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안정적인 유통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서죠. 또, ‘헬프미’의 박효연 대표는 일부 엘리트층이 독점하고 있는 법률서비스에서 벗어나, 서민을 위해 법률서비스의 문턱을 낮추겠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만들었어요. 이처럼 기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방향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게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 에 등장하는 여성 CEO에게서 볼 수 있는 포인트가 아닐까 싶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대표는 누구인가요?


인터뷰하면서 제일 감동을 했던 건 ‘이노마드’ 박혜린 대표였어요. 대학시절 떠난 인도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산간 마을의 소년이 전기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현실에 가슴아파하며 흐르는 물로 에너지를 만드는 휴대용 수력 발전기를 개발했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여행에서의 잊지 못할 기억, 혹은 안타까움 정도로 끝났을 일인데 박혜린 대표는 사업을 생각한 거죠. 이 일을 통해 전기혜택을 받지 못하는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에게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제게 굉장히 큰 울림을 줬어요. 사실 오늘 오면서 이 책을 다시 읽었는데, 박혜린 대표 이야기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취재 당시의 감정이 느껴지면서 또 한 번 감동했어요. (웃음)

 

인터뷰를 하면서 기분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나이가 있는 분들을 만나면 경륜에서 오는 동질감, 연대감이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싶으면서 귀엽고 좋아요. (웃음) ‘스타일쉐어’의 윤자영 대표는 평소 좋아하던 길거리 패션을 사업화했는데, 학창시절부터 재기발랄함이 돋보였어요. 교복이 예뻐서 대일외고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나, 학교의 복장 규정에 순응하기 싫어서 학생회장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에게 대들었다는 등 체제에 반기를 드는 기질, 담대함, 자기 취향에 대한 솔직함 같은 게 좋았죠. ‘아크로밧’의 임재연 대표는 수제화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성수동 수제화 장인들에게 끈질기게 매달리고, 찜질방을 전전하는 등 고생을 했지만 긍정의 에너지와 집념으로 버텨냈잖아요. 인터뷰하면서 제가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죠. 인터뷰 한 CEO들 대부분과 계속 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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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후배들의 앞날을 응원해


『그녀들은 어떻게 CEO가 되었나?』를 출간한 이후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어요. 당시와 현재, 여성 CEO들의 면면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저자 서문에도 ‘제가 40세를 넘겨 만난 2030세대 CEO들은 전(前) 세대에겐 다소 부족한 ’자아실현‘에 대한 열망이 강했습니다. (11쪽)’라고 쓰셨는데요.


2005년 책을 낼 당시에는 여성이 창업을 하는 게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에요. 남편이 작고한 뒤에 사업을 물려받거나, 가업을 이은 경우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 창업을 한 케이스를 찾는 게 쉽지 않았죠. 여성 CEO가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가면 은행 직원이 “진짜 CEO와 함께 와야 한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그때는 ‘여자도 성공할 수 있다’, ‘여자도 기업가가 될 수 있다’에 방점을 찍고 취재를 했었어요. 반면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로  만난 친구들은 사업 분야가 다양하고, 자아실현을 통해 세상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연대의식이 느껴졌어요. 제가 93학번인데, 저희 때보다 대학진학률도 높고 대외적 능력이 훨씬 출중한 동시에 그 재능이 나에게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바깥으로 향한다는 데 의미가 있어요.

 

취재하면서 느낀 여성창업자들의 강점이 있나요?


여성이라고 한정할 수는 없고,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가 가진 자유롭고 민주적인 에너지가 창업 시장에 흐르는 것 같아요. 젊은 남성 CEO 중에도 유연한 사고와 따뜻한 감성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여성 CEO들도 강단 있고 진취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분들이 많거든요. 다만 디테일의 차이는 있겠죠. 직원들을 훨씬 섬세한 감정으로 챙긴다거나 힘들 때 따뜻하게 손길을 내미는 등 여성 CEO에게는 엄마 같은 리더십이 좀 더 부각되는 듯 해요.

 

‘전체 벤처기업 중에서 여성벤처기업 비중은 8% (13쪽)’라는 현실에 놀랐어요.


작년 연간 기준으로 보면 8.7%였어요.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죠. 알게 모르게 사회에서 받는 제약이 창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제 딸이나 여성 후배들과 이야기해보면 처음부터 창업을 생각하는 친구가 드물거든요. 반면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나는 회사를 차릴 거야’, ‘어느 조직의 대표가 될 거야’라는 말을 하는 친구들이 비교적 많죠. 여자에게는 조신함을, 남자에게는 씩씩함을 가르치는 교육의 영향일 거라 생각해요.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 에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이처럼 여자는 사회에서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알을 깨뜨려야 하는 것 같아요. 학창시절 나를 옥죄었던 편견과 시선을 깨려고 노력해서 그 벽을 깨면 다른 벽이 나오고, 또 깨뜨리면 또 다른 벽이 나오니까요. 저도 지금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여성이 조직에서 고연차가 되고 중앙관리직 이상 오를 때까지 살아남는 건 단순히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아요. 단계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거든요. 그래도 그걸 해내는 친구들이 곳곳에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이 책에 등장하는 CEO의 상당수는 조직생활을 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던 친구들이에요. 지금 어딘가에서 업무에 치이거나 일상이 힘든 사람들에게 무작정 창업을 시작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일단 살아내는 일상에 충실하며 좋을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들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며 헌신하는지 그 열정과 노력을 봐주시면 좋겠어요. 또, 제 첫 책에서 인터뷰를 했던 아이소이의 이진민 대표가 ‘남성화된 여성’과 ‘여성화된 여성’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의도적으로 남성에 가깝게 행동하며 자신을 남성의 반열에 놓고, 일반 여성과 차별화된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여성을 일컬어 남성화된 여성이라고 해요. 이 사람들은 여성이 손을 내밀 때 잡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여성화된 여성은 나의 삶과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시에 옆도 돌아볼 줄 아는 여성이에요. 취재를 하면서 2030 친구들은 여성화된 여성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이들처럼 나와 비슷한 집단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연대하면서 동반자로 함께 걷는 여성 사회인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가 독자들에게 어떤 책으로 남기를 바라나요?


이 책은 언니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냈고, 어려움을 극복했는지 15세인 제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음으로 썼어요. 우리 세대 다음을 살아갈 이 땅의 여성 후배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힘들 때 책을 들춰보면서 ‘그래, 이렇게 힘들어도 극복할 수 있으니까’, ‘긍정으로 살아낸 선배들이 있으니까’라며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후배들에게 “너희 모두는 각각 소중하고 훌륭한 존재이니까, 지금 힘들어도 용기 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정민정 저 | 스마트북스
여자가 강점을 갖는 아이템은 무엇일까? 당찬 그녀들의 창업과 성공 노하우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창업 후배들에게 해주는 조언을 따뜻하고 진솔한 육성 그대로 담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말하기 특집] 손경이가 말하는 강연 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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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강사로 활동 하고 있어요.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아이와 친구처럼 오랫동안 관계 맺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려면 소통이 잘 돼야겠다 싶어서 아이가 어릴 때부터 대화법도 배우고 심리치료도 배우고 여러 가지를 배웠죠. 대화가 잘 되다 보니 성 얘기도 하고 되고 하다 보니 제가 재미있어서 관심을 갖고 배우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아들과의 대화 방법이 궁금해지네요.


저는 먼저 아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큰 게 아니라 작은 것부터 해결해 주면서 마음을 샀어요. 엄마한테 말하면 풀리는 구나, 다 해결 되는구나, 엄마는 내 편이구나 하는 마음을 심어 주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우리 애는 24살인 지금까지도 고민이나 문제거리가 있으면 저한테 얘기를 해요. 그 반대도 필요해요. 제가 힘들고 고민이 있으면 저 역시 가장 먼저 아들한테 얘기해요. 왜냐면 제가 말을 했어요. 사람은 마냥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힘든 날은 훨씬 더 많다고. 너랑 나랑은 가족이니까 힘든 건 서로 알고 안아야 한다. 힘든 얘기를 서로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서 나부터 힘든 얘기를 해요. 사람들을 보면 엄마 아빠가 힘든 얘기를 하지 않아요. 저는 그것도 소통의 부재인 것 같아요. 힘든 걸 얘기해야 ‘엄마도 이걸로 힘들어? 내가 몰랐네?’ 생각을 하죠. 저는 힘든 얘기를 해야만 친구 같아요.

 

강의를 시작한지는 얼마나 됐나요?


17년 정도 됐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쪽 강의에 관심을 갖거나 돈을 지불하거나 시간을 내주지 않았어요. 다들 동영상 강의를 듣거나 아예 안 듣거나. 다들 대학 잘 가는 것 이런 쪽에만 관심이 있었죠.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들었어요. 하하. 알바수준으로 하는 정도였죠. 그런데도 계속 끌려서 이어가고 있었는데, 한 7년 전쯤 전 대통령이 미국 순방을 갔을 때 대변인 사건이 터졌잖아요. 그때 좀 폭발적이었다가 강남 살인사건 났을 때 엄청나게 커지고 확산되고 그러더라고요. 

 

강연을 잘 하기 위해 신경 쓰는 부분은 뭔가요?


듣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강연이 끝나면 찾아오는 분들이 그 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다음 강연 때 꼭 반영을 하죠. 몇 년 전에 대학 강연를 갔는데 첫 강의 후 학생들이 적어 준 메모를 봤어요. 강연의 장점과 단점들이 적혀 있었는데 그걸 모두 읽고 두 번째 강연 때 피드백대로 다 바꿨어요. 강연 준비를 돕는 학생이 그러더라고요. 멘트까지 다 바꾸는 강사는 처음 봤다고요. 또 저는 직접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들어요. 댓글 같은 건 진심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직접 와서 눈을 보고 얘기하는 건 그럴 리가 없거든요. 직접 찾아온다는 건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예요. 상대도 시간을 냈으니 저도 시간을 내서 들어야죠.

 

다른 사람의 강연도 많이 들으러 다니신다고요.


진짜 많이 들으러 다녀요. 제가 말하는 거에 두세 배 이상은 들으러 가요. 말하는 직업이다보니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하고 참고하고 공부해야 할 것들도 많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또 자꾸 듣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눈 높이를 맞추는 말, 이해가 쉬운 말들이 어떤 건지 참고가 돼요. 솔직히 입은 하나 귀가 두 개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귀가 세 개’라는 말을 듣나봐요.


그 말은 상담할 때 나온 말이에요. 아이들이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마음을 얘기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들리는 것 같다고. 숨기고 싶었는데 숨기고 있는 것까지 보는 느낌이라고요. 보통 어른들은 귀가 두 개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대요. 우리가 얘기를 해도 못 알아 듣는데 선생님은 한 마디를 하면 두 가지를 찾아낸다면서 ‘선생님은 귀가 하나 더 있죠?’ 그러더라고요. 기분이 묘하게 좋았어요. 귀가 세 개인지 두 개인지 모르겠지만, 잘 듣는 귀 덕분에 제가 여태까지 살아 남았고 강의도 더 발전한 것 같아요.

 

촬영할 때 보니까 이해가 안 가면 바로바로 물으시는 편인 것 같아요.


질문이 많아요. 전 묻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질문을 해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알 수 있고 다름을 찾을 수 있죠. 질문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아요. 다른 사람 얘길 듣지 않으면 제가 강연을 못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성에 대한 이야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피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성을 얘기하면 다들 피해요. 다들 폐쇄적이고 말하기 싫어하는 주제예요. 그럴 땐 ‘라포’ 형성이 먼저예요. 라포는 상담할 때 쓰는 용어인데 친밀감 같은 걸 이르는 표현이에요. 그게 먼저 형성이 돼야 솔직한 자기 얘기가 나오죠. 그래서 강연할 때는 친해지려는 노력을 먼저 해요. 제 얘기도 살짝살짝 하고 잘 얘기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상을 모델로 보여줘요. 서서히 다가가기 위한 노력들을 해야 해요.

 

어려운 주제일수록 사람들과의 교감이 더 필요하겠죠?


네. 그래서 라포가 잘 형성돼야 해요. 저는 또 강연 중에 잘 울어요. 강연을 하고 있으면 두 세분이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려요. 마음으로 우는 게 보여요. 숨기려는 표정이지만 토끼눈이라고 해야 하나? 울면 안되고 표현은 되고 다들 내가 당사자인 것 같고. 한 번은 30명 정도 듣는데 눈 60개가 그런 토끼눈이더라고요. 마음이 애잔해지고 저도 감정이 실려서 저부터 울었어요. 여기서만큼은 마음 편히 울게 해주고 싶었고 사람들도 다 울었었죠. 그 때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들 마음 속에 내 얘기가 들어갔구나 싶었죠.

 

강연할 때 피해야 할 말하기는 무얼까요?


듣는 걸 강요하는 게 저는 불편해요. 요즘은 많진 않은데 옛날에는 떠들지 마라, 똑바로 앉아라,잘 들어라, 학생은 무조건 듣는 거다 강요를 많이 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싫더라고요. 저는 마이크를 붙잡고 이랬어요. 여러분 많이 힘들죠?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은 똑같아요. 40분이든 60분이든 시간 흘러가는 건 똑같은데 그 시간 나한테 투자하면 안되겠냐고 했어요. 인터넷도 재밌고 친구랑 떠드는 게 더 재미있겠지만 나 또한 사람인지라 자꾸 그게 보이면 많이 힘들다고 도와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면 애들이 ‘네’라고 대답하고 진짜 도와줘요. 전 도와달라는 말을 많이 해요. ‘같이 읽어 볼까요? 도와줄까요? 한번 말해 줄 사람?’ 은연중에 튀어나와요. 주의할 점도 있는데, 실수 할 때가 있어요. 말을 하다보면 실수를 하는데, 그걸 빨리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인정하고 사과해요. 한 번은 강연 한 학생이 손을 들었는데 남학생인지 여학생인지 헷갈리는 거예요. 어머 남학생 일어나요 그랬는데 여학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내가 실수한 거다. 이 학생이 실수 한 게 아니다. 머리가 짧든 길든 남자 여자로 국한 시킨 건 내가 잘못한 거니 내가 사과하겠다. 바로 사과했더니 애들이 웅성웅성 하더라고요. 저도 편견 많아요. 자꾸 깨우쳐야 해요.

 

강연에 대해 불신하는 목소리도 있어요. ‘강연 때 뿐이다. 가짜다’ 하는.


저 역시 그렇게 비쳐질 때가 있을 거예요.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일관성이 부족해서예요. 이중성 때문이죠. 지금의 미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미투의 핵심은 이중성이 들켰다는 거예요.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위치가 똑같아야 하는데, 강자한테 잘하고 약자한테 못했던 이중성이 드러나는 거죠. 강연도 강 안과 밖이 같아야 하는데 강연 중에는 ‘아들과 대화를 많이 해야합니다’ 그래놓곤 본인부터 대화가 없다면 신뢰가 떨어지는 건 당연해요.

 

결국 솔직한 말하기가 필요하네요.


제가 강연 초창기 때 한 초등학교에서 성폭력 예방 강연을 했어요. 강연 중에 5학년 아이가 손을 딱 들더니 선생님 피해자 몇 명 만나보고 와서 강의 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다른 애들이 모두 쳐다보고 있었고 솔직히 많이 만나봤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애가 다시 한번 내 눈을 보더니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 눈빛과 ‘솔직히’라는 말은 지금도 귀에 박혀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TV에서 딱 두 개 봤다고. 강연 이후 많이 힘들었어요. 난 강사가 아니야 못하겠다 그러면서 6개월간 쉬었어요. 처절하게 고민하고 준비하고 나서 다시 시작했는데 기적 같은 일이 뭐냐면 들리는 거예요. 귀가 세 개처럼 가만히 있는데도 들리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도 쟤는 뭔가 경험이 있는 거 같다 느낌이 오는 거예요. 살짝 ‘너 요즘 힘드니? 질문할 거 있니?’ 물어보면 그래요. ‘선생님 실은 강의 중에 내 얘기가 너무 많았어요. 저예요!’ 순간 수없이 많은 애들이 눈에 들어 왔어요. 그때 그 아이가 많이 듣고 와서 말하라고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힘들고 꺼리는 주제이지만 계속해서 강연을 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제가 강연을 하는 목적은 하나예요. 인품이 권력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거예요. 직급이 권력이 되고 성별이, 나이가, 지역이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전 인품이 힘이 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10대 20대에게 물어보면 존경하는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우리도 괜찮은 10대 20대가 있었으면 좋겠잖아요? 그래서 남녀노소 인품이 권력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강연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게 꿈이 됐어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아들 성교육 하는 법손경이 저 | 다산에듀
부모와 교육관계자들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성교육 방법을 파악하고 젠더교육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아들 성교육하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말하기 특집] 개그맨 황영진 - 예의 있게 웃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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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유머라도 상처를 주면 안됩니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어요.


처음 제안이 왔을 때는 고민이 많았어요. ‘양성평등’에 관한 주제로 강사들을 모았는데 다른 분들이 작가, 국회의원, 교수님들 뭐 이랬죠. 저는 그 정도의 커리어도 안 되고 어차피 잘난 체를 해봤자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죠. 제가 소위 남을 까는 개그를 많이 했거든요. ’사전 MC’라고 하잖아요. 바람잡이를 오래 했는데, 그걸 하면 관객과 소통을 할 때 얼굴이나 외모를 비하하며 웃기곤 했어요. 제가 지금 개그맨 16년차인데 10년 넘게 그렇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걸 감추고 성평등을 외치는 것보다, 오픈하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사과하고 시작하자 한거죠.

 

남을 웃기는 말하기에서 외모비하는 흔한 소재죠.


맞아요. 젤 쉬운 개그가 남을 까는 개그고. 가장 먼저 들어오는 얼굴로 그러는 게 제일 쉽거든요. 신인 시절에는 그런 개그가 트렌드이기도 해서 할 수 밖에 없던 면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어요. 강연에서도 그런 개그로 시작을 하니까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야유를 보내더라고요. “제가 이런 개그를 했습니다”라며 반성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자 그제야 박수를 쳐주시더라고요.

 

방송에서도 언급은 하셨지만 남을 상처 주는 유머에서 전환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이전엔 뚱뚱한 여자분들을 놀리는 개그를 많이 했거든요. ‘괴물한테 먹히는 스타일이다’ 이러면서 장난을 쳤었죠. 그런데 한 번은 ‘웃?찾?사’가 끝나고 어머님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사인을 요청하셨는데, 딸이 팬인데 황영진씨가 매일 놀리던 뚱뚱한 여자다. ‘지금은 직접 오면 놀림 당할 까봐 못 오고 나중에 살 빠지고 예뻐지면 올 거다’라고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많이 놀랐어요. 남들을 웃기려고 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걸 알았죠. 고민과 방황을 시작했어요. 내가 왜 그랬을까, 당장 방송에 들어갈 수 있는 코너를 만들어도 그걸 안 하게 되고, 1년 동안 무대에 오르지 않았어요.

 

그 결과 만들어진 게 ‘홍하녀’인 거죠?


네. 사실 ‘홍하녀’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어요. 집주인이 하녀에게 전형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 같은 것을 하죠.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보복과 응징을 당한다는 내용을 추가했어요. 메시지 있는 코너를 처음 했는데, 반응이 웃기다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 기억에 남는다. 통쾌하다고도 하시더라고요.

 

자격증을 따서 성희롱 예방교육 강사로도 활동 하시잖아요.


제가 신입시절에 선배들에게 성희롱을 당했던 피해자이기도 해서, 나중에 내가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이 문화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우연하게 한국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추천한 뮤직비디오를 찍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계기가 됐어요. 자격증 시험은 굉장히 어려웠어요. 시험 전날 날새고 공부해서 겨우 턱걸이 점수로 합격을 했어요. 교육을 통해서 저도 생각이 정말 많이 바뀌었고요.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하는 반성도 많이 했어요.

 

개그맨이라는 직업이 강연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지루할 수 있는 강의라 초반에 웃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해요. 레크레이션이나 심리테스트 같은 걸 해서 유도를 하는데, 개그맨이 하니까 웃기는 것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무조건 재밌게 하고 싶진 않아요. 제 목적은 웃음이 아니라 예방이니까요.

 

개그맨은 남을 웃기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있잖아요. 웃기는 말하기에 공식이 있을까요?


공식이라기 보다 트렌드는 있죠. 슬랩스틱이 유행할 때도 있고, 제가 데뷔했을 때처럼 비하개그가유행할 때도 있고 바보 개그 같은 게 먹힐 때도 있고 변해요. 하지만 내가 웃기려고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웃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웃을 거야 하지만 안 웃는 경우도 많아요. 그럼에도 개그맨이 웃겨야 한다는 건 숙명이죠. 사람들이 웃는 모습에 개그맨들이 희열을 느끼는 건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하는 거에요.

 

어떤 개그를 하고 싶으세요?


저는 흐름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어렸을 때 ‘미스터 빈’을 보면, 누굴 비하하지 않고 상황 자체가 웃겨요. 찰리 채플린의 개그도 좋아하는데 깃발을 들고 흔들었을 뿐인데 뒤에서 사람들이 따라오고. 그런 상황들이 너무 재미 있어요. 대사가 없어도 상황 하나를 가지고 재미있게 가는 거죠. 요즘은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혼자 나와서 만담 식으로 웃기는 게 많아요. 사연도 그런 식이잖아요. 혼자 나와서 혼자 얘기하는. 그런 개그에 찬성 해요.

 

개그맨을 꿈꾼 이유가 있나요?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부모님이 지방에서 일을 하시느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혼자 살았어요. 일종의 유학이었는데,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죠. 혼자서 도시락을 싸고 학교 가고 집에 와서 혼자 밥 먹고, 부모님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생활을 했어요. 힘들고 외로웠죠. 그때 유일한 낙이 혼자 밥 먹으면서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거였어요. 개그맨의 말 한 마디에 TV 속 사람들도 웃고 저도 웃으면서 그 시간만큼은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어요. 그러면서 개그맨을 동경하고 꿈꾸고 그랬던 것 같아요. 웃으면 견딜 수 있으니까요. 그건 지금도 그래요.

 

웃음의 힘을 느끼셨네요.


웃음이 정말 필요해요. 일반 성인이 하루에 열 번 정도 웃는데 그 중 7번이 비웃음이래요. 3번은 유쾌한 웃음이고요. 그만큼 안 웃는다는 건데. 늙어가기 때문에 웃음이 그치는 게 아니라, 웃음이 그치니까 늙어가는 거죠. 저는 억지로 웃으려고 노력해요. 개그맨들이 그래서 동안이 많아요. 억지로 웃으니까. 젊게 사시는 분이 많거든요. 저는 억지로라도 사람들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웃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기도 해요.


웃음의 효과가 몰핀의 열 배래요. 어떤 사람은 마취를 하지 않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수술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이게 천연 진통제예요. 저 역시 일부러라도 많이 웃으려고 노력을 해요.

 

노력이 필요한가요? 굉장히 밝아 보이는데요.


사람들은 ‘너는 원래 밝잖아’라고 하지만 사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노력을 하죠. 예를 들어 처음에 들어가는 곳이나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만나기 전이면 들어가기 직전에 손을 올려 입꼬리를 올리고 들어가요. 가장 행복한 기억이나 가장 재미있었던 영상 같은 걸 떠올리면서요. 그 상태로 웃으면서 인사를 해요. 습관은 타고난 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을 웃게 하는 말하기에 나만의 비결이 있다면 뭘까요?


웃기려는 사람들은 먼저 많이 웃어줘야 해요. 웃음이 없으면 못 웃겨요. 시작할 때 내가 먼저 웃기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웃음에 반응을 크게 해주는 게 먼저죠. 그러고 나서 제가 유머를 하는 거예요. 또 웬만하면 존칭을 써요. 그러면서 물 한잔 먹는 것도 참 잘 먹는다고 칭찬을 하죠. ‘그러셨어요? 정말 멋져요!’ 저는 존칭과 칭찬을 유머 코드로 활용해요.

 

유머를 말할 때는 표정이나 몸짓도 중요하잖아요. 강연 때 보면 제스처를 크게 하시는 것 같아요.


네 크게 하는 편이에요. 근데 처음부터 그러는 건 아니고요 오버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엔 안 웃기려는 것처럼 조신하게 말해요. 제스처가 클 땐 하나밖에 없어요. 리액션! 웃어주면서 너무 ‘재밌다! 최고야!’ 이런 반응만으로도 사람들이 웃어요.

 

남들 앞에서 웃기는 말하기를 하는 직업, 여전히 좋나요?


저는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는 말을 좋아해요. 어떡하든 웃으려고 노력하죠. 제가 이 직업이 아니었으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가 왔을 것 같아요. 멘탈이 약하거든요. 그나마 이 직업 때문에 건강한 것 같아요. 굉장히 놀랍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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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 “좋아하는 곳이 ‘무사’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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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강명은 말했다. “팟캐스트 진행을 잘하는 노하우요? 요조 씨랑 진행하면 됩니다.” 답변을 듣고 한참 끄덕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장강명은 『오늘도, 무사』  추천사에 “요조는 작지만 신실한 세계를 가슴에 품고, 그 우주를 주변으로 넓히는 사람이다. 나는 그 소중한 세계를 망가뜨릴 것 같아 두렵다. 아름다운 연못을 본 독개구리의 심정과 비슷하다”고 썼다. 요조의 세 번째 책  『오늘도, 무사』를 읽는다면 이 말의 의미를 절감할 수밖에 없다. 2년 전, 요조를 만났을 때와 오늘의 느낌을 비교해본다면 서점 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듯했다. 며칠 전 소속사에서 그에게 물었단다. “요조 씨는 뮤지션이에요? 서점 주인이에요?” 그전의 요조는 “뮤지션”이라고 답했지만 이제 쉬이 말할 수 없게 됐다.

 

요조에게 ‘책방 무사’와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요조의 세상에 이런 책이>는 그저 심심풀이땅콩으로 하는 일들이 아니다. “인기는 없고 재미는 있는 불운의 책을 소개합니다.” 이 문장은 그가 홀로 녹음하는 오디오클립의 타이틀이다. 2시간 남짓 인터뷰하며, 정말이지 ‘요조의 작지만 신실한 세계’를 오랫동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를 다 정리할 무렵, 그가 <아무튼, 떡볶이>를 쓸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추천하고 싶은 제목은 사실 <아무튼, 요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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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도 이렇게 쭈뼛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 녹음을 2주에 한 번 해서요. 녹음할 때는 서울에 있고, 특별한 일정이 없을 때는 거의 제주에 있어요.

 

올해 두 번째 책이에요. 왠지 『오늘도, 무사』『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보다 더 빨리 나왔어야 할 책이 아니었나 싶어요.


맞아요. 이 책이 훨씬 먼저 계약이 되어 있었어요. 오래 전 북노마드 윤동희 대표님과 책을 하나 같이 써보자고 약속했는데, ‘책방 무사’를 열게 되면서 책방 에세이를 써야지 하고 가닥을 잡았어요. 책방을 오픈하고 1년 정도 글을 썼을 때쯤, 난다 ‘읽어본다’ 시리즈 제안이 왔는데 이건 다섯 권의 책이 같이 나와야 하는 책이라 제가 늦게 쓰면 민폐가 되니까 부랴부랴 썼어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요.

 

한 인터뷰를 보니, ‘지옥 같은 경험’이었다고요.


(웃음) 네,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6개월간의 독서 일기는 다시는 못 쓸 것 같아요. 지금 서효인 시인과 박혜진 편집자, 오은 시인과 김민정 시인도 쓰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진짜 힘들겠다 싶으면서도 좋아요. 나만 당할 수 없으니까요. (웃음)

 

독자로서는 “요조가 이 시리즈를 계속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어요.


책으로 내진 않겠지만 정말 짧게 메모를 하고 있긴 해요.  

 

도서 팟캐스트 진행을 2년 넘게 하고 있어서, 책을 쓰는 일에 더 부담을 갖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말 그래요. 훌륭한 저자, 휼륭한 저자들을 많이 뵀기 때문에 내가 글을 안 써도 된다는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됐어요. 계약을 해서 써야 하니까 썼지만, 덕분에 저도 책방에 대한 생각이 많이 정리됐어요. 몇 년 전 자기 글을 보면 너무 부끄럽잖아요. 북촌 시절에 썼던 글을 다시 보니 너무 민망했는데요. 북노마드 대표님이 안 부끄러워해도 괜찮다고 응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책방 무사’가 제주로 이전한 게 곧 1년이 되가요. 자연스럽게 북촌 무사, 제주 무사 이야기가 어우러졌어요.


북촌 때까지만 해도 책방 이야기를 다룬 책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많이 나왔잖아요. 좀 더 일찍 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지만, 책을 받아보니 좋았어요. (웃음) 출판사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주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써 주셨어요.

 

책이 우선 예쁘고 감각적이에요. 디자인 덕분에 책이 더 재밌게 읽히는 느낌이 있어요. 


진짜 감사하죠. 글은 그냥 썼을 때와 인쇄된 책으로 읽을 때와 느낌이 정말 달라요.

 

책방 일기를 1년차에 썼다면, 이런 질감이 나오지 못했을 것 같아요. 4년차 서점주인이기 때문에볼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죠. 우여곡절도 많고. 지금도 모르는 게 정말 많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더 심했겠죠. (웃음)

 

<책, 이게 뭐라고>의 짝꿍이시죠? 장강명 작가님의 추천사를 읽다가 여러 번 박수를 쳤어요. “요조를 알게 된 지 1년인데, 아직도 그 앞에 서면 긴장한다” 아, 이거 진짜 맞는데 싶어서요. 표현하긴 어렵지만 어떤 독특한 아우라,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뭔가가 있어요.


아…. (웃음) 사실 그 추천사를 뒤늦게 읽고 많이 놀랐고 많이 고마웠어요. 장 작가님이 요즘 해야 할 일이 진짜 많은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부탁드리면서도 되게 죄송했거든요. 촉박하게 글을 받아야 해서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글을 너무 잘 써주셔서 제가 되게 많이 울었어요.

 

한 줄도 그냥 쓰신 문장이 없더군요. 또 눈길을 잡아 끈 문장이 “호신용품과 CCTV가 반드시 필요하다”였어요. 책을 읽기 전에 이게 웬 말이지? 싶었는데, 읽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중요해요. 낯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공간이고 또 번화가에 있지 않으면, 여자가 혼자 있으면 더 그렇고요. 책방 개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또래들을 만나면 꼭 이야기해줘요.

 

139쪽 문장에도 밑줄을 쳤어요. “책방을 하면서 어딜 가도 이렇게 쭈뼛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책을 통해 서점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세계를 너무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말씀하신 거 맞아요. 어쨌든 책방은 사업이잖아요. 사업가라는 직잭 자체가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어요. 매사 돈으로 보게 되고요. 뮤지션 입장에서는 너무 치명적인 거죠. 머리가 안 굴러가니까요. 책방 무사를 처음 열 때,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돈으로 평가할 수 없는 낭만적인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수입을 별개로 생각할 수 없잖아요. ‘책이 팔리지 않으면 난 뭘 먹고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면서 제가 너무 딱딱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손님이 오면 좋게 생각해야 하는데, 왜 책은 안 사지? 생각하게 되고요.

 

뮤지션으로만 살 때와 정말 다를 것 같아요. 우선 불특정 다수를 매일 만나야 하고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처음 한 거죠. 치열하게 책도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좋게 말하면 사람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생겼어요. 시시때때로 나는 정말 별 게 아니라는 걸 매일매일 느끼니까요. 명문을 쓰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내가 꼭 글을 써야 해? 책을 써야 하나?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검열이 너무 심해진 거죠.

 

 

너는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잖아

 

요조 만의 문장이 분명 있어요.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을 읽고, 오늘도, 무사』을 보니까요조라는 사람이 명쾌하게 보이더라고요. 시적인 문장을 발견할 때마다 즐거웠고요. 하지만 고민이 될 것 같아요. 뮤지션이라는 정체성이 옅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 같고요.


안 그래도 며칠 전 회사에서 진지하게 회의를 했어요. 회사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요. “너 뮤지션이야? 책방 사장이야?” 묻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답하셨나요?


“솔직히 옛날에는 나는 뮤지션이고 책방은 나의 어떤 진지한 취미 생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취미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매니저가 그러더라고요. “언니, 예전이랑 말이 달라졌다”고.

 

책방 주인으로 행사에 참여할 때, 기분이 좋으시다고요. “출판 관계자 같다”라고 이야기도 종종 들으신다고.


(웃음) 가끔 들어요. 책 행사를 책방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면, 낯설고 부끄럽지만 기분은 좋아요. 양손에 악기를 잔뜩 들고 움직였을 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홀가분한 느낌이죠.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이 홀가분함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지갑이나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죠. ‘책방 무사 대표 신수진’이라고 쓴 현수막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요. 책에도 썼지만 책 행사를 나가면 이심전심을 많이 느껴요. 책방 주인들끼리 만나면 우리는 자주 ‘징징이’가 돼요. 다른 사람들에게 징징거리면 꼭 듣는 이야기가 “너는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잖아”, “다들 힘들게 살아”인데요. 책방 주인끼리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못해요. 우리는 정말 힘들거든요. 책이 너무 안 팔리고 수익이 없어서요. 그런데 그 어두운 얼굴 틈에서 작게 빛나는 ‘단호한 행복’의 빛이 있어요. 그게 참 좋아요.

 

이번 책에도 남자친구 종수 씨가 사진을 찍었어요. 전 책에도 많이 등장하셨죠. ‘책방 무사’를 같이 운영하고 있지만, 연예인이 아니 작가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실명으로 책에 등장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솔직할 수 있나요?


종수가 없었다면 ‘책방 무사’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종수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공간이에요. 나만의 공간, 내가 만든 공간이라고 하면 전 정말 염치가 없는 거죠. 모두 나의 공으로 생각하는 거니까요. 종수가 없었으면 아주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물론 종수는 책을 거의 안 읽는 친구이기 때문에 책방에서 실수를 많이 해요. 증정으로 온 책들을 서가에 꼽는 경우도 있고요.

 

사실 북촌 무사 시절, 책을 두 권 사왔는데, 한 권이 사인본이었어요. (웃음)


아… 그러셨구나.

 

프롤로그에 이렇게 쓰셨어요. “나는 이종수 덕에 책방뿐만 아니라 내 삶 전체가 무사하다고 느낀다.”(12쪽) 헌사로 쓰지 않으셨겠지만 위대한 헌사로 읽혔어요. 종수 씨는 이 책을 보셨나요?


책방에 책을 갖다 놓긴 했는데 읽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종수를 생각하면 정말 고맙고요. 종수는 제게 정말 큰 존재예요. 저는 책방 주인으로 살아가지만 곡도 써야 하잖아요. 사업가와 뮤지션 사이의 거리 조절이 어려울 때가 많아요. 제가 너무 힘들어 하면 종수가 그래요. “내가 한 달 정도 책방을 지킬 테니까 너는 작업해”라고. 그렇게 저를 놓아줄 때가 있어요. 책방뿐만 아니라 제가 뮤지션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종수는 제게 큰 도움을 줘요.

 

‘이태원’이라는 글에서 “이제는 다 작별한 유행이다”(150쪽)라고 했어요. 책방 주인이 되어 작별한 또 다른 취미가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늘어났으니까요. 시간에 연연하게 되더라고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기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잖아요. 책을 소개하려면 우선 책을 읽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일상의 우선순위가 정리돼요. 술 한 잔 마시는 거,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 확실히 줄었어요. 어쩔 때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많이 줄었다는 걸 체감해요.

 

요조 씨의 글을 보면요. 스스로 포장하는 일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뭔가 아는 체를 했다가도 곧바로 정정해요. “나, 진짜 이거 몰라요”라고. (웃음)


누구에게도 하나의 덕목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게 덕목이 있다면 솔직함이 아닐까 생각해요. 솔직함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마구잡이로 솔직한 건 상대에게 폭력이 될 수 있겠죠.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요. 저는 솔직한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솔직하려고 노력해요. 100% 솔직은 불가능하고 제 캐릭터를 위한 어떤 인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건 좋은 거라 생각해요. 솔직한 사람들과는 아주아주 좋게 잘 지내고 싶어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어색한 자리에서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애씀이 이제는 보이신다고요.


정말 그래요. 예전에는 그 노력들이 안 보였어요. 예전의 저는 ‘나는 그냥 낯을 가리니까 노력하지 않을 거야, 이게 나야’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동안 제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낯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못 본 것 같아요. 모두가 어렵고 어색한데 어떤 사람은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었고, 저 같은 사람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거예요.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얄미워졌어요. 나는 절대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 생각해요. 그래서 누군가 어색해 보이면 다가가려고 노력하게 됐어요. 노력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고생이 많으세요”라고 말하고요. 나이가 들면서 못 보던 걸 보게 됐어요.

 

책방 주인이 됐기 때문에 더 잘 보일 수도요.


그렇죠. 직장을 오래 다닌 사람들은 진작에 경험했을 것을 저는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무사를 하면서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책방을 하니까 이메일로 소통할 때가 많은데요. 간혹 글을 기고할 때, 편집자 분들이 “이거 좀 수정하면 안 될까요?”라고 물으면 “싫은 데요. 아니요. 안 바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어요. 그런데요. 저의 어떤 반응에도 끝까지 친절한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아, 나는 졌구나.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구나’ 몇 번의 패배감을 느낀 후 ‘나도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자아가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웃음)

 

그러니까 말이죠. 예전부터 요조 씨의 어떤 글, 곡들에서 느꼈어요. 환경이 변한다고 사람이 다 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깊이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서 변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카리스마가 없어진 건 분명해요. 못되면서도 매력적인 사람이 있는데, 저는 사실 그렇게 비쳐지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예술가라면 제멋대로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장강명 작가님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는데요.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에 이런 글을 쓰셨어요. “친절한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허세만 잔뜩 부렸다.” 인터뷰에서는 “착하면 만만해 보였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고 말하셨고요.


장 작가님이 원래 친절한 성격이 아닌데 정말 친절하세요. 예의가 바르시고요. 이게 노력이란 걸 제가 알고 있기 때문에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장 작가님은 사소한 거에도 정성을 들여요.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겠죠. 제가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를 하면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아요. 멤버들을 보면 정말 일당 백이에요. 너무 잘하고 너무 열심히 하세요. 그래서 제가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아요. (웃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아시죠? 아실 것 같아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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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든 몸이든 움직여야 행복이 찾아온다

 

평소 궁금했어요. <책, 이게 뭐라고>에 소개해야 하는 책인데 읽어보니 너무 별로다,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음, 처음에는 순진하게 티를 냈어요. 나는 이 책 별로라는 느낌을 어떤 멘트에서라도 한 번은 하려고 했어요. (웃음)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안 해요.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해요. 사실 이건 장 작가님이 잘하세요. 장점만 딱 발견해서 소개를 해요. 이제 와서 반성을 하자면, 진행자가 둘이다 보니까 별로인 책을 다루게 되면 조금 방관한 측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프로페셔널한 장 작가님을 보면서 감화를 받았어요. 내가 별로였다고 하더라도 장점을 발견해서 이야기하려고 해요.

 

소개했던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은 무엇인가요?


올해 3월에 나온 책인데요. 『평균의 종말』을 읽고 너무 놀랐어요. 아니 신선했다는 표현이 가장 맞을 것 같아요. 내가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인간인가를 가늠할 때 찾는 게 평균이잖아요. 그런데 이 개념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많이 이해하게 됐어요.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채널예스>에 연재됐던 ‘정지혜의 사적인서점’ 칼럼을 읽은 적이 있어요. 대표님이 책방 운영이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였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도서전에서 ‘읽는 약국’이 굉장히 인기가 많았잖아요. 하지만 수입은 얼마 없었을 거예요. 그게 너무 훤하게 보여서요. 아는 사이가 아니라서 전달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네 맘 안다’ 심정이었어요. 노력 대비 가져오는 돈이 너무 적은, 그런 책방들을 볼 때 너무 속상해요. 더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책방 무사’는 언제까지 제주에 있을까요? 언제까지 무사할까요?


가능하면 오래하고 싶은데요. 일단 유지가 되려면 그만한 수입이 있어야 하니까요.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어쨌든 다른 직업이 있으니까요. 조금은 덜 불안하게 지금까지 올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한 해 한 해 연소득이 줄어드는 걸 지켜보면서 고민이 많아요. 자주는 아니지만 규칙적인 고민이에요.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오래 하고 싶어요.

 

어떻게 살아야지 행복을 자주 느낄 수 있을까요?


자기가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단적으로 먹고 싶은 걸 집어먹더라도 움직여야 하잖아요. 생각만 하지 않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애 못하는 사람이 고민을 토로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우선 어디라도 가. 동호회에도 들어. 우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로 가.” 어떻게 방안에만 계속 있으면서 연애를 할 수 있겠어요. 물론 못 나가는 마음, 질문하는 심정도 이해하지만요. 그러면 행복을 찾을 순 없다고 생각해요. 마음이든 몸이든 움직여야 얻을 수 있는 게 행복이죠.

 

제주에서의 일상은 어떤가요? 서울보다 느린 속도로 살고 있나요?


특별히 내 속도를 지키기 위해서 제주로 간 건 아닌데요. 서울에 오면 너무 빠르다고 느끼긴 해요. 제주에 오래 있다가 서울에 오면 사람들이 저를 놀릴 때가 많아요. 너 옷이 그게 뭐야? 라고. (웃음) 제주에 있을 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제 스타일이 서울에 오면 특이해져요. 서울에 오면 나도 피부과를 좀 가야 하나? 옷을 사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요. 제주에 가면 그런 고민이 사라져요.

 

제주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요조 씨가 더 행복할까요?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요. 요즘 주로 느끼는 건 서울이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사실이에요. 제주에 산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부러워하거든요? 그런데 제주에 살아보니 서울도 좋아요. 갈 때도 너무 많고 편의성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모르죠. 서울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결국 인간의 삶은 이런 것인가? 어디에 살아도 가장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 아닌가? 그런 거창한 생각도 하곤 해요.

 

책 제목이 『오늘도, 무사』입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책방 무사가 오랫동안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의 작은 책방들이 오래 무사하려면요.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선 손님이 필요하겠죠. (웃음)  『오늘도, 무사』를 보시고 나면 이 책방에 가보고 싶다는 상태를 경험하실 텐데요. 그 상태가 ‘책방 무사’에 오는 것으로 완성이 되면 좋겠어요. 와서 실망하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지만요. 3년차인 지금도 고민이 정말 많아요. “사진 찍어도 되죠?”라고 물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안돼요”라고 하기도 그렇고 “찍으세요”라고 말하기엔 그렇게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책방에 와서 충분히 책을 보고 즐기고 책을 구입해주시는 게 백점일 텐데요. 책방이 너무 힘들다, 수익구조상 돈을 벌기가 너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동시에 사람들이 책방이라는 공간에서 느끼는 낭만을 훼손하는 건 또 싫어요. 비슷한 질문을 들을 때마다 매순간 고민이 돼요.

 

지금 순간에서 그 마음을 정리해본다면요?


독립책방들의 개성과 분위기, 그런 공간을 마음껏 느꼈으면 좋겠고요. 그 책방의 주인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만약에 이 공간이 오래오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열심히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솔직한 심정이에요.

 

 

 


 

 

오늘도, 무사요조 저 | 북노마드
나만의 공간의 주인을 꿈꾸는 이라면, 일단 ‘오늘도, 무사’해보자. 오랜 시간 찾아 헤맸던 답을 요조의 삶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황선미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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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때로 누군가에게는 너무 가혹하다”고 작가는 썼다. ‘장미’는 가혹한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진 존재다. 열여덟의 나이에 엄마가 된 소녀. 그보다 일찍 부모에게 외면당한 아이. 가출청소년, 미혼모 같은 차가운 단어로 손쉽게 설명되는 사람. “그러니까 이 꼴이지.”라고 혀를 차도 될 것 같은 대상이다. “멍청하고 어리석고 몸뚱이 함부로 굴린 불량소녀”이니까.

 

그러나 작가는 말했다. “이 사정의 배경에 뭐가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장미의 안에도 웅크리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것은 성폭행이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생겨나는 거”라고 들었지만 아이를 낳았다고 모성이 솟아나는 건 아니었다. 아기 ‘하티’의 살냄새를 맡으면서도 이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장미는 알지 못한다. 입양을 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양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티를 데리고 도망쳐 나온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반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분유를 살 돈도 없는 현실.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하티는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다는 사실. 장미의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갈수록 더 짙은 어둠에 휩싸이는 것 같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몹시 괴로운 것이어서 가슴이 죄이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다행히 책장을 덮으며 안도할 수 있을 테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현실은 다르다. 가혹한 세상이 일순간 낯빛을 바꾸는 일은 극히 드물고, 그 속에 많은 장미들이 남겨져 있다. 어쩌면, 장미의 이야기는 그렇게 기억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엑시트』가 탄생하기까지, 황선미 작가는 ‘입양’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10년을 보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진행 중인 이야기이기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작가적 기질 때문이었고, 덕분에 얻은 것은 고질적인 입병이었다. 작품을 끝맺고 지병도 나아졌지만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장미의 이야기가 쉽게 휘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황선미 작가는 무겁게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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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인의 입장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요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님이 너무 미웠어요(웃음). ‘장미’가 계속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는 걸 보는 게 힘들었거든요. 쓰시는 분은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싶어요.

 

힘들었죠. 정말 힘들었어요. 10년 동안 붙잡은 소재니까 ‘어쩌다 이런 데 걸려버렸나’ 싶기도 했죠. 덫에 걸린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버릴 수도 없잖아요. 작가 습성은 있으니까 자꾸만 소재를 모으는 거예요. 말씀하신 것 같은 반응도 있더라고요. 작가가 미울 정도로 아이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그런데 취재를 하면서 제가 만났던 사정들은 이보다 더해요. 이런 일이 너무 많고요. 그 중에서 맥락에 맞게 추려서 정리를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더 심한 일이 너무 많아요.

 

장미의 심리가 아주 세세하게 그려져 있어요.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들이죠. 긴 시간 동안 취재하셨을 것 같아요.


장미라는 아이는 없어요. 어떤 모델이 있어서 상상을 한 건 아니고요. 좋지 않은 상황에 있다고 할까요, 그런 여자 아이 하나를 만든 거예요. 주인공을 여자로 할까 남자로 할까 하는 생각도 별로 안 했어요. 그런데 취재를 할수록 남자보다는 여자를 많이 만나게 됐어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저지른 일인데, 여자가 계속 피해자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남자는 책임지는 일이 별로 없고 여기에서 너무 자유로운 거예요. 이후에 벌어지는 좋지 않은 사건들을 여자 혼자 감당해야 되는 일이 많은 거죠. 부모도 딸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해줘야 될 것 같은데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연을 끊자고 한다든지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일도 많고요. 학교에서 강제전학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자퇴를 해야 되는 상황까지 생기는데 그걸 다 여자 혼자 감당해야 되는 경우도 많아요. 사회에 나온다고 해도 보호 장치가 없는 일도 너무 많고요.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면요?


미혼모 협회를 갔을 때 지원 정책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지원금을 가지고 근검절약해서 생활하면 공부도 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안 된다는 사정 얘기를 들었고 많은 사례를 봤어요. 또 해외 행사를 가면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이 그런 경우들을 봐요.

 

장미 주변에는 입양을 권하는 목소리만 있어요. 보호시설의 사람들조차 그렇죠. 아이를 데리고 사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말해요.


미혼모 시설에 갔을 때 아이들이 쓴 수기를 읽었어요. 대부분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더라고요. ‘너에게는 미래가 있다, 학업도 계속 해야지’ 소설에 나오는 얘기 그대로예요. ‘현실은 다르다, 아이를 위해서도 네가 포기하는 게 낫다, 입양을 보내서 좋은 가정에서 키우는 게 낫다’는 식의 조언 내지는 권유를 하는 거예요. 장미 같은 여자 아이들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조차도 입양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자유를 느끼는 것 같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입양 보낸 아이가 어떻게 될지 고민하기보다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이렇게 일을 벌인 남자애들은 다 어디 갔어?’라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고요.

 

입양 가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있는 거군요.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제가 해외에서 만난 입양인들은 할 말이 너무 많았고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수기에서 입양인들의 입장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어른들도 그렇고, 아이를 낳은 사람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제가 가정위탁지원센터의 홍보위원을 했었는데, 거기는 부모가 책임질 수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기관이에요. 시설에 보내기보다 위탁해줄 가정을 찾는 곳이고, 부모가 준비될 때까지 도와주면서 기다려주는 곳이에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정책이 있는 거죠. 그런데 잘 모르잖아요. 그리고 그런 보호시설에서조차 입양인들의 입장은 얘기를 안 해요. 미혼모들에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너는 이렇게 해야 돼’라고만 하는 건데, 여전히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성의 화신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미혼모, 입양인을 다뤄온 시각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편견이죠.

 

맞아요. 한 예로, 조국을 찾아온 입양아는 늘 감동적인 상봉을 하잖아요.


그러니까요. 어떤 프로그램은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려고 하는 게 보이는데, 너무 싫었어요. 엄마는 울고, 집에 데리고 가서 잡채며 불고기며 만들어서 먹이잖아요. 그런 음식을 먹고 큰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요. 저는 그런 프로그램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스컴의 긍정적인 역할도 분명히 있지만, 매우 사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에 대한 배려는 정말 부족한 것 같아요. 매스컴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것들이 철저하게 유린돼 버리는 게 너무 불쾌했어요.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이 없었을 때도 그랬어요. 그런데 그때는 이 불쾌한 감정이 정확하게 뭔지 몰랐어요.

 

소설을 준비하시면서 알게 되셨나요?


입양인 입장에서 서술된 글들을 많이 읽었어요. 역시나 제가 불쾌하게 느꼈던 지점이 있더라고요. 어떤 입양인은 살라미를 먹으면서 자랐고 그게 고향의 맛인 거죠. 매스컴에서는 마치 김치 맛이 핏속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들끼리 있을 때는 살라미 맛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 걸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픈 거죠. ‘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구나’ 싶고 ‘그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는 웃었지만 속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미혼모를 그리는 방식도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아요. 모성애가 아주 강한 경우에만 조명 받는다고 할까요. 장미와는 많이 달라요.

 

장미를 모성의 화신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도 사랑 받은 경험이 없는 아이가 느끼게 되는 이상한 본능이 있는 거죠. 그런데 장미도 때때로 아이만 없으면 자유로울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열여덟 살짜리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간절하겠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렇죠. 그런 인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모성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해요. 그런 마음으로 쓴 건 아니거든요. 버려진 장미가 모성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로 읽는다면 마음이 불편해요. 그런데 반대로, 모성애를 느끼지 않는 인물이면 ‘어떻게 그런 감정도 없어?’라는 반응도 보이거든요. 그게 무서운 편견이죠.

 

『엑시트』『마당을 나온 암탉』은 모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데요. 한 가지 더 닮은 점이 있어요. 혈연이 아닌 관계가 가족공동체를 이룬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우리에게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걸 권장할 수는 없어요. 사실 모성이라는 것도 경험하면서 학습되는 거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하게 보살피는 건 동물적인 본능인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그보다 앞서는 감정인데요. 내 새끼도 아닌 남의 새끼를 품어 아는 일은 더 힘든 거죠. 더 노력해야 되는 거고 훨씬 더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보고 하라고 하면 과연 할 수 있을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위탁센터나 가정지원센터에서 많이 봤어요.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셨죠.


맞아요. 위탁부모들이 청와대에 초청받았을 때 함께 간 적이 있는데요. 아이들은 낯선 데에 오니까 신기하고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막 뛰어다녔어요. 그런데 청와대에는 방문객이 가면 안 되는 곳이 있으니까 경비하시는 분들이 아이들을 붙잡으러 따라다니시는데, 잘 통제가 안 되죠. 홍보위원인 저도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매는데, 그런데도 그 분들은 다 품어주세요. 아이들이 제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도 다 참고 봐주고요.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참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분들이 있는 걸 보면 천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진짜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사회가 그렇게 돼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강조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요. 그래도 그런 사회가 다행인 거죠. 스웨덴에 있을 때도 입양 가족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세 집이 모였는데 집에 아이들이 두 명씩 있었어요. 그 중에 제일 어린 아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엄마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더라고요. 엄마 껌딱지예요.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 보듬어주는 거예요. 참 감동적이었어요. 그 아이들은 정말 다행인 경우였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양이 돼서 나이가 비슷했어요. 여섯 명이 형제가 된 거죠. 집안끼리도 자주 왕래를 하더라고요. 한국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있으면 다 같이 참여하고요. 부모가 아이들한테 맞춰서 많은 노력을 하는 거죠. 그걸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어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니까 여러 형태의 가정이 있어요.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거죠.

 

각각 장단점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기왕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누가 답을 제시할 수 있겠어요. 시스템 안에서 가장 적합한 걸 찾아야겠죠. 소설에서 김순영이 장미에게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하는 게, 선뜻 나온 게 아니에요. 그 사람도 끝없이 밀어내고 싶었어요.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런 거죠. 자기 경험의 영향도 있을 거고. 그러니까 이해하는 건데, 이해가 제일 먼저인 것 같아요. 경험이 있다고 다 그러는 것도 아니거든요. 성품이 그 정도가 되니까 하는 거죠. 사실은 다행인 거예요. 제가 본 사연 중에는 이런 일도 없었어요. 이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거죠.

 


너 이러는 거, 너희 엄마는 아시니?


취재를 하시면서 입양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지셨을 것 같은데요. 어떠셨어요?


제 입장은 분명했어요. 입양인을 취재할 때 한국 정부나 엄마, 가족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물어봤었어요. 그랬더니 ‘당신들이 낳은 아이들은 당신들이 키우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아, 이게 답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아침에도 뉴스에 출산율이 낮아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이런 아이들도 집계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아이들도 물론 보호받아야 되지만, 이 아이들이 더 시급하잖아요. 아직 준비가 안 된 부모도 당연히 도와줘야 되는 거고요. 그 아이들도 여기에서 크면 우리나라 국민인데, 열외 시키고 다른 곳으로 보낸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요.

 

작품을 준비하시면서 미혼모, 미혼부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도 많이 느끼셨죠?


사회적 편견을 바꾸는 것도 노력이거든요. 학교 다닐 때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쟤가 뭘 했대, 정학을 맞았대, 하면서 흉을 보는데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어요. 사정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런 기회가 생겼던 적도 없고, 그 입장이 돼보지도 못했고, 그러다 보니까 비난하는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이건 누가 나쁘거나 못돼서가 아니에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나면 일종의 카르텔이 생겨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거죠. 그냥 감상적인 데 매이지 말고 매뉴얼 대로 할 수 있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다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서 차츰 정착시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건 개인의 감정 면면을 움직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에요. 정책이 필요해요. 그리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네. 개개인이 감상적으로 접근을 하고 후원을 하는 건 그것대로 있는 상태에서 국가 정책이 마련돼야죠. 그러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말을 하기 싫었어요. 제가 미처 모르는 여러 사정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함부로 말하는 게 될까 봐 되게 조심스러워요.

 

‘김순영’이라는 인물을 두고 “장미에게 유일한 어른”이라고 쓰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더라고요. 어른다워야 어른인 경우가 많죠. 이 소설에도 여러 어른이 나오는데, 사실은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어요. 나름대로 자기 깜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거죠. 김순영 씨처럼 살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어쨌든 짐작을 했을 거 아니에요? 장미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장미가 분유를 사기 위해서 돈을 달라고 했을 때도, 아이가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안 되는 돈인데 그걸 안 주고 ‘너 이렇게 사는 거 너네 엄마가 아니?’ 이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주변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 어떤 아이를 비난할 때 어른들이 그렇게 말을 해요. 너 이러고 있는 거 너희 부모가 아냐고.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아이를 때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진짜 나쁜 사람이라고 느껴요. 자기는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내 자식은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런 눈초리를 가지고 비난하는 거죠. 그런 사람은 어른이 아닌 거예요. 자기 경험을 통해서 아직 준비가 안 된 아이들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어른다운 어른인 거죠.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 대접을 받아서도 안 되고, 강요해서도 안 돼요.

 

집필하시면서 마음이 너무 괴로우셨을 것 같고, 중간에 ‘그냥 덮을까?’라는 생각도 하셨을 것 같아요.


몇 번이고 있었죠. 안 쓰고 싶었죠.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고 싶다, 왜 이게 나를 이렇게 붙들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10년 동안 입병에 시달리셨잖아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많이 괜찮아졌어요. 아주 나쁜 컨디션이 아니면 생겼다가도 금방 나아요. 그런데 그때는 잘 낫지 않고 끝까지 갔어요. 이 소설 때문인 줄은 몰랐어요. 작가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는 걸 겪으면서도 몰랐던 거죠. 제 경우에는 몸이 고장 나면 제일 먼저 표시 나는 데가 입이에요. ‘말하지 말고 쓰라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는데요(웃음). 아마 이 소설을 쓰지 않았어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 썼을 때 ‘드디어 살았다, 나 자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런데 책이 나온다고 하니까 또 부담감이 엄청나더라고요. 이걸 누가 읽게 될 거라는 부담이 너무 심하게 왔어요.

 

이번 작품이 유독 심했나요?


다른 것들도 그런 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이전에는 있는 정보 안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든 거였잖아요.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부분들에 담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고요. 그런데 이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에요. 내 상황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진행 중인 상황이죠. 미혼모협회를 취재하고 올 때도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어요. 그 분들한테 필요한 건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도움일 텐데, 사실 제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가 안 되거든요. 갈 때마다 아이들 주려고 여러 가지를 사가기는 했지만, 제가 필요한 것만 빼서 오는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미안함이 있었어요. 뒤가 부끄러운 느낌이라고 할까요.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조심스러운 이야기군요.


제 입장에서는 그래요. 읽는 사람은 ‘이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작가의 책임의식은 또 다른 거니까요. 상당 부분 팩트를 통해서 나온 이야기이다 보니까 가십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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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시’를 만드는 방법


덮고 싶은 순간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쓰신 이유는 뭔가요? 안 쓰면 계속 괴로울 거라는 걸 아셨기 때문인가요?


그런 사회적인 감정보다는 작가 기질 때문이에요. 자꾸만 스토리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제 경우에는 그걸 엉긴다고 표현하는데요. 정리가 잘 되면 집을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랬어요. 소재가 들어오면서 저절로 집이 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이미지들이 선명하게 연상이 되는 거예요. 이미지 연상이 안 되면 글을 못 써요. 어떤 장면이 이미지로 생기고, 그 이미지가 역동적으로 움직여줘야 돼요. 소재가 막 들어오는 단계는 정리가 안 되고 엉기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에요. 그런데 스토리가 들어오니까 기질적으로 이야기가 꿈틀거리는 거죠. ‘이런 일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있는데, 너는 그걸 글로 쓰겠다는 거구나’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있었어요.

 

장미라는 아이를 떠올리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장미는 너무 자존감이 낮은 아이라, 자기가 충분히 괜찮은 애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실패자가 아니거든요. 살면서 다들 크고 작은 일들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 지나가요. 죽을 것 같아도 지나가요. 그러니까 이런 실수 때문에 자기가 낙오자라고 생각하거나, 큰 치명상을 입어서 어디에도 가기 어렵고 더 이상 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설에 ‘침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땡감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요.


그게 장미의 상황이거든요. 굉장히 상징적인 표현이고, 전체를 말해주는 하나의 단어이기도 해요. 만약 제목을 『엑시트』 로 하지 않았으면 ‘침시’로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고, 좋지 않은 연상을 할 수도 있어서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죠.

 

상징적인 단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떫은 감은 아무도 먹지 않아요. 감이라고 할 수도 없죠. 그런데 그걸 먹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 거예요. 바늘로 찌르는 거죠. 그게 얼마나 아픈 거예요. 고통을 주는 거잖아요. 그리고는 소금물에 담가요. 소금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소금물이 감 속으로 들어가서 화학 반응이 일어나고, 그러면 굉장히 단맛이 돌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침시’는 많은 분들에게 생소한 말일 것 같아요.

 

저희 엄마가 항상 침시를 해놓으셨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게 뭔지를 알죠. 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감나무예요. 저는 평생 감나무를 제일 예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아버지 고향에 감나무가 흔했는데, 제가 일곱 살 때 그곳을 떠나왔는데도 굉장히 좋은 풍경으로 기억에 남아있어요. 가을에 예쁘게 물들어서 달려있었던 풍경이. 아버지가 노동자로서 집을 처음 사셨을 때,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하고 싶은 일이 감나무를 심는 거였어요. 지금은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고 그 집을 팔았는데도, 아직 그 집에 그때 심은 감나무가 있어요. 『푸른 개 장발』에 보면 달팽이 계단이 나오는데요. 실제로 아버지가 감나무에 만들어주신 거예요. 내가 죽어도 손주들이 감을 따라고, 꼭대기에 있는 것까지 쉽게 따라고 만들어주셨거든요. 그때도 아버지가 침시를 만들었어요.


 

 

엑시트황선미 글 | 비룡소
앙다문 입으로 세상을 대하고 자신을 대책 없이 취급하는 장미의 삶은 살갗으로 고스란히 저미는 듯한 묘사와 문장을 통해 살아 움직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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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이라 불리는 어린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단지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재미에 빠져 역사를 공부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역사적으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고 그 지식들은 그 아이의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책을 읽었지만 나중에는 책이 재미있어서 읽었고 뭔가를 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역사학자의 꿈을 키우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문과에 가면 취직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인지 아버지는 이과를 권했다. 마침 어릴 적 보았던 스타워즈가 꿈으로 남아 있던 아이는 그렇게 천문학도가 된다. 그런데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다시 찾아온다. 프로그래머로 입사한 직장에서 홍보팀에서 일할 지원자를 뽑았던 것이다. 역사학도를 꿈꿨던 이과 출신은 홍보팀에 지원하면서 다시 문과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홍보 일을 하려면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을 글로 재미있게 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그는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을 풀어 놓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사람들은 와이셔츠가 원래 속옷이라는 것도 알라딘이 원래 중국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아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을 하나 둘 글로 써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가 쓴 글을 재미있어 했고, 어떻게든 책으로 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정작 글 쓴 사람은 아직 준비가 안됐지 주위에서 먼저 출판사에 연락을 했고, 출판사 관계자도 그가 알고 있는 지식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어른이 된 아이가 갖고 있던 수많은 지식들이 ‘쓸데 있는 상식’이 되어 우리 앞에 책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만나 볼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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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 의해서 강제로 책을 내다


책이 나오게 되기까지의 사연이 독특하다고 들었습니다. 강제로 출판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 말씀해 주세요.

 

S병원 홍보팀에서 일하다 보니까 기자분들과 만날 일이 많은데요, 병원이라는 환경적인 특성상 특정 부서가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기자분들과 만나고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항상 병원 얘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제가 알고 있던 얘기 중에 재미있는 얘기를 해 드리면 너무 좋다고 보내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2011년부터 재미있는 얘기들만 모아서 이메일로 보내드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글에 제목을 붙였는데요, 그게 ‘가리지날’이에요. 저희 어머니가 예전에 사실과 다른 것을 ‘가리지날’이라고 하는 걸 많이 들었었거든요.

 

예전에는 가짜라는 의미로 ‘가리지날’이라는 말이 유행했었죠. 책에도 상단에 작게 적혀 있는 걸 봤습니다.


네, 그래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같은 것들을 모아서 보냈는데 그게 기자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뭐 재밌는 거 있다면서요? 저도 보내주세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된 거예요. 그 분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정도 보내 드리다 보니까 재미있게 읽어 주신 분들이 이걸 책으로 내보자고 제 의견은 묻지도 않고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 이야기를 해서 몇 군데서 저를 찾아오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거의 반 강제적으로 책을 내게 된 거죠. (웃음)

 

책 제목이 비슷한 제목의 TV 프로그램을 생각나게 하는데요,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참고하신 건 아닌가요?


그건 정말 억울한 점입니다. 이 책이 원래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오기 전인 2015년에 출판될 예정이었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일이 생긴 거죠. 당시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문제가 좀 있었고, 다음 해에 ‘일년 지났으니까 이제 괜찮겠지’하고 책을 내려고 했더니 또 병원에 다른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렇게 악재가 겹치는 바람에 이제서야 책이 나오게 된 거죠.

 

그러면 이메일로 보냈던 내용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책에 그대로 담겨 있는 건가요?


비틀즈의 음반 중에 ‘아버지의 길’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비틀즈가 ‘아버지의 길’이라는 음반을 낸 적이 있나요?


네, <abbey road>라고요. (웃음)

 

* <애비 로드>. 비틀즈의 11번째 스튜디오 음반으로 네 명의 비틀즈 멤버가 횡단보도를 일렬로 걸어가는 자켓 사진이 유명. 그들이 걷고 있던 거리 이름이 ‘애비 로드’인데 발음이 우리말 아버지와 유사함을 개그로 활용함.

 

하하하. 아재개그가 갑자기 나오네요.


그 음반 같은 경우에 미완성 곡들을 묶어서 낸 것처럼 저도 그 동안 썼던 글들을 다시 재편집해서 손보고, 원래 원고에 들어 있는 직설적인 표현이나 욕설 같은 것도 빼고서 조금 더 건전하게 다듬어서 책으로 냈어요.

 

여러 출판사에서 제안했는데 특별히 지금 출판사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쓴 글에 손을 많이 안 대셨어요. 크게 문제가 안 된다면 작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한 거죠. (웃음) 제 글이 재밌기는 한데, 옛날로 치면 <딴지일보> 같은 스타일이라 출판사 관계자 분들이 아무래도 수정을 많이 요구하셨어요. 실제로 제가 온라인에 글을 올릴 당시에 <딴지일보>의 너부리 편집장이라는 분이 저에게 <딴지일보>에 글을 써 보라고 제안을 해 주신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당시 병원 홍보팀 과장이었는데 윗 분들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된다고 해서 못했죠. (웃음) <ㅍㅍㅅㅅ> 에서도 연락을 주셨는데 못했어요.

 

기자들에게 재미있는 글을 보내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시작하셨다고는 하지만 원래 전공은 천문학이고, 본업은 병원 홍보 담당자라서 이런 책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요, ‘알아 두면 쓸데 있는 지식’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릴 적부터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했고, 책을 정말 많이 봐서 유치원때부터 한국사를 대략적으로 알 정도였어요. 그때만해도 동네 형들이나 친구들한테 자랑을 하려고 주요 사건의 연도를 외웠죠. 그래서 사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문과에 가지 말고 이과에 가라는 거예요. 이미 그 당시에도 ‘문송합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문과 출신들이 취직이 어렵다는 것을 풍자하는 말)’가 될 거라고 생각하셔서 먹고 살려면 이과에 가서 기술을 배우라는 말씀이셨어요. 저도 취업하려면 이과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 천문학과에 지원을 하게 됐죠. 제가 어릴 때 삼촌하고 영화 <스타워즈>를 본 게 너무 감명 깊었거든요.

 

그래서 서울대 천문학과에 합격하셨나요?


서울대에서는 떨어졌는데요, 안타까운 사연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대학 시험을 지원하는 대학에 가서 봤는데, 서울대에 시험을 보러 갔더니 제 자리 옆에 라디에이터가 있는 거예요.


엄청 뜨거웠을텐데요.


그래서 1교시에 잠들었어요. 옆에 있던 감독관도 깜짝 놀라서 저를 깨웠는데 시험을 망쳐서 재수를 했죠. (웃음) 책에도 라디에이터 이야기는 썼는데, 서울대에 시험 보러 갔다가 잠든 얘기는 너무 치욕적이라서 차마 쓸 수가 없더라고요. (웃음)

 

그러면 결국 ‘알아 두면 쓸데 있는 지식’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릴 적 친구들에게 잘난 척하기 위한 목적 말고는 없는 것인가요? (웃음)


아뇨. 아직 얘기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연세대에서 천문기상학을 전공한 다음 삼성 SDS에 프로그래머로 입사를 했는데, 홍보팀에 사보 담당자가 그만 뒀다고 그 자리에 적합한 인재를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인재라고 생각하고 지원을 했죠. 홍보팀장을 찾아가서 내가 대학 때 동아리에서 출판도 했다면서 뽑아달라고 했는데, 홍보팀장님이 문과 출신을 원한다는 말을 해요. 어문 계열이거나 신문방송학과 전공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저도 어문 계열입니다. 보세요. 국문학, 영문학, 중문학, 일문학, 천문학.’ (웃음) 그랬더니 알았으니까 가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 그 일 때문에 인사 팀장이 조홍석이 누구냐고 화를 내고 난리가 한 번 났어요. 그런데도 결국 저는 홍보팀으로 가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재미있게 말을 잘 해서 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지원자가 저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어쨌든 홍보팀에서 일하게 되니까 아버지께서 책도 더 많이 읽고 인문학도 공부를 해야 된다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홍보팀에서 일을 하려면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잘 써야 된다는 이유였어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인문학 책도 많이 읽게 되었고 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지식들을 조금씩 쓰다 보니까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그 덕에 많은 분들과 만날 때 사교적으로 도움도 됐고요.

 

 

알고 보면 쓸데 있는 ‘잡학사전’


독자평을 보니까 이 책을 소개팅 나갈 때 써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저자님이 생각하시기에 이 책은 어디에 ‘쓸데가 있는 책’일까요?


사내 퀴즈 대회에 나갈 때 좋아요. (웃음) 저희 회사에서도 사내 퀴즈 대회를 했는데, ‘알라딘’이 어느 나라 사람일까라는 문제가 나왔어요. 그때 제가 알라딘이 중국 사람이라는 것을 맞혔어요. 죄송합니다. 경쟁사 이야기를 해서요.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 그런 퀴즈를 맞힐 수 있어요. 근데 그것보다도 사람들을 만났을 때 말주변이 없어서 고민이라면 정말 이런 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만나도 무슨 말을 해야 될 지 입이 안 떨어지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이 책을 읽고 누구와 만나 스테이크를 먹는다면 스테이크라는 것이 원래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는 것에서부터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서양 정식 요리의 전파자라는 이야기까지 하게 되면 교양도 있어 보이고 상대방과 얘기를 편하게 풀어나가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 즉 사교적인 면에서는 월등히 유리해진다는 말씀이시네요.


사실 효과에 비하면 이 책이 정말 싼 값에 비법을 알려주는 셈이죠.

 

얼마인가요?


14,500원입니다. 커피 세 잔 값이면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웃음)

 

말씀하신대로 재미있는 내용들이 참 많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와이셔츠’가 원래 ‘속옷’이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그 밖에도 놀라운 사실들이 많이 담겨있는 흥미로운 책인데요, 선생님은 이런 정보들을 주로 어디에서 수집하시나요?


책을 워낙 많이 읽다 보니까 기억에 남아 있어요. 어떤 것은 인터넷에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기억해서 쓰는 것이 많아요. 예를 들어 1930년대 일본이 기획한 철도가 있어요. 사할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이르는 원형 철도 계획인데요, 이런 지식은 인터넷에 찾아봐도 나오지 않지만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관심이 있어서 읽었던 책에 있었던 내용이에요. 물론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거짓은 아니죠. 그렇게 기억에 남아 있던 지식들을 꺼내서 조사한 후 책으로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제를 정해서 자료 조사를 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정리해서 쓴다는 말씀이시네요?


많은 분들이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해서 쓰냐고 하시는데요, 일부러 조사를 해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인터넷에서 검색이 안 되는 것도 많고, 어디에 자료가 있는지 찾기가 어렵죠.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관련이 있는 것을 묶어 글을 쓰는 것이죠.

 

어렸을 때 신동으로 소문이 났었다고 하시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어렸을 때 신동으로 소문이 났었다고 기억하는데, 어머니께 다시 여쭤봤더니 ‘네가 신동이었다고?’ 하시면서 기억을 못하시더라고요. (웃음)

 

책 내용이 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책에 있는 것 중에서 특별히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쓸데 있는 지식’이 있으신가요?


책을 보시면 중간에 인간의 거주지, 즉 ‘집’에 관해 이야기를 한 부분이 있어요. 그 부분이 『사피엔스』  같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으신데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 별명 중에는 ‘무발 하라리’도 있어요.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집에 관해 생각해 보면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벌을 줄 때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요. 그러면 아이들은 나가게 해 달라고 발버둥을 치죠. 서양의 애니메이션을 봐도 이런 장면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저는 이런 장면이 이해가 안 갔어요. 우리나라나 동양에서는 애가 뭔가 잘못하면 반대로 쫓아냅니다. 그러니까 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두는 것이 벌이 되는지 궁금해 진 거예요. 그러다가 그 이유가 침대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얼마전에 어떤 논문을 보고 알았어요. 자신들이 잠을 자는 방 자체가 그런 문화를 만드는 것이었죠. 서양에서는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공포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침대 밑에 뭔가 있을 수 있다는 공포가 방을 절대적인 안식처로 만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밖으로 진출해 나갔던 원동력이 방 구조에서 시작됐다는 논문을 제가 얼마 전에 읽은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책에 담아 여러분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었습니다.

 

신선한 해석인 것 같기는 합니다.


생활 문화가 국민성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일본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후 라커 룸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간 것이 화제가 됐잖아요. 그건 일본의 다다미방 문화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어요. 다다미방에서는 물을 흘리거나 하면 바닥을 다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강박관념이 돼서 사회적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문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죠. 물론 자기들끼리 폐를 안 끼치는 대신 다른 나라에 폐를 끼치기는 하지만요. (웃음) 우리나라의 경우도 독일전에서 두 골을 모두 추가 시간에 넣었잖아요. 그건 야근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까 축구를 해도 골을 추가 시간에 넣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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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듯 쉽게 쓰는 것이 좋은 글쓰기


별명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다 얘기하기도 어려운데 앞에서 소개한 ‘유발 하라리 동생, 무발 하라리’나 ‘걸어다니는 네이버’ 같은 별명 말고도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라는 별명도 있더라고요.


제가 영국식으로 살짝 비꼬면서 돌려 비판하는 식의 유머 코드를 좋아하는데요, 그러다보니 제 글이 빌 브라이슨처럼 재미있다는 뜻에서 그런 별명을 지어 주신 것 같아요.

 

많은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글을 재미있게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질문에 어떤 답을 주실 수 있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쓰기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글을 쓸 때 말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쓰기 때문이에요. 사실 일상 생활에서 말을 할 때 ‘다, 나, 까’와 같은 말은 거의 쓰지 않고, ‘요’로 끝나는 말을 많이 쓰는데 글을 쓸 때 ‘요’로 끝나면 가볍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보니 말할 때와 다른 딱딱한 글만 보게 되고 말하는 것과 달라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서 글 쓰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글을 쓸 때도 글과 말이 일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말하는 것과 글이 다르다 보니까 글 쓰는 것을 따로 훈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말하듯이 글을 쓰면 편하게 쓸 수 있고,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본문 중에 역사적 사실을 상황극으로 꾸민 부분을 보면 누가 하는 말인지 대사만 봐도 알 수 있게 쓰셨어요. 독자분들도 읽어봤으면 좋겠는데요, 이런 점도 참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그런데 글을 이런 식으로 쓰시다 보면 반응이 정말 좋을지, 독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되는 점은 없으신가요?


제가 이렇게 좀 재밌게 얘기를 하고, 글도 재밌게 쓰니까 가볍고 우습게 보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쓴 글의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에요. 책을 내게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어요.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책 보다는 영상을 많이 보는 시대가 됐지만 책이 갖고 있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에 지식을 책으로 많이 접했으면 좋겠어요.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은데요, 일본 <요미우리 신문> 같은 주요 일간지 1면 하단에는 다른 광고는 못 싣고 꼭 책 광고를 싣게 돼 있어요. 법적으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관행이죠. 지식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일본에는 공공도서관이 많이 때문에 양서를 만드는 출판사는 망하지 않아요. 도서관이 왠만한 책은 다 삽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나온 좋은 책들을 어마어마하게 일본어로 번역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은 세계의 지식을 골고루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번역서도 많이 없고 공공도서관도 적은데다 도서관이 책을 많이 사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지식 사회가 돼야 된다는 말도 하고, 노벨상 만들기 단기 프로젝트도 한다고 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나라 전체가 지식 기반을 갖기 위해 공공도서관을 늘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공도서관은 양질의 책을 많이 사야 하고요.

 

예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북한에 공공도서관 짓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당시 북한이 우리보다 도서관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도서관과 책이 부족하다는 것을 직시하고 늘려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국민들도 좋은 책을 더 자주 접할 수 있고, 출판사도 잘 되고, 인터넷서점 예스24도 좋겠죠. (웃음)

 

현대인들에게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 하시나요?


내가 몰랐던 사실이나 다르게 알고 있었던 지식들이 지금 내가 하는 일들에 변화를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럴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바꿔나가면 좋겠다는 것이죠. 저도 처음에는 그저 잘난 척하려고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했지만 지금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도 재미로만 읽으실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다르게 보고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조홍석 저 | 트로이목마
인간 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의, 식, 주, 그리고 오락적 신체 활동에서 발전한 스포츠 분야의 가리지날을 엮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헤르츠티어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발견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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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제각기 따로 놀지만 어떤 순간 하나의 궤를 그리며 이어진다.“간밤에 비가 왔고 죽은 지 30년 된 아버지가 나의 황무지에 다녀(52쪽)”가던 날 발자국이라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저버리고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아무도 없었지만,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116쪽)”던 순간을 발견하고 만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 날에는 “힘이 머리끝까지 솟는(125쪽)” 것을 느끼며 횡단보도를 지난다. 누군가, 혹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일상은 지속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힘을 주어 이야기한다. 삶 귀퉁이 어딘가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던 풍경을 발견한 작가가 그를 대신해 사진을 남기고, 풍경이 남긴 이야기를 전한다. 헤르츠티어(‘마음’을 뜻하는 독일어 ‘Herz’와 ‘짐승’의 ‘Tier’를 합성한 조어. 헤르타 뮐러의 소설『마음짐승』에서 가지고 옴.)작가의 첫 번째 에피그램,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 그렇게 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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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카메라를 줍고, 사진을 줍다

 

‘열다섯에 길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줍는 것으로 셔터를 처음 눌렀다’고 하셨어요.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길에서 줍는 걸 잘했거든요. 동전, 지폐, 달력 같은 걸 줍곤 했는데 그날은 길에 일회용 카메라가 버려져 있었어요. 코닥 카메라였는데 필름이 몇 장 남아 있었어요. 남은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사진관 운영하시던 친구 아버지에게 맡겨서 현상, 인화도 했어요. 제가 찍은 사진 몇 장과 이미 찍혀 있던 사진이 있었죠. 현상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기억이었던 거예요. 재미있었어요. 이후에도 종종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럼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한참 뒤였겠네요.


20대 후반에서야 첫 카메라를 샀어요. 당시 만나던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언니의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온 거예요. 물욕이 강한 편은 아닌데 그때 처음 ‘아, 나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전엔 이상하게 카메라 살 생각을 못 했어요. 심지어 동생에게도 디카 선물을 했으면서. 목에 건 카메라의 무게가 익숙해진 뒤로 제 일상이 많이 달라졌죠.

 

어떻게 달라졌나요?


스물여섯 살 때 문학편집자로 첫발을 뗐어요. 오래전부터 글을 써왔기에 텍스트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사진이 더해진 거예요.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일상을 찍었어요. 똑같은 날인데 셔터를 누를 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그냥 일상이 아니더라고요.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이 그거 하나로 특별한 순간이 되는 것 같았어요. 마법 같았죠.

 

2016년 말부터 그라폴리오에 사진 연재한 계기가 있었나요?


십 년 지기 친구인 일러스트레이터 클로이 씨의 강한 권유가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개인 블로그나 지인 위주의 SNS에만 사진을 올려왔는데 그게 아깝다면서요. 그라폴리오, 들어보긴 했는데 그땐 일러스트 위주였고 또 ‘창작자들의 놀이터’라는 캐치프레이즈에 위축되어서 망설여지더라고요.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는데 클로이 씨가 괜찮다고, 다들 좋아할 거라고 용기를 줘서 시작하게 되었죠. 연재를 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과 제 작품을 두고 소통하게 되었어요. 점점 제 안에서 편집자의 정체성뿐 아니라 사진 찍는 사람의 정체성도 만들어졌고요.

 

사진 찍는 사람의 정체성이라면 '헤르츠티어'인가요?


맞아요. 예명은 이전부터 썼던 거예요. 2013년에 정유정 작가님 소설『28』  이 나왔을 때 소설 OST 음반을 만들었어요. 제가 프로듀싱을 하고 에필로그 테마곡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때 예명을 헤르츠티어로 쓴 거예요. 이후에도 사진이나 음악, 영상 등 창작 영역의 작업들은 모두 그 이름으로 했어요.

 

예명을 쓰는 이유가 있나요?


아예 다른 정체성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어요. 문학편집자라는 직업은 어떻게 보면 검열자에 가까워요. 이야기의 흐름뿐 아니라 작가가 고른 어휘나 표현의 뉘앙스까지도 세세하게 살피고 의심을 하며 잠시 동안 그 원고 속에서 살게 돼요. 작가가 신뢰하는 첫 독자니까 더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게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자기 자신에게도 엄중하게 대하게 돼요. 편집자인 제게 충실한 자아가 있다면, 그렇지 않은 자아는 검열의 범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바라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마음짐승’이라는 말도 그래서 와닿았던 거고요. 한 사람의 마음에 담긴 ‘마음’엔 동물성, 역동성, 욕망, 정적임, 평화로움 등 들쑥날쑥한 에너지가 다 담겨 있잖아요. 예술 작업을 통해서 저의 마음짐승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분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어려웠어요. (웃음) 처음엔 물리적인 공간이 분리될 때를 기점으로 삼았어요. 편집자라는 직업이 퇴근해도 퇴근한 게 아닐 때가 많아요. 봐야 할 원고도 계속 있고, 여러 가지로 일 자체에 관해 꾸준히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일단은 야근을 하더라도 회사 일은 회사에서 끝내자는 게 첫 번째 원칙이었어요. 그리고 회사 밖으로 나가면 헤르츠티어가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죠. 처음엔 저도 쉽지 않았어요. 예전엔 금요일 밤에 야근하고 집에서 원고를 보는 일이 많았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요즘에도 많은 편집자들이 그렇게 해요. 그렇게 오래 하다 보니까 번아웃이 왔죠. 이걸 끊지 못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천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자신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잖아요.

 


길에 선 풍경의 이야기를 담다


그라폴리오에 올라온 작품들을 봤을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작가님의 시간 활용법이었어요.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음악도 만들어서 함께 올리잖아요. 이번엔 책도 출간하셨고요.


시간 활용에 특별한 비법이 있다기보다는 정말 남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같아요. 사진은 주말에 훌쩍 어디로 떠나거나 평소에 퇴근하고 나서 자주 찍어둡니다. 메모리카드에 담긴 사진들을 아이패드로 바로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작업이 좀 더 효율적이 된 것도 있어요. 그리고 사진을 올리면서 글을 함께 쓰고 있어요.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또는 사소한 만남들에서 얻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자주 메모해놓는 편인데, 거기서 영감 받은 이야기들을 많이 반영해요. 아, 그리고 주로 길을 걸어요. 거리 사진가(street photographer)로서 저는 사진을 찍는다기보다 줍는다고 표현하길 좋아하는데, 그렇게 걷다 보면 사진을 줍게 되고 문장도 줍게 돼요. 이번 책은 길에서 주운 사진들의 첫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길에서 사진을 찍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길에서 보이는 풍경이, 너무 흥미로워요. 다 이야깃거리인 것 같아요. 특히 뭐랄까, 예쁘고 잘 짜여 있고, 누가 봐도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버려져 있거나 중심에서 소외된, 조금 덜 빛나는 것들에 눈길이 가요. 어떤 풍경이나 사람은, 무작정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카메라를 두고 멀리서 그런 것들을 바라봐요. 그런 날에는 보람이 있어요. 특별히 해준 건 없지만, 카메라에 담았다는 게 공감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무심히 지나쳤던 슬픔을 느꼈다는 것, 그리고 그 슬픔을 기억하기 위해서 사진에 담았다는 게 좋아요. 책에도 그런 사진이 많아요. 211쪽 「당신의 잠」 에 수록된 사진이 그래요.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광화문이었어요. 낮이었는데 광장에는 집회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그리고 중심을 벗어난 인도에서 한 남자가 웅크리고 자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많은 사람의 열망과 욕망이 들끓는 광장 한편에서 이 사람은 자기만의 싸움을 하는 것 같았어요.

 

길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 시선을 사진으로 담는 게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 책에 담긴 사진들은, 그렇죠. 주목받지 못하는 감정인 슬픔을 바라보자는 태도였어요. 슬퍼하는 사람은 슬퍼하도록 두고,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여러 감정 중에서도 슬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괴로운 일을 겪거나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에게, 마치 슬픔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처럼 굴어요. 가령 일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그 정도 슬퍼하면 됐지’ 하는 말도 하고요. 기쁨이라는 감정은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정인데 슬픔은 ‘우울증’이나 치료해야 할 것, 혹은 자연스럽지 못한 감정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것들에 의미를 찾고 싶었어요.

 

표지와 뒤표지에 쓰인 사진부터 좀 쓸쓸해요. 앞표지는 빈자리이고, 뒤표지는 뒷모습이에요.


표지 사진은 학쌀롱이라는 술집이에요. 처음 갔던 날에 찍은 사진이거든요. 들어가자마자 딱 보이는 장면에서 전율이 느껴졌어요. 아무도 없는데 빛이 떨어진 이 장면을 보고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사진을 찍고 정리할 때 ‘아무도 없는데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다(117쪽).’라고 쓰기도 했어요. 뒤표지에 쓰인 사진에는 ‘있을 땐 있음을 보고 없을 땐 없음을 본다(189쪽).’라고 썼어요. 둘 다 상실의 태도예요. 아무도 없었지만 없는 게 아니었다는 태도와 있었던 것이 빈 상태를 보겠다는 게 제가 상실에 임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두 컷이 앞뒤에 쓰였어요.

 

「착한 풍경」(236쪽)의 장면은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어요. ‘찌든 점퍼 속에 백 년의 눈빛을 감춘 사람’이 ‘냉기가 발에 채는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는데, ‘길을 재촉하던 중년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노파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장면이었어요. ‘체온을 나눠주고 있다’고 썼는데요. 정말 발견한 순간이었나요?


저도 정말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어요. (웃음) 사진 속 앉아계신 분이 혼자 있을 때 그 앞을 저도 왔다 갔다 했거든요. ‘대체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처량하게 계속 앉아 계신가’ 하고 빤히 바라보는데 한 분이 다가와서 가만히 손을 내미는 거예요. 처음엔 돈을 드리는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손을 잡아주는 거였어요. 이 ‘착한 풍경’을 많은 사람들과 같이 보고 싶었어요. 좀 더 가까이서 담지 못해 아쉽긴 합니다. 좋은 장면을 잘 포착하려면 용기도 필요하답니다.

 

눈물이 많은 택시 기사님을 만난 이야기(159쪽)도 있어요.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시고 하는 일 다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건강하고 안전운전 하겠습니다.”라는 덕담을 하시고 우는 기사님이었어요. 둘 다 일상에서 발견했다기에는 생경한 일이에요. 작가님에게 유독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감지한다고 하잖아요. 슬픔의 감도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느껴지나봐요. 특히 택시 기사님 만났던 작년은 제가 유독 많이 힘들 때였어요.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기사님이 그렇게 덕담해주시는 거예요. 저도 제 이야기를 좀 하고 그랬는데, 10분 남짓한 짧은 대화였는데 서로 알아준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일하러 밖으로 나오기 전에 울고 나온다고 하셨어요. 누군가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이 있는 분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같이 아팠어요.

 

글과 사진이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요. 때로는 사진과 글이 같이 읽히고, 때로는 따로 읽혔어요. 처음엔 어떻게 읽어야 할지,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어려웠어요.


한 편의 글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가 서로를 설명하는 구성은 독자의 상상을 제한하고 해석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죠. 그런데 저는 그 방식을 취하되 글과 사진에 차이를 두고 싶었어요. 둘 사이가 가까운 게 있는 반면 어떤 건 멀어요. 나란히 둔 텍스트와 사진이 공유하는 정서는 닿아 있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떤 글은 사진의 서브일 수도 있고, 어떤 글은 글 자체일 수 있어요. 사진도 마찬가지고요. 개인의 신변을 위주로 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제가 빠져 있는 장면. 헤르츠티어라는 화자가 빠지고 카메라가 화자로 등장해서 카메라가 바라보는 사람과 장면을 담고 싶었어요. 이 책의 주인공 또는 내러티브 화자는 제가 아니라 카메라, 일종의 시선인 거죠.

 

카메라의 시선이 곧 책을 읽는 사람의 시선일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보는 사람의 이야기일 수 있죠.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니까 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누군가 바라보는 순간 완성되는 이야기인 거죠. 카메라로 순간을 담은 건 저이지만, 저 역시 거리를 둠으로 다른 사람이 상상할 여지를 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찍힌 대상과 거리에 보는 사람이 누구든 그의 생각과 메시지가 고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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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이야기하는 상실과 슬픔을 담다

 

사진을 찍으면서 슬픔이나 상실을 담아보자고 생각했던 계기가 있었나요?


사진은 제게 좀 슬픈 매체예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의 제대로 된 증명사진 한 장이 없었어요. 그러다 주민등록증을 들고 사진관에 가서 확대해서 아주 조악한 화질의 영정사진을 만든 거예요. 화질이 좋지 못하니 화면이 흐릿한, 영정사진이었어요. 그게 지금도 기억이 나요. 앨범을 찾아도 찾아도 제대로 된 아버지 사진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사진은 좀 더 슬픈 이미지로 다가와요.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이 그랬고, 기본적으로 늘 가지고 있는 감정에 슬픔이나 상실감이 바탕에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책에도 간혹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어요. 「나의 유년」이나(65쪽) 「환상의 빛」(302쪽)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나의 유년」이라는 글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러니까 그날 밤의 이야기예요. 이전까지 아버지를 피해 다락방에 숨던 날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날은 아니었어요. 똑같은 밤이었는데 그러다가 새벽에 「환상의 빛」에서처럼 가셨어요. 제가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그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어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저 자신이 30년째 애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계속 있었어요. 왜냐하면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산 사람은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장례를 치르고, 계속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데 그 상실감 같은 게, 계속 있어요. 아직 탈상하지 못한 느낌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조금 더 아프고, 슬픈 사람, 마음이 다친 사람, 상실감에 시달리는 사람의 마음이 더 잘 헤아려지는 것 같아요. 책에 담긴 텍스트가 어떤 면에서는 문학적이지만 추상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풀어낸 깊은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슬픔을 간직하는 사람을 알아본다거나, 슬픔을 터부시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작가님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책 전반에 사랑이나 상실감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신 것도 오랫동안 상실감에 빠져 있는 작가님 본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아버지가 좀 위압적이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후 당장은 아버지의 상실이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간혹 아버지 없다고 놀리는 친구를 볼 때나 청소년기에 어른 남자의 모델이 없다는 걸 느끼면서 아버지의 부재를 느꼈죠. 여자 형제밖에 없어서 남성적인 모델이 부재한 상태에서 자란 거예요. 그러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어느 날 아버지 꿈을 꿨어요. 비가 잔뜩 내리고 있는 황무지에 아버지가 서 있었는데 물리적으로 전혀 느껴지지가 않는 거예요. 가서 만져보고 느끼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사라지고 발자국만 남았어요. 비가 그치니까 발자국마저 사라지고 없는데 그 자체가 정말 강렬했어요. 서른아홉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일기를 쓰셨어요. 아버지 일기를 읽으면서 한번 더 떠올리고, 그의 죽음을, 아니 그를 이해하려 애를 썼어요. 그렇게 수용하는 과정을 거친 거 같아요. 그래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다 슬퍼지고요. 그렇게 슬퍼지면 주변에선 새삼스러워하는 거예요.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러냐고요. 그래서 영화관에서 <환상의 빛>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 너무 놀라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영화를 보고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게, 힘들 것만 같은데 정말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이 이야기를 공명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어요. 다 잊으라고, 털어내라고 하는 말은, 사실 바람 같은 말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서른아홉에 돌아가셨는데 서른이 될 때쯤에 굉장히 두려웠어요. 나도 아버지처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저를 사로잡더라고요. 당시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 조금 안심이 됐어요. 이게 일반적인 감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요. 저 역시 다른 것보다 책으로 마음을 나눠주고 싶었어요. 그게 누구건 무엇이건, 소중한 것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보고, 마음을 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는 건가요?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제대로 슬퍼하지 못했던 거죠. 올바르게 자라야 한다는 강박이 좀 있었어요. 『콰이어트』 라는 책에 보면 저와 같은 유형이 나오는데, 강인하고 적극적이고 모범적이고 밝아야 한다는 의무를 자신에게 지우는 사람이요. 성격이 내향적임에도 학창시절 내내 학생회장을 했어요. 자발적인 거였지만 어쨌든 슬픔을 외면해야 하는 세계에 있어야 했죠. 그러다 보니까 내가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프롤로그에 슬픔의 단계를 본문 구성으로 취했다고 하셨어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게 있다고 하잖아요. 이게 미션 완료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거 같아요. 반복하면서 흐려지고, 다시 반복하고 흐려지는 거예요. 두세 번 반복하면서 슬픔의 농도가 묽어지는 거예요. 사람은 계속 나아가게 되니까요. 수용하면서 나아가기도 하고요. 또 가끔은 다시 처음처럼 진한 슬픔의 단계로 되돌아가기도 하지만요. 그런 과정을 거치고, 거치면서 묽어져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렇게까지 깊게 파고드는 게 애도 말고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아요.


2014년 4월 16일 이후였어요. 출판사에 전화가 한 통 왔는데, 자신이 쓴 소설이 세월호 사건과 너무 비슷하다고 지금 출판하면 대박날 거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였어요. 정중하게 안 되겠다고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표현하진 못했지만 너무 화가 났어요.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에 이렇게까지 둔하구나,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도 둔할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 내면의 슬픔이 있다고 인식해도 깊게 보려고 하지 않잖아요.


슬플 때 슬픔에 몸을 맡겨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안 보려고 외면하려고 하지 말고, 바라보자는 거죠. 바라본다는 게 추상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자기 안의 방에서 자기를 바라봐도 좋고 아니면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나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줄 사람들 속에 있어도 좋아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서 작가 헤르츠티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나 주제가 있나요?


어릴 때 말을 심하게 더듬었고 그 때문에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 되었고 편집자로 일하며 글을 쓰는 오늘에 이른 것 같아요. 사진 역시 제게는 또 하나의 언어적 수단이에요.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게 지금은 잘 맞고, 많은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음,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저는, 길에 떨어져 있거나 외진 데 있는 조각들에 숨을 다시 불어넣어주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존재들에 목소리를 부여해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고, ‘대신 말해주기’를 하고 싶어요. 대신 말해줌으로써 사람들이 모든 것에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하고, 시선을 넓힐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다음엔 여행 관련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어요. 올해 가을에 필름을 잔뜩 챙겨서 필름사진을 잔뜩 찍고 오려고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헤르츠티어 저 | 싱긋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면서 또 쉽게 공유할 수 없는 아픔인 상실감과 슬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둠 속을 더듬어 빛을 찾아가는 사진의 원리나 과정과 비슷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원영 “오래 보아야 인간이 존엄함을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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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은 장애아가 태어났을 때, 삶 자체로 손해가 발생했으니 장애를 진단하지 못한 의사에게 손해를 배상하라고 청구하는 민사소송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는 분명 막대한 의료비와 돌봄 노동이 필요하고, 비장애 아이의 육아와 비교한다면 장애를 가진 삶은 손해에 가깝다. 소송의 이유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과연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손해일 수 있을까? 1급 지체장애인인 변호사 김원영은 한 손에 책이나 커피를 들고 익숙하고 우아하게 휠체어로 이동하는 ‘노련한’ 장애인이지만 늘 이 질문에 맞닥뜨렸다. 의무로 배운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문장 속에서는 잘못된 삶이란 있을 수 없지만, 어떤 삶이든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을 구분하는 사회 속에서 당위는 쉽게 효력을 잃는다. 글래머러스하고 마른 몸매, 건강하고 탄력 있는 몸매를 ‘착하다’고 표현하는 세상에서 장애인의 몸은 쉽게 ‘나쁜’ 몸이 된다. 자국에서 전쟁이 나 피난 온 난민, 성정체성을 숨기는 성소수자, 추한 외모를 가진 이와 가난한 이의 삶 또한 쉽게 잘못된 삶의 경계 안에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은 책 한 권을 오롯이 바쳐 초상화를 그리듯 이들의 고유한 이야기를 그리며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엄하고 매력적이라는 변론을 펼친다. 당위만으로는 그 사람의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이들이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을 가질 때 소수자들 스스로 실격한 존재라는 낙인에 맞서 자신을 변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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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성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노명우 사회학자가 ‘삶으로 쓴 텍스트’라는 추천사를 써 주셨어요. 전작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에서도 ‘온몸으로 쓴 사회과학 에세이’라는 소개가 붙어 있었죠.

 

그렇게 평가해 주셔서 좋긴 하지만, 저자로서는 윤리성이 중요해지니 또 부담돼요. 책에서 이야기했던 삶의 태도를 온전히 제가 구현했거나 구현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거든요.


한 발 떨어져 보려고 한 게 보였어요. 가상의 커플 이야기를 빌려 경험을 각색하기도 하고요.


이번 책은 제 경험 외에도 일부러 조금 더 다른 사례를 많이 가져왔어요. 개인의 고백이 중심이 되지 않고 이론이나 입장을 연구자로서 정리하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어요. 가까운 지인이나 제 경험을 넣어서 캐릭터 설정을 한 이유도, 개인의 서사에만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서울대 출신 장애인 변호사임을 내세워 그럭저럭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라면 아마도 좀 더 ‘팔리기를’ 기대할 수 있었을”(316쪽) 것이라고 하셨어요.


자기 서사를 더 솔직하고 문학적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저보다 많이 있을 거예요. 제 위치에서 가장 유의미한 책을 쓰고 싶었어요. 한국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교육받기가 힘들어요. 저는 여러 가지 의미로 고등 교육을 받았고 아카데믹한 언어에 접속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글쓰기라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어떤 삶의 길을 가든, ‘잘못된 삶’에 대해 한 번은 제대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12쪽)고 하셨는데,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제 장애인 친구 혹은 저 자신의 입체성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경험이 단순히 부정적이기만 하거나 단순히 낭만적이지 않고 입체적인데, 그 경험 자체가 인간의 중요한 부분인데 누구도 경험을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한다고 느꼈어요.


책을 읽으며 ‘잘못됐다’고 표현되는 삶은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종류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죠. 인간이 가진 고유하고 입체적인 면모가 장애나 특정한 표지를 갖는 순간 장애인이라고만 보아죠.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규범적 명제로는 그 상황이 드러나지 않아요. 규범으로만 정체성의 가치를 낭만화하는데, 실재에 가까운 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걸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들어요. 그래야 하니까 그래야 한다는 규범에 기대지 않고 보이고 싶었어요. 변론이라고 제목을 붙여서 논증적 글쓰기의 외형을 띄고 있지만, 책에서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가진 입체적인 면모를 묘사하고 싶었던 거죠.

 

 

장애는 어떤 면에서는 문화일 수 있다


품격과 존엄을 대비해서 설명한 부분이 있어요. 존엄이 지위나 역할, 신분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권리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신분과 지위에 맞게 행동해야 ‘존엄’을 가지게 된다고 여겼다고요.


품격이 꼭 나쁘다고 전제한 건 아니에요. 지위와 환경에 부합한 행동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죠. 제가 비판적으로 본 건 품격주의인데, 자신의 품격을 유지하려고 타인을 오로지 수단으로 삼는다거나, 자신의 품격을 연출하는 데 몰입하는 게 품격주의죠. 과거에는 존엄이 명예의 개념이었는데 점점 분리되면서 품격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을 대조시키고 싶었어요.


누구든 품격을 내면화하려는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시위할 때도 준법시민으로서 품격을 지켜야지만 주장하는 말이 가닿을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검열하잖아요.


품격은 결국 질서와 규범에 부합하기 때문에 항상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행위와 떨어질 수 없어요. 항상 요구받는 규범대로 행동하지 않는지 검토하는 거죠. 다른 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편한 방식으로 움직이면 주류적인 규범과 다르게 움직이게 되고, 그게 추하게 보일까 봐 항상 경계하고 사회적으로 손가락질받을까 걱정해요. 그게 품격주의적 시선의 내면화라고 볼 수 있어요. 반면 존엄은 서로 존중하는 과정에서 순간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규범과 내가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떤 장애인이 곤경에 처해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저도 비슷하게 행동해서 그 사람이 혼자 창피하지 않게 할 수도 있잖아요. 다수자의 시선에서 보면 그건 품격 있는 행동이 아니죠. 하지만 저는 그 순간 이 사람을 충분히 존중하는 행위를 한 거고, 존중하는 행위와 품격에 부합하는 행위는 굉장히 달라져요.


제목의 실격이라는 단어가 장애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항상 장애 경험에는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소수적 경험이 집약된 상태거든요. 아쉽지만 사람들이 실격이라는 단어에서 특수한 집단의 어려움에 대한 내용이라고 접근하는 것 같아요. 실격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보편적인 경험이거든요. 모두가 일부분은 겪을 경험인데, 노인도 자신의 경험을 장애인과 구분하려고 하고, 자신의 경험을 다른 집단과 분리하려고 하죠.


정체성 정치의 함정도 언급하셨어요. 특정 정체성을 가진 집단만이 자신의 존엄과 아름다움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는 걸 우려한다고요.


정체성 정치를 어떤 시점까지는 긍정해요. 우리가 우리의 속성을 자각하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데 있어서 정체성 정치는 필요하고,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에요. 하지만 어떤 시점에 가서는 보편적인 인간적 경험과 윤리로 확장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는 특정한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될 수도 있어요.


정체성만을 맹목적으로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여러 사례를 들어주셨어요.


아주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을 때 그 부모를 비난할 수도 있고, 그 정체성을 가진 아이를 낙태하는 것이 곧 나에 대한 부정이라고 연결할 수도 있고요. 어떤 청각 장애인이 인공 와우 수술하는 걸 비난하거나,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퀴어에게 퀴어함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어요. 각자 개인이 자기 속성을 가지고 인생을 비판적으로 써 내려가는 작업을 다 무시하고 그 속성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그건 정치의 종말인 거죠. 하지만 정체성 정치를 우려하는 건 어느 정도 고민한 사람들의 이야기고, 적어도 장애 문제를 잘 모르고 경험이 적은 사람들이라면 장애라는 부정적 경험이 항상 없애거나 제거하고 싶은 게 아니고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경험일 수도 있다는 걸 먼저 공유해주셨으면 해요. 그걸 공유한 바탕 위에서 정체성 정치의 폐해를 이야기할 수 있겠죠.


말씀하셨듯 독자마다 공유하는 인식이 서로 달라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 같아요. 장애에 대한 인식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장애를 감춰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면, 정체성 정치를 이야기하는 게 와닿을 수 있을지 고민이 되고요.


책을 쓰면서 상정했던 독자는 두 집단이었어요. 하나는 장애 당사자이거나 적어도 장애 문제에 상당한 관심이 있어서 장애를 정체성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분들에게는 정체성을 수용하더라도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고요. 장애가 부정적이라는 또 하나의 집단에게는 장애가 어떤 면에서는 문화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래 볼 가능성


책의 핵심 중 하나는 ‘매력차별 금지법’은 가능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기회 평등법’은 가능하다고 변론하는 부분이었어요.


아름다움과 매력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장애인이 기회를 얻어서 시설을 나오더라도 대부분 외롭거든요. 본인이 신체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이 사람의 캐릭터가 다른 사람에게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고, 대부분 비공식적인 인간 네트워크에서 소외되어 있어요. 어느 정도는 엄연히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맞아요.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거죠. 외모의 매력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초상화처럼 오랫동안 이 사람을 바라볼 때 외적 매력이 그 사람의 여러 요소와 통합될 수 있을 거예요. 스냅 사진처럼 단편만 본다면 왜 존엄하고 왜 가치 있는지 대답할 수 없어요. 적어도 오래 볼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이 존엄하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그려나갈 수 있어요.


오랜 시간 보이려면 여러모로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할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의 장애의 모습이 거리에 많이 나와야 하고요.


그 내용의 핵심을  『커버링』에서 가져오기도 했어요. 어떤 개인이 자기의 고유성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세상에 나와야 우리가 그 사람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주류 세계에 나오기 위해 그 사람이 고유성을 항상 숨기거나 혹은 소거하길 요구받는다면 그 사람은 고유한 속성과 조건을 유지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회는 그걸 너무 쉽게 요구하잖아요. 모두가 자기 고유함을 100% 유지하고 등장할 수 없다면 어떻게 법적이고 규범적인 제도로 이 사람이 고유한 속성을 최대한 드러내도록 도울 것이냐, 굉장히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 가져올 수 있다면 논증의 부담과 입증 책임을 전환하는 거죠.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요.

 

소수자가 자기 속성을 감추거나 버려야지만 어떤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다수자가 상당히 높은 근거로 정당화해야 해요. 대부분 다수자가 장애인에게 극복하거나 입증할 것을 요구하잖아요. 그걸 바꿔보자는 거죠. 입증 책임이 제도화된 게 장애차별금지법의 ‘정당한 편의 제공’이라는 규정이에요. 자기의 조건 자체로 사회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다수자에게 있고, 그 의무를 제공하는 것이 안 된다면 안 되는 사정을 다수자가 입증해야 하죠. 실질적으로 입법화되면서 그래도 일부 현실에서 적용되고, 실제 장애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잘못된 삶’ 소송의 법리 판결은 어떻게 났나요?


부모가 제기한 ‘잘못된 출생(wrongful birth)’의 위자료는 인정했어요. 법원도 아이 자체가 손해라고 판결할 수 없으니 미처 장애아의 출산을 대비하지 못한 정신적인 충격에 한해 보상하라고 한 거죠. 양육비는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걸 인정하면 출생 자체가 손해가 되는 거니까요. 아이의 이름으로 제기한 ‘잘못된 삶’ 소송은 대체로 다 인정하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법에서는 평등을 보장하고 존엄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편의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법률적 한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거칠게 추상적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법이 상정하는 법령의 주체는 일정한 나이대의 의사결정력이 있는, 대체로 남성인 표준화된 인간으로 상정되어 있어요. 그런 표준화된 인간을 제약하거나 방해하는 건 곧바로 헌법상으로 침해가 되는 데 표준이 아닌 사람은 국가가 열심히 ‘배려’해야 할 의무 정도로만 다루죠. 지금은 표준을 상정하고 거기에 예외를 붙이는 식으로 법을 만드는데, 앞으로 법이 상정하는 인간 자체가 훨씬 다양해질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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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을 희망한다


장애운동에서 선구자들이 활약하면서 이동권을 쟁취해나가는 과정이 있었어요. 법이 바뀌려면 자기 품격이 상하더라도 운동을 해야 하는 맥락이 있는데, 지금 지하철 점거 운동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아마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엘리트라고 부를 수 있는 소수자라면 다 가지는 부채감일 거예요. 워낙 지난 10여 년간의 현장 투쟁이 힘들었잖아요. 대학 다닐 때 저는 사실 참여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집회와 시위는 탈규범적 공간을 만드는 거잖아요. 어쩔 수 없이 주저하게 돼요. 최근에 한 번씩 투쟁 현장에 가보려고 노력하고, 뭔가 제 위치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나름의 것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쓰기도 하지만 부채감이 많이 남아요.


경찰들 입장에서는 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변호사이든 뭐든 상관없이 휠체어를 탄 시위자라고만 받아들일 거예요. 그런 면에서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요.


예전에 경찰과 과격하게 대응할 때는 물리적인 두려움이 컸어요. 뼈에 장애가 있다 보니 골절 위험이 항상 있었고요.

 

어렸을 때 작가님이 불편해할까 봐 물놀이를 가지 않고 눌러앉은 친구와의 일화가 인상 깊었어요. 자신을 정체화하는 데 주변 분들의 영향도 많았을 것 같고요.


그 사례가 굉장히 강렬해서 여러 번 언급했었어요. 워낙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거든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민감한 면이 있어요. 상대방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닐 수 있는데 조금이라도 저를 모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감각을 항상 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저를 존중하는 행동도 잘 보이고요. 그래서 때로는 오해도 하겠죠. 누군가는 아무 의도 없었는데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고요.


코스모폴리탄을 희망한다’고 자기소개를 쓰시더라고요. 무슨 뜻일까요?


지리를 좋아해요. 새로운 공간을 점유하는 느낌이 좋아서 여행을 가면 아무도 안 가는 북쪽 끝까지 가보기도 하고요.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에서 제가 가진 관심사와 경험이 소수에 국한되어 있고, 책을 써도 이 책의 내용을 깊이 공감하고 읽을 독자가 많지 않을 거예요. 멀리 봐서 다양한 문화권과 공간에서도 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일을 도모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물론 생업 때문에 못 하고 있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아직은 대학원에 소속되어 있고요, 법무법인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변호사 업무를 하고 있진 않아요. 법정에서 싸우기보다는 이 책처럼 근본적인 변론을 더 선호해요.


앞으로 관심을 가지는 주제가 있나요?


학술적으로는 정신적 장애인의 자기 결정과 자율성에 관심이 있어요. 이런 분들의 자율성은 개인의 정신 능력보다는 다른 상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자율성을 가져갈 것인지 깊이 있게 써보고 싶어요. 개인적인 욕심은 책에 나온 현오와 선우 같은 인물들을 소설이나 희곡 같은 픽션으로 확장해서 표현해 보고 싶어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저 | 사계절
어떤 특징과 경험과 선호와 고통을 가진 사람인지를 드러낼 무대가 주어진다면, 소수자들 스스로가 ‘인간 실격’이라는 낙인에 맞서 자신을 변론할 수 있으리란 전망을 제시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재즈 드러머 최보미, 앨범을 녹음하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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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드러머 최보미의 첫 앨범 <보미즈 호미즈 Bomi's Homies>가 처음 나왔을 때 몇몇 사람들은 앨범에 화려한 멤버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최보미가 누구야?' 그런데 얼마 전 발표된 그녀의 두 번째 앨범 <B와 함께 점핑을 Jumpin' with B>은 첫 앨범의 화려함이 단지 일회적인 우연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부드러운 스윙과 함께 탄탄한 작곡 실력과 편곡 능력을 갖춘 드러머. 일류 재즈 연주자들과 녹음한 그녀의 앨범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직접 듣기 위해 비가 쏟아지는 어느 오후, 재즈 드러머 최보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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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음악을 시작했나?


중학교 2학년 때 교회 학생부에 참가했다가 그곳에서 음악 하는 언니, 오빠들을 알게 되었다. 나도 그 음악이 너무나 하고 싶어 부모님을 마구 졸랐다. 음악 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왜 하필이면 드럼이었나?


그때 이미 록밴드를 하고 있는 교회 오빠가 있었다. 너무나 멋있게 보였다. (웃음) 그래서 나도 드럼을 연주해서 록밴드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분당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그곳에서 제일 연주 잘 하는 록밴드가 서현 고등학교 록밴드였다. 서현 고등학교는 공부를 꽤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록밴드가 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원하는 학교에 입학도 하고 록밴드에 들어가는 꿈도 이루었다.

 

도중에 다른 악기로 바꾸거나 보컬리스트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원래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드럼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는 다른 악기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록밴드를 좋아했나?


건즈 앤 로지즈, 콘 같은 밴드의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어떻게 재즈로 방향이 흘렀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T-스퀘어, 카시오페아와 같은 일본 퓨전 밴드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타워 오브 파워 음악을 들었는데 그게 너무나도 좋았다. <소울 백신 Soul Vaccination>이란 제목의 라이브 앨범이었다. 너무 좋아서 잠도 오지 않았다. 내가 평생에 할 음악은 이런 음악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타워 오브 파워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소울, 펑크(funk) 밴드가 아닌가?


타워 오브 파워를 계기로 허비 행콕의 <헤드 헌터스 Head Hunters>를 듣게 됐고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음악이 재즈인지 뭔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음악이 좋았을 뿐이다. 그때도 여전히 고등학생 때였다.

 

그럼 지금과 같은 재즈 취향은 대학에 진학해서 형성 된 것인가?


그때도 아니었다.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재즈를 배우기는 했지만 공부한다는 기분이었지 이 음악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음악 전반이 다 좋았다. 지금도 록, 펑크 모두 다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최보미가 발표한 음반은 모두 스트레이트-어헤드 (Straight-Ahead) 스타일의 재즈다.


그런 음악을 진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석사과정으로 유학 가고 나서였다. 내가 03학번인데 졸업하자마자 07년도에 유학을 떠났다. 뉴욕대학(NYU)에서 공부한 뒤 다시 뉴욕 주립 대학인 퍼치스로 진학했다. 그런데 맨 첫해에는 정말 두려웠다. 언어 문제도 있었고 막상 유학을 와보니 이건 재즈라는 음악에 완전 올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공부하는 것이 두려웠다는 뜻인가?


그런 점도 있었지만 재즈라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해보니 이건 너무 살벌했다. 그것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경쟁도 너무 치열하고 연주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전 세계에서 재즈 잘 하는 사람들이 이 좁은 뉴욕으로 몰린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느 장소에서 긱(gig)을 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였다. 과연 그 길을 갈 것인가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방황하다가 어느 순간이 결심이 서더라. 재즈에 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그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매일 잼세션에 참가하고 사람들 만나서 레슨 받고 마구 부딪히며 살았다.

 

조금 전에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언어의 장벽도 큰 어려움이라고 했는데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나?


NYU 다니면서 에이미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와 집을 함께 구해서 같이 살았다. 함께 살면서 영어가 부쩍 늘었다.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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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연주자가 되겠다고 결심이 선 이후로는 순조롭게 일이 풀렸나?

 

결코 아니다. 여전히 무섭고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유학 가서 고생 안 한 사람 없겠지만 나보고 고생한 이야기 쓰라고 하면 책 한 권은 나올 것 같다. 우선 재즈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밤늦게 하는 잼세션에 참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서 자정 혹은 새벽 한 시에 나서야 됐다. 밤늦게 동양에서 온 작은 여자 아이가 밤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잼 세션이 벌어지는 장소에 가서 구경하다가 “나도 한 곡 연주해도 되겠니?”라고 넉살 좋게 끼어들어야 하는데 그 말이 좀처럼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스몰즈' '팻캣' '클레오파트라즈 니들'과 같은 일급 재즈 뮤지션들이 모이는 재즈 클럽이었다. 재즈란 음악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한계가 있는 음악이다. 현장에 나가서 뮤지션들과 부딪히면서 배워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더라. 동양에서 온 스물 네 살 된 여성이 재즈를 하겠다고 하면 그곳 남자들은 대놓고 무시했다. 어떻게 부탁해서 한 곡을 연주하다 보면 그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드러머가 스틱으로 심벌즈를 치면서 무대 위로 올라온다. 이제 그만 비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NYU 졸업하고 또 퍼치스로 진학하지 않았나?


2009년도에 NYU를 졸업했는데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퍼치스에 다시 입학했다. 그곳에서 명 드러머인 케니 워싱턴(Kenny Washington)을 만났다. 굉장히 엄격하게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드럼 테크닉뿐만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시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레슨 때 그는 계속해서 음반을 찾으면서 이 곡, 저 곡 계속 들려주셨다. 그러면서 “이 곡에서 드러머가 누구인 것 같아? 한 번 맞춰봐.” “이 부분에서 드럼은 어떻게 치는 것 같아?” 등등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음악 듣는 법, 음악에 대한 관점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췄다.

 

오늘날 최보미의 음악은 그때 형성된 것인가?


(조금 생각하다가)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나의 첫 앨범을 그곳에서 녹음한 적이 있다. 물론 발매는 하지 않아서 비공식 앨범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때 음악을 들어보면 2000년대 초반 당시의 뉴욕의 포스트-밥 사운드를 따라 하느라고 무척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무척 겉멋이 들었던 것 같다. (웃음) 당시에는 그런 음악을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케니 워싱턴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내 나름대로의 음악에 대한 관점이 생겼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으니 그 무렵 나의 음악이 만들어 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최보미의 음악은 비밥인 것인가?


내 음악에 어떤 명칭을 붙이는 것은 그리 의미가 없다고 본다. 비밥, 하드밥, 포스트밥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나는 지금도 록, 펑크, R&B 모두를 좋아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추구하는 음악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며, 나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음악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런 음악이 왜 좋았나? 듣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웃음) 그렇다. 연습은 엄청 많이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록 드럼은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면 되는데 재즈 드럼은 음악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계속 끌고 가야 하니까 그것이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 어려운 만큼 그것을 이뤄냈을 때 재즈 드럼은 그 어떤 연주보다도 내게 성취감을 줬다. 그리고 어느덧 이 음악이 나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음악이 되었다.

 

재즈 드러머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나?


물론 선생님이시니 케니 워싱턴을 빼놓을 수 없고, 로이 헤인즈(Roy Haynes), '필리' 조('Philly' Joe Jones),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 지미 코브(Jimmy Cobb), 루이 헤이즈(Louis Hayes)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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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미국에 갔다가 언제 한국에 돌아왔나?


2014년에 공부를 다 마치고 돌아왔다.

 

데뷔 앨범 <보미즈 호미즈>는 언제 녹음했나?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곳에서 녹음해서 돌아온 2014년도에 국내에서 발매했다.

 

당시 이 앨범의 멤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보미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일급 음악인들과 앨범을 녹음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멤버들을 모았나?


앨범에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한 빈센트 헤링(Vincent Herring)의 도움이 컸다. 그 당시에 나는 브루클린에 살고 있었는데 역시 브루클린에 살고 있던 빈센트는 그곳의 지역 뮤지션들을 낮에 그의 집으로 초대해서 잼세션을 열면서 신인 뮤지션들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도 그 잼세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빈센트를 알게 되었다.

 

공부를 마칠 무렵 앨범을 녹음해야겠다고 생각했나?


아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하니 빈센트가 먼저 제안을 했다. 여기 와서 고생했는데 뭔가 성과를 남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앨범을 녹음하기로 했다. 빈센트가 많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브루클린 뮤지션이어서 평소에도 잘 알고 지내던 베이스 주자 데이비드 웡(David Wong)과 빈센트가 일단 내가 짠 멤버였다. 나머지 트럼펫 주자와 피아니스트가 필요했는데 빈센트가 누구와 제일 녹음하고 싶은지 내게 물었다. 그때 써 놓은 곡이 하나 있었는데 난 머릿속에 톰 해럴(Tom Harrell)이 그 곡을 불면 정말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빈센트가 해럴에게 녹음을 제안하자 그의 매니저였던 일본인 부인이 너무 높은 금액을 제시해서 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빈센트가 섭외한 뮤지션이 트럼펫 주자 월러스 로니(Wallace Roney)와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키코스키(David Kikoski)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내 연주자의 리더 앨범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정도의 올스타 멤버들이다. 녹음할 때 긴장하지 않았나?


왜 안 하겠는가. 너무 긴장해서 녹음 끝나고서 어떻게 녹음이 진행됐는지 기억도 안 나더라.

 

레코딩 세션비로 얼마를 주면 그 정도 멤버들과 녹음할 수 있나?


월러스와 키코스키에게는 1천불씩 주었다. 그것도 빈센트가 잘 이야기해 주어서 그 정도에 가능했다.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니다. 비용을 들인 만큼 성과는 만족했나?


내가 너무 부족했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리허설도 충분히 했다면 내 연주가 더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사실, 딱 하루 리허설 하고 그 다음 날 하루 만에 녹음을 마쳤는데 리허설 날 월러스가 세 시간이나 늦게 왔다. 다른 사람들이 세 시간씩이나 기다렸으니 리허설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녹음 당일에 만나보니 역시 그는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더라. 엉뚱한 키로 곡을 불곤 했다. 다른 멤버들은 최선을 다해주었다.

 

역시 동양인 여성 밴드 리더를 무시했다고 본다.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못 알아듣게 한국말로. 웃으면서. (웃음)

 

앨범 대부분이 최보미의 오리지널 곡이고 스탠더드 넘버 편곡도 매우 신선했다. 드러머가 작/ 편곡을 하는 경우는 다른 악기 주자들과는 달리 편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원래 작곡-편곡에 관심이 많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유학 와서도 계속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드러머가 드럼을 연주하면 곡의 진행을 이해하고 있으니 그 점이 자연스럽게 연주에 반영된다고 본다. 그래서 난 연주 할 때 피아니스트들의 컴핑(comping)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악기를 하던 밴드 리더는 작/ 편곡가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자신의 악기를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도 밴드 전체의 시각에서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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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앨범 <B와 함께 점핑을>에도 2016년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녹음되었더라.


그 해에 뉴욕의 한국 문화원에서 한국의 재즈 연주자들을 초청해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때 멤버로 참여 했는데 그 기회로 미국에 간 김에 녹음을 한 것이다.

 

이번 앨범에도 게리 스멀리언(Gary Smulyan), 사챌 바산다니(Sachal Vasandani) 등 유명 뮤지션들이 앨범에 참여 했다. 이번 멤버들은 어떻게 모았나?


먼저 피아니스트 제브 패턴(Jeb Patton)은 유학 시절에 내 피아노 스승이었다. 그는 데이비드 웡과 함께 지미 히스(Jimmy Heath) 빅밴드 멤버다. 사실 곡을 쓸 때는 트럼펫 주자를 생각하며 곡을 썼는데 현지에서 적당한 트럼펫 주자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케니 워싱턴에게 트럼펫 주자를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그가 추천해 준 사람은 뜻 밖에도 바리톤 색소폰 주자 게리 스멀리언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악기였지만 평소에 게리의 연주를 좋아했던 터라 함께 녹음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들어보니 역시 트럼펫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트럼펫 주자 윱 반 라인(Jeop Van Rhijin)에게 부탁해서 트럼펫 파트를 더빙으로 녹음했다.

 

첫 앨범에 비해 훨씬 안정감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허설을 많이 했나?


그러지는 못했다. 뉴욕에 머무는 시간에 제한이 있다 보니 리허설 시간을 잡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리허설 때는 데이비드 웡이 오질 못했다. 그런데 녹음 날 그냥 초견으로 연주를 너무 잘 해주더라. 첫 음반 녹음했던 경험이 있으니 두 번째 음반 녹음은 훨씬 심리적으로 편안했다.

 

「비처럼 음악처럼」도 실려 있던데 그 곡도 초견으로 연주했나?


그렇다. 편곡도 현장에서 그냥 이루어졌다.

 

「비처럼 음악처럼」을 넣을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나?


내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실은 내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이 내가 연주한 곡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넣었다. 그래도 좀 친숙한 곡이 있으면 앨범 듣기가 편하지 않은가.

 

여러 곡이 있었지만 <무민 댄스 Moomin Dance>에서 밴드 전체의 스윙이 참 좋더라. 그런 포 비트 리듬을 좋아하는가?


재즈를 하면서 어떻게 그런 리듬을 안 좋아할 수 있는가! 그런 스윙을 느끼면 안락한 재즈의 품에 안기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위안을 받는다.

 

왜 미국에서, 미국 연주자들과만 녹음하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미국에서 녹음한 이유는 그곳 스튜디오 임대비가 훨씬 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앨범 녹음한 브루클린의 스튜디오는 한 시간당 70달러였다. 아울러 미국 연주자들과 녹음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있는 음악이 어디에서든 공감을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두 번째 앨범을 이런 저런 사람들과 미국에서 녹음해 왔다고 하자 한 동료 뮤지션이 이렇게 말하더라. 앨범 이렇게 녹음해 와도 국내에 와서 국내 연주자들과 활동 할 건데 뭐 하러 그렇게 녹음 하냐고. 하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난 나의 음악을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연주하는지가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지금 길을 가고 있는지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보다 경험이 많고 평생 재즈를 연주한 사람들과 연주하면 역시 얻고 배우는 것이 많다. 늘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앨범을 녹음하는 것은 그 배움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미국 연주자 하고만 녹음하는 것이 아니다. 피아니스트 곽정민, 베이시스트 고재규와 함께 '트리오 마인드폴리'를 결성해서 첫 앨범 <미팅 오브 마인드 Meeting of Minds>를 2016년에 발표했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우린 아주 유쾌하게 연주한다. 또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의 작품만을 연주하는 '점프 밍거스'란 국내 밴드에서도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7인조 밴드인데 앞으로 좋은 성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번 앨범 <B와 함께 점핑을>을 보면 녹음한 지 2년 동안 발매되지 않고 묵혀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


(잠시 생각하다가) 사실 2014년 새로운 앨범을 들고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한국 재즈의 현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공 들여서 음반을 제작하고 활동해도 다음 앨범을 녹음할만한 돈조차 모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또 미국에 가서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는데 녹음이 완성되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가 내게 거짓말 하고 있다고 느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첫 앨범을 내고 반응이 좋아서 활발히 활동했고 그래서 또 2집 앨범을 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클럽에서 연주하고, 학교에 출강해서 돈을 모아 한곡씩 믹싱-마스터링을 진행했다. 한 곡이 끝나면 다음 곡을 하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앨범 전체가 다 끝날 때까지 많은 시간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이 앨범의 곡들을 누구와 연주하나?


앨범에도 참여한 윱이 트럼펫을 불고 바리톤 대신 테너 색소폰에 용석이 오빠(이용석), 피아노에 종현이 오빠(박종현), 베이스에 최성환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이 연주한다. 그룹 이름은 '보미즈 호미즈'이다. 이 멤버들과 자주 연주해서 다음에는 이들과 녹음하고 싶다.

 

그래서 고심 끝에 재즈 드러머가 되겠다는 결심은 이제 흔들리지 않는 건가?


현재 박사학위 논문 준비 중인데 그 지료를 모으기 위해 뉴저지 주 러트거스 대학 재즈 연구소 도서관을 이용했다. 하루 종일 그곳에서 자료를 찾으니 너무 좋더라. 그래서 요즘은 도서관 사서가 살짝 당기긴 하다. (웃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영도 “독자의 기대는 부담스러우면서도 좋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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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멀지 않은 현대 한국에는 이영도라는 작가가 살고 있었다. 하이텔 통신망으로 연재한 『드래곤 라자』로 인해 독자들은 ‘좀비’를 자처하며 올라오는 글마다 남김없이 읽어내려갔고, 이후 책으로 나온 소설들은 방대한 분량으로 수많은 사람의 밤을 없앴다. 한국적 소재와 독창적인 세계관으로 만든 『눈물을 마시는 새』 와 『피를 마시는 새』로 상업과 문학의 양 기둥을 높게 세운 작가였다.


시간이 흘러 더 현대 한국,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판을 마지막으로 신작 소식이 없던 이영도가 『오버 더 초이스』 로 돌아왔다. 보완관보 ‘티르 스트라이크’가 사는 소도시에서 ‘서니 포인도트’라는 6살짜리 아이가 폐광에 빠져 죽는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엄마는 음독 자살을 하려다 구조되고, 깨어나자마자 지상과 지하의 왕에게 검을 바치면 모두가 부활하는 세상이 온다고 외친다.


10년 만의 신작 소식에 독자들은 트위터 실시간 검색 1위, 수십 만의 유료 완독 등으로 화답했다. 죽음, 이별, 부활, 치유 등 묵직한 단어를 쓰면서도 농담을 잊지 않는 특유의 문체는 여전하다. 인터뷰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가는 방식도 여전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신작에 즐겁고, 작가를 놀리는 재미도 전과 같다. 아래의 인터뷰가 오매불망 이영도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의 목마름을 해결하기는 힘들겠지만, 모쪼록 작품을 즐기는데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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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싱싱한 가능성


10년 만에 장편 소설이 나왔습니다. 소감이 궁금합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쑥스럽습니다.

 

도서전에서 사인회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독자가 요청한 문구 중 기억에 남는 문구가 혹시 있나요?


문구보다는 많이 들은 말씀들이 기억에 남는군요. '중학교 때 처음 접했는데 이제 삼십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초등학교 때나 사십대 등으로 약간씩 변주는 있었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지요.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그건 제가 20년 동안 버텨서 얻은 것들이라 저 혼자 간직하겠습니다.


초판 사인본이 3000부라고 들었는데 손목은 괜찮으신지요.


별 문제는 없습니다.


“연재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연재할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만 아직 ‘여기다’ 싶은 곳이 없다”고 2008년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플랫폼 연재 방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 흔한 말로 글쓰기는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라고 하지요. 제가 동의하고 말고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대략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에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글쓰기는 작곡이나 작사에 가깝겠지요. 그런데 연재 형식이 되면 가창이나 연주와 비슷해지는 면이 있는 듯합니다. 관객을 앞에 두고 무대에서 노래, 혹은 연주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느낌이 재미있지요.


브릿G에서 연재한 내용이 묶였습니다. 브릿G 플랫폼은 어땠나요?


정식 오픈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그 성격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온라인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이라면 며칠이면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와 읽기의 호흡은 아무래도 훨씬 느리니까요. 그래서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아직 싱싱한 가능성이 흥미롭습니다.


독자의 댓글을 보는 편인가요?


예.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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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 매를 두드려도 발표하지 않았다면 없는 것


『오버 더 초이스』에 나온 카닛이라는 종을 두고 독자가 서로 상상하는 바가 다릅니다. 다른 종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나요? 마음 속에 상상한 구체적인 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보고 듣고 읽고 느낀 모든 것들에서 나옵니다. 구체적인 상이라고 하실 때 '구체적인'이 어느 정도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제가 이야기 내에서 묘사되는 등장 인물 간의 여러 상호 작용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상은 가지고 있습니다.


티르 스트라이크는 현세에서 흐른 시간과 달리 나이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10년 동안 ‘오버 더 초이스’가 아닌 다른 내용의 이야기, 티르 스트라이크의 복제들이 있었나요? 그렇다면 컴퓨터 하드에 남아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아.. 발표하지 않은 글들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어렵군요. 원고지 십만 매를 두드렸다 해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냥 없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라서요. 따라서 그런 건 없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서니의 죽음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사건을 계속해서 떠올렸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현실 세계가 ‘오버 더’ 세계에 영향을 미친 점이 있다면요.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AI 같은 경우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글쟁이라면 당연히 현실에 살고 있으니 그 의식은 계속 현실에 영향을 받겠지요. 그런데 그 현실은 70억 개의 현실 중 하나겠지요.


작중 세계가 현실 세계가 바뀐 만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신지도 궁금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질문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름을 얻으려고 고래를 죽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시대이니 모디 딕의 내용은 바뀌어야 한다... 같은 이야기일 리는 없을 테고요.

 

모호한 질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 작품과 비교해 요새 만든 이야기가 달라진 게 있다고 느끼시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달라진 것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저 스스로 면밀히 비교해본 적은 없어 뭐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캐릭터보다는 서사와 세계관을 더 중시한다고 느꼈습니다. ‘오버 더’ 시리즈 세계관은 긴 시간에 걸쳐 직조했을 텐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쓰다 보면 이 세계관에서 저 세계관으로 건너 뛰어야 합니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힘들지 않나요?


기계적인 어려움이라면 당연히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이름이 비슷한 다른 세계의 등장 인물의 이름이나 지명 등을 두드린다거나 하는 경우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잖습니까?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는 분이 아버지한테 온 전화를 받고 무의식적으로 안녕하세요, 고객님 하고 말했다거나 하는 실수담은 익숙하지요. 그런 흔한 경우와 구분될 만한 특별한 혼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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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리는 재미죠


주로 언제, 어떻게 쓰시나요?


딱히 정해진 루틴 같은 것은 없습니다만 주로 밤에 작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정은 어떻게 보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냥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서 읽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모릅니다. 참 효율이 떨어지는 방법이라서 좀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저도 좀 알았으면 정말 좋겠군요.


인터뷰가 어려운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직접 말하기보다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전달하는 게 쉬운 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지방에 살고 또 불규칙적으로 생활해서 작정하고 수도권으로 갈 여력을 내기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인터뷰어께 나한테 오라 할 수도 없다 보니(오시겠다고 해도 제가 죄송스럽습니다.) 그냥 피하는 편입니다.


이영도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힘이나 동력은 무엇일까요.


두드리는 재미죠.


드래곤의 “좀 부르지 말라”는 말이 사실 작가의 말이라는 독자 평이 있었습니다. 신작을 계속 요구하는 독자의 성화가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기대야 항상 부담스럽지요. 거기에 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등이 없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기대이므로 참 좋은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짓궂은 질문입니다. 『오버 더 초이스』 에서 식물을 불에 태우지 말라는 요구가 정말 과수원 농사와 관련이 있을까요? (대답을 회피할 것 같지만 꼭 질문드리고 싶었습니다)


하하... 뭐, 모든 독자는 자기만의 해석을 가질 권한이 있고 따라서 모든 해석은 다 옳으며 제가 그 중 무엇이 맞고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논리에서 저는 그와 정반대되는 다른 해석을 공인할 수 없는 것처럼 그 해석도 공인하지 않겠습니다. 글쟁이 입장에선 자기 해석의 타당성이 궁금하다면 다른 독자들과 의견을 교환하시라고밖에 말할 수 없군요. 그게 글읽기 후 가외의 재미이기도 하잖습니까?


 

 

오버 더 초이스 호라이즌 박스 세트이영도 저 | 황금가지
만일 죽음으로 인해 떠나보낸 소중한 이가 '부활'할 수 있다면? 이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통해, 독자들에게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이스 박 “동화에 숨겨진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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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좋아했던 동화를 성인이 되어 다시 읽고 배신감에 뒤척인 밤을 기억한다.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은 공교롭게도 같은 여성인 계모일 때가 많았고, 그녀들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왕자의 구애였다.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남은 굳센 여인의 삶을 축복하는 엔딩은 어째서 늘 혼인인 건지,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잠을 삼킨 밤이었다. 그런데  『빨간모자가 하고 싶은 말』을 읽으며 비로소 이야기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동화 속 그녀들은 사실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네가 맞닥뜨리게 될 여성의 삶에는 무수한 편견과 아픔이 있어.”


몸과 마음이 무너졌던 순간, 속에서 터져 나온 울분을 SNS에 올리며 글쓰기를 시작한 ‘조이스 박’은 삶의 고비에 등불이 되어 준 동화 속 여성들을 떠올리며 첫 번째 에세이집  『빨간모자가 하고 싶은 말』을 펴냈다. 동화 속 켜켜이 숨어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찾아낸 조이스 박의 시선을 따라가면,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가 어느새 여성의 삶으로 환원된다. 『빨간모자가 하고 싶은 말』 은 수많은 여성이 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뿌리를 내리고 가시를 틔웠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어떤 아픔이 묻어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여자로 산다는 것은 장미나무를 키우는 것과 같다. 세상은 오로지 꽃만 내보이라고 한다. 그러면 장미나무 밑에 자기 시체를 묻은 후, 울고 또 울어서 꽃을 피우는 삶을 살게 된다.
-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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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여성의 목소리 


출간 제의를 받은 지 3년 만에 나온 책이라고 들었어요. 집필 기간이 꽤 길었습니다.

 

페이스북에 쓴 글들이 호응을 받은 덕분에 여기저기서 출간 제의가 왔어요. 책을 펴낸 ‘스마트북스’ 출판사는 2년 전에 만났는데요. 제가 주로 글을 쓰는 채널이 SNS이기 때문에 특정 분야나 주제에 대한 글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문학, 영화, 영어 교육, 사회적 이슈 등 그때그때 떠오르는 관심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쓰거든요. 제가 썼던 글들 중, 책으로 엮을 만한 주제를 모색하고 원고를 다시 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요.

 

오랫동안 준비한 책인데, 출간한 소감이 어떤가요?


2006년에 첫 책을 펴낸 이후로 그동안 영어 관련 서적을 많이 썼기 때문에 책이 나온 건 낯설지 않은데, 에세이집을 내는 느낌은 확 다르더라고요. 실용서를 쓸 때는 ‘저자’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나도 작가가 된 건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제목이 『빨간모자가 하고 싶은 말』 이에요.


처음에는 ‘숲으로 가는 이야기’라고 썼어요. 동화에 나오는 숲은 인간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동화 속 주인공들이 숲으로 가는 여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숲으로 대변되는 무의식으로 하강해 깊은 상처와 조우한 뒤 어떻게 새로운 사람이 되어 돌아갈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의 책인지 짐작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빨간모자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새롭게 제목을 붙였어요. 저는 소녀가 쓴 모자의 빨간색을 사람이 가진 생의 에너지라고 봤거든요. 빨간모자를 쓰고 검은 숲으로 들어가는 소녀는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갖추고 떠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빨간모자를 쓴 소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다는 의미에요.

 

동화의 내용을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 흥미로워요. 왜 하필 동화였나요?


동화는 여성들이 드러내놓고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오랜 옛날부터 어머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예요. 그 속에 숨겨진 말들을 찾아 나누고 싶었어요. 동화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메시지가 많이 들어있거든요. 이야기가 구전됐을 당시보다, 지금 훨씬 발전한 것 같지만 사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반복되는 경우가 많아요. 흔히 아는 줄거리의 이야기이지만, 텍스트의 숲으로 들어가서 그 숲에 어떤 목소리가 숨겨져 있는지 들려주고 싶었어요.

 

 

이야기가 보듬어 준 상처들


동화를 보는 색다른 시선에 놀랐어요. 「인어공주」는 ‘사람이 두 개의 구멍으로 환원되는 이야기(143쪽)’라거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여성이 질적인 변화를 하며, 그 비밀은 영혼의 깊은 잠에 있다(103쪽)’는 등의 내용이요. 익숙한 줄거리를 남다르게 해석한 덕분에 그동안 알고 있던 동화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저는 1993년부터 한국영어영문학회 내 페미니스트 소모임에 가입해 원서로 문학작품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는 훈련을 많이 했거든요. 이야기에 대해 질문을 던진 뒤, 그 답을 찾는 방식으로 동화를 읽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모자」를 읽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나씩 해보는 거예요. ‘왜 빨간모자의 할머니는 숲에 살지?’부터 시작해서 ‘아픈 할머니의 부름에 빨간모자가 응답하고 숲으로 떠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늑대는 왜 나타나는 거지?’ 이처럼 질문을 확장해나가며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야기의 조각이 맞춰지는 때가 있어요.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라면 한 번쯤 느낄 수밖에 없는 상처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답답하고 힘들 때, 타로카드를 보듯이 책을 펼쳐 나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문장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성 독자들로부터 책을 읽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특히 「미스포츈」을 주제로 한 챕터 ‘태어날 때부터 재수가 없는 여자’와 「손 없는 소녀」를 주제로 한 챕터 ‘잘린 손을 키우는 법’을 읽으면서 함께 아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특히 많더라고요. 동화 속 주인공들의 상처를 읽으면서, 자기 내면에 있던 아픔들이 불거져 나오는 것 같아요.

 

저도 「미스포츈」의 이야기를 읽고 눈물이 났어요. ‘존재 자체가 불운 혹은 불행이라고 꼬리표가 달리는 것, 그처럼 사람의 자아감을 궁색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51쪽)’고 쓰셨죠.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들이 아니어서 축복받지 못했다’는 아픔이 대한민국 여성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부모가 나를 이렇게 키운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요. 「미스포츈」은 이 지점에서 ‘나의 아픔과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어요. 주인공 ‘미스포츈’이 자신의 추레하고 지저분한 포츈(운)에게 빵을 건네고 새 옷을 가져다주는 모습을 통해 스스로 존귀함을 키우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동화라고 생각했거든요.

 

‘여성 억압이 심한 사회에서는 여성들끼리 반목하는 정도가 더 심하다(34쪽)’는 구절이나,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계모를 통해 가부장적 구조에 억압당한 늙은 여성이 자신의 비뚤어진 에너지를 젊은 여성들에게 투사하는 것을 꼬집는 이야기도 공감하며 읽었어요. 사회생활을 할수록 여성들끼리의 연대가 참 중요하다고 느껴요.


저도 20년 넘게 사회생활을 하며 다양한 일을 겪었고, 제 또래의 일하는 여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여자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무척 많더라고요. 대학에는 출산휴가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를 가르쳤던 여자 교수님들은 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방학기간을 계산해서 임신하고, 출산을 했어요. 더군다나 제가 강의를 했던 교양영어는 전부 계약직 강사들이었기 때문에 더 눈치가 보였어요. 그 당시에 두 명의 강사가 동시에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선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애 둘씩 낳아 키우면서 집안일도 하고, 제사 지내고, 공부까지 했어. 너희는 왜 못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참 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그게 보이더라고요. 사회가 항상 여자들끼리 반목하는 구조를 만들어요.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집 바깥에서도 여자들끼리 경쟁할 수밖에 없는 뒤틀린 구조가 있는 거예요. 여자에게 시기질투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을 곡해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어공주」를 주제로 한 챕터들 중 하나인 ‘또 다른 공주이야기’도 인상 깊었어요. 덕분에 사랑에 실패한 인어공주뿐 아니라 왕자와 결혼식을 올린 이웃나라 공주까지 절절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그려졌는데, 어떤 마음으로 쓴 이야기인가요?


그 공주도 원해서 시집간 게 아닐 텐데…(웃음) 과거에는 정략결혼이 워낙 많았잖아요. 이웃나라 공주가 인어공주에게서 왕자를 빼앗은 가해자가 아니라, 원치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게 된 입장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옛날 공주들의 결혼과 초야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 굉장히 슬픈 이야기가 많거든요.

 

숲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책에 실린 주인공들은 대부분 숲으로 들어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더라고요.


인간의 문명에서 전기가 생기기 이전에는 불가를 뺀 전 세계가 캄캄한 숲이었어요. 그 시절의 숲은 인간에게 어마어마한 두려움이었죠. 맹수들이 우글거리고, 길도 알 수 없고, 생채기가 나면서 마구 헤매야 하는 곳이었으니까요. 우리에게 숲은 힐링을 위해 찾는 장소이지만, 인간의 집단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숲은 그게 아닌 거예요. 특히 동화 속에서 숲은 무의식을 대변한다고 했잖아요. 주인공들이 상처를 안고 깊은 숲, 즉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숨겨진 아픔과 조우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읽으면서 독자들도 지혜를 찾고, 달라진 자신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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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해야할 남자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는 동화 속 남자 주인공의 삶을 해석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넣은 이유가 궁금해요.


남자의 삶도 동화에서 끌어와 이야기할 부분이 많아요.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고, 그 남자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 책을 남자들이 꼭 읽었으면 싶었거든요. 그러려면 남자의 이야기도 넣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어요. (웃음) 다만 담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데, 한국에는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殺父) 모티프가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아기장수 죽이기를 통해 비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어릴 때부터 없애버리는 이야기들이 나오죠. 보통 서양의 동화, 신화에는 소년이 진정한 남자로 성장하고 혁명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를 넘어서는 내용이 많이 등장하거든요. 한국인들이 가부장적인 구조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싶었어요. 남자들에게 진짜 전하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아쉽게 이 책에는 넣지 못했어요.

 

‘답은 소년에 있더라. 앞으로 자랄 말간 남자아이들, 그리고 아직 덜 자란 어른 남자 속에 숨어 있는 남자아이들, 이 작은 모습들을 들여다보면 남자라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227쪽)’고 했어요. 아들을 키우면서 느낀 감정이 아닐까 싶었는데요.


맞아요. 저는 딸만 셋인 집에서 자라서 어릴 때부터 ‘아빠 빼고는 다 늑대’라고 교육받으며 컸어요. 남자에 대해 정말 몰랐고, 늘 경계해야 하는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했죠. 사춘기 청소년들이 부모님께 반항을 하다가, 어느 순간 ‘부모님이 내가 생각한 것만큼 큰 존재가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는 것처럼 20대의 제게는 그 반항의 대상이 남자였어요. 남자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화내고 소리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여러 남자를 사귀어보고, 아들을 키우다 보니까 ‘뭐야, 별로 대단할 게 없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

 

일종의 연민인가요? (웃음)


인간은 모두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특히 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남자라서 생기는 생물학적인 기제들이 있잖아요. 끌어 오르는 호르몬에 안절부절못하고, 육체적 힘을 과시하기 위해 옥신각신하는 또래 남자 집단에서 자기의 위계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보이거든요. 그 사이에서 이성이 새싹처럼 자라나 본인의 존재와 사랑, 권력, 삶의 가치 등을 헤아리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발견할 때면 ‘인간은 모두 힘들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남자를 이해할만한 구석이 생기는 것 같아요. (웃음)

 

남성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우선 불편하다는 남자분들이 있었고요. 어떤 분은 남녀만 바꿔놓으면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어요. 여자들이 이런 아픔을 밑에 깔고 있는지 몰랐다는 분들도 있었고요. 예상외로 남자 분들이 책을 많이 읽어주셔서 좋으면서도, 의아한 지점이 있어요. 제가 페이스북에 여성주의적 글을 쓸 때, 때로는 격하게 쓰기도 하고 때로는 재미있고 유쾌하게 쓰기도 하거든요. 그럼 재미있고 편안해 보이는 글에만 남자 분들이 주로 반응을 하세요. 그러면서 “평소에도 이렇게 기분 상하지 않게 이야기를 해주면 들어줄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남자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게끔 글을 써야 들어주겠다는 태도에 빈정이 상할 때가 있었는데, 제 책을 막상 남자 분들이 읽으시니까 ‘유하고 부드러운 말로 쓰여서 그런 건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거든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웃음)

 

 

뱀 같은 말을 하는 여자가 되다


페이스북에는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나요?


2014년에 몸이 많이 아프면서 삶의 위기가 왔어요. 10여 년간 일과 육아에만 매달려 지내다 보니 건강이 무너졌고, 그 여파로 우울증까지 생겼거든요. 일을 다 줄이고 학교 강의와 운동만 하고 지내며,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울분을 페이스북에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맨 처음 썼던 글이 쿠거(cougar: 연하의 남성과 사귀는 성공한 중년 여성을 일컫는 말)’론을 주창한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웃음) 그 글을 쓴 날 하루에 200여 명의 친구신청이 들어왔을 만큼 반응이 좋았어요. 그땐 누가 내 글을 읽는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고, 그저 내가 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쏟아냈던 말들이었기 때문에 문체는 더 과격했고, 주제는 훨씬 예민했었죠.

 

그런 시작이었다면, 글을 쓰면서 꽤 통쾌했겠네요.


아니요. 그땐 글이 모두 칼이었거든요. 글을 칼로 삼으면 가장 먼저 나를 베고 나가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그만 베자’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솔직하고 거침없는 글로 많은 팔로워가 생긴 만큼, 언쟁이 오갈 때도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여성주의적인 글들은 SNS에서 유독 심한 공격을 당하곤 하죠. 왜 그런 걸까요?


인셀(Incel)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약자인데 성관계를 원하지만, 하지 못한 이들을 일컬어요. 서구에서 발생하는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대다수가 스스로 인셀 멤버임을 밝히고, 성명을 남기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죠. 그들은 자신이 사회구조적으로 차별을 받는 바람에 왕따를 당했고, 돈이 없고, 여자도 없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 분노가 약자인 여성에게 향하는 거예요. 서구는 그게 인종차별주의로도 나타나요.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백인들 중 타인종차별주의자가 많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단일 국가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게 여자에게 쏟아지는 것 같아요. 우석훈 경제학자가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성 솔로들에게서 여성혐오가 관찰된다는 칼럼을 쓴 것을 봤는데 일견 동의해요. ‘왜 나의 못남을 나보다 약한 타인에게 투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즉흥적인 SNS 글쓰기와 책의 원고는 결이 다르잖아요. 책에 실릴 원고를 쓰는 게 힘들진 않았어요?


글쓰기 습관이 몸에 배어있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쓰고 오타 정도만 수정하거든요. 그런데 책에 실리는 글은 언제까지 마감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차근차근 다듬어야 하니까 어렵더라고요.

 

저자 서문이 ‘글을 써서 천 냥 빚 좀 갚을까 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요. 글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고등학교 때 존경하던 국어 선생님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말씀을 항상 하셨어요. 유일하게 학교 재단 세력에 타협하지 않은 선생님이었거든요. 그분을 보면서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란 저런 거구나’라고 느꼈어요. 제가 생각하는 글에 대한 책임도 이와 같아요. 자신의 말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 영어로는 ‘integrity’라고 하는데, 굉장히 좋아하는 단어예요. 제가 뱉은 말대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거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독자 한 분께서 책을 읽고 “드디어 자기 문제의 원인과 해결을 찾았다”며 벅차올라 연락을 해오셨어요. 그래서 그분께 "이건 단지 열쇠를 찾은 것뿐이에요. 그 열쇠를 들고 문을 여는 과정은 고스란히 당신의 몫으로 남아있어요."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Drink me’라고 쓰인 물약을 먹고 몸이 작아진 뒤에야 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문에 맞춰야하는 일이 독자 개개인에게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은 그저 열쇠를 찾아드린 것뿐이니,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빨간모자가 하고 싶은 말』이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이에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좋으세요?


음… 다른 건 몰라도, 천국에는 남자보다 더 쉽게 갈 것 같아요. (웃음) ‘여자로 태어난 게 천국 가기에는 좋은 조건인데?’라는 생각을 종종 해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조이스 박 저 | 스마트북스
동화를 거울로 삼아 여성이 처한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그림자를 파헤치고, 왜곡된 점을 똑바로 꼬집어본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페미니즘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하고 잘 이해시켜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한민 “저는 『불안의 책』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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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 작가는 그를 일컬어 ‘복수(複數)의 화신’이라 말했다. 120여 명의 인물을 창조해내고, 그들을 통해 서로 다른 결의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 주인공이다. 페소아 안에는 수많은 페소아들이 존재하는 까닭으로,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페소아를 페소아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김한민 작가는 자신을 지워냈다. 어떤 구심점도 지향점도 설정하지 않고, 파편화된 모습 그대로를 담아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심스럽다. 김한민의 목소리를 떨쳐내고, 김한민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지 말라고 주문한다. 진정으로 페소아를 만나고 싶다면 그가 남긴 작품과 직접 만나야 한다고, 작가는 말했다.

 

『페소아 :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複數의 화신』  (이하 『페소아』)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네 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국내 최대 인문기행 프로젝트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내 인생의 거장을 만나는 특별한 여행’이라는 컨셉으로, 우리 시대 전문가 100인이 거장을 찾아 떠나는 특별한 기록을 선보인다. 황광수 평론가가 셰익스피어의 자취를 따라 걸었고, 정치사회철학자 이진우가 니체를 만나러 알프스와 지중해로 떠났다. 전원경 인제대학교 교수와 『클림트』 , 유윤종 <월간 SPO> 편집장과 푸치니의 이야기도 출간됐다. 이들의 기록은 팟캐스트 <김태훈의 책보다 여행>을 통해서 엿볼 수 있고, 강연과 여행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

 

김한민 작가는 『유리피데스에게』 를 시작으로 『웅고와 분홍돌고래』 , 『카페 림보』 , 『사뿐 사뿐 따삐르』 , 『그림 여행을 권함』 , 『비수기의 전문가들』 , 『STOP!』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예리하게 현실을 파고드는 이야기로 성인 독자들을 사로잡는 동시에, 자연과 동물을 그린 작품으로 어린이들과 호흡해 왔다. 지난 9일, 신촌에 위치한 위트앤시니컬에서 김한민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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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조금은 페소아가 아닐까


요즘 ‘씨 셰퍼드(해양 생물 보호 단체, Sea Shepherd Conservation Society)’ 활동 때문에 바쁘시죠?

 

네, 지난 토요일에 ‘동축반축(동물축제 반대축제)’이 있었어요. 영장류 연구하는 저희 형과 같이 기획한 축제였고요. 다행히 날씨가 받쳐줘서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최근에는 동물권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이슈가 되고,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요.


네, 관심이 정말 많더라고요. 막상 해보면 여전히 소수 이슈라는 건 느껴지는데요. 옛날 같은 소수는 아닌 것 같아요. 점점 퍼지는 소수라고 할까요.

 

‘동축반축’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지금은 작가로서는 대충 하고 있는 것 같고(웃음), 환경운동을 엄청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고민도 하세요?


아뇨. 그냥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중요한 일을 그때그때 해왔는데, 지금은 환경과 동물이 훨씬 중요해요. 몇 년 전만 해도 저한테 페소아가 전부였고, 여전히 중요하기는 해요. 그렇지만 우선순위라는 건 항상 바뀌는 거니까요.

 

놀라운 소식은 아닌 것 같아요. 계속 작품 안에서 동물과 환경 이야기를 하셨으니까요.


저는 되게 다행스러워요. 그런데 멀리서 보는 사람은 페소아라는 시인에서 갑자기 환경, 동물 이야기로 옮겨간 걸로 볼 수 있겠죠. 그런데 페소아도 굉장히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페소아와 작가님 사이에 닮은 지점이 있다고 느끼세요?


그럼요. 스타일에 대한 다양성, 정체성의 다양성이라는 두 가지 점에서 그런 것 같아요. 제 책들을 보면 그림 스타일이 다 다르잖아요. 매번 다른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이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도 몇 번 했어요. 보통은 자기 스타일을 굳건히 하고, 그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는 게 더 유리하잖아요. 그림을 봤을 때 어떤 작가의 그림인지 알 수 있으면 여러 가지로 편해지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페소아를 보고 나서 ‘이게 나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정체성과 관련해서는 어떤가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최소한 세 개는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일할 때의 나와 사생활에서의 내가 다르고, 연애할 때의 내 모습도 다를 수 있죠. 그게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그럴 때 이걸 고쳐야 되나 싶은 생각도 드는데요. 페소아는 저 우주처럼 복수가 되라고 말하잖아요.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은 복수가 되어서 완전히 폭발시키라고 말하고 있고, 본인은 거의 폭발시켰죠. 그래서 힘들기도 했지만 인문학사상 전례가 드문 작가가 나온 거고요. 페소아를 보면서 스타일과 정체성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걸 많이 배웠어요. 페소아한테서 많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페소아는 자기 안의 다양한 모습을 각각 분리해서 인격화했잖아요. 그래서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걸 통합해야 된다는 게 우리의 고민이고 갈등이니까요.


맞아요. 페소아도 통합의 의지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하나로 통일시켜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필요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거나 강박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다르게 말하면, 통합의 의지보다 다양성에의 욕구나 의지가 더 강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더 마음이 편했다기보다는, 자칫 정신분열이나 자아분열증적인 증세가 될 수 있었는데도 ‘약’으로 돌리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독’도 있었어요.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걸 문학뿐만 아니라 많은 양의 술과 담배로 달랬던 것 같아요. 페소아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확증을 할 수 없지만요.

 

페소아 본인도 ‘내가 정신병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면서요?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요. 흥미로운 사실이었어요.


자신에게 정신이상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함께 살았던 할머니도 늙으면서 가벼운 증세들을 보였는데, 그걸 보면서 자신에게 실제로 의학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죠. 페소아는 엄청 공부벌레였기 때문에 혼자 조금 고민해 보는 정도가 아니라 온갖 문헌들을 찾아봤어요. 정신병리학, 임상학, 심리학, 어떤 것이든 찾아서 읽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조금 놓은 것 같아요. 미쳤으면 미치는 거지, 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리스본에서 만난 페소아


공부벌레라는 점에서도 페소아와 닮지 않았나요(웃음)? 그림도 그리시고, 소설도 쓰시고, 번역도 하시고, 해양 과학과 관련해서 공부도 하셨잖아요.


해양 과학 공부는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했죠. 바다 속 환경은 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내가 다이버가 되든 뭐가 되든 엄청나게 공부를 해야 돼요. 그래서 나름대로 조금 공부를 했는데요. 페소아는 저보다 훨씬 더 심했어요.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도 거의 2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잖아요. 아마 선생님들보다 더 똑똑했던 것 같아요. 웬만한 교수들보다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봤고, 언어도 더 잘하고, 시도 더 잘 쓰고, 그러니 특별히 뭘 더 얻었겠어요. 일기를 보면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학교를 그만둔 후에 공부는 더 열심히 했죠.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주위 문인들한테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페소아는 굉장한 공부벌레여서 여러 분야에서 해박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파리에서 페소아의 장서 목록을 가지고 전시회를 했는데, 그 정도로 책도 굉장히 많이 봤어요.

 

그 전시회에 대해서는 ‘굳이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웃음).


저는 웃겼어요. 페소아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저처럼 페소아를 공부하는 사람은 되게 궁금하죠. 그렇다고 그 사람이 읽었던 책을 다른 나라로 옮기면서까지 전시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박물관에 있는 건 괜찮지만요. 한국의 경우에는 페소아가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니까 정보들이 부족한 실정이지만 유럽에서는, 특히 프랑스나 포르투갈 같은 곳에서는, 페소아의 너무 작은 것까지 다 알 정도예요. 워낙 유명한 작가가 돼서 너무 사사로운 것까지 다 출판되거든요. 저도 작가이지만, 제가 쓴 잡글까지 다 출판된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오해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작가한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본인은 원치 않을 수도 있고요.


네. 그리고 페소아는 굉장히, 굉장히, 완벽주의자잖아요. 특히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시와 작품에 대해서 그렇죠. 어느 정도였냐 하면, 시에 날짜 붙이는 걸 싫어했어요. 시라는 건 영원성이 있어야 되는 거라서, 어떤 시간적인 한계에 규제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시에 날짜가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을 만큼, 그 정도로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러니 자기가 그냥 휘갈겨 쓴 노트까지 출판된다는 건 페소아가 용납하지 않았을 일인데... 물론 책임은 페소아한테 있어요. 그걸 하나도 안 버리고 다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자기가 대단한 작가가 될 걸 알고 있었어요. 어쨌든 많은 연구자들이 너무 많은 걸 노출시킨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어쩔 수 없죠. 대작가가 된 운명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죠.

 

대부분의 작품이 파편화된 상태로 남아있는 것도, 완벽주의적인 성향 때문이죠?


그렇죠. 그리고 페소아는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생각들을 하나로 통합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걸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보니까, 여기저기에 써놓았던 거예요. 아마 디지털 시대에 살았다면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기는 해요. 우리도 노트, 스마트폰, 노트북, 데스크탑 등 다양한 곳에 기록하잖아요. 그렇게 엄청나게 쓴 거죠. 그때는 그런 디바이스는 없었지만 카페에 있는 작은 종이 위에 쓰기도 하고, 컵 받침대에 쓰기도 하고요. 그런 게 굉장히 많죠.

 

지금 시대에 페소아가 살았다면, 작품마다 다른 방식으로 창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영상도 만들고요.

 
맞아요. 멀티 아티스트가 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죠. 페소아는 디바이스가 필요 없었던 사람인 거예요. 지금 우리가 증강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페소아는 그런 디바이스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현실을 증강시킬 수 있는 거죠. 지금 시대에 살았다면 인터넷 디바이스와 완전히 끊고 굉장히 외골수 같은 길을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둘 중에 하나였을 것 같아요. 중간은 없었을 것 같아요. 조금 극단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니까.

 

포르투갈에는 얼마나 머무셨어요?


4년 조금 넘게 있었는데요. 그 사이에 프랑스에도 오래 체류했기 때문에 3년 반 정도 될 것 같아요.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어요. 그런 걸 안 하는 편이라.

 

『페소아』  집필 제안을 받고 떠나신 건가요?


아니에요. 이미 포르투갈에 가 있었어요. 페소아를 연구해보고 시를 읽고 싶어서 갔던 건데, 중간쯤에 제안을 받았어요. 4년 정도 머무르면서 반은 포르투에 있었고 나머지 2년은 리스본에 있었는데요. 리스본에 있었을 때 제안을 받았어요.

 

이전에도 포르투갈에 가셨었나요?

한 번도 없었어요. 페소아는 그 전부터 좋아했지만, 저는 원래 아프리카에 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저희 형이 포르투갈 여행을 다녀왔어요. 대화를 하면서 포르투갈이 굉장히 다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흔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거의 스페인의 속국처럼 생각하는 건데, 어쩌면 유럽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리스본에 다녀온 저희 형이 여기는 스페인과 너무 다르다고, 오히려 저한테 잘 맞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가봤죠. 처음에는 형이랑 같이 갔어요. 그때 대학의 교수님들도 만났고, 페소아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갑자기 동양에서 페소아를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그랬겠죠.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어요.

 

리스본에 가지 않고 한국에만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페소아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을까요?


물론이죠. 굉장히 달랐겠죠. 일단 한국에 있을 때 저는 포르투갈어를 전혀 못했어요.

 

단시간 내에 배우셨네요?


비교적 단시간이긴 한데, 제가 스페인어에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덜 부담스럽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해를 하면 안 되는 게, 포르투갈어랑 스페인어가 닮아있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달라요. 처음에 갔을 때는 읽기만 조금 읽고 말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수업시간에도 진짜 고생 많이 했죠. 그런데 몇 개월 지나니까 빨리 배울 수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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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는 항상 ‘사이’에 있어요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게 페소아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됐나요?


페소아를 위해서 포르투갈어를 배운 거죠. 이 사람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봐요. 나도 작가이고 책을 쓰지만, 나를 읽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울 사람이 있을까. 아마 페소아는 저 말고도 그런 사람이 되게 많을 거예요. 언어 하나를 통째로 배울 만큼의 가치가 있는 세계인 거죠. 저도 ‘이 시인은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페소아가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자신이 만든 잡지를 두고 한 이야기인데요. ‘포르투갈은 그곳의 풍경과 이 잡지만으로도 알 가치가 있다’고 했죠.

 

이번 책에서 ‘페소아 되기’를 시도하셨는데요. ‘이런 점에서만큼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페소아는 못 되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부분도 있어요?


올해 출간될 예정인 페소아의 시선집이 있는데, 사실 저는 그 책이 먼저 나왔으면 했어요. 작품을 먼저 알고 작가한테 가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쨌든 그 시선집에 「해상송시」라는 작품이 나오는데요. 900행이 넘는 엄청난 시예요. 저는 그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어요. 주의가 산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읽기만 해도 몇 시간이 걸려요. 그러면 쓰는 건 어땠겠어요? 페소아 본인은 그런 엄청난 대작을 한 번에 썼다고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런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는 건 엄청난 일인 것 같아요. 그런 건 제가 범접할 수도 없고, 상상으로도 하기 힘들어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썼을까 싶죠.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어떤가요?


페소아는 상당히 내성적이었죠. 연재 한 번 제대로 못 해봤을 정도로요. 저는 성격상 그렇지는 않고요. 어떻게 보면, 페소아도 내성적이지만은 않았어요. 발언을 해야 될 때는 굉장히 용감했죠. 소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용감하게 나서서 독재정권을 상대로 용기 있는 발언을 한 경우도 있었고요. 페소아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찾다 보면 결국은 어딘가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만나게 돼요(웃음).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시킨다면 소심한 면, 대담한 면, 당찬 면, 소극적인 면, 모든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페소아가 자기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점은, 우리한테도 다 그런 씨앗이 있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죠. 너무나 많은 공통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데, 그걸 스스로 억압하느냐 페소아처럼 해방시키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페소아는 일관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잖아요. 말을 바꾸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요. 자료를 찾다 보면 화나거나 지칠 때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맞아요. 그래서 페소아를 공부하다 보면, 페소아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웬만하면 단정을 하지 않고 결론을 유보하는 약간의 요령이 생겨요. 다른 부분은 ‘사람의 생각은 어차피 변하기 마련이니까’ 하고 넘길 수도 있는데, 두 가지 점에 있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어떤 건가요?


첫 번째는 정치적인 입장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감각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거예요. 그런 문제들과 관련해서 계속 상반된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짜증이 나거나 혼란스럽죠(웃음). 예를 들면 노예제에 관해서 페소아의 입장을 정리해 보고 싶은데 찬성과 반대 의견이 똑같이 나와 있는 거예요. 감각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이야기를 보면 ‘감각적인 것을 굉장히 중시하는 것’, ‘흔히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립되는 것으로써 감각적인 것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 감각주의라고 생각돼요. 그러다가도 오히려 감각적, 감성적, 감상적인 모든 걸 배제하는 게 감각주의 같기도 하거든요. 감각주의는 페소아한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라 한쪽으로 치우고 넘어갈 수도 없는데, 그렇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본인이 여기에서 이야기한 것과 저기에서 이야기한 게 달라요. 게다가 극적인 요소까지 넣어서 ‘캄푸스’는 이 이야기를 하게 만들고 ‘카에이루’는 저 이야기를 하게 만들기도 하고요(웃음). 어떤 때에는 의도성까지 있어요.

 

‘페소아를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으셨겠어요.


제일 좋은 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연구자는 가능한 한 그것들을 하나로 정리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가 중요하고요. 신진 연구자 같은 경우에는 그 안에서도 어떤 일관성을 발견해서 정리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그 사이에서 페소아가 보이겠죠. 제가 산문집 『페르난두 페소아 : 페소아와 페소아들』의 후기에도 썼지만, 페소아는 항상 어디와 어디의 사이에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그래도 어느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느냐’고 질문할 수 있는데,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아요. 명확하지 않아요. 그 조차도 페소아가 이야기해주는 거죠. ‘사람은 사실 명확해 보여도 그렇지 않아’라고.

 

작가님께서 엮으신 페소아의 시선집이 올해 안에 출간될 예정이죠?


네, 올해는 무조건 나올 거예요. 문학과지성사와 워크룸프레스에서 두 권이 나와요.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올 책은 페소아의 본명에 집중해 있고요. 워크룸프레스의 책은 페소아의 이명들에 집중해 있어요. 각기 다르죠.

 

 

저를 지워내고 싶었어요


우리나라에서 페소아가 대중적으로 알려진지 얼마 안 됐잖아요. 초기에 어떤 모습으로 소개하는지가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요. 제가 번역자나 학자였다면 달랐을 것 같은데, 저는 작가잖아요. 그러니까 저만의 색깔이 강한 편이기는 한데요. 시인이 시인을 소개하거나 작가가 작가를 소개하는 경우를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 재밌기는 한데, 확실히 연구자가 아니다 보니까 ‘내가 본 페소아’가 더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걸 처음부터 굉장히 의식했고 배제하고 싶었어요. 페소아가 셰익스피어처럼 이미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면, 제 색깔대로 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굉장히 학자적이고 번역자적인 자세로 페소아를 대했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객관화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좋게 말하면 굉장히 겸손한 자세로 했던 거죠. 저를 내세우기보다.

 

나중에는 ‘김한민이 본 페소아’도 만날 수 있을까요?


후속 연구나 번역이 더 많이 나와서 어느 정도 안정기를 이룰 때, 진짜 독창적인 ‘나만의 페소아관’ 같은 걸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현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굉장히 많은 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조금 합의하는 부분들, 팩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들 위주로 담았다는 거예요. 그래도 제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건 ‘최대한 균형 잡힌 페소아 소개’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죠.

 

“이 책은 페소아를 찾아 떠난 기행문이라기보다 ‘체류문’에 가깝다.”고 쓰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첫 번째 의미는, 저는 여행하는 걸 안 좋아해요.

 

정말요? 페소아와 달리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웃음).


아니에요. 페소아와 거의 비슷한 정도인 것 같아요(웃음). 저는 여행하는 걸 귀찮아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그냥 그 도시에 계속 있고 싶지, 뭘 보고 싶은 게 별로 없어요. 여행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여행기를 썼다고 말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림 여행에 관해서 책을 쓰기는 했지만 그건 조금 특수한 거고요. 점점 더 여행을 안 좋아하고 있는 중이에요(웃음). 그런데 체류는 좋아해요. 그래서 체류문에 가깝다고 썼어요. 오해가 없어야 될 것 같았거든요. 여행기라고 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어디를 가보고, 페소아의 발자취를 쫓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회의가 있어요. 페소아에게 영향을 받아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페소아가 갖고 있던 여행의 무용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여행이 무용하니까 자동적으로 여행기 자체는 거의 무용에 가깝게 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그 부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죠.

 

결국은 페소아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셨어요(웃음).


그런 셈이죠. 저는 언어가 더 중요하기는 했지만요. 그걸 막을 필요는 당연히 없는 거고,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죠. 어쨌든 이 책은 체류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해요. ‘리카르두 레이스’도 그렇게 말했어요. 자기가 거짓말을 싫어하는 이유는 윤리적인 게 아니라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저도 그래요. 정확하지 않은 말 되게 싫어해요. 그래서 한사코 체류기라고 적어놨는데, 실제로도 그랬어요. 계속 리스본에 있었으니까요. 완전히 다르거든요. 리스본에 한 번 들러서 설레는 마음으로 에그타르트를 먹는 심정과, 체류하면서 이민국에 가고 언어를 배우는 심정은.

 

여행 때마다 그림 도구를 가지고 가시잖아요. 포르투갈에도 챙겨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책 속에 작가님의 그림이 없어요. 왜 안 넣으셨어요?


페소아에 대해서 한 번 그린 적은 있었어요. 누가 부탁을 해서 잡지에 그렸었는데요. 제가 리스본에 살았기 때문에 페소아를 그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페소아에 관한 온갖 기념품들이 너무 많거든요. 중절모, 동그란 안경, 콧수염, 나비넥타이, 그게 너무나 아이콘화 되어서 지겨웠어요. 그런데 그걸 빼고 페소아를 그리는 것도 쉽지 않고. 저는 별로 페소아 자체를 그린 적이 없어요. 리스본에서 그린 그림들의 대부분은 『비수기의 전문가들』에 나왔죠. 페소아의 심상, 시상에 젖어서 그린 건 많아요. 그렇지만 나도 중절모를 그리거나 중절모를 조금 다르게 그리는 거엔 별로 의미를 못 찾았어요.

 

지금은 어떠세요?

 

이제는 서울에 왔기 때문에 아이콘화 된 페소아의 기호조차 그리워서 그리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전혀 그런 게 배고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배가 불렀죠. 포만감을 넘어서 지겨웠기 때문에 똑같은 거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결국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책에서 가능한 저를 지워내고 싶었거든요. 어쨌든 김한민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페소아에 더 주목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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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불안의 책』 을 모르겠어요


『불안의 책』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죠. 누군가 한 줄 평을 묻는다면 “내게는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책’이었다”고 답하실 거라고요.


잠 못 드는 밤에 쓰일 수 있는 책이고요. 잠 못 드는 밤을 달래줄 수 있는 책이에요. 잠 못 드는 밤에 가장 읽기 좋은 책이고. 실제로 페소아가 ‘수아르스’로 빙의돼서 밤마다 쓰기도 했죠. 밤이랑 되게 어울리는 책이에요. 밤과 새벽. 그래서 제가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책’이라고 썼는데요. 그게 『불안의 책』을 폭력적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아요. 다양하고 파편화되고 너무나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책이잖아요. 만약 ‘불안의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해 주세요’라고 물어봤다면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책입니다’라고 한 마디를 했을 것 같아요(웃음). 사실 『불안의 책』  번역 제안을 몇 번 받았는데, 고민 중이에요. 이미 여러 권이 나왔고, 물론 포르투갈어 번역은 한 권밖에 없지만, 이걸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한다면 제목도 조금 바꾸고 싶기는 해요. ‘잠 못 드는 밤의 책’이라든지. 아직은 모르겠어요.

 

『불안의 책』 과 페소아를 ‘폭력적으로 환원시켜서’ 말하는 걸 보신 적도 있어요?


있죠. 저도 들은 이야기이지만, 『불안의 책』을 보고 ‘너무 스위트하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속된 말로 ‘허걱’ 했거든요. 왜냐하면 이 책에는 굉장히 까칠하고, 되게 날카롭고, 거의 준엄할 정도의 비판도 들어 있잖아요. 스위트하다는 말과 반대로 ‘굉장히 웅장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도 될까 싶어요. 제가 볼 때  『불안의 책』에 대해 설명할 때 제일 자연스러운 반응은, 제가 정답을 제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누가 물어봤을 때 ‘음...’이 적당한 표현이에요. 할 말을 찾는 거죠. 『파우스트』도 그렇고 바이블도 그렇고 금강경도 그렇고,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너무 가볍게 이야기하는 건 걸작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잖아요. 어떤 때는 걸작이나 경전에 조금 더 가볍게 접근할 필요도 있겠죠. 그렇지만 저는 그 풍부한 걸 하나의 말로 환원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사실 『불안의 책』  몰라요. 제가 어떻게 『불안의 책』을 알겠어요.

 

『불안의 책』과 관련된 챕터에는 파편화된 글을 실으셨어요.  『불안의 책』의 형식이 그렇듯이요.


편집자 분들 사이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어요. 읽기 좋게 해야 되는 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저는 웬만하면 그냥 살리자고 했어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는  『불안의 책』  모르겠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그 책에 대해서 제가 해설자인 양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저도 파편화되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죠. 그런 면에서 그냥 정직하게 쓴 것 같아요.

 

‘그래서 페소아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도 대답은 같겠네요. ‘모르겠어요’라고 답하실까요?


그렇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걸 이야기한다면’ 하고 말하겠죠. 페소아를 1년 정도 공부했을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와서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가졌어요. 그때 제가 한 이야기 다 후회해요. 그 이후로 달라진 것도 있거든요. 진짜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점점 그런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요. 이번 주에도 그런 시간이 있는 것 같은데(웃음), 가능한 1인칭으로 말하고 싶어요. ‘나는 이렇게 느꼈다’고 말할 수는 있잖아요. 불경에 보면 항상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는데, 저는 그 문장으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어요. 페소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게 조심스럽고 싶고요. 이 책이 제 부담을 덜어줬으면 좋겠어요. 페소아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안 해도 될 거잖아요. 어차피 사람들이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처럼 페소아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상태에서는 약간 부담이 있고 신경을 쓰는 거죠. 페소아를 아끼고 사랑하는 입장에서 가능한 한 잘 소개하고 싶은 심정이 있어요.

 

이번 책을 쓰실 때 어떤 마음이셨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페소아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나는 이렇게 봤다’는 이야기를 하신 거 아닐까요?


맞아요. 제가 꼭 말하고 싶은 건 이 책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앞으로 나올 페소아의 산문, 이미 나와 있는 『불안의 책』 , 곧 나올 시선집까지 반드시 도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페소아 읽기’가 최소한 시작되는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페소아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고 ‘이런 사람이구나’ 단정하지도 말고, 제 말을 믿지도 말고요(웃음). 페소아를 직접 확인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페소아김한민 저 | arte(아르테)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떠나 수년간 그곳에 체류하면서, 리스본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작가를, 하나이자 여럿인 이 신비로운 인물을 깊숙이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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