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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늘 사람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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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소설가는 자신을 ‘소포모어 징크스’라 불러 달라고 했다.  『쇼코의 미소』  이후 2년, 단편과 중편 소설을 모두 합해 11편을 쓰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두 번째 소설집을 생각하면 무서워서 눈을 꽉 감았다. 내면에서는 두려워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써야 한다는 마음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다. 그 가운데 펴낸 『내게 무해한 사람』  은 최은영이 쓸 수 있는 최선의 소설이었다.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많은 사람 중에 최은영이 있다. 순한 눈망울로 지금 맺고 있는 관계와 이미 떠나버린 관계를 되새김질하는 소설가의 노력은 그가 만드는 이야기에 투영된다. 십삼 년 전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을 만나 자기가 아프게 했던 사람을 떠올리고(「그 여름」), 관대한 사람에게 ‘네가 뭘 아냐’고 상처를 자랑한 순간을 기록하며(「모래로 지은 집」), 눈빛으로 했던 가혹한 말을 고백하고 걸어 나간다(「고백」). ‘눈물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반성과 함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주하는 그때의 마음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상처 주고 상처받았던 시절로 끌려간다. 마치 소설가 최은영이 자기가 쓴 글에 붙들려 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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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도 더 잘 쓸 수는 없을 거예요


2년 만에 단편집이 나왔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쇼코의 미소』  이후 단편 소설 8편, 중편 소설 3편을 썼어요. 계속 글을 쓰면서 보냈네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되더라고요. (웃음) 청탁을 거절하지 못 해서 다 받았는데 마감 펑크만 안 냈다 뿐이지 망한 적이 많았어요.


제목이 ‘내게 무해한 사람’이에요.


거의 마지막 교정 볼 때까지 제목이 없었어요. 마지막 교정지를 보면서 몇 개 골라 의견을 모았는데 ‘내게 무해한 사람’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어요.


다른 후보는 뭐가 있었나요?


‘지나가는 밤’이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요. 처음에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호기심을 덜 끌 거라는 출판사 직원분들의 말에 수긍했어요. 정하고 보니 작품에서 다 무해한 사람들, 상처받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독자 리뷰는 찾아보셨어요?


저 자신에게 확신이 없으니까 제대로 된 책인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불안에 떨면서도 리뷰를 찾아보고, 그렇게 2주를 보냈어요.


작가님은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부담이 하나 더 있었을 거예요.


그게 제 이름이에요. 제 이름으로 저장해 두세요. (웃음) 2년 동안 그 이름으로 살았어요. 『내게 무해한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 너무 무서웠어요.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서 인터넷에 ‘뉴질랜드 이민’을 검색해 보기도 하고요. 첫 번째 책이 너무 잘돼서 힘들다는 이야기는 공감 받을만한 이야기도 아니잖아요. 어디에 말도 못 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작업실에 가다가도 두 번째 책을 생각하면 눈을 꽉 감았어요.


이제는 책이 나왔으니까 마음을 좀 놓으셨겠어요.


내기 전보다는 훨씬 부담이 덜해요. 다시 돌아가도 더 잘 쓸 수는 없을 거예요.

 

 

늘 사람 생각을 해요


작가의 조각들이 소설에 들어가게 마련이잖아요. 이번에는 어떤 단편이 제일 작가님을 닮은 것 같나요?

 

「모래의 집」에 나오는 선미가 잘 모르면서 상대방을 판단하는데, 그런 모습이 어렸을 때 제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상대를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괜히 자기 자신한테 믿음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은 더 쉽게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모습에서 제 모습이 비쳤어요.


주로 80년대 태어난 사람이 회상한 1990년대-2000년대의 모습이 들어가 있어요.


그 시기가 무의식적으로 나오더라고요. 매번 비슷한 걸 쓰게 되니까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또 쓰게 되고요. 지적인 글쓰기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쓰는 편이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쓸 때는 제어할 수 없어요. 그냥 쓰다 보면 글이 저를 데리고 가요. ‘넌 내거야!’ 하면서 끌고 가야 하는데, 그런 기운이 없어서 대부분 글이 저를 끌고 갔어요.


사람 사이, 그것도 특히 친구 사이의 관계를 위주로 생각하신다는 느낌이었어요.


첫 번째 책을 냈을 때 사람들이 저보고 관계를 중시하는 글을 썼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그렇구나 생각했어요. 제가 정도 많고 사랑도 많은데 미숙해서 상처도 많이 주고 후회도 많이 하다 보니 늘 사람 생각을 해요. 글을 쓰기 전에도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요즘은 사람을 새로 사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힘들어서일까요?


어찌됐든 사랑하고 애착이 생기고 나서 헤어지면 가슴 아프잖아요. 친구가 안 좋다 하면 제가 영향을 많이 받고요. 그런 부분 때문에 관계에 대한 글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순간들이 있어요. 셋이 모였을 때 항상 하나가 소외 당하는 느낌이라던가요. 그런 찰나를 잘 포착하시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사람 사이를 관찰했다는 기분이 들어요.


사람을 사귈 때 대부분 제가 더 많이 좋아해요. 갑인 사람들은 자기가 노력 안 해도 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데, 관계에서 을인 사람들은 항상 더 많이 볼 수 있어요. 을들은 항상 모든 걸 의미화하는 특징이 있잖아요. 항상 상대방이 무슨 의미로 저렇게 행동했을까 생각하는 ‘의미병’에 걸려 있다 보니 관찰을 많이 했던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는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127쪽)처럼, 관계 안에서 덜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힐 때도 있어요.


아마도, 사랑을 받아본 만큼 할 수 있을 거예요. 자기가 아무리 관대해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생겨요. 그게 타고난 인성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서 방어 기제를 만드는 건데, 그랬을 때 우리는 너무 쉽게 저 사람 너무 꼬였다고 생각해 버리잖아요. 결과적으로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경쟁이 심한 사회에 살다 보면 사람은 어느 정도 다 꼬여 있을 거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서로 힘들게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고요.


이 문장이 좋았어요.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180쪽)’. 작가님도 자신의 고통을 의심하는 순간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되게 심했어요. 항상 세상에 저보다 고통 받는 사람, 극단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이 많은데 고작 이런 거 가지고 징징대냐고 스스로 가혹하게 대했던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저 자신의 괴로움을 스스로 공감하면 자기 연민이 아닌지 반성하고요. 그렇게 자기한테 박하게 하다 보면 다른 사람한테도 충분히 박하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속으로 ‘저 사람은 왜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저러지?’ 하면서요. 그게 어른스럽고 쿨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아직도 저를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혹하진 말아야겠다고 이제야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여성 분들이 자기 검열이 심한 편이잖아요.


특히 예술 쪽의 여성분들은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는 제 친구가 남자 작가들은 ‘내 작품의 의미는 이거야!’ 하면서 강하게 나간다면 여성 작가들은 오만 가지를 생각하는 자기 검열 때문에 창작을 못 하는 기제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아마도 많은 예비 작가들이 그것 때문에 초고를 쓰지 못해서 포기할 것 같아요. 저도 완벽한 글에 대한 강박 때문에 그런 시기를 겪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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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기억에 남는다


다들 복닥거리면서 서로 상처주는데, 모두가 모두를 박해하는 체제 안에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 때가 있어요.


더 거대한 억압을 하는 존재들이 있죠. 거기에 할 수 없이 적응하려고 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게 되고요. 슬프지만 저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사람으로 태어나면 다른 사람과 치고박고 상처 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서는 굳이 안 받아도 될 상처, 굳이 안 줘도 될 상처를 줄 때가 너무 많아요. 그냥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하면 끝나는 일을 그 사람 자체에 대해 비난을 하면서 편견을 학습하잖아요.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런 것들을 비판 의식 없이 흡수해버리면 가해자의 길로 가버린다고 생각해요.


사회 안의 차별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세요?


특히 한국은 소수자에게 잔인한 사회라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어른이고 평소에는 관대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어도,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온다고 하면 반대 서명을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을 그 사람 자체의 인성 문제로 비난할 수도 없고요. 이미 사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은 채로 바빠서 다른 사람을 세심하게 신경 쓰고 살 수 없는 사회 속에 있으면 어려워요.


「그 여름」과 「고백」 에서 여성 동성애자가 등장했던 이유는, 목소리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의미였을까요?


대변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소재로 써야겠다고 작정하고 쓰는 게 아니라 어렴풋하게 와서 스케치로 시작하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저한테는 자연스러웠어요. 의도를 가지고 이걸 써야겠다고 한 적도 있는데, 그렇게는 글이 안 써지더라고요.


전작 「미카엘라」에서는 광화문의 세월호 농성장이 나오기도 했어요.


그 소설도 처음에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엄마와 그런 엄마가 짜증 나는 딸의 관계에 관해 쓰려고 했는데, 엄마가 광화문으로 가더라고요. 그래서 혼란스러웠어요.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고, 함부로 쓰면 안 되잖아요. 엄마가 갑자기 광화문으로 가는데 너무 당황스럽더라고요. 그걸 제가 막을 수도 없었고요.


실제 일어난 사건이나 피해자가 있는 상황을 글에 녹일 때 고민하게 될 것 같아요.


소설이라는 장르가 내가 겪지 않은 일, 내가 당사자가 아닌 일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 잘 써야 하고요. 그럼 너무 위험하니까 쓰지 말아야 하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또 마음속에서는 그래도 써야 한다는 두 개의 목소리가 항상 있어요.


차별에 이야기로 맞서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소설이나 이야기가 차별에 맞서는 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항상 우리 몸 안에 갇혀 있는데,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 볼 수 있어요. 그 대상이 되어 감정을 느끼는 게 머리로 차별은 잘못된 거라고 익힌 것보다 훨씬 힘이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남지 않아도 감정은 기억에 남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렸을 때 영화를 많이 봤는데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것,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은 것이고, 어떤 관계에서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학교에서 많이 배웠다고 한 분들은 별로 없더라고요. (웃음) 작가님 소설에 등장하는 학교 선생님들도 대개 학생을 핍박하는 존재로 그려져요.


학교에서 배우는 건 너희가 어떤 경우를 당해도 너희를 보호해줄 어른은 없다는 것 정도였어요. 그래서 어른들에게 약간 체념하게 됐어요. 세상 어디엔가는 좋은 어른들이 있을 거라는 꿈을 꿨지만, 아니더라고요. 저부터가 좋은 어른이 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요.


어른들에게 배울 수 없다면, 좋은 관계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많은 사람과 한꺼번에 깊고 좋은 관계를 오래 맺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사람들 관계가 깊어지려면 싸움도 하면서 서로의 바닥을 보여줘야 건강한 관계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도 맞아요. 하지만 상처 입은 상태로 이어지는 관계는 피하고 싶어요. 적어도 사람 사이, 인간적인 관계에서는 상처 주지 않고 사회에서 받지 못하는 것들을 주고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원체 말보다는 글을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소설 속 등장인물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대신 편지를 많이 써요.


제가 말주변이 원체 없어서 횡설수설해요. 하고 싶은 말은 A인데 하고 나면 B가 될 때가 많고요. 말을 못 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쓰니까 말로 인터뷰할 일이 생기네요. (웃음) 글을 쓰면 시간을 들여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훨씬 편하게 느껴져요. 말로 할 때는 제가 부족한 게 너무 느껴지고 혼란스러운데 글로 쓰면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 들어요.


서른에 등단했어요. 어릴 때부터 소설을 썼던 사람의 소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에요.


일찍 등단한 사람들 보면 확실히 다르죠. 반짝이는 재능이 느껴져요. 저는 어찌 됐든 제 소설이 약간 심심하고 유려하지 못한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몰랐어요. 다른 분들이 글을 쓰는 방법을 발견해서 키워왔던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 아쉽기는 한데, 어찌 보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습작하던 시절에 저는 다른 걸 했으니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등단하고 나서 혼란에 빠져서 제 안에 재고가 없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어요.


요새는 채워야겠다는 느낌이 드나요?


항상 저는 뭐가 없다고 생각해요. 평상시에도 문학을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쓸까 너무 두려웠는데, 쓰게 되면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나오더라고요. 그랬기 때문에 요즘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요. 이제까지 너무 교만했어요. 어떻게 매번 잘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명작은 못 써도 망작을 많이 써야 좋은 것도 쓰겠죠. 이번에도 못 썼구나, 망신 당하고 또 쓰려고요.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저 | 문학동네
과거는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치에서 끊임없이 재조정되며 기억을 마주한다는 건 미련이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강원국 “베스트셀러 쓰는 법? 독자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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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을 두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나도 글이 쓰고 싶어졌다”다. 한 독자는 “잘 팔리는 글쓰기 책은 희망보다 절망의 도구”라고  『강원국의 글쓰기』를 평했는데, 이것 또한 큰 상찬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 덕분에 주 5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책만 읽고 있으려니 손이 간질간질했다. 일로 하는 글쓰기 외의 글이 몹시 쓰고 싶어졌다. 당장 블로그를 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평소 쓰지 않는 친절한 문체로, 하지만 특정 독자층을 상상하면서.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회장님의 글쓰기』로 소위 대박이 났다. 강연만 해도 충분히 먹고 남을 상황. 강원국은 진짜 쓰고 싶었던 책을 쓰기로 한다. 자신의 이름을 건 세 번째 책  『강원국의 글쓰기』 . 대통령, 회장님의 글은 고스트 라이터로 썼다면 이번 게임은 다르다. 기업에서 17년, 청와대에서 8년, 출판사에서 3년, 글로 밥벌이를 하면서 터득한 글쓰기 노하우를 집약했다. 글 좀 읽는 사람들은 안다. 강원국처럼 쓰고 말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그의 민낯이 궁금했다. 글과 말이 잘 이어지는지, 어우러지는지. 지나친 겸양이나 과장은 없는지, 왜 이렇게 다들 강원국이 좋다고 안달하는지 샅샅이 캐보고 싶었다. 365일 이어지는 강연, 라디오 출연은 지나치게 소모적인 일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30여분 대화를 나눴을까? 강원국의 캐릭터가 읽혔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느끼하지 않은, 상대의 마음을 귀신같이 읽고 있으나 굳이 먼저 아는 체하지 않는, 독자와 밀당하는 법을 아는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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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글을 써야 한다

 

아주 오랜만에 ‘글쓰기 책’을 읽고 설렜다. 뭔가 다른 글, 독자의 마음을 완벽히 꿰차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그렇다면 성공이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에 부합하는 반응이다.

 

누군가 묻더라. 『회장님의 글쓰기』 , 『대통령의 글쓰기』와 차별성이 있느냐?고. 그래서 답했다. “자기 이름이 더 중하지 않나?” 당연히 가장 알토란 같은 책일 거라 기대했다.


그전의 두 책은 내 글쓰기 방법이 아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떻게 쓸까?를 생각하면서 쓴 글이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내 방법이다. 겹치는 부분을 없애려고 염두에 뒀지만, 일일이 체크하면서 쓰진 못했기 때문에 100%라고는 확언할 수는 없다.

 

책 제목에 ‘강원국’의 이름을 걸어도 될 때가 됐다고 생각했나?


글쓰기 하면 강원국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이오덕 선생, 유시민 작가를 넘어서려면 자꾸 쨉을 날려야 하지 않겠나? 유시민 선배만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같은 책을 쓰란 법은 없으니까. (웃음) 물론 우리 두 사람은 느낌이 다르다. 나는 유시민 선배처럼 타고난 재주를 가진 사람도 뛰어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에 애를 먹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글쓰기 사전’을 생각했다. 노하우 40가지를 사전처럼 정리해볼 요량이었는데, 우선 좀 재밌게 읽혀야 하니까. 글 속에 40가지를 숨겨놓았다. 그걸 찾아본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된다.

 

2014년에 두 권을 썼다. (『대통령의 글쓰기』는 2017년에 개정판 출간) 후속작이 생각보다 늦게 나온 셈이다.


그 사이 책을 두 번 썼는데 엎어졌다. 한 번 엎은 건, 괜히 잘나가는 책을 두고 새 책을 내면 독자들이 헷갈려 할 수 있으니까 좀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다 최순실 사태가 잠잠해졌을 때 다시 썼는데, 몇 달 후에 다시 읽어 보니까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도저히 낼 수가 없겠더라. 불과 몇 달 사이였는데 차이가 확 났다. 그 때 책을 안 낸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강원국의 글쓰기』 는 만족하나?


4년 만에 낸 책이고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이 한도 끝도 없이 든다.

 

어떤 면에서?


사람이 말하다 보면 생각이 더 명료해지지 않나? 책 쓸 때 생각나지 않았던 게, 강연하다가 떠오르면 미치겠다. (웃음)

 

글쓰기 노하우 40가지를 찾는 게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숙제일 텐데,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건 ‘독자를 염두에 둔 글쓰기’다. ‘독자’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체화라고 할까? 훈련이 된 것 같다. 그동안 나의 글쓰기는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이었다. 대통령은 내 글을 어떻게 생각할까? 회장님은 내 글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민해야 했으니 검열이 심한 편이다.

 

『회장님의 글쓰기』 의 카피가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90가지 계책’이었다.


독자를 상사 대하듯 하면 좋은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강원국의 글쓰기』에도 직장인들을 위한 꼭지가 많았는데, 그러면 너무 자기계발서 느낌이 난다고 해서 생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원고를 쳐냈다. 아무래도 이 책의 주 독자가 직장인이라는 생각했는데, 내가 또 출판사에서 하는 말은 잘 듣는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도 맞는 이야기고.

 

이번 책의 카피는 ‘남과 다른 글쓰기’다. 남과 다르게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을 한 줄로 답한다면?


나다운 글을 써야 한다.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가능한 글쓰기다.

 

책에 아내 이야기가 계속 나오더라.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하나의 전략으로 읽혔다.


아내 이야기가 나오는 건 내게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단 나는 아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결혼한지 29년이 됐는데, 대학 1학년 때부터 4년 동안 연애를 했으니 33년을 지지고 볶으면서 산 셈이다. 아내도 현재 잡지사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묘한 게 아내는 법학, 나는 외교학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글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평생 글동무로 지내다 보니 아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내가 강원국의 모든 글의 첫 독자이자 열렬한 지지자이더라. 18쪽에 이렇게 썼다. “그렇다면 글쓰기 자신감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내 글에 호의적인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생각난 분한테 당장 전화했다. “내 곁에 오래 있어달라고” 청했다.


(웃음) 중요하다. 글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미국의 긍정심리학자 ‘바바라 프레드릭슨’은 “성공한 조직은 칭찬과 긍정이 부정적 반응보다 3배 정도 많다”고 했다.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을 보면, 서양과 동양 학생을 대상으로 공부에 대한 생각 차이를 실험을 통해 비교했는데, 서양인은 더 잘하기 위해 힘쓰는 데 반해, 동양인은 못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글에는 네 가지 반응이 따른다. 지적, 위로, 격려, 칭찬이다. 네 가지 모두 선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글쓰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역시 칭찬이다.

 

아내가 이번 책을 두고는 어떤 말을 해줬나?


『대통령의 글쓰기』 보단 안 팔리겠네? 너무 욕심내지 말라고 했다. (웃음)

 

그렇다면 첫 번째 책은?


나를 다시 봤다고 하더라. 깜짝 놀랐다고. 뭐에 놀랐냐고 물으니, 첫 번째는 그렇게 당신이 고생한 줄은 몰랐다, 두 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이 깊은 사람인지 몰랐다, 세 번째는 ‘당신 참 글 잘 쓴다’였다.

 

인정하나?


(웃음) 『대통령의 글쓰기』를 내고 나서 다시 읽은 적이 한번도 없다. 궁금하기도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려서 못 보겠다. 왜 이렇게 썼나?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후회할 것 같기도 해서 안 본다.

 

작가에게도 뚜렷한 캐릭터가 필요한데, 강원국은 뭐랄까. 친근한 아저씨? 속에 있는 말 다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 불쌍하게 보이고 싶었다. (웃음) 왠지 도와주고 싶은 캐릭터가 내 설정이다. 글쓰기 책을 보면 잘난 체들을 많이 하지 않나? 이렇게 써라, 저렇게 쓰라고 말하다 보면 계속 잘난 척이 되는데, 그러면 독자들이 불편하다. “제가 이렇게 말하지만, 저도 당신처럼 힘들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실제 내 모습이기도 하고. 책은 텍스트로 읽기도 하지만, 저자의 육성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저자가 캐릭터를 갖고 있을 때, 훨씬 더 와닿는다. 나는 세 가지 방법을 썼다. 비틀기(의외성), 돌려치기(반전), 바보 되기(가학)이다. 마지막 웃기는 한 줄을 먼저 썼다. 이 한 줄이 성공할 수 있도록 앞에 자락을 깔고 공을 들인다. 소설 작법을 주로 활용했다. 소설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 가운데 먼저 배경으로 자락을 깔았다.

 

“글 쓰는 사람은 태생이 관종”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읽는데 통쾌하더라. 끝끝내 “나는 관종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멀미가 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데 이 욕구를 너무 누르고 산다. 나는 그동안 너무 눈치를 보고 살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누군가를 위한 글을 썼으니까. 그래서 이에 따른 반작용도 있는 것 같다. 말과 글에 관한 책이 지금 많이 팔리고 있지 않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집단에 묻어가는 태도로만 살 수 없다. 말에서 이제 글로 넘어간다. 누구라도 글을 쓰고 잘 쓸 수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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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내 편으로 두고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번 책에서 가장 좋았고 인상적이었던 글쓰기 노하우는 ‘독자의 마음을 사는 법’이다. 285쪽에서 “독자를 읽고 독자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사람이 작가”라고 했다.


직장 글쓰기를 예로 들어보자. 상사에게 관심이 있고 상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글을 잘 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내 글의 독자인 상사의 취향과 성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상사와 가깝지 않으면 상사가 가진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 상사에게 자신의 기획이나 아이디어를 표현할 기회가 없으니, 상사가 보고서 내용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글재주가 있고 아이디어가 많아도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독자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도 했다.


글은 독자가 읽어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내 글을 읽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내 글의 주인이 된다. 독자가 이해하고, 동의하고, 공감하고, 설득당하고, 감동하는 글이 좋은 글이다. 이것이 글쓰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다. 우리가 직장에 가면 상사의 안테나에 잘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나? 마찬가지다. 독자 입장에서 쓰려고 자꾸 노력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 혼자 쓰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독자를 앞에 두고 쓰는 게 좋다. 왜 혼자 쓰려고 하나? 글쓰기는 2인3각 경기다.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약 3년간 일했다. 편집자로 일한 경험이 책 쓰기까지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물론이다. 일단 편집자의 마음을 잘 안다. 책은 저자와 편집자가 함께 걸어가야 한다. 편집자가 내게 무얼 기대하는지 나는 안다. 결정적으로 어떻게 써야 잘 팔리는 지도 알고. 1년 이상 출판사에서 고민해봤으니까, 전혀 안 한 분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출판사에서 2년 이상 일하면 책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책을 쓰고 싶다면 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것보다 출판사에서 일해보는 게 좋다. 취업이 어려우면 무급으로라도.

 

“글도 기교보다는 그 사람 자체가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하며 진정성이 있는가에 달렸다. 글을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다.”(317쪽)고 했다.


강연을 가면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잘 살아라.”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사람들이 막 감동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왜 좋나? 그 사람이 좋기 때문이다. 그 분처럼 살고 싶고, 따르고 싶기 때문에 좋은 거다. 좋아하는 사람의 글은 어떻게든 좋은 거다. 좋아하는 사람의 글은 다 좋은 거다.

 

(웃음) 정답이다.


내가 호감이 있는 사람이 되면, 내 글은 좋아진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면 나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면 쓸 거리가 생긴다. 이오덕 선생님이 “삶은 곧 글”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나? 어찌 보면 사는 것과 쓰는 것은 맞물려 갈 수밖에 없다.

 

강원국은 선플이 확실히 많더라. 그래도 종종 악플이 달릴 텐데 어떻게 대처하나?


고맙다고 댓글을 쓴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다. 고맙다고 댓글을 달면서 트라우마를 없애는 거다. “당신이 정말 잘 봤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저는 가장 두렵습니다”라고 거하게 칭찬하면서 대댓글을 달면, 그 분은 “미안합니다. 제가 심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다시 댓글을 쓴다.

 

“구성요소를 알면 글이 써진다”고 했다. 소설 목차를 보며 가슴이 뛰었다고. 『강원국의 글쓰기』  목차를 다시 꼼꼼히 읽었는데, 위트가 넘친다. 이 목차를 읽고서 이 책을 안 읽고는 못 배긴다.


예스24에 자주 들어온다. 책을 검색해서 보면 목차가 쭉 나오지 않나? 목차를 보면 얻는 게 많다. 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독자를 끌어당기기 위해서 구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목차야말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책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어두는, 치밀하게 짜인 각본 같은 거다. 책과 친하지 않은 분이라면, 목차를 꼼꼼하게 봐라. 이 책, 무슨 내용이야? 살까 말까 고민될 때 목차를 보면 책을 잘 알 수 있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 작가가 말했다. “비밀글만 쓰면 늘지 않는다.” 『강원국의 글쓰기』에도 같은 결의 이야기가 나온다.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 문장을 읽고 보니, 강원국이 다시 보이더라.


어쩌면 이 문장이  『강원국의 글쓰기』 의 핵심이다. 혼자 일기를 쓰고 SNS 비공개로만 글을 쓰면, 글은 늘지 않는다. 독자를 두고 써야 글이 는다. 독자를 내 편으로 두고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독자를 내 편으로 두려면 특정 독자를 만들 필요가 있다. 막연한 독자는 없는 것과 똑같다. 독자는 중력 같은 존재다. 마음껏 활개 치고 싶을 때, 나를 자꾸 당긴다. 그런데 생각해봐라. 중력이 있으니까 글을 쓸 수 있지, 진공 상태라면 글을 쓸 수 있겠나?

 

온라인 글쓰기는 호객 행위라고 했다. 독자는 즉각적으로 감응하거나 응답할 수 있는 글에 반응한다고.

 

온라인 독자는 다이제스트를 좋아한다. 정리해줘야 한다. 또한 패러디를 좋아한다. 아포리즘을 즐긴다. 명언이나 멋진 구절, 랭킹, 유행, 영상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핫해야 한다. 나는 블로그를 시작하고 한동안 공감이 '빵'이었다. 메아리 없는 글쓰기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내가 읽는다고 생각하고 계속 썼다. 누가 읽지 않아도 축적된 자료는 내게 소중한 추억이 되니까. 한 사람이라도 읽는 사람이 있으면 써야 한다. 그 사람에게 고마워서라도 써야 한다. 회사에서는 니즈(needs)로 썼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은 원츠(wants)로 쓴다.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쓰면 그건 라이크스(like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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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연을 가도 후회한 적이 없다

 

강연을 상당히 많이 하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려면 체력이 많이 소모되지 않나? 글 쓸 힘을 어떻게 비축하는지 궁금하다.


글과 말은 서로 오가야 한다. 말하기 전에 써보고 써본 것을 말해야, 글쓰기와 말하기를 잘할 수 있다. 어떤 작가들은 글만 쓰는데, 말을 하면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을 잘하는데 글을 안 쓰는 사람들은 글을 좀 써야 한다. 그러면 말이 더 정교해지고 깊이가 생긴다. 쓰기 전에 말해보면 알아듣기 쉬운 글을 쓸 수 있다. 강연을 하면서 이 점을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에 소모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청중들의 진심 어린 눈빛을 자주 접하면, 강연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정말 그렇다. 단 한 명이라도 내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경청하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내가 나를 표현하는 즐거움, 인정 받는 즐거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즐거움이 한꺼번에 온다. 어떤 강연을 가도 후회한 적이 없다. 천 번이 넘는 강연을 했어도 ‘오늘은 잘못 왔다’ 생각한 적이 없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게 또 하나 있다. 강원국에게 인복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 운이 좋다. 내 인생을 쭉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누군가 나를 항상 도와줬다. 최순실 같은 사람도 나를 도와줘서, 『대통령의 글쓰기』가 잘되지 않았나. 이번에는 유시민 선배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 『역사의 역사』『대통령의 글쓰기』와 같은 날 출간되고, 쪽수도 같고, 책값도 같다. 유시민 선배 책이 지금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1등이다. 나는 계속 선배한테 엮여 가야 한다. 내가 조금만 따라가도 나는 선전하는 거다. 같이 하고 있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선배는 모르겠지만 나는 좋다. (웃음)

 

칼럼이나 기사를 읽을 때, 인상이 찌푸려지는 글이 있나?


첫째, 자기도 잘 모르고 쓴 글일 때. 둘째, 한 문장의 길이가 너무 길 때, 즉 중언부언할 때. 셋째, 문장이 느끼할 때. 문장에 지나치게 멋을 부렸거나 화장을 진하게 한 글을 보면 좀 싫다. 콘텐츠가 없는 사람이 쥐어짜면 최악이다. 유시민 선배 같은 분이 쥐어짜면 멋있는 글이 가능하지만.

 

강원국에게 유시민이란?


나의 벤치마킹 모델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주위에서 시샘도 많이 받을 텐데.


나는 안티가 많지 않은데 이유를 따져보면 내가 좀 불쌍한 캐릭터다. (웃음) 왠지 돌봐줘야 할 것 같은 캐릭터라서 미움을 안 사는데, 지금은 좀 질투를 받는다. 내가 60점이라는 걸 아는 친구들이 “강원국 얘 왜 이렇게 잘나가? 이거 아닌데” 생각한다.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나?


겸손하면 더 재수없다. 그냥 가는 거다. (웃음) 나는 예순을 향해 가면서 가벼운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내가 운으로 얻은 게 많다. 내 역량보다 더 얻는 게 생기면 그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환원하지 않으면 크게 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도저히 해답을 못 찾겠다는 사람에게. 딱 한 마디만 해준다면.


하루에 세 줄만 써봐라. 내 삶이 바뀐다. 이건 틀림 없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쓰라는 게 아니다. 뭐가 됐든 세 줄이라도 써봐라. 뭐라도 한 번 써봐라. 인생이 달라진다.

 

『강원국의 글쓰기』를 읽어볼 작정을 한 독자에게는?


이 책은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하는 책이다. 곳곳에 글쓰기 노하우가 숨어 있다. 총 40가지다. A4 한 장을 책상 위에 놓고, 40가지를 찾아 써봐라. 그러면 이 책을 다 읽은 거다. 힌트를 몇 개 말하자면 몰입으로 써라, 기억과 상상으로 써라, 습관으로 써라 등이다.

 

후속작도 글쓰기 책인가?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쓸 게 아직 많다. 청소년의 글쓰기, 직장인의 글쓰기, 여성의 글쓰기, 어르신의 글쓰기, 공무원의 글쓰기 등 정말 많다. 공무원들이 이제 글쓰기로 승진 시험을 본다. 그래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여성들에겐 감정 치유의 글이 필요하다. 울분을 토해내고 한을 풀어야 한다.


형광들 불이 꺼지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들지 못했다. 동트기를 기다렸다. 대학 시절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집에 간 날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책을 읽었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신혼이던 아내에게 하소연하다 복받쳐 울었다. 나만의 분투였다. 투명인간으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나는 오늘도 아는 것이 재미있어 책을 읽는다. 동영상 강의를 듣는다. 생각난 것은 메모한다. 그리고 강의할 때마다 새롭게 알게 된 걸 말한다. 일상이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다. 이 네 가지가 리듬을 타며 나를 드러낸다. 누구의 간섭도 없고, 눈치도 보지 않는다. 날마다 새롭다. 하루하루가 충만하다. 스스로 고양되고 성숙해지는 것을 느낀다. 남처럼 살지 않는다. 내가 나로서 나답게 산다.

(강원국 저, 강원국의 글쓰기』  331쪽)


 

 

강원국의 글쓰기강원국 저 | 메디치미디어
앞으로 글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곧 글쓰기 강의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하루 빨리 모든 이들이 자기 글을 쓰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바라 마지않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키노코호텔, 한국 대중에게 자기소개서를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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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본 아티스트들의 내한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10년째 쉬지 않고 활동 중인 4인조 밴드 키노코호텔의 내한이 바로 그것. 1960~70년대 GS 신과 쇼와 시대의 감성을 그릇으로 삼아 그 안에 자신들만의 방법론과 철학을 담아낸 음악성을 기반으로, 독특한 비주얼과 강렬한 퍼포먼스가 결합되어 많은 리스너들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중이다.

 

내한공연 <Salon de Kinoco>를 마친 후, 리더인 마리안느 시노노메와 서면인터뷰를 진행하였다. 10주년을 맞아 내놓는 신작 <プレイガ-ル大魔境(플레이걸 대마경)>을 비롯, 음악을 대하는 마음가짐 및 앞으로의 목표까지. 한국 대중들에 대한 자기소개서로서 충분한 내용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인터뷰를 보고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다면, 꼭 그들의 라이브무대를 놓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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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1960년대 후반 유행했던 GS의 사운드가 많이 묻어나옵니다. 몇몇 곡들은 과장 조금 보태 플레이리스트 중 스파이더즈와 블루 코메츠, 사와다 켄지 등의 사이에 끼어 있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한편으로는 키노코호텔만의 색깔도 분명해 GS라던가, 가요곡이라던가, 이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고 만드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본인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음악활동을 시작한 계기엔 아무대로 일본의 좋은 가요곡이나 GS와 같은 1960년대 일본 문화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저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중요시하게 된 결과 현재에 이르고 있어요. 옛 시대의 카피나 재탕 등의 작업은 지금은 전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음악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평소에는 어떤 음악을 많이 들으시는지, 그리고 최근에 자주 듣는 음반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집에 있을 때는 조용히 멍하니 있고 싶어서 그다지 음악을 듣지는 않네요. 외출할 때도 교통사고의 위험성도 있고 해서 잘 듣지 않습니다.

 

새앨범 <プレイガ-ル大魔境(플레이걸 대마경)>은 이전에 있었던 곡들을 재편곡 및 재녹음해 완성한 앨범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줄곧 <마리안느의 ~> 시리즈를 이어오다 처음 다른 타이틀을 사용한 작품이기도 한데요. 어떤 필요성에서 처음으로 다른 제목을 붙인 것인지요.


이번 작품은 키노코 호텔 10주년을 기념한 특별한 작품이기 때문에, 보통 만들던 것과는 애초에 존재가 다릅니다. 그것을 리스너 분들이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붙인 이름이에요. 다음 앨범에서는 아마도 다시 <마리안느의 ~>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겠지만요.

 

보통 베스트앨범이라고 하면 예전에 녹음했던 결과물을 싣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만, 이 작품은 기존의 곡을 재편곡, 재녹음해 실었습니다. 이와 같이 '리뉴얼'이라는 콘셉트를 차용한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키노코 호텔이 낸 여태까지의 앨범은 레코딩 엔지니어도 믹싱의 방향성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한 것들을 어지럽게 나열하기만 한 작품에는 아무래도 아름다움(美)을 느낄 수 없겠지요.

 

앨범 자켓의 디자인 컨셉트가 완전히 '레트로'입니다. 지금까지의 앨범 자켓은 대부분 마리안느 시노노메의 단독 샷이었는데, 이번 베스트 앨범에는 멤버들 모습도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변화가 느껴지는데, 앨범 재킷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으신지요.


이번 앨범의 재킷은 10년간 응원해 주신 팬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입니다. 그런 뜻에서 특별히 3명의 사진도 사용했습니다.

 

'愛人共犯世界(애인공범세계)'의 원곡은 오르간의 사운드가 강했던 반면, 재녹음버전엔 기타 사운드가 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惡魔なファズ(악마스러운 퍼즈)'는 이전보다 BPM이 느려진 반면 그루브감이 극대화되기도 했고요. 예전 곡을 다시 만진다는 것 자체가 원곡들의 팬들도 있는만큼 조심스럽기도 했을 텐데. 전반적으로 어떤 면에 중점을 두고 작업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리지널보다 쿨하면서도 팝적으로, 세련된 결과물을 내겠다는 일념으로 임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거의 직감이네요. 너무 깊게 생각하면 작업이 괴로워지고, 즐길 수 없게 되거든요.

 

'惡魔なファズ(악마스러운 퍼즈)'에서는 징기스 칸(Dschinghis Khan)의 'Dschinghis Khan'을, '還らざる海(돌아갈 수 없는 바다)'에서는 프랑소와즈 하디(Francoise Hardy)의 'Comment Te Dire Adieu'를 차용했는데, 각각의 계기가 궁금합니다.


'還らざる海(돌아갈 수 없는 바다)'는 예전부터 'Comment Te Dire Adieu'와 비슷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의식해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만, '惡魔なファズ(악마스러운 퍼즈)'엔 재미삼아 넣어 보았지요. 해보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고 생각합니다.

 

'Go go kinoco hotel', '愛人共犯世界(애인공범세계)', 구체관절 등 오르간이 도입부부터 치고 나오는 곡, 백업 사운드의 중심을 잡고 있는 곡이 많은데, 오르간/키보드의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신지요.


작곡자인 제가 담당하고 있는 파트이기도 하기 때문에, 곡이 자아내는 세계관이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리스너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안느 시노노메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혹은 영향 받은 오르간 연주자가 있으시다면요?


레이 만자렉(Ray Manzarek)、데이브 그린필드(Dave Greenfield), 브라이언 오거(Brian Auger), 야마가다 히로(柳田 ヒロ)입니다.

 

밴드가 10년을 활동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활동을 이어오면서 본인들이 그것을 더욱 절감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음악' 혹은 '밴드'라는 개념에 대해 많은 인식의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신에게 뭔가 깨달음이 왔었던 특별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있었던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프로가 되었다고 해도 타인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별로 없을 뿐더러, 지금까지 저희만의 페이스로 여유롭게 활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저 개인으로서는 그다지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밴드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책임'이라는 개념이 제 안에서 생겨난 것은 큰 사건이지요. 그것이 싹트지 않았다면 키노코 호텔은 단순한 취미활동으로 끝나버렸을 거예요.

 

지배인/종업원 설정 및 머시룸 컷과 밀리터리 룩 등 콘셉트가 확실한데, 이러한 콘셉트의 모티브는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키노코호텔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인지요.


다른 밴드와의 차별화, 단순히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 정했던 것 같습니다만, 10년 전의 일이라 별로 기억나지 않네요.(웃음)

 

키노코 호텔의 음악에서 비유적인 가사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 비중을 두고 가사와 제목을 결정하시는지요.


일본에서 팔리는 음악은 '너를 좋아해'라든가 '보고 싶어'라든가, 단순하고 비유도 없는 블로그 같은 것뿐이라서, 그것과는 다른 것을 제 나름의 감성으로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제 자신은 타이틀이나 가사에 그다지 감정 이입을 하지 않습니다. 만들어 버리면 끝, 이라는 느낌입니다.

 

10주년을 계기로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은 있다면요.


글쎄요, 영화 음악을 해보고 싶습니다. 영화 음악 하는 김에 배우 데뷔라든가?(웃음)

 

영국 및 유럽, 마카오 등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었는데, 일본에서의 공연과는 느낌이 다를 것 같습니다. 보통 어떠한 생각과 각오로 해외 공연에 임하는지. 그리고, 첫 한국공연을 맞이하는 느낌은 어떠신 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일본어 밖에 모르기 때문에, 연주하는 소리와 퍼포먼스만으로 어떻게 관중을 뒤흔들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스테이지에 서면 단지 가지고 있는 힘을 전부 쏟아 내어 집중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건 해외이건 저에게 스테이지는 전력으로 싸우고, 그것을 즐기는 장소입니다. 한국에서 키노코 호텔을 알고 있는 분이 어느 정도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반응이 전혀 예상이 안 되고, 흥분되기도 합니다만,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일본에 이런 색다른 밴드가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많은 분들이 알게 되고, 즐겨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진행 : 조아름, 황선업
정리 : 황선업
협조 : 지누락엔터테인먼트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손아람 “감정으로 설득하는 글을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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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는 1998년 결성된 힙합 그룹이다. Soul Train의 멤버로 활동을 하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유명해졌다. 조PD, DJ Uzi, Ra. D, 태완, MC 메타 등의 뮤지션과 함께했던 시기였다. 당시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에서 속사포 랩을 구사하던 손전도사는, 손아람 작가가 래퍼로 활동했을 때 쓴 예명이었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는 손아람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자 실제 사건에 허구를 가미한 팩션(Fact Fiction)이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시작과 끝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면 1990년부터 2000년대 초반의 힙합 문화가 펼쳐진다. 힙합에 빠진 이들은 사회적 성공이나 부귀영화를 꿈꾸지만, 음악을 하려는 근거는 성공이 아니었다. “힙합만큼은 순수하게 사랑했다”.


『소수의견』 과 『디 마이너스』 , 여러 칼럼과 방송에서 보인 손아람의 모습은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의 손전도사와 겹쳐 보이지 않는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를 읽다 보면 그저 ‘무모한 사람들’이 겹쳐 보일 뿐이다. 작가 손아람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그는 “이 책을 보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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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아니라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작가들에게 10년 전 본인이 썼던 소설을 다시 보라고 하면 대개 괴로워하시더라고요.

 

말도 안 되게 괴롭죠. 개정해야 하는 건지 절판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어요. 다른 유명한 작가들도 자기 첫 책은 부끄럽다고 할 텐데, 제가 쓴 다른 책과는 달리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는 색깔이나 글을 써가는 방식도 달랐고요. 차라리 습작에 가까워요.


한국의 힙합 1세대를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 시대 힙합의 오마주 혹은 역사가 담겨 있어요.


역사라고 하면 거창하고, 팬픽션이라고 생각했어요. 최초의 시작 지점에서 같이 한 건 맞아요. 20년이 지나고 뒤돌아보면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활동 시기상으로는 개척자인데, 지금의 문화를 개척했다고 말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팀은 아니었어요. 힙합의 조상이라고 하기에는 사실도 아니고 부끄럽죠.


요즘 힙합 신을 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일 것 같아요.


그 당시 힙합을 해서는 미래를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뿐더러, 미래가 있다고 말하고도 다들 착각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렇게 안 믿고는 버틸 수 없으니까요. 음악으로 성공하겠다고 가사로 말하지만 실제로 성공한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다 가짜인 거죠. 지금 힙합 신과 그 당시 차이는 음악으로 성공하는 게 정말 가능해졌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저희가 할 때는 특유한 힙합의 태도가 일종의 거짓말이었어요. 지금 친구들은 훨씬 거침없이 하면서 그 도구를 자기 삶의 도구로 잡을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죠.

 
‘나’가 많은 부분 허구라고 선을 그어놓고 시작했지만, 실제 ‘손아람’이 많은 부분에 들어가 있어요.

 

그게 이 책에 제가 가지는 부끄러움이자 실수일 거예요. 작가로서 제가 만약 지금 책을 썼다면 이렇게 절대 쓰지 않을 거거든요. 나만 쓸 수 있는 구체성을 가진, 실화에 바탕을 둔 방식으로 저 자신을 끼워 넣다 보니까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재구성되어 있음에도 실제처럼 읽히죠. 굉장히 무책임하기도 하고 장난치고는 너무 나간 장난인데, 이제는 누구나 저를 작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걸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그런 것들이 부담스러워요.


그런데도 개정판을 낸 이유가 있다면요?


실수가 있다면 글쓰기의 전략적인 면인데, 제 삶의 어떤 부분을 분명 담고 있어요. 2005년에 처음 썼을 때 저한테는 중요한 시기였어요. 이 책이 없었으면 제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거예요.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활동을 중단하고 방황을 많이 하다가 이 책을 쓰기 시작했고, 이 책을 쓰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를 쓰면서 극복할 수 있었고, 다행히 제 이야기였기 때문에 소중한 글이기도 해요.


생각했던 독자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손아람이라는 작가를 알고 싶어서 그의 책을 읽는다면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를 빠뜨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제 책 중에서는 가장 이질적이면서 저에게 가까운 부분을 제일 많이 담았어요. 작가로서 써야 할 글을 선택한다는 의식을 갖기 전에 써서 오히려 더 솔직한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손아람의 진실을 보려면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를 읽어야겠네요.


네, 정확해요. (웃음)

 

 

마음이 돌아가는 방식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디 마이너스』『소수의견』도 그렇지만,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야말로 청춘의 이야기가 될 텐데요.


청소년 소설에 가까운 청춘 소설이죠. 표현 방식은 미흡해도 기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서사예요. 『소수의견』도 비교적 젊은 변호사가 국가와 부딪쳐가는 이야기였고,  『디 마이너스』는 운동권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데, 실제 만나기는 드문 유형의 사람들이거든요.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자기가 상처받든 극복하든 일단 부딪치는 유형의 사람들이요. 비현실적으로 꿈밖에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부딪쳐 가는 이야기를 매우 좋아해요. 그게 심지어 제 삶과 직접 결합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야말로 무모한 사람들이 그려져요.


저도 그렇게까지 무모한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사람을 옛날부터 좋아하고 어떤 면에서는 존경해요. 처음 만난 게 음악을 하면서였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저랑 비슷한 제도권 아래서 공부하던 사람들만 봤는데, 스무 살 남짓한 Ra.D나 태완 같은 캐릭터를 실제로 보니 완전 다른 세계의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안전망 따위 하나 없이, 뭔가를 이루어낸다는 보장 없이 미친 듯이 음악만 하는 거예요. 대개 불안하면 자기 일에 집중력을 못 가지게 마련이잖아요. 이를테면 글 쓰는 걸 아무리 좋아해도 직업이 되고 내 돈벌이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집중력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태도 없이 음악을 하는 거예요. 그 시간을 또 즐거워하고요. 대학에서 훨씬 머리가 좋고 사회를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올바르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저는 반대편 사람들에게 더 매력을 느꼈던 거죠.


왜 이런 사람들은 무모할까요?


순수하게 개인적인 의도와, 대의로 표현되는 사회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은 개인적인 이유일 것 같아요. 대의에 사로잡힌 자기 삶의 관성이 결국 책임감으로 바뀌어서 자기 삶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망이요. 이만큼 살아왔는데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를 자기 삶의 완성이라고 표현하는 행위, 그게 결국 저는 개인적인 이유라고 보거든요.

 

사람들을 소설 속에 그려내는 데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지금도 그래요. 이야기를 떠올릴 때 세계와 배경, 사건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인간이 제게 주는 영감을 바탕으로 배경과 사건을 붙여요.


좋은 예술가로 인정받는 것 이상으로 사회적인 걸 바꾸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무모한 사람들을 그리고 싶은 욕망과는 또 다를 것 같아요.


인물을 표현한다는 것은 순수하게 내 기예로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마음이 돌아가는 방식 같아요. 세계가 이렇게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모습을 글로 표현하려는 욕망은 머리로 하는 거죠. 저 매력적인 사람을 내 이야기에 담아내고 싶다는 건 마음이 이끌리는 쪽이에요. 무모함이 저를 설득시키고 공감하게 만드는 사람이 제게 감동을 줘요. 제가 의식하는 세계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고요. 둘이 완전 다르지 않은 게, 아주 엉뚱한 사람에게 끌리진 않거든요. 부동산 투기에 대한 열정으로 큰돈을 버는 사람이 저에게 감동을 주진 않아요.


가슴이 따르는 방식보다는 머리로 쓰는 모습, 강연하거나 칼럼을 쓰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어요.


고민이에요. 제가 글쓰기로 직업을 택했을 때는 머리로 하는 게 좋아서 택한 게 아니거든요. 만일 그랬다면 소설가로 시작하지 않았겠죠. 다른 글쓰기는 제 표현과 생각을 드러내는 기술이 중요하다면, 문학적 글쓰기는 숨기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늘 문학에 매료됐었어요. 심지어 역사적인 저서라 할지라도 잘 썼다고 감탄하는 것 외에 한 번도 작가가 주장하는 방식대로 제 삶을 움직여야겠다고 설득된 적은 없어요. 늘 감정으로 설득하는 방식에 움직여 왔고 그런 글을 쓰고 싶었어요. 하다 보니 계속 하고 싶지 않았던 길로 끌려가게 되네요.


끌려가는 것 치고는 말하기를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 머리를 더 쓰는 사람이고 광기를 부리는 유형의 예술가는 아니에요. 요즘 가장 큰 고민거리이기도 해요. 요즘은 정작 저를 부르는 건 다 강연회나 칼럼 자리예요. 칼럼은 쉽게 털어낼 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끌려가는데, 소설은 긴 호흡이 필요하잖아요.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고민을 많이 해요.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과 칼럼을 쓰는 머리를 화해시키려고 하나요?


화해보다는, 그 두 개가 그냥 저인 것 같아요. 머리로 세계를 바라보는 저와 그 세계에서 마음에 안 들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바꾸는 데 기여하겠다는 정치적인 제가 있어요. 다행히 그 두 개가 다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두 개가 늘 담겨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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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말 하는 건 제 역할이 아니에요


올해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세계를 만드는 방법』을 출간했어요.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에서는 이준석 씨와 같이 대화를 주고받았어요.


대화만 보면 대화하기 좋은 사람이에요. 생각의 방향이 맞아도 대화가 어려운 사람이 있고,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어도 대화하기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어요. 같이 논쟁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는데, 이준석 씨는 생각은 안 맞지만 대화가 되는 사람이라 재밌는 시간이었어요.


SNS에서 댓글로 논쟁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를 매우 논쟁적인 유형의 인간으로 알지만, 정서적으로 논쟁을 힘들어해요. 대화가 논쟁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면 정서적으로 왜 이걸 하고 있어야 하는지 잘 못 받아들이거든요. 차단도 마음을 불편하게 해요. 다른 방식의 공격이잖아요. 언제 나를 공격할까 싶어서 팔로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느 시점이 지나니까 제가 못 버티겠더라고요.


그래도 SNS를 도구로 자주 사용하는 편이죠?


가장 활발하게 사용하던 시기는 문화문제대응모임 활동을 할 때였어요. 다른 활동가들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고 일종의 입법 로비를 하기 위한 이슈를 만드는 활동으로는 SNS가 유용했거든요. 하지만 작가로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피드백을 주기 때문에 그걸 의식하면서 글을 쓰기 쉬운 도구라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슬슬 떠나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생각을 하죠.


문단 비판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하셨어요.


제가 등단 방식을 거치지 않았던 이유는 저항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작가가 꿈이 아니라서 몰랐어요. 진지하게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힙합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제 경력을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 같고요. 문단 비판은 사실 권력이라고 말했던 문단이 점점 작아지고 출판업계가 약해지면서 의미가 없어졌어요. 이런 방식으로는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고 언젠가 대형 출판사도 불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결국 그때가 온 것 같아요. 지금은 문학 권력이라도 말하기도 민망한 느낌이 들어요.


권력 장을 성찰하면 자연히 자기 권력을 생각하잖아요. 작가님 스스로 자기 권력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을 것 같아요.


여러가지로 있죠. 일단 제가 무슨 말을 하든 훨씬 쉽게 공론화돼요. 심지어 공론화를 원하지 않았던 말조차 퍼지는 걸 보면서 말을 안 해야 된다는 고민이 들어요. 책을 쓰는 데 조금 더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책은 늘 안 팔리기 때문에 공정하거든요. (웃음)


『망국선언문』에 “언어로 주는 위안은 위약으로서 효과를 다했다”는 표현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책이 많이 나와요. 위약의 효과가 계속되는 게 아닐까요?


영원히 계속될 거로 생각해요. 사람들이 책을 살 때는 일종의 자기 최면적인 주술이 작동하고 있을 거예요. 그게 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 최면이 실제로 작용해서 잠시 마음이 좋아진다면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위약만 있어서는 안 되죠. 약효는 의심스러워도 안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이야기 없이 위약만 있으면 문제죠.


책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공산당 선언』을 추천하기도 했어요.


출연자에게 소개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논쟁적인 책을 최대한 많이 노출하는 게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웬만하면  『공산당 선언』을 집어 들지 않잖아요. 굳이 책으로 방송을 한다면 그런 책을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작진하고도 항상 그 이야기를 했어요.


스피커가 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느낌이에요.


방송을 열심히 잘하면 스타가 될 거라고 믿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손아람이 할 수 있는 말이 다른 방송인과 다르기 때문에 부르는 건데 그럼 방송에서 쓸모를 다 해야죠. 가서 예쁜 척 예쁜 말 하는 건 제 역할이 아니에요.


작가 손아람이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관념적이고, 치우쳐 있고, 자기 관념을 수호하는 데 우선순위를 많이 두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아요. 여기에는 많은 지식인의 딜레마가 있어요. 저도 사실 관념에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쪽에 가깝지만 선호는 반대 방향의 사람들에게 늘 가 있어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되고 싶은 사람을 꼽는다면요?


살아온 삶의 궤적으로 보자면 심상정 대표 같은 사람이요.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라, 만나면 늘 에너지가 가득하고, 기본적으로 낙관주의를 지니고 있어요. 세계를 보는 낙관이 아니라 자기가 쓰러지든 실패하든 자기 일을 하겠다는 자세와 활력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자기 자신보다 세계를 많이 생각하다 보면, 특히 싸우는 입장에서는 쉽게 좌절하거나 우울해지기 쉽잖아요. 다들 폐인처럼 있을 때 에너지가 넘쳐서 끝까지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멱살 잡고 끌고 나가는 것 같아요.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손아람 저 | 들녘
“음악이라기보다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힙합이라는 공통 관심사 하나로 뭉친 가수와 관객들은 공연 내내 위계 없이 함께 포효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민철 “내 취향을 소중히 여길 사람은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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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과 『모든 요일의 여행』  이후, 김민철 작가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 속에서 ‘취향’은 늘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다들 훌륭하고 특이하고 멋진 와중에 자기 자신은 초라해 보이는 ‘취향’이라는 마법의 단어. 하지만 김민철 작가가 사전에서 찾은 단어의 의미는 달랐다.


취향[취ː향]
[명사]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좀 촌스럽더라도, 좀 볼품없더라도, 좀 웃기더라도’ 마음이 가는 방향은 다 취향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라는 직함으로 광고의 카피라이터를 쓰는 김민철 작가의 신작 에세이, 『하루의 취향』은 개인적인 삶의 공간, 물건, 관계, 여행, 일을 살뜰하게 한 단어 안에 모아 펼쳐 보인다. ‘대단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가장 나다운 하루를 살게 하는, 그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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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의 취향


‘취향’이라는 주제 안에 글이 엮었어요.

 

<한겨레>에서 연재한 칼럼 ‘김민철의 가로늦게’가 시작이었어요. ‘가로늦게’라는 말이 후회를 동반한 단어라, 계속 후회 쪽으로 주제가 갔었는데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제목 따라서 가더라고요.


‘모든 요일의 후회’가 될 뻔했네요. (웃음)


그렇죠. ‘내가 그때 술만 덜 마셨더라면…’ (웃음) 다시 보니 그때그때 마음에 들어오는, 마음이 향하는 것들을 글로 쓰다 보니 그런 것들이 다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옷이나, 책, 물성을 가진 것들을 선호하는 걸 취향이라고 부르는데, 취향을 넓게 해석해보면 살아가는 방식이나 직업이 다 넓게 보면 취향의 영역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쓸 것들이 떠올랐어요.


취향을 주제로 삼은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최근 트렌드가 거의 ‘너 자신을 알라’에 가깝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해요. 자기 자신을 아는 데는 취향이 무엇보다 효과적인 방법이고요.


작년 이맘때 제목을 정해놓고 올해 들어야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취향이라는 단어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더라고요. 들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랐어요. 회사 광고주 중에 옥션이 있는데 이번 슬로건이 ‘취향존중’이거든요. 팀장 회의에서 그걸 보는데 속으로 ‘어떡하지’ 했어요.


글은 주로 언제 쓰셨어요?


이번 책을 쓰면서 알았는데, 제가 짬짬이 쓰는 스타일이에요. 30분 시간 나면 쓰다가 회의하러 들어가고요. 저도 제가 꾸준히 쓴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달력에 무슨 날 어떤 글을 썼는지 기록했더니 거의 이삼일에 하나씩 써나가더라고요. 주말에는 더 많이 쓰고요. 제가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흔히 취향을 자신이 선호하는 물건 정도로만 생각해요. 회사에서 일을 하는 방향도 일의 취향이라고 말한 점이 색달랐어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카피라이터 출신은 창의적이어야 하고, 갑자기 아이디어가 번뜩하고 떠오르고 카피도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짧은 한 문장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데는 큰 재주가 없어요. 그런 일들이 그다지 즐겁지도 않았고요. 모범생 DNA가 강한 사람이라 카피와 아이디어를 잘 내기 위해 계속 애를 썼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가 제일 신나 할 때는 정리하고 책임지고 프레젠테이션하는 일, 여러 명이 모여서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더라고요. 팀장 역할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럼 저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평생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제 일 취향을 존중한다면 저는 회사에 귀속되어야 하는 존재죠.


지금은 만족하시나요?


좋아요. 결국 가장 맞는 일을 찾았다고 느끼고 있어요. 

 

회사의 카피로 못 채운 마음은 책을 쓰면서 채워나갔을 것 같아요.


전환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에요. 카피는 기본적으로 길게 쓰는 글이 아닌데, 제게 어울리는 글은 책에 실린 글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둘 다 할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일의 취향을 말하면서 ‘야근 안 시키는 팀장’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해요.


솔직히 말하면 100%라기보다 거의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일이 잘 끝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관리자가 빨리 결정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여러 가지 아이디어 중 하나를 채택하는 건 자기가 확신을 가지고 책임지겠다는 거잖아요. 그걸 가지고 일이 되는 건데 자기 확신을 가지지 못하니까 “이것도 괜찮은데… 저것도… 다시 해 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뭐라도 정리하고 결정을 내리려고 하면 괜찮아져요. 다만 꼰대 마인드가 튀어나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사생활을 가지고 있든 오늘 회의에 들어와서 일을 제대로 한다면 그 과정을 보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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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귀기에도 취향이 있다


사람을 만나면서 자기 자신이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사람에 대한 취향도 바뀔 것 같아요.


회사에 다니면서 제일 많이 바뀌었어요. 그전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개 상황에 의해 강제로 주어진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어른이 되고 취향으로 사람을 만난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그러면서 사람을 점점 더 적게 만나니까 자기 취향에 맞는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남편 분 이야기가 특히 많이 나와요. ‘사랑만큼 자신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또 있을까’ 싶게요.


남편에 관한 내용으로 거의 한 장을 썼어요. 같이 모든 걸 경험하기 때문에 근육이 생기는 것처럼 같은 취향이 점점 더 많이 생겨서요.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는 선언’(28쪽)으로 집의 취향을 만드는 데 남편 분이 훌륭한 조력을 하기도 했어요.


남편이 저를 잘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돈을 쓸 때 인간이 이 정도까지 소비를 할 필요가 있나 늘 물어보거든요. 남편은 제가 원하는 게 많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늘 등을 떠미는 역할을 하죠. 객관적으로 남편은 학생이었고 제가 돈을 버니까, 어떤 사람은 ‘어떻게 저런 남편을 만나지?’ 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떻게 ‘제가’ 그런 남편을 만났냐고 묻고는 했어요.


모두 ‘어떻게 저런 남편을 만나?’ 라고 질문하는 건 똑같네요.


그렇죠? ‘너 괜찮아?’ 랑 ‘남편은 괜찮아?’라는 상반된 의미겠지만요. (웃음)

 


사람을 이야기하자면 김하나 작가님과 황선우 기자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어요. “어떤 책임감도 없지만 유대감만은 가득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187쪽)이 되었다고요.


가족의 정의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사회가 폐쇄적이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진지한 글을 쓰는 건 어울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한에서 쓰려고 했던 것 같아요. 페미니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고요.


“멋진 언니, 멋진 동생, 더 많이 원합니다.”(51쪽)이 어찌 보면 작가님의 페미니즘인 거죠.


원래 처음 썼던 글은 탈춤으로 시작해서 시시하게 끝났는데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져서 뒤가 완전히 투사가 됐었어요. 무거워지고요. 편집자님이 조심스럽게 “앞과 뒤의 글이 너무 다르다, 뒤에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다.” (웃음)고 말씀하셔서 지금 실린 글은 괜찮아진 버전이에요. 직업병인 것 같아요. 광고는 이걸 통해 뭘 하겠다는 목적이 있는 글인데, 그렇지 않은 글을 쓰면서도 계속 이걸 왜 읽는지 스스로 질문을 많이 하거든요. 남의 책에서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데 스스로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가 없으면 되게 불안해하더라고요.


칼럼에도 꼭 교훈을 넣어야 될 것 같죠.


그걸 어떻게 떨치지 하면서도 계속 불안해져서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어쩔 수 없죠. 직업을 15년을 했는데 영향이 있겠죠. 『모든 요일의 여행』도 그랬거든요. 결국 말하고 싶은 건 “너희 왜 블로그처럼 여행하냐, 하고 싶은 대로 해!” 였는데 교조적으로 말하면 안 되니까 살살 몰아넣었어요. (웃음)

 

 

'취향 존중'은 오로지 나의 몫


보통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기 취향을 더 날카롭게 벼리는 것 같아요. 일에서 자기 자신이 드러날 수 없으니 취향을 개발해서 자기 자신을 채운달까요?

 

저도 회사에 다녀서 그랬나 봐요. 밀란 쿤데라의 『불멸』을 보면 자매가 나와요. 한 명은 덧셈으로 자기 인생을 판단하고, 한 명은 뺄셈으로 자기 인생을 판단해요.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에 언니는 자기가 아닌 것들을 계속 소거해 나가고, 동생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꼽으면서 자기 자신을 더해나가요. 책을 쓰면서 그 두 명을 많이 생각했어요. 저는 언니 같은 캐릭터라고 생각해 왔는데 책을 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 겪은 경험을 주섬주섬 챙겨서 덧셈하게 되더라고요.

 
반면 스스로 취향을 말하면 이상하게 기가 죽는 때가 많아요. 왜 그러는 걸까요?


너무 많은 사람들의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SNS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이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러지?’ ‘저 사람이 입은 옷은 완전 비싼 걸 거야’라고 생각하고요. 그 옷이 싼 거였으면 그 사람의 안목을 또 부러워했을 거예요. 끝없이 남들은 긍정하면서 자기 자신은 부정하는 환경에 우리를 밀어 넣고 있더라고요. 작게는 옷부터 집, 모든 걸 비교하면서 자기 취향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돌이켜보면 작가님은 어땠나요?


제가 어떤 취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대신 호불호가 강했어요. 물건을 사야 하거나 결정해야 할 때는 명확하거든요. 저 혼자 감당하면 되는 거니까요. 쉽게 결정하는 걸 제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결국 제 생각을 제 취향이라고 긍정해주지 않으면 끊임없이 남들과의 비교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없더라고요. 여행지, 사진, 비교할 게 너무 많으니까요.

 

반대로 생각하면 작가님을 선망하는 독자들도 있을 거예요. ‘망원동 사는 힙스터’의 전형으로요. (웃음)


그럴 수 있죠. 제 취향을 존중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산 결과물을 남들이 보면 ‘광고 회사 팀장으로 책도 내고 여행도 다니고 서울 안에서 집 구해서 사는 좋은 삶’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이 저한테 보게 되는 건 결과예요. 제가 관심 있는 건 결과보다 그 중간에 고민하고 꾸준하게 견뎠던 순간들이에요. 자기 취향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어요. 그럼 자기 자신이 그걸 존중해줘야 해요. 그 취향대로,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남들의 시선을 판단 기준으로 놓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이정표가 생기고 보석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걸 또 소중히 여길 사람은 자기밖에 없고요.


자아존중과도 연결되네요.


『모든 요일의 기록』이나 『모든 요일의 여행』 모두 뒤돌아 생각하면 취향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었어요. 특히 『모든 요일의 여행』도 남의 여행이 아니라 자기 여행을 하라는 말이었잖아요. 이번에는 여행이 아닌 일상으로 무대를 옮긴 거겠죠.

 



 

 

하루의 취향김민철 저 | 북라이프
남의 시선을 배제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나의 마음을 꼼꼼히 파악하여,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택을 내리면 된다. 사전에서 단호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 응답하면 될 일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목수정 “경쟁하지 않을 자유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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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아이들은 정답을 맞히는 훈련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는다. 정답으로 가는 길을 탐구하고 그 과정을 말로 설명하도록 훈련된다. 수학 문제를 푸는 순간에도 논리를 찾아내고 정확한 어휘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정해진 단답형의 인생이 아니기에 그들의 길목은 미어터지지 않는다. 순간의 실수로 인생이 미끄러지는 법도 없다. 그들이 가는 속도는 더디지만 매 순간 존엄을 지킬 수 있게 해준다.(258-259쪽)

 

구구단을 2년 동안 배운다. 알파벳을 3년 동안 배운다. 수영이든, 외국어든, 악기든, 뭘 배워도 일주일에 한 번씩만 수업이 있다. “중요한 것은 ‘즐거움’과 ‘재미’를 놓치지 않게 하는 것.”(94쪽) 이것이 프랑스 교육의 핵심이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월경독서』 ,  『파리의 생활 좌파들』 , 『아무도 무릎 꿇지 않은 밤』  등을 쓴 목수정 작가는 “한국에 훨씬 익숙한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이 프랑스에서 주로 자란 아이가 프랑스 교육을 받는 것을 바라보는 입장”을 기록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파리에서 딸 ‘칼리’를 낳아 한국에서 어린이집을 경험하고, 칼리의 나이 만 세 살 때부터 다시 파리로 가 프랑스 공교육이라는 자장 안에서 교육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교육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철학의 구축이라는 사실이었다. 프랑스 학교에는 사생대회도, 등수도, 신체에 관한 어떤 규율도 없다. 미술 교사가 추리소설을 쓰게 하고, 영어 선생님이 유튜브로 청년들의 난민 캠프 활동 영상을 보여주고, 역사 선생님이 가상의 마다가스카르 여행을 숙제로 내준다. 경쟁은 타인과 하지 않고, 오직 어제의 나와 한다. 목수정은 말한다. 경쟁하지 않을 자유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자고. 아이들에게 다른 출구를 열어주면 그것이 큰 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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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걱정해요


오랜만에 오시는 것 아닌가요? 한국에 얼마나 계셔요?

 

한 달 정도 있을 예정이에요. 이제 이틀째예요. 1년 만에 온 건데요. 올 때마다, 조심스러워요. 갈수록 더 그런 느낌이에요. 한국 사회가 보면 갑들이 다 갖고, 을, 병, 정들이 싸우도록 놔두잖아요. 혜화역 시위 때도 그랬고요.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에도 방해하는 분들이 계시고요. 편의점주 분들도 최저임금 인상되면 힘들다, 고 하시는데요. 너무나 명확한 을과 병과 정들끼리의 싸움이에요. 이런 싸움이 격화되어 벌어지는 일을 목격하죠. 갈등과 혐오가 격화된 세상에 딱 들어오니 여러 가지로 조심하자는 생각을 하게 돼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외국에 살더라도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을 하셨잖아요. 프랑스에 살지만 한국 사회를 계속 바라보고 계신 거죠?

 

소통하는 많은 분들이 해외에 계신 분들이에요. 놀랍게 같은 빈도로, 그리고 더 자유롭게 한국 사회에 대해 얘기해요. 그나마 저는 한국에 자주 오잖아요. 그분들은 안 오시거든요. 그런데도 똑같은 강도로 얘기하고, 똑같이 걱정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있는 곳에서도 같은 이슈로 집회 하고 그러는 거죠. 쉽지가 않아요. 아무도 그 사회에서 우리를 봐주는 사람이 없는데 모여서 집회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요. 열정적으로 해외에서 시위를 같이 했고요. 한국에서는 별 관심이 없지만 그것이 우리들한테는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어요. 이제 연대체도 만들어졌고요.

 

연대체가 있나요?


『개성공단 사람들』을 쓰신 김진향 교수님을 모셔서 유럽 순회 강연도 했어요. 이제 우리가 북맹(北盲)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니까요. 이런 것들이 과거 한인회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은 촛불집회나 세월호 유가족들과 연대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진행되고 있어요. 주로 세월호 때 만들어졌고, 여러 활동을 같이 하죠.

 

이번 책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에 대해 “아이가 11살 때 쓰기 시작한 책이 13살이 되어 마무리되었다”(405쪽)고 하셨는데요. 처음에 책을 쓰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더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공적인 이야기로 막 갔어요.(웃음) 30년 이상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라는 저의 위치가 있잖아요. 한국에 훨씬 익숙한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이 프랑스에서 주로 자란 아이가 프랑스 교육을 받는 것을 바라보는 입장이 있으니까 사적인 얘기를 해도 공적인 이야기가 되겠다고 생각했죠. 칼리 아빠는 철저하게 프랑스 사람이고요. 그의 20대 때 직업이 교사예요. 철저한 교육관이 있어서요. 그런 것만 써도 되겠다 싶었는데 하다보니까 프랑스 교육을 좀 더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양쪽을 다 다루려고 했어요.

 

그래서 인터뷰도 수록이 된 거군요?


그렇죠. 내 경험만 이야기하면 편협한 얘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다른 학생들의 이야기, 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담았어요. 그러면서 내 편견에 대해 나도 확인하고 그랬죠. 책이 400페이지가 넘는데요. 너무 무거우면 안 될 것 같아서 10꼭지 정도는 뺀 거예요.

 

이번 책은 교육에 관한 이야기지만 교육만의 이야기는 아니죠. 프랑스 사회가 가진 개인에 대한 존중은 한국 사회에 꼭 전해져야 할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먼저 “프랑스에는 유아에게만 쓰는 특유의 단어가 없다”(77쪽)는 말이 흥미로운데요. 


한국에 ‘노키즈존’이 많아서 놀랐어요. 그 자체에 대한 충격도 있지만요. 그렇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도 있는 거잖아요. 아이들이 주변에 폐를 끼친 일도 있을 거고요. 프랑스는 그게 전혀 없거든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폐를 끼치도록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고요. 별로 폐를 끼치지도 않아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유아 시기부터 교육을 받는 거죠. 식탁 예절도 그렇죠. 저도 칼리에게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는데 어디선가 배웠어요. “지금 식탁에서 일어나도 돼요?”라고 물어봐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간식도 아무 때나 안 먹고요. 하루 딱 한 번 정해진 시간에 먹어요. 자기들이 마음대로 마트에서 사먹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자는 시간도 철저하고요. 이러한 기본적인 생활의 틀이 철저하게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폐를 끼치거나 어른이 아이를 저지하고 혼내는 모습을 볼 일이 없어요.

 

아주 일찍부터 한 명의 시민으로 키우는 거죠.


돌도 안 된 아기, 젖병을 들고 먹는 아기에게도 같은 식이에요. 아기가 젖을 달라고 울어도 서두르지 않아요. 천천히, 보호자가 자기 리듬대로 하는 거죠. 아기를 바라보면서 “내가 우유를 타고 있어, 곧 줄게, 기다려.”라고 해요. 그러면 아기가 진짜 울음을 멈추고 기다려요. 아기들도 보호자의 리듬에 맞추는 거죠.

 

그러니 어린이도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하고요. 어른의 말에 반드시 수긍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존재들인 거잖아요.

 

칼리와 약속이 있어서 외출을 하려는데 갑자기 칼리가 안 나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시간도 없고 해서 약속을 그렇게 어기면 안 된다고 제가 막 화를 냈는데요. 칼리가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잖아.”라고 했어요.(웃음) 그걸 그림으로 그려두었더라고요.

 

 

‘자유, 평등, 박애’


교육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학생들과 선생님이 수평적인 관계예요.


학생들도 선생님에게 문제제기 할 수 있고요. 선생님들도 그 비판을 빨리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어요. “그래, 맞다.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거예요.


프랑스 사회도 문제가 아주 많아요. 그래도 그나마 좋은 것은 공유하고 있는 가치가 확실하다는 거죠. 제가 인터뷰한 한 학생은 지금 대안학교를 다니는데요.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에 화를 내고 그것을 찾기 위해 대안학교를 선택했어요. 참 다르죠. 우리는 구호와 현실이 완전히 유리된 것에 너무 익숙해요. 하지만 이들은 구호가 그대로 현실이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게 참 감동이에요. 프랑스도 자유와 평등, 박애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하지만 그럴 때 훨씬 더 크게 사람들이 분노하는 거죠.

 

수사(修辭)로만 남는 게 아닌 거네요.


우리는 ‘그건 수사일 뿐이야’에 너무 익숙해요. 누가 교훈을 쳐다보고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이를 테면 ‘5공’때 ‘정의사회구현’이 슬로건이었잖아요. 정의사회구현과는 정반대에 있는 사회의 수사일 뿐이었죠. 지금 말하는 ‘노동존중사회’도 똑같아요. 노동 존중이 되지 않은 현장에 사람들이 별로 분노하지 않잖아요. 노동자들만 그것에 대해 얘기할 뿐이죠. 안 지켜지고 있는 것을 분노하는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종류의 냉소는 사회에 대한 신뢰 부족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수정된다는 공감대가 있는 사회라면 더 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주장도 하고, 그 주장이 가끔 이뤄지기도 하고 해야죠. 그런 경험이 필요해요. 사실 그 방법밖에는 없거든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역사를 이끌어 왔던 것은 87년 6월 항쟁이니, 촛불혁명이니, 이런 것이지 법이 먼저 바꾼 것 별로 없어요. 먼저 움직이지 않았죠.

 

바로 그 지점에서 세월호와 촛불혁명을 거친, 특히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 일찍부터 시민으로 교육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일 거예요.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정말 시위를 많이 하고요. 조직이 생기기도, 없어지기도 많이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보수화되기도 하고 그러면 또 새로운 조직이 생기죠. 최근에도 전국고등학생협의회 대표로 누가 당선되었다, 하는 뉴스가 있었어요. 마치 과거 한국에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에 누가 당선되었다, 하고 뉴스 나왔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들은 어쩌면 대학생들보다 더 격렬하게 단결해서 싸웁니다. 한국에서도 학생들이 모의투표를 하고 그러잖아요. 프랑스 학생들은 지난 대선 때, 1차와 2차 투표 사이에 2차 투표 거부 운동을 직접 했어요. ‘르펜도 안 된다, 마크롱도 안 된다’는 깃발을 든 거죠. 투표권이 없음에도 했고요. 그게 무의미하지 않았어요. 마크롱 당선 당시 역대 무효표가 제일 많이 나왔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엄마가 보기에 가장 놀라운 과목은 시민윤리다.”(249쪽)라고 하셨잖아요. 시민윤리, 어떤 것인가요?


저희 학창시절에 국민윤리 과목이 있었어요. 주로 배웠던 게 어떤 철학가가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 하는 것이었죠. 니체는 뭐라고 말했고, 칸트는 뭐라고 말했는지를 배우는 건데요. 프랑스의 시민윤리는 참 미묘해요. 과목이 있는데 담당 교사가 따로 있지는 않아요. 고등학교는 잘 모르겠는데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역사 과목 교사가 2주에 한 번 이 과목을 가르쳐요. 다른 과목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잖아요. 담당 교사도 없고, 2주에 한 번 돌아오고, 시험도 당연히 안 보고요. 무엇보다 교과서가 없어요. 특정 내용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져주는 거죠. 그렇게 어떤 태도를 익히게 하는 건데요. 칼리는 이 수업이 참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깊게 남는 과목인 거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이 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던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이 시간에 삶에서 제일 필요한 것을 배운대요.

 

삶에서 진짜 필요한 것, 교과서 바깥의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네요.


저는 칼리에게 항상 물어봤어요. 학교에 왕따가 없느냐고요. 없다고 하더니 어느 날 왕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이 시민윤리 시간에 왕따에 관한 교육을 받은 즈음이었더라고요. 아마 그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피해자 아이가 신고를 결심한 것일지도 몰라요. 이후 역할극을 하면서 다시 따돌림에 대해 교육을 했고요. 조를 짜서 역할극을 했는데 공교롭게 칼리 그룹에 왕따 주동자가 피해자 역할을 맡게 됐대요. 그런 식의 교육이 진행되는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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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비교는 없어요


“경쟁의 대상이 옆 사람이 아니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157쪽)라고 적은 문장을 읽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한국은 완전히 경쟁 사회예요.


칼리가 중학교에 갔더니 아이의 모든 성적, 계획과 관련된 것들을 인터넷에 접속해서 볼 수 있더라고요. 비번을 주고 학부모와 아이, 교사가 함께 보는 건데요. 점수는 있지만 등수는 안 나오는 거예요. 나오는 것은 1학년 1학기 때와 2학기, 지금의 점수 그래프죠. 나의 성취도 변화를 보여주는 거고요. 반 평균만 나와요. 학년 평균은 없어요. 당연히 등수도 없고요. 모든 게 반 중심이에요. 기껏해야 30명 정도인데요. 반 평균을 기준으로 나는 어떤 과목을 잘하고 어떤 과목이 부족한지만 확인할 수 있어요. 그걸 보고 내가 누구를 따라잡아야지, 생각할 일이 전혀 없잖아요. 아주 자세하게 여러 가지 그래프를 컴퓨터에서 보여주는데 거기에 타인과의 비교는 없어요. 오직 나를 분석할 수 있을 뿐이죠. 저는 그래서 너무 안심이에요.

 

안심이요.

 

어떤 종류의 경연대회, 경진대회도 없어요. 한국은 눈만 돌리면 경연대회잖아요. 그러니까 뭘 해도 나의 우열을 평가 받아야 하죠. 칼리가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참 좋아요.

 

문화 교육도 폭넓고 다양하게 받는다는 점이 눈에 띄더라고요. 교육이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도 이루어져요.


칼리가 클라리넷을 배워요. 초등학교 때는 음악 특성반에서 친구들과 같이 했고요. 그만 둘 수도 있고 계속 할 수도 있는데 계속 하겠다고 해서 콩세르바투아르(Conservatoire, 국립음악원)에 갔어요. 콩세르바투아르는 대부분 공립이고요. 음악과 무용이 주 과목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 1:1교육을 받고요. 수업료는 소득별로 차등 부과되는데요. 칼리는 1년에 150유로(약 19만원) 정도 내요. 그런데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동안 칼리가 만화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일주일에 3번 가면 교재비 포함 한 달에 40만원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프랑스는 그러니까 돈이 거의 문제가 안 돼요. 교육의 질은 또 아주 좋기 때문에 제대로 하지 않는 아이들은 계속 할 수가 없고요. 2년에 한 번 레벨 테스트가 있거든요. 하지만 그것 역시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니에요. 7명이 수업을 하는데 다 올라갈 수도 있고, 다 떨어질 수도 있어요.

 

교육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주는 사회네요.


프랑스에서 ‘공화국’은 중요한데요. 이들은 공화국이라는 말을 프랑스라는 말 대신 쓰기도 할 정도예요. “나는 공화국의 학교 교장이다”라는 식이죠. 교육에 대한 절대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공화국의 출발인데요. 공화국을 만들고 귀족이나 왕이 갖고 있던 권력을 시민들이 가져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시민들 한 명, 한 명이 똑똑해야죠. 학교가 그래서 만들어졌고요. 당연히 그렇게 생긴 학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거고, 프랑스는 그 때문에 대학교까지 거의 무상교육이에요. 심지어 칼리 아빠는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간다고 돈 내라고 하면 “왜 학교에서 돈을 내라고 해? 이게 무슨 공화국이야?”(웃음) 이래요. 큰돈이 아닌데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인 거죠. 그래서 뭔가가 후퇴할 때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아직도 ‘자유, 평등, 박애’는 필요하다”라는 말을 해요. 계속해서 이 가치를 환기시키는 거죠.

 

그런 가치가 현재 우파 정권의 장기 집권으로 조금씩 무너지고 있잖아요. 현재 프랑스 사회에서 느낀 공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은 뭔가요?


엄청나게 무너지고 있어요. 마크롱 집권 1년밖에 안 됐는데 제가 직전에 확인한 지지율이 34%였어요. 원래도 그렇게 높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우파들도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워낙 정도가 심하니까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걱정을 해요. 불평등이 너무 심화됐거든요. 특히 대학교육에 있어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요. 이전에는 바칼로레아를 통과하면 대학을 못 갈 일이 없었어요. 웬만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마크롱이 대학 입학시험을 보기 전에 서류, 면접을 접수하게 하고 그 대학에서 합격 여부를 통보하게 했어요. 그런데 그 평가 기준이 학교마다 달라요. 우스운 건 프랑스의 해외령, 예를 들면 타히티 섬 등에서도 파리로 진학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들을 받아주지 않는, 지역차별이 가능해진 거예요. 이런 일이 지금 막 일어나는 중이에요. 공화국의 원칙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경악하고 있어요.

 

이런 장면을 칼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최근에 마크롱이 철도노동자가 누리는 지위상의 혜택을 없애겠다고 선언해서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했어요. 그때 고등학생들도 다 같이 파업을 했죠. 그중 일부가 집회에 참여했다가 학교에 들어와 있었는데 경찰들이 학교에 있는 학생들을 잡아간 거예요. 이틀 동안 구속을 시켰죠.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았어요. 그게 큰 문제가 됐었고, 그 얘기를 칼리한테 해줬더니 이 정부가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도발한 것 같다는 거예요. 아니면 겁주기라고요. 그렇다면 나도 한다, 하더라고요.

 

 

노동중심 삶에서 휴가중심의 삶으로


작가님도 칼리를 통해 새롭게 배운 것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중 정말로 바꾸기 어려웠던 교육적인 태도가 있었을까요?


이효리 씨가 “훌륭한 사람 되지마. 아무나 돼.”라는 말을 해서 화제였잖아요. 그 비슷한 생각을 칼리가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테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고 해요.(웃음) 그런데 저는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래야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어디든 말이에요. 어영부영 보내기보다 열정의 지점을 발견해서 가꾸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러니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웃음) 생각이 있는 거죠. 그런데 보면 칼리의 인생관은 ‘La vita e bella(인생은 아름다워)’예요.(웃음)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교육 받으며 키워진 작가님의 목표지향적인 면과 대비되는 장면이네요.(웃음)


네, 칼리는 목표지향이 하나도 없어요. 얘한테 제일 중요한 것은 친구들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는 것 같아요. 우정을 표현하고, 친구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하는 거죠.

 

한국 사회가 난민에 대한 이야기로 또 뜨겁잖아요. 연대 의식이 부족한 사회에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아요. 칼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생각을 하게 되네요.


경쟁을 도구로 성적을 올리는 건 되게 쉬워요. 얘를 이기지 않으면 대학 못 가. 쉽잖아요. 그걸 정상이라고 보죠. 다른 방법은 없다, 건강한 경쟁이다, 라면서 미화를 하고요. 하지만 경쟁 아닌 방법으로 사람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어요. 우리 사회는 그 방법을 열어놓지 않았어요. 그걸 모르니까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누가 와서 빼앗겠다는 거야, 가 되는 거죠. 그렇지만 내가 베푼 선행은 돌고 돌아요. 반드시 나한테도 돌아오거든요.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거죠.

 

앞서 10꼭지 정도를 덜어냈다고 하셨잖아요. 뺀 것 중 아쉬운 건 없으세요?


노동인권교육과 장애인교육이요. 노동인권교육은 시민윤리 교육 안에 들어가 있는데요. 칼리가 본격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었어요. 1-2년 후에 배우는 것이라 제가 직접 본 게 없어 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어요. 역사와 연관이 있는데요. 프랑스 노동자들이 1936년에 한 달 동안 총파업을 해요. 그때 상황이 지금 한국과 비슷한데요. 좌파가 정권을 기적적으로 잡아서 억압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모든 꿈이 실현될 것 같은 순간이었거든요. 2주 동안의 유급 휴가, 주 40시간 노동, 통상임금의 12% 상승, 실업급여 등을 당선된 정권이 다 공약했던 것인데 실현되지 않았죠. 그래서 선거 일주일 뒤에 파업을 시작해요. 그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돼서 200만 명이 참가했고, 딱 한 달 됐을 때 총리공관에서 노조 대표와 만나 노동자의 요구를 전면 수용합니다. 이것이 프랑스 사람들의 삶을 전면적으로 바꾸었어요. 노동중심 삶에서 휴가중심의(웃음) 삶으로 바뀐 거죠.

 

그 이후에 2주 유급 휴가가 5주까지 확대된 거군요.


80년대에 5주 유급 휴가로 확대됐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한 달 동안 아파트 경비도, 택배도 휴가를 가고 없어요. 심지어 방송국도 재방송만 틀고, 모든 공연장이 문을 닫아요. 모든 사람들이 쉬는 거죠. 또 여름에 휴가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때 휴가를 가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1년 내내 휴가를 계획해요. 휴가를 중심으로 삶이 꾸려지는, 지금의 패턴이 만들어진 거예요. 1936년 총파업이 그것을 가져다줬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업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해요. 그들이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삶이 없었으니까요. 불편하지 않은 파업은 없고, 파업을 하지 않는 한 가진 사람들이 더 가져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라는 것을 사람들이 역사책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배우는 거죠. 또 교사들이 수시로 파업을 하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의 노조가 무엇이 있는지, 어떨 때 파업을 하는지, 그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배우지 않아도 학습이 돼요.

 

지금 한국 사회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가지고 하는 얘기들을 떠올리면 참 멀게 느껴지는 얘기예요. 52시간, 너무 많잖아요.


너무 많아요. 프랑스는 주 35시간 근무예요. 그러니까 오후 5시에 학부모 회의가 있으면 다 올 수 있는 거죠. 수요일에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면 보호자가 노동 계약을 할 때 “난 수요일에 쉴게”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금요일에 쉬고요. 그게 가능하죠.

 

마지막으로, 독자분들에게 꼭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경쟁하지 않을 자유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것은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에요. 워낙 경쟁만이 삶의 방식이라고 믿어온 아이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 아이들에게 다른 출구를 열어주면 아이들은 분명히 그것이 의미 있는 출구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쪽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저도 한국에서 완벽하게 교육 받은(웃음) 사람인데 프랑스에서 다른 출구를 보고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면 그게 큰 길이 될 수 있겠죠.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목수정 저 | 생각정원
프랑스 공교육의 모습을 비추며 우리가 교육을 통해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을 다시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아이들을 교육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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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 “제 역할은 영원하지 않은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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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한 장면을 재연한다. 신촌에 자리한 이한열 기념관 2층에는 6월 항쟁 당시 그가 입었던 옷과 신발 한 짝이 전시되어 있다. 짝을 잃어버리고 덩그러니 남은 신발 한 짝을 김겸 작가가 복원했다. 복원한 신발은 기념관 유리 벽 뒤에서 가만히 사람들을 맞이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한 짝만 남은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복원하는 내내 운동화가 이야기하는 바를 읽고 해석하는 복원가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운동화가 어떻게 가닿을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이 소설 『L의 운동화』 로, 운동화 주인인 이한열 열사가 살아있던 때를 배경으로 한 영화 <1987>이 개봉한 후에는 전율이 일었다. “유물이나 예술작품의 가치는 물질로서의 존재보다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로부터 나온다.”라는 평소 신념이 실제로 구현되는 걸 지켜본 셈이다.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에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뿐만 아니라 그가 복원한 수많은 예술 작품과 그의 이야기가 담겼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곱씹고, 생각하고, 다듬고, 매만진 생각이 담담하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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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짝의 운동화에서 시작했습니다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는 어떻게 기획하고 쓰게 됐나요?

 

꽤 오래전부터 보존복원 관련 서적 집필에 관한 문의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주로 전공서 수준의 책이었고, 실제로 준비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오래 전부터 일을 하면서 품고 있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는 문화예술이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보통은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거나 우리 삶에 깊숙하게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제가 전공 서적을 집필한다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드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예술작품이나 유물이 왜 역사의 씨앗이 되는지, 그것을 보존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유물을 통해서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는지, 왜 선진국에서는 문화와 예술, 예술가를 높게 평가하는지, 오랫동안 일하며 제가 묻고 답을 찾고 있는, 근본적인 것에 관한 생각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문학동네에서 비슷한 기획으로 제안해 주셨습니다.

 

제안을 받았던 시기가 김숨 작가님의 소설 『L의 운동화』 가 나온 이후인가요?


처음 이 책 제안을 받았던 건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하기 전입니다. 이한열 열사 운동화를 만나면서 이 책의 큰 주제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운명적인 만남이었죠.

 

처음 운동화를 복원한다고 했을 때,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 같아요.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할 때, 소중한 자료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 역시 “운동화 한 짝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을 했죠. 그런데 운동화 한 짝이 복원된 것을 보고 소설이 나오고, <1987> 영화에 관한 인터뷰에서 감독님이 “이 영화는 한 짝의 운동화에서 시작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실 때, 소름이 돋는 것 같았습니다. 저로 인해서가 아니라 운동화가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음으로 여러 일이 촉발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거예요. 유물이라는 씨앗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야기로 성장하는가를 짧은 시간에 체험하게 된 겁니다.

 

보존복원 의뢰를 모두 승낙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거나 하지 않는 기준이 있나요?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보존복원 전문가를 의사로 비유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가릴 이유가 있나요? 제게 오는 작품이나 유물은 ‘아픈’ 것들인데요. 대개 의뢰하는 분의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이를테면 소중함 같은 거요. 지난주에는 3D프린터로 만든 평화의 소녀상을 고쳤어요. 아는 가족인데 가족여행을 할 때 항상 평화의 소녀상을 가지고 다니면서 여행을 다녔대요. 그런데 여행지에서 그만 부러진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안 될까요?” 하는데, 제가 감쪽같이 고쳐드렸습니다. (웃음) 태권브이 로보트를 가지고 오는 동네 분도 있고요. 유물이어야만 한다, 유물 중에서도 어떤 유물이어야 한다, 그런 기준은 전혀 없습니다. 의사 분들이 아픈 환자를 가릴 수 없는 것처럼요.

 


제 일이 재미있습니다

 

진로를 선택하는 데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정말 지금까지도 오로지 창작만 생각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어렸을 때 집이 좀 어려웠어요. 슬레이트로 지은 네다섯 집이 모인 곳에 살았는데요. 밤이면 촛불을 들고 화장실에 가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힘드셨죠. 그러다 보니 제 능력과는 관계없이 의대에 가길 원하셨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과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으니까, 미술이나 예술과 관련된 것을 해야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아버지께서 실기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미술비평이나 이론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합의를 본 거죠. 그때 이후로는 어떤 선택하는 것에 대해 크게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삼성문화재단 복원실 채용 공고를 우연히 보고 합격한 걸 계기로 보존복원 전문가의 길을 선택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모두 우연인데요. 계속 복원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어떤 점 때문이었나요?


일을 시작했을 때 ‘야, 이거 재밌는데?’ 했던 거죠.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할 때 마키노 다카오 선생님의 생활을 보면서 내가 꿈꾸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의 생활은 도제식이니까 삶의 전반을 보거든요.

 

일이나 작품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도 많이 배울 수 있었겠네요.


거의 제가 따라쟁이예요. (웃음) 그분은 그분의 삶 자체가 보존복원과 일체화되어서 너무 자연스러우세요. 기가 막히게 작업을 하시는 데도 애쓰는 것 같지도 않고, 너무나 자연스러우시죠. 삶에서 대가의 느낌이 묻어나는 거예요. 장인의 향기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것들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복원가로 삶을 꾸리면서 고민할 때마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죠.

 

마키노 선생님이 일본 전통 목조 불상 복원가라는 사실을 일본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26쪽)고 하셨어요. 원래 조각 복원을 배우고 싶으셨잖아요. 2년 동안 일본에서 공부한 시간을 후회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릴 때는 좀 더 효과적이고 실리적인 고민을 하고 후회하죠. 처음부터 영국으로 갔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분명히 했는데요. 점점 일본에서 있었던 2년간이 오히려 저한테는 훨씬 소중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실감하게 되는 겁니다.

 

보존복원이 정말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직업인 것 같아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잖아요. 작품이 산산조각이 난 현장에 갔던 일화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했어요.


그런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담당자분들은 반쯤 넋이 나가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계세요. 동분서주하며 걷는데 마치 허공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복원이 시작되고, 작품이 조금씩 모습을 찾을 때마다 같이 살아나시는 거예요.

 

악몽도 많이 꿀 것 같아요. 일에 시달릴 때 일하는 악몽을 꾸기도 하잖아요.


책을 쓸 때 처음 모은 원고가 30~40% 더 많았는데요. 삭제된 원고 중에 악몽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 5년간은 복원한 작품이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악몽을 꿨던 것 같아요. 꿈을 꾸고 나면, 다음날은 그 작품을 보러 가는 거예요. 안 그러면 또 잠이 안 오니까요. 한 5년간은 그렇게 계속, 악몽을 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계속 보존복원 일을 하셨어요. 어떤 사명감 때문인가요?


음, 그런 것보다는요. 일단 저는 제 일이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 직업이 직업이자 취미이고, 생활입니다. 취미로 소설을 즐기시는 것처럼, 저는 이게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보게 되고요. 생각해보면 그렇게 악몽을 꿀 때도 일이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가끔 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행복한 순간이라는 건 무언가를 할 때 배도 안 고프고, 잠도 안 오고, 밤낮없이 그걸 할 수 있는 순간이 행복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이 일을 할 때 제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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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직업탐방 기사를 쓰러 온 대학생 기자분이 ‘유물을 왜 보존하고 복원해야 하나요?(184쪽)’라는 질문을 하셨다고요. 그 질문을 그대로 하고 싶었어요.


신입생이 들어오면 첫 시간에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경제학을 전공하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렇게 질문하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이번에 어떤 문화재가 손상돼서 몇백 억 들여 복원했다고 하더라?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밥 굶는 아이도 많고, 집이 없어서 비를 맞는 어르신이 그렇게 많은데, 그게 지금 우리나라에서 급하게 할 일이야?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 주고, 집 지어주는 게 먼저 아니야?”라고 한다면, 여러분께선 “아니야, 그래도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복원해야 해.”라고 설득할 수 있습니까? 설득할 수 없다면, 진심으로 이걸 전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보통 학생들은 교과서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중요하다거나 유물의 소중함 같은 거요. 그럼 제가 다시 묻습니다. “집안이 어려워 며칠을 굶고 있는 아이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너무 잔인한 상상이네요.


사실은 여기에 대한 제 믿음이, 답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이 답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고, 이 책을 쓰게 된 거였거든요. 이것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없다면 저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문화체육관광부 보존담당관으로 일할 때, 보존예산을 따러 가거든요. 가면 무형문화재의 복지나 지원 예산이 필요해서 오신 다른 사무관이 계세요. 그러면 한정된 예산으로 “아니에요. 그분들의 복지보다 지금 미술작품을 복원하는 데 비용이 이만큼 드니까 거기에 떼어서 저도 예산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라는 주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답을 못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답이 뭘까요?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하는 질문을 품고 선택하며 삽니다. 만약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불행을 피하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유방암에 걸린다는 미래를 보았다면, 발병을 피하거나 예방할 수 있잖아요. 이건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측을 잘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보면 됩니다. 과거의 수많은 데이터로 현재와 비교해 비슷한 상황을 찾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분명히 비슷한 상황이 있거든요.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선택한 것의 결과를 봅니다. 그런데 결과가 현재 원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 이런 예측은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수많은 과거의 데이터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역사가 있는 민족이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가 그거예요. 과거의 경험이 없다면 절대 지금의 상황을 올바르게 볼 수도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복원가는 지금 현재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고, 이용 가치가 없는 것 같지만 앞으로 어떤 순간에 어떻게 이용될지 모르는 수많은 데이터를 열심히 보존해서 모으는 사람들입니다.

 

밥을 굶는 아이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답하나요?


왜 그걸 복원하냐고,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밖에 대답하지 못해요. 하지만 이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될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서 역할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만약 남기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역시 모든 것을 지금은 알 수 없지만요. 아이를 만나면 일단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사줄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할 거예요. “네게 오늘처럼 매일 따뜻한 밥을 사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수많은 과거의 데이터를 모으는 일이다. 그걸 모아서 남길 테니 너는 앞으로 그걸 이용해서 좋은 선택을 해라. 너, 그리고 너의 후손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수많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서 남기도록 할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스스로 질문했고, 거기에 내린 답 같은데요. 생각을 정리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성격 탓인데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잘 못 합니다. 계기는 없었고, 죽 해왔던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가 좋아서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조금씩 했던 거죠.

 


한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하는 도구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원한 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도 있나요.


당연히 운동화도 그렇고요. 정확히 10년 전인 1998년에 삼성문화재단에서 일할 때 광화문 지나면서 페인트가 발려진 동상을 보면서 저 표면 작업을 내가 하면 어떨까 꿈을 꾸었는데 정확히 10년 후에 2008년에 이순신 동상 위에 있더라고요. 삶이 재미있다는 것을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길이나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복원 후에 전시된 걸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감회보다도 상태가 어떤지, 마치 환자 살피는 것처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원은 절대 치료가 끝났다고 끝나는 게 아니거든요. 정기적으로 다시 봐야 하고요. 치료는 정말 치료입니다. 계속해서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고요.

 

외국과 우리나라가 보존복원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분명 차이가 있지만, 어디가 좋고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니까요. 그건 나라마다 문화나 취향이 다른 것처럼 그냥 다름인데요. 단지 문화선진국에서 문화재나 유물, 작품에 애정이 좀 더 깊은 것, 이것은 좀 더 닮았으면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건가요?


진심으로 소중히 하는 것, 그리고 그 소중함이 생활 속에 녹아있는 거죠. 예를 들어 영국은 할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작가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오래된 골동품 같은 것들이 훼손되면 복원연구소에 맡기거든요.

 

사설복원연구소가 많은 편인가 봐요.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길에 보면 자동차 수리하는 곳이 많지 않습니까. 많은 분이 자동차를 아끼기 때문에 조금만 다쳐도 수리를 하거든요. 영국은 집에서 오래 가지고 있던 인형 같은 것들도 복원연구소에 맡깁니다. 자연스러운 문화니까요.

 

그렇게까지 되려면 예술을 소비하는 문화가 수반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일반적으로 예술이 어렵다는 생각이 예술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미술사 강의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술의 재미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요. 한 작품은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이 어땠는지 이야기합니다. 강의 시간에 역사책은 글로 쓴 역사이고, 미술작품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 역사라고 하거든요. 100~200년 전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희로애락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게 예술입니다.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을 알려주는 도구라고 생각하면 좀 더 재미있게 바라볼 수 있겠네요.


맞습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소통을 하고 살지 않습니까. 여러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는데 지금 시대는 너무 언어에만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어로 하는 소통은 너무 표면적인 것 같거든요. 말에 속고요. 말은 말하는 사람의 본의조차도 왜곡시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때는 백 마디 말보다 눈물 한 방울이 훨씬 정확하게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 같은데요. 예술 작품이 그런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하는 도구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누군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노래만 듣고 그런 게 아니라 그때의 감정, 그 시대의 풍경,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미술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미술 작품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익숙해진다면 음악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을 얼마든지 미술 작품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보존도 물건에 새겨지는 기록입니다

 

보존복원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 같은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천 명의 복원가가 있다면 천 명이 모두 다른 복원가이기 때문에 복원가가 이래야 한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요. 학생들에게도 기초를 철저히 하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복원 후에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보통 많은 분이 기대하시는 게 이렇게 멋지게 복원했다고 작품을 드러내는 것인데요. 그럴 수 없는 게 제 성격은 둘째 치고요. 보존복원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면, 완전한 복원이 없다는 것이 가장 기초이고, 기본이거든요. 그 어떤 물질도 영원한 것은 없고요. 계속해서 변해가는 거고요. 제 일은 변화를 다루는 일이어서요. 제가 복원했던 것도 수십 년 후면 또다시 변화할 것이고요. 그것을 후대의 복원가가 재복원해야 하고요. 마치 인간이 살아가며 어떤 병원에서 병 하나를 고쳤다고 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건강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재발하기도 하고, 다른 곳이 아프기도 하고요. 끊임없이 한 사람의 삶을 위해서 많은 분이 애쓰시는 것처럼. 저 혼자 감당할 일도 아니고요. 감당해서도 안 되고요.

 

저라면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 같아요.


아니요. 아까운 게 아니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서 내가 하는 복원의 역할이 어느 일부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생각이 아니라 그건 정답입니다. 유일하게 제가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모든 복원가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제 역할은 일부분입니다. 그것도 영원하지 않은 일부분이요.

 

유물에 보존복원하는 당시의 시간을 쌓는 작업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복원 이론 가운데 ‘사그라지는 대로 놔둬라, 계속 복원해서 살려라.’ 이 둘이 복원에 있어서 가장 핵심에 있는 이론인데요. 복원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는 복원가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또 그것은 복원가만의 판단이 아니라 유물을 둘러싼 모든 사람의 의견이 더해지는 거죠. 어떤 식으로 보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은, 당시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의견과 의식, 생각, 철학이 모두 담기는 겁니다. 500년 된 유물을 현재 복원하고, 다시 500년이 지난 후에는 만든 당시 조상의 뜻뿐만 아니라 복원한 때의 사고도 함께 읽을 수 있는 거죠. 그게 유물의 역할일 겁니다. 보존도 물건에 새겨지는 기록입니다.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김겸 저 | 문학동네
모두가 숨 가쁘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재빨리 폐기 처분하기 바쁜 시대에 가까이는 수십 년, 멀리는 수백 년 전 태어난 작품을 붙잡고 사라져가는 기억을 되살리는 그의 손길이 특별한 울림을 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도대체 “연애는 살면서 겪는 사건일 뿐, 목표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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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자화자찬.


도대체 작가의 프로필 마지막 소개 글이다. 인터뷰 하는 동안에도 그는 “너무 자화자찬이 되는 것 같은데요(웃음)”라며 유쾌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결코 자화자찬이 아닌 것도 있었지만 설령 자화자찬이라 하더라도 그 말들을 듣는 게 즐겁기만 했다. 거기에는 반짝이는 ‘긍정성’이 있었으니까. 찌질한 연애를 하던 과거의 나를 애정으로 바라보는 시선, 사업 실패 등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 이후 갖게 된 고마움과 어떤 삶에 대한 발견, 이것들이 도대체라는 작가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3분을 웃기기 위해서는 3일도 투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유머. 그 모든 것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작가의 전작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가 일상의 고비를 씩씩하게 건너는 방법을 엿보게 해줬다면 이번 책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은 서툴고 어설펐던,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빛났던 우리 모두의 지난 연애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는 도대체 작가가 꼭 붙잡아 낸 연애의 작은 순간들(상대에게 받은 문자를 한 시간 동안 다시 보고 있다든가 아주 사소한 이유로 상대가 싫어졌다든가 하는)이 발랄하게 담겨 있다. 그 발랄함이 연애를 하지 않는 나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연애는 목표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도대체 작가의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 은 그러니까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인 사람으로부터’ 온 즐겁고 상쾌하며 소소한 자화자찬일지도 모른다. 이 자화자찬을 읽노라면 어쩐지 나의 지금도 꽤 괜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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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웃을 수 있으면 성공


“제목부터 진짜 공감 된다”라는 리뷰가 있더라고요. 이 제목, 어떻게 결정된 거예요?

 

다행이네요.(웃음) 제목을 제가 짓기는 했어요. 처음엔 ‘연애는 남의 일’이라고 했다가 이렇게 지었는데요. 사실 후회도 살짝 하고 있어요. 저는 ‘예전에 연애를 했었지만 어차피 연애가 지금은 남의 일이 되었으니까’라는 조금 코믹한 느낌으로 지은 제목이거든요. 그런데 받아들이는 분들이 되게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더라고요. 문장으로 뉘앙스를 충분히 담기가 어렵구나, 생각했죠. 이 말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분도 있는 것 같아서 좀 아쉬워요. 여러분, 내용은 발랄하답니다.(웃음)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출간 때 진행한 네이버 책문화 생중계에서 “3분 웃기기 위해서 3시간도 투자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웃음) 그만큼 작가님께는 재미가 중요한 것이죠?


그때는 없어 보일까봐 3시간이라고 했는데요. 3일도 준비할 수 있어요.(웃음)

 

그러니 책을 쓰실 때는 얼마나 재미를 위해 애썼겠어요.


네, 쓰면서 사실 제가 제일 많이 웃어요. 저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이긴 한데요. 그래도 사람들이 보고 재미있어 할 생각을 하면서 저의 찌질한 과거도 솔직하게 담는 거죠. 책을 본 사람들이 웃을 수 있으면 성공!(웃음)

 

제일 재미있게 그렸던 장면은 뭔가요?


많이 있는데요. 「소개팅 6」도 저에겐 굉장히 재미있는 기억이에요. 소개팅을 한 날 그 분이 저를 ‘형수’라고 수십 명에게 소개한 거죠.(웃음) 책은 다 제가 겪었던 것을 그린 거라서 어떤 장면을 그려도 그때가 다시 떠오르면서 재미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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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려보낼 수도 있을 작은 순간을 붙잡아 그려내는 것이 작가님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찰나에 느낀 감정을 기억하고, 잡아내는 것인 것 같아요. 어떤 얘기를 한 주제로 길게 쭉 끌고 나가는 것보다는 말이에요. 개인적으로는 트위터에 최적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웃음) 야구 선수로 치면 장타보다는 단타에 적합한 사람인 거죠.

 

그런 순간이 탁 들어오면 메모를 하시는 건가요?


기록을 안 해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생각이 나는데요. 그래도 ‘이 순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은 휴대전화 메모장에 꼬박꼬박 기록을 해요.

 

트위터가 일종의 작업 보조도구처럼 많이 사용되기도 하겠군요?


많이 그래요. 저를 오랫동안 팔로우 하신 분들은 아마 트위터에서 본 이야기에 조금 더 살이 붙어서 책에 실린 것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트위터 이전에는 이렇게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저장해놓을 일이 많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어떤 큰 사회적 뉴스도 리트윗 등으로 같이 저장이 되죠. 이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보면 개인에게도 큰, 의미 있는 기록이 될 것 같아요. ‘아, 이 무렵에 탄핵이 있었구나’ 하는 식으로요. 예전에는 일기를 쓴다고 해도 그런 것까지 다 기록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남자 달력」 같은 것처럼 말이죠.(웃음)


네, 그렇죠.(웃음)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해내시죠? 정말 재미있었어요.


「남자 달력」은 친구와 이야기 나누다 생각한 건데요. 자꾸 서로 그렇게 얘기하게 되는 거예요. “그 영화 언제 개봉했지?”라고 물었는데 “내가 그때 누구와 봤으니까 몇 년 전이겠다.”라고 말하게 되고요. 어떤 시기를 떠올릴 때 자꾸 “그때 누구와 만났을 때니까”라는 식으로 시기 계산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건 그냥 떠오르는 거라서…(웃음)

 

글도 있고, 그림도 있는데요. 어떨 때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는 건가요?


소재를 생각하면 글로 쓰는 게 더 재미있겠다, 싶은 것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겠다, 싶은 것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림은 사람들 표정 같은 것을 보여줄 수 있잖아요. 특히 표정, 동작은 그림 한 컷이면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데 글로는 구구절절 써야 하거든요. 그런 건 만화로 하면 한 페이지로 끝날 수 있겠다, 싶고 그렇죠.

 

 

저의 연애관은 동행이거든요


“과거로 돌아가 지난날의 나에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너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말렴.””(122쪽)이라는 부분이 좋았어요.

 

20대 때부터 30대 초반 즈음까지는 연애를 하면서 감정의 부침을 많이 겪었어요. 만나면 좋은 건 당연한데 헤어지고 나서 그것 때문에 너무 많이 힘들어했죠. 내가 부정된 느낌 때문에요. 한 사람한테 부정되었을 뿐인데 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 것 같은 생각 때문에 한참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랬어요. 복수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생각만 한 적도 있고요.(웃음) 물론 그런 시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됐고, 생각의 폭이 넓어졌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얘기를 할 수 있다면 너무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끝난 연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말씀이군요.


나는 사실 혼자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에요.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데 그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연애 하다가 끝나면 다 끝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후에 30대 중후반 즈음으로 오면서는 그냥 헤어져도 그때처럼 힘들진 않더라고요. 마음이 아프긴 해도 받아들이게 되고요. 특히 예전처럼 악플을 단다거나(웃음) 복수를 생각한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방금 말씀하신 ‘혼자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 진짜 좋아요. 연애를 할 때의 나도, 하지 않을 때의 나도 있는 법인데 너무 연애할 때의 나에게만 집중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요.


맞아요, 지금은 그냥 잘 살고 있어요. 꽤 오래 연애를 안 하고 잘 살고 있죠. 요즘 저의 연애관은 동행이거든요. 어깨동무를 한 동행이라기보다 나란히 산책하듯 동행하고, 서로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이런 정도의 느슨한 동행을 지향하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그걸 못했던 것 같아요. 서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달라도 같이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각자에게 중요한 게 너무 다르면 어려울 거예요.(웃음) 저는 갈치를 좋아해서 아무리 가시가 많아도 일일이 가시 발라내는 걸 감수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귀찮아서 안 먹고 말 수도 있잖아요. 감수할 수 있다면 동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편 작가 후기에도 쓰셨는데요. 아무래도 그 언젠가의 남자친구들이 신경 쓰인 면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하지 않은 얘기도 있나요?


일단 ‘19금’얘기는 쓰지 않았어요.(웃음) 사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있어요. 언젠가 19금 책을 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번 책에는 싣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은 하고 있으니 긴장들 해라(웃음), 라고 말하고 싶어요.

 

꽤 다양한 연애 경험들이 등장해요. 특별히 나만 경험했을 것 같은,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아까 얘기한, 메탈 밴드 멤버와 소개팅 한 경험인데요. 이분 성격이 활발하셔서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은 맥줏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맥줏집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오는데요. 수맥봉 있죠? 그걸 들고 바닥만 보고 들어오는 거예요. 앞을 안 보고요. 무심코 보면서 ‘되게 특이한 사람들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호프집을 누비다가 저희 테이블 앞에 딱 서더라고요. 알고 보니 제가 소개팅한 분의 지인들이었어요.(웃음) 테이블 앞에 서서는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너무 반가워하면서 “우리가 일부러 앞을 안 보고 수맥봉으로 너희들을 찾았다.”고 기뻐하는 거예요. 그날 수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웃음)

 

다시 연애하면 이런 실수는 안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으세요?


예전에 한 배우 분 인터뷰를 어디서 봤는데요. 그분이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듯 하니까 그분의 어머니가 “연애는 구걸이 아니야.”라고 하셔서 그때 딱 멈췄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 들으면서 공감을 많이 했거든요. 사귀다가 마음이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매달렸던 적도 있었어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지 않을까, 하죠.

 

연애에 있어서는 특히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 모습이 있게 마련인 것 같아요.


그리고 조금 오래 만나다 보면 그 만난 시간이 아까워서 못 헤어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는 잘 맞았지만 안 맞는 부분이 발견될 수도 있고요. 사람의 성향도 변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니다, 싶어지면 딱 그만 만나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걸 못하던 때도 있었죠. 같이 지낸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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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어떻게든 쓰지 않을까


무엇보다 책 전반에 깔린 긍정성이 참 좋아요. 무지개를 보면서 “매 순간 나에게 주어진 그 순간의 기쁨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그런 것이다.”(220쪽)라고 쓰셨잖아요. 무지개가 사라질 것을 근심하며 바라보는 게 아니고요.


만나서 좋기는 한데 이러다가 헤어질까봐 너무 무섭다는 말을 자꾸 하는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그게 되게 싫었거든요. 만나고 있을 때 좋으면 되는데 계속 “헤어지면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라는 얘기를 자꾸 하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무지개 얘기도 한 건데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만나는 동안 계속 행복한 이유를 얘기하는 거예요.(웃음) 이래서 좋다, 저래서 좋다, 하면서요. 만나면 행복한 이유를 막 설명하니까 그건 그것대로 힘들더라고요.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제가 구구절절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이렇다고 얘기를 하지만요. 막상 만나면 그럼에도(웃음) 좋은 면이 있으면 빠지게 되기도 하고 그래요.

 

작가님이 번번이 빠지게 되는, 사람의 매력도 있나요?


제가 그게 문제인데요.(웃음) 어떤 기준이 있어서 그것에 빠지면 좋은데 저는 매번 다른 게 보여요. 친구들 말로는 제가 그걸 잘 발견하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친구는 자기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것에 반했고요. 어떤 사람은 감성적인 면이 있어서 반했죠. 어떤 사람은 거창한 꿈이 있거나 이런 건 아니지만 자기 생활을 뚜벅뚜벅 해나가는 모습이 좋아서 반했어요. 그게 너무 달라요.(웃음) 외모에 반한 적도 물론 있고요. 어떤 친구는 너무 귀여워서 반하기도 해요. 반하는 면은 다양한데요. 공통적으로 안 좋아하는 면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건가요?


자기 연민에 너무 빠지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책에도 썼는데 자기를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건 누구도 구할 수 없더라고요. 너무 힘들고요. 그런 사람은 자기를 구원해줄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언젠가 구원 받아야 할 존재’라는 위치에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관계 개선이 될 것 같지 않더라고요. 또, 못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니컬을 가장해서 못된 말을 툭 내뱉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친구 이야기인데요. 남자친구가 너무 속을 썩여서 하루는 카페에서 울었대요. 이러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그 남자가 “너는 내가 이런 줄 모르고 만난 거냐”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무조건 맞추라고 한다면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앞서 긍정성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안에 약간 들어있는 비관적인 인식도 흥미로워요.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에서는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저 불빛 속에 어떤 우울한 사연들이 있을지 상상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고 했잖아요.


무지개를 보면서도, 사실 정말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은 이런 글도 안 썼겠죠. 저는 무지개가 곧 사라지겠구나,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굳이 사라지겠지만 지금을 즐겨야 하는 거다, 라는 얘기를 쓰는 거예요. 습관 같은데요.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에 실린 「행복한 고구마」를 그린 것도 다른 자아가 저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한 거거든요. 저를 관찰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계속 의식하는 것도 아니고요. 어떤 일이 벌어지면 내 시점에서도 보고 다른 시점에서도 봐요. 하다못해 저는 개랑 자주 다니니까 개 시점에서 볼 때도 있어요. 말하고 보니 너무 작위적인 것 같은데요.(웃음) 원래 그래요.

 

그리 작위적이지 않아요. 괜찮아요.(웃음)


산책할 때 개미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제 기쁨 중 하나예요. 개미굴이 보이면 사료를 잘게 쪼개서 그 앞에 둬요. 그러면 개미들이 신나서 들고 가요. 그걸 보는 게 되게 좋은데요. 그러면서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개미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죠.(웃음) ‘얘는 지금 득템했다고 생각하겠지’하면서요. 한 번은 개미가 먹이가 아닌데 그걸 힘들게 들고 가는 걸 봤어요. 제가 일부러 그 앞에 먹이를 놓아줬거든요? 그런데 그걸 보고도 끝내 쓸데없는 부스러기를 들고 가더라고요. 그걸 보면서도 쟤가 저걸 가지고 갔을 때 다른 개미들의 반응은 어땠을지 상상했어요. 습관이어서, 왜 그러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팟캐스트 <예스책방 책읽아웃>에 출연하셔서 말씀하신 일화도 있잖아요. 드라마 <덱스터>를 좋아하시는데 산책할 때 늘 비상 대비소를 찾아둔다고요.


네, 그것도 저의 비관적 성향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항상 어떤 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해요. 여성이기도 하니까 산책을 하다보면 저녁이든 낮이든 이상한 일을 당할 수도 있잖아요. 이때 동선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쉽게 넘어서 몸을 숨길 수 있는 낮은 담장, 이런 것 미리 파악해두고 그래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서 피곤하다기보다는 그냥 재미예요. 저 혼자 생각하면서 재미있으니까 계속 그러는 거예요.

 

내가 나와 잘 노는 사람들이 있죠. 혼자서도 전혀 심심하지 않고요.


네, 저는 좀 그래요. 요새는 TV를 좀 보는데요. 예전에는 TV를 거의 안 봤어요. 어쩌다 보니 중학교 때부터 몇 년 집에 TV가 없었던 때가 있거든요. 그때 습관이 들어서 20대 때도 TV를 거의 안 보게 되더라고요. 영상을 거의 안 보고 지내서요. 그래서 더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습관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

 

그림도 그리시는데 영상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게 느껴져요. 그림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어렸을 때 만화책도 거의 안 봤거든요. 초등학교 때 <보물섬>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것 조금 보고 만화를 많이 보진 않았어요. 그림 그리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했다기보다는요. 그냥 무슨 일이 있으면 그림 그리고, 낙서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홈페이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만화 그려 올리고 하다가 재미 삼아서 그리게 됐지 어떤 영상이나 이미지에 자극 받았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사실 제가 그림을 잘 못 그려요.(웃음) 잘 그리는 그림은 아니에요.


미술대학을 나왔는데요. 그림에 열망이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때 한창 인기 있던 직업이 광고업이었거든요. 저도 그런 걸 해보고 싶었던 거죠. 공부로는 광고업계로 갈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미술 쪽으로 우회를 하려고 했는데요. 과 선택을 잘못 해서 공예학과를 갔어요.(웃음) 광고와는 상관없는 공부를 했죠. 그런데 꿈도 계속 바뀌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대학교 때는 무슨 꿈을 꾸셨어요?


글을 쓸 거라는 생각은 늘 했어요. 글 쓰는 게 어렵지 않았거든요. 잘 쓰진 않지만요. 잘 쓰는 것과 내가 어렵지 않게 쓰는 건 다르잖아요. 뭔가 글 쓰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글은 어떻게든 쓰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가 그림까지 같이 그리게 된 거예요.

 

 

그것도 즐겨찾기 해놨어요


요즘 고민은 뭔가요?


이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나.(웃음)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데요. 이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요.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노동해서 돈 버는 거예요. 사업 실패 후 돈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취직을 했을 때 내가 일을 해서 정당한 대가가 들어온다는 게 좋았어요. 자부심도 느껴지고, 자신감도 상승하고 그렇더라고요. 때문에 노동해서 돈 버는 게 좋은데요.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우리나라가 노동 시간이 길잖아요. 그보다 짧은 시간 노동을 하면서 내 일을 병행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은데 힘들어요. 저는 상황이 되는 한 그런 노동은 계속 하고 싶거든요. 어렵죠.

 

앞서 제목을 오해하는 분들에 대한 아쉬움을 말씀하셨잖아요. 오해를 푸는 작가님의 추천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책은 20-30대에 연애를 떠들썩하게 한 사람이 그 시절에 행복하고 반짝였던 나를 지켜보는 이야기예요. 연애가 어느 정도 남의 일이 된 사람이 회상하면서 쓴 거거든요. 그렇게 처절하지도 않고요. 슬프지도 않아요. 슬펐지만 기억하고 싶은 일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재미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 담아 쓴 책입니다.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인 사람으로부터’(웃음)면 어떨까요? 점점 제목이 길어지네요.(웃음)

 

또 준비 중인 작업이 있으세요?


몇 년째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있어요. 걔네를 관찰해보니까 성격도 다 다르고, 특유의 행동들이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저마다 다르더라고요. 그 관찰기록을 계속 하고 있어요. ‘운동기구파’와 ‘계단파’ 고양이들 특성이 다 있거든요. 그런 것을 정리해보고 싶어요. 만화로 하고 싶긴 한데요. 아직 고민이에요.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잖아요. 이번 책도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덕분에 마음에만 갖고 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하는 어떤 확신 같은 것도 생기셨을 것 같아요.


정말 많이 생겼어요. 사업하는 4년 반 동안 많이 작아졌었어요.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했고, 고생도 많이 했는데 잘 안 됐죠. 그런데 저번 책을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이번 책도 관심 가져주셔서 응원을 많이 받았어요. 얼굴은 모르지만 그분들에게 응원 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정말 좋아요. 오버하는 것 같은데(웃음) 최근에도 좋은 리뷰들을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창작자들한테 잘 봤다는 얘기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들 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응원이 됐어요. 예전에 한 커뮤니티에 「행복한 고구마」가 올라왔는데 밑에 좋은 댓글이 많이 달렸었거든요. 저는 그것도 즐겨찾기 해놨어요.(웃음) 자신감 없을 때 가끔 봐요. 연애도 비슷한 것 같아요. 사람한테 사랑받았던 기억이 힘이 되고요. 무엇보다 제가 치유될 수 있었던 건 제 반려견 덕분이에요. 전적으로 나를 좋아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제 삶이 조금 바뀐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부탁드려요.


연애를 해야 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꼭 하지 않아도 되죠. 그런데 연애를 안 하고 있으면 하자가 있는 것처럼 보잖아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나 혼자로도 이미 충분히 완성된 사람이에요. 그 사실을 안고 살다 보면 동행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바람은 저도 아직 갖고 있는데요.(웃음) 연애는 내가 살면서 겪는 일들, 사건일 뿐이지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연애는 남의 일도대체 저 | 위즈덤하우스
연애의 공백기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팠던 지난 연애들이 다 나쁜 경험은 아니었음을, 또 소중하고 반짝반짝 빛났던 나의 순간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위로를 전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염혜원 “문 앞에서 제일 무섭죠, 열어 보면 별 거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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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파란색으로 채워진 표지가 단번에 눈길을 붙든다. 그림책  수영장 가는 날이다. 물을 등지고 선 아이는 노란 수영 모자에 파란 수경을 얹고, 깜찍한 딸기 무늬 깜찍한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이의 표정이 뾰로통하다. 쌜쭉 입을 내밀고 어깨 너머로 수영장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걸까.

 

매주 토요일은 수영장에 가는 날이다. 아이는 아침부터 배가 아프다. 엄마는 “일단 수영장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도착한 수영장. 바닥은 미끄럽고, 차갑고, 주변은 소란스럽다. 수영 모자는 너무 꽉 끼고, 여전히 배는 아프다. 아이는 이 낯선 공간에 적응할 수 있을까? 물속에 텀벙 뛰어들어서 둥둥 뜨는 경험을, 아이도 할 수 있게 될까?

 

『수영장 가는 날』은 아이들이 처음 겪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긴장, 걱정, 두려움 속에서 나타나는 반응을 세밀하게 포착했다. 그 시간을 통과해나갈 수 있는 힘을, 아이들은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른들에게 필요한 건 조바심과 채근이 아니라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응원하는 일이다. 『수영장 가는 날』은 그 사실을 조용히 짚어준다.

 

이 작품을 쓰고 그린 염혜원 작가는 브루클린에 살면서 그림책 작업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첫 책  『어젯밤에 뭐했니?』로 ‘2009년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아동 도서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을 시작으로, 염혜원 작가의 작품은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다. 2010년에는 미국 일러스트레이터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 신인상을(『There Are No Scary Wolves』), 2013년에는 『야호! 오늘은 유치원 가는 날』로 ‘에즈라 잭 키츠 상’을 받았다.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한 염혜원 작가는 아이들의 방학을 맞아 함께 한국을 찾았다. 오랜만에 한국의 독자들과 재회하는 만큼 반가운 자리도 마련했다.  『수영장 가는 날』의 출간 기념 북토크를 준비한 것. 8월 9일 그림책 전문서점 ‘비-플랫폼’에서 진행될 본 행사는 채널예스를 통해 참가 신청 할 수 있다.
(http://ch.yes24.com/Culture/SalonEvent/1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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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는 모습이 좋았어요


『야호! 오늘은 유치원 가는 날』  , 『쌍둥이는 너무 좋아』  , 『우리는 쌍둥이 언니』는 작가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었어요. 일상에서 소재를 찾으시는 편인가요?

 

네.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는, 제 경험을 소재로 해서 쓸 때 이야기가 더 자연스럽게 나오고 재밌는 것 같아요. 이번 책도 제가 어렸을 때 경험한 일이에요.

 

수영장에 처음 가셨을 때요?


맞아요. 수영장에 가면 옷도 별로 안 입고, 추우니까 총총총 걸어가야 되잖아요. 그리고 그때는 무서운 수영 선생님이 계셨거든요. 막대기 같은 걸 들고서 아이들이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밀어내고 그랬어요. 그런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쓴 책이에요(웃음).

 

『수영장 가는 날』 에 등장하는 어른들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그렇죠. 저희 아이들이랑 미국에 살면서 수영장에 가보니까, 선생님들이 너무 좋으시더라고요. 많이 기다려주는 모습이 좋았어요. ‘일단 경험을 해서 물에 떠 봐, 그러면 수영할 수 있게 돼’라고 하지 않고 아이가 물과 친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거예요. 수영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 있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가끔 엄마들이 ‘한 번만 해 봐’ 하면서 닦달할 때가 있죠(웃음).


부모로서 그런 마음이 들기는 하죠. 저도 엄마로서 조급한 마음이 많이 드는 것 같아요. 혹시 뒤처지지는 않을까 싶은 거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꼭 그래야 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사실 다 똑같이 자라잖아요.

 

작가님은 잘 기다려주시는 편인가요?


엄청 잘 되지는 않지만 노력하는 거죠(웃음). 그리고 제가 성격이 조금 느긋한 편인 것 같아요.

 

이번 책은 미국에서 먼저 출간이 됐어요. 인물을 다양하게 그리신 점이 눈에 띄던데요. 한국에서 먼저 출간될 계획이었다면,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켰을까요?


안 그랬겠죠. 한국에서는 수영장에 가면 다 한국 사람이잖아요. 저는 한국에서 자라다가 미국에 간 경우라서, 처음 갔을 때는 너무 낯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지내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이더라고요. 아이들이랑 같이 수영장에 다니면서도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서 물장구치는 모습이 너무 예뻤어요. 그걸 그리고 싶었고요. 최근에 미국에서 그림책 만드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도 그거예요. 작품 속에 다양한 문화를 담아내는 거죠.  『눈 오는 날』 을 쓴 에즈라 잭 키츠도 자신은 백인이지만 작품에서 흑인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는 책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저희 아이들도 동양 사람이지만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한국에서도 그런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필요성에 공감하는 독자들도 많아지고요. 미국에서는 이미 익숙한 일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보군요.


그동안에는 그렇게 다양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에 더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고요.

 

첫 책 『어젯밤에 뭐했니?』도 미국에서 처음 나왔는데요.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작업 환경이 조금 다른가요?


많이 다르죠. 일단 미국은 시장이 되게 넓어요. 그리고 리뷰어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요. 책이 나오기 1년 전쯤에 이미 원고는 다 나와 있어요. 그걸 리뷰어한테 보내서 6개월 정도 리뷰를 받아요. 그 다음에 책이 출간되니까,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리죠. 조금 더 까다로운 것 같기도 해요.

 

리뷰어의 반응을 보고 원고를 수정하는 일도 있나요?


아니요, 그런 경우는 없는 것 같아요. 반응에 따라서 조금 더 프로모션을 하거나 홍보 방향을 잡거나, 그런 변화는 있죠.

 

그림책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한국 독자들 중에는 여전히 ‘그림책 = 어린이책’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나요?


요즘에는 한국에도 그림책 읽는 어른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미국은 도서관 같은 시스템이 조금 더 잘 되어있는 것 같고, 기본적으로 책이 넓게 퍼진 것 같고요. 저는 한국에 살지 않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은 한국에도 학교 도서관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단행본보다는 전집 같은 걸 많이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많은 책을 읽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죠.


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잠잘 때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항상 있잖아요. 그래서 자신이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기도 하는데, 저도 그런 책을 하나 내고 싶어요. 내 아이에게도 읽어줄 수 있는 책.

 


문 앞에서 제일 무섭죠, 열어 보면 별 거 아닌데


『수영장 가는 날』 의 주인공을 보면, 처음 해보는 일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결국 스스로 극복하잖아요. 『야호! 오늘은 유치원 가는 날』 에서도 아이가 엄마보다 더 씩씩한 모습을 보여줘요. 아이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힘이 있다고 느끼세요?


네. 저는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이 두려워하는 편인데,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느끼죠. 그런데 또 두려워하는 아이들도 있잖아요. 그런 아이들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해요. 사실 문을 열기 전까지, 문 앞에 서 있을 때가 제일 무섭잖아요. 문을 열어보면 별 거 아닌데.

 

『수영장 가는 날』에 나오는 것처럼, 작가님도 꾀병을 부리신 적이 있나요(웃음)?


저는 체육 시간마다 배가 아팠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그랬어요. 제가 체육을 엄청 못하거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배가 아팠어요.

 

아이들이 실제로 통증을 느끼기도 하는군요.


이번 책이 나오고 나서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주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물어봤었거든요. ‘너희도 이렇게 배 아픈 적 있지?’ 하고요. 그러면 자기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물론 ‘왜? 나는 수영 가는 게 제일 재밌는데?’ 하는 아이들도 있죠(웃음).

 

책 읽어주는 시간은 미국에서 가지신 거죠? 자주 있는 일인가요?


네. 출간되기 조금 전에 학교를 방문해요. 그때 읽어줬던 건데요.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학교에 작가를 초대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미국에서는 학교별로 학부모회의 같은 데에서 초청하고는 해요.

 

작가로서 가장 긴장되는 자리일 것 같아요. 아이들은 정말 솔직하게 반응하잖아요.


조금 긴장되죠. 그래도 해야 되는 일 같아요.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많은 부분을 캐치할 때도 있거든요. 그림도 더 자세히 보고요. 또 그림책 같은 경우에는 한 번 읽고 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기에는 짧은 이야기니까 보고 또 보죠. 그만큼 더 자세히 보니까 조심해야 돼요(웃음). 옥의 티를 많이 찾거든요(웃음).

 

책이 나올 때마다 두 아드님과 같이 보시죠?


그럼요. 같이 보죠.

 

작업하실 때도 대화를 나누시나요?


네, 제가 아이들한테 물어봐요. 이야기가 괜찮은지, 이 스토리는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보죠. 캐릭터가 예쁜지도 물어보고요.

 

돌아오는 반응은 어떤가요? 엄마 작품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편인가요, 응원을 보내는 편인가요?


책이 나오고 나면 엄마가 잘 쓴 것 같다고 이야기해줘요. 그 전에는 비평을 많이 하고요(웃음). 『수영장 가는 날』도 처음 보여줬을 때 큰 애는 별로인 것 같다고 했어요. 둘째는 좋다고 하고요. ‘그래도 나는 간다’ 하는 마음으로 계속 했죠(웃음).

 

첫 번째 독자이자 무서운 독자네요(웃음).


네, 무서운 독자죠(웃음).

 

『쌍둥이는 너무 좋아』 , 『우리는 쌍둥이 언니』를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일상의 미세한 순간들을 포착해서 이야기로 살려내신 점이 놀라웠어요. 쌍둥이 자매도 귀엽고, 전개 자체도 재기발랄해서 좋더라고요.


아이들이 정말 신기한 말을 할 때가 많죠. 그런 걸 잘 써놔야 하는데, 다 놓쳐서 너무 아까워요.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희 시어머니께서 작은 애한테 ‘이것도 못 먹어? 바보네’라고 하셨거든요. 그랬더니 저희 애가, 한국말을 아주 잘하지는 못하는데, ‘에이, 좋겠다. 손자가 바보라서’ 그러는 거예요(웃음).

 

어디에서 그런 말을 배웠을까요(웃음).

저한테 배웠나 봐요. 그래서 제가 도망갔어요, 시어머니한테 혼날까 봐(웃음).

 

아이의 말이 너무 귀엽네요.


그런 건 잘 써놔야 돼요. 아이들이 너무 빨리 커서 재료가 없어지고 있어요(웃음).

 

쌍둥이 언니가 있으시잖아요. 『쌍둥이는 너무 좋아』 , 『우리는 쌍둥이 언니』를 보셨겠죠?


봤죠. 되게 좋아했어요. 오랜만에 한국에 오면 같이 옛날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는 해요. 쌍둥이인데도 성격이 엄청 다르거든요. 그런 이야기도 한 번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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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시다가 직접 창작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셨어요. 아무래도 창작그림책 작업이 더 즐겁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만든 이야기에 내가 그린 그림을 결합시키는 거니까요.


네, 그게 더 재밌죠. 처음부터 제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 어려워요. 책을 만드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처음에 잘 몰랐을 때는 그냥 했는데(웃음), 몇 권 나오다 보니까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계속 할수록 ‘이렇게 하면 되지’ 하면서 쉬워지는 게 아니고요. 이야기를 만드는 것, 책을 만드는 것은 점점 어려워져요.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요. 전작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죠. 늘 아쉬운 점이 있고, 조금 더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시작하실 때 스토리가 먼저 생각나세요? 아니면 특정 장면이 떠오르나요?


제 책을 만들 때는 특정 장면이 생각나서 시작할 때가 많아요. 『수영장 가는 날』 의 경우도, 책에 보면 아이가 물 위에 뜨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너무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먼저 여러 장을 그렸었고요. 아이들이 다 같이 물에 떠있는 장면도 있는데, 이 이야기는 그 장면에서 출발한 거예요. 『쌍둥이는 너무 좋아』도 쌍둥이가 이불을 덮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 거고요.

 

그림체에 대한 고민도 하실 것 같아요. 작품마다 느낌이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요. 『수영장 가는 날』의 그림에서는 시원한 느낌이 많이 들고, 『쌍둥이는 너무 좋아』 , 『우리는 쌍둥이 언니』 는 알록달록한 색감이 눈에 띄어요.


조금씩 바꾸기는 했어요. 처음에는 똑같은 그림체로 가야하는 거 아닐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요. 지나고 보니까 전체적으로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열심히, 잘, 그리려고요(웃음). 저는 이야기에 따라서 재료나 기법을 약간씩 바꿔보고 싶었거든요. 시작하기 전에는 고민도 많이 하고 망치기도 하는데, 결국은 비슷비슷하게 보이니까요.

 

『물웅덩이로 참방!』에는 빗물이 그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수영장 가는 날』과 달리 조금 더 잔잔한 느낌이에요.


그 작품은 네 가지 컬러만 정해서 썼어요. 그리고 프린트를 따로 따로 한 거라서 약간 다르죠.

 

작품을 준비하실 때 가장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다면요?


제가 쓰는 책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가장 신경 쓰여요. 좋은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재밌고 계속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요. 한 번 읽고 치워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찾아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할까요. 지금까지는 따뜻한 색감과 사랑스러운 이야기로 채워진 책을 만드셨다면, 조금 어두운 그림과 글도 보여주고 싶으실 것 같아요.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좋은 이야기들은 왜 항상 조금 슬퍼야 하나’라는 내용이었는데요. 그런 이야기도 좋은 것 같아요. 조금은 슬픔이 있는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요. 아이들의 책을 읽다가 『샬롯의 거미줄』을 봤는데 ‘그러네, 슬프네. 그런데 좋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 이야기는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너무 좋잖아요. 그런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을까’를 생각하기도 하세요?


그런 건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요. 쓰고 나서 ‘내가 보기에 좋은가’를 더 많이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요즘도 <뉴욕타임스>에 그림을 발표하시나요?


가끔만 그리고 있어요. <뉴욕타임스>의 데일리에 그림이 나오려면, 그릴 시간이 너무 짧거든요. 세 시간쯤 전에 부탁하면 그려서 보내야 돼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렇게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특집호의 커버 같은 경우는 시간을 많이 주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요청을 받아서 그리죠.

 


‘그래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요


작가님의 작품이 해외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아유, 아니에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웃음).

 

굉장히 부끄러워하시네요(웃음). 그림책이 갖고 있는 큰 매력이 그런 것 아닐까 싶어요.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거죠.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거니까 좋은 점도 있겠죠. 처음 만든 책(『어젯밤에 뭐했니?』 )은 그림만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출판할 때 에디터가 글을 써서 넣자고 하겠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림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고 해서 거의 있는 그대로 출간됐어요. 그래서 저도 용기를 얻고 계속 다음 책을 내게 된 것 같아요.

 

첫 책을 함께 만든 편집자가 굉장히 유명한 분이라면서요?


네, 편집자로 굉장히 오래 일하셨고 유명한 작가들과도 많이 일하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제가 ‘Fairy Garden Grandma’라고 부르곤 했어요. 눈은 파랗고 머리는 하얬던,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그렇게 연세가 많으신 분이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어린이책 작업을 하신 거잖아요. 너무 매력적인 분이었을 것 같아요.


네. 멋있었어요. 같이 일하는 게 되게 좋았어요. 그 분은 말을 많이 하지 않으세요. 그저 ‘오, 좋은데’ 하시거나 ‘이건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될 것 같다’ 하시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저 혼자 생각하게 하시는 거예요. 마치 선문답처럼. 그 분과 일할 때 정말 좋았어요.

 

『수영장 가는 날』 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없으세요?


독자들에게는 딱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요. 책에서 다 이야기했으니까요. 독자들이 책을 잘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에요.

 

이 책을 잘 읽는다는 건 어떤 걸까요?


그림도 자세히 봐주고, 주인공이랑 공감도 해주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책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서 ‘누가 나일까?’하고 자기 자신도 한 번 찾아보고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이와 같이 이 책을 보시는 부모님이 계신다면 ‘강요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저도 아니까요(웃음). 하지만 아이들을 채근하지 않고, 혼내지 않고, 조금 기다려주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 사실 엄마가 마음이 급해서 그렇지, 아이들은 다 더하기 빼기도 하고 한글도 읽거든요. 늦게 배워도 다 하잖아요.

 

그렇죠. 속도만 다를 뿐이죠.


네, 그런 걸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희 아이들 친구들을 봐도, 삐쭉빼쭉 달라 보이는 아이들도 나중에 보면 다 잘 자라더라고요. 튀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이 좋은 점이 될 수 있고, 그래서 더 예쁘고 더 멋있게 자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냥 ‘예뻐라, 예뻐라’ 해주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어요.


 

 

수영장 가는 날염혜원 글그림 | 창비
주인공이 수영을 배우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를 넘어서 아이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해 작은 용기, 즐기려는 마음, 그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는 인내심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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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뇌과학자 정재승의 새로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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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정재승 박사의 신작 『열두 발자국』을 읽다 보면 인간이란 어쩌면 복잡계 행성에서 떨어진 가장 흥미로운 객체 같다. 정재승은 책 제목을 궁리하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을 올렸다. 인간이라는 미지의 숲을 탐험한 과학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싶었다. 지금까지 20가지 주제로 1,000회 이상의 강연을 진행한 그는 10년 전부터 모든 강연을 녹취하고 있다. 과학을 구술 문화의 한 형태로 소통하고 싶었다. 2001년 첫 책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를 쓴 후 17년 만의 단독 저서. 독자들이 책을 읽다가 막히는 순간이 없도록 수십 번 퇴고했고, 읽는 맛을 살리기 위해 강연 분위기를 담은 추임새도 곁들었다. 의사 결정, 창의성, 놀이, 결핍, 습관, 미신, 혁신, 혁명이라는 키워드를 들었을 때, 단 하나라도 귀에 콕 박히는 단어가 있다면 정재승이 권하는 ‘미지의 인간 숲’으로 탐험을 떠나보자.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일종의 탐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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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10년간의 뇌과학 강연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12편을 선별했다. 책을 하나로 묶는 큰 주제는 ‘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내 인생의 화두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가니까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뇌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울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지?’ 이건 비단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전 연령대가 가진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들에 관해 생각해본 책이다.

 

첫 발걸음부터 거슬러 올라가보자. '선택하는 뇌'를 첫 번째 키워드로 꼽았다.

사람들은 선택 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다. 선택했으니까 반드시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움직이는 과녁을 맞히는 것처럼 분명한 답이 없다. 잡았어야 할 기회를 놓쳤다면 쉽게 털어버리는 편이 낫다. 시도했는데 실패했다면 결과를 받아들이고 빠르게 대응하는 편이 현명하다. 이건 신경과학자들의 의사 결정법에서 배운 것이다. 그동안 내겐 정말 많은 기회가 왔다. 돌이켜보면 ‘이걸 왜 했지’ 싶은 것도 있고, 정말 잘한 선택도 있었다. 수많은 기회를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앞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면 좋을지 알게 됐다. 물론 내 선택이 옳지 않았을 때도 있다. 스스로의 동력에 의해 엎어지는 일도 있으니까. ‘이건 절실하게 꼭 해야 한다, 안 해야겠다’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의사 결정 자체에 큰 부담감을 갖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일이면 하되, 다만 적절한 시기에 선택하고자 노력한다.

 

‘결정 장애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두 번째 키워드다. 신념 체계가 확실하지 않아서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책을 많이 읽고 고민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책의 전반에서 강조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자기 객관화’다. 흔히 우리는 우유부단해서 선택을 미루거나, 결정했지만 완수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결정 장애가 있다’고 말한다. “난 원래 성격이 이래”라고 단정지어버리면, 그 사람은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 남에게 항상 결정을 미루는 사람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배려일 수도, 확신의 부재일 수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따른 후회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선택을 빨리 한다. 자신이 선택을 못하거나 굼뜨다면 자기 밑에 있는 이야기를 들춰낼 필요가 있다.

 

의사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새로운 환경이 놓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집에서 키우는 개와 들에서 자란 개 중에 누가 더 의사 결정을 잘할까? 정답은 후자다. 들에서 자란 개는 집에서 키우는 개와 달리 다양한 상황에 놓이고, 그때마다 해야 하는 의사 결정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반면 안전한 집에서 편하게 자란 개들의 의사 결정은 제한돼 있다. 결과가 어떨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정해보고, 이것이 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경험을 많이 해보면 의사 결정에 자신감이 생길 수 있다.

 

세 번째 챕터 ‘결핍 없이 욕망할 수 있는가’를 읽으니 ‘정재승에게도 결핍이 존재할까’ 궁금해졌다.

 

글쎄, 지금 내 삶을 돌아보면 너무 많은 기회가 몰아닥치고 있다. 강연 요청도 너무 많고, 세종시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도 수행해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하고, 학생들 상담도 하다 보니 중요한 일과 급한 일 사이에서 자꾸 급한 일만 처리하게 된다. 지금에서야 책이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고. 우리의 뇌는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 있으면 급한 일에 먼저 반응한다. 그러다 보면 중요한 것들이 계속 밀리게 되는데, 급한 일이 항상 중요한 건 아니라서 나도 종종 반성하곤 한다.

 

“어떻게 노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고 했다.

 

‘인간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챕터를 쓰면서 생각한 문제의식이 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모든 질문의 초점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까’에 있느냐였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나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까’를 생각하며 삶을 준비한다. 정작 사람은 하루의 1/3을 자는 일로 보내는데도. 한 사람을 이해하고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즐기며 사는가에 있다. 놀이가 갖고 있는 속성을 살펴보자. 첫째, 자발적이고 평가에 민감하지 않다. 둘째, 좋은 사람과 함께할 때도 재밌고 혼자 해도 즐겁다. 이런 마음으로 놀이를 즐기다 보면 우연히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정재승은 어떤 놀이를 즐기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 사진 촬영도 나에겐 일종의 놀이다. 단순히 책을 홍보하는 일을 넘어 내겐 매우 즐겁고 흥미로운 시간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닐 때 사람은 즐거운 감정을 느낀다. 인터뷰를 예로 들어보자. 내가 매우 자발적으로 즐겁게 했는데, 심지어 결과물도 근사하고 생산적일 때 이보다 더 좋은 놀이가 있을까? 나는 일과 놀이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취미가 나에겐 어떤 생산물로 탄생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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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

 

다섯 번째 발자국 ‘새로 고침’ 편은 직장인에게 특히 도움이 될 이야기가 많았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1월 1일이 되면 다양한 새로 고침의 욕망들을 담아 ‘새해 결심’을 한다. 그리고 설날에 한 번 더 한다.(웃음) 인간은 습관을 쉽게 고치지 못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 하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특성은 장점이기도 하다.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진행된다는 것, 그 자체로도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 챕터는 뇌 과학자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쿨하게 들여다본 이야기다.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자고 강조하지도, 습관이 갖고 있는 힘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 삶에 있어서 반드시 바꿔야 하는 그것조차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죽음을 앞둔 때를 상상해보라는 이야기다. 나는 종종 ‘내 삶이 3개월 남았다면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를 상상해보곤 한다.

 

‘20%쯤 열어두는 삶’을 권했다.

 

사람은 과거의 경험과 학습 내용을 갖고 삶을 꾸려가는데, 10~20% 정도는 새로운 탐색을 하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다. 과거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면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결과를 얻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주는 뜻밖의 수확은 얻을 수 없다.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라면 새로 고침이 주는 예상 밖의 즐거움을 만끽해봐도 좋지 않을까.

 

1부의 마지막 챕터는 ‘미신’ 이야기다.

 

학생들이 사주, 타로점, 손금을 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미신은 우리 사회의 정말 큰 사회 문제다. 미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결혼을 못하고, 낙태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과도한 부를 축적한다. 미신을 믿는 사람이 무조건 나쁜 사람이고 한심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빨간색으로 내 이름을 쓰지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미신 속에서 살고 있다. 사소하게라도 계속 지키고 있기 때문에 미신은 아직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미신이 말도 안 되고 비이성적이고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미신을 따를까?

 

‘믿어서 손해 볼 건 없다’는 태도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미신에 친화적이다. 우리가 잘 아는 ‘도파민(dopamine)’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은 무작위적인 패턴 사이에서 어떤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역할을 한다. 이 도파민의 분비가 지나치면 무작위적인 패턴에서도 쉽게 특정 패턴을 ‘만들어’ 발견하게 된다. 결국 굉장히 중요한 의사 결정에 비합리적 영향을 끌어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한다.


“결국 중요한 건 삶의 태도”라고 강조했다.

 

과학적인 사고, 이성적인 판단, 논리적인 추론이 우리 일상 안으로 좀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 나는 회의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길 희망하고 그러기 위해 애쓴다. 회의주의적인 삶이란 어떤 것도 쉽게 믿지 않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애쓰는 태도다. 근거를 중심으로 현상을 판단하고, 항상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인드를 갖는 삶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리처드 파인먼, 리처드 도킨스, 마틴 가드너 등 많은 학자가 회의주의자였다. 이 챕터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건 균형 감각을 갖자는 이야기다. 모든 걸 깐깐한 눈으로 보되 극단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것, 각각의 시각에서 장점을 갖추되 놓칠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뇌과학자에게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바로 ‘창의성’. 창의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다. 2부를 시작하는 챕터가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어지는가’인데, 최고의 창의적 발상으로 ‘은유’를 꼽았다.

 

KAIST에서 학생들의 창의성 워크숍 때 사용하는 훈련 방법이 있다. 어떤 특정한 사건을 설명해준 후, 3시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강의실에서 그대로 앉아 과제를 수행하게 하고, 다른 그룹의 학생들은 내 연구실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들어 무작위로 문장 하나를 고르게 했다. 그리고 다른 책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문장 하나를 꼽아, 이 두 문장을 넣어 위의 과제를 수행하게 했다. 결과는? 첫 번째 그룹은 무난하지만 다소 뻔한 이야기를 만들어왔고, 두 번째 그룹은 이어지지 않는 두 문장 사이를 메우기 위해 엉뚱한 뇌 영역을 사용하게 되면서 아주 기발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물론 영 이상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나 역시 글을 쓸 때 비슷한 원리를 사용한다. DNA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면 오히려 문학 서적을 뒤적거린다. 기존의 유사한 글들을 쓰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천장이 높아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더라.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천장의 높이가 대개 2.4m, 보통 회사의 사무 공간 천장이 2.7~3m 사이인데, 50년간 노벨상 수상자를 12명이나 배출한 소크생물학연구소의 천장 높이는 3.3m였다. ‘소크연구소는 천장이 높아서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시 전설이 생기면서 연구자들은 궁금해졌다. 그래서 실제 실험 공간을 만들어 천장 높이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천장의 높이가 가장 높았던 3.3m에서 가장 좋은 성과가 나왔다.

 

감성을 나눌 때, 수다 떨 때 좋은 공간의 특징도 있을까?

 

직각으로 나뉜 공간보다는 둥근 형태,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에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보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요양원의 경우, 발코니와 창문을 높게 만들었더니 기억력 저하가 점차 줄었다. 또 초록 빛깔이 붉은 계열보다 사람을 더 사교적이게 만들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운동, 수면, 독서, 여행과 더불어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를 꼽았다.

 

창의성이 사회적 맥락으로 길러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 사람이 A라는 나라에선 굉장히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 B라는 나라에서는 매우 평범한 유형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굉장히 복합적인 존재라서 어떤 장소에 놓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만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경험을 한 사람과 만나보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 특히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는 자기가 직접 물리적 환경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현상과 내 문제를 연결시켜보려고 애쓰다 보면 창의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스타트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일하는 공간을 직접 설계한다면 어떻게 꾸미고 싶나?

 

우선 천장이 높은 공간을 선택하고, 사람들이 뒹굴뒹굴하면서 브레인 스토밍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작은 광장을 만들고 싶다. 물론 혼자 몰입할 수 있는 밀실 같은 공간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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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현재 연구하고 있는 주제가‘인간 뇌를 닮은 인공 지능’이라고.

 

사람처럼 상황을 판단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는, 뇌를 닮은 인공 지능을 만들려고 한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인공 지능이 인간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간과 상호 작용하려면 결국 인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도 인간처럼 사고해야 우리가 불편을 겪지 않는다. 앞으로 인간의 직업은 사회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역할은 인공 지능에게 넘겨주고, 우리는 데이터 자체를 검토하거나 결과를 해석하는 고등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종이 책의 미래는 어떻게 보고 있나?

 

라디오와 비슷한 운명이 되지 않을까. TV가 등장하고 아이맥스 영화관이 나오고, 블루 레이가 나오면서 라디오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지 않았나? 하지만 라디오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라디오는 여전히 남아 있다. 종이 책 역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정보의 양이 엄청나게 늘면서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부터 전자책으로 된 교과서를 공부할 시대가 머지않지만, 종이 책만이 갖고 있는 장점, 매력은 사라지지않는다. 중요한 건 전자책을 많이 보는 사람에게 종이 책이 하나도 없을 리 없다는 사실이다. 책을 안 보는 사람은 종이 책도 이북도 없겠지만.

 

정재승의 서재가 궁금하다. 집에만 2만여 권의 책이 있다고.

 

책을 위해 집을 지었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논문이나 영어책은 주로 전자책으로 보지만, 평소 자주 접하는 건 종이 책이다. 나는 곧 전자책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종이 책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 때문에 집이 좁아지는 문제만 없다면 삶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종이 책을 소유하고 싶다. 20~30년 후를 내다본다면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종이 책의 가치가 높아질 거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말하며 “기술 계급 사회가 가장 두렵다”고 했다.

 

과학 기술을 잘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들과 기술을 두려워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불평등을 생각해야 한다. 또 인간이 인공 지능에게 의사 결정을 맡기고 결재만 하는 존재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 기계 문명은 우리에게 놀라운 생산성, 효율성을 가져다줬지만, 인공 지능은 이제 우리의 뇌가 되려 한다. 인공 지능의 의사 결정 계산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 값에서 의존한다면 의사 결정의 주체는 인공 지능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다. 기업이 미래의 기회를 잡기 위해선 무엇보다 함께 일해야 한다. 인공지능팀, 빅데이터팀, 서비스기획팀을 따로 운영하지 않고 같이 일하게 해야 한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지라도 인내심을 갖고 시행착오를 넘어서야 한다.

 

이번 책에 저자 사인을 하면서 “인간이라는 미지의 숲으로 탐험을 떠나요”라는 문장을 새겨놓았다. 열한 번째 발자국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에 도전하는가’를 읽는데, 이 문장을 곱씹게 되더라.

 

인간은 영원한 탐구 대상이다. 과학자들이 인간이라는 숲을 이해하기 위해 미지의 탐험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아무런 지식을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인간의 본질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수만 발자국의 탐험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저 세상에 순응하고 산다면 혁신과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 이 살벌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나려면 탐험가의 기질을 소유해야 한다.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큰 조직 안에 있어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 조직이라는 우산이 없어도 홀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조직이라는 우산을 거둬냈을 때도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로 대체되기 어려운 존재로 성장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노력도 해야 하고, 현명하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과감하되 무모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되 실패하지 않기 위한 준비에 철저한 사람이 곧 시대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면 나이 드는 게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재승도 그렇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드는 일은 두렵다. 사회적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까. 나도 언젠가는 KAIST 교수가 아닌 인간 정재승으로 세상에 나와야 한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의 직업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일이다. 과학자인데 글도 쓰고 강연도 하고, 사회적인 일에도 앞장서는 지금까지 없던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 여전히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어른을 볼 때마다 나쁜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친 학생이 아니더라도 작은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는, 뭔가를 나눠주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한 독자의 질문을 대신해 묻는다. 정재승에게 인생 책 3권은 무엇인가?

 

특별한 인생 책이 없다. 책에 너무 과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옛날에는 별것 아니었던 책이 지금 너무 와 닿을 때가 있고, 어떤 사람이 인생을 바쳐서 쓴 역작인데 내겐 시큰둥하기도 하다. 왜 그럴까 따져보면 내가 계속 바뀌고 있어서지 책 자체가 어떤 완결된 훌륭함을 갖고 있어서 내게 감동을 주는 건 아닌 것 같다. 책은 늘 곁에 있고 매 순간 때에 따라 다르게 내 마음을 건드린다. 올해는 혁명을 많이 말하다 보니 『돈키호테』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열두 발자국정재승 저 | 어크로스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저자의 발자국을 따라 인간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탐험하는 근사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도우 “기꺼이 속아주는 사람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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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로 수많은 독자를 잠 못 들게 했던 이도우 작가가 돌아왔다. 롱 스테디셀러가 된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펴낸 지 14년만, 두 번째 소설  『잠옷을 입으렴』 출간 이후 6년 만의 일이다. 오랜 기다림에 끝에 출간된 신작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독립서점 ‘굿나잇 책방’을 운영하는 ‘은섭’과 그가 한때 짝사랑했던 동창생 ‘해원’, 그녀의 이모 ‘명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랑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펜션 ‘호두하우스’를 운영하는 명여의 곁에서 지내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해원은 우연한 기회로 은섭의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마을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자리한 굿나잇 책방과 호두하우스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든다. 그들이 들려주는 시시콜콜하고 이따금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은 따사롭고 애틋해서 마치 절반은 꿈같고, 절반은 현실 같다.

 

이도우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두고두고 꺼내 읽는 소설’이라 평한다. 어느 날 문득 다시 꺼내 읽으면 이전과는 또 다른 감상이 일어난다는 것. 그래서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은섭과 해원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 실컷 설렜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해원과 명여의 관계에 가슴이 저릿했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지 며칠이 지난 지금은 등장인물들의 비밀스러운 사연들이 자꾸 마음을 맴돈다. 저마다 말 못할 아픔이 있지만, 자신의 상처를 탓하지 않고 기꺼이 살아가는 단단한 사람들. 아무래도 이 뜨거운 여름이 가기 전, 이 책을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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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참아온 이야기들


『잠옷을 입으렴』  이후 6년 만에 나온 장편소설이에요. 소감이 어떤가요?

 

완성했다는 게 너무 기뻐요. 책이 못 나올 줄 알았거든요. 독자분들이 정말 오래 기다려 주셨기 때문에 너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커요. 전작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과  『잠옷을 입으렴』의 성격이 워낙 다르다 보니 제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크게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과 ‘순수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뉘거든요. 이번 책이 출간되고 나서 많은 분들이 슬쩍 물으시더라고요. “작가님, 이건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소설이에요?”라고. (웃음)

 

저는 두 작품의 독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소설이라 생각했어요. 은섭과 해원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시에 모종의 사건으로 멀어진 가족, 친구의 이야기도 큰 중심을 차지해요. 


이미 독자 분들께서도 결론을 내리셨더라고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 모인 사이트에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가 로맨스 소설인지, 일반 소설인지 묻는 질문이 올라왔는데 어떤 분이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과  『잠옷을 입으렴』을 섞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라는 답변을 달아주셨어요. 그걸 보고 ‘와 정답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분류를 나누기보다는 ‘이도우 작가다운 소설’이라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오랜만에 나온 신작인 만큼, 작가님의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의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리뷰나 댓글은 살펴보세요? 

 
안 본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웃음) 모든 말씀이 다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을 찡하게 했던 리뷰가 있어요. 책을 사놓고 떨려서 페이지를 못 넘기겠다는 거예요. ‘내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정말 오랜만에 나왔는데, 내용이 실망스러워서 내 소중한 추억이 사라지면 어쩌지? 이 작가가 망가져서 돌아왔으면 어쩌지?’라는 애틋함과 염려가 마치 저를 걱정해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 따뜻한 애정에 코끝이 찡할 만큼 고마웠어요. 앞으로는 좋은 작품으로 좀 더 자주 찾아뵙고 싶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13년에 채널예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물 위의 책방’을 제목으로 하는 단편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씀하셨었어요. 하나는 소설의 제목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 은섭이 집필하는 글로 소설 속에 등장합니다.


단편을 집필 중이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작업을 중단했어요. 그러다 작년에 6개월간 제주에 머물면서 이 소설을 썼거든요. 무더운 제주에 있다가 제가 사는 파주에 올라오니 일주일 뒤에 첫눈이 내리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지난해의 제게는 봄, 가을이 없었어요. 덥고, 춥고를 계속 반복하다 보니 잊고 있던 단편의 제목이 불현듯 떠오르더라고요. 처음 정한 제목은 ‘밤의 벨롱’이었는데, 제목을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로 바꾸고 나니 비로소 틀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덕분에 마무리를 할 수 있었죠. ‘물 위의 책방’은 은섭이 쓰는 소설의 제목이잖아요. 사실 제가 은섭에게 마음을 두고 이 소설을 썼거든요. 은섭이 책방일지에 쓰는 말들은 사실 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예상했어요. ‘작가의 말’조차 은섭의 글 같더라고요. (웃음)


은섭의 마음이 제 마음이었거든요. 그의 책방일지는 제 일기장 같은 이야기들이었고요.

 

 

이건 판타지 소설이에요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추운 겨울이에요.


해원이도, 명여 이모도 마음이 스산했잖아요. 추운 겨울왕국에서 시작해서 봄이 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어요. 실제로 소설을 쓰는 작업도 아카시아 향기가 자욱할 무렵엔 끝나길 바랐고요. 초고는 여름에 썼지만, 제목을 바꾸고 글을 본격적으로 수정해나간 건 겨울이었어요. 제주에서 올라와 일산의 작업실에서 수정 작업을 했는데, 추워도 너무 추운 거예요. 그래서 작업실에 난방 텐트를 치고 들어가 그 안에서 글을 썼어요. 그리고 바라던 대로 봄이 와서 텐트를 걷으면서 비로소 탈고를 했죠.

 

와, 텐트에서 쓰는 글이라니. ‘굿나잇 책방’과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그렇죠? (웃음) 덕분에 은섭이에게 더 잘 빙의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이 소설은 날씨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그럼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역시 은섭인가요?


쓸 때는 은섭에게 가장 마음을 줬는데, 소설을 완성하고 나니 해원이 마음에 짠하게 남아요. 은섭은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면이 많은 인물이고, 명여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제 역할을 하는데 해원은 여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존재감이 약하잖아요. 하지만 은섭과 명여 사이에서 해원이 드러나지 않게 자리를 지켜줬기 때문에 이 소설이 완성될 수 있었어요. 많이 챙겨주지 못한 인물이어서 그런지 지금은 해원이 자꾸 생각나요.

 

책을 읽으면서 계속 ‘관계’에 대해 생각했어요.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려면 수많은 시간과 추억이 필요한데, 그 사이가 틀어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게 마음 아프더라고요. 해원과 그녀의 친구 보영, 그리고 해원과 명여 이모의 사이가 그랬어요.


소설 속에서 보영이 말하죠. “금이 가면 어때? (중략) 늘 흠 없는 우정이어야 해? 그런 게 세상에 있기나 해?(308쪽)” 사실 이 말은 저에게 하는 말이었어요. 예를 들어 무척 아끼는 꽃병이 있는데 금이 가면 어떤 사람은 잘 붙여서 쓰지만, 어떤 사람은 버리잖아요. 저는 후자였거든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친했던 사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실수로 관계가 어긋나면 상대방을 보지 못했죠. 완벽했던 사이가 틀어진 것에 대한 상처가 견디기 힘들어서 만나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것도 오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흠결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 모든 게 완벽하지 않은데 왜 사람의 관계는 늘 완벽하길 바랐던 건지…. 누군가와 다투고 화해한다는 것은 사실 스스로와 화해를 하는 것이기도 해요. 어떤 관계든 한 사람의 잘못으로만 틀어지진 않잖아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용서하지 못해서 관계를 돌이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오해는 없어, 누군가의 잘못이 있었던 거지. 그걸 상대방한테 네가 잘못 아는 거야, 라고 새롭게 누명 씌우지 말라고.(132쪽)”라는 해원의 말에 공감했어요.


제가 굉장히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에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해하셨네요”라는 말. 제 장점 중 하나는 사과를 잘한다는 거예요. 사과를 못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에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으니 오해를 풀어달라고 하는 거죠. 마음이 약한 거라 생각해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의 영향인지 은섭과 해원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읽는 독자들이 많지만 결코 로맨스 소설은 아니에요.


저는 이번 작품이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은섭과 해원의 사랑은 거들 뿐이죠. (웃음) 시골의 한 기와집에서 월세도 내지 않고 독립서점을 운영하는데 연애도 하고, 책방도 잘되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 독서모임과 북스테이도 하잖아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판타지 아닐까요? 꿈같은 이야기잖아요. 하지만 마냥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충분히 꿈꿔볼 수 있고, 이번 생에서 이뤄볼 수 있을 것 같은 판타지를 쓰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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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랑을 믿어요


작가님의 소설을 읽으면 잠들어 있던 연애 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에요. 유독 사랑 이야기에 강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사랑을 믿기 때문인가 봐요. 연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 부모와 자식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깊은 사랑을 믿어요. 물론 세상을 살다 보면 냉소적인 부분이 생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이 세상이 굴러간다고 생각하고, 그 마음으로 글을 써요.

 

특히 달콤한 말들이 마음을 간지럽게 해요. 은섭이 책방일지에 쓴 ‘눈동자 뒤에 그녀가 살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다. (192쪽)’ 같은 문장이요.


은섭에게 빙의해서 소설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어요.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된 상황에서, 은섭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고민하다 보니 저절로 그 말이 나오더라고요.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의 한 구절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역시 주인공 ‘이건’의 마음을 생각하다 툭 나온 말이었거든요.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걸 보면 제가 연애편지를 잘 쓰나 봐요. (웃음)

 

실생활에서도 이렇게 달콤한 멘트들을 잘하는 편이세요? (웃음)


애정표현을 부끄러워하진 않아요. 남편과 아이에게도 그렇고, 친구들에게도 사랑한다고 잘 이야기하죠. 우리 모두 오래 살아봤자 평생 100년도 채 못 살잖아요. 사랑하는데 뭐 하러 부끄러워하나 싶어요. 저는 순간의 진심이 되게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이 우러나오면 “알러뷰~ 사랑해~ 좋아해~”하고 막 이야기해요. 사랑한다고 말하고 죽은 귀신이 얼굴도 편하지 않을까요? (웃음)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의 주인공들은 따지고 보면 굉장히 염세적일 수밖에 없는 일을 겪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그들의 태도가 너무 따뜻해서 작가님 마음에 사랑이 많은 걸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는 사회 고발적이거나 슬픈 소설을 쓰면 너무 아파요. 아픔이 있는 사람과 함께 눈물 흘리고, 집회에 나가는 일은 할 수 있지만 그걸 제 글에 담지는 못하겠어요. 작가로서 저의 콤플렉스이자 한계죠. 그래서 쓰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걸러내고, 남은 부분을 글로 쓰려다 보니 항상 따뜻한 이야기, 해피엔딩이 나오는 것 같아요. 아픔에 기꺼이 동참하면서, 그 아픔에 동화되어 작품을 써내는 작가들을 보면 존경스러워요.

 

오히려 그 점이 작품을 돋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슬픔을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놓고 아파하지 않는 인물들의 꿋꿋한 태도가 좋았거든요.


저는 순수한 사람을 사랑해요. 물정 모르고 순진한 것은 원치 않고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래선 안 되잖아요. 다만 세상이 나를 괴롭히고, 속이는 것을 알지만 기꺼이 속아주는 사람, 그래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심지 곧은 사람이 좋아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요.

 

 

이번 생은 ‘트리뷰트 인생’


아픈 할아버지를 걱정하던 승호가 책 『집에 있는 부엉이』 를 가져오는 장면에서 ‘마음이 힘들 때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이 진짜 ’인생책‘ 아닐까 싶었다’고 쓰셨어요. 작가님에게 인생책은 무엇인가요?

 
‘인생책’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저는 그런 책을 ‘원점책’이라고 불렀어요. 읽으면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책이라는 의미에서요. 꼭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가 저의 인생책이에요. 그 외에 김채원 선생님, 엘리너 파존, 최승자 시인 등도 좋아해요. 모두 20대 초반에 만났던 작가들인데, 힘들 때 이 분들의 작품을 읽으면 다시 출발선으로 되돌아가게 돼요.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 밝히는데요. 사실 ‘명여’라는 이름을 김채원 선생님의 단편집 『초록빛 모자』에 실린 소설 「아이네 크라이네」에서 따왔어요. 같은 인물은 아니지만, 김채원 선생님을 트리뷰트(tribute)하는 마음을 표현한 거죠. 『초록빛 모자』가 지금은 절판됐는데 정말 좋은 책이거든요. 제발 다시 출간됐으면 좋겠어요. (웃음)

 

제주에는 왜 내려갔던 건가요?


아들이 대학을 갔거든요. ‘이제 다 키웠으니 엄마는 글을 쓰러 가겠다’는 마음으로 갔어요. 가족들이 없는 곳에서 혼자 집중하며 소설을 쓰고 싶었거든요. 미리 장소를 정해둔 건 아니었는데 되도록 멀리 가려고 하다 보니 선택된 게 제주였죠.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에 등장하는 ‘경혜’라는 친구가 해녀시험에서 똑 떨어지고 독립출판을 하며 제주에서 살고 있거든요. (웃음) 그 친구 옆집에 방을 얻고, 함께 독립서점을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책을 좋아하는 분들과 모여 제주 신화를 읽고 공부하는 모임을 했어요. ‘시스터필드’라는 이름의 빵집을 왔다 갔다 했고요. 이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아마 다른 소설이 탄생했을 거예요. 제주에 간 게 인연이었나 봐요. 

 

작가후기에 ‘책방을 열고 싶은 대책 없는 워너비’라고 하셨어요. 정말 책방을 운영한다면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나요?


당연히 굿나잇 책방이죠. 한쪽은 만화책, 한쪽은 그림책, 한쪽은 재미있는 소설 등 제가 좋아하는 책만 갖다놓고 싶어요. 은섭의 굿나잇 책방처럼 키핑(keeping) 책장도 만들고 사랑방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까지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월세 내면서는 못해요. 아무래도 건물주가 돼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웃음)

 

이 작품을 쓰면서 어느 정도 대리만족이 되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리고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애썼어요. 자칫 독립서점 운영이 너무 쉬운 일처럼 보일까 걱정스러웠거든요. 소설이 완성되고 독립서점 운영자 분들이 추천사를 써주셨는데 그 어떤 유명인이 써준 것보다 영광스러웠어요. 굿나잇 책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너그러이 품어주신 것 같아 너무 고마운 마음이에요.

 

쓰고 싶지만, 아직 쓰지 못한 주제가 있으세요?


판타스틱한 걸 좋아해요. 제가 좋아하는, 제 취향이 가득한 픽션의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저는 너무 재미있는 걸 보면 그 일부가 되고 싶거든요. 20대 때는 『슬램덩크』를 읽고 내가 북산고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억울해서 엉엉 울었고, 인생책이라고 밝혔던 『워터멜론 슈가에서』 를 읽었을 때는 책을 찢고 들어가고 싶었어요. (웃음) 워터멜론 슈가 마을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투명한 관에 넣어서 꽃과 등불로 장식하는 ‘무덤조’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일을 너무 하고 싶은데, 현실에서는 할 수 없어서 또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마 덕후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많을 거예요. 저는 제 삶을 ‘트리뷰트 인생’이라고 정의해요. 좋아하는 걸 평생 트리뷰트하다 가는 삶. 사랑하는 것을 더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표현하다가 이번 생이 끝날 것 같아요. 어쨌든 저는 쓰고 싶은 말을 소설로 쓰기 때문에, 세부적인 주제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걸 하나로 집약한다면 ‘트리뷰트’가 되지 않을까요? 지금 구상 중인 작품 ‘책집사’에 이런 생각과 경험을 녹여낼 예정이에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였으면 하나요?


그냥 이도우 소설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꼭 ‘어떤 종류의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저에게 재미있고, 제 취향이 반복되는 작품을 쓸 뿐이니까요. “이도우 작가가 썼어? 그럼 뭔지는 몰라도 재미있겠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영광이겠죠.

 

글 쓰는 사람에겐 최고의 찬사죠.


그래서 ‘이도우 월드’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우리 편집자가 “월드라고 하기엔 작품수가 너무 적어요”라고 돌직구를 날리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다시 고쳤어요. “하긴 내가 무슨 월드야. 소소하게 빌리지 하자! 하하하.” 저는 마을 이야기를 좋아해요.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잖아요. 저 다운 작품들로 ‘이도우 빌리지’ 하고 싶어요. 독자 분들이 그 안에 머물면서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이도우 저 | 시공사
그날은 좀처럼 오지 않고 날씨는 계속 맑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며, 맑아도 흐려도 지금 그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용기에 대해 특유의 다정다감한 문장과 깊이 있는 시선으로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널보(Nervo), 쌍둥이 자매의 디제잉을 선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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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 일렉트로닉 듀오 널보(Nervo)는 EDM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스타로 통한다. 2005년에 작곡가로 먼저 커리어를 개시한 쌍둥이 자매는 케샤, 브리트니 스피어스, 데이비드 게타, 카일리 미노그, 마일리 사이러스 등에 곡을 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내에선 보아, 애프터 스쿨의 노래를 쓰기도 했다. 출중한 송라이팅을 갖춘 이들은 2010년에 본격적으로 DJ로서 발돋움했다. 활동 시작과 동시에 폭발적인 무대 매너와 디제잉으로 이름을 알렸고, 유수의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작년5월 난지한강공원에서 열린 <Dream Station>을 비롯, 한국 무대에도 여러 번 등장한 바 있다. 인터뷰는 이즘에서 작성한 질문지를 바탕으로 소니 뮤직 측이 진행했다. '좋아하는 일인 음악을 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어 행운'이라는 이들의 답변에선 흥분과 떨림이 느껴졌다.

 

먼저, 근황이 궁금하다.


현재 스페인 이비자와 미국의 라스 베가스에서 레지던트 디제이로 활동하고 있고, 전 세계 각지에서 'NERVOnation'이라는 우리의 파티를 주최하고 있다. 7월에는 벨기에에서 열리는 EDM 페스티벌 <투모로우랜드>에서 2주 연속 메인 스테이지에 올라 노래를 틀 예정이고, 그 외의 많은 페스티벌에서도 공연을 한다. 다양한 멋진 나라들을 방문했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들도 찾을 예정이다. 공연은 언제나 너무 재미있다!

 

이제 막 아시아 투어를 끝냈다. 아시아는 어땠나.


정말 좋았다. 어떤 도시가 가장 좋았는지 선택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시아의 음식들을 좋아한다.

 

10대 때 모델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디제이를 시작했다. 디제이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사실 우리의 배경은 팝 아티스트를 위한 곡을 쓰는 것이었다. 다른 팝 가수들과 디제이들을 위해 곡을 썼었고 어느 정도 괜찮게 하고 있던 차에 댄스 음악과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우린 금세 댄스 음악에 매료되었고,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데이비드 게타를 위해 쓴 'When love takes over'라는 곡이 그래미 상을 타고난 후, 우린 직접 아티스트가 되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미 우리가 만든 곡들이 많이 있었고, 그 곡들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우리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다.

 

듀오로서 곡 작업을 할 때 각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곡을 쓰거나 프로듀싱을 할 때, 서로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 한 명이 작업을 하다 막히면 다른 한 명이 참여해서 작업을 이어나간다. 우린 합이 잘 맞는다. 일에 대해 같은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알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항상 정직하기 때문에 작업이 순조롭게 이어진다.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할 때 서로 기분이 상하는 일도 많지 않다. 서로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우리 둘 다 마음이 드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도해본다. 아마 자매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쌍둥이 자매라서 좋은 점이 있는지. 부딪히는 일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린 자매이자 절친한 친구고, 비즈니스 파트너면서 서로의 실험 대상이 되어주고, 서로의 가장 든든한 서포터이자 엄격한 비평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린 서로가 없이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 다툴 때도 있지만 우린 항상 서로에게 정직하고, 그런 정직이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엄청난 팀워크로 나타난다. 우린 우리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면에서 비슷하다. 우린 음악을 위해 살고, 일에 대해 동일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다. 창의성에 대해 말하자면, 우린 많은 경우 같은 '파장'에 있다. 서로 다른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항상 중간의 합의점을 찾는다. 우린 둘이어서 더 잘 되는 것 같고, 우주가 서로를 선물해준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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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보의 음악에선 아주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런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린 우리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지 않을 이유도 없다. 우린 항상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노력도 많이 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행운이라고 느껴진다. 음악을 만들고, 우리가 만든 음악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틀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기분 좋은 일이다.

 

게스트 보컬을 활용할 때도 많지만 일부 곡에서는 직접 노래를 불렀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우린 둘 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예전부터 노래를 해왔다. 처음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직접 데모를 녹음했었다. 다른 가수와 작업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가끔은 우리의 데모 형식을 지키는 것이 편하다 보니 우리가 직접 보컬을 담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마일리 사이러스, 푸시캣 돌스, 아프로잭(Afrojack), 카일리 미노그, 케샤, 데이비드 게타를 비롯해 많은 가수들의 곡을 작곡했고, 데뷔 앨범 <Collateral>에도 다양한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협업을 통해 느낀 점들이 있다면.


다른 아티스트와 작업을 하면서 우린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창의적인 팁들을 배우기도 하지만, 비즈니스에 대해서, 또 음악 산업에 종사하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들까지 다양한 것들을 배운다. 우리의 일이 음악을 만들기만 하는 것이라면 참 쉽겠지만, 아티스트로 살면서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참 많다.

 

다른 디제이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은 항상 신난다. 투어를 할 때 만나고 서로의 무대에서 음악을 트는 등의 일은 재미있다. 'The other boys'에서 카일리 미노그와 시저 시스터즈(Scissor Sisters)의 제이크 시어즈(Jake Shears), 그리고 나일 로저스와 함께 일했던 것은 단연 우리 커리어의 정점이었다! 그들은 전설이니까! 재능이 넘치는데 정말 겸손한 사람들이다. 또 그들과 함께 작업한 곡이 빌보드 댄스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것도 너무 좋았다. 그 트랙의 'UK Summer Edit'을 이번 달에 발매하게 되어 기대가 크다.

 

앞으로 콜라보레이션을 기대하는 가수가 있다면.


체인 스모커스가 요즘 진짜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고 있어서 그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또 퀸티노(Quintino), 덥스(DVBBS), 리햅(R3hab)같은 오랜 친구들에게서도 영감을 얻는다. 그밖에 에미넴, 리아나, 이모젠 힙(Imogen Heap), 플리트우드 맥, 스크릴렉스 등 함께 작업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너무 많다. 세상에 너무나 대단한 아티스트가 많아서 누구 하나를 꼽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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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커버들이 대단히 다채롭다. 글씨 폰트 등 디테일까지 인상적인데, 커버 작업에 공을 많이 들이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앨범 커버를 비롯해 온라인에 올라가는 다양한 그래픽들의 작업을 담당해주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다양한 시각자료들을 만들기 위해 몇몇 디렉터들과 긴밀하게 일을 하고 있다. 정말 시간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지만, 우리를 상징하는 시각적인 요소들이 우리의 음악과 잘 어울리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서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음악적으로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다면.


우린 프로디지(The Prodigy)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프로디지가 우리 고향인 멜버른에서 열린 <The Big Day Out>이라는 행사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 행사는 우리가 처음 가본 콘서트이자 페스티벌이었다. 음악은 물론, 페스티벌에 놀러 온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도 우리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널보가 음악에 임하는 자세, 마음가짐이 궁금하다.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걱정은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우리'다운 모습으로 임하고 만들고 싶은 음악을 만들되, 스타일은 계속 변화하고 장르는 지속적으로 파생되니 항상 아티스트로서 자신에게 진실된 태도를 가지려 한다. 레이브/댄스 컬처가 가지는 자유로움과 수용이 있는데, 그런 부분이 우리와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우리만의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는 것 같다. 물론 그래미 상을 수상하면 참 좋을 것 같고,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곡이 10곡 있으면 좋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인 음악을 하면서 재미있게 살 수 있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에 크고 작은 EDM 페스티벌이 많이 열리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전자 음악에 대해 열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트렌드를 어떻게 생각하나.


우린 전 세계에서 열리는 이런 음악 페스티벌에서 음악을 트는 것이 너무 좋다. 다른 나라에 가서 색다른 세상을 보고 새로운 팬들을 만난다는 것은 멋진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팬들은 늘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공연장에 오니까.

 

<Let's F Cancer> 재단을 위해 의류 브랜드 “일렉트릭 패밀리”와 함께 만든 기부 팔찌에 대해 들었다. 어떤 활동인지 설명해 달라.


우리는 유방암을 위한 기금과 관심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속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우리 어머니가 유방암을 투병하고 완치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난 후, 암 환자는 물론, 그 가족에게도 이런 복지 단체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감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방암 치료를 위한 연구에도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린 다양한 병원과 기관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tittiestittiesYEAH'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동일한 목적으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렉트릭 패밀리와 손을 잡았다. 올해도 관련해 더 많은 활동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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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의 프로젝트 계획이 궁금하다.


최근 'In your arms'라는 곡을 공개했는데 정말 공을 많이 들인 곡이다. 또, 새로운 곡을 열심히 작업하고 있고 몇몇 아이디어들을 개발하고 있어서 앞으로 2-3개월 안에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올해 안으로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할 아티스트들도 결정되었는데, 이 중에는 동료 디제이인 덥스(DVBBS), 대니 아빌라(Danny Avila)와 울프팩(Wolfpack) 등이 있다. 또, 올해 우리의 레이블인 “갓 미 베이비 레코즈”(Got Me Baby Records)도 론칭해 좋은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들과 계약하고자 한다.

 

당신들이 새로 시작한 레이블인 갓 마이 베이비! 레코즈에 있는 아티스트 중 한국 팬들이 좋아할 것 같은 아티스트에는 누가 있는지?


일본에 알리사 우에노라는 아티스트가 있는데, 디제이로 활동하면서 아시아의 패션에도 관심이 많다. 도쿄 출신이지만 한국에도 자주 방문하니 그녀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길 바란다.

 

널보가 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댄스 음악 레이블인 “리퀴드(LIQUID)”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어떤 곳인가.


우리는 리퀴드와 활동하는 것에 대해 기대가 크다. 아시아에서 전자 음악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레이블이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있는 많은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을 알리는 곳이 될 것이다. 리퀴드는 댄스 음악을 좋아하고 댄스 음악을 위해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레이블이다.

 

널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대표작 몇 개를 소개해달라.


<Collateral>. 우리의 첫 앨범이다. 만드는데 거의 3년이 걸렸는데 이때 카일리 미노그, 스티브 아오키, 그리고 나일 로저스와 같은 엄청난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 니키 로메로(Nicky Romero)와 함께 작업한 'Like home'은 라이브 셋(set)에서 팬들이 특히 좋아하는 곡이다. 데이비드 게타와 켈리 롤랜드가 함께한 'When love takes over'는 그래미 상을 수상해서 각별한 곡이다. 2011년 <투모로우랜드> 페스티벌의 주제가였던 'The way we see the world'도 소중하다. 우리가 미국에서 투어를 돌고 있을 때 버스에서 만는 노래인데, 곡의 시초가 된 아이디어는 디미트리 베가스와 라이크 마이크(Dimitri Vegas & Like Mike)와 함께 썼고, 후에 아프로잭이 와서 드롭 부분을 바꿔주었다. 아직도 라이브에서는 이 곡의 아카펠라 부분들을 사용한다. 또한, 한국의 아티스트 보아와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우리가 쓴 '네모난 바퀴', 'Not over u'를 녹음했는데, 아시아에서 그 곡이 꽤 인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인터뷰 : 김반야, 정민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배보경, 전창록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아닌 일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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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배보경 오른쪽-전창록

 

 

『4차 산업혁명 시대, 어떻게 일할 것인가』는 4차 산업혁명을 “가지고 놀던 레고 조각 100개가 순식간에 1억 개로 늘어난 상황”에 비유한다. 100개의 레고 조각도 제대로 가지고 놀지 못했던 지난날은 지우고, 이제는 레고를 가지고 노는 방법 자체를 달리해야 한다. 늘어난 레고 조각은 상상했던 모든 것을 창조했고, 지금까지는 상상도 못 한 것 역시 창조할 것이다.


학습하면서 지능을 높이고, 감정적으로 소통하며,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창작마저 거뜬하게 하는 인공지능이 있는가 하면, 작곡 프로그램이 만든 곡이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구글이 개발한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 딥드림은 주어진 이미지를 재해석해 독창적인 스타일로 표현한다. 한 가지 패턴만 집요하게 파고든 ‘넥스트 렘브란트’라는 로봇 화가도 있다. 2016년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호이 신이치상’이라는 SF 상의 1차 심사를 통과했다고 전한다. “‘그래도 아직은 사람만 못해’라고 자위하는 건 부질없는 일(33쪽)”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IGM(Institute of Global Management, 세계경영연구원)의 전성철, 배보경, 전창록, 김성훈 연구원은 책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답이 된 사례를 제시한다. 먼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본질과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기업 사례를 든다. 어떤 부분에서는 절망적이고, 어느새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제시한 제법 충실한 가이드다. 배보경, 전창록 저자가 인터뷰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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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급수적인 성장이 가능한 시대

 

네 명의 저자가 한 권의 책을 어떻게 구성하고 썼는지 궁금하다.

 

전창록 : 『4차 산업혁명 시대, 어떻게 일할 것인가』는 FRCC(4차 산업혁명 최고위 과정, The 4th Revolution Club for CEOs)로부터 출발했다. FRCC는 IGM 연구원에서 운영한 4차 산업혁명 CEO 멤버십 프로그램이다. 교육 자체는 4차 산업혁명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4차 산업혁명을 기술로 접근하지만, 우리는 본질을 알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집중했다.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배보경 :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연구와 학습이 필요하다. 네 명의 저자가 각자 맡은 강의뿐만 아니라 전체 강의 커리큘럼의 내용을 모두 공부했다. FRCC를 운영하며, 우리가 강의하는 내용 역시 책으로 정리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책은 많지만, 일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았다. 이에 각자 강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쓰고, 초고가 나온 후에는 함께 퇴고하는 과정을 거쳤다.

 

4차 산업혁명은 명확하게 ‘무엇’이라고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있다.

 

전창록 : 일반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본질은 빅데이터로 연결된, 초연결에 의한 초지능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기하급수적인 성장이라고 본다.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가능하기 위해서 ‘융합과 공유의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특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유다. 에어비앤비나 우버는 소유한 내적 자산이 없는 상태에서 외부 자원을 무한히 이용한다. 소유하지 않은 자산이 주 수입원인 셈이다. 사람의 욕구를 파악하고, 무한대인 자원을 어떻게 융합하고 공유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래서 융합과 공유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이야기가 많이 되는 것은 불안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배보경 :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었던 게 가능해지는 시대라고 생각하면 다르게 볼 수 있다. 해오던 방식을 고수한다면 4차 산업혁명은 두려움이 맞다. 그런데 변화하려고 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시대다.

 

전창록 : 과거에는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이 시가총액 1조에 도달하기까지 평균 20년 걸렸다. 요즘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 기업을 전설 속의 동물인 유니콘에 비유하여 지칭하는 말)은 평균 5.5년이 걸리고, 우버나 에어비앤비는 2년이 걸렸다. 기업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은 기술, 자본, 시장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은 이 모든 것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메이커스 문화가 확산하면서 기술자들은 자신이 가진 기술을 공유하고, 나눈다. 마음 맞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하는 기술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예전보다 100배 높아졌다. 자본은 크라우드 펀딩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다. 외부 자본을 가지고 오는 동시에 미리 시장에서 아이디어를 검증할 수 있다. 기술, 자본, 시장의 리스크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한 예로 중국의 전동 스케이트보드를 제작하는 스테어리 보드는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출발한 경우다. 기존 전동 스케이트보드의 모터를 바퀴에 넣고, 배터리를 얇게 만드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메이커 스페이스에서 기술자들을 만나서 아이디어를 실현했다. 실제 상품으로 만들었을 때는 유튜브로 동영상을 찍어 올렸다. 지금은 한 달 매출이 7억이 넘는다고 한다. 과거였다면, 혼자 기술을 익히거나 기술자를 찾는 데만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 훨씬 적은 노력이 든다.

 


4차 산업혁명,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1장을 읽으면서는 조금 무력해지는 느낌이었다. 노동자로 사는 사람이라면 무수히 많은 인력을 대체할 기계와 마주했을 때 무력감을 느낀다.

 

전창록 : 지금까지 세 번의 산업혁명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이전 시대의 인식과 시선으로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불안한 거다. 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에 관한 인식이 바뀌고 일하는 방식이 바뀌는 거다. 2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현재는 컴퓨터를 사용해 일하는 사람이 많다. 마찬가지로 4차 산업혁명이 지나면 다시 변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다. 정말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 유연하게 따라가야 한다. 인공지능이 대처하지 못하는 인간만의 가치를 가지고, 지금보다 훨씬 적게 일하고 많이 누리며 사는 시대가 오리라고 본다.

 

배보경 : 예전과 같은 방식만 고수하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마켓컬리 김슬아 대표의 이야기를 얼마 전 듣는 기회가 있었다. 수많은 기술을 활용해 데이터로 제고, 주문 관리를 하고 있었다. 고객의 요구, 재고, 상품의 질 등을 모두 데이터로 관리해서 정확하고 신속하게 진행한다. 그런 기업들을 보면,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은 정말 빠르게 변화하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내 거라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시간을 투자하면 기회는 온다. 디지털이든 아날로그이든 방법은 자신과 맞는 것으로 선택하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하면 된다. 일하는 시간을 조절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다. 책임을 다한다면 일하는 장소는 관계없다. 마이크로 소프트나 구글, 페이스북 같은 곳은 굉장히 자유롭다. 물론 목표 달성을 위해 받는 개인의 스트레스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일하는 시간과 장소 등을 주체적으로 정한다는 데서 개인의 능률이 오를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이를 가능하게 했다. 출퇴근 시간을 명확하게 정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다만 ‘자유로운 분위기’를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개인에게도 책임감이 필요하다.

 

기술의 발전이 일의 능률을 높일 수는 있지만,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다는 건 ‘워라밸’이나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구호와는 먼 이야기인 것 같다.

 

배보경 : 이것 역시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렸다. 자기 시간을 관리하는 게 가능해지는 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꼭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회사에서 일해야 한다는 개념을 없애고, 일할 수 있는 시간에 집중해서 일하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되면 하루 24시간을 스스로 관리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근무 시간에 자리에는 앉아 있는데 해야 할 업무를 하지 못해서 야근하는 것이 효율적인가? 그렇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은 자기 시간을 관리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많다. 도구를 활용해서 생각을 달리하면 일하는 방법을 바꿀 수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일하는 문화’ 자체가 변해야 가능한 일일 것 같다.

 

전창록 :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많다. 독일의 경우 산업 자체가 제조업 중심이다. 그러다 보니 스마트 팩토리로 인해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많이 없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독일 정부는 4차 산업혁명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일자리를 지킬 것인지 연구했다. 정부나 사회뿐만 아니라 개개인 모두 고민해야 할 숙제가 있다.


“인류는 생물계에서 처음으로 신과 같은 막강한 힘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그것들이 불러올 결과에 대해선 아직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42쪽)”라는 부분이 있다. 핵물리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핵을 만들고 나중에 후회했던 게 생각났다.

 

배보경 : 4차 산업혁명 교육에는 인문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에 관한 단순 지식 충족뿐만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순한 싸움과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전창록 :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 에서 신에 도전하는 인간의 운명에 관해 예측했다. 인공지능을 창조하면서 신이 된 인간이 결국 인공지능에 지배될 것이라는 암울한 미래를 예측한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게 그런 시대가 오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최소한은, 인공지능에 뭘 시킬 건지에 관한 최종 결정은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을 기술이 아니라 어떻게 일할 것인가로 잡은 이유도 생각의 혁신이 먼저라는 점 때문이다. 우리 기업은 왜, 나는 왜 존재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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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잉, 계속 변화하고 혁신하는 기업

 

3장에서는 ‘대기업, 기하급수 기업으로 탈바꿈하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 이미 기업 문화가 정착한 대기업은 어디서부터 바꾸어야 할지 많은 고민이 생긴다.

 

배보경 :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성공한 기업이 우리나라보다는 해외 기업 사례가 더 많다. FRCC 과정을 듣는 기업 CEO들도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규제 때문에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럼에도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식은 모두 가지고 있다. 간편 결제나 송금 시스템도 해외에서 출시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할 수 없는 환경이었는데, 지금은 카카오페이나 카카오뱅크 같은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이제는 대기업들도 계속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시작만 하면 빠르게 변화한다는 것이 장점이다. 다만 4차 산업혁명에 의한 변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지속해야 한다는 점이다. 변화를 지속하고, 실행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얼마 전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스타벅스에 다녀왔다. 세 기업 모두 끊임없이 변화를 촉구한다. 세 기업 모두 ‘온고잉’을 이야기한다. 계속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혁신해야 한다.

 

기하급수적 기업으로 변화하는 기업을 예로 들며 ‘바로 지금의 시대(176쪽)’라는 이야기도 한다. 유럽의 경우 일보다는 휴식을 중시하고, 한국인이 가면 여러 가지로 느려서 답답하다는 이야기가 많지 않나. ‘바로 지금의 시대’ 같은 말이 세계적인 흐름인 건지 궁금했다.

 

배보경 :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어떤 욕구가 있는지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디지털로 모든 욕구를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욕구를 파악하고 해결하면 사람들에게 선택받는다. 특별히 ‘요즘’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만 강요되는 문화는 더욱 아니다.

 

전창록 : 4차 산업혁명의 큰 특징 중 하나로 초연결성 시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과거에는 나의 욕구가 충족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기다렸다. 이제는 수많은 방법으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는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옷을 산다면, 옷을 입어보고 만져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팔리고 있는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입고 있는지 후기도 같이 보기를 원한다. 반대로 온라인 매장에서 살 때는 입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양한 욕구가 있지만, 장소의 한계라는 것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달라졌다. 그러다 보니 옴니채널(Omni Channel: 라틴어의 모든 것을 뜻하는 옴니와 제품의 유통경로를 의미하는 채널의 합성어)에 관한 요구가 많다. 중국 알리바바의 허마 슈퍼마켓의 경우 매장 안에서 제품을 큐알 코드로 찍으면 생산지, 배송 정보, 영양분을 알 수 있고, 결제까지 가능하다. 구매한 제품은 30분 내로 배달이 된다. 대부분 신선식품은 오프라인에서 구매하기를 원한다. 온라인 구매보다는 당연히 불편함이 따른다. 줄 서서 결제해야 하고, 타 채널과 비교가 어렵고, 직접 들고 가야 한다. 허마 슈퍼마켓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편함을 해결했다. 지금의 시대에는 고객이 자기 욕구 충족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런 흐름은 한국만 유별난 게 아니라 세계적인 움직임이다. 선두 그룹이 세세한 욕구까지 만족시키기 위해 흐름을 만들고 있다.

 


규모는 작게, 끊임없이 시도한다

 

3장과 4장은 주로 기업 사례를 다루었다. 최근 주목하는 기업이 있나?

 

배보경 : 우리나라 기업은 마켓컬리다. 고객의 불편함을 어떻게 해결해 줄지 생각하고, 그에 따른 방안을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 같다. 외국 기업은 마이크로 소프트다. 마이크로 소프트가 위기 상황일 때 사티아 나델라가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이후 사티아 나델라는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마이크로 소프트를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업을 혁신하는 과정 자체가 실험적이고 혁신적이다. 예전의 마이크로 소프트와 다른 따뜻함도 느껴졌다. 사티아 나델라의 책 『히트 리프레시』에서는 전 구성원이 조직의 혁신과 구성원의 목표를 연결해 하나의 미션으로 이끄는 과정이 있다. 일부가 아니라 전 세계 구성원과 함께 하나의 미션을 성립해 헤쳐나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전창록 : 중국의 알리바바를 이야기하고 싶다.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중국인의 삶을 많이 바꿨다. 알리바바는 ‘상생’이라는 가치 철학이 있는 것 같다. 중국과 함께 상생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역시 지속해서 성장한다. 마윈 회장은 IT 시대가 아니라 DT(Data Technology)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이마트라고 한다면, 상계동과 도곡동점의 상품 구성을 다르게 하는 것이다. 구매자가 다르니 판매되는 물건도 다를 것이고, 이를 데이터 기반으로 관리한다. 실제로 중국인이 미국인보다 캐나다산 랍스터를 싸게 먹는다고 한다. 이는 허마 슈퍼마켓 자체에서 데이터로 제고를 낮추고 유통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시스템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나라와 국민의 상생을 추구하는 데 데이터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알리바바를 높게 평가한다. 우리나라 회사로는 카카오 모빌리티를 보고 있다. 올 초에 즉시 배차 서비스와 스마트 호출 서비스를 도입하려다 규제 때문에 어려워졌는데 성장 가능성 있는 사업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잘 될까 싶었는데 의외로 성공해서 놀랐던 기업도 있나?

 

전창록 : 딱히 어떤 기업을 짚기보다는 대부분 스타트업이 처음 시작했던 아이템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를 피보팅(Pivoting: 기존 사업 아이템을 바탕으로 사업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한다. 스타트업이든 일반 기업이든 투자가가 투자를 할 때는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시장 환경에 따라 아이템은 변화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피보팅해서 성공한 사례가 많다.

 

배보경 : 린 스타트업(아이디어를 빠르게 최소요건제품(시제품)으로 제조한 뒤 시장의 반응을 통해 다음 제품 개선에 반영하는 전략)이라고도 한다.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걸 시도하면서 정착시키는 것이다. 예전엔 물음표 사업이라고 했는데, 물음표 사업에서 스타 사업으로 가기까지 험난했다. 요즘은 테스트하면서 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실패를 장려하는 기업

 

실패가 예상되는데 계속 시도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책에서는 아마존의 사례를 들어 ‘실패를 장려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배보경 : 맞다. 아마존이 대표적인 건 실패 사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문화가 된 점이다. 아마존은 실패한 것을 다음 아이템에 변주해서 적용해서 성공한 사례도 있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기업가도 많다. 분위기를 바꾸고, 계속 도전하고, 실패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대신 한 번에 크게 성공하려는 것보다 작게,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

 

기업 임원급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많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일해야 할지 고민하는 개인도 생각할 만한 지점이 많다.

 

배보경 :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실행한다고 삶이 바뀔지 안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변해가는 시점에서 주도적인 삶을 살 것인지, 끌려가는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하는 길에 놓인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개인과 기업 모두가 현재 위치를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을 달리하고, 관점을 바꾸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나 역시 스스로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 역시 ‘온고잉’이고, 마찬가지로 한국 기업들도 혁신적인 변화 이끌어서 더 많은 성공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전창록 : 3개년, 5개년 계획 세우는 걸 잊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계획을 세운다는 건 앞선 변화가 예측 가능하다는 가정이다. 앞으로는 예측 가능한 변화란 없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기하급수적 변화가 상수라는 점이다. 우리는 변화가 상수이고, 혁신이 일상인 시대를 산다. 모든 것을 연장 선상에서 바라봐야 한다. 보통 멀미는 속도 인식 차이에서 난다. 만약 배나 버스의 운전사라면 멀미를 느끼지 않는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만이 멀미를 느낀다. 변화가 일상인 시대에서 자기 인생의 운전석에 앉을지, 조수석에 앉을지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미래를 만들고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어떻게 일할 것인가전성철, 배보경, 전창록, 김성훈 저 | 리더스북
4차 산업시대를 대비해 어떤 식으로 일하는 방법을 혁신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려주고 국내 기업들의 현황과 참고할 만한 사례를 ITㆍ금융ㆍ제조 등 산업 부문별로 제시해 한국 현실에 밀접한 내용을 다뤘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오승원 “질병보다 사람 자체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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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캄캄한 밤에도 빛을 밝히는 병원이 있다. 하루가 저물 때쯤 문을 열고 자정을 넘겨 문을 닫는 ‘반딧불 의원’이다. 찾아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바쁜 일과 중에 병원 갈 시간도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직장생활에서 얻은 만성피로와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치매를 염려하고 배뇨 장애로 곤란을 겪는 어르신도 있다. 그들은 ‘반딧불 의원’의 진료실에서 이수현과 마주 앉는다. 조금은 까칠하고 냉랭해 보이는 의사 이수현은 오래도록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증상의 원인과 해결을 그들의 ‘삶’에서 찾기 위함이다.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에게 무심한 듯 툭, 진심어린 조언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덕분에 병원을 찾은 이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괜찮지 않은 당신을 위한 반딧불 의원』 (이하 『반딧불 의원』)은 오승원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 교수가 쓴 ‘페이크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저자는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 질병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고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공간과 인물을 만들어냈다.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늘 어딘가 아플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조명하고, 넘쳐나는 건강 정보의 숫자만큼이나 많이 퍼져 있는 잘못된 상식들을 바로잡는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가정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현재 서울대학교 강남센터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진료와 더불어 비만, 영양 등 만성질환과 관련된 요인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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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의 힘


『반딧불 의원』은 <채널예스>에 연재됐던 칼럼이기도 합니다. 당시 제목은 ‘오승원의 반딧불 의원’이었는데요. 연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출판사에서 소개를 해주셨어요. <채널예스>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나중에 그 글들을 모아서 책을 엮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주셨는데요. 이전에는 제 이름을 걸고 일반 대중서를 쓰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책을 만드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도 잘 몰랐죠. 그래서 저는 책에 담길 내용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방식은 출판사에서 제안해주신 대로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대학병원 의사는 너무 바쁘잖아요. 연재를 하시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연재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면 책을 못 썼을 것 같아요. 마감의 힘이라는 걸 엄청 깨닫게 됐어요(웃음). 사실 중간에 후회도 많이 했어요. 2주에 한 번씩 글을 보내는 게 쉽지 않은 과정이었거든요. 말씀하신 것처럼 의사들이 다 바쁘기도 하지만, 전업 작가들도 글을 쉽게 쓰지는 않으실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전업 작가도 아니고 기본적인 업무가 있다 보니까 2주에 한 편씩 글을 써서 보내는 게 어려운 과정이었어요. 아마 마감 날짜가 없었으면 못 했을 것 같아요. 혹시 또 글을 써서 책을 낼 기회가 있다면 같은 방식이어야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못 쓸 것 같아서요(웃음).

 

연재 당시와 글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죠? 조금 다듬는 과정만 거치셨나요?


네, 그런데 많이 다듬어주셨어요. 제가 초안을 써서 보내면 편집자 분께서 다듬어서 다시 보내주셨고요. 그 과정에서 제 의도에서 많이 벗어났거나 사실과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으면 그것만 재수정해서 보내드렸어요. 편집자 분이 수정해서 보내주신 글을 보면서 많이 놀라기도 했고 느낀 바도 많았어요. 저는 대중적인 글을 쓴 적이 별로 없다보니까, 아무래도 글이 조금 딱딱한 것 같더라고요. 쉽게 쓴다고 했는데도 나중에 다시 보면 조금 어려운 거죠. 만약 제가 쓴 글을 되풀이해서 읽기만 했으면 잘 몰랐을 것 같은데, 편집자 분이 고쳐서 보내주신 글을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훨씬 더 부드럽게 읽히고 ‘일반인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렇게 전달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엮는 과정에서도 문장들이 꽤 많이 바뀌었는데요. 편집자 분들이 많이 애를 써주신 것 같아서 감사했어요.

 

편집자와의 협업이 중요하죠.


역시 편집하시는 분들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책이 나오기까지 작가보다 편집자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편집자 분들께 정말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반딧불 의원』의 시작은 어땠나요? 출간 제의를 받으셨나요?


출판사 대표님께서 제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셨는데,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책을 내보면 어떻겠냐고 메일을 보내주셨어요. 저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깜짝 놀랐죠. 사양을 할까 하다가 한 번 만나만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제가 가지고 있는 글들이 많아질 때 기회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그래서 가볍게 한 번 만나보자라는 생각으로 출판사 대표님과 편집자 분을 만나게 됐어요.

 

형식이 독특한 책이에요. 의학 정보만 담아놓은 것도 아니고, 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도 아니죠. 마치 소설처럼 가상의 공간과 인물이 등장해요. 이런 형식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셨어요?


첫 만남에서 어떤 글로 책을 만들지 상의하다가 출판사 측에서 몇 가지 형태를 제안해주셨어요. 제가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쓴 글들을 엮어보자는 제안도 해주셨고, 일종의 백과사전 형식으로 건강 정보는 전달하는 책을 만들자는 제안도 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고민한 바로는 둘 다 책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백과사전 형식으로 건강 정보를 전달하는 책은 이미 많잖아요. 기존에 나왔던 책들과 다르게, 더 나은 내용을 전달할 자신이 없었어요. 요즘은 조금만 찾아봐도 많은 정보를 알 수 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개인적인 글들을 엮는 건 일기장 형식밖에 안 될 것 같았어요. 이걸 누가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서 둘 다 썩 내키지 않았는데, 이후에 제안을 해주셨던 게 지금과 같은 형식이었어요.

 

‘페이크 다큐’였나요?


네, 편집자 분이 ‘페이크 다큐’라는 게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비교하기 죄송스러운 책이지만 『82년생 김지영』을 이야기하셨었어요. 당시에 그 작품이 한창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던 것 같은데요. 그런 형식의 책이라면 정보 전달과 재미라는 두 가지 측면을 다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주셨어요. 그 뒤에 제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어 보고 좌절을 했죠(웃음). 도저히 비슷하게는 못 쓸 것 같다고. 그렇지만 편집자 분이 이야기하셨던 형식은 재미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토리가 조금 가미된 정보라면 기존과 다르기도 하고, 제가 갖고 있는 환자들과의 에피소드를 조금 각색하면 비슷하게 갈 수는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반딧불 의원’이라는 공간은 어떻게 떠올리게 되셨어요?


1년여 전의 일이라 지금 정확하게 생각나지는 않는데요. 소소한 이야기를 담아야 되니까 큰 병원보다는 작은 의원을 생각했었어요. 어떻게 보면 ‘반딧불 의원’은 약간 판타지스러운 공간이잖아요. 너무 사실적이면 안 될 것 같았고,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너무 일상적인 이야기가 되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 느낌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밤에만 문을 여는 병원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심야식당』의 분위기가 조금 유행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걸 병원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고요.

 

병원 이름은 왜 ‘반딧불’이에요?


실제로 ‘달빛어린이병원’이 있어요. 밤에 여는 소아과 의원인데요. 밤에 응급실을 가야 하는 아이들도 있고, 그럴 때 적절하게 진료를 받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정부에서 밤에도 문을 여는 병원에 지원을 해주기로 하고, 기존에 있는 소아과 의원들이 참여한 건데요. ‘달빛’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굉장히 좋은데 똑같이 쓰면 안 되니까, 어떻게 이름을 지을까 고민을 했어요. 이름만 보고도 밤에만 문을 여는 병원이라는 걸 전달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죠. 그러다가 휴일 오후에 집에 있으면서 첫째 아이한테 물어봤어요. ‘아빠가 글을 쓰려고 하는데 여기가 밤에만 여는 병원이야, 밤에만 활동하거나 밤에만 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랬더니 아들이 ‘반딧불’이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이 의원의 이름은 아이가 정한 거예요.

 


질병보다 사람을 봐야 한다


주인공 이수현은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환자들에게 마음을 쏟는 의사예요. 왜 이런 인물로 그리셨어요? 저자님의 실제 모습과 닮았나요(웃음)?


아뇨, 저를 생각하고 그렇게 한 건 전혀 아니고요(웃음). 따뜻하기만 하면 재미가 좀 없을 것 같았어요. 주인공이 다 갖고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따뜻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복잡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고요. 이 책을 통해서 풍기고 싶은 분위기를 한 인물 안에 다 담기에는 제가 능력도 안 됐고(웃음), 그래서 다른 인물들이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병원 안에 있는 의사나 간호사한테만 이야기가 집중되는 걸 생각했던 건 아니었거든요. 이 이야기에는 ‘반딧불 의원’이 있는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데요. 그 사람들이 다 각자의 캐릭터가 있고, 모든 캐릭터가 전체적으로 버무려지기를 바랐어요. 그러면서 건물 전체가 따뜻한 분위기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여러 사람이 나오려면 각각 다른 성격을 가져야 되잖아요. 부족한 부분들도 있어야 되고요. 이수현도 따뜻하기도 하고 시니컬하기도 한,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성격은 조금 까칠하게 그려진 것 같아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돼요.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콜센터 상담원, 불면증으로 힘들어하는 편의점 사장 등이 등장하잖아요.


사회 문제와 엮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었어요. 그렇게 하면 너무 거창한 이야기가 될 것 같고요. ‘사회’라기보다는 ‘삶’인 것 같아요. 결국 사람이 질병을 가지고 오는 거니까, 똑같은 질병이라도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원인도 다르고 접근방식도 다를 수 있거든요. 그 부분은 의사 선생님들은 다 아시는 걸 거예요. 제 전공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데요. 가정의학이라는 전공 자체가 질병을 개별적으로 보기보다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시각을 갖고 있어요. 주치의 역할을 하는 게 가정의학과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롤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까 질병보다는 사람 자체를 보도록 계속 훈련을 받아요. 물론 다른 과 선생님들은 그렇게 안 하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첫 장의 제목부터 ‘과로사회’예요.


피로는 제가 제일 많이 접하는 증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걸 첫 번째 에피소드로 쓰는 건 되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피로라는 게 워낙 비특이적 증상이고, 해결하는 방법이 모범답안처럼 정해진 게 아니에요. 결국 증상을 해결하려면 피로를 갖고 있는 사람을 볼 수밖에 없죠.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몇 시에 일어나서 얼마나 오래 일하고 몇 시간을 자는지, 그런 것들을 다 볼 수밖에 없거든요. 사회 문제를 꼭 담아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에피소드를 생각했던 건 아니고요. 의사 입장에서 쓰는 글은 좀 재미가 없고 딱딱하게 느끼실 것 같아서, 환자 입장에서 써야 될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면 환자 개인의 입장에서 ‘내가 왜 이 증상을 갖게 됐는지’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구체적인 캐릭터를 생각하고 이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을 붙였어요.

 

이수현처럼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한국 의사들의 평균 진료 시간이 3분이 채 안 된다고 하던데요.


어렵죠. 대학병원이나 환자가 정말 많은 개인의원의 경우가 3~5분 동안 진료를 할 것 같고요. 개인의원 중에서도 환자가 많지 않으면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선생님들이 꽤 있으실 것 같아요. 제가 알고 있는 선생님들도 있고요. 그런데 제가 있는 곳(서울대학교 강남센터)은 본원과는 조금 달라서요. 건강검진에 대한 상담을 하면 보통 15분 정도 하기 때문에 조금 더 여유 있는 편이에요.

 

환자들은 ‘반딧불 의원’ 같은 병원을 꿈꿀 것 같은데요. 의사들에게도 꿈의 직장일 수 있겠어요. 여유롭게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테니까요.


있죠. 대부분의 의사 선생님들이 다 비슷한 생각을 하실 거예요. 3분 진료나 5분 진료를 하고 싶어서 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3분마다 진료를 한다는 게, 의사도 계속 소진되는 일일 거예요.


그렇죠. 제가 대학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을 때도 숱하게 봤던 광경이고, 이제는 많이 줄었지만 조금 있는 경우죠.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서울대병원에서도 15분 진료를 하고 있어요. 시범 사업으로 하고 있는 건데요. 그것도 제도가 뒷받침돼야 할 수 있죠. 시범 사업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은 의료수가를 조금 더 보장해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여유롭게 진료하고 싶은 마음은 다 있지만, 지금 현실에서는 모든 선생님들이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해요. 전체적으로 의료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야 될 것 같아요.

 

『반딧불 의원』과 관련해서 우려하시는 부분도 있나요?


제가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다른 선생님들보다 커서 이게 이상적인 진료라고 상상하고 만든 건 아니에요. 다만 어떤 선생님들은 이 책을 보시고 ‘아이고, 참 순진하게 썼네. 밤에만 여는 병원이라니. 대학병원에 있어서 그런가, 현실을 모르고 있군’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현실을 다 알지는 못하고, 개원한 의사가 아니다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의사는 아닐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대학병원에 계속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걸 조금 더 할 수 있는 환경이기는 하죠. 그렇지만 대학병원 선생님들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고, 개원하신 선생님들의 어려움도 또 있어요. 이 책을 읽으신 환자분들이 ‘이런 의사가 있어야 되는데, 이런 병원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나라 의사들은 안 돼’ 이렇게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반딧불 의원’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고요. 내용을 보시고 ‘사실은 많은 의사들이 이렇게 바라보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조금 어려움이 있다’는 걸 이해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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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의 근거, 놀랄 만큼 빈약하다


‘쇼닥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담겨 있던데요. 같은 의사로서 이야기하기 조심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저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이야기하시는 분들 많아요. 저는 순화시켜서, 어떻게 보면 약간 비겁하게 말씀을 드린 거죠. 종편이 생기면서 의사들이 나올 만한 방송들이 굉장히 많아졌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출연할 의사들이 필요하고, 의사들 입장에서도 방송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면 진료실에서 이야기할 때보다 파급력이 훨씬 크고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으니까 나쁜 일은 아니죠. 그런 양쪽의 입장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순기능만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문제죠.

 

방송에 출연하신 경험도 있나요?


멋모를 때 방송에 출연했던 적이 있는데요. 방송이라는 게 항상 준비된 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해야 될 때도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러다 보면 엉겁결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야 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게 버거워서 방송에 안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가 방송에서 꼭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잘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그런 게 익숙해지다 보면 문제의식이 조금 사그라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안 먹어도 괜찮아요’라는 꼭지가 있어요. 비타민제 과용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종합비타민이나 영양제, 건강보조제에 대한 견해도 의사마다 다르잖아요. 그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대중의 입장에서는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요.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요?


일단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건강기능식품이나 영양제가 어디에 좋다’라는 근거가 방송에서 이야기되는 것만큼 또는 많이들 믿으시는 것만큼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거예요. 오히려 놀랄 만큼 빈약해요. 이건 팩트예요. 그런데 ‘그 근거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를 두고 시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근거가 빈약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데,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선생님들이 있고요. 빈약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도 있을 거예요. ‘근거가 쌓이려면 그만큼 연구가 돼야 하는데 돈도 별로 안 되는 약은 제약회사에서 투자해서 연구를 하지 않고, 그러면 앞으로도 근거가 별로 없을 텐데 손 놓고 있을 거냐’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지 말고 적극적으로 작은 근거라도 찾고, 그것들을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보자는 거예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만약,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불치병이거나 심각한 문제라면, 작은 근거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 관련 정보들은 그런 문제에 적용되는 게 아니거든요. 비타민이나 건강기능식품도 그렇고요. 물론 암 같은 중한 질병에 관련된 부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시중에 나와 있는 정보들이 적용되는 부분들은 대체의학과 관련된 것들이에요. 병원에서 이야기하는 정통 치료가 아니고요. 그런 것들 말고도 근거가 훨씬 더 확실하고 조금 더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데, 거기에 소홀하게 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비타민은 쉽게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런 데에 혹하다 보면 기본적인 부분들을 소홀히 할 수 있죠. 잘 먹고, 잘 쉬고, 운동 열심히 하고, 체중 관리하고, 이런 것들은 재미도 없고 어렵고 오래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찾게 되죠.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그렇지만 그런 걸 너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꼭 해야 될 부분들에 소홀하게 되고, 반작용이 있는 것 같아요.

 

의사가 초기 단계의 연구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죠. 그건 문제가 아닌데, 그 내용이 방송에서 다뤄지면 대중은 실제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정보라고 오해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쇼닥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는 것 같아요.


연구 결과는 계속 쏟아져 나오고, 짧은 기간에도 수백 수천 건의 연구들이 나와요. 일반인 입장에서 어떤 게 좋은 연구인지 판별할 수 없죠. 당연히 전문가가 해야 될 역할이에요. 그런데 연구가 갖고 있는 가치가 굉장히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서 실험실에서 하는 연구가 있고, 수십만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있어요. 흔히 발견되는 오류는 실험실에서 했던 아주 작은 연구가 부풀려서 전달되는 경우예요. 예를 들면 특정 질병에 도움이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성분이 하나 발견되면, 그건 하나의 가설이거든요. 그런데 기사로 나오거나 방송에서 다뤄질 때는 치료제가 발견됐다는 식으로 전달되는 거예요. 일반인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죠. 굉장히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례들이에요.

 

의사들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연구 결과를 소개해야겠죠.


전문가라면 자신의 주장을 받쳐줄 수 있는 연구 결과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있고, 상반된 연구 결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 결과만 찾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죠.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의 철학이나 원칙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고혈압 약, 평생 먹어야 된다?


책에서 잘못 알려져 있는 건강 정보를 바로잡아 주셨는데요.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건 뭔가요?


고혈압 관련 약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일 것 같아요. 평생 먹어야 하는 약 중에 제일 흔한 게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약이에요. 그 약들에 대해서 환자 분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대부분 비슷해요. 약을 처방하겠다고 하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시고 ‘내가 뭔가 크게 잘못했구나. 약을 먹어야 된다니, 내 인생은 이제 끝난 것 같아’라고 생각하세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어요.

 

약을 먹기 전에 자기 힘으로 노력해보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그런 상황에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치료시기가 늦어지면 더 문제가 생겨요. 대개 이런 만성 질환들은 수치가 지나치게 높다거나 상황이 정말 안 좋은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처음부터 약을 쓰지 않거든요. 치료 원칙도 그래요. 일정 기간 생활습관 관리를 해보고, 열심히 해봐도 반응이 없거나 안 될 때는 약을 드시게 돼요. 많이들 잘못 생각하시는데, 자신이 뭘 잘못해서 약을 먹는 게 아니에요. 그냥 치료하는 과정 중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옵션 중에 하나인 거예요. 저는 환자 분들께 그 점을 설명 드리는 편이에요. 그리고 약을 평생 먹는 것에 대해서 다들 두려움을 갖고 계세요. 그 이면에는 부작용에 대한 걱정이 있죠.

 

약을 오래 먹는 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네. 약을 평생 먹으니까 그만큼 부작용도 경험할 수밖에 없고 내성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사실 저는 처방을 할 때 조건들이 잘 갖춰지면 약을 끊을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는 편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싫어하시는 선생님들도 있을 거예요. 처음부터 평생 먹어야 된다고 이야기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시거든요. 약을 끊을 수도 있는 사례가 있다는 걸 몰라서 그러시는 게 아니에요. 사실 이런 만성질환은 대부분 평생 약을 드시는데, 생활습관 관리를 잘 하고 체중을 줄이면 약의 효과를 대신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대부분 그렇게 못해요. 그걸 알기 때문에 약물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거예요. 제일 걱정스러운 부분은 ‘약을 끊을 수 있다더라’ 하는 생각으로 약을 잘 안 먹는 경우예요.

 

방송에서 부작용에 대한 내용이라도 나오면 흔들릴 거고요.


그렇죠. 최근에도 고지혈증 약을 먹으면 당뇨가 생긴다는 이야기들이 나왔거든요. 사실이에요. 그런데 미치는 영향이 아주 적어요. 관련된 많은 연구 결과들이 나와서 쌓이고, 의사들이 이제 믿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을 때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고지혈증 약을 오래 먹으면 혈당이 조금 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지혈증 약이 혈관 계통에 미치는 이득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드셔야 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중간 중간 혈당 검사도 하는 거죠. 그런데 방송에서 고지혈증 약을 먹으면 당뇨가 생길 수 있더더라, 하는 내용이 나오면 오랫동안 했던 노력이 말짱 도루묵이 돼버리는 거예요. 꼭 약을 드셔야 될 환자 분들이 안 드세요.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의사들이 약을 끊어도 된다고 섣불리 이야기를 못 하는 거죠.

 

책에도 나오지만, 독감 백신 접종을 기피하는 임산부들도 있잖아요.


예방접종을 하면 아이가 자폐증에 걸린다더라, 하는 식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들이 있는데요. 치료를 회피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기저에는 불안이나 걱정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은 누구나 갖고 있잖아요. 그걸 탓하거나 왜 신뢰하지 못하냐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부분인 것 같아요. 자꾸 설명을 해드리고 간극을 좁혀나가야 될 것 같고요. 조금 허무하고 힘이 빠지는 부분은, 그 과정을 열심히 오랫동안 해도, 방송에서 잘못된 정보가 나오거나 의도적으로 악용하시는 분들이 나타날 때예요. 얼마 전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안아키(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 카페도 한 예죠. 어떻게 보면 전문가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해서 그런 걸 텐데 ‘왜 대중은 이상한 이야기들만 듣는 걸까’라고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계속 노력해야 될 부분인데요. 그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안타깝기는 하죠.

 

‘한미수필문학상’을 두 차례 수상하셨어요. ‘의사들의 신춘문예’라고 불리는 문학상이죠? 원래부터 글을 잘 쓰시는 분이었군요(웃음).


제가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되게 어려운 일이에요. 정말 잘 쓰시는 작가 분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 많이 봤는데, 글 쓰는 건 누구한테나 쉬운 작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만 글 쓰는 과정 자체를 외면하지 않았고 뭔가를 써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복잡한 마음이 들 때 글을 쓰면, 어렵고 힘들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님한테 받은 게 조금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어요. 이번 책을 쓰면서도 그랬고요. 저희 어머니가 뒤늦게 대학을 가셨거든요. 제가 성인이 된 다음에 가셨는데 전공으로 문예창작학과를 선택하셨어요. 당시에는 어머니가 왜 다시 공부를 시작하셨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어머니랑 그런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고요. 그런데 제가 글 쓰는 게 힘들어도 외면하지 않고 조금씩 써왔던 건, 어머니한테 받아서 내재돼 있는 유산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책은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썼다고 하셨어요. 『반딧불 의원』을 쓰신 후에 달라지신 부분이 있나요?


제한된 시간과 환경에서 환자들에게 설명을 잘 하려면 노하우도 필요하고 고민도 필요하고 경험도 필요해요. 쉽게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의사라고 다 설명을 잘하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환자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잘 전달하고 환자의 행동이 바뀌도록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돼요.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책을 쓰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게 됐어요. 매력적인 설명 모델이라고 할까요.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이 ‘이렇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보니까 더 이해가 잘 된다’라고 느낄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요. 그러려면 일반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쉽게 써야 하잖아요. 그래서 평소에 진료실에서 하지 않는 이야기들도 생각하게 됐어요. 실제로 이 책을 쓰고 나서 환자들한테 설명하기가 훨씬 더 편해졌고요. 환자들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진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반딧불 의원』 의 다음 이야기도 이어질까요?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 짓고 나서 편집자 분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또 써야 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여력이 조금 갖춰지면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요(웃음). 아직 쓰지 않은 질병에 대한 이야기는 많으니까요. 조금 더 여유가 되면 이어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반딧불 의원오승원 저 | 생각의힘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사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올바른 의학 지식을 얻도록 하는 한편, 각 에피소드의 끝에는 반딧불 의원의 진료실에서 다 다루지 못한 건강 지식들을 정리해두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경미 “에세이 쓴 이유?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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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영화감독 이경미는 매일 다이어리를 썼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때의 솔직함은 더욱 가감 없었다. 꾸준히 그의 글을 탐독하던 한 출판 마케터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다니는 출판사에서 마케터들도 기획 아이템을 내라고 했다. “이때다” 싶어 마케터는 이경미 감독에게 기획안을 보낸다. “당신의 책을 만들고 싶어요.” 마케터는 이경미 감독만이 쓸 수 있는 문장, 글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8년을 기다렸고 이경미 감독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이 세상에 나왔다. 2016년 12월부터 6개월간, <채널예스>에서 연재한 ‘이경미의 어쨌든’이 초고가 됐다. 이경미 감독은 ‘안 해봤던 걸 해본다’는 작심으로 책을 썼는데, 막상 책이 나오자 마음이 달라졌다. “어쨌든 잘돼야 한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출간 1주일만에 3쇄. 저자가 의도적으로 쓴 비문(非文) 앞에서 독자들은 아찔한 해방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이경미 감독은  『잘돼가? 무엇이든』을 두고, “연세가 많은 분들에겐 철없는 어른의 농담으로 여겨질 책”이라고 했다. 저자로서 가장 바라는 것은 ‘부담 없는 위로’가 되는 일. 오래 전부터 이경미 감독은 영화감독 이후의 삶으로 작가의 삶을 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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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다

 

얼마 전 북 콘서트를 했다. 영화 GV와는 느낌이 달랐을 텐데.

 

정말 그렇더라. 영화로 관객들을 만나는 것과 책으로 독자들을 만나는 게 완전히 달랐다. 책에서는 워낙 솔직하게 나를 드러냈으니까,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안심이 됐다. 이걸 좋아할까?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나 신경 쓰는 일이 없었으니까, 재밌었다.

 

기억 남는 질문이 있었나?


책의 일러스트를 그린 동생 이야기를 궁금해하더라. 동생이랑 작업을 다신 안 하겠다고 해놓고 왜 또 책을 같이 했냐고 묻는 독자 분이 있었다. (웃음)

 

<채널예스>에 연재했던 ‘이경미의 어쨌든’이 초고가 됐다. 연재 때도 일러스트를 동생 이경아 작가가 그렸다.


(웃음) 나는 선의를 갖고 한 제안이었는데 동생은 내가 독단적으로 스케줄을 결정했다고 분노했다. 말다툼의 처음은 사소했지만 동생은 끝내 울었고 나도 밤새 잠 한 숨 못 잤다. 결국엔 책까지 같이 작업하게 됐지만. 성인이 되어서, 칼럼을 연재하기 전까지 동생이랑 크게 싸운 적이 없었다. 공교롭게 작업을 같이 하면서 정도 쌓였고, 서로를 조금은 억지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책을 본 동생의 반응은 어땠나?


너무 좋아했다. 만족스러워 했고. 티저 예고편을 보고 울었다고도 했다. 너무 기쁘고 뭉클하다고, 온갖 감정이 다 느껴졌다고 했다. 이번에 책 작업을 같이 한 후, 여러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다.

 

역시 책 제목을 잘 지어야 한다. (웃음) 표지 일러스트가 좋다는 이야기가 많더라. 이경미 감독이 요가를 하는 장면을 그린 컷이다.


책에 일러스트를 넣을지 말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결혼식 전날, 동생이 아침에 전화를 해서는 우리 부부의 얼굴을 그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림을 받고 비공개 계정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잘돼가? 무엇이든』을 기획한 정유선 아르테 팀장이 표지에 그림을 넣어도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동생과의 두 번째 작업이 시작됐다. (웃음)

 

연재 종료 후 1년이 지나서 책이 나온 셈인데, 그동안 이경미 감독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출판편집자들의 전화를 정말 많이 받았다. 책 출간 제안도 많이 받았을 텐데.


연락을 받긴 했는데 이 원고는 이미 정유선 팀장과 약속되어 있는 책이었다. 정유선 팀장은 나의 글을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원래는 올해 초 책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칼럼 연재가 끝날 무렵, 결혼 날짜를 잡게 되면서 결혼식 후에 책을 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혼을 준비하며 있었던 일을 글로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왜냐면 연재 때는 결혼 계획도 없었고, 남자친구도 없었으니까. 일상이 바뀐 모습을 담아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퇴고를 꼼꼼히 하는 성격이다. 책은 어땠나?


교정 보는 선생님께서 많이 힘드셨던 걸로 안다. 내 글의 성격이 비문이 특징이 되는 글들이라서. 어디까지 비문을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신 걸로 안다. 나로서는 교정을 몇 번 거치면서 정신을 좀 차렸다. 되도록 읽기 쉽게 하려고 노력을 하긴 했다.

 

칼럼 연재 때도 등장했던 문장 “못.쌩.겨.가지고.”(41쪽)가 다시 등장해서 반갑더라. “영화를 보면 이경미 감독은 평생 남자한테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한 여자가 분명하다”고 말한 한 영화 관계자의 말을 듣고 난 속내다.


(웃음) 출판사에서 ‘못 생겨가지고’라고 두 번 고치셨는데, 이건 ‘못.쌩’으로 써야한다고 우겼다. 두 번쯤 메일을 보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영화 관계자가 이 책을 볼 가능성이 있을까?


안 볼 것 같다. 봤다고 하더라도 본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다.

 

책 중간중간에 10년 전부터 쓴 매우 오래된 일기가 실렸다.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인 시절에 썼던 일기라고.


평소에 혼잣말을 절대 안 한다. 혼자 있을 때는 외마디도 지르지 않는 성격인데, 싸이월드에는 그렇게 오래 일기를 썼다.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하고 낯설다. 아마 가장 오래된 일기가 2003년도에 쓴 글일 거다.

 

그렇다면 이경미의 15년이 담긴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잘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웃음) 글을 너무 솔직하게 썼기 때문에 걱정도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쓴 건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어떤 일을 계속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한 무게감이 생기면서 어떻게 해야 한다, 되야 한다는 틀이 생긴다. 이 틀을 깨버리고 싶다는 마음속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해방감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이를 테면, 부모의 기대를 받는 애들 중에 삐뚤게 성장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스스로 어때야 한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버린. 삐뚤게 나가야지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떤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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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백 만 명을 잃고 한 명을 얻었다

 

짧은 분량의 에세이인데, 영화적으로 읽히는 장면들이 많다. 대사 형식으로 이뤄진 글도 많고.


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다 보니까 그림을 상상하면서 쓰는 버릇이 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듯이, 인물의 감정 속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눈물병」에서 ‘완연한 가을바람이 후드득’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영화 속 인서트처럼 읽혔으면 했다. 내 버릇인 것 같다.

 

책 제목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지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중간에 다른 제목으로 살짝 갔었는데, 올해 단편영화 <잘돼가? 무엇이든> DVD와 각본집이 나온다. 그래서 같이 나와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제목이 주는 맥락이 책에 담긴 글과도 잘 맞겠다 싶었고. 후보군으로 ‘어쨌든 가고 있다’도 있었는데, 정치인 자서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니다 싶었다.

 

프롤로그 제목이 ‘이건 그냥 하는 농담이지만’인데, 내용은 가장 무거운 글이 아닐까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바로 이것. “이 책의 절대적 존재 이유이자 의미인 나의 부모님.”(12쪽) 그런데 놀라운 건 정작 본문으로 들어가면 엄마, 아빠 이야기가 굉장히 적나라하다는 점이다. 어떤 애증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도 많고.


아버지는 이 책을 보고 감상을 이야기 해주셨는데, 어머니가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 칼럼을 연재했을 때, 사실 어머니가 첫 화를 읽고 선 너무 슬퍼하셨다. 책에는 ‘눈물병’으로 실린 글인데, “경미야, 이거 읽는데 내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앞으로 네가 쓰는 글에 마음이 아픈 내용이 많을 까봐 너무 무섭다”고 하셨다. 그 날 좀 많이 우셨던 걸로 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모님이 알고 있는 내 모습과 나의 진짜 모습의 갭이 너무 커버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 책을 대범하게 좋아해주고 계셔서 다행이지 싶다.

 

사실 아버지에 관한 에피소드는 칭찬보다는 흉에 가까운 글이 많은데, 부모님들은 신기하게도 잘 이해해 주시더라.


거짓말을 한 게 아니고 사실이니까, 아버지도 할말이 없었던 게 아닐까. (웃음) 아버지가 책을 읽고는 문자 메시지를 주셨다.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문득 너의 냉소적인 인생관을 읽을 수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사회를 향한 분노를 농담처럼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고.

 

「엄마 문자」를 읽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매일 밤 “딸, 편안히 잘 자라”는 문자를 보내신다고.


엄마가 나이가 드시면서 긴 잠을 못 주무시니까, 딸이 잠을 못 자서 힘들어하는 걸 본인의 고통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혼자 남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시절, 엄마의 문자는 그날 밤을 버틸 수 있게 한 유일한 빛이었다. 지금도 엄마는 종종 문자를 보내신다. 편안히 잘 자라고.

 

책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을 꼽으라면 나의 선택은 75쪽 「불타는 싫은 마음」에 실린 글귀다. “같은 입장이 아닌 사람에게 온전한 동의와 공감을 바라진 않는다. 마음이 싫다는데 어쩌겠나. 나도 사람인지라 살다보니 나쁜 줄 알면서 싫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다만,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티 내진 말자 이 말이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존중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정말 싫은 마음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도 아름다운 존중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그 사람 너무 싫어”라는 말을 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무례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나?


얘기를 안 한다. 안 보면 되니까. 다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시하려고 노력한다.

 

올해 3월에 결혼했다. 결혼 후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았을 것 같다. 남편 필수 씨는 한국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그 중에서 이경미 감독의 영화 <비밀을 없다>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영화기자다. 11쪽에 이렇게 썼더라. “결국 나는 3백 만 명을 잃고 한 명을 얻었다.”


<비밀은 없다>가 흥행에 참패한 후, 무지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실패의 여러 과정, 시간을 겪으면서 이 영화가 내게는 너무 고마운 작품이 됐다. 나는 <비밀은 없다>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감정과는 별개로 이 작품을 통해 세상만사에는 음과 양이 혼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겪을 때마다 <비밀은 없다> 시절을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아쉬워할 게 없다는 생각이다.

 

반면 <미쓰 홍당무>를 통해서는 사랑을 잃고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얻었다. 실제 짝사랑 실패 경험담으로 만든 첫 장편이었다.


하하. 그런 셈이네. <미쓰 홍당무>는 속상한 마음으로 내가 나를 가지고, 나를 웃겨서, 내가 위로 받은 영화다.

 

영화감독과 영회기자와의 만남, 특별한 프러포즈가 있었을 것 같다.


남편이 스페인에 갔을 때 프러포즈 반지를 맞췄더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만난 날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데이트 장소를 쭉 산책하자고 해서 걸었고, 좋은 곳에서 밥을 먹고 무릎을 꿇고 내게 결혼하자고 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땀을 뻘뻘 흘려서 남편이 너무 불쌍해서 울면서 반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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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오면 그냥 지내. 언젠가 잠이 와

 

‘스트레스를 장기처럼 달고 다니는 인생’이라고 했다. 결혼 후에는 조금 달라졌을까?


글쎄, 결혼을 해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 책을 비롯해 여러 일을 겪으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생겼다. 예전에는 솔직히 노력을 안 했던 것 같다. 너무 그 안에 함몰되어 있곤 했는데, 재작년 영화 <비밀은 없다>를 개봉한 후, 면역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면서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2004년 개봉한 단편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의 주인공. 그러니까 사회생활에 신물이 난 3년차 직장인 ‘지영’과 눈치 없는 노력파 ‘영주’에게 지금의 이경미가 말 한 마디를 건넨다면?


힘들겠다? 나는 조언 같은 걸 잘 못한다. 하기 싫어한다. 문득 하게 될 때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생각한다. 그래도 인생을 겪어보면서 내린 결론은 다 지나간다는 것. 어떤 힘든 상황도 다 지나간다는 이야기다. 내가 너무 힘들 때는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지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로 놀랍도록 다 지나가 있더라. 내가 한창 불면증을 겪을 때,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경미야, 잠이 안 오면 그냥 지내. 언젠가 잠이 와.” 일도 비슷한 것 같다.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올 땐 너무나 힘들지만, 어떻게든 지나간다. 파산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겐 이런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적당히 힘들 때는 다 지나간다. 물론 재난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이경미가 가장 좋아하는 때는 언제인가?


요가를 하고 나왔을 때? 내가 뭔가를 해서 엄마 아빠가 좋아하실 때? 누군가가 기뻐할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뭔가를 준비할 때, 그 순간이 행복하다.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공포 판타지 <새색시>라는 작품을 쓰고 있다. 내가 새색시가 된 날, 그러니까 결혼식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뒤풀이 장소로 이동하면서 떠오른 이야기다. 결혼식이라는 게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밀려오는 공포감 속에서 생각난 시나리오다. 본격적으로 작품이 들어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경미 감독의 변화도 궁금하고.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 좋아하는 인물을 쓰게 되는데, 결국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자력구제해서 스스로 헤쳐나가는 캐릭터가 되더라. 이유를 따져보니 내가 의존적이거나 재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걸 무지 싫어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작품에서는 내가 쓰고 있는 인물과 나를 분리시키고 싶다. 왜냐면 좀 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인데, 내가 만든 인물이 사람들에게 연민을 작동시켜 눈물이 나게 되는 게, 마음이 걸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물을 통해 남 탓하는 습관을 버리고 싶다. 다른 인물을 만들어보고 싶다.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싶나?


영화 <미쓰 홍당무>에 나오는 대사이기도 한데,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너한테 관심 없어.”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왜냐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잘돼가? 무엇이든이경미 저 | arte(아르테)
삶은 여전히 힘들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래도 농담 같은 그 시간의 기록이 우리를 웃게 하고, 그 웃음의 힘으로 또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꽤 괜찮은 것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젊은 작가 특집] 박영 “전혀 모르는 사람과 연애하듯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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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인정 받은 무용가 ‘제인’은 그러나 은퇴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 오로지 무용가로서의 성공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제인, 그에게는 남편 ‘진’도, 딸 ‘레나’도, 딸의 곁에서 엄마의 자리를 완벽하게 지켜온 하우스헬퍼 ‘크리스티나’도 무용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텐’이라는, 무용가로서의 경력을 한 발짝 더 내딛도록 도와줄 유명 안무가가 나타나고, 이제 남은 제인의 목표는 그와의 공연, 그뿐이다. 그러나 미스터리한 그 인물은 어째선지 제인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제인에게 텐은 어떤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는다.


박영 작가의 『불온한 숨』은 첫 장편 『위안의 서』로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두 번째 장편이다. 그 자체로 도전이었던 소설. 그만큼 힘들고 그만큼 치열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연애하듯 썼다는 작가는 어느 날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크리스티나의 질문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라는 말을 적고 숨이 막혔다. 목표지향적인 인물 제인과 치열한 사춘기를 보내는 인물 레나, 내면의 약함과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위악을 부리는 인물 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세상의 금기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 크리스티나 등 강렬한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버린, 우리의 아름다운 일면”을 되찾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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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소설의 배경이 싱가포르죠. 작가의 말에서 “한국에 돌아와서야 나는 이국의 거리에서 한 여자가 나를 따라왔음을 알아차렸다.(221쪽)”고 하셨는데요. 왜 한 여자가 작가를 따라오게 됐는지, 궁금해요. 싱가포르의 어떤 점이 소설을 시작하게 만들었나요?

 

싱가포르에 대해 공부를 하고 간 것은 아니고, 그냥 여행을 갔던 건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다니는 풍경이었어요. 다양한 나라의 음식, 음악이 거리에 함께 공존하고 있었거든요. 그 속에 함께 어우러지면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갑자기 느끼게 되더라고요. 특히 중국인 거리가 소설에도 등장하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그곳에서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어요.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고요. 알아보니 싱가포르에 축제가 많더라고요. 그날은 축제 전날이어서 설렘 같은 게 거리에 가득했어요. 한쪽은 축제에 대한 설렘으로 들떠있는데 한쪽에서는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던 거죠. 길의 한복판에 관이 놓여 있고, 향을 피우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기리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요. 보는데 신선한 충격 같은 걸 느꼈어요. 이런 거리에서 마지막을 맞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제 삶과는 거리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렬했어요.

 

해방감을 느꼈다고 하셨는데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요?


켄 윌버의  『무경계』 를 보면서 생각할 게 많았는데요. 까닭 없이 미워하게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이 가진 일면이 내 안의 어떤 면과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우리는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죠. 그중 내가 추구하는 것이 강해질수록 추구하지 않는 것을 배척하게 되고 그것을 나의 일부가 아니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면서 경계를 짓는 거예요. 그 경계를 통해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협소해지고 있는 거죠. 그 내용을 보고 한참 멍했던 기억이 나요. 그동안 제가 써온 작품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힘들고, 고독한 작업인데 왜 글쓰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이 작업에 끌리는가, 가 늘 의문이었는데요. 그 책을 읽고는 소설을 쓰면서 내가 나의 경계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소설 속 인물들은 작가님과 닮지 않은 부분이 많겠어요.


그럴 때 너무 신이 나요. 사실은 원래 나였지만 어떠한 이유에서든 버린 나죠. 사실 나였지만 지금은 멀어진 나,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인물에 반영을 많이 하고요. 그것은 나에 대한 도전인 것 같은데요. 나아가 이것이 제 책을 읽는 독자 분들에게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독자 분들도 제 소설을 보면서 정서적 해방감을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같은 테이블에서 보드 게임을 즐기듯이 말이에요. 제 소설 속 인물들과 만나고, 소설 속 거리를 거닐면서 심리적인 모험을 하시길 바라요.

 

주인공 제인은 한국에서 태어나 입양되었고, 텐은 중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죠. 크리스티나 역시 이주노동자고요. 이 인물들의 경계성이 방금 말씀하신 ‘모험’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부러 캐릭터를 모험적으로 했어요. 『위안의 서』는 첫 소설이라 차가 우러나듯 제 안에서 걸어 나온 인물들이었는데요. 운 좋게도 그 작품으로 여러 독자 분들을 만났고요. 소설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분들과 용기 내어 더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저는 지금 소설을 모험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요. 현실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고요. 그 맥락에서 인물 설정을 했죠. 대표적인 인물이 크리스티나예요. 욕망이 강하고, 야성적인 인물이잖아요. 어찌 보면 저는 크리스티나처럼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그리게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제게는 금기 그 자체인 인물이에요. 우리가 버린, 우리의 아름다운 일면 같아요.

 

공감해요. 왜 그렇게 크리스티나에게 마음이 갔는지 몰라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웃음) 소설을 읽은 분들이 제인에게는 애증을 느낀다면 크리스티나에게는 굉장한 애정을 느끼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크리스티나라는 캐릭터는 여기서 끝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소설을 퇴고할수록 크리스티나의 숨결과 체취가 강하게 되살아나서 통제가 안 되는 느낌이었거든요. 저에게는 운명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어서 꼭 크리스티나가 아니더라도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인 소설을 언젠가는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랑


무엇보다 크리스티나는 제인의 정반대에 있잖아요. 제인은 “세상 사람들에게”“부도덕이자 파렴치한 폭력일 뿐”인 춤으로부터 도망친 인물이지만 크리스티나는 세상이 부도덕이라고 말할 어떤 시선들에 맞서기를 택하죠.

 

“다시 말하지만 난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거예요.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중략) 그렇지만 그런 사실들이 내 마음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129쪽)

 

누구나 목표가 있죠.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고요. 그러나 그러면서 자기다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거기서 불행이 시작되는 것 같은데요. 제가 소설을 쓰기 위해 밀실에 들어가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나 자신을 만나는 순간에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답은 어떤 사람을 거침없이 마음껏 마음에 담아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것을 통해서만 나를 벗어날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그런 사랑을 통해서만이 한 번뿐인 생을 안타까움 없이 떠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해요.

 

역시 크리스티나가 제인에게 한 질문,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66쪽)가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겠어요. 소설이 이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는데요. 이 질문으로 작가님이 환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맞아요, 이 질문을 독자 분들에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대사를 쓸 때는 정말로 의식적으로 개입한 게 아니었어요. 크리스티나가 생생하게 외친 거예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부분을 카페에서 썼었는데요. 쓰다가 숨이 확 막혔어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그때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그 문장까지만 쓰고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아, 이 소설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야겠다, 라고 생각했죠. 크리스티나가 무의식에서 저에게 질문을 던져준 것 같아요. 결국 이 질문이 독자 분들에게 가닿는다면 일단 이 소설은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문장이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온몸으로 그 대상을 껴안고 부서지는 것인지도 몰랐다.”(182쪽)였어요.


이 소설에 숲 이미지가 강하게 나오잖아요. 제인과 맥스와 마리의 숲을 우리가 엿보기도 하고, 크리스티나가 숲에서 사랑하는 장면을 보기도 하고요. 그래서 처음 생각한 제목에는 ‘숲’이 들어가기도 했었는데요. 저는 사랑에 대한 답을 숲이라는 것으로 대신 드리고 싶어요. 숲은 굉장히 많은 존재들이 어우러져 있어요. 물론 서로 잡아먹기도 하고, 경쟁도 하고, 치열하게 부대끼겠죠. 자신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해 서로를 침해하기도 할 거고요. 그렇지만 같은 비와 햇빛, 바람을 맞으면서 끝없이 뻗어나가는 생명력이 숲 같아요. 저는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숲이 메마르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닮아 있는 것이 바로 숲 같아요.

 

제인은 매우 위태로워 보여요. “이제껏 나의 생은 그저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벌인 한낱 연극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몰랐다.”(137쪽)라는 문장처럼 제인을 움직인 것은 그 자신의 온전한 욕망이 아니었거든요. 그를 “해방”시켜야 했던 이유는 뭔가요?


텐도 그렇지만 특히 제인은 강박에 가깝게 목표 지향적이에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잘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죠. 누구나 자기 안에 제인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잘하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 때문에 어느 순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는 생각이 소설을 쓰면서 많이 들었어요. 잘하려고 하면 뭔가를 절제하게도 할 것이고요. 자신을 통제하려고도 하겠죠. 그러면서 나를 나답게 하는 감정을 경계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인처럼 나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정의 대상인데요.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지금까지의 규칙을 파괴하게 하잖아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나를 해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문화도 그렇잖아요. 익숙하고, 기존에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고수하려다가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것은 확장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숲이 되려면 나무 한 그루로는 안 되는 거죠.


네, 확장에 있어서는 필수불가결하게 파괴가 있어야 하고요. 부서진다는 것이 위기와 위협, 혼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확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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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제인이 춤을 추는 사람이라는 것도 중요해요.


소설을 쓰다가 한계에 부딪히거나 하면 연락을 드리는 은사님이 계세요. 『불온한 숨』 을 쓸 당시 춤에 대해 쓰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거든요. “두 번째 소설에서 너무 도전을 하고 말았구나.” 하시더라고요. 당연히 두려웠죠. 더구나 몸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저로서는 무용을 선택한 것이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잘하고 익숙한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갈등도 컸는데요. 그러나 역시 모험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어떤 투쟁과 저항, 해방을 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전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 전 독자와의 만남을 갖는 행사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전 제 스스로의 소설이 독자 분들에게 일종의 모험처럼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제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하고 싶었고요. 그래야만 떳떳하게 이 책을 읽은 분들께도 시도하고, 도전해보시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소설의 줄거리 자체도 더 나아가는 이야기이니까요.


네, 그러니까 제가 시도를 해야 제인의 이야기,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도 용기를 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제가 먼저 보여드리고 싶은 욕구가 많아요. 요즘 더 그런 것 같고요. 결국, 위험하게도(웃음) 도전을 했어요.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많이 힘들었어요. 일단 몸보다는 머리를 써버릇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힘들었죠. 그래서 춤도 많이 봤고요. 몸에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보니까 저는 저의 정신, 감정, 마음, 이런 쪽만 비대해져 있더라고요. 미뤄두었던 것이 나의 감각들이었죠. 감각에 관심을 두려고 애썼고, 감각에 대한 책도 많이 봤어요. 스킨십 자체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고요. 먹을 때도 풍미 같은 것을 더 느껴보려고 했고, 내 몸을 깨우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요가도 해보고, 발레 스튜디오에 찾아가서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너무 아파 비명도 지르면서(웃음) 내 몸이 얼마나 굳어 있었나, 느꼈고요. 거의 소설 쓰는 작업이 아니라 연기하는 작업 같았어요. 연애하듯 썼어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 도전하는 느낌으로 썼죠.

 

쓰기 전과 쓰고 난 후, 작가님도 많이 바뀌셨을 것 같아요.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도 바뀌고 있는 중인 것 같고요. 아마 세 번째 소설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요. 작년에 한 전시회에 갔다가 어떤 스파이의 일생을 봤어요. 그 사람이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이름만 55개였다고 하더라고요. 그 많은 이름으로 각각 인연 맺은 사람들이 있겠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그를 다르게 기억한다는 기록이 있더라고요.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우리 안에는 다양한 면이 있을 텐데 어떤 것을 위해서 어떤 면을 희생하지 마시고 다 거침없이 풀어놓아보셨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소설로 꼭 전달하고 싶어요.

 

제인에게 마리 선생이 “너의 춤을 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네. 너만의 춤을 추라고요. 마리 선생님 너무 좋아해요.(웃음) 저도 마리 선생이 곁에 있다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마리 선생이 버려진 연습실로 자기와 영혼이 통하는 학생들을 초대하잖아요. 그 버려진 연습실은 세상의 도피처 같은 공간이었고요. 연습실 창을 통해 숲이 보이는데요. 숲의 열기가 그대로 들어와요. 상징적으로 볼 때 그런 숲과 같이 세상이 버린 곳,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곳에 마리 선생이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죠. 세상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 허용하지 않는 것에서 진정한 나 자신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마리 선생이 제인과 맥스를 그곳으로 초대한 거예요. 제가 좋은 소설가가 된다면 마리 선생과 같은 소설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어요. 그러려면 제가 도전을 많이 해야겠죠.

 

 

불온


네이버 사전 연재 댓글에 ‘세밀한 묘사’에 대한 감상이 많더라고요. 어떤 부분을 쓰실 때 특히 힘드셨어요?


버려진 연습실에서의 세 사람의 접촉이 농밀하게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손도 잡게 되고, 가닿을 수 없는 마음이 들수록 더 많이 스킨십을 하게 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끌림이 있잖아요. 그런 절박한 간절함, 떨림을 세 사람의 밀회 장면에서 만큼은 받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손에 피부가 스치는 것 같은 통렬한 자극 같은 거요. 그 부분을 묘사할 때 촘촘하게 한 사람을 만지는 기분을 그리고 싶었고, 앞으로 한 번 더 도전(웃음)해보고 싶다, 생각했어요.


쓰면서 뒤라스의 『연인』이 많이 떠올랐어요. 나이와 인종의 경계를 넘잖아요. 스킨십을 통해서 말이에요. 그 소설을 16살에 읽었는데요. 어린 나이에 굉장한 떨림을 느꼈어요. 제게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미지로까지 각인이 된 것 같아요. 정신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생명의 원리 같기도 하고요. 그걸 억제하지 않고 분출해보고 싶었어요.

 

제목에 들어간 ‘불온’이라는 말이 꽤 역설적으로 들려요.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데 작가님은 이것을 긍정하고 계신 거잖아요.


강하게 긍정하고 있어요.(웃음) 두 번째 소설에서 향후 제 작업의 화두를 과감하게 던지지 않았나 생각하는데요. 사실 저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요. 모험가적 기질이 강해요. 도전해보고 싶은 게 많고요. 아까 얘기한 이름이 55개인 스파이처럼, 소설을 낼 때마다 독자 분들이 ‘내가 읽었던 작가 맞아?’라고 하실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제 삶도 그렇고요. 계속해서 끊임없이 변하고 싶어요. 그래야 살아있단 생각이 들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독자 댓글도 있으세요?


질문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꼭 말씀드리고 싶은 분들이 계시거든요.  『위안의 서』 때부터 리뷰를 올려주신 독자 분들이 계세요. 사실 답장을 다 드리고 싶은 마음인데요. 행사 때나 언젠가 뵙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 못 뵀거든요. 그분들께서 이번에도 리뷰를 올려주셨더라고요. 첫 번째 작품 『위안의 서』 에 비해 뭐가 좋고, 뭐가 아쉬운지 다 적어주셨는데요. 되게 감사하더라고요.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뵙겠다고, 이 기회에 인사드리고 싶어요. 어디 계시는지 모르니까요. 특히 기억나는 리뷰가 있었는데요. 아이가 다쳤대요. 정신없는 중에 제 책을 읽었는데 많이 우셨다고 하셨어요. 왜 눈물이 흐르셨을지 공감이 갔어요. 한 사람의 여성으로 자기 자신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정말 벅찼어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고요. 응원하고 싶어요.

 

창작자에게 리뷰가 정말 큰 힘이 된다는 말씀을 많이들 하시더라고요.


그렇죠, 이번 작품은 독자 100분께 가제본을 보내드리고 미리 서평을 받기도 했어요. 네이버에서 사전 연재도 했었고요. 그 리뷰들 모두 정말 꼼꼼하게 보고 있다고(웃음) 말씀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보고 있고, 여러 번 읽고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제대로 소통하고, 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항상 불안하고요.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불안하고 위태로운 여자. 그리고 그녀 주변의 불완전하고 부도덕한 여자들.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그녀들의 욕망과 방황을 사랑한다”는 조남주 작가님의 추천사를 받아보고 어떠셨어요?


정말 좋았어요. 감사했어요.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저보다 먼저 수상하신 선배님이기도 하셔서 작년에 논산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할 때 뵌 적이 있어요. 그때 주로 어떤 독서를 하시는지 여쭸더니 실제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기록들, 르포를 문학 작품 못지않게 찾아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소설을 쓸 때는 문 닫고 들어가게 되지만 주의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그 밀실에서 영원히 못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요. 저는 제 작품이 아름다워지는 것만을 바라지 않고, 분명히 이 세상에 쓰임새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 목소리를 껴안지 않는 아름다움은 공허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려면 세상에 대한 시선을 탄탄하게 가꿔야 할 텐데 그런 것들을 먼저 하고 계신 선배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추천사를 받았다는 게 의미가 크죠. 그 말을 그대로 믿기보다 앞으로 이런 글을 써줬으면 좋겠다, 로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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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가로서, 관심 두고 있는 것은 뭔가요?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우리가 경계 지은 자연의 원초성, 그건 원래 우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어야 한다, 동물과는 달라야 하고 이성적인 존재다, 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수없이 내리면서 원초성, 자연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 같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회복을 향해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요. 나의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둔, 억압되어 있는 것을 깨어나게 하는 작업이 될 것 같고요. 그것을 통해 저와 동시대를 호흡하는 분들이 제 책을 읽는 과정에서 떨림과 해방감을 다시 떠올리실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요. 포장하지 않고 제 안에 있는 날것 그대로를 꺼내서 보여드리는 작업을 계속 하고 싶어요. 점점 솔직한 작가이자 사람이 되고 싶죠.

 

그렇다면 개인의 깊은 내면을 해방하는 작업과 앞서 말한 사회와의 호흡을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 가실지, 조금 더 묻고 싶거든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설에서는 좀 더 감각적인, 개인의 욕망과 같은 것들에 집중했다면 세 번째 소설부터는 좀 더 세계에 대한 묘사가 풍부해질 거예요. 지금 세 번째 소설을 90% 정도 완성한 상태인데요. 여기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그려질 거예요. 쓰면서 실제로 용기 내서 많이 만나러 다니기도 했는데요. 살짝 말씀드리면 역시 해방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이야기예요.

 

작가님이 좋아하는 소설가가 궁금해요.


한강 작가님 존경해요. 학창 시절부터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왔어요. 「내 여자의 열매」 「아기 부처」 같은 단편, 중편들은 아직도 제게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어요. 인간의 심연과 본질을 꿰뚫는 섬세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읽다보면 리듬감 있게 번지는 문장도 좋고요. 황정은 작가님도 빼놓을 수 없어요. 장편 『백의 그림자』도 아름다웠고요 「양의 미래」라는 단편도 좋았어요. 황정은 작가님은 맛깔스럽게 읽히는데 깊이 있는 생각까지 이끌어 내게 하신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소설 쓸 때는 일부러 책상에서 치우는 작가님 중 한 분이죠.(웃음) 압도되기 때문에요.

 

만약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으세요?


제가 일하는 곳 맞은편에 약사선생님이 여름휴가를 떠나셨는데, 알고 보니 해마다 보름씩 해외 봉사를 다녀오시더라고요. 일 마치면 작업실에 앉아 소설만 구상하고 있는 제 자신이 때로 무력하게 느껴져요. 장편소설은 날마다 조금씩 쓰지 않으면 원하는 이야기에 다가가기가 어려운거 같아요. 그것 때문에 한자리에 붙들려 있어요. 만일 소설을 쓰지 않는다면 정말 먼 나라로 원정 다닐 수 있는 직업을 택했을 것 같아요.

 

언젠가 꼭 써보고 싶은 소설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이름이 여러 개인 한 남자의 이야기에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여성과 자신의 이름이 없는 여성이 나와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해방되어 가닿는 세계를 묘사할 건데요. 그 세계에 대한 상상을 지금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그들이 떠나고 싶고, 떠나야만 하는 이 세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돼요. 우리가 발붙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세상을 그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하고요.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신비하고 아늑한 이미지가 될 것 같아요.

 


 

 

불온한 숨박영 저 | 은행나무
감추고 싶고 벗어나고 싶었던 오래전 숲에서의 비밀스러운 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거짓말, 오해, 그리고 죽음, 함께 나눠 갖게 된 고통의 기억들이 서사를 끌어간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임승수 “마르크스, 한 번 접하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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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칼 마르크스의 탄생 200주년이다. 중국은 마르크스 동상을 만들고, 독일에서는 액면 0유로 기념 지폐를 판매할 동안 ‘생계형 마르크스주의자’ 임승수 저자는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을 썼다. 2008년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시작으로 마르크스의 철학을 경쾌하게 녹인 실력이 세 번째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와 실패의 목소리가 전세계를 뒤덮으면서 다시금 마르크스주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청년 시절 공산주의를 홍보하려고 썼던 정치 팸플릿 ‘공산당 선언’의 몇몇 구절은 유명하지만, 사상을 압축해 짧은 글에 녹인 만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직도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법이고 꺼름칙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쩐지 어려워서 손쉽게 도전하지 못한다면, 기립, 아니 구매하시오. 이것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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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경제, 철학, 정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에 이어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이 나왔어요. ‘원숭이도 이해하는~’ 3부작 마르크스 이론 입문서예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낼 때까지만 해도 시리즈로 낼 거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워낙 『자본론』이 유명하지만 어렵다 보니까 대중해설서를 쓰면 의미도 있고 판매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죠. 제 예상과 출판사 예상보다 훨씬 많은 반응이 오더라고요. ‘원숭이도 이해하는~’이라는 표제가 주는 충격도 있고요. 그래서 출판사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리즈로 가보자는 제안을 했어요. 저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2010년에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을 쓰고 이 정도면 구색이 갖춰졌다고 생각했었어요.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의 어떤 면을 다루고자 했나요?


2018년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잖아요. 굉장한 마케팅 포인트 아닙니까. (웃음) 앞의 두 책이 두꺼운 분량의 어려운 내용을 쉽게 압축해서 다이제스트로 썼다면, 공산당 선언은 원문 자체가 얇거든요. 하지만 공산당 선언도 쉽지 않은 텍스트라고 느꼈어요. 20대 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40대 때 다시 공산당 선언을 읽으니까 엄청 좋은 글이었더라고요. 지금 제가 읽으면서 느꼈던 지적인 희열을 20대 독자들, 대학 초년생, 고등학생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게 하자는 게 콘셉트였어요.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의 현실 정치였으니, 경제와 철학, 정치, 어떻게 보면 운동의 삼위일체가 모인 거죠.


지금 세대에게는 공산당 선언이 생소한 텍스트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2013년부터 경희대학교에서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강의에서 다루는 게 마르크스 사상이에요.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듣겠나 싶은데 처음 30명 정원으로 시작했던 강의가 지금은 120명이에요. 70% 정도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와요. 왜 이런 걸 학교에서 안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게 설득력 있다고 말해요. 물론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을 접한 것 자체는 좋았다고 하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마르크스의 사상이 시의성이 결여된 게 아니라 접촉면이 없다고 느꼈어요. 접할 일이 없어서 편견이 있다가도 일단 접하면 달라지는 거죠. 기존 동유럽 사회주의가 망했다고 해서 모든 마르크스의 사상이 한꺼번에 버려지게 됐는데, 목욕물 버리다가 애까지 버리는 과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상당한 두께로 책이 나왔어요. 책을 쓰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서너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책을 쓰는 건 빨리 쓰는 편이에요. 미문을 쓰려고 노력하거나 문학적으로 공을 들여 쓰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목표와 구상이 잡히면 오래 걸리지 않아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회전율이 좋은 저자죠.


공대생이었다는 설명이 늘 저자 소개에 붙어 있어요.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었다는 장단점이 있을 것 같아요.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목표가 명확해요. 저도 대학생 때 마르크스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아 이렇게 인생이 뒤집어졌는데, 많은 사람이 이걸 읽으면 더욱 세상이 좋아지겠구나 싶은 거죠. 쉽게 마르크스를 만나는 기존의 해설서도 있었지만, 제가 대학생 때 고생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으니 떠먹여 주는 수준의 해설서를 쓰고 싶었어요. 제 정체성은 작가이면서 저술활동가예요. 책을 통해 운동하는 게 제 목적이에요. 사람들이 마르크스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서 의식이 바뀌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목적 자체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학자들처럼 논문을 쓰는 건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아요. 대중들이 학문에 접근하는 소통 경로가 거의 없으니 제가 그 사이에서 역할을 하자는 거죠.


떠먹여 주는 수준이라고 하셨는데, 쉽게 쓰는 게 더 어렵잖아요.


어렵게 쓰려고 해도 어렵게 안 나오더라고요. 도식화하고 요약하는 게 제 장점인 것 같아요. 마르크스의 원문 자체가 화려하고 문학적인데, 제 사고체계 자체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단순한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을 최적화해서 장점을 활용하는 기획을 잡다 보니 그게 잘 부각되는 거죠.


왼쪽에 공산당 선언의 원문을, 오른쪽은 해설을 실었어요.


원문만 쭉 나오고 맨 뒤에 해설이 나오는 것도, 일부만 떼서 뒤에 해설이 나오는 것도 애매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왼쪽을 원문으로 흘리고 오른쪽을 해설로 흘렸어요. 왼쪽을 읽다 모르는 걸 오른쪽에서 볼 수 있도록 편집을 잡으면 의도하는 바를 제일 잘 구현하는 꼴이라고 생각을 해서 출판사에 먼저 제안했었어요. 출판사도 동의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번 책이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까요?


아직은 계획이 없어요. 경제, 철학, 정치 했으면 기초 교재로 다룰 수 있는 건 다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모르죠, 210주년 되면 또 마케팅 차원에서 고민할 수 있을 지도요.

 

 

현실 정치의 벽


지금 적용 가능한 이야기가 있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싸우는 문제에 대해 공산당 선언은 어떻게 보는가, 같은 이야기들이요.


원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 운동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140쪽)라고 써 있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몰라요. 현재적 의미로 이걸 다루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문제가 떠오르죠. 갈수록 이 문제가 첨예해지니까요. 독자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고, 현재적 의미를 통해야 공산당 선언의 원문을 잘 설명할 거라 생각했어요.


공산당 선언이 쓰일 당시에도 이런 공격이 있었겠죠?


공산당 선언 자체가 공산주의자 동맹을 홍보하는 내용이어서 굉장히 현실 참여적이에요. 당시 독일의 참된 사회주의나 차티스트 운동의 입장을 비판하기도 하고요. 그 밖에도 공산주의는 문란하다든가, 가족을 버리고 애들을 뺏어간다는 내용이 담긴 걸 보면 당시에도 공산주의를 둘러싼 논쟁적인 부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190쪽)는 말은 다시금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라는 슬로건으로 재조명되고 있어요.


원문은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없앤다는 비난에 대처하는 수사적인 측면이 강해요.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죠. 국가가 계급 간의 착취와 억압을 강제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권력을 잡아나가는 긴 국면에서 국가는 사멸할 거라는 게 긴 호흡으로는 맞지만, 또 현실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자체는 여전히 국가적이라고 나와 있기도 했어요. 국가라는 단위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과도적인 특성도 놓치지 않는 거죠. 그래서 공산당이 어떤 차원에서는 국내 정치활동도 하지만 국경을 넘어 국제 회합도 하잖아요. 이 두 가지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죠.


민주노동당 활동을 한 전적이 있어요. 군소 정당이 눈에 안 보이는 상황에서 실제 현실 정치를 하면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대중정당에서는 선거 시기에 다른 모든 활동이 모두 멈추게 돼요. 여기서 많은 장벽을 느꼈어요. 선거 활동이 명함 나눠주고 공보물 만들어서 뿌리는 일인데, 내용이야 다르겠지만 문득 보니 자유한국당도, 다른 정당의 활동과도 크게 차이가 없는 거예요. 선거 일정에 당 활동이 맞춰지다 보니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힘을 못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사람의 의식이 바뀌어야 결국 행동도 바뀌고 실천한다고 생각하는데, 예전 80년대 운동권들이 동아리 등에서 학습한 힘으로 세상을 바꿔온 거잖아요. 최근에는 그런 학습 분위기라든지 세계관과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분위기가 많이 없어요. 그런 분위기를 복원해야지 운동도 좀더 튼튼하고 힘있고 뿌리를 깊이 박아서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역사가 발전된 가능성이나 맥락 없이 몰역사적으로 생각하는 현실을 우려한다고 쓰신 적이 있어요.


재벌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내용의 강의를 하고 있어요. 제가 놀랐던 건 재벌이 탄생하는 과정, 즉 일본이 소유하던 기업이나 토지가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 시절에 민간 매각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더러운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면 학생들이 깜짝 놀라요. 재벌이 애당초부터 정경유착에 의해 탄생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성공해왔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도 편법과 탈법 같은 이상한 짓을 하더라도 성공하면 된다는 잘못된 습성이 남아 있잖아요.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의 현재 모습만이 아니라 왜 그것이 지금과 같은 문제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성을 함께 고려해야지만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도 모든 것은 변화 발전한다는 거잖아요. 변화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봐야지만 어떤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처럼 사회의 문제도 문제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봐야지만 해결책도 잘 내올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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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워라밸’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외에도 여러 저작이 있어요. ‘어떻게 글을 쓰는가’도 관심사 중 하나인가요?


글쓰기를 선망하거나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없어요.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저자가 있어도 저는 ‘너 글 잘 쓰냐? 나는 미분방정식 잘 푼다’ 이런 생각인 거죠. 오히려 글쓰기에 욕심이 없는 게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제 목적은 지식을 좀 더 쉽게 전달하는 거예요. 목표를 달성하면 미문이 아니어도 되는 거죠. 항상 과외나 학원 없이 혼자 공부하는 스타일이어서 뭔가 정리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요.

 

저술 활동의 장점이 있다면요.


제가 외모는 20대지만 40대 중반이잖아요. 이런 이야기 꼭 써주셔야 해요. (웃음) 93년에 대학교 들어가서 학력고사 끝물이었는데, 제 뒤에 이런 활동 하는 친구들이 거의 안 보여요. 돈이 되는 분야는 아니기 때문에 강력히 권할 순 없지만 먹고 살 수는 있어요. 블루 오션이라 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은근 생계가 해결 돼요. 큰 욕심 없다면 적절하게 생계를 해결하면서 얼마나 좋습니까.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혁명을 계속 이어나가야죠.


강연도 자주 다니시는데, 주로 어떤 내용을 강의하나요?


‘자기소개서 쓰기’도 가르쳐요. 저 자기소개서 강연 잘해요. (웃음) 돈 되는 건 다 하고, 그래서 생계를 유지해요. 마르크스가 사실 제 생계를 그렇게 잘 해결해주지는 못하거든요. 이 활동을 계속 생명력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요.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수익의 다변화라고 볼 수 있겠죠. 나중에 와인으로 자격증도 따보려고요. 돈이 없으니 와인을 많이는 못 마셔요. 경험을 많이 해봐야 할 텐데. 유명한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도 40대 때 와인 처음마시고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가 되었대요. 제가 안 되면 제 애들을 평론가로 키워서 공짜 와인을 받아서 마시겠다는 큰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에서 인생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인간은 동물이에요. 동물로서 가지게 되는 욕망이 있잖아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부정하는 활동은 오래가기 어려운 것 같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미루기만 하고 의무감으로만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상황이 오거나, 병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저는 많이 못 벌지만 한도 내에서는 술을 마시고 싶으면 술을 마시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카드 할부를 돌려서 가고 싶어요. 저는 운동권 책 쓰는 도구가 아니에요. 저도 저의 삶이 있고, 그 삶을 영위하면서 활동을 하고 그게 잘 어우러져야지만 오래 할 수 있는데 모든 걸 도덕주의와 헌신성으로 접근하면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가능한 선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할지 생각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운동의 ‘워라밸’이 되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피아노와 와인을 즐기시는 거죠?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 어울리는 것들이에요. 와인을 마시고 피아노를 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니요.


솔직히 와인은 마신지 얼마 안 됐어요. 2015년에 마트에서 한 병 사서 마셨는데 문화충격을 받은 거예요. 영혼이 뒤흔들릴 정도로 맛있었어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비슷했어요. (웃음) 이건 취미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봐야 해요. 저는 와인 마실 때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마시지 않아요. 아내랑 단둘이 와인을 두 시간 전부터 열어 놓고 길게 맛을 음미하면서 마셔요. 사랑하니까요. 음악도 그 정도 수준의 의미가 있던 시절이 있었어요. 하나만 제 인생을 뒤흔든 게 아니잖아요. 음악이 흔들었고, 마르크스가 흔들었고, 이번에는 와인이 제 삶을 흔든 거죠. 삶을 즐기자는 의미보다는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 것 같아요.


‘나의 DNA는 작가보다는 영업맨’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작가에게 주는 홍보 팁이 있다면요.


중요한 건 마음가짐인 것 같아요. 자기가 정말 팔아야겠다는 절실한 고민이 생기면 구체적인 방법은 어떻게든 알아내게 되어 있어요. 많은 저자가 자기 일은 책을 쓰는 것에서 끝난다고 생각하시는데, 그 책이 안 나가서 손해인 건 자기 자신이에요. 책에 담은 내용을 한 사람이라도 더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책을 낸 거잖아요? 그게 인세가 되어서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도 있지만, 그 전에 모든 작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쓰는 거예요. 매일 임승수를 검색하는 이유가 제가 관심종자여서가 아니라 누가 내 책을 읽고 무슨 이야기를 썼을까 너무 궁금해서 검색하는 거거든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팔아야 해요. 저자분들이 책 쓰는 걸 고상하게 생각하고 무게를 잡는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멸치, 옷, 물건 팔아서 돈 벌고 저는 글 팔아서 돈 버는 거예요. 뭐 대단한 거겠어요. 허례허식을 벗어버리시고 열심히 파세요.


마지막으로 책을 홍보해 주세요.


온 국민의 필독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세 살짜리에게 사주셔도 됩니다. 10년 후에 읽을 수 있어요. 10년 뒤에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더 오릅니다. 지금 사두시고 10년 후에 읽히시면 됩니다. (웃음)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임승수 저/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원저/정재윤 역 | 시대의창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인류 역사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그 너머에 대한 지식과 통찰이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상상하는 데에 여전히 많은 영감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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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숙 “『토지』는 수많은 길로 이끄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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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친구 맺지 말라는 말이 있다. 삼국지연의가 재밌긴 한데, 그저 남자들끼리 싸우고 죽이는 이야기를 읽어야 친구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 우정 쌓기가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하나의 작품만 꼽는데 굳이 중국 고전을 택해야 하는 이유도 없을 듯하다. 필자는 차라리 『토지』 세 번 읽은 사람과는 친구 맺고 싶다, 이 정도로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을 읽으며 떠올린 감상평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이자 한국토지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인 김연숙 저자가 쓴 이 책은 『토지』 에 관한 글이다. 2012~2017년까지 경희대에서 이루어진 『토지』  읽기 강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고 박경리 선생이 쓴 대하소설 『토지』는 연재 기간 26년, 원고지 4만 장 분량, 등장인물 600여 명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대하 소설이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을 젊은 세대가 접근하고 싶어도 숫자에 압도된다. 그럼에도 김연숙 교수의 토지 강의는 호평을 받으며 『토지』라는 작품으로 많은 학생을 안내했다.

 

『토지』 의 매력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한반도라는 시공간적 배경, 극적인 사건 그리고 수많은 개성 있는 인물이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은 특히 인물에 주목한다. 인간, 계급, 가족, 돈, 사랑, 욕망, 부끄러움, 이유, 국가라는 9가지 주제를 정하고 『토지』  속 인물로 해당 주제에 관해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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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강의가 호평을 받기까지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에서 『토지』를 연상하는 독자가 많지는 않을 듯해요. 이렇게 제목을 붙인 사연이 궁금합니다.

 

출판사 ‘천년의상상’에서 지어줬는데요. (웃음) 처음에는 이 제목이 싫었어요. 세상에 쓸모 없는 게 어딨으며, 그 쓸모를 누가 정하나 싶어서요. 그러다 이반 일리치가 쓴 『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 라는 책이 떠올랐어요. 인간을 학교나 병원에 의존하게 만드는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책입니다. 사회나 시스템이 발달하는 게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결국 나의 쓸모는 내가 만들어야 하고 『토지』  등장 인물들이 그랬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괜찮은 책 제목을 선물 받았구나, 감사하게 받았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다른 텍스트가 아니라 『토지』를 강의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작품을 제가 정해야 했다면, 안 했을 거예요. 소설의 이해, 문학 사상사와 같은 건 입문 강의로 할 수 있겠죠. 어떤 텍스트를 딱 하나만 정해서 한 학기 동안 읽자? 더구나 『토지』처럼 큰 작품을? 부담되죠. 그런데 후마니타스 칼리지 ‘고전읽기’ 강의 중 하나로 『토지』가 개설되었고, 그걸 제게 맡겨서 ‘직장인’의 마음가짐으로 했습니다. (웃음) 교양 강의다 보니 다양한 학과 학생들이 들어와요. 이들 학생을 대상으로 국문과 수업처럼 할 순 없고요. 수업은 단순합니다. 무조건 읽어요.

 

『토지』  분량이 깁니다. 한 학기에 다 읽나요?

 

다 못 읽죠. 첫 학기에는 의욕에 불탔어요. 학생들도 많지 않아서, 매주 한 권씩 읽어나갔어요. 그때 15권을 읽혔는데, 대학은 한 학기가 16주 강의입니다. 중간고사 기간 지날 때 10명이 나가고, 마지막에는 11명 정도만 남았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미안하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권수를 줄여서 보통 한 학기에 8~10권 정도 읽었어요. 경희대에는 ‘독립 연구’라는 특이한 학점제가 있습니다.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연구하고 싶은 주제와 지도교수를 정하는 세미나형 대학수업입니다. ‘고전읽기’로 『토지』를 읽은 학생 중에서 5~6명이 독립 연구 신청을 했어요. 이런 학생들과는 20권 완독까지 하죠. 두 번 정도 했네요.
 
강의 평점 최고점을 기록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워낙 살벌하게 강의 평가를 해서, 1등부터 꼴등까지 강의평가 순위를 매기는 학교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경희대는 그렇게까지 안 해요. 사실 어떤 강의가 최고, 최저는 없어요. 제 수업이 비교적 좋은 점수를 얻었고, 호응이 좋았다 정도인데요. 『토지』  덕분이죠. 첫 권 읽을 때는 힘들어하는데, 다음부터는 학생들이 책을 잡고 읽으면서 스스로 얻어요. 저는 옆에서 한두 마디 건네주는 역할이죠. 이러니 만족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죠.

 

학점은 제가 원래 하는 교양 강의보다는 비교적 잘 주는 편이긴 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과제가 엄청나게 많거든요. 매주 읽고 독후감을 내야 해요. 분량은 정해주지 않지만, 말이 쉽지 어떤 형식, 어떤 분량이든 매주 뭘 써야 하면 괴롭습니다. 그래도 책을 읽고 자기소감을 쓰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교감을 많이 하는 거 같았어요. 인상 깊은 사연 중 하나를 소개해드릴게요. 회기동 캠퍼스에서 교양 강의동이 정문 바로 옆에 있고, 정경대나 한의대나 의대는 굉장히 높은 언덕을 지나서 안쪽에 있어요. 한 학생은 매주 언덕길을 내려와서 토지 들으러 오는 길이, 일요일날 교회 가는 느낌이래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 받아서요. 『토지』의 힘이죠.

 

『토지』 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강의가 이루어진 2012~2017년 동안 한국 사회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 기간 학생들의 반응 중에 특이할 만한 게 있었나요.

 

제 강의에서는 독후감보다는 읽기 메모라고 표현하는데요. 읽기 메모 중에서 책에는 쓰지 않았는데, 이런 대목이 있어요. 평사리 농민과 자기들을 비교하면서, 너네는 소작농이고 하인이고, 우리도 21세기 소작농이라고. 매여서 마음대로 못 사는 삶인데, 잠시나마 자유를 느끼는 시기가 대학이지만 이 시간조차 소작농이 땅 가진 지주 눈치 보듯, 학생들은 자신을 뽑아줄 회사 눈치, 점수 줄 교수 눈치, 오만 눈치 다 보는 소작농이라고 일필휘지로 쓴 학생이 있었어요.

 

 

수많은 길을 품고 있는 『토지』 의 매력

 

책이 9가지 주제이고, 끝은 국가예요. 이런 배치는 어떤 기준으로 배열했을까요?

 

글쎄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웃음) 책에서 다룬 ‘돈, 사랑, 일’ 이런 게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이고 서로 얽혀 있어요. 자기로부터 외부 관계로까지 이어나가게 확장하는 구성을 무의식 중에 생각해서인지, 국가가 아마도 가장 마지막에 나오게 된 게 아닐까 합니다. 하나 못 다룬 게 있긴 해요. ‘환대’라는 걸 다루고 싶었는데, 못 넣었어요.

 

가장 안 써진 장, 쓰면서 특히 더 신났던 장이 있나요?

 

가장 안 써진다기보다는 힘들었던 건 1장이었어요. 『토지』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어떻게 어디까지를 써야 할까… 신나거나 가장 잘 써진 장이 특별히 있지는 않았고요. 인물이나 장면에 부분 부분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다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음 아픈 장은, 최근 제 관심이기도 한데 7장 ‘부끄러움’이에요. 요즘 현실 상황도 그렇고, 나는 어떤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까에 관해 토지 인물로 더 많이 이야기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짠해요.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삶, 그 이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문제입니다. 염치를 차려야, 부끄러움을 알아야 그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06쪽)

 

『나, 참 쓸모 있는 인간』 에서 많은 인물을 다루셨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제가 만든 인물이 아니어서 못 고르겠어요. (웃음) 자기 전에는 두만아비가 가슴에 와 닿고, 아침에 세수하다 보면 윤보, 밥 먹고 나면 월선이가….. 이렇게 그때 그때 다른 인물이 치고 나오는 것 같아요.

 

『토지』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하는 책일지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한 말은 아니고, 기존에 『토지』 를 연구한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인데요. 『토지』는 하늘의 별자리죠. 별이 여기 저기 빛나고 있는데, 별자리를 연결하면 새로운 모습이 나오잖아요. 『토지』는 수많은 이야기, 수많은 장면, 수많은 길로 이끄는 책입니다. 수많은 길을 품고 있는 게 가장 큰 매력이지 않을까 해요. 저도 읽을 때마다 이런 구절이 있었구나, 이런 장면이 있었구나, 놀랄 때가 많거든요.

 

『나, 참 쓸모 있는 인간』『토지』를 읽은 독자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지 않을까, 합니다. 아, 나도 이랬어, 하면서 읽으실 거 같아요. 이 책에는 가능하면 학생들의 말을 많이 넣으려 했는데요. 그렇게 한 이유가, 다른 사람은 이렇게 읽었구나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아직 『토지』를 안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계기로 『토지』를 읽고 싶다는 느낌이 들면 정말 바랄 게 없겠어요. 책을 내고 어쩔 줄 모르는 제 마음이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합니다.

 

원고를 넘기고 책이 나오면 보통은 홀가분해 하는데, 선생님은 반대이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제가 쓴 첫 번째 책도 아니거든요. 첫 책은 일종의 학술서, 논문집인데 1920~1930년대 신여성에 관해 쓴 논문을 모은 거예요. 처음 공부했을 때 제게 중요했던 주제가 페미니즘이었고, 이후에 학교 밖 연구 공동체에서 공부할 때도 그랬고 페미니즘, 여성, 신여성에 관심이 많았어요. 책을 막 끝냈을 때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가 고공 크레인에서 내려왔을 때였는데요. 머리말에 1930년대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갔던 ‘체공녀’ 강주룡, 그리고 지금의 ‘소금꽃’ 김진숙이야말로 신여성이라 생각한다고 썼죠. 새로운 길을 가는 삶을 저도 가고 싶었고, 공부했던 흔적을 모아서 냈다는 작은 성과라 생각하며 나름의 뿌듯함이 있었거든요. 물론 잘 팔린 책은 아니었지만요.

 

그런데 이번 책은 내고 나서 계속 무섭고, 부담스러워요. 제가 왜 이렇게 힘들어하고 당황하는 걸까 생각해봤는데요. 이 책은 『토지』 에게 기대고 빚졌어요. 『토지』는 엄청난 작품이고 수많은 사람이 느낀, 수많은 결이 있을 텐데, 제가, 우리 학생이 이렇게 읽었다 하면 잘못하는 건 아닐까, 누를 끼치는 게 아닐까, 폐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있어요. 이 무게를 못 견디고 있나 봐요.

 

외국 고전에 관한 안내서는 많았는데, 우리 고전에 관한 안내서가 그간 없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했어요.

 

외국 문학하는 분들이 가끔 한국 문학을 경시하는 부분이 있어요. 저도 20대 때 그랬지만, 『토지』 도 얕게 봐요. 한국 현대문학이 주로 영문학 토대이고 학문 체계가 다 서양에서 들어온 부분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점이 있긴 해요. 외국 문학에서는 엄청난 내면의 깊이, 철학적 사색이 있는데 우리는 너무 얕다는 거죠. 저도 어떨 때는 텍스트를 보면 그런 거 같기도 하거든요.

 

이 책을 쓰면서 생각을 했는데, 확실하게 항변할 말이 생겼어요. 살아온 삶이 다르잖아요. 제국에  억눌리지 않고 인간 자체로서 자신의 서사를, 심지어 제국의 서사로 중심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우리는 다르지요. 조선 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근대화를 하려다 금방 식민지 되고 식민지 36년을 겪었어요. 해방됐다 하더니 전쟁이 뻥, 그리고 분단, 지금까지 종전 선언 못하고 있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처럼 큰 나라에 둘러싸였는데 우리는 그마저 중간에 선을 쫙 그은 분단국가이지요. 이 정도면 안 망하고 살아있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외국문학 특히 서양문학이 내면 성찰, 철학적 깊이가 엄청 대단한 건 맞지만 그건 그쪽 사람들이고 저희는 여기 태어났잖아요. 특별하게 뭔가가 뭔가에 비해 대단하고 모자라는 건 아니다, 이제는 다르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요. 『토지』  시대 상황이 워낙 살벌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살인, 출생의 비밀 등 극적인 사건이 많아요. 저는 이 작품이 참 센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던 듯합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굉장히 센 사건을 슬그머니 넘어가요. 출생의 비밀, 살인, 이렇게만 적고 보면 정말 막장 오브 막장이겠지만, 소설에서는 장면으로 안 드러납니다. 어쩌면 우리 삶도 그럴 거 같아요. 엉망진창인 게 많은데, 슬며시 넘어가잖아요. 살아가는 사람은 늘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제가 강의할 때 이야기해주는 것 중 하나가 “고전은 세다.”라고 하는 거예요. 『오이디푸스 왕』을 봐요. 출생의 비밀에다가, 근친상간 심지어 어머니와 결혼해서 자식을 한 명만 낳나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자기 아내가 자신의 생모라는 게 밝혀졌어요, 『오이디푸스 왕』 은 이 엄청난 지경에서,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갈 건지 우리에게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드라마와 고전의 차이는 여기에 있을지도 몰라요. 드라마는 밝혀질 때까지 끌고 가다가 빵 터지는 게 중요하다면, 고전은 그 다음이 중요하죠. 『토지』도 딱 여기에 충실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또 제 감상평입니다. 저는 『토지』  에서 서희가 어머니가 되고 나서는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유시민 작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토지』는 1, 2부만 읽으면 된다고요. 『토지』가 우리 말의 보고(寶庫)이면서 정말 재밌지만 1, 2부만 읽으면 충분하다고 했다고 해요. 제가 박경리 선생님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1930~1940년대를 다루면서 어떻게 재밌게 쓸 수 있을까요? 그 시대 사람들은 정말 숨만 살고 살기도 힘들었어요. 실제로 문학사에서 절필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작가도 많아요. 너무 답답한 상황이죠. 그런데 끝까지 완독한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4~5부에 등장하는 20대 청년 이야기 이런 부분에 많이 공감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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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관심사는 1950~1960년 사회문화사

 

어쩌다 학문의 길로 접어드셨나요.

 

‘천년의 상상’과 인터뷰하면서 제목으로 뽑힌 단어가 ‘어중간이’였는데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들어선 거 같아요. 제가 87학번인데 어쩌다 보니 87학번 동기들이 대학원에 많이 갔어요. 왜 이렇게 대학원을 많이 갔나, 저희끼리는 우스개소리로 공부를 못해봐서라고도 이야기하는데요. 저희는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강의실에 들어간 적이 없거든요. 1987년에는 6월 항쟁이 있었고, 1988년에는 노동항쟁이 있었죠. 그 뒤로 조금 명민하고 똑똑한 친구는 일찌감치 사회로 갔고, 저같이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학원에 남았어요. 대학원에 간 친구중에서는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을 수 있어요. 청운의 꿈을 품고 학자, 학문의 도야를 위해 남은 분이 있을 수 있는데, 저의 경우는 사회로 나가지 못해서 남았어요. (웃음)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서는 욕망에 관해 다뤄주셨잖아요. 선생님의 지금 욕망은?

 

지금 인터뷰를 빨리 끝내고 싶습니다. (웃음) 박경리 선생님이 쓴 텍스트, 대담 등에서 자료를 모아 박경리 선생님의 어록을 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지금 연구자로서 관심사는 1950~1960년대 사회문화사에요. 그 시기 대중잡지를 보고 있는데요. 해방 이후, 개인들이 어떤 사람으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관한 사회문화 담론을 주목하고 있는데요. 암울한 건, 60년 전 잡지인데 연도가 안 느껴져요. 지금과 똑같은 문제, 똑같은 편집자 코멘트, 똑같은 사건이 있다는 의미에요. 역사는 도대체 뭘까, 암울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 참 쓸모 있는 인간김연숙 저 | 천년의상상
‘일, 돈, 배우자’일 것이다. 그는 이런 고민을 인간, 계급, 가족, 돈, 사랑, 욕망, 부끄러움, 이유, 국가라는 9개의 낱말로 소설을 해석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독자들이 『토지』를 생생히 체험하게 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공지영 “우리가 앞으로 싸워야 할 악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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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디까지나 극의 재미를 위해 꾸며진 이야기라고. 소설의 제1부, 그중에서도 맨 첫 번째 장을 읽은 순간부터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바람은 가차 없이 빗나갔다. 공지영 작가는 5년여의 취재 끝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신작  『해리』를 펴냈다.


소설의 주인공 ‘한이나’는 암 투병 중인 엄마와 함께 지내기 위해 고향 무진에 내려갔다가 한 사건을 맞닥뜨린다. 이를 시작으로 그녀는 사건을 둘러싼 고교 동창생 ‘이해리’와 천주교 신부 ‘백진우’를 추적하며 우리가 신성하고 선하다고 여겼던 것들의 추악한 어둠을 발견한다. 파헤치려 할수록 세상은 자욱한 안개가 낀 듯 답답하고, 궁지에 몰린 악인들은 점점 더 추악해지는데,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악을, 법의 테두리를 교묘히 비껴가는 악을 응징할 근거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까.


책을 읽고, 인터뷰를 마친 지금까지도 이 소설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종교의 흉악한 이면을 이야기하던 공지영 작가의 격양된 목소리, 대구 희망원 사건의 피해자를 언급할 때 순식간에 두 눈을 차오르던 눈물이 대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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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내다보고 쓴 것 같은 이야기


불매운동, 평점 테러 등으로 소음이 많았지만, 출간 이틀 만에 초판 6만 부가 매진되었을 만큼 반응이 좋아요. 응원받은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정말 그런 느낌 받았어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심적으로도 힘들었던 게 사실이고요. 그래도 많은 사람이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권으로 구성돼 있어 각오를 하고 책을 펼쳤는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어요.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웃음)


고마워요. 제가 바라던 감상이에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해주셨어요. 그런데 앞으로 『해리』를 보실 독자분들은 제발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다들 너무 빨리 읽으시는 것 같아요.

 

출간기념회에서 『해리』를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에 대해 “진보의 탈을 쓰는 게 돈이 된다는 사실을 터득한 사기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민주화운동을 지나온 과거 70~8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소위 약자의 편을 들고 진보의 기치를 올리면 투옥되거나 가난을 감수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늘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죠. 하지만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고,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정의를 부르짖는 게 무척 쉬워졌습니다. 특히 SNS와 팟캐스트의 등장으로 개인이 스피커를 갖게 되며, 누구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잖아요. 이를 통해 진보의 기치를 내걸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감지한 사기꾼들이 대거 몰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어요. 기존 보수 정권에 대한 실망으로 정의에 목말랐던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가 물질화되어 그들에게 권력과 재물을 주었고, 대중들은 누구보다 가장 속기 쉬운 상황에 놓여버렸죠. 그걸 재빠른 악인들이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시대의 징후로 포착한 거예요.

 

신작을 출간하고 난 뒤, ‘현재를 내다보고 쓴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을 종종 밝히곤 하셨어요. 『해리』 가 출간된 뒤에도 그랬을 것 같아요. 


네, 마찬가지였어요.(웃음) 책 출간하고 난 뒤, 하루는 편집자에게 문자가 왔어요. “선생님, 신부 이름을 왜 백진우라고 쓰셨어요?”라기에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더니 “이름이 진우잖아요”하는 거예요. 아니, 그 이름 1년 반 전에 쓴 건데.(웃음) 실제로 SNS에 달린 책 관련 악플 중에도 ‘일부러 이름을 그렇게 지었지?’라는 게 있었어요. 무진 시장의 이야기도, 시장이 이런 횡포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해서 쓴 것인데 지금 와서 보면 마치 작정해서 쓴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장편소설은 집필 기간이 길다는 걸 다들 아시기 때문에 오해하는 독자분들은 없겠지만, 이걸 쓴 저 조차도 현재의 상황과 묘하게 엮이는 걸 보며 소름이 돋았어요.

 

작가는 시대를 앞서 보는 눈이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작가님은 특히 더 혜안이 있으신가 봐요. 왜 그럴까요?


작가는 현재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예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인간의 기층 심리를 계속 탐구하고, 생각한 세월이 수십 년 쌓였으니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아요. 현재 속에 들어있는 미래의 작은 단서를 포착하는 거죠. 해바라기 씨가 뜰에 떨어진 것을 보고 ‘여름이 오면 여기가 해바라기 밭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예언은 아니잖아요.

 

한 인터뷰에서 “『도가니』 를 쓰는 동안 온 나라가 무진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당혹스러웠다”고 말씀하셨어요. 반면 『해리』는 ‘온 나라가 무진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쓴 느낌이 들더라고요.


무진은 대한민국 사회의 압축판이에요. 권력, 자본, 언론이 똘똘 뭉쳐서 약자들을 착취하는데, 그 어떤 저항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하더라고요.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가진 게 없는 자를 끊임없이 약탈하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들어요.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이 있나요?


‘너 이런 소설 써놓고, 그런 짓 했구나’라는 악평이 있었어요.(웃음) 난 그게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리뷰 중에는 ‘PPSS(ㅍㅍㅅㅅ)’에 실린 허희정 소설가의 글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 없이, 제 의도를 잘 읽었더라고요. 요즘은 이렇게 눈 밝은 독자들로 인해 긴장하게 돼요. 어떨 땐 나의 약점이나 나태까지도 찾아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악이 빼앗은 가치, 사랑으로 되찾아야 한다


등장인물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악을 파헤치는 한이나는 권력이 있는 집안의 딸이고, 악을 일삼는 이해리는 가정폭력을 일삼는 편부 아래서 가난하게 자란 소외 계층이에요. 대개 진실은 약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 반대였어요. 


보통은 약자에게 진실이 있어요. 하지만 그걸 역이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가난하게 자랐고, 소외되었고, 약자인 사람에 대해 한없이 너그러운 선함이 있어요. 이건 분명 좋은 점이고, 우리 사회가 가진 엄청난 잠재력이에요. 그런데 이걸 악용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끊임없이 앵벌이에 사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도 분명 많거든요.

 

페이스북 화면, 메신저 대화를 소설에 차용한 것도 독특해요. "SNS가 위선과 사기의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하셨는데요.


종교, 언론, 권력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누구나 우상을 원해요.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목말랐던 선과 정의를 사람들이 이를 SNS에서 찾기 시작한 것 같아요.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특정 인물에게 자신의 선의를 투척하고, 영웅을 만들고, 그에 대항하는 이에게는 힘을 모아 응징하고 있어요. 공공성에 대한 측정이 되지 않은 인물, 얼마든지 위선을 행할 수 있는 인물이 대중을 속이기 쉬운 토양이 마련된 셈이죠. 그럴듯한 말만 내뱉으면 되니까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그날을 그렇게 자세히 기억해? 세상에 태어나 부당함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1권, 123쪽)’는 구절이 마음에 남아요. 사회적 사건에서 상처는 늘 피해자의 몫일 때가 많은데, 부당함을 당해보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아서 그런 걸까요?


특히 여자이고, 약자일 때 더 그렇죠. 제가 느끼기에는 ‘이명박근혜’ 정권을 지나며 그게 더 심해진 것 같아요. 특히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면서 약자에 대한 약탈이 노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거든요. 그 신호탄이 용산 참사였고, 쌍용차 노조가 파업했을 때는 국가 장비인 헬기를 이용해 국민인 노조원들의 머리 위로 최루액을 뿌렸어요. 이로써 힘이 있는 자가 최고이고, 그렇지 않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메커니즘이 국가를 뒤덮으며 약자에 대한 혐오가 생겼어요. 이제 당한 사람을 억울한 피해자로 보는 게 아니라 약자라고 보는 거예요. 반대로 가해자는 범죄자가 아닌 강자이고요. 소위 사회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한이나 조차 성추행을 당했을 때는 입을 열지 못해요. 피해자는 약자라는 인식이 있으니까요. 어쩌다 정말 큰 용기를 내 피해를 고백해도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냐. 신부를 모함하지 마라”는 말밖에 듣지 못하는 거죠.

 

이해리와 백진우는 분명 악인이에요. 필요할 때마다 ‘가면을 바꿔 쓰는’ 위선은 무척 악랄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요. 소설을 읽으며 답답함을 느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게 현실이니까요....... 머리는 가지 말라고 하더라도 영혼이 가라고 이야기할 때, 영혼을 따르는 게 나에게도 좋고 우리 사회에도 좋은 것 같아요. 종종 “선생님, 이길 수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아요. 그런데 법적으로 판결이 나고, 권력을 뒤집는 것만이 승리가 아니라 어둠에 빛을 비추고, 끊임없이 저기 추악한 게 있다고 소리치는 것도 승리예요. 그게 사회를 바꾸니까요. 편의점에 강도가 들었다고 가정했을 때, 다칠 것을 알면서도 달려가서 칼을 뺏는 사람을 보면 우리 가슴에 분명 어떤 울림이 생기잖아요. 모른 척, 외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우리를 상심하게 만들고요. 한 사람의 용감한 행위가 우리를 움직여요. 결국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가장 쓰기 힘들었던 장면이 있나요?


첫 장면부터 너무 힘들었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최대한 드라이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제 감정을 억눌러야 하니까요. 또 다른 하나를 꼽자면 질문의 의도와 맞는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 이야기가 전개될 때도 힘들었어요. 연애에 대한 감이 다 떨어져서.(웃음)

 

다른 의미의 힘듦이네요.(웃음) 그럼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은요?


어떤 세력에 의해 눈을 다쳐 병실에 입원한 미카엘 신부가 이나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요. “그들은 독약을 먹고 있어요. 그게 독약인 줄도 모르고, 안 죽네, 맛있네, 이러고 있다구요. 그들이 쥐약이 든 빵을 계속 먹고 있는데, 왜 화가 나요? 안타깝지요, 그 사람들이요.(2권, 169쪽)”라고 했잖아요. 이 대사는 사실 어떤 성직자가 제게 해주신 말씀이에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나쁜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면 화가 나잖아요. 그런데 사실 악한 사람들은 꼭 망해요. 이건 인류 역사상 보편적인 진리예요. 그러니까 화낼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악에 저항할 때 화를 내면 동화돼 버려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해요.

 

“증오로 몰아가는 싸움을 해서는 안 돼. 그러다가는 적과 닮아버려요.(2권, 260쪽)”라고 쓰셨어요.


네, 악인들이 빼앗아간 가치를 사랑으로 되찾아야지, 분노로 맞서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해리』에서 거듭 반복되는 문장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 부류가 있어요 흔히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늘 ‘좋은 쪽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게 이들의 토양이에요.(1권, 246쪽)‘ 상식은 『도가니』 에서도 무척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요. 책을 읽으며 ’상식이란 대체 뭐지?‘라고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정치인들로 인해 상식이라는 말이 너무 퇴색되었단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정치인들이 제일 나쁘게 전락시킨 단어는 ‘소설’이에요. BBK를 감추기 위해서 이명박이 그랬죠. “여러분, 이거 다 소설인 거 아시죠?” 그때부터 소설이 굉장히 안 좋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어요. 전주시청과 마찰이 있었을 때, 한 관료가 제게 “소설 쓰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서 맘먹고 한마디 했거든요. “전주가 예향의 도시라면서요. 그곳의 관료가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를 비하하면 되겠어요?” 그러니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요. 소설이라는 단어가 자꾸 나쁜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어요. 왜 소설을 그렇게 함부로 사용해요? 그냥 거짓말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소설은 대중들이 즐기는 중요한 예술 장르 중 하나예요. 그걸 폄하하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권력자들을 질타할 수 있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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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

 

 

사랑하는 종교를 지키는 마음


취재 기간만 5년에 달한다고요. 사건을 파헤쳐가는 주인공 한이나와 작가님이 겹쳐 보였는데, 취재 당시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나가 저보다 훨씬 침착한 것 같은데요.(웃음) 우연히 제가 한 신부, 그리고 봉침 여목사와 엮이고 송사를 치르면서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너무 궁금해서 취재를 시작했어요. 소설의 모티브가 된 대구 희망원 사건과 전주 봉침 목사 사건이 아니었다면 가톨릭이 이렇게 부패했다는 것도, 장애인이라는 약자를 위한다는 인간들이 이렇게 악랄할 수 있다는 것도 아마 몰랐을 거예요. 사실 『도가니』 의 사건은 자애학원에 있던 사람들이 악했던 것인데,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러한 악과 위선이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신성하다고, 신성해야 한다고 믿는 영역인 가톨릭, 그리고 SNS에서 자선을 행하는 장애인 단체의 사업가가 세월호까지 이용하며 악행을 저지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사실 저의 취재 스토리는 한이나가 백진우와 이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과 굉장히 비슷해요.

 

인터뷰집 『괜찮다, 다 괜찮다』 에서 “저는 가톨릭을 믿는 게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하며 종교에 회의가 든 적은 없나요?


회의보다 그 좋은 종교를 말아먹는 인간들에게 엄청난 분노가 일었어요. 새로운 사실을 알아갈수록 분노를 넘어 슬프더라고요. 이렇게까지 부패했을 줄은 몰랐거든요. 아직도 그날이 기억나요. 그해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이었는데요. 대구 희망원에 관계된 사실들을 취재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내가 믿는 천주교가 이정도로 타락했나’ 싶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나더라고요.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어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동안 펑펑 울었어요. 그 안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지금도 끔찍해요. 언젠가 희망원에 대한 보고서를 『의자놀이』처럼 따로 쓰려고요.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예요.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죽어갔어요.

 

이 사건은 소설에서 ‘지난 6년 통산 312번째, 최근 2년간 일어난 129번째 비슷비슷한 죽음이었다.(1권, 17쪽)’고 등장해요. 


어떤 분이 정정해주셨는데 2010년부터 2016년까지, 6년 사이에 309명이 죽었다고 해요. 희망원 전체 정원의 26.9%예요. 국내 다른 장애인 시설에 비한다면 연평균 7.5배가 넘는 사람들이 더 죽은 것이고요. 이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고상한 척하는 천주교 교구가 관장하고 있었어요. 백번 양보해서 관리감독이 소홀할 수 있었다고 쳐도, 사건에 대처하는 교구의 위선을 보면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어요.

 

회의가 아니라 종교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네요.


맞아요. ‘왜 이걸 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독자의 재미를 반감시킬까 봐 자세히 전할 순 없지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신부의 이야기가 압권이었어요. ‘내가 또 속았구나’ 싶더라고요.


제가 직접 겪은 실화예요. 앞선 사건들을 취재하고 나서 소설을 구상하다가, 너무 가톨릭을 나쁘게만 묘사하는 것 같아서 소개를 받아 그 신부를 만났어요. “신부님 이야기를 소설에 쓰겠다”고 전하기까지 했는데, 그런 비화가 있을 줄 몰랐어요. 그때 느낀 배신감은 정말….(웃음) 그 신부가 『해리』를 봤을까 모르겠네요. 
 
그런 사람들은 책 잘 안 읽더라고요.(웃음)


정말이에요. 책 안 읽어서 아마 모를 거예요.

 


소설을 읽어야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어요


예민한 사안에도 거침없이 생각을 발언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잡음이 생길 때가 많으시잖아요. 작품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집필에 몰입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나요?


출판사에게 미안하면 어쩔 수 없이 쓰게 돼 있어요.(웃음)

 

‘언젠가 망한다. 그 언젠가가 올 때까지 손 놓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한 번뿐인 젊음이나 가족, 혹은 생 전체를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언젠가 망한다” 이 말처럼 무책임한 것이 또 있을까, 이나는 잠깐 생각했다(1권, 256쪽)’는 구절을 읽고, 작가님이 계속 발언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맞아요. 그사이에 희생되는 삶의 시간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거든요. 악은 분명 언젠가 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 없잖아요.

 

후회하지는 않으세요?

 

힘들죠.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이번에 쓴 대사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고, 심혈을 기울여 쓴 게 있어요. 서유진이 한이나에게 하는 말인데, “열 받으면 내 피부만 망가지고 걱정하면 나만 늙고 울면 코만 풀어(2권, 60쪽).” 후회하면 뭐 해요, 나만 손해지.

 

작가님이 믿는 선(善)이란 무엇인가요?


생명에 이바지하는 거요. 그게 어떤 것이든. 우리 모두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살리는 게 선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악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버리고, 죽어가게 만드는 거겠죠. 청소년들을 자살하게 만들고, 최저시급도 주지 않은 채 일을 시키고, 약한 사람을 착취하고…. 이 모든 게 악이에요.

 

그럼 어떤 사람을 좋아하세요?


살리는 사람이요. 주로 엄마들이 그렇죠.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결국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작가후기를 보니 소망하던 작업실을 마련하셨다고요. ‘소망’이라는 단어로 인해 어떤 공간일지 궁금했어요.


지리산 인근에 거처를 하나 마련했어요. 지리산은 품이 넓고, 다른 어떤 산보다 많은 생명이 깃들어있어서 가장 좋아하는 산이에요. 그래서 ‘어머니 산’이라고 부르나 봐요. 지리산가에 제가 지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몰라요. 

 

작가님께 나이 든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어릴 때와 다르게 무언가 많이 보여요. 느긋해지고요. 어떤 일이 닥치면 예전에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제 그 이면까지 바라보게 되었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는 것을 알아요. 나이 들수록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이 더 좋으세요?


훨씬 좋아요. 물론 살이 찌고, 외모가 변하는 건 새롭게 각오를 해야 하지만요. 그런데 저는 제 얼굴을 매일 보니까 변하는 것도 잘 모르겠더라고요.(웃음)

 

올해로 작가 생활 30주년을 맞이하셨어요. 소설가로 30년을 살아온 소회가 어떤가요?


굉장한 일이다 싶어요. 30년간 소설가로 이렇게 꾸준히 먹고살았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느끼고 있어요. 아직 이 사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요.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뉴스 기사로도 접할 수 있는 일들이잖아요. 그럼에도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할까요?


세상은 이것을 은폐하니까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 공감하고, 우정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에요. 익명의 해리가 누군지 모르고, 무진이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 몰라도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한이나의 방황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그녀에 대한 공감과 우정이 생겨요. 소설을 읽고 이러한 감정을 연습해야만, 우리가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어요.


 

 

해리공지영 저 | 해냄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진정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만듦과 동시에, 그 희망을 일궈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뜨겁게 던지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현주 “동네서점,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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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이 다시 늘어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이현주 저자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치기 힘들었다. 20년 동안 출판 업계에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지금 같은 시대에-독서 인구는 점차 줄고 그마저도 대부분 인터넷서점을 이용하는 시대에-작은 서점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전작 『읽는 삶, 만드는 삶』을 함께 출간했던 유유 출판사가 ‘세계 도시의 서점들’과 관련된 책을 기획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애틀의 동네 서점’ 탐방에 나섰다.

 

“2년 남짓 살아 본 경험으로 다른 곳보다 덜 낯설어서” 선택한 곳이기도 했고, 이제는 삶의 터전이 된 공간이었다. ‘동네서점의 천국’이라 불리는 동시에 ‘아마존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묘한 지역. 그곳의 작은 책방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저자는 ‘책으로 먹고사는 이야기’를 찾아 시애틀의 골목골목을 누볐다. ‘시애틀미스터리 북숍’, 그래픽ㆍ건축 전문 서점 ‘피터밀러 북스’, 아마존 편집부에서 일하던 직원이 차린 ‘피니 북스’, 공학 전문 서점 ‘에이다스테크니컬 북스’ 등. 시애틀의 동네서점이 처한 현실과 생존기를 취재했다. 그 결과 탄생한 책의 이름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 . 부제는 ‘‘아마존’의 도시에서 동네 서점이 사는 법‘이다.

 

이현주 저자는 서평지 『출판저널』, 인터넷 서점 ‘리브로’, 책 요약 서비스업체 ‘북코스모스’, EBS라디오 <책으로 만나는 세상>의 패널 등으로 활동하며 책과 관련된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을 해왔다. 1인 출판사 ‘뜰’을 설립하고 3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고,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여러 책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읽는 삶, 만드는 삶』을 썼고, 현재 시애틀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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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이 책은 “출판사의 제안에 따른 취재기”라고 쓰셨어요.

 

유유 출판사 대표님과는 『읽는 삶, 만드는 삶』으로 인연을 맺게 됐어요. 그 후에 대표님이 세계 도시의 서점들과 관련된 책을 기획하고 계셨고, 저한테 관심 갖고 있는 도시가 있는지 물어보셨었어요. 그런데 제가 시애틀에서 2년 정도 살았었거든요. 그 경험으로 시애틀에 재밌는 동네서점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애틀이라면 제가 한 번 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던 거예요.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제가 살아봤던 곳이고, 또 제 동생이 오랫동안 시애틀에 살았거든요. 저한테는 되게 친숙한 지역인 거예요. 이 책의 첫 장에 『아메리칸 버티고』를 인용해서 실었는데, 그 글에도 보면 “매우 전문화된 서점들”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시애틀은 서점에 특화된 지역이에요. 그들은 ‘독립 서점의 천국’이라고 표현해요.

 

취재를 시작하실 즈음에, 한국에서도 동네 책방 열풍이 불었죠?


맞아요. 그런데 저는 약간 회의적으로 보이더라고요. 출판업계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다 보니까 ‘그게 지속 가능하지 않을 텐데’ 싶었어요. ‘젊은 세대가 어떤 환상을 가지고 책방을 시작하는 건 아닐까’, ‘책을 파는 일이 겉으로 근사해 보이면서도 다른 물건을 파는 것보다는 덜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과연 먹고 살 수 있는 일인가’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거예요. 또 한국의 출판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외국은 상황이 좋다더라’ 하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말 그런지도 궁금했어요. 시애틀이라는 동네에는 유난히 독립서점이 많다고 하고 재밌는 서점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다 먹고 살만 한지 궁금한 거예요.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그것들이 효과가 있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 서점을 운영하려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20년 동안 몸담았던 출판계를 떠나셨는데요. 출판계의 불황과 관련이 있나요?


있죠, 당연히. 100%(웃음). 이민을 결정하던 시기에 제일 고민했던 것 중에 하나가 ‘나의 노후’였어요.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서 나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출판업이 사양 산업이 된 현실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글을 쓰는 건 어디에 거처하든 가능한 일이잖아요. 『읽는 삶, 만드는 삶』 을 통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 직업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지 않나’(웃음). 이 일과 닿아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에 장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것도 이민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출판계의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동네 책방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고 걱정하셨던 거겠죠.


맞아요. 그런데 취재를 다 마친 지금은, 사실 비관도 낙관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냥 ‘서점은 존재 가치가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새로운 서점은 계속 생길 것이고 어떤 서점들은 문을 닫을 것이다, 그렇지만 계속 존재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됐어요. 제가 며칠 전에 ‘사적인서점’의 정지혜 대표님과 북토크를 했는데요. 서점을 하고 싶어서 찾아오신 분들도 계셨어요. 그때도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저는 서점을 하기 보다는 그냥 서점 손님이 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누군가 서점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하셔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고요. 좋은 결과를 맺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서점은 문을 닫고 또 어떤 서점은 문을 열고, 그렇게 ‘오고가는’ 과정에서 더 풍성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시애틀미스터리 북숍’은 이 책이 나오기 전에 결국 문을 닫았어요. 폐점 전에 주인이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실으셨는데요. 처음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사실 저는 동종 업계에 있던 사람으로서 서점의 어려움에 막연하게 공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글도 덤덤하게 읽었는데요. ‘사적인서점’ 정지혜 대표는 그 글을 읽고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시애틀미스터리 북숍’이 폐점할 때의 주인장이 ‘제이 비’라는 사람인데, 직접 만나고 나서 굉장히 실용적인 자영업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서 모임은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는 초과 근무를 할 수 없어’라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거든요. 독서 모임이나 북클럽 같은 경우는 서점을 운영하는 데 밑바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포기하기 힘든 부분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서점들도 꼭 구비하고 있는 조직 중에 하나예요. 그런데 전문 서점이, 더구나 독자 충성도가 높은 장르 문학 전문 서점이, 북클럽 하나도 없는 거죠. 저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그만큼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실용적인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서점에서 실질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계속 고민했을 거예요. 그리고 2014년 즈음에 인터뷰한 기사에서는 매년 매출이 늘고 있다고 이야기했었거든요. 시장이 굉장히 짧은 기간 내에 급격하게 변한 거죠. 제가 찾아갔던 시기에 이미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인터넷 펀드를 통해서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죠. 그런데 폐점 결정을 내린 것도,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돼요. 또 한 번 펀드를 모아볼까 생각했지만, 그게 지속 가능한 대안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 사람다운 태도였고 결정이었어요. 그게 얼마나 절박한 결정이었는지 잘 알겠어서, 남다른 마음이 들었죠.

 


그곳에는 ‘사람’과 ‘장소’가 있다


취재 과정은 어땠나요? 일일이 다 찾아가고, 메일을 보내고, 인터뷰를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2016년 겨울에 시애틀에 갔는데, 그 전에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저희 조카가 시애틀에 있어서 근처의 괜찮은 독립 서점들 리스트를 보내달라고 했었고, 제가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들을 같이 모았어요. 그 중에서 가보고 싶은 곳들을 체크해 놓고 미국에 가자마자 다 둘러봤죠. 그 다음에 제 나름의 기준으로 고른 건데요. 너무 규모가 큰 곳은 제외했어요.

 

‘엘리엇베이 북컴퍼니’, ‘시크릿가든’, ‘서드플레이스 북스’ 같은 독립 서점이 빠진 이유군요.


네. 너무 규모가 큰 데는 주인의 개성이 별로 안 드러나잖아요. 그리고 헌책방도 재밌는 곳들이 많았는데 제외했어요. 비슷한 특성을 가진 서점들 중에서는 그 특성이 더 강한 서점을 골랐고요. 그런 식으로 선별한 다음에 일제히 메일을 보낸 거죠. 답장이 오는 대로 취재를 진행했어요. 인터뷰 질문을 준비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공통 질문이 있었거든요. ‘먹고 살기 위해서 서점에서 특별히 하고 있는 건 무엇인지’, ‘재정적인 문제는 없는지’ 그런 질문들이 중심이 됐고요. 서점을 열게 된 사연, 서점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도 공통 질문이었어요.

 

시애틀에는 ‘아마존’의 본사가 있죠. ‘아마존’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온라인 서점인데요. 그곳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고 해서 지역의 오프라인 서점이 영향을 받나요?


‘피터밀러 북스’의 주인장인 ‘피터밀러’가 굉장히 분노하는 지점이 있어요. 아마존이 가지고 있는 태도에는 존중이 없다는 거예요. 책에 대한 존중, 그리고 책을 파는 일을 하는 그들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태도를 고객들이 배웠다고 이야기해요. 예를 들면, 소규모의 서점들을 큐레이션을 하잖아요. 아마존에서는 세상의 모든 책을 다 검색할 수 있지만, 작은 책방에서는 주인이 골라놓은 책만 만날 수 있어요. ‘피터밀러’ 같은 사람은 확고부동한 자기 취향으로 책을 골라놓고요. 그런데 그 목록을 베껴가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더 싼 곳에 주문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목록의 책들을 고르기까지 심혈을 기울이고, 직접 읽고, 좋은지 나쁜지 스스로 판단해서 골라놓은 거니까요.

 

그것도 서점 주인의 노동인데 말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지역 서점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곳에서 본 책을 온라인에서 주문하니까요. ‘사적인서점’의 정지혜 대표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이 책방에 와서 책을 봤는데 다른 곳에서 책을 산다면, 그 서점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한 거냐고요.

 

작은 서점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도 있나요?


미국이 연방정부이기 때문에 가지는 특징이 있는데요. 주마다 세금을 따로 걷는데, 온라인 업체는 전국 규모이기 때문에 지역소비세를 안 내요. 그러다 보니까 지역 독립 서점을 지원하는 비영리 조직 ‘인디바운드’라는 곳에서는 ‘숍 로컬(shop local)’ 운동을 해요. 지역에서 소비를 하면 그 지역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든요. 예를 들어서 100달러를 소비한다고 하면 지역소비세로도 남고, 이웃들의 급료로도 나가고, 운송 거리도 줄고, 그렇게 50달러가 남는 거예요. 온라인이나 중앙집권화 된 업체에서 구매를 하면 그런 이득이 남지 않죠. 많아야 20~30% 정도 남거나 품목에 따라서 0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숍 로컬’ 운동에 동참해요. ‘퀸앤 북컴퍼니’처럼 지역색이 강한 서점에서도 적극적으로 운동에 동참하고요.

 

온라인 서점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동네 책방에만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겠죠. 그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두 가지죠. 사람이 있다는 것과 장소가 있다는 것. 방문한 서점들마다 공통적으로 했던 이야기가 ‘발견’이었어요. ‘피니 북스’의 대표인 톰은 아마존에서 일했던 사람인데, 자신이 아마존에서 배운 건 ‘아마존을 따라하지 말라’는 거였다고 말해요. 아마존이 할 수 없는 건 ‘발견’이라고 하고요. 알고리즘이 찾아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거죠. 인간이란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잖아요. 어떤 날 어떤 기분에 어떤 책을 보고 싶은지, 그 생각이 시시각각 바뀌죠. 알고리즘이라는 건 ‘당신이 산 책과 비슷한 책을 산 다른 사람들은 이런 책을 샀다’라고 제안을 해주는 거잖아요. 분명히 설득력 있는 제안일 거예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특정한 날에 특정한 기분에서 만나고 싶은 책을 과연 찾아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걸 해줄 수 있는 건 사람이라는 거예요. ‘피니 북스’의 대표도 그렇게 말하고 ‘퀸앤 북컴퍼니’에서 일하는 사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발견’이라고요.

 

서점에서 만나는 사람과 ‘관계’가 생기기도 하고요.


그렇죠. 시애틀 동네서점의 굉장히 큰 특징이 ‘staff’s pick‘이라고 하는 스태프 추천이 어딜 가나 있다는 거예요. 그건 스태프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일인 것 같아요. 어떤 스태프가 추천한 책을 읽었는데 나한테 딱 맞았다면, 다음부터는 그 스태프가 추천한 책을 유심히 보게 되잖아요. 그런 식의 관계들이 만들어지는 거죠.

 

앞서 ‘장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장소성이 수익과 연결되는 경우도 있어요. ‘퀸앤 북컴퍼니’의 운영자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서점에서는 온라인 주문을 받고 있고 책을 택배로 보내주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꼭 서점에 와서 책을 찾아가기를 바란다’고요. 장소가 주는 어떤 시너지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거예요. 직접 서점을 찾아왔을 때 누구를 만나는지, 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 날의 날씨는 어떤지, 장소의 분위기는 어땠는지에 따라서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에이다스테크니컬 북스’는 장소를 대여하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있어요. 거기는 공학 전문 서점이라는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거든요. 그들이 서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고요. 인터넷에서는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모으는 게 쉽지만, 동네에서 그렇게 하려면 장소가 제공되어야 해요. ‘에이다스테크니컬 북스’를 보니까, 우리나라의 작은 서점들도 장소 대여를 통해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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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서점, 존재의 의미


‘책방 주인들의 추천 도서’를 직접 구매하셨어요. 가장 인상적인 책은 무엇이었나요? 


‘에이다스테크니컬 북스’에 갔을 때 『라군 Lagoon』이라는 책을 추천받았는데요. 제가 읽을 자신이 없어서 못 사왔어요(웃음). 일상적인 장편소설도 읽으려면 한참 걸리는데 배경 지식이 필요한 SF는 도저히 읽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책이 빨리 번역되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분명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장르가 SF거든요. 우리나라는 장르 문학이 잘 판매가 안 되잖아요. 추리소설이나 미스터리는 조금 형편이 낫지만 SF는 잘 안 되거든요. 『라군 Lagoon』은 SF이고 나이지리아계 작가가 쓴 작품이에요. ‘에이다스테크니컬 북스’는 민족적으로나 성정체성으로 소수인 작가들한테 관심을 가지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작품들 같이 읽으려고 노력하죠. 『라군 Lagoon』은 ‘에이다스테크니컬 북스’에서 강력히 권했던 책이라 빨리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또 다른 책이 있다면요?


아무래도 외국어로 된 작품은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보니까, 저한테는 이미지가 있는 책들이 훨씬 도움이 되는데요. ‘애런델 북스’에서 추천받은 『다 끝나 간다 This thing is about to end』는 분위기로 압도하는 책이었어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우울하고 약간 비애가 느껴져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감옥에 간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인데요. 미국 독립 출판의 또 다른 특징이 지역 작가와의 유대가 강하다는 거예요. ‘애런델 북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 ‘채트윈 북스’도 시애틀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작가들을 전격적으로 지원하고 그들의 책을 출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위기가 있거든요. 『다 끝나 간다 This thing is about to end』도 시애틀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가 쓴 책이라서 잘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진이랑 같이 있기 때문에, 모국어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도 조금 적지 않을까 싶어요.

 

맺음말에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출판계를 떠나 시애틀로 가신 후에 ‘서점,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셨다고요.


저는 20년 넘게 출판업으로 먹고 살았던 사람이라, 책을 읽고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쓰는 것이 자아정체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어요. 이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좌절도 있었고요. 한편으로는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고고하게 정신적인 노동을 할 거야’라는 식의 태도가 어느 정도 마음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책을 읽지 못하겠더라고요.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난 딴 사람이고 이게 진짜 나야, 이런 하찮은 일을 하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생각할까 봐 두려웠어요.

 

그렇지만 다시 책을 읽게 되셨죠?


원고 마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 했어요(웃음). 손보미 작가의 『디어 랄프 로렌』이었는데요. 손보미 작가는 약간 현실하고 괴리된 것 같은 이미지를 품고 있잖아요. 『디어 랄프 로렌』자체도 약간 그런 느낌이고요. 다른 지역의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그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왜 나에게 책이 중요한 것이었던가’ 하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 전에는 현실에 압도돼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을 볼 때도 기능적인 부분만 보게 됐거든요. 그 사람과 내가 맺는 관계에서, 그 사람이 기능적인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내 문제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너무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거예요. ‘나는 더한 것도 해’ 이런 마음이 드는 거죠.

 

『디어 랄프 로렌』 변화를 가져왔나요?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나의 삶도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게 됐어요. 나와 맺는 기능적인 관계가 아니고요. 『디어 랄프 로렌』 은 누군가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이지만, 진실을 찾아갈수록 진실이 와해되는 구조잖아요. 그런 것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돼요. 그 책을 보는 동안에 제 삶도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삶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효과가 생겼어요. 그러면서 사람이 조금 착해지고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실제로 경험하신 바를 예로 든다면요?


저희 주방에서 일하는 친구가 몽골에서 왔어요. 예전에 그 친구를 볼 때는 너무 느리고, 게으르고, 일을 깔끔하게 못하는 게 화가 났어요. ‘저 친구를 자르고 내가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부엌 뒷문에 기대서 바깥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 거예요. 원래 그러고 있으면 안 되고 설거지를 해야 되는데(웃음). 그래서 제가 뭘 보고 있냐고 물어보니까 ‘하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문득,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 사람이 살았던 데는 몽골 어디쯤일까, 저 사람이 보았던 것은 몽골의 하늘일까, 몽골의 초원일까, 저 사람도 거기에서 꾸었던 꿈이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게 굉장히 피상적이고 상대를 객체로 놓고 생각하는 거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으로서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떠나서, 그 사람을 이해하게 만드는 주변적인 생각들이 떠오른 거잖아요.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달랐을까요?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 혹은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읽지 않고는, 그렇게 되기가 되게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 ‘이렇게 바쁘고, 이렇게 현실이 압도적이고, 심지어 책보다 더 재밌는 게 이렇게 많은데, 왜 책을 읽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바쁜 일상에서 책읽기를 위해 짬을 낸 사람들에게 “온라인 서점이 아닌 오프라인 서점이 더 좋은 이유를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셨다고요. 이제는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웃음)?


음... ‘책을 읽으면 좋아요’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서 보시라고 제안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여건이 안 된다면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이야기할 것 같아요. 반드시 오프라인 서점이 아니어도 되는데요.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서점에서 만나는 직원,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당신이 무언가를 물어보면 난 대답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마음으로 나를 환대해주는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이 있는 거죠. 그게 책을 읽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 책이 과연 어떤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라고 자문하셨는데요. 답은 찾으셨어요?


내가 책을 통해서 혹은 어떤 것을 읽는 행위를 통해서 얻었던 모든 즐거움과 모든 의미를 당신도 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서점이 할 수 있고, 하고 있다는 거고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이현주 저 | 유유
요즘 같은 세상에 오프라인 서점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은 요령은 무엇일까,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서점 사람들의 고민이 따뜻하고도 호기심 어린 시선과 함께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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