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채널예스 : 만나고 싶었어요!
Viewing all 8510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치과의사 고광욱 “치과에 마녀사냥이 존재하는 이유”

$
0
0

_15A1987.jpg

 


학점을 담합하고, 족보를 공유하고, 튀지 않고 선배들 말을 잘 들으며 치과의사가 된 이들은 가격을 담합하고, 서로 유대를 쌓으며 자신들의 폐쇄적인 세계를 만들었다. “의사들이 돈에 욕심내지 않고 올바르게 진료 할 수 있도록”(232쪽) 보장되어야 한다는 진료비, “‘표준의료수가의 책정’이라는 그럴듯한 문구로 포장되어 있”(112쪽)는 그 진료비는 어기지 말아야 할 ‘법’이었다. 한 치과의사가 ‘표준수가’ 230만원이던 임플란트를 100만원에 받기 시작하자 지역치과의사협회는 즉시 제재를 시작한다.

 

“우리 창주시는 단합이 잘되기로 유명한 지역입니다.(중략) 좋은 게 좋은 거랍시고 한두 번 넘어가기 시작하면 옆 동네처럼 수가 무너지는 거 한순간입니다. 지금도 한 번씩 전화 돌려보면 ‘임플란트 200만 원입니다’이렇게 말하는 병원이 몇 군데 있는 게 현실입니다. 혹시 주변에 연락 닿는 원장님들은 반드시 제가 경고한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냥 지켜보지만은 않을 겁니다.”(41-42쪽)

 

어느 날 구청 직원들이 찾아와 간판 철거를 지시했다. 직원들은 퇴사를 종용하는 전화를 계속해서 받았다. 기자재 업체로부터 거래 불가 연락을 받았고, 직원 채용 공고를 올린 치과계 신문은 폐간되었다. 이 치과는 진료비를 싸게 한다는 이유로 ‘덤핑치과’, ‘영리병원’이 되었다.


현직 치과의사 고광욱의  『임플란트 전쟁』 은 그가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한 ‘본격치과담합리얼스릴러’다. 이 기가 막힌 이야기,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들은 질문을 갖게 될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사실인가,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이에 답하듯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소설의 내용은 다 허구다. 만약 실제와 비슷하다면 그것은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_15A2028.jpg

 

 

아주 좁고 폐쇄적인 사회


책 첫 머리에 “이 소설의 내용은 다 허구다.”라고 적었어요. 마치 선언처럼 이렇게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단 제가 직접 겪은 일들이 절반 이상 돼요. 나머지 일들은 간접적으로 듣고, 접한 자료들이고요. 이건 대중들에게 알리려고 쓴 책이니까요. 쉽게 접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소설 형식으로 썼어요. 서로 연관되는 사건을 써야 하니까 본의 아니게 피해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서 가명도 쓰고, 단체 이름도 바꾸고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실제 있었던 일들을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밝히긴 밝혀야 했어요. 동시에 완전히 없는 일은 아니고, 어느 정도는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썼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르포로 썼다고 들었어요.


네, 완전히 기사처럼, 다큐멘터리로 쓴 원고가 있었고요. 기획 단계에 소설로 바꾸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법적인 부담감이 있는데다가 르포 방식으로 쓰려면 100%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것만 써야 하더라고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많은데 제한이 있었던 거죠. 또 ??시, XXX 누구, 이런 식으로 가려서 많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러면 읽는 것도 재미가 없을 것 같았어요. 이게 우울한 얘기일 수 있거든요. 저도 당한 일이 많기 때문에 억울하긴 하죠. 그래도 일단 책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제가 당한 일이 아니라면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흥미로운 일이라고 여겼고, 사람들에게도 흥미 있게 읽혔으면 해서 이 방식으로 썼어요.

 

그 동안 쓰겠다는 생각은 갖고 계셨던 거예요?


언젠가 이 이야기를 글이든 뭐든 정리해서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년 전부터 해왔어요. 신기한 일이 많았으니까요. 화가 나기보다 신기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많아서요. 한 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죠. 글은 빨리 썼어요. 르포 형식으로 쓸 때도 한 달 정도 걸렸고요. 회의 끝에 소설 형식으로 바꾸기로 하고도 한 달 걸렸어요. 거의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각색한 내용이니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고요. 물론 준비 기간은 어찌 보면 10년 걸린 셈이에요. 

 

『임플란트 전쟁』 은 말씀처럼 선생님께서 직접 겪은 지난 10년의 이야기를 담았잖아요. 이것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짐작하기가 어려운데요.


치과의사로 활동을 시작한 게 2008년이고, 딱 10년 전인데요. 여느 동네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치과에서 페이닥터로 일을 했었죠. 그때부터도 신기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보통 사람은 이해 못할 비상식적인 일들이 있다고 느꼈거든요. 책에 등장하는 치과의사 익명게시판은 실제로도 있어요. 생긴 지 15년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여러 이해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더라고요. 보면서 치과계는 아주 좁고 폐쇄적인 사회라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느낌은 있었죠. 하지만 어쨌거나 저와 직접 관련된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2009년쯤부터 제 병원을 시작하고 진료비를 싸게 했는데요. 책에 진료비가 적힌 팩스를 받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건 사실 제가 치과의사 되자마자 받아봤던 거예요. 하지만 그대로 받지 않고 진료비를 싸게 받았죠. 그때 진짜 태클이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태클이라면?


사실 진료비 싸게 하는 게 범법행위도 아니고 누가 제재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간접적인 괴롭힘으로 태클이 들어왔어요. 하나 같이 치졸하고, 비겁하다고 느꼈는데요. 더욱이 의사를 괴롭히면 피해는 환자가 봐요. 환자를 볼모로 괴롭힌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사건이 워낙 다양하고요. 책에는 일부만 들어간 건데요.(웃음) 이것이 단순히 동종업자들 사이의 해프닝에서 머물지 않잖아요. 정치권도 연관이 되었고요. 실제로 경찰, 검찰 조사도 일어났고, 탐사 보도 프로그램에서 저희를 악한 집단으로 취재해 방송하기도 했죠. 최근 몇 년 정치 뉴스가 풍년이었잖아요. 그걸 보는데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과 아주 비슷하다, 생각이 들었어요. 

 

 

반이 바뀌지 않는 고등학교


학부 때부터 이런 분위기를 겪어왔고,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수긍하기가 더 쉬운 선택일 법한데 안 그러셨어요. 지금 ‘신기하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외부인의 시선 같은 게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고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의료에 이런 단어는 적절치 않지만 환자분들도 ‘시세’를 알고 오잖아요. 충치가 몇 개다, 금으로 때워야 한다, 하면 대충 얼마가 나올지 아시죠. 그런데 저는 그걸 보는 마음이 되게 불편해요. 난데없는 지출이잖아요. 웬만큼 중병에 걸리지 않으면 병원비로 100-200만원 나가는 일이 흔하지 않거든요. 수술, 입원이나 돼야죠. 그런데 치과는 일단 가면 그렇게 나와요. 보통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소비를 해야 할 때 받는 충격을, 우리는 다 알잖아요. 치과의사들도 예전엔 알았을 텐데 말이에요. 저는 그게 처음부터 불편했어요. 치과를 열고, 가격이 싸다고 욕을 하셨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은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어요. 비싸게 할 때보다는 훨씬 편하니까요. ‘비싸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 병원에서 하면 조금 쌀 겁니다.’가 마음에 깔려 있으니까 저도 편하게 진료비 얘기를 할 수 있었어요.

 

아들의 부탁을 아버지는 매번 들어주었다. 하지만 급한 돈이 50만 원이나 100만 원쯤 되면 아버지도 곧바로 보내주시지는 못했다. 며칠이 걸렸다. 모의셨거나 빌리셨으리라. 200만 원 혹은 300만 원, 이런 숫자가 보통 사람의 어깨를 누르는 무게감을 광호는 잘 안다.

 

“그냥 제가 생각해도 좀 비싼 것 같아서 처음부터 싸게 받았어요. 그래도 환자분들이 좋아하시니까 소개 환자도 많아져서 충분히 먹고살 만큼은 남더라고요.”(19쪽)

 

치과의사의 일이 진료하고, 진단하는 일인데요. 또 중요한 것 하나가 환자들한테 진료비 설명하는 일이에요. 그걸 예전에는 의사들이 직접 했는데 지금은 ‘실장’이라는 사람들이 다 해요. 왜냐하면 전에는 의사가 얼마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그냥 했던 거예요. 이제는 환자들이 흥정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돈 얘기를 대신 할 사람이 필요해진 거죠.

 

치과의사들도 예전에는 알았을 텐데, 라는 말 곰곰이 생각하게 되네요.


다 알았을 텐데 치과의사가 되고 나면 당연히 비싸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것도 턱이 없는 거다, 원래는 더 받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요. 예전에는 더 많이 벌었는데 지금은 그만큼이 아니잖아요.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냐, 싶거든요. 저는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없어요. 치과의사들 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다 우울해요. 마치 폐업하는 동네 골목 자영업자분들이 모인 것 같은 분위기예요. 그러니까 신기하다고 말씀 드린 거예요. 그러면서 동시에 올라오는 것은 벤츠 영업자 좀 소개해 주세요, 이런 거니까요.

 

진짜 이 정도일 줄이야, 라고 가장 처음 생각하게 한 장면이 성적담합 부분이었어요. 학부 때부터 이미 ‘맥시(학생회가 정한 성적 상한선)’, ‘미니(교수가 공지한 최소 점수)’라고 해서 담합을 하잖아요.


그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는데요. 폐쇄적인 집단의 특성일 것 같아요. 대학교에 가면 학과라는 소속이 있긴 하지만 여러 과가 섞여서 학교생활을 하게 되잖아요. 수업도 다른 과와 섞여 듣고요. 그런데 치과는요. 첫 2년, 예과 때는 교양과목도 듣지만 본과로 가면 4년 내내 같이 수업을 들어요. 고등학교처럼. 고등학교는 해마다 반이라도 바뀌죠. 여기는 반도 안 바뀌어요. 서울대는 정원이 많은 거고요. 다른 학교는 20-30명 정도거든요. 이 사람들이 4년 동안 모든 수업을 같이 듣는 거예요. 그것도 9시부터 6시까지요. 그러다보니까 다양성이 없는 거죠. 고인물인 거예요. 그게 이 치과계 집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폐쇄되어 있는 것, 모두의 이해관계가 같은 것.

 

기본적으로 담합이 아주 쉬운 구조군요.


다른 의사들 경우 과도 다양하고요. 병원의 형태나 규모도 다양하기 때문에 같은 의사라도 서로 이해관계가 저마다 다르죠. 그럴 때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그나마 바른 쪽으로 가는데요. 치과의사들은 거의 모두가 자기 병원, 개인 병원의 의사가 되거든요. 모두의 이해가 완벽히 일치해요. 그러니까 튀는 사람을 용납 못하죠. 선배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튀지 마라”예요.

 

저자 소개 글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다니며 독특한 왕따 문화에 놀랐고’라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 이 말씀인 거죠?


네,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튀면 깎아 내리고 욕해요. 공부도 조용히 잘해야 해요. 시험도 조용히 잘 보고, 얌전히 있어야지 교수님한테 예쁨 받거나 이러면 욕을 먹어요. 치대마다 ‘독사’라는 말이 있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학점 잘 따는 사람을 부르는 말인데요. 당연히 완전히 욕먹는 사람이고요. 치대 나온 사람들은 독사라는 말을 다 알 거예요.

 

 

_15A1979.jpg

 

 

이견이 없는 팩트예요


말씀을 들어보면 군대 문화와 아주 흡사한 느낌이 들거든요. 폐쇄적이면서 위계가 심하고, 상부의 말에 복종해야 하고, 튀면 안 되고요.


선배 권위도 되게 심하죠. “본과 생활 힘들게 하고 싶냐?”가 선배들이 하는 말인데요. 본과생들 케이스 점수를 레지던트들이 주거든요. 그때 괴롭힌다는 말이에요. 동시에 아주 편하게 본과 생활을 만들어줄 수도 있어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제가 본과생 때 지하철 총파업이 일어난 적 있거든요. 선배가 아래 학년 강의실에 왔어요. 그러더니 정부의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집회에 나가야 한다, 너희도 전부 참석해야 한다, 안 나오는 사람은 본과 생활 힘들 줄 알아라, 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독재잖아요.(웃음)

 

이 이상한 이야기를 알리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나요? 이대로 안 된다,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거든요.


스스로도 많이 자문해봤어요. 나는 왜 이러고 싶을까, 하고요. 그런데 그걸 잘 모르겠어요. 사명감 같은 게 없진 않지만 정의감에 불타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거든요. 그냥 말이 안 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오기 같은 것도 생겼고요. 지금도 싸게 하는 치과의사들, 또 제가 속해 있는 유디치과가 치과계에서는 공공의 적이거든요. 그들에게 저희가 나쁘다는 건 이견이 없는 팩트예요. 의견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죠. 저는 그런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분위기 안에서 그것이 이상하다고 말해주고 싶은 오기 같은 게 있어요.

 

싸게 하는 치과는 전체 치과계에서 어느 정도나 돼요?


일단 유디치과가 전국에 100개니까요. 치과는 2만 개 정도 되고요. 1% 이하죠.

 

겪은 일들 가운데 선택한 이야기와 선택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 가령 일명 ‘반(反)유디치과법(의료인이 의료기관을 2개 이상 개설하지 못하도록 막은 현행 의료법 33조8항)’과 같은 일은 책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제가 보기에는 너무 이상한 일인데 일반인이 볼 때는 관심 가지 않는 얘기도 있을 수 있죠. ‘반유디치과법’이 저희가 받은 괴롭힘 중 가장 큰 거고요. 이를 통해 아예 저희를 불법 집단으로 만들었는데요. 그 얘기를 뺀 이유는 ‘치협(대한치과의사협회)’과 유디가 싸우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책은 치과계에서 일어난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다룬 것이고, 그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이것은 실은 유디치과가 대표로 당한 일이지 소소하게는 다른 치과들도 당해온, 지금도 당하고 있는 일이에요. 본질은 진료비고요. 치과계에서 가격 때문에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일들을 알리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뺐어요.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늘 궁금한 건 결말 이후거든요. 『임플란트 전쟁』도 한 국면이 일단락이 되면서 끝이 나잖아요. 10년 싸움을 지나온 지금, 어느 정도나 바뀌었다고 느끼세요?


바뀐 건 없어요. 법을 바꿔서 저희를 공격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기사를 보면 아시겠지만 현재 저희가 기소되어 있는 상태인데요. 그 법 자체가 문제 있다, 해서 위헌 여부를 가리기 위해 해당 내용이 헌법재판소에 몇 년째 쌓여 있어요. 그것은 저희의 일이고요. 가격을 싸게 하는 치과를 괴롭히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계속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죠. 주인공이 처음 치과를 개원해서 동네치과협회로부터 당하는 일 있잖아요. 그런 일도 여전해요. 여전히 싸게 하는 치과들은 욕을 먹고 있어요.

 

책에는 치과의사 익명게시판 ‘덴탈갤러리’가 폐쇄되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아닌가 봐요.


익명게시판이 실제로 폐쇄되었어요. 환자 블랙리스트 때문에요. 그런데 ‘닉네임게시판’으로 바뀌었어요. 익명게시판 때는 완전 익명, 그러니까 밑에 글을 쓰고 그 위에 글을 써도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곳이었고요. 이제 닉네임은 있어요. 가보면 지금은 최저임금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요. 치위생사, 간호조무사 월급이 200만원이 거의 안 되거든요. 그 정도면 이것저것 따지면 거의 최저임금이잖아요. 그게 힘들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치대 정원은 줄여야 한다고 하고, 치위생과 정원은 늘려야 한다고 해요. 표리부동이죠. 그런데 치위생사가 모자랄까, 하면 아니거든요. 실제 일하는 치위생사 비율이 얼마 안 돼요. 월급을 안 올려주니까요. 치위생사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고요. 월급이 적어 취업하지 않는 게 문제니까 월급을 더 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정원 늘리자는 얘기만 하죠. 그러면 초년생이 많아지고 그들은 싸게 줄 수 있으니까요.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거예요


사실은 그래도 뭔가가 조금은 바뀌었겠다, 싶었거든요. 선생님의 10년 싸움으로 처음에 나도 당했다면서 쪽지를 보내오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오히려 반대예요. 전에는 미워하고 욕만 했지만 몇 년 동안 첨예하게 대립했잖아요. 그런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말하지 않아요. 그때는 적군, 아군 개념이 없었는데요. 지금은 적군과 아군이라는 경계가 지어진 거예요. 저들이 나쁘다, 가 되어버린 거죠. 그나마 좋아진 건 있어요. 전에는 괴롭히는 것도 공문으로 보내고 했잖아요. 이제 그런 건 없어졌어요. 공식적인 괴롭힘은 없어졌는데요. 알음알음, 은근하게 괴롭히는 일이 생겼죠. 몸은 편해졌다고 할 수 있고요. 저희가 주적이라는 개념은 명확해진 거예요.

 

그래서 가장 힘든 게 뭘까요? 채용이 어려워지는 것, 직원이 떠나는 것도 참 힘든 문제일 것 같아요.


얼굴 팔리는 일을 다들 부담스러워하죠. 치과의사들도 대체로 개인주의적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오르내리면 괴롭잖아요. 싸게 하는 치과가 있으면 그 치과 광고나 홈페이지 같은 것을 캡쳐해서 게시판에 올려요. 그러면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거예요. 저는 그런 게 별 상관이 없지만 치과의사들은 많이 괴로워해요. 그러다가 ‘싸게 해서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올리기도 하는 거죠. 처음 협회에서 유디치과 괴롭힐 때 유디치과를 하던 분들이 많이 나갔어요. 워낙 외압도 많았으니까요. 치과계가 진짜 좁은데 어디서 제명한다고 하면 얼마나 공포를 느끼겠어요. 사실은 별일 없지만 말이에요.

 

우리 사회 전반에 갑질과 적폐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 치과계의 이런 문제들은 해결이 요원해 보이거든요.


요원한 이유는 이런 것 같아요. 치과의사 분위기가 우울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이유가 전보다 못 벌어서 그런 거거든요. 점점 못 벌고 있고요. 그러니까 점점 더 화가 나는 거예요. 이때 누군가에게는 화를 내야 하는데요. 그 대상이 싸게 하는 치과인 거예요. 치과의사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린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독자가 꼭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은 뭔가요?


의료계에 이런 일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폐쇄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이게 세상에 드러나면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책은 드러내는 작업이었고요. 알게 되면 달라지겠죠. 임플란트가 200-300만원 하니까 재료값이 80만원 하는 줄 아셨잖아요. 물론 재료만 사다가 파는 것은 아니니까 재료비 이야기만 하면 안 되지만 말이죠. 임플란트 10개만 하면 3천만 원이고, 그럼 그 달의 운영비는 다 빠지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수익이고요. 그저 그런 것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저절로 변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폐쇄된 정보의 울타리를 터뜨리면서 동시에 치과의사들이 좀 이상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당신들 이상해(웃음) 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알리는 일을 계속 하시려는 거고요?


네, 사실 제가 치과의사여서 이런 말을 하는 게 특이하게 보이는 것이지 시민단체나 이런 곳에서는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치과의사가 했기 때문에 주목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TV 토론 프로그램 보면 의사들은 나와서 다 의사 편만 들어요. 의사가 나와서 의료계 비판은 거의 안 해요. 하면 큰일 나니까요. 저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가령 ‘문재인 케어’에 대한 의견도 여러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어요.


국가에서 보험으로 치료비를 보장해주겠다는 것인데요. 이때 가령 적정 진료비는 5만원 정도인데 국가에서 3-4만원으로 책정할 것 같다, 그러니 반대한다, 고 하거든요. 하지만 현재는 5만원 하는 진료를 50만원 받고 있단 말이에요. 그 얘기는 안 하죠. 의사가 돈 많이 버는 것 나쁘지 않아요. 그 욕망을 인정하는 게 자본주의고요. 그런데 그걸 권리처럼 생각하면 문제잖아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문장이 “벤츠 타고 출근하면 잘되던 진료가 그랜저 타고 출근하면 잘 안 됩니까?”(233쪽)예요.

 

“예전에는 치과 문 닫는 시간 되면 은행 직원이 자루를 들고 수금하러 왔대. 오래된 치과 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은 보통 그 치과 원장이 주인이라는 말도 있었고. 돈을 하도 많이 벌어서 그 빌딩을 사게 된다는 거지. 아마 지금 치과의사들은 그때의 환상과 지금의 현실을 비교하는 것 같아.”(209쪽)

 

수가 떨어지면 진료 질이 낮아진다는 얘기 의사들이 많이 하잖아요. 차 팔고, 방 빼야 하는 정도면 진료 질이 낮아질 수 있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보험에서 나는 손실을 비보험으로 메우고 있다, 비보험을 보험에 편입시키면 적자로 진료 봐야 한다, 고 하는데요. 지금 100원 적자 나는 걸 만원으로 채운단 말이에요.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게 보험이 이미 대부분인 과는 문재인 케어에 찬성한다는 사실인데요. 비보험이 많은 과일수록 싫어해요. 한의과, 정형외과 같은 곳은 좋아하거든요. 결국은 비보험 놓칠까봐 반대한다고 봐야 해요.

 

 

 


 

 


 

 

임플란트 전쟁고광욱 저 | 지식너머
“왜” 가만히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그들에게, 가만히 등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어서 썼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한정주 “인간의 도리는 관계에서 나온다”

$
0
0

기사내_1.jpg

 


한자는 오랜 시간 인간의 형상과 본성을 투영해 왔다. 화목할 화(和)에는 농경사회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의 화목함이 떠오르고, 아첨할 첨(諂)에서는 교묘한 말 속에 함정이 있다는 교훈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재벌가의 갑질과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한 폭력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어떤 한자를 떠올릴까?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는 뜻에서 짐승 수(獸)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부끄러운 줄 알라는 뜻에서 부끄러울 치(恥)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정주 작가는 이처럼  『인간도리 인간됨을 묻다』에서 한자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았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고칠 개(改)와 어질 인(仁)을 떠올린다. 잘못을 고치는 용기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인간됨’이기 때문이다

 

 

기사내_3.jpg

 

 

관계에서 인간됨이 시작된다


출판사에서 먼저 ‘한자에서 인간학을 읽는’ 책을 만들자고 제안하셨다고요.

 

한자를 파자(破字)해서 한자에 담긴 의미나 뜻을 가지고 요즘 독자들의 읽는 속도에 맞게 짧게 써보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다른 전작에 비해 집필하기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얼른 들었어요. 평소에 사람들과 모여 차 한잔하며 나눈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요. 많이 고민하지 않고 하자고 했죠.


뉴스를 보거나 일상생활에서 감정이 생기면 한자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고 하셨어요. 예를 든다면 어떤 걸까요?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국정농단 사건이 있었어요. TV를 보면 항상 자기가 잘못했다거나 뭔가 다른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사람이 없었죠. ‘왜 저렇게 당당하지? 왜 아무렇지도 않지?’ 생각해보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구나 싶었어요. 남 앞에 잘못한 게 없으니까 부끄러운 게 없고, 부끄러운 게 없으니까 당당한 거예요.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부끄러울 치(恥)와 고칠 개(改)였어요. 공자와 제자 자로 간의 이야기인 지과필개(支過必改)도 떠오르고요.


그래서 그럴까요? 책의 홍보 문구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전하는’ 교양 한자 에세이에요. 요즘 세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경시한다고 느끼시나요?


그런 편이죠. 다만 독자들이 도덕이나 윤리를 훈계하고 가르치는 책으로 읽을까 우려가 돼요.


고전을 이야기하면 일단 교훈적이라고 느끼죠.

그런 의도에서 쓴 건 아니거든요. 도리어 인간됨이라는 걸 제 나름대로 질문을 던진 거였어요. 흔히 고전을 ‘사람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가르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추상적인 개념의 ‘인간됨’은 실체가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예의 바르고 정의롭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례하고 폭력적일 수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인간됨을 이야기하는 건 상대적이에요. 상대적이라는 말은 결국 관계죠. 개인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서 인간됨이 오는 것 같아요.


책에서도 관계를 중심으로 한자를 풀어 설명했어요.


예를 들어 흔하게 직장 내 회식 자리에서 상사 옆에 여직원을 앉히는 게 예의 바르다고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어요. 여직원 입장에서는 예의가 아니라 폭력이죠. 인간됨은 결국 관계에서 그 사람이 도리를 다하는지를 보는 게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인간됨 아닐까요?


선생님이 생각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이 담겼다고 해주셨는데, 독자에게 드러내면서 두려운 마음도 있으셨다고요.


사람이 다양하고, 보기에 선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면이 있어요. 자기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요. 그런 면에서 부담은 되죠. 사람들이 바라볼 때 이 책에 쓴 제 생각대로 제가 살았다고 볼 지도 모르잖아요. 사실 그렇게 살아서 쓴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고민이 있었고, 스스로 더 많은 문제제기를 한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닐까 싶어요.

 

 

낡고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 찾기


주로 한자를 파자(破字)해서 한자가 어떤 뜻을 가지게 됐는지 썼어요. 강의하실 때도 주로 쓰시는 방법인가요?


독립적으로 한자만 강의한 적은 없고요. 강의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고하는 습관과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이 이야기해요. 대개 주변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오히려 고전을 이야기할 일이 없어요. 한자 이야기를 잡담처럼 하죠.


파자가 한자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무턱대고 외우는 방식보다는 의미를 새기니까요. 이미지가 남는 게 기억이 오래가잖아요. 파자해서 구성이나 의미를 새기면 이미지가 남더라고요. 제 나름대로는 한자를 공부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권하고 싶어요.


한자를 보면 볼수록 파낼 거리가 많아 보여요. 그런 면이 고전을 공부하는데도 연료가 되지 않았을까 싶고요.


한자는 한국어의 일부로 봐야 해요. 한글로 된 것만이 한국어가 아니에요. 한자는 오래전부터 우리 말속에 존재했고, 이미 한국어의 일부예요.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근대 이전에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정보,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지식을 어떻게 알겠어요. 한자를 쓰지 말자는 것은 사실 역설적으로 한자를 아는 전문가들의 지식 권력을 키워주거든요.


모두가 모르니까요?


아예 한문을 안 하면 모를까, 우리가 쓴 모든 근대 이전 책은 한자로 되어 있어요. 우리 역사와 우리 문화 자체인데 몰아낼 수 없죠. 한글만 쓰자는 건 한자를 아는 사람들의 지식 권력만 키워주는 거예요. 한자 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거죠.


젊은 나이가 지나서 한문 공부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보통 한문을 깨치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한문이나 동양고전을 공부하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없어요. 논어나 맹자로 공부하고 암송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리를 깨친다는 게 시간적으로 보면 보통 10년 걸려요. 전통적으로 공부했던 방식으로 보면 그래요.


통상적으로 천자문 이후 소학을 배우는 등 정해진 방식이 있죠.


제도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따르는 길이 있죠. 그런데 한문 공부를 하면서 제도권의 길을 거친 사람들이 가진 고정적인 면을 우려했었어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고전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도 정통적이고, 거기서 벗어나면 일탈로 보는 경향이 있죠. 저는 정통에서 벗어나 집필 활동을 했기 때문에 훨씬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은 걸 발언하는 편이었어요. 제 나름대로는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기도 한데, 단지 낡고 오래됐기 때문에 고전을 보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낡고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으니까 읽는 거죠.


새로운 것이라면 뭘까요?


제가 고민하는 문제, 우리 사회, 우리 시대가 고민하는 문제죠.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없고, 결국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건 과거뿐이에요. 낡고 오래된 것들 중에서도 참조할 가치가 있는 것만 고전으로 살아남는 것 같아요. 『사기』처럼 몇천 년이 흘러도 살아남는 게 있는가 하면 몇백 년 전 것도 없어지기도 하죠. 조선 시대의 『사기』 읽기와 지금의 『사기』 읽기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조선시대 지식인이 고민했던 문제와 우리가 가진 문제는 서로 다른걸요.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런 것 같아요.


작가 소개를 보면 베네디토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과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 철학을 바탕으로 글을 쓰신다고요. 옛것과 새것 사이 균형은 어떻게 잡으려고 하나요?


박지원 선생 시절에도 어떻게 옛것을 배워 익히고 다룰 것인가를 가지고 치열한 고민이 있었을 거예요. ‘법고’를 하는 방식은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는 박지원 선생의 방식이에요. 옛것을 배우고 익히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걸 찾아내는 거죠. 또 하나의 방법은 아예 과거를 부정하는 거예요. 옛것과 낡은 것을 부정하고 거칠고 날 것 그대로라 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죠. 첫 번째 방법은 반드시 필요해요.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없으면 뭐가 새로운지도 모르고 방향을 잡을 수 없잖아요. 그러나 옛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돼요. 어느 순간 옛것을 부정해야 해요. 그래야만 자기 게 나오는 것 같아요. 제 나름대로도 고전을 그렇게 읽으려고 하는데 그런 수준까지는 아직 못 왔어요.

 

세월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질 것 같아요. 점점 옛 것들이 많이 쌓여서 배우는 데 더 오래 걸릴 테니까요. (웃음)


맞아요. (웃음)

 

 

기사내_2.jpg

 

 

지금 시각으로 해석하는 한자


혐오할 혐(嫌)에 담긴 계집 녀(女) 자에서 차별 감정을 비판한 대목이 인상 깊었어요. ‘이제라도 그것들을 들여다봐야 할 때’라고 쓰셨는데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도 있듯이, 언어는 어떻게 보면 그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고나 감정이 표현되어 있어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지배적인 담론과 주류의 사고를 읽을 수 있잖아요. 계속해서 남성이 모든 걸 지배했던 사회였고, 좋은 건 자기들이 다 가지고 부정적인 건 희생양에게 뒤집어 씌운 결과물인 거죠.


한편으로는 계집 녀(女)에 담긴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대에 와서 잘못됐다는 의식이 생겼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거겠다 싶기도 했어요.


맞아요. 지금 시각으로 계속 해석해야 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은 혐(嫌) 자를 당연히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저도 솔직히 한자를 오래 공부하면서도 왜 여기 계집 녀 자가 있는지 안 보였어요.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지고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들을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했던 시절을 지나, 젠더 감성이 확산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니 비로소 이 글자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 거죠. 어떻게 보면 핍박받는 사람들이 자기발언을 계속 해야 문제의식이 생기고, 문제의식이 생겨야지만 당연했던 것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자기애의 바탕에는 사랑이 아닌 미움이 존재한다’(101쪽)는 말도 흥미로웠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자’는 말이 요즘 트렌드인데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할 때가 많아요. 사람이 같을 수 없으니 구별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차별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같이 쓰고, 개성과 독선을 같이 쓰더라고요. 내가 내 멋대로 살고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는 걸 개성이라고 해요.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고 해꼬지를 하면 독선이죠. 자기애도 비슷한 것 같아요.


『문장의 온도』  독자 중에서 SNS에 책 구절을 올리신 분이 있었어요. 혐오가 담긴 말을 굉장히 많이 쓰시더라고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조롱해도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소신껏 하는 사람이라면서 이덕무 선생 글에서 그 내용을 찾더라고요. 독선을 개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완전할 완(完)에서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끌어내셨어요. 자기답게 살라는 말과 자기애는 차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자기답게 산다는 건 그렇게 사는 다른 사람의 삶도 존중한다는 거죠. 용서할 서(恕)나 너그러울 관(寬)에 그 내용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남과 다른 나와, 나와 다른 남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존중해야죠.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차별하고, 상처 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다들 힘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여유가 없는 거죠.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여유가 없어요.


한편으로 바랄 망(望)에서는 루쉰을 떠올리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박지원 선생, 중국에서 찾으면 루쉰, 서양에서 찾으면 니체, 이런 사람들을 좋아해요. 그런 분들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아요. 인간이 갈 수 있는 경계 끝까지 가면 몰락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면을 봤음에도 삶을 긍정한 분들이잖아요. 루쉰의 말 중에 ‘희망에 의지하지도 말고 절망에 좌절하지도 말라’는 말을 좋아해요. 희망도 절망도 실체가 없으니 자기 갈 길을 가라는 게 루쉰의 삶이나 문학이 던지는 메시지 같아요.

여러 한자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좋아하는 한자는 뭘까요?


두 가지예요. 하나는 고칠 개(改). 누구나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하고 단점이 있죠. 그걸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공자나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도 어떻게 보면 남보다 자기 잘못과 실수를 훨씬 많이 발견한 사람 같아요.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건 자기 단점과 잘못을 고치려고 했던 거죠. 실수나 잘못을 알았을 때 고치려고 했냐 하지 않았냐, 이 차이인 것 같아요.


나머지 한 글자는요?


용서할 서(恕) 자요. 우리가 용서를 그냥 봐준다는 의미로 보는데, 봐주는 건 묵과에 가까워요. 진심으로 그 사람에 대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잖아요. 용서할 서 자는 같을 여(如) 자에 마음 심(心)자가 합해 있어요. 내 마음을 살피고 헤아려서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보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아프다면 자신도 아픈 마음이 드는 게 진정으로 용서한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내 마음을 헤아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내 마음을 알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던지려고 한 메시지, ‘관계의 인간됨’이 용서할 서 자에 가장 잘 담겨있지 않나 생각해요.


최근에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이덕무 선생과 관련한 글을 계획하는 게 두세 권 더 있어요.  『문장의 온도』가 이덕무 선생의 문장과 소품을 가지고 이야기했다면, 후속작으로 이덕무 선생의 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시의 온도』  탈고를 끝내 놨어요. 그 정도 하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덕무 선생의 글을 다룰 수 있을 것 같고, 하나는 이덕무 선생 평전을 계획하고 있어요. 최근 강의는 주로 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그것도 탈고해서 곧 출간될 예정이에요. 그게 나오면 본격적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가지고 제가 말씀드렸던 낡고 오래된 것 속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문제, 또는 사회 문제, 이런 것들을 통해 지금의 숙제를 질문하고 모색해보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당분간은 사기를 중심으로 집필이나 강연 활동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요.


 

 

인간도리 인간됨을 묻다한정주 저 | 아날로그(글담)
인간의 형상과 본성을 본떠 만든 한자를 통해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됨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여러 고전과 문헌을 바탕으로 그 답을 성찰한 결과물이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혜령 “행복하려면 결핍을 받아들여야”

$
0
0

DSC07848-사본.jpg

 

 

브런치에 ‘평화쿤데라’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김혜령 저자는 ‘불안학개론’이라는 매거진으로 브런치프로젝트 은상을 수상했다. 불안을 향한 그녀의 관심사는 첫 책 『불안이라는 위안』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자아, 연애 상대, 직장 생활, 가족 관계에서 느끼는 불안을 유형별로 다루며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한 이 책은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며 꾸준하게 인기를 누렸다.

 

불안에 맞서는 요령을 얻었다면 감히 행복해져도 좋지 않을까. 두 번째 책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 이 출간됐다. 첫 번째 책에서 건넨 다정한 메시지를 이번 책에도 담았다. 방대한 분량은 아니지만 특유의 다정한 문장, 적재적소에 인용된 고전과 사상가는 책을 풍성하게 한다. 김치찌개에 얽힌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이 책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태도로 완벽하지 않아도 될 것을 주문한다. 행복은 부나 명예와 같이 거창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일상 속 소소함으로부터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이 주는 메시지다. 저자의 다정한 문장과 함께 이 책에 실린 에리히 프롬, 빅터 프랭클 등등의 명문장도 잠들어 있었던 행복 회로를 깨우는 데 도움이 되리라.

 

 

DSC07839-사본.jpg

 

 

젊은 사람이 쓴 행복론

 

알려지지 않은 저자의 첫 책이었는데  『불안이라는 위안』이 1만 부 팔렸습니다. 

 

 제 글보다는, 불안이라는 주제에 사람들이 관심이 많았던 게 아닐까요. 누구나 다 불안하잖아요. 그렇다고 굳이 내세워서 이야기는 하지 않고요. 책으로 읽기 좋은 주제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두 번째 책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를 냈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두번째 책 작업 들어가면서는 회사를 그만두고 글에만 집중했고요. 집필 끝내고는, 심리학 쪽 공부를 계속 하면서 다음 책 구상하고 있습니다.
 
행복론 중에서는 종교인이나 나이가 좀 지긋한 사람이 쓴 책이 많잖아요. 이번 책에서 행복을 다뤘어요. 젊은 사람이 쓴 행복론이라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제가 학자나 수행자가 아니어서 이 주제를 쓴다는 게 조심스럽긴 했는데요. 첫 번째 책 『불안이라는 위안』 이 좀 무거운 내용이었잖아요. 그래서 다음 책은 좀 더 밝은 걸 써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긍정적인 정서에 관해서 얘기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불안이든, 행복이든 둘 다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주제였고, 할 말이 많아 쓸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전작과 이번 책은 어떤 점이 다를까요.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의 전체 구성은 비슷한데요. 첫 번째 책을 쓸 때는 제 생각보다는 다른 책이나 전문가의 글을 많이 인용했어요. 아직은 제 글만으로는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아서였죠. 두 번째 책은, 거기서는 좀 자유로워진 듯해요. 좀 더 제 이야기를 편하게 써 보고 싶었고, 다행히 에디터님도 그 방향으로 조언을 해주셔서 이번 책은 전반적으로 제 생각이 많이 들어갔어요. 
 
또 다른 점이라면,  『불안이라는 위안』은 제 문제에서 시작된 얘기들이 많았어요. 반면,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 는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시작된 얘기들이 많아요.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행복에 관해 생각할 계기가 많았어요. 기쁨이 무엇인지 배우기도 했고 또 저마다 다른 이유로 행복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서 속상하기도 했어요. 마음이 자주 아프고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는 사람들을 보며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고민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들을 많이 풀어냈습니다.

 

 

김치찌개에 양파 빼도 괜찮아, 그게 행복
 
책 머리말이 김치찌개로 시작합니다. 행복과 김치찌개는 어떤 관계인가요.
 
머리말을 제일 마지막에 쓰는데요. 원고를 다 쓰고 나서, 저녁을 준비할 때였어요. 자취할 때는 레시피대로 요리하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재료도 모두 갖추고 나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김치찌개를 만드는데, 양파를 안 넣은 걸 뒤늦게 발견했어요. 그 날 요리하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아 내가 융통성 있게 잘 하고 있구나, 몇 가지 빠져도 큰 문제 아니구나, 어쩌면 행복도 이와 같지 않을까? 몇 가지 빠져도 문제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 그게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말에 이 에피소드를 넣었어요.
 
시중에 행복에 관한 책이 많아요. 최근에도 김형석 선생님의  『행복 예습』이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고요. 어쩌면 우리가 행복하지 않아서 이런 행복 관련 책이 꾸준히 나오는 건 아닐까요? 책에서도 썼지만, 실제로 주변을 보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요. 왜 행복하기가 힘들까요?
 
제가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요. 제 생각인데,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들을 행복 위에 두고 사는 듯해요. 인정이라든가, 부, 체면 이런 가치들이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한 사람도 많고요. 그러다 보면 방향성을 잃고 행복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큰돈과 엄청난 인내로 얻을 수 있는 무엇보다, 바로 지금 여기서도 부담 없이 내 기분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작은 방법들 아닐까. 그게 바로 명품보다 더 마음의 가성비가 높은 기쁨이 되어주지 않겠는가.'(203쪽)가 이 책의 주제인 듯한데요. 선생님만의 기분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너무 많은데요. 커피 좋아하고, 카페에 혼자 있기, 라디오 듣기 좋아해요. 유머 영상도 즐기고요. 동물과 아기 좋아해서, 이런 영상이나 사진도 많이 봐요. 기분 안 좋을 때 친구 아이들, 조카들 사진 쭉 보곤 해요. 보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죠. 요즘은 날씨가 좋고, 하늘이 예쁘잖아요. 하늘 사진도 많이 찍어요. 
 
기분 안 좋을 때는, 주로 언제인가요. 최근에 그런 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커피 못마실 때요... 농담이고요, 기분이 안 좋다기보다는 일상에서 불쑥불쑥 '사는게 쉽지 않네' 이런 생각이 찾아들 때나 문득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 때요. 그럴 땐 아무래도 발걸음이 무겁죠. 개인적인 부분은 그렇고요. 

 

다른 이유로는 생명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인간을 포함해서 동물들이 자유롭게 살지못하는 것을 목격할 때인 것 같아요. 같은 맥락에서 아동학대나 동물학대 문제를 접할 때 정말 속상합니다. 제 책에도 그런 내용을 썼는데요, "어쩌면 모든 생명체의 스트레스는 태어난 유전자대로 살지 못하는, 그러니까 개가 개답게, 돌고래가 돌고래답게, 인간이 인간답게, 내가 나답게 살지 못하는 데에서 유발된 것이 아닐까."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 다시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요.

 

 

DSC07889-사본.jpg

 

 

감정 이해하기, 감정 다루기 평생의 화두

 

두 책 모두 감정에 주목했습니다. 지금 심리학 공부를 계속 하고 있고요.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감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항상 가까이에 있었어요. 그런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가 고민이었어요. 본인이 가장 힘들겠지만, 주변 사람이 상처받는 일도 더러 생기고요. 왜 어떤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고 단단한데 어떤 사람은 감정을 다루는 게 힘들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정작 커서 보니, 제 감정을 제대로 못 다루고 있더라고요. 제 감정이 어떤지를 못 들여다본 거죠. 저 자신이 건강하다 생각했는데, 20대 중반 넘어서 보니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저만이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자기 감정에 대응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관계와 삶이 망가진다거나 생활이 어려워지죠. 감정이라는 것은 평생의 화두였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 문제가 중요했고, 어려웠고, 잘하고 싶었어요.
 
글 쓰는 사람으로 살기로 한 사연도 궁금합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텐데,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야지' 하고 결심한 적은 없어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 쓴 거고, 운이 좋아서 책을 냈을 뿐이죠. 글은 늘 썼고, 책을 안 내도 계속 쓸 거예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노래를 안 듣고 안 흥얼거릴 수 없듯, 저도 그래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문장이란?
 
생각을 확장시켜 주는 게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공감도 좋고, 단순하게 재미 있는 글도 좋긴 하지만 고민하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나의 문제를 건드려주고, 고민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신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면, 일상이 달라질 수 있다면, 그런 문장, 글이 좋아요.
 
에리히 프롬, 빅터 프랭클을 자주 인용했어요. 요즘 즐겨 읽는 저자는 누구인가요.
 
최근에 꽂힌 작가는 전이수 동화작가, 저보다 어린 친구인데요. 아이 키우는 친구로부터 추천받아서 책을 읽었어요. 제가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작가로서 이렇게 써볼 수 있겠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작가가 알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풀어내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요. 저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많은 편인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들어줄지, 거부감이 없을지, 오만하게 들리지는 않을지 고민이 되거든요. 그 작가가 다양성 생명, 동물, 장애, 입양 등을 다루고 있는데 제 관심사랑 많이 겹쳐서 더 관심이 가죠.
 
『불안이라는 위안』 에서 "사상 유례없이 취업이 어려워졌고 실직률도 높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먹고살기 힘들어진 때에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정작 인문대생들은 취업이 어려워졌는데 말이다."(171쪽)라고 썼습니다. 최근에는 TV에 출현하는 유명 인문 저자들의 책으로 쏠림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글도 있었어요. 인문 책을 내는 입장에서 지금 인문학 열풍에 관해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일부 저자만의 책이라도 팔린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열풍이라고 할 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안타까운 게, 사실 저희가 성장 과정에서 이미 다 배우고 생각했어야 하는 내용이잖아요. 정작 초중고 때는 가정이든 학교에서든 안 알려줘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음은 무엇이며 행복이 뭔지, 삶이 불안한데 어떻게 해야 하지 등등. 학생 때 배운 게 없으니, 사회생활하면서 문턱에 걸리고 넘어지면서, 그제서야 필요성을 깨닫죠. 누구나 결핍이 있고, 이런 결핍을 매체에서 건드린 거죠. 특정 인기 저자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고 고민해보는 게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열풍이 가라앉고, 보편화되면 제 책도 좀 더 읽힐 수 있지 않을까요. (웃음) 사는 게 힘든데, 방법은 모르겠고 심리학이 뭔가 혜안을 줄 것 같은 기분을 주니까 심리학 책도 많이 찾는 듯해요. 건강하게 푸는 방법을 스스로 잘 찾으면 좋겠고, 그 방법이 책에서만 그치지만 않았으면 해요.
 
책에서 명상을 추천했습니다. 명상이 작가님이 찾은 방법 중 하나일까요.
 
명상이 일상을 사는 데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일 수 있거든요. 다만 명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낯선 이미지가 있죠. 특정 종교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고요. 저만 해도 고등학교 선생님이 가르쳐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싫었어요. 재미 없고, 뭔가 사이비 같고. 저도 받아들이기까지 무수히 많은 일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려줄지 고민이에요. 나중에 꼭 쓰고 싶은 여러 주제 중 하나가 마음챙김에 관한 건데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이에요. 유발 하라리도 명상을 말했다고 하니까, 제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고요. (웃음)
 
학창 시절 작가님은 왠지 모범생이었을 것 같아요.
 
겉으로는 모범생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진짜 모범생은 아니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두 번 정도 진지하게 학교 관두는 것에 관해서 생각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지만 아무도 모르고 지나간 적이 있었어요. 가까운 친구에게는 계획을 이야기했는데,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죠. 가출도 치밀하게 생각했지만 용기가 없어 지나갔고요. 그때는 내면의 문제를 방출할 방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내면에 있는 것들을 건강하게 발산하는 방법을 글쓰는 것말고는 하나도 몰랐죠. 사람들과는 잘 지내야 하고,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프레임에 갇혀 꺼내보지 못하고 지나갔네요.

 
심리학에서는 외향성, 내향성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작가님은 내향성이 강한 인상입니다.
 
단적으로 말하긴 어려운 게, 사람들 만나면 잘 지내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주기적으로 완전히 고립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싸이월드를 비롯해서 온라인으로 하는 활동도 꾸준하게 잘 못했죠. 갑자기 연락 끊고 숨어버릴 때가 있어요. 지금도 좋은 글을 써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은둔하고 싶은 생각도 불쑥불쑥 들어요. 어떻게든 도망갈 생각을 주기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아직 대인 관계 능력이 좋지 않나, 고민하다가 아 그냥 이렇게 평생 살겠구나, 싶어요.
 
다음 책은 어떤 주제를 다룰 계획인가요.
 
쓰고 있는 건 늘상 있는데요. 넓은 의미의 사랑에 관해 써보고 싶어요. 사랑이라고 말해지는 모든 관계에 관해서요. '사랑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와 같은 강박이나 사랑이 어떻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또는 너무 쉽게 남발되거나 반대로 너무 부족한 사랑에 관해서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이번 책의 주제인 행복과 관련하여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추석을 행복하게 보내는 법, 알려주시죠.
 
아하하... 제가 과연 이 질문에 답할 자격이 있을까요. 저도 명절은 어렸을 때부터 무거웠어요. 그냥,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 같아요. 너무 많은 게 얽혀 있잖아요. 나를 얼마나 챙길 것인지, 다른 사람을 어디까지 챙길 것인지 기준을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자신의 한계를 알았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다 지나갈 수 있어요. 억울하고 짜증나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는데요. 어떤 사람은 속병으로 몸이 망가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역할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역할에서 얼마나 자신을 지킬 것인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챙길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나의 한계가 그리 높지 않다면, 냉정하게 나쁜 사람이 되어야겠죠.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김혜령 저 | 웨일북
주변의 사물을 보는 시선, 대화의 소재를 선택하는 과정, 크고 작은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 등 일상의 여러 패턴 속에서 근육은 단단해지거나 반대로 소실된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젊은 작가 특집] 정은 “좋아하는 걸 여기 다 써버렸어요”

$
0
0

_15A2988.jpg

 


일 년에 한 달, 한 도시에서 사는 삶을 선택하고 그 이야기를 독립출판으로 출간하기도 했던 정은 작가는 2014년, 다른 도시 대신 소설을 선택했다. 한 달을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서점, 극장, 무인 경비 회사, 절, 고시 학원 등에서 일하며 생활하던 작가는 소설 쓰기가 여행과 무척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책을 듣는 시간』의 초고가 그때 완성되었다. 하지만 번번이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다. 어느 공모전에서는 최종심까지 올랐지만 당선되지 않았다. 그만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계속 하는 게 맞다”고 한 어느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정은 작가는 계속 썼다. 『산책을 듣는 시간』은 제1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수지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다정한 세상 속에 사는 인물이다. 그에게 듣지 못하는 불편함은 없다. 엄마와 둘만의 언어로 대화하고, 자신만의 고요를 즐기고, 몸으로 노래를 부른다.『산책을 듣는 시간』은 장애를 남다른 능력이라 말하는 수지의 씩씩함, 뜻하지 않은 이별과 독립이라는 매운 성장통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책에서 ‘장애가 있으면 불편하다’는 식으로 쓰니까 사람들 인식도 따라가는 것 같아요. 책도,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정은 작가. 『산책을 듣는 시간』 은 장애라는 능력을 가진 수지와 자기애 강한 할머니와 함께 성장하는 친구라는 조금 다른 존재들을 보여주면서 계속 질문한다. 그 해본 적 없는 질문 덕분에 독자도 수지와 함께 성장하게 될 것이다. 

 

 

_15A2850.jpg

 


환경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표지가 작품을 많이 말해주고 있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네, 저도 정말 좋았어요. 원래 좋아하던 이윤희 작가님이 그려주셨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표지 작업을 해주셨는지 몰랐거든요. 나중에 알았어요.

 

게다가 뒷표지는 지금 저희가 인터뷰 하고 있는 그 장소예요. 맞죠?


맞아요. 아마 이윤희 작가님도 이곳에 자주 오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그려주신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뵌 적이 없어서 얼굴은 모르지만요.

 

 

커피발전소.jpg

 

 

이 공간에서  『산책을 듣는 시간』도 만들어진 건가요?


네, 맞아요. 여기서 많이 썼어요.

 

우선 제16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을 축하 드려요. 수상 연락 받고, 어떠셨어요?


오래 잡고 있던 원고였어요. 초고를 2014년에 썼거든요. 오래 고쳤죠. 이게 책으로 나올 가능성은 없겠구나, 하고 약간은 포기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화를 받았고요. 그래서 정말 놀랐어요. 

 

왜 가능성이 없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다른 공모전에도 냈었는데요. 최종심에만 오르고 계속 떨어지더라고요.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만 복잡한 마음이 들었는데요. 그러다가 수상 소식을 들었죠. 또 심사위원 분들 모두 제가 굉장히 좋아했던 분들이거든요. 그분들이 쓰신 책도 계속 읽어왔고, 어떤 식으로든 그분들의 글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더 기뻤어요.

 

많이 하는 생각인데요. 공모전과 작가 사이의 궁합도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시기에 잘 만나는 일도 작품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고요.


맞아요. 그래서 만약 제가 했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그 얘기를 꼭 해드리고 싶어요. 작품과 심사위원 사이의 궁합 문제도 있는 거니까 절대 글이 부족해서 떨어졌다는 생각은 안 하시면 좋겠다고요.

 

고독한 작업이잖아요. 작가님만 해도 2014년에 초고를 완성하고 2018년에 수상을 하신 건데요. 그 시간을 혼자 의심하지 않고 해내기 쉽지 않은 일이에요. 방금 말씀이 쓰시는 분들에게 큰 응원이 될 것 같아요.


사실은 저도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다른 일을 하려고 자격증도 따고 그러는 중이었는데요. 친구들이 그러지 말고 계속 쓰라는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어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요.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포기하기 전에는 계속 하는 게 맞다, 는 말을 들은 적 있거든요.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주변 상황이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글에 대한 소망은 계속 갖고 있었던 거죠?


오래 전부터 쓰려고 했는데 진득하게 앉아서 쓰질 못했어요. 계속 완성을 못해서 오래 걸렸고요.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10년도 더 된 것 같아요. 아주 오래됐어요. 단편을 쓰긴 했지만 좋은 글을 읽고 나면 내 글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랬죠. 때문에 늘 완성이 덜 되었다고 생각했고, 자꾸 쓰지 않게 되기도 했어요. 그래서 더 오래 걸린 게 아닌가 싶어요.


글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선생님이 “책장을 둘러보고 거기 없는 걸 쓰세요”라고 하시는데 그 말에 갑자기 놀랐어요. 그냥 다른 걸 쓰라는 얘기잖아요. 쓰려면 잘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렇다면 나도 쓸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어요. 아마 그때부터 쓰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항상 있어요. 그리고 쓰고 싶으신 분들께도 꼭 이 얘기를 전하고 싶어요.

 

수상이 남달랐을 거라 짐작한 이유 또 하나는 작가 소개 글 때문이었어요. 그동안 서점, 출판사, 방송국, 카페, 무인 경비 회사 등에서 다양한 일을 해오셨잖아요. 게다가 매년 한 달 이상 다른 도시에 머물기도 했다고요?


5년 전만 해도 소원이 그냥 1년에 한 달은 다른 도시에서 사는 것이었어요. 10년 전쯤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후 계속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려면 남은 11개월은 일을 해야 하잖아요. 한 달을 다른 도시에서 살려면 정기적인 직업을 갖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다양한 일을 한 거고요. 2014년에는 그렇게 안 살고, 한 달 동안 아무데도 안 가고 집에서 소설만 썼어요. 한 번은 쉬어 가자는 의미도 있었는데 그것도 재미있더라고요. 한 달 다른 도시 가는 것과 한 달 동안 집에서 소설만 쓰는 것이 통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더 경제적이기도 하고요.(웃음) 그때부터 한 달 동안 다른 도시를 못 가는 해에는 한 달 동안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둘만의 언어


주인공 수지나 한민뿐 아니라 할머니, 엄마, 고모 등 조금 ‘다른’ 등장인물들이 참 새롭고 반가웠어요.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어떤 특별한 장면이 있었나요?


유독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를 보면 할머니 캐릭터가 비슷하잖아요. 시골에서 올라왔거나 도시를 모르거나 하죠. 그게 이상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주변에 계신 할머니들은 다르잖아요. 저희 엄마도 이제는 할머니인데, 달라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니까요. 달라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했고요.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주변에 있는 평범한 캐릭터예요. 소설에 많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죠. 저는 그냥 흔히 있는, 평범한 인물을 담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할머니나 고모는 특히 그래요.

 

원래 이 소설의 시작은 수지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수지의 아빠와 엄마가 주인공이었고요. 수지와 한민은 주변 인물이었는데 쓰다가 주인공이 바뀐 거예요.

 

아, 그런가요? 쌍둥이 아빠라는 설정 언급이 잠깐 나오죠. 궁금했어요.


그 이야기가 쓰면서 다 빠지게 되었고요. 수지는 제가 10년 전에 경험한 일에서 나온 인물이에요. 친구들과 단편 영화를 찍은 적이 있는데요. 저는 사운드 담당이었거든요. 촬영지에서 헤드폰을 꼈는데 정말 다양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때 내가 아주 일부분밖에 못 듣고 살았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조금 적은 소리를 듣는다는 이유로 청각장애라는 말을 만든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들었죠. 세계에 있는 소리가 10,000개라면 인간은 10정도 들을 텐데 그보다 조금 더 적게 듣는다고 장애라고 하는 게 이상했어요. 그런 생각으로 처음에는 아주 낮은 주파수의 소리만 듣는 인물을 쓰려고 했고 쓰다 보니 수지가 되었어요. 한민은 아마 가장 실제에 가까운 인물일 거예요. 제가 실제로 만난 어떤 순간을 모아놓은 게 한민이거든요. 여행하다가 개와 함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큰 가방에서 개 밥그릇을 꺼내 정성스레 닦고는 밥을 주는 모습도 실제 제가 본 거예요.

 

수지라는 인물의 생각을 따라가다가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많았어요. 심사평에도 ‘우리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관념까지도 완전히 깨 버린 탁월한 작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말 공감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라는 책이 있어요.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에게 말 대신 수화를 먼저 배운 작가가 쓴 에세이인데요. 그 책을 읽고 많이 깨달았어요. 미국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따로 있고요. 공동체 같은 게 있대요.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이 담겨 있는데요. 그 책을 읽고 충격을 많이 받아서 알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산책을 듣는 시간』을 쓸 때 아마 그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마음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1년 정도 노력한 끝에 나는 몇 개의 단어를 발음할 수 있었다. 입 모양이 정확한 사람과 마주 보고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면 약간의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마침내 내가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다며 모두가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정상이 되었다며 기뻐하는 꼴이라니. 배신감이 들었다. 그전까지 나는 부족함 없이 충만한 삶을 살았는데,(32쪽)

 

제가 어렸을 때 눈이 아주 나빴어요. 처음 시력을 쟀을 때 0.1정도였는데요. 저는 세상이 원래 그렇게 보이는 건 줄 알았던 거죠.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그때 안경을 맞춰 썼거든요. 그런데 쓰는 순간 너무 화가 났어요. 어떤 배신감을 느껴서 안경을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고 일 년 동안 쓰지 않았죠. 그런 마음도 떠올리게 됐던 것 같아요.

 

“못 듣는 것은 그들 삶의 핵심적인 정체성이었다.”(62쪽)는 문장에서 아주 오래 머물러 있게 되더라고요. 작가님께서 수지의 내면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 애쓴 장면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어요.

 

수지가 어렸을 때 엄마와 수화 나누는 장면을 공들여 쓰고 싶었어요. 둘만의 언어죠. 그런 언어를 갖고 있다가 추방당하잖아요. 둘만 아는 언어인데 한 사람이 더 이상 그 말을 하지 않으면 그건 죽은 언어니까요. 실제로 그런 언어가 있다고 들었어요. 세상에 어떤 언어를 쓰는 사람이 단 둘만 남았는데요. 그 둘이 싸워서 대화를 나누지 않자 언어학자들이 화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요. 쓰면서 그 이야기도 생각나더라고요. 그렇게 수지는 아마 그 이후로 계속 추방당한 느낌을 간직한 채 살았을 테니까요. 그 마음을 잘 전달하고 싶었어요.

 

엄청난 고독감이에요.


외국에 나가보면 제가 외국어를 잘 못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유치원생처럼 대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한국에서는 신문도 읽을 수 있는(웃음) 대학생인데 그 나라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제가 유치원생처럼 사고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게 되게 놀라웠어요. 동시에 나도 다른 환경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_15A2775.jpg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었으면


한편 ‘작가의 말’에는 두려움과 자괴감을 적기도 하셨어요.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어려운 작업이었던 거죠?


책 나오기 전에 악몽을 엄청 많이 꿨는데요. 우선 제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잖아요. 또한 인공 와우 수술을 받는 것은 개인에게는 아주 큰 결정이고, 청소년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 소설을 보고 수술을 안 받겠다고 결정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 이후의 삶에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너무 걱정됐어요. 제가 실제 겪지 않은 채로, 자료를 바탕으로 쓴 건데 이걸 믿고 자신의 삶을 결정할 청소년들이 있을까봐 그게 정말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 걱정은 해결이 됐나요?


이 소설은 그 길만이 아니라 이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이지만 아직도 무서워요. 계속 무섭죠.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청소년들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자기 삶이니까요. 내 선택과 내 책임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줄 수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그런 책을 좀 더 써야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수지가 인공 와우 수술을 한 후 불행함을 느꼈던 것은 수지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또 수지가 수술과 동시에 집도 잃어버리죠. 공간과 자신은 같은 거라는 생각을 항상 했는데요. 그 공간을 빼앗기는 경험은 언제든 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공간을 결정할 수 있을 때는 사실 별로 없어요. 산다는 게 실은 그런 일이 곁에 늘 기다리고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럴 때, 이미 닥친 상황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원치 않게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고, 그것이 성장이라고 한다면요. 성장의 기회를 수지에게도, 엄마에게도, 다른 가족에게도 주고 싶었어요. 성장의 기회가 왔을 때 스스로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핵심이 아닐까요. 저도 거의 스무 살까지 같은 집에 살았는데요. 건물을 새로 짓느라 그 집이 사라졌어요. 그 후로 내가 되게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생각이 들고 그 기억이 여기에 담겨 있기도 해요.

 

그 수화는 우리 집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이 수화로 사전을 만든다면 우리 집의 도면이 될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작은 의자-달-달-구름-접시-접시-책장-문-식탁-서랍장-마루-벽장-마당의 향나무. 이것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였고, 그것만으로도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되었다.(10-11쪽)

 

마침내 수지는 산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하는데요. 왜 산책이었나요?


사실 산책은 사적인 경험이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산책했는지 알기가 어려워요. 수지가 하게 된 ‘산책을 듣는 시간’이라는 사업은 다른 사람의 산책을 듣는 사업인데요. 예전에 친구들과 여행을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어느 날은 각자 다니고 와서 서로 얘기해주기로 했죠. 그런데 분명 같은 곳을 다녔는데도 돌아와서 하는 얘기들이 각자 다른 거예요.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나의 산책과 친구에게 들은 산책이 겹쳐지면서 그 길이 완전히 새로워지는데 그 경험이 정말 좋더라고요. 아마 그래서 쓰게 된 것 같고요. 다른 사람의 산책을 경험하는 것의 특별함에 더 초점을 맞추려고 했어요.

 

작가님에게도 산책은 특별한 것이겠죠?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친구는 산책을 할 때 걷는 속도와 뇌가 움직이는 속도가 딱 맞으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대요.(웃음)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도 그렇게 믿고 잘 안 써질 때는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그래요. 산책은 몸이랑 정신을 동기화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아요.

 

달리기도 하세요?


실은 수상 소식을 듣고 기뻐서 이곳 카페 사장님께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쁜 소식이니까 2.5㎞를 달려서 왔죠. 와서 소식을 전하는데 사장님은 “축하합니다”라고 하고 하던 일을 하시는 거예요.(웃음) 그게 끝이었어요. 사장님이 저보다 더 기뻐한 적이 있었나, 생각을 해봤더니 제가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얘기했을 때더라고요.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얘기했을 때는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기뻐하셨어요. 여기 사장님 같은 분에게는 수상보다 달리기가 더 축하할 만한 일이었던 거예요.

 

 

그냥 그래도 괜찮겠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125쪽)라는 할머니의 말은 작가님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거든요. 쓸 때, 무엇을 떠올리면서 쓰신 건가요?


처음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인데요. 부모님이 원하는 삶은 다를 것 같았어요.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야 할 것 같고, 결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렇더라고요. 당시 인도에서 ‘타블라’라는 악기를 배우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 얘기를 해주셨어요. 네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하고, 삶은 한 번뿐이니까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요. 그때는 그 말이 잘 이해 안 됐는데 10년이 지나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할머니의 얘기를 들었지만 아마 수지도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좀 시간이 지나면 알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된 10년은 어떤 시간이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제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 계속 부모님 핑계를 댔던 것 같아요. 자신이 없으니까 부모님 때문에 못하겠다, 한 거죠. 하지만 사실은 내게 용기가 없었던 거거든요. 그걸 직시한 순간이 있었어요. 내가 나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인정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구나 생각을 했고요. 인정을 하고 나니 그때의 말도 이해가 됐어요. 그때 이후로는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계속 해왔다고 생각해요.

 

소설가로서, 관심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세요?


최근에 <서치>라는 영화를 봤는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잖아요. 어린 친구들은 영상으로 기록을 하고요. 문자에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도 고민을 해요. 그 안에 많은 것들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것이 문화고 현대인들의 생태계인데 지금 그런 것을 담은 책은 거의 없는 것 같거든요. 지금의 책은 20세기의 방식이잖아요.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거죠.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는 방식도 새롭게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정말 다른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모습일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생각을 많이 해보고 있어요.

 

만약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요. 소설가가 안 되었다면 반찬가게나 돌잔치 전문 사진사가 되었을 것 같아요.(웃음) 좋아해서요. 아마 그런 일을 하며 만족하고 살지 않을까 싶어요. 책 나오고 정말 기뻤어요. 책을 받아들고 집에 혼자 앉아 있는데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구들과도 사이좋은 편이고, 부모님도 건강하신 편이고요. 하지만 일 년 뒤에 전혀 다른 곳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별로 무섭지 않았고요. 그냥 그래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나 자신과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겠죠?(웃음)


그런가봐요.(웃음)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수지의 엄마, 아빠 이야기는 쓰실 계획 없으신가요?


아, 써야죠. 이번 책을 고치면서 빠진 이야기인데요. 아마 SF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꼭 다시 쓰고 싶어요. 실은 이번이 첫 소설이고, 다음 소설을 못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이야기를 다 넣다보니 그 이야기는 빠지게 된 건데요. 빠진 이야기가 여러 가지 있으니 아마 여러 이야기가 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마르첼로도 그렇고, 시도 그렇고,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좋아하는 편이고요. 산책도 좋아해서요. 이 책이 나왔을 때 친구들이 걱정도 했어요. 좋아하는 걸 여기 다 써버려서 다음 소설을 쓸 수 있겠느냐고요. 저도 진짜 고민했었는데요. 한 친구가 영화 <매그놀리아> 얘기를 해줬어요.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이 좋아하는 것을 <매그놀리아>에 다 넣어놓고 이후에 하나씩 빼서 영화를 계속 찍었다면서 너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위로가 됐어요.(웃음)

 


 

 

산책을 듣는 시간정은 저 | 사계절
완벽했던 침묵의 세계에서 불완전한 소음의 세계로 옮겨진 수지는 낯선 세상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새로운 발걸음을 준비한다. 눈이나 귀가 아닌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지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장혁 “결국 음악에서 중요한 건 '전달력'”

$
0
0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를 겪은 세대의 감성 지도 위에는 조장혁의 기록 또한 존재한다. 아티스트의 시작을 알린 '그대 떠나가도'서부터 'Change' '중독된 사랑' 'Love' 등으로 이어지는 히트 넘버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애청곡이자 애창곡. 거친 목소리로 직접 써 내린 발라드 팝들은 그 위에 티끌 하나 생길 틈 없이 계속 회자돼왔다.

 

허나 역설적으로, 조장혁의 이름 위에는 종종 먼지가 쌓여왔다. 큰 성공 다음에는 오랜 침체가 따랐고 한 때는 음악계를 벗어난 활동 경로까지 보이기도 했다. 이 싱어송라이터에 다시 붙는 큰 관심은 사실 꽤나 최근의 것이다. 데뷔 22년 차, 오랜 시간이 만든 활동 기간에는 여러 부침이 함께 했다. 그 순간순간을 주인공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

 


 1.jpg

 

 

몇 년 전<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에 나가며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출연하며 거부감은 없었나.


“형, 조카(아들) 키워야지.” 이 한 마디에 나갔죠. 당시 같이 일을 하던 제작자 친구가 했던 말이에요. 원래는 안 나가려고 했는데, 저 얘기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모든 걸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나갔고... 다행히 잘 됐습니다. 아들을 지칭하는 저 조카라는 말이 언론 첫 보도에는 진짜 조카로 나가서.(웃음)

 

결과적으로는 이득이다마는, 끝까지 나가지 말고 버티지 하는 의견도 주위에 많았을 텐데.


그랬죠. 사실 제 성격도 그렇고요.

 

<나가수>  <불후의 명곡>에서 가진 무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퍼포먼스라면.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무대. 음정이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 가사가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 내려와서 아무 생각이 안 드는 무대가 정말 만족스러웠어요. 오히려 기억하면서 부르려 했던 무대에 개인적으로 조금씩 불만이 들었죠.

 

음정이 가거나 가사가 틀리면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카메론 디아즈가 노래 부르는 씬 있잖아요? 음치 캐릭터로 나와서 처음엔 엄청 야유 받다가 점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장면. 전 그게 음악이다 싶어요. 조금 틀리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어도 결국은 전달력에 관건이 달렸죠. 물론 많이 틀리면 문제가 되죠. 아,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웃음)

 

그 전까지 공백기가 길었다. 디스코그래피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리메이크 앨범 <The Present>가 눈에 걸린다. 앨범엔 자작곡만 다루지 않았었나.


그렇죠. 원래는 다 자작곡으로 넣었죠. 그쯤 제가 계약 문제로 피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도망간 매니저 계약금까지 갚아야 하는 배경인데다 일은 안 들어오고 막막했거든요. 리메이크 앨범은, 그 때 만난 다른 관계자 한 분이 '안 좋은 상황이니 이렇게라도 하나 내자'며 만들게 된 결과물입니다. 곡 리스트도 그 분이 다 짜 오신 거고요.

 

사기 당할 줄 몰랐던 건가.


도망간 그 매니저 형이랑 워낙 친한 사이었어요. 함께 했던 일도 있었고. 둘이 같이 다른 회사로 넘어가면서도 계약서 대충 보고 치웠어요. 형이 알아서 잘 해주겠지 하면서요. 그 때는 몰랐죠.

 

당시 타이틀 곡 'Love is over'는 꽤 알려지지 않았나.


그래도 욕 많이 먹었죠.

 

사실 어떻게 보면 그 전부터 침체가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4,5집 앨범은 왜 그리 안 떴나. 직전인 3집까지만 해도 호황이었는데.


앞 맥락이랑 연결되는 얘기입니다. 3집까지 하고 매니지먼트가 끝났어요. 의리를 지키자는 마음으로 그 형이랑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매니저 돈을 제가 갚아야하는 이상한 계약이 생긴 거죠. 손익분기를 넘기네 마네 이런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사람을 너무 믿는 바람에 내우외환이 생긴 셈입니다. 제게도, 제 음악에도 안 좋은 일들이 다가왔어요. 저 혼자 이래저래 힘써야 했고요. 핑계만 대는 것 같아 싫지만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그 시기에 불법 다운로드가 정말 판을 쳤어요. 오늘 앨범 내면 내일 아침 소리바다에 다 뜨던 때였잖아요. 앨범 판매량에 의존해왔던 저희로서는 손을 댈 수도 없었고, 사회 차원에서 이걸 막을 방안도 없었고. 불운이 꼈죠.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개인 내면으로도 '왜 안 떴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낯을 가렸다고 해야 하나? 사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숨어있는 걸 좋아했어요. 나대는 걸 싫어했고요. 성격상 그랬던 거 같아요. 신비주의랍시고 콘셉트 잡고 이런 건 아예 없었고요.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 당시 음악계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겁니다. 그 때는 숨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인기를 누렸잖아요. 대표적으로 동아기획처럼 비주류가 주류로 확 올라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본받고도 싶어 했죠. 음악 공부를 하며 자라왔으니 그런 배경이 자주 눈에 들어왔고요.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제는 자신을 열어보자고 자주 생각해요. 고민도 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이거 뭐, 안 하던 짓을 막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웃음)

 

'그대 떠나가도'와 'Change'를 통해 데뷔를 알렸다. 두 곡 다 드라마, 영화에 삽입돼 더 잘 알려졌는데.

 

2.jpg맞아요. 이진석 감독님 영화 <체인지>에 들어갈 곡을 모집할 때 'Change'를 갖다 냈었죠. 원래는 곡만 쓰고 다른 사람이 보컬을 맡기로 했었는데 그게 조금 틀어져서 후에 직접 불렀습니다. 영화 작업도 조금 도와줬어요. 악기 연주 장면에서 동작 잡아주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 뒤로도 서로 얘기가 잘 돼서 감독님이 연출한 드라마 <별은 내가슴에>에도 제 곡 '그대 떠나가도'를 쓰게 됐어요.

 

1,2집 성공에 이어 '중독된 사랑'을 통해 3집이 크게 터졌다. 최고의 히트 곡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심지어 다 만들자마자 만족감을 느끼게 한 노래에요. 처음에는 작곡하면서 막히기도 했던 곡이거든요. '다시 너를 볼 수 있을까' 여기까지만 나오고 뒷부분이 안 써져서 꽤 오래 묵히다가... 한참 뒤에 술 한 잔 한 채로 써냈습니다. 노래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어요. 당시 잘 나간다는 매니저한테 들려줬을 때 '이거 너밖에 못 불러' 이런 답까지 왔으니까요.

 

우쭐했나.


어우, 그랬죠. 스포트라이트도 따라줬지만 그것보다는 일단 제가 직접 곡을 만들었잖아요. 자신도 있었고. 명예나 이름값 이런 부수적인 것들에는 애초부터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어요. 데뷔하기 전서부터도 저는 음악계에 꽤 오래 있었는걸요. 다운타운에서 시작해 급여 5만 원 주는 통기타 업소에서도 일했어요.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한테 장밋빛 로망 이런 얘기는 재미없죠. 제가 곡을 쓴다는 것. 그게 중요했어요.

 

중독된 사랑이 왜 먹혔다고 생각하는지.


제가 생각해도 멜로디가 정말 좋아요. 그런 멜로디는 없는 거 같아요. (웃음) 코드 진행도 센세이셔널했어요. 물론 뭐 코드 때문만은 아니지만, 일단 그냥 잘 쓴 거 같아요. 누가 써줬나 하는 느낌도 받았어요. 저기 귀신 같은 영적 존재께서 써준 그런 느낌 있잖아요. 지금 생각해봐도 그게 어떻게 쭉 나왔을까 해요.

 

톤도 다양하다. 맑게, 살짝 거칠게, 완전히 거칠게. 기분 좋은 음색의 파노라마라 하고 싶다.


맞아요. 그렇게 나왔죠. 그 곡이 그랬어요.

 

신 내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딱 두 번 있었죠. '중독된 사랑'이랑 (고) 최진영이 부른 'My lady'랑. 'My lady''는 20분 만에 쓴 곡이었어요.

 

곡 쓸 때의 주안점이 궁금하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 얘기를 듣고 많이 썼죠. 아픈 마음, 경험담 같은 걸 듣고 있다가 감정이입이 돼 쓰곤 했죠. 제 경험도 물론 갖다 쓰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멜로디를 떠올리다가 살짝 괜찮다, 죽인다 싶은 포인트를 잡아서 살려서 만들어내기도 했어요.

 

이번엔 조장혁의 보컬에 중심을 두고 얘기해보고 싶다. 스스로 생각하는 보컬 컬러, 정체, 매력은?


사실은요, 사람들이 제 보컬에 어떤 매력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어요. 거친 목소리는 일부러 만들어 낸 거예요. 대학교 스쿨 밴드에서 'Heaven'을 부르면서 브라이언 아담스의 목소리에 완전히 꽂히는 바람에 많이 거칠게 불렀죠. 들국화 형님들 곡도 해보면서 전인권 선배 목소리도 많이 따라 해봤어요.

 

원래 목소리는 어땠나.


되게 맑았어요. 밤에 집에서 노래하면 시끄러우니까 살던 곳 천호동 근처 올림픽대교 밑에 들어가서 소리 버럭버럭 지르고 그랬죠. 목이 쉬었다가 또 괜찮아지면 소리 지르고. 지르면 지를수록 목이 트이더라고요. 창 하시는 분들도 그렇다고들 하시잖아요. 억지로 목 만들고 틔운다면서요. 대신 단점이 생겼다면, 가성이 잘 안 돼요. 자연스레 팝보다는 록을 지향하게 되고, 알앤비는 더 힘들어지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촌스러운데, (웃음) 그 땐 왜 그랬는지. 그 시대가 그런 거친 목소리를 좋아했던 거 같아요. 덕분에 제 노래도 세대에 잘 맞았을 테고요.

 

그 거친 목소리가 특히 <나가수> <불후의 명곡>에서 좋은 무기로 작용했다. 허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스튜디오를 통해 나온 곡들에서는 보컬이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았나.


스튜디오 안에서는 조금 자제하려고 해요. 스튜디오에서 쓰는 마이크가 정말 예민합니다. 거친 소리는 거친 소리대로, 호흡 소리는 호흡 소리대로 다 나오거든요. 괜히 흥분하면 듣기에 안 좋은 소리가 많이 들어가니 녹음할 때 디렉터분들이 저를 많이 자제 시켰죠. 반면 라이브에 자주 쓰이는 55마이크는 사운드를 다 잡아주지 않아요. 그래서 공연 때는 거칠게 불러도 괜찮죠. 예전에 2집에서 한 번 거칠게 녹음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들어보면 그렇게 좋진 않더라고요.

 

 

3.jpg

 

 

그래서 그런지 곡들마다 나름의 절제미가 느껴진다. 여러 보컬 톤이 등장하는 '중독된 사랑'이 특히 그랬고.


'중독된 사랑'은 해프닝을 통해 나온 작품이에요. 가이드로 한 번 부를 때 기사님께서 누르신 걸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겁니다. 앞부분은 절제다, 뒷부분은 한 방이다 뭐 이런 걸 계산하고 불러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잘 안 되더라고요. 다시 하겠다는 말만 연발했죠. 처음 만든 것에는 왠지 믿음이 안 가잖아요. 그러다 “역시 맨 처음 게 최고지? 그냥 그걸로 해”라고 하신 기사님 말씀에 결국 오케이 했습니다. 애초에 전 절제고 뭐고 생각도 안 하고 불렀어요.

 

오래 남아 있는 히트 넘버들은 결국 예쁘게 뽑힌 노래지 않나.


그런데도 거칠게 부르면 뭔가 멋있어요. 이상하죠? (웃음) 요즘에는 소리에 대한 변신도 조금씩 고민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제 걸음 방향을 정하지 않았나 싶어요. 일례로 소몰이 창법이 한창 유행할 때 선두에 있던 (박)효신이가 목소리를 확 바꾸면서 다른 모습을 만들었잖아요. 그런 식으로 목소리에도 유행이 있고 흐름이 있어요.

 

균형을 잡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죠. 뭐든 한쪽으로 너무 가면 큰일 납니다. 최근에는 아까 잘 안 된다던 가성을 연습하고 있어요. 가성을 살리면 거친 목소리를 완화시킬 수 있거든요. (이)승환 선배처럼 목소리를 여러 번 뒤집는 식으로 자주 노래를 부르다 보면 점점 컬러가 중성이 되는 거죠.

 

초창기의 롤 모델을 브라이언 아담스로 잡았다면 요즘에는 어떤 목소리에 끌리나.


지금요? 닮고 싶은 사람은 워낙 많아서. 존 메이어 같은 애들이 좋더라고요. 거칠면서 매력이 풍부하잖아요. 반대로 마이클 부블레 같이 스윙 감성이 있는 목소리도 잘 듣고 있어요. 해리 코닉 주니어도 여기에 들어가겠네요. 같은 울타리 안에서 마이클 부블레는 대중적인 감성에, 해리 코닉 주니어는 조금 더 재지한 감성에 닿아있어서 두 사람 모두 챙기고 있죠.

 

작곡가이자 가수, 음악가 조장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에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가족.

 

앞으로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노래 계속해야죠. 동시에 지금 선생으로 있는 학교에서 후진양성도 하고 만든 제 소속 회사도 키우고요.

 

끝으로 조장혁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뮤지션에 대해 듣고 싶다.


정말 많죠. 아까 꺼냈던 브라이언 아담스도 많이 들었고요. 프린스도 특히 많이 들었죠.

 

의외다. 조장혁과 프린스라니.


프린스 음악은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작품이에요. 'Purple rain'은 어우, (웃음) 곡 'Purple rain'도 좋아하지만 음반 <Purple Rain>도 좋아하고 그간 프린스가 낸 수많은 작품들 모두 좋아하죠.

 


인터뷰 : 임진모, 이수호
정리 : 이수호
사진 : 이수호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임경선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도 용기예요”

$
0
0

20180914__뗡뀿_료__㎭녅_됣뀯_メ꼳_■넧_?___DSC6916.jpg

 


“강인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고, 소설가 임경선은 말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을 뒤흔드는 관계와 상황 속에서도 뒷걸음질 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말하는 일곱 편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엮였다. 임경선의 두 번째 소설집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영원히 평행선을 그을 어떤 관계”를 끊어내는 결단을 내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생을 밀고 나간다. 지극한 사랑 앞에서 거침없이 자신을 던지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로 놓아주고 돌아서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가 임경선은 ‘용기’와 ‘정직’을 말한다. 스스로에게 정직함으로써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것. 그럼으로써 “온전히 내가 주인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집필을 마무리할 즈음, 파킨슨 병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성실한 작가’는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를 떠나 보낸 후 한 달여가 지난 뒤에도, 그녀는 늘 이야기를 짓던 자리에서 우리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작가의 말이, 유독 묵직하게 다가왔다.

 

 

20180914__뗡뀿_료__㎭녅_됣뀯_メ꼳_■넧_?___DSC6734.jpg

 

쭉쭉 잘 써질 때 멈춰요


『어떤 날 그녀들이』 이후로 7년 만에 출간된 소설집입니다.

 

그 사이에 장편을 두 편 썼으니까, 다음에는 단편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계속 장르를 바꿔가면서 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머릿속의 여러 근육을 사용하는 느낌이에요. 독자들에게도 지루하지 않게 느껴질 것 같고요. 의도한 건 아니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는데요.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오히려 장편소설만 계속 쓰시는 분들이 대단한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장편과 단편, 소설과 에세이, 각각의 리듬이 다르잖아요. 호흡을 바꾸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한테 질려요. 그리고 똑같은 화두나 소재라고 하더라도 장편, 단편, 에세이로 쓸 것이 다 다르거든요. 그 용도에 따라서 분리하고 정리하는 것도 재밌어요. 저는 글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틀이 없어요. ‘이건 이렇게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거예요. ‘이건 이렇게 써야 잘 쓰는 것이다’라고 정해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심리적으로 구속되면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고, 그렇게 주저하면 쓸 수가 없어요. 기본 형식을 갖춰서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거죠. 저한테는 그걸 제어하는 심리적 방어벽이 없어서,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써요. 그 대신 스스로를 환기시켜주는 의미에서 매번 다른 장르로 바꿔가는 거죠. 

 

1년에 한두 권씩 계속 쓰셨어요. 한동안 쉬고 싶은 생각도 드실 것 같아요.


매번 생각하죠, 안식년을 가져야 된다고. 그런데 쉬는 걸 잘 못해요. 이번 주 초에도 조금 쉬었는데 너무 지루해요. 그래서 다음 책을 기획하고 있어요. 글을 쓰는 것도 일을 하는 것이고 힘들지만, 직장 생활에 비하면 불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직장을 오래 다녔는데, 조직 생활 할 때는 일 외에도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들이 많잖아요. 글 쓰는 건 일만 하는 거고, 그것도 양질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렇다면 ‘직장을 그만두니 이 일을 안 해도 돼서 정말 좋다’고 생각하시는 건 뭔가요(웃음)?


제일 좋은 건 조정하는 일을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 부서와 부서, 내부 팀과 외부 팀 사이의 조정 있잖아요. 부서장 자리에 있다 보니까 내부 상사한테 보고하고, 외부 회사랑 일하고, 다른 팀과 충돌할 때 조정하는 입장에 있을 때가 많았어요. 중간 관리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그 일을 잘한다고 해도 조금 버겁더라고요. 두 번째로 좋은 건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전화 통화하는 걸 싫어하거든요(웃음). 그리워하는 것들도 있어요. 회의할 때 아이디어 끌어내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면 팀원들도 즐거워하고, 그런 분위기 자체가 좋았어요. 같이 뭔가를 기획하고 실천해서 그게 잘 됐을 때, 그때 느끼는 희열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조금 그립고, 단체 산행 같은 것도 재밌었어요.

 

협업의 즐거움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은 그리우시겠어요. 작가는 홀로 일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니까요.


직장 생활을 12년 했으니까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못해요(웃음).

 

‘작가의 말’에서 처음 소설집을 썼을 때를 회고하셨어요. “아직 소설 쓰는 방법을 몰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고요. 이제는 “최소한 백지 앞에서의 긴장과 두려움은 사라졌다”고 하셨죠.


이제는 막막하지는 않죠. 특히 단편은 하나의 장면이나 단어가 떠오르면 한 호흡으로 써내려가니까요. 장편은 중간에 막힐 때가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면 솔루션이 생각나요. ‘아, 이거 어떻게 하지’ 하면서 계속 스트레스 받으면서 자는데, 아침에 보면 어떻게든 풀려있어요. 계속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머리를 조금 쉬게 해주거나 물리적으로 나를 다독거려주면 뭔가가 나와요. 희한해요. 어떻게든 앞으로 가게 돼 있어요. 중간에 막혀서 소설을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체적으로 만들어놓고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이건 그냥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쓰다가 막혀서 그만두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분들도 그러시지 않을까 싶어요.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글을 쓰시잖아요.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초조하지 않으세요?


마감이 있는 원고라면 항상 일주일 전에 마감을 해요. 강연 같은 경우에는 한 시간 전에 도착하고요. 지각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지금까지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어요.

 

정말 ‘성실한 작가’이시군요.


그냥 성격이에요. 급하고, 조바심 내고, 남한테 폐 끼치는 거 정말 싫어하고. 빨리 해치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할까요. 별로 좋은 거 아니에요(웃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내일 할 일을 오늘 하는 거예요. 마감이 닥쳤을 때 쓰면 글에 긴장감이 들어가서 더 좋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저는 이해 안 돼요. 그런 사람은 마감 전에 쓴 글이 없을 텐데 어떻게 비교해볼 수 있겠어요.

 

글이 잘 안 써질 때는 어떠세요?


오늘은 잘 써진다, 안 써진다, 그런 거에 대한 감이 별로 없어요. 소위 말하는 ‘영감이 떠올라서 쓰는 스타일’은 아니니까요. 대신에 그런 건 있죠. 장편을 쓸 때 썰매 타듯이 쭉쭉 나가면서 재밌게 쓰는 장면이나 상황이 있잖아요. 그럴 때는 오히려 멈추고 다음날로 미뤄둬요. 그러면 아침에 시작할 때부터 신나게 쓸 수 있으니까, 조금 더 밀고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거든요.

 


관계는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을 표제작으로 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하고 ‘가만히 부르는 이름’이 제목 후보였어요.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소설집에 없기도 하고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더 낫다고 해서 이렇게 정했고요. 편집자와 북디자이너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한 작품이기도 했어요. 사실 소설의 주인공에게 저자의 어떤 부분이 투영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데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의 ‘영미’ 같은 경우는 저의 모습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유일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어요.

 

‘영미’처럼 단호한 결정을 잘 내리실 것 같은데요.


이렇게 오랫동안 한 남자한테 매여 있는 건 안 하죠. 저는 ‘준호’의 와이프 스타일이죠. 얄미운 스타일(웃음). 그런데 영미 같은 습성을 가진 여자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정이 많고, 잘 퍼주고, 약간 헛똑똑이 같은.

 

읽으면서 감정 이입이 되더라고요(웃음).


그런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제가 상담 사연도 많이 받았었잖아요. 영미 같은 분들을 보면 속 터지는 것 같고 그렇지만(웃음),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좋으니까. 그리고 남자 쪽에서도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고, 하다 보니까 희망고문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잖아요. 남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의존적이 되고, 기대고 싶어 하는 게 있잖아요. 자기 아내한테 모든 걸 다 받을 수 없으니까 다른 여자들한테 챙김을 받으려는 욕구도 있고요. 또 여자들은 품어주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계속 애매한 상태로 끌고 가는 데에도 엄청난 각오가 필요해요.

 

영미는 대학생 때부터 준호에게 마음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준호가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될 때까지도 곁을 못 떠나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까 ‘내가 저 사람을 더 잘 알아’라고 하는 마음이 있어요. 정, 책임감, 연민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있죠. 그리고 자기가 알던 찬란했던 모습의 남자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걸 보는 게 너무 속상한 거예요. 안타깝고. 정말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던 너무 너무 빛나던 모습으로 그 남자를 기억하는데, 현실 속에서는 많이 치이고 머리카락도 조금 빠지면서 나이 들어가는 거죠. 그러면서 날카롭던 사람이 둥글둥글해지고 자기한테도 잘해주는 부분이 있지만, 항상 처음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기도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복잡해지는 거예요.

 

부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게 무서운 것 같아요. 그 과정을 서로 지켜본 사람들이 헤어지기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요.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건, 그 사이에 있었던 모든 희로애락을 서로 안다는 거잖아요. 상대가 마냥 멋있어 보이거나 한 쪽의 단면만 보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 면들을 다 보고 견뎌낸 거예요. 추한 모습까지다 보면서도 그걸 견뎌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죠. 그렇게 되면 웬만한 일로 헤어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세상도 알 만큼 아는 정말 어른이 되면, 이성 사이에도 말이 너무 잘 통해요.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규정지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오히려 규정지어지는 관계와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도 다 공유할 수 있게 돼요. 얼마나 친밀하고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못 헤어지는 거예요.

 

결국 영미도 결단을 내리는데요.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이, 도망을 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회피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밀고 나가죠. 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으셨어요?


무엇에 대해서 썼냐고 물어보신다면, 정직과 용기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용기가 있으려면 정직함이 바탕이 돼야 해요. 자기 자신한테 정직해야 하는 거죠. 안 그러면 용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예요. 중요한 건, 용기의 모습이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거예요. 성취하고 정면 돌파하는 것도 용기이지만 무언가를 깨닫는 것, 내가 변하는 것, 아예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것도 다 용기예요. 사람들은 그건 용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딱 끊어주는 것도 용기거든요. 그게 결국은 자기 감정에 충실한 거죠. 그렇게 해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 수 있어요. 스스로 선택하고 상황을 움직이는 변화의 순간 같은 게 있는데, 그게 인생에서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아름다운 순간 같아요. 그것이 슬픔을 동반하든, 고통을 동반하든, 희열감을 동반하든, 자기가 결단을 내리는 것. 저는 그런 결기가 너무 좋아요. 그래야 자기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 같고,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씀을 듣다 보니 「나의 이력서」의 주인공 ‘소영’이 생각나요. “항상 관계에서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는” 수동적인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먼저 이별을 통보함으로써 자비를 실천하기로” 결심하잖아요. 소영으로서는 엄청난 모험을 시작한 거죠.


소영은 관계에 있어서 자신감이 별로 없는 스타일이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그리고 ‘지훈’이라는 남자가 처음에는 자신을 다 품어줬는데, 그래서 소영도 ‘이 사람이 내 옆에 계속 남아 있을 사람이구나’ 생각했는데, 지훈이 자신의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달라진 거예요. 지훈을 탓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약해지고 바보 같이 굴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래, 내가 예전에 힘들었을 때 네가 나를 많이 품어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너를 품어줄게’라고 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소영은 그렇게 하지 않은 거죠. 소영은 항상 강해지고 싶은 아이였어요.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을 초월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아이죠. 그래서 지훈이 약하게 구는 걸 못 참는 거예요.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투영인 거죠. 소영은 자신이 약해지는 것도 용서 못할 스타일이잖아요.

 

강인하지 못한 지훈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을 수도 있겠어요.


지훈에 대해서 너그러워질 수가 없고 ‘내가 왜 너그러워져야 돼? 자기가 못난 건데?’ 이렇게 된 거죠. 이성적으로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사랑에 소질이 없나? 나는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인 걸까?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하면서 그냥 포기해버리는 거죠. ‘내가 사랑이 부족한 건가’ 고민도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지 않기로 한 거예요.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죠. 다 품어주고 갈 필요도 없는 거고,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인 건 아니거든요. 소영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그 에너지를 일적으로 쏟아 붓는 거예요.

 

비슷한 고민을 하신 분들도 꽤 계실 것 같아요. ‘상대의 저런 모습까지 다 끌어안아야 하는 건가?’라는.

 

헤어질까 말까 기로에 섰을 때 ‘이걸 참아야 되나 끊어야 되나’라는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저 사람의 최악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되는 건가? 그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 하고요. 그게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거예요. ‘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가’, ‘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속 품고 갈 것인가, 아니면 놔줄 것인가’ 생각하는 거죠. 관계는 다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요.

 

 

1.jpg


 

‘어쩔 수 없음’을 사랑해요


이번 소설집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치앙마이」의 ‘희진’도 좋아하고 「우리 잠든 사이」의 어머니도 좋아해요. 희진은 무모한 일인 걸 알면서도 뛰어 들어가는 열정 같은 게 있어요.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성숙함도 가지고 있고요. 굉장히 강한 여자예요.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데, 희진이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영욱’의 딸 ‘슬아’를 만나는 장면이에요. 사실 그 씬을 쓰고 싶어서 쓴 소설이에요(웃음). 어떻게 보면 서로 안 좋은 관계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일이 꼭 그렇지도 않거든요. 저는 가능하면 모든 장소에 사랑이 있기를 바라요.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 모든 종류의 사랑을 향해 열려 있으신 게 느껴져요. 그 점이 참 좋아요.


다른 부분에서는 엄청 스토익하고 범생이스럽거든요. 일과 관련해서는 그런데, 사랑만은 완전히 관대하고 완전히 열려 있어요. 너무 극단적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부분도 있어서 제가 사는 것 같아요. 어떤 형태든 사랑하면 다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과정에서 남한테 상처를 안 주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어쩔 수 없음’을 너무 사랑하고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치앙마이」에 있었던 것 같아요. 희진이 치앙마이의 여성 교도소를 찾아갔을 때, 자신이 ‘그저 타인의 불행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곳에 갔다는 걸 깨닫잖아요. ‘이런 마음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고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진 적이 없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누구나 다 있죠. 그리고 우리가 남의 불행을 소비하고 살잖아요. 사실 남의 행운에 기뻐해주는 게 쉽지가 않아요.

 

희진이 교도소를 찾아가게 만드신 이유는 뭐였나요?


감정적으로 바닥을 한 번 쳐야 될 것 같았어요. 그래야 영욱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끝나도 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끝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지 않으면 적당히 타협할 것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희진과 영욱 둘 다 완벽주의자인 거예요. 완벽주의자들끼리 만나서 사랑을 하면 극한의 희열감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결합을 하는데, 또 완벽주의 때문에 다시 못 보게 되는 경우도 생겨요. 그런데 정말 미칠 것 같은 사랑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그 이하로는 타협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혼자 살아도 과거에 사랑했던 기억으로 버틸 수 있는 거고요. 그럴 걸 알면서도 가는 거죠. 불나방이 불길로 달려드는 것처럼. 그렇게 끝까지 치닫는 사람들이 있어요. 적당히 하는 게 안 되는 사람들. 그것도 인생이죠.

 

지난해에 네이버 오디오클립 <임경선의 개인주의 인생상담>을 진행하셨어요. 상담을 재개하신 게 6년만이죠?


그렇죠. <라디오천국> 끝난 후에 처음 한 것 같아요. 그때는 다시는 상담을 안 하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저를 글로 기억하는 것보다 상담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고 ‘이건 조금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6년 동안 할 수 있는 한 책을 많이 내면서 제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이 생긴 것 같고요. 사실 그 전에는 ‘내가 방송 덕을 많이 본 게 아닌가, 정말 내 글을 좋아해서 책을 사서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6년 동안 에세이와 소설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조금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고요. 무엇보다 ‘남들이 나를 찾아줄 때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웬만하면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남들이 잘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해야겠다, 가능한 한 나누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마 나이가 들어서 그랬을 거예요. 이 나이에도 날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뭐가 됐든 나의 어떤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떠세요?


사람들의 고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고요. 저도 기본 틀은 같은데, 인생을 조금 총체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시적인 고민에 대해서 미시적인 대답을 해줬다면, 지금은 조금 더 거시적인 입장의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하게 되는 거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 거예요. 조금 뒤에서 바라봤을 때 생각되는 것들을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달에 첫 번째 번역서  『나비』가 출간됐어요. 원작자 에쿠니 가오리와 번역자 임경선의 호흡이 다 들어가 있는 책이에요.


책에 담긴 건 100% 에쿠니 가오리의 호흡이죠. 저는 거기 들어가면 안 되죠. 그런 부분은 고민도 안 했어요. 제가 번역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무조건 그렇게 해야 되는 게 번역자로서의 윤리에 맞다고 생각해요. 긴 글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비』는 짧은 동화이기도 하고, 게다가 아우라가 있으니까요. 에쿠니 가오리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소설은 거의 다 읽었어요. 몇 편의 소설은 굉장히 좋아하고요. 연애의 절절한 감정, 정말 심장이 흐드러지는 것 같고 뜨겁고 부스러질 것 같은 감정은 에쿠니 가오리만큼 잘 묘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마무리하고 계신 원고가 있죠?


『태도에 관하여』의 개정판이 곧 나올 거예요. 출간된 지 3년이 넘었거든요. 업데이트 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책에 보면 현실에서의 양성평등, 남편과의 가사분담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요즘 현황에 대해서 싣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곁에 남아 있는 사람임경선 저 | 위즈덤하우스
다양한 삶의 조건을 가진 등장인물들은 온전히 자신이 주인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저마다의 고독한 싸움을 한다. 그 과정에서 고립과 고독의 시대에 자신의 곁에 남아 있을 사람을 깊이 갈망한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미경 “온라인 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0
0

정미경-(2).jpg

 


소설의 제목  하용가는 ‘하이 용돈 만남 가능?’의 줄임말이다. 온라인상에서 성매수를 목적으로 여성에게 접근하는 남성들의 인사말. 소설가 정미경은 이 여덟 글자 속에 “여성의 몸을 거래하는 문화, 여성의 몸을 비하하고 조롱하고 짓밟는 문화”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상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 없이 ‘돈으로 너의 몸을 살 수 있잖아?’라고 묻는 사람들. 그들은 여성을 ‘무엇’이라 인식하고 ‘어떻게’ 다루어도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는 걸까.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 16년 동안 100만 유저를 거느리면서 온갖 성폭력이 이루어졌던 ‘소라넷’. 작가는 그곳을 “가장 은밀한 지옥”이라 불렀다.

 

소설은 소라넷의 ‘초대남 사건’을 다루면서, 소라넷 폐지 운동의 과정과 연대한 여성들이 이룬 승리를 기록한다. 실제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다큐소설이다. 동지수, 구희준, 기화영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초대남 사건은 물론 불법 촬영, 데이트 강간 등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의 실체를 보여준다. 작가는 묻고 싶다고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잘 알고 있는지. 그리고 공감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피해 여성들이 겪는 ‘시선에 사로잡히는 고통’에 대해서.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편집장을 지낸 소설가 정미경은 에세이『남자는 초콜릿이다 : 정박미경의 B급 연애 탈출기』 , 『넌 나의 귀여운』을 썼고, 지난해 장편소설  『큰비』로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정미경-(1).jpg


 

온라인 페미, 새로운 페미니스트의 등장


『하용가』 를 읽는 동안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많은 독자 분들이 그러시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쓰시는 과정도 다르지 않았겠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데 두 달 정도 걸렸어요.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아서. 친구들이랑 가족들도 제가 짜증이 너무 많이 늘었다고, 성격이 괴팍해진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어요. 집필은 6월 초에 끝났는데 편집하고 책이 나오기까지 계속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환기하는 시간이 필요하셨겠어요.


네, 여행도 다녀오고 좋은 것들 보려고 했는데... 그나마 저는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여자들이 여전히 있으니까, 그 부분은 항상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죠.

 

집필의 계기가 된 게 ‘초대남 사건’이었죠?


네. 『근본없는 페미니즘』의 에디팅 작업을 했었는데, 그 책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글에서 소라넷과 초대남 모집글에 대한 언급이 있었어요. 나중에 알게 됐는데 ‘초대남 사건’이 온라인 페미를 하나로 결집시키고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더라고요. 2015년에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오면서 굉장히 큰 이슈가 됐고요.

 

해당 사건에 대한 소설을 쓰자고 결심하셨을 때,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로는 이런 일이 온라인에서 일상 속의 성문화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소라넷은 폐쇄되었지만 여전히 제2, 제3의 소라넷은 건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요. 두 번째는 여성들의 힘으로 소라넷을 폐쇄시켰다는 거였죠. 그리고 온라인이라는 여성혐오적인 공간을 탈환해서 여성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이제 저는 40대 중반이고 페미니스트로 산지 20년이 넘은 올드 페미예요. 제 친구나 지인들도 온라인이 이렇게 폭력적인 공간이라는 걸 잘 몰라요. 그래서 이 소설은 기성세대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  『하용가』를 읽히고 싶은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과 정치하는 분들이고요. 특히 요즘 들어서 이 책을 꼭 읽히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어요.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라고 이야기하시는 분, 그리고 그에 동조하시는 분들이 정말 읽으셔야 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의 오세라비 저자의 주장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분이 주장하는 건 남녀평등은 현실화됐고 대한민국은 치안이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이 1그램의 이론과 1톤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그러면 ‘초대남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치안이 안전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물론 총기 소지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총에 의해 사망하는 확률은 비교적 낮겠죠. 그건 저도 인정해요. 그런데 제도로 잡히지 않는 놀이문화 안에서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성폭력이 자행되고 있잖아요. 그리고 피해 의식 이전에 피해 경험이 있는 거거든요. 여자들이 망상증 환자도 아니고, 무수한 피해 경험들이 쌓이고 쌓였을 때 피해 의식이 되는 거죠. 피해 경험이라는 게 직간접적인 거잖아요.

 

직간접적으로 피해 경험이 쌓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누군가 시선으로 내 몸을 훑고, 버스에서 내 몸을 만지고, 페이스북에서 ‘용돈 만남 가능?’이라는 쪽지를 받는 경험들도 있는 거고요. 여자의 몸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폭력에 있어서 나 아닌 다른 여자가 당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간접적 경험이 돼서 공포를 유발하는 거잖아요. 범죄가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실제로 여자들이 어떤 느낌과 감정으로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거죠. 거기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대한민국이 치안이 안전한 나라이고 여자들이 모든 평등의 권리를 누리는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봐요.

 

앞서 ‘올드 페미’라고 하셨는데요. 페미니스트의 세대 교체가 이뤄졌다는 걸 체감하세요? 다른 세대가 나타났다고 느끼시나요?


다른 세대 정도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페미니스트의 등장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온라인 기반이라는 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느껴요. 예전에는 오프라인 기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이 직접 대면해서 관계를 맺었고 운동의 방식도 기존에 하던 대로 있었어요. 지금의 온라인은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이죠. 그래서 온라인 페미들은 기존 페미와의 유사성보다 온라인에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유저들과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다고 봐요. 온라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라면 이해하지 못하는 운동 방식이라는 거죠. 지금까지 기성 페미들이 온라인 페미들을 바라볼 때, 온라인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생각은 별로 안 하고, 같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이슈가 있으면 결합하고 여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봤을 때 그건 기성 페미들의 로망일 뿐이에요. 이 친구들은 기성세대의 방식으로 운동할 생각이 전혀 없고, 그런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아요. 철저하게 익명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그래서 온라인 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라인 공간을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여성혐오의 포문을 여는 ‘낙인 찍기’


소설에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잖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데이트 강간, 최음제 문제, 초대남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폭력의 실체가 드러나요. 이 인물들은 어떻게 탄생됐나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초대남 사건의 주된 피해자들이 10대, 20대 여성이었어요. 온라인 페미니즘의 주 연령층도 10대와 20대죠. 온라인에서 남자들이 주로 성적 대상화하는 여자들, 그리고 지금 페미니즘의 이슈를 끌고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여자들의 나이대에 집중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대로 선정을 한 거고요. ‘동지수’와 ‘기화영’을 마케팅 회사의 인턴으로 선정한 건 브랜드 네이미스트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 소설에서 이름 짓기에 관해서 꼭 이야기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여자를 김치녀, 된장녀, 창년 등으로 부르면서 낙인을 찍는 건 여성혐오의 포문을 여는 거예요. 여성혐오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다양한데요.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희화화해요. ‘운전 못하는 김 여사’ 같은 거죠. 그러다 점점 조롱하고 낙인을 찍어요. 김치년, 창년,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언어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던 게 조건과 기회가 되면 개별적 폭력과 구조적인 폭력으로 나아가죠. 그것의 끝에는 제노사이드가 있죠. 여성을 집단 강간해서 죽이거나 영아 낙태를 하는. 저는 이 스펙트럼이 ‘걸레’로 관통된다고 봐요. 모든 여성은 걸레가 될 가능성이 있고 걸레 취급을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여성의 성기가 더럽혀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걸레라는 낙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 여사’와 제노사이드가 연결되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게 ‘걸레’라고요?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몸을 바라볼 때 가장 흔하게 쓰이면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욕이 걸레라는 건데, 그 이름을 거부하는 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죠. 지금의 온라인 페미 세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제 세대만 해도 걸레 소리를 들으면 거의 아웃되는 분위기였잖아요. 걸레니 창년이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는 것 자체도 왠지 껄끄러웠는데 그런 걸 거침 없이 표현하는 여자들이 등장했어요. ‘나는 걸레가 아니야, 나는 보지야’라고 말하는.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의 모든 것인데, 이들은 세상이 부여하는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의 온라인 페미들이 너무 좋아요(웃음). 그들의 거침없음. 그 밑바닥에 너무나 깊은 분노와 슬픔이 있다는 게 굉장히 마음 아프죠.

 

출연하신 팟캐스트 <웃자! 뒤집자! 놀자!>를 들었습니다. ‘성적 수치심’이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 성폭력 피해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화영이라는 인물이 수치심에 굴복하지 않는 인물이기를 바랐어요. 구희준도 마찬가지이고요. 여자라면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할 것인지는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수치심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불쑥불쑥 치밀어도 거기에 압도되지 않기를 바랐고요. 수치심이라고 알고 있는 감정에 다른 이름-분노, 불쾌감, 무너지지 않겠다는 절박함 같은 다른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용가’라는 제목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저는 사실 그렇게 센 제목인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남성분들의 댓글을 보니까 굉장히 불쾌감을 표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쓰는 놈들이 극소수 있을 뿐인데, 일반적인 문제인 것처럼 하는 게 불쾌하다는 거죠. 그리고 소라넷에 관해서 썼다고 하니까 불편한 거예요. 남자들만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을 여자들이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의혹의 눈초리로 쳐다볼 거 아니에요? 그래서 굉장히 불편한 감정들을 댓글에 달아 놓으셨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본인이 가해자가 아닌데 왜 스스로를 가해자 남성으로 쉽게 동일화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피해자 여성에게 공감하면서 ‘진짜 나쁜 놈들이네, 피해자 여성분이 고통스러웠겠네’ 하면 되잖아요. 이런 문제가 나오면 온라인 페미가 성 대결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사실은 남성 그룹들이 성 대결을 부추기는 게 아닌가 생각돼요.

 

예를 든다면요?


몰카 관련 뉴스가 올라오면 여성분들이 가해자 남성에 대해 나쁘다고 댓글을 달잖아요. 그러면 가해자를 범죄자 취급하면 되는데, 남성들은 자기네들을 욕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범죄자와 한국 남성 일반을 철저하게 분리시켜야 한다고 보고 거기에 남성들도 동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인은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런데 마치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요.

 

그런 남성들이 주장하는 바는, 온라인 페미들이 ‘한국 남자는 다 그런 사람인 것처럼’ 말하니까 화난다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정말 많아요. 어느 사이트에 자기 몰카가 올라왔다고 해서 봤더니 정황상 범인이 남친 밖에 없는 거예요. 피해 여성이 경찰에 신고를 하죠. 경찰이 남친을 불러서 올렸냐고 물어봐요. 남친이 아니라고 말해요. 그러면 풀려나요. 휴대폰 검사도 한 번 안 하고요. 그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하고, 여자들 입장에서는 찍은 놈은 있는데 처벌 받는 놈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 남자 전체를 일반화해서 욕을 하게 되겠죠. 그 상황에서 남자들이 주장해야 되는 건 ‘우리가 욕먹기 전에 빨리 범죄자를 잡아라’인 거죠. 그러니까 가장 잘못한 건 국가예요. 저는 성 대결을 조장하는 건 국가라고 봐요. 이걸 범죄자화해서 빨리 분리해내야 여자들도 ‘그래도 이 남자는 안 잡혀갔으니 믿을 만 하겠다’ 생각하죠. 지금 관계가 다 깨져버리고 있는 거거든요. 그 관계를 복원하는 게 정말 쉽지가 않을 것 같아요. 불법 촬영 범죄에 있어서는 국가가 빨리 범죄화시키고 가해자 처벌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범죄이고 반드시 잡힌다는 메시지도 계속 줘야 하고요. 남성 내부에서도 ‘나는 몰카를 찍지 않고 보지도 않고 유포하지 않겠다’라는 정화 운동이 일어나야 된다고 봐요.

 


‘피해자다운 피해자’라는 편견


집필을 멈추고 싶으셨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아요.


소설에서 지수가 “이거 꼭 해야 돼?”라고 묻는 대사가 있잖아요. 제 심정이 딱 그거였어요. 이걸 내가 꼭 해야 되나, 라는 생각이었어요. 소라넷은 ‘여성의 몸을 향한 지독히 일관된 상상력’이 있는 곳이잖아요. 모든 여자는 구멍이고 걸레라고 하는. 저는 페미니즘이라는 게 ‘여자를 쉽게 구멍으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해요. ‘여자는 구멍이 아니야’라는 외침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소라넷은 지독히 일관되게 여자를 구멍, 걸레, 창년으로 만드는 곳이잖아요. 그런 문화가 너무나 일상적이라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계속 쓰신 데에는 이유가 있잖아요. 사망한 피해자의 몰카를 두고 ‘유작’이라고 부르면서 조롱한 인간들이 있었다면서요?


인터넷 사이트에 몰카 피해자가 죽었다는 정보가 떠돌아다니면요. ‘**골뱅이’, ‘**골뱅이 자살’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나라예요.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문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게 대한민국의 일부분인 거죠. 그걸 우리가 조금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자꾸 ‘극소수의 미친놈들만 그러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문화가 일반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거든요. 일베나 소라넷의 문화들이 온라인상에 다 퍼져서 SNS, 심지어 단톡방에서도 여자 품평회를 하고 조롱하잖아요. 그게 너무 일상화되어 있어요.

 

『하용가』를 읽으면서 ‘왜 대한민국에 이런 남자들이 생겨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눈에 띈 대목이 있었는데요. “여자 배려하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는 증거야. 여자를 가볍게, 천하게, 하찮게 여길수록 남자다워지는 거니까”라는 대사였어요. 여자를 멸시하고 혐오해야 강한 남성으로 인정받는 문화 안에서는 이런 남자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한국의 남성이라는 정체성의 내용물들의 무엇인지, 그것이 건강한지, 그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어요. 패드립이 유행하는 걸 보면, 사실 부양자와 피부양자 사이에서는 명확히 부양자가 권력을 갖고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엄마와 아들의 관계에서는 어느 순간 역전이 되면서 엄마도 성적 대상화하는 거예요. 자기 엄마를 창녀 취급 해달라고 친구들 단톡방에 엄마 모습을 올리기도 하고요. 엄마라는 여성이 나이도 많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이게 젠더 권력 관계로 가게 되면 여전히 최후의 식민지인 거죠. 그 식민지를 착취하고 침탈하면서 남성이라는 존재가 자기 정체성을 구성해 나가고요. 소라넷에 가보면 그런 현실이 너무나 많이 보여요.

 

첫 장에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의 한 문장을 쓰신 이유군요.


그렇죠.

 

“코린토스에서는 남자의 약한 모습을 본 여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말이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는데요.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킨 남자가 반드시 여자를 응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네요.


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여자는 남자를 만나면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는데, 남자는 여자를 만나면 자기를 모욕할까 봐 두려워한다고요.

 

데이트 강간의 피해자인 구희준의 경우에는, 가해자(백철진)를 너무 쉽게 용서하는 거 아닌가요? 늦게나마 진심으로 사과하기는 했지만, 한 마디 말에 모든 걸 용서해줘야 한다는 게 피해자 입장에서 맥이 빠질 것 같기도 해요.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여러 자료를 보면서 내린 결론이 있어요. 피해자가 가장 심정적으로 원하는 건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라는 거예요. 물론 피해 경험을 하신 분들마다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만난 분은 자신은 한 번도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보지 못했고, 그게 자기한테는 너무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거기에 정말 진심이 담겨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걸 받아냈대요. 그 장면이 없었다면 가해자가 다른 벌을 받더라도 자기는 끝내 그 일을 자기 안에서 끝낼 수 없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 부분도 고민을 했는데, 어떻게 보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제시하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한 번도 성폭력 가해 남성이 피해자 여성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여자들이 진짜 원하는 건 ‘정말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백 번 천 번 미안하다’ 이런 말들이에요.

 

소설 속에 묘사된 피해자들의 심리 상태를 보면 ‘나는 피해자야, 저 사람이 잘못한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빌미를 줬을까? 저런 인간인 줄 몰랐던 나에게도 잘못이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 가해자가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죄를 지었어’라고 말하면 불필요한 자책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맞아요. 자책감이라는 게 정말 떨쳐버리기 힘들잖아요. 게다가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더 괴롭죠. 그래서 연인 사이의 폭력 문제가 쉽지 않은 거고요. 구희준의 이야기를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진짜 피해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려면, 이 피해 경험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 하고요. 우리가 피해자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이 무엇이든, 그건 편견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해자다운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꼭 남자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여자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 걸 다 벗기고 나서 피해 여성이 느낄 수 있는 많은 감정들, 세상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존재하는 감정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라넷 폐지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나 성폭력 피해자 분들을 취재하시는 과정은 어땠나요?


소설을 쓸 때는 소라넷이 이미 폐쇄돼서 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DSO(Digital Sexual Crime Out)에서 소라넷에 대해 카드뉴스를 만들어 놓은 게 있었거든요. 그게 상당히 많이 도움이 됐어요. 캡쳐 화면을 보면 ‘헤어진 섹파’, ‘초대남 모집’ 같은 제목의 글들이 쫙 나오거든요. 초대남 모집글 하나 올리면 그 아래 댓글이 막 달리고요. 그 화면이 소설 쓰는 데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됐죠. 그리고 메갈리아에서 익명의 유저로 활동했던 분들을 인터뷰했는데요. 요즘 메갈리아나 워마드에 대한 논문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어서 참고를 했고, 또 여러 가지 자료들을 통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많았지만, 당시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어서 그 분들을 인터뷰했어요. 그러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죠.

 

 

정미경-(3).jpg


 

나는 작지 않다, 작아지지 않을 것이다


결말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긍정적으로 끝내기에는 현실과 너무 다르잖아요. 암울하게 끝내자니 마음이 불편하고요.


그러니까요. 고민 많이 했죠. ‘김세준’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제 상상력이 발동이 안 되는 거예요. 한 번도 폭력을 휘둘러본 적도 없는데, 그런 제가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쓸 수는 없겠더라고요. 죽이는 장면이 상상이 안 갔어요. 그리고 현실 속의 여자들이 다 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큐소설이니까 조금 더 리얼리티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김세준을 그대로 두지는 못하겠고. 어떤 식으로든 자기 죄에 맞는 처벌을 받는 방식으로 결말을 내고 싶었는데요. 그게 기화영의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여성들의 집단적인 연대로 가능하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만약 김세준을 죽였다면 여성들의 분노나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는 판타지의 의미는 있었겠지만, 현실 속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해소할 길 없는 분노감을 드러내주는 데에는 맞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니고 다큐이니까요. 현실 속에서 여자들이 그런 감정을 품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기 때문에 결론은 지금처럼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쓰셨어요. “얌전하게 살지 않기로 결심한 여자들”은 세상과 마찰하고 체제와 불화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요. 페미니즘을 알고 나면 예전에는 그냥 넘겼던 것들도 불편해지는 것 같은데요. 작가님도 그런 시기를 지나셨나요?


그렇죠.

 

그러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늘어나는데, 왜 이 길을 계속 걸어오셨어요?

 
작아지지 않으려고요. 내 존재보다 작아지지 않으려고. 그런데 세상은 내가 늘 작아지기를 원했어요.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내가 작아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페미니즘은 나한테 작아지라고 하는 것에 맞서는 것, 나는 작지 않고 작아지지 않을 거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여자에게 자꾸 작아지라고 하고,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라고 하고, 꿈도 소박하게 꾸라고 하죠. 그 속에서 제가 가장 행복해지는 방법이 페미니즘이었어요. 20대를 굉장히 우울하게 지내다가 대학 3학년 때 페미니즘을 만났는데, 그 후로는 한 순간도 페미니스트로 살지 않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없었어요.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편집장을 지내셨고, 이후 에세이를 두 권 쓰신 후에 소설을 발표하셨어요.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리고 사실 소설을 읽은 지 얼마 안 돼요(웃음). 학부 때는 사회과학 책을 주로 읽었죠. 정치학, 여성학을 공부했으니까.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어떤 이야기가 저한테 왔던 거죠.  『큰비』 의 ‘원향’의 이야기가 왔어요. 그때 다른 자료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원향의 이야기를 봤어요.

 

무녀들이 역모를 시도한 적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이었죠?


네. 그때부터 원향이라는 인물이 내 가슴에 확 와 닿았어요. 그러고 나서 꿈을 꿨는데, 무당이 와서 저한테 자기 방울을 줬어요(웃음). 원향의 이야기를 가슴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쓸 수 있겠어요. 소설밖에 없죠. 그래서 새로운 장르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사실 저는 『큰비』를 쓰고 나서 소설 공부를 새로 시작한 거죠. 그 전에는 소설을 써본 적이 없어요. 쓰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큰비』  이후의 작품이  『하용가』 인데요. 두 작품이 많이 다르잖아요.


방점을 찍는 부분이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큰비』는 배경이 조선시대이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무녀들의 이야기이고 게다가 역모 이야기이기 때문에, 조금 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리고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데 주안점을 뒀어요.  『하용가』는 말 그대로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잘 알고 있나요?’라고 질문하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몰카 범죄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 잘 안다고 생각해요. ‘나체 사진이나 섹스하는 동영상을 몰래 찍어서 올리는 게 몰카잖아’하고요. 그런데 그게 정말 잘 알고 있는 건지, 시선에 사로잡히는 고통을 정말 잘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세상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막막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죠. 소설가는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는 걸 들리게 만드는. 아까 전에 이 소설을 읽기 힘들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독자분들도 공감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으로 썼어요.

 

『큰비』 , 『하용가』뿐만 아니라 에세이  『남자는 초콜릿이다』 ,  『넌 나의 귀여운』까지, 쓰신 책들의 색깔이 다 달라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궁금해져요.


저도 궁금해요(웃음). 그런데 그건 제가 선택하는 것보다, 저한테 오는 이야기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아요. 어떤 이야기를 쓰겠다고 생각하는 건 없고요. 그때그때 이야기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야기에 따라서 형식이나 플롯 같은 부분은 달라지겠죠. 개인적으로는 ‘불편한 진실’ 같은 것에 끌리는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감추려고 하는 어떤 것이라든가, 사람들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안 보고 싶어 하는 것, 내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버려지거나 젖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에 끌리는 것 같기는 해요.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은 가족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고 친밀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쓰고 있는 중이기는 한데 어떻게 될 지는 잘 모르겠어요. 써봐야 알 것 같아요(웃음).


 

 

하용가정미경 저 | 이프북스(IFBOOKS)
초대남 모집이라는 이름의 집단강간과 지인능욕, 여성 신체의 비하와 조롱, 신상털기 등 여성의 몸을 제물로 삼아 광란의 카니발을 벌이던 소라넷을 여성의 시선으로 중계한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규리 “나만의 딱따구리를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
0
0

박규리-메인-1번-사진.jpg


 

딱따구리는 이렇게 나와 남편이 옮겨 다닌 최근 세 곳의 거처에서 용케 발견한 이웃이자, 꿈같은 행운이 우연을 가장하여 허락되는 우리 삶의 상징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집 찾는 기준에 딱따구리가 있던 건 아니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부동산에 가서 “딱따구리 소리가 들리는 집을 찾아요”라고 들이밀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다! 단 한 번도 부동산에 그런 청을 한 적은 없었어도 이 세 보금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방향이 가리키는 곳과 딱따구리가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차근차근 알게 되었다.(11-12쪽)

 

지속가능 디자인 연구원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공대 산하 산업지속가능성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박규리와 영장류 학자 김산하 부부는 “단지 같이 있기 위해서 서로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희생하지는 말자는 합의 하에”(31쪽)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산다. 프로젝트에 따라 영국과 태국 등 세계 각지를 다니는 박규리는 번식기에는 만나 훌륭한 호흡으로 함께 알을 품고 육아를 나눠 맡으며 지내지만 평소에는 각자 지내는 딱따구리를 보며 “이마저도 우리는 딱따구리를 좀 닮았다”라고 쓴다. 이 사랑스러운 부부는 중고 가구와 살림살이로, 28명만 초대한 지리산에서의 작은 결혼으로 부부생활을 시작했다. 최근 이사한 고척동 집은 오래된, 현관 보안키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에서 먼 집이라는 남다른 조건에 꼭 맞는 산기슭 오래된 5층 아파트다. “우리에겐 당연한 일인데 사람들에게는 유별나고 희한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답답했던  『아무튼, 딱따구리』의 저자 박규리. 그는 환경 문제에 관심 두고 실천하는 일을 이렇게도 유쾌하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부도 하고 변명도 하지만 스타일 있게 환경주의자로 사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아무튼 시리즈의 열네 번째 책  『아무튼, 딱따구리』 는 더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딱따구리를 찾고, 외롭지 않게 지속가능한 삶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박규리의 응원 같은 책이다.

 

 

2.jpg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 책은 산하 씨 동생 한민 씨가 고척동 집에 놀러오면서 아무튼 시리즈를 들고 온 데서 시작되었다.”(225쪽)고 적으셨잖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어요.

 

저희가 고척동으로 이사 간 지 얼마 안 돼서 한민 씨가 집에 놀러왔어요. ‘아무튼 시리즈’를 들고 와서 한 번 읽어보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도 채식에 대해 쓰고 있다고요. 먼저 산하 씨에게 “형도 할 얘기 많을 테니까 편하게 한 번 써봐.”라고 해서 제가 옆에서 ‘아무튼 옛날’을 써보라고 했어요. 산하 씨가 “옛날엔 안 그랬다”는 얘기를 자주 하거든요.(웃음) 그러다가 “근데 나는 딱따구리 할래”라고 제가 말한 거죠. 마침 2014년부터 2015년까지 강릉에 살면서 쓰던 글이 있었거든요. 재미있는 얘기가 많았어요. 또 저랑 산하 씨랑 살면서 느낀 게 있어요. 우리에겐 당연한 일인데 사람들에게는 유별나고 희한하게 보인다는 사실인데요. 꼭 그럴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마침 잘 됐다, 싶었어요. 그때 한민 씨가 출판사를 소개시켜줬고 그렇게 시작됐어요.

 

이야기가 ‘딱따구리’라는 존재에게 모이는 것이 참 재미있었어요.


고척동 집에 이사한 첫날부터 딱따구리 3종을 다 봤어요. 제 방 창문에서 말이에요. 고척동 집에서 유별나게 딱따구리 소리가 많이 들리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니 딱따구리가 짝짓기를 하는 시기라 더 많이 들렸던 것 같은데요. 매일 들리니까 매일이 정말 황홀한 거예요. 처음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싶었는데요. 산하 씨와 얘기를 하다가 강릉에 살 때도, 그리고 케임브리지에 살 때도 딱따구리가 주변에 있었던 게 우연은 아니구나, 생각했죠. 

 

“알면 사랑한다는 최재천 선생님의 말씀”(153쪽)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누군가는 몰라서 알아채지 못한 것도 있을 테고요. 


딱따구리를 잘 알아서 이 책을 시작한 건 아니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딱따구리 챕터는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웃음) 다만 산하 씨가 여러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니까 딱따구리의 생태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요. 그런 도움은 많이 받았어요.

 

무엇보다 발랄함과 유쾌함이 좋았어요. “궁상스러운 괴짜나 교조주의적 독설가의 함정”(28쪽)을 경계하는 모습도 좋은 시사점이 되고요.


제 캐릭터가 그런 것 같아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 안 받아들여지거나 사회에서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을 때 산하 씨는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 캐릭터인데요. 저는 산하 씨가 왜 햇볕정책을 안 펴나(웃음), 생각해요. 저는 아부도 많이 떨고요. 그런 식으로 스며들면서 딱딱하지 않게 다가가려고 해요. 산하 씨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고, 제가 하는 역할이 있는 거겠죠.

 

환경에 대해 고민할 때 삶의 지향점과 실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중요할 것 같아요.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어떤 건가요?


얼마 전 있던 일이에요. 마음 맞는 동료들에게 ‘플라스틱 프리 피크닉’을 제안했어요. 빵도 비닐에 든 것은 사면 안 되고, 음식은 집에 있는 반찬통에 담아 와야 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한 동료가 “그런데 너 초콜릿은 어떻게 생각해?”라는 거예요. 이런 것 잘하려면 저것도 잘해야 한다, 는 태도가 많잖아요. 거기에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다 죽는 게 맞을 거야.”라고요. 전부 해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죠. 초콜릿은 내게 약점인데 지금 네게 선물한 초콜릿은 오가닉이고, 플라스틱 안 쓰고 종이로 포장한 거야, 라고 해서 넘어갔거든요.(웃음) 공격 받기가 쉽잖아요. 하지만 일관적으로 지속불가능한 것보다는 비일관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실천하는 사람이 공격 받을 때가 정말 많아요. 공격 받기 쉽기 때문에 선택을 보류하거나 고민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도덕을 내세우면 일관성으로 반박하더라고요. 하지만 일관적으로 안 하는 것보다는 저희가 사는 방식이 훨씬 나은 거죠. 적어도 저희가 노력한 부분에는 변화를 일으키는 거니까요. 이런 것은 어떤 사람이 실천하는 것만으로, ‘너는 왜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공격받았다고 느끼게 마련이에요. 그러다보니 너 그건 안 하던데, 라면서 실천하는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요.


제가 일하는 연구소에 채식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어떻게 하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공장식 사육에 충격을 받아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를 몇 년 후에 봤는데요. 버거를 시키는 거예요.(웃음) 멋쩍어하긴 했지만 먹고 싶으면 먹어야죠. 적어도 멋쩍어하고, 양심에 찔려하는 것도 저는 되게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실은 저도 얼마간 채식을 한 적이 있는데요. 주변의 놀림 같은 말들이 많았어요. 그게 참 외로웠던 기억이 나거든요. 작가님도 그런 외로움을 느낀 경험 있으시겠죠?


그럼요, 제일 친구에게도 외로움을 느끼는 걸요. 집에 놀러 가면 플라스틱 쌓여 있고 그래요. 하지만 그럴 때 “너 이러면 안 돼!”라고 하는 것보다 제가 한 번씩 걔네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요리해주고, 재활용 잘 버려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친구도 이쪽으로 넘어 오기를 기다리는 거죠. 그래도 몇 년 지난 지금 친구도 많이 바뀌었어요. 그 친구는 나쁜 사람도 아니고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지 않고, 아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재미(웃음)를 만들려고 해요. 화를 다스리는 게 중요하죠.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요.

 

다 바꿀 수 없고, 모두를 설득할 수도 없지만 오늘, 내가, 실천한다, 는 감각이 중요하겠네요.


한 번은 일로 만난 분이 저를 대접해주신다고 참치집을 데려가셨어요. 좋은 걸 대접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참치가 정말 멋있고 훌륭한 생명인데다 멸종 위기이기도 해서 저는 안 먹으니까 다른 곳을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거든요. 하지만 결국 갔어요. 제게는 다른 것을 시켜주시고 그분들은 참치를 드시더라고요. 그런데 적어도 메시지를 전달한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하나 안 먹어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안 먹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달라지는 건 크게 없겠죠. 그렇지만 저는 안 먹었고, 메시지는 전달했으니까요. 그분도 참치 두 번 드시려던 것 한 번 드시게 되겠죠. 그렇게 생각해요. 더구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없을 때는 이런 노력이 더 힘이 없잖아요. 또 훌륭하신 분들은 목소리가 안 크신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 책이 그런 분들을 잘 모으는 계기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요.

 

 

너무 오만한 것 같아요


이 책은 지향점이 있는 삶,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는데요. “환경 문제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활 습관과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다”(227쪽)는 말이 중요할 것 같아요.


올해 플라스틱 문제도 있었고, 폭염도 심각했고, 미세먼지도 계속 문제였잖아요. 그런데 미세먼지 때문에 공기청정기를 돌리면 그게 다시 미세먼지 발생에 기여를 하는 거거든요. 그 연결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폭염도 마찬가지죠. 너무 더우니까 에어컨 켤 수밖에 없는데요. 그게 또 문제를 일으키잖아요. 그것들을 연결하는 게 중요한데요. 다 그런 거지, 인생 뭐 있어, 라고 하는 자포자기의 태도나 해보니까 안 되던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라는 타협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분들에게 이런 환경 얘기가 고리타분하지만은 않고 재미있고 웃기고 감동적이다, 할 만하다, 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맞아요, 불가능하지 않죠.


저는 결혼할 때 신혼여행까지 200만원 들었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그랬어요. 몰라서 그런 거지 아무리 네가 하고 싶어도 안 된다고요. 작은 결혼식이 돈 더 많이 든다면서 못하게 하는 말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되더라고요.(웃음) 모두 다 행복했어요. 결혼해서도 가구를 중고로 마련하겠다고 하니까 오래 써야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느니 별 얘기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써보니까 멀쩡해요. 이런 이야기들을 책으로 편안하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인간은 왜 여기까지만 똑똑해서 우리가 모든 종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135쪽)라는 질문에 오래 머물렀어요. 정말 자주 하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얼마 전 동물원에서 탈출한 퓨마가 사살된 일도 있었잖아요.


저도 그 뉴스 듣고 많이 화가 났었어요. 지금 태국에서 프로젝트를 하는 중인데요. 진짜 저만 한 도마뱀이 캠퍼스에 돌아다녀요. 물론 되게 무서워요. 정말 커서요. 하지만 같이 있거든요. 이렇게 만약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였다면 굳이 ‘사살했다’는 뉴스를 안 냈을 거예요. 위험하다고 하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그렇게 한 거잖아요. 그보다 우선 퓨마를 왜 거기에 데려다놓았는지 말이죠. 인간이 스마트폰도 만들고, 집도 엄청 높이 짓지만 우리보다 지능이 낮다고 하는 동물들은 훨씬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요. 인간이 잘났다고 생각하니까 자연을 거슬러서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인간에게 호모 사피엔스라고 이름 붙이는 것 자체가 너무 오만한 것 같아요.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도 실은 많을 거예요.


맞아요. 다만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이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다 보면 너무 우울해져서 죽고 싶어요.(웃음)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스타일 있는 환경주의자가 되자”(44쪽)고도 하셨죠. 소비가 지나치게 쉬운 환경인데요. 이런 구조 안에서 가능한 스타일 있는 환경주의자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나가서 뭘 사려고 하면 살 게 없어요. 질려서 사는 것뿐이죠. 그때도 선택할 수 있을 거예요. 가령 제 파우치는 스리랑카의 란제리 공장에서 나온 브라컵 자투리 천으로 만든 건데요. 만져보면 더 재미있어요.(웃음) 또 제 펜은 심을 계속 교체해 쓸 수 있는 거예요. 몇 년 째 쓰고 있는데요. 이런 것 하나를 고를 때도 선택할 것은 있더라고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채러티 숍(charity shop, 중고 옷과 물품을 기부 받아 파는 가게)에서 산 건데요. 터진 부분도 있고, 땀자국도 있지만 나쁘지 않아요. 또 요즘 에코백 정말 많이 주잖아요. 그럴 때 사양하는 것도 방법이죠. 커피를 마실 때는 빨대 없이 마실 수 있다고 말하고요. 생각하면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되게 많아요. 워낙 넘치는 세상이니까요.

 

영국에서만 한 해 버려지는 옷이 100만 2천 톤이고,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아 서울에서만도 하루에 백 톤씩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패스트패션 브랜드에서 쏟아내는 싸구려 옷들을 매주 사들이느라 빚까지 지는 시대적 풍조까지 등장했다.(중략)


누군가 가끔 나의 옷차림에 대해 칭찬을 건넬 때―대부분 예의상이겠지만―이거 채러티에서 건진 거야, 라는 답에 휘둥그레진 눈을 볼 때의 쾌감이란.(110-117쪽)

 

저희 집에 와본 친구가 이 책을 다 읽고 그러더라고요. 아쉬운 점이 있대요. 너희 집을 중고로 꾸몄다고 하면 구질구질하게 생각할 텐데 실은 예쁘다고, 그게 표현이 안 돼서 아쉽다고요. 그렇다고 우리집 되게 예쁘다고 쓸 순 없잖아(웃음)라고 말하긴 했는데요. ‘patina’라는 단어가 있어요. 세월이 주는 흔적은 돈으로도 못 사고요. 억지로 만들려고 해도 안 돼요. 흔하디흔한 새 제품보다 오래되고 낡은 것에서 기품과 멋을 찾는 감각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뭐라든지 말이죠.

 

때로는 소비하기가 더 쉬워요. 고쳐 쓰는 비용이 더 들 때가 있고요.


거꾸로 기업이 만들어놓은 것에 당당하게 맞선다고 생각하면 낫지 않나요? 내가 너희의 꾐에 넘어가나 봐라(웃음) 하는 거죠. 화는 좀 나지만 휘둘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지역 상인과 직접 소통하는 인간적인 기쁨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어요. 어디에 소비할 것인가, 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기질적으로 남들이 하는 건 일단 싫어하는 면도 있는데요. 저는 대형 프랜차이즈 가는 게 너무 싫어요. 안 가본 것도 아니고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고, 그래서 더 그 사람만의 개성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매장을 더 찾게 되는 경향이 분명히 있어요. 대기업에 돈을 주면 거기에서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알 수 없잖아요. 그런 것들을 거치지 않고 상인에게 직접 줄 수 있다면 큰돈은 아니더라도 기여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별로 복잡하진 않아요. 가능하면 그렇게 하려고 하고요. 그러면서 그분들과 교류하는 기쁨도 커요.

 

 

박규리--(6).jpg

 

 

각자의 딱따구리를 찾아야


환경 문제 때문에 아이 낳기를 거부한 친구가 있어요. 우리끼리는 이야기하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책에서 그런 이야기도 솔직하게 해주셔서 좋았어요.


아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저도 주변 사람들한테 거의 말 못했어요. 유난 떤다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하고, 저 역시 마음의 결정도 아직 안 내리기도 했거든요. 그 부분은 쓸 때 저도 고민이 됐죠. 너무 내밀한 얘기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야말로 저도 용기를 냈어요. 저와 같은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요. 그러면서 이런 고민을 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어떤 문제를 ‘난 결론 냈으니까 끝’이라고 하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더라고요.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일 같아요.

 

말씀을 들으면 이런 고민들이 나를 외롭게 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돼요. 내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인 거죠. 그동안은 관심사가 늘어나는 일이 곤란함이 늘어나는 일과 똑같아지는 경험을 더 많이 했거든요.


좋은 게 좋은 거다, 는 이제 끝났어요. 하던 대로 하고 남이 하니까 묻어가는 것도 더 이상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스스로를 괴롭게 하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죠. 상황을 너무 경색되지 않게 하면서 계속 할 수 있는 방법을 저도 고민하는데요. 제 경우는 그래서 아첨을 떨고(웃음) 하는 거예요. 며칠 전에 강의를 하는데 한 학생이 고맙다고 커피를 플라스틱 잔에 빨대 꽂아서 준 거예요. 그나마 저는 이런 책도 쓰고 강의도 하니까 할 말이 있어요. “너무 고마운데…….”하면 이미 다 알아듣고요.(웃음) 이런 식으로 모두들 저마다의 방법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각자의 딱따구리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혼자 너무 괴로워하면서까지 주변 시선에 맞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회용 커피잔은 늘 고민인데요. 안 쓰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쓰게 되기도 해요.


최근 ‘유어 보틀 위크’라는 게 있었어요. 자료를 찾다가 정다운 디자이너라는 분을 알게 됐는데요. 그분은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의 모든 손님에게 잔에다 음료를 줬대요. 테이크아웃 하는 손님에게도 말이에요. 물론 회수율이 낮았는데요. 그래서 이분이 안 쓰는 텀블러를 모으기로 한 거예요. 그리고 신촌, 홍대 일대 7곳의 카페와 함께 유어 보틀 위크라고 해서 일회용품 없는 일주일 실험을 하셨더라고요. 그런 식의 창의적인 방법이 많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친구 얘기를 했는데요. 저도 친구와 싸우고 싶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옆에서 말없이 하는 거예요. 이걸 왜 해야 하는지 그냥 설명해주고요. 지나가는 말로 계속 하면 처음에는 안 하다가도 조금씩 바뀌겠죠. 그렇게 되기를 바라요.

 

재활용보다는 재사용, 재사용보다는 쓰레기 줄이기가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잖아요. 각자의 일상에서 어떤 실천이 가능한지 궁금한 분들에게 몇 가지 팁을 주신다면 어떨까요?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이유가 있어요. ‘서울새활용플라자’라고 혹시 들어보셨나요? 서울디자인재단에서 업사이클 디자인에 관한 공간을 만들었어요. 산업 폐기물을 모으는 뱅크, 새활용 가능한 소재를 모은 라이브러리, 전시 공간, 국내 업사이클 디자인 스타트업 등이 있는데요. 올해부터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있거든요. 그곳에서 얼마 전 워크샵을 했는데요. 워크샵이 끝나고 간 식사 자리에 함께 계시던 통역사 분이 물수건을 뜯다가 “같이 다니다보니 이런 것 쓰면 안 될 것 같아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재밌죠?(웃음) 또 치킨을 먹는데 비닐장갑을 많이 주셔서 제가 돌려보냈어요. 그런 소소한 실천은 많아요. 커피숍에서 주는 휴지도 안 쓰는 것은 제 자리에 갖다 놓고요. 음식점에서 먹지 않는 반찬은 처음부터 돌려드려요. 공짜로 주는 것도 필요 없으면 안 받고요. 그런 것들이 정말 많을 거예요.

 

또 써보고 싶은 책 주제가 있으세요?  


좋은 기회가 돼서 이번 책은 제가 답답하게 생각했던 것을 편안하게 썼어요. 알고 보면 웃긴 이야기 되게 많잖아요.(웃음) 웃긴데 나만 알고 있어서 답답했던 게 사실 있었거든요. 그런 걸 다 풀어놓아서 더 이상 제 얘기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제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써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그런데 제가 빠른 사람은 아니에요. 오래 걸려요. 당장 뭐가 새로 나오진 못할 거예요. 차근차근, 좀 더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면 더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정말 좋아해요. 그 시대상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면서도 시대를 뛰어넘어 메시지를 주잖아요. 『나는 왜 쓰는가』에서도 그랬고요. 그게 제게 아주 좋은 이정표가 돼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묘사하면서 보편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가끔 쓸 수 있다면 그런 노력을 하고 싶어요

 

이 책을 어떤 분들이 읽었으면 하세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분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나만의 딱따구리를 찾고 싶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거든요. 또 미세먼지 때문에 화나고 폭염 때문에 전기세 많이 나가서 화가 나는 분들에게 이것이 환경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만의 딱따구리’는 어떤 것일까요?


인간 종 외에 다른 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이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자신만의 상징 같은 거죠.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약간 쑥스러워 하면서 자기와 여자 친구에게도 그런 새가 있다는 거예요. 뭐냐고 물었더니 비둘기래요. 할아버지 집에 갈 때마다 들리는 새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가족에게 가는, 자연 속으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재미있게도 여자 친구에게도 그런 소리가 있었다면서 둘이 공감했대요. 너무 멋지더라고요. 누군가는 모기를 할 수도 있겠죠?(웃음) 산하 씨와 에스토니아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은 상징이 모기였어요. 우리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신선했어요. 모두들 찾으시면 좋겠어요.


 

 

아무튼, 딱따구리박규리 저 | 위고
웃기고, 슬프고, 열 받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웃음을 짓게 하는 한편, 사람과 동물 모두가 처한 암울한 현실이 우리를 슬픔에 잠기게도 한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신회 “이대로의 나를 돌보는 연습”

$
0
0

_15A3797.jpg

 


에세이스트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만 더 책을 써보고, 안 되면 포기하자는 마음으로 매진해 펴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의 만화 주인공 보노보노와 친구들의 대화를 인용한 에세이로 지난해 큰 사랑을 받은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는 김신회 작가가 쓴 아홉 번째 책이다.


얼떨떨한 성공 뒤, 그녀는 갑작스레 찾아온 손가락 통증으로 글을 쓸 수가 없어 본의 아니게 무기한 휴가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 중독자’를 자처하는 그녀에게 주어진 긴 휴식은 죄책감이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신회 작가는 문득 이 시간 동안 ‘나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의 열 번째 책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에는 한낮까지 잠을 자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먹고, 무의미한 일로 시간을 보낸 1년여의 마음이 담겼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건, 어떤 마음을 갖건 그저 나로서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이 목표다. 더 나은 내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 있는 것이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8쪽

 

 

_15A3708.jpg

 

 

마음이 힘들 때 쓴 책


열 번째 책이에요. 소감이 어떤가요?

 

막상 책이 나오고 나니까 10은 숫자에 불과하더라고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작가의 길을 계속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가 잘 됐잖아요. 참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목받고 사랑받는 일이 어색해서 낯설고 얼떨떨했어요. 이걸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방법을 몰라서 불안감이 컸던 것 같아요. 한 번도 이렇게 성공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웃음) 이번 책을 쓸 때는 유난히 마음이 힘들었기 때문에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이제 독자분들의 반응을 겸허하게 기다리려고요.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는 독자 투표로 결정된 제목이죠?


맞아요. 몇 개의 제목을 지어서 출판사에 보냈는데 다 나쁘지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출판사 내부에서도 투표를 했는데 여러 가지로 갈려서, 제가 낸 제목 몇 가지와 출판사에서 지어준 제목 몇 개를 후보로 독자 투표를 진행했어요. 진짜 고민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내부적으로 제일 많이 나온 제목을 독자분들께서도 선택해주셨어요. 제가 직접 지은 제목이라 마음에 들고, 많은 분들이 제목만 봐도 휴식을 취하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작가님이 힘내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리뷰가 많았어요. 마음이 힘들 때 쓴 책이라는 걸 독자들도 느끼는 것 같아요.


힘내라는 말씀도 많이 해주셨고, 딸기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웃음) 자조적으로 웃음을 주는 제 특유의 유머감각을 좋아하셨던 분들은 그게 없어서 아쉬웠다는 말씀도 해주셨고요. 예전에는 그런 글들을 보면 만족을 못 드린 것 같아 죄송했는데 지금은 ‘내 마음 상태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해요. 다시 그런 유머코드가 있는 글을 쓰는 날도 오겠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나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있다는 자책감이요. 늘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상황이 오니 적응을 못하겠더라고요. 머리로는 쉬어도 된다는 걸 알지만 잘 안되는 거예요. 한 번도 아무 것도 안하고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고작 손가락 좀 아프다고 이렇게 유난을 떨 일인가 싶어서 자책하게 되고, 하염없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는 게 괴로웠어요.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이세요?


엄청 그렇죠. 그게 나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긴장을 풀기가 쉽지 않아요. ‘쉬어도 괜찮다’는 마음과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보내도 될까’라는 마음이 갈등하는 동안 이 책을 썼어요.

 

 

내 마음을 바로 보는 연습


책이 출간된 지금은 어때요?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잖아요.


아직 많이 부족해요. 저에게는 무얼 하지 않고 있다는 자책감을 떨쳐내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책을 읽으신 분들께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놓고 영어도 배우고, 요가도 배우고, 책까지 썼는데 대체 뭘 안 한 거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직 멀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계속 마음을 다잡는 연습 중이에요.

 

불안을 떨치는 나름의 비결은 생겼을 것 같아요.


불안하다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려고 노력해요. ‘아,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두렵구나’ 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번 이야기를 해주면 조금 괜찮아져요. 대부분의 감정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서 계속 우리 주변을 떠돌거든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뭔지 모르니까 막연하게 짜증만 나는 거죠. 요즘 심리상담센터를 다니고 있는데 심리상담을 받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내 감정을 제대로 바라보는 거예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마음이 많이 편해진다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어요. 그래서 수많은 감정이 제 안을 떠돌고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더라고요. 그때그때 해결했어야 하는 감정을 무시해 온 탓인 것 같아요.

 

책에도 심리상담에 대한 내용이 등장해요. ‘감정에 대한 질문에는 감정으로 대답해야 한다. 어떠어떠한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감정이 어땠는지 느껴보아야 한다.(217쪽)’고요.


상담사 선생님께서 “그럴 때 기분이 어떤가요?”라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한 거예요.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잘 모르겠어요”였고, 이후에는 “제 생각엔 좀 우울했던 것 같아요.”, “화가 났다고 생각해요”처럼 설명하고 정의하려고 했어요.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그동안 한 번도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런데 감정을 바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마음이 한결 나아지더라고요.

 

심리상담을 받는 게 마음을 돌보는 데 도움이 많이 되나요? 

너무 도움이 됐어요. 전에 TV에서 작사가 김이나 씨가 정신건강을 위해 심리상담을 빼놓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어반자카파’의 조현아 씨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심리상담이래요. 저는 그분들의 말을 듣고 상담센터에 갈 용기를 냈어요. 그전까지는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고, 타인의 시선도 신경이 쓰여서 번번이 포기했었거든요. 보통 마음이 힘들면 금방 기분 좋아지는 쇼핑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데 돈을 쓰곤 하잖아요. 그 대신 심리상담센터에 가보셨으면 해요. 저는 책으로 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제 감정을 표현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담사 선생님께서 저는 감정을 많이 억압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동안은 내가 할 수 있는 말, 해도 괜찮은 말만 했던 거예요. 심리상담을 받는 시간 동안 아이처럼 내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새롭게 저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혹시 지금 마음이 힘든 분들이 계시다면 꼭 상담을 받아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타인과 나는 온전히 다른 사람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이걸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훨씬 편해질텐데, 자꾸 잊게 되죠. 우리는 왜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기가 어려운 걸까요?


한자로 ‘타인’은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이걸 번번이 잊는 것 같아요. 특히 관계가 개입되면 더 그렇죠. 가족, 친구, 연인의 경우에는 이 사람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감정적으로 연결돼 있으니까요. 저도 예전에는 누군가 저에게 참견을 하거나 제가 타인에게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애정이라고 느꼈어요. 우리는 가까운 사이니까 서로 같아지는 게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나와 누군가를 비슷하게 만들려고 시도할 때 결국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라는 걸 계속 생각해야 해요. 안 그러면 자꾸 잊게 되거든요. 

 

이번 책에는 나를 위해 덥석 비싼 딸기를 사먹고, 요가를 하는 등 스스로를 다독이는 모습이 많았어요. 요즘 작가님의 생활을 가장 즐겁게 하는 활동은 무엇인가요?

 
동네 친구들끼리 한집에 모여서 본방사수를 하는 모임 ‘TV회’를 만들었는데 그게 제일 즐거운 일이에요. 요즘은 <쇼미더머니>를 보고 있어요. 오늘은 저희 집에서 모이는 날이에요. 그냥 TV보면서 함께 맥주마시고 이야기하는 모임인데, 제 인생의 ‘대확행’이에요.(웃음)

 

작가님의 글에는 부모님 이야기도 자주 등장해요. 인스타그램에서 아버지에게 책을 드리고 왔다는 내용의 피드를 보았는데, 부모님께서 책을 읽고 전해주신 말씀이 있었나요?


아버지께서 표현은 잘 안하지만 제 책을 열심히 읽으시거든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여주며) 이렇게 메시지가 왔어요. ‘안녕. 책 다 읽으스움. 잘 썼네. 감동이다.’ 최고의 칭찬이죠.(웃음) 이렇게 오타도 있고 그런 게 더 뭉클해요. 제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는 살가운 딸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평소에 부모님께 못하는 말을 책에 대신 써요. 엄마는 제 책을 잘 못 읽으셔서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제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솔직하게 다 써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으신가 봐요. 수고했다는 말만 해주셨어요.

 

 

_15A3788.jpg

 

 

솔직하지 못한 글은 독자가 먼저 안다 

 
방송작가로 십여 년, 에세이스트로 십 년을 살았어요. 전업작가로 지낸 소회가 어떤가요? 


방송작가로 일하며 글을 쓸 땐 에세이스트가 세컨드잡이라는 느낌이었어요. 나에게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본업이 있고, 책은 잘 되면 좋지만 안 돼도 경험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서른은 예쁘다』를 쓸 때 쯤부터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여러모로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그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가 잘 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을 거예요. 지금부터 또 다른 시작이죠. 앞으로 10권을 더 쓸 수 있어야 하는데, 독자분들께서 그 필드를 마련해주신 것 같아요. 제 책을 읽으시는 분들이 많아지는 만큼,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훨씬 더 생각하게 되고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요.

 

많은 장르의 글 중, 왜 에세이가 쓰고 싶었어요?

방송 대본은 타인의 입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는 글이잖아요. 지금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말을 쓰고, 그들을 배려하며 사는 일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 말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어요. 그게 꼭 글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해온 일이 글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글로 한 번 풀어내 볼까 싶었죠. 막연한 생각뿐이었는데 마침 준비하던 방송이 어그러지면서 일순간에 백수가 됐고, 내친김에 ‘쓰고 싶었던 글을 써보자’하고 시작한 게 첫 책 『도쿄싱글식탁』이에요.

 

처음 내 이야기를 쓸 때 어렵지는 않았나요? 타인의 말을 쓰는 데 익숙해지면 정작 내 이야기를 쓰는 건 어색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지금 첫 책을 읽으면 얼굴이 빨개지지만, 당시에는 글을 쓰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갈증이 너무 컸나 봐요. 진짜 신나게 썼어요. 그런데 출간하는 책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내 이야기를 드러낸다는 게 부담스러워지더라고요. 글이 점점 개인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했으니까요. 지금은 괜찮지만 초반에는 창피하고, 힘들었어요.

 

작가님 글이 독자에게 위로를 주는 건 솔직함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멋 부리거나 감정을 숨기며 쓴 글은 독자분들이 먼저 알아요. 제가 처음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던 이유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순간의 창피함보다 제 진심을 잘 전달하는 게 훨씬 중요해요. 진심을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니까 자연스레 창피한 게 없어졌어요. 자꾸 꾸미려고 할수록 어색하고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괜찮다, 그냥 다 이야기하자’라고 생각하며 글을 써요. 그랬더니 독자분들이 더 공감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그럼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에세이의 조건은 역시 솔직함인가요?


솔직함은 기본이고요. 더불어 쉬운 문장으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문학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에세이는 누가 읽어도 잘 전달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쓰고 난 뒤에 보다 쉬운 문장으로 여러 번 고치고, 거듭 읽어보면서 숨 끊어지는 부분까지 세세히 표시해요. 이건 방송작가로서 대본을 보며 갖게 된 습관이에요. 또 하나의 조건은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거요. 거창한 사상이나 상념을 풀어내기보다 일상의 가벼운 에피소드, 경험 같은 것을 전달력 있게 표현하는 게 에세이죠. 만났을 때 편한 친구 같은 글이요.

 

올해 초에는  『보노보노의 인생상담』  번역 작업을 하셨어요. 첫 번역 작업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작가의 글을 번역하는 경험이 어땠나요?


끝날 것 같으면서 끝이 안나고, 몹시 외로운 작업이었어요.(웃음) 번역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알겠더라고요. 또 원작을 해치지 않도록 제 생각과 의견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잖아요. 그것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도전이었어요. 그런데 번역을 하다 보니 보노보노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더 샘솟더라고요. 엄청 울고 웃으며 몰입해서 번역을 했어요. 마치 캐릭터들이 제 앞에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죠. 너무 감사한 작업이었어요.

 

한 인터뷰에서 ‘문장으로 소설을 기억하는 버릇이 있고, 책의 좋은 구절을 늘 메모한다’고 말씀하신 걸 보았어요. 최근 메모한 문장 중 들려주실 만한 게 있을까요?


록산 게이의 『헝거(Hunger)』에 나오는 문장을 소개하고 싶네요.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서 이대로도 충분하기를 바라는 건 겁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지금 그대로의 당신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충분할 수 있으리라 믿는 건 겁나는 일이다. (285쪽)’


스스로 자신이 충분하다고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책을 쓰면서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위안을 많이 받았던 문장이에요.

 

이번 책에서 독자들을 위한 구절을 하나 뽑아주신다면요?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은 그에게 무언가를 제안, 조언,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들어왔던 ‘나 같아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되는 과보호 및 통제에 우리는 얼마나 맘고생을 해왔는가.(중략) 굳이 내가 참견해주지 않아도 다들 각자 잘 살아간다. 내가 누군가의 참견 없이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20쪽)’


흩어진 글들을 책으로 묶을 때, 편집자님께서 책의 첫 번째 순서에 이 글을 넣어주셨어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없고 평이한 글을 처음으로 배치해서 의아했는데, 이 에세이가 이번 책의 주제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지금은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결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독자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너무 사랑해주신 덕분에 제가 또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책을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고요.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는 생각보다 어둡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는 에세이집이라 밝고 희망적인 내용을 기대한 분들에게는 의외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저 저와 대화하는 기분으로, 친한 친구와 편히 누워 휴식을 취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김신회 저 | 놀
뒤처질까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불안해서 끊임없이 자책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그러니까 편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우리가 듣고 싶던 한마디를 마침내 해준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영진 “이해하는 것보다 느끼는 그림책”

$
0
0


메인-_-그림부분만-잘라서-크게-보이도록.jpg

 

 

아빠 : 우리 딸들, 여태 안 자고 기다렸어?
첫째 딸 : 오늘은 일찍 온다고 약속했잖아! 아빠는 왜 맨날 늦어?
막내 딸 : 아빠! 아이스크림 사 왔어?

( 『아빠의 이상한 퇴근길』  에서)

 

아빠는 퇴근하고 싶다. 정시에 퇴근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싶다. 그런데 자꾸만 엄청난 일이 터진다. 부장님이 자꾸 부르고 해외 거래처에서 전화가 오고, 보스는 뜬금없이 으르렁댄다. 결국 보스를 달래기 위해 회식이다. 술에 취한 보스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이제 겨우 집에 갈 수 있나 했더니 후배가 회사 일이 힘들다며 엉엉 울기 시작한다. 집에 가는 버스를 놓치고 후배를 위로하기 시작한다.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사오기 만을 기다리는 딸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지만, 후배를 그냥 돌려보낼 순 없었다. 아빠도 후배 같은 시간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야근을 많이 부모라서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라면, 이 그림책을 눈여겨보자. 『아빠의 이상한 퇴근길』 . 수상한 퇴근길도 아니고 이상한 퇴근길? “도대체 아빠는 왜 퇴근을 늦게 하냐?”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면, 아이와 함께 이 그림책을 읽어보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아이도 부모도.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일만큼 소중한 시간은 없다.

 

 

2.jpg

 

 

아이들에게 러브 레터를 쓰는 심정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림책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어서 무척 반가운 마음입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2년여 전에 비교적 조용한 곳으로 이사했어요. 계획한 일이 있어 작업실 생활을 정리하고 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일을 하면 여러가지로 불편하고 작업 시간도 줄어들 것 같아 걱정했지만 오히려 더 편한 느낌입니다. 생계형(?) 작가로서 규칙적으로 일하다 보니, 1년에 두 권씩 꾸준히 출판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시리즈가 연작으로 나오고 있어요. 이 소재를 계속 다른 방식으로 그리시는 작업이 놀랍고 반갑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마 요즘 제 화두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와 개인으로서 나, 그리고 아이와 부모로서의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에도 그런 생각이 반영되는 것 같아요. 일례로  『아빠가 달려갈게』는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에게 러브레터를 쓰고 싶어지더라고요.(웃음)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아빠가 달려갈게』였어요.
 
이번 신작  『아빠의 이상한 퇴근길』은 어떻게 출발한 작품인가요?

 

오래 전에 간략하게 써 두었던 원고입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가 한참일 때, TV 다큐멘터리를 보고 떠올렸던 이야기입니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어느 아빠의 인터뷰가 인상깊었어요. '아이와 같이 놀아 줘야 하는데, 내가 빠지면 이 집회도 힘이 빠질 것 같다. 그래서 계속 참가하고 있다. 아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빠로서의 역할, 직장인으로서의 역할, 시민으로서의 역할도 모두 힘겹게, 그러나 열심히 해 나가는 아빠의 모습에서 출발한 작업이었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가 바로 거절 당했습니다.(웃음) 몇 년이 지난 뒤, 그 원고를 기반으로 해서 나온 작업이  『아빠는 회사에서 내 생각해?』 , 『엄마는 회사에서 내 생각해?』였어요. 이런 얘기를 책읽는곰 출판사에 했더니 "그 얘기 재미있는데요!"라고 해 주셔서, 원래 원고를 다듬어서 이번에 출판하게 되었어요.
 
스토리를 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무겁지 않게, 가볍고 재미있게 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은 실제 촛불 집회 장면을 그려 넣고 싶었어요. 촛불 집회를 보면서 떠올린 이야기이기도 하고, 고단한 집회였지만 촛불의 빛이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래서 꼭 그려 보고 싶었죠. 하지만 편집부와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오렌지를 줍는 장면으로 바꿨습니다. 그동안 촛불의 상징성이 너무도 커졌다는 이유였습니다. 자칫 촛불을 소재적으로 활용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어떤 아빠라도 흔히 경험할 수 있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만 있으면 선뜻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촛불 이미지를 고집했었지만, 결국에는 편집부 의견을 받아들였죠.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책 속에 담긴 다른 에피소드는 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저 또한 익히 경험했던 일에서 나온 거예요. 정말 바쁜데 내 앞에 선 손님이 주문하는 내내 버벅거리고, 겨우 끝났다 싶으니까 포인트 카드를 여러 장 내밀고, 그걸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산 오류가 생기고…… 어휴! 제 경험에서 나온 에피소드들을 적극 활용했어요.
 
주인공 아빠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습니다. 아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아빠는 작가님께 어떤 이미지의 인물인가요?

 

평소 파마 머리를 한 아저씨들을 보면 재밌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놀러 왔는데 파마를 했더라구요. "도대체 왜?" 하고 물었죠.(웃음) 꼭 동생을 모델로 그린 건 아니었는데, 그려 보니 동생과 닮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머리카락은 안테나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생 때 머리 모양에 신경을 많이 쓰는 이유도 그렇고, 군인들의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이유도 그렇고……. 뽀글이 파마 머리는 이런저런 생각이 얽히고 설킨 것 같이 보이곤 했어요. 그래서 여러 걱정을 안고 사는 이 시대 아빠들과 어울린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파마 머리에 넉넉한 마음을 가진 아빠, 딸아이들 성화에 핑크색 와이셔츠만 입는 아빠를 상상했습니다. 
 
그림책에 아빠의 상사가 ‘사자’의 형상으로 등장합니다. 왜 사자일까요? 물론 예상은 되지만요.

 

예상하신 것이 맞습니다.(웃음)

 

(웃음) 책 뒤쪽에 섬네일 스케치가 실려 재밌었습니다. 요즘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어떤 점인가요?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예요. 그래서 뒷면지에 실린 섬네일 스케치(손톱 스케치)가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3.jpg

 

 

4.jpg

 

5.jpg


 

아빠의 그림책, 대사를 외울 정도예요

 

전작  『엄마를 구출하라!』의 주인공 ‘나로’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나로는 펄럭이와 잘 지내고 있나요? 작가님의 상상 에너지는

 

나로는 제 머릿속에 잘 있습니다.(웃음) 제 아이들도 "4편은 언제 나와? 왜 안 그려?"라고 가끔 질문해요.  『아빠의 이상한 퇴근길』에도 나로가 이름으로 등장하고, 오렌지 줍는 장면에는 펄럭이도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의 줄기는 아빠의 상상 에너지이니까요. 노하우라기보다 버릇인데요. 재미있는 상황이나 사람, 물건 등을 보면 뚫어져라 관찰합니다. 그래서 가끔 오해도 받습니다. 당연한 반응일 거예요.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 신고 모자까지 푹 눌러쓴 사람이 뚫어져라 바라보면 무섭죠. 그럴 때는 다가가서 "저 나쁜 사람 아니예요! 그림책 작가거든요! 지원이 병관이 시리즈 아시죠?"라고 외치고 싶어요. 그러면 더 무서워하겠죠.(웃음)
 
두 아이는 아빠의 요즘 그림책을 어떻게 읽고 있나요?

 

아빠 책을 대체로 좋아해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특히 이번에 나온 『아빠의 이상한 퇴근길』 은 인기가 좋습니다. 타조와 거북이 페이지는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로 좋아합니다.

 

2015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부모도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셨는데요. 요즘도 두 아이에게 사랑을 많이 표현하고 계신가요? 어떤 말을 주로 해주시나요?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하게 됩니다.
 
요즘 강연도 종종 하시나요? 강연을 듣는 아이들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와 잘 그린다.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려요?" 강연이 끝나면 사인과 그림 한 장씩 그려줍니다. 그럴 때면 꼭 나오는 아이들의 고마운 칭찬입니다. "아저씨가 이걸 얼마나 많이 그렸겠어? 아마 1,000번도 넘게 그렸을 걸! 그래서 잘 그리는 거야 많이 했으니까."라고 대답해 주죠 
 
정시 퇴근을 못하는 부모들에게 또는 칼퇴를 못하게 만드는 기업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근무 환경의 개선은 한 개인의 선언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법과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퇴근길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작업실 생활을 할 때 퇴근하면서 주로 걱정들을 끄집어내 곱씹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쓸데 없는 걱정들이 많았죠. 막연한 불안감 말이죠. 막연한 불안감은 지금도 따라 붙어요. 이 시대를 사는 부모들도 다 같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표지에도 등장하고 이야기 마무리에 등장하는 공룡은 막연한 불안감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며 작업했어요. 편집부에서도 동네 불량배 정도로 생각했으니,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겠지만, 저는 실체가 없는 막연한 불안감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공룡으로 표현했습니다. 집에서 일을 하니 퇴근길이 없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들어올 때가 퇴근 시간이죠. 아이들이 들어오면 다치지 않을 정도로 격하게 안아 줍니다.  그래도 산책할 때 가끔 그 공룡 녀석이 입을 쩍 벌리고 따라붙습니다.(웃음)

 

퇴근길에 사가면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무엇인가요?

 

물론 아이스크림이지요.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누군가 퇴근길에 작가님을 위한 간식을 사간다면, 무엇이 가장 좋으세요?

 

야구를 좋아해서 8시 즈음이면 야구를 보고 있습니다. 야구 보고 있으면 치킨보다는 족발이 먹고 싶죠. 그나저나 LG트윈스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단장부터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빠의 이상한 퇴근길』을 어떻게 읽어주면, 아이들이 더 아빠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될까요?

 

꼭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같이 읽고 나서 서로의 일상을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해하는 것 보다 느끼는 것이 더 강력한 것 같아요.

 

 

마지막에 넣어주세요.jpg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아빠의 이상한 퇴근길김영진 글그림 | 책읽는곰
곤히 잠든 아이들의 귓가에 아빠의 진심 어린 사과가 꿈결인 양 아득하게 들려옵니다. 세상 모든 아빠들을 대신한 유쾌한 변명, 세상 모든 아빠들을 향한 따뜻한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그림책입니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손보미, 그것도 소설 쓰는 시간

$
0
0

 

참고-사진-(2).jpg

 

 

“말씀하시는 대로 해볼게요.” 인터뷰에 앞서 시작된 사진 촬영. 손보미가 촬영팀에게 건넨 한마디다. 잘 못하더라도 우선은 해보겠다는 말. 스태프들이 늘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카페 옥상에도 올라갔고 아직은 더운 골목에도 나가 장시간 사진을 찍었다. 살짝 지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손보미는 어떤 답도 크게 망설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5년 만에 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을 앞에 두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의 말’에 등장하는 한 문장이었다.

 

장편  『디어 랄프 로렌』  이후 손보미는 달라졌을까, 여전할까. 언제나 그가 소설가로서 바라는 건 단 하나.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 책의 씌어진 문장들을 통해 자신들의 시간과 공간을 아주 잠시라도 마주하게 되는 일”(293쪽)이다.

 

 

111.jpg

 

 

내가 행복해 하는 행위이면 좋겠다

 

‘작가의 말’을 안 쓰려고 했다면서요.

 

책이 나오면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잖아요. 다음 작품으로 내가 이미 넘어갔는데, 예전에 쓴 작품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이야기를 보탠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냈을 때 다음 단편집에는 ‘작가의 말을 쓰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출판사에서 써달라고 하셔서요. 제가 대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편이라(웃음) “네”하고서 썼죠.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문장을 거의 쓰지 못한 날이었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아, 어떻게 해? 오늘도 한 글자도 못 썼어”라고 했더니 “그것도 소설 쓰는 시간에 포함되는 거야”라고 답장이 왔다고요.


제가 도서관에서 소설을 주로 쓰는데요. 한 문장도 쓰지 못하는 날이 있었어요. 도저히 이렇게는 집에 가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지금 인터뷰하는 시간도 그럴 거예요. 소설가에게는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맞아요. 어떤 작품에 어떻게 들어갈지 모를 일이죠.

 

수록 작품을 살펴보니, 가장 최근에 쓴 소설이 「몬순」. 『문학과 사회』 2016년 가을호에 실린 작품이에요. 가장 오래 전에 쓴 작품은 2013년 봄호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대관람차」입니다.


「대관람차」는 제가 참 좋아한 소설인데요. 이번에 책을 내면서 다시 읽어보니까 내가 뭘 많이 썼구나, 굉장히 펼쳐져 있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같으면 더 잘 쓸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요. 저는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이 2013년에 나왔으니까, 두 번째 소설집이 나오기까지 공백이 길었잖아요. 그래서 더 신경을 썼던 것 같아요. 분위기가 좀 튄다 싶은 건 빼기도 했고요. 그래도 내가 재밌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소설집을 읽을 땐 ‘왜 이 작품을 첫 번째로 넣었을까? 왜 이 작품은 마지막 순서로 정했을까?’를 생각하게 돼요. 「고양이의 보은」이 마지막에 들어간 건 확실한 이유가 느껴졌고요.

 

「고양이의 보은」은 자전적 소설로 썼던 작품이라 작품과 저의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요. 지금까지 쓴 소설 중에 저와 가장 가까운 작품일 거예요. 가끔 소설을 쓰다 보면, 어떤 세계에서 넘어온 인물이 제게 말을 거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예측하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하고 상황이 펼쳐지곤 하죠. 제 머릿속이라는 세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 셈인데 그럴 때 저는 무척 행복하다고 느껴요. 어떤 세상에 있는 누군가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해서요. 마치 소곤소곤 속삭이는 것처럼요.

 

“따지고 보면, 내 삶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하기도 했다”(234쪽)는 실제 손보미가 생각하는 마음일 거고요.

 

그렇죠. 저는 굉장히 운이 좋았는데, 결과론적으로 생각해보면 ‘계속 운이 좋았던 게 과연 정말 운이 좋은 건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2009년에 데뷔한 걸로 치면 소설가로 거의 10년을 살아온 셈이잖아요. 2011년에 「담요」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 주목을 조금 받은 편이라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나를 증명해내야 해, 더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좀 편하게 써도 좋았을 텐데, 힘을 좀 빼고 쓸 것을’ 하는 마음이 있어요.

 

지금은 어때요?

 

확실히 부담 같은 건 없어요. 물론 작품을 쓸 때는 최고의 완성도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작가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는 오늘 작품을 쓰고 내일을 상상할 때예요. 하루 종일 글을 쓸 수 없으니까 집에 가야 하잖아요. 학교 도서관을 나서면서 ‘아, 나 내일 또 와서 소설을 쓸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 그게 참 행복해요. 이런 감정을 계속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을 쓰는 행위가 나한테 즐거워야 하고, 내가 행복해하는 행위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런 마음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정말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나요? 자리를 벗어나요? 아니면 끝까지 앉아 있어요?

 

앉아 있는 편이에요. 다른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더라도, 어쨌든 이 시간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앉아 있어요.

 

하루에 최소 몇 시간은 쓴다는 기준이 있나요?

 

말하기 부끄러운데요, 최소 지키는 시간은 20분이에요.

 

하루에 20분이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웃음) 타이머를 맞춰놓고 20분을 쓰고 또다시 알람을 맞춰놓고 써요. 최소 20분은 절대 다른 걸 하지 않고요. 제가 진짜 산만하거든요. 조금 쓴 다음에 막 다른 걸 하고. 그래서 타이머를 맞춰놓아야 해요.

 

낙천적인 성격인 것 같아요. 동시에 노력파라는 생각도 들고요.

 

스스로 “나는 주의력 결핍 장애자”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웃음) 무언가를 엄청 계획하면서 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냥 닥치는 대로 주어지면 하는 성격이죠. 소설도 대학 때 처음 쓰기 시작했는데 제가 집중을 너무 잘하는 거예요. 타자를 치는 순간만큼은 놀랄 정도로 집중을 해서 ‘아, 내가 이 일이 되게 재밌나 보다’ 생각했어요.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쓰기 시작한 게 아니거든요. 소설을 계속 쓰면서도 ‘진지하게 써야지, 이제 그만 쓰고 싶다’같은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3.jpg

 

 

앞으로 작품을 많이 쓸 거니까요

 

이번 소설집 제목이 단편 제목이 아니에요. 보통 표제작을 쓰기 마련인데요.

 

「대관람차」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편집자가 다른 제목을 생각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어요. 그런데 제목이 안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다 편집자가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을 제안했죠. 처음엔 너무 귀여운 것 같아서 내 소설이랑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설득해줬어요. 작품에 고양이가 많이 등장하고, 주요한 사건이 밤에 많이 일어나고, 또 제가 ‘우아한’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elegant’라는 단어를 좋아하기도 해서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죠.

 

고양이를 키우나요?

 

11세, 10세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어요. 「고양이의 보은」에 나오는 ‘눈이’라는 고양이 이야기는 진짜 제 경험담이에요.

 

생각해보니 이번 소설집의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에 고양이가 등장하네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이 마침내 「고양이의 보은」으로 바뀌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사실 저는 고양이를 키우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주변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 매일매일 고양이 사진을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첫 작품의 주인공처럼 ‘나도 어쩌면 고양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맞아요. 키우기 전에는 모르는 일일지도 몰라요.

 

「산책」이란 소설은 제목에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어요. 서늘한 분위기라고 할까요.

 

오래전부터 추운 곳에 있는 어린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라도 써보고 싶어 「담요」라는 소설에 등장시켰는데, 언젠가 이들 부부를 주인공으로 꼭 써보리라 생각했었어요. 이 작품의 시작은 ‘아무도 내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다’에서 출발한 거예요.

 

주인공은 ‘한밤의 산책을 즐기는 아버지’를 끊임없이 걱정하는데, 오히려 과도하게 걱정하는 딸이 걱정스럽더군요. 과연이 작품의 주인공은 딸이 맞을까? 어쩌면 남편? 아버지가 아닐까도 생각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딸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장치일지도 몰라요. 실질적인 주인공은 다른 사람일 수 있죠. 우리는 서로가 너무 잘 안다고 확신하지만, 아내와 남편, 딸과 아버지라는 가장 가까운 가족도 온전히 믿지 못해요.

 

이번 소설집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할 인물은 아마도 「임시교사」의 ‘P부인’이 될 것 같아요. “천성적으로 남을 비난할 줄 모르는 사람. 지하철에서 누군가 메모지를 돌리며 적선을 부탁하면 절대로 거절하는 법이 없는 여자”(89쪽). 주변에 있을 것 같으면서도 없는 그런 캐릭터인데, 어쩐지 이 작품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 읽었어요.

 

예전부터 쓰고 싶은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와 긍지를 잃지 않는 여성이었어요. 너무 쓰고 싶어서 시도를 많이 했지만 계속 실패하면서 내가 쓸 수 없는 이야기인가 보다 마음을 접었죠. 그렇게 인물만 갖고 있었는데 콩트를 쓸 기회가 있어서 P부인 이야기를 썼어요. 임시 교사였다가 치매 노인을 보살피는 여자의 이야기였죠. 그렇게 쓰고 잊힌 상태였는데 2014년에 『문학동네』 20주년 기념호에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어요. 장편을 준비하고 있을 때라 처음으로 “이번에는 못 쓸 것 같다”고 했는데, 담당 편집자가 “라인업이 정해져 있는 거라, 우선 써보고 못 쓰겠으면 펑크를 내라”고 하더라고요. “알겠다”고 대답만 하고 며칠을 보냈는데 전에 썼던 콩트가 생각났죠. 그렇게 급하게 시작해서 완성된 작품이에요. 쓴 기간은 1주일이 안 되지만, 주인공 이미지는 오래 갖고 있었던 작품이죠.

 

현실에 P부인이 있다면 존재감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거예요.

 

아마도 그렇겠죠. P부인은 불의한 상황을 겪더라도 그 일에 대해 따지거나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P부인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죠. 제가 쓰고 싶었던 건, 불의한 상황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삶에 긍지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궁금해하고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물론 고맙지만, 그 사람들로만 세상이 굴러가는 건 아니니까요.


P부인은 자신이 아이를 돌봐주는 부부로부터 “남의 집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여러 번 듣게 되는데, 뭔가 끔찍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 부모는 자신이 가진 에티켓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단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은 아니었는데 상황이 바뀌면서 모든 게 달라져버리죠. 원래는 진심이었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진심이 아닌 말이 돼버린?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들이 많이 그렇지 않나요?

 

저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말할 때, 거북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작가님은 어떤가요? 과한 친절, 과한 상찬을 들을 떼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라고 생각하죠. 당연히 마음속으로만요.(웃음) 사람들이 제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고 하면 잘 안 믿어요. 그냥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상대가 서운할 수 있겠어요. 대신 표현은 안 하죠. 제가 데뷔할 때부터 부담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문학상을 받거나 공식적인 평가를 들을 때마다 작품으로 증명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 작품을 많이 쓸 거니까요. ‘지난번 작품보다 더 잘 써야 해’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지’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선호하는 문장, 쓰고 싶은 문장이 있나요?

 

스스로 문장을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소설집을 엮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쓰지?’ 싶을 때가 있어요.(웃음) 제가 쓰고 싶은 문장은 정말 단순한 문장이에요. 적확한 단어를 적재적소에 넣어서 그 문장이 어떤 의미를 생성하는 문장? 그런 문장을 쓰고 싶은데 어렵죠. 제가 묘사도 잘 못하는 편이라, 고유명사를 많이 공부하는 편이에요. 고유명사를 잘 쓰는 문장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메인-1.jpg

 

 

내가 즐거운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상자 사나이」에 등장하는 문장 “열심히 사는 건 어떤 거죠?”를 조금 응용해서 열심히 소설을 쓰는 건 어떤 거죠?

 

언젠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은데요. 올리버 색스가  『깨어남』이라는 책에서 “의사들은 객관적인 관찰자 입장에서 내려와 환자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해요. 제가 쓰는 소설이 인물과 가까운 거리에서 쓰는 작품이 아니지만, 소설을 쓸 때 가장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건 인물의 얼굴을 바라보고 인물이 하는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하는 일이에요. 도저히 이야기가 안들리고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계속 노력하다 보면 결국엔 뭔가가 떠올라요. 「고양이의 보은」도 그렇게 쓴 작품이었어요. 어떤 대사도 떠오르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후드득 생각났죠.

 

10년 차 소설가로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요.

 

소설을 너무 좋아하지만 소설 쓰는 행위 자체를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내가 안 쓰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진 않는 거예요. 다만 어떤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오면 그냥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이게 제가 가장 즐겁게 창작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때때로 다른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지만, 오래 쓰려면 내가 즐거운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해 출간된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에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실었어요. 처음엔 집필을 망설였다고요.

 

작품 속에 사회적 이슈를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편이 아니에요. 다른 식으로는 쓸지 몰라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걸 즐겨 하진 않죠. 어렵기도 하고요. 그래서 청탁을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편집자가 「임시교사」 같은 분위기여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1인칭을 잘 쓰지 않고,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 쓰는 걸 더 편하게 생각하는 터라 고민을 좀 했던 것 같아요. 책을 받아보니 제 소설만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더라고요.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신선한 경험이었죠.

 

‘아무튼’ 시리즈에 ‘미드’를 소재로 에세이를 쓸 예정이죠? ‘근간’에 출간된다고 책날개에 계속 등장하던데요.

 

(웃음) 아, 지금은 그걸 쓰고 있지 못하는데 감사하게도 출판사에서 재촉을 안 해줘서…. 빨리 써서 드려야죠.

 

지금까지 산문집을 낸 적은 없어요.

 

짧은 산문은 많이 썼는데 묶을 만큼 쌓이진 않았어요. 저 같은 경우는 무엇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시간이 있는 한에서는 되도록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계속 글을 쓰는 상태이고 싶은 거죠.

 

요즘 주로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소설가가 아닌 그냥 손보미로 보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지?’라는 문제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작품을 행복하게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괴롭게 쓰는 작품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내가 행복하게 소설을 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해요.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논픽션을 읽는 걸 좋아하는데, 제가 100% 문과 기질의 소유자라서 과학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해요. 이해하고 읽는다기보다는 이해하고 싶어서 읽는 것에 더 가까울 거예요. 펜이랑 자를 들고 밑줄을 치면서 읽거든요.

 

소설을 꾸준히 쓰고 싶다는 마음이 읽히는데요. 작품을 오랫동안 쓰기 위해서 지켜야 할 작가의 태도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를 자꾸 행복한 상태로 만들어서 열심히 쓰는 일? 제가 일상을 보낼 때는 게으르지만, 소설을 쓸 때는 부지런해지는 것 같아요.(웃음) 아이작 디네센의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쓴다”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계속 뭔가를 쓰는 감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평정심」(9와 숫자들)이라는 노래가 있는 거 알아요?


몰랐어요.(웃음) 들어볼게요.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손보미 저 | 문학과지성사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면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는 인물들이 새로운 자아와 관계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작가 특유의 세심하고 정갈한 문체로 담아낸다.

 

 

팟빵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서령 “삶의 비밀은 어디에나 숨어있는 거니까요”

$
0
0

20180917__?_듄넽_됣뀯_끷뀱_솽꼮_⒰꼮_α넰_?___DSC7124.jpg

 

 

김서령 작가가 들어오는 순간 문득 빨강머리 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인 엄마와 “무언가 슬프고 허전한 일이 있어 계란찜 뚝배기 앞에 두고 매운 닭발을 줄줄 빨고 있어도 그냥 묵묵히 맞은편에 앉아 있어 줄 것만 같은” 여자친구들이 있는 한국의 빨강머리 앤.


어렸을 때부터 소설가를 꿈꿨고, 꿈꾸던 소설가가 되어 장편소설 『티타티타』,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 등을 펴냈다. 여러 도시에서 여행객이 아닌 생활자처럼 살았다. 평생 혼자 살 줄 알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주라는 아이가 찾아왔다. 지금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기의 편을 들어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사랑을) 아는 사람보다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뒤돌아보고 더 많이 울었을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사랑은 없다”라는 신용목 시인의 추천사를 읽으면, 김서령 작가의 사랑이 흘러넘쳐 두 번째 산문집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 로 나왔나 싶다. 오래된 인연과 새로운 인연 모두 너무나 좋지만, 김서령 작가는 짐짓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 대충 해.” 라며 허리께를 툭 친다. 사랑은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주와 H 언니와 J

 

5년 만에 두 번째 산문집이 나왔어요. 그동안 어떤 게 변했을까요?

 

아무래도 변한 건 역시나 우주예요. 아기가 생기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생의 모든 부분이 변한 것 같아요. 또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해보면 정말 변한 건 하나도 없어요. 특히나 출산 이후 첫 산문집에 나왔던 H 언니와 J와의 관계가 많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옆 동에 나란히 살게 됐고, 정말로 똑같아요. 다만 이런 건 있죠. 둘이 여행갈 때 안 끼워주는 정도?


연락도 안 해줘요? (웃음)


둘이서 연락 없이 여행을 간 바람에 완전히 삐진 적이 있어요. 지금은 너도 갈 수 있으면 가자고 빈말 한 번 던져주기는 해요. 항상 못 가죠. 글 쓰는 것도 똑같고, 변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하루에 한 시간씩 엄마랑 전화하고, 한 시간보다 더 오래 해서 전화기가 너무 뜨거워져 그만 좀 하자고 끊기도 하고요.

 
변하든 변하지 않았든, 결국 관계 이야기가 담겼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인간이 와서 생긴 변화와, 변하지 않은 예전의 관계요.


저는 사람이 제일 좋아요. 제가 지구에 온 것 자체가 누군가를 만나러 왔다고 생각하고, 싱글이었을 때도 열심히 놀러 다니면서 사람들 만나면서 살았어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매일 연재하던 칼럼에 어느 순간 할 이야기가 없어지더라고요. 왜 이러지 생각해 보니 제가 아무도 안 만났던 거예요. 그래서 H 언니한테 “이제 글을 못 쓰겠어, 정말 쓸 말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더니 언니가 그날 반차를 내고 조퇴하고 나왔어요. 같이 온 동네를 헤집고 술집 네 곳을 돌면서 낮술을 마셔줬어요. 그리고 집에 와서 칼럼 네 편을 썼어요.

 

칼럼을 모으는 것도 꽤 오래 걸리셨겠어요.


편집자님에게 드린다고 해 놓고는 파일 찾는다고 한 몇 달 걸렸어요. 누더기로 모아서 드렸었죠. 편집자 선생님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원고도 엄청 많이 주고는 하나도 안 건드리고 알아서 쓸만한 걸 골라달라고 했으니까요.


채널예스에는 <김서령의 우주 서재> 칼럼으로 먼저 인사를 드렸어요. 처음에는 다른 칼럼명을 생각했다고 하셨죠.


‘김서령의 우주 책방’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 ‘마포 김 사장의 야매 책방’이 있어서 못 했어요. 그 무렵에 정말 책방을 내고 싶었어요. 조그마한 서점을 내서 이름을 꼭 우주 책방이라고 하고 싶었거든요. 포대기에 우주를 업고 책방을 운영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돈 안 되는 일이 소설쓰기인데 세상에서 제일 돈 안 되는 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겠다니 제가 너무 무모하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못했죠.


책에도 쭉 우주 이야기가 나와요. 우연한 계기로 생각하지 못했던 때 온 아기예요. 요새 다들 험난한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무섭고, 자신이 없다고 하잖아요. 두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아이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조카도 제대로 한 번 안아준 적이 없을 정도로 아이에 대한 관심이 추호도 없던 사람인데, 사고 이후에는 중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그렇게 예쁜 거예요. 아이들이 애틋하고 자꾸자꾸 쳐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도 어쩌면 이게 마흔을 건너는 하나의 통과 의례고, 이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두려움이 이런 마음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폄하했어요. 그랬는데 막상 아이가 생기니까 정신이 없었죠. 고민도 많이 했어요. 테스트기를 본 순간부터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겠다는 마음이 있었구나 싶어요. 막상 가족들은 도대체 왜 이제 와서 결혼을 하냐고 반대했죠. 그때 우리 엄마는 제가 아기를 가진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나중에야 이야기하니 정말 이것들이 미쳤구나, 정신이 나갔구나, 나는 그 남자애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웃음) 식장 예약을 해버렸다니요.


어떤 엄마로 자랄지 가장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고 하셨는데, 36개월이 지난 지금은 어떤 엄마 같나요?


절대 좋은 엄마는 아닌 것 같아요. 착실한 엄마, 성실한 엄마는 더더욱 아니고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우리 엄마거든요. 지금까지 즐겁게 살아온 이유가 엄마 같은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우주에게도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편한 사람. 훈육은 누군가 해주겠죠. 저는 무조건 괜찮아, 그래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요. 한 아이에 대한 응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지 확신하거든요. 끝끝내 네 편, 영원한 네 편 한다는 엄마만 되자. 어차피 여러 가지는 못해먹겠고 나는 이것만 하련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요. 그리고 마흔 두 살에 아이를 낳았으니 우주는 자기 또래 친구들보다 한 10년은 엄마 아빠랑 일찍 헤어지게 될 거잖아요. 그 생각을 하면 굳이 아이를 닦달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예뻐만 하고 싶어요.


우주의 장점을 잔뜩 나열한 글이 있었어요.


편집자 선생님께 너무 창피하다고 두 번이나 빼달라고 했는데 넣으셨더라고요.


최근 발견한 우주의 재능은 뭔가요?


시인을 시킬까 봐요.


우주가 글을 쓰나요?


아니요. 책도 되게 싫어하고, 책은 세워놓고 공 던져서 쓰러뜨리는 것만 알아요. 그런데 얼마 전에 기저귀를 떼고 저한테 말했어요. “엄마, 왜 응가가 똥인 줄 알아? 왜? 응가가 변기에 똥 똥 하고 떨어지잖아. 그래서 똥이야.” 그래서 이 아이를 시인을 시켜야 하나 엄마한테 이야기했다 또 욕먹고. 요즘 그래요. (웃음)


아마 작가님 어머니도 어렸을 떄는 그러셨을 거예요. (웃음) 아이 때문에 생기는 자기 관찰자 시점도 있잖아요. 글도 바뀐 게 있지 않나요?


한동안 산문을 너무 많이 썼어요. 한동안 아이 생각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기쁨만 생각하다 보니 일상의 소소한 산문은 쓸 수 있지만 소설 쓰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사람들이 늘 아이를 낳고 나면 글이 훨씬 깊어진 걸 느낄 거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혼자서 자꾸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거예요. 깊어졌나 안 깊어졌나. 왜 나는 그대로고 철이 없지 그런 생각만 자꾸 들고요. 지금은 아이와 상관없이 스스로 철이 들고 안 들고의 문제라고 결론을 냈어요. 요즘 다시 소설을 쓰고 있자니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20180917__?_듄넽_됣뀯_끷뀱_솽꼮_⒰꼮_α넰_?___DSC7035.jpg

 

귀 기울여주고 들어주는 일

 


책에서 특히 청년 남녀가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좋았어요. 대화를 잘 기억하는 편인가요?


너무 귀엽지 않아요? 그런 구상 자체를 칼럼에다 쓸 수는 없잖아요. 대사 자체로 죽 연결해서 보여줘야 하는데 칼럼이나 소설에도 못 넣고, 그런 대화를 넣기 위해 산문집을 내는 것 같아요. 친구들이 녹음기 들고 다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따라가면서 그런 대화를 들으면 녹음기를 쓰지 않아도 들려요. 쓸려고 하면 써지고요. 엄마 전화를 구술한 부분도 여러 군데 있잖아요. 생각해보면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귀를 기울였나 보다 그렇게 짐작은 해요. 귀 기울여주고 들어주는 게 작가가 하는 일 같아요.

 

남자   가자.
여자   됐다.
남자   가자.
여자   돈도 없다.
남자   내 있다.
여자   있나.
남자   있다.
여자   됐다.
남자   돈 있다.
여자   얼마 있는데.
남자   16만 원 있다.
여자   진짜가.
남자   진짜다.
여자   어디서 났는데.
남자   원래 있었다.
여자   가까.
남자   가자.
여자   가자.
- 「동피랑 골목길」 중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가는 능력이기도 할 거예요. 대화를 귀기울여 듣는다고 하더라도 복기하려면 그 대화 안에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잡아내야 하잖아요.


엄마와 전화한 내용을 SNS에 쓴 적이 있는데, 한 작가가 자기 책에 인용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보니 메모에 관한 책이었는데, 사람이 메모를 잘해야 이런 글도 쓸 수 있다고 제 글을 인용하셔서, 그게 아닌데…(웃음)


부모자식을 넘어서 삼촌과 작은 엄마의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고모나 작은 엄마의 존재는 늘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통해 다가왔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강원도 삼척에서 구멍가게를 했던 풍경도 늘 아빠의 이야기 속에 있었고, 엄마가 이야기할 외할머니의 포목점도 많이 들어서 가끔 직접 가봤다는 착각이 들어요. 지금도 소설 쓸 때 엄마아빠에게 전화해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요. 아마도 저는 부모님에게서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을까요.


작은어머니는 이번 산문집을 보고 뭐라고 하실까요?


걱정돼요. 작은 엄마가 보면 안 되는데요. 소설적 장치라고 해야겠어요. (웃음)


그래도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글을 쓰고 책에 관심이 많은 분이 있다는 건 큰 힘이었을 거예요.


그럼요. 아빠가 시인 지망생이었다는 사실 자체도 재미있어요. 아직까지 아빠가 엄마한테 썼던 연애편지 노트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 걸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좋은 체험이에요.


가족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글이에요. 선생님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웃음)


결혼식에 중학교 1, 2, 3학년 담임 선생님 다 오셨어요. 제 인간관계가 그래요. 엄마도 아무리 내 딸이지만 징그럽다고 하시더라고요. 사람들이 살다 살다 이렇게 친구 많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하객만 700명이 와서 지인 사진을 세 번에 나눠 찍었어요.


그 정도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남들보다 사랑의 총량이 많은 게 아닐까요?


글쎄요. 어떤 사람은 제가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건 남의 인생에 하나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H언니는 우리가 서로 너무 깊숙이 들어오지 않아서 좋다고 그래요. 서로 집 비밀번호를 다 공유하면서 아무 때나 열고 들어가면서도,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하건 나무라거나 간섭하거나 참견하지 않고 알아서 하겠거니 하기 때문에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H 언니와 J는 옆 동에 사시죠?


그러니까요. 구두 사는 것도 아니고 집 사는 건데 H언니가 이사를 쉽게 결정해 버리더라고요. J는 결혼이 어그러지고 파혼녀가 됐으니 당연히 이사라도 가야 한다고 왔고요. 엄마가 반찬 가져다주면 세 집이 나눠 먹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어요. 좋으면서도 이상해요.


읽으면서 이런 종류의 따뜻한 공동체가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받기도 했어요.


공동체라는 말을 되게 좋아해요. 새로운 형태의 가족, 혈연이 아닌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에 관심이 많고 그것에 대한 소설도 늘 생각하고 있어요.


H 언니와 J도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나요?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H언니는 세상 태어나서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저 때문에 한 권씩 읽고 저 때문에 가끔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나고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다른 사람이 모이게 됐을까 모르겠어요. 우리의 공통점은 그저 좋은 부모님이 계신다는 거? 그거 외에는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게 됐어요. 가장 단단하게 옆에 서 있어 주는 사람들이에요. H 언니와 J 같은 친구가 너무 부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나이 들어서 혼자 사는데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말을 해요.

 

 

20180917__?_듄넽_됣뀯_끷뀱_솽꼮_⒰꼮_α넰_?___DSC7266.jpg

 

 

사람들이 시선을 어디에 두는지가 궁금해요


최근 『빨강머리 앤』 시리즈를 번역하기도 하셨죠.


김서령 이름으로 번역한 건 『빨강머리 앤』이 처음이었어요. 그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실용서를 번역하고는 했죠. 허밍버드에서 번역을 제안했을 때 이건 제 이름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역자 서문에 우주가 커서 작가님의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쓰셨어요.


그런 생각 굉장히 많이 해요. 우리 엄마는 정말 책을 안 사주셔서 (웃음) 제가 가지고 있던 책을 물려줄 순 없지만 지금도 제가 읽은 것 중 좋은 책들은 책장 한 편에 따로 모아놔요. 나중에 꼭 우주 줘야지 하고요.


잘해야 하는 것, 잘하는 것, 잘하고 싶은 것으로 일을 나눈다면, 번역은 어디에 속할까요?


이제 번역은 꼭 해야 하는 것만 하고 싶어요. 예전에는 직장 그만두고 오랫동안 여행을 가면 번역거리를 가져가면 참 좋잖아요. 지금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이 드니까 꼭 해보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요. 좋은 것만 하고 싶은 마음이죠. 그게 오히려 욕심을 부리는 걸까요?


소설은 어때요?


소설에는 항상 빚진 기분이에요. 잘하고 싶은 것. 잘해야 하는 것은 다 소설이죠.

 

산문은요?


말씀하신 것 중에는 잘하는 것일 거예요. 저는 쉽게 쓰고 편안하게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소설가가 이렇게 시시한 이야기를 떠들어도 되는 걸까 고민하다 산문집을 냈는데 만족스러워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편소설을 내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읽어는 줘야 하는데 읽기는 싫고 양은 많고요. 칼럼을 연재할 때는 다들 기뻐하고 즐거워했어요. 그래서 내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산문집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산문은 계속 쓰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김서령 소설은 폭발적이거나 거대하지 않고, 갈등도 심각하지 않다는 리뷰를 봤어요. 앞으로 혹시 거대하고 거창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나요?


그런 건 별로 재미가 없어요. 애초에 제 관심사가 그런 쪽이 아닌가 봐요. 저는 사람들이 시선을 어디다 두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어떻게 돌아서서 나왔는지, 그때 그 사람이 왜 치마자락을 잡았는지에 훨씬 관심이 많은 사람 같아요. 스스로 격정적이거나 거창한 순간도 없고요.


성정이 글에 드러나죠. 산문도 마찬가지고요.


비슷한 것 같아요. 아마 첫 산문집을 읽으신 분이라면 두 번째 산문집을 읽고 비슷하다고 재미가 없다고 하지 않을까 해요. 정말 소소하죠. 하지만 소소한 이야기들도 가만히 듣다 보면 재미나거든요. 삶의 비밀은 어디에나 숨어 있는 거니까요.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김서령 저 | 허밍버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만은 아니니까. 또 한 여성이자 개인으로서의 ‘나’는, 다른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이 중요하니까. 문득, 이런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가까운 사람들이 전에 없이 귀하게 다가온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새 시대의 밴드, 아도이

$
0
0

어디서든 아도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시내 곳곳의 카페와 펍은 물론 소소한 편집샵부터 규모 있는 의류 매장 등 일상 속 배경 음악은 물론 서울 패션위크와 같은 패션쇼에도 이들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국내 주요 음악 페스티벌의 핵심 라인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냄은 물론 해외에서의 러브콜도 쏟아진다. 낭만적인 신스 팝으로 청춘의 감성을 대변하는 아도이는 젊은 인디 팬들을 상징하는, 새 시대의 밴드로 빠르게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렛츠 록 페스티벌> 무대를 마치고 온 밴드를 홍대 빅퍼즐문화연구소에서 만났다. 바쁜 일정에도 멤버들의 목소리는 쾌활하고 즐거웠다. 


 

1.jpg

          좌측부터 주환, ZEE, 다영, 근창

 


처음 아도이의 음악을 구상할 때 어떤 스타일을 기획했나.


주환 : ZEE를 제외한 멤버들은 트램폴린, 이스턴 사이드 킥 등, 인디 씬에서 오래 활동해왔다. 신디사이저를 다루고 가요 활동을 하면서 나에게 없던 커머셜한 부분을 갖추고 있던 ZEE에게 주목했다. '팝을 해야겠다', 그중에서도 신스 팝이었다.

 

ZEE에게 신스 팝 아이디어를 얻었다면 다영에게는 어떤 힌트를 얻었나.


주환 : 다영에겐 유니크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업계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베이스를 잘 친다. 그리고 과거 함께 음악을 한 경험도 있었다.

 

사실 아도이의 스타일이 베이스라인이 두드러지는 음악은 아니다.


주환 : 그래서 처음에는 트러블도 있었다. 나는 좀 더 쉽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영 : 팀에 합류할 때 베이스로 뭔가 보여주겠다는 마음은 없어서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초기엔 어떤 리프를 쓸 것인가에 대해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사실 심플한 라인을 더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고 타 멤버들이 아도이 스타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영 본인이 선호하는 베이스라인, 스타일이 따로 있나.


다영 : 구체적으로 정해놓기보다는 곡에 따라 라인을 만든다. '훅 가는' 라인? (웃음)

 

아도이의 사운드에서 신디사이저를 다루는 ZEE의 지분은 제일 중요하다. 주환과 처음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눴나.


ZEE :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도이 결성 이전 진행하던 미디 레슨으로부터 출발한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싶어 하던 주환 형에게 미디를 가르쳐주면서 서로 얘기를 나누게 됐는데, 그때 형이 아도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아도이를 결성한다고 했을 때 어떤 스타일이 나올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냥 부딪쳐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때문에 데뷔 EP <Catnip>에 보다 다채로운 시도가 담겨 있다. 시티팝 스타일의 'Grace'가 있고 'A Runner's high', 'Laika'처럼 M83 느낌 나는 인디 스타일이 있으며 신나는 'Don't stop'이 있다. 다양한 스타일 중에도 내가 처음 해보는 결과가 나왔다.

 

주환이 타 멤버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데도 격의 없는 팀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근창 : 모두의 의견을 잘 듣고 조율을 잘 해준다. 정말 형 같은 형이다.
 

 

2.jpg

 


ZEE의 말대로 새 EP <Love>는 보다 정돈되어 있다는 인상이 있다.


Zee : 편곡 차원에서 다 같이 의논을 했다.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아도이만의 색을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생각했다. 가장 좋아하는 곡인 'Grace'의 스타일을 두고, 작업 전 멤버들과 함께 집중이라는 콘셉트를 설정하고 작업에 임했다.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있어 약간 튄다고 생각하는 곡들은 과감히 제외하기도 했다. 추후 라이브나 B사이드 격으로 공개될 수 있을 것이다.

 

<Love>에서 'Wonder'를 타이틀 곡으로 선정한 이유가 있나.


주환 : ZEE가 원했다. (웃음)


ZEE :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다른 곡은 애초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확실히 ZEE에게 대중적 감각이 있는 것 같다.


ZEE : 팝적인 감각을 좋아한다. 화려한 보여주기 식 연주도 일부러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

 

'Young'은 어떤 분위기에서 쓴 곡인가.


주환 : 멜로한 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작업했다. 아도이 음악을 사랑해주시는 주 연령층 : 2-30대 여성분들이 듣기에 카페 / 바 등 다양한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곡이라 생각했다.

 

리드미컬한 'Bike'도 인상적이다.


주환 : 기타 팝이다. 신스보다는 기타 위주의 곡이라 고민은 있었지만 그런 스타일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봤다. 새소년의 '긴 꿈'과도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곡이다. 인디 씬의 어린 팬들과 소통하고 함께 호흡하고자 했다.

 

'Blanc'은 R&B 신인 죠지와 함께 했다.


주환 : 가장 힘들게 작업한 곡이다. 벌스가 잘 나왔고, 코러스 부분도 괜찮았는데 작업 과정이 힘들었다. 멜로디도 많이 썼고, 조도 바꾸고 키도 바꾸는 등 편곡 면에서도 굉장히 변경을 많이 했는데 죠지가 떠올랐다. 금방 결과가 나왔다. 짧지만 단단하고 틀이 잘 갖춰진, 절도 있는 유니크한 느낌을 내려 노력했다.

 

굉장히 흡수력 있는 멜로디를 갖춘 'Balloon'도 있다.


주환 : 편안한 바이브를 내고 싶었고, 플루트 사운드를 통해 몽환적인 스타일을 구현하고 싶었다.

 

'It doesn't even matter' 앞부분은 다영의 보컬인데 잘 어울린다. 남녀 보컬 어우러지기가 쉽지 않다.

주환 : 다영의 목소리가 어떤 보컬과도 잘 어울린다.


다영 : 원래 내가 공기가 많아서 어디든 잘 어울린다(웃음). 곡 자체는 마음에 드는데 녹음을 잘 못한 것 같아서 아쉬운 점도 있다. 


 

3.jpg

 


멤버들이 각자 지금까지 거친 밴드들을 소개한다면.


ZEE : 나는 혼자서 음악을 주로 하다 프롬 디 에어포트라는 팀에서 전자 음악을 시작했다. 공동 작업이나 밴드 음악은 처음이라 많이 배웠다.


주환 : 밴드는 이스턴 사이드 킥과 스몰 오가 다다.


다영 : 도나웨일로 시작해 이스턴 사이드 킥에서도 잠깐 활동했다. 주환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던 사이다. DJ 안과장을 거쳐 트램폴린 3집 <Marginal>에 합류했다.


근창 : 원래는 친구들과 함께 하드코어 음악을 했다 (뉴메탈인가) '저스트 하드코어'. (웃음). 군대 갔다 와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사이키델릭 밴드 적적해서 그런지를 했고, 김바다의 아트 오브 파티스 밴드에서도 활동했다.

 

과거 IZM은 아트 오브 파티스의 <Ophelia> 앨범을 호평했다.


근창 : 얼마 전 김바다와 만나서 얘기를 나눴는데, '요즘'이라는 개념을 아예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더라. 아도이 밴드를 통해 내가 구상해본 스타일이 맞춰지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

 

트램폴린의 음악 역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다영 : 실용음악 전공자들의 음악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효선, 나은 언니랑 같이 작업하면서 많이 변했다. 어떻게 이런 곡을 만들고 가져오나 싶었다. 음악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처음 밴드 결성했을 때와 비교해 사람들의 호응을 비교해본다면?


주환 : 기대 이상으로 잘되고 있어 놀랍다. 행사, 공연 섭외, 음반 음원 판매량 등 어떤 부분으로든 결성 초기의 목표를 모두 뛰어넘었다. 내가 봤을 때 '역대급' 수익이 아닐까. 물론 메이저 시선에서는 조그만 편이기에 시선을 좀 더 높여 목표를 상향 조정하고 있다.

 

라이브 무대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음원과의 차이가 있지 않나.


ZEE : 많은 관객들이 라이브 무대가 훨씬 파워풀해 놀랍다는 반응을 보여준다. 라이브에선 오히려 날 것의 느낌이 더 많이 난다. 생각보다 신나는 곡도 있고 로킹한 곡도 있어 오히려 덜 정돈되면 덜 정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라이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4.jpg

 


방송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영어 가사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주환 : 첫 번째 이유는 한글로도 해봤는데 영어의 느낌을 따라가지 못해서다. 두 번째 이유는 처음 아도이를 결성할 때 홍대 바운더리만을 생각하지 않고 보다 넓은, 세계적인 영역을 염두에 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대만 등 다양한 해외 공연과 뮤콘 무대 등 국제적 차원에서 장점이 된다.


다영 : 한국어 가사가 좀 딱딱하다는 느낌이 있다.

ZEE : 인터뷰를 진행할 때마다 이런 질문을 꼭 받는다. 'A runner's high' 같은 곡은 원래 한글 가사로 작업했는데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나왔다.


주환 : 그렇다고 한글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건 아니다. 음악의 결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쓸 의사가 있다. 과거에 비해 현재의 음악 팬들이 영어 가사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부분도 있다.

 

근창이 앞서 '요즘' 이야기를 했다. 근창이 바라보는 현시대의 음악이란?


근창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흘려 듣든 집중해서 듣든 적어도 절반 이상은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고 유능한 뮤지션들과 밴드들을 보면 오히려 더 거칠고 사이키델릭 한데도 대중이 받아들이기 좋게 잘 다듬어서 내놓는 것 같다.


재희 (기타 세션) :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음악과 비교하면 확실히 달라지긴 했지만 좋다.

 

요약하자면 아도이의 음악은 '시대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겠다.


주환 : 영미권과 달리 아시아 음악 시장은 파편화되어 있었고 하나로 통합되어있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한국, 일본, 대만의 여러 밴드들이 스타일적으로 융합되어 하나의 시너지를 내고 있다. 시대적으로 미주, 영국 등 통일된 아시아적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5.jpg

 


과거 주환은 사석에서 플릿 폭시스(Fleet Foxes)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아도이를 결성할 때, 전제로 생각하거나 구상 과정에서 떠올렸던 밴드들이 있다면? 혹은 좋아하는 밴드가 있다면?


주환 : M83, 비치 하우스(Beach House), 디스트로이어(Destroyer), 더 엑스엑스(The XX) 같은 요즘 밴드들과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 티어스 포 피어스(Tears For Fears) 같은 1980년대 신스 팝 밴드들. 너무 과거로 가기보다 최신 성향과 조화를 이루려 한다.


ZEE : 다프트 펑크를 무척 좋아한다. 한 때 프렌치 일렉트로 유행 때 에드 뱅어 레코즈(Ed Banger Records) 소속 아티스트들의 음악도 즐겨 들었다. 최근엔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주로 음악을 듣는다. 인터넷 시대의 음악이 매우 다양해져서 고민이다.


주환 : 과거엔 콜드플레이의 음악을 많이 듣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 큰 무대를 구상하게 되면서 1000명 10000명 50000명 이상의 공연장에서의 무대를 위해선 그만한 음악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영 : 블러드 오렌지(Blood Orange)를 좋아한다. 연주자를 보다는 보컬, 아티스트들을 더 좋아한다.


근창 : 테임 임팔라(Tame Impala)를 정말 많이 들었다. 아도이가 테임 임팔라처럼 됐으면 좋겠다.

 

아도이가 롱런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음악 스타일도 약간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주환 : 급격한 스타일의 변화는 없을 것 같다.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 상황을 매번 가정하고 음악을 할 수는 없다. 그건 음악으로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나. 항상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굳이 말로 하자면 보다 확장성 있는 음악을 구상하고 있다.

 

차기작의 방향을 살짝 예고한다면.


ZEE : 아직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라이브 무대에서 더욱 호응 있는 곡을 만들고 싶다.

 

 

인터뷰 : 임진모
정리 : 김도헌
사진 : 김도헌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임성순 “인간 삶이 별 게 아니라 다행”

$
0
0

 1.jpg

 

 

소설가 임성순을 몰랐던 사람이라면 세 가지 지점에서 놀라게 된다. 첫 번째, 여성이 아니라 남자다. 둘째, 발표한 작품마다 소재와 문체, 관통하는 정서가 다 다르다. 셋째, 꼼꼼한 자료 조사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글이라는 느낌이 바로 올 정도로 내용이 탄탄하고 문장이 촘촘하다.

 

임성순 작가의 6번째 장편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 전작이 주로 자본주의 작동 방식과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람(『컨설턴트』 , 『문근영은 위험해』,  『자기 개발의 정석』 ), 인간의 폭력성(『오히려 다정한 사람이 살고 있다』 , 『극해』 )을 다뤘다면  『우로보로스』는 세계를 주제로 한다. 이번 작품은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주제는 거대하다.

 

로봇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한 미래가 시대적 배경이다. 일자리를 뺏긴 인간은 사이버 세계에서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한 연구소에서는 태초 우추의 탄생을 재현하려는 실험이 한창이다. 작가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여러 인물을 등장시키고 현대 물리학 이론과 인간성을 두루 살피면서 근원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세계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jpg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사소한가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우로보로스』  교정 봤고, 아마 10월 말쯤에는 에세이가 나올 거예요. 그 에세이 수정 작업했어요. 1980~1990년대 서브컬쳐라고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일 듯합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만화나 오락실 게임에 관한 이야기죠.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게 있어서, 그 작업을 하고 있고요.

 

지난 번  『자기 개발의 정석』  때 인터뷰에서 집필 중이라고 밝히셨던 SF 소설이 『우로보로스』죠?『문근영은 위험해』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물론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습니다. 제게는 다소 어려웠습니다.

 

구성 자체는 난해한데, 작품을 꿰뚫는 정서는 어렵지 않아요.  『엘리건트 유니버스』『코스모스』 와 같은 물리학 책을 조금 본 독자라면 다 읽고 나서 느끼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넓은 우주에 대해서 과학적 이야기를 하는 책인데요. 우주라는 게 광대한데, 인간의 삶은 별 게 아니죠. 그래서 느껴지는 안도감, 서글픔 같은 감정이 있습니다. 제가 쓰면서 둔 목표는 그런 감정을 소설에서 독자들이 느낄 수 있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어렵거나 이해 안 되는 용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감정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죠.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웃음)

 

소설 후반부 등장 인물인 연구원 엄마와 딸의 이야기가 그런 부분이었군요.

 

네, 그렇죠. 앞부분에서는 세계가 실제하느냐 아니냐, 실제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서로 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관계 있는 각 캐릭터를 통해서 보여줬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이야기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수도사가 등장하는 첫 장이 아름다웠습니다. 누구도 없는 곳에 갇힌 채,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캐릭터인데요.
 
첫 번째 장은 시지프스 같은 이야기죠. 세상이라는 건 계속 무너지고, 부숴집니다. 거기에 인간은 계속 도전하죠. 세계라는 틀 속에서 개인은 무의미한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요. 부조리함 속에서 찾을 수 없는 답이라고 해도, 답을 찾아내려 하는 게 인간이죠. 이런 게 아마 인간이 지닌 몇 안 되는 미덕 중 하나가 아닐까요. 그런 맥락으로써 마지막 연구원 이야기와 첫 번째 수도사 이야기는 이어져요. 엄청난 스포일러인데, 엄밀히 말하면 첫 번째 주인공은 인간은 아니에요. 인간 정신인 건 맞지만요.

 

 

미래나 지금이나 개인은 무기력

 

애초 법의 의도와 달리 인간은 로봇도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들고, 부가가치 없는 일만 했다. 남겨진 일이 그 모양이니 당연히 인간들은 더더욱 노동을 기피했고 그 결과 노동수당이 만들어졌다. 어떤 형태든 노동을 하는 이들은 임금과 별도로 정부로부터 받는 기본수당의 두 배를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중략)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수당에 만족했고, 젊은이들은 일을 할 바에는 이계라 불리는 가상 세계의 삶을 택했다. (81쪽)

 

"행복한 지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죠. 미래에 로봇이 일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은 기초소득에 의존하고 그 돈을 가상 세계에서 소비하는 묘사에서는 인간의 미래를 어둡게 그렸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4차 산업혁명, 가상 세계, 이런 묘사가 약간 어둡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어둡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세계와 개인 관계를 놓고 그림을 그릴 때, 세계에 대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요. ‘아톰’이라는 장은 어떻게 보면 무기력한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인데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한다기보다 SF가 그러하듯, 지금 개인이 사는 삶을 미래라는 틀을 빌려와서 보여준 거죠. 아까도 잠시 말했듯 『코스모스』 나  『엘리건트 유니버스』 를 읽고 나서 사람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우울하진 않잖아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이렇게 사는 게 크게 의미가 있진 않구나, 내 고민이 심각한 게 아니었구나, 이런 자기 객관화의 위로가 생기거든요.

 

전작에서 몇 차례 다룬 주제인 자본주의 속 노동하는 인간에 관해서도 묘사를 했습니다. 인간이 로봇으로 대체되지만, 윤리적 책임이 필요한 일자리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거라고요.

 

그 부분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미래에는 인간이라고 정의내려지는 지점이 지금보다 많이 모호해지고 원하는 역할이 많이 변할 거라고요.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 중 하나가 정말 정확한 게 하나 있거든요.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지배를 받는다고요. 경제적 기반이 변했을 때 미래는 이런 형태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썼죠. 이를테면 부가가치가 되는 건 로봇, 인공지능이 하겠죠. 부가가치가 크지 않거나, 투입되어 생산되지 않는 건 인간의 몫으로 남겨질 겁니다. 결국은 인간에게는 윤리적인 책임을 묻는 역할이 남겨질 거예요. 이 에피소드가 우주에 관한 이야기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안 될 수도 있어요.

 

다시 앞서서 이야기했던 내용입니다만, 우주라는 스케일로 놓고 봤을 때 인간의 삶이 사소하고 별 볼 일 없어요. 여기서 오는 안도와 위안이 있는데요. 어찌 보면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는 미래를 보여주면서도 이 부분에 주안점을 뒀어요. 만약에 일상이라는 게 부재하고 가상 생활에서 일상을 찾는 시대가 온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야말로 소중하다는 걸 느꼈으면 해요. 사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인간사 전체를 놓고 보면 오히려 예외거든요. 이 모습이 계속 유지된다는 법도 없고요.

 

SF 중에는 로봇이 인간을 정복하거나, 인간을 노예화하는 내용도 있는데요. 이 작품에서는, 로봇의 인간 정복에 관한 비효율성을 이야기했죠.

 

정말 로봇이 인간보다 뛰어난 시대가 온다면, 인간이 로봇과 같은 형태로 대체되거나 로봇이 굳이 인간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소멸하는 종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양자역학, 불확정성의 원리, 컴퓨터 공학 등 과학 이론이 많이 등장합니다. 자료 조사에 공을 들였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세상이 왜 이런가에 대해 의문이 많았어요. 물리학과 사회과학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이 책을 쓰기 위해서는 정보 관련 이론을 더 공부했어요. 그리고 제가 수포자였거든요. 수포자였기 때문에, 수학을 잘 몰라요. 이 작품을 쓰기 위해서 방학 때 열리는 8강짜리 수학 특강 들으러 다니기도 했죠. 평소에 물리학 개론서는 몇 권 봤고, 특별히 물리학 관련해서 읽은 건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라고, 파인만이 칼텍에서 1학년을 가르친 내용을 담은 교재인데요. 쓱 봤어요. 어려운 수학 이론과 물리학 공식을 증명하라고 하는 책인데, 제가 증명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쓱’ 봤죠. (웃음)

 

현대 물리학이 내용 중에서는 불확정성 원리와 같이, 얼핏 보면 직관과 반대되는 내용이기도 하잖아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인간은 얻을 수 없다거나, 그런 점이요.

 

글쎄요. 인간의 직관과 물리적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좌절할 이유는 없을 거 같아요. 오히려 공부해보면 의외로 아름다워요. 이 소설을 쓴 동기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인간이 만든 세계의 미학이 지닌 아름다움 말고, 개별적으로 흩어져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이 사실은 어떤 내부 규칙성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드는 미학적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 걸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죠. 굉장히 무리한 시도를 했죠. 그래서 이런 무리한 책이 나오게 된 건데요. (웃음)

 

 

3.jpg

 

 

임성순은 게으른 편, 작가 임성순은 다른 자아

 

'지도에 대한 열정'은 「과학에 대한 열정」의 오마주 격인 장인데요. 보르헤스가 임성순에 지니는 의미는?

 

보르헤스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과학에 대한 열정」은 실제와 가상이 있고, 가상이 실제를 대체할 수 없다는 보르헤스의 철학을 담은 내용입니다. 이런 명제가 플라톤 이후부터 장 보드리야르까지 이어지면서 서양사에서 내려온 거죠. 진짜가 중요하냐, 가짜가 중요하냐, 이런 화두를 보여주는 짧은 소설이에요.

 

물리학이 다루는 실제성 이야기를 하면서, 이 장을 슬쩍 끼우면 좋겠다 싶었어요. 한편으로는, 완충 역할을 할 장을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우로보로스』가 내용상 어려운 것도 있지만 각 장이 지닌 구조 때문에 읽기 괴로운 지점이 존재하거든요. 독자가 머리 비우고 쓱 읽어도 좋겠다 해서 넣었죠.

 

재밌는 게, 움베르토 에코도 ’제국의 현척 지도를 만드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보르헤스에 대한 인용에 대한 인용을 단 거예요. 소설상 필요로 집어넣은 장이기도 하고, 비현실적 이야기에 현실성을 덧붙이는 사족으로서 기능도 하고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 장이에요. 보르헤스를 좋아하는 작가가 재밌게 노는 장이었구나, 생각해도 될 거예요.

 

'아톰'에 등장하는 인물이죠. 병원 접수대에서 일하는 여성이 밖에 나가기는 싫지만 벌이가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일은 하고, 번 돈으로 가상 세계에서 현질하는 사람입니다. 『문근영은 위험해』의 등장 인물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이런 인물을 즐겨 그린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즐겨 그린다기보다는, 그런 인물들을 사람들이 최근에 원하는 것 같아요. 초등학생이 가장 하고 싶은 게 유투버라고 하잖아요. 직업 이야기 하다가 "작가라서 집에서 글만 씁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의외로 엄청나게 부러워하거든요. 작가라는 걸 부러워하진 않는데, 집에서 글만 쓴다는 부분을 굉장히 부러워해요. 다른 사람에게 그만 치였으면 좋겠다 하는 욕망이 있는 듯해요. 소설에서는 가상세계를 이계라고 표현했고, 의도적으로 쓴 이유가 있어요. 최근에 라이트노벨, 이계물이 엄청나게 번역되어 들어오잖아요. 일본에서 팔렸기 때문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타인으로부터 고립되고 싶은 욕망이 많은 듯해요. 그런 욕망을 반영해서 이 캐릭터로 만든 거예요.

 

『문근영은 위험해』에 직접 등장하셨는데요. 작가님이 그린 임성순은 히키코모리, 오타쿠 성향이 짙은 인물로 나옵니다. 실제로 비슷한가요?

 

그 소설을 내고 다른 매체에서 인터뷰할 때 밝혔는데, 주변에 오타쿠 친구는 많았지만 제가 그 정도로 열정을 가진 사람은 아니에요. 어떨 때는 숨쉬는 것도 귀찮아 할 정도입니다. 오타쿠는 정말 열심히 파헤치고, 몰두하고, 알아보잖아요. 저는 게으른 편이에요. 글만 쓰면서 굶어 죽지 않는 것도 스스로 대견해 하고 있을 정도로요. (웃음) 

 

『우로보로스』 도 그렇지만 전작  『극해』와 같은 작품은 배경 지식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고, 전반적으로 임성순 작품에는 작가님의 지적 호기심이 느껴졌습니다. 게으른 편이라니 의외입니다.

 

소설 쓸 때는 달라요. 독서는 독자들의 기회 비용과 시간을 뺏는 일이에요. 저도 책을 읽으니까 이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죠. 독자들이 책을 읽는 데 적게는 5시간, 10시간씩 쓰기도 하는데요. 최저임금으로 따져도 적지 않은 돈입니다. 물론 돈 벌 시간을 포기하고 책 볼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여하튼 기회비용 측면에서 그런 걸 뺏는다고 생각하면 저 개인을 위해서는 안 알아보겠지만, 글 쓸 때는 하나라도 더 찾아보려고 노력하죠.

 

이 작품에 관해 하실 이야기가 더 있을 것 같아 마지막을 폈는데, 작가의 말이 없었습니다.

 

 『자기 개발의 정석』  때도 없었어요. 작가의 말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까 말했듯 독자 시간을 뺏는 일이 독서이니까요. 제 근황까지 독자에게 알려주면서 시간을 뺏고 싶진 않거든요. 제가 독자가 알아야 할 정도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요. 작가의 말과 책 뒤에 추천사까지는 가능하면 출판사에 부탁해서 안 싣는 걸로 하고 있습니다.

 

 

늘 새롭게 쓰는 건 스스로 재밌어서

 

지난 인터뷰 때 필모그라피 엉망으로 관리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하셨잖아요. 늘 새로운 문체, 소재에 도전했고 이번 작품도 새롭습니다. 임성순의 작품들을 AI에 분석하면 쓴 사람을 못 맞힐 거 같아요. 왜 계속 새롭게 쓰나요?

 

제가 재밌으니까요. 게으른 사람인데도 계속 글 쓰는 걸 보면 이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소설 써서 먹고 사는 게 아니거든요. 소설은 제게 경제적인 도움이 거의 안 되죠. 어차피 작가로서 돈을 벌거나 성공하기는 힘들다는 걸 깨닫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겠구나."였어요. 물론 독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쓴다는 건 아니에요. 독자의 귀중한 기회 비용을 빼앗고 있다는 건 늘 자각하죠.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죠. 쓰고 싶은 걸 쓴다에서 멈추면 돈을 받으면 안 되거든요. 전 돈을 받고 팔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직업 윤리를 지키는 선에서는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작업하고 있어요. 다만 저는 지금까지 쓴 걸 지키면서 발전시키고 미학적으로 완성시키는 쪽이라기보다는 이걸 써 봤으니까 다음에는 다른 걸 해 봐야지 하는 식으로 하는 거라 전혀 다른 소설이 나왔습니다.

 

기존의 소설을 다시 보기 힘들다는 의미일까요.

 

언젠가는 예전에 썼던 느낌의 다른 작품을 쓸 때도 있겠죠. 가능성은 열어두죠. 앞으로도 아마 비슷한 느낌의 소설을 쓸 때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아직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고 최소한 앞으로도 2~3년 안으로는 없을 것 같긴 해요.

 

제일 좋아하는 느낌의 작품을 꼽아 달라는 것도 무의미하겠네요.

 

그때 그때 재밌어서 한 작업이니까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는 건, 크게 의미가 없어요. 다 제 자식들이니까.

 

젋은작가 수상, 컨설턴트 연극화 등 2018년니 작가님에게는 좋은 해였을 것 같습니다.
 
컨설턴트 연극화는 기쁜 일이고 젊은 작가상도 좋은 일이었죠. 그런데 올해 제가 뭔가를 해서 얻은 성과라기보다는 그 전에 했던 게 여러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나온 결과였습니다. 사실 올해는 참 일이 안 풀린 해였어요. (웃음) 올해는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쟤가 드디어 일어나기 시작했어!” 이런 해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네요. 불상사가 많았다기보다는, 글이 원하는 퀄러티로 잘 안 써졌어요.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작업도 썩 만족스럽게 풀리지 않았고요. 올해는 엎고 다시 쓰고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에 단편이 뽑힌 건 기쁜 일인데 그 뒤로 단편 써달라는 데는 어디도 없었네요. (웃음) 한 해, 한 편은 쓸 줄 알았는데 아 올해도 단편을 못 쓰고 넘어가는구나.... 에세이도, 초고를 쓴 건 작년이었는데, 올해는 고치는 해였어요.  『우로보로스』도 이렇게 어렵게 쓰면 독자가 안 사 볼 텐데 하면서 고치고 고치고 이런 한해였고요. 뒷수습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해였네요.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힘든 한 해였습니다.

 

지금도  『컨설턴트』  등단했을 때 습관 그대로 쓰시나요?

 

그때는 4시간 쓰고 3시간 고치고, 이런 식으로 7시간씩 일했는데, 지금은 4시간 정도 일해요. 몸이 못 버텨요. 최근에는 한 시간 정도 자료 찾고 워밍업 하고, 글 쓰는 건 두 시간. 그리고 한 시간 정도 고치죠.

 

글이 막힐 땐 어떻게 하시나요?

 

자거나 산책하거나 영화 보거나 게임 하거나 음악 듣거나 딴짓하면서 보내죠. 어차피 매일 하는 일이니까, 안 풀려도 무조건 써요. 자리 앉아서 쓰죠. 그런데 만족스럽지 않죠. (웃음) 등단 이후로 작업하던 방식을 쭉 유지했더니 너무 피곤한 것 같아요. 좀 쉬어야겠구나, 생각도 최근 들어서 하게 되어요. 어쩌면 글이 마음에 안 드는 것보다는 피곤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안 팔리는 작가라 벌이가 시원치 않다 보니 계속 열심히 써야 되고, 쉴 수가 없네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네요.

 

안 팔리는 작가라고 해도 팬덤이 있지 않나요. "임성순 작품을 한 편도 안 읽은 독자는 있지만, 한 편만 읽은 독자는 없다."는 평도 있고요.

 

글쎄요. 그런데 『우로보로스』는 이 작품만 보면 다시 안 볼 사람이 있을 것 같긴 해요. (웃음) 한국에 없던 유형이긴 한데, 아 이래서 없던 유형이구나. 아 이래서. 독자들을 괴롭게 하는 소설을 쓰면 안 되는데, 독자를 괴롭게 하는 소설이라. 현명한 작가들이 안썼던 거죠. 저는 왜 이런 걸 안 하지, 해볼까,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든 거죠.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는 ‘젊은 작가상 수상집’ 작가 노트에서 밝힌 대로, 뉴욕에 관한 소설인가요?

 

아직 준비 중이고, 쓰기 시작한 건 아니에요. 한국인이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고요. 악당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법했던 큰 선이 이루어지는 그런 소설입니다.


 

 

우로보로스임성순 저 | 민음사
고도의 지식 체계가 갖추어진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시대의 다종다양한 욕망, 좌절, 갈등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이 소설에서 ‘우로보로스’는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 준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민근 “마광수 교수는 나의 심리치료사였다”

$
0
0

1.jpg

 

 

책의 반 이상이 고 마광수 교수의 이야기. 하지만 책 표지 어디에도 ‘마광수’라는 글자는 없었다. 저자 프로필을 읽어보니 “1999년, 마광수 교수의 재임용 심사 문제로 학내 사태를 겪으며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 써있다. 문학치료사 박민근의 이야기다.  『살아낸 시간이 살아갈 희망이다』 . 처음 제목을 읽었을 때, 좀더 명확하고 강한 제목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다 읽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자꾸 곱씹어 읽어야만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제목이 때때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10대 시절, 박민근은 가난 때문에 화가의 꿈을 포기하면서 첫 번째 우울증을 겪었다. 이후 어렵게들어간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고 마광수 교수와 운명적으로 만났고, 치유서 읽기를 통해 우울증을 극복하고 내적 성장을 경험했다. 작년 이맘때 마광수 교수가 세상을 떠난 후, 하루라도 빨리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마광수의 오해를 풀기 위한, 그간의 고통을 증명하기 위한 마음이 아니었다. 상처를 이야기함으로 나눔으로써,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jpg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쓴 책

 

프롤로그를 읽고서, 이 책의 저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글을 쓰기 쉽지 않았겠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동안 몇 권의 책을 써왔지만 이렇게 힘들게 쓴 건 처음이었어요.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뭔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후련하다고 말하긴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최종 원고를 넘긴 후에는 며칠 동안 정신이 없었어요.

 

무엇이 가장 어려웠나요?


스스로 굳이 따져 묻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하나하나 자기 분석을 해야 하는 일이어서그게 참 어려웠어요. 사실 몇 년 전부터 마광수 선생님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서 편집자 몇 분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썩 반기지 않으시더라고요. 선생님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을 내는 일이 조심스러웠던 것 같아요. 저도 그 부분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요.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죠.

 

작년 이맘때 마광수 교수님이 돌아가시고, 마음이 좀 급해졌을 것 같아요.


마음이 확 바뀌었죠. 꼭 써야겠다,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너무 큰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마광수 선생님은 성 억압이 심해지면 성폭력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하셨어요. 일본, 프랑스만해도 성문학은 문단에서 아주 중요한 장르인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조심스러워요. 매장되거나 3류소설이 되거나, 음지에서만 보고 있으니까요. 요즘 문학을 봐도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자로서 문학치료사로서 작가 ‘마광수’를 객관적으로 바라본 책으로 읽혔어요. 교수님의 연약했던 부분도 감추지 않고 쓴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한 줄 한 줄 쓰면서 엄정해졌어요. 마광수 선생님은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분이었어요. 자기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는데, 그걸 부정하셨죠. 마지막까지 감정의 핵은 원한이라는 걸 버리지 못하셨어요.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셨어요. 이것이 제겐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마광수 교수님을 두고 “그는 나의 소중한 치유자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섬세한 사람, 마음을 꿰뚫는 사람”(7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육성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목소리가 특히 한 사람을 향할 때, 더할 나위 울림이 있다는 걸 떠올릴 거예요. 선생님은 인간의 감정에 예의 바른 사람이었어요. 대개의 사람들이 쓰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것을 쓰고, 남들이 칭찬할 만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자신이 성적 판타지에 젖어 있는데 이걸 표현하지 않으면 문학인가? 문학가라면 자신이 느끼는 것, 자신이 경험한 것을 거짓 없이 표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한국에서는 수사가 뛰어난 문학가들이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좇지 않으셨어요. 제가 시인을 꿈꿨을 때는 몇몇 문인을 두고는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고도 말하셨는데, 후에 알고 보면 선생님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죠.

 

마광수 교수님의 흠은 ‘치명적인 솔직함’이었다고요.


가식적인 말을 싫어하셨어요. 잘잘못도 확실히 표현하셨죠. 저는 선생님의 그런 솔직함이 많이 부러웠어요. 자신에게 힘이나 권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약한 자들의 허물에는 관대했으니까요. 선생님의 솔직함이 향하는 대상은 뒤가 구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남다른 직관력 덕에 단박에 사람의 성품을 꿰뚫어 봤죠. 선생님은 시인이라서 어감의 차이를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이 보기에 징그럽도록 적나라한 강의조차도 긴 고민에서 나온 것일 때가 많았습니다.

 

“언제나 글은 쉽게 써야 한다”고 강조하신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정말 크게 배운 점 중 하나인데요. “좋은 작가가 되려면 읽는 사람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저는 어떻게 보면 강박적일 정도로 글을 쉽게 쓰려고 노력해요. 항상 글을 쓰면 아내에게 먼저 보여주곤 하는데요. 일반 독자들이 읽을 때 어떻게 읽히는 지를 알기 위해서예요. 마광수 선생님이 글을 쉽게 쓰려고 한 건, 멋있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가 정확하게 읽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어요. 항상 제게 되묻곤 하셨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윤동주 시인 이상의 정직한 작가들이 한국에는 많이 없다는 이야기도 자주 하셨어요.

 

어쩌면, 선생님은 문학가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연대 국문과 사태가 없었더라면 계속 문학을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문학치료사가 된 지금이 좋기도 합니다. 대학생 때, 교수님이 제게 “문학이 치료가 된다. 네가 대학원에 가면 이 주제로 논문을 쓰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엔 새로운 영역이었으니까요. 10년 20년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셨어요.

 

마광수 교수님이 살아 생전 이 책을 보셨다면, 굉장히 고맙다고 말했을 것 같아요. 누군가 나를 정확하게 읽어주는 일, 이해해주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이 이 책을 읽고 어떤 말을 해 주셨을지. 섭섭하다고 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저는 선생님을 버린 제자예요. 어쨌든 나도 살아야겠다고, 선생님을 떠났으니까요. 하지만 선생님을 통해 제 삶이 단단해진 것, 정신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가장 커요.

 

임종 전에 교수님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요?

 

글쎄요.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했겠죠.

 

 

독서가 현실과 괴리되면 독이 될 수 있다

 

어릴 적 옥상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맨 일, 그 때문에 몇 년이나 심한 불안장애와 함묵증으로 고통스러웠던 일, 목숨 같았던 미술을 포기하며 어둠 속에서 10대를 보낸 일 등 저자의 개인적인 사건들을 고백하며 책이 시작돼요.


마광수 선생님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내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동안은 압축된 형태로 나의 심한 우울증을 고백했다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한 건 이번에 처음이에요.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굉장히 주저가 되면서도 한 줄 한 줄이 험난했어요. 20대 때 저는 지독하게 불안한 사람이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리포트를 내는데, 한 달 전에 제출하곤 했어요. 그랬던 제가 마광수 선생님과 이야기하면 굉장히 편안했어요. 헤르만 헤세가 칼 융을 만나 치료가 된 것처럼, 선생님은 제 아픔을 가장 받아먹기 좋은 말로 풀어주셨어요.

 

1999년, 마광수 교수님의 재임용 심사 문제로 학내 사태를 겪으며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2년 넘게 용서 훈련을 하셨어요.


서른 중반이었을 거예요. 그제야 인생을 잘 살아보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어요. 시골 생활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시골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갔던 도시의 사람들과 너무 달랐어요. 이들은 선함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비로소 저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죠. 서른 후반이 됐을 무렵, 인생을 걸고 고민했어요. 내가 평생을 바쳐 도전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크게는 독서 치료사가 되는 것,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는 일이었어요. 내가 경험한 것들을 글로 쓰고 관심 분야를 연구하는 일에도 열정을 갖게 됐죠.

 

조셉 골드 교수가 쓴 『비블리오테라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요.


2003년에 이 책을 읽었어요. 정말이지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죠. 책으로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비블리오테라피, 독서치료예요. ‘Biblio’는 그리스어로 책이나 문서를 뜻해요. 서구에서는 이미 독서치료가 100년 전부터 해온 심리치료 방법이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독서치료는 시와 소설 등 문학과 인문학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하고 심리치료도 잘 알아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한 가지 영역만 파고드는 학문 풍토 때문에 자리잡기가 쉽지 않았죠.

 

영국은 독서치료를 활발하게 하는 나라더군요.


영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독서치료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치유 방법으로 부상했어요. 경험론의 나라답게 몇만 명에 달하는 임상 실험이 진행되기도 했어요. 현재 영국에서는 ‘책 처방’이 전국적 의료서비스로 제공돼요. 책 처방이란 가벼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증상을 겪는 환자의 경우, 약물 처방 대신 자기조력(self-help) 도서를 먼저 권하는 방법이에요.

 

최근 한국에서는 심리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일도 흔한 일이 되었고요. 독서치료는 어떤가요?


아직 걸어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세력도 약하고 교수들이 지지하는 바도 아니고요. 외국 사례들을보면 이렇게 독서치료가 홀대 받는 나라가 없어요. 프랑스의 독서치료사 레진 드탕벨이 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이란 에세이가 있어요. 저자는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는 프랑스에서 명망 있는 작가예요. 그가 말하길, 독서치료는 문학을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해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독서치료사를 만나기 어렵다면, 혼자 하는 것보다는 3,4명이 한 권의 책을 읽고 같이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추천해요. 독서가 현실과 괴리되면 독이 될 수 있어요. 현실과 너무 멀어진 독서는 자폐적인 일이 될 수 있고,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어요.

 

실질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좋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우울증에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예요. 상담가와의 대화가 아니고 주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아요. 젊은 친구들에게 왜 이렇게 우울증이 많이 생기는지를 보면,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관계욕구를 갖고 있어요.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핍감과 감정적 동요로 힘들어하게 되죠. 외로움은 우울만큼이나 치명적인 감정이에요.

 

심리치료서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될까요?


물론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때는 심리치료서보다는 철학적 치유서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집니다. 돈 문제로 전전긍긍하는 분들께 많이 권하는 책은 존 암스트롱이 쓴  『인생학교 돈』인데요. 이 책을 읽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3.jpg

 

 

우리에게 책이 있는 한,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15년째 밤 9시에 잠들어 새벽 3시에 일어나 책을 읽으신다고요.


결혼 전, 충북 음성에서 홀로 지낼 때 생긴 습관이에요. 해가 지면 대개 집에 있었으니까요.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저녁 9,10시쯤 잠이 드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새벽에 읽는 책은 달라요. 깨끗한 의식에 뜨개질을 하는 느낌이에요. 새벽 독서의 큰 장점은 책의 한 줄, 한 줄이 대지를 향하는 빗방울처럼 아름답게 작용한다는 점이에요. 새벽의 읽기는 마음의 병에 잘 드는 ‘책 약’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깨우고 정돈하는 시간이에요.

 

“우리에게 책이 있는 한,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는 글귀를 책 서두에 제목처럼 넣으셨는데요. 너무 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2014년에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를 쓰면서 찾아낸 문장이에요.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론에서 ‘트라우마’를 찾아내는데, 미국의 하버드대 교수 조지 베일런트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을 완전히 뒤집어요. 사람은 70세쯤이 되면 어떤 학대, 어떤 트라우마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죠. 그는  『행복의 조건』 , 『행복의 비밀』 을 통해 사람이 40, 50대에 성숙한 방어기제를 익히면 외상후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해요. 외상후트라우마가 아니라 외상후성장이 가능하다는 거죠.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는 제 삶 속에 계속 품고 가는 삶의 문장이 되었어요.

 

“어떤 상처라도 존중받아야 한다”(234쪽)는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상처와 이별하기 위해선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치유는 상처를 가감 없이 수용하고, 지금보다 나은 의식을 가다듬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상처 받기 쉬운 세상에 던져졌어요. 불완전한 삶에는 선한 보충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겐 치유의 힘을 가진 책이 중요해요. 침묵을 즐긴 현자조차 책만은 남겼으니까요. 현자가 지상을 떠나도 우리가 구한다면 그 온전한 육성을 체험할 수 있어요.

 

현재 박민근독서치료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주로 어떤 분들이 오시나요?


독서치료가 아주 대중적으로 소개 되진 않아서, 주로 제가 쓴 책을 읽고 오는 분들이 많으세요. 처음부터 책을 권하지는 않고, 간단하게 우울증 검사를 해본 후 대화 상담을 하면서 책을 소개해드려요. 독서치료는 자가치료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서요. 저를 꼭 계속 만나지 않아도,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방법을 알고 가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으며 느낀 건, “큰 상처를 회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받는 치료는 평탄하게 만 살아온 사람에게 받는 치료와는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짐작이었어요.


심리센터 원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어요. 심한 트라우마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는데요. 원장으로 일하다 보니 학부모들과 예후 상담을 많이 했는데, 큰 상처를 겪었던 치료사들이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보다 더 공감을 잘해줬죠.

 

『살아낸 시간이 살아갈 희망이다』를 어떤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까요?


편견 없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자신이 갖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 편견을 접어두고 글 자체로 수용해보시고 판단해주시면 좋겠어요. 또 제 사례를 자신에게 적용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살아낸 시간이 살아갈 희망이다박민근 저 | 생각속의집
갈수록 사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처 입은 영혼에서 문학치료사 되기까지 저자가 겪은 상처와 치유의 고백이 힘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힘이 되리라 기대한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지혜 “책을 쓰고 나니, 제 앞길이 보였어요”

$
0
0

정지혜-메인.jpg

 

 

2016년 10월. 홍대입구에 신기한 서점이 생겼다. 조금 허름해 보이는 건물 4층. 입간판 하나만 두고 문을 연 ‘사적인서점’. 출판편집자로 2년, 서점인으로 3년을 보낸 정지혜 대표가 만든 ‘책 처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예약제 서점이다. 서점은 모두의 공간인데 어떻게 ‘사적인서점’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이곳은 한 독자의 고민을 듣고 책을 처방하는 서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취업, 연애, 가족 문제로 고민 중인데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등의 고민을 갖고 사적인서점을 찾은 사람들은 모두 700여 명. 이들은 사적인서점에 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책 처방사가 추천한 책을 읽었다. 2년간 컴플레인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는 정지혜 대표가 책방을 오픈하기 전, 계약한 책이다. 서점 창업 과정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고 덜컥 수락했는데, 2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 ‘사적인서점’ 시즌1을 정리하는 책이 됐다. 편집자, 서점인, 서점 대표로 8년간 책 곁을 즐겁게 지킨 저자 정지혜의 삶도 고스란히 담겼다. “책을 쓰고 나니, 앞으로 내가 갈 길이 환하게 보였다”는 정지혜 대표를 만났다.

 

 

2.jpg

 

 

나만이 할 수 있는 책 이야기

 

‘사적인서점’ 이야기가 책으로 묶이길 기대한 독자들이 많아요. 첫 책을 쓴 소감부터 여쭐게요.

 

우선 기쁘고요. (웃음) 쓸 때는 정말 너무나 고통스러웠는데, 쓰고 나니 잘 썼다 싶어요. 너무 웃긴 이야기지만, 완성된 책을 다시 읽어보는데 제가 읽어도 재밌는 거예요. (웃음) 문장이나 글쓰기가 부족한 건 지금도 알고 있는데요. 이 책은 제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독자들에게 선보여도 되는 게 아닐까, 이 글은 나만 쓸 수 있는 책이니까. 그런 뻔뻔스러운 생각을 했어요. (웃음)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제목이 좀 어려운 느낌이 들었어요.


출판사 대표님께서 뚝심 있게 밀어 주신 제목이에요. 사실 처음엔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었어요. ‘사적인서점’을 모르는 분들께는 조금 어려운 제목일 수도 있을 것 같았고요 하지만 계속 되뇌게 되는 제목인 것 같아서 좋더라고요. 사적인서점이 단순히 책만 파는 곳은 아니니까요.

 

‘사적인서점’ 시즌1을 마무리하면서, 1주일간 이 책을 사적인서점에서만 팔았다고요. 흔치 않은 기회인데요.


맞아요. 아무리 제가 쓴 책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죠. 이렇게 팔아도 될까? 싶었는데요. 서점 공간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워하는 손님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책을 선보이면서 만남의 자리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 권을 파셨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5일 동안 200권쯤 나간 것 같아요.

 

한 달 전 성산동으로 서점을 이전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휴업 상태예요.


이사도 너무 갑작스레 정한 거였어요. 일에 너무 지쳐있다 보니까 뭔가 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사 준비가 너무 힘에 부치더라고요. 원래 하던 일도 하면서 준비해야했으니까요. 서점 일을 오래 하려면 조금 쉬어가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원래 계획이라면 10월 초에 시즌2를 여는 게 목표였는데 9월 중순에 이사를 취소했어요. 계약금을 날렸지만 지금 제 체력으로는 도저히 힘들겠더라고요. 우선 몇 달이라도 좀 쉬려고 해요.

 

마음의 체력은 어땠나요?


아무래도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사적인서점을 운영하면서 인스타그램(@sajeokinbookshop)을 통해서 책 소개도 정말 열심히 하는데, 이 책들이 반드시 우리 서점에서 팔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애정을 갖고 일하면 할수록 허무해지는 딜레마가 생기더라고요. 오히려 서점원으로 일했을 때가 더 행복했던 게 아닐까. 서점원으로 일할 때는 그저 책을 잘 소개하는 것으로도 행복했는데, 서점 주인이 되고 나니 이 책을 팔아야 제가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점점 마음이 가난해지더라고요. 책을 통해 얻는 기쁨, 손님을 만나는 즐거움이 무척 크지만 그것이 내 생계, 내 일상으로 잘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책을 쓸 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이 책을 계약한 게 2016년이에요. 그러니까 두 해를 지나 책이 출간된 건데요. 당시에는 서점 주인이 쓴 책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좋은 책이 많이 나왔잖아요. 서점 창업기도 많고요. 어쩔 수 없이 ‘내가 책을 써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깊이에 대한 강박도 들고요. 그러다 은유 작가님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다시 읽는데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어요. 사적인서점에서 겪은 일은 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잖아요. 그렇다면 나도 책을 써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고쳤어요. 사실 이 책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면 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저자로서 바라는 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어떤 독자를 상상하며 쓰셨나요?


꼭 책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얼마만큼의 접점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 삶의 환경이 달라지면, 공감 포인트가 달라져요

 

‘사적인서점’ 책 처방 프로그램을 예약하면, 책 처방사와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1주일 후 처방사가 고른 책과 편지를 택배로 받아요. 2년 동안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을 받았다고 항의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 놀라워요.


사적인서점의 영업 비밀은 공감과 소통에 있어요. ‘이 사람이 진심으로 고른 책이니까 어떤 책이 와도 괜찮을 거야, 읽어 보고 싶어’하는 열린 마음으로 책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항의도 없었다고 믿어요. 처음 책 처방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만 해도 책값 외에 책을 고르는 수고에 값을 매겨 받는 것이 가능할지 자신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책을 매개로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는 걸 제 눈으로 확인했어요.

 

서점주인으로서 현재 갖고 있는 고민은 무엇인가요?


최근 서울의 대표적인 독립서점, 동네서점이 문을 닫았잖아요. 사적인서점 시즌1을 종료하는 것도 비슷한 문제로 보실 것 같아서, 열심히 잘 운영하고 있는 다른 동네서점들의 힘을 빠지게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돼요. ‘역시 서점은 어렵구나, 생계가 안 되는구나’라고 지레짐작할까봐요. ‘사적인서점’ 수입으로 보자면, 당연히 서점원으로 일할 때보다 수익이 많았어요. 문제는 제가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수입이 정비례하진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한 노력이 내 수익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때 오는 괴리감이나 너무 과도한 업무 양 때문에 지친 거죠.

 

예전에 “책이 나오면 잘 팔 자신이 있다”고 하셨었는데, 기억하시나요?


기억하는데요. (웃음)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그 말을 취소해야 해요. 마케터 친구들이 SNS에 책 관련 피드를 매일 하나씩 올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자가 올려야지 효과가 있다고요. 그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너무 부끄러워서요. 도저히 매일 하나는 올리지 못하겠더라고요.

 

하루 한 번 자신의 책 제목, 이름을 검색하는 저자들이 은근히 많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나요?

 

많아요. (웃음) 사실 공유하고 싶은 리뷰가 많은데 꾹 참고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땡스북스’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가 써준 리뷰예요. 제가 항상 즐겁게만 일한다고 생각했나봐요.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했는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서점원으로 일하는 것과 서점주인으로 일할 때,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제가 추천한 책들을 누군가가 사주고, 반응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좋았거든요? 그런데 서점주인이 된 후로부터는 반은 기쁘고 반은 쓸쓸해요. 제가 추천했다고 제 서점에서 사 주시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넓게 보면, 이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요. 서점의 수익이라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기뻐만 하긴 어려운 게 솔직한 제 마음이에요.

 

프롤로그에 “책 처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끊임없이 자격을 의심하며 스스로에게 깊이를 강요했다”(12쪽)고 쓰셨는데요.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까요?


없어졌다고 말하긴 이른 것 같아요. 다만, 누군가의 취향, 안목을 타인이 평가할 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책에 관한 내 수준을 평가 당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책을 너무 엄격하게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고요. 그런데, 지금 휴식기를 가지면서 순수하게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읽고 나니 책이 다르게 다가왔어요. 2년 동안 쏟아냈으니까 다시 충분히 채운 후에 시즌2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누군가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것 같나요?


먼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저도 학습만화,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책을 좋아하게 됐거든요. 처음부터 고전을 읽고 베스트셀러를 읽고 어려운 책을 읽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쉬운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내 삶의 환경이 달라지면, 공감 포인트가 달라져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달라짐에 따라 관심 분야가 달라지는 것처럼요. 책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넓어진다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만화책만 읽어도 좋으니까요. 독서를 너무 고상한 취미라고만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에도 강조한  『보르헤스의 말』에 나오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가 떠오르네요.


정말 그래요. 때때로 고통스러운 책 읽기도 있겠지만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요. 책 처방 프로그램을 할 때, 국어교사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좋은 책을 소개하고 싶은데 아이들이 좀처럼 책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고민하시더라고요. 우선은 책에 흥미를 갖는 게 1순위라고 생각해요. 무조건 책을 읽자, 사자고 말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필요해요. 굿즈도 그런 노력이잖아요. ‘이 책을 사면 이렇게 재밌는 아이템을 준다’는 건데, 굿즈를 갖고 싶어서 책을 사는 게 왜 나쁜 일인지 모르겠어요. 책은 책답게 팔아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고리타분해요. 읽고 싶네? 한 번 사보고 싶네? 라는 분위기를 주는 것도 서점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같은 동기로 책을 사지 않는 것처럼요.

 

맞아요. 서점에서 커피를 팔아도, 팔지 않아도 모두 의미가 있어요. 각자의 색깔이 있는 거니까요. 모두의 색깔, 입장이 존중되면 좋겠어요.

 

 

3.jpg

 

 

독자와 가장 최전선에 닿아 있는 사람

 

책 뒤쪽에 ‘사적인 연표’를 실었어요. 정말 많은 일을 하셨구나, 생각했어요.


편집자님이 제안해주셔서 기록하게 됐어요. 너무 짧은 기록이 아닐까 염려했는데, 어쩌면 서점을 준비하는 분들이나 책 관련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써있지만 하나하나 제게는 큰 의미가 됐던 일들이고요.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의 사적인서점이 존재했겠구나 실감했어요.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현장 클리닉 - 읽는 약국’ 부스를 운영했는데, 도서전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기가 많았어요.


서울국제도서전은 두 번째 참여였어요. 2017년에도 ‘서점의 시대’ 부스를 운영했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올해는 정말이지 숨 쉴 틈 없이 바빴어요. 현장 아르바이트 분을 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독자들이 찾아와 주셨거든요. 체력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지만 좋은 경험이었어요.

 

서점 대표가 아닌 독자로서, 좋아하는 동네서점 3곳을 추천해주신다면요? 너무 어려운 질문일까요?


네. (웃음) 너무 어려우니까 요즘 제가 자주 가는 곳으로 답을 해도 될까요? 먼저는 홍대 땡스북스를 좋아해요. 전 직장이었다는 것을 떠나서, 정말 책으로만 사람들을 맞이하는 공간이라서 좋아해요. 지금은 워크숍, 행사도 거의 안 하거든요. 책 고르는 환경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서 독자들을 끄는 역할을 하는 서점이에요. 두 번째는 연남동에 위치한 ‘스프링플레어’. 좋아하는 책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서 자주 가게 돼요. 마지막으로는 저희 동네에 있었다면 정말 자주 갔을 파주의 ‘땅콩문고’예요. 지금까지 두 번 가봤는데요. 정말 보물 같은 책들이 많이 있어요.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장르의 책을 판매하고 있는데요. 좋은 책을 선별하는 재미가 있는 공간이에요.

 

서점인으로 오래 일하려면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사람을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요? 책을 좋아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요.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점인은 힘든 직업인 것 같아요. 서점인도 서비스업이니까요. 어쩌면 독자와 가장 최전선에 닿아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사적인서점’ 시즌2의 계획을 말씀해주신다면요.


2년간 서점을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 얻은 건, ‘아,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라는 확신이에요. 책의 에필로그를 쓰면서 더욱 느꼈어요. 나는 앞으로도 책을 팔겠구나, 어떻게든 책의 언저리에 내 삶이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시즌2의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일단 여행을 좀 다녀오려고 하고요. 사적인서점의 오프라인 공간은 없었지만, 사적인서점 대표로서의 활동은 이어갈 예정이에요. 10월 20일부터 열리는 ‘언리미티드 에디션 - 서울아트북페어’에도 참여하고요. 인스타그램에 책을 소개하는 일도 계속 이어나갈 거예요. 지금 고민은 오프라인 공간을 마련해서 서점을 이어 가느냐, 책을 소개하는 역할로써의 서점을 운영하느냐예요. 열심히 고민하고 궁리하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정지혜 저 | 유유
서점 안팎을 넘나들며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다양한 일을 하고 싶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그 마음은 다른 이에게도 전해진다고 믿는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장문정 “마케팅 바이블이 아니라 소상공인 현장 매뉴얼”

$
0
0

_15A4950.jpg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공식이 없다. 매일 똑같은 길로 가다 우연히 가게 된 길에서 본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했던 사람이 사소한 물건 하나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사지 않기도 한다. 장문정 작가는 사람들이 구매 확정을 결심하고 집어 드는 순간에는 결국 ‘잘 파는 언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흔들리는 과녁과 같은 고객의 마음은 때와 장소, 시간, 날씨, 고객의 상황이나 행동 등 그가 발현하는 수많은 메시지를 재빠르게 읽고 적절한 말을 던졌을 때 잡을 수 있다. 가만히 듣다 보면 묘하게 빠져드는 언어로 굳게 닫힌 문을 조금씩 두드려 결국 열게 하는 순간에 어떤 말이 있는지 『왜 그 사람이 말하면 사고 싶을까?』 에 담겨 있다.

 

『고객을 낚아라 그리고 감동시켜라』 ,  『팔지 마라 사게 하라』  ,  『사람에게 돌아가라』 , 『한마디면 충분하다』까지 세 권의 마케팅 관련 서적과 한 권의 심리 에세이를 출간한 장문정 작가의 다섯 번째 저서 『왜 그 사람이 말하면 사고 싶을까?』에는 좀 더 직설적이고, 현장감 있는 ‘세일즈 언어’가 담겼다.

 

사는 사람의 마음처럼 파는 사람의 말에도 공식은 없다. 그렇지만 팔기 위해 쓰였던 수많은 언어가 있다. 책에서는 타깃 언어, 시즌 언어, 공간 언어, 사물 언어, 공포 언어, 저울 언어, 비난 언어, 선수 언어, 통계 언어까지 아홉 개의 언어가 쓰인 순간을 정리했다. 자신만의 판매 언어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하나씩 대입해 사용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다.

 

 

_15A5076.jpg


 

현장감 있는 언어로 소상공인에 도움될 만한 사례 담아

 

다섯 번째 저서다. 기존 책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현재 경제경영 부분에서 1등을 하는 책들은 푸드트럭 하는 사람들이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없다. 한국 활동 기업이 555만 개이고, 거기에서 10개 중 8개가 1인 기업이다. 소상공인이 한국 경제의 주축이 된다는 거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독립형 근로자, 일명 프리랜서가 작년 미국 경제를 끌어올린 원동력이었다. 앞으로 15~20년 사이에 미국 전체 근로자의 34%는 전부 독립형 근로자(Gig)가 된다는 보도가 있다. 15년 안 갈 것이다. 그렇듯이 1인 기업이 대세인데, 시중에 나온 책들은 초대형 기업 사례만 나온다. 내 책은 소상공인을 위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만약 필요하다면 책에 나온 문구를 직접 응용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실제 밥 먹고 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

 

다양한 경험을 책에 소개한다. 많은 경험이 있어도 적재적소에 비교해서 활용하기가 쉽지 않은데 책에 든 사례가 경험을 축적해서 활용하는 방법이 궁금하다.


『틀 안에서 생각하기』라는 책이 있다. 뉴욕 애널리스트가 쓴 책인데 그 책에서는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데도 일종의 공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성공한 작곡가들이 발표하는 노래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도 거의 성공한다. 자기만의 설명할 수 없는 공식 같은 게 있다는 거다. 내가 대표로 있는 MJ 소비자 연구소도 두부 회사, 건강식품 판매 회사, 보험 회사 등 각기 다른 업종의 마케팅 의뢰가 들어온다. 모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했던 매뉴얼이 있기 때문에 빠르게 공식화할 수 있다. 맨 처음 학교 가는 길이 30분 걸렸다면, 학년을 마칠 때 즈음이면 15분이면 갈 수 있다. 똑같은 길을 가도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는 경험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다.’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데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공식이 만들어진 것 같다.

 

에필로그에 ‘돈을 벌기 위해 이 책을 집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타깃 언어로 보였다. 이 책의 타깃 설정은 어떻게 한 건가.


책을 내면서 많은 독자를 만났다. 출판하고 나면 메일이 많이 오는데 그중에서도 몇은 직접 만난다. 회사가 쉬는 토요일에 메일을 보낸 분을 사무실로 초대한다. 차를 대접하면서 고민도 듣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엔 다들 ‘북 콘서트’ 같은 행사에 초대된 줄 알고 오는데 둘이 대화하는 걸 알고 놀란다. 그렇게 한 명씩 만나다 보니 내 책을 어떤 분들이 읽는지 조금은 파악이 됐다. 대부분 장사하는 분들이었다. 『왜 그 사람이 말하면 사고 싶을까?』도 출간 후 토요일에 세 명의 독자를 만났다. 오전엔 숭실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들었던 수강생이었고, 한 시에는 푸드 트럭을 하는 사람이었고, 세 시에는 양계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메일을 쓴 사람들이라면 만났을 때 당황하면서도 감동할 것 같다.


북 콘서트 형식으로도 독자를 만나봤지만, 혼자 강의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게 나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방식이다. 쉬는 날이니까 편안하게 만나서 책 이야기도 듣고, 고민하는 것도 듣고, 내가 책에서 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고, 그래서 좋다. 그렇게 해야 쌍방향이 된다. 원칙은 1대 1로 만나는 거다. 그럴 때 속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독자의 피드백이 계속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나.


시중에 나오는 책 중에서 1인 기업가를 위한 책이 많이 없으니 적용할 만한 게 없어서 많이 답답한 것 같다. 실용적이고 직접적인 사례로 도움이 되고 싶었다. 독자 메일을 읽으면 책 읽고 결혼에 골인했다는 사람도, 대학 합격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럴 때 감사하다. 나에게 메일을 보내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찾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절박하다. 절박하니까 서점에서 이 책을 사서 읽고 고민을 한 거다. 메일을 읽다 보면 어떤 사람이 절박한지 보인다.

 


절박한 현장에서 직접 쓰인 언어로 구성한 책

 

1장부터 9장까지 상황과 특성에 맞는 언어를 소개한다. 9개 언어로 분류하고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상품을 컨설팅할 때 첫 번째가 타깃이다. 이 물건을 누가 쓸 건지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즌 언어, 공간 언어, 사물 언어 부분은 전략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공포 언어, 저울 언어, 비난 언어, 선수 언어는 직접 세일즈를 할 때 쓸 수 있는 언어이고, 통계 언어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두었다. 감성 마케팅이라는 말이 많지만, 결국 지갑을 열고 물건을 구매하는 건 이성적인 접근일 수밖에 없다.

 

‘대면 채널 위주의 직접 세일즈에서는 광고와 세일즈가 아주 다른 세계(8쪽)’라고 했다.


광고는 전체 마케팅의 한 과정이고, 세일즈는 마케팅의 한 과정이지만, 진부분 집합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 교육 기업에서 모 아나운서를 광고 모델로 써서 홈페이지에 정말 많은 사람을 유입시켰다. 그런데 이게 직접 판매로 이어지지 않았다. MJ 소비자 연구소로 의뢰를 해와서 직접 판매 영상을 만들어 80배 매출을 올렸다. 광고는 비용도 시간도 많이 든다. 그렇다고 기대한 만큼 나올지 안 나올지도 미지수지만, 세일즈를 위해 만든 직접판매 영상은 매출로 꼭 이어져야 한다.

 

광고 모델이나 광고를 보고 물건 구매로 이어진 경험은 많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비즈니스 위크지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접하는 광고가 3천 개라고 했다. 최근에는 3,500개 정도를 본다고 한다. 한국광고협회에 따르면 그중 사람들이 기억하는 광고는 하루에 6개가 안 된다. 기업의 이미지를 구축하거나 신뢰감을 쌓는 등의 영향이 있겠지만, 세일즈의 영역에서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직접판매 영상 하나를 만든다고 하면 판매로 이어지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니 광고보다 훨씬 승률이 높다.

 

타깃을 설정할 때 가장 많이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있나?


잘라 말하기 어렵다. 유통업은 한마디로 생물 같다. 죽어가는 것 같다가도 살아나고, 굉장히 가변적이다. 만약 타깃 설정 매뉴얼이 있다고 하면 굉장히 위험한 거다. 변수가 꽉 차 있어서 기준이 있다고 하기가 어렵다. 모든 게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한다. 예를 들어 녹차를 판매한다고 할 때 타깃을 뭐라고 할 건가? 여름에는 냉 녹차, 겨울에는 따뜻한 녹차를 팔아야 하고, 티백으로 하는 것과 우려먹는 녹차는 또 다르고, 판매처가 마트일 때와 로드숍일 때, 카페일 때가 다르다.


상품 하나를 판매할 때 책에 나온 모든 언어를 어떻게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유통 생태계는 학문이 아니다. 학문처럼 분석하려고 하면 안 된다. 탐구적인 학습 태도도 좋지만, 분류 기준을 만드는 게 좋지 않다. 예전에는 기업에서 고객 성향 분석을 했다. 지금도 하는 곳이 많지만, 이제는 적용되지 않는 시대다. 예를 들어 VIP 투자자문 회사에 100억대 자산가가 상담을 받는데 부부가 둘이서 커피 한 잔을 시키더라. 현금 자산 100억인 부부인데도 그렇다. 또 벤틀리를 타고 다니는 중년 여성이 점심으로 김밥집에서 김밥 한 줄을 먹었다고 하더라. 나이, 자산, 성별, 결혼 여부 등으로 분류 기준을 만드는 게 무의미하다.

 

공포 전략의 실제(192쪽) 부분에서 마트 장바구니를 판매하는 중소기업 사장님과의 일화도 나온다. 마트에 쌓인 종이상자를 보고, 사용하면서 거기에 벌레가 서식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어나서 바로 물을 마시면, 밤새 입에 있던 세균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말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바로 물을 마시지 못하겠더라.


상품 판매하면서 적용했던 사례들이다. 의뢰를 받으면 회사 측에서 전달하는 자료를 토대로 다른 정보를 수집하고,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관련 기사 스크랩하면서 시나리오를 만든다. 하나를 맡으면 그쪽으로 늘 안테나가 뽑혀 있어야 한다. 트랜드에 맞게 계속 업데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상품도 관련 있는 상품을 빨리 캐치하고 매칭하면 된다. 노트북에 정말 자료가 많다. 항상 가지고 다닌다.

 

판매하는 방법 중에서도 언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나?


요즘은 이미지나 영상을 우선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세일즈나 마케팅에서 언어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스티브 잡스가 15초짜리 그림자 CF만으로 제품을 이만큼 팔았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매장에서 만난 판매원에게 묻는 건 용량이나 가격 등 제품의 스펙이다. 이건 모두 언어로 이루어진다. 사고 싶다는 감정이 일기 전에 생각을 먼저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감정이 생기는 거다. 생각은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그만큼 소비자가 속기 쉬운 것도 언어인 것 같다. 통계 언어에서는 ‘과즙 100, 설탕 0’이라고 광고하는 주스일지라도 설탕 대신 다른 당류를 그만큼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사례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책을 판매할 때 산 사람이 원가를 다 알 필요도 없고, 공개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인쇄소가 어디인지, 종이는 얼마인지를 알릴 의무도 없지 않나. 그것과 마찬가지다.

 

 

_15A5261.jpg

 

 

바이블이 아니라 ‘매뉴얼’이 되길

 

좋은 소비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물건을 살 때는 물건을 판매할 때만큼 고민하지 않는다. 어떻게 사야 할지 밤을 새워가며 고민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팔아야 할지는 밤새도록 고민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길 수는 없다. 다만 분별력을 가지고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작가는 어떤 언어에 잘 넘어가는 편인가?


나는 잘 구매하지 않는다. (웃음) 필요한 물건을 필요할 때 사는 편이다. 그냥 성향인 것 같다.

 

잘 사는 사람이 ‘사는 마음’을 잘 아는 줄 알았다.


그것도 통계의 오류다. 한국인이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라고 하는데 그런가? 사람에 따라 다른 거다. 아니어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니까 사네? 다음엔 이렇게 해서 사게 해 봐야지.’라고 하는 것과 ‘내가 써 봤는데 좋으니까 사라.’라는 건 전혀 다르다. 사는 것과 파는 건 별개라고 생각한다.

 

판매 감각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책에 나오는 많은 사례를 접하고 알면 감각을 키울 수 있을까?


라면을 끓일 때 설명서를 보지는 않지만, 감각적으로 해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매뉴얼이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과 없는 건 큰 차이다. 그런 매뉴얼이 되었으면 한다. 1인 기업가나 현장에서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방향을 잡고 싶을 때, 보험이나 금융, 생활 잡화나 식품 등 판매하는 분들이 읽고 책에 나온 사례를 가져다 쓰면 좋겠다.

 

실제로 길을 지나다니며 보이는 간판들을 두고 ‘나라면 어떻게 쓰겠다’라는 사례도 많이 나온다. 늘 그렇게 하는 건가?


습관적으로 한다. 인테리어 업자는 인테리어만 보듯이 나는 길에서 광고 관련 문구만 눈에 들어온다. 바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썼다. 만약 식당을 운영하는 데 어떤 문구를 붙이면 좋을지 고민하는 분들이 이 책을 보고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다면, 그대로 쓰면 좋겠다. 그렇게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든 책이다. 한 줄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왜 그 사람이 말하면 사고 싶을까?』를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1인 가구가 많으니까 1인 가구를 타깃으로 사업을 한다고 원룸을 산다? 이건 막연함이다. 퇴직 자금을 다 바쳐서 원룸 몇 채를 산 사람이 있다고 치자. 지난주에 주민등록상 1인 가구가 7백만이 넘지만, 절반 이상이 방 3개 이상에 산다는 기사가 나왔다. 트랜드는 계속 바뀐다. 과거에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막연함이다. 막연함과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다 망하는 거다. 막연함에 의존하지 말고, 명확하고 또렷한 것에 의존해라. 그런 언어를 찾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왜 그 사람이 말하면 사고 싶을까?장문정 저 | 21세기북스
메시지에 확신을 주는 ‘이성 언어’가 먼저이고, 그다음이 ‘감성’이라는 얘기다. “듣고 싶은 통쾌한 정보는 없고 너스레만 떠는 것처럼 속 터지는 일도 없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명현 “과학은 소중한 것들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
0
0

_DSC8238.jpg

 

 

이명현은 별과 시와 소설을 사랑하는, 글 쓰는 천문학자다. 이제까지 『이명현의 별 헤는 밤』   『판타스틱 과학 책장』 『외계생명체 탐사기』등의 책을 내고 ‘글 쓰는 과학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어느 날,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관상동맥 속에 스텐트를 박아넣었고 심장근육의 반 이상이 죽었다. 학교와 연구소를 은퇴하고 힘들게 숨을 고르며 책을 읽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밖에 없어서 혼신을 다해 서평에세이를 썼다.


그렇게 모인 서평이
『이명현의 과학책방』이다. 딱딱하고 지루한 평론집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경험과 현재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전적 과학 에세이’에 가깝다. 달력과 날씨 같이 친숙한 주제에서부터 블랙홀, 양자역학, 힉스 입자 같은 어려운 과학 개념에 이르기까지 읽다 보면 과학책을 읽고 싶어진다. 책을 읽는 책인 셈이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이명현은 과학책방 ‘갈다’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책방에 붙어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정기적으로 과학책을 소개하던 프로그램을 그만두었다. 과학책을 만나는 방식은 변했지만, 여전히 과학책이라는 화두는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국내 저자의 책이 먼저


저자 소개를 보면 전파천문학자라고 되어 있어요. 전파천문학자는 무슨 일을 하나요?

 

종이와 머리를 써서 천체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이론 천문학자라 부르고, 기기를 통해 천체를 관측하면 관측 천문학자라 부르죠. 관측 천문학자 중에서도 광학 망원경을 쓰면 광학 천문학자가 되고, 우주 공간을 대상으로 하지만 적외선 필터 망원경을 쓰면 적외선 천문학자가 되죠. 저는 전파 망원경을 이용해 천체를 관측하니까 관측 천문학자이자 전파 천문학자가 되고, 연구하는 대상이 은하니까 은하 천문학자가 되죠. 은하를 관측해서 우주의 나이를 결정하기 때문에 관측 우주론자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이명현의 과학책방』은 과학책을 다룬 서평집이에요. 프레시안 북스에서 연재하던 서평을 모았다고 들었는데, 몇 년 정도 연재한 글인가요?


격주로 하는 코너였는데 3년 정도 했어요. 격주에 한 번 쓰기도 벅차서 그사이 다른 신문사 청탁은 많이 거절했었어요.

 

3년이면 300권이네요.


본격적으로 서평을 쓰기 전에는 한 달에 한 30권 봤어요. 필요에 따라 훅 보는 것도 있고 소설책 재밌게 읽은 것도 있고, 다큐멘터리 식으로 된 책도 좋아하고요. 늘 정독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제 마음에 들 만큼만 읽으면 되는데 서평을 쓰고 나서는 한 달에 여섯 권 정도 읽은 것 같아요. 정독하는 게 작가에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서요. 다 읽으려면 못 해도 3, 4일은 걸리죠. 제일 허망한 건 그렇게 다 읽고 서평을 못 쓰는 거예요. (웃음) 비판을 하든 칭송을 하든 마음이 울려야 쓸 수 있는데, 어떤 책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할 말이 없는 책이 있어요. 정서적으로 안 맞거나 동의하지 못하거나, 너무나 익숙해서요. 이런 것들은 못 쓰니 새로 책을 읽어야 할 때 힘들었죠.


공적인 서평 자리라서 말하지 못한 내용도 있었을 테고요.


실명으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대부분 과학책 저자들이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가능하면 실명과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를 노출하려고 했어요. 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민감한 사람도 있어서 글이 나가고 이름을 고쳤던 때도 있고요.


특히나 아는 사이라면 서로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어려울 거예요.


맞아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제가 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책을 평론할 의무가 없잖아요. 애정이 있는 책만 하다 보면 그 책에 대해 즐거운 이야기와 감동한 이야기만 쓰게 되고요. 저에게는 너무 좋은 책이지만 그 책이 가진 허술한 면도 같이 이야기해 줘야 하는데 사실 선택한 책들은 이미 한쪽으로 기운 책들이에요. 그렇다고 평론처럼 작정하고 쓸 수는 없고, 그런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과학책을 재밌어하거나 열심히 읽은 편이 아니라서, 이 정도로 한국 저자가 쓴 양서가 많다는 걸 새로 알았어요.


최근 한 5년 사이에 많이 늘어났어요. 이전에도 과학책 쓰시는 분들은 늘 있었는데 예전 세대는 대부분 한국어로 사고하는 게 아니라 일본어로 사고하거나 영어로 사고하고 그걸 번역해서 썼죠. 반면 저희 세대는 어릴 때부터 한국어로 사고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 세대잖아요. 한국어로 사고하고 글을 쓰는 한국어 세대가 이야기하기 시작하다 보니 예전보다 가독성이 높아진 건 있어요.


책을 고른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국내 저자가 쓴 책이면 일단 먼저 선택했어요. 그리고 더 열심히 읽었죠. 막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 비평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업자들이 읽으면서 접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번역서들도 훌륭한 책이지만 우리나라 정서에 안 맞거나 답답한 면이 있고요. 항상 예전 것부터 훑어야 하는데 모든 옛날 것들이 1장 2장에 몰려있고 5장쯤 가야 새로운 게 나온다면 답답하게 느껴지잖아요. 국내 저자들은 그런 걸로부터 좀 자유로운 것 같아요. 같은 내용이라도 익숙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뱉어내는 것들이 있어서, 국내서적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항상 들어요.


_DSC8273.jpg 

 

결과보다는 풀어가는 과정의 희열


책은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을 했었나요?


초안 이후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계약을 했어요. 글이 출판사에 넘어가는 순간부터 흥미가 확 떨어져서요.


보통 저자라면 원고가 넘어간 후에도 이것저것 살펴보게 되지 않나요?


책은 저자만 쓰는 게 아니잖아요. 저자는 꼭 할 말이 있고, 출판사에서는 늘 조금만 문턱을 낮추면 책이 많이 팔릴 것 같은 유혹이 있는데 그런 걸 조율하는 게 편집자죠. 마케터는 또 다른 관점이고요. 제 생각에는 저자들이 판매나 편집자의 눈에 맞추기보다 하고 싶은 말 다 던져주고 그  다음에 편집자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 싶어요. 맞춰서 쓰다 보면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못 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저자 입장에서 계속해서 이끌어가는 동력이 떨어지겠죠. 편집자의 역할과 마케터의 역할, 저자 역할을 분리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원고 초안이 넘어가면 책 나올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고 해요. 서문을 누가 쓰는지 책 표지는 어떻게 됐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리뷰도 덜 찾아보시는 편이시죠? 퇴고는 어때요?


리뷰를 안 봐요. 원고도 제가 쓴 걸 보내고 나면 다 지워버려요. 다른 방식으로 쓰는 저자도 결국에는 똑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를테면 김탁환 선생님은 퇴고를 한 열 번쯤 한다고 해요. 저는 퇴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대신 머릿속으로 글을 한 열 번 고쳐요. 글을 쓸 때 완성된 걸 그대로 옮겨 적는 편이죠. 사람에 따라 생각을 미리 적고 그걸 계속 고쳐나가는 방식이 있고, 계속 머릿속에서 고치고 완성본을 만든 다음 옮겨 적은 스타일이 있잖아요. 저는 후자인 것 같아요. 머릿속에서 많은 버전을 만들고 막상 글을 쓸 때는 다른 생각 없이 정한 이미지를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하는데요. 책 한 권을 실제로 쓰는 시간은 한 5일 정도 걸렸어요.


서울시립과학관의 이정모 관장님도 퇴고를 안 한다고 들었어요. 과학자의 특성일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과학자는 플로 차트를 전체적으로 만든 다음 알고리즘을 짜잖아요. 사고하는 방식이나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그렇게 훈련 받아서 습관이 되어 있을 순 있을 것 같아요. 전혀 다르신 분도 있어요. 윤태웅 교수님은 처절하게 장편 소설가처럼 쓴 글을 계속해서 고치는 편이라고 해요. 사람마다 특성이 있겠죠.


번역에 관한 문제가 많이 언급되어 있어요. 일반 대중이 보기에는 번역도 과학책을 읽는 하나의 걸림돌이에요.


최근에 너무 좋아졌지만 예전에 번역된 건 세월이 지나면서 언어 습관이 달라지기도 하고 번역한 분의 세대가 달라지기도 했죠. 지금처럼 밀도 있게 번역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으니, 예전에 번역했던 책이라도 자꾸 다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번역 문제가 아니더라도 어려운데 말이죠. ‘대중을 위한, 비과학 전문인을 위한 책이라고 해서 전문지식이 안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이야기가 쓰여 있으면 일단 겁이 나긴 하거든요.


과학은 기본적으로 수학이라는 언어로 교감해요. 이 언어는 매우 명확하죠. 하지만 과학책은 수학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 한 번 번역되어서 나온 거고, 우리말과 영어 사이에 문맥상 번역이 되어야 하듯이 번역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요. 수학적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언어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도 하고요. 현대 과학이라는 게 원래 직관적이지 못해요. 양자 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은 거시와 미시 세계라서 뇌가 직관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훈련을 통해 사고해야 그 현상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 훈련과정이 결국 과학적인 사고방식인데, 그게 없는 상태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어렵죠.


노벨상 시즌마다 기자들이 과학자들에게 전화해서 노벨상 결과를 쉽게 설명해달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20년 단위로 보면 노벨상도 패턴이 있어요. 우주론과 관련한 연구가 상을 받으면 금방 공부해서 말할 수 있는데, 고체 물리로 상을 받았다면 저는 밤새워서 공부해야 해요. (웃음) 과학자들도 자기 분야 외에는 잘 몰라요. 현재 노벨상도 이전처럼 보편적이라기보다는 굉장히 특정한 연구 결과에 주는 경우가 많아서 힘들죠.


과학현상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으실 것 같아요.


그림책이나 사진집을 볼 때도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지 않고 전체 이미지로 보는 거잖아요. 수학이나 과학에도 아름다운 공식이나 수식이 있어요. 어려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어렵게 만들어지는 과정을 써 놓으면 경외심이나 동경, 판타지로 다가올 수 있을 거예요. 어느 연령대든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설명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려운 게 들어가야 쉽게 설명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까요.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도전이 되는 게 있어야 얻는 게 있으니까요. 과학이 결과의 희열보다는 풀어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는 게 과학자들이거든요.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물만 가지고 서로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있어요.


개론서를 읽다 보면 ‘내가 쓴다면 더 잘 쓸 텐데’하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 책에는 이 파트가 마음에 들고 저 책에서는 저 파트가 마음에 드니까 붙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아요. 강의할 때는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막상 책을 떼어서 붙여놓으면 뭔가 안 맞죠. 결국 개별적으로 좋아도 묶어놓으면 힘을 못 쓰게 돼요. 다소 부족하더라도 한 사람이 맥락을 잡으면 하나하나는 미흡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좋은 책이 나오기도 하고요. 그걸 잘 조화시키고 싶은 생각이 늘 있죠.


강양구 기자는 ‘삶에 무한한 애정’이 있어서 작가님의 글이 아름답다는 평을 써주셨어요.


강양구 기자와 오래된 사이에요. 십몇 년 전부터 과학자들이 열댓 명 모이는 모임이 있어요. 다들 바쁘니까 날짜를 정해놓고 만나자 해서 매년 동지와 하지에 사적으로 만나서 노는 모임이에요.

 
과학자가 만나기에 제격인 날이네요. (웃음)


처음 만난 날이 하지여서 그렇게 정했어요.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사람들끼리 교류하면서 백탑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서울 살던 한량들이 모여서 자기네들끼리 지적 교류하던 모임을 서울종로3가에 있던 탑 이름을 따서 백탑파라고 불렀죠. 거길 보면 다른 사람들의 책에 밑줄을 긋고 주석을 달아서 팔기도 하고, 서로간에 장난치는 게 나와요. 서로 책에 추천사를 쓰고 있자면 그런 장난이 실현되는 것 같기도 하고, 되게 좋아요.


"인간은 과학에 대하여 자신의 인간다움을 주장할 때가 온 것 같다"는 김용준 선생의 말을 인용했어요. 과학에 대해 인간다움을 주장한다면, 어떤 게 인간다움일까요?


이전에는 인간다움이 철학자의 영역이었어요. 칸트의 오성, 흄의 휴먼 빙(human being)을 거쳐 『인간 본성에 대하여』라는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나오고, 그 사이에는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러셀이 있었죠. 인간 본성을 논의하는 주도권이나 주체가 철학자에서 진화심리학 등의 과학으로 넘어온 것 같아요. 제 생각에 과학적으로 인간을 탐구한다는 것은 결국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드러난 진실 중에 옳은 건 많죠. 인간은 죽어요. 너무나 뻔하지만 그걸 극복하지 못해 여러 가지 가설이 생기잖아요. 내세가 생기고 내세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면 근본주의자와 테러리스트도 생기고요. 삶도 유한하고 우리는 흩어져 원소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면 허망하죠. 그 허망함을 애써 외면한 역사가 스토리와 전설과 종교를 만들고, 버티며 살아가게 하는 가치 체계를 만들었어요. 그렇다면 번개가 신이 아니고 쓰나미가 신의 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이후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이 짧은 시간을 살아내야 할까요. 인간종 자체가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당장 가상의 스펙에 기대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커뮤니티와 내가 마음이 가는 사람들과 지금 이 순간에 훨씬 교류를 많이 해야 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더 소중하고 조금 더 평화로워질 것 같아요.

 

오히려 유한성이 삶의 의미와 애정을 증폭시킨다는 거죠?


그럴 수 있죠. 유한하니까 개망나니처럼 살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을 포용하면서 각자가 가진 시간을 방해받지 않고 나누려면 버려야 할 것들도 있겠죠. 전통이 세월이 지나면서 원래 뜻이 윤색되고 바뀌면서 더 이상 할 필요 없지만 관성 때문에 하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걸 꼭 과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과학이 훨씬 더 소중한 것들에게 정교하게 가치부여를 해줄 수 있다는 거죠. 그런게 오히려 인간다움이 아닐까요?


중학교 교과서에서 진화 과정이 없어졌던 걸 굉장히 우려하셨어요. 과학의 엄밀성과 상관없이 자꾸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려는 현상이 있어요.


터키에서는 쿠데타 이후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다 빼버렸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개체가 아니라 집단이 발현되고, 집단은 뭉쳤을 때 쉽게 바뀌죠. 그때 상식적이거나 회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으면 어느 정도 브레이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과학이 사회가 극단적인 길로 가지 않게 하는 제어장치가 되는 거죠. 제도권 안에서 그걸 인지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데, 교과서에서 그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과학적 사실을 뺀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_DSC8202.jpg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서평 에세이를 연재하던 당시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어요. 아내 분도 잇달아 심하게 투병했고요. 요새 건강은 어떠신가요?


지금 하는 활동이 다 경제활동이라 활동을 멈출 수는 없지만, 조화를 맞춰야죠. 길게 버텨야 하니까 3일 일하면 3일은 쉬는 식으로 패턴을 정하고 있어요. 여러모로 계속 균형이 중요해서 정기적으로 한 번씩 검사를 받아요. 주기적 패턴이 있어서 계절마다 조심하려는 것도 있고요.


새끼손가락만 아파도 온 신경이 손가락에 가는데, 아플 때 광대한 것들을 설명하는 책을 읽는다면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 같아요.


그때 당시 다른 활동을 전혀 못 해서 사람들에게 서평을 청탁하고 읽고 쓰는 게 유일한 대외활동이었어요. 다른 걸 할 수 없는 그 시절과 우연히 겹쳐서 더 열심히 읽기도 했을 거예요.


최근에는 과학책방 갈다를 운영하고 계세요. 갈다는 어떤 곳인가요?

 

주식회사이자 과학콘텐츠그룹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과학콘텐츠 그룹 갈다의 첫 번째 오프라인 프로젝트가 과학책방 갈다인 셈이죠. 장대익, 정대승, 이정모 작가님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책방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유망해서라기보다는, 저희만 해도 지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게 잡지와 책이었거든요. 그리고 과학자들이 다들 책을 쓰는 사람들이니까 책방 주인에 대한 로망과 책에 대한 부채 의식이 여전히 남아있어요. 2, 3년 후에 이런 논의를 한다면 책방을 열자는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없게 될 것 같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첫 오프라인 사업으로는 책방을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난 거죠. 회사 형태도 여러 가지로 논의해봤는데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는 가장 간단한 게 주식회사더라고요.  


책은 몇 종 정도 갖춰져 있나요?

 

지 않아요. 한 7, 8백 종? 제가 큐레이션을 맡았는데 고전적인 외국책보다는 가독성 있는 국내 작가 책을, 국내 작가 중에서도 여성 작가를 위주로 놓기로 했어요. 보통 문학가나 철학가는 작가별로 책을 모아서 사람에 대한 조망을 많이 하잖아요. 과학 책은 주로 현상 위주로 모아놓아서 저술자 자체에 대한 관심이 적죠. 여기서는 과학 저술가로 살아온 이야기, 저자로서 이야기가 있는 한 인간을 조명하려고 해요. 매니저 두 분이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본 과학책을 들여놓아서 좀 더 풍성해졌죠.


세상에서 제일 책 못 읽는 사람이 책방 주인이라는 농담이 있어요. 공간을 운영하느라 바빠서 책을 못 읽는다고요.


맞아요. 저도 많이 못 읽어요. 지하부터 2층까지 있어서 공간을 운영하고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가능하면 공간 운영은 외주를 통해 해결하고 매니저는 강의 기획과 출판사 협업을 담당하는 식으로 꾸며가는 중입니다.

 

들어오면서 칼 세이건 책 읽기 강좌가 크게 붙어있는 걸 봤어요.


대중적인 과학책 중에서는 어쨌든 칼 세이건의 책이 가장 풍성하고 잘 알려져서 『코스모스』부터 『콘택트』 까지 읽는 책 모임이 있습니다.  처음 특집 기획을 칼 세이건으로 했고, 10월 말에는 블록체인 특집 코너를 운영하려고 해요.처음 기획을 칼 세이건으로 했고 10월 말에는 블록체인 특집 코너를 운영하려고 해요.


『이명현의 과학책방』에 소개된 책 중에서 한 권만 꼽으라면, 역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일까요?


『코스모스』도 있지만, 정재승 교수의 『과학콘서트』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었어요. 그런 베스트셀러가 한 20위권으로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베스트셀러 과학책의 순기능이 많지만, 다른 책이 더 많이 나와서 약진하면 좋겠어요. 한 권을 꼽자면 돌아가신 나대일 교수의 『아인슈타인과의 두뇌 싸움』이라는 책이 있어요. 자기만의 말하는 투로 아인슈타인을 설명하는 게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 책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책방 갈다를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간을 만들어놓으니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자발적인 독서 모임이 생기고,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면 북토크도 하고요. 과학과 과학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이곳을 사용할 수 있을까 싶으신 분도 연락하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락해주세요. (웃음)


 

 

이명현의 과학책방이명현 저 | 사월의책
결코 딱딱하고 지루한 ‘모범’ 가이드가 아니라, 저자 자신의 과학책 읽기 ‘희로애락’을 과감 없이 드러내는 솔직담백한 ‘자전적 과학 에세이’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오지은 “그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하죠?”

$
0
0

기사-셀렉_첫번째.jpg

 

 

이번이 세 번째 에세이다. 2010년  『홋카이도 보통 열차』 를 내고 ‘마음의 각도가 1도 바뀌’었던 오지은 작가는,  『익숙한 새벽 세 시』에서 어른이 된 자신의 형편없음을 발견하고 설렘의 반대편에 섰다. 이후 3년, ‘기쁨을 느끼는 감각이 퇴화되는’ 병을 앓으면서 유럽 기차 풍경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냥 즐거워지고 싶다는 담백함이 스위스부터 이탈리아까지의 기차 여행을 결정하게 했다.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 는 충동적으로 떠난 유럽 기차 여행에서 즐거움을 찾아 헤맨 기록이다. ‘이런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장을 뱉고, 결코 그런 뜻은 아니라며 문장의 꼬리를 끌어모아서 자기 말을 완성한다. 화려한 직업이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늘 신경 쓰고 쭈그러든다. 구석에 파묻혀 있는 걸 좋아하면서 또한 여행을 좋아한다.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즐거울 수는 있다.


자기 검열의 과정을 거친 1981년생 가수는 아직 회색 대륙에 있다. 앞으로도 상황이 바뀌리라는 낙관과 희망은 거의 없다. 다만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는 21세기의 사람들도 즐겁긴 해야 한다고,『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를 읽는 사람도 작은 즐거움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커다란 산맥을 보는 여행이 있으면
작은 촛대를 보는 여행도 있다.
- 149쪽

 

 

기사-셀렉_세번째.jpg

 

 

수면 위로 뻐끔거리는 행위


‘책읽아웃’에 출연해서 글이 안 써진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를 쓰던 때였죠? 처음 마감은 작년 5월 즈음이라고 들었었는데요.

 

편집부에서 3개월 주면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항상 1년 이상 걸리는 사람인가 봐요. 이제는 항상 무슨 일이든 1년 이상 걸린다는 걸 인지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날이 새로 깨닫지 않나요? 전부터 알고 있지만 늘 후회를 하죠.


어른이 된다는 게 얼마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또 새삼 자신을 이렇게 알지 못하고요.


첫 장과 프롤로그만 6개월 넘게 쓰셨다고요.


구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요? 음악할 때도 첫 곡의 편곡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첫 번째 곡이 나오고 나서야 다음 곡이 생각나서요. 책도 비슷한 것 같아요. 초반에 톤이 정해지면 할 말이 정해지기도 하고, 무슨 톤으로 말할지가 늘 어려워요.


여행 이후 1년을 묵혀놓고 쓰게 됐는데, 글을 쓰면서 그 당시 감정과 느끼는 게 달라졌나요?


재해석이 많이 들어갔을 것 같아요. 여행 당시 했던 메모를 꺼내서 무엇이 글이 될 만하고 무엇이 자격이 없는지 따지는 데 오래 걸렸어요. 그 과정에서 어떤 기억은 증폭되고 어떤 기억은 소모됐어요. 삭제한 부분이 많고요.


『홋카이도 보통 열차』 와 비교하면 확실히 글밥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 책이 바로 자신의 감정에 취해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워 담으며 낸 책이에요. 그래서 아마 다시는 그런 책을 못 낼 거예요. 어떤 의미로는 청춘의 책이고요. 이번 책은 나이가 들수록 쓸데없이 과묵해지는 느낌 있잖아요. 말해봐야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워진 부분이 많아요. 두 책이 다른데, 『홋카이도 보통 열차』 를 읽은 분이 나이를 먹어서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도 재밌게 읽어주시는 게 흥미롭더라고요.


책을 쭉 읽은 제 소감은, ‘왜 이렇게 은근히 웃기지?’ 였어요.


잘 됐네요. 제 최고의 목적이었어요. 전체적인 골자는 웃긴 내용이 아니잖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안 즐거운 사람이니까요. 씁쓸한 내용이니까 유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마시고 있는 캬라멜 마끼아또 같네요. 커피는 쓴데 캬라멜을 뿌린 느낌.


『홋카이도 보통 열차』는 말이 많고 발랄했다면  『익숙한 새벽 세 시』는 매우…

 

정색했죠, 갑자기.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이었어” 하고요.


두 전작을 생각해보면 이 책의 다른 점은, 웃기려는 욕심이 보이는 거죠.


‘드립’을 많이 쳤죠? (웃음) 제 상황을 블랙코미디처럼 바라보는 걸 수도 있어요. 결국에는 다 해프닝이고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한밤중에 열쇠가 부러지고 아웃렛 가서 무소유가 다 무슨 소용이냐며 트렁크를 사는 상황을 담담하게 쓰긴 조금 그렇잖아요. 쓴웃음 나는 상황 속에서도 자제하면서 웃기고 싶었어요. 친구가 제 책 읽는다고 하면 어디서 몇 번이나 웃었냐고 확인하죠.


예전에 오지은서영호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어요. 사실, 음악은 잘 기억나지 않고 두 분이 만담한 것만 기억나요.


제가 계속 농담했었죠? 결국에는 우울한 인간이라 그런가 봐요. 태양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공기를 마셔보려고 수면 아래에서 뻐끔거리는 인간 같아요. 안 그러면 너무 가라앉으니까요. 그 행동이 필사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자제를 하는데, 수면 위로 뻐끔거리는 건 저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 같아요. 확실히 태양을 동경하기도 하고요.


여행하는 자기 자신을 관조적으로 보려는 태도가 있었어요. 이를테면 자신을 ‘동북아시아인’이라고 표현하는 거죠. 유럽 안에서는 자신이 계속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태도였어요.

 

제가 중국, 일본, 한국을 되게 재밌어해요. 이탈리아는 어떻고 영국은 어떻다는 것처럼 이 동북아 3국의 공통점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다들 긴장을 잘 풀지 못하는 태도가 있다고 할까요? 유럽인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칠링’(chilling)한다면 우리는 휴식도 ‘오늘 휴식할 것’이라고 써서 오늘 어디 가서 휴식을 어떻게 하고 사진을 찍어 올릴지 고민하잖아요. 그게 동북아는 성장 집약적 인간들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거든요.


뭐라도 열심히 하잖아요. 긴장을 풀지 못하고요.


쉬는 것도 머리를 텅 비우는 게 아니고 ‘쉬기’를 목표로 하고요. 저도 분명 그런 성질이 녹아있을 거예요. 여행에서 남기는 게 있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으니까요. 그냥 재밌고 쉬고 싶다는 게 여행의 기본인데, 저는 여행 가면 반드시 가사를 써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조금이라도 나은 자신이 되어야 할 것 같고 인생을 정리하고 온다는 착각이라도 건지려고 했죠. 그 착각도 이제는 그만 집착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착각의 결정체가『홋카이도 보통 열차』였다면, 그다음 이게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게 『익숙한 새벽 세 시』였고, 그럼 그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하지? 재밌자! 하는 게 이 책이죠.


정반합이네요? (웃음)


맞네, 정반합이었네요. 변증법적 출간. 헤겔이었군요. (웃음)

 

 

우는데 가끔 웃음이 나는 상태


책을 쓰겠다고 계약하고 여행을 가신 거잖아요. 마음을 내려놓으려야 놓을 수 없는 환경인데요.


계약을 애매하게 하고 갔어요. 여행을 갔다 와서 책으로 쓸 내용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보수적인 태도로 어떤 여행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왠지 제 감성 상태로는 쓸 말이 있을 것 같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떠났어요. 그러고 보니 아직 계약을 안 한 책일 수도 있어요. 계약금도 다 받고 책은 나왔지만 계약한 기억이 없네요. 출판사와 신뢰 관계에 있나 봐요.


책이 나올지는 모르는 상황에서도 메모를 열심히 하셨어요.


너무 심심했어요. 혼자 여행 가면 할 게 없어서요. 앞에 있는 청년이 노래를 너무 시끄럽게 틀면 어디에라도 쓰고 싶잖아요. 계속 인터넷이 연결된 환경이었다면 트위터를 미친 듯이 했을 텐데, 인터넷이 잘 안되다 보니 열심히 메모했죠.


트위터 이야기를 하니 ‘쓰는사람’ 계정이 생각나요. 작년에 글이 너무 안 써질 무렵 계정을 만들어서 매일 얼마나 썼는지 적으셨죠.


큰 해결책이었어요. 괴로울 때 괴롭다고 생각만 하는 거랑 괴롭다고 말하는 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약간의 펑 트이는 느낌이 있어요. 그 느낌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많은 헛소리를 혼자 쓴다고 생각하는데, ‘쓰는사람’ 계정도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데 그 벽을 정해놓은 느낌이었어요. 벽에 대고 오늘 썼어, 못 썼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책에 실린 그림도 직접 그리셨어요.


이번 여행 때 아이패드를 가지고 간 김에 애플펜슬도 샀어요. 역시 너무 심심해서요. 노선도를 그리고 나니까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음악을 할 때도 자기가 어설프게 친 피아노 연주를 들고 가서 전문 연주자에게 이 느낌대로 쳐달라고 하면 못 해요. 약간 소박할지라도 생각한 사람과 화자가 같이 착 붙는 느낌이 없어지거든요. 이 책도 훌륭하신 분이 그려주면 멋있었겠지만, 그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꼬물꼬물 그린 게 훨씬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전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일로 유럽 기차 횡단을 꼽으신 적이 있는데, 소원을 이뤘네요.


아, 이뤘네요? 와!


충동적으로 비행기 표를 결제한 순간은 어떤 때였나요?


고립된 기분이 드는 깊은 밤이었어요. 무슨 일을 해도 즐겁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 같은 밤 있잖아요. 구글에 기차를 검색했더니 책에 소개한 론리플래닛 기사가 떴거든요. 저런 데 가면 너무 좋겠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지금 갈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든 거예요. 평소 같았으면 ‘너무 좋겠다’에서 끝났을 텐데 너무 좋다면 한번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한 거죠. ‘이렇게까지 좋은 거라면 이런 나라도 즐겁지 않을까, 이탈리아 가서 피자까지 먹었는데 안 즐거울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즐겁네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는 유럽에 가더라도 현지인들이 가는 뒷골목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클럽에 가는 ‘현지인처럼 하는 여행’에 집착했던 거예요. 관광객의 왕도 중 왕도라는 스위스나 이탈리아는 나중에 가도 되겠지 하면서요. 오만한 생각이었죠. 나중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대놓고 즐거워지라고 만든 코스를 즐겁게 즐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실천했어요.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에 따르면 울고 있는데 웃음이 나는 책이라고 합니다. 우는데 가끔 웃음이 나는 게 제 기본 상태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유럽 여행은 특히 생활과 분리된 느낌이 들잖아요. 이국적인 거리에, 서양인들로 가득하고요.


계속 자신을 멀리서 붕 뜬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크로아상을 먹으면서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부스러기를 안 떨어뜨릴 수 있는지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사람들이 저 조그만 동북아시아인이 크로아상 먹는 꼴 보라지 하면서 저를 안 좋게 볼 것 같았고요. 저는 모두 공작새처럼 풀 메이크업을 하고 멋진 코트를 입고 다니는 밀라노 같은 환경에서 거리낌 없이 그럼에도 나는 멋지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곳의 공기가 저를 박해하는 공기면 저는 박해당하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완전히 찌그러져 있다가 왔어요. 예전에는 그걸 경험으로 치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찌그러져 있던 시간도 분명 여행이고, 아무것도 못 봐도 분명 여행이라고 적었다는 게 나름대로 변한 것 같아요. 많이 본 날, 적게 본 날, 아무것도 못 느낀 날도 여행이라고 생각하게 됐고요.


‘혼자 여행하는 여성을 보면 연대감이 든다’는 문장이 있었어요. 실제로 여행하면서도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을 집중해서 봤던 편인가요?


특정 성별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고,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늘어뜨린 채 자는 아저씨는 자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여성은 만취하지 않는 이상 공공장소에서 그런 자세로 잠에 빠지기 힘들어요. 여행하면서 안전이 중요한 와중에도 들뜬 마음과 세상에 얕보이고 싶지 않은 복잡한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여성을 보면 초콜릿이라도 주고 싶고 눈인사라도 하고 싶은 오지랖이 있어요.

 

최근 매체에서 작가님을 호명하면 대개 페미니즘을 주제로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페미니즘을 이야기한 후로 혼자 여행하는 여성에게 더욱 눈길이 갔을 것도 같고요.


예전에는 저와 인연이 있거나 제가 좋아하는 요소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로 특정 여자들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좋아하는 여성의 폭이 많이 넓어졌어요. 그건 페미니즘의 덕분인 것 같아요. 이전에 이런 여자, 저런 여자는 싫다고 말한 게 여성혐오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기차의 맞은편 여성에게 아름답게 웃으신다고 말하신 거예요?


아름다운 여성한테는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자고 결심하게 됐어요. 장점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장점을 칭찬하는 데 적응이 안 되어 있더라고요. 우리는 스스로 칭찬하는 것도 박하고 상대방에게 칭찬하는 것도 박해요. 익숙하지 않아도 남에게 칭찬하는 걸 더 많이 하자 싶어서 누가 조금이라도 예쁘고 좋다 싶으면 칭찬해요.

 

 

 

기사-셀렉_두번째.jpg

 

 

회색인 세계에서 생존하기


뮤지션으로는 10년, 작가로서도 8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어요. 편안해진 게 있을까요?


지금 말씀하신 걸 듣고 놀랐어요. 벌써 그렇게 됐군요. 작가로서는 이번 책이 확실히 편해진 것 같아요.  『홋카이도 보통 열차』 는 누가 읽는지도 신경 안 쓰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면, 『익숙한 새벽 세 시』 는 첫 책인 것처럼 과연 제 책이 누군가에게 가서 읽힐지 효용을 의심했어요. 지금은 그런 의심 없이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네요. 글쓴이로는 편해졌지만 글 쓰는 건 정말 어려워졌어요. 누가 짧은 추천사만 부탁해도 너무 어려워요.


음악도 그런 기분이 드나요?


음악도 점점 어려워지긴 했네요. 지금부터가 진짜 어려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있어요. 선배들 말을 들어봐도 계속 어렵기만 하지 쉬워지지 않는데요. 정말 탈출구가 없네요. 여행이나 가야겠어요. (웃음)


자아를 써서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데, 고갈됐다는 느낌도 들 것 같아요.


이 책을 쓰고 나서는 다음 책을 제가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고갈됐어요. 하지만 요새 음악 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는 게 신기해요. 아마 천천히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고갈되었지만 음악을 하고 싶어지는 기분은 뭘까요.


음악과 글이 다른 뇌를 쓴다는 증거인데, 오지은서영호 팀으로 음악 한 지가 2년 반 정도 됐더라고요. 2년 정도 묵히면 글을 얼마나 썼냐와 상관없이 음악이 하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음악 쪽 세포가 보기에는 글로 노력한 건 아무것도 안 한 거고, 이제 슬슬 음악할 때 되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기분이에요. 신기한 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제까지 다리 근육만 쓰고 팔 근육은 안 썼으니까 웨이트 트레이닝은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랄까요?


이번 책은 ‘마음이 희미해진 사람들’이, 『익숙한 새벽 세 시』는 ‘자신이 꿈꿔온 어른의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둘이 비슷하면서도 다를 것 같아요.


생각했던 어른이 되지 못해 당황했던 사람들의 다음 단계가 희미한 마음 아닐까요. 하나마나한 말 안 하게 되고, 예전에 재밌다고 끓어올랐던 것에 반응하지 않게 되고요. 어른이 어떤 개념이라고 잘라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고, 세계가 회색인 것도 알게 된 상태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가 제 화두예요. 그런 사람들이 제가 즐거워지려고 했던 기록을 읽고 본인만의 즐거운 방법을 찾았으면 했어요.


‘이대로 괜찮아. 뭐 별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썼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별수가 없어요.


별수 없는 게 21세기의 우리들인 것 같아요. 20세기의 우리가 마이클 잭슨이 문워크 하고 인간이 달에 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에 흥분해 있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달은 계속 멀리 있고 마이클 잭슨도 죽었고, 다들 종말을 알고 있는 기운 빠진 상태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즐겁긴 해야 하잖아요. 즐거울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방법은 뭘까요, 계속 여행을 해야 할까요?


분명 제가 모르는 게 아직도 있을 것 같아요. 스위스에 가는 게 재미있다는 걸 이제야 안 것처럼, 남들은 이미 알고 있는데 늦되게 배우는 게 있을 거예요. 이를테면 흑당이를 키우는 즐거움처럼 전혀 모르던 즐거움이요. 그래서 예전만큼 무턱대고 허무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 입양한 강아지 이름이 흑당이죠?


네, 흑당이는 버려진 강아지였어요. 개를 입양하고 싶어서 각종 입양 관련 카페를 다 돌아다니다 동네 동물병원에 갔는데, 인터넷에는 없었던 까맣고 조그만, 다른 개들과 다르게 기운도 하나도 없고 모던한 아기 강아지를 봤어요. 완전히 마음을 뺏겨서 데리고 왔죠. 그때는 모던 락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펑크락입니다. 인형은 하루 만에 박살 내는 파괴 왕이에요. “너무 사랑해서 박살 낼게!” (웃음)


개를 키우는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잖아요.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진이나 인형이 아닌 귀여운 생명체가 나를 바라본다는 게 막연하게 상상한 것과는 아주 달라요. 물론 사고도 많이 치지만 이 아이가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으면 생명이 소통하는 느낌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따끈하고 이상한 일이에요.


『두 개의 목소리』  인터뷰에서 기혼 여성으로 출산과 육아를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읽었어요. 흑당이는 그 고민의 결과물일까요?


흑당이는 별개라고 생각해요. 그 고민은 아직도 하고 있어요.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나이라는 것도 세상에는 있으니까요. 그전까지는 계속 고민하게 될 것 같아요. 인간이 한 명 생기는 게 너무 큰 일인 것 같아서 고민만 계속하고 있네요.


개, 특히 어린 강아지를 키우는 일은 육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더라고요.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귀여움은 하나도 못 즐기고 키우느라 바빴어요. 사진으로 보면 뒤늦게서야 귀여운데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요. 이제는 마음 편하게 귀엽네요. 어떤 의미로 크고 못나졌는데, 지금 덩치의 흑당이가 더 좋아요.


에필로그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쓰셨어요. 우울증이 책을 쓰는 중요한 기저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우울증이 없었다면 전혀 다른 내용이 나왔겠죠. ‘오지은의 낄낄 하하 유럽 유람기’가 되었으려나요. 농담만 하다가 책으로 안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결국 병이 저를 창작시키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최대의 고민은 책을 잘 읽을 수 없다는 거예요. 너무 좋아하는 일인데 못한다니 괴롭죠. 글을 쓰면 쓸수록 못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되는 걸 수도 있고요.


「인생론」의 가사가 떠오르네요. ‘나로 태어났으니까 나로 살아가야만 해 / 자학에 사용하는 에너지를 절약합시다’.


누가 저보고 절망적인 세상에 사는 긍정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긍정적인 세상에서 절망적인 사람이 아니라요. 나 자신은 엉망이고 세상은 절망이지만 그냥 살자는 부류의 인간인가 봐요.


이 책은 어떤 책이 되길 바랐나요?


그냥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 되길 바랐어요. 마음에 남는 글이라든지 효용이 있는 글을 쓰는 방식으로 에세이 시장이 발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외국에는 그냥 읽어서 재미있는 산문이 많잖아요. 제 목표도 그런 산문을 쓰는 거였어요.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에세이 시장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밤에 읽어도 마음이 일렁이지 않는, 좋은 의미로 무색무취인 글, 읽었을 때 재미있고 깔끔하게 읽히는 글이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이 책은 그것보다는 약간 더 찐득하네요.

 

 


 

 


 

 

이런 나라도 즐겁고 싶다오지은 저 | 이봄
오지은 작가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담백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여행자다. 우리 삶이 가진 두 개의 모습, 그래서 발생하는 삶의 아이러니. 그 모두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여행이 오지은의 여행이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권일용, 고나무 “고립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른다”

$
0
0

_15A5474.jpg

                                          권일용(왼쪽) 고나무(오른쪽) 


 

‘대단한 사명감이나 책임감 없이’ 1989년 순경 공채에 합격한 권일용 순경은 1992년 7월 동부경찰서 관할 파출소로 발령받아 처음으로 경찰 제복을 입었다. 가볍게 입기 시작했던 제복은 수많은 사건 현장과 범죄 피해자들을 마주 보면서 점점 무거워졌다. 제복의 무게가 제법 묵직하게 누르던 1999년 겨울 과학수사계 윤외출 계장의 전화를 받고 2000년 2월 9일 그동안 한국에는 없었던 ‘프로파일러’가 된다.

 

프로파일러는 범죄 현장에서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범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가 왜 이 장소에서, 이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헤쳤는지, 어떻게 움직였고, 무엇을 신경 썼는지, 행동을 분석하고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그들의 전기를 함께 기록한 고나무 작가는 서문에 “이 실화는, 이 돈키호테들이 어떻게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링 팀을 만들고 그들이 범죄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밝혔다.

 

한 명으로 시작한 프로파일러가 팀을 꾸리고,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프로파일링이 경찰 내부에서 자리 잡는 과정은 하나의 의미 있는 기록이 된다. 또, 가볍게 입기 시작한 제복에 누군가의 죽음이 켜켜이 쌓여 기꺼이 범죄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권일용이라는 사람의 드라마가 선명한 잔상을 남기기도 한다. 최초의 프로파일러가 은퇴 후 애증 했던 자신의 직업에 바치는 전 상서 같기도 하고, 고나무 작가의 말에 따르면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고 관철시킨 그들의 태도에 대한 전기’이기도 한 것이다.


“돈키호테는 혼자 싸울 수는 있어도 혼자 승리할 수는 없다.”
- 17쪽

 

 

_15A5534.jpg

 

 

출판사의 제안으로 함께 집필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권일용 : 알마출판사 이전에도 여러 출판사에서 제안이 있었는데, 결이 맞지 않았다. 언젠가 현장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일반적인 전기나 무용담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일을 시작했고, 시대적인 상황은 어땠으며, 어떤 요구가 있었는지, 함께 일하는 프로파일러들의 고뇌를 함께 드러낼 수 있는 기록물을 남기고 싶었다. 마침 알마출판사에서 제안한 것이 추구하던 바와 맞았다. 고나무 작가가 이전에 했던 작업도 알았기 때문에 기대하고 시작했다.

 

고나무 : 권 교수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자기 고민이 뚜렷했다. 전기작가인 나는 캐릭터를 고민했다. 프로파일러를 다룬 무수한 언론 보도가 있지만, 언론 보도와 전기의 차이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언론은 프로파일러 ‘권일용’이 한 프로파일링은 보도하지만, 그가 행동하면서 어떤 고민을 얼마나 치열하게 했는지 보도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진 때 권일용은 동부경찰서 감식 요원으로 있었다. 갑자기 끊어진 다리 위에서 차량 여섯 대가 추락했고, 교각 단면에 부딪힌 시신을 일주일간 하나하나 카메라로 찍었다. 무수히 많은 사건의 중심에서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 성장한 과정을 그린 언론 보도는 없었다. 권 교수가 생각하는 방향과 나의 고민이 방향이 잘 맞았다.

 

서문에 ‘태도에 관한 전기’라고 밝힌다. 프로파일러 권일용의 전기이자 프로파일러 팀 전체에 관한 전기라고 했는데, 어떤 방향으로 쓸 것인지는 함께 결정한 건가.

 

고나무 : 존 더글러스와 마크 올셰이커의 『마인드 헌터』라는 책이 있다. 미국 프로파일러의 선조 격인 존 더글러스의 일대기를 그린 책인데, 마크 올셰이커라는 작가와 공동 집필했다. 전기 묘사 대상과 작가가 혼연일체 되어서 공저한 것이다. 한국의 『마인드 헌터』를 쓰고 싶었다. 권 교수도 초창기 프로파일러가 되었을 때 많이 읽었던 책이다.

 

취재 기간이 궁금했다.

 

고나무 : 몇 년 동안 몇 회에 걸쳐 만났느냐는 질문인가? 글쎄. 몇 회인지는 세 보지 않아 모르겠다. 2016년 11월에 처음 만나 2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취재했던 것 같다. 그동안 권 교수도 퇴직하고, 나도 창업했던 시기가 겹쳐서 그때 빼고는 많은 시간 만났다. ‘권일용’과 그의 동료, 1기 공채 프로파일러, 피해자나 유가족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취재 후에도 뉘앙스나 판결문 등으로 사실 확인 등을 해야 하니까 과정이 복잡했다. 그 동안 취재나 글쓰기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 걸렸다.


“초창기에는 그저 막막했다. 모든 것을 혼자서, 알아서 해야 했다.”
- 48쪽

 

책에는 초창기 여섯 개 사건을 담았다. 여섯 개 사건이 인간 권일용과 프로파일링 수사가 자리 잡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던 건가.

 

고나무 : 프로파일링 성장 과정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나 프로파일러가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검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사건을 기준으로 뽑았다.

 

권일용 :  2000년에 처음 과학수사계가 생기고, 프로파일러로 발령이 났을 때만 해도 경찰 조직 내에서 프로파일러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그때만 해도 범죄의 이유가 단순했다. 원한이나 보복 등 관계에 의한 것이 많았고, 현장에서 세세하게 조사하고 수집한 증거물만으로도 범인이 검거되는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유영철이 나타났다. 이건 동기나 목적이 불분명한 범죄가 사회에서 벌어진다는 의미로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 범죄이기 때문에 현장에 증거가 거의 남지 않는 것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예측 가능한 범죄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초창기 사건들에서 잘 드러났고, 이는 프로파일러가 자리 잡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가 변화하는 흐름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유영철이 나타난 2003년 이전에 프로파일러 직책을 만들어 미리 훈련한 것이 큰 예방이 되었을 것 같다.

 

권일용 : 유영철이 등장했을 때 바로 투입되었던 게 매우 중요한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범죄 유형이 변화하는 것을 예측하고 대비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특히 3장에 담긴 정남규 사건을 프로파일러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사건이라고 꼽았다.

 

고나무 : 여섯 개 사건이 모두 언론에 보도가 많이 된 것들이다. 그런데 양으로만 놓고 따졌을 때 정남규 사건이 보도 양이 적은데, 이 책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우연히 검거된 연쇄살인범이 단순 강도로 잡혔다가 금방 풀려날 뻔한 사건이니까. 프로파일링이 범인 검거나 체포에 적극적인 기능을 했던 첫 사례다. 1장에 나온 조현길 사건도 언론에는 많이 보도되지 않은 사건이다. 한국 경찰 역사상 첫 프로파일 보고서를 작성했던 건데 그것도 기록된 게 많이 없다.

 

장마다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실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권일용 : 보고서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많이 수정한 것이고, 밝힐 수 있는 것만 썼다. 정남규 사건은 개인적으로 큰 의미였다. 조직에서 프로파일러로 역할을 인정받았고 경사에서 경위로 특진하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 시대가, 우리 사회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괴물을 낳기 시작했구나.”
- 101쪽

 

범인을 잡기 위해 ‘그화 되기’를 한다고. 범인이 범행 저지른 시간에 그 장소에 가서 분위기나 주변 풍경을 살피고, 범인의 마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권일용 : 과학적인 단서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진술을 분석하거나 범인의 행동으로 무언가를 유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범죄 패턴이 변화하는 지금은 ‘왜 이 사람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이 선택의 동기는 무엇인지, 어떻게 형성되어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아야만 유사한 행동이 나왔을 때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입장으로 타인을 분석하듯이 접근하면 사고 자체가 안 된다. 예를 들어 가해자가 “피해자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라고 했을 때 “말이 되는 소리야?”라는 반응은 철저한 조사자의 입장이다. “그래, 피해자가 운이 없었을 수도 있어.”라고 하는 게 그의 삶과 사고방식에 빠져들었을 때 나오는 대답이다.

 

 

_15A5496.jpg

 

 

완전히 범인에 동화되어야 나올 수 있는 반응인 것 같다.

 

권일용 : 피해자를 같이 비난하는 게 아니다. 범인이 피해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비슷한 유형의 범죄자를 미리 예방하거나 발생했을 때 더욱 빨리 잡아서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계속 범인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 권일용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 같다.

 

권일용 : 현장에 나가지 않는 프로파일러들은 ‘힘들고 어렵다’고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 나가면 마음이 달라진다.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를 직접 보고, 만지고, 범행 동기를 찾기 위해서는 끝없이 사진을 본다. 그러면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걸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이 숙명처럼 느껴진다. 나는 제복을 입고 있으니까. 제복을 입고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니까, 숙명처럼 느껴지는 거다.


조현길과 밥을 먹고 나오면서 “‘이제 이런 괴물들과 같이 밥 먹고 살아야 하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라고 했다. 수없이 느꼈을 기분일 텐데, 이런 기분을 느낄 때도 두렵다거나 그만해야겠다는 고민은 하지 않았나?

 

권일용 : 두렵다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제복을 입었으니까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제복은 국민과 한 약속이자 피해자와의 약속이다.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찾는 게 우선이었다. 프로파일러가 되기 전에 CSI를 하며 수없이 많은 현장을 보고, 피해자를 보았다. 그때도 문제가 발생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왔다고 느꼈을 때도 ‘내 길인가, 아닌가’를 고민하지 않았다. 대단한 사명감이나 무게감으로 경찰이 된 거 아니었고, 경찰로 먹고살아야 하니까 계속했던 거다. 다만, 제복을 입고 본 현장이 내가 추구했던 삶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현장에서 그런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나무 작가는 ‘권일용 되기’를 했다고?

 

고나무 : 일단 권일용이 느끼고 생각한 걸 최대한 따라 했다. 권일용 팀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오른쪽에는 대중이 있고, 왼쪽에 권일용이 있고, 그 가운데 내가 서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의 활동과 고민을 가장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싶었고 그게 ‘권일용 되기’였다. 가령 그 시점의 권일용은 물론이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권일용의 행적을 모두 물었다. 그가 꾸었던 꿈이나 부모나 종교, 성장 과정에서의 생각 등 프로파일러 권일용 말고 인간 권일용이 지나온 길을 훑어보는 작업을 했다. 또 2000년도에 프로파일러로 발령을 받은 후 권일용의 책상에 있던 책을 따라 읽었다. 그 시점의 권일용이 했던 고민과 학습을 한 것이다.

 

권일용 작가가 갔던 사건 현장을 같은 시각 같은 동선으로 걷기도 했다고.

 

고나무 : 권일용은 늘 현장에 나가는 사람이다. 대표적인 현장인 정남규 사건은 걸었던 동선을 물어서 골목까지 똑같이 따라서 걸었다. 10년 전이기 때문에 재개발된 곳도 있었지만, 안 된 곳도 많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대략적인 느낌을 잡는 것이다. 또 동료들을 만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 나만의 특별한 방식이 아니다. 미국식 논픽션 마니아인데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나온 것들을 따라 한 거다.

 

쓰는 사람이 권일용이라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고나무 : 한 인간을 깊이 공부하다 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도 늘 거리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소설가가 아니라 논픽션 작가이기 때문이다. 권일용이라는 프로파일러와 그의 팀을 잘 담는 게 전기작가의 목표이자 의무다. 그런데 권 교수가 인간 고나무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약간 또라이인 점. (웃음) 그래서 동화되거나 연민이 깊었지. 그래도 거리를 두는 게 결과물에 좋다고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권일 : 고 대표가 너무 몰입하고 있다고 생각되거나 지나치게 많은 부분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함께 상의했다. 오래 만나다 보니 눈빛이나 말투만 봐도 너무 빠져들었다는 게 느껴지면 자르기도 하고, 같이 조절했던 것 같다.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의 범죄 피해자들은 나의 이웃들이었다.
- 263쪽

 

쓸 때나 검수할 때 아무래도 생존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을 염두에 두었을 것 같다.

 

고나무 : 5년 전 지존파 납치 생존자 인터뷰를 하면서 범죄 문제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범죄 논픽션 작가로 핵심 화두와 고민 중 하나가 범죄 피해자 트라우마다. 이 책을 쓰면서도 잔혹한 범행 방식을 일부러 묘사하지 않았다. 범죄 장면 묘사가 차별화할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피해자나 그 가족이 불필요한 묘사를 보았을 때 심정을 떠올렸다. 흔히 미디어에서 범죄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잔혹한 범행 방식을 다룰 때가 있다. 사람들이 1차원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잘 팔리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_15A5652.jpg

 

 

피해자 인터뷰도 시도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고?

 

고나무 : 인터뷰 직전까지 갔는데 거절당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상처다. 자식이나 부인이 아무 의미 없이, 원한 없이 떠났으니까. 예를 들어 1억을 빌렸는데 갚지 않아서 살인을 당한 게 드라마 <수사반장> 시절의 인과관계가 있는 범죄였다면, 이 책에 나온 범죄들은 이유가 없다. 피해자 가족에게는 마치 재난 같은 거다.

 

두 사람에게는 늘 ‘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책을 집필하면서 조금이라도 해소된 부분이 있나.

 

권일용 :  ‘왜 범죄자가 되었느냐’보다는 같은 시대와 상황을 교감하면서 누구는 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만난 범죄자들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사회로부터 고립된 사람들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 중에서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들은 왜 저지르지 않는가를 보면 주변에 자신의 고민을 듣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달랐다. 범죄 예방은 문단속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고립되지 않도록 국가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은 그 문제를 결국 남에게 발산하는 거다.

 

고나무 : 지금까지 전문가의 답변이라면, 나는 범죄자 인터뷰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은 없다. 다만 이 책을 작업한 작가로 답을 한다면, 가족의 중요성 같은 걸 느꼈다. 여기에서 가족이라는 낱말이 전통적 가족의 의미뿐만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좋은 관계 맺기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보살피고 배려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책에는 한국에서 프로파일러가 자리 잡는 초창기에 관해 많이 다루었다. ‘아직 경찰 내부에서도 프로파일은 낯선 기법이었다’라는 문장이 많이 나온다. 현재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하는지, 바람이 있나.

 

권일용 :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앞으로 나올 범죄를 예습해야 한다. 프로파일러 1기가 2005년 선발되어 2006년에 첫 발령이 난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났다. 이들이 10년 동안 많이 다듬어졌다. 그중에서 훌륭한 프로파일러가 나올 것이다. 집단이 모여 있으니 미래를 대비한 연구도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고나무 : 책을 통해 없던 방식을 만들고 증명하는 과정, 낯섦을 보여주는 게 명확한 목표 중 하나였다. ‘권일용’ 혼자로 시작한 프로파일러가 현재는 서른두 명이 되었다. 이것으로 프로파일링, 프로파일러의 필요성은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2권에 관한 계획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권일용 : 2권은 장난처럼 이야기한 건데, 아직은 모르겠다. 일단 어떤 거대한 바람보다는 피해자 가족들이 이 책을 통해 다시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어려운 시대를 살고, 현재를 견디는 젊은 층들이 자기가 하고 싶고, 믿고 싶고, 가고 싶은 길에 대해 용기를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별거 아닌 사람도 이렇게 되었으니까. 피하지 말고,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어떤 일을 더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나무 : 당분간 작가로 글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 범죄 전기작가를 발굴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기획, 제작하는 기획사 대표로 활동할 예정이다. 한국 출판 시장에 미약한 실화 스토리, 논픽션, 실화 베이스의 픽션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고나무, 권일용 저 | 알마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러가 되고 그의 프로파일링 팀이 탄생하는 과정과, 그들이 사건 현장에서 기존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딛고 수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Viewing all 8510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script src="https://jsc.adskeeper.com/r/s/rssing.com.1596347.js" async> </scri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