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죽음,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소설이 없어졌다, 문학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읽을거리 볼거리가 많아지고,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문학의 사회적 위상, 문학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예전만 못하다는 뜻일 테다. 자연스레 문학 비평의 파급력도 예전만 못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2016년,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이라는 글이 문학 전공자만이 아닌, 상당수의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다. 표절과 문단 권력 등 예민한 주제에 관해 거침 없이 진단한 오혜진 평론가가 쓴 글이었다.
오히려 개탄스러운 현실을 초래한 원인은 이번 문학권력 논쟁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바 있는 퇴행의 양상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 ‘퇴행’은 오랫동안 한국문학(장)의 지배적 경향성을 형성해왔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한국문학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와 같은 그 퇴행의 내용들이야말로 지금의 ‘몰락’을 초래한 한국문학의 어떤 ‘체질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92~93쪽)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은 오혜진 평론가가 낸 첫 단독 저서다. 2013년에서부터 여러 매체에 발표한 평론과, 미발표한 글을 묶었다. 책에는 한국문학의 지배적인 경향과 함께 이와 길항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문학 작품을 향한 평론도 실렸다. 평론의 대상은 한국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 <26년>과 지슬, 웹툰 <미지의 세계> 등 다양한 콘텐츠를 분석했다. 오혜진 평론가가 생각하는 한국문학의 지배적 경향과 과제, 평론의 역할을 들었다.
문학은 정치투쟁이 일어나는 장소이자 역사적 축적물
첫 단독 저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을 내셨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첫 책 출간의 감회를 만끽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제가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도록에 글을 한 편 썼는데, 그 핑계로 베니스 비엔날레를 보겠다고 출국 일정을 잡아놨거든요. 그래서 출간과 관련된 언론 인터뷰 일정들을 꽤 급하게 소화해야 했어요. 공항에서 전화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죠.
출간은 물론 뜻깊은 일이지만, 그저 쓴 글을 수정해 모으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서 담담한 편이었는데요. 그래도 첫 책이라고 지인들이 축하와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독자들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이 있는지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책이 꽤 두꺼우니 완독한 독자들이 나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도 하셨고요.
언론에 보도되는 걸 보면, 주로 제 책의 1부와 2부에 관심을 많이 보여주시네요. ‘K문학’이라는 명칭을 비롯해 한국문학의 가부장주의를 비판한 내용,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문학(장)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실험들을 다룬 부분이죠. 그중 제가 악명(?)을 떨치게 된 글이자 표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이라는 글에 대한 질문이 많아요. 그 글은 제대로 읽히기도 전에 신문지상에 선정적으로 보도돼서 저로서는 꽤 부당한 공격도 받았고,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혁신을 꾀하려는 한국문학(장)에서 좀 소비된 면도 있는데요. 그 모든 일들이 제겐 양가적인 의미가 있었죠.
이번 책이 문학만 다룬 건 아니고 웹툰, 영화, 드라마 등 다른 대중문화도 다뤘습니다. 그럼에도 제목과 부제에 ‘문학’을 넣은 의도가 있을 듯합니다.
제가 한국 근현대문학을 전공했어요. 제가 대학원에 들어간 2000년대 중반은 문학을 일종의 ‘문화’로 보는 관점, 즉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문학 연구에서 ‘문화론적 전회’라는 학문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제 지도교수님도 국어국문학과 소속이지만 문화론을 가르치시고, 저도 제 전공을 문화론이라고 생각해왔죠. 이처럼 문화론의 견지에서 문학을 보는 관점이 혹자들에게는 거부감을 주기도 했어요. 문학도 대중영화나 TV드라마, 예능프로그램과 같은 ‘문화’에 속한다는 주장이 문학의 위상을 격하시킨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거든요. 하지만 저한테 문화는 공기 같은 것이라서, 문화 아닌 게 없고 어디서든 문화정치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과 문화를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게 전 더 부자연스럽게 여겨져요.
저는 작가론ㆍ작품론만을 유일한 문학 연구 방법으로 간주하던 전통에서 벗어나, 문학 역시 일종의 시장ㆍ제도ㆍ미디어로서 사유하도록 훈련받았어요. 어떤 작품을 볼 때, 그 작품이 실린 매체와 제도의 조건, 정치적 환경 등을 중요한 변수로 생각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문학이 특정 개인의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정치투쟁이 일어나는 장소이자 역사적 축적물이라고 보는 편이 더 익숙해요. 제 석사논문 제목이 「1920~1930년대 자기계발의 문화정치학과 스노비즘적 글쓰기」인데요. 식민지 체제의 조선에서 ‘자조론’이나 ‘입신출세’ 같은 자기계발 담론이 지닌 통치효과를 분석한 논문이에요. 당대의 소설과 문학평론은 물론, 신문ㆍ잡지 기사, 광고, 처세서, 수험서 등 온갖 것들을 분석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제목만 보면 국어국문학과 논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저희 학교에서는 이런 주제가 그리 낯선 건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물론 저는 문화의 많은 영역들 중에서도 한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한국 근현대문학의 역사와 장르법칙, 생산ㆍ유통ㆍ수용의 조건 및 양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죠.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을 ‘한국 근현대문학을 전공한 문화연구자’로 설명하는 게 가장 편합니다.
제 책에서 문학 외의 다른 장르를 다룬 이유는, 첫째로는 제가 문학 외의 다른 장르와 플랫폼에서 시도되는 서사 전략과 상상력에도 관심이 있기 때문이고요. 둘째로, 전체 서사시장에서 문학이 위치한 좌표를 정교하게 읽기 위해서는 문학 외부의 서사물들을 참조항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볼거리ㆍ읽을거리가 신문과 라디오, 한정된 분야의 책(문학)들만 있던 과거와, 영화ㆍ유튜브ㆍ온라인게임ㆍ웹드라마ㆍ웹소설ㆍ넷플릭스 등이 마구 번성하는 오늘날 ‘문학’이라는 양식이 처한 조건과 위상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오늘날의 문학이 다른 문화장르와 엄격하게 구분돼서 창작되거나 수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작품을 구상하고 쓸 때 영화나 TV드라마, 게임 등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설정과 상상력을 차용하기도 하고, 독자 역시 그런 온갖 종류의 서사를 접하는 와중에 문학도 접하는 거죠.
웹툰 <미지의 세계>를 다룬 글 「“포스트-아포칼립스”를 향한 미지의 미러링」에는 한국문학을 다룬 글에서보다 호의적인 문장이 많았습니다.
‘문학 대 웹툰’이라는 식의 장르 간 대결을 의도한 적은 없고요. 문학을 부정적으로, 비문학을 호의적으로 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을 비롯해 한국문학의 몇몇 문학적 실험들에 대해서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했어요.
<미지의 세계>를 다룬 글에 호의적인 문장들이 많았던 것은 그 작품이 비문학 장르에 속해서가 아니라, 제가 정말 그 작품을 즐겁게 봤기 때문이에요. <미지의 세계>의 여성표상과 상상력은 제게 무척 이채롭게 여겨졌어요. 그간 ‘88원세대’나 ‘N포세대’와 같은 청년담론들은 ‘연애-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생애사 전개를 당연시하면서, 그 과정에서 여성을 ‘정상적’이고 ‘성공적’인 인생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자원이나 트로피 같은 것으로 간주했죠. 이건 사실상 청년의 성별을 ‘이성애자 남성’으로 설정한 것과 다름없어요. <미지의 세계>는 바로 그 청년세대론의 성별정치를 전복하고 미러링하는 전략을 취했죠.
웹툰 장르의 주류적 경향이 어떤지는 제가 잘 모르고요. 한국문학에 대한 ‘전적인’ 지지와 비난이 불가능하듯 웹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다만, ‘웹툰’이라는 미디어/장르를 주도하는 주체들이 민주주의를 새롭게 감각하는 젊은 세대이니, 한국문학의 오랜 전통을 통해 축적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상상력과 인식론이 웹툰에서 발견될 수는 있겠죠.
한국문학은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의 대상
“엘리티즘적 계몽주의, 가부장주의, 시장패권주의, 순문학주의 같은 퇴행의 내용들이야말로 지금의 ‘몰락’을 초래한 한국문학의 어떤 ‘체질’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93쪽)이라는 진단이, 해당 글이 발표된 2016년에도, 책이 나온 지금에도 화제인데요.
어떤 분들은 제가 한국문학을 “싸잡아” 비난했고, 급기야 한국문학을 증오하거나 저주했다고까지 생각하시던데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한테 문학은 ‘저주’나 ‘증오’ 같은 인격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정치적ㆍ역사적 분석대상이에요.
한국문학사를 살펴보면 여성문학ㆍ생태문학ㆍ노동문학ㆍ이주자문학 등 당대 현실에서 변혁과 운동의 기획을 담은 여러 문학운동과 실험들이 있죠. 하지만 저는 그보다, 우선 한국문학의 지배적 경향, 주류적 흐름에 대해 이야기한 거예요. 특정 작가나 평론가, 출판사를 지시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한국문학(장)에서 전개된 주요 담론과 비평적 화두들을 대상으로 그것들에 투영된 한국문학계 주류의 욕망과 인식론을 검토해본 것입니다.
인용하신 내용은 제가 처음 지적한 게 아니라, 현재 독자들이 그동안 한국문학의 특징이라고 언급해온 내용들을 정리한 거예요. 일부는 편견이고, 또 일부는 경험적 사실이겠죠. 다만 저는 특정 작품 분석을 통해 한국문학에 정말 저런 퇴행적 특징들이 있는지 검증하거나 증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보다는 한국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감수성과 기대치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그 변화의 원인과 방향을 읽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글에 대한 반박글 중 대표적인 게 정홍수 평론가의 「당신은 왜 한국문학을 걱정하는가」였습니다.
저도 정홍수 선생님의 글을 따라 읽어온 독자이기 때문에 제 글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했어요. 정 선생님의 반박 글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죠. 하지만 아쉽게도 그 글은 제목부터 제게 실망을 줬습니다. 정홍수 선생님의 글 제목이 「당신은 왜 한국문학을 걱정하는가」인데요. 음… 저는 한국문학을 “걱정”한 게 아니에요. 아까 말씀드렸듯, 한국문학은 제게 “걱정” 같은 인격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ㆍ역사적 산물이자 분석 대상이거든요. 한국문학이 무슨 보호가 필요한 취약한 어린아이는 아니잖아요. 가장 기묘했던 건, 마치 한국문학을 걱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누군가가 따로 있다고 암시하는 듯한 그 제목의 뉘앙스였어요. ‘네가 뭔데, 도대체 누군데?’라며, 메시지보다 메신저를 공격하는 건 정당한 비판 방식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요. 또 왜 제가 한국문학에 대해 발언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도 궁금해요. 제가 등단 제도를 거치지 않아서일까요? 몇십년간 출판독서계에 종사해오신 정홍수 선생님보다 한국문학계에 몸담은 시간이 짧아서일까요? 한국문학에 대한 발언권 자체를 제한하는 듯한 그 제목 자체가 제가 지적한 한국문학의 위계와 폐쇄성을 반증하는 듯해 아쉬웠습니다.
물론 특정 대상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책임이 따라야 하죠. 그게 아마 한국문학을 “걱정”(?)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자격 조건일 거예요. 그렇게 본다면, 저는 제가 그 조건을 누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줄곧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어요. ‘국문학’만 팠죠. (이에 대해서는 가끔 후회합니다만……) 한국비평들이 자주 쓰는 별칭을 따르자면 국문학계의 “서자”나 “이단아” 쪽보다는 “적자”에 가깝달까요? 아, ‘여성’도 ‘적자’의 계보에 끼워준다면 말이에요. 아무튼 저는 국어국문학 전공자로서 제가 연구하는 필드에 대한 제 문제의식을 쓴 거예요. ‘남의 필드’를 ‘침범’한 게 아닙니다. 한국문학이 특정 주인에게 배타적으로 소유ㆍ독점된 ‘영토’가 아니라면 말이죠.
제가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을 썼을 때 기대한 반론의 내용은 좀 다른 거였어요. 앞서 말씀드렸듯, 한국문학의 저항적 실험들에 대해 제가 과소 서술한 것은 사실이니 그 점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고요. 제가 거론했던 한국비평계의 주요 화두들, 이를테면 장편소설론이나 세계 문학상 담론 등에 대한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죠. 문학과 비평을 취향과 연관시켜 언급한 대목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고요. 무엇보다 제가 20~30대 여성주체, 한국문학의 미디어성, ‘정상성’에 대한 통찰, 나아가 87년 체제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문학의 새로운 비전 등의 주제를 내세웠으니 그에 대한 논의가 있길 바랐습니다. 저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지닌 제 또래 (여성) 평론가 및 독자들과의 연대도 기대했고요. 하지만 당시에는 제가 기대한 종류의 반론이나 후속 논의가 전개되지는 않았습니다. “개저씨”라는 용어의 발칙함(?)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은 많았네요. 그건 제가 만든 말도 아닐뿐더러, 앞 세대가 주도한 “20대 개새끼론” 같은 논의의 상스러움을 떠올려보면 좀 억울하긴 했습니다만…….
문학계의 적자라고 하셨잖아요. 학부부터 박사까지 국문학을 공부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책을 꼽아주신다면?
저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이 바뀌는 식의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는 않았어요. 전 ‘단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만약 바뀐다면 그건 예외적인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책들’의 역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에요. 저한테 문학은 ‘순정’이나 ‘신앙’, ‘첫사랑’ 같은 건 전혀 아니고요. 오히려, 문학이 탁월한 개인의 대체 불가능한 산물이 아니라는 점, 문학을 창작하고 해석하는 데 소용되는 상상력과 장르 법칙은 일종의 계보와 역사를 가지고 변주되거나 유형화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문학이 제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여겨졌어요. 문학연구가 그저 독후감 쓰기가 아니라 분석을 요하는 정치적ㆍ역사적 행위임을 인지했을 때에야 문학이 학문의 영역으로 생각됐죠. 문학이라는 재현의 체계에 매력을 느꼈던 겁니다.
그걸 깨닫게 된 게 학부 1학년 1학기 월요일 1교시 때 들었던 이혜령 선생님의 수업 때였어요. 염상섭의 중편소설 「만세전」(1922)에 대한 강의였는데, 「만세전」 자체도 흥미로운 소설이지만, 그 작품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와 상상력조차도 역사화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건 제가 창작보다 비평에 더 매력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죠. 이러저러한 미적 상상력이 이러저러한 역사적ㆍ정치적 조건에서 가능하거나 혹은 불가능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 공부의 희열이 조금 있었어요.
가장 열심히 공부한 텍스트는 염상섭과 그에 대한 평론이었어요. 제가 소명출판에서 총 3권으로 나온 『염상섭 문장 전집』 (한기형ㆍ이혜령 편, 2013~2014)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는데요. 그때 염상섭의 작품들을 한 개인의 산물이라기보다, ‘식민지라는 조건 하에서 가능했던 사상의 형상’으로 보는 관점을 배웠어요. 마찬가지로 어떤 작품이나 문화현상을 2019년 현재 한국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가능한 사상의 형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죠.
장편대망론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에서는 장편대망론의 허구를 지적해주셨어요. 장편소설이 한국문학의 미래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한국문학은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할까, 하는 답답함이 들었습니다.
질문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장편소설은 한국문학의 미래가 아니다, 다른 답이 있다’라는 주장을 한 건 아니고요.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문학계에서 ‘장편소설’이라는 특정 문학 양식을 의미화해온 방식, 그것에 투영된 정치적 욕망을 질문한 겁니다.
한국문학사에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은 그저 여러 문학 양식들 중 하나인 것이 아니라, 위계화돼 있어요. 시대에 따라 그 위계화의 양상과 논리는 달랐습니다. 식민지기에는 단편소설이야말로 예술적 성취로 여겨졌고, 장편소설은 통속적이고 상업적이며,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매문(賣文)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김남천의 장편소설론이 등장하면서, 장편소설이야말로 세계의 ‘총체성’을 조망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장르로 부상하죠. 2000대 중후반부터 전개된 ‘장편소설 대망론’은 과거 김남천이나 게오르그 루카치 등이 주장한 소설미학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장편소설을 옹호합니다. 이때 장편소설은 단편소설보다 영화화될 가능성이 훨씬 높고, 그 때문에 더 넓은 시장에서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상업적 기대, 세계문학에의 가능성 때문에 주장됐죠.
2007년부터 대대적으로 이어진 장편소설론을 보면 ‘이야기가 살아 있다’, ‘서사가 살아 있다’는 식의 표현이 자주 등장해요. 그런데 짧으나 기나 원래 모든 소설은 이야기잖아요? 그럼에도 장편소설이야말로 ‘이야기가 살아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죽어 있는’ 소설도 있다는 뜻이겠죠. 이때 ‘이야기가 없는’ 소설들로 지목된 것이 주로 1990년대 소설들이에요. 신경숙ㆍ은희경ㆍ공지영ㆍ김형경ㆍ양귀자 등 한국문학사에서 여성문학, 내면성, 고백의 양식 등으로 불린 소설들이죠. 이 1990년대 여성소설들은 ‘한국문학의 여성화’라는 비난(결코 칭찬은 아니었죠)을 들으며, 자폐적이고 사소설적이라는 평가를 듣습니다. 나아가 편의점, 고시원, PC방 등을 무대로 88만원 세대의 이야기를 다룬 2000년대 소설 또한 자폐적이라고 진단되며, 그 역시 1990년대 소설전통의 해악으로 이야기됐죠.
결국, “아저씨 독자”가 떠난 ‘한국문학의 위기’를 강조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살아 있는 장편소설이 나와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진정으로 부정하고 싶은 것은 1990년대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이었던 거예요. ‘1990년대 여성문학이 한국문학을 ‘여성화’했고, 그게 2000년대의 ‘자폐적’ 문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990~2000년대 문학적 경향은 그저 ‘이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우리에게는 ‘되살려야 할’ 강력하고도 굵은 ‘남성적’ 이야기들이 있다’라는 주장이죠. 실제로 ‘이야기꾼’이라는 별칭이 한유주나 배수아보다는 황석영, 이문구, 성석제, 천명관, 박민규 등과 같은 특정 스타일을 구사하는 ‘남성’작가들을 지시해온 용례를 볼 때, 저한테 장편소설론은 ‘이야기’, 나아가 한국문학의 전통을 ‘남성’으로 성별화하려는 시도로 이해됐어요.
이문구, 황석영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장편대망론에 설득된 적이 있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문학적인 취향에 관해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책에서는 이야기꾼으로 호명되는 방식에서 정유정의 예도 들어주셨는데요. 최근에 김언수 작가의 『뜨거운 피』 를 천명관 작가가 감독으로서 영화화한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이야기꾼으로 호명되는 소설가의 작품이 영화 등 다른 매체로 확장력은 있는 듯한데요. 웹툰 『26년』 의 영화화 사례를 분석해주셨는데, 문학 작품의 영화화에 관해서도 선생님의 분석이 궁금합니다.
문학작품의 영화화 자체에 대해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잘라 말할 필요는 없겠죠. 서로 다른 매체가 각자의 장르법칙과 미학의 임계를 시험하고 교란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다만 제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장편소설을 ‘영화화’가 가능한, 즉 대중적 흥행을 위한 양식으로서 ‘도구적’으로 이해한다는 점, 그리고 바로 그런 기대를 충족한 소설만이 ‘한국문학의 나아갈 길’, ‘한국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라고 의미화하는 경향입니다.
왜 노벨문학상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부터 질문해야
시장패권주의와 관련해서는 노벨문학상을 둘러싼 언론 보도나 출판계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 발표 때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전 ‘한국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것인가’라는 주제에 큰 관심은 없어요. 일단 거론되는 후보가 늘 같잖아요. 고은, 황석영……. 이건 ‘고은, 황석영 작가가 훌륭하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한국문학은 이미 1970~1980년대 문학정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갱신해왔는데, 여전히 한국문학의 대표이자 첨단으로 그분들이 호명된다는 건 한국문학에 대한 무관심이 아닐까 싶고, 이에 대해 무감각한 한국의 상황도 좀 의아하긴 합니다.
한국인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죠. 중요한 건, ‘한국문학계가 노벨문학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이를 통해 한국문학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려 하는가’의 문제죠. ‘왜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안 나오냐, 상을 탈 만한 작가는 누구냐’라며 한국문학을 위계화하는 기준으로 노벨문학상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비롯한 각종 문학제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말하듯, 노벨문학상의 문화정치는 매우 복합적입니다. 한국어시장이 넓어야 하고, 한국문학의 맥락들을 새롭게 선별하거나 창조해서 ‘번역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각종 외교정치도 필요하죠.
제 책 5부에서 영화 <지슬>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음에도, 그 호평의 근거가 한국사회에서 볼 때 지극히 탈정치적인 것이었음을 지적했는데요. 이처럼 한국어문화권에서 제출된 특정 작품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그 작품이 다루는 주제의 맥락을 공유한 해당 문화권의 독자들이 가장 잘 알아요. 외부에서 평가기준을 찾는 게 이상하죠.
아시아,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노벨문학상 담론이 ‘지방문학’과 ‘국민문학’ 및 ‘세계문학’의 위계를 만들며 식민주의적 열망을 추동해온 역사를 떠올려보면, 현재 한국문학계가 보이는 노벨문학상 집착은 무성찰적이에요. 심지어 신경숙 표절사건 때 특정 출판사가 자본주의에 의해 오염ㆍ타락했다고 주장하며 ‘진보적ㆍ저항적’ 문학정신을 강조한 문학권력론의 논자들 중에서도 신경숙은 세계문학 작가로서 미달이며, ‘노벨문학상을 탈 만한 요즘의 한국문학이 있는가’라고 개탄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심지어 자신은 요즘 소설들은 읽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시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때 정작 질문돼야 했던 건, ‘신경숙이 정말 세계문학 작가로서 자격 미달인가 아닌가, 한국작가들 중에 노벨문학상을 탈 만한 이가 있나 없나’가 아니라, ‘왜 노벨문학상이 기준이어야 하는가’죠.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만 아니라 김연아 선수와 박근혜 대통령이 재현되는 모습을 분석했잖아요. 공인이 여성으로 재현되고 소비되는 지점에 관해서였는데요. “‘싱글여성’에게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탐욕적인 호기심과 관성적인 해석틀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230쪽)라고요. 여성평론가로서 직접 느끼시는 건 어떤지요.
질문의 의미가 좀 모호합니다만, 그냥 제 나름대로 답해볼게요. 저는 여성주의를 학습하며 비평을 써왔고, 저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제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되거나 비난받는 상황이 되면 늘 양가적인 감정을 느껴요. 이를테면 제 책이 출간되자 많은 분들이 일단 ‘여성필자가 단행본을 냈다’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격려해주셨는데요. 특히 여성기자들과 여성독자들이 아주 기뻐해주시더라고요. 이때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올려치기(?) 당해도 괜찮은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분들이 지지하는 게 제 생물학적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라는 걸 알기에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성평론가 모두의 입장을 대표할 수는 없고요. 오히려 여성평론가, 혹은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여러 연구자들의 관심사와 전략, 목표와 운동방식 등이 각기 다른데, 그 모두가 ‘여성’, ‘페미니스트’라는 집합명사를 경유해서만 호명된다면 각각의 연구자들이 지닌 입장과 전략의 동일성과 차이, 나아가 페미니즘 지식의 스펙트럼이 잘 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소설 「하나코는 없다」를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평하셨잖아요. 텍스트와 해석이 완전히 어긋났는데, 상을 준 평론가들은 당대 최고의 평론가들이었고요.
1994년에 발표된 최윤의 단편소설 「하나코는 없다」는 그해 제1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합니다. 저명한 문학상을 받았으니 검증된 ‘걸작’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진 않겠지만, 제가 주목한 것은 좀 다른 지점이에요. 『1994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하나코는 없다」에 대한 심사위원 다섯 분의 심사평을 읽어보면, 그분들과 저는 서로 전혀 다른 작품을 읽은 것 같거든요. 물론 1994년에 중년 남성들이 「하나코를 없다」에서 읽은 내용과 2019년에 30대 여성인 제가 그 소설에서 읽어낸 것이 반드시 같아야 할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다른 게 자연스럽죠. 각 시대마다 동원할 수 있는 지적ㆍ정서적 자원이 다르고, 그로 인해 형성된 ‘해석의 지평’이 다를 테니까요. 제가 흥미를 가진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에요.
제가 보기에 「하나코는 없다」는 아무리 봐도 남성 동성사회에 속하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사회(성애적인 것을 포함하는)가 남성에게 끝내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인데, 당시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주제를 ‘남자와 여자의 우정은 가능한가’ ‘익명성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경험하는 개인의 소외’라고 파악하셨더라고요. 제 생각에 「하나코는 없다」에 간직된 어떤 결은 1994년 중년 남성들의 해석지에는 결코 포착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작품을 보다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는 해석의 지평이 당시에는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았던 탓이죠.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하나코는 없다」는 ‘저주받은 숙명’을 타고났다고 농담처럼 말해본 거예요. 그럼에도 수상작이 됐으니 꽤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코는 없다」를 둘러싼 그 현상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이런 겁니다. 혹자는 퀴어문학이 지금 막 유행을 타고 등장한 것 혹은 소재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문학에서 ‘퀴어한 것’, 즉 이성애 규범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세계에 대해 질문하는 소설들은 옛날부터 있었다는 것이죠. 유구한 전통이 있어요. 지금 이광수나 손창섭 소설에서도 남성 동성애의 욕망을 발견하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거든요.
퀴어문학이 지금 돌발적으로 등장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퀴어한 것’을 읽어낼 지적 자원과 해석의 지평이 이제 막 형성ㆍ축적되기 시작했다는 것, 퀴어문학의 문제의식이 이제야 비로소 한국문학계에서 ‘문학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사실에 더 가까워요. ‘이성애자 중년 남성은 절대로 ‘퀴어적인 것’을 읽어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건 절대 아닙니다. 이건 특정 개인의 비평적 무능에 대한 문제가 아니에요. 무엇보다 저는 특정 문제를 해독하는 능력이 나이ㆍ성별ㆍ성적 선호ㆍ교육경험 등에 좌우되는 고정불변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정 작품이나 현상에서 퀴어의 문제의식을 발명ㆍ발견하는 능력은 해당 사회에 그 문제와 관련된 지식과 정보, 교양과 감수성이 얼마나 축적돼 있는가와 관련됩니다. 그 요소들이 한 사회의 공통감각과 지적 토대, 즉 ‘해석의 지평’을 만드니까요.
지금도 여전히 독자나 평론가들에게 미처 감지ㆍ해석되지 않아서 ‘문제화’되지 못한 숱한 텍스트의 결들이 있을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이제 동성애를 다룬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동성애혐오’의 혐의에서 자유로울지 다 깨달은 것처럼 믿고 있지만, 전 그렇지 않을 거라고 봐요. 여전히 의미가 축소되거나 은폐되는 많은 문제의식들이 있을 겁니다. 예컨대 장애, 이주, 인종, 인터섹스와 트랜스정치, 계급투쟁, 환경과 종차별, 신자유주의시대 전쟁과 군사주의, 분단과 식민주의 같은 문제들을 보다 정교하게 질문하고 해석하기 위한 지적 자원들이 한국문학계에 충분히 축적돼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많은 비평적 학습이 필요한 주제들이 있습니다.
지금 비평의 역할, 지금 한국 문학
매체 상황이 바뀌었고 지금도 바뀌고 있잖아요. 평론의 역할도 과거와는 달라져야 할 것 같은데, 지금 평론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평론의 역할이라…….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는 아니겠고요. 그저 제가 어떤 평론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평에 대한 세간의 여러 생각이나 입장들 중 저를 가장 갑갑하게 하는 것은 비평을 ‘칭찬’ 아니면 ‘욕’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이에요. 물론 ‘칭찬’이 그저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상찬’이 아니라 ‘정확하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비평적 자의식을 설명한 비평가도 있고, 그게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좀 다른 종류의 이야기예요. 비평가가 특정 작품을 ‘칭찬’한다거나 ‘욕’을 한다는 표현 자체가 저한테 비평에 대한 기묘한 상을 각인시켜요. 비평가가 특정 작품이나 현상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그건 즉물적인 감정이 아니죠. 비평은 정치적ㆍ역사적 성찰과 분석이고, 그 결과는 그 작품에 대한 호오를 밝히는 데만 소용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갱신할 미적 감각과 상상력의 방향을 가늠하는 데 참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천명관의 소설들은 천명관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자의식과 세계관은 천명관이 산 시대의 산물이죠. 천명관의 자의식과 세계관을 ‘개성적’이라고 인식하는 오늘날 독자의 감각 또한 역사적으로 구성된 거고요.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최근 ‘여성서사’에 대한 논의가 부상하고 있는데요. 특강을 해보면 청중석에서 ‘여성서사가 무엇인지 정의해달라’, ‘바람직한 여성서사를 추천해달라’라는 질문이 자주 나와요. ‘여성서사’에 대한 간명한 정의와 사례를 접하고 싶은 욕망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여성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을 ‘여성서사’라고 정의할지, 혹은 ‘여성서사’에 투영된 욕망과 전략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가출과 “불륜”을 다룬 전경린의 1990년대 소설은 페미니즘 문학인가 아닌가’, ‘조선희가 쓴 『세 여자』 의 등장인물들 중 누가 가장 바람직한 페미니스트인가, 끝까지 남편을 기다린 주세죽은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오빠의 밥을 차려주고 싶다고 말하는 유관순 영화는 여성주의적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보다는 ‘왜 그 당시 전경린의 여자들은 집을 나가 낯선 남자를 만나는 걸 ‘해방’으로 생각하게 됐는가, 주세죽에게 남편의 존재는 무엇이었나, 주세죽에게 남편을 기다리는 일은 왜 필요했을까’라는 식의 질문이 당대 역사를 산 여성들의 구체적인 삶과 욕망, 그들이 시도할 수 있었던 전략을 상상하는 데 더 낫다는 거죠. ‘무엇이 가장 페미니즘의 이상에 부합하는가, 누가 가장 페미니스트인가’ 같은 단순비교는 여성의 삶과 욕망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조건을 보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여성에 대한 무지를 강화합니다. 특정 여성이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 자기해방을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할 수 있었는지, 그 맥락에 관심 갖는 게 ‘여성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더 나은 방식이자 비평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스타 작가 못지않게 스타 평론가 역할이 중요하지 않나요. 스타 평론가로서 오혜진의 가능성을 이번 책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런 질문 처음 들어봐요. (웃음) 아까 노벨 문학상 담론에 대해서도 말했듯, 특정 권위에 기대는 방식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타’나 ‘에이스’ 양성을 통해 해결되는 문제는 없을 거예요. 이게 제 진지한 답변이고요.
다른 방식으로 얘기를 해볼 수도 있죠. 이를테면 최근 진행자를 필요로 하는 문학 이벤트들이 많아졌죠. 작가 사인회나 낭독회, 북토크와 같은 오프라인 ‘행사’는 물론, 문학 팟캐스트나 유튜브 같은 매체나 플랫폼들이 생겨났죠. 이때 평론가에게 사회나 진행을 포함해 일종의 엔터테이너 역할을 맡기는 일이 많아졌더라고요. 문학이 팟캐스트나 이벤트의 대상이 되는 현상 자체에 대해 ‘좋다, 나쁘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다만 그 새로운 문학 플랫폼에서 비평가에게 어떤 역할이 요구되는가 생각해볼 수는 있겠죠. 물론 전 그런 행사들에 거의 불리지 않습니다. 직업이 ‘문학평론가’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로 인지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중요한 자리에서는 저를 잘 안 부르시더라고요. 근데 제가 또 작품이 좋으면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굉장히 잘 만들 수 있거든요? (웃음)
저는 한국문학의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20세기에 있었던 계몽주의라든지 엘리트의식은 옅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 소설가, 작품의 경향을 어떻게 보시나요.
‘한국문학의 계몽주의’라는 주제는 단지 특정 작품이 지나치게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거나, 작가ㆍ비평가가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는 차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계몽’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요. 문학을 ‘계몽’의 주요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아주 오래된 인식을 포함하는 문제죠. 그건 ‘문학하는 행위,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도전받아서는 안 되는, 배타적인 지적ㆍ사회적ㆍ정치적 권위가 있다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문학비평은 어중이떠중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탁월하고 예외적인 지적 훈련과 경험을 축적한 소수의 전유물이라는 뿌리 깊은 생각이 있죠. 요컨대 ‘비평가’와 ‘일반 독자’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믿음, 그게 계몽주의를 형성하는 하나의 신념이고, 그건 실제로 계몽이 되고 있는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어요. 이를테면 저는 ‘이 소설은 평론가가 보기에는 좀 부족해도 일반 독자에게는 재밌게 읽힐 수 있지’ 하는 식의 비평들이 굉장히 성의 없고 오만하다고 생각되거든요. 물론 설득력 있는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분명 오랜 지적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게 ‘개나 소나 비평을 하면 안 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건 이상하죠.
또 한편으로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대놓고 계몽주의를 표방하는 게 힘든 분위기가 됐죠. 그러면 ‘꼰대’라는 비난을 들으니까요. 계몽주의가 최근의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명백해진 이후, 한국문학의 전략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평범한 보통 사람’, ‘상식적이고 평균적인 인간’, ‘소시민’ 등으로 정체화하는 겁니다. 1960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광장』처럼, 20세기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명문대 학생이나 교수, 작가 등 지식인 남성이었어요.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소설의 주인공은 백수나, 편의점 알바 등 ‘보통 사람’을 표방하는 인물입니다. 작가도 스스로를 사회지도층이나 오피니언 리더라기보다 ‘글 쓰는 노동자’로 칭하는 경우가 많아졌죠. ‘밥벌이의 숭고’ 같은 말도 등장하고요. ‘보통 사람’이 한국문학의 페르소나가 됐다고 해도 무방한 거죠.
보통 사람은 누구인지 질문해야
책 제목과 부제를 활용해서 질문 드리자면, 개인 취향의 정상성을 묻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대중문화를 감상할 때의 자세와 연결될 듯합니다.
‘개인적 취향의 정상성’을 물은 게 아니고요. 제 책의 부제가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인데요. 앞의 답변에 이어서 얘기해볼게요.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문학의 페르소나 혹은 자아상이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 ‘소시민’이라고 해도, ‘보통 사람’의 형상과 감각은 성 중립적이지도 않고 비정치적이거나 탈계급적이지도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반드시 ‘보통이 아닌 사람’을 상정하죠. 스스로의 ‘특별하지 않음’을 강조할 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존재’로 식별돼 배제되거나 차별을 당하는지 한국문학은 깊이 성찰해보지 않았어요.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다민족적 배경을 지닌 이주자 등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 등장하면 반드시 ‘보편/특수’의 구분이나 ‘정체성정치’ 등을 틀을 소환하는 비평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죠. 이런 상황에서는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이주자들 또한 자신이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사회적ㆍ문화적 발언권을 획득하려 합니다. 이게 바로 켄지 요시노가 말한 ‘커버링’의 압력이죠. 민주화 이후 한국문학이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재현체계로서 정체화할 때, 과연 한국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정상/비정상’, ‘다수/소수’, ‘보편/특수’ 등의 틀로 인식하고 식별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표상을 선취함으로써 부여되는 발언권, 문학적 시민권에 대해 질문해봐야 해요.
끝으로, 요즘 주목하는 문화현상이나 작가, 작품이 있다면 알려주시고 관련하여 집필 계획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이라기보다 늘 주목하는 주제는 ‘페미니즘, 퀴어, 문학사, 고양이’고요. 여전히 문학, 영화, TV, 웹툰, 넷플릭스, 유튜브, 팟캐스트 등을 닥치는 대로 보고 듣고 있습니다. 향후 집필 계획은……. 일단 지금 기회가 되는대로 각종 짧고 긴 글을 여기저기에 기고하고 있고요. 작년에 진행한 강좌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총10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이 올해 하반기에 나옵니다. 작년에 출간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의 ‘문화사’ 버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요. 작년 말부터 올 초까지 ‘여성신문’에 연재한 <‘여성-창작’을 말하다> 인터뷰 시리즈를 묶은 책도 올해 안에 나올 예정이에요. 가장 중요한 건 근년 내로 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는 것인데, 이건 몇 년 전부터 수없이 말해놓고 지키지 못해서 제 사회적 신용도가 많이 떨어졌네요. 아무튼 저로서는 분발하고 있습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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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혜진 저 | 오월의봄
한국문학(장)에서 감지되는 바로 그 퇴행의 징후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페미니즘과 소수자정치에 입각해 한국문학의 새로운 기준을 모색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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