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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좋아하지 않아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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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회사원’인 이다혜 작가가 신작을 냈다. ‘일터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말, 글, 네트워킹’이라는 카피를 단 자기계발서. 이 책은 제안을 받고 쓴 글이 아니다. 올해 6월 말, 여성들의 ‘일’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함께 책 작업을 할 수 있는 편집자에게 연락한 후 딱 3개월만에 출간됐다. 지금 일하는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매우 현실적인 팁이 빼곡히 수록된 덕분에 책을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88쪽, 작은 판형의 책이지만 눈이 돌아가는 시간이 무섭게 밑줄을 긋게 된다. 단순히 ‘사이다 발언’이 아니라, 실질적이라서 더 곱씹게 되는 이야기들. 비단 여성뿐 아니라 ‘정확하고 단단하게’으로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두면 좋을 책이다.

 

<씨네21>에서 편집팀장으로 일하는 이다혜 작가는 2012년  『책 읽기 좋은 날』  을 시작으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  『아무튼, 스릴러』 ,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  『교토의 밤 산책자』  등을 썼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 출연하면서 ‘책 좀 읽는’ 독자들로부터 무한 애정과 신뢰를 받았고, 지금은 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팟캐스트 <이다혜의 21세기 씨네픽스>를 진행 중이다.

 

『출근길의 주문』  을 쓴 이다혜 작가와 서면으로 만났다. “솔직한 성격은 타고난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전혀 솔직하지 않다”고 답한 작가. 하지만 이 인터뷰는 솔직하게 답한 것 같다. ‘꼰대주의보’가 내려졌거나, 내려질 전망인 사람들은 특히 더 정독하자.

 

누구 한 사람만 앞에 있어도, 한 명만 눈에 보여도, 그 길을 선택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내가 일을 시작하던 때는 결혼하지 않고 40대가 될 때까지 조직 생활을 하는 여자가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점점 늘고 있다. 회사마다 관리직, 임원급에 오르는 나이 든 여성이 늘고 있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도 늘고 있다. 여자의 자리는 정해져 있지 않다. 과거의 기준으로 상상하지 말자. ( 『출근길의 주문』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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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올해 3월에 전작 『교토의 밤 산책자』  를 내고, 5개월 만에 신간이다. 굉장히 시의성이 있는 책으로읽었는데, 『출근길의 주문』  의 책 계약은 언제했나?

 

다른 내용으로 계약한 건이 있었고, 편집자에게 이런 내용으로 책을 쓰고 싶다고 연락한 게 2019년 6월 27일이었다. 빨리 써서 빨리 내고 싶었기 때문에 바로 진행이 가능한지, 일찍 낼 수 있는지 편집자에게 문의했고 바로 진행했다. 일정이 늦어질 듯하면 다른 출판사를 알아볼 생각이기도 했고.

 

기자의 책은 매체에서 소개를 잘 안 해준다. 어떤가? 지금까지 책을 내면서, 언론에 기사가 많이 나왔는지 궁금하다.

 

기자가 쓴 책은 매체 리뷰가 거의 실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일단 내 책에 대해 매체 리뷰를 받는 일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고. 나 역시 기자가 쓴 책보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책을 선호하기는 하니, 별 수 없다고 느끼긴 한다.

 

『출근길의 주문』  은 꼭지 제목 중 하나다. 초고를 쓸 때, 제목은 무엇이었나?

 

내가 원고를 쓰면서 생각한 제목이 따로 있기는 했고, 원고를 보낼 때는 제목이 없이 보냈다. 그 편이 편집부에서 더 편하게 제목에 대해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받은 제목은 문장형 제목이었는데, 최근 내가 문장형 제목으로 된 에세이에 대한 피로도를 느끼고 있던 참이라 가능한 문장형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제목 확정이 잘 되지 않아서 고심하고 있었는데, 편집부에서 ‘출근길의 주문’이 어떻겠느냐고 질문을 주었을 때 나 역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목 관련한 본문 내용은, 전에 함께 일한 적 있는 최다은 SBS PD가 출근길의 만다라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떠올려 적은 내용이었다. 책이 나온 뒤, 가장 먼저 최다은 PD에게 선물과 함께 책을 줬는데, 정작 본인이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 했다. 주변 사람이 한 좋은 생각을 크레딧 달아서 기억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도 이 책 제목에 대해서는 고맙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올해 7월 초부터 쓰기 시작했고, 중간에 휴가와 추석 연휴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기간에 집중해서 썼다. 이런 내용으로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원고가 원고지 300매 정도 분량이 있었고, 책 전체에 쓸 내용은 이미 2년 전부터 95% 정도 완성된 상태(꼭지의 제목과 해당하는 내용 폴더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절반 정도만 추려서 쓴 책이 『출근길의 주문』)에서 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는 원고를 추가하면서 계속 고치는 작업을 했다.  

 

편집자와 작업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나?

 

작업을 함께 한 허유진 편집자가 사회생활 관련해서 이런 부분에 대한 글을 읽고 싶다는 의견을 메일로 정리해서 준 적이 한 번 있었다. 그 중에 취사 선택을 해서 원고에 추가했다. 편집자와 편집부의 도움을 가장 크게 받은 부분은 구성이었다. 원고 배치 순서와 내지 편집에 대해서는 가능한 편집자의 의견을 거의 다 따랐다.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책을 보면, 스스로 홍보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비호감이 되지 않으면서 적절히 자신의 성과나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노하우가 있다면?

 

노이즈 없이 좋은 결실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홍보가 과하면 비호감으로 찍히는 일을 피할 수 없고(나 역시 그런 계정들은 뮤트해버린다), 홍보가 부족하면 뭘 하는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는다. 나도 SNS를 하는 데 있어서 그런 부분 때문에 늘 고민이다. 내가 SNS에 대해 할 수 있는 조언은, 의견을 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주력하는 일에 관련된 뉴스를 업데이트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말라는 정도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나 개인이 인정받고 책을 구입하게까지 유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개인의 인기에 기대어 활동하는 일에 대해서는 장래성이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뉴스와 이슈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가 있으면 의견이 다를 때도 쉽게 팔로우를 끊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이 책의 주 타깃 독자는 누구인가?

 

이 책을 쓰면서 생각한 독자는, 첫째, 나처럼 20년 정도 일한 40대 이상의 여성들이다. 남자에게 일을 배워 여자 부하직원과 일하는 경험은 남성에게도 어렵지만 여성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나도 같은 여잔데’라고 생각하며 하는 실수가 많다. 혼자 겪는 외로움이 아니라는 위로를 하고 싶었고, 동시에 얼른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었다. 둘째, 중간관리자 급이 되는 10년차 직원들에게도 1번과 같은 의미에서 쓸만한 노하우를 전하고 싶었다. 셋째, 신입사원에서 5년차 사이의 여성들이 많이 읽기를 바라며 쓰기는 했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 중에는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어떻게 읽고 계신지 알고 싶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내가 여자라고 해서 다른 여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출근길의 주문』은 ‘일’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면 직장인이든 프리랜서든 관계없이 읽기를 원하며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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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CM

 

 

모르면 크게 혼쭐이 날 것이다

 

책의 첫 장이 ‘페미니즘과 글쓰기’다. 직장에서 페미니스트로 인식되면, 종종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입에 올려도 과격하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요즘 너무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은, ‘모르면 크게 혼쭐이 날 것이다 곧 망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평상시 생각보다 좀 더 과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기준을 두지 않으면 과거를 답습하는 데 그치고 만다.

 

누가 봐도 꼰대인 상사와 잘 관계 맺는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인가?

 

꼰대인 사람과 관계를 잘 맺으면 초고속으로 꼰대가 된다. 여자 꼰대들이 “나는 여자라 꼰대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걸 볼 때가 있는데, 다 똑같이 된다. 어떤 사람에게 장시간 노출되면 비슷해지는 게 인간이며, 나의 경우는 좋은 관계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런 상사가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일했다. 이런 전략의 문제도 있다. 승진을 잘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꼰대인 사람과 잘 관계 맺으며 꼰대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애초에 이런 책이 왜 필요하겠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후배 유형은 어떤 캐릭터인가?

 

두 번 말하게 하지 않는 사람. 문제는 같은 말 반복하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같은 말 반복하게 하는지도 잘 모른다.

 

좋아하는 상사 유형, 또는 선배 유형은 누구인가?

 

결정이 빠르고 책임감 있는 사람.

 

55쪽에 보면 “꼼꼼하게 리뷰해주는 상사가 있다면 그 신뢰도는 급격히 상승한다”고 써 있다. 당신이 피드백을 할 때, 가장 잘 활용하는 단어 혹시 표현이 있다면 무엇인가?

 

피드백할 때 사람마다 쓰는 단어나 표현이 다르다. 원고에 대해 피드백할 때도, 그 사람이 어떤 원고를 주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게 말한다. “재미있어요” “좋았어요” 같은 가장 간단한 말도 언제나 효과 있지만, 다른 사람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쓰지 않는,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딱 들어맞는 표현을 들으면 기분 좋으리라 생각하고 그런 표현을 고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특별히 잘 활용하는 말이 있지는 않다. 물론, 내가 이렇게 고심해서 말을 골라도 상대가 언제나 그 고심을 헤아려준다는 뜻은 아니다.

 

‘인생은 피드백’이라는 말에 굉장히 동의한다.  『출근길의 주문』  을 읽으면, 관계를 잘 못 맺는다고 하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잘 챙기는 것 같다. 당신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성격이 비관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서 내 힘을 빼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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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CM

 

일단 하려는 말이 있어야 한다

 

프로필 소개를 읽으니, “팀원 없는 편집팀장”으로 일한다고 써 있다. <씨네21>에서는 정확히 어떤 업무를 하시는지 궁금하다.

 

주 업무는 주간지 편집이다. 세 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한 명 쓰는 시스템이 되었다. 기자들의 원고를 읽고 제목을 달고, 수정사항이 있는지 확인해 전달한 뒤 책이 나오기까지 전 과정에서 일한다. 책 관련해 원고를 쓰는 일도 하고 있다. 업무량이 계속 늘고 있다.

 

<씨네21>에서 ‘다혜리의 요즘 뭐 읽기?’가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이 칼럼을 어떻게 쓰게 됐는지 궁금하다.

 

연재를 시작한 것은 고경태 편집장이 <씨네21>에 있던 때였다. 내가 쓰는 원고가 있으면 좋겠다는 윗사람의 판단이 그 코너를 지금까지 쓰게 만든 셈이다. 이 코너는 일단 책을 여러 권 읽다가 쓸 책을 정하는 거라서, 원고량 대비 품이 많이 드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 꼭지다.

 

글도 좋지만 말도 잘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둘 다 잘하는 작가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말을 잘하는 노하우를 알려달라!

 

글이든 말이든 하려는 용건이 분명해야 한다. 발음이나 목소리가 좋다면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일단 하려는 말이 있어야 한다. 알맹이 없는 말이나 글을 필력이니 말투니 하는 것으로 돌파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다만, 의식적으로 천천히 말하는 것과, 할 말 없을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스킬임에 분명하다.

 

후속작이 궁금하다. 여행 책은 언제 나오나? 

 

내가 책을 열심히 쓰는 이유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서 나오는 <코난 도일> 책 마감을 못하기 때문도 있다. 정작 그 책을 못 써서 다른 책을 쓰고 있다. 올해를 넘기지 않고 그 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런던과 에딘버러를 중심으로 코난 도일과 셜록 홈즈 이야기를 기행 구성으로 쓰는 책이다. 이 책으로 고민한 만큼 책이 팔린다면 100만 부가 나가야 할 것 같다. 열심히 쓰는 중이다. 여행책이라면 유유에서 <여행의 말들>도 예정에 있다.

 

책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선배 작가로서, 팁을 하나 준다면?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는 건 쉽지 않다. 특정한 주제나 소재를 가지고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지 구성을 먼저 짜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일정한 분량의 글을 꾸준히 써야 한다. 그리고 내가 쓰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만한 출판사는 어디가 있는지, 다른 작가들은 유사한 주제나 소재에 대해 어떤 글을 쓰는지 살펴보라. 결국은 독자가 저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저자들도 있지만, 나는 이런 원론적인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정말 좋게 읽은 책, 2권만 추천해달라.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 그리고 2018년 부커상을 받은 『밀크맨』.

 

『출근길의 주문』  은 확실히 여성 독자를 타깃으로 썼다. 이 책의 여성 남성 독자 비율이 확연하게 차이가 날 것 같은데, 남성 독자에게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일을 잘하는 방법만 따지면 여성, 남성이 따로 있지 않다. 문제는 채용, 승진, 급여의 문제에서 사회가 남성을 인정하는 만큼 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 잘하는 여성 실무진에 대한 남성 상사들의 인정보다도, 여성을 실무진에서 승진시키지 않고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남성이라면 여성 동료에게 잡무가 몰리는 일을 방관하지 말고, 승진이나 포상 관련한 기회가 있을 때 일 잘하는 여성 동료를 추천하라고 말하고 싶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프로파일>을 진행하고 있다. 단독으로 팟캐스트를 더 진행한다면, 어떤 주제로 만들고 싶나?

 

나에게는 정말 책만 다루는 팟캐스트가 필요하다. 연락 달라!

 

『출근길의 주문』  을 읽고, 딱 3개만 기억하자!고 말한다면, 어떤 것을 특히 강조하고 싶나?

 

첫째, 다른 여성을 좋아하지 않아도 존중하고 같이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다음해 계획을 세우는 것만큼이나 연말에 그 해 자신이 한 일을 정리하는 포트폴리오 갱신 작업을 해라. 셋째,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의 나를 칭찬해라.


 

 

출근길의 주문이다혜 저 | 한겨레출판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남자들만의 네트워킹에 밀리고 싶지 않아 나름의 노력을 해본 여성들, 열심히 일하지만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있는 여성들에게 이 책은 ‘말, 글, 네트워킹’이라는 보다 정교한 무기를 손에 쥐여주고 투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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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양희은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연대는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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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수 양희은이 윤종신, 이상순, 성시경 등의 후배들과 함께 곡을 만들고 노래해 싱글로 발표하는 ‘뜻밖의 만남’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다양한 장르, 다양한 뮤지션이 양희은을 만나 만들어내는 새로움은 ‘노래하는 사람’ 양희은의 존재를 재확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엄마가 딸에게>는 2015년 발매한 ‘뜻밖의 만남’ 네 번째 곡으로, 마치 “자기가 커나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악동뮤지션, 김세정, 폴킴 등과 거듭 콜라보를 하기도 했던 <엄마가 딸에게>. 이 곡이 다시 한 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찾았다. 지난 10월 출간된 그림 에세이 『엄마가 딸에게』  는 김창기, 양희은의 시적인 가사와 키큰나무의 서정적인 그림이 더해져 포근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엄마가 딸에게』  를 통해 엄마와 딸이 마주 보고 대화를 해나갈 수 있다면, “혹시 이 노래가 물꼬를 틔우는 역할을 했다면” 족하다는 가수 양희은. 따라서 그가 세상의 모든 딸에게 전하는 말은 “더 많은 소통을 하고, 후회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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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불씨를 키워


2016년에 발표한 곡 <엄마가 딸에게>가 그림책으로 출간이 되었어요. 기분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그러게요. 그림책으로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어요. 생각 밖이었는데요. 그림책 제안을 주셨을 때 좀 더 간단하게 사람들에게, 엄마에게, 딸에게 다가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나는 콘셉트를 잡거나 생각을 미리 하고서 무엇을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이쪽에서 얘기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요. 할만 하면 하고 그래요.

 

곡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책으로 만들어졌으니 이제 더 오래 남게 되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네, 활자는 오래 가죠. 노래는 허공에 전파되었다가 사라지면 끝이지만 책은 오래 남겠죠.

 

그림은 마음에 드셨어요?


좋았어요. 끝부분이 좋더라고요. 엄마가 딸의 방에 들어가서 이불 덮어주고 가만히 보다가 딸의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엄마와 딸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나오죠. 그 부분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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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딸에게> 뮤직비디오에는 동생 분이기도 한 양희경 배우가 ‘엄마’ 역할로 등장했잖아요. 하나의 노래가 이렇게 다양한 콘텐츠로 나오는 게 흔치 않은 일인데요.


맞아요, 희경이가 뮤직비디오 찍은 것도 울림이 컸죠. 이 곡은 여러 번 다른 가수와 같이 부르기도 했죠. 악동뮤지션, 폴킴, 김세정, 이런 가수들과 콜라보를 해봤어요. 타이미가 랩을 붙인 버전도 있고요. 그게 좀 별나죠. 이런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또 이렇게 그림책으로 나오고, 생각해보니까 정말 다양하네요.

 

곡 스스로가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것 같아요.


자기가 커나가는 거죠. 곡은 가수의 의도와는 상관 없어요. 노래는 들어주는 사람 것이니까요. 불러주거나 들어주거나 하면서 그 노래의 불씨를 키워 다시 가수 가슴으로 돌려주거나, 하는 것이죠. 가수가 무엇을 의도했던 간에 말이에요. 게다가 의도한 대로 세상이 되질 않아요. 특히 노래나 음반은 자기가 뭘 의도했다고 해도, 그대로 풀리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예요. 요새 큰 기획 회사 같은 곳에서는 그것을 자본으로 가능하게도 할 수 있겠죠. 우리 같은 사람은 꿈도 못 꿔볼 일이에요.

 

이 곡으로 젊은 팬들도 많아졌죠? 콘서트에도 엄마와 딸이 함께 많이 왔다고요.


보면 알잖아요. 얼굴이 비슷하니까 엄마와 딸이구나 하죠. 보면 손수건을 꺼내 그렇게 울고 그래요. 같이 울고 있어요. 같이 울고 난 뒤에 엄마와 딸이 가슴을 터놓고 얘기를 했는지는 확인할 바 없지만 일단은 같이 운다는 것. 물론 그걸로 다 된 건 아니에요. 그 다음에 이야기가 시작되고 앙금을 서로 얘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일단 같이 공감하긴 해요. 혹시 이 노래가 물꼬를 틔우는 역할을 했다면, 그만큼이면 족한 거예요. 내 몫은 거기까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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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래, 오래 가는 노래


가사가 원래는 엄마의 이야기였는데 딸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는 생각에 2절 가사를 직접 쓰셨다고요.

김창기 씨가 쓴 가사에 제가 딸 얘기도 붙이고 싶다고 해서 쓴 거예요. 엄마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얘기를 듣는 딸의 이야기도 들어줘야지, 생각했어요. 그래야 공평하죠. 주거니 받거니.(웃음)

 

저는 “너의 삶을 살아라” 부분만 들으면 눈물이 나요.(웃음)


엄마로 살면 자기 삶이 없으니까요. 자기 시간도 없고, 자기 삶도 없죠. 모든 걸 아이의 시간에 맞춰요. 애뿐이겠어요? 남편의 사정, 시가의 사정, 친정의 사정 등 모든 게 역할로만 가니까 ‘나는 어디에?’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정말 “네 삶을 살아라”처럼 절실한 말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이제 결혼도 안 하고, 출산도 안 하는 거 아닌가요?(웃음) 나부터도 결혼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하면 “하지마! 뭘 하니!” 해요.(웃음) 이 세상에 여자한테 썩어서 거름이 되는 남자 봤어요? 여자는 다 썩어서 거름이 돼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썩어서 거름이 되면 그것으로 자라는 게 남자고요.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가 썩어서 거름이 되어주는 것이 남자 아니냐고 얘기를 하곤 하죠. 그러나 다양한 선택이 있겠죠. 모두 존중해요.

 

책 뒤에 “가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고인 얘기를 노래로 풀어내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실으셨잖아요.


좋은 노래, 오래 가는 노래는 그렇다는 이야기인데요. 아주 오래 전에 한 얘기예요.

 

‘뜻밖의 만남’ 프로젝트를 이어나가고, 꾸준히 새 곡을 발표하시는 것도 그 이유인 거죠?


소통. 오프사이드로 밀려나는 게 싫어서요. 점점 오프-오프사이드가 되니까요. 관객들도 옛날 노래, 70년대 노래들만 원하는데요. 나는 같은 곡을 너무 많이 되풀이해서 부르잖아요. 지겨운 마음이 생기죠. 그러나 귀라는 것은 익숙한 걸 좋아하고, 눈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까요. 귀가 갖고 있는 특성상 자기가 어렸을 때 같이 어렸던 그 노래를 듣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게 그냥 답보상태인 것 같아서요. ‘뜻밖의 만남’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과 소통도 되고요.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는 게 싫어서 하고 있어요. 도태되기는 싫으니까요.

 

계속해서 새 곡을 만들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에서 굉장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곡이야 그냥 일로 한 건데요. 매일 아침 라디오 생방송을 하니까요. 거기 도착하는 편지는 정말 여러 사람이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마음을 열고 가슴으로 쓴 것이거든요. 그 진솔한 내용 덕분에 사실 나는 제자리에 있어도 현재진행형이에요. 한편 나는 금지곡이 하도 많고 그래서 솔직히 라디오로 숨었어요. 노래로부터 도망을 늘 해왔으니까 그런 면으로 보자면 노래에 대한 미안함이 늘 있죠. 노래를 라디오만큼만 열심히 했더라면 어떤 가수가 되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그 생각 때문에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무언가 한 듯이 해봐야 그만둘 것 아닌가, 했어요. 뭘 했어야지 그만두죠. 뭐 발표도 안 하고 70년대, 80년대, 90년대 무렵이 끝인데 뭘 그만둬?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해서 곡 작업을 해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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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중요하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만 20년을 진행해오셨잖아요. 방금 “노래로부터 도망을 해왔다”고 하셨는데 라디오를 진행해온 20년이 어떤 회복의 시간도 됐을까요? 노래에서 도망을 치는 마음은 어떤 걸까, 조금 더 여쭙고 싶어요.


워낙 금지곡이 많이 돼서 노래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숙제 같았어요. 너무 하기 힘든, 하려면 너무나 진이 빠지는 숙제, 진도가 안 나가는 숙제 같았죠. 그런데 방송은 늘 좋았어요. 그래서 라디오에 훨씬 마음이 많이 갔어요. 근데 라디오나 방송을 하고 돌아오면 노래한테는 항상 미안해요. 이렇게 있다가는 그냥 흘러간 옛 가수처럼 되어버리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TV에 나와서 웃기는 얘기 하고 그러면 요즘 젊은이들은 코미디언인데 노래도 잘하는 아줌마, 이렇게 보기도 했거든요. 그건 좀 아니다, 내 본업은 가수다, 한 거고요. 거기에 같이 음악 하는 친구들이 생각을 보태주니까 용기를 내서 ‘뜻밖의 만남’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요즘은 그렇다면 노래에 조금 덜 미안하세요?


네, 괜찮아요. 미안함이 조금 가시고 있는 중이에요. 얼마나 해야 완전히 가실지는 몰라요. 그러니까 계속 해야죠.

 

대표적인 금지곡이 <아침이슬>이죠. 가수 양희은을 생각하면 필연적으로 함께 떠오르는 곡이에요.


시작이 너무 그랬죠? 그 다음 너무 힘들었어요. 그 산을 넘기가. <아침이슬>보다 더 나은 곡, 더 나은 곡, 그런 생각을 스스로 했죠. 그래서 만들어진 <아침이슬>은 아니지만 그 노래의 파급 효과와 영향력이 컸다면 그걸 능가하는 곡을 발표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강박이 있었는데요. 그러나 언제부턴가는 자유로워졌어요. 꼭 거대한 명제가 아니어도 된다고요. 아주 사소한 것도 노래가 될 수 있어요. 작은 게 큰 거니까요. 반드시 거대한 물결, 거대한 파도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작은 것이 중요하고 소중한 거예요. 그걸 잘 간직하고, 간수해야 해요.

 

1971년 데뷔하셨어요. 내년이 데뷔 50주년인데요. 이 시간을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시간이 잠깐 지난 것 같아요. 진짜 한 다섯 달 지난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게 빨리 지나갔을까, 해요. 그냥 하루하루 살았잖아요. 작은 게 큰 거라는 말이 그 얘기예요. 하루하루가 쌓여서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그렇게 해서 50년을 산 거죠.

 

올해 10월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어쩌면 데뷔 50년을 앞두고 받은 큰 응원이었을 것 같은데요.

아무렇지 않더라고요. 제 옆에 앉은 문화관광부 장관님이 알려주셨어요. ‘금관문화훈장’은 대부분 돌아가신 분들에게 많이 드리니까 ‘은관문화훈장’이 살아서 받을 수 있는 제일 영광스러운 상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그래요?” 했죠, 하하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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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생명력 있는 연대


노래하길 잘했다, 생각할 때가 있으세요?


방송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하죠. 특히 라디오가 그래요. 라디오를 좋아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해요.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설명하긴 힘든데요. 라디오는 소통이죠. 요즘은 반응도 금방 오잖아요. 문자, SNS 등으로 오니까 우리가 말을 하면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금방 알 수 있어요. 보이진 않지만 활자로 소통하는 거죠. 노래는 글쎄요. 현장에서 노래하지 않는 한 어떻게 알겠어요.

 

선생님께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관심이나 애정이란 말보다는 그냥 호기심인데요. 내가 부족한 게 많은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부족한 게 있는 애들을 잘 알아봐요. 힘들고, 외롭고 그런 사람들이 잘 읽혀요.

 

선생님을 생각하면 다정한 동시에 엄격한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 면이 있죠. 끊임없이 봐줄 것 같은데요. 봐주다가 딱 하나가 경우가 어긋나면 그걸로 왁 쏟아내는 것 있어요. 그래서 예전에 내 별명이 ‘화곡동 맨홀 뚜껑’이었어요.(웃음) 느닷없이 맨홀 뚜껑에 빠지는 것 같은 황당함이 있어서요. 하지만 나는 다 꼽아두고 있는 거예요. 적금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아주 사소한 일에 터지니까 당하는 사람은 너무 황당하겠죠. 어떻게 보면 무서울 수 있죠. 말도 안 하고 하염없이 봐주거든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인간됨’은 어떤 건가요?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은 아마도 그 인간됨에서 벗어났을 때일 텐데요.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뭔가요?

 

분수를 아는 것. 신의가 있을 것.

 

앞으로 직접 책을 쓰고 싶은 생각도 있으세요?


그러게요. <여성시대> 20년을 하면서 쌓인 원고가 있으니까요. 추려서 해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모르겠어요.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요.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성시대> 박금선 작가님이  『인생, 어떻게든 됩니다』  출간 당시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양희은 선생님이 버킷리스트를 물으신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거기서 힌트를 얻어 질문을 드릴까 해요. 선생님의 버킷리스트는 뭔가요?


오로라를 보고 싶어요. 추울 때 가야 하잖아요. 여행을 종종 하지만 겨울에는 안 가니까 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제가 추위에 약해서요.(웃음)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려요.


세상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연대는 엄마와 딸 사이, 그리고 딸과 딸 사이 같아요. 더 많은 소통을 하고, 후회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딸에게김창기, 양희은 저/키큰나무 그림 | 위즈덤하우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잘 하려고 애도 써 봤지만 따라가기가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엄마 하는 말에 대답하기도 귀찮고 싫다. 힘들고 답답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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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장세이, 강병인 “우리말은 ‘말맛’이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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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한 글자 의성의태어를 모아 들여다봤다. 홀로 우뚝 선 채로 삼라만상의 뜻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그것들을 한 데 모으자  『오롯 한 글』  이 이루어졌다. 오롯한 글, 오롯한 한글, 오롯한 글자, 오롯한 한 글자가 담겼다.

 

‘하’는 “입김 불 때의 의성의태어”이고, ‘붕’은 “공중에 들리는 모양을 담은 의태어”, 그리고 ‘헉’은 “몹시 놀라거나 숨차 순간 숨을 멈추거나 들이마실 때 쓰는 의성의태어”이다. 이렇듯 112자를 모아 그들이 가진 맛과 멋을 발굴해냈는데, 한 예로 ‘삭’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시옷은 두 개의 사선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열린 지퍼나 세로로 긴 종이 가운데를 찢다 그대로 뒤집으면 바로 시옷이 된다. 특히 삭의 첫소리(ㅅ)는 양쪽 사선으로 벨 때의 칼의 움직임을 옮겨 놓은 듯 보이고, 받침소리(ㄱ)는 시옷의 쇳소리를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베는 행위가 끝났음을 알리는 마침표 역할을 한다. 재빨리 삭 하든 천천히 ‘사악’하든 삭이 지나간 자리에는 가늘고 선명한 자국이 남는다. ( 『오롯 한 글』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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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이 작가는 깊이 있는 통찰과 해석에 특유의 재치까지 더하며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었다. 앞서 『후 불어 꿀떡 먹고 꺽!』  으로 800여개의 우리말 의성의태어를 소개했던 그가 다시 한 번 ‘글맛’ 나는 책을 선보이는 것. 그런가 하면  『오롯 한 글』  이 전하는 ‘글씨맛’은 글씨예술가 강병인의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하는 일”을 맡아 각각의 글자가 가지는 의미, 그것을 발음할 때 만들어지는 소리의 속도, 무게, 크기 등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

 

두 사람은 십여 년 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당시 잡지기자였던 장세이 작가가 강병인 작가를 인터뷰하며 처음 만났다. 잡지사를 떠난 후 장세이 작가는 나무 수필  『서울 사는 나무』 , 우리말 의성의태어를 담은 책  『후 불어 꿀떡 먹고 꺽!』  을 썼다. 한글 캘리그래피의 개척자로 불리는 강병인 작가는  『한글 꽃이 피었습니다』  ,  『글씨 하나 피었네』  를 통해 우리말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2012년 대한민국디자인대상 은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영화 <의형제>와 드라마 <대왕세종>, <미생>의 제목, ‘참이슬’과 ‘화요’의 상표 글씨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지난 11월 14일, 성수동에 위치한 생태책방 ‘산책아이’에서 장세이, 강병인 작가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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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가진 오묘함이 있어요


처음 공동 작업을 제안하신 건 장세이 작가님이었나요?


장세이 : 네.  『후 불어 꿀떡 먹고 꺽!』  이 나온 후에 한 글자 의성의태어에 대한 부록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것까지 하기에는 제가 너무 지쳐있는 상태여서 나중에 따로 책을 내자고 하고 시간이 흘러갔는데, 유유 출판사 대표님이 우리말 책에 대한 뜻이 계속 있어서, 고민을 하다가 한 글자 의성의태어에 대한 책을 따로 내보자고 했죠.

 

강병인 작가님의 글씨를 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장세이 : 두 글자, 네 글자 의성의태어는 워낙 양이 방대한데다가 글씨로 표현하려고 하면 되게 복잡한 작업이 되겠더라고요. 그런데 한 글자 의성의태어는 글씨로 표현했을 때 뜻의 방향성이 글씨의 방향성과 맞아떨어질 수 있고, 효과적으로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캘리그래피로 표현되면 더 재밌겠다’ 생각했고, 그걸 잘 하실 수 있는 분은 선생님일 거라고 생각한 거죠.

 

제안을 받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강병인 : 저는 무조건 O.K 이죠. 장 작가님이 원체 글과 기획력이 탁월하시니까요.

 

모두 112자의 ‘한 글자 의성의태어’가 실려 있습니다. 선정 기준이 있었나요?


장세이 :  『후 불어 꿀떡 먹고 꺽!』  는 ‘때’로 나누어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면, 한 글자 의성의태어는 그런 식으로 나누기에는 갈래 기준이 명확치 않았어요. 또 강 선생님이 글씨를 쓰셔야 된다는 걸 염두에 두다 보니까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에서 어느 정도 가늠이 되는 가늠자가 필요했는데요. 그래서 수직, 수평, 사선 등 뜻의 방향성 여섯 가지를 정하고 거기에 맞게 글자를 배분했어요. 

 

각 글자에 대한 장세이 작가님의 해석과 강병인 작가님의 글씨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요. 서로 생각을 교환하시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강병인 : 전체적으로 다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그래서 처음에 고민이 많았죠. 정말 치열하게.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조금 걸렸고요. 제일 중요한 건, 소리의 방향성에 대한 생각이 서로 통해있었어요. 공감이 돼 있었고요. 어떤 부분은 글을 다 읽지 않고도 글씨를 썼는데, 거기에 대한 믿음은 있었어요. 글을 안 보고 글씨를 써도 얼추 같은 맥락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맺음말에 쓰시길 붓, 나뭇가지, 돌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했다고 하셨어요. 질감이 다른 종이도 다양하게 쓰시고요.


강병인 : 저는 원래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게 제일 편한데, 어떻게 하면 소리를 보이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도구에 대한 고민을 한 거죠. 예를 들어서 딱 소리 나는 글자를 쓴다고 하면, 부드러운 붓보다는 나뭇가지로 쓸 때 더 딱딱한 느낌이 나거든요. 성질이 딱딱한 걸로 쓰면 글자도 딱딱하게 나와요. 그러다 보니까 돌로 쓴 글씨도 있고요.

 

책을 읽다 보니까 소리의 방향성과 뜻의 방향성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새로운 발견이었어요.

 

장세이 : 신기하게도 한글은 그게 되는 것 같아요. 알파벳으로는 표현하기 쉽지 않거든요. 낱개의 요소들이 흩어져 있잖아요. 한글은 하나의 글자가 초중종으로 합쳐져 있기 때문에, 그게 주는 오묘함이 있어요. 발음도 그렇고요. 이 책을 쓸 때 음운학 책을 많이 봤어요. 뜻의 방향성과 소리의 방향성이 거의 같다고 했을 때, 저도 그걸 이론적으로 공부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다들 너무 어렵게 쓰셨더라고요. 일단 용어 자체가 어려워서 사전을 찾아 해석하면서 봤어요. 그걸 다 인용해서 쓰는 건 별 의미는 없는 것 같았고, 독자들이 조금 더 쉽고 편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풀어 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혹시 제가 잘못 전하는 건 없을지, 저만의 해석에 오류는 없을지, 고민을 많이 했죠.

 

우리말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실려 있잖아요. ‘평소에 어떻게 공부하시는 걸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장세이 : 저는 학창시절에 이과였는데 수학 공부를 안 했거든요. 국어 만점 이과생이었지만 수학 빵점 이과생이기도 했어요(웃음). 그 시간에 저는 단어 찾기를 했어요. 영어사전 국어사전이 항상 책상에 있었고, 사전의 종이와 문장을 좋아했어요. 사전만의 어투가 있는데, 뜻풀이를 해놓은 걸 보면 정말 흠잡을 데가 없거든요. 더도 안 가고 덜도 안 가고 중간치의 해석이 달려있는데 그런 식의 문장력이 참 좋았어요. 그리고 제가 모르는 말이 너무 많은 거예요. 안다고 생각했던 말도 그 뜻이 아니고. 그래서 ‘가’부터 ‘하’까지, ‘ㄱ’부터 ‘ㅎ’까지 찾는 이상한 짓을 많이 했어요.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단어를 단어장에 옮겨 적고요. 그렇게 만든 단어장이 되게 많았어요.

 

강병인 작가님은 초등학생 때 서예를 시작하셨죠. 한글 글씨를 분석, 해석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오셨는데요. 한글에 대한 이런 관심은 어떻게 생겨난 건가요?


강병인 : 추사 김정희 선생 있잖아요. 특히 예서에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죠. 추사 선생의 예서를 보면,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글씨로 옮긴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사는 공간과 그 사람의 삶과 철학을 다 분석해서 글씨로 옮기거든요. 추사께서 글씨를 쓰셨던 그 방식들을 배우려고 애를 썼어요. 다만 표현 방식은 한글로 하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렇게 시작이 된 거죠. 한글도 한자 못지않다는 생각이 출발이었어요. 특히 한글은 그 제자 원리가 ‘훈민정은 해례본’에 담겨 있으니까, 그 책을 제대로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을 글씨로 쓰면서 이해하고 공부하게 됐죠. 그때 영향을 준 분이 정병규 북 디자이너예요. 그 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타이포그라피적인 관점에서 수업을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제가 쓰고 있는 글씨를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 원리에 대입시켜 보니까,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정형화된 활자 또는 우리의 한글 교육에서 표현할 수 없는 한글의 제자 원리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거죠. 그게 고맙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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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지다’, ‘사라지다’


각각의 글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발음하는지, 그 모습도 많이 관찰하신 것 같아요.


강병인 : 저 같은 경우는 ‘소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가 관건이었잖아요. 소리 안에는 사실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거든요. 한글에 표의성만 있는 게 아니고 상형성도 있어요. 한글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는 형태로 상형화했다고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요. 그리고 ‘이기불이(理旣不二)’라는 말을 써요. 이치가 둘이 아니라는 거거든요. 다시 말하면 소리와 문자가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한글 제자 원리의 핵심이죠. 사실 우리의 감정이 다 소리로 드러나잖아요. 화가 나면 악센트가 올라가고, 급하면 빨라지고, 슬프면 울고, 이게 자연과 인간의 삶의 형상이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 시각화하느냐를 생각해 볼 때 한글은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큰 문자인 거죠. 그 안에 철학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번 책을 만드는 작업은 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재밌었어요. 더 중요했던 건 소리의 방향성이었고요. 한글의 제자 원리를 보면 소리의 방향성이 아주 명확하거든요.


장세이 : 선생님이 책   『글씨 하나 피었네』 에서 일반 명사나 추상 명사 위주로 쓰셨는데, 어떻게 보면 뜻이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확 열려 있는 것도 있어서, 표현에 자유로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책에서 다룬 의성의태어는 현재성이 있는 말이고 역동성이 있는 말이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운동성이 있는 말을 하나의 글자 안에 다 표현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모필의 굵기, 농담 같은 것들로 자유자재로 잘 표현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이 쓰신 글씨를 보면 글자마다 이응의 형태도 다 달라요. 힘의 강약과 현재성을 많이 살리려고 애쓰신 것 같아요. 뱃고동 소리 ‘뚜’, ‘부’를 봐도 자음이 여러 개 나오는데, 되게 재미난 시도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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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이 작가님의 글에는 특유의 유머가 있어요. 평소에도 말씀을 재밌게 하실 것 같아요.


장세이 : 약간 강박이 있어요. 제 꿈이 개그맨이었거든요. 다른 사람을 웃기는 사람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기자 생활을 할 때도 개그맨 인터뷰는 다 제가 했어요. 너무 좋아해서.

 

이번 책에서도 많은 언어유희를 볼 수 있었어요.


장세이 : 근대소설을 좋아하는데, 박태원 같은 작가를 좋아해요. 그 분들의 글을 보면 멋도 있는데 항상 유머가 있어요. 정말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때 낭만이라는 게 있었잖아요. 강퍅한 게 다 드러나지 않고 그걸 해학적으로 그렸어요. 판소리도 되게 좋아하는데, 알고 보면 되게 처절한 상황도 웃음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거든요. 요새 글을 보면 그게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자조에서 끝나는 경우들이 많죠?


장세이 : 제가 늘 경계하는 부분이 자조나 비아냥은 아니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책을 읽는 것도 다 즐겁고 행복하기 위한 거잖아요. 뭔가를 깨달아서 얻는 행복도 있고요. 그러려면 가는 길이 너무 고되고 힘들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이 책에 실린 말들도 평소에 쉽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글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평소에도 여러 분야에서 한글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들을 했으면 좋겠고요. 알면 알수록 과학적이고 아름답잖아요. 뻔한 표현이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참 많이 쓰는데 참 모르고 쓰고 잘못 쓰는 게 우리말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말 책이 더 나왔으면 좋겠는데, 안타깝죠.

 

일반 성인 독자가 재밌게 볼 수 있는 우리말 책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장세이 : 잘 없어요. 주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책,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책이에요. 품사 관련된 책은 그렇더라고요. 그리고 교양서는 없고 학술 서적, 전공 서적은 많이 있어요.

 

이번 책을 쓰시면서 특히 즐거웠던 부분이 있었다면요?


장세이 : 제가 제일 좋아했던 표현은 ‘사라지다’였어요. ‘뿅’에 대해 설명할 때 나오는데 “‘사라지다’는 ‘죽다’의 대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곧 죽음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살아지다’를 발음나는 대로 쓰면 ‘사라지다’인데 둘의 뜻은 이승과 저승만큼 다르다“고 썼어요. ‘사라지다’의 원 뜻을 계속 찾아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네 글자가 다 예쁜 거예요. 그리고 ‘사라지다’와 ‘살아진다’의 발음이 똑같은 게 되게 신기했어요. ‘사라지다’와 ‘살아지다’는 사실 반대의 뜻이지만 어떻게 보면 같은 걸 품고 있는 거죠. 이게 우리말의 오묘한 지점인 것 같아요.

 

강병인 작가님도 그런 순간이 있으셨나요?


강병인 : 이번에 ‘흥’을 쓰면서 깜짝 놀랐어요. 한자의 ‘흥’도 굉장히 조형적으로 재밌는 글자인데 되게 복잡하잖아요. 한글 ‘흥’은 단순하면서, 소리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실제로 우리 삶에서 나오는 흥겨움을 표현하는 게 가능해요. 또 쓰면서 재밌게 느낀 건 ‘끅’이었어요. 쌍기역이 주는 느낌이 있어요. ‘꺽’은 쌍기역과 모음의 가로획이 절묘하죠.


장세이 : ‘꺽’은 트림하는 소리인데, 꼴 자체가 행로하고 똑같은 거예요.


강병인 : 뭔가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이.


: ‘꺽’ 자체에 기역이 세 개 들어가는데, 그러면서 꼴 자체가 큰 기역자 형태예요. 이런 게 참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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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장세이 : 우리말은 정말 ‘말맛’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말맛’이 많이 파괴된다는 느낌을 받아요. 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건 좋은데, 원 뜻을 먼저 알고 그 다음에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대로 알려는 노력을 한 번쯤 기울이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강병인 : 말이 있어야 꼴이 살거든요. 말이 사라지면 꼴도 사라지고, 궁극적으로 문자도 사라져요. 일단 우리말을 지켜야 되고, 말을 지킴으로 해서 꼴도 살게 할 수 있는 거죠.  『오롯 한 글』  은 말과 꼴을 드러내는 책이거든요. 말의 가치와 힘, 글씨가 가지는 힘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과 문자가 인간과 자연을 드러내기에 하나도 모자람이 없다는 걸 조금 느껴보는 책이었으면 좋겠고요.


 

 

오롯한글장세이, 강병인 저 | 유유
한글을 더 깊이 알고 글과 제대로 놀고 싶어 하는 이들, 귀에 쏙 박히는 말, 감칠맛 나는 문장을 구사하고 싶어 하는 이들, 고유한 한글의 멋을 품은 글씨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써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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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리키친 “유튜브에서 사랑받는 비결? 화려한 색감과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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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129만 명, 누적 조회 수 2억 5천만 뷰.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아리키친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고 5년여 만에 얻은 성과다. 매주 토요일 올라오는 아리키친의 베이킹 방송은 화려한 비주얼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오븐 없이 할 수 있는 레시피부터 아이돌 그룹 베이킹, 캐릭터 케이크 만들기, 아리키친의 일상을 담은 영상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손만 나오는 다른 베이킹 방송과 달리 얼굴을 보이며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뒀다”는 아리키친. 미공개 레시피와 방송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아리키친의 아이디어 통통 쿠킹』  를 출간하고 책의 세계로 첫발을 뗀 그를 수원 광교에 있는 아리키친 디저트 매장에서 만났다.

 

“초보가 하기엔 어려운 머랭 쿠키부터 만들고 ‘베이킹 너무 어려워’, ‘나랑 안 맞나봐’하면서 포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쉬운 것부터 해야 해요. 식빵, 마들렌부터 만들어 보세요. 작은 성공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어야 베이킹과 친해지고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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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하나의 방송이 만들어지기까지
 
매주 수요일이 촬영일이라고 들었어요. 하루 전인데 준비는 끝나셨나요?


준비는 끝났고 오늘 저녁부터 촬영을 시작해요. 짧으면 5시간, 길게는 8~10시간 정도 걸리는데 일찍 시작할 때는 화요일 저녁부터 해요.

 

10분짜리 방송을 만들기 위해 최소 10시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어떻게 진행되나요?


아이디어를 내고 내용을 기획하는 일은 거의 매일 이뤄진다고 보시면 되고요. 주제가 정해지면 의상, 소품, 레시피, 영상 내용, 준비물을 파악해요. 이 과정을 2~3일 안에 끝내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요.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가능한 미리 준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의상도 매회 다르게 준비하시나요?


방송 초창기에는 의상의 중요성을 몰랐어요. 미니언즈 마카롱을 만들면서 미니언즈랑 옷을 맞춰 입으면 재밌겠다 싶어서 노란색 티셔츠에 멜빵바지를 입은 적 있었는데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의상도 신경 썼어요. 정말 재미있는 게 최근에는 의상에 신경을 못 썼는데 시청자분들이 유심히 보시고 “오늘은 하트 디저트를 만들서 하트 귀걸이를 하셨나요? 라고 의미를 찾아내시더라고요.

 

매번 레시피를 만들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레시피 만들 때 반드시 지키는 게 있다면요?


이전 레시피에 내용을 더하고 응용하는 방식으로 구성하려고 노력해요. 고급 기술이 들어가면 시청자분들이 어려워하거든요. 디저트 비주얼보다 맛에 더 신경 쓰는 편이고요.

 

사용하기 어렵거나 비싼 도구는 없는 것 같았어요.


생소한 도구를 사용하면 시청자들이 낯설게 느낄 수 있으니까 최대한 익숙하고 어렵지 않은 도구를 쓰는 편이에요. 만약 새로운 도구를 써야 한다면 사용하기 전에 이 도구가 어떤 건지 충분히 설명하고요. 특정 도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 일상에서 쓰는 도구를 변형해 사용하는 방법도 알려드리려고 해요.

 

대사를 직접 쓰시나요?


직접 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요. 협찬 촬영을 할 때는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이 있어서 의논해서 쓰거나 더 신경 쓰는 편이고요. 평소에는 전반적인 흐름만 구성하고 자유롭게 하는 편이에요. 대사를 쓰고 그대로 읽지는 않는데 촬영 전에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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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이유

 

도구를 떨어트리는 모습처럼 가벼운 NG는 편집하지 않고 넣으시더라고요. 친근함이 느껴졌어요.


실수를 정말 많이 하는데요. (웃음) 실수를 하고 난 뒤에 반응이 재미있으면 NG를 넣고, 재미없으면 편집해요. 경험이 쌓여서 이제는 실수해도 당황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어? NG 났어요”라고 하는 느낌의 표정을 짓게 되더라고요. 너무 현실적인 반응보다는 이런 반응을 시청자분들이 더 재미있게 느끼는 것 같아요.

 

푸드 방송 특성상 손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비교적 얼굴을 자주 보여주는 편이시잖아요. 이유가 있나요?


처음부터 전략을 짰어요.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푸드 방송을 많이 봤는데 얼굴을 보여 주면서 진행하는 채널이 별로 없었어요. 그때 ‘나는 얼굴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차별화를 하자’ 싶었죠. 얼굴을 직접 보여주면서 알려주면 시청자분들이 더 친근감을 느낄 거로 생각했고요.

 

시청자의 피드백을 받고 바꾸신 것도 있나요?


바로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요.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 발음이 좋지 않았는데 저한테 발음을 지적하신 시청자가 있었어요. 아직도 그분의 닉네임이 정확히 기억나요. ‘마가린’이라는 분이었는데 프로필 사진도 마가린 사진이었어요. (웃음) 그냥 ‘발음이 안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약간 놀리듯이 “왜 믹싱 볼을 미씽볼이라고 하지?”라는 식으로 지적하셨는데 처음에는 악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의 지적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 발음에 정말 문제가 있나?” 싶었고 그때부터 또박또박 말하는 연습을 했어요.

 

아리키친을 생각하면 정확한 발음과 상냥한 말투가 떠올라요. 스피치 학원에 다니셨나 싶었는데 한 시청자의 역할이 컸군요. (웃음)


요즘에는 발음이 좋다고 하는 시청자분들이 많아요. 심지어 외국인 시청자들이 한글을 배우려고 제 방송을 본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고, 마가린 님께 정말 감사해요.

 

10대 팬이 많으시잖아요. 상냥한 말투도 인기 요인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발음을 정확히 하고 싶어서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게 됐는데 유치원 교사 같은 느낌이 됐어요. 의도한 건 아닌데 어린이, 외국인 시청자들이 좋아해 주시니 다행이고 감사하죠. 마가린 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웃음)

 

10대 팬이 많을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2~3년 전에 유튜브 앰배서더로 활동한 적이 있어요. 그때 유튜브에서 패널 분석표를 보여주셨는데 어린이 시청자분들이 많은 걸 보고 정말 놀랐어요. 전혀 예상 못 했거든요. 10대 시청자들이 많으니까 이분들에게 맞는 콘텐츠를 더 많이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죠.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셨어요?


일단 알록달록한 색을 쓰고, 캐릭터를 많이 활용했어요. 캐릭터 팬이 아주 많거든요. 캐릭터를 활용한 방송을 한 뒤로 캐릭터 팬들이 정말 많이 유입됐어요. 예측했던 건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구독자 수를 빠르게 올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커스텀 쿠키’라고 그냥 제가 좋아서 시작한 방송이 있어요. 방탄소년단 캐릭터를 좋아해서 이걸로 커스텀 쿠키를 만들었는데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해외 시청자분들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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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 마들렌부터 만드세요

 

구독자 반응은 어떻게 체크하나요?


영상을 올린 날에 댓글을 다 읽어봐요. 인스타그램에 달리는 댓글도 게시물을 올린 날에 다 확인하고요. 답글도 달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서 여유 있을 때마다 달려고 해요.

 

구독자가 50만 즈음일 때는 영상을 일주일에 두 개씩 올리셨잖아요. 업로드 수에 따라 확실히 반응이 다른가요?


다르죠. 두 번 올리면 너무 좋아하세요. 그래서 다시 영상을 일주일에 두 편 올릴까 생각하는데 아직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아요.

 

영상을 두 개 올리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콘텐츠의 품질이 떨어질 것 같기도 한데요.


조율이 중요해요. 예를 들어 토요일에는 10~12분짜리 ‘아이디어 통통 쿠킹’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는 손만 나오는 ‘베이직 영상’을 올리는 거죠. 베이직 영상 제작 기간이 비교적 짧거든요. 왜 오래 걸리냐고 많이 물어보시는데 촬영할 때 장비 세팅 등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아요. 특히 저는 방송에 얼굴을 비추다 보니 주변이 항상 깨끗해야 해요. 머리도 정돈해야 하고 재료도 세팅하고 설거지도 바로 해야 하고요.

 

편집 과정이 궁금해요. 세 분이 단계별로 편집하신다고 들었어요.


컷 편집은 제가 하고요. 곰 피디님이 제가 컷 편집한 영상에 음향이나 화면 조정 등의 작업을 해서 고화질 영상을 뽑아요. 마지막으로 고화질로 뽑은 영상을 다시 편집하고요.

 

컷 편집하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일단 제일 중요한 건 시나리오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거예요. 컷 편집에서 영상의 흐름이 결정되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모르면 할 수 없어요. 느낌을 알아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 아리입니다”라는 문장과 다음 문장을 자연스럽게 이으려면 중간에 잘리는 부분이 정확해야 해요. 약간의 잡음도 들어가면 안 돼요.

 

시간은 얼마나 드나요?


엄격하게 하는 편이어서 6시간 정도 걸려요. 실패하면서 얻는 팁이 많은데 시청자분들께 팁을 많이 알려드리고 싶어서 과정을 최대한 자세하게 넣으려고 노력해요. 그만큼 분량도 늘어나고 편집 시간도 길어지니까 주변에서는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할 필요 없다’고 하는데 새로 유입된 시청자들을 위해서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방송을 시작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요?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었기 때문에 다 어렵고 조심스러웠어요.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시청자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알 수 없으니까요. ‘혹시라도 안 좋게 보이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이 커서 긴장했던 것 같아요. 지금 초장기에 촬영한 영상을 보면 말도 딱딱하게 하고 표정도 굳어 있어요. 정말 많이 달라졌죠. (웃음) 경험이 쌓이고 시청자분들이 재미있다고 칭찬하고 응원해 주시니까 자연스럽게 제 모습을 찾아간 것 같아요.

 

스튜디오를 직접 꾸미셨다고요. 팁을 준다면요?


디저트와 어울리는 하늘색, 분홍색, 파스텔 계열의 색을 많이 사용했어요. 가지고 있던 인형을 소품으로 썼고요. 나중에는 팬분들이 인형을 정말 많이 보내주셔서 선물 받은 인형도 갖다 놨고요. 스튜디오를 꾸밀 때는 주제를 잘 표현하는 색, 소품을 활용하면 좋아요. 예를 들어 헬로키티 빵을 만든다면 주변에 헬로키티 인형을 하나 둔다든지, 헬로키티를 연상시키는 분홍색 소품을 쓰는 식으로요. 어떤 방송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시각적인 효과를 주는 거죠. 이렇게 하면 보는 사람이 더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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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편집된 꿀팁, 책에 다 넣었어요

 

방송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게 있을까요?


충분히 연습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처음에는 ‘아,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거니까’라고 쉽게 생각하고 바로 촬영을 했는데 실수를 너무 많이 하는 거예요. NG가 정말 많이 났어요. 베이킹은 정확함이 생명이에요. 시간과 온도를 정확히 지켜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죠. 안 보고도 할 수 있게 완벽히 숙지한 다음 촬영에 들어가는 게 좋아요. 완벽하다고 생각해도 실패하는 게 베이킹이에요. (웃음)

 

유튜브의 세계에 있다가 책이라는 또 다른 매체로 발을 떼셨어요. 책 만들면서 가장 신경 쓴 게 있다면요?


방송에서 미처 알려드리지 못한 꿀팁을 다 넣었어요. 예를 들어 방송에는 10초로 나가지만 충분히 설명하려면 30초는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계속 줄일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생략되는 내용이 정말 많아요. 방송하면서 더 많이,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책에 그걸 다 담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최근에 매장을 오픈하셔서 더 바쁘시겠어요.


바쁘죠. 그런데 팬분들이 많이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좋아요. 외국에서도 많이 오세요.

 

TV 방송으로 역진출하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많잖아요. 출연 제의 많이 받으시죠?


제의는 많이 받았는데 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베이킹하는 사람이니까 방송에서도 베이킹해야 하는데 베이킹은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없잖아요. 반죽하고, 굽고… 시간이 오래 걸려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 환경하고 안 맞을 때가 많더라고요. 가령 어떤 방송에서 대왕 마카롱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대왕 마카롱을 만들려면 그만한 사이즈의 오븐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30분 이내에 만들어야 한다’고 하니까 못 할 때가 많았죠. 방송 출연을 일부러 피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방송이 있나요?


여행하면서 세계의 디저트를 소개하는 방송을 해보고 싶어요. 지난번에 프랑스 다녀오면서 몇 개 영상을 만들었는데 새로운 디저트를 알려 드릴 수 있어서 정말 좋았거든요.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유튜버 크리에이터로 활동한 지 5년 정도 되셨어요. 5년 후 아리키친의 모습은 어떨까요?


오프라인 클래스를 많이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지금도 클래스를 요청하는 팬들이 많거든요. 저도 정말 하고 싶고요. 
 


 

 

아리키친의 아이디어 통통 쿠킹아리키친 저 | 베가북스
아리키친이 유튜브 채널에 올린 수많은 디저트 레시피 중 알짜배기만 쏙, 쏙 골라 책 한 권에 모두 담았다. 디저트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쿠키부터 마카롱, 마들렌, 스콘, 머랭쿠키 그리고 케이크까지 디저트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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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배우 정혜영 “요리는 내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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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혜영이 요리책을 출간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본 그의 요리 사진을 떠올리다 ‘왜 이제야 책이 나왔을까’ 생각했다. 눈길을 끄는 정혜영의 요리를 보고 출판사 관계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 그 이유를 가장 먼저 묻고 싶었다. “요리사도 아닌데 무슨 책을 내나” 싶었다는 정혜영을 요리책 저자로 만들어 준 건 다름 아닌 셰프 샘킴의 책. “평범한 주부처럼 가족과 함께 먹기 위해 요리했고,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마음껏 요리를 배우고 할 수 있었다”는 정혜영에게 『정혜영의 식탁』 은 요리책이기 전에 일상의 기록이다.

 

결혼한 뒤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요리를 만들고, 예쁘게 담았던 수많은 날이 모여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우리집 요리사’로 열심히 살아온 제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는 것 같습니다._ 『정혜영의 식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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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자주 하는 요리만 골랐어요

 

SNS로 요리 실력이 알려졌어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원래 SNS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의 생활을 보거나 내 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데 취미가 없는 편인데 제가 워낙 예쁜 걸 좋아하니까 남편이 인스타그램이라는 게 있는데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말도 못 꺼내게 했어요. 안 한다고 했죠.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자기 SNS를 보여줘서 들여다보니까 사람들이 사진 찍어서 올리는데 ‘별거 아닌데?’ 싶더라고요. 그때 남편이 운동을 열심히 할 때라 샐러드를 자주 만들어 줬거든요. 아침마다 맨날 하는 일이 샐러드 만드는 거니까 그럼 이걸 한 번 올려보자 하고 시작했어요.

 

출간 제의 많이 받지 않았나요?


많이 받았는데 요리책을 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가족들을 위해 요리했을 뿐이고, 전문가도 아닌데 무슨 요리책을 내나 싶어서 아예 답장도 안 드렸어요.

 

마음이 바뀐 이유는요?


예전에 같이 작업했던 기자님이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어요. 같이 책을 내고 싶다고요. 그러면서 출판사를 소개하셨는데 샘킴 셰프의 책을 출간한 곳이더라고요. 정말 신기했던 게 그 메시지를 받기 일주일 전 즈음에 서점에서 샘킴 세프의 책을 보면서 ‘지금까지 본 책 중에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책을 만든 출판사에서 연락을 주신 거예요. 신기하기도 하고 들뜨고 재미있어서 덜컥 계약해버렸어요.

 

샘킴 셰프의 책이 다리가 되었네요. 계약하고 바로 출간 준비하셨나요?


레시피는 아주 오래전에 출판사에 넘겼어요. 레시피 넘기고 자료 조사하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동영상을 만든 분들도 많고, 비전문가인데도 잘하는 분들이 정말 많은 거예요. 내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 책을 내는 목적과 이유가 없으면 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미루고 미뤘는데, 중간에 편집자가 바뀌었어요. 이전에 계시던 편집자는 설득하고 기다려주는 스타일이었다면 새로 오신 분은 추진력이 있어서 바로 진행하자고 하시더라고요. 덕분에 책이 나올 수 있었죠.

 

우려했던 것과 달리 반응이 좋아요. 지금은 어떠세요?


‘아, 낸 이유가 있었구나’….(웃음).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니까 감사했죠. 아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충실했을 뿐이거든요. 맛있는 음식 만들어서 가족들하고 같이 먹고 싶은 단순한 마음이요. 그게 쌓여서 지금의 실력을 갖추게 됐고, 출판사에서 그걸 기록할 수 있게 도와줘서 책이 나왔죠.

 

책에 들어갈 요리를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 궁금해요.


쉽게 만들 수 있고, 집에서 자주 하는 요리들을 골랐어요. 어려운 요리보다는 쉬우면서 색다르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려고 했죠. 예를 들어 평소에 쉽게 할 수 있는 유부초밥을 조금 다르게 만들어서 손님상에 올릴 수 있게요. 

 

레시피가 최대 다섯 줄을 넘지 않는 게 특징이에요. 이것도 쉽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인가요?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정리했어요. 요리하다 보면 많은 내용을 읽을 시간이 없거든요. 가령 ‘어슷썰기를 하세요”라는 식의 내용은 과감히 정리했어요. 책을 한 번 펼쳐 보고 ‘이 정도는 따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은 어떻게 촬영하셨나요?


처음에 출판사에서 스튜디오를 빌려서 하루 만에 사진을 다 찍는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준비할 것도 많고 아이들 오기 전까지 찍어야 하니까요. 편집자하고 상의해서 스튜디오 대신 집에서 촬영했어요. 약속한 시간 내에 끝내려면 미리 준비해야 해서 촬영 전날 장보고 새벽 두 시까지 손질하고, 분류해놓고 잤어요. 촬영 당일에는 요리하고 하나 완성하면 사진 찍고, 끝나면 설거지하고 또 다음 요리 만들고 이렇게 5일 찍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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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좋아하는 이유

 

‘OO 먹이기 위한 방법’처럼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많이 소개하시더라고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강조했던 게 ‘편식은 안 된다’라는 거였어요. 싫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이걸 먹으면 왜 좋은지 설명해줘요. 만약 김치를 줬는데 먹기 싫어하면 반만 먹어 보라고 할 때도 있고요.

 

잘 먹이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재료를 안 보이게 해서 먹였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같이 먹거나 다른 방법으로 요리해 줘요. 예를 들면 아이들이 고기 먹을 때 상추에만 싸 먹으려고 하거든요. ‘깻잎에 싸 먹어도 맛있어’라고 해도 안 먹어요. 깻잎 향이 싫은 거죠. 그런데 신기한 게 ‘스팸 무스비’에 깻잎이 안 들어가면 또 안 좋아해요. 이런 식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랑 섞어서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물론 아이가 너무 싫어하면 억지로 먹이면 안 되고요.

 

아이들하고 요리 자주 하시나요?


어릴 때부터 자주 했어요. 아이가 네 명이잖아요. 아이들한테 “오늘은 셔벗 만들어 볼래?”하고 역할을 나눠 주죠. “엄마는 총괄 셰프야, 너는 냉동실에서 딸기 꺼내와”, “너는 계량컵에 물을 담아”,  “너는 저울을 두고 설탕 몇 그램을 채워” 이런 식으로요. 아이들이 이 과정을 놀이처럼 재미있게 느끼고, 계량컵 사용하고 무게를 재면서 수 개념을 익히기도 해요. 

 

요리가 왜 좋은가요?


요리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잖아요. 재료 준비부터 마지막 설거지까지 하다 보면 가끔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도 내가 준비한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친구를 만나거나 손님을 초대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잖아요. 흔히 하는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의 속뜻도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는 거고요. 이런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게 좋아서 요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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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주변을 눈여겨 봐요

 

요리를 따로 배웠다고 들었어요.


첫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셋째 아이 낳기 일주일 전까지 요리 클래스를 들었어요. 원래 배우는 걸 좋아하는데 특히 요리가 잘 맞았어요. 클래스에 가면 에피타이저부터 후식까지 하루에 총 일곱 개 정도 배웠는데요. 배우고 나면 그날 바로 해보고 싶어서 집에 들어가면서 재료를 사 갔어요. 특히 초반에는 남편밖에 먹을 사람이 없는데도 꼭 만들어 주고 어떠냐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주로 어떤 요리책을 보나요?


다양하게 봐요. 중식만 빼고요. 중식도 배우긴 했는데 집에서 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일단 화력이 안 따라주고 재료도 구하기 쉽지 않고요. 중국 요리는 사 먹는 게 제일 맛있어요. (웃음) 특히 튀김, 볶음 요리는 집에서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어요.

 

테이블 세팅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따로 공부하셨나요?


처음에 요리 배울 때 테이블 세팅하는 법까지 배웠어요. 선생님이 만든 요리를 내 접시에 담았더니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같은 요리도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걸 알았죠.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면 음식 외에 다른 것들을 눈여겨봤어요. “저건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걸까?’ 생각하면서 어떤 그릇에 담겨 있는지, 그릇의 여백은 어느 정도인지를 봤어요.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프렌치토스트를 어떻게 하면 더 맛있고 예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잘하는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자세히 보는 거죠. ‘아, 이렇게 바나나를 올리니까 훨씬 예쁘네?’, ‘소스를 이렇게 종지에 담아서 주는구나’하고 기억했다가 아이들한테 똑같이 해줘요.

 

그릇 관련 질문 많이 받으시죠?


어디서 샀냐고 많이 물어보시는데 지금은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13년 전에 여행 가서 사거나 10년 전에 선물 받거나…. 대부분 아주 오래전부터 모아 온 것들이에요. 그래서 답하기 민망하더라고요. 결국엔 못 구하는 것들이니까요. 원래 그릇 살 때도 세트로 사지 않고, 시간을 가지고 마음에 꼭 드는 게 있을 때 사는 편이에요. 결혼할 때도 한 번에 안 샀어요. 만약 정말 예쁜 찻잔을 보면 이게 다시 내 눈에 보일 때까지 기다려요. 하다못해 쓰레기통을 하나 사더라도 꼭 맘에 드는 게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사요. 

 

고르는 기준은요?


현란한 무늬가 있는 식기는 잘 안 사요. 하얀 그릇에 담을 때 제일 예쁘더라고요. 한식은 흙으로 만든, 투박한 모양의 도자기 그릇에 담는 게 예쁘고요.

 

셰프마다 시그니쳐 메뉴가 있잖아요. 정혜영의 시그니처 메뉴를 꼽는다면?


시그니처 메뉴라기보다… 아이들이 엄마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메뉴는 있어요. 아이마다 다른데요. 첫째는 볼로네제 파스타, 셋째는 스팸 무스비를 제일 좋아해요. 남편을 위해 만든 샐러드가 많으니 샐러드를 꼽을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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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심사는 ‘건강한 밥상’

 

유튜브나 요리 방송을 생각해 봤거나 제안받은 적 없으신가요?


책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방송은 더 그렇죠. (웃음) 제안은 많이 받았는데…. 저는 아주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에요. 이번에 책 낼 때도 주변에서 “왜 동영상은 안 찍었냐”고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일단 제가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은 아이들 키우기도 바쁘고요.

 

정리해 놓은 레시피가 많을 것 같은데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A4 용지에 정리해 놓은 레시피를 서양요리, 면 요리, 한식 요리. 밥 요리 등 나름의 방법으로 분류해 놨어요. 빨리 찾을 수 있게요. 

 

레시피 궁금해하는 지인들이 많을 것 같아요.


먹어 보고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많이 물어봐요. 그럼 “간단해! 지금 받아 적어”라고 쉽게 알려줘요. “이 재료 없으면 안 넣어도 돼”라고 하기도 하고요. 무조건 쉽게 가르쳐 주려고 해요. 그래야 할 마음이 생기거든요. 복잡하면 하기 싫어져요.

 

‘배달 음식 안 먹을 것 같다’는 반응도 있더라고요.


당연히 먹죠. 핸드폰에 배달 앱도 있고요. 어떤 음식이든 해서 바로 먹는 게 가장 맛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시켜 먹는 음식은 주로 치킨 아니면 분식이에요. 다른 건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맛과 아주 다르더라고요. 플라스틱 용기에 다 식어서 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플라스틱 그릇이 싫어서 분식을 시켜도 꼭 그릇에 옮겨서 먹어요. 일회용 식기 분류하는 것도 번거롭더라고요. 남은 음식 다 씻어내고 분류하느니 설거지를 하더라도 집에서 쓰는 그릇에 담아 먹는 게 좋아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요리가 있나요?


건강한 밥상에 관심이 많아요.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이라는 책을 보고 관심이 생겼어요. 이 책에서 저자가 “여자들이 부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라면서 조리 과정을 최소화해도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튀기거나 볶지 않아도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요리법을 배워 보고 싶어요. 친구가 지금 그런 음식을 배우고 있는데 맛있냐고 물었더니 맛있대요. 예전에는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했는데 점점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크니까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어져요. 아마 곧 배우러 갈 것 같아요. (웃음)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궁금해졌어요.


어제 친구가 살아 있는 전복을 말없이 택배로 보냈더라고요. 전복솥밥 자주 먹는 것 같으니 해 먹으라고요. 다 씻어서 분류하고 진공포장 해서 냉장고에 넣어놨어요. 오늘 먹을 만큼 꺼내서 전복 밥이나 전복죽 만들어 먹어야죠. 

 

 

 

 

 

 

 


 


 

 

정혜영의 식탁정혜영 저 | 이덴슬리벨(EAT&SLEEPWELL)
과연 어떤 요리를 가족에게 해줄까? 그녀가 자주 하는 밑반찬, 샐러드, 서양 일품요리, 전통 한식 요리, 베이킹과 제철 과일 음료 중 다양한 요리 중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데 맛도 좋은 73가지 요리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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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장류진, 계속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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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1986년생 소설가 장류진이 자신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에 사인을 부탁하는 독자들에게 적어주는 문구다. 20,30대 독자들은 이 문장을 마치 부적처럼 품고 자신의 SNS에 인증샷을 올린다. 마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주인공 ‘안나’처럼. 장류진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판교의 IT회사에서 7년간 일했다. 1년간 쉬면서 대학원에서 소설을 공부했고 다시 들어간 두 번째 직장에서 등단 소식을 접했다. ‘내가 쓴 소설 한 편을 갖고 싶어서’ 시작한 소설 공부가 직업을 바꿨다. 판교를 배경으로 쓴 단편은 젊은 독자들에게 이례적인 관심을 받았고 “센스의 혁명”이라는 평론을 받았다. 출판사에서 제작한 장류진의 유튜브 영상 제목은 “퇴사하고 쓴 소설이 40만 조회수 기록”. 웹 소설을 홍보하는 문구 같지만 ‘2018년 제21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자의 이야기다. 장류진은 인터뷰에 앞선 사진 촬영에서 “시키는 대로 다해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웨딩 촬영을 4시간만에 찍었던 경험이 있다며, 과연 ‘센스의 혁명’을 눈으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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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렇게 쓰지 않나?

 

얼마 전 두 번째 퇴사를 했다고. 그럼 전업작가인가?


현재로서는 그렇다. (웃음) 다행히 책과 관련한 일들이 계속 생겨서 심심할 여력이 없다. 직장인으로 9년 정도를 살았는데 이렇게 불규칙하게 지내는 건 처음이다. 내년엔 루틴을 만드는 게 목표다.

 

2018년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창비신인소설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년 가을, 창비 홈페이지의 서버를 마비시킨 문제의 화제작이다. 무료 공개 2주 만에 15만 명, 총 40만여 명이 이 소설을 웹으로 읽었다.


그날이 10월 3일 개천절이어서 날짜까지 기억한다.(웃음) 트위터에 링크가 많이 공유됐는데, 페이
스북에도 올라왔고, 지라시처럼 카카오톡 메시지로 소설 전문을 받은 지인도 있었다. 굉장히 신기
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출판 역사 상 전무후무할 사건 아닐까? 젊은 직장인, 특히 IT 업종 종사자들에게 이렇게화제가 된 작품은 없었으니까. 당시에는 작가도 판교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지 않았나?


두 번째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사실 소설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회사에서 한번도 말한 한 적이 없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화제가 됐을 때도 초반에는 몰랐다. 다들 트위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 기사가 나오면서 결국 모두들 알게 됐는데, 몇 개월 지나 퇴사하겠다고 하니 놀라더라. 이직이 아니라 소설을 쓸 거라고 말했더니 축하해줬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부터 글을 썼나?


전혀. 소설을 써본 적도 없고 소설을 많이 읽은 편도 아니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직장인이 되면서부터다. 회사 1년차 때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소설 쓰기 강좌를 들었는데 계속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쓴 소설을 한편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일이었는데 2016년에 소설을 다시 써볼 결심을 하고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그러다 2017년에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동국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으로 편입했다. 이후 다시 회사에 들어갔는데 출근한 지 3일째 되는 날, ‘창비신인소설상’에 당선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는 회사를 절대 그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웃음) 

 

퇴사를 해도 되겠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나?


우선 데뷔를 하고 장편 소설을 계약했다. 회사를 그만둬도 아예 할 일이 없지는 않겠구나, 생각했고 1년은 버틸 때까지는 버텨 보자는 마음이었다. 사실 전업작가가 된 게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지금은 책이 나온 시점이라 예외적인 상황인 거고. 하지만 스케줄이 많아지니까 회사를 그만두길 잘한 것 같다. 직장인이었으면 포기해야 할 상황이 많았을 테니까.

 

하이퍼 리얼리즘, 극사실주의, 스타트업 호러 등 장류진 소설을 수식하는 다양한 표현이 나왔다. 등단 1년차에 이례적인 일이다.


내가 읽고 좋아했던 소설을 쓴 거라 이게 독특한 소설이라는 걸, 몰랐다. 다들 이렇게 쓰지 않나? 싶었는데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름이 붙여진 거니까 기분은 좋았다. (웃음)

 

8편 중 3편의 소설 제목이 다른 작품의 제목을 차용했다.


고민이 별로 없었다. 제목도 빨리 정하는 스타일이다. 다른 작가들도 영화나 책 제목에서 많이 차용하지 않나? 특별한 의미는 없었는데 조금 특이하게 보는 것 같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다소 낮음」은 밴드 이스턴사이킥의 노래, 「도움의 손길」은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집 『악몽』 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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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올록볼록에 가깝다

 

등단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판교를 배경으로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 ‘우동마켓’의 직원인 주인공 ‘안나’와 월급을 신용카드 포인트로 받은 직장인 ‘거북이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소설의 첫 문장은 “합시다. 스크럼”이다. (스크럼: 선 채로 짧게 어제의 경과와 오늘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전체 상황을 점검하는 것)


독자들의 반응 중 “애자일 경찰을 만들어 스크럼이 15분 넘어가면 체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IT 회사가 배경이라서 비슷한 직종에서 일하는 분들이 특히 재밌게 봐주신 것 같다. 판교에서 일하면서 이곳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만의 동류의식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나 역시 판교에서 일하면서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월급을 포인트로 받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상해본 이야기다. 다른 회사에 다닌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월급을 포인트로 받았지만 그럼에도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주인공 역시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다.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중고 거래를 하지만,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 거다. 슬픈 노동을 해야 하지만 월급날에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예매할 수 있으니까.

 

주인공이 월급을 포인트로 받을 만큼 회사에서 크게 잘못했나? 생각하면, 결코 아니다. 흥미로운 건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남다른 수완으로 이겨내고, 씁쓸하지만은 않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떤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힘들다고 하면, 그 사람이 하루 종일 비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결코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참하지 않고 그 사이사이 나름의 즐거움도 기쁨도 있다. 기성세대는 젊은 사람들을 두고 불행한 세대라고 자꾸 눌러버리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납작하지 않다.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진짜 속살을 보면, 실제로는 올록볼록에 가깝다.

 

「잘 살겠습니다」는 청첩장을 한번이라도 받아봤거나 또는 줘본 사람이라면 크게 공감할 이야기다. 청첩장을 돌리면서 산 밥값과 축의금 액수에 둘러싼 두 주인공의 미묘한 신경전과 성차별적인 회사에서 일하는 인물들의 서사가 묘한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또 주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만약 이 소설을 읽은 친구가 청첩장을 준다고 밥을 사려고 한다면, 조금 긴장될 것 같다. 주인공처럼 내가 계산기를 돌리는 사람으로 오해할까 봐. (웃음) 이 소설을 쓸 때는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어떻게 대우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주인공과 빛나 언니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 노동자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면 다르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동명의 페미니즘 소설집( 『새벽의 방문자들』 ) 표제작이었다.


가장 힘들게 썼던 작품이었다. 혼자 살 때였는데 누군가 밤중에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 렌즈를 보니,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이런 경험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닐 거다.

 

「도움의 손길」도 인상적이었다. 결혼 7년만에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주인공이 가사 도우미를 부르게 되면서 시작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공포’에 관해 써보고 싶은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올라왔다고 생각한 인물이 그 밑으로 내려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써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오래 전 한 정치인이 비서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켜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해명을 듣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뭔가 찝찝한 거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부릴 수 있는 위치가 됐을 때, ‘과연 역할이 다를 뿐, 인격은 같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도움의 손길」을 구상하게 됐다.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부터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고.


사유를 말하면 다들 조금씩 당황하는데, 남몰래 롤모델로 생각했던 상사가 모함을 당했을 때 그 분도 울고 나도 울었다. 커리어적으로도 인생을 사는 모습도 본받을 점이 많았던 여성 시니어 분이셨다.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슬펐던 기억은?


연봉 동결에 가까운 상황이 지속됐을 때? 더 열 받는 건, 올해는 인센티브가 없다고 해놓고 받을 사람은 받았더라. 그때 가장 열 받았다.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애틋했던 인물은 누구인가?


「잘 살겠습니다」의 눈치 없는 ‘빛나 언니’. 회사에서든 회사 밖에서든 앞으로 그녀에게 펼쳐질 상황이 녹록치 않을 것 같다. 언니가 현실에 있다면, 퇴사하지 말고 오래오래 계속 회사에 다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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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소설이냐고, 말하기도 한다

 

소설의 소재는 어떻게 찾는 편인가?


메모를 따로 하지는 않는데, 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에 짤방처럼 저장이 돼있는 것 같다. 아무런 폴더, 분류도 없이. 그건 예전에 내가 했던 대화일 수도 있고 눈으로 본 장면일 수도 있는데, 잡생각을 하다가 떠오르는 쓸데없는 상상 속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거대한 설정이나 완전히 참신한 세계관 같은 건 아니다. 정말 멀리 가지 않는 상상들, ‘이거 아니야? 저거 아니야?’ 같은 파편적으로 저장된 몇 가지의 생각들이 타닥, 하고 붙으면서 소리를 낼 때가 있다. ‘어떤 메시지를 줘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큰 줄기를 짠다. 그렇게 쓰다가 찾아온 새로운 생각을 이야기 속에 넣다 보면 소설이 나온다. 메시지는 그 생각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깊이가 없다”는 평가를 많이 받아서 항상 콤플렉스였다고.


사실 지금도 깊이가 뭔지 모른다. ‘없다고 하니까 없나 보다’라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다. 이번 소설집 해설을 인아영 문학평론가님이 써주셨는데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215쪽)는 문장을 읽고, 몇몇 독자가 작품을 안 좋게 평가한 것으로 생각하더라. 좋은 맥락으로 써주신 것인데. 사실 평단에서는 좋게 봐준 측면이 큰데 일부는 “이게 소설이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독성이 좋다”는 호평도 많이 들었다. 문장 수정을 많이 하는 편인가?


당연히 많이 한다. 일단 나는 가독성이 높은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독성이 있게 글을 쓰는 편이다. 문장이 정확할 때 가독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정확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고, 퇴고할 때도 계속 가독성을 높이는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데 무조건 가독성이 좋은 글이 좋은 작품은 아니라고 하더라. 가독성은 하나의 특징이라고 배웠다.

 

좋아하는 작가들이 정말 많더라. 인터뷰에서 밝힌 작가들은 손보미, 권여선, 정이현, 김애란, 황정은, 백수린, 김금희 등이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는 것 같다.


한국 현대소설이 짱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재밌고. 해외 작가 중에는 개브리얼 제빈, 조이스 캐럴 오츠, 레이먼드 카버도 좋아한다.

 

‘퇴사 VS 등단’의 기로에 선 누군가가 조언을 부탁해온다면?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그만두라는 말은 못할 것 같다. 나는 먹고 사는 일이 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 이전에 생활인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계획이 있다면 써 보시라고 말하겠지만 무조건 소설에 올인하겠다는 분께는 쉽사리 드릴 말씀이 없다. 또한 내 조언이 필요 없을 것이고.

 

만약 직장인 시절,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잘 버틸 수 있었을까?잘 이겨냈을 거다. 당연히 다른 취미를 만들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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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선언하면 기운이 빠져나간다

 

“소설이 고귀하지 않다”고 했다. 이런 태도가 있어서 독자들이 장류진의 소설에 환호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독자 장류진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의 주독자층인 동년배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여서가 아닐까?

 

현실적인 이야기를 꾸준히 소설로 쓸 생각인가?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현실과 땅에 발 붙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날아다니는 것 말고 붙어 있는 이야기가 좋다. 그런 글이 자꾸 쓰고 싶어진다. 사실 등단한 지 1년밖에 안 됐기 때문에 아직 어떤 것을 써야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없다. 다만 조금 긴 호흡의 소설을 써보고 싶다.

 

만약 이 소설집에서 딱 두 편을 골라 읽어야 한다면?


첫 번째 트랙 「일의 기쁨과 슬픔」과 두 번째 트랙 「잘 살겠습니다」. 소설집에 실린 순서가 작품의 발표 순서와 거의 비슷한데, 이 두 작품이 가장 먼저 쓴 작품이다. 「잘 살겠습니다」가 『현대문학』 2018년 12월호에 실렸는데 이 작품 이후 청탁을 많이 받았고, 출판사에서 사전 서평단을 모집할 때도 이 두 작품을 꼽았다. 물론 모든 작품이 내 자식 같지만.

 

장류진의 소설을 한두 편만 읽기는 독자들도 아쉬울 거다.


나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노래를 들을 때, 한 곡만 듣지 않고 모든 곡을 다운받아서 폴더에 정리해서 듣는다. 예전만큼 CD를 모으지는 않지만, 전곡을 다 듣고 아티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추측하려고 한다. 뭔가 이렇게 듣는 게 크리에이터들에 대한 존중 같기도 하다.

 

‘소설의 기쁨과 슬픔’은 무엇인가?


이야기를 완성했을 때,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냈다는 기쁨이 있다. 슬픔은 쓰지 않고 있을 때, 예를 들면 쉬거나 놀고 있을 때에도 내 마음속 소설가가 ‘소설을 안 쓰고 있네?’라고 쪼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이렇게 말하면 소설 쓰는 시간이 엄청 많은 부지런한 소설가 같지만 불편한 채로 안 쓰는 시간이 더 길다. 특히 요즘은. 그러니까 쓰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약간의 찝찝함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 슬프다.

 

현재 쓰고 있는 단편은 어떤 이야기인가?


나는 발표를 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는 절대 내용을 미리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콘텐츠를 볼 때 조금의 스포도 싫어하고 뭐든 알고 보면 재미가 반감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 소설은 ‘스토리’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든 선언하면 기운이 빠져나가서 못 쓴다고 믿기 때문에 훗날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1년 전 인터뷰에서 “청탁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소원이 이뤄진 셈인데, 내년의 소망을 미리 이야기해 본다면?


장편을 무사히 완성했으면 좋겠다. 장편을 한번도 안 써봐서 좀 두려운데, 내년 말부터 시작할 장편 연재를 잘 해내면 좋겠다.

 

 

장류진_ 소설가. 1986년에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국문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 10월,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썼다.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저 | 창비
씩씩한 모습이 담백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소설이다. 자신을 짓누르는 외부의 압력 아래서도 어느 몫의 자유와 행복만큼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의 활력과 당당함을 형상화한 듯한 인물들이 이 매력적인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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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산하 박사 “쓸모만 따지면 아무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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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자연과학책이라고 생각했다. ‘습지주의자’라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 이상의 기대는 없었다. 첫 장을 읽자마자 예상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과학책인가 소설책인가’ 갸웃거리며 한 장 한 장 넘기다 난생처음 듣는 습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습지가 다르게 느껴졌다. 축축하고 음산한 ‘쓸모없는 땅’에서 물이 머물러 있는 ‘자연스럽고 생명력 있는 땅’으로.

 

물과 뭍이 만나는 다양한 방식의 총체, 두 세상의 경계이자 어엿한 하나의 독립 세계, 수분과 대지라는 가장 근본적인 생명의 가능성을 상징하고 의미하는 곳. 네, 그렇습니다. 바로 ‘습지’입니다. (29쪽)

 

한국 최초 야생 영장류학자 김산하의 새 책 『습지주의자』는 픽션이다. 이야기는 ‘장’과 ‘무대’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흐른다. 영화를 만들면서 부업으로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장’에서, 김산하 박사의 팟캐스트 <반쯤 잠긴 무대>가 ‘무대’에서 진행된다. 도시부적응자인 ‘나’는 두꺼비와 개구리의 생태 통로를 홍보하는 영상을 만들게 되고, 우연히 알게 된 팟캐스트 <반쯤 잠긴 무대>를 들으면서 생태학적 감수성을 경험하고 ‘습지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민음사 사옥에서 만난 김산하 박사는 픽션을 선택한 이유를 말하면서 “처음 시도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바란다는 뜻일 테다. 『비숲』  , 『김산하의 야생학교』 를 통해 자연과의 공존, 생물 다양성 등을 이야기한 그가 생명의 서식지이자 다양한 생각과 감수성의 원천으로 습지를 재조명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까. “습지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습지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김산하 박사. 그의 습지예찬론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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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적인 사람이 아름답다

 

책을 습지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다. 축축하고 음산한 장소에서 생명력 넘치는 땅으로.

 

그걸 원했다. 아주 고무적이다.

 

『비숲』 에 이어 『습지주의자』의 표지를 동생인 김한민 작가가 작업했다. 같이 하면 좋은 점, 불편한 점이 있을 것 같은데


불편한 단계는 오래전에 지났다. 예전에 같이 어린이 책 만들면서 한방에서 지낼 때는 회의하고 집에 가서 싸우고 그랬는데 지금은 좋은 협력관계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습지들」이라는 시에 착안해서 제목을 지었다고 썼다. 자세히 듣고 싶다.

 

페소아는 신기한 사람이다. 이명(異名)이 많은 사람으로 유명하고, 해외 경험이 거의 없는 데도 여러 장소에 있는 것처럼 글을 썼다. 한 곳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 있는, 한 마디로 분산적인 사람이다. 페소아의 <습지들>은 이해를 목적으로 할 수 없는 시다. 나도 이해 못 한다. 다만 ‘습지’하고 ‘주의’를 합친 게 맘에 들었다. 습지를 하나의 사실이나 현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추구하는 사상처럼 말하는 태도, 그 단어의 조합이 주는 의미가 좋았다. ‘습지주의’라는 말은 습지가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습지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거니까.

 

원래 습지에 관심이 있었고 나중에 페소아의 시에서 습지를 발견한 건가.


그렇다. 책 다 쓰고 알았다. 페소아를 공부하는 김한민 작가가 <습지들>을 추천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한민 작가에게 처음 페소아를 소개한 게 나다. 2014년 즈음에 페소아를 처음 알았는데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고 김한민 작가가 힘들어할 때 “그러지 말고 페소아 작가 한 번 알아보라”고 제안했다. 그때는 김한민 작가가 페소아 책을 번역하게 될 줄은 몰랐다.

 

‘습지다운 사람’을 설명한다면?


물의 자연스럽게 머무는 곳이 습지다. 맺고 끊는 거 분명하지 않고 때로는 물러터졌다고 욕먹지만,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이 습지다운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이런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습지는 물론이고 습지적인 사람도 평가절하당한다.

 

일을 똑 부러지게 한다든지, 강단이 있다든지, 야무지다는 표현은 하나같이 고체의 성질이 바탕을 이루는 말들이다. 경계가 뚜렷하고 형체가 확고하며 성질은 단단한 것에 부여하는 긍정적인 의미가 확연하다. (중략) 정형에 높은 가치를 두는 고체 숭상의 문화이다. 이에 반해 액체로 대변되는 속성은 더욱 하등한 것을 묘사하는데 동원된다. (90쪽)

 

본인은 습지적인 사람인가?


결론적으로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습지의 미학에 심취해 있다. 굳이 따지자면 습지적인 면이 50% 정도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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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은 처음, ‘나’에 자신을 투영했으면

 

‘나’가 김산하 박사의 팟캐스트 <반쯤 잠긴 무대>를 들으면서 습지주의자로 변화하는 이야기다. 평범한 자연과학책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픽션이어서 의외였다.


처음으로 시도한 일이다. 다른 글은 많이 썼지만, 픽션은 처음이라 걱정되기도 했다. 

 

두 개의 목소리로 진행되는데 이런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강연을 많이 하는데 20~30분이 넘어가면 조는 사람이 생긴다. 이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설파하듯이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읽는 사람이 벅차고 지겹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에 등장하는 ‘나’처럼 생활 전반에서 습지를 느끼길 원했다. 

 

‘나’의 모델이 있었나?


‘나’에는 여러 가지가 투영됐다. 자신도 있고, 막냇동생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도 있다. 가장 가까운 인물을 한 명 꼽자면 막냇동생이다. 그 친구가 실제로 ‘나’처럼 영상 작업을 하고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은 있었지만 아주 좋아하진 않다가 최근에 넘어오기도 했다. ‘나’라는 인물에 그 친구를 가장 많이 투영하긴 했다. ‘나’를 통해 평범한 사람이 습지주의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고 독자들이 ‘나’에 자신을 투영하기를 원했다.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


『비숲』  『김산하의 야생학교』 를 내고 강연을 많이 했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서식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적으니까 서식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장 사랑하는 서식지가 밀림 또는 습지다. 우글우글 살면서 무언가가 많이 나올 것 같은 곳. 그곳을 독특한 방식으로 변호하고 예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첫 번째 주제가 습지고 1년 정도 집필했다. 다른 사람과 회의하고 공동으로 기획하는 게 잘 안 맞는 스타일이라 책을 완성한 다음 출판사에 제안했다. 계약 조건이 두 개였는데 첫째는 글을 많이 바꾸지 않을 것, 둘째는 친환경 인쇄였다. 다행히 출판사 관계자분들이 잘 받아줘서 책이 나왔다.

 

사진은 직접 찍었나?


3-4년 동안 습지를 많이 보러 다녔다. 이 책을 쓸 생각이 없을 때도 습지를 워낙 좋아해서 그냥 습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왔다. 사실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하는데 습지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후로 습지를 방문하면 옆 사람을 동원해서 무조건 찍었다. 해외에서 찍은 게 반이고 나머지는 반 정도는 국내 습지들이다.

 

캡션이 없는 사진이 많다. 이름 없는 습지라 그런가?


이름이 있는데 모르는 걸 수도 있고, 실제로 이름이 없는 곳도 있다. 사실 ‘우포늪’같이 잘 알려진 습지는 전체 습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어디인지 알려주기보다 그냥 습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비전문가들의 느낌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전문가들은 뭔가를 추출하려고 애쓰는데 추출보다는 습지에 몸을 담그듯이 자신을 노출하면 갑자기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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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은 ‘열려 있음’을 자연이 채우는 것

 

내용이 철학적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관심이 많은가?


아버지가 철학을 좋아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릴 때 식탁에 앉아서 밥 먹으면서 철학 이야기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엄청 지겨웠는데 결국 영향을 받았다. 동물을 연구하면서부터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동물을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와 같은 문제들은 철학적, 인문학적 고민으로 귀결된다. 어떤 과학적 사실이 나오면 그 사실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인문학적인 문제다. 내가 전형적인 과학자의 길을 안 걷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런 문제에 집중해서 그런 것 같다. 어떤 사실을 알아내는 것보다 그걸 가지고 사회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나한테는 더 중요한 문제이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철학이나 인문학에 관심을 쏟게 됐다.

 

과학이 인문학, 철학과 연결되는 게 불가피한 일이지만 모든 과학자가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정말 그런가?


대부분 관심 없다. 속상할 정도로. 자신이 전공하는 생물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사람을 좋아하던 의사가 환자들로부터 부정적 경험을 하고 난 뒤로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처럼 과학자도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과학 교육계 내에서 철학과 인문학을 연계해 생각하게 하는 방식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를 꼽자면 ‘흐름’이다. 언제부터 ‘흐름’에 집중했나?


대학원생 때 생태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이 ‘저것’에 영향을 주는 관계라 할 수 있다. 과학에서는 메커니즘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런 관계가 작용하려면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운동장이라고 해야 할까. 이게 없으면 힘이 작용할 수 없다. 이런 ‘열려 있음’을 자연이 알아서 채우는 게 흐름이다.

 

어디든 자연은 있지만 흙 한 줌, 돌 한 개, 물 한 모금이 혼자 덩그러니 또는 띄엄띄엄 있어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흙은 호흡해야 하고 돌은 굴러가야 하며 물은 흘러넘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이 제 방식대로 펼쳐질 기회가, 통로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77쪽)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흐름이 막힐 때 문제가 발생한다. 가장 쉬운 예가 설거지 배수대다. 배수대가 고장 나면 싱크대에 문제가 생긴다. 비에 젖은 우산을 잘못 말려서 냄새가 나는 것도 결국 우산 속에 공기가 잘 흐르지 못해서다. 교통부터 인간사까지 다 마찬가지다. 모든 영역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A에서 B로 쭉 가는 게 아니라 가끔은 멈추기도 하는 게 흐름의 또 다른 특징이고 그렇게 생긴 게 습지다. 인간은 어떨 때는 흐름을 무시하지만, 또 다른 때는 흐름에 천착한다. 왜 안 흘러가나, 빨리 보내야 한다면서. 이렇게 하면 또 물의 머무름이 사라진다. 이런 흐름에 주목해야 우리가 처한 상황도 다르게 보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부각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길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중간 지점을 찾는 방법은?


지금 일어나는 파괴만 줄여도 훨씬 낫다. 1900년대 이후로 통제 불가능한 정도의 습지는 다 사라졌다. 여름이 되면 도시의 폭염이 되게 심한데 이 폭염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습지다. 학자들이 도시를 철판으로 표현한다. 모두 아스팔트로 되어 있으니까 한 번 달궈지면 냉각 기능이 전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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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를 부차적으로 봐야

 

존재는 기능주의적 근거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268쪽)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책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더 설명한다면


『비숲』  에도 썼던 말인데 자연이 너무 망가지니까 사람들이 ‘쓸모’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토지를 정화한다’ 또는 ‘멸종 위기니까 보호해야 한다’는 식의 이유를 달아서 설득한다. 이런 방식의 접근이 싫다. 사람한테 대입하면 어떤가. 노인이나 장애인은 사회적 기능을 못 하니까 없어도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기여도 안 하고 노는 걸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다. ‘다양성’에 주목하자는 말이다.

 

누군가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서양학자들이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이 대체 무슨 기능을 하는지 풀려고 애를 썼다. 결국 얻어낸 답이 ‘다양할수록 생태계가 안정돼 있다’는 거다. 이런 결과가 확실하게 나타나진 않지만, 경향을 보인다. 가령 전체 생물이 100종이면 4~50종은 확실히 어떤 기능을 하는데 나머지 종은 무슨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가령 기능적으로 보면 코뿔소는 있으나 마나 한 동물인 셈이다. 그런데 그건 우리가 모를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저놈은 기능이 없으니 죽어도 된다’ 또는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식의 접근은 존재를 부정하는 실수를 범하는 일이다. 본인도 거기에 노출되면 똑같이 억울할 거면서. 앞으로 수많은 직업이 AI로 대체될 거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얼마나 슬픈가. 기능을 전혀 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절대적 요소로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 부차적 요소로 써야 한다.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면 존재감이 약해진다. 쓸모를 제외하고 존재감을 느낄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쓸모를 넓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쓸모를 돈벌이로 축소해서 생각한다. 협의의 쓸모에는 미학적 쓸모가 포함되지 않는다. 동기부여 하는 쓸모, 우정의 그물을 제공하는 의미에서의 쓸모 같은 것들이 없다. 이런 협의의 쓸모만 이야기하는 걸 반대한다는 거다. 이야기할 거면 광의의 쓸모를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광의의 쓸모를 이야기하면 쓸모 있는 게 많다. 지금 상태에서는 쓰레기이지만 우리가 어떤 인프라를 발달시키면 갑자기 자원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실마리는 결국 관계인가.


그렇다. 쓸모의 의미를 확대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최초 야생 영장류학자로 불린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주는 좋은 점과 불편한 점이 있을 것 같다.


나를 설명하고 증명해야 할 때가 많다. 가끔은 내가 처음에 세우고 애썼던 것들을 후배들이 충분히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좋은 점이 훨씬 많은데 일단 한국에 없는 동물을 처음으로 연구했다는 이유로 마이크를 준다는 거다. 목소리 낼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다.

 

앞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기후 변화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고 싶다. 2018년에 송도에서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총회가 열렸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남은 시간이 12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2030년까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을 45%를 감축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한다. 결과가 충격적이라 세계적으로 대서특필 됐는데 한국은 잠잠했다. 급박한 건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서 타임라인까지 준 적이 없다. 김한민 작가와 같이 2020년에서 2030년까지 10년 동안 기후 변화를 주제로 1년에 한 작품씩 내려고 한다. 현재의 시스템이 변화해야 한다고 한국 사회에 화두를 던지려고 준비 중이다. 요즘 김한민 작가랑 “이거 하고 죽자”고 이야기한다.

 

  

 

 

  

 


 

 

습지주의자김산하 저 | 사이언스북스
픽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습지라는 공간을 생명의 서식지이자 다양한 생각과 감수성, 상상력의 원천으로서 조명한다. 생태적 관점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오늘날 우리의 감각부터 다시 설정할 필요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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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인간 사회를 다르게 보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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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소설가는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0 영 ZERO 零』 의 인물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고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재능이 “짓밟히고 꺾여, 뭉개지고 피가 튀고, 헐떡거리다가, 마침내 뒈져버리는” 광경을 기다린다.

 

흔히 떠올리는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의 전형처럼 사람을 죽이거나 기이한 범죄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나’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함은 그에 못지않다. 게다가 ‘나’처럼 타인을 착취하는 뱀파이어 유형의 사람을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유 없이 타인을 괴롭히고, 그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하고, 그것을 동력 삼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를, 언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까닭이다. 소설 『0 영 ZERO 零』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나’와 같은 모습들, 일상 속에 녹아든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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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영이」로 ‘2005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김사과 소설가는 전위적인 서사와 파격적인 형식으로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장편소설 『미나』 , 『풀이 눕는다』 , 『나b책』 , 『테러의 시』 , 『천국에서』 , 『N.E.W』 , 소설집 『02』 , 『더 나쁜 쪽으로』 , 산문집 『설탕의 맛』 , 『0 이하의 날들』등 거침없는 에너지로 가득한 이야기를 선보였다. 이번에는 『0 영 ZERO 零』을 통해 더 사소하고 은밀한 폭력의 민낯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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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 있잖아요


주인공 ‘나’는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이런 인물을 만들게 되셨는지 궁금한데요.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에 관한 책을 많이 읽으셨다면서요?


네, 책을 읽으면서 그런 타입의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았고요.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언뜻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창작품에서 그런 인물을 실제로 본 적이 없잖아요. 보통 살인마 같은 모습으로 나오죠. 그래서 그런 주인공이 나오면 의외로 현실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 사람 중에 ‘나’와 같은 이상한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뭔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되게 이상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 있잖아요.


맞아요. 분명 쎄한 느낌은 있는데, 그 사람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거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니죠.


사람들이 그냥 ‘내가 예민한가?’ 하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되게 많잖아요. 그런데 의도적으로 그러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죠. 저도 예전에는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 거겠지,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거든요. 진짜로 나쁜 사람인 게 티 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굉장한 권력가라든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의도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딱히 목표가 있지 않아도, 그냥 사람들한테 공격적이고 해롭게 행동하는 경우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았어요. 인간관계라는 게 그럴 수 있다는 걸, 저 같은 경우에는 약간 깨달은 것 같아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에 대한 책을 읽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그냥 궁금해서요(웃음). 예전부터 연쇄 살인범이나 그런 사람들에 대한 책을 찾아보는 걸 좋아했는데, 너무 이입을 하면 무서우니까 안 읽었었어요. 그런데 비슷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책이 되게 많은 거예요. 미국, 영국, 캐나다 같은 곳에서는 이런 타입의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많이 되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영미권 사회의 가장 안 좋은 모습, 극단적인 모습을 다룬 것 같아서 사회적인 연구 같기도 하고요. 개인주의나 자본주의적으로 굉장히 발전을 하면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큰 폭력성이나 이기심 같은 게 드러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책을 읽으면서 인간 사회에 대해서 되게 다르게 보게 된 것 같아요.

 

책 뒤편에 황예인 문학평론가와의 대담이 실려 있죠. 황예인 평론가가 “이 인물을 보며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과 닮았다고 여기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는데요. 내 안에도 그런 섬뜩한 마음이 조금은 있는 것 같은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도 너무 화가 나면 ‘저 사람이 잘못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그냥 생각으로 그치지, 계획을 세워서 무언가를 하지는 않잖아요. 그 점이 되게 다른 것 같아요. ‘나’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한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장애물도 아닌 사람들한테 굳이 그 생각을 실행하잖아요. 생각을 한 것과 실행을 한 것의 차이는 엄청난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쁜 거라고 여기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물건을 보고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로 훔쳐서 집으로 가져가는 건 너무 다른 거잖아요. 그 경계가 되게 큰 것 같아요. ‘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실제로 하는 거니까 문제가 있는 거고요.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인 거죠.

 

‘나’를 제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않았어요. 일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는데요. 왜 그렇게 하셨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연구하고 계획해서 쓴 이야기가 아니고요. ‘이런 타입의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가볍게 썼어요(웃음). 어떻게 보면 일인칭 작업이 제일 단순하니까 선택한 것도 있고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 책을 읽고 생각을 하면서 ‘이런 사람이겠거니’ 하고 관념적으로는 알아도,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일인칭 시점에서 그려보면서 실제로 그 사람이 되어 보면 약간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 점에서 일인칭 시점으로 그리는 게 개인적으로 부담이 덜했던 것 같아요(웃음).

 

주인공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박세영’을 만나게 되죠. 재능 있는 학생인데 ‘나’는 세영을 파멸시키고 싶어 해요. 이유가 뭘까요?


모르겠어요... ‘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 중에서 유일하게 먼저 접근을 해온 거잖아요. 호의를 가지고. 사실 다른 학생들은 별 관심 없이 그냥 수업을 들은 거고요. ‘그냥 그 여자애가 나한테 왔으니까, 먹잇감이 자기 발로 기어왔으니까, 안 잡아먹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처음 ‘나’가 세영이를 보게 된 게, 수업 시간에 세영이가 제이디 스미스의 소설을 가져왔을 때거든요. 자꾸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거예요. 따로 만나기도 하고 메일도 보내고, 그런 행동들을 했단 말이에요. 세영이 입장에서는 복합적인 마음이 있었을 것 같아요. ‘나’가 멋있어 보이니까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왠지 저 언니는 자신이 쓴 글을 알아봐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주인공 입장에서는 완전히 그냥 먹잇감으로 본 거죠. 어쩌면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에 대해서 경멸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가 가진 교양 있는 이미지는 스스로 만들어낸 거고, 사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는데, 세영이가 그걸 보고 다가왔을 때 그 여자 아이가 너무 하찮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사기를 쳤는데 넘어온 거잖아요. 사실 ‘나’는 열등감 같은 것도 되게 많은 사람인 거고, 그래서 자신을 좋아하는 세영이가 좋아 보이지 않는 거죠. 되게 꼬여있는 사람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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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다단계 같은 느낌이에요


주인공은 “도시에서 가장 쉽고 싸고 안전한 것”이 인간이라고 말해요. “온갖 일에 써먹을 수가 있는 요상한 생명체”라고요.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고, 돈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이런 인간형이 탄생한 데에는 사회가 미친 영향도 있을까요?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는데, 사회가 이런 사람들이 살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부분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은 타인을 수단으로 보고 이용 가치로 판단하는데, 개개인한테 전혀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하나하나의 이용할 대상으로 보면 되게 편리할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인적 자원’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실제로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많이 나아간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사람들한테 제시하는 삶의 방식이 ‘나’가 말하는 것과 자꾸 겹치니까, 그게 맞는 말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많은 것 같고요.

 

선배 ‘김지영’의 이야기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불행을 바라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암 투병 중인 ‘민희’를 만나러 가자고 하잖아요. ‘민희’를 만나고 난 뒤에는 훨씬 더 가볍고 편안해 보이고요. “자신의 불행을 가릴 커튼”이 필요했던 건데, 낯설지만은 않은 감정이에요.

사실 많이들 그럴 것 같아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되게 나쁜 사람이고 나쁜 행동을 하는데 ‘김지영’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태연하게 그런 행동을 하는 거예요. 그런 부분들이 주인공이 ‘그것 봐라,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는 부분이죠.

 

‘나’와 4년 동안 연애했다가 헤어진 남자친구 ‘성연우’는 이런 말을 해요. “너는 완전히 제로야. 완전히 텅 빈……” 어쩌면 ‘성연우’가 주인공을 간파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게 ‘나’에게는 가장 큰 공포였을까요?


아니요, 별로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요(웃음). 이런 사람들의 문제가 학습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자신이 어떤 사람한테 나쁜 행동을 했는데 통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면 안 통하는구나’ 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학습이 없대요. 그냥 ‘안 통했구나’ 하고 다음 사람한테 또 똑같이 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뭔가가 결여된 사람들 같기도 하고, 동시에 그래서 되게 잔인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황예인 문학평론가와의 대담에서 “현실에서는 이런 식인적 행위가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단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어요. “피라미드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요.


원래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요즘에는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어떤 분야든지요. 예를 들어 대학원에 간다고 하면, 솔직히 요즘에는 대학원을 졸업한다고 해서 다음 단계로 가거나 교수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대학원 사회 안에 들어있는 거잖아요. 계속 대학원을 다니고 그 근처에 머무르거나 ‘나’의 경우처럼 대학원이라는 사회 안에 본인도 들어가고 또 새로운 신입생이 들어오고... 일종의 다단계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어떤 분야든 요즘에는 성공하는 사람은 너무 극소수잖아요. 아이돌의 경우도 그렇고, 영화판도 비슷하죠. 성공하는 사람은 진짜 적고 대부분은 그냥 그 판 안에 있는 거잖아요. 직장인의 경우는 잘 모르겠는데, 많은 경우에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도 한 것 같고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이런 단계적인 포식의 구조에서 자신이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에 많이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이셨죠. 그런 환상은 왜 갖게 되는 걸까요?


다단계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요. 되게 놀랐던 게, 의외로 명문대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 중에 다단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대요. 자기는 너무 똑똑하니까 피라미드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남들은 못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거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으면서 너무 신기했어요. 예전에 제가 친구한테 『88만원세대』를 추천한 적이 있었어요. 물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친구이기는 했는데, 책을 읽고 나서 들려준 감상평이 ‘나는 여기에 안 들어간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어떤 종류의 자신감이 있다는 거잖아요. 되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나 봐요. 그래서 피라미드식 구조도 돌아가는 거겠죠. 자신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뛰어드는 거고, 그런데 많은 경우 주변에서 보기에는 안타까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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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신비로운 숫자 같아요


‘박세영’은 피식자가 되기에 너무 좋은 위치에 있잖아요. 어리고, 사회 경험도 없고, 혼자이고... 세영이를 보면서 어떤 감정이 드셨어요?


저는 예술대학교를 나왔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예술가 지망생들이나 그와 비슷한 동기들이 주변에 많아요. 아트 스쿨 같은 곳이, 겉보기에는 어때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는 경쟁이나 질투가 심한 것 같아요. 사실 재능을 가진 사람은 소수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티가 나요. 그러면 집단적인 시기가 장난 아니죠. 엄청나게 눈치가 빠르거나 생존 본능이 강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적응해서 성공하기가 힘들어요. 진짜 반짝거리던 아이들이 많은 경우 좌절하는 거죠. 그런 걸 많이 봤어요. 저도 학생일 때는 주변에 무서운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고, 내가 봤을 때는 정말 이상한 충고를 해주는 선생님인데 다른 아이들이 그 말을 계속 듣는 걸 보면서 안타까웠던 경우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더 나이가 들어서 보니까,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어른들 눈에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 쉬워 보였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예술 학교 안에서 미투 운동도 벌어지고 있지만, 성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착취가 이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에서 주인공과 세영이의 관계 같은 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기성세대는 ‘박세영’ 같은 아이를 한눈에 알아보겠죠. ‘저 아이는 잘 구슬리면 내가 원하는 대로 손쉽게 움직일 수 있겠다’ 하고요.


그렇죠. 엄청난 통찰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위치의 차이인 거잖아요.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니까 보이는 거죠. 주변에 자신보다 더 어리거나 약자인 사람들이 보이고, 그런 사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면, 그 유혹은 되게 강할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들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많이들 그럴 것 같고요.

 

‘박세영’으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의 마음도 이해가 되죠. 재능이 있어도 경험이나 인맥은 부족하니까, 상대한테 조금 쎄한 느낌이 들어도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거죠.


맞아요, 그렇죠. 실상은 완전히 썩은 동아줄인데... 그래도 잡는 거죠.

 

‘김사과의 소설은 세다’는 평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폭력에 대한 묘사도 강하고, 날 것 그대로 서술하기 때문에 그랬겠죠.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작가님의 작품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나요?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대놓고 자극적인 묘사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잘 안 그러거든요. 요즘에는 저 스스로도 잔혹한 장면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예전에는 관심이 많으셨던 건가요(웃음)?


굳이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혈기왕성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자극적인 건 너무 힘들어요(웃음). 이제는 제 소설에 자극적인 것들이 노골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이야기 자체는 더 살벌하거나 더 무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사실적인 게 많아진 것 같거든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더 강해졌을 수도 있는 것 같고, 많이 달라질까 싶기도 한 것 같아요.

 

스물한 살에 등단하셨잖아요. 자연스럽게 작가님의 작품이 ‘요즘 세대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어요. 이제는 ‘90년생이 오는’ 시대가 됐는데요(웃음). 이제는 작가님이 쓰시는 이야기들도 달라졌을까요?

예전에는 스스로도 그런 게 약간 있었던 것 같아요. 뭔가 무의식적으로, 내 세대의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서 훨씬 더 나이 든 사람의 이야기도 하고, 내 이야기도 하고, 더 어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하고... 훨씬 더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이번 소설의 제목이 『0 영 ZERO 零』 이고, 앞서 산문집 『0 이하의 날들』 도 쓰셨어요. ‘0’을 반복적으로 쓰시는 이유가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되게 집착하는 것 같아요(웃음). 되게 신비로운 숫자라고 생각하나 봐요. ‘0’이라는 개념이 신기하잖아요. 없다는 뜻인데, ‘없다’는 걸 개념화할 수 있다는 게 되게 신기한 것 같아요.

 

 

 

 

 


 

 

0 영 ZERO 零김사과 저 | 작가정신
타인으로부터 얻는 맹목적인 신뢰, 이 세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듯한 견자見者적인 태도,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나’는 “개화, 문명화된 도시의 식인종”으로서 사냥감을 찾아 헤매고,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로 은밀하고도 사소한 방법을 통해 타인의 삶을 불행에 빠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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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요조, 임경선 “단호하고 예리한 작가, 그리고 웃긴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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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 작가(왼쪽)와 임경선 작가

 

편지도 나누지 않는 시대에 ‘교환 일기’라니. 이 어려운 일을 요조, 임경선 작가가 해냈다. 출발은 문자 대화였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요조, 임경선은 트위터, 페이스북,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서로의 일상 보고부터 이슈 논쟁까지, 쉴 틈 없이 대화를 나눴다. 너무나 재밌지만 때때로 한심해보이기까지 했던 두 사람의 대화. 결국 ‘고효율 작업자’ 임경선은 요조에게 제안한다. “우리 안 되겠다. 차라리 이걸로 영양가 있는 뭐라도 만들자.” 이렇게 네이버 오디오 클립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 일기’가 탄생했고, 이 방송에서 나눈 대화가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로 묶였다.

 

여성 독자만 읽어야 할 것 같은 책, 그러나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소재는 굉장히 폭넓다. 곁에 있는 여성의 마음이 좀체 이해가 안 되는 남성 독자가 있다면, 필독해도 좋을 책이다. 글쓰고 노래하며 제주에서 ‘책방 무사’를 운영하는 뮤지션 요조와 다수의 에세이, 소설을 펴낸 전업 작가 임경선. 두 사람이 ‘아는 사이’에서 ‘친구’가 된 사연도 흥미진진하다. ‘나라는 존재, 타인, 책임, 관계, 자유, 솔직, 즐거움’ 중 하나라도 꽂혀 있는 단어가 있다면 책장을 펼쳐 보자. 가벼운 마음으로 열었다가 순간 몰입하고 책을 읽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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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

 

책이 나온 지, 한 달이 좀 지났어요. 평소 공저를 쓸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임경선 작가님과 임 작가님과 교환일기를 쓰게 된 요조 작가님, 책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시는 요즘인가요?

 

임경선 사실 처음에는 저희들끼리 교환일기를 네이버 오디오클립 방송을 통해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이미 충분히 즐거웠던 터라 솔직히 책으로 묶어내는 일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욕심이 있진 않았어요. 기록으로 남겨두면 최소한 좋은 추억이 되겠다는 정도랄까요? 한데 막상 책이 출간되고 나니 ‘우리 둘만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있더라고요. 독자 분들의 공감과 즐거움이 전해져오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네,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눌 수 있으니, 책으로 묶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조 책이든 음반이든 발표해버리고 하면 아쉬움이랄지 후회랄지 꼭 몇 번은 겪었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이번 책은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네요. 이 책에 대해서 떠올릴 때마다 언제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웃음)

 

혼자 써온 책과 달리, 좋았던 점도 있고 힘들었던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요조 힘든 것도 좋은 것도 다 ‘우리’ 라는 개념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내가 못하는 것도 ‘우리’가 못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는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두 배로 신경을 곤두세웠는데요. 지금은 좋은 점을 톡톡히 누리는 것 같아요. 책 관련 행사를 다닐 때 늘 두 사람이 (편집자까지 세 사람) 다니니까 일한다기보다 노는 기분이 더 많이 들고 외로움도 덜하고요. 내가 좀 말을 못해도 상대방이 메꿔주겠지 하는 여유도 있고요.

 

임경선 누군가와 함께 책을 내는 것도 저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출판사와 편집자도 처음 호흡을 맞춘 셈인데, 힘든 것은 없었습니다. 요조와는 이미 여섯 차례 벼룩시장을 함께 분기별로 연 적이 있어서 ‘일하는 방식’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또한 저의 리드에 요조가 잘 맞춰주고 따라와주었어요. 문학동네 이연실 편집자의 경우, 워낙 일을 잘하신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일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좋았던 점은, 이 책을 만드는 동안 담당 편집자, 요조, 저, 이렇게 셋이 긴밀히 머리를 맞대고 이러쿵저러쿵 시시콜콜 협의하는 과정 자체가 그냥 너무 재미있고 웃기고, 마치 동아리를 주제로 한 청춘 만화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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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 작가

 

요조 작가님은 이 책에 뒤이어 『아무튼, 떡볶이』 도 출간됐어요. 한 해에 두 권을 쓰시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두 권을 쓰면서 마음가짐이 달랐나요? 

 

아무래도 『아무튼, 떡볶이』쪽이 마음은 더 편했던 것 같아요.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경력과 실력이 우월한 작가와 함께 작업하는 일이라 아무래도 마음에 무게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아무튼, 떡볶이』를 쓰면서는 그런 부분에서 홀가분함이 있었죠. 만약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가 잘 안 팔렸으면 전 잠도 못 잤을 거예요. 『아무튼, 떡볶이』 가 잘 안 팔리면 속상하겠지만 그래도 잠은 잘 잤을 거고요. 다행히 둘 다 잘 팔리고 있어서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있습니다.

 

두 분은 독자 리뷰를 찾아보시는 편인가요?

 

임경선 리뷰를 찾아보거나 참고하지 않는 편이에요. 대신 북 토크에서 들은 리뷰 중에 좋았던 것을 말씀드리자면, “제목에 ‘여자’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젠더로서의 ‘여성’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보다는 ‘인간 전체’를 아우르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이야기라서 참 좋았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조 얼마 전 북토크 때 들었던 리뷰였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밝히는 것이 좀 쑥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글을 쓰면서 ‘이렇게 읽어주었으면' ‘이렇게 나를 칭찬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저의 내심을 정확하게 들킨 리뷰였어요. 이상형을 만난 것처럼 그 리뷰를 말씀해주시는 분 뒤로 후광이 비치더군요. 이해받고 싶은 대로 이해받는 영광을 그때 누렸습니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제목이 굉장히 폭넓게 다가왔는데요. 어떻게 나온 제목인가요? 왠지 임경선 작가님이 정하지 않았을까, 짐작했어요.

 

임경선 제목에 대한 고민을 오래도록 편집자와 함께 셋이 했어요. 아마 각자 백 개 정도 제목안을 그때그때 생각날 때마다 공유했는데요, 어느 날 제가 생각한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가 돌연 채택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 책의 콘셉트, 혹은 메인 카피라 할 수 있는 ‘다정하고 감동적인 침범’은 요조의 멋진 작품입니다.

 

카피도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제목과 부제를 두 저자님이 함께 만드신 거네요? 공저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표지에 관한 질문도 드려 볼게요. 임 작가님은 표지 디자인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자 분 중 한 분이시니까요.

 

임경선 표지 디자인 역시도 편집자와 우리 셋이서 수백 가지의 표지 이미지를 각자 찾아와서 공유하고 갑을론박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을 원점으로 돌려, ‘심플하게’ 가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표지의 이미지보다 우리 두 사람의 글에 더 무게 중심을 싣고 싶기도 했고요. 

 

임경선 작가님은 함께 책을 작업하는 분들을 각별하게 생각하시는 듯해요. 또 다들 작가님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요. 프로페셔널하시다고요. 살아오면서, 작가님이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확고해지나요? 작가님이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이 궁금합니다.
 
임경선 (웃음) 제가요? 고맙습니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한편 호불호 인간 유형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공정하고 솔직하고 자기 일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거기에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유머 감각이 더한다면 금상첨화고요. 싫어하는 사람은 비겁하고 변명하고 남 탓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뜨끔했던 건 24쪽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어떤 솔직함은 못됐다는 거 언니도 아시죠.” 솔직함에 관한 가장, 적확한 마음과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어서 인상적이었어요.

 

요조 사실 저는 솔직함보다도 더 우위에 두는 것이 '그 의도'입니다. 선한 의도를 위해 얼마든지 솔직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무조건 솔직한 게 좋은 거야, 라는 태도로 자기 속내에 있는 말을 듣는 사람 생각 없이 거침없이 꺼내는 사람을 좀 힘들어 합니다. 저 자신도 타인에게 굳이 솔직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다만 ‘의도’에 집중하려고 하고 ‘의도'에 맞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29쪽을 보면, 요조 작가님의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하는 것” 리스트가 나옵니다. 그런데 임경선 작가님은 이미 이것들은 안 하고 계신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는 일들은 정말 없나요?

 

임경선 올해(2019년) 초, 제사 지내는 것을 안 하기로 협의를 마친 바 있어, 이제는 ‘하기 싫지만, 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기 싫지만, 하고 있고, 하고 나면 그럭저럭 기분이 괜찮은 것’ 하나는 있습니다. 바로 운동(피트니스)입니다. 오로지 글을 쓸 수 있는 체력을 갖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혹시 너무 괜찮은 남자 후배가 “선배, 나랑도 이런 책 쓰자”고 한다면 쓰실 건가요?

 

임경선 그 남자 후배가 괜찮을수록, 그 남자 후배를 좋아할수록, 같이 책을 안 쓸 것 같습니다. 그냥 같이 놀기만 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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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작가

 

 

다 봐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거야

 

요조 작가님에 대한 칭찬으로 넘어가볼게요. 요조 님은 최근 『아무튼, 떡볶이』를 쓰시기도 했는데, 역시 글을 잘 쓰시더라고요. 요조 작가님만의 문학성도 느껴졌고요.

 

임경선 요조의 글은 표현이 독창적이고 문학적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우면서도 서늘하고, 서늘한 가운데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가운데 예리하고, 예리한 가운데 허를 찌르는 유머를 구사합니다. 제가 이번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조의 글은 ‘피와 땀’입니다. 제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요조가 그에 반응하는 글을 썼지요. 그 중 일부를 발췌해 드릴게요. 

 
“사랑에 빠진 상대와 눈을 맞추고, 키스를 하고, 각자의 손이 서로의 몸을 내 몸처럼 절박하게 쓰다듬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애와 섹스하고 싶어’라고 생각하게 될 때면 저는 내 몸 안에서 무언가가 배 아래로, 더 아래로 우루루 몰려가는 것을 느껴요. 아마도 그것은 피이겠지요. 남자의 몸 안에 있는 피도 그 순간 아래로 아래로 몰려가서는 어떤 기관을 발기하게 만들고, 동시에 피는 볼로도, 입술로도, 손끝으로도 몰려가 우리를 더욱 붉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이 피들은 다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여기저기로 몰려다니는 것일까. 피의 활약을 입고 붉어진 두 사람이 사랑과 장난기로 충만한 섹스에 열중하느라 모든 것을 잠깐 잊어버리는 사이, 그들의 표면에서는 땀이 흘러요. 재미있지요. 피땀 흘려서 고생과 수고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신나고 아름다운 일도 우리는 피땀을 흘려서 해요.”

 

글을 쓸 때, ‘최소한 이것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것들이 있나요?

 

요조 지키는 법칙까지는 없습니다만 바라는 점은 몇 가지가 있지요. 잘 읽혔으면 한다. 재미있었으면 한다. 아름다웠으면 한다.

 

임경선 작가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단호함이 아닐까 싶어요. 에세이에서 그것이 아주 두드러지지요. 속이 다 시원한 단호. 누가 뭐래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는 그 오만이 참 멋지고 근사합니다. 그런가 하면 소설에서는 또 다른 뭉근한 문체를 구사하는데 그 안에서도 단호함이 빛나고 있어요. 흐리멍텅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나요?

 

요조 하나만 꼽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하나만 생각나는 문장을 말해보자면 이거예요.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상대와 함께 춤을 추는 것과 같아. 그냥 자연스럽게 노는 것 같지만, 실은 스텝이 엉키지 않도록 볼 거 다 봐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거야.”

 

임경선 작가님이 일하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셨잖아요. 가장 감탄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요조 게으르지 않다는 점이에요. 지금 이 인터뷰도 아마 임경선 작가님은 바로 질문지 체크하고 준비 끝냈을 거예요. 언니는 늘 그런 식이에요. 마감까지 질질 끌지 않고 바로바로 빨리빨리 해버려요. 그러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마음 졸일 일이 없지요.

 

자, 이번엔 편집자님 칭찬으로 넘어가 볼게요. 이연실 편집자님은 김훈, 하정우, 이슬아 등 베스트셀러를 많이 편집한 분이시잖아요? 저자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책을 만드시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편집자님과의 작업 과정은 어떠셨나요? 그리고 편집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작업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임경선 일단 책과 편집 일과 저자를 너무나 좋아하고 아껴 주시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재미있고 웃기기까지 하니 함께 일하는 게 너무 즐겁고요. 작업하는 방식에 있어서 타 저자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책의 콘셉트, 제목, 디자인, 마케팅 등에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함께 일하는 편이라는 점입니다. 반대로 원고에 대한 편집자의 수정요청이나 전문가로서의 식견은 전적으로 수용합니다. 다시 말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아닐까 조심하고 몸을 사린 후, 나중에 불평하기보다, 함께 나누고 싶은 의견에 관해서는 완전한 신뢰를 기반으로 열린 귀와 입을 가지려고 합니다. 소통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오랜 직장생활 경험이 도움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임경선 작가님의 전작  『자유로울 것』 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에세이입니다. ‘~ 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또 한 권의 책을 쓴다면, 어떤 삶의 태도가 있을까요?

 

임경선 만약 그러한 책을 또 한 권 써야만 한다면 아마도 <섬세할 것>을 고려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자책하는 걸 보게 되는데요, 사실 ‘예민함’이라는 성향이 잘 관리가 되면 ‘섬세함’이 되니깐요. 그리고 지금은 과다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각자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섬세하게 가려낼 수 있어야 하고요. 갈수록 ‘섬세함’이 어른스럽고 이로운 가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플함’도 ‘섬세함’을 관통해야 얻을 수 있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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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않은 관계에 시간을 쏟지 마세요

 

요조 작가님이 118쪽 ‘난 이런 사람들이 싫어요’라는 글에서 뒷담화를 좋아하신다고 쓰셨어요. 그리고 타인이 내 욕을 해도 별로 화가 안 난다고요. 저도 비슷한데요. 뒷담화는 전해질까 봐 무서운 거잖아요. 그럼 신뢰하는 분들과만 뒷담화를 하시는 것인지요? 뒷담화를 현명하게 하는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요조 뒷담화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뒷담화의 주인공이 행여나 내용을 알게 되더라도 심하게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것이 좋고. 설사 이 뒷담화가 절대 전달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더라도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는데요. 어쨌든 뒷담화라는 것도 독이라, 너무 심하게 말하고 나면 말한 당사자의 마음도 굉장히 안 좋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내뱉은 욕에 내가 상처를(충격을) 받는 기분이랄까요. ‘뒷담화를 현명하게 하는 노하우'를 알려달라시기에 말씀드려보자면 저는 정말 친한 사람들하고만 뒷담화를 나누고요,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너무 나갔다 싶으면 서둘러 좋게 마무리합니다. ‘그래두 좋은 사람이야.’ ‘그래도 난 그 사람이 싫진 않아.’ 이런 식으로요. 구차하지요? 제가 좀 구차한 데가 있답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자주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를 해주신다면요.

 

임경선 우선 공적인 인간관계와 사적인 인간관계로 나누시고요, 공적인 인간관계(회사 동료 등)에 대해서는 최대한 마음보다 머리를 써서 공존을 위한 최적의 타협안을 강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반면 사적인 관계(가족, 친구, 애인)에서는 내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뭔가 좋지 않으면 그 분들을 죄책감 없이 다 놔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인간관계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요.

 

어른으로 잘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임경선 수치심을 가지는 일이요.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뻔뻔해지고 얼굴이 두꺼워지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데,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를 인지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자기 규율을 섬세하게 다져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요조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할아버지의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문득 두 작가님께 여쭤보고 싶네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선택은 무엇인가요?

 

임경선 난임의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기로 한 일입니다.

 

요조 조깅을 시작한 것. 저는 지금 PT를 받고 있고, 요가도 하고 있는데요. 러너에 적합한 몸이 되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아직 정말 초짜이고 무릎과 발목이 좋은 편도 아니지만 꾸준히 연습해서 꼭 마라톤에 출전해보고 싶어요. 그게 제 목표입니다.

 

두 분은 SNS를 잘 활용하는 편에 속하세요. 특히 요조 작가님은 신요조, 요조, 신수진 등 다양한 이름으로 SNS에 글을 올리시는데, 세 이름의 정체성이 각각 다른가요?

 

요조 크게 다르진 않지만 미묘하고 분명하게 다른 느낌입니다. ‘요조' 라는 이름은 굉장히 공식적인 느낌이고, ‘신요조' 는 제가 저를 공식적으로 불러야 할 때 자주 쓰는 편이고 ‘신수진' 은 정말 모든 수식을 걷어낸 제 알몸 같은 단어이죠. 그래서 정말 제가 내심 좋아하고 있던 사람이 저를 본명으로 불러주면 뮤지션이 아니라, 작가가 아니라, 그냥 저 자체를 바라봐주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강아지처럼 좋아합니다. 반대로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애가 뜬금없이 저를 ‘요조' 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저는 그게 서운해서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적도 있어요.

 

하하, 저라도 왠지 서운했을 것 같아요. 최근 <한겨레>에 연재했던 인터뷰 연재가 끝났어요.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를 진행하고 있지만, 종이신문의 인터뷰어가 되신 일은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인터뷰를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면요?

 

요조 질문을 ‘잘'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했고요. 그 점에 대해 한계를 많이 느끼기도 했습니다. 막연한 스몰 토크가 아니라 이 사람의 위대한 지점을 제가 대중 앞으로 끌어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제가 여러모로 많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럼에도 일년간 너무 값진 경험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저의 인터뷰이들과 한겨레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잘 읽은 독자가 있다면, 임경선의 또 다른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임경선 (이 책과 이어서 읽으면 좋을 책) 이번 책에서 읽으신 저의 생각이 좋으셨다면 산문집 『태도에 관하여』를 읽으시면 더 입체적으로 ‘즐독’하실 것 같고요, 겨울이라는 계절의 특성에 맞게 따스한 독서 체험을 원하시면 소설집 『곁에 남아 있는 사람』과 산문집 『다정한 구원』 을 추천드립니다.

 

임경선 작가님은 후속 장편 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시라고요. 요조 작가님의 후속작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요조 네? 뭐라고요? 안 들려요.

 

독자로서 바라는 점은 요조 작가님이 시를 쓰셨으면 좋겠어요. 시집 출간 계획은 영영 없나요?

 

요조 뭐라고요? 이상하다... 왜 이렇게 안 들리죠? 여보세요?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요조, 임경선 저 | 문학동네
그녀들은 솔직과 가식에 대하여, 어정쩡한 유명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강연하고 글쓰고 노래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어린 시절, 자물쇠 달린 하드커버 노트에 비밀스럽게 주고받던 교환일기의 추억이 두 여성 작가의 대화에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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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동영 “천국 같은 순간은 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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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누구도 사후의 찬란한 천국은 가보지 못했겠지만, 마음이 천국에 있는 것 같은 순간은 안다. 지친 몸을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거나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크게 웃을 때처럼 우리는 일상의 어떤 순간에서 종종 천국을 떠올린다. 김동영 작가는 이런 소소한 천국을 여행에서 만났다고 했다. 지난 20년간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그가 여행지에서 느낀 천국 같은 장면들이 천국이 내려오다에 담겼다. 김동영 작가가 기억하는 천국은 위험을 벗어난 안도의 순간이기도 하고, 부둣가에 흩어져 누운 고양이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의 품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그가 만난 천국에 도달하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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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천국에 대한 이야기

 

이번 신작은 일반 여행기가 아니라 각 여행지에서 만난 천국의 순간을 담았어요. 어떻게 기획한 건가요?


이제 여행기는 더 이상 쓸 말이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원래 ‘천국이 내려오다’라는 제목으로 다른 글을 쓰고 있었는데요. 이 책을 내기 전에 종교에 대해 공부하면서 세계 여러 종교마다 원하는 천국의 이상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때마침 인도 바라나시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죠. 우리는 천국에 늘 밝은 빛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되게 행복한 이미지만 그리잖아요. 그런데 인도 사람들의 천국은 아무 것도 아닌 ‘무’로 돌아가 생을 반복하지 않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항상 천국은 멀리 있고,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해왔는데 그 말을 듣고 안도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수많은 여행을 다니며 느낀 최고의 순간, 영감을 주었던 순간들을 천국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거창한 천국 말고, 소소한 천국에 대한 이야기요.

 

전작들과 좀 다른 느낌이었어요.


요즘 에세이가 많이 출간되잖아요. 에세이는 나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는 글인데, 뭔가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주려는 경향이 많아지는 거 같아요. 광고 홍보문구도 그렇고,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에세이가 자기개발서화 되는 게 싫었어요. 저는 항상 글을 쓸 때 독자에게 뭘 가르쳐주겠다는 거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글을 오래 쓰다 보면 자꾸 뭔가 의미를 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사소한 교훈 하나 없이 장소와 순간에 대한 묘사로 글을 채우려고 노력했어요. 


또 언젠가부터 책을 쓰며 그런 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내 책이나 나의 이름을 검색했을 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문구들이 있잖아요. 독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제 문구는 ‘살아가면서 산처럼 높아지는 것이 정답은 아니고, 바다처럼 깊고 넓어지는 것도 하나의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글귀인데 저는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썼거든요. 그런데 해석이 거창해서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 계속 그런 문구를 써내야 한다는 게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글을 쓰면 자꾸 제가 좋아하지 않는 류의 에세이처럼 흘러가더라고요. 이번에는 오직 독자들이 책을 읽고 여행을 한 번 떠나보길 원하는 의미로 썼어요. 리뷰를 몇 개 보았는데, 다행히 옛날처럼 인생을 다시 생각했다는 것보다 책을 읽으니 여행 가고 싶었다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좋았어요.

 

출판사에서 제작한 집필기 영상을 보니 해외에서 작업한 것 같더라고요.


저는 고립되는 걸 좋아해요. 특히 책 작업을 할 때는 집중력을 위해서 항상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글을 쓰거든요. 이번에는 일본 교토와 동경에서 4개월 정도 머무르며 썼어요. 제가 6월에 출국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한일 관계가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가서 지내는 동안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저는 그 도시의 분위기가 글에 담기길 원하는 마음으로 작업할 여행지를 선택해요. 교토는 정갈하고 유니크한 느낌 때문에 선택했는데,  지내는 와중에 그렇게 돼서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요. 사실 브이로그도 제작하려고 영상도 진짜 많이 찍었는데 거의 다 못 쓰게 됐죠. 제가 쇼핑하는 걸 되게 좋아하고, 특히 이렇게 책 작업이 끝나면 저에게 큰 선물을 하나씩 주거든요. 이번에는 쇼핑을 최대한 안 했어요. 그렇게라도 애국을 하려고요.(웃음)

 

오래전 다녀온 여행지를 다시 되새기는 작업은 어땠나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니요, 전 너무 쉬웠어요.(웃음) 작업하기 전에 우선 이제까지 찍었던 사진들을 쭉 봤어요. 거기서 기억에 남았던 장소들을 추리고 그때 있었던 이야기들에 대해 정리했죠. 그래서 그렇게 어렵진 않았는데, 그래도 집필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던 건 제가 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제 글은 감성적이긴 했지만 논리적이진 못했거든요. 물론 이 책이 논리적인 내용의 글은 아니지만, 공간에 대한 묘사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했어요.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같은 책을 보면 어떤 장면을 글로 생생하게 묘사하잖아요. 저도 그런 묘사 위주의 글을 쓰고 싶다는 게 제일 큰 포커스였죠. 내 감성은 드러나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어요.

 

천국의 순간이 된 장소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나요?


어떤 영감을 주었던 순간들이요. 저는 여행을 다닐 때 항상 외롭다고 생각했거든요. 혼자 다니니까요. 그런데 천국 같은 순간들이 늘 있더라고요.

 

그럼 집필이 힘들기보단 좋았겠네요.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을 다시 떠올리는 작업이니까요. 


되게 좋았는데 일본에서 쓰느라 마음 한편은 계속 불편했어요.(웃음)

 

이번 책에는 사진이 최소한으로 들어갔어요. 그마저도 흑백으로 처리했고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원래는 사진을 안 넣으려고 했어요. 그래도 중간 중간 사진이 들어간 것은 ‘내가 묘사한 글만 읽고 사람들이 그 장면을 연상시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오로지 확인을 위해 현실적인 사진만 넣었어요. 전처럼 글과의 시너지를 위한 게 아니라 글의 일부처럼 삽입했죠.

 

책에 삽입된 지도와 그림도 직접 그린 걸로 알아요.


어떻게 그곳에 도달하는지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약도로 작업했는데 좀 더 디테일하게 그려보고 싶어서 지도를 따라 그려봤는데 퀄리티가 너무 다른 거예요. 약도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지도는 노동의 강도가 딱 보였어요.(웃음) 그래서 그때까지 그린 약도는 다 버리고 다시 지도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가 나중에 후회했어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눈이 흘러내릴 거 같았거든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지도를 보고 똑같이 그린다고 해도 완벽히 같을 순 없어서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거든요. 덕분에 하나 알게 된 건, 잘 사는 나라일수록 지도 그리기가 쉽다는 거예요. 소위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도로 정비가 잘 안 돼 있어서 곡선이 많고 길도 들쑥날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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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느낀 최고의 순간, 천국이 되다

 

바라나시 화장터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비유적 천국이 아닌 죽음 이후의 천국을 생각하게 되고요. 바라나시 화장터에 왜 가고 싶었던 건가요?


바라나시에 가기 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인도 라다크 지역으로 히말라야 여행을 떠났었어요. 그때 인도라는 나라를 처음 가봤는데, 제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인도와 전혀 다르더라고요. 인도가 워낙 크고 소수민족도 많다 보니까 라다크 지역에는 대중들이 알고 있는 인도의 모습이 별로 없어요.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람들도 없고요. 그게 신기해서 구글링을 하다가 바라나시 화장터의 이미지를 보게 됐어요. 바라나시에 화장터가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잔인하게 탄 시체의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걸 보면서 ‘아 정말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라다크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바로 바라나시로 떠났어요.

 

그동안 주변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아가신 분이 많았거든요. 어머니도 돌아가셨고요. 그런데 현실감이 없었어요.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잖아요. 전쟁도 없었고 직접적으로 죽음을 겪을 만한 재해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아는 죽음은 다 가려진 죽음인 거예요. 병원에서 임종하시는 걸 보거나 화로에 들어갔다 나오면 사라지는 것뿐이니까요. 그런데 바라나시 화장터에 가면 죽음이 우리와 그리 멀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숙소도 화장터 5분 거리에 잡고 3주간 매일, 하루 종일 화장터에 있었어요. 처음엔 화장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게 부정적이었어요. 저 같은 관광객이 너무 많으니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 매일 가서 앉아있으니 어느 순간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그렇게 친해지다 보니 점점 제가 갈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고 시체와 더 가까워졌어요. 결국 화장터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볼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서 정말 자세히 볼 수 있었죠.  

 

실제로 보니 어떻던가요?


‘저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시체가 막 널려있고요. 너무 함부로 대해요. 우리는 염을 해서 시체가 보이지 않도록 꽁꽁 싸매잖아요. 거긴 그런 게 없어요. 골목마다 시체를 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도착한 시체는 화장터 한 군데에 줄을 세워놔요. 가려봤자 하얀 천을 덮어놓은 거뿐이라 다 볼 수 있죠. 그리고 나무를 사서 태우는데, 시체 한 구가 다 타는 데 두 시간 좀 넘게 걸리거든요. 보고 있으면 ‘와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정말 이렇게 리얼하다고?’ 이런 생각이 계속 들어요. 불에 타서 내장기관이 막 쏟아져 내리고, 화장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잘 타라고 대나무로 시체를 툭툭 쳐요. 그럼 막 부서지기도 하고. 몸에서 다리가 맨 마지막에 타거든요. 다리에는 분명 살이 있는데, 상체는 뼈만 남은 모습들이 너무 충격적이다가 나중에 알게 돼요. ‘이게 여기에서는 하나의 일상이구나. 육신은 잠시 영혼이 머물렀던 껍질에 불과하구나.’라는 걸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는 변화가 있었어요?


좀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거 같아요. 옛날에는 누군가가 죽으면 실감이 안 났어요. 그리고 무작정 슬퍼하고 아쉬워했는데 지금은 담담해졌다고 할까요. 홀가분함을 느꼈어요. 죽고 나서 그렇게 깔끔히 사라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더라고요. 바라나시에 있을 때는 잠이 안 오면 새벽에도 나가서 화장하는 걸 보고 그랬거든요. 캄캄한 밤에도 여전히 시체는 타고 있어요. 연기가 자욱하고 불꽃이 튀면서 알 수 없는 살 타는 냄새가 나고. 그런 게 되게 안정감을 줬어요.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감이 장맛비처럼 내리던 날들’을 보며 포틀랜드는 글 쓰는 사람들의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포틀랜드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도시의 분위기 자체가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지만, 특히 재밌는 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의 70%는 다 자기가 작가래요. 책을 내거나 어떤 결과물을 발표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냥 글을 쓰면 작가인 거예요. 그림을 그리면 화가고, 노래를 부르면 가수고요.(웃음) 그런 당당함이 굉장한 자극이 됐어요.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잖아요. 그런데 포틀랜드에서는 “나 글 쓰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무슨 책을 썼냐, 어떤 글을 쓰냐 같은 건 하나도 묻지 않고 “어! 그럼 너 작가네?”하면서 되게 대접을 해줘요. 항상 가는 카페에 가면 오늘은 글 잘 써지냐고 물어봐주기도 하고. 그들은 내가 한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책을 몇 권이나 펴냈는지는 관심이 없어요. 그냥 뭔가를 쓰고 있다고 하니까, 도시 전체가 그걸 응원해주는 분위기였어요.

 

와 진짜 멋있네요.


우리나라는 길거리에서 하는 버스킹도 어느 정도 실력 있는 분들만 나오잖아요. 거긴 노래를 진짜 노래를 못하는 사람도 버스킹을 해요. 그냥 자기가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아티스트가 처음부터 잘할 순 없다고요. 부족한 실력으로 시끄럽게 노래 부르면 보통 불평을 할 텐데, 포틀랜드에서는 박수치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도시 전체에 퍼져 있어요. 또 대부분의 카페에서 책 읽고 작업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죠. 그런 환경 덕분에 영감이 막 떠오르는 거죠. ‘이걸 써도 될까? 이 이야기를 독자들이 좋아할까?’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다 떠나서 일단 쓰는 거예요. 우리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포틀랜드 사람들은 결과 따윈 중요 없고, 지금 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정말 한 카페에 앉아있으면 작가만 열 명이에요.(웃음) 또 창작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대접해줘요. 예를 들어 커피 리필이 되지 않는 카페인데, “넌 작가라서 오래 작업해야 하니까 리필해 줄게”라며 커피를 주기도 했어요. 이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창작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도와주려고 해요. 포틀랜드는 정착민보다 이주민이 많은 도시잖아요. 그들이 만든 분위기일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포틀랜드는 되게 특별한 도시인 것 같았어요. 

 

국내의 장소로는 신촌의 한 모텔이 등장해요. 편찮으신 어머니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있는 집을 나와 모텔에서 잠시나마 안정을 느끼는 모습에 공감했어요. 여행을 자주 떠나기에 이렇게 공간을 벗어날 때 오는 해방감을 자주 맛볼 것 같아요.


제가 여행을 언제 떠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사람이 싫어질 때인 거 같아요. 싸우고 욕하고 그러면서 사고 칠까 봐 떠나요. 옛날엔 그러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한테 섭섭함을 잘 느끼고, 쏘아붙이게 될 때가 종종 있어요. 보통 그때 여행을 떠나는데, 일단 여행지에 가면 외롭거든요. 그럼 그들이 했던 섭섭한 행동이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일들도 다 이해가 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책에 쓴 천국의 순간들 중, 다시 돌아가고 싶은 천국이 있나요?


마나베섬이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예뻐 보인다고 느꼈어요. 스스로 내가 참 사랑스럽다는 걸 느낀 건 이때가 처음이었거든요. 그 이후로도 없어요. 그 밤바다의 분위기와 널브러져 있는 고양이들이 함께 있는 풍경을 누군가 봤다면, 혹은 만약 이 장면을 영화로 찍었다면 “쟤 너무 사랑스러워”라고 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자기애가 생기더라고요. ‘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 있구나’라고요. 그걸 스스로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로 다시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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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상상 이상을 보여준다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늘 특별한 경험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작가님 글을 보면 무척 특별한 일이나 인연이 참 많아요. 


낚시랑 똑같은 거 같아요. 낚시할 때도 어느 곳은 물고기가 잘 잡히는데 어디는 안 잡히잖아요. 그런데 결국 이기는 건 끝까지 앉아서 기다리는 거예요. 저는 여행을 일주일, 열흘 이렇게 짧게 가지 않아요. 만약 짧게 여행을 한다고 해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한 도시, 한 자리에 계속 머물거든요. 매일 가는 카페, 식당, 산책하는 경로가 똑같아요. 그리고 필라테스를 배운다거나 명상 클래스를 듣는 등 현지인처럼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하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 저는 흥미로운 사람인 거예요. ‘얘는 무슨 여기에 세 달씩이나 여행을 와?’라는 생각이 들 테니까요. 그냥 한곳에 매일 가서 앉아있으면 “너 여기 왜 왔어? 왜 안 가니?”같은 질문이 나와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 거죠.

 

좋아하는 여행지의 조건이 있다면요.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소일거리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 장소를 좋아해요. 그래서 관광객이 별로 없는 곳을 주로 가요. 또 이동수단을 타고 일주나 횡단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저는 여행지를 정할 때, 그 도시에 대한 분위기나 이미지 같은 느낌만 가지고 고르거든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이제 좀 확실해진 거 같아요. 일단 영미권만 아니면 돼요. 영미권 국가는 이제 저에게 더 이상 새롭게 다가오는 게 없어서요. 요즘은 인도, 동남아시아 같은 데가 더 재밌어요. 그들이 가진 특유의 거친 에너지가 매력적이더라고요. 최근에 인도를 좋아하게 된 것도 치열한 에너지 때문이에요.

 

에필로그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찾기 위해 떠나고 돌아오는 일에 대해 그 의미를 모르게 되었다’며 ‘앞으로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늪 같은 창전동 집에만 머물 거다’라고 했어요.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지겨워요. 여행 다녀와서 방 침대에 누우면 ‘아이고 여기가 천국이네!’라는 생각이 딱 들거든요. 고양이와 강아지가 있고 익숙한 내 침대와 나의 모든 게 다 있는 곳이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여행이 로망이겠지만, 그게 생활이 되면 정말 힘들거든요. 제가 지난 20여 년간 1년에 두 달 이상씩은 여행을 다녀왔더라고요. 그게 점점 길어져서 3~4개월이 되기도 하니까 필요한 물건 하나를 사려고 해도 ‘어차피 몇 달 후에 나갈 텐데’ 싶어서 그냥 대충 지내게 돼요. 요즘은 ‘내가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해요. 사실 그동안의 여행이 그렇게 여유롭진 않았어요. 늘 뭔가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필사적으로 썼기 때문에 제겐 힘든 시간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외로웠고요. 앞으로도 여행은 계속 가겠지만, 이제 쓰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냥 푹 쉬는 여행을 가고 싶어요.

 

고민이 많아진 것 같아요.


저는 심각하게 미래에 대해 준비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게 있어서 미래는 다음 달, 6개월 후였지 10년, 20년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면서 어떤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아요. 여행에 있어서도 그렇고, 글에 대한 고민도 있고요. 저는 에세이를 주로 써왔잖아요. 에세이는 자기 이야기를 쓰는 거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혹은 관심을 가져볼 만한 주제를 찾아서 현실감 있게 전해주는 르포를 써볼 예정이에요. 그리고 내년부터는 새로운 일거리를 좀 구하려고요.

 

인스타그램에 생선이라는 필명에 대해서도 글을 남겼어요. ‘살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는 생선처럼 어떤 순간에도 눈을 감지 않겠다’는 의미였지만, 이제 눈 감고 회피하고 싶은 순간도 있다고요.


책 팔리는 게 너무 스트레스예요. 옛날에는 ‘난 할 만큼 다 했어’라는 마음이었고 큰 미련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책이 얼마나 팔릴지 너무 궁금해요. 과거에는 그 궁금증이 ‘얼마나 많은 독자가 읽느냐’에 포커스가 맞춰졌다면 지금은 ‘얼마를 벌 수 있나’가 궁금해요. 그런 마음이 든 다음부터는 부담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을 구하려 해요. 책 판매량과 관계없이 생기는 수입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지만, 사실 보편적인 선에서 보면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거든요. 이제 몸을 움직이는 삶을 좀 살아보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 알바몬 열심히 보고 있어요. 

 

그럼 아예 다른 직종의 일을 할 생각인 거예요?


네. 해보고 싶은 분야를 몇 개 정하고, 그에 맞는 일들을 찾고 있어요. 우선 공항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수하물창고 아르바이트를 찾았고요. 혹은 숙식제공 되는 공장이나 청소 일도 알아보고 있어요. 제가 이제 와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돈을 벌고 싶지도 않거든요. 그러니 내가 관심 있고 흥미로운 일을 해보려고요. 평생 직장 말고 3~4개월 일하다 그만 둬도 미련 없을 만한 일이요. 그냥 이렇게 흘려 보내기엔 아까운 인생인 거 같아요.

 

이 책을 직접 추천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가요?


일상이 지겹거나, 인생에 영화 같은 감동이 필요하신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해요. 어떤 위로를 받고 싶어서 선택하신다면 이 책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테고요. 다만, 인생의 전환점이나 변화의 계기를 여행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지금까지 살아보니, 세상은 항상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더라고요. 행복, 좌절, 불운, 행운 모두 다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괴롭겠지만,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또 이 책에 담긴 천국은 아주 다양한 순간들이잖아요. 독자분들에게도 이런 순간들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내려왔으면, 그런 순간들을 많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천국이 내려오다김동영 저 | 김영사
작가는 여행지에서 겪은 천국 같았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왜 하필 ‘천국’이냐고 묻자 “사람들은 천국을 떠올릴 때 아주 멀리 있고 우리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생각하지만 사실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 장소에서 격하게 행복하거나 눈물겹도록 감동적일 때 ‘정말 천국 같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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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상은 “기쁨은 짧고 슬픔은 긴 이 시대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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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내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아프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른 위로는 쉽게 선을 넘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럼에도 이상은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힐링과 치유를 노래했고 우리를 위로했다. 그렇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곡들은 지금도 여기, 우리 곁에 살아있다.

 

'담다디'의 시원하고 신선했던 등장, '언젠가는'으로 전했던 빛바랜 인생의 통찰, '삶은 여행'으로 가져온 따뜻한 온기를 거쳐 그는 < 더딘하루 >의 날 것의 로킹함, < 공무도하가 >의 독특한 동양 서사, < 외롭고 웃긴 가게 >의 서늘함을 종횡무진 오갔다. 화려했던 데뷔, 그만큼 치열했던 자기 고민의 시간 속에서 그는 솔직함을 놓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솔직함은 여전히 이상은의 위로가 유효할 수 있는 이유다. 5년 만에 6곡의 작은 음반으로 15.5집< Flow > 의 출발을 알린 그를 홍대 부근 빅퍼즐 사무실에서 만났다. 타이틀처럼 그가 흘려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인터뷰는 이 궁금증을 중심으로 수록곡을 하나씩 조명하며 진행됐다.

 


삶 가까이 행복이 있잖아요, 그건 느껴야지만 보이는 거죠

 

이상은의 음악에는 늘 가사가 살아있다. 이번에는 뭐랄까? 완전히 자기 얘기 같기도 하고 또 타인에 대한 조언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공허한 메아리는 아니다.

 

데뷔 이후 이렇게 긴 시간 쉰 건 처음이다. 거의 5년 반 만의 신보니까 말이다. 결론적으로는 자, 타의로 휴식기를 가졌는데 나에게는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충남 공주에 있는 부모님 댁과 서울에 있는 우리 집을 오가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나 할까? (웃음) 처음에는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자연하고 가까이 살면서 점점 어떤 안정감이 느껴지더라. 진짜로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되고, 눈치 안 봐도 되고. 내가 어려서부터 일만 해오지 않았나. 살면서 거의 처음 느낀 자유로움이었다.

 

그런 편안함 덕택인지 노래들이 쉽고 부드럽다.

 

5년간 멈춰 있으면서 그간 주장해왔던 것을 내려놓게 됐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음악도 일부러 찾아 들었다. 그러면서 '대중성'이란 단어를 깊게 들여다봤다. '도구로 사용되는 대중성' 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했을 때 이것들을 어떻게 잘 버무릴 수 있을까 고민한 거다. 그때 철학 하는 지인이 “내게 음악은 멀리 떨어진, 거기 있든 말든 상관없는 것” 이었는데 내 음악을 통해 노래가 “자기를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더라. 이 말이 깊게 새겨졌다. 그동안 내가 종종 어떤 계층만 이해할 수 있는 실험적인 곡들을 만들지 않았나. (웃음) 더 많은 사람들이 음악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하고 싶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을 꺼라 생각한다.

 

첫 곡 'Relax'는 그럼 부모님 댁에서 만들어진 건가?

 

아니다. 아주 먼 곳에서 만들어졌다. (웃음) 런던에 갔다가 지인이 오로라를 보고 왔는데 너무 좋았다고 한 말에 꽂혀 그대로 핀란드 북쪽인 로바니에미로 갔다. 푸른 하늘, 자연이 주는 영감을 기대하며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숙소도 허름하고 오로라는커녕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순록이 끄는 썰매 탔는데 웬걸. 바닥에 누워 타는 썰매에다 속도도 아주 느린 게 상상했던 거랑 정반대였다. 날씨도 춥고 피곤하기도 하고... 그렇게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데 순간 '뻥'하고 머릿속에 진공 상태가 왔다. 그간의 잡념과 고민이 싹 정리됐다고나 할까?

 

일상을 잡고 있던 긴장들을 확 풀어졌다고 느껴진다.

 

말 그대로 생각이 다 날라 갔다. 거기가 영하 20도에 춥기도 엄청 추웠고 가뜩이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봤다. 다들 연인, 가족끼리 오는데 내가 혼자 달랑 배낭 하나 메고 가서 그런가? 어쨌든 방도 가장 구석에 작은 거로 주고 다들 나를 피하더라. 열 받아서 조식도 몰래 먹고 그랬다. (웃음) 그랬는데 그 고생과 허탈함이 순식간에 '아, 별거 아니구나' 하는 울림으로 다가온 거다. 'Relax'의 가사에는 계획대로 되는 게 없는, 소박하고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에 '빛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는 내 경험이 녹아있다.

 

오로라를 잃고 순록과 경험을 얻은 셈이다.

 

제대로 깨달았다. 순록은 크지만 아주 느리다. 하하하.

 

반면 '일상 노마드'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곡 같다.

 

이번 음반은 개인적으로 내게 도전과도 같았다. 예전에는 작업을 좀 하다가 2주쯤 짬을 내서 일본도 가고 태국도 다녀왔는데 그사이 시대가 바뀌었더라. 빠르고 압축적이다. 오랜만의 컴백이니 욕심이 나기도 해서 몸을 안 아끼고 밤새워 가며 곡만 만들었다. 주구장창 떡볶이만 먹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힘들게 쥐어 짜내다가 잠깐 마트나 나가볼까? 하고 집 앞 슈퍼에 갔다. 세상에나. 모든 게 다 너무 아름다웠다.

 

평소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나. 그 여행지에서 느끼는 환기와 무엇이 다른 건가?

 

일상을 발견한 거다. 의욕이 없이 쓰러져 있더라도 태도만 긍정적이면, 동네 마실만으로도 환기가 된다. 난 하와이나 미국에 가면 꼭 '홀 푸드 마켓(Whole foods market)'에 간다. 여기에 가면 물건들이 깨끗하고 예쁘게 정리되어 있다. 일본 로컬 문화 중에는 카페에서 벼룩시장을 여는 게 있는데 이렇게 동네 일상에서 느끼는 기쁨이 내겐 너무 소중하다. 왜 '텐바이텐'(아기자기한 물건을 파는 종합 문구 매장-편집자)에 가면 사람들이 일상을 이렇게 귀엽고 소중하게 꾸미려 하는구나 느껴지지 않나? 삶 가까이에 행복이 있다. 이런 건 느껴야지만 보이는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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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음악으로 치유했어요


트레몰로(같은 음을 같은 속도로 빠르게 연주하는 것-편집자) 사운드가 인상적인 '가을 수채화'는 딱 이상은 표 노래다.

 

11집 < 신비체험 >의 '비밀의 화원'을 떠올리며 쓴 곡이다. 가사들로 연결 관계를 짓거나 한 건 아니지만 분위기를 좀 바꿔보려 했었다. 그 곡이 봄이라면 이건 가을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 노래를 많이 들어오셨던 분들이라면 편하게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곡이다.

 

반면, '넌 아름다워'는 기타 톤도 그렇고, 멜로디도 그렇고 참 좋다! 이번 음반에서 가장 대중적인 곡을 꼽자면 이 노래이지 않을까?

 

기타는 '언니네 이발관'에서 활동하기도 한 (이)능룡이 연주했다. 깔끔하고 담백하게 사운드를 잘 잡아줬다. 다만 그런 것에 비해 뚜렷한 후크(멜로디 라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곡뿐만 아니라 사실 많은 내 노래들이 그렇다. 글자가 너무 많은 거지. (웃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내 곡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아마도 이런 메인 선율의 부재 때문일 거다.

 

이상은에게는 천진난만하지만 강한 목소리와 선명한 메시지가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내 목소리가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다. 악기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목소리만으로 표현되는 '감성' 또한 있다. 내가 어떻게 인식을 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들어준다면 감사한 일이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보이스 칼라를 다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목소리에 대한 지적은 처음이다. 설명을 조금만 더 해준다면?

 

한마디로 꾸밈없는 보컬이다. 힘을 풀고 고음을 지를 때 기존 음색과는 다른 지점들이 나타나는데 이게 쾌감을 준다. 나이를 잊어버리게 되는 개방성이라고나 할까? 그런 어떤 틀 지우기가 이상은의 노래를 일상 속으로 끌어당긴다.

(눈이 둥그레지며) 정말 좋은 칭찬이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려서부터 내가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았나. 그러면서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 사람은(주인공) 할아버지와도 젊은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 문장이 너무 좋았다. 사람으로서 내게도 어떤 한계들이 늘 존재한다. 나는 언제나 그걸 넘어서고 싶었고, 또 넘어서 왔다. 음악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다가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번 음반에서 어린 친구들에게 가장 추천해주고 싶은 곡은 무엇인가?

 

공교롭게도 방금 이야기 나눈 '넌 아름다워'다. 어릴 때는 슬프면 슬프고, 기쁘면 기쁘고 그랬다. 모든 감정들이 오롯이 온 거다. 그런데 어른이 돼서 보니까 기분 조절이 가능해지더라. (웃음) 반복적으로 괴롭다고만 말하면 정말 괴로워진다. 가사를 보면 '마음을 따라가 / 완벽한 것은 따스하지 않아'라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도 스스로의 기분은 본인이 만들 수 있다. 그걸 말해주고 싶었다.

 

음반 명은 < Flow > 인데 타이틀은 또 '넌 아름다워'다. 수록곡 'Flow'가 타이틀이 되지 못한 이유가 있는 건가?

 

다 만들고 보니 음반에서 가장 대중적인 곡이 '넌 아름다워'와 'Flow'였다. 타이틀로 뽑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웃음) 개인적으로 이 곡은 내 상처와 관련이 있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친구와 좋지 않게 끝을 맺었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그러면서 우리나라 자살률이 떠올랐다. 왜 사회는 잘 성장하고 있다는데 자살률 같은 건 떨어지지 않는 걸까? 내 노래로 그것들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정확하게 들었다.

 

이 곡에서 명대사가 나온다. '오늘 , 지금을 살면 잊혀져'('Flow' 가사 중) 풀이를 좀 더 부탁한다.

 

나는 내게 남겨진 상처를 늘 음악으로 치유해왔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음악으로 이걸 돌려주고 싶었다. 지금을 살아야 정신건강에 좋다. 과거로도 미래로도 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거다. 너무 많이 돌아보면 버겁고 불안해지지 않나. 지금을 사는 아이들처럼 다들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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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분절로, “그래도 삶은 흐른다!”


그렇다면 이상은이 말하는 < Flow > 는 무엇인가?

 

흐른다는 건 좋은 거다. 생각해보면 내가 막혀있을 때마다 주변에서 늘 나를 흘러갈 수 있도록 해줬다. 멈춰져 있고 막혀있는 입장에서 무언가가 흘러들어와 준다는 건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 굳어져 가는 걸 막을 수 있게 내가 그들(대중)에게 일종의 흐름을 전달해주고 싶다.

 

음반이 발매된 지 한 달 정도 지났는데 팬들의 반응은 어떤가? 상은의 의도대로 반응이 오고 있는지.

 

작가인 팬이 코멘트를 남겨줬다. '내가 겪어본 아픔과 치유만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반응들이 내 음악의 힘이다. 한번은 실연을 당해 죽어야지, 죽어야지 했던 팬이 내 콘서트를 다녀간 후기를 읽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 내 공연을 보고 다음 날 < 개그콘서트 >를 보며 깔깔 웃고 있었다는 거다. 음악이 주는 힐링이 내가 원하는 것들이다.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웃음)

 

마지막 곡 '오아시스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가사들 중 가장 비유가 많은 것 같은데.

 

가끔은 세상과 분리되는 순간들이 필요하다. 분리를 히브리어로 '카도시' 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Holy'다. 즉, 속물 사회와 분리시키는 순간들이 '홀리'하다는 거지. (웃음) 조금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아시스는 무슨 뜻인가?

 

오아시스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음반을 준비하면서 때로는 내가 세상과 분리되어있는 것처럼 느꼈다. 내가 여기 있는데 분리되어 있는 건 뭐지? 그렇다면 이건 나쁜 건가, 좋은 건가? 그런 꼬리의 꼬리를 무는 고민을 했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가끔의 분절이 평범함과 비범한 순간의 경계를 준다는 거였다. 삶 자체가 사막이고 때로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분리되어 오아시스를 만나보자. 그래도 괜찮다, '괜찮습니다' 노래한 거다.

 

왜 사람들이 상은에게 기대는지 알겠다. 힘들어도 괜찮다는 메시지, 나 대신 세상에 맞서 싸워 주는 사람 같다.

 

하하하. 감사할 뿐이다. '담다디'로 한 번에 세상에 알려지고 이후 혼자서 길고 긴 창작활동을 해오면서 나름의 질곡이 많았다. 이 시간들을 지나오며 내가 나를 버티게 해준 음악을 이제 다른 사람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로 잘 만들고 싶다. 염세주의로만 빠지지 말자. '세상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길을 갈 수 있게, 가끔은 예쁜 것도 보고 일상도 쓰다듬어 주면서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래도 삶은 계속 흐른다!

 

끝으로 앞으로 활동 계획을 묻고 싶다. 이번 음반이 EP이니까 16집도 비슷한 연장선상으로 기대하면 될까?

 

(고개를 저으며) 완전 새로운 작품이 나올 거다. (웃음) 이건 내가 5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는 신고식 같은 앨범이다. 오래 쉬었으니 싱글 작업도 하고 노래도 많이 만들어보려 한다. 이건 비밀인데 조만간 가사 비디오도 나올 거다. 반겨줘서 고맙다. 기쁨은 짧고 슬픔은 긴 이 시대에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살아보자.


 

 

 

 


 

 

이상은 - fLoW이상은 노래 | Sony Music
좁고 우스운 이 땅에 내려오지 않는 ‘새’가 될 필요도 없고, 삶과 죽음의 경계지인 ‘삼도천’을 기웃거리지도, 거칠고 황량한 ‘사막’을 방황하지도 않는다. ‘지도에 없는 마을’이나 ‘제3의 공간’을 찾아나서는 ‘코스모폴리탄 보헤미안’으로서의 분주한 여정을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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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 “도시를 알면 삶이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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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도 공간이 중요하다. 어디에서 나누는 대화인가에 따라 질이 달라진다. 도시건축가 김진애가 비교적 자주 드나드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한국 근대문학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던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운영하는 보안책방에서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사진을 찍고, 책방의 마스코트 강아지 ‘연두’와 인사를 나눈 뒤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김진애는 사진을 즐긴다. 사진작가가 원하는 포즈를 척척, 지나가는 팬들의 기념 촬영 요청도 흔쾌히 받았다. 작년 라디오 <KBS 열린토론>을 진행하면서 책 작업이 더뎠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18년에 나왔을 책. 김진애의 도시 3부작(『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도시의 숲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 『우리 도시 예찬』 )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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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긍정이 같이 있는 책

 

5년 전부터 기획한 책이라고요.


머릿속에는 늘 구상이 되어 있었어요. 3부작으로 쓰고 싶어서 일부러 『도시 읽는 CEO』를 절판 시키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죠. 원래 책을 쓸 때 2년 정도는 걸려요. 사람들은 훅 읽고 지나갈 수 있는데, 잘 읽히기 위해서 애를 좀 쓰죠.

 

첫 장을 읽고 나니 가속도가 붙더군요.


이제는 도시 이야기가 조금은 대중적인 주제가 된 것 같아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가 인기가 꽤 있어요. 청취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죠. 방송하면서 이 책의 콘셉트도 조금 달라졌어요.

 

3부작 중 첫 번째 권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은 새로 쓰셨고, 『도시의 숲에서 인간을 발견하다』『우리 도시 예찬』은 개정판입니다.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는 3부작의 주제 의식을 풀어 놓은 책이에요. 우리 주변의 도시 이야기를 하나하나 살펴봤어요. 원래는 그림도 많이 실으려고 했는데, 자료를 많이 쓰면 독자들이 자료에만 심취해버려요. 도시 이야기를 듣게 하기 위해서 그림을 뺐어요. 만약 이 책이 반응이 좋으면 개정판을 만들 때는 자료를 더 보완해도 좋을 것 같아요.

 

공간에 관한 책은 그래도 꽤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도시’는 부동산으로 접근하는 책이 더 많죠.


도시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 현상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요. 아니면 구조에 관한 비판이죠. 현상과 구조를 연결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잘 안 나와요. 저는 일방적인 예찬, 비판, 매도를 너무 싫어해요. 도시를 다룰 때는 비판하는 시각과 긍정하는 시각이 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랑 비슷해요. 장점만 단점만 있을 순 없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도시에 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걸 인정해야 해요. 콤플렉스를 인정하지 않으면 예찬하는 태도가 안 생겨요. 긍정하고 예찬하면서 동시에 문제를 피해가지 않는 태도가 필요해요.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라는 단정적인 이야기를 많이들 했는데, 전 동의하지 않아요.

 

“서울은 잡종 도시”라고 표현하셨어요.


20년 전부터 해오던 말이에요. 봉준호, 이명세, 박찬욱 감독이 왜 좋은 작품을 찍겠어요? 우리나라의 현실을 부정만 하지 않고 그렇다고 예찬만 하지도 않잖아요. 쓸데없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는 건 훌륭한 일이죠. 아쉽게도 도시 건축 분야에서는 이런 태도가 드물어요. 그게 늘 아쉽죠. 그래도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도시 이야기를 꾸준히 들어온 청취자분들이 자주 하는 말씀 중 하나가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자부심이 생겼다”는 말이에요. 우리나라 도시 이야기가 기껏해야 얼마나 갈까 했는데, 3년이 됐잖아요. 이제는 독자들도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지적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주제예요.


이 책이 인문교양서로 분류됐지만, 약간은 자기계발적인 느낌도 있어요. 도시와 인간의 성장을 연결하면서 썼으니까요.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처럼 읽고 싶으면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를 읽으면 되고요. 해외 여행을 가고 싶으면 『도시의 숲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 주말 산책을 꿈꾸신다면 『우리 도시 예찬』을 읽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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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중간중간에 길을 만들어야 한다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는 익명성, 권력과 권위, 기억과 기록, 알므로 예찬 등 ‘12가지 도시적 콘셉트’를 중심으로 책을 풀어가셨는데, 이 책의 한계와 역할까지 짚으셨습니다.


책을 쓸 때, 세속적인 허영심을 부추기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도시에 대한 의미와 느낌, 그리고 자존감은 높이 띄우고 싶었고요. 하지만 도시 공간들에 관해 상세하게는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랬다가는 엄청 두꺼운 책이 될 거니까요. 저자로서는 어디까지나 ‘도시적 콘셉트’를 전개하는 일에 충실하려고 했어요. 이 콘셉트에 익숙해지면 도시를 보는 눈에 좀더 구조적 시각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면 현상의 현란한 자태에 덜 속게 되고 본질적인 변화에 대한 바람을 키울 수 있죠. 무엇보다 정책에 대한 분별력이 커졌으면 좋겠다는, 저자로서의 바람이 있었어요.

 

두 번째 콘셉트가 ‘권력과 권위’입니다. 청와대, 국회, 청사 등을 소재로 다뤘는데 ‘권력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유독 크다고요.


책을 쓰면서 이유를 곰곰이 살펴봤어요. 아마도 권력 공간이 그 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이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권력 공간에 얽힌 스토리 자체가 흥미진진하기 때문일 텐데요. 얼마 전에 ‘청와대’ 이야기가 카드 뉴스로 만들어졌더라고요. 정말이지 비서를 부르면 최소 1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면 얼마나 갑갑하겠어요? 거리가 멀면 관계도 멀어져요. 권력자가 따로 있을수록 가까이 다가서는 접근성이 줄어들어요. 청와대 공간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자주 소환되는 게 백악관이잖아요? 백악관은 대통령 집무실과 모든 비서진 프레스룸이 같은 건물에 모여 있어요. 긴밀한 소통이 가능하죠. 백악관도 처음부터 지금 모습은 아니었어요. 큰 화재 후 리모델링 비용을 아끼려고 흰색으로 건물 전체를 칠했고, ‘화이트 하우스’라는 이름을 얻은 후 외양은 지키고 전체 구성은 끊임없이 진화했죠.

 

권력 공간에 물을 수 있는 것으로 세 가지를 꼽으셨는데, ‘인정할 만한 존재감’을 부여한다는 게 인상깊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이에요. 주눅들게 하지 않으면서 충분히 자긍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니까요. 예를 들자면, 민주정 아테네의 꽃은 아크로폴리스가 아니라 아고라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고라는 어느 한 건축물이 아니라 신전, 공회당, 시장, 광장, 연설대, 공연장이 섞인 공간이잖아요.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있는 동시 철학자의 토론, 소크라테스 재판이 벌어진 곳이죠. 상인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직접 민주주의가 펼쳐진 거죠. 고대 아테네에서는 궁궐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어요. 수많은 경호원에 둘러싸여 시커먼 승용차에 오르는 지금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모습이죠.

 

초고층 아파트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을 독자들이 많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는데, 저는 아파트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주거 특성상 아파트에 살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는데, 공동주택이 곧 아파트죠. 우리는 더 근사하게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데, 너무 업자들에게 휘둘려요. 자본의 논리로만 흘러가는 거예요. 사는 방법을 두고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 자기네들끼리 담을 쌓고 게이트를 만들고 오아시스 성체를 만들어버려요. 이건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일이에요. 저는 단지형 아파트가 아니라, 길을 만드는 아파트, 가로형 아파트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차는 다 지하에 넣고, 우리만의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도시의 삶이 있는 아파트를 지어야죠. 재건축을 할 때도 발상전환을 해야 해요. 아파트 중간중간에 길을 만들어야 해요.

 

아이와 노인은 초고층 아파트에 살면 안된다고요.


제가 초고층 자체를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오해예요. 초고층 자체에는 이의가 없어요. 탁월하게 설계된 초고층을 보면 한껏 고양되기도 해요. 다만 아파트용으로 세우는 초고층은 반대입니다. 일단 초고층은 창문을 열 수 없어요. 또 발코니에 나가기 어렵죠. 그리고 소방용 사다리차는 22층까지 닿는 게 일반적이에요.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면 초고층에 사는 사람들은 위험을 피하기 어렵죠. 초고층은 보기에 멋져요. 일하기에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건 잠깐이에요. 살기엔 상당히 나빠요.

 

하지만 여전히 인기가 많죠.


언론이 잠잠하잖아요. 과장 광고를 싣고 미화하는 기사들도 많이 나오고요. 초고층 건물에 아파트를 넣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잘 팔리고 비싸게 팔리는 분양 사업이기 때문이에요. 초고층에 살아도 괜찮은 사람은 젊은 사람, 싱글족, 워커홀릭이거나 출장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사람이에요. 살림 안 하고 레지던스 호텔처럼 살고 싶은 사람, 물론 돈 걱정 없는 부유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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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마스터하면 행복해진다

 

여행에 관한 접근도 인상적이었는데 대개 여행을 가기 전에 공부를 하잖아요. 그런데 여행 중 하는 공부, 여행 후 하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어요.


저는 공부하고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남편이 딱 그런 케이스예요. 아침부터 밤까지 밥 먹을 곳까지 다 짜서 여행을 준비하는데, 저는 별로 안 좋아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요즘엔 저에게 옵션을 줘요. 1번, 2번, 3번 중에 택하라. 일단 이야긴 다 들어 놔요. 그런데 막상 여행을 가면 아무 데나 들어가죠.

 

도시 여행의 목적지로 ‘서울’을 택했다면, 추천하고 싶은 장소가 있나요?


저는 몇 가지를 딱 추천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서울은 굉장히 좋아져서 갈 데가 정말 많아요. 서울 사대문 안의 지역은 어디를 가도 좋아요. 주말 하루 코스로 종일 걷는 것도 좋아요. 다만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는 게 좋아요. 이 동네가 어떻게 깨어나는지를 알려면 아침 식사부터 시작해야 해요. 전 여행을 가면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다녀요. 그래야 보이거든요.

 

달동네를 자주 가신다고요?


의외성이 있는 공간이거든요. 얼마 전에는 부산 감천문화마을을 갔는데 정말 ‘한국의 마추픽추’라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달동네는 설계해서는 만들 수 없는 공간이에요. 건축가가 없는 건축, 도시계획가가 없는 도시의 정석이죠. 개별적인 변화와 다양성, 즉흥성, 의외성을 지닌 흥미진진한 곳이에요. 저는 달동네에 갈 때마다 ‘설계해서는 만들 수 없는 도시’라는 개념에 매혹돼요. ‘경직된 마스터플랜 마인드’로 만들어진 신도시와는 확실히 다르죠. 저도 전문가로 참여해 만들어온 신도시를 보면 한계를 느껴요. 어느 신도시를 가나 엇비슷한 설계해서 만드는 도시의 한계를 느끼니까요.

 

부록으로 ‘도시 주제에 관한 추천 도서’를 소개했는데 굉장히 상세하게 쓰셨더군요.


18권을 추천했고, 제가 도시에 관해 쓴 몇 권의 책을 소개했어요. 저의 성장과 함께한 책들이죠. 도시에 관한 대중적인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도시 주제는 정치, 경제, 사회, 행정, 문화,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기 때문에 도시만을 다룬 책보다는 도시에 관한 통찰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소개했어요. 『세기말 빈』 , 『행복의 건축』 , 『인간의 조건』등이 들어간 이유죠.

 

tvN <알쓸신잡>의 유일한 여성 출연자셨잖아요. 일하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욕을 먹어야 큰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평생 욕을 한번도 안 먹었으면 반성해야 해요. 뭔가를 안 하고 있다는 거니까요.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일이란 없어요. 좋은 사람만 되려고 하면 절대 자랄 수 없어요. 풀 타임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자라는 게 아니에요. 8시간만 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자유 시간에도 생각이라는 건 할 수 있잖아요. 자기 성장을 위한 시간을 잘 가꿔야 해요.

 

다음 책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이번에 ‘도시 3부작’을 마무리했으니까 이제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우리를 억누르기도 하고 격려시키기도 하는 ‘공간’의 비밀을 책으로 써볼까 해요. 즉, 공간에 조종 당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알게 모르게 설계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종하려고 하거든요. 조종당하지 않는 법을 알고, 공간을 마스터하는 방법을 알면 행복해져요. 그리고 또 여행 이야기도 쓸 거고요.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김진애 저 | 다산초당
도시 또한 얼마든지 이야기로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도시 문제가 우리 삶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도시를 이해함으로써 우리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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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기욤 뮈소,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이야기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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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사진 Guillaume Musso (c)Emanuele Scorcelletti_D5B0010.jpg 

ⓒEmanuele Scorcelletti

 

 

비밀을 가진 것은 매혹적이다. 숨겨진 진실을 알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기욤 뮈소의 신작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은 그런 매혹의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 유명 작가 ‘네이선 파울스’는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아름다운 지중해의 보몽 섬에 은둔한다. 그리고 그 섬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 과연 기욤 뮈소의 소설다운 시작이다. 진실을 찾으려는 등장인물들처럼 독자 역시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이 게임의 설계자를 만나 묻고 싶어진다. 여러 층위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이 퍼즐 게임을 어떻게 만들었냐고. 그 비밀의 열쇠를 쥔 기욤 뮈소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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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비밀스러운 삶에 매혹되다

 

이번 신작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 까지 한국에서 16번째로 소설을 출간하셨어요. 한국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열성적으로 지지해준 한국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한국에서 소설이 출간될 때마다 항상 주의를 기울여요. 제가 쓴 이야기를 독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알아보기도 하고요. 진심으로 서울을 다시 방문하게 되기를, 그래서 어쩌면 서울을 제 소설의 배경으로 삼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소설의 제목인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은 무슨 뜻인가요? 특별히 작가‘들’인 이유가 있나요?

 
그야 이 소설에 여러 명의 작가들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우선 유명작가 네이선 파울스, 그다음으로 신인 작가 라파엘 바타유, 그 외에도 제가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 줄곧 영감을 주고 자양분이 되어준 많은 실존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이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작가도 있지 않나요?

 

지금까지 사랑, 가족 등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오셨어요.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은 ‘작가’에 대한 소설입니다.


‘작가’는 사실 꽤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주제예요. 이전에 출간한 다른 작품들에도 암암리에 등장합니다. 가령 『종이여자』를 예로 들 수 있겠죠. 이번에는 아예 소설 한 편을 작가라는 주제에 할애했어요. 인간혐오 증세가 있거나 언론 시스템의 톱니바퀴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기를 고집하는 일부 작가들의 삶에 깊이 빠졌거든요.


소설 속 주인공 ‘네이선 파울스’는 작가의 삶에 대해 “작가로 산다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 없는 삶이니까.”(53쪽)라고 혹평합니다. 혹시 작가님도 비슷한 생각인가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사는 삶은 어떤가요?


물론 전 네이선 파울스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글쓰기는 어둠의 작업입니다. 굉장히 고독하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제 삶은 무척 행복합니다만 아주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죠. 아침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사무실에 가서 저녁 7시쯤까지 글을 써요. 집에서는 절대로 글을 쓰지 않아요. 언제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죠. 스티븐 킹이 말했듯이 글을 쓰려면 반드시 ‘문을 닫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를 떠나 상상의 세계로 탈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간 작가님이 쓴 소설의 주요 배경은 뉴욕, 파리, 앙티브 등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였어요. 이번에는 가상의 공간 ‘보몽 섬’을 등장시켰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전작 『아가씨와 밤』 을 쓰면서 지중해의 분위기를 탐사하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그 속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서 이번에도 다양한 풍경과 감각을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몇 년 동안 뉴욕이나 파리를 묘사하다가 깎아지른 절벽과 황무지,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을 움직이니 그야말로 신선한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설 앞머리에서 보몽 섬은 이 세상과 멀리 떨어진 일종의 평화스러운 전원풍 안식처, 피난처로 묘사됩니다. 그러다가 극적 긴장이 고조되어감에 따라 풍경이 점점 음울하고 신비스럽게 변해가죠.

 

소설에서 “독창성 있는 작가가 되려면 구조나 스토리보다는 언어 자체의 탐구에 집중해야 합니다.”(26쪽) 라는 한 작가의 주장이 언급되는데요. 작가님은 ‘문체’와 ‘스토리’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시나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에 언어를 맞추는 거라고 봅니다.


은둔 작가 ‘네이선 파울스’부터 모험에 뛰어드는 작가 지망생 ‘라파엘 바타유’, 기자 ‘마틸드 몽네’ 등 소설 속 캐릭터들이 매력적입니다. 인물을 창조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요?

 

소설의 성패는 줄거리에 달려있지만 적어도 그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등장인물들에도 비중이 있다고 봅니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심리, 그들이 느끼는 풍부한 감정 등이 픽션의 밀도를 높이고 독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공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니까요. 미국 소설가 데니스 루헤인이 한 말이 제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해요. “당신은 항상 가장 좋은 인간들에게서 가장 나쁜 면을 보고, 가장 나쁜 인간들에게서 가장 좋은 면을 본다.” 글을 쓰면서 등장인물들이 제가 미처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하고 싶어 할 때마다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죠.


“기욤 뮈소의 소설은 영화 같다”는 평이 많아요. 한국에서 2016년에 작가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가 개봉되기도 했죠. 창작 단계에서 영화적 연출을 고려하시나요?

 

영화를 직접 봤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요. 홍지영 감독이 시나리오를 직접 썼는데, 제 소설의 감수성을 한국적인 맥락으로 해석해서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줬죠. 2년 전 브뤼셀에서 홍 감독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고, 특히 좋아하는 배우인 김윤석 씨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의 다른 소설도 한국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글을 쓸 때 딱히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두지는 않습니다. 비록 제가 글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독자들이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이미지를 완성해간다고 할 수 있지만요. 폴 오스터도 말했듯이 소설 한 편은 작가와 독자가 동등한 비중으로 참여하는 창조물입니다.

 

 

 2 번 사진 Guillaume Musso (c)Emanuele Scorcelletti_D5B8175.JPG

Emanuele Scorcelletti

 

 

소설은 독자가 참여하는 게임

 

결말을 미리 말할 수는 없지만, 작가님은 반전을 즐겨 사용하세요. 소설에서 반전은 어떤 효과를 낸다고 생각하시나요?

 

소설을 쓸 때 항상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해요. 이번 소설은 일종의 게임처럼 기획했습니다. 심지어 여러 층위를 가진 게임이죠. 책들과 작가들을 소재로 삼은 게임인데, 소설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필요할 때마다 힌트 또는 성찰의 문을 열어주는 단서처럼 활용돼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인용들이 다른 책을 읽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또한 독자들이 참여하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독자들을 일종의 문학적 퍼즐로 이끌고 싶어요. 몇 해 전부터 줄곧 절 사로잡고 있는 현실과 픽션 사이의 신비하면서도 유동적인 경계를 맛볼 기회를 독자에게 제공하고 싶었죠.

 

작가 지망생 라파엘에게 작가 네이선은 “삶 자체에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하라.”(233쪽)고 조언합니다. 만약 작가님이라면 위험하긴 해도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면 모험에 뛰어들 건가요?

아버지가 된 이후 나는 가급적 내 자신이 신체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는 상황을 피하고자 합니다. 지적인 모험을 감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인물들이 알고 있는 진실이 소설에서 여러 번 뒤집힙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진실’은 무엇인가요?

 

‘진실’이야말로 제가 애착을 갖고 있는 주제입니다. ‘세상엔 3개의 진실이 있다. 나의 진실, 너의 진실 그리고 그냥 진실!’이라는 속담을 아주 좋아해요. 진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고, 각기 다른 관점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 중 어느 누구도 진실을 전부 알지는 못하고, 독자들마저도 마지막에 가서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이번 작품에는 소설에 작가에 대한 수많은 인용이 나와요. 은둔 작가 ‘네이선 파울스’도 모델이 있나요?


네이선 파울스는 J.D. 샐린저, 밀란 쿤데라, 엘레나 페란테, 필립 로스 등 여러 작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샐린저는 자신의 소설이 거둔 성공의 포로가 된 나머지, 더는 새 작품을 쓰지 못했어요. 기대 이상의 큰 성공이 오히려 부담이 되어 은둔의 삶을 택한 거죠. 쿤데라를 비롯해 언급한 작가들 대부분이 언론을 굉장히 경계했습니다. 몇십 년 동안 인터뷰라고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정도니까요. 문학 교수이자 작가로 정점에 서 있던 필립 로스는 소설을 더 쓰지 않겠다고 선언해 독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죠. 엘레나 페란테는 아예 얼굴을 세상에 드러낸 적이 없는 작가입니다. 한동안 로맹 가리가 얼굴 없는 익명의 작가로 지냈듯이 말이죠. 로맹 가리는 제가 흠모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에요.

 

작가가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2명을 꼽는다면요?

 

어머니와 국어(프랑스어) 선생님입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독서에 대한 제 열정 덕분에 자연스레 생겼는데요. 도서관 사서였던 어머니 덕분이었죠. 어머니는 독서를 좋아했던 제게 모든 종류의 문학작품을 섭렵해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 후, 저와 책은 즐거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죠. 그 관계는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어요. 점점 더 기술 지향적이고, 이미지의 범람으로 피폐해지는 사회에서 오히려 우리 사이는 더욱 끈끈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국어 선생님이 연 단편소설 쓰기 대회예요.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야기를 꽤 잘 지어내고 그 일을 좋아하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3 번 사진 Guillaume Musso (c)Emanuele Scorcelletti_D5B9883.jpg

ⓒEmanuele Scorcelletti

 

작가님도 슬럼프에 빠져 네이선처럼 절필을 선언하고 싶은 적은 없으셨나요? 글이 안 써질 때 주로 무얼 하시나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든 그렇지 않든 일단 글을 씁니다. 전 이른바 ‘영감’이라는 것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꾸준히 일을 하다 보면 결국 영감이 떠오르더군요.

 

좋아하는 경구, 또는 좌우명이 있나요?


저급함을 멀리하자. 저급함은 전염병이므로.

 

가장 집착하는 소재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면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나요? 아니면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히 변화를 거듭하고, 내일의 인간은 오늘의 인간이 아니고, 오늘의 인간은 더 이상 어제의 인간이 아니죠. 시간은 우리를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면서 자기 규칙을 따르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시간에 맞설 수밖에요.

 

소설 창작 이외에, 요즘 작가님의 머릿속에 맴도는 관심사는요?


두 아이의 교육입니다.

 

창작자에게 제일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독창성. 작가라면 자기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점을 찾아내야죠. 항상 남을 따라 하지만 말고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야 합니다.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기욤 뮈소 저/양영란 역 | 밝은세상
게걸스럽게 빨아들일 수밖에 없는 역대급 스토리와 악마적 반전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느 날, 죽은 한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고, 경찰의 섬 출입 봉쇄조치가 단행되면서 돌연 어둡고 불안한 그림자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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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노석미 “더 뺄 수 없는 상태가 제겐 ‘완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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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이상한 그림’. 노석미의 그림을 두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어울리지 않는 그림과 글의 조합, 거기서 비롯되는 왠지 모를 어색함,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되는 노석미의 그림을 이보다 잘 표현 수 있을까.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도시보다 자연이 편했던 노석미 작가는 40대 초반 경기도 양평으로 이주했다. 직접 땅을 찾아 터를 잡아 살면서 ‘아름답고 이상한 그림’들을 그리고 글을 썼다. 자신의 그림처럼 군더더기를 빼고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한 날들이었다. 오십을 앞두고 양평에서 보낸 지난 10년을 돌아봤을 때 섬광처럼 떠오른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매우 초록’. 10년 동안의 글과 그림을 묶은 책의 제목도 『매우 초록』이어야 했다.

 

매우 초록. 그 쾌감은 엄청나다. 길들에는 거의 인적이 드물다. 도의 접경 지역들은 대개 그런 것 같다. 지형이 험하고, 사람이 모여 사는 면내 같은 거점 지역으로부터 거리가 있다. 사람이 귀하게 보이고 그만큼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중략) 작은 강, 작은 길 등이 조화를 이루어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 길에 작은 트럭이 털털털 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내가 갖고 있는 네모난 틀 안에 잘 넣어보려고 하지만 항상 내 세계는 그것에 비해 초라하다.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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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함께 있을 때, 그 느낌이 좋아요

 

최근에 인터뷰를 많이 하셨더라고요. 힘들진 않으세요?


신간 나왔으니까 홍보해야죠. 생각보다 똑같은 걸 묻는 분들은 없어서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서울에 오신다고요.


두세 번 이상으로는 안 오려고 하고요. 한 번 올 때 두세 가지 일을 해요. 오늘도 일정이 많습니다. (웃음)

 

서울에 방문하면 꼭 하는 일이 있나요?


꼭 하는 일은 없고요. 대체로 친구들 만나서 밀린 수다를 떨죠. (웃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오면 여행 온 것 같아요. 제가 홍대 졸업했거든요? 그래서 홍대가 익숙했는데 요즘은 낯설어서 재밌어요. 이런 느낌 때문에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울을 보게 되고요. 예전에 서울 살면서는 관찰 안 했거든요.

 

10년 동안 쓴 글과 그림이 묶였어요. 책을 내야겠다고 언제 생각하셨나요?


양평으로 이사하는 이야기로 시작하잖아요. 딱 그 전까지의 이야기를 『서른 살의 집』이라는 책에 썼는데 그 책을 낼 때부터 다음 버전의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른 살의 집』이 일종의 열린 결말이거든요. 이후의 계획이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마무리 한 거예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책을 낼 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책을 내기 위해서 글을 쓴 건 아니지만, 출간을 염두에 두긴 했고요. 본격적으로 책 형태로 정리한 건 3년 전 출판사와 계약한 다음부터예요. 그동안 썼던 글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챕터를 만들어 정리했죠.

 

글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진 않더라고요. 의도한 건가요? 


집 짓는 이야기로 시작하니까 글에서 시간의 흐름이 보일 거로 추측하더라고요. 부제가 ‘40대 이야기’라 더 그런 것 같은데 그렇게 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자서전은 아니니까요. 내용뿐만 아니라 문장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을 살렸어요. 그래서 어떤 내용을 쓴 책이기도 하지만 문장이라고도 말하고 싶어요. 글을 쓰다 보면 ‘이 문장은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부제가 ‘어쩌면 나의 40대 이야기’예요. 왜 ‘어쩌면’이 붙었을까요?


출판사에서 프롤로그에 있는 문장을 부제로 뽑은 거예요. 원고를 다시 읽어봤는데 ‘아 나의 40대로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프롤로그에 ‘어쩌면 나의 40대 이야기’라는 문장을 넣었고요. 출판사에서는 그냥 40대 이야기라고 하면 진부하니까 그 문장을 고른 것 같아요. 화두를 잘 잡아야 하니까요. 저도 텍스트 작업을 하니까 형용사, 부사를 어디에 어떻게 쓰냐에 따라 뉘앙스가 얼마나 달라지는 잘 알죠. 재미있어요.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이지 않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표현을 접목하는 걸 좋아해요.

 

‘매우 초록’이라는 제목도 비슷한 느낌이에요. ‘시’ 같은 표현이랄까요. 


양평에 살면서 자주 보는 풍경을 그렸는데 그 풍경들이 너무나 초록색인 거예요. 다른 말이 필요 없었어요. 초록, 그린이라는 말 자체가 감탄사처럼 느껴지는 거죠. 그래서 이걸 그대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그린’이 아니라 ‘베리 그린’이라고 하고 싶었고요.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른 표현이에요. 알고 있던 단어도 아니고 원래 있는 단어도 아니죠. 2년 전에 한 전시회 이름도 ‘베리 그린’이었어요. 전시회 끝나고 책 제목 정할 때 ‘베리 그린’이라는 제목을 쓰고 싶었는데 ‘베리 그린’은 영어니까 ‘매우 초록’으로 바꾼 거죠.

 

어떤 글에서 작가님의 그림을 ‘아름답고 이상한 그림’이라고 표현했더라고요. ‘맞아 이거야’ 싶었어요.


아주 적확하게 표현하신 것 같아요. ‘이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관련 있겠지’ 하고 막연하게 연상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게 제 그림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죠.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단어가 같이 있을 때 일어나는 어떤 감정. 그런 걸 좋아하고 추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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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더 뺄 수 없는 지점’까지 가는 것

 

그림에 텍스트가 있는 게 작가님 그림의 특징이잖아요. 텍스트도 영감처럼 떠오르는 건가요?


맞아요. 어떤 상황에서 텍스트가 떠오를 때도 있고 이미지가 떠올랐다가 그 이미지와 연상되는 텍스트가 나중에 떠오를 때도 있어요. 텍스트와 이미지로 편집 작업을 하는 건데요. 이런 걸 할 때 재미를 느껴요.

 

‘더 뺄 수 없는 지점까지 가는 것’이 그림 그릴 때의 목표라고요.


더 뺄 게 없는 상태가 완성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려요. 그 상태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제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의 상태예요. 군더더기나 장식 없는 그림이요. 장식이 없어도 충분히 완성도가 있는 것들 있잖아요.

 

글에서도 그런 태도가 느껴졌어요.


드러나겠죠. 장식하는 거에 별로 자신이 없어요. 해본 적도 없고요. 장식이 많은 글을 읽을 때 피로를 느끼기도 하고요. 꼭 필요한 게 아닌 것들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잖아요. 그런 글이 많거든요. 심지어 장식이 전부인 것도 많고요.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안 좋아하니까 안 하려고 하죠.

 

뺄 수 있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도 하셨죠.


욕망이 많으면 머리가 아프잖아요. 내 것이 될 수 있는 건 머리를 아프게 하지 않아요. 그런데 내 것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헷갈릴 때 힘든 거잖아요. 이럴 때 판단을 잘해야 해요. 결국 자신을 잘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남의 건 잘 보이잖아요.

 

글을 쓰다 보면 나를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누가 읽어줬으면 좋겠고, 읽기에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 것만 올려요. 독자가 있다는걸 알죠. 그런데 기본적으로 어떤 작업을 한다는 건 무대에 벌거벗고 올라가는 거예요. 아무리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어서 자신을 숨기려 해도 독자들은 알죠. 저도 독자로서 전시를 보러 가면 다 보이거든요. 그린 사람의 수준이나 상태를 알 것 같아요. 이렇게 무서운 게 독자이고 관객이죠. 이런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 있는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콘텐츠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만큼 숙성됐는지 알아야죠. 그리고 숙성하려고 노력하는 게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박수받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작업을 하기가 정말 어렵죠. 여러 사람에게 노출되면 말이 많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시를 하고 책을 내는 건 결국 자신을 마주하는 일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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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마냥 뽀송한 게 아니거든요

 

많은 사람이 막연하게라도 자연 속에서 사는 삶을 꿈꾸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일단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명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도시의 삶은 생명체가 행복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죠. 그런데 여러 요인으로 사회적 동물이 되었고, 그렇다 보니 쉽게 할 수 없는 거고요. 사회적 동물에서 ‘동물’보다 ‘사회적’이 더 세진 거 아닐까요?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동물의 죽음도 많이 목격하신다고요. 


당연한 거죠. 자연이 마냥 뽀송뽀송하지 않거든요. 자연은 자연이기 때문에 슬퍼요. 생명체의 삶과 죽음은 그냥 슬프더라고요. 그런데 그거를 잊고 사는 거예요. 도시에서 살면 더 잊기 쉽죠. 내가 죽어가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자각할 시간 없이 살죠. 자연하고 같이 살면 죽음을 자주 목격하니까 자각하고 배우게 돼요. 저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이거든요. 목격할 줄 몰랐고, 몰랐던 시절과 많이 달라졌죠.

 

양평으로 이사한 이후로 그림도 환해졌다고 들었어요.


환경이 달라져서 그림이 밝게 바뀐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않겠나 싶어요. 원래 젊었을 때 그린 그림은 대부분 암울해요. 저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평균적으로 그래요. 그게 젊음의 상징 같아요. 젊은 작가인데 그림이 밝으면 이상한 거예요. (웃음) 젊을 때는 대체로 음울하고 뾰족하고 삐딱한 게 정상이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마모되고 둥글어지는 거죠.

 

그러네요. 자연스러운 변화군요.


반대로 나이 들었는데 음울하고 뾰족하면 또 그것처럼 꼴사나운 게 없어요. 작가로서도 젊었을 때는 마음속에 분노가 있으면 표출해야 하고 그 표출이 바로 내가 지향하는 예술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어떤 표출, 배설 상태 딱 거기까지인 예술을 하는데 젊은 작품이란 게 원래 그런 거 같아요. 밀도가 부족하고 완성도가 낮지만 뾰족하고 신선한 느낌. 어떤 게 더 좋다, 안 좋다 하기는 어렵지만요. 두 가지를 다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거리’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띄었어요. 작가님에게 중요한 키워드 같더라고요.


거리라는 주제로 작업을 많이 하긴 했어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한 건 맞아요. 거리는 관계에서 비롯된 단어잖아요. 관계가 항상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사람이고요. 그런데 상대방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 같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이럴 때 문제가 생기죠. 어떤 일치가 일어나면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힘들어요. 그렇다고 관계를 포기할 수 없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주목하게 된 게 ‘거리’인 것 같아요. 과연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하는 것들이요.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가늠하면서 사는 거 같고요. 예전에는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하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보면 아니고 그렇잖아요. 지금 내가 아는 게 항상 정답은 아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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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탐미(耽美)적인 사람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별로 없다고 쓰셨더라고요. 그래서 동물이 좋은 건가요?


동물과 상대적 개념으로 두는 건 아니고요. 탐미(耽美)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보니까 매사에 탐미(耽美)적인 태도를 갖게 돼요. 그게 어떤 저의 비극이고, 저와 비슷한 일을 사람들이 대체로 겪는 감정이죠. 아름다운 상태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관대하지 않은 거예요. 아름답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요.

 

어떤 부분에서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지 궁금해요.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시나요? (웃음) 조금 복잡한데…. 아름다움에 엄격한 태도를 취하니까 매사에 뾰족하고 상냥하지 않은 상태가 돼요. 매사 상냥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게 잘 안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고요. 인간관계 잘하는 사람이 보면 나 같은 사람은 재수 없는 거예요. ‘안 예뻐도 예쁘다고 하면 안 돼?’ 하겠죠. 힘들더라고요. 인간관계에서는 지켜야 할 선이 있잖아요. 그런 게 너무 어려워요. 감정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거기에 충실한 게 저한테 중요한데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는 거죠. 너무 복잡하니까요. 물론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과연 존재 자체를 온전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려운 숙제 같아요. 저도 인간이어서 그렇겠죠.

 

호칭에 관한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갤러니 노’에서 ‘미스 노’로 바뀌셨는데 지금도 양평의 마을에서 ‘미스 노’로 불리나요?


네. 여전히 ‘미스 노’예요. 또는 ‘노 선생님’이라고…(웃음) 양평에서 오래 살기도 했고, 작가라는 인식이 좀 생겨서 그런지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자꾸 저를 ‘선생님’이라고 해요. 별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이랑 거리가 더 짧아지지 않으니까요.

 

불리고 싶은 호칭이 있나요?


작가의 세계에서는 작가라고 불리는 게 편하긴 해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작가라고 부르면 이상해요. 제가 사는 마을에는 작가가 흔하지 않으니까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우리나라는 이름을 안 부르는 문화잖아요.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가 돼야 서로 이름을 부르죠. 친구가 돼도 나이가 다르면 언니, 동생이 되고요. 존대 문화가 없어지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싶어요.

 

온전히 이름으로만 불리는 일이 드문 것 같긴 해요.


예전에 종로에 있는 영어 회화학원에 다녔어요. 선생님이 처음에 영어 이름을 지으라고 하잖아요. 이름이 다 ‘마이클’, ‘톰’ 이래요. 어느 날 종로를 걷다가 회화반 친구를 만난 거예요. 본명을 모르니까 “마이클”하고 불렀죠. 종로 한복판에서 소리치며 마이클이라고…(웃음) 얼마나 편해요. 그 사람의 이름만 알면 되잖아요. 어떤 역할로 부르는 문화야말로 우리나라의 특수성인 것 같아요. 상황이 지나치게 계급적인 거죠. 이런 호칭 문제가 다들 불편할 텐데 사회적 합의를 거쳐서 바꾸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가님 영어 이름이 뭐였는지 궁금한데요.


제 이름이요? 두 개였는데 한 번은 줄리, 한 번은 잼이었어요. 먹는 잼(jam) 아니고 잼(zam)이요.

 

직접 지은 건가요?


둘 다 선생님이 만들어줬어요. 잼(zam) 영어로 보석이라는 뜻인데 제 이름 석미를 풀이하면 ‘아름다운 돌’이잖아요. 그래서 잼(zam)이라고 지어줬죠.

 

그러고 보니 이름이 아주 탐미(耽美)적이네요. (웃음)


무슨 그런 말씀을요. (웃음) 여자 이름에서 가장 흔한 게 미(美) 아닌가요? 우리 가족 돌림자가 ‘석’ 자였어요. 다 남자 형제이고 저만 여자인데 딸이니까 ‘석’ 자에 억지로 ‘미’를 붙인 것 같아요. 제 이름이 드물긴 해요. 동명이인이 별로 없고 사람들이 이름을 잘 잊지 않더라고요. 중고등학교 때 별명이 ‘돌미’였어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전시도 자주 하는데 혹시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짧은 미래만 결정해요. 내년 일정 정도요. 전시랑 출간 준비해야죠. 나이 드는 걸 체감하면서 막연하게 더 늙기 전에 다른 삶을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긴 하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지는 않아요. 이러다 또 자연스럽게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겠죠. 일단 현재 삶이 좋아요. 루틴이 생겨서 아주 편안해요. 남들이 보기엔 불편하게 사는 것 같지만요.

 

 

 

 

 


 

 

매우 초록노석미 저 | 난다
서로 얼굴을 익히고 가까이 지내는 일의 사귐. 자연과 사귀게 하는 책, 사람과 사귀게 하는 책, 동물과 사귀게 하는 책, 그렇게 나 자신과 사귀게 하는 책. ‘매우 초록’은 어쩌면 그 사귐이 통한다 하였을 때 유레카 하며 알아먹고 내뱉는 우리만의 암호 우리만의 구호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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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안보윤 “누구도 그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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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아이를 수련원 화재로 잃게 된 ‘주혁’, 직장 내 성폭력과 일련의 일들로 고통 받은 ‘강연’, 꼭 한 마디를 더 하고 부당한 일에 반드시 목소리를 내는 ‘해림’과 그의 행동을 번번이 말리고 마는 언니 ‘해원’. 이 사회의 무수한 폭력과 부조리를 날카로운 언어로 그려온 소설가 안보윤이 장편소설 『밤의 행방』 에 불러 모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금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어서 아프고, 사회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어서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다.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제10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소설집 『소년7의 고백』 , 장편소설 『사소한 문제들』 , 『알마의 숲』등을 통해 사회의 그늘진 곳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온 안보윤은 『밤의 행방』 을 이전 작품과는 달리 “사건보다는 사람의 입장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고민한 것은 이 소설이 지금도 ‘밤’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되는 방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인쇄가 들어가기 전까지 많은 대사를, 문장을, 조사 하나까지도 고쳐 써야 했던 이유다. 그리고 소설가는 말했다. 밤에는 결국 끝이 있으며 밤이 끝나면 반드시 새로운 날이 오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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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죽음이 도처에


1999년 6월 30일에 발생한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건이 오래 남아 소설을 쓰게 되셨다고요.


사건 당시에는 놀랐을 뿐이었지만 차츰 깨달았던 것 같아요. ‘나 상처를 받았었네’라는 신기한 깨달음이었는데요. 왜 계속 떠오르고,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게 되고, 유가족 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가 궁금한지 생각하다가 그제야 이것도 하나의 상처이자 트라우마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동시에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굉장히 많이 상처 받은 사건임을 알았죠. 그리고 올해가 20주기잖아요. 천천히 지난 20년을 돌아봤는데요. 비할 사건이 너무 많았어요. 어디선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또 상처를 받았고요. 그러니까 이것을 꼭 써야겠다, 보다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라는 고민이 훨씬 더 많았어요. 때문에 소설을 결말도 ‘이것이 우리의 상처였다’는 식이 될 순 없었죠. 그보다는 수많은 죽음이 도처에 깔려 있는데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앞서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사건에 내가 상처를 받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언제였나요?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은 씨랜드 사건 유족들이 다른 사건 유족들을 찾아왔다는 기사를 봤을 때였어요. 씨랜드 이후 대구 지하철 참사도 있었고, 세월호도 있었잖아요. 그때마다 이분들이 오시는 거예요. 천안함 유족 분들도 오셨고요. 그게 너무 마음 아프더라고요. 이분들을 지금 움직이게 하는 건 도대체 어떤 동력일까, 생각했죠. 씨랜드 참사 때 쌍둥이 딸을 잃으신 분이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을 세우셨어요. 이 사실이 감동스러우면서도 그 모든 장면들이 제게는 상처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여러 참사가 일어났고요. 반복되는 뉴스를 보면서 쓰는 일이 참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넣어야 하는 소재가 너무 많았어요. 다뤄야 할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그 사건이 더 중요해서는 아니거든요. 이야기 구조에 맞춘 것뿐이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더 참담하고, 그렇지 않아서 덜 참담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마치 경중을 나누는 것 같아서 이상한 죄책감이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일단은 저에게 너무 오래 얼룩으로 남아 있었던 이야기부터 천천히 해나가자는 마음으로 진행을 했어요.

 

참사와 관련해 “만들어진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 만들어진 죽음과 관련해 특별히 기억 나는 뉴스도 있으세요?


유족 분이 재단을 만들었단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 사건과 맞물려서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게 있었어요. 유족 분들이 참사가 일어난 공간에 추모를 하러 가셨다가 거기 불법 시설물이 들어가 있는 것을 목격하고 신고를 해요. 신고하고 보니 참사 당시 청소년수련원의 주인이 또 그곳에 불법으로 만들어낸 시설물을 운영하고 계셨던 거예요. 자신들의 아이들을 기리기 위해 갔다가 목격하고 신고했다는 것이 너무 지옥 같았어요. 결국은 만들어진 것을 또 만들고, 또 만들고 있는 거예요. 소설에서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안 쓰려고 정말 노력했어요. 굳이 단어로 명명하지 않아도 이미 느끼는 부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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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그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돼


제목이 『밤의 행방』 이잖아요. ‘작가의 말’에서는 어떤 ‘밤’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지만 막상 소설 안에는 특별히 밤에 관한 이야기가 드러나지는 않아요.


처음 가제는 ‘모든 것은 핸드메이드’였어요. 그런데 이 제목이 ‘만들어진 죽음’과 너무 딱 맞았어요. 내내 그 제목에 대한 낯섦이 제게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생각한 것은 과연 죽음이 어디로 갈 것인가, 였어요. 이 사람은 과연 이 죽음을 따라가게 될까, 라는 문장들을 쓰다가 ‘죽음의 행방’이라는 말이 떠올랐죠. 그러다가 또 이들에게는 반드시 물리적, 신체적인 죽음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죽음’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제가 생각한 의미와 조금 달라서 죽음에 준하는 어둠의 형태를 떠올렸고, 그렇게 지금의 제목을 결정하게 됐어요.

 

아이가 화를 입은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달라는 시위에 매일 같이 나가는 아내 ‘영주’에게 남편 ‘주혁’이 잔인한 말을 뱉잖아요. 유가족이 살아가는 삶의 또 한 면을 본 것 같았어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상처 받는 일들이 있겠구나, 생각했고요. 


 “똑같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서로를 조금도 위로해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요. 유족, 피해자라는 단어로 사람들을 한꺼번에 묶을 때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이들끼리도 서로를 힘들게 하고, 상처 주게 된다면 어떻게 버틸지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팠고요. 그렇지만 이런 부분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가 무지한 부분에서 겹겹이 또 다른 상처가 새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서 넣은 장면이에요. 주혁의 대사를 엄청 오래 고민했어요. 어떻게 하면 관련된 분들이 상처를 덜 받으실 수 있는 말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밖에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오래 머물러 있던 장면이나 대사가 있는지 궁금해요.


‘해림’에게 애착이 많이 갔어요. 그런데 해림에게 “이제 좀 적당히 해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도 저인 거예요. 이런 입장 때문에 내내 해림이가 너무 안타까웠고, 또 그래서 해림이가 하는 대사나 행동을 아주 정성껏 쓰고 싶었어요. 해림 같은 인물은 지금도 분명하게 사회에 존재하시거든요. 조금이라도 그분들이 힘을 받으시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그러면서도 죄송스러웠죠. 결국 해림이는 죽었으니까요. 해림을 “한 마디를 더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그 한 마디를 더 하시는 분들이에요.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쌓여서 정말 힘들게 세상이 조금 바뀌는 거죠. 그런데 어떤 때는 저도 모르게 해림의 언니 ‘해원’이 그랬던 것처럼 ‘너무 그러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다잡는 마음도 조금 있었어요.

 

대부분의 독자가 그럴 텐데요. 해림과 해원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내 안의 해원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기도 했어요.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닿아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그럴 거예요.


그래서 해원을 가족으로 설정했어요. 해원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해원은 부모가 힘들어 하니까, 동생이 걱정되니까 그러는 거고 그건 너무 당연해요. 오히려 너무나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방식의 사람이죠. 지금 사람들이 여러 참사를 경험하면서 목소리를 내고, 나름대로 위로의 뜻을 전달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잖아요. 이것은 ‘이제 더 이상은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의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해원에게 꼭 그 대사를 주고 싶었고요. 앞서 어떻게 움직여왔고, 어떤 걱정의 말이 이기적인 발언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누구여서도 안 된다는 말을 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게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지 않나 생각도 들었고요.

 

여자가 한 음절씩 쐐기를 박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들이 더 이상 아무도 죽일 수 없게 만들 거예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돼요. 제 동생뿐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요.(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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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서 있는 연대


직장에서 동기의 성폭력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주연누나’를 어떻게 읽느냐도 중요한 문제였어요. 지나친 선의, 혹은 악의 없는 어떤 행동이 실은 악행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처음을 이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소설 진도가 너무 안 나갔었어요. ‘미러링’도 신경을 써야 했고, 유사한 사건도 너무 많아서 그분들이 상처 받지 않은 대사를 써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죠. 퇴고하면서 정말 많이 고친 부분이기도 한데요. 주연누나는 지나친 선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실은 상처 받은 사람이기도 해요. 이전 회사에서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내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뻗어나갔다고 생각해요. 주연누나라는 인물을 넣으면서 이야기가 복잡해졌다는 생각을 약간 했었는데요. 꼭 써야만 했어요. 단지 직장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데에서 멈추는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고요. 누군가를 돕겠다는 것이 실은 누군가를 과도하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냥 넘길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또 다른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이런 경계선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주혁은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는 인물인데요.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는 순간이 있어요. 그러면서 ‘제발 죽지 말아줘’(185쪽)라고 생각하죠. 이 변화가 참 놀라웠어요.


저는 그 말이 갑자기 생겨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히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고통스러워하고, 장례식장에서 머리를 찧고 괴로워하는 아내 영주를 보면서 한 생각일 거예요. 영주에게, 자기 스스로에게, 또 누군가에게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일 텐데요. 상처로 훼손된 부분이 너무 커서 차마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 말이었을 뿐이었을 거예요. 또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한 마디였을 수도 있겠죠. 그 말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올라온 말이었으리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주혁이 죽음을 계속 읊게 되잖아요. 그러면서도 당사자들을 도울 수는 없어요. 그 입장에서 주혁이 느끼는 것도 많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죽지 말아달라는 말은 『밤의 행방』 을 통틀어 작가님이 가장 직접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거든요.


네, 저는 누군가가 죽고 나서 따라 죽는 일들이 너무 무서워요. 너무 안타깝고요. 저 사람을 죽인 것은 본인의 마음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도 너무 괴롭죠. 괴로워하는 유족 분들을 보면서도 너무 불안하고 아팠던 것 같은데요. 그 유족 분들이 단단한 표정을 하고 더 이상 같은 피해를 입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하시고, 또 다른 위로를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필요한 것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또 다른 사람이 죽지 않게 붙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주혁이 아주 오랜만에 영주를 찾아가면서 소설이 끝나요. 소설의 마지막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많이 고민하셨던 것 같아요.


완벽한 위로가 아니라 나란히 서 있는 연대를 생각했어요. 그저 나란히 앉아 있어주는 것. 그것은 씨랜드 참사를 겪은 분들이 이후의 참사를 겪은 유족을 위로하러 왔던 장면에서 본 것이고요. 거기서 정말 많이 감동을 받았었거든요. 저것만으로도 인간은 살아갈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누군가가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더라도 누군가가 함께 옆에 있어주고, 말 걸어주고, 함께 걸어가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어쩌면 완벽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


죽음을 보는 신비한 나뭇가지 ‘반’은 어떻게 탄생한 캐릭터인가요? 반 덕분에 주혁이 조금 경쾌해졌어요.


얘는 되게 이기적이고, 어리고, 어떻게 보면 유아기적인 사고로 계속 말을 하죠. 뻔뻔하고요. 처음에 반을 10대보다 어린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는 주혁이 그토록 그리워한 평범한 삶 때문이었거든요. 아이와 말다툼도 하고 대화하는 일을 주혁이 경험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 깔려 있었고요. 또 죽음은 외면이나 무지에서 오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어서요. 가장 무지한 죽음의 안내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었어요. 주혁의 가까이에서 쓸데없는 말을 했으면 했죠. 주혁은 너무 진중한 질문에만 파묻혀 있으니까요.

 

소설을 쓰시면서 상상했던 가상의 독자는 어떤 분들이었나요?


지금까지 존재했던, 지금도 존재하는 해림이들요. 그분들이 해림이라는 인물에게 동조하는 해원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했어요. 미안하다고 말하는 해원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전달된다면 좋겠죠. 그렇다면 고공 농성하시고, 1인 시위 하시는 분들의 마음에 조금 평화가 깃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졌었어요.

 

작가님이 갖고 있는, 계속해서 쓰게 될 주제는 무엇인가요?


가장 단순하게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예요. 모든 질문은 다 거기서 시작해요. 이런 사회에서, 이런 태도와 질문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제 주제가 될 것 같아요. 살아가는 데 늘 한계에 부딪히고, 하나의 선택만을 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거듭하는 것만이 삶의 태도일 수밖에 없고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파편화되어서 튀어나올 때마다 소설을 쓰는 것 같아요. 답은 아마 끝까지 안 나오겠죠. 아주 작은 퍼즐들만 하나씩 튀어나올 텐데 그걸 가지고 계속 쓰겠구나 생각해요.

 

 

 

 

 

 

 

 


 

 

밤의 행방안보윤 저 | 자음과모음
점집에 찾아든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맞물리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방문객들과 관련된 죽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파헤쳐지며, 그들 각각의 시선을 통해 사연들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쌓아가며 사회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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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준 박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는 것도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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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의 테오도르 준 박은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힘든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그저 물질적인 유기체일 뿐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생의 근본적 물음은 내내 그를 괴롭혔다. 이 궁금증의 해답을 찾고 싶었던 그는 “10년간 묵언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끌리듯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마침내 송담 스님과 처음 마주한 자리, “묵언수행 끝에 무엇을 깨달으셨냐”는 그의 질문에 스님이 답한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심을 다해 참선한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재미교포 테오도르 준 박은 송담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출가해 환산(還山) 스님이 되었다. 30여 년의 승려 생활 중, 15년을 송담 스님의 시자로 일한 그는 얼핏 ‘성공한’ 스님의 길을 걸으며 또 한 번 고민에 맞닥뜨린다. 인생의 진리를 찾아 한국에 왔던 목적을 잃어버린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환산 스님은 환속해 다시 테오도르 준 박으로 돌아왔다. 승복은 벗었지만 깨달음을 위해 참선하는 삶은 그대로 남았다. 그가 펴낸 『참선 1ㆍ2』에는 마음을 다스리고, 삶의 근본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기술인 참선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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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방송, 워크숍 등을 통해 오랫동안 대중에게 참선을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나아가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나의 스승이신 송담 큰 스님께서 현대인들에게 참선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셨다. 송담 큰 스님은 현대인들, 특히 국내의 젊은 사람들과 외국인에게 참선을 알리는 일에 관심을 갖고 계셨다. 그분의 뜻을 받들기 위해 포교활동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책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큰 스님께 배운 참선법을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침서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제목도 있는 그대로 ‘참선’이라 정했다.

 

참선을 하게 된 과정부터 스님으로 살아온 인생과 그 후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에세이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 책을 쓸 때는 참선에 대한 교과서가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출판사에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가야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다고 조언했다. 사실 송담 큰 스님의 뜻을 담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서 집필 초기에는 그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주로 썼다. 그랬더니 종교적인 책이 되더라.(웃음) 그래서 내가 왜 이러한 삶을 살게 됐고, 어떻게 참선법을 좋아하게 되었는 지에 대한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필의 방향을 바꿨다. 덕분에 일반 대중들도 참선의 가치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책의 맨 앞장에 어머니, 아버지께서 독자에게 쓴 메시지가 있다. 부모님의 성함과 메시지를 넣은 이유가 있나.


거의 30년간 스님 생활을 하느라 집을 나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지가 너무 오래됐다. 그동안 불효자였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기쁨을 드리고 싶었다.

 

불교방송에서 참선을 가르치는 방송을 1년쯤 진행했을 때, 불현듯 ‘이제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TV프로그램 녹화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송담 큰 스님을 처음 뵈었던 스물 세 살의 내가 TV 속 환산 스님을 보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대답이 바로 떠올랐다. ‘저 사람은 광대다. 진지한 구도심이 있다면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겠나’라고 생각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수치심이 들며 그만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30년의 삶을 바친 일인데, 어떻게 바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나.


그만 두어야한다는 순간은 금방 알게 된다. 인생의 참뜻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추종자는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설명을 들으려 하지만 구도자는 자기의 의지와 체험으로 그 뜻을 찾아나간다. 내가 처음 송담 큰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는 구도자였던 것 같다. 그런데 출가를 하고 30년의 세월이 흐르며 점점 외부의 무언가에 의지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내가 유지하고 지켜야하는 본질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절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3년간 TV프로그램을 출연한다는 약속이 있었고, 나도 송담 큰 스님의 법문을 프로그램에서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그분의 법문을 영어로 번역해 자막을 삽입해 방영하는 활동을 마친 뒤, 마지막 촬영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 모든 소임을 내려놓고 절에서 나왔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프로그램이 18개 나라에서 방송되었다고 한다. 그 정도 했으면 큰 스님이 주신 임무를 나름대로 충실히 수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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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스님에게 환속하겠다는 결심을 고백한 날이 생일이었다고.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생일이었다. 송담 큰 스님께서 절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스님들을 암자로 부르신 날이다. 큰 스님께서 많이 연로하셨기 때문에 절에서 맡고 계신 직책을 내려놓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하실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 틈을 타 나도 내 뜻을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송담 큰 스님께서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나를 부르셨을 것이다. 그날이 마침 생일이었다는 게 참 신기하다.

 

30년간 몸담았던 절을 떠났는데, 환속한 소감이 어땠나.


신기했고 굉장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너무 낯설었는데,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새 삶을 시작한다는 증거일 테니까. 영화 <킬빌>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새로운 각본을 짜서 제출할 때, 당황스럽고 민망하지 않으면 스스로 솔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감 있게 각본을 보여줄 수 있을 때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라고. 나도 그런 마음이었다. 낯설고 불안하다는 건, 새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좋았다.

 

 

참선은 마음을 이끄는 기술이다


참선은 종교적 수행법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참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마음이 속상한 순간, 조금도 기다릴 필요 없이 즉시 대처해 맑은 정신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는 실용적인 방법이다. 참선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이끌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참선을 하면 내면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괴로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참선할 필요가 없다. 내가 알기로 여러 가지 명상법 중에 이런 장점을 가진 건 참선뿐이다( 『참선 1』 246쪽)’라고 썼다. 일반적인 명상과 참선은 어떤 차이가 있나?


다른 명상법들은 ‘나’가 아닌 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림, 촛불, 소리, 호흡 등이다. 하지만 참선은 관찰자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고, 조금만 연습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바로 적용할 수 있다. 보통 명상이라 하면 어떤 상황에서 탈출하고 벗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참선은 그 상황에 더 집중하여 극복할 수 있게 만든다. 특별히 시간을 내서 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는 것이다. 


나는 7년 전부터 줄곧 바쁘게 지냈다. 일주일에 한 번은 포교를 위한 방송 촬영을 했고, 세 군데의 대학에서 지도법사를 했다. 주말에는 청년 참선 법회 모임이 있었고, 송담 큰 스님의 시자역할도 수행했다. 매일 멀티태스킹하는 상황이었다. 선방에 가만히 앉아서 참선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운전하면서 참선하고, 연설하면서 참선하고, 지하철에서 참선했다. 실시간으로 참선을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확인했다. 

 

“이뭣고”라는 화두 들기의 중요성을 거듭 이야기했다. 참선에서 “이뭣고”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이뭣고”라는 세 글자는 참선의 마음 상태로 들어가게끔 하는 장치다. “이뭣고”를 내뱉음으로 인해 마음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릴 수 있고, 관심을 마음의 근원으로 돌릴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의심이 일어난다. 알고 싶은데 알 수 없고,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상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마음이 막힌 것인데, 그 의심을 일으키고 관조하면서 유지하는 게 참선의 핵심이다. “이뭣고”는 그 모든 걸 일으키고 유지하는 장치이기에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참선을 알려왔는데, 기억에 남는 참가자들이 있다면.


환속을 하기 몇 년 전, 페이스북에서 초청을 받아 참선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신제품 개발자들이었다. 워크숍이 끝나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은 나를 종교인이 아닌 기술자로 봐주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을 가진 전문가라는 거다. 또,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점을 뛰어넘기 위해 참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목표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초월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다. 그걸 가장 방해하는 장애물은 자신의 생각과 믿음, 고정관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과 맞지 않는, 그러면서도 힘이 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배우고 싶어 한다. 의식의 영역을 넓히는 방법을 항상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깊은 목적을 가지고 참선을 배우고 싶어 하고, 참선을 정신적인 과학이자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명상이 떠오르는 시대다. 현대인들에게 명상이 왜 주목받고 있을까.


요즘은 업무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감당하지 못할 양의 정보가 순식간에 쏟아진다. 그 속도에 압도되는 것 같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거나 극복하지 못하면서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이 늘고, 임상적으로 어떤 진단을 받지 않더라도 느낌상 힘들다고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마음을 달래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되고 수시로 아프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인 힘을 키우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지는 것 같다. 지난 20년간 소위 명상이 주류 문화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과거에는 히피족이나 극소수의 예술가, 철학자만 명상을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상을 알고 있고 실생활에 적용한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불교가 자리 잡고 있으니 멀리 가서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다. 

 

참선이 필요한 순간은 마음이 힘들 때일 것이다. 하지만 괴로운 생각이 들 때는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 참선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분들은 삶이 너무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 중에 지나치게 자책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이 있다. 성공이나 실패에 크게 연연하며 왜 나는 참선이 잘 안 되냐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참선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할 순 없다. 어린 아이를 대하듯 어르고 달래가며 익혀야 한다. 잡념이 일어나고 자세가 불편하고 호흡이 안 되는 건 당연하다. 부처님도 처음에는 부처님처럼 참선하지 못했을 거다.(웃음) 사실 초심자는 참선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참선이다. 일단 하려는 노력이 잘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해보길 바란다. 참선에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다.

 

참선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스리기 힘든 감정이 있나.


너무 많다. 왜 참선을 배우려고 했겠나. 남들보다 성격이 안 좋으니까 그런 거다.(웃음) 여전히 화를 내고 뜻대로 안 되면 속상하고 남 탓하고 질투한다. 누구나 그런 생각이 일어날 수 있지만 참선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그런 마음이 일어났을 때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느냐에 있다.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고 해서 성격이나 인격이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다만 이걸 다스리는 방법을 교육받을 기회가 있었나, 얼마만큼 연습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어쨌든 참선TV’ 채널을 시작했다. 어떤 콘텐츠를 다룰 예정인가.


질문을 받아 구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한 참선법을 알려줄 예정이다. 내가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다루는 영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참선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을 알려주는 채널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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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감정, 인격이 아닌 교육의 문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참선을 알리며 수행하는 현재의 마음은 어떤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사람들은 성직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기대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실망을 하게 된다. 스님의 신분으로 참선을 말할 때는 내가 종교의 대변인이라는 생각에 부담감이 많았다. 지금은 참선에 대해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가 더 많은 이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루 중 집중해서 참선하는 시간이 있나.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침, 저녁으로 매일 한다. 더 하고 싶다. 늘 더 하려고 노력한다.

 

안정된 미래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도 클 것이다.


당연히 불안하지만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불안감은 수행의 엔진이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종류의 불안은 내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죽을까봐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따라서 살아있으니 불안감이 드는 게 당연한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생로병사의 과정 안에 갇혀있으니 말이다. 미래가 불확실하니 겁이 나고, 때로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화도 난다. 그런데 화의 기운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긴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참선을 통해 그 에너지를 올바르게 쓰면 되는 것이다. 나는 불안하기에 오히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편하면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낄 것이다.

 

기쁘거나 즐거운, 긍정적인 감정으로 마음이 들뜨는 것도 경계하는 편인가?


좋을 땐 그냥 좋다. 나는 단순하다. 표정관리도 잘 못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어린 아이같이 웃고 좋아한다.

 

환속 후 요가를 배우고 있다고. 요가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처음에는 허리가 안 좋아서 치료를 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몸이 이완되는 자세를 이해하게 되고, 호흡법도 더 정확하게 배우기 때문에 참선을 이바지하는 데 있어 정말 좋았다. 요가를 하면 참선이 더 쉬워진다. 구체적인 자세를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선은 허리를 펴고 앉는 것 외에는 특별한 자세를 배우지 않기 때문에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요가는 나에게 무척 유용하고 고마운 운동이다.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할 계획인가?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절에 있을 때와 똑같다. 계속 참선을 하고, 참선을 알릴 것이다. 또 2월에는 참선을 어떻게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매뉴얼 책 『어쨌든 참선』이 출간될 예정이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참선 1?2권보다 훨씬 중요할지 모른다. 참선 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고, 체계적으로 생활에 적용하는 기술을 담았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긴장하지 않고 싶을 때,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등 세부적인 상황을 나누어 참선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참선을 하는데 유용한 참고서가 되길 바란다.

 

앞으로 참선을 접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불행하고, 외롭고, 좌절하게 되는 마음의 어려움은 방법만 알면 반드시 벗어날 수 있으니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드는 건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고, 연습하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가짐과 생활을 바꾸고 향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초보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활구참선법


학교, 직장, 심지어 대중교통 안에서도 참선을 할 수 있다.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괴로운 순간, 그 자리에서 곧장 다음의 방법을 따라하면 된다.

 

* 자세
- 먼저 의자에 앉아 있다면 상체를 등받이에 기대지 말고 의자 좌석 중앙에 엉덩이를 대고 허리를 곧게 편다.
- 두 발은 바닥에 붙이고 무릎이 직각이 되게 한 뒤, 다리를 골반 넓이로 벌린 다음 몸이 의자가 된 듯 발목과 무릎, 무릎과 상체가 모두 수직이 되게 한다.
- 등을 곧게 펴고 앉은 뒤 양쪽 어깨를 귀까지 바짝 들어올렸다가 툭 떨어뜨린다. 이때 턱을 살짝 당겨 정수리가 천장을 향하게 하면 척추가 곧게 펴진다.
-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 가장자리를 아랫배(단전)에 대고 그대로 편안하게 넓적다리 위로 내린 뒤, 그 위에 왼손을 얹고 양쪽 엄지를 맞대 둥근 무지개 모양을 만든다.
- 눈은 감지 말고 편안하게 뜬 상태로 정면을 바라보면, 턱을 당겼기 때문에 시선이 전방 2,3미터 바닥을 향할 것이다.
- 혀끝을 윗니 뒤쪽 입천장에 살짝 대고 몸의 긴장을 푼다.

 

* 호흡
- 자세가 편안해지면 복식호흡을 시작한다. 먼저 2,3초간 길고 부드럽게 코로 숨을 들이쉰다.
- 코로 숨을 들이쉴 때 마치 공기가 배에 채워지는 것처럼 아랫배를 부드럽게 내밀어보자. 이때 들이쉬는 공기가 배꼽에서 6센티미터쯤 아래 지점까지 쭉 내려간다고 상상해보자.
- 배에 공기가 80퍼센트쯤 채워졌다고 느껴지면 그 상태로 2,3초간 숨을 참다가, 숨을 들이실 때보다 더 길게(약 3,4초) 코로 숨을 내쉰다. 이때 아랫배를 안으로 끌어당긴다.
- 숨을 내쉴 땐 배꼽을 척추 쪽으로 끌어당겨 아랫배에 들어 있는 풍선의 바람이 빠져나간다고 상상해 보자.

 

* “이뭣고?” 화두 들기
- 바른 자세로 복식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면 된다.
- 이때 “이뭣고?”는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어떤 생각을 떠올릴 때 내 안의 또는 내 의식 속의 무엇이 그 생각을 만드는가?’ ‘생각을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뜻이다.
- “이뭣고?”를 할 때 마지막 음절인 ‘고’를 숨이 다할 때까지 길게 끌어준다.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 내쉬며 “이뭣고?” 한다.
- 이때 음절은 중요하지 않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얼마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인가가 중요하다. 자신의 의식을 깨워 살아있는 질문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익숙해질 때까지 소리 내서 연습해보자.

 

『참선1』 중에서

 

 

 

 

 

 

 


 

 

참선 1테오도르 준 박 저/구미화 역 | 나무의마음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가고 사회가 온전히 기능하려면 꼭 필요한데도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그 위험한 공백을 메우기 위한 책이다. 참선을 ‘행복으로 가는 새로운 공식’이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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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원재 “기본소득제, 합의만 한다면 실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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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노동자를 모을 필요가 없어졌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무인화, 자동화로 노동을 대체한다. 메신저, 이메일로 업무를 할 수 있으니 자리를 더 만들 필요도 없다. 필요한 인력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그 업무를 진행할 사람을 일시적으로 고용하면 된다. 개인의 노동은 그만큼 불안해진다. 『소득의 미래』 에서 이원재 LAB2050 대표는 『자비 없네 잡이 없어』의 자료를 인용하며 전체 노동자를 정규직 여부, 대기업 여부, 노조 유무 등 세 가지 기준으로 분류했을 때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노동자는 7.6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힌다. 나머지 92.4퍼센트의 소득과 삶은 어디로 갈 것인가. 『소득의 미래』는 직장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소득의 개념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사회가 어떤 합의를 해야 하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원재 대표는 공무원뿐 아니라 모두의 소득이 공무원 소득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적 기본소득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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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적자 구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득의 원래 정의는 무너지고 있다”(12쪽)고 강조했어요. 달라지는 소득의 개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이 뭔가를 기여하고, 그에 대해 응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소득에 대해 지금 갖고 있는 통념인데요. 그런 경우는 사실 많지 않아요. 사회가 심은 일종의 환상이죠. 워낙 근로윤리가 강하고요. 기여에 대한 보상을 소득이라고 강하게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산 적이 없어요. 노동조합이나 정부에서 협상을 하거나 정책을 펼 때도 4인 가족 생계비 기준으로 했잖아요. 한 명의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면서 4인 가족 생계비를 얘기하는 것은 기여에 대한 보상이라는 전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죠. 또 나이가 들면 점점 임금이 높아지는 호봉제 임금 체계도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제도로 자리 잡고 있었어요. 결국 땀 흘린 자만이 먹을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환상을 우리 사회가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고요. 실제는 원래부터 그 통념과 거리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통념이 더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첫째, 노동을 더 투입해야 하는 경제 체제가 아니에요. 이미 1990년대 후반 인터넷 경제가 시작되고부터 노동 투입에 의존한 성장은 어렵다고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 다 말을 했고요. 그에 더해 지금은 고도화된 자동화 기술이 나오면서 노동 투입으로 경제성장을 이루려는 게 비효율적인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어요. 그러니 개인의 기여, 노동이라는 것이 아주 낡은 이데올로기가 되는 거죠. 또 한 가지, 한 명의 가장이 세 명의 피부양자를 부양한다는 모델 자체가 깨지고 있어요. 성인 남성 한 명이 아내와 자식 두 명, 조금 더해 부모 2-4명까지 부양해야 하는 ‘가족 내 재분배 모델’이 지금은 2인 가족, 1인 가족으로 다 분해되고 있죠. 셋째가 가장 많이 목격하는 요인인데요. 일자리가 불안해지는 겁니다. 전 세계가 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특히 더 심해요. 제조업 고용이 고용의 중추를 이루는 국가인데 이것이 계속 이어지기는 어려우니까요.

 

일자리 불안 관련해 서비스업 종사자의 증가도 중요하게 짚었는데요.


제조업 고용 등이 다른 분야 고용으로 많이 옮겨가고 있는데 대표적인 분야가 도매, 소매, 음식, 숙박, 사회복지서비스 등 서비스업이에요. 편의점 아르바이트, 음식점 서빙, 마트 계산원, 사회복지사 등으로 일하는 분들인데 다 열악하죠. 또 우리나라는 자영업 비중이 굉장히 높거든요. 치킨집 사장이나 편의점 주인뿐 아니라 디자이너, 소프트웨어 개발자도 포함되는 거고요. 이분들 소득이 대부분 불안정해요. 절대적으로는 소득이 조금씩 나아지긴 합니다. 불안정성이 커지는 거죠. 그런 상태에서는 이전의 소득 개념으로는 살 수 없어요. 소비는 일정한데 기여에 맞춰서 보상을 한다면 사람이 살 수가 없게 돼요. 인생의 적자 구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다들 봉착하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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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인, 여성, 청년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했거든요. 말씀하신 4인 가족 중심의 분배 체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논의가 계속 정규직, 4인 가족 등에 머물게 되는 거예요.


여성, 청년, 노인이 대표적으로 인생의 적자 구간에 있는 분들이 많은 영역이죠. 과거에는 가족 내 재분배로 그걸 해결해왔어요. 가족 중 한 명이 정규직 노동자로, 전일제로, 호봉제로 평생 일을 하면서 이분들에게 가족 내 재분배를 통해 생계를 해결해줬죠. 하지만 지금은 이게 깨지고 있잖아요. 가족 내 재분배가 안 되면 이분들은 어떻게 적자 구간을 메워요? 정규직 호봉제 일자리가 줄어드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먼저 문제가 생기는 거죠.

 

지금 많이 논의하고 있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어쩌면 해답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전면적인 해답은 될 수 없어요. 물론 똑같은 일을 하는데 임금 격차와 처우 격차가 있다면 당연히 그건 바꿔야 하고요. 하지만 그것만 얘기하는 순간 기여가 없는 사람들은 논의에서 빠지게 되잖아요. 구조적으로 기여가 없는 사람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기여가 있는 시기와 없는 시기를 계속해서 맞게 되는 상황일 때는 다른 답이 필요하죠. 사실 공공기관 정규직이라는 게 소득을 평탄하게 해주는 거거든요. 기여를 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지만 기여한다고 더 버는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덜 버는 것도 아닌 것이 공무원이잖아요. 제 얘기는 소득은 공무원 소득처럼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공무원뿐 아니라 모두의 소득이 말이에요.

 

미래에도 ‘코끼리’ 같은 기업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벼룩’처럼 한 곳에 종속되지 않고 자리를 옮겨가며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어요.


이미 상당히 그런 사회로 왔는데 더 그렇게 되겠죠. 대기업, 공공부문,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 기업 등 코끼리는 계속 있겠지만 플랫폼의 플레이어나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일하는 소기업 종사자, 사회적 기업가들 등 벼룩이 더 많이 생길 거예요. 갈등도 심해지겠죠. 엄청 과감한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해요. 예컨대 택시 기사 중 연로하신 분들이 많다면 연금을 보장하고, 차차 교체하는 방식으로 가야죠. 사회 전체적으로는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고요.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는 부분은 길을 터서 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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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일단 없어져야죠

 

보편적 기본소득제란 모든 국민 개인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정기적으로 조건 없이 지급하는 제도다. 가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물품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현금으로, 한꺼번에 주는 게 아니라 생활비로 쓸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일을 하건 하지 않건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지급한다. 모든 개인이 기본소득 액수만큼의 실질적 자유를 얻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345-346쪽)

 

‘보편적 기본소득제’라는 개념이 직관적인 만큼 즉각적인 비판도 나오는 것 같아요. 책 후반부에 이에 대한 반론을 상세히 다뤘는데요. 선별 복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복지 함정과 행정 효율성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 정도 되는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되려면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나 되어야 할까?’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3천불, 5천불 얘기하지 않았을까요? 만불 얘기하면 “말도 안 돼” 같은 얘기 들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작년에 한국이 3만3천불이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가난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죠. 빈곤 때문에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가장들 이야기가 계속 있잖아요. 이상해요.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정도 되면 절대빈곤은 없어져야 해요. 가난은 일단 없어져야죠. 2000년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만들고 우리도 수급자에게 생계급여를 지급하기 시작했는데요. 여전히 가난이 안 없어진다면 제도가 계속 실패하는 거예요. 선별적 복지는 빈곤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니까 선을 엄격히 관리하는데요. 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발생하고요. 그러다보면 사각지대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생기잖아요. 그러느니 제도를 바꾸자는 거죠.

 

또 기본소득 자체에도 소득세를 매기면 부자가 더 내고 모두가 똑같이 받는 체제가 된다는 점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선 부자에게도 기본소득을 줘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공교육에서의 무상급식 사례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벌가 자녀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고 당시 반론이 있었지만 지금 보세요. 문제가 생겼나요? 생기지 않은 이유는 간단해요. 재원은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고요. 그 세금은 재벌가에서 더 많이 냈을 거예요. 누진세 구조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그렇게 됩니다. 기본소득은 일단 매달 일정 금액이 모두에게 소득으로 깔리는 거고요. 거기에 자기 소득이 더해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원래 소득이 많던 사람은 소득을 더 내게 되고, 소득이 전혀 없어 세금을 안 내던 사람들은 기본소득에 대해서만 세금을 내게 되겠죠. 정리하면 과세의 누진성을 강화한다, 지급은 기본소득으로 한다, 그러면 재분배 효과가 크다, 인 거죠.

 

이때 기본소득을 가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지급하자는 거잖아요?


그것이 핵심인데요. 사회 구조적으로 미시적인 권력 관계가 여기저기 있죠. 대표적인 게 가족 내 권력 관계예요. 부모와 자식, 부모와 조부모, 부부 등. 이런 관계에서는 누가 소득을 가져오느냐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고, 굉장히 많은 부작용들이 발생해요. 기본소득은 그것도 교정할 수 있어요. 어쨌든 누구든 기본적인 소득이 있으니 완전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권리를 조금 더 요구할 수 있겠죠. 캐나다 마니토바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했는데요. 이혼율이 높아졌어요. 가정폭력이 있던 집에서 여성들이 나온 거죠. 또 10대 취업률이 낮아졌어요. 학교를 안 다니고 일하던 청소년들이 돈이 생기니까 학교를 다시 간 거예요. 개인에게 지급할 때 이런 장점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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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안정이 뒷받침되는 자유


책을 처음 시작한 뒤에도 고정관념이 여러 번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고 머리말에 쓰셨잖아요. 기억나는 자료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4차 산업혁명도 산업혁명이니까 이전 산업혁명을 살펴봤거든요. 그랬더니 첫 번째 산업혁명 때 벌어진 일이 지금 벌어질 일과 아주 유사했어요.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공장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공장에서 노동하려고 하지 않죠. 그러니까 자본이 공장 옆에 집도 지어주고 하면서 사람을 꼬시고요. 규모가 커지면서 수공업으로 유지됐던 산업을 다 파괴하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공장으로 왔죠. 조금 지나 노동자들이 저항했고, 그들을 계속 일하게 하기 위해서 복지국가를 만들었잖아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이 있었고요. 만약 이번 것도 산업혁명이라면 비슷할 거예요. 자본은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가게 하고, 그걸 정치가 뒷받침 하겠죠. 저는 그것이 지금의 트럼프주의고,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의 집권이라고 봐요. 그러니 먼저 깨어서 산업혁명 당시부터 복지국가를 도입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지금 취하자는 것이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을 얘기한 거예요.

 

이 맥락에서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전달될 메시지가 소득과 생산방식이 “다양한 정치과정을 거쳐 규범적으로 정해졌다”(201쪽)는 말일 것 같아요. 원래부터 정해진 노동환경은 없다는 것이죠.


가까운 사례가 북유럽 국가죠. 1960-1970년대 이후 북유럽 국가는 보편적 복지로 갔고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이 몰아칠 때도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자유화를 했어요. 한편 영국은 완전히 민영화했고요. 프랑스는 변화를 별로 주지 않고 기존의 고용 중심 체제를 계속 가져갔어요. 그런데 지금 결과를 보세요. 모두가 알고 있듯 북유럽 국가들 국민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그 시점에 그 나라 사람들이 선택한 거거든요. 지금 우리는 그대로 선택이 용이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복지 제도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기회죠. 프랑스는 계속 시위가 일어나고 있잖아요. 뭔가 바꾸려고 할 때마다 피해보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복지 제도가 미미하기 때문에 미래의 관점에서 설계할 여지가 좀 있어요.

 

결국은 합의의 문제입니다.


‘자유’와 ‘안정’이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해요. 두 개념은 독립적인 면이 있어서 종속적이면서도 안정될 수도, 자유로우면서 안정될 수도, 불안하면서 종속적일 수도, 불안하면서 자유로울 수도 있어요. 우리 사회의 과거 패러다임은 종속적이면서 안정적인 것이었는데요. 불안하면서 자유로운 것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생각에 드라이브가 걸렸던 것이죠. 이제는 경제적인 안정이 뒷받침되는 자유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기업이 점점 더 직접 고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이른바 ‘거대한 전환’을 앞둔 시점에서 젊은 세대 혹은 어떻게 소득 활동을 하면서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일을 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할 것 같아요. 보수를 받고, 종속되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노동이라는 생각이요. 노동을 그렇게 이해하면 우리 미래가 너무 불행해져요. 내가 가치를 만들어내고, 거기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거고요. 임팩트가 사회에 남을 수 있어야 ‘일’인 거예요. 그렇게 되면 되게 달라져요. 이전에는 내가 중심이 되면 종속성은 없어지죠. 이렇게 인간의 역할이 바뀌는 시대에 그래야 비참하지 않게 살 수 있어요. 물론 이것은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의 보편적 기본소득제 실현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고 계세요?


기술적 실현 가능성은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기본소득제를 하기로 합의만 한다면 가능하고요. 정치적 실현 가능성은 글쎄요. 만들기 나름이겠죠. 저는 이번 2020년 총선 이후 구성될 국회에서 이 제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면 2022년 대선 이후에는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최저임금위원회’라는 게 있잖아요. 매년 사회 여러 계층이 모여서 최저임금을 논의, 결정하는데요. 기본소득도 그렇게 할 수 있죠. 도입했다가 결과를 가지고 연구, 토론해서 효과가 좋으면 기본소득액을 높이자고 할 수도 있고요. 계속 논의하는 구조를 만들어가면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득의 미래이원재 저 | 어크로스
일자리와 소득의 구조가 급변하는 시기에 필요한 담론과 정책을 연구하고 대안을 모색하며, 작가는 구체적인 데이터와 사례를 통해 앞의 질문들에 답하고, 전환기의 혼란과 고통을 줄여 줄 해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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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홍성수 “법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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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누구의 것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 1조 1항처럼, 법의 주권은 마땅히 국민에게 있고 법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나 사법과 입법이 정말 국민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회의적인 답변이 나올 때가 많다. 사람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죄질보다 판결이 가볍게 나왔다고 느끼거나,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 법정의 엘리트들이 억울한 사연을 충분히 들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법은 분명 나와 다른 국민들을 위해 존재할 텐데, 우리는 왜 종종 억울한 기분이 들까?


『법의 이유』는 홍성수 교수가 진행한 <영화를 통한 법의 이해>와 K-MOOC에서 진행한 <문학과 영화를 통한 법의 이해> 강의를 옮긴 책이다. 영화는 사람 사이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법정을 자주 등장시켜왔다. 법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영화 속 상황은 법의 기본 이념을 설명하기 좋은 장치이기도 했다. 홍성수 교수는 법을 맹신하거나 불신하는 주장을 넘어 사회의 다양한 장치와 법이 서로 보완하면서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법이 존재한다. ‘법의 이유’를 이해할 때 시민들은 진정한 ‘법의 주권’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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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학생들의 눈높이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엮인 책이에요.


오프라인 강의로 시작해서 중간에 온라인 강의가 추가됐어요. 온라인 강의를 제작하기 위해 만들었던 스크립트를 전환하면 책이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인지 구어체 문장이 살아있는 편이에요.


준비한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요?


출판사에서 직접 수업을 들으러 오신 게 6년 전으로 기억해요. (웃음) 차일피일 미루다가 사이버 강의 스크립트를 만들면서 용이하게 낼 수 있었습니다. 실제 작업은 한 6개월 걸렸어요.


사실상 『말이 칼이 될 때』전부터 준비한 책이네요.


그렇죠. 훨씬 전이에요.


『말이 칼이 될 때』출간 이후 강의도 많이 다니죠?


전에도 강의는 종종 하는 편이었는데, 재작년 이후로 많이 하게 됐어요. 책이 나오니까 기존에는 잘 만나기 어려웠던 청중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전혀 다른 세계에 접속한다고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어떤 분들이신가요?


예전에는 제가 다루는 주제에 관심이 많고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분들이 주로 불러주셨다면, 지금은 서점이나 도서관 행사에 가기도 하고요, 각종 독서토론대회에서 불러주시기도 해요. 교사들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아무래도 예전 만났던 청중보다는 폭이 넓어졌죠.


어릴 때부터 평등을 교육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강의라는 게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켜 주는 건데, 제가 하려는 방향과 반대에 있는 성인들은 강의와 책을 통해 바꾸기는 어렵죠. 하지만 성인이 되기 이전의 청소년이나 아동들은 훨씬 여지가 많다고 생각해요. 학생 대상으로도 강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만, 무엇보다 교사 모임에서 요청을 주시면 가려고 노력해요. 가장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청중이거든요.


대학교 수업을 진행하면서 염두에 둔 점이 있었나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다양한 전공의 스무 살 학생들이 주로 듣는 수업이었어요. 법에 대한 전문지식도 전혀 없었고, 시민으로서 교양 수업을 듣는 거죠. 수업 내용도 앞으로 법을 전공할 학생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살아갈 시민들에게 필요한 내용이 뭘까 고민했어요. 마침 제가 만든 교과목은 아니지만 <영화를 통한 법의 이해>라는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영화를 활용해서 설명을 용이하게 하는 작업을 10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책으로 만드는 작업도 수업하던 내용의 콘셉트에 맞춰서 진행할 수 있었고요. 어떻게 보면 일반 대중이나 시민들도 이 눈높이에 맞추면 비슷한 난이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대형 강의로 하면 토론이 쉽진 않아요.


100명 이상이 듣는 대형 강의고, 사이버 강의로 하면 2백 명, 3백 명이 듣는 강의라 상호작용이 어렵기는 했어요. 대신 학습 노트 과제가 중요한 평가 요소예요. 그걸 읽어보면서 학생들이 어떤 걸 궁금해 하고 관심 있어 하는지, 쟁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축적하면서 책에도 반영할 수 있었죠.


어떻게 보면 교육의 최일선에서 스무 살 시민들의 생각을 듣게 되는 일일 텐데, 사회가 변하는 흐름이 느껴지진 않았나요?


주로 소수자나 약자 인권에 더 집중해서 법의 문제를 강의하다 보니, 아무래도 세계가 거듭되면서 더 민감성이 높아진다고 할까요? 다양성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업에서 뻔한 이야기보다는 조금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해야 수업이 의미도 있고 학생들도 만족한다는 생각은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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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이유’라는 제목을 정한 과정이 있었나요?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해주셨어요. 법의 근본정신과 원리가 가장 중요한 시민 교양이라는 내용을 다뤄서, ‘법의 근본’ ‘법의 취지’ 정도가 적당했다고 생각했어요. ‘법의 이유’는 사실 비문에 가깝죠. 제목으로서는 내용을 잘 살려주지 않았나 싶어요.

 

 

사법적 문제 해결의 위험성


법철학을 이야기하다 보면 아무래도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게 돼요. 한국 사회의 법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대안을 내기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요즘 이야기하는 ‘사이다 같은 대안’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당장 효과는 안 나지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과제들을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교양일 수 있고 또 시민 교육 차원에서 해야 하는 교육은 교양 측면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원론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히려 법으로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사전 자정 능력이 더 필요하다는 언급이 많았어요.


그게 법철학입니다. (웃음) 아무래도 실무가들이나, 실정법 전공하시는 분들은 되도록 법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죠. 자기가 다루는 도구가 잘 활용되길 바라지 덜 활용되거나 조금 활용되길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법철학과 법사회학의 접근은 그런 점에 대해서 좀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법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무조건 많이 쓰인다고 중요한 게 아니라 절제되어서 쓰이는 게 시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법률가를 위해서도 법이 적절하게 잘 쓰이면 중장기적으로는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법이 중요하고 잘 써야 한다는 이야기는 다른 분들이 많이 해서, 저는 다른 측면으로 법이 지나치게 많이 쓰이거나 시민들의 삶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문제들에 아무래도 더 관심을 가지게 돼요.


모든 분쟁을 사법화시키는 것이 한국적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결국은 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예요. 사회적인 분쟁이 자율적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그걸 해결해주는 경향이 있어요. 어떤 경우 민주적 조정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엘리트 법관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또 사법적 문제 해결은 단순한 결론을 지어버리거든요. 분쟁 중에는 너도 잘했는데 나도 잘했다, 너도 못 했고 나도 못 했으니 양보하고 줄 거 줘야 할 때도 많아요. 이런 게 사법부로 넘어가는 순간 굉장히 앙상하고 이분법적인 결론으로 귀결되는 게 한국에서는 과하다고 생각했고요.


법 체제가 필요한 부분도 많이 언급했어요. 전작 『말이 칼이 될 때』 는 당시 혐오발언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생겨나면서 회자가 많이 되었죠. 차별금지법 이슈에서는 선생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요.


이를테면, 무딘 칼을 휘두르기보다 메스로 문제를 도려내야 한다는 비유를 많이 써요. 법은 문제되는 부분을 날카롭게 도려낼 때 의미가 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정능력에 맡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업무 분담이라고 생각하고요. 법이 그렇게 세팅될 때 법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고 시민사회도 법의 도움으로 더 활력을 가지고 자율성을 가지는 풍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시민사회 자율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죠. 특히 힘의 강약 문제에서 법은 균형을 맞추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강자의 권력 남용은 막아주고 약자의 권리 침해는 보호해주는 방향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때 사회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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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발언 규제 법안이 실제로 상용화되었을 때, 법안을 비껴가는 교묘한 혐오발언이 더 늘어날 거라는 우려도 있었어요.


어떤 문제든 간에 법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는 없어요. 법이 해결해줄 수 없는 부분은 전제하고 개입해야 하는데, 대부분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면 법 말고 다른 방법은 쪼그라드는 경우가 너무 많죠. 법 개입의 필요성이 제안되더라도 나머지 비법적 수단들을 활용하는 걸 결코 멈춰서는 안 되고, 법에 질식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늘 주장하고 있어요. 심지어 차별금지법도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히 있어요.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한 법이지만,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차별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고 전제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거죠. 그 외 문제들은 지금도 비법적인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야 하고, 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평등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역사 부정죄를 만들었을 때,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자기 의견이 정당하다는 요지로 쓰일 가능성도 언급했어요.


법을 만드는 주장을 할 때도, 그 법의 집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니에요. 부작용이 있다는 걸 알고 어떻게 감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있어야죠. 역사부정죄로 누군가를 처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역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궁극적인 목적이잖아요. 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걸로 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나 전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화해와 조정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 판과 장을 마련해주는 거죠. 형사 고소, 검찰 수사, 사법부 재판 방식은 공론장을 마련한다거나 조정 장을 마련하는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법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식으로 대신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부분은 고쳐나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책 곳곳에 그런 부분이 스며 들어 있는데, 전반적인 흐름은 법의 절제된 사용에 있어요.


사형폐지나 검찰 권력 배분은 첨예하게 읽힐 소지가 있어요. 권력 분립의 원리에서 한국의 검찰 상황이 겹쳐지기도 하고요.


공수처 도입이라든가,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는 너무 첨예한 현안이어서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어요. 대신 권력 분립의 원리가 수사 재판의 부분에서 어떻게 분담이 되어야 하는지 일반적인 이론을 말한 거였죠. 어떤 원칙과 원리에 입각해 수사권과 권찰 권력이 분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기제로 법을 사용할 때, 협의가 아닌 법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시민사회 자율에 모든 걸 맡기게 되면 힘의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부분을 내버려 두면 강한 자는 계속 강하고 약한 자는 계속 약하죠. 약자들이 권리를 투쟁하는 과정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법의 취지와 구성이 약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구성해야 법의 정당성과 활용성이 답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시민의식조사나 국민의식조사를 해보면 법을 막연하게 두렵게 느낀다거나 강자의 도구로 여기는 경향이 많이 있었어요. 일본강점기부터 시작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법이 작동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시민들의 법 의식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생각대로 가면 법의 정당성은 없어집니다. 법이 강자의 도구가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는 도구이자 장치로서 작동해야만 법의 정당성이 생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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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에게 힘을 주는 역할


도덕이 오히려 법보다 빨리 변할 때가 있다고 짚었는데, 반대로 생각할 때가 많아요.


도덕이 더 빠를 때도 있고, 법이 어떤 도덕적인 발전을 선도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다만 이 두 개의 속도가 늘 일치하지는 않아요.


현실에서 차별금지법이나 동성혼 조항을 이야기하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죠.


법적인 판단과 입법을 통해 도덕의 발전을 선도해야 할 때가 있어요. 특히 소수자 인권과 관련된 문제들은 법이 선도적인 조치를 취해서 발전을 이끌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어요.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입법뿐만 아니라 사법적 판결에 의해, 판사의 판결에 의해 시대가 선도되는 경우도 있어요. 사법부는 원리상 다수결에 의해 결정이 구성되는 기관이 아니거든요. 선거를 의식한다거나 국민 여론, 국민 투표를 의식해서 판단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소수자의 권리 문제는 더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구성이에요. 실제로 판결에 의해 소수자 인권 문제가 선도되는 경우가 꽤 있어요. 그것이 사법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될 수 있고요.


반대로 생각하면 판사의 판단이 일반적인 도덕에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어요.


재판을 국민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도 없고, 엘리트 법관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도 없는 묘한 줄타기를 해야 해요. 그 고민의 산물이 어떻게 보면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제도가 되겠죠. 어느 나라든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하는 제도는 있지만, 어느 정도 참여하는 게 정답인지는 명쾌하게 나와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너무 분리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정도는 개입하고 간섭하고 관여하는 장치를 마련해 놔야 하는데,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고 생각하고요. 지금은 대한민국 발전 수준에서 나름대로 적합하게 마련한 장치가 형사 재판에 대한 국민 참여제도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지, 한발 물러서야 될 지는 시행 과정에서 검토하면서 결정해야죠.


최근 성폭력 사건에서는 방청연대로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사법과 입법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사법 기관이 겸허하게 문제 의식을 느낄 필요가 있죠. 판사의 신상을 턴다거나 사생활에 위협을 가하는 정도의 선이 되지 않는 선이라면 얼마든지 시민들은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사법부도 시민의 의견을 적절히 수용해 가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법철학 기준에서의 노동법 이야기도 언급됩니다.


어쨌든 노동은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계약입니다. 그런데 우리 법에서는 계약의 내용을 노동자와 사용자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형태, 임금을 얼마나 받고 근로시간을 얼마나 할지에 대한 최소한의 한계를 걸어놨어요. 왜 우리가 이런 한계를 걸어 놨는지, 이게 무너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봐야 합니다. 현실에서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를 많이 마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힘의 균형이 잘 이루어지는 상태는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노동자-사용자 관계에서는 법을 통해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조정이나 화해의 시초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요?


일단 차별을 금지할 필요가 있죠. 다만 차별을 금지하는 역할에 양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한 편으로는 차별을 하려는 사람을 제재하려는 방향이 있고, 다른 방향으로는 차별 당하는 사람들이 자력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한 기제예요. 소수자 권리 보장을 위한 교육이나 홍보, 소수자 집단을 지원하는 내용도 차별금지법의 중요한 내용으로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차별을 금지하기도 하지만 평등을 더 증진시키고 소수자를 자력화하는 내용도 법에 탑재되어야 한다는 거죠. 법명도 차별금지법이라고 하기보다는 평등기본법 같은 이름으로 제정하고요. 그렇게 되면 소수자들이 힘을 얻고 차별에 저항하는 힘이 생기거든요.

 


 

 

 

 

 

 


 

 

법의 이유홍성수 저 | arte(아르테)
법은 모든 인간의 타고난 권리, 타고난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자 제도로서 존재한다. 사회의 다양한 장치와 법이 서로 보완함으로써 법이 제정된 궁극적인 목적인 평등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모두 힘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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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샘 해밍턴 "놀이는 육아의 기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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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혼자 아이들을 돌보는 연예인 아빠들의 육아 도전기를 다룬다. 외국인 코미디언으로 유명했던 샘 해밍턴은 이 프로그램으로 두 아이의 아빠로 사는 제 2의 삶을 드러냈다. 처음이 아닌 사람은 없다. 샘 해밍턴도 처음에는 육아 초보였지만, 아이와 신나게 노는 아빠표 육아로도 아이들을 바르게 키울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샘 해밍턴의 하루 5분 아빠랜드』는 아빠도 아이도 즐겁고 행복해야 좋은 육아라고 믿는 샘 해밍턴의 육아 신념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샘 해밍턴의 육아 스토리와 화보 같은 놀이 사진, 놀이 전문가와 아동 심리 전문가가 검증한 놀이 방법으로 고된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온 지친 아빠, 자녀와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모르는 아빠, 아이의 성장 발달을 돕는 놀이를 찾는 아빠라면 도움을 얻을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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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과 벤틀리가 부모가 되었을 때 도움이 될 책


책을 받은 소감이 어때요?


오늘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처음 들어봤어요. 방송 하다 보면 워낙 작가님, 작가님 부를 일이 많은데요. 제가 들은 건 처음이에요. 주말에 서점 가서 책이 어디 있는지, 몇 권 남았는지 보고 몇 권은 직접 사고 그랬어요. 아직은 책을 냈다는 게 100% 실감이 안 나요.


매일 얼마나 팔렸는지 검색해보세요?


어떻게 알았어요? 아침마다 일어나면 인터넷 들어가서 검색하고 있어요. (웃음)


원래 모든 저자분들이 그러세요. (웃음)


그래요? 저는 없어 보일 줄 알고 걱정했어요. 다른 분들은 안 그런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개그 콘서트>가 코미디언 샘 해밍턴을 알렸다면,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아버지 샘 해밍턴을 알린 프로그램이에요. 출연 이후로 인기가 높아진 걸 실감하시나요?


처음에는 진짜 놀랐어요. 아이들하고 같이 다니면 확실히 달라요.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알아보시는 분들 연령층이 다양해졌어요.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나오면서 사람들이 알아보면 힘드실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무조건 쉬운 건 아니에요. 아이들은 유명하다는 것 자체를 몰라요. 방송 자체를 안 보여주거든요. 밖에 나갈 때는 이 사람들이 왜 자기를 아는지 궁금해하죠.


아이들은 책을 봤나요?


윌리엄과 책 언박싱 영상을 찍었는데, 윌리엄은 조금 실망했어요. 왜 책이 있냐고 하더라고요. 장난감 받을 줄 알았나 봐요. 이 책은 지금 윌리엄과 벤틀리를 위한 것보다 나중에 윌리엄과 벤틀리가 결혼하고 또 부모가 될 때 오히려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주변 반응은 어땠어요? 특히 아내 반응이 궁금해요.


책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이전부터 아내가 저도 책을 낼 수 있다고 많이 응원해줬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기회가 오면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예전부터 팬들이 책 안 내냐고 물어보고, 나중에 아이들을 낳으면 샘 아빠처럼 키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게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팬들에게도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출판사에서 책을 먼저 제안했나요?


여러 군데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저한테 어떤 방향이 제일 잘 맞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일단 지금은 부모 된 지 3년 조금 넘었기 때문에, 이 방향에 집중하고 책을 내려고 했어요.


앞으로 6년 된 아버지, 10년 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도 있겠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부모 되기 전과 비교해서 부모 된 후에 인생이 너무 달라졌고, 전보다는 되고 난 후가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6년 후, 10년 후에 노하우도 많이 생길 테니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빠가 처음일 수밖에 없는 세상 모든 남자를 위해 이 책을 내기로 마음먹었다’(23쪽) 라고 쓰셨어요.


엄마, 이모, 삼촌 등등 모두가 독자가 될 수 있어요. 다만 처음 육아하는 아버지는 아이와 공감하고 소통하고 싶은데, 어색하고 서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아버지들한테 ‘일단 같이 즐겁게 노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권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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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


윌리엄, 벤틀리와 같이 노는 사진이 책에 실렸어요.


무엇이든 애들이 하고 싶은 게 최우선이에요. 최대한 재밌고 편한 분위기에서 찍다 보니 사진 촬영이 크게 힘들진 않았어요. 윌리엄은 좀 완벽주의자라서 놀다가 생각만큼 잘 못 하면 짜증 낼 때도 있어요. 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교육을 했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고 연습 과정은 누구나 다 있으니까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또 못하면 못 하는 대로 좋고요. 놀이잖아요.


TV 프로그램에서도 ‘안 돼’보다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로 말하는 장면이 좋았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안 돼’라는 단어를 아예 안 쓰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최소한 아이에게 설명은 해줘야 해요. 아이들 입장에서는 식당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 내가 소리 지르면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요.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게 부모로서 기본자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다른 한 편으로는 무조건 안 된다고 부정적으로만 말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안 그래도 한국어에 ‘죽겠다’ ‘힘들다’는 말이 많잖아요. 평소에 많이 쓰는 말투에 더해서 ‘안돼’ ‘하지 마’까지 반복하면 아이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급하면 부정적인 말이 당연히 나오죠.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고 죽을 때까지 평생 가는 마라톤이에요. 죽기 전까지 부모로서 할 일이 많아요. 지금 틀을 잘 만들어야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여유를 갖되 열심히 하는 거예요.


육아에도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텐데, 책에서 놀이에 집중한 이유가 있을까요?


훈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마다 훈육하는 스타일이 다르니까 책으로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단 놀이가 재미있잖아요. 아이들하고 재미있는 시간 보내고 행복한 아이로 키워주면 부모로서 성공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놀 때 그냥 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모로 알려줄 게 많아요. 놀다가 주먹이 날아갈 수도 있고, 그 주먹에 제가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럼 놀이를 하다가도 훈육을 해야죠. 그런데 놀이가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가 최우선이에요. 아무래도 교육만 하면 엄마 아빠랑 관계가 얼마나 좋아질지 고민을 하거든요.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아버지지만, 우선은 친구예요. 고민이 있거나 슬플 때 친구처럼 다가와서 아빠에게 다 이야기할 수 있게끔 바탕을 만들어 놓으면, 교육은 그다음에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놀이마다 아이들 연령과 아빠 체력 소모량이 표시되어 있어요.


전문가 선생님의 자문을 받아서 성장 발달 단계를 고려한 적정 연령을 적었어요. 하지만 아이에 따라서 발달 과정이 서로 다르니까 연령에 크게 집중하시지는 마세요. 2~3세라고 적혀 있다고 꼭 2세에서 3세까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발달에 따라 하시면 돼요. 아빠의 체력 소모량은 자문에 더해서 제가 직접 놀면서 느낀 체력 소모량을 적었어요. 저는 젊지도 않고, 몸무게도 조금 나가는 편이라 주관적일 수 있어요. 상태에 따라 놀아주시면 돼요. 


책을 쓰면서 배운 게 있다면 뭘까요?


솔직히 배운 게 너무 많아요. 제가 하는 과정에서 몰랐던 부분도 있고 생각 못 했던 부분도 있으니까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아이들 이 닦이는 다른 방법은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제가 쓰는 방법만 쓰게 되니까요.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아버지와의 경험이 많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더 육아를 고민하게 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아빠와 놀았던 기억이 전혀 없어요. 혼자 노는 기억이 많았죠. 늘 다른 집을 바라보면서 아빠랑 무언가 하는 걸 되게 부러워했어요. 그래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잘 몰랐어요. 뭘 해야 될지 모르고요. 제가 영향을 받은 건 어머니 역할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건지 더 열심히 하고 싶고, 아이들 위해서 좋은 환경 만드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어렸을 때 뭐가 부족한지 느꼈기 때문에 그 부족함만은 절대 우리 아이들이 느끼지 않게끔 노력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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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만의 놀이를 찾아보세요


휴지, 신문지, 풍선 등으로 노는 놀이가 소개되어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부모님들이 다 공감하는 부분인데, 육아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면 일주일 후에 흥미가 식어서 새로운 걸 가지고 싶어하는데요. 부모로서 돈 낭비를 줄이기 위한 노하우가 중요할 것 같아요. 돈으로 이것저것 사줄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매일 쓰는 필수품으로 상상력을 키우면 어떨까 싶었죠. 환경 보호하려고 재활용도 많이 하는데 기왕이면 한 번 더 쓰면 어떨까 늘 생각했거든요. 아이들은 신문지를 자르고 거기다 대고 주먹을 날리라고 하면 환장해요(웃음). 집에서 엉망진창 만들고 신문지 찢어 던지면서 “눈 온다” “비 온다” 하는 별것 아닌 활동 안에서 아이들은 행복해 하는데 그게 너무 아름다워요.


놀고 나서 뒷정리는 어떻게 하세요?


아이들한테 청소 시키는 놀이도 있어요. (웃음) ‘쓱싹쓱싹 쓰레기 모으기’ ‘어서 오세요! 정리 마트’같은 놀이로 그때그때 치우긴 하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너무 힘들어요. 정리하자마자 아이들은 다시 장난감 들고 와서 다 엎을 테니까요. 우선 아이들 잘 때 한 번 마무리하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것도 또 교육 과정이에요. 아이들에게 치워야 한다는 걸 가르쳐 주는 거죠.


윌리엄과 벤틀리는 한 살 차이에요. 연년생 육아의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다면 뭘까요?


힘든 점은 같은 시기에 같은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쌍둥이였다면 같은 시기에 분유 먹고 기저귀 차니까 오히려 괜찮을 텐데, 연년생이라 윌리엄은 우유 줄 동안 벤틀리는 분유 줘야 하고, 윌리엄은 화장실 갈 동안 벤틀리는 기저귀를 신경 써야 해서 정신이 없더라고요. 좋은 점을 꼽으라면, 우정이 강해요. 아들 둘이 연년생이면 형 동생을 떠나서 친구예요. 어느 순간부터 둘이 손잡고 다니더라고요. 그걸 보면 너무 뿌듯해요. 당연히 싸울 일이 많지만 이 끈끈한 우정을 보고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부모님 입장에서 앞으로 이 우정만 평생 유지하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싸울 때도 많을 것 같아요. 싸울 때는 어떻게 가르치나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얼마 전에 벤틀리가 윌리엄을 때렸어요. 그럼 윌리엄한테 너도 벤틀리를 때릴 거냐고 물어봐요. 자기는 안 때릴 거래요. 이렇게 서로 이야기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다른 예로 장난감 때문에 싸웠고 둘 다 이걸 갖고 싶어요. 그럼 일단 눈앞에서 그 장난감을 빼야 해요. 싸움의 원인을 치워야 아이들이 진정하거든요. 벤틀리가 5분 동안 가지고 놀고 그다음 윌리엄이 5분 가지고 놀라고 하면 말이 안 돼요. 아니면 같은 장난감을 두 개 사줘야 하는데 그것도 말이 안 돼요. 그러니 서로 배려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요. 집에서 싸우면 무조건 상대방을 안아주고 뽀뽀하는 걸로 끝내요. 그래야 뒤끝이 없어요. 아이들도 싸워서 기분이 안 좋았다가, 뽀뽀하고 나면 부끄러워하고 서로 좋아하고 그래요. 모든 관계에서 안 싸울 수는 없어요. 다들 부부 간에도 싸우잖아요. 싸우는 이유야 여러 모로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로 관심 있으니까 싸우는 거예요. 무관심하면 상대방과 싸우지 않아요, 그냥 무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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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스토리텔링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코딱지한테 편지가 온다거나, 스파이더맨에게 붙잡힌 연기를 한다거나요.


연기 경험이 육아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단순하지만 상상력이 뛰어나요. 예를 들면 벤틀리가 유난히 늑대랑 여우를 무서워하더라고요. 그럼 말을 잘 안 듣거나 지금 상황을 바꿔야 할 때, ‘어, 여우 왔다! 내가 가서 잡을게!’ 하고 밖에서 여우랑 싸우는 소리를 내는 상황극을 만들어 보는 거죠. 어떻게 보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는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에 애들은 굉장히 좋아해요.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춰줄 수도 있고요. 이건 하면 안 돼, 이건 저래 하는 직설적인 말은 아이들 귀에 안 들어와요. 과정이 길더라도 쏙쏙 귀에 들어가게끔 이야기로 해주는 게 효과가 좋아요. 아이들 반응도 워낙 솔직해서 이제는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만들게 돼요.


윌리엄은 말을 빨리 배운 편인 것 같아요.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쓰는 환경에서 아이들 언어에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한국어로 주로 이야기하다가도, TV는 거의 영어 프로그램만 보여줬어요. 알아듣든 안 알아듣든 적응시켜야 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가게끔 하는 거죠. 아버지 모국어가 영어고 어머니 모국어가 한국어인 상황에서 친할머니를 보러 간다고 하면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잖아요. 환경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규칙적으로 아빠는 영어만 하고 엄마는 한국어만 한다, 이런 식으로는 불가능해요. 윌리엄은 지금 한국말을 더 잘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국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TV를 영어로만 보여줘도 부모님 한 명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이어갈 수 있어요.


윌리엄과 벤틀리가 작가님을 닮은 점이 있다면 뭘까요?


윌리엄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게 저랑 비슷해요. 또 굉장히 예리해요. 윌리엄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이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찰청에서 경찰 로고를 보더니 ‘어, 경찰차 왜 저기 있지?’ 하는 거예요. 글자를 읽을 수 없는데 로고만 보고 경찰이라는 걸 아는 게 너무 신기해요. 자기 자식 자랑인가요?


부모님들은 다 그래요. (웃음)


그러니까요. 다들 자기 자식은 천재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나이에 비해서 예리한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섬세한 부분을 많이 보는 스타일이라 그 점이 비슷한 것 같아요. 벤틀리는 힘이 엄청 세요. 힘세고 고집은 장난 아닌 게 저를 닮았죠. 둘은 길을 너무 잘 아는데, 이건 둘 다 저를 닮은 것 같아요. 계속 비슷한 걸 발견해 가고 있어요.


윌리엄과 벤틀리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됐으면 하나요?


지금 바라는 건 별로 없어요. 그냥 사회성 있고 예의 바르게 자라고, 무엇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자기 할 일은 다 알아서 찾을 텐데요. 그 일 하면서 행복하면 다른 건 필요 없는 것 같아요. 그저 민폐만 끼치지 않았으면 해요.


독자들이 책을 어떻게 읽어줬으면 하나요?


‘샘 해밍턴이 쓴 책이니까 나도 똑같이 해야지!’라는 생각이라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 책은 제가 윌리엄과 벤틀리와 함께 했을 때 나온 결과고, 다른 아이들과 하면 안 좋아할 수도 있어요. 그저 틀이나 보조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책에서 보고 재미있겠다 싶으면 한 번 해보는 거죠. 아이들을 들어야 하는 놀이가 있는데 아이가 무거울 수도 있잖아요? 그럼 누워서 해볼 수도 있어요. 앉아서 해볼 수도 있고요. 변화를 주면 자기 놀이처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샘 해밍턴의 하루 5분 아빠랜드샘 해밍턴 저/손석한, 권오진 감수 | 구층책방
육아 초보 아빠였지만 지금은 남다른 육아법으로 인정받는 샘 해밍턴. 그가 내 아이와 재미있게 놀아주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초보 아빠들을 위해 자신의 놀이법과 육아 노하우를 대방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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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루시드폴 “들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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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음성을 지닌 사람과 이야기할 때, 마음을 활짝 열게 된다. 흩어지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자꾸 더 귀 기울이게 된다. 2년만에 루시드폴과 다시 마주했다. 반려견 ‘보현’과 함께 쓰고 지은 사진 에세이 『너와 나』를 앞에 두고서, 그가 손수 지은 감귤을 까먹으면서 제주의 날씨를 걱정하고, 아티스트로 정식 데뷔한 ‘보현’의 저작권 문제를 궁금해하며, 다음 앨범의 주인공이 될지 모르는 ‘식물’의 소리를 BGM으로 틀어놓은 채 조용하고 긴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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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코스 요리를 준비하는 마음

 

오늘도 일찍 일어났나요?


농부는 원래 일찍 일어나요. (웃음) 농사철에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요. 1시간쯤 차를 마시고 일을 시작하죠. 저녁 8시가 제겐 늦은 시간이에요. 새벽 6시가 가장 피크로 일할 시간이고요.

 

8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 도 에세이와 함께 냈는데, 9집도 사진 에세이를 썼어요. 처음에는 보현의 사진집 출간으로 제안받았다고요.


작년 여름에 그림책( 『손으로 말해요』) 번역 작업을 제안 받았어요. 좋은 책이라 번역하기로 했는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번역비를 받으면 동네 유기견보호소에 보내야겠다’고. 제주에 유기견이 무척 많아요. 개를 너무 사랑하는 한 분이 유기견보호소를 열었는데, 단체나 법인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라서 지원을 잘 받지 못해요. 알음알음 아는 분들이 도움을 주고 계시지만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이 말을 들은 편집자님께서 보현의 사진집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해주셨고요.

 

평소 필름 카메라를 즐겨 찍으시죠. 사진은 충분히 많았을 것 같은데.


보현이를 찍은 사진이 필름으로 따지면 아마 수백 롤은 될 거예요. 물론 낼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보현과 저의 사진이지,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 책은 이미 많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렇게 고민을 계속하다가 나만이 할 수 있는 뭔가를 넣으면 유니크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귤은 아니고(웃음) 결국 음악이더라고요.

 

‘처음부터 보현과 같이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던 거네요.


그땐 백지도 아닌 까만 먹 같은 상태였어요. 작년에 손가락을 크게 다쳤고 당시에는 회복이 안 된 상태였거든요. 예전처럼 기타를 잡을 수 있을지 겁이 났어요. 뭔가를 해야 하니까 기타와 관계 없는 음악만 들었는데, 여러 가지가 꼬이는 거예요. 머릿속에 일어나는 건 루시드폴스럽지 않았고, 그럼 루시드폴스러운 게 뭘까? 내가 앨범을 과연 낼 수 있을까? 좀처럼 정리가 안 됐어요. 생각해보면 굉장히 두려웠던 것 같아요. 어차피 정규 앨범은 안 될 것 같으니까 비정규앨범을 만들어야겠다, 음악이 될지 사운드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조금 자유로워졌어요. 뭐가 됐든 우연히 걸려든 걸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보현과의 공동 작업이 시작됐군요.


보현과 매일 산책하면서 소리를 채집했어요. 소리를 음악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일이 점점 커졌고 하고 싶었던 것들이 스멀스멀 나오더라고요. 정승환이랑 같이 곡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엠비언트 음악을 해볼까? ‘그래뉼라 신테시스'란 기술을 활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아이디어가 계속 이어지면서 사운드 스케치에서 데모 상태로 머물러 있는 곡이 17개까지 만들어졌어요. 이 정도면 정규 앨범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에 사진 에세이까지 더해졌고요.


작년에 에세이와 같이 8집 앨범을 냈을 때 반응이 좋았어요. 저도 만족했고요. 저는 앨범을 만들 때 풀코스 요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거든요.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차 마시고 디저트까지. ‘아 잘 먹었다’는 기분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책이랑 같이 만들면 정찬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앨범을 찬찬히 들으면서 인터뷰 장소로 왔거든요. 곡마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굉장히 고요했다가 또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슬픈 마음도 느껴지고요.


앨범을 만들어놓고 보니,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만들어졌어요. 총 열 세곡이 들어갔는데 한 곡은 히든 트랙이라 네 곡씩 카테고리가 나눠졌어요. 지금까지 노래 가사에 사랑하는 존재를 ‘너’라고 표현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모든 게 흘러가듯 만들어졌어요. 저도 보현이를 ‘너’라고 부르고, 보현도 저를 ‘너’라고 부르고. 우리를 둘러싼 또 다른 ‘너와 나의 노래’가 만들어졌어요. 앞에 실린 네 곡은 ‘너의 노래’, 중간의 네 곡은 ‘나의 노래’, 마지막 곡들은 ‘너와 나의 노래’로 나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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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읽을 수 없는 책

 

타이틀곡 제목이 「읽을 수 없는 책」이에요. 보현이가 만든 앨범, 보현이가 주인공인 책인데 보현이는 읽을 수 없구나, 싶었어요.


보현과 저는 오랜 시간을 함께 살고 있어요. 우리의 나눈 추억은 상당히 많죠. 그 추억이 노래가 되기도 책이 되기도 하지만, 보현은 정작 읽을 수 없는 책이에요. 이 곡은 가사를 정말 빨리 썼어요. 10분인가? 1시간인가? 체감상으로는 10분만에 쓴 것 같아요. 예전에 「봄눈」, 「고등어」, 「할머니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아직, 있다」를 그렇게 썼거든요. 어떤 과정에서 썼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써지는 곡들이 있어요.

 

보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적은 없나요?


제가 번역한 그림책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아빠가 읽어줄게”라고 말하니, 표지 냄새를 킁킁 맡고 ‘재미없어’하고 가버리더라고요. (웃음) 정말 보현스러운 거죠. 얘한테 가장 중요한 자극은 냄새니까요. “아빠, 나 이 냄새 맡았어”하고 가버린 거예요.

 

보현이가 노래를 듣다가 잠들면 그건 좋은 노래였다고요. 『너와 나』앨범을 들었을 때는 어떤 반응이었나요?


자기 목소리가 나오면 막 짖더라고요. 자기인 줄 모르고 다른 강아지의 소리라고 생각한 것 같았어요. 보현이랑 산책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어요. “네 목소리인 줄 아니?”라고. “안다”고 하더라고요. 여기서부터는 믿거나 말거나예요. (웃음)

 

(당연히 믿죠.) 이번 앨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이 보현이 직접 연주한 「콜라비 콘체르토」입니다. 왜 콜라비였는지도 궁금했어요.


보현이가 단단한 과일을 먹을 때는 다 좋은 소리가 나와요. 사과는 속이 좀 쓰릴까 봐 안 줬고요. 이 곡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들으면, 보현이가 콜라비를 먹고 있는 소리인지 알기 어려울 거예요. 저는 빗물 튀는 소리, 종이를 구기는 소리, 유리를 밟는 소리라고 느꼈어요.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신비로운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가공과 편곡만 했을 뿐, 보현이가 작곡한 곡이에요.

 

보현의 저작권이 궁금해요. 당연히 따로 받겠죠?


(웃음) 이미 보현이 통장을 만들었어요. 책의 인세가 들어오면 일부가 보현이 통장으로 들어가요. 밥이 됐든 무엇이 됐든 필요한 게 있겠죠. 우선은 보현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작권협회에도 등록했어요. 직접 못하니까 아티스트 이름으로 ‘보현’을 등록했고 저희 부부가 보호자예요. 한국음악실연자협회도 있거든요. 노래를 부르거나 코러스, 기타를 쳐도 등록할 수 있어요. ‘보현’ 이름으로 신청했더니 문자가 왔더라고요. “앨범 발매 후에 다시 등록하라”고. 저희가 너무 서둘렀나 봐요.

 

좀더 보현이 입장에서 즉각적으로 만족할 만한 선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앨범이 나오는 날이 보현이 생일과 닿아 있어요. 보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재밌게 노는 일.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에요. 그날은 보현이랑 하루 종일 놀아주려고 해요.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보현과 이렇게 오래 살았으면서도 보현이 시선에서 보현에게 집중해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는 사실이었어요. 함께 음악을 만든 것도 좋았지만 보현이에게 온전히 집중한 시간들이었으니까요. 그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요.

 

『너와 나』는 보현과 제대로 협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소리로 재구성한 측면에서도 독보적이에요. 새로운 작법에 도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손가락을 다쳤을 때, ‘테일러 뒤프리’의 인터뷰를 읽었어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시골로 이사해서 소리를 연구하고 있는 아티스트인데, 그가 만드는 앰비언트 곡에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작곡의 시작부터 기계와 협업한다면, 다친 손가락을 쓰지 않고도 음악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모듈러 신스, 샘플링, 필드 레코닝, 그래뉼라 신테시스 등을 공부했어요.

 

이번 앨범은 주로 ‘고요연구소’에서 작업하셨다고요. 이름을 딱 듣는 순간, ‘루시드폴스럽다’ 싶었어요.


앨범을 만들면서 침묵, 소리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소리를 만드는 사람에게 침묵은 뭘까,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깊이 해본 것 같아요. 침묵의 반대는 소리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의도한 침묵도 있을 거고 의도하지 않은 침묵도 있을 거란 말이죠.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중에 ‘음악이 없는 곳을 ‘연구소’라고 한다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침묵연구소’를 떠올렸어요. 마지막 크레딧을 정리하는데 편집자 분이 ‘고요’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해서 ‘고요연구소’라고 썼어요. 생각의 흐름대로 간 거예요.

 

「불안의 밤」은 보현의 불안을 생각하며 쓴 곡이에요. 강아지들은 사납게 비가 오는 날에 공포감을 느낀다고 알고 있어요.


보현이는 태풍이 오거나 천둥이 치면 밤새 잠을 못 들고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무력감을 느꼈던 마음으로 쓴 곡이에요. 언젠가 대학 친구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어요. 강아지랑 잘 놀아주는 친구라서 “너 되게 잘 놀아준다”라고 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아니야, 얘가 나랑 놀아주는 거일 수도 있어”였어요. 맞는 말 같았어요. 보현이랑 산책할 때도 그래요. 제가 놀아주는 게 아니라, 보현이가 저를 산책 시키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빠. 운동 좀 해야 하지 않니? 내가 나가 줄게”하고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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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과정으로 돌보았는가

 

새해가 됐으니 이제 7년차 농부예요. 올해 귤 수확은 어땠나요?


농사가 잘됐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년보다는 올해가 귤이 맛있어요. 지금 제주도는 난리예요. 9월부터 비가 많이 와서 귤 농사를 하는 분들이 힘들었죠. 제주는 이제 겨울이 없어진 것 같아요. 어제 아내가 과수원에서 일하는데 낮에 기온이 17도였대요. 저는 좀 걱정이 돼요. 매년 기후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바뀌니까요. 저희 기준에 귤은 당도가 높은 과일이 아니에요. 감귤의 당도가 평균 9에서 9.5브릭스거든요. 저희 귤은 10정도 나오고요. 그런데 사람들의 입맛은 한라봉(13), 천혜향(14)에 맞춰져 있어요. 요즘 사과는 마냥 달잖아요. 어릴 때 먹었던 맛이 안 나죠. 저희는 와일드하고 복잡한 맛을 내는 귤이 진짜 맛있는 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은 다른 것 같아요. 음악으로 치면 저흰 록이 좋은데, 사람들은 발라드를 원하는 거죠.

 

소비자의 취향도 무시할 순 없을 텐데요.


기준이 헷갈리지만 농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봐요. 어떤 면에 있어서는요. 아내나 저나 어쨌든 농사는 농부가 주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무가 하는 일이고, 저희는 나무를 도와서 수확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는 역할을 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귤이 맛있다고 하면 너무나 기쁘지만, 우리가 어떤 과정으로 나무를 돌보았는지가 중요해요. 그것이 사람이 됐든, 땅이 됐든 해를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돌봤다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레몬 농사도 도전하셨다고요.


제대로 익은 레몬이 나오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덜 익은 풋레몬이 나고요.

 

앨범 작업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도 되도록 잠은 제주에서 잔다고 들었어요.


서울에 오래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엊그제 마스터링을 마쳤는데 너무 늦었더라고요. 마지막 비행기라도 타려고 했는데 그날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비행기를 취소하고 다음날 첫 비행기표를 끊어서 공항 근처 호텔을 잡았어요. 두 시간이라도 좀 자보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기본적인 도시의 소리, 자동차 소리가 힘들더라고요.

 

제주는 어때요?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깡촌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골이거든요. 저녁 8시가 지나면 조용해요. 다만 집 주변에 슬슬 새로운 건물이 생기고 있어서요. 아침 7시, 8시가 되면 집 짓는 소리가 들려요. 365일 땅을 파는 소리가 매일매일 들려요. 오늘은 무슨 땅이 팔려서 뭐가 생길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소음과 소리가 참 달라요. 가요도 장르마다 제각각 다르죠. 루시드폴이 만든 노래를 들으면 일단 차분해져요. 흥분보다는 고요에 가깝죠.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집중해서 들어도 편안해요. 무해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자연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어요. 청력에 문제가 있어서 도저히 도시에서 생활이 안돼서 혼자 살다시피 하셨대요. 그러다 우연히 제 앨범을 들었는데 귀가 아프지 않아서 너무 기뻤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저로서는 상상하지 못한 피드백이었죠. 제 7집 앨범 제목이 『누군가를 위한,』이었어요. 제 바람 같은 제목이었지만, ‘내 노래가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한 마음이 들었어요. 책이라는 매체도 그래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책을 읽어?”라고 하지만, 읽는 사람은 읽죠. 쉽게 버리지 못하고 애착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반갑고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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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반려견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더 특별한 앨범이 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이번 앨범은 펄프가 된 심정이었다”고 말했어요. 제가 사는 동네는 밭농사를 많이 해서 주변에 건강원이 많거든요. 양파, 비트, 브로콜리 등 즙을 짜주는 곳이 많아요. 비트를 갖다 부면 물 한 방울 안 넣고 고압으로 엑기스를 만들어요. 그러면 굉장히 작은 펄프가 남는데, 제가 그런 펄프가 된 것 같았어요.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해서, ‘어떤 반응이 올까’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안 들어요. 혼자 만든 앨범이 아니라 보현과 작업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저 자신을 만족시킨 뭔가가 좀더 커진 것 같기도 하고요.

 

평범한 일상도 살아내는 사람이라서, 어쩌면 더 초연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천상 뮤지션인가? 그런 마음은 없어요. 다만 제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에요. 음악도 농사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음악에게 선택 받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제가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음악을 했다고 생각해요. 농사도 마찬가지예요. 거창하게 말하면, 저에게 귤은 먹는 음악 같기도 해요. 제가 대한민국에서 음악을 만들지만 마음만 먹으면 전세계 사람이 제 음악을 들을 수 있잖아요. 귤도 그래요. 택배 송장에 주소를 쓰다 보면 제가 가본 곳이 얼마 안 돼요. 심지어 귤이 어떻게 꽃을 피우고 자라는지 모르는 분도 있거든요? 그런 분도 전국 곳곳에서 귤을 주문하죠. 귤도 음악도 묘한 것 같아요. 좋은 쪽으로요.

 

좀 이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갑자기 묻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 너무 큰 질문인데요. 대답이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아내랑 ‘쉽게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산다는 걸 긍정하고,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자유롭게 사는 거라고요. 우리가 평소 ‘자유롭게 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걸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건 빨리 인정하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에 승복하기 좀 쉬울 것 같아요. 수긍일 수도 있고요.

 

85쪽에 실린 사진이 특별히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오랜 팬이 짜준 커플 목도리를 두르고 뮤직비디오를 찍은 겨울이었어요. 루시드폴에겐 오랜 팬이 많다고 느껴지거든요. 팬들에게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 같아요.


팬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앨범을 만들면서 너무 지치니까 ‘이쯤 했으면 그만하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오래하지 못하게 해주는 분들이에요. 99%는 제가 모르는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그분들로 인해 제가 음악을 할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우리가 연결돼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라는 끈 하나를 갖고 각자의 삶을 살다가 앨범을 내면 공연장에서 다시 만나고. ‘뮤지션으로 살아간다는 게 뭘까’ 생각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팬들을 생각해요.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항상 이 질문을 품고 지금처럼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다음 앨범은 정말 식물과 콜라보를 할 생각인가요?


진지해요.(웃음) 밭에 수백 그루의 나무가 있어요. 나무가 내는 신호를 소리로 바꾸는 기계를 연결해서 소리를 채집 중이에요. 계절마다 내는 소리가 다를 거예요. 꽃이 필 때, 열매를 딸 때 그 달라지는 소리를 음악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너와 나루시드 폴 저 | 미디어창비
반려견 보현과 함께한 산책 같은 사진과 노래를 한데 엮은 작품집으로, 2년 만에 발표하는 정규 9집 음반과 동시에 선보인다. 이번 앨범의 CD는 책 이외의 형태로는 별도 판매하지 않으며, CD에는 음원으로 공개되지 않는 루시드폴의 음성이 담긴 특별한 낭송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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