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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규 "다이어트는 장내 환경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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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먹어도 살이 잘 안 빠진다. 잠을 자도 피곤함이 풀리지 않는다. 체질 탓이라고 하는데, 혹시 장내 환경이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건강 상태를 좌우하는 장에는 다양한 세균이 살고 있다. 크게 유익균과 유해균, 중간균으로 구분하는 세균 무리는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세력이 달라진다. 고된 다이어트와 지겨운 요요 현상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장내 세균부터 돌아봐야 한다.


『평생 살찌지 않는 기적의 식사법』은 음식을 통해 장내 환경을 좋게 만드는 10가지 식습관을 소개한다. 장 건강을 위한 요구르트, 체질을 바꾸는 양배추, 유익균을 늘리는 양파 초절임 등 주변에서 흔히 구하는 음식 재료가 구체적으로 왜 좋은지, 어떻게 먹으면 좋은지 요리법까지 기재해 쉽게 시도해볼 수 있게 했다.


책 감수를 맡은 김남규 교수는 세브란스 대장항문외과 교수로 지난 25년간 1만 건이 넘는 대장암 수술을 진행한 베테랑이기도 하다. 장 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방송과 강연을 통해 건강한 장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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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살이 찌고 누구는 안 찐다면


『평생 살찌지 않는 기적의 식사법』의 감수를 맡으셨어요.


감수에 대한 경험이 많진 않지만, 올해 6월에 『몸이 되살아나는 장 습관』을 낸 계기로 맡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내 환경 관점에서 다이어트를 이야기하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체질량지수 25 이상을 비만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평균 10명 중 4명이 비만이에요.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고요. 이걸 놔두면 심각한 보건 문제가 됩니다. 대사증후군, 당뇨병, 동맥경화, 뇌졸중, 심장병, 무엇보다 암과 관련되어 있어요. 비만 환자에게는 암이 더 잘 생긴다는 통계가 나와 있어요.


오랫동안 대장항문 질환을 연구해 오셨죠?


외과 의사라 주로 병든 장을 잘라내는 역할을 해 왔는데요, 과거에는 없던 질환이 많아지면서 외과적 시술이 늘어났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병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3,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대장 자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대장질환 종류도 적었고 빈도도 낮았어요. 따라서 전공하는 의사들도 별로 없었고요. 지금도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음식을 섭취해 위에서 소화하고 소장에서 흡수하고, 대장은 노폐물을 배출만 하면 끝이라고 여겨요. 통로 역할로만 생각한 거죠. 지금은 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장이 ‘제2의 뇌’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하루 2000cc 액체가 몸에 들어온다면 대장에서 1800cc 정도를 흡수하고 나머지 200cc 정도가 배출됩니다. 상당히 적은 양 안에 노폐물을 농축해서 배출하는 거죠. 그래서 스펀지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에 가장 기본적인 신경 단위를 뉴런이라고 해요. 이 뉴런 집합체는 주로 뇌와 척수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어요. 척수에 뉴런이 1억 개가 있었다고 한다면, 소장과 대장 장벽에 뉴런 수가 5억 개가 있다고 밝혀졌습니다.


장이 기분도 좌우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우울증에 빠진다고 하죠. 몸 전체에 세로토닌이 100이라고 하면 그중 70은 장에서 나옵니다. 또 재밌는 것은 장내 미생물 환경이 나빠지면 우울증이 많이 생겨요. 장 건강이 나쁜 사람들이 뇌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거꾸로는 장내 미생물 변화를 유도하고 생활 습관을 바꿔서 유익균을 많이 양생하는 쪽으로 환경을 바꿔가면 치매나 자폐증 등의 증상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요. 이런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면서 뇌와 장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제2의 뇌’라는 명칭이 나온 것 같습니다.


『평생 살찌지 않는 기적의 식사법』에서 유익균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설명했는데요. 장내에는 유익균과 유해균, 중간균이 있다고 설명했어요. 그중 중간균인 퍼미큐티스는 ‘뚱보균’이라고 불린다고요.


표현을 뚱보균으로 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중간균의 하나인데요. 편의상 저도 뚱보균이라고 말할게요. 뚱뚱한 쥐의 장내 미생물을 무균 상태의 장내 환경을 가진 정상 체중 쥐에게 투여하면 쥐가 뚱뚱해진다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똥보균은 지방을 저장하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죠. 퍼미큐티스 균뿐만 아니라 장내미생물에 관계된 다양한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 중인데요, 어쨌든 우리가 주목할 점은 중간균이 유해균 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가공식품이나 정크 푸드, 기름기 많은 음식, 당 지수가 높은 음식 등을 오랫동안 먹으면 중간균이 유해균 쪽으로 갑니다. 똑같이 먹으면서도 누구는 살이 찌고 누구는 안 찐다면, 장내 미생물의 미묘한 변화 때문이 아닌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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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식습관


양배추 초절임, 버섯, 양파, 찰보리 등 일본식 식단을 위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메보시와 된장국 등도 나오는데, 사실 우메보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먹는 음식은 아니죠. 된장국도 미소 된장을 말한 거라 한국의 된장국과는 차이가 있고요. 하지만 후지타 고이치로 저자가 쓴 책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장 건강과 장내 세균에 대한 책을 많이 집필해 관심을 두고 있었고, 내용을 보니 상당히 실제적인 레시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른 책과 차별성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다이어트 책이나 장 건강 책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책의 핵심은 결국 먹으면 살찐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식생활을 올바르게 하면 살찌는 부담이 적어진다는 내용인데요. 사람들이 개념을 알아도 실천하기 어렵잖아요. 뭘 먹어야 할지 모르는데 이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레시피를 지정해 줘요. 건강한 야식도 언급합니다. 야식이 몸에 해롭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아요. 하지만 먹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럴 때 야식을 먹지 말라고만 하는 게 아니라 칼로리가 낮고 장에 부담이 적은 메뉴를 제안하고 있어요.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게 느껴져요.


처음 소개된 식품이 유청이에요. 인크레틴이 들어 있어 소화 속도를 줄이고 흡수가 많이 되도록 한다고요. 요구르트가 장에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유청은 새로웠어요.


저도 책을 보면서 배웠어요. 사실 요구르트를 가라앉혀 뜨는 것만 먹는 게 쉽진 않아요. 일반적으로는 유산균을 많이 먹지요. 식물성 유산균이 좋다는 저자의 주장도 있었는데요. 우리 식품 중에도 김치가 유산균이 많잖아요. 최고의 건강식품이고요. 유산균은 위하고 췌장을 지나면서 산성도가 높아 많이 죽는데, 식물성 유산균은 그걸 견뎌서 장에 안착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우리가 고유 발표 음식을 통해 식물성 유산균을 섭취한다면 우리 장에 도움이 되는 프리바이오틱스도 잘 얻을 수 있고요.


프리바이오틱스, 프로바이오틱스, 유산균, 장내 미생물… 여러 개념이 많습니다.


프리와 프로를 구분하는 건 아무 소용 없어요. 그냥 대체품일 뿐이에요. ‘OO 바이오틱스’ 이름 붙인 상품 참 많이 파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식단이 문제 있다고 생각하면 식단을 먼저 바꿔야 해요. 나쁜 식단을 유지하면서 아무리 상품화된 유산균을 먹어봤자 소용없어요.


저탄고지, 혹은 FMD라 불리는 다이어트가 유행하고 있는데요. 장내 환경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나요?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탄수화물 대신 지방을 많이 먹는 게 장내 환경에서 미생물에게 좋을지 의문은 듭니다. 그저 유행에 현혹될 게 아니라 건강한 다이어트를 하기를 권유하고 싶어요. 건강한 다이어트란 식사를 하면서 체중감량을 계획적으로 하는 거예요. 대개 급격한 감량은 단식이거나 아프거나 둘 중 하나에요. 먹지 않는다면야 살이 쭉 빠져요. 그런데 요요가 금방 와요. 그래서 자기 체중의 10%를 3개월 이내에 빼라는 거예요. 칼로리 계산해서 식사하고, 식단 가리고, 그리고 동시에 운동해야죠.


스트레스도 장내 균을 바꾸는 원인이 된다고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이나 카테콜라민 등 유해물질이 분비되는데, 이런 것들이 장내 유해균을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항생제에 관한 언급도 있었어요.


중요한 언급입니다. 의학 분업으로 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항생제를 받을 수 있게 되면서 남용이 줄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조금만 아프면 항생제 가지고 있다가 먹는 사람들이 있어요. 항생제를 먹으면 장내 유익균이 많이 죽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고, 조금만 아파도 항생제를 투약하다 보면 장내 미생물 환경에 매우 해롭습니다. 조금 더 자라면 패스트푸드를 먹고, 유해균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아토피 질환에도 영향이 가고 염증성 장 질환도 생기죠.


성인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떤가요?


성인들도 항생제 함부로 먹으면 미생물이 많이 죽습니다. 특히 노인들이 항생제를 남용하면 클로스트리듐 디피실레 균이 자라면서 장내염증이 심하게 와요. 그걸 위막성 대장염이라고 합니다. 항생제를 함부로 먹으면 장내 미생물에는 도움 될 게 없어요. 우리가 숲에 가서도 환경 보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몸이 우주라고 하잖아요. 우리 몸이 가진 장내 미생물 생태 체계는 왜 보호하지 않냐는 거죠.


장내 미생물군의 구성이 생후 1, 2년 사이에 정착되고 나면 구성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애를 낳을 때 가급적이면 정상분만 하라는 의견도 있어요. 산도를 통해 엄마의 미생물을 지나오면 아이가 건강한 장내 구성을 만드는 데 효과적이라고요. 꼭 그러지 않더라도 음식물을 먹으면 장내 구성 비율은 달라집니다. 유익균과 유해군 비율이 2대 8이었어도 식습관을 통해 중간균을 유익균 쪽으로 가게 만들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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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소개된 일본식 식단 외에 장에 좋은 음식이 있을까요?


너무나 많죠. 일본은 낫또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청국장이 있어요. 대두 발효 식품은 강력히 추천하는 프리바이오틱스입니다. 염분 비율이 높아서 문제지, 그것만 빼면 청국장이나 김치는 정말 좋은 식품이에요. 채식이기도 하고요. 불수용성 식이섬유질로 저작 운동을 하면 뇌혈관을 자극해서 치매도 예방하고, 천천히 먹으면서 포만감을 늘일 수 있어요.


불수용성 식이섬유질은 무엇인가요?


물에서 녹지 않는 식이섬유입니다. 몸 안에 들어가면 포만감이 생기고, 수분을 흡수하니까 부피가 커지고 변량이 많아지고, 발암물질을 흡착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유해물질이 장 점막에 노출되지 않게 밖으로 끌고 나가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리고 또 장내 미생물의 유익균 먹이가 됩니다. 장내 산도를 낮춰서 유해균이 못 사는 환경을 만들기도 하고요. 두 번째는 짧은 사슬 지방산을 많이 만드는데 유산균이 프리바이오틱스를 가지고 뷰티르산이나 아세틱산 같은 짧은 사슬 지방산을 만들어 내서 장 점막을 강화해요. 웬만한 염증이나 항암 물질도 자가 면역으로 방어합니다.


건강한 사람의 대장균을 추출해 환자에게 이식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장 건강에 획기적인 치료법이 되지 않을까요?


배변 이식은 장내 미생물 환경이 나쁜 환자 중에 기존 치료방법이 적용되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실제 임상에서 유용한 효과를 보고 있는 건 유막성 대장염이에요. 대장에 깔린 염증을 다른 항생제가 효과적으로 제거를 못 하는데, 그럴 때 건강한 사람의 장내 미생물 환경을 특수처리해서 이식했더니 80% 이상 완치됐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임상에서 인정된 치료법이에요. 염증성 잘 질환이라든가 치매, 자폐증 등 여러 분야에서 임상 실험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임상적으로 심각한 환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겠지만, 계속 강조하듯 본인이 바뀌려면 무엇보다 식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몸이 되살아나는 장 습관김남규 저 | 매일경제신문사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경험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책이다. 검증되지 않은 속설과 건강보조식품의 범람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대중을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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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강의모 “무조건 납작 엎드려서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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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의 이름 뒤에 숨어 말을 건네면서 스무 해를 보냈다. 라디오 작가로 살아온 시간이었다. 마침내, 60년의 세월을 지나,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저자로 하여 책을 냈다.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 그것은 곧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일 테다. 강의모 작가는 ‘책 이야기’를 택했다.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달콤하고 짜릿한” 독서의 기억, 그것을 붙들고 책과 호흡하면서 살아온 시간들이 담겨있다. 삶의 길목마다 지표가 되어주었던 책들과 책을 통해 만난 사람들, 책이 비춰준 자신 안의 모습들을 말한다. 사이사이 자리를 잡은 독서록에는 ‘읽으며 익어갑니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야말로 ‘읽으며 익어 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책이다.

 

“읽기는 늘 맛있는 기억”이라고 말하는 강의모 작가는 마흔의 나이에 뒤늦게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MBC FM <오미희의 가요응접실>을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의 구성을 맡았으며, 14년째 SBS 러브FM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담당하고 있다.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함께 만들고 있으며, ‘2013 SBS연예대상’에서 라디오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은 책으로 『노년에 인생의 길을 묻다』(공저), 『아까운 책 2012』(공저), 인터뷰집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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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으로 삶을 정리한 것 같아요

 


책에도 쓰셨듯이, 방송작가는 다른 사람의 이름 뒤에 숨어서 살잖아요.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나는 책을 쓰셨는데, 느낌이 어떠세요?


굉장히 두려웠어요.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사회 명사도 아닌데 개인적인 삶을 오픈하는 거니까요. ‘이 책이 누구한테 어떤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되도록 포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잘 받아들여질까?’라는 생각도 했는데요. 지인들이나 가족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어떻게 생각하면 제가 살아온 60년의 삶을 잘 정리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 중에서도 나의 삶을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던 사람들이 ‘책을 읽고 나서 너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참 좋았다’고 이야기할 때가 제일 좋더라고요. 책 한 권으로 나를 설명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 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원래는 에세이를 쓴다는 건 엄두를 못 냈었어요. 누가 에세이를 한 번 써보자고 해도 ‘내가 셀럽도 아닌데, 누가 내 인생에 관심을 가져?’라는 생각으로 못 한다고 했었거든요. 예전에 인터뷰집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낼 때도 제 이야기는 빼버렸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서울신문>에서 칼럼 제의를 받았어요. 어떤 주제도 좋으니까 편하게 쓰라고 하더라고요. ‘될까...?’ 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읽어 주는 분들이 계시고, 그렇게 2년을 하다 보니까 ‘내 이야기를 써도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든 거예요. 칼럼 연재는 2년 동안 하고 끝이 났는데, 목수책방의 전은정 대표가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글을 더 쓰고, 그동안 읽어 온 책의 내용을 조금 더 녹여내서 ‘읽으며 익어갑니다’라는 독서록도 넣고, 그렇게 만들게 된 거죠.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의 작가로 14년 동안 일하고 계세요. 상당히 긴 시간이에요. 놀라울 정도로요.


저도 놀라고 있어요. 매일매일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멋모르고 시작했어요. 좋아하는 작가들 만난다는 생각에 무조건 좋기만 했고, 신기함에 빠져있었죠. 하다 보니까 책을 읽는 재미가 조금씩 달라져요. 요즘에는 ‘내가 이걸 계속 하고 있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웃음). 오히려 갈수록 더 즐겁고 하루하루가 새삼스러워요.

 

이선아 PD(<최영아의 책하고 놀자> PD)는 작가님을 두고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책에서 받은 인상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갇혀있지 않은 분 같았어요.


예전에는 굉장히 갇힌 삶을 살았어요. 40대 중반 이후, 50대에 가까워서야 열리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때부터 뭔가 삶의 전환을 꾀하게 된 것 같은데요. 한 일 년 정도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인터뷰를 하면서 사람 만나는 재미를 알게 됐어요. 주로 시사 다큐를 많이 하다 보니까 어두운 곳도 가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그들에게 배우는 게 되게 많더라고요. 배우려면 일단 내가 열려야 되잖아요. 또 당시에 노인 프로그램을 맡게 됐었는데, 제가 50대에 가까워 질 때였어요. ‘물론 다른 사람의 노후도 생각해야 되지만 나의 노후도 잘 준비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쉰이 넘어서 노인 복지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그런 노력을 하면서 내 삶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 보게 됐죠.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이제까지 살았던 것과는 다르게 나를 확 펼쳐 놓고 살아야겠다, 그러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이제는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나이도 들었는데, 조금 배짱 있게 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예전에는 소심하고 사람들 만나는 걸 힘들어했다면 이제는 반대로도 한 번 살아 보면 어떨까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배짱도 조금 생겼던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어른도 자라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아이들한테만 ‘잘 자라라’ 할 게 아니라 사실은 어른이 더 잘 자라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탁환 작가는 이번 책을 읽고 “책과 사람이 연결되어야지만 삶의 지혜가 다리처럼 놓인다는 점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썼어요.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어요?


제가 이선아 PD와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개편하고 기틀을 잡을 때, 처음 떠올린 분이 김탁환 작가님이었어요. 당시에 작가님이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로 계실 때라, 섭외 메일을 드렸는데 같이 하기 힘들 것 같다고 답을 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세 번까지 연락을 드렸죠. 진짜 삼고초려 끝에 모신 거예요(웃음).

 

그리고 지금까지 ‘김탁환의 뒤적뒤적’ 코너를 맡고 계시죠(웃음). 김탁환 작가님을 ‘훌륭한 독서 스승’으로 꼽으셨는데, 이유가 있나요?


선생님이 책을 정말 ‘뒤적뒤적’ 읽으세요. 장르가 국한되지 않아요. 존 스타인벡 같은 고전을 읽다가 갑자기 대중과학서, 에세이, 시집으로 옮겨가세요. 처음에는 따라가기가 되게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쭉 따라가다 보니까 독서 편식이 저절로 교정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책을 바라보는 자세, 책을 대하는 나만의 방법 같은 걸 선생님을 통해서 많이 배웠어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선생님, 저는 게을러서 책에 메모도 안 하고 밑줄도 잘 안 그어요. 그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도대체 저한테 뭐가 남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딘가에 다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독서록을 정리하다 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어디에 있는 무슨 구절인지까지는 안 떠올라도 ‘아, 그 책’ 정도는 떠오르더라고요. 책을 꺼내서 다시 들여다보면 내가 생각했던 그 구절이 나오고요. 책을 읽는 건, 나도 모르게 쌓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새롭게 발견한 부분이에요.

 

작가님의 독서 스타일은 어떤가요?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으시는 것 같던데요.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 병행 독서를 하잖아요. 머리맡에 한 권, 화장실에 한 권, 대중교통 이용할 때 들고 다니는 가벼운 책 한 권... 저도 그런 식으로 하는데요. 예전에는 소설만 좋아했었어요. 스토리 따라가기가 좋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진도가 빠르게 안 나가는 책들도 봐요. 가령 조금씩 생각을 해야 되는 책들은 주로 화장실을 놓으면 좋더라고요. 집중이 잘 돼요. 머리맡에는 스토리가 있어서 빠져들기 좋은 책을 많이 두고요. 되도록 다양하게 읽으려고 노력해요.

 

최근에 재밌게 읽으시는 책들은 어떤 건가요?


대중 과학서도 재밌게 읽고 있어요. 시작은 아마 『이명현의 별 헤는 밤』이었던 것 같아요. ‘과학자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에요.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같을 책을 봐도 아름다운 글이 정말 많고요. 정재승 교수님도, 저희가 정말 어렵게 게스트로 모셔서 녹음을 하고 있는데, 과학 책만 골라 오시는 게 아니에요. 예술, 문학 등 모든 분야가 다 들어있어요. ‘이래서 모든 지식이 어우러진 과학적 저술이 나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가 SF 소설을 잘 안 읽는 편식이 있었는데, 최근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을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관심 갖지 않았던 분야도 분명히 이런 재미가 있을 거야’ 하면서 마음이 열리게 되죠. 심지어 자기계발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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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로 산다는 것


책의 제목이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 예요. 앞서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를 쓰실 때 이런 결론을 얻으셨다고요.


그때 인터뷰한 분들이 거의 다 제가 오랫동안 알았던 분들이었어요. 그렇다 해도 만나서 ‘지금까지 인생을 사시면서 어떤 전환점 있었습니까?’ 하고 물어 보면 본인도 확실하게 언제라고 말하기 힘들어요. 대화를 하다 보니까 나오는 거죠. ‘말을 하다 보니까 그때였던 것 같네요’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가는 게 인생인데, 그 흐름 속에서 내가 중심만 잘 잡으면 되는 거누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린 결말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야겠다고요. 그 책의 마지막에서 그 문구를 썼죠.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라고요. 쓰면서도 ‘아, 이거 너무 잘 쓴 것 같아’ 그랬어요(웃음). 그리고 이번 책의 제목을 정하는데 그 문장으로 하면 어떨까 싶었죠. 출판사 대표님도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읽으며 익어갑니다’라는 말을 꼭 어딘가에서 하고 싶었어요. 대표님이 그 말은 독서록 제목으로 하면 딱 좋겠다고 하셔서 정하게 됐죠.

 

국어 교사로 계시다가 방송작가가 되셨죠. 그 변화가 작가님 삶의 터닝 포인트였나요?


그건 경로가 한 축으로 흐른 게 아니고요. 제가 국어 교육을 전공했는데, 그때는 국립 대학교 사대를 졸업하면 바로 발령을 받았어요. 임용 고시가 없었어요. 그래서 바로 시골 학교에 국어 교사로 갔는데, 저는 대학에 갈 때부터 선생님이 되기 싫었어요(웃음). 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하면서도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건 참 재미있고 좋은데 그 시스템이 되게 싫더라고요. 지금하고는 달리 되게 불합리한 게 많았고, 그런 게 저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어서,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게 목표였어요. 정말 철이 없는 시절이었죠. 제가 선생님을 그만둘 수 있는 길은 빨리 결혼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둘러서 결혼을 하면서 사표를 냈어요. 그런데 방향을 잘못잡고 결혼을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어서 결혼 생활 12년 만에 정리를 했어요. 아들하고 한 팀을 이뤄서 따로 독립을 했고, 그러고 나서 방송작가를 하게 됐어요.

 

예전부터 방송작가가 되고 싶으셨어요?

 

그게 아마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기도 할 테고, 제 인생의 정말로 큰 운이 작용한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제가 무엇을 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났어요. 그 친구가 방송계에 있었는데, 저를 만나자마자 ‘너는 학교 다닐 때부터 글을 잘 썼던 친구인데 왜 이러고 살아, 너는 내가 아는 가장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네가 이런 인생을 살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어요. 나에 대해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일도 세상에 있다는 게. 그때 정말 힘들 때였는데 굉장히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때 방송 구경을 갔는데 친구가 ‘네가 혹시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너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이러는 거예요. 그때가 마흔이었어요. 방송계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정말 너무 해맑게 들어간 거예요.

 

이후에 방송국 생활은 어땠나요?


친구 덕분에 방송계에 진입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홀로 서기가 됐죠. SBS에서 저를 잘 아는 PD들이 ‘자수성가형’이라고 이야기를 해 줄 때, 그때 진짜 행복했어요. 운의 작용으로 방송국에 들어갔지만 중간에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자수성가를 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는 게 너무 기뻤어요. 그게 아마 첫 번째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한두 번은 아니잖아요. 방송작가가 될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는 친구가 내손을 잡고 끌어줬던 거고요. 후반부의 터닝 포인트들이 또 있었던 것 같아요. SBS에서 혼자 힘든 시간을 견딜 때 옆에서 지켜봐 준 사람들이 있었고,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많은 걸 배워 가면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었던 때도 있었고... 아마 그런 게 후반부의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2013년에는 ‘SBS 연예대상’에서 라디오 작가상도 받으셨잖아요.


그때는 진짜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만큼 인정받았으면 됐다고요. 저한테는 물질적인 성취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든요. 그냥 열심히 한 거 인정받았다는 거, 그거면 된 거예요. 그때부터 마음이 더 넉넉해진 것 같아요.

 

“방송작가란, 듣기 좋은 말로 ‘프리랜서’, 자조적인 표현으로는 ‘일용직’”이라고 쓰셨어요. 방송작가로 사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힘들죠. 방송작가의 세계라는 게 약간 겉멋이 들기 쉬운 세계잖아요. 내 위치를 자꾸 잊어버리게 될 수 있죠.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나 진행자들의 수준이 내 생활의 어떤 축이 되니까요. 사실은 저도 그래요.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를 하면서 유명한 저자들, 훌륭하신 게스트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 조금 답답해지는 마음이 들 때가 있거든요. 나는 별거 없는 사람인데. 연예인들과 자주 만나는 방송작가도 그럴 수 있죠. 그런 것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면 도태되기도 쉽고, 자기 나름의 실력이나 생존 경쟁력을 쌓는 것에 소홀하면 오래 할 수 없을 수도 있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너무 늦게 시작했으니까 ‘나의 경쟁력은 그냥 죽어라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자수성가형 작가’가 된 비결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나를 조금 낮추면서 일했던 것 같아요. 저보다 어린 PD들은 계속 들어오고, 나이든 작가를 불편해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원고는 일회용이지, 남지 않잖아요. 그때 그 방송만 잘 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방송작가들은 되도록 자신을 지워야 되거든요. 그런 걸 잘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겸손해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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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쁨을 발견하는 한 해가 되길


“돌아보면, 책을 읽는 것도 방송작가로 일을 해 온 과정도 겸손과 비굴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라고 쓰셨어요. 책이 작가님을 비굴하게 만들 때도 있나요?


있죠. 작가에 대한 부러움이나 경외감이 들 때 당연히 그렇고요. 그러다가도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납작 엎드려서 읽는 게 가장 좋은 거다’라는 생각이 들죠. 작가는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고, 나보다 먼저 앞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지식을 쌓고 나에게 좋은 길을 알려 주는 사람이니까. 

 

“나이 들어 가장 맛있게 읽은 책은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라고 하셨어요. 어떤 책을 ‘맛있게’ 느끼실까 궁금해요.


잠을 잊게 하는 책이 있잖아요. 이제 자야 되는데 읽는 걸 멈출 수 없는 책들이요. 『스토너』같은 경우는, 처음 앞부분은 ‘이게 뭐지?’ 하면서 읽다가 두 번째 날 멈췄던 부분에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에서부터 몰입이 쫙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읽다 보니까 해가 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 부분이 주인공이 죽음을 맞는 부분이거든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과정이 몇 페이지 걸쳐서 길게 나와요. 그게 황혼하고 너무 잘 어울리잖아요. 해가 지는 가운데 그 부분을 읽는데, 꼭꼭 씹어서 읽게 되더라고요. 내 인생을 생각하게 되고요. 그 마지막 부분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흐르는 거예요. 그 느낌이 정말 좋더라고요. 제가 그 책을 세 번 읽었고, 주변에도 많이 권했는데, 정말 그 책은 읽는 사람마다 다 느낌이 달라요. 인생관이 드러나더라고요. 물론 저도 읽을 때마다 포인트가 조금씩 달라졌고요.

 

평소 ‘시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으시죠?


시간에 대한 생각은 『싯다르타』를 읽을 때 제일 먼저 한 것 같아요. 그때가 이십 대 초반이었을 텐데 ‘강물은 늘 거기에 있지만 같은 강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시간이라는 건 뭔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시간을 잊어버리고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시간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요. 시간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지, 시간을 어떻게 감각하면서 사는 게 좋은 것인지, 꾸준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에 대한 책이 나오면 무조건 읽는 편인데요. 제일 좋아 하는 책은 칼 하인츠 A. 가이슬러의 『시간』이라는 책인데 지금은 절판됐어요. 되게 아쉽더라고요. 그 책이 있으면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도 그 책은 컴퓨터 옆 책꽂이에 항상 꽂아두고  자주 들여다봐요.
 
시간에 관한 책도 많이 모으셨는데, 당분간은 그림책 『시간은 어디에 있는 걸까』을 가장 앞에 두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유가 뭔가요?


그림책은 글이 적잖아요. 그런데 글 하나하나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요즘은 좋은 그림책들이 너무 많아요. 안녕달의 할머니의 여름휴가』라든지 수박 수영장』이라든지. 얼마 전에는 『기억의 풍선』이라는 그림책을 봤는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손자의 교감을 담은 책이에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면서 기억의 풍선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이 나오는데, 그걸 그림하고 너무 아름답게 엮은 거예요. 풍선 하나에 하나의 추억들이 들어 있는 거죠. 제가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는 프로그램도 하고 있는데, 노년층을 위한 방송이에요. 지난 추석 때 그 방송에서 『기억의 풍선』을 소개했어요. 그 책이 너무 좋았어요.

 

책과 관련해서 내년에 계획하신 바, 기대하시는 바도 있으세요?


요즘 워낙 책이 많이 나오는데 ‘나도 좋으면서 남들에게도 좋을 책’을 잘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세대를 건너뛰어서, 나도 젊은 세대의 느낌과 맞추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이번에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작품인데요. SBS 라디오에서 PD로 일하던 한 친구가 그만두고 암스테르담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 친구가 소설을 써서 이번에 당선이 됐어요. 『최단경로』라는 소설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다층적인 면을 고루 잘 짜서 소설을 썼는지 ‘이건 한 번 읽고 말아서는 안 되겠다, 여러 번 읽어야겠다’ 싶었어요. 어젯밤에 끝까지 읽고 덮어놓고 왔는데 진짜 재밌게 읽었어요. 그런 좋은 책들, 생각지도 않았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사실 책이 많이 쌓이기 때문에 흘긋 보고 치워놓는 책들도 많은데, 그 중에서 나중에 재발견하는 책들이 있거든요. 그런 실수를 조금 덜 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그리고 재독했을 때 더 좋은 걸 발견한 책들이 있잖아요. 그런 책들만 따로 모아두는 서가를 마련해야겠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어요. 가령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든지  『스토너』, 『데미안』같은 책들.
 
내년에는 동네 책방에서 독서 모임을 진행하실 계획이라고요.


제가 역량이 된다면 독자들하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요. 옛날에는 수줍음을 많이 탔는데 요즘에는 얘기 나누는 게 좋더라고요. 특히 젊은 친구들하고. 목수책방 대표님이 한번 기획해보신다고 하니까, 저는 시간만 맞으면 얼마든지 하고 싶어요. 아기자기한 동네 책방들하고 같이요.

 

‘책 읽는 귀여운 할머니 되기!’가 꿈이라고 하셨어요. 지금 바라시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요즘에는 경계를 뛰어넘어서 많은 것을 만나면서 잘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요. 이건 정말 큰 욕심인데, 주변 사람들한테 뭔가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우리 손자한테만이라도.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강의모 저 | 목수책방
어렵게 꺼낼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 등을 그동안 읽었던 책 이야기와 촘촘하게 엮으며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한 인생의 문제들을 툭 던져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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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전미경 “가짜 자존감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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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오해받고 있다. ‘자존감이 높아야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지난 몇 년간 ‘자존감 높이는 방법’, ‘자존감이 낮은 이유’와 같은 이야기들이 TV, 책, 강연을 통해 쏟아졌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들을 만나며 자연스럽게 자존감에 주목하게 됐다는 정신의학전문의 전미경은 “많은 사람이 가짜 자존감의 함정에 빠져 있다”며 ‘가짜 자존감’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자존감을 오로지 트라우마의 문제로 접근하게 되면 그런 문제를 야기한 원인, 즉 타인과 과거에 집중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계속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50쪽)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는 부정적 감정과 과거의 트라우마에 집중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자율성과 연대감을 바탕으로 자존감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이동할 것을 권한다. 천안에서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을 운영 중인 전미경 저자는 직장인들을 위한 인문서 시리즈 『퇴근길 인문학 수업: 관계』(공저), 『퇴근길 인문학 수업: 멈춤』 (공저)를 출간하고, 아이들의 심리 문제를 다룬 『괜찮아 괜찮아』『어린이 감정 사전』의 감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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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규정되지 않은 단어

 

심리학자나 상담전문가가 아닌 정신과 의사가 말하는 자존감 이야기에요. 특별히 자존감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어요. 증상이 호전되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자존감 때문이더라고요.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않으니까 힘든 거죠.

 

자존감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근 몇 년간 자존감이 화두였어요. 이런 현상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은데요. 


맞아요. 자존감은 이미 익숙한 단어죠. 남발되기도 하고요. 제가 『퇴근길 인문학 수업: 관계』 (공저)에서도 자존감에 관해 썼는데요. 책을 소개하는 출판사 블로그 게시물에 어떤 분이 ‘개나 소나 다 자존감을 팔아먹는구나’라고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대한 피로감이 상당하다는 걸 알았어요.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자존감은 규정되지 않은 단어예요. 심리학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요. ‘정의’라는 단어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학자마다 정의를 다르게 이야기하잖아요. 벤담의 공리주의, 칸트의 정언 명령,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론 등 아주 다양해요. 자존감도 마찬가지예요. 규정되지 않은 가치이기 때문에 자존감에 대한 내 생각이 곧 자존감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명확하면 편하니까요.


자존감이나 정의같이 규정되지 않은 단어들의 특징이 긍정적 개념이라는 거예요. 긍정적 개념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명확히 규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반면에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개념은 그렇지 않죠. 명확히 정의되어야 해요. 법 또는 사회문화적으로 문제 될 때가 많거든요.

 

이를 테면요?


『퇴근길 인문학 수업: 멈춤』 (공저)에서 이야기한 안락사나 동성애 같은 경우가 그런데요. 안락사는 법적, 의학적인 정의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어요. 동성애의 경우 아직 한국에서는 정서적으로 불일치하는 면이 있지만, 계속 논의 중이죠. 미국에서는 사회, 문화적인 합의가 있는 편이고요. 이렇게 문제가 될 만한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합의가 필요해요. 반면에 긍정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죠.

 

그럼 저자님께서 생각하는 자존감은 뭔가요?


자신의 효용과 가치에 대한 평가가 바로 자존감이에요. 자존감을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총론적으로 자존감은 행복이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추구하는 방향은 다를 수 있죠. 그래서 더 규정하기 어려운 단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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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을 높이는 의외의 요소 ‘지성’과 ‘도덕성’

 

자존감이 왜 시대의 화두가 되었을까요?


신자본주의 열풍과 맞물렸다고 생각해요. 절대적 빈곤은 해소됐지만, 상대적 빈곤이 두드려지면서 사람들이 ‘나는 왜 행복하지 않나’ 생각하기 시작했고,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자존감이 부각되지 않았나 싶어요. 혈연 가족 중심, 조직 중심 등 기존의 가치들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의 변화와 함께요.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자존감에서 해답을 찾은 건지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흔히 심리학을 ‘자본주의의 시녀’라고 하잖아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를 도외시하고 개인의 책임에만 집중하는 경향 때문인데요. 특히 노년 우울증 같은 경우가 그래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행복하지 않은 건 네 탓이야’, ‘네가 자존감이 낮아서야’라고 하면 안 되죠. 개인의 노력이나 역량도 중요하지만,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대승적인 관점에서 자존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가짜 자존감’을 추구한다고 하셨어요. 가짜 자존감의 특징이 뭔가요?


자존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과도한 칭찬이나 인정, 자신감으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가짜 자존감이죠. 진짜 자존감은 본질에 대한 좋은 능력이에요. 이 능력은 ‘지성’, ‘긍정 정서’, ‘도덕성’, ‘자기 조절력’으로 기를 수 있고요. 이 네 가지 요소에 집중하고 갈고 닦으면 진짜 자존감을 높일 수 있어요.

 

가짜 자존감과 진짜 자존감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면요?


나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봐야 해요. 기준이 타인이나 외부 환경에 있으면 안 돼요.

 

자존감을 높이는 요소로 ‘지성’을 꼽은 게 의외였어요.


그런 반응이 많은데요. 일단 지식과 지성을 구분해야 해요. IQ같이 타고난 머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광범위하게는 지성이고요. 더 좁게 하면 이성, 더 좁히면 당시 상황에 대한 사고 분별력을 말해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하에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능력이요.

 

‘도덕성’이 자존감에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도 새로웠어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자존감 높은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도덕성이 높다는 거예요. 도덕성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긍정적 자기 개념을 쌓는 출발점이 되는데요. 도덕성이 높은 사람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돼요. 이때 말하는 도덕성은 법과 규칙을 지키는 것 이상의 가치 지향적인 거고요.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고 비건을 지향하거나 기부를 하는 등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요. 실제로 임상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환자 중에 자신을 ‘문란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분이 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을 “쓰레기 같다”고 해요. 친구든 연인이든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앞에서 떳떳하지 않다’라고도 하고요. ‘나는 괜찮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탑재되는 거죠.

 


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모델’이 되어주세요

 

‘현실의 자아’랑 ‘이상적 자아’의 차이가 클수록 자존감이 낮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차이를 줄일 수 있을까요?


장점에 집중해야 해요. 한국 사회는 못 하는 부분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 아이가 수학을 못 한다 싶으면 즉시 수학 과외를 시키는 등 못 하는 부분을 잘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요. 잘하는 걸 더 잘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죠. 그러다 보니 잘하는 능력이 사장돼요.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이런 경향을 자주 느끼는데요. “성격이 어때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모르겠대요. 장점도 잘 몰라요. 그런데 단점, 못하는 건 너무 잘 알아요. 이럴 때 보면 한국 사람들은 내가 못하는 게 뭔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를 평생 고민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자존감 키울 기회를 박탈당하는 거죠.

 

이상적 자아가 유독 비대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특징이 있나요?


자신에 대한 객관성이 없어요. 내 말만 옳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꼰대들이 그래요. 물론 비대할 수는 있죠. 내가 잘하는 영역에서는 조금 비대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에 맞는 노력을 해야 해요. 자존감을 키우는 요소로 ‘자기 조절력’을 꼽은 이유도 이 때문이고요.

 

자존감이 낮은 이유를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찾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요.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과거에 트라우마에만 집중하거나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하면 그런 문제를 일으킨 원인, 즉 타인과 과거에만 집중하게 돼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거죠. 그보다 개인이 갖는 내면의 인지 패턴을 수정하고 성취와 몰입의 경험을 쌓는 데 더 집중해야 해요. 내 생각이 왜곡되어 있다는 걸 비춰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거울을 가져야 하고요. 외부 세계와 더 많이 소통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차원까지 나아가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내 자존이 떨어졌을 때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돌고 돌아 나의 자존을 높여 줄 수 있으니까요.

 

흔히 ‘자존감이 높다’, ‘낮다’라고 하는데 과연 자존감이 둘 중 하나고 정의될 수 있는 건가 싶어요. 높음과 낮음 사이에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당연하죠. 모든 사람은 자존감의 높음과 낮음을 왔다 갔다 해요. 만약에 내가 갑자기 직장을 잃고 돈도 떨어지고 상황이 어려워진다면 자존감이 낮아지겠죠. 그런데 내로라하는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인정받고 사랑하는 연인도 생긴다면 자존감이 올라갈 거고요.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사람과 자존감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존감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든요.

 

유년기가 자존감을 결정한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유년기는 중요하죠.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자존감은 모든 시기에 여러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고요. 인간이 갖는 목적과 의지,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로서는 특정 시기, 특정인이 자존감을 결정한다고 보지 않고요. 그 이후에도 얼마든지 스스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는 부모님들에게 조언한다면요?

 

엄마가 자존감 높은 사람이 되면 돼요. 아이에게 모델이 되어 주는 거죠.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찾고 거기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에요. 아이의 자존감을 파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나의 자존감을 키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대승적으로 사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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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 대신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퀴어플렌들리 확정 병원으로 선정되셨다고요. 배경이 궁금해요.


스스로 퀴어프랜들리 병원을 표방한 건 아니고요. 성 소수자 커뮤니티내에서 공유하는 병원 정보가 있는데 거기에 ‘퀴어프랜들리 확정 병원’으로 기재돼 있다고 들었어요.

 

선정된 비결이 뭘까요?


『퇴근길 인문학 수업: 멈춤』 (공저)이라는 책에 동성애에 관해 쓰면서 관련 책이나 논문을 많이 봤어요. 사실 정신과 의사들도 동성애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게 되면 평소 선입견이 드러날 수밖에 없죠. 노력하고 공부해야 해요. 그리고 제 병원이 퀴어프랜들리 병원이라는 사실보다 사람들이 정신과에서도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 즉 퀴어언프랜들리 병원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해요.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온전히 수용해줄 거라는 기대를 하고 가는데 이게 안 된다는 말이니까요.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나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죠. 시그니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간단해요. ‘나답게 살자’라는 거예요. 타인을 존중하면서요. 누군가를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 색깔, 감성 같은 것들 있잖아요. 자기만의 뚜렷한 철학이나 가치관이 있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들이 시그니처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외양이나 재산 같은 게 아니라 내적인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시그니처를 가진 사람들이 매력적이에요. 시그니처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낙담할 필요는 없어요.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요. 여러 경험을 통해 사회적 자아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알기 힘들어요.

 

‘자기 위로’(나는 괜찮다)를 ‘자기 판단’(나는 잘못되지 않았다)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 좋았어요.

 

모욕적인 일을 겪으면 불쾌하잖아요. 하지만 그 감정을 느끼는 것과 ‘나는 모욕적인 일을 당할 만큼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건 달라요. 그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난 건지 저 사람은 왜 나한테 그렇게 행동했는지 나는 그 순간에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중심으로 사고하면 자존감이 훼손되는 걸 막을 수 있어요. 감정을 살피는 일과 자존감을 분리하자는 거죠. ‘나는 괜찮다’라고 아무리 다독여도 훼손된 자존감은 회복되지 않아요. ‘괜찮다’는 감정의 문제잖아요.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감정과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여있게 만들기도 하고요.

 

주의할 점은 없나요? 잘못하면 ‘아전인수’ 격의 태도를 갖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주변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책하는 걸 경계하라는 거죠. 또 한 가지, 실패의 경험을 과도하게 인식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인생 자체가 실패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럴 때 필요한 게 ‘나는 괜찮다’가 아니라 ‘나는 또는 내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기 판단이에요. 실제로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할 때 쓰이는 개념이기도 한데요. 인지행동치료라고 과하고 왜곡된 인지 패턴을 교정하는 치료예요. 이런 치료의 핵심을 저는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 거고요.

 

자존감을 키우는 요소로 언급한 ‘지성’이 이때 꼭 필요하겠네요.


맞아요. 객관과 이성은 자존감을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해요. 실제로 자존감이 낮은 분들은 이게 부족한 경우가 많고요. 단, ‘모든 게 잘될 거야’라는 낙관주의도 경계해야 해요. 개인의 노력과 의지가 아닌 외부의 운에 자신을 맡기는 무책임한 태도이니까요.

 

자존감이 왜 중요하냐는 물음에 답한다면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본질, 가치이고 행복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세상이 계속 변화잖아요. 산업구조부터 직업관, 가족관이 바뀌면서 기존이 가치들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요. 그뿐인가요? 빈부격차는 계속 커지고 있어요. 과거의 가치들이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행복하게 하려면 자존감을 지켜야 해요.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전미경 저 | 지와인
아픈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한발씩 나아가게 하는 책.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고, 나아가 다른 이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여섯 가지 레슨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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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만화가 이희재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어른이 읽어야 할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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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이지만 가슴 속에 사랑이 가득한 다섯 살 꼬마 제제의 이야기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던 만화가 이희재는 이 작품을 “내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 1986년의 일이다.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했던 그의 만화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응원을 받았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잡지사가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만화가는 원고를 회수하고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마침내 만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가 원저작권자와 협의를 거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 그 옛날의 이야기가 왜 아직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까. 여기에 만화가 이희재는“어른이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어떤 “깊은 슬픔”을 말한다. 누구나의 가슴 안에 있는 울고 있는 어린 아이, 바로 그 아이가 우리를 제제에게로 이끄는 것일 터. 따라서 이 작품은 만화가의 말대로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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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동화되었다고 할까요


1986년에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되었던 작품이죠.


이건 원래 <보물섬>에서 제 친구에게 연재 제안을 했던 거예요. 제안을 받을 때 친구가 저와 함께 있었는데 옆에서 내용을 보고 ‘저 작품은 친구보다 내가 맞겠다’(웃음) 했었죠. 친구의 만화 스타일은 활극, 무협 쪽에 더 어울렸거든요. 그렇지만 내가 뭐라 할 수는 없고, 친구에게 참고할 책이나 연극 등을 소개해줬어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잡지 편집자에게 전화가 왔어요. 저와 하자고요. 친구도 그랬대요. 보니까 이건 제게 더 맞겠다고요. 그렇게 시작한 만화였어요. 당시에도 책이 출간되어 있었는데 많은 독자들이 책을 좋아했어요. 머나먼 이야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는데요. 무엇보다 제가 주인공 ‘제제’에게 아주 공감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만화는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주인공 제제에게 공감을 하셨다고요?


내가 이 꼬마 같은 삶을 살았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고요. 아버지가 없는 집을 생각하기까지 했거든요. 그렇잖아요. 옛날에는 어른들이 엄하게 아이들을 대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아버지가 안 계시면 더 행복할 것 같더라고요. 나는 이 꼬마에게 아주 공감을 했고요. 그 점에서 어쩌면 이 작품에 동화되었다고 할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원저작권자와의 협의를 거쳐 새롭게 출간을 하게 되었는데요.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30년이 훌쩍 넘어 책을 받아보셨을 때는 기분이 어떠셨어요?


책이 크게는 세 번 나왔어요. 처음에는 흑백으로, 두 번째는 ‘청년사’에서 나왔죠. 청년사에서 나온 책도 예뻤어요. 저는 이번에 나오는 책이 그보다 안 예쁘면 어쩌나(웃음) 걱정했는데요. 아주 예쁘게 나왔어요. 실은 같은 디자이너가 작업을 한 것이거든요. 이번 책은 맑으면서도 따뜻해서 순수하다고 할까, 순결하다고 할까, 이런 것이 있어요.

 

청년사 판은 언제 절판이 된 건가요?


처음 잡지 연재를 위해 그릴 때, 외국 작가의 것이니까 허락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 부분은 잡지사에서 책임져달라고 얘기하고 시작한 건데요. 그게 오랜 세월 안 된 거예요. 때문에 책을 절판 시키고 원고를 서랍에 넣어뒀어요. 이후 15년쯤 지나 2000년도에 들어서서 청년사에서 새로 찍겠다고 하기에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출간 동의를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문서가 오지 않아서 다시 절판을 했어요. 아마 10여 년 전이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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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인류의 이야기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이 작품의 매력, 미덕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어린 시절의 마음이란 한없이 행복한 것일 수도, 한없이 괴로운 것일 수도 있죠. 제 경우는 한없이 세상이 두려웠어요. 그 두려움의 최대치가 아버지였고요.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우선 그 점이 나와 같다는 생각에서 매력을 느꼈죠. 이게 나의 문제, 한국의 문제가 아니구나, 지구 저편도 똑같구나, 싶더라고요. 또 이 작품은 아름다워요. 이 작품은 어린이와 어른이 만나는 내용으로는 정말 드물게 아름답죠. 아름다움에는 재미있고, 유쾌한 아름다움도 있고 가슴을 흔들어서 도리 없이 눈물을 쏟게 만들고 마음을 빼앗는 아름다움도 있는데요. 이 작품은 슬픔이 아주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 다른 시기에 쓰인 작품에 그대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하죠.


만화를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이게 원작자 바스콘셀로스의 대여섯 살 때 일이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강점기, 1920년대 정도 될 거예요. 내가 그릴 때는 60년도 더 지난 때잖아요. 시간적으로는 그렇고, 공간적으로는 지구 저편이에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아득한 저 세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같이 느낄 수밖에 없는, 공감 가는 이야기라는 것이 중요하겠더라고요. 이것은 인류의 이야기고, 가족의 이야기니까 똑같을 수밖에 없구나 싶고요. 한편 만화를 그리면서는 내가 어떻게 브라질 소년을 그리면서 브라질을 잊고 우리 소년이 되게 할까, 고민도 했어요.

 

특별히 마음에 남는 장면을 꼽는다면 어떤 장면인가요?


제제의 풍선 장면인데요. 제제가 애써서 만들고 있잖아요. 신이 나서 만드는 데에 취해 있는 애에게 누나는 밥 먹으러 오라고 하죠. 빨리 안 오니까 누나가 와서 어찌어찌 하다 둘이 말싸움이 붙었단 말이에요. 애는 철이 없으니까 말을 함부로 하고요. 거기에 누나가 화가 났죠. 화가 나니까 풍선을 밟아버린 건데요. 그 순간 모든 게 깨져나간 것 같더라고요. 제제는 자기의 마음을 실어서 풍선에 띄우려던 거잖아요. 어쩌면 정말로 우스운 것 같고, 방이나 어지럽히는 것 같은 짓거리지만 제제에게는 그렇지 않아요. 참 마음이 아팠죠. 또 ‘뽀르뚜가’ 아저씨의 비보를 듣고 학교에서 뛰쳐나가는 대목도 기억에 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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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제를 제외하고 마음이 많이 갔던 인물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작은 누나와 선생님이죠. 제제가 선생님을 위해서 화병에 꽃을 꽂아드리잖아요. 그 대목은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어요. 또 제제 아버지도 그래요. 아버지도 가엾은 인물이죠. 능력 없어 지내던 어느 날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불편하니까 아이가 철없이 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몸부터 먼저 나가잖아요. 이번에 책이 나와 다시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있어요. 뽀르뚜가 아저씨와 놀러 간 제제가 “아저씨가 저희 아빠였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잖아요.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사달라고 말이에요. 이번에 새삼스럽게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까지 했을까, 느꼈어요.

 

원작을 어떻게 나의 만화로 만들 것인가, 가 아주 중요한 작업이었겠네요.


만화는 내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주인공을 나의 주인공, 나의 캐릭터로 만드는 일이죠. 그렇게 해서 내 만화가 되는 것이고요. 나는 한국의 어느 소년을 머릿속 한 편에 두고 그럼에도 원작을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통용될 수 있도록 작업을 했어요.

 

선생님께서 생각한 ‘한국의 어느 소년’은 어떤 캐릭터였나요?


나 자신이죠. 다만 나는 제제처럼 명랑하지 않아요. 악동이지 않았죠.(웃음) 제 만화 중에 『악동이』도 있는데요. 나는 내게 있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면, 이런 것들의 반대편을 못하니까 만화로 표현하는 거죠. 내가 못하는 꿈 같은 것을 거기에 실어보는 거예요.

 

 

아이도 보고 어른도 보는 것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모임에서 추천한 책이기도 하잖아요. 선생님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읽으려고 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잘은 몰라도 아마 슬픔의 공감이 아닐까 해요. 그런데 그 슬픔이라는 게 사실은 끝나버리고 해야 하는데요. 깊은 슬픔은 어른이 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런 슬픔이 내려앉아서 어린이에게 잠겨 있다고 한다면 안 없어진단 말이에요. 그것이 상처이자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아마 그 슬픔에 공감하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어른도 함께 읽을 수 있는 만화를 그리겠다고 하시잖아요.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만화는 어떤 것일까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같은 경우는 아이들용이 아니죠, 사실은. 어른이 읽어야 할 만화예요. 어른이 한 번 돌아보면서 ‘내가 어린이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구나’ 생각해볼 수 있잖아요. 또 아이들 입장에서는 제제를 통해 공감할 수 있는 거니까, 결국 아이도 보고 어른도 보는 만화죠. <개구쟁이 데니스>라는 만화가 있어요. 사실 그게 어린이 만화가 아니에요. 어른이 보는, 아이가 등장하는 만화죠. 어린이가 등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어린이가 보는 게 아니고요. 더구나 저는 만화를 그리면서 어린이만 보는 만화를 그린다는 생각은 특별히 안 해봤어요. 물론 만화의 특수성이 있지만요. 아이도 보고 어른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대개는 함께 볼 수도 있고요.

 

만화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잖아요. 이야기를 빨리 소비하기도 하고요. 이런 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만화는 문화예요. 잘 팔리는 소설이 예술이고, 그렇지 않은 소설이 예술 아닌 문제는 아니잖아요. 만화도 마찬가지인데요. 다만 만화 역사가 비교적 짧고요. 특히 우리나라의 유교 문화와 엄숙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가벼운 것들을 경시했던 면이 있어요. 인생은 어떤 면에서 유쾌하고 가벼워야 해요. 그런데 가벼운 사람을 경시해요. 가벼운 것이 전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러나 무거워서 버겁고, 온 사회가 칙칙하다면 그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문자는 원래 상형문자였죠. 그림에서 왔단 말이에요. 결국 문자나 그림을 인간 삶에 맞도록 쓰면 되는 것이에요.

 

오랫동안 만화를 그려오셨기 때문에 만화에 대한 경시를 체감한 적도 있으시겠네요.


만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만화의 매력을 못 느낀 사람들이죠. 제가 한창 젊을 때 ‘심의실’이 있었어요. 심의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변호사, 여성계 인사 등이에요.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한심할 정도로 만화에는 무식했어요. 자기 분야는 공부해서 잘 알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거죠. 그런데 이해가 부족한 분야를 무시해버려요. 한 번은 동료의 만화가 검열 예제로 나와 있는 걸 봤어요. 청년A와 B가 마당에서 싸우다가 B가 A를 깨진 소주병으로 찌르는 장면이었어요. 그 장면을 검열해놓은 거예요. 하지만 맥락을 보면 그럴 수가 없어요. A가 B의 동생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껴 사랑을 했는데 술주정뱅이 B가 그날 마당에서 동생을 때리고 있던 거거든요. A가 폭력을 그만두라고 하니까 B가 “얼씨구” 하면서 소주병을 깨서 찌른 거죠.

 

그걸 단순히 폭력적이라고 본 거군요. 


나는 그 장면이 그 만화의 가장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장면이 있어야 이 만화가 온전한 건데 그 장면을 삭제하다니요. 제가 그걸 들고 심의실에 가서 심의위원들에게 물었어요. 이 만화를 아느냐고요. 아무도 몰라요. 그 장면만 본 거예요. 그 다음 장면이 이래요. 소주병으로 찌른 건 폭력이죠. 그런데 폭력이 딱 들어왔을 때 A가 사랑의 힘으로 오히려 한 발을 더 밀고 B쪽으로 나가요. 찌르면 아파서 물러서야 하는데 도리어 들어오니까 B가 아주 놀라면서 물러선단 말이에요. 이것은 폭력을 사랑의 힘으로 제압하는 장면이에요. 그것을 폭력이라고 검열하는 게 맞느냐고 심의위원들에게 되물었어요. 저도 워낙 심의에 걸린 경험이 많았어요. 사무치죠. 그런 것 역시 따지고 보면 만화는 아동이 보는 거니까 모든 폭력은 안 된다, 는 쪽으로 가버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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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색깔을 가졌으면


후배 만화가를 만나면 꼭 해주시는 말씀은 뭔가요? 


나 자신을 발산했으면 좋겠다, 예요. 대개 자기 자신이 뭔지 모르기도 쉬워요.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익어가는 과정인데 처음에는 쓸려가거든요. 유행에도 쓸려가고요. 눈 똑같이, 코 똑같이 그린 그림을 만화가 이름 떼고 보면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를 보면 하늘에 거대한 UFO가 떠 있잖아요. 난 아시아의 상공에 일본의 UFO가 떠 있다고 생각해요. 만화에 관한 한 그래요. 그것이 태양을 가리고, 우리는 그림자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아시아 만화가 일본 만화의 영향력 아래 있단 말이에요. 중국 만화도 그렇고요. 그만큼 일본 만화류가 대중과 친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함부로 무시할 수 없죠. 그러니까 그것을 때에 따라 내 것과 결부시키되 시간이 가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색이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굳이 말하자면 자기 색깔을 가졌으면 하는 게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예요. 사실은 ‘알아서 해라!’(웃음)라는 의미예요.

 

선생님께서 나의 만화에 있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옛날부터 ‘마음’이라는 것이 많이 신경이 가더라고요. 어찌 보면 추상적인데요. 마음을 어떻게 담아낼까, 마음을 어떻게 교환할까, 소통할까, 이것이 제 주제라면 주제예요. 다만 이것은 만화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에 해당하는 얘기죠.

 

지금 『사기』를 작업하는 중이시라고요?


2014년부터 시작한 작업인데요. 원래 저녁부터 새벽까지 작업을 하는데 요즘은 좀 지쳐요. 이제 절반이 조금 넘었고요. 중국 고대사라는 내가 모르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해서 아주 재미있어요. 이 재미있는 인물들을 오늘로 끌어내서 오늘의 사람들, 내 옆의 이웃들이 그들을 만나게 하자는 생각이에요. 단지 옛 것을 끌어내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사기』 속 어떤 인물에 요즘 인물로 송강호를 집어넣을까, 설경구를 집어넣을까, 어떻게 하면 더 흥미로울까, 생각해보는 거죠. 해보니까 재미있어요. 앞으로 2년 정도 더 작업해야 해요. 곧 1, 2권이 출간될 거고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J.M. 바스콘셀로스 원저/이희재 그림 | 양철북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선과 그림체, 인물들의 풍부한 표정과 현실적인 묘사, 생생한 장면들 속에서 제제는 낯선 브라질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동네, 어느 골목길을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마냥 가깝고 친숙하게 다가온다. 글자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인상 깊은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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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불꽃 “성 상식 없는 사람들 때문에 열 받아서 쓴 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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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오던 2017년 9월의 어느 밤, 김불꽃은 스마트폰을 켜고 결혼식 예절에 관한 글을 무작정 썼다. 분노에 차 쏟아낸 글이 4천 개 넘는 추천을 받자 처음에는“오류가 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숫자는 진짜였고 김불꽃은 생활 예절 시리즈를 시작한다. 제목은 ‘○○ 예절 알려 준다, 이 예의 없는 새끼들아’. 이때 연재한 글을 묶은 첫 책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 예절』이후 두 번째 책의 주제를 고민하던 김불꽃은 주변에서 전해오는 성(性) 관련 고민들을 떠올렸다. 실제 고민 상담도 많이 받았다. 어떤 고민은 예절 문제라기보다 범죄에 가까웠다. 써야 할 이야기가 많았고, 『김불꽃의 불꽃 튀는 성(性)인식』“기본적인 성 상식은 알고 가자, 얘들아”라는 느낌으로 쓴 책이다. 거침없는 언어로, 가끔은 욕설까지 더해 일명 ‘청학동 에미넴’으로 불리는 김불꽃의 시원함에 마음껏 공감하기를. 그리고 오해 말기를. 욕설은 범죄자들을 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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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김불꽃, 제3의 김불꽃이 분명히 있을 것


김불꽃’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된 건가요?


처음 ‘네이트 판’에 ‘○○ 예절 알려 준다, 이 예의 없는 새끼들아’라는 생활예절 글을 연재할 때는 ‘ㅇㅇ’이라는 이름이었어요. 거의 익명처럼 결혼식 예절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컸어요. 추천수가 4천 개씩 찍혀서 오류가 난 줄 알았죠. 무섭더라고요.(웃음)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너무 많이 좋아해주셨어요. 이후에 사람들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닉네임을 지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책을 출간하게 될 줄 모르고 지은 이름이었어요. 별 생각 없이 강렬한 이름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 성(姓)에 ‘불꽃’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였어요.

 

결혼 예절 글은 어쩌다가 올린 거예요? 글을 올릴 때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어요.


그냥 잠이 안 와서요.(웃음) 심지어 PC 앞에 앉아서 쓴 것도 아니고요.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막 썼어요. 그게 이렇게 반응이 폭발적일 줄은 전혀 몰랐죠.

 

책 날개에 있는 소개 글 첫 줄에 “김불꽃은 우리 사회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써 있죠.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그건 저 말고도 불편함을 호소하고 싶으신 분들이 많을 거라는 의미예요. 제2의 김불꽃, 제3의 김불꽃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일상에서는 제가 인터넷에 올렸던 것처럼 욕설을 한다던가 강한 어조로 말하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마음은 있을 거예요. 불만은 자꾸 쌓이고 풀 데는 없는 분들이 분명히 많을 거라 생각해요. 제 글을 읽고 공감해주신 분들도 평소에 그런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겠죠. 다만 저는 그걸 풀어냈을 뿐이고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제2의 불꽃, 제3의 불꽃이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조심 좀 하자, 이런 의미를 담은 말이에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첫 책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 예절』 이후 어떤 주제로 두 번째 책을 쓸지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성(性)’이라는 주제로 쓰게 된 이유는 뭔가요?


성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린 것도 또 누워서였는데요.(웃음) 역시 잠이 안 와서요. 원래 처음에 시집을 냈었거든요. 이후에 네이트 판에 연재를 하게 됐고, 첫 책이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큰 사랑을 받은 거죠. 차기작을 고민하던 중에 몇몇 독자로부터 쪽지로 고민을 받았어요. 이성 친구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면서 상대에게 예절을 가르칠 방법을 묻는다든가 학교에서 남자 애들이 불편한 말을 한다든가 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예절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첫 책을 쓸 때 성에 관한 내용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요. 예절이라는 범주에 묶기엔 범죄와 가깝지 않나, 싶은 거죠. 예절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그 책에는 담지 못했지만 쓰고 싶었던 주제인 성을 마침 쪽지도 받고 하다 보니 써야겠다 생각했어요.

 

워낙 성 문제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이기도 하고요.


뉴스 기사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오잖아요. 그걸 보면서 ‘성교육’, ‘성 인식’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고요. 무엇보다 제목이 먼저 떠올랐어요. 원래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은 ‘성 상식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 받아서 쓴 성교육’이었어요.(웃음)

 

쪽지나 뉴스 외에 이 주제에 대한 작가님 개인의 체험이나 고민도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접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남자 분들도 남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만요. 또 주변 친구들의 고충도 많이 들어왔어요. 남자친구와의 관계 같은 것을 계속 접해왔으니까요. 한 번은 쓰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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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본적인 성 상식


책을 쓰면서 무엇을, 얼마나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많았죠. 우선 제가 남자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남성의 경험을 쓸 때 어려웠어요. 2차 성징 같은 것은 제가 체험을 못한 것이니까 조심스럽더라고요. 몽정을 저는 겪어보지 않았잖아요. 주변에 있는 남자인 친구들도 “나 몽정했어”라고 말하고 다니진 않으니까요.(웃음) 그것을 어떤 식으로 처음 경험하는지, 기분은 어떤지, 가족한테 들켰을 때는 어떤지, 최대한 이해하고 써야 했어요. 그게 참 어려웠는데 운이 좋게도 편집자님이 남자 분이어서 많은 대화도 나누고 그랬어요.

 

재미있네요. 몽정 관련 부분에서 청소년에게 “아침엔 제가 발기가 될 수 있으니 배려를 부탁드린다고 이야기를 해라”(55쪽)라고 조언하셨잖아요. 경험하지 않았고, 어떤 기분인지 모르는 영역에서 이런 조언을 쓰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가능했는지 궁금해요.


일단 제게 네 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어요. 제가 아직도 아이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요.(웃음) 부모님이 저희 남매에게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키셨어요. 제게는 남동생에게 사춘기가 왔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동생 방 문을 갑자기 열지 말라고 하셨고요. 밤에 신경질을 내고 화장실에 가더라도 모른 척 해줘라, 라는 말도 하셨어요. 그런 조언이 많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 외에 자료 조사라든지 취재는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거의 대부분 웹에서 취재했어요. 친구에게 가서 “남자친구와 성 관계는 어때?”라고 물어볼 수 없잖아요.(웃음) 대부분 주위에서 들었던 고민들을 떠올리면서 작업했어요. 예를 들면 성관계를 할 때 어떻게 하면 더 만족스러울까, 덜 아플까, 같은 것이죠. 남자친구가 이렇게 할 때 싫다고 얘기했던 고민들도 떠올랐고요.

 

성이라는 주제 아래로도 워낙 많은 소주제가 있잖아요. 책에는 자위, 피임부터 성희롱, 성매매, 스토킹과 데이트폭력 등을 다뤘는데요. 그것은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셨어요?


첫 책을 쓸 때 제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 있어요. ‘예절’을 쓰고 있으니까 ‘센스’에 해당하는 부분은 배제하자, 였어요. 정말 기본 생활 예절만 가지고 가자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큰 틀, ‘가정생활’, ‘사회생활’ 하는 식으로 소주제를 잡았었는데요. 이번 책도 다르지 않아요. 남자친구와 관계를 할 때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같은 고민은 뺐고요. 정말 ‘기본적인 성 상식을 알고 가자, 얘들아’(웃음) 이런 느낌으로 주제를 잡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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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 교육


그도 그럴 게, 보면 극히 기본적인 이야기인데 우리 사회가 이 기본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진짜 충격적이었던 게 친구들 이야기였어요. 책을 쓰기 전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데요. “남자친구가 이거 하지 말래”라거나 “남자친구가 이렇게 하면 싫어해”라는 말을 자꾸 하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나의 의사가 없어지는 연애를 하는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그게 심해졌을 때 폭력이 되는 거잖아요. 귀가 시간 통제라든가 주변인을 못 만나게 한다든가 하는 일이 주위에 꽤 많더라고요. 심지어 술을 몇 잔 마셨는지 보고 해야 하는 친구도 있었고요. 저는 그게 이해가 안 갔어요. 그래서 이걸 꼭 쓰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성범죄 관련 내용도 마찬가지예요. 반드시 험악하게 생긴, 모르는 사람이 범죄를 일으켜야만 범죄는 아니잖아요. 일상 속에서 나도 모르게 가해하고 있고, 피해 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짚어주고 싶었어요.

 

지난 해, 10대의 성병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뉴스가 되기도 했는데요. 책에도 이들의 안전한 성 생활에 대한 조언이 나오거든요. 10대의 성 욕구는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이들이 안전하게 성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전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게 돼요.


일단은 10대가 성 관계를 한다는 자체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죠. 때문에 10대는 욕구를 해소할 데가 없어요. 성 관계를 잘못된 것으로 인지하고 있고, 그렇다면 부모님 몰래 해야 하는데 모텔이나, 호텔, 여관 같은 숙박 업소에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출입을 못하니까 DVD방, 멀티방, 룸카페 같은 성 관계 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공간으로 가게 되죠. 게다가 이들은 자신이 어떤 병을 갖고 있는지 인지를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급하게, 비위생적으로 하니까 관계 이후에 병이 생겨도 병원에 가지 않죠. 여성의 경우 질염 종류도 여러 가지인데 부모님한테는 얘기를 못하고, 산부인과에도 못 가요. 계속 그런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 같거든요. 저는 부모님들이 10대 자녀분들에게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좋으니 나에게 얘기해줘. 우리는 항상 너희 편이니까”라는 식으로 지도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동 간 성폭력에 대한 내용도 쓰셨잖아요. 작가님은 “부모부터 방관하지 마십시오”(78쪽)라고 하셨어요.


어른이 아동을 가해하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죠. 한편 아동이 아동을 가해하는 것은 좀 달리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동이 뭘 알고 그랬겠어요. 가정에서부터 받은 교육 영향이겠죠. 전체적으로 성교육은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 교육 같거든요. 그래서 ‘(부모님) 이렇게 교육해주세요’, ‘친구들아, 이런 거야. 알아둬’라는 식으로 썼고요. 특히 부모님은 우리 아이가 반에서, 유치원에서 어떤 성향을 갖고 친구들과 사귀는지, 대장인지 아닌지 분명히 알잖아요. 그러니까 내 아이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관심 있게 봐주시고요. 조금이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면 교육을 해야 해요.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를 하잖아요. 가해 아동 부모님이라면 자신의 아이도 아이지만 피해 아동과 그 가족 분들한테도 죄책감을 가지시고, 최소한 ‘대신 아파할 수 없어 미안하다’는 의미라도 전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을 쓰는 동안에도 뉴스가 있었겠죠?


정말 쉴 수가 없었어요. 한 챕터 구상이 끝나면 바로 뉴스가 터지니까요. 그래서 추가하고, 또 추가하는 작업이 이어졌어요. 원래 이렇게 수정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 책은 계속 수정해야 했어요. 그만큼 국내 성범죄가 많아요. 그게 힘들다기보다 마음이 참 아팠어요. 괴롭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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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서라도 봤으면


김불꽃 특유의 문체가 있죠.(웃음) 웹에 글을 쓸 때와 책을 쓸 때 어떻게 달랐나요?


책을 쓴다고 생각하고 쓰니까 좀 점잖아지더라고요.(웃음) 편집자 분은 어떻게 느끼셨을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느끼기에는 그랬어요. 그래도 성범죄 주제에 가서는 욕설을 아끼지 않았어요. 피해자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속이 시원하셨으면 했어요. 마음껏 웃으셔도 좋고요. 욕설을 보면서 작가가 못됐다고 욕을 하셔도 좋아요. 그냥 마음 놓고 읽으실 수 있었으면 해서 성범죄 부분에는 욕설을 많이 넣었어요. 무거운 주제지만 가볍게 쓰려고 했어요.

 

작가님, 원래는 시를 쓰셨다고요?


갑자기 인생 인터뷰 같은데요.(웃음) 경영학과를 나왔거든요. 중학교 때 아주 잠깐 쇼핑몰 창업도 했었고요. 그래서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고 경영학과에 지원하게 됐죠. 가보니 실무가 아니라 이론 위주더라고요. 물론 배우는 것도 많고 좋았지만 ‘이 길로 가는 게 맞나’ 싶은 거예요.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인데요. 내가 남들보다 쉽게 하는 것이 재능이래요. 그걸 보고 나는 무엇을 쉽게 하는지 생각했죠. 저는 시험도 객관식보다 서술형 시험을 좋아했거든요. 그러면서 비교적 글을 남들보다 쉽게 하지 않나, 생각했고 시를 쓰게 된 거죠. 친구의 권유로 독립출판도 했고요. 아무도 사주진 않았지만요.(웃음) 지금은 겁이 굉장히 많아졌는데요. 전에는 겁 없이 워낙 하고 싶은 건 그냥 하는 편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그야말로 ‘그냥’ 글을 올렸던 것이 큰 공감을 받아 작가가 된 거네요. 말씀을 들으니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지 더 궁금해지는군요.


대학교 졸업 하고 집에 선포를 했어요. 작가가 되겠다고요. 작가를 하면 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죠. 1년 안에 보여주겠다고요.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 대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시집도 출판하고, 웹드라마도 시작하고, 책도 내게 된 건데요. 생활 예절 글이 많은 관심을 받은 건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요. 연재가 됐을 때 엄마가 저를 안고 우시더라고요.(웃음) 앞으로도 다룰 주제는 많으니까 김불꽃으로 계속 활동할 생각이에요. 어떤 채널을 통해서 어떻게 보여드릴지 아직 구체적으로 들려드릴 수는 없지만요.

 

이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고 바라세요?


욕심은 정말 전 국민이 다 보셨으면 하죠. 책의 판매를 떠나 하는 이야기인데요. 빌려서라도 보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제가 명작을 썼다고 말씀은 못 드리지만 평소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거든요. 자녀를 키우시는 부모님들, 청소년들이 특히 보셨으면 하고요. 혹시 성폭력 가해자가 있다면 이 책을 보고 잠자리가 뒤숭숭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욕설이 많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욕설을 하는 대상은 독자 분들이 아니라 위법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독설을 보시고 마음 편하게 쾌감을 느끼시면 합니다.

 

 

 

 


 

 

김불꽃의 불꽃 튀는 성인식김불꽃 저 | 한빛비즈
잘못된 성 인식으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에 경종을 울리고 올바르게 성을 인식하고 행동하기 위한 방법을 저자 특유의 촌철살인 화법으로 담아냈다. ‘피해자가 올바르게 대처하는 방법’과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가해자에게 보내는 조언’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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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오소희 “엄마들이 눈썹을 그려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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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에게 모든 시간을 집중할 것?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충족시킬 것? 아니다. 일단 엄마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도 편안하게, 엄마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행복해지는 법을 깨닫는다. 젊은 부모들의 육아 멘토 오소희 작가가 『엄마의 20년』 으로 ‘엄마의 자아상’에 균열을 내고 있다. 뻔한 조언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일단 엄마들에게 눈썹을 그리고 밖으로 나가라고 권한다. “매월 ‘활동비’를 정하고 남김없이 쓰자”고.

 

“아이가 내 품에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성적분리불안이랑 저 멀리 던져버리세요. 긍정의 힘으로 아이를 바라본 엄마 아래서 아이가 잘못됐단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딱히 좋다는 교육을 따로 안 시켰어도 말이지요. 부정의 힘으로 아이를 바라본 엄마 아래서 아이가 잘됐단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온갖 좋다는 교육을 다 시켰어도 말이지요. 그러니 언제나 내게서 좋은 것을 끌어내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세요.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퍼붓게 해주는 사람들과.”

(『엄마의 20년』 , 245-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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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 당신이 더 중요해

 

『엄마 내공』을 쓰고 2년만에 신작입니다. 자녀교육서가 아니고 자기계발서예요.


이번 책은 분명한 목적성을 갖고 쓴 책이에요. 엄마들을 위한 실용서죠. 온라인에서 ‘언니 공동체’를 시작하면서 처음엔 육아, 그리고 시댁, 남편 이야기를 했거든요. 일부러 몰아간 거였어요. 조금 더 깊이 들어가려고요. 결국 엄마들의 자아 찾기가 목표였어요.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책을 보면, 대개 육아법을 다루죠. 아니면 위로를 하거나.


뭔가 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밖에서 강의를 하면 엄마들이 늘 물어요. “나를 찾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기존의 책들을 보면, 엄마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는 많아요. 페미니즘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엄마들의 목소리를 내라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할까?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못 본 것 같아요. 우리가 답을 찾아가는데 있어서는 나태한 거죠. 제 아들이 어렸을 때, 누군가 이런 책을 써줬었다면 나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썼어요. “엄마들 당신이 더 중요해! 엄마가 잘살면 아이도 잘살 수 있게 되어 있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이 책의 출발이 한 독자의 사연 때문이었다고요.


오랫동안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엄마들과 소통하고 있는데, 하루는 한 엄마가 이런 글을 남겼어요. “작가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름 사교육도 많이 안 시키고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됐는데 너무 꼴 보기 싫다. 맨날 TV만 많이 보고, 그렇다고 아이랑 사이가 좋은 것 같지도 않고. 학원도 적게 보냈는데 엄마한테 고마운 것도 몰라서 화가 난다”고요. 그래서 제가 이 책의 서문이 된 ‘엄마의 20년’이라는 시를 댓글로 달았어요.

 

엄마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가 됐던 시였죠. 저는 이 시구가 가장 좋았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목매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부담도 주지 않을 것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를 존중할 것이다. (중략) 너는 가끔 생각난 듯 나의 세계를 힐끗 들여다볼 것이다. 그것이 잘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래, 되었다는 듯 한번 따끈히 안아주고 총총히 네 바쁜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시를 읽고 공감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용기를 내서, 다른 사람들이 안 쓰면 나라도 써야지 생각했어요. 2017년에 『엄마 내공』을 쓰고 엄마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무엇을 가장 고민하고 어려워하는지를 저도 직접 듣고 깨달은 시간이었어요. 『엄마 내공』에 “엄마로서의 최선은 어디까지일까요?”라는 챕터가 있는데, 그 내용을 기본으로 『엄마의 20년』 한 권으로 썼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해요.

 

“’엄마’라고 쓰고 ‘부모’라고 읽는다. 이 책에서 편의상 사용한 ‘엄마’라는 단어가 ‘부모’로 완벽히 대체되는 육아 양성평등의 그날을 꿈꾸며.”(11쪽) 이 문장도 기억에 남아요. ‘아빠의 20년’이라는 책도 나오는 세상이 되면 좋겠고요.


‘엄마’라고 쓴 표현을 다 ‘부모’로 바꿔볼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안 되더라고요. 왜냐면 현실이 아니니까요. 딴 세계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까 ‘엄마’라고 쓸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부모’로 바꿔도 무방한 내용이 있으면 ‘부모’로 표현했어요.

 

1부 제목은 ‘대한민국 엄마들은 왜 ‘나’를 잃어버렸나?’입니다. 대한민국 엄마들의 역사를 집어내고 2부 ‘어떻게 ‘나’를 찾을 것인가?’에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셨어요.


1부에 시대적인 이야기를 담은 건, 우리의 인식 전환이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에요.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세대마다 어떤 억압과 혜택을 받았고, 그 결과 어떤 육아를 했는지를 알아야 우리의 엄마, 그리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들로 시작해 아들로 끝났던 우리의 할머니 시대, 독박 육아와 성적 관리가 당연했던 우리의 엄마 시대, 필연적으로 죄책감을 안고 사는 요즘 엄마 시대를 제대로 이해해야, 가정에서 분리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아’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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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물은 그냥 밟고 가자

 

‘나를 찾는 법’ 15가지 방법 중 세 번째가 “만약 전업맘이라면 아침 일찍 남편과 아이를 내보내자마자 무조건 화장대로 달려가 눈썹을 그리라”는 조언입니다. 일단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죠.


눈썹을 그리느냐 그리지 않느냐가 그날 하루를 결정하기 때문이에요. 눈썹을 그리지 않는 날은, 밖에서 볼일이 생겨도 온라인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다 보면 카톡이 날라오고 온라인 쇼핑몰을 보다 하루가 가죠. 작심해서 책이라고 펼쳐놓으면 몇 쪽을 넘기기도 전에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나 작은 집안일이 눈에 아른거리고요. 그래서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해요. 직장맘이라면 ‘매일’을 주중 하루 저녁이나 주말 일부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오라는 데가 없어도 일단 나가는 거예요. 스타벅스 같은 카페에 가서 프라푸치노 한 잔 딱 시켜놓고 책을 읽는 거예요.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한숨 쉬다가 제일 싼 거 시키는 일은 하면 안 돼요. 나를 홀대하는 것도 습관이니까요. 더 비싸 봐야 천 원이에요. 지금 꼭 먹고 싶은 음료를 시키세요. 그러면 커피 값이 아까워서라도 책을 더 봐요.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기분이 확 달라져요. 집안일도 육아도 조금 다르게 느껴지죠.

 

“매월 활동비를 정하고 남김없이 쓰자”고 하셨어요.


‘나를 위한 활동비’ 통장을 만드는 거예요. 전업맘이든 직장맘이든 무관해요. 활동비는 각자의 형편껏 정하면 돼요. 매일 아침 아이 방문을 닫으며 “내 인생은 나의 것, 애 인생은 애의 것” 소리 내어 말하고, 눈썹을 그리고 나가보세요. 어차피 일주일 내내 가긴 힘들어요. 집안 대소사에 방학에, 주중 평균 4일 가면 많이 가는 거죠. 20만 원이면 대충 한 달치 점심값과 차비로 충분해요. 매일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 한 끼는 남이 차려주는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세요. 애 학원비 20만 원은 안 아까운데, 내 활동비 20만 원은 아깝다고요? 그건 완전히 적신호죠. 20만 원 아까워서 밖에 안 나가면 우리는 과연 집에서 뭘 할까요? 인터넷, 스마트폰, TV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지 않을까요?

 

또 통쾌했던 것이 “장애물은 그냥 밟고 가자”인데요. 엄마의 자아 찾기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시선을 무시하고, 꾸준히 하라고 조언하셨습니다.


이 엄마가 왜 바람이 나서 사진을 배우고 책을 읽고 모임을 나가? 이런 지적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래도 그냥 자근자근 밟고 넘어가야 해요. 붙잡고 싸우는 게 아니라 내게 이롭게 넘어가는 거예요. 취미든 뭐든 지속적으로 활동하다 보면 결과물이 생겨요.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엄마라면 하물며 작은 전시회에 참여할 수도 있겠죠? 결과물이 생기면 지속하기 더 쉬워져요. 선순환이죠. 결과가 안 좋으면 어떡하냐고요?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책임지면 되지요. 까짓, 비난하면 비난받고 미워하면 미움 받으면 돼요. 백 세 인생, 흠결 하나 없이 살 생각이었어요? 우리가 회사를 차린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우리의 인생을 사는 거죠.”

 

책에 가장 짙게 밑줄을 친 부분은 ‘가족의 다름을 정중히 인정하자’는 챕터였어요.


다름을 존중하는 가정은 평화로워요. 운전대는 각자 잡고, 엄마는 아이에게 풍부한 기본 연료만 제공해주는 거예요. 밥을 먹을 때면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요. 아이의 할 일을 다시 한 번 강조하거나, 아이를 지적하는 시간 대신 말이에요. 방학이 되면 학원 공부보다 가족의 시간을 더 갖는 일에 돈을 쓰는 거예요. 인생에서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기는 한정되어 있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니까요.

 

“불안의 티파티인 학부모 모임에 자주 가지 말고, 수시로 식탁을 빠져나와 전체를 조망하라”는 이야기는 엄마들이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부모의 불안만큼 아이들에게 해로운 것이 없으니까요.


상황을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마음을 다잡는 거예요. 내가 잘살고 있음을 믿고 내 어여쁜 아이도 잘 자라고 있음을 믿어야 해요. 교육제도, 나, 아이 중에서 오늘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뿐이에요. 아이에게 시험을 전전하는 것 말고도 다양한 일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요. 아이의 재능과 선호에 맞는 일은 반드시 있으니까요. 엄마부터 무언가를 배우러 나감으로써, 엄마가 먼저 자신의 재능과 선호에 맞는 일을 찾아 보람을 느껴야 아이에게도 그것이 소중하다고 안내해줄 수 있어요.

 

가치관이 같은 부모들과 육아 공동체를 만드는 일도 필요해요. 공동체를 만들 때,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요.


시작도 끝도 신뢰예요. 우리가 공동체라고 부르는 수많은 조직이 있잖아요.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공동체가 아닌 곳들도 많아요. 자기 입장을 먼저 내세우면 서로를 신뢰할 수 없어요. 믿지 않으면 공동체가 오래 갈 수 없고요. 제가 꾸리고 있는 ‘언니 공동체’는 굉장히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에요. 자신의 치부처럼 보일 수 있는 고민을 털어놓아요. 그러면 멤버들이 그 고민을 자기 이야기처럼 신중하게 듣고 위로하고 조언해요. 신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죠. 성의 없이 글만 읽는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가요. 시간과 공을 들인 사람은 남아 있는 거죠. 저는 이번 책도 혼자 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언니 공동체’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기꺼이 그 고민들에 응답한 분들 덕분에 나온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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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라면 어떻게 할까

 

사실 자녀교육 노하우를 듣고자 책을 펼친 분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기대와 달랐다고 실망할 책으로 여겨지지 않아요. 엄마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면, 아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니까요.


책을 내고 리뷰를 몇 개 보았어요. 가장 반가웠던 리뷰는 “내가 지향하는 방향에 대한 이 모호했던 느낌을 책을 통해 정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책이 품고 있는 많은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모호하게 깨달았던 어떤 형체에 윤곽을 그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2019년 저의 키워드는 ‘견해’였어요. 대한민국 범국민적 질병 중 하나가 ‘성적분리불안’이잖아요. 사교육을 시키면서도 ‘이것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부모들, 찾아보면 정말 많아요. ‘아, 이래도 되나? 난 아무래도 이 길은 아닌 것 같은데’ 고민하는 부모님들이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고 각자의 견해를 말하고, 한번쯤은 뭉쳐봤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저자로서의 바람이에요.

 

생각은 많지만, 선뜻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거나 바깥 활동을 주저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껍질을 깨고 나오기까지는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내가 오늘 하루는 애를 봐 줄게”하는 세심한 배려도 필요할 거고요. 다만, 지금 조금 끌리는 게 있으면 그것만큼은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충분히 생각할 만큼 했다면, 조금은 내디뎌 봤으면 해요.

 

3살부터 엄마와 함께 세계 여행을 하고 봉사활동을 한 ‘중빈’ 군이 벌써 대학생이 됐어요. 부모로서 가장 뿌듯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말도 좋고요.


제 생일 때 아들이 문자를 보냈어요. 종종 긴 편지 같은 문자를 보내곤 하는데요. “내가 부딪히는 모든 상황 속에 ‘엄마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무리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해도 끝까지 설명해주고 인내심을 갖고 하나의 인격체로 나를 대해준 것 너무 감사하다. 내 인생의 멘토가 되어줘서 고맙다.” 이런 이야기였어요. 20년 동안 육아하면서 힘들었던 것들이 한번에 쑥 사라지는 느낌이었죠.(웃음)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실 때, “순간을 보채지 않는 마음의 평화”라는 글귀를 적으시더라고요.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라오스에 갔을 때 제가 배운 게 정말 많았어요. 우리가 버스에 탈 때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타는 거잖아요? 그런데 라오스 사람들은 버스가 언제 떠나는지 재촉하지 않아요. 떠날 것을 아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타느라고 무한정 대기를 해도 화내지 않아요. 또 사람이 많이 타서 자기가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에 대해 적의감이 없어요.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세 가지가 바로 이게 아닐까 싶어요. 이것만 되면 우리가 복지국가가 될 수 있어요.

 

꾸준히 책을 쓰시고 활동하고 계신데, 인터뷰나 방송 출연은 거의 없으신 것 같아요.


라디오는 가끔 나가는데 TV는 안 나가요. 라디오를 하는 이유는 파급력이 적으니까요. 파급력이 큰 건 안 해요. 저는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사람이고, 집에서 극도로 바쁜 사람은 한 명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어요. 엄마, 아빠가 모두 바쁘면 육아 밸런스가 깨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육아와 일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고요. 결혼하고 제가 했던 결심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야”였어요. (웃음) 왜냐면 뭐가 되라고 해서 됐는데, 너무 허탈했기 때문이에요. 남편과 결혼하고 계룡산에서 지내면서 저도 조금씩 치유됐고 이렇게 육아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어요. 저라는 사람의 사이즈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요.

 

엄마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건강이요. 단순히 꼭 운동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몸을 보살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 건강한 사람은 운동을 하는 사람이고, 운동을 하면 몸뿐 아니라 정신도 활성화가 돼요. 공간 우울증이 있다는 거, 아세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 우울해질 수 있어요. 자꾸 몸을 움직여야 새로운 에너지가 나와요. 나에게 맞는 운동법을 찾는 것도 좋아요. 저는 덤벨을 들고 걷는 날도 있고, 수영을 하는 날도 있고, 요가도 해요. 어떤 간식을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운동을 고르다 보면 즐길 수 있을 때가 와요.

 

 

 

 


 

 

엄마의 20년오소희 저 | 수오서재
대한민국 엄마들이 ‘나(자아)’를 잃어버린 이유를 파헤친다. 아이와 함께 세계를 다니며 깨달은 ‘균형 육아’의 중요성과, 할머니 세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역할과 자리를 살펴보며 ‘가치 육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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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채사장 “우리가 몰랐던 인류 지식 절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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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가게 주인 채사장이 새 상품을 내놨다. 밀리언셀러가 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 )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5년여 만의 나온 새 책의 이름은 『지대넓얕 제로』 . 왜 3권이 아닌 ‘제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대넓얕 제로』『지대넓얕』 의 내용을 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선(先)지식이기 때문이다. 『지대넓얕』 이 자아와 세계를 구분하는 ‘이원론’의 구조에서 고대 이후의 역사, 경제, 정치 철학, 과학 등을 이야기했다면 『지대넓얕 제로』 는 인류 지식의 역사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우주의 탄생부터 고대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솜씨 좋은 지식 가게 주인 채사장이 알기 쉽게 손질한 우주, 생명, 베가, 도가, 불교, 철학, 기독교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아와 세계를 하나로 보는 ‘일원론’을 만날 수 있다.

 

현대인은 인류 사상의 역사가 파편적인 정보의 무더기일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놀라운 정합성과 일관성으로 이어져 있다. 하나의 철학, 종교, 사상 속에서는 찾아낼 수 없지만, 마음을 열고 위대한 스승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거대 사상의 맥락을 발견하게 된다. 책의 끝에 닿았을 때 당신은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이 흥미롭게도 하나의 주제, 하나의 담론, 하나의 질문에 끈질기게 매달리고 탐구해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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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

 

주변 사람과 같이 읽고 이야기 해보고 싶은 책이었어요. 낯설지만 흥미롭더라고요.


실제로 『지대넓얕』 으로 독서토론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혼자 읽기 보다 같이 읽고 이야기 하면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대넓얕』 의 후속작인데 3권이 아니라 ‘제로’예요. 어떻게 지어졌나요?


‘제로’라는 이름을 붙일지 말지 고민했어요.  『지대넓얕 제로』 부터 읽는 분들이 어렵게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예 다른 책으로 낼지, 『지대넓얕』 시리즈의 연장이되 1, 2권과 구별할지 고민하다가 출판사 대표님의 의견을 따라서 제로로 결정했죠.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일원론 이야기인데 언제부터 생각한 건가요?


『열한 계단』을 쓸 때 즈음 생각한 것 같아요. ‘언젠가는 정리할 때가 오겠구나’라고요. 『지대넓얕』 을 읽으셨거나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들었던 분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일관된 흐름이 있다는 걸 아시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채사장이 지금까지 책을 써왔구나’ 하시더라고요.

 

이번 책으로 『지대넓얕』 시리즈를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일관된 흐름’을 설명한다면요?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생각, 자아와 세계의 관계 의식에 대한 문제죠. 『지대넓얕』 이 나왔을 때 많은 분이 역사, 경제 등을 다룬 1권에 집중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가장 쓰고 싶었던 건 2권의 열 번째 주제 ‘신비’였어요. 『열한 계단』을 쓰면서 ‘신비’의 비중을 늘렸고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에서는 절반에 가까운 분량으로 ‘신비’를 이야기했죠.

 

일원론의 세계에 눈을 뜨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다를까요? 비유한다면요?


자각몽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자각몽을 꾸면 그 꿈속에서 날아다니기도 하고 장풍도 쏘고 하잖아요. ‘이거 꿈이었어?’, ‘다 가짜네’ 하지 않고요. 현실에서 무엇인가 일원론을 깨닫는 것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갑자기 현실을 초월하거나 ‘죽어야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만약 이 삶이 임시이고 부처가 말씀한 것처럼 공(空)한 것이라면 그때부터 집착하는 마음이 수그러지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아, 내가 모든 걸 쥐고 있을 필요가 없는 거구나’ 하고요.
 
체험으로 일원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런 체험이 있었던 건가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고요. 명상하거나 기도를 통해서 거대한 무언가를 깨달으신 분들이 있죠. 저는 아니에요. 이성적으로 일원론에 접근한 사람이죠.

 

이성에서 출발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한데요.


그렇지 않아요. 보통의 현대인이기 때문에 더 쉬운 것 같아요. 한국인의 교육 수준이 높잖아요. 머리가 큰 사람들이죠. 저도 그렇거든요. 어떤 체험을 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분들이 말씀하신 건 저도 잘 모를 때가 많아요.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분들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이성적으로 설명하면 일원론에 접근하기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 사람은 그런 체험을 했구나’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나요?


무수히 많죠. 주기적으로 명상을 하거나 관상기도 하는 분들은 책을 읽고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신 거죠. 그분들이 말씀하는 깨달음의 공통분모를 이성적으로 풀어낸 게  『지대넓얕 제로』 고요. 스님들이 하는 선문답이나 하이데거가 쓴 책을 읽으면 ‘무슨 말이야?’ 싶고 읽히지 않거든요. 그런데 의식이 만들어 내는 내면세계, 즉 일원론을 이야기한다는 걸 알고 읽으면 읽혀요. 전달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알고 보면 인류 지식의 절반 이상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더 잘 아는 분들이 등장했으면 좋겠어요

 

리뷰를 자주 찾아보시나요?


서점 리뷰도 보고 인터넷에서 후기를 검색해 보기도 하죠.

 

최근에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다면요?


제 책을 꾸준히 읽으신 분이 쓴 것 같았는데요. ‘버스 비용을 주고서 비행기를 탄 기분이었다’는 댓글이었어요. 기뻤어요. 잘 읽어주셨구나 싶어서요.

 

‘채사장은 팟캐스트계의 비틀스다’라는 댓글도 봤어요. 팬들의 표현력이 훌륭하더라고요. (웃음)


보통은 비틀스보다 더 위 단계로 비유를… (웃음) 농담이고요. 여러 방식으로 좋아해 주신다는 느낌이 들어요.

 

불편하게 한 리뷰는 없었나요?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몰라도 『지대넓얕 제로』 에 대해서는 아직 없는데 아쉽기도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지대넓얕 제로』 이 한국 사회에서는 낯선 내용이잖아요. 하지만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인류를 놓고 본다면 전체의 절반 정도는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 이 사실을 모르죠.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쟁점이니까 저보다 더 잘 아는 분들이 등장해서 논쟁이 되면서 이야기가 더 확장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이원론적 세계관 안에서 성장한 한국인이니까 잘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프롤로그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질문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원래 질문이 많은 사람이셨나요?


누구나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질문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지니까 학교나 가정에서 못하게 했고 거기에 익숙해져서 질문을 잃어버린 것뿐이지 누구나 질문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유사한 환경에서도 누군가는 질문하기를 포기하고 누군가는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있잖아요. 그 차이는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세요?


일단 제 경우에는 공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게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책을 본 게 고3 때였고 공부도 그때부터 시작했거든요. 어차피 공부를 못하니까 선생님도 부모님도 저한테 기대를 안 했어요. 돌이켜 보면 그게 행운이었죠. 근의 공식이나 미적분을 배우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 혼자 상상할 수 있었거든요.

 

친구와 대화하기 위해서 『지대넓얕』 을 썼다고 했는데 지금은 독자가 있잖아요. 책을 쓸 때의 느낌이나 방식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일단 글쓰기가 곤욕스럽고 두려워지긴 했죠. 『지대넓얕』 을 정말 쉽게 썼거든요. 왜냐면 아무도 안 읽을 줄 알고 …. (웃음)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팟캐스트의 영향력이 약할 때였어요. 그때는 쓰는 게 즐거웠는데 1권 이후부터는 글 쓰는 게 조금 어려워졌죠.

 

‘쉬운 설명’과 ‘구조화’가 장점이자 특징이 아닐까 싶은데 비결이 있다면요?


비결은 아니고요. 항상 구조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흔히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는 단어나 문장을 따라가면서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첫 번째 문장이 ‘A는 B, C, D다’라면 그 문장 뒤에 B, C, D에 관한 설명이 뒤따른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본인이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전체 구조를 생각하면서 읽는 거죠. 뒤따르는 문장을 앞에서 보여준 구조와 다르게 쓰면 독자들은 ‘뭐야? B, C, D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왜 E가 나왔어?’라고 생각하죠. 작가가 구조를 명확히 알고 써야 독자들에게 내용이 잘 전달되는 것 같아요.

 

내용을 어려워하는 독자분들에게 팁을 주신다면요?


모임을 만들어서 같이 읽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그에 대해 의문도 제기하고 피드백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진리가 텍스트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말하는 자한테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대요.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진리를 잉태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주변 사람이랑 모임을 만들어서 같이 읽는 걸 추천해요.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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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를 출간하면서 “잔이 비었다”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텅텅 비었죠. 다시 또 잔을 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잔을 채운다는 건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경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실 ‘잔을 채운다’는 이야기는 니체의 말이에요. 니체가 잔이 가득 찼으면 그걸 몰락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세상으로 나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잔을 비우는 거죠. 그리고 자기 내면 안에서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걸 ‘잔이 채워지는 시간’이라고 하는데 말씀하신 대로 책이나 영화, 연극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본질은 ‘고독한 시간’이에요.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요. 현대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죠. 너무 바쁘고 재미있는 게 많아서요. 그래서  『지대넓얕 제로』 마지막 부분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눈을 감고, TV를 끄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어요. 누구에게나 고독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게 장기적 목표’라고 하신 걸 봤어요. 지금도 그런가요?


군대 전역하면서 ‘다신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처럼,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시 살고 싶지 않다’ 이런 건 아니고요. 행복이나 불행같이 격정적인 마음에 시달리는 게 피로하게 느껴져요. 무수히 많은 삶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지대넓얕』 의 ‘신비’ 부분에서도 이런 내용을 썼는데요. 일원론의 관점에서 어떤 특별한 조건 아래에서 우리의 의식이 발현되는 거라면, 그러니까 과거나 미래나 물질적으로 특정한 조건이 형성되면 내 의식이 다시 발현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다시 이 세상에서 눈떠서 그걸 거쳐 간다는 게 논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유물론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고요. 그런 걸 생각하면 피로감이 들기도 하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무리할 수는 있는 건가요?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이게 베다의 세계관인데요.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영원한 삶을 이야기하지만, 베다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해요. 업, 윤회, 해탈이 핵심 내용인데 불교도이면서도 이걸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좋은 곳에서 금수저로 다시 태어나는 게 좋은 거라고요. 그런 내용은 아니고요. 베다도 그렇고 베다가 기반인 불교도 그렇고 윤회를 피로하다고 봐요. 삶이 영원히 반복되니까요. 더 윤회하지 않고 끊어지는 걸 해탈이라고 생각하고요. 기독교 문화권이 지배적인 현재의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인류의 절반 정도는 우리가 계속 윤회하는 걸 피로하게 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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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걸 찾고 있다면

 

JTBC <양식의 양식> 출연을 망설였다고 들었어요. 막상 하니까 어떠세요?


좋은 점이 더 많아요. 같이 출연하는 분들과 맛있는 음식도 먹고 여행도 하고, 방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게 되고요. 아쉬운 건 독자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그와는 상관없는 걸 해서 아쉽죠.


기대와 상관없는 게 어떤 건가요?


팟캐스트 지대넓얕을 다시 하기를 기대하는 분들도 있고, 제 책을 읽으신 분들은 제가 <양식의 양식>에서도 관련 정보를 쉽게 전달할 거라고 기대하신 것 같아요. ‘채사장이 굳이 TV에 나왔으면 그런 게 있겠구나’라고요. 그런데 매체의 형식이라는 게 큰 차이를 만든다는 걸 알았어요. 호흡이 긴 지식을 전달하기에 TV 프로그램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작가 채사장’으로서의 모습보다 ‘인간 채성호’의 모습이 부각될 수 있다는 부담은 없으세요?


모든 게 ‘기브 앤 테이크’인 것 같아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생기죠. <양식의 양식> 출연을 결정하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잃을 걸 예상하고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가능하면 드러나지 않게 살고 싶은데 그걸 지키려고 하면 또 많은 걸 잃겠죠. 더 많은 분하고 일원론이나 고대의 지식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런 기회를 잃을 수도 있고요. 조율이 중요한 것 같아요. 

 

팟캐스트 <지대넓얕>이 다시 시작되기를 원하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혹시 팟캐스트 대신 유튜브를 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생각은 하고 있어요. 팟캐스트라는 매체가 굉장히 빠르게 올드 매체가 됐잖아요. 그래서 ‘어떤 매체가 적절할 것인가’하는 매체 자체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유튜브를 생각한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이 책을 어떤 분들이 읽으면 좋을까요?


인류의 지식 절반에 관한 이야기니까 인간이라면 읽어야 하는 내용 같아요. 한편으로는 안 읽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자신의 세계관이 진짜라고 믿으면서 정원을 가꾸듯이 자기 세계관을 잘 가꾸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가족, 친구들과 행복하게 잘 머물 수 있다면 평생 무신론자이든, 기독교인이든, 불교도이든 괜찮죠. 그런데 불만이 있고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요. 그런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있거든요. 비슷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시대와 장소에 있었다는 걸 이 책이 설명하고 있으니까 도움이 될 겁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채사장 저 | 웨일북 |
나와 세계를 이해하게 하고, 개인의 관점과 세계관을 형성해주며, 일상에서 파생되는 지식들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번 책 [제로] 편은 당신이 진정한 지적 대화를 하고 싶다면 제일 먼저 접해야 하는 가장 근본 지식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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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임대형 영화감독 “타인의 삶을 말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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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관객에게 큰 위로가 된 영화 <윤희에게>의 시나리오집이 출간되었다. <윤희에게>는 한국 여성 ‘윤희’와 오타루에 사는 일본 여성 ‘쥰’의 사랑을 그린 로드무비다. 윤희는 20년 전 첫사랑 쥰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딸의 권유로 인생의 첫 단추를 다시 꿰기 위해 오타루로 향한다. 지금껏 주목받지 않았던 ‘퀴어 중년 여성’의 목소리를 담기까지 임대형 영화감독은 어떤 고민을 거쳤을까.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이후 2번째 장편영화를 완성한 임대형 감독과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한 시나리오의 디테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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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의식했다면 찍지 못했을 영화

 

감독님은 한때 문학을 좋아하셨다고요. 영화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특히 한국소설을 많이 읽으면서 자랐고요. 그러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좋은 대본들을 읽게 됐고 시나리오 작법 책으로 혼자 공부했죠. 큰 목표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고, 즐거운 것을 계속하다 보니 영화의 길로 들어서게 됐어요.

 

시나리오집은 누구의 기획이었나요?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하셨고, 제작사 대표님이 책으로 내길 원했어요. 대본을 오랜 기간 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았던 대본인데 대표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봐요. 출판사에서 초판 한정부록으로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의 편지를 각각 한국 종이와 일본 종이로 만들어주셨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해오셨어요. 어쩌면 ‘중년 퀴어 여성’의 이야기는 감독님에게 타인의 것이기도 해요.


처음에는 극단적인 조심성이 있었어요. 이 상황에서 인물이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까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매번 고민했죠. 어느 순간 감독으로서 조심하는 태도도 필요하지만, 너무 다가가지 않으면 찍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에둘러 가기만 하면 정작 하려는 이야기를 못 하니까요. 조심스럽게 접근하되 단호하게 할 이야기는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었어요. 스스로에게는 모순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죠. <윤희에게>는 너무 많은 시선을 의식하면 찍을 수 없는 영화였어요.

 

이중적인 태도가 영화에도 반영되었나요?


<윤희에게>는 당사자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어디 둘 것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아예 밀착해서 인물의 시점에서 찍을까 아니면 거리를 두고 인물을 가만히 지켜보게 할까.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결국, 신마다 달리 접근했어요. 윤희의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면 카메라가 흔들리면서 따라가고, 어떤 순간에는 거리를 두고요.

 

<윤희에게>에서 ‘편지’는 윤희와 쥰의 마음을 전달하는 중요한 장치인데요. 시나리오를 영화로 옮기면서 내용이 달라졌어요. 시나리오에는 인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있었다면, 영화에서는 절제된 느낌이 들어요.


현장에서는 시나리오대로 녹음했었어요. 그런데 긴 호흡의 영화를 편집하다 보니 새로운 리듬에 맞게 편지를 짧게 줄여야 했죠. 원래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나 되짚으면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윤희와 쥰이라면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덜 직접적으로 쓸 것 같아서 함축적으로 고쳤어요. 완성 직전까지 윤희의 편지를 두 버전으로 녹음해놓고 고민했죠. 최종 결정한 내레이션은 윤희의 내레이션이 쥰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라는 것이 더 명확해졌어요. 쥰이 “나는 너에게 도망쳤던 거야” 하고 쓰면, 윤희는 “나도 너처럼 도망쳤던 거야” 하고 대답하죠.

 

시나리오에 두 번 이상 반복되는 대사가 많아요. 오타루에서 쥰과 함께 살아가는 ‘마사코 고모’가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하면, 나중에 쥰이 그 대사를 똑같이 말하는 것처럼요.


한 인물의 대사를 다른 인물이 반복하게 해서, 한국의 윤희 가족과 일본의 쥰 가족이 비슷하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두 가족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같은 문화권이니 느끼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특히 윤희와 쥰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적인 차별과 혐오의 공기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고, 딸 새봄(김소혜)과 마사코 고모(키노 하나)는 그 삶을 곁에서 지켜봐 왔을 거예요. 이렇게 인물들의 유사성을 강조해서, 관객분들이 인물의 삶에 깔린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비슷하다고 느끼셨으면 했어요. 또, 제가 개인적으로 대사들이 반복되는 걸 좋아하는데 반복하면서 차이가 있지만 관객분들에게 상기시키고 어떤 부분에서는 반복을 한다는 것만으로 유머를 유발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퀴어 로맨스 영화 <캐롤>과 달리, 직접적인 성애 장면이 없어요.


너무 넣고 싶었어요. 실제로 호텔 바에서 만난 쥰과 료코(타키우치 쿠미)가 그 이상으로 발전하거나, 윤희와 쥰의 키스신이 들어간 버전도 있었어요. 영화에서 쥰에게 마사코 고모가 무슨 꿈을 꿨냐고 물으면 “그냥 같이 있었어” 하는데, 꿈에서 쥰이 어린 윤희의 형체를 보는 버전도 있었어요. 그러나 영화를 찍어나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물론 사랑하는 관계라면 성애도 나누겠지만, 윤희와 쥰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같이 있는 순간을 가장 원하지 않았을까요? 아직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아서 제 생각이 조금 어렸구나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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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와 딸 ‘새봄’의 모녀 관계가 특별해요. 새봄은 윤희에게 온 편지를 읽고 엄마의 첫사랑을 도와주려고 하죠.


윤희와 새봄의 모녀 관계는 제가 어머니와 동생을 관찰한 것을 반영했어요.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어떻게 딸이 편지를 받고 엄마의 연애를 도와주려 하냐고요. (웃음) 누군가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는 제가 보고 싶었던 모녀 관계를 그리고 싶었어요.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새봄도 딸의 역할로만 한정되지 않는 인물이에요. 영화에서는 편집되었지만, 시나리오에는 새봄이 혼자 우는 장면도 있고요.


새봄의 디테일도 편집 과정에서 많이 생략되었죠. 새봄이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모습도 시나리오에는 담으려 했어요. 비범한 친구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어떤 성적 지향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새봄이 엄마에게 온 편지를 읽고 자기혐오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의 첫사랑을 알았을 때, 혹시 자신이 엄마의 삶에 방해가 되어온 건 아닌가,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을 거예요. 그 생각을 엄마에 대한 증오로 표출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쏘게 된 거죠. 그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 것 같지는 않아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우는 장면을 넣었어요.

 

김소혜 배우는 그 전사를 다 숙지하고 연기를 했나요?


네, 대본을 성실하게 분석해서 현장에 오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들어왔어요. 저도 새봄이 우는 신을 좋아하는데, 김소혜 배우가 연기를 정말 잘했거든요. 새봄이 슬퍼서 운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화나서 우는 것 같은 그런 미묘한 감정을 다 표현하더라고요. 현장에서 김소혜 배우는 새봄 그 자체가 됐어요. 촬영 동안에는 생각과 말을 새봄처럼 하고 “새봄이라면 이러지 않을까요” 하고. 상당히 캐릭터와 밀착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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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간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에 윤희의 공간인 지방 도시와 쥰의 공간인 오타루가 나오죠. 두 공간이 대비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방 도시는 윤희가 오랫동안 갇혀 지낸 공간이라 활기가 느껴지지 않도록 원색을 배제하고 무채색으로 한정했어요. 대신 오타루에서는 의상, 소품에 색을 많이 사용해서 두 공간을 대조시키려 했어요. 오타루가 상대적으로 너무 예뻐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촬영 감독님이 두 공간을 다르게 연출하되 어느 한쪽이 미적으로 보이지 않게 균형을 잘 잡은 것 같아요. 오히려 일본 스태프들은 한국의 공간이 신선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윤희에게>는 ‘취향’에 대한 영화이기도 해요. 윤희와 새봄은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고, 마사코 고모는 SF소설을 읽는 할머니죠.


주변에 하나에 몰두해서 삶을 즐기는 ‘덕후’ 친구들이 많아요. 무언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윤희가 필름 카메라, 그중에서도 코닥을 좋아하는 것처럼요. 세세한 자기만의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재미있어 영화에 자주 등장시키는 것 같아요. 반대로, 뭘 싫어하는지 보면, 서로 같은 사람이구나 알아볼 수 있죠. 좋아하는 건 세세하게 다를 수 있는데 싫어하는 건 정말 비슷하더라고요. 쥰과 마사코 고모가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과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하는 것처럼요.

 

결국, <윤희에게>는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이야기 같아요.


이 영화의 인물들이 처음부터 비슷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서로 사랑하다 보면, 배우려고 하고 닮아가는 것 같아요. 말도 비슷하게 하고 좋아하는 것도 비슷해지고. 물론 ‘나’와 ‘너’라는 경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사랑하다 보면 ‘내’가 마치 ‘너’ 같은 상태가 되잖아요. 저도 그런 경험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윤희와 쥰은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첫사랑의 사진을 사진첩에 넣어 두고, 고장 난 필름 카메라도 보관하죠. 다음 세대인 새봄과 경수는 그걸 잘 고쳐서 ‘간직하는 사람’ 같고요.


물건이든 사람이든 과거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저 과거가 현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요즘 이전 세대를 혐오와 경멸의 시선으로 보곤 하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도 언젠가 나이가 들 텐데, 그때 젊은 세대가 저를 혐오한다면 무서울 것 같아요. 존경할만한 부분이 있다면 조명하고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 먼저 이 영화를 전하고 싶은 사람은요?


이 영화의 핵심은 ‘퀴어’이기 때문에, 당사자인 퀴어분들이 재밌게 봤다고 할 때, 기분이 가장 좋죠. 당사자를 만족시키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퀴어의 이야기인데 그분들이 영화를 별로라고 하면 그게 가장 상처가 될 것 같아요. 퀴어분들이 연애를 시작할 때, ‘이 영화 보러 가자’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럴 때, 이런 이야기가 너무 늦게 나왔구나 싶죠.

 

 

 


 

 

윤희에게 시나리오임대형 저 | 클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간 장면까지 모두 담긴 무삭제 시나리오와 영화 속 윤희와 쥰이 주고받은 편지가 시나리오 뒤에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와 비교하며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문학적으로 쓰인 시나리오에 오롯이 집중해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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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늘한여름밤 “조금씩 나쁘고 이기적인 연애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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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하고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는 순간마다 수많은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평생 한 사람과 사랑할 수 있을지, 최악의 나를 보여줘도 괜찮을지, 어디까지 공유할 수 있을지, 결혼에는 왜 방학이 없는지.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애 각본이나 남들이 다 한다는 매뉴얼을 가지고 질문에 대처하고는 한다.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나에게 다정한 하루』등 심리학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왔던 서밤(서늘한여름밤)이 이번에는 한 사람을 만나 연애에서 결혼까지 7년 동안 겪었던 사랑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직접 부딪치고 깨진 시행착오를 통해 질문을 피해가기보다 질문을 통해 미성숙한 자기 모습을 대면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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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나쁘고 이기적인 사랑


심리학 이야기를 주로 해왔던 것과 달리, 이번 책은 연애 에세이에요.


원래는 이런 에세이가 될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사람들이 사랑하기 전에 해야 할 질문을 책으로 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책 내용이 바뀌면서 구성이나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죠.


사랑하기 전에 해야 할 질문들은 무엇이었나요?


이를테면 결혼하기 전에 부모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는 거죠. 질문만 보면 이상하게 보이지만, 계급이 분명 존재하고 그게 삶에 대해 가지는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거든요. 막연하게 일 년에 한 번 정도 해외여행 가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 사람과, 여권이 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생각하게 되잖아요. 개인적인 경계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명절은 어떻게 할 것인지도 결혼하기 전에 꼭 이야기해야죠. 연애와 결혼 관계는 가치관을 맞춰가야 하는 문제니까요.


그림일기로 표현하는 것과 글로 표현하는 게 다른 점이 있었나요?


그림은 눙쳐서 표현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림으로 표현하면 사람들이 그림 안에서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데, 글은 훨씬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야 하고 숨길 곳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으면서 썼어요. 책을 쓰면서 글 쓰는 연습도 많이 하게 됐고요.


에필로그에는 배우자의 글이 들어갔어요.


그림일기에서도 어떤 이슈에 대해서는 남편이 글을 쓰고 제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 봐서, 글도 같이 넣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늘 글을 쓰면 남편이 거의 제일 첫 독자였어요. 늘 ‘잘 썼다’ ‘프로 작가다’ 하면서 제 기운을 북돋워 줬죠.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사생활을 많이 드러내게 되는데요.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두려움은 없었나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면 미문이라도 남겼을 텐데, 남길 게 없잖아요. 솔직함밖에 줄 수 없는 게 없어요. 어떤 사람의 인생 이야기에서 교훈을 받으려면 그 이야기가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논문이나 기사는 결론에 어떤 과정을 거쳐 도달했는지 정보를 왜곡하지 않고 공개해야 하는데, 에세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완성된 모습만 보여주는 것도, 과정 없이 그저 성숙해졌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들, 혹은 힘들게 했던 생각이나 숨기고 싶었던 것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지 이 글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돌아보거나 얻어갈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요.


책을 읽은 가족들 반응은 어땠어요?


엄마는 역시 자기가 더 좋은 사랑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반응이었고, 나머지 친척들은 잘 읽었다, 남편 잘 만났다 등의 말씀을 해주셨죠. “너, 요즘 섹스를 잘 안 한다며?” 이럴 수는 없으니까요. (웃음)


섹스를 등산에 비유한 게 재밌었어요. 다른 운동도 아니고 등산이라니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에요. 섹스가 마치 운동 같은데, 운동 중에서는 등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질한 에피소드도 많아요. 이별하고 난 뒤 인터넷 게시판에 이별 글을 남긴 사람들한테 일일이 쪽지를 보냈다고요. 답장이 왔었나요?


답장이 많이 왔어요. 인류애가 느껴지더라고요. 힘든 걸 공감하니까 열심히 답장을 해주셨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분명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나아졌다고 하더라고요. 3개월이 기점이라고 해서 날짜를 세면서 기다렸었죠.


딸기 바나나 요거트가 너무 맛있어서 애인에게는 주고 싶지 않다는 옹졸함도 나오죠. 이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 상태여서 이런 이야기도 나올 수 있는 걸까요?


숨기고 싶어한 내용이었다면 쓰지 않았을 거예요. 다들 연애를 하면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너무 애쓰잖아요. 사실 다들 이기적이고 비겁한 면이 있는데도요. 조금씩 나쁘고 이기적이어도 전체적으로는 관계가 잘 굴러갈 수 있어요. 첫 연애는 성숙하게 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제 모습이 아니더라고요. 지금 남편과의 연애에서는 그냥 미성숙한 마음을 표현하고 관계를 맺었던 것 같아요.


프롤로그에 “시작했던 곳과 다른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의 경험을 풀어놓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쓰셨어요.


저처럼 좋은 사람이나 좋은 가정을 보지 못하고 자라왔던 사람에게 이 경험을 나누고 싶었어요. 항상 저도 부모님의 관계를 똑같이 답습하지 않을까 항상 불안했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어떤 부분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나누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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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관계를 실험했으면


결혼을 ‘예상치 못한 기득권의 맛’(120쪽)이라고 표현했어요.


결혼한 사람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결혼이 제 것이 되자마자 안정감과 편안함, 모든 사람이 나를 축복해주는 느낌을 한 번에 느꼈던 것 같아요. 사실 저희는 사회에서 너무나 환영할 만한 커플인 거죠. 둘 다 비장애인에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직장도 있고요. 그래서 그 기득권을 오롯이 느꼈던 것 같아요.


이 편안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는데요.


이성애자들만 이런 권리를 갖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동성결혼 법제화가 되지 않은 시점에서 차별을 통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건 당연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 제도에 편입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폭력적으로 끌려 올 때가 있잖아요. 그런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 마냥 마음 편히 결혼해서 너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거죠.


‘어쨌든 너는 결혼하지 않았느냐’ ‘네 사회적 위치로는 그나마 낫다’는 비판도 들어오잖아요.


당연히 그런 비판이 있을 수 있고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그 힘으로 부수고 나갈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운이 좋은 사람들이 앞에 가면서 길을 닦아놔야 운이 덜한 사람도 함께 갈 수 있어요. 이번 설에 하는 ‘차례상 대신 브런치’ 모임도 제가 알려져 있고, 이성애자고, 결혼했기 때문에 열 수 있었고요. 명절에 시가에 안 가는 걸 혼자서 조용히 할 수도 있지만, 더 대놓고 함께하자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게 더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 명절에 시가 안 가려는 유별난 여자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저를 보고 한 명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페미니즘 안에서도 서로 대립할 때가 많아요. 내 의자가 더 시급하다는 게, 다들 연대할 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네 의자가 내 의자거든요. 우리는 같이 벤치에 앉아 있어요.


여성혐오에 대한 내용도 많이 들어 있었어요. 남편과 함께 살면서 부딪치는 지점이 많았을 텐데요.


온도 차이만 있어도 서운하더라고요. 페미니즘을 몰라도 여자라면 싸한 순간이 있잖아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저는 너무 화가 나서 밤까지 잠이 안 오는데 남편은 잘만 자요, 그러면 화가 나는 거죠. 같은 여자라도 같은 지점에서 같은 강도로 분노하긴 어려운데 내 배우자는 분노해주길 바라는 게 현실적인 기대인 걸까 생각은 들어요. 어쨌든 지금은 제 배우자에게 내가 화내는 것 같으면 너도 화내는 척이라도 해라,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웃음)


책을 읽고 공감했다는 리뷰와 함께, 이 관계가 부럽다는 리뷰도 있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는 리뷰가 제일 좋아요. 특히 저랑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너무 습관처럼 불행을 기다리는 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리뷰를 보았을 때 책 쓴 보람이 있다고 느꼈어요.


불행이라는 키워드가 제목에도 나오는데요. 항상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었나요?


부모가 행복한 걸 못 보고 자란 사람들은 늘 그런 불안이 있는 것 같아요. 나도 언젠가는 부모처럼 되지 않을까 불안해서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 과잉 노력을 하다가 지치고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도 많고요. 특히 관계가 좋을 때 이 관계는 언제 불행해질까 하는 질문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또 불행이 오죠.


그렇죠. 자기충족적 예언이 될 때도 있죠.


지금은 불행을 기다리지 않는 상태인가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관계가 꼭 행복해야 된다는 생각, 관계를 영원히 지속해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없어졌고요. 우리 둘이 서로 진실한 자기 자신으로 만나는데,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언젠가 서로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서로 갈라설 수도 있어요. 이 관계가 끝까지 행복하게 가야 한다는 집착을 버린 상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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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면 좋을까요?


습관처럼 불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행복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연애를 시작할 때 좋으면서도 자신이 낯설 때가 있어요. 늘 누더기 입고 편안해하던 사람인데 명품 옷을 입은 것 같고, 이건 내 옷이 아니고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워요. 낯선 행복을 좀 견디고 익숙해졌으면 좋겠어요.


대부분의 사람은 관계 안에서 그런 행복을 찾기 쉽지 않아요.


행복이 이미 왔을 수도 있어요. 그걸 행복이라고 느끼지 않고 낯설고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거든요. 이게 낯설어서 싫은 건지 정말 싫은 건지 살펴볼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커플들에게 심리상담을 권하는 내용도 있었어요.


커플뿐만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심리상담을 권하고 싶은데요, 커플들이 갈등 상황이 있을 때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저는 커플 상담 전에 개인 상담을 받아보라고 많이 권유해요. 개개인의 문제를 정리하고 나서 커플 상담을 받아야 서로 더 원만하게 대화하기 좋아요. 갈등이 있을 때 꼭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가 반복되는 것일 수도 있거든요.


이 관계 안에서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관계를 실험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배워온 연인의 모습이 꼭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닐 수도 있어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우리가 맺는 관계의 특별함은 무엇인지 우리만의 관계를 만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너에게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사랑할까?”라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너는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 날 사랑해?(응) 내일도 날 사랑할 것 같아?(응) 그럼 된 거야.” 그렇다. 그러면 된 것이다. 불행한 미래가 길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사랑하는 오늘이 있다.
결혼은 믿지 않는다. 오늘 하루를 믿는다.
(194쪽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서늘한여름밤 저 | arte(아르테)
‘사랑은 사랑으로 시작될까?’와 같은 경쾌한 질문에서부터 ‘어떻게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겠어?’ ‘일주일에 섹스는 몇 번이나 해야 할까?’ ‘평생 너만 사랑할 수 있을까?’와 같은 금기의 질문까지, 터놓기 힘든 물음을 좇아 민낯의 모습을 한 사랑에 대해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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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경록 “은퇴 앞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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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을 용기』는 한겨울의 참나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무성했던 잎을 다 떨구고 둥치와 줄기만 남아있는 그 모습에서 노년의 삶을 엿본다. 인생의 후반전은 꽃과 잎을 자랑하며 살 수 없는 시기이고, 그렇기에 “벌거벗은 모습이 아름다워야 할 때”라는 깨달음을 전한다. 겸허한 수용이되 낙담은 아니다. 겨울의 앙상한 나무도 봄이 오면 꽃을 피우듯, 잘 준비된 노년기에는 ‘다시 한 번 나를 꽃피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 까닭이다. 그때를 위해 지금의 우리가 갖춰야 할 삶의 근간은 무엇인가. 『벌거벗을 용기』는 성찰, 관계, 자산, 업(일), 건강의 5가지 요소를 꼽는다. 그것들을 견고하게 만듦으로써 벌거벗은 몸이 아름다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김경록 저자는 '미래에셋 은퇴연구소'를 이끌며 고령 사회, 노후 자산 관리에 대해 연구해왔다. 보고서와 강의, 교육, 유튜브, 팟캐스트 등을 통해 연구 결과를 알리고 있다. 동시에 경제학자이자 은퇴 연구 전문가로서 각종 언론 매체에 글을 쓰고 자문을 하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운용최고책임자, 미래에셋캐피탈 대표이사, 매레에셋자산운용 경영관리부문 대표를 역임했으며, 지은 책으로 『인구구조가 투자지도를 바꾼다』 , 『폭발하는 글로벌 중산층, 투자의 지도를 바꾼다』, 『1인1기』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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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앞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이것’


노년을 ‘벌거벗는 시기’로 보셨는데요. 무엇을 벗는다고 생각하세요?


우리 존재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건강이라든지 가족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요. 사회에서의 지위나 엄마로서의 지위 같은 것들은 비본질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0대 후반 정도에 접어들면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지위들, 사회적 관계들이 다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자녀들이 독립하면서 엄마로서의 지위도 떨어져나가고요. 한편으로는 책임에서 해방된 것 같지만,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나무에서 잎이 우수수 다 떨어지고 가지와 둥치만 남은 것 같이 벌거벗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게 두려운 거죠. 그렇지만 명예, 지위, 사회적 관계들을 벗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것들에 가려져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이제는 자신의 본질만 남게 되는 겁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 자신의 예상보다 일찍 은퇴를 맞았다고요.


네, 2~3년 정도 빨리 은퇴를 합니다. 54~55세 정도인데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금과 다를 겁니다. (현재 은퇴 시기에 있는) 베이비부머들은 인구수가 많습니다. 1955년생부터 베이비부머 세대로 보기도 하고 1958년생부터 보기도 하는데요. 거의 천오백만 명 정도입니다. 1974년생까지 있는데, 1974년생이면 올해 마흔일곱이 됩니다. 이 사람들이 퇴직하고 나면 진짜 텅 비게 돼요. 게다가 요즘 구조조정으로 퇴직하는 40대가 많다고 하잖아요. 그 사람들까지 조정되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 회사의 윗자리가 많이 비게 됩니다. 그렇지만 잘 적응해서 생존하면 훨씬 롱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이전의 노년 세대와 굉장히 다르다고 하셨어요.


1930~1940년대에 태어난 노년 세대의 경우에는 한국 전쟁도 겪고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대들입니다. 살아남은 것 자체만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세대가 지금의 80대인 것이고요. 지금의 50~60대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회사에 들어가기 시작했거든요. 그때부터 우리나라가 고성장을 하게 됩니다. 집값도 막 오르게 되고요. 아무래도 이전 세대보다는 부를 많이 축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이비부머 세대는 양적인 숫자도 훨씬 많고 질적으로도 교육 수준이 훨씬 높습니다. 지금 60대 이상의 인구에서는 대졸자가 많지 않은데, 40대 같은 경우에는 거의 절반 정도의 비중입니다. 베이비부머는 30% 정도 됩니다. 앞으로 베이비부머 세대가 세상을 많이 바꿀 겁니다. 좋은 방향으로 바꿀지 나쁜 방향으로 바꿀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큰 책무 중에 하나는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쓰셨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를 떠올릴 때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연히 불안해합니다. 저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을 다른 쪽으로 조금 옮겨가자는 뜻이지요. 은퇴라는 것이 정말 환영할 만한 것이고 직장 다닐 때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은 어차피 이 시기를 맞아야 됩니다. 어떤 자세로 맞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은퇴 후의 삶이 객관적으로 너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도 취약해지는 시기이고, 사회적 관계도 많이 흩어지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약해지거든요. 일이라는 것이 사람을 다이내믹하게 해주는데 그런 것들도 많이 떨어져나가고요. 전체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당합니다. 그래서 은퇴 후에 정말 좋은 세계가 펼쳐진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인 것이고요. 그래도 우리가 맞아야 될 시기이니까 긍정적으로 맞아보자는 것입니다.

 

은퇴를 앞두고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돈’인가요?


맞습니다. 그 다음이 건강이고요. 본질적으로 남는 것들이지요. ‘돈’이라고 하니까 탐욕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게 아닙니다. 자신의 생존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사자가 잡아먹는 토끼를 잡아먹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사회적 관계를 가져야 되는 것이고, 또 행복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런 본질적인 것들을 고민하게 됩니다.

 

책에서 돈이 아닌 성찰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셨어요. 이유가 있나요?


성찰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괴팍스러워집니다. 거의 2100년 전에 키케로도 노년에 대해서 ‘성마르고, 화 잘 내고, 괴팍스럽고, 인색하다’고 썼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성찰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바꿔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옆에서 지적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궤도를 이탈하고, 그렇게 10년 20년이 지나면 괴팍한 노인이 돼 있는 겁니다. 화도 벌컥벌컥 내고요.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안 모이고 외롭게 되는 것이죠. 스스로 돌아보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성찰이 중요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볼 때에도 성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생 후반기가 되면 살아오면서 쌓아 놓은 데이터를 해석하게 되는데요. 결국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은 성찰입니다. 옆에서 볼 때 괜찮은 삶을 산 것 같은데도 ‘내 인생은 참 엉망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남들이 볼 때는 어려운 시간을 살아온 것 같은데 ‘참 감사한 삶을 살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후반전도 기쁘게 되는 것이지요. 전반전 슬프게 바라보면 후반전도 계속 꼬이고 외롭고 괴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찰이 중요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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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재취업 하려면 전문성 갖춰야


노년의 일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 깊었습니다. 소득이 있고 연금을 받아도, 일을 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서요?


네, 독일에서 조사한 결과인데요. 실업 급여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실업 상태에 있는 것이 불행하다고 합니다. 일을 하면 뭔가를 창조하고 만들어낸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몰입을 하면서 잡념이 없어지고 행복해지거든요. 그리고 일을 하면서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노년기에 일을 그만두면 사회적 관계망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게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젊을 때는 일을 하면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먹고 살아야 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노후를 준비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일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그런 부분이 노후에는 많이 덜어집니다. 그래서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일을 할 수도 있고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을 통해서 자기효능감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퇴 후에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부지런하고 어릴 때부터 도덕적인 교육을 많이 받아서 일을 하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면이 강하기는 합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빨리 은퇴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일을 안 하면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런 강박관념은 조금 버리실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평생 해보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추구해보는 것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수 사회에서는 생을 하나 더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60세가 되더라도 건강하게 20년 정도 살 수가 있거든요. 가끔 ‘이번 생은 정말 재미없었는데, 다음 생에 태어나면 다른 일을 해볼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저는 ‘이번 생에서 덤으로 생을 하나 더 줬으니까 지금 해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년에 일자리를 얻더라도 노동 환경이 좋지 않은데요.


기대를 조금 낮춰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가 고성장을 하다가 멈췄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받아들여야 됩니다. 사회가 나한테 뭘 해줄 거라는 기대를 낮춰야 됩니다. 그 기대폭을 낮추는 것이 성찰 중에 하나이거든요. 그렇게 해야 행복해지는 거고요. 정말 어려운 일인 건 맞습니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받았던 대접에 적응하고 있다가 퇴직하자마자 기대를 낮추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얼마나 많은 방황과 갈등을 겪는다고요. 저는 그걸 ‘사추기’라고 이야기하는데, 50대에 퇴직하고 나면 사추기를 겪습니다. 그때 ‘나는 왜 이럴까’ 생각하지 말고, 기대를 조금 낮추고 잘 견뎌내고 새로이 적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젊을 때처럼 좋은 일자리가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장점은 있습니다. 젊을 때는 직장에 매여야 하지만, 노년에는 매이지 않고 자신이 주도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일을 해도 그렇고, 봉사활동을 해도 그렇습니다.

 

은퇴 후 재취업을 위해 ‘나만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시더라고요.


예,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요. 제 친구들 중에도 자격증을 따서 취업한 사람도 있고,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는 친구도 있고, 타일 기술을 배우는 친구도 있고, 다양합니다. 그렇게 적응하는 것이고요. 전문성은 정말 다양합니다. 최근에는 전국에서 ‘이야기 할머니’를 뽑는다는 기사를 봤는데요. 이야기를 잘하는 것도 자신의 전문성입니다. 앞으로 그런 다양한 일들이 생겨날 겁니다. 많이 물어보고 많이 찾으면 하나하나 찾아가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젊을 때처럼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기대는 벗어던져야 되고요.

 

퇴직 후에 소자본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성공하는 비율이 낮죠. 50% 정도 되나요?


50%도 안 됩니다. 3~5년이 지나면 70%가 문을 닫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고용하는 것이 자영업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고용할 때는 경쟁력을 보고 고용하는데, 자기 스스로를 고용할 때는 그런 게 없습니다. 경쟁력이 없어도 그냥 하는 것이지요. ‘나는 성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소자본 창업을 할 텐데, 통계의 법칙이라는 게 참 우습습니다. 나는 퇴직 안 할 거라고 생각해도 어느 나이가 되면 휩쓸려서 같이 가야 되고, 나는 안 죽을 거라고 생각해도 어느 나이가 되면 다 죽듯이,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성공하는 30%에 꼭 포함될 것이다’라는 희망으로 시작하지만 70%가 사라집니다. 소자본 창업을 해서 실패하면 노후 자금이 없어진다는 게 문제인데, 기술을 배워서 자격증을 얻어서 일을 하면 자본이 안 들어가도 됩니다. 그래서 전문성이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를 발휘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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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늦게 받으면 좋을까요?


종신연금을 활용하라는 조언도 해주셨는데요. 가장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 종신연금이 국민연금이잖아요.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요?


국민연금은 의무화 돼서 가입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부부가 같이 납부하면 각각 받게 되고 그 금액이 꽤 큽니다. 또 중간 중간 납입하지 못한 기간은 채워 넣으시는 게 좋습니다. 취업한 후에 거꾸로 불입할 수가 있거든요. 그리고 가입 기간이 길수록 좋으니까 일찍 시작하시는 게 좋습니다. 연금을 받는 시기를 연기할 수도 있는데요. 매년 연기할 때마다 수령액이 7.2%씩 늘어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빨리 죽으면 손해라고 생각해서 연기를 안 하시는데요. 80세 정도가 되면 손익분기점이 거꾸로 돼서, 오래 살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많은 돈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자칫하면 빨리 죽을 수도 있는데’ 하고 생각하시지 말고 ‘나는 오래 살 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연기하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자님도 연기할 계획이신가요?


최대 5년 연기가 가능한데요. 현재 생각으로는, 기본적으로 3년은 연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65세부터 받으니까, 3년 연기하면 68세가 되는 것이지요. 생을 길게 봐야 된다는 생각으로 최소 3년 정도는 연기하려고 하고요. 몇 년 후에도 건강하다면 5년을 연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산의 대부분을 부동산에 묻어두는 경우가 많은데요. 노년에는 현금 자산도 가지고 있어야겠죠?


지금 국가에서 주택연금을 통해서 부동산을 유동화 시켜줬습니다. 아주 좋은 제도이고, 그래서 저는 항상 주택연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합니다. 그것보다 걱정이 되는 게 ‘하우스 리치, 캐쉬 푸어(house rich, cash poor)’입니다. 노후에 집 한 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엄청나게 비싼 집을 한 채 가지고 있으면서 현금 자산이 없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유동성이 없고 집값이 떨어지면 자산도 많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현금 자산 없이 집만 두 채, 세 채 가지고 있으면서 임대업을 하겠다고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기는 하지만, 보통 집을 살 때 돈을 빌려서 삽니다. 부채가 있는데 주택 가격이 떨어져버리면 힘들어지지요. 그런 부분에서 부동산을 너무 믿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아놓은 자산도 없고, 투자 경험도 없는데, 노후 자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투자에 관한 설명을 하러 가서 많이 듣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투자를 하지’라고 말하시는 거지요. 모아놓은 자산도 없고 자녀 교육에 다 써버렸다고 하는데, 그게 많은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건, 자산을 가만 가만 뽑아 보시라는 겁니다. 일단 주택 자산이 있을 테니까 주택연금 같은 방법을 잘 활용하면 한 달에 50~100 만원의 연금은 나오게 되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투자도 하고, 자격증도 얻고, 그렇게 해서 ‘일을 해서 소득을 버는 나’를 만들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50대 중후반 분들에게는 ‘자녀 교육하는 데에 지출하시는 건 괜찮은데, 결혼 시킬 때 체면 때문에 돈을 왕창 쓰시는 건 제발 하시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웰다잉의 출발점”입니다. 노년기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이죠.


사람들이 웰다잉에 대해서 ‘이런 죽음은 좋은 것이고, 이런 죽음은 본받지 않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끝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항암 치료를 받고 병원비를 쓰면서 사는 것은 추악한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시한부 선고를 받고 가족과 만나 삶을 정리하면서 여행을 떠나는 죽음은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삶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죽음이라는 것도 개인의 실존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런 것은 좋은 죽음이고, 이런 것은 안 좋은 죽음이다’라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웰다잉을 확대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다잉’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이 있어야 됩니다. 삶도 남을 따라서 살 필요가 없듯이, 죽음도 자신의 성찰을 거쳐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필로그에서 ‘prosper’, ‘flourish’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prosper’는 물질적 성공을 ‘flourish’는 생물의 성장을 의미한다고요.


벌거벗을 용기를 가진 다음에 발전적으로 해야 되는 일이 ‘자신을 꽃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flourish’라는 용어로 표현해봤습니다. ‘prosper’는 우리가 젊을 때 추구했던 것입니다. 직위도 가지고 돈도 벌어야 하는 것인데, 나이가 들어서도 ‘prosper’를 추구하는 건 조금 안 맞는 것 같고요. 노년은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들, 내 안에 씨앗처럼 심어져 있는 잠재성을 ‘flourish’ 하는 기간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장수가 준 기회를 그런 데에 활용해 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벌거벗을 용기김경록 저 | 흐름출판
‘고령화, 저성장, 저출산’이라는 우리 사회의 변화 속에서 성공적인 인생 후반전을 이끌 리노베이션 전략을 소개한다. 성찰, 관계, 자산, 업(일), 건강 등 다섯 가지 영역에 걸쳐 제시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은 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이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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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 메탈 거장 블랙홀 “기적을 다시 목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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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Miracle>로 데뷔한 블랙홀이 올해로 30주년이라는 기념비를 쌓았다. '깊은 밤의 서정곡'으로 대중적 히트를 기록한 이들은 <Black Hole>의 위기를 <Made In Korea>로 극복하고, 정규 8집까지의 순조로운 활동을 통해 척박한 한국 헤비 메탈 시장의 대들보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가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해외 음악을 카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만의 소리', '한국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 그들의 열정과 탐구는 '한국의 헤비 메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적인 답변이 됐다.데뷔 30주년과 더불어 14년 만에 정규 9집 <Evolution>을 발매한 블랙홀은 이즘을 만나 '늘 연습하고 곡을 만들다 보니 30주년이 됐다'며 현재 진행형 전설의 여유를 전했다. '노땅'이라 불리는 대신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고, 단단한 실력을 통해 '음악으로 승부하겠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신보를 소개하는 모습에선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놀라운 미래 세계에 대한 통찰을 들려주기도 했다. 30주년이라는 시간의 훈장만 달았을 뿐, 블랙홀은 1989년 열정과 도전으로 가득했던 젊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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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9월에는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현역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이 1989년 데뷔 앨범 <Miracle>에 헌정하는 <블랙홀 트리뷰트 : Re-Encounter The Miracle>을 발표했다.

 

이원재 : 우리가 관여한 기획은 아니다. '블랙홀의 30주년을 맞아 기념비적인 앨범이 필요하다'는 뜻 아래 헌정 앨범을 기획한 분들이 후배 밴드들과 함께 제작한 프로젝트다. 팬들과 함께하고 싶어 일반 제작 대신 '텀블벅' 사이트를 통한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모여서 기분 좋게 작업했다.

 

정병희 : '잘하겠지' 싶었는데, 듣고 나서 깜짝 놀랐다. '우리 음악 관둬야겠다' 싶더라. (웃음)

 

이원재 : 사실 그 과정보다 앨범의 만듦새가 더 놀라웠다. 메서드, 렘넌츠 오브 폴른, 바세린, 어비스 등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밴드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우리의 곡을 훌륭히 해석했다는 점이 우선 감격스러웠고, 보통 헌정 앨범은 베스트 앨범 형태를 취하는데 <Miracle>의 트랙 순서를 그대로 옮겨 만들었다는 점도 신선했다.

 

주상균 : 그 팀들 덕분에 우리가 30주년이라는 걸 알았다. '우리 30주년이야?'

 

'기적을 다시 목도하라'는 앨범 제목이 인상적이다.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과 팬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멋진 문구였다.

 

주상균 : 현재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의 실력은 세계 시장과 견줘 봐도 결코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앞서가는 면도 많다. 그런데 그들이 아주 한정된 공간에 가둬져, 많은 빛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거의 모르지 않나. 변화라고, 음악의 흐름이라고 무시하기엔 너무 아쉬웠다.

 


신중현, 들국화, 동아기획 등 최근 들어 헌정 앨범이 많이 등장하는 추세지만, 헤비 메탈으로는 첫 트리뷰트 작품이다.

 

주상균 : 처음엔 고사하려 했다. '우리가 그런 자격이 되나?' 싶었다. 그럼에도 허락한 이유가 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토록 비인기인데 30년 이상 버텨온 장르가 없다. 이번 트리뷰트 앨범이 우리에게도 더 열심히 할 계기가 되고, 후배들에게도 전통을 이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원재 : 앨범을 통해 타 밴드들과 교류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도 삼고자 했다.

 

후배 밴드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주상균 : 마지막 트랙 '깊은 밤의 서정곡'은 앨범에 참여한 팀들의 기타리스트들이 한 데 모여 다시 부른 곡이다. 후배들 정말 잘한다. 내가 선생님으로 모셔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매번 느끼는 거지만, 헤비 메탈하는 후배들은 정말 예절 바르고 조용하다. (웃음)

 

이원재 : 많은 사람들이 헤비 메탈 뮤지션들은 거칠고 방탕한 삶을 살 것이라 오해한다. 한 장르를 깊이 탐구하려면 공부와 고뇌가 필수다. 대부분 사색적인 친구들이고, 음악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많은 공부를 한다. 사람들은 쇠사슬을 몸에 감고 (포즈를 취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장면만 기억하지만.

 

주상균 : 우리나라 헤비 메탈 밴드들의 특징일 수 있다. 해외의 경우 헤비 메탈은 노동자 계급과 같은 하위 계층으로부터 출발했지만, 한국은 그 문화를 학생층이 받아 시작했다. 소심, 서정성, 내성… 잘난 척도 안 한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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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균 (보컬/기타)

 

 

아홉 번째 정규 앨범 <Evolution> 이 나오기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주상균 : 2005년 8집 <Rage>가 극찬을 받았다. '죽기 전에 이 작품은 남겼다'라 할 수 있는 인생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헤비 메탈은 21세기 들어 내리막길을 걷는 중이고, 우리도 나름 메인스트림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14년 동안 많이 고민하고, 좌절도 하며, 방황도 했다.

 

이원재 : 정규 앨범에 얽매이지 않고 디지털 싱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4년 <Hope>는 그런 결과물들을 모아 발표한 앨범이다.

 

정병희 : 정규 앨범만 내지 않았을 뿐, 공연은 계속 이어갔다.

 

주상균 : 8집까지 우리의 스타일은 전통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미디어 통해 홍보하고, 투어 다니고. 당시까진 음반 시장이 살아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 시장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그 고민의 결과가 <Evolution>의 주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인도한 것인가.

 

주상균 : 블랙홀이 오랜 시간 음악을 해 온 이유는 끊임없는 도전,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익히 밝힌 대로 정규 10집 발표 전까지 꾸준히 달려 나갈 계획이다. 그래서 미래 이야기를 하게 됐다. 지금까지 우리 주위의 이야기를 노래했다면, 이제는 더 진취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Hope> 앨범의 'Universe'가 분기점이다. 그 노래를 끝으로 우리는 지구를 벗어난 거다. 고민이 많았다.

 

기존 블랙홀의 음반에 비해 신작은 굉장히 신선하다. 'AI'에는 신시사이저를 추가했고, 드럼 사운드도 달랐다.

 

주상균 : 소리에 대한 고민을 했다. 2010년대 들어 각국 메탈 밴드들의 음악 퀄리티가 상향 평준화됐지만, 그 결과 모두 다 똑같아졌다. 특색이 사라졌다. EDM과 팝 장르는 다르다. 소리의 질감도 좋은 데다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펀치가 더 확실하다. 음원 하나에 각을 확실히 잡아서 잘 가다듬는 덕이다. 그런 음악을 하고 싶었다. EDM 못지않은 음악.일반적으로 헤비 메탈에서 드럼 샘플을 붙여서 사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샘플을 아예 따로 만들었다. 하이 파이 스피커로 들어도, 작은 이어폰으로 들어도 드럼 소리가 세세하게 다 들린다. 믹싱 기간만 1년이 소요됐다.

 

정병희 : 킥 드럼과 베이스를 붙이는 작업도 심혈을 기울였다. 16비트 멜로딕 스피드 메탈의 리듬과 다른 튀는 소리를 의도했다. 2010년대 이후 헤비 메탈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작법이다. 앨범 제목만 '진화'가 아니라 블랙홀의 음악도 진화한 것이다.

 

'AI'에만 신시사이저가 들어갔다는 사실이 놀랍다.

 

주상균 : 다른 곡들은 스트링 건반이 들어갔다. EDM의 샘플링 작법을 활용한 곡은 'AI' 뿐이다.

 

이원재 : 미래 세계와 <Evolution>이라는 제목이 주는 착시 효과인지, 음반을 들어본 사람들이 '샘플링이 강하다', '신시사이저를 많이 활용했다'는 느낌을 이야기하더라.

 

다양한 시도에도 3분 내외로 곡 길이가 짧아졌고, 헤비니스하지만 기승전결이 확실하다.

 

이원재 : 듣기는 편해도 연주하기는 어려웠다.

 

정병희 : 원래는 합주를 먼저 했다. 이번에는 다 따로 했다. 기타는 기타, 드럼은 드럼, 베이스는 베이스. 끝날 때까지 무슨 곡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주상균 : 하루에 몇 곡을 녹음하는 게 아니라, 한 곡의 몇 파트만 녹음할 수 있을 정도로 소리에 공을 들였다. 베이스를 예로 들겠다. 여러 소리 이펙트를 없애고 오직 베이스 앰프 소리만 가지고 녹음을 했는데, 한 음 한 음 어긋나지 않게 정확한 연주와 편집이 요구됐다.

 

이원재 : 예전 방식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그 부분만 다시 하면 됐다. <Evolution>의 작업 과정에선 각 마디마다 밸런스를 새로 잡아야 했다.

 

주상균 : 느린 패턴의 곡에서 특히 베이스 연주가 어려웠다. 정말 있는 힘껏 치지 않으면 베이스 드럼과 소리가 어우러지지 않았다.

 

정병희 : <Rage>도 굉장히 힘들게 만든 앨범인데, 그보다 더 공을 들였다. 'Dimension', 'Utopia' 같은 곡에서 베이스 소리는 드럼과 하나 되어 거의 들리지 않는다.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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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기타)

 

 

앞서 언급한 주제, '미래를 향한 발걸음'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주상균 : 미래 세계 인간의 모습은 어떨까,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를 고민했다. <Evolution>은 유토피아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은 실수도 많았으나 항상 늘 발전해왔고, 여러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할 것이라 믿는다. 'Dimension'은 그 유토피아를 그린 곡이다. 다중우주와 다차원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기가 오면, 인간은 물질적 가치에서 벗어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봤다.

 

보통 미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관적인 경우가 많은데. '기계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등.

 

주상균 : 내가 일본에 살았다면 디스토피아 서사를 썼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긍정적 생각을 하지 못한다. 청년 시절엔 한국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봤다. 식민의 잔재, 독재 정권, 부정부패가 판치는 사회에서 소심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항상 사람들이 좋은 뜻을 모아 그 구습을 깨트려왔다.

 

유토피아의 결론을 확실히 내린 것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범국민운동 이후였다. 시민의 힘으로 평화롭게 정권을 교체한 대사건 아닌가. '촛불 혁명'의 진행 과정을 보고 'Log-in'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인공지능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엔 그 역시 극복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내일을 노래하는 것만은 아니다.

 

주상균 :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Ur fire'd' 같은 노래가 대표적이다. 분명 누군가는 기술을 독점하려 들 테고 권력을 움켜쥐고자 할 것이다. 'Ur fire'd'는 앞서 언급한 공동체가 그런 악인을 '해고'하는 곡이다. 'Rain'은 미래 세계 사람들이 내리는 비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하며 만들었다.

 

앨범은 게임 세계를 다루는 'Item', 소셜 미디어 유명인을 노래하는 'M.follower' 등 디지털 시대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준비하는데 어렵진 않았나.

 

주상균 : 'Item' 속 '헤르메스의 시미터'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나는 스타크래프트 세대였는데 요즘은 '롤' 세대더라.이원재 : 게임을 안 하는 내 입장에선 참… (웃음) 가사가 안 들어왔다. 구글에 다 찾아봤다.정병희 : 코러스 넣을 때도 어색할 때가 많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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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희 (베이스)

 

 

얼마 전 이세돌 9단이 은퇴 결심의 이유로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의 대국 패배를 꼽았다. 사회 여러 부분에서 문명과 인간의 과도기적 적응이 이뤄지고 있다.

 

주상균 : 아직 과도기도 오지 않았다. 도입기, 생성기에 불과하다. 'Lovbot'처럼 사람과 동일한 로봇이 출시될 때가 되어야 과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직접 부딪쳐 보고 해결책을 만들어내야 과도기 아닌가.

 

이원재 : 뭐든 변해 봐야 안다. 변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변화를 파악할 수 없다.

 

주상균 : 처음 CD가 출시됐을 때가 기억난다. LP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는 '대체 저 작은 걸로 어떻게 음악을 듣냐'며 비관적이었다.

 

이제는 CD도 과거의 유산이 되어가는 모습이다.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음악 감상의 창구로 자리를 잡았는데, 블랙홀이 바라보는 음반 시장의 미래는 어떤가.

 

이원재 : 요즘 젊은 친구들은 오히려 앨범을 잘 사지 않나? 우리처럼 P2P 서비스로 음악을 아예 공짜 불법 다운로드하던 세대는 '음악을 돈 주고 산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주상균 : 최근 음반 소비가 늘어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것이 '시장'이 될 정도라고 보진 않는다. 2~30년 후가 되면, 뭐랄까… 음악으로 돈을 벌 순 없을 것이다. 지금만 해도 음악을 너무 쉽게 접할 수 있지 않나. 단가만 보면 가치가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이원재 : 라이브 무대, 공연에 대한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한다. 뮤지션들은 양질의 무대를 제공하고, 팬들은 티켓을 구매해 아티스트에게 더 좋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모범 모델이라고 본다.

 

실제로 블랙홀 30주년의 힘도 꾸준한 공연에 있다.

 

이원재 : 타 팀들에 비해 우리는 단독 공연 위주로 무대를 꾸리는데, 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진전성을 느끼는 것 같다. 여러 팀과 함께 합동 공연을 만들면 오히려 팬들이 많이 오지 않는다. 이벤트성으로 생각한다.

 

주상균 : 우리에게 공연이라 함은 단독 공연을 뜻한다.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걸고, 블랙홀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70~80년대 전성기를 누린 헤비 메탈 밴드들은 2019년 지금까지도 활발히 무대를 이어가며 전성기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한다. 결례가 되는 질문일 수도 있으나, 체력적으로 한계가 느껴지진 않나.

 

주상균 : 민감해진 부분은 있다.정병희 : 연주는 힘들지 않다. 다만 나이는 못 속인다. 오래 서 있으면 허리가 아프다. (웃음)

 

이원재 : 사실 일이 많으면 몸도 더 건강해진다. 계속 연습하고 무대를 해야 하니까.

 

주상균 : 외국 뮤지션들은 하루 종일 연습한다.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우리나라 뮤지션보다 2~3배는 더 노력한다. 쉴 틈 없이 기타를 치고 쉴 새 없이 노래를 한다. EMI 소속 시절 스콜피온즈의 마이클 솅커를 본 적 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연습하고, 대기실에서도 연습한다. 한 번은 어떤 기자가 인터뷰에서 '하루에 연습은 얼마나 하는가?'라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마이클 솅커가 이렇게 답했다. '연습을 시간 정해놓고 하나?'.

 

정병희 : 일단 음악을 잘하면 된다. 나이에 관계없이. 오늘도 인터뷰하기 전 30주년 공연을 위해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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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에 대한 의식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한국에서 음악을, 특히 헤비 메탈 음악을 30년 동안 해왔다는 사실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정병희 : <Evolution>발매 후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하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 '정말 대단한가?' 싶긴 했다.

 

이원재 :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나 보다, 싶었다. (웃음)주상균 :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똑같을 것이다. 음악하고, 연습하고, 공연하고…

 

블랙홀이 정규 앨범 9집 <Evolution>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주상균 :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매사 최선을 다하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그게 천국 아닐까?

 

끝으로 12월 14일 블랙홀의 30주년 기념 공연이 서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개최된다. 지난 30년간 블랙홀을 지지해온 팬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정병희 : 가끔 이 긴 여정의 끝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함께 같이 가자. 몸 건강히, 술 좀 줄이시고. (웃음)이원재 : 팬 분들이 없으면 계속 음악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팬들도 있고, 젊은 신세대 팬들도 있다. 음악을 오래 할수록 팬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끼고 있다.

 

주상균 : 과거에는 팬들의 자랑이 블랙홀이었다. 지금은 블랙홀의 자랑이 팬들이다. 주다스 프리스트를 만났을 때도 자랑한 건 우리 팬들이었다. '블랙홀에겐 이런 팬들이 있다!'

 

 

 

 

 

 


 

 

블랙홀 (Black Hole) - Evolution블랙홀 노래 | Universal
미래의 변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혹은 근미래에 펼쳐질 수 있는 물질문화의 급격한 변동과 그에 따른 인간의 삶의 형태와 가치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상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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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신애라 “딸아이와 쓴 그림책,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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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신애라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1년째 같은 사진이다. 첫째 딸 예은이가 12월 15일에 써준 편지. 14년 전 이날은 예은이가 복지원에서 지금의 가정으로 온 특별한 날이다. “나는 내가 우리집에 와서 너무너무 좋아”로 시작되는 빼곡한 글. 신애라는 이 편지를 읽고 펑펑 울었다. 매년 엄마의 생일에 편지를 써준 딸이었지만, 12월 15일에 받은 편지는 처음이었다. 너무 기뻐서 액자까지 만들어 놓은 ‘예은 엄마’ 신애라. 두 모녀가 주고 받은 편지는 『내가 우리 집에 온 날』 이라는 그림책으로 재탄생했다.

 

5년간의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작년에 귀국한 신애라와 아이들. 신애라는 ‘중앙입양원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유튜브 <신애라이프>로 팬들을 만나며, 곧 방송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차예은, 김물길 작가와 함께 만든 『내가 우리 집에 온 날』 은 책을 통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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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소장하고 싶은 책

 

1년 전 예은 양에게 받은 편지를 TV에서 공개했어요. 사연을 본 편집자 분이 책을 제안하셨다고요.


연락을 받고 너무 반가웠어요. 입양의 좋은 점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구나 싶었죠. 입양 가족이나 입양 아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책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어요.

 

예은 양도 책 작업을 반가워 했나요?


그럼요.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평소에도 두 딸에게 편지를 많이 받았다고요.


제 생일마다 선물보다는 긴 편지를 써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편지를 많이 받아봤지만, 12월 15일에 받은 건 처음이었어요. 그동안 저는 예은이의 생일만 생각했지, 예은이가 집에 처음 온 날은 특별히 의식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은이가 앨범에서 날짜를 찾아서 저한테 편지를 써줬으니 너무 뭉클하고 행복했죠. 하도 자랑을 해서 가족이나 친구들은 이 편지를 다 알아요. (웃음)

 

동생은 언니와 엄마가 책을 내니까 부러워하지는 않던가요?


신경은 안 쓰는데, 슬쩍 “나도 편지나 쓸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웃음)

 

김물길 작가님이 그림을 그리셨어요. 신애라 씨가 적극 추천하셨다고 들었어요.


작년까지 제가 미국에 있었잖아요. 미국에서는 운전할 시간이 많으니까 차안에서 <세바시> 프로그램을 자주 들었어요. 운전을 하니까 화면은 못 보고 소리만 들었는데, 김물길 작가님이 나온 편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세계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마인드가 너무 좋은 거예요. 일부러 집에 가서 영상으로도 찾아봤죠. 그림도 참 멋지더라고요. 당시 출판사에서 여러 그림 작가 분들을 추천해주셨던 때라 김물길 작가님의 작품도 한번 보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 드렸어요.

 

『아트로드, 한국을 담다』의 저자이시기도 해요.


맞아요. 김물길 작가님이 1년간 활동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팬층이 두터워지셨어요. 인기도 많으시고요. 함께 작업해서 정말 좋았어요.

 

두 모녀의 편지를 읽고 김물길 작가님이 그림을 그려 주셨을 텐데요. 저자로서 요청한 부분이 있었나요?


부탁 드린 건 딱 하나였어요. 편지에 꼭 맞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어요. 왜냐면 저희가 쓴 편지는 서점에서 한 번 읽으면 그만이잖아요. 하지만 그림은 여러 번 봐도 좋으니까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선물하고 싶고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했어요. 그림이 주가 되고 편지는 부수적인 것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노을을 정말 좋아해서요. 자연과 어우러지는 그림이 돼도 좋고, 하늘, 구름, 사람들의 즐거운 표정, 눈물 짓고 미소 짓는 모습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표지 그림도 참 따뜻해요.


저도 참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노을이 안아주는 것 같기도,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림책 마지막 쪽을 보면 저희가 여행가서 찍은 사진을 그려주신 그림이 있어요. 뭉클하면서도 기뻤어요.

 

꼭 부모와 자녀, 입양 가족이 아니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읽는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육체적으로 태어나든, 입양을 하든 누구나 집에 간 날이 있을 거예요. 나의 자녀가 집에 처음 온 날을 기억해도 좋고, 성인이 돼서 어릴 적을 추억해도 좋아요. 더불어 이 당연한 일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아이들이 대한민국에 수만 명이 있다는 걸 아시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든 최소한의 보호를 받고 자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있잖아요. 그 아이들을 누가 돌보고 있지? 누가 돌봐야 하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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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은 '축하' 받을 일이다

 

첫째 아들 차정민 군을 낳고, 2005년에 예은 양을, 2년 뒤에 예진 양을 입양하셨어요. “입양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족의 한 형태”이고,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 축하 받을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여전히 입양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지고요.


저도 결정하기까지는 굉장히 어려웠어요. 예전부터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막상 결심할 때는 밤새 고민했거든요. 그런데 그야말로 기우였어요. 저처럼 신생아를 입양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아요. 다만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공개하느냐, 어떻게 말하는지가 어렵죠. 하지만 저는 딸아이를 신생아 때부터 키웠잖아요.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을.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문제는 부모가 입양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예요. 부모가 입양을 영화 같은 일로 생각하면 아이도 실제 그렇게 생각해요. 평범한 일로 생각하면 아이도 똑같이 생각하고요. 저는 뭐든지 노출했어요. “네 몸에 점이 있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널 낳아준 엄마는”이라고 말하면 아무 문제 없어요. 아이들도 크면서 궁금한 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요. 신생아 입양은 이것만 잘 지키면 그저 축복이에요. 전 첫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 입덧이 정말 심했어요. 그런데 입덧 없이 이렇게 예쁜 두 딸을 만났어요. 얼마나 기뻐요.

 

연장아 입양은 신생아 입양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그렇죠. 조금 큰 아이를 입양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도 너무 존경스러워요. 그런데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큰 아이나 아픈 아이를 입양하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일부러 아픈 아이를 가정으로 데리고 오는 가족도 많고요. 큰 아이를 입양하면, 그 아이가 집에 오기까지의 인생을 바라봐 줘야 하는 일이거든요. 물론 저도 우리 딸들에게 “너희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고 이야기해요. 아이를 낳아준 엄마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지키고 낳았으니까요. 이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고요. 하지만 친모와 결별한 기억이 있는 아이는 뇌와 몸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거든요.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고요. 그래서 되도록 어릴 때 입양이 되면 좋죠. 극복할 수 있는 시기가 당겨지니까요. 입양 사실을 인지하면서부터 사랑을 받으니까요.

 

국내 입양법이 까다로워서 입양을 원해도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굉장히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입양특례법이 너무 어려워요. 미국에서 친해진 한 후배는 지난해 여름에 아이를 입양했어요. 입양특례법 때문에 절차가 너무 많은 거예요. 아기 사진만 계속 받고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었어요. 정말 안타깝더라고요.

 

기간이 얼마나 걸렸나요?


1년이 넘었죠. 아이에게 그 1년은 얼마나 중요한 시기예요. 위탁가정에 1년간 있었는데, 그 가정도 아이에게 정이 들어 힘들고, 아이도 힘들고요. 제가 미국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는데요. 미국은 위탁가정 리스트와 입양가정 리스트가 완비돼 있고, 입양해야 할 아동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매칭해요. 미국에 있어보니 좋은 케이스를 참 많이 봤어요. 인스타그램으로 친구가 된 분이 있는데, 부모가 텍사스에 살고 이미 아이가 4명이 있는데 한국 아이를 막내로 입양했어요. 아이가 미국 생활을 잘 적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인교회에 나오시더라고요. 노력하는 분이 정말 많으세요. 그런데 입양이라는 타이틀로 너무나 자극적으로 보도되는 기사가 많아요. 많이 안타까워요.

 

입양이 되려면 연고가 확실해야죠?


그렇죠. 지금 가장 속상한 건, 아기들이 베이비박스 같은데 버려지면 부모의 연고가 없잖아요. 그러면 입양 가기가 쉽지 않아요. 시설로 가야 해요. 왜냐면 부모가 언제 찾아올 지 모르니까요. 부모의 포기 각서가 없으면 어려워요. 위탁가정 희망자가 신생아를 희망한다면, 신생아를 그 가정에 보내고 최소 3년간 친부모로부터 연락이 없으면 그 아이를 입양 아동으로 바꾸면 좋겠어요. 법은 있다고 하는데, 왜 실행이 잘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위탁가정 희망자가 적지 않나요?


진짜 적어요. 그런데 제가 유튜브를 보니까 많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일부러 제 유튜브 채널 <신애라이프>에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Precious Children’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거든요. 최근에 고아권익연대를 만들어 활동하는 분의 인터뷰도 읽었는데, 기사 댓글을 보니까 관심이 있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그런 분들을 모아 교육 프로그램을 잘 만들면, 위탁가정을 희망하는 분들이 많이 늘지 않을까 싶어요.

 

작년에 ‘중앙입양원 홍보대사’로 임명돼 활동하고 계시죠?


입양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께 정확한 정보를 드리고 싶어요. 편견도 많이 사라졌으면 하고요. 일단 저는 미혼모들이 아기를 키울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어렵다면 신생아들은 되도록 빨리 입양 가정, 또는 장기 위탁가정에 보낼 수 있도록 하고요. 입양이 어려운 아이들의 경우 시설 밖으로 퇴소했을 때 자립할 수 있도록 정교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보육사들이 너무 힘들거든요. 집에서도 한 아이를 돌보기 힘든데, 여러 명의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워요. 보육사들을 전문적으로 상담해주는 프로그램도 꼭 필요해요. 사실 국가가 미혼모를 잘 지원하고 입양 가정을 잘 찾아준다면, 시설은 필요가 없을 거예요. 첫 번째 단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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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모습이든 엄마는 너를 사랑해

 

작년에 한국으로 돌아오셨어요. 미국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좀더 늦기 전에 영어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제 평생 로망이 외국 생활을 해보는 일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너무 좋아요. 우선 말이 통해서. (웃음)

 

미국에서 기독교상담학을 공부하신 거죠?


기독교상담학으로 석사를 받았고 가정사역을 공부했어요.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제가 다닌 학교는 영어보다 한국어 수업이 많아서 영어가 늘진 않더라고요.

 

세 아이들은 적응을 잘했나요?


저랑 막내딸은 너무 좋았고요. 이번 책을 같이 쓴 큰딸은 친구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라 미국에 갈 때 많이 울었어요. 친구들이랑 헤어진다고요. 딸들이 미국에서 다닌 학교는 스마트폰을 못 갖고 다녀요. 그래서 또 울고. (웃음) 큰아들은 작년에 군대 때문에 들어왔어요. 신검을 받아야 해서요.

 

아이들이 한국에 와서 차인표 씨가 가장 좋아했겠어요.


너무 좋아하죠. (웃음) 저희들이 미국에 있는 5년 반 동안 남편이 미국을 28번 왔어요. 한 번 왔을 때 오래 있다가 가면 좋은데, 어머님이 혼자 계시니까 걱정이 되어서요. 한국에 있을 때는 저희들을 걱정하고, 미국에 있을 때는 한국에 계신 어머님을 걱정하고 그랬죠. 남편이 올 때마다 시차 때문에 많이 힘들어해서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이제는 저희가 완전히 왔으니까 너무 좋죠.

 

유튜브 <신애라이프>로 팬들을 만나고 있어요.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저는 배우니까요. 오랫동안 연기를 하고 싶은데요. 제가 진짜 해야 하는 일은 입양과 위탁가정을 늘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림책도 낸 거고요. 유튜브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원래 SNS를 아예 안 했는데, 이제는 필요하겠더라고요. SNS로 인해서 굉장히 안 좋은 일도 생기지만 반대로 역이용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유튜브는 TV와 달리 저에게 관심이 있는 분들이 찾아서 보는 매체이기 때문에 입양, 위탁가정, 신앙 같은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턱대고 입양을 설명하는 것보다 저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함께 소통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려고 해요.

 

요리도 굉장히 잘하시더라고요.


좋아해요. 하지만 어떤 메뉴든 초간단 레시피예요. 제가 복잡한 걸 싫어해서요. (웃음) 간단하게 뚝딱 완성할 수 있는 요리를 주로 해요. 어묵탕, 된장찌개, 멸치볶음 같은 영상을 올렸어요.

 

세 아이가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준 엄마였을 것 같아요.


진짜 많이 읽어줬어요. 하루에 몇십 권을 읽어준 날도 있었고요. 그림책은 텍스트가 적으니까 여러 번 읽어주는 편이었고요. 얼마 전에 제가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신애라이프>라는 채널인데, 책을 읽어주는 코너를 만들었어요. 저작권이 있으니까 많은 책을 읽어 드리진 못하지만, 허락을 받은 좋은 책은 많이 소개하고 싶어요. 어릴 때 아이들이랑 책을 읽었던 시간이 너무 귀했어요. 얼마 전에 어머님 댁에 갔는데 김려령 작가님이 쓴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가 있더라고요. 입양에 관한 책인지 모르고 아이들에게 읽어줬는데, 좋아하더라고요. 남편한테 “우리가 이 책을 언제 샀냐?”고 물어보니까 “입양에 관한 책이라 샀었다”고. (웃음) 이렇게 우연히 다시 발견하는 책도 있어요.

 

신애라 씨를 떠올리면 항상 웃는 얼굴이 생각나요. 아이들을 키울 때도 화를 잘 안 내는 부모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니에요. 저도 화내요. 화를 보여줘요. 그런데 이성적으로 보여줘요. 말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이들에게도 “화내지 마”라고 말하지 않아요. 화는 감정이니까요. 화는 누구나 다 낼 수 있지만 어떻게 내느냐가 중요해요. 어떻게 마무리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아이들에게도 알려주죠. 어떨 땐 “엄마가 너를 한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진짜 화가 났어. 그래서 엄마한테 지금 시간이 필요해”라고 말하기도 해요. 도저히 안 될 때는 미친듯이 화내기도 하고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바로 물어보죠. “엄마가 이렇게 화 내니까 너희 기분이 어때? 너네 둘이 이렇게 싸우는 거야. 그럼 엄마 기분이 어떻겠어?”라고요. 다만 화를 냈다고 문을 쾅 닫거나 하는 행동은 안 좋은 방법이니까요. 얼마든지 말로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하죠.

 

결국 부모와 자녀 간에도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육아의 가장 중요한 팁이라면 일관성이라고 생각해요. 일관성이 있으면 괜찮아요. 일관성 있게 무섭든지, 좋든지, 민주적이든지. 가장 안 좋은 건, 일관성이 없는 거예요. 어떨 땐 봐주고 어떨 땐 안 봐주고. 그게 가장 큰 문제에요.

 

아이들의 사춘기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그냥 받아주려고 했어요. 그분이 오신 거기 때문에 싸우거나 혼낼 필요가 없어요. 사춘기는 왔다 가는 거거든요. 사춘기에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서로의 관계를 좋게 하는 거예요. 사춘기 때는 아무리 아이에게 옳은 소리를 해도 안 들리거든요. 오로지 바깥에서 만나는 친구들, 자기가 좋아하는 유튜버 이런 사람들만이 영향을 끼치죠. 그럴 땐 아이들을 믿어줘야 해요. 부모들의 가장 큰 문제가 어릴 때는 다 받아주고 커서는 엄격 모드로 바뀌는 거거든요. 반대로 어릴 때는 엄격하게 습관을 잘 키워주고 아이가 크면 신뢰해줘야 해요. 가끔 속아 주기도 하고요. 그러면 아이가 나쁜 길로 가려다가도 자기를 믿어주는 부모를 생각해요. 너무 감사한 건 저희 아이들은 사춘기를 약하게 보냈거든요. 어쩌면 미국에 있을 때, 딸들이 힘든 시기였을지도 모르는데 잘 이겨냈어요. 물론 저도 이론과 달리 잘 안 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알면서 조심하는 것과 모르고 지나가는 건 큰 차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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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준은 좀 편해요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일까요?


아이가 낙담하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낄 때, 어떤 모습이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아이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말이고 수용의 말이니까요. 100점을 맞아오면 엄마 딸이고, 50점을 맞아오면 엄마 딸이 아닌 게 아니잖아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상황에 있든 너는 엄마의 귀한 자녀”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해요. “엄마는 그냥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런 수용의 메시지를 보내주는 일이 꼭 필요해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잘한 건, 제가 선택해서 한 건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기로 한 거고요. 그리고 우리 두 딸을 입양한 거예요. 저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세상을 마지막으로 사는 날, 누군가 제게 묻는다면 입양한 두 딸과 내가 낳은 아들. 그것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제 삶에 가장 중요한 일이고요.

 

1989년에 데뷔하셨어요. 30년 넘게 활동하면서 연예계를 바라보셨을 텐데요. 후배나 배우 지망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일단 자기가 기쁘게 즐겁게 잘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잘하는 일이지만 내가 기쁘지 않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예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이니까 남들의 말이나 이목을 무시할 순 없어요.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너무 끌려 다녀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준은 좀 편해요. 사람들이 칭찬해도 제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않으면 그건 제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요. 사람들이 욕해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일이면 신경을 끌 수 있는 일이에요.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주위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서로서로 힘들 때 위로해주는 관계가 더 중요하니까요.

 

최근 연예계에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았어요.


너무 속상했어요. 연예인 선배로서 이렇게만 있으면 안 되는데 싶고, 그렇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우선 기획사들이 어느 정도 소속 연예인들의 마음 상태를 잘 들여다봤으면 좋겠어요.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신호를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심리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는 일이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일이 돼야 하고요.

 

배우가 아닌 자연인 신애라 씨의 꿈도 궁금해요.


연기를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쉬는 타임이 생기면 자연이 좋은 시골 같은 곳에서 일주일씩 살아보고 싶어요. 저는 걷는 걸 되게 좋아해요. 걸어서 여행하다가 그 지역의 음식도 먹어 보고, 그렇게 살면 좋겠어요. 누구나 꿈꾸는 일이죠? (웃음)


 

 

내가 우리 집에 온 날차예은, 신애라 글/김물길 그림 | 위즈덤하우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셀럽의 이야기 또는 입양으로 만난 특별한 사람들만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아닙니다. 평범한 엄마와 딸,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관계를 아름답게 표현한 그림책입니다. 특히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열린 사고를 키우며 삶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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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정세랑, 패자부활전에서 살아남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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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세랑이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출간하자 독자들은 “인세를 받으세요”라고 응답했다. 실제 트위터에서 이 태그를 검색해보면 정세랑의 신간을 샀다는 인증샷이 주르륵 뜬다. ‘정세랑 봇’을 운영하는 독자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이벤트다. SF 전문 출판사 ‘아작’에서 나온 82권의 소설 중, 예약 판매에서 2쇄를 찍은 책은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처음이다. 정세랑의 소설이라면 믿고 읽는 든든한 독자 뒷배 덕이다. 2020년, 정세랑처럼 특별하게 사랑받고 있는 작가가 있을까? 정세랑은 2019년 창간한 ‘작가 덕질 아카이빙’ 매거진 『글리프』 1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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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아껴두었던 이야기들

 

인터뷰하러 오는데 긴장이 되더군요. 팬덤을 갖고 계셔서 허투루 질문하면 팬들의 원성을 듣게 될까 봐요.(웃음)

 

인터뷰를 많이 한 작가에 속할 거예요. 여기저기에서 말을 많이 했죠.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주세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애정을 드러내는 일은 아름답죠.

 

신간이 나오면 책을 한 권만 사지 않고 두세 권 사서 주변에 선물하는 독자분들이 계세요.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부담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올해 또 두 권 정도가 나올 예정이라.(웃음)

 

“정세랑 작가는 성실해서 좋다. 계속 써서 좋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데뷔작도 아직 책으로 안 묶었고, 책으로 나오지 않은 소설이 두 권 량 정도 있어요. 제가 소설을 많이 쓰긴 했네요.

 

SF 소설만 묶은 책은 처음이에요. SF 전문 출판사에서 내고 싶으셨다고요.

 

장르 문학과 문단 문학을 오가면서 활동하다 보니 단편집을 묶을 때, 혼재된 형태가 되기 쉬운 것 같아요. 제 소설을 읽어주시는 분들도 취향이 균일하지 않으시고요. 스스로 생각할 때 판타지 작가인 것 같지만 종종 SF를 썼기 때문에 한 권의 책으로 따로 묶어서 혼란스러움 없이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특별히 아끼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고요.

 

‘작가의 말’에 각각의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을 자세하게 쓰셨어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요.

 

처음부터 작품만 딱 보여드렸으면 몰라도 늘 친밀히 교류해왔으니 편하게 편지 쓰듯이 쓰는 편이에요. 제일 궁금해하시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수록작을 보면 2010년에 웹진 <거울>에 발표한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부터 시작해 2019년 웹진 <크로스로드>에 게재된 「리셋」까지 8년간 쓴 SF 단편들이에요.

 

소설을 쭉 모아보니까 약간은 들쭉날쭉한 이야기로 읽히더라고요. 2019년에 이 책을 준비했기 때문에 2019년의 시점으로 고치게 됐지만, 세계관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편편히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죠.

 

판타지와 SF를 쓰지만 또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도 씁니다. 평범한 인물이 가진 사소한 초능력으로부터 출발하는 작품도 많고요.

 

일단 저는 디테일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써도 디테일이 있으면 진짜 사람으로 느껴지거든요. 한 사람의 습관, 표정, 말투, 취향 같은 것들로 질감을 만드는 작업이 흥미로워요. 사실 크게 쭉쭉 치고 나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제 성향 자체가 자잘한 것에 큰 애정을 쏟는 쪽이라 잘 안 되는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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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목소리를 드릴게요』는 2010년 출판 편집자로 일할 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특별판을 만들다 ‘한국에 수용소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다가’ 출발한 소설입니다. 친구들의 이름을 잔뜩 넣은 작품이라서 이 책이 출간되길 기다린 친구가 많다고요.

 

평소에도 친구들 이름을 작품에 많이 써요. 물론 허락을 구하고요. 이제는 더 이상 쓸 이름이 없어서 독자분의 이름을 많이 빌려 쓰고 있죠.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수용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갇혀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쓴 소설이에요.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 사회에도 교묘하게 민주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잖아요? 너무나 교묘해서 깨닫기 어려운 부분들을 말하고 싶었어요. 기본적으로는 한국식으로 색다르게 수용소 이야기를 해보는 게 목표였고요.

 

저는 굉장히 따뜻한 소설로 읽었어요. 재미도 있었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특성, 혹은 능력이 현실화된다면 우리는 어떤 능력을 선택해야 할까? 작가님에게도 묻고 싶었어요.

 

잔인해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 제가 안검하수 수술을 했거든요. 한쪽 눈에 염증이 계속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요. 홑꺼풀로 살고 싶었지만요. 수술을 하고 나니 안검하수 수술 때문에 놀림을 받았던 연예인, 정치인들이 생각났어요. 어디까지나 의료 수술인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을까요? 각자의 사정은 자신만이 알 수 있잖아요. 노출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특히 더 가혹한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타인의 사정을 모를 때, 넘겨짚지 말고 잔인하게 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필요한 능력이 있다면요?

 

정확히 인용되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끔 소설도 앞부분만 인용되면 맥락이 완전히 바뀔 때가 있거든요. 오타가 있는데 그대로 퍼져나가는 경우도 있고, 인터뷰를 했는데 너무 자극적인 제목으로 나갈 때도 있어요. 사실 어느 정도는 포기했지만, 만약 초능력이 있다면 잦은 오해를 좀 피하고 싶어요. 말하고 글 쓰는 여자들은 평생 오해 받다가 죽는 게 아닐까 낙담한 적도 있는데요. 선택할 수 있다면 잘 인용되고 오해받지 않는 능력? 정말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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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에 뿌리를 둔 소설가

 

작년에는 개정판을 두 권 내셨어요. 『지구에서 한아뿐』 , 『덧니가 보고 싶어』 . 개정판인데도 각각 10쇄, 쇄를 찍었어요. 이 또한 흔치 않은 일 같아요.

 

저도 놀랐어요. 『덧니가 보고 싶어』 가 제 첫 책인데 당시에는 1쇄도 안 나갔거든요. 개정판으로 내보자는 제안을 받고 원고를 많이 고쳤어요. 사실 른 책들도 나온 지 5년이 지나면 고치고 싶은 데가 보여요. 제가 많이 변해 있거든요. 소설이 낡는 속도는 세계가 나아가는 속도와 일치하는 것 같고요.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한 번 더 이 이야기를 통과하며 정교하지 못했던 부분을 깎아낼 수 있어 서 기뻤어요.

 

『덧니가 보고 싶어』 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재화 씨, 재화 씨는 왜 장르를 써? 얼른 재등단해. 쉽잖아. 적절한 주제에 대해 모나지 않게 쓰면 돼.”(19쪽)실제 작가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데뷔 전, 최종심에 오를 때마다 “재미있고 발랄하지만 장르적 요소가 있다”, “장르 작가인 것 같다”는 평을 받았고요.

 

덕분에 제 길이 정해졌다고 생각해요.(웃음) 저는 뭘 써도 장르적 요소가 항상 있어요. 예를 들어 『피프티 피플』은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단서들이 스쳐지나가는 방식이 추리소설을 닮았지요. 장르에 뿌리를 둔 것이 작품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당연히 계속 장르 문학을 쓰고 싶고요.

 

가장 기분 좋은 리뷰가 “직장인이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모니터로 읽었다”는 이야기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제가 그런 작가인 것 같아서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문학을 쓰는 사람이요. 더 진지하게 읽어야 할 책들도 있지만, 그냥 일하다가 지쳤을 때 한번 들춰보고 환기할 수 있는 그런 소설도 좋잖아요. 사실 진지한 책은 주말에 읽어야 해요. 출퇴근 시간에 잠깐 읽기는 어렵죠. 그런 이유에서라도 출근길에 잠깐, 퇴근해 잠깐 읽었을 때 피로감을 풀어주는 책을 쓰고 싶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문장론도 궁금해요. 쓰는 과정에서 가독성을 염두에 두는 편인가요?

 

그보다는 사람들이 입말로 쓰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해요. 미문도 좋지만 문장에서 명확한 생각이 드러나면 좋겠어요. 어떤 사고 과정이 잘 드러나는 집약적인 문장을 쓰고 싶어요.

 

글쓰기 수업도 하셨잖아요. 그때는 무엇을 강조하셨나요?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글을 써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사람 내부를 파고 들어가는 이야기는 장편으로 이어지기가 좀 어렵거든요. 장편으로 풀고 싶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 쓰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해요.

 

2016년 가을에 출간된 장편 『피프티 피플』에서는 무려 51명의 이야기를 다뤘어요. 인물을 구성할 때, 유의하는 부분이 있나요?

 

어떤 직업에 관해 잘못 쓰는 것? 한쪽 입장에서만 바라본다거나 편견을 강화하거나 지나치게 객체화하지 않으려고 해요. 실패할 때도 있지만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10년 이상 작품을 쓴 작가들을 보면, 언젠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써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저도 비슷해요. 추리소설이나 완전히 생소한 장르에 도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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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과연 내 욕망인가?

 

넷플릭스의 『보건교사 안은영』드라마 작업은 이제 마치셨나요?

 

시즌1 준비는 끝났어요. 그런데 시즌2에 들어갈 수도 있고 아예 다른 작품을 쓸 수도 있어서요. 『보건교사 안은영』 은 지금 편집이 끝났고 그래픽 작업을 하는 걸로 알아요. 방송은 올해 여름에 할지, 가을에 할지 아직 모르겠어요.

 

드라마 작업을 하신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놀랐어요.

 

드라마를 워낙 좋아해요. 원래는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를 좋아했는데 요즘은 한국 드라마가 너무 재밌는 것 같아요. <동백꽃 필 무렵>, <어쩌다 발견한 하루>도 재밌게 봤고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품을 좋아해요.

 

작년에 창간한 독립 잡지, 작가 덕질 아카이빙 매거진 『글리프』 1호의 주인공입니다. 작가에게는 선물 같은 책이지 않을까 해요.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흥미롭지 않은 코너가 없었고 굉장히 날카롭게 기획하셨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독자층이 이렇게 성숙했다는 걸 체감했고 좋은 성취라고 생각해요.

 

재밌게도 정세랑 작가를 인터뷰하지 않고, 트위터에서 ‘정세랑 봇’을 운영하는 분을 인터뷰했더라고요. 어떻게 보셨어요?

 

저를 인터뷰했다면 뻔한 이야기만 했을 텐데(웃음), 너무 좋은 아이디어였던 것 같아요. ‘정세랑봇’ 운영자 님은 정말이지 다정하고 든든한 존재예요. 너무 큰 애정을 쏟아주셔서,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최대치가 10이라면, 정세랑의 독자들은 5나 6이 아닌 10의 개념으로 작가를 지지하고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는 처음부터 사랑받은 작가가 아니라 점점 지지해주시는 마음을 천천히 흡수하면서 성장한 경우라서요. 패자부활전에서 계속 부활한 작가 같아요. 계속 부활시켜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커요. 제가 받은 마음을 새로이 나타나는 작가들과 나누고, 제가 속한 창작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도 힘쓰면서 20년, 30년 글을 쓰고 싶어요.

 

20대 독자들이 유독 많은 것 같아요.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고요.

 

강연을 하러 가면 교복 입고 온 학생들이 많아요. 행사가 늦게 끝나면 너무 미안해요. 안전하게 귀가해야 하는데. 그런 걱정도 들고요.

 

선배의 마음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자신의 욕망인지 외부로부터 온 욕망인지 구별해봤으면 좋겠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욕망으로 움직이면 결국 후회하게 되니까요. 사회에서 우리가 이걸 원한다고 세뇌하는데, 이게 과연 내 욕망인가? 생각해보면 아닐 때가 많아요. 저도 아직 잘 못 하고 있지만, 함께 이야기하면서 정교해지면 좋겠어요.

 

팟캐스트 <책읽아웃>에 출연해서 우스갯소리로 ‘문체부장관’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잖아요. 만약 작가님의 유명세가 문학계 너머까지 확대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문화와 예술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출판에 대해서만 말씀드려도, 출판산업 자체가 공공재인데 예산이 너무 적어요. 도서관의 책들은 우리가 무료로 읽잖아요. 소비는 공공으로 하면서 생산은 완전히 시장에 맡기는 것 같아요. 작가, 출판사에 대해서도 더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해요.

 

요즘 독자는 오프라인에서 작가들을 많이 만나고 싶어 해요.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쓴 사람과 직접 소통하길 원하고요. 이런 흐름이 작가 입장에서는 장단점이 있을 것 같아요.

 

최근에는 강연을 잘 안 했어요. 시작하기 전에 뭘 못 먹어요. 말하는 일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는 편은 아닌데, 컨디션을 조절해야 해요. 제가 알레르기 비염이 심하거든요. 봄, 가을에는 코가 너무 안 좋아져요. 강연장에서 독자분이 휴지를 주신 적도 있는걸요. 위염, 독감 같은 게 걸릴까도 늘 조심스럽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독자들을 만날 때는 되도록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어요. 특히 강연은 정말 건강을 챙길 수 있을 때 하고 싶고요. 독자들을 만나는 일은 좋은데 말하는 컨디션 유지에 자신이 없는 것 같아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많이 생겨나는 데요. 어떤 마음으로 응원하면 좋을까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면 그 작가가 좀 망해도, 가끔은 잘못 짚어도,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매번 잘 쓰긴 어렵고, 잘하다가 순간 삐끗할 수도 있으니까요. 작가도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헤매면서 찾아가는 거겠지, 느긋하게 지켜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SF, 장르 소설을 아직 낯설게 생각하는 독자들에게도 한 마디 하신다면요.

 

진입로가 될 만한 작가를 꼭 만나시면 좋겠어요. 한두 권 읽고 나서, ‘SF 소설은 나한테 안 맞아’가 아니라, 좋아하는 작가를 찾아서 그 작가의 작품부터 쭉 읽어갔으면 좋겠어요. 한국 작가로 시작해도 좋고 고전으로, 해외 베스트셀러로 시작해도 좋고요. 정확한 진입로만 만나면 읽는 재미가 굉장한 장르니까요.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저 | 아작
만나기 힘든 안식처를 제공한다. 그러니 마음이 무거울 때, 그냥 심심할 때, 짝사랑을 하고 있을 때 등등, 언제고 부담 없이 들러서 쉬어 가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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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트레이더 김동조 “원칙이 있어야 좋은 선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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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실수로 거액을 잃을 수 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위험을 매일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 포지션을 가지고 주식 또는 채권을 거래하거나 시세를 예측하는 트레이더. 오르락내리락하는 차트를 앞에 두고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트레이더의 일은 흡사 전쟁터에 나간 군인과 같다.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을 쓰고 2007년 미국 부동산 시장 붕괴와 경기침체를 전망한 트레이더 김동조는 ‘나는 늘 시장이 두려우면서도 좋았다’고 말한다. 원칙을 세우고 때로는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날카롭게 벼려온 시간과 그로부터 얻은 보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고백이다.

 

어떻게 원칙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승부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원칙을 세웠다면 그 원칙을 고수할 것인지 변경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좋은 원칙은 사수하고 잘못된 원칙은 개선해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또 승부를 해야 한다. 압도적인 승리와 패배는 시간 낭비다. 그러니 승리에 오만하거나 패배에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필생의 승부는 드물고 당신은 원칙을 위한 몇 개의 경기를 이제 막 끝냈을 뿐이다. (87쪽)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트레이더 김동조가 자신의 유료 블로그 ‘김동조닷컴’에 2015년 중순부터 2018년까지 올린 글을 정리해 묶은 책이다. 독자들은 월 11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구독료를 지불하고 김동조의 글을 본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기꺼이 ‘김동조닷컴’의 유료 구독자가 되는 걸까. 시장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부터 정치적 견해, 서평, 일상에서 길어 올린 단상이 담긴 이 책을 읽고 알았다.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트레이더 김동조의 원칙과 사유, 태도를 배우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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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운 이야기는 뺐어요

 

딱딱한 느낌의 사무실에서 정장을 입고 일할 것 같았는데 예상과 달라서 놀랐어요.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웃음) 트위터로 저를 알게 된 분들은 실제로 보고 놀라시더라고요. 트위터에서 분석이나 비평을 많이 하다 보니 까칠한 이미지를 예상하시는 것 같아요.

 

제목도 의외였어요. 트레이더의 마켓 일기라기엔 인문학적이랄까요.


편집자가 권한 제목은 ‘나는 마켓이 두렵지만 좋았다’였어요. 부제가 ‘마켓 일기’인데 제목에 마켓을 또 언급하기는 싫어서 선택하지 않았고요. 제가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게 선택의 문제인데요. 같은 상황이어도 누구는 사고 누구는 팔잖아요. 그래서 ‘같은 달을 보지만 다른 꿈을 꾼다’라는 말이 좋았어요. 한쪽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른 원칙, 다른 결정이 있을 수 있고, 문제는 본인이 그걸 어떻게 납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제목을 골랐는데 편집자는 굉장히 의외였다고 하더라고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블로그 ‘김동조닷컴’에 쓴 글을 모은 책이에요. 어떤 기준으로 글을 골랐나요?


‘시황’이라는 카테고리에 있는 글을 모은 책인데요. ‘시황’은 시장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에 맞는 코멘트를 쓰는 카테고리에요. 현재 시장 상황에 대해 유료 독자들에게 내가 보기엔 이런 거 같고, 이렇게 대응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계속 그런 내용만 쓸 수는 없거든요. 저도 제 멘탈을 추스르기 위해서 이런 포지션이 있는데 꼬인 것 같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써요. 그러는 중에 좋은 일 있으면 공유하기도 하고, 일상의 단상이나 정치적 이벤트에 대한 생각도 쓰고요. 그중에서 핵심만 추려서 책으로 묶었어요. 너무 어려운 이야기, 직설적이거나 특정인이 언급된 내용은 뺐고요. 채우는 것보다 빼는 게 힘들더라고요. 다행히 담당 편집자가 잘 추려줬죠.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일반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기본적으로 트레이더로서 일하면서 어떤 선택을 내릴 때 했던 고민이나 생각이 많이 담겼어요. 경제나 금융시장의 문제가 정치나 사회, 문화적 사안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도 있을 수밖에 없고요. 일기 형식으로 나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원래의 글이 날짜별로 되어 있기도 하고 편집자가 일기 형식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기획 방향뿐만 아니라 구성 등 모든 영역에서 편집자를 믿고 맡겼는데 결과물을 보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앞으로는 무조건 젊은 편집자의 의견을 따라야겠구나 싶었어요.

 

김동조닷컴은 유료 블로그잖아요. 주로 어떤 분들이 구독하나요?


60% 이상은 금융계에 있는 분들이고 10% 정도는 금융계 종사자만큼 알고 싶은 일반인인데 대체로 전문직 종사자들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트레이더나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처럼 금융권에서 일하는 분들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김동조닷컴의 목표거든요. 그래서 내용이 쉽지 않아요. 제가 금융계에 있지 않은 일반 회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산 운용이든 재테크든 내 힘으로 하고 싶다면 공부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바닥 자체가 어려운데 어려운 걸 쉽게 할 수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잖아요. 블로그를 운영한 지 5년 정도 됐는데 이제 일반 회원들의 내공도 상당해요. 질문이 달라졌어요. 가끔 제가 틀리게 쓰거나 오타를 내면 다 잡아주셔서 깜짝 놀라요. 처음에는 비금융권 분들에게는 너무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하면 되더라고요. 

 

어떤 댓글들이 달릴지 궁금하더라고요. 회원분들과의 유대감이 클 것 같아요.


약관에 블로그에 있는 내용을 유출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편하게 써요. 다른 데서 못하는 이야기도 블로그에서는 하죠. 서문에서 지난 3년 넘게 같이 읽어주신 회원들에게 고맙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일부 댓글을 책에서 소개하기도 했는데요. 기본적으로 회원들의 수준이 높아서 댓글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아요. 회원의 1/3 정도는 얼굴도 알아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 사무실에서 북클럽도 하고요.

 

김동조닷컴의 오프라인 모임이군요.


지금까지 세 번 했는데 다들 좋아하시더라고요. 저도 많이 배우고 ‘책 하나를 이렇게 심층적으로 읽는 게 이렇게 좋구나’라고 자주 생각해요. ‘나중에 결과물을 모아서 책으로 내면 어떨까?’ 싶기도 했고요.

 

책은 어떻게 선정하세요?


한 번에 3시간 정도 하니까 그 정도로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 책을 선정해요. 첫 번째 책은 피터 자이한의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였고 두 번째는 박상준의 『불황터널』, 『불황극복』을 같이 했어요. 가장 최근에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도시의 승리』 로 했는데 전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책이라 참여하는 분들의 반응도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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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되게 잘하려면 원칙이 있어야 해요 

 

원칙에 관한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원칙을 굉장히 중시하는 것 같았어요.


트레이더는 매일 터닝 포인트 앞에 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이게 큰 결정일지도 몰라’ 또는 ‘정말 큰 투자일지도 몰라’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요. 실제로 2007~2008년도에 일어난 세계 금융 위기처럼 세상이 뒤집힐만한, 시장이 흔들리는 변화가 있었고요. 트레이딩은 한번 잘하거나 잘못하는 걸로 끝나지 않아요. 야구선수로 치면 오늘 잘해도 내일 또 등판해야 하고 일주일 있다가 또 나가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긴 시즌에서 일관적으로 잘하려면 원칙이 있어야 해요.

 

최근에 추가하거나 수정한 원칙이 있다면요?


매일 새로운 원칙을 만들거나 수정하는데요. 최근에는 충동적으로 포지션에 안 들어가려고 해요. 대체로 어떤 사건이나 지표를 예상하고 들어가거나 나온 다음의 반응을 보고 들어가거든요. 예전에는 반응만 보고 바로 들어갔다면 지금은 반응을 보고 그 반응이 미치는 가격대를 확인한 다음에 기다렸다가 원하는 지점에 왔을 때 들어가려고 해요. 이게 말은 쉬운 데 정말 어렵거든요. 마치 인어들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해 잡아갔다는 어느 신화 속 이야기 같아요. 가격의 흐름을 보고 있으면 홀려요. 지금 들어가면 벌 것 같거든요.

 

고민하고 망설이는 걸 아주 싫어하시더라고요. (웃음)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주인공이 우유부단하면 잘 못 봐요. 주인공이 피도 눈물도 없고,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서 칼같이 끊고 이러면 몰입해서 보고요. 잘 훈련받은 군인 이야기나 영화 ‘본 시리즈’를 보면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서 도망쳐야 할지 싸워야 할지 신속하게 판단하잖아요. 트레이더가 그래야 하거든요. 매 순간 비용 편익을 따지면서 선택해야 해요.

 

그 부분에서 조금 뜨끔했어요. 내 원칙은 뭔지 생각해 보게 됐더라고요.


요즘 더 절절히 느끼는 게 있는데요. 어떤 일을 할까 말까 고민이 되면 일단 해야 한다는 거예요. 많은 분이 공감하신 이야기인데요. 예를 들어 내가 미용사인데 요리를 하고 싶어서 고민이 되면 일단 요리를 해야 해요. ‘요리하면 지금까지 익힌 미용 기술을 썩혀야 하고... 등의 계산을 하게 되는데 일단 해야 ‘역시 나한테는 미용이 맞는구나!’ 또는 내 천직은 요리야’하고 알게 되잖아요. 그런데 고민하는 상태에서 머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하나를 선택했을 때 생기는 문제는 에너지를 써서 풀면 돼요. 그런 에너지를 사용하는 게 인생의 즐거움이고 묘미라고 생각하고요.

 

현재 애인과 헤어지고 다른 애인을 만나기로 결심했다는 건 그로 인해 생기는 많은 문제를 처리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이 문제가 고통과 고난처럼 보이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거야말로 삶이 주는 성취와 즐거움의 본질이기도 하다. 삶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크기와 길로 결정될 뿐이다. (268쪽)

 

이야기를 들을수록 트레이딩이든 인생이든 절제와 판단이 관건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훌륭한 트레이더, 투자자 중에서 방임과 방종으로 돈을 번 사람, 우연히 돈을 번 사람은 없을 거예요. 트레이딩하다 돈을 벌고 있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잖아요. 안 그래요. 회한이 사무쳐요. ‘더 들어갔어야 되는데..’ 하고요. 예를 들어 하루에 3천만 원을 벌면 ‘아 3배를 했으면…’ 하는 자괴감에 빠져요. 반대로 터질 때는 ‘내가 미쳤구나! 왜 이렇게 많이 들어갔을까?’ 아니면 ‘나눠서 살걸’하고요. 

 

자신과의 싸움이네요. (웃음) 모든 트레이더가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거겠죠?


경험을 쌓으면서 자기 스타일을 알게 되죠. 마켓 유저들하고 미국에서 유명한 트레이더들만 인터뷰한 책이 있는데 그 책을 보면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트레이딩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반대로 박사까지 공부해도 못해서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도 있고요. 정말 다양해요. 그래서 트레이더를 일반화하기 어려운데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씩 깊은 자괴감에 빠져 본 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근본적으로 자신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인간은 자기 충동이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트레이딩을 하다 보면 여기서 자유로워지는 게 중요하거든요. 오르면 팔고 떨어지면 사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웃음) 간혹 추세가 길게 나오면 오를 때 사고 내릴 때 팔아야 할 때가 있거든요? 이걸 분간해야 해요. 이게 감각이고 지성인데 기본적으로 본능에 반하는 액션이라 진짜 두려워요. 그렇지만 한 번 하고 나면 ‘아 오늘 내가 정말 아름다운 트레이딩을 했구나’ 싶죠. 이런 경험이 쌓여서 노하우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주식을 한 종목 사서 돈을 벌려면 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시장을 설명하고 포지션을 잡는 건 특별한 애정이 필요하다. 얻어터지면서도 다시 링에 오르는 것과 똑같다. (50쪽)

 

앞으로 많은 직업이 AI로 대체된다고 하잖아요. 트레이더도 그럴까요?


상당히 많은 트레이더가 이미 대체됐고요. 트레이딩에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어서 다를 수 있는데 아마 워런 버핏 같은 스타일은 대체되기 어려울 거예요. 다른 회사들이 들어올 수 없는 경쟁력 있는 회사를 발굴하고 게다가 그 회사가 싸야 하고 그 회사가 싸질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 그 회사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능력과 자본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이런 건 AI가 판단하기가 어렵죠. 그런데 가격의 흐름을 보고 시장의 반응에 대응해서 트레이딩하는 스타일은 대부분 대체될 거고 아주 많은 절제와 인내심, 과감함이 없는 트레이더들은 대체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걸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무수히 생겨날 거예요. 바른 결정을 한다면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건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이건 전혀 상관없는 게 이 시장이 가진 장점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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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폭발적으로 성장할 장르

 

트위터 팔로워 수가 상당해요. 반응도 좋은데 혹시 SNS 중에서 트위터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짧아서요. 블로그 외에 다른 곳에는 긴 글을 못 쓰겠더라고요. 그리고 페이스북에는 댓글이 달리잖아요. 제가 댓글을 무시할 만큼 셀럽이 아니기도 하고 가장 큰 이유는 와이프가 페이스북을 해요. 전략적 협상 끝에 서로의 우주를 분리했어요. 저는 트위터, 와이프는 페이스북으로 (웃음). 서로 들여다보는 건 괜찮은데 댓글 달고 그러지 말자고 했죠. 

 

이번 책을 내면서 직접 출판사를 세웠어요. 이유가 있나요?


저한테 세 가지 목표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투자회사를 잘 운영해서 크게 키우는 거예요. 이건 회사에 투자하신 분들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죠. 두 번째 회사는 리서치 회사에 관한 건데요. 처음에는 취미처럼 생각하고 시작한 건데 예상보다 인원이 많아져서 앞으로 더 잘됐으면 좋겠어요. 세 번째가 출판 사업이에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출판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평소에 책을 많이 읽기도 하고 독자로서 읽고 싶지 않은 수준의 저작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그건 시장에서 판단하는 거지만요. 제가 만든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쭉 보면 상당히 재밌거나 유익하거나 지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들게 하고 싶더라고요.

 

실제로 서평도 많이 올리시잖아요. 어떤 책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한 문장만 봐도 밀도가 있고 내면이 튼튼한 책들을 좋아해요. 그런 책을 만나면 트위터에 엄청나게 홍보해요. 『직업의 지리학』 을 정말 좋게 읽어서 틈날 때마다 소개했더니 출판사에서 고맙다고 연락을 주기도 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이후에 1쇄를 더 찍었더라고요. 제 책을 소개하는 트윗보다 다른 책을 추천하는 트윗에 대한 반응이 훨씬 좋아요.

 

최근에 읽은 좋은 책은 뭔가요?


『바바리안 데이즈』라고 윌리엄 피네건이 쓴 책이요. 표지가 멋있어서 샀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이런 책을 만나면 너무 기뻐서 많이 홍보해요. 『존 치버의 일기』도 좋았고요. 편집자가 일기 형식으로 책을 내자고 할 때 반신반의하면서도 따른 이유 중에 『존 치버의 일기』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의 일기를 몰래 본다는 사실이 굉장한 쾌감이 있더라고요.

 

출판사 이름 지을 떄도 고심했을 것 같아요. ‘아웃사이트’는 어떤 의미인가요?


금융시장에 있다 보니 인사이트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인사이트가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아웃사이트는 밖에 놓인 현상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이에요. 인사이트의 상대어라고 할 수 있죠. 아웃사이트를 가지면 인사이트도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지었어요.

 

요즘은 어떤 책 읽으세요?


한국에 사는 콜롬비아인이 쓴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라는 에세인데요. 솔직해서 좋아요. 한국을 이해하려고 쓴 책은 아니고 스페인어로 문학을 하는 작가가 이방인의 시선으로 본 아주 주관적인 한국의 모습, 편견 없는 상식적인 인간의 모습을 소개한 책이에요. 내가 만약 외국인으로 한국에 살고 있으면 이런 책을 쓰지 않을까 싶었어요.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요?


미리 보기로 보고 문장이 탄탄하면 사요. 표지가 예쁜 책도 사고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당연히 사고요. 한국 문학 작가 중에서는 정세랑 작가를 좋아하는데요. 『피프티 피플』나오기 전부터 ‘이분은 왜 못 뜨지?’ 싶었는데… 지금은 완전 유명해지셨죠. (웃음)

 

또 전망하셨군요. (웃음)


이게 약간 버릇이 된 것 같아요.

 

앞으로 아웃사이트에서 나올 책이 기대되는데요. 어떤 책들이 나올까요?


요즘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를 일부러 많이 봐요. 아웃사이트에서 순수문학을 할 생각은 없거든요. SF나 환상 문학, 스릴러 쪽을 생각하는데요. 만약 제가 투자 회사로 많이 벌면 원고료를 많이 걸고 공모전을 열까 싶기도 해요. SF나 환상 문학 분야의 상상력이 개발되지 않았을 뿐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한류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약간의 시너지만 만들어주면 폭발할 장르라고 생각하고요. 아마 SF나 환상 문학, 스릴러는 이미 많은 사람이 군침을 흘리고 있을 거고 5년 안에 폭발할 거예요. 터지기 전에 숟가락을 놔야 하는데…(웃음)

 

어떤 분들한테 이 책을 권하고 싶으세요?


금융시장에서 일하는 분들이라면 대체로 좋게 읽으시는 것 같아요. 비슷한 경험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분들은 어렵거나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 고민했던 이야기라서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김동조 저 | 아웃사이트(OUTSIGHT)
저자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시장을 보며 썼던 글을 한데 모은 것이다. 어떤 날은 그저 순수한 기쁨이 느껴지고, 어떤 날은 지독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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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원부연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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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떨치기란 쉽지 않다. 무엇을 업으로 삼아야 할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무턱대고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건 아닐지... 고민이 깊어진다. 그런 이들을 향해 『퇴사 말고, 사이드잡』은 조언한다. 현재의 직장을 계속 다니면서 두 번째 밥벌이를 준비하라고. ‘말이야 쉽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말뿐만이 아닌 생생한 경험담을 모았다.

 

원부연 저자는 광고회사에 다니면서 사이드잡으로 술집 ‘아름다운시절’을 운영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원부술집’, ‘모어댄위스키’, ‘보통술집’, ‘신촌살롱’의 문을 열었고, 문화예술 소극장 ‘신촌극장’의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두 권의 책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 『합니다, 독립술집』 (공저)과 블로그, 강의, 칼럼을 통해 자신의 창업기를 공유해 왔다.

 

그리고 자신처럼 두 번째 밥벌이를 찾는 데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서울경제>의 박해욱 기자, ‘스튜디오 봄봄’의 이선용 대표, ‘안전가옥’의 김홍익 대표, ‘와이낫미디어’의 홍일한 이사가 그 주인공이다. 원부연 저자와 네 사람은 ‘퇴사 레시피’라는 이름의 워크샵을 함께 하면서 회사 밖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 이른바 ‘사이드허슬러(Side Hustler)’와 만났다. 사이드잡, 창업, 이직 등 커리어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듣고 속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들이 들려준 솔직한 경험담과 실용적인 가이드가 『퇴사 말고, 사이드잡』 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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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만 있었다면 망했을 거예요


사이드잡을 갖고 있다가 회사를 그만두셨어요. 그때 30대 초반이셨죠. 이른 나이에 퇴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내 브랜드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나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기획한 모임에서 사람들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요. 그런 것들을 모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차에 ‘아름다운시절’을 인수하셨고요.


그렇죠. 그 전에 신촌에서 공간을 알아봤었는데, 당시에는 상권이 좋아서 보증금 권리금 인테리어 비용까지 해서 1억 정도가 필요했어요. 적은 금액이 아니니까 ‘일단 우리처럼 회사를 다니다가 공간을 만든 경험자를 찾아가 보자’고 생각했어요. 지인을 통해서 홍대에서 카페를 운영하시는 분을 찾아갔는데, 삼성에 다니다 그만두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절대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된다고 만류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보증금과 월세와 관리비가 얼마인지, 하루 매출은 최소 얼마여야 하는지, 그만큼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현실적인 숫자들을 이야기해줬어요. 그러니까 편하게 회사를 다니라고요. 그 분을 만나고서 더 고민해 보자는 생각으로 일단 계획을 접었어요. 그러다가 ‘아름다운시절’의 사장님이 귀향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인수를 하게 됐죠.

 

그때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맞아요.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80만 원, 권리금이 2300만 원이었어요. 비용 부담이 적었고, 대학 시절 선배 한 명, 후배 한 명과 같이 인수했어요. 이미 있는 브랜드를 그대로 인수하는 조건이라 좋은 점도 있었고요.

 

수익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게 어려운 일일 수 있는데, 항상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시더라고요. 이번 책에서도 그랬고요.


그걸 안 알려주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데 저는 홍대에서 카페 운영하시는 분을 만났을 때 그런 걸 알려줘서 너무 고마웠거든요. 공간 운영에 대한 로망만 가지고 시작했으면 백프로 망했을 것 같아요.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모르고, 연습도 안 해봤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가게를 시작해 보니까 생각보다 준비 없이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로망만 가지고 있다 보면 간과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죠.


첫 번째로 ‘나만의 공간 = 나만의 예쁜 감옥’이라는 생각을 해야 되고요. 두 번째로 이상과 현실의 매출은 굉장히 다르다는 걸 알아야 돼요. ‘현실적인 매출은 이 정도이고, 그 중에서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매출은 이 정도다,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면 시작해라’라고 말해주고 싶은 거죠. 기본적으로 창업은 찬성해요. 다만 전반적으로 다 알고 창업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 않고 재미로 시작했다가 가게를 정리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분들도 많이 봤거든요.

 

드물지 않은 경우인가 봐요.


되게 많아요. 자영업자는 기본적으로 신용대출이 안 된다고 봐야 되거든요. 2금융권이나 4금융권 같은 데에서 돈을 융통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금방 갚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회사원처럼 정기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오늘 장사가 안 됐는데 내일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모든 매출은 기대수익이거든요. 매출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열심히 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대출을 받아서 쓰고 못 갚아서 이자가 늘어나고... 그런 악순환이 반복돼서 가게를 그만두는 분들도 많아요.

 

고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안감이 훨씬 덜하겠죠. 그래서 사이드잡을 가지라고 조언하시는 걸 테고요.


회사원 같은 경우에는 회사 안의 시간과 밖의 시간이 분리가 되어 있죠. 그런 상태에서 사이드잡을 해볼 수 있고요. 한쪽에서는 월급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재미를 찾는 건데, 지금 시대에는 그 전략이 더 잘 맞지 않나 생각돼요. 안정적 수입원인 월급은 받으면서, 그 외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경험해보면서 그런 시간을 늘려가는 전략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는 직장인이 사이드잡을 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퇴사 레시피’라는 워크샵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이번 책의 토대가 됐어요. 저자님 외에도 네 분의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는데, 이 분들은 직접 섭외하셨어요?


원래는 <중앙일보>의 ‘폴인’에서 스터디를 같이 기획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에디터는 커리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고민을 했어요. 저는 공간을 운영하는 공간기획자인데, 소위 말하는 술집 사장이 무슨 커리어 조언을 할 수 있겠나 싶은 거예요. 그런데 에디터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결국 모든 직장인들이 퇴사 후의 삶을 고민하고 그걸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라고요. 저는 그걸 준비했었고, 사이드잡이 잘 돼서 퇴사를 했고, 퇴사 후에 창직을 했고, 커리어 관련해서 계속 멘토링을 해주고 있으니까, 누구보다 진솔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취지면 해볼 만 하겠다고 생각됐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섭외해 보자고 생각했고요.

 

그 중의 한 명이 <서울경제>의 박해욱 기자님이죠. 무려 8개의 사이드잡을 갖고 계신 분이에요.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웃음). 새로운 걸 구상하고 이야기하는 걸 너무너무 좋아하세요. 아이디어도 많으시고요.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렇게 자신이 마음껏 아이디어를 내고 사람들을 만나서 무언가를 해보는 건, 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있기 때문이라고요. 자신은 현재의 직장을 유지하면서 사이드허슬러로 활동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게 훨씬 더 재밌다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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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박해욱 기자님의 신조가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거라고요. 무리하지 않으면서 직장과 사이드잡을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렇죠. 직장을 다니면서 어디의 대표를 맡기는 힘들잖아요. 내 일을 하려면 대표가 돼야 하고, 대표가 되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그걸 저도 박해욱 기자님한테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박해욱 기자님은 ‘나는 회사를 계속 다녀야 되니까 주인공이나 대표가 될 생각이 없다, 대신 내가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이나 회사가 있으면 조언이나 활동을 해주면 된다’고 세팅을 하신 거예요. 월급이든 자문료든 어떤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고, 지분이라든가 역할을 받는다고 하시는데요. 너무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십분 활용하신 거죠. 인적 네트워크, 인사이트 같은 것들이요. 지금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맞아요. 그것도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박해욱 기자님의 경우에는, 일단 기자라는 직업에서 비롯된 네트워킹이 되게 큰 장점이었겠죠. 그런데 사실은 5, 6년차 때까지 별 생각이 없으셨다고 해요. 구조 조정된 은행원들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두 번째 밥벌이는 내가 준비해야겠구나’ 하고 마음이 바뀌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계기가 됐든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는 은퇴 시기에 더 커질 것 같아요. 내가 무엇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점점 쌓아 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워크샵의 연사로 참여해주신 분들이 더 계시죠?


요즘 스타트업이 대세이다 보니까, CJ ENM과 SK 텔레콤에서 일하다가 스타트업으로 이직하신 홍일한 ‘와이낫미디어’ 이사님의 이야기도 들었고요. 저처럼 안정적인 회사를 다니다가 창업하신, 지금 매거진 <언유주얼>을 만들고 계신 이선용 ‘스튜디오 봄봄’ 대표님도 모셨었고요. 삼성과 카카오에서 일하셨고 현재는 스토리프로덕션 ‘안전가옥’을 운영하고 계시는 김홍익 대표님도 만났어요. 김홍익 대표님의 경우는 처음부터 투자사가 같이 기획해서 ‘안전가옥’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케이스인데요. 직장인 분들이 다양한 스토리를 직접 듣고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됐어요.

 

네 분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들이 있었나요?


가장 큰 두 가지 공통점은, 첫 번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생각만으로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거죠. 두 번째로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일에 대한 나의 취향을 잘 알아야 된다는 거였어요. 저를 포함한 연사 분들이 그 과정을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 해주셨어요. 덕분에 이 책이 조금 더 솔직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 같고요. 워크숍도 만족도가 되게 높았어요.

 

저자님을 포함해서 다섯 분 모두, 평균 수면 시간이 3시간 정도였다고요.


저도 사이드잡을 가졌을 때는 하루 3시간 정도 잤어요. 8시 반부터 5시 반까지는 회사에 있고, 7시쯤부터 새벽 2~3시까지는 사이드잡을 하고, 집에 가면 네 시쯤 되고, 다시 7시쯤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했어요. 그걸 3개월 동안 반복했는데 너무 재밌으니까 피곤한지 모르겠더라고요. 회사 외에 내 브랜드의 무언가를 한다는 즐거움, 나만의 오아시스 같은 행복함을 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잠자는 시간도 잊고 했던 것 같아요. 박해욱 기자님도 초반에는 그러셨고, 이선용 대표님도 그러셨더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게 장기적으로 가면 당연히 몸이 힘들어지겠지만, 저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렇게 했었고요. 지금은 회사를 안 다니니까 수면 시간도 길어졌어요. 박해욱 기자님도 여덟 개의 사이드잡을 갖고 계시지만 자신만의 밸런스를 찾아가셨고요. 박 기자님의 경우에는 출퇴근 시간도 아까워서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으셨어요. 1분 1초를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공통점은 있는 것 같아요. 생각에 그치지 않고 무엇이든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도 그렇고요. 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해보고, 괜찮으면 발전시켜 나가고, 그런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창업 1년차가 되었을 때 외로움과 고독이 찾아왔다고 하셨어요. 이유가 뭐였나요?


저도 회사만 다니고 창업은 처음 해봤잖아요. 경험을 안 해봤고, 누구랑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도 없었어요. 모든 것의 책임자가 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더라고요. 다 결정하고 다 책임져야 되니까요. 회사는 관료제 조직이고 각각의 업무가 있는데, 여기는 부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업무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는 거예요. 그게 심리적으로 되게 큰 스트레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공간이 감옥 같은 느낌도 들고 그래서 가기 싫었던 적도 있고. 또 좋은 손님만 오는 건 아니잖아요. 직장 다니면서 사람 스트레스를 안 받은 건 아니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되게 원초적인 것들로 지적을 받으면 생각보다 충격이 커요. 그런 것들이 많이 쌓였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정신없이 일 하고 가게 정리하고 불을 끄고 나오는데 마음이 너무 허전하고 외롭고 두렵고... 온갖 마음들이 쏟아지듯 갑자기 찾아왔어요.

 

그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서 바를 갔던 거죠. 나를 위해서 술 한 잔 해야겠다, 하면서 바에 가서 한 잔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면서 하루를 마감했어요. 그런데 다행이지 불행인지 그러면서 바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바를 창업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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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1,100억이 생긴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 계속할 건가요?’라는 질문을 이선용 대표가 했을 때 ‘그렇다’고 말한 경우를 찾기 어려웠다고 하셨어요. 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걸까요?


그렇죠. 대체로 답변들이 비슷했어요.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돈을 은행에 저축한 다음, 충분히 여행을 다니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대답이 회사에 대한 압박과 억지로 다닌다는 느낌을 복합적으로 보여준 것 같아요. 회사라는 게 나쁜 존재가 아닌데, 다녀야 하니까 다닌다는 생각이 어는 순간 직장인들의 마음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안정적인 대기업을 다니는 게 미덕처럼 여겨져서 다들 들어가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이잖아요. 더 재능이 많은 사람들도 ‘회사는 회사니까 다니는 거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안타까운 마음도 있기는 해요. 그래서 이선용 대표님이 1,100억에 대한 질문을 하셨을 때 다들 조금 뜨끔했어요.

 

‘나는 1,100억이 생기면 일을 그만둘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나면 ‘그러면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지?’라고 자문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죠. ‘회사 아닌 너는 뭐야? 너의 직업은 무엇으로 설명할 거야? 일은 영원히 안 할 거야?’ 같은 질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을 안 해봤기 때문에 1,100억이 생기면 일을 그만두겠다는 대답들이 나왔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의 나와 회사 밖에서의 나를 분리시키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의 나는 행복하지 않은 나, 회사 밖에서의 내가 진정 행복한 나. 그런 식으로 분리시키다 보니까 그런 대답이 나온 것 같은데요. 그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찾아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홍일한 ‘와이낫미디어’ 이사는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정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저자님도 다섯 가지를 꼽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일 년에 책 한 권씩 쓰기’예요.


네, 다섯 개 중에서도 첫 번째예요.

 

공간 운영과 책 쓰는 일을 병행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크게 두 가지 이유인데요. 첫 번째는, 공간을 운영하는 게 되게 바쁘고 정신없는데 공허함이 있어요. 뭔가 풍요 속의 빈곤 같은 느낌이 있어요.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힘들고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만 결과물이 나왔을 때 되게 행복하더라고요.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있어요. 공간을 운영할 때의 풍요 속 빈곤 같은 허전함을 책이라는 기쁨이 채워줘요. 그게 두 번째 이유와 연결이 되는데요. 사업하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 쏟아지는 하루하루를 보내거든요. 그 경험을 나한테만 남기면 별로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대로 잘 기록으로 남겨서 창업을 고민하고 준비하는 사람들한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일 년에 한 권씩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질의 콘텐츠를 독자에게 전하고, 피드백을 받고, 그러면 그 피드백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토양이 되기도 해요. 내가 하는 일들을 잘 정리하는 기록으로써의 의미가 있는 거죠.

 

강의와 기고도 활발히 하시잖아요.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없나요?


현실적인 이유도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사업이라는 게 업앤다운이 너무 심해요. 공간도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신기한 게, 어디 한 곳이 잘 안 되면 다른 곳이 잘 돼요. 많은 일을 할수록 월급 같은 평정심이 찾아오는 거예요. 어느 하나가 조금 안 되더라도 다른 것으로 채워지는 측면이 있는 거죠. ‘그럼 어느 것에도 전문가는 아닌 거 아니야?’라고 이야기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이게 다 연결되어 있어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창업기를 썼고, 창업기를 썼기 때문에 책이 만들어졌고, 강연을 할 수 있었어요. 저한테는 그런 것들이 선순환적으로 필요한 업무라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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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두 번째는, 세상이 너무나 빨리 흘러가잖아요. 새로운 트렌드들이 물 밀 듯이 쏟아져 나와요. 그것들을 제가 일하는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되는지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또 요즘에는 너무나 다양한 파생과 융합 일어나는데, 그런 것들을 저도 테스트하고 그 결과를 기록으로 남겨야 해요. 그런 일들을 올해는 되게 많이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여유 시간이 없는 것 아닌가요?


진짜 시간이 많아요. 회사 다닐 때는 되게 바빴거든요. 야근도 많이 하고. 그런데 회사에서는 정말 불필요한 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보고를 위한 보고서를 쓰고, 컨펌을 받고, 수정하고, 의전하고... 그런 것들을 안 했으면 8시간 근무도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 안 해도 되고요.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안 써도 된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가게 운영이 조금 익숙해지니까 시간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요.

 

요즘은 하루에 몇 시간 주무세요?


7시간씩 자요. 회사 다닐 때의 패턴과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회사 다니면서 ‘아름다운시절’을 운영할 때는 하루 3시간씩 잤던 거고요. 회사 다닐 때도 회식 하고 집에 가면 12~1시에 자서 7~8시에 일어나 출근하잖아요. 그 패턴과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나머지 시간을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 그게 가장 큰 장점인 거죠.

 

일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 되나요?


모르겠어요. 눈 떠서 자기 전까지는 거의 일과 관련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회사 다닐 때 으레 했던 것들은 전혀 안 해요. 자리를 위한 자리, 만남을 위한 만남 같은 것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몇 달에 한 번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야지’ 이런 건 안 해요. 다만 ‘이 사람을 만나서 같이 사업 이야기를 하고 싶다,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하고만 만나요. 술자리 자체를 많이 안 하고, 해야 되니까 하는 자리도 거의 안 가져요. 그런 식으로 삶의 패턴은 달라진 것 같아요. 회사 다닐 때는 스트레스 받으니까 퇴근 후에 만나서 밥 먹고 술 먹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약속이 거의 없죠. 시간이 남으면 혼자 조용히 책을 읽는다든가 글을 쓴다든가 하는 식이에요.

 

퇴사 후에 사업을 잘 하고 있어도 ‘핑크빛 라이프’를 사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럼에도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고 하셨고요.


네,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영원히 없어요.

 

이유가 뭔가요?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인가요?


그렇죠. 내 계획대로 성장하고 있다는 흐름을 느끼니까요.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것들로 올해는 이런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어요. 공간 안에서 어떤 브랜드와 콜라보를 하고 싶고 생각했을 때 서로한테 즐거운 마음으로 협업이 되기도 하고, 그럴 때 ‘내가 프로필을 잘 쌓았구나’ 싶어요. 나와 같이 일했던 사람이 나를 믿고 추천을 해줄 때, 그런 횟수가 늘어날 때 ‘내가 이만큼 더 성장했구나’ 생각되고요.

 

 

 

 

 

 

퇴사 말고, 사이드잡원부연 저 | 카시오페아
사이드잡, 창업, 이직 등 다양한 커리어에 대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5인의 솔직한 경험담과 함께 나만의 커리어를 쌓기 위한 실전 가이드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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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B 26주년 “히스토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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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YB의 정규 10집이 발매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풍향을 따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밴드로 성장하고 연이어 2003년 정규 6집 <YB Stream>의 수록곡 '잊을게'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그들은 이후 17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노래를 쌓았고 음악적 변화를 일궈왔다. 신보 <Twilight State>에는 이러한 이들의 에너지와 세간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은 영특한 장르의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의 흔적을 담은 연륜 있는 메시지와 연주가 번뜩였다.시기는 조금 늦었지만 지난주 화요일 영등포 근처의 한 카페에서 YB의 다섯 멤버 윤도현(보컬), 박태희(베이스), 허준(기타), 김진원(드럼), 스캇 할로웰(기타)를 만났다. 이제 두 자릿수로 접어든 디스코그래피의 소회를 물으니 보컬 윤도현은 멋쩍게 웃으며 “이 음반으로 만든 음악적 성과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앨범을 통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단 거다. YB의 히스토리는 계속된다”고 말했다. 6년에 걸쳐 탄생한 정규 음반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와 어느덧 데뷔 26주년을 맞이한 그들의 우여곡절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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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박태희(베이스), 허준(기타), 윤도현(보컬), 김진원(드럼), 스캇 할로웰(기타)

 

 

정규 10집, “터널을 지나자 길이 보이더라!” 10집 <Twilight State>발매를 축하한다. 기분이 어떤가?

 

윤도현 : 10은 의미를 담아야만 하는 숫자 같다. 근데 사실 그걸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놓고 나니까 그제서야 '아, 우리가 이렇게 10집을 냈구나' 싶었다. (웃음)

 

김진원 : 레드 제플린이 음반 라이센스를 9장까지 내고 지미 페이지가 편집 음반으로 10집까지 만들었다. 그러니까 드러머 존 본햄이 살아있을 때를 기준으로 모든 멤버가 함께 한 건 9장이다. 우리도 정규 2집 (YB가 정식 밴드로 구성을 갖춘 건 2집부터였다 -편집자)부터 이제 딱 9장을 낸 거다. 어쩔 수 없이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레드 제플린과 비교를 하게 된다. 그들과 같은 기간 동안 음반 활동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만감이 교차한다.

 

허준 : 나는 지금껏 작품을 만들며 이번이 제일 재밌었다. 그냥 과정 자체가 좋았다. 물론 즐겁지만은 않았겠지만 그 전과 비교해봤을 때 훨씬 즐기며 음악을 만들었다. 그동안 앨범을 만들며 조금씩 배워왔던 것들이 있지 않나. 그것들을 통해 머릿속에 있는 사운드를 실제로 구현해가는 과정을 직접 느꼈다. 너무 즐거웠다.

 

태희의 소감도 궁금하다.

 

박태희 : 난 우리가 지금까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노래를 만들고 쌓아가는 과정이 굉장히 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터널을 지나고 나니까 수월해지더라.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분명 만족스럽지 않은 지점이 생길 테니까 과감하게 밀어붙이자. 여기가 마지노선이다.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미끄럼틀을 탄 듯 흘러내려 갔다.

 

그때가 언제 즈음인가?

 

박태희 : 2019년 1, 2월쯤이었다. 마지막 음반 <Reel Impulse>(2013)을 내고 4, 5년은 정말 힘들었다. 노래는 많은데 잘 뭉쳐지지 않으니까. 그러다 2018년 겨울에 도현이 산에 들어갔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랬기에 이번 앨범을 최종적으로 완성할 수 있던 거 같다.

 

산에 들어갔다고?

 

윤도현 : 이렇게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 겨울이면 많은 밴드들이 한창 투어를 할 때다. 일부러 그 시기를 골라 산으로 갔다. 투어 등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안 하면 안 된다 하면서 정말 이를 물고 곡을 쓰고 편곡을 했다. 그때 아마 한 100여 개쯤 노래가 있었는데 정말 열심히 추리고 추려 13개의 수록곡을 골랐다. (웃음)

 

결과물에는 만족하나?

 

박태희 : 최선을 다했다. 1, 2개의 타이틀로 앨범 전체의 성격을 보여줄 수 없어 위험한 줄 알면서도 타이틀을 3개로 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후회는 없다.

 

(프로듀서인 윤도현과 마찰은 없었냐는 질문에) 좋게 말하면 좋은 프로듀서였다. (일동 웃음)

 

윤도현: 프로듀싱도 프로듀싱이지만 믹싱 하는데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톤 스튜디오의 김대성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 친구는 예전부터 쭉 록을 만지던 사람이다. 그러다 요즘은 먹고 사는 게 그렇듯 가요부터 록까지 일이 들어오는 대로 다 하더라. 사실 대성은 YB 1집부터 어시스트 엔지니어였다. 우리와는 각별한 사이인데 바빠도 너무 바쁘니 이번에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더라. 이런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소주 한잔하면서 얘기했다. 그랬더니 “10집인데 내가 목숨 걸고 하겠다” 하더라. 그렇게 다시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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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수록곡 얘기를 해보자. 기존 인기곡이었던 '박하사탕', '잊을게' 등이 넓은 의미에서 일반적인 사랑의 감정을 담았다면 이번 수록곡은 더욱 개인적인 면모가 많이 느껴진다.

 

윤도현: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하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거창한 주제보다는 '사람의 감정'에 치중해보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감정을 통해 시대를 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걸 잘 표현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설명을 조금 더 이어준다면?

 

윤도현: '생일' 이란 수록곡은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전에는 이러한 위로가 어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배경 삼아 시작했다면 이번에는 완전히 나 자신의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사적인 가사를 느꼈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거다.

 

'생일'의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막의 중심에서 /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 그러자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라는 가사가 참 매력적이다.

 

윤도현: 이응준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를 읽는 순간 내 마음과 같다고 느꼈다.

 

특히 이번 음반은 YB의 분투가 느껴진다. 앞서 말한 이응준 시인과의 협업은 물론 세계적인 얼터너티브 록 그룹 스매싱 펌킨스의 제프 슈뢰더(Jeff Schroeder)가 기타 연주로 앨범에 참여('야간마차')하기도 했다. 또한 다국적 밴드로 한차례 유명세를 치른 슈퍼 올가니즘의 소울 역시 첫 곡 '딴짓거리'에 피처링으로 합류했다. 26년이란 관록의 활동 속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려 하는 이들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독특하게도 이번 음반에 타이틀이 3개다. 그중 하나는 YB의 히트곡 제조기('나는 나비'를 만들었다 -편집자) 태희의 작품인데.

 

박태희 : '나는 상수역이 좋다'를 썼다. 앨범에는 6번째 트랙에 위치 하긴 하지만 최종 수록곡으로 묶인 건 맨 마지막이었다. 솔직히 내게 1970년대 아저씨 정서가 있다. 뭐, 내 나이가 있으니까 당연한 거다. 그런 면에서 이 곡이 최종 선발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회사와 멤버들이 잘 봐준 거 같다. (웃음)

 

멤버들에게 물어보자. 타이틀로 뽑은 이유가 무엇인가?

 

김진원 : 앞서 말했듯, 이번 음반은 한두 곡으로 전체 앨범을 규정할 수 없다. 태희의 곡을 타이틀로 밀어붙인 건 과거 '나는 나비'가 그랬듯 이 곡이 가진 편안함과 대중성 때문이었다. 또 다른 대표곡 '생일'이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파워풀한 에너지를 건넬 수 있는 노래였다면 슈퍼 올가니즘의 소울이 내레이션으로 참여한 '딴짓거리'는 진화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은 곡이다. 주제를 두고 묶기보다는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려는 마음이 컸다.

 

그럼 허준이 좋아하는 가장 꽂힌 곡은 무엇인가?

 

허준 : 워낙 만들 때 공을 많이 들여 그런지 지금은 대부분 다 좋은 거 같다. (그래도 하나만 꼽아 달라고 했더니) 공연했을 때 가장 좋은 건 '반딧불...그 슬픔에 대한 질문'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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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과의 생생한 에너지 교감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말이 나왔으니 공연 얘기를 좀 해보자. 이번 음반 발매 기념 콘서트 후기가 엄청나다.

 

윤도현: 한 번도 음반 안에 있는 전곡을 연주한 적이 없다. 무대에서 완전 처음 선보이는 12개의 곡을 연달아 들려 드렸고 그 사이사이 히트곡도 넣었다. 그래서 더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 (웃음)

 

며칠 전 영동대로 공연(2020년 새해 카운트다운 공연으로 YB만 유일한 록 그룹이었다 ?편집자)은 또 어땠나. 현장 반응이 정말 좋던데.

 

윤도현: 앞뒤로 다 아이돌, 래퍼여서 그랬는지 현장에서 사람들이 더 반겨준 게 있었다. 록 밴드가 생방송 무대에 선 게 오랜만이기도 하고. 특히 감사했던 건 히트곡 말고 이번 음반의 수록곡인 'Jumping to you', '나는 상수역이 좋다'와 같은 신곡도 함께 따라 즐겨주셨다는 거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곡을 통해서도 충분히 교감할 수 있다는 또 한 번의 확신을 얻었다.

 

그런 측면에서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를 이어줄 밴드가 바로 YB라고 생각한다.

 

윤도현: 나도 딸이 있고 애들이 요즘 어떤 노래를 듣고 어떻게 음악을 향유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회를 열어주는 것뿐이다. YB를 충분히 잘 모르는 어린 친구들도 공연 현장을 왔다 가면 생생한 라이브가 주는 그 에너지에서 느끼는 게 많은 것 같다. 이번 우리 앨범 발매 공연만 보더라도 연령 분포가 20대에서 40대까지 고르게 퍼져있다. 10대도 꽤 되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나라 록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나?

 

윤도현: 록 음악 시장이 어렵다고들 이야기하는데 필드에 있는 입장에서는 (늘 그래 와서 인지) 특히 요즘이 더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든다. 물론 나도 트렌드가 힙합이나 아이돌에 치우쳐 있다는 건 느낀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밴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걸 보면 무조건 덮어두고 침체는 아닌 것 같다. 경제적으로 기울 때가 많고 그런 부분에서 제약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록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까지 부정할 순 없는 것 같다. 당장 YB의 10집만 봐도 매스컴의 주목이 부족했다.

 

윤도현: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다. 음반을 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우리가 대중음악 신과 거리감이 있다는 걸 살갗 근처에서 느꼈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서운함이 있기도 했다. (웃음) 그럼에도 우리 음반을 들어준 한 명, 아니 두 명, 아니 세 명, 네 명의 분들이 이 작품을 정말 집중도 있게 감상하고 내려준 고마운 리뷰를 보며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넓은 관심을 받진 못하지만 깊은 관심을 받고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잘 만들었다, 잘 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쉬움을 상쇄할 수 있는 건 뭘까?

 

윤도현: 공연. 조금 아까도 부사장님과 진지하게 얘기했다. 올해는 작은 곳, 큰 곳 가리지 않고 단독 공연을 많이 할 예정이다. 생각해보니 활동하면서 클럽 투어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더라. 그래서 지난 연말 공연이 끝나자마자 바로 2020년 공연 대관을 다 마쳤다. 지방의 작은 클럽까지 직접 돌아다닐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 달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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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주년, “YB의 히스토리는 계속된다”

 

YB가 활동한 지 벌써 26주년이 됐다. 가장 자랑스러운 곡을 하나 뽑는다면?

 

윤도현: 범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곡이 아닐까? '나는 나비'. 우리를 대표하는 곡이다.

 

김진원 : 지금은 신보의 '야간마차'가 제일 좋다. (예전 앨범까지 포함해 골라 달라고 하니) 너무 많아 못 정하겠다. 유명하고 팬들이 좋아해 주는 곡을 대표곡이라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커리어를 통틀어 내 마음에 가장 잘 들어오는 노래는 그런 우열순위를 통해 나눌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지금만 보자. (웃음) 난 '야간마차'다.

 

허준 : '박하사탕'. 내가 막 밴드에 들어와 낸 첫 번째 음반 <An Urbanite>(2001)의 수록곡이다. 연주한 지 오래됐는데 연주할 때마다 새롭고 늘 더 공들여 소리 내게 된다.

 

끝으로 태희와 스캇의 픽은 무엇인가?

 

태희 : 글쎄... 오늘 무대에서 부를 노래가 가장 좋은 곡인 거 같다. 이번에 10집을 내면서 느낀 건 어제의 노래는 우리한테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무대에서 연주할 곡이 언제나 베스트다.지

 

금 무대에 선다고 가정하고 고른다면?

 

박태희 : 그건 내가 정할 수 없다. (일동 웃음) 멤버들이랑 함께 정하는 거다. 곡들이 저마다 다 흐름을 타고 연결돼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비'도 '박하사탕'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거고, '박하사탕'도 1집 <가을 우체국 앞에서>(1994)의 '임진강' 같은 내면의 고통에 주목한 노래 없이 탄생할 수 없었을 거다. 아까 진원의 말대로 한 곡만 뽑기는 너무 어렵다.

 

스캇 할로웰 : 나는 밴드 밖에서 곡을 들었을 때와 내가 직접 연주했을 때, 이 2가지로 나눠 곡을 정해 봤다. 한국에서 처음 본 YB 공연에서 '잊을게'를 들었다. 그때 그 곡이 연주되는 광경과 멜로디가 지금도 생생하다. 또한 하드록을 좋아하는 록 키드 출신으로 '정글의 법칙'이 가진 시원함을 좋아한다. 연주할 때마다 늘 푹 빠진다. 내 선곡은 이 두 개다. '잊을게'와 '정글의 법칙'.

 

'잊을게'는 인기가 많았던 반면 우려도 컸던 싱글로 기억된다.

 

윤도현: 이게 (윤)일상의 곡이다. 그때는 정말 밴드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던 때다. 우리 뿐만 아니라 팬들도 그랬다. 그랬는데 작곡가의 곡을 받는다고?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지. (웃음).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윤일상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커리어를 보니까 댄스 음악부터 대중적인 곡을 많이 썼던데 그러니까 더 반항심이 들고 이질감이 생기더라. 사장님이 곡은 받아왔지 녹음은 해야 하지. 하기 싫은 티 팍팍 내며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렇게 레코딩을 했다.

 

그래도 반응이 정말 좋았다.

 

윤도현: 음반을 내자마자 그 곡이 터졌다. 거의 이효리의 '10 minutes'와 맞붙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 아닌가. 그래서 더 오랜 시간 일상에게 미안함이 있었다. 사랑을 많이 받은 노래니 자연스레 무대에서 부르기도 많이 불렀는데 그때마다 일상이 떠올랐다.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고맙게도 이해해주더라. 10년 묵은 응어리를 시원하게 풀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2002년 '오 필승 코리아'로 주류 밴드가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진원 : 앞서 스캇이 말했던 '정글 스토리'의 음반이 1996년 6월에 나왔고 그 전에 도현이 1집이 1994년도에 발매됐다. 이후 <한국 록 다시 부르기>로 살짝 주목 받은 게 1999년이니까 오래 걸리긴 했다. (웃음)

 

그렇게 먼 길을 돌아온 정규 10집이다. 음악적 성과가 있다면 뭘까?

 

윤도현: 음악적 성과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만 직시한다. 그래도 굳이 성과를 꼽자면 이 앨범을 통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단 거다. YB의 히스토리는 계속된다!

 


 

 

윤도현 밴드 (YB) - 10집 : Twilight State윤도현 밴드 (YB) 밴드 | Universal
정규 앨범으로는 10번째, YB가 새 정규 앨범을 발표한 것은 지난 2013년 발매한 [Reel Impulse] 이후 6년 만이다. 앨범 타이틀에서부터 느낄 수 있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앨범 전체에 안개처럼 짙게 내려앉아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범준 “통계물리학은 덕업일치가 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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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도 물리학인가요?”


통계물리학자 김범준 교수가 자주 듣는 말이다. 그의 연구에는 사람과 사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나 ‘윷놀이에서 말을 업는 것과 잡는 것 중 무엇이 더 유리한가’는 실제로 김범준 교수가 진행했던 연구 주제다. 흔히 물리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김범준 교수의 두 번째 책 『관계의 과학』은 그래서 흥미롭다. 우리 사회를 색다르게 바라보는 통계물리학자의 시선을 엿볼 수 있어서다. 그는 누적확률분포로 부의 불평등을 읽고, 페이스북 친구의 연결망을 만들어 과학적으로 절친을 찾아본다. 비폭력 시민운동의 성공을 예로 들어 통계물리학의 개념 중 하나인 ‘상전이’를 설명하는가 하면, 배우 차은우와 저자의 합성사진으로 ‘중력파’의 검출 방법을 소개한다. 그러니 물리학이라는 말에 책을 읽기도 전에 겁먹지 않아도 된다. 책에 실린 과학적 개념은 어려울지라도 저자의 설명은 쉽다. 이과 센스가 없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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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는 과학책


통계물리학이란 무엇인가요?


물리학의 전통적인 분야 중 하나예요. 입자의 숫자가 굉장히 많을 때, 어떤 물리 현상이 드러나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라서 뭐라도 많으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수 있어요. 전통적인 물리학에서는 입자가 많을 때를 뜻하는데,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 많은 사람이 관계를 주고받으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볼 때도 통계물리학의 연구 방법을 적용해 이해할 수 있어요. 한 마디로 ‘무어라도 많을 때 전체를 이해하는 연구 방법’이라고 할까요. 실제로 사회현상이나 경제현상 같은 것도 통계물리학자들이 연구를 많이 해요.

 

책에 실린 재미있는 연구들이 많았는데, 연구 주제는 어떻게 정하는 편인가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궁금한 걸 택해요.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통계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방법들을 적용하는 거죠.

 

리뷰도 종종 보세요? 물리학이라고 해서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다는 평이 많아요.


하루에 몇 번씩 찾아봐요.(웃음) 이번 책에는 꼭지가 끝날 때마다 마지막에 그 글에서 주로 다룬 과학 용어에 대한 설명을 넣었거든요. 출판사에서 용어 설명을 넣자고 제안했을 땐 꼭 필요할까 싶었는데, 그 부분을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저의 글쓰기 스타일을 간파해주신 분도 있고, 웃음을 주려고 썼던 몇몇 문장들을 재밌다며 좋아해주시는 분도 있었어요.

 

교수님이 차은우보다 잘생겨 보인다는 리뷰도 있었어요.


저도 봤어요. 듣기 좋으라고 해주신 말씀이겠죠.(웃음)

 

각 편이 끝날 때마다 에세이가 함께 실렸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여러 매체에서 청탁받아 썼던 원고들인데, 과학 칼럼이 아닌 제 생각을 썼어요. 그 글들이 실린 건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제목은 직접 정하셨어요?


출판사에서 지었어요. 제목에 관해 어떤 논의를 하는지 담당 편집자가 계속 내용을 전달해줬는데, 치열하게 고민하시더라고요. 여러 후보가 있었지만, 제 의견도 그렇고 편집부에서도 『관계의 과학』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후보에서 아쉽게 탈락한 제목은 어떤 게 있었나요?


굉장히 많았어요. 『곁을 읽는 물리학』 『복잡한 세계를 경쾌하게 읽는 통계물리학의 다섯 방정식』 『연결사회』 등이요.  『관계의 과학』은 정말 많은 고민 끝에 지은 제목이에요. 마음에 들어요.(웃음) 

그런 것도 물리학인가요?


물리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통계물리학을 전공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연구 방법에 따라 물리학을 크게 둘로 나누면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으로 나뉘어요. 그런데 실험은 제게 전혀 재능이 없다는 게 너무 명확했어요.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는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대학 동기들 중에 실험에 재능 있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요. 그 친구들을 보면 정말 놀라워요. 컴퓨터 하드웨어 같은 걸 스스로 설계해서 자동적으로 실험 데이터를 모으더라고요. 그걸 보고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그래서 이론에 관심을 뒀고, 그러다 보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요. 처음엔 큰 고민 없이 통계물리학을 택했어요.


그런데 스웨덴에서 조교수로 임용될 때쯤부터 내 관심사와 굉장히 잘 맞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립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제 책에 실린 것 같은 다양한 내용의 연구를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독자분들이 자주 오해를 하세요. 제가 항상 그렇게 엉뚱한 연구만 하는 건 아니고요. 설명하면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주제들도 연구를 계속 해요. 하지만 그걸 책으로 쓰면 아무도 안 보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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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시민운동보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공률이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를 물리학의 ‘상전이’로 설명한 내용을 읽고 과학이 위로가 된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올바른 생각을 가진 소수가 모이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게 환상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가 있는 사실이니까요.


맞아요. 이 책을 통해 정확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누적확률분포로 부의 편중을 설명하면서, 부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기본소득을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기본소득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에요. 물리학자들이 무엇에 대해 생각할 때는 먼 미래를 먼저 상상해 봐요. 100년이 짧다면 1000년 뒤까지요. 그때는 어떤 세상일까 상상하면 인공지능이나 자동화된 기계에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이 의존할 게 분명하잖아요. 그러한 미래에서 사회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게 너무 자명한 것 같아요. 지금 사람의 노동력에 기반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 중 상당부분이 기계화 될 텐니 미래에는 기업이 지금보다 수익을 더 많이 낼 가능성이 아주 커진단 말이에요. 그럼 그 수입의 일부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사람의 노동력으로 지불되어야 했을 돈이잖아요. 그런데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비용은 줄이고 수익은 더 많아졌다면 당연히 사람에게 돌려줘야죠. 기업이 얻은 추가수익을 국가에서 세금으로 걷고, 그걸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럼 인공지능을 낙관하는 입장이신가요?


낙관적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조심해야 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는 점엔 동의하지만, 지금 당장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그런데 ‘1000년 뒤에도 괜찮을까?’라고 생각하면 그건 아닐 수도 있죠. 어쨌든 인공지능도 사람이 만드는 거잖아요. 사람들끼리 합의해서 어느 선까지는 허락하고 어느 이상은 조심해야 한다는 지점을 정해두면 분명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도움 될 여지는 훨씬 크죠.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우리가 태블릿 PC나 핸드폰을 사용하지만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르잖아요. 미래에는 그런 것들이 더 많이 늘어난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화장실에서 종종 하던 게임의 승률 데이터를 1년간 모아 그동안 게임 실력이 좋아졌는지, 어떤 시간대에 주로 게임을 하는지 푸아송분포로 알아본 내용을 보고 많이 웃었어요. 이외에도 ‘대체 이게 왜 궁금할까?’싶은 연구들이 많았는데요.(웃음) 물리학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역시 호기심일까요?


호기심이 맞는데, 그걸 해결하는 과정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죠. 궁금한 게 많다고 다 과학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 특히 궁금한 게 있나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요.(웃음) 저와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데이터를 살펴보자고 했더니 한 학생이 지금까지 공개된 데이터를 분석해 보여줬어요. 지금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서 미래를 명확히 예측할 순 없는데요. 그 학생이 사용한 모델을 통해 예측한 바로는 누적환자 4~5만 명 정도에서 확산이 멈출 것으로 봤어요. 물론 아직 감염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단계라서 확실한 건 아니에요. 증가폭이 둔화되는 시점까지의 데이터는 있어야 미래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거든요.

 

지금까지 한 연구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게 뭔가요?


재미의 방점을 ‘의미’에 둔다면 학교와 커피숍의 수에 관한 이야기요. 커피숍 수가 인구밀도와 비례하는지, 그렇다면 초등학교의 수는 어떤지 알아본 연구였어요. 커피숍은 이윤을 추구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인구밀도에 정비례하지만, 학교는 공익적인 곳이고 사람의 이동거리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죠. 인구밀도가 아무리 적은 곳에도 학교, 병원 같은 시설물이 있어야 하는 이유예요. 연구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의미가 있었어요. 가장 최근에 했던 것 중에는 사람의 체질량 지수와 직립보행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있어요. 사람이 직립보행을 한다는 게 체질량 지수를 계산하는 방법과 연결된다는 걸 발견하고 아주 짜릿했죠. 재미삼아 피카추의 체질량 지수도 계산해 봤는데, 이 연구의 내용이 한 어린이 과학책에 실려 곧 출간될 예정이에요.(웃음)

 

통계물리학의 매력은요?


통계물리학을 이용해 해결할 수 있는 궁금증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전파를 살펴볼 수 있는 물리학 분야는 통계물리학밖에 없죠. 이런 점이 아주 매력적이에요.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의 상당수를 통계물리학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거든요.  다른 물리학 분야보다 훨씬 열려있죠. 덕분에 엉뚱한 연구를 해도 통계물리학자로 사는 데 크게 위험하지 않았어요.(웃음) 직립보행과 체질량 지수의 관계 같은 것도 통계물리학 분야의 학술지에 충분히 실을 수 있어요. 아, 물론 피카추 얘기는 빼야 하지만요.(웃음)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의 상당수를 통계물리학의 연구 방법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덕업일치가 가능한 학문이에요.

 

“그런 것도 물리학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요.


정말 많이 받아요. 그런데 통계물리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제가 아주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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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지식이 아닌 태도


그동안 과학은 지식인 줄 알았는데,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과학은 ‘생각의 태도’더라고요. 


맞아요. 저는 진실인 것, 참인 것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과학자예요. 세상에는 온갖 지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떤 것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고 어떤 것은 근거가 없잖아요. 그런데 과학적인 판단 기준으로 참인 것을 선별해내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어요. 단순히 과학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게 아니라,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방식을 경험해보고 그걸 아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면 그간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말도 안 되는 일들은 좀 없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대중이 가진 과학에 대한 오해 중 억울한 게 있다면요.


억울하기보다 걱정되는 오해가 있어요. ‘과학자들이 하는 말은 진실이다. 믿을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최근에 했던 강연에서 “과학자를 믿지 말라”고 했어요.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진행하는 일들의 과정은 상당히 합리적일 때가 많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과학자는 누군가의 부모이고 어디선가 월급을 받는 한 시민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과학자로 대표되긴 하지만, 정말 과학자로서 하는 이야기인지 그 사람에게 규정된 사회적 역할 때문에 하는 이야기인지 헷갈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과학자가 하는 이야기라고 해도 다 믿지 말고 항상 의심해야 해요. 저 사람이 저 이야기를 왜 하는지 생각해보고요.

 

과학적 태도네요. 끊임없이 의심하고, 근거를 찾고요.


그렇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중들이 싫어해요. “그럼 도대체 뭘 믿어야 하냐”고 묻는데, 저는 “믿을 게 하나도 없다”고 대답하죠.(웃음) 과학적 사고를 하다보면,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있고 어떤 부분은 믿을 수 없는지도 판별할 수 있게 돼요. 예를 들어 누가 손바닥에 있는 동전이 스스로 공중에 뜰 수 있다고 하면 다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잖아요. 그건 우리가 아는 확실한 과학적 지식인 거죠. 그런데 누군가 음이온이 건강에 좋다고 해요. 그럼 “아 그래요?”하고 믿는단 말이에요. 그러지 말고 고민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음이온이 몸에 들어오면 건강에 왜 좋을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죠.

 

과학을 잘 모르는 경우에는 어려운 과학적 개념을 가져와 설명하면 혹하고 믿게 되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과학자 사회 전체가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유사과학 같은 것들이 판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과학자들이 명확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죠. 단 과학자 개개인에게 맡기기는 어렵고요,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출판, 강연 등을 통해 대중과 활발히 만나고 계신데요.


과학이 즐겁다는 것, 즐거울 뿐 아니라 삶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개인이 어떤 것을 판단할 때도 과학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고요. 사회 전체로도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과학을 배우는 것과 과학적 사고방식을 익히는 건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굳이 특정 분야의 과학을 전공해야 과학적 사고방식이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론에 도달하는지 유심히 보신다면 누구나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질 수 있을 거예요.

 

‘물리학과 같은 기초과학의 연구에 응용가능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학을 질식시키는 행위(322쪽)’라고 했어요.


과학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된 예는 정말 많지만, 사실 도움이 되지 않고 사라진 과학적 연구 결과는 훨씬 더 많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해요. 모든 과학은 도움이 된다고요. 처음 과학의 연구 결과가 생산되는 이 시점에서, 어떤 연구는 50년 뒤에 도움이 되고 어떤 연구는 100년 뒤에 도움이 될지 지금 판단할 순 없어요. 일단 과학자들에게 폭넓은 연구의 자유를 주고, 그게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게 맞는 거죠. 반대로 세상에 도움이 될 것만 연구하라고 하면 오히려 도움이 될 연구가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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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물리학자다


어릴 때부터 물리학을 좋아하셨어요?


아주 어릴 때는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고 고등학교에 가면서 자연스레 물리학을 좋아하게 됐어요. 단순히 물리학을 전공해야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물리학자가 아니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어요. 과학자가 아닌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어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천문학 책을 보면 우주가 엄청나잖아요. 그에 비하면 인간은 무척 하찮은 존재예요. 그런데 그 하찮은 인간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인간의 이성이라는 건 정말 허접하잖아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멋지더라고요. 저도 그 일부가 되고 싶었죠.

 

‘물리학의 아름다움도 친해져야 드러난다.(153쪽)’고요. 아직 물리와 친해지지 못한 이들에게 물리의 아름다움을 전한다면요.


예술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물리학자가 물리학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다를 거예요.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요. 물리학을 이용해서 어떤 대상을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느낌이 들 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저 이론 정말 아름답지 않아? 그 논문 봤어? 너무 멋지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요. 모호했던 대상이 한 순간 명징해질 때의 짜릿함이라고 할까요.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다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물리학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은, 그게 정말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것에 공감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어요.(웃음)

 

책을 읽으며 ‘과학자가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글을 잘 쓰기 위해 하는 개인적인 노력이 있나요.


특별히 훈련을 한 적은 없는데 계속 쓰다 보니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요. 아마 모든 작가들이 그럴 텐데, 제 앞에 독자가 있다고 상상하고 글을 써요. 나에게는 너무 자명하고 당연한 이야기일지라도, 상상의 독자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상상의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쉽게 쓰려고 노력해요. 퇴고도 많이 하고요. 제가 쓴 글을 소리 내서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가상의 독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설정하나요?


과거에는 제 아내였어요. 첫 책 『세상물정의 물리학』을 쓸 땐 원고의 상당 부분을 아내에게 봐달라고 했었어요. 요즘은 아내에게 부탁하진 않고요. 과학자들이 흔히 말하길 ‘당신의 청중이 완벽하게 무지하지만,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라’고 하거든요. 제가 상상하는 독자도 그래요.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내가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죠.

 

물리학자들이 펴낸 대중과학서가 많은데요. 다들 글을 잘 쓰셔서 ‘물리학 논문을 쓸 때 글쓰기 능력이 필요한가?’라는 생각도 했어요.(웃음)


저도 동의해요. 논문은 전문적인 분야이지만 읽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잖아요. 제가 상상하는 독자가 물리학자냐, 아니면 물리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상상의 독자를 앞에 두고 그를 설득하는 글을 쓴다고 본다면 논문이나 책에 실린 글이나 큰 차이가 없는 거죠.

 

SF소설 같은 문학을 써보고 싶은 마음은 없으세요?


전에 한 번 수필을 청탁받은 적이 있어요. ‘별 거 아니지 뭐’ 하고 쉽게 생각했는데 못 쓰겠는 거예요.(웃음) 그때 알았어요. 과학자가 쓰는 글과 문학가가 쓰는 글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요. 과학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훈련 받아요. 논문을 쓸 때도 내가 쓴 문장이 다른 과학자가 보기에 동의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문학이나 에세이는 그게 아니잖아요.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런 걸 쓸 능력은 안 될 것 같은데, 수필은 재미있어졌어요. 제가 겪었던 일들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글이라면 한 번 써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독가이시잖아요.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나요? 


『아름다움의 진화』 요. ‘적응주의만으로 진화를 이해하는 건 협소한 시각이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책이에요.

 

독자들이 『관계의 과학』을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나요.

‘이렇게 해야 하는 구나’라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통계물리학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렇게도 보는 구나’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얼마든지 다른 시각으로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서문에 ‘나는 행복한 물리학자다’라고 쓰신 게 기억에 남아요. 


꿈이 작다는 이야기겠죠. 내일 당장 삶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아주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아쉬움이 없어요. 더 해보고 싶은 것도 없고 노벨상 받고 싶다는 생각도 한참 전에 접었고요.(웃음) 그냥 연구하는 게 재밌고 즐거워요. 요즘은 대학원생들과 많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궁금증을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방향을 찾게 되고, ‘아 이런 거였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 너무 즐거워요. 책 내는 것도 좋고요. 이전에는 과학자들을 많이 만났다면 책을 출간하면서 사회의 다양한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됐어요. 물리학자들은 콧대가 높잖아요.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똑똑한 줄 알거든요.(웃음)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덕분에 자연히 겸손해지고, 세상이 더 재미있어요.

 

 

 

관계의 과학김범준 저 | 동아시아
우리의 일상과 친구 관계에서부터 사회 현상과 재해 등 자연현상까지 어떻게 작은 부분들이 전체로서의 사건이 되고 현상이 되는지 통계물리학의 방법으로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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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유정 “질병은 결점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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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좋다는 대학, 남들이 좋다는 직업을 좇아 20대를 보내던, 결혼을 두 달 앞둔 스물여덟의 어느 날 자궁 근종을 발견한 이유정은 임신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얼른 근종을 제거하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말에 덜컥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박스 포장을 기다리는 햄처럼”수술 상담실로 옮겨져 수술 날짜까지 잡게 된다. 자궁 근종이 어떤 것인지, 수술만이 방법인지에 대해서라면 전혀 알 수 없었다. 예비 남편에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유정은 고민 끝에 수술을 취소하고 자궁 근종에 관한 논문과 관련 기사 100여 개를 찾아보며 병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술을 미루고 1년 간 나를 관찰하기로 결심한다.나를 이해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아프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는 저자 이유정이 자궁 근종 발견 후 1년 6개월 뒤 근종 제거 수술을 받기까지 어떻게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진솔한 경험담이다.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살도록 교육 받았던 것 같다”는 저자가 수술이라는 ‘결론’을 최대한 유예한 뒤 자신을 지켜보며 근거 있는 선택을 하려고 애쓴 결과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결혼식 대신 가족여행을 하고, 채식을 시도하고, 술을 끊기 위해 노력하고, 면 생리대를 사용하는 등 삶의 태도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저자는 갑자기 닥쳐왔던 자궁 근종을 “명백하게 고마운 존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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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는 질문


“근종을 만나 나는 더 선명하고 명확하게 살 수 있었다”(8쪽)고 하셨어요. 근종을 발견한 후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했어요.


가장 큰 변화는 행동적인 면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변화였다고 생각해요. 근종을 발견한 이후에는 ‘왜’라는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스스로 찾으려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옷을 산다고 할 때 예전에는 제 가치관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 평가에 의존했거든요. 이제는 이 옷을 삼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것, 환경에 미치는 영향 같은 과정을 먼저 생각해요. 이 생각 훈련이 가장 큰 변화였어요.

 

이전의 작가님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반추하게 됐겠군요.


그렇죠, 자궁 근종을 발견했을 당시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엔 병원에서 수술하라고 하니까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거든요. ‘왜’라는 질문이 없었던 거죠. 이것이 어떤 질병인지도 몰랐고, 제 의견이나 자기 확신도 없었는데요. 서서히 수술을 ‘왜’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면서 이전의 제게는 없었던 일들을 해보게 됐어요.

 

왜 수술을 해야 하는지 잠깐 멈춰서 생각했던 건데요.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무슨 질병인지도 모르면서 수술을 하겠다 마음 먹은 상태였는데요.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가 직접 관련 논문까지 찾아보면서 이런저런 내용을 알려줬어요. 그게 너무 창피한 거예요. 내 몸인데 나는 모른 채로 남자친구가 알려준다는 사실이 말이죠. 솔직히 이것도 일종의 평가로부터 시작한 생각인 건데요. 이 상황에서 남자친구가 나를 이상하게 평가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너무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나도 논문을 찾아봐야겠다 생각했던 거예요. 찾으려고 보니 의외로 정보가 없더라고요. 그게 화가 나서 더 관심을 갖게 됐어요.

 

책에서 한 문장을 고른다면 “근종과 함께한 여행은 세상을 보는 눈을 변화시켰다.”(185쪽)일 것 같아요.


처음엔 자궁 근종이 내 삶을 망치러 온 불청객이라고 생각했어요. 결론적으로 보면 근종 덕분에 제 삶이 변화했죠. 다른 사람을 따라가기보다 내 스스로 내 결정에 책임질 수 있는 근거자료를 모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점점 커진 건데요. 데이터가 쌓이니까 기존에는 거의 없다시피 한 자기 확신이 생겼어요. 전에는 병원의 말, 부모님의 말, 사회가 하는 말을 듣고 움직였다면 이제는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놀라운 건 그러니까 누구도 함부로 비난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했어, 너 때문이잖아”라고 할 필요가 없게 된 거예요. 또, 전에는 환경을 많이 생각 안 했는데요. 근종 발견 이후에는 소비 과정과 그에 따른 환경적인 부담들을 더 생각하게 됐어요.

 

관심이 아주 넓게 확장됐어요. 병을 알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시선을 병 안에만 둔 것이 아니라 병 바깥의 다른 영역에까지 두었다는 것이 인상적인데요. 어쩌면 글을 쓰는 일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글을 쓴 1차 계기는 말한 대로 화가 났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내가 알던 것과 다른 정보들이 많다는 거였죠. 그러고 보니 사람들도 모르는 정보가 많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책임감이 생겼고요. 다른 사람들이 제 글을 보고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자료도 더 찾아보게 됐고, 더 연구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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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결점이 아니다


처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직업이 마케팅이라 업무적인 글은 썼지만 내 글을 쓴 적은 없어요. 글을 쓰기 전에도 역시 ‘내 글을 누가 읽을까’라면서 조회수가 안 나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조금씩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서히 그렇게 된 건데요. 하나 써보고 좋아서 또 쓰고, 그러다 열 개만 써보자고 생각하고, 계속 쓰게 됐어요. 처음엔 반응이 크진 않았지만 글을 읽은 분들이 댓글을 남기고, 자신의 경험을 메일로 보내고 하는 걸 보고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데요. 20대는 물론이고 30대, 40-50대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 배우자 분이 “제 배우자가 수술을 하러 가는데 무엇을 가져가면 좋을까요, 약은 무엇이 좋을까요”라고 질문을 하니까 저도 더 찾아보고 서로 피드백 하게 됐어요.

 

근종 발견 후 100여 개의 논문과 기사 등을 찾아 읽으면서 공부하던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


가령 어느 블로그에서 콩이 여성의 몸에 좋다고 해요. 정말 그럴까, 하고 논문을 찾아요. 보면 좋다는 논문도 있지만 안 좋다는 논문이 더 많은 거예요. 콩에 함유된 식물성 여성호르몬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면 그것이 뭔지 궁금해져서 또 찾아보게 되잖아요. 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하면 점점 커지는 것처럼 질문이 연결돼서 여러 논문을 찾아보고 그랬어요.

 

작가님을 보면 병에 걸린 당사자로서 공부하는 일도 힘들지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흔히 쉽게 결정하는 이유가 어려운 것을 피하고 싶어서인 것 같거든요. 결론만 알고 싶은 거죠. 수술을 해? 말아? 어디서 해?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고요. 사실 누구나 불안할 거예요. 하지만 살짝 여유를 가져도 괜찮아요. 저는 그걸 받아들이니까 시간을 두고, 자료를 더 찾아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작가님의 근종이 가진 특수성도 분명히 있었을 테고요. 진행이 빠르지 않으니까 1년 정도 시간을 갖고 지켜보겠다고 생각하신 거잖아요. 작가님과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힘들게 계신 분들에게는 제가 감히 어떻게 말씀을 드리겠어요. 저와 같은 상황인 분들에게만 말씀을 전한다면 역시 일단 여유를 가져도 괜찮다는 이야기예요. 이것은 결점이 아니거든요. 저는 일종의 마음의 체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체력이 약한 건 나쁜 게 아니잖아요. 언젠가는 기를 수 있고, 당장은 어떤 결과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의 체력을 기르는 데 집중하면 좋겠어요. 내 질병을 알아가는 데 더 도움이 되고, 나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어느 책에서 건강해야 행복하다는 말은 부자여야 행복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을 읽은 적이 있어요.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다 그러신 건 아니지만 질병을 결점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결점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많죠. 특히 저 같은 가임기 여성은 그런 평가를 더 많이 받는 것 같거든요. 저도 “임신하는 데에는 문제 없고?”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편견에서 나오는 말이죠. 그런 말을 들으면 안 좋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요. 마음의 체력을 기르고 나니까 저 말을 하는 사람은 결혼하자마자 애를 낳았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이해한다고 해서 그 말을 용인하는 게 아니고요. 그 말을 듣고 넘길 수 있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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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한 삶의 완성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편견의 말을 하는 상황에서 한 개인이 마음의 체력을 길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작가님이 마음의 체력을 기르는 과정에서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뭔가요?


남편이에요. 저와 더 많은 세월을 보낸 엄마는 오히려 여자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고, 남편의 식사를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수술을 안 한다고 해도 하루에 몇 번씩 “그게 임신하는 데 문제가 되진 않니?”라는 말을 했어요. 하지만 남편은 달랐어요. 게임 하듯이 술을 끊을 수 있게 도와준다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싶을 때 자신이 밥을 한다거나 하면서 지지해줬거든요. 이 책을 쓴 이유도 같은데요. 그런 지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건네고 싶었어요. 저는 운이 좋아 남편의 지지를 받았지만 안 그런 경우도 많잖아요. 그럴 때 괜찮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질병을 갖고 있는 당사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소중한 일이에요.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요. 그러니까 질병을 가진 분들이 더 얘기를 안 하려고 하죠. 엄마 친구 아들은 다 대기업에 다니잖아요.(웃음) 전 국민 중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 비율은 아주 적을 텐데 말이에요. 그렇게 좋은 결과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보여주려는 사회가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요.

 

작가님을 보며 느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과정이 있지만 그 과정을 충분히 갖고, 심사숙고 해야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겠다는 점이에요. 질병을 발견하고, 수술을 하고,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무슨 치료인가 싶고요.


‘하이푸’라는 시술법이 있어요. 아주 제한된 사람에게만 하는 방법인데요. 워낙 의료사회가 비즈니스화 되니까 엄격한 조건이 필요한 시술임에도 권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다 보면 재발하고, 또 재발하는 분들도 많아요. 저도 처음 진료를 받았을 때 병원에서는 질병이나 치료 과정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이러면 임신 힘들 수도 있는데”라면서 불안감을 조성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참 나쁘다, 싶어요.


제 경우 긴 시간을 갖고 관찰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 게 채식이었거든요. 결과적으로 채식이 제게는 안 맞아요. 물론 환경 면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제 건강에는 안 좋더라고요. 언뜻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시도하는 과정에서 배웠고, 시도해보고 빼보고 하는 과정에서 디테일한 삶이 완성됐다고 생각해요. 한 번 실패해보는 것 나쁘지 않아요. 실패 여러 번 하고 나면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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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만들어보자


수술을 보류한 뒤 채식, 면 생리대 사용, 소비 자제 등 다양한 시도를 하셨잖아요. 그 분투의 과정에서 맞닥뜨린 어려움이나 깨달음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선택을 할 때 근거가 있는 선택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어요. 아무 근거 없이 하는 선택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가령 채식이 몸에 좋다고 믿는 분들이 있는데요. 실제로는 안 좋은 분들도 있거든요. 면 생리대를 사용할지, 셀프 웨딩을 할지, 모두 개인의 결정이에요. 결혼식을 두고 저도 부모님과 갈등이 컸어요. 워낙 관계 지향적인 사회라 결혼식이란 이벤트가 부모님 입장에서는 가족의 이벤트였던 거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 이것은 개인의 이벤트라고 생각했어요. 이 가치관 차이를 조율하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은데요. 조율 과정에서 싸울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노력하는 거잖아요. 노력을 힘들어하는 사회긴 하지만 필요한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소통의 문제로까지 나아가네요.


맞아요, 저는 근종을 발견하고 소통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환경을 지키고, 텀블러를 사용하고, 건강한 식재료를 먹는 것은 저의 가치관이잖아요. 결국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치관을 조율해나갈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소통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일이었어요. 

 

지금 작가님이 지키고자 하는, 유지하고 있는 생활습관은 어떤 것인가요?


지금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바디버든’이에요. 체내의 화학물질 양을 말하는데요. 배달음식을 먹을 때나 일회용 컵으로 음료를 마실 때, 화학물질이 나올 수 있어요. 그것이 체내에 흡수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완벽하진 않아도 최대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 중이고요. 이왕이면 플라스틱 통에 들어 있는 샴푸보다는 비누를 사용하고, 면 생리대를 사용하고, 장을 보러 갈 때도 제 용기를 들고 가거나 면 봉투, 생분해 봉투를 사용해요. 거창하진 않아도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고 있어요. 새로운 물건 잘 안 사고요.

 

이 책에 대해 “다 큰 어른의 성장기”라고 표현하셨잖아요. 책을 쓰면서 상상한 독자가 있다면 어떤 분들인지, 그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들려주세요. 


글을 쓰면서 20대부터 40대 이상까지 여러 여성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의외로 나이가 있으신 분들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흔들릴 때, 주변의 무례한 말에 상처를 받을 때 ‘그래도 괜찮다’라고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당장 아파도 함께 마음의 체력을 기르고, 다시 한 번 습관을 만들어보자고 얘기하고 싶고요. 저는 이 책을 남자 분들도 많이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여자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시면 어떨까 싶어요.

 

 

 

 

아프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이유정 저 | 북스토리
자궁 근종을 시작으로 촉발된 ‘여성성’과 ‘사회의 편견’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비판 없이 받아들인 통념들에 대해 반문하며, 많은 첫 시도들을 감행한 탐구형 이유정 작가의 경험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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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사진가 천경우 “이미지보다는 과정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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붐비는 인도 뭄바이의 기차역, 한 작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버리고 싶거나 타인에게 주고 싶은 물건을 가져와 달라고 요청한다. 준비한 테이블 위에는 딸이 태어나서 처음 신었던 분홍색 양말과 20년간 팔에 끼고 다니던 팔찌, 폐병을 앓았을 때 찍은 엑스레이 사진 등이 놓인다. 남원의 해인사와 스페인 나바라 주에서는 붉은 보자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고통의 무게만큼의 돌을 모아 담고 한 장소에 늘어놓는 퍼포먼스를 제안한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요청에 사람들은 진지하게 반응하고, 반응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된다. 


천경우 작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 곳곳에서 사진, 영상, 대중 퍼포먼스,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별개의 공간을 무대로 그곳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질문(요청)을 던진 후, 그들이 질문에 반응하여 어떤 경험과 조우하는지를 지켜본다. 시간과 경험, 관계와 소통, 실재와 부재에 대한 질문 앞에서 벌어진 낯선 경험은 참여자들의 표정과 행동을 다르게 한다.


천경우 작가의 첫 에세이집 『보이지 않는 말들』은 그동안의 주요 작품을 토대로 기록한 작업노트이다. 지금까지의 작품 모티프에서부터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 진행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그 후의 기억까지 퍼포먼스의 여정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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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현장에서 직접 느끼는 작품


부제가 ‘천경우 작업노트’에요. 에세이 같은 느낌도 나고요.


작업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기획자들과 여담으로 나누거나 대담에서 종종 이야기하거든요. 가까운 기획자 한 분이 글로 써서 사람들과 공유하면 좋겠다고 권하셨고, <현대문학>의 제안으로 기고를 했었어요. 미술지가 아닌 오래된 문학지였기에 용기가 난 것 같아요.


용기를 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그간 적잖은 메모와 스케치들이 여기저기 쌓여가는 것을 보며 언젠가 정리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작업노트들을 들여다보고 기억을 되짚다 보니 뜻밖에 과거의 저 자신과 새롭게 만나게 되더라고요. 책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계기가 만들어졌어요.


글을 쓰기 전부터 기록물을 꾸준히 남기셨어요. 월간 <현대문학> 연재 전에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나요?


기록은 항상 해요. 저만 알아보는 개인적인 기록, 지도, 도구 등 다양한 형태의 흔적들이 남고요. 기록을 가지고 뭘 하겠다기보다는 기억을 선명히 하고 다음 이정표의 실마리를 남겨두는 거죠. 또 스스로 검증하고 돌아보기도 하고, 새로운 작업과 연결되기도 해요. 아마 대부분의 작가는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하겠지만 저는 남겨지는 형태가 없는 작품이 많아서 의식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하죠. 생각을 공유하는 일은 중요한 소통방식이기도 하고요.


처음 물성으로 된 책을 받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무겁지 않지만 묵직한 오브제 느낌이 좋았어요. 작품집하고는 달랐고요. 작품집에는 제 글이 들어간 적이 없어서 특별했어요. 영상이나 조형 언어가 아닌 문자 언어로 남긴 첫 번째 책인 데다, 이제 꼼작 없이 이 어설픈 글들도 나의 일부가 되었다는 조금은 무거운 느낌도 들었죠. 이미지의 인쇄 질보다는 책의 무게. 손으로 만졌을 때 감촉과 무게에 더 중점을 둬서 출판사와 함께 제작했어요. 책은 제게 공간체험이기도 해요. 종이로 인쇄된 책을 손에 들고 보는 건 책과 독자의 일대일 만남이거든요. 작품의 소유나 전시를 보는 일과는 달리 의지만 있다면 경제적인 여건과 크게 상관없이 누구나 손에 쥘 수 있어요.


QR코드를 통해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작품(‘Perfect Relay’)도 있었어요. 사진과 영상이 책과 만난 느낌이에요.


처음부터 판매하지 않고 11분가량의 영상을 쉽게 공유하게 한 영상작품이었어요. 현장을 상상하던 독자들이 책 속 이야기를 함께 느껴보게 하려고 작은 통로 같은 장치를 넣어 보았지요. 이 엄지손톱만 한 통로로 들어가 보면 18명의 어린이들이 손으로 달리고 있어요. 

 


 


리뷰를 보면 작품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분이 있더라고요. ‘도슨트를 듣는 기분’이었다고 남기셨어요.


물론 이 책의 글을 읽으면 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생각을 엿보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작품에 대한 해석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책에 실린 퍼포먼스나 설치사진들은 그저 작품의 기록일 뿐 이것 자체가 작품은 아니에요. 작품은 행위 현장에서 직접 느끼는 것들이죠. 단편적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참여하는 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타인을 통한 간접경험을 선호하기도 하지요. 엄격히 이야기하면 이 책은 저에게는 그냥 노트예요. 제가 기획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만들었지만, 작품을 대하는 해석은 감상자 각자의 몫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저 또한 감상자이기 때문에 책에 담긴 내용은 감상자 중 한 명의 시각이기도 해요. 가급적이면 느끼면 느낀 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공개했어요. 현장에서 작가의 존재가 의미 있는 작품들도 있지만, 작가를 떠난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로부터 독립해서 다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거죠. 책이 좋은 게, 사람보다 오래 살더라고요. 디지털 이미지나 데이터와는 다르게 모든 책이 다른 모양으로 낡을 수 있고요.


사진작가로 표기되어 있지만, 대부분 퍼포먼스 위주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어요.


책에 들어 있는 25개 프로젝트 중에 순수한 사진 작품에 가까운 것은 네 개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과정에 중심이 있는 작품들이죠. 퍼포먼스냐, 공공미술이냐 하는 카테고리 자체는 제게 그리 중요하진 않아요. 자연스레 이어진 방법으로 하다 보니 이 시대 이론가들이 분류하는 영역에 속해있게 됐어요.


사진을 처음 했기 때문에 이런 작품들을 만들게 된 걸까요?


분명 사진적 체험들이 저를 이끈 면이 있어요. 사진을 찍으면서 공간을 느끼는 체험이 저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어요. 사진은 이미지의 결과에 매진하다 보면 과정의 공간은 스치듯 지나가고 철거하는데, 이미지보다는 과정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간을 드러내는 건 사진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사진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었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마주하는 공간에서는 상호작용을 통한 에너지들이 항상 오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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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를 기다리는 과정


’18x1 Minute’는 참가자들이 시계 없이 18분을 속으로 셈하는 내용이었어요. 사진 작품으로 남기도 하고, 퍼포먼스로 하기도 했죠.


6명이 함께하는 사진작품으로 시작해서 9명의 퍼포먼스로 발전되었던 작품이에요. 책에 실린 사진에는 안 드러나지만 참여했던 사람들은 복합적인 시공간 체험을 하게 되죠. 퍼포먼스는 실시간의 경험이 그 본질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 작업을 확장된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다른 18분이라는 시간을 우연히 모인 타인들과 함께하면서 서로 영향을 받는 우연적이고 인간적인 현상을 경험할 수 있지요. 사람 사이에 오가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작용을 사진에서든 행위에서든 드러나는 것들을 찾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된 프로젝트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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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woo Chung, 18X1 Minute
Video based on performance, 2004

 

 


‘Happy journey’에서는 작품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작가님이 관찰하는 상황이 있었어요.


뭄바이에서는 사람들이 정말 저를 많이 관찰하더라고요. 현장에서 작업하는 동안 제 얼굴을 스케치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동아시아 사람들이 드물다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가 누군가를 관찰한다고만 생각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도 항상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는 것 같아요. 티 안 나게 애쓰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관찰하고 타인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경험하죠. 그래서 항상 상호관찰자들인 거예요.


불특정한 참가자들과 같이 작업을 진행할 때,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나요?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특별한 묘수는 없어요. 그저 당신과의 소통을 진정으로 원한다는 메시지를 조용히 느끼게 하고, 내용을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예를 들어 중국을 오가며 프로젝트를 할 때는 소통은 거의 못 하더라도 중국어를 계속 배웠어요. 그 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려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제가 자신들과 소통하려 하는 조금 귀여운 모습을 엿보게 하려는 의도거든요. 그러다 보면 그래도 잠시 여행하는 사람보다는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더 보는 거죠. 어딘가 불쑥 찾아가 작품의 목적을 위해 그들의 삶을 리듬을 훼손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의식은 늘 갖고 있어요.


‘달리기 Run-Left or Right’에서는 노숙자의 참가가 가장 기뻤다고 쓰셨어요.


퍼포먼스를 진행하던 서울역 광장에 원래 노숙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항상 왜 저 사람들은 제외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는데, 그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사정에서든 거기 와 있을 것 아니에요. 이분들이 퍼포먼스가 완성되어가던 저녁 때가 되니까 모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대부분 자기들이 배제되는 것에 더 화가 나서 방해를 하고 스텝들은 그 사람들을 끌어내는 식으로 공공 행사들이 이루어지는 걸 직간접적으로 봤거든요. 처음에는 계속 방해했어요. 그러다가 그분들도 참여하시라 권했더니 조금 당황하더라고요. 참여 전제가 ‘누구나’ 인데 왜 안 되겠어요. 그래서 함께 달리며 참여하고 주변 사람들은 손뼉도 쳐 주었는데, 자신도 무언가 역할을 부여받아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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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말들 Die unsichtbaren Worte’도 독일에서 에너지공사, 시 당국과 온갖 협의를 거쳤죠. 힘든 협의 과정을 거쳐 작업을 계속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필연성이라고 할까요? 운이 좋게 미술관이나 재단에서 제가 평소에 관심 있던 주제로 작품 의뢰를 하면 고맙죠. 하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행운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요. 이것이 저에게 필연적이지 않다면 예산이나 계기들이 맞지 않은 채 2, 3년 있다가 흐지부지될 텐데, 몇 년이 지나도 그 에너지가 살아있으면 그건 반드시 해야 해요. ‘Thousands’도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예산이 많이 드는 프로젝트였고, 한,중,독 3개 국가의 여러 후원이 필요하고 또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함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요. 하지만 저한테는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던 거였지요. 대부분은 편지 쓰고 기다리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에요.


정부나 다른 곳과 협상을 오래 해야 했던 다른 작품은 무엇이 있나요?


‘Perfect Relay’는 18개국 어린이가 참여하는데, 촬영과 퍼포먼스는 며칠 안 걸렸어요. 리서치와 편지 쓰고 동의를 기다리는 과정이 길었죠. 심지어 일본문화원에는 직접 가서 일본인 공보관에게 제 목적을 설명해야 했어요. 지인들을 동원하면 더 쉽지만 저는 가급적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여러 정책의 책임자들이 간접으로 퍼포먼스를 경험하게 하려 하는데, 그런 과정은 기다림이 길죠. 돌이켜 보니 정말 편지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중요하더라고요.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걸 서로 확인했을 때 작품이 비로소 시작돼요. 오래 기다리고 결정된 만큼 더 안정감이 있어요. 급하게 이루어진 것들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루어져야 할 일이면 이루어진다고 믿어요. 지금도 어딘가에 편지를 쓰고 기다리고 있어요.


후회가 남는 과정은 없었나요?


작업 자체에 대해서 아쉬움은 있어도 후회는 별로 없는데, 후회보다는 양심의 가책이 남아요. 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나게 했는데 그 사람들과 인연을 다 가져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떠오르면 가끔 밤잠을 설칠 때가 있어요. 참여자들이 저에게 연락해오기도 하는데, 모든 연락에 답변은 못 하지만 대신 다른 작업을 통해서 이분들에 대한 나름의 응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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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들


‘공공미술의 개념이 ‘장소’의 개념에서 ‘시간’의 개념으로 변해’(86쪽)가는 게 다행이라고 쓰셨어요. 어떤 뜻일까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공공장소에 놓인 작품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공유를 해야 하잖아요. 동시대의 통념, 감수성과 소통해야 하는데 돌이나 강철과 같은 물성으로 한 장소를 차지하면 소수의 명작을 제외하고는 수십 년, 수백 년간 소멸이 없고, 소멸이 없으면 공간의 새로운 가치가 생성되지 않죠. 도시마다 중요한 광장에 조각과 동상이 있는데, 언제까지 둘 수 있을까요? 기획자와 작가들도 문제의식을 많이 느낄 거고요. 그래서 설치기간을 정해둔 일시적인 조형물이나 퍼포먼스도 공공미술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거죠. 제가 가고자 하는 언어의 방식과도 맞고요. 조형적이고 물성적인 걸 통해 궁극적으로는 공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데, 고정된 조형물을 통해서만 울림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들이 긴 울림을 줄 수도 있어요.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주제가 바뀐 게 있을까요?


근본적인 관심사는 크게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초기에는 인간의 고유함과 다양성에 더 관심을 가졌어요. 지금도 당연히 유효하지만, 많은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하고 나이가 들면서 인간의 근본적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경험해요. 언어와 삶의 방식이 달라도 뭔가 비슷하고 연결되는 게 있어요. 사회의 통념이나 규율 속에서 정해준 역할 외의 것을 하면 딴짓한다고 하거나 그 가치를 무게 있게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가 내면에 가진 게 그렇게 작은가요? 산업화된 효율적 가치 바깥의 영역에서 잠재적 감성을 확인할 기회가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제 작업을 통해 이 영역을 제공해 주고 인식하지 못하던 인간의 인간다움이 드러나는 작은 기회, 각자의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는 영감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작가이자 교수이기도 하시죠. 가르치면서 중점을 두는 게 있나요?


예술을 가르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교수는 조력자 역할을 하는 건데, 모든 학생들에게 숨겨진 고유성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각자 가진 가장 강한 목소리를 학생들과 협력하여 찾는 게 제 수업이에요. 보통 예술 하면 재능 있는 사람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장인적이고 수공예적인 시대의 개념이고, 필연적 의식과 성실함이 있다면 지금은 굉장히 많은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중요하고,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죠. 학생들은 제게 무언가 완성도 있는 결과를 보여주려 하지만, 저는 과정과 결과를 50:50으로 봐요. 실패한 결과물과 성실한 과정을, 성공한 결과와 엉성한 과정보다 더 높게 인정해요. 테이블 위의 결과물보다 가방이나 폰 속에 담긴 잡다한 재료들에서 핵심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 맥락을 찾는 토론을 하지요. 학생들 역시 저를 관찰하기에 제가 작업을 지속하고 고민하는 걸 보여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교육이라고도 생각해요.


작가, 사진가, 교수 등 여러 직함을 갖고 계신데요. 직업적으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걸 명함에 넣게 될까요?


이름만 넣으면 좋겠는데 꼭 필요하다면 작가라고 넣어야겠지요. 부족하나마 스승이 될 수 있는 전제니까요.


앞으로 준비하는 기획이 있나요?


올해 6월에 핀란드에서 발표되는 작업을 지난해부터 준비하고 있어요. 자연 속에서 가장 전형적인 새들의 소리를 조류학자와 같이 수집해서 헬싱키 앞바다 섬 공간에 설치하고 사람들이 새소리를 듣고 상상해 그리는 작업이에요. 오랫동안 느꼈던 것 중 하나가 세상에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듣는 사람은 점점 없다는 거예요. 이 작업은 인간과 자연 관계에 관한 이야기인데, 사실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역설이죠. 자연 안에서 그 자연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도 들어있으니까요. 또 하나는 오는 3월부터 광화문 일민미술관과 광장에서 시작되는 새 퍼포먼스와 설치가 있어요. 광장에 스피치 부스가 설치되고 전시기간 동안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 말들천경우 저 | 현대문학
지금까지의 작품 모티프에서부터 작품 제안의 준비, 진행 과정에서의 다양한 에피소드, 참여자들과의 시간 그리고 그 후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간 꺼내놓을 기회가 없었던 퍼포먼스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가 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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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모델 오지영 “글쓰기가 제겐 명상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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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이 있어 글을 썼다. 소소한 일상과 오래 품고 있던 기억이 글의 재료가 되었다. 쓸수록 자신과 친해지는 느낌이었다. 글쓰기가 ‘명상’ 같다는 모델 오지영. 1세대 탑모델로 이름을 알린 그가 파리와 밀라노를 누비던 시절부터 싱가포르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사는 지금까지 꾸준히 글을 쓰는 이유다.

 

여러 개의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따뜻하고 희망적인 글들은 아침 나절에, 조금 슬펐던 기억의 글들은 늦은 오후나 밤에 썼다는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나의 마음이 이리 바뀐다는 것도 글을 쓰며 알게 된 것이니 글을 쓰며 내 자신에 대해서 배우기도 한다. (281쪽)

 

오후 2시, 이태원에서 만난 오지영은 인터뷰 두 개를 끝내고 에세이집 『소소하게 찬란하게』 의 북토크를 앞두고 있었다.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조금 피곤하다던 그는 내내 웃었고 딱 한 번 눈물을 보였다. 서른 즈음부터 15년간의 이야기가 담긴 그의 첫 책을 앞에 두고 네 번의 이별과 글쓰기, 싱가포르에서의 일상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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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품고 있던 이야기  

 

최근에 한국에 오셨다고 들었어요. 얼마나 됐나요?


사흘 됐어요. 내일 다시 싱가포르로 가요.

 

바로 친구들을 만나셨더라고요. 친구들이 SNS에 후기를 많이 남겼던데 끈끈한 관계 같았어요.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같이 고생하면서 일했던 사람들이라 유대감이 있는 것 같아요. 과거에 제가 활동할 때만 해도 모델 일이 넉넉하지 않았거든요. 다들 유명해지기 전에 만나서 그런지 오랜 친구 같기도 하고요. 도와주고 싶고, 좋은 일 있으면 축하해 주고 싶고, 무언가를 이루면 감동이 커요. ‘내 친구가 책을 냈어’라면서 본인들이 더 감동하더라고요. 

 

‘글을 쓰게 된다면 수필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꿈이 이뤄진 셈이에요. 소감이 어떤가요?


신기해요. 평소에 끄적거린 글이 묶여서 책으로 나왔는데 반응이 좋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행복해요. 아무래도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서 홍보가 잘 된 것 같아요.

 

긴 시간의 이야기가 담긴 것 같았어요. 언제 쓴 글인가요?


대략 서른부터 15년간 쓴 글을 모았어요. 싸이월드에서 쓰다가 페이스북에도 쓰고 그랬죠. 페이스북에 있는 글을 보고 책을 내자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때는 아이들 키우느라 바빠서 엄두를 못 냈어요. 30%는 예전에 쓴 글이고요. 새로 쓰거나 예전에 쓴 글에 내용을 덧붙이고 수정한 글이 70%에요.

 

30%를 엄선하셨겠네요. 


다시 봐도 좋은, 그때의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는 글들을 골랐어요. 예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는 이야기만 썼기 때문에 고르기 어렵지는 않았고요. 이야기가 시간순으로 흐르는 게 아니어서 반응이 나뉘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시간이 왔다 갔다 해서 헛갈린다고 하고, 반대로 어떤 분들은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아서 좋대요.

 

한창 바쁠 때부터 글을 썼어요.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썼어요. 쓰고 싶어서 썼는데 주변에서 읽고 좋아해 주니까 더 써보기도 했고요. 글을 쓰면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도 생기더라고요. 명상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가족들이 책을 읽었나요?


한국에 있는 언니들한테는 줬고요. 싱가포르에 있는 식구들은 아직 못 읽었어요. 아이들이 한국어를 할 줄은 아는데 책을 읽을 정도는 아니라서요. 나중에 커서 한국어를 더 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읽게 될 것 같아요. 언젠가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 감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하고요.

 

아이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요.


궁금해하죠. “엄마가 너 되게 못됐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적었어”라고 장난치면 “진짜야?” 하면서 같이 웃고 그래요.

 

프랑스인인 남편도 이 책을 읽기는 힘들겠네요.


그렇죠. 책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웃다가 갑자기 진지해져요. 한국에 가면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아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요. 그래서 앞으로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책에 뭘 썼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나쁜 건 안 쓰고 좋은 건 썼다고 하면 그냥 ‘하하하’ 웃어요.

 

내밀한 이야기를 쓰면서 주저하지는 않았나요?


솔직하게 썼어요. 제가 가진 환경의 장점 덕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문신 이야기나 술, 담배를 끊은 이야기, 남편 이전에 만난 남자 이야기를 한국의 평범한 기혼 여성이 쓰기는 쉽지 않잖아요. 시부모님도 있고, 남편이나 주변 사람의 눈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저는 거기서 비교적 자유롭잖아요. 남편이 프랑스 사람인 데다 과거 이야기를 마음에 담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시부모님도 한국 시부모님보다는 편하니까 조건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제 이야기를 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만한 이야기이고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거니까 편하게 썼어요. 다만 읽는 분들이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하기는 했죠.  

 

가까운 사람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더 못 하기도 하잖아요. 언니들한테 책을 보여주기 쑥스럽지는 않았나요?


그러지는 않았어요. 책을 보낸다고 했더니 언니가 ‘내가 아는 내용이지 뭐’ 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책을 받고 나서는 너무 슬퍼서 못 읽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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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아이를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짧은 기간에 네 번의 이별을 겪으셨다고요. 정확히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인가요?


1년 반 정도요.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고 다음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돌아가신지  4개월만에 아빠가 가셨고요. 그다음에 반려견 ‘랄라’가 갔죠.

 

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짧네요.


네. 다들 건강했는데 갑자기... 아, 왜 눈물이 나지? (웃음)

 

잠깐 쉬었다 할까요?


인터뷰하면서 운 적 없었는데 여기 조명이 너무 은은해서 그런가 봐요. (웃음) 다른 건 괜찮았는데 기간을 물어본 건 처음이어서…

 

질문이 불편하셨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좋아요.

 

이별 이야기의 비중이 큰데 ‘짧은 기간’이라고만 나와서 얼마나 짧았던 건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싶어서 정확한 기간이 궁금하더라고요.


사실 글을 쓰면서 많이 울었어요. 10년이 넘은 일들이지만 슬픔이 흐려질 뿐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파고 들어가면 나오니까요.

 

상실을 경험하고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뭘까요?


원래 결혼하고 싶다거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달라졌어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너무 힘들어서 말도 잘 못 하겠는데 언니들은 아이들 때문에라도 웃고, 자기 생활을 하더라고요. 가정이 필요하구나 싶었죠. 남자친구한테도 아이 키우고 집안일 하느라 힘들어서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바빠지고 싶다고, 북적북적하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임신하고 입덧할 때 엄마 생각이 가장 간절했다고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후회하는 분들 많잖아요. ‘이것도 해드릴 걸, 저것도 해드릴걸’ 하고요. 저는 후회보다 떼를 부리고 싶었어요. 이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나이 먹고 다른 사람한테 그러면 큰일 나죠. (웃음) 임신했을 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입덧을 8개월 했어요. 배 속에 있을 때보다 아이 낳고 힘들어하는 엄마들이 많은데 저는 낳으니까 살 것 같더라고요.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면 나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잖아요.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물론이죠. 계획도 세웠어요. 남편한테 유서를 준비해 놓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고요.  남편하고 자주 이야기하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조심스러워요. 만약 내가 죽으면 또는 당신 죽으면 어떻게 하자고 말하는 게 웃기잖아요. 말하기 힘든데 그래도 솔직히 말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지만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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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로만 보지 않으면서 아이임을 잊지 않기 

 

결혼과 동시에 싱가포르로 이주하셨다고요. 싱가포르에서의 하루는 어떤가요?


잘 안 나가고 집에 있는 편인데요. 아침에 일어나면 밖이나 집에서 필라테스를 해요. 그러고 나서 빵을 만들죠. 매일 하는 건 아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구워요. 하나 만들면 2, 3일 먹거든요. 그다음에는 글을 쓰거나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만드는데 그러면 하루가 정말 빨리 가요. 4시에 아이들이 오면 그 이후로는 저녁까지 쭉 바쁘죠.

 

일정이 빡빡하네요. 싱가포르에서의 일상을 궁금해하거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죠?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을 보고 일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얼마 전에 조카가 싱가포르에 와서 한 달간 있었거든요. 한국에 가서 언니한테 ‘이모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만 한다’고 했대요. 언니가 ‘왜 그렇게 사냐’고 하더라고요.(웃음) 조카가 보기에는 이모가 종일 바쁘게 움직이니까 불쌍해 보였나 봐요. 이렇게 다른 거 같아요. 제 일상을 동경하는 분이 있고 가까이서 보고는 저렇게는 못 살겠다 하는 분들도 있고요.

 

SNS나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뭔가요?


다이어트나 운동 비법이요. 채식 관련 질문도 많이 하세요. 채식하면 뭐가 좋은지 물어보시더라고요.

 

술, 담배, 커피를 어렵게 끊었다고요.


커피는 가끔 마셔요. 오늘 아침에도 마셨어요. 여행을 가면 유독 먹고 싶어져서 디카페인으로 마셔요. 스트레스가 가장 안 좋잖아요.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것보다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에서 하려고 해요. 채식도 마찬가지고요. 싱가포르에서는 채식하지만, 한국에 오면 떡볶이 같은 간식도 먹어요. 어제도 책 나왔다고 모여서 샴페인 터트렸는데 안 마실 수 없잖아요.(웃음) 한 모금 마셨죠. 

 

생활 방식을 바꾼 계기가 있나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나이가 드니까 자연스럽게 건강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나이 들면 영양제, 건강식품 챙겨 먹잖아요. 관심이 많아서 의학, 해부학 관련 책도 많이 읽었어요. 요리를 좋아해서 영양학 관련 책도 자주 읽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공부하면서 알게 되니까 바뀐 것 같아요.

 

동생과 싸우고 엄마한테 서운해하는 딸에게 본인의 감정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말해주는 일화가 인상적이었어요. 혼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이를 아이 취급 안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써요. 프랑스 사람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가령 집에서 정치, 경제 이야기할 때도 아이들을 배제하지 않아요. ‘너희는 아이이고, 우리는 어른이야’라는 경계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엄마로서 가르쳐야 하는 것도 있지만, 가능한 강압적이지 않게 하려고 해요. 물론 늘 되는 건 아니에요. 노력하고 있어요.

 

아이를 아이 취급하지 않으면 어떤 점이 좋나요?


아이라고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명령조로 말하게 돼요. 명령조로 말하면 아이도 반발심이 생기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안 하게 되고요. 아이로만 취급하지 않되 아이임을 잊지 않아야 해서 어려워요.

 

엄마가 되고 새로 알게 된 내 모습이 있나요?


인내심이요. 엄마가 되면 인내심이 가장 필요해요. 자신을 버리면서… (웃음) 나도 성질 있는데 성질난다고 나는 대로 내면 안 되잖아요. 다 받아줘야 할 때도 있고요.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어요. 나를 다 주면서 커지는 사랑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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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유튜브에서 ‘바닐라 TV’를 방송 중이에요. 직접 만드시나요?


직접 촬영하고 편집해요. 편집을 배우면서 하고 있어서 제작 시간이 오래 걸려요. 한 달에 한두 편밖에 못 올려요.

 

개인 방송을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요. 빵 만드는 법이나 요가 알려달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다 알려드리고 싶어요. 도움이 됐다고 하면 뿌듯하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저는 주부잖아요. 다른 사람하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환경 이야기도 하고 싶고 어떻게 플라스틱 줄일 수 있는지, 생리컵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다 보여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책도 좋아하신다고요. 어떤 책을 즐겨 보나요?


요리책 많이 봐요. 영양학 관련 책이나 요가책도 자주 보고요. 에세이도 좋아해요.

 

최근에 좋게 읽었던 책은요?


일단 피천득 작가 책은 늘 옆에 있어요. 제일 좋아하는 작가고요. 헬렌 니어링의 책도 자주 보는 편이에요.

 

모델, 요기, 작가 등 오지영을 수식하는 말이 많아요. 혹시 새로 도전하고 싶은 영역이 있나요?


채식과 환경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소수가 비건이 되고 환경운동가가 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고기를 적게 먹고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는 게 환경에 더 도움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채식해야 해!, ‘플라스틱 줄여야 해!’가 아니라 ‘좋으니까 같이 하자!’고요. 이런 이야기가 각자의 생활 방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인터뷰 끝나고 첫 북토크를 하는데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오늘 아침부터 일정이 있었거든요. 솔직히 조금 피곤한데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에요.(웃음)  그래도 오신 분들께 정말 고마우니까 잘해야죠. 사랑이 보일 수 있는,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소소하게 찬란하게오지영 저 | 몽스북
가장 빛나던 순간에 가장 아팠으며 가장 큰 기회가 왔던 때에 그 기회를 애써 잡지 않았다. 인생 중반부가 되어 돌아보는 지금, 감추고 싶지도 포장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의 토막들을 조심스럽게 꺼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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