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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플로우 “결국엔 남에게 들려주는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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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만 해도 딥플로우는 EDM만 흘러나오던 '홍대 놀이터 옆 코쿤 사거리'에서 호스트 MC로 일하며 힙합과 함께 생존하고자 외로이 투쟁하던 래퍼였다. 4년 후 그는 이 파토스를 인생 전체로 확장한 <양화>를 발표하며 한국 힙합의 중심에 섰다.

평단과 대중의 찬사, '당산대형'이라는 굳건한 페르소나 구축, '작두'. 그러나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Crew에서 Company, 두목에서 사장님”('대중문화예술기획업')의 훈장을 얻은 것은 쾌거였으나 거리를 두던 예능 프로그램 출연 후로는 '배신자'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감수해야 했다.

변화 속 자신을 돌아본 <FOUNDER>로 딥플로우는 <양화> 이후 지난 5년의 시간을 술회한다. 사업가, 래퍼, 아들, 레이블 대표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펼치며 그간의 질문에 시간의 무게로 답을 한다. 서교동 비스메이저 컴퍼니(Vismajor Company)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그는 거듭 '내 이야기'를 힘주어 언급했다.



<양화> 이후 5년 만의 정규작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양화> 이후 정규 음반을 계속 내야겠다는 의무감이 없었어요. “아이디어가 생기면 내야겠다”하는 막연한 마음만 있었죠. 방송 나가고 '다모임' 활동도 하면서 창작욕이 일부 해소된 것도 있었고요. 그러다 정규작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겼고, 3년 전부터 작업을 시작해 약 2년간 과정을 거쳐 앨범을 발매하게 됐습니다.

발매가 늦어진 데 다른 이유는 없었나? 그 해 <양화>에 쏟아진 엄청난 반응을 의식했다거나.

순전히 제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사장인데요 (웃음). 컨펌받을 사람도 없고 앨범 내라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20대 초부터 랩을 했으니 거의 20년 가까이 한 셈이라 언제든 제가 만들 수 있을 때 앨범 단위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죠.

모든 작품은 아티스트가 살아가는 환경, 시대와 충돌하며 빚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특히 <FOUNDER>처럼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앨범이라면 더욱 그렇다. <양화> 이후 5년 동안 딥플로우에게도 그런 사회적 화학 작용이 분명 있었을 텐데.

<양화>는 30대 초반의 제가 20대 초부터 30대 초까지의 삶을 담은 앨범이었죠. 발매 당시엔 “나는 내 할 말을 다 했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분명 화학 작용이 있었죠. 변화에 휩쓸리기도, 뛰어들기도 하면서요. 그렇게 제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앨범 아이디어를 구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노래 제목만 보면 거의 경제학 앨범이다. 그것도 슬픈 경제학. 앞서 언급한 화학 작용의 결과임이 분명해 보인다.

앨범을 만들며 제 이야기, 제 변화에 집중했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이 작품은 변명이 되겠구나 싶었고, 그래서 '이 앨범은 VMC 식구들에게 하는 말, VMC 식구들에게 헌정하는 앨범' 이라는 점에 집중해서 작업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제 힙합은 거리의 메시지가 아니라 '나의 메시지'를 담는데 집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앨범도 그런 현상을 잘 대변하는 작품으로 들리고.

최근에 젊은 친구들이 가져오는 음악을 들어보면 정말 '음악', '즐거움'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더라고요. 가사를 쓸 때도 메시지보다는 테크닉과 소리의 차원에서 단어를 활용하고요. 힙합의 시대정신이 바뀌고 있다는 건 몇 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가치 판단을 하는 건 아니에요. 이런 시대가 됐고, 저도 최근에 즐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친구들은 그런 음악을 하고, 저는 제 음악을 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중이에요.



<FOUNDER>는 <양화> 이전부터 이후의 오랜 시간 경과, 아주 어려웠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담아낸 앨범이다. 사운드도 고전 소울을 가져오며 그 느낌을 의도한 것처럼 들리는데.

우선 제가 샘플링을 좋아해서 과거 음악을 많이 들었습니다. 누구 노래인지,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고 그냥 많이 들었어요. 소울, 재즈, 펑크(Funk), 블루스 등등 처음에는 샘플을 따기 위해 듣던 음악이 어느 순간 엄청난 라이브러리로 쌓이고, 제 취향으로 굳어지게 됐죠. 어디 가서 분위기를 내기 위한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면 저는 꼭 소울 음악을 틀거든요. 그러던 와중에 '그냥 가져오는 것보다, 내가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영화 '파운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듯 영화는 과거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마틴 스콜세지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맞아요. 스콜세지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소울 음악을 선택한 것도 영화 느낌의 톤 앤 매너를 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어요. 앨범 커버도 고전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 풍으로 그렸고, 그런 영화의 사운드트랙 같은 노래를 만들고자 했죠. 프로듀서에게 <FOUNDER>가 영화처럼 들렸으면 좋겠다고 주문했어요. “영화 같은 걸 해야 해!”, 아예 “OST처럼 들렸으면 좋겠어.”라고도 말했어요.

앨범을 지휘한 프로듀서 반루더(Van Ruther)는 <양화>를 프로듀싱한 티케이(TK)와 동일 인물이다. 전작과 완벽히 다른 장르와 밴드 셋, 트랙을 만들고 랩을 얹는 과정이 모두 새로웠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

반루더가 다했죠 (웃음). 원래 반루더는 건반으로 작업하는 친구, 피아노맨이에요. 그래서 처음 가져온 곡들은 피아노 기반의 느낌이 강했어요. 저는 마초적인 느낌을 담기 위해 기타를 넣어달라고 강력 주장했죠. 그래서 기타 위주로 테마를 짰어요. 그러면서 록처럼 들리진 않았으면 좋겠고…. 반루더가 이번 앨범의 장르와 사운드 감을 잡기 위해 제 취향의 음악을 듣고 공부하며 백여 곡 정도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미디로 곡의 뼈대를 잡아 비트를 만들고 그 위에 제가 랩을 녹음한 후 세션 작업을 진행했어요. 랩 이후엔 제가 거의 관여를 안 했어요. 제가 어려울 건 없었어요. 반루더가 어려웠죠.

앨범에는 1970년대 스택스 레코드(Stax Records)과 멤피스 소울, 마빈 게이, 필리 소울 등 다양한 스타일이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Blueprint'의 경우 모타운의 느낌도 나는데.

맨 마지막 트랙이라 특별히 모타운 스타일을 강하게 주문했어요. '커튼콜' 같은 인상을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녹음에 들어가니 이미 BPM이 80 중반대로 고정되어 있었죠. 랩 녹음을 바꿀 수도 없고, BPM을 바꿀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의도했던 것처럼 나오진 않았네요(웃음).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힙합에 가까워졌죠. 블루 매직(Blue Magic) 풍의 필리 소울 풍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멋지지만,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의 시카고 사운드 풍 곡이 하나 있었다면 어땠을까. .

그 생각도 했는데 예제가 너무 많았어요. 프로듀서가 자기가 구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선택을 한 거라고 봐요.

4월 21일 앨범 세션 밴드 프롬올투휴먼과 함께 '네이버 NOW'에서 <FOUNDER>의 곡들을 라이브로 선보였다. 인상적인 무대였는데, 어렵지는 않았나.

오케스트라 같은 대형 무대를 꾸린다면 모를까 지금은 크게 어렵진 않아요. 의도적으로 MR로 하는 라이브는 거절하고 있습니다.

작사에 시간이 걸렸을 줄 알았는데 사운드 차원에서 작업이 오래 걸린 인상이다.

가사는 6개월 만에 다 썼어요. 제게는 빠른 페이스였죠. 주제가 워낙 명확한 콘셉트 앨범이었고, 트랙리스트를 미리 만든 다음 가사를 썼기에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쉽지 않았던 곡, 혹은 가장 공들인 곡이 있다면.

'Low budget'이 녹음하는 데 어려웠던 기억이 나네요. '대중문화예술기획업'은 긴 스토리를 압축해서 들려줘야 했기에 단어 고르는 과정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요. 이외엔 제게는 쉬웠던 것 같습니다. 프로듀서가 앨범을 꾸며주는 후반 작업이 어려웠죠. 가사를 다 쓴 건 작년 6, 7월이었는데 발매는 올해 4월이었으니까요.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Big deal'의 랩이 마음에 듭니다. 'VAT'도 좋고요.



한때 딥플로우는 <쇼미더머니>로 대표되는 미디어와 힙합의 유착 관계에 반감을 숨기지 않은 대표적인 래퍼였다. 많은 래퍼들이 방송에 출연해 유명세를 얻고 인기를 누리는 와중에도 그는 “그게 내가 양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불문율')”라 일갈하며 “진짜 어울려 딥플로우와 힙합 말이야”('잘 어울려')라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우리는 TV에 나온 딥플로우, <쇼미더머니>에 나온 딥플로우, '언프리티 랩스타'에 나온 딥플로우의 모습을 목격했다. '변절자'라는 비판, 변화의 흐름에 대해 딥플로우는 “지금은 제가 한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담담히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록과 힙합 모두 마찬가지지만 일종의 '저렴한 순수성'이란 게 있다. 미디어 출연, 거대 자본과의 협력은 곧 타락으로 보는 시각이다. 최근 딥플로우는 그 순수성 부분에 있어 가장 논쟁이 되는 래퍼다.

과거에는 이런 여러 활동을 하면 순수함에 위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직도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도 TV 출연 자체가 무조건 배신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저렴한'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대중음악은 대중 상대로 설득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그 설득의 방법 중 하나가 TV 출연이고. 어떻게 보면 본인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미디어에 자신을 노출하는 건데 '순수성'을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비판의 대상이다.

<쇼미더머니>를 예로 들자면 그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 힙합 신에는 분명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았고, 저도 동일한 생각이라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게 <쇼미더머니>를 넘어 '아예 미디어에 나오면 안 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되더라고요. 물론 제가 한 말이 달리 해석되고 퍼지는 걸 다 주워 담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제 생각은, 우리의 활동이 백 퍼센트 순수 창작예술이라면 저만 듣고 만족하면 되겠지만 결국엔 남에게 들려주는 대중음악이잖아요. 이제는 사실 제 음악을 알리기 위해 계단을 한 발 딛느냐와 열 발 딛느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그런 시각이 딥플로우를 언더그라운드라는 공간에 가둬놓는 것은 아닐까.

'딥플로우는 붐뱁을 추구한다', '딥플로우는 언더그라운드의 수호신이다'…. 그런데 제가 기자 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낼 수도 없잖아요(웃음). 흘러가게 놔두는 편이죠.

<쇼미더머니>에 대한 생각은.

결과론적으로는 사람들에게 힙합을 많이 알렸죠. 방송 당시엔 몰랐지만, 대략 10년이 지난 지금 보니 새롭게 랩을 하고 힙합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졌을 뿐더러 그들에게 <쇼미더머니>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래퍼들에게 독과점화 된 플랫폼 등 부정적인 영향도 있어요. 하지만 시대는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 대거 등장했던 한국 힙합 래퍼들이 현재 3, 40대에 접어들며 과거를 회고하는 듯한 메시지가 두드러지고 있다. “30대 꺾인 래퍼 라인업”으로 출발하는 '36 dangers' 역시 의미심장하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게 얼마 되지 않았어요. 다모임 활동을 하면서 묘한 연대감을 느꼈죠. 저도 VMC에서 보일링 프로젝트(Boiling Project)를, 더콰이엇은 랩 하우스(Rap House)를 진행하며 각자 나름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다가왔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그냥 각개전투였다면, 이제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다음 세대에게 줄 영향을 결정한다'는 생각이죠. 나비효과처럼요. 자아성찰을 많이 하게 돼요.

딥플로우의 랩은 과거부터 20대 초중반에서 흔치 않은 묵직한 플로우와 음색을 갖고 있었다. 30대의 이야기를 하는 <FOUNDER>에선 '넉넉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본인의 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제 주위 사람들은 워낙 제 랩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익숙해해요. 사실 항상 궁금하거든요. 사람들이 내 랩을 어떻게 생각할지, 내가 랩이 어떻게 들릴지를요. 모니터링 과정에서 워낙 좋아해 주는 친구들도 있지만 힙합을 많이 접하지 않은 분들은 제 스타일이 지루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그게 내 랩의 단점이구나' 싶을 때도 많아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분야는 무척 많은데, 하나의 모드로 굳어져 있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그런 점들을 밀도 있게 잘하고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웃음).

마지막으로 <FOUNDER> 이후의 딥플로우를 전망한다면.

사업가 딥플로우와 래퍼 딥플로우 모두 연결이 되어있어요. 활동 없이 경영만 하면 제가 회사의 핵심 인물이라 사업이 안 될 거고, 그렇다고 활동 안 하고 경영만 할 수도 없죠.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하며 VMC의 생명을 유지하는 게 목표입니다.



딥 플로우 (Deepflow) 4집 - FOUNDER [일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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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플로우
Stone Music EntertainmentV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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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베스트셀러 에세이의 비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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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독자들을 만난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김수현 작가가 4년 만의 신작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를 출간했다. 솔직하고 발랄한 글로 베스트셀러를 만든 작가는 이제 “어떤 순간에도 만만하지 않은 평화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번 신작은 나를 지키면서도 갈등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간관계 처방전’이다. 김수현 작가는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는 관계와 균형에 관한 책이다. 어떻게 관계를 맺고, 마음을 표현하며, 상대를 사랑해야 하는지 오랜 고민의 결과를 담았다”며, “모두에게 정중하되, 누구에게도 쩔쩔매지 않는 사람이 되어 보자”고 말한다. 다섯 번째 에세이를 쓴 김수현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나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

전작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2016년 11월 출간작입니다. 4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후속작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음. 제 책은 한 주제에 대해서 짧게 짧게 다루다 보니, 한 권 분량의 소재를 채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래서 1년 정도는 어떤 이야기를 쓸지 고민을 했고,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자 결심한 뒤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관찰을 많이 했어요. 본격적인 작업 기간은 1년 정도 걸렸는데요. 절반은 관련된 책들을 공부하면서 지냈고, 나머지 절반은 열심히 썼죠. 지나고 보니 딱 적당한 기간이었던 것 같아요.

신작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의 제목은 어떻게 정해졌나요?

원고 중반에 가제로 삼았던 제목인데요. 약간 밋밋한 제목일수도 있지만, 책에서 가장 전하고 싶은 이야기라서 다른 건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집단지성의 힘을 믿고 투표한 결과가 결정적이었지만요.

이번 책의 주제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국 님이 힌트를 주셨나요?

저는 좀 솔직한 편인데요. 장단점이 있는 성격인데,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아요. 그러다 보니 남들도 저 같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인간관계를 굉장히 단순하게 생각했고,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30대가 되고 알게 되었어요.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이 지당한 명제가 저의 고민의 시작이자 책의 발단이었죠. 그리고 질문해주신 정국님은 동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제 세계관에 영향을 많이 줬고, 책의 방향성에도 큰 힌트가 됐어요.

책을 보니, 독자와의 만남에서 소재를 많이 찾으셨더라고요. 독자와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로서 배우는 부분도 많았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네. 맞아요. 책 출간 이후에 강연할 일이 있었는데, 질의응답 시간이 전 굉장히 좋았거든요. 다양한 연령대, 직업, 환경에 있으신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어요. 이 때 들려주신 관계에 대한 질문들이 책에 정말 큰 영향을 줬고, 실제 사례로도 많이 등장했죠. 제가 쓰는 장르가 에세이다 보니 극단적이고 병리학적인 문제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고민들이 더 궁금한 것 같아요.

참고한 도서가 많더라고요. 요즘도 사회학, 심리학 도서를 주로 읽으시나요?

책을 준비하면서는 정말 많이 읽었어요. 책에 첨부한 참고 도서는 직접 관련된 책들만 추린 거라 실제로는 더 많이 읽었죠. 읽을 때마다 요약본을 만들어서 공부하듯이 봤어요.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는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싶었어요. 해당 분야의 비전문가가 접할 수 있는 내용은 이제 거의 접한 거 같다고 할까요. 사회학, 심리학 책 대신 최근에는 명상이나 종교 철학, 영성에 관한 책들에 관심이 생겼어요. 저는 결국 사람이 궁금해요. 사회학이 사람을 거시적으로 바라본다면, 심리학은 미시적으로 바라보는데요. 요즘은 심연에 있는 정신적인 부분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32쪽을 보면 사이다 발언이 나옵니다. “나 너 마음에 안 들어”라는 말에 “어머 나도”라는 답이 나오죠. 혹시 작가님의 경험이실까요? 

(웃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았네요. 면전에서 “나 너 마음에 안 들어” 정도의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없다 보니, 그런데 속으로 그런 생각은 했어요. ‘누가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그러면 마음이 작아지잖아요. 그럴 땐 내가 그 상대보다 약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누가 나를 괴롭히면 나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는 거죠. 네가 나를 미워하고 싶다면, 내가 너를 미워할 것도 감수하라는 마음. 너무 방어적일 필요는 없지만, 마음이 작아질 땐 이런 마음도 필요한 것 같아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번역이 많이 되었죠. 총 몇 개국인가요? 해외 독자들의 반응도 알고 계신가요?

판권 수출은 8개 국가에서 됐는데, 번역까지 마친 곳은 다섯 곳이에요. 태국, 인도네시아 독자들에게도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지만 가장 많이 연락을 받은 건 일본이에요. 공유하는 문화가 더 비슷하다 보니 공감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제 개인 SNS에 댓글도 많이 남겨주시지만 메시지를 정말 많이 주셨어요. 한국 문화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라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김수현 작가님의 초기작을 아직 모르는 독자들도 있을 텐데요. 2009년에 쓴 첫 책 『100% 스무 살』은 어떻게 나오게 된 책인가요? 

대학교 때 그냥 책을 내보고 싶어서, 짧게 원고를 써서 출판사로 보냈어요. 그냥 해보고 싶은 일이라 해봤는데, 이렇게 직업이 됐네요. 초기작을 좋아해주신 독자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전 굉장히 쑥스러워서 몇 년째 읽는 건 시도도 못 하고 있어요. 모르시는 독자 분들은 모르는 채로 있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하하.

첫 책부터 4번째 책까지 쭉 마음의숲 출판사와 함께 작업하셨는데요. 이번에는 놀(다산북스)와 함께 하셨어요.

아무래도 한 회사에만 다니다 보면 다른 회사가 궁금해지고 그런 게 있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양해를 드리고 새로운 출판사에서 내게 됐어요. 다행히 좋은 팀을 만나서 즐겁게 작업했어요.



글의 힘을 만드는 건 ‘독자’

이번 신작의 표지 그림이나 일러스트는 어떤 생각으로 작업하셨나요? 

작업을 시작하며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의논을 하기도 했는데요.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 됐으면 했어요. 참고로, 단발머리 캐릭터가 저의 페르소나거든요. 전혀 안 닮았지만요. 그리고 반복되는 긴 머리 여자 캐릭터와 남자 캐릭터는 독자의 페르소나였어요. 그림들의 스토리를 보자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제가 독자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안아주는 그런 따뜻함을 바랐어요. 또, 땡스 투나 마지막 장에도 그림을 넣었는데 친밀감이랄까요? 작가가 저 멀리서 떠드는 게 아니라, 정말 나한테 말하고 있는 책이 됐으면 했어요. 

에세이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유시민 작가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글은 손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삶 전체로 쓰는 거라고. 적어도 에세이는 독자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존중과 연민이요. 예를 들면 이번 책에 ‘수고했다’라는 글이 나오는데, 쓰다가 저도 눈물이 났거든요. 얼마나 다들 사느라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책 후기를 보니 그 부분에서 찡했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굉장히 평범한 문장인데 말이죠. 진심인지 아닌지, 독자분들은 다 아시는 것 같아요.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은 사전서평단의 리뷰를 받았습니다. 인상 깊었던 피드백이 있었나요?

사전 서평단의 리뷰는 책이 중간쯤 완성됐을 때 받은 거였어요. 새로운 시도였죠. 원고에 대해서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을 받았는데, 퇴고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리고 완성된 책을 보고 다시 리뷰를 남겨주신 분들이 계신데, 어떤 리뷰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제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주시고, 애정을 담아 써주셔서 마음이 정말 찡했어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스스로 평가하시는지요? 꾸준히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부터 주목받은 책도 아니고, 1위가 됐던 책도 아니었는데, 계속 읽어주시는 건 운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메시지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초반에 의도하고 마케팅을 한 게 아니었는데도 자존감을 높여주는 책이라고 많이 거론을 해주셨는데요. 책에서 다뤘던 열등감이나 초라함, 시선의 압박 같은 감정이 굉장히 사회적인 감정이잖아요. 제 초기작들을 포함해서 기존 에세이가 조금 더 개인적인 위로에 치중했다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경우는 사회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려 했어요. 그 메시지가 필요한 분들이 그만큼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작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우선 더 이상 진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던 거? 1년 반이 걸려서 완성하긴 했지만, 작가로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고, 다 쓰고 나서 생각하자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민하는 게 직업이 됐죠. 가족들도 많이 좋아하고요. 집안에서 회장님이 됐어요. 하하. 고민됐던 부분은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의 평가와 생각에 조금 더 예민해졌다는 것. 그 전에는 더 자유로운 영혼이었거든요. 아이러니하게도 안 그러려고 책을 썼지만, 주목을 받게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이번 책이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가 됐네요.

최근에 재밌게 읽은 에세이가 있나요?

에세이는 아니고 만화인데, 마스다 미리 수짱 시리즈가 새로 나왔거든요. 『나답게 살고 있습니다』초반 부분은 우리 문화에서는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다 읽으니 여운이 남았어요. 그리고 꽤 전에 읽었다가 다시 읽었는데요. 도대체 작가님의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도 좋았어요. 에세이는 따뜻하면서 소소한 피식거림이 있는 책들이 좋아요. 귀엽잖아요? (웃음) 

신작을 어떤 독자들이 읽으면 좋을까요?

글의 힘을 만드는 건 작가가 절반, 독자의 상황이 절반이라고 생각해요. 동일한 독자도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가 중요한데요.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상비약처럼 책장에 꽂아뒀다가 인간관계가 답답할 때, 버거울 때, 편안하지 않을 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위로가 필요한 날, 편안함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김수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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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작가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짜증이 많을까?’, ‘왜 나는 나 스스로를 채찍질할까?’, ‘왜 나는 항상 이상한 사람들과 엮일까?’ 문제의 원인이 ‘엄마’에게 있다는 사실은, 작가 자신이 엄마가 된 후에 알게 됐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내가 평생 엄마를 돌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그러다 우연히 나르시시스트 부모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게 되면서, 자신과 엄마의 관계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 모녀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한 애정이 과도한 ‘자기애성 인격장애(NPD,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지고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나 이타심이 부족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썸머 작가도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것”을 꼽는다. 이들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한다. 아이는 엄마의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한다. 그래야만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이가 따라와 줬을 때는 애정을 주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냉담하게 대하거나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썸머 작가는 나르시시스트 학대에 관해 공부하면서 “점차 내 인생의 진실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2018년부터 유튜브 채널 ‘사이다힐링’을 통해 자신이 공부한 이론과 경험을 나누기 시작했고, 2만 명에 가까운 구독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있다. 네이버 카페 ‘썸머의 사이다힐링’을 통해서 나르시시스트 학대 생존자들을 위한 온라인 서포트 그룹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객관적인 이론, 다양한 사례를 통해 현실적인 조언을 들려준다.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랍니다”라고 말하는 썸머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엄마를 돌봐줄수록 제 내면은 점점 망가져갔어요

가정학대 생존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신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서른이 넘은 시점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조금씩 제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의 여유 없이 정말 치열하게 순간순간을 살아왔습니다. 스스로 참 재미없는 사람, 피곤한 사람이라고 느끼면서요.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치열했던 제 지난 시간들이 무의미한 시행착오와 쓸모없는 감정 소모로 가득하다는 걸요.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열심히 노력했던 거죠.

저 자신이 한심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다고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주 소수의 사람이라도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역기능 가정에서는 ‘집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 밖에서 말하면 안 된다’, ‘다른 집도 다 이렇게 사는데 아닌 척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주입을 받아서 더더욱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타인과 공유하지 못하죠. 그렇기 때문에 객관화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튜브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해외 유튜브 채널을 보며 저 또한 많은 공부를 했는데요. 라이프 코치, 작가, 심리상담사 등 전문가들 혹은 일반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임상 경험을 나열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실제로 어떻게 극복했는지까지 보여주는 모습이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다만, 한국어로 된 자료나 경험은 찾기가 어려웠어요. 영어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양질의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미흡하지만 직접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전에도 ‘우리 엄마는 왜 그러는 걸까?’, ‘나에게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등의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어디에서도 속 시원한 답변을 찾지 못하셨나요? 

지금까지 신뢰할 수 있는 분들에게 저의 고민을 털어놓은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저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려 애썼지만 누구도 저희 엄마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설명해주지 못했어요. 동네방네 저에 대한 자랑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던 엄마가 집에 돌아와 대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집 자식들과 저를 비교하거나 모욕감을 퍼부었죠.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대개는 일시적이었습니다. 한 상담사분은 제게 엄마를 더 이상 분석하려 들지 말라고, 그저 한 시대를 살았던 여성으로서 이해하라고 이야기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묻어둘 수 없었습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와 학대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미국 생활을 하며 자주 다니던 한 커뮤니티에서 희생양(scapegoat, 역기능 가정 내에서 죄책감, 비난, 책임을 짊어지는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개념을 접했습니다. 그 이후 몇 주 동안, ‘역기능 가정’의 구조부터 자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라는 개념까지 쉬지 않고 파고들었습니다. 혼란/죄책감/낮은 자기 확신/병적인 외로움/완벽함 추구 등 제가 가졌던 내면의 문제를 빚어내는 원인이 하나씩 밝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길러진 사람이었던 거죠. 내면이 불안정한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저 자신을 억누르고 어려서부터 남을 돌봐왔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엄마를 돌봐줄수록 제 내면은 점점 더 망가져갔던 거죠.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놀랍게도 엄마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십 년 동안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짜증이 많을까?’, ‘왜 나는 나 스스로를 채찍질할까?’, ‘왜 나는 항상 이상한 사람들과 엮일까?’ 등 스스로에게 품었던 많은 의문이 풀려 속이 후련했습니다. 원인을 알고 나니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동 패턴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분을 담아 유튜브 채널 이름도 <사이다힐링> 이라고 지었고요.


자녀를 조종하고 통제하는 ‘나르시시스트 엄마’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특징이라고 할까요? 이런 유형의 공통적인 심리와 행동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자녀들이 객관적으로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들은 본인의 희생과 헌신을 누누이 강조하기 때문에 자녀들은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피해자라고 믿는 경우가 많거든요. 엄마가 피해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빠는 당연히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거나 가정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주로 ‘피해자 코스프레’와 ‘죄책감 씌우기’를 사용해 자녀들을 조종하고 통제합니다.

다른 특징도 있을까요? 

또 하나의 특징은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딸 사이에 ‘허니문 기간’과 ‘학대 기간’이 반복된다는 겁니다. 관계가 좋을 때는 너무 좋지만, 엄마가 원하는 것이 생기면 재빨리 학대가 시작되며 딸이 그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다시 허니문 기간으로 돌아갑니다. 딸이 무엇을 잘하거나 잘못해서 학대를 받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엄마의 기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죠. 엄마에게 무언가 요구 사항이 생기면 학대 기간으로 돌입했다가, 딸이 그 요구를 만족해주었을 때 허니문 기간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관계와 차이가 있습니다. 딸은 어떻게든 관계를 허니문 기간으로 되돌리고 싶기 때문에 결국 엄마의 요구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님의 경우, 나르시시스트 엄마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세요?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부분은 ‘완벽주의’ 같아요. 완벽한 모습으로 살았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보다는 완벽하지 않은 저 자신을 무척이나 혐오하고 모질게 채찍질하며 살았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결혼을 해서도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면 부부가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내로서 요리도 잘하고, 살림도 잘하고, 경제적 능력도 가지고, 외모도 출중하고 등등 말이지요. 안타깝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저는 언제나 제가 꿈꾸던 이상에 가까워지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실패는 우울감을 낳았습니다.

그동안 유튜브, 카페 등을 통해서 만난 다른 생존자들의 경험도 유사했나요? 

제가 어떤 사례를 들어 개념을 설명했을 때 구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저희 엄마가 하는 말과 똑같아서 소름 돋아요”입니다. 심지어 제가 해외 자료를 번역해서 카페에 올려놓으면 그 문장 그대로 부모에게 들었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다들 어디 나르시시스트 학교가 있어 자녀를 조종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배워오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정도랍니다. 물론, 가족 구성원이나 경제적 상황이 다르니 각자의 경험에는 세부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엄마가 된 후 ‘잘못된 죄책감’에서 해방 됐어요

딸이기 때문에 받는 피해도 있을까요?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든지, 연애와 결혼에서 잘못된 상대를 선택하게 된다든지, 양육 과정에서 나의 아이가 나르시시스트 양육자(할머니)의 학대를 대물림 받게 된다든지... 

아무래도 여성들이 공감능력과 동정심 등이 더 강하다 보니 가정 내에서 엄마를 돌보는 역할(Caretaker)을 주로 맡게 됩니다. 이 역할을 맡은 자녀는 자신의 욕구, 필요, 감정은 억누르고, 대신 엄마의 욕구, 필요, 감정을 돌봐주고 채워주고 보살펴줍니다. 이렇게 맺어진 관계의 패턴은 이후 인간관계나 이성관계에서도 반복됩니다. 내가 돌봐주고 보살펴줘야 할 사람을 선택하고, 받는 것보다는 주는 쪽이 더 편하고, 언제나 희생하고 참고 인내하는 위치에 서지요. 안타깝지만 많은 경우, 나를 학대하는 남성을 만나 결혼하기도 합니다. 딸은 관계에 있어 놀라울 정도로 인내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상대를 돌봐주지만 대부분 그런 딸의 노력에 고마워하거나 보상해주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는 나르시시스트이고 나는 그로 인한 학대의 피해자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심리적 저항이 있을 것 같은데, 작가님도 그러셨나요? 

저도 20대 중반까지는 그랬던 것 같아요. ‘가난하니까’, ‘남녀차별을 받고 자랐으니까’, ‘남편이 무신경하니까’ 등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마다 정당한 이유를 붙여줬어요.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고군분투했어요. 엄마의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마음이 너무 커서 말 그대로 제 인생을 바쳐 최선을 다했어요. 엄마의 요구를 학대로 받아들이고 저를 피해자라고 쉽게 인정하기는 어려웠죠. 아마 그때까지도 어떤 ‘기대’나 ‘미련’ 같은 것들이 남아 있었던 듯해요. 탑 안에 갇혀 고민하던 라푼젤처럼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괴로웠던 것 같아요.

그 단계를 넘어서서 현실을 직시하게 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작가님이 엄마가 된 경험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아이를 낳고 나서 엄마가 지금까지 제게 했던 메시지들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어요. 예를 들어, “네가 신생아 때 잠을 안 자서 너를 재우느라 허리가 다 망가졌다” “동생이 태어나니까 너는 갑자기 오줌을 싸대고 동생을 괴롭히더라” 등 어린 시절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고 자라서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거든요.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이 늘 죄송했지요. 하지만 제가 막상 아이를 키우면서, 또 또래 아기 엄마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건 원래 아기들은 다 그렇다는 거예요. 안 그런 아이가 간혹 있기는 하겠지만 아주 드물지요. 저는 그저 아주 평범한 아기, 유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가정학대를 경험한 경우, 아이를 키우며 아이 나이 때의 과거 기억이 떠올라 힘들어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제 경우에는 오히려 엄마가 심어준 죄책감이나 잘못된 가치 등을 구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원래 신생아는 낮밤이 바뀌어 있구나!’, ‘원래 동생이 생기면 아이는 퇴행을 하는구나!’ 이런 깨달음은 저를 잘못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너무나도 홀가분하게 만들어주었답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랍니다

이 책은 섣부른 이해와 용서를 권하지 않아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게 바로 제가 했던 실수이기 때문일 거예요. 이해와 용서는 맨 마지막 단계이지만 우리는 일단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중간 단계를 다 건너뛰어 버리기 때문에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다시 쓴 뿌리가 올라오게 되는데, 이때 온전히 용서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 우리를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학대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지난 상처와 아픔, 트라우마는 전문 심리상담사와 함께 치유해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선택하세요. 용서를 하면 좋지만,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각자의 선택은 모두 옳습니다.

자신이 나르시시스트 엄마로부터 학대 받아온 피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면, 이후에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더 이상 우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간혹, 학대 사실을 깨닫고 계속 분노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깨달음이나 분노에서 훨씬 더 많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르시시스트 학대에 대해 공부하고,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상처, 아픔, 트라우마를 꺼내 치유해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나르시시스트 부모로부터 자란 자녀에게는 이렇다 할 유년 시절의 기억이 없습니다. 한창 자신과 세상을 마음껏 탐험해야 할 시기에 모든 신경을 부모의 감정을 캐치하고, 필요나 욕구를 알아채는 데 사용했으니까요. 이제 내가 가진 에너지를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돌보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천천히 알아 가면 좋겠어요.

유튜브와 카페를 통해 나르시시스트 학대 생존자들과 만나고 계신데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통, 공감, 연대가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것 같습니다. 어떠셨나요? 

세상에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습니다. 주변에서 나르시시스트 학대를 받은 사람들을 찾아봐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래서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거야’, ‘나는 정말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어’라고 지레짐작해서 스스로 고립되기 쉽거든요. 온라인 커뮤니티 덕분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었지요. 개인의 경험뿐 아니라 심리상담이나 관련 도서 등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책에 실린 힐링 과제를 카페 게시판에 제출하기도 하고, 온라인 서포트 그룹으로서 시도해볼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을 많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지금까지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우리가 어떤 실수를 해서, 우리에게 어떤 부족함이나 문제가 있어서 겪은 일들이 아닙니다. 잘못된 죄책감이나 과도한 책임감을 내려놓고 이제부터 자신을 돌보고 채워주는 회복의 여정을 시작해보아요. 분명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고, 회복과 치유 과정을 마쳤을 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자신해요.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지만, 앞으로 계속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책임이니까요.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랍니다.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
썸머 저
책과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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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희아 “아이돌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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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을 전문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냐’는 물음에 아이돌 전문기자 박희아는 답한다. 왜 아이돌은 ‘전문’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냐고, 아이돌의 한계는 누가 정하느냐고. ‘아이돌’을 취재하는 ‘여성’ 기자라는 두 겹의 편견을 뚫고 마침내 자신을 드러낸 박희아. 그는 아이돌을 가볍게 취급하는 인식의 기저에 ‘청소년 혐오’가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이돌’이라는 렌즈로 지금 이 세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그러니 아이돌의 말에 귀 기울여 달라고 권한다.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는 박희아 기자가 아이돌 여덟 명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2019년에 나온 『무대 위의 아이돌』의 개정증보판으로 세븐틴 호시, 청하, 빅스 레오, 방탄소년단 J-HOPE, SF9 찬희, 아이즈원 채연, 오마이걸 유아, 아스트로 문빈의 말이 담겼다. 『아이돌 메이커』, 『아이돌의 작업실』, 『내 얼굴을 만져도 괜찮은 너에게』 등을 출간한 박희아 기자는 한국의 음악, 드라마, 예능을 분석하며 아이돌 전문 기자에서 문화 전문 기자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제목에서 ‘아이돌’이 사라진 이유

오랜만에 인터뷰어가 아닌 인터뷰이가 됐어요. 소감이 어떤가요?

사실상 제가 메인인 인터뷰는 처음이에요. 부담되기도 하고 기대도 돼요. 

최근에 ‘코로나19가 바꾼 케이팝의 풍경’을 주제로 BBC와도 인터뷰하셨더라고요.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아이돌 산업이 어떤 난관에 봉착했는지 이야기하는 인터뷰였어요. 20초가량 방송됐지만 실제로는 40분 넘게 인터뷰했거든요.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았어요. 해외 매체에서 K-POP의 부정적인 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재 아이돌 산업의 주체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왜 해외 매체에서 K-POP의 부정적인 측면에 집중하죠? 견제하는 건가요?

명확하게 견제예요. 기본적으로 서구권에는 우월주의가 있어요. ‘여기는 팝이라는 장르를 만든 곳’이라는 우월감이요. 아이돌을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도 있는데 저스틴 팀버레이크나 저스틴 비버가 대표적이죠. 한국과 비슷해요. 한국에서도 보컬 실력이 뛰어난 가수가 아무리 많아도 SM엔터테인먼트를 아이돌 제작하는 레이블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있잖아요.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고 하니 궁금해져요. 아이돌에 대한 편견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요? 

시스템에 의해 제작됐다는 사실 때문이죠. 메시지 있는 음악이 아니라 댄서블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도 한몫하고요. 그리고 이건 조금 많이 나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이돌을 평가절하하는 인식의 기저에 청소년 혐오가 있다고 생각해요. 

청소년 혐오요? 

10대에 대한 불신, 10대의 판단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는 거죠. 청소년이 만드는 음악, 청소년이 노력해서 이룬 결과물, 나아가 청소년이 좋아하고 소비하는 음악. 이 모든 걸 포함해서요. ‘이제 나는 완전한 어른이 되었으니 미숙한 문화와는 거리를 두겠다’고 생각할 수 있죠. 

아이돌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게 신기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생각해볼 만한 지점인 것 같아요. 

인터뷰가 아니면 이런 이야기 할 기회가 없잖아요. 늘 아쉬웠어요. 중요한 이야기인데… 제가 낸 책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책도 『아이돌 메이커』예요. 10대인 아이돌을 기획하고 만든 어른들의 이야기죠. 당사자인 아이돌이 하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쏠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이런 현상도 10대와 20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가 네 번째 책이에요. 지금까지 나온 책들이 다 인터뷰집인데 왜 인터뷰인가요?

아티스트의 깊은 이야기를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트렌드를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인터뷰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제가 사람을 좋아하더라고요. 기자라는 직업의 장점과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을 활용해서 이야기를 기록해보자 해서 탄생한 게 인터뷰집이에요. 

에세이처럼 보이길 바랐다고요. 

이 책의 전신인 『무대 위의 아이돌』이 잡지로 분류됐었어요. 그러다 보니 책이 짧게 소비되고 매대에서 금방 사라지는 거예요. 흔히 아이돌 책은 팬들이 사주니까 잘 팔릴 거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독자들이 어떤 아이돌은 좋아하고 어떤 아이돌은 안 좋아하니까 고민하다 결국 안 사요. 심지어 나중에 중고책 시장에 나오는 게 아니라 소위 탈덕하는 굿즈 시장에 나오기도 하고요. 제가 원하는 방향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의 이야기가 의미 있어서 읽기를 바랐죠. 자기계발서나 에세이처럼 오래 두고 읽을 수 있는 이야기요. 

제목도 달라졌어요. 처음으로 제목에서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빠졌는데.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갔을 때 팬이 아닌 대중이 갖는 불편함, 편견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무대 위의 아이돌』을 읽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아이돌’이 들어가는 책이 독자들의 선택을 받기는 쉽지 않겠다 싶었죠. 방향을 바꿨고,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라는 제목이 탄생했어요.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 제목 같으면서 무대라는 이야기가 들어갔으니까 아이돌의 이야기라는 걸 암시하는 제목으로요. 

아이러니하네요. 

묘한 부분이죠. 아이돌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대중이 접근하기 쉽게 하려면 아이돌 관련 책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돌 굿즈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돌 굿즈인지 모르게 만들어야 팔려요. 



“팬이라서 기자가 된 게 아니거든요”

‘볼빨간 사춘기’ 관련 기사에서 ‘아이돌인 듯 아닌 듯’이라는 표현을 쓰신 걸 봤어요. 아이돌의 기준이 뭔가요?

사전적 의미대로 ‘우상’이에요. 닮고 싶은 문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저는 이효리 씨도 후반기까지는 아이돌이었다고 생각해요. 닮고 싶은 문화에는 춤이나 노래는 물론이고 퍼포먼스 할 때 입는 의상, 공항에서 입는 옷까지 포함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까만 마스크죠.  

아, 까만 마스크! (웃음)

아이돌이 공항에서 까만 마스크를 하고 다니면서 10, 20대들이 까만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잖아요. 이런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아이돌이죠. 일상의 모든 것이 퍼포먼스가 되고, 내가 닮고 싶은 부분이 있는 사람이 아이돌이라고 생각해요. 

섭외는 어떻게 이뤄졌나요?

직접 섭외한 분도 있고 <ize> 강명석 편집장이 섭외하신 분도 있어요.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에 추가된 찬희, 유아, 문빈 씨는 직접 섭외했고요. 최대한 사적인 인맥을 동원하지 않는 게 제 철칙인데요. 섭외하기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워요. 

사적인 인맥을 동원하지 않으려는 이유는요?

회사를 통해서 오피셜하게 하는 게 스텝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예를 제가 사적인 인맥을 동원해서 어떤 아티스트를 섭외하면 회사가 불쾌해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 회사에서 다음에 나오는 아티스트를 인터뷰하고 싶을 때 쉽지 않겠죠. 저도 지속 가능하게 일하는 걸 고려해야 하는 사람이니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아이돌 전문기자라는 길을 개척한 셈이잖아요. ‘최초’로서 갖는 좋은 점과 힘든 점이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점은 이제 아이돌을 이야기할 때 저를 떠올려 준다는 거예요. 힘든 점은 아이돌 전문기자를 굉장히 한정적으로 생각하고, ‘아이돌을 전문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라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를 끊임없이 이야기 해야 한다는 거고요. 음악평론가와 아이돌 전문기자의 중간에 있다 보니 음악평론가들의 편견을 깨는 것도 어려워요. 예전에 토크쇼에 나갔을 때 굉장히 크게 불쾌감을 표출한적이 있었는데 저를 ‘팬들의 롤모델’이라고 표현하신 거예요. 

아, 어떤 의미인지 알겠네요.

팬이라서 기자가 된 게 아니거든요. 그랬으면 『아이돌 메이커』 같은 책을 내지 않았겠죠. 그런데 여성 기자가 아이돌을 취재하는 일이 그렇게 비춰지는 구나 싶어서 씁쓸했어요. 

팬심으로만 하면 한계가 있겠죠. 

갠관적으로 분석할 수가 없어요. 이번 책에도 분석 아이돌의 퍼포먼스를 분석하는 글이 있잖아요. 거기에 팬의 마음이 들어가면 분석하는 틀이 한정되어 버려요. 그렇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이런 식의 편견을 깨는 게 중요한 과제였고요. 쉽지 않더라고요. 가끔 ‘왜 여자 아이돌은 남자 아이돌보다 적게 섭외 하냐’는 등의 이야기도 듣거든요. 그런데 그건 기획사들과의 이해관계에 의한 거지 제 의지가 아니에요. 

편견의 연속이네요.  

저도 여자 아이돌과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여자 아이돌이 말하기가 더 조심스러운 상황이에요.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회사 입장에서는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하니까 여자 아이돌이 말하기 조심스러운 시대가 됐어요. 전보다 섭외가 어려워졌죠.


『90년대 생이 온다』의 별책부록 같은 책

사실 아이돌을 분석하고 이야기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이돌을 세밀하게 분석하려고 하는 노력하는 이유가 있어요. 예전 한 가수가 한 수상 소감에 대해 글을 썼어요. 수상 소감을 한 이유와 그 아티스트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고 썼는데 SNS에 소설 쓴다는 식의 반응이 많더라고요. 

과잉해석이라는 건가요?

정확히 그거였어요. 당황스러웠던 게 영화배우들이 하는 수상소감을 해석하는 경우는 많잖아요. 의미를 부여하고 분석하고요. 왜 아이돌은 그 대상이 되면 안되죠? 제 글 특유의 문체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중잣대처럼 느껴졌어요. 아이돌의 수상소감은 깊이 있게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해요.

팬이 아닌 사람이 아이돌 이야기에서 어떤 걸 얻을 수 있을까요?

세대 이야기요. 한국의 주요 산업인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동향도 알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여자 아이돌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지금 변화하고 있는 여성상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20대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는 힌트가 될 거예요. 『90년대 생이 온다』라는 책의 별책부록 같은 책일 수 있죠. 90년대 생을 분석한 게 『90년대 생이 온다』라면 이건 사례집이에요. 제 책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아이돌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거고요. 

아이돌이 행복한 직업인이 되길 바란다고요. 어떤 의미인가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기자나 평론가들이 하는 말보다 아이돌이 말이 들어간 책이 더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요. 그게 아이돌을 행복한 직업인으로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고요. 아티스트의 말이 담긴 책보다 평론집이 더 관심받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돌의 언어적 자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돌보다 기자나 평론가의 말에 더 집중하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아이돌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하려면 뭘 해야 할까요? 아이돌의 역할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책에 나온 여덟 명이 잘 보여줬어요. 마이크를 받았을 때 최대한 이야기 해야 해요. TV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한정돼 있거든요. ‘브이앱’같은 채널도 마찬가지고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일들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생각하고 기회가 왔을 때 솔직하게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필요해요. 



최근 관심사는 ‘아이돌 이후의 삶’

팬만을 위한 책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팬들이 이 책을 궁금해할 것 같아서 생각해 봤어요. 내가 팬이라면 어떤 게 궁금할까 하고요. 사소하지만 언제, 어디서, 얼마나 오래 인터뷰했는지 알고 싶을 것 같더라고요. 

재미있게도 그걸 궁금해하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기사를 읽으면서 날짜를 추론하는 분들도 있어요. 이건 다른 인터뷰 이야기이긴 한데요. 얼마 전에 SF9 로운 씨랑 ‘본명 인터뷰’라는 걸 했어요. 인터뷰 내용 중에 로운 씨가 “일본하고 호주에 갑니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팬분들이 날짜를 확인하더라고요. 저한테 DM을 보내시는 분들도 계세요. “정말로 만났나요?”라고. 이 자리를 빌려 답을 드리자면 당연히 직접 만났고요. (웃음) 2~3시간 정도 이야기했습니다. 

좋아할수록 구체적으로 궁금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이스터 에그’처럼 일부러 넣어 놓은 내용도 있어요. ‘이쯤이면 눈치채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요. 이런 거야말로 팬분들을 위해 만든 장치죠  

장소는요?

기획사 사무실에서 했어요. 아이돌이 바쁘잖아요. 회사가 서로 편해요. 아이돌 입장에서는 본인에게 익숙한 곳이니까 무슨 말을 해도 훨씬 안정적이고요. 그래서 무조건 회사에서 결정하시라고 해요. 

채연 씨 인터뷰가 유독 조심스러웠다고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온 사람이라서요. 어떤 말을 했을 때 채연 씨한테 상처가 될까 봐 걱정했어요. 채연 씨가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고 가수가 되는 과정에서 부침이 많았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왜 JYP에서 W엔터테인먼트로 옮겼나요?”라는 질문을 할 때 그분 입장에서는 계기가 무엇이든 상처받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유독 조심스러웠어요. 

껄끄러운 이야기나 아픈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물어보나요?

당시에 재미있었을 것 같은 일을 찾아서 그 순간을 회상하게 해요. 예를 들어 오마이걸 유아 씨랑 인터뷰할 때는 ‘롤러블레이드’나 ‘샤치마’같은 의상 이야기를 먼저 했고요. 이번에 문빈 씨와 인터뷰할 때는 문빈 씨가 먼저 “이번에 1위 해서 너무 좋았어요”라고 해서 과거와 기분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봤죠. 

기분, 느낌을 물어보는 질문이 많더라고요.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당시에 그 사람이 느낀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가 다음의 행동을 결정하게 만들었을 테니까요. 그걸 모르면 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아이돌 메이커』를 만들 때부터 요즘 말로 ‘TMI’라고 느껴질 정도로 느낌을 많이 물어봤어요. 과정을 이해해야 그 사람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집중하는 것 같아요. 

책 출간을 앞둔 기자님의 기분은 어떤가요? 저도 궁금해지네요

제일 어려운 질문인데요? (웃음) 저는 요즘….힘들어요. 찬희 씨가 인터뷰 때 한 말이 생각나는데요. ‘백지에 너무 많이 그려서 이제 더 그릴 데가 없다’고 했는데 그게 지금 제 상태인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쿵’하는 기분을 느꼈어요. 제가 인터뷰를 좋아하는 이유예요. 연륜 있는 분들과 하는 인터뷰와는 또 달라요.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백지를 채웠다는 게 부럽기도 한데요. 눈치 없는 발언인가요? (웃음)

그런가요? (웃음)  무얼 비우고 무얼 다시 그릴지 고민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아이돌 전문 기자에서 문화 전문 기자로 일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고민하게 돼요. 

앞으로 인터뷰하고 싶은 아이돌이 있다면요? 

선미 씨요. 전 원더걸스, 소녀시대 멤버들하고 해보고 싶어요. 

의외예요. 뉴페이스가 아니네요.

아이돌 다음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요. 아, 그리고 김동완 씨! 꼭 하고 싶어요. 제가 최근에 <채널예스>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을 썼는데요. 김동완 씨야말로 아이돌의 이후의 자신의 삶을 확립하는 과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모델이라고 생각해요. 팬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현재 아이돌들에게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 거야
박희아 저
우주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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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영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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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족한테서 가장 크게 상처를 받잖아(118쪽)”

만약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서로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고 자랄 수 있을까. 사춘기 시절, 남몰래 해봤음직한 상상이 소설로 탄생했다. 이희영 작가가 펴낸 『페인트』에서는 아이들이 부모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미래 사회가 펼쳐진다. 

지금보다 저출산이 더욱 심화되자 국가는 육아를 부담스러워하는 국민을 대신해 아이를 키우기 위한 양육공동체 NC센터를 설립한다. 부모가 양육을 포기해 NC센터로 들어온 아이들은 13세가 되면 직접 면접을 본 후 마음에 드는 부모를 고를 수 있다. 각기 다른 조건을 내세우며 부모 면접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꿈은, 좋은 부모를 만나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과연 아이들은 어떤 부모를 선택하게 될까. 

제1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페인트』는 ‘아이들이 부모를 면접 한다’는 당찬 설정으로 청소년과 학부모 독자를 모두 사로잡으며 판매 부수 10만 부를 돌파했다.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지 못하는 인간관계인 가족. 그 안에서도 가장 가까운 부모와 자식의 사이를 비트는 상상을 통해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 좋은 부모란 무엇이고, 좋은 가족은 우리 삶의 어떤 의미냐고.



나는 자격 있는 부모인가

‘부모를 면접한다’는 설정이 재밌어요. 어떻게 기획하신 건가요? 

제가 2018년 6월부터 『페인트』를 쓰기 시작했는데, 같은 해 5월에 가정의 달 특집으로 게재된 ‘학대 받는 아이들’에 대한 기사를 봤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서 아동학대 사건은 늘 가슴 아프게 지켜보는데 그런 기사에는 항상 고정적인 댓글이 달리더라고요. ‘이래서 부모 자격 있는 사람만 아이를 키워야 돼’라는 거죠. 그 댓글을 보면서 ‘부모의 자격은 누가 주는 거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그 자격은 아이들이 주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라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구성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구체적인 기획을 하고, 2주 만에 초고를 완성했던 것 같아요. 

굉장히 빨리 완성된 소설이네요. 

저는 초고를 빨리 쓰고 퇴고를 여러 번 하는 편이거든요. 6월에 쓰기 시작해서 창비 청소년문학상 마감인 9월 마지막 주까지 계속 다시 보면서 고쳤던 거 같아요. 정말 큰 기대를 안 하고 투고했었어요. 

막상 수상 소식을 들으니 어땠나요. 

사실 작품을 응모하고도 잊어버렸었거든요. 그만큼 수상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요.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창비입니다”라고 하는데 ‘창비가 나한테 전화를 왜 했지? 이벤트 신청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런데 수상했다고 해서 너무 놀랐죠. 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들이 워낙 쟁쟁하잖아요. 좋은 작품인 건 물론이고,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이 받았던 상이기 때문에 저는 그저 독자로 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도 꿈같아요. 

평소에도 부모의 자격에 대해 종종 생각하세요? 

그렇죠. 살면서 연습을 절대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육아잖아요. 저희 아들이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육아 관련 다큐멘터리도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이론과 실전에는 늘 차이가 있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집필 직전에 기사를 보고 첫 번째로 든 생각이 ‘나는 과연 자격 있는 부모인가?’였어요. 깊이 생각해봤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작가의 말에도 썼듯이 저희 아들이 소설의 주인공 ‘제누301’처럼 제게 면접 점수로 15점을 준대도 저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해요. 

아마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 것 같아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 가면 그 마음을 느끼죠. 보통 학생들은 『페인트』를 읽고 ‘재밌다,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학부모님들은 ‘나는 몇 점짜리 부모지?’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몇 점짜리 부모인 것 같았냐고 여쭤보면 50점 이상을 주는 분이 안 계세요. 그런데 신기한 건 아이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선 이 책을 읽고 ‘우리 엄마 아빠는 몇 점이지?’라는 생각을 했다는 아이들이 거의 없고요. 오히려 부모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엄마 아빠도 부모가 된 게 처음이구나. 엄마 아빠도 나를 선택하지 못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면서요. 강연을 가면 오히려 제가 아이들에게 배울 때가 많죠. 

철저히 아이들의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였어요. 쓰면서 어린 아이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무리하게 요즘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진 않았어요. 2020년을 사는 아이들과 저는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억지로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려 하는 건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대신 주인공 제누301을 제 과거의 모습에 빗대 보았죠. ‘내가 십대일 땐 어떤 부모를 원했지?’ 생각하며 과거의 제 목소리로 소설을 쓴 거예요. 그래서 힘든 점도 있었어요. 현실에서는 아이의 엄마인데 소설 속 자아는 10대 아이였으니까요. ‘나는 이런 부모를 원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자아가 ‘그럼 너는 그런 부모니?’라고 묻더라고요.(웃음)

‘페인트’라는 제목이 독특해요. ‘Parents Interview(부모 면접)’의 줄임말로 만든 제목인데요. 

저는 원래 제목을 생각하지 않고 내용을 먼저 쓰는 편이거든요. 소설이 중간쯤 완성됐을 때 문득 ‘Parents Interview’를 줄여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NC센터가 있는 미래의 세대에서도 줄임말을 쓸 것 같았거든요. 특히 10대들은 중요한 말일수록 줄여서 은어로 사용하잖아요. 그에 착안해 ‘페인트’라고 바꿔봤죠. 중의적인 표현으로 그 안에 담긴 의미도 잘 표현이 됐다고 생각해요. 모든 가족은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는데, 그 색깔들이 서로에게 물을 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탁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등장인물의 이름이 없는 점이 독특했어요. ‘박’ ‘최’ ‘제누301’ 등 호칭은 있지만,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은 없는데 유일하게 주인공 제누301을 입양하기 위해 찾아 온 ‘서하나’와 ‘이해오름’만 이름이 있었어요. 

클리셰이긴 하지만, SF는 차갑고 기계적인 느낌이 있잖아요. 그 느낌을 살려서 등장인물을 최대한 건조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NC센터라는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박’ ‘최’ 등 성을 이름처럼 부르거나 ‘제누301’ ‘아키505’처럼 독특한 호칭을 만들었죠. 그 건조함을 순화시키는 게 ‘하나’와 ‘해오름’이었어요. 어른과 아이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가장 한국적인 한글 이름을 지어줬던 거예요. 아이처럼 철이 없으면서도 어른인 두 사람의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생부, 생모가 NC센터를 찾아오는 장면도 인상적이더라고요. 까다롭게 부모를 심사하는 NC센터에서도 생부, 생모에게는 친자확인만 거친 후 아이를 바로 보내줬어요. 

청소년 대상 강연을 가면, 중학생 또래 아이들이 제일 싫다고 말하는 장면이에요.(웃음) 아무리 낳아준 부모라고 해도 무작정 아이를 보내면 어떡하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사실 우리 사회가 혈연을 중요시해서 생기는 문제들이 많잖아요. 부모가 아이를 잘 돌보지 않아도, 단지 친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제도적으로 둘 사이를 떨어뜨려놓을 수 없기도 하고요. 그런 부분을 비판하고 싶었어요. 

소설에는 여러 유형의 부모가 등장해요. 그중에서도 ‘하나’의 엄마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모의 모습이었어요. 아이를 위해 헌신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지만 그게 정작 아이를 위한 건 아니었는데요. 

특히 한국에 유독 그런 부모가 많은 것 같아요. 말로는 “너를 위한 거야”라고 하지만 사실은 본인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아이로 대리만족 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봐요. 사실 저조차도 그런 면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수학을 정말 싫어했거든요. 숫자만 나와도 두려워서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수학 공부를 강요하고 있더라고요. 꼭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나올 정도로 욕망이 큰 부모들만 아이를 자신의 틀에 가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바람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경우가 무척 많죠. ‘하나’ 엄마의 이야기는 사실 저의 반성문이었어요. 

쓰기 어려웠던 장면이 있나요? 

‘박’이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연민을 털어놓는 장면을 쓸 때 울컥했어요. 흔히 작가가 소설 속에 너무 들어가면 작품을 망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작품과 거리를 두고 글을 쓰려고 항상 노력하는데, 박의 이야기를 쓸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사과할 줄 아는 엄마가 되고 싶다

강연으로 독자들을 많이 만나시잖아요. 독자들이 들려준 말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가끔 제가 강연에서 “이 책 읽고 부모님 점수 매겨본 친구 있나요?”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럼 한두 명 정도 손을 들거든요. 몇 점을 줬냐고 물으면 대개 90점 이상 줬다고 해요. 그런데 한 친구가 강연 끝나고 사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작가님, 그렇게 공개적으로 물어보면 아무도 얘기 안 할 거예요.” 그 순간 깨달음이 있었어요. 요즘 마음 아픈 아동학대 사건이 특히 많이 보도되는데, 얼핏 생각하면 ‘아이들은 왜 학대를 당하면서도 주변에 말하지 않았을까’ 싶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부모에게 진짜 상처받은 것들은 말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부모가 꼭 고쳐줬으면 하는 점이 있어도 겉으로 그걸 표현하지 않죠. 하지만 부모들은 여럿이 모이면 “우리 애는 이런 게 문제야. 이것 좀 고쳤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잖아요. 그때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뜨끔했어요. 이제 공개적으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려고요. 

청소년 강연과 학부모 강연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를 텐데요. 각각 빼놓지 않고 전하는 말이 있나요?

저는 학부모 강연에 가서는 아이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청소년 강연에 가서는 부모님들께서 주로 하시는 말씀을 들려 줘요. 보통 학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굉장히 작은 점수를 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막상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돈 많은 부모 필요 없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엄마 아빠를 택하겠다”는 아이들이 정말 많아요. 그걸 학부모 강연에서 얘기해드리면 위안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는 반대로 부모님들의 마음을 전하죠. 학부모님들은 늘 아이들에게 잘 못해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고, 본인은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그 얘기를 하면 아이들이 놀라는 것 같아요. “우리 엄마아빠는 그 정도로 부족하지 않은데”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반대로 이야기를 전하면 강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요.(웃음) 여자 친구들은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해요. 항상 엄마에게만 짜증을 부렸던 것 같아 미안하다고요. 

하나와 제누301의 대화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엄마 역시 나로부터 독립이 필요했다(180쪽)’고 했는데, 작가님도 자녀와 나를 분리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시나요? 

거리를 최대한 많이 두려고 노력하죠.(웃음)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글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요즘은 남편과 그런 얘기도 자주 해요. 우리 아들이 며느리를 데려올지, 사위를 데려올지, 아니면 평생 혼자 살지 모르는 거라고요.(웃음) 그 친구가 성인이 돼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삶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가야 하는 삶이니까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으세요? 

제일 어려운 질문인데요. 정말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어요. 친구 사이에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요. 아주 가깝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는 인간관계가 친구 사이인 것 같아요. 그런데 가족은 종종 그 선을 넘잖아요. 타인에게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도 아이에게는 상처 주는 말을 함부로 하기도 하고요. 저는 아이와 무척 친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부모가 되고 싶어요. 

꼭 지키려고 하는 육아 원칙이 있으세요?

딱 하나 있어요. 잘 지켜지진 않지만, 제가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 부모님께 그런 사과를 받아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저희 세대 어른들은 대부분 그러셨잖아요. 설령 부모가 잘못한 일이어도, 아이가 언짢은 기색을 내보이면 “어디 어른한테 대드냐”고 혼을 내곤 하셨으니까요. 저는 그러지 않으려고요.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꼭 말하려 노력해요. 제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면, 아이는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더라고요. 

한 인터뷰에서 아이가 작가님 책을 절대 안 읽는다고 하신 이야기를 봤어요.(웃음)

제가 글을 쓸 땐 워낙 예민해지니까 제 책들은 저희 집 금서예요.(웃음) 그런데 요즘은 종종 봐요. 『페인트』도 읽었는데 보면서 피식피식 웃더라고요. 책에는 좋은 부모가 갖춰야할 것들만 다 써놨는데, 정작 저는 잔소리하고 그러니까요. 실제 엄마와, 엄마가 쓴 소설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아요. 읽으면서 “엄마는 내가 제누301처럼 똑똑했으면 좋겠지?”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내 유년은 회색이었다

글을 늦게 쓰기 시작하셨다고요. 

서른다섯 살에 처음 글을 썼어요. 아이 낳고 산후우울증이 있었거든요. 계속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보다가 우울감이 정말 심해질 땐, 아이를 그냥 베란다에 두고 나오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산후우울증은 정말 무서운 게, 우울감과 죄책감이 함께 밀려온다는 거예요. 이걸 어디에 토해내고 싶은데, 육아 때문에 우울하다고 말하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집 근처에 문예창작을 가르쳐주는 곳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처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고, 그냥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을 토해내고 싶었죠. 

돌파구로 글쓰기를 택했던 이유가 궁금해요. 

글은 접근이 멀면서도 가깝잖아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 같은데, 물리적인 접근은 또 무척 쉬워요. 컴퓨터만 있으면 쓸 수 있으니까요. 그림 같은 건 시작하려면 준비물이 굉장히 많잖아요. 글은 그렇지 않다는 게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글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작가의 꿈이 있었거나, 문학을 전공했다면 감히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까요. 

그래서 저는 강연에 가면 이 얘기를 아이들에게 꼭 해줘요. 어떤 꿈을 이루려면, 어릴 때부터 탄탄히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렇지 않다고요. 저희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한국문단은 정말 깨끗하다”고 말하곤 해요. 제가 상을 받고, 작가가 된 걸 보면 심사가 아주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거라고요.(웃음)

‘좀 더 일찍 작가가 됐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하세요? 

가까운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20대 때부터 글을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요. 그런데 친구가 “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생활이 안정됐기 때문에 글을 쓸 수 있었던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저는 20대 작가 지망생 친구들에게 부채의식이 있어요. 그 친구들이 재능이 없어서 작가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20대 때 글을 썼다면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글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저는 가정주부였고, 어쨌든 남편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졌기 때문에 마음 편히 글을 쓸 수 있었어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작가가 되고 『페인트』가 이렇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100% 운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나서, 작품을 잘 써서 그랬다는 생각은 1%도 하지 않아요. 

청소년 소설을 쓰는 이유가 뭔가요? 작가의 말에 ‘내 안에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와 놀아주는 일이 나에겐 글쓰기다.(224쪽)’라고 쓰셨는데요. 

우선 제가 철이 안 들었고요.(웃음) 저는 10대 때 제가 정말 지질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특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외모가 특출 났던 것도 아니라서 스스로한테 지질하다는 말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40대가 돼서 과거의 저를 돌아 보니, 그렇게 못나지만은 않았던 거예요. 나름대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내가 나를 왜 그리 홀대했을까 싶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과거의 이희영에게 “너 그렇게 못나지 않았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청소년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작가의 말 첫 문장이 ‘내 유년은 회색이었다’였어요. 

아주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건 아니었거든요. 특히 아버지가 엄하고 가부장적이었어요. 여자도 공부하고, 사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의 말이 법이자 진리라는 생각을 가진 분이셨죠.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으로 두려워하고, 억눌렸던 것들이 소설에 많이 녹아있을 거예요. 

먼 길을 돌아 작가가 된 게, 어린 시절의 영향도 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때 동화책을 읽고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께서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어떤 대화 속에서 그 말을 하신 건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뒤 글재주는 타고나야 하고, 선택받은 사람만 하는 거라는 게 무의식에 각인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아직도 제가 작가라는 게 실감이 안 나요. 사실 저희 아버지는 지금도 제가 작가라는 걸 모르세요.(웃음)

너무 좋아하실 텐데,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얘기하기가 좀 어색해요. 내게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정장을 입고 고급스러운 파티에 참석한 느낌이거든요. 작가라는 게 어떤 면허나 자격증이라면, 그걸 땄다고 말하면 되겠지만 글을 쓰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작가는 독자에게서 잊히면 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제가 소설을 쓰고 있고, 감사하게도 『페인트』가 큰 사랑을 받았지만 이게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모래성 같은 거죠. 저는 그냥 글쟁이라는 말이 편해요. 그래서 제가 작가라는 걸 아는 지인은 10명 남짓밖에 안 돼요. 한 번 얘기할 기회를 놓치니 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페인트』를 쓰면서 어린 시절의 상처들이 많이 치유됐을 것 같아요.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아마 저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그럴 거라 생각해요. 알게 모르게 자신의 상처를 글로 승화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상처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요즘도 매일 글을 쓰세요?

그럼요. 글도 근육이니까요. 운동하는 사람이 매일 운동을 하듯이 저도 매일 글을 써요.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겨우 따라간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가급적 매일 읽고 쓰는 걸 습관처럼 하려고 노력하죠. 보통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는 원고를 쓰는데요. 하루에 정해 놓은 분량을 웬만하면 다 채우고 일어나려고 해요. 그걸 안 지키면 하루를 허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독자들에게 『페인트』가 어떤 책이었으면 하나요?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에 너무 초점을 맞추고 읽으려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학부모님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 부모일지 긴장하며 봤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렇다고 소설 속에 완벽한 부모의 상이 나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육아는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부모도 아이를 키우는 게 처음이고, 아이들도 세상에 태어난 게 처음이니 모두가 서툴 수밖에 없죠. 때로는 삐걱거리는 게 정상이에요. 그러니 우리 모두 “잘하고 있어”라고 다독이며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다음 작품 계획이 궁금해요. 

아마 『페인트』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소설이 될 텐데요.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펴낼 계획이에요. 어른들도 충분히 공감하며 읽으실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만약 NC센터의 아이들처럼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을 가장 중요하게 볼 것 같나요? 

음… 노른자 땅에 건물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웃음) 농담이고요. 사실 강연을 가면, 아이들이 NC센터에 사는 아이들은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부모를 선택하려면 너무 머리가 아플 것 같은데, 지금의 엄마 아빠에게서 태어나 다행이라고요.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아무리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고 해도 저희 부모님 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이 나지 않아요. 



페인트
페인트
이희영 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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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 “집에서 논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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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 책을 읽을 때 가장 매력적인 끌림은 “이 작가님, 이 책 진짜 쓰고 싶었구나”를 체감할 때다. 단순히 가독성이 뛰어난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술술 읽히되 저자의 본심이 문장 속에서 툭툭 튀어나올 때, 독자는 스릴 넘치는 독서 경험을 갖는다. 소설가 정아은이 2018년에 쓴 『엄마의 독서』를 읽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이 책의 심화편으로 볼 수 있는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은 엄마, 주부를 비롯한 모든 존재에게 소문 내고 싶은 책이었다.

“전업주부를 폄하하는 말이 마음껏 뛰놀며 활약하는 대지에는 ‘아빠’라 불리는 이들과 ‘결혼과 출산과 육아라는 전형적 길을 가지 않는 비혼 여성’이라는 존재가 서 있었고, 이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나는 가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길을 걸어간 끝에 만난 세상은 더 넓고 더 다채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집에서 가사를 담당하는 이들을 폄하하는 사회현상에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엄마들만이 아니라 아빠들, 엄마가 아닌 주부들, 엄마도 주부도 아닌 비혼 여성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변화된 생각의 과정을 드러내고 분류하고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변화 과정을 드러내기 위해 초반에 품었던 단선적이고 편협한 생각들도 여과 없이 기술했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11쪽)



내 안에 있는 걸 잘 쏟아내는 일

신간은 소설일 줄 알았어요.

(웃음) 『엄마의 독서』를 내고 강연을 좀 다녔거든요. 단발성 강연도 있었고 시리즈 강연도 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젠더의 눈으로 본 자본주의’라는 제목이었거든요. 엄마의 독서로 시작해 남편과 아내가 괴로운 이유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죠. 강연을 주선하신 분이 “이런 주제는 인기가 없다”고 하셨는데 오신 분들 반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현장에서 만난 분께서 “오늘 이야기는 어떤 책에서 나오냐?”고 물으셔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엄마들의 애환을 다룬 책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서요. 이 생각은 2년 전쯤 한 것 같아요.

제목이 강렬합니다. 부제는 “남성들의 언어 속에 감춰진 가사 노동의 사회, 역사, 경제적 비밀을 파헤치다”예요. 초고의 제목도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였나요? 

원래 ‘엄마의 자본론’, ‘주부의 노동’이라고 할까 생각했는데 접근성이 떨어지겠더라고요. ‘거짓말’에 초점을 두고 책을 쓰고 싶었고, 이런 뉘앙스로 포맷팅 된 책도 몇 권 있어서 힌트를 얻었어요.

실은 『엄마의 독서』가 나왔을 때 조금 놀랐어요. 2013년에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모던하트』로 데뷔하신 후, 장편소설 『잠실동 사람들』『맨얼굴의 사랑』을 쓰셨잖아요. 이미 소설가로서의 입지가 있는데, 작가로서의 에세이가 아닌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인문 에세이를 쓴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엄마의 독서』를 쓰고 나서 너무 좋았거든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나서 봇물처럼 사회 정치서를 읽게 됐는데요. 이런 책들을 읽으니까 픽션이 아닌 글쓰기가 나오더라고요. 원래 『엄마의 독서』도 일기식으로 막 편하게 썼던 책이에요. 너무 복받쳐오는 감정에 휘말려서. (웃음) 그러다 한겨레출판사 편집자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원고에 흥미를 보이셔서 출간된 책이에요. 

예전에 어떤 작가님이 자신이 엄마라는 걸 기사에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어요. 

어떤 의미였을지 조금 예상이 가요. 저도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 주부, 아줌마라는 느낌보다는 조금 지적이고 멋있게 보이고 싶은? 그런데 책을 써보니까 정말 쓸 게 많고 잘 써지는 거예요. 세상에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지침서가 얼마나 많아요. 하지만 엄마가 직접 쓴 책은 많지 않은 거죠. 그래서 엄마인 내가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모 독자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책이었죠.

실은 처음엔 많이 긴장했었어요. 모성 신화를 건드리면 초토화가 되잖아요. 그런데 강연을 가보니, 너무 공감해주시고 좋아해주시는 거예요. 욕을 먹진 않을까? 덜덜 떨었는데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어”라고 저를 확 안아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꼭 소설만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다른 글쓰기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죠. 왜 글쓰기에는 치유 기능이 있잖아요. 『엄마의 독서』를 쓰면서 저 스스로도 치유를 받았어요. 소설가로 불리든 에세이스트로 불리든, 내 안에 있는 걸 잘 쏟아내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죠. 

이번 신간 소식을 들은 한 독자 분이 “내가 쓰고 싶은 책이 세상에 나와 있구나”라고 댓글을 다셨더군요.

자꾸 『엄마의 독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이 책을 내고 외부와의 접촉이 많았어요. 심심치 않게 아빠나 남편 분들로부터 메일이 와요. 한 초등학교 교사 분은 “이 책을 읽고 10년 만에 아내를 이해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저도 책을 쓰고 많이 반성했어요. 적대적인 감정으로 남녀를 나눌 게 아니라 사람은 개별적인 존재로 바라봐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누구나 사람 안에는 선한 면이 있잖아요. 어떤 기회를 만나고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다른 것들이 발현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의 선한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글을 쓰면서 그동안 제가 갖고 있었던 편협한 젠더의식에서 많이 빠져 나왔거든요. 여자도 남자도 다 다르고, 하나의 균질한 덩어리가 아니니까요. 아마 독자 분도 비슷한 생각을 갖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신간 리뷰도 많이 들으셨나요?

제목은 센데 내용은 생각보다 부드럽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제목을 보면 ‘가부장제 철폐!’ 같잖아요? (웃음) 하지만 아니죠. 싫기만 한 가사노동을 말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상하게 포장된 약자, 그들의 공부

책은 기본적으로 독서 에세이 형식이에요. ‘집에서 논다’는 말의 연원을 15권의 책으로 살펴보는데 등장하는 책이 무척 다양합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시작으로 서영남의 『민들레 국수집』 등 사회학서부터 에세이까지. 책에서 발견한 사유로 ‘가사노동’이 왜 이렇게 폄하되어 왔는지를 분석해요. 

결론적으로 저는 돈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어떤 부부가 이혼을 한다고 하더니 몇 개월 후에 금슬이 다시 좋아졌어요. 이유를 살펴보니 배우자가 좋은 기업으로 이직해 연봉이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은 공기 같은 존재예요. 엄마, 여성들의 많은 문제는 가사노동에 있는데, 속으로 들어가보면 돈이에요. 왜냐? 가사노동은 돈을 받지 않잖아요. 문제는 물질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을 타파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태도, 언어, 가치관, 정서의 문제로 남자를 가르치려고 해도 불가능해요. 사람들이 주부들에게 ‘집에서 논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것이 잘못됐다고 교정하는 단계를 넘어 발화자가 그 말을 하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살펴보는 일이 이 책의 핵심이에요. 

로이 F. 바우마이스터의 『소모되는 남자』도 다루셨어요. 남녀의 차이를 분석한 심리서인데요. 남성도 여성 못지않게 문화적 착취를 당한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책은 되게 잘 쓴 책이에요. 그래서 현혹되기 쉽죠. 남녀의 특성이 다른 이유를 ‘동기’의 차이로 보는데요. 초반에는 ‘아, 그런가?’ 하고 봤는데 중반을 지나가니,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읽고 다시 읽었어요. 저자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보면서 깨달은 게 많아요. 올바르지 않은 사실을 어물쩍 넘어가는 방식이 많은데, 스스로를 돌이켜보건대 저 역시 그랬던 적이 있더라고요. 이를 테면 남녀 평등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인정을 안 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 이 정도는 덮고 갈 수 있어’라고 생각한 지점들이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결국 이런 습관은 목적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82년생 김지영』을 읽으셨나요?

네, 책이 나오고 초기 때 읽었어요. 저는 젊을 때부터 남녀평등에 관한 생각이 투철해서 어디를 가나 혼이 많이 났거든요. (웃음) 그래서 이런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겁부터 났어요. 이 작가가 꼭 살아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열풍이 일었잖아요. 저는 소설을 읽고 ‘지금도 엄마들이 이런가?’ 싶었거든요. 좀 지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잖아요.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제가 운 좋게 살아남았던 거죠. 아직도 많은 여성은 힘들어 하고 있고요. 이 소설로 여성들의 현실적인 문제, 감정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 걸 보고 되게 기뻤어요. 소설이 기폭제가 될 수 있구나, 그것에 놀랐고요.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섬세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 책에 소개된 책들을 이어서 읽고 싶을 것 같아요.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나요?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연성이라고 하나요? 읽기에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도 정말 잘 쓴 책이에요. 저자가 경제학자인데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잘 풀어 쓴 책이에요. 또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조금 어렵긴 했거든요. 하지만 읽으셔도 좋겠어요. 제가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가서 고병권 선생님이 쓰신 『다시 자본을 읽자 1』을 추천한 적이 있어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해설한 시리즈 책인데, 저도 『자본론』이 어려워서 고병권 선생님 수업으로 읽었거든요. 그런데 엄마들이 바로 다음날 스터디를 결성하셨더라고요. 고병권 선생님의 책으로 읽는 『자본론』 수업을 말이에요. 요즘 엄마들은 정말 지적이고 부지런하시구나, 정말 놀랐고 반가웠어요. 

공부하는 엄마들이 정말 많죠. 

맞아요. 엄마는 묘한 약자예요. 관계의 약자, 이상하게 포장된 약자. 꾸준하게 약자 입장에 처하면서 사회에 대해 달아올랐다고 할까요? 그래서 굉장히 폭발적인 것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저 때랑은 정말 다르구나, 굉장히 비판적이면서 열심히 공부하세요. 

코로나19로 힘들지 않으셨나요? 학교에 자주 못 가는 아이들의 끼니도 매일 챙겨야 하고요.

사이버 수업을 해도 아이가 수시로 방문을 열고 “엄마, 엄마” 찾으니까요.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전부인데, 학교를 못 가는 상황을 엄마들이 다 막아야 하는 거잖아요. 쉽지가 않죠. 



말은 유하게 행동은 세게! 

책을 보면 작가님이 확실히 ‘살림’에 대해 편안해진 느낌이 들어요. 요즘도 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나요?

최근에 독거노인분들께 반찬을 만들어 드리는 봉사를 했어요. 사실 30대 때는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것도 환장인데 밖에 나가서도 그거 하리? 싶었거든요? 그런데 봉사를 하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마흔이 지나니까 밥을 짓는다는 거, 구수한 밥 냄새를 맡는 일이 참 따뜻하고 좋더라고요. 누군가를 살게 하는 일이잖아요. 이거야말로 진짜 일처럼 느껴졌어요. 제가 작가로 살면서 글을 쓰고 말을 하잖아요. 아무래도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말과 글이 우리는 너무 속이는 것 같은? 비약적으로 말하면 입만 산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일단 저부터요. 작가라는 직업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기 딱 좋은 일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대단한 무엇이 된 양. 그런데 봉사를 하니까 밥을 짓고 있으니까, 이거야 말로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맞는 이야기예요.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들어도 비하를 당해도,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가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비임금 노동을 갈아 넣어서 지탱하고 있는 거잖아요? 주부들이 이용을 당하는 측면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인간 본연의 어떤 세계와 맞닿을 기회를 제공받는 측면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저는 제 노동을 착취 당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지만 가사노동이라는 것이 강요를 당해서 문제인 거지,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봉사할 때, 아이들도 함께 갔다고요.

반찬을 배달할 때 아들 둘을 데리고 갔어요. 나눠 드리는 걸 아이들이 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휴, 이런 일 남자 애들 시키면 안돼”라고 하시는 거예요. “빨리 며느리를 봐서 이런 건 며느리 시키라”고 하시고. 제 노동력의 수혜자인 분들께 이런 가부장적인 이야기를 또 들어야 한다니, (웃음)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남편까지 데리고 갔어요. 남편도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는데, 남편이 반찬을 나눠 드리자 어쩔 줄 몰라하시더라고요. 제가 반찬을 나눠 드릴 때랑 공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요즘은 살림하는 남자가 인기가 많죠. 가사노동을 분배하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고요. 

가끔 허세가 정말 심한 남자들을 보잖아요? 잘 살펴보면 원인은 집안일에 있어요. 전혀 안 하는 거죠. 반면에 이름난 작가인데 조금도 거만하지 않은 분들이 계세요. 그분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집안일을 잘하세요. 집안일은 일단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잖아요.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자기가 자기 존재를 떠받드는 훈련을 한 사람은 결코 거만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이가 좋은 부부들을 가끔 보거든요? 핵심은 ‘가사노동’에 있어요. 한 사람만 주구장창 가사노동을 하는 관계는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살림이 내 체질이고 좋아도, 이 매일의 노동을 한 사람이 감당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남편이 가사노동을 조금도 안 해서 힘들어 하는 아내들에게 힌트를 좀 주신다면요. 

보통 대화로 풀라고 하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해요.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생각해보면, 말로 누군가를 바꾸는 건 가장 게으른 방법이에요. 제가 독거노인 봉사활동을 했다고 했잖아요. 당시 저는 ‘좋은 엄마가 되려는 열망’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나도 좀 타인을 위한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아이들 저녁을 당신이 가급적 일찍 퇴근해서 챙겨 달라고 했죠. 처음엔 자장면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봉사활동을 나가니까 마음이 너무 좋았어요. 그 마음이 어디로 갔을까요? 집으로 가죠. 집안의 공기가 달라졌어요. 제가 얻은 활력이 가족들에게 간 거죠. 남편도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아이들 밥을 기꺼이 즐겁게 만들어줬어요. 

정말 내 삶을 바꿔야 하는 거네요. 

그렇죠. 어떻게 우리가 남을 바꿀 수 있겠어요? 말하지 말고 내 삶을 바꿔야 해요. 우선 상황을 만들어야 해요. 어쨌든 제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바깥 활동을 많이 만들고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면 안 돼요. “당신이 할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해요. 말은 유하게 행동은 세게 하는 거죠. 저도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된 거예요. 누군가를 바꾸려면 제 삶을 바꿔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아내들은 남편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보다 자신이 희생하고 만다고 생각해요. 

가사 분담이 안 되면 평생 힘들어요.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평생 혼자서 할 수 없어요. 남편의 얼굴을 붉히는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그냥 말해야 해요. 왜냐면 이게 쌓이면 화가 다른 데로 뻗어 나가거든요. 남편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도 각오해야 해요. 평생 살아야 하니까요. 

동네 엄마들을 종종 만나실 텐데요.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은 없나요? 

별로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주로 집에서 혼자 글을 쓰니까요. 가끔 기회가 생기면 엄마들과 잘 어울리는데요. ‘작가’라고 하면 굉장히 자기충족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많이 하시는데, 저는 그게 아니라는 걸 많이 알려줘요. 제가 얼마나 잘 나가는 작가들을 보면서 질투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막 솔직하게 말하거든요. (웃음) 그래도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만, 거리감을 많이 느끼진 않으시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 사회,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일일까

‘엄마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뚜렷하게 밝히는 분을 자주 보지 못했거든요. 어떠세요?

저도 과거에는 세련돼 보이는 작가로 어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의 독서』를 쓴 이후부터 그 욕심에서 해방됐어요. 내 정체성의 8할을 차지하는 것이 엄마, 주부잖아요. 그것이 싫지 않아요. 그리고 항상 내 문제에 천착하는 일이 가장 자유로운 것 같아요. 가장 나답기도 하고요. 『엄마의 독서』를 쓰고 나서 아이와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어요. 

사회에 나오고 싶어 하는 엄마들이 많아요. 경력 단절이 되면, 정말로 취업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데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분들이 많죠

맞아요. 지금도 전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꿈을 꿔요. (웃음) 누가 저에게 지금 회사에 나오라고 하면 당장 나갈 것 같아요. 그런데 말이에요. 사람의 삶은 다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든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엄마들도 있고, 주부로서의 자신, 엄마로서의 나에 굉장히 만족하는 분도 많아요.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결핍이 있었던 경우에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하는 엄마들이 있잖아요. 행복의 절대 요소인 거예요. 그런데 또 결핍이 있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자신의 엄마가 전업주부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란 경우, 엄마로서의 자신을 꿈꾸기도 해요. ‘엄마로만 사는 것이 행복할 리가 없어’는 아닌 거예요.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그렇죠. 아이를 잉태하고 키우고 좋은 사람으로 양육해서 사회로 보내는 일,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죠. 

사실 생각해봐요. 전혀 살 필요가 없는 전자제품을 2년이 지났으니까 신제품으로 바꾸라는 설득하는 일과 내 아이의 밥을 짓는 일, 둘을 비교해보면 당연히 후자가 훨씬 가치 있는 일이잖아요. 인간을 살게 하는 일이고요. 가사노동을 자본주의의 프리즘으로 바라보면 주부로서 사는 삶의 미덕이 더 드러나는 측면도 있어요. 주부 생활을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당연히 이해되죠. 

초등학생, 중학생의 학부모로서 교육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어릴 땐 남들이 시키는 거 다 해봤다가, 중간에는 대안교육도 알아보면서 학원도 안 보냈다가 지금은 뭐든지 ‘아이한테 좋으면 하는 게 좋다, 뭘 하든 많지 않게! 여유롭게! 하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공동체가 다 깨졌잖아요. 학원이라는 존재가 일종의 돈을 주고 사는 공동체가 됐는데, 너무 이상적인 관점으로 “사교육은 무조건 안 좋아”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저자로서 기대하는 의외의 독자가 있을까요?

나이 많은 남자 분들이 읽는다면 좋겠어요. 가끔 강연회에 가면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오시는데요. 굉장히 경청하고 가세요. 기왕이면 이 책이 남자 독자들께도 가 닿으면 좋겠어요. 

책의 핵심이 ‘가사노동’이잖아요. 독자들이 이것 하나는 꼭 기억했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가사노동은 삶의 명(明)이자 암(暗)이 될 수 있어요.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자로 산다는 건 기회를 부여 받는 것이기도 하면서 족쇄를 차는 일이기도 해요. 우리가 가부장제,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잖아요? 이 견고하고 거대한 사회를 위태위태하게 살고 있는데, 여기서 잘 살려면 이 양대 산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자기를 실현하면서 잘 살 수 있으니까요. 가사노동이 가치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셨으면 해요.

후속작은 어떤 주제인가요?

우선 나이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있고요. 소설도 쓰고 있어요. 돈에 관한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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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이 “이제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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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비와이는 정규 2집 <The Movie Star>를 통해 독특하고도 과감한 확장된 음악 세계를 선보였다. <The blind star>의 자아 성찰을 넘어 한국 힙합 시장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주체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입체적 시각을 영화 사운드트랙처럼 웅장한 소리에 실어냈다.

신실한 교인,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되묻고 고뇌하는 모습은 본인뿐 아니라 힙합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는 6월 15일 래퍼 심바자와디와 함께한 새 앨범 <Neo Christian Flow>를 공개 예정인 비와이를 만났다.


   

상대적으로 비와이는 '어른들도 아는 래퍼'의 이미지가 있다.

제가 사랑받기 좋은 캐릭터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아요. 힙합 팬 말고 대중 분들께서 '비와이는 이래서 좋다'라고 말씀하실 때 주로 나오는 내용이 '욕이 없다', '돈 이야기가 없다', '여자 이야기가 없어서 좋다' 등이거든요. 어른 분들께서는 아무래도 앨범 대신 싱글 단위로 많이 들으시니까, 'Forever', 'The time goes on', 'Day day' 등 희망적인 내용의 노래들이 많이 어필했다고 봅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클린'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교회 영향도 있고요.

6월 15일 발표되는 새 앨범의 이름 역시 <Neo Christian Flow>다. 본인이 생각하는 'Neo Christian Flow'란 무엇인가.

'네오 크리스천'이라는 본질적인 개념이 있는 것이지 따로 '네오 크리스천 플로우'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저희는 힙합 하는 사람들이지, 찬양에 사용되는 소리나 성경에 나오는 단어를 굳이 가져와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에요. 비와이, 그리고 이번 앨범을 함께한 심바자와디가 '네오 크리스천'이라는 주제 아래 힙합으로 이야기하는 앨범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금 더 찬양에 가깝고, <The Movie Star>만큼은 아니지만 무게감 있는 작품이에요.

비와이의 랩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많죠. 카니예 웨스트, 켄드릭 라마, 프로듀서 마이크 딘 등… 한국에서는 버벌 진트죠. 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The Movie Star>에서도 드러나듯 비와이의 음악 세계는 카니예 웨스트처럼 큰 규모와 실험적인 시도가 두드러진다.

실제로 그 앨범은 그런 결이 있었죠. 클래식의 요소도 가져왔고, 올드 스쿨적인 요소, 테크노, 하우스, 트랩 등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했어요. 그게 힙합의 매력이라 생각해요. 하나에 정체되기보단 여러 가지를 가져와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재창조의 매력이랄까요.

켄드릭 라마를 언급한 데는 본인이 힙합의 주요한 메시지 중 하나, 저항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는 뜻일까.

물론 고민하고 있죠. 음악적으로도 전통을 깨고 싶고 완전히 새로운 걸 찾죠. 하지만 어떤 부분에선 그런 게 저희 윗 세대가 힙합을 바라보는 일종의 클리셰라 생각되기도 해요. '나라가 이런데 래퍼는 뭐하냐!', 평소 기부 활동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기부 안 하냐', 나름 사회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왜 저항 안 하냐'… 이해는 하지만 조금은 구시대적인 개념 같아요.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비와이가 생각하는 비와이의 힙합, 비와이 랩의 핵심을 묻고 싶다.

흠…. 평소에 많이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굳이 한마디를 담자면 '저에 대한 연민'? 'Day day'의 경우 나답게 살지 못했던 어린 시절 콤플렉스를 털어놓는 곡이고, <The Movie Star>의 경우도 무작정 미국 힙합이 멋있다고 생각하며 따라 했던 과거 제 모습을 연민하는 감정이 어느 정도 있죠.

비와이를 대중에게 소개한 계기로 2016년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시즌 4에 처음 등장했던 비와이는 이듬해 시즌 5에서 'Forever', 'Day day'를 통해 자신을 알리며 경연 우승을 거머쥐었다. <쇼미더머니>에 나간 계기를 묻자 비와이는 “나의 음악이 너무 좋아서 나만 듣기 아쉬웠다.”라 대답하며, 경연 프로그램 출연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것들과 그로 인해 변화를 맞은 삶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The Time Goes On> 앨범을 발표한 후 <쇼미더머니>에 출연했다.

시즌 4 나갔을 때는 어색했어요. 그때는 '잘못된 겸손'을 갖고 있어서 제가 봐도 멋이 없었어요.

'잘못된 겸손'이라는 개념이 궁금하다.

그때의 제게 있어서 겸손함은 사람들 앞에서 고개 숙이고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 제가 경외하는 존재에 대한 섬김이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겸손이죠. 때문에 제가 자신감 있는 게 겸손함이었죠. 자신감이 없다는 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하나님만 무서워야 했는데 <쇼미더머니 시즌 4>에선 사람을 무서워하려니까, 멋이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겸손'이었어요.

그리고 그다음 해 시즌 5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고 실제로 정상에 올랐다. 예감이 들었나.

'믿는다'와 '믿긴다'를 구분해야 한다고 봐요. 제 자신이 '이번 시즌 우승을 믿는다'는 생각에 속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 저는 <쇼미더머니 시즌 5> 우승이 너무 '믿겨졌'어요. 마치 하나님이 '믿기는' 것처럼요. 물론 이게 제가 우월해서, 제가 대단해서라는 뜻은 아니에요.

당시 2016년 IZM 올해의 싱글로 선정된 'Day day'가 화제였다. 현재 빠른 랩 스타일과 비교하면 리드미컬한 느낌이 두드러지는데.

저도 그런 스타일을 하고 싶은데 더 깊이 공부하고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 하는 랩 스타일의 경우 일단 디자인하고 808 드럼으로 강렬한 비트를 더하면 완성이 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Forever'도 물론 멋진 곡이지만 저는 'Day day'에 더 많은 게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일단 비와이가 있었고, 그 당시 유행하던 트랩 비트가 있었고, 펑크(Funk), 오케스트라적인 요소도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분들께 사랑도 받았으니까요.

<쇼미더머니> 이후 비와이의 결과물을 듣는 팬들은 '의도적으로 과거 스타일을 배제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일부러 그런 랩 스타일을 추구하는 건가?라는 오해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비와이라는 캐릭터가 빡세고,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니까요. 그런 스타일을 극대화해서 만든 앨범이 바로 <The Movie Star>죠.

힙합이 세대 음악을 벗어나 전 대중을 아우르는 '팝 뮤직'의 영역을 넘보는 지금 비와이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경연 프로그램과 크리스천 이미지를 통해 기성세대로의 접근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비와이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며 소통의 영역에 대한 고민을 내비쳤다. 동시에 “래퍼들은 다 이렇다는 일반화를 벗고 들어 보면 현재 힙합 신에도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번거로울 수 있지만, 한 번쯤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라며 힙합 신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The Movie Star>의 배경이 궁금하다.

우선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특히 스케일이 큰 영화를 보며 받는 압도적인 느낌을 좋아하는데 이걸 음악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메시지로는 영화에서 주인공, 그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의 삶에 대해 생각한 내용을 담았고요.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나.

영화 <아이언맨>을 예로 들어볼게요. 우선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를 연기하는 배우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죠. 지금 그 사람은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아이언맨>이라는 작품 안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토니 스타크라는 존재로 살고 있어요. '주연'이라는 트랙에 이 개념이 더 잘 설명되어 있어요. 주연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인공은 토니 스타크인 거죠.

저는 지금까지 힙합 신에서 '주연'의 삶을 살았어요. 해외 래퍼들, 미국 힙합을 들으며 그 문화와 요소 모두를 동경하고 그들처럼 행동하고 말을 뱉어야 진짜 멋진 힙합 스타가 될 줄 알았죠. '주연'을 맡아서 그들을 연기한 거예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멋없는 행동이었어요. 따라쟁이였던 거죠. 그래서 이제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인스타그램 독자 @s2s2_y_kiki 님의 질문 : 앨범을 제작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개념이 있다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새로움'입니다. '이것은 새로운가?'를 항상 제 자신에게 물어봐요. 새로운 게 없으면 그걸 들을 이유가 있나 싶은 생각입니다. 물론 제가 낸 작품들이 엄청나게 혁신적이고 새로운 작품은 아니지만, 항상 새 것에 대한 고민을 하는 편이에요.

실제로 굉장히 변화무쌍하고 독특하며 과감한 작품이라 본다. 앨범을 셀프 프로듀싱했는데, 이것도 '새로움'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이었나.

그렇기도 하지만 우선 셀프 프로듀싱이 제 생각을 구현하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이었어요. <The Movie Star>의 경우 사운드는 괜찮았는데 텍스트, 특히 가사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의 어려움인지?

애매모호한 부분이 걸렸죠. 일부러 모호함을 의도하기도 했지만 명확히 텍스트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믹싱 과정에서도 제가 최대한 내고 싶은 소리를 내려니 쉽지 않았고요.

<쇼미더머니> 출연 이후 방황하다 구원을 받고 앞으로 전진하는 <The blind star>와 공통적으로 <The Movie Star> 역시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다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극복의 서사가 중심이다. 흥미로운 공통분모인데.

1집은 말씀하신 대로 의도된 이야기였어요. 어떻게 보면 정말 제 삶의 이야기니까요. <The Movie Star>도 비슷한 결을 가져가려 했고요. '꼭 이렇게 해야겠다!'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모두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The Movie Star>의 타이틀 싱글 '가라사대' 역시 2019년 IZM 올해의 가요 싱글로 선정되었다. 'Day day'와 'Forever'의 중간을 의도한 것으로 들린다.

정확한 표현이에요. <The Movie Star>가 'Forever'의 확장판이었다면, 다음 앨범은 'Day day'의 확장판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비와이가 꼽는 '내 인생의 영화'가 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을 꼽겠습니다.



인천 출신 힙합 아티스트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대전에서 태어나 인천으로 이사를 온 비와이, 그리고 그의 고등학교 친구 씨잼(C Jamm)은 현재 한국 힙합을 이끄는 젊은 신성이다. 이들이 재학했던 인하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의 선배가 3인조 힙합 그룹 리듬파워, 그리고 후배가 지난해 <오리엔테이션> 앨범으로 주목받은 래퍼 최엘비다. 부평구 문화재단의 프로젝트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의 첫 주자로 선발된 비와이에게 인천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한 생각은.

건강하고 멋진 도시가 되었으면 해요. 아무래도 학창 시절엔 어두운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인천이 서울 바로 옆에 있어서 규모도 점점 커지고 사람들도 많아지는데 모두 서울로 가지 인천에 모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도시, 서울로 가지 않아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으면 합니다.



비와이 (BewhY), 심바 자와디 (Simba Zawadi) - NEO CHRISTIAN
비와이 (BewhY), 심바 자와디 (Simba Zawadi) - NEO CHRISTIAN
비와이, 심바 자와디
(주) 카카오 MDejavu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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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 “와인, 공부하려고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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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시간을 같이 한다. 고고학 자료를 보면 신석기 초기의 트랜스코카서스(현재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지역)에 거주하던 동굴인들도 와인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와인은 포도보다 보관과 운송이 용이했으므로 인류의 생활에 밀착해 발전을 거듭했다. 이후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와인을 일컬어 ‘지적 황금’이라고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 와인은 약 50만 종이 넘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새로운 맛과 향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와인 인문학 산책』의 저자 장홍은 프랑스 유학시절 와인에 빠져 와이너리 투어를 시작해 30년 프랑스 생활 동안 약 3000여 곳의 유명 와이너리를 탐방하며 와인을 경험하고, 공부했다. 『와인 인문학 산책』은 그런 저자의 와인 지식을 집약한 책으로 역사와 신화 속의 와인, 와인이 바꿔놓은 인류의 생활사 등을 살피는 동시에 와인과 음식의 궁합, 레스토랑에서 와인 주문하는 법 등 와인에 관한 아주 실용적인 정보를 모두 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와인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와인은 나눔의 기쁨이고 기쁨의 나눔이다”라는 저자 장홍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분위기에서 마시는 와인이 가장 좋은 와인이라고 강조했다. 



역사 속 와인을 통해 본 와인의 생명력

와인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와인을 마시는 법 등 실용적인 정보를 모두 담았는데요. “한 잔의 와인에는 무수한 이야기와 비밀이 숨겨져 있다”(457쪽)는 말을 실감하게 해요. 

한국에도 와인 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이 우선했고요. 서양 문명을 와인이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 보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도 싶었어요. 또 약 30년 프랑스에 살며 많은 와이너리를 다녀본 입장에서 종교와 예술, 문학 등 문화에 녹아 있는 와인을 살펴봤어요. 문화는 끊임없이 섞이고, 때로는 충돌하죠. 따라서 우리 문화가 아니더라도 와인이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술 중 와인만큼 상징성과 문화성, 역사성, 경제성을 지닌 것이 없다고도 하셨잖아요. 

프랑스에 ‘와인 한 잔에는 맥주 한 말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실제로 술의 역사를 보면 맥주가 먼저 시작했죠. 포도로 주조하는 과정은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맥주가 먼저 나온 건데요. 그럼에도 와인만큼 신화와 종교를 거쳐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술이 없어요. 포도는 실용성은 좋지만 오래 보관하기가 힘들어요. 운반도 힘들죠. 그러나 발효해 와인으로 만들어두면 오래 보관할 수가 있어요. 경제성이 컸던 거예요. 그러다 기독교가 서양의 국교로 지정되면서 와인과 기독교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가 됐어요. 9-10세기에는 특히 수도원을 통해 양적, 질적인 발전을 했고요. 잘 아는 ‘로마네콩티’ 같은 것이 수도사들이 기도하듯 와인을 빚어 만들어진 작품들이죠. 

“포도나무와 와인이 없었다면 성경의 부피도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 분명하다”(107쪽)고 한 말도 떠오르네요. 

성경에서 창세기와 마태복음까지는 그야말로 와인이 철철 넘쳐 흘러요.(웃음) 포도가 으깨지고 죽어야만 와인이 탄생하잖아요. 와인은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을 상징했고요. 포도는 다산과 부를 상징했죠. 노아가 방주를 나와 처음으로 심은 나무도 포도나무였거든요. 유럽의 성당에 가보면 스테인드글라스나 부조가 많은데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는 모습이나 노아와 와인에 관한 형상이 굉장히 많아요. 예수가 일으킨 첫 번째 기적도 물을 와인으로 변화시킨 거잖아요. 최후의 만찬에서도 와인을 나의 피니까 받아 마시라고 했고요. 만약 예수가 혼인잔치에 가서 와인을 물로 만들었다고 상상해보세요. 아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웃음) 

고대 이집트에서는 와인을 상류층만 마실 수 있어서 취하는 게 신분의 반영이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신화에서 신이 갖는 역할을 보면 그 신이 상징하는 것들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데요. 고대 이집트에서 와인이 갖는 상징성은 대단해요. 와인의 신 ‘오시리스’는 생명과 농업까지 관장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신이에요. 이때는 와인을 마시고 많이 취하면 취할수록 대단한 사회적 부와 명예를 갖고 있다고 여기던 시대니까요. 심지어 노예 2-3명이 술에 취해 완전히 뻗은 주인을 모시는 모습이 피라미드 벽화에 기록되어 있죠. 와인을 조금만 마신다면 결코 중요한 파라오가 될 수 없는, 당연히 누구보다 많이 마시고 많이 취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거예요. 

그런 와인이 생존력을 갖고 인류 문명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또 다양한 시대적 맥락이 있는데요. 상수도가 보급 되기 전에는 와인이 가장 위생적이고 안전한 음료였다는 사실도 짚어야 할 것 같아요. 

유명한 샴페인 이름이기도 한 ‘태팅거’를 만든 태팅거가 “역사의 재판정에서 와인만은 언제나 승리했다”고 했는데요. 맞는 말이에요. 와인의 생명력을 말할 때 음료로써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죠. 상수도 보급 전까지는 대부분의 전염병이 오염된 물로 시작됐잖아요. 게다가 항생제가 발명되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와인이 만병통치약이었어요. 장티푸스에 걸려도 와인을 마시고, 아픈 곳에 바르기도 하는 식이었죠. 또 전쟁에서도 퇴각을 하면서 우물이나 강가에 독약을 풀기 때문에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군대에 무기나 탄약을 공급하는 것 이상으로 와인 공급하는 게 중요했어요. 2차 대전까지 그랬거든요. 프랑스 같은 데는 보건성이 학생들을 시켜서 와인 찬양 포스터 대회 같은 걸 하고 그랬으니까요. 또 일꾼에게 와인을 주면 황소 두 마리보다 일을 잘한다고 했어요.(웃음) 그만큼 에너지 공급 차원에서도 효과적이었던 거죠. ‘와인은 늙은이의 우유’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요. 



와인 어떻게 즐길 것인가

그렇다면 현대 사회와 와인은 어떤 위치에 와 있다고 보세요? 

서양은 와인이 삶의 한 부분이에요. 지금도 프랑스는 여론조사를 하면 85%가 와인을 음식이라고 인식하고 있는데요. 와인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는 와인 소비가 급격히 줄고 있어요. 통계만 보면 2030년쯤에는 와인을 아무도 안 마신다고 나와요. 이런 추세면 와인의 장래가 밝진 않죠. 과거 와인을 물처럼 마셨다면 현재는 특별한 경우에 와인을 마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와인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요. 점점 소수가 마시고, 가려서 마시고, 새로운 와인을 찾아 마시는 흐름이 있는데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 중국 등 와인을 생산하지 않는 국가에서 와인 소비량이 늘고 있다는 점이고요. 다만 아직 한국에서는 와인을 너무 레이블 위주로 마시지 않나 생각해요. 

비싼 와인이 곧 좋은 와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레이블을 보고 와인을 선택하는 것 등 흔히 갖고 있는 편견들을 여러 번 비판하셨죠. 

와인 강의를 가면 백이면 백 나오는 질문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값도 싸고, 질도 좋고, 맛있는 와인을 고를 수 있나?’ 하는 건데요. 그건 완전히 도둑 심보예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올림픽 메달 따고 싶다는 것과 같은 거예요. 기본 체력을 만들고, 연습 과정을 거쳐 경기에 나가야 하잖아요. 와인도 마찬가지거든요. 과정이 필요해요. 게다가 지금은 마트에 저렴한 와인도 많아요. 좋은 와인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우선 시작해보면 좋죠. 1987년부터 국내에 와인이 수입되기 시작했으니 30년이 조금 넘은 거잖아요. 역사가 짧으니까 아직도 상류층이 레이블을 따지고 와인을 마시는 경향이 남아 있는데요. 저는 와인에 있어서 만큼은 양적 팽창이 질적 심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고요.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다 보면 와인 문화의 성숙이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와인의 대중화 단계에서 필요한 것으로 ‘가격 접근성’과 ‘문화 접근성’을 꼽았잖아요. 한국을 두고 얘기한다면 그 중 문화 접근성 부분이 아직 미진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가격 접근성은 많이 괜찮아졌는데 여전히 문화적인 접근성은 떨어지는 것 같아요. 와인에 관심 갖고 있는 분들이나 지금 마시고 있는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공부하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거든요. 한국은 너무 학구열이 뛰어나서 뭐든 배우려고 해요. 그런데 와인은 즐거움이고 쾌락이에요.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노는 것이고 마시는 것인데 공부부터 시작하면 재미 없어서 못 해요. 배워서 알면 소믈리에가 되겠죠. 하지만 그러려는 게 아니잖아요. 일반 소비자는 와인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만 고민하면 돼요. 일단 마시세요.(웃음) 가능한 한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마시면 양잿물도 맛있어요. 가장 좋은 와인은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마시는 와인이죠. 저도 개인적으로 제일 경계하려고 하는 게 있어요. 와인을 그냥 마실 때는 절대 아마추어 경계에 서 있으려고 해요. 와인은 즐거움이니까요. 와인은 나눔의 기쁨이고 기쁨의 나눔이에요. 




와인이 선사하는 문화의 질적 팽창

취향 맞는 와인을 고르는 방법으로 같은 와인을 6병 구매해서 마셔보라는 말이 눈에 띄어요. 

6병 단위로 구매해서 마셔보라는 건 아주 중요한 조언인데요. 대다수 아마추어가 다양한 와인을 마셔보면 알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순수하게 와인을 즐기는 차원이라면 괜찮지만 조금 관심을 갖는 사람은 이 방법이 좋죠. 첫째, 6병이나 12병 단위로 사면 조금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요. 둘째, 6병을 그날 다 마시지 않는 한 시간의 변화에 따라 와인이 어떻게 변하는지 느낄 수 있어요. 셋째, 마시는 날의 컨디션에 따라 와인의 맛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 수 있겠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냐 즐거운 날이냐에 따라 같은 와인의 맛도 전혀 다르거든요. 마지막으로, 같은 와인을 6병 마셔보면 이 와인은 대략 이런 색깔, 이런 느낌, 이런 향과 맛이구나, 하는 데이터를 쌓을 수 있죠. 그러면 품종, 지역 등을 막연하나마 구분할 수 있을 거예요. 다양한 와인을 널뛰듯 마시면 절대 알 수 없거든요. 

와인을 잔에 따르고 색을 관찰하고, 일정한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에 걸쳐 향을 맡고, 그리고 한 모금 머금고는 입안 여러 부위로 와인을 굴리고 나서 삼켜야 한다. 그리고 삼킨 후의 여운과 역후각이 주는 어딘가 아련한 향의 느낌도 즐겨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 병의 와인을 마실 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향과 맛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273쪽)

맛은 중요해요. 우리도 일 년에 하루 정도는 ‘맛의 날’을 정해서 셰프들이 유치원, 초등학교에 가면 어떨까요. 복잡한 교육도 필요 없어요. 귤 하나, 감 하나씩 주고 만져보고, 색도 관찰하고, 향도 맡아보면 감각이 살아나요. 이것이 오감을 깨우는 창조적 교육이죠. 학교 앞에 ‘창의교육’ 같은 현수막 걸지 말고 생활 속에서 창의교육을 하면 좋겠어요. 할 수 있다면 간단한 음식도 만들어보면서 말이죠. 맛과 향, 질감 이런 것들이 뇌를 창조적으로 만들어요. 향은 맛을 지배하고, 맛은 뇌를 지배한다고 하잖아요. 성인에게는 와인만큼 좋은 것이 없고요. 

와인을 편식하는 것처럼 안 좋은 습관도 없다고도 하셨는데요. 

세상에 와인이 몇 종류나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알 수도 없죠. 어림잡아 50만종이 된다고 하는데 거기에 와인만 갖는 빈티지 개념을 더하면 와인 종류는 무한대가 되어버리거든요. 여담이지만 한 번은 서재에 앉아 지금까지 마셔본 와인의 종류를 계산해봤어요. 30년 줄기차게 마셨으니 많이 마셔봤겠지 했거든요. 보니까 대략 1만종 정도 되더라고요. 그 생각을 하기 전에 제 평균 행복지수가 70정도였는데 50으로 내려왔어요.(웃음) 이렇게 다양한 와인을 매일 30년 넘게 마셔도 극히 일부밖에 맛을 볼 수 없는데 한 와인만 마시는 건 안타까운 일이죠. “난 ‘1865’만 마셔”(웃음)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사람과의 관계는 충실함이 중요하지만 와인에 관한 한 충실함은 가장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에필로그에 ‘위하여 문화’와 ‘와인 문화’를 비교하면서 한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했어요. 

‘위하여 문화’는 ‘울타리 문화’죠. 편한 면도 있어요.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너무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문화죠. 그래서 폭력적인 문화가 되는 거고요. 술자리에서 윗사람이 잔을 들었는데 아랫사람이 잔을 들지 않으면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 되잖아요. 술 마시는 역량은 개인적 차이가 큰데 비슷하게 마셔야 해요. 그래야 동질감이 생긴다고 여기는데요. 과거에는 유효했을지라도 이제는 달라져야죠. 이때 와인 문화 같은 것들이 우리 사회에 다양성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접근성도 좋아졌으니까요. 와인을 마시면 자연스럽게 일상의 문화가 조금씩 바뀔 거예요. 와인은 이른바 ‘우리가 남이가’ 문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거든요. 

와인의 어떤 면들이 한국 사회에 다른 가치를 전할 수 있다고 보세요?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균형적으로 맞출 수 있는 역할을 와인이 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고, 빨리 깨서 일하러 가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사람은 충분히 놀아야 창조적일 수 있어요. 기업 강의를 할 때도 ‘일 열심히 한다고 컵라면 옆에 두고 밤새 일하면 20년 안에 회사는 망한다’는 게 제 주장이었거든요. 놀고, 와인도 한 잔 하면 훨씬 창조적 인간이 되고 부가가치 높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이죠. 저는 이 사회의 양적인 팽창에는 한계가 왔다고 봐요. 이제는 질적인 심화가 필요한데 이것은 절대로 속도전이나 양적인 접근으로는 불가능해요. 속도 속에는 생각이 없잖아요. 좀 느릿느릿, 여유 있게 색과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와인이고요. 술이라는 범위 안에서 생각하면 와인은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술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와인을 시작해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려요.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가 너무 어려워요.(웃음) 다만 할 수 있는 얘기는 기회가 있다면 거부하지 말고 시도해보라는 거예요. 마셔보라고요. 또 절대로 한 번 마시고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는데요. 저도 처음 삭힌 홍어를 먹었을 때 입에 넣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다 뱉고 왔거든요. 하지만 몇 번 먹어보니까 엄청난 나름의 맛이 있더라고요. 더구나 와인은 마실 당시의 내 육체적, 정신적 컨디션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3-4번 기회를 갖고 마셔보면 좋겠어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상상 이상으로 좋아지게 하는 게 와인이니까요. 몇 번 와인을 마셔보면 분명히 와인과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한국의 성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와인을 마시면 이 사회는 밑에서부터 바뀔 거라고 확신해요. 



장홍이 제안하는 <와인을 와인답게 마시기 위한 10가지 조건>

1) 일상생활에서 향과 맛에 대한 관심을 갖고 훈련하라

2) 너무 강렬한 음식과 함께 와인을 마시는 것은 피하라

3) 와인은 식초와 상극이다

4) 적절한 잔을 선택하고 3분의 1 이상 채우지 말라

5) 각 와인에 맞는 적정 온도에서 마셔라

6)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라

7) 좋은 사람들과 좋은 분위기에서 마셔라

8) 적당히 마셔라

9) 가능하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인 시음식을 가져보라

10) 일정한 양과 일정한 종류의 와인을 집에 저장하라



와인 인문학 산책
와인 인문학 산책
장홍 저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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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주현미 “노래, 살아있는 유기체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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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데뷔 35주년을 맞은 가수 주현미가 첫 번째 에세이 『추억으로 가는 당신』을 펴냈다. 자신의 음악 인생을 들려주는 한편, 한국 대중가요의 태동기였던 192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가요 100년의 역사를 되짚는다. 

그는 2018년 11월에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개설한 후 옛 노래들을 직접 부른 영상을 업로드하며 대중과 소통해왔다. 잊혀져가는 전통가요를 보전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었다. 불후의 명곡들을 찾아 가사를 복원하고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발굴해냈다. ‘주현미밴드’의 음악감독인 이반석 베이시스트는 “받은 사랑이 너무 많다. 이제 내가 돌려주고 싶다”는 주현미의 말에 ‘주현미TV’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추억으로 가는 당신』에 실린 내용을 정리하기도 한 이반석 음악감독은 “오류를 가지고 전해져오는 곡들이 많았다. 일단 노래의 원형부터 복원하겠다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고 말했다. 

‘주현미TV’라는 거대한 아카이브 속에서 사람들은 ‘추억 속의 노래, 노래 속의 추억’과 만났다. 옛 노래를 따라 지나간 시절 속을 거닐기도,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노래의 탄생 비화, 그 안에 담긴 역사의 한 장면과 만나기도 했다. ‘주현미TV’는 10만 명 구독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추억으로 가는 당신』이 탄생했다. 50곡의 전통가요 명곡을 통해 노래와 추억을 이야기한다.



원곡의 아름다움을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책입니다. 지금까지 출간 제의를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중간에 회고록 같은 걸 써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기도 했는데요. 솔직히 10년 20년 노래하고 책을 쓴다는 게 부끄러웠고...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추억으로 가는 당신』은 데뷔 35주년을 맞아 출간하신 건가요?

이 책도 저의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을 담은 에세이는 아니에요. 만약 그런 내용이었다면 저는 책을 못 냈을 거예요. 솔직히 부끄럽죠. 제가 35년 동안 노래를 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이번 책은 노래 이야기를 엮은 거니까 용기가 생긴 거죠. 

유튜브 채널 ‘주현미TV’를 운영하고 계신데요. 전통가요를 복원하고 기록하겠다는 계획은 오래 전부터 갖고 계셨던 것 같아요. 

네, 그 작업은 꼭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인으로서 부채감 같은 게 있으셨어요?

그렇죠. 제가 처음 데뷔한 게 선배님들의 주옥같은 옛 노래들을 메들리로 부른 거였잖아요. <쌍쌍파티>라는 앨범이었는데, 그냥 한 리듬으로만 해서 흥겹게 만든 거였거든요. 사실 그런 류의 상품도 필요한 거고 수요가 있었던 거지만, 분명히 원곡의 아름다움이 많이 훼손된 것이기도 하죠. 그건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기존의 방식으로라면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드니까 못 하죠. 엄두도 안 나고요. 그런데 유튜브라는 스테이션이 생긴 거예요. 물론 지금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것도 제작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요. 그래도 음반으로 내는 것보다는 훨씬 가벼우니까요. 세션 두 사람만으로 하니까 인원수가 적기도 하고. 그래서 용기를 낸 거예요. 

유튜브 영상은 ‘주현미밴드’의 이반석 음악감독과 함께 만들고 계시죠. 먼저 제안하셨어요? 

네. 생각은 항상 맴돌았는데 이걸 풀어낼 방법이 없는 거예요. 유튜브는 우리 아이들을 통해서 접하게 됐어요. 커버곡 영상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그런데 조회수가 몇 백만이 돼요. ‘이게 뭐지? 오리지널 가수가 분명히 있고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그 가수의 노래를 안 듣고 커버곡을 듣는 거지? 심지어 아마추어가 부른 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본단 말이야?’ 처음에는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프로페셔널이라도 이렇게 못할 이유가 뭐가 있어, 꼭 사운드가 잘 갖춰진 근사한 데에서만 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 이것도 음악을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방식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서 해답을 찾은 거예요. 그래서 이걸 해보려고 하는데 풀어내줄 사람이 주위에 반석 씨밖에 없는 거죠(웃음). 그래서 인천에서 콘서트할 때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했어요.

즉흥적으로 이야기하셨던 거 아니에요(웃음)?

이야기는 즉흥적으로 꺼냈지만 제 머릿속에는 항상 그 생각이 있었어요. 심지어 딸한테도 ‘엄마도 이거 해보고 싶은데...’ 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아이들이 ‘엄마가 그걸 왜 해?’ 그러더라고요(웃음). 꾸준히 아이디어 내야 되고 업로드 해야 되고, 보통 작업이 아니라고요. 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옛 노래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나는 부르기만 하면 되는데.’ 곳간에 곡식이 이만큼 쌓여 있는 것 같았어요. 선배님들이 남겨놓은 노래가 너무 많고 저는 그냥 조금씩 꺼내서 풀어내는 것뿐이니까요. 그런 생각으로 반석 씨를 불러서 이야기를 했던 거죠. 이런 작업을 하고 싶은데 풀어내달라고(웃음).


 

노래가 살아있는 유기체 같아요

원곡의 자료를 모으고 복원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중뿐만 아니라 후배 가수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서 더 꼼꼼하게 하셨을 것 같아요.

네, 그건 정말 숨겨진 저의 마음이에요. 고리타분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리 선배라도 속으로 ‘그래, 잘났다’ 이렇게 이야기할까 봐 조금 조심스럽지만, 사실은 이 장르를 노래하고 공부하는 후배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바람이고요. 언젠가는 봐주겠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주현미만의 색깔로 부른 옛 노래도 듣고 싶은데요. ‘주현미TV’에서는 그런 재해석을 자제하시는 것 같았어요. 

기록으로 남기고 싶고 교과서로 남기고 싶은데, 그걸 제 스타일로 불러놓으면 결국 제가 모델이 돼서 그걸 흉내 내게 될 거잖아요. 내가 기본이 되면 안 되겠다, 그냥 선배님들이 불러놓은 만큼의 감정과 기교를 담자고 생각했어요. 곡을 더 화려하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건 거의 배제했어요. 저는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중에 어떤 후배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이걸 기본으로 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색깔을 입힐 수 있게 해놨어요. 

평소에 음악인으로 작업을 하실 때도 가사의 의미를 곱씹어보실 것 같아요.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도 알고 싶어 하시고요. 어떠세요?

맞아요. 그리고 노래를 할 때 혼자서 그 스토리를 만들어 봐요. 항상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예로 드는데요. 그 노래는 그냥 하나의 이야기예요. 1절부터 3절까지 그 안에 다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전쟁이 나서 어떤 남자가 부산으로 피난을 간 거죠. 혈혈단신 의지할 곳도 없다가 어떤 경상도 아가씨를 만난 거고. 그러다가 사랑을 했겠죠. 그런데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이별의 부산 정거장」 중에서)’그 노래를 들으면 너무 기가 막힌 이야기예요. 저는 그런 것들이 재밌어요. 내가 스토리를 만들어서 해석한 대로 부르고. 누구나 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천 가지 만 가지 이야기가 되는 거죠. 살아있는 거죠, 노래가. 

책에서 선배 음악인들과의 인연, 추억도 들려주셨어요. 쓰시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셨을 것 같습니다.

많이 그립더라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그때 너무 어렸다, 더 많이 매달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걸...’ 싶어요. 그때는 진짜 선배들이 뭐라고 잔소리를 하면 도망 다녔어요(웃음). ‘우리 때는 천막 치고 벽에 가마니 쳐놓고 녹음했다’ 그런 이야기 들으면 또 저런 소리 한다고 도망 다녔는데, 진짜 그때 많이 들어놓을 걸 그랬어요. 지금 선배님들 생각하면 너무 슬퍼요. 

『추억으로 가는 당신』은 동명의 곡에서 따온 제목이에요.

저한테는 노래로 많이 각인되어 있는 제목인데, 그게 이별의 노래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들었을 때는 노래가 먼저 떠올라서 ‘괜찮은가?’ 싶었는데, 설명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너무 딱 맞는 거예요. 모든 노래에는 각자의 추억이 있잖아요. 내가 어떤 시절에 좋아했던 노래가 들려오면 그때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잖아요. 노래를 들으면서 추억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책 제목을 너무 잘 지은 것 같아요. 내 노래 중에 이런 제목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현미TV’ 구독자들의 사연도 책에 실려 있는데요. 정말 한 곡의 노래 위에 수많은 추억들이 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너무 신기해요. 노래가 살아있는 유기체 같아요. 남겨주신 사연들을 보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많아요. 이런 작업을 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무대에 서는 게 힘들지만 저의 삶이죠

전통가요 명곡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시면서 ‘어떤 곡들이 오래 살아남고 사랑 받는지’ 생각해 보셨을 것 같아요.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쉬운 노래들이 노래 남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정확한 답은 없어요, 사실.

최근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는데, 거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럴 수 있죠. 

따라 부르기 쉬운 트로트들이 많이 나온 걸까요? 

요즘 트로트를 이야기하면... 네, 쉽죠. 많이 쉽고 많이 말초적이죠. 유행가니까 어떤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아쉬운 점도 많지만 그 중에 또 좋은 노래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유행가는 시대를 반영해요. 요즘 대중들이 복잡한 건 싫어한다는 거죠. 저는 거기에서 조금만 더 탈피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노래는 멜로디는 참 괜찮은데 가사들이 너무...

말초적인가요(웃음).

네, 표현을 그렇게 하니까(웃음). 아니면 내용도 없고 계속 똑같은 말이 반복이라든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런 걸 요하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으로 이 장르를 택해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면 그래도 조금은 멋있게 불러줬으면 좋겠어요(웃음). 

최근에 <트롯신이 떴다>에서 정용화 씨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는데요. 이전에도 후배 가수들과 같이 꾸준히 작업해오셨어요. 

네, 행운인 거죠. 그 후배들도 작업을 하면서 몇몇 선배들을 리스트에 올렸을 거 아니에요(웃음). 그 중에서 저랑 같이 하고 싶다고 한 건데, 솔직히 이건 선택된 거죠. 자신들의 음악에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 거고, 악기라면 어떤 세션으로 필요한 거였는데, 꼭 필요했던 걸 제안한 거잖아요. 그런 건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그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적절하게 쓰여지고 그렇게 역할을 할 수 있고, 현역 가수로서 후배들하고 함께할 수 있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책에서 가수 주현미의 음악 인생을 엿볼 수 있었어요. 아버님께서 딸이 노래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나 봐요. 

맞아요(웃음). 노래를 시키면 제가 곧잘 했나 봐요, 어렸을 때는 겁도 없이. 그러니까 현미가 노래를 잘 한다고 친구 분들이나 친척 분들, 아는 분들한테 자랑하고는 하셨어요. 콩쿨 대회 같은 게 있으면 안아서 무대 위로 올려주시고요. 

그때는 너무 부끄러워서 싫었다고 쓰셨어요. 

저는 지금도 무대에 서는 게 엄청 힘들어요. 

그런데 어떻게 35년 동안 무대에 설 수 있으셨어요?

뭐... 그냥 제 삶이죠. 

중학생 때 기념 앨범을 내셨죠. 대학생 때는 ‘강변가요제’에도 나가셨고요. 노래하는 건 계속 즐거우셨나 봐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초등학생 때부터 노래 레슨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무서워서 못 빠지고 맨날 가서 노래 연습을 한 거예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아버지가 ‘이 정도 했으면 음반을 내자’고 하셔서 기념음반을 냈는데, 당시에는 미성년자는 활동을 못 했어요. 그래서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요. 강변가요제는 잠시 외출 같은 거였어요. 그해 여름에 계절 학기를 들었는데, 수업 끝나고 중앙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는데 약대 실험실에서 악기 소리가 나는 거예요. 너무 궁금해서 가봤더니 강변가요제에 출전하려고 연습을 한대요. ‘진생 라딕스’라는 약대 밴드가 있었거든요. 옆에서 연습하는 걸 지켜봤는데, 몇 번 들어보니까 멜로디를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흥얼거렸는데 선배가 같이 가요제에 나가보지 않겠냐고 그래요. 호기심도 들고 그래서 한 번 불러봤는데 잘 맞을 것 같다고. 그래서 그 해에 강변가요제에 나간 거예요. 그것도 그러고 말았죠. 공부하는 데 너무 어렵고 힘들었거든요. 중간에 노래를 할 기회도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어요. 

데뷔 35주년 기념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죠. 코로나19로 인해 일정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어요. 

네, 2월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계속 미뤄지고 취소되고... 7월 공연은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기념 앨범 발매 계획은 어떻게 되었나요?

원래 내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정규 20집을 발매하기로 했어요. 매달 두 곡씩 음원을 선공개하고, 6개월이 지난 후에 모아서 20집 앨범으로 낼 계획이에요. 



추억으로 가는 당신
추억으로 가는 당신
주현미 저 | 이반석 정리
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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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권석천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각오하면 편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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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한 범죄 소식을 들었을 때, 착한 일을 했다고 여길 때, 내 기준에 어긋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낀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며 점점 더 커지는 ‘괜찮은 나’. 우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 

소문난 글쟁이이자 ‘<중앙일보>의 송곳’이라 불리는 권석천. 그는 ‘인간의 비극은 자신을 믿기 시작할 때 출발한다’며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의심하기를 권한다.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는 시대에 ‘사람에 대한 예의’를 말하는 그에게 ‘예의’는 불편함과 편함의 접점을 찾는 일. JTBC 보도총괄이 되고 한 달 뒤, 새 책 『사람에 대한 예의』를 펴낸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숨을 쉬듯 누군가를 손가락질하지만 당신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자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16쪽)



행성 주변을 도는 ‘위성’ 같은 사람

JTBC 보도총괄로 부임하고 한 달여 만에 책이 나왔어요. 어떻게 지내나요?

생활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5월 초에 인사가 났고 <중앙일보>에서 다시 JTBC로 가게 됐어요. 혼자 생각하고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논설위원이라면 보도총괄은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일이거든요. 회의도 많고요. 그래서 요즘 안 쓰던 근육을 쓰고 있습니다. 말하는 근육, 가까운 사람들의 말을 듣는 근육이요. 

보도총괄직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고요.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는데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글 쓰는 삶과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데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었기 때문에 오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쓰면서 지금까지 써온 글과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졌어요. 신문이 아닌 다른 플랫폼에서도 그게 가능하겠다고 생각했고요. 신문 칼럼은 주로 '~해야 한다' 또는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2,000자 내에서 하는 글이잖아요. 물론 이런 글이 필요하고 앞으로 칼럼을 안 쓰겠다는 건 아니지만, 굳이 환경을 제한할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했죠. 



내부의 분위기에 반하는 글을 많이 써왔는데 불편하거나 걱정되는 건 없었나요?

반대되는 글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글이었죠. 걱정이라기보다 마음의 불편함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요. 누구나 하는 생각을 쓰는 건 의미가 없죠. 그러면 긴장감, 불편함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나요? 함께 일하는 사람이나 외부와의 긴장감, 불편함이 투영된 글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요. 문제는 그 불편함을 어느 정도까지 밀어붙이느냐인데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선을 넘게 되잖아요. 글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선을 넘지 않으면 글의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 넘고, 불편해지는 거죠. 

'<중앙일보>의 송곳'이라는 수식어가 있죠. 들으면 느낌이 어떤가요?

면구스럽죠. 주머니를 찢고 나오는 게 송곳인데 '과연 내가 그렇게 살았나'하고 생각해 보면 가깝지 않은 것 같아요. 그동안 제가 살아온 걸 돌이켜 보면 후배들과 같이 고민하고 비판하면서도 회사 앞에 서면 조금 달라지는 박쥐 같은 선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마음속에는 송곳 같은 게 있겠죠. 삐죽삐죽해서 부딪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칼을 밖으로 꺼내기보다 안에서 꺼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중심에 있으면서 주변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주변을 보게 하는 동력이 뭔가요?  

주변인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겠죠. 동력이라기보다 상처가 아닐까 싶은데요. (웃음) 초등학교 때 네 번 전학을 다니면서 아주 약한 정도의 따돌림을 받았는데 이런 경험이 중심이 아닌 주변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 것 같아요. 중심이 되어서 무언가를 이끌겠다기보다 조금 떨어져서 잘하는지 지켜보자 생각했고, 그래서 기자를 하게 된 거 같아요. 

실제로 ‘주류와의 거리를 의식하면서 살아왔다고’도 하셨죠. 의아했어요.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왜 주류와 거리를 두느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겠죠. 옳은 지적입니다만 대학 때부터 줄곧 중심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대학 때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다른 과 강의실을 서성이곤 했거든요. 친구들이 형법 이야기를 하면 섞이지 못하고 혼자'저 대화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어떤 가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심적인 거리가 있었죠. 경력 기자로 회사를 옮기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위성 같다고 할까요. 행성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별똥별은 아니지만, 행성 주변을 맴도는 위성이요. 그래서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된 것 같아요. 

위성치고는 존재감이 큰 것 같은데요. (웃음) 지금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심에 서게 되셨고요. 

그렇죠. 현재는 많이 달라졌죠. 어떤 조직에서 중심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운명 같은 느낌이 있어요. 보도국장이나 보도총괄이 된 것 모두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거든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지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잘 해내고 싶습니다. 위성도 존재감은 있으니까요. (웃음) 



예의는 불편함과 편함의 접점을 찾는 일

자신을 의심하는 태도를 권하고 있어요.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것도 습관이 될 수 있지 않나 싶은데요. 의심하려는 태도를 의심한다면요? 

일단 의심하려는 마음 자체가 하나의 포즈이거나 자기만족을 위한 장치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아서 의미심장하고요. 자신을 의심하는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려면 '나'를 넘어서 '우리'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기자 집단일 수 있고, 대한민국에서 잘 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죠. 제가 책에서 '악의 낙수효과'를 말했잖아요.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으면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일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꼭대기에 있는 악이 밑으로 흘러내려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받을 수 있거든요. 자기의 무게 때문에요. 이런 것들을 깨닫고 자신을 의심하면서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속한 곳을 기준으로요.

공동체 내에 미세먼지처럼 뭉쳐 있는 것들이 있잖아요. 편견이나 혐오 같은…. 미세해서 보이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 미세먼지로 인해 진짜 봐야 할 것들을 볼 수 없죠. 이런 미세먼지가 뭔지 깨닫고 바꿔나가면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이런 노력을 같이할 사람이 있어야 힘이 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잖아요. 혹시 외롭거나 어려워서 힘들 때는 없었나요?  

외로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요. 예전에 회사 구내식당에서 한 선배를 마주쳤는데요. 그 선배가 제 칼럼에 달린 댓글을 봤다면서 알려주더라고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권석천은 회사에서 혼밥하고 있을 것 같다’고...(웃음) 그 선배는 저랑 다르게 쓰는 분인데 서로 식판 들고 혼자 먹다가 마주친 상황이었어요. 그 선배가 “나도 혼밥하는데 왜 너만 혼밥한다고 하냐”고 해서 같이 웃었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는데요. 다만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구체적인 반응이 왔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는데 그런 게 많지는 않았죠. 이번에 책 쓰면서 편집자 덕분에 이런 갈증이 해소됐어요. 편집자의 반응에 따라 글을 많이 고쳤는데 신뢰 관계에 있는 누군가의 반응은 중요한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불편함을 권하는 책이에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편한 걸 선택하려는 관성이 있잖아요. 선택의 상황에서 이런 관성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불편하게 살라는 건 아니고요.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각오하면 오히려 편하게 살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책에서 어떤 대기업 부장이 한 말을 소개했잖아요. 그 사장의 말대로 자기 캐릭터를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잡으면 누구든 쉽게 못 해요. 사장 되고 부사장 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죠. 그리고 편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잖아요. 사람도 동물이니까 본능대로 살려는 욕망이 있죠. 이를테면 ‘밥이냐 원칙이냐’는 문제 앞에서 밥을 선택하는 게 사람일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도 없어요. 그런가 하면 우리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본능만 따라가지도 않아요. 이 불편함과 편함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예의일 수 있죠. 

인간에 대한 예의요?

그렇죠. 예의를 지키는 일이 편한 게 아니잖아요. 그냥 내키는 대로 하면 자신은 편할 수 있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예의를 갖추면 서로 편해져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이런 가치를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예의에 어긋나는 사람이나 상황을 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편인가요?

누구나 그렇듯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하고 생각하죠. 다른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나라도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요. 제가 예의 없게 행동할 때도 물론 있는데요. 일단 누구든 상대를 어른으로 대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기 결과에 책임지고 배려할 건 배려하면 꼰대가 안 되는 거 같아요. 

어떤 분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후배한테 먼저 밥 먹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요. 혹시 이렇게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게 있나요?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거 자체가 꼰대라고 하던데요? (웃음) 

사실 꼰대가 안 되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싶기는 해요. (웃음) 덜 꼰대스러울 수 있겠지만요. 

꼰대가 안 될 수 없죠. 그리고 저는 밥 먹자고 하는데요? (웃음) 구체적인 노력이라면 일단 후배들의 사적인 일상에 관심을 표하지 않아요. 윗사람들은 그걸 관심이나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벼운 호기심이고 간섭이죠. 또 하나는 후배들이 필요를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에요. 그래서 사무실 문을 항상 열어 놓고요.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면 연민에 빠지기 쉬워요 

내밀한 이야기들도 많이 실렸어요. ‘아픈 손가락 같은 글’들이라고 했는데 마지막까지 게재 여부를 고민한 게 있나요?

‘어디선가 아버지가 센서 등을 깜빡일 때’라는 제목의 글인데 성장 과정, 아버지와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서 마음에 걸렸죠.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글 쓰는 사람의 예의 같아요. 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요. 편집자한테 책 뒤쪽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1장 맨 끝에 배치했더라고요. (웃음) 

독자 입장에서는 그런 글을 읽으면 저자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읽으면서 본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예전에 대법원에 관한 책을 냈을 때는 지인들한테 많이 보내주고 했는데 이 책은 못 보내겠더라고요.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느껴질까 싶어서요. 원래 아는 사람한테 내밀한 이야기 하는 게 더 어렵잖아요.  

법을 전공했지만 시를 좋아했고, 문화부 기자를 꿈꿨지만 법조기자로 일했어요. 지금은 ‘<중앙일보>에서 권석천의 글만 읽는다’라는 말을 듣고요. 공통점이 보이는데 우연인가요? 

잘 보신 것 같아요. 우연은 아니고요. 생각했던 삶을 살지 못한 거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뭘 잘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다 대학에 갔고 법을 공부하게 됐는데 내 적성하고는 달랐던 거죠. 그렇게 한 번 겉돌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고, 이게 운명이 되고 인생이 되었는데 그 과정 자체가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전공이나 친구가 나빠서가 아니라 저랑 안 맞아서 힘들었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문학 담당 기자를 했다든지 하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있어요. 

더 잘했을 것 같다는 말인가요?

잘했을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달랐을 것 같아요. 인공위성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얻은 것도 있거든요.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완전히 다른 길인 거죠. 

이번 책에서 여러 형식의 글을 쓰셨더라고요.

2012년도부터 칼럼 '권석천의 시시각각'을 썼는데 다양하게 써보고 싶었어요. 신문에 실리는 글이 재미없었거든요.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면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러면 내 글도 그렇게 읽힐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다르게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절박했어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고요. 그래서 이번에 책을 내면서 총 38개의 글을 써서 편집자에게 줬는데 그중에 하나를 빼자고 하더라고요.

어떤 글인가요?

움베르트 에코가 쓴 『프라하의 묘지』라는 두 권짜리 소설을 보면 반 쪽 정도가 한 문장인 글이 있어요. ‘이제 어느 행인이 있어..’로 시작되면서 파리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똑같이 써보고 싶더라고요. 장문의 묘미랄까. 그런 걸 좋아해서 1895년 서울 광화문을 배경으로 썼는데 재미없다고 킬 당했죠. 제가 봐도 재미없는 것 같아요. (웃음)

혹시 최근에 인상 깊게 본 문장이나 글이 있다면요? 

‘단어들이 섬광처럼 결론을 내리게 하고 너는 빠져나오라’라는 문장이 생각나요. 도널드 홀이라는 미국 작가가 여든 넘어 쓴 책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글 쓰는 사람이 주의할 점이 아닌가 싶어요. 글 쓰다 보면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거든요. 읽는 사람이 모를까 봐. 글이 말하게 하고 자기는 빠져나와야 하는데 멈춰서서 글을 걱정하는 거죠. 

기자님의 칼럼을 좋아하는 젊은 언론인이 많아요. 이제 막 언론인이 됐거나 언론인을 꿈꾸는 사람에게 조언한다면요?

언론인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잖아요.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깊이 파고들어서 '사실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줘야 하니까 정직해야죠. 그리고 일하는 과정이 투명해야 해요. 소셜미디어가 계속 발전하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더 그렇고요. 쉬운 직업은 아니에요. 돈이나 명예가 크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자신을 잘 알아야겠죠.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성격 때문에 언론인이 되기를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술도 잘 못 먹는데 기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이런 생각 안 했으면 좋겠고요. 사람을 만나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자료를 파악하고 정리해서 전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게 언론이거든요. 그러니까 본인의 성격 때문에 고민하기보다는 본인의 강점을 키우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경험에 의한 조언인 것 같은데요. 일을 시작한 이후에 본인에게 자료를 다루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맞아요. 다른 기자는 검사랑 농담도 하면서 금방 친해지는데 저는 검사 방을 못 들어가고 그 앞에 서 있고 그랬어요. 들어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고, 친해지기 힘들더라고요. 5년 차, 10년 차 되면서 달라지긴 했는데 숫기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경제부를 거치고 법원 취재를 담당하면서 판결문 보고 해석하는 일을 내가 잘한다는 걸 알았고, 그러면 기자라는 직업이 맞겠다 싶었죠. 호기심은 있는 거니까요. 호기심만 있다면 소심하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문제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호기심이 없으면 기자 생활은 안 맞을 거예요. 

책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원칙이에요. 언론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다면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면 주인공 동백이가 그러잖아요. ‘노 머니에 노 서비스’가 아니라, ‘노 매너에 노 서비스’라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직업적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침해하면 ‘노 서비스’죠.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라는 책에 '두려움도 호의도 없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개인의 호오나 어떤 사람한테 미안해서, 회사가 힘들어지니까 등을 이유로 쓰거나 쓰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해요. 나침반이 망가지면 길을 잃잖아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일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쉬워요. 자기는 항상 피곤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지만 따져보면 결국 안 좋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아야 하고, 양심과 자존심을 지켜야죠. 

JTBC 뉴스룸을 통해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이야기했어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여요. 앞으로 더 조명받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묻고 따지고 조명하는 일이 저널리즘인 것 같아요. 그러면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죠. ‘죽지 않고 일할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거고요. 직장 내 따돌림이나 여성 혐오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피해자 몇 명이 재수 없어서 당한 일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와 언론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메시지를 던지려고 노력해야죠.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사람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저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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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영 “죽음이라는 주제 아래의 콘셉트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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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목소리로 '기억상실'을 노래하던 2001년의 오소영, 2009년 차분한 목소리로 서정적인 세계를 노래하던 <A Tempo>의 오소영의 공통분모는 쓸쓸함, 고독, 우울, 절제 등의 단어였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20년, <어디로 가나요>의 오소영은 분명 달라졌다. 앙증맞은 일러스트의 앨범 커버 속 그는 애완묘 '순둥씨'와 함께 춤을 추며 앞으로 나아가고, 노래는 꾸밈없이 밝고 명랑하다. 그럼에도 깊고 섬세하다.

인터뷰에 참여한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배경을 모르고 들으면 음악 교과서에 실려도 될 음악이다!”라는 표현으로 베테랑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변화를 요약했다. 무더운 여름의 초입, 11년만의 새 정규작으로 돌아온 오소영은 밝은 햇살처럼 환한 미소로 긴 공백기, 그리고 오랜만의 세상 외출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말해주었다.



앨범 발표 이후 기분은 어떤가.

홀가분해요. 작업한 지 굉장히 오래된 곡도 있었고, 전작이 나온 후로 시간도 많이 흘러서 어떻게든 세상 밖으로 내보고 싶었거든요.

말한 대로 2009년 <A Tempo> 이후 11년 만에 발표하는 정규작이다. 긴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싶다.

<기억상실>과 <A Tempo> 사이에도 8년의 간격이 있었죠. 그때는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많았어요. 하지만 이번 11년 동안은 음악을 해야겠다는 분명한 뜻이 있었어요. 활동을 많이 못할 때도 꾸준히 곡을 쓰면서 저를 갈고 닦는데 많이 노력했습니다.

긴 시간이 있었던 만큼 음악 팔레트 구축의 기간도 오래 걸렸을 테다. 음악은 어떻게 구상했나.

이번 앨범 전까지는 항상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모두 보여드리자'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어요. 이번 앨범은 다르죠. 특정한 주제 아래의 콘셉트 앨범을 의도했어요.

그 특정한 주제가 무엇인가.

'죽음'이었어요. 굉장히 무거운 주제고, 그 주제에 맞춰 쓴 곡들 중 몇 곡이 이번 앨범에 들어갔고 빠진 곡도 있어요. 곡을 배열하는 과정에서 박경환 프로듀서가 많은 도움을 줬죠. 전체적으로 처음 생각했던 맥락에서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죽음'은 기존 우리가 오소영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주제다. 하지만 앨범 단위로 감상했을 때 어둡다는 인상은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밝은 음악을 하자고 의도하진 않았어요. 제 자신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어떻게 변했나.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어요. 예민한 성격, 불편했던 것들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많이 놓아줄 수 있게 되었고, 힘들었던 부분도 많이 내려놓게 되었어요. 비관적인 성격도 긍정적으로 많이 변했고요.

음악적인 측면에서 본인을 정의하는 방법도 달라졌을까.

지금은 '친밀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싶어요. 제 소망이기도 해요. 리스너 분들께서 들으셨을 때 친근하고 꾸미지않은, 친구의 편안한 노래를 듣는 것처럼 들어주셨으면 해요.

사실 <어디로 가나요>가 전체적으로 밝은 음악을 담고 있지만, 2번 트랙 '살아있었다'의 반전은 마냥 해맑은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원래 앨범의 주제였던 '죽음'과 관련된 노래죠. 한창 3집을 준비할 때, 우울한 마음도 많았고 삶이 힘들었던 순간에서 나온 곡이에요. 당시 인터넷에서 '극한직업'에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고 있었는데 마침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는 업체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어요. 그 중 한 사진이 눈에 강렬하게 들어왔어요. 보통 사진을 보면 옷가지나 유품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널브러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진만큼은 너무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거에요. '그 분은 어떤 마음이셨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제 이야기와 정서를 투영하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처절한 가사, 그럼에도 사운드는 그렇게 어둡지 않다. 프로듀서진과의 협의가 있었던 부분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이 곡 편곡은 저 혼자 했거든요.



그 다음 트랙 '멍멍멍'은 마지막 합창 부분이 인상적이다. 다만 더 웅장한 느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사람 모으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저도 많은 분들이 한 데 모여 내는 더 큰 목소리를 담고자 했는데,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멍멍멍'은 개별 아티스트 한 분 한 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따로 녹음해서 한 데 모아 놓은 결과물이에요. 아쉽죠.

'즐거운 밤의 노래'는 정말 오랜만에 대중음악에서 들어보는 요들이다.

어린 시절 김홍철 씨가 항상 TV에 나오셨던 걸 보며 요들을 많이 따라 불렀어요. 공백 기간 동안 곡 쓰는 습관을 들이려고 하루에 한 곡 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나온 곡이에요. 당시에는 작업한 노래들을 사운드클라우드에 업로드하곤 했는데 그때 만든 노래가 '난 바보가 되었습니다', '떠나가지마', 그리고 '즐거운 밤의 노래'에요.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했던 결과물입니다.

다음 트랙은 앨범의 타이틀곡 '어디로 가나요'다. '도망쳐요'라는 표현이 인상적인데.

'어디로 가나요' 역시 힘들때 작업한 곡이에요. 앨범을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힘들때 만든 곡과 그렇지 않았을 때 쓴 곡의 차이가 커요. '어디로 가나요'는 힘든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 노래로 건네는 위로와 같은 곡이에요. '도망쳐요' 부분이 이 곡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어디로 가나요'는 물론 앨범 전체 반주와 편곡 역시 세련됐다.

작업할 때 세련되어야 하겠다, 이렇게 해야겠다 하며 의도하진 않았어요. 곡 작업할 때는 먼저 떠오르는 심상을 담고 미리 설계를 해둬요. '살아있었다'를 만들 때도 기타, 하모니카, 쉐이커 이렇게 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구상을 미리 하죠. '어디로 가나요' 역시 잔잔히 연주하지만 힘을 싣고자 했어요. 목소리와 기타 플레이가 앞에 나서는 것도 생각했죠. 그게 제 음악의 색이라 생각해요.

'떠나가지 마'의 메시지도 앨범에서 주요한 내용으로 들린다.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붙잡고 싶지만 붙잡지 못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곡인데, 곡을 녹음할 땐 다른 심상으로 불렀던 것 같아요. 나에게 있는 어떤 것들이 모두 다 떠나가는 느낌, 그런 생각을 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난 바보가 됐습니다'은 트로트 곡이다.

어릴 적부터 트로트를 좋아했어요. 어머니께서 항상 집안일 하시며 트로트 부르시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어요. 물론 20대 때 듣진 않았죠.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그 감성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공연에서도 트로트 곡을 많이 불렀고요. '동백 아가씨', '봄날은 간다'… 앞으로도 기타를 치며 더 많은 트로트 곡을 시도해보려 해요.

9번 트랙 '난 알맹이가 없어'의 경우 앨범을 마무리하는 트랙이다. 전진 배치되었다면 어땠을까.

앞서 말씀드린 '죽음'의 주제대로 말씀드리면, 사실 이 앨범의 주인공은 1번 트랙에서 이미 죽었어요. 2번에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3번과 4번부터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구성을 의도했죠. 거슬러 올라가보는 진행인 거죠. '난 알맹이가 없어'는 계속 의문을 만드는 곡이에요. 사운드에 공백을 넣으면서 알맹이가 없는 느낌을 그대로 전하고자 했어요.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갖고 있던 희망, 사랑, 허무함 등 다양한 감정을 담고 싶었죠.

실제로 무게를 덜어낸 편안한 곡이다. 마치 1번 트랙에서 사망한 주인공이 현실을 천천히 돌아보고 난 후 미련 없이 훨훨 떠나려는 듯.

너무 멋진 설명인데요? 사실 이 곡은 제 음악하는 자세를 소개하는 노래이기도 해요. 과거에는 '나는 왜 스케일이 큰 곡, 밝은 곡,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곡을 쓰지 못할까' 하는 부담이 있었거든요. 많이 덜어내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무리 메시지를 건네는 '그 사람'의 뜻은.

쭉 진행했던 내용을 정리하는 곡이죠. 노래의 분위기도 그렇고, 화자가 말하는 감정과 모든 것들이 한족에 치우치지 않고, 그리워하는 감정 그 자체에 오롯이 집중한 모습이에요. 뭔가를 더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기다림. 그 기다림이 '정리'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봤어요.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그럼에도 살아있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계속 이 자리에서 그리워하면서도, 기다리자. 이런 뜻을 담았어요.



앨범 작업하며 많이 들었던 앨범 혹은 아티스트가 있나.

평소에도 한국 인디 음악을 많이 들어요. 김사월 씨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김사월 X 김해원의 <비밀>도 많이 들었고요. 키라라도 많이 들어요.

한국 인디 신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환경 덕인가, 혹은 예술적인 접근인가.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메인스트림 음악을 안 듣는 건 아니고요. 아이돌 음악도 좋아합니다. 3집 작업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케이팝 그룹은 레드벨벳이었어요. 'Bad boy'를 좋아해요.

전체적으로 앨범을 만들면서 '홀가분'하다는 감정을 내비쳤지만, 긴 시간 동안 작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힘이 된 존재가 있다면.

오래도록 저와 함께한 고양이 '순둥씨'에요. 지난해 8월 무지개 다리를 건넜는데 그 때 참 많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어요. 순둥씨가 나와 함께할 때의 기억들, 순둥씨가 내 곁을 떠나던 순간의 허무함, 이후 극복하려 하기도, 차오르는 감정을 받아내기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빈 자리가 생겼지만 다른 느낌이 차오른다고 할까요. 오히려 더 살고 싶고, 재미있게 지내고 싶고… 순둥씨가 제게 준 선물이에요.

*인스타그램 inspirace74님의 질문 : 차기작은 어떤 방향이 될까?

4집 앨범은 더욱 편안한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 노래는 슬플 때 같이 울어주는 노래들이었거든요. 3집에서 기존 스타일 반, 편안한 새 스타일 반을 담았다면 다음 작품에서는 더 밝은 노래를 담고 싶어요. 어쿠스틱 기타 연주 앨범도 내고 싶고요.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한 단어로 압축해본다면.

'이불'이라 말하고 싶어요. 덮어주고 싶은 마음의 음악.



<어디로 가나요>에 시인과 촌장 하덕규, 낯선 사람들의 고찬용, 어떤날 조동익 세 명의 레전드 아티스트들이 추천사를 남겨주었다. 이번 앨범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음악 동료, 혹은 선배의 찬사 혹은 묘사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며칠 전 5월 30일 단독 공연을 했어요. 그 때 찾아온 제 10년지기 친구들이 '이 앨범이 얼마나 좋은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어요. '종합선물세트'같다는 의견도 있었고, '언니의 모든 게 담겨있는 앨범이다'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말들이 기억에 남네요. 저를 10년 넘게 바라봐 주고, 힘이 되어준 친구의 칭찬이니까요. 뮤지션 분들 중에선 코멘트 요청 드린 세 분의 말씀이 가장 인상적이었죠. 하덕규 선생님께선 '어디로 가나요' 싱글을 먼저 들어주시고, 박경환 씨에게 '너무 잘 들었다'는 칭찬을 남겨주셔서 더욱 좋았습니다.

선배 아티스트들 중 삶의 측면에서 롤 모델로 삼는 뮤지션이 있다면.

조동진 '형님'이에요. 어떤 것에 있어서도 벽을 두지 않았던 모습, 편견 없는 모습, 모두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모습이 기억에 아직도 남아있어요. 최근 조동익, 장필순 선배님께서 앨범을 내신 것도 저에게는 너무 감사한 일이었어요. 하나음악에서 선배님들이 활동하시는 모습을 꾸준히 봐왔기에, 지금 활동하시는 모습이 제게 남다르게 다가왔어요. 그 분들께서 음악을 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좋아요.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마지막으로 <어디로 가나요>를 듣는 모든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을 남겨달라.

오소영 3집 많이 사랑해주세요! 유튜브에서 오소영 '멍멍멍'을 검색하시면 사랑스러운 뮤직비디오도 보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음악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소영 - 어디로 가나요
오소영 - 어디로 가나요
오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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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세상은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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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주인공 이진오는 이십오 년 동안 공장 노동자로 일해 온 노동자이다. 공장이 폐쇄되고 회사가 다른 회사로 팔리면서 졸지에 일터가 사라진 상황, 그는 공장 건물의 굴뚝 위에 올라 농성을 시작한다. 하늘도 땅도 아닌 경계에서 삼대에 걸친 윗세대의 환상이 보이고, 그 속에는 끊임없이“같이 좀 살자”고 외쳤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 이야기는 황석영 작가가 1989년 평양에서 평양백화점 부지배인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대를 이어 철도원으로 일했던 부지배인의 경험은 황석영 작가의 경험과 맞물려 근대와 현대를 잇는 거대한 열차의 서사로 바뀌었다.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서사 

기차에 대한 이야기로 출간 간담회를 열었다가 막상 기차를 못 타서 간담회에 오지 못하셨다고요. 기자들 입장에서는 화났을 법도 한데, 대체로 기사가 호의적으로 났어요. 

그 다음 주에 다시 간담회를 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신문사 경향에 따라 자기하고 경향이 맞지 않으면 비꼬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대부분 호의적이고 반가워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고맙게 생각하죠. 신세대 기자들이 많았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와 현대 노동자를 다루는 장편 소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고요.

2000년대 후반에도 아르바이트나 도시 빈민, 비정규직을 이야기하는 문학은 많이 있었지만 산업 노동자를 다룬 것들은 드물었던 것 같아요.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노동쟁의와 투쟁은 소설로 반영되지 않았어요. 카프 계열에서 나올 법도 했는데, 대부분 장편은 농민 이야기고 산업 노동자 이야기는 단편에 그치더라고요. 식민지 근대부터 노동자를 전면으로 다룬 장편소설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정도였죠. 왜 이 부분이 빠졌을까 바라보니 결국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노동운동의 전통은 사회주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아마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건드리기에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주제가 되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노동의 일반성에 비해 작품 수가 적은 편이긴 하죠. 

지금 노동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인터뷰도 다 노동이죠. 그런데 노동자로서의 인식이나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게 됐어요. 왜? 노동자라는 자각이나 계급의식이 사라졌으니까요. 30년 동안 산업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근대화와 민주화에 큰 밑받침을 했는데도 그 부분을 문학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리셨다고요. 갈아엎고 다시 쓴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겨레>에 몇 달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북에서부터 접근한 게 잘못됐다 싶었어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사회주의를 마치 낡은 이야기처럼 느낀 이유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몇 년 전 자전을 쓰면서 때를 놓쳤다고 깨달았죠. 지금도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고공에 올라가 세상에 호소하고 있는데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잖아요. 이게 결코 낡은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짐 싸고 익산으로 내려가서 다시 썼어요. 

기차라는 소재 자체가 근대의 상징이에요. 근대와 현대를 잇는다는 발상에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기차도 그렇지만, 방북 당시 만났던 부지배인의 영등포 이야기에 더 이입되었던 것 같아요. 나도 영등포 출신이에요. 어렸을 때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봤죠. 6.25때 부모님따라 피난길에 오르면서 전쟁의 흔적들을 봤고, 이후로도 개발독재 30년을 겪기도 했어요. 영등포를 무대로 이야기를 그리면 변화했지만 번지수는 똑같은, 식민지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서사를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천상도 지상도 아닌 곳에서 

<채널예스> 연재 당시 맨 첫 문장은 ‘이진오는 똥을 누고 있었다’였어요. 책에는 실리지 않았더군요.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책을 들자마자 똥을 누고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것 같아서 살짝 바꿨어요. 그밖에 연재에 쫓기면서 역사적 사실을 가져다가 채워놓은 부분이라든지, 스토리텔링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다 들어냈어요. 연재는 2,600매 정도 되었는데 한 달 정도 집중해서 싹 추리고 고쳐서 책으로 묶인 건 2,200매 정도예요. 군더더기나 옆으로 샌 이야기도 추리고, 헷갈렸던 인물 이름도 통일시키고요. 

환상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아요. 주안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르케스의 마술적 현실주의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우리 민담 형식이 원래 사실적이지 않잖아요. 우렁이가 각시로 변해서 밥을 해주기도 하고,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죠. 마르케스의 소설은 남미 전설이나 신화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중남미가 겪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은 정확히 보이지 않고 안개처럼 깔아 놨었죠.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역사가 생활 속에 들어와 민담과 더불어 가는 형식이에요. 더욱 뚜렷한 현실이 눈앞에 있는 거죠. 물론 가상의 세계로 일관하고 역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본능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여기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책무 때문이기도 하겠죠. 죽을 때까지 책무를 짊어지고 가자는 생각을 해요. 

대개 현실에서 벗어나 물리 법칙에 어긋난 이야기를 하면 독재 정권 아래서 진실을 말하기 어려웠다는 평론이 붙곤 하죠.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쓰다 보니 현재에 발 딛은 노동자가 굴뚝 위에 서서 과거의 시간을 통해 지금을 표현하는 게 좋은 방법이었어요. 어느 독자가 굴뚝 위를 천상도 지상도 아니고 중간인 중음계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천상도 지상도 아닌 곳에서 일상을 견뎌야 하니까 상상을 하기 좋은 위치였을 거예요. 만약 굴뚝을 빼고 처음부터 이백만 할아버지가 인천에 가서 무슨 직업을 가졌고 누구를 낳았고 그는 또 누구를 낳았고 하면서 시간 배열 순으로 서술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급박한 현실이 지나가는 와중에 상상력이 끼어드는 게 서사를 풍요롭게 만든 것 같아요. 

이진오가 상상하면서 여러 시대로 건너뛰는데, 시대에 몰입하는 힘은 생활의 세부 묘사라고 생각했어요. 

쪼끄마한 큼큼이 아저씨가 거한의 불알을 잡아서 꼼짝도 못하게 하는 일화도 있고, 주안댁이 갑자기 수레를 번쩍 들어서 사람들을 구해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어린 시절에 동네에서 숱하게 듣던 이야기예요. 내가 43년생이니까, 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그런 세계가 실제로 있었죠. 그때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캐릭터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었어요.

밥 먹는 장면이 좋더라고요. 물에 밥 말아 먹는 장면만 나와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에요.

용변 보는 장면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리고 먹죠. 굴뚝으로 밥이 올라가요. 자고 먹고 싸면서 그 안에서 하루를 또 보내는 게 사람의 삶인 것 같아요.

‘영숙이 누나’에게 눈길이 갔는데요. 김진숙 전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이야기로 읽혔어요.

사실 처음부터 김진숙 씨를 주인공 모델로 삼으려고 만나려 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한참 동안 숨어서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어요. 아프기도 하고, 오래 투쟁해 왔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힘들었겠죠. 하는 수 없이 그 뒤에 올라갔던 차광호 금속노조 전 지회장을 만나 취재를 했죠. 소설에 나오는 고향에 갔다거나 도망 다녔다거나 하는 건 김진숙 씨하고는 상관없이 다 지어낸 이야기예요. 다만 농성하러 올라갔던 철탑이 거대한 나무로 변해서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이야기는 김진숙 씨의 『소금꽃나무』에서 나온 말이에요. 그 말이 아주 좋아서 인용했어요.  

영숙이 누나 외에도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해요. 

주안댁 막음이, 신금이 그리고 한여옥. 김영숙도 그렇고,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윤기를 주는 건 여성 캐릭터들이에요. 여성 캐릭터들이 신화도 만들고 전설도 만들었죠. 이들이 없으면 이 이야기는 그냥 철근만치 차갑고 딱딱한 산문일 거예요. 

한여옥은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요.

옛날처럼 대하소설로 쓰였다면 만주로 무대가 옮겨가서 한여옥이 무장투쟁하는 이야기가 나왔겠죠. 밀정과 독립군들, 공산주의자, 자본가가 얽히는 풍부한 서사였을 텐데, 그러려면 10권은 써야 하니까요. (웃음) 등장인물은 오고 가더라도 영등포와 인천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끝나게 했어요. 



이행기를 줄이는 과정

“현장에 가면 노동자들이 이해를 못해요. 왜 별 차이도 없는 노선을 가지고 다투냐구요.”(259쪽)라는 말이 있었어요. 운동 진영에서 힘을 보태면서 노선에 회의감이 든 적도 있을 거예요.

아마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이념적 갈등이 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이 죽였어요. 크고 작은 분쟁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으로 만들어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싹 죽였잖아요.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고 하는 건 모순이에요. 그전에 이미 38선에서는 일 년에 수십 회씩 무력충돌이 있었고 지방에서는 지리산이든 한라산이든 게릴라들이 싸우고 있었어요. 

야마시타 최달영이 일본을 도와서 조선인을 색출하는 계기는 아끼던 돼지의 죽음이었죠. 일제 강점기 일본 편에 섰던 사람을 향한 연민으로 느껴졌어요.

야마시타 최달영은 따로 떼어서 소설을 씀직한 인물이에요. 신금이하고 주안댁만큼 최달영에게 애착을 느껴서, 따로 최달영 전을 쓰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은 다 자기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친일을 저지르죠. 야마시타가 잘 먹고 잘 살고 힘 있으면 되는 거지 무슨 의리가 소용 있냐는 건 사실 이명박 정권 때 하던 이야기와 같아요. 

친일파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기는 쉽지 않죠.

이일철 입장에서도 철도원 일은 살아남기 위한 거였죠. 일반 백성 입장에서 보면 일본 놈들이 나쁜 놈들이고,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했다는 건 다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 뒤에 전국에서 수천 번씩 마찰이 일어나요.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농민들이 작당해서 수십 일 동안 항쟁하는 건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게 아니겠죠. 특히 30년대에는 아주 치열했는데, 전시체제로 바뀌면서 치안유지법이 더 강력하게 작동해서 항쟁이 많이 잦아들었어요. 처음부터 순순히 압제를 받아들이고 먹고 사는 데만 매몰된 건 아니에요. 역사적 자료를 보면 각자 처한 입장이 다 다르고 일화나 에피소드가 풍부에서 사실 어떤 걸 취사선택해서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이야기 거리가 많아요.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요. (웃음)

하지만 이진오가 굴뚝에서 내려왔을 때, 현실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어요. 

또 다시 시작하는 거죠. 여러 사람이 지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몰락하는 과정, 또는 전혀 다른 체계로 가기 위한 이행기라고 이야기하죠. 역사를 보면 이행기는 짧을 때도 있고, 굉장히 길 때도 있어요. 서양의 자본주의 근대화 이행기를 르네상스부터 산업혁명까지 300년 정도로 잡잖아요. 우리는 30년 했으니 큰 틀에서 놓고 보면 변화의 과정도 그만큼 길지 않겠어요? 그동안 사회주의도 해보고 이른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도 해보고, 다양하게 시도해 왔으니 이 기간을 짧게 줄이는 건 우리 노력 여하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금이는 “그때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564쪽)고 말해요. 마치 작가님의 말씀처럼 들렸어요. 

이긴다기보다 변화하는 거죠. 그 변화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요. 그래도 어쨌든 나선형으로 가요. 어떤 때는 뒷걸음질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옛날하고 똑같이 가는 것처럼 보여도 두 걸음 뒤로 갔다 세 걸음 앞으로 가다 보면 변화하겠죠.

소설을 끝내고 난 뒤 이진오의 삶을 상상해보기도 하세요?

지금도 그 사람들은 거리에 있어요. 식구들은 각자 뿔뿔이 알바하고 마트에서 캐셔하고, 밤에 서로 만나기 힘들겠죠. 산재가 나서 죽을 수도 있고요. 미국은 10만 명이 코로나로 죽었는데 흑인 민권 운동도 난리가 났잖아요. 가장 첨단 자본주의를 이루어내는 미국의 벌거벗은 모습을 다 보고 있어요. 저런 사회로 가는 게 올바른가 질문하게 되는 거죠. 더구나 우리는 분단 상태인 데다 정치 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와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갈 길이 아주 멀고,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긴 힘들겠죠.

코로나19 이후 다음 작품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셨다고요. 

포스트 코로나라고 부르면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짐작하고 있는데, 과연 백신이 나오면 옛날로 돌아갈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저질러 놓은, 발전했다고 믿었던 문명이 과연 올바른 길로 온 건가 하는 질문이 이제 생긴 것 같아요. 이행기를 줄이기 위한 노력에서 여러 가지 태도나 방법이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 작품은 어떤 걸 생각하고 계시나요?

익산에 가면서 미륵사상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종교답지 않게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사람도 관계의 그물망 속의 하나일 뿐이지 사람이 중심이 아니잖아요. 불성에 관한 이야기를 철학 동화 비슷하게 쓸까 해요. 이번에 익산에서 작업실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거기서 쓰려고요. 이제 내가 78세니까 10년을 더 쓸 수 있다면, 아마 세계문학사에서 작가 중에는 제일 오래 쓸 것 같아요. 그때까지 총기를 유지하면서 계속 썼으면 좋겠어요.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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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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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김이나, 누구에게나 있는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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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화 재밌으셨나요?”김이나 작가가 자신의 책에 사인과 함께 써준 문장이다. 아마도 라디오 DJ를 하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목적을 두고 마주한 인터뷰이기 전에 타인과의 대화,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김이나의 작사법』 이후 5년 만에 쓴 두 번째 책 『보통의 언어들』. “지금도 충분히 좋은 에세이가 많은데 내가 또 책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김이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일상의 언어’를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평소 자주 쓰는 단어들을 주인공 삼아, 적확하게 쓰고 있는지 관성적으로 쓰는 말은 없는지, 낯설고 또 익숙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은 사람에게 

작사가의 ‘언어’ 이야기.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언가를 쓴다면 언어가 좋을 것 같았어요. 내가 어떤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지, 어떤 표현을반복적으로 사용하는지는 내 삶의 질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끼치니까요. 사람의 감정이 ‘언어’라는 액자 안에서 전달된다고 생각했을 때, 이 액자에 관해 말해보고 싶었어요. 

3개월간 집중적으로 썼다고요.

작년 12월쯤 윤곽이 잡혔어요. 당시 MBC 라디오 <김이나의 밤편지>를 진행하고 있었던 터라, 라디오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아 볼까 생각했다가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썼어요. 

조금 묵직한 에세이로 읽혔습니다.

읽는 분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제목 없이 초고를 썼는데요. 만약 ‘보통의 언어들’이라는 제목을 정하고 썼으면 중압감이 컸을지도 모르겠어요. ‘언어들’이라는 표현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지잖아요. 하지만 ‘보통’이라는 단어를 보태면서 좀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언제 주로 쓰셨나요? 

대부분 스케줄이 있었던 날, 누군가를 만난 날 썼던 것 같아요. JTBC <슈가맨>에 출연했던 때는 이 방송이 저에게 유일한 사회 교류 활동이었거든요. 방송이라는 게 굉장히 의외성이 있어요. 일인 동시에 인간관계가 되기도 하는. <슈가맨>을 촬영하고 나면 어쨌든 방송이니까 굉장히 피곤하거든요. 그런데 신체는 피곤한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확 충전되는 날이 있어요. 몸은 고되도 그런 날이면 작업실에 들러서 몇 꼭지 쓰고 퇴근하고, 그렇게 쓴 책이에요. 

프로필 문구가 “유년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의 칭찬과 사랑을 부족함 없이 받으며 자랐고”로 시작돼요. 조부모님의 사랑이 특별하셨나봐요.

맞아요. 저는 그 부분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요. 자기 소개글을 쓰는 일이 좀 쑥스럽잖아요. 하지만 수상 이력을 줄줄 쓰는 프로필은 싫었어요. 뭔가 스토리가 있는, 서사적인 느낌이길 바랐어요. 제가 되게 결핍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자격지심, 인정 욕구도 많고, 여전히 지금도 불안한데요. 이상하게 문득문득 자존감이 건강하다고 스스로 느낄 때가 있어요. 왜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아마 아기 때부터 조부모님과 지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왜 어릴 때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유독 뿌리가 튼튼하잖아요.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요. 저는 어릴 때 아빠 없이 살았고 엄마랑도 많이 떨어져서 지냈거든요. 그 시간을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많이 채운 것 같아요. 

1장 ‘관계의 언어’에 ‘미움받다’라는 단어가 나와요.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을 것”(23쪽)책 제목 후보였다고 들었는데요.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해요. 

『미움 받을 용기』가 굉장히 큰 사랑을 받는 걸 보면서 그것만으로 되게 위안이 됐어요. 많은 사람이 ‘미움’에 대해 두려움이 있구나, 나만 못나게 일희일비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제가 그동안 방송 활동을 하면서도 불호가 크게 없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방송은 어쨌든 감독으로부터 편집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거잖아요. 제 모습이긴 한데, 약간 포토샵이 된. 반면에 라디오는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완전히 드러나요. 피곤한 날은 피곤한 대로, 컨디션이 다운일 때는 다운인 대로. 라디오를 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저 문장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괜찮은 사람인데도 누군가는 싫어할 수 있고, 별로인 사람도 굉장히 큰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그런데 모두에게 사랑받으려면 나만의 에지는 없어지는 것 같아요. 에지를 버리고 싶지 않다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해도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해요. 라디오는 별로인 제 모습도 드러나면서 ‘그래도 저 사람, 나는 괜찮을 것 같아’하고 좋아해 주시는 거잖아요. 나인 채로 사랑받는 게 더 좋죠.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공감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혼자 보는 글이 아니니까요. 작사도 마찬가지죠. 한 명의 가수가 부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듣는 ‘글’입니다. 어떻게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20대 때 제가 공감 능력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그런가?’ 의문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동의해요. 공감 능력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남의 눈치를 본다는 점이에요. 눈치를 지나치게 많이 보면 불편하지만, 어떻게 보면 눈치는 결국 배려예요. 다른 사람의 시선, 마음을 신경 쓰는 일이니까요. 눈치를 많이 보는 걸 단점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제 경우 직업이랑 아귀가 맞아떨어지니까 공감 능력으로 평가 받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다른 일을 했다면 ‘쟤는 눈치를 많이 보는 애야’라고 비난의 요소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보통의 언어들』을 쓰면서 상상한 독자들이 있을까요? 타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사람이라든지. 

내 생각을 잘 전달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 그런 분들이 읽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결국 다 표현이잖아요. 가사, 무용, 그림은 아니지만 대화도 표현의 기술이니까요. 화려한 기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단어와 말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히스토리. 이건 자신에게도 필요한 일이거든요. 자기 모양새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은 사람? 두려움이 있는 사람? 소심한 사람들이 읽으셔도 좋겠어요. “우린 서로 알아볼 것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책을 읽다 보면, ‘이거 내 이야기인가?’ 싶은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결국엔 좋은 사람이 돼야 해요

가사를 빨리 쓰는 편이라고 들었어요. 마감도 꼭 맞추시고요.

당장 써야 한다면 나오죠. 가사가. (웃음)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자의식 과잉이에요. 싱어송라이터는 자의식이 많아도 되고 또 도움이 될 때가 있지만 작사가, 작곡가는 노래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라 자기 마음을 잘 지켜야 해요. 나는 ‘one of them’이라는 마인드를 잃지 않아야죠. 가사는 마음가짐에 따라 정말 다르게 나와요. 창작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면 마감은 한없이 늘어나요. 그런데 죽어도 내일까지 마감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든 나와요. 안 나온다는 사람이요? 다 엄살이에요. 그건 싱어송라이터들의 이야기예요. 작사는 직업이거든요. 내 예술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쵸. 내일이 마감이면 무조건 원고는 써야 하는데요. 약속이니까요.

제가 A&R(Artist and Repertoire)를 해봤잖아요. 그래서 더 입장을 알아요. 신인 가수나 신인 제작사의 경우, 더 속 터지는 일이 많을 거예요. 물론 각자의 일을 존중해야 하지만 약속은 지켜야죠. 곡을 의뢰한 제작사가 큰 곳이든 작은 곳이든 똑같이 마감을 지켜야 해요. 프리랜서의 일이라는 게 매사 똑같아요. 결국엔 좋은 사람이 돼야 해요. 왜냐면 항상 100점짜리를 만들 순 없거든요. 작사가든, 소설가든. 기복이 있죠. 하지만 한번 꺾였을 때 그 다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인성이에요. 그리고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 사람인가, 정말 중요하죠. 

“대중의 칭찬을 의식하면 망한다.” 『김이나의 작사법』에 나오는 문장이었죠.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나요?

그렇죠. 제가 생각하기엔 되게 잘 쓴 가사인데 대중들은 별로라고 평가하는 곡도 있고, 힘준 가사가 아닌데 대중들이 좋아해주는 경우도 있고. 어쩌면 이게 너무 당연해요. 

의뢰받은 곡을 부르는 가수가 작사가의 취향에 안 맞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나요?

사실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는 큰 문제가 안 돼요. 그보다 가사를 쓰기 어려울 때, 그게 힘들죠. 내가 이 음악 스타일을 안 좋아하는 건 괜찮은데, 가사가 안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제 사정을 이야기하거나 저의 최선을 보내요. 부족해도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여러 개의 가사를 올려야 하는 A&R의 입장을 아니까요.

작사가로 전업하기 전에 직장 생활을 꽤 하셨어요. 작사에 도움이 됐나요?

그럼요. 가사를 쓸 때조차 도움이 돼요. 조직원으로서의 시선을 이미 갖고 있으니까요. 가사를 쓰는 일은 어쨌든 음악 산업이잖아요. 혼자 일하는 게 아니고 스태프랑 함께 하는 작업이니까요. 

가사를 정말 잘 쓴다고 생각하는 가수가 있나요?

아이유 씨요. 원래도 잘 쓰는데 점점 더 잘 써요. 최근에 제아 씨의 곡을 썼는데, 와 너무 좋더라고요. 아이유 씨의 가사는 문학적으로는 물론 감각도 훌륭해요. 예전에 타블로 씨가 유일무이한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요? 스타일리시 하면서 동시에 메시지를 갖고 있는. 이 균형을 맞추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타블로 씨가 참 독특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아이유 씨가 그런 것 같아요. 문학적으로 잘 쓰는 건 생각보다 안 어려워요. 감각적인 면을 갖추는 게 어렵죠. 운동 실력과 미감이 있어야 되니까요. 방탄소년단의 RM 씨도 음악적인 아우라가 굉장하죠. 

지금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데이브레이크인 거죠? 

(웃음) 네, 정말 좋아해요. 행동파 덕질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음, 데이브레이크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에너지를 받는 느낌이 들어요. <고막 메이트>도 이원석 씨와 함께 진행하는데, 이분이 가진 긍정적 에너지가 너무 좋아요. 저는 아티스트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예술적 능력과 인간성을 별개라고 생각하는데요. 완전히 분리형인데, 이분은 좀 달라요. 

분리하기 어렵지 않나요?

글쎄요. 무슨 상관이죠? 저랑 알 사람이 아닌데. (웃음) 

그런데 데이브레이크는 예외인 거고요. 

네. (웃음) 오래 전에 발표했던 곡들도 찾아 듣고 이 사람이 쓰는 가사도 분석하면서 들어보곤 해요. 저는 계속해서 새로운 걸 찾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영화도 하나 좋아하면 반복해서 보고. <왕좌의 게임>은 세 번을 정주행 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걸요? <하얀거탑>은 다섯 번을 봤고요.  어릴 때부터 뭘 좋아하면 안 질렸어요. 레고도 어릴 때 좋아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좋아하고요. 새로운 것들이 안 생겨서 그렇지, 좋아하면 꾸준해요. 윤상 선배님을 좋아하는 것도 지금 몇 십년인데요. (웃음) 

책에서 “칭찬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찬이 후한 편인가요?

칭찬이라기보다 모든 사람에게 미학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전 그걸 좀 잘 봐요. <팬텀 싱어>에 출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캐치하지 못한 매력을 잘 보는 편이에요. 그리고 그 매력을 당사자가 인지했을 때, 더 메력이 배가 된다고 생각해요. 확 피어나는 거죠. 칭찬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책에서 ‘간지럽다’는 말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좋아하는 동시에 쑥스러운? 다른 사람에게 박수로 던지는 칭찬이 아니라, 팩트를 전달하는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그것도 자세하게. “당신이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당신이 가진 무기”라는 의미예요. 


 

잠깐 특별한 루틴으로 사는 요즘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채널A <하트 시그널>, 웹예능 <고막 메이트> 등을 진행하고 있어요. 사람, 즉 타인에게 관심이 많아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사람을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스킨십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이 사람 알아두면 좋아”라는 이야기예요. 이 말은 20대 때부터 거부감이 있었어요. 모임을 위한 모임을 좋아하지 않아요. 내적으로 통한 사람과는 오래 만날 수 있지만. 저는 정말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 명밖에 없는데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누군가를 관찰하는 일도 좋아하고요. 다만 관계는 좁은 편이에요. 

사람에게 마음을 줄 때 신중한 편인가 봐요. 

그보다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 사람이 만든 작품, 노래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아요. 이 노래가 좋으면 이 곡을 쓴 작곡가를 찾아보고 싶어 하고, 이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 작품을 해석하고. 혼자서 상상해보는 식으로 사람을 좋아해요. 

방송 출연 섭외가 올 때, 승낙의 기준이 있나요?

예를 들어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서 제가 ‘관찰 당하는 대상’이 되는 건 피해요. 왜냐면 그건 본격적으로 제가 콘텐츠의 주인공이 되는 거잖아요. 그건 좀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제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보면, 약간은 스태프 같은 역할이거든요. 패널을 했거나 보조 MC였거나. 그리고 제 직업적 정체성과 너무 안 어울리는 프로그램은 피해요. 물론 상황마다 조금 다르지만, 숫자는 절대적이에요. 한번에 두 개 이상은 하지 않아요. 이건 체력의 문제라서요. 그리고 또 하나, 제작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해요. 이 사람이 예전에 어떤 작품을 만들었고 그 작품이 히트를 했느냐가 아니라, 출연진을 다루는 방식이 자극적인가 아닌가를 주의 깊게 봐요. 출연진을 인간적으로 아끼는 예능,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죠.



지금 하는 일 중에 가장 ‘인간 김이나’의 정체성과 닮아있는 일은 DJ일까요?

압도적으로 DJ죠. 작사도 물론 제가 드러나요. 하지만 간접조명이죠. 반면에 라디오는 정말 생얼로 서 있는 느낌? 그래서 라디오가 가장 편해요. 

작사가, 방송인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어요. 지금이 정점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런 생각을 한지 조금 오래 됐어요. 지난해에 “왠지 올해가 끝인 것 같아”라고 생각했는데, <별이 빛나는 밤에> DJ를 하게 됐죠. <별밤>이 끝이 아닐까? 이거 너무 이상한데 괜찮은가? 왜 팔자에 없는 사랑을 받고 있지? 지금도 신기해요.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요?

뭐든지 편리함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는 것? 굉장히 피곤할 때가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친절을 받으면서 사는 일상이잖아요. 어딜 가나 매니저와 대동하고, 내 스케줄을 내가 관리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차에 실려만 다녀도 되는 거예요. 방송국에 가면 1인 대기실에 쓱 들어가고, 그러면 음료수를 가져다 주시고. 이런 모든 과정이 당연해지면 큰일날 것 같아요. 지금 내 인생에서 잠깐 특별한 루틴으로 살고 있는 거지, 이게 디폴트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면 굉장히 불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작사가 김이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나요?

아. 조금 조심성이 있고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을 본능적으로 사랑스럽게 생각해요. 이게 1순위인 것 같아요. 사실 이게 표면적인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수줍음이 있는 사람 안에 단단한 것들이 있더라고요. “보통 이런 사람이 괜찮더라”하는. 그런 신뢰가 있어요. 



보통의 언어들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저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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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희 “더 많은 여성들이 욕심을 가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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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욕망하라』를 통해 ‘현명한 욕심’으로 편견을 깨는 여성의 삶을 이야기했던 조주희 ABC 뉴스 한국 지국장. 그가 10년 만에 두 번째 책 『우아하게 저항하라』을 펴냈다. 아시아 여성 외신기자로 취재 현장을 누빈 지난 30여 년, 그의 앞에는 수많은 ‘선’들이 놓여있었다. 인종과 성별과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어진 금도, 한국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며 내면화한 경계도 있었다. 자신에게 맞는 ‘선’을 찾아야 했다. 필요한 것은 유연함이었고 그 결과 얻게 된 것은 균형이었다. 『우아하게 저항하라』에 담긴 것은 그러한 깨달음과 해답이다. “유연하게 설득하여 내가 원하는 결과, 결론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조주희 저자는 미국, 싱가포르, 홍콩, 한국 등을 누비며 국제 정세를 전한 1세대 여성 외신기자이다. CNN 서울에서 통역사로 활동했고, CBS 워싱턴 DC 지국에서 인턴십을 거쳤다. ABN(아시아비즈니스뉴스)에서 일했고, 워싱턴포스트 서울 특파원과 ABC 뉴스 한국 지국장을 겸임했다. KBS <시사투나잇>을 진행했으며, 여권신장과 저널리즘의 미래에 관한 주제로 국제회의를 진행하는 모더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현재 ABC 뉴스의 한국 지국장을 맡고 있다. 



일하는데 불필요한 감정 소모할 필요 없죠

아시아 여성 외신기자로 일하시면서 ‘선’을 느낄 때가 많으셨을 것 같아요.

선이라는 건 문화적 차이인 것 같아요. 외국에서 느꼈던 인종 차별, 한국에서 느꼈던 성차별과 역차별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요. 또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것들이 있잖아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운 게 있고, 거기에 더해서 스스로 정해놓은 선이라는 것도 있죠. 거기에 갇히는 게 굉장히 위험하다는 거예요. 선을 넘기도 해보고, 해봤는데 아니면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그렇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유연성인 것 같은데요. 사고의 유연성이죠. 그걸 첫 번째 책에서도 많이 강조를 했어요. 우리가 굉장히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과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려면 유연하게 선을 넘나드는 도전 의식과 경험이 필요해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큰 이슈를 만들 수는 없는 애매한 상황들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고 쓰셨는데,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 순간에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돌아서서 후회할 때가 있는데요. 지국장님은 연습을 하신다면서요?

많이 했어요. 

일종의 시뮬레이션 같은 거죠? 20~30대 때는 많이 하셨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화가 나서 ‘다음날 뭐라고 이야기해야지’ 생각하고, 그러다가 말해놓고도 너무 후회스러운 거예요. ‘그냥 웃으면서 이야기했으면 됐을 텐데, 굳이 표정 굳히고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니까, 제가 직업상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연습을 하잖아요. 어떤 표정, 어떤 눈빛으로 말해야 하는지 훈련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연습하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상대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해보는 거예요. ‘어제 네가 한 말에 나는 상처 받았어, 네가 어떤 뜻으로 그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어, 그냥 그렇다고’ 하는 거죠. 거기까지만 이야기하면 돼요. ‘나는 꼭 사과를 받아야겠어’가 아니에요. 그러면 지는 거예요. ‘그냥 나는 그렇다고’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사과를 하면 그 사람하고는 서로 잘 지낼 수 있는 관계인 것이고,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면 상종 못 할 사람이구나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안 좋은 일을 겪으면 ‘그냥 잊어버리자’고 생각하고는 하잖아요. 그런데 지국장님은 따로 복기하고, 메모하고,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생각해야 된다고 하셨어요.

그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속상해하는 데에서 끝내버리면 또 반복되는 거예요. 그 때는 ‘또 당했네, 내 인생은 왜 이래’ 하게 되죠. 이게 계속 쌓이면 나만 상처 받고 자꾸 가라앉는 거죠. 대비책을 세워놓고 그대로 해보면 ‘내가 첫 번째는 당했지만, 두 번째는 이렇게 잘 처신했어’ 하고 자신감이 생겨요.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불필요한 마찰과 감정 소모를 굳이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하지 않고도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연인끼리 하면 되는 것 같아요. 연애할 때는 그렇게 밀고 당기는 게 중요하죠. 그러나 일터에서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건 나만 손해예요. 우리는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면 일을 하면 되는 거죠. 그 안에서 서로 좋은 걸 나눌 수는 있어요. 누군가 승진을 했거나 출산을 했을 때 같이 기뻐해주고 축하해주고 응원해주고 그런 건 좋죠. 하지만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잘한 것들,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그런 거에 연연할 필요는 없는 거죠. 왜냐하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가장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나와 내 가족이거든요. 직장은 관둘 수 있지만 가족과는 평생을 가야 되는 거잖아요. 가족끼리는 감정선의 업다운이 있어야 돈독해지지만 직장에서는 전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책에서 ‘일과 삶의 밸런스’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요.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도 감정을 잘 배분해야겠죠.

그렇죠. 내가 어디에, 누구에게, 감정을 얼마만큼 쏟을 것인가도 잘 생각하고 배분해야 되는 것 같아요.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집에까지 가지고 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요. 직장에서의 일은 직장에서 끝내야지, 그 감정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가족들한테 풀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걸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길러야 돼요. 책에서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더 많은 여성들이 욕심을 가졌으면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낮게 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어요. 더 욕심을 내지 않거나, 자신의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당당하게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요. 지켜보면서 많이 안타까우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여성 CEO 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제가 국제회의에서 모더레이팅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전 세계의 쟁쟁한 여자들을 많이 만나요. 그 분들은 다 어렵게 유리 천장을 뚫고 올라온 분들인데, 똑같이 하는 이야기가 ‘더 많은 여자들이 일터로 나와야 된다’, ‘더 많은 여자들이 매니지먼트 레벨로 올라가야 되는데 도와주고 싶어도 그들 스스로 욕구가 많지 않다’는 거예요. 높은 자리에 있는 여자들이 봤을 때, 결혼해서 가정도 잘 지키고 아이들도 잘 키우면서 자기 일도 잘하는 여자들을 보면 돕고 싶어요. 그런 여자들이 가족들과 잘 조율해서 회사 일도 잘하고 가정도 잘 돌보면서 밸런스를 맞춰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둘 다 하겠다는 욕심보다는 둘 중에 하나라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큰 것 같아요. 재능이 있고 훌륭한데 일을 그만두는 친구들을 보면 굉장히 안타까워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태도는 성장 과정에서 주입받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자만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일종의 자기검열이죠.

절대 아닌데 말이죠. 그건 문화적인 영향 때문이에요. 그렇게 자라서 그래요. 여자는 애교 많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야 좋은 거고, 남자는 씩씩하고 쟁취하고 용기 있어야 한다고 교육 받아서 우리도 모르게 그렇게 돼버린 거죠. 그걸 깨고 나가야 돼요. 저는 목표점을 높게 둘수록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원하는 게 50 이면 열심히 일해도 5 밖에 못 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건 100 이라고 생각하면 5 까지 노력할 걸 조금 더 노력해서 8 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터에서도 사장까지 올라간 여자 선배가 있으면 ‘일단 저 사람이 갔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목표를 사장으로 잡아놓는 거예요. 그러다가 상무, 이사까지만 올라가도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일이에요. 그런 욕심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나라의 상황을 지켜보고 보도하시면서 차이점을 느끼기도 하셨나요?

미투 운동으로 명명되기 전부터 미국에서는 그런 생각을 해왔으니까 굉장히 오래 됐죠. 한국은 굉장히 늦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을 경험한 게 너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경종을 울렸잖아요. 어떤 건 되고 어떤 안 되는지가 어느 정도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기였다고 생각해요. 한번 경종을 울렸으니까 이제 각자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계속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한국에서는 ‘미투’ 고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데요. ABC 뉴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ABC 뉴스)의 저널리즘 원칙이 있어요. 미투 뿐만이 아니라 뭔가 폭로를 할 때, 실명이 아니면 우리는 싣지 않아요. 실명을 공개하면 고발자의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진다든가 그런 아주 드문 경우에 사내 변호사들이 검토를 하고 OK를 하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 실명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면 크레딧을 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기사를 쓰면서 기자의 힘이나 사견이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걸 굉장히 남발하고 있죠. 하다못해 토지거래허가제도를 시작하는 데도 ‘대치동에 사는 A씨는...’이라고 하면서 기사를 쓴다든가. 무슨 ‘북경에 있는 북한 소식통 관계자는...’이라고 쓴다든가. 만약에 그게 재판까지 갔을 때, A씨나 관계자가 누군지 밝히지 못하면 그 기자는 거짓말을 한 건데, 어떻게 그렇게 위험스럽게 A씨 B씨 C씨를 쉽게 남발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30년 넘게 외신기자로 활동하고 계세요. 한국의 언론 상황을 보면서 취재윤리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셨을 것 같아요.

너무 속상하죠. 세상에서 제일듣기 싫은 말이 ‘기레기’예요. 어쩌다가 그게 유행어가 돼버렸는지...

기자들 안에서 자정 노력이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당연하죠.

있지도 않은 취재원을 기사에 쓴다든지, 다른 기사를 베껴 쓰는 일도 벌어지잖아요. 

방송사나 언론사에서 기자들이 입사할 때부터 취재윤리를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우리는 이런 걸 지킨다’고 천명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그런 언론사가 없더라고요. 마음이 아프죠. 



여자들끼리 연대해야 돼요

어떤 뉴스를 보도했을 때, 기자로서 자긍심과 보람을 느끼셨어요?

오래 조사하고, 생각해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전문가들의 의견과 분석을 들어 보고,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인 기사가 나갔을 때 제일 보람이 있죠. 제가 다루는 대부분은 안 좋은 뉴스예요. 사고가 났다든지 누군가 죽었다든지, 주로 안 좋은 기사들이죠. 좋은 뉴스는 거의 없어요. 기사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보람을 느낄 수 없죠. 그렇지만 내가 발품을 들여서 그게 하나의 좋은 스토리텔링으로 나왔을 때 혼자 기분이 좋은 거죠. 

‘시각화’에 대한 이야기도 쓰셨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뉴스 내용을 머릿속에서 영상화해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훈련이라고요. 

맞아요. 처음 훈련을 할 때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의 뉴스 화면을 보여줘요. 그리고 (기자나 앵커의) 눈만 보이게 해놓고 어떤 뉴스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해요. 슬픈 뉴스인지, 좋은 뉴스인지, 경제 뉴스처럼 건조한 내용인지 알아맞히는 훈련을 해요. 그 다음에는 내가 카메라를 앞에 두고 연습을 하는 거예요. 뉴스 원고를 미리 읽고 그 위에 슬픔, 기쁨 등 감정의 종류를 적어놔요. 그리고 머릿속으로만 ‘이건 슬픈 뉴스인데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해’ 하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고 기자가 울 수는 없으니까 슬픈 뉴스를 전할 때는 눈에 약간 힘을 풀고 전달하는 거예요. 기쁜 뉴스를 전할 때는 눈으로만 살짝 웃으면서 말하는 훈련을 하고요. 

‘시각화’를 가르쳐준 선배가 (ABN의 앵커 겸 보도국장을 지낸) 리네트 리트고우였죠. 지국장님에게 워크맘(work mom, 직장 내의 엄마 같은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줬던 것 같아요.

리네트한테 받은 게 정말 많아요. 특히 그때는 제가 막 일을 시작했을 때였고 개인적으로 힘들었을 때였거든요. 그 분이 굉장히 큰 용기를 주었고, 제가 정말 많은 은혜를 입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 해줬던 조언들이 평생 남아있고, 결국에는 저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거거든요. ‘여성성을 잃지 말고 여자로서의 권리를 찾으라’는 말도 그 분이 하셨던 이야기예요. 여성으로 태어난 걸 축복으로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걸 부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충분히 여성성을 누리면서 권리를 찾아갈 수 있는데 굳이 남자처럼 행동할 이유가 없다는 걸 이야기해주셨고요. 그 분은 영국에서 여권운동을 하셨던 분이거든요. 회사에서 남자 매니저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나의 자존감을 버리지 않으면서 생존할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셨어요. 너무 고마운 마음이 컸어요. 저의 롤모델이기도 해요. 

지국장님에게 정말 큰 사랑을 주신 것 같아요. 이유가 뭐였을까요?

리네트가 태어난 곳이 트리니다드 토바고라는 곳인데 캐리비안의 작은 섬이에요. 영국령인 곳인데, 그 섬에서 태어나서 열아홉살 때 스튜어디스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등록금을 벌어서 영국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옥스퍼드 법대까지 다녔어요. 그러니까 본인도 영국에 갔을 때 주류가 아니었던 거예요. 영국 시민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BBC에 들어가서 앵커가 됐는데, 본인도 힘든 시기를 겪은 거죠. 저를 보고 옛날의 자기가 생각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한테 ‘너는 정말 재능이 많은데 갖고 있는 것에 비해서 표출을 안 한다, 더 많이 너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한테 네가 하는 일을 더 많이 알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앵커이자 데스크였는데, 다른 남자 매니저들로부터 저를 보호해주기도 했어요.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앵커, 기자 중에 60~70대 분들도 계신다고요. 그런 선배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자체로 힘이 될 것 같아요.

그렇죠. 우리 회사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내가 나이가 들어서 잘리거나 밀릴 거라는 걱정이 없고, 오히려 전문가로서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그런데 그건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 여자들이 만들어나가야 되는 부분이에요. 그러려면 여자들끼리 연대를 해야 돼요. 조직에서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라가면 정말 치열하잖아요. 조금밖에 없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남자와 한두 명의 여자가 경쟁해야 하잖아요. 그럴 때 다른 여자 동료들이 응원하고 밀어줘야 자신에게도 문이 열리고 그 문이 조금씩 더 넓어져요. 그걸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높이 올라간 선배가 있어야 나에게도 기회가 온다는 생각으로 뒷받침해줘야 하고, 선배 입장에서는 ‘나를 바라보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조금 더 투지(fighting spirit)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독자들도 이 책 안에서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자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의외로 『아름답게 욕망하라』를 읽은 남자들이 다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이번에 책이 나오고 나서 주변의 남자들한테 읽고 피드백을 들려달라고 했는데, 그 중에 나이가 많은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앵글에서 볼 수 있었고 ‘이런 생각도 있구나’라는 걸 새롭게 배웠다고요. 딸이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아마도 남자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을 읽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우아하게 저항하라
우아하게 저항하라
조주희 저
중앙북스(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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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민 PD “혼자 살아가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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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른이 될까?” 과도기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한 번쯤 해보는 질문이다. 해답을 가르치는 말들 대신, 권성민 PD는 자신의 생활을 담담히 전한다. 그는 세월호 보도를 비판하는 웹툰을 올리다 해직 언론인이 됐고, 복직 후 문해학교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는 MBC 예능 프로그램 <가시나들>을 연출했다. 그 시간만큼 밥을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월세를 냈다. 담백한 일상이지만, 책을 덮은 뒤 인정하게 된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단단한 중심이 됐고,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위한 일들을 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날들

오랫동안 몸담았던 MBC를 떠나 작년에 카카오M으로 옮기셨어요. 

MBC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이미지였는데 그렇게 됐어요.(웃음) 기존의 지상파 예능 포맷이 아닌, 자유로운 형태의 짧은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어요. 

2016년 『살아갑니다』 이후, 두 번째 에세이입니다.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온전히 기획해서 내놓은 창작물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첫 책은 기존에 썼던 글을 묶은 거라 확신이 없었거든요. 이번 책은 기획 단계부터 출판사와 함께했죠. 예전에는 책이 나왔다고 말하는 게 쑥스러웠는데, 이제는 열심히 알리려고요. 

홍보의 필요성을 느꼈군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 창작물이니까요. PD로서도 함께 제작한 식구들의 밥그릇이 걸려 있으니, 임시 프로그램을 정규 편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거든요. 마찬가지로 책도 여러 사람이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콘텐츠더라고요. 저자가 너무 소극적이면, 함께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소외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예능 PD와 에세이, 신선한 조합 같은데요.

저는 예능과 에세이가 비슷하게 느껴져요. 둘 다 선명한 것을 빼고 나머지를 담는 여집합이거든요. TV 프로그램 중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는 특징이 비교적 명확해요. 그 외에 분류하기 어려운 건 다 예능이에요. 순간을 포착해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게 제가 하는 일이죠. 에세이도 정해진 형식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되는 장르잖아요. 특별하지 않더라도 일상을 쓰면, 저만의 생각이었던 것이 누군가에게 전해지죠.

PD 일을 하시느라 글 쓸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데, 주로 언제 글을 쓰시나요?

주로 밤에 안 자고 써요. 제가 글 쓰는 공간이 SNS나 블로그인데, 올린 시간을 보면 주로 새벽이에요.(웃음) 늦게 퇴근해서 자려고 했는데, 문득 생각이 떠오르면 그때부터 쓰기 시작하는 거죠.

어떻게 ‘자립’을 주제로 삼게 됐나요?

처음 출판사에서 주셨던 기획안은 ‘꼰대’였어요.(웃음) 재밌지만 부담스러워서 ‘좋은 어른’에 대해 써보기로 했어요. 당시 30대 초반이었는데, 이 나이가 학생도 어른도 아닌 애매한 시기잖아요. 사회적으로 어른이 되는 시점이 유예되고 있기도 하고요. 이 과도기에 자립하고 온전한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고민하고 싶었어요. 

직접 만드신 북 트레일러 영상을 봤어요. PD님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혼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으셨더라고요.

우선 제가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웃음) 인터뷰 형식을 택한 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과연 제가 책에 쓴 내용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했거든요. 실제로 인터뷰해보니 다들 비슷한 경험과 고민을 갖고 있더라고요. 혼자 살면 치킨을 못 시켜 먹는다는 사소한 이야기까지요.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일부터 시작해 어른이 되어가는 날들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어요. 처음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 게 서울 신촌의 하숙방이었다고요.

대학생이 되면서 천안에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낡은 기숙사에서 살다가 하숙방에서 혼자 살게 된 거죠.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게 좋으면서도 어색하게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많은 대학생들처럼 방이 좁으니까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곤 했어요. 생활비와 등록금을 버느라 하루 서너 시간씩 자면서 일했는데, 몸은 고단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어요. 

“어른은 언제 돼”라는 말이 공감됐어요.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요?

처음으로 제 방을 계약할 때요. 하숙방은 돈만 내면 모두 관리해주지만, 원룸을 계약할 때는 법적인 주체로서 모든 걸 책임져야 하더라고요. 은행의 대출 창구에서 돈이 없다고 무시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사인하고, 세대주에 이름을 쓰고 나서 비로소 제 공간을 갖게 됐어요. 그동안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이제 스스로의 권리를 지킬 사람은 나뿐이더라고요. 그때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 됐구나 싶었어요.

최근 결혼하셨다고요. 혼자에서 두 사람의 생활이 된 건데요. 실제로 살아보니 어떠신가요? 

너무 좋습니다.(웃음) 혼자여도 충분할 때 연애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실망하는 것도 생기고 더 큰 결핍을 겪게 되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6년 동안 연애를 안 하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죠. 예전에는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삶이 완전히 바뀌는 거니까요. 그런데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니까 고민들이 무의미해졌어요. 이 사람과의 구체적인 일상을 상상하니 기꺼이 제 삶을 조율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지금은 새로운 생활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원래 늘 생산적인 일을 찾는 타입이었는데, 결혼 후에는 집에 오면 아내가 있으니까 목적 없는 시간을 나누게 돼요. 한 사람이 제 일상에 스며든 거죠.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도록

2011년에 썼던 ‘MBC 합격 수기’가 PD 지망생들 사이에서 반응이 뜨거웠어요. 

솔직히 쑥스럽죠. 합격 직후 들뜬 마음으로 블로그에 쓴 글이었는데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어요. 제 일이니 부끄럽지만, 후배가 그런 글을 썼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아무것도 모를 때, 앞으로 이루고 싶은 포부를 쓴 거니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 자신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콘텐츠를 통해서 ‘몸과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거든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팔리는 콘텐츠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늘 있어요. 회사에서 기꺼이 제작비를 내고 많은 시청자가 호응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SNS에 내부 비판 글과 웹툰을 올려 해직을 당했다가 2016년에 복직하셨죠. ‘해직 언론인’의 이름으로 보낸 시간이 궁금합니다.

당시에는 과분하다고 생각했어요. 해직 언론인 선배들은 위험을 각오하고 앞장서 싸우신 분들이 많으니까요. 고작 입사 3년 차 예능 PD였고,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 온라인에 글을 쓴 건데 잘린 거잖아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선배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건, 권력이 얼마나 선을 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니까요. 그래서 해직 언론인으로 저를 불러주는 곳에는 최대한 나가서 MBC 내부 상황을 알렸어요.

긴 머리 남자로 살아가시는 중이에요. 머리를 기른 후 PD님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존재가 됐어요.(웃음) 여자로 오해하는 분도 있고, 가게에서 저를 기억하기도 하고. 귀찮은 일이지만, 좋은 점도 있더라고요. 오랫동안 저는 남성 집단에 못 섞이는 편이었어요. 내부에서 당연하다고 전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런데 머리를 기르고부터는 “쟤는 나와 달라” 하고 인정해주더라고요. 성별 이전에 한 개인으로 보는 거죠. 의도하진 않았는데 이런 효과도 있네 했어요. 

MBC 예능 프로그램 <가시나들>은 문해학교 할머니들이 연예인과 한글을 배우는 내용이었죠. 다른 세대와 소통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 ‘존중하는 태도’예요. 세대가 달라도 나와 동등한 개인이라 생각하고 소통하는 건 중요해요. 먼저 눈높이를 맞추고 시작하면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하거든요. <가시나들> 촬영 당시, 할머니들이 방송을 잘 모를 거라 짐작했어요. 그런데 굳이 쉬운 언어로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으시더라고요. 이해 못 하시겠지 생각한 게 오히려 실례인 거죠. 반대로, 우리에게 무례하다고 느껴지는 노년층의 행동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어요. 다른 감각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갑자기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위험한 일이거든요. 가끔 어르신들이 제 긴 머리를 보고 대뜸 “여자예요?” 물어보실 때가 있는데 그냥 웃고 넘어가요. 제 기준과 다르다 할지라도 그 세대의 방식으로 신기함을 표현하는 거니까요.

에세이와 관찰 예능이 유행입니다. 이 트렌드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나요? 

콘텐츠 시장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고 느껴요. 예전에는 방송사만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다면, 지금은 개인들도 얼마든지 자기 영상을 만들어서 온라인에 올릴 수 있는 시대가 됐잖아요. 기술이 뛰어나지 않아도, 아이디어만 좋으면 시청자들이 재밌어하고요. 출판 시장도 비슷한 것 같아요.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채널이 많아지면서, 책을 내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죠. 저 같은 사람도 에세이를 출간하게 된 거고요. 에세이가 유행이라 해서 다른 장르가 침체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전체 파이가 커졌다고 봐야겠죠. 



다른 사람의 책장에 어떤 책이 있을까 관심이 많다고 하셨어요. 작가님의 책 취향도 궁금해지는데요.

주로 사회과학 책을 많이 봐요. 불평등, 빈곤, 정의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최근에는 『노랑의 미로』『갈등 도시』『임계장 이야기』 등이 추가됐죠. 최근에는 책장에 제 관심사 이외의 책들도 들어오고 있어요. 주변에서 지인들이 책을 쓰기도 하고, 출판사에서 신간을 보내주기도 하고요. 아내와 책장을 같이 쓰면서 ‘서재 결혼시키기’를 해보기도 했죠.(웃음) 옛날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책들을 만나게 되는 게 재밌어요.

향후 또 책을 내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계획을 세우는 편은 아니지만, 글을 꾸준히 쓰고 있으니 또 책을 내지 않을까요? 출간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다양한 통로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좋아서 PD가 됐으니 소설을 써보고 싶기도 하고요. 여러 종류의 글쓰기에 대한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습니다.



서울에 내 방 하나
서울에 내 방 하나
권성민 저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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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지은 “사람들이 기절하겠지? 상상하며 만든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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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림책을 만들던 시절엔 좋은 작품을 선보이고 싶어 마음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이지은 작가의 다섯 번째 그림책 『이파라파 냐무냐무』는 작가가 즐겁게 작업한 시간의 가치가 극대화된 그림책이다. 따뜻한 동화 같기도 하고, 웃기는 만화 같기도 한 이야기는 읽는 순간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아무 근심걱정 없는 평화로운 마시멜롱 마을. 매일 맛있는 열매를 먹고 뒹구는 게 중요한 일과인 마시멜롱들 앞에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커다란 털숭숭이가 나타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마시멜롱들은 털숭숭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힘을 합치지만, 어떤 공격도 털숭숭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털숭숭이는 정말 마시멜롱을 잡아먹기 위해 마을에 온 걸까? 귀여운 그림보다 더 귀여운 이야기. 그림책의 반전을 보고 나면 마법에 걸린 듯 온종일 이 말을 되뇌게 될지 모른다. “이파라파 냐무냐무”




‘냐무’에서 시작된 이야기  

독자들의 반응이 굉장히 좋아요. 실감하세요? 

전작 『빨간 열매』를 출간할 때까지만 해도 거의 무명작가였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해 주시는 게 좀 얼떨떨해요.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요. 

다섯 번째 그림책인데 소감이 어떤가요? 

‘잘 버텼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끈기가 없는 편이라 꾸준히 해 온 운동이나 취미생활이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그림책을 만드는 일만큼은 계속 해왔거든요. 한 번도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걸 보면 잘 버텨온 것 같아요. 

‘용감한 차차’라는 제목의 더미북에서 출발한 그림책이라고요.

맞아요. 더미북을 만들 당시에 ‘군상’ ‘무리 속의 갈등’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어떤 갈등이 일어나고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이기심, 변하는 마음 등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다 그리고 나니 굉장히 재미가 없더라고요.(웃음) 마치 ‘정답은 이거야’라고 제가 정의를 내리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묵혀두었던 이야기였죠. 

아이디어를 어떻게 구체화 시켰나요? 

저는 그림책을 구상하면 남편에게 제일 먼저 보여줘요. 저에게는 남편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남편이 ‘용감한 차차’를 보고는 재미없다고 해서 그냥 넘겨뒀는데 어느 날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다가 간판 하나를 보게 됐어요. 누군가 직접 쓴 간판에 다른 건 다 지워지고 ‘냐무’라는 글자만 남아있더라고요. 그걸 보는 순간 너무 재미있어서 ‘저걸 이야기에 녹여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차를 타고 가면서 계속 마시멜롱들처럼 “냠냠냠 냐무냐무냐무”하고 말을 뱉어봤어요. 그러다 ‘냐무냐무’를 ‘너무너무’와 접목해 말의 오해를 만들어보면 괜찮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바로 작업에 들어갔죠. 당시에 남편도 재미있다고 말했었는데, 책이 나오고 나니 그날의 일을 기억 못하더라고요.(웃음)

남편의 조언이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편인가 봐요. 

네, 엄청 단호하고 제 일에 감정적으로 엮이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게다가 아이언 맨 같은 것에만 열광하는 대중의 신이라서(웃음) 도움이 많이 돼요. ‘이파라파 냐무냐무’의 더미북을 보여줬을 땐 다른 더미북을 볼 때와 제스처가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진짜 재미있구나’ 싶었어요.



마음 속 마시멜롱을 꺼낼 수 있는 용기 

재밌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책인 만큼 신나게 작업했을 것 같아요. 

너무 즐거워서 컨트롤이 안 될 정도였어요. 사실 전작 『종이 아빠』와 『할머니 엄마』는 연구해서 나온 책이거든요. 기승전결, 에피소드 등을 촘촘히 생각해서 만든 거였죠. 그런데 『이파라파 냐무냐무』는 그냥 후루룩 나온 이야기라 그림 그리는 내내 정말 신났어요. 빨리 세상에 내놓고 싶어서 두근두근하고(웃음) 한 장면 그릴 때마다 ‘이거 사람들이 보면 기절하겠지?’하고  혼자 키득키득 거리면서 폭주하듯 만들었어요.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반전을 미리 공개할 수 없어서 아쉬움도 있었을 텐데요.

맞아요. 책이 나오면 드디어 내가 원하던 털숭숭이의 귀여운 모습을 팡! 하고 보여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사실 표지에도 털숭숭이가 아주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담고 싶었거든요.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어요.(웃음) 

왜 마시멜로를 주인공 캐릭터로 정했나요?

편집부에서 주신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제작했어요. 처음에는 마시멜롱이 그냥 그래픽적인 이미지의 아이였거든요. 그런데 전작 『팥빙수의 전설』을 보신 편집자님께서 음식을 캐릭터로 잡아보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저런 음식을 이야기에 대입해보다가 우연히 마시멜로가 떠올랐는데 말캉말캉하고 둥그런 모습이 귀엽고 잘 어울렸어요. 

주인공 털숭숭이는 반려견 ‘쿵이’를 생각하며 만든 캐릭터라고요. 

네, 쿵이는 제주도에서 온 유기견이에요. 구조 당시에 너무 아팠는데 제주에선 치료가 어려워 서울에서 임시보호를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마침 제주에 놀러 갔을 때 쿵이와 마주쳤는데 실물을 보고 첫 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임시보호를 하다가 너무 사랑에 빠져서 입양을 했죠. 그땐 쿵이가 어렸기 때문에 얼마나 클지도 모르고, 제가 과연 키울 여력이 있는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또 쿵이를 미국의 한 협회에서 데려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상황이라 저는 온전히 임시보호만 해야 하는 입장이었거든요. 그런데 도저히 못 보내겠더라고요. 그래서 쿵이를 구조하기 위해 쓴 모든 비용을 제가 지불하고 데려왔어요. 사실 이렇게 클 줄 몰랐어요.(웃음) 덩치가 커서 처음 본 사람들은 무서워하는데, 사실 너무 순하고 소심한 아이예요.

쿵이로 인해 주민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고요. 

쿵이의 덩치만 보고 몇몇 주민이 불쾌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셨거든요. 그런 분들을 마주치다 보니 제가 한동안은 사람들을 혐오하기까지 했던 것 같아요. 그분들이 저를 보고 불편하다고 느끼듯, 저도 그랬던 거죠. 나아가 인성까지 의심하면서 주민들을 피했는데, 쿵이를 소개하고 책임감 있게 돌보겠다는 전단지를 주민들에게 나눠드린 뒤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결국 제가 몇 명의 사람들로 인해 갖게 된 작은 편견을 사회적 편견으로 키웠던 거예요. 그때 내 안의 마시멜롱 하나가 ‘정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아?’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책을 보시는 분들도 마시멜롱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내면에 마시멜롱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면서 편견이 생길 때 그걸 꺼내 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작가의 말에서 ‘여러분 마음 속의 털숭숭이는 무엇인가요?’라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작가님 마음 속 털숭숭이는 무엇인가요? 

너무 많죠. 얼마 전에 ‘편견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쓴 후기를 봤어요. 그런데 문득 ‘편견이 정말 나쁜 건가? 내가 이 책을 편견이 없어지길 바라면서 쓴 책인가?’라고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편견은 생존을 위한 본능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도 쿵이만큼 큰 개를 보면 저절로 뒷걸음질을 칠 만큼 무서워요. 하지만 견디는 거죠. 그 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섭지 않길 바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비단 개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죠.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땐 자연히 거리를 두게 되잖아요. 사실 편견은 나를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 중 하나인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파라파 냐무냐무』의 수많은 마시멜롱들이 내 마음에 사는 원소 같은 아이들이라고 생각해요. 모두 편견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그게 오해일 수도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보자’고 이야기해주는 마시멜롱이 하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막연히 ‘편견을 없애자’가 아니라, 나에게 수많은 편견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대신 ‘정말 그런가?’라고 자세히 들여다볼 줄 아는 하나의 마시멜롱을 꺼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시멜롱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사는 여유를 전하고 싶었고요. 

 털숭숭이가 나타나기 전 마시멜롱 마을은 정말 평화로워 보여요.  

마시멜롱 마을에는 천적이 없고 먹을 것도 많거든요. 계급도 없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서 이 아이들은 천성이 게을러요.(웃음)  

책을 보면서 털숭숭이는 과연 어디서 온 아이인지 궁금했어요. 

마시멜롱의 땅 지도를 보면 하나의 대륙이 둥둥 떠 있고 나머지 면은 다 물이거든요. 물 바깥에 뭐가 있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는 미지의 세계인데, 털숭숭이가 수영을 너무 잘해서 물질하고 놀다가 마시멜롱 마을까지 흘러온 거예요.(웃음) 사실 최종 장면은 털숭숭이가 다시 가족을 만나러 가는 거였는데, 전체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 디테일인 것 같아 편집 과정에서 빠졌어요. 숭이가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 텅숭숭이는 마시멜롱 마을에 그냥 놀러온 거예요. 

작가님의 그림책은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아요. 한 페이지에 여러 장면이 있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라고요. 이런 작업 방식을 선호하세요? 

예전엔 피하려고 했는데, 요즘은 선호하는 작업이에요. 사실 『빨간 열매』를 그릴 때까지만 해도 한 페이지에 여러 이야기가 보이는 게 싫었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재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게 제 부족한 그림 실력 때문인 것 같았거든요. 구구절절 칸이 나누어진다는 건 그만큼 함축적으로 그리지 못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팥빙수의 전설』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가 생계형 일러스트 작업을 할 땐 거의 컴퓨터를 이용하는데, 그림책을 그릴 땐 이상한 고집을 부려서 늘 수작업을 했거든요. 처음으로 컴퓨터로 그렸던 게 『팥빙수의 전설』이었어요. 사실 내 이름으로 출간하는 책을 수작업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건 저한테 큰 도전인 동시에 굉장히 중요한 것 하나를 겸허히 내려놓는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작업 방식을 바꿨더니 독자들의 반응이 더 좋더라고요.(웃음) 행간이 나누어진 이야기에 재미있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수작업을 하면 수정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크거든요. 성향에 맞지도 않는 걸 잡고 있느라 힘들었는데, 컴퓨터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제 이야기를 훨씬 편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이파라파 냐무냐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뭔가요? 

마시멜롱들이 너른 벌판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열매를 먹는 장면이요. 제일 힘들게 그려서인지 그만큼 좋아요. 제가 책을 출간하고 “앞 장의 작업들이 축적되며 뒤로 갈수록 그림 실력이 늘었다”고 종종 말했거든요.(웃음) 실력 상승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그 들판의 마시멜롱 그림이에요. 마치 이 세계를 규정해주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될 거야’라고 말하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제가 즐거운 작업을 해요 

그림책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줄곧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가 서른 즈음에 내 이름으로 된 책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림책 공부학교 모임을 다니며 더미북 만들기나 그림책 읽는 방법 등을 훈련했죠. 사실 전에는 업무적으로만 텍스트를 대했고 그림책의 정서를 깊이 느끼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모임을 통해서 그림책이 가진 느낌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계속 아이디어를 모으고 더미를 만들고 그랬어요. 

첫 책이 나왔을 때 어땠나요? 

의외로 실망스러웠어요. 너무 보여주기 식 이야기인 것 같더라고요. 나오기 전엔 몰랐거든요. 그저 ‘최상의 책을 보여줘야지’라는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출간된 걸 보니 쉼표가 없었어요. 이야기를 전달할 땐 가끔 쉬어가는 부분도 필요하다는 걸 배웠죠. 

동물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빨간 열매』 『팥빙수의 전설』 『이파라파 냐무냐무』 모두 커다란 동물이 나오는데요. 

맞아요. 저는 크고 소심하고 겁 많은 존재들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 있어요. 사람도 덩치가 큰데, 순수한 모습을 보면 막 좋아하게 되거든요. 그 마음이 조금씩 쌓이나 봐요. 『팥빙수의 전설』에 나오는 호랑이도 사실 할머니를 잡아먹는 캐릭터인데 무섭기보다 귀엽고 익살스럽잖아요. 제가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특히 동물들의 겁쟁이 캐릭터는 정말 거부할 수가 없어요.(웃음) 

작가님도 그림을 그리기 힘든 순간이 있으세요?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작업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힘들어 멈췄던 시간은 별로 없어요. 한 번 이야기에 몸을 실으면 탄력이 붙어서 쭉 진행하는 편이라, 작업 과정에서 크게 헤매지 않는 것 같아요. 

동료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내놓으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나만 제 자리에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잖아요. 

그건 그냥 일상이에요. 제 하루의 디폴트라서(웃음) 슬럼프라고 할 수가 없어요. 문신으로 새긴 것처럼 늘 제게 붙어있는 감정이죠. 그런데 질문을 듣고 보니 부족한 실력과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림책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게 신기하네요. 보통 그런 마음이 들면 ‘다 때려 치워야지!’하면서 그만두고 싶을 만 하잖아요. 물론 그런 말을 내뱉은 적은 있지만, 진짜 그만하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이 더러운 세상! 그래도 내 책이 더 재밌어’하면서 계속 작업해요.(웃음)

평소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정리하세요?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먼저 아이패드를 켜고 필기 앱에 쓱쓱 그려둬요. 이야기가 생각날 땐 아이디어만 저장해두는 계정에 써놓고요. 

SNS에 『이파라파 냐무냐무』 후기가 정말 많이 보이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후기가 있다면요. 

책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본 후기인데, 어떤 아이가 책을 보고 꺄르르 웃으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장면의 영상을 아이 어머님이 찍어서 올리신 거예요. 그걸 매일 봐요.(웃음) 좀 우울하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들어가서 그 영상을 보고 힘을 얻어요. 그리고 어떤 분은 그림책에 대한 전문적인 포스팅을 꾸준히 올리시는 분인데, 다른 그림책들은 어떤 점이 좋은지 자세히 쓰셨으면서, 제 책에는 ‘중독성 갑’이라는 네 글자만 써두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와 좋다, 이거면 됐어!’라고 생각했어요. 

그림책을 그릴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뭔가요? 

예전엔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잘 포장해서 최대한 독자를 설득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내 안에서 나온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들려줄까, 편하게 들려줄까’를 먼저 생각해요. 책을 읽으시는 분들이 그냥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마음에 변화가 많이 생긴 거네요. 

맞아요. 첫 책을 그릴 땐 실력을 검증 받고 싶었어요. 마치 학교에 입학한 첫 날, 모든 아이들에게 나를 알리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였죠. 내가 그림책을 그리며 느끼는 즐거움보다는 ‘사람들이 날 이렇게 봐줬으면 좋겠어’라는 외부의 평가에 초점을 맞춰 작업했던 거예요. 지금은 제가 즐거운 작업을 해요. ‘내가 이만큼 즐거우니 보는 사람들도 즐겁겠지?’라는 생각으로요. 

작업하는 과정이 전보다 훨씬 재밌겠어요.

네 정말 그래요. 제가 작품이 풀리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걸 ‘영감님이 오신다’고 하는데 이전 작업들이 즐거웠던 만큼 ‘앞으로는 영감님이 안 오시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생겨요. 사실 지금 진행하는 더미북이 하나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겠어요. 

영감님이 아직 안 오셨나요?(웃음)

아직 안 오셨어요.(웃음) 요즘은 영감님을 기다리는 일이 가장 힘들어요. 사실 『팥빙수의 전설』도 처음에는 되게 슬펐거든요. 첫 더미는 할머니가 손녀에게 주려고 팥죽을 품고 눈보라가 치는 길을 뚜벅뚜벅 걷다가 호랑이를 만나는 내용이었어요. 결말도 얼마나 슬픈지 몰라요. 호랑이한테 팥죽을 다 빼앗기고 손녀도 못 만난 채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끝나거든요. 그런데 문득 할머니 캐릭터에 대한 의심이 들었어요. ‘내가 원하는 여성상은 뭔가? 나는 이런 할머니를 원하나?’라고 생각해보니 아니더라고요. 덕분에 지금의 눈썹 진한 할머니가 탄생한 거죠. 그런데 할머니 캐릭터가 바뀌고 나니 온 세상이 다 바뀌는 거예요. 지금은 독자에게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아요. 보면서 같이 즐거울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는 책이 많이 팔리는 작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독자가 어디 있는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팥빙수의 전설』을 출간하고부터 표현해주시는 독자 분들이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사실 예전에도 분명 존재했던 분들인데 제가 이전까지는 독자를 그저 수치로 봤던 거예요. ‘내 책은 왜 이거밖에 안 팔리지?’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팥빙수의 전설』을 잘 봤다고 말씀해주시는 독자님들이 『종이 아빠』를 비롯해 제 전작들도 가지고 계시는 걸 보고 ‘이 분들이 그림책을 보호해주는 아래에서 내가 살았구나. 그동안 그걸 몰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들이 그림책이라는 장르를 수호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자리를 빌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올려주시는 후기 포스팅 하나가 저뿐 아니라 많은 그림책 작가들에게 내일의 더미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주거든요. 그러니 책을 보고 즐거우셨다면 그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실제로 후기를 매일 찾아보신다고요. 

네, 사실 매일 보는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봐요.(웃음) 너무 좋아요. 더 많이 표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파라파냐무냐무
이파라파냐무냐무
이지은 글그림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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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누가 봐도 명백하게 밝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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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배제를 통해 오로지 ‘정상’만을 재생산하려고 하는 편협한 세계에서 ‘비정상적’ 주체들이 자기기만과 자기혐오의 덫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을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무수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지를 이 소설은 진지하게 묻고 있다.(박선우, 『우리는 같은 곳에서』, 신샛별 평론가 해설, 228쪽) 

2018년 「우리는 같은 곳에서」로 데뷔한 이후 2년 동안 오직 쓰는 일에만 매달렸던 소설가 박선우는 그러나 그간 쓴 소설을 묶은 첫 번째 소설집 『우리는 같은 곳에서』를 출간한 이후에야 발견하게 되는 것들 덕분에 “뒤늦게 배우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겪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주저함에 대해 “성소수자인 사람이 읽지 않는 이상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던 그는 이제 그때의 자신처럼 억압 속에 있는,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작가의 말’에서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의 인사를 적기도 한 그는 용기 내는 일이 누군가를 희망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고, 그래서 아직 두려움이 있긴 하지만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만한 소리로 말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기를

‘작가의 말’에서 작품을 쓸 때 번번이 인물의 성별을 고심했다고 밝혔잖아요. 그 뒤에 이유를 짧게 적긴 했지만,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책으로 묶는 과정에서 이 소설들을 쓰는 동안 무엇을 가장 고민했고 힘들어했는지 새삼 되짚게 됐어요.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때에는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주저함이 없었고, 그것이 제 본질과 아주 맞닿아 있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여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때는 저도 모르게 조금 더 희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려고 애쓰는 기분이랄까 의무감이 생기는 걸 느꼈어요. 처음에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생기는 거리감이 글쓰기에 자유로움을 주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 것인지 혼동이 왔는데요. 결국 소설 속의 인물들이 전부 ‘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한없이 우울해하고 비극을 당연시하는 나도, 밝아지려 애쓰고 장난치며 웃고 싶은 나도 나니까요. 거의 믿지는 않지만 희망을 찾아보려고, 그것을 다시금 믿어보려고 하는 마음이 저한테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성별을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고요.  

방금 희망을 “거의 믿지는 않지만”이라고 했어요. 

네, 거의 믿지 않는 편이에요. 그보다는 자주 잊어버리게 되니까, 거의 부재하다고 느끼는 편이죠. 살다 보면 희망을 잃어버리기가 더 쉽잖아요. 여전히 혐오는 만연하고요. 최근 온라인상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는데 그곳마저 혐오 세력이 난입해서 방해하는 게시물을 올리는 걸 봤어요. 그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런데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아 맞다, 그렇지, 원래 세상이 그랬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모든 비극이 오랫동안 현재진행형이었다는 자각을 할 때마다 쉽게 비관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은 곳에서』는 등단 후 꾸준히 발표해온 여덟 편의 단편을 묶었어요. 단편을 발표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주변의 반응, 약간의 희망이나 환대 같은 것이 있었나요? 

단편 발표를 할 때는 수상을 하거나 평론가들이 리뷰를 써주지 않는 이상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여기 실린 단편들은 계속 비슷한 상태에서 썼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한 권으로 묶고 나니까 비로소 좀 놓여나는 기분이 들어요.

이 단편들을 썼을 때의 그 “비슷한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였어요? 

다수에게 읽힌다는 전제하에 글을 쓰다 보니 허공에 편지를 띄우는 기분이 들었어요. 먼 곳의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싶고, 연결되고 싶고, 그래서 어떤 답신을 돌려받았으면 하는 상태로 글을 쓰게 된 거죠. 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아니, 단 한 명이면 족하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책을 내고 나서는 좀 달라졌어요. 개인적인 연결감이나 충족을 넘어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졌달까요. 저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나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졌어요. 사회적으로도 올바른 영향을 주고 싶고요. 

「고요한 열정」에 “나 같은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생을 견디다가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것일까”(154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요. 어떤 마음으로 쓴 문장일지, 상상해보게 됐어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이 쓴 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작품에서 미진함을 느끼곤 했죠. 그런데 어쩌다가 아주 몰입해서 읽은 작품들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저처럼 혼란과 억압에 갇혀 삶을 꾸려가는 인물들이 나오는 걸 봤죠. 그 후로는 비슷한 이야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이런 이야기가 읽고 싶다는 것은 쓰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아요. 김봉곤, 박상영 작가님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례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누군가 하고 있고, 해도 된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디선가 주저하고 있던 이들에게 용기가 된다는 사실을 체감했어요. 분명히 영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아직 두려움이 있긴 하지만 제가 읽고 싶은 글을 써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세상 어딘가에 남아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바랐던 것 같아요.

얼마 전 트위터에 책 출간 소식을 이제야 가족에게 말했다고 올렸잖아요. ‘작가의 말’에는 남자친구에게 인사도 전했는데요. 지금 말씀을 들으면 이런 생각의 변화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것 같아요. 

맞아요, 책을 묶을 즈음에야 진지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 굳이 그런 인사를 넣은 건 저라는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알기 때문이에요. 돌이킬 수 없도록 명시해야만 했던 거죠. 은근슬쩍 물러설지도 모르는 미래의 저를 다그치는 정언명령처럼 말이에요.(웃음) 이렇게까지 함으로써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선 안 된다, 라는 다짐을 첫 책에 써두고 싶었어요. 그러면 지금처럼 그 말이 질문으로 돌아오고, 그때마다 제 안에 새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사실은 작품 안에도 작가님이 많이 있잖아요. 이미 작품으로 발언을 하고 있는 셈인데 그보다 더 분명하게 밝혀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들려요. 

어중간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밝히고 싶었죠. SNS로 ‘작가의 말을 보고 감동했다’, ‘그런 말을 해주셔서 고맙다’는 쪽지도 받았거든요. 그런 걸 보니 어쩌면 누군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제가 대신 쓴 거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분명한 문장을 쓰는 게 점점 후회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 내용을 쓰고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기까지 3일을 망설였거든요.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지 저 스스로 오래 고민했는데요. 항상 문턱에서 망설였던 시간이 길었고, 그때마다 뒷걸음질쳤던 기억이 나서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고,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기로 했어요.



주저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작품에서 흔히 사용되는 쉬운 말로 간편하게 정의되지 않는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이 좋았어요. 가령 「우리는 같은 곳에서」에서 주인공 ‘나’와 ‘영지’는 한때 사귄 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채 지낸 시간이 더 길죠.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분명한 관계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불명확한 관계가 훨씬 많은데 사람들은 친구나 연인, 동료, 선후배처럼 분명하게 명명해야 안심하죠. 관계는 아주 복잡하고 이름 붙이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데뷔작 「우리는 같은 곳에서」를 쓸 즈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요. 사실 작업할 당시에는 이렇게 다양한 관계를 써보자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어요. 책으로 묶고 보니까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접근해보려 했구나, 싶더라고요. 계속 저의 위치를 바꿔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신샛별 평론가는 “관계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이 박선우의 신념이자, 그의 글쓰기 동력이 아닐까”(245쪽)라고 했죠. 

해설자는 책의 첫 번째 독자라고 생각해요. 첫 독자 분이 제가 막연하게만 감지하고 있던 부분들을 하나 하나 짚어주시니까 울컥하는 게 있었어요. 작가로서 울컥한 것을 넘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사적인, 내밀한 울컥함이 있었는데요. 사실 책을 묶으면서도 제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주저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읽는 사람들이 알까 싶었거든요. 발표하는 내내 공식적으로 그런 피드백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우리처럼 성소수자인 사람이 읽지 않는 이상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어요. 그러다가 신샛별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꼭 그런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덕분에 좀 더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북테라피라고, 흔히 책으로 아픈 마음에 대한 처방을 내린다고 하잖아요. 제게는 이 해설이 그랬어요.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 시차로 인해 달라지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점도 주목하게 돼요. 편지가 뒤늦게 도착하거나 메일을 뒤늦게 보는 과정을 통해 관계가 재정의되는 거예요. 

이야기로 써놓으니까 장치처럼 보이는데 저는 그게 아주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상대가 저를 기쁘게 했든 불쾌하게 했든 어떤 영향력을 끼쳤을 때 분명하게 반응을 해야 하는데요. 대부분 저는 그때 반응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시차라는 게 저라는 사람한테는 일상적으로 발생했던 거죠. 그 순간 말하지 못했다면 결국 나중에 말할 수밖에 없는 건데, 한번 놓쳐버린 타이밍 때문에 시간은 계속 벌어지고, 그럼에도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몇 년이 지나서야 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이것이 자연스러운 관계의 흐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시작과 끝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관계 안에는 뭔가가 미진하게 남아서 영구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라고요. 그러다가 한 번씩 봉합되는 듯한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 매듭의 순간이 단편소설의 미학과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작품들에는 ‘왜 이렇게 사나’ 하는 감각도 있죠. 「휘는 빛」의 “왜 이렇게 살까”(197쪽)나 「그 가을의 열대야」의 “살고 싶나, 이렇게 계속...”(122쪽)같은 문장처럼 지금의 자신의 회의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면들이 있잖아요.  

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문학 출판을 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고, 소설 공모전에서 수상해 책도 내고 싶었고, 그렇게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원했어요. 그렇게만 되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는데요. 막상 바랐던 모습에 가까워졌는데도 딱히 행복하다는 느낌이 없더라고요. 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예전보다 더 행복해지거나 충만해지진 않았어요. 물론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고 생활도 좀 나아졌고 응원도 받았지만요. 근본적인 우울감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라는 사람은 왜 이 모양인가, 그런 자문을 하다 보면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이란 결론에 이르게 돼요. 혼자서 이 악물고 지내온 시간이 워낙 길었으니까, 이를 상쇄해줄 만큼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누적된 비관이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아요. 

비슷한 기분이었을 때 정희진 선생이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부정적 감정(dark emotions)’은 현실 인식이기도 하죠. 극복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죠.(중략)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는, 누구나 힘들다는 것 그래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죠.”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고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작가님의 작품 속에서 그렇게 비관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비슷하게 안도하게 되는 묘한 경험을 했어요. 

김연수 작가님도 책을 읽는 이유를 비슷하게 짚어주신 적이 있어요. 내가 막연히 하던 생각을 누군가 명료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보는 일은 이런 상태의 인간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준다고요. 글을 읽는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타인과 연결되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그게 곧 ‘우리가 함께 있다’는 감각이기도 한 것 같고요. 보통 독서를 고독한 취미 활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이곳에 없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뭔가를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

책에서 딱 한 문장만 꼽으라면 「밤의 물고기들」에 나오는 이 문장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39쪽)를 꼽고 싶어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한테 늘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반이어도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데, 꼭 대놓고 저를 싫어하고 조롱하던 애들이 있었거든요. 남중, 남고, 군대를 거치는 내내 그랬어요. 그 시절의 만연한 여성혐오는 여성스러운 남자 또한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거든요. 그저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죠. 제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처럼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고,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한 거예요. 그런 이들에게 방금 꼽아주신 문장을 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예술대학원에 진학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게 되면서는 조금씩 그런 식의 괴롭힘과 멀어질 수 있었지만 이 영역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여전히 혐오 발언을 많이 듣게 돼요. 멀리 갈 것도 없죠. 그렇기에 계속 써야만, 뭔가를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요.

책 가장 뒷부분에 수록 작품 발표 지면이 나와 있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짧은 기간 동안 굉장히 발표를 많이 했어요. 

2년 동안 계속 쓴 것 같아요. 회사를 다니니까 퇴근한 다음에 쓰고, 주말에도 쓰고요. 매일이 작업 상태였죠. 그때는 남자친구가 없어서 몰입할 게 이것뿐이기도 했어요.(웃음) 계속 마감이 있으니까 쓰는 일에만 매달렸던 것 같아요. 말하다 보니까 그 시간들이 떠올라 점점 슬퍼지네요.(웃음)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분들일까요? 

특정 시기에 몰입이 잘되는 책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그 글을 쓴 작가와 가장 유사한 상태일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그래서 이제 막 정체화를 시작했거나 시작하려는 분들이 읽어주시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채널예스> 독자 모든 분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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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해도 다시 하게 되는 집안 정리. 흔히 ‘버리기’를 정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청소가 공간을 깨끗이 하는 일이라면 정리는 물건의 자리를 찾는 일.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를 쓴 정희숙 정리컨설턴트는 “물건에 주소를 부여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정리는 마음을 풀어내는 일’이라며 지금 삶이 괴로운 모든 이에게 ‘정리’를 권한다. 

집을 최대한 비우는 것이 최고의 정리라 생각하거나 눈에 안 보이게 물건을 어딘가에 잘 넣어놓으면 정리가 된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줄 것이다. 진짜 정리는 물건을 버리고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진열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가야 할 곳을 정해주는 것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_(7p)

평범한 주부였던 정희숙 정리컨설턴트는 마흔 살에 정리컨설팅을 시작하고 2,000여 개의 집을 정리하며 경험을 쌓았다. SBS <생방송 투데이>, MBC <기분 좋은 날> 등 다수의 방송에 출연했으며 한혜연, 박명수, 화사의 집을 정리해 화제를 모았다. 현재 유튜브 <정희숙의 똑똑한 정리법>을 운영 중이며 한국정리컨설팅협회장을 맡고 있다.



정리는 ‘나’를 돌보는 일

집 정리를 마음과 연결해 설명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정리컨설팅을 하다 보니 점점 사람이 보이더라고요. 정리를 의뢰한 사람이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궁금해진 거죠. 얼마 전에 어느 집에 갔는데 유통기한이 2015년인 라면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무심코 “2015년에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봤어요. 갑자기 우는 거예요. 알고 보니 2015년에 아이가 떠난 거죠. 그때 이후로 그 고객의 시간이 멈췄고, 정리를 못 한 거예요. 

정리하면서 그 사람의 역사를 알게 되는군요.

그냥 물건만 정리하는 게 아니에요. 월세인지 전세인지 재혼인지 이혼인지 다 알게 돼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거나 20년간 자기를 힘들게 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거나 하는 등의 사건을 계기로 정리컨설팅을 의뢰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인지 왜 정리해야 하는지, 정리의 의미를 강조하셨더라고요. 

아마 현장에 안 갔다면 몰랐을 거예요. 회장님 사모님인 어떤 고객은 과거에 몇억을 부도 맞고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대요. 그때 이후로 알뜰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생겨서 지금도 물건을 잘 못 버리더라고요. 정리는 마음과 연결돼 있어요. 그래서 중요하고요. 

정리로 저자님의 인생도 달라졌다고요. 

결혼하고 마흔 넘어서까지 전업주부로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굉장히 무기력해졌어요.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고 아이들은 내 마음처럼 안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자주 화가 나고 눈물도 많아졌고요. 그래서 건강가정지원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갔는데 일을 하라고 해서 한 달에 딱 30만 원만 벌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죠. 재미있었어요. 

원래 정리를 잘하셨나요?

강박적으로 열심히 했어요. 아이들 장난감을 컬러, 종류별로 분류하고 온 집안을 소독할 정도로요. 주변에서 피곤하게 산다고 할 정도로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정리컨설팅이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일을 시작하고 언제부터 반응이 왔나요?

2013년에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정리컨설팅에 대한 인식이 없었죠. 저도 커리어가 없었고요. 최근 2~3년 전부터 유망 직업이 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처음 일을 시작하고 해외 자료를 보면서 공부하셨다고요

미국, 캐나다, 일본 자료를 주로 봤고요. 일본에서 정리컨설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 모르지만, 넷플릭스에서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봤는데 코칭 위주의 내용이더라고요. 버리기를 강조하고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말이 이른바 ‘핫’ 했잖아요. 그런데 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하셨더라고요. 

어떻게 설레는 것만 남겨요. (웃음) 쓸 것도 있어야죠. 일본에서는 자꾸 버리라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정(情)이 많고, 한(恨)도 있고, 덤을 좋아해서 못 버려요. 무조건 버리라고 하지 말고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죠. 그냥 꺼내놓고 쓰라는 게 아니라 예쁘게 꾸미면 누구든 쓰고 싶은 마음이 들잖아요. 가령 서재를 예쁘게 만들면 책 읽고 싶듯이요. 그렇게 정리해야 해요. 

집의 크기와 정리는 상관없다고요. 

집이 크면 밖에 나와 있는 물건이 적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건 정리가 잘 된 게 아니라 한쪽에 모여 있는 것뿐이에요. 그냥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놓은 거죠. 이 물건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침대, 소파, 식탁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물건이 가구를 점령하는 거죠. 

가구가 제 기능을 잃는 거네요.

물건이 너무 많아서 집에 못 들어가는 분도 있었어요. 집이 창고가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정리가 필요해요. 소비 방식도 점검해야 하고요. 처음에 이 일을 시작할 때는 저도 잘 몰라서 최대한 버리지 않고 물건을 많이 넣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남의 물건이고 아까우니까 상자나 압축팩 가지고 다니면서 최대한 많이 넣었죠. 그런데 그건 정리가 아니더라고요. 다 버릴 순 없지만, 버릴 건 버리고, 버리지 않는 물건은 쓰게 만들어야 해요. 



제1원칙 ‘눈에 보이게 하라’ ’ 

정리할 때는 큰 그림을 먼저 그려야 한다고요.

공간에 이름을 부여하고 공간의 목적을 정한 다음 물건이 따라가게 해야 해요. 어떤 물건은 특정 공간 외에는 없어야 하고요. 예를 들어 가족이 함께 쓰는 거실에는 개인 물건을 두지 말아야죠. 그런데 많은 분이 큰 그림을 그리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거에 연연해요. 양말, 수건 예쁘게 접는 것부터 하는 거죠. 그건 정리의 단계가 높아졌을 때 하는 거예요. 

‘현재’에 집중해서 정리해야 한다고도 하셨죠. 

사람이 자라는 만큼 물건도 성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학창 시절에 입었던 교복, 어릴 때 읽은 동화책, 과거에 주고받은 편지 같은 걸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물론 사람에 따라 추억의 물건에 부여하는 가치가 다를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물건 때문에 현재의 내 공간을 제대로 못 쓴다면 문제가 있죠. 반대로 지금 당장 쓸 물건이 아닌데 미리 사 놓고 쌓아두는 분들도 많은데요. 정작 그 물건을 다 쓰느냐? 그렇지 않아요. 공간만 차지하는 거예요. 

컨설팅하면서 가장 많이 버리는 물건이 있나요?

비디오, 삐삐, 옛날 핸드폰 충전기요. 주로 쓰지 않는데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죠. 버리기 힘들어하는 분들께는 사진으로 남겨 놓으라고 해요. 

역시 주로 추억의 물건이네요.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는데 비디오를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것들은 결국 창고로 가게 돼요. 

한 번에 못 버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설득하는 노하우가 있나요?

일단 모든 물건을 다 꺼내야 해요. 물건의 양이 한눈에 보이게요. 다 꺼내 놓으면 자연스럽게 우선순위가 정해지거든요. 어떤 걸 버리고, 어떤 걸 써야 하는지 고객이 먼저 알아요. 예를 들어 텀블러가 여러 개면 사은품으로 받은 건 버리고 스타벅스 텀블러는 남기는 식이죠. 그런데 고객이 직접 자기 집을 정리할 때는 다 꺼내 놓으면 안 돼요. 하루에 한 품목씩 해야 다 정리할 수 있어요.

순서대로 할 때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품목이 있다면요?

내가 관심 있는 품목부터요. 책에 관심이 있으면 책부터 하고, 옷에 관심이 있으면 부피가 큰 패딩이나 코트부터 정리하는 게 좋아요. 관심 있는 물건부터 정리해야 재밌거든요. 부피가 큰 것부터 버려야 하고요. 

물건이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요.. 

정리는 버리기가 아니에요. 재고 조사고 분류예요. 내가 가진 걸 알아야죠. 그래야 버릴 수 있고, 안 살 수 있어요. 가진 걸 모른 채로 버리면 잘못된 버리기를 해요. 만약 가위가 10개 있으면 하나 정도는 버릴 수 있겠죠. 그런데 집에 가위가 몇 개 있는지 모르는데 ‘오늘 비도 오고 우울하니까 이걸 확 버려?’ 싶어서 버리면 나중에 다시 그걸 찾는다니까요. (웃음)  

그러면 최대한 상세히 분류하는 게 좋을까요?

기준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니에요. 대분류부터 순서대로 정리하는 게 중요한데요. 의류, 주방용품, 문구류로 시작해야지 처음부터 지우개, 칼 이렇게 하면 골치 아파요. 카테고리를 크게 묶어야 하고, 의류는 사용자별로 분류하는 게 좋아요. 예를 들어 남편 패딩, 엄마 코트부터 정리하는 거죠. 부피 큰 거부터 해야 하니까. 

부피별로 옷을 정리하면 자연스럽게 계절별로도 구분되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한국은 사계절이라서 계절별로 구분하면 기준이 모호해져요. 얇은 재킷부터 두꺼운 재킷, 긴 패딩부터 짧은 패딩처럼 종류별로 정리해야 해요. 종류별로 정리한 다음에는 색상, 소재, 길이별로 다시 나누고요.  

옷을 개어서 정리하는 것보다 걸어놓는 게 좋다고요. 이것도 옷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함인 거죠?

정리 못 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책장이나 상자에 옷을 넣어 놓거나 압축해서 쌓아두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많은 옷을 보관할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정리법인데요. 저는 그렇게 안 해요. 쓰는 게 목적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옷은 걸어야 해요. 눈에 보이게요.  



나와 물건을 알아야 해요

고객에게 ‘왜 정리하려고 하는지’ 물어본다고요.

SNS에서 비포&애프터를 보고 가격부터 묻는 분들이 많은데요. 저는 한 번만 할 사람이잖아요. 정리컨설팅을 통해 시스템을 갖춰도 고객이 정리에 관심이 없거나 유지할 의지가 없으면 의미 없어요. 부모님 집을 정리해 달라고 하는 자녀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께는 받지 마시라고 말씀드려요. 왜냐하면 잘 안 변하거든요. 청소가 치우는 거라면 정리는 잘 쓸 수 있게 자리를 잡아주는 거예요. 물건에 주소를 부여하는 거죠. 그런데 이걸 모르고 살던 대로 살면 소용없어요. 

물건의 질서를 잡아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맞아요. 정리를 못 한다는 건 내가 물건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물건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많은 사람이 자기가 똑똑하게 소비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제가 여러 집을 컨설팅 하잖아요. 모든 집에 똑같은 물건이 있어요. 정리하면서 최신 트렌드를 알게 된다니까요. 

그만큼 유행에 따라 물건을 산다는 거죠?

그렇죠.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대리만족한다는 걸 많이 느껴요. 예전에 연예인이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요즘은 셀럽으로 바뀐 거 같아요. 요즘은 USM이라는 가구가 인기예요. 청담동 가면 이 가구가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뉠 정도로요. 그리고 집의 구조와 상관 없이 유행 따라 소비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패밀리 침대가 18평에도 있고 25평에도 있는 식이죠. 

나와 내가 가진 물건을 아는 게 중요하군요. 

정리는 선택이에요. ‘쓸 거야 말 거야?’, ‘버릴 거야 남길 거야?’, ‘보물이야 쓰레기야?’를 선택하는 건데 이걸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어렸을 때부터 선택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한 거예요. 정리는 습관이고 대물림이거든요. 엄마가 하는 대로 아이가 따라 해요. 

의뢰받는 일의 30% 정도만 수락하신다고 들었어요. 이유가 있나요?

정확히 30%는 아니고요. 상담했을 때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고객과는 일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고객이 모든 걸 다 정해 놓고 “이불 압축해주시고, 안 쓰는 물건 지하 창고에 내려주세요”라고 하면 “죄송하지만, 제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씀드리죠. 본인이 결정했는데 컨설턴트가 갈 필요 없잖아요. 수익이 남지 않아도 정리컨설팅이 필요한 고객에게는 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사양하죠. 

정리컨설팅을 받으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질 것 같아요. 업체를 고를 때 주의할 점이 있을까요? 

방문 견적 없이 평당 얼마로 시작하는 업체요. 방문 견적 없이 저렴한 비용으로 제대로 정리하기 쉽지 않아요. 물건이 섞여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꺼내놓고 퍼즐처럼 맞춰야 하거든요. 그러면 최소 5~6명이 필요해요. 정리컨설팅은 단순 수납이나 청소와 달라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에요. 



정리컨설턴트를 꿈꾸는 분들에게 조언한다면요? 

정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분들이 하면 좋죠. 그런데 모든 분이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냥 일이 필요해서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최소한 이 일이 노동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몸 쓰는 걸 안 좋아하는 사람은 못 해요. 활동적이어야 할 수 있어요. 

SNS도 열심히 하시더라고요.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게 있나요?

정리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모든 사람이 정리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정리는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고, 대물림이니까요. 저는 정리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잖아요. 더 많은 사람이 저처럼 바뀔때까지 컨설팅하고, SNS도 하면서 계속 일하고 싶어요.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
정희숙 저
가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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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승 “매스커뮤니케이션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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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가 아니라 소통입니다』의 저자 정혜승은 <문화일보> 기자에서 ‘다음’ 대외협력 담당자로, ‘카카오’ 부사장에서 청와대 뉴미디어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며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변화를 모두 지켜봤다. 신문, 방송 등과 같은 언론을 중심으로 한 일방향 소통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는 정혜승은 “소통이란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의 맥락을 짚어내는 일이 필요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쌍방향 소통을 위해서 정보 공급자는 무엇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것인지, 취향, 성향 등에 따라 작게 나뉘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정보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뉴미디어의 혁신과 현장의 고민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홍보가 아니라 소통입니다』는 저널리즘의 현재와 미래부터 주류가 된 밀레니얼 세대의 소통 방식까지 모두 점검하는 동시에 그가 청와대 국민청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했던 고민들을 자세히 담았다.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청와대를 위해 국민청원을 만들면서도 이렇게까지 많은 청원을 받게 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는 정혜승은 “홍보와 소통은 홍보인들 혹은 미디어 종사자들, 공보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판매해야 하는 상품이든 서비스든 혹은 나의 주장이든 모두에게 소통의 니즈가 있다”며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고민하는 이들과 함께 소통의 문제를 고민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

‘홍보가 아니라 소통’을 이야기할 때 먼저 생각할 부분이 “매스컴의 시대 끝나고 있다”(26쪽)고 한 대목일 것 같아요. 

언론사 기자로 일하다 인터넷 기업으로 움직였어요. 그곳은 뉴미디어의 다양한 시도를 하는 곳이었죠. 기자가 펜을 독점하던 시대가 있었고, 기자가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2008년, ‘아고라’, ‘블로거 뉴스’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제는 기자보다 시민 또는 전문가들이 직접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제게도 이런 뉴미디어는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언론에서 볼 수 없던 이야기가 현장에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서 미디어 생태계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언론사는 시장의 위기와 신뢰의 위기에 한꺼번에 부딪혔어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절박하게 여러 시도를 했고요. 마침 해외 언론들도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세계적으로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가 있는 것이라면 그에 맞춰 다른 시도를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그래서 꾸준히 해왔던 거예요. 

그게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이런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과 정보를 나누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거든요. 

사실은 이를 모색하는 여러 친구들이 있었어요. 언론사, 통신사, 방송사, 인터넷기업, 학교 등 다양한 단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공부도 열심히 했죠. 그러다 2016년 ‘트레바리’에서 ‘뉴미디어클럽’을 8개월 했는데요. 2030 세대가 바라보는 미디어의 혁신과 도전은 또 다르더라고요. 실은 그때 이미 이런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2017년 청와대에 갔고, 2019년에 청와대를 나온 뒤 미디어 환경의 변화, 뉴미디어의 혁신, 향후 미디어의 지향점 등을 어떻게 책에 담아낼지 본격적으로 고민을 했죠. 그러다 보니 저의 25년 사회생활을 종합한 책이 나온 셈이에요.  

2017년 뉴미디어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합류했을 때에도 이러한 고민을 안고 계셨던데요. 

지금까지 없던 방식으로 국민과 소통하고 싶다는 이야기로 제안을 받았어요. 다르게 하고 싶다고 하는데,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미디어 환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도 알고 있고, 토론도 많이 했는데 그렇다면 실전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죠. 직접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떠든들 뭐하겠어요.(웃음) 그래서 간 거고요. 당시 윤영찬 국민소통수석께서 “양 날개 소통을 할 것”이라고 하셨거든요. 한쪽에서 언론과의 소통을 한다면 그 외에 국민과 직접 하는 소통도 할 것이라고요. 그래서 ‘홍보수석’에서 ‘국민소통수석’으로, 조직 이름도 바꾸었다는 거였죠. 사실 정부도 블로그, SNS 등 열심히 많이 했어요. 그러나 거기 댓글이 달린다고 쌍방향 소통은 아니죠. 그것 역시 한때는 아주 힙한 것이었지만 그런 시절이 지나가면서 다른 방식의 소통을 고민한 거였어요. 

“이제 검색이 아니라 공유가 관건인 시대”(191쪽)라고 한 말이 떠오르네요. 

포털에 있을 때, 어떻게 하면 검색에서 노출이 많이 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검색 최적화 업체도 많았고요.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갔어요. 이제는 검색보다는 공유예요. 소셜미디어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어떻게 공유되느냐를 봐야죠. ‘있어빌리티’라고 하죠? 공유가 되려면 정보가 있거나 감동이 있거나 그도 아니면 웃기는 것 중 하나는 해야 해요. 그런데 제일 공유가 안 되는 게 정부 콘텐츠잖아요. 그 어려운 걸 도전해야 했던 거죠.(웃음) 

게다가 사람들에게는 들여다 봐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요. 

이제는 기존 언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보도들을 국민들이 안 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요. 또 공론장을 고민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유권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가 전달되고, 유권자가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부든 기업이든, 누구든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해야 하죠. 그런데 사람들이 예전처럼 모여있질 않아요. 매스커뮤니케이션이 끝났으니까요. 이제는 마이크로, 조각조각 흩어져있죠. 연령대 별, 젠더 별, 직업 별, 취향 별로 모두 나뉘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대 테러 이슈처럼 60대가 좋아할 뉴스는 <FOX TV>에서 인터뷰를 하고, 20대가 좋아할 뉴스는 우리로 치자면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서 설명을 했거든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든 해보기로 했던 거예요. 



공론장으로써의 국민청원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실에 가서 한 첫 프로젝트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국민청원을 만들었고요. 가장 혁신적인 부분은 인증을 간편하게 한 거라고 생각해요. 

청원을 만들 때 가장 걱정했던 건 사람들이 올까, 하는 것이었어요. 카카오나 네이버도 망한 서비스 엄청 많아요. 수천만 명이 이용하는 곳에서도 안 되는 서비스가 있으니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건 아주 큰 도전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청와대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올까 고민이 많았죠. 세월호 때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을 한 적이 있잖아요. 저도 참여를 했었고, 6백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는데 정부에서는 답이 없었어요. 그 기억이 있어서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게 청원에서 아주 중요했어요. 더구나 인증은 정부 사이트를 안 들어가는 가장 큰 이유잖아요. 인터넷 기업에서는 UX(이용자 경험, User Experience)가 엄청 중요해요. 저는 정부 홈페이지도 UX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올렸으니 너는 보아라, 가 아니라 ‘너무 좋은데?’ 라는 경험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청원을 했을 때 효능감이 있었으면 했다고도 했죠. 

청원을 하는 행위는 공감과 지지, 응원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마치 팬덤처럼 말이죠.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서명을 할 때는 이 행위가 조금이라도 여론을 만들고, 관심을 받게 해서 뭐라도 되면 좋겠다는 마음인 거잖아요. 서명을 하건 말건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면 하고 싶지 않겠죠. 그러면 청원을 했을 때 정부가 답을 해야 하는데 이 답이 되게 괜찮아야 해요. 기존에 있던 정부나 기업의 공식적 답변은 아주 정제되어 있잖아요. 그런 걸 들으려고 청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관, 수석이나 비서관이 직접 답을 하도록 한 거예요. 청원을 다 들어줄 순 없지만 설령 안 된다 하더라도 왜 안 되는지에 대해 이분들이 답을 하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방식도 서면 답변이 아니라 영상으로 답하도록 했죠. 



책에서 20만 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에 대해 누가 답할지 검토하고, 어떤 답을 내놓을지 여러 유관 부서가 협의하는 과정도 자세히 보여줬는데요. 그 하나 하나가 쉽지 않은 과정이더라고요. 

대개 해결이 왜 안 되느냐고 하지만요. 해결이 잘 되는 문제는 사실 많지 않아요. 다만 그 문제를 정부가 인지하고, 책임 있는 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입장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답을 못할 청원은 없는 거죠. 안 되면 안 된다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말씀을 드렸으니까요. 사실은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어요. 되는 게 없으면 왜 청원을 하느냐, 청원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 얘기를 하는데요. 온라인의 거의 모든 것은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해요. 오프라인에 있는 갈등과 분열이 청원에 나타난 것뿐이죠. 청원이 문제를 조장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청원을 계기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청와대뿐 아니라 미디어, 국민도 같이 해보면 어떨까 생각도 했고요. 공론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너무나 중요하잖아요. 더 좋은 공론장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곳이 역할을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장 바뀌는 것은 없다 해도 끝내 바뀌는 데 도움이 되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법을 바꾸고, 제도를 개선하는 노력에 국민이 직접,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효능감을 준다고 믿는다.(중략) 청원해봐야 별 소용 없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요구에 맞춰 뭔가 해볼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드는 게 정부의 피드백이라면, 그걸 활용하는 건 또다시 국민의 피드백이다. 이게 소통이다.(298쪽)

청원 내용을 분석해보니 여성, 인권, 동물 등의 키워드가 많이 등장했다고 했어요. 말하자면 이것이 한국 사회의 현재를 반영하는 키워드이기도 할 거예요. 

미디어는 그렇지 않지만 청원을 보면 국민들은 같은 문제도 지치지 않고 계속 제기하거든요. 빅데이터를 돌려보니 인권, 성평등 이슈가 너무 많아요. 그렇다면 그 문제를 잘 생각해봐야죠. 책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말을 계속 쓰고 있어요. 한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환경운동 하는 그레타 툰베리가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 for Future)’을 하는데요. 거기 참여해 등교 거부를 하는 학생이 수십만이잖아요. 이제 밀레니얼 소비자들은 그런 것에 관심 없는 기업들을 좋아하지 않는 거죠. 나이키 등이 광고에서 젠더 감수성을 많이 보여주고 있고요. 감각이 좋은 기업들은 이미 다 하고 있어요. 저희가 정부 콘텐츠에 대해서도 피드백을 몇 번 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실은 정부도 빨리 학습해요.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변화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느리지만 분명하게 있는 걸 발견할 때가 종종 있어요. 

변화하고는 있는데 변화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속도가 너무 느린 거죠. 저도 연사가 남자로만 구성되어 있는 포럼을 보면 별로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아직도 그런 경우가 아주 많지만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요. 정보 공급자 입장에서 이 부분을 많이 생각해야 하는 거죠. 내가 알려주는 정보가 중요하니까 보라는 식이 되어선 안 되고, 정보 소비자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조금 더 고민하면 풀리는 문제이기는 하니까요. 실패 사례가 엄청 많잖아요. 그런 것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된다고 봐요. 

그밖에 청와대 시절 잘했다고 평가할 만한 것이 있다면 뭘까요? 

인스타그램 사례를 종종 얘기해요. 반응도 좋고, 피드백도 좋았는데요. 그 이유는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에서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웃음) 기업도 마찬가지고요. 고위 임원들이 인스타그램을 잘 하지 않아요. 그런데 국민들이 인스타그램으로 가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곳으로 가야죠. 저는 인스타그램 운영 업무를 20대 직원에게 맡긴 후 “허락 받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놀아”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담당자가 정말로 놀아서요. 어떤 게시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사님 뚠뚠”밖에 없는 거예요.(웃음) 그렇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잘한다고만 했죠. 이 에피소드가 어떤 의미가 있느냐면요. 세상은 바뀌었고, 대중은 저기에 있는데 우리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아직 잘 모르니까 제발 알아주세요, 라는 거예요. 뭔가를 바꾸려면 위에서도 알아주셔야죠. 



팩트에 대한 요구

언론이 신뢰도의 위기에 부딪혔다고 했잖아요. 이에 팩트체크 저널리즘을 올드미디어의 새로운 생존전략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요. 

모두가 할 수 있는 건 아닌데요. 잘하는 곳이 있어요. ‘사실은 이렇습니다’라는 정부의 팩트체크가 있거든요. 바이럴이 돼요. 사람들이 공유를 하는 거예요. 팩트에 대한 요구가 있는 거죠. 제대로 된 팩트에 대한 대중의 갈증과 요구가 있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돌파구를 찾는 전략으로 이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미디어를 안 보고, 뉴스를 안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밀레니얼도 자신들에게 맞는 뉴스가 있으면 봐요. 세대마다 사정은 달라도 이렇게 정보가 많고,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때 믿고 볼 수 있는 데가 있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이때 기자의 브랜드를 키운다면 신뢰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했죠. 

매체 브랜드도, 기자 브랜드도 중요해요. 신뢰를 되찾는 것이 지금은 우선일 것 같거든요. 언론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으니까요.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가 매년 40개 나라의 언론 신뢰도를 발표하는데 올해 발표 자료를 봐도 또 꼴찌예요. 그러니까 신뢰를 되찾는 것을 기회로 봐야 해요.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으로 갈 때 고민을 많이 했잖아요. 그럼에도 가겠다고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어요? 

딸과의 토론이 기억에 남아요. 한국 사회의 누구나 비슷할 텐데 세월호 사고 이후에는 아이들 세대를 위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잖아요. 그런 상황이니까 제가 딸에게 청와대에서 일하는 것이 딸 세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택할 수 있는 괜찮은 선택 같다고 말을 했어요. 그런데 딸이 “청와대에 가서 일하는 것과 나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 왜 연결되는 일이야?”라고 되묻더라고요. 거기에 답을 한 것이 촛불을 거쳐 탄생한 지금의 정부가 잘 되는 것이 그래도 이 사회가 더 나은 미래로 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결심을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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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삭 “대중이 원하는 것과 내 지향 중간점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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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삭은 꾸준히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넘고자 한다. 어쿠스틱 기타 한 대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신인 시절, 긴 무명의 끝에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자 한 '하나님의 세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를 거쳐 영화 음악까지 계속해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갈팡질팡하며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겉으로 그렇게 볼까 봐 나름 걱정이지만 저는 확실히 제 길을 찾아가고 있어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깊이와 폭을 넓혀가고 싶습니다.”인터뷰 내내 홍이삭은 '새로움'과 '발전', 그리고 '과정'과 같은 어휘를 반복적으로 동원했다.

“음악 하는 사람으로 자리를 잡은 지금을 어떻게 다져 놓아야 계속해서 더 좋은 음악을 오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많은 갈등과 다짐이 교차했지만 그의 시선은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으로 인해 모두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홍이삭은 어떤가.

<슈퍼밴드> 출연 이후 쉬지 않고 계속 달려왔어요. 영화 <다시 만난 날들>(가제) 주연을 맡아 촬영도 했고, 음악 감독을 겸하는지라 작업도 했고요.  <놓치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 미니 앨범도 발표했죠. 물론 계획했던 많은 것들이 취소되어 슬프기도 하지만, 영화 후반 작업을 하며 재충전 및 돌아보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만난 날들>의 개봉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

영화제를 통해 먼저 공개할 것 같아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개막작 혹은 폐막작, 혹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코로나19 여파로 영화제 역시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추세라… 걱정이네요.

영화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쓴 심찬양 감독님이 학교 선배에요. 2017년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어둔 밤>이라는 작품으로 최고상인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을 수상했죠. 그 후 감독님께서 제 음악을 소재로 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는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생겨 제작까지 들어가게 됐어요. 원래는 음악 감독으로 참여하는 거였는데, 촬영하는 도중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결국 제게 주연 제의가 왔어요. 연기 경험 없는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 상까지 받은 <어둔 밤>을 보고 저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사운드트랙을 어떤 음악으로 채웠나.

저의 20대 초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어요. 기타치고 노래하던, 지금보다 훨씬 날 것이던 시절의 음악이죠. 그렇다고 감독님께서 아마추어 느낌을 바라진 않으셨어요. 어떻게 보면 그 때 음악들이 어쿠스틱 기반이긴 해도 꽤 매니악했는데, 그 음악의 선이 영화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음악의 방법이기는 하나 '날 것이던 시절'을 담아내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듯 하다.

그 지점이 힘들었어요. 습작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항상 발전하고 싶고 지금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벗어나고 싶은, 잊고 싶은 모습의 저를 영화 음악에 담아야 했죠.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어린 시절의 저를 데려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홍이삭이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 현재 새로 추구하는 음악은 어떤 형태인가.

제가 부르기 편한 노래, 잘 부를 수 있고 표현도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은 게 요즘 마음이에요. 대중이 제게 원하는 것과 제가 지향하는 것의 중간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랄까요. 우선은 기타를 내려놓고자 합니다.

기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의외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깊이와 폭을 넓히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해요. 기본적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자세를 벗어나고 싶어요. 곡 작업할 때도 피아노와 기타 비율을 반반으로 가져가고 있거든요.

기타 작업과 피아노 작업의 차이가 있나.

정서가 다르죠. 편하게 칠 수 있는 건 기타예요. 그러다 보니 말을 하면서 곡을 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나의 이야기, 나의 정서가 더 많이 담기는 것 같아요. 피아노로 곡을 만드는 건 일종의 '조각' 같아요. 정서를 만들어두고 그 과정에 닿기 위해 하나하나 소리를 조각하고 합쳐가는 과정이랄까요. 기타는 주관적이고, 피아노는 더 많이 계산해야 해요. 발성도 다르고요.

실제로 홍이삭은 버클리 음대 음악교육과에서 음악을 배웠다. 대위, 화성 등을 활용해 더 다양한 장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지르는 음악, 록 음악보다 R&B, 블랙 뮤직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과거 뮤지션 중에는 레이 찰스(Ray Charles), 현재 뮤지션 중에는 갈란트(Gallant)를 생각하고 있고요. 학교에서 기초적인 지식을 배우기도 했지만 지금도 꾸준히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이제서야 마이크를 잘 쓰는 방법을 알게 된 거 같아요.

그렇다면 <슈퍼밴드>에서의 모습은 일탈에 가까웠던 것 아닌가.

<슈퍼밴드>는 가만히 있어도 저를 털어낼 수 있었던 프로그램이었죠.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 자신의 한계를 좀 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 '너와 함께'라는 곡을 가장 좋아해요. 2라운드 3라운드와 달리 4라운드를 준비하는 동안 시규어 로스(Sigur Ros)의 음악을 들어보며 표현과 방향을 이 쪽으로 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렇게 제 자신을 다<슈퍼밴드> 이후 오히려 기타를 더 배제하게 된 것 같아요. 피아노를 더 많이 치고 있죠.

인천 출신이다. 인천에 대한 기억은.

저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현재 제물포 쪽에 살고 있어요. 사실 완벽한 인천 사람은 아니죠. 인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부산에서도 살았고, 포항에서도 살았고, 아버지께서 전근을 가셔서 파푸아뉴기니에도 잠깐 살았으니까요. 그래도 매 년 방학 때마다 항상 인천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인천에 대한 자부심은.

일단 재난 지원금이 아직 안 나왔고요(웃음). 농담이고. 인천이라는 도시를 속속 찾아다닌 건 굉장히 최근의 일이에요. 동인천의 헌책방거리, 차이나타운, 근대화거리 등을 다녀보면 낮은 건물들, 그리고 예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줘요.

솔직히 좋은 데가 많다.

인간미를 느껴요. 정제된 느낌은 아닐 테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잘 모르는 좋은 곳들도 많이 있어요. 언젠가는 음악의 소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평소에 서울을 너무 자주 오고가고 인천은 잠깐만 머무는 곳이라 그 점이 조금은 스트레스기도 합니다.

2013년 제2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봄아'로 동상을 수상했지만 홍이삭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것은 2015년 발매한 싱글 '하나님의 세계'다. 버클리 음대를 휴학하고 뜻하지 않은 부정교합수술을 앞둔 상황에서 써내려간 곡이다. 이 곡으로 그는 엠넷 예능 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에 출연 제의를 받게 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홍이삭을 CCM 가수로 인식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엇나가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었던 시절'이라 정의하며 음악에 대한 현재진행형 고민을 털어놓았다.



스트리밍 서비스, 인터넷 검색 시 홍이삭에게는 <슈퍼밴드>와 '하나님의 세계', 그리고 최근 발표한 '네가 없는 하루'가 제일 먼저 뜬다.

'하나님의 세계'는 제가 기독교 환경에서 오래 자라서 나온 곡이에요. 부정적인 의미는 전혀 없고요. 제 삶, 삶의 방식, 생각하는 방향, 가치를 두는 부분, 사람을 대하는 태도 모두가 기독교의 환경에 속해 있었던 거죠. 그렇게 살아오다 부정교합 때문에 수술을 하게 됐는데 그 당시 굉장히 힘들었어요. 부모님과 주변인들이 제게 미안해하는 모습도 좋지 않았고, 다시는 노래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죠. 그 때 스물다섯까지 살아온 저의 철학과 삶의 방향, 생각의 과정을 정리하고자 만든 곡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요.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 철학과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죠.

기독교적 환경이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을 텐데.

물론이죠. 저는 저 자신을 '학습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선 부모님께서 초등학교 선생님이세요. 그리고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성가대도 하면서 교회 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주위 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올바르게 잘 자라고 싶었고 잘 배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 사람들이 저를 올바르게 봐주시지만 반대로 저는 엇나가지 못하는 게 답답하기도 해요. 음악을 하게 된 것도 제게는 '분출'의 의미가 있었어요. 올바른 이미지, 학습의 과정을 벗어나고 싶어서 다양한 시도를 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가장 최근 발표한 '네가 없는 하루'는 어떤 마음으로 만든 곡인가.

앞서 제가 말씀드린 저의 환경을 벗어나 또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만들었어요. 작곡가 입장에서는 '나도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노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할까'를 강조하고자 했죠. 이전에는 노래할 때 중심을 항상 제게 뒀어요. 하지만 '네가 없는 하루'에서는 듣는 분들을 더 많이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더 잘 들어주실 수 있을까?'를요. 분기점이 된 곡입니다.

거듭 자신이 속한 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티스트적 고민이 가득 차 보인다.

이런 고민을 제가 20대 후반부터 해왔어요. '하나님의 세계' 이후 많은 CCM 쪽 관계자 분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신앙의 영역으로는 훌륭하나 음악의 방향으로는 저와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과거가 싫은 건 아니에요. 다만 다음을 바라보고 고민하는 과정인 거죠. 영화음악도, '네가 없는 하루'도요. '하나님의 세계'가 진정한 저를 들려주겠다는 마음이었다면, '네가 없는 하루'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분들께 닿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 곡이에요. 사람들이 보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선을 찾고자 했죠.

지난해 12월 홍이삭은 두 번째인 EP <놓치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발표했다. 2008년부터 작곡해온 곡들을 모은 앨범은 어쿠스틱 위주의 소박한 편성인 돋보인다. 듣는 순간 즉각 자신의 음악세계를 천천히 들려주고자 하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홍이삭은 앨범에 대해 “내가 왜 이 곡을 내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틀을 깨지 못한 답답함을 토로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로했던 과정을 담아 갈무리하는 의미가 있었죠.”라고 설명했다. 셀프 힐링 앨범? 하지만 동시에 '과거보다 현실이고 싶은 마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홍이삭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의 세계' 때까지는 저를 담는 일기였고요, 지금은 조각해야 할 대상이라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앨범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아직 정규 앨범에 대한 구상은 하지 못하고 있어요. 앞서 말한 그 조각품이 적어도 서너 개는 나와야 전체적인 틀이 잡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 아이콘, 혹은 롤 모델이 있나.

보통 저 같은 친구들에게는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가 우상이죠. 저는 나름의 깊이도 있고 쉽게 쓰는 아티스트를 추구하는데 사실 그렇게 다차원적인 분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존 메이어(John Mayer)는 그런 점에서 스펙트럼이 넓은 가수죠. <Contiuum> 앨범을 듣고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웃음).

음악을 만드는 원동력이 뭔지 궁금하다.

노래마다 각기 다른 것 같아요. '네가 없는 하루'는 보다 많은 분들께 노래를 들려드리고자 했죠. 반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의 '소년', '별 같아서' 등의 곡은 분명 대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제 기준에서는 좋은 곡이거든요. 제가 아티스트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저를 표현하고 좋은 음악을 할까'의 원동력과,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잘 살아가고 어울릴까'의 원동력은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이 모호한 색이 나오는 거죠. 계속해서 음악을 만들게 되는 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요. 어떻게 하면 가장 나답고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 중이에요.



홍이삭 - 놓치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 [EP]
홍이삭 - 놓치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 [EP]
홍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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