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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청소부 김완 “죽음이 왔다 간 자리, 사연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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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인터뷰를 예상했다. 마치 우리가 죽음을 무겁고 엄숙하게 대하듯이. 그러나 일상적으로 죽음의 흔적을 청소하는 ‘특수청소부’ 김완 작가는 어두운 곳에 묻어둘 수만은 없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죽은 자의 유품을 처리하고 쓰레기 집을 깨끗이 비워내면서 그는 판단을 유보하게 되었다고 했다. 산 자인 우리는 ‘좋고 나쁨’을 덧씌우지만, 죽음의 자리에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사정들이 남겨져 있다고. “특이한 직업인데, 힘들지 않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김완 작가에게 전해진 수많은 감사의 메시지들에서 이미 일하는 보람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김완 작가는 죽음의 흔적을 청소하는 특수청소부다. 대학에서는 시를 전공했고, 출판과 트렌드 산업 분야에서 일하다 전업 작가로 살고자 30대 후반에 산골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에 머물며 취재와 집필을 하다 동일본대지진 후 귀국하여 특수청소 서비스회사 ‘하드웍스’를 설립하여 일하고 있다. 에세이집 『죽은 자의 집 청소』를 통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죽음 현장에 드러난 인간의 삶과 존재를 기록했다.



죽음의 자리를 청소하며

일상에서 마주치는 ‘죽음’의 이야기를 쓰셨어요. 어떻게 기록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개인적인 동기로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블로그에 일이 끝난 후의 소회를 남기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홍보 차원이었거든요.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서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죠. 요청이 없었다면, 글로 남길 생각을 안 했을 거고요.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됐다는 독자평이 많았어요.

감사하게도 독자분들의 피드백을 많이 받았어요. 다양한 사연을 읽고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한 독자분은 사회복지사인데 제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어서, 자살 위험이 있는 환자를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됐다고 해요. 어떤 분들에게는 제가 ‘불행의 끝판왕’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나 봐요. 힘든 일을 하는 사람도 이렇게 책을 내는 걸 보니 희망을 갖고 살아야겠다 하시는 분도 있고요. 독자분들이 메시지를 보내면, 저는 2배 길이로 답장합니다. (웃음) 그렇게 소통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특수청소는 주로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범죄나 자살 현장 등을 맞닥뜨리기도 하는데요.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청소 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유품을 수습하는 일이나 쓰레기가 가득한 집처럼 점점 하기 곤란한 청소까지 의뢰가 들어왔죠. 자연스럽게 특수청소 일까지 하다 보니,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시를 전공하고, 출판, 트렌드 산업 분야에서 일하셨다고요.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출판 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어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보다는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죠. 한동안 유령 작가로 활동하며 자기계발서, 정치인에 대한 책, 음악 리뷰 등 장르 구분 없이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오랫동안 방치된 집이지요. 청소 과정에서 예측 못 하는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 방진 마스크, 방독 마스크를 둘 다 가지고 들어가요. 특히 가스가 정말 위험하죠. 냉장고가 고장 나서 내부 음식물이 부패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문을 억지로 열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스가 터져 나오는데 그걸 마시면 순간 어지러워져요. 그래서 냉장고를 열기 전에 방독 마스크를 꼭 착용합니다. 



문장의 밀도가 높았어요. 문학적이기도 하고요. 

시 쓸 때의 습관이 남아서, 글을 굉장히 많이 고치는 스타일이에요. 문장 하나를 여러 번 수정하기도 하고 문단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요. 글 하나를 끝날 때쯤이면 이미 수백 번은 읽어본 상태가 돼요. 굉장히 수고스러운 작업이지만, 습관이 돼서 힘들지는 않아요. 달리기에 ‘러너스 하이’가 있듯이,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거든요. 적절한 표현을 발견했을 때는 마치 손전등을 켠 것처럼 선명해지는 기분을 느껴요. 편집 과정에서 같이 글을 수정하는 과정도 즐겁고요. 제가 편집자님을 ‘그저 빛’이라 부릅니다. (웃음)

마지막까지 고민한 원고가 있었나요?

고양이의 죽음을 다룬 ‘천국과 지옥의 문’은 끝까지 망설인 글이에요. 한 아파트에서 일곱 마리의 죽은 고양이를 치우게 되는 일화인데요. 그 사건이 제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어서 도저히 못 쓰겠더라고요. 저는 고양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산 지 10년이 넘어서 더 마음 아프게 느껴지거든요. 그렇게 묻어뒀다가 마감할 때쯤 편집자님이 그때 쓰지 못한 원고도 세상에 내보이면 어떻겠냐고 물으셨어요. 그 말에 다시 용기를 내서 완성하게 됐죠.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상기할 수 있는 독자들을 우려하기도 했나요?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에필로그에 죽음에 대한 면밀한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괴로울 수 있다는 경고를 남기기도 했죠. 제 원래 의도는 죽음에 대한 기록을 통해, 우리의 삶이 좀 더 가치 있고 굳세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을 분들에게는 다시 한번 면목이 없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비워낸 자리에 사연들이 모였다

위급 상황에 처한 사람으로부터 청소를 의뢰하는 전화가 오면서 일이 시작되지요. 적절히 응대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되도록 쓸데없는 이야기는 안 하려고 해요.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가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요. 전화 내용으로 의뢰자와 고인의 관계를 유추해보고 적절한 대답을 생각하죠. 사실 여부를 엄격하게 판단하기보다 상대의 ‘심정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해요. 쓰레기 집 방치 현장도 보통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말하거든요. 물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그렇게 전하고 싶다면 그것도 진실이니까요.

일을 하면서 가장 동요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무리 감정을 차단하려 해도 돌아가신 분에게 이입되는 순간이 있죠. 특히 개인적인 취향이 저랑 비슷할 때 동요하게 돼요. 서가를 정리하는데, 저도 좋아하는 책이 꽂혀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마음속 버튼이 하나씩 눌리다 결국 열려 버리죠. 

쓰레기로 가득 찬 집도 청소하신다고요.

네, 상상 이상으로 많아요. ‘내가 청소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 이렇게 많이 나타나나?’ 할 정도로요. (웃음) 한 건물에 한 집 정도는 잡동사니로 가득 찬 집이 있을 거예요. 수많은 쓰레기 집을 봤지만, 아직도 매번 새롭게 놀랍니다. 그렇지만 섣불리 심판하지 않으려고 애쓰죠.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누구나 어질러진 서랍 하나쯤은 있지 않나요? 무질서한 상태가 집으로 확장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있나 싶어요. 알고 보면, 더럽다는 판단도 자의적이죠. 실제로 라면 봉지 하나라도 주인이 버리지 않기를 원하면, 쓰레기가 아니라 재산이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어떻게 이렇게 사나 했지만, 계속 청소 일을 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청소 일에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작업이 끝난 후, 깨끗해진 방을 볼 때 해방감이 느껴져요. 현장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가벼워질 때도 있고요. 의외로 많은 분들이 감사 메시지를 보내와요. 개인적인 사연을 털어놓기도 하고, 청소 이후 새 삶을 살고 있다고 정기적으로 소식을 전해오시기도 하고요.



가벼운 죽음 이야기를 쓰고 싶다

특수청소 종사자에 대한 편견을 체감하시나요?

보통 반응이 차별과 우대 양쪽으로 갈려요. 대단한 일을 한다는 사람도 있고, 천한 직업이라고 낮추어 보는 반응도 있죠. 작업 현장에 가면, 음료수를 전해주시는 분도 있고 면전에서 손사래를 치는 분도 있어요. 작은 마을은 소문이 빠르게 퍼지니까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하고요. 어떤 종류의 반응이든 싫지는 않습니다. 죽음에 얽힌 일이니 그런 반응이 이해도 되고, 어쩌면 알기 쉬운 표현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고독사 현장에 대한 인터뷰를 많이 하셨죠. 자살이나 고독사에 대한 언론 보도를 어떻게 보시나요?

양가적인 감정이 들죠. 언론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조명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흥행성을 좇은 보도도 많으니까요. 특히 명절 앞두고 인터뷰 제의가 많이 와요. 송파 세 모녀 사건처럼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추가 취재로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보도들이 단발성으로만 그치고, 한 달이 넘는 심층 취재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일본의 경우, 무연고 사망자에 대해서 오랜 시간을 들여서 취재한 시도가 있었어요. 『무연사회』라는 제목으로 방송과 책으로 만들어져 큰 화제가 됐고요. 우리 사회에서도 고독사가 심각한 문제인 만큼, 언론에서도 시간과 인력을 투자해서 진득하게 취재했으면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나요?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그러기엔 죽음에 대한 콘텐츠나 교육이 아직 부족하죠. 부모도 죽음에 대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잘 알려줄 수도 없고요.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들을 밀어붙이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망각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죽음을 잘 알아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거든요. 삶과 맞대고 있는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면, 삶도 더 뚜렷해지고요. 그건 제가 현장에서 자주 겪는 경험이기도 해요.

계속 죽음에 대한 글을 쓰실 계획인가요?

현재로서는 한 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책도 읽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썼는데, 스스로 아직 죽음에 대한 무게를 덜어내지 못해서 다소 진중한 어조가 됐거든요. 다만, 죽음을 좀 더 가볍게 다뤄 보고 싶기는 해요. 사노 요코의 에세이 『죽는 게 뭐라고』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일을 안 하게 되어 즐겁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거든요. 이런 관점도 있을 수 있구나 대단하다고 느꼈죠. 그렇게 죽음을 다루지만 ‘웃픈’ 농담 같은 책을 써 보고 싶어요.



죽은 자의 집 청소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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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현 “아이 성적 올리려면? 관계 회복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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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공부가 머니?>에서 날카로운 솔루션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최성현 저자가 첫 책 『아이와 나는 한 팀이었다』를 썼다. 진로 입시 상담소 ‘에듀맘 멘토링’ 대표로 일하는 최성현은 자녀를 5개 명문대에 동시 합격시키며 학부모들로부터 자녀교육, 진로 등의 질문을 꾸준히 받고 있다. ‘최소한의 사교육, 최대한의 집교육’을 실천한 최성현 저자는 “휘둘리지 않는 부모가 흔들리지 않는 아이를 만든다”고 말한다. 『아이와 나는 한 팀이었다』에는 각 연령별로 아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핵심 코칭 노하우부터 아이에게 최적화된 학습 로드맵을 찾는 법을 공개했다. 

최성현 저자가 학습, 진로 컨설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와의 관계 회복’이다. 순조로운 소통은 건강하고 공평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이 관계가 만들어져야 아이에게 맞는 미래를 그릴 수 있기 때문. “가장 나쁜 교육은 아이에게 맞지 않는 교육”이라고 단언하는 최성현 저자를 만났다.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이 먼저

프롤로그 제목이 “나란히 가야 멀리 갈 수 있습니다”다. 성적 향상을 만들기 전에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랜 기간 진로 상담을 하다 보니,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어긋난 채로 오는 경우를 많이 봤다. 어릴 때는 순하게 말을 잘 듣던 아이가 변했다고 고민하는 부모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관계 회복보다 공부, 성적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의 성향과 수준을 정확히 모른 채 정형화된 교육에 아이를 맞추면 아이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아이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줘야, 비로소 진짜 성장이 가능하다. 

첫째 아이를 가르치다가 진로 상담을 하게 됐다. 계기가 있었나? 

직장 생활 하다가 그만두고 집에서 두 아이를 돌보게 됐다. 첫째 아이가 말이 없고 발달이 느린 것 같아서 6살이 돼서야 유치원에 보냈는데, 어느 날 아이의 유치원 친구 엄마가 “유아영재교육기관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그러다 아이의 특성을 파악하게 됐고 집에서 수학을 직접 가르쳤는데, 대회에 나가서 상을 많이 받았다. 아이가 영재원을 다니면서부터 “아이의 선생님이 도대체 누구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고,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났다. 대학교 영재연구소를 가면 학부모를 대상으로 많은 교육을 실시하는데, 그때 많이 배웠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지금도 내성적이다. 숨어 있는 것도 좋아하고. 일단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에너지가 없어진다. 내 직업에 있어서도 마이너스이고. 극도로 조심하는 편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에디터 일을 했다. 말하는 것보다 글 쓰는 일이 더 적성에 맞았는데,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논리적인 글쓰기가 습관이 됐다. 상업적 글쓰기로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기소개서를 봐줄 때 조금 편했던 것 같다. 학생부 자료를 볼 때, ‘교사들이 어떤 의미에서 이런 평가를 했는지’에 관해 판단이 쉬운 건 독서 덕분이다. 

MBC <공부가 머니?>에서 “아이와 관계가 좋다”고 자신했다. 아이의 교육에 열성인 부모의 경우, 아이와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부모라면, 아이에게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공부를 잘할 수 있게 지원하는 동시에 아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준다. 아이와 함께 가지만 늘 템포를 너무 빠르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을까 싶다. 

세심하면서도 대담하게 아이를 키운 듯하다. 아이의 재능을 찾아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는 무엇인가?

내 아이를 냉정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학원에서는 아이가 대단한 재능을 보이지 않아도 뛰어나다고, 재능이 있다고 칭찬한다. 그런 격려에 고무된 엄마는 착각에 빠져 학원에 시간과 돈을 바친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는 엄마의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다. 엄마의 눈이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어떤 기질을 타고났는지, 일상 속에서 어떤 점이 뛰어나고 또 어떤 일에 어려움을 겪는지, 사회적 관계는 어떻게 맺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눈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때 단 몇 번이라도 다른 엄마들과 대화를 맞추고 아이를 지켜봐라. 미끄럼틀 계단을 오를 때 한 칸씩 올라가는지,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무시하는지, 조심성이 조금도 없는지. 그런 행동들을 꾸준히 살펴보면 아이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관찰을 토대로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고, 아이에게 맞는 공부법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경우, 선생님의 평가를 흘려 듣지 말라고 조언했다.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아이에 대해 원하는 평가를 듣지 못했다고 무시하거나 흘려 듣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좋지 않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 집에서 엄마가 보는 아이와 학교에서 선생님이 보는 아이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습 또한 우리 아이의 모습이다. 선생님은 해마다 30명 이상의 아이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데이터가 풍부하다. 선생님의 전문가적 시각과 노하우, 조언을 잘 듣는 것이 좋다. 

‘에듀맘 멘토링’ 대표로 일하고 있다. 주로 상담을 오는 연령은 중,고등학생인가?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다. 어린아이의 경우 부모님들이 상담을 하러 온다. 그래서 내가 늘 부모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중학생 이상이 되면 사춘기를 겪기 때문에 아이랑 대화를 해야 한다. 부모님들이 아이를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자기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건 아이 자신이다. 중학생, 고등학생의 경우 직접 상담을 한다. 지금 나도 아동 심리, 상담 심리를 공부하고 있는데 결국 모든 상담의 중심은 내담자에게 있다. 인간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어떤 좋은 처방도 필요가 없다. 특히 자존감이 떨어져서 상담을 오는 경우에는 심리적인 측면이 더욱 중요하다. 



양육에 자신이 있는 부모들은 은근하다

사교육 대신 엄마표 교육을 지향하는 부모들도 많다.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까?

우선 ‘엄마표 교육’은 공부가 아니다. ‘엄마표 교육’은 아이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더 주요한 목적이다. 즉, 내 아이를 알 수 있는 기회로 봐야 한다. 아이랑 하루 종일 붙어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표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엄마가 가장 잘하는 것을 골라서 아이와 함께 하는 일이다. 왜냐면 이 시간을 놓치면 내 아이랑 가까워질 시간이 없다. ‘엄마표 교육’의 의미를 공부, 학습에 두지 않으면 좋겠다. 요리를 잘하면 요리를 같이 하고, 그림을 잘 그리면 그림을 같이 그리면 된다. 아이가 향후 엄마를 떠올릴 때, “우리 엄마는 이걸 참 잘했어”라고 말할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거다. 

학업 정보에 뒤쳐져 있다는 공포를 갖는 부모들도 많다. 

부모의 심장이 쪼인 만큼 아이는 성장한다. 내가 아이를 멀리 두고 좋은 모습만 보고 싶다면, 아이는 성장할 수 없다. 아이의 아픈 모습도 보고, 그 아픔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 부모로 성장하는 것이지, 아이가 매번 똑똑하고 1등을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나는 성장한 것 같다. 내가 잘했나? 잘 대처했나? 도움을 주었나? 생각하면서. 

상담을 하면서, 자녀교육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특징이 있다면.

아이를 강하게 휘두르지 않는 부모다. 양육에 자신이 있는 부모들은 은근하다. 절대 강하게 나가지 않는다.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살짝 유도하지, 억지로 손잡고 끌고 가지 않는다. 고수 부모들은 아이와의 줄다리기도 곧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즐긴다. 물론 그 순간순간은 무척 힘들지만.

아이에게 칭찬을 잘하는 노하우가 있을까? 

벼락치기를 해서 좋은 점수를 맞은 것과 매일매일 노력해서 좋은 점수를 맞았을 때의 칭찬을 다르게 해야 한다.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운이 좋아 좋은 점수를 받았을 때는 “시험 시간에 집중을 잘했구나”라는 칭찬으로 끝내야 한다. 왜냐면 이건 아이의 능력치가 좋은 점수를 받아온 거지, 아이의 노력치가 얻어낸 성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들도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과정보다 결과로 항상 칭찬을 받은 아이는 향후에 공부 과정을 즐기기 힘들다. 과정에 맞물려 있을 때, 비로서 100%의 칭찬을 아이에게 해줘야 한다. 결과만 두고 칭찬을 하면 위험하다. “결과도 안 좋은데, 내가 한 노력이 무슨 상관이야?”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는 노력하지 않을 수 있다. 

책 뒷부분에 ‘독서’ 관련 부모들의 질문을 정리해놓았다. 부모들의 ‘독서 교육’ 고민이 굉장히 많은데. 

독서를 막무가내로 싫어하는 아이들의 경우, 그래도 조금이라도 흥미를 갖는 부분을 찾으면 좋다. 글밥이 많은 걸 싫어한다면 글이 짧지만 난이도가 있는 책을 꾸준히 읽히는 것도 좋다.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소통’ 때문이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고 이야기하는 것도 내 생각이 정립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어렸을 때 잘 듣고 잘 말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이전에 잘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면 짧은 글도 긴 글도 읽어봐야 한다.

6~9세의 경우, 방에서 혼자 자기가 좋아하는 책만 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했다.

독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게도 하지만, 자칫하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 위험성도 있다. 특히 6~9세 정도의 어린아이의 경우 부모가 곁에서 지도를 잘해야 한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아이를 말릴 필요는 없다. 모든 독서의 시작은 자기가 좋아하고 궁금한 걸 읽는 거다. 독서 편식이 걱정된다고 일부러 넓혀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것만 읽는 아이들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분야를 넓힌다. 이때 아이가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적절한 책을 선택하고 있는지, 잘못된 정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지를 확인하며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하다. 



전집을 구매해야 하나, 고민인 부모들도 많다. 

나는 조금 인색한 엄마였다. 아이가 흥미를 갖는 책이 있으면 우선 몇 권을 사준 다음에 추가로 사줬다. 아이의 성향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전집을 사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 과하면 아이도 흥미를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웩슬러 지능검사는 언제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

너무 어릴 때 받는 건 아이가 틀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하지 않는다. 초등학생 정도가 적당하다. 웩슬러 지능검사는 유아용, 아동용이 있는데 유아기에 지능지수가 좋았다고 해도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떨어질 수도 있다. 왜냐면 유아기에는 아이가 글씨를 모르기 때문에 선생님이 질문을 읽어준다. 부모님이 평상시 책을 자주 읽어주고 경청을 하는 아이였다면 지수는 높게 나온다. 하지만 산만하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경우는 최저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부모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웩슬러 지능검사의 경우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기 때문에 모두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필요한 건, 지능과 학습 능력을 동일시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지능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곧 뛰어난 학습 능력을 가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검사 이후의 부모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검사는 단순히 아이큐뿐 아니라 아이의 심리 상태와 부모와의 관계 등을 종합적인 관점으로 검사하는 프로그램이라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점검해볼 수 있다. 

첫째 아이가 저자에게 가장 고마워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아이가 지금 AI를 연구하고 있다. 아이가 진로를 결정할 때, 코딩 쪽에 재능이 있어 그쪽 분야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코딩에 너무 몰입하기보다는 물리학까지 해야 한다”고 조언해줬다. 물리학의 메커니즘을 모르면 깊이 있는 코딩이 아닌 단순한 기술로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항상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기본적인 질문을 밑바탕에 깔고 나서 시스템에 열중하라”는 말이었는데, 평소 이런 이야기를 해준 걸 고마워 한다. 반가워 했고. 

아이들이 엄마가 ‘교육 전문가’로 방송에 나오는 걸 봤을 텐데, 어떤 반응을 보였나?

두 아이 모두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큰 아이는 휴대폰으로 보긴 했을 건데, 자기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원하는 인생이면 노력하고, 아니면 은퇴해도 좋다”고 하더라. “50세가 넘었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면서. (웃음) 둘째 아이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정보에 둔감하다. 



젊은 부모들에게 딱 한 가지 강조를 하고 싶다면.

예의가 있으면 좋겠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정문 앞에 주차를 하고 아이를 등원 시키는 부모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타인을 배려하는 예의가 아이를 키운다는 말을 하고 싶다. 시간적인 바쁨에 예의를 놓치는 게 너무 안타깝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될 때, 너무 공격적으로 변한다. 다른 아이들과 소통하고 양보하는 일을 가르쳐야 한다. 학습은 트렌드가 계속 바뀐다. 부모 역할 역시 정답이 없다. 내 아이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보다 아이에게 비쳐지는 부모의 모습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닮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문제가 생겼을 때 타인의 상황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면 좋겠다. 아이에게 효를 바란다면, 부모가 스스로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 배려가 익숙한 아이로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최성현 저자의 초등 저학년 엄마 코칭 핵심 포인트

1. 책 읽기가 힘들면 짧은 글을 읽힐 것

책 읽기를 힘들어하는 아이들은 한 권의 책을 소화하기 어려울 수 있다. 문장을 읽고 문장으로 표현된 내용을 이해하는 종합적인 과정 자체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무작정 책을 읽으라고 들이밀면 곤란하다. 문장 단위의 짧은 텍스트부터 시작해 점진적으로 긴 글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하고 하루에 읽을 분량을 조금씩 정해놓으면 쉽게 지치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다.

2. 선행학습에 집착하지 말 것

선행학습은 예습과 수준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음 수업에 대한 준비로 적절하게 예습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다음 학기 혹은 다음 학년의 교과 과정을 미리 마스터하고 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당장의 성적은 잘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학습 능력 발달에는 도움 되지 않는다. 미리 배우는 것보다 제학년 학습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

3. 영어를 늦게 시작했다면 입시형 학습을 시킬 것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학교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영어를 시작하게 됐다고 불안해하지 말자. 무리하게 레벨이 맞지 않는 학원에 보내거나 집중 과외로 따라잡으려고 하기보다는 학습의 방향을 현실적인 길로 돌리는 게 좋다. 이때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6학년, 중고등학생 때 더 힘들어진다. 외국인과 유창한 대화를 하는 게 목적이 아닌 이상, 수능에 맞춰서 독해와 문법 중심으로 반복적으로 문제를 풀며 다가올 입시를 대비하는 게 시간을 아끼는 길이다.

4. 선생님의 평가를 흘려들지 말 것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아이에 대해 원하는 평가를 듣지 못했다고 무시하거나 흘려듣지 말자. 누구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 집에서 엄마가 보는 아이와 학교에서 선생님이 보는 아이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습 또한 우리 아이의 모습이다. 선생님은 해마다 30명 이상의 아이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데이터가 풍부하다. 선생님의 전문가적 시각과 노하우, 조언에 귀 기울이자.

5. 한 번쯤은 지능검사를 시켜줄 것

발달장애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은 보통 초등학교 1~2학년 사이에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더라도 어릴 때는 몰랐던 다양한 징후들이 학교생활, 즉 사회성이 요구되는 시기에 드러날 수 있다. 초등 입학 후 한 번쯤은 지능검사를 받아보기를 권한다. 전문적인 분석을 통해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학습법을 찾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와 나는 한 팀이었다
아이와 나는 한 팀이었다
최성현 저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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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나를 키운 8할은 『과학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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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동안 국내 과학책 중에서 가장 오래 사랑받은 책.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이하 『과학 콘서트』)가 돌아왔다. 2011년 출간 10주년을 맞아 출간됐던 첫 번째 개정증보판 이후 바뀐 내용들을 점검·수정하고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했다. 두 번째 커튼콜 무대에 오른 저자는 이번 책이 “독자들에게 복잡계 과학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문적 나이테이자, 과학자 정재승이 독자들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학문적 주름”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커튼콜에 기꺼이 응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과학 콘서트』가 하나의 아카이브로써 독자들과 호흡하며 성장할 것임을 기대하게 된다. 



나를 키운 8할은 『과학 콘서트』

20년 동안 꾸준히 사랑 받아 온 책입니다. 그만큼 두 번째 개정증보판을 출간하시는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얼마 전에 독자 분이 찍은 초판과 개정증보 2판의 사진을 봤는데요. 초판은 정말 얇은데 개정증보판 2판은 되게 두껍더라고요. 20년 세월의 역사가 묻어있다는 게 보였어요. 그냥 편집만 잘해서 개정판을 낸 게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이 분야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담았다는 면에서, 개정증보판을 꾸준히 낼 수 있도록 해주신 독자 분들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그게 저의 학문적인 성장의 역사이기도 하죠. 이제는 물리학자들이 물리적인 도구를 이용해서 사회 현상을 연구하고 접근하는 것이 보편화됐고, 그렇게 얻은 통찰이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내놓는 통찰과 조금 결이 달라서 서로 보완이 되고 있는데요. 그런 역사들이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 같아서 너무 좋고요. 저의 학문적 주름이자 나이테인 것 같아서 굉장히 뿌듯합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개정증보판도 출간하실 계획이라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학문적 주름, 나이테가 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시게 될 텐데요. 많이 기대되실 것 같습니다. 

저한테 『과학 콘서트』는 굉장히 각별한 책인 것 같아요.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책이 아니라 저도 그 위에 탑승해서 함께 세상을 항해하는 책 같거든요. 그러다보니 계속 고쳐 쓰고 새로운 내용들이 드러나면 그것을 넣어서 확장하는 제 삶의 배 같아요. 이 책이 성장하는 모습이 마치 제가 성장한 것 같아서, 그걸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고요. 사실 처음 책을 낼 때도 ‘아마 10년쯤 지나면 새로운 이론들, 연구결과들이 많이 등장할 텐데 그때 개정판을 내야겠다’고 출판사 대표님께 말씀을 드렸었어요. 20주년 됐을 때도 진작부터 그런 논의를 했었고요. 그 마음을 변치 않으려고 30주년, 40주년, 50주년에도 여력이 닿는 한 개정증보판을 내겠다고 썼어요. 쓰고 지키려고요. 그게 저한테도 굉장히 행복한 의무, 과학자이자 작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친근하게 느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신데요. 그게 과학자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시나요? 

의무이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학자들이 우리 분야에 관한 다른 책이나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책을 내는 일들이 많았는데, 자신이 한 연구를 바탕으로 책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 가설을 대중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논문의 형태가 아니라 책의 형태로 냈잖아요. 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가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썼죠. 우리 사회에 그런 일들이 벌어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제가 했던 연구이고 제가 썼던 논문이라서 남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더 쉬운 언어로 소개해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과학 콘서트』에 나와 있는 내용은 실제로 제가 지난 15년간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내용들이에요. 『열두 발자국』도 마찬가지이고요. 제가 했던 연구 안에 뇌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녹아져 있고, 그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서 설명을 하다 보니까 조금 더 친근하게 와 닿고 쉽게 이해가 된다고 느껴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많은 책을 출간하셨지만, 유독 『과학 콘서트』를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웃음). 서문에서 애정이 듬뿍 느껴져요.

제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만약에 제가 죽으면 부고 기사의 첫 문장이 ‘『과학 콘서트』의 저자가 죽었다’일 거라고요(웃음). 

‘뇌과학자 정재승이 죽었다’가 아니고요(웃음)?

네. 제가 아무리 뇌과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를 저를 설명하는 단 한 문장을 생각해 보면 아마 ‘『과학 콘서트』의 저자’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맥락에서 저를 키운 8할이 『과학 콘서트』라고 서문에 쓰기도 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지금 저에게 복잡계 과학에 관해서 책을 써보라고 하면 『과학 콘서트』 같은 책을 못 냈을 것 같아요. 

처음 『과학 콘서트』를 쓰셨을 때는 스물아홉의 젊은 과학자이셨죠. 

젊은 나이에 되게 호기롭게, 잘은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이거 너무 중요한 건데...’ 하면서 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책이 다른 과학책들보다 훨씬 훌륭해서가 아니라 ‘이 젊은이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 봐’라는 맥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해줬던 것 같거든요. 그렇게 애정해주신 것이 마치 우리 사회가 젊은 물리학자의 가능성을 응원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 책과 함께 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말씀을 드린 거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더 각별한 책이죠. 『열두 발자국』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알쓸신잡>에 출연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더 늘어났고, 학문적으로는 최근에 네이쳐지에 논문도 냈고... 제가 생각하기에 되게 뿌듯하고 좋은 일들도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쭉 돌아보면 『과학 콘서트』가 굉장히 의미 있는 저작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지금은 호기로움이 조금 사라진 것 같으세요(웃음)?

네, 지금은 조금 더 사려 깊어진 것 같아요. 초판을 쓸 때는 저 혼자 알게 된 걸 누구한테 말해주고 싶어서 ‘이거 모르지? 진짜 재밌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통로로 책을 쓴 거예요. 그런데 20년이 지나니까 ‘10년 후에도 이걸 맞다고 이야기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과학이라는 건 끊임없이 변하고, 공격받고,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기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썼다면 ‘이런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밝히고 조심스러운 글을 썼을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호기롭기보다는 더 사려 깊은 글이 나왔을 것 같고요. 그렇게 했다면 사람들이 ‘나이가 있으니까 성찰적 글쓰기를 하는구나’라고 봐주셨을 것 같고, 만약 스물아홉에 그런 글쓰기를 했다면 ‘너무 돌다리를 두들기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아요. 



비합리적이지만 훌륭한 선택?

20년 동안 일어난 변화들 중에서, 뇌과학자로서 가장 인상 깊고 의미 있었던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복잡계 과학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다양한 영역에 응용되기 시작했고 인간관계, 뇌, 심리 같은 것과도 접목되게 됐죠. 그 확장된 스케일을 이번 개정증보 2판에 담으려고 애썼어요. 뇌 안에서 벌어지는 일부터 시작해서 한 도시의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복잡계 과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적용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미 초판에 그 정신을 담기는 했어요. 영국 레스토랑의 소음부터 시작해서 반딧불이 콘서트까지, 이 관점으로 들여다보니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현상들이 하나로 잘 꿰어지는 거죠. 마치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와 지구의 주위를 도는 달이 같은 물리 법칙으로 설명되듯이. 사실 그게 물리학의 매력이기 때문에 『과학 콘서트』에서도 ‘사회 현상도 그렇게 하나로 꿰어서 설명할 수 있겠구나’라는 걸 담으려고 애썼어요. 

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어요. 

도시야말로 그 어떤 시스템보다 복잡한데 그럼에도 도시를 운영하는 방식 자체가 복잡할 필요는 없고, 복잡한 도시의 현상도 기본적인 근본 원리를 통해서 컨트롤할 수 있어요. 옛날에는 운영자가 도시를 잘 운영해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행복과 삶의 질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도시의 시스템이 작동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뇌과학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이 그렇게 모호한,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만이 아니거든요.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는 굉장히 구체적인 지표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도시에도 이런 걸 적용해 볼 수 있다는 걸 이번 책에 담으려고 애썼어요. 

『열두 발자국』에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우리 뇌가 생각보다 합리적으로 작동해서 결과를 도출하지는 않는다는 거였어요. 교수님도 가끔은 ‘내 뇌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정말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세요(웃음)?

그럼요(웃음).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서 얻어진 결과와 감성적으로 끌리는 것 사이에서 제가 늘 합리적 결과를 좇지만은 않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행동 같은데요. 예전에는 그런 행동들을 보고 ‘인간은 비이성적이다, 합리적이지 않다’고 간주했어요. 특히 경제학자들의 관점이 그랬죠. 요즘 뇌과학자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 들여다봤어요.

결과는 어땠나요? 

나한테 합리적이라는 이름의 경제적 이득을 주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행복하려면, 일종의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요. 예를 들면, 내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한다는 관점으로 보자면 기부를 할 필요가 없죠. 내 목숨을 던져서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할 필요도 없고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있는 사회는 전체적으로 만족도도 높고 삶의 질도 높고,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어지잖아요. 다음 세대에게는 그런 사회를 물려주고 싶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의 이득을 생각하면서 의사 결정을 하기도 하는 거예요. 마음이 끌리거나, 왠지 도와주고 싶거나, 공감이 가면 경제적 이득을 기꺼이 포기하는 일들도 뇌과학적으로는 충분히 설명 가능한 행위가 됐죠. 그런 걸 알고 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죠. 비합리적인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죠(웃음). 

교수님의 시각이나 가치관에 큰 변화를 주었던 연구 결과나 이론, 법칙이 있나요?

네, ‘스티글러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요. 어떠한 법칙도 그 법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경우는 없다는 법칙이에요. 재밌죠?

상식과 너무 다른 이야기인데요?

그렇죠. 예를 들면, 알츠하이머 치매라는 병은 알츠하이머 박사가 연구해서 그의 이름을 딴 병명인데, 실제로 알츠하이머 환자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알츠하이머 박사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뉴턴이 제일 먼저 발견한 게 아니에요. 심지어 스티글러의 법칙조차도 스티글러가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아니에요. 되게 놀랍죠? 

정말 그러네요. 그럼 어떤 방식으로 이름이 붙은 걸까요?

최초의 발견자는 그걸 발견한 후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진짜로 그것에 천착해서 연구하고, 학계에 중요성을 보고하고 알리고, 그걸 넘어서서 꾸준히 계속 연구했던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일 수밖에 없어’ 하고 이름을 붙인 거죠. 결국 발견의 영광을 가져가는 건 최초로 잠깐 기록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진짜로 그 주제에 대해서 깊이 천착한 초기 인물인 거죠. 그 사람이 명예를 가져가는 거더라고요. 제가 이 법칙을 되게 좋아하는데, 처음 이 법칙을 듣고 ‘맞아, 과학이란 건 이런 거구나’ 하고 약간 감동했어요. 우리가 우연한 발견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고 꾸준히 연구했던 학자를 더 존경하는구나,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경계에서 피는 꽃

“세상의 모든 경계에선 꽃이 핀다고 하지 않았던가!”라는 문장이 있어요. 교수님은 소설가와 함께 책을 쓰기도 하셨고, 방송에서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셨는데요. 그런 작업을 해보시니까 어떠셨어요? 정말 좋았나요?

네. 진짜 강추드리는 게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예요. 결국은 그게 <알쓸신잡>의 정신이기도 한데요. 나와 굉장히 다른 경험, 관점,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건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행위예요. 우리 분야의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때도 즐겁고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할 수 있지만, 나와 굉장히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분야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겠죠. 그런 영역에서 저는 협업을 굉장히 즐기는 편이에요. 그때 진짜 중요한 게 나와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거든요. 인정하고 존중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분야에 대한 자부심은 있어야 되고요. 서로 다른 생각들을 조금 더 큰 틀에서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 경계에서 꽃이 핀다고 생각해요.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 꽃인지, 저는 아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일하면서 만끽하며 살아왔어요. 

<알쓸신잡>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보였어요. 

그래서 아주 자신 있게 권해드리죠. 어쩌면 『과학 콘서트』는 그런 경계에 핀 꽃들의 다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이라는 큰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사실은 물리학자들이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복잡성의 본질을 캐려고 애썼고 인문학자들, 사회과학자들, 공학이나 예술 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새로운 이해들을 얻어낸 거예요. 그건 물리학자들끼리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것이겠죠. 전통적인 물리학 분야 안에 있었다면 거기까지 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세상의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는 걸 만끽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뇌를 관찰해 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순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영역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연결된다면서요? 가끔 ‘딴짓’을 하는 게 창의적인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교수님도 일부러 ‘딴짓’을 할 때가 있으세요?

통상의 경우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조금 엉뚱한 곳에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엉뚱한 곳을 조금 뒤지는 작업들을 해야죠. 그러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굉장히 몰입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아주 완전히 끊고 며칠 엉뚱한 곳에서 머리를 다른 방식으로 말랑말랑하게 하는 과정은 필요하고요. 다시 돌아와서 예전 같지 않은 머리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죠. 제가 하는 건 공연을 본다거나, 엉뚱한 분야의 책을 읽는다거나, 나와 완전히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고 수다를 떤다든가 하는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럴 때 야구도 보시나요(웃음)?

네(웃음). 요즘은 사실 야구를 본 지 조금 오래 됐는데요. 제가 한국야구학회 초대 회장이거든요. 

한국야구학회를 출범시키셨죠.

제 인생에 가장 즐거운, 남들은 인정해주지 않는 저만의 업적이죠(웃음).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 못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야구를 글로 분석하고 연구하고 통계하는 학회를 만든 거였어요. 일종의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를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야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자기가 분석한 걸 나눴는데, 저에게는 너무 즐거운 일이었죠. 뇌를 리프레쉬하는 작업 중에 하나였어요. 제가 진짜로 좋아했던 선수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들에게 야구 이야기를 듣고... 옛날에는 진짜 TV에서만 보던 백인천, 마해영 선수 같은 분들을 만나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가슴도 뛰고. 슈퍼스타 물리학자, 뇌과학자를 만난 것 같은 기쁨을 느꼈죠. 

최근에 야구 경기를 안 보신 이유가 있나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시잖아요. 

제가 대전에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한화이글스에 정이 가고, 자이언츠의 오랜 팬이기도 하고, 늘 그렇듯이 자이언츠와 한화가 저를 득도하게 만들었는데요... 경기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올해 한화 팬 분들이 마음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전 국민이 한화의 1승을 염원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러니까요(웃음). 삼미슈퍼스타즈가 가지고 있던 연패의 기록과 타이를 이뤘죠. 오늘 져도, 그동안 계속 졌어도, 내일 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진정한 야구죠. 

역시 한화 팬 분들은 보살이군요(웃음).

어줘야구는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살아있는 생명체예요. 어떻게 잘하든 보듬야 됩니다(웃음).

야구는 전술게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어떤 선수를 언제 기용해서 어떻게 경기를 풀어갈지, 두뇌 플레이를 하는 즐거움이 있다고 할까요. 그런 점이 교수님의 성향과도 잘 맞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야구를 좋아하시는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야구 경기가 2시간 반 정도 펼쳐진다고 하면 실제로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시간은 20분 내외예요. 대부분의 시간들은 기다리고 예측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운동량이 많지 않아요. 저는 야구는 머리를 쓰는 운동이지 몸을 쓰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또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이기도 해서, 저처럼 몸보다 뇌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더없이 매력적인 스포츠죠.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이공계열, 과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고요. 문과 출신이 ‘나 수포자였어’라는 말을 할 때는 스스럼이 없는데, 이공계열 출신은 ‘나는 데카르트가 누군지도 몰라’라는 말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거죠.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면 굉장히 많이 바뀐 지적 풍토 중에 하나가 ‘그래도 과학을 조금 알아야 돼’ 하는 변화인 것 같아요. 진짜 옛날에는 수학을 못 한다는 게 되게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그렇지만 철학이나 역사를 모른다고 하면 굉장히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양자역학의 한 마디 정도는 알아야,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뭔지는 알아야, 전전두엽이 어딘지는 알아야 되는 시대로 많이 옮겨왔어요. 인문사회과학자들도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애써주는 시대가 됐죠. 그런 건 되게 좋은 것 같고요. 한편으로는 과학 기술이 지나친 위용을 갖게 되기도 했어요.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학문적으로는 대학 안에서 인문사회과학이 과학 기술과 접목되지 않으면 제대로 지원 받기 어렵고, 그래서 정부 예산이나 기업의 지원을 많이 받는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의 목소리가 학계 안에서 지나치게 커졌죠.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수조원이 연구비로 집행되는데, 실제로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지급되는 연구비는 몇 천 억 정도 수준이거든요. 이공계열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죠. 이런 것들이 균형이 잡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인사이트를 제공해야 하는데 편향이 심해서 그걸 바로잡는 게 학계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숙제 중에 하나입니다. 



정재승으로 설명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앞서 ‘경계에서 꽃이 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만,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통합적 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죠? 이유가 있나요?

예를 들면, 학부 때까지는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머릿속에 잘 집어넣는 일을 하잖아요. 그게 공부였죠. 그런데 대학원에 가면 연구를 해야 되잖아요. 연구는 남이 던지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답을 내고, 그 답이 중요하다는 걸 논문과 학회 발표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야 되는 작업이에요. 그런데 점점 중요한 문제들은 어느 한 영역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꽃이 피는 경계에 모여 있어요. 분야를 넘나들고 통합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좋은 연구를 하기 어렵죠. 통합적 사고가 잘 이루어진 학생들의 경우에는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를 만나는 데에 두려움이 없어요. 기꺼이 넘고 그 분야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답을 향해 가거든요. 그런데 어느 특정한 영역에 머물러 있는 학생은 답을 향해 가다가 만나게 되는 (다른) 분야라는 벽에서 뒤로 물러나거나, 그냥 돌아가거나, 자기 분야의 방식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진짜 좋은 문제를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풀기가 어렵죠. 

예를 들어 설명해주신다면요?

심리학과 학생들이 뇌를 연구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중요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작업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심리학과가 문과이다 보니까 학생들이 겁을 내는 경우가 있어요. 생물학적인 뇌를 탐구하는 법, 뇌를 촬영하고 측정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법, 컴퓨터상에 가상의 뇌를 만들고 관찰하는 법, 이런 접근들을 두려워하죠. 학부 때부터 통합적 사고를 하는 게 너무 중요해요. 최근 카이스트에서도 융합학부를 만들었어요. 제가 학부장을 맡게 됐는데요. 분야라는 틀에 자신의 지적 사고를 가두지 않고 ‘진짜 중요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뭐든지 익히고 배운다, 배운 것들을 서로 연결해서 통합적으로 사고한다’ 이런 훈련들을 가능하면 빨리 할 수 있으면 좋죠. 

지금까지 쓰신 책들을 보면 ‘과학 이야기’라는 알맹이는 같아도 계속 형식에 변화를 주셨던 것 같아요. 다음 책에서도 그러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떠세요?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제 부고 기사가 나온다면, 사람들이 정재승이라는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봤을 때, 제가 했던 일들이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직업군 혹은 개념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냥 ‘정재승’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교수가 왜 저런 일을?’, ‘과학자가 왜 저런 일을?’, ‘책 쓰는 작가가 왜 저런 일을?’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하고, 그런 것들이 쌓이고, 사람들이 거기에 충분히 적응하고 나면 ‘저 사람이니까 저렇게 했을 거다’라고 생각될 것 같아요. 그래야 다음 세대에는 교수가 되든 과학자가 되든 직업의 선입견에 갇히지 않고 ‘저런 사람도 있었잖아’ 하면서 자기가 꿈꾸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떤 다른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는, 정재승으로 설명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요. 지금도 그런 것들을 계속 탐험하는 과정이죠. 

그 과정 속에서 다음 책도 나오겠죠? 현재 집필 중이신 책이 있나요?

지금 쓰고 있는 책은 얼마 전에 EBS에서 방영했던 <뇌로 보는 인간> 5부작인데요. 뇌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와 문명의 특별함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예요. 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나고 얻게 된 수많은 석학과의 대담이나 지식을 책으로 담아내려고 합니다. 인류학자나 고생물학자들,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관심 있을 만한 주제인데 뇌과학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해 보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그런 걸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아요.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쓸 책도, 그게 뭐가 됐든 간에, 과학이 담뿍 담겨있는데 인문사회과학적인 느낌들을 주고 예술적 감수성을 느낄 수 있는,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비빔밥이나 잡탕, 짬뽕이 아니고 중요한 심지는 있는 글들을 계속 쓰고 싶어요. 

『과학 콘서트』의 초판본을 읽은 독자가 첫 번째 개정증보판, 두 번째 개정증보판까지 읽고 소감을 남긴 경우도 있었나요?

네, 굉장히 많으셨어요. 인스타그램에 보면 대개 초판을 사신 분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때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과학 콘서트』를 사서 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 인생의 첫 번째 과학책이었다’고 하시고요.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 이제는 아이에게 ‘엄마가/아빠가 읽었던 책이야’ 하면서 개정증보판을 선물해주신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바람직한 사회 현상이 아닌가(웃음)... 더 많이 퍼졌으면 하고요(웃음). 부모님과 자녀들이 ‘내가 읽었던 책인데 되게 좋았어, 너도 읽어 봐’, ‘네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사이에 이 분야도 굉장히 발전했나 봐, 그래서 개정증보판이 훨씬 더 두껍고 재밌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 네가 읽고 얘기해 줘’ 그런 대화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정재승 저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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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번역가 박현주 “운전을 잘 못해서 생긴 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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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협조 : 레스케이프 호텔소설 『나의 오컬트한 일상 1, 2』『서칭 포 허니맨』을 쓴 소설가이자 트루먼 커포티,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한 박현주 작가는 15년 가까이 책을 읽고 칼럼을 써왔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마감에 허덕이던 어느 해에 그는 제주로 갔고, 혼자된 삶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결심한 것이 운전. 자전거도 못 타던 그에게 운전을 배우겠다는 결심은 다소 공교로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박현주 작가는 이 공교로움에 대해 “영어에서는 결핍과 필요가 같은 말이기도 한데, 결핍이 필요를 만들어낸다. 내게는 늘 이동성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원하는 것은 현재 나의 능력치나 현재 상황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래를 못하지만 가수가 되고 싶을 수는 있지 않나.(웃음) 그 공교로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시도하는 것 같다. 거기서 시도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는 그런 그가 운전에 대해, 그리고 책에 대해 쓴 이야기로 편하고 부담 없지만 삶에 유용한 생각이 많은 “상념의 다이소 같은 책”이다. 

나는 운전을 배워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기술이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도, 누구를 사랑하는 경험도, 책을 읽는다는 독서도 반드시 발전을 약속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꼭 발전이 아니라도 우리는 변화만은 겪게 된다.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훌쩍 달라진다. 그렇게 인생의 지도를 그려나간다.(247쪽)



조금씩 나아가는 삶

처음 생각한 제목은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가 아니었다고요? 

운전에서 중요한 세 가지가 안전거리, 서행, 일시정지예요. 사고가 나거나 실수를 할 때는 이 세 가지를 못 지켰을 때죠. 이 세 가지가 제 책에 맞는 키워드라고 생각했는데요. 저는 ‘선과 초보운전의 기술’이라는 제목을 원했어요. <채널예스>에 연재할 때는 ‘초보운전자의 독서법’이라는 평이한 제목이었고요.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형태의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형태의 거리라는 것도 알게 됐잖아요. 더 이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안 만나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고요. 문제는 인간은 늘 안전거리를 어기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그 자체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실패한 관계도 관계니까요. 당신과 나의 안전거리에서 우리는 늘 실패를 하고요. 사고도 나고, 좌절도 하는데요. 그래도 인생은 계속 나아간다는 관점으로 글을 썼어요. 그래서 이 제목으로 결정이 됐어요. 

운전과 독서를 함께 이야기하는 글이라는 점이 새롭게 느껴지더라고요. 이런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였나요? 

저는 사실 자전거도 못 탔거든요. 그래서 운전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나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없던 경험이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죠. 독서도 행위 자체는 익숙하지만 어떤 새로운 형태의 경험이잖아요. 물론 처음에는 이 둘을 따로 생각했고, 처음부터 둘을 결합시켜 글을 써야겠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요. 독서가 하나의 커다란 은유라고 한다면 운전 역시 생활에 대한 은유니까요. 운전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은데 이것이 개인적인 경험만은 아니다, 책이라는 보편적 경험과 연결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이 둘을 결합해서 책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사실 운전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상한 일이잖아요. 글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글이 되어 나왔던 데에는 남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거든요. 

일단은 제가 운전을 잘 못해서 생긴 일 같아요.(웃음) 만약 이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해냈다면 아마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숨쉬기는 워낙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생각하며 하지 않죠. 걷기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자연스럽지 않고 생경한 일이 있을 때, 잘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게 돼요. 저는 다른 기기에 내 몸을 맡겨 움직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운전이라는 행위를 굉장히 많이 인식할 수밖에 없었어요. 살아간다는 것도 어떤 면에선 그런 것 같아요. 태어났으니까 살지, 딱히 의도가 있어 태어난 사람이 없잖아요. 흔히 하는 말로 ‘이번 생은 처음’이라 서툴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 삶을 생각하게 돼요. 잘 되어가고 있을 땐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잘 안 될 때는 ‘나는 왜 이렇지’ 생각하게 되고 ‘산다는 것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관점이었어요. 

책에서 인용한 『수비의 기술』에 나오는 세 단계 “생각이 없는 존재. 생각하는 존재. 생각이 없는 존재로 되돌아가는 존재”(33쪽에서 재인용)가 떠오르네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과정들인 거예요. 

그런 거죠. 처음 글자를 읽을 때도 너무 어렵잖아요. 글자를 모를 때는 이것이 글자라기보다 하나의 형상으로 펼쳐져 있죠. 이처럼 ‘생각이 없’다가 글자를 인식하게 되면 글자를 ‘생각하’고 읽게 돼요.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다시 인식하지 않는 단계로 돌아가는 거죠. 기술이 숙련된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이와 같이 존재하는 줄 몰랐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의 존재를 알고 배워나갈 때 인식을 하는 상태로 가고, 그 다음 익숙한 상태로 이동해 숙련됨, 기술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다시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은 모든 기술에서 세 번째 단계가 되길 원하죠. 하지만 그건 쉽게 달성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꾸준한 연습, 실패,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거죠. 게다가 익숙해진 기술조차 어느 순간 낯설어지기도 하잖아요.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책 전반에 걸쳐 하고 있는 이야기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조금씩 나아가는 삶’에 대한 것인데요. 작가님은 그것을 “인생의 지도”(247쪽)라고 표현하셨어요. 

책을 청탁한 출판사의 의도나 독자의 기대나 저의 의도는 다 다를 거예요. 사실 출판사에서 원한 것은 인생의 어떤 성취를 한 사람이 독자에게 조언이랄까 가이드를 주는 것이었을 텐데요. 그와는 별개로 제가 어떤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계속 고군분투하고, 무언가를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했던 것 같아요. 때문에 타인에게 조언하는 걸 쓸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내가 어떤 시도를 했었고, 실패도 하고, 여전히 가끔은 좌절도 하는데 그 속에서도 어쨌든 이루게 되는 작은 성취들이 삶을 계속 밀고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는 이야기였던 거죠. 



내 갈 길을 가는 수밖에

작가님이 운전을 하고 나서 새롭게 알게 된 세계는 어떤 것이었나요? 

쓰려다 쓰지 않은 챕터 중 ‘오후 4시’가 있었어요. 그 시간이 제게는 한가한 시간처럼 여겨졌어요. 직장에 다니더라도 오후 4시 정도가 되면 일과가 끝나기 직전이란 느낌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모두 어떤 건물 안에 있고, 활동성은 살짝 떨어지는 느낌도 있고요. 제게는 오후 4시가 몰려왔던 무언가가 정리되는 평안하고, 한가로운 시간이었거든요. 그런데 운전을 하고 보니까 오후 4시는 너무 바쁜 거예요. 학생들이 학원을 가는 시간이고 학원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너무 바쁜 거죠. 그래서 김성희 작가님의 『오후 네시의 생활력』이라는 책과 같이 글을 써보려고 했어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보편적이지 못한 느낌이 있어서 뺐어요. 이미 그런 생활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얘기가 너무 한가롭게 들릴 수 있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새벽 4시에 열심히 일해요.(웃음) 

운전을 해서 가장 좋을 때는 언제예요? 

혼자 있을 때 같아요. 고독을 오롯이 즐길 수 있죠. 또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존 카치오포의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에도 나오는 말인데요. 사람들은 고독을 수치스러운 상태로 생각해요. 그 이유는 내 고독을 구경하는 타인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런데 운전을 할 때는 혼자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 누구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상태죠. 자기만의 작은 방 안에 있는 것과 같아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요. 혼자 있음을 충분히 즐길 수 있어서 아주 자유로워요. 

‘주차’, ‘백시트 드라이버’ 등 운전과 관련한 키워드로 삶을 성찰하는데요. 그 중 경쟁과 망각에 대해 적은 부분이 크게 와 닿더라고요. “경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승리가 아니라 망각에 있다”(127쪽)라는 건데요. 

경쟁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운전을 할 때 누가 뒤에 있다가 나를 앞질러 가면 화가 났어요.(웃음) 그렇지만 잊어버려야죠. 기억하고 있다가 내가 다시 앞서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골치가 아파져요. 사실 저도 그럴 때가 있었거든요. 이 길을 가려고 차선을 바꿔 간 건데 어떤 차는 내가 추월했다고 생각하고 저를 다시 앞서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쫓아가면 보복운전이죠. 분한 마음을 잊어버려야 해요. 잊어버리지 않으면 괴롭고, 사고도 날 수 있어요. 책을 내는 일도 그렇죠. 저는 책을 쓸 때까지는 즐거운데요. 책이 나오면 그때부터 마음이 너무 복잡해요. 독자에게 누가 먼저, 빨리 도달하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리니까요. 나의 책인데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괴로워요.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봤자 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잊어버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냥 내 갈 길을 가는 수밖에요. 언젠가는 헤어지니까요. 끝까지 나와 같이 가는 사람은 없어요.(웃음)

한편 ‘에필로그’에서 “더 많은 여성들이 잠재적 폭력에 지지 않고 도로가 자기의 것이기도 하다고 주장하길 바란다”(240쪽)고 했어요.

두 가지가 있는데요. ‘사고’ 챕터를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좋은 사람은 드물다」 같은 작품과 함께 좀 더 폭력에 대한 것을 강조해 쓸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 여성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은 피해자가 되기 쉽다는 인식을 더 강화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어요. 피해자로서의 여성에 초점을 두고 싶진 않았고요. 시도하는 사람으로서의 여성을 말하고 싶었죠. 여성의 자리는 마치 조수석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 여성이 차를 끌고 나오면 욕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느리게 운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또 그런 남성도 많이 있고요. 여성도 스스로의 필요로 도로에 자신 있게 나갈 수 있었으면, 그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었으면 했어요. 두려움을 너무 자아내지 않는 쪽으로 쓰고 싶었어요. 



지도를 조사하는 마음

책을 처음 쓸 때는 끝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깡패단의 방문』으로 시작하겠다는 계획만 있었다고 밝혔어요. 

2012년, 처음 제주도에서 살기 위해 가서 썼던 일기가 시작이에요. 이전에 외국에서 산 적도 있지만 그때도 룸메이트가 있었어요. 제주도에서 두 달이지만 정말로 혼자 살게 됐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이렇게 어느 순간에는 정말 누구와도 함께 살지 않는 날이 오겠다고요.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누구와든 언젠가 혼자 살게 될 시점이 있잖아요. 그럼 나는 혼자인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각했죠. 그 와중에 『깡패단의 방문』처럼 시간에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고요. 공감하게 되는 면이 있었어요. 이때의 삶 또는 조금 더 젊었을 때의 삶을 후에 돌아볼 때 우리는 객관화 해서 보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이 시간을 내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생각하게 됐고요. 그게 결국은 내가 혼자 서서 살아가게 될 시간을 생각하게 했어요. 그런데 제주도에 사는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죠. 

운전을 하지 않았을 때니까 더 그랬죠. 

당시 제주도는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도 힘들었거든요. 이전에는 누군가와 함께 살 것이다, 그 사람이 나 대신 운전을 해줄 것이다, 혹은 서울에 살 것이다, 그러면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여러 수단을 이용해 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요. 늘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주도에서 알게 된 거죠. 그때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운전과 소설에 관한 에세이를 쓴다면 그때가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본다는 관점이 요즘은 낯선 것 같아요. 워낙 ‘현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요. 

운전에 비유를 해볼게요. 내비게이션을 찍고 운전을 해도 그 길대로 갈 수 있는 건 아니죠. 반드시 돌발상황이 생겨요. 사고가 난다든가 공사를 한다든가 행사로 길이 막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내비게이션을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실제로 내가 간 길은 내비게이션이 제시한 길과는 다르지만 지도를 미리 조사하는 마음이 있는 거죠. 지도를 조사하는 마음이란 게 목적지에 도착한 나 자신을 상상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곳에 가기 위한 내 여정을 상상하는 거예요. 또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 자체도 시간을 선형적으로 보는 거죠.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는 생각인데요. 실제로 인간은 현재만 살지 않아요. 과거에 살 때도, 미래에 살 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느 시점에는 ‘도착한 나’를 상상하는 것이 내가 계속 길을 가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흔히 나중에 무엇이 될 거야, 라고 했을 때 늘 계획대로 이루어지진 않지만요. 계획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르니까요. 

시도하는 삶이나 삶의 변화 등을 생각할 때 역설적으로 “안온한 실패”(31쪽)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변화하지 않고 계속 현재 상태에 머무는 것이 더 낫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거예요. 

현재에 만족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미션이 있기 때문에 지칠 수 있어요. 잠시 머물러 가는 것은 중요해요. 그렇지만 사실 그 상태는 편안하고요. 편리하기도 해요. 나를 나쁘게 생각할 필요도, 나를 괴롭힐 필요도 없어요. 만약 책을 썼는데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거나 출간조차 할 수 없다거나 공모에서 계속 떨어지면 어느 정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까지만 한 뒤에 거기에 머물러서 이것이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욕망을 조절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한 발짝 더 나아갔을 때, 한 번 더 해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순간에는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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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안전거리
        
박현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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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윤여림 “그림책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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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말들이 사는 나라』의 작가 윤여림이 신작 『바늘 아이』를 펴냈다. 일러스트레이터 모예진 작가와 함께 만든 이 그림책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던 ‘바늘 사람’과 아이가 만나면서 시작된다. 모든 것을 잃고 죽은 듯 자고 있던 ‘바늘 사람’과 자존감이 낮아진 아이가 서로 만나는 순간, 둘은 새로운 희망을 마주한다. 현실과 판타지가 오가며 완성된 『바늘 아이』는 윤여림 작가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이야기. 어린 시절 시멘트 도랑 너머 숲에서 놀던 기억을 살려, 지금은 사라진 도랑과 숲의 생명들을 『바늘 아이』로 불러냈다. 샌디에이고에서 살고 있는 윤여림 작가와 이메일로 나눈 이야기. 



다시 숲을 키울 수 있다는 희망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저는 미국의 샌디에이고라는 시에 살고 있어요. 초기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확진자들이 어떤 경로로 감염되었고 이동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장 보러 가는 일처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외출을 안 하고 있어요. 저처럼 많이들 외출을 안 하기 때문에 외식업이나 세탁업 등을 하는 지인들이 힘들어 해요. 재난지원금 같은 도움을 받으면서 버티고 있지요. 소소한 어려움으로는 머리 관리가 있어요. 봉쇄령이 풀린 뒤로 확진자가 더 늘어나서 미장원에 가질 못하거든요. 남자들은 유투브에서 가르쳐 주는 방법으로 가족이 머리를 깎아 줘요. 덕분에 이발도구가 엄청 팔렸다네요. 여자들은 거의 다 그냥 머리를 길러요. 지금 저처럼요.(웃음)

『바늘 아이』은 어떻게 구상한 그림책인가요? 

언젠가부터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 있던 시멘트 도랑과 그 너머 숲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도랑을 들여다볼 때, 도랑을 건널 때, 도랑을 건너 숲에 들어갈 때의 마음과 함께요. 몇 달이 지나도 그 시절의 풍경과 마음이 떠나지 않자 결심했어요. 이야기로 쓰자!

현실과 판타지가 오갑니다. 처음부터 생각하신 부분인가요? 

처음부터 판타지가 현실에 스며 있는 이야기로 쓰기로 마음 먹었어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자기 곁에 판타지 세계가 있다는 걸 모른다는 설정으로요. 윤이가 도랑을 건널 수 있었던 건 ‘바늘 사람’이라는 존재 때문이에요. 하지만 윤이와 주변 인물들은 그 사실을 몰라요. 윤이가 어렴풋이 그 존재를 느끼기 시작할 때 이야기가 끝나지요. 사실 저는 우리 현실 세계와 판타지 세계가 공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어린 시절 도랑과 숲을 바라볼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주인공 ‘윤이’의 이름을 작가님의 이름에서 따오셨어요. 주인공의 성격이 작가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해서일까요?

‘윤이’는 제 이름에서 딴 이름을 가진 첫 주인공이에요. 나의 어린 시절 한 부분에서 태어난 아이라 그렇게 이름을 부여했지요. 하지만 윤이와 어린 시절의 나는 엄연히 달라요. 물론 비슷한 점은 있어요. 상상력이 지나쳐 겁이 많았다는 점, 속상하거나 화가 나도 잘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래요. 하지만 그뿐, 윤이는 나와 다른 인격체이고 나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갈 거예요. 어린 시절 ‘바늘’을 발견하지 못했던 나보다 더 건강하게 자라날 거라 믿어요.  

윤이는 ‘바늘’을 잡은 순간, 판타지 세계로 들어갑니다. 판타지로 넘어가는 매개체를 ‘바늘’로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린 시절 도랑 너머 숲 입구에는 소나무들이 서 있었어요. 마치 숲을 지키는 파수꾼처럼요. 숲으로 들어가려면 그 소나무 아래로 몸을 숙여야만 했죠. 그때마다 바늘이 콕콕 찔렀는데, 아플 정도는 아니었어요. ‘각오는 되어 있겠지?’ 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으름장 놓는 파수꾼이라고나 할까요? 그 파수꾼 소나무를 생각하자 ‘바늘’이 떠올랐어요. ‘바늘’에서 ‘바늘 사람’이 떠올랐고요.

그리고 자연스레 ‘바늘의 의미’가 다가왔어요. ‘바늘’은 옷이나 신발 등 무언가를 짓기도 하지만 수선도 해요. 찢어진 부분을 이어 붙이고, 구멍 난 부분을 꿰매지요. 바늘 사람은 숲의 나무들을 돌보는 일을 해요. 찢어진 나뭇잎, 구멍 난 나뭇잎을 이어 주고 메꿔 줘요. 나무를 지키는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하늘 바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요. 그러고 보니, 정작 영감을 준 소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네요.(웃음) 언젠가 다른 이야기에 등장할지도 모르지요.

계속 ‘바늘 사람’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그림책 제목을 ‘바늘 사람’이 아니라 ‘바늘 아이’라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처음 원고 제목은 ‘바늘 사람’이었어요. 지적하신 대로, 윤이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 스며든 존재는 ‘바늘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출판사 쪽에서 제목을 ‘바늘 아이’로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그게 좋겠다 싶었어요. ‘바늘 사람’이 윤이에게 용기를 주었다면, 윤이는 ‘바늘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해요. 윤이를 만나기 전까지 바늘 사람은 자기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 못했거든요. 윤이가 바늘 사람의 세계에 들어선 순간, 윤이는 ‘바늘 아이’가 되었고, 다시 숲을 키울 수 있다는 희망을 꿈꾸게 하는 존재가 된 거예요. 그러니 책 제목으로 ‘바늘 사람’보다 ‘바늘 아이’가 맞겠다 싶었죠. 어린이 독자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제목이기도 하고요.


모예진 작가님 덕분에 탄생한 그림책

글이 먼저 완성된 후, 그림 작가님께 글을 보내셨을 텐데요. 출판사를 통해 원하는 그림에 관해 의견을 주셨나요?

없었어요. 제가 그림책 글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원고 장면마다 그림지문을 세세히 적고, 그림에 대한 제 바람도 편집자에게 전했더랬어요. 심지어 가더미도 만들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아요. 그림에 대한 바람도 편집자에게 전하지 않고, 꼭 그림으로 표현되어야 할 요소가 있을 때만 원고에 그림 지문을 넣어요. 그림 작가님들의 해석력이나 상상력, 표현력들이 다 뛰어나서 제가 일일이 요청하는 게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고요. 

편집자랑 이 작품에는 어떤 느낌의 그림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서로 의논을 할 때는 있어요. 어떤 그림 작가님께 부탁드릴까 결정하기 전에 그렇게 편집자가 저랑 의논해 주면 기분이 좋아요. 『바늘 아이』가 그런 과정을 거쳤죠. 

그림을 작업해주신 모예진 작가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림 작가님은 그림을 딱 본 순간,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솔직히 처음에 바로 느낌이 오지는 않았어요. 그림이 안 좋았다는 뜻은 절대 아니에요. 그저 어쩐지 이야기랑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모예진 작가님도 그리 느끼셔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디지털로 작업했던 그림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 손으로 그리기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단한 분이구나 감탄했죠. 작가가 몇 달 동안 작업한 것을 깡그리 버리기가 쉽지 않잖아요. 제가 의견이나 수정 부탁을 드릴 때마다 불평 한 마디 없이 최선을 다해 주셨어요. 그렇게 최고의 장면들을 만들어내셨지요. 모예진 작가님 덕분에 『바늘 아이』가 탄생했어요. 진심으로 감사해요. 

펼침면이 두 번이 나와요. 작가님의 주문이셨는지요?

네, 처음 원고에서부터 두 장면을 펼침면 또는 반펼침면으로 표현했어요. 도랑괴물이 나오는 장면과 윤이가 숲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풍경 장면 이렇게요.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그림)은 무엇인가요?

장면들 모두 각자의 이유로 좋지만, 내가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건 도랑괴물이 나오는 장면이에요! 그 장면 글을 쓸 때 즐거웠어요. 윤이가 무서워하는 존재들을 묘사하는데 왜 그리 재밌던지요. 그런데 그 장면 스케치를 보자마자 와! 하고 탄성이 나오는 거예요. 상상력을 자극하는 멋진 그림이었어요. 언젠가 녀석들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마지막에 ‘반짝’이라는 글자와 함께 선녀처럼 보이는 인물이 등장하고 ‘바늘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마지막 부분에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부분이에요. 바늘 사람 이야기부터 들려준 다음 윤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까? 그림책으로서 너무 복잡하고 긴 이야기인데, 동화책 원고로 다시 쓸까?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 그냥 그림책 원고로 가자였어요. 내 머릿속에서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며 펼쳐지는 그림책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었거든요. 그리고 윤이 이야기부터 들려주고 마지막 장면에서 ‘바늘 사람’을 그림으로 슬쩍 보여주자, 그러고 나서 ‘바늘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자 마음먹었어요. ‘바늘 사람 이야기를 읽고 나서 윤이 이야기를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거야.’ 하고요. 모험으로 느껴졌지만, 일단 제 결심대로 원고를 완성해서 나는별 출판사에 보냈어요. 출판사에서 너무 어렵다고 하면, 동화책 원고로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요. 다행히 출판사에서 이 원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 줘서 그림책으로 무사히 나왔어요.

‘바늘 사람’ 이야기는 설화처럼 느껴져요. 기존에 있던 설화를 재구성하신 건가요, 아니면 창작하신 건가요?

창작이에요.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파고들었어요. ‘왜 바늘 사람은 윤이가 도랑을 건너게 도왔을까?’ ‘왜 윤이는 바늘 사람의 꿈, 숲을 볼 수 있었을까?’ ‘왜 바늘 사람은 바늘의 모습으로 도랑에 처박혀 있었을까?’ 어느 순간, ‘하늘 바늘’이 ‘바늘 사람’이 되고 ‘바늘 사람’이 ‘바늘 아이’를 만나는 이야기가 내 눈앞에 차르르 펼쳐졌어요. 정신없이 받아썼죠. 작가로서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글을 완성하기까지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읽어요

그림책의 글을 쓸 때, 유의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글밥이 아무래도 적어야 하는데요. 그림을 상상하면서 글을 써야 하는지요?

글밥이 적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 될 수는 없어요. ‘그림과 조화를 이루는 글을 쓴다는 것’이 원칙이지요. 그림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글밥은 저절로 줄어들어요. 예를 들어, 그림이 전할 수 있는 말을 굳이 글이 할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글을 쓸 때부터 그림이 전할 말을 생각하는 힘이 매우 중요해요. 

그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살펴야 해요. 그림과 글이 중언부언하고 있지 않나? 하고요. 그럴 경우, 과감하게 글줄을 들어내거나 다른 글로 바꿔서 좀더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림과 함께 놓았을 때에도 꼭 들어가야 할 글밥이 많다면 그대로 둘 수밖에요. 그림과 서로 조화를 이루기만 한다면, 글밥이 많더라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림책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예비 작가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조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글 쓸 때의 팁)을 부탁드립니다. 

그림책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문학’이에요. 어떤 문학 장르보다 글이 귀에 어떻게 들리는가가중요하지요. 그래서 저는 글을 완성하기까지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읽어요.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수정이 이뤄지고요. 그림 스케치가 들어오면 또 소리 내어 읽고 고쳐요. 최종 교정 단계까지 그렇게 계속 소리 내어 읽으면서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글 소리가 물 흐르듯 흘러가는지, 그림 속에 잘 녹아드는지 살피지요. 아마 그림책 글 쓰는 작가들이라면 다 저랑 비슷할 거예요. 그림책 글작가를 꿈 꾸는 분이라면, 이 과정을 제대로 잘 거치시기 바라요. 제 생각에 이 과정 속에서 자기만의 문체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해요. 좀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네 그럼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웃음), 이거야말로 현실적인 조언이라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림책 글은 ‘홀로서기’를 할 수 없어요. 어떤 문학 장르도 이런 어려움을 갖고 있지 않아요. 시도, 소설도, 수필도, 동화도 다 홀로서기가 가능하죠. 그림책 그림은 어떤가요? 홀로서기가 가능하죠. 글 없는 그림책들이 많잖아요. 그림 없는 그림책은? 물론 그림 없는 그림책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대히트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일회성일 수밖에 없어요. 그림이 있어야 그림책이 되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그림작가가 있어야만 우리는 책을 낼 수 있어요. 그림작가를 영영 구하지 못하면, 내 글은 쓸쓸히 사라지고 말겠지요. 그게 우리 그림책 글 쓰는 사람의 숙명이에요. 책이 나와도 아무래도 눈에 바로 들어오는 그림을 그린 작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요.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그림책 글 작가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모든 걸 알고서도 그림책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분은 이미 그림책의 매력, 글쓰기의 매력에 빠져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림책 글쓰기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머릿속 이미지를 따라 글을 쓰는 즐거움이 첫째고요, 책의 모양새를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게 둘째 매력이에요. 둘째 매력이 왜 매력이 되느냐고요? 저 같은 경우는 그 과정에서 짜릿한 기쁨을 느끼거든요. 처음에는 내 머릿속 이미지로 만들어진 그림책이 있어요. 이 그림책은 나밖에 볼 수 없어요. 그림작가가 결정되고 나면, 그림작가의 전작에 맞춰 또 다른 그림책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라요. 스케치가 나오면, 그 이미지는 대개 수정이 되어요. 채색이 끝나고 디자인이 완성되기까지 계속 책의 모양새는 수정이 되어요. 제작이 끝난 뒤 내 손에 책이 쥐어질 때까지요. 동화를 쓸 때와는 전혀 다른 재미예요. 물론 그 과정에서 긴장하거나 좌절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대개는 ‘놀라움의 연속’이에요. 그림작가님들이 주는 놀라움, 디자이너가 주는 놀라움들이지요. ‘그림책 글쓰기의 매력’을 이미 알고 있는 분이라면, 사실 글 쓸 때의 팁 같은 건 필요 없을 거예요. 그 매력 속에 ‘팁’이 들어 있으니까요.(웃음)

최근 읽은 그림책 중에 특별히 좋았던, 기억에 남는 책이 있나요?

좋아하는 작가님들과 그림책이 많고, 읽어 보고 싶은 신간들도 많은데, 미국에 있어서 일일이 다 보지 못해 아쉬워요. 가장 최근에 읽은 그림책 중에서는 김지연 작가님의 『호랑이 바람』이 인상에 남아요. 김지연 작가님의 전작을 다 보고 싶어요.

그림책을 우리말로 옮기시기도 하는데요. 번역할 때, 가장 고려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원작자의 의도를 우리 말로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는 것! 원작자의 문체와 문학적 개성도 담아내려고 노력하고요. 하지만 이런 말 하기도 쑥스럽군요. 번역한 작품이 많지 않으니까요. 

어떤 책을 만들고 싶나요?

그런 목표는 없어요. 그때그때 저를 찾아온 이야기를 잘 살리고 싶을 뿐이에요. 그 이야기들이 다양한 빛깔을 띄기를 바라고요. 한 가지 빛깔로만 글 쓰는 건 너무 지루해요. 저는 음악도 온갖 장르를 섞어서 듣는답니다(웃음) 최종 목표로 두고 있는 책은 있어요. 언젠가 제가 작가로서 원숙해지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SF를 쓰고 싶어요.

곧 출간될 새 책의 힌트도 살짝 알려 주세요.

하반기에 두 권이 나와요.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 여행? 또 하나는 택배 상자의 반란? 이 정도만 말씀드릴게요. 둘 다 제가 즐겁게 썼고 그림작가님들도 멋지게 그리고 계시니까 기대해 주세요(웃음)

『바늘 아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바늘 사람>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에요. 원고를 완성하자마자, 느꼈어요. 이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하구나 하고요. 남편은 내가 후속편을 써야 비로소 『바늘 아이』 완성될 거 같다고 하는데, 저는 어린이 독자님들, 어른 독자님들이 『바늘 아이』를 완성해 주면 좋겠어요. 대책 없는 바람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만약 한 분이라도 그 뒷이야기를 상상해 주신다면 행복하겠습니다.



바늘 아이
바늘 아이
윤여림 글 | 모예진 그림
나는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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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지옥,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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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5일 후 15시에 지옥에 간다.” 

어느 날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불특정 인물들에게 지옥행을 고지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영화 <부산행> <반도>의 연상호 감독과 만화 『송곳』의 최규석 작가가 의기투합해 만들어 낸 기묘한 세계 『지옥』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오랜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다가 작품을 기획했다고 한다. 연상호 감독이 구축한 세계는 최규석 작가의 손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태어났다. 

지옥에 갈 것을 고지 받은 자들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죽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예고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누군가는 지옥의 사자들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되는 사회. 이 혼란의 중심에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옥행 사례를 연구해 온 ‘새진리회’의 정진수 의장이 있다. 그는 지옥에 간다는 선고가 정의롭지 않은 인간을 향한 신의 경고라고 말한다. 눈앞에서 사람이 끔찍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새진리회에 열광하고 지옥행을 앞둔 사람들에게 죄를 물으며 참회를 강요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죄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직 결말이 밝혀지지 않은 『지옥』의 첫 번째 이야기가 책으로 묶였다. 



최규석 감독, 연상호 시나리오의 이야기 

책은 출간 이후에 본격적인 행사들이 진행되는데 반해 영화는 개봉 전에 홍보 일정을 소화하느라 더 바쁠 것 같다. 개봉 당일의 기분은 어떤가. (인터뷰는 연상호 감독의 새 영화 <반도> 개봉일에 진행됐다) 

어제까지 수십 군데 언론사와 인터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실시간으로 관객 데이터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웃음) 흥행에 대한 부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늘 하던 일이라 이제 일상이 된 것 같다. 

오늘은 『지옥 1』에 대한 인터뷰다. 오랜 친구인 최규석 작가와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인데.  

최규석 작가와는 아주 옛날부터 제일 친한 친구 사이다. 하루에 3~4번씩 통화를 하다 보니  “너희 사귀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웃음) 그런데 결혼해서 애 낳고, 서로 바빠지다 보니 만날 일이 없는 거다. 재작년쯤인가 같이 맥주를 마시다가 “우리가 같이 작업을 하면 좀 자주 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와서 함께 작업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돼지의 왕>을 냈을 때쯤, 최규석 작가가 인터뷰 등에서 다른 작가와 작업을 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냐는 질문에 “연상호 감독과 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그런데 사실 같이 작업한 작품은 인권위 기획 『사이시옷』에 수록된 단편만화 「창」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처음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최규석 작가의 작업실 근처 만화방에서 그간 구상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부적인 스토리를 잡아 나갔다. 

단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인 <지옥: 두 개의 삶>이 모티프가 되었다. 

이야기의 베이스를 거기에서 가지고 왔다. 최규석 작가와 함께 작업하자는 대화를 나눴을 때 <지옥: 두 개의 삶>으로 뭔가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었다. 최규석 작가가 예전부터 그 작품을 좋아했다. 

작업하면서 <지옥: 두 개의 삶>의 시나리오를 썼던 시절이 많이 떠올랐겠다. 

<지옥: 두 개의 삶>의 첫 번째 이야기인 <지옥 part.1>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쓴 시나리오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나리오라는 걸 써본 셈인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 완성도를 떠나 그 설정 자체는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아이디어를 다시 살려보고 싶었다. 그땐 어떤 느낌만 있었지 작품을 만든다는 거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취향만 존재하는 상태였다. 

친한 친구와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땠나. 

어느 투자자보다 힘들더라.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웃음) 최규석 작가와는 워낙 말이 잘 통하고, 작품적으로도 취향이 맞아서 작업하는 게 수월할 줄 알았는데 같이 작업해보니 상당히 까다로웠다.(웃음) 중간에 아예 갈아엎고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도 했다. 

어디서 의견 차이가 있었나. 

『지옥』이 1,2부로 나뉘어 있는데 사실 초반 시나리오는 2부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보니 ‘애초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가정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다 쓰기까지 3~4개월쯤 걸렸나. 완성해서 메일을 보내고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한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한참 뒤에 연락이 온 거다. “이렇게 하면 안 될 거 같다”고.(웃음) 최규석 작가는 이런 세계가 등장하게 된 사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을 줬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지. “장난하냐? 그걸 왜 지금 얘기해?”(웃음) 결국 다시 썼다. 원래 2부에 있었던 이야기가 1부에 많이 반영됐다. 

예상했던 것과 반대다.(웃음)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영향력이 더 클 거라 생각했는데. 

영화로 따지면 이 작품은 최규석 작가가 감독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시나리오만 쓰면 그만이지만 그걸 연재하는 입장에서는 혼자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하고, 무대 디자인까지 다 해야 하는 거다. 그리고 최규석 작가는 작품의 내용과 주인공의 감정을 완벽히 이해해야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더라. 전화가 엄청 많이 왔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어떤 감정이냐고 물어보고, 본인이 생각할 땐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의견을 많이 줬다. 최규석 작가가 작업하는 걸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엇이 부러웠나. 

모든 걸 혼자서 다 창조해야 하지 않나. 예를 들어 ‘새진리회’의 공간이라고 하면 그게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등을 다 생각해야 한다. 말 그대로 혼자 배경 디자인, 배우의 표정, 화면의 구도 등 모든 걸 만들어내야 하는 거다. 나는 영화 작업을 오래 해서  그런 게 부러웠다. 영화는 외부 자본도 많이 유입되고,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수많은 사람과 협업한다. 배우와 소통도 해야 하고. 그런데 만화는 약간 개인 사업을 하는 느낌이었다.(웃음) 그래서 이번 작업을 하면서는 마음이 편했다. 만화를 연재하는 플랫폼에서도 작품을 관리하긴 하겠지만, 영화만큼 콘텐츠에 디테일한 관여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말 그대로 둘이 장사하는 느낌으로 작업을 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상상했던 장면이나 캐릭터가 최규석 작가의 손을 거쳐 그림으로 나왔는데 첫 화를 보고 어땠나. 

나는 최규석 작가의 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오랜 팬이기도 해서 그의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만든 이야기가 최규석이라는 걸출한 만화가를 통해 그려진다는 게 좋았다. 물론 내가 작업하는 방식과 조금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내 이야기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연출자에 의해 재해석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옳은가 

『지옥』이란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무척 이성적이지 않나. 그런데 알 수 없는 어떤 계기를 통해 순식간에 야만의 세계로 돌아가 버리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때 ‘야만의 세계로 가게 되는 원동력이 인간의 이성이라면 어떨까’라는 게 첫 시작이었다. 그 이야기를 미스테리 스릴러로 보여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두 존재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공권력’, 하나는 ‘신’이다. 공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형사가 주인공이 됐다. 

지금은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사회다. 공권력이 아닌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공권력의 상징이면서 장르적으로 스릴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을 생각했을 때 형사라는 직업이 적합했다. 형사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지옥행을 고지받는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방식으로 죽는다.  

명확한 이미지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새로운 현상으로 인해 동요하려면 마치 심판처럼 보일 명확한 액션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 현상을 해석하는 건 사람들의 몫이지만, 어쨌든 보편적으로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텐데, 그걸 명확한 이미지로 보여준다면 집단 광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새진리회’를 이끄는 정진수 의장의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정진수 의장 때문에 새진리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리뷰도 많았는데, 대사를 쓸 때 공을 많이 들였을 것 같다. 

정진수 의장만이 가진 논리가 분명히 있다. 보편적 다수, 평균적인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진수의 논리가 확실하게 존재하는데, 특별히 고민을 많이 했다기보다는 ‘내가 정진수 의장이라면 어떤 말을 할까?’라는 관점에서 대사를 많이 썼던 것 같다. 

새진리회를 열성적으로 추종하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화살촉’ 집단은 원주민 분장을 하고 있다.

원초적인 기원 같은 느낌이 필요했다.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세계 말이다. 새진리회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성으로 지어진 세계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원시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서 아프리카의 주술적 의미를 가진 분장들을 생각했다. 

등장인물은 대부분 가족을 중심으로 딜레마를 겪는다. 여러 가족관계 중에서도 특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많았다. 특별한 의미가 있나. 

아무 의미 없다.(웃음) 그저 보편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기본 단위가 가족이고 특히 부모와 자식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주인공이 딜레마에 빠지는 게 속도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분들이 사소한 부분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절대 사소한 부분에 무언가를 숨기지 않는다.

애니메이션 <사이비>에서도 종교, 사후세계 등의 이야기를 다뤘다. 평소에 종교나 죽음 등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편인가.

거의 안 한다.(웃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끌어오기에 종교가 좋은 소재인 건가.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나약한 면도 많고, 뭔가에 기대고 싶어 하고. 비단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살기도 하는데 이건 불안, 확실치 않음에 대한 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게 가장 큰 이슈인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면에 뭔가가 존재한다는 느낌말이다. 그게 음모든 신이든 이데올로기든.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종교인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업계가 종교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대부분의 업계가 종교화되어 있다고? 

예를 들자면 영화도 그렇다. 영화 찍으면 흥행하라고 고사 지낸다.(웃음) 특정한 뭔가를 해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막연한 믿음이 존재하는 거다. 그걸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지 모든 분야에서 맹신하는 게 있다. 종교인들도 자기가 뭔가를 맹신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종교를 믿지 않나.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다.(웃음) 왜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보면 알겠지 뭐’라는 입장이다. 얼마 전에 마이클 조던의 다큐멘터리를 재미있게 봤는데, 마이클 조던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절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운동을 열심히 할 뿐이지 오늘 이길지 질지 같은 거에는 신경을 안 쓴다는 거다. 그런 태도가 인상적이다.

일주일 뒤에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으면 그사이에 뭘 할 것 같나. 

변호사를 만나야지. 저작권에 관련된 것도 조정해놔야 하고, 앞으로 하기로 한 작품도 있는데 일주일 뒤에 죽으면 못하지 않나. 그럼 계약금을 어떻게 할 건지 다 정리를 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곤 사토시’ 감독이 췌장암으로 40대에 죽었는데, 본인이 죽기 전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한 걸 본 적이 있다. 엄청 정신없이 보냈더라. 일주일이면 쉴 틈이 없다.(웃음)

현재 『지옥』 시즌2 18화까지 공개됐다. 언제 완결될 예정인가? 

아마 8월 중에는 끝날 것 같다. 일단 최규석 작가와 같이 기획한 건 2부까지였기 때문에 시즌2로 작품이 완결될 거다. 그런데 이런 세계관의 작품은 얼마든지 다른 에피소드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후속작에 대한 가능성이 아예 닫혀있는 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야기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이번 작품으로 『지옥』의 세계가 끝난 게 아닌가? 

영원히 안 끝날 거다. 평생 하는 게 목표다.(웃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도 선보여질 예정이다.   

지금 촬영 중이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을 해야 하는 등 세부 작업이 많아 아마 내년 하반기쯤 방영될 것 같다. 

웹툰을 드라마로 만드는 작업인데, 무엇을 가장 신경 쓰고 있나. 

영상화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크게 만화와 다른 느낌을 주려 하진 않고 있다. 최규석 작가의 연출 방식 자체가 무척 영화적이기 때문에 그걸 잘 살리려 한다. 다만 촬영을 하다 보니 『지옥』이 꽤 까다로운 작품이더라. 등장인물 ‘박정자’ 집을 구하러 한 달을 돌아다녔다. 만화에 구현된 모습을 영상으로 찍으려면 비슷한 공간이 필요한데, 지옥에 가는 모습을 시연하는 장면을 찍으려면 벽을 다 헐어야 하지 않나. 그런 데가 어디 있냐고.(웃음) 그래도 다행히 겨우 구했다.

웹툰은 공개되는 즉시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린다. 특히 『지옥』은 구독자들 사이의 토론도 활발한데, 댓글도 보나. 

최규석 작가는 만화 그리느라 시간이 없어서 댓글을 아예 안 보고, 나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본다. 개별 의견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편은 아니고, 전체적인 분위기만 파악하는 정도다. 



작품이 기억되는 게 중요하다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그래픽노블, 드라마, 웹툰 등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선보인다. 경계 없이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뭔가. 

프리랜서라 그런 것 같다.(웃음) 사실 프리랜서들은 어떤 직업이 있다고 얘기하가기 좀 애매하다. 말 그대로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없으면 못 하는 거니까. 그런 관점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기회가 닿으면 이것저것 다 해보고 있다. 일단 하다 보면 뭔가 더 나은 게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했던 것 같다.

여러 플랫폼을 넘나들면서 오는 두려움은 없나. 

작품을 할 때마다 압박감은 있다. 나에게 제안을 해준다는 게,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만들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려면 힘이 들긴 한다. 그런데 그건 플랫폼을 옮겨가며 생기는 게 아니라 영화만 주구장창 해도 갖게 되는 두려움이다. 

연상호 감독을 이야기할 땐 늘 ‘대중성’과 ‘작품성’ 양쪽의 평가가 공존한다. 

작품이 새로 나올 때마다 ‘이게 진짜 연상호가 맞냐. 내가 아는 연상호는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건 작가로서는 행운인 것 같다. 어떤 논란 혹은 격렬한 반응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작가에게 좋은 일이다. 다만 “진짜 연상호는 뭐냐”고 많은 분들이 묻는데, 나는 작품에 내 진짜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웃음) 그리고 내가 대표해서 인터뷰를 하긴 하지만, 모든 작품은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나가는 거기 때문에 그 평가가 꼭 나만을 향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평가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진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가장 부합하는 건 어떤 작업이라고 생각하나. 

나이를 더 먹으면 만화를 하고 싶다. 만화는 개인적인 작업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혼자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싶다.

협업에 지친 건가? 

그건 아니고, 여러 명이 하는 일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화를 찍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무리 영화를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물론 지금은 어느 정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겼지만, 이게 평생 가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다. 

창작자는 무엇보다 대중의 시그널을 잘 읽어야 한다. 대중이 매력을 느낄만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있나. 

플랫폼을 이해하려고 한다. 웹툰, 영화, 드라마, 넷플릭스 등 다 같은 대중인 것 같아도 각 장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다른 것 같다. 내가 가진 이야기가 어느 플랫폼에 어울릴지를 주로 생각하는 편이다. 

플랫폼에 따라 팬들의 반응도 다른지 궁금하다. 

팬…? 팬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무슨 의미인가? 

팬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났는데, 팬을 본 적은 없다. 그냥 영화 한 번 봤으면 팬이라고 하는 거지. 기자들도 인터뷰하면 “팬이에요”라고 자주 말하는데, 팬은 무슨.(웃음) 나는 진짜 팬의 모습을 안다. 정치인들의 팬도 봤고, 같이 촬영하는 배우들의 팬도 봤다. 그런 게 팬이지, 작품 한 두 개보면 다 팬인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웃음) 그럼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 

사실 별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내가 아니라 작품이 기억됐으면 좋겠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나에게 팬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 내 팬이 아니다. 내 작품의 팬인 거다. <돼지의 왕>의 팬이니까 <부산행>을 욕하는 거고, <부산행>의 팬이니까 <염력>을 욕하는 거다. 사실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작품을 만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전면에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작품이 기억되는 게 중요하다. 

웹툰이 곧 결말을 앞두고 있다. 『지옥』의 최종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 것 같나. 

넷플릭스 측에서는 결말을 알지 않나. 시나리오를 다 보고서는 “이 다음에는 어떻게 되냐”고 묻더라. 그래서 “끝인데요?”라고 했더니 이대로 끝내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웃음) 



『지옥』을 책으로 만나 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만화책을 되게 좋아하는데 『20세기 소년』을 봤던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다. 친구가 그 만화를 추천하길래 재밌냐고 물었더니 만화방에 가서 딱 두 권만 빌려보면, 나머지 다 빌리게 될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정말 두 권을 빌려본 뒤, 바로 달려가 나머지를 다 빌려왔다. 『지옥』이 그런 경험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으로 출간된 『지옥』은 내가 동경하는 만화책이라는 것에 가장 근접하는 상태다. 너무 좋아하는 형식이고, 좋아하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그걸 잘 즐기셨으면 좋겠고, 아직 2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인데 2권을 기다리게 되는 책이길 바란다.



지옥 1
지옥 1
연상호,최규석 글그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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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방송인 안현모 “난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최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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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통역, 앵커, 예능 등 다채로운 안현모의 길에 ‘번역’이 추가됐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오프라 윈프리의 책이다. 『언제나 길은 있다』에는 세계적인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토크쇼에서 만난 90여 명 현자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명사들의 삶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은 안현모의 삶에도 단단한 뿌리가 되어 주었다. 미국 빌보드 뮤직 어워드, 북미 정상회담 방송 동시통역 등 중대한 행사에 서면서도, 늘 중심을 잃지 않았던 이유다. 

인터뷰 내내 안현모는 ‘최선’을 강조했다. 인생의 길에는 너무나도 변수가 많으니,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철저히 조사하고 연습하는 것뿐이라고. 실제로 그는 카메라 앞에 서는 한순간을 위해 밤새 정보를 수집하고, 행사의 세부 사항을 체크한다. 스스로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최선주의자’”라 말하는 그의 모습은 심플하되 깊다. 

“목적 있는 삶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 역시 세상이 바라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서 갈등하던 때가 있었죠. 지금은 내가 무얼 하기 위해 여기 있는지 분명히 알아요. 나의 본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매일 매일의 결정에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 오프라 윈프리



쉽고도 어려운, 지혜의 책

동시통역, 앵커, 예능까지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오셨어요. 이번엔 ‘번역가 안현모’예요. 어떻게 번역 작업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책을 번역했다고 하니, 주변에서 의외라며 놀라기도 하는데요. 사실 제게 완전히 새로운 일은 아니에요. 대학생 때 번역 아르바이트를 했고, 통ㆍ번역도 공부했으니 늘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오프라 윈프리의 『언제나 길은 있다』는 번역 제안을 받기 전에 이미 북 페어에서 접한 책이에요. 구성과 내용이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의뢰가 와서 기뻤죠. 조금의 의심 없이 반갑게 수락했어요. 

이 책의 매력 포인트가 무엇이었나요?

정말 지혜로 꽉 찬 책이에요. 오프라 윈프리뿐만 아니라 토크쇼 <슈퍼 소울 선데이>(Super Soul Sunday)에 출연한 90명의 현자들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요. 단순히 나열한 게 아니라, ‘씨앗’에서 시작해 ‘등반’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구성으로 짜여 있어요. 끝까지 읽고 나면, 세계적인 연사들의 손을 잡고 여행한 듯한 기분이 들죠. 

바쁜 스케쥴을 다 소화하면서도 어떻게 번역 작업을 했을까 궁금했어요.

다른 일을 병행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하진 못했고, 단기간에 집중해서 끝냈어요. 마침 코로나19로 행사가 취소되면서 시간이 많아졌거든요. 저도 거리두기 캠페인에 동참하면서, 번역 작업을 몰아서 할 수 있었죠.

통역과 번역 모두 외국어를 다루는 일이지만, 두 작업은 다를 것 같아요. 

확실히 달라요. 통역은 실시간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순발력이 중요해요. 번역은 기록으로 남으니까, 시간적 여유를 두고 작업해야 하죠. 저는 둘 다 잘 맞는 것 같아요.

번역을 하며 특별히 도움 됐던 것이 있나요?

인도로 명상 여행을 떠났던 경험이 예상외로 도움 됐어요.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읽고 명상에 빠졌는데, 오프라 윈프리의 이 책에 바로 그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말이 나오거든요. 오랫동안 영향을 받은 작가의 글을 제가 번역하게 된 거죠. 그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와, 놀라운 우연이네요! 

실제로 제가 다닌 명상학교 선생님들이 오프라 윈프리의 케이블 방송 ‘오프라 윈프리 네트워크(OWN)’에서 강의했어요. 오프라 윈프리도 그 강연을 들은 사람이니까 사고방식과 언어가 비슷하겠죠.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할 때, 훨씬 수월했어요. 좋은 번역은 배우가 연기하듯이, 실제 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번역할 때만큼은 오프라 윈프리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배경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말을 건네는 듯한 ‘해요’체로 번역하셔서, 더 마음에 와닿았어요. 문장과 단어 면에서 신경 쓰신 부분이 있다면요?

사실 이 책은 쉽고도 어려워요.(웃음) 내용을 다 이해하려면 굉장히 어렵지만, 표현 자체는 단순하거든요. 그래서 독자들이 쉽게 읽고 지혜를 탐구할 수 있도록,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했어요. 한자어나 어려운 단어를 쓰면, 깊은 세계에 들어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요.



공중곡예 같은 동시통역

“오프라 윈프리에게는 사람들의 내면을 보듬으며 지혜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에게서 가장 배우고 싶은 점은 무엇인가요?

방송인으로서 오프라 윈프리의 장점은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능력이에요. 대통령이든 평범한 시민이든 선입견 없이 경청하기 때문에, 상대방도 솔직히 속마음을 털어놓죠. 진행자로서 꼭 필요한 자질이에요. 그런 면모 덕분에, 세계적 명사들이 자신의 지혜를 선뜻 나눌 수 있었고 이 책도 나올 수 있었겠죠.

90명의 세계적인 길잡이들의 말이 나오지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면요?

다 좋아서 고르기가 어려운데.(웃음) 굳이 하나 꼽자면, 오프라 윈프리의 말이 기억나요. 그는 세계적인 토크쇼의 진행자인데도,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축사를 할 때 너무 긴장됐대요. 불안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대목을 읽고, 이렇게 말을 잘하고 성공한 사람도 큰일을 앞두고 고민하는구나 싶더라고요. 

역자님도 미국 빌보드 뮤직 어워즈 등 중요한 행사에 여러 번 섰죠. 긴장되지는 않았나요?

행사 직전보다는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늘 걱정해요. 그래서 준비를 더 철저히 하죠. 

늘 프로답게 해내서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데요.(웃음) 

많은 분들이 완벽주의자로 봐주시지만, 스스로를 ‘최선주의자’라 생각해요. 사실 어떤 것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죠. 능력, 환경, 운이 따라야 가능하기 때문에, 완벽하다는 말은 오만한 것 같아요. 그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해요. 

2018년 북미 정상회담 CNN 방송처럼 큰 행사를 맡을 때, 어떤 준비 과정을 거치시나요?

모르는 건 다 찾아봐요. 조금이라도 모르는 게 생기면, 잠이 안 와서 알아내야 직성이 풀려요. 큰 행사일수록 제가 모르는 정보가 있으면 큰일 나잖아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서 힘들긴 하지만 결국 남 주는 게 아니더라고요. 행사 당일, 막상 쓰는 정보는 절반에 불과하다 해도, 다음 행사를 진행할 때 나머지 지식을 활용하게 돼요. 그래서 늘 만반의 준비를 하는 걸 선호해요. 

역대급으로 힘들었던 행사가 있었나요?

솔직히 말할까요?(웃음) <어벤저스> 기자 간담회 행사가 역대급으로 힘들었어요. 통역 제의를 받았을 때, 마블 시리즈의 전편을 다 봤어요. 모든 고유 명사들을 메모해가면서 그야말로 정주행한 거예요. 그런데 막상 행사 당일에는 하나도 못 써먹었어요. 기자 간담회에서는 미리 영화 내용을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 대해서만 말하는 거예요. 영화를 볼 시간에 다른 기자 간담회를 많이 찾아볼 걸 후회가 되더라고요. 

행사 당일 변수가 많아서 말 그대로 완벽하게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겠네요. 그래서 동시통역을 “서커스 공중 곡예”에 비유하셨군요.

네, 간발의 차이로 외줄에서 떨어지는 공중곡예처럼, 동시통역도 잠깐이라도 집중력이 흩어지면 실수하게 되죠. 자료조사를 철저히 준비하고 수없이 연습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실수를 한 번이라도 하면, 마음에서 털어내기도 힘들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제가 털어내는 건 잘해요. 이별의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푼다는 말이 있잖아요. 일에서 실수한 건 다음에 맡게 될 일로 만회하려고 해요. 현재가 좀 미흡하더라도 다음 번에 잘하면 되지 하고 잊어버려요. 



가족은 소통의 원동력

“결혼은 하나의 모험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삶을 창조한다”(128쪽)는 문장이 인상 깊었어요. 역자님에게 결혼 생활은 어떤 의미인지요?

저도 그 문장이 공감됐어요. ‘따로 또 같이’가 결혼 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거든요. 너무 각자의 인생만 살아도 안 되고, 24시간 붙어 있어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각자의 시간과 함께의 시간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좋죠. 저희 부부도 바쁜 일정 속에서도 조화를 찾을 수 있도록 늘 노력하고 있어요.

가족이 ‘통역사 집안’이라고요. 어머니와 작은 언니의 영향을 언급하기도 했어요. 

작은 언니만 말했다가, 큰 언니가 한 달 동안 삐져서 풀어주느라 혼났어요.(웃음) 제가 막내였기 때문에, 나이 차 많이 나는 두 언니들을 보고 배우면서 자랐거든요. 지금도 저희 가족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단체 대화방을 통해서 24시간 수다를 떨죠.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에 저도 소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역자님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소통’인 것 같아요. 지금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으신지요?

네, 거창한 문제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소통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는 다 똑같은 물이지만, 댐처럼 사이에 수문으로 닫혀 있는 것 같아요. 그 문만 열면 서로 섞일 수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마음이 닫혀 있다가도 문득 열리는 순간을 좋아하고요. 그 소통은 저와 남편 사이, 부모님 사이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나요? 

번역 작업 내내, 독자들을 상상했어요. 진로에 대한 글에서는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서점을 기웃거릴 학생을, 자녀 양육에 대한 문장에서는 아이가 잠시 낮잠 자는 사이에 책을 펼쳐볼 주부 독자를 생각했죠. 그런 얼굴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내 떠올랐어요. 제 번역을 통해 이 책의 메시지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언제나 길은 있다
언제나 길은 있다
오프라 윈프리 저 | 안현모 역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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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윤 “팔리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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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욕’을 주제로 에세이를 쓴 작가라니. 대한민국 제1호가 아닐까. 편집자로부터 “작가님, 출세하고 싶잖아요”라는 말을 듣고 덜컥, 여섯 번째 책을 계약한 이주윤 작가.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는 출세욕에 가려진 집필욕을 발견하게 한 책이었다. 글을 왜 쓰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책을 잘 팔기 위해 저자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 등 독보적인 솔직함으로 무장한 글을 읽다 보면, 독자는 궁금증이 인다. “작가님, 이렇게 정직해도 되나요?” 쉬운 일도 어렵게 한다는, 수다는 ‘종이’에 떠는 이주윤 작가를 만났다. 



출세욕을 그대로 드러내다 

‘드렁큰에디터’에서 출간하는 ‘먼슬리 에세이’ 두 번째 책이죠. 어떻게 기획된 책인가요?

전작이 잘 안 팔려서 의욕을 많이 잃은 상태였어요. 인스타그램 계정(@leeeeeeejune)에 만화를 종종 올렸는데, 편집자 분이 보시고는 연락이 왔어요. 그때 올린 만화가 아마 나는 열심히 쓴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책이 안 팔리냐고 하소연한 이야기였어요. 

‘작가의 출세욕’을 써보자는 제안, 망설이지 않았나요?

별로 고민을 안 했어요. (웃음) 편집자님을 만난 자리에서 써보겠다고 했죠. 편집자님을 처음 딱 본 순간, 신뢰감을 느꼈어요. 책을 잘 만들어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 이후로 성인 단행본으로는 네 번째 책이에요. 집필은 어떠셨나요? 굉장히 빠르게 쓰셨을 것도 같은데요. 

6개월쯤 걸린 것 같아요. 독자분들은 재밌게 썼을 거라고 하시는데, 즐기면서 쓰진 못했어요.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이기도 했고 부담이 좀 있어서 힘들게 썼어요. 왜냐면 책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편집도 해야 하고 마케팅도 필요하고 인쇄도 해야 하고. 이 한 권의 책에 많은 사람의 노동이 들어가잖아요. 대충 써서 넘기면 안 되는 일이니까 책을 만들 때는 늘 부담이 생겨요. 이번 책은 편집자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한 꼭지씩 글을 쓰면 구글드라이브에 올렸거든요. 처음부터 의견을 맞춰 가는 게 좋으니까 피드백을 받으면서 작업했어요. 의견을 많이 주셔서 좋았고요.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인기 있는 작가들의 실명이 그대로 등장해서요. “그러나 독자들은 여전히 김애란, 임경선, 이슬아만 좋아했다.”(11쪽)보통의 저자들이 이렇게 실명을 언급하는 경우는 무척 드무니까요. 

블로그에 오랫동안 글을 쓰다 보니까 솔직하게 쓰는 게 버릇이 됐는데요. 이렇게 써도 될지, 편집자님께 괜찮다고 물었는데 문제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책의 타이틀이 ‘자학과 자뻑을 오가는 혼란한 작가 생활’입니다. 아마도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이 출간될 무렵 신문사에 칼럼 연재를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원고를 찬찬히 다듬을 여유가 있는 단행본과는 달리, 신문사에 원고를 한번 넘기면 그걸로 끝, 며칠 후면 전국 방방곡곡에 뿌려지잖아요. 여러 번 경험한 일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발가벗겨진 채 거리로 내쫓긴 느낌이 들어요. 더 잘 썼어야 하는데, 이것밖에 못 쓰다니 너무 분하고 창피하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신문을 죄다 수거해서 불살라버리고 싶다, 자학에 자학을 거듭하는 요즘이에요. 글을 쓰면 쓸수록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져요. 앞으로 책을 많이 파는 작가가 된다고 해도 자학을 멈추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래도 이런 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종종 자뻑하기도 해요. ‘내가 잘 쓰니까 신문 연재할 기회도 얻은 거야. 안 그래?’ 속으로만 되뇌는 말을 직접 하니까 너무 재수 없네요. 죄송합니다. 

(웃음) 대학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셨어요. 희곡, 에세이 등을 공부하고 방송작가교육원도 수료하시고. 그런데 간호사로 일하시기도 하셨다고요.

일하다가 쉬기도 해서 간호사 경력은 4년 정도예요. 책에도 썼지만 정말 특이한 케이스죠. 제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간호대학교에 바로 입학했거든요.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고요. 응급실에도 있었다가 노인병원에도 있었고. 제가 31살 때부터 직장을 안 다니고 글을 쓰기 시작했거든요. 경제적인 상황은 좋지 않았죠. 그러다가 일간지 연재를 하면서 주기적으로 일감이 들어왔던 것 같아요. 단행본 작업을 하고 삽화도 그리면서 전업 작가가 됐죠. 

글쓰기 책을 많이 읽으셨다고요. 글을 쓸 때, 꼭 지키는 것이 있나요? 

흐름이 끊기는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해요.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이해가 안돼서 “무슨 말이야?” 하고 위에서부터 다시 읽을 때가 있잖아요. 내가 딴 생각을 했나 싶어서 다시 읽는데도 이해가 안 될 때, 그건 저자가 독자를 배려하지 못한 것 같아요. 흐름이 잘 이어지는 글을 쓰려고 노력해요. 

‘출세욕’은 어떻게 정의하면 될까요?

글을 쓰려면 누군가 기획을 줘야 하잖아요. 투고를 하더라도 누군가의 평가가 필요하죠. 저에게 출세욕이란, 누군가가 출간 제안을 해주는 일? 사실 그 정도죠.



책을 팔려면 돈값 하는 글을 써야 한다

인스타툰으로 책 홍보를 엄청나게 하고 있어요. 독자들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는 일은 어떤가요?

음. 어쨌든 저도 책 내용처럼 출세를 해야 하니까요. (웃음) 어떻게 보면 영업을 하는 셈인데, 책 홍보만 올리면 반감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짧은 만화를 그리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원래 저는 독자분들이랑 소통하고 그러는 걸, 잘 못하고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재밌어요. 제가 인스타그램에 두 시간 정도 안 나타나면, 편집자님이 댓글로 저를 막 소환하세요. 행방불명 신고할 거라고. (웃음) 우선 ‘먼슬리 에세이’ 3권이 나올 때까지는 열심히 해보려고요. 

작가들이 독자 리뷰를 꼼꼼히 본다는 건, 독자들에게도 기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인스타그램 리뷰를 살펴보면 일반 독자보다 출판 관계자가 이 책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그런데 이전에 다른 주제로 책을 냈을 때도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독자들은 작가님 책 몰라도 편집자들은 다 알아요!” 그 말이 고맙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씁쓸하더라고요. 독자 여러분은 여전히 저를 모르시겠지만, 그래서 제가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지 역시 모르시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어요. 저는 쉽고 재미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오락을 즐기듯 읽을 수 있을 거라 자부해요. 그래서 ‘일 년에 책 한 권쯤 읽는 게 목표인데 도무지 읽기 싫다!’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제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나요?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는데 저에게 보여주고 자문을 받고 싶다는 50대 중년 남성의 리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처음에는 가족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점점 출간 욕심이 일어났다고 해요. 그런데 제 책을 읽다가 ‘독자에게 책을 팔려면 돈값 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으신 모양이에요. 과연 본인의 글이 돈값을 하는지 의문이 들었던 거죠. 사실 리뷰 자체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말 제 메일로 200쪽 가량의 원고를 보내 오셔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제가 누군가의 글을 평가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성심성의껏 의견을 드렸어요. 감사했어요. 



돈값, 솔직히 중요하죠. 에세이에서 ‘솔직함’이 중요한 것처럼요.

출판계에 갓 입문한 저에게 어느 출판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주윤 씨 글은 솔직해서 좋아요. 나 같으면 쪽팔려서 그렇게까지는 못 쓸 것 같거든.” 저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작가들은 거짓으로 글을 쓴다는 건가? 그럼 독자들은 남이 하는 거짓말을 돈 주고 사서 읽는 건가? 그런데 계속해서 글을 쓰다 보니 자신의 민낯을 보여주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는 편이 훨씬 쉽고 간편하고 있어 보이기까지 하더라고요. 저 역시 거짓으로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많아요.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설득해요. 독자에게 거짓말을 파는 건 작가가 아닌 사기꾼이 할 짓이라고요.

잘 팔리는 것과 무관하게 책을 써도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나요?

제 글 앞에 항상 따라붙는 게 ‘재기 발랄’이거든요. 매번 발랄할 수는 없기도 하고, 가끔은 우울하고 진지한 글도 쓰고 싶어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요. 

수입이 적지 않은, 전업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뭐라 딱히 할 말은 없는데요. 원래 그러니까 그러려니 하자?! 굳이 말한다면, 저는 무조건 전업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다른 일을 같이 하면서 해도 되니까요.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글로 수입이 너무 적으면 다른 일을 해야겠죠. 다른 일을 하더라도 인생의 경험은 쌓이는 거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흥미를 잃지 않는 일이에요. 

혹시 롤 모델이 있나요?

마스다 미리 작가가 생각나요. 모든 책을 읽은 건 아니라 글의 내용까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다작을 하시면서도 인기가 있고, 그림과 글로 먹고 살잖아요. 저도 다작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출판사에서는 ‘먼슬리 에세이’ 시리즈를 계속 출간할 텐데요. 라인업에 올라온 10명의 작가 중에 1등을 할 자신이 있나요?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아요. 10명 중에 1등하고 싶어요. 다른 책으로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중에서는 1등을 하고 싶어요. 아, 기대되는 저자는 석윤이 디자이너님이에요. 아이덴티티에 관해 쓰실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아무래도 미술을 전공했으니까, 관심이 많이 가네요. 편집자님이 제 책은 스테디셀러로 사랑받을 거라고 했어요. 믿어 봐야죠. (웃음)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이주윤 저
드렁큰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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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실패한 인생은 어떻게 계속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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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의 신작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쓰기 전까지, 김연수는 어두운 터널 안에 있었다.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앞으로 더 나빠질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인생 도대체 뭐지?' 하며 고민하던 나날이었다.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이 되어 북한 변두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백석. 이 실패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은 소설이 된다고 믿는 김연수는 자신의 믿음대로 무너진 백석의 현실을 소설로 재건했다. 쓰지 않음으로써 시를 지킨 백석의 마지막 7년. 그 역설을 쓰면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_작가의 말 중에서 



눈보라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 이야기 

8년 만의 신작 소설이에요. 20년 전에 처음으로 이야기를 구상했다고요. 오래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 놓은 느낌이 어떤가요?

느낌이 묘한데요. 이 책은 자기가 나오고 싶을 때 나온 것 같아요. 언젠가는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평생 품고 살아갈 이야기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백석 시인의 이야기였어요. 2016년부터 뒷부분을 연작 단편으로 쓰고, 이제 끝을 내야겠다 싶어서 올해 1월부터 다시 썼는데요. 이렇게 나올 줄 몰랐고 분명히 제가 썼는데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안 나요. (웃음)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나 싶어서 의아하기도 하고요. 

이 소설을 쓰면서 위로받았다고요.  

8년 만에 나온 신작이지만 그동안 쓰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계속 써왔는데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안 나왔죠. 출판할 만한 이야기를 못 썼다는 건데… 계속 이런 의문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생 도대체 뭐지?’ 하는 고민이요. 행복하고 성공하면 사는 이유가 분명하잖아요. 내일이 기대되니까. 그런데 ‘내일이 기대되지 않고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무언가가 한 번 훼손된 후에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살지?’ 이게 해결되지 않았어요. 물론 ‘생명은 소중한 거야’ 라든지 ‘희망이 있다’는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사실 자신도 예상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쓴 거죠. 다행히 쓰면서 마음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아주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 사람에게도 어떤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요. 

어떤 희망인가요?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많이 찾아봤는데요. 북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한은 지난 70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변했어요. 아마 타임머신 타고 가서 그때의 사람들에게 “70년 후에 서울이 이렇게 바뀔 겁니다. 그러니 희망을 품고 사세요”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겠죠. 그만큼 그때 그 사람들한테는 희망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무언가를 계속했단 말이죠. 그래서 사회가 발전하고 지금까지 왔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 속 ‘옥심’처럼 못 견디고 죽는 사람이 있고요. 기행(백석의 본명)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희생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안 죽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이런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거죠. 체제나 정부, 권력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조종하려고 하고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강하게 살아남아서 삶이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대체 이 힘이 뭘까?’ 하고 굉장히 궁금했는데 소설 속에 나오는 카자흐 여인들에게서 힌트를 얻었어요. 

중앙아시아로 쫓겨온 한인들에게 빵을 준 카자흐 여인들이요?

동쪽에서 온 낯선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굽잖아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찾아와서 ‘일단 먹자’고 하는 거예요. 화물칸에 실려 와서 버려진 한인들이 울면서 빵을 먹고요. ‘네가 살아 있어야 전체가 살아 있는 거다’라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죠. 자연스럽게 지금 상황을 떠올리게 됐어요. 

이를 테면요?

지난 8년 동안 사는 게 괴롭고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사회가 점점 나빠지는 것 같고 앞으로 더 나빠질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그게 편견이고 착각이라는 걸 알았어요. 전체적으로는 좋아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코로나19 때문에 일상이 파괴되고 있잖아요. 이것만 해도 이렇게 힘든데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은 지금 상황의 수천 배쯤 되지 않겠나 싶고,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런 사회를 건설했다고 생각하면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서 많은 사람이 희생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끝내 안 죽고 살아남아서 뭔가를 만들어 낼 것 같아요. 이게 인류가 가진 원동력인가보다 이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건 기업이나 권력의 힘이 아니고 이 힘이겠구나 싶었어요. 사람들이 살려고 하는 힘. 그 힘은 없어지지 않겠다는 생각이요.

사람이 살려고 하는 힘을 발견하면서 무기력에서 벗어난 건가요?

맞아요. 그 힘을 믿어보자 싶었고요. 또 다른 하나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덕분이었어요. <겨울밤>이라는 시인데 내용을 보면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집안의 촛불 하나가 타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화자는 여름날을 꿈꾸고요. 보자마자 어떤 시인지 알겠더라고요. 눈보라는 소비에트, 촛불은 시인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인 거죠. 그런데 엄청난 눈보라에도 촛불이 끝내 안 꺼져요. 

백석 시인의 이야기와 겹쳐지네요. 

사실 백석의 이야기는 촛불이 꺼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겨울밤>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웠는데 사실로 믿고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소설을 쓴 거죠. 언젠가부터 위대한 문학 작가들의 말은 사실 내지는 사실이 될 거라고 믿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소설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쓰인 거예요. 

실제로 소설에 눈과 불꽃이 자주 등장해요. 중요한 상징으로 느껴졌어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겨울밤> 속의 눈과 불꽃의 이미지가 저를 사로잡은 거죠. 언뜻 보면 백석의 이야기가 불이 꺼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꼭 불이 꺼졌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본인은 잊힐 거로 생각하고 죽었지만, 나중에 백석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시집이 출판돼서 집마다 깔리게 되잖아요. 이건 눈보라, 그러니까 어떤 권력도 막을 수 없는 불꽃이에요. 권력을  뛰어 넘어서 불이 옮겨붙은 거니까요. 

모든 게 카자흐 여인들의 이야기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덕분이네요. (웃음) 

맞아요. 두 가지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나서 확신을 가진 거죠. 사람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가치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더라도 그 가치는 후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요. 이 생각을 하고 나서 개인적인 어려움도 많이 극복됐어요.



세 번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디오북으로 먼저 나왔죠. 집필 작가가 직접 녹음한 건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원래 오디오북을 좋아했어요. 2000년대 초반에 영국에 있을 때 아침에 설거지하고 있으면 BBC에서 『전쟁과 평화』를 들려주더라고요. 드라마타이즈하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거였는데 그게 부러웠어요. ‘우리는 왜 이런 거 안 하지?’ 싶었고요. 처음에 네이버에서 제안했을 때는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했다가 책을 다 쓴 다음에는 안 하겠다고 했어요. 최선을 다해 썼는데 제 목소리 때문에 독자들이 못 들으면 어떻게 하나 싶고, 소설에 할 짓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전문 성우가 읽는 게 낫겠다고 했더니 네이버에서 일단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성우를 섭외하자고 해서 일단 했는데… 역시 잘 못 하더라고요. (웃음) 사투리가 있어요. 

나중에 생각이 바뀐 이유는요?

제가 쓴 글은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알아서 NG가 많이 안 났는데 백석이 쓴 글은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백석의 산문을 읽는 부분에서 NG가 많이 났어요. 글 쓰는 사람의 호흡과 읽는 일이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호흡을 끊는다는 점에서는 내가 제일 잘 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수락했어요. 

댓글로 독자들의 반응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오디오북의 특징일 것 같은데요. 인상적인 후기가 있다면요? 

엄마랑 같이 들었다고 하신 분이 있었어요. 원래 책은 혼자 보는 거였는데 오디오북은 소리니까 누군가와 같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평소에 독자들을 자주 상상하는데요. 혼자 집에서 읽거나 카페에서 읽는 모습이 그동안 상상한 독자의 모습이었다면 오디오북을 듣는 독자들은 더 다양할 것 같았어요. 산책하면서 듣거나 운전하면서 듣거나 헬스 하면서도 들을까 싶고…. 그리고 그동안 밝히지 못한 바람이 있었는데 이번에 만든 오디오북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뤄졌어요.

어떤 바람인가요? 

그동안 감히 말하지 못했지만 내 책을 세 번 읽어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어요. 네 소설이 뭐라고 세 번이나 읽으라는 거냐고 욕먹을까 봐 한 번도 말한 적은 없는데요. (웃음) 독자들이 오디오북으로 이야기를 접하면 어쩔 수 없이 두 번 읽더라고요. 일단 듣고 다시 읽는 거죠. 세 번 들은 사람도 많고요. 집중했든 안 했든 일단 이야기를 세 번 접한 거죠. 그래서 ‘아 소원을 성취했구나’ 싶었어요. 뜻한 건 아닌데 원했던 바가 이뤄져서 흡족해요. 

왜 세 번인지 궁금해지는데요. 두 번도 아니고 네 번도 아닌...(웃음)

세 번 읽으면 누구나 그 텍스트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게 제 신조예요. 예전에 서평이나 영화 감상평을 많이 썼는데요. 세 번 보면 뭐든 다 쓸 수 있어요. 자기 이야기와 책이 연결된 서평이 좋은 서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한 번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요. 두 번 읽으면 ‘아 이런 이야기구나’ 하고 분석하는데 세 번 읽으면 이 책에 관한 내 이야기가 나와요. 

작가님이 첫발을 떼셨으니 다른 작가들도 많이 녹음했으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 꿈꿨던 일 중 하나인데요. 뉴욕에 작가들이 단편을 자기 목소리로 읽고 설명하는 팟캐스트가 있어요. 그걸 들으면서 왜 우리는 이런 팟캐스트를 안 하나 궁금하더라고요. 저작권 등의 문제가 있겠지만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지 않을까요? 꼭 계간지에 발표하라는 법 없잖아요. 

팟캐스트 좋은데요. 작가님이 시작해보면 어떤가요? 

예전에 비슷한 건 해봤어요. 최은영 작가가 책 내기 전인데요. 『쇼코의 미소』를 보고 ‘이 사람은 크게 될 사람이다’ 싶어서 신작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대학로의 공연장을 빌려서 작가의 목소리로 처음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행사를 했어요. 그때 나온 소설이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신짜오 신짜오>예요. 최은영 작가도 그때 처음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거였는데 낭독이 끝난 뒤에는 간단히 설명하고 독자와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이런 거 하면 정말 좋을 텐데 왜 안 하나 싶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자연스럽게 바뀌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지막 장의 제목이 책 제목이 됐어요. 고심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지어졌나요? 

백석 시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쓰고 싶었는데 시가 너무 직설적이어서 아무리 봐도 쓸 만한 게 없었어요. 그래서 계속 못 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석탄이 하는 말>을 읽는데 ‘일곱 해의 마지막’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미 여러 번 읽은 시인데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이거다! 이거 제목으로 하면 되겠다’ 싶어서 결정했어요. 그러고 나서 이게 왜 제목같이 느껴지는 궁금해서 햇수를 헤아려봤는데 공교롭게 소설이 1956년부터 1962년까지 딱 7년의 이야기인 거예요. 신기했어요. 백석 시인이 책에 제목을 시에 남겨놨구나 싶기도 하고… 운이 좋았죠.

실존했던 인물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를 쓴다는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만약 나중에 무언가가 발견돼서 ‘사실은 백석이 체제에 완전히 충성했다더라’ 하면 이야기 전체가 무너지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어떻게 밝혀지든 백석을 모델로 또 다른 세계에 사는 ‘기행’이라는 주인공을 만들었고, 기행은 자기가 알아서 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가 아닌 다른 현실에 있는 백석 시인이 이 소설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글쎄요. 실제는 다를 수 있는 건데… 후배 작가로서 최선을 다해서 상상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냥 ‘수고했다’라고 하겠죠. (웃음) 그러면서 문학이란 사실 여부와 관계없는 거라고, 상상이란 그런 거라고 이야기할 것 같아요.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혹시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소설의 한 장면을 그려준다면 어떤 장면을 꼽고 싶은가요?

한 장면만 꼽아야 하는 거죠? (웃음) 마지막 장면에서 언덕 위 방목장에 올라가서 확 트인 하늘을 보는 장면이요. 아, 꼭 하나만이라면 바꿀게요. 기행이 양을 치다가 달을 보면서 달이 왜 이렇게 밝고 선명한 것인가 생각하는 장면이요. 그 장면이 클라이맥스거든요.. 

독자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면서 쓸수록 쓰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했는데 이번 책을 쓰면서 구체적으로 상상한 독자가 있나요?

있어요. 제가 발표하지 않고 오래 쓰고 있는 소설이 있는데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어렵대요.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거다”, “소설을 공부하면서 읽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을 들어서 고민했어요. ‘내가 잘하는 건 이건데 시대가 요구하니까 달라져야 하는 건가?’ 하고요. 이를테면 쉽게 읽히는 소설을 쓰고 가벼운 주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변해야 하나 고민한 건데요. 이 소설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시대에 맞춰서 억지로 바꿀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나서 독자를 상상했죠. 

어려운 소설도 찾아서 보는 독자일까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순문학이라는 말을 싫어해서…. 영화로 치면 예술영화라고 해야 할까요. 의미나 상징이 많고 독자가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서 어떤 사람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소설인데요. 이런 소설을 원하는 독자도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많지는 않겠지만요. (웃음) 그러면 아무래도 나이가 꽤 있는 분일 테고 생각이나 고민이 많은 분이 아닐까 싶어요. 

항상 어떤 고민이나 의문에서 소설이 시작되잖아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소설로 출발하지 않은 고민이 있다면요?

일단 이번 소설을 쓰면서 많이 해결됐고요. 또 다른 게 있다면 소현 세자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소현 세자의 꿈이 끔찍하게 좌절되는 이야기인데요.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라기보다 더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실패한 이야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우리가 소현 세자의 이야기에서 무얼 발견할 수 있을까 궁금해요. 



희망 없는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은 걸까요? 이야기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요?

이야기의 효능을 믿어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경험하고 자기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접할수록 자기 인생도 그런 식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소설가의 임무라고 생각하고요. 




일곱 해의 마지막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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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연 “생각을 말하지 말고 욕구를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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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만 독자의 선택을 받은 『엄마의 말하기 연습』의 박재연 저자가 새로운 책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로 돌아왔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말들’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명쾌하다. “결국, 듣기 어려운 말은, 화자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공감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가로막는 모든 말”이라는 것. 

상대의 말에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는 뭘까. 말 속에 감춰둔 진짜 마음을 알아채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화자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말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무언가를 자극했거나. 원인과 상황은 다양해도 본질은 같다. 많은 이들이 말 속에 자신의 욕구를 담아내는 데 서투르고, 상대의 말에서 진짜 욕구를 읽어내는 방법도 잘 모르는 데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반응하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우리가 그간 잘못 배워온 대화”를 함께 배우고 연습해 보자고 제안한다. 

박재연 저자는 오랫동안 비폭력대화, 죽음학, 인지행동치료, 심리도식치료를 배우며 임상 경험을 쌓아왔다.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에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단절의 대화’ 양상을 보여주고 원인을 설명하며, 어떻게 하면 ‘연결의 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지 해법을 제시한다. 제대로 듣고 바르게 말하는 방법을 연습할 수 있는 대화 안내서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대화를 망친다?

이번 책은 밀도가 높은 것 같아요. 많은 내용들이 빼곡히 담겨있다고 할까요.

대한민국의 어른들을 위한 책이지만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서른다섯부터 쉰다섯 사이의 독자들을 생각하면서 썼어요. 그 즈음 되면 뜻대로 되지 않는 많은 관계들을 경험하거든요. 제가 만나는 분들도 40대 중후반, 50대 분들이 많아요. 제일 많이 하시는 말 중에 ‘저 사람이랑 일 못하겠다’, ‘저런 사람 처음 봤다’, ‘저 사람만 없으면 살 것 같다’가 있는데요. 핵심은 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이 고통스럽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통제할 수가 없거든요. 상처가 되는 말을 잘 받아서 다시 돌려줄 수 있는, 주체의식을 가질 수 있는 대화 습관을 어떻게 연습해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이 책을 쓰게 됐어요. 

좋은 대화란 어떤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좋은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안타까운 대화를 하고 있는데, 주옥 같은 마음을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는 다 능숙해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요. 첫 번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솔직하게 표현해봤더니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든지, 그래서 어려서부터 ‘내가 솔직하게 원하는 걸 말하면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구나’라고 배웠다면 어른이 되면서 원하는 걸 말하는 용기를 갖지 못했겠죠. 그보다는 에둘러 표현하거나, 침묵하거나, 참거나, 참았다가 공격적으로 표현하거나, 부탁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알아서 해주기를 기대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거죠. 이건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와 연결돼 있어요. 

그럴 것 같아요. 

우리는 참고 인내하는 것이 좋은 거라고 배웠잖아요. 여성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해왔고, 남성들은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교육받아 왔어요. 그런데 대화의 목적은 문제 해결도 아니고, 헌신과 인내도 아니에요. 서로가 연결되는 거거든요. 어쩌면 연결감은 타고난 본성 중에 하나인데, 우리는 그걸 잃어버린 거죠. 대화에서 연결감을 되찾아가는 것이 핵심이에요. 그러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굉장히 달라져요. ‘너에게도 욕구가 있었고, 나에게도 욕구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둘 다 충족할 수 있을까?’라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죠. 그걸 다시 탐색해가는 것이 대화 훈련의 핵심이에요. 

항상 ‘연결의 대화’를 강조하시는데요. 그만큼 우리 사회에 ‘단절의 대화’가 만연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단절의 대화에도 유형이 있을까요? 

우선은 대화의 변수를 살펴봐야 하는데요. 일단 직장과 일터에서 단절의 대화가 일어나고 표면화 되는 이유를 살펴보면, 핵심은 힘이에요. 파워 오버와 파워 언더가 존재하는 조직이고, 그 안에 돈이라는 물질이 개입되잖아요. 그런 장소에서는 단절의 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두 번째는 가정, 그 중에서도 부부 사이인데요. 부부 사이에서 대화의 변수는 자아성찰이에요. 핵심적인 신념(핵심 신념, core belief)이 형성돼서 굳어지는 나이를 20세 정도로 보는데요. 법적으로 20세 이후에 결혼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전혀 다른 성격으로 형성된 사람이 만난 거예요. 두 사람이 잘 지내기 위한 대화의 변수는 자아성찰이에요. 내가 어떻게 자라왔는가, 내가 어떤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돌아봐야 되는 거죠. 세 번째는 부모와 자녀 사이예요. 이 관계의 대화의 변수는 역지사지예요. 이해의 마음이에요. 우리 아이가 어떤 마음일까, 나는 어릴 때 어땠는가, 생각해 보는 거죠. 

관계 유형은 달라도 대화가 어그러지는 이유는 비슷한가요?

같은 이유가 있는데, 저희는 그걸 ‘자동적 생각’이라고 표현해요. 20년 동안 굳어져 온 신념 체계가 만들어낸, 툭 떠오르는 침투적인 생각을 말하는데요. 자동적 생각의 여섯 가지 패턴-판단, 비난, 강요, 비교, 당연히, 합리화의 대화 패턴을 반복할 때 그 대화는 실패해요. 조직에서 파워 오버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파워 언더에게 말을 하면 당연히 대화는 어그러지죠. 파워 언더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다음부터 자신의 역량을 최소한만 발휘해요. 그러면 대화는 또 어그러지죠. 

부부 사이는 어떨까요? 

그런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조직원이 배우자를 만날 때 ‘내가 얼마나 피곤한 하루를 보냈는지 알아?’ 하면서 ‘네가 배우자라면 당연히 나에게 맞춰줘야지’라고 합리화를 해요. 그렇게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아이를 보면 ‘너 숙제 했어, 안 했어? 너 누구 닮아서 그래?’ 그러는 거죠. 이 말을 들을 때 우리 아이가 어떤 마음일까 하고 역지사지로 생각하지 않고 말하면 그 관계 또한 단절이 되는 거예요. 조직과 가정, 사회적 관계는 도미노처럼 서로 연결돼 있어요.

예로 들어주신 말들이 낯설지 않아요. 책에 나온 사례들을 보면서도 느낀 건데요. 우리가 나누는 말들이 생각보다 식상한 것 같아요. ‘자동적 생각’이 몸에 배어있는 거죠. 

그렇죠? 조금 지겹지 않으세요? 저희는 워크숍을 할 때 자동적 생각을 실컷 나누게 해요. 솔직하게, 자신이 했던 말들을 다 날 것으로 뱉어내게 해요. 처음에는 떠오르는 게 없다고 하시던 분들도 누군가 먼저 터트리면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해요. 그러고 나서 제가 말하죠. ‘어떤가요? 여기 새로운 말이 하나라도 있나요? 다들 지겹지 않으세요? 이제 그만 버리고 싶지 않으세요? 우리가 다른 말을 배워봐야 되지 않겠어요? 본성적으로 타고난 언어를 다시 회복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요. 그러고 나서 시작해요. 자동적 생각이 우리 몸에 다 차버려서, 다른 말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르거든요. 정말 슬픈 일이에요. 학교나 가정에서 이런 걸 배우지 못하고, 머리는 과도한 지식으로 충만한데 마음에는 정서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모이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배우는 거예요. 



생각을 말하지 말고 욕구를 말하세요

“대화 훈련을 통해 희망하는 것은 ‘자동적 생각 그만두기’가 결코 아닙니다. ‘자동적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라고 쓰셨어요.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나요?

완연히 달라져요. 책 속에 자동적 생각을 그린 표가 있는데, 저희는 그 표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바탕화면에 저장하시라고 말씀드려요. 그리고 두 가지 과제를 내드려요. 첫 번째는 ‘한 주 동안 무엇을 말했는지 찾아보기, 그리고 그 말을 안 하려고 하지 말기’예요. 그런데 점점 안 하고 싶어져요. 하지 마시라고 하면 저항감이 올라오기 때문에 다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그렇지만 말하고 나서는 꼭 찾아보시고 소리 내서 읽으세요’라고 말씀드리는데요. 예를 들어서 ‘이딴 식으로 할래?’라고 말했다면 (표를 보고서) ‘아, 내가 자동적 생각에 비난과 강요를 섞었구나’ 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상대를 보면 ‘미안해’라는 말이 나와요.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분류해보는 건데요. ‘저 사람이 지금 자동적 생각 중에서 비난을 하고 있구나’라고만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려요.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흔히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요. 

상대가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자기 안에서 답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럴수록 오해는 더 커지죠. 책에서 ‘관찰부터 시작하라’고 강조하신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판단을 유보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후설(Edmund Husserl)이라는 철학자가 ‘비판단으로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비판단이라는 건, 판단이 나쁘다는 개념이 아니라, 판단을 보류한 채 관찰로 돌아가라는 말이에요. 판단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어요. 그러나 ‘내가 판단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어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진짜 관찰의 명언이거든요. ‘물에 들어가면 춥겠지?’가 아니라 ‘저기 물이 있구나’ 하고 그냥 보라는 거예요. 그저 본 대로 들은 대로. 그게 굉장히 중요해요. 그것만 해도 대화가 끝나는 경우도 있어요. 제 아들이 방 청소를 너무 안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방문을 열고 보니까 온라인 게임을 하다가 쉬고 있더라고요. ‘왜요?’ 하고 물어보기에 ‘아니야, 그런데 바닥에 수건이 있어’ 그랬어요. 그랬더니 ‘아, 미안해요’ 하면서 바로 주워서 ‘엄마, 이것 좀 넣어주실래요?’ 하더라고요. 우리는 그날 싸움은 피한 거예요. 저는 그냥 본 것만 이야기한 거죠. 

마셜 로젠버그 박사의 말을 인용하셨어요. ‘우리의 모든 말은 부탁이거나 감사의 표현’이라고요. 나를 베고 찌르는 말들도 ‘부탁 또는 감사의 표현’인 걸까요? 애써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를 위해 좋은 일일까요?

세상에는 이른바 ‘아가리 파이터’가 존재하죠. 그 사람들을 이해할 것인지 차단할 것인지는 나의 선택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 듣기 힘든 말을 하는 대상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사무치게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아주 측근들이에요. 그리고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이죠. 매일 문을 걸어 잠그고 같이 자는 사람들, 싸워도 다음 날이 되면 같이 밥을 먹어야 되는 사람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지만 나한테 돈을 주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당신에게 필요하고 소중하고 중요한 대상이라면 그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그게 당신의 삶에 실질적 도움이 되기 때문이에요. 상사라면 당신한테 월급을 주기 때문이고, 부모라면 당신이 그 안에서 행복한 관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자녀라면 당신의 마음속에 좋은 부모가 되고픈 핵심적인 요구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일단은 ‘그 사람의 말을 들을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해야겠네요. 

그렇죠. 말을 들어야 할 대상이라고 해도 이런 마음이 들 수 있어요. ‘왜 매번 내가 양보해야 하지?’, ‘왜 맨날 내가 지는 기분이 들어야 되지?’ 그런데 정말 내가 지는 것인지 따져보자는 거예요. 어느 날 저희 엄마가 새언니에 대한 불만을 저한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저는 새언니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엄마의 마음도 이해가 돼서 ‘엄마, 서로 조금만 이해를 해보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제 가슴을 찌르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네가 대화 선생이라며?’ 그 말부터 듣기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무시할 수 없는 대상이잖아요. 들어주자니 내가 지는 기분이 들고요. 그런데 엄마가 한 번 더 찌르시는 거예요. ‘네가 밖에서나 대화 선생이지, 지금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그리고 너 지금 누구 편이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제 방으로 갔어요. 물론 이런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어요. ‘내가 저런 말을 들어야 돼?’, ‘내가 대화 선생이어도 그렇지, 저런 말까지 들어줘야 딸이 되는 거야?’, ‘도저히 못 하겠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합리적 판단과 공감이 필요해요. 저 말을 들을 것인지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돼요. 그 다음에는 내 마음과 엄마 마음이 어떤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엄마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는 거예요. 만약 제가 엄마와 싸웠다면 저한테 득이 됐을까? 

한동안 계속 속상하셨겠죠.

저는 ‘엄마는 말을 들어봐야 될 대상이고, 엄마의 말을 들어보는 것은 내가 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가서 ‘엄마, 섭섭했어?’ 그랬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엄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거예요. ‘엄마도 언니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잘해주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돼서 너무 속상해서 공감 받고 싶었을 텐데, 그렇지?’ 그랬더니 엄마가 하염없이 우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방에 들어가시더니 조금 후에 ‘밥 먹을래?’ 하셔서 저는 엄마가 차려주신 밥 먹었어요(웃음).

상대가 힘듦을 토로할 때, 제일 좋은 듣기 태도는 어떤 건가요?

첫 번째는 그 사람의 말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거예요. 두 번째는 복합 반응으로 그 사람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감정을 말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생각과 말을 구별하지 못해요. 예를 들어서 엄마가 ‘새언니가 열흘에 한 번 전화하는데, 그러면 되겠니?’라고 한다면, 열흘에 한 번 전화해서 섭섭했다는 게 엄마 마음인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니?’라는 건 생각이잖아요. 그럴 때 ‘그때 엄마 마음은 섭섭했던 거야?’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생각으로 가거든요. ‘응, 네가 생각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러거든요.

맞아요. 동조를 구하죠. 

그때는 그 사람의 감정을 다시 한 번 짚어주면서 감정의 원인을 찾아줘야 돼요. ‘엄마가 원했던 건 주기적으로 소식도 알고 싶고 반갑게 통화도 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새언니가 전화 안 해서’라는 말만 빼면 돼요. 이건 아주 미묘한 차이이지만 의식에는 엄청난 전환을 갖고 와요. 엄마는 ‘아, 내가 소통하는 걸 되게 중요하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며느리가 자주 전화해주기를 바랐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 욕구가 충족이 안 돼서 섭섭했던 거예요. 감정의 원인을 욕구에서 찾아주는 게 핵심이에요. 그 사람이 정말 바라던 것을 찾아주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의 욕구를 모르겠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모를 때는 그 사람한테 물어봐도 돼요. 그런데 비난이 아니라 질문을 해야 돼요.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이해하고 싶은데 몰라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요. 대화에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요. 당연히 기술도 필요하지만 그건 세 번째예요. 첫 번째는 상대를 연민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저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걸 모르는구나, 나도 내가 원하는 걸 모르는 것처럼.’ 연민을 가지고 우리는 똑같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다가갈 용기가 필요하고요. 세 번째는 기술적으로 배워야 하는데, 생각을 말하지 말고 욕구를 말하세요. 



SNS 대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SNS로 소통하는 시대입니다. 한정된 메시지를 가지고 온갖 해석을 시도하게 되죠. 

SNS 대화를 할 때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가 진실이에요. 면대면 대화를 하면 여러 가지 정보가 존재해요. 상황에 대한 정보가 있고, 시각적 정보가 있고, 목소리의 뉘앙스나 톤을 들을 수 있고, 말의 내용이 있어요. 그런데 SNS 대화에는 말의 내용 하나만 남아요. 예를 들어서 상사가 팀원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아주 친절하게 ‘나는 이런 게 중요한데,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하고 적어서 보냈는데, 메시지를 읽고 30분이 지나도록 답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네..’ 이렇게 답장이 온 거예요. 

답장을 받고 생각이 많아졌겠는데요?

그 팀원이 ‘생각해 보니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음... 네’라는 의미로 보낸 건지, 아니면 ‘(하아...)...네..’라는 의미인지 모르는 거예요. 30분이라는 공백 동안 급한 일이 있었는지 사고가 났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SNS 대화를 할 때 우리가 외워야 되는 원칙은 ‘나는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걸 알면 소통을 할 때 자세히 보내줘야 돼요. 말의 내용만 있을 때는 정보가 줄어들었으니까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는데, 이 해석의 다양성을 좁혀주는 말하기가 가장 잘 말하는 거예요. 

‘악성 댓글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하셨어요. 그런 글을 보면 속으로 “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에 대한 이야기군요”라고 외치라고도 하셨죠.

그야말로 심리적 조종자들이 하는 말들은 아주 훈련이 잘 되어 있어요. 어떤 워딩을 썼을 때 상대방이 괴로운지 알아요. 예전에 제가 세바시 강연을 했을 때, 저를 굉장히 아프게 했던 댓글이 하나 있었어요. ‘아버지를 팔아서 강의하는 사람’이라는 댓글이었는데요. 사실 제 내면에 그 목소리가 있었어요. ‘내가 아팠던,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버지에게 상처가 되면 어떻게 하지?’, ‘그렇지만 내 삶의 모든 이야기가 그런 것에서 시작이 됐는데, 그걸 빼고 나를 어떻게 설명하지?’ 생각했어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저로서는 용기를 내서 했었던 이야기인데, 거기에 심리적 조종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댓글을 남긴 거죠.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걸 어떻게 잘 알았을까?’ 생각을 해보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잘 아는 거예요.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은 내가 알 수 없더라도, 추측해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이 사람이 이렇게 자라온 사람이구나’라는 거죠. 

그때 어떻게 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그걸 덮어주는 거예요.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원치 않는 것에 다 대응하다 보면, 정작 원하는 것에 몰입할 수 있는 에너지는 다 떨어지고 말아요. 시간의 양만 봐도 거기에 대응하고 있다 보면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악성 댓글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거죠. 우리가 그것만 알고 있자는 거죠. 

진심으로 사과하는 방법도 알려주셨어요. 

아주 심플한 방법은 ‘미안하다’, ‘다음에는 다르게 하겠다’ 이 두 가지 말만 반복하셔도 돼요. 제발 다른 말 좀 안 붙였으면 좋겠어요(웃음). 하나만 더 붙인다면 ‘혹시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 달라, 내가 해보겠다’고 말하면 돼요.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이 좋아질 수 있을까’ 그 말이면 돼요. 

자신이 상대를 아프게 했던 순간을 직접 말하라고 조언하셨는데요. 필요한 과정인가요?

네. ‘엄마, 내가 너무 나쁜 행동을 했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하라는 거예요. ‘엄마, 내가 물컵도 집어 던지고 큰소리 내면서 이 집에 다신 안 오겠다고 하고 나갔었는데...’라고 말하는 거죠. 그게 미안한 마음을 고백하는 방법 중에 첫 번째였고요. 두 번째는 자기 비난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 번째는 충족하지 못한 핵심 욕구를 말하라는 거예요. 이게 제일 중요해요. 상대의 마음이 아픈 이유거든요. ‘엄마, 나는 지금 너무 후회가 되고 그 말을 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엄마아빠를 존중하고 싶었는데 그때 그러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라는 말을 하라는 거죠. 네 번째는 그때 왜 그랬는지 말하지 말라는 거고요. 다섯 번째는 ‘다음에 또 내가 화나는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엄마가 알려줄래? 내가 노력해볼게’ 라고 말하라는 거예요. 

중점적으로 말해야 할 것은 첫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내용이라고 하셨죠. 

만약 엄마가 ‘그런데 그때 왜 그랬니?’라고 물어보면 ‘정말 답답했어, 내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던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그렇지만 그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부끄러워’라고 말하는 거죠. 이게 핵심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사과할 때 과도하기 자기비난이나 자기혐오를 한다든지, 아니면 그때 왜 그랬는지 합리화를 해요. 그 두 가지는 되게 잘하죠. 하지 말아야 될 건 너무 잘하고 해야 될 건 안 해요. 그래서 연습을 해야 된다는 거죠. 

대화 방법을 연습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어떤 상대와 연습을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가장 친한 사람과 해보시는 게 제일 좋아요. 나쁜 관계를 풀어내는 일에는 에너지가 훨씬 더 많이 들어요. 이미 친한 사람과 더 잘 지내는 방법은 기쁘게 연습할 수 있어요. 그래서 친한 사람이랑 해보기를 권유하고 싶고요. 그 후에는 가르쳐 보라고 하고 싶어요.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사람들을 가르치면 좋아요. 아이의 친구 엄마들과 나눈다든지, 동호회 사람들과 해본다든지, 필요한 대상과 해보면 좋아요. 처음 일대일로 연습할 때는 친한 사람이랑 해보면 좋고요. 두 번째는 같이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하면 좋아요. 그 결과를 가지고 불편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저는 대한민국의 대화 문화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외상의 국가거든요. 트라우마가 너무 많은 나라예요. 우리나라가 앞으로 자생력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해요. 생존하고 연결돼 있어요. 더 잘 살고 고상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게 대화예요. 저는 대한민국의 대화가 바뀌었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그런 일을 할 거예요.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박재연 저
한빛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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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김미경, 코로나 시대의 자기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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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리부트』는 경제경영서이기도, 자기계발서이기도, 그저 개인의 공부 노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대표 자기계발 강사이자 110만 구독자를 지닌 유튜브 채널 ‘김미경TV’의 운영자 김미경. 그 역시 최근 코로나19가 불러일으킨 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오프라인 강의가 모두 취소되고 직원 절반을 내보내야 할 상황이 온 것. 김미경은 “강의를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갈’ 것”이라며 과감히 코로나 이후의 시대로 넘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가 직접 읽고 공부해 남긴 기록이 선택을 뒷받침했다. 그가 말하는 ‘리부트 공식’은 번뜩이는 영감이 아니라 그가 헤쳐온 삶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앞으로도 이 난관을 극복해 나가리라는 에너지 넘치는 생활인의 믿음. 이 인터뷰가 미래 예측 시나리오 중 하나라면, 그가 가진 경험이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결론으로 끝날 것이다.



개인을 위한 미래 예측 시나리오

『이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 이후 올해 두 번째 책이에요. 그동안 코로나바이러스로 자영업자들의 상황이 심각해졌죠.

첫 번째 책은 3월에 나왔는데, 2월 중순부터 위기 상황이었어요.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1월 22일 이후로 모든 강의가 끊겼거든요. 그저께 간신히 10분짜리 무료 강의를 했어요. 다시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서는 게 6개월 만이라는 게 너무 슬프기도 하고, 모든 게 변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더라고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썼던 노트가 책이 되었어요.

24명 직원 중에 제 강의를 도와주고 마케팅해주는 오프라인 업무를 하는 직원 반,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는 직원이 반이에요. 오프라인 강의가 끊기자 직원 절반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왔어요.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지금까지 생계를 지켜왔다고 자신했던 부분에서 존엄성을 못 지키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었어요. 그야말로 『난중일기』 같은 노트였죠. 책으로 엮기에는 내용이 적어서, 나머지 독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3개월 정도 몰입해서 썼어요. 쓰면서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책 쓰면서 공부를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강의는 에피소드를 구성지게 풀어놓을 수 있는데, 책은 아무리 말을 잘했던 에피소드도 정리하면 두 장밖에 안 되더라고요. (웃음) 보통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게 아니에요. 바이러스를 이해하려고 인류학 분야 책을 읽기도 하고, 미래 트렌드 관련 서적도 많이 읽었어요. 이번에 특히 매켄지, 베인앤드컴퍼니 등 외국에서 오는 경영 리포트를 열심히 공부했어요. 기업은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나리오도 알려 주고, 매일같이 정보를 받으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있는데, 일반인은 누가 이 상황을 가르쳐주고 미래 예측 시나리오를 대신 써 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또 슬프고 화가 나요.

다들 우울함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우울함을 넘어서 감도 잡지 못해요. 매일 언제 끝날지, 언제 이 상황이 풀릴지 기다리고만 있는 거죠. 코로나19가 무엇을 야기했고 어디로 가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비가 와서 괴로운 정도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누군가 이게 위기라는 걸 일단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기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고급 정보예요.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경제경영서가 아닌, 내 생계와 관련된 경제경영서로 느낀다면 좋겠어요.

세계 미래 예측이 아니라 자기 미래 예측인 거군요.

그럼요. 세계는 상관없어요. 자기 자신이 중요하죠. 다 공부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영어도 먹고 살 만큼만 하면 되듯, 세상 돌아가는 일도 먹고 살 만큼만 알아내면 돼요. 세상 경제 경영 흐름은 너무 빨라서 적응하기도 전에 지나가는데, 세상이 다시 시작할 때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기술은 반조리 식품, 어렵지 않다

기존 자기계발 방식은 자기 전문 분야 위에 영어 공부 등을 더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필요 없는 능력을 빼는 마이너스 방법으로 가야 한다고요.

코로나 시절 이전에 먹고 살던 방법이 있는데,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 방법이 없어지고 있어요. 떠나간 애인이 자기를 다시 찾아올 거라 믿으면서 그대로 있으면 안 돼요. 새로운 걸 찾아서 코로나19 이후로 넘어와야 한다는 거죠. 과거에 잘했다고 생각한 일도 필요 없으면 버리세요. 질질 끌고 오면 이후의 세계로 못 넘어와요. 저도 강의를 언젠가 할 수 있겠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하겠다고 결단을 내려서 빨리 넘어올 수 있었어요.

새로운 분야를 배우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분들에게 ‘나도 했으니 여러분도 할 수 있다’라고 말했어요.

늦었다는 두려움이 제일 많아요. 늦게 시작했으니 안 될 거라고 자기를 과소평가하죠. 하지만 밥 먹고 나와서 직장 다니는 정도의 능력, 자기 생계를 책임지는 걸 해내는 사람은 누구나 달라진 세상에서도 살아낼 수 있어요. 생존의 영역에서 남과 비교할 생각은 접으시고 그냥 추격하세요. 저도 늘 추격자였어요. 강의도, 유튜브도, 디지털 세상에서도 추격자예요. 한 번도 앞서 본 적이 없어요.

변해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만큼만 상상해보라는 조언도 있었어요.

상상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전문가만 AI와 4차 산업혁명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혁명 안에 있어요. 세탁기와 냉장고가 음식과 빨래를 분류하고 뭐가 필요한지 알아서 해줘요. 가전이 아닌 사물 인터넷이고, 그 안에 들어간 기술이 인공지능이고 그 인공지능은 빅데이터를 토대로 훈련해요. 말하자면 모든 디지털 기술은 일반인에게 반조리 식품이에요. 코딩을 배워서 페이스북을 만들 필요 없이, 이미 만들어진 서비스 안에 나만 들어가면 완성돼요. AI가 협업의 대상이지 내 직업을 뺏어가는 게 아니고, 빅데이터는 내가 데이터 생산자라는 개념만 알고 있으면 돼요. 워드프레스로 사이트 만들고 직거래하고 마케팅까지 배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6개월이면 충분해요. 이미 만들어진 내용을 빠르게 배워서 적용하는 개념으로 자기 일을 운영해야 해요. 그게 독립 근로자(independent worker)예요.

독립 근로자는 결국 다른 말로 하면 프리랜서나 1인 기업 아닐까요?

프리랜서의 일이 불안정한 이유는 중간 연결업자를 통해 일을 받기 때문이에요. 직거래와 중간 연결업자를 동시에 둬야 하청업에서 독립할 수 있어요. 하나의 회사가 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나를 세상과 연결하는 디지털 통로를 알고 이용하는 데 능해야 해요. 그게 다른 점이죠.

오랫동안 프리랜서로 일해 오면서 겪었던 경험이 지금 통찰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도움이 많이 됐죠. 음대 나와서 피아노 학원에서 성공한 콘텐츠 하나 가지고 강의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잖아요. 개인 실력도 중요하지만, 판로를 개척해 나가면서 자기 자신을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해요. 

직원들에게도 독립 근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편인가요?

사람마다 독립 근로자의 속성이 맞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요. 우리 회사 직원들도 나가서 일하다가 다시 들어오기도 해요. 나가면 저에게 좋은 정보원이 되고, 들어오면 제 정보를 같이 공유할 수 있어요. 다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필요는 없어요. 그저 무조건 어느 회사든 들어가지 않으면 인생 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정규직 일자리 자체가 없어지다 보니 반강제로 자기 사업을 찾아가야 할 때도 있고요.

앞으로 직업 대부분은 독립 근로 체제로 갈 거예요. 주부들에게는 기회의 시기예요. 여성들이 왜 결혼을 못 하고 아이를 안 낳겠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못 하게 되는 게 두려워서잖아요. 하지만 만약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삶을 소망한다면, 겁내지 말고 그 삶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이제 인생은 스무 번도 더 변해요. 아이를 키우다, 임시직 경제 안으로 들어가서 하루에 두 시간씩 일하다, 사업도 하다가, 아이가 성장하면 경력사원으로 회사에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고요. 편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자신만의 ‘코어 콘텐츠’를 찾으라는 조언이 있었어요. 코어 콘텐츠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매일같이 스스로 묻고 써야 해요. 뭘 잘하는지 아직 모를 수도 있어요. 잘하기까지는 무조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대부분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안타까운데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건 자신과 시간을 안 보냈기 때문이에요. 나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건 하고 싶은 걸 지원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돈과 시간을 투자해 가면서 내가 이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인해야 해요. 모든 꿈은 나와 나 사이의 협업이라고 생각하세요. 글 쓰는 게 좋다고 하는 데서 멈춰 있지 말고, 내가 나를 글쓰기 수업에 끌고 가서 등록해요. 하기 싫은 숙제도 내보면서 칭찬도 받아보면 비로소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요. 디지털 세상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걸 알아내는 게 정말 중요해요. 

직장인들이 키워야 할 역량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요즘에는 다들 경제적 성공을 넘어서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 인플루엔서가 되고 싶어 해요. 방법은 디지털밖에 없어요. 물론 오프라인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오프라인이 보완재고 온라인이 메인이에요. 인터넷에 이름과 아이디를 검색해서 안 나오면, 그 사람은 디지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거예요. 인터넷에 나와 있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아이디어, 판매할 제품, 신규 서비스를 무슨 수로 알려주겠어요? 온라인 세상에서는 일단 첫 번째로 존재하는 게 중요해요. 존재해야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할 기회도 있을 거예요. 두 번째, 사람들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의 가치로 내가 팔릴지 정해야 해요. 



‘제대로’ 시장은 언제나 비어 있다 

유튜브 채널 ‘김미경TV’로 강의를 옮기면서, 오프라인 강의와 형식이나 내용이 바뀐 게 있다면 뭘까요?

오프라인 강의가 많은 정보 중에서 핵심만 뽑아서 배치하는 한 시간 반짜리 오페라 같다면, 온라인 강의는 핵심을 백 개로 쪼개서 10분, 20분씩 전달해요. 사실 온라인이 훨씬 교육하기 좋아요. 모르면 반복해서 들을 수 있고, 강의에서는 5분 듣고 지나갈 일을 온라인에서는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죠. 오프라인 강의의 강점은 옆 사람에게서 나와요.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연대감이죠. 

아쉬움은 없나요?

왜 없겠어요. 온라인에서는 등을 두들겨 줄 수가 없어요. 아무리 따뜻하게 말해도 온라인에서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온라인 강의에서는 눈물이라도 흘리려고 애써요. 손이 안 가면 눈이라도 공감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요. 지금 너무 그리운 게 사인회인데요. 예전에는 항상 사인하는 동안 독자를 옆에 앉히고 이야기하면서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두들겼어요. 그 짧은 시간 동안 독자들이 인생 이야기를 다 하고 가는데, 그렇게 위로해주는 게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온라인에서도 연대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어요. 팔로워에게 모두 인스타그램으로 모이라고 해서 해시태그를 만들었어요. 관련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사람들이 한 번에 보이죠. 게시물에 하트 눌러주고 댓글 달아주고, 제 스토리에 올려주면서 나름의 연대를 찾고 있어요. 

유튜브 운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요?

제일 중요한 건 구독자와의 소통이에요. 라디오 프로그램과 똑같아서 MC가 매일 자리에 있는 것처럼 제가 매일 있어야 해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내 것만 이야기하다가, 이제는 구독자 폭이 넓어지면서 구독자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훨씬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언니의 독설 콘텐츠로만 해도 충분히 사람들이 좋아했는데 지금은 구독자들이 너무 다양해요. 그래서 뭘 알려드리면 좋을까 분석하고 있어요.

유튜버와 구독자의 관계를 넘어서 함께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 같아요.

김미경은 자기 청중,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새로운 길로 갈 수 없다는 걸 최근 청중 없는 6개월을 겪으면서 사무치게 느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계가 어렵다고 하면 걱정이 많아져요. 방법이 있는데, 알려 줘야 하는데, 공부하면 할 수 있는데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안 풀리고 슬플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예요. ‘공부해라’가 아니라 ‘나랑 같이하자’는 거예요. 온라인에서도 해시태그를 걸고, 서로 숙제하는 걸 보고 ‘좋아요’도 눌러주면서 같이 가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세계가 재편되고, 만약 유튜브가 망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디지털 세계는 융통성이 있어서 옮겨가는 데 편해요. 오히려 오프라인이 이사하는 데 힘들죠. 내 콘텐츠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플랫폼은 백 개, 만 개가 되어도 얼마든지 요리해서 옮겨갈 수 있어요. 지금도 매일 시작하기에 너무 늦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들 유튜브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양질로 콘텐츠를 만드는 시장은 언제나 비어 있어요. 유튜브에서 연습 충분히 하다가 다른 플랫폼이 나오면 다시 가공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아요. 내가 제대로 만든다고 생각하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유튜브 시장에서 목표가 있다면요?

양질의 콘텐츠를 잘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자신을 조금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고 싶고요. MKYU 대학에서는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즉시교육 프로그램을 탄탄하게 만들고 싶어요.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 하는 공부 말고, 나와서 부딪쳤을 때 그걸 뚫기 위한 공부가 진짜예요. 이 대학에서 저는 강의하는 대신 큐레이터 역할만 해요. 좋은 분들 모시고 프로그램 기획하는 게 제가 하는 일이에요.

별명이 ‘독설 언니’였지만, 요새 독기는 많이 빠진 느낌이에요.

지금도 독기가 중요한 부분은 맞아요. 저는 원래 열심히 사는 사람이고, 자기에 대한 강한 집념, 스스로 열광하는 마음이 독에 가까운 것 같아요. 빌 게이츠가 인터뷰에서 ‘나는 내 꿈에 열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자기를 응원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자기 몸이 열광한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저도 평생 저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싶었어요. 열광할 때 나오는 말이 독설 스타일로 나오는 거죠. 사실 강의에서 하는 모든 독설은 저에게 하는 말이에요. 나의 작은 꿈에 스스로 열광해주지 않으면 이 힘든 상황에서 누가 날 구해주겠어요. 

『김미경의 리부트』는 자기계발분야 책이지만 기후 변화가 언급되어 있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자기계발의 핵심은 기후 변화가 될 거예요. 솔직히 더 공부하고 쓰고 싶었는데, 일반인 김미경이 접속할 수 있을 만큼만 화두를 던졌어요. 모든 자기계발의 성장 안에 기후변화라는 과목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거예요.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경제가 생계라면, 기후 변화는 생존이에요. 자기계발이고 뭐고 숨을 못 쉬는데 어떻게 살겠어요. 이런 세상을 살아낼 어린이들을 보면 무서워요. 나의 성장과 더불어 지킬 걸 지켜주는 게 성장의 근간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구가 망하면 자기계발도 소용이 없죠.

돈도 뭐도 다 소용없어요. 그래서 변화 공식 중에 안전(safety)을 넣었어요. 기업이 안전 철학을 가지지 않으면 고객은 그 기업을 본능적으로 피할 거라는 거죠. 기업들이 벌써 태양광을 쓰고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하는 걸 보면 이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거예요. 얼마 전에도 최재천 교수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생명다양성재단에 돈이 없어서 운영이 안 되고 있대요. 그래서 저도 기부하고 구독자에게도 기부 운동을 벌였어요. 디지털 내에서의 연대적 조직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봐요. 



김미경의 리부트
김미경의 리부트
김미경 저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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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원하 시인 “단 한 사람을 위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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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하 시인을 움직이는 건 오직 사랑이다. 제주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시를 썼고, 행여나 알아채지 못할까 봐 산문을 썼다. 그렇게 두 권의 고백,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와 산문집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이 세상에 나왔다. 솔직한 사랑시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안, 시인은 한 사람을 기다렸다. 진심을 다 털어놓았으니 이젠 그가 대답할 차례. 그러나 열쇠를 쥔 사람은 이미 정해졌다. 꽃을 선택한 건 그가 아니라 ‘시인’이니까. 



삶이 어려워서 쓴 사랑시

첫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산문집이 출간됐어요. 

마음속으로 시와 산문을 나란히 내기로 정해 두었어요. 시를 먼저 쓰고, 산문을 나중에 썼죠. 산문집에 있는 사진도 직접 찍은 거예요. 

시 하나와 산문 한 편이 짝을 이뤄요. 시와 동일한 제목의 글에 구체적인 사연이 적혀 있죠.

한 편의 시를 쓸 때, 어떤 상황과 감정이었는지를 산문으로 풀어 썼어요. 시 하면 왠지 어렵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근데 저는 시가 제일 쉽거든요. 별거 아닌 일상이 이렇게 시가 되는데, 전혀 어렵지 않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사실 시는 이렇게 만들어졌어 하고요. 

시인이 되기 전, 다양한 직업을 거치셨죠. 원래 미용 일과 배우를 하기도 했다고요. 

꾸미는 걸 좋아해서 미용 일을 했는데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좀 더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어요. 제가 원래 표현을 잘 못 했어요. 전 슬프면 울어야 하는데 웃고 있었거든요. 연기 학원에서 웃고, 울고, 화내는 법을 배우면서 표현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연기의 길을 접고, 시를 쓰게 된 거죠?

연기할 때, 목표가 딱 하나였어요.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꼭 출연하자. 그것만 이루어지면 인생이 끝나도 상관없다. 결국 오디션을 봤는데 원하는 배역에서 떨어졌고, 미련 없이 그만뒀죠. 서른이 되기 전에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마음이 급했어요. 맞지 않으면 빨리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죠.

처음에는 여행에 대한 산문을 썼다고요. 

아는 오빠가 여행 관련 책을 많이 읽더라고요. 저거나 해볼까 하고 여행 작가 아카데미에 등록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 글을 보고 시를 써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 한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면서 시를 쓰게 됐어요. 그전에는 시집을 읽어본 게 딱 한 권밖에 없었어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저는 삶이 어렵지 시는 어렵지 않아요. 현실이 고달프면 시는 저절로 써져요. 이야기하고싶은데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을 때 글을 쓰면 시가 되더라고요. 시를 가르칠 때도, 1분이면 끝낼 수 있어요. ‘사랑해라. 가능하다면 짝사랑을 해라.’ 저한테는 사랑이 가장 아프거든요. 짝사랑을 하면 삶이 힘들어지고 시가 나와요. 

힘든 현실이 글이 된다면, 시와 산문은 어떻게 다른 건가요?

항상 머릿속으로 한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글을 쓰는데요. 그 사람이 못 알아듣게 말한 건 시고, 좀 알아들어 하고 쓴 건 산문이에요.(웃음)



그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

제주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글을 썼죠. 왜 제주였나요?

서울을 일단 벗어나서 시를 쓰고 싶었어요. 시 수업에 가니, 저 빼고 다 쟁쟁한 대학교의 문예창작과 학생들이더라고요. 남들과 다른 게 없을까 하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시를 쓰니까 가장 먼 제주도로 갔죠. 

실제 제주 생활은 어땠어요? 

시에만 집중한 귀한 시간이었지만 정말 힘들었어요. 외롭고 또 외로웠어요. 제주에 혼자 살면 신경 쓸 게 아무것도 없어져요. 동네가 너무 조용해서, 아침에 귀가 먹은 건 아닐까 혼자 말해보고 음악도 틀어보고 할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섬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어요.

여기서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요. 저는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바라보고 달려가거든요. 제주에서 한 사람을 위해서만 쓰겠다고 미리 정했어요. 죽을 만큼 힘들어도, 시를 쓰기 전에는 떠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죠.

산문집이 야해서 좋았어요.(웃음) 남자에 대한 관심을 솔직하게 표현하죠.

저는 여자들이 다들 똑같은 생각한다는 거 알아요.(웃음) 왜 솔직하지 못해, 사실은 나랑 같잖아 하는 마음으로 썼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자들은 ‘여자들도 그런 생각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숨기지 않으려고 했죠. 

글의 화자도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아도 마음만은 정말 적극적이잖아요.

맞아요. 제가 그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에,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며 썼거든요. 그 시를 발표하고, 왜 한 남자에 목매느냐는 질문도 받아 봤어요. 그런데 전 오히려 이게 당당하지 않은가 되묻고 싶어요. 남자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안 따라오면, 그 사람이 손해죠.(웃음)

소녀 같다고들 하지만, 알 거 다 아는 소녀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소녀는 알 거 다 알잖아요.(웃음) 여고 시절, 소녀들이 얼마나 이성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열여덟 살 소녀의 감성을 끌어와서 스물아홉 살의 저를 섞은 건 있어요.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게 밉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부다페스트에서 살고 시를 쓸 거예요

“타고나기를 여행보다는 정착이 체질인 사람”(213쪽)이라 했는데, 시는 어딘가로 떠나서 쓰는 것 같아요. 

지금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 시가 써져요. 여행하러 가는 건 아니에요. 슬픔이 있어야 시가 써지니까 현실을 꼬아서 어렵게 만들려고 가요. 정해 놓은 건 없어요. 

슬픔에 집중해서 시를 쓰시는군요.

시를 쓰다가 눈물이 그렁그렁 하기도 해요. 작업할 때는 주로 슬픈 음악을 듣고, 다 쓴 다음에는 감정에 빠져나오기 위해서 클럽 음악을 틀어요. 그러다 보니 감정 기복이 심해지더라고요. 

다음 행선지는 부다페스트라고요. 

부다페스트라는 글자가 예뻤어요. 저는 받침 없는 단어를 좋아하거든요. 올해 초 사전 답사를 다녀왔는데, 우울한 분위기를 느꼈어요. 여기, 멋있네 하고 바로 결정했죠. 부다페스트에 대해 쓴 사람이 별로 없는 것도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원하 시 쓰려고 런던 갔대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거기 나도 갔어 하겠죠.(웃음)

제주가 끝나고, 새로운 것이 등장할 시기군요. 

제주에서의 감정은 접었어요. 빨리 털어야지 미련을 가지면 안돼요. 독자들도 언제까지 제주에 대해 쓸 거냐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 독자보다 먼저 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사랑이 이루어지면, 시를 그만 쓰게 될까요?

늘 시인으로 영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이 있어요. 나는 시인으로서 성공하겠어 하면 시에 힘이 들어가서 오히려 망해요. 저는 한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시를 쓰게 됐지,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니까요. 

독자들이 두 권의 책을 어떻게 읽어주었으면 하나요?

순서 상관없이 끌리는 대로!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하든 시와 산문을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떠올리며 읽어도 좋겠죠. 제가 한 사람을 위해 시를 쓴 것처럼요.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이원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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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세랑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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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민영주

지금 대한민국 젊은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정세랑 작가와 신작 『시선으로부터,』를 두고 짧은 이메일 인터뷰를 나눴다. 구상과 집필까지 5년이 걸린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올해 3월에 오픈한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 당시 가장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심시선’은 살아생전 대한민국을 대표한 미술가이자 작가. 심시선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족들은 단 한번뿐인 심시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하와이로 떠날 계획을 세운다.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이라고 제사를 강경하게 반대했던 심시선의 제사를 왜 굳이 하와이에서? 가족들은 심시선을 어떻게 추억하려는 걸까?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의 가계도를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번의 결혼으로 독특한 가계의 구성원을 만들어낸 심시선. 그가 남긴 많은 작품과 말, 그리고 흔적들을 통해 독자들은 대한민국의 여성사, 현대사의 비극, 따뜻한 개인주의를 발견한다. 

영화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은 “이 책은 가부장제에 포섭되지 않은 여성이 가장이 될 때, 가족들이 어떠한 결을 갖고 살아갈지에 대한 기분 좋은 전망을 준다. 내게 위로와 계보를 선사한 이 근사한 작품이 페미니즘 영화의 고전 <안토니아스 라인>처럼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추천사를 썼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코로나19를 대하는 소설가의 요즘이 궁금합니다.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 라이브 행사를 해보았는데, 공간적 제약 없이 독자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앞으로도 온라인 위주로 하고 싶어졌어요. 코로나 사태가 확실하게 잡힐 때까지 오프라인 행사는 하지 않으려고요. 전염병에 관한 소설도 썼기에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시선으로부터,』를 퇴고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한동안 장편소설을 쓰지 못하다가 쓴 거라, 힘든 것보다 반가운 마음이 컸어요.  

소설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구상과 집필까지 5년이 걸렸다고요. 

엄마가 자주 하시는 농담에서 출발한 소설이라 오래전부터 계속 쓰고 싶어하다가 2016년에 조사를 위해 하와이에 갔었고, 그 이후로도 하와이에 대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서 큰 도움을 받았어요. 실마리만 있는 상태에서 자료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씁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을 한 글자 바꾼 것이 이 책의 주인공 ‘심시선’입니다. ‘시선’이라는 이름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관용구를 살짝 비트는 것을 좋아해요. 자주, 여러 의미로 쓰이는 단어라서 제목을 떠올리고 나니 딱 들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막혔던 순간이 있었나요? 

화산 지형을 직접 못 가보고 써서, 조사는 열심히 했지만 힘들었습니다. 2018년에 화산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이후 가볼 기회가 없었어요. 

심시선의 인터뷰, 강연록 등을 쓸 때는 왠지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웃음)

처음에는 20세기 말투를 흉내 내는 게 어색했는데 하다보니까 무척 즐거워졌습니다. 마음껏 능청스러울 수 있었어요. (심시선의 옛 자료를 소설에 넣은 건)  20세기와 21세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형식이었어요. 그리고 세상을 뜬 작가,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애정이기도 했고요. 

가계도가 나올 만큼, 다양한 인물이 나옵니다. 특별히 애정을 가진 인물이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화수, 지수, 우윤, 해림에게 가장 애정이 갑니다. 

125쪽의 문장이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단단히 마음 먹고선, 어찌 살아 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참 어려운 일인데,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해치는 사람들로부터 있는 힘껏 벗어나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가끔 세계 전체가 우리를 해치려 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지지대가 될 수 있으면 합니다.  

208쪽에 “무신경하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문장이 나와요. 심시선은 무신경한듯 보이지만, 가족들을 각각의 고유한 인물로 사랑해줬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심시선의 가장 큰 장점, 그리고 약점은 무엇일까요?

원하고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고, 살아남으려고 말을 많이 했다보니 모순을 끌어안게 되었다는 게 약점이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님께 ‘심시선’은 어떤 존재인가요? 

가지지 못한 과거, 가지고 말 미래였으면 합니다.  

191쪽에 “웬만한 헛디딤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딸들을 비난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라는 말이 나와요. 심시선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20세기 중반 사람들은 분단 이후에 태어난 이들보다 한결 더 코스모폴리탄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가고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던 데에서 호방함이 비롯되지 않았을까 추측해요. 현대사의 참혹함을 정면으로 헤치고 나간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심시선이 중요하지 않은 것에 연연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책을 인쇄할 때 재생 용지를 사용해달라고 요청하셨다고요. 1쇄본은 양장본으로 제작되었는데, 양장본은 선호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계속 재생용지를 쓰고 싶은데, 사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콩기름 인쇄도 꿈꾸고 있습니다. 종이가 재생될 때 중금속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독자 분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콩기름이 낫지 않나 하는데 제작비가 역시 많이 들겠죠? 양장본은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 책이 도서관에서 자주 읽힌다고 해서 기쁜데, 가끔 사진을 보면 너무 심하게 망가져 있더라고요. 격한 사랑을 받은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모습이라, 양장본이라면 더 버텨주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소설 집필을 위해 참고로 읽은 책들이 많습니다. 가장 크게 도움을 받은 책은 무엇인가요? 

『하와이 원주민의 딸』입니다. 내용은 물론 시각에도 큰 영향을 받았어요.  

후속작의 힌트를 조금 주신다면요?

잡지 <미스테리아>에 발표했던 단편을 연작 장편으로 확장하고 싶어요. 통일신라 시대의 탐정 이야기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시선으로 문학을 읽으면 좋을까요? 그리고 작가의 말에 “죽는 날까지 쓰겠다”는 심오한 글을 남긴 이유가 있나요?

열린 대화로 여겨 주시면 좋겠어요. 작가의 말에 “죽는 날까지 쓰겠다”고 말한 이유는요. 작가들이 활동을 멈추거나 사라지는 게 속상하더라고요.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로 그렇게 썼습니다. 




시선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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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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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 “끼적임을 좋은 글로 바꾸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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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편집숍 29센티미터의 카피라이터였던 이유미 작가가 새로 문을 연 동네 책방 ‘밑줄 서점’ 서가에는 메모가 붙어 있다. 주제별로 꽂힌 책들을 소개하며 책방지기인 작가가 직접 써 붙여 둔 것이다. 그중 글쓰기에 관한 책이 모인 코너에 붙은 메모장이 눈에 들어왔다. ‘읽으면 쓰고 싶어지는 욕망을 억누르지 마세요. 도움 되는 책들.’ 이유미 작가가 펴낸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을 한 줄로 표현한다면 이 문장이 될 것이다.  

29센티미터에 취직하기 전까지 글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운이 좋아’ 카피라이터가 됐다는 이유미 작가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꾸준히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모으고, 성실하게 글을 썼다. 그렇게 모인 글들은 책이 돼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은 이 과정에서 느낀 글쓰기에 관한 깨달음을 풀어낸 책이다. 



일기는 가장 좋은 글쓰기 소재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이라는 명확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떻게 기획된 책인가요? 

제가 브런치에 연재했던 ‘소설로 카피쓰기’를 통해 『문장수집생활』을 출간하면서 브런치에서 강연 자리를 마련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때 카피가 아닌 다른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관계자 분들과 회의를 하던 중에 나온 기획이었어요. 제가 일기를 오래 쓰다 보니까 자연스레 에세이를 잘 쓰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럼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에 대해 강연하자는 걸로 의견이 모였거든요. 그때 강연 자리에 『일기를 에세이로 쓰는 법』의 담당 편집자가 참석을 하셔서 책으로 출간될 수 있었어요. 

비교적 수월하게 쓴 책이었을 것 같아요. 제목과 컨셉트가 확실하게 정해졌으니까요.

맞아요. 작년 10월에 퇴사를 했는데 회사 다니면서 원고를 거의 다 썼어요.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를 토대로 기획과 대략적인 꼭지가 잡혀 있었던 덕분에 빨리 쓸 수 있었던 책이에요.  

막연한 내용이 없어서 좋더라고요. 글쓰기에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도 곧장 따라할 수 있는 실용적인 팁이 많았어요. 

글 쓰는 일을 하고 있고, 오래 글쓰기에 대해 공부해 왔지만 저는 아직도 배우는 입장이거든요. 출판사에서 제안을 주셨을 때도 말씀드렸어요. 글쓰기에 관한 깊이 있고 어려운 이야기를 할 자신은 없지만, 제가 아는 방법을 쉽게 알려드리는 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최대한 쉽게 쓰고 싶었어요. 

메모장에 어제의 일기를 작성하는 ‘오늘 쓰는 어제’가 정말 유용했어요. 요즘도 메모장 일기를 쓰세요? 

책방을 열고 개인적인 업무가 많아져서 지금은 자주 못 하는데, 회사 다닐 땐 날마다 했어요. 제가 아기 때문에 일찍 출근을 해서 회사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날이 많았거든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바로 일을 시작하긴 싫어서 매일 알람을 맞춰 놓고 어제 있었던 일을 기록했어요. 감성적인 군더더기는 다 빼고 그냥 있었던 일만 간략하게 썼는데, 하다 보니 좋더라고요. 나중에 에세이에 쓸 소재가 되기도 하고요. 

어떻게 시작했던 건가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떤 책에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글로 풀어 써 놓은 걸 봤어요. 그걸 보고 내 하루도 메모를 해 놓으면 좋겠다 싶어서 혼자 시작했는데, 알람을 맞춰 놓은 게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됐어요. 귀찮아도 알람이 울리면 쓰게 되니까요. 일기를 매일 쓰는 건 꾸준히 쓰는 습관을 들이는 데 도움이 돼요. 일단 쓰면 뭐라도 남으니까, 내 이야기를 기록하는 게 중요하죠. 



계속 써봐야 잘 쓸 수 있다 

책의 ‘파트 2’에서 본격적으로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그중 ‘인식-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글이 잘 써진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대단한 걸 쓰려는 마음이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맞아요. 책에도 썼지만, 모든 글에 너무 공을 들이고 잘 쓰려고 하면 계속 하기가 힘들어요. 일단 쓴다는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게 중요하죠. 많이 써봐야 더 잘 쓸 수 있으니까요. 오늘 좀 못 썼다 하더라도 ‘다음에 더 잘 쓰면 되지’라고 생각해야 계속 쓸 수 있어요. 

작가님도 글을 쓰기 어려운 순간이 있으세요? 

요즘 그래요.(웃음) 큰일 났어요. 내년까지 출간하기로 계약된 책이 세 권인데 아예 워드 파일을 여는 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여러 일을 하면서 한껏 긴장했던 마음이 탁 풀려서 그런지 글이 안 써져요. 아니, 안 써지는 게 아니라 쓰기가 싫어요. 시험 기간이 되면 갑자기 소설책 읽고 싶잖아요.(웃음) 요즘 제가 그래요. 매일 서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책만 읽고 있어요. 

그런 마음이 들 때 책을 읽으면서 이겨내는 편인가요?

네 오로지 책을 통해 극복해요. 계속 읽으면서 느낌이 올 때를 기다리죠. 읽다 보면 글이 쓰고 싶어지는 책이 있잖아요. 주로 그런 책을 찾아 읽어요. 그러다 보면 갑자기 막 무언가를 쓰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아주 찰나인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글을 쓰죠. 그동안은 소설이나 에세이를 많이 읽었는데, 지금은 사회 또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나 건강 관련 책 등 평소에 보지 않던 것들을 공부하듯 읽고 있어요. 읽으면서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를 또 기다리려고요. 

‘글은 쓰면서 배운다는 말을 신봉하듯 명심한다(51쪽)’고요. 

지금까지 나온 제 책들이 그걸 증명해요. 브런치와 회사에서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 책으로 출간한 거잖아요. 모두 꾸준히 썼기에 가능한 거였어요. 브런치는 독자와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요일을 정해서 계속 업로드했어요. 회사에서 쓰는 글은 일이니까 안 할 수가 없었고요. 어떻게든 꾸준히 쓰다 보니 글에 대한 감을 점점 더 터득하게 되더라고요. 좋은 문장을 쓰는 연습을 하게 됐을 뿐 아니라, 이런 내용을 쓰면 독자들이 좋아하겠구나 혹은 싫어하겠구나 라는 걸 구분할 수 있게 된 거죠. 온라인에 공개하는 글은 피드백이 바로 있어요. 그렇게 꾸준히 글을 써서 공개하고, 독자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점점 실력이 늘었던 것 같아요. 

글을 잘 쓰는 많은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글은 공개적으로 써야 실력이 는다’고 하더라고요. 이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와요. 타인의 피드백을 꼭 받아야 한다고요. 

저는 브런치의 덕을 크게 본 케이스인데요.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 독자가 하트도 눌러주고, 댓글을 달잖아요. 요즘은 새로운 글을 못 쓴 지 몇 달째인데도 꾸준히 구독자가 늘고 있어요. 이렇게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사실이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글을 잘 쓰냐, 못 쓰냐는 내 기준에서 판단할 게 아니에요. 어떤 글이든 공개를 해야 계속 수정, 보완을 할 수 있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는 게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온라인에 글을 공개하면 사람들의 반응이나 댓글에 연연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처음에는 악플이 달리면 너무 상처를 받아서 끙끙 앓고 그랬어요. 남편이 모르는 사람인 척 하면서 저를 옹호하는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고요.(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게 됐어요. 그렇게 무분별한 악플을 다는 사람은 내 글을 꼼꼼히 읽은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그냥 어떤 한 문장에 꽂혀서 악플을 다는 경우가 많아요. 그걸 깨닫고 나니 무시하게 되더라고요. 또, 같은 글을 보고도 사람에 따라 반응은 천차만별이거든요. 저도 브런치에서 반응이 좋았던 글을 다른 플랫폼에 게재했더니 반대의 의견을 받은 경험이 있어요. 타인을 계속 신경 쓰다 보면 내 글을 아예 쓰지 못할 수 있으니 너무 연연하지 말고 당당히 쓰는 게 중요해요. 

작가님 글의 첫 독자는 누구인가요?

대부분 남편이나 친언니예요. 특히 남편은 되게 객관적으로 평가를 해줘요. 좋다, 싫다가 확실해서 “이 글이 대체 왜 싫으냐”며 싸울 때도 있지만(웃음) 대체로 도움이 많이 돼요. 남편이 “이 부분은 좀 그런데?”라고 해서 고쳐보면 훨씬 더 좋은 글이 되더라고요. 



좋은 에세이의 필수 조건, 솔직함

필사를 자주 하신다고요. 

회사에 다닐 때는 일할 때 참고할 자료로 쓰기 위해서 좋은 글을 타이핑해서 모아뒀어요. 워드 파일은 검색이 쉬우니까요. 좋아하는 작가의 글은 통으로 베껴 써볼 때도 있어요. 예전에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읽고 좋았던 글을 타이핑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는데, 필사가 글쓰기 감을 익히는 데 정말 도움이 많이 돼요. 요즘은 그렇게 자료화 할 필요를 못 느껴서 손으로 메모를 하고 있어요. 책을 읽을 때 꼭 노트를 같이 펴고, 읽으면서 밑줄 그은 문장을 한 번씩 써보는 거예요. 남기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무엇이든 쓰고, 남겨두려는 습관이 정말 중요하네요. 

맞아요. 그래서 책과 노트를 내가 주로 머무는 생활공간 곳곳에 가까이 둬야 해요. 일단 편해야 자꾸 하게 되거든요. 

책의 후반부에는 ‘에세이를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사소한 Q&A 20’이 담겼는데요. 글을 쓰면서 고민하게 되는 대부분의 궁금증이 담겨 있더라고요.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에 대한 브런치 강연을 했던 날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았거든요. 그날 나왔던 질문과 제가 평소에 많이 들었던 질문을 모아서 공통적인 것들을 추렸어요. 

에세이는 내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작가와 글을 분리시키기가 어려운데요. 글에 비치는 이미지에 대한 부담은 없나요. 

아직까지는 없어요. 오히려 실제의 저보다 더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요.(웃음) 그런데 제가 좀 소심해서 겪은 이야기를 100% 그대로 쓰진 못하거든요. 글로 쓰지 않으면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니 쓰긴 하지만, 정말 속상했던 일 같은 건 돌려서 이야기하기도 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익명으로 진짜 솔직한 속마음을 써봐도 좋을 것 같아요. 

요즘 부캐(부 캐릭터)가 인기잖아요.(웃음) 

안 그래도 부캐로 글 쓰고 싶어요.(웃음) 남편한테도 얘기 안 하고, 아무도 모르게요.

일상의 여러 소재 중 ‘이건 쓰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으세요?

무엇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쓰는 건 최대한 조심하려고 해요. 글의 좋은 소재가 된다면 쓰긴 하지만, 온전한 험담이나 상황에 대한 비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그 사건을 보는 나의 관찰과 해석을 담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표지 카피가 ‘끼적임이 울림이 되는 한 끗 차이’예요. 끼적임을 울림으로 바꾸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 하나를 꼽는다면요.  

솔직함이요. 에세이를 쓴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말하고 싶은 대로만 쓸 수는 없잖아요. 독자를 위해 어느 정도는 상황을 미화하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기도 하는데 글의 한 부분에는 진심을 반드시 넣어야 울림이 생기는 것 같아요. 



글 쓰는 일이 좋아서, 더 잘하고 싶었어요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카피라이터가 됐어요. 갑자기 글 쓰는 분야로 전업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29센티미터에서는 어떻게 일을 시작했나요? 

처음에는 텐바이텐에서 <히치하이커> 매거진을 만들면서 편집디자인 일을 시작했어요. 5년쯤 다니다 퇴사를 하고 디자인 에이전시에 들어갔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나오려고 준비하던 차에 29센티미터 사장님이 회사를 만들 계획인데 에디터로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있는지 제안을 주셨어요. <히치하이커>를 만들 때도 글을 쓰긴 했었거든요. 마침 29센티미터에서 에디터로 일할 기회가 온 거였죠. 그런데 온라인 편집숍이다 보니 카피를 꼭 써야 했어요. 회사에서 글 쓰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까 MD들이 상품 카피 좀 써 달라는 업무를 많이 부탁했거든요. 그걸 시작으로 계속 카피 작업을 하게 됐죠.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웃음) 

이전에도 글쓰기에 흥미가 있으셨어요? 

편집디자이너로 일할 때도 글 쓰는 일이 좋았어요. 좋아하면 더 잘하고 싶으니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너무 잘하고 싶었거든요. 카피가 무엇인지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책을 엄청 찾아 읽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보통 잡지나 TV에서는 멋진 카피 문구가 많이 보이는데, 당시만 해도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그런 문구를 본 기억이 없었거든요. ‘우리는 이렇게 쓰면 안 되나?’라는 생각으로 다른 곳과는 차별화된 카피를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조금씩 29센티미터의 색깔이 잡혔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쇼핑몰에 카피를 보러 들어온다는 사람도 생기고, 다른 기업에서 사장님과 미팅을 하러 오면 “카피 쓰는 직원이 누구냐”고 묻기도 했어요. 반응이 오니까 재미있어서 더 열심히 했죠. 

어떤 에세이를 읽을 때 빠져드나요? 

솔직하게 쓴 글이요. 저는 저와 비슷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런 글을 읽으면 내 글을 얼른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돌고 도는 느낌이 있어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작가들의 솔직한 글을 읽었을 때 가장 좋아요. 

그럼 ‘이건 나와 안 맞는다’ 싶은 에세이는요? 

여행에세이는 잘 안 읽어요. 여기 책방에도 여행에세이가 별로 없을 거예요. 왜냐면 제가 여행을 싫어하거든요.(웃음) 원래 돌아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어떤 글이 싫다기보다는 제 취향에 맞지 않는 장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생활에 맞닿아 있는 글을 좋아해요. 

서점 이름이 ‘밑줄 서점’이에요. 밑줄 치는 행위에 대한 애착이 느껴져요. 

맞아요. 밑줄 치는 거 정말 좋아하죠. 책도 험하게 보고요. 제가 지금 운영하는 이 책방은 책을 대여하는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손님들이 책을 보고 “여기 왜 이렇게 밑줄이 많아요?”라고 물으면 “밑줄서점이라서요”라고 대답하려고 그렇게 지었어요.(웃음) 그런데 신기하게 밑줄 있는 책을 좋아하는 분이 많더라고요. 새 책과 헌책이 있을 때, 헌책을 사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제가 밑줄을 긋고 본 건, 저에게도 애착이 있는 책이라 팔고 싶지 않은데 너무 간절하게 원하셔서 눈물을 머금고 판 적이 몇 번 있어요. 

손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김행숙 시인의 『사랑하기 좋은 책』에 있는 ‘당신이 접어놓은 페이지나 밑줄 친 문장, 그런 흔적들은 내게 당신의 영혼으로 건너가는, 허공에 걸린 흔들다리처럼 생각되었다.’는 문장이 생각나네요. 

저도 100% 공감해요. 전에 부산 헌책방에서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를 샀는데 그 안에 밑줄이 많았거든요. 그 책을 좋아해서,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마음에 산 거였는데 저랑 같은 곳에 밑줄을 그은 걸 보니 좋더라고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괜히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어요.(웃음) 

책방에서 가까이 독자와 마주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일부러 찾아와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격스럽고, 고맙죠. 저희 책방은 동네 사람들보다 제 브런치 독자나 인스타 팔로워 분들이 일부러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휴가 내고 밑줄서점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죄송스럽고 감사해요. 독자 분들이 오실 때 제일 좋아요. 

9년 다닌 회사를 그만 두고 책방을 열었는데요. 삶에서도, 일에서도 달라진 점이 많을 것 같아요.

180도 달라졌죠. 일단 3시간가량 걸리던 출퇴근 시간이 5분으로 줄었고요.(웃음) 덕분에 지치지 않으니까 아이에게 그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됐어요. 예전에는 퇴근하고 오면 너무 힘들어서 “엄마 조금만 쉴게.”라는 말을 자주 했거든요. 요즘은 활기찬 모습으로 아이를 대할 수 있어서 좋아요. 지금도 카피라이팅 일을 받아서 하고 있고, 책 원고도 쓰고 있어서 제 일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일상생활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드렁큰 에디터’에서 펴내는 ‘먼슬리 에세이’의 다음 순서가 작가님의 책인 걸로 알아요. 

맞아요. 저는 공간욕을 주제로 책방 오픈기에 대해 썼어요. 곧 출간될 예정이에요. 

에세이를 잘 쓰고 싶은데 막막한 사람들에게 들려줄 말이 있을까요. 

쓰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후루룩 써보는 방법이 도움이 돼요. 하지만 아무 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는 그냥 아무 것도 쓰지 말고 좀 기다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멍 때리는 시간이 꼭 필요하거든요.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글을 쓰고 싶은 느낌이 다시 찾아올 거예요. 그걸 잘 포착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에세이를 써 본 경험은 없지만, 글쓰기에 관심이 있거나 한 번 써보고 싶은 사람들이 쉽게 시작할 수 있는 팁이 있다면요.  

자기 글을 제대로 써보지 않은 분들은 필사부터 시작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읽고 나서 너무 좋았거나,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 있다면 베껴 써보는 거예요. 손으로 쓰는 게 어렵다면 키보드로 타이핑을 해도 좋아요. 이때 입으로 소리 내 읽으면서 쓰면 훨씬 더 도움이 돼요. 직접 쓴 글이 아니라 보고 베꼈을 뿐인데도, 그 문장들이 내 안에 쌓이면서 쓰는 감각을 익힐 수 있거든요. 어떻게 써야 할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당장 에세이를 한 편 쓰려면 너무 어렵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좋은 에세이를 몇 편만 베껴 써봐도 ‘나는 이렇게 써봐야겠다’는 감이 와요. 저는 한수희 작가를 좋아해서 에세이 한 편을 통째로 베껴 쓰기도 하는데, 쓰다 보면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게 하고, 이 에피소드와 다음 에피소드가 이렇게 연결되는구나’라는 느낌이 오거든요. 그 감각을 먼저 익히신다면 시작하기가 훨씬 수월할 거예요.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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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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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가수 전효성 "당신에게 전하는 ‘블링달링’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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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금이 정말 행복해요.”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반짝이는 아이돌. 배우, MC 등 멈추지 않고 도전해온 방송인. 그러나 무엇보다 빛나는 건 ‘사람 전효성’이 아닐까? 인터뷰 내내 그는 이 순간의 행복을 말했다. 집에 가면 고양이 블링이, 달링이가 있어 행복하고, 일도 즐기는 여유가 생겼다고. 현재 그는 말실수를 만회하고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공백기 후 그 어느 때보다 ‘전효성다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단단한 중심,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첫 에세이집 『나도 내가 처음이라』에는 전효성의 ‘긍정 에너지’가 아낌없이 담겨 있다. 2009년 그룹 시크릿으로 데뷔한 이래, 좌절을 극복하고 차근차근 달려온 솔직한 기록. 결국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무대에 선다는 그는 소소하지만 진실한 위로를 전한다. “누구나 나로 사는 건 처음이니까. 조금 실수해도 괜찮아요.” 

“나로서 살아가는 것조차 매 순간이 처음이라 서툴고 힘든 건데. 그래서 사실은 실수 좀 해도 되는 건데. 좀 부족해도,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그러면 되는 건데. 우리 모두, 여자답지 않아도, 남자답지 않아도, 엄마답지 않아도, 아빠답지 않아도, 나답지 않아도, 그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은 게 아닐까. 정말 다 괜찮은 거 아닐까.” (182쪽)



처음이니까 서툴어도 괜찮아요

노래, 연기, 예능, 최근에는 라디오 DJ까지 다양한 활동을 소화하고 있어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라디오 DJ를 1순위로 두고 있어요. 매일 2시간을 생방송으로 이끌어야 하니까 책임감이 남달라요. 저는 제가 안 떨 줄 알았는데, 첫 방송 때 정말 떨리더라고요. 다행히 깜짝 게스트로 유빈 언니가 와서 응원해준 덕분에 무사히 잘 마쳤어요. 

이제 ‘작가 전효성’이죠. 언제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어요? 

책으로 누군가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꾸준히 해왔어요. 제가 힘들 때, 에세이를 읽으면서 위로받았거든요. 공백기 때, 집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랑 여행을 떠났어요. 비행기에서 에세이를 읽었는데, 너무 와 닿는 거예요. 따뜻한 책 한 권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에게 이렇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면서, 언제 글을 썼는지 궁금했어요.

본격적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한 건 올해 2월이에요. 드라마 <메모리스트>를 찍고 있을 때였는데, 틈틈이 쓸 시간이 났어요. 어휴, 근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웃음) 김영하 작가님이 방송에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을 쓰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저도 ‘안 보여주면 되지 뭐’ 하면서 썼어요. 집에서, 차에서, 카페에서 장소를 계속 바꾸면서요. 

‘나도 내가 처음이라’는 제목이 재밌었어요.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그냥 다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서툰 건데. 실수 좀 해도 되는 건데”라는 대사가 나와요. 아, 맞아. 정말 ‘나’로 사는 건 처음인데 실수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몰아세웠구나 싶더라고요. 다들 학생, 엄마, 직장인 등 다양한 이름으로 살아가는데, 어차피 다 처음이니까 가끔은 서툴어도 괜찮은 게 아닐까? 그런 위로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무대에서 자신을 보여주는 건 익숙하지만, 글은 처음이잖아요. 두렵진 않았나요?

많이 떨렸죠. 음악은 가사에 리듬이 더해지니까 덜 부끄러운데, 글은 진짜 날 것 그대로의 저를 보여주는 느낌이었어요. 한편 완성할 때마다 편집자님에게 보냈어요. 잘 써지는 날에는 4편씩 보내고, 안 풀리는 날은 3일 뒤에 또 1편 완성하는 식으로요. 다행히 편집자님이 용기를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인지 글이 솔직하고, 쓴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정말요? 이런 이야기 들으면 너무 감동받아요! 단어 하나하나 고민했거든요.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 평을 들으면 진짜 좋죠.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킨 공백기

스물아홉 살에 공백기를 맞이했죠. 바쁘게 달려오다 잠시 멈추는 순간이 낯설기도 했을 것 같아요. 어떤 시간이었어요?

당시엔 힘들었는데, 돌이켜 보면 참 의미 있는 시기였어요. 가장 큰 변화는 대단한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된 거예요. 예전에는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를 극한으로 몰아붙이고는 했거든요. 지금은 소소한 일상을 잘 챙기려고 해요. 작은 행복이 쌓여야 큰 행복이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좀 더 ‘나다운 것’에 집중하게 됐어요. 

스스로 생각하는 ‘전효성다운 것’은 어떤 모습인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남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하는 것? 데뷔 초에는 많이 사랑받고 싶어서, 사람들이 장점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에 무조건 맞추려 했어요. 그러다 공백기를 맞이하면서 ‘내 진짜 모습은 뭘까? 굳이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결국, 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훨씬 낫더라고요. 지금은 자유로워졌고, 훨씬 행복해요. 

말실수가 논란이 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결국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자격증을 따서 실수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죠. 어떤 마음이었나요?

말실수하고 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미움받는 걸 두려워했는데, 그 상황을 스스로 초래한 거잖아요. 제가 생각해도 명백한 잘못이어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더라고요. 실수를 만회하려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목표로 정했어요.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시험장에서 누가 날 알아보지 않을까 온갖 걱정이 들더라고요. 열심히 공부했고 시험 시간에 맞춰 아침에 일어나는 연습도 했어요. 시험날 당일, 눈을 딱 떴는데 비가 오더라고요. 비 오니까 시험 보러 오는 사람이 적을 수 있겠다. 보러 가자 했어요. 택시 기사님도 그날따라 친절하고 감독관님도 신분증을 보시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시더라고요. 결국, 2개 빼고 다 맞았어요. 그래, 이 정도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아. 앞으로 실수 안 하면 돼 하면서 혼자 뿌듯해했죠.(웃음) 

“바쁘게 지내야 살아있다고 느끼는 요상한 성격”이라고 본인을 표현했어요. 

저는 열심히 살 때, 행복하더라고요. 어릴 때는 자발적으로 신문 배달을 하기도 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달리는데 막 스스로 너무 멋있는 사람인 것 같고.(웃음) 연습생 시절, 데뷔가 무산되어서 우울했던 적이 있었어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시간 맞춰서 일하러 가는 그 시간이 심리적인 안정을 주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아, 나는 바쁘게 사는 걸 좋아하는구나. 

정말 타고난 성격이네요. 

그런데 요즘엔 조금 바뀐 것 같아요. 20대 초반에는 열심히 한 만큼 보답을 받았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열심히 했다고 해서 모든 결과가 잘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물론 결국에는 보상이 오긴 하는데, 그 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지금은 매 순간 바쁘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천천히 가도 돼 하면서요.

휴식의 중요성을 알게 된 건가요?

네, 온전히 쉬어요. 예전에는 불안해서, 무리해서 다음 스케쥴을 잡고는 했거든요. 지금은 휴식 기간이 있어야 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이 좀 안 될 때도,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거나, 고양이 블링이와 달링이랑 놀면 행복하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적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도 있죠. 전효성의 10대, 20대 시절과 30대는 어떻게 다른가요?

10대 때는 열정이 가득했어요. 오히려 제가 10대의 전효성한테 배우고 싶은 것도 있어요. 야,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하면서요.(웃음) 20대 때는 어느 때보다 많이 사랑받고 빛났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하루하루가 서바이벌이었으니까요. 많은 아이돌 친구들도 똑같이 느끼더라고요.

그렇, 20대 후반에 공백기를 맞이했고, 정말 내적으로 성장했어요. 인생과 ‘일’을 분리하니, 일 말고도 세상을 살아갈 이유는 많더라고요. 일도 즐기면서 해야 성과가 좋고요. 그런 큰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도 불안하겠죠. 저도 30대를 맞이해서 이렇게 여유를 찾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블링달링’한 일상의 행복

고양이 블링이와 달링이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어요. 고양이를 키우게 된 후, 어떤 변화를 느끼나요?

너무 많이 달라졌죠. 제가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동물에 대한 시선이 어린아이에 머물렀을 거예요. 사람보다 동물이 낫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고양이는 순수하고, 보이는 게 전부거든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요. 고양이한테 위로받으니까, 다른 동물도 다시 보게 되더라고요. 인간에게 동물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연예인을 그만두는 날이 온다면, 제2의 직업으로 고양이를 위한 일을 하고 싶어요. 길고양이 보호소도 짓고요. 

팬들을 생각하며 노래 <STARLIGHT>를 썼다고요. 팬들은 어떤 존재인가요?

늘 애틋하고 미안해요. 공백기를 겪다 보니, 팬들과 자주 만나다 이별한 느낌이었어요. 어떤 관계든 눈에서 멀어지면 애정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팬들은 긴 시간도 다 기다려주시더라고요. 정말 ‘팬심’이라는 단어 말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도 누군가를 좋아해 봤기 때문에 그 감정이 얼마나 신기하고 대책 없는지를 알거든요.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니 늘 고맙죠. 어떤 팬이 편지에서 “저는 언니가 일이 잘되는 것도 좋지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예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제가 항상 모자란다고 생각하죠. 

오늘도 라디오DJ로서 청취자들을 만나죠. 

네, 같은 시간, 동일한 주파수에서 청취자들을 기다려야죠. 라디오는 듣는 매체니까 온전히 소리와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더라고요. 보이는 게 없으니 애써 꾸밀 필요도 없고요. 요즘은 워낙 자극적인 것이 많으니, 그 시간만큼은 편안히 소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 뒤, 자신은 어떤 모습일 거라 예상하시나요?

진짜 멋있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선배들을 봐도 여전히 한창인 느낌이 들거든요. 10년 뒤면 이제 인생 시작이다 하면서 훨씬 여유 있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가진 역량을 좋은 곳에 쓰면서요. 그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도 내가 처음이라
나도 내가 처음이라
전효성 저
스튜디오오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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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주 “내 인생이 영화라면,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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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아빠가 내 일기를 허락 없이 읽고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증거로 나를 혼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뒀다”고 기억한다.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상처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숨을 토해내듯 써내려갔다. 그 글들이 모여 『샌프란시스코 이방인』이 됐다. 오랜 시간 서동주는 ‘누구누구의 딸’로서 비쳤다. 『샌프란시스코 이방인』 안에서 그 수식어는 뒤로 물러나고 ‘서동주’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스며든다. 서동주가 지나온 시간, 지금의 서동주를 이루고 있는 것들, 그 수많은 조각들 중 하나다. 

“읽어보시면 저라는 사람하고 (독자들이) 겹치는 접점이 많아서 놀라실 것 같아요.” 그는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이방인』 속의 서동주는 외로웠고, 치열했고, 사랑하고 싶었고, 꿈을 찾고 싶었다. 도전했고, 실패했고, 다시 도전했다.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더럽고 어두운 비밀 하나쯤” 안고 살아가는 모습까지도. 왜 이토록 힘든 말들을 꺼내놓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위안’을 말할 것이다.

세상이 던져 대는 돌은 막을 수도 없고 상처 입기 마련이지만 그 상처가 나의 전부가 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살아감에 있어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아파하며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꿈을 꿀 것인가. 나는 꿈을 꾸는 쪽을 선택했다. 인생은 마음대로 제어되지 않더라도 내가 꿈꾸며 살아가는 삶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아프더라도 다시 꿈을 꿨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길을 내가 같이 걸어가 주고 싶다. (『샌프란시스코 이방인』 프롤로그 중)



인생에 지고 싶지 않은 마음

블로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셨고, 그 글들이 『샌프란시스코 이방인』에 담겼어요. 블로그 일기를 읽은 분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일도 많았다면서요?

맞아요. 비밀 댓글이어서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지만, 정말 자기 삶에 대한 에세이를 써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답장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분들의 이야기가 저와 닮은 면도 있고, 또 저보다 힘드신 분들도 있으니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더라고요. 사실 서툰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힘든 일 겪을 때도 주변에서 위로랍시고 했던 말들이 오히려 칼처럼 저를 찌르는 경우들이 많았거든요. 사람은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밖에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서툰 위로를 하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은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다 알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에 그 분들이 상처를 받지 않는 거예요. 똑같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도, 제가 말하는 것과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르게 느껴지나 봐요. 제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같아서 되게 좋았어요. 그때부터 꾸준히 소통한 것 같아요. 

당시 경험했던 공감과 연대가 이번 책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이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쓰셨어요.

그렇죠. 그게 굉장히 컸어요. 사실 책속에 부끄러운 일도 많고, 창피한 일도 많고, 어떻게 보면 공개했을 때 저한테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럼에도 공개함으로써 많은 분들에게 조금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카고(cargo, 여기에서는 ’삶의 목적 또는 우리가 태어난 이유‘라는 의미로 쓰였다)’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창피한 일’, ‘공개했을 때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말씀하신 건 어떤 건가요?

대부분 가족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요. 사실 책의 대부분은 저의 직장, 삶에 대한 가치관, 데이트 같은 내용이고 굉장히 적은 일부분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처음에는 딱 그 부분만 집중을 받았어요.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많이 우려했었는데 현실이 돼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지금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언급될 때가 많았는데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서동주’라는 사람이 보이는 느낌이에요. 

세상에 태어났으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살아야 되는지’ 고민을 해봐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돌아보는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기도 쓰게 된 것 같고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 생각들에 대한 이야기가 책속에 많이 스며들어 있을 것 같아요. 조금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저앉지 않으려고 하는 기본적인 마음 상태. 

어린 시절에는 ‘왜 더 잘하지 못 해?’라는 말을 듣곤 했다고 하셨어요. 낯선 사람들이 나를 예의주시하고, 평가하고, 소문을 만들고... 그런 일도 경험했어요. 스스로도 ‘나는 왜 더 잘하지 못할까’,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움츠러들지 않았더라고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욕심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욕심이 많다는 게 어떤 거냐면, 그냥 인생에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굉장히 강해요. 어떤 풍파가 있어도 안 지고 이기고 싶은 느낌. 영화 주인공은 힘든 상황이 닥쳐도 어떻게든 이겨내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잖아요. 내 인생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분명히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믿고 있는 거죠. 그래서 중간에 주저앉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서 영화가 끝나니까. 조금 더 노력해서 좋은 상황일 때 영화가 마무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타고난 성향인 것도 맞아요. 자꾸 ‘주저앉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까. 책에도 썼듯이 스스로를 잡초라고 생각하는데요. 사람들이 욕하고 밝으면 주저앉을 만도 한데 자꾸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나는 어쩌면 잡초가 아니었나, 그래서 자꾸 이겨내고 싶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잡초는 콘크리트 바닥도 밀어내면서 올라오잖아요. 

프로필에 보면 “가십에 얽혀 살다”라는 문구가 있어요. 관련된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는데요. 변호사 시험에 떨어졌을 때 누군가 그 이야기를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뜨렸다면서요? 전혀 모르는 남자가 ‘서동주랑 잤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했고요.

그런 일이 요즘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늘 있어왔거든요. 하다못해 대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는 저한테 와서 ‘내가 아는 다른 여자 친구가 그러는데, 최근에 네가 낙태를 했다더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 여자는 다른 학교 사람이었는데 이름을 들어보니까 제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야기를 하지?’ 싶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저한테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 믿을 거면 헤어지라고, 오히려 그 여자가 증거를 대야 되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하고 정리했어요. 

그런 일들이 작가님에게 미친 영향도 있겠죠?

오해가 있으면 사람이 걸러지기는 해요. 어떤 나쁜 일이든 분명히 좋은 효과는 있어요. 그걸 믿어야 되는데, 저는 그런 일이 있을 때 주변 사라들이 걸러진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을 믿고 나를 떠난다면 그 사람은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사람인 거죠. 그런 말을 듣고 나한테 상의하기 전에 그 여자에게 ‘너는 동주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왜 떠들어?’라고 쳐냈다면 내가 믿어도 되는 사람인 거고요. 그렇게 걸러지더라고요. 우리가 살면서 앞뒤가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나잖아요. 그러면 굉장히 충격을 받지만, 저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으니, 충격을 받기보다는 그냥 좋은 기회로 삼는 것 같아요. 

저라면 낯선 사람을 만날 때 거리를 두게 될 것 같은데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항상 오픈마인드이고 늘 좋게 생각하려고 해요. 웬만하면 상대방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를 대한다고 생각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어요. 상대방이 그에 반하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당연히 보내야겠죠. 그 전까지는 일부러 의심하지 않아요. 그 자체가 되게 스트레스예요. 내 경험이 그랬기 때문에 ‘쟤가 왜 나한테 잘해주지? 의도가 있겠지?’, ‘뒤에서 무슨 이상한 소문을 내지 않을까?’ 의심하면서 산다는 건 저한테는 너무너무 피곤한 일이에요. 좋은 의도로 상대방을 대하고 믿어주고, 그러다가 그 사람이 상처를 주면 그때 정리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미리 의심하면 삶이 너무 어두워져요. 



잃는다는 것

부모님의 영향으로 본의 아니게 유명해졌어요. 그래서 ‘착한 딸 콤플렉스’도 생겼을까요?

그렇죠. 아무래도 부모님이 유명하다 보니까 공부 잘해야 된다는 압박이 없을 수는 없죠. 한 번 잘하면 그 다음부터는 ‘이번에도 잘하나 지켜봐야지’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잖아요. 그런 식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던 것 같아요. 저는 또 욕심이 많으니까 기대에 부응하려고 능력 이상으로 많이 노력하고. 어릴 때도 과외를 11개인가 했던 것 같아요. 유학가기 전까지는. 어린아이인데도 새벽에 공부하고...

부모님 의견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아이였다면, 조금 더 행복했을까요?

네, 그러면 더 행복했겠죠. 자기 의견이 있다는 거니까. 매번 반기를 들지는 않겠지만 내가 원하는 게 있을 때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죠. 그런데 그때는 부모님이 너무 큰 존재여서 엄두가 안 났어요. 아예 생각을 못했어요. 

30대 초반에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고 하셨어요. 자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고요. 계기가 있었나요?

그건 아니고, 저에게는 그 시기가 조금 그랬나 봐요. 주변에도 보면 30대 초반이 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나이대가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자꾸 자아를 성찰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일들이 뒤따라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내가 전업주부로 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시기가 오니까 ‘이게 내가 행복한 길인가, 내 커리어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건가, 이제 아이를 낳으면 되는 건가’ 이렇게 자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갔을 때 어떠셨어요? 막막하고 외롭고, 그런 도시로 와 닿았나요?

막막하죠. 그 전에 제가 전 남편을 따라서 이사를 할 때는 항상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 친구들을 사귀는 경우가 많았어요. 언어도 다르고. 중국, 체코처럼 말 한마디 못하고 친구 하나 없는 곳에서 정착을 시작해야 되는 상황이 있었어요. 샌프란시스코도 그런 곳 중에 하나였던 것 같아요. 언어는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요.

네, 지금은 저의 고향이 됐죠. 

외롭고 버거웠는데, 왜 떠나지 않으셨어요?

블로그에 올렸던 글 중에 「One art」라는 시가 있어요. 엘리자베스 비숍이 지은 사랑에 대한 시예요. 사실 잃는다는 것은 굉장히 쉽게 이루어지는 미학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나는 언젠가는 열쇠도 잃어버렸고 집도 잃었고 대륙도 잃었다고 해요. 사랑을 하고 살아가다 보니까, 결국에는 슬픈 기억이 남으면 다 잃어지는 거예요. 대륙을 잃었다고 하는 것도,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이 거기에서 자살을 해서 너무 슬픈 기억이 있으니까 거기를 갈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런 느낌으로, 제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 마음속에서 안 가고 싶은 장소로 잃어버리게 될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잃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 시가 저한테 되게 큰 의미였어요. 

‘지금은 인생 3막을 살고 있다’고 하셨어요. 2막은 언제였을까요? 결혼을 기점으로 시작됐을까요?

음... 그렇죠. 한 챕터가 새로 열렸던 건 맞는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거의 1년간 인생을 굉장히 단순화시켜서 살았거든요. 예전에는 생각이 너무 많았어요.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쓸 수 없는데, 제가 남한테 상처주기 싫고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되게 커요. 당시에는 그걸 버리는 시간을 조금 가졌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더 큰 의미가 있었던 시기예요. 이혼을 해서가 아니고, 당시에 저의 마음가짐이 새로웠기 때문에 기억이 많이 남아요. 그때는 진짜 단순하게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만 생각하고 결정을 다 내렸어요. 예전에는 튀기 싫고 남들이 하는 대로 맞추는 게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당시에는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고, 자고 싶으면 자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좋아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좋아하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다 단순화시켜서 결정을 내리며 살았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인생 2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단순히 이혼을 해서가 아니고요. 

인생 3막은 어떤 계기로 시작된 것 같으세요? 작가가 되면서? 방송 활동을 시작하면서? 변호사가 되면서?

그 모든 게 이루어지면서 같이 어우러지면서 된 것 같아요. 직업이 바뀌어서는 아니고요. 세 가지 일이 맞아떨어지면서 3막이 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보낸 인생 3막은 어땠나요?

음... 사실 아직도 생각이 많아요. 이것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되는지에 대한. 제가 방송을 하면서 만나는 PD님이나 작가님들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너의 포지셔닝이 애매하다’는 거예요(웃음). 방송을 해도 방송인인지 변호사인지, 애매하다는 거예요. 

방송에 출연하는 변호사도 많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은 주로 법률 자문을 하시는데 저는 그런 것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포지셔닝이 약간 애매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그 부분은 조금 고찰이 필요할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생각을 많이 해봐야 될 것 같아요. 이것도 남의 시선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변호사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방송에 나오냐’, ‘(방송에 안 나오면) 욕 안 먹고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그런데 저한테는 욕을 먹고 안 먹고가 전혀 중요한 게 아니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거거든요. 그런 문제들에 대한 정리를 많이 해야 됐던 것 같아요. 

왜 방송 일을 하고 싶으세요?

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도 약간 똘끼가 있나 봐요(웃음). 되게 재밌고 확실히 에너지를 받아요. 방송 하고 나면 에너지를 뺏기거나 지치는 게 아니고, 즐겁고 재밌고 사람 만나는 게 좋아요. 방송에서 약간 망가지기도 하잖아요. 그게 재밌어요(웃음).

확실히 끼가 있으시군요(웃음).

조금은 있는 걸로(웃음). 제가 ‘연예인 해야지’ 이럴 정도의 끼는 아닌 것 같고요. 조금은 있는 걸로 생각해요. 

책에도 쓰셨듯이, 사람들이 너무 쉽게 ‘나 같으면 안 그럴 텐데?’,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살까?’ 하고 말하잖아요. 작가님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오셨을 것 같고, 지금도 들으실 것 같아요.

그렇죠. 

방송 출연을 하지 않으면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적을 텐데요. 그러면 삶이 더 순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냥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욕 안 먹고 순탄한 삶을 원하면 안 하면 되는 거고, ‘내가 하고 싶으면 한다’는 마인드로 살고 있는 사람이면 그냥 하면 되는 거고요. 자기 마인드에 따라서 결정을 하면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남의 시선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해요. 그냥 가만히 있어야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건 내가 디자인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태어나게 된 건데, 한 획은 못 그어도 점이라도 찍고 떠나야 하지 않나 싶어요(웃음). 그 점을 찍는다는 게 ‘그냥 직장 다니면서 사는 게 편할 텐데’라는 말을 듣는 게 옳은 건지, 아니면 욕은 조금 먹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면서 사는 게 옳은 건지, 그건 자기 마음가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한다’는 의미의 욜로를 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남들의 시선, 말에 별로 신경 안 쓰세요?

신경 당연히 쓰이죠. 댓글 보면 당연히 기분 나쁘고. 사람인데 어떻게 안 그래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결정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런 말에 너무 큰 가치를 두면 내가 힘든 걸 아니까 안 보려고 하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변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내 인생인데 내가 정하고 싶잖아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이전까지는 남의 말 듣고 살았잖아요. 엄마아빠 기대에 부응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

“나처럼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끼는 외로운 이가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쓰셨어요. 다른 인종, 다른 문화 사이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도,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사실 우리는 다 조금씩 다르죠.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평균이 된 거잖아요. 다 평균만 있으면 평균이라는 말도 없겠죠. 우리는 다 다르기 때문에 평균을 내는 거고, 모두 조금씩은 이방인이라고 느끼면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름을 인정하면 좋은데, 자신도 이방인이면서 평균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안 맞추는 사람들을 보면 욕을 하게 되죠. ‘너 그렇게 튀면 안 돼.’ 왜냐하면 나도 참고 평균에 맞추고 있으니까. 그래서 ‘너도 참아야지, 이게 인생의 옳은 길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모두 이방인이니까 그걸 인정하고 다름도 인정하자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살까’ 싶어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은 나를 보면서 ‘왜 저러고 사나’ 싶을 거잖아요. 서로 그래요. 그냥 어우러져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이슬란드로 여행 갔던 이야기도 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한편의 영화 같아요(웃음). 여행을 준비할 때 라디오에서 ‘카고(cargo, 삶의 목적 또는 우리가 태어난 이유)’에 대해 들으셨다면서요?

네, 되게 유명한 요가 구루라는 분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카고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내 카고가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 많은 사람들을 돕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은 유명해야 되고 돈도 조금 있어야 되고, 이런 필요한 요소들이 있잖아요. 제가 전문직을 갖고 있고 책을 쓰고 방송 활동도 조금 하고 이런 것들이 어우러지면 분명히 도움이 되는 특성(feature)들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것으로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남들이 볼 때는 생뚱맞은 세 가지를 왜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제 큰 그림으로 봤을 때는 저한테 도움이 될 법한 일인 거예요. 

“억지로 애쓸 필요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마음과 상처와 시간이 물처럼 흐르게 놔두는 것. 지금 우리 가족에게는 그저, 그것으로 족하다”고 쓰셨어요. 지금은 물 흐르는 대로 지켜보자고 생각하세요?

그런 것 같아요. 인생에 있어서 계획을 세운다거나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을 때 그대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리고 물은 이리로 흐르고 있는데, 이미 물길은 나있는데 옮기려고 하면 땅도 새로 파야 되고 너무 많은 일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흐르는 대로 놔두는 게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가장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안 좋은 기억들도 지우려고 하면 오히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기억에 대해서. 없애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놔두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 아닐까요.

다음 책은 공부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항상 저한테 공부법을 물어봐요. 얼마 전에 인스타 라이브를 했는데 다 공부법만 물어보시더라고요(웃음). 이번 책에도 공부법에 대한 내용이 있기는 한데 그래도 구체적으로 써볼까 싶어요. 



누군가 ‘서동주는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것 같으세요?

두 가지 정도인 것 같아요. 열정이 있는 사람이고 긍정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행복하기 위해서 긍정적인 걸 버리면 안 되는 것 같고, 그걸 꾸준히 이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건 대단한 일이기도 하죠. 사람에 대한 희망,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저도 많이 변했기 때문이에요. 저도 부모님이 잘 나가고 그랬을 때는 거만하고 교만하고 남들 무시한 적 많았어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알지 못한 채(웃음), 굉장히 겸손하지 못한 채 살았는데요. 내 경험에 기반 해서 남들을 보니까, 되게 좁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남을 많이 판단했던 것 같아요. 이제 제가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까, 사실 타의에 의해서 조금 겸손해진 것도 있죠.

내가 변했듯 남들도 변할 수 있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진짜 많이 변했어요. 배려심도 없었는데 배려도 많이 늘고. 많이 변했어요 저는. 

앞서 ‘어떤 나쁜 일이든 분명히 좋은 효과는 있다’고 말씀하신 게 생각나네요.

예전에 테레사 수녀님이 그러셨대요. 하나님은 당신이 감당할 만한 일만 주신다고. 그 말을 듣고 정말 싫어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맞는 것 같아요. 다 감당이 되는 것 같아요.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분명히 거기에서 또 좋은 점들이 얻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샌프란시스코 이방인
샌프란시스코 이방인
서동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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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을 더 믿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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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자마자 부모와 이별했다. 보육원과 남의 집을 전전하며 고된 노동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불행에 자격이 있다면 이보다 적격일 수 있을까 싶지만, 비관보다 낙관을 선택한 어린아이. 긍정과 상상력의 상징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다. 넘어진 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앤의 모습에서 고집스러운 기쁨을 발견했다는 백영옥 작가. 빨강머리 앤은 백영옥 작가가 가장 힘들 때 찾는 ‘안전지대’다. 초록색 지붕집에 오기 전, 어린 앤의 이야기를 담은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으로 돌아온 백영옥 작가를 만났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 순간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앤이 내게 온몸으로 보여준 진실이었다. (9p)



캐릭터 에세이, 계속 나오지 않을까요?

4년 만에 후속작이 나왔어요.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내면서 라디오를 시작했고 어쩌다 보니 방송을 많이 했어요. 주로 책 관련 프로그램이었고, 상담 프로그램도 했고요. 

책을 매개로 활동 영역이 넓어진 건데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아요.

방송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작가로 혼자 일하다 보면 그런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다른 필드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배웠죠. 반면에 어려웠던 건 그냥 너무 힘들었어요. (웃음) 조금 다른 의미의 번아웃을 겪은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2006년에 등단한 이후로 제대로 쉰 적이 없더라고요. 10년간 주말도 없이 일한 거예요. 편집자들이 저보고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의 워커홀릭이래요. 제 안에 쉬면 안 된다는 불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작이 베스트 셀러가 돼서 후속작을 내면서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아요.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아무래도 전작을 읽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실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부담이나 걱정을 달고 살면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다만 항상 읽을만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요. 

가장 힘들었을 때 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고요. 

2006년도에 회사에 사표를 내고 몸이 망가졌을 때였어요. 두 달 동안 누워서 우유만 먹을 정도로 의욕이 바닥났을 때였는데 그때 유일하게 보고 싶었던 게 빨강머리 앤이었어요. 빨강머리 앤 비디오를 멍하게 보고 있으니까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너는 힘들 때 꼭 그거 보더라” 하더라고요. 예전에 중요한 인터뷰를 못 하게 된 날이 있었는데 그날도 집에 와서 빨강머리 앤을 봤대요. 힘든 순간에 붙잡는 끈이 다 다르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앤이었던 거죠. 잘 모르다가 힘든 일을 겪고 알게 된 거예요.

그때 앤의 어떤 말을 들었는지 기억나나요? 

앤이 그러잖아요. 실망하더라도 기대한다고요. 처음에는 그 말이 싫더라고요. 그때는 등단 전이었는데요. 매번 ‘이번에는 등단할 수 있을까’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죽을 것 같은 거예요. 같은 일이 반복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더 힘들더라고요. ‘아, 나의 이 재능 없음을 어떻게 하나’ 하고요. 그런데 앤이 자꾸 그런 말들을 하니까 혼자 생각해 보다가 한 번 써보자 싶었어요. 적으니까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실망하더라도 기대할래요’를 소리 내서 읽는 데 마치 앤이 나를 응원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시 해보자 싶었어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 출간된 이후 캐릭터 에세이 붐이 일었어요. 이런 현상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내고 ‘플란다스의 개가 하는 말’부터 ‘키다리 아저씨가 하는 말’까지 다 나오겠다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는데 진짜 나와서 정말 놀랐어요. (웃음) 독자들이 예측 가능한 인물이 주는 확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은 사는 게 너무 불확실하잖아요. 그런데 앤을 비롯해서 우리가 하는 만화 속 주인공들은 너무 예측 가능한 인물이니까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는 거죠. 

반대로 캐릭터 에세이가 인기 있다는 건 요즘 사람들에게 예측 가능한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네요.

그렇죠. 결혼하고 똑같다고 생각해요. 결혼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건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 주는 거거든요. 그게 작동하면 원만하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죠. 저 사람이 나한테 돌아올 거라는 신뢰가 있으면 그 사람이 어디서 무얼 하든 고통스럽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연인이 서로 사랑하는데 못 믿어요. 결혼하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안정감이잖아요. 내 편을 만들고 싶다는 거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불안정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건데 그걸 표현하는 말이 예측 가능성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앤을 좋아하는 이유도 예측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모든 유행이 그렇지만, 계속되는 캐릭터 에세이의 인기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처음 냈을 때 그렇게 인기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캐릭터 에세이가 지금처럼 많이 나올 거라고도 예상 못 했고요. 그런데 사실 지금 하는 말은 전부 사후적인 거죠. 나오고 나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거고요.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계속 나올 것 같아요. 일종의 시장이 된 게 아닐까 싶고요. 

캐릭터 에세이라는 장르요?

그런 셈이죠. 요즘 아이들에게도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잖아요. ‘방귀 대장 뿡뿡’이라든가 ‘토마스’라든가 얼마나 많아요.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100% 의지하고 좋아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거든요.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 같은 친구요.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나오지 않을까요? 



누구나 ‘빨강머리 앤’ 같을 수는 없지만

이번 책에는 앤이 초록색 지붕집에 오기 전의 이야기가 담겼어요. 가장 기억의 남는 어린 앤의 말이 있다면요?

가장 크게 와 닿은 건 ‘고집스러운 기쁨’에 관한 이야기예요. 책의 제일 처음에 넣은 이유도 그래서인데요. 살다 보면 안 좋은 일이 생기잖아요. 이별을 겪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여러 종류의 실패도 경험하고요. 그런데 결국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모든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노력하느냐 아니냐인 것 같더라고요.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로 들려요.

태도의 문제죠. 그러니까 고집스러운 기쁨과 자연스러운 기쁨이 다른데요. 맛있는 걸 먹거나 좋아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기쁨이잖아요. 그런데 고집스러운 기쁨은 그런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너무 슬픈 일이 있는데 그 와중에 밥을 하다가 밥통에서 나오는 밥 냄새를 맡고 위안을 받는다거나 지는 노을을 보면서 위안을 받는 거죠. 앤이 빨래가 바람에 날리는 걸 보면서 바람에 이름을 붙여 주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고집스러운 기쁨은 좋은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은 아니에요. ‘어떻게든 나는 행복을 선택할 거야’라는 다짐 같은 거죠. 앤은 넘어졌을 때도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는 초긍정의 아이콘이잖아요. (웃음) 물론 누구나 앤 같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태어나진 않아요. 앤은 타고난 거죠. 

타고나지 않은 사람도 할 수는 있는 거죠?(웃음)

낙천성과 낙관은 다른 것 같아요. 낙천성은 타고나야 하지만 낙관은 일정 정도의 훈련으로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해보자는 거예요. 자연스러운 기쁨 말고 고집스러운 기쁨, 행복 쪽으로 나를 가져다 놓는 연습이요. 불행 속에 자신을 던져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사명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좋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야 어른 같아요. 그런 사람이 그나마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고요. 그저 남 탓하고 ‘내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 하면 자기 성장으로 이어질 수 없거든요. 

결국 자신을 위한 태도가 아니라는 거네요.

그렇죠. 그래서 건강한 방어 기제를 갖는 게 중요해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방어하잖아요. 투사하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하고 다양한데 앤의 방어기제는 유머와 상상이죠. 

작가님의 방어 기제는 뭔가요? 앤과 비슷한가요?

저한테는 안전핀이 있는데요. 소설이에요. 힘든 일을 겪으면 ‘내가 이 일을 이겨내고 나면 한 권의 소설이 나올 거야’ 하고 생각하거든요. (웃음) 이게 제 마음의 안전지대예요. 대개의 작가는 소설을 쓰고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요. 그 캐릭터와 시대를 살기 때문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죠. 

SNS를 안 한다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인가요?

지금도 안 해요. SNS의 좋은 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필터를 통해 구성되는 거라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거죠. 우리 사회의 분열과 SNS 생태계가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현대인들은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내면화하는데 SNS가 이런 생각을 하게 부추겨요. 특히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SNS를 접하잖아요. 너무 많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요. 우리 어릴 때는 우리 반 친구랑 나를 비교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걸그룹을 보면서 비교하는 거예요.

비교 대상이 많아진 거군요.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로 예쁘고 잘하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해요.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경험을 많이 하면 스스로 평범해지면 안 된다는 공포가 생기는 거예요. ‘남들만큼 살고 싶어’의 ‘남들’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거죠. 자존감이 주식 폭락하듯 떨어지고 안 멈춰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끊어낸 거예요. 살려고요. (웃음)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나한테 집중을 못하더라고요. 

SNS를 끊고 책도 더 읽게 됐다고요. 

SNS 하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마 많은 분이 공감하실 거예요. 물론 SNS를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바이럴 마케팅 같은 SNS 생태계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다만 대안을 찾을 필요는 있어요. 그리고 확증 편향을 강화하지 않고 다른 것들도 볼 수 있게 스스로 노력하고 힘을 길러야죠.



말은 위로되지 않았어요

앤이 버트 아저씨와 이별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합’이라고 했어요. 위로가 어렵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혹시 기억에 남는 위로가 있나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말보다 옆에 있어 주고, 따뜻한 차 한 잔 건네주었던 일이 기억 나고요. 정말 힘들 때는 언어 이전에 감각이 더 우선되는 거 같아요. 손을 잡아 준다거나 안아준다거나 그냥 옆에 있어 주는 일, 때로는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도 인정해 주는 게 위로 아닌가 싶어요. 어려운 일이죠. 

어려운 일 같아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죠.

생각해 보면 상대방을 위해서라기보다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하는 위로도 많아요. ‘힘내’, ‘파이팅’, ‘시간이 약이야’, ‘다 지나갈 거야’,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다 잘 될 거야’ 같은 막연한 말들 있잖아요. 그런데 정말 너무 힘들 때는 이런 막연한 이야기는 하나도 도움 안 돼요. 와 닿지 않고 평소라면 소화할 수 있는 말들도 하지 못해서 불편해지기 쉽죠. 

위로를 밧줄에 비유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밧줄을 던졌는데 내가 밧줄을 안 잡고 던지면 안 되잖아요. 던진 사람이 밧줄을 힘껏 잡고 있어야 올라오는데 안 잡고 있으면 어떻게 올라오겠어요. 더 밑으로 빠져들죠. 밧줄을 던졌으면 그 밧줄의 끝을 잘 잡고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줄을 잡고 올라 올 때 놓으면 안 돼요. 그런데 꽉 잡고 버티다 보면 잡고 있는 사람도 열상을 입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위로가 어려운 거예요. 

라디오 하면서도 가능하면 ‘힘내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요. 

아무리 좋은 책을 추천해도 너무 힘들면 책을 못 읽어요. 정말 힘든 사람한테는 책 추천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문장 처방을 했어요. 딱 맞는 어떤 문장과 상황을 먹기 좋은 형태로 잘 조리해서 주는 거죠. 잘 소화할 수 있게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었겠어요. 

후회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고요. 그걸 몇 년을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그 원고를 썼어요. 원래 힘이 가장 많이 드는 일을 처음에 해요. 제일 하기 싫으니까. 그게 주로 소설 쓰기였는데…(웃음) 그 원고 쓰려고 트라우마나 애착 관련 책도 읽고 정신과 선생님들도 많이 만났어요.  



앤의 이야기를 보고 위로받았다는 독자들이 많아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기 바라세요?

에필로그에도 썼는데요. 외상 후 스트레스보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을 더 믿고 싶어요. 근육을 찢는 운동을 반복하면서 근력을 키우듯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앤의 어린 시절도 사실 고난의 연속이거든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 성장한 거예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메시지를 발견하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와 닿는 이야기가 저마다 다르겠지만요.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백영옥 저
arte(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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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진 “예민함은 나쁜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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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사람의 고통은 예민한 사람만 안다. 누군가 스치듯 던진 말 한마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 내일 처리할 회사 업무 같은 걸 생각하느라 잠 못 드는 밤이 얼마나 괴로운지. 종종 벼랑 끝을 걸으며 사는 것 같고, 꼬리를 문 걱정이 일상을 덮칠 정도로 불어나면 늘 자책한다. ‘나는 왜 이토록 예민하게 태어나서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는 걸까?’

그런데 삼성서울병원 정신의학과 전홍진 교수가 펴낸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에 따르면 예민함은 타고난 게 아니라 길러졌을 가능성이 높고, 잘 관리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곧게 날이 선 예민함의 방향을 조금만 바꾸면, 성공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니. 예민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책에 적힌 해결 방법들을 하나둘 따라 해 봤다. 단 며칠 만에도 유의미한 효과가 있었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은 예민함이 심해지면 긴장, 걱정, 불면에 우을증으로 진행될 수 있지만,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뇌의 균형을 찾고 항상성을 잘 유지하면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통찰을 얻게 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잘 공감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39쪽)



우울증 환자도, 성공한 사람도 예민하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제목이 정말 직관적이에요. 어떻게 기획한 건가요? 

저는 주로 우울증 환자들을 진료하는데,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은 매우 예민하다는 특성이 있어요. 그런데 병원 위치가 강남에 있다 보니 건강검진을 위해 아주 유명하고 성공한 분들도 많이 오시거든요.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무척 예민하신 거예요.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예민하고, 우울증 환자도 예민하다면, 이 차이가 어디서 시작됐을까 생각을 해보니 아주 옛날로 돌아가더라고요. 성공한 사람들은 본인이 예민하다는 걸 일찍부터 잘 알고 관리를 했어요. 그리고 그 예민성을 일에 최대한으로 발휘한 거죠. 예를 들어 디자이너라고 하면, 예민한 감각으로 트렌드를 읽고 남과 다른 옷을 만드는 거예요. 

반면 우울증 환자들은 이 예민함 때문에 우울한 기분에서 헤어나오질 못해요. 잠을 못 자는 건 기본이고요. 집밖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사람을 아예 안 만나는 분들도 많죠. 같은 예민성을 가지고 있는데, 삶이 극명하게 차이나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예민한 성향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본인이 그걸 느꼈을 때로 돌아가 스스로 예민하다는 걸 자각하고 관리를 잘 하면 환자가 될 사람이 성공하는 게 아닐까?’ 그 방법을 수많은 사람에게 알려드리고 싶어서 책을 쓰게 됐어요. 

제목은 직접 지으신 건가요? 

원래 처음 제가 지었던 제목은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었어요. 그런데 책을 내기 직전에 출판사에서 ‘조언’이라는 표현은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 권하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바뀌었는데, 저도 지금의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들어요.(웃음) 

정신의학에 관련된 내용이라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술술 읽히더라고요.

예민한 사람들이 읽기 쉽게 만들려고 굉장히 애를 썼거든요. 예민한 사람들은 책도 디테일하게 읽어요. 이분들에게 예민함을 관리하면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설득하려면 쉽고 정확하게 써야 해요.(웃음) 어디서 인용한 건지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납득할 만한 근거를 꼭 알려줘야 하죠. 모호하면 안 믿거든요. 그리고 너무 길면 읽다 지치니까 짧은 원고들을 모았어요. 

한국과 미국의 우울증 사례 연구를 해오셨는데요. 어떤 점이 가장 다르던가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연수를 가서 본격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우울증을 비교하게 됐는데요. 서양 사람은 우울증이 있으면 자기가 신에게 죄를 지어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우울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내 감정이 슬프다, 불안정하다, 예전과 다르다는 걸 잘 인지하죠. 또 미국 사람들은 파티 등 취미생활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곳에 가면 우울한 기분이 표면으로 잘 드러나니까 주변에서도 피드백을 많이 해주는 거예요. 우울한 기분이 드러날 기회도 많고,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는 편인 거죠. 

반면 아시아권 사람들, 특히 극동아시아는 감정표현이 적어요.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게 많기 때문이에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게 미덕처럼 문화 속에 오랫동안 굳어진 탓에 희로애락이 표정에 잘 안 나타나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다 보니 슬프고 예민해지면 몸이 아파요. 보통 환자들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머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소화도 잘 안 된다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해요. 그러니까 계속 병원만 돌아다니게 되는 거예요.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주로 흔하게 드러나는 신체적 증상이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이거든요. 잘 관리해서 일하는 데 쏟아야 할 예민성의 에너지를 신체 증상을 고치려고 병원을 찾아다니는 에너지로 소진해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얻으면 그제서야 정신의학과를 찾아요. 너무 안타깝죠. 

실제 치료 사례들이 담겨 있어서 흥미로웠어요. 

제가 그동안 진료한 환자가 만 명 가까이 되거든요. 그 중 예민한 사람들의 사례를 잘라서 40개의 유형으로 만들었어요. 책에 나오는 사례 하나당 적게는 10~20명, 많게는 100명이 넘는 환자의 케이스를 압축해서 담은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이 사례에 속하는 사람들이 환자라는 뜻은 절대 아니에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민한 사람들을 제가 진료한 데이터를 토대로 유형화 한 거죠. 



예민함은 성향일 뿐, 나쁜 게 아니다 

자신이 ‘매우 예민한 사람’인지 아닌지 체크해볼 수 있는 자가점검표가 실려 있어요. 직접 고안하신 건가요?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설문지는 체크하기가 어렵겠더라고요. 전부 다 인지적인 걸 물어보거든요. 문항이 보통 ‘당신은 우울하십니까?’ ‘당신은 불안을 느낍니까?’ 이렇게 시작해요. 그럼 체크하는 사람 입장에선 난감하죠. 우울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불안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웃음) 정상적인 평균치를 잘 모르니까요. 그런 설문지는 제가 봐도 체크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체적 느낌들을 모아 임의로 척도를 만들어 봤어요. 신체적 증상은 감별하기가 쉬우니까요. 그랬더니 구별이 정말 잘 되더라고요. 주위 사람들에게 테스트를 많이 해봤는데,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은 보통 2~3개의 항목만 체크를 하는데 예민한 사람들은 심할 경우 모든 항목을 다 체크하기도 해요. 제 주위에도 이런 분들이 많았죠. 그런데 예민한 분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니, 이게 다 체크 안 되는 사람도 있나요?”(웃음) 

사실 저도 ‘2~3가지의 몇몇 질문을 빼고는 대부분 체크 할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아니에요. 남들보다 조금 더 힘들게 살고 계신 거예요.(웃음) 보통 2~3개 정도 체크하는 분들이 많고, 전체의 1~20% 정도의 매우 예민한 사람들만 대부분의 항목에 체크를 하거든요. 여기에 얽힌 한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출간 전, 출판사에서 원고를 보고 자가점검표가 잘못된 거 같다면서 연락을 하셨어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직원들에게 테스트를 해봤는데, 거의 다 대부분의 항목을 체크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교정 보고, 책을 편집하는 일이니 성향 자체가 예민한 분들이 많이 모이셨나 봐요. 예민성을 일에 쏟는 분들인 거죠. 

그런데 체크된 항목이 많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매우 예민한 성향일 뿐이죠. 예민한 성향은 결코 나쁜 게 아니니까, 스스로 예민하다는 걸 알고 앞으로 어떻게 예민함을 관리해 나갈 건지가 중요해요.  

그럼 어떻게 관리할 수 있나요? 

먼저 책에 나오는 ‘매우 예민한 사람들’의 다양한 유형 중,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찾아보시고, 그 안에 있는 조언대로 한 번 실천해 보시기를 권해요. 또, 예민함은 에너지와도 연관이 있거든요. 예민함을 잘 관리하려면 자신의 에너지 수준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자기가 가진 에너지가 소진되기 전에, 다시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죠.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거나, 예민함을 발휘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중간중간 에너지가 다 떨어지기 전에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시간을 끼워 넣어야 해요. 그러면 예민함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확 줄어들 거예요. 관리가 잘 되면 상당히 부드러워지죠. 

‘예민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에너지가 소진되기 전에 다시 충전을 해야 한다.(355쪽)’고요.

핸드폰 배터리가 0%에 가까워지면 난감하고 불안하잖아요. 하지만 50% 정도 떨어졌을 때 알아차리면 다시 충전해서 금방 100%를 만들 수 있죠. 예민함도 똑같아요. 자기가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에너지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이유죠. 그럼 저절로 마음의 여유가 생겨요. 책에는 ‘예민한 마음을 약간 평평하게 해준다(6쪽)’고 썼는데, 예민함을 관리하려고 작은 행동이라도 하나씩 하다 보면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날 거예요. 실제 치료 사례 중, 확실한 효과가 있는 방법들만 모았거든요. 



예민해서 대인관계가 힘들 때 

우리나라에서는 예민하다는 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곤 해요.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릭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죠. 

그건 예민함을 잘 관리하지 못해 감정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현된 하나의 예일 뿐이고요. 오히려 예민하다는 건 섬세함, 꼼꼼함과 연관이 있죠. 예민한 사람들은 섬세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아요. 

‘예민한 성격은 인간관계의 형성에 지장을 줄 수 있다(342쪽)’고도 하셨어요. 

예민함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매우 큰 영향을 미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일지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되는데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리스트를 쭉 써보면, 좋아하는 사람의 교집합은 본인과 비슷한 모습이고 싫어하는 사람의 교집합은 본인과 정반대 성향의 모습일 경우가 많아요.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과 친해지기 마련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예민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왜 문제가 생기냐면, 만나서 편한 사람이 아주 적기 때문이에요.(웃음) 반면 싫은 사람은 많고요.

또, 싫어하지 않더라도 예민한 사람들은 타인을 만나면 너무 많은 정보를 얻기 때문에 쉽게 지쳐요. 대화를 나눌 때, 보통 사람들은 상대가 어떤 말을 하는지 듣는 것만 집중한다면 예민한 사람들은 이야기의 내용뿐 아니라 작은 디테일에 다 신경을 쓰죠. 예를 들어 표정, 말투, 옷차림, 분위기, 태도 같은 것들이요. 보통 사람은 메가바이트로 받는 정보를 기가바이트로 받는 셈이에요.(웃음) 그러니 사람을 만나고 오면 기력이 떨어지죠.  

비단 대인관계뿐 아니라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정보를 다량으로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맞아요. 책에도 나오지만 특히 운전할 때 예민함이 발휘되는 분들도 많죠. 차가 옆에서 튀어나오면 어쩌지? 누가 갑자기 뛰어들면 어쩌지? 급발진 일어나면 어쩌지? 하면서 너무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요. 그래서 차 운전할 때 무척 조심하고, 한 번 운전하고 나면 굉장히 힘들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운전하지 않거든요.(웃음) 이런 게 쌓이다 보면 나중에 탈이 날 가능성이 높은 거예요.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가족, 그중에서도 특히 ‘배우자가 가장 중요하다(318쪽)’고요. 

예민함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편안해지거든요. 자신이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배우자를 만날 때도 이를 염두에 두셔야 해요. 내가 예민한데 배우자가 그걸 자꾸 자극하면 예민성은 점점 더 심해져요. 안정적이고 다정다감한 상대를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하죠.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떡하나요?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돼요. 무언가를 했을 때, 마음이 편안하고 예민함이 없어지는지 발견해야 하는 거죠. 반려동물일 수도 있고, 취미활동일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마라톤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라톤 동호회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거든요. 이야기를 나눌 때도 불편함이 없고요. 그런 걸 찾아야 해요. 예민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다고 집에만 누워있으면 안 돼요. 보통 매우 예민한 사람들은 사회와 단절되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에요. 혼자 누워서 더 많은 생각을 하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예민해져요. 20~30년 전 일까지 생각하게 되거든요. 타임머신을 타고 아주 먼 옛날로 회귀해서 내가 잘못했던 일, 창피했던 일 다 생각하며 괴로워하죠. 

저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 ‘내가 그 말을 왜 했지’라는 생각 때문에 힘든 날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책의 조언을 보고 그 불편한 감정이 거의 사라졌어요. ‘지금 말한 것이 결국은 잊어버릴 내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좋다.(296쪽)’고 하셨는데요. 

맞아요.(웃음) 달력을 확인하지 않고 한 달 전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곧장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죠. 그날 만났다는 기억, 익숙한 느낌만 떠오르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세세하게 기억하고 곱씹는 사람은 없어요. 그것만 알아도 마음이 한결 편해져요. 

예민함이 유전되기도 하나요? 

유전이라기 보다는 닮아간다고 할 수 있어요. 예민한 부모를 보고 배우니까요. 특히 예민한 분들은 산후우울증에 걸리기도 쉬운데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남편의 역할이에요. 아이는 태어나서 1년간의 양육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불안정안 아내 대신 남편이 아이를 잘 돌봐 줘야 해요. 그래야 아내의 우울함도 나아지고, 아이의 애착 형성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 남편이 일찍 퇴근해서 아내, 아기와 시간을 보내는 게 꼭 필요하죠. 영아기 시절 아빠의 육아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이에게 그 어떤 사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훨씬 큰 이익으로 돌아올 거예요. 



예민한 사람들은 슈퍼맨이에요

책에 대한 반응이 좋아요. 실감하세요? 

예민한 분들과 소통하고 싶었는데, 책이 나오면서 그게 가능해진 것 같아 즐거워요. 보통 리뷰를 보면 이 책을 읽은 독자의 감상이 세 부류로 나뉘더라고요. 하나는 ‘정말 내 얘기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에요. 이분들은 스스로 예민하다는 자기 인식이 된 거니까, 본인에게 맞는 유형을 찾아 해결방법을 따라해 보시면 큰 도움이 되실 거예요. 또 하나는 ‘본인은 안 예민한데 가까운 주변인이 예민하다’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책을 선물했더니 예민함을 가진 당사자가 굉장히 재밌게 보고, 조금 바뀐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머지 하나는 ‘이 책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분들이었어요. 아주 소수이긴 했는데요. 본인도 예민하지 않고, 주변에서도 이렇게 예민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 분들이 가장 중요해요.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가장 중요한가요?

일단 본인이 예민하지 않다면, 주위 사람 중에 예민한 사람이 있는지 관찰해 보고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뜻이잖아요. 그럼 공감능력이 다소 부족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주변에 예민한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없어요. 만약 책을 읽고 ‘이런 사람들이 어딨어’라고 느끼셨다면,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분명 있을 거예요. 만약 다시 생각해도 전혀 없다면, 본인을 한 번 돌아보세요. 예민한 사람들이 자신의 예민함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할 정도로 불편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같이 있으면 불편하니까 예민한 사람들이 피하는 거예요.(웃음) 지금 당장 집필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는 이런 분들을 대상으로 한 책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예민함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거든요. 

예민함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리뷰를 보시면 무척 뿌듯하시겠어요.

너무 기쁘죠. 어렵게 책을 쓴 목적이 달성된 거니까요. 그런데 독자들이 대부분 예민한 사람들이다 보니 자꾸 책의 오탈자를 찾아서 보내주세요.(웃음) 어디에 오타가 있고, 띄어쓰기가 잘못됐다고 메일이 종종 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책을 쭉 확인하고 전부 수정했어요. 이제 오탈자가 없을 거예요. 

이 책을 직접 추천한다면, 누구에게 권하고 싶으세요?

10대~20대 초반의 독자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생각해보면 예민성은 고등학교 때까진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오지선다형인 수능 시험을 정해진 시간 안에 틀리지 않고, 풀려면 얼마나 예민해야 하겠어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까진 스스로 예민하다는 걸 잘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공부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을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대학에 가면 방황해요. 갑자기 환경이 바뀌고, 대인관계가 어려워지다 보니 현실에 휘둘리다가 휴학하는 경우가 많죠. 아마 대학에 적응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다가 휴학한 학생의 상당수가 매우 예민할 거예요. 지금까지 리뷰를 보면 30~40대 독자들이 많은데, 10대~20대의 독자들도 책을 꼭 봤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예민하다는 걸 빨리 알수록 앞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을 정하고, 커리어를 쌓는 데도 도움이 되거든요. 

자신이 예민하다는 걸 일찍 자각하지 못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진 환자들을 보면 너무 안타까우실 것 같아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이렇게까지 힘들어지진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하죠. 안타까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저는 3차 의료기관에서 일을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1,2차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거나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서 오는 환자들이 대부분인데 이건 우울증으로 10년 이상 고생했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환자들을 직접 볼 때도 안타깝지만, 성공한 분들을 만날 때도 환자들이 생각나요. ‘예민함을 관리하면 이렇게 성공할 수 있구나. 우리 환자들도 자기가 예민하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요. 

예민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해 줄 위안의 말씀이 있을까요. 

예민한 사람들은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듣고, 느끼지 못하는 걸 느껴요. 슈퍼맨이죠.(웃음) 그래서 힘든 거거든요. 하지만 예민함은 얼마든지 관리할 수 있고, 잘 관리해서 좋은 쪽에 사용하면 굉장한 성장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예민함을 관리하는 방법을 잘 살펴보시고, 작은 행동일지라도 조금씩 실천해보시면 삶이 훨씬 편하고 풍성해질 거예요. 

저는 예민해서 삶이 힘든 사람들이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주체적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 방법을 꼭 알려주고 싶고요. 특히 예민함 때문에 감정적인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분들이 방에 숨어 동정만 받는 건 전혀 원하지 않아요. 우울증으로 고통스럽다는 걸 자각하고, 치료를 받는 것도 주체적인 활동이죠. 이분들이 꼭 예민성을 잘 관리해서 사회에 나가고, 그 예민함을 무기로 직접 세상을 바꿔보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예민한 사람의 주변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예민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지지해줘야 한다는 거예요. 잘 들여다보면 이들은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남에게 싫은 소리 잘 못하고, 눈치 많이 보고, 폐 안 끼치려고 노력해요. 대신 본인은 엄청 힘들게 속앓이를 하죠.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살아가는지 모른 채 살게 돼요.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이 책을 읽어보세요. 그럼 너그러워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 거예요. 특히 예민한 배우자를 둔 분들께서 꼭 보시고, 부부간에 이야기를 나눠 보시면 좋겠어요.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전홍진 저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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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남형도 “체헐리즘? 기자가 체험을 한다고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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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그런 자극적인 기사를 안 봐, 제대로 취재해서 기사 써! 그래야 많이 봐.” 남형도 <머니투데이> 기자가 가장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 그래서 2018년 여름부터 ‘남기자의 체헐리즘’ 연재를 시작했다. ‘애 없는 남자의 육아 체험’, ‘소방관 하루 체험’, ‘폐지 수집 동행’, ‘유기견 봉사’ 등 여성, 취업, 장애인, 노동에 관한 사회 이슈를 직접 체험해 기사를 썼다. 올해로 3년차에 접어든 이 연재는 <네이버> 기자 페이지 구독자수 1위를 만들었고, 에세이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을 탄생시켰다. ‘체헐리즘’은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합친 표현으로 남형도 기자가 붙인 제목이다. 



첫 마음을 간직하려 노력한다

기자가 책을 쓰면 기사화가 잘 안된다. 

(웃음) 정말 그렇더라. 책을 내고 알았다.

책은 언제부터 준비했나? 

연재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출간을 제안 받았다. 그후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 책이 나왔으니, 나로서도 꽤 기다린 책이다. 책을 내기까지 고민을 좀 했는데, 기사를 다 모아서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이야기에 힘을 얻었다. 책 리뷰가 올라올 때마다 긴장이 되긴 하지만, 감사한 마음이 크다. 

얼마 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했다.

‘직업의 세계’ 시리즈였는데 확실히 사람들이 TV를 많이 보시더라. 인사를 많이 받았다. 방송 출연이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었다. 다행히 상금을 탔는데, 유재석 씨의 제안처럼 예산이 부족해서 취재할 수 없었던 체험을 기획해보려고 한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 구독자수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기자 소개글을 “쓰레기를 치우는 아주머니께서 쓰레기통에 앉아 쉬시는 걸 보고 기자가 됐습니다. 시선에서 소외된 곳을 크게 떠들어 작은 변화라도 만들겠다면서요. 9년이 지난 지금도 첫 마음 간직하려 노력합니다.”라고 썼다. 굉장히 큰 다짐으로 읽히는데.

스스로 기억하려고 남긴 글이기도 하다. 스물넷 대학생 때 학교 도서관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쉬시는 곳이 쓰레기통 위였다. 우리 주변을 가장 깨끗하게 치워주는 사람이 쉴 곳이 마땅치 않아 가장 더러운 곳에 앉아 있는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이메일에 ‘human’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도 늘 소외된 사람을 생각하고 싶어서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연재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수습기자 때 수동 휠체어를 처음 탔다. 장애인의 시선으로 온종일 서울 곳곳을 다녔는데, 이미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장애인의 이동권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던 터라 내가 직접 체험을 해본 후 기사를 쓰면 독자들이 더 주목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관심을 갖고 쓰는 기사와는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서를 옮긴 후 기획해볼 수 있었다.

가장 주목을 받은 기사는 아무래도 ‘브래지어, 남자가 입어봤다’ 편이었나?

화제성으로 따지면 그렇다. 아이템을 발제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데, ‘남기자의 체헐리즘’을 많은 사람에게 알린 꼭지다. 이외에도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봤다’도 반응이 좋았다. 

최근에는 치마를 입어보는 체험도 했던데. 

여름을 맞아서 기획했던 아이템이었다. 하체가 뚱뚱한 편이라 의자에 자꾸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니까 바지가 자꾸 터지더라. 아내가 치마를 입으면 편하다고 해서 이틀 동안 치마를 입고 생활해봤다. 통풍이 잘되는 점은 좋았지만 남자가 치마를 입었다는 불편한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 일은 곤란했다. 체험할 때 내가 착용한 건 주로 고무줄로 된 편한 치마였는데, 기사가 나간 후 정장 치마를 입는 경우에는 조금도 편하지 않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내가 놓친 부분이었다. 

‘체헐리즘’ 기사로 인해, 폐지를 함께 주웠던 최진철 씨가 치과 진료를 받게 됐다. 가장 보람된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정말 기사를 써서 다행이다 싶었다. 최진철 씨는 치아 상태가 많지 안 좋아 식사도 잘하지 못했다. 매일 1만 원 벌이라 치과에 갈 수 없는 형편이라 댓글로 치과 치료를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며칠에 걸쳐 메일 200여 통이 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분, 고등학생, 기초생활수급자 등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좋은 이야기를 자꾸 접하게 되면

기사를 굉장히 쉬운 문체로 쓴다. 의도한 듯하다.

작정하고 쉽게 쓴다. 기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초등학생이 읽어도 이해가 되도록 써야 한다는 것이 지침이었다. ‘체헐리즘’ 기사의 경우 막힘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어야 감정이입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독자 연령이 더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쉽게 쓰려고 노력한다. 최근에 한 독자분이 “초등학교 4학년 딸이 읽었다”는 리뷰를 전해 주셔서, 다행스러웠다. 

어떤 독자가 ‘행동하는 또라이’라는 댓글을 남긴 적이 있다고. 

(웃음) ‘체헐리즘’ 연재를 시작했을 때는 “그게 기사가 되겠냐?”고 말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냥 “기사로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그래도 꾸준히 독자들로부터 반응이 있으면서 조금씩 믿어주신 것 같다. 

집배원, 소방관 등 직업 체험을 많이 했다. 거절 당한 사례도 있었나?

많다. 직원들은 상사나 조직의 눈치를 보고, 또 괜히 안 좋은 시선으로 주목을 받을까 봐 걱정하신다. 

거절을 당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면, 꼭 도전하고 싶은 체험은 무엇인가?

국회의원? 어쩌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평범한 분들을 찾아가보고 싶다. 용접하시는 분들의 하루도 꼭 취재하고 싶었는데, 섭외가 너무 어려웠다. 언젠가 꼭 체험해보고 싶다. 



현재 디지털컨텐츠부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주 업무는 무엇인가?

회사에서 온라인을 강화하는 추세라 팀을 따로 만들었다. 나는 기획 파트를 맡아 기획 기사의 데스크 역할을 하고, ‘남기자의 체헐리즘’을 격주로 연재하고 있다. ‘체헐리즘’은 거의 혼자서 진행한다. 사진기자와 함께 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 취재한다. 직업 체험의 경우, 많은 취재진이 가면 부담스러워 하시기도 하고 하루 종일 함께 있기도 어렵다. 

회사에서는 어떤 캐릭터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특별한 시선을 받고 있진 않는데, 체헐리즘을 할 때 비쳐지는 모습은 다를 것 같다. 치마 입고 회사에 가고, 청각장애인 체험을 할 때는 일부러 귀마개를 하고 간 적도 있으니까. 

체험을 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나?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래도 살만하다는 쪽으로 믿고 있다. 좋은 취지로 쓴 기사를 두고 끊임없이 악플을 다는 분들을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 회의가 들곤 하지만, 격려의 댓글도 많다.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고 이야기를 해주실 때가 가장 기쁘다. 댓글을 보면 시야가 넓어진다. 반성의 계기도 되고.

만약 직업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

다큐멘터리 PD를 하고 싶다. 수의사가 꿈인 적도 있었고 라디오 PD도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다. MBC 라디오 <푸른밤, 옥상달빛입니다>에 분기별로 출연한다. 계절 게스트라고 불리곤 하는데, 가끔 나가서 그동안 했던 체헐리즘을 소개한다. 책에도 실린 ‘30년 친구에게 사랑한다고 했다’ 편은 라디오에서 청취자분들과 이벤트를 한 다음에 너무 좋아서, 확장했던 아이템이다. 



“글의 선한 힘에 중독돼” 기자를 9년째 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사람, 어떤 기자가 되고 싶나?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너무 심플한 이야기이긴 한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상대를 대하고 싶다. 한 신부님으로부터 “사람에게는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있는데, 좋은 이야기를 자꾸 접하게 되면 좋은 마음이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따뜻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다. 사람들이 전해주는 좋은 마음으로부터 희망을 얻고 싶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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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도 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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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작가 윤정주 “시끄러운 냉장고에서 탄생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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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밤, 냉장고가 들썩인다. 주인공 송이가 엄마를 기다리다 잠든 사이, 냉장고 속 재료들이 피자를 만든다. 모차렐라 치즈가 노래를 부르고 케첩이 랩을 하는 신나는 무대! 바로 윤정주 작가의 그림책 『꽁꽁꽁 피자』 속 세계다. 그는 20년 이상 어린이 책을 작업해온 베테랑. 어떤 주제든 뛰어난 분석력과 상상력으로 그려내 ‘갓정주’로 통한다고. 그림책 『꽁꽁꽁』, 『냠냠빙수』에 이어, 훨씬 풍성해진 냉장고 이야기. 이번에도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깊은 내공이 녹아있다.

 


냉장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꽁꽁꽁’ 시리즈가 4년만에 『꽁꽁꽁 피자』로 돌아왔어요. 이번에는 냉장고 속 재료들이 피자를 만들어요.

아이스크림은 1편에서 만들었으니 뭘 만들어 볼까 고민했어요. 요즘 번쩍번쩍한 냉장고가 많잖아요.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문 열면 완성된 피자가 짠 하고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한 거예요. 참 단순하죠?

달걀 친구들이나 모차렐라 치즈처럼 어린이 독자들이 좋아할 캐릭터들이 와글와글 해요.

다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니까 길게 생각할 필요 없었죠. 인터넷에서 피자 만드는 법을 검색해보고 하나씩 캐릭터를 잡아 나갔어요.

실제 레시피를 참고하셨군요.

네. 그런데 막상 요리 사진을 찾아보니 재미없는 거예요. 너무 깔끔해서 생동감이 안 느껴져요. 아이들은 여기저기 묻히기도 하고 초콜릿 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료도 넣어보면서 자유롭게 만드는 걸 좋아할 텐데. 그림책을 볼 때만큼은 ‘우와 엄마, 우리도 해먹자’하는 마음이 들었으면 했어요.

냉장고의 스케일이 커졌더라고요. 층과 동이 나뉜 것이 아파트 같아요.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으니까 등장인물도 다양한 거예요. 모차렐라 치즈, 식빵, 케첩, 달걀... 너희들 좀 정리해야겠다 하고 아파트처럼 칸을 나눴어요. 위칸은 고추장, 된장, 아래칸은 채소 가족들. 냉장고 정리하는 것처럼요. 

재료들이 서로 어울려 춤추는 장면을 보니까 뮤지컬이 떠올랐어요.

다들 한 번쯤은 재료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나요? 그릴 때는 머릿속에 영상이 재생돼요. 양파가 훅훅 날아가고 케첩이 튀기도 하고. 저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단지, 맞아 나도 저렇게 생각했는데 할 뿐이죠.

피자에 안 들어가는 엑스트라 재료들도 많아요. 개성이 뚜렷하고 저마다 이야기가 있어요.

정말 하나하나 다 고민했죠. 심지어 정하지 못해서 통만 그려 놓은 것도 있어요. 무엇이 있는지 너의 상상에 맡기겠다 하면서.(웃음) 환경 문제도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냉장고를 친환경으로 만들어볼까 해서, 플라스틱 하나 없이 재생 용기로만 그려봤어요. 그런데 색깔을 못 넣으니 너무 단조로운 거예요. 일단 재밌게 보여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죠.

실제로 피자를 만들어 보셨어요?

네! 밑그림을 다 그리고 책 그대로 한번 만들어봤어요. 맛있더라고요.(웃음) 사실 제가 소화가 안돼서 피자를 잘 못 먹거든요. 평소에 하지 못하는 걸 그리면서 대리 만족하는 거죠.



원고를 보면 상상력이 펼쳐져요

1편 『꽁꽁꽁』에서 늦는 건 아빠였는데, 이번엔 일하는 엄마가 늦게 돌아와요. 

의도했어요. 그땐 아빠였으니 이번에는 엄마로 해보자! 1편에서 아빠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엄마들이 억장이 무너진다고 하더라고요. 현실이랑 너무 똑같아서. 2편에서는 일하는 엄마가 나오면 공감하겠지 하면서 바꿨어요. 사실 저는 남편이 술을 안 좋아해서 이런 장면을 볼 일이 없어요. 어쩜 그렇게 리얼하게 그렸나고요? 사실 술 마신 날 제 모습이 저래요.(웃음)

고양이가 냉장고 문을 짠 하고 열자 재료들이 꽁꽁꽁 얼어붙어요. 냉장고 문을 여는 고양이라니 신기해요.

냉장고 여는 장면도 판타지니까 가능하죠. 동물 중 뭐할까 하다가 고양이로 정했어요. 실제로 냉장고 문을 여는 고양이도 있어요. 사람처럼 행동하는 독특한 애들 있잖아요. 

그림책이 마치 만화를 보는 것 같아요. 말풍선이 있고 한 장면 안에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이런 구성을 선호하시나요?

만화를 워낙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화적인 요소가 들어간 게 아닐까요? 

데뷔는 만화로 하셨지요. 

5살 때부터 만화가가 꿈이었어요. 옛날에는 만화방에 가면 엄청 혼났는데, 오빠가 만화광이어서 다행히 만화를 많이 볼 수 있었죠.『베르사이유의 장미』『유리가면』도 그때 다 봤어요. 노트 한 가득 열심히 따라 그리면 친구들이 돌려 보다가 선생님한테 압수당하고 선생님은 또 교무실에서 몰래 보고 그랬죠.

그 후, 만화를 그만두고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셨어요.

만화는 좋아했지만, 돈을 버는 건 너무 힘들었어요. 열심히 그려도 보수가 너무 적고요. 또, 저는 전형적인 소심 A형이라 마감을 꼭 지켜야 하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새벽에 돌아와 마감을 했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만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생업으로 삼으니 너무 지친 거죠.

어린이 책은 어떤 점이 잘 맞으셨어요?

너무 힘들지 않아서 좋았어요. 책 한 권을 완성하면 되니 호흡이 길지 않은 거예요. 즐겁더라고요.

그렇게 20년 동안 작업하다가, 그림책을 내셨죠. 

작업의 성격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원래 제가 글, 그림을 모두 작업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다른 작가의 원고를 보고 감정이입해서 이미지를 그려내는 게 잘 맞았거든요. 다양한 주제를 의뢰 받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좋은 원고들이 예전만큼 나오지 않고, 원고를 받아도 상상력이 펼쳐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글도 쓰기 시작했죠. 

인상 깊었던 독자 후기가 있나요?

제가 처음 받았던 팬레터가 뭔 줄 아세요? 어린이 독자의 그림 지적!(웃음) 한 초등학생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저는 선생님의 팬입니다. 근데 몇 페이지에 있는 그림 잘못 그리셨어요. 다음 페이지에 짝꿍이 바뀌어 있어요.’ 잘못 그린 거 아니야, 시험 시간이라 바꾼 건데! 답장을 쓸까 말까 고민했어요. 근데 그 친구는 발견한 게 너무 기뻐서 우표까지 붙여서 보냈을 거 아니에요. 얼마나 황당하고 귀엽던지. 그냥 남겨두자 하고 답장을 안 썼어요.



그림책은 누군가와 함께 읽는 것

언제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세요?

작업을 시작하면 밤낮이 바뀌는데, 조용한 밤 머리 식히러 베란다에 나가요. 건너편 아파트 불빛도 보고 산도 보고. 그럴 때 새로운 생각이 많이 떠올라요. 처음 ‘꽁꽁꽁’의 아이디어를 낸 것도 베란다로 나가는 도중이었어요. 당시에 큰맘 먹고 커다란 외국 냉장고를 샀는데, 소음이 너무 심한 거예요. 그날도 너무 크게 들려서 냉장고한테 ‘조용히 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니까요. 그런데 막상 냉장고를 열면 또 조용해지고. 그렇게 냉장고 속 세계를 상상하게 된 거예요.

책이 나오면 다시 읽어보지 않으신다고요.

절대 안 봐요. 완성본이 오면 인쇄가 잘 됐나 확인하고 그걸로 끝. 그러다 4~5년 뒤에 문득 보면서 야, 이때 내가 이렇게 잘 그렸구나 하죠.(웃음)

출간 직후에 안 보는 이유가 있나요?

다시 내 그림을 보는 게 창피하잖아요.

이미 엄청 많이 그리셨잖아요. 수많은 어린이가 작가님 그림을 보며 자랐는걸요.(웃음)

아마도 부끄러워서 안 들여다보니까 지금까지 작업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일일이 다 신경 썼으면 못 냈을 거예요.


『꽁꽁꽁 피자』 원화

어린이 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내가 즐거운 것! 그리는 사람이 즐거워야 독자가 봐도 재밌죠. 이심전심이니까요.

어린이들이 즐길 게 많은 세상이잖아요. 그림책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함께 읽는 경험! 그림책은 누군가와 같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목소리가 주는 편안함이 있으니까요. 또, 종이책만이 주는 추억도 있죠. 좋아하는 책은 너무 많이 봐서 종이가 찢어지기도 하고, 슬퍼하다가 다시 사기도 하고. 그런 따뜻한 기억이 오래 남는 것 아닐까요?



꽁꽁꽁 피자
꽁꽁꽁 피자
윤정주 글그림
책읽는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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