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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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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 작은 카페. 요조의 단골집이란다. 제법 추운 날이었지만 요조의 외투는 가벼워 보였다. 춥지 않냐고 물으니, 누빔 재킷이라며 괜찮다고 말했다. 더운 나라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겨울나기도 거뜬한 모양이다. 요조는 아침형 인간이다. 매일매일 햇빛을 꼭 쐐야 하는 식물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커튼을 친다. 한밤중에 암막커튼을 치고 음악을 만드는 여타 뮤지션들과는 다르다. 멀지 않은 거리는 도보로, 늦잠을 자면 아침이 짧아서 속상한, 연애하지 않을 때도 산책을 즐기는 서른셋 여자다.

『요조, 기타 등등』출간을 기념해 마주한 인터뷰. 요조는 지난 11월 27일에 열린 ‘예스24 문화축제’에서 오프닝 공연을 펼쳤다. ‘첫사랑’을 주제로 한 토크에서 요조는 “첫사랑은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다. “첫사랑 상대가 기사를 보면 어떡해요?”라고 물었더니, 그건 운명에 맡겨야 한단다. 무대 위에서는 씩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인터뷰이 요조는 수줍은 기색이 역력한 소녀 같았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데시벨이 올라갔다. 일상을 노래하는 요조의 음악처럼, 매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상념

지난 7월, 2집 『나의 쓸모』가 발매되고 인터뷰를 많이 하셨던 데요. 책을 펴내고 작가로서 인터뷰는 처음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 맞아요(웃음). 음반을 내고 인터뷰할 때랑은 조금 다른 느낌인 것 같아요. 음반은 익숙한 감이 있으니까요. 책도 처음에는 앨범이랑 비슷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내보니까 낯설어요. 기분이.

평소 작사도 직접 하고 글쓰기에 애정도 많은 걸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요조, 기타 등등』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어요. 다만 가사집을 낼 줄 알았는데, 가사와 함께 기타 악보가 들어있더라고요.

기타에서 비롯된 노래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부른 노래, 기타와 함께하면 좋은 노래를 담고 싶었어요. 처음 가제가 ‘낭만 기타’였는데, ‘낭만’이 제가 좋아하는 단어가 아니라서 그냥 후보군 없이 ‘요조, 기타 등등’을 제안했는데 출판사에서도 좋아했어요. 저도 좋았고요.

책에 사진도 많아요. 찍히는 것보다 찍는 걸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제 좋아해 보려고요. 사진은 리에라는 친구가 찍어줬어요. 제 촬영을 자주 해주는 친구인데 이번에도 부탁을 했어요. 하루 종일 제 일상을 찍는 콘셉트로 진행했거든요. 일부러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순간부터 찍었어요.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웃음). 그 날 하루에 찍은 사진이 전부에요.

『요조, 기타 등등』을 읽으면서, 어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썼을지 궁금했어요.

제 노래 들으면서 썼어요. 가수들이 의외로 자기 노래를 잘 안 듣거든요. 앨범을 내고서 공연할 때나, 연주할 때나 듣지 평소에는 안 듣잖아요. 이번에 글을 쓰면서 제 노래들을 다시 듣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새삼스럽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작곡보다 작사가 어렵다고 했었죠? 책을 쓰는 건 더 조심스러웠을 것 같아요.

작곡할 때보다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힘들긴 힘들었어요. 노력한 만큼 꼭 비례하지 않으니까요. 매니저가 전화해서 “오늘 뭐해?”라고 물으면, “하루 종일 글 쓸 거야”라고 말한 날이 많았어요. 그런데 고작 세 줄밖에 쓰지 못한 날이 많았죠(웃음). 들인 시간은 엄청 많은데 오래 앉아 있다고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답답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일상에서 자주 이야기하게 되는 것, 자주 느끼는 감정들은 무언가요?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것 같아요. 이를 테면, 연애할 때도 아무리 사랑을 해도 결코 전부를 소유한다거나, 전부를 알 수 없잖아요. 상대를 모두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끔 슬프고 화도 나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애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에요. 엄마를 참 사랑하지만 좋아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그런 부분이 애석하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런 부분들을 거듭거듭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노래를 만들 때는 어떤가요?

사랑한다, 행복하다 이런 이야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쓰게 되죠.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참 많아요. 감정도 그렇고 버릇도 그렇고요. 요조 씨는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고 싶은 게 있나요?

음. 고독해지는 것? (웃음) 요즘 이런 생각 많이 해요. 어떻게 표현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을 걷고 싶어지는 거예요. 옛날에는 남이 걷지 않은 길을 걷고 싶었는데. 왜냐면 그게 좀 더 나다운 삶을 사는 방법이고, 정체성이나 내가 가진 커리어에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선택에 자부심도 느꼈고요. 그런데 점점 그 선택들이 나를 더 고독한 쪽으로 몰고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고민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을 기웃거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라고 할까요?

이를테면 뮤지션 요조로서의 길인가요?

가수로서도 개인으로서도 둘 다요. 경제적인 것, 다음 앨범, 결혼?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제 앞에 놓여있는데 옛날처럼 선택하면 너무 고독해질 것 같아요. 지금 나이도 그렇고. 옛날에는 이런 문제들에 겁먹지 않았는데 지금은 제가 겁먹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돈 많이 못 벌면 어때? 난 나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안 돼요. 겁도 나고. 옛날의 선택이 나를 점점 어렵게, 고독하게 만들 것 같고.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내가 왜 이러지?’ ‘나이 먹은 건가?’ 싶고 그래요. 왜 그런지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고 있어서 생각보다 힘들어요.

고민이 너무 많아질 때는 어떻게 해요?

그럴 때는 트위터로 개드립을 하죠(웃음). 딴 생각을 하려고 해요. 생각한다고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잊고 싶어서 그냥 헛소리하고 그래요(웃음).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나요? 상담을 받는다던가.

고민 상담을 안 하는 건 아닌데, 자기검열을 많이 거치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어떤 고민이 있으면, ‘이걸 오늘 이 기자님한테 털어놓을까?’ ‘이야기하면 이런 대답을 해주겠지?’ 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대답까지 예상이 되는데, 굳이 이야기해서 뭐하리’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이야기를 잘 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한계치에 부딪히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막 털어놓고 이야기를 듣다가 “힘내,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그래. 안녕, 다음에 또 보자”라고 인사하고 나면, 집에 가는 길이 괴로워요. 괜히 이야기했나? 이런 생각도 들고.




프로필 대신 이메일, 팬과 친구가 되다

『요조, 기타 등등』추천사가 재밌어요. 옥상달빛, 10cm 권정열, 재주소년 유상봉, 세렝게티 유정균, 마이큐 씨가 써줬는데, 권정열 씨는 ‘요조는 섹시하다’고 말했어요(웃음).

(웃음). 제일 의외였던 글이었어요. 다들 안지 오래된 사람들이라서 부탁했는데, 되게 고마웠어요. 저를 만났던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 때를 막 회상한 거예요. 저도 가끔 이런 부탁을 받았을 때 그랬거든요. 이 사람들에 대한 어떤 일화를 떠올리고, 새삼스럽게 처음 만났던 때를 막 생각하고(웃음). 우리가 이렇게 만났구나, 이런 생각하는 게 참 좋았어요. 몸에 좋은 차를 마시는 것처럼. 이 분들도 저와의 인연을 떠올리면서 써줬는데, 마이큐 같은 경우에는 네 줄 추천평을 쓰는데 글쎄 네 시간이나 걸렸대요. 강남 카페에 앉아서 멍 때리면서 저를 생각하면서 썼다는데, 그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좋았어요(웃음).

모두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더라고요. 기분 좋았을 것 같아요. 요조 노래의 가사를 보면,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재밌잖아요.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요. 관찰하고 두리번거리고 그러는 거 좋아해요. 누구를 기다릴 때도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만 보고 있어도 끝이 없어요. 그냥 웃는 얼굴, 화난 얼굴, 무표정한 얼굴. 단편적인 것 같은데도 미묘한 변화가 많아요. 그걸 관찰하는 게 너무 재밌고요. 그림에 소질이 있으면 저런 얼굴들을 다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사진 찍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림에도 왠지 소질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릴 때 엄마가 미술학원 비싸다고 안 보내주셔서(웃음). 좋아하긴 해요. 얼마 전에 김소연 시인이 새 시집(『수학자의 아침』)을 냈는데, 제가 표지 캐리커처를 그려줬어요. 문학과지성사 시집 표지에는 작가의 캐리커처가 실려있잖아요. 작가의 지인들이 그려주는 게 관례라고 하던데, 김소연 시인이 “그림 그릴 줄 알아요?” 묻더라고요. 내 실력은 생각하지도 않고 재밌을 것 같아서 덜컥 “할게요” 했죠. 재밌었어요. 제가 볼 때는 좀 비슷하게 나온 것 같아요(웃음).

가사를 직접 쓰니까 시 창작에도 관심이 많을 것 같은데, 김소연 시인이랑 친하니까 한번 가르쳐달라고 할 법도 한데요.

시는 너무 어려워서요. 가사랑 가장 밀접한 게 시라서 처음에는 만만하게 봤거든요. 도전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김소연 시인한테 “시 좀 가르쳐주소” 했는데, “시를 써와야 알려줄 거 아니요?” 하더라고요.

김소연 시인의 시와 요조의 그림이 곁들어진 책, 괜찮을 것 같은데요?

언젠가는 하겠죠? 김소연 시인이 요즘 저보고 ‘화백’이라고 불러요. ‘요화백’(웃음).

책을 보면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어요. 홈페이지 프로필에 자기소개대신 이메일 주소를 적어놓았다고. 편지를 주고 받는 걸 좋아하나 봐요.

좋아해요. 되게 직접적이잖아요. 방명록 글보다 이메일로 이야기하는 게,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게좋아요. 지금도 가끔 메일이 와요. 물론 이상한 사람도 있지만 진짜 친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오늘은 제가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해요. 어떤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주셨는데, 왜 홈페이지에 글을 안 쓰냐고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SNS를 하면 전 남자친구 계정을 자꾸 찾아보게 돼서 페이스북을 끊은 지 반 년이 됐는데, 제가 요즘에는 SNS에만 글을 올리니까 못 본다고요. 그래서 오늘은 그 사람을 위해서 글을 하나 쓰려고 해요. 이런 메일을 받았을 때, 이런 게 되게 고마운 것 같아요.

팬과 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다가 실제로 만나기도 했잖아요.

책에도 등장하지만 두 분을 만났는데, 제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요. 한 분은 자기 화분을 맡아달라고 해서 만난 거고요. 다른 친구도 만나고 나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연예인이 팬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다는 것, 쉽지 않을 텐데요.

제가 연예인이라는 자각이 거의 없어요(웃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고요.




이제는 정말 착한 사람이 좋아요

싱어송라이터에게 늘 궁금한 게 있어요. 사랑에 빠지면 음악이 잘 만들어지는지. 요조 씨는 어떤가요? 책을 보니 ‘”사랑에 빠지면 시가 필요하다”라고 썼던데.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어떤 경우에는 음악을 만들어보고 싶은 동기가 많이 생기고, 또 어떤 사람을 만나면 노래가 한 곡도 안 나오고. 더 사랑하고 안 하고의 차이는 아닌 것 같아요.

상대에게 집중하고 싶어서 음악을 잠시 놓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게 참 신기해요. 분명히 음악적 영감을 많이 주는 상대가 있긴 있었어요.

연애할 때 ‘내가 생각해도 이런 점은 변한다’ 싶은 게 있나요?

상대에 따라 어떤 부분은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전혀 안 받아요. 말투가 닮기도 하고 어떤 비슷한 취향을 갖게 되기도 하고. 그런데 안 바뀌는 게 하나 있어요. 저는 너무 같이 붙어있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그래서 연애 초반에는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해요.

첫사랑이랑 중학교 3학년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만났다고 했잖아요. 정말 이렇게 오랫동안 만날 수 있어요?

뭔가 ‘미친 듯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처럼, 이렇게 두 번 다시는 연애 못하겠다는 확신이 들만큼. 굉장히 에너지 넘치게 연애를 했어요. 기간도 길었지만, 이렇게 지지고 볶다가 끝나고 나니까 앞으로는 도저히 이런 연애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짜 못하고 있는 것 같고요(웃음).

지금은 연애 안 해요?

네, 지금 없어요.

앞으로 어떤 사람이랑 만나고 싶어요? 어떤 연애를 하고 싶다던가.

글쎄요.

가장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 같아요.

질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웃음). 음, 일단 진짜 좋은 사람이랑 연애하고 싶어요. 나를 괴물로 만들지 않는, 착한 사람이랑 만나고 싶어요. 연애를 하면서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잖아요. 괴물이 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괴롭고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자괴감을 느끼는 게 싫어요. 이런 경험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나는 착한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면, 못생긴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말 착한 사람이 좋더라고요.

요조 씨는 어떤 사람이랑 친구가 되는 게 편해요?

의젓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좋아요. 물론 친해지면 망나니처럼 굴어도 용납이 되겠지만, 알아가는 단계에서 짓궂은 사람은 싫어요. 벽이 딱 쳐지는 것 같아요.

궁금한 게 또 하나 있어요. 요조라고 하면 ‘홍대 여신’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잖아요. 처음에는 좋았을지 몰라도 이제 싫을 것 같아요. 가수든 배우든 하나의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으면 변신을 해도 끊임없이 비교하고. 인디 싱어송라이터에게 ‘여신’이라는 캐릭터는 처음부터 반갑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이제 그 스트레스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안 받는 건 아니지만 적응이 된 거죠. 옛날만큼 감정이 격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예전에는 미리 주문한 적도 많았어요. 촬영할 때도 인터뷰를 할 때도, 그 단어를 붙이지 말아달라고. 그런데 소용도 없었고(웃음). 지금은 그냥 뭐, 많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정도인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가 3주 남았어요. 특별한 계획 있어요?

12월이 됐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제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았어요. 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고요. 내년에 계획하고 있는 앨범을 잘 만들고 싶어요. 엄마 앨범도 만들어 드릴 계획이에요.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어요? 바람이 많이 불던데.

요즘 고민이 많아서, 얇게 입어도 별로 안 추워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발열이 되잖아요. 그래서 좀 견딜만한 것 같아요. 평소에 많이 걷는 편이거든요. 사람들을 보면 다들 꽁꽁 싸매고 다니는데 저는 별로 안 추운 거예요. ‘내가 몸이 건강해졌나? 왜 이렇게 안 춥지?’ 생각했는데, 건강해진 건 아닌 것 같고.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까 그래요. 이런 장점이 또 있네요(웃음).


나의 쓸모

세상에는 이렇게 부를 노래가 많은데
내가 굳이 또 이렇게 음표들을 엮고 있어요
사실 내가 별로 이 세상에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있는 데에는
어느 밤에 엄마아빠가 뜨겁게 안아버렸기 때문이에요
어감이 좋은 동네에서 살아가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이름이 무서웠거든요
모두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그 방법은 다들 다르더군요
결과적으로 나는 또 멍청이가 된 것 같은데 어떡하죠

쓸모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고민도 참 드문 건데, 라고 생각해놓고 돌아서면 다시 쓸모라는 문제에 매달렸다. 정말 무시무시한 관성이다. <나의 쓸모>의 가사를 완성하고 조금 후회도 되고 부끄러웠다. 너무 아이 같은 생각이고, 칭얼거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코를 후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정작 앨범이 나오고 나니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노랫말 중에 하나가 되었다. 역시 다들 보여주지 않는 것일 뿐, 우리 모두 코를 후비며 살아가고 있다. (『요조, 기타 등등』 p.150)

[관련 기사]

-요조 “첫사랑은 모르는 게 약”
-‘예스24 문화축제’ 요조 김영하 작가, 첫사랑을 떠올리다
-다정하고도 씩씩한 쓸쓸함 - 요조(Yozoh)
-요조, 사나운 복숭아, 김소연, 성미정, 홍성범의 여행법
-마이 네임 이즈 요조, 요조의 달콤한 첫번째 프러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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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 기타 등등요조 저 | 중앙북스(books)
홍대 인디 뮤직의 아이콘 요조가 작가로서 ‘공식적’으로 선보이는 ‘첫 책’ 《요조, 기타 등등》은 노래를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고, 그 노래들을 연주할 수 있는 기타악보가 이어지는, 꽤 특별하고 흥미로운 에세이집이다. [요조, 기타 등등]의 큰 줄기는 제목 그대로 요조(Yozoh), 기타(Guitar), 등등(etc.). 요조가 직접 선곡한 30개의 노래를 따라가며 기타 치고 노래하는 그녀의 일상과 사랑, 추억, 작사작곡 뒷이야기, 그 외의 기타 등등한 사연들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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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현 아나운서 “음식은 내 몸에 직접 들어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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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사바랭은 말했다. 어떻게 음식만으로 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사바랭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순한 음식, 그것이 사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한 그릇의 음식에 담긴 것은 빛깔과 냄새와 맛과 영양이 전부가 아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다. 만든 이와 향유하는 이의 손길, 눈길, 그리고 그때의 마음까지도 음식은 담아내고 있다.

『뜨거운 위로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는 바로 그 음식에 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는 위로와 격려를, 설렘과 기대로 한껏 들뜬 순간에는 축하와 응원을 전해주는 음식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의 저자인 위서현 아나운서는 그 안에 자신의 지난 시간과 소중한 사람들, 그 모두가 쌓여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녹여냈다. 엄마표 미역국을 떠올리면서 ‘탄생으로 가려지고 삼켜진’ 엄마의 눈물에 대해 깨닫는가 하면, 홍차를 우려내며 ‘기다림을 알고 정확한 때를 아는’ 사람에 대해 자문해 보기도 한다. 그녀의 시선이 닿으면 평범한 음식들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춰 보인다. 투박한 브라우니는 꾸미거나 포장하지 않는 삶에 대해, 두부는 단단하지만 부드럽게 이지러지는 유연함에 대해 속삭이는 것이다.
 


힘들 때 먹는 음식은 엄마가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

『뜨거운 위로 한 그릇』에는 위서현 아나운서의 삶에서 음식이 함께했던 순간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녀가 발견한 인생의 진실과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보석처럼 박혀있다. 입 안에 침이 고이도록 맛깔나게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이다.

삶은 우리가 어찌하지 못하는 속도와 흐름을 가지고 있기에, 궁금해 한다고 미리 답을 알려주는 법도 없고, 늘 더 나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법도 없다. 그러니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늘 있던 자리에서, 늘 하던 대로, 혹은 그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머무를 수밖에 우리에겐 뾰족한 수가 없다. 누가 사갈지도 모를 케이크를 만들어놓은 채 늦은 저녁까지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케이크 가게 주인처럼, 그냥 그렇게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거다. (p. 134)

음식을 소재로 마음과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처음부터 음식 얘기를 쓰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마음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야 독자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읽을까 고민했어요. 일단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먹는 거고요(웃음). 그래서 음식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저도 즐거울 것 같았어요. 제가 즐겁게 써야 읽는 분들도 쉽고 즐겁게 읽으실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음식으로 사람 마음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라고 결정했죠. 『뜨거운 위로 한 그릇』을 쓰는 동안 제가 즐거웠던 것처럼, 많은 분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에게 음식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를 것 같은데요.

음식과 함께 음악, 문학, 그림도 좋아하는데요. 음악은 그걸 들음으로써 마음으로 들어오는 거고, 그림이나 글은 읽어서 들어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음식은 몸 안으로 직접 들어오는 거거든요. 관념적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실제적이고 감각적으로 들어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음식처럼 직접적으로 위로해 주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과 만나면서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혼자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낼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 엄마가 안아주듯 위로해주는 건 음식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접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점에서 보면 관능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죠.

같은 음식도 만드는 사람의 레시피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되기도 하잖아요. 작가님만의 비법 레시피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레시피를 하나 꼽자면, 저는 할머니가 만들어준 것 같은 애플파이를 만들어서 주변 분들에게 선물하곤 해요. 계피랑 흑설탕을 넣고 조린 사과를 단단한 파이에 듬뿍 얹어서 만들어요. 그 과정도 즐겁지만 선물을 드릴 때마다 오히려 제가 특별한 즐거움을 받았던 것 같아요. 다들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특별하면서도 정겨운 선물을 받았다는 느낌이 드나 봐요. 그래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한테 자주 애플파이를 구워서 선물해요.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셨어요. 공부를 결심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인연이나 운명을 믿는 사람인데요. 상담심리학도 그 시기에 제가 배웠어야만 하는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관심을 갖고 정보를 찾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연세대학교 상담대학원에서 1년 동안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1년 정도만 공부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제가 질문이 끊이질 않으니까 교수님께서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시더라고요. 아마 머리로 생각했다면 시작할 수 없었을 거예요. 사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한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이미 입학시험을 보고 개강하는 날 강의실에 앉아 있더라고요(웃음). ‘이렇게 운명처럼 끌려가는 게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아나운서라는 직업도 계획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어요. 계속 교사가 되려고 준비하다가 대학교 4학년 때 홀린 듯이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게 됐거든요. 사람마다 다 운명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길 때 그걸 너무 강력하게 거부만 하지 않으면, 결국엔 다 자기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요.




나를 바꿔야 한다면 그 일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나운서라는 조직이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는 곳인데요. 특히 여자들에게는 많은 제약과 요구들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아나운서에게 제약 조건이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저한테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맞춤처럼 딱 맞았어요. 아나운서국이 굉장히 정신적이고 강해야 살아남는 조직인 건 확실해요. 자기 소신을 지키지 않으면 버텨내기가 쉽지 않죠. 자신을 충분히 믿어주면서 오만하지 않은, 그런 자신감도 꼭 필요해요. 카메라 한 대가 사람 만 명의 기(기운)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뉴스를 진행할 때도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하면, 겁먹은 채로 진행한다는 느낌이 시청자에게도 전해져요. 그러니까 자신감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시청자들한테도 금세 주눅이 드는 거죠. 그리고 칭찬보다도 지적을 많이 받는 직업이고, 다른 아나운서와 비교하는 이야기도 많이 듣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중심을 지키고 자기 진심을 믿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역할을 받을 수 있겠죠. 그런 확신이 있지 않으면 정말 버텨내기 힘든 것 같아요. 경쟁도 계속 되고, 거기에서 밀리면 ‘내가 뭐가 부족하지’하고 자괴감도 많이 들죠. 그렇지만 어떤 프로그램에 투입되면 항상 빛나는 모습으로 자신감 있게 해야 하잖아요. 신입사원 때는 항상 그것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나운서를 꿈꿨던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나를 바꿔야 한다면 내가 이 직업에 안 어울리는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버텼어요. 제 동기들 중에 노현정 아나운서, 김보민 아나운서처럼 쟁쟁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사실 신입사원 때는 쉽게 제 자리가 생기지는 않았어요. 바로 돋보이지 않으면 PD들이 쉽게 선택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데서도 꾸준히 즐겁게 일하고 있으면, 언젠가 자기한테 정말 잘 맞는 프로그램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다 펼쳐낼 수 있도록 계속 쌓고 있어야 되죠.


그런 부분들이 상담심리학 공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아나운서 생활 때문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건 아닌데요. 상담 심리학을 공부한 것이 큰 힘이 된 건 사실이에요. 페이스를 지키는 중심도 많이 갖게 됐고요. 제일 도움 받은 건 아나운서가 ‘조명을 받는 빛나는 자리’라는 생각을 완전히 깨게 됐어요.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계속 내담자를 만나게 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의 마음에 조명을 비추고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그때 얻게 되는 희열은 정말 비교가 안 되더라고요. 빛나는 무대에 섰을 때의 희열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그러다 보니까 아나운서인 나를 완전히 지우고 인터뷰이나 청취자들의 마음에 계속 초점을 맞추게 됐고요. 그런 것에 기뻐하는 라디오 청취자들도 많이 생겼어요. 인터뷰이들에게도 ‘제 인생의 바라보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보게 됐고, 너무 의미 있게 돌아갑니다’라는 얘기를 듣게 됐고요. 그렇다 보니까 아나운서 역할이 내가 나서서 빛나는 자리가 아니라, 시청자들에게 누군가를 소개하고 연결해 주는 역할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갖고 계셨던 생각들도 달라졌나요?

저는 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수동적인 입장이었거든요. 워낙 수줍음이 많고 낯가림이 심해서 먼저 다가가거나 ‘저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았어요. 제가 아나운서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말 놀랐었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너무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상담을 하면서 만난 내담자들은 자기의 깊은 상처를 치유 받고자 용기를 내서 저를 찾아와 준 거잖아요.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에서는 저를 완전히 열어 놓고, 상대방이 자기 인생을 치유하는 도구로 쓰이게 내놔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상담자의 자기 노출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자기를 알맞은 시점에서, 필요한 만큼 적절하게 노출을 할 경우에 내담자가 큰 용기를 얻는다고 해요. 그래서 저 자신을 열어 놓는 것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일상에서 만났다면 가볍게 인사하고 스쳐갔을 사람들도 나를 얼마나 열어 놓느냐에 따라서 깊은 인연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운명과 인연의 폭도 확실히 넓어진 것 같고요. 운명을 거스르거나 인연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 폭과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게 넓힐 수는 있는 거죠.

『뜨거운 위로 한 그릇』을 쓰시면서 인연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셨을 것 같습니다.

책을 쓰면서 음식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나 치유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어보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이렇게 특별한 맛이 나오는지 여쭤보게 되고,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지내온 인생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요. 음식 하나에도 그 사람의 긴 인생이 같이 따라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까 또 다른 인연이 생기는 거죠. 어떻게 보면 스쳐 지나갈 법한 사람이었는데 인연이 되고, 그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정말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데미안』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책

2010년에 에세이 『만남의 힘』을 출간하셨고, 『어떤 날』에는 공동저자로 글을 쓰기도 하셨어요. 오래 전부터 책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셨을 것 같은데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셨나요?

제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까 작가에 대해서 너무나 드높게 기준을 잡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책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부정적이었거든요.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거랑 책을 내는 건 너무 다른 얘기라고 생각했어요. 워낙 글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하니까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계속 글을 썼는데, 그러면서 책을 내자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신변잡기나 가벼운 생각을 내용으로 책으로 내는 건 오히려 책 시장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서(웃음) 계속 안 쓰고 있었죠.

그런데 입사 3년차쯤에 『88만원 세대』를 읽고 나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생겨서 『만남의 힘』을 쓰게 됐죠. 『88만원 세대』의 이야기에는 공감하지만 대안은 특별히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노하우 혹은 삶의 비법을 들려주기로 한 거예요. 방송 인터뷰를 통해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거죠. 그 분들은 인생에 대해서 너무 재지 않고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성공을 거두셨더라고요. 그게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떤 날』은 출판사 대표님의 제안을 받고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저 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여행 얘기를 마음껏 풀어내면 좋겠다고 하셔서요. 같은 주제에 대해서 다양하게 얘기가 펼쳐지는 걸 보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내가 좋아하는 김소연 시인이나 뮤지션 요조는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해 하면서 출간을 기다리곤 했죠. 『어떤 날』에 참여하는 동안 너무 즐거웠고, 생활에 많은 활력을 얻었어요.


『뜨거운 위로 한 그릇』에 실린 음식 이야기처럼 잊을 수 없는 ‘책과의 순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만난 책도 있을 테고, 용기를 내게 해 준 책도 있을 테고요.

저는 철학서나 사상서를 좋아하는데요. 칼 융이나 칼 융을 공부한 로버트 존슨의 책들을 혼자 카페에서 읽곤 해요. 그럴 때면 그 작가와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제 문제에 대한 답들을 발견하고요. 근래에는 로버트 존슨의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를 읽으면서 깊은 치유를 받았어요. 내 안에 가장 어둡고 외면하고 싶고 덮어놓고 싶은 부분, 그 그림자가 사실은 가장 큰 창조의 영감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직면하면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독창성을 가질 수 있는 있다는 거죠. 그게 결국 칼 융에서 나온 이론인데요. 그 책을 읽으면서 많이 힘을 얻었어요.

곁에 두고 거듭 찾게 되는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주기적으로 읽는 건 헤르만 헤세의 책들이에요. 특히 『데미안』은 정말 시시각각,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것 같아요. 아무 때나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싱클레어의 말이 저에게 어떤 지표가 되어줄 때가 있거든요. 헤세의 힘은 정말 자기 내면에 집중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이 가치가 옳다, 저렇게 해야 한다’하면서 나를 흔드는 많은 요소들이 있잖아요. 『데미안』같은 책은 항상 들고 다니다가 갑자기 읽어도 ‘그래, 어찌 되었건 모든 일의 책임은 결국 내가 져야 되고, 내 안의 빛이 말해주는 길을 따라야 나중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렇게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게 저에게는 『데미안』인 것 같아요.

『뜨거운 위로 한 그릇』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마도 그것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작가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가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은 모두가 각자 자기 위치에서 힘든 거예요. 그런데 그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는 거죠. 저도 그런 시간을 보냈거든요. 너무 어두운 터널 같은 힘든 시간을 거쳤었는데, 그걸 누구한테도 해결 받을 수 없고 도움 받을 수 없더라고요. 모두가 그렇게 외로운 섬처럼 살아가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치유를 받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썼어요. 결국은 자기가 책임져야 할 자기 인생이잖아요. 물론 운명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어차피 자기가 해결해야 되는 일들이 있어요. 일상에서 자기를 돌보고, 자기의 경험의 폭에 대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 세계를 끊임없이 조금씩 넓혀가는 것, 그런 건 누군가가 해결해줄 수 없는 거죠.

그 이야기를 저는 음식으로 풀어냈지만, 누구에게는 그것이 요리가 될 수도 있고 집안일이나 커피를 만드는 일, 혹은 음악을 듣는 게 될 수도 있겠죠. 그렇게 자기 감각을 가장 예민하게 깨울 수 있고 건드릴 수 있고 열어낼 수 있는 도구를 하나씩은 가졌으면 좋겠어요. 정말 힘들고 외롭고 우울한데 아무에게도 도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도움의 손길을 줘도 그 손길을 붙잡을 힘도 없는 날이 오거든요. 그럴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마음을 한껏 열어놓을 수 있는 장치들을 지니고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힘든 날에는 그것이 반드시 힘이 되거든요. 무의식중에 찾아와서 자기를 붙잡아주는 무형의 존재가 되어 줘요. 힘들지 않은 날에는 삶을 즐겁고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즐거운 소재가 되고요. 그러니까 누구나 그런 도구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위서현 아나운서에게 음식이란 우리의 감각을 황홀하게 하면서도 삶에 질문을 갖게 하는 존재였다. 거기에 더하여 그녀는 『뜨거운 위로 한 그릇』을 통해 ‘음식이 우리 삶을 위로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바람은 단순하고도 분명했다. 『뜨거운 위로 한 그릇』에서 위로 받고,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한 가지의 질문이라도 지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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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위로 한 그릇위서현 저 | 이봄
매일 아침 7시 클래식 FM을 통해 우리의 아침을 깨워주던 KBS 아나운서 위서현의 첫 번째 에세이이다. 음식을 좋아하고, 심리상담학을 전공한 저자가 음식을 매개로 일상에서 만난 깨달음, 음식이 주는 따뜻한 위로,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방법,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치유를 말한다. 사람에게 지치고, 세상살이에 고단해질 때면 그 어떤 말보다 한 그릇의 음식이 진하고 깊게 마음을 치유해줄 때가 있다. 여행에서, 혹은 일상 속에서 만난 음식과 음식이 이어준 인연들을 통해 지친 삶이 어떻게 위로받고, 치유되며,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외수 작가, 트위터에서 리트윗을 해주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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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사용자는 이외수 작가를 팔로우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160만 이상의 팔로어로 ‘트위터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이외수. 매일 4,5개 트위터를 날리고, 국민 권익을 위한 정보는 반드시 리트윗을 한다. 이외수에게 트위터는 주먹밥 같은 존재다. 이외수는 “하루 한 덩어리 혹은 몇 덩어리의 주먹밥을 만드는 기분으로 포스팅을 한다. 영양가를 고려해 좋은 재료를 쓰고 감칠맛을 더해서 맛있는 주먹밥을 만든다.”고 말한다. ‘트위터 대통령’보다는 ‘꽃노털 오빠’ 또는 ‘트위터의 간달프’로 불러달라고 말하는 이외수 작가를 만났다. 하창수 작가와의 대담집 『마음에서 마음으로』를 읽고 나니, 작가 이외수에 대한 웬만한 궁금증은 사라졌다. 이외수의 일상이 궁금하면 그의 트위터,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될 일이다.

80시간 동안 이외수, 하창수 작가가 나눈 속문선답. 지금까지 작품 40여 권을 펴내며 이외수는 작품 외적으로 작가의 철학을 밝힌 바가 없다. 하창수 작가는 대담집을 준비하며 네 가지 키워드를 꼽았다. 예술, 인생, 세상, 우주와의 대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한 대담은 최소 18시간, 길게는 24시간이 넘게 진행됐다. 대담에 속하지 않았을 질문을 찾는 건, 마치 이외수가 트위터를 하지 않은 날을 찾는 것과 비등비등한 일일지 몰랐다. <채널예스> 인터뷰는 책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정도로 진행됐다.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이 아닌, 서울 마포구 한 호텔에서 진행된 인터뷰. 화천은 벌써 폭설이 내렸다고 하는데, 서울에는 짙은 안개주의보만 내릴 뿐이다. 하나, 책 제목이 『마음에서 마음으로』가 아니던가! 이외수의 머릿속보다 마음을 들여보기로 했다.
대담은 오후 서너 시쯤 시작해서 밤을 새웠다. 어느 때는 동이 트고도 그치지 않고 정오 무렵에야 끝난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마라톤 대담이었다. 한 번 대담에 4기가바이트의 녹음기가 거의 채워질 정도였다.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인 내게는 마라톤 이상의 고역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녹음기는 여전히 켜져 있었고, 간간이 맥주나 막걸리가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대담이 모두 끝났을 때 세상엔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지만, ‘감성마을’엔 그제야 봄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p.6)



내가 지금까지 이외수를 건성으로 알았구나

화천에서 지내신 지 올해로 8년이 되셨죠? 한 달에 한두 번 서울에 올라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울 공기는 어떤가요?

천식이 심해서 호흡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서울에 오면 좀 심해지죠. 대개 서점은 지하잖아요. 사인회를 해도 꼭 지하 서점이니까 아무래도 답답한 기운이 있죠. 자연은 항상 청량한데, 도시 공기는 탁해서. 그래도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기운이 어수선한 겁니다. 화천은 벌써 폭설이 내렸어요. 장독대 위에 쌓인 눈이 장독대 높이만큼 쌓였죠. 골바람이 심한 데다 산간지역이니까 그늘이 져서 아주 춥습니다. 그래도 감성마을에 있을 때는 언제나 편안합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후배 소설가 하창수 작가가 인터뷰어로 참여한 대담집입니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후배이니 대화의 깊이나 편함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부담도 덜하셨을 테고요.

우선 안심이 됐죠. 다른 작가는 저를 추상적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하창수 작가는 가까운 거리에 살기도 하고, 왕래도 잦고요. 평소 술도 많이 마시고 이야기도 자주 나누는 사이라서 큰 부담이 없었어요. 좋은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을 그냥 내놓으면 되니까, 다듬거나 꾸밀 이유가 전혀 없어서 편했습니다.

80시간 대담이면 녹취록 분량이 상당했을 텐데요. 압축하느라 여간 고생이 많지 않았겠습니다.

애를 많이 먹었고 다듬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죠. 일단 제가 여러 번 검토도 했고요. 정치적인 문제도 허심탄회하게 말했는데, 사회적으로 물의가 일어날 법한 여지가 있는 이야기는 많이 뺐고 현존하는 인물 이야기도 좀 생략했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제목은 직접 지으셨다고요.

내가 느끼고 있는 것 중 하나가 21세기는 더 이상 이성이 세상을 주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20세기까지는 머리 중심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죠. 우리나라 교육제도를 보면, 머리 좋은 사람을 우수하다고 인정하는데 나는 이게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부터는 이것이 수정돼야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진보하기 때문에 이성보다 감성이 중요하다는 걸 인식할 거고 감성이 시대를 주도하게 될 거예요. 지금 경제, 마케팅도 감성 경영으로 전환되고 있잖아요. 머리 좋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보다, 마음 좋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훨씬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중심이 되는 삶, 인간적이고 사랑의 마음을 중시하는 작가,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입니다.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예술과 인생 부분이었습니다. ‘아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몇 번이든 고친다는 이야기는 다소 의외였습니다. 이외수의 과거와 현재도 흥미로웠고요.

집필에 들어가면 저는 예고편 보여주듯이 광고를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모니터도 합니다. 발표하기 전에 10대부터 40대까지, 전 연령 독자들에게 초고를 주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 걸리는 부분을 말해달라고 합니다. 막내 아들이 가장 냉정한 독자죠. 최종 심의는 언제나 막내 몫이에요. 내가 “이걸 읽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놓고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화장실에 간다고 대답하면 다시 씁니다.

언제부터 원고를 미리 보여주셨나요?

『꿈꾸는 식물』때부터 그런 것 같아요.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대담집이니 사전에 보여주시진 않았을 것 같고. 가족들은 이 책에 대한 반응이 어떤가요?

‘지금까지 나는 이외수를 건성으로 알았구나’ 하던데요. 막내 동생이 가장 놀랐고, 큰 아들은 “내가 평소에도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어요. 같이 살고 있는 가족들이 저에 대해서 놀라는 기색이 있었어요. 독자들 같은 경우에는 대개 이외수의 단편적인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이번 책 리뷰를 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이외수를 보게 됐다는 평이 많아요.

“내가 이외수 작가만큼 나이가 들면, 과연 이렇게 잡다한 것들까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이런 리뷰도 있더라고요. 책을 보니, 평범해서는 작품을 쓰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기인적인 풍모를 갖게 됐다고 하셨는데요.

평범하게, 평탄하게만 살았으면 일반적인 시각을 가졌을 것이고, 그러면 일반적인 글밖에 못 썼겠죠. 보편적 사고에 머무르면 글도 보편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자기가 보는 각도에 따라서 세상 만물이 다르게 보이는 거예요. 작품을 쓸 때는 남다른 시각, 남다른 사고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제 글은 어쨌든 개성은 인정 받았으니까, 소재가 독특하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끄집어낸 건 아니니까요.

『장외인간』『벽오금학도』가 대표적이겠지요. 신비적 우주론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책 ‘우주와의 대화’에도 자세히 언급이 되었습니다. 달에 사는 지성체와 나눈 교신, 채널링 일화도 흥미로웠고요. 요즘도 우주의 지성체들과 환담을 나누신다고요.

예전과는 달리 두세 달에 한 번 정도로 뜸하죠. 채널링을 통해 배운 건, 우리가 지구에 사는 한 지구의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죠. 지구의 특질은 지구의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다만 지구가 우주에 속해 있는 이상 우주의 본질적 속성인 아름다운 사랑을 추구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달 친구들은 지구의 비, 물이 풍부하다는 것과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좋아했어요. 우주의 많은 지성체들이 지구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사람은 태어나서 꼭 한 번은 사춘기를 겪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겪지 않으신 건가요?

40대를 지나면서 지금까지 사춘기를 겪고 있죠. 밥 세끼를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춘기에요. 지금도 늘 설레고, 곧잘 흥분하고, 감동도 잘 받고 울기도 잘하니까(웃음).

굶으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셨죠. 잠도 마찬가지고요.

글을 쓰는 데 절실히 필요한 일이에요. 정신이 청명하고 명료해지면 글이 청명하고 명료해집니다.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가지치기가 절로 됩니다. 지금도 잠을 잘 자지 않는 건, 많이 자면 오히려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트위터 덕분에 집필 속도 빨라졌다

파격과 기행의 작가를 넘어 대한민국 대표적인 친절한 작가, 독자와 소통을 잘하는 작가, 또한 위트 있는 작가입니다. 트위터에서 공익을 위한 트윗이라면 반드시 리트윗도 해주시고. 하나, 작가는 외로워야 하는 존재이기도 할 텐데요. 이외수 작가님을 보면 외로울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밑에서 컸는데, 할머니가 이삭을 주우러, 동냥을 얻으러 가면 빈집에서 혼자 할머니를 기다려야 했어요. 산 밑 오두막에서 자라 사람 구경을 하기 힘들었고 혼자 집에 있으면 그렇게나 두려웠어요. 마을을 바라보면서 ‘어딘가에 할머니가 있겠지, 할머니가 내 울음소리를 들을까?’ 하는 기대로 울면서 할머니를 기다렸어요. 어린 시절 탓인지 지금도 혼자 있는 게 두려워요. 별로 안 좋아해요.

고독을 즐기는 작가들도 많습니다. 독자와의 밀접한 소통은 불편해하는 경우도 많고요.

작가들이 지나친 권위의식을 갖게 되면 독자와 작가와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너무나 재미있는 매체들이 젊은이들을 유혹합니다. 책을 한창 읽어야 할 독자들의 시선이 모두 다른 데로 분산되고 있죠. TV, 영화, 스포츠 등 무궁무진하게 재밌는 것들이 많잖아요. 자칫하면 책 읽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빼앗긴 독자, 서점으로부터 멀어진 독자를 다시 찾아오려면, 작가부터 그 높은 담벼락, 깊은 골, 넓은 거리감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들이 먼저 작가에게 다가오기는 어려우니까, 작가 스스로 먼저 담을 허물고 자진해서 독자에게 다가가야 하는 거죠. 요즘 SNS가 많이 발달했잖아요. 트위터, 페이스북을 잘 활용할 수도 있겠죠.

트위터를 열심히 하게 된 후부터 집필 속도가 더 빨라졌다고 말씀하셨어요. 최근 <소설문학> 겨울호에 단편 ‘파로호’를 발표하셨는데, 단편소설은 2010년 ‘완전변태’ 이후 3년 반 만입니다. 이번 단편은 열흘 만에 쓰셨다고 들었는데요.

보통 단편을 쓰면 두세 달은 걸립니다. 그런데 트위터를 습작 공간으로 활용하다 보니 집필 속도가 빨라졌어요. 뼈와 기름은 빼고 살코기만 골라내는 일을 매일 같이 하다 보니, 농축된 메시지를 전달하기 쉬워졌죠.

작가님은 대한민국 파워 트위터리안의 상징이 되었으니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떤 작가는 “모든 작가는 트위터 계폭(계정 폭파)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던데요. 트위터를 개설한 걸 후회한 적은 없었나요?

그냥 잡담만 하는 공간으로 사용한다고 하면 다소 회의가 생겼겠죠. 트위터가 조잘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정보를 습득하는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사회적 흐름, 이슈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요. 또 하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 이게 가장 큰 장점이죠. 무의미한 문장을 올릴 수도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는 공간이지만, 최소한의 양심, 도덕성을 갖고 사용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리트윗 요청이 굉장히 많죠? 요청에 응답하는 원칙이 있을까요?

첫째, 농수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의뢰하는 분들은 거의 해드립니다. 또 정부기관에서 국민 권익을 위해서 정책 방안을 내놓을 때는 100% 리트윗 하죠. 소방서라든가 경찰서,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각 부처에서 내놓은 국민 권익을 위한 일이라면 무조건 해드립니다. 개인적인 글로는 아이가 실종됐다거나, 치매를 앓고 있는 부모가 사라졌다, 또 희귀 혈액을 구하는 위급한 상황일 때는 리트윗 하고 있습니다.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리는 동시에 안티 팬들도 많습니다. 트위터에서도 좋은 댓글이 주를 이루지만, 악플러들도 여전히 많아요. 어떤 심리일까요?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거겠죠. 열등감이 많거나, 소외됐다고 생각하거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는 경우가 많아요. 무슨 글이던지 정치적으로 왜곡해서 해석하는 사람도 많고. 어떤 때는 대꾸를 해주지만 너무 무가치하다고 느낄 때는 살충제를 뿌립니다. 예전에는 정신과 전화번호를 올려놓기도 하고 여러 가지 처방이 있었어요. 요즘은 가급적 무시하는 쪽이죠.

“편하고 행복한 사람은 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악플러들이야말로 이외수 작가의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제가 고통 받고 외롭고 슬픈 삶을 살았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글을 씁니다. 좌절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하면서 책을 쓰죠. 행복하면 안 읽어도 된다는 말은, 제 책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즐거울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산재되어 있잖아요. 이미 행복하다는 건 성공했다는 것과 같고, 굳이 내 책을 읽으면 고통스러운 부분이 많으니까. 오히려 제가 그 분들한테 폐를 끼치는 느낌이 들어서 안 읽어도 된다는 생각이죠.

나는 이미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읽어도 되겠죠.

사실 뭐 책은 많이 읽을수록 좋은 거죠. 외국의 한 작가가 ‘작가적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작가는 내 글을 읽는 독자가 나 한 명이라도 족하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 세계가 내 글을 열광해주기를 바란다.” 모든 작가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독자를 사랑한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독자가 사랑한 작가는 들어봤지만, ‘독자를 사랑한’ 이란 타이틀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작가 이외수에게 독자란 그만큼 큰 존재겠지요.

독자를 사랑한 작가를 독자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요? 우리 식구들이 다 그렇습니다. 독자를 식구 의식을 가지고 대하죠.

작가에게는 어떤 독자들이 반갑나요?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좋지요.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 독서량이 부끄러울 정도로 낮다는 게, 일단 심각한 문제에요. 대한민국은 OECD 중 경제력 12위,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데 놀랍게도 자살률은 3관왕입니다. 국민 자살률, 노인 자살률, 청소년 자살률 1위. 이렇게 많은 목숨이 쓰러져 가는데 아직까지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생명의 존엄성을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정신적 빈곤이 가장 큰 문제죠. 내적 풍요, 내적 충족감, 자기 존재감에 대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예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독서입니다. 우리가 보통 책을 읽으면 지식이 쌓인다는 건 상식입니다. 지식이라는 건 머릿속에 내장되어 있는 것을 발효시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면 실천이 필요합니다. 또 타인에 대한 애정까지 플러스 시켜야죠. 그래야만 지성이 되고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지성을 거쳐 지혜가 되려면, 만물을 사랑할 줄 아는 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독자가 책을 읽고 실천할 수 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거죠.

오행사상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을 구상 중이시죠. 언제 독자들이 만날 수 있을까요?

장기적으로 5부작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공부에 들어갔고 내년부터 집필에 몰두해서 3년 이내에 끝낼 계획입니다. 트위터를 통해서 훈련을 많이 했으니 속도를 낼 수 있겠죠. 단편이랑 산문은 쌓인 원고가 많아요. 책은 쉼 없이 낼 겁니다.

쉼 없이 집필하는 작가가 있으니, 독자들도 쉼 없이 독서를 하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순천에 강의를 갔는데, 순천시에서는 아이가 새로 태어나면 책을 선물한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게 책이 되는 거예요. 얼마나 멋진 생각입니까? 모든 지자체에서 본받았으면 좋겠고, 국민들도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독자들을 만날 때 큰 행복을 느낀다.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더라도, 편지나 트위터에서의 만남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런데 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보다는, 내 글을 읽고 어려운 상황을 잘 견딜 수 있었다거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인생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가슴이 뭉클하고 콧날이 시큰해진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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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마음으로이외수 저/하창수 편 | 김영사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멘토들의 멘토, 160만 팔로어를 지닌 트위터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외수. 그러나 세상이 명명한 이름 뒤에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한 이외수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에서 길어올린 깊은 사유와 성찰의 세계, 눈물겨운 절망과 상처를 딛고 꽃피운 영적이고 우주적인 인식은 아직 한번도 꺼내놓지 않은 이야기였다. 한칸 방 안에서도 우주를 만나는 작가 이외수, 그가 세상과 간절히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후배 소설가 하창수와의 대담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새로운 시대를 연 로큰롤 황태자 - 프란츠 퍼디난드(Franz Ferdin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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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달을 앞두고 인터뷰는 진행됐다. 음악 팬들에게 있어, 그리고 음악 전문지들에 있어 12월은 꽤나 의미심장한 달이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는, 다시 말해 그 해의 우수 작품들을 가려보는 결산 작업이 이 시점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미리 예고를 하자면 이즘도 내부에서 선정을 이미 마친 상태다. 이 얘기를 왜 꺼내느냐. 이에 대한 이유를 이제 슬슬 밝혀야겠다. 어쩌면 눈치를 챈 사람도 있겠다. 맞다. ‘이즘 올해의 팝 앨범’ 중 하나로 프란츠 퍼디난드의 올해 신보 <Right Thoughts, Right Words, Right Action>을 꼽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글로 찾아뵐 예정이다.

각설하고, 한 해를 대표할 만큼이나 2013년의 프란츠 퍼디난드는 멋있었다. 몸을 바로 들썩이게 하는 댄서블한 리듬이 여전했고 흡인력을 발휘하는 멜로디가 넘실거렸으며 이 둘이 이루는 사운드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성적도 남다르다. 본토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앨범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으니 양질의 작품을 선보이면서도 밴드의 성공가도를 훌륭히 이어간 셈이다. 이즘 입장에서도 올해의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운이 좋은 일이었다. 보컬 겸 기타의 알렉스 카프라노스와 드럼의 폴 톰슨과 마주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두 가지 질문으로 먼저 시작하고 싶다. 여태까지 발매한 모든 스튜디오 음반들이 영국 앨범 차트 Top 10에 올랐다. 이러한 기록에 신경을 쓰는가? 그리고 차트에서 승승장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알렉스 카프라노스(이하 알렉스) : 신경 쓰지 않는다. 전혀 신경 쓴 바가 없다. 예상한 바도 없고. 우리 스스로 표현을 하고 싶은 게 있고 내보이고 싶은 게 있어서 음악을 하는 것이지 성적을 내려고 이래야겠다는 것은 없다. 차트 상에서의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곡이 좋으니 그만한 반응이 온 것이 아닐까. 좋은 곡이 성적도 또 좋다.

압박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나.

알렉스 : 전혀. 매우 자유로웠다. 걱정했던 것도 없었고 모든 아이디어를 시도해볼 수 있었다. 사실 몇몇 밴드는 차트에서 성공하기 위해 곡을 쓴다고 알고 있는데, 좋다. 여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게 우리 나름대로 실패하지 않는 이유 같기도 하다. 물론 매우 감사한 일이다. 특히나 국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반응이 오고 또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많이들 얘기해준다는 게 내 자신에게는 엄청난 일이고 또 신기한 일이다.

늘 그래왔듯 이번 음반도 댄서블하고 세련되며 지적이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드나.

알렉스 : 넓게 영향을 받는다. 인생 전반에 걸쳐 들었던 모든 지점에서 조금씩 흡수해오는 것 같다. 네 살 때 들었던 음악이 들어있기도 하고 4일 전에 들었던 음악이 또 들어있기도 하다. 여러 음악이 결합되어 나오는 셈인데 단순한 재생산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흡수는 새롭게 나만의 것을 도출하는 또 다른 과정이다. 그리고 댄서블하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맞다. 사실 우리가 하는 음악이 댄스 음악이다. 단순히 비트만 가져가는 게 아니라 우리는 리듬도, 멜로디도 모두 챙기려 한다. 어느 파트에서건 리듬이 존재하고 그 리듬을 멜로딕하게 연주한다. 여러 밴드들을 돌이켜 보면 밴드의 음악을 결정하는 독자적인 파트가 있지 않나. 예를 들자면 리드 보컬이나 리드 기타리스트가 있지만 프란츠 퍼디난드를 이끄는 독자적인 파트는 없다. 우리 모두가 리듬을 연주하고 멜로디를 연주한다.

이쯤에서 프란츠 퍼디난드에 대한, 그리고 프란츠 퍼디난드 음악에 대한 정의를 듣고 싶다. ‘소녀들을 춤추게 하겠다’는 취지는 여전한가.

알렉스 : 음. 맞는 것 같다. (웃음) 음악을 시작할 무렵, 음악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은 갖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관객들이 다 남자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관객들이, 왜 그런 관객들, 그런 남자들 있지 않나. 음악에 대해 괜히 깊게 생각하면서 벽에 기댄 채로 까딱거리기만 하는, 그런 종류(chinstroker)였던 것이다. 음악을 지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아니면 무언가 생각을 더 집어넣으며 듣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그와는 다른 관객들을 대상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순수하고 본능적으로 음악을 느끼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전작 <Tonight>은 덥스텝의 느낌이 나는 음반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 신디사이저가 특히 많이 활용됐었는데 이번에는 관악기와 코러스를 유독 많이 사용한 형상이다. 빈티지한 톤으로 채운 키보드도 그렇고. 앨범 전반에서 복고적인 색채가 묻어난다.

알렉스 : 심각하게 고려한 건 아니다. 일렉트로닉에서 레트로로 가야겠다는 그런 의도도 없었고 일렉트로닉이나 레트로라는 스타일에 대해 고려한 것도 없었다. 일렉트로닉 음악도 사실, 처음 들었을 때 뭐가 다른 건지 싶었다. 5년 전의 음악이랑 이거랑 어디가 다른 건지. 그건 특별하게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뭐가 새로운 건가. 밴드의 오리지널리티는 곡을 쓰고 연주하는 데서 나오는 거다. 악기를 고르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댄서블한 비트가 러닝 타임 내내 지칠 줄을 모른다. 멜로디 역시 훌륭하게 가져가고 있고. 멜로디와 리듬, 어느 한 가지도 놓치지 않으면서 명확하게 끌고 나가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평소 작업을 어떻게 하나.

알렉스 : 맞다. 멜로디와 리듬을 동일하게 가져가는 게 목표다. 기타나 보컬이나 아니면 어느 한 파트가 밴드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그룹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든 파트를 똑같은 비율로 구성하려 한다. 폴의 드러밍도 밥의 베이스도, 내 기타와 보컬도, 닉의 기타와 키보드도 그 모든 걸 동일하게 말이다. 밴드의 캐릭터는 밴드가 연주하는 데서 분명 비롯된다. 그 캐릭터는 또 하나의 퍼스널리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가 결합된 형태다. 그게 힘이고 정체성이다. 그런 캐릭터들을 억눌러버리면 뭐, 다른 것들을 못 보지 않겠나.

폴은 어떤가. 드럼으로서 멜로디를 연주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말 그대로 리듬 파트인데.

폴 톰슨(이하 폴) : 그렇다. (웃음) 뭐 나름.
알렉스 : 댄스 음악, 일렉트로닉 음악은 결국 리듬에 기초한다. 대부분 히트하는 팝 음악도 그렇고. 멜로디보다는 리듬에 무게가 더 실리는 편이다. 멜로디의 중요성만큼이나 리듬의 중요성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 보 디들리나 롤링 스톤스나 아니면 1960년대 영국 음악만 봐도 리듬에서 노래가 나온다. 기타리스트에게 있어 왼손이 하는 것만큼이나 오른손이 하는 게 중요한 것처럼, 왼손이 멜로디를, 오른손이 리듬을 맡고 있는 것처럼,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질 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한국의 전통음악도 리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알렉스 : 아, 오늘 경복궁에 갔는데 엄청 큰 드럼을 봤다. 보자마자 ‘와, 이거 소리 엄청 나겠다.’ 하면서…(웃음) 대단하게 생겼다. 리듬은 복잡한 개념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 리듬들이 바뀌지 않나. 사실 전통적인 서구 음악에서는 리듬을 그리 많이 찾을 수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많이 배울 수 있겠고.
: 한국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들었던 거 같은데…신정현인가.

신중현을 말하는 건가.

: 맞다. 미군 라디오 채널에서 접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 전통 음계랑 그 리듬이 되게 잘 섞여 있었다. 이게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속에서 무언가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그런 게 또 느껴지더라.
알렉스 : 이곳저곳 다른 곳에서 결국 흡수하게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댄스 음악에 특히 영향을 받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 음악도 듣는다. 스케일이나 무드나 멜로디를 연주해보기도 하고 또 따라해 보기도하지만 내 손을 거쳐서 나오면 무언가 다른 형태가 되어있다. 터키 리듬도 라틴 아메리카 리듬도 여러 차례 시도해보는데 절대로 오리지널처럼 나오진 않더라. 잘못 연주하기도 하면서. (웃음)




다시 음반으로 돌아가보자. 첫 트랙 「Right Action」 이나 「Love Illumination」, 「Stand on horizon」, 「Treason! Animals」와 같은 트랙들이 정말 멋지다. 곡을 만들며 역점에 둔 부분이 있었나.

알렉스 : 사실 양면으로 나오는 LP를 기준으로 만들었다. 원래는 이런 데 크게 신경 쓰는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편집에서 신경을 써 봤다. 첫 트랙 「Right action」부터 「Bullet」까지를 사이드 원에, 그 다음부터 「Goodbye lovers & friends」까지를 사이드 투에 담아내면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양면에 넣었다. 둘의 성향이 상당히 다르다. 앞면이 긍정적이고 밝고 양의 느낌이 있다면 「Bullet」서부터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멜랑콜리하고 감정적으로 건드리는 식으로 시작된다. 「The universe expanded」의 경우는 특히 어딘가 부유하는 듯하고. 그런 식으로 곡을 만들었다.

이번 음반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곡을 꼽는다면.

알렉스 : 사이드 별로 하나씩 뽑아야하지 않을까. 사이드 투에서는 「The universe expanded」를, 사이드 원에서는 「Stand on the horizon」을 선택하겠다. 「Stand on the horizon」의 경우를 보면 멜로디도 강하고 또 직선적인 팝 사운드를 담고 있다. 즉각적으로도 나오고. 하지만 평범한 팝 음악의 틀로 만든 노래는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더 복잡하다. 반복되는 부분도 없거니와 전통적인 코러스의 구조도 아니다. 들을 때는 쉬워도 막상 편곡하고 만지기에는 까다로운, 이게 나름 트릭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그런 점에 있어서 가장 괜찮은 곡 같고.

<Tonight>을 만들 쯤, 음악을 발전시키려 상당히 고심했고 연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듀서가 한 차례 바뀌기도 했고. 이번 음반을 만들 때는 어땠나. 어려움은 없었나.

알렉스 : 재밌게 즐겼다. 모든 소리를 만들어봤고 여러 콜래보레이션도 했고. 프로듀서를 찾을 때는 소리를 강하게 뽑아내는 프로듀서보다는 조금 더 현대적으로 접근할 만한 사람을 고르려했던 것 같다. 우리도 꽤 괜찮은 생각들이 있었으니까. 콜래보레이션의 느낌을 프로듀싱에서 내보고 싶었던 게 또 작용했던 것 같고 말이다. 프로듀서 모두가 곡을 쓰고 연주하는 뮤지션들이다. 알렉시스 테일러 같은 경우는 핫 칩에서 활동하고 있고 비욘 이틀링도 피터, 비욘 앤 존에서, 또 토드 테리에도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말 재밌는 녹음 작업이었고 결과물도 대부분 맘에 든다. 내 스튜디오에서도, 닉의 스튜디오에서도 편하고 일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모든 게 이루어졌다.

앨범 제목이 <Right Thoughts, Right Words, Right Action>이다. 밴드가 생각하는 ‘바른 생각’, ‘바른 단어’, ‘바른 행동’은 무엇인가.

알렉스 : 뭐라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다. 이건 본능적이고 음악을 마주했을 때 직관적으로, 느끼는 대로 나오는 것이다. 내면이 말해주는 것이니까. 딱히 특별한 정의는 없다. 듣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음반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가. 멤버 모두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점수를 매겨본다면 어떨까.

알렉스 : 양으로 환산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넌 어때, 폴.
: 숫자를 말하나. (웃음) 뭐, 100은 아니다. 완벽히 만족할 만한 작품은 아니니까. 또 우린 계속 만들 거고 활동할 거고. 엄청난 대작이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알렉스 : 후작이라는 것은 아마도 전작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다. 매번 작업을 하면서 상상하는 것은, 다음은 조금 다르지 않겠냐는 점이다. 접근법도 그렇고 기술도 그렇고. 더 나아가지 않을까. 녹음을 끝낸 직후에는 물론 100 퍼센트로 가득 행복하지만 새로이 음악을 시작할 때는 또 0 퍼센트로 느껴지는 것 같다.

0점으로 떨어뜨리면 안 되지 않나.

알렉스 : (일동 웃음) 아 물론, 당연하다. 다만 전과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가는 게, 반복하는 게 싫다는 거다. 다른 걸 또 생각하고 있으니까. 발매된 직후에는 충분히 행복을 느낀다.
: 막 만들었을 때는 만족도가 최상에 달한다. 하지만 다시 들었을 때는 뭔가 ‘저렇게 부르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하는 생각도 많이 하고, 아쉬운 부분들이 생긴다.
알렉스 : 그간 해왔던 음반들 중에서 두 번째 앨범이랑 세 번째 앨범은 당시에 특히 만족하지 못했던 작품들로 기억한다. 조금 더 달라야하지 않나 느끼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뭐, 이번 앨범은 괜찮네 싶고…조금 다르다.




각자가 뽑는 베스트 트랙은 무엇인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닉 맥카시와 밥 하디의 베스트 트랙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나.

알렉스 : 연주할 때 괜찮은 곡들이 좋은 것 같다. 내 경우는 「Goodbye loves & friends」가 좋다. 다른 트랙들과 어딘가 다르기도 하고. 그렇지?
: 맞다. 그런 감이 좀 있다.
알렉스 : 닉은 「Love illumination」을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나 이번 음반에서 록의 느낌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니까. 밥은 아무래도 「Stand on the horizon」이 아닐까 한다. 연주할 때 좋아하는 것 같던데, 「The universe expanded」도 좋아하고. 연주할 때 뭘 좋아했지?
: 「Stand on the horizon」을 제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알렉스 : 그런 것 같다. 베이스 라인이 진짜 좋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알고 싶다. 특별한 이유가 작용했나.

알렉스 :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지 않았나. 너(폴) 드럼 잡았을 때도 그랬지?
: 그랬던 것 같다. 단지 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 남들 음악 좋아하듯 나도 음악 좋아했고, 제일 친한 친구가 또 기타를 쳤고. 주위에 기타 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대학에 진학하니 다들 음악을 시작하더라. 어떻게 보면 이게 사람을 만나면서 생기는 일련의 과정 같기도 하다. 또 난 에딘버러에서 태어나서 글래스고에서 자랐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 환경에 있었던 것 같다. 알렉스도 그랬을 거다, 아마. 이 그룹에서도 연주하고 저 그룹에서도 연주하고.
알렉스 : 맞다. 나도 주위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아버지도 기타를 쳤다. 그런 데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 제일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앤드루가 기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의 곡을 따라 치는 것으로 연주를 시작했고, 다른 곡들의 코드를 충분히 몰라서 연주할 게 모자라졌을 쯤에 우리 노래를 시작했던 것 같다.

영향을 준 아티스트나 음악에 대해서는 어떤가.

알렉스 : 있다. 정말 많다. 하지만 매번 바뀐다. 데드 케네디스도 그렇고 킹크스도 그렇고. 그래도 킹크스에 제일 많이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레이 데이비스의 송 라이팅을 특히나 좋아했던 것 같다. 물론, 킹크스라는 밴드에서 정말 많은 역할들을 담당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매력적인 작곡가로서의 레이 데이비스다. 전형적인 로큰롤 넘버 「You've really got me」도 좋아했고 「Autuum almanac」은 진짜 기묘하다. 「Shangri-la」는 실로 낯설면서도 추상적이면서 또…매력적인 장소에 대해서도 노래한 곡들이 많다. 특히나 정말 지루한 (웃음) 교외에서 자란 내 경우에는 그런 노래들이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또 롤링 스톤스의 「Jumping Jack Flash」도 좋아했고.

폴의 경우는 어떤가. 글래스고에서는 할 만한 게 축구 아니면 음악 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알렉스 : (웃음) 맞다.
: 축구 아니면 음악을 다들 했던 거 같다. 아니면 바를 차리던가. (웃음) 둘이 섞여있다. 또 어떻게 보면 지금 이렇게 산다는 게 운이 되게 좋은 것이기도 하고.
알렉스 : 특권의 유무에 차이가 달린 게 아닐까 한다. 괜찮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면 그만한 특권을 가질 수 있다. 성공적인 변호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도시에서 일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캐임브리지)에 가거나. 그런 도시들은 충분히 좋은 것들을 보장해줄 수 있다. 아마 우리가 하는 이런 밴드 활동은 못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정말로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있지 않나.
: 양친이 모두 일을 했다. 동시에 아버지는 음악 팬이기도 했는데 집에서 쉬지 않고 음악을 틀어 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 주변에는 그런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그걸 이뤘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다. 또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고 음악도 듣고 연주도 하고.
알렉스 :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도 상당한 특권을 받은 셈이다. 폴이나 나나 밴드를 잘하고 있고, 즐기고 있고.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돈이 많이 따라온 것은 아니지만. (웃음) 런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 간다.
: 돈이 든다, 돈이.
알렉스 : 하지만 이렇게 지내게 되어서 정말 좋다.
인터뷰 : 신현태, 이수호
정리 : 이수호
사진 : 이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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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선택하는 조건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일, 사람, 돈, 회사. 일이 1순위인 사람은 수입이 조금 적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과 호흡이 맞지 않아도 견딜만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 그러나 사람이 1순위인 사람은 일, 돈, 회사가 모두 만족스러워도 ‘내가 언젠가 이 회사를 나가고야 말지’하며 마음속에 딴 생각을 품고 있다. 조직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관계만큼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다. 관계 맺기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잘 알아듣고 잘 말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 치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성공하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상사 복 없고, 부하 복 없다고 하소연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상사, 좋은 부하가 되어야 한다. 우선 열 마디 할 말을 두 마디로 줄이고, 말한 만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부하에게 의견을 묻는 상사를 두고 의뭉스러운 행동을 할 후배는 없다.

2002년, 유승렬 대표는 SK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오랫동안 회사 내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고민해왔던 터라 기업 CEO, 임원들을 대상으로 코칭, 컨설팅을 주로 하는 벤처솔루션스를 창업했다. 유 대표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첫손에 꼽을 만큼 가장 인상적인 메시지는 “직장인은 누구나 경영자”라는 말. 당시 10년차 과장이었던 그는 스스로 경영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업무에 임하게 됐다. 오랜 직장 생활 끝에 얻은 노하우로 최근 『베타 커뮤니케이션』을 펴낸 유승렬 대표. “모든 일에 있어서 ‘어떻게 할까?’에 앞서 ‘무엇을 할까?’가 중요하듯, 회사 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도 ‘무엇을 커뮤니케이션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베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다. 유 대표는 “좋은 상사란, 배울 게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부하 입장에서는 이렇게 토를 달 수도 있을 것이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행동을 하셔야죠.” 이런 마음,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해답은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은 기존의 ‘알파’와 대비되는 ‘베타’. 알파 모델이 하향식 방침과 명령에 의한 계층적 조직 운영 위주의 방식이라면, 베타 모델은 구성원 각각이 자아를 실현하면서도 서로 간에 협업을 이루어내는 재즈 밴드와 같은 수평식 조직 운영 위주다. 회사 내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도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베타 조직에서는 개개인의 재능과 창의성을 결합하여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베타 커뮤니케이션』 p.5)




상사는 존중하고, 부하는 제때 보고하라

‘회사 업무 중 80%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내 말을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이만큼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높지만 정작 기업에서는 눈치껏 잘 알아듣기를 바란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60%는 커뮤니케이션의 잘못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미국에 있는 한 기업이 직장인 2만3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회사원의 37%만이 자기가 속한 조직이 무엇을, 왜 달성하려고 하는지를 분명하게 안다고 말했다. 그리고 5명 가운데 1명만이 자신의 업무가 팀과 조직의 목표와 일치한다고 답했다. 이런 현상은 누구의 잘못이겠나? 누구에게나 근본적인 잘못은 없다. 대부분 커뮤니케이션의 잘못에 기인한다.

조니 버나드 쇼는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어려움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곡을 찌른 말이다. 사실 본인들이 이 사실을 깨달으면, 이미 반 이상이 발전된 거다. ‘내가 커뮤니케이션을 과연 잘하고 있을까?’하고, 되돌아보는 건 발전의 시작이다.

대학에서 경영학과를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대표이사직까지 올랐다. 신입사원 때부터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항목, 그 명제를 가지고 잘했다기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일찍 ‘경영자’ 마인드를 가질 수 있었다. 직장생활 10년차 때 회사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초급 간부도 경영자’라는 마인드를 알게 됐다. 그 때부터 ‘어떻게 일을 해야 할까’에 초점을 두고 직장생활을 했다. 부하 직원을 육성해야 하는 책임감도 있으니,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더 절실했다. 예전에는 서류를 검토하는 일에만 급급했지, 서로 협의하고 결정해야 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잘 파악하진 못했다.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장 먼저 바뀐 변화는 무엇인가.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알게 됐다. 내가 깨달은 것을 동료들한테 이야기하고, 동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들어 보는 일의 중요성을 알았다. 다른 부서가 가지고 있는 정보, 지식을 얻어다 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 부서, 저 부서 기웃거리면서 사람들을 사귀고 요청도 많이 했다. 정성껏 이야기하면 상대도 거부감이 없다. 인문계를 전공해서 이공계 지식은 부족했다. 생산, 기술, 엔지니어 이런 부분에 약하니까 타 부서에 가서 많이 물어봤다. 특별히 밀접하게 관계되는 일이 아닌데도, 와서 물어보고 궁금해 하니까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나중에는 친절하게 가르쳐주더라. 저절로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이공계 지식이 필요하듯 그 쪽도 시장 상황이나 경쟁사 동향, 마케팅 등을 알면 업무적으로도 효율이 붙는다. 서로 윈윈 했던 것 같다.

책에 나온 조사를 살펴보니 “어떤 형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리더를 선호하느냐?’’고 물었을 때, “달변은 아니더라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말을 하는 리더”라는 답변이 66%로 압도적이었다.

사실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 같은 경우, 팀원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 자체에 여유를 부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에 쫓기고 할 일은 많은데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급해 죽겠는데, 그럴 여유가 어딨나?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물어보고 결정하면 결과가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부하 직원 다섯 명이 있는데 본인을 포함해서 여섯 명이 뛰는 것과 한 명이 열심히 뛰고 다섯 명이 그냥 쫓아다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그 다섯 명을 어떻게 열심히 뛰게 하냐?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하고 존중해주고, 자기가 이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동적이게 된다. 열정이냐 몰입이냐, 이런 데서 결과가 차이가 난다.

임원들에게 경영 코칭을 하며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첫째는 통찰력이다. 많은 정보가 축적되고 내적으로 침착이 되어야, 그것이 논리적인 사고나 통찰력으로 발휘된다. 이건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동료, 부하 직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 지식, 아이디어를 공급 받아야 한다. 임원에게는 리더십을 많이 강조하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와 부하직원들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몰입을 해서 창의적으로 일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에 핵심이 있다. 어떻게 서로 힘을 모으게 만드느냐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리더십, 통찰력을 갖기 위해서도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절실히 요구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에게는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상사라고 치자. 내가 일에 대한 열정이 있고 부하에 대한 애정이 있더라도, 그걸 밝히지 않으면 부하들은 모른다. 속마음은 ‘너를 아끼고 있어’라도, 그걸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 가장 중요한 건 ‘같이’ ‘함께’ 일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내가 뭐를 해줄게’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말하는 것보다, ‘너희들과 함께 더 좋은 성과를 내서 그걸로 승부하겠다’는 마인드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고 할수록 실패한다. 파트너 십, 같이 하겠다는 마인드, 일을 도모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과를 ‘같이’ 낸다는 생각을 할수록 일은 성공한다. ‘신입사원들이 사장과 같이 함께한다는 생각’은 내가 잘해서 빛을 보겠다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처럼’이 아니라 정말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런데 정작 동료들에게는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일을 잘하더라도 너무 어필을 많이 하니까, 동료들이 볼 때는 언짢은 것이다. 상사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상사는 부하가 자신이 애를 많이 썼고 고생했다는 것이나, 자신이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장황하게 보고하는 것을 싫어한다. 상사는 이미 자신의 부하직원 개개인의 활동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경험이 쌓이고 자리가 높아지면 자연히 보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 상사가 문제점에 대해서 질문할 때 답변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것 또한 매우 싫어한다. 대부분 부하직원은 상사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공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상사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사의 입장에서 함께 일하기 편한 부하는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나.

어렵고 곤란한 일이 생길수록 빨리 보고하는 부하가 현명하다. 명제는 ‘그것을 잘했냐’가 아니라, ‘나 혼자 풀려고 하지 않고 즉시 보고를 잘했냐’다. 직속 상사는 보통 직속 후배와 짧으면 2,3년차 길면 4,5년차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비슷한 경험치가 있기 때문에 업무를 부여할 때 이미 짐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능한 상사는 일을 맡겼다고 해서 일이 끝날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계속 모니터링을 한다. 그런 모니터링을 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보고, 알고 있다.




똑똑한 질문보다 무식한 질문이 좋다

일이 잘 풀리고 성과가 좋을 때는 커뮤니케이션이 쉽다. 그러나 일이 잘 안 풀렸을 때, 상사와 부하는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난감하다.

회사 대표 입장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어떤 목표를 추진했는데 뜻대로 잘 안되고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부하직원에게 짜증을 내거나 야단치면 안 된다. 정말 중요한 대목이다. 호흡을 잘 고르는 게 필요하다. 실패에 대해 화를 내고 야단을 치면 그 다음에 상대는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 그 권한은 나에게 짐으로 넘어오고, 나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없게 된다. 두 번째로 일을 판단할 때는 70% 성과면 대성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어차피 60% 비즈니스 룰을 가지고 일한다. 60% 이익을 내면 되는 거다. 70%면 좋은 성과라고 판단한다. 30%를 못했다고 담당 직원에게 화를 내면 그 사람은 판단을 포기한다. 60%에서 50%로 떨어질 때는 그 권한을 회수해야 한다. 70%를 해냈는데 그 이상을 유지하고 싶으면, 담당자에게 권한을 더 줘야 한다. 30%를 못한다고 그냥 놔두는 게 아니라, 30% 상황에 대해 조언을 해줘야 한다. ‘나 같으면 이런 생각을 했겠다, 누구에게 이런 걸 물어봤겠다’ 이런 조언이 필요하다.

조언을 해주는 방법, 타이밍도 중요하다. 말하는 태도에 따라서 듣고 싶을 상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조언은 바로 해주는 게 제일 좋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 이야기하는 톤은 ‘내가 질책을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더 잘하기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해봐라’ 긍정적인 태도로 말해주는 것이 좋다. 부하 입장에서도 자신을 야단친다거나 앞으로 내 평가를 나쁘게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더 잘하게끔 도와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질문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직장생활에서 좋은 질문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목적’에서 좌우된다. 질문하는 목적이 나를 프리젠테이션 하기 위한 목적인가? 내가 상대방을 더 이해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목적인지가 중요하다. 데이트할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알고 싶다. 아니면 내가 과시하기 위해 질문을 하기도 한다. 사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발전을 하려면, 듣고 배우는 비중이 높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질문도 나온다. 좋은 질문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는 일단 질문은 많이 하는 게 좋다. 상사 입장에서 질문을 많이 하는 부하를 보면, ‘궁금한 게 많구나’ ‘습득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구나’ 생각한다. 체면을 따지지 않고 무식한 질문을 한다고 해도 욕하지 않는다. 용감하다고 생각하고 더 호감이 간다. 질문을 통해서 그 사람을 더 알게 되면서 ‘저 친구를 이렇게 훈련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게 되면 배려도 할 수 있다. 좋은 질문을 한다고 똑똑하다고 평가하는 일은 별로 없다.

동료 입장에서도 유식해 보이는 질문을 숱하게 하는 사람보다는 이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질문을 하는 동료에게 더 호감이 가기 마련이다.

상사 또한 마찬가지다. 유능한 상사는 그런 단면으로 부하를 평가하지 않는다. 한 조각에 불과한 단편적인 행동에 감동을 받거나 좌우되지 않는다. 반복적인 대화를 통해 부하에 대해 잘 알게 되고,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어 배려해줄 수 있다. 자기를 노출시키면 자기에게 유리하다. 결정적일 때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잘 넘어가겠지’ 이런 생각은 좋지도 않고 효과도 없다.

회의 때도 그렇다.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임이 분명한데,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끊임없이 늘여놓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나름이다. 이를테면 소주 한 잔 마시면서 여유롭게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분초를 다투는 보고회의, 업무회의에서 사견을 내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이슈를 다뤄야 하는데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다. 그런 이야기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야기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잘 살피는 게 필요하다. 그걸 업무시간, 회의시간에 하려고 하면 그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다.

좋은 상사의 정의를 내려 본다면?

‘저 분하고 일하면 배울 게 많겠다’라고 생각이 드는 상사가 좋은 상사다. 좋은 훈련을 받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면 좋은 상사다. 두 번째는 나에게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도움을 많이 주는 상사.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잘 들어주는 상사가 좋은 상사다. 또한 어떤 성과가 있으면 공을 부하에게, 잘못되면 내 탓으로 여기는 상사가 좋은 상사다.

요즘 직장인들은 멘토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 동시에, 좋은 상사보다 편한 상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다.

‘나를 편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봤을 때, 편하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일을 좀 덜해도 되는 상황을 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됐다. 일을 적게 하게 만들어주는 상사가 과연 좋은 상사인가? 이건 쥐약이다. 마취제, 담배, 술 같은 거다. 당장에는 즐겁고 편한 것 같아도 평생 도움이 안 된다. 부하들은 상사가 간섭한다고 생각하고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왜 간섭하는가? 골똘히 생각해볼 문제다.

상사가 간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부하가 만들고 있는 것인가?

예전에 공장을 가보면 공장 간부들이 자기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본부장, 팀장이 권한을 안 주고 일일이 다 체크한다고 불평한다. 그러면 난 이렇게 질문한다. 첫째로 당신이 팀장으로서 상사인 본부장에게 일하는 과정을 얼마나 잘 알 수 있게끔 모니터링 수단을 제공했는가?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 보고를 제때 하지 않았다. 팀장 입장에서는 팀원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상사가 부하에게 권한을 줬다고 책임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 부하에게 권한을 줬지만, 잘못하면 상사 책임이다. 보통 회사에서 보고서 쓰다가 판 난다는 소리를 한다. 관료 체계가 어쩌고저쩌고 말도 많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얼마나 상사에게 모니터링 수단을 제공했는지.

책 속에 ‘상사와 부하가 서로 불만을 겪는 사례’가 나온다. 매우 동의하는 바가 컸다. 직장생활을 이제 막 시작하는 신입사원들이 읽어도 좋겠지만, 특히 상사와 부하가 모두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팁이 많더라. 임원이나 간부, 상사들이 읽어보고 직원들에게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다. 직원들이 찾아서 읽기는 어렵고,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직원들이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잘 습득하고 소통을 잘하면 누구의 이득이겠는가. 회사가 잘되는 길은 직원들이 상사, 부하 관계 없이 모두 소통을 잘하는 길에 있다. 친구가 이 책을 보더니 ‘30년 전에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 아들 주랬잖아.”(웃음)



상사와 부하가 서로 불만을 겪는 사례

부하의 불만

상사의 불만

 우리 팀장(상사)는 왜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김 대리는 시도 때도 없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

 아무도 회사의 전략이나 본부의 전략을 나(평사원)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신입사원 박 모씨는 모르는 것을 도통 물어보지를
 않는다.

 나는 회사의 중요한 사정을 소문으로 듣고 있다.
 심지어 외부로부터 듣는 경우도 있다.

 정 파트장은 내부는 물론 외부의 소문에 대해서
 즉시 보고하지 않는다.

 전략 수립이나 의사결정을 할 때 나의 의견은 묻지도
 않는다. 결정은 혼자 하고 나에게는 지시만 한다.

 부하들의 의견을 몇 번 들어보았지만 열심히 준비를 하지
 않고 즉흥적이고 피상적인 말만 하니 의미가 별로 없다.

 간혹 의견을 말하면 그 의견의 단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여
 주눅이 들고, 더 이상 의견을 말하고 싶지 않다.

 이 대리는 비합리적인 의견을 말하는 경우가 많고
 문제점을 말해주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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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커뮤니케이션유승렬 저 | 위즈덤하우스
이 책을 쓴 유승렬 대표는 "직장인은 누구나 경영자다"라고 말하며 되도록 많은 경영자들이 이 책을 읽도록 권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영자는 조직 구성원 모두를 의미한다. 말단 직원이라도 자신이 한 사람의 경영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업무에 임한다면 회사를 잘 경영하기 위해 무엇을 잘 알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저절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부서 내 협업, 부서 간 협업, 공식 행사 등과 같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상하ㆍ부하ㆍ동료 등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커뮤니케이션 등 각각의 경우에 맞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제공하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미술 감상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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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두려워하는 곳을 꼽으라면 백화점, 그리고 미술관. 백화점에 가면 뭔가 사야 할 것 같아 두렵다. 미술관에서 10분이고 20분이고 지긋하게 작품을 소통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나만 그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무안했다. 공부하고 보면 좀 낫겠지? 서점에 갔다. 서점에서 미술 관련 책을 봤다. 어려웠다. 입체파, 야수파, 낭만주의 초현실주의 등 ‘파’, ‘주의’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다. 분명 미술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본 용어인데, 미술이 수능 교과목은 아니었던 탓인지 그때 외웠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이 쓴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은 필자와 같이 미술을 감상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전문용어를 배제하고 일상에서 쓰는 쉬운 말로 작품을 설명했다. 책에 수록한 작품이 미술 교과서에서 보던 것이라 많은 사람에게 친숙하기도 하다!

 

이명옥 관장은 국민대 미술학부 교수, 한국미술관협회장, 과학융합포럼 공동대표 등 여러 곳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미술을 친절하게 소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노력으로 『명화 속 신기한 수학 이야기』, 『명화 속 흥미로운 과학 이야기』, 『천재성을 깨워주는 명화이야기』,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외 다수의 책을 썼다. 그녀를 사비나 미술관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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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쉽게 미술을 설명하려는 이유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을 냈습니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요. 이 때문에 가족조차도 갈등이 생기죠. 미술 작품은 예술가의 생각, 감정, 철학을 일상 언어가 아니라 시각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러니 일반인이 이해하기 더 어렵죠. 미술에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아졌습니다. 창의력이 중요한 시대고, 교양을 쌓거나 정서 함양하기 위해서 미술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책이 의외로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전문가의 시선으로 쓰되, 대중을 위해 번역하겠다고 마음먹었죠. 예술가가 되지는 않지만 예술적 감성을 가진 사람을 독자로 예상하고, 대안 교과서를 만드는 심정으로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을 냈습니다.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을 쓰면서, 혹은 평소에도 교과서를 많이 봤을 텐데요. 요즘미술 교과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미술을 학교에서 배웠을 때는 감상 교육이 부족했어요. 화가나 조각가가 되려는 사람이 아닌데도 (교과서에서 지시하는 대로) 대다수 학생이 그려야 했죠. (교과서가) 미술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요즘 교과서는 감상 위주로 바뀌었고 현대 미술 작품도 수록해요.
 
수학, 과학, 경제 등 다른 분야와 융합을 시도했는데요. 이유가 있었나요?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관객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죠. 미대 학생, 미술 전문가만 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와 융합이 필요하더군요. 전시를 하고, 책도 출간했습니다. 수학, 과학 전문가가 전시를 많이 찾았고 책도 많이 읽혔어요.『명화 속 흥미로운 과학 이야기』로 과학문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가 융합의 시대잖아요. 융합의 시대가 오리라고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미술관 운영, 3가지가 중요해


2011년에 쓴 동아일보 칼럼 ‘사립미술관장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미술관을 세우겠다고 하면 말리겠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사비나 미술관을 세우고 겪은 일 중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나요?
 
미술관은 열정, 전문성, 재력 등 3가지가 있는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죠. 20년 전 미술관을 만들려고 했을 때는 지금처럼 절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비싼 수업료도 치렀고요. 보통 미술관을 화랑으로 생각해요. 작품 매매하는 영리공간으로도 보고요. 그러다 보니 수집한 작품이 많으니까 미술관을 세워 볼까, 하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미술관에는 이보다 기능이 많습니다.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연구, 교육 기능을 하고요.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수집하고, 지방 미술관은 커뮤니티 역할까지 맡습니다. 복합 예술 공간이죠. 이런 걸 고려하면 전문적인 사람이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내용을 칼럼으로 썼죠.


1990년대와 지금, 미술관 운영에서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요?


예전에는 작가를 초빙할 때 돈이 들긴 했어도 지금처럼 돈이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거장이라도 편지를 잘 써서, 초빙하는 게 가능했는데요. 지금은 전시공간이 많아지고 기업도 미술관을 세우니까 경제력이 많은 곳으로 좋은 전시가 몰립니다. 아티스트도 artist fee를 무조건 요구하는 시대가 됐어요. 삭막해졌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사회 각 분야가 승자독식으로 가잖아요. 미술계도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재력이 많은 전문적인 화랑, 공적 자금을 투입한 미술관, 대기업 문화재단이 설립한 큰 규모의 미술관이 살아남고 중간 쪽이 없어졌습니다. 이게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싶어요.


미술관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적 재능이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생각과 작품 결과가 다르더군요. 머릿속에서는 걸작인데, 표현되어 나온 결과물이 그에 미치지 못했어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한계를 느꼈지만 미술을 워낙 좋아하니 이쪽을 떠나긴 싫었죠. 내가 미술계에서 일을 하려면 아티스트가 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작품 보는 것도 재능이거든요. 나는 안목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작품을 하는 예술가를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활용하고자 미술관 경영인으로서 사는 길을 택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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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미학에서 ‘천재론’이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고, 관장님도 『천재성을 깨워주는 명화 이야기』, 『이명옥의 크로싱』에서 천재를 논했는데요. 천재는 어떤 존재인가요?


천재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죠. 똑같은 물건을 보더라도 예술가들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보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구나, 볼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해 줍니다. 지금 전시중인 함명수 작가는 도시 욕망을 표현하면서, 맨하튼을 욕망의 덩어리로 그렸죠. 이 작품을 봤던 사람이 뉴욕에 간다면 뉴욕을 욕망의 덩어리로 볼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예술 작품은 우리가 균형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완성도 높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획일화 되어 있어요. 인맥, 학연 찾으면서 편을 가르고요. 다르게 생각하는 걸 방해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창의성 뛰어난 사람이 잘 나오지 않는 게 남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은 풍토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튀었습니다. 하고 다니는 것, 생각도 튀었어요. 남과 같은 것보다 다른 게 좋았고요. 유행을 피했어요. 개성 없어 보이니까. 20년 전 옷도 지금 입고요. 이렇게 본다면 저도 천재와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게 아닐까요? (웃음)


천재가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예술가가 그런 존재잖아요. 관객이 미술 작품을 봐야 하는 이유와도 자연스레 연결되네요.


무수히 많은 세계가 있습니다. 뭉크는 세상을 죽음으로 바라봤어요. 엄마, 형제가 일찍 죽어서 그의 머릿속에는 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죠. 자신의 인생관도 죽음이었어요. 이에 비해 르노아르에게 세상은 온통 장밋빛이죠. 그의 작품은 늘 유쾌하고 낙천적이죠. 뭉크의 세상은 우울하고, 르노아르의 세상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어요. 이런 식으로 예술작품을 볼 때마다 나의 세계관이 무한히 증식되는 걸 느끼게 될 것입니다. 미술 작품을 감상해서 유연하고 다양하며 경계를 뛰어 넘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서문에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예술작품 덕분에 우리들은 단 하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만을 보는 대신 그 세계가 스스로 증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차적인 예술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많은 세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국에는 스타 예술가가 故 백남준 선생 이후로는 뜸하다고 하던데요.


결국은 나오겠지만 아직은 두드러진 작가가 없어요. 왜 그럴까 고민했는데요. 우리 작가를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하고 통로가 없더라고요. 온라인상에서라도 한국 작가를 많이 보여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구글 아트 프로젝트로 100명 정도를, 코리안 아트 프로젝트로 한국 작가 63명을 소개했습니다.


관장님 패션이 독특합니다.
 
강의 나가면 “모자, 두건이 많은데 도대체 몇 개나 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400~500개가 넘어요. (웃음) 원래부터 모자를 좋아했어요. 예전에는 긴 머리를 즐겼는데 시간이 갈수록 긴 머리를 못해요. 긴 머리를 향한 향수도 있고요. 나를 드러내는, 브랜드화 하는 역할도 합니다. 경제적이기도 하죠. 평범한 옷에도 모자 하나 쓰고 나가면 패셔너블한 느낌을 주거든요.


미술 작품, 어떻게 봐야 하나


앞으로 나올 책은 어떤 책인가요?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은 1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시리즈에요.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까지는 계속 이 시리즈로 책을 낼 것입니다. 미술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술에 얽힌 시대적 배경, 과학 기술 등 배경 지식이 들어가죠. 요즘 젊은 세대는 재미있고 짧은 걸 좋아하잖아요. 동서양 다양한 작품을 짧으면서도 재미있게 쓰고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작품과 진지하게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 혼자만 이해 못하는 것 같고요. 요령을 알려 주세요.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다만 자신의 취향을 존중했으면 합니다. 취향이 미술 감상에도 반영이 되거든요. 취향이 있다면 그 취향에 맞는 작품부터 보는 게 좋아요. 동일한 취향인데도 좋은 작품이 있고 그렇지 못한 작품이 있습니다. 이를 보는 능력은 훈련으로 기를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 자주 와서 친해지는 게 필요해요. 어떤 취미 생활도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잖아요. 좋은 선생님 만나고, 동호인 만나고, 책도 사보고요. 이런 과정을 안 하려는 게 문제죠. 내가 어떤 인간인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보는 우선입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 어떤 걸 좋아하는가? 이명옥 관장이 던진 질문은 결국 어떤 미술 작품을 봐야 할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에는 교과서에서 봐서 익숙한 작품이 다수 수록되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자신의 취향을 찾고,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도 추운 겨울을 나는 한 가지 방법이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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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웹툰작가 박수봉 “군인 신분, 어떻게 네이버 만화 연재를 했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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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네이버 만화에 소리 없이 등장한 『수업시간 그녀』. 작품 속 주인공은 군 입대를 앞둔 스무 살 남짓한 대학생이다. 수업시간 옆자리에 앉게 된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을 첫사랑을 담담하게, 매우 간결하게 그려냈다. 이색적인 건, 모든 등장인물의 얼굴에 눈을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는 특정한 얼굴 생김새나 이름으로 인물을 정의하기보다는 독자 자신의 이야기, 혹은 주변의 이름 모를 친구의 이야기로 만화가 다가가길 원했다. 『수업시간 그녀』가 연재되면서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은 “작가의 경험담이 분명하다”는 반응이었다. 과연, 박수봉 작가의 경험담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휴가를 맞아 ‘독자와의 만남’을 갖게 된 박수봉 작가에게 만남을 청했다. ‘작가’라는 호칭이 아직 수줍은 그는 대답을 꺼내놓을 때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해야 하지?” 여러 번 멈칫하며 대화를 이어갔지만, 꾸밈없는 모습이 『수업시간 그녀』의 작가다웠다. 재미로, 즐거워서 그리게 된 만화는 어느덧 ‘웹툰작가’ 데뷔로까지 이어졌다. ‘누구나 혹은 누군가 느꼈을 법한 그때의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는 박수봉 작가. 한 독자는 『수업시간 그녀』을 두고 “소설 한 권을 읽은 느낌”이라고 평했다.

박수봉 작가는 인터뷰를 마치고 필자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상부 허락을 받았다고 기사에 꼭 써주세요. 그동안은 인터뷰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얼결에 웹툰작가로 데뷔하게 된 박수봉 작가는 요즘 선임들의 연애 편지에 그림을 그려주느라 바쁘다. 덕분에 예쁨을 받고 있다는 그는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어서 행복한 만화가다. 또 하나, 박수봉 작가는 『수업시간 그녀』를 그리면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됐다. 그렇다면 『수업시간 그녀』을 본 독자들도 용기를 내서 연애를 시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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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 그녀』 감정이입이 관건이었다

2년 전 개인 블로그에서 연재하다가 네이버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역전! 야매요리』정다정 작가와 같은 경우죠? 언제쯤 나에게도 연락이 오겠지, 하고 예상했나요? 아니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데뷔였나요?

여자친구랑 만난 지 100일이 되던 날, 꽃을 사려고 가고 있는데 문자가 왔어요. 네이버 알림창이 울렸는데, 네이버 만화 담당자 분이 비밀글로 연재를 제안하는 메시지를 남긴 거죠.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못 질렀고요(웃음).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냥 덤덤했던 것 같아요.

『수업시간 그녀』는 어떻게 탄생한 작품인가요? 독자들 대부분이 ‘작가의 경험담이 분명하다’는 반응을 보였는데요.

(웃음) 습작 차원에서 그렸던 작품이었어요. 제가 얼만큼 이야기를 짤 수 있는지도 궁금했고요. 제 주변 몇몇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싶어서 그린 만화에요. 친구들에게 작품으로 인정 받고 싶었어요. 물론 연재를 시작하면서는 독자 분들을 고려했지만 일차적으로 칭찬 받고 싶은 사람들은 제 주변 사람들이었어요. 친구들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면 독자들을 만족시키기란 더 어려운 일이니까요.

7월에 군입대를 했고 지금 의경으로 복무 중이잖아요. 연재는 어떻게 가능했나요?

이미 작품은 3월에 완결했었고요. 5월부터 연재를 시작하면서, 6월 말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다시 그렸어요. 7월 4일에 입대했는데, 논산 가는 날, 차 안에서도 편집을 했어요(웃음). 부모님이랑 여자친구가 많이 도와줬죠. 여자친구가 멀티미디어영상을 전공하고 있어서 파일 다루는 법이나 여러 가지 노하우를 많이 알려줬어요.

연애 중이시군요. 혹시 『수업시간 그녀』속 그녀를 닮았나요?

(웃음) 아니에요. 연재를 하다가 알게 된 사이인데요. 안경도 쓰지 않았고요.

연재를 하다가 연애를 하게 되었다니! 『수업시간 그녀』는 정말 행운 같은 작품이네요. 기대하지 않았던 웹툰작가 데뷔에 사랑까지. 여자친구는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블로그에 『수업시간 그녀』를 연재했을 때, 학교 페이스북에 링크가 걸렸는데 그걸 타고 타서 알게 된 사이에요. 같은 학교 친구다 보니까 자주 만나게 됐고, 서로 잘 맞아서 사귀게 됐어요. 물론 고백은 제가 했고요(웃음). 여자친구가 만화에 도움을 많이 줬어요. 좋은 아이템도 주고 결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죠.

아,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는 왜 안경을 쓰고 있나요? 평소 안경 쓴 여자에 대한 로망이?

지적인 느낌이 있잖아요. 안경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속마음을 불투명하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등장인물 얼굴에 눈을 그리지 않은 이유는?

프랑스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 작가도 눈을 잘 안 그려요. 눈을 안 그린다는 것 자체에 포인트를 잡고 간다기보다는 눈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작가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인물들의 눈빛을 대사로 유추하게 되는데, 저는 그걸 포인트로 잡고 갔어요. 대사를 더욱 농밀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림의 보여주기를 살짝 눌러주고 간다고 할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실험적인 면보다는 평범한 해석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마지막에 여자 주인공의 눈이 등장하는 장면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한 장면에 얼만큼 힘을 줄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고요.

눈이 없지만 인물의 표정, 심리가 읽힌다는 것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이에요.

눈을 그리게 되면 그 한 사람의 이야기로 그치지만, 눈이 없으면 모든 독자가 주인공이 될 수 있잖아요. 공감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마지막에 눈을 그린 건, 그 순간만큼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글도 적고, 채색도 많지 않아요. 그림도 무척 간결한 느낌이고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나요?

어렸을 때 『아빠와 아들』이라는 만화를 보고 자랐어요. 대사 없이 그림만으로 전달되는데 막연히 재미가 있었어요. 『수업시간 그녀』를 그리면서, 그냥 전달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정회라는 친구가 함축의 중요성을 알려줬어요. 함축의 매력을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독자가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놓는다고 할까요?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위해서 생략하고, 길을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채색은 정말 가끔 등장해요. 26화에서 여주인공이 신문만화를 볼 때, 노란색 배경이 나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쉽게 말해 노란색은 행복인데, 인물들이 행복을 느낄 땐 주로 노란색이 등장해요. 여주인공이 짝사랑하는 남자와 술을 마실 때는 탁한 노란색이 나오죠. 불안정한, 확실하지 않은 감정이니까 탁한 노란색을 쓴 거예요. 후반부 신문만화를 읽고 나서, 주인공에 대한 마음이 전해졌을 때는 깨끗한 노란색이 나오고요. 마지막 화에 파란 비는 봄비 같은 느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맞이하고 그 전의 것들은 리셋하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만화 속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카페는 실제로 있는 카페라고요. 커피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특히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유독 많이 등장해요.

예전에는 아메리카노 같이 쓴 걸 왜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언젠가 정말 힘들 때 한 잔을 마셨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예전에는 ‘있어 보이려고 쓴 걸 마시나?’ 했는데, 아니었던 거죠(웃음). 남자 주인공과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는 카페에서 만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자는 코코아를 남자에게 주잖아요. 아직은 단 걸 좋아하는 순수한 느낌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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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주인공, 단순한 성격은 저랑 닮았어요

필명을 안 쓰고 본명을 사용하시는데, 되게 정감 가는 이름이에요.

굉장히 여러 사건을 만들어준 이름이에요(웃음). 어릴 적에는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외우기도 쉽고 정이 가는 이름이라서 좋아요. 아 그런데, 너무 나이 들어 보이나요?

아니요. 20대에게는 흔한 이름이 아니라서 기억에 남았어요. 독자들은 작품 속 주인공을 작가로 투영해서 보기 마련이잖아요. 『수업시간 그녀』의 남자 주인공과 닮은 모습이 있나요?

단순한 면은 닮은 것 같아요.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는? 수를 두지 않는 단순함이 비슷해요. 어떻게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콤플렉스가 하나 있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잘 몰랐어”라고 그냥 넘겨버리는 거거든요. 몰랐다고 용서가 되는 게 아닌데, 이런 걸 『수업시간 그녀』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남자 주인공을 두고 “장점이라곤 순진함 밖에 없는 놈”이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 장점 때문에 연애를 하게 되는 사람이라고. 실제 연애할 때 어떤 스타일인지 궁금하네요.

음.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글쎄요. 상대가 ‘기분이 상했나? 상하지 않았나?’ 이런 걸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좀 안 해도 될 매너들을 지키려고 하는 면이 있어요.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싫어할 수 있는? 당시에는 모르지만요(웃음).

미술을 전공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만화가에 대한 꿈은 정확히 없었는데, 그림 그리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 입시 미술을 준비하다가 저랑은 맞지 않은 것 같아서 도망치듯 나왔는데, 덕분에 영상을 접하게 됐어요. 제가 배운 연출법은 영상 분야이고, 스토리보드 작업이어서 만화를 그리면서, ‘너무 영상 쪽으로 가는 그림은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만화는 만화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너무 문학적으로 만들려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하고 요즘에는 개념을 제대로 잡아보려고 해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 어렵지 않나요? 개성 있는 학생들이 많기로 유명하잖아요.

운이 좋았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3D영상을 만드는 형이랑 같이 영상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제가 스토리보드를 그렸거든요. 그게 좋은 점수를 얻은 것 같아요. 입시에 대한 준비를 그렇게 많지 하지 않아서, 자유롭게 말해서 오히려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학교에서 저는 그냥 어울리는 사람들이랑만 어울리는? 그런 학생이에요. 저 말고는 다 튀는 것 같아요. 개성이 강하고 각자 신념이 도드라지니까, 표현하는데 능숙한 친구들이 많아요.

동기나 선후배 중에서 웹툰작가로 데뷔한 사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윤현석 선배님이 네이버에서 <다이스>를 연재했고, 졸업한 김혜원 선배님이 <월남특급>을 연재한 걸로 알고 있어요.

『수업시간 그녀』때문에 박수봉 작가도 학교에서도 유명인사가 됐겠어요.

입대 이후에는 학교를 잘 가지 않아서 확인이 안 돼요(웃음).

군대에서는 유명세를 좀 타고 있나요?

웹툰을 연재했다는 건 알아요. 덕분에 벽화를 그리는 일에 많이 투입되고 있어요(웃음). 선임들의 기념일마다 그림도 자주 그려줘요. 귀찮긴 한데 덕분에 예쁨을 좀 받고 있어요.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개인 블로그가 이렇게나 소문 나기는 쉽지 않잖아요. 파워 블로거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소문이 난 건가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최초로 박재수 작가님이 제 웹툰을 좋게 보시고 이종범 작가님께 말씀해주셨고, 이종범 작가님이 SNS에 소개해주셨는데 그걸 또 주호민 작가님이 퍼뜨려주셨어요. 주호민 작가님의 팔로어가 많아서, 덕분에 제 블로그에 많이 오셨어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 운 좋게도. 작가님들에게 정말 감사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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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작가성에 빠지지 않는다면

웹툰작가는 댓글 보는 낙으로 연재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기억에 남는 댓글이 많을 것 같아요.

마지막 화에서 다른 분의 로맨스 이야기가 댓글로 올라왔는데, 그게 베스트 댓글로 뽑혔어요. 바로 바로 반응이 올라오니까 연재를 하는 입장에서도 힘이 나죠. 즐거워요.

어린 나이에 웹툰 작가로 데뷔했어요. 애초에 만화가를 꿈꾼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만화가로서의 앞날은 계획하고 있나요?

학창시절 때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찾아보던 중에 영상을 공부하게 되면서 대학에 왔고, 나에게 맞는 일을 찾고 있던 때에 그림을 그리게 된 거예요. 입대를 하고 나서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만화를 하고 싶다는 결론이에요. 그 전에는 막연한 꿈만 있었거든요. 바스티앙 비베스 작가처럼 스물두 살에 책을 내고 싶다는 꿈만 있었는데, 이렇게 단행본도 내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행운인 것 같기도 하고 마냥 좋기도 하고 그래요.

『수업시간 그녀』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와 만남을 약속하고 ‘나 아주 쓸모 없는 인간은 아니었어’라며 환호하잖아요. 현실에서는 언제 스스로의 쓸모를 느끼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음. 되게 간단한 거 같아요.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그리고 제가 한 행동에 대해 누군가가 웃어줄 때가 그래요.

혹시 <응답하라 1994>봤나요? 연애에 숙맥인 만화 속 주인공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드라마였어요.

본방을 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서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요. 짧게 짧게는 봤어요. 주변에서 이야기도 많이 듣고. 김칫국을 마시는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만약에 『수업시간 그녀』가 드라마화가 된다면 <응답하라 1994>를 연출한 감독님께 부탁 드리고 싶어요. 명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내공이 보이더라고요. 스토리 전개나 생각 같은데, 정말 마음에 들어요.

요즘 웹툰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먼저 데뷔한 선배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귀와 눈을 활짝 열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만든 작가성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고요. 유행이나 너무 인기 있는 것만 따라가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성에 빠져버리면 그림 자체에만 몰입해서 스토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고, 연출까지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아요. 창작은 힘들지만 그림과 글을 조율하는 능력이 정말 실력이라고 생각해요. 인기 있는 작품을 보고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가장 냉정한 판단을 하는 사람은 독자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내 작품을 독자들이 이해 못한다’는 건, 핑계인 것 같아요.

글, 그림을 나눠서 작업하는 작가들도 많은데요. 앞으로도 쭉 혼자 그릴 계획인가요?

계속 혼자서 할 것 같아요. 정말 하고 싶은 것, 표현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요. 다만 뭔가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제가 그림을 안 그릴 수도 있을 거예요. 이야기에 따라 표현 방법도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감성물로 데뷔를 했는데 앞으로 장르의 변화는 없을까요?

영화는 액션을 좋아해요. 그런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건 다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감성물을 잘한다는 건 아니고요. 그렇지만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건, 『수업시간 그녀』같은 단편이에요. 우선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걸 하려고요.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어서 즐거워요. 행복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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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 그녀박수봉 글,그림 | 애니북스
군 입대 전의 스무 살 남짓한 남자 주인공(가운데)이 수업시간에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여학생(왼쪽)에게 마음이 끌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업시간 그녀』는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주인공 승민(이제훈)과 여주인공 서연(배수지) 사이에 오가던 감정의 몇 배는 될 듯 압축된 감정 표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 여자’만 바라보면서 ‘나를 좋아하는 여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간결한 그림체에 극도로 절제된 표현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건축학 개론〉보다 훨씬 달콤하고 쓰라린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려 줄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롤러코스터 김성덕 PD, 연애는 돌직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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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연애하고 싶은 솔로는 많다. 연애, 생각보다 잘 안 된다. 서점에 수많은 연애개론서가 있는 이유일 테다. 여러 연애개론서 중에서 뭘 읽어야 할까 고민한다면, 『네 남자친구가 제일 문제다』는 어떨까. tvN에서 방영한 <재밌는 TV 롤러코스터 - 남녀탐구생활>을 만든 김성덕 PD가 쓴 책이다. <남녀탐구생활>은 같은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여성과 남자의 심리를 재밌게 묘사하며 케이블 시청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남녀 그리고 재미. 이 두 단어는 김성덕 PD를 설명하기에 없어서는 안 될 말이다. 그는 남녀관계 전문가이며, 재미를 추구하는 방송인이다. 대표작인 <남자셋 여자셋>, <세친구>, <롤로코스터 남녀탐구생활> 모두 남녀를 소재로 해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한 프로그램이다. 김성덕 PD의 이런 면모를 안다면, 『네 남자친구가 제일 문제다』가 어떤 연애개론서일지 짐작이 갈 테다. 이 책은 남녀관계를 재미있게 분석한 책이다. 덧붙이자면, 아주 솔직하기도 하다. 인터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책 내용의 일부를 공개해 본다.

 

헐크가 다른 남자한테 화내는 건 괜찮은데 자기 여자한테까지 성질을 부리면 그 영화 안 된다. (8쪽)
남자의 경제력은 중요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경제력을 재산 수준으로만 이해한다면 오산이라는 것이다. (18쪽)
남자는 늙으나 젊으나 다 똑같다. 나를 포함한 남자들에게 섹스는 가장 큰 화두요 사투이고, 고민이자 관심사에 장엄한 숙명이기까지 하다. 이 화두 앞에서는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차이도 그저 무색해질 뿐이다. (46쪽)
연애 기간 동안 남자들은 죽을 힘을 다해 숨긴다. 잘난 부분만 부각시키고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던 행동이 줄을 잇는다. 없던 매너가 갑자기 발휘되고 철없고 본능적인 모습을 숨긴다. 통장 잔고를 숨긴 채 온갖 선물을 안긴다.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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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자친구가 제일 문제다』를 쓴 계기가 궁금하다.


석사 졸업 논문에 미래와 과학이 들어가야 한다. 보통은 지구, 환경 이런 쪽을 쓰나 나는 예능 PD니까 과학을 대중화할 게 없나 고민했다. 연애, 결혼을 과학적으로 풀어보자고 결심하고 2년 동안 공부하면서 연애, 결혼 원리를 연구했다. ‘네 남자친구가 제일 문제다’는 제목은 연애상담하며 떠올린 문구다. 사귀기 전에는 멋져 보였던 남자친구가 사귀고 보니 형편없더라는 게 대체로 상담 내용이었다. 네 남자가 제일 문제라고 인정하고 출발해라, 이런 의도를 담았다.
 
책에 지인 사연을 많이 실었다. 자랑스럽기보다는 감추고 싶은 사연이 많은데, 지인으로부터 항의가 온다면 어떻게 하겠나.


책을 재미있게 쓰기 위해서 썼다. 대표적으로 나를 지도했던 교수님은 나에게 ‘배신자’라고 말하더라.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대들지 못할 것이다. 사실이니까. (웃음) 나는 욕 먹을 각오가 돼 있다.


책에는 술버릇, 폭력, 도박을 남자의 3대 재앙으로 꼽으며, 이것을 발견할 때 즉시 떠나라고 조언했다. 혹시 여성에게도 3대 재앙이 있을까?


혹시 남자가 『네 남자친구가 제일 문제다』을 보고 왜 남자를 형편없이 취급하느냐고 할 수 있을 텐데, 오해다. 여자가 형편없다, 남자가 형편없다는 게 주제가 아니다. 우리가 물건을 하나 살 때 잘 사기 위해 흠이 있나 없나를 살피지 않나. 여성을 위한 글이다 보니, 남자를 고를 때도 신중하자는 취지에서 썼다. 남자는 술, 도박, 폭력이 3대 재앙이다. 여자에게는 3대 재앙까지는 아니고, 남자가 싫어하는 3가지를 꼽으라면 1번, 고집. 2번, 남자를 바보로 만드는 여자. 3번, 남자 자존심을 건드는 여자.


남자를 바보로 만드는 여자,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한다.


사자에 비유해보자. 사자는 이빨과 발톱이 있다. 이 사자가 자신의 여자를 안 물게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방법을 고민하다 사자의 이빨과 발톱을 다 빼버린다. 그럼 이 사자는 발톱과 이빨이 없으니, 내 여자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사자 역할을 하지 못한다. 발톱과 이빨을 빼는 것, 이게 남자를 바보로 만드는 행위다. 바보가 된 남자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 이렇게 하지 말고 발톱과 이빨을 빼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여자를 안 물게 해야 한다.



『네 남자친구가 제일 문제다』후속편으로 『네 여자친구가 제일 문제다』가 나올 수 있겠다.


쓸 수는 있겠으나 인터넷으로 무료 연재하지, 책으로는 안 낸다. 남자는 책을 안 읽는다. 그 돈으로 술 마시지. 나는 여자 편이다. (웃음)


지금 연애 중인데, 본인의 연애는 어떻다고 생각하나.


내 연애는 치열하다. 돌직구다. 속도를 빨리한다는 게 아니라 온 힘을 다 한다. 알아볼 것도 최선을 다해 알아본다. 안 좋은 건 빨리 이야기한다. 낯부끄러운 이야기도 다 한다. 연애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 예의 차린다고 머뭇거리면, 한 달이면 될 걸 1년 걸린다. 자세하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오해도 빨리 풀린다.


연애 상담을 하거나, 둘 사이를 이어줄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게 뭔가.


상담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된다, 안 된다. 25살 이상 넘어가면 사람이 안 바뀐다. 바뀌도록 노력하라고? 안 한다. 옆에서 보면 맞는지 안 맞는지 보인다. 상담보다는 정보를 많이 준다. 당사자끼리 직접 묻기 뭣한 정보. 제3자가 정확한 정보를 주면 시행착오가 덜하다. 내가 정보를 준 사람은 보름 만에 6개월 만큼 진도가 나간다. 요즘 빅 데이터가 중요하지 않나. 정확한 빅 데이터를 가지고 연애를 하도록 도와준다.


지인들을 연결해 주는 데, 어떤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나? 성공률은 얼마인가.


맞나, 안 맞나를 본다. 260 사이즈의 신발을 신는데, 명품이라도 해도 250 사이즈의 신발이 뭐가 필요한가. 직관에 가까운데, (관계의) 아귀가 맞고 안 맞고는 대충 안다. 성공률이라... 사람들이 성공률을 잘못 생각하는 것 같다. 맺어준 게 성공이 아니다. 빨리 깨져도 성공이다. 안 될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게 문제다. 내 예언은 대충 맞다. 깨져, 하면 거의 다 찢어지더라. 성공률보다는 적중도라고 한다면 100%다. (웃음)


지금 연애와 20년 전의 연애, 어떤 게 달라졌나.


옛날에는 남자가 리드했으나 요즘은 철저하게 여성이 리드한다.


연애는 OO다, 결혼은 OO다고 정의한다면?


연애는 날씨다. 결혼은 신발이다. 내일 날씨, 모른다. 오늘 비올까 말까 고민하면 안 된다. 우산 들고 가든지, 안 들고 가서 비 맞든지 둘 중 하나다. 오늘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결혼은 신발이다. 내 신발 찾기. 신발 안 맞으면 미친다. 연애는 미친 듯 앞으로 돌진하기, 결혼은 나와 맞는 것 찾기. 별개다, 연장이 아니다. 연애는 연애, 결혼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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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방송인 김성덕 PD에 관해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MBC 코미디 작가로 데뷔해 공중파에서 <일요일일요일밤에>와 같은 국민 예능프로그램을 제작했고 <은장도>를 비롯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지금은 케이블에서 공중파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방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코미디 작가로 시작했다. 방송계에 입문한 계기는?


어릴 때부터 웃긴 걸 좋아했다. 드라마는 거의 안 봤다. 어릴 때 가난했는데 드라마는 연속이라 챙겨볼 여력도 없었다. 그래도 코미디는 일회성으로 볼 수 있다. 글재주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춘문예에서 계속 떨어졌다. 그러다 MBC에서 코미디 작가를 모집하더라. 3천 명 중 7명을 뽑는데 수석으로 뽑혔다. 코미디 작가를 하다, PD가 찍어온 게 마음에 안 들더라. 그때부터 연출도 하기 시작했다.


공중파, 영화, 케이블 3개를 모두 경험했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를 듯하다.


장르가 다 다르지만 ‘나’는 똑같다. ‘나’는 웃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웃음을 매개체마다 다르게 전달한다. 공중파는 웃음이 공짜다. 공짜니까 조금 덜 웃겨도 괜찮다. 대신 잘못 웃기면 공익을 저해한다는 말이 나온다. 영화는 돈 내고 보는 웃음이니 치열하다. 제대로 웃기지 않으면 관객은 영화 보러 가지 말라고 말하며 복수한다. 케이블은 실험적이다. 케이블은 공중파에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


공중파 하면서 징계받은 적은 없나.


많이 받았다. 몰래 카메라 찍을 때, 술 취한 행인 역할의 엑스트라에 새마을 모자를 씌웠다. 새마을 단체에서 난리가 났다. 또 한 번은 몰래 카메라에서 이휘재와 김애경 결혼 발표 때다. 몰래 카메라입니다, 라고 했는데도 국민을 황당하게 속였다고 난리가 났다. 그만큼 공중파가 엄하다. 이건 징계는 아닌데, 제일 욕 먹었을 때가 서태지를 올렸을 때였다. 내부에서 이게 노래냐고 욕을 엄청나게 먹었는데, 방송 나가고 1주일 뒤 서태지가 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며 고민하는 게 캐스팅일 텐데, 배우 쓰는 기준이 궁금하다.


남들이 키워 놓은 사람은 빼 먹는 느낌이라 싫다. 완전 신인은 부담된다. 중고 신인을 쓴다. 중고 신인이 뭐냐 하면, 일반인이 보면 모르는데 방송인이 보면 아는 사람, 능력 있는데 때를 못 만난 배우를 말한다. <세친구> 윤다훈이 그 예다. 이미 공중파 18년 경력이었는데, 저렇게 웃긴지는 몰랐다. 5년 전부터 써 먹어야지 생각하다, <세친구> 때 썼다. 안연홍, 안문숙도 그랬고.


다소 초점이 나간 질문일 수도 있는데, 오랫동안 방송을 하며 속칭 ‘찌라시’를 많이 봤을 듯하다. 신뢰도는 어느 정도인가?


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다. 증권가 찌라시는 말 그대로 증권가에서 뿌리는 것이고, 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발행하는 것일 텐데. 소문의 당사자 입장에서는 최악이다. 틀리면, 찌라시다 이렇게 하고 끝나니 무책임하다. 설사 맞다 해도 개인 사생활을 침해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증권가 찌라시, 너희들만 봐라. 너희들 친구들에게도 뿌리지 말고.


책과 마찬가지로 인터뷰 내내 돌직구를 날리던 김성덕 PD는 졸업 논문 마무리에 한창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중년 여성의 외도를 다룬 시트콤으로 시청자를 찾아간다. <남자셋 여자셋>에서는 대학생을, <세친구>는 30대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중년의 심리를 재미있게 묘사할 예정. 『네 남자친구가 제일 문제다』에 나왔던 내용이 시트콤에도 등장할지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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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 목사 “자신과 화해한 사람은 분노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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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생수 한 컵만큼 건강에 좋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마음 건강을 위해서는 무엇이 좋을까. 쉴새 없이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읽고 싶은 소식만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이야기도 있다. 잠시 묵상을 하고 나면, 마음속에 감춰있던 착한 기운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게 하는 글. 조정민 목사의 트위터(@ChungMinCho)를 팔로우하는 까닭이다.
사랑하면 사람을 배려하고 두려워하면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배려하면 평안하고 눈치 보면 피곤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침묵하지만, 마음이 허전한 사람은 자랑합니다.
자랑은 교만의 가장 흔한 얼굴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보다 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많이 실패했지만 그 실패로부터 더 많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010년 5월에 트위터를 시작한 조정민 목사는 매일 아침 기도와 함께 140자 짧은 글을 트위터에 올린다. 전도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트위터 세상 속에서 잠시 잠깐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위로가 되는 말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16만 팔로어의 마음을 사로잡은 조정민 목사의 글은 2011년부터 ‘트위터 잠언록’ 시리즈로 출간되고 있다. 『길을 찾는 사람』『인생은 선물이다』『사람이 선물이다』에 이어 지난 11월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을 펴냈다. 션, 이지선 작가부터 슈퍼주니어 동해와 최시원, 소녀시대 수영 등 아이돌 스타까지, 이들은 모두 조정민 목사의 트윗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며 정성스레 추천사를 남겼다. 2014년을 기다리는 지금, 새로운 길을 계획하고 있다면, 조정민 목사의 글을 하루 아침 생수 한 잔을 마시듯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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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걸 붙들면 내려놓을 수 있다

4년 넘도록 트위터에 꾸준히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대부분 새벽이나 오전 일찍 올리시는데 무척 부지런하신 것 같습니다. 트위터를 시작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10년쯤 트위터를 우연히 알게 됐는데, 140자 공간이더라고요. 언론사에서 방송기자 생활을 25년 동안 했는데, 가장 많이 훈련 받은 게 글을 줄이는 연습이었어요. 앵커 멘트도 모두 100자에서 140자 안에 소화가 되잖아요. 호기심이 생겨 트위터를 열었는데, 깊이 있는 글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너무 사적인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어쩔 때는 듣기 거북스러운 이야기도 많고. 트위터라는 게 일종의 광장이잖아요. 사람들이 나왔다 들어가는 공간이더라도 뭔가 마음의 위로가 되는 글들을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하루에 두 번 정도 트윗을 올렸어요. 올해 들어와서는 하루에 하나씩만 올리고 있죠.

140자를 올리기까지 여러 번 생각하고 정리하실 것 같은데요.

하루 종일 생각이 날 때마다 수첩에 글을 적어요. 대여섯 줄이 될 때도 읽고 한두 줄이 될 때도 있죠. 보통 새벽 4시쯤 일어나는데, 기도하고 말씀 준비를 하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죠.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는 가운데서 얻는 깨달음도 있고요.

트위터에서 목사라는 신분을 굳이 밝히지 않고 계세요. 글에서도 종교색을 발견할 수 없고요.

직장 생활을 25년 동안 했는데, 모든 직장이 그럴 테지만 언론사라는 직장도 무척 고통스럽고 힘든 곳이었어요. 현실을 살아가는 게 너무나 힘들다는 걸 많이 경험했고, 인생 선배로서 경험이 축적되어 있으니까, 30, 40대 직장인을 상대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힘이 되는 작은 가이드라인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 정도였어요. 굳이 크리스천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내세울 까닭이 없었죠.

그런데 트윗만 올리시고 댓글을 달거나 리트윗은 하지 않으세요. 일방적인 소통이라고도 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댓글을 달았죠. 초기에 제 글에 댓글을 단 사람들은 딱 두 부류였어요. 크리스천들은 “목사라는 사람이 왜 종교적 컬러를 버리고 글을 쓰냐”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왜 목사 신분을 감추고 위장 취업을 하냐?”는 반응도 있었어요. 일부 사람들은 “왜 글을 베끼냐?”면서 출처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런 사람한테는 “베낀 글이라면 그건 하나님한테 베낀 거다”라고 말했죠. 그런데 이런 반응들은 1년이 지나니까 딱 사라졌어요. 이후에는 인생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일일이 답변을 공개하는 것보다는 일대일로 소통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타임라인에는 댓글을 달지 않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과는 친구를 맺어서 다이렉트 메시지로 소통하고 있어요. 그렇게 연결된 분들이 1천 명 정도 됐네요.

보통 어떤 조언을 구하나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고, 집에 와서 상담을 해달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남편을 좀 전도해 달라고 해서 만나 뵌 적도 있었고. 트위터를 보고 교회로 찾아오신 분들도 있고요.

의도하지는 않으셨겠지만 최근 교회를 개척하면서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한 전도가 저절로 되겠네요.

끊임없이 접촉점을 찾으려고 해요. 페이스북을 시작한 건,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자양분은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페이스북에는 매일 아침 말씀 묵상을 12줄 정도 나눠요. 다 읽으려면 1분 20초 정도가 걸리죠. 주일예배는 나가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다르니까요. 오프라인 교회를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SNS도 좋은 수단이에요. 중요한 것은 예배의 일상화를 위해서도 쓸데없는 메시지가 흘러나가는 것보다 복음적인 메시지가 흘러가는 게 영적인 유익이 되는 거죠. 그런 메시지를 흘러 보내기 위해 애를 써야 해요.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는 메시지를 흘러 보내야,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지 않겠어요.

MBC 사회부 기자에서 앵커까지 25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0년 전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셨어요. 아내의 열성적인 신앙 생활을 지켜보다가, 의심스러운 마음에 교회를 찾았다가 예수님의 포로가 되셨다고요. 정치인의 꿈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쉽게 포기가 되던가요?

어려웠죠. 몇 십 년을 한 가지 꿈을 향해 살아왔으니까 아깝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것이 답이다. 이것이 길이다”라고 생각했을 때는 바꾸는 게 어렵지 않아요. 내가 가진 걸 내려놓긴 어렵지만 더 좋은 걸 붙드는 순간, 부지불식간에 자기도 모르게 떨어뜨려 버리게 돼요.

사회 생활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교인들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겠지만, 단번에 비판적인 시각들을 버리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언론은 비판이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존재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느 날 깨달은 게, 비판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 ‘내가 비판할 자격이 있나?’를 생각해봤을 때, 비판하는 동일한 기준을 나에게 적용해봤을 때, 나는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신앙은 반대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는 거예요. 사랑하고 용서하고 덮어줌으로써, 비판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언론인이었을 때는 뜨는 사람을 조준해서라도 쏴놓고 떨어뜨려 놓았다면, 이제는 실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도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 거죠. 제 자신이 정반대로 바뀌지 않으면 언론인을 하다가 목회하기는 쉽지가 않은 일이에요.

신앙을 갖게 되면서 본질적인 변화가 가능했던 건가요?

저는 학창시절 때부터 세상에 대한 비난, 비판도 많았고 세상을 뿌리 채 바꿔놓고 싶은 혁명적인 욕구가 강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언론인이 됐고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고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권력은 인간의 욕구, 대중적 욕구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방법은 사랑이에요. 모든 악순환의 종지부를 끊는 게, 바로 사랑인데 예수님은 그 길을 선택한 거죠. 사실 예수님이 이 시대 인기로 보면 정치를 했으면 왕이라도 될 수 있는 분이었는데 왜 정반대로 십자가를 졌는지. 그게 답이라는 걸 깊이 깨닫고 난 후로는 권력의 길로 갈 것이 아니구나, 사랑의 길로 가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구나. 그래서 제 인생을 바꿔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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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완적 패러다임으로 사는 삶

트위터를 보면 유독 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는 글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언론인 생활을 오랫동안 한 까닭일까요?

성경에서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쓰여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없는 말을 훨씬 많이 해요. 마음에서 영근 말을 하면, 그 말은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돼요. 하지만 우리는 순간적인 충동이나 느낌만으로 말을 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가 쉬워요. 언론계에 오래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 내 말이나 글이 밖으로 표현되지만, 그것도 나를 형성하고 나간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거친 말을 하면 내 안에 거친 상처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어요. 욕을 하면 욕이 먼저 나를 해치고 남에게 전달되는 거예요. 고운 말을 쓰는 건 어떤 수양보다 중요한 일이에요. 한 마디 한 마디 마음을 담아서 말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내 인격 자체가 성숙하기가 어려워요. 논어에 보면 “부지언 무이지인(不知言, 無以知人)”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사람의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거죠. 말을 통해서 인격을 알 수 있다는 것만 명심해도, 함부로 말할 수 없죠.

남에게 한 말이지만 때론, 나에게 더 큰 상처가 될 때가 있어요. 비단 남을 향한 이야기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죠.

인간의 뇌는 언어와 현실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로 선포되는 것은 실재화가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해요. 남에게 공손한 말을 하는 것이 비단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니에요. 남을 이롭기 전에 나를 먼저 이롭게 하는 일이고, 남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남을 해치기 전에 나를 먼저 해치게 돼요. 폭력적인 언사를 쓰다가 폭력배가 되고,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하다가 자살을 하게 되는 거예요. 말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 점을 명심해 둬야 합니다.

“부드러운 말은 사람의 분노를 삭이고, 거친 말은 분노에 불을 붙입니다. 막말 하다 막장에 이르고, 막장 벗어나지 못하면 막판입니다.”라고 하셨어요. 언제나 그러했지만, 여전히 분노를 조절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분노를 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사실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한 사람은 분노하지 않아요. 더 깊은 뿌리를 살펴보면, 하나님과 화해된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쉽게 분노하지 않아요. 저는 인간의 분노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아요. 나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부드럽게 응대해요. 화가 나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해요. 심지어 어떤 분은 저에게 “어떻게 교회를 청담동에 개척할 수 있냐?”고 하셨어요. 자초지종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지만, “우선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겠다. 내가 생각이 모자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부드럽게 받아주면 자기가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해요. 어떤 사람은 트위터를 통해 제게 욕을 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제가 블로킹하지 않아요. 욕을 하기 전에는 분노의 원인이 있기 마련이에요. 자기 자신의 분노의 원인을 발견할 때까지 남에게 분노를 폭발하고 있는 거죠. 그 분노를 보았을 때 불쌍히 여기는 것이, 긍휼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정당한 분노, 의로운 분노도 있을 텐데요.

내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라 남을 위한 분노가 분명히 있어요. 공동체를 위한 분노, 거룩한 분노라고도 말하는데 분명 필요한 부분이에요. 그러나 그 분노조차도 긍휼화하지 않으면 독이 됩니다.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칼날을 만드는 거예요. 분노가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그건 독이에요. 사랑에서 출발한 부모의 분노는 자식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요. 아이를 때려도 눈물로 다시 품어주니까, 부모에게 분노하지 않는 거예요. 욕이라고 해도 사랑이 있는 욕이 있고, 교양 있는 말이라도 허언이 있잖아요. 어떤 표현이 전달될 때, 마음속에 깊이 영글어 나온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은 전혀 다른 말로 전달될 수 있어요.

사랑이 담긴 분노는 어떻게 표현되어야 좋을까요?

일상에서도 옳은 분노가 있어요.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분노 쪽보다는 긍휼로 변해요. 길거리에 쓰레기가 무단으로 방치되어 되어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 상황을 대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달라요. 누가 버렸는지를 찾는 사람이 있고, 그 쓰레기를 분석하는 사람이 있고, 또 쓰레기의 책임 소재, 법적 문제까지 따지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쓰레기를 자신이 치우는 사람이에요. 쓰레기를 치우면 그걸로 끝나는 거니까요. 우리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건,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찾겠다고 몽둥이를 들기만 했지 빗자루를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몽둥이 가지고 설치면 피투성이만 되지 쓰레기는 절대 없어지지 않아요.

쓰레기를 치웠는데도 또 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또 치우고, 또 버리면 다시 치우면 돼요. 그러다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거예요. 말 실수할 때마다 때리면 어떻게 배우겠어요? 아이가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정상적인 언어 생활을 하듯이, 수없이 배변, 배뇨훈련을 거치다 보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어른이 돼요. 누군가 참아주고, 대신 치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성숙한 사회가 되는 거예요. 자꾸만 목청을 세우는 사람만 많지, 소리 없이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사회가 점점 어려워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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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것을 잘 돌려줘야죠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프롤로그를 읽어 보니 “돌아보면 진심으로 손뼉을 쳐 준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쓰셨어요. 그런데 트위터 프로필 사진이 손뼉을 쳐주는 사진입니다.

누군가가 찍어준 사진인데, 흐릿하지만 마음에 들더라고요.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감사하기도 하고요.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는 걸 경험하면 더 이상 경쟁적 패러다임으로 살지 않아요. 보완적 패러다임으로 살게 되죠. 내가 박수를 기대하기 보다는 쳐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목회자들은 대부분 대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 활동을 시작하죠. 사회 경험이 없는 목사들을 만날 때면, 답답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습니다. 오랜 직장 경험이 목회 활동에 도움이 되나요?

저에겐 큰 도움이에요. 술집에서 목회 훈련을 받은 거 같아요. 술집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상처를 스스럼 없이 드러내잖아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많은 실수를 하는 경우도 없을 거예요. 인간의 참모습이 다 드러나죠. 누가 쓰러지면 집에 데려다 주고, 돈도 안 내고 그냥 가버리면 대신 돈 내주고 그러잖아요. 그게 제겐 목회 훈련이었던 것 같아요. 가끔 생각해보면 목사가 된 게 더 편한 길 아닌가 싶어요.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보다 많지 않으니까요. 목사들은 어찌됐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틈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더 많은데, 현실에서는 안 믿는 사람이 많고, 적대적 환경, 엄청난 대립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하잖아요. 누군가의 표현대로 그들만의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 틈에서 사는 길이 가장 편한 길이죠.

대형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올해 개척교회를 열었어요. 더 편한 길이 있었지만 선회를 한 셈입니다. 교회 이름이 ‘베이직교회’인데,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뜻인가요?

저는 교회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는 입장이에요. 세상에서 살아내는 게 더 어려우니까요. 교회라는 건 잠깐 들러서 말씀과 기도로 본인이 채워지면 돼요. 상처가 깊으면 회복되는 곳이고. 여기서 살면 안 되는 곳이에요. 세상이 교회 때문에 더 좋아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교회는 부흥했지만, 세상 속에서 부흥을 꿈꿔야 할 사람들이 교회를 부흥시키느라 다 탈진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에요. 교회 안에서 활동하지 말라는 입장이에요. 활동하러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곳이 교회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현 사회에서는 교회가 건물과 제도로 갇히는 부분이 많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교회, 사람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일상에서 주님이 가르치신대로 말씀대로 살아내기만 한다면 사실 교회는 정말 새로운 종교개혁이 되겠죠. 전임으로 사역하는 목회자를 보면, 내 눈 앞에 교인들이 많이 모여있으면 그걸 부흥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안에 오랫동안 머무르면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장 살아가기 치열한 곳에서 죽을 힘을 다해서 살아남는 게 성령 충만이에요. 그걸 바꿔주지 않으면 우리는 자폐증 환자처럼 죽어가는 거죠. 세상에서 살아내는 게 중요해요. 사람이 교회이고 성전이니까요.

목사로서 어떤 숙제를 가지고 있나요?

‘성경 메시지를 어떻게 이 시대가 알아듣는 메시지로 전하느냐’가 저의 숙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2천 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가 알아듣는 말과 코드로 이해시키는 게 설교죠. “사랑, 소망, 믿음이 복음에 대한 씨앗”이라며, 사랑하라고 소리쳐 봐야 사람들은 못 알아 듣습니다.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아가페 사랑을 경험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꾸 사랑하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하면 안되죠. 이 시대는 “꿈을 가져라, 배려하라, 관심을 가져라, 용납하라, 보살펴라”라고 말하는 게 통하죠. 시대적인 패러프레이즈가 설교자의 미션이죠.

“인생의 목표는 입상하는 것이 아니라 완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지금의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어느 단계에 와있다고 생각하나요.

올해 63세에요. 겨울 초입을 사는 셈이죠. 겨울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순간인데, 지금까지 받은 것을 되돌려주고 떠나야 하는 때에요. 살면서 받은 교육, 그리고 관계 등을 생각해보면 정말 상상할 수 없이 많은 걸 받았어요. 제가 받은 메시지를 잘 정제해서 되돌려 드리는 일이 제 임두라고 생각해요. 저는 많은 종교적 방황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그 분의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이 시대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복음적 메시지로 전할 것인가. 이것이 제 유일한 관심사에요. 목사로서 다른 꿈이 있다면 이상한 거겠죠.

혹시 이 것만큼은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후회하는 습관이 별로 없어요. 실수를 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실패도 자산이 되니까요. 그 당시에는 쓸데없는 것 같지만, 언젠가 퍼즐처럼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어요.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겼지?’라고 이유를 찾기보다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지나가야 하나? 이걸 왜 이겨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게 현명해요.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들이 많아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일어나지 않아서 감사한 것들도 많죠.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은 졸고 있는 내 인생을 깨워주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생각 없이 사는 사람에게 생각을 하게 만드는 동기라고.

인생 선배로서, 지금 새로운 길을 가려는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왜 이 직장을 다니려고 하는지 철저하게 고민하고 일을 결정해야 해요. 내면의 동기, 목적에 대해 자기 성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일생을 쏟아도 될 일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이에요. 내 인생을 올인 해도 아깝지 않은 일, 그럴 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거기에서부터 열정이 생길 수 있어요. 한 여자를 좋아하면 그 여자를 위해서 뭐를 해도 좋을 때가 있는 것처럼, 어떤 일을 해도 좋은 게 있잖아요.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열정이 없을 수가 없어요. 당장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무의미해서 늘 괴로운 직장은 아니라는 거죠. 나에게 가치 있는 일을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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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히, 나를 지배하는 정서가 있다면 그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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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히의 음악 이력은 변화의 연속이다. 슬로코어 밴드 ‘잠의 베이시스트로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했지만 우연히 구입한 보사노바 앨범에 매료돼 자신의 장르를 브라질 음악으로 바꾸었고, 그후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로 불리며 세 장의 앨범을 내놓으면서도 각각을 다르게 가져가며 변화를 이었다. 2집에서는 첫 음반에서 선보인 그만의 브라질 음악에 일렉 요소를 가미하며 반복을 피하더니, 3년 만에 발매된 최근의 3집에서는 첫 셀프 프로듀싱 작업으로 ‘또 다름’을 발현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앞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 같다’고 언급했다. 새로움에 대한 의지와 시도는 현재도 끊임이 없다.

변화는 다양함을 축척해 가는 과정이다. 변화를 통해 풍성해진 자기 재료는 남다른 스스로를 일구어내는 원천이 된다. 브라질 음악의 부드러운 곡선과 과거 밴드 시절의 영향이라는 직선적인 메시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특별한 개성을 만드는 소히의 음악은 그 든든한 예다. 직접 만난 그도 이색의 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소히는 자신의 노래처럼 차분한 어조로 거침없이 말했고, 그 이야기들은 강과 약, 곡과 직의 리듬을 타며 유연하게 흘렀다. 지나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편안한 대화였다.




신보 <Daycare>는 어떤 바람으로 세상에 나왔나요? 스스로 자신의 앨범을 소개한다면?

요즘 위로다 힐링이다 너무 많잖아요. 워낙에 세상이 각박하다 보니 그런 대표 이미지들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여전히 세상이 각박하니까 힐링을 표방하는 것들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오는 것 같아요. 제 음반도 위로를 드리려고 했지만 단순한 포근함이 아니라 듣고 나서 ‘나도 비슷한 감정들 경험들 있는데’ 하는 외로움의 동질감. 그런 위로를 전하고 싶었어요. 또 셀프 프로듀싱한 음반이다 보니 마음속의 작은 감성을 건드리고 싶은 바람이 있었고요.

힐링을 하려고 일부러 ‘당신 괜찮아요’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 더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선배님이 그러셨는데, 위로는 일방통행인 단어래요. ‘위안’이 서로가 상대방을 생각하는 양방통행의 주고받음이라면, ‘위로’는 하는 사람의 의도가 더 부각된 단어인 거 같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위로보다는 위안을 드리고자 하는 앨범이에요.

그래서 앨범 타이틀도 ‘데이케어’인데, ‘노인데이케어센터’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셨다고요.

‘노인데이케어센터’를 흔히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잘 모르시더라고요. 저는 길 지나가면서 정말 자주 보거든요. 근데 제가 그런 걸 즐겨 보는 건 있어요. 구 소식지 이런 거.(웃음) 마포구 소식지 같은 것들 집마다 날아오거든요. 그런 걸 잘 활용해서 봐요. 유용한 정보가 많아요. 무료강좌 같은 거.(웃음)

전작과 다른 3집만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곡을 쓰건 편곡을 하건 프로듀싱을 하건 온전히 제 뜻으로 곡 작업을 했기 때문에, 제 색이 많이 나는 게 가장 다른 점이에요. 사실 3집이지만 셀프 프로듀싱은 처음 하는 거라 이 음반이 1집 같은 느낌도 있어요. ‘2집 좋아하시는 분은 3집은 좀 실망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하시는데, 저는 이 앨범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이거든요. 저만의 것을 인정해 주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시금 모이도록 새로이 시작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이번 앨범이 지금까지 중 본인과 가장 닮은 앨범이라 봐도 되나요? 같다면 얼마나 같고, 그럼에도 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다를까요?

네. 저랑 온전히 같은 것 같아요. 굉장히 저 같은 음반을 만들었어요. 그렇다고 이전 앨범이 나빴다는 게 아니라, 이번 앨범 하면서는 ‘싱어송라이터라면 프로듀싱까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그 정도로 내 곡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거죠. 그래서 1,2집 때는 어떤 부분에서는 내 옷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살짝 있었다면, 이번 앨범은 제 옷 같아요. 저로서는 굉장히 마음이 가요. 온전한 저 자신이라서.

「떡볶이 식사」 등에서의 삼바 리듬이 앨범 내에서 도드라지게 부각되는데, 브라질 음악 속에서도 변화가 있다면 그런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죠. 사실 저는 보사노바를 더 이상 듣지 않거든요. 수식어는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로 고착화됐는데, 이번 앨범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도 보사노바뿐 아니라 다양한 브라질 음악을 전하는 거였어요. 브라질 음악 스펙트럼이 무척 넓은데 그중에서도 브라질 팝이나 삼바에 관심을 많이 갖게 돼서, 그게 더 표현된 음반이에요. 좀 더 재즈풍의 곡들도 있고요.

조용한 트랙들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뒤로 갈수록 리드미컬하게 곡 배열을 한 것은 의도인가요, 결과적인 건가요?

의도도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전 앨범들과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이전 음반은 모두 1, 2번 곡들이 밝거든요. 또 재즈 향이 났으면 하는 제 의도를 표현하고 싶어서 1, 2번에 재즈풍 배치를 했어요. 그래서 2집 때의 신선함이 없어졌다는 평이 있더라도 저는 만족해요.




첫 곡 제목은 왜 「왈츠」 라고 지었나요? 다른 제목들은 가사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축약하는데,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스타일의 곡명이에요.

「왈츠」는 제목이 안 나와서 제목 고민을 많이 한 곡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 추는 왈츠? 가사가 주는 느낌도 외로움이고, 혼자서 느끼는 감성이라서. 그런 상상 많이 했어요. 이 곡을 틀어놓고 혼자 왈츠를 추는 거예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심증」 이라는 곡은 성추행 문제를 다루었는데, 어떤 배경에서 나왔나요?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만든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 주세요> 1집에 실렸던 곡이에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거고요. 사실 저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고 다녀요. 제가 진정한 페미니스튼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근데, 다 연결돼 있잖아요. 성추행이든 뭐든, 전쟁도 그렇고, 모든 폭력이 연결된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심증」 에는 부분 부분 한국적인 가락이 있어요. 과장되게 말하면 민요스럽게 들리기도 했어요.

아, 그 트로트멜로디요?(웃음) 2집 때는 「강강수월래」 같은 곡을 통해서도 그랬고, 한국색을 찾고 싶었고 그런 걸 유지해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심증」이라는 곡도 그런 마인드가 있을 때 쓴 곡이어서 그런 느낌이 나는 거 같아요. 그런데 한국색을 끌고 가다 보면 멜로디적으로 한계가 생기는 것도 같아요.

특별히 한국색을 찾고자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때는 그랬어요. 우리나라는 우리 옛 음악과 현대음악의 맥이 완전히 끊겨 있잖아요. 일제 시대와 독재 시대를 겪으면서 더 단절이 되었는데, 그걸 잇고 싶다는 강박 비슷한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꼭 그래야 하나 싶어요. 어쨌든 중요한 건 음악인데, 내가 대단한 애국주의자라도 된 마냥 꼭 그래야 할까 라는 의문이 드는 시점어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저 말고도 퓨전국악하시는 분들이나, 그런 역할 하시는 분들은 또 많이 계시니까요.

마지막 두 곡인 「이별공부」 와 「꿈같아」 에서는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아요. 6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더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음.. 저는 죽음에 대해 많이 떠올리는 사람이, 그러니까 ‘내가 언젠가는 죽을 존재다’라는 걸 인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자살을 할까 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에는 너무 바쁘게 살죠. 좀 여유 있는 사람들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살률도 높은 것 같고… 그래서 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사실 제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지식도 짧고 산 날도 얼마 안 되지만, 앞으로도 계속 저한테는 큰 화두가 될 거 같아요.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요.

가사가 굉장히 돌직구 스타일이에요.

80년대 가요를 많이 들은 영향인 거 같아요. 그때는 돌직구 스타일의 가사가 많았어요. 신해철씨나 공일오비나, 사회현상 같은 걸 굉장히 직접적으로 말했었는데, 그런 분위기가 어느 순간 사랑노래 일색이 되면서 많이 사라졌어요. 또 저는 활동을 인디씬에서 록밴드로 시작했으니까, 그 영향도 있는 거 같아요. 제가 만약 밴드를 안 했다면 어떤 주제나 소재로든 곡 쓰는 걸 망설였을 거예요. 밴드를 하면서 어떻게 해도 무방하다는 것을, 같이 밴드 하는 친구들 보면서 많이 배웠고, 그러면서 가사도 거침없이 쓰게 된 것 같아요. 다음 앨범은 상징적인 걸 써 볼까 싶긴 해요. 좀 더 시적이 되고 싶달까.(웃음) 어떤 분은 재즈가 너무 직접적이면 음악 색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시는데, 저는 그건 좀 재미없는 생각인 것 같아요.

보통 어떤 것에서 영감을 얻나요? 특별히 자신을 지배하는 정서가 있나요?

저를 지배하는 정서가 있다면 그건 ‘사람’인 것 같아요. 「떡볶이 식사」 도 떡볶이 파시는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는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안쓰러움에서 시작됐고요. 내가 누구 안쓰러울 입장도 아닌데.(웃음)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커요.




이번 앨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을 고른다면 무엇인가요?

타이틀곡인 「투명인간」 이요. 사실 1,2집 때는 타이틀 정할 때 듣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걸 많이 고려했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타이틀곡조차도 저한테 감동이 있는 곡을 골랐어요. 사실 타이틀 감은 아니거든요. 소위 말하는, 훅이 있고 밝고 통통 튀는 노래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일부러 그렇지 않은 곡을 골랐고, 저희 레이블(푸른곰팡이)이 그런 걸 뮤지션에게 온전히 맡겨요. 사장님이 터치를 전혀 안 하세요. (윤)영배 오빠가 얼마 전 낸 앨범에서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야길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자신은 이 앨범으로 프로모션을 하면 안 되겠다고, 그래서 지금 활동을 전혀 안 하는 앨범이에요. 이게 회사 입장에서는 되게 피해인데도, “네 뜻이 그러냐? 그럼 알았다” 하는 식이에요.

푸른곰팡이로 소속사를 옮긴 후 나온 첫 앨범인데, 음악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나 스스로에게 또 다른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 다 맡기시니까 자생력이 생긴 느낌이랄까.(웃음) 앨범이 나왔으니 홍보도 해야 하고, 그런 부분을 신경 쓰게 돼요. 예전에는 회사에 다 맡겨 버리면 됐거든요. 그런데 그러면서 더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음반에 대해서도 결정권이 저한테 있으니까, 더 책임지고 하게 돼요.

김정렬씨가 후반작업을 도왔고 고찬용씨와 박용준씨도 참여했는데, 앨범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제가 데모를 보내서 김정렬씨가 참여하게 된 거였는데, 데모를 할 때 음반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된 상태였어요. 후반작업 들어가서 몇 곡 재녹음을 했는데, 당시 제가 노래에 지쳐 있었어요. 노래를 잘 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압박감을 줘서 흥미를 잃은 상황이었는데, 정렬 오빠가 디렉팅을 봐 주시면서 노래가 다시 좋아졌어요. 노래는 자신감이 반이라잖아요. 만약 누군가가 노래를 할 때 “이 음을 그렇게 내지마”라고 하면 긴장이 생겨 버리고, 또 생각이 많아지면 노래가 안 되는데, 그런 디렉팅이 전혀 없었어요. 스포츠 심리학에도 테니스 선수한테 코치가 ‘팔을 돌리고 발을 이렇게 하고’ 그러면 경기를 제대로 못한대요. 대신 “공에 한번 집중해 봐”라고 하면 경기력이 좋아진다는 코칭 방법이 있더라고요. 그런 식이었어요. 어떤 걸 어떤 방식으로 해 보라는 조언이 있지 어떤 걸 하지 말라는 건 없었어요. 그래서 재미있어진 거 같아요. 박용준씨나 고찬용씨 보면서는 앨범을 작업하는 데 있어서의 집요함을 배웠어요. ‘이정도로 집요하게 하시는구나, 나는 참 대충 했구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하세요. 내가 듣기로는 아까 것과 똑같다 싶은데 다시, 다시, 다시 하자고. 그런 걸 보면서 많이 배웠죠.




원래 작업스타일은 어땠나요?

저는 성격상 완벽주의를 추구하지 못해요. 관심사도 많고 호기심도 많아서 뭔가를 뭉뚱그려서 그려내는 것에 더 가까운데, 저도 점점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보컬에 있어서는 전과 다르게 목소리에 힘이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노래하고 싶었어요. 제가 추구하는 보컬 스타일이 그런 스타일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가수도 그런 가수. 브라질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전반적으로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거든요. 보사노바 같은 건 특히 더 그렇고… 앞으로도 힘을 더 빼려고요.

앨범에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의 커버곡도 실었는데, 이 곡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요?

곡 중반부에 5초 나오는 멜로디라인이 주는 감동이 있었어요. 그 감동이 좋아서 택했어요. 평소에 부르지 않은 노래를 넣고 싶기도 했고요.

앞으로 더는 커버곡을 하지 않으려 하신다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항상 브라질 커버곡을 넣고 싶었는데, 처음으로 넣어 본 거예요. 근데 한번 해 보니까 ‘그냥 내 음악 하기도 바쁜데, 커버는 해 봤으니 됐다’ 하는 마음이 돼요. 브라질 음악을 좋아하지만 브라질 음악을 얼마나 똑같이 구현해내느냐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구현 한번 했으니까 또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록밴드로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하시다가 음반가게에서 우연히 구입한 아스트로 질베르토(Astrud Gilberto) 앨범을 듣고 보사노바와 인연을 맺으셨죠. 록밴드를 하다 브라질 음악으로 장르를 바꾸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별로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한 게, 집에서 아스트로 질베르토 노래를 들으면서 좋다는 생각만 하다가, 당시 저는 팀에서 베이스를 치고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베이스 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는데, 노래를 하려다 보니 기타를 쳐 보고 싶더라고요. 기타 잡는 운지법이랑 코드가 나와 있는 ‘보사노바 송북’이란 게 있어요. 그걸 보면서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씩 그냥 연습했어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밌어서 한 거예요. 그래서 힘든 게 없었던 거 같아요.

추천할 만한 브라질 음악이 있다면요?

요즘에는 자반 (djavan)이라는 남성 싱어송라이터 음악을 많이 들어요. 이분 공연 영상을 보면 멜로디가 굉장히 어려운데도 브라질 사람들이 다 따라 불러요. 그거 보면서 ‘얘네들 음악적으로 정말 많이 발전한 나라구나. 이런 어려운 멜로디를 수많은 관중이 따라 부르고 있다니’ 하는 감탄을 했었죠. 한국에서는 가요가 어려운 멜로디를 쓰면 사람들이 어렵다고 치부해 버리고 안 듣잖아요. 그런 면은 다른 것 같아요. 브라질 사람들은 노래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가수보다 크게 노래하더라고요. 크게 막 합창을 해요. 그래서 저도 생긴 꿈이, 나중에 제 공연장에서도 사람들이 합창을 하게 되는 날을 꿈꾸고 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앞으로의 음악은 또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지금 많은 변화 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가요?

네. 요즘에도 곡을 쓰고 있는데, 곡 쓰는 방법도 달라졌고 멜로디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내부에서 태어나면서 지닌, 자기만이 가진 멜로디가 있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생성된 멜로디랄까. 근데 그게 계속 반복이 되거든요. 음반을 서너 장 내면, 특히 멜로디적으로 계속 새롭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그래서 이 사람은 재탕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게 되는데, 저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요. 저 자체도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성격이다 보니 멜로디적으로 자기갱신이 있는 송라이팅을 하려하고, 그런 면에서 앞으로 좀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죠. 그래서 공부하고 있어요. 사실 예전에는 음악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불안함이 있었어요. 내 음악이 바뀌는 게 아닌가, 아카데믹해지는 게 아닐까,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게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3집까지 쭉 하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게 없어지더라고요. 되게 웃기죠? 그 걱정이나 불안이, 시간이 지나면 그냥 없어질 것들이었는데 그때는 참 왜 그런 고민을 했나 몰라.(웃음)

앨범에 대한 만족도는 어떻게 되나요?

모든 것을 제 중심으로 했어요. 나를 어떻게 볼까. 남들이 어떻게 들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좋은 것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만족해요. 하지만 셀프 프로듀싱을 한 첫 음반이기 때문에 분명히 아쉬운 점은 있어요. 편곡적으로도 더 다양하게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 같은데 싶고, 근데 그걸 이번 음반에 다 담아야 한다는 건 욕심이죠. 저는 계속 공부하면서 변화하는 사람이고, 하나하나 해 나가면서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음악 인생을 되돌아볼 때,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해 온 거요. 2집 나왔을 때 ‘많이 알려지고 싶다, 내 앨범을 더 많이 들려주고 싶다’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욕심이 있으면 그대로 안 되나 봐요. 공연을 하거나 라디오를 나가면 너무 긴장을 하는 거예요. 그래선지 평도 되게 안 좋았어요. 특히 노래에 대해서. 그러니까 ‘노래가 내 길이 아닌데, 내가 부여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노래가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웃음) 그런데 그때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하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싹 없어지는 때가 오더라고요. 악플 같은 것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냥 그냥 한 거죠, 별 생각 없이. ‘이게 내 길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냥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하자.’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 나간 거는 칭찬해 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앨범이 전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고, 공연을 하면 티켓이 예전보다 더 안 팔릴 수도 있지만 ‘내가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하고 있는 게 어디야. 그것만으로도 어디야’ 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해 나가려고 해요.

앞으로 어떤 음악인이 되었으면 하나요?

저는 이번 음반 작업하면서, 물론 슬픈 일도 있었겠지만, 행복감을 제일 많이 느꼈어요. 결과물 내고 나서도 그랬고요. 그 이유는 저한테 집중을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타인들보다는. 앞으로도 저 자신에게 집중하고, 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인터뷰 : 김반야, 윤은지
사진 : 이한수
정리 : 윤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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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NGO 활동가 곽은경, 정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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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봄날

지난 10월, 출판사 남해의봄날은 ‘행동하는 멘토’ 시리즈 첫 번째 주인공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 곽은경의 이야기를 담은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를 펴냈다. 국제사회에서는 ‘로렌스 곽’으로 더 많이 불리는 곽은경은 스물다섯에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 제네바의 국제 NGO 팍스 로마나 세계 사무총장을 역임, 국제 NGO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NGO에 대한 리포트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NGO 활동가에 대한 저서는 많지 않았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가 더욱 특별한 지점은 곽은경과 그의 오랜 벗, 작가 백창화가 함께 집필한 책이기 때문이다. 곽은경이 한국을 떠나 세계 각국의 어둠을 밝히고 있을 때, 백창화는 한국에서 평범하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작은 도서관 관장으로 살아왔다. 곽은경과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언제나 그와 같은 꿈을 품어온 백창화는 2년간 파리와 제네바, 인터라켄을 오가며 곽은경의 삶을 복기했고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를 탄생시켰다.

“왜 그런 나라들만 돌아다녀요? 그러니 수상해 보일 수밖에요.” 2003년 5월, 곽은경이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공항 직원에게 들었던 말이다. 곽은경은 라틴아메리카 지역 주요 NGO 연석 회의 차 볼리비아 산타크루즈로 출장을 가던 중, 비행기에서 정신을 잃었다. 응급 치료를 받고 환승 수속을 밟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내렸지만 그는 입국 심사를 거절 당했다. 25년 동안 100여 개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처음 당해보는 일이었다. 아르헨티나에는 1초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란 말을 했지만, 공항 직원들은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나타나 그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대륙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곽은경. 한 공항 직원은 그에게 “한국 국적을 가진 여자가 프랑스에서 혼자 살면서, 요주의 나라들만 골라 다니니 의심을 살 수 밖에 없지 않냐”며 추궁했다.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 케냐 등. 곽은경은 한 해도 정착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국제 연대활동가로 이름이 난 곽은경은 1987년, 파리에 본부를 국제가톨릭학생운동(IMCS)에서 NGO 활동을 시작해 비행기에서 기절하기를 여러 번, 귀 고막 한 쪽을 잃고,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국제사회에서 소외된 나라의 생존과 인권, 평화를 위한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가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처참한 빈곤과 학살의 현장에는 언제나 ‘NGO 노마드’ 곽은경이 있었다. 이 인터뷰는 국제 NGO 활동가의 치열했던 인생을 돌아보기보다는 개인의 삶을 버렸지만 그 또한 행복했다고 말하는 한 사람의 속내가 궁금해 시작한 질문들이다. 곽은경 저자는 인터뷰를 마치며 한 마디를 보탰다. “관심을 갖는 것 만으로도 이 세계는 좀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실천이 더해지면 더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 수 있겠지요?” 혹여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를 통해,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면 관심에만 멈추질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인권과 평화는 스스로만이 만들 수 있다.

로렌스 곽은 나의 멘토이자, 나의 영감이며 언제나 닮고 싶은 거울이다. 국제 인권과 시민단체의 발전을 위한 그의 업적은 비교 불가능하다. 그는 항상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권운동가로 단 한 번도 지름길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아시아 여성으로서 여러 형태의 차별과 삶이 던져준 도전에 맞서 그는 남보다 세 배나 더 열심히 일하며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심지어 무급 풀타임으로 일할 때도 그는 옳다고 여기는 일이라면 온 마음을 쏟아 일했다. 나는 그런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리고 그가 부르면 언제든 함께 일하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 앤 베아트리스 (말레이시아 연대활동가)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저자, 곽은경과 백창화 ⓒ남해의봄날


깨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는 오랜 친구인 백창화 작가와 함께 엮은 책입니다. 나의 인생이 누군가의 글로 전해진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일 텐데요. 타인의 시선으로 본 나의 삶이 어떻게 다가왔나요?

거리가 멀어 아주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백창화 씨는 마음으로 굉장히 가깝게 느끼는 친구입니다. 친구의 시선이, 마치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 친구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새삼 느낄 수도 있었고요.

1987년,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가톨릭학생운동(IMCS)로부터 취업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빈약한 영어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한국을 떠났습니다. 25세 나이에 파리 행을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25세는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이미 성인이잖아요 자기가 사는 사회에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는 나이이지요. 저의 25세는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나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당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에 가게 된 동기는 세 가지였어요. 호기심, 책임감 그리고 신앙심.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많은 생각과 경험을 했고 세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느꼈습니다. 가톨릭이라는 종교는 내게,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26년 전, 다시 선택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해도 파리 행을 선택하셨겠지요.

대부분 NGO 활동하시는 분들이 그렇듯이 가진 건 몸뿐이라고(웃음), 젊었을 때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제대로 돌보지 않고 관리에 소홀했던 점을 이제 와서 많이 반성하고 있지요.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다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좀 더 준비를 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이 발달해서 정보도 쉽게 찾을 수 있고, 여건이 많이 좋아졌어요.

국제 NGO 활동가로 일하며 100여 개국을 돌아보셨습니다. 단 하루도 정착하지 않는 삶, 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사실 굉장히 피곤하고 힘든 삶이죠.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낯선 타인이었던 사람이 오늘 나의 친구가, 동료가, 가족이 된다는 것, 그렇게 남과 내가 ‘우리’가 되어 함께 세상을 바꿔간다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고 행복한 경험입니다. 모든 개인은 나약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아주 미약한 한 사람의 도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그 힘들이 모여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희망적입니까? 이러한 것들이 지난 25년간 제가 NGO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에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세상을 구한다는 건 착각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고 알리는 일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많이 깨지는 시간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게 실망한 적은 없었나요?

깨지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거기에 좌절하지 마세요. 물론 저도 처음에는 부끄럽고, 마음 아프고 실망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성공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요. 세계 곳곳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조금이나마 그들이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신들의 환경을 바꿔나가는 일에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깨진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간혹 너무 처참하거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아주 작은 변화에도 희망을 봅니다. NGO 활동은 결실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빨리 결실을 보고 성공을 이끌어내기보다는 함께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변화를 모색하고, 어디에서 용기를 얻을 것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곽은경으로 살았던 25년과 2003년 로렌스 곽이라는 이름도 갖게 된 지금. 두 이름의 의미가 조금 다를까요?

이름이나 국적이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권에 찍힌 국적은 제게 있어 활동기관과 정서에 따른 신분증일 뿐, 제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바꿀 수 없고 여전히 내 모국은 한국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국적은 제게 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곽은경이든 로렌스 곽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렌시아라는 이름은 원래 저의 세례명이라 제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이름이기도 하고요. 다만 곽은경으로 산 한국에서의 25년은 유년기와 청년기였기 때문에 보살피는 쪽이기보다는 보살핌을 받는 시기였고, 홀로서기 할 수 있었던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로렌스 곽으로 산 25년은 넓은 세상에서 정말 홀로서기 해야만 했던 시간이었지요. 홀로서기는 결코 혼자 사는 삶, 외로운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행동에 책임을 지고 이웃을 보살필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더불어 삽니다. 우리가 가깝고도 먼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25년간 국제 NGO 활동가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아무래도 눈앞에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고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그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힘들긴 하지만 춥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위기를 처했을 때 더 에너지를 발산하는 편입니다. 어떻게든 부딪쳐서 바꾸고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물론 NGO 활동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론 고되고 때론 어려움과 좌절을 겪기도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추위를 느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작고 힘 없는 개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으고, 연대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어려움을 느낄수록 신앙에 의지하게 되고, 서로에게 힘이 되려 노력하니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 아닐까요?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때는?

개인적으로 인생을 살며 추웠던 순간이 있기는 합니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 나와 홀로서는 과정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데, 마침 건강이 안 좋았을 때 그때가 가장 추웠어요.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어떤 어려움에 처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고 조금씩 변화하면서 자신의 삶, 나아가 이웃의 삶을 변화시키고 자기 사회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속한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했을 때 그들을 바라볼 때 가장 행복합니다. 차별에 저항하기 시작한 인도 달리트 여성들, 끊이지 않는 내전 속에서 가족과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연합한 콜롬비아 여성들을 비롯해 이런 사례는 매우 많았습니다. 덕분에 저의 지난 25년이 행복하고 의미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후회되는 일이 있나요?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은.

NGO 활동을 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분 한 분 만날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지만, 때론 일정이 너무 바쁘고 시급해서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도 모자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프리카에 내일은 유럽에 다음 날은 인도에 가 있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려다 보니, ‘다음에 방문할 때 꼭 더 잘해드려야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연이라는 게 얼마나 오래갈지 또 얼마나 빨리 끝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라, 다음 번에 방문했을 때 그 분이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더 잘해드릴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곽은경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며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를 전했다. 저자는 평소 수도꼭지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또한 그만큼 웃음도 많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는 복합적인 위기 상황에 처한 곳이 많아서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매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후회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자산인 체력을 소홀하게 관리했다는 겁니다. 몸이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쳐야지 하는 일도 생기가 돌고, 일에도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데 최근 그 힘이 많이 부족한 걸 느낍니다.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찜질방, 한의원 같은 곳들을 찾아 다니고 있어요(웃음). 이 일을 시작하고, 가족 경조사에 한 번도 참석을 못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 돌아가실 때에 임종도 지키지 못했어요. 자녀로서의 도리, 형제로서의 도리를 못한 것이 미안합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① 카탈루니아 출신 젊은 시인 카를레스와 함께
② IMCS 아시안 팀 동료들과 함께-카를레스, 헬렌, 마누 신부님과 이 성훈 안셀모와 함께
③ 2011년 6월 유엔 인권 이사회가 열리는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열린 소수민들을 위해
인권 옹호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 마련 사이드 이벤트
④ 아프리카 코디네이터 자격으로 아프리카 대륙 참가자들과 함께


‘다른 이와 함께하는 삶’을 행복하게 여기는 인생

말레이시아 연대활동가 엔 베아트리스 씨는 곽은경 저자를 두고 ‘나의 영감, 언제나 닮고 싶은 거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자에게 가장 소중한 멘토는 누구인가요?

딱 정해진 한 사람의 멘토가 있기보다는, 매 순간, 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많은 멘토가 있습니다. 제게 멘토는, 우러러 봐야 하는 스승이기보다는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 동료입니다. 한국에서 가톨릭학생운동을 할 때는 바로 위 선배였던 강경희 안젤라(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선배가 든든하고 좋은 멘토였고, 파리에서는 함께 활동한 동료 카를레스(카탈루냐 시인, 교수)가 좋은 멘토였습니다. 카를레스는 나이도 나보다 조금 어린데, 늘 세상을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바라보는 친구입니다. 처음 프랑스에서 제가 많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에 늘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또 우리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농담처럼 부르던, 프랑스의 앙투안 신부님도 제겐 훌륭한 멘토입니다. 제가 제일 처음 맡은 지역이 아프리카였는데, 기본적인 지식도 하나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아프리카에 대한 모든 것을 마치 족집게 과외 선생님처럼 알려주신 분입니다. 유머와 위트가 인생에 그리고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신 분이기도 하고요. 앙투안 신부님은 아무리 좋은 자리나 좋은 직책, 높은 급여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 밖에 현재는 고인이 되신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 투투 주교님도 있고, 세계 곳곳에 저의 멘토는 무척이나 많습니다. 제가 멘토로 생각하는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성과보다는 심성, 그들이 일과 삶에 대해 가지는 자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이고 또 자기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어떻게 삶을 살고, 어떻게 다른 이들과 함께 더불어 변화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지가 제겐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여준 사람들이 제게는 모두 멘토입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존경스럽다는 마음을 갖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크게 성공하고 돈을 벌고 높은 직책에 있는 이들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존경스럽지는 않지요.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 대해서 성실하고 그것을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행복해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제가 세계 곳곳에서 만난 인권피해자와 분쟁피해자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너무 착하고 법 없이도 살수 있는 많은 좋은 분들이었지요. 이 분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입니다. 가령 인도에서는 달리트라는 이유만으로 폭행과 겁탈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 제가 만난 좋은 사람들은 아주 오랜 시간,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그렇게 많이 빼앗기고 당하고 살면서도 늘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착해서 먼저 용서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저에게 많은 지혜와 교훈을 주었습니다.


한국 NGO에서 함께 일하자는 요청을 받았지만, 프랑스에 머물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학연, 지연, 경제적인 환경 등을 말씀해주셨는데요. 한국 NGO의 한계(활동가로서 살아가기 힘든 여건)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프랑스에 머물겠다는 결심을 따로 한 것은 아니고 제가 하는 일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다 보니 정신 없이 일만 하다가 한국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NGO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것은 그 사회가 개방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NGO에서 일하는 분들에 대해, 그들의 위치와 역할, 성과에 대해 한국 사회가, 사람들이, 그리고 국가가 제대로 알아주고 인정해 주고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국민들은 “NGO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며 정기 기부를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리 사건이 터지면 바로 정기후원을 끊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후원을 해야 건강한 후원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것은, 기부를 하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기부만하고 본인의 일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가볍게 돈을 내고는 손쉽게 큰 만족감을 얻지요. 활동에 참여하고, 지원하고 모니터링 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돈을 준다고 자신의 몫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관심이 있어서 돈을 기부했다면,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그 단체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질문하고 자료를 요청하고, 모니터링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기부문화는 아직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회의 NGO를 신뢰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드는 이들이 바로 기부자입니다. 그런 분들이 건강한 후원환경을 만드는 책임을 진 첫 서약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NGO에서 일하기를 꿈꾸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저 길을 개척하신 분으로서 조언을 한다면.

NGO란 말 그대로 비정부기구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의 ‘주류’가 아닙니다. 안정적이지도 않고요. 그런데 우리나라 많은 청년들은 ‘주류’를 꿈꾸고, 국제사회의 화려함만 상상하고 막연히 NGO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보면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아서, 때론 금방 도망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본인의 심지가 굳센 사람들이 대개 오래 잘 버틸 수 있습니다. 다른 능력보다 굳센 마음,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세계를 보고, 많이 배우고 많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도전을 해보라 말해주고 싶어요. 꼭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길을 걷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꼭 도전해보라고요. 여건이나 환경은 열악하지만 이 일이 주는 보람과 가치, 긍지는 다른 어떤 주류에 속해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보다 더 큰 선물로 돌아올 겁니다. 다만 무작정, 무모하게 도전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일에 대해 사전에 열심히 준비해 두면 더욱 좋겠지요.

평생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이하셨죠.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고 계신데, 민박집 주인으로서는 까칠하고 불친절하시다고요? (웃음) 스위스를 찾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안식년이라고는 선언을 했는데 결국에는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일들을 계속 하고, 꼭 참석해야 하는 회의를 다니고, 그 사이 책까지 쓰면서 오히려 더 바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인터라켄 민박집은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고령의 어머니께 맡겨 놓고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웃음). 25년 연대활동가로 살면서 안가 본 곳 없이 정말 많은 여행을 많이 다녀서인지, 여행자들의 삶이 마치 제 삶처럼 느껴져서 여행 온 친구들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민박집을 하면서 많은 한국 청년들을 만나게 되는데, 놀랍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안타까운 것도 참 많아요. 가장 안타까운 점은, 여행이 계획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입니다. 한국의 여행자들은 대게 틀에 박힌 여행을 하는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

작은 등산 가이드북 출간 계획은 진행 중이신가요?

아직 계획만 하고 있는데(웃음), 내년에는 조금씩 실행에 옮겨볼까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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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곽은경,백창화 공저 | 남해의봄날
국제사회에서 저명한 이름, 국제연대활동가 곽은경. NGO를 떠올리면 긴급 구호활동 혹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는 연예인의 봉사활동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전부인 우리에게, 그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높은 문턱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잔혹한 세상의 비극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영어 불어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그가 스물다섯에 한국을 떠나 전 세계 55개국 대표들의 투표로 국제 NGO 팍스 로마나 세계 사무총장으로 일하기까지 그 치열한 평화의 기록이 지구촌 아픈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마틴 김 “류현진 선수가 팀을 옮긴다면 함께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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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한국의 야구팬들은 류현진 선수의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 소식에 들떴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의 성적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마틴 김에게로 옮겨갔다. 기자회견장에서는 물론 경기장에서도 변함없이 류현진 선수의 곁을 지키는 한 남자. 그의 정체를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통역사였다. 그러나 곧 그가 전문 통역사가 아니라 LA 다저스 구단의 마케팅 담당 직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어떤 연유로 마틴 김은 류현진 선수의 마케팅이 아닌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을까. 최근 그가 펴낸 『빛을 그리는 그림자』는 바로 그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빛을 그리는 그림자』 류현진 선수와 같이 쓴 책이라고 할 수 있죠

두 사람은 류현진 선수와 LA 다저스 구단 측이 계약 조건을 조율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마틴 김은 구단 단장의 통역 자격으로 함께했고, 류현진 선수의 곁에는 스캇 보라스를 비롯한 에이전트들이 있었다. 에이전트 중 한 사람은 마틴 김의 오랜 지인이었고, 류현진 선수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입단식 이전에 몇 차례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짧은 만남이 반복되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마침내 류현진 선수가 자신의 통역으로 마틴 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처음 마틴 김의 대답은 ‘No’였다. 류현진 선수를 위해서도, 그리고 구단을 위해서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마케팅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스프링캠프를 마친 뒤에도 류현진 선수가 통역을 부탁하자 그의 대답은 ‘Yes’로 바뀌었다. 단순히 통역을 해줄 사람이 아니라, 친구처럼 믿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류현진 선수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틴 김은 류현진 선수의 입과 귀를 대신하며 그와 함께 한 시즌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마틴 김은 류현진 선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류현진 선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류현진 선수와 자신이 함께한 기적의 시간들을 『빛을 그리는 그림자』안에 펼쳐 보인 것도 그 때문이다. 책에는 류현진 선수와 LA 다저스의 계약 뒷이야기부터 락커룸과 덕아웃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류현진 선수와 관련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빛을 그리는 그림자』를 읽는 또 다른 재미다. 돈 매팅리 감독과 클레이튼 커쇼, 후안 유리베, 야시엘 푸이그와 같은 ‘다저스 식구들’과의 이야기는 물론, 추신수 선수와의 만남도 엿볼 수 있다. 그 모든 순간에 함께했던 마틴 김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류현진 선수만큼이나 한국 야구팬들에게 인기 스타가 된 마틴 김의 삶과 꿈에 대한 독백들이 실려 있다. 하지만 한국의 팬들이 마틴 김에게 가장 듣고 싶은 것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그래서, 내년에도 류현진 선수와 함께할 건가요?’ 그의 말이 궁금하다면, 채널예스가 마틴 김과 나눈 대화에 주목하시길.

SNS를 통해서 류현진 선수가 『빛을 그리는 그림자』의 ‘첫 고객’이라고 말씀하셨죠. 책을 본 류현진 선수의 반응은 어땠나요?

돈은 아직 안 줬고요. 책값은 꼭 받으려고요(웃음). 가장 처음 받은 책은 제가 간직하려고 받아뒀고, 두 번째 책을 류현진 선수에게 줬습니다. 참 잘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되게 신기해하더라고요. 류현진 선수 덕분에 많은 분들이 책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 같아요. 류현진 선수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빛을 그리는 그림자』출간과 관련해서 류현진 선수와는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나요?

LA 다저스 마케팅팀의 상사 중에 ‘마이클 영’이라는 분이 계신데, 예전에 미식축구와 야구 선수이기도 하셨거든요. 그런데 자신에게 남은 것은 기억뿐이고 제대로 된 사진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사진도 많이 찍고 기록을 남기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 밖에도 주변의 많은 분들이 책을 쓰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고요.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후부터 사진을 많이 찍기 시작했죠. 류현진 선수가 물어보더라고요.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냐고요. 나중에 책을 쓸 거라고 했더니, 잘 해보라고 응원해 줬어요. 책을 쓰는 동안에는 제가 애매한 부분들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죠. ‘이 얘기는 써도 될까? 이렇게 쓸 건데 어떻게 생각해?’하고요.

류현진 선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쓸 때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제일 두려웠던 건 ‘마틴 김이 1년만 통역을 하고 돈 벌려고 책을 출간하나?’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1년 동안 류현진 선수와 같이 다니면서, 한 나라가 이 선수에게 보내는 관심과 사랑이 너무 뛰어나다는 걸 느꼈어요. 류현진 선수에 대해서 기자 분들만 질문을 하시는 게 아니라 정말 많은 팬 분들이 메일을 보내주시거든요. 그런 관심들을 보면서 류현진 선수와의 이야기들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류현진 선수가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는 성격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출간을 결심하게 됐고요.

『빛을 그리는 그림자』의 저자에는 제 이름이 써있지만, 이 책은 류현진 선수와 제가 같이 쓴 책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류현진 선수가 1년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쓴 책일 뿐, 다른 목적이나 인위적인 마음은 전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판매 수익금은 류현진 선수의 재단에 전달하기로 했어요. 현진이가 재단을 통해서 한국에 어린이 야구장을 만든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좋았거든요.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었고, 그 열정을 같이 나누고 싶어요.


처음 류현진 선수를 만났을 때 개구쟁이 같아 보였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지셨나요?

아니요. 현진이는 모든 상황 속에서 웃음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죠. 항상 웃는 걸 좋아하고 선수들과 어울려서 장난도 잘 치고요. 하지만 등판하는 날에는 아주 진지해져요. 그때는 서로 얘기도 많이 없죠.

류현진 선수와 함께한 지난 1년 동안 마틴 김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우선은 한국 음식을 더 많이 먹게 됐고요. 머리 스타일도 바뀌었죠(웃음). 처음에는 사람들이 류현진 선수가 영어를 많이 배웠냐고 물어보면 ‘아니, 내가 한국말을 더 많이 배웠어’하고 농담으로 얘기했는데, 그건 사실인 것 같아요(웃음). 또 다른 변화라면 남자로서 비전이 더 넓어진 것 같고요. 삶의 목표들도 조금 더 정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모든 게 다 좋지는 않았어요. 저한테는 정말 힘든 부분도 있었죠. 어떻게 말하면 한 선수를 뒷바라지하는 건데, 그걸 위해서는 저한테 중요한 것들을 많이 내려놔야 되잖아요. 이기적인 생각들이 있으면 부딪히니까요. 그런 부분에서는 조금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걸 통해서 제가 조금 더 발전된 것 같아요.

류현진 선수는 오로지 마틴 김에게 의존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했습니다. 온전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요.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류현진 선수가 하는 말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얘기를 아마 현진이도 주변 사람들한테 들었을 거예요. 그리고 저도 류현진 선수 통역을 할 때는 항상 배려를 많이 하죠. 처음에 류현진 선수가 팀에 입단했을 때, 당연히 한국에서는 대스타였지만 미국에서는 아니었어요. 미국에서는 누군지도 몰랐고 오히려 기자 분들이 의심을 많이 했어요. ‘네가 누구 길래 그렇게 거금을 받고 입단했냐’라는 거죠. 제가 마케팅 일을 했었기 때문에 현진이 이미지를 제대로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기자들에게 통역을 할 때는 항상 겸손하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야 미국 기자들도 천천히 믿게 되고 좋아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건 작은 부분들이고요. 결국은 류현진 선수가 마운드에서 너무 멋진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일이 쉽게 풀린 것 같아요.
저도 야구팬이어서 가끔 선수들의 실수를 보면 안타깝고 야유를 보낼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현진이가 저에게 그러더군요. “형, 내가 홈런을 맞고 싶어서 맞는 거 같아?” 그때 깨달았습니다. 누구보다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우고 싶고, 홈런이나 안타를 맞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당연히, 바로 투수라는 사실을요. 그때부터 상황에 도움이 안 되거나 잔소리 같은 이야기, 오히려 집중에 방해가 되는 말들은 통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p.57)



제가 봐도 ‘외질’과 닮았더라고요

마틴 김은 스스로 류현진 선수의 그림자로 머물기를 자처해 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류현진 선수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면서,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경계했다. 류현진이라는 빛이 더 밝게 빛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희생도 기꺼이 감내했다. 한식과 고기를 좋아하는 류현진 선수의 입맛에 맞춰서 함께 식사하고, 원정 경기를 가면 가장 먼저 한국식당을 알아보는 일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사생활은 꿈도 못 꿀 만큼,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류현진 선수의 곁을 지켰다. 오전에는 마케터로, 경기 중에는 통역사로 활약했다. 원정 경기를 갔을 때는 류현진 선수의 가족을 대신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했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류현진 선수의 귀와 입이 되어주기를 거부했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류현진 선수가 직접 동료들이나 관계자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인간관계를 쌓아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내에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마틴 김이 가진 깊은 배려심과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그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열 살이 되던 해부터 미국에서 성장했다. 집에서는 반드시 한국어를 사용하게 할 만큼 ‘한국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부모님 덕분에 그는 한국과 남미, 미국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며 자랐다. 덕분에 그는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에게 사랑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이따금씩 차별당하는 동양인 친구들을 보며 ‘왜 나와 다르게 저 친구들은 저렇게 힘들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품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서로 다른 인종의 친구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한 이유로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국제 마케팅’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한국과 미국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한국 회사를 미국에, 또는 미국 회사를 한국에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한국인 이민자가 많은 LA를 연고지로 하는 다저스 팀에 입사하게 된 것도 이러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그는 대학 입학 전까지 야구선수로 활동했을 만큼 누구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 다저스로 향했고, 운명처럼 류현진 선수와 만났다.

야구 팬으로서 메이저리그 구단에 입사하게 된다는 건 꿈같은 일일 텐데요. 어땠나요?

처음 다저스라는 팀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제가 LA의 한인 커뮤니티와 일을 할 때였어요. 5년 전쯤이었는데 그때 컨설팅 일을 병행하고 있었어요. 다저스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마이너리그에 있는 2명의 한인 선수를 위해 통역을 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처음에 제의를 받았을 때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미국의 프로페셔널 스포츠라는 분야는 들어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연봉이 굉장히 적어요. 공짜로 일을 할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연봉이 너무 적기도 했고, 제가 쌓아온 커리어가 퇴보하는 느낌이어서 죄송하지만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그렇다고 인연이 끝난 건 아니었어요. 그 뒤에도 일을 도와주고 아이디어들을 제시하기도 하면서 계속 관계를 이어갔죠. 결국 류현진가 다저스 팀에 들어오기 2년 전에 입사하게 됐죠. 제가 너무 축복 받은 사람 같아요. 타이밍이 잘 맞아서 대한민국에서 아주 큰 스타와 같이 일을 하게 됐고, 덕분에 별명까지 생겼잖아요. 참 감사하게 생각해요.

한국의 팬들이 붙여준 별명을 알고 있나요?

외질 닮았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제가 봤을 때도 사람들이 왜 닮았다고 하는지 알겠던데요? 눈이 처진 게 닮았잖아요.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 같아요(웃음). 별명도 붙여주시고, 정말 감사하죠.

『빛을 그리는 그림자』는 류현진 선수와의 인연으로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LA 다저스에 입사하게 된 계기도 이전부터 이어온 인연 때문이었고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철칙이나 신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도 백인들이 많은 동네에서 자랐는데, 저는 차별 받지 않고 사랑 받으면서 지냈어요. 그런데 어려움을 겪는 동양인 친구들을 보면서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사람, 그리고 관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게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걸 배웠고요.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사랑과 응원과 도움은 무엇보다 제일 강한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을 제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해요. 편할 때 진심이 나오기 마련이잖아요. 진짜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은 편할 때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일에서도 그렇고, 직장이나 집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항상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고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덕분에 류현진 선수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현진이와 나이 차이도 나고, 한국의 문화와 언어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정말 빠른 속도로 친해졌거든요.


항상 류현진 선수의 뒤에서 배려해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가요?

야구장 안에 있을 때는 일이잖아요. 저는 류현진 선수의 통역이고요. 그러면 항상 뒤에 있어야 되는 게 맞는 거죠. 그냥 일을 열심히 한 거예요. 한 번도 제가 현진이 앞에 선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선수가 있기에 제가 있는 거고, 선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 팀이 있는 거니까요. 초기에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 거죠. 아무리 저보다 어려도 주인공은 류현진 선수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나온 것 같고요. 제가 특별히 노력한 건 아니에요. 또 야구장 밖에 있을 때는 현진이가 참 잘해요. 그래서 저는 진짜로 현진이를 동생처럼 보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친하게, 편안하게 지내는 이유인 것 같아요.




류현진 선수와 윤석민 선수의 경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류현진 선수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마케팅을 전공하면서 PR 공부를 했는데요. 항상 강조하는 포인트 중 하나가 사람의 대화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50%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지난 1년 동안 제대로 느낀 것 같아요. 제가 혼자서 메신저가 되면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은 없었다고 보면 돼요. 진짜 마주보고 눈빛으로 대화해야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 거잖아요. 저는 커뮤니케이션보다 커넥션(connection, 연결)이라는 말을 배운 것 같아요. 마주보고 얘기를 해야 커넥션이 생기죠. 그냥 말로만 통하면 종이에 써서 주고받는 거랑 똑같잖아요.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지난 시즌에 추신수 선수와 류현진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직접 코리아데이 행사 기획하셨죠? 싸이와 소녀시대도 섭외하고, 태권도 시범 무대도 마련했고요. 현재 기획 중인 또 다른 이벤트는 없나요?

저는 한국에서 살았던 적도 없고 서류상으로 한국 사람도 아니에요. 하지만 사춘기 시절에 ‘내가 누구인가’ 고민하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내가 미국에 살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절대로 미국 사람은 안 된다는 사실이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항상 제 몸 속에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죠.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저는 코리아데이와 같은 이벤트를 통해서 한국 문화나 한국 사람들에게 빛을 비출 수 있는 자리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안 그래도 내년 시즌의 코리아데이 날짜를 정하는 문제로 지난 주에 미팅이 있었는데요, 지금도 고민 중이에요. 우선은 추신수 선수와 윤석민 선수의 계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윤석민 선수가 MLB에 진출하게 된다면, 당연히 윤석민 선수와 류현진 선수가 같은 야구장에 있을 때 코리아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싶고요.

마케팅 전문가로서 한국과 관련해서 이루고 싶은 목표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리 역할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거나, 아니면 미국 사람으로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다리 역할을 많이 한 것 같은데요. 목적이 있다면 그 다리가 아주 단단하고 길고 튼튼한 다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야구 시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한 번은 조금 더 큰 물에서 활약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류현진 선수만큼 큰 스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제가 갖고 있는 아주 큰 꿈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한국의 야구 팬들은 다음 시즌에도 마틴 김이 류현진 선수와 함께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빛을 그리는 그림자』에서는 “류현진 선수가 팀을 옮기게 된다면 함께 가겠다”고 밝히셨는데요. 내년에도 류현진 선수의 입과 귀가 되어주기로 한 건가요?

통역으로 같이 가겠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제가 다저스에서 일을 하면서 아주 특이한 일들을 많이 하잖아요. 한국 선수가 입단하기 전부터 한국의 문화나 업체들과 연계해서 일을 해왔어요. 만약에 류현진 선수가 다른 팀으로 간다면 어느 팀이든 제가 같이 가서 똑같은 일(마케팅)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 현진이 옆에 있어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내년 시즌 통역에 대한 부분은 말씀드리기가 아주 민감한데요. 일단 구단 측에서는 저를 통역사보다는 마케터로 데리고 있고 싶어 해요. ‘너는 프론트에서 돈을 벌어주는 게 우리한테 더 좋아’ 라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제가 지난해에 자리를 비워 둠으로써 놓친 기회들이 많거든요.




마틴 김은 『빛을 그리는 그림자』를 통해 독자들이 영감을 얻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두 남자의 찬란하고도 치열했던 MLB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얻을 수 있는 영감이란 어떤 것일까. 마틴 김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몇 년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제가 한국이 낳은 슈퍼스타 투수의 통역을 맡아 LA 다저스 경기를 지켜본 경험에 대해 2013년 연말에 책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면, 저는 아마 웃기는 소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살다보면 놀라운 일들과 기회가 실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이야기입니다. (『빛을 그리는 그림자』머리말)
<채널예스>와 직접 만난 마틴 김은 여기에 덧붙여 ‘기회의 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인생에는 수많은 기회의 문들이 있다는 것, 문을 열기 전에는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또 다른 문으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알 수 없다는 것. 어쩌면 『빛을 그리는 그림자』는 빛이 된 남자 류현진과 그림자로 남은 남자 마틴 김에게 주어졌던, 기회의 문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듯 보이는 두 사람이 하나의 문 앞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이야기이고, 손잡이를 힘주어 잡으며 그들이 냈던 수많은 용기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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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그리는 그림자마틴 김 저 | 휴먼큐브
『빛을 그리는 그림자』는 바로 그 마틴 김이 올해 류현진과 겪었던 기적 같은 시간들을 글과 사진으로 류현진의 등넘버인 99가지 이야기로 정리한 책이다. 1장은 ‘류현진 스토리’로 올 시즌 그의 활약상과 LA 다저스 팀 동료들과의 일화, 또 다른 한국인 메이저리거 추신수 선수와의 맞대결, 소녀시대와 함께한 코리안 데이 등의 이야기들이 수록했다. 2장에서는 국내 야구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마틴 김 스토리’로 교포 2세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성장 스토리와 훈남 마케터로서의 MLB 프런트 이야기와 야구팬들에게 보내는 조언 등으로 흥미롭게 구성되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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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길러 뒤로 묶은 독특한 헤어스타일, 남다른 느낌의 패션. 전광수 대표의 첫인상은 그의 이력처럼 독특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런 그의 특이함이 보통 사람들은 시도하지 못하는 인생의 반전을 유도한 듯했다. 한때 그는 제약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그가 주어진 삶을 탈피해 ‘커피’에 모든 것을 건 것은 벌써 20년 전 일이다. 어느새 머리카락 사이사이는 희긋희긋하게 세월의 흔적이 생겨났지만 마음만은 처음 시작할 때와 다름없이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배운 것을 소유하려하지 않고 모조리 공개함으로서 자신만의 ‘나눔’을 실천하고 있기도 한 그는 쉐프에게 시크릿 레시피와 다름없는 로스팅 노하우를 스스럼없이 공개하고 있다. 그의 노하우가 특별한 것은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 100% 자신의 경험과 시행착오로 알아낸 비결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전광수 스타일의 커피’를 만들 수 있는 비결인 셈이다. 자신만의 철학과 고집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커피 이야기는 진한 향기를 머금고 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대개는 그렇지만, 커피를 볶는 로스터에게 책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전광수 대표가 커피를 주제로 한 책의 집필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뭘까? 스스로 글재주가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그가 쓴 책은 최근 『전광수의 로스팅 교과서』를 비롯해 공저 포함 총 4권에 달한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바람은 소소했다. ‘전광수 커피’를 바탕으로 커피를 좋아하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커피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는 것. 무언가를 진정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법이다.

『전광수의 로스팅 교과서』와 앞서 집필하신 책들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앞서 공저한 책들은 일반적인 로스팅의 서론 정도라고 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5년 전에 쓴 『전광수의 커피 로스팅』이 가장 애착이 가는데, 그 책 역시 산지별 커피를 쉽게 볶을 수 있는 방법을 정리한 수준이에요. 그에 비해 이번 『전광수의 로스팅 교과서』는 저만의 스타일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죠. 만일 책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다고 해도 저는 개의치 않아요. 사실 제 지인이나 제자들 중에도 책을 통해 제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속된 말로 ‘까발려도 되느냐’였는데, 제 생각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전광수의 커피 로스팅』이전에 이론적인 내용을 전개시켜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늘 마음에 걸렸거든요. 사실은 당시 제가 처음 책을 만든다고 했을 때도 제자들의 항의가 있었어요. 자신들은 수업료를 지급하고 배운 것을 책으로 공개하면 어떻게 하냐는 거였죠. 그래서 결국은 이론적인 부분을 빼고 산지별 커피에 대한 이야기로 그친 거예요. 결국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돼 버린 거죠. 그래서 꽤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완을 하게 된 거예요. 일부러 이 번 책에서는 산지별 커피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적진 않았어요. 『전광수의 커피 로스팅』하고 같이 연계해서 보시면 좋을 거예요.

『전광수의 로스팅 교과서』는 ‘로스팅 이론’, ‘로스팅 실전’, ‘블렌딩 실전’ 등의 파트로 나눠져 있는데요. 각 파트별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들을 말씀해주신다면?

한 가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가 쓴 책들은 어떤 문헌도 참고하지 않고 순수하게 제 경험에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했다는 점이에요.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계에서 유일한 책이죠(웃음). 우선 가장 앞부분의 ‘로스팅 이론’은 커피를 볶기 전 제일 중요한 사항들을 정리한 거예요. 생두 보는 방법, 구분하는 방법, 수확한지 얼마나 됐는지, 콩의 성질은 어떤지를 파악하는 방법들이죠. 또 거기에 맞춰서 저만의 로스팅 기술들을 모아 놨어요. 두 번째 장인 ‘로스팅 실전’은 앞쪽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산지별 커피에 대한 내용을 정리했는데, 처음에 나온 책과 다른 점은 대표적인 커피 품종에 맞춰서 실전에 적용하는 방법을 소개했다는 거죠. 세 번째 장인 ‘블렌딩 실전’은 세계적인 추세인 ‘블렌딩’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산지별 커피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가까운 일본이나 커피 선진국에서는 이미 블렌딩 커피 쪽으로 많은 관심을 두고 있어요. 우리나라 역시 앞으로 블렌딩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거예요.

앞서 책을 내셨을 때 적잖이 항의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이번 책 경우에는 어떠셨나요?

커피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한지 벌써 10년 전인데, 당시 제자들과 지금 배우는 친구들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노하우를 공개하는 것을 일종의 재능 나눔으로 받아들이는 듯해요. 저 역시도 그렇고요. 이 책을 통해 커피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로스터나 바리스타에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가르치는 것과 책으로 정리하는 것의 차이도 느끼셨을 듯 한데요. 책을 쓰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앞서 몇 권의 책 쓰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아 나는 글재주가 없구나’란 생각을 많이 해요(웃음). 글로 쓰는 것보다 말로 하는 게 훨씬 편하다 이런 걸 새삼 느끼죠. 사실 책의 내용 외에도 수업 시간에 수강생들과 함께 실습을 하면서 그때그때 상황을 체크해주는 부분은 미처 책에 넣지 못했어요. 제 글재주의 한계인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부족한 사람이 책을 쓴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해요.




인생의 변화를 꾀했던 시절

그의 소개말을 보면 ‘어느 날 커피의 매력에 빠져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 선라이즈 커피회사로 연수를 떠났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커피를 좋아하긴 했지만, 보통 사람처럼 자판기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그가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 커피의 어떤 매력에 빠진 것일까? 호기심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처음 원두커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직장 생활하다가 우연치 않게 커피에 관련 된 책을 하나 얻었는데 영문판이었어요. 그때까지 제 커피 상식은 그저 ‘빨간색 체리를 따면 바로 커피로 만들어 먹는 건가’ 정도였는데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책 속에 있더군요. 사전을 찾아가며 책을 읽었는데, 커피콩을 볶아야 된다는 걸 처음 알았죠. 한 번 호기심이 생기니까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어요. 무작정 미국행을 택한 거죠(웃음). 벌써 20년 된 이야기네요.

그 이전에는 전혀 다른 분야에 몸담고 계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대학을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취업했죠. 잠깐 광고 판촉 일도 했었고요. 한 마디로 커피와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서 살았어요. 전공도 경영학이었으니까요. 요즘 커피 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식품영양학과나 관련 전공을 한 사람들이 많은데, 전 완전히 아니었던 거죠(웃음).

아무리 커피에 빠지셨다고 해도, 미국으로 떠날 당시 상황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만류는 없었나요?

그렇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 때 이미 결혼을 했을 당시인데, 아내도 선뜻 동의했고요. 사실 저나 아내나 좀 즉흥적이거든요(웃음). 솔직히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연수를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이를테면, 먼 미래를 내다보고 ‘곧 커피가 뜰 거야’해서 공부를 한 건 아니란 말이죠. 그저 제가 좋아서 한 것뿐이에요. 어찌 보면 시대를 잘 타고 난거라 할 수도 있죠. 그래도 초반엔 고생을 꽤 많이 했어요.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얻은 경험과 노하우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전광수’라는 브랜드를 만들기까지

미국 연수시절 그는 엘살바도르 출신의 스승을 만났다. 책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스승은 그를 커피 분야에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준 사람이었다. 기연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커피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전광수 스타일’ 커피를 만들어 냈다. 오늘날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커피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 경험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습득한 노하우에 대한 책임감이라 할 수 있다.

아카데미도 그렇고 커피하우스도 모두 본인의 이름을 내 걸었는데요. 당시로서는 드문 선택이었을 듯한데, 일종의 ‘장인의 고집’같은 것인지요?

(웃음)국내에 커피 장인은 없어요. 적어도 그 문화가 100년은 지나야지 장인이라 할 수 있죠. 커피 볶은 지 30년도 안된 제가 무슨 장인이라 할 수 있겠어요. 전 장인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에요. 그럼에도 제 이름을 건 것은 그동안 공부했던 것에 대해 좀 책임을 져야하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사실 부담스럽기도 했어요(웃음). 원래 가맹점도 내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제자들이 하도 조르는 바람에 하나 둘 내게 됐는데, 그래도 제한은 뒀죠. 20개만 한다는 거예요. 20개 넘으면 책임을 못 질것 같더군요. 마구잡이로 가맹사업권을 다 줬더라면 아마 지금 ‘전광수 커피하우스’가 꽤 많이 생겼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했으면 일찍 죽었을지도 몰라요. 스트레스 받아서(웃음).

그럼 이제까지 ‘전광수 커피하우스’는 몇 호점까지 생겼죠? 각 지점에 적용된 필수적인 기준이 있을 듯 한데요?

이제까지 17 곳이 생겼어요. 기준이라면, 일단 저희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아야 되고요. 교육 받은 학생들 중에서 저희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 선별을 합니다. 서울이 조금 예외긴 하지만 한 지역에 한 곳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있죠. 예를 들어 수원에 하나. 인천에 하나 개설하는 식이에요. 그래야 20개만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직까지 아래 지방, 부산이나 광주에는 없어요. 어쨌든 각 지역별로 중복되지 않게 지점을 연다는 원칙은 변함없어요. 예를 들어서 현재 서울 정동점 있잖아요. 그런데 누가 시청에서 ‘전광수 커피하우스’를 연다고 하면 저는 지점 사업권을 주지 않아요. 상권이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이미 정동점 점주와 약속한 게 있기 때문이죠. 만약 그런 식으로 지점을 개설한다면 40~50개는 해야죠.

‘전광수 커피’는 일관된 맛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점주들과는 매달 한 번씩 회의를 해요. 또 아르바이트를 쓰지 않고, 기존 직원들 교육 프로그램과 신입사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죠. 고용한 이후에도 계속 교육을 시킵니다. 왜냐면 핸드드립은 같은 커피를 내려도 사람 손에 따라서 방법이 약간씩 달라지거든요. 저희는 가급적 그 과정을 똑같이 만들고자 하는 거죠. 물론 100% 똑같다는 것은 욕심이죠. 다만 갭을 줄이려고 하고, 그래서 교육을 반복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좀 안타까운 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걸 알고 입사를 해서 노하우만 배우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나라 커피 문화에 대한 생각

급격하게 성장한 우리나라의 커피 시장을 두고 최근에는 ‘포화상태’를 넘어섰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작은 동네에서도 한 블록 넘어 중소규모 커피 전문점이 영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전광수 대표는 이를 문화가 성숙되는 과도기로 보고 있다. 한국 커피 시장, 그리고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은 의외로 밝다.

십여 년 전 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은 대부분 인스턴트커피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언젠가부터 갑자기 원두커피 맛에 빠지게 된 이유는 뭘까요?

‘약간 억눌려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다양성이 없던 시절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인스턴트커피에 빠져 있었을 뿐이죠. 라면을 먹더라도 꼭 자판기 커피 먹어야 입가심이 되던 시절이었잖아요.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유학파도 생기고 여행도 자유화되면서 사람들이 많은 걸 느끼게 된 거 같아요. 보통 GNP 2만 달러 정도 되면 커피 문화가 자리잡아간다고 해요. 이제 사람들 눈을 뜬 셈이죠. 하지만 인스턴트커피는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고마운 커피임은 확실해요. 눈이오나 비가 오나, 언제 어디서 먹으나 늘 똑같은 맛을 유지했으니까요. 그건 사실 대단한 것이거든요.

한국 커피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데요. 저자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는 커피 시장을 키우려면 마케터, 사업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같이 교육만 한다면 커피 시장이 크질 않아요. 그리고 익히 아는 메이저급 회사들은 최근까지 인스턴트커피에 혈안이 돼 있었으니 원두커피 자체의 발전은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원두커피 전문 프랜차이즈 회사들이 많이 생기면서 커피 시장을 확대해 놓은 건 긍정적인 부분이에요. 그럼에도 제가 감히 의견을 말하자면, 이분들이 커피를 사업적인 측면 외에 열정을 갖고 키웠으면 더 좋겠다는 겁니다. 어느 업체를 보면 정말 커피 맛이 없는 곳도 있거든요. 마케팅만 생각했기 때문이죠. 스타벅스 같은 회사를 보면 커피에 대한 오너들의 열정은 상상 이상이에요. 늘 커피만 생각하죠. 저는 그런 열정이 마케팅하고 접목이 돼야 더 큰 영향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A라는 업체에서 브랜드를 키운 다음 대기업에 팔아버린다든가 하는 행태는 커피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니죠.

보통 커피를 식후에 마시는 사람들이 많은데, 커피의 맛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커피 타임'이 존재하나요?

개인적으로 아침에 먹는 커피, 일어나서 먹는 커피가 제일 낫다고 생각해요.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고,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하니까요. 적당한 카페인은 아무래도 각성하는 데 효과가 있잖아요. 그리고 늦은 저녁 보다는 오후 무렵이 좋은 것 같아요. 저녁 때 진한 커피를 마시게 되면 잠자는데 부담이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좀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커피 마시러가자’하면 꼭 ‘밥 먹고 가면 안 될까?’ 라고 말하죠(웃음).

커피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을 놓고 봤을 때 어떤 이들은 과도한 섭취가 건강을 해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요. 하루 적정량의 커피 섭취 기준이 있을까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하루 2~3잔 정도면 충분하다고 봐요. 술, 담배에 따라붙는 말이 커피 마시지 말라고들 하는데, 아마 그것은 인스턴트커피를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원두커피라도 신선하지 않으면 독이랑 마찬가지긴 해요(웃음). 뭐든지 적당한 게 좋다는 거죠. 어떤 것이 몸에 맞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잖아요. 술도 주량이 있는 거처럼 카페인도 견딜 수 있는 정도가 개개인 마다 다르니까요.

일반인이 핸드드립 커피를 만들어 먹을 때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면?

볶음 정도에 따라 핸드드립 물의 온도를 달리하는 것이 관건이에요. 약하게 볶은 것은 물의 온도가 높아야 잘 우러나요. 반대로 진하게 볶은 것은 물의 온도가 낮아야죠. 섭씨 85도를 기준으로 그 이하면 낮은 것이라고 보면 되요. 높다는 것은 95도 이상을 말하죠. 진하게 볶은 것을 높은 온도의 물로 내리게 되면 불필요한 성분까지 다 나오고 그래서 커피 맛이 써지는 거예요. 반대로 약하게 볶은 커피를 너무 낮은 온도의 물로 내리면 맛이 싱거워져요. 또 하나 더한다면 진하게 볶은 커피는 굵게 분쇄하고 약하게 볶은 커피는 곱게 분쇄하는 것이 좋아요. 그래야 좋은 커피 맛을 낼 수 있어요.

2014년에도 여러 가지 계획이 있을 듯 합니다.

해외에 직영점을 내볼 생각이에요. 욕심 부리는 건 아니고, ‘전광수 커피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직원들에게 외국에서 일 해보는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어요. 또 하나는 하와이에 코나 지역에 커피농장을 하는 한국 업체가 있는데, 아카데미생들을 대상으로 투어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이어 커피에 관해 일반인들에게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책을 써보고 싶기도 하고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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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수의 로스팅 교과서전광수 저 | 벨라루나
어느 날 커피의 매력에 빠진 이후 20년 동안 로스터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 커피 대표 명인 '전광수'.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광수 커피아카데미’를 열어 제자들을 양성했고 그의 로스팅 수업을 들은 제자 400명 중 150여 명이 카페를 창업했다. 또,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세운 로스터리 카페 ‘전광수 커피하우스’를 열어 지금은 전국 16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로스터로 살아온 전광수가 자신의 로스팅 인생 20년간의 현장 경험을 공개하면서 동시에 로스팅 전문 아카데미에서의 강의 경험을 살린 실전적인 로스팅 전문서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길 위에서』 이창재 감독이 백흥암으로 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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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산이 많다. 그 산에는 대개 절이 있기 마련이다. 굳이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절은 한국에서 친숙한 공간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온 불교는 이 땅의 역사와 함께하며 전국 곳곳에 불교 유적을 남겼다. 우리는 자라면서 소풍으로, 체험학습으로, 수학여행으로 절을 방문했다. 많은 사람이 취미를 등산이라 말하는 지금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절을 찾는다. 이른바 명산이라 소문난 곳에는 절이 있기에.

 

절마다 구조가 다르긴 하지만 부처님을 모셔 놓은 대웅전과 절의 입구에 우뚝 선 일주문은 사찰 대부분에서 볼 수 있다. 대웅전과 일주문과 함께 흔히 관찰되는 게 있으니 바로  ‘출입금지’, ‘정숙’ 등과 같은 문구다. 이 문구 앞에서는 시끌벅적 떠들던 등산 동호회 사람들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조용해진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일부 사람도 있지만.

 

‘출입금지’라는 말 뒤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까. 『길 위에서』저자인 이창재 감독의 의문은 여기서 시작했다. 책으로 나오기 전에 영화로 먼저 만들어진 <길 위에서>는 비구니 수행 도량인 백흥암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백흥암 내부가 공개된 건 14년 만이고, 비구니 스님의 일상과 수행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는 국내 최초라고 한다. 전례가 없다는 말은 어렵다는 말과 통한다. 당연히 취재 자체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제작진의 노고는 흥행 성적으로 입증됐다. 5만 명이라는 관객은 다큐멘터리로는 동원하기 쉽지 않은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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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는 백흥암에 머문 300여 일간의 기록이다. 이 긴 시간을 한 편의 영화에 담기란 쉽지 않았다. 영상에 담지 못한 이야기는 책에 실었다. 

 

이창재 감독이 종교적인 주제에 천착하는 까닭

 

취재 허가가 쉽게 나지 않았고 촬영도 어려웠다. 무엇을 찍고, 어느 정도까지 공개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을 텐데, 책을 내면서도 그런 고민은 이어졌을 것 같다.

 

책도 스님에게 물어 보면서 만들었다. 남존여비, 이런 부분은 민감하니까 빼면 좋겠다고 얘기하시더라. 남존여비는 모든 종교에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전여신설(여자는 남자가 되어야 성불할 수 있다)이나, 팔경법(비구니가 지켜야 할 8가지 규범)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스님들의 용돈. 스님 중에는 1년 용돈이 30만 원인 분도 있고, 한달 용돈이 30만 원인 분도 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청빈하게 사신다. 그럼에도 스님의 용돈이 30만 원이라고 써버리면, 마치 모든 스님이 그렇구나 하고 오해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청빈하시다. 그 두 대목은 책에서 조금씩 다루긴 했다.

 

<길 위에서>를 촬영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백흥암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영화 들어가기 전에 머릿속으로 그렸던 절의 모습이 궁금하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에 등장하는 암자 정도를 생각했다. 암자에는 노스님, 젊은 스님, 막 들어온 동자승이 있다. 이런 절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작은 절이라도 신도가 있으면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여기서는 (수행자보다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크다. 동자승이 초등학생이라면 학부형 노릇도 해야 한다. 수행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기가 어렵겠더라. 수행처로써 절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렇게 수행에만 집중하다 보니, 촬영할 만한 절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구니 선방은 20개 정도였는데, 전통이 있고 알려진 선방은 10개 안팎이었다.

 

전국에 절이 많을 텐데 10개 안팎이라, 생각보다 적다. 비구니 사찰은 어떤 면이 비구 사찰과 다른가.

 

비구니 스님은 선택할 수 있는 절이 많지 않다. 특히 선방은 운영하는 데 돈도 많이 든다. 30명 숙식을 제공해야 하니 그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나. 그런데 수행 위주다 보니 시주도 받기 힘들다. 비구 스님보다 비구니 스님이 인기도 없다. 주로 신도가 여성이고 여성 신도는 비구 스님을 찾는다. 여성 신도는 힘도 남자가 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비구 스님의 기도력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남자 신도는 많지 않고, 있더라도 굳이 비구니 사찰로 오지 않는다. 비구니 사찰에 오는 사람은 절이나 스님과 아주 인연이 깊은 사람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조건적으로 항상 결핍이 있더라. 엄격하게 원칙을 지킬 수밖에 없는 데에는 결핍에서 오는 자연스러움도 있을 것이다. 비구니 스님이 계도 잘 지키고, 비구 스님보다 훨씬 엄격하다.

 

전작 <사이에서>는 무속인을, <길 위에서>는 불교를 다뤘다. 종교적인 주제에 천착하는 이유는?

 

지금 죽음에 관한 걸 찍고 있다. 이렇게 3편을 만들고 나서 사회적인 걸 찍을까 생각 중이다. 보통 영화 감독은 본인의 호기심 30, 관객의 호기심 70 비율로 만든다. 나는 100% 나의 호기심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마이너다. 많이 와도 5만 명, 적게 보면 5천 명인데 많든 적든 그 차이가 크지 않다. 어차피 많이 안 보는 영화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마음 먹었다. 3편에 대해서 ‘존재의 간극’이라는 표현을 썼다. 존재 사이에 끼어 있는 서글픔이라고 할까? 여기에 관심이 있다. <사이에서>에 등장하는 무당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이용당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무당을 정말 사랑하면 재능만 부여하지, 붙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고 시켰을까? 인간이 무당을 신으로 생각한다면 천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필요할 때만 이용한다. <길 위에서>의 스님도 마찬가지다. 깨달으면 좋은데, 성불하지 못한 스님의 과정은 지난하게 어렵다. 부처님처럼 짠하게 결과가 나오는 사람은 10,000명 중 1명이 있을까 말까다. 대부분은 인간으로써의 한계와 수행자로써의 면모와 부처의 끄트머리 사이에 끼어 있다. 차기작은 죽음을 다룬다. 천주교 재단의 호스피스가 무대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간이역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인 이 간이역에서 1개월에서 3개월 정도 산다. 이분들이 이 기간에 어떤 생각을 할까를 담으려 한다.

 

사회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말했는데, 좀 더 설명 부탁한다.

 

다음 편까지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이후에 사회적인 걸 찍을 생각이다. 영화라는 게 규모가 되어야 만들 수 있다.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예전에 사회적인 작품으로 한 번 시도했다 투자를 못 받았다. 아는 사람에게 투자를 요청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투자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때 조금 실망했다. 밖에서 돈을 얻는 건 불가능하고, 만든다면 내 돈으로 할 생각이다.

 


백흥암에서의 촬영이 영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

 

책에서 출가하고 싶었다는 고백도 했다. 불교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인연이랄 건 없고, 언젠가부터 불교 책을 보게 됐다. 지금도 머리 아프면 남들은 여행가거나 하는데, 나는 수행하러 간다. 불교 관련된 책도 보고, 불교 관련되지 않은 책도 많이 봤다. 신학 관련해서도 좀 봤고. 불교가 나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볼 텐데, 나의 창으로 봤을 때는 불교가 이야기하는 게 과학적이고 앞뒤가 맞았다. 기독교는 중요한 선언을 신이 인간의 몸을 빌어 이야기하고 여기에 의심을 하지 말라, 여기에 약간 애정이 있는 정도다. 예수님부터 애정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애정도 없었다. 이거 해, 저거 해, 였는데 얼마나 인간이 말을 안 들었으면 이렇게 했을까 싶다. 불교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좋아할 것 같다. 내가 이미 부처의 본성을 다 갖고 있다, 그걸 발견하면 된다, 이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안식년 때, 보통 외국에 가는데 나는 절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내가 갔을 법한 길이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스님과 가까워질 수도 있고, 작품도 찍고. 고생을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백흥암에서 촬영 상황은 어땠나.

 

처음에는 절 안에 작은 방을 내주더라. 서로 민망했다. 남자 3명이 방에 갇혀 못 나갔다. 문을 열어 보면 빨랫줄이 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빨랫줄에 스님들이 입는 반바지가 하나도 안 널려 있었다. 스님들도 우리를 굉장히 불편해 하시는구나, 하고 눈치를 챘다. 그렇다고 그 근처에 마땅한 숙소가 없었다. 걸어서 1시간 넘게 가야 하고, 차 타고도 15분 이상 가야 하니, 촬영을 못할 정도였다. 예전에 절에서 나무해 주던 분이 살았던 집이 20m 떨어져 있었다. 마침, 이분이 아이 교육 때문에 내려갔더라. 그 집을 썼다. 화장실도 없고, 추웠지만 숨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무속, 불교 등의 소재를 특정 종교가 싫어할 수도 있는데, 시사회에 참석하면서 혹시 불상사는 없었나?

 

전혀. 영화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지 않았을까. (웃음) 몇몇 목사님이 보러 오시긴 했다. 편지도 보내 주시더라. 어떤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삶이다, 불교는 제사 지내는 기복 신앙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걸 알게 됐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런 식으로 변하게 하는 것까진 힘들지만, 각자 가진 도그마적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해 주는 게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관객은?

 

기억에 남는다기보다는, 스님들이 참 많이 봤다. 일반 관객 만족도가 높았다면 스님의 만족도는 절반이었다. <길 위에서>는 스님용으로 만든 건 아니다. 내가 오로지 궁금해서 찍었고, 내가 궁금해 하는 걸 공유하고자 찍었다. 출입금지, 뒤에서 스님들이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스님들은 그 안에서 매일 왔다 갔다 하니 궁금할 이유가 없다. 관객 중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서 고맙다고 메일을 보내 주셨다. 영화로 자신의 정신이 진일보했다는 평도 있었다. 영화로 진일보했다? 1,000만명이 보는 영화도 한 사람의 정신을 진일보시키기는 어렵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영화가 정신을 진일보하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저런 평은 영광이다.
 
안거 기간에 쫓겨나기도 했는데, 촬영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언제였나?

 

겨울수행 때였다. 겨울수행이 수행 강도가 가장 크다. 스님들도 굉장히 민감해 있고 나 역시도 작품 막바지에 이르렀으면서 제작비도 거의 다 쓴 상황이었다. 이걸 못 찍으면 영화 자체가 무산되는데, 나도 양보 못하고, 스님도 양보 못했다. 대중공사라고 스님 의견을 묻는 자리가 있는데 소환되어서 몇 번 이야기했다. 나를 빼고 대중공사가 2, 3번 더 열렸다. 격론이 벌어졌다. 언성도 높아졌고.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지뢰밭이라는 말이 맞더라. 20년 넘게 이 작업을 했는데, 그 기간 합친 것보다 더 힘들었다.

 

촬영하기 전 기획과 찍고 나서 결과물을 비교하면 어떤가?

 

모양은 비슷한데 깊게는 안 나왔다. 스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았다. 드러내고 나면, 나중에 빼라고 하시더라. 절반의 만족이었다. 촬영하기 전에는 비구니 스님에게 비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전여신설, 팔경법 등도 그렇고 비구보다 낮은 대우를 받기도 하니까. 촬영하면서 느꼈는데, 대부분 없더라. 비구니 스님이 불심도 세고 행복했다. 열에 아홉은 이 길에 확신을 갖고 있다. 촬영 마치고 나서 존경심이 더 커졌다. 우리도 지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이고, 그분도 지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접근했는데 차이가 컸다. 우리가 하수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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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 관객 시대, 우리는 행복할까

 

대학원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는데, 다큐멘터리 영화로 본 2013년은 어떤가?

 

원래 다큐멘터리로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 힘들다. 영화계에 대해 말하자면, 2억 명이나 되는 관객이 영화를 봤다? 놀랍다. 주 관객층에서 본다면 한 사람이 10편, 20편 본다는 말이다. 영화계로써는 행복할 수 있는데, 과연 현실이 만족스러울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영화는 판타지다. 사실주의적인 영화라도 현실에서 최소한 10cm는 떠 있다. 정치적인 문제에서든, 경제적인 문제에서든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으니 판타지에 기대는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일본에서 수많은 만화를 만들어내는 데 신기하고 고무적이라는 지적에 “너무 많이 보면 바보가 된다, 한 두 편 즐길 만화를 보라”고 답했다. 20년 전, 조연출할 때 이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 많이 보세요가 아니라 영화는 영화일 뿐, 만화도 만화일 뿐이라는 게 거장다운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꿈꾸는 후배에게 선배로서 한 마디 부탁한다.

 

해 줄 말이라기보다는 느끼는 걸 이야기하겠다. 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이 안에 모든 궁극의 해답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오면 좀 여유롭지 않을까. 평소 가르치는 대학원생에게도 인생을 모두 걸 만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가르친다. 영화는 방편이다. 영화가 잘 되더라도 3년 동안 그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 없다. 영화는 소모성이다. 다큐멘터리도 그 중 하나고, 인생을 즐기는 방편이며 우리는 인생을 여행하는 여행객 중 한 명이다.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 최선을 다해보고 아니면 다른 길로 가면 된다. 예술을 위해 절대혼을 판다? 그래서 성격이 괴팍한 예술가가 된다? 예술을 통해서 영혼을 고양시키는 거지, 예술의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 인간적인 가치를 훼손하거나 폄하하는 사람이 예술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파괴 욕망을 실현하는 것일 뿐. 영화감독이 소매치기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 소매치기해보는 게 제일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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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사진을 오래 찍을 수 있는 비결? 사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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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사진작가 조선희.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조선희가 찍은 영화 포스터를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2013년에만 <변호인> <관상> <공범> <숨바꼭질> <감시자들> 등을 찍었고, <건축학개론> <7번방의 선물> <써니> <후궁>도 조선희의 작품이다. 패션 매거진 화보, 여러 브랜드의 광고 사진을 비롯해 대한민국 유수의 영화 포스터가 조선희 카메라로 담기고 있다. 대중들은 간혹 TV에 출연한 조선희의 모습을 보고 “무서울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털털한 성격에 거침 없는 발언은 신인 모델이라면 당연히 긴장할 만하다. 그러나 트위터(@zosun_hi) 세상 속 조선희는 옆집 언니 같다. 『네멋대로 찍어라』『왜관촌년 조선희 카메라와 질기게 사랑하기』『조선희의 힐링포토』에 이어 네 번째로 펴낸 책 『조선희의 영감』은 근 4년동안 조선희가 찍은 사진과 글을 모은 에세이다. 뻔한 내용이겠지 싶었는데, 읽고 나니 조선희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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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에 위치한 조아조아 스튜디오에서 조선희를 만났다. 그를 인터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사진작가의 얼굴을 카메라로 담아내야 하는 사진기자는 꽤나 긴장했을 것이다. 조선희는 사진기자의 특별한 주문 없이도 자유자재로 포즈를 취하며, 렌즈에 눈을 맞췄다. 조선희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 ‘고작’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23년 사진인생에도 ‘고작’이라고 평했고, 마흔셋 나이 앞에도 ‘고작’을 붙였다. 사진을 오랫동안 찍을 수 있는 비결을 물으니, “사랑 밖에 없죠”라고 답했다. “사진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건 재밌기 때문이에요. 뭔가 제 생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좋아요. 사진작가로서 위기감? 그런 건 없어요. 저보다 잘 찍는 사람은 많지만, 그 사람들이 조선희처럼 생각하고 찍진 않잖아요. 난 그냥 내 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얼마 전부터 조선희는 스스로에게 “나 잘 살고 있나?”를 묻기 시작했단다. 스타 모델들의 후문, 촬영장 에피소드도 묻고자 했으나 ‘사람 조선희’가 더 흥미로웠다. 

 

내려놓기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요즘


사진을 보려고 『조선희의 영감』을 폈는데, 글이 좋았어요. 글쓰기의 시작이 ‘책 읽기’라는 점도 인상 깊었고요. 사람이 글을 쓰고 싶을 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좋은 글을 읽었을 때만큼 강한 욕구는 없는 것 같아요.


왜 이런 거 있잖아요. 어떤 책을 읽었는데, 작가가 나랑 너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내 식으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알랭 드 보통이 말했던가요? “글 쓰는 작가의 본능은 소통이다.” 저는 사진을 찍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모두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방법의 차이일 뿐이죠.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소통을 하는 거죠. 제가 글을 세련되게 쓰는 능력은 없지만,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4권의 책을 내면서 글쓰기는 내게 일종의 ‘명상’인 것 같아요. 글을 쓰면서 내가 가진 생각들이 정리되니까요. 수많은 상념들을 흘려 보내지 않고, 어떻게 붙잡느냐, 남기느냐의 문제죠. 만약 글을 쓰지 않았으면 놓쳐버릴 것 같은 생각들은 남기는 거에요.


‘영감’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내렸는데, 가장 와 닿은 것이 ‘너무나 익숙한 명제를 다시 깨닫는 것’이었어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다른 시각에서 보려고 노력해요. 본다는 것 자체가 굳이 시각적인 것만이 아닐 거예요. 청각, 후각일 수도 있고 내 마음의 방향인 거죠. 사진 찍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같은 피사체, 같은 콘셉트라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서서 찍는 것과 앉아서 찍는 건 완전히 다르거든요. 사진의 톤 앤 매너는 지켜야겠지만,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틀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것들이 모여 내 자신이 된다고 생각해요. 출발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요. 


글쓰기의 한 방법으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고 했어요. 요즘 눈을 떴을 때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뭔가요?


나 잘살고 있나?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그런 생각 많이 해요. 『조선희의 영감』에도 썼지만, 최근 2,3년 동안 나이듦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주변 사람들을 보면, 참 괜찮은 얼굴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약간 못되게 보인다던가, 안 좋게 변한 모습을 종종 봐요. 안타까운 생각도 들고,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잘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만약 신경이 많이 쓰이는 촬영이 잡힌 날이면, ‘오늘은 화를 안 내야지’라고 다짐하고 나와요. 그렇다고 화를 안 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생각을 한 번 하고 나오는 거랑은 달라요. 좀 덜한 거죠.


잘사는 건 뭘까요? 베푸는 삶인가요?


나누는 일을 포함해서 작은 에티튜드를 지키는 것, 선배나 후배에 대한 배려 같은 거죠. 너무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내려놓기. 요즘 내려놓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데, 오늘 아침에도 스님이 된 초등학교 친구와 문자를 했어요. 내려놓는다는 건, 그럼 내가 사진을 그만 찍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이런 말씀을 하더라고요. “나의 욕심, 나를 위해서 사진을 찍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내가 더 떵떵거리기 위한 사진 작업은 안 한다. 누군가에게 위로, 기쁨을 주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사진 작업을 해야 한다”고. 어려운 문제에요. 알지만 잊을 때가 많고요. 어떻게 보면 책을 내는 것조차도 제 욕심일 수 있어요. 내려놓는다는 명제에 대해서, 3년동안 스님과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도 확신이 오지 않았어요. 욕심과 열정의 차이, 이런 걸 고민하고 있는 중이에요. 다 내려놓으면 열정이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아직 그 차이를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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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주는 사람들만 알면 되지 않을까요?


사진에서는 ‘눈빛’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이제 모델의 눈빛만 봐도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 대충 감이 오겠어요.


짐작은 조금 되겠죠. 그런데 첫인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려고 해요. 짐작은 되지만 평가는 안 하려고 해요. 눈빛만 보고 평가하면, 선입견인 거에요.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거든요. 제가 ‘사랑한다’는 표현도 할만큼 정말 좋아하고 아끼는 후배가 있는데, 이 친구 눈빛은 참 마음에 안 들어요. ‘쟤 눈빛은 왜 그럴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해요. 


조선희는 세다, 강해 보인다는 선입견이 있어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카리스마가 없진 않죠(웃음).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에요. 겉으로 보이는 남성성도 많지만, 오랫동안 저를 지켜본 사람들은 천상 여자 같은 면도 많다고 해요. TV에 보여지는 것들, 촬영하면서 보이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평가할 순 없는 거잖아요.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출연한 모습을 몇 번 봤어요. 다른 작가와 비교해보면 직설적인 편이에요. 모델들에게 화도 많이 내고. 주로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나요?


흠. 잘 기억이 안 나요(웃음). 화를 내고 그냥 잊어버리거든요. 화라는 게, 자기 안에 나쁜 기운을 담아놓지 않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워낙 화를 잘 내는 편인 거고요. 그런데 화를 낸 순간에 끝나버려요. 오래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염세적일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게, 다 까먹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이야기해도 기억이 잘 안 나요(웃음). ‘왜 그랬지? 내가?’ 이럴 때가 많아요. 화를 내고 나서 생긴 버릇이 바로 사과하는 거예요. “내가 화를 낸 건 그 일 때문이지, 너에게 감정은 없어. 오해는 하지마”라고 말해요. 제 뜻과는 다르게 상대는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까요.


‘조선희’ 라는 사진가에 대한 편견, 선입견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스트레스 받았었어요.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내가 전부 컨트롤 할 수는 없으니까요. 처음에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게, 10년 전쯤 친한 기자 언니가 인터뷰를 하던 도중에 “왜 조선희 라는 사람은 정말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밖에 없냐? 왜 중간이 없냐”고 하더라고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거야?’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진심이 통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나 현실적으로 깨달았죠. 그래서 제가 <도수코> 같은 방송을 잘 안 봐요. 마음 아프니까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어떻게 편집됐구나’ 대충 짐작은 돼요.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만 알면 되지 않을까요? 전 모든 사람한테 사랑 받는 사람을 싫어해요.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진실을 많이 숨겨야 했겠어요.


모델들 많이 까다롭잖아요. 특히 톱스타의 경우에는 사진작가가 설득을 해서 촬영해야 신도 많고요. 


사진이라는 게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찍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 번 저와 사진을 찍고 나서, 더 이상 안 찍는 사람도 있어요. 사진작가가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모델의 기분을 잘 맞춰야 하는 임무도 있지만, 설득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가끔 매니저나 기자들이 “‘그 사람이랑 뭐 문제 있었냐고”고 굳이 안 전해져도 되는 말을 전해줘요(웃음). 저도 알죠. 그런데 쉽게 갈 수 있는데 어렵게 가는 거 아니냐는 것도, 그 사람의 생각이니까요. 저는 늘 똑같은 걸 찍을 거면 찍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마음은 아파요(웃음). 


어떤 모델을 볼 때 잘 찍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포즈를 잘하고 안 하느냐, 열심히 하냐 안 하느냐’ 보다는 애정이에요. 비주얼을 떠나서, 상대가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질 때, 좋은 에티튜드를 보여줄 때 더 잘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인성의 문제, 이런 게 다 사랑이죠.


인물은 좋은데 표정이 안 나오는 모델들도 있을 텐데요. 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주나요?


보통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진은 움직임을 정지되게 표현할 뿐이지 말해도 되고 움직여도 상관없어요. 몸과 바디라인이 같이 표현되는 게 좋은 사진이에요. 이런 말을 해주면 뭔가 깨달은 것처럼, 바로 달라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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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발력, 디테일 중요. 엔지니어가 되면 안돼요 


대학에서는 의생활학과를 전공, 사진은 대학 서클에서 배웠어요. 김중만 작가를 사사했고요. 사진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데뷔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을 법도 한데, 1996년 매거진 <IMAZINE>을 통해 이정재 사진을 찍으면서 일찍 주목 받았어요. 당시 편집장에게 “내 시작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신이 있었던 건가요? ‘시작’이라는 표현도 인상적이에요. 


심사숙고 해서 어떤 말이 나올 때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묵혀있는 말이 때가 많아요. 편집장님에게 그 말은 처음 했지만, 이미 몇 년 동안 저한테 묵혀있던 말이었던 거죠. 연습한 말이 아니고 그냥 그 말이 나왔어요. 오랫동안 시작에 대해 생각했으니까요. KBS 서수민 PD가 친구인데, 당시 같이 술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니, 경험이 없다고 일을 안 주면 도대체 언제 경험을 쌓냐. 누구한테나 시작이 있어야 두 번째, 세 번째가 있는 거 아니냐”고.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속에서 그냥 녹아 있는 거예요. 『조선희의 영감』‘내면의 얼룩’에 쓴 글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에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살아온 나의 시간들을 찍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간들이 쌓여 내 속 깊숙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만들고 그것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치게 만든 것이다. 미친 듯이 세상을 향해 마구 셔터를 누르던 이십 대의 나의 시간들은, 내면의 얼룩을 쏟아 내고 싶은 욕구였다. 이십 대엔 아침이면 일어나 아무 이유 없이 소리 내 통곡하며 울던 때가 있었다. 세상을 사각 프레임으로 잘라 내는 것은 곧 나의 오랜 얼룩이며 울부짖음이다. (『조선희의 영감』 p.277)


이제는 거꾸로 누군가의 시작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었어요. 


되도록 많이 기회를 주려고 해요. 사실 저도 김중만 선생님께 감사한 것이, 선생님이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없을 거예요. 제자나 후배들에게 멘토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시작할 수 있는 용기, 도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매개체가 되어주고 싶어요. 5년 동안 대학에 나가고 있는 것도 제가 받은 것을 어떤 식으로든 되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예요. 일주일에 한 번 가지만, 학교가 대구라서 하루를 온전히 소비해야 하는데, 매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을 먹다가도, 학교라는 곳이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론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테크닉보다는 어떻게 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낼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가르치려고 해요. 5년만에 처음으로 가르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에요. 


학교 제자들을 스튜디오에서 연습생으로 받아주기도 하나요?


두세 번 받았고, 이번에도 한 명 받기는 했는데, 학교에서는 안 뽑으려고 해요. 아이들이 교수로서 저를 바라보는 것과 스튜디오에서 만나는 것의 갭이 커요. 제가 친절하고 좋은 교수는 아니지만, 어시스턴트를 대할 때보다는 아무래도 부드러우니까요. 아이들 참을성도 문제고, 3개월쯤 지나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다른 곳으로 가거나 그래요. 제 스튜디오에 있다가 다른 곳에 간 아이들은 “일 너무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대요. 


교육생, 후배들을 뽑는 기준은? 


인연이 닿는 사람을 뽑는 편이에요. 제가 필요로 할 때,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는 게 없으면 받아줘요. 어차피 한 번 보고 그 사람을 다 알 순 없는 거니까요. 너무 안 맞으면 그만 두는 거고요. 그 사람이 저를 필요로 해서 왔는데, 저도 필요한 상황이면 그게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일할 때 빼고는 완벽주의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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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조선희로서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글쎄요. 조언을 많이 안 해봐서(웃음). 일단 사진가는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견된 상황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순발력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디테일에 신경 쓰라고 말해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 이 말이 정말 명언이에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엔지니어가 되지 말라는 거예요. 엔지니어인 사진가는 몇 년 쓰다가 버려져요. 왜냐면 더 신선하고 잘 찍는 애들은 늘 나와요.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몰려가죠. 그러다 모든 걸 소모했다는 생각이 들면 하락세를 걷고 어느 날 사라져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해요. “톤 앤 매너를 유지해라”, “네 생각을 넣어서 너만이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요. 


일반인도 요즘은 사진 실력이 수준급이잖아요. 사진작가로서 위기감은 없나요?


전혀 없어요. 저보다 테크닉적으로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엄청 많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조선희처럼 생각하고 찍진 않잖아요. 저는 한 명이니까, 내 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능력 콘테스트에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테크닉 순위를 경쟁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진 찍는 거 자체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 거라서, 저는 전혀 상관 없어요. 


『조선희의 영감』에 나온 이야기에요. 히말라야 여행에서 만난 친구 크리스가 ‘영원히 걸을 수 있는 비결’로 “아주 천천히 계속 걷는 것, 물을 조금씩 자주 3리터 정도는 먹을 것, 가끔 단 것을 먹을 것”이라고 알려줬어요. 조선희 작가가 사진을 영원히 찍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런 거 없는데… 사랑밖에 없죠. 뭐, 사랑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관계, 로맨틱하고 핫한 사랑을 표현한 소설, 영화에 열광하지만, 아무도 그 오래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잖아요. 사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스무 살 때 찍은 사진의 느낌과 서른 살 때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요. 5년, 10년이 지나면 더 달라지겠죠. 가끔 사진을 찍다가 ‘진짜 확 때려쳐’ 싶을 때가 있어요. 사진 때문이 아니라, 이 바닥 이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들 때요. 그래도 견디는 거예요. 제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좋아하는 게, 어떤 고통도 지나가게 돼있으니까요. 견디는 싸움인 것 같아요. 제가 파리에 갔을 때, 헤물트 뉴턴 전시회가 열렸어요. 내가 그동안 본 그 사람의 사진이 30, 40대 때 찍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60% 이상이 50, 60대 때 찍은 사진이었어요. ‘나는 아직 그 나이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반성 많이 했어요.


사진작가로서의 바람은 보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평생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사진을 찍고 싶나요?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든, 상대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말을 거는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고 노력하려고 해요. 제가 A라고 생각하고 찍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 A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A라고 찍었지만 Z로 느껴도 되고, 자유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뭐 저는 그냥 죽을 때까지 사진을 하고 싶은 게, 글쎄요. 그냥 재밌어요. 물론 스트레스 받고 짜증날 때도 있지만 이 일 자체가 에너제틱한 일이고 사람들 관계, 소통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어떤 면에서는 즐거운 워커홀릭이기도 한데, 재밌어요. 뭔가 내 이야기, 생각을 사람들에게 사진으로 보여주는 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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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 “야구광, 의대 졸업생 맞지만 내 이름은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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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피아니스트, 프로듀서… 사실 그의 활동영역은 단순히 ‘음악’이란 단어로 설명하기 힘들다. 클래식, 락, 재즈 등 장르는 물론, 때론 음악적으로 전혀 다른 분야 간 경계를 넘나들며 매번 다른 이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도전을 두려움 없이 펼쳐왔기 때문이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공식 주제가이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프런티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을 비롯해 다수의 영화음악,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음악감독, 국립극장 예술감독과 같은 이력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필모그래피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독특한 예술가로서 삶을 살아가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야했다. 이를테면 재일 한국인 2세로서 태어나 유년기 겪었던 독특한 환경, 아버지의 바람과 대척점에 있던 자신의 꿈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방황과 고민 같은 것들이다. 평범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스스로 ‘경계인’임을 인식했다. 이후 그는 음악이라는 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경계 속의 삶에서 다시금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음악과 함께한 인생의 긴 여정에서 그가 경험한 축복과 깨달음은 과연 무엇일까? 생애 첫 악보집 『양방언 피아노 콘서트』펴낸 피아니스트 양방언을 만났다.




공연은 내 삶의 카타르시스

얼마 전 성공적으로 개최된 <크리스마스 피아노 판타지> 공연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데요. 어떤 공연이었는지 궁금하네요.

기존 공연과 음반은 오케스트라가 들어가고 많은 음악적 장르들이 무대에서 합류하는 방식이었어요. 영상이 포함되거나 웅장함을 강조하는 콘셉트였다면 이번 공연은 좀 달랐죠. 이제 30년으로 접어드는 음악인생을 한번쯤 정리한다고 할까요? 악보집 출간을 공연 즈음으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내 음악의 내면을 바라보고자’하는 의도였어요. 음악자체가 갖고 있는 핵심적인 부분을 가장 표현하기 쉬운 피아노로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죠. 그래서 피아노와 기본적인 현악기만으로 구성을 했던 것이고요. 그런 점에서 기존 제 공연에서 볼 수 있었던 영상 같은 것도 의도적으로 배제했어요. 부드럽고 깊이 있는 공연을 추구했죠.

공연을 치러 낼 때는 아무래도 평소보다 스트레스가 적지 않을 텐데, 그런 순간에 선생님만의 마인드 컨트롤 법이 있으신가요?

평소보다 다른 것은 확실히 맞아요. 하지만 특별한 마인드 컨트롤이랄 게 없어요.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대 위의 순간을 위해서 달려가는 거잖아요. 그 순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걱정할 여유조차 없어요. 참여하는 연주자가 많으면 악보도 준비해야하고 미리 편곡도 해야 하고…, 정말 달려가는 거죠. 그런 준비가 힘들기는 해도 무대 위에서 좋은 공연이 펼쳐지는 순간에는 승화가 되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죠.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요즘 같은 시기는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데요. 선생님께 2013년은 어떠했는지, 또 2014년의 시작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2013년은 지난 30년 음악생활을 이번 악보집과 공연, 앨범을 계기로 정리하는, 나의 내면으로 돌아가는 한해였죠.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아리랑 판타지’라는 곡을 작곡해 연주하기도 했고, 국립극장에서는 한 달간 여우락페스티벌에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고요. 다른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많이 시작했던 해이기도 해요. 덕분에 2014년은 음악을 통해 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많아질 듯해요. 일본에서 대형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게 될 것 같고, 1월에 열리는 큰 행사에 참여를 할 예정이죠. 중국의 온라인 게임 음악이나 일본의 애니메이션 음악 작업도 해야 하고요. 다양한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해가 될 거예요.

계속 언급하고 계시는 것처럼 이번 악보집 『양방언 피아노 콘서트』출간은 꽤 의미가 있으실 듯 한데요.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듣고 싶네요.

실은 이전에도 몇 번 악보집 제작 제의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제 스스로 납득이 안 갔죠. 마음이 끌리지 않았어요.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번에 음악세계의 제안은 조금 달랐어요. 이제까지 제가 제작한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선곡을 한 악보집을 내자는 것이었죠. 문득 해 볼만한 작업이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에요. 기본적인 선곡은 음악세계에서 제안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 더하고 빼기를 했죠. 나름대로 즐거운 작업이자 고민스러운 작업이기도 했어요. 편곡을 하는 과정도 그렇고요. 오래 음악을 했으니까 예전 곡도 있고 새로운 곡도 있는데, 오래된 곡은 시간이 지나고 지금 시점하고 그 시점하고 생각과 이미지가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그래서 원곡의 느낌을 살리면서 조금 변화를 줬죠. 그런 것이 지금까지 해 보지 않았던 작업인 듯해요. 그런 작업이 아주 좋았죠.

25곡이 담겨 있다고 알고 있는데, 각각의 곡마다 개인적인 추억, 사연들이 있을 듯 합니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면?

하나만 고른다는 건 정말 어려워요. 그럼에도 굳이 말하자면 일단 제 대표곡, 양반언의 곡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프런티어’죠. 그 곡은 태평소와 오케스트라 연주가 들어가는 웅장한 곡인데 그것을 어떻게 피아노로만 표현할지 꽤 고심했거든요.

악보집을 ‘여러분에게 선사하는 음악 팔레트’라고도 하셨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팔레트라고 하면 좀 회화적이죠. 평소에 제 음악은 회화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이나 영상적인 느낌이 컸죠. 그러나 피아노 판타지 프로젝트만은 회화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피아노로서 어떻게 깊이 그리는지. 또 시간이 흘러가는 동영상이 아니고 찰나의 순간이 담겨있는 회화적 감성을 어디까지 깊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거든요. 또 하나는 이 악보집이 일종의 소재라는 점이에요. 각 개인의 음악 팔레트가 있거든요. 팬들이 『양방언 피아노 콘서트』로 단순히 피아노를 치는 것뿐만 아니라 양방언의 음악에 자신의 음악을 덧입히는 과정을 경험해봤으면 하는 바람도 있죠.




경계 위에 선 삶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그지만, 이번에는 이왕이면 ‘피아니스트’, ‘작곡가’ 정도로만 불러달라고 했다. 넓은 영역에서 활동해 오긴 했지만 이번 악보집 『양방언 피아노 콘서트』를 만들며 초심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문득 그가 처음 음악을 접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한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면 그 이전의 삶 또한 궁금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음악을 처음 접한 기억은 언제로 거슬러 올라가나요?

누님이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음악보다 야구를 더 좋아했죠(웃음). 그런데 중학교 들어갔을 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팝에 빠지게 됐어요. 그때까지 들었던 음악과 이 음악이 같은 것인가라는 충격을 받으면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됐죠. 그때부터 밴드활동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의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음대를 가고 싶었지만, 의과대학에 들어가야 했어요. 그리고 대학시절부터 프로로서 음악을 시작했죠. 의대는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버지와 약속 때문에 의사 면허까지 받고 1년간 의사로 근무하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1년 간 근무한 경험 덕분에 결단을 빨리 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결단이었냐고요? ‘역시 난 음악이 좋다’였죠(웃음).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하네요.

재일교포 1세로 고생이 많으셨죠. 일본에 오셔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일본사람과 공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저희 오남매 자식들에게도 힘겨운 삶을 지워주지 않기 위해 의사가 될 것을 바라신 분이셨어요. 하지만 결국 전 딴따라가 됐죠(웃음). 결국 의사를 그만둘 즈음에는 가출을 했어요. 아버지에게 음악은 취미로도 충분한 것이었고, 제 선택은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비판밖에 받을 수 없었거든요. 경제적으로 초기에는 고생했지만, 한편으로 마음은 편했어요. 그때까지 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과 의사로서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해왔거든요. 그 고민이 해소되니 마음이 편해졌던 거죠.

우여곡절 끝에 음악을 하면서 처음부터 목표가 남달랐을 듯 한데요.

아니에요. 처음에는 바보 같았어요.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큰 기쁨이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좋아하는 것을 하면 할수록 환경이 달라지는 거예요. 다른 아티스트와 협업을 하게 되고, 좋은 제안들이 많이 들어왔죠.

재일 한국인 2세라는 수식어는 지금까지도 항상 붙어 다니는데, 그 말 속에는 한국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하는 힘겨움이 깃들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없다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굳이 그런 것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재일 한국인 2세이니까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기보다는 제 관심은 오로지 ‘양방언이라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통해 대중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떤 그림을 그리는가’ 뿐이에요. 가끔 나오는 재일 한국인 2세들이 겪는 어려움, 물론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제게 향하는 시선이 그런 것에 초점 맞춰지는 것은 탐탁지 않아요. 전 그저 다른 재일 한국인 2세와 비슷한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을 뿐이고, 그것이 그리 특별할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재일 한국인 2세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좋을 때는 양쪽에서 환영받지만, 때로는 본의 아니게 양쪽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다는 말씀들을 하시는데요.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신가요?

그런 경우는 많아요. 그러나 그것도 다르지 않아요. 하나하나 인식을 해서 부정적인 것을 쌓기보다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는 것이 좋죠.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님께서는 제게 “경계라기보다 중간자”라고 얘기해 주시더군요. 중간에 있는 사람은 양쪽을 볼 수 있고 한쪽에 속한 사람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중간에 있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저는 그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서 ‘나만의 색깔과 개성이 담긴 음악’을 만들자는 생각을 늘 해요.




음악으로 살아가는, ‘삶은 계속된다’

지난 시간을 돌이키며 그는 변화해 온 자신의 과정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20대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30대는 음악을 선택함으로서 만나게 된 다양한 인연과 기회의 순간이었다. 40대는 자신만의 음악을 솔로활동으로 풀어가며 양상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을 음악과 접목하는 시도를 해왔다. 이제 30년이 된 음악인생이라고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끝이 없다.

음악으로 추구하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최근에는 음악을 통해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어요. 몇몇 의과대학생들이 악기를 배우고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아픈 이들을 위해 연주를 해오고 있는데 지난해 초 그 오케스트라가 저를 초대했죠. 그 친구들과 함께하며 실력은 둘째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지난 크리스마스 공연에도 그 친구들을 불러 함께 공연하고 관객들에게 소개시켰죠. 젊은 시절에는 음악 하나에만 몰입했다면 지금은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에요.

문득 피아노는 선생님께 어떤 악기인지 궁금하네요.

아내보다 항상 가까운 곳에 있는(웃음), 하지만 작곡, 제작이 많아지면 피아노 치는 시간이 많지 않을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느 때는 가까이 다가오지만 또 어느 때는 히말라야처럼 저 멀리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그럼에도 지금처럼 제가 이야기를 할 때는 반드시 빼놓지 않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죠.

작곡을 할 때 영감을 얻는 선생님만의 비결이 있으신가요?

보통 영감을 얻는 다고 할 때는 그림을 본다든지 자연을 느낀다든지 하는데, 제 경우는 그런 것을 ‘영감을 얻기 쉬운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시해요. 열려있는 상태죠. 우리는 살아가며 영감을 접할 수 있는 많은 계기를 만나는데, 닫혀있는 사람은 그런 계기를 그냥 보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저는 13년 전에 산속의 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해발 1천m 정도의 마을로 글을 쓰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죠. 거기서 스튜디오를 짓고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

일 자체가 즐거움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즐기시는 다른 즐거움은 없는지 궁금한데요.

실은 요즘 여가를 즐길 여유가 좀 없어요. 최근에 배철수 씨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그래서 인지 저보고 너무 재미없다고 하더군요(웃음). 굳이 떠올리자면 우리 집에 오래 키운 개가 있어요. 요즘은 늙어서 달릴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나면 함께 산책하곤 하죠. 산 속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좋아요. 공기가 좋고 무엇보다 시간을 자기가 관리할 수 있죠. 도시에 있으면 미팅, 인터뷰…, 물론 필요하고 좋지만, 피하고 싶을 때도 있거든요.

책도 자주 읽으신다고 알고 있는데요. 최근에 본 책 중 채널예스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일본 책이라도 좋을까요? 저는 요즘 시게마츠 기요시라는 소설가의 책을 읽고 있어요. 예전부터 이 작가의 책을 좋아했죠.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초에 이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게 됐어요. 이 작가의 책을 읽으면 가끔씩 눈물이 나는데, 저는 음악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듣는 순간 눈물이 나는 음악이죠.

이번 악보집을 접할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오랫동안 음악을 했지만 처음으로 직접 편집한 악보집이에요. 같이 나온 음반과 함께 들으시면서 피아노를 쳐보시기도 하고, 여러분 각자의 ‘음악’을 풍부하게 하는 팔레트로 활용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관련 기사]

-북한국적과 의사 포기하고 선택한 음악 - 양방언
-양방언, 임권택의 백 번째 영화 <천년학>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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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 피아노 콘서트: Piano Fantasy양방언 저 | 음악세계
“피아노로 말하는 남자, 양방언이 직접 편곡한 생애 첫 악보집!” 솔로, OST 등 장르를 불문한 베스트 곡을 양방언이 직접 피아노 솔로를 위하여 편곡한 연주곡집이다. 새롭게 녹음한 베스트 앨범 「Piano Fantasy」 에 수록된 10곡 이외에 15곡이 더해진 25곡의 양방언 피아노 연주곡이 감각적인 비주얼의 화보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하성란 “글쓰기, 가장 사람다운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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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산문은 독자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치 문장 속 주인공이 나인 것만 같고, 글쓰기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에서는 마주칠 수 없는 작가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산문, 소설과는 또 다른 맛이다. 그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산문을 발표했던 하성란 작가가 『아직 설레는 일이 많다』를 펴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까지, 작가가 맞닥뜨렸던 사건, 품었던 마음을 기록한 글이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 나는 정직했다”고 고백하는 작가. 오래 전 글을 마주하며 ‘10년 나는 어떻게 그런 확신에 차 있었던 걸까’. ‘어떻게 내 생각이 진실인 듯 단정적인 문장으로 쓸 수 있었을까’ 자문해보았다.

홍대 북 카페에서 만난 하성란 작가. 낮고 조용한 음성이 오히려 듣는 사람을 집중시켰다. 작가는 “산문은 많이 쓰면 쓸수록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시대의 흐름이 작가들에게 목소리를 크게 내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 쓸 수는 없고, 또 쓰자니 좋을 수만은 없는 주제의 글들. 작가는 때때로 오랜 고민 끝에 펜을 들곤 한다. 겸손과 교만의 차원이 아니다. 표현할 수 있는 지면이 있다는 건, 들을 준비가 된 독자가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성란 작가는 인터뷰를 할 때면 언제나 탁자 위에 작은 노트를 꺼내 놓는다. 한 순간의 단상도 놓치기 싫은 걸까. 작가에게 질문을 쏟아내면서도 자꾸만 노트를 훔쳐보고 싶었다.
한참 뒤에 읽는 글을 낯설다. 분명 내가 지나온 시간인데도 말이다. 마치 미래에서 타임슬립한 ‘큰 나’와 과거인 ‘작의 나’의 대면이라고 해야 할까. ‘큰 나’는 자꾸 ‘작은 나’의 글을 고치고 싶어 했다. ‘작은 나’도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느 글 속의 “유한한 모든 것들은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있다”라는 문장은 지웠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10여 년 전의 나는 어떻게 그런 확신에 차 있었던 걸까.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진실인 듯 단정적인 문장으로 쓸 수 있었던 걸까. 그 문장을 지운 것에 대한 판단은 지금부터 10년 20년 뒤에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때면 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일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지만 지금까지 알게 된 건 이것이다. 글쓰기가 바꿨다. - 『아직 설레는 일이 많다』 p.8



나이가 든다는 것, 한편으로 기대되는 일

“큰 아이가 대학생인데, 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부터 썼던 글들을 모았어요. 내가 쓴 글 같지 않고, 읽으면서 낯간지러운 글도 있었어요. 인위적인 것들, 자신만만해 보이는 것들, 지나가보니까 바뀐 생각들도 많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변화니까, 그냥 내버려두자고 생각했어요. 한 문장은 빼긴 했지만요. 나이가 든다는 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해요. 또 다른 깨달음이 있으니까요. 천 년을 산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작가도 있잖아요. 독서든, 생활에서의 경험이든. 경험이 많다는 건 쓸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말이기도 해요. 저처럼 평범한 삶을 산 사람에게 조차도.”

올해로 등단 19년을 맞은 하성란 작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습작을 했다.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문청 기간이 꽤 길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 단편소설 「풀」로 등단, 여자에게는 유독 힘들다는 서른 해를 가뿐히 지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등단했더라면 지금까지 글을 못 썼을 거예요. 힘들고 고단했지만 그래서 버틸 수 있었고, 습작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는 지면이 주어지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어요. 제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 건, 그런 지면이 꾸준히 주어졌으니까요.”

지난해 10월에 출간된 『여름의 맛』은 하성란 작가가 2006년 작 『웨하스』이후, 7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하성란표 소설의 정수’라고 평가 받은 표제작 「여름의 맛」은 익숙하면서도 감각적인 이야기다. “당신은 복숭아를 정말 좋아하게 됩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그 맛을 찾아 헤매기 시작하는 주인공 최와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내상을 지닌 김선생 이야기를 통해, 비단 사람이 ‘맛’을 느낄 수 있는 건, ‘행복’이라는 감정이 앞서 있기 때문이라고 독자에게 속삭이고 있다.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카레 온 더 보더」를 두고는 “작가가 현실과 경험을 질료로 삼고 과거의 기억과 조우하면서 집중적으로 분투하는 느낌”이라는 평을 들었다.

“소설을 쓸 때는 내 자신이 느껴지지 않아요. 가공의 장르니까요. 수많은 주인공 속에 투사돼서, 저는 그냥 몸을 대신 빌려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쓰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산문은 달라요. 내가 쓴다는 느낌이 확실히 드니까요. 내 의식이 명료하게 살아있어서 좀 더 정확한 문장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문장도 더 좋게 쓰고자 노력하게 되죠. 순수하게 제 이야기니까요. 소설과는 많이 달라요.”

소설을 마감하고서 작가는 기진맥진하지만, 어디에 비할 데 없는 상쾌함을 느낀다. 산문을 쓰고 난 뒤는, 마음이 다소 무거워진다. “쓸 때마다 주제가 달라지지만, 이 시대를 집어내야 한다는 의식 같은 게 있어요. 내 위치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하고, 어느 정도 톤도 조절해야 하고요. 그래도 소재에 대한 자신은 있어요. 경험이 점점 많아지니까요.”

질료가 많아진 까닭일까. 하성란 작가의 글쓰기는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 주부작가라는 의식에서도 벗어났다. 과거에는 작가와 주부와의 관계에 있어, 무게 중심을 가운데로 뒀지만, 이제는 양쪽에 두기 시작했다. 한결 편안해졌다. 작가로서의 자의식보다 정체성에 무게의 추를 맞췄기 때문이다.
이맘때가 되면 어머니는 쑥쑥 들어가서 드디어 바닥을 보이는 김칫독 때문에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50포기가 넘는 김장을 해두었지만 김치볶음을 해서 도시락 반찬으로, 찌개로 한겨울을 나고 나면 별수 없었다. 봄까지는 좀 남았고 먹여야 할 입은 많고, 부엌을 서성이던 어머니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다는 것을 안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무얼 먹고 컸는지, 음식이 언어처럼 사람의 얼굴을 변화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아직 설레는 일이 많다』 p.139



찾아보세요. 아직 설레는 일 많을 걸요?

“겨울에는 봄호 마감을 해야 하니까, 겨울이라는 계절감만 느끼는 게 아니에요. 마감이 맞춰서 계절이 지나가고, 소설 몇 개 쓰면 1년이 금세 지나가버리니까. 이렇게 시간이 도둑맞듯 지나가는 게, 저만 느끼는 건 아니겠죠. 때로는 시간이 이렇게 빠를 수 있나? 생각하기도 해요. 그런데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간다고 하면, 그래서 우리에게 박탈감이 없으면 깨달을 게 없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시간의 부조리함에서 시작된 뭔가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건 아닐까. 시간이 고여있다면 우리가 정말 변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짧다면 짧은 생.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뇌를 하고, 학문이 존재하고, 작가들이 글을 쓰는 지 모른다. 표제작 「아직 설레는 일이 많다」 제목을 두고, 작가에게 질문을 했다. 요즘, 작가에게 설렘을 준 일은 무어냐고. “크리스마스가 예년보다 설렜어요. 큰 딸아이가 처음으로 사귄 남자친구와 저녁을 먹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떨릴까?’ 오래 전 흘러가버린 감정들이 다시 찾아오더라고요.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7살 초등학생인 둘째 아이를 보면서도 별안간 행복하고(웃음). 설렌다는 게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야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니까요.”

작가는 지난해 대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를 보고 있으면, 새삼스럽기만 하다. 책 읽기를 즐기고 반듯한 문장을 잘 쓰는 큰 딸은 국문과에 입학했다. 순수문학을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출판사 일을 해보고 싶단다. 부모와 같은 길을 걸으려는 딸을 보며, 작가는 어떤 마음일까.

“우리나라에서 대입 과정은 정말 힘들잖아요. 딸아이는 자연스럽게 국문과를 선택해서 진로에 따라 갔어요. 딸을 통해 청년들의 구직, 현실을 보게 돼요. 1학년인데도 벌써부터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고, 얼마 전에는 대화를 나누다가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어요.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현실은 또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는 거예요. 과거나 지금이나 엄마들이 자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이제 벗어났어요. 어느 순간부터 나와 너무 낯선 타인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어요.”

자식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는 것. 거리감을 느낀다는 의미보다는 내 자식이라는 정체성보다 아이 자체로서 존재를 인식해준다는 뜻일 것이다. 하성란 작가는 때때로 딸아이가 쓸 작품들을 상상해본다. ‘어떤 문장으로, 어떤 이야기를 쓸까? 내가 쓰지 못한 어떤 비밀을 들여다볼까?’ 마치 좋아하는 후배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듯이 설렌다. 물론 글을 쓴다는 전제 하에서의 일이다.

“후배 작가들의 책도 많이 읽어요. 황정은 씨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도 재밌었고 최진영 씨 『팽이』, 박솔뫼 씨의 『백 행을 쓰고 싶다』도 좋았고요. 소설이 갖고 있는 특성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이들은 어떤 비밀을 알아채고 이런 글을 쓰게 될까? 영상시대라서 그럴까?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무슨 부분이 있나?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면 궁금한 게 많아져요. 그 사이에서도 정통적으로 소설을 쓰는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보면, 작가의 개성이라는 생각도 들고. 어떤 면에서 우리 때와는 어법이 달라졌음을 느끼죠.”

2년 전,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 있었던 일을 작가는 생생히 기억한다. 어머니 몰래 숨어 소설을 써왔다고 고백한 소설 당선자의 어머니를 회유하느라 애를 썼던 일이다. “문학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어머니의 말에 당선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성란 작가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여러 생각들로 착잡했다. 등단의 문턱을 넘었던 1996년 기억도 떠올랐다. 그리고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혹시나 소설 거리가 될까 전해주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도 느꼈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고 작가는 너무도 많아요. 데뷔작을 끝으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는 작가들도 많고요. 작가들을 지원하는 행사도 많이 줄었어요. 정부에서 홀대하기 시작하면 독자들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어요. 한국작가회의 사업인 ‘은수저’도 정부의 지원이 없었으면 끊겼을 거예요. 은이라는 게, 금방 변색이 되기 때문에 다시 닦아서 쓰는 거잖아요. 닦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세상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니까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많이 아쉬워요.”
내 주위엔 오랜 무명을 떨쳐낸 이도 있고 아직 기회만 엿보고 있는 이도 있다. 친구는 자신이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랜 무명의 시간을 버텨온 힘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당나귀처럼 튼튼한 그의 이가 떠오르곤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누구보다 운이 좋은 작가였다. 박수와 환호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랬기에 이들의 재출발에 누구보다 큰 박수를 보낸다. 그간 묻혀 있던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기쁨도 크다. - 『아직 설레는 일이 많다』 p.39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주는 ‘글’의 힘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예전에는 굉장히 열심히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요즘은 문장에 대한 책임감이 많이 생겨요. 독자에게 말을 쉽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말로 사람을 만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글로 만나는 일이 저에겐 가장 어울리고 편안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외과의사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이제는 작가라는 일에 더욱 확신이 서요. 가장 잘할 수 있고 흥미로운 일이니까요. 또 이 일이 어쩔 수 없이 밖으로의 관심을 갖게 하니까, 그게 사람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에요.”

작가가 산문을 통해 독자에게 속삭이고 싶은 건, 작가의 의도를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본심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짧은 글에 자신을 빗대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그것으로 작가는 족하다. 독서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작가라는 삶이 힘들기 때문에 문청에서 끝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일처럼 즐거운 일이 있는가 싶어요. 내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세계 안에서 창조하는 일이니까요. 창작이라는 건 아주 재밌는 일이고요. 물론 쉽지 않은 과정도 있지만,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어요. 재주 많은 후배들이 많은 글을 써줬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인데, 요즘엔 여름이 워낙 더워져서 예전만큼 즐기지 못해요.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견디는 것 같고요. 얼마 전에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던 식물들이 전부 다 시들었는데, 걱정 안 했어요. 얼마 있으면 다시 솟아날 거니까. 물론 그랬고요. 제가 바라는 봄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예쁘고 여린, 생명력 있는 것들을 통해 쇠퇴되어가는 우리가 다시 기운을 받으려는 것 같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면 작가는 변덕스러워진단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건 정작, 1월이 아니라 봄이라고.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볼까, 운동을 해볼까, 발동이 걸리는 건 3월 달력을 넘긴 후다. 새순이 돋을 때쯤이면 작가에게 다시 한 번 연락을 해보련다. 작가의 변덕으로부터 쓰여진 글은 왠지 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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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하성란 저 | 마음산책
“쉽게 쓰지 않는 작가” 하성란. 올해로 등단 18년을 맞이한 그가 10여 년 동안 써온 62편의 산문집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를 내놓는다. 등단 후 1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썼던 글들, 작가의 성장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산문집이다.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곳곳에는 유년 시절, 문청 시절의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난 시간 속에서 작가는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자랐고, 엄마가 되었다. 단어와 단어, 글줄과 글줄 사이에, 작가의 인생이 흐르고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자우림 “대한민국에 김윤아 같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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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스물하나」 를 듣고 놀란 이들이 여럿 되었을 것이라 예상한다. 어느덧 9번째 앨범, 밴드의 어깨엔 어느덧 「일탈」 의 강렬함이나 「매직카펫라이드」 의 발랄함 대신 오랜 경력에 따른 관록이 살포시 얹혀 있었다. 그렇기에 감행할 수 있었던 이번 변신은 반전의 촉매제가 되어 성공적인 결과를 불러왔고, 이것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지지대로 분하며 밴드의 생명력을 연장시켰다. 또한 가뭄이 든 가요계에 내린 단비와도 같은 컴백이기도 했다.

어느 한 콩트 프로그램에서도 소재가 되었듯, 대개 자우림은 ‘김윤아의 밴드’로 통칭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인터뷰를 마친 뒤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다른 세 명의 멤버가 없었다면 김윤아가 이 정도로 부각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묵묵히 지켜오며, 각자의 욕심은 거둔 채 배려와 조화를 중심에 놓고 이뤄낸 17년이라는 값진 성취. 그 끝에서 만난 자우림은 과거 혹은 현재보다 미래가 훨씬 빛날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었다.




조용필도 그랬듯 요즘 아홉수라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어디서 들었는데 정말 고생하면서 만든 앨범이란 얘기가 있더라.

김윤아 : 힘들었단 얘기는 제가 제일 많이 했는데 진짜 죽을 뻔했어요.

팀워크 측면에 있어 굉장히 이전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정서적으로 보자면 이전의 고유한 느낌과 이번의 새로운 느낌이 잘 교배가 된 것 같고. 대강의 느낌으로는 이번이 한층 톡톡 튀는 듯한 밝은 이미지가 그려진다. 첫 곡과 마지막 곡이 수미상관을 이루는 느낌도 드는데. 의도한 바인가.

김윤아 :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저한테 이 앨범은 개인적인 얘기가 정말 많이 들어간 앨범이에요. 다른 느낌이 나는 건 자우림이 여태까지 작업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과정을 납득시키려고 멤버들을 계속 설득하기도 했고요.

그 다른 느낌이란 건 뭔가.

김윤아 : 저는 밝다 어둡다라는 기준으로 다르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개입이에요 개입. 여태까지는 각 파트를 믿고 맡기는 식이었죠. 선규 오빠가 솔로 파트를 연주하고 있으면 지금까지는 그 부분은 본인이 판단해서 끌고 가야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안 했어요. 모든 걸 다 관여했죠. 원래는 대강 흐름을 정한 다음 각자를 믿고 가는 스타일이었어요.
이선규 : 확실히 전에는 즉흥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정말 많이 치밀한 쪽으로 갔어요.
김윤아 : 사실 이전부터 뭐가 모자란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그 자체도 자우림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재밌게 끌고 가려 했었죠. 이제는 다른 걸 할 시기라고 느낀 게 8집 끝날 때였어요. 작정했죠.

예를 들어 전체적인 디렉팅을 맡으며 이선규의 기타를 이번에는 자우림의 기타로 만들려 했다는 이야긴가.

김윤아 : 아니오. 그렇게 말로 나눌 수 있는 건 아닌거 같아요. 이 전에는 내가 생각한 솔로, 리프를 강요한 적이 없었어요. 알아서 하라고, 내 방향과 다르지만 않으면 OK. 그렇게 해서 8집까지 내다보니까 쉽게 말해 질렸어요. 그냥 편하게편하게 가는 그런 면 자체가. 그러던 차에 8집 직후 몸까지 굉장히 안 좋아져서 은퇴할 수도 있겠구나, 강제 은퇴당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죠. 그 땐 바이러스 때문에 굉장히 작은 소리에도 메가폰을 귀에 대고 소리치는 거 같았어요. 면역력이 굉장히 떨어진 탓에 여러 사인들이 왔었는데 다 무시하고 일을 하다보니까 그게 결정타였죠. 주치의 선생님도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을 못하던 상태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지금에 굉장히 감사해요. 작업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으니까. 어쨌든 그 즈음부터 자우림의 작은 끝맺음. 다음 앨범을 자우림과 같이 하게 되면 이러이러하게 해야겠다. 차근차근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럼 그 김윤아씨 생각에 다들 동의가 되었던 건가. 작업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나.

이선규 : 사실 이전에는 다들 즐겁게 좋게좋게 하다 보니 고민하고 치열하고 그런 건 없었던 거 같아요. 근데 이번에는 한번 그렇게 해보자서 했는데, 결과물이 좋으니까 만족하고 있죠.
김진만 : 윤아 얘기를 이어서 하자면, 윤아가 아프고 8집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고 나니 앞으로 앨범을 몇 장을 더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고민은 더 하게 됐지만 예전보다 더 치열해진 건 맞는 거 같아요.

분명 의도가 강한 앨범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분 나쁜 의도, 억지로 등을 떠밀어 절정으로 겨우 올라가는 강요가 아닌, 한마디로 말해 기분 좋은 권유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러한 변화에는 나가수가 영향도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연하면서 얻은 것이라면 무엇인지.

김윤아 : 팀 내 전제로 삼았던 것은 다른 팀들이 하지 않았던, 그리고 자우림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는 거였어요. 백현진 형하고 했던 듀엣이나, 「Abracadabra」 도 나가수용 편곡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하면서 어느 순간 ‘그래 너네 자우림은 원래 그런 걸 하니까’라는 일종의 어떤 감화를 받았어요.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우리 방식으로 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리고 사실 그 전까지는 음악을 거창하게 펼치는 것이 쑥스럽고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했어요. 다른 팀의 큰 음악을 들으면 멋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자우림이 그러면 별로 안 멋있어보여서. 그랬었는데 스케일 큰 음악이 우리한테 잘 맞는 옷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9집이 그런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믹싱이 굉장히 잘된 거 같다. 개입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의도성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조화라는 측면에서 아주 좋다. 그런 측면에선 어땠나.

이선규 :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굉장히 많이 썼는데요. 17년째 해온 것들이 앨범 안에 다 묻어나와 있는 것 같아요. 몇 년 전부터 후배 밴드 동생 녹음, 프로듀싱, 믹싱도 하고 있는데 얼마나 노력을 해봤나. 조금 치사하지만 얼마나 돈을 많이 썼느냐의 문제도 있는 듯 하고.

마스터링까지 끝난 앨범을 접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가.

구태훈 : 자우림 같은 밴드가 국내에 100팀이 있었으면 좋겠다. 팀을 떠나서 굉장히 좋은 앨범인데 이런 아티스트가 많으면 행복하겠다라고.(웃음)
김진만 : 능청스러운 거죠(웃음)
구태훈 : 그 맛에 해야죠.
이선규 : 대표가 한 얘기랑 비슷해요. 좋은 앨범을 내는 팀도 물론 많은데, 잘되는 팀이 많았으면 좋겠다라는 것. 시장에서.
김진만 : 그동안의 자우림은 예를 들어 큰 그림의 곡이 필요했을 때 우리 인생은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적당히. 이랬었는데 이번에는 마찬가지로 큰 그림의 곡이 필요할 때 아예 우주만 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런 쪽으로 성공한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구태훈 : 한 가지 덧붙이자면, 뮤지션들이 음악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요. 그 사이에서 그래도 이 팀은 굉장히 본질에 충실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자랑이네요.(웃음)
김윤아 : 두 가지 느낌이었어요. 마스터링 끝나고 와 드디어 끝났다. 제정신이 돌아온 이후에는 드디어 끝났다. 이렇게.
김진만 : 마스터링 끝나면 보통 뮤직비디오나 여러 스케줄 때문에 굉장히 빡빡해지는데 이번만큼은 윤아가 너무 홀가분해했어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워 하는 거 같다.

김윤아 : 9집이라서 특별히 만족스러운 것 같지는 않아요. 성향상 성취욕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해냈어!’ 이런 느낌은 전혀 없고, 어쨌든 끝났으니까 기분 좋다. 다 쏟아부었으니까가 아니라 잘 끝나서 좋다라는 느낌이 가장 어울리는 듯합니다.

사실 트랙 리스트가 정해지기 전에 앨범을 접했었는데, 확실히 순서가 중요한 것 같다. 그 땐 안나가 제일 마지막이었는데 이렇게 에디팅 하고 나니 또 얘기가 다르다. 왜 안나를 첫 트랙으로 정했는지.

김윤아 : 그냥 앨범을 딱 여는 사운드였어요. 뒤쪽으로 가면 배치할 곳이 없더라고요. 사실 「Dear mother」 를 처음에 배치하자는 얘기도 많았어요.
(편곡 자체의 느낌이 블루지하다고 하자) 이선규 : 워낙 어렸을 때부터 블루스를 쳐서, 그런게 흘러들어간 것 같아요.




타이틀 곡 「스물다섯 스물하나」 는 여태까지의 분위기와 확실히 다르다. 옛날에 내걸었던 곡들과 비교하면 우선 스트링자체도 강하게 들어가고 건반도 그렇고. 이번 곡을 들으며 확실히 느낀 건 예전부터 자우림은 약간의 뽕끼가 있다는 거다. 덕분에 노래의 생명력이 길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김윤아 : 나이일수도 있는데… 그게요, 즉흥적이죠.(웃음) 노래를 만들다 멜로디와 가사를 같이 떠올렸어요. 딱 맞더라고요.

다른 멤버들은 이 노래 듣고 어땠나.

이선규 : 누구나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굉장히 멋있잖아요. 윤아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 노래처럼 앨범이 전반적으로 지나간 것을 돌이켜보고 반성하는 기조이지만 그 와중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긍정성이 있다.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실험을 하고 그 와중에 많은 고통도 있었을 텐데, 어쨌든 그러한 새로운 점이 기존의 자우림이 표방했던 것들과 굉장히 잘 섞였다.

김진만 : 다들 연륜, 인생이 쌓였으니까. 슬프고 힘들다는 얘기보다는 힘든 걸 스스로 반추해보는 쪽으로 사람들이 변하는 게 아닐까요.
김윤아 : 밝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저는 감정에 대한 건 한곡도 울지 않고 쓴 게 없어요. 저한테는 굉장히 슬픈 앨범이죠.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느 때보다도 많이 반영돼 있기 때문에. (가장 많이 반영된 곡이 뭐냐고 묻자) 다네요…다…

본인의 이야기라고 친다면 ‘이카루스’는 과욕을 상징하는 신화적 인물인데. 본인이 이카루스라는 생각을 하나.

김윤아 : 사실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잖아요. 과욕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가면 안 돼 이건 너희의 영역이 아니야라고 듣는 순간 생기는, 그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교육받은 내용이나 관습보다는 자기의 탐구욕을 이루려는 마음이랄까.

이번엔 연주자들에게 묻고 싶은데, 사운드라는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뭔가.

김진만 : 저는 「님아」 요.

그러고 보니 「님아」 하고 「무지개」 의 보컬이 특징적이더라.

김윤아 : 곡마다 다 다르게 해봤어요. 「님아」 는 기타와 베이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것도 있고. 멜로디나 소재가 에스닉해서 그렇게 맞춰 불러봤습니다.

그럼 가장 만족스럽게 나온 보컬은.

김윤아 : 특별히 고를만한 건 없어요. (전체적으로 좋다는 얘기냐고 묻자) 그런 건 아니고, 부족한 거 같아서요.(웃음) 믹스가 잘 돼서 돋보이는구나.

이번 앨범을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줬으면 하는가.

김윤아 : 의도는 아는데 조금 엉뚱하게 가자면, 좋은 장비로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사운드적인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 앨범은 확실히 소울이 들어간 느낌이 들어서.
김진만 : 보완을 하자면, 컴퓨터 스피커로 들어도 좋은 음반들이 많아요. 근데 9집은 그렇지 않거든요.




벌써 17년째 활동 중이다. 활동하는 모습으로 인하여 예전부터 세상에 대해 다들 불만이 있을 것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 같다.

김윤아 : 부조리에 대해 불만이 많죠.
구태훈 : 누가 법을 만들었나.
이선규 : 저는 불만이 없어요.
김진만 : 거짓말을 해 왜 인터뷰 앞에서.(웃음)
이선규 : 아뇨 전… 피곤하다는거…?
김진만 : 사실 전 ‘하면 된다’는 말이 싫었어요.
김윤아 : 그것도 부조리의 일부지.
김진만 : 될 걸 하라는 얘기가 더 맞아요.

될 것을 하는 데에서 성취감을 얻는다?

김진만 : 저흰 지금까지 될 것만 했어요.
김윤아 : 응?(웃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김진만 : 어떤 분들은 연기도 하고 노래도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네 명 다 ‘이걸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싶은 건 안했어요. 그렇게 17년을 해왔죠.

그렇다면 17년 동안 자우림을 하면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꼽는다면.

이선규 : 윤아가 아파서 쓰러져 있을 때, 그러니까 8집 만들자마자요. 사실 그전까지는 자우림의 존폐에 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못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구태훈 : 저는 4집 앨범.
김진만 : 저도 4집 얘기하려고 했는데. 지금이랑 같은 엔지니어(요시무라 켄이치)가 믹싱했는데. 그 친구 만나면서 이전까지 어떻게 해야하나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믿음도 생기고 사운드의 정체성도 찾았죠. 좋은 동료를 만났어요.
구태훈 : 맞다.
김윤아 : 전 역시 블루데빌이죠. 그날이 데뷔 날 같아요. 황인뢰 감독님 팀이 유앤미블루 보러 왔는데 엉뚱하게 우리가 연주하는 걸 보셨어요. 그걸 보고 맘에 들었는지 「헤이헤이헤이」 를 너희가 써보라고 제안하셨었어요.

가장 자랑스러운 노래를 꼽아 본다면.

김윤아 : 되게 어렵네요. 6집 「Beautiful girl」. 사실 6집이 제가 생각하는 자우림 앨범 중 가장 아름다운 앨범이에요. 「나사」 라고 제목 없이 나온 비정규 EP곡. 꼽으려니까 굉장히 많아진다. 갑자기.(대중들과 호흡했던 곡은 어떠냐고 묻자) 그건 다 자랑스러워요. 굉장히 감사하죠. 초기에 히트한 곡들은 나중에 싫어지는 경우가 많다던데 아직은 재밌어요.

자신을 뮤지션으로 만든 밴드나 아티스트, 앨범이 있다면.

이선규 : 결정적인 건 크라잉넛 공연을 보고.
김윤아 : 에?
구태훈 : 의왼데 그건.

같은 밴드인데 이 사실은 몰랐나.

구태훈 : 처음 듣는데요 그건.
이선규 : 95년에 홍대 주차장에서 공연하는 걸 진만이랑 길가다 보고 저 정도면 나도 음악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전원 대폭소). 어렸을 때 기타를 빨리 치거나 그런 건 잘 못해서 음악할 생각을 못했는데 그 공연을 보고 아 나도 해도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죠. 앨범은 비틀즈의 <Abbey Road>.
구태훈 : 저는 목사님 때문에. 교회 일을 하려고 하나씩 배우다 음악을 시작하게 됐어요. 개인적으로는 대중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가스펠이 더 좋았고 지금도 그렇죠. 대중음악 듣고 눈물 흘려본 적은 없으니까.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사가 아무리 좋아도 눈물은 안나요. 오히려 그 당시에 찬송가를 목사님이랑 같이 연주하며 굉장히 전율을 느꼈죠. 드러머는 역시 레드 제플린의 존 본햄(John Bonham). 완벽하게 밴드 드러머인게 좋아요.
김윤아 : 저는 시네이드 오코너(Sinead O'Connor)요. 처음에 들은 곡은 「Nothing Compares 2 U」. 그 곡은 프린스를 리메이크한거지만 정말 달라요. 특히나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부분은 ‘내 생각을 이렇게 넣을 수 있구나’라는 거. 그 전에도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많았지만 고1때 시네이드 오코너 앨범을 처음 듣고는 지금까지 제가 생각하는 좋은 보컬리스트의 최우위를 다투고 있어요. 어렸을 때 집안환경이 엄해서 대중음악을 통제 당했었는데 중2때 두시의 데이트를 방문 몰래 잠그고 듣고, 독서실에서 AFKN 몰래 듣고 그랬죠. 어쨌든 중학교 때부터 곡을 쓰는 걸 취미로 삼았는데 그 전까지 되게 서정적인 이야기가 위주였다면 시네이드 오코너를 접한 이후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 영향을 준 앨범은 퀸의 <The Night at the Opera><A Day at the Races>이 두 앨범. (여성 뮤지션으로서의 로망은 누구냐고 묻자) 저는 누구처럼 되고 싶다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시네이드를 굉장히 좋아하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그처럼 살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김진만 : 저는 들국화 1집. 전까지는 음악을 듣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중1 수련회 때 밴드를 만들고는 음악이란 게 만들 수도 있는 거구나라는 걸 알고는 기타를 샀어요. 해보고 싶다는 생각. (베이스 최성원이 보였나) 그때는 몰랐죠. 그때는 인권이 형님이 더 잘 보였어요.

어쨌든 밴드의 중심은 김윤아인데, 세 멤버가 김윤아에 대한 경배를 해본다면.

구태훈 :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웃음)
김윤아 : 화장실 갈까.
이선규 : 훌륭한 싱어송라이터죠. 제 취향이 많이 섞여있어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국내에서 넘버원으로 꼽고 있어요. 운이 좋게 같은 밴드를 하고 있고요. 특히 이번 앨범에서 「슬픔이여 이제 안녕」 을 좋아하는데, 옛날엔 날도 있었고 불만도 있었고 그랬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녹은 느낌이라 좋아요. 많이 편해 보이고, 곡들이 이제. 사실 자우림은 객관적으로 보기가 좀 힘들어요. 대신 윤아 솔로는 공연 때 볼 수 있잖아요. 하… 그 야상곡, 야상곡을 우연히 들었는데. 사실은 히든싱어라는 프로그램에서 윤아 모창 하는 친구들이랑 비교하면서 들어봤는데 달라도 너무 다르더라고요.
구태훈 : 저는 20년 동안 봐왔잖아요. 되게 오랜 친구잖아요. 저는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김윤아 : 하지마.
김진만 : 독하다.
구태훈 : 윤아를 대신할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근데 또 인간적인 면으로도 굉장히 좋고.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 스스로도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굉장히 치열하게 살아요. (출산 후 달라지지 않았냐고 묻자) 아니에요. 핵심은 같아요. 음악적으로도 만족스럽고요. 언제나 기대 이상이죠.
김진만 : 전 제가 들어본 대한민국에서 발표된 노래 중에 야상곡이 제일 좋아요. 인간적으로 보자면 저는 대한민국에 김윤아 같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으면 좋겠어요. 50% 정도? 지금 대한민국이라면 50%가 들어가야 나라 밸런스가 맞을 것 같아요. 그만큼 솔직하고, 예의바르고.

반대로 17년 해오면서 윤아 씨의 전체적인 이상, 지향 같은걸 완벽하게 지켜주고 도와주는 세 멤버다.

김윤아 : 이런 팀은 세계 음악신에서는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 음악 신에서는 당분간 나오기 힘들지 않을까요. 남자 셋이 도사님들이에요. 현명하고 인격도 훌륭하고. 인생에서 남자들은 뭐가 중요한지 모른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 셋은 뭐가 중요하고 뭘 지켜야 되는지 알아요. 제가 만약 이런 성향의 인격자가 아닌 다른 동료들과 일을 했다면 저도 못 참고 그들도 저를 못 참았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 최고의 멤버들이 아닌가 싶어요.

인터뷰 : 임진모, 황선업, 이수호
사진 : 이한수
정리 : 황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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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연주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어떻게 이겼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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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누른 스물셋 무명작가의 등장’, 이 흥미로운 이변의 주인공은 작가 정연주와 그녀의 소설 『기화, 왕의 기생들』 (이하 『기화』) 이다. 지난해 5월, 예스24는 웹 사이트 내에 새로운 코너 ‘e연재’를 개설하면서 정연주 작가의 『기화』를 선보였다. 그리고 10월부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제3인류』를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한국에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인 만큼 베르베르의 『제3인류』에 대한 기대는 뜨거웠고, 공개와 동시에 조회수 1위를 기록할 것이라는 예상은 확신에 가까웠다. 그러나 『기화』의 열기는 그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뜨거웠다. 『제3인류』를 제치고 조회수 1위를 굳건히 지켜낸 것. 이미 4개월 전에 연재가 종료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기화』는 누적 조회수 32만여 건을 기록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12월에는 2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영화화 판권도 계약한 상태다.

『기화』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기생 ‘가란’의 사랑과 성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걸인 출신으로 기방의 부엌데기로 살아가던 그녀는 궁기(宮妓)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고, 상처를 간직한 채 왕위에 올라 망나니라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가는 왕 ‘이훈’과 만나 운명 같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사랑과 상실의 감정들과 함께 권력에 대한 욕망, 그로부터 비롯되는 암투와 배신까지도 두루 조명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필체와 눈앞의 영상을 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는 『기화』를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기화, 왕의 기생들』, 목숨 걸고 필사적으로 썼어요

『기화』의 독자들은 작품 속에 그려진 섬세한 감정들과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에 한 번 놀라고, 그 모두가 스물셋 어린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이런 작가가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걸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e북을 출간한 바 있다. 『인어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야수의 청혼』『붉은 매듭』『헤스키츠 제국 아카데미』『도깨비 각시』에 이르기까지 판타지 소설 분야에서 차근차근 내공을 쌓던 중이었다. 그런 작가에게 역사 로맨스인 『기화』는 분명 모험과도 같은 길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녀는 그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그 시작에는 예스24 과의 만남이 있었다.

“예스24 담당자 분께서 말씀하시길, 제 필체가 담담하니까 판타지 소설보다는 동양 로맨스 소설에 어울릴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때마침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열기가 식지 않고 있었는데, 조선을 배경으로 역사 로맨스를 써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셨죠. 처음에는 남장물을 떠올렸었는데 양효진 작가님이 「파란만장 태자호위담」 을 연재 중이셔서 포기했고요. 담당자 분께서 ‘망나니 왕을 갱생시키는 기생의 이야기’가 정말 핫할 것 같다고 하셔서,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시작하게 됐어요.”

이후 3개월 동안 시놉시스를 다듬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기화』는 독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연주 작가는 지금과 같은 뜨거운 반응을 예상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매력적인 소재와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스스로 ‘목을 내걸고 쓰는 느낌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썼기 때문이다. 처음 『기화』의 연재 제의를 받았을 때, 정연주 작가는 이제 막 전업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녀는 세무회계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자세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면서 이중생활을 해왔던 것. 이루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이 몰려와 고단한 시간들이 계속됐지만 소설 쓰기의 즐거움과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전업 작가로 살아갈 것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세무사 사무실 일이 싫었던 건 아니에요. 힘들긴 했지만 대학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기도 했고, 좋은 직장 동료들과 일하는 게 즐겁기도 했어요. 하지만 소설을 재밌게 읽고 쓰던 사람이 책도 거의 읽지 못하고 숫자만 계속 보고 있다 보니까 감성이 메마르는 느낌을 받았어요. 뭐라고 할까, 내가 회색으로 죽어가는 느낌 같은 거예요. 점차 감성이 마모되어 가면서 삭막해져가는 게 느껴지는데, 못 견디겠더라고요. 마침 그때 연재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일과 병행하는 게 너무 힘들었죠.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한계가 온 거예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죠.”

정연주 작가가 처음 부딪힌 벽은 가족들의 만류였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누구도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겠다고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1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며 모은 천만 원을 담보로 설득을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그녀는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보장받았다. 기한은 1년, 그 뒤에도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이 뒤따랐다.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보다 더 애가 타는 이는 그녀 자신이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작가로서의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 속에서 『기화』의 연재 제의를 받았을 때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 작품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필사적인 노력 끝에 마침내 『기화』는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작가는 ‘이제 작가로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기화』를 끝내고도 독자들의 반응을 얻지 못하면, 직장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면서 작품을 계속 쓰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작가의 길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기로 한 거죠.”

정연주 작가에게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열어 준 작품 『기화』. 이 작품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 중에는 분명 작가의 절박한 심정과 간절한 바람, 그리고 무서운 집중력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일리 없다. 『기화』가 가진 매력 혹은 힘은 무엇일까.

“매력적인 요소들을 철저하게 계획해서 넣기는 했어요. 신분 상승이라는 코드도 그렇고요. 모든 로맨스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캐릭터의 매력도 뛰어났죠. 일단 여자 주인공이 당찬 캐릭터이다 보니까 현대 여성들하고 맞아 떨어졌던 모양이에요. 운명이라든가 사랑에 이끌려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자들이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여자 캐릭터, 그 당당한 모습을 좋아하셨던 것 같고요. 또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도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상처 받았지만 사실은 상당히 괜찮았던 남자 ‘이훈’이 있었고, 키다리 아저씨 같은 ‘윤재민’이 있었죠. 무엇보다 『기화』는 러브스토리에만 치중한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에 대한 자아실현과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미숙했던 사람이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성장해서 더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담았죠. 그 부분에 많은 공감을 가져 주셨던 것 같아요.”

상처를 딛고 일어서며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가란’ 만큼이나 ‘이훈’이라는 인물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훈’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만든 생채기 속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가 ‘가란’을 만난 후 정체성을 회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주는 한 마디의 대사에서 『기화』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훈이 대왕대비인 권인교에게 ‘소자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대사는 시놉시스 초반부터 있었어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모든 과정을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 대사 딱 하나를 놓은 다음에 시놉시스를 짰거든요. 절대 빠질 수 없는 장면이었죠. 이훈은 남들이 망나니라고 부르는, 굉장히 패륜적이고 정무도 돌보지 않는 왕이잖아요. 심지어 본인이 왕이라는 것 자체도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그가 자신의 숙적 앞에서 ‘소자가 왕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수천 번씩 그렸어요. 어떻게 보면 그 순간을 위해서 달려갔던 거죠.”




단행본 『기화』, 제가 봐도 연재 때보다 더 재밌어요

판타지 소설 작가로서 정연주 작가가 쌓아온 내공은 『기화』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 작가의 상상과 창작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궁에 입궐하는 기생이라는 뜻의 ‘궁기(宮妓)’라는 단어 자체가 정연주 작가가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는 연산군이 궁궐에 기생들을 불러들이면서 ‘가흥청’이라 명명했던 것에서 착안해 ‘궁기’라는 새로운 존재를 창조해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기생들에게 1패?2패?3패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토대로 해서, 궁기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인 ‘기패시험’을 떠올리기도 했다.

“판타지는 지어서 쓰는 이야기고 역사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잖아요. 판타지는 만들면 되지만 역사는 공부해야 되죠(웃음). 아시겠지만 제가 공부를 별로 안 좋아해요. 학창시절에 국사 점수가 안습이었어요(웃음). 그런데 역사를 바탕으로 써야 되니까 머리가 너무 아픈 거예요. 그래서 아예 생각을 바꿨어요. 고증을 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으로 밀고 나가자고요. 어설픈 고증은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드라마 <해를 품은 달>도 상당한 픽션을 가지고 시작했잖아요. 기화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다 픽션이에요. 제대로 된 고증은 많지 않고, 고증 되어 있는 자료를 각색해서 소설에 맞게 2차 가공을 거쳐서 만들어냈죠. 그래서 소설에 있는 그대로 믿으시면 곤란해요(웃음).”

예스24의 코너에 『기화』를 연재할 당시에도 1장의 원고를 얻기 위해 5장 이상의 분량을 버려 가며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던 작가는, 이번 단행본 발행 과정에서도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이미 완성된 이야기이건만, 더 재밌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3주 동안 출판사에서 합숙을 하다시피 하면서 고쳐나갔다. 캐릭터에 힘을 실어 부각시키고 이야기의 개연성을 높여나가는 그 과정은 전면적인 수정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 시간들이 너무 재밌어서 문제였다고 말한다.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 더 즐기고 싶은 마음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

“작품을 연재할 때는 끝까지 다 써놓고 나서 고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미진한 부분들이 있을 수밖에 없죠. 아무리 노력해도 그걸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숙제예요.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쓸 수 없는 비애라고 할까요(웃음). 근데 연재할 때만의 맛은 있는 것 같아요. 날 것 그대로의 원고이기 때문에 필체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죠. 수정을 하면서 고치는 게 없으니까요. 연재 당시의 작품은 원래 전하려던 메시지나 스토리가 좀 더 강하게 담겨있되 조금 더 투박하다고 할까요(웃음). 단행본으로 다시 작업할 때는 초반부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아예 이야기를 갈아엎었어요. 이야기를 다시 구성하면서 견고하게 만들었죠. 아마 단행본이 더 재미있으실 거예요(웃음). 제가 봐도 단행본이 더 재밌거든요. 왜냐하면 연재는 혼자 썼지만 단행본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다시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재밌을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작품이 거듭 새로워지는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작가인 정연주는 『기화』의 영화화에 있어서도 제작진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기화』가 영화로 재탄생되는 과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어요. 그 분들이야말로 영상매체의 전문가 분들이잖아요.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손 놓고 있는 게 낫겠더라고요. 영화로서 『기화』는 연재 작품 혹은 단행본 작품과는 다를 것 같아요. 조금 더 고풍스럽고 섹시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모든 이야기를 영화 한 편에 담다 보니까 기승전결도 훨씬 뚜렷해질 것 같고, 더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것 같아요. 어떻게 나올지 저도 기대돼요. 하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변주하든 그건 영상매체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원작과 꼭 같이 가라는 법은 없잖아요. 더 재밌게 변주해서 나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죠.”

『기화』가 영화화 되는 데에는 정연주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이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기화』를 읽은 독자라면 한 번씩은 감탄한다는 그 생생한 장면들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고등학교 때 디지털 영상학을 공부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됐죠. 어떻게 장면 전달을 해야 사람들이 메시지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배웠거든요. 그게 글에 녹아든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어렸을 때는 만화영화만 봤는데 커서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어요. 저희 세대는 영상 매체와 깊숙이 관계를 맺고 있다 보니까 시각적으로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요. 아마 그런 부분들이 글에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해요. 저는 영상매체와 글은 엄밀히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작품이 영상으로 제작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작품을 쓰는 동안 머릿속에서 영화 한 편이 계속 상영되고 있는 거죠. 판타지 배경의 글을 쓰면 애니메이션처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요. 『기화』같은 역사 로맨스를 쓰면 풍경이라든가 느낌,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아른거리는 거죠. 그렇게 머릿속에서 장면을 그리면서 써요.”




인터넷 소설은 다 똑같다고요?
왜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될까 생각해 봐야죠


아마도 작가들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질문 중에 하나는 ‘언제부터 작가를 꿈꿨나요?’일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들은 많은 경우 아주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뻔한 기대와 예측은 정연주 작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녀는 작가를 꿈꾸거나,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면서 학창시절을 보낸 적이 없노라고 답했다. ‘그럼, 타고난 천재?’라는 의문을 품게 마련인데, 그녀의 지난 이력을 살펴보면 의문은 이내 확신으로 바뀐다. 중학교 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했던 작가는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실수로 캐릭터 부문이 아닌 시나리오 부문에 지원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 번도 시나리오를 써본 적 없었던 그녀는 덜컥, 당선이 되고 만다. 이후에도 그녀는 e북 작가로 활동하기 전까지 소설의 구조나 작법에 대해 따로 공부한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베르베르보다도 더 사랑받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첫 작품을 쓰기 전부터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어요. 작법은 배우지 않았지만 소설을 어떻게 써야 될지는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만화책을 정말 많이 읽었는데요, 장면을 이미지화하는 건 그때부터 굳혀진 것 같아요.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본 소설이 해리포터였어요. 이후에는 판타지 소설, 무협 소설, SF 같은 장르 소설을 계속 읽었고요. 그러다가 중학교 도서관에 오니까 신세계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대여점에서 빌려 읽었거든요. 중학교 때는 거의 도서관에서 살았다고 보시면 돼요. 소설책은 거의 다 읽었고요. 그 외에도 경제학, 시사, 수필도 재밌으면 빠짐없이 읽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사서 선생님이 저한테 공부는 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웃음). 제가 1년 동안 책을 70권 읽었다고요.”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그녀의 글쓰기는 시작됐다. 처음 시작은 패러디 소설과 팬픽을 쓰는 것이었다. 그 과정이 재밌었지만 작가를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고.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글 쓴다는 것에 매력을 많이 못 느꼈어요. 그때는 차라리 그림 그리는 게 훨씬 더 재밌었고요. 당시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았는데, 그러다 보니까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밥 벌어먹지 못하는 것들은 다 소용 없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글 쓰는 건 순전히 취미였죠. 중학생 때부터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안정적인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어머니는 제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빨리 취업 하고 싶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했죠.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한 번도 해본 적 없고요. 처음 판타지 소설을 썼던 것도 취미로, 재밌어서 시작했던 거죠.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을 갖겠다고 말한 그 순간 누구보다 간절해졌죠. 생활이 달렸잖아요(웃음).”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학창 시절, 정연주 작가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도서 대여비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월 천만 원 이상의 인세를 받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그 누구도,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 커다란 변화 앞에서 마음껏 들떠있다 한들 누구도 힐난하지 않을 텐데, 그녀는 혹여라도 자신이 초심을 잃을까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요즘 하고 있는 생각은 ‘초심을 잃지 말아야지, 까딱 잘못하면 옛날 일 생각 못하고 크게 한 번 깨지겠구나’ 하는 거예요. 사람이 갑자기 높이 올라가면 굉장히 좋을 것 같잖아요? 오히려 무서워져요. 이 아래가 얼마나 밑바닥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높은 데서 떨어지면 얼마나 아플지도 알고 있는 거예요. 그거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게 돼요. 굉장히 조심스러워지고요. 그래서 항상 기초적인 것과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전업 작가로서 처음 쓴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둔 만큼 부담도 크게 작용할 터였다. 한껏 높아진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거짓말이 아닐까. 『기화』가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달콤한 성공만이 아닐 것이다. 꼭 그만큼 작가의 어깨는 무거워졌을 것이다. 아울러 다음 행보에 대한 고민도 짙어질 수밖에.

“사실 『기화』를 쓰기 전에도 실패한 일이 많았는데요. 그런 걸 보고 배워서 앞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알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무슨 글을 써야할지 몰랐어요. 어떤 게 맞는지, 어떤 게 시장성이 있는지, 또 어떻게 써야 내 글이 가장 잘 나오는지 전혀 모르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거쳤으니까,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알잖아요. 그 길을 걷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도 알고요. 방향을 알고 그 길을 따라서 노력해야 된다는 것만 알면, 그 다음부터는 순전히 제 몫인 거예요.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이제는 그 몫을 어떻게 달성하느냐가 관건인 거죠.”

언젠가 그녀가 뛰어 넘어야 할 벽들 중 하나는, 인터넷 소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봤다. 그것이 괜한 기우가 아니라는 듯, 정연주 작가는 e북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 그러한 편견들을 무수히 많이 체감했다고 말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부족, 그렇기 때문에 e북 작가는 종이책을 출간한 작가와는 뭔가 다르다는 편견. 인터넷 소설과 그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선 긋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단순한 흥미 위주의 휘발성 짙은 작품들 일색’이라는 평가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는 것. 이렇듯 바깥으로부터 규정지어진 한계에 대해 정연주 작가의 생각을 들어봤다.

“저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휘발성이 짙다고 하더라도 사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거든요. 남들은 찍어낸 듯이 내용이 똑같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똑같은 얘기가 계속 나오는 걸까’를 생각해 봐야 해요. 저는 독자들이 그 얘기를 좋아하고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많이 나오는 만큼 선호한다는 얘기예요. e북 시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 독자들이 원하는 니즈가 다 담겨 있어요. 그런 점은 한 번 눈여겨봐야 해요. 종이책으로 나올 때는 각자 소장해서 읽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요. 반대로 인터넷 시장은 적나라하게 잘 보여요. ‘이런 이야기를 원하는구나, 저런 얘기는 싫어하는구나’ 라는 게 눈에 보이거든요. 그럼 저희는 ‘이런 이야기를 원하시니 거기에 우리들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담아서 더 좋은 글을 제공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죠.”

인터뷰를 마치며 정연주 작가에게 ‘어떤 작품을 쓰고 싶은지’ 물었다. 그 안에서 그녀는 이상의 편견과 한계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비책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인터넷 소설은 종이 위에 인쇄된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 담긴 작가들의 바람과 메시지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끊임없이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기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주인공이나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 처럼요. 그건 제가 살면서 느낀 감정들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가는데 사실은 그 안에 의미가 있었던 것들이기도 하죠. 그런 것들을 계속 던져주고 싶어요. 한 번쯤은 뒤돌아보고, 한 번쯤은 생각할 수 있고, 한 번쯤은 잠깐 쉴 수 있는,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현재 정연주 작가는 예스24의 코너에 「가희, 사랑할지어다」를 연재 중이다. 궁궐 안으로 한정된 역사 소설의 무대를 벗어나 보고 싶었다는 그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조선 시대의 브리더(breeder)인 ‘개지기’라는 존재를 새롭게 창조해냈다. 이야기는 계모에 의해 버림받고 개지기의 딸로 성장하게 되는 가희와 그녀의 이름을 빌려 살아가게 되는 계모의 딸,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것이다. 아울러 정연주 작가는 다가오는 여름에 선보일 작품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기화』만큼이나 깜짝 놀랄만한 소재일 거라고 귀띔하는 그녀의 들뜬 미소를 보니, 『기화』에서 시작된 작가의 작은 신화는 올 한 해에도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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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닥터 프로스트>,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추천하는 웹툰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마법 -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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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 왕의 기생들정연주 저 | 들녘
『기화, 왕의 기생들』 은 연산군을 떠올리게 하는 조선의 망나니 왕 이훈과 걸인 출신으로 ‘왕의 여자’의 자리까지 올라서게 되는 기생 가란의 사랑이 모티브가 되는 소설이다. 두 인물 외에도 가란을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돕는 채홍준사 윤재민, 이훈의 감춰진 상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권력을 유지하려는 대왕대비 권인교, 가란을 제거하기 위해 대담하고 위험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자월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배신과 암투, 갈등과 사랑을 담아낸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병수 “사랑의 힘, 너무 믿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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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 우울증』. 제목만 보아도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은 ‘사모님’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일까? 궁금한 마음이 적잖이 들지만, ‘사모님도 아닌 내가 굳이 이 책을 펴볼 까닭이 있을지’ 갈등하던 차에 읽게 된 문구 하나. “하루 종일 눈물만 나는데,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요.” 책을 읽고 나면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언젠가 심심한 일상을 사는 ‘사모님’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책장을 펴기 시작했다.

“당신이 뭐가 아쉬워서 우울한 거야! 당신처럼 편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우울하다는 거야?” 『사모님 우울증』의 저자 김병수는 이런 말 한마디가 사람을 진짜 아프게 만든다고 말한다. 아픔마저 이해 받지 못할 때 우리들은 우울해진다. 또 내 마음이 왜 불안한지, 나조차도 이유를 알 수 못할 때 마음의 갈피를 잡기 어려워진다. 김병수 교수가 이들에게 내놓는 해답은 ‘감정 읽기’다. 내 감정을 제대로 읽어낼 수만 있다면, 우울한 마음이 들어도 견딜만하다. 불안한 가운데서도 자아를 버리지 않는 힘이 생긴다.

종합병원 스트레스 클리닉에서 우울증 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김병수 교수는 KBS <남자의 자격> ‘남자, 그리고 중년의 사춘기’ 편에 출연해 이경규, 김태원, 전현무 등 멤버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기도 했다. 정신과 전문의는 얼마나 정신노동을 많이 하며 살까. 하루 종일 우울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의사의 마음도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감정 읽는 법’을 묻고자, 저자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첫눈에도 푸근한 인상, 노련함보다는 따뜻한 느낌이었다. 김병수 교수는 달변가이자 탁월한 경청가의 모습을 지녔다. 저자의 대학 스승인 한 교수님은 『사모님 우울증』에 대해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는 평을 했단다. “듣기에는 좋은 조언이더라도 현실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데, 누구도 다치지 않는 적절한 조언을 해서 좋았다”고. 김병수 저자와의 인터뷰 또한 다르지 않았다. 뜬구름 잡지 않는 위로와 매우 현실적인 심리 해석. 우울의 근원을 열심히 파헤친다고 모든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 심리를 이해하게 됐다는 건 세상을 살아갈 여력이 생겼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뜻한 말 한마디’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바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훈련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감정과 그 감정이 비롯된 상황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미워하거나 무력하게 느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더 아껴야 한다. - 『사모님 우울증』 p.53



관점, 생각의 전환에서 치료가 시작된다

저자는 40대인데, 중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책을 2권이나 펴냈다.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마흔은 없다』에 이어 『사모님 우울증』까지. 아직 중년으로 보기에는 젊은 나이인데, 중년의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6년째 병원의 건강증진센터 스트레스 클리닉에서 스트레스, 우울증 분야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아주 심한 정신질환은 아니지만, 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 스트레스 진단을 받고 오는 환자들이 많다. 1년에 2,3천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맥락이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간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한 자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서 숱하게 많이 언급되는 병명이 ‘우울증’이다. 그래도 아직은 정신과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환자들이 많을 텐데.

상담을 하다 보면, 의사가 어떤 말을 해주길 바라는 것보다, 뭔가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기를 바라고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위로 받는 환자들이 많다. 특별히 큰 사건이 터지지 않았는데도 혼란스러워하는 중년 여성들이 많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하시는데, ‘우울증’이라고 명명을 해드리면, 마치 해결된 느낌을 받는 분들이 많다.

스스로 ‘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공황장애인 것 같다’고 진단을 내리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줄긴 줄었다. 우울증이라고 진단하면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고. 하지만 여전히 부담을 느끼는 환자들이 대다수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남편과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아내들이 ‘우울증’이라고 진단을 받으면,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 나로 인해 남편, 자식이 피해를 볼까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 이제 곧 결혼하는데 엄마가 우울증이라는 소문이 나면 난처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남편 회사에 소문이라도 나면 남편의 사회생활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이런 걱정을 하는 중년 여성들이 많다. 서글픈 현실이다. 남자들은 보통 이런 이야기 안 한다.

정신과를 찾는 성비를 보면, 남성의 수가 확연히 적다. 남자들은 정말 심리에 관심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알기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관심은 많지만 들여다보기가 싫은 거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다. 아내가 아프다, 힘들다고 하면, 남편들은 부담을 느낀다. 도와 주고는 싶지만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피하려고 하는 거다. 내 마음을 열어서 보는 것 자체가 힘드니까, 보기 싫은 거다. 남자 환자들은 병원에 와서도 의사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한참 동안 회사,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의사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신이 서면 그 때서야 속마음을 보여준다. 남자, 여자의 시간 차가 크다. 남자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명화에 빗대어 표현했다. 미술치료가 많아지고 있지만, 그림을 통한 상담은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 명화를 보여주면서 상담을 하는 경우는 없다. 할 수도 없고.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마음을 해석해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림을 책에 실은 건, ‘공감’을 주기 위해서다. 객관적으로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다. 심리학 이론보다 명화 한 점이 인간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 장황하게 풀어낸 정신분석보다 하나의 그림이 사람 문제의 본질을 더 잘 묘사해주기도 하니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곳의 기억과 감정을, 오직 그림으로만 끄집어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시각적인 치료를 해보고 싶기도 하다. 환자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는 미술치료는 많지만, 환자의 심정을 그림에 빗대어 표현해주는 상담은 아마 지금까지 없었을 거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면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에 강하게 와 닿을 수 있다.

한 번쯤은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정신과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막상 진단을 받기에는 두려운 마음도 있고. 사람들이 정신과에 와서 의사에게 가장 기대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주거나 인생을 바꿔주는 경우는 굉장히 희박하다. 바꿔 드릴 자신도 없다. 이런 표현을 주로 한다. 나를 거울처럼 생각하라고. 거울이 없으면 스스로를 정확하게 바라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의사를 거울처럼 생각하면,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정신과 치료 중 하나가 관점의 전환이다. 사람들이 우울하고 힘들면 관점이 좁아진다. 넓게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서 이야기해주면 관점을 바꿀 수 있다. 생각의 전환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스트레스 적게 받으려면 ‘자기 효능감’ 중요

중년 여성들의 고민 중 하나가 스스로가 선택한, 자신이 원해서 하는 행동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남편, 자식에게 의존하는 일상이 많기 때문에 자아 존중감 역시 부족하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기본적인 믿음이 있는데,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왔다는 생각이다. 지금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틀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느낌,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람은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느끼면, 동기가 생기고 활력이 넘친다. 자기 행동의 통제 소재(locus of control)가 자신의 내부에 있다고 자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택권이나 결정권이 자신이 아닌 외부에 있다고 느끼면 무기력해지고 활력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자기 효능감(self-sfficacy)도 사라진다.

일상에서 ‘자기 효능감’을 많이 누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인을 예로 들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자의가 아닌, 지시에 의한 업무가 대부분인 회사원들이 많고.

직장에서는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꼽고 더러워도 견뎌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는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데, 잡 크래프팅(Job crafting)이란 개념을 많이 이야기한다.

‘잡 크래프팅’이란, 주어진 업무를 스스로 변화시켜 보다 의미 있게 일을 한다는 개념인데,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라고 말하기엔 현실이 너무 힘들지 않은가.

공항 셔틀버스 운전만 30년을 한 남자가 있다고 치자. 얼마나 힘들었겠나, 30년을 같은 일만 했는데. 하지만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단지 운전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누군가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는 여행의 시발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어 디자이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손님의 요구에 따라 머리 스타일을 바꿔주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 자체가 의미 있고 힘이 될 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다양한 생각을 통해서 자신의 직업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이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다. 추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직을 준비하는 직장인이 있다 치자.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견디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1년이든 2년이든 뭔가 이루고 나서 이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누구도 내 인생에 의미 부여를 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해야 한다. ‘자기 효능감’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믿음이 있으면 자기 효능감이 커져서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는 것이다.

자기연민이 심한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특히 여성의 경우가 많다. 딜레마다. 여성이 갖고 있는 이중적 심리인데,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고 채찍질하면 우울해지는 걸 알지만,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해버리면 이대로 안주해버릴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내제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연민에 숨겨진 이면의 메시지다.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나쁘다는 걸 알지만, 자기비난에도 자신을 움직이는 동력이 있으니까 버리지 못한다. 더욱이 한창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포기가 어렵다. 그런 분들에게는 지금 당장 해결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한다. 해결한다고 해도 또 다른 불안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자기연민에 따라오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것을 동력 삼아서 잘 지내는 것이 현명하다. 지금은 조금 괴롭고 힘들어도, 실수하지 않고 열심히 살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하니까. 다만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엄마라면, 아이를 볼 때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고 괜한 죄책감이 전달되기 때문에 좋지 않다. 스스로를 자꾸 비난하게 되는 습관이, 내가 진짜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자기비난을 하는 성향’ 때문이라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양면성을 인정해야 마음의 피로를 풀 수 있다. 인정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풀리는 방법이 보인다.

사람의 성격이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기질, 성향으로 성격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왔는데.

성격이라는 게 대부분 생존의 이점이 있어서 발달된 것이다. 유전적으로 연결되는 기질조차 생존의 이점이 있어서 유전되었고, 학습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성격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거다. 40, 50년을 한 성격으로 살아왔는데, 상대에게 그걸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신중하고 말이 없는 남편에게 아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적극적으로 표현도 하고, 이전과 다른 행동을 보여달라”고 하는 건, 당신의 유전자를 바꾸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가능한 요구다. 사람의 성격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구성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본질적인 성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한 사람의 생존 본능에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을 바꾸려는 외부의 시도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아내들이 남편의 변화를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남자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여자가 아무리 교양 있게 말해도 남자가 느끼기에는 ‘정서 충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남자들은 정서적인 피로감이 몰려오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 살만큼 살았는데, 바꾸라고 하면 엄청난 부담인 거다. 또 그렇게 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거리감을 두고 남자를 대하면 오히려 관계가 좋아진다. ‘당신이 나 사랑하면 이렇게 해줘. 이렇게 변해줘”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사랑의 힘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한다. 믿지 않으면 오히려 돌아온다.

통계에 의하면 성격이 비슷한 성격의 부부들이 편안한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한다. 나와 비슷한 상대를 찾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까.

확률적으로 비슷한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면, 이혼할 가능성이 적는 건 사실이다. 문화적인 배경이 아니라 기질, 성향이 비슷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런 상대와 만나면 재미 없을 것 같다. 티격태격 싸우고 갈등도 있어야지 살아가는 재미가 있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그냥 평탄하게 살면 나중에 ‘잘 살았다’는 느낌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 같다. 메달로 따지면 은메달 정도? 물론 금메달을 못 딸 수도 있겠지만, 갈등을 품고 살아온 삶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비혼자들에게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때, 이것만은 주의해라! 조언을 한다면.

정신과 의사로서 합당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너무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남녀 관계에서는 절대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일을 처리할 때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하는 게 맞지만, 대인관계와 같이 불확실성이 많이 노출된 상황에서의 이성적인 판단은 대부분 실패하는 결론이 많다. 정보량이나 사회 환경 등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일반적인 생각으로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내가 답을 찾았다고 생각해도 오류일 가능성이 많다. 그 때는 오히려 자기 감정을 따르는 게 더 나을 때가 많다. 자기 감정이라는 것도 생존에 따라 발달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상심하면 뇌에서 ‘너 위험하니까 지금은 쉬어야 한다’고 신호를 보내 온다. 남녀 관계에서는 이성적 판단이 작동하지 않는다. 결혼을 늦게까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너무 많이 따지는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감에 따라서, 충동적으로 살라는 게 아니다. 감정, 관계의 문제는 이성적인 변수를 조합해도 올바른 정답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야 한다.




마음의 스트레스, 몸으로 푸는 것이 최선

사람의 감정을 다룬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본능대로 하라고 부추기는 책들도 많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우선 내 자아가 본능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고, 세상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강한 사람은 없다. 약한 사람한테 자꾸 단칼에 잘라버리라는 격인데, 안 되는 일을 자꾸만 부추기는 격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현실은 환상이 아니니까. 듣기는 좋아도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정답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자기 자신과 친해져야 한다.

심리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해답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나의 불안, 우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인가?

불안은 치료 후에도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치료가 됐다는 건, 불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했을 때 좋아지는 것이다. 불안이 없어져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불안하고 우울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고 고민이 많지만, 이렇게 인터뷰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안한 마음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상태.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온전할 수 없다.

정신분석을 전공한 전문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궁금하다. 화가 나면 어떻게 하는가?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노하우도 있을 것 같은데.

의사도 감정노동자다. 혼자 있을 때,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낸다. 흔히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이게 가장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마인드는 컨트롤하는 게 아니다. 마음의 스트레스는 몸으로 푸는 게 가장 좋다. 땀 흘리면서 운동하는 게 제일 좋다. ‘안면 피드백 이론’이라고도 말하는데, 신체 반응에 따라서 뇌가 영향을 받는 거다. 스트레스 받고 불안한 상태라고 해도, 사람이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리게 되면 몸의 긴장이 자연스럽게 풀리면서 뇌가 거꾸로 영향을 받는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운동을 적극 추천한다. 효과가 가장 좋다. 개인적으로 또 다른 방법은 음악 감상이다. 바하 인벤션을 듣고 있으면 내 몸이 조율되는 느낌이다.

『사모님 우울증』이라는 제목 때문에 중년을 타깃으로 한 느낌이다.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

솔직히 말하면 20, 30대 따님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엄마를 이해하는 통로로 이 책이 읽혔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또 나중에 겪게 될 불안한 심리, 우울증을 대비하기 위한 통로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30, 40대라고 해서 다른 고통이 숨겨져 있지 않다. 삶은 정말 제각각이지만 고통의 본질은 대부분 몇 가지로 취합된다. 불확실성이 압도되는 상황에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들을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획기적이고 새로운 것들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남자, 남편들도 읽으면 좋지 않을까.

물론이다. 남편이 읽는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병원에 찾아오는 중년 여성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남편을 데리고 왔으면 좋겠다”고. 이 말을 가장 많이 한다. 남편이 도와주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런데 남편들은 잘 오지 않는다.

남편으로서 저자는 어떠한가? 중년 여성들의 심리를 이렇게 잘 아는데, 현실의 아내에게 어떤 남편인가?

아내가 그러더라. “책을 읽으면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인데, 왜 현실에서는 이러냐고.”(웃음) 내가 심리에 도통해서, 이중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비유를 들자면 나는 아직 미숙하고 인생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지만,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베이스캠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등산을 잘하진 못하지만, 등산하는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가장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조금 더 편안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알려주는 정도이지, 내가 엄홍길 대장은 아니다. 모든 현실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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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 우울증김병수 저 | 문학동네
<남자의 자격>에서 이경규, 김태원, 전현무 등 출연 멤버들의 심리 상태에 대해 명쾌한 분석을 들려주었던 정신과의사 김병수가 이번에는 중년의 여자, ‘사모님’들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기를 원하는 우울한 아내와 외로운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삶을 살 것 같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책장을 넘길수록 평범한 우리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책에 담긴 스물다섯 가지 사연은 소수의 ‘사모님’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내 아내 그리고 외로운 어머니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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