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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다드래기 “『안녕 커뮤니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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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커뮤니티』는 주민 대다수가 고령층인 어느 작은 동네 ‘문안동’을 배경으로 한다. 어느 날 사진관 ‘박씨’가 고독사 하는 일이 벌어지고, 이에 충격을 받은 10년 차 홀아비 ‘방덕수’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 ‘안녕 커뮤니티’를 만든다. 이 모임은 단순하다. 순서를 정해두고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서로의 생사를 묻는 것. 그렇게 은퇴한 교사 부부 ‘김경욱’과 ‘장형팔’, 공인중개사 ‘허보경’과 그의 반려인 ‘오영남’, 분식집의 ‘신세봉’과 그가 부양하는 치매노인 ‘막례’,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도 식당 아르바이트, 공공근로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설쌍연’과 ‘조영순’ 과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낱낱이 펼쳐진다. 





2013년 <달댕이는 10년차> 라는 작품으로 데뷔하며 만화를 시작한 다드래기 작가는 자신을 ‘스케일 작은 만화가’로 부른다. 인물에 관심을 두는 만화를 지향한다는 의미다. “역사는 비극적으로 흘러가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소망을 갖고, 희망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들의 미래는 죽음이겠지만 죽는 일이 무섭거나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라는 다드래기 작가. 그가 그려나갈 인물들은 그래서 “있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인물을 당사자 관점으로 보여주는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이들이 없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성소수자도 그렇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있는 거죠. 광주에 살면 총상 입은 사람들을 많이 봐요. 누구는 눈이 안 보이고, 누구는 다리가 하나 없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들이 독특하게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그리고 싶고요. 그래서 행인 한 명을 그릴 때도 머리카락이나 피부색을 다르게 표현하려고 애써요. 특히 피부색은 똑같지 않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시작한 이야기

2016년부터 웹에 연재를 했던 작품이죠.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때는 언제였나요? 

2012년이에요. 회사를 다니던 때였는데 퇴근하던 길에 할머니 두 분을 봤어요. 오르막 육교를 한 분이 엄청 힘들게 올라가는데 다른 한 분은 지팡이가 있어서 조금 덜 힘들게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다 먼저 가던 분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지팡이를 척하고 세우면서 “하나 사!” 하셨어요.(웃음)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주어도 없이 대뜸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너무 웃겨서 혼자 엄청 웃었죠.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시작했던 거고요. 2013년 만화가로 데뷔를 하고, 제 현실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이야기가 됐어요. 

작가님과 작가님 부모님의 경험이 많이 담겼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기도 하셨죠. 

부모님이 오래 살던 곳에서 저만 보고 이사를 오셨어요. 화순이었는데요. 거긴 완전히 고령화된 곳이라 그냥 저 같은 사람이 튀죠. 아예 어리거나 노인인 사람들만 있고, 구청 직원이 아닌 이상 제 세대의 젊은 사람은 없어요. 그런 상황이니 노인 대상의 공공근로를 하려면 워낙 다들 나이가 많아서 60대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실제로 아빠가 겨우 순번이 나와서 일하러 간 적이 있거든요. 또 식사 때가 돼서 복지관에 가면 봉사 나온 사람들은 전부 외국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 이주해 온 젊은 여성들이었어요. 이 사람들도 십 수년씩 살아서 다 한국 사람이에요. 자가 운전하면서 다니고요. 그런데 이분들을 보는 할아버지들은 “차 어떻게 샀어? 남편이 사줬어?”라고 물어요. 거기에 이 여성들은 “내가 샀지”라고 대답하고요.(웃음) 그런 장면들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점점 재료가 많아지더라고요. 

작가의 말에 “이 이야기를 그린 것은 죽음의 두려움이 삶의 전부를 끌어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밝혔잖아요.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했어요. 

제가 사는 아파트에는 대부분 은퇴한 노부부나 독거 노인 혹은 외국인이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살아요. 은퇴 노부부들은 자식에게 재산 나눠주고 분양 받아 들어온 경우가 많고요. 그러니까 이들은 조금 부자죠.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세입자고요.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다 있기도 한데요. 그만큼 죽음이 많아요. 윗층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건너 사는 사람도 죽고, 그랬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참 힘들었을 때였는데요. 2018년 2월에 이웃에 사는 사람이 자살을 했거든요. 그때는 아예 집에 못 갔어요. 그 전보다 그때 이후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자꾸 나한테 무슨 신호를 주는 것 같고, 혹시 내가 죽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하고 그랬어요. 죽음에 자꾸 의미를 두고, 집착을 한 거죠. 하지만 죽음은 필연이잖아요. 어제 안녕한 사람도 오늘 죽을 수 있어요. 당연한 건데 내가 너무 의미를 뒀구나,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그러면서 작품에 더 집중을 했어요.

 



캐릭터 한 명 한 명은 명확하게 

독거노인, 다문화가정, 성소수자 등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을 듯한데요. 작업 방식이 어땠나요? 

시놉시스을 짤 때 마인드맵을 이용하는데요. 사회적인 사실들을 상세히 적어두고, 큰 그림을 그려놔요. 내용을 다 쓰진 않아도 정해놓은 내용대로 진행하는 편이고요. 저는 캐릭터를 세세하게 잡아두는 편이에요. 인물 성격이 어떤지, 어떤 과거를 갖고 있는지 다 정해두고 시작하거든요. 역사는 바뀌지 않잖아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인물들을 결혼시켜도 볼리니아 대학살로 누군가는 죽게 될 거예요. 그 사실을 알지만 사람들은 행복하게 지내죠. 마찬가지로 『안녕 커뮤니티』도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아래에 흐르고 있지만 사람들은 열심히 사는데요. 그러려면 캐릭터 한 명 한 명은 명확하게 정해두어야 해요. 그래서 캐릭터 준비를 엄청 많이 하죠.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많은데요. 조연급 캐릭터지만 ‘진주’가 정말 좋았어요. 시비를 거는 동네 불량 할아버지들한테 그냥 “꿀꿀!” 하고 무시하는 대꾸를 해버리는 인물이거든요. 보는데 희열이 느껴졌어요.(웃음) 

더 이상 사람의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의지였죠.(웃음) 진주가 살짝 저를 모델 삼아 만든 인물이거든요. 저를 아는 사람들이 닮았다고 많이 하는데요. 자세히 보시면 지나가는 조연이나 옆에 앉은 사람 중에도 닮은 사람이 많이 있어요. 왜냐하면 하도 앉아서 그리니까 나를 가지고 옷만 바꿔 입히는 식으로 그리게 돼서 그래요.(웃음) 저는 진주의 부모님인 ‘설쌍연’과 ‘조영순’ 부부를 좋아하는데요. 차가 있어도 돈이 드니까 몰지 못하고, 재산이 애매해서 복지를 받지 못하는 등 제 부모님 모습이 조금씩 들어가 있기도 하고요. 거기서 우리 부모님이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모습들을 극대화 시킨 것이기도 해서 좋아해요. 되게 재미있게 살잖아요. 이 정도만 살아도 좋겠다, 생각한 모습으로 그린 거라 마음이 많이 가요. 

작가님 블로그에 있는 ‘어두운 이야기를 포르노로 만들지 않는 방법’이라는 글이 참 좋았는데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쪽방촌의 풍경이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또는 필리핀 출신의 ‘안젤라’를 향한 동네 사람들의 시선 등을 그릴 때 고민한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만약 있는 그대로 그린다면 노인 인물은 다 골병이 들어 있어야 해요. 걷는 것조차 힘들고요. 주방 일도 워낙 힘들어서 일하는 분들을 보면 여기 저기 다 파스를 붙였거든요. 하지만 이야기 속에는 뉘앙스만 담았죠. 치매도 마찬가지예요. ‘세봉’의 엄마는 되게 귀엽게 나오잖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치매환자의 폭력적인 면은 요양 병원에서 살짝 도입만 보여줬잖아요. 독자가 ‘그래, 이런 게 있지’라고 느낄 정도만 보여준 건데요. 어차피 이 정도만 흘려도 독자는 뒤의 모습을 아니까요. 작품에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선만, 아예 무시는 하지 않되 연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은 의도적으로 여성 등장인물의 이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같거든요. 가령 ‘설쌍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나오는데요. 깜짝 놀랐어요. 

만화를 그리기 전에 콜센터에서 일했었는데요. 노인 여성들의 경우 ‘갓난’, ‘아기’ 같은 이름이 진짜 많았어요. 딸이 태어나면 이름을 제대로 안 지었던 거죠. 그리고 ‘쌍연’도 정말 많았죠. 작품에서는 순화를 한 거고요. 실제로는 ‘쌍년’도 많아요. 저희 엄마 이름도 마찬가지예요. 이름이 ‘분순’이었는데요. 첫째를 딸 낳았다고 분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었죠. 

1949년생 퇴직 교사인 김경욱은 자신의 이름이 너무 싫다고 하잖아요. 아들일 거라 확신하고 지어둔 이름이었으니까요.

작품 안에서는 노인 여성에게 붙인 이름인데요. 실제로는 언니 친구의 경우가 그랬어요. 언니 친구 이름이 ‘명수’였거든요.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면서 미리 이름을 다 지어놨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일이 아주 빈번했죠. 


다음에 할 얘기가 더 있다

책 작업을 하면서 연재 때보다 40컷 정도를 더 그렸다고요? 추가 작업을 많이 하신 건데요. 책을 내면서 달라진 건 무엇이었나요? 

40컷을 더 그린 것은 우선 후반 부분인데요. 후반부를 연재할 때 연재처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요.(웃음) 빨리 끝내되 나의 작품을 망치면 안 되니까 망가뜨리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연재를 해서요. 정신력으로 연재를 끝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시간 관계가 안 맞거나 할머니가 앞에 했던 말을 뒤에 또 한다거나 하는 부분이 눈에 보이더라고요. 이야기를 단정하게 끝내는 데 중점을 뒀고요. 중요한 건 너무 우울하지 않게 끝내려고 했어요. 다음에 할 얘기가 더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끝내고 싶었거든요. 

고독사 등 무거운 이야기가 많지만 작품 전체적인 느낌은 아주 유쾌하잖아요. 이 작업을 하시면서 작가님이 제일 신나게 그린 장면은 뭔가요? 



처음에 얘기한 지팡이 장면이요. 작품 안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장면인데요. 저는 엄청 그리고 싶었던 부분이에요. 할아버지도 약간 ‘요다’처럼 생겨서(웃음)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느낌으로 그렸어요. 또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은 세봉의 엄마가 세봉에게 “오래 살아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부분인데요. 제가 실제로 들었던 말이라서 많이 사무치는 부분이에요. 그 부분 그릴 때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이었는데 그런 말을 하셨었거든요. 제가 그려놓고도 막상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자꾸 생각이 났어요. 

자산가임을 숨기고 쪽방촌에 사는 ‘분례’라는 인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세상에 영웅은 없어요”(2권, 353쪽)라고 말하는 사람이지만 영웅적인 마음은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 결핍이 있는 사람이죠. 아버지가 가정을 버렸고, 가난했고요. 결혼을 했지만 일찍 사별했고, 자식도 없어요. 그러니까 자신에게 없던 것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집착이 있어요. 자신의 업적을 많이 생각하고요. 그러다 보니 어찌 보면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셈이에요. 제 생각에 분례는 비극적으로 미친 사람은 아니지만 약간 다른 방식으로 미친 사람인데요. 그런 이중적인 면을 그리는 게 좋았어요. 분례의 대립점에 있는 ‘황영감’과 비교하면, 황영감이 되게 나쁜 사람 같잖아요. 하지만 황영감은 그냥 성실하게 산 사람이죠. 전쟁 때 운 좋게 살았고, 부동산 붐을 타서 마침 땅값이 올랐을 뿐이에요. 분례의 영웅적인 마음은 알겠지만 딱히 황영감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주변 사람들이 거기에 계속 의문을 가져주는 것이 갈등의 시작이 되기를 바랐어요. 

이야기에서 좋은 편, 나쁜 편이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잖아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안젤라’ 부부는 희망을 갖게 되고, 분식집을 하던 세봉 역시 살림이 넉넉해지지만 한편에는 쪽방촌에서 쫓겨나는 사람들도 생기고요. 뭔가 찝찝하다는 느낌을 사람들이 계속 갖죠. 사실은 그것이 진짜 현실이기도 해요. 

독자 후기 중에 그 부분을 좀 더 얘기할 줄 알았는데 안 해서 아쉽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저는 그 말을 듣는 게 되게 좋아요. 젠트리피케이션 부분을 이렇게 끝냈기 때문에, 『안녕 커뮤니티』의 사람들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냈지만 사실 뒤에는 난장판이 되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저한테는 다음 이야기가 있거든요. 이렇게 끝나서 아쉽다고 느끼든 이 결말이 품고 있는 불편함을 느끼든 저는 다 굉장히 좋아요. 

분명히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거든요. 이야기를 더 이어나갈 계획이 있으신가요? 

원래는 이게 끝이 아니에요. 제가 여기서 끊은 건데요. 할 수 있다면 더 하고 싶어요. 원래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정리 되면 안젤라 세대의 이야기로, 다른 제목을 걸고 스핀 오프가 나오면서 젠트리피케이션 얘기를 이어가도록 하고 싶었어요. 『안녕 커뮤니티』가 그 이야기의 시작이라면 그걸 이어서 안젤라 쪽 세계관을 보여주기가 좋으니까요. 언젠가 그 이야기를 더 하게 된다면 분례가 터 놓은 새로운 공동체에도 문제가 생길 거예요. 




그림은 그리면서 는다

꾸준히 장편 작업을 해오셨잖아요. 『달댕이는 10년차』가 2권, 『거울아 거울아』가 3권으로 출간되었고, 『안녕 커뮤니티』 역시 두툼한 책이 2권 나왔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만화 그리는 분들은 대부분 궁극적으로 장편을 하려고 할 거예요. 연재처 역시 장편을 더 선호하고요. 꾸준히 이어지는 트래픽이 있으니까요. 제 경우 만화를 포기하고, 콜센터를 다니고 하다가 뒤늦게 만화를 다시 시작했잖아요. 그동안 만화도 안 봤어요. 감을 완전히 잃었죠. 그런 상태로 『달댕이는 10년차』를 처음 그리기 시작한 건데요. 기술적으로 깨달은 게 있다면 그림은 그리면서 는다는 거예요. 완벽하게 그리고 나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닌 거죠. 당장 이상한 것을 창작자가 못 견디면 안 돼요. 그냥 가야죠. 그러다 보니 그 시점에 내가 할 수 있는 생활툰, 짧은 이야기로 해야 했고요. 그러다가 『거울아 거울아』를 중편으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연출에 약점이 있다 싶으니까 4컷으로, 기승전결을 연습한 거예요. 그러면서 트레이닝을 했다고 생각해요. 『안녕 커뮤니티』를 하면서는 스스로 준비가 됐다고 느꼈고요. 그래서 2012년부터 장편을 준비한 거였죠. 

이 말씀은 만화를 그리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네, 정말로요. 저는 32살에 데뷔했잖아요. 더 어렸을 때라면 못했을 것 같아요. 조바심도 많고, 겁도 많아서요. 그런데 늦게, 마음을 반은 접고 시작해서 된 것 같거든요. 젊고, 빚이 없다면(웃음) 더더욱 조바심 내지 말고, 지자체에 주는 모든 청년지원을 다 받아가면서 천천히, 차분하게 그려나가시면 좋겠어요. 물론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진 않겠지만요. 술 먹지 말고, 건강 챙기면서요.(웃음) 




*다드래기

스케일 작은 만화가. 만화 외판원으로 가능한 일은 다 하고 있다. 노인이 되어도 스스로 먹고살다가 잠들어 자연사하는 것이 목표이고 종교는 캣홀릭(CATholic)이다. 쓰고 그린 작품으로 『달댕이는 10년차』(전2권), 『거울아 거울아』(전3권), 『얼렁뚱땅 병상일기』 등이 있다. 




안녕 커뮤니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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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추혜인 “나의 진료에는 페미니즘이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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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원칙은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다양성의 존중’이라고 말하는 의사 추혜인. 그는 왕진 다니는 의사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경제적인 이유가 있거나, 저마다의 사연으로 병원을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이웃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추혜인은 따릉이를 타고 골목 곳곳을 누빈다. 어떤 환경 속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꼼꼼히 살핀다. 단순히 질병으로 정의되는 환자가 아니라, 고유한 삶의 주인으로서 한 사람과 만난다. 그는 말한다. “조금 더 건강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페미니즘 진료”라고. 

한때 건축학도였던 그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증언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고, 본과 1학년 때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해 알게 됐다. 오랜 준비 끝에 2012년, 국내 최초 여성주의 병원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의원)의 문을 열었다. 여성으로, 페미니스트로, 동네 주치의로 살아온 20여 년. 그동안 진료실 안팎에서 만난 사람과 이야기들을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에 담아냈다. 





페미니스트 의료인의 오진율이 낮은 이유

처음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을 때,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의대에 다닐 때 2000년 의약분업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학교를 잠깐 쉬고 여성단체에서 일하고 있어서 중심에서 뭔가를 했던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한테까지 파장이 오게 됐어요. 의약분업을 지지하는 선생님들과 반대하는 선생님들이 싸우게 됐는데, 사실 저는 의약분업에는 지지하거든요. 의약분업은 잘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랑 생각이 달랐던 선배들이나 친구들도 이상한 사람들은 아니었거든요. 사람을 살리고 싶어서 의대에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실제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의약분업에 반대하면 다 돈만 밝히고 밥그릇 싸움하는 의사들로 몰리는 걸 보면서 조금 마음이 아팠어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왜 이렇게 몰릴 수밖에 없을까... 서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고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를 너무 적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특히 의사와 국민이 잘 지내려면 잘 지낼 수도 있는 사이인데 너무 사이가 나쁜 것 같았어요. 국민들은 나도 병원에 아는 의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사 집단에 대해서는 너무 불신이 큰 거예요.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수가 시스템 자체가 행위별 수가이니까, 검사를 하면 할수록 환자는 돈을 많이 내고 의사들은 돈을 많이 벌게 되는 구조잖아요.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어떤 검사나 처치를 하자거나 약을 쓰자고 해도 환자들 입장에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다른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의료협동조합이라는 게 있다고 하는 거예요. 지역 주민들이랑 의사들이 같이 돈을 모아서 만드는 거라고, 거기에서라면 어떤 검사나 치료를 하자고 했을 때 조금 신뢰를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지금도 ‘의료협동조합’이 낯선 개념인데, 당시에는 더 했겠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진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병원은 의료인들이 만드는 거고 우리는 그걸 이용하는 거라는 시스템만 알고 있었던 분들에게 돈을 모아서 같이 병원을 만들고 운영하는 거라고 이야기하면 ‘다단계야?’, ‘병원에 투자하는 거야? 수익 나면 나눠주는 거야?’라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어요(웃음). 영리 병원이 아니니까 병원에 투자를 한다고 해도 수익은 돌려줄 수가 없고 이자는 없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설득을 해야 했죠(웃음). 그래서 동네 축제란 축제는 다 가서 부스를 차리고 주치의 상담을 했어요. 그러면서 주민들하고 친해지기도 했고요.

조합원이 되어 달라고 홍보도 하셨겠죠? (웃음)

네(웃음). 상담이 마음에 드셨던 분들이 어느 병원이냐고 찾아가겠다고 하시면 ‘저희가 아직 병원이 없고 이제 병원을 만들 거다, 조합원이 되어주시면 하루라도 빨리 병원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죠(웃음). 

조합원이 되어주신 분들은 ‘의료협동조합’의 필요성에 공감하신 걸 텐데요. 어떤 병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가요?

조금 항생제를 덜 쓰는 의원, 아니면 약을 처방할 때 이 약을 왜 처방하는지 설명을 잘 해주는 병원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요. 초반에는 ‘협동조합의료기관’이라는 걸 설명하기 너무 힘드니까, 생협(생활협동조합) 같은 걸 하시는 분들에게 ‘그 방식으로 의료기관을 만드는 거예요’라고 설명하는 게 훨씬 쉬웠어요. 그래서 먹거리 생협 하시는 분들, 공동육아협동조합을 하시는 분들, 그런 분들이 초창기 조합원으로 많이 가입하셨어요. 

“페미니즘은 내 진료에 필수적”, “당신이 혹시 나의 진료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 주치의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쓰셨습니다. 의사로서 페미니스트인 것과 아닌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되게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통계적으로 페미니스트 의료인들의 오진율이 조금 더 낮은 걸로 되어 있어요. 환자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믿고 환자가 자신의 몸에 대해서 충분히 주권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환자들의 통증이라든가 불편함 호소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거죠. 환자와의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부권적이고 권위적인 의사들보다 소통이 조금 더 잘 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진이 줄어들거나, 오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로잡거나 혹은 소송으로 가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거죠. 그래서 저는 페미니스트 의사가 조금 더 실력이 있는 게 아닐까, 의사들이 다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요(웃음).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페미니즘은 어떤 건가요?

특히 진료실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원칙은 다양성을 존중하되 차별이나 혐오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는 다양성 존중이 페미니즘의 원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혐오와 차별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조금 더 건강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페미니즘 진료라고 생각해요. 




모두에게 주치의가 생긴다면?

“단 한 번이라도 환자의 집에 가본 경험이 있는 의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쓰셨어요. 진료실 안에서만 환자를 만나는 것과, 환자가 사는 공간을 직접 찾아가서 보는 것은 확연히 다르겠죠.

네. 제가 오늘 오전에도 왕진을 네 군데 다녀왔는데...

수요일에만 왕진을 다니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닌가요?

수요일에 갈 때도 있고, 목요일에 갈 때도 있고, 진료 마치고 야간에 갈 때도 있어요. 

시간 되실 때마다 가시는 거예요?

네, 환자 분들이 갑자기 아프신 경우도 있으니까 그럴 때는 급히 가기도 해요. 정해놓은 시간은 보통 수요일이고요. 오늘은 급하게 요청이 들어와서 가게 됐는데, 같이 왕진 가본 적 없는 간호사 선생님이랑 갔어요. 그 분도 간호사로 10년 정도 일하셨는데 왕진을 나가본 건 오늘이 처음인 거예요. 다른 간호사님들이 왕진 다녀왔다는 이야기들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집에 갔더니 상상만 해봤던 것과 너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저희가 동주민센터에서 이야기를 듣고 가게 됐거든요. 다리에 상처가 있어서 소독해야 되는 분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이 분은 다리의 상처가 문제가 아닌 거예요. 165cm 키의 남자 분인데 몸무게가 30~32kg 정도로 너무 마르셨어요. 매트리스가 없어서 바닥에 아주 얇은 이불을 깔고 지내시는데, 저희가 왔다고 잠깐 일어나셨다가 앉으시는데 쿵 소리가 나서 뼈가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발의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 드시는 것, 씻는 것, 이부자리, 모든 것들이 다 문제인 거예요. 같이 간 간호사님은 여기에 안 와봤으면, 이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랐으면,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집에서 나올 때는 동주민센터 직원에게 매트리스나 전동 침대 기증된 것 없느냐고 물어보시고요. 그러니까 직접 가봐야 우리가 연결할 수 있는 자원들이 뭐가 있는지, 더 찾아봐야 될 건 뭐가 있을지, 알 수가 있거든요. 

만약, 그 분을 진료실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왜 몸 상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병원에 안 오셨어요?’, ‘가족은 없으세요?’ 하면서 계속 문답만 하지 않았을까요? 환자가 말해주지 않는 정보는 알 수 없었을 테고요. 

동주민센터 직원이 그 분을 너무 병원에 모시고 가고 싶었대요. 그래서 몇 번을 찾아가서 병원에 가자고 말씀드렸는데 가기 싫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본인이 병원에 가서 좋은 대접을 받거나 친절하게 대해진 경험이 한 번도 없으셔서 안 가겠다고 하신 거죠. 그래서 동주민센터 직원이 ‘그러면 의사 선생님이 집에 오시는 건 어떠시냐, 한 번만 진찰을 받아보자’고 설득해서 저희가 가게 된 거거든요. 동주민센터 직원이 진짜 애를 많이 쓰신 거죠. 그렇게도 설득이 안 되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책에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나요. 뇌출혈로 누워 계시는 분의 집이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의 4층에 있었죠. 병원에 갈 때는 119를 부르고 돌아올 때는 이송료를 주고 사설 구급대를 불러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필요할 때마다 병원에 갈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119를 불러야만 병원에 갈 수 있으니까, 사실은 동네 병원에 올 만한 문제들로도 응급실을 가게 되시는 거예요. 119는 동네 병원에는 데려다 주지 않거든요. 조금 설사를 해서 동네 의원에 가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죠. 그러려면 사설 구급차를 타고 동네 병원에 와야 하니까요. 정말 작은 문제로도 응급실에 가니까, 응급실에서는 왜 이 정도 문제 가지고 응급실에 오냐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점점 응급실도 안 가고 어떤 병원에도 안 가는 상태가 되시더라고요. 

동네 의원 의사로서, 가정의학과 의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계신 게 느껴져요. 

저는 큰 병원과 저희 같은 작은 동네 의원이 함께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어떤 분이 위암이 의심돼서 위암 전문가에게 진료를 받는다고 하면, 앞으로 계속 위암 전문가에게만 진료를 보시는 건 아니거든요. 위암만 전문으로 보시는 선생님은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증상들이 위절제술을 받은 상태와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상담하기가 힘드세요. 시간도 너무 없으시고요. 그래서 저희가 환자와 의료 전문가 사이에서 적절하게 중재자나 소통의 역할, 통역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형 병원에서의 진료 과정이나 결과를 잘 알고 해석해서 결과적으로 환자분이 더 건강해지실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들이 바라는 의사는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조금 통합적으로 봐주는 의사를 바라세요. 너무 세부적인 전문과 과목의 의사들을 많이 만나 오셔서, 환자분들이 진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그건 제 전공이 아니에요’, ‘그건 다른 데 가서 물어보세요’라는 거거든요. 그럼 어디에 가서 물어봐야 되는지를 혼자서 알아서 찾아내야 되는 거죠. 문제를 통합적으로 보면 이 분이 이야기하는 증상과 연관된 다른 문제들까지 넓게 볼 수도 있고, 전문과를 가야 된다면 특정해서 어떤 과목의 어느 병원을 가면 좋을지 의뢰할 수 있거든요. 환자들도 그런 걸 원하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도 주치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모두가 자신의 주치의에게서 진료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점이 달라질까요?

일단 진료 기록이 잘 관리될 것 같아요. 저희가 많이 답답한 게,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있어요. 15년 동안 고혈압 약을 먹어왔는데 앞으로는 살림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다고 하세요. 그러면 처방전이나 최근의 진료 기록, 검사 결과지 같은 것들을 주셔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이 오시는 거예요. 말씀을 들어보면 여기저기 의원에서 그런 식으로 진료를 받아오셨던 거고, 그래서 기록들이 여러 의료기관에 산재해 있는 거예요. 그러면 통합적으로 관리할 책임은 환자에게 있는 거거든요. 

맞아요. 병원마다 찾아다니면서 진료 기록을 다 떼어야 하는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에요. 

네. 그리고 같이 드시면 안 되는 약들이 있는데 그런 것도 관리가 안 되는 거예요. 동시에 서너 군데 병원을 왔다 갔다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저희가 약을 정리해 드리는 게 되게 큰일이에요. 드시는 약을 다 가져오시라고 하고 약을 펼쳐놓고 보면 비슷한 위장약을 두세 개 같이 드시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비슷한 약들을 불필요하게 많이 드시면 빼드리고, 또 같이 드시면 안 되는 약들은 빼드려요. 이를테면, 이런 경우도 있어요. 어떤 약을 드시고 숨이 차는 증상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약을 처방했던 병원에 가서 증상을 호소하시는 게 아니라 다른 병원에 가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병원에서는 무슨 약을 드시고 증상이 나타난 건지 모르니까 숨이 찬 증상에 대한 약이 추가돼요. 한 가지 증상에 대해서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약이 막 추가되는 건데, 알고 보니까 약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이 추가됐던 거죠. 그래서 모든 약을 끊고 나서 좋아지시는 분들도 있어요.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마을을 꿈꿉니다

환자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의사들은 진료하는 환자들을 잘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잖아요. 그러려면 그 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환경들을 같이 파악해야 되니까, 그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 같아요. 저는 그게 페미니즘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 있는 사람이고 어떤 관계적인 맥락 하에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를 밝히는 게 여성주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환자들을 진료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 분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 있는지 보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제 진료에 페미니즘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료실 안팎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일들’과 마주하실 때가 많죠? 책에서 다양한 사례를 들려주셨는데, 일례로 엄마들은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책하잖아요. 주위에서는 ‘엄마가 몸이 약해서 그런가 보다’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요.

아토피 아이의 엄마들이 그런 자책을 많이 해요. 임신 중에 제가 뭘 잘못 먹었나 봐요, 이런 이야기를 되게 많이 하세요. 엄마들이 너무 심하게 자책을 하고 있어서 ‘엄마가 왜 그랬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죠’ 이런 이야기를 진짜 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많은 의료 기관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오세요. 심지어 방을 너무 깨끗하게 관리하면 아토피가 심해진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면 ‘제가 너무 결벽증적으로 방을 치워서 아이가 아토피가 있나 봐요’ 하면서 자책하세요. 그래서 엄마들의 자책을 가라앉혀 드리기도 해요. 엄마 탓이 아니라고요. 

“원래도 딸은 살림 밑천이라 했는데, 요즘에 딸은 돌봄 밑천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왕진 다니시면서 이런 사례를 많이 보셨을 것 같아요. 

네, 결혼을 하지 않은 딸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경우를 되게 많이 봤어요. 

딸이 아니더라도 보호자는 주로 여성 아닌가요? 아내라든지. 

그렇죠. 어머니인 경우도 있고요.

누나인 경우도 있을 테고요. 

남자 보호자는 한 분 봤던 것 같아요. 극진히 어머니를 모시는 남자 보호자였어요.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이런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위험한 것 같고요.

그렇죠. 사회적으로 남녀의 임금격차가 있으니까 노부모님을 모셔야 될 때 남자가 직장을 포기하기보다는 여자가 너무 쉽게 직장을 포기하고 집에 머물게 되는 거죠. 부모님을 모시는 데에도 어쨌든 돈이 드는데, 그만큼을 여성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벌 수가 없으니까요. 

의료계 안에서의 성차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어요. 일단은 여성들이 의료계에 많이 진출해서 수적으로 평균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조금 더 많이 진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의사는 남성으로 상징되어 있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제가 처음에 의사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간호사들과 여자 의사들의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많았어요.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나요?

‘여적여’ 같은 말들 있잖아요. 그런 것도 있고. 남자 의사들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의사로서 뭔가를 지시하면 간호사들이 크게 불만이 없는데, 이를테면 젊은 여자 의사가 나이 많은 간호사에게 뭔가를 지시하면 관계의 문제들이 생기고 그랬어요. 지금은 여자 의사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가야 되는지를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서로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지금은 분위기가 되게 좋아요. 제가 보면 여자 의사들이 간호사들이랑 더 잘 지내는 것 같거든요.

‘돌봄 센터’ 건립을 계획하고 있으시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돌봄 받고 임종을 맞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신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병원보다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저도 가능하면 병원 신세를 많이 안 지고 집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왕진을 가보면 신체적 조건이나 경제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병원에 가기 싫어서 집에 머무시는 분들도 많아요. 병원에 안 가시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보니까, 아무래도 병원에 가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질환 중심으로 보이고 내 삶을 잃어버리게 되는 과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병원에서 적절한 진료를 받으면서도 본인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삶이 연속될 수 있는 돌봄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병원이나 요양원 같은 시설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노인 돌봄 시설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언제 완성될지, 지금은 알 수 없겠죠?

내년에 만들 거예요. 저희 건물 샀습니다(웃음).

축하드려요(웃음). 

아직은 계약만 한 상태고요. 건물 살 돈을 모으고 있어요. 조합원들이랑 10억 모으기로 했거든요. 집에 머무는 분들을 케어하기 위한 재가 케어 중심부터 시작할 거고, 궁극적으로는 요양원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살림의원부터 돌봄센터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활동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시나요?

일단 우리 동네에서 보자면 정주율이 높아지는 변화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계속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야 동네가 뭐가 필요하고 나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니까요. 오래오래 살고 싶은 마을이 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지역에서도 내가 오래 살고 싶은 마을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자원들을 개발했으면 좋겠어요. 의료협동조합도 그런 중요한 자원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마을 운동 같은 것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어떨까요? 어떤 일생을 살게 될까요?

공동육아협동조합을 만들었던 선배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서, 마을에서 자라서, 마을에 좋은 일자리도 많아지고, 마을에서 안심하고 나이 들어서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코로나 같은 전 세계적인 재앙이 닥치고 보니, 저도 마을이 되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코로나는 동선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이 빠르게 퍼지는 특성이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마을이랑 교류하면 안 된다는 건 아니고요. 우리 마을에도 충분히 좋은 병원이 많이 있고 좋은 직장도 많이 있다면, 그렇게 멀리까지 출퇴근 하면서 동선이 복잡하게 꼬이지 않아도 행복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마을을 꿈꾸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책이 나오고 나서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엄마 이야기는 많이 나오는데, 내는 없대~?’ 되게 서운해 하셨어요(웃음). 그래서 두 번째 책을 쓰면 아빠 이야기를 꼭 많이 실어드리겠다고 약속드리고 싶습니다(웃음). 




*추혜인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가정의학과 의사. 199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1학년 겨울 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진로를 변경해 이듬해 같은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서울대학교병원 가정의학과에서 수련을 받았으며, 여성 단체에서 만난 어라 님과 뜻을 합쳐 2012년,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조합)을 창립했다. 건강하고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온 8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추혜인 저
심플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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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황정은 “잘 모르면서 바라고, 이어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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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정은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소설을 쓴다는 건 타인의 삶을 생각하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신작 『연년세세』를 쓰면서 등장인물들이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마다 마음을 다쳤다는 황정은 작가. 그럼에도 계속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보지 않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삶, 누군가는 이미 살아버린 타인의 삶을. 그리고 그런 삶에 대한 자신의 몰이해를. 1946년생 여성 이순일과 그의 딸 한영진, 한세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네 편의 이야기를 묶은 『연년세세』는 지난 수년간 황정은 작가가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자 『디디의 우산』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신이다.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가닿을까. 황정은 작가는 ‘작가의 말’에 ‘누구에게 어떻게 읽히건 필요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고 썼다.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138쪽)





마음을 다쳐가며 쓴 소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에요.

후기에 그렇게 썼지만 오로지 그 이름 때문만은 아니에요. 순자라는 이름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생각했고 『연년세세』의 씨앗이 그때부터 있었지만, 씨앗이 싹 튼 시기는 『디디의 우산』에 있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후였어요. 그때부터 이상하게 ‘대대손손’이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더라고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비슷한 말이 등장하거든요. 좋아하지 않는 말인데 자꾸 생각났어요. 그래서 ‘연년세세’라는 제목으로 가부장제가 각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고 구상을 시작했어요.

사실 제 할머니 성함도 순자예요. 이순일처럼 호적상의 이름은 아니고요. 신기하고 반가운 동시에 ‘순자’라는 이름의 뜻을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순자’라는 이름이 정말 많아요.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고 지금도 많은 여성들의 삶에 ‘순자’가 있는 것 같아요. 아이의 이름을 굳이 순자라고 부를 때, 어른들이 기대하는 것이 있잖아요. 순한 아이. 그런데 순하다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어떤 생각인가요?

한 사람의 삶이 온전히 본인의 선택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다양한 삶의 조건이 있고, 조건들은 시대 상황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순한 아이로 살기를 요구받고, 그런 이름으로 호명되는 게 대체 어떤 일일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두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고요. 

그 과정에서 신기한 경험을 하셨다고요. 

말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평소엔 말을 잘 하시는 분들이거든요. 특히 한국전쟁과 이후 몇년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못하셨어요. 술어를 말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제 얼굴에서 말을 찾으려는 것처럼 저를 열심히 쳐다보면서 말하려고 노력하는데 말을 잘 찾지 못하셨어요. 그분들도 그때 깨달은 것 같았어요. ‘내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구나’하고요.  



아,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다고요?

네. 말을 잘 할 수 없으니까 자꾸 변명하듯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는 다들 이런 일을 겪었고, 더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도 많아서 어디 가서 말해본 적이 없다’고요. 피난 이야기를 들으려고 진행한 인터뷰였는데 그때 들은 피난 이야기에서 『연년세세』에 들어간 건 한두 군데 정도예요. 말의 내용보다는 말하는 형식에 관심이 갔고요. 

독자 리뷰를 보면 소설 속 인물들에 공감하면서도 마음 아파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소설 쓰기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연년세세』를 쓰면서 고생을 조금 했어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요. 보통 단편 하나를 쓰는데 길어야 두세 달 걸리는데 <무명>을 6개월 정도 쓴 것 같아요. 스스로를 괴롭히면서요. 180매까지 썼다가 처음부터 다시 쓰기도 했고요. 

어떤 점이 가장 괴로웠나요?

인물들의 삶에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선택들이 계속 등장해요. 그러다 보니 소설을 쓰면서 인물들과 싸우는 거예요. 그 인물은 이미 어떤 선택에 따른 삶을 반평생 이상 살아버렸는데 저는 소설 바깥에서 그 인물한테 계속 ‘왜’를 물으면서 괴로워하는 거죠. 아주 마음 아픈 문장을 써놓고 나서요. 결국 납득했지만, 그 과정에서 계속 마음을 다쳤어요. 그래서 소설을 쓰기가 힘들었고요. 

가장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이 있다면요?

글쎄요. 예를 들어 기혼의 삶이 그랬고요. 이순일이 한영진에게 생계를 의탁한 것이나 한세진이 한영진의 삶을 무대에 올린 것들이요.




화해를 원하지 않았어요

이순일과 한영진의 관계와 갈등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영진이 끝내 이순일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잖아요. 

일단 갈등 해소가 이 소설의 목적은 아니었어요.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수 있는 갈등도 아니고요. 어떤 갈등 상황에서 한바탕 퍼부어대면 그 순간의 감정은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르죠.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 저도 ‘한영진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안 하더라고요 한영진이. 그건 제가 아니라 한영진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한영진은 왜 끝내 말하지 못했을까요? 

한영진의 원망은 이순일을 향하고 있지만, 온전히 이순일만 탓할 수는 없다는 걸 한영진도 알 것 같았어요. 이순일에게 원망을 터뜨린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요. 살림과 육아로 이순일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도 한영진은 알고 있고요. 게다가 가장 역할을 충실히 해 온 한영진이라면 이순일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한세진이 한만수에게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모욕감을 느끼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이때 한세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모성애에 대한 칭송, 정언명령과 같은 말이 기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만수가 이야기하고 있는 맥락에서요. 한세진도 그걸 즉각 알았을 거고, 소설 바깥에서 이 상황을 목격하는 독자들도 한세진과 같은 감정을 느낄 거로 생각했고요. 그리고 한만수가 정말 베풀듯이 이야기하거든요. 영어를 번역한 것 같은 말투로요. 

그 부분에서도 멈칫했어요. 정말 베푸는 말로 들려서요.

‘모성은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말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베풀어져요. 다들 알잖아요. 그래서 그런 유사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누군가는 모멸감을 느끼는 거죠. 이제는 너무 많은 여성이 눈치를 채서 예전보다 더 많지 않을까 싶고요. 한세진도 그런 인물인 거죠. 그리고 한세진이 이런 상황에서 모멸감을 느끼는 인물이기 때문에 한세진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모멸감에 대한 보상 같은 건가요?

아뇨. 이전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 이전 세대의 삶을 알고 있지만 다른 선택을 하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화자의 이야기로 마지막 단편을 쓰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말>에 한영진이 김원상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특별한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하죠.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면서 답답했던 것 같아요. 

한영진의 이런 생각들과 다투는 게 대단히 힘들었어요. 소설 초반에 한영진이 “매력 있다”는 말을 듣잖아요. 한영진이 즉시 말해요. “나는 이미 40대고, 결혼도 했다”고요. 반발하듯이. ‘내게 매력 있다고? 그럴리 없어’ 하는 태도인데 그 이유가 ‘나는 나이 먹었고 이미 결혼했고 아이도 있다’ 였어요. 이 반사적인 반응이 이상하고 속상했어요.  

현실에서 많은 여성이 한영진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을 폄훼하는 말 같은 것들이요. 자주 들어서 자주 하게 된 말 같은 거. 한영진은 본인이 왜 이런 대답을 하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지만 저는 그 대답이나 태도의 맥락을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서 일일이 마음을 다치는 거죠. 소설 바깥에서. 

한영진과 작가님이 대치하는 상황이…(웃음)

대치까지는 아니지만… 그렇죠. 앞에서 말씀하신 '특별한 악의’ 같은 것도…  모종의 악의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소설에서 그렇게 말해버리면 그건 한영진이 아니라 작가의 말인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하고 싶은 말>에서는 한영진이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말들을 제가 받아 적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또 발생해 버리고 그건 소설 바깥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도 계속 쓰게 만든 동력이 있다면 뭘까요? 마음을 다치면서 써야 했던.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의 삶, 선택이라는 게 그다지 가능하지 않았던 시기에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잖아요. 살림을 정말 사람을 살리는 일로 경험한 어떤 사람의 삶이요. 출산과 양육을 감당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몰이해가 저한테 있었고, 그런 몰이해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나 봐요. ‘더’ 생각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내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현실에 이미 있는 삶들에 대해서요. 실은 이 욕망이 이 소설들을 쓰게 만든 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디디의 우산』에 이은 연작소설인데 이유가 있나요?

연작소설을 선호하는 건 아니고요. 하나의 흐름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려고 하니까 여러 시점이 필요해서 연작이라는 형태로 계속 작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디디의 우산』이나 『연년세세』 이전에 한 작업도 실은 연작 성격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예전에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온다”는 말도 하셨더라고요. 같은 맥락인가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요. 아주 예전인 것 같아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그냥 어떤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그게 어느 순간 소설이 돼요. 지난 10년간 저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 건 한국 사회였고요. 

소설 속 장면에 관해 묻고 싶을 때가 많은데 망설여져요. 독자들의 해석을 제한할 것 같아서요. 소설에 대해서 작가가 어느 정도로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요?

기본적으로 많이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디디의 우산』 과 『연년세세』의 경우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독자와 작가 사이에 대화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제 다른 책들보다 조금 더. 그래서 이 소설들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어요. 

말을 많이 하는 걸 꺼리는 것 같아요. 

말은 생각보다 빠르잖아요. 실수할 수밖에 없어요.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말들을 하거나, 습관 같은 말들을 나중에 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때가 많아요. 저도 수십 년을 한국 사회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내면화하고 있는 상투적인 말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 말들이 언제 나올지 몰라서 긴장하는 편이에요.



책 앞부분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라는 글귀를 사인과 함께 쓰셨어요. <다가오는 것들>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고요. 어쩌면 이 소설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다가오는 것들>에 ‘안나는 안나의 삶을 여기서’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게 나올 줄 몰랐어요. 그 문장을 쓰면서 이 소설이『디디의 우산』을 향한 답신 중 하나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디디의 우산』에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 문장을 자주 생각했거든요. 그 문장을 ‘안나는 안나의 삶을 여기서’라는 문장으로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의 앞에도 그 메시지를 쓰고 싶었고요. 

이순일이 잘 사는 게 뭔지 모르면서 ‘잘 살기’를 바랐다고 말해요. 이순일의 말을 빌려서 ‘잘 살기’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는데요. 작가님에게 ‘잘 살기’란 무엇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저도 ‘잘’의 의미를 열심히 생각하고 노력하는데요. 많은 사람이 ‘잘 살기’가 무엇인지 질문할 기회도 없이 사는 것 같아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잘 사는 삶이라는 게 답이 하나일 수 없는데도 그렇죠. 그러니 이런 질문들을 더 여유 있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좋겠어요. 이순일 뿐만 아니라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잘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내용이 개인적으로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채로 거대한 질문이 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너무 큰 소리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이미 많은 삶이 그렇게 연년세세(年年歲歲)로 이어져 왔고요. 앞으로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미 많은 여성이 온 사회가 자기한테 하는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챘으니까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달라진 것들이 있고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황정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되고, 한국일보 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 소설 『디디의 우산』 등을 썼다.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양의 미래』로 제5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나 현대문학 사태로 상을 반납한 바 있다



연년세세 年年歲歲
연년세세 年年歲歲
황정은 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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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박정섭 “읽으면 배가 고파지는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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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박정섭 작가와 최경식 작가

최경식 작가의 『어서 오세요! ㄱㄴㄷ 뷔페』를 읽고 나니 허기졌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14개 닿소리로 시작하는 42가지 음식이 책장 가득 펼쳐지는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ㄱㄴㄷ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는 최경식 작가는 아이에게 한글을 알려주는 아빠의 마음으로 『어서 오세요! ㄱㄴㄷ 뷔페』를 펴냈다.



이 책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노래 그림책’이라는 것. 최경식 작가의 글에 박정섭 작가가 음을 붙여 동명의 노래를 만들었다. 작가가 즐겁게 임한 작품의 에너지는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두 그림책 작가의 컬래버레이션이 얼마나 유쾌했는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생생히 느껴졌다. 인터뷰는 박정섭 작가가 운영하는 공간 ‘그림책 식당’에서 진행됐다.





밥 먹기 전에 보면 좋을 거예요

두 분의 인연이 궁금해요. 원래 친분이 있으셨어요?

박정섭: 한 3~4년 전쯤 그림책 작가들 모임에서 처음 만났어요. 

최경식:그날도 그림책 식당에서 만났거든요. 당시에는 여기에 오락기가 하나 있었는데요. 그날 제가 멤버들 중 가장 먼저 도착해서 어색하게 앉아 오락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두 분이 처음으로 함께한 작업인데요. 그림책에 곡을 붙이는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최경식:출판사 첫 미팅 때 문득, 노래로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흘러가듯 지나갔는데 책 작업이 진행되면서 점점 발전했어요. 진지하게 곡을 만들자는 대화가 오고 갈 무렵에 박정섭 작가님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림책 식당에 왔을 때 작곡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거든요. (웃음) 『똥시집』『검은 강아지』 등 작가님의 그림책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도 하셨고요. 함께 해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부탁을 드렸어요. 

박정섭: 저는 그동안 혼자서만 작곡을 했지, 외부의 의뢰를 받은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출판사의 연락을 받고 좀 의아하면서도 좋았어요. ‘아 이렇게 데뷔하는 건가?’ 싶고. (웃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죠.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도 선뜻 응할 수 있었던 건, 처음 연락을 받았을 당시에는 간단한 작업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중간에 작업 방향이 바뀌면서 어려워졌죠. (웃음)

어떻게 바뀌었나요?

박정섭:처음 제안을 주셨을 땐 음식 이름은 제외하고, 시작되는 문장인 “기대 가득 안고서” , “나란하게 줄 서요” 등의 글로만 짧은 노래를 만든다고 했어요. 그럼 곡 길이가 짧거든요. ‘이 정도면 도전할 수 있겠다’ 싶어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는데, 중간에 나, 아빠, 엄마가 먹는 음식을 다 넣어서 노래를 만드는 걸로 방향이 바뀌었어요. 그때부터 지옥이 펼쳐졌습니다. (웃음) 처음에 했던 작곡은 술술 풀렸는데, 그렇게 바뀌고 나니 멍하더라고요. 매일 고민만 하다가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다행이었죠.

최경식: 맞아요. 사실 저와 편집자의 생각은 음식은 제외하고 글의 앞부분만 따서 짧은 노래를 만드는 거였는데요. 회의 중에 전체적으로 곡을 붙여서 한 편의 노래를 만드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와서 갑자기 일이 커졌어요. 원래 무슨 일이든 수정이 제일 힘든 법인데, 정섭 작가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훨씬 좋은 노래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최경식 작가님은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최경식: 한 번 듣고 계속 흥얼거렸어요. 저는 처음 작업한 짧은 버전의 노래도 좋았거든요. ‘그냥 음식 넣지 말고 이대로 가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너무 좋았는데, 새로운 버전을 들으니까 이전 노래가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웃음)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박정섭 작가님은요? 『어서 오세요! ㄱㄴㄷ 뷔페』의 첫인상이 어땠을지 궁금해요. 

박정섭: 곡 작업을 의뢰받았을 땐 그림을 못 봤고, 출간한 뒤에 책을 처음 봤는데요. 경식 작가님 특유의 세밀하고 꼼꼼한 스타일이 편안하게 바뀌었다는 게 가장 먼저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신선했죠. 작가님이 기존의 작업 방식을 내려놓고 되게 즐겁게 작업하신 것 같아서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 배가 고파요. 마치 식전 빵처럼, 밥 먹기 전에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침이 막 고이거든요.(웃음)


최경식 작가

2인3각 경기를 하는 기분이었어요

‘ㄱㄴㄷ 그림책’을 펴낸 계기가 있나요?

최경식:처음 그림책 작가가 되었을 때부터 줄곧 ㄱㄴㄷ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아이디어를 구상하다가도 늘 마지막에는 ㄱㄴㄷ 그림책에 대해 고민하곤 했죠. 제가 2007년에 회사를 그만두었을 당시에 첫 아이가 생겼거든요. 아마 아이의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아이에게 ㄱㄴㄷ을 알려주곤 했던 게 머릿속에 깊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시중에 이미 ㄱㄴㄷ 그림책이 많잖아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을지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작년 이맘때쯤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처음에는 ‘과일로 할까? 음식으로 해볼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한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뷔페라는 개념을 대입하니까 머릿속에 전구가 탁 켜지면서 내용이 짜 맞춰지더라고요. 

음악 작업은 어떻게 진행하셨어요? 

박정섭저는 우쿨렐레로 작곡을 해요. 일단 A4용지에 가사를 쭉 적은 뒤, 코드를 넣고 우쿨렐레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봤어요. 코드가 너무 복잡하면 아이들이 부르기 어려우니까, 간단하면서도 중독성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처음 두 소절은 들었을 때 곧장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쉬운 멜로디를 배치하고, 그다음에는 변주를 해서 지루하지 않도록 했어요. 이후에 편곡을 담당해주신 박주운 선생님께서 좀 더 신나는 느낌으로 작업을 해주셨어요. 

곡을 만들면서 제일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박정섭: 듣다가 중간에 지겨워지지 않도록 만드는 게 관건이었어요. 중독성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가사가 재밌어서 노래도 잘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경식:이 노래는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흥얼거릴 수밖에 없어요. (웃음)

두 분이 직접 녹음도 하셨잖아요. 

최경식: 저는 “기역! 니은! 디귿!” 하고 외친 것뿐이라 녹음에 참여했다고 하긴 어렵지만(웃음)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매 소절마다 녹음한 소리를 수정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더라고요. 총 3~4시간쯤 녹음했던 것 같아요.

박정섭:목표는 1시간 30분이었는데, 3시간 이상 걸렸어요. 함께 녹음을 해 준 아이들 덕분에 더 즐거운 시간이었죠. 노래는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시는 혜경 님의 큰 아이가 불러줬어요. 곡을 만들고 나서 5~6학년쯤 된 여자아이가 노래를 부르면 좋을 것 같았는데, 어떻게 섭외할지 고민하던 차에 평소 알고 지내던 혜경 작가님의 아이가 떠올라서 부탁을 드렸거든요. 

녹음 당일에 혜경 작가님이 남매를 데리고 스튜디오에 오셨는데요. 노래하는 역할을 맡은 큰 아이는 긴장한 반면, 둘째 아이는 굉장히 의욕적이더라고요.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누나가 녹음할 때 같이 들어가서 기역 니은 디귿이라고 외치는 거 같이 할래?”라고 물었더니 벌떡 일어나서 그러겠다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두 아이 모두 녹음을 하게 됐는데, 덕분에 더 좋은 노래가 나왔어요. 경식 작가님과 아이가 같이 닿소리를 외쳐주니까 에너지가 확 살더라고요. 녹음하는 내내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최경식:맞아요. 만약 저 혼자 했다면 노래가 칙칙했을 거예요. (웃음) 

음악 작업을 하면서 의견 차이는 없었나요? 

박정섭: 출판사와 의견이 달랐던 게 딱 하나 있어요. 가사 중에 “난, 엄만, 아빤”이라고 쓴 부분을 출판사에서 전부 “나는, 엄마는, 아빠는”으로 고쳐 달라고 하셨거든요. 아무래도 아이들이 보는 책이니까 교육적인 부분을 깊이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거 하나 바꿨다고 완전히 다른 노래가 되어버리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아서 제가 안 된다고 강하게 설득을 했어요. 결국 제 뜻을 받아들여 주셔서, 경식 작가님께 그림책의 글도 “난, 엄만, 아빤”으로 수정할 수 있을지 조심스레 여쭤봤는데 흔쾌히 그렇게 해주셨어요. 

최경식: 사실 처음에는 글도 전부 ‘난’이라고 쓰여 있었어요.(웃음) 저도 확실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듣고 나중에 바꾸었던 건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거죠. 글과 음악을 함께 작업하는 데 이렇게 여러 가지를 살펴야 하는 과정이 있을 줄 몰랐어요. 단순히 곡을 붙이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음악과 그림책 작업이 한 작품으로 움직여야 하고 하나가 바뀌면 다른 하나에도 영향이 미친다는 걸 이번 작업을 통해 깨달았죠. 

박정섭 작가님은 그림책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종종 해오셨지만, 최경식 작가님은 처음이시잖아요. 이번 작업이 어땠나요? 

최경식:정말 신선하고 좋았어요. 그림책을 만들 때는 글, 그림 모두 혼자 해내야 하기 때문에 외로울 때가 있거든요. 삽화 작업을 할 때도 글을 쓰는 작가와는 보통 편집자를 거쳐서 소통하지, 직접 만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늘 혼자 일하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협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좋아하는 작가와 함께할 수 있어서 더 즐거웠죠. 마치 2인 3각 경기처럼 정섭 작가님과 발을 맞춰서 착착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박정섭: 저도요. 외롭지 않고 즐겁게 작업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그림책이 음악과 만날 때 일어나는 시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최경식: 여러 차원으로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제일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공부할 때도 눈으로 보고, 소리 내서 읽고, 손으로 쓰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하잖아요. 또 음악에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어요. 제가 90학번인데, 그때 당시 들었던 노래가 나오면 순식간에 대학생 때의 추억이 소환되거든요. 아이들도 음악과 함께 그림책을 접한다면, 이 책을 더 오래 기억해주지 않을까요. 

박정섭: 제가 그림책과 음악 작업을 함께 하게 된 건, 한때 음악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음악감독은 하지 못했지만, 그림책 작가가 되면서 ‘그림책 OST’를 제작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만든 그림책에 곡을 붙였을 땐 모든 작업이 다 끝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저 혼자 글, 그림, 음악을 다 해야 하니까요. 이번에는 경식 작가님이 글, 그림을 해주시니까 저는 음악만 만들면 돼서 참 좋았어요. (웃음) 상대적으로 작업이 정말 빨리 끝나고 편하더라고요. 

최경식: 다음에 또 한 번 같이 해요. (웃음) 


박정섭 작가


그림책은 ‘건축’과 ‘음식’ 같아요

이번 책은 전작들과 느낌이 많이 달라요. 가볍고 경쾌하다고 할까요. 

최경식:그림은 엉덩이로 그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동안 제가 했던 작업이 특히 그런 편인데요. 계속 무언가를 그리고, 덧칠하고, 쌓아 올리는 작업을 오래 하다가 이번에는 처음으로 부담을 내려놓고 작업했어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고 재미있게 한 일이라서 좀 낯설어요. 음식을 그리는 데는 한 달이 걸렸고, 인물은 일주일 만에 다 그렸거든요. 평소의 저에게는 이렇게 빨리 끝나는 작업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면서도 좋더라고요. (웃음)

박정섭: 표정만 봐도 정말 좋아하시는 거 같네요. (웃음) 

최경식: 이전 작품들은 한 장 한 장 그릴 때마다 뿌듯함이 있었지만,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작업을 하면서 청량감을 느꼈어요. 무조건 오래 그린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걸 알았죠.

작가의 말에서도 “요즘은 말랑한 그림을 그려 보려고 합니다”라고 하셨어요.  

최경식:어떤 계기가 있어서 새로 다짐을 한 건 아니고요. 출판사와 미팅할 때마다 버릇처럼 했던 말이에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늘 “이번엔 진짜 쉽게 가겠다”라고 했는데 드디어 실현됐네요. (웃음) 사실 절반의 실현이에요. 원래 제 더미북에서는 음식도 캐릭터화 한 그림이었거든요. 그런데 편집부 회의에서 음식은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게 인물들과 대비되는 느낌이 들고,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어서 세밀하게 그렸어요. 다음 작품은 정말 쉽게 가보려고요. (웃음)

책에 들어갈 뷔페 메뉴들은 어떤 기준으로 정했나요? 

최경식: 먼저 각 자음으로 시작하는 음식들을 생각나는 대로 쫙 쓰고, ‘뷔페에 있을 법한 음식,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 위주로 추렸어요. 음식을 정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나중에는 편집자랑 같이 머리 싸매고 고민했어요. 예를 들어 원래 ‘포도’ 같은 과일도 있었는데, 이왕이면 조리한 음식을 넣자는 의견이 있어서 싹 빠지고 다시 고민하게 되는 일들이 종종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너비아니, 골뱅이 같은 음식들도 들어갔죠. (웃음) 사실 첫 회의 때는 진짜 뷔페처럼 애피타이저, 메인 음식, 디저트 순으로 음식을 맞추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그 순서를 지켜서 음식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더라고요. 아쉬운 대로 ‘ㅋ’ 부분만 음료(코코아, 콜라, 커피)로 통일했는데 다음 장에서 또 탕수육, 파스타 같은 음식을 먹어서 디저트 느낌이 사라졌어요.

박정섭:저는 이 순서가 맞는 거 같은데요. 원래 뷔페 가면 디저트 먹고 나서, 몇 접시 더 먹지 않아요? (웃음)

최경식:아, 그럼 오히려 현실적인 건가? (웃음) 각 자음에 맞는 음식들을 찾느라 어려웠지만, 반대로 좋은 점도 하나 있더라고요.

어떤 건가요?

최경식: ‘ㄹ’을 표현할 단어가 많았어요. 제가 그림책 모임에서 ㄱㄴㄷ 그림책을 주제로 발제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작가들이 호소했던 어려움이 ‘ㄹ’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는 거였어요. 보통 ㄱㄴㄷ 그림책을 보면 “룰루랄라, 랄랄라” 같은 의성어를 넣거나 “우리, 다리미”처럼 뒤의 음절로 ‘ㄹ’을 맞춰요. 두음법칙 때문에 외래어가 아니면 ‘ㄹ’로 시작하는 단어가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음식은 그런 제약에서 좀 자유로웠어요. 

가장 그리기 어려웠던 음식은 무엇인가요? 

최경식: 너비아니요. 뚜렷한 특징 없이 네모 반듯하게 구운 고기 요리라서 표현하기가 어려웠어요. 반대로 제일 쉬웠던 음식은 랍스터였고요. 사실 코로나19가 심해지는 바람에 식당을 가기가 어려워서 음식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힘든 점이 많았어요. 사진을 보고 그리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어쩔 수 없이 여러 각도에서 찍힌 사진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보며 작업을 했어요. 음식 그림은 광택을 잘 표현하는 게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박정섭:너비아니를 다른 음식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최경식: 그럼 음악도 바꿔 달라고 해야 하잖아요. (웃음) 민폐 끼칠 수 없어서 그림을 계속 수정했죠. 


(왼쪽부터) 최경식 작가와 박정섭 작가

이 책에는 “둘째에게 선물하고픈 아빠의 마음을 담았다”고요. 어떤 의미인가요?

최경식: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8살 차이가 나는데요. 첫째를 낳았을 때만 해도 제가 지금보다 덜 바빴거든요. 그래서 아이와 같이 시간을 많이 보냈고, 자주 놀아줬어요. 요즘은 그때보다 일이 많아져서 늘 둘째가 일어나기 전에 작업실에 나가고, 퇴근 후에도 피곤해서 오래 놀아주지 못해요. 그게 내내 미안해서, 이번 책은 둘째에게 선물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둘째가 정말 잘 먹거든요. 음식 그림 그리면서 아이 생각을 많이 했죠. 

책을 본 아이의 반응은 어땠나요?

최경식:노래를 계속 흥얼거려요. 그리고 “푸쉭푸쉭 방귀가” 부분을 제일 좋아했어요. 

박정섭:아이들은 방귀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웃음)

책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장면을 하나씩 꼽는다면요? 

최경식: 맨 마지막 장 “화장실로 뛰어요” 부분이요. 제 책 『파란 분수』에서 아이가 욕실로 달려가는 마지막 장면과 똑같거든요. 의도하고 그린 건 아니었는데 나중에 발견했어요. 아마 제 무의식에 있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박정섭: 저도 같은 장면이요. ‘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시원했어요. 여러 가지 의미로요. 

최경식: 사실 이 그림 그릴 때 조금 걱정했어요. 혹시 뷔페 음식이 상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생각할까 봐요. (웃음)

두 분에게 그림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최경식:제가 건축과를 나왔는데요. 건축을 배울 때, 종합 예술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미적인 감각과 공학적인 감각이 모두 필요하니까요. 그림책도 비슷해요. 건축 같은 느낌이 있죠. 그래서 작업을 할 땐 어려운데, 마치고 나면 뿌듯함이 정말 커요. 한 가지 아쉬운 건, 작업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거예요. 보통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2~3년 정도 걸리니까, 먹고살려면 다른 일을 병행해야 하죠. 그래서 늘 그림책 작업에 대한 갈증이 있어요. 『어서 오세요! ㄱㄴㄷ 뷔페』는 처음 아이디어를 생각한 것부터 출간까지 딱 1년이 걸렸어요. 제 책 중에 제일 빨리 나온 거예요. 

박정섭:저에게 그림책은 음식 같아요. 저는 요리를 하는 것도 참 좋아하는데, 몸에 나쁜 음식은 단순히 배만 부르지만 좋은 음식은 영양소가 골고루 있잖아요. 그림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좋은 그림책은 보고 또 봐도 볼 때마다 계속 새로운 걸 느끼게 되죠. 또 그림책 작업을 할 땐 요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말 요리를 잘하는 고수들은 몇 가지 재료만으로도 맛을 내잖아요. 그런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해요. 내가 하나씩 그림책을 펴낼 때마다 어떤 메뉴가 완성되는 것 같죠. 그래서 더 어렵고요. 

요즘 그림책 식당은 어떻게 운영하고 계세요? 

박정섭: 영등포 그림책 식당은 내년 봄에 정리하고, 강원도로 내려갈 예정이에요. 거기서 그림책 식당을 다시 오픈하려고요. 게스트하우스와 연계해서 운영할 생각인데요. 내려와서 바다도 보고, 휴식도 하고, 그림책도 보고 가시면 좋을 공간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책에 나오는 다양한 음식들 중 오늘 저녁에 먹고 싶은 걸 하나씩 골라주세요.  

박정섭: 저는 초밥이요. 한때 초밥 요리사가 되고 싶었는데 취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만둔 적이 있어요. 초밥을 만들려면 생선을 잘 죽여야 하더라고요. 맛있는 초밥의 뒤에는 살아있는 생선을 빨리 죽이는 과정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거예요. 비록 요리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초밥은 여전히 좋아해요. 오늘은 초밥을 먹고 싶네요.(웃음) 

최경식: 저는 스테이크요. 소고기가 먹고 싶어요. 원래 ‘ㅅ’에는 메인 요리로 스테이크 하나만 넣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커다란 스테이크를 온 가족이 나눠 먹는 모습으로요. 

박정섭: 만약 그랬다면 노래도 바뀌었겠네요. 이렇게 해야 하나? “난 스테이크~ 아빤 미디엄~” (일동 웃음)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최경식: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뷔페를 거의 못 가잖아요. 그림책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래고, 대리만족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웃음)

박정섭:음악을 들으면서 이 책을 읽으면 정말 배가 고프거든요. 식사하기 전에 한 번씩 노래를 들으면 입맛이 돌면서 건강이 좋아질 거예요. (웃음) 편하고, 즐겁게 노래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최경식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건축을 공부해서 그런지 딱딱한 그림을 잘 그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말랑한 그림을 그려 보려고 합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는 『파란 분수』, 그린 책으로는 『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 『도시의 나무 친구들』이 있습니다.
 



*박정섭

어릴 적 산만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고 살아왔지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니 상상력의 크기가 산만 하단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젠 그 상상력을 주위 사람들과 즐겁게 나누며 늙어 가고 싶답니다. 그림책 《검은 강아지》 《그림책 쿠킹박스》 《도둑을 잡아라》 《놀자》 《감기 걸린 물고기》 《짝꿍》을 지었고, 동시를 쓰고 그린 《똥시집》이 있습니다. 《토선생 거선생》의 이야기를 쓰고, 《담배 피우는 엄마》 《콧구멍 왕자》 《우리 반 욕킬러》 《으랏차차 뚱보클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금은 서울 문래동에서 그림책을 맛보는 그림책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ㄱㄴㄷ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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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식 글그림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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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희경 “당신의 자리에서 반 발짝 나아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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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통과한 시간은 어디로 갈까? 지난 10년간 유희경 시인의 마음에 찰랑거리던 낱말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됐다.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의 책방지기이기도 한 그는 무수한 밤을 보내며 서점의 불을 밝히고 글을 썼다. 세계의 첫 밤처럼 또 하나의 밤이 밀려오는 동안, 시인의 마음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아마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글들은 같은 밤을 거쳐온 당신에게 시인이 건네는 편지이므로.

유희경은 시인이자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의 책방지기다.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 있다. 그는 시를 쓰는 틈틈이 작은 글을 썼다.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은 그렇게 10년 동안 모은 글이다.



세계의 첫 밤, 당신에게

시집을 출간하면 마음앓이를 하신다고요. 이번 산문집은 어땠나요?

시집과는 다른 의미로 마음앓이를 했어요. 시는 한번 완성되면 손대지 않는데, 이번 산문집은 기존의 글을 많이 고쳤거든요. 독자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려고 애썼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생기고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죠. 신경이 쓰여서 두 번은 못 하겠다 했는데, 지금은 평온해졌어요.(웃음)

“이 책이 시와 산문, 소설과 에세이 중간쯤 놓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처음에 어떤 책을 상상하셨어요?

세상에 없는 양식의 책이었으면 했어요. 저는 좋은 책은 독자가 알고 있는 세계보다 반 발짝 앞선 것이라 생각해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건 그렇지 않건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거죠. 읽었을 때, ‘나도 이거 알아’하고 공감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작가인 저도 저만의 사적인 기록에서 한발 나와야 하는 거죠.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기록이 되지 않도록 시와 산문의 중간 지점을 찾으신 거군요.  

그렇죠. 가령 『월간 채널예스』에 연재했던 시집서점 칼럼은 ‘위트앤시니컬’을 운영하는 제 상황에 특화된 이야기지만, 이 산문집의 글들은 오롯이 저만의 것은 아니예요. 열린 이야기에 독자들이 들어가서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하고 싶었죠.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시적인 요소를 덧붙여주는 것이었고요. 그래서 시도 산문도 아닌 그 무언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10년간 써 오신 글을 묶으셨어요. 꽤 긴 시간인데요.

오래 망설였죠. 그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시집을 냈고 큰 수술을 했고 서점을 열기도 했어요. 그 과정에서 가치관이 변하다 보니 고칠 부분도 많은 거예요. 큰 수정이 4번 정도 있었어요. 주어를 전부 ‘나’로 바꾸기도 하고, 이야기를 더 쉽게 풀어 보기도 하면서요. 고치면서도 잘하는 짓일까 의심이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누가 한 번씩 흔들어요. 저번 원고가 낫지 않아 하고.(웃음)

수정 이전으로 돌아가신 적도 있나요?

아니요. 한번 결정하면 후회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문제가 생겨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요.

10년 전의 자신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예전보다 무뎌졌죠. 원고를 다시 보면, 이렇게까지 예민할 일인가 싶은 것도 있어요. 물론 많이 알게 되어서 너그러워진 것이기도 하고요.



다시 조용한 밤의 시간으로

시 쓰기와 산문 쓰기는 어떻게 다른가요?

이번 산문집은 시 쓰기와 기본적인 태도는 같았어요. 물론 그 외의 산문들은 시와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서 서로 방해될 때도 있어요. 연재 시기가 겹치기라도 하면 곤란했죠. 시를 쓰다 산문으로 가면, 이렇게 쉽게 나아가도 되나 싶고, 산문을 쓰다가 시로 가면 이렇게 멈추지 않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같은 주제라도 산문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분명하다면, 시는 설명을 달아서는 안 되거든요.

시와 산문에 ‘당신’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이번 산문집도 ‘당신에게’로 시작하죠.

정중하게 ‘너’를 대하고 싶었는데 그런 단어가 ‘당신’밖에 없었죠. 교정볼 때, 이 단어가 너무 반복되어서 ‘그대’로 바꿔볼까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게 어울리는 단어는 ‘당신’이더라고요. 문득 부모님이 서로를 당신이라 불렀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두 분이 사이가 좋으셨는데, 자식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당신’이었던 거죠.

주된 정서가 ‘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밤도 낮도 아닌, 저물 녘의 시간이요.

기형도 시인이 ‘푸른 저녁’이라고 표현했죠. 밤이 찾아오기 직전, 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시간. 모든 것이 파랗게 변하는 풍경에 대한 기억도 많고, 이 시간에는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이 찾아오잖아요. 골목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밥 짓는 냄새… 이 모든 것들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죠. 글을 쓰면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이 시간을 자주 불러내는 것 같아요.

프롤로그에는 ‘세계의 첫 밤’이 에필로그에는 ‘새해의 밤’이 나와요. 

밤은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그런 장치를 했어요. 계속 똑같은 밤이 반복되지만, 그 시간들을 다르게 만드는 건 내 관점의 시간성이거든요. 제 시에서 반복되는 주제이기도 해요.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다양한 마음의 부침을 겪고는 결국 조용한 ‘적요’ 상태로 돌아오죠.

사실 고요한 마음이 되고 싶다는 바람에 가까워요.(웃음) 산문집의 ‘나’는 현실의 저와 완전히 같지 않고, ‘바라는 나’이기도 하고 ‘그때 그랬어야 했던 나’이기도 해요. 그런 태도가 보였으면 해서 “그땐 그랬어”하는 시제를 뒤에 깔아 두기도 했죠. 힘든 일이 있어도 지나가고 나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지켜보면서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다독이고 싶은 거죠.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듯한 익숙한 감정을 ‘전생의 기억’이라 표현하셨어요. 

저는 새롭게 느끼는 감정도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쁨, 슬픔, 공포 등 기본적인 감정은 이미 우리가 이미 체험한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것을 두려워하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 감정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매일 반복되는 밤을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의 첫 밤’이 있듯이, 감정에도 근원이 있었겠죠. 현재의 내가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있었던 것을 ‘전생’이라 은유한 거예요. 이 전생은 ‘이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전(全)’ 생에 걸쳐서 배워야 하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해요. 너무 엄청난 것을 겪은 순간, 삶을 다 살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는 하잖아요.



시 읽는 사람들은 닮았어요

현재의 울음이 아니라, 지나간 울음을 쓰셨어요. “어디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소리, 가깝게 들리다가 이내 멀어지며 점점 사라져간다.”(「일기」) 

저는 눈물이 많은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뒤늦게 ‘그때 내가 울었던 거구나’ 알게 될 때가 있어요. 한바탕 울면서 해소한 뒤에 납득하고 화해하는 순간으로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해소의 순간마저 지나가 버리면 무엇이 남는 걸까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건지 다른 의미가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죠. 제 시에 “낡고 흔한 울음”이라는 표현을 넣은 적이 있어요. 이 구절을 떠올렸다면, 그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교정과 운동장 풍경도 등장하죠. 작가님은 어떤 소년이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잘 삐치는 아이였어요.(웃음) 혼자 마음이 상해서 집에 가기도 하고, 친구들도 “희경이는 너무 잘 삐쳐”라고 말했죠. 어린 저에게는 마음에 일어나는 작은 소요도 중요한데 상대는 아니니까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하고 원망했던 거죠.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강철 가슴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해를 못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거든요.

시니컬하기도 했나요?(웃음)

네,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까칠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서점에 손님이 찾아와서 산문집에 사인을 받고는 저를 ‘오빠’라고 부르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같은 교회를 다녔대요. “오빠는 친절하고 시크한 사람이었어요.”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 까칠하고 시니컬했나 싶더라고요.(웃음)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이 얼마 전 4주년을 맞이했어요. 처음 문을 열 때, 김소연 시인이 “이 공간에 온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하셨죠. 서점이 어떤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 같나요?

처음에 기대했던 대로 느슨한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어요. 서점에서 사람들은 시집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감정적으로 교류하기도 해요. 행사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성향이 닮았어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섞이죠.

서점을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요?

손님들이 ‘위트앤시니컬’의 분위기를 누릴 기회를 더 만들고 싶죠. 서점이 신촌에 있을 때는 들어와 앉아서 충분히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었거든요. 지금의 ‘위트앤시니컬’은 책을 사면 빠져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앉을 공간을 마련하는데도 아직은 쉽지 않아요. 앞으로 사람들이 편하게 시를 읽고 머무르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게 과제예요.




*유희경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에서 문예창작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극작을 전공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 되었으며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 있다. 시를 쓰는 틈틈이 작은 글을 썼다.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은 그렇게 10년 동안 모은 글이다.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유희경 저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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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재 “3년 만에 출간한 에세이, 이번에는 농담이 아닌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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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box. All Rights Reserved. 사진 최문혁 스튜디오

코미디언, 방송인, 작가, 크리에이터…… 2014년 SNL에서의 첫 등장 이후 유병재라는 이름 앞에 따라오는 타이틀은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어떤 단계에서든, 메모를 멈추지 않고 묵묵히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그는 늘 같은 모습이다. 『블랙코미디』 이후 3년 만에 출간되는 신간 『말장난』에는 짧고 깊이 있는 삼행시 201편이 담겨 있다. 『말장난』의 편집자와 유병재가 나눈 인터뷰. 두 사람의 솔직한 이야기를 공개한다. 



두 번째 책입니다. 첫 책을 쓸 때와는 다른, 특별한 집필 동기, 즐거움, 만족감 같은 것이 있었나요?

첫 책 블랙코미디는 진지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벼워졌다면 이번 책은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무겁게 마무리 했습니다. 방송에서 1회성으로 휘발되는 삼행시들을 모아보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접근했는데 쓰다 보니 새로운 가능성도 엿보게 되었고 진짜 시인이라도 된 냥 꼴값 떠는 순간도 솔직히 아주 잠깐씩 찾아왔던 것 같아요. 

왜 하필 삼행시의 형식을 빌렸나요? 삼행시의 특별한 재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무언가를 만들 때 어떤 제한을 두는 방법을 즐겨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안 되는 팬미팅이라던지 웃으면 안 되는 생일파티, 아니면 리액션을 금지한 마술쇼라던지. 굳이 한계를 설정해두고 거기 안에서 노는 게 재밌어요. 삼행시 역시 첫음절을 제한했을 때 나오게 되는 그 말장난 특유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200편 가까운 ‘짧은 시’들을 읽어가며, 인간 유병재는 눈물이 되게 많은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물과 웃음이 유병재의 글쓰기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눈물이 많았고 그걸 극복하는 방법으로 웃음을 택했던 것 같아요. 지금에서는 슬픔이 너무 소중한 웃음의 소재입니다. 안 섞일 것 같은 여러 가지 감정과 웃음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후회> <상담> <거울> <개인사업자> <인건비> <상처> <자기소개서>처럼 지금의 우리를 대변해준다고 생각되는 글들이 <실검> <상한가> <꾸안꾸>처럼 ‘천재적’ 기지가 빛나는 글들보다 좋았습니다. 이 책을 통틀어 유독 마음에 드는 글이 있다면요? 

부끄럽지만 마음에 드는 글들이 좀 됩니다. 

기를 쓰고 잊으려 / 억지로 잊지 않으려 도 좋았고

거울 거짓 두 표제어가 책 거터를 기준으로 거울처럼 비춰진 것도 좋았고 

세금 내다 보니까 / 월세 내다 보니까 도 좋았구요

대학입학이 출발 / 이렇게 자라주었구나. 요 연작도 좋았고

편리한건 너 / 견디는 건 나. 요것도 아주 기가 막혔고 

사직사유서의 끝글자 맞춤도 아주 참신했고 개인사업자도 아주 속시원했고 직책 이름 시리즈도 아주 재치가 넘쳤다고 할 수 있는데 말장난이라는 표제어로 연달아 다섯 번 끝맺음 말을 만든 것도 장난 아니었죠. 많이 부끄럽네요. 그 외에도 아주 기가막힌 글들 투성이입니다.


ⓒSandbox. All Rights Reserved. 사진 최문혁 스튜디오

삼행시의 표제어를 선정한 기준은 무엇인가요? 삼행시를 쭉 읽으며, ‘가족’ ‘관계’ ‘직장’ ‘분노’ 등의 주제가 특히 돋보였는데요. 유병재에게 이런 주제들이 중요한 까닭이 있나요?

제 경험도 있지만 주변의 이야기들을 많이 녹였습니다. 이전의 책 농담집을 ‘코미디언’으로서 썼다면 이번 책은 스스로 ‘감정 대리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써봤어요.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공감하실만한 단어들 위주로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말장난』이라는 표제어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유병재의 캐릭터가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그렇게 봐주셨다니 너무 기쁩니다. 제가 이 책을 대하는 태도가 딱 그랬던 것 같아요. ‘에유 나 같은 게 무슨 시집이에요. 웃기지도 않어 증말.’ 그러면서도 일단 다음장 넘기면 이백편 정도 써져 있고.  무거워지고 젠체하려하는 나를 다잡는 의미가 컸던 것 같습니다.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요?

댁에서 홈트 한번 하실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니까 기왕에 사신 거 끝까지 읽어주실 분들이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글을 생각하는 시간의 유병재는 어떤 사람인가요?

약간 좀 재수 없어지는 것 같아요. 워낙 친구도 말수도 없어놔서 구어체보단 문어체에 익숙해서 그런지 좀 신나 있는 모습이 영 꼴 뵈기 싫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자기만의 노력이 있나요? 

메모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엄지 몇 번 움직이는 게 뭐 그렇게 귀찮다고 생각난 것들 못하고 까먹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날려버린 글들 중에 진짜 세상을 뒤바꿀만한 것들도 있었는데..

이번에 펴낸 책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문장의 여운이 짙습니다. 이 문장에서 시작하여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위해서는?”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요?

너무 쌩뚱 맞지 않나 싶어서 아직도 좀 부끄러운데 메이플스토리 확성기 아이템 같은 게 있어서 사람들한테 딱 한마디만 할 수 있다고 하면 그 말을 하고 싶습니다. 칼이든 말이든 글이든 서로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살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방법은 모르겠어요. 내가 그렇게 많은 거 바라는 게 아니거든요. 살리거나 뭐 잘 살게 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서로 죽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 죽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 죽인 다른 사람들 나무라는 꼴을 너무 많이 봤어요. 

어떤 책들을 좋아하나요?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다면요? (서점: 서서 숨만 쉬어도 점점 기분 좋아져. 믿어봐)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는 말을 맹신합니다. 기왕에 서점까지 갔으니 한번에 여러권 사오는 편인데 우선 독자로서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른 뒤에 인스타에 올려서 보여주고 싶은 책을 골라서 함께 구매합니다. 

『말장난』을 통해 만난 독자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만화를 좋아합니다. 저랑 비슷한 톤의 감정을 가진 책들도 좋아하고. 최근에 봤던 책은 네이선 파일 작가님의 <낯선 행성>은 귀여운 그림으로 방심 시켜놓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게 아주.. 영악하고 너무 좋습니다. 황석희님의 번역도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듭니다. GAZEROSHIN 작가님의 <그리 대단치도 않은 것들을 사랑하려>는 제가 원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줘서 참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김정연 작가님의 <혼자를 기르는 법> - 너무 너무 좋아서 난 왜 이렇게 못 쓸까 우울해지게 만드는..  이무기 작가님의 <곱게 자란 자식>은 일제강점기 이야기인데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연출력에 무릎을 치다 연골이 나갈 정도.. 닉 드르나소의 <사브리나>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꼰대 저격, 일침,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주는 사람…… 유병재를 둘러싼 키워드는 곧 당신이 ‘청춘의 표상’처럼 보이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변하니, 고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청춘이라기에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전보다는 셀러브리티에 가까운 입지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지점에 대한 당신의 고민이 궁금합니다.

믹 폴리라는 프로레슬러가 있습니다. 요즘 많이 알려진 부캐, 기믹 개념의 조상격인 레슬러인데 기본적으로 기믹이 많습니다. 로얄럼블이라는 등퇴장식 매치에서는 한 경기에 세 가지 다른 기믹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팔년 전에 쓴 일기에 믹 폴리를 보고 배우자는 글이 써있더라구요. 대충 난 어차피 변해갈거니까 그거 받아들이자라는 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잊혀질 권리가 없어진 시대에 사는 만큼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난 어차피 변할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유병재를 보고 좋아하고, 웃는데 정작 본인이 박장대소를 한다든지 하는 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자연인 유병재는 무엇을 좋아하나요? 무엇이 웃긴가요? 

안 그래도 잘 못 웃는 게 평생 고민인데 그나마 고양이 동영상이나 프로레슬링 보면 좀 웃는 것 같습니다.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직업인 유병재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다음 영역은 어디인가요? 어떤 채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싶나요? 

요즘은 글 쓰는 게 재밌습니다. 어떤 플랫폼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글 쓰는 일을 좀 늘려가고 싶어요. 

현실적인 문제가 사라진다면, 가장 해보고 싶은 시도는 무엇인가요?

올해 초에 미니멀, 무소유에 꽂혀서 기획했던 게 있습니다. 미니멀라이프를 선언하고 집안의 필요없는 물건들을 버리기 위해 황금 바퀴달린 최고급 쓰레기 상자를 산다던지 그 물건을 플리마켓으로 내다 판 수익금으로 백만원을 호가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초판 양장본을 구입한다는 간단한 촌극이었는데 플리마켓을 못 여는 상황이 되어서 대충 한두달 뒤에 상황 좋아지면 다시 해보자 했는데 이렇게 까지 일이 커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뭐가 됐건 얼굴들 좀 뵙고 싶어요. 재밌는 것들 많이 기획해놓았는데. 

두 권의 책을 쓰셨어요. 다음 책을 쓴다면 어떤 형태가 될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소설이나 꽁트 같은 다른 분야의 집필도 염두에 두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소설 쓰고 있습니다. 쓰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분량인데 일단 그래도 뭔가 계속 쓰고는 있습니다. 영상매체로 선보이게 될 것 같은 스케치 코미디 대본도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Sandbox. All Rights Reserved. 사진 최문혁 스튜디오

표정과 멘트, 말투, 행동 모든 것을 총동원해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는, 영상 매체에 특화된 동적인 코미디 콘텐츠와 텍스트라는 정적인 콘텐츠. 두 영역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두 영역의 콘텐츠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데 유병재가 하는 고민이 궁금하다. 특히나 유튜브와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며 활발히 활동하는 중에 신간 집필을 생각한 계기가 궁금하다. 어떤 니즈가 있었나?

일 시작하고 한 십년 정도는 그래도 매년 뭔가 한두가지 새로운 일들을 벌였었던 것 같은데 유독 올 한해는 심심하게 보냈던 것 같았어요. 안정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초심자의 열정이 남아있는 상태라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유병재에게서 무엇을 원할까?

아유 그건 죽을 때까지 모를 것 같아요. 그냥 전 뭘 좋아하시는 지 모르니 이것 저것 준비해놓는 수밖에. 굳이 따지자면 쟤보다야 내가 낫지 하는 안정감?

그럼 유병재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원하나? 어떤 사람으로 비추어지길 바라는지. 

원앤온리까지는 아니어도 “쟤 같은 애 많지는 않았어.” 정도 소심히 바라봅니다.  




*유병재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2011년 뮤직비디오 [니 여자친구]로 일약 ‘인터넷 스타’로 떠올랐다. 이어 2014년 케이블 방송 tvN [SNL 코리아]에서 작가와 연기자를 겸하며 대중에게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나아가 2015년과 2017년 MBC 예능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지상파 채널에 본격적으로 입성했다. 2017년 8월, 스탠드업 코미디쇼 [블랙코미디]가 티켓 판매 1분만에 완판되며 화제를 모았고, 코미디 신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는 평을 받았다. 방송과 공연뿐만 아니라 평소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해온 그는 자신의 신념이 담긴 해학적인 글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블랙코미디』 『말장난』 등을 펴냈다. 



말장난
말장난
유병재 저
arte(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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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이경미 감독, 유효기간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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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었다. 이미 많은 독자에게 사랑 받은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에게 어떤 캐릭터를 보탤 수 있을까?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선택한 작품이지만 이경미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전작 <비밀은 없다>은 평단의 호평이 쏟아진 작품이지만 극장 흥행에는 실패했다. 개봉 후 2주 만에 극장을 떠나야 했던 영화. 이경미에겐 유효 기간 없는 스크린이 필요했다. 이토록 따뜻한 관객은 처음이었다. 아무 대가 없이 학생들을 지키는 보건교사 ‘안은영’처럼, 특별한 기운으로 안은영의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한문교사 ‘홍인표’처럼,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오는 옴벌레를 퇴치해주는 옴잡이 학생 ‘백혜민’처럼.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이경미에게도 펼쳐졌다. 



넷플릭스의 선택? 나의 선택이기도 했다

이경미 감독의 잠재된 팬들이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모두 집합한 듯해요. 

반갑고 좋아요. 원작 소설도 더 사랑받고 있어서 기쁘고요.

오래 전부터 넷플릭스와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고 들었어요. 

<비밀은 없다>가 개봉했을 때 관객들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상도 많이 받고 평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극장에서 마치 거세당한 느낌을 받았어요. 당시 미국에서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가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일단 작품을 아카이빙 할 수 있다는 점이 되게 좋았어요. <미쓰 홍당무>의 경우 그 동안 사람들이 찾아보고 싶어도 구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넷플릭스는 언제든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볼 수 있잖아요. 큰 장점으로 느꼈어요. 

2015년 출간된 『보건교사 안은영』 초판은 5년간 8만 부가 팔렸어요. 이번에 넷플릭스 시리즈가 개봉하면서 나온 ‘특별판’은 출간 1달 만에 7만 부가 나갔고요. 영상화 된 원작 소설이 이렇게 빠르게 반응이 있는 일은 드물어요. 

시리즈에서 설명되지 않은 것들을 소설로 찾아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는데, 관객들 입장에서는 경험이 풍부해지는 거니까 좋은 현상인 것 같아요. 『보건교사 안은영』은 비주얼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장면이 많아서 좋았어요. 예전에 박찬욱 감독님과 『액스』라는 소설을 각색했는데, 완성은 못했지만 굉장히 재밌는 작업이어서 이런 방식으로 영상화할 수 있는 원작 소설을 찾고 있었어요. 타이밍이 잘 맞았죠. 

원작자인 정세랑 작가님도 각본 작업에 참여했어요. 

<넷플릭스>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원작 소설과 4부까지의 대본을 받았어요. 당시에는 대본이 한 에피소드 당 한 사건을 다루고 끝내는 옴니버스 형식이었고요. 소설이 흥미로워서 제가 이 작품을 하게 된다면 조금 고쳐도 되겠냐고 물었죠. 정세랑 작가님은 최소한의 가이드를 코멘트 해주셨고요.  거기서 조율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넷플릭스>는 어떤 주문을 했나요? 

‘안은영’ 캐릭터를 더 살리고 싶다고 했어요. <미쓰 홍당무>와 <보건교사 안은영>이 통할 것 같다며 제게 제안한 건데, ‘안은영’을 살리기 위해서는 확실히 성장 드라마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선 등장인물들의 타임라인이  각자 달라요. 성장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서는 소설 속의 각 에피소드를 가지고 ‘안은영의 성장’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서 한 타임라인으로 만드는 작업이 중요했어요. 

전세계에 동시 개봉된다는 점이 <넷플릭스>의 장점이에요.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도 즉각적으로 볼 수 있고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넷플릭스>에는 엄청 많은 작품들이 있어도 누구나 원한다면 제 작품을 언제든지 찾아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박스오피스가 없는 점도 좋았어요. 영화는 개봉하기 전부터 점수가 매겨지고 랭킹이 나오고, 그 평가에 따라 극장 상영 일수가 정해지니까요. 이보다 슬픈 일은 없죠.

영화계에서는 어떤 반응인가요? 

처음에 <넷플릭스> 시리즈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제가 뭐라도 만든다니까 다행이라는 반응이었어요. <비밀은 없다> 이후 제가 쉽게 작품을 만들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보건교사 안은영>을 제안 받은 게 3년 전, <페르소나>를 찍을 때였는데요. 그 이후로 점점 사람들이 넷플릭스에 관심을 많이 갖기 시작했어요. <킹덤>도 잘됐고요.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을 잘 못 가니까 창작자들의 관심도 점점 높아지고 있어요. 



어쩌면 작고 애틋한 이야기 

2008년에 <미쓰 홍당무>가 개봉했을 때, 양미숙(공효진 분)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정말 센 캐릭터”라고 말했지만 “더 센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어요. ‘안은영’은 어떤가요? 

저를 아는 감독들은 제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라고 이야기해요. 이건 원작의 힘인 것 같아요. 소설이 이 갖고 있는 따뜻하고 성숙한 시선, 재기발랄하면서도 평화를 지향하는 면. 이런 지점들 때문에 가장 대중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안은영’은 절대 싫어할 수 없는 인물이지요.  

1부와 2부는 원작 소설을 본 독자에게도 파격적이었어요. 거대하고 오래된 ‘두꺼비 괴물’을 비롯해서 대낮에 기괴한 표정으로 옥상으로 달려가는 학생들의 장면 등 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쾌감을 느꼈던 부분이 바로 2부에서 ‘두꺼비 괴물’이 학교를 부수고 나오는 장면이었어요. 제겐 소설 속의 판타지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 시키느냐가 가장 중요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 판타지 세계를 구현하려고 보니 이 곳이 어떤 로직을 갖고 움직이는지 정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은영이 싸우는 세계를 이야기의 재미 만을 위해 편의적으로 이용할 순 없었거든요. 예를 들어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돼야했고 아이들을 재난의 상황에 밀어넣을 때 교사의 책임감을 한번 더 생각해야했어요. 특수효과, CG가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작업이었어요. 젤리가 가진 말랑말랑하고 투명한 질감을 살리는 일은 정말 고난이도예요. 

‘하트’ 젤리는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건 콘티를 짜다가 나온 아이디어예요. ‘하트’ 젤리는 은영이가 사람에 대해 품고 있는 사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경우예요. 소설은 글로 필요한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영상은 독백이나 대사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어요.  저는 색감, 비주얼, 무드로 ‘안은영’을 이야기해야 했어요. 나쁜 젤리를 없애면, 하트 젤리 비가 내리는 설정은 게임에서 미션을 클리어 하면 터져나오는 포상 같은 개념이라고생각했어요.

특별히 애정이 많이 가는 장면이 있나요? 

아무래도 5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보건교사 안은영> 촬영을 한달 앞두고 아버지께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어요. 고민 끝에 작품에서 하차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고, 제가 끼치는 손해액이 얼마냐고 물었어요. 금액이 너무 컸어요. 넷플릭스에서 그 돈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저와 작업을 하려고 모인 스태프, 배우들을 전부 버리게 되는 일도 큰 고민이었어요. 당시 아버지에게 남은 날이 촬영 기간보다 짧았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본인 때문에 제가 작업을 그만두는 건 원치 않아서, 어렵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쓴 회차가 5부예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썼기 때문에 5부가 특별해요.  피할 수 없으면 당해야 된다는 대사를 그 때 썼어요. 

5부에서 ‘안은영’과 옴(붙으면 사람에게 불운을 가져오는 벌레)을 잡아먹는 학생 ‘혜민’이 밤새 학교 보건실에서 옴을 잡아먹고, 학교 밖으로 나가잖아요. 이 장면이 잊히지 않아요. 둘의 대화도 그렇고요.

저는 무신론자예요. ‘죽음’은 마치 전등 스위치가 딸깍 내려가면 순식간에 빛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는데요. 언제인가부터 매일 ‘죽음’을 생각하게 됐어요. 죽음’이 뭘까, 진짜로 매일 생각해요. 결국 육체는 없어지는데, 그건 너무 당연해서 놀랍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존재하던 우리의 ‘의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런 답도 없는 질문들을 안은영과 백혜민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참 작고 애틋해요. 

O.S.T도 화제죠. 전래동요, 판소리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사용됐습니다. 

저는 늘 장영규 음악감독님과 작업 해왔어요. <보건교사 안은영>은 전세계에 소개되는 시리즈니까 한국말을 많이 넣고 싶었어요. 보통 한국 영화에서 가사가 많이 들어간 노래는 사용하기 조심스러워요. 거슬릴 수 있거든요. 그래도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노력해보자는 전제로 한국말 가사를 썼어요. 안은영의 능력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는 장면에서는 화려한 합창곡을 넣자고 했어요. 온 세상이 은영이를 노래해주는 기분이 들기를 바랐어요. 

이번에도 직접 쓰신 가사가 있죠? 

어쩌다 보니 제가 작업한 작품에서는 늘 제가 작사를 하게 돼요.  장영규 음악감독님이 기본 멜로디와 함께 가사가 들어갈 자리마다 ‘0’을 그려 넣어서 보내주시면, 저는 매번 퍼즐 맞추듯 단어를 찾아내야 해요.  「레인보우」라는 곡은 특히 작사가 어려워서 한 달 넘게 시간을 보냈어요. “음악감독님, 어떡해요?  잘 안 써져요”라고 했더니, 늘 그렇듯 조용히 힘없는 목소리로 “그냥 아무 단어나 넣으세요.  뭐 바나나, 빗자루 같은 그런 거?”하시는 데, 그게 그렇게 큰 영감을 줬어요. 특히 ‘노란 사과'랑 '분홍색 이빨’ 같은 건 진짜 장영규 음악감독님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학생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의 오디션을 무척 많이 봤다고 들었어요. 주연 정유미, 남주혁 배우의 연기도 좋았지만 조연들도 무척 눈부셨어요. 

조감독에게 물어봤더니, 오승권(현우석 분), 성아라(박혜은 분) 역할은 경쟁률이 300:1이었다고 해요. 다른 학생들 역할도 200:1이었고요  그러니까 한 캐릭터당 최소 200명 이상 본 거죠. 

캐스팅 기준이 있었나요? 

일단 이 배우가 이 역할을 했을 때 제가 새로운 영감을 얻었으면 했어요. 소설이나 각본에 어울리는 사람 보다는 이렇게 조합을 해보니까 재밌네? 싶은. K드라마에서 자주 보여지는 얼굴이 아닌 신선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해외 시청자들이 보기에 동양인 안에도 이렇게 다양한 얼굴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신인 배우들을 많이 캐스팅했어요. 



안은영과 큰 산을 넘은 기분 

이번 시리즈를 비롯해 영화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등의 주요 배경이 학교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각본을 쓰는 건 아닌데요. ‘왜 나는 학교를 못 벗어나지?’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늘 엔딩에선 주인공이 청소년과 만나는 장면으로 끝나요. ‘다른 걸 써보고 싶은데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미성숙한 어른이 자기 고통을 알고 있는 누군가(청소년)를 유사가족처럼 만날 때, 안도감을 느끼고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여성이에요. 그리고 능동적이죠. 

꼭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어요. 제가 여자라서 자연스럽게 여자를 더 많이 상상할 수 있고, 여자가 더 재밌어요. 결심을 하진 않았지만 여자 이야기가 더 재밌으면 계속할 것 같아요. 여자 이야기는 희소 하기도 하고요. 작업 하면서 느끼는 보람이 커요. 

어떤 보람인가요? 

인물을 상상하면서 저도 영향을 받고 삶에 변화가 생겨요. 여성 캐릭터를 만들 때, 제가 좋아하고 선망하는 것들을 상상하게 되는데요. 이런 인물을 만들면서 저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아서 보람이 생겨요. 

<보건교사 안은영>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요? 

책임감을 배웠어요. 얼마 전 제가 참 좋아하는 정서경 시나리오작가한테 문자가 왔어요. “<보건교사 안은영>을 봤는데 너무 좋았다”고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언니도 변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서, “나도 은영이랑 같이 큰 산을 넘은 기분”이라고 답했어요. 이번 시리즈는 예전에 작품을 만들던 방식과 좀 달랐어요. 처음에는 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오로지 책임감으로 끝내야 하는 작품이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기쁨이나 멋진 꿈을 꾸는 일 없이 오로지 직업인의 자세로 임했어요. 이 시리즈는 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버리는 일로 치환된 작품이라서, 이 책임감이 안은영에게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 같아요. 

6부에서 안은영이 젤리를 보는 능력이 다시 생기자, 울었던 심정과 비슷할까요?

딱 그런 심정이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떨어져서 보면 좀 우습기도 해요. 성인 여자가 장난감 칼을 쥐고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오열하니까요. 정세랑 작가님과 저의 세계는 여러모로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소외된 인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은 비슷해요. 조금 모로 가더라도 목적지가 같다고 생각하면 안도감이 들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특히 고마웠던 사람이 있나요? 

남편의 외조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그리고 스태프들도 저를 많이 이해해줬어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는 상황에서 촬영을 했지만 스태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래도 저를 많이 헤아려줬어요. 시리즈는 영화 작업보다 몇 배 힘든 작업이에요. 영화를 찍는 속도로 찍으면 완성이 힘들죠. 계산해보니 얼추 4배 이상 빨리 찍어야 했는데 아시겠지만 저는 뭐든 끝까지 수정하는 사람이잖아요. 현장에서 대사나 소품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는데, 배우나 스태프들 모두 잘 감당해줬어요.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난 작품이에요. 



지난 9월에는 미쓰 홍당무 각본집』이 출간됐습니다. 영화가 개봉한지 12년 만이에요.

12년 전엔 양미숙을 남처럼 이야기했는데 이번에 각본집을 준비하면서 그 당시 저의 솔직한 상태를 설명할 수 있게 됐어요. 그 때는 첫 작품이라서 참 열심히 자기 고백을 했던 것 같아요. 애정 하는 열 개의 장면을 정해서 코멘터리를 추가로 썼고 이다혜 기자님과 긴 인터뷰도 했어요. 블루레이는 연말 즈음 출시될 것 같아요.

2년 전에 첫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을 쓰셨을 때, 굉장히 심사숙고하신 걸로 기억해요. 

그땐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제가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니까요. (웃음) 그런데 생각보다 큰 영향이 없더라고요. 좋은 영향만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를 테면 가끔 관객들이 “에세이를 잘 봤다”고 이야기해주실 때, 감사했죠. 

개인의 삶에 있어서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현재 가장 큰 욕망은 우리동네 길냥이들이 잘 자라는 거예요. 우리동네에 새끼 길냥이가 열한 마리 정도 있어요. 오늘도 길냥이의 밥을 주고 왔는데, 단지 사람들의 반대가 심해서 첩보 작전처럼 몰래 주고 있어요. 중성화 수술도 계획하고 있어요. 길냥이들이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왜 밥도 못 주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다음 작품은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반드시 호러 영화를 하고 싶어요. 부부 이야기를 담은 공포 영화일 것 같은데, 빨리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보건교사 안은영』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독자 분들께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사는 일이 참 버겁다고 느끼시는 분들께 안은영이 위로가 되면 좋겠어요. 세상 일이 원래 내 뜻대로 잘 안 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어떻게든 살아나가고 있어요. 안은영도 그런 사람이에요. 이 시리즈에선 안은영의 능력이 특별하게 표현되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겐 각자 버리고 싶은 어떤 것이 있어요. 때론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포기할 때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기도 해요. 




*정세랑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0년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2017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목소리를 드릴게요』,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재인, 재욱, 재훈』, 『보건교사 안은영』, 『시선으로부터,』등이 있다. 창비 장편소설상,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보건교사 안은영 (리커버 특별판)
보건교사 안은영 (리커버 특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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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 홍당무 각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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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박은교,박찬욱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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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약사 천제하, 최주애 “영양제는 그저 거들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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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천제하 약사와 최주애 약사

여성 피로의 악순환은 이렇다. 스트레스, 균형 잡히지 않은 식사, 환경호르몬 등 다양한 원인으로 피로가 온다. 이때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 사이의 균형이 깨진다.  ‘에스트로겐 도미넌스(dominance)’는 에스트로겐이 우세해 인체의 피로도를 높이는 증상이다. “피곤해서 여성호르몬이 불균형해졌는데, 이 불균형으로 더 피곤해지는 여성 피로의 악순환”(48쪽)이 계속된다. 천제하, 최주애, 두 약사가 여성 피로에 관한 솔루션을 담은 책 『나도 내 몸을 잘 몰라서』“아프진 않지만 이제 그만 좀 피곤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꿀팁을 담은 책”으로 피로를 느끼는 원인을 점검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생활 습관들을 제안하고 있다. 약 한 알로 간단히 해결되는 피로는 없으므로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관찰하고, 작은 실천들을 해나가길 바라는 것이 이들의 한결 같은 마음이다. 

동갑의 친구이기도 한 천제하, 최주애 저자는 약사라는 직업에 고민하고, 회의하던 시절 만났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이들이 지금은 약과 약사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약사가 조금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는 이들이 약사와의 거리를 얼마나 줄여나가게 될까. 그것은 두 저자가 유튜브와 팟캐스트, 그리고 책을 통해 세상에 하는 이야기로 확인할게 될 것이다.



여성피로의 악순환

지난 9월에 올라온 유튜브 채널 <약먹을 시간> 3주년 특집 영상을 봤어요. 본업이 있는데 3년이나 꾸준히 콘텐츠를 제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처음에 유튜브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천제하: 약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요. 약국이라는 공간에 여러 제약이 있더라고요. 손님들이 너무 바쁠 땐 약사에게 충분한 설명을 못 듣고 가기도 하고요. 공간이 좁아 불편한 부분도 있죠. 또 약국은 24시간 문을 열지 않는데 도움은 24시간 필요하잖아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두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생각하다가 유튜브를 떠올렸던 거예요. 2017년은 영상 콘텐츠가 활발하게 시작되고 있었던 때라 저희도 해보기로 했죠. 

최주애: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것은 약에 대한 정보를 드리는 것에 더해서 약사와 약국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더 잘 이용할 수 있는지 알려드리는 거였어요. 특히 젊은 분들은 약국에서 약사와 상담을 한다는 식의 접근은 잘 안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동네 소모임을 연 적이 있는데 젊은 분들은 약을 구매할 때 약국보다 ‘올리브영’ 같은 드럭스토어에 가는 게 더 편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약사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었어요. 


(왼쪽부터) 천제하 약사와 최주애 약사

두 분은 약국을 “가장 문턱이 낮은 건강센터”(156쪽)라고 표현하셨죠. 

천제하: 항상 말씀 드리는 게 단골약국을 만들라는 거거든요. 단골술집, 단골음식점은 있는데 단골약국이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단골약국을 만들면 주기적으로 약사와 소통하면서 약력 관리도 자연스럽게 되고요. “저번 약은 잘 안 듣던데요?” 하는 식의 대화도 하면서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어요. 약은 어쩔 수 없이 부작용도 있거든요. 아무리 약사라도 어떤 사람에게 어떤 약의 부작용이 있을지 완벽하게는 몰라요. 그러니 약사와 유기적인 관계를 이어간다면 자신의 건강도 훨씬 증진시킬 수 있게 되는 거죠. 

『나도 내 몸을 잘 몰라서』는 피로, 그 중에서도 여성의 피로에 집중했어요. 마치 워크북 같기도 했는데요. 특히 책 가장 앞부분에 ‘피로도 체크리스트’를 두었어요. 의도가 있었던 거죠? 

최주애: 오프라인에서 ‘피로타파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어요. 그것을 책으로 구성하게 된 셈인데요. 피로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꼭 알아갔으면 했거든요. 영양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생활 습관의 변화도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책에도 내가 왜 피로한지 생각해보고, 적어보도록 했고요. 생활 습관 면에서는 이것을 고쳐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으면 했어요. 그런 이유로 단계별로 독자가 책을 쭉 따라갈 수 있게 했습니다. 

천제하: 사람들은 피로를 많이 오해하고 있어요. 간이 피로를 담당한다고 하니까 그냥 간 영양제를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요. 약국에 가서도 다른 상담 없이 그냥 “간 영양제 주세요.”라고 직접적으로 말을 해요. 책 앞부분에는 그 오해를 풀고자 ‘부신’이라는 키워드로 얘기를 했어요. 나의 피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느껴요. 만성피로는 현대인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여성의 피로가 다른 점도 있더라고요. 바로 호르몬이죠. 

천제하: 호르몬의 노예라는 말을 진짜 많이 하죠. 생각해보면 여성은 임신 아니면 생리예요.(웃음) 임신 중에도 호르몬으로 생기는 몸의 변화가 많고요. 피임약 역시 호르몬에 영향을 주어서 피임을 하거나 생리를 늦추는 게 가능한 거잖아요. 그만큼 여성은 호르몬에 큰 영향을 받고 있어요. 그걸 모르면 자칫 자신이 병에 걸린 줄 알 수도 있거든요. 생리 전 증후군(PMS) 기간에 우울감이 커지는 분이 호르몬 때문인지 모르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심지어는 우울증이라고 혼자 진단을 내릴 수도 있고요. 이럴 때 잘 관찰하고 자신의 기분을 확인해보는 게 좋아요. 매일의 기분에 대한 기록을 세 달만 반복하면 패턴을 확인할 수 있겠죠. 그걸 생리주기와 비교해서 보세요. 영향이 보일 거예요. 그런 식으로 일단은 그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최주애:인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생리 전 증후군으로 피곤을 느낄 때 생리의 영향 하나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그뿐 아니라 내가 먹는 것, 평소에 만지는 것, 피부에 바르는 것 등도 다 영향을 주고요. 스트레스도 피로와 연관이 있잖아요.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봐야 해요. 여성의 경우는 여성 호르몬이 더해져 악순환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예요.  

피곤해서 호르몬 불균형이 발생하고, 그 불균형 때문에 더 피곤해지는 게 여성 피로의 악순환이더라고요. 

천제하: 그래서 저희가 생각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알아차림’이에요. 호르몬에 우리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해야 해요. 왜냐하면 개인마다 반응이 다르거든요. 신체적인 증상으로 반응이 오는 경우도 있고, 정신적인 증상으로 반응이 오는 경우도 있어요. 따라서 자신에게는 호르몬 반응이 어떻게 오는지를 체크할 필요가 있고요. 그 다음에 호르몬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어떤 영양소가 도움이 되는지 알면 좋을 거예요. 

최주애: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잘 처치할 수 있는 건데요. 물어보면 당장 어제 먹은 것과 일주일 동안 먹은 것도 잘 떠올리지 못해요. 많이 바쁘잖아요.(웃음) 여기 저기 뺏기는 시간도 많다 보니 내 몸, 내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관찰하지 못하죠. 때문에 저희가 알아차림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던 거예요. 아픔이 느껴질 때는 이미 많이 안 좋은 상태니까요. 그 전에 내가 먹은 것, 내 감정 등을 하루 15분씩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점검하면 어떨까 해요. 


천제하 약사

삶의 질을 높이는 조언들

생리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약을 복용하라고 강조하셨어요. 알려진 듯 하면서도 아직 많이들 모르는 내용일 것 같아요. 

최주애: 약의 원리를 이해하면 돼요. 생리 기간에는 자궁을 수축시켜 피를 나오게 하려고 몸에서 나오는 물질이 있거든요. 그것이 통증을 발생시켜요. 이때 진통제를 복용해서 통증을 방지하는 건데요. 이 물질이 조금씩 만들어지는 시기가 있잖아요. 그때는 아직 통증이 없겠지만 그럴 때 약을 먹으면 정말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고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거든요. 보통 생리통이 오기 전 느낌을 아시죠. 바로 그때 진통제를 먹는 거예요. 물론 통증을 느꼈을 때 약을 먹어도 서서히 통증이 가라 앉긴 해요. 하지만 가라 앉을 때까지 얼마간은 아프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어요. 

천제하: 한 번 약을 먹고 통증이 나아졌다고 가만히 있다가 다시 통증이 오면 그때 먹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보다는 감기약을 아침, 점심, 저녁 규칙적으로 먹는 것처럼 진통제의 효과 지속 시간에 맞춰서 생리 기간 동안 규칙적으로 복용하는 게 삶의 질을 훨씬 높여줘요. 

진통제를 막연히 거부하는 분들 가운데는 내성이 생길까봐 걱정하는 경우도 있어요. 

천제하: 진통제도 굉장히 종류가 많고요. 성분도 다양해요. 개인마다 선호하는 약이 다를 수는 있는데요. 거기에 대해서는 각자가 잘 알아차려야 하고요. 다만 성분이 한 가지로 되어 있는 진통제들이 있어요. 그건 내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돼요. 복합 성분인 진통제를 일반 사람이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요. 약 포장재에 성분이 표기되어 있거든요. 거기 적힌 성분이 한 줄이면 단일 성분이고요.(웃음) 복합 성분은 대개 세 줄이에요. 복합 성분인 경우 대개 카페인 등이 들어 있어서 중독 증상, 내성이 발생할 수 있죠. 그것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걸 추천하진 않아요. 그럼에도 가끔씩 두통이나 치통이 발생할 때는 복용할 수 있어요. 

최주애: 한 달에 2-3일 정도 생리통 때문에 진통제를 먹는데 내성이 걱정돼서 안 먹고 버티는 건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진통제나 영양제를 복용할 때 물을 충분히 마시라고 한 것도 사소하지만 중요한 조언이에요. 240ml 정도를 마셔야 한다고 했는데 이건 종이컵 한 컵 반 분량으로 의외로 많은 양이죠. 

최주애: 약국에서 근무할 때 위장 장애를 호소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약만 먹으면 속이 쓰리다고요. 실제로 그런 약도 있긴 한데요. 물만 충분히 많이 마셔도 속 쓰림이 훨씬 줄어들거든요. 물이 식도를 적셔서 약이 지나갈 때 불편함이 줄어드니까요. 

천제하: 한 번은 어떤 분이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약을 복용하시는 거예요. 친한 동생이었으면 정말 크게 혼냈을 텐데(웃음) 말이에요. 그렇게 약을 먹으면 식도 다 버려요. 또 약의 흡수라는 점에서도 물이 있어야 약이 녹으면서 충분히 흡수가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약 먹을 때 마시는 물의 양을 표시한 ‘약 먹는 컵’을 만들어서 구독자 이벤트를 한 적도 있어요.(웃음)

질 세정제와 여성 청결제를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도 표를 통해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잖아요. 이 둘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 부탁드려요. 

최주애:명확하게 알려드리고 싶었던 내용인데요. 여성 청결제는 쉽게 말해 세정을 하는 클렌저라고 보면 되고요. 질 세정제는 살균하고 소독하는 소독약이에요. 상처가 나거나 다친 것이 아닌데 평소에 소독약을 사용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여성 청결제와 질 세정제가 사용법이 비슷하다보니까 질 세정제를 루틴하게 쓰시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 경우 유익균까지 다 없애버릴 수 있거든요. 오히려 질염이 더 재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요. 그래서 단기간 사용해야 해요. 반면 여성 청결제는 클렌저로써 외음부의 산도를 적절하게 유지시켜주는 제품이니까 매일 사용하면서 관리하면 돼요. 이 둘은 분류도 달라요. 여성 청결제는 화장품이고요. 질 세정제는 일반의약품이죠. 

천제하: 여성 청결제의 경우 일주일에 2-3회 정도만 사용해도 된다고 말씀을 드리는데요. 매일 여성 청결제를 사용해서 관리하실 필요까지는 없고요. 그냥 물로 세정해도 돼요. 비누를 사용해서 씻는 것이 가장 좋지 않고요. 그냥 물로 세정하시고, 일주일에 2-3회, 여성 청결제를 사용해서 씻으면 좋을 것 같아요. 최근엔 매일 사용이 가능한 제품이 나오긴 했으니까 제품을 잘 보고 사용하시길 바라요. 


최주애 약사 

진짜 약사의 역할은

“영양제는 그저 거들 뿐”(164쪽)이라는 말이 재미있었어요. 약사인데 말이에요. 두 분은 어떤 영양제가 어디에 좋다는 말도 물론 하지만 그보다는 좋은 습관을 계속 강조하거든요. 

천제하: 좋은 약 좀 알려달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듣는데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피로나 통증은 생활의 문제이기도 하거든요. 약을 찾는 건 그냥 간단히 해결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사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경우도 꽤 많다고 생각해요. 수면 패턴이 안 좋은 사람, 음식을 골고루 못 챙겨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경우 당장 약으로 접근하기보다 수면 환경을 관리하거나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죠. 좋은 습관이 모여서 건강이 증진되는 건데 그걸 알면서 습관을 고치지 않고 약 한 알로 모든 것을 대신하려는 태도가 너무 안타까워요. 

최주애:사실 약사가 약을 잘 먹게 하고, 어떤 약이 도움이 되는지 처방하는 것도 하나의 역할인데요. 진짜 약사의 역할은 약을 무조건 먹어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필요하지 않은데 약을 과다복용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균형을 잡아주는 것도 중요한 약사의 역할인 거죠. 만약 “이 약이면 다 돼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약사가 아니라 ‘약팔이’예요.(웃음) 

잘 쉬기 위한 방법으로 가만히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세포 이완을 시켜야 한다는 대목도 중요할 것 같아요. 이때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안한 것이 심호흡이었어요. 

최주애: 푹 쉬면 피로가 회복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죠.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안 되잖아요. 내일 또 출근해야 하고요. 그래서 책을 쓸 때 ‘그래도 효율적으로 쉴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확실한 실천법을 알려드리는 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러다 양치질 할 때마다 심호흡을 하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소개를 했는데요. 떠올리는 게 어렵지 일단 떠오르면 심호흡은 할 수 있잖아요. 규칙적으로 심호흡 하는 건 진짜 가성비 좋은 휴식이에요.  



피로 회복을 위해 약사들이 가장 선호할 영양제로 ‘비타민 B군’을 꼽았죠. 어떤 영양제가 나에게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약국에 갔을 때 어떤 방법으로 상담을 요청해야 할까요? 

최주애: 본인이 겪고 있는 불편한 증상을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시면 좋아요. 피로 증상이 근육통으로 더 오는 분도 있고, 두통으로 오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걸 약사가 들으면 적절한 처방을 받을 수 있어요. 또 가장 해결하고 싶은 최우선 증상을 얘기해주시면 훨씬 좋죠. 어쨌든 영양제를 먹으면서 효과를 느껴야 하잖아요. 이때 모든 증상에 다 효과를 느끼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것은 꼭 개선하고 싶다, 하는 부분을 알면 도움이 되죠. 여기에 더해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거나 앓고 있는 질환이 있다면 꼭 얘기를 해야 하고요. 

천제하: 약사와의 상담으로 진행될 수 있는 부분이 정말 많아요. 약사들을 안 무서워하셨으면 좋겠어요. 제 경우 “피곤해서 그런데 뭐가 도움이 될까요?”라는 식으로 열린 질문을 하시면 이어서 상담하기가 편했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약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있는 사소한 습관들을 지도해드릴 수 있더라고요. 반면 사전에 특정 제품을 말하면서 “이거 주세요”라고 하면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기 어렵죠. 만약 상담을 안 좋아하는 약사가 있다면 그 약국은 안 가는 게 낫습니다. 



* 약먹을시간(천제하·최주애)

할까 말까 고민보다 “일단 해본 다음 고민하자!”는 실행력으로 유튜브 채널 [약먹을시간]을 이끌어가고 있는 동갑내기 현직 약사. 유튜브에서 피임약 영상 콘텐츠를 발행했을 때, 피임약에 대해 문의하는 많은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약국에서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피임약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약사로서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쉽고 정확한 피임약 정보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고, 믿을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과 삶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본업인 약사로서도 의미 있는 일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의기투합하여 [약먹을시간]을 만들었다. 기존 약국의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약에 대한 꿀팁과 궁금증, 올바른 약 사용법 등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소개한다. 그리고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보기만 해도 약이 되는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서로 장단이 잘 맞아서 유튜브 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며 둘의 에너지를 재밌고 즐겁게 확장하고 있다.



나도 내 몸을 잘 몰라서
나도 내 몸을 잘 몰라서
천제하,최주애 공저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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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홍은전 “『그냥, 사람』, 무겁지만 읽어주셨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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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차별이 사라져서 노들장애인야학(이하 노들야학)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오래전부터 이 희망적인 말에 저항하고 싶었다는 홍은전 작가. 그가 꿈꾸는 세상은 차별 없는 세상이 아닌 싸우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이다. 싸우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세상에 차별과 고통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곧 망할 거라는 징조이기 때문(27쪽)이다. 사범대 4학년, 임용고시를 뒤로하고 찾아간 노들야학에서 ‘중력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는 최근에 알게 된 동물권 운동을 보면서 노들야학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내가 자라온 세상에선 누구도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를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현실을 바꾸거나 최소한 직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끝인 줄 알았던 거기가 최전선이었다. 나는 그런 이들의 저항이 세상의 지평을 넓혀왔다고 믿는다. (228쪽)



무겁지만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2쇄를 찍으셨다고요. 소식 듣고 기분이 어땠나요?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구나 싶었죠. (웃음) SNS에 후기 올라오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책이 나오고 약 2주 사이에 누군가가 책을 사서 읽고 심지어 쓰기까지 한 거잖아요.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후기가 많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서 고마웠어요.

후기가 정말 많이 보이더라고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인 친구한테 이 책을 선물했는데요. 친구가 피곤해서 퉁퉁 부은 다리를 벽에 올려놓은 채로 책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냈더라고요. 빨리 읽고 싶다면서 신나 보이는 모습으로요. 그런데 다음 날 오전에 장문의 문자가 왔어요. 책을 읽고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요. 죄책감이 들었대요. 아마도 책을 읽고 어떤 내적 갈등을 겪었나 봐요. 

친구분이 솔직하시네요. 가볍게 잘 읽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요.

아침부터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예요. 언제나 내적갈등이 충만하고 그걸 잘 말하는 친구고요. 그래서 저는 ‘아, 내가 내 친구마저도 죄책감이 들어서 읽지 못하는 책을 썼구나’ 싶었어요. (웃음)

그런 후기를 들으면 어떤가요 ? 

반반이에요. 사실 이 책을 내고 처음 들은 피드백도 비슷했어요. ‘역시 내 인생에 대박은 없구나’ 싶었죠. (웃음) 그러다 나중에 ‘무거운 내용이지만,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메시지들을 봤어요. 사실 제가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이어서 자랑을 잘 못 하는데 책을 냈으니까 팔아야 하잖아요. 읽으라고 쓴 글이니까요. 그래서 나도 그렇게 이야기해야겠다 싶었어요. 이 책은 무겁다. 그렇지만 읽어줬으면 좋겠다고요. 내 인터뷰이들이 힘을 내서 나에게 말해준 것처럼 나도 힘을 내서 말해보겠다. 이런 식의 다짐을 하고 있어요. 

‘신문에 칼럼을 쓴다는 건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는 것 같다’라고 했는데 책을 내는 건 어떤가요?

책을 내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글을 더 써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쓰는 게 너무 힘들거든요. 출판사 대표님은 칼럼을 모아서 책으로 묶자고 하면 제가 반대할 줄 알았대요. 그런데 저는 “괜찮아요. 저만 글 안 쓰면 돼요” 했어요. (웃음) 서문만 썼죠. 서문 쓰는데도 몇 개월 걸렸어요. 무얼 써야 하는가가 항상 어렵잖아요. 계속 ‘뭘 쓰지?’ 생각하다가 길고 긴 서문을 쓰고 말았죠. 

고민 끝에 ‘나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의 서문을 썼어요. 어떻게 쓰게 됐나요? 

‘활동가 글쓰기’라는 강의를 요청받고 어떻게 인권기록활동을 하게 됐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쓴 글이었어요. 사실 요약하면 별거 아니에요. 노들야학을 그만두고 나서 인권활동가들이 저에게 세월호 참사 유가족,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자고 했고 저는 ‘네 알겠습니다’ 한 거예요. 듣고 기록하는 일은 제가 계속해 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고요. 그러니까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하게 됐다’고 설명하면 되는데 서문을 쓰면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본 거죠. 노들야학을 그만뒀을 때, 산티아고를 갔을 때, 산티아고 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 산티아고에서 얻지 못한 걸 서울에서 찾은 것. (웃음) 

선유도공원에서 찾으셨죠. (웃음)

산티아고에서는 내내 우울했어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무기력한 상태였죠. 망한 것 같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그랬는데 한국으로 돌아와서 선유도 공원에서 무언가 반짝하는 선명한 감정을 만난 거죠. 그리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왜 우울했을까를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정말 혼자가 됐다는 걸 인식했고, 지금까지 혼자 살아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살지를 끊임없이 말해주는 존재들 속에서 살아왔고, 노들야학을 나오고 나서 무엇을 잃었는지를 절감한 거예요. 서문을 쓰면서 그 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재생해본 것 같아요.  



노들야학, 재미있어서 했어요

노들야학을 그만두고 방황했다는 이야기는 있는데 왜 그만뒀는지는 나오지 않더라고요.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제가 노들야학을 한 건 의미 있어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거든요. 처음 5년은 정말 미치게 재밌었어요. 그다음 5년은 재미와 의미가 엎치락뒤치락했고 그러다 어느 시점이 지나니까 의미만 남더라고요. 

왜 그랬을까요? 

노들야학은 5~60명이 상시로 만나는 곳이에요. 그 많은 사람과 매일 사는 건데 함께 산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무언가를 견뎌야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견뎌도 될 만큼 가치 있고 즐거운 일인데 그 과정에서 오는 긴장이 계속 누적된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재미는 줄어들고 의미만 남으면서 내가 싫기도 하고, 교장 선생님이 밉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더라고요. 좋아서 한 건데 좋지 않으니까 힘든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꼭 이렇게 안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직장이든 7년 정도 있으면 고비가 오는데 저는 13년 했으니까요. 예전에는. 좋은 것도 많고, 싫은 것도 너무 많았는데 노들야학을 그만두기 전 2~3년은 싫은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는 상태가 되더라고요. 그게 싫었어요. 이렇게 기쁨도, 슬픔도 못 느끼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괴로워도 그 괴로움을 견딜 만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고 싶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노들야학 때려치울 거야’가 아니라 ‘괴롭지만 즐거운 무언가를 다시 열심히 해보고 싶어’ 이런 마음이요. 

노들야학의 무엇이 재밌었나요?

얼마 전에 은유 작가님하고 인터뷰했거든요. 작가님이 뭐가 즐거웠냐고 물어봤는데 제가 대답을 못 했어요. (웃음) 은유 작가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기쁨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계속 생각해봤는데요.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라일리라는 사춘기 아이가 집을 떠나서 방황하고 집에 돌아오는 장면이 나와요. 라일리의 부모님이 화를 내지 않고, 돌아와서 기쁘다고 하면서 셋이 끌어안는데요. 그전까지는 선명하게 나뉘던 기쁨, 슬픔, 분노의 구슬이 이때 뒤 섞여요. 이런 감정을 경험하면서 성장한다는 게 영화가 주는 메시지이기도 한데요. 노들야학을 하는 기쁨도 비슷한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슬퍼하는게 지나고 나면 기쁨이 돼요.

함께 슬퍼하는 기쁨이라니. 멋진데요.

노들야학을 나오고 나서 기쁜 일이 생겨도 혼자 기뻐하니까 외롭더라고요. 기쁘지만, 혼자 기쁘니까 슬픈 일이 되는 거예요. 노들야학에 있을 때 우리에게 수많은 슬픔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슬픔을 함께했다는 게 지나고 나면 다 웃을 일인 거예요. 지금도 종종 노들야학에 놀러 가는데 갈 때마다 소외감을 느껴서 ‘다시는 안 와야지’ 이런 생각을 해요. (웃음) 자기들끼리 재밌다고 웃는데 뭐가 그렇게 재밌나 싶어서 들어보면 다 고생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저는 같이 못 웃으니까 어느 순간에는 심술이 나더라고요. 나만 소외되는 것 같고, 저한테 별로 관심도 없고요.

충분히 반겨주지도 않고요? (웃음) 

그러니까요. (웃음)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고 가기 싫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됐죠. 내가 이들과 함께 웃으려면 고생을 함께 해야 하는구나. 고생은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저 사람들의 기쁨만 가지려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구나 하고요. 그래서 같이 기쁘려면 같이 고생을 하든지 아니면 여기와는 인연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생하면서 새로운 기쁨을 찾아야 하는구나 싶었죠. 



‘차별받는 사람’에서 ‘저항하는 사람’으로

함께 슬픔을 겪으면서 알게 되는 기쁨이 있다고 했는데 노들야학에서 일할 때보다는 혼자 일하는 일이 많아졌잖아요. 인권기록활동가로 글을 쓰면서는 어떻게 그런 기쁨을 찾나요?

이건 제가 이 글쓰기를 그만둬봐야 알 것 같아요. 무엇이 기쁜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웃음) 

그렇군요. 지금은 안에 계시니까. 

네. 그리고 이 기쁨이야말로 잘 납득이 안 돼요. 안 기뻐요. (웃음)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열은 있어요. 그런데 그게 글을 썼을 때 그 순간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이 괴롭고 외로워요. 물론 글을 쓴다는 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내 감정을 언어화한다는 희열을 주는 엄청난 것인데요. 사람이 살아가는 힘을 주는 데는 언어로 하는 일 이른바 인간적인 관계보다는 노들야학에서처럼 함께 하는 시간, 약속을 지키는 관계, 이를테면 동물적 관계와 가까운 것들이 더 도움을 주지 않나 싶어요. (잠시 침묵) 글을 쓰는 기쁨이 뭐예요?

저요? (웃음) 말씀하신 것과 비슷해요. 내 경험이나 생각, 감정을 언어화한다는 기쁨이 있어요. 그리고 이게 너무 좋으니까 나만 알 수 없어서 알려주고 싶고,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아, 이것을 나만 알 수 없어. 중요하네요. 적어야겠다. 알아줬으면 좋겠다. 

저한테 되물으신 분은 처음이라 당황했어요. 

(종이에 적으며) 그런가요?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너무나 중요한 말이네요. 출판사에서 노들야학에 이 책을 선물하면서 연판장 같은 걸 써달라고 했어요. 홍은전에게 한마디씩 해달라고요. 그중에 어떤 친구가 한 말이 가장 좋았는데요. “아, 이거 하면 누가 알아주나 했는데 네가 알아줘서 좋다”였어요. 정말 기분 좋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저도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차별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는 말이 좋았어요. 제가 노들야학 사람이라면 우리를 알아주는구나 싶을 것 같아요. (웃음) 

노들야학의 이야기를 담은 『노란들판의 꿈』 초판을 읽고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차별이 사라져서 노들야학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요. 좋은 말이죠. 좋은 뜻으로 한 말이고, 심지어 노들의 동문, 노들야학을 만든 사람들이 한 말이었어요. 그런데 왠지 그 말이 듣기 싫고, 무슨 뜻인지 알지만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노란들판의 꿈』 개정판을 낼 때가 돼서야 서문에 ‘나는 차별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고 쓸 수 있었죠. 

노들야학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차별받는 집단에는 도움을 주고받는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저항하는 사람들인 모인 곳은 모두가 주체잖아요. 나는 비장애인이지만, 누굴 돕지 않았고, 그냥 나의 세상과 싸운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썼어요. 노들은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이고, 세상에 마지막에 누군가 살아남아야 하면 노들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다른 똑똑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아야 한다고요. 그런데 쓰고 보니 너무 좋은 거예요. (웃음)

네, 너무 좋았어요. (웃음)

제가 쓰고도 ‘아, 내가 이러려고 책을 썼구나’, ‘이 말을 하려고 그 고생을 했구나’ 싶었어요. (웃음) 그런데 이것도 초판을 낼 즈음, 그 고생을 할 때는 쓰지 못했던 거예요. 언어화가 안 됐는데 그 이후에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줬기 때문에 그다음에 쓰게 된 거죠. 출판사에서 낸 책 소개 글에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나중에 제가 페이스북에 다시 써야겠어요. 작고 연약해서 우는 게 아니에요. 남들 앞에서 우는 건 강인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대단한 저항이거든요. 



저건 우리가 하던 거다

탈(脫)육식을 선언하셨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DxE(비폭력 직접행동 동물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모임에 나가고 있어요. 가서 그분들이 하는 이야기 듣고, 쓸 수 있을 때는 글을 쓰면서 지내요. 동물권 운동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채식’이 아닌 ‘탈육식’이라고 표현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DxE에서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정확히는 ‘동물해방물결’이라는 곳에서 ‘탈육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DxE는 ‘채식’이나 ‘탈육식’보다 동물들의 고통, 인간이 어떻게 동물을 착취하는지를 더 많이 이야기해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채식’과 ‘탈(脫)육식’이 다르게 느껴지네요.

둘은 같은 목표를 가졌고, 완전히 분리될 수 없지만 조금 달라요. 비거니즘이 밥상 이야기, 인간이 채식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면 탈(脫)육식은 자기 밥상과 도살장을 연결해요. 왜 자꾸 인간들 이야기만 하느냐고, 동물들이 착취당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거죠. DxE의 활동이 장애인 운동방식과 굉장히 비슷해서인지 저는 그쪽이 더 끌리더라고요. 

동물권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 장애인 운동을 처음 만났을 때 비슷하다고 하셨죠. 어떤 점에서 비슷한가요?

불편한 것들을 계속 보게 하고, 이런 방식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은 운동처럼 보이는 게 비슷해요. 고깃집 가서 음식을 폭력이라고 말하고, 불편한 도살장의 영상을 도시로 전송하고, 밸런타인데이에 상의를 벗고 우유를 소비하지 말라고, 이것은 폭력이라고 시위하는 것들을 보면 얼마나 불편해요. 노들야학이 지하철을 막고, 버스와 도로를 점거했던 것과 비슷하죠. 보면서 ‘저건 우리가 하던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작가님도 불편하셨다고요. 

그랬죠. 이마트에 들어가서 포장된 고기에 꽃을 올리는 영상을 보면서 ‘설마’ 하면서 조마조마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해서 얻을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알았죠. 이 사람들은 아주 진지하구나. 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 말하려는 게 뭔지 알아야겠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싶어 하는구나 싶었어요.

또 알아주셨네요. (웃음) 

네 제가 알아줬어요. 욕으로 샤워를 하는 그들의 마음을요. (웃음) 이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는 게 아니라 평화를 깨기 원한다는 걸 알았어요. 비건은 평화, 비폭력을 말하잖아요. 맞는 말이죠. 그런데 DxE가 말하는 건 불화예요. 그리고 이 평화가 어디서 왔는지 말하고 싶어 해요. 노들야학이 운동하는 방식과 정말 닮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DxE를 노들야학에 초대했어요. 

분위기는 어떘나요? 

시너지가 장난 아니었죠. (웃음) 사실 초대하고 나서는 조금 걱정했거든요. 제가 무언가를 많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요?

‘나는 개가 아니다’, ‘우리는 소, 돼지가 아니다’, ‘우리에게 등급을 매기지 말라’. 이런 구호들이 장애인 운동에서 중요했거든요. 동물로 취급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그렇게 전했는데 DxE는 ‘인간도 동물이다’, ‘동물을 착취하지 말라’고 하는 단체잖아요. 그러니까 서로 불편할 수 있죠. 그래서 그날 조금 긴장했어요. 그런데 활동 영상을 보고 나서 우리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메시지보다 방식을 보고 서로를 알아본 거죠.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겠다고요.

왠지 뭉클하네요. 분위기가 상상돼요.    

다들 굉장히 들떴었죠. 박경석 교장 선생님은 DxE 활동 영상을 보고 밧줄을 선물하기도 했고요. 노들야학에서 투쟁할 때 쓰려고 아껴 놓은 밧줄이 있었거든요. 점거할 때 서로 묶으려고요. 

슬픔과 고통을 목격하고 삶이 달라질 때 얻는 기쁨이 분명 있지만, 목격하는 것 자체가 유쾌하거나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계속 그 일을 하는 작가님의 동력은 뭔가요?

기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요. 그냥 제 눈이 그쪽으로 가요. 그리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안 믿어주지만, 노들야학을 하면서 얻은 기쁨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고통과 연대하는 기쁨이 커요. 

기쁨이라는 건 복합적인 감정이라고 했잖아요. 동물들의 고통을 봤다는 기쁨이 있어요. 내가 알아줬잖아요. 그들의 고통을(웃음) 

고통을 알아주는 기쁨이라니 새로워요. 

몰랐어도 되는 건데 알아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있어요. 몰랐으면 그냥 잘 살았을 텐데 알게 돼서 내 삶이 아주 크게 바뀌어야 하지만, 바뀌어서 기쁜 거죠. 이런 기쁨이 크니까 슬픔을 마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가르켜서 “사람 같다”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동물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익숙하지 않은 말이니까. “사람 같다”고 표현하는 거죠. 반려동물은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동물이 맞잖아요. 내가 동물이라는 걸 느낀 후에 오는 해방감이 아주 커요.



만약 단 한 명한테 이 책을 권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 주시겠어요?

아직 꽃님 씨한테 책을 못 드렸어요. 꽃님 씨가 자신이 모은 돈을 기부했잖아요. 그걸 보면서 제가 부끄러움과 존경을 느꼈고, 나도 무언가를 함께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서 인세의 절반을 노들야학과 DxE 기부한다고 했으니 꽃님 씨한테 드리고 싶어요. 

꽃님 씨가 책 받고 뭐라고 하실까요?

모르겠어요. 그런데 인터뷰를 당해보면 인터뷰를 하는 마음을 알듯이 꽃님 씨가 기부한다는 걸 글로 쓸 때는 몰랐는데 돈을 기부해보니까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주면서 “꽃님 씨 드디어 당신의 마음을 알았다”고 할 것 같아요. 얼마나 번민이 많았느냐고요. (웃음)




*홍은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활동했고, 차별에 저항해 온 장애인들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노란 들판의 꿈』을 썼다.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와 4·16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도 했다. 문제 그 자체보다는 문제를 겪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차별받는 사람이 저항하는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인권의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외에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등을 펴냈다. 




그냥, 사람
그냥, 사람
홍은전 저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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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한비야 “우리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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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긴급구호 현장에서 만나 신뢰하는 동료이자 친구로 지내던 한비야와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이하 ‘안톤’)은 2014년에 연인이, 2017년에는 결혼식을 올리며 부부가 됐다. 이제 결혼 3년 차. 부부가 된 이들의 생활은 1년 중 3개월은 네덜란드에서, 3개월은 한국에서 같이 지내고 나머지 6개월은 따로 지내는 ‘336 타임’으로 돌아간다.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는 아주 독립적인 두 개인이 60대에 결혼을 한 뒤 자신들만의 방식에 맞게 생활해나가는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는 이야기다. 저자 한비야는 “이 책을 읽은 모두가 각자의 방식을 찾길 바란다”고 강조하면서 누군가와 함께 행복하고 싶어 선택한 길에서 “행복을 방해하는 조건이 바꿀 수 있는 조건이라면”각자의 상황에 맞게 바꾸자고 거듭 말한다. 

일상에서도 구호 현장 용어를 사용하고, 10년 후의 일까지 계획하며 수정하기를 즐기는 ‘플래닝닷컴’ 커플이자 아침마다 함께 기도를 하고,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시간을 내 순례길을 걷고, 언제든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들.“30대에 만나 60년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우리처럼 60대에 만나 30년 사이 좋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7쪽)는 이들의 혼자로서도 충분한 힘과 ‘우정’을 기반으로 한 결혼생활이 얼마나 더 많은 ‘각자의 방식’을 만들어낼까. 인터뷰를 마치며 한비야는 독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 모든 커플의 행복과 행운을 빈다.”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DNA를 가진 아이를 가질 수는 없죠. 그러나 사회적인 DNA라는 것도 있는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로 우리의 사회적 DNA를 전하고 싶고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대단하진 않아도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공헌이 아닐까 생각해요.”



바꿀 수 있는 조건이라면

1년에 6개월 이상 떨어져 사는 장거리 결혼생활이에요. 다양한 삶의 모습이 더 이야기 되어야 할 한국 사회에 ‘이런 삶도 있다’고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책이라는 사회적 자산이 되어 사람들과 나눌 가치가 있는 경험인지 고민하느라 거의 1년을 보냈는데요. 삶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일단 저희는 아주 다른 상황이긴 해요. 다른 국적을 가진 부부고, 60대에 결혼을 한 부부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아주 독립적인 사람들이라는 점이고요.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기엔 문제가 있는 거예요. 같이 살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가 다 그만두고 네덜란드에서 ‘서울댁’으로만 살까요? 그렇다고 남편이 한국에 와서 ‘안서방’으로만 살 수는 없잖아요.(웃음) 우리한테 딱 맞는 공식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있었던 거고요. 그걸 보여주는 것이 지금처럼 다양한 형태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성인 커플이 같이 사는 삶의 방식 중에서 결혼만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168쪽)라고 분명히 말씀하기도 했죠. 

그럼요! 각자의 방식대로 하면 돼요. 당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태를 각자 찾아나가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결혼하기로 결심을 한 것뿐이죠. 다만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살 수가 없는 상황과 조건이니 저희에 맞게 조율해가며 사는 거예요. 주변에 딸 키우는 친구들이 있는데요.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이것이 싫어, 이것이 무서워, 라고 하면서요. 저는 개인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거나 바꾸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진 않을까, 생각했어요. 물론 저희의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핵심은 각자의 방법을 찾아가자는 것이었어요. 누구나 함께 행복하고 싶은 거잖아요. 누군가와 함께 하려는데 행복을 방해하는 조건이 바꿀 수 있는 조건이라면 바꿔가며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구호현장에서 거의 평생을 일해온 분들답게 결혼 생활에도 구호 현장의 방식을 적용한 것이 재미있더라고요. 바로 ‘우선순위’와 ‘최소 기준’ 정하기예요. 

안톤은 40년, 저는 거의 20년 구호활동을 해왔어요. 그곳에서의 규칙이 몸에 밴 거죠. 구호라는 게 문제가 있는 것을 풀려고 하는 것이잖아요.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러 좋은 공식들이 있거든요. 저희는 무슨 일이 있을 때 잘 됐을 경우와 안 됐을 경우를 생각해요. 현실은 그 중간 어디쯤 있을 테니까요. 일상 속에서도 구호 현장 용어를 굉장히 많이 쓰는데요.(웃음) 의견 충돌을 겪은 후에 이야기가 풀리면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로 ‘clearing out’이라고 해요. 그러고 나면 다시는 그 주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죠.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 확보가 핵심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잖아요. 

만약 우리가 결혼을 하자마자 24시간 딱 붙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어요. 사실 그것이 결혼의 무조건적 방식이었다면 결혼을 다시 생각해봤을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못 살아요. 나라는 개인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거든요. 안톤이 곁에 있든 없든 개인으로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지금도 중요하고 앞으로도 중요하고 죽을 때까지도 중요해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안톤과 한집에서 살게 되겠죠. 그래도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아마.

 


혼자로도 충분한 힘

결혼하고 가장 크게 변한 것 중 하나가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우리 중심적’인 사고로 바뀌었다는 점일 거예요. 스페인어를 배울 때도 ‘우리’에 해당하는 동사 변화를 많이 사용하게 됐다면서 변화를 실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맞아요, 아니었다면 1인칭 단수 ‘나’에 해당하는 동사 변화를 더 많이 썼을 거예요. 협주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솔리스트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 둘이 만난 셈이잖아요. 이때는 맞춰야 할 것도 많은 거예요. 상대를 빛나게 해야 할 때 나는 가만히 있어야 하고, 내가 빛나야 할 때 상대가 가만히 있어야 해요. 이 합이 맞아야죠. ‘나는 더 이상 솔리스트가 아니다’ 이것이 결혼을 결심했을 때의 생각이었어요. 혼자 독주할 때보다 협주할 때 더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서로 돋보여야죠. 그런 생각으로 결혼을 하고 나니 역설적이게도 나란 사람이 더 잘 보이더라고요. 저는 정말로 지금이 가장 나답게 사는 것 같아요. 나아가 나답게 연주할수록 이 연주가 빛나는 것도 알게 됐고요. 

일명 ‘과일 칵테일식 결혼생활’과도 닿은 이야기네요.

과일 칵테일을 만들 때 배와 사과가 있다면 두 과일의 양이 비슷해야 하고요. 크기도 비슷해야 해요. 그래야 각각의 과일 맛도 느끼면서 함께 먹을 때 더 맛있을 수 있어요. 결혼하고 뭐가 좋으냐는 질문을 받는데요. 저는 나의 바람막이가 생겼다든지 나의 버팀목이 생겼다든지 하는 건 아직 모르겠어요. 나중에는 생각이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보다 결혼 3년 차 입장에서 결혼은 나의 성장 촉진제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워낙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해온 두 사람이 만난 거잖아요. 필연적으로 ‘다름’이 있을 텐데요. 이것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두 사람만의 비결이 있다면 뭘까요? 

사실 저희는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니에요. 2002년부터 여러 경험을 함께 했어요. 남녀가 거치는 거의 모든 단계를 다 겪었다고 봐도 돼요. 상대가 산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그 산의 여러 가지 면을 본 셈인 거죠. 제 경우 남편을 나의 상사로도 봤고, 동료로도 봤고, 친구로도 봤어요. 그러니까 일단 저희는 서로에게 “당신이 뭘 알아” 같은 말이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요. 서로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태도로 사는지를 알기 때문에 자기가 무조건 옳다든지 상대에게 틀렸다고 하는 일은 없어요. 그게 참 중요한 것 같고요. 그래서인지 지금 저희에게 제일 중요한 건 우정이에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우정이죠.

 우정이요. 방금 말씀은 상대를 ‘나의 누구’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보겠다는 말로 들려요. 

우리가 부러 “서로를 그 사람 자체로 보자”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요. ‘우정’이라는 단어로 우리 생각이 다 나타나는 것 같아요. 저희는 결혼했다고 “너는 내 것” 같은 말은 하지 않아요.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각자가 독자적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 만나서 그야말로 협주를 하고 있는 거죠.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낼 것 같다는 느낌은 서로가 혼자로서 충분한 힘이 있어서라는 생각을 하고요. 혼자로도 충분한 힘이 있어야 둘이어도 충분한 것 같아요. 흔히 나의 반쪽을 찾아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요. 그럼 나는 여태껏 반쪽이었단 말인가, 싶어져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인터뷰 직전에, 책 표지 그림의 원본이기도 한 책 날개의 사진이 다른 모습도 아니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라 좋다고도 하셨잖아요. 

손을 잡고 가지 않아도, 이 정도의 거리로 나란히 걸어도 충분한 거라고 생각해요. 이 사진을 일부러 그런 마음으로 찍은 건 아니거든요. 안톤의 친한 친구가 순간 찍어준 스냅사진인데요. 이게 우리의 평소 모습인 거예요. 꼭 손을 잡고 가지 않아도 둘이 걸으면 얼마든지 행복한 거잖아요. 그래서 책 제목도 마음에 들어요. 함께 ‘걸을’ 사람도 아니고, 함께 ‘걸어갈’ 사람이라는 게 말이에요. 각자 자기의 발로 걸어가는 거예요. 곁에 동행을 두고서. 여태껏 들어온 ‘결혼을 하면 밧줄이 생긴다’, ‘그늘막이 생긴다’, ‘버팀목이 생긴다’ 같은 말이 저한테는 해당 안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나 더 좋죠. 성장촉진제니까요.(웃음) 



주제가 있어야 변주도 한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재미있는 삶”을 말씀하셨는데요. 대단하지는 않아도 재미있는 삶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20-40대라면 대단하게 해야겠죠. 그 시기에는 목표도 있어야 하는 거고요. 저희도 그래왔어요. 목표를 향해 가는 도중에 견디는 힘도 늘어나고, 버티는 힘도 늘어나고, 나의 정체성도 늘어나는 거잖아요. 한편 60대인 저희에게는 대단한 삶에 대한 욕심은 없어진 것 같아요. 안톤과 매일 하는 말이 뭔 줄 아세요? “우리가 재미있게 사는 게 사회공헌이다”예요. 구호 현장에 40년을 있었다고 힘만 들었지 남은 게 뭐가 있냐, 같은 말들을 하잖아요. 우리는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말년에 이렇게 재미있게, 대단하진 않지만 재미있게 사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한창 여행 다니던 20대 때 나이 들면 후회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러니까 내가 재미있게 사는 걸 보여줘야 돼요. 그래야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할까 말까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늙어서도 저렇게 재미있게 산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모델은 하나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요.(웃음) 

순수한 재미로, 순수한 열정으로 무언가를 계속 해나가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신혼여행을 가서도 스페인어 공부에 열을 올리잖아요. 그리고 공부를 정말 순수하게 재미있어 해요. 

하다 보면 새로운 계획도 떠오르니까요. 저희는 언젠가 중남미 시골을 여행하면서 직접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때 스페인어가 도움이 되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이 언어를 하는 다른 나라를 다니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스페인어를 배우겠다고 한 게 아니거든요. 재미있게 배우다가 보니 쓸모가 생긴 거죠. 세상에는 목표지향적인 사람들도 있는 거니까 저희를 보면서 이제 와서 무슨 스페인어를 배우냐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저희는 그 사람들과는 삶의 태도가 약간 다른 거예요. 

결혼 10년 차 보고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후반부에 언뜻 내비치셨는데요.(웃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건데요. 지금까지 한 말은 저희가 결혼 3년 차이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태도 중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있겠죠. 저도 궁금해요. 어떤 것이 10년이 되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것이 변할 것인지 말이에요. 가령 ‘336 타임’은 제가 은퇴를 하게 되면 변하겠죠. 저는 66살에 은퇴를 할 생각인데요. 결혼 전에는 60대에 은퇴를 결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동반자로서 우리가 함께 가는데 저만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가 함께 다니면서 직접 도움을 주는 일을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거니까요. 이것도 결혼으로 제가 달라진 점이네요.



‘뭐든지 반반’이라는 원칙은 어떻게 될까요? 

그건 계속 유지될 것 같아요. 할 일도, 비용도 반반으로 하는 것은 변함 없을 거예요. 여행도 우리가 처음 만난 아프가니스탄을 기준으로 동쪽은 제가, 서쪽은 안톤이 계획과 정산 모두를 책임지거든요.(웃음) 혹시 나중에 우리 중 누구의 건강이 조금 더 나빠지면 몸으로 하는 것이 반반이 될 순 없겠죠. 그건 또 그때 맞춰서 하면 될 거예요. 무엇보다 원칙이 중요한 것 같아요. 주제가 있어야 변주도 하는 거잖아요.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확보한다는 우리의 주제, 뭐든지 반반으로 한다는 우리의 주제 아래 앞으로 여러 변주가 가능해질 거예요. 

누군가는 이러한 원칙을 답답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말씀을 들으면 원칙이야말로 다른 가능성을 더 열어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돼요. 

원칙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거예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이 있죠. 그 말이 정말 진리예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마음껏 변하는 거예요. 그런 후에 변하지 않는 것으로 돌아오는 거죠. 자신의 고갱이, 자신을 만드는 힘, 자신의 정체 같은 것들은 결혼을 한 후에 훨씬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그것이 없으면 타인의 변주에 끌려가고요. 그러다 문득 보면 주제가 없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몰라요.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에 대한 이야기가 후반부에 담겨 있어요. 지금의 생각도 듣고 싶어요. 

글쎄요, 변수가 많죠. 살아보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고요. 코로나-19 때문에 책이 나왔는데도 남편이 함께 하지 못할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런데요. 우리는 구호팀장들이었잖아요.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최선을 찾는 게 우리의 일이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놀라거나 하지 않아요. 이건 현장에서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죠. 정부와 한창 협업을 하는데 정부가 없어져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그저 사회의 일원으로 변화에 잘 맞춰서 갈 수 있을까, 하는 60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염려는 갖고 있고요. 그보다는 재미있겠다, 기대된다는 생각이 훨씬 더 커요. 저희는 일명 ‘플래닝닷컴’이라(웃음) 2030년까지 모두 계획이 있거든요.




*한비야

지구촌(global village)가 아니라 지구집(global hom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른나라의 다른 민족들도 진정한 한 공동체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발전기를 부착한 에너자이저. 30대에 육로 세계일주를 떠났고, 40대에 한국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으로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에서 일했다. 50대에 인도적 지원학 석사학위를, 60대에 국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1년의 절반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머지 절반은 국제구호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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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이 제목만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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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작가 제공

10대 후반 학교 밖의 글쓰기 모임 ‘어딘글방’을 제 발로 찾아갔던 작가 이슬아. 이곳에서 “아무도 안 시켰는데 하필 글을 쓰겠다고 애쓰는 청년들(198쪽)”을 만났고, 23살부터는 글쓰기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아르바이트를 거쳐가면서도 놓지 않았던 글쓰기 수업. 그의 글쓰기 수업 첫번째 사명은 ‘궁금해하기’였고, 10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한 격려를 해주려고 노력했다. 『부지런한 사랑』은 작가 이슬아의 여섯 번째 책이자, 글쓰기 수업에서 탄생한 ‘부지런한 사랑’에 관해 쓴 책이다. 이 제목 말고는 떠오르는 제목이 없었다. 언제나 사랑과 용기를 듬뿍 담아, 이야기하는 이슬아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가장 오래 다듬은 책이라고 들었어요. 책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나요? 

우선 제자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 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수업에 온 아이들의 수많은 글을 인용하는 책이니까요. 제 글의 힘뿐 아니라 아이들 글의 힘을 크게 빌리는 책이라, 인용 허락을 아주 정확히 받기로 했죠. 아이가 몇 살 때 쓴 글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인용하는지, 왜 인용하고 싶은지를 상세히 적어서 모든 아이와 가정에게 연락 드렸어요. 아이와 보호자가 모두 동의해야 그 글을 책에 모셔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이 마흔 명 넘게 등장하니까 인용 허락을 구하는 작업만 며칠이 걸렸죠.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제자들도 이제 책을 읽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소감을 이야기해주던가요? 피드백이 궁금합니다.

대체로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해주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피드백은 이제 거의 성인이 된 파도라는 아이에게 들은 말이에요. “많이 기쁘고 좋아요. 슬아가 제 글을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해주셔서요.” 파도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과 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지내는데 그래도 서로에 대한 존중이 결코 사라지지 않죠. 이름으로만 불러도 존중과 예의와 동료애는 아주 살아있는 것 같아요. 제 글쓰기 스승‘어딘’과 저의 관계도 그렇죠.

아르바이트로 글쓰기를 가르치셨고, 지금은 헤엄출판사가 있는 파주에서 아이들의 글쓰기를 가르치고 계시는데요. 수업을 오는 아이들은 어떤 계기로 오게 되는지, 무엇을 목표로 수업을 듣는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청강해보고 싶을 정도로 그 광경이 궁금해요. 

파주 헤엄출판사에서 진행하는 동네 아이들 글쓰기 수업에는 아홉 살부터 열두 살 사이의 초등학생들이 와요. 처음엔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제안하셨겠지만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다니지 않겠죠. ‘글쓰기가 삶 전반을 얼마나 풍부하게 만드는지’ 실감하시는 부모님들이 글쓰기 수업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한두 번 다녀보고 재밌어서 다니고요. 글쓰기 수업을 하러 헤엄출판사에 갈 날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아이도 있어요.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안학교 로드스꼴라에서도 수업을 하나 해요. 이 수업에서는 10대 후반의 청소년들과 만나요. 대안학교 진학 역시 부모님과 상의해서 결정하겠지만, 10대 후반 아이들은 더 주도적이고 자율적인 선택으로 오는 편이에요. 글쓰기란 ‘어렵지만 재밌고 아주 잘해보고 싶은 무엇’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게 저의 목표예요. 

<경향신문> 칼럼 등을 통해 글쓰기 수업 이야기를 종종 나누셨는데요. 아이들의 글을 보면서 반성을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가 기억이 나요. 많이 배우시기도 했을 것 같고요.

예전에는 너무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압도되어서 글을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초등학생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그 습관을 많이 버리게 되었어요. 초등학생들은 정말 용감하게 첫 문장을 그냥 시작하더라고요. 별 욕심 없이 아무렇게나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제가 고심해서 쓴 문장보다 나을 때가 있어요. 아이들 글의 도입부를 보고 첫 문장에 대한 강박을 조금 버릴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용감한 마음, 정말 중요해요.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으면서 작가님의 글쓰기 교사 ‘어딘’이 참 궁금했어요. ‘어딘’으로부터 배운 많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넓고 깊은 사랑이요. 넓고 깊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어딘을 가까이에서 보며 배웠어요. 어딘 만큼 훌륭해질 수 있는 세월이 저에게도 주어진다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지구가 무탈했으면 좋겠고요. 

전작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을 비롯해 『심신 단련』『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등 책 제목들이 모두 문학적이면서 낯선 느낌이 들어 단번에 반했었어요. 이번 책 제목도 ‘역시’라는 탄성이 나오더군요. 혹시 다른 후보 제목도 있었나요? 

유일한 후보였습니다. 다른 유력 후보는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제목 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글쓰기가 어째서 부지런한 사랑인지 이야기하는 책이라서요. 또한 제가 글쓰기 교사로 일하며 부지런히 사랑한 타자들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요.

매일 글을 쓰고 연재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슬아 작가가 쓰는 문장은 닳고 닳은 느낌이 없어요. 그래서 늘 읽을 때마다 신기하다는 감정이 드는데요. 그건 아마도 끊임없이 아이들을 만나고 아이들의 글을 읽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글쓰기 수업을 할 때, 교사가 지녀야 할 마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글쓰기 교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좋고요.

저도 아직 배우고 있어요. 교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요. 좋은 글쓰기 교사의 자질 중 가장 기본적이고도 어려운 것이 아이로 하여금 쓰고 싶게 하는 능력인 것 같아요. 근데 이야기하고 싶게 만드는 능력은 비단 글쓰기 교사에게만 중요한 능력은 아니죠. 사랑과 우정에 영역에서도 늘 중요하잖아요. 좋은 질문을 가진 사람,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는 소망으로 글쓰기 수업에 들어가요.

아이들에게 글쓰기 교사로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있나요?

아이가 안 좋은 컨디션으로 글쓰기 수업에 올 때마다, 제가 칠판에 자주 쓰는 말이 있어요. ‘잠 > 밥 > 글쓰기’ 이렇게 적어요. ‘잘 자고 잘 먹는 것이 글쓰기보다 늘 더 중요하다, 글은 못 써도 상관 없지만 몸이 축나면 안 된다, 절대로 밤 새가며 글 쓰지 마라.’ 라고 해요. 졸리면 일찍 자고, 차라리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쓰라고도 말해요. 

너무 중요한 이야기네요. 아참, 후속작이 궁금해요.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여섯 번째 책을 냈어요. 지난 2년간 책을 여섯 권이나 낸 거예요. 열심히 해서 기특하지만 앞으로는 이 속도로 작업하지 않을 것 같아요. 스스로를 덜 소진하는 방식으로 글 쓰고 싶어요. 몸과 마음을 돌보며 천천히 쓰자는 게 새해의 목표예요. 2020년 한 해 동안 인터뷰를 열심히 해서 원고를 많이 쌓았으니 2021년에 헤엄에서 인터뷰집을 만들 계획이고, 제가 좋아하는 위고 출판사와 함께 아무튼 시리즈를 함께 만들 계획이에요. 

작가 이슬아가 품고 있는 가장 큰 꿈은 무엇인가요?

글쓰기를 언제까지나 쾌락의 영역으로 간직하는 것. 그게 요즘의 꿈이에요. 



부지런한 사랑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저
문학동네




*이슬아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간 이슬아]를 발행하고 헤엄출판사를 운영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대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 에세이 『일간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심신 단련』,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 서평집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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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사진가 황예지 “가족, 슬프고 명랑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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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탕 한 솥과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엄마가 집을 떠났다. 그렇다면 남은 세 식구만이라도 잘 살아보자고, 서로를 다독이던 말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아빠가 수감됐다. 언니와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의 나이는 열여덟. 슬픔을 잊기 위해 어린 황예지는 교복이 해질 때까지 축축한 암실에서 필름을 만졌다. 

2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뒤 아빠는 석방됐고, 10년 만에 엄마가 돌아왔다. 가족이 함께하는 일상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조각난 마음은 봉합할 수 없어서 사진가 황예지는 카메라를 들었다. 엄마와 언니의 모습을 찍은 작품 <절기>를 통해 그는 이 깊은 상처와 “잔인한 화해”를 했다. 

그의 첫 번째 에세이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은 치열하게 아팠던 그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내밀한 마음을 모두 꺼내 보이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덮으면 당신은 저의 가장 친구가 된 것이에요. 아린 마음과 함께 우리가 다정한 세계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3쪽)”



아픔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렇게 긴 글을 쓴 건 처음이시죠. 

네, 보통 사진으로 작업을 하니까 글 쓰는 게 익숙지 않았어요. 제가 책을 냈다는 게 아직도 좀 얼떨떨해요.(웃음) 

구독 서비스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에 매달 16일마다 연재했던 글이 책의 토대가 되었어요. 암을 앓고 있던 친구, 이도진 디자이너의 치료비를 위해 가수 이랑 씨가 구독 서비스를 기획했고 창작자들이 모여 매일 이야기를 발송했죠. 당시 연재했던 에세이가 책으로 묶일 수 있었던 계기가 궁금해요.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에 글이 연재되고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를 받았어요. 하지만 저는 글을 쓰던 사람이 아니라서, 대부분 거절을 했는데요. 이 책을 편집해 주신 바다출판사의 염은영 편집자님이 거의 6개월가량을 제 전시와 행사 등에 찾아오셨어요. 진솔하게 마음을 전해주신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죠. 사실 저 스스로는 제 글에 확신이 없었거든요. 워낙 작가들을 경이롭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 글이 책으로 나와도 되나’라는 의심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꾸준히 좋은 피드백을 듣다 보니까,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말에 가장 마음이 흔들렸나요?

첫 원고를 마무리하고, 두 번째 원고를 쓰던 와중에 편집자님을 만났어요. 드문드문 전시장에서만 얼굴을 보다가 처음으로 미팅을 한 자리에서 제가 “글을 쓰고 있긴 한데, 저는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한 번 보실래요?” 하고 노트북을 편집자님 쪽으로 돌려서 보여드렸어요. 그런데 읽다가 우시는 거예요. 그때 진솔한 모습을 보았어요. 서로 연결돼 있고, 가치관이 비슷하다고 느낀 계기였죠.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은 편집자 개인을 믿고 출발한 책이에요. 

어떤 글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현성이」라는 글이었어요. 

의외예요. 저는 앞선 글들을 보고 내내 눈물이 났다가 「현성이」를 읽을 땐 괜찮았거든요. 글이 정말 따뜻해서요.

눈물이 나는 포인트가 각각 다른가 봐요. 이도진 디자이너는 「피의 구간」 읽고 오열했다고 했거든요. (웃음) 저도 정말 신기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리뷰를 보면 독자들도 울컥하는 포인트가 다 다르더라고요. 



이도진 디자이너와는 어떤 인연이었어요?

도진 씨의 친구들과 제 친구들이 많이 겹쳤어요. 알음알음 알고 지내다 보니 ‘언젠가는 같이 작업을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분이 젊은 사진가에게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래서 도진 씨가 기획한 매거진 <DUIRO>나 여러 프로젝트를 할 때, 제가 불려 갔죠. (웃음) 같이 작업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가까워진 친구였어요.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의 참여 제안을 받고, 어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나요? 

일단 주제 자체가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서, 나에게 가장 큰 상처가 무엇이고 제일 치열하게 아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렸어요. 그게 저에게는 가족이었거든요.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과 글로 풀어내는 건 다르니까, 아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면 첫출발은 당연히 가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를 스쳐간 일들에 대해서 언젠가 정리를 하고 싶었는데, 정신적으로 피로한 일이다 보니 계속 모른 체하고 미뤄뒀거든요. 좋은 기회에 그 이야기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세랑 작가가 추천사를 썼어요. 

출간을 앞두고 제가 정세랑 작가님 책을 많이 읽고 있었거든요.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이 소설 안의 캐릭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정세랑 작가님 소설을 읽을 땐 유일하게 그 캐릭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 같은 인물들이요. 삶에 지지 않고, 명랑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제가 살고 싶은 삶의 모토와도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추천사를 부탁드렸는데 너무 흔쾌히 해주셨어요. 



한 계절이 지나갔구나

대학교 수업에서 선과 형태를 담아오라는 과제를 받고, 튼살이 자리한 언니의 몸을 찍으면서 작가님의 가족 사진 작업이 시작되었는데요. 섬광처럼 문득 ‘언니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가요. 

언니라는 사람은 늘 저에게 숙제 같았거든요. 사랑해야만 하고, 실제로 사랑하면서도 원망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엄마 아빠가 부재한 상황에서 저에게는 언니밖에 없었고, 언니에게도 저밖에 없었기 때문에 꼭 치열한 연인처럼 서로 시간을 보냈죠. 사실 학창시절에는 가족을 찍는 게 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는데, 성인이 된 후에는 막연히 ‘이제 가족을 찍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과제를 받고 큰 숙제였던 언니의 몸을 확 찍어버렸죠. 제가 눈물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학교에서 대성통곡을 했어요.

과제를 발표하면서요? 

네, 왜 이 사진을 찍었는지 설명을 할 때 제가 빙빙 돌리면서 되게 이상하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교수님이 사진에 담은 만큼은 말을 하라고 정곡을 찌르셔서 눈물이 팍 터졌어요. 민망할 정도로 오열을 해서 ‘아 이제 학교 어떻게 다니지, 자퇴해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사진 너무 잘 봤다고, 정말 좋았다고 이야기해주더라고요. 그때 치부를 드러내는 게 그리 추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사진을 찍고 어떤 해방감 같은 것도 느껴졌을 듯해요. 

언니의 몸과 표정을 마주하는 게 저에게는 정말 큰 의미였어요. 저는 언니가 웃음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면 꽤 냉소적이고 우울한 모습이 있는 거예요. 언니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나중에는 엄마와 언니 모두 이렇게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더라고요. 

졸업전시를 준비할 때는 엄마랑 언니가 옆에 붙어서 사진 고르는 데도 의견을 냈어요. ‘이게 더 낫다’면서. (웃음) 그때 여성 가족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연대 같은 게 느껴졌어요. 우리가 어그러진 무언가를 애써 담기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봉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아요. 잔인하게 파헤치는 게 때로는 치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그 작업을 하면서 정말 단단해졌어요. 첫 프레젠테이션 때 오열하고, 두 번째 프레젠테이션 때도 너무 울었는데 지금은 작업자로서 큰 무대에 서는 순간에도 너무 수월하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마음에도 체력이 생기는구나 싶어요. 이제는 ‘내가 지나온 시간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됐네’ 라는 경쾌함이 생겼어요.



사진도 그렇지만, 특히 이번 책은 개인적인 상처에 대한 고백으로 채워졌어요. 내밀한 아픔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게 힘들진 않았나요?

아주 옛날부터 저를 통과한 일이라서, 저는 그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한 날이 많았거든요. 사실 좀 더 어릴 땐, 저에게 이런 사연이 있다는 걸 수치스럽다고 여겼는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저의 토양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진 작업을 할 때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고요. 그래서 점점 이 상처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었어요. 상실과 허무, 같은 것들을 오래 바라보다 보니 그리 부끄럽게 느껴지진 않더라고요. 사람들이 “책 나오니까 어때?” 라고 많이 묻는데,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만 하나 신기한 건, 책을 읽고 눈물 흘리신 분이 정말 많다는 거예요. 제 지인들도 그렇지만, 리뷰를 찾아봐도 “너무 좋았다, 눈물을 흘렸다” 같은 말들을 하시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해요. 

책을 읽는 동안, 작가도 글 쓰면서 많이 울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슬픔을 삼키는 사람이라서, 감정을 밖으로 잘 표출하지 않아요. 글 자체도 감정을 분출하고 드러내기보다는 덤덤하게 썼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가족들은 어떤 말을 전해줬나요? 

저희 가족이 정말 단단한 사람들이라고 느낀 게, 이걸 읽고 웃는 거예요. 수위가 너무 약하다면서, 좀 더 세게 써야 한다고 농담도 하고요. (웃음) 아빠는 책 보고 “나는 안 좋은 일 겪은 걸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던데, 너는 그렇지 않니?”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숨기는 것보다 드러내는 게 더 근사한 일 같은데?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더라고요. 

독자들은 우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울지 않는 이상한 상황이에요. (웃음)

그러니까요. 정말 이상하고 웃긴 사람들이에요. (웃음)



무사하다는 감각이 늘 필요했어요

엄마가 집을 나가고, 아빠가 수감돼도 나의 일상은 계속 되잖아요. 죽지 않으려면 어쨌든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데, 작가님은 너무 어렸어요. 그 당시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게 있나요? 

사실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요. 너무 힘든 일을 겪으면, 세세한 기억은 없어지고 감각만 남잖아요. 그래서 막연하긴 하지만,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게 정말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 암실 작업을 엄청나게 많이 했거든요. 그 치열한 작업이 분풀이가 되었어요. 교복이 상할 때까지 축축한 암실에 머무는 시간이 참 좋았거든요. 감정을 해소하는 저만의 방식이었죠. 

그리고 당시에 무척 좋은 어른을 만났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는데, 저와 비슷한 일들을 겪고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자란 분이셨어요. 그 선생님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려고 마음을 많이 써주셨죠. 선생님께도 책을 보내드렸는데, 읽고 대성통곡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미안하고, 대견하다면서요. 또, 불행 중 다행인 건 여러 일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가족들이 되게 귀여워요. 끝내 명랑함을 잃지 않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저도 마냥 처절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수감됐을 때 보내준 편지들도 내용을 보면 구구절절 하기보다는 그냥 웃겨요. 재미있는 사람들이죠. (웃음) 

유머가 있는 가족이네요. (웃음)

어릴 때는 ‘신이 하다 하다 나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장난을 치나’ 라는 생각도 했거든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눈만 감았다 뜨면 새로운 사건이 생기는 거예요. ‘신이 있다면, 이게 인간에게 할 짓이냐’고 그랬는데(웃음) 이제 다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계절이 지나갔구나, 잘 수습해야지.’ 가족들이 책 보고 웃는 모습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저희 아버지는 흥망성쇠의 아이콘인데(웃음) 그걸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세요. 지금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고요. 그런 태도가 멋있어요. 

부모님이 부재하는 동안, 편지가 어린 황예지를 키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엄마가 떠나면서 편지를 남겼고, 수감된 아빠도 매주 편지를 보냈죠. 

맞아요. 제가 감정을 삼키는 사람이라, 편지를 유독 소중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저 스스로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도 텍스트를 쓸 때거든요. 편지라는 물성에 좀 남다른 애정이 있죠. 연애할 때도 애인이 기념일에 편지를 안 주면 서운해서 눈물이 막 났어요. (웃음) 지인들에게도 편지를 종종 잘 써주는데요. 제가 어려운 일을 겪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순간을 잘 알아채거든요. 그럴 때 메시지를 써서 마음을 전할 때가 많아요. 

제목은 어떻게 지으셨어요?

과거에 한 인터뷰에서 “첫 시집을 낸다면 제목을 무엇으로 할 거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불현듯 “우리는 우리의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이라는 제목이 떠올랐거든요. 거기에서 가져왔어요. 

작가님에게 ‘다정한 세계’란 어떤 모습인가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일을 겪어서 ‘무사하다’는 감각이 늘 필요했어요. 누구도 나를 해치지 않는 무해한 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돼요. 그리고 저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고, 그들과 함께 근사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거든요. 이들과 함께 늙으면 언젠가 다정한 세계를 알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이도진 디자이너도 그런 친구였고, 도진 씨의 친구들과 제 친구들이 대부분 소외된 것, 차별, 혐오와 싸우는 어른들이에요. 그들을 볼 때마다 ‘이 사람들과 어른이 되어가면 내가 꿈꾸던 다정한 세계를 알겠다’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주변 친구들이 소중하게 챙기는 게 너무 예쁘고 가치있는 것들이거든요. 유기견 보호소에서 강아지를 데려온다거나, 사회 운동에 참여한다거나 하는 일들이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그 세계로 가는 길처럼 보여요. 언젠가는 친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각기 다르게 예쁜 가치들이 하나로 모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냥 유연하게 살고 싶어요

원래 글 쓰기에 관심이 있으셨어요? 작가님 글을 보며 시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니 몸에 우리가 만든 저주가 걸려 있다.(32쪽)” 같은 문장이나, 책 속의 전시 「병과 악과 귀」 등이요. 

글 쓰는 사람들을 오래 존경했어요.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글을 쓸 땐 제 옷을 입은 것 같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늘 동반자처럼 글을 옆에 두고 함께 지냈죠. 싸이월드나 블로그에 짤막한 글들을 쓰곤 했는데 그걸 되게 많은 분들이 읽으셨더라고요. 어느 리뷰에서는 “예지 씨를 15년간 봐 왔는데, 책이 나와서 기쁘다”는 이야기도 봤어요. 내 글을 이렇게 오래 읽어 준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해요. 

특히 시를 무척 좋아해요. 많이 읽고요. 제 글에서 그런 느낌이 있었다면, 존경심에 의해 구현된 게 아닐까 싶어요. 시인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사진 작업할 때도 시의 도움을 많이 받아요. <마고> 전시회 때도 임승유, 김이든, 김혜순 시인의 시를 깔아 놓고 전시를 시작했어요. 

“수집과 기록을 좋아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그들의 습관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시작했다”고요. 어떤 의미인지 좀 더 듣고 싶어요. 

저희 아버지가 메모를 많이 하시거든요. 심지어 넷플릭스 시청 기록도 수기로 다 쓸 정도로 기록하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에요. 집에 아빠의 일기장,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이 정말 많죠. 모아둔 박스 안에 아빠 인생의 흥망성쇠가 다 있어요. (웃음) 어린 시절의 선명한 기억 중 하나는, 아빠가 가족들과 외출할 때마다 필름 2롤과 카메라를 챙기시던 모습이에요. 사진 찍는 게 당연한 일상에서 살았고, 모두 그런 줄 알았는데 성장해서 보니 저희 집이 유별나더라고요. (웃음) 가족사진에 접근하게 된 것도 결국 아빠 덕분인 것 같아요. 아빠가 가족의 모습을 워낙 많이 기록하던 사람이었거든요.

사진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요? 고등학교 시절, 사진 작업하던 일을 회상하며 “마음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는데 그 길이 조금씩 좁혀졌다. 많은 것에서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96쪽)”고 했어요. 

사진을 찍는 게 감정 표현, 해소의 수단이 된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학창 시절의 저는 암울했고, 타인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아이였거든요. 그런데 사진을 찍어가면 선생님들이 “나 사진으로 점 볼 수 있는데, 너 왜 우울해?”라고 묻곤 하셨어요. 친구들은 제 사진을 보고 축축하다고 표현했고요. 그때 ‘여기에 내 감정이 담기는구나’라는 걸 처음 알게 됐죠. 특히 축축하고 치덕치덕한 암실이라는 공간이 너무 좋았어요. 제가 암실 작업을 할 때 좀 예민해지는데, 그렇게 곤두서는 시간이 저에게 필요했던 거 같아요. 가끔 ‘내가 사진 안 했으면 뭘 했을까?’하고 생각해보는데 잘 안 보여요.  

과거 인터뷰에서 사진 작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어요. 요즘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어때요?

비슷해요. 코로나19 때문에 정말 많은 촬영이 취소가 됐거든요. ‘나중에’라는 기약밖에 할 수 없다는 게 허무하더라고요. 사실 사진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끈을 놓지 않으면 작업자가 너무 힘들어요. 상업 사진을 하지 않는 이상 비참해지기 쉽죠. 그래서 유연해지려고 해요. 작업하는 사람의 권위나 소신을 내세우면서 다른 일을 미루기보다는 저를 이쪽저쪽에 골고루 써보는 편이죠.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영역도 많아지더라고요. 우연히 디제잉을 한 덕분에, 제 전시회에서 음감회를 열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지금 당장 친구가 “백화점에서 당일 알바 구하는데, 너 할래?”라고 물으면 저는 “그래!”하고 가요. (웃음) 코로나19로 일이 많이 취소됐을 땐 식당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손님들이 종종 저를 알아보기도 했는데, 그런 경험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요즘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좀 많아졌어요. 

무언가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가요? 

작업자의 지위나 권위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웃음) 저는 가수 이랑 씨의 태도를 참 좋아해요.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팔고, 작업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맞는 거죠. 저는 언제든 제2의 생계를 생각하고 있고, 사진보다 나와 더 잘 맞는 매체가 있다면 사진과 결별할 수도 있어요. 그냥 유연하게 살고 싶어요. 

사람들이 ‘황예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게 있을까요?

SNS로 많이 알려지다 보니까 저를 화려한 사람으로 바라보시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특정한 단어들이 생태계를 흐릴 때가 있잖아요. 저는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오글거린다”고 표현하는 걸 경계하고요. 힙스터, 인싸 같은 단어들에 쉽게 갇힐까 봐 두렵기도 해요. 깊이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점점 가벼운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까 봐 무서워요. 

지금까지는 황예지라는 개인의 역사에 대한 작업이 많았어요.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을 깊게 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세상으로 시선이 환기되곤 할 텐데요. 앞으로 해 나가고 싶은 작업의 방향이 궁금해요. 

여성 서사에 관심이 굉장히 많고, 특히 여성 기록자의 위치에 대해 생각을 자주 해요. 사진이라는 매체가 워낙 남성지배적이거든요. ‘내가 카메라를 들고 어떤 일을 하는가, 내 카메라가 어디를 향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생계를 대하듯 여러 분야를 자주 부딪혀보고 있어요. 홍콩 시위 현장에 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요. 제가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고 싶거든요. 아직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직시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요즘은 누군가를 교육하는 일이 많아요. 청각장애인 혹은 청년 센터 학생들과 사진 작업을 하는 등이요. 그분들도 수업을 듣다가 많이 우세요. 다른 매체로 자신을 만나는 경험을 하면서 북받쳐 오르는 거죠. 제 학창시절에도 이렇게 호흡할 수 있는 수업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요. 저도 우울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우울’이 어떻게 배제받는지 잘 알거든요. 이런 감정이 허용되는 상황에 대해 자주 고민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강의 제안이 오면 대체로 다 하는 편이에요. 



책 작업도 다시 할 의향이 있나요? 

제가 원고 하나 마감할 때마다 그랬거든요. “절대 안 쓴다. 죽어도 안 쓴다. 이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웃음) 그런데 책이 나오고 나니까 사람들이 “예지는 글 써야겠다. 글이 잘 맞는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거예요. 얼마 전에 가까운 친구를 만나서 “내가 무슨 일을 한 건지 잘 모르겠다” 라고 토로했더니 친구가 “모르는 상태에서 뭔가를 하는 게 나은 일일 수 있어. 나는 네가 오래도록 몰랐으면 좋겠어.”라고 했어요. 그 말이 참 도움이 되더라고요. 언젠가 또 글을 쓰고 싶다는 갈증이 생길 것 같아요. 다음엔 좀 더 경쾌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아직까지 글 쓰는 건 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인데요. 쉬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인상 깊게 읽은 리뷰가 있는데요. “무척 오랫동안 외면하면서 살았던 일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밑동이 흔들렸다. 황예지라는 사람을 보면 부끄러워서 피할지도 모르겠다.”는 글이었어요.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요. 저도 오랫동안 제 상처를 외면해왔으니까요. 책을 읽고 비슷한 마음이 드는 분들이 계시다면 아픔을 잘 피하는 사람이 될 때도, 잘 보는 사람이 될 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눈물 흘리는 게 정말 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책을 읽고 눈물 흘리셨다는 독자의 이야기가 너무 값지게 느껴져요. 건조해지기 쉬운 일상에서, 저의 책이 사람들의 눈물을 모으고 있다는 게 장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요.  




*황예지

사진가. 19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집과 기록을 좋아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그들의 습관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시작했다. 개인의 역사에 큰 울림을 느끼며, 가족사진과 초상사진을 중심으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사진집 『mixer bowl』, 『절기season』를 출간하고 개인전 〈마고Mago〉를 열었다.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황예지 저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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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공지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채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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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섬진강의 너른 품에서 2년여를 보냈다. 그동안 작가는 더 자주 미소 짓게 됐고,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누군가는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때로 지인들조차 묻곤 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담긴 것은 그 질문들에 대한 공지영 작가의 대답이다. 

섬진강 가에 작업실을 마련한 후, 후배 H와 J, S가 찾아왔다.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밀리고, 부모님의 부모 노릇을 하느라 지치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 매일이 지옥 같고... 저마다의 고민과 고통을 안은 채였다. 그 곁에서 작가는 말한다. 오랜 시간 자신을 마주하며 깨달은 사실들을. 기쁨보다 고통에서 더 많이 배운 것들을. 이를테면 ‘나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고,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한 이야기다. 





나를 끌어올린 원동력은 자존감

섬진강에서 지내신지 2년 됐나요?

2년 조금 넘었어요. 

예전보다 표정이 더 편안해지신 것 같아요. 주변 분들이 그런 이야기 하세요?

네. 내가 봐도 그래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이번에 찍은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서울에 있을 때하고 거기에 있을 때 표정이 달라요. 거기 있으면 약간 얼굴에 빛이 난다고 해야 되나. 피부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많이 타기는 했는데, 저는 조금 탄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건강해 보이고. 거기 있으면 찡그릴 일이 없고 매일 쳐다보면서 ‘너무 좋아’ 그래요. 마트에 갈 때도 ‘강물이 너무 예뻐’ 그러고요(웃음). 제일 가까운 마트가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야 하는데, 강변의 길을 따라 가야 되거든요. 강물이 되게 예뻐요. 그러니까 어떻게 안 좋을 수가 있겠어요.

제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 이보다 더 잘 맞는 제목은 없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처음부터 생각하고 썼어요. 몇 년 전부터 계속 이 접속사를 외웠어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면 참 좋더라고요. 실생활에서 되게 유용했어요. 

‘그래서 (…)’라고 생각할 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생각할 때, 괄호 안에 들어가는 말은 어떻게 변한 것 같으세요?

‘그래서’ 인간들은 다 믿을 수 없고 ‘그래서’ 이 세상은 지옥 같고, 그런 거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하니까 ‘아직도 하늘에 별이 뜨고, 너는 그 별을 쳐다볼 수 있는 눈이 있잖아’ 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노래 가사처럼. 그런 생각하니까 되게 좋았어요. 

책속에 세 명의 후배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평소에도 지인들이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는 일이 많은가요?

제가 불행의 원당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처음 보는 사람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는 해요. 다행인 것은, 제가 많은 고통들을 겪어봐서 그런지 세상에 이해 못 할 고통이 거의 없더라고요. 아마 그런 마음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이 와서 물어보는 것 같아요. 많이들 물어봐요. 

지나온 고통이나 시련이 남겨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요. 제가 굉장히 편안하게 살았고 부모님도 되게 좋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만약에 저에게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달랐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 때는 마음속으로 살짝 ‘어머,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생각했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죠. 나 자신이 엄청 낮은 곳으로 내려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정말 이 세상 어리석음은 다 해봤기 때문에(웃음). 누가 그런 짓을 해도 그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럴 때가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마음으로 경멸 같은 걸 안 하니까 사람들이 조금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깨달음을 얻는 건 아니잖아요. 깨달음을 못 얻는 사람도 있고요.

그렇죠. 삐뚤어지는 사람도 많죠.

맞아요. 경험과 나 자신이 능동적으로 상호작용을 계속 해야 깨달음을 얻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떠셨어요?

가장 나를 끌어올렸던 원동력은 자존감이에요. 자존감 혹은 책임감. 자존감은 뭐냐 하면, 내가 일시적으로 후져졌다고 해서 내 존재 자체가 후진 것이 아니라는 긍지예요. 그러려면 자기 양심에 비췄을 때 자신이 있어야 돼요. 선의에 대한 긍지가 있어야 돼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돼요. 제가 맨날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이런 일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 일에 영향 받아서 내 남은 인생을 망치면 너무 억울하다’, ‘이제부터는 내 책임이야’라는 거였어요. 예를 들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놈이 와서 난데없이 뺨을 때렸어요. 그건 내 책임이 아니죠. 그렇지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서 남은 하루를 보낼 것인가는 내 책임이죠. 뺨 맞은 게 억울하다고 하루 종일 그러고 있으면 그건 내 책임이에요. 

지나간 일에 휘둘리지 않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 일이 일어난 것이 내 탓인지 아닌지 빨리 구분할 수 있도록 계속 공부하고 연습한 거예요. 설령 내 탓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이미 일은 일어났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보면,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거든요. 그러면 그 일에서 반성할 거 있으면 반성하고 교훈 얻을 건 얻고, 그러고 나서 남은 하루는 더 잘 지내도록 애쓰는 거죠. 그런 게 인생에도 적용되면 그렇게 낙담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빨리 깨달아야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건데, 그게 ‘내려놓기’, ‘비우기’와 연관돼요.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나머지는 빨리 포기해야 돼요. 그러면 삶을 즐겁고 알차게 보낼 수 있어요.


 


산책하는 삶을 살 거예요

사실, 한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없어요. 심지어 나도 못 바꾸잖아요. 항상 무슨 일이 닥치면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데, 진짜 없더라고요. 그러면 나머지는 내려놓는데, 내려놓기가 너무 힘이 드니까 기도라는 걸 하는 거죠.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제 힘으로 도저히 안 되는 거니까 조금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요. 기도하고 ‘하느님 뜻대로 하십시오’, ‘부처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나면 모든 기도가 다 이루어지는 거잖아요(웃음). 그러니까 마음이 편한 거죠. 

작가님이 마음을 돌보는 데 신앙생활이 큰 도움을 준 것 같아요.

맞아요. 신앙생활이 나의 자존감에 엄청난 도움이 됐어요.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신이 너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긴다는 메시지를 받은 거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내 양심에 비추어서 크게 잘못하지 않았으면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 이렇게 나를 소중히 여기는데, 누가 감히 나에게 그럴 수 있어?’ 하고 자존감이 고양되는 거죠.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죠. 결국 기도라는 건 신이 대답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내 속의 참자아가 대답하는 걸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계속 하다 보면 흔들리지 않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내가 어쩌겠어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을 붙들고 괜히 진 뺄 필요 없죠.

그러니까요. 그리고 예수도 사람들이 투표해서 매달아 죽었는데, 내가 뭐라고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겠어요. 그런 마음 없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고요.

상처가 되는 말들은 오래 곱씹게 되잖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세요?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시나요?

생각을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고요. 그냥 ‘저 사람이 내가 상처 받고 불행해지기를 원하는구나, 저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기 싫어’ 하는 거죠(웃음). 원래도 그렇게 되기 싫은데 그 사람이 원하니까 더 싫은 거예요(웃음). 그럴 때는 나한테 계속 좋은 걸 해줘요. 예를 들면 화분을 사온다든가, 아직도 하동에는 꽃이 너무 많거든요, 길에서 꺾어다 예쁜 꽃병에 꽂아두면 그런 생각이 조금 사라져요. 아니면 지인들한테 전화해서 ‘내가 오늘 맛있는 거 사줄게, 우리 남해 바다 갈래?’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하동에서 경치를 바라보면 그런 생각이 없어져요. 그래서 제가 거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위로들이 너무 많이 널려 있으니까. 

“한 번뿐인 내 인생 이런 식으로 살다 죽기는 싫다”는 생각이 힘들 때 작가님을 붙잡아줬다고요.

정말 웃겼던 게, 그 생각이 제일 심하게 났던 때가 있었어요. 살이 10kg이 쪘을 때였는데(웃음), 아랫배는 늘 나온 거니까 상관없는데 갑자기 10kg이 찌니까 윗배가 나오는 거예요. 그랬더니 앉아있을 때 늑골이 너무 아프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아니,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내가 이렇게 아프면서 살아야 되나? 정말 싫다, 이렇게 살다 죽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웃긴 이야기는,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반신욕을 하는데 늑골이 너무 아픈 거예요(웃음). 요새는 조금 살이 정돈되고 나니까 너무나 편안해요(웃음). 

‘이렇게 살다가 죽기는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뒤이어 ‘그럼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라는 생각도 드셨을 텐데요.

맞아요. 제가 새로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건축가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선생님, 저 여기서 수도원처럼 살다가 죽을 거니까 그렇게 지어주세요’라고요. 남은 인생은 꽃 가꾸고 기도하면서 조용히 있다가 죽고 싶어요. 진짜로. 그래서 집도 그렇게 지어달라고 부탁드린 거고요. 요새 지리산 개발하면서 하동이 조금 시끄러운데, 반대에 앞장서 달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평소에 연락도 안 하다가 연락하고 찾아오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나 이제 애국 그만할 거라고. 제가 SNS를 그만두지 않았으면 한 번만 인용해 달라고 부탁했을 거고 저는 그걸 거절하기가 너무 힘들었을 것 같은데, SNS를 그만두니까 나 이제 좋은 일 그만하고 살 거라고 했더니 금방 수긍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새 너무 편해요(웃음). 이제 천천히 산책하는 삶을 살 거예요. 수입도 많이 줄어들겠지만 더 적게 쓰고, 환경 조금 더 생각하고, 꽃 가꾸고, 천천히 산책하면서.. 천천히 살려고요. 애국 그만하고. 

거절을 하면 관계가 끊어질까 봐 두렵잖아요. 책에 보면, 후배 S가 이런 말을 해요. “혼자 죽을까 봐 무서워.” 낯설지 않은 마음이에요.

다들 그런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원하지 않는 모임에도 나가게 되고...

그런 거죠. 아까 이야기했듯이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계속 생각했었는데, 저는 노년에 혼자 있는 삶을 너무 살아보고 싶은 거예요. 어제 갑자기 생각났는데 다음 책의 제목은 ‘참된 고독’이 될 것 같아요(웃음). 참된 고독 속에서 살고 싶거든요. 왜냐하면 이제는 나이도 많고,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자연하고 조금 더 가깝게 있으면서, 옛날만큼 사람들하고 있는 게 그렇게 즐겁지 않아요. 지금도 하동 내려가면 바로 튤립 심어야 되거든요. 튤립 천 개를 샀어요. 튤립 심을 생각에 너무 즐거워요(웃음). 

누구나 자신에게 상처 주는 사람과의 관계는 정리하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서 ‘사회생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혼자 사는 거 아니지 않느냐’ 하는 말들로 간섭을 하거든요. 

그렇게 간섭하는 사람도 다 정리해야 돼요(웃음). 그런데 연습을 많이 해서 여유가 생기면 관계를 끊지 않고 조금 거리를 둘 수 있게 돼요. 그리고 사람이라는 건 또 다른 길목에서 좋게 만날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싸우지 말고, 예를 들어서 누가 나한테 ‘너 왜 이렇게 다리가 굵어? 너 왜 이렇게 살쪘어?’라고 이야기하면 그냥 ‘어머, 내가 잊어버린 약속이 있어’ 하고 집에 가서 그 사람의 연락을 받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몇 번 시도하다가 안 해요. 눈치를 채는 거죠. 아니면 며칠 후에 문자를 보내서 ‘내가 요새 정신이 없어서 문자 답장도 못했네, 바쁜 일 끝나면 보자’고 해요. 그 정도로 조금 떼어놓으면 돼요. 그 사람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우리가 또 어떤 중요한 순간에 만날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하는 게 비겁한 게 아니에요.

 


나의 시선으로 내 몸을 바라보면

흔히 연륜이라고 하죠, ‘살아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이야기했죠. 극복된 상처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고요. 극복되지 않은 상처는 대물림되고.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데, 상처를 소화해낸 사람은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아요. 제가 책에서 카잔차키스의 말을 인용했잖아요. “행복이란 무엇인가, 모든 불행을 살아내는 것이다. 빛이란 무엇인가, 온갖 어둠을 응시하는 것이다.” 이게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이에요. 이외에 아무 방법도 없어요. 상처를 받았으면 그 상처를 끝까지 들여다보는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상처 받았는가’가 결국 ‘당신이 무엇이 집착하고 있는가’예요. 그러니까 자꾸 봐야 돼요. 내가 무엇에 가장 많이 상처 받고, 무엇을 또 회복하려고 하는지. 거기에서 자기의 약점이 보여요. 그걸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조금씩, 저절로 회복이 돼요. 뭘 하려고 할 필요 없고 그냥 보면 돼요. 아는 순간에 조금씩 치유의 길로 들어가요. 그러니까 알면 돼요. 

인지를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차이가 굉장히 큰 거네요.

그걸 심리학에서 ‘의식화’라고 하거든요. 무의식에 있었던 것을 의식 속으로 끌어들이면 치유는 자동적으로 일어나요. 

작가님에게도 그런 게 있었나요? 뭐였어요?

관계였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게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사랑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저의 가장 큰 집착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실수를 너무 많이 연발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랑 받고 싶고, 그러지 못해서 상처 받고...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걸 계속 바라봐야 돼요. 물론 마음이 아파요. 안 아픈 게 아니에요. 책에도 썼지만, 성숙해진다는 게 무감각해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무엇이 먼저인지 순서를 잘 정해야 돼요.


 

이번 책에서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기 더 어려운 측면이 있을까요?

엄청 많죠(웃음). 우선, 단행본 제일 많이 판 저 같은 작가한테 맨날 ‘3번 이혼’이 따라다니잖아요. 작가의 결혼 횟수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제가 나중에 보니까 헤세도 3번 결혼했고, 헤밍웨이가 4번 결혼했고, 마가렛 미드도 3번 결혼했던데 그 이야기가 따라다니냐고요. 찾아봐야 나오잖아요.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진짜 촌스러워서 못 살겠어요. 

작가님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외모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니까요. 작가를 데려다 놓고 왜 자꾸 외모를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말씀은 결례입니다,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이야기하신다고요. 그러면 바로 안티로 돌아서지 않나요?

그렇죠, 벌써 안티 됐어요(웃음).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리고 그건 제가 앞서 사는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책임감이에요. 개그 프로 같은 데서 여성 개그맨들 외모를 비하하고 그러는 것도 우리가 진짜 비판해야 돼요. 여자가 뚱뚱하면 어때서? 뭐 어쩌라고? 그거 정말 명예훼손이에요. 절대 하면 안 돼요. 그리고 여자들 스스로도 비하하면 절대 안 돼요. 농담으로라도 ‘내가 그렇지, 뭐’, ‘내가 하는데 잘 될 리가 있어?’ 이런 이야기 하면 안 돼요. 의도적으로 하지 말아야 돼요. 

책에서 알려주신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습이 있어요. 작가님은 ‘누구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물으셨죠.

이번에 후배가 한 구절에 밑줄을 쳐서 저한테 보냈더라고요. ‘내 거울 내 눈으로 보는데 왜 내 시선으로 못 보냐고, 젠장.’ 이 문장을 읽고 빵 터졌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니까 내 몸을 내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매스컴의 시선, 남자들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거죠. 그 부분을 항상 명심해야 돼요. 

스스로에게 ‘넌 충분히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게, 작가님도 처음에는 힘드셨나요?

그 이야기는 정말 책 한 권을 써야 되는데요(웃음), 전혀 안 그랬죠. 거울을 보면 남한테는 안 보이는데 내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요. 검버섯이라든지 기미라든지. 그런 것만 보고 앉아 있는 거죠. 정말 미친 짓을 한 거죠. 젊었을 때 더 예쁘다고 생각할 걸, 아까워요(웃음). 그런데 지나간 거 어쩌겠어요.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니까 오늘 그렇게 생각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나 자신’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의 자존심’이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셨어요.

진짜 중요한 이야기예요. 이번 책을 쓰면서 저도 몸소 체험하게 됐는데, 편집장님이 카톡으로 ‘선생님, 앞으로 10매씩 저한테 보내세요’ 하는 거예요. 여태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가 답장으로 ‘말도 안 돼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써서 보내려다가 지웠어요. 그때 저도 나와 나의 자존심에 대해서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면 자존심 상하는 말이에요. (원고를) 너무 안 쓰니까 10매씩 보내라고 한 거잖아요(웃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 나쁠 게 없는 말인 거예요. 그래서 ‘괜찮은 생각이에요’ 하고 답장하고 나서 저 자신한테 되게 놀랐어요. 내가 이걸 이렇게 수용하는구나. 잘한 거죠, 그러니까 책이 나왔잖아요(웃음). 책이 거의 완성되고 나서 제가 편집장한테 고맙다고 했어요. 

“인생이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는 결정의 시점을 어디서 잘라 바라볼까의 문제일 뿐이다”, “어느 시점에서 돌아보느냐에 따라 삶의 색깔이 바뀌는 것이다”라는 말씀도 인상적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회사에서 나한테 그만두라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더 좋은 회사로 가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 회사에서 나를 잘라주길 잘했잖아요. 그런 것처럼 죽을 때 ‘이게 뭐야,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어’ 하고 죽기는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잘 죽네’ 하면서 죽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오늘이 너무 소중한 거죠. 선물처럼 공짜로 주어지는 오늘 하루를 잘 지내면 어제 있었던 일도 다 오늘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퇴비가 되는 거예요.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혹시 오늘 저녁에 내가 죽더라도, 나의 인생은 멋진 것이 되는 거잖아요. 요즘 그렇게 생각하고 사니까 하루하루가 소중해요. 이렇게 극한 공격을 받는 저도 이렇게 행복한데, 안 행복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웃음).

“나는 스스로 죽어도 될 이유를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라고 쓰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도 헤아려보셨어요?

1번은 아이들이었어요. 저는 주변에 부모님이 자살한 친구들이 있어서 그게 얼마나 큰 배신감인지 알아요. 상처가 보통 큰 게 아니더라고요. 그런 부모가 돼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같은 게 있었어요. 두 번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결백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힘이 있었어요. 세 번째는 신앙의 힘 같은 게 있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되게 많이 생각했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요. 어떻게 죽는가가 결국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패배하고 상처 받아서 쫓기듯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것 또한 자긍심이었겠죠.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예전에 SNS를 할 때 30~40대 친구들이 저한테 힘든 이야기를 하고는 했어요. 그때도 제가 항상 했던 말이 ‘넌 지금 이러이러한 걸 다 갖고 있잖아, 그리고 젊잖아, 이게 얼마나 행복한 건데 그런 불행한 몇 가지에 매달려 있어, 그러지 마’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일단 오늘만 너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대접해 봐’라고 지령을 내렸어요(웃음). 평생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 힘드니까 매일매일 ‘오늘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기를 원해서 이 책을 쓴 거예요. 그리고 저한테 전화해서 ‘언니, 죽지 마’, ‘언니, 죽으면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한테 ‘나 안 죽어, 나 너무 행복해’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 때도 있었는데 그때 늘 하고 싶었던 말이 이 책이에요. 이런 과정들을 거쳐 왔고, 그러고 나서 지금은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고. 그리고 조금 더 미움 받고 조금 더 가난해져도 더 편할 수도 있는 거고 행복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을 정말 소중하고 예쁘게 채색하고 싶다’는 게 저의 생각이에요. 




*공지영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창작과 비평]에 구치소 수감 중 집필한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89년 첫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3년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통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다뤄 새로운 여성문학, 여성주의의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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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어른의 사랑은 한없이 투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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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사랑을 쓰고 싶었다.” 이 한 마디로 시작된 소설은 순도 높은 투명한 사랑 이야기로 뻗어 나갔다. 수진, 혁범, 한솔 각자의 일에 치열한 사람들이 상대의 불완전함까지 껴안는 애정의 모습. 임경선 작가는 많은 것이 불안한 시대이기에 “더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어떤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서로의 손을 잡기 어려운 시기, 온기 가득한 장편소설로 돌아온 임경선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임경선 작가는 일과 사랑, 인간관계에 대해 글을 써오고 있다. 소설 『곁에 남아 있는 사람』『나의 남자』『기억해줘』, 『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공저), 『다정한 구원』『태도에 관하여』『자유로울 것』『나라는 여자』『엄마와 연애할 때』를 비롯해서 다수의 책을 냈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으셨나요?

처음부터 ‘어른의 사랑’을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어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이 상처받거나 손해 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요, 어른이라는 것은 사실 강해서 어른이기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상대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그것을 탓하지 않기에 진정한 어른인 것 같거든요. 그렇게 인간이 한없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이별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제목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두 번째 소설집을 내실 때, 고려했던 제목이기도 해요. 어떻게 정하게 되셨나요?

앗,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어요? 맞습니다. 저에겐 ‘버려진 책 제목들의 무덤’이라는 파일이 따로 있는데요, 그간 스무여 권의 책을 내면서 모아둔 수백 개의 탈락한 책 제목들을 고이 간직해두었지요.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계속 최종 후보까지 올랐다가 마지막에 탈락한 제목이었는데, 이번 장편소설에 더없이 잘 어울려서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 제목을 사용하게 되었지요. 한솔이 연상의 수진에게 연서를 보내면서 늘 부드럽게 ‘수진 님’으로 시작하는 점에서도 착안했고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늘 조심조심 부드럽게 부르지 않나요? 제가 딸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처럼요(남편한테는 그러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매력적이었어요. 수진과 혁범은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고 한솔은 식물을 다루는 조경사예요. 캐릭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어떻게 설정하게 되셨나요?

소설을 쓰는 동안, 집 이사를 하면서 ‘집’이나 ‘공간’을 주목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직업을 주인공에게 주게 되었습니다. 건축에 관한 다양한 책과 자료를 읽고 공부하고 건축가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면서 건축이란 삶의 방식이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과묵하지만 단단하고 진실된 현실을 구축하려 하고, 냉철하게 안전과 책임을 중시해야만 하는 건축가의 성정이 혁범이 사랑하는 방식에 어울리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조경사라는 직업은 제가 1년 전부터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직업입니다. 단골로 다니던 식물 상점의 사장님들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고요,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식물이라는 생명체를 다루면서 찰나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마음이나, 순리나 운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천진한 아이 같은 성정이 한솔이 사랑하는 방식과도 역시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판단했고요.

현실을 알아갈수록 자연히 상처가 많아지고, 마음을 열기가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사랑이 슬픔과 고통을 언젠가 동반하게 된다 해도 사랑이 내게 찾아온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랑에게 한껏 마음을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상처를 입는다 해도, 상대를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이별한 스스로를 다독이며 언젠가는 털고 일어나서 다시 씩씩하게 내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믿어야 하겠지요. 상처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저절로 아물거나 더러는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게 될 거예요. 사랑을 ‘받는’ 일보다 사랑을 ‘주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수진에게는 두 남자 ‘혁범’과 ‘한솔’이 있습니다. 혁범은 일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고, 한솔은 섬세하고 애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인데요. 조금 유치한 질문이지만, 작가님이라면 어떤 사람을 택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웃음)

전혀 유치하지 않습니다. 저요? 혁범은 사실 지적이고 세련된 겉모습을 떠나 속마음이 시리도록 외롭고, 또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제가 참 좋아하는 유형의 남자인데요(네, 실제로 이런 남자들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이번만큼은 한솔의 곁에 서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무치게 사랑하고 그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너무도 경이롭고 눈부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솔의 맑고도 치열한 사랑의 힘이 결과적으로 수진과 혁범을 단계적으로 구원한 셈이니까요. 아낌없이 주는 진심 어린 사랑의 힘은 너무도 압도적이라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마저도 근본부터 변화시킵니다.

두 남자를 향한 수진의 선택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더라고요. 결말을 고민하진 않으셨나요?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완벽한 모습을 한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정직할 수밖에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궁극에는 가 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설사 한없이 불완전하고 불안해 보인다고 해도요. 사랑은 ‘이성’이나 ‘합리’의 영역에 있는 감정이 아니거든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 그래서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수진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준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투명하고 맑은 사람은 말없이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거든요. 또한 소설의 에필로그는 ‘그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제가 쓰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해서도 수진의 선택은 ‘그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주인공 ‘수진’ 역시 유년기의 결핍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죠. 누구나 사람은 결핍이 있을 텐데요, 어떻게 마주해야 ‘어른’이 되는 걸까요? 

예민한 사춘기에 찾아온 급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나 아빠의 냉담함은 수진을 표현에 서툰 사람으로 만든 감이 있습니다.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질문을 속으로 삼키고,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 습관이 되어 어른이 되어버렸죠. 스스로의 생활을 잘 통제하고 자립된 어른으로 컸지만 마음속에는 응석 부리지 못한 쓸쓸한 어린아이가 여전히 남아 있지요.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다 내보이며 성큼 다가서는 한솔로 인해 많이 흔들렸을 거예요. 

사실 대개의 어른들은 성장기에 부모로부터 저마다의 크고 작은 상처를 받게 되는데요, 그 결핍을 이제 와서 부모를 통해 채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오히려 떨쳐낼 것은 과감히 떨쳐내고 자신을 보호해온 껍질을 자발적으로 깨고 나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경험의 누적들로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누그러뜨릴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결핍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살살 달래가면서 같이 데리고 살아나가야죠. 그런 상처나 결핍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이해하고 그에 너그러울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게 아닐까요?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초고를 수정하는 도중 코로나19가 퍼졌고,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쓰는 것에 잠깐 회의하기도 하셨다고요. 힘든 시기에,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사랑 이야기’를 읽고 듣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코로나19는 안전과 생사 등 워낙 국가 단위의 큰 문제가 삶의 중심에 놓이다 보니, ‘생명’의 문제에 대비해 ‘감정’의 영역인 사랑을 논하는 것이 조금 사치스럽지 않나, 너무 태평하지 않나, 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실생활에 반영된 모습은 무척 구체적으로 잔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를 떼어놓고,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칠 수 있다는 잔인한 가능성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외로움이 마음을 잠식해버릴 것만 같은 이럴 때에, 온 마음을 다하는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불신과 미움, 갈등이 일어나기 쉬운 이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어요. 두려움 없이 다가서고, 상처를 기꺼이 온몸으로 떠안는 그런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투명한 사랑이 도리어 마음을 정화하고 온기를 보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집필 계획이 궁금합니다. 

그간 소설과 산문을 번갈아 내왔으니 다음 책은 산문이 될 텐데요, 아직은 확고하게 주제를 정하지 않고 연말까지 여러 가지 주제들을 탐색해볼 생각입니다. 산문을 건너뛰고 바로 단편소설을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임경선

글쓰는 여자.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거쳐 13년째 전업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일과 사랑, 인간관계와 삶의 태도에 대해 쓰는 것을 좋아한다.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인생 상담을 하기도 했다. 

소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나의 남자』, 『기억해줘』, 『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공저), 『다정한 구원』, 『태도에 관하여』, 『자유로울 것』, 『나라는 여자』, 『엄마와 연애할 때』,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하는 여성에게 들려주는 『월요일의 그녀에게』, 그리고 여행서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독립출판물 『임경선의 도쿄』를 비롯해서 다수의 책을 냈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임경선의 개인주의 인생상담’ 시즌2를 진행하고 있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
가만히 부르는 이름
임경선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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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연 “다시 돌아온 소감? 독자에게 사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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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연 시인이 새 시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SNS에 전해지자, 그를 아는 독자들은 순식간에 1990년대를 소환했다.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의 사랑이 떠오른다”거나, “매일 시집을 품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는 풋풋한 추억들. 2002년 펴낸 『안녕』을 마지막으로 독자들을 떠난 그는 영화감독으로, 작사가로, 드라마 작가로 지평을 넓혔지만 대중은 여전히 원태연을 애틋한 사랑 시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18년 만에 시집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로 독자들을 찾아와 “미안하다”고 말하는 원태연 시인을 만났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말 보고 싶었어 그래서 다 너로 보였어”라고 쓰는 시처럼, 무엇 하나 돌려 말하지 않는 표면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독자들에게 진짜 미안하다

오랜만에 시집으로 돌아왔다. 소감이 어떤가. 

18년 만에 낸 책인 줄도 몰랐다. 성공해서 멋지게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돌아온 탕아다. (웃음)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너무 공사다망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직장 생활을 10여 년 하다가 잘렸다. 그 사이에 제작하던 드라마는 까였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한동안 힘들었지. ‘신이 나에게 왜 이러나?’ 싶었다. 나는 해보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산 편인데, 첫 번째 꿈이었던 드라마 작가는 30년을 매달려도 이루어지지 않더라. 마지막 미련이라도 거두려고, 이번에는 모든 걸 다 쏟아부었다. 그런데 어그러지니까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이제 그쪽으로는 볼일도 안 볼 거다. (웃음)

시인보다 더 앞선 꿈이 드라마 작가였나. 

시인은 나에게 꿈이 아니었다. 시 쓰는 건 습관 같은 거였지. 

아이러니하게도 꿈을 포기하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지 않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일단 내가 더 이상 드라마를 안 했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그 부분에 재능이 없다는 걸 완전히 인정했다. 회사도 나오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그동안 잡초가 너무 안락한 곳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자꾸 야생성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내가 과대포장되어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출간 소식이 전해지니 “옛날 생각난다”며 반가워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독자들에게는 진짜 미안하다. 그분들 덕분에 내가 있다는 걸 몰랐다. 내가 잘나서 잘 된 줄 알았지. 살면서 우울증에 걸릴 줄 몰랐는데, 마지막 끈이었던 드라마 제작마저 취소되고 나니 침대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넌지시 인사를 드리고 싶다. 다시 한번 책을 읽어주신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쓰겠다고. 

지금은 어떤가. 마음이 괜찮아졌나?

HAPPY한 상태다. (웃음) 7~8개월을 아무것도 안 하며 흘려보냈는데, 책 덕분에 무언가를 하게 되니 좋더라. 

시집 출간은 어떻게 진행된 건가. 

드라마 제작이 취소되기 2주 전쯤, 출판사 대표님께 연락이 왔다. 같이 필사 시집을 내고 싶다고. 당시에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는데, 이후 드라마 제작이 불발됐다. 한동안 방황을 하다가 3개월쯤 뒤에 내가 먼저 출판사 사장님께 전화를 드려서 한 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어떤 마음으로 출간하겠다는 결심을 했나. 

말로 표현이 안 된다. 그런데 하기로 한 다음부터는 재밌었다. 기존에 썼던 시 70편에 새로운 시 30편을 더해서 총 100편의 시로 책을 내기로 했는데, 그동안 써 둔 시가 하나도 없다고 하니 출판사에서는 거짓말인 줄 알더라. 정말 20년 동안 한 편도 안 썼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쓰려고 하니 공포가 찾아왔다. 작사하고, 시나리오 쓰는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문체가 바뀐 데다가, 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을 순간에 포착해서 써야 하는데 내가 나를 못 믿겠더라. 겨우겨우 다섯 편의 시를 써서 조심스럽게 보냈더니 출판사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겠는데요.” 그게 정말 힘이 됐다. 처음 보낸 다섯 편 쓰는 데 두 달이 걸렸는데, 그 말 한마디 덕분에 한 달 안에 나머지 25편을 마저 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 있는 책이겠다. 

예전에는 누구를 만나면 명함처럼 내 책을 선물로 줬다. 이번 책은 한 권도 안 줄 생각이다. 다 사서 보라고 할 거다. (웃음)



오늘은 진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거든

과거에 쓴 시 70편을 다시 돌아보는 작업은 어땠나?

‘어떻게 이렇게 썼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신감 있게 쓴 시는 다르더라. 7살짜리 어린아이들도 “잘한다 잘한다” 라고 칭찬해야 계속 잘하지, 못 한다고 하면 기가 팍 죽는다. 옛날에 쓴 시들을 보면서 지금의 나는 기가 죽어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슬펐지. 

2002년 펴낸 『안녕』이 마지막 시집이었다. 당시 “책 내려고 시 쓰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에 앞으로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 결심을 뒤엎고 새로 시를 쓴 경험이 어땠나?

그 당시엔 내가 고갈됐는데, 글발은 남아 있어서 계속 시를 쓰고 있었다. 『안녕』은 오로지 글발로 쓴 거다. 그게 싫어서 시 쓰기를 관뒀는데, 지금은 반대다. 나는 차고 넘치는데 글발이 없어졌다. 감정은 차고 넘치고, 경험도 충분히 많지만 이걸 풀어낼 능력이 없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공포가 찾아온 거다. 영화와 드라마가 잘 안 된 건 “전문 영역이 아니었다”는 명분이 있다. 그런데 시집을 제대로 못 만들면 어쩌나. 이건 진짜 창피한 일이거든. 두려웠다. 

책에 실을 70편의 시는 어떤 기준으로 추렸나?

온전히 출판사의 뜻에 맡겼다. 첫 시집을 냈을 때는 출판사가 영세해서 편집자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다 만들었다. 그게 몸에 배서 시집을 낼 때마다 편집에 관여를 많이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출판사가 하자는 대로 다 했다. 편집자가 워낙 꼼꼼해서 나보다 훨씬 더 낫기도 했고. (웃음) 점 하나까지 어디에 찍을지 고민하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완성된 책을 보고 어땠나?

좋았다. 무엇보다 출판사 대표님의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웃음) 보통 책 제목은 작가의 의견이 대부분 반영되는데, 이번에는 제목까지도 출판사 의견에 따랐다. ‘내가 이렇게도 책을 내는구나’ 싶었지. 담당 편집자의 센스도 좋아서 책이 잘 나온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경주마 같아서 내 마음대로 하거나, 누가 시키는 대로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번 시집을 만들면서 깨달음이 많았던 것 같다. (웃음) 

아내가 나보고 그만 좀 깨달으라고 한다. (웃음) 이번 작업은 진심으로 재밌었다. 옛날엔 뭘 안다고 그렇게 시를 썼는지 모르겠다. 깨닫지도 못했는데. 

각 파트의 맨 마지막 장에는 직접 시를 필사해서 넣었다. 

필사하는 게 새로 쓰는 것보다 어려웠다. 글씨를 워낙 갈겨쓰는 편이라, 나도 내 글씨를 잘 못 알아본다. 처음에 필사한 것을 출판사에 보냈더니 이건 안 된다고 했다. 계속 다시 쓰다가 마음처럼 안 되니 나중에는 막 성질이 났다. (웃음) 4편의 시를 필사하는데 A4용지 한 묶음을 반 이상 썼다.

새로 쓴 30편의 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무엇인가?

‘그림자의 하루’다. 그거 쓰다가 울었다. 꼭 나 같아서… 지난 10년 동안 내가 그러고 살았던 거다. 신경질 나도 “감사합니다”하면서. 그렇게 안 살던 사람이 컨펌 받는 거에 익숙해지다 보니 힘들었던 것 같다. 익숙해지는 줄도 몰랐는데, 나중에는 혼자 결정을 못하겠더라.

그림자의 하루

오늘 뭐 했어?

나, 난 뭐

엄마한테 전화 안 한 거 빼고

어제랑 똑같았지 뭐 

오늘은 진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럼에도 계속 회사를 다녔던 이유가 있나. 

월급 주고, 그럴듯해 보이니까.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은 항상 했다. 그래서 회사 잘리고 3초간 기뻤다. 지금은 후회하지만. (웃음)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시를 쓸 땐 스치는 영감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스치는 순간은 언제 오나. 

‘생각이 나는 것’과 ‘생각을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온종일 쓰고자 하는 내용만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스치는 거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나. 그 찰나에 소원을 빌었다는 건 평소에도 그 생각만 했다는 증거다. 이걸 염원이라고 한다. 시 쓰는 것도 비슷하다. 아이디어는 떠올리는 게 아니다. 그러면 말라죽는다. 첫 책 내고 난 뒤, 잠깐 카피라이터로 일한 적이 있는데 카피 하나 쓰고 그만뒀다. 계속 생각을 해서 써야 하니까. 장사꾼처럼 이야기하면 타산이 안 맞고, 예술가처럼 이야기하면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면 그걸로 끝나야 하는데 또 계속 고치지 않나. 못하겠더라. 차라리 돈을 안 쓰고 말지. (웃음) 

주로 사랑에 대한 시를 많이 썼는데, 개인적인 취향인가?

멜로는 잘 안 본다. 영화도 킬러 영화나 아귀가 착착 맞는 스릴러를 좋아한다. 멜로는 <첨밀밀>만 좋아한다. 그건 30번도 더 봤다. 

그럼에도 사랑 시, 감성적인 시를 잘 쓸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대답하기에 굉장히 부끄러운 질문이다. (웃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원 작가는 안에 소녀가 있는데, 그걸 숨기려고 이렇게 상남자처럼 구는구나.”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작품 속에 쑥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이 있다. 들어갈 땐 좋은데, 나오면 ‘이걸 보내도 돼?’라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빨개진다. 예를 들면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쓸 때도 ‘내가 미쳤구나’ 싶었다. 마치 여고생이 된 듯 “제발 이러지 말아요. 끝이라는 얘기~”라고 노래하지 않나. 내 작품을 볼 때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걸 인정한다. (웃음) 

이런 질문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뭐든지 물어봐도 된다. 

직접 쓴 것 중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절대 못 보겠다’ 싶은 시가 있나. (웃음)

노코멘트하겠다. 그 시들에게 미안해서 안 된다. 모두 다 사랑해야지.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이런 거 진짜 오그라든다. (웃음) 

그런 시와 노래들이 수많은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캐치하는 감각은 어떻게 얻나. 

하늘에 감사해야지. 옛날에는 시건방져서 내가 잘한 줄 알았는데 진짜 하늘에 감사해야 한다. 

인터뷰 내내 “옛날에는 시건방졌었다”는 말을 많이 했다. 대체 어땠기에? 

이거 말하면 재수 없을 것 같은데, 하… 담배 한 대만 피고 와도 되나? (웃음) 1998년도에 펴낸 『사용설명서』라는 시집의 인사말에서 시건방짐의 끝을 볼 수 있다. “나는 오른손으로 시를 쓴다.” (좌중 웃음)

그때의 자신을 돌아보면 어떤가. 

아휴, 죽여버리고 싶지. (웃음) 

20대 초반, 시집을 내고 싶어서 무작정 출판사를 찾아갔던 걸로 안다. 당시 시에 꽂혔던 이유가 무엇인가. 

신춘문예에 시를 계속 냈는데,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출판사를 찾아갔다. 나는 재미가 없으면 뭘 못 하는 사람인데, 그땐 시 쓰는 게 제일 재밌었다. 옛날 TV 프로그램 중에 <호기심 천국>이라는 방송이 있었다. 거기서 대형 공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공을 굴려 한강을 건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시를 쓰는 게 꼭 그런 기분이었다. 진공상태인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땐 나와 세상뿐이었다. 얼마나 좋았냐면 노트를 머리맡에 두고 자다가 눈 뜨면 시를 썼다. 그게 계속될 줄 알았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시집을 내기 위해 또다시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고 다닐 것 같나.

계약을 똑바로 하겠지. (웃음) 당시에 내 별명이 출판 재벌이었다. 돈은 더럽게 못 벌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독자의 이야기가 있나. 

나는 팬들과 소통을 잘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 한 독자와 나눈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 연락하는 독자가 있는데, 이번 책 출간을 앞두고 통화를 했다. 기존 시 70편에 신작 시 30편을 묶어서 한 권의 책을 만들게 되었다고, 옛날 같으면 비겁해서 이런 방식으로 책을 내는 건 절대 안 했을 거라며 걱정스러운 속내를 비쳤다. 그러자 그분이 “기존 시 100편에 인사말만 새로 써도 좋아하는 게 팬인데, 30편을 새로 썼으니 얼마나 고맙냐”는 말을 들려줬다. 덕분에 용기가 났고, 독자들에게 더 미안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한 출판사 대표님께 선물 받은 노트북으로 이 책에 실린 시를 썼다. 그 출판사에서 조만간 에세이집이 나올 것 같다. 가제는 ‘하드코어 반성문, 다음 주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지었다. (웃음) 나는 진짜 게으르다. 해야 할 일을 미룰 수 있는 순간까지 미루는 스타일이다. 

시도 계속 쓸 예정인가. 

이번 책 잘 되면, 한참 있다가… 아니다. 진짜 열심히 쓸 거다. (웃음)

앞서 “하늘에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다. 스스로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나. 

‘럭키 가이’지. 특히 우리 부모님 아들로 태어난 게 행운의 시작이다. 내가 공부를 못해도, 엉뚱한 짓을 해도 아무 말씀 안 하셨다.

오랜 시간 원태연을 기억하고, 기다려 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혹시 이 책에 실린 30편의 시가 과거에 알았던 원태연의 시와 비슷했다면,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돌아가고 싶다. 허허벌판에 팬티만 입고 선 기분이 들 때 ‘독자들이 나를 기다려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못돼 먹은 남자다. 

나쁜 남자? (웃음)

나쁜 남자는 너무 멋있지 않나. 그냥 못돼 먹은 거다. 정말 죄송하고, 기다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내가 글은 말랑말랑하게 쓸 수 있는데 말은 투박하게 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기다려 준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사로 썼다. 가수 류동현이 부른 <One Day(어느 날)>이라는 노래다. 이번 시집을 내는 인사말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원태연

원태연의 인터넷 닉네임은 ‘원시인’이다. 그의 성 ‘원’에 시인을 부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석시시대 ‘원시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자든 후자든 원태연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내는 시집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시인이기도 하고 또 그의 시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지닌 채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표현으로, 그리고 언젠가 내가 겪은 일인 양 다가오기 때문이다. 마치 실연을 하고 난 뒤 모든 사랑 노래의 가사가 구구절절이 내 마음을 파고들 듯이 말이다.

지은 책으로 『사용설명서』,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도』, 『원태연 알레르기』, 『안녕』 등이 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원태연 저 | 배정애 캘리그라피 | 히조 삽화
북로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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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얀 “돈을 아끼고 좋아해야 돈도 나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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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적게 벌어 적게 써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20-30대를 보내던 김얀은 2019년 여름, 작은 빌라를 마련하기 위해 대출을 알아보던 중 마주한 ‘연소득 480만원’이라는 숫자에 큰 충격을 받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돈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생활 습관을 바꾸고, 경제신문을 읽으며 주식 공부를 하고, 일주일에 최소 2-3권의 책을 읽었다. 직장도 열심히 다녔다. 그 결과 김얀은 이제 더 이상 카드값을 고민하지 않고, 돈 걱정을 하던 시간에 글쓰기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침형 인간이 되었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불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도. 『오늘부터 돈독하게』는 연소득 480만원의 가난한 프리랜서가 이른바 ‘돈 붙는 체질’로 완전히 변화하는 과정을 담은 책으로 저자 김얀이 어떻게 연소득 480만원을 월소득으로 바꾸게 됐는지, 돈과의 관계를 어떻게 돈독하게 만들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가이드북이다. ‘대문호’를 꿈꾸던 사람이 ‘대부호’로 꿈을 조정하고, 더 이상 돈에 끌려가지 않는 삶을 만들어낸 과정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변화를 꿈꾸게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김얀은 이제 ‘45살까지 10억을 모으자’라는 처음의 목표에 집중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지금, “조금 낮은 산을 오르더라도 지금부터 사람들과 같이 재미있게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마흔이 되는데요. 솔직히 친구들 중에 제가 제일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저만큼 여유롭게 사는 사람도 없어요. 친구들과 재미있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지내잖아요. 너무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생각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존리 대표가 ‘사람들은 부자가 아닌데 부자처럼 보이려고 한다’는 말을 했거든요. 남한테 시선을 두기 보다 스스로에게 집중하길 바라요. 돈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이에요.”



돈 공부가 좋았다

“인생의 3분의 1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으니 이만하면 됐다”(248쪽)라는 대목이 있어요. ‘대부호’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돈 공부를 시작했을 때 작가님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직접 듣고 싶었어요. 

글 쓰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적게 벌어서 적게 쓰면 된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만족하다 보니 돈에 관해서는 아예 생각을 못하고 살았어요. 마침 살던 곳의 전세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고, 대출을 받아서라도 조그마한 집을 사려고 했는데 은행에서 현실을 마주한 거죠. 나의 연소득을 증명하는 서류에 찍혀 있는 숫자를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이게 지금 내 상태구나, 싶더라고요. 은행 창구에서는 제가 어떤 작업을 해왔고,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필요가 없잖아요. 딱 종이 한 장에 있는 숫자로만 얘기를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게 큰 각성의 계기가 됐어요. 곧 나이 마흔이고, 부모님도 머지 않아 일을 못 하게 되실 거고, 그렇다고 노후가 준비된 것도 아닌데 두 분 중 누구라도 아프시면 또는 내가 아프면 어떻게 될까 싶어 아득했어요. 당시 내 상황을 딱 얘기해주는 그 서류의 숫자에 결심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월소득도 아닌 연소득 480만원이었으니까요.(웃음) 

결심을 하고 막상 돈 공부를 시작하자, 재미있었다고요?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고요. 주식의 경우, 주변에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호기심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일단 돈이 없으니까 제대로 할 수도 없었고, 돈을 모으는 방법도 몰랐죠. 그러다 공부를 시작했는데 돈의 세계가 너무 크고 깊더라고요. 그전까지는 도서관에서 재테크 관련 분야 쪽으로는 가본 적도 없거든요. 오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안에도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가 들어 있고, 배울 게 아주 많다는 걸 알았어요. 사소한 것까지 다 돈과 연결되어 있고, 무수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재미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부동산 분야만 해도 아주 다양하거든요. 당연히 아파트, 주택청약을 떠올리는데 반지하 주택만 경매로 사서 투자하는 사람도 있고요. 또 퇴근하고 부동산에 와서 공부하고, 정보도 얻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이런 제가 몰랐던 세계, 몰랐던 이야기, 몰랐던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돼서 돈공부가 좋았어요. 지금도 너무 재미있고요. 

돈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준다”(7쪽)고 했죠. 여기에 먼저 공감해야 돈 공부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1년 조금 넘게 돈 공부를 했는데요. 작은 빌라지만 내 집을 마련했어요. 일단 주거가 안정이 된 거고요. 언제든 작업할 수 있는 저만의 공간도 생겼거든요. 지금은 돈 걱정을 하지 않아요. 돈이 어떻게 흐르는지 이제는 조금 알았다고 생각하고요. 돈 걱정을 하지 않으니까 돈 걱정을 하던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많이 할 수 있더라고요. 저는 지금 ‘퍼시몬’이라는 회사를 창업해서 예술인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돈과 예술을 융합하려는 시도들을 매주 하고 있는데요. 옛날이라면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만큼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고 할 수 있어요. 경제적인 여유가 곧 마음의 여유가 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돈’이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하는데요. 이 말이 비유가 아니네요. 꿈을 위해서 돈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돈을 잘 관리해두면 돈과 꿈이 함께 갈 수도 있다는 거죠. 

예술인들이 너무 돈을 밝히면 안 된다, 그러면 예술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하는데요. 지금껏 돈을 많이 벌어본 예술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닌가 생각해요.(웃음) 제 경우 지금 돈과 여유가 있다 보니 다른 예술가를 챙기는 입장이 됐고요. 이들과 함께 창의적인 것을 해보자고 얘기해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요.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남기느냐

우선 얘기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 싶든지 직장을 다니면서 충분히 준비하라는 조언이에요. 매달 200만원의 고정수입을 부동산 수익률로 따지면 4억 상가건물을 가지고 있는 정도라고도 설명했고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는 월급처럼 일정하게, 꾸준히 들어오는 돈의 힘이 정말 커요. 액수는 상관 없어요. 게다가 4대 보험, 대출 등을 따진다면 직장에서 월급 200만원을 버는 게 진짜 적은 게 아니에요. 월급이 500만원이라도 없는 건 비슷하거든요. 그 정도면 일단 주변이 다르기 때문에 소비 규모가 커지죠. 결국 중요한 건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를 남기느냐예요. 제가 연애 칼럼을 썼었는데 연애는 공식이 안 먹혀요. 사람이 다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돈은 공식이 있어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것만 따르면 중산층까지는 갈 수 있거든요. 우선 제 책의 차례를 꼼꼼히 보시면 되고요.(웃음) 저도 그보다 더 부자가 되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요. 욕심 부리지 않고 책에 나온 공식만 따라 가도 인생이 전보다 훨씬 평탄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똥을 싸도 돈을 주는 직장. 세상에 이렇게 친절한 곳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정녕 이 바닥을 벗어나야겠다 싶으면, 먼저 확실한 목표를 세우자.(중략) 퇴근하면 호프집 대신 부동산에 들르자. 오늘 야식은 뭘 먹을까 고민하는 대신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사이드잡’이나 ‘파이프라인’을 검색해 관심이 생기는 분야를 찾자.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월급 200만 원을 모조리 저축하는 기술을 연마하자.(37-38쪽)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멘탈 관리의 중요성도 설파하는데요. 부자들의 생활 태도나 인생 철학을 보면서도 공부가 많이 됐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작가님은 수단으로써의 돈이 아니라 전반적인 생활 태도에 관해 말씀하려고 한 것 같기도 했어요.

맞아요, 저는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고, 부모님도 부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부자가 될까요? 지금 내가 가난하니까 그동안 살아온 것과 정반대로 살아보자, 싶었어요. 여태껏 살아온 방식을 다 바꿔보면 되지 않을까 하고요. 실제로 어떤 부자에 관한 책을 보더라도 다들 그때의 저와는 거리가 먼 생활 방식을 갖고 있었어요. 아침형 인간에 매 순간 열심히 사는 분들이고요. 또 모두 미래지향적이더라고요. 저는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살았는데 말이죠.(웃음) 그래서 좀 더 내 앞날이나 미래에 관해 생각해보게 된 것도 부자들에게서 배운 좋은 삶의 방식인 것 같아요. 멘탈 관리만 된다면 진짜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요. 누구나 1년만 돈 공부를 하면 작가님처럼 될 수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조금 힘들 거예요. 저는 원래 뭐든지 어중간하게 하지 않는 편이에요. 노는 것까지도요.(웃음) 언젠가 집에서 일을 하다가 자려고 눕는데 ‘이러다 부자가 되기도 전에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어요. 방은 모두 에어비앤비로 주고 저는 거실 한쪽에 칸막이를 두고 지낼 때였거든요. 한창 브런치에 글을 쓸 때는 거의 출근 2시간 전에 카페나 직장에 가서 썼고요. 새벽형 인간은 도저히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돈이 그렇게 사람을 바꾼 거죠. 거기에 주식 공부도 하고, 책까지 읽으면서 지내는 게 쉽진 않았어요. 게다가 그런 생활을 1년 동안 유지하는 건 아무나 못할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미쳤었다는 생각도 해요. 

사실 책에도 밝히긴 했어요. 작가님의 방식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요. 

습관을 다 바꿔야 하는데 그게 어렵죠. 사람들이 “주식 어떻게 해요?”, “어떻게 부자가 돼요?”라고 묻는데요. 저는 일단 아침에 일어나 팔굽혀펴기를 하나씩 해보라고 말하거든요. 매일 개수를 조금씩 늘려가라고 해요. 뭐든 66일 정도를 꾸준히 하면 그게 습관이 된다고 하는데요. 최소한 2주만이라도 어떤 것을 해보면 어떨까요. 그런 습관부터 조정을 해야죠. 제일 쉬운 것은 아침에 물 한 잔 마시는 거예요. 

아침에 물 한 잔 마시기, 팔굽혀펴기 같은 습관이 돈을 모으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 걸까요? 책에서 ‘작은 성취감’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요. 

이런 습관을 만들어나가는 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일 같아요. 또 절제력인데요. 지금 당장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는 법은 아주 간단해요. 소비를 줄이고, 소득을 키우면 돼요. 그런데 당장 소득을 키우기는 힘들거든요.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죠. 우리가 만원을 번다고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만원을 안 쓰는 거예요. 만원 쓰기 얼마나 쉬워요? 스트레스 받으면 쓰게 되고, 그냥 습관처럼도 쓰게 되는데요. 그걸 참아야 해요. 예를 들면 직장에서 다같이 커피 마시러 갈 때 안 가겠다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데 이렇게 마음 먹기 위해서는 작은 성취감부터 키워나가는 게 필요해요. 

그리고 그런 꾸준한 실천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사실 다들 알죠.(웃음) 

어려워요. 제 경우 집에는 정수기가 있고, 작업실에는 정수기가 없는데요. 편의점에서 2리터짜리 물 한 통이 1,400원이잖아요. 어떤 건 1,800원이고요. 그러니까 저는 집에서 물을 떠다가 작업실까지 가져 가요. 지인들이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지만요.(웃음) 물 두 통만 산다고 해도 3,600원이면 김밥을 한 줄 사먹을 수 있거든요. 그런 소소한 것부터 스스로가 통제를 해야 해요. 

“이렇게 한 푼 두 푼 잔돈을 아끼는 것은 나중에 큰돈이 들어올 때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85쪽)고 했어요. 

뭔가를 이루는 것은 사실 쉬워요. 다이어트를 생각해보세요. 3개월 다이어트는 성공할 수 있어요. 그렇게 성공한 다이어트가 평생 가야 하는데 자칫 놓치면 요요가 오잖아요. 담배를 1년 끊었다고 해도 어느 순간 다시 피워버리면 원위치거든요. 유지가 정말 어려운데요.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 놓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 진짜 부자는 소수잖아요.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사실 그런 큰 부자가 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작은 부자로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고, 너무 큰 것을 쫓으려 하지 말고 이 안에서 만족하되 돈과 나의 관계는 돈독하게 해야 한다는 거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돈에 끌려 가고, 휘둘리지 말자는 거니까요. 돈을 아끼고 좋아해야 돈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부자’가 아닌 ‘대부호’

작가님의 목표가 45살까지 금융자산 10억 모으기라고 했잖아요. 사실 어떻게 모을 것인가 만큼이나 모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도 중요한데요. 대부호가 된 후 하고 싶은 것은 뭔가요? 

처음 돈 공부를 시작할 때 다들 목표를 확실하게 잡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45살까지 10억을 모으겠다고 다짐하고 공부를 시작한 건데요. 그때는 정말 불가능해 보였지만 지금은 이대로 하면 목표를 이룰 수는 있을 것 같아요. 1억이 2억이 될 때와 3억이 4억이 될 때 속도가 달라지거든요. 그런데요. 10억이 내게 있다면 또 내 주변에는 20억, 30억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겠죠.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또 열심히 하면 돈은 벌어질 거고요. 문득 액수가 뭐 중요할까, 싶어졌어요. 저의 부자 멘토님이 계신데요. 행복이 뭔지 물었더니 결국에는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큰 기쁨이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아주 부자가 된 사람들의 책을 읽어봐도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생각했어요. 나는 조금 낮은 산을 오르더라도 지금부터 사람들과 같이 재미있게 가면 좋겠다고요. 

‘퍼시몬’을 창업한 데서 그런 의도가 보이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번다고 해봤자 빌 게이츠처럼 될 순 없잖아요. 10억, 20억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결국에는 내가 쌓아온 작은 지식들을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회사를 만들었어요. 다만 아직도 사업 철학은 구상 중이에요. 방향성만 잡은 상태예요. 

돈이 어느 정도 모이는 것을 보면서 더 모으고 싶다는 욕심은 안 들던가요? 

지금 너무 만족해요. 솔직히 말해 집에 들어간 돈이 있고, 사무실도 있지만 현금으로는 1억이 없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목표한 것을 이미 다 가진 느낌이에요. 부자의 기준을 조금 낮추면 훨씬 편해요. 사람들은 자꾸 서울 안에 있는, 한강변의 아파트를 생각하잖아요.(웃음) 그러면 부자와 계속 멀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내 집이 있고, 함께 재미있게 지내는 친구들이 있고, 나의 사무실이 있고, 적절히 돈의 흐름을 알았기 때문에 부족하게 느끼지 않아요. 굉장히 만족하죠. 제 목표가 원래 ‘부자’가 아닌 ‘대부호’잖아요. 대부호는 사실 자산만 많아선 안 되는 거예요. 권세가 따라와야죠.(웃음) 세력이 필요한 거고요. 우리만의 방식을 만들어서 즐겁게 사는 게 제 목표예요. 




*김얀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게 빨랐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치기공과를 나왔지만 글을 쓰는 게 좋아 작가로 전업했다가, 정기적인 소득의 중요함을 깨닫고 다시 치과에서 서비스 코디네이터로 성실하게 근무 중이다. 에세이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 『바다의 얼굴 사랑의 얼굴』을 썼다. 2020년 7월 30일, 예술가들을 위한 콘텐츠기업 퍼시몬을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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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돈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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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브이로그를 왜 보지? 에서 출발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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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41도의 혹한기가 찾아온 미래. 춥고 척박한 바깥세상과 달리 따뜻하고 쾌적한 ‘스노볼’은 ‘액터’들에게만 허락된 세계다. ‘액터’들은 자기 삶을 24시간 카메라에 노출하는 대신 스노볼에 사는 특권을 누리고, 바깥세상 사람들은 스노볼 액터들의 삶을 소비하기 위해 쳇바퀴를 굴리며 전기세를 번다. 어느 날, 바깥세상의 인력 발전소 노동자로 살아가는 ‘전초밤’에게 동갑내기 스노볼 액터 ‘고해리’로 살 기회가 찾아오고, 스노볼에 입성해 고해리로 살던 전초밤은 스노볼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발견하고 가려진 사실과 마주한다. 

제1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대상 수상작 『스노볼』은 ‘바깥세상’과 ‘스노볼’로 이분화된 미래 사회에 사는 열여섯 살 전초밤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출간 한 달 전부터 카카오페이지에서 사전 연재해 10만 명 가까운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독자들은 이 시대의 특징이 반영된 배경과 인물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기자, 웹 소설 작가를 거쳐 수상과 함께 단행본 작가로 첫걸음을 내디딘 소설가 박소영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내 인생의 편집권이 타인에게 있다면

처음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요? 

출판사 전화 받고 가장 먼저 한 말이 “혹시 지금 꿈인가요”? 였어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정말 예상 못 했거든요. 발표일에 연락받았는데 당연히 그 전에 수상자한테 연락이 갔을 거로 생각했어요. 엄마한테 전화해서 처음 한 말도 “엄마 나 상 받았어”가 아니라 “엄마 지금 이거 꿈 아니지?”였어요. 

전체 원고의 1/3만 제출하셨다고요.

출판사에서 공모할 때부터 미완성 원고도 가능하다고 해서 1/3만 써서 제출했어요. 제출하고 두 달 동안 나머지 내용을 하나도 안 쓰고 있었거든요. (웃음) 정말 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 못 했으니까요. 그래서 수상했다는 연락받고 그때부터 스토리 다시 한번 보고, 수정해 가면서 뒷부분을 썼어요. 

수상 소식을 듣고 이어서 쓰려면 몸에 힘이 실릴 것 같아요. 부담도 되고요. 

전체의 1/3만 보고 대상을 주셨는데 읽는 분들이 뒤로 갈수록 ‘처음에 기대했던 그 느낌이 아닌데?’ 하면 어떡하나 하는 부담이 있었죠. 다행히 공모전에 원고 낼 때 결말까지 시놉시스를 써서 내야 했으니까 처음에 정한 스토리대로 일단 썼어요. 어차피 초고는 수정할 수도 있으니까 마무리하자는 생각으로 썼죠. 

기자로 일하셨다고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됐나요?

기자로 일한 건 아주 잠깐이고요. 중학교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어요. 기자 준비를 오래 해서 원래 내 꿈이 소설가가 아니라 기자였나 싶을 때도 있었는데요. 막상 기자가 됐을 때 기뻤지만, 일하면서 내 적성과는 맞지 않는다는 걸 빨리 깨달았어요. 선배들처럼 열심히 할 게 아니라면 빨리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었고, 그때서야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어차피 이렇게 열심히 취재할 거면 열심히 글을 쓰자. 그러면 뭐가 돼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틀렸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빨리 뭐가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웃음) 

왜 소설가가 되고 싶었나요?

너무 많이 말해서 친구들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중학교 때 『해리포터』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들어간다는 기쁨이 컸고, 호그와트라는 세계관이 매력적이었고요. 그때부터 사람들이 상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고요.  

수상 소식을 들은 친구들 반응은 어때요?

처음에 상 받았다고 할 때는 무덤덤하게 축하해줬는데 전민희 작가님이 추천사를 써 주셨다고 하니까 그때는 깜짝 놀라더라고요. 어떻게 전민희 작가님이 추천사를 써줄 수 있냐면서요. 저도 정말 좋았고, 수상 소식을 두 번 듣는 느낌이었어요. 

‘스노볼’이라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스노볼』의 스토리를 구상할 때 즈음에 브이로그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걸 왜 보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안 봤는데 계속 보니까 재미있었어요. 계속 관심 있게 지켜보다가 이런 상황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요. 디스토피아적으로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는 게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건가요? 

지금은 유튜버 본인이 편집권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 편집권이 타인에게 있고, 내가 찍힌 결과물을 타인이 가공해서 사용한다면 많은 사실이 왜곡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요즘 브이로그나 유튜버들이 선망의 직업이 됐잖아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방송을 만들고 출연하는 일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 되는 세상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요. 자기 인생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사람만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세상을요. 그런데 온 세상에 카메라를 설치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어딘가에 모여 살겠지 싶었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제한된 공간을 생각하다 스노볼이 나왔어요. 그리고 스노볼에 사는 사람들이 탈주하지 않고 굳이 그 안에서 사는 원동력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스노볼 밖의 세계는 평균 영하 41도에 육박하는 추운 세상이라는 설정을 나중에 붙였고요.

 


너무 정의롭고 도덕적인 주인공은 싫어요 

카카오페이지에 연재하기도 했죠. 독자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 수 있는데 혹시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나요?

재밌다고 해주시는 게 가장 좋았고요. 카카오페이지에는 한 편씩 올라가니까 감상도 분절돼서 올라오잖아요. 그래서 책 전체에 대한 소감을 확인할 수 없어서 아쉬웠거든요. 나중에 책이 나오고 나서 전체 리뷰를 볼 수 있었는데 아주 긴장하면서 봤어요. 어떤 분이 경쾌한 소설이라고 써주셨는데 경쾌하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왜냐면 스노볼의 세계관이 경쾌하지는 않잖아요. 영하 41도의 추운 날이 계속되고 안팎으로 삶이 힘들고 사건도 무겁고 진지하고요. 그런데도 사람이 항상 힘들기만 한 건 아니고, 웃을 일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걸 알아봐 주신 것 같아요. 

‘전초밤’이라는 인물 자체에도 경쾌한 느낌이 있어요.   

다행이에요. 초밤이가 마음에 든다는 소감도 좋았어요. 저를 칭찬하는 리뷰도 좋지만, 캐릭터가 칭찬받을 때 더 좋더라고요. 내가 이 캐릭터한테 느낀 애정을 독자분들도 느끼는구나 싶어서요. 

‘작가의 말’에서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어요.

소설 속 사건이 큰 들을 따라서 미리 정해 놓은 대로 따라가는 거라면 인물들은 쓰면서 완성되는 것 같아요. 원래 조미류도 한 번 나오고 그 뒤로는 안 나올 캐릭터였거든요. ‘차향’과 ‘조미류’가 애틋한 관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캐릭터들이 알아서 자기의 역할을 찾아가는 느낌이에요. ‘작가의 말’에 캐릭터 이야기를 많이 쓴 것도 그래서예요. 캐릭터들한테 고마운 마음이 커요. 

혹시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이 있나요? 

생각해 본 적 있는데요. 일단 주인공 초밤이는 아니에요. 초밤이 눈으로 본 세계를 이야기한 게 스노볼이니까 왠지 “초밤이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건 “저는 박소영이 좋아요”라고 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초밤이는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배새린’이나 ‘차설’이 좋아요. 

악역이라면 악역일 수 있는 인물이잖아요. 의외예요. 

궁금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돼졌을까, 어떻게 이렇게 틀어졌을까 싶어요. 아무래도 제가 더 깊게 볼 수 없었던 캐릭터들이 더 궁금하고, 그래서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아요. 

다른 인물의 외전도 재미있었어요. 어떻게 쓰게 됐나요? 

처음부터 외전을 계획한 건 아니고요. 편집부에서 궁금해하기도 했고, 다른 인물들 이야기가 줄거리에 들어가면 주요 서사를 해칠 것 같고, 완전히 빼자니 아쉽더라고요. 편집부와 어떤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외전을 떠올렸죠. 예전에 유행한 인터넷 소설에 외전이 꼭 있었거든요. 팬 서비스처럼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즐겁게 썼어요. 초밤이의 시점으로만 쓰다가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쓰니까 색다르고 재밌더라고요. 

주인공 전초밤의 모델이 있었나요?

모델은 없었지만, 정의로운 캐릭터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영어덜트 장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대체로 지나치게 도덕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불의에 가장 먼저 맞서고, 그러다 리더가 되는 식으로요. 그래서 저는 조금은 비도덕적인 사람이면서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스노볼의 액터 ‘고해리’의 삶을 욕망하는 ‘전초밤’이 탄생한 거네요. 

장르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사건에 휘말리잖아요. 그런데 초밤이는 스노볼에 가기로 스스로 결정해요. 물론 ‘차설’이 끌어들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본인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가요. 나중에 스노볼에 가서 고해리의 삶을 대체하게 됐을 때도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거나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빠르게 만족감을 느끼는 인물이고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고해리는 왜 죽었지?’, ‘나라면 안 죽었을 텐데’ 하면서요. 나중에는 ‘고해리는 무책임해’라고 하면서 합리화하기까지 하죠. 사실 이 정도도 『스노볼』이 영어덜트 소설이라 많이 정제한 거예요. 만약 초밤이가 성인이었다면 더 했을 거예요. 

작가님의 욕망이 느껴지는데요. 작가로서 더 복잡한 캐릭터를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요. (웃음)

만약에 주인공이 성인이었다면 ‘배새린’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을 것 같아요. 솔직히 초밤이도 올드한 느낌이 있어요. 평균보다 훨씬 정의롭잖아요. 그래서 약간 비인간적이다 싶기도 해요. (웃음) 



오래 살고 싶어지는 소설을 쓰고 싶다

제목은 처음부터 ‘스노볼’이었나요?

원고를 쓰고 나서 혼자 붙인 제목이 스노볼이었고요. 투고할 때는 달랐어요. 스노볼이라는 제목만 봐서는 심사위원들이 무슨 내용인지 모를 것 같고, 흥미를 끄는 제목도 아니어서 기획 의도에 있었던 말로 제목을 바꿨죠. 기획 의도에 21℃가 사람한테 가장 쾌적한 온도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해서 ‘21℃’라고 했어요. 수상 이후에 편집부에서 ‘21℃’는 환경 문제를 다루는 소설 같다고 해서 여러 후보를 두고 다시 논의하다가 결국 스노볼로 결정됐고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후기도 있었어요. 영화화된다면 주인공은 누가 하면 좋을까요?

생각만 해도 너무 좋은데요. 답이 정해져 있어요. 생각해 본 적 있거든요. (웃음) 특히 주인공 초밤이 역할을 해주셨으면 하는 배우가 있어요. 

이미 준비가 되셨네요. (웃음) 누군가요?

김유정 배우요. 실제로 초밤이와 비슷한 헤어 스타일을 하신 적도 있더라고요. 아역배우 출신이셔서 대중들이 김유정 배우의 어린 시절, 청소년기의 모습을 다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전초밤 역할에 찰떡일 것 같아요. 

‘고해리’라는 인물은 평범한 사람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요.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잖아요. 

예전에는 TV에 나오는 스타가 전부였다면 이제는 유튜브나 각종 SNS에서 유명해지는 분들이 많잖아요. 동경할 대상들이 너무 많은 거죠. 그래서 그런 대상을 응축한 ‘고해리’라는 존재를 만들었고, 선망의 대상인 사람의 삶을 대신해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이 왔을 때 이걸 거절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어요. 그리고 시작은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그게 행복으로 가는 게 아니라 막상 갔더니 온갖 일들을 다 겪으면서 오히려 고생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현실을 잘 반영했다는 평도 많더라고요. 이분화된 세상이나 미디어 권력에 대해서요.

대학교 때부터 10년 넘게 미디어에 관심을 두고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미디어 이야기를 하게 됐구나 싶어요. 미디어가 얼마나 쉽게 우리의 생각을 조작할 수 있고 대중을 속일 수 있는지를 오래전부터 배워왔고 지켜봤으니까 『스노볼』에서 자연스럽게 이본 미디어 그룹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소설 속에 나오는 이본 미디어 그룹을 보면 자연스럽게 현실 세계의 미디어를 생각하게 돼요.  

이본 그룹이 미디어를 이용해서 사람들한테 존경받고 자기들의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잖아요. 현실과 비슷해요. 실제로 자본가들이 미디어를 소유하면서 이용하기도 하고, 미디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얻잖아요. 소설 속 이야기는 현실에 못 미치죠. 이런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스노볼』에는 많이 나오지 않았어요. 아마 다음 이야기에는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후속작 계획이 있나요? 벌써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이 있더라고요. 

오늘 편집자님과 다음 이야기를 쓰기로 했는데요. 『스노볼』이 마무리된 이야기가 아니니까 2권에서 시원하게 마무리 짓자고 했어요. 스노볼 안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까지는 ‘차설’, ‘차귀방’이라는 개인의 일탈과 범죄를 중심으로 이야기했다면 2권에서는 더 확장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밤이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스노볼에도 비합리적인 면이 있고 썩은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잖아요. 그러니까 2권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요.

독자들이 『스노볼』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간단해요. 소설가니까 소설에 비유해야겠지만 영화에 비유하고 싶은데요. 때로는 픽션에서 얻은 에너지로 현실을 살아가기도 하잖아요. 저는 영화 ‘아이언맨’과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거든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제 소설을 보는 분들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더 큰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소설을 더 잘 써서 읽는 분들이 ‘이런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보기 위해 오래 살아야겠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박소영

1989년생. 대학에서 정보방송학을 전공하고 잠시 기자로 일했다. 2016년 제1회 대한민국 창작소설 공모대전에서 창작스토리상을, 2020년 『스노볼』로 제1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웹소설 『인생 2회차를 샀다』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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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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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진목 “시라는 장르가 저랑 잘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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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를 짓고 싶었다”고 시인은 말했다. 말하자면, 등단 시집 『연애의 책』에서 출발해 지금의 『작가의 탄생』에 이른 하나의 시기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첫 시집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 하나의 챕터를. 마무리 짓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와 나눈 대화는 『연애의 책』 『작가의 탄생』 사이를 더듬거렸다. ‘연애(사랑)’와 ‘작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신중하고 적확하고 담백한 말들 속에서 그의 ‘명징한’ 시어를 떠올렸다. 

2016년 시집 『연애의 책』의 출간과 함께 등단한 유진목 시인은 시집 『식물원』과 산문집 『디스옥타비아』『산책과 연애』 등을 썼다. 영화 현장에서 일하며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에 참여했고, 1인 프로덕션 ‘목년사’에서 단편 극영화와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있다. 부산 영도에서 서점 ‘손목서가’를 운영하고 있다.




마무리 짓고 싶었어요

시인의 말에 한 문장만 쓰셨어요. “나는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을 쓰시면서 어떤 시간을 지나오신 걸까, 궁금했어요. 

어떤 시간들을 지나온 것에 대해서 표현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제가 등단을 하기 전에 독립출판물로 시집을 낸 적이 있어요(『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 그 시집 뒷면에 “나는 너가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구절을 썼었거든요. 그걸 반영시킨 거예요. 약간 대조를 이루는 식으로.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가 나오고, 그 다음에 『연애의 책』, 『식물원』이 나오고, 이번 『작가의 탄생』으로 한 번 마무리를 짓고 싶었어요.

지금까지의 작업들 사이에 무언가 연결되는 것이 있었고, 이제는 또 다른 장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그리고 사실, 다음에 또 시집을 낼 수 있다는 미래의 일은... 제가 내고 싶으면 또 독립출판물의 형태로 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드는 생각으로는 ‘다음에 또 시집을 내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미래의 알 수 없음..?. 그래서 그냥 마무리를 한 번 짓고 싶었어요. 

‘다음 시집이 있을까?’라는 생각은, 시집을 낼 때마다 드셨어요? 아니면 요즘 들어 갑자기 든 생각인가요? 

음... 『연애의 책』이 나왔을 때는 다음 시집 같은 건 아예 생각을 안 했었고요. 『식물원』을 냈을 때는 계약이 되어있는 상태여서(웃음), 다음 시들을 모아서 시집의 형태로 묶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저의 의지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웃음). 그런데 제가 미래를 계획하고 이런 성격이 아니에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라고 늘 생각을 하고 있고. 그걸 향해서 차근차근 단계를 만들어서 준비를 해나가는 타입이 전혀 아니에요. 그때그때 가능한 것을 하는 편이어서...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한 상태이고 책임을 지고 마무리를 지어야 되는 일이어서 시집을 묶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어요. 

이제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그 장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보셨어요?

『작가의 탄생』이 나오고 나서 연작시들을 계속 쓰고 있는데요. 『작가의 탄생』에도 같은 제목의 시들의 연작시의 형태로 나오는데, 지금은 40~60편 정도의 연작시를 쓰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냥 혼자 쓰고 있어요. 



연작시를 쓰시는 이유가 있나요?

한 편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제가 어떤 소재들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한 편의 형식 안에서 마무리가 되면 하나의 시로 끝나고 그 다음 시로 넘어가는데, 그것도 같은 이야기 안에 있기 때문에 제목이 같은 걸로 계속되는 거거든요. 이번 시집에 실린 「작가의 탄생」이 다섯 편짜리의 호흡이었다면, 지금 쓰고 있는 시는 40~60편 정도의 호흡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시집 한 권 분량의 호흡이 되지 않을까. 

영화를 하셨잖아요. 산문집도 내셨고요. 시인님은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그 점이 연작시 작업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제가 시집 한 권을 내면서 등단을 했잖아요. 그 후에 청탁을 받고 시를 써서 내는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됐는데, 예를 들어서 두 편을 청탁 받으면 제가 그 편수에 맞춰서 쓰고 멈추는 거예요. 만약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지고 다섯 편을 마감해야 한다면 한 달 동안 다섯 편의 시를 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은 시기에 쓴 시들은 주제가 연결이 되기도 하고, 이게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이 되기 시작해서 하나의 주제가 여러 시로 나뉘기도 하더라고요. 청탁 받은 편수에 맞추지 말고 더 써야 했는데 멈춰버렸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청탁과 상관없이 혼자서 작업을 했어요. 

최근에 쓰신 시들도 그런가요?

요새는 청탁이 들어왔을 때 쓰는 시들이 다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의 문예지는 봤는데 또 다른 문예지는 보지 못한 독자 분들도 계실 텐데, 그러면 이야기에 구멍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는 거죠. 최근 (문예지)겨울호에 마감한 시들도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세 편으로 나뉘어서 쓰여져 있어요.

『시인, 목소리』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산문을 쓰고, 시는 매일 쓰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셨어요. 연작시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쓰시나요?

아니요, 전혀 규칙적으로 쓸 수 없고요. 그냥 시는... 아무 때나 쓰는 것 같아요. 자다 일어나서 쓰기도 하고, 시간을 정해놓고 쓰지는 않아요. 산문의 경우에는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써야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 같고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문은 쓸 수가 없어요. 산문 쓰는 것을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하고요. 제가 무계획적인 인간인데, 계획적으로 그날그날 분량을 정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가서 저한테 엄청난 부담이 되는 일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산문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어요.

 


시를 ‘입다’

명징한 시어를 쓰시잖아요. 시를 쓴 후에 오랫동안 다듬으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아니요, 저는 한 번에 쭉 쓰고요. 퇴고 같은 경우는 아주 조금만 해요. 만약에 쭉 써지지 않으면, 그냥 그 시는 안 써지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저에게 한두 문장 정도가 있는데 결국에는 못 쓰는 시들이 있어요. 딱히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한 번에 쭉 써졌다면, 그건 완성이 되더라고요. 이것도 계획을 해서는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계획한 시들이 몇 개가 있거든요. 이 제목으로 이 시는 꼭 쓰고 싶다, 하고. 그런데 결국 그건 쓰지를 못해서 『작가의 탄생』 묶을 때 들어가지 못했어요. 

「작가의 탄생」은 주제를 정해놓고 계획해서 쓰시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아니에요. 「작가의 탄생」 중에서 제일 먼저 쓴 시가, 아버지가 신문을 보는 이야기가 나오는 시예요(23쪽). 그러고 나서 (같은 제목으로) 여러 편을 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뒤에 쓴 게 도시에서 새를 구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인데(35쪽), 집을 나와서 도시에서 혼자 살다가 그 도시를 떠나는 이야기를 쓰게 됐어요. ‘그러면 제목은 뭘로 하지?’ 하다가 ‘작가의 탄생’을 붙이게 됐고요. 그렇다면 작가의 탄생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시집의 맨 처음에 실린 「작가의 탄생」을 읽으면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돼요.

음... 저는 굉장히 이성적이지 못하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비약이 강한 편이에요. 감정적으로 모든 걸 받아들이고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머리를 굴려서 세상을 살아야 잘 살아갈 수 있는데 그쪽으로는 뇌가 작동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감정을 사용하게 되고, 감정을 사용하다 보니까 그게 점점 더 활성화되는 거죠. 그런데 저한테 없는 것이 시를 쓸 때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세상을 사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데(웃음). 예를 들면, 제가 1981년 3월생이거든요. 말씀하신 시에서 태어나서 글을 쓰게 될 아이는 저인 거예요. 제가 화자가 아니라 저의 탄생 이야기를 쓴 건데,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저의 이야기를 논리에 맞게 쓰려고 하자면 말이 안 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것이 시를 쓰는 데 제약이 되지 않고요.

저는 이렇게 살다 보니까 시를 쓰는 데도 그게 그렇게 거슬리지 않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부분이 굉장히 거슬리면 그걸 교정하려고 하거나 더 낫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고치려고 할 텐데, 저는 평소에도 되게 비논리적이고 비약이 강하고 그냥 제멋대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다 보니까 시를 쓸 때 전혀 거슬리지 않는 거죠. 그런데 읽으시는 분들은 그 안에서 뭔가 아귀를 맞추려고 하시고 그 부분에서 되게 어렵다고 여기시는 것 같아요. 그 비약을 저도 설명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논리 자체가 없기 때문에. 

독자들이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아요. 읽으면서 분명히 어떤 느낌은 받았는데, 그걸 일목요연하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 거죠. 시인님도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설명하기가 힘들다고 느끼시나요?

설명을 할 수 없지만 ‘어떤 한 편의 시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은지’ 그건 정확하게 있어요. 양가감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동시다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있는데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거죠.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죠. 사람을 사로잡지 않죠. 여러 가지 감정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끼는데 그 중에서 어떤 감정은 여기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슬프고 기쁜데, 웃기지는 않아’라든가. 이런 식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인지를 계획하는 편이죠. 

‘작가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일단 사람들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반응이 작가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음... 일단 산문의 경우에는 저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에 대해서 조금 꺼려지는 게 있어요. 그래서 어떤 형식을 빌려서 조금 더 보편적으로 읽히게 하려는 게 있는데요. 시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저의 이야기로 읽히더라도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여백이 많아서, 해석의 여지가 있어서 그럴까요?

그게 아니라 시라는 장르랑 저랑 잘 맞아요. 어떤 사람은 비키니를 입어도 괜찮으니까 바닷가에서 입는 거잖아요. 내가 비키니를 입었는데 배가 너무 신경 쓰이고 끈도 풀릴 것 같고 이러면 못 입는 거거든요. 그런데 시라는 장르는 입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산문이라는 장르는 입었을 때 계속 신경이 쓰여요. 스타킹을 신었는데 스타킹 올이 나간 건 아닌가 하는 식으로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아요. 약간, 장르를 신체의 일부로 느끼는 것 같아요. 

어떤 의미인가요?

머리가 길어서 불편하다면 자르겠죠. 그런데 불편하지 않으니까 나한테 편하고 좋다고 느끼는 스타일의 머리를 할 거 아니에요. 그런 거랑 비슷하게 느껴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는데 ‘조금 마음에 안 들게 나왔어’ 이런 느낌을 받는 게 저한테는 산문이고요. ‘오늘 딱 좋아, 다음에도 이렇게 잘랐으면 좋겠어’ 하는 느낌은 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만큼 저한테 잘 맞는 형태여서 그게 제 이야기로 읽히든 아니든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아요. 자유로운 것 같아요.

 


지금 물속에 있어요

『작가의 탄생』에서 떠나거나,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데 만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많이 보여요. 

일단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쓸 때는 만나지 못하는 면이 있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는 굉장히 근접돼 있는, 한 시공간에 있는 면이 있어요. 예를 들어 「미시령」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랑 내가 같은 시공간에 있지는 못 하잖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같이 있어요. 「로스빙」이라는 시에서 개가 구슬을 묻고 나서 ‘그게 뭐야?’라고 물으니까 이번 생에서 얻은 거라고 얘기하거든요. 저는 이번 생에서 얻은 것이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에요. 시도 그 이야기를 쓴 거고요. 

『연애의 책』은 “한국 최고의 연애시집”(황현산)이라는 찬사를 받았어요. 『산책과 연애』에서는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셨고요.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생각은 결혼 전후에, 혹은 결혼생활 중에 달라졌나요?

지금은 제가 완전히 사랑 안에 있어서 그걸 느끼는 단계는 지난 것 같아요. 점점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 물에 닿으면 신기하잖아요. 그러다가 무릎까지 차고 가슴까지 차고 완전히 깊은 데까지 들어가 버리는 단계가 있다면, 지금 저는 완전히 물속에 있어서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작가니까.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글로 써서 남기고 싶은 욕망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인데, 사랑을 막 체험하는 건 지나온 것 같아요. 지금은 체험했던 것들을 어떻게 잘 구성하고 조합하고 재가공해서 사람들한테 보여줄까를 생각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게 부러운데요(웃음). ‘나는 완전히 잠겨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가끔씩 ‘내가 잠겨있는 게 맞나?’, ‘조금 물 밖으로 나와 있는 것 같은데?’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죠. 연애를 할 때는 항상 의심했기 때문에 지금 그 사람하고 같이 안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걸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한 것 같은데, 저희 부모님이 제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동사무소 직원한테 듣고 아셨어요. 저는 굉장히 제멋대로 살아온 사람이거든요. 부모님께 제 결혼 사실을 알린다거나 상의한다거나... 그게 한국사회가 말하는 정상가족이라면 저는 그런 정상가족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결혼이라는 것을 한 것은, 저랑 같이 사는 사람이 아프거나 할 때 법적 보호자가 되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한 것뿐이고요.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모두가 그러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부모님께 소개를 시키고 결혼을 하고 저희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전혀 동참할 생각이 없어요.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많은 사람들을 배제시키죠.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걸 밝히는 이유도, 이 사회에는 정상가족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하나의 모델이랄까 어떤 방향이랄까, 저런 방법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곁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교실의 시』에도 그런 이야기를 쓴 거예요. 사실 제 사생활 얘기 하고 싶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책이라는 게 소통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책 리뷰도 찾아보지 않는 거거든요. 

책을 통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거나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책을 쓰고 나면) 이제부터는 독자의 것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이 책은 제 거예요(웃음). 전혀 독자의 것이 되지 않아요. 그들이 잠시 볼 수 있을 뿐이죠. 제가 이것을 볼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리뷰를 찾아보면 저의 사생활에 대한 엉뚱한 이야기들도 있고, 예를 들면 ‘되게 독특한 방식으로 결혼을 했더라’라는 이야기라든가, 그런 말들이 있을 때 제가 거기에 대해서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반박할 수 없거든요. 굉장히 일방적인 거죠. 독자도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고 저도 거기에 맞장구를 친다거나 항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책을 쓰면서 소통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면 『교실의 시』를 쓸 때는 어떠셨어요? 독자에 대해 생각하셨나요? 

『교실의 시』에서 염두에 뒀던 것은 정상가족의 범주에 있지 않은 청소년들이었어요. 저는 되게 막막했거든요. 항상 연애를 하게 되면 상대들이 하나같이 정상가족의 과정을 밟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고, 그렇다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지 않고서도 서로 합의만 된다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데. 어쨌든 저희(부부)는 하필 여자이고 남자이다 보니까 법적 혼인 제도를 이용할 수 있어서 이용한 거예요. 그런데 저희처럼 사랑해서 함께 사는데 이성이 아니어서 정상가족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래서 빨리 ‘생활동반자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기회가 되면 꼭 하고 있어요. 

『산책과 연애』에서도 이야기하셨죠.

네. 이렇게 필요한 것을 왜 남자와 여자만 할 수 있는 것이냐고, 왜 그렇게 해온 것이냐고 썼죠. 인간을 너무 자본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생활동반자법’이) 생기겠죠. 그런 날이 오겠죠. 제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을 한 게, 한국사회에서는 약간 이상한 일인 거잖아요.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아닌데, 미쳤나 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데 그걸 했고, 그러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아, 그렇게 해도 되는구나’, ‘어쩔 거야?’(웃음)라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살아있어야 한다

마지막에 실린 작품 「식물원」은 시나리오 형식으로 되어 있어요. 이번 시집의 목차도 희곡처럼 ‘막’으로 되어있고요. 이런 구성은 처음부터 생각하신 건가요?

제가 독립출판물로 시집(『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을 냈을 때도 마지막 부가 시나리오 형식이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그 방식을 취하고 싶었는데요. 결정적으로 「식물원」이 들어가게 된 계기는, 『연애의 책』에 「리의 세계」라는 시가 있는데 그게 이번 시집에 나오는 「식물원」의 대사를 거의 그대로 발췌한 시예요. 「리의 세계」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이 희곡을 읽으시면 재밌어하시지 않을까 싶었어요. 「리의 세계」를 따로 떨어트려 놓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근원을 담아두고 싶었고요. 지금까지 낸 시집들을 한 번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리의 세계」는 어떻게 탄생한 작품인가요?

「식물원」은 제가 영화 일 할 때 써놓은 단편 시나리오예요. 주인공이 조선족 여성인데 연변에서 같이 있던 언니와 한국에 넘어와요. 그 둘이 소주 마시면서 하는 이야기예요. 

오래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번 시집에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제목처럼 ‘탄생’의 이야기도 있거든요.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도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음... 저는 태어난 것을 굉장히 오랫동안 원망했고요.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 부모이기 때문에 또 부모를 원망했죠. 왜냐하면 너무 사는 게 힘드니까. 우리 사회는 혼자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고 불가능한 사회잖아요. 결국에는 부모가 도움을 줘야 하고, 어쨌든 자립을 해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사회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저는 다른 길을 택했단 말이죠. 만약에 제가 ‘내일 당장 집을 잃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사실 시를 쓰는 것이 아닌 매달 월급이 나와서 다음 달에도 집을 잃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직장을 구했어야 되잖아요. 사회의 시스템 안으로, 자본주의의 구조 속으로 길이 들어가는 것을 택해야 되는데 그러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대책이 없는 사람이 돼있는 거죠.

그렇게 선택하신 이유가 있었겠죠.

저는 그냥 갑자기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논리를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니라 ‘죽기 싫어’라든지 ‘이거는 꼭 해보고 죽을 거야’ 이런 거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었고, 죽는다는 건 태어나기 전이랑 똑같은 상태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후(死後)를 이야기하는 종교라든가 그런 걸 극도로 거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웃음), 『작가의 탄생』에서도 신에게 계속 질문을 하는데,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살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셨어요?

바뀐 게 있다면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죽으면 저랑 같이 사는 사람의 인생이 너무 망가지기 때문에, 그걸 할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까지 그 사람한테 제가 나쁘게 할 수가 없어서, 지금은 약간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예전과 달리 근심 걱정도 생기고(웃음), 내년에는 어떻게 해야 되나 내후년에는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런 장기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도 ‘나는 오로지 당신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아있는 거니까 그 점만 조금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웃음). 

뭐라고 답하시던가요?(웃음)

‘정말? 정말이야? 고마워, 잊지 않을게’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순전히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죽으면 이 사람이 너무 상처받고 망가지겠구나’ 라는 걸 알게 됐고, 그럴 수 없겠더라고요. 제가 남을 위해서 살아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다니, 너무 생색을 내고 싶은 거예요(웃음). 그게 삶에 대해서 조금 바뀐 생각이에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무 즐거워요(웃음).

나머지는 전쟁이에요(웃음). 그 외의 시간은 아주 전쟁이에요(웃음).

『작가의 탄생』을 가장 먼저 구비해 놓은 책방은 ‘손목서가’였겠죠?

‘위트앤시니컬’이 더 빨라요(웃음). 언제나. 제가 시집을 보기 전에 이미 ‘위트앤시니컬’의 유희경 시인이 시집을 실물로 봤어요. 

직접 쓰신 책을 ‘손목서가’에 진열하실 때는 느낌이 남다르실 것 같아요. 눈앞에서 독자들 반응을 볼 수 있으니까 떨리기도 하실 것 같고요. 

저는 되게 남인 척 해요. 저 아닌 척(웃음).

그래도 다들 알아보시지 않나요?

제가 아닌 척하면 말씀을 못 하시고 가시는 분들도 많아요. 계산대에 제 책을 가지고 오셨을 때 제가 조금이라도 의식을 한다든가 ‘앗’ 이러면 ‘작가님이시죠?’ 이런 이야기를 하실 텐데, 너무 태연하게 다른 책 계산하듯이 하니까 오히려 말씀을 못 하고 가시는 것 같아요. 그 상황이 조금 이상하신 거죠. ‘이 사람 뭐지?’ 이런... 그래서 말을 못 꺼내고 그냥 가세요. 

겉으로는 아닌 척하시지만, 속으로는 많이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

전혀요. 저 되게 뻔뻔한 사람이에요(웃음). 만약에 그런 걸 의식했으면 제 책을 거기(손목서가)에 깔면 안 되죠. 자기 책을 자기 서점에 막 뻔뻔하게(웃음)... 저는 그냥 남의 책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한 번은 ‘유진목 시인 아니신가요?’ 해서 ‘아닌데요’라고 한 적도 있고(웃음).

왜 그러시는 거예요?(웃음)

아... 모르겠어요(웃음). 그냥... 잘해주시려고 하니까, 그 점을 별로 받고 싶지 않아가지고. 

그러면 ‘손목서가’에서는 낭독회를 안 하세요?

혼자서 여러 번 했어요. 트위터 라이브 같은 거 켜놓고. 

오프라인으로 하실 계획은 없나요?

언제 어떻게 낭독회를 할 거라고 모객을 한다거나 그런 방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 같고요. 그냥 갑자기 낭독회를 하고 싶으면 카메라 켜놓고 하는 편이에요. 




*유진목

1981년 서울 동대문에서 태어났다. 2015년까지 영화 현장에 있으면서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일곱 작품에 참여하였고, 1인 프로덕션 ‘목년사’에서 단편 극영화와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있다. 2016년 시집『연애와 책』이 출간된 뒤로는 글 쓰는 일로 원고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산문집『디스옥타비아』, 2018년 시집『식물원』을 썼다. 부산 영도에서 서점 ‘손목서가’를 운영하고 있다.



작가의 탄생
작가의 탄생
유진목 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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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갑 “아파트 팔고 손해봤지만, 집을 쫓는 모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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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쫓는 모험』이라. 책 제목에 꽂혔고 프로필 문구를 읽다가 물음표가 생겼다. 6억을 손해 봤다고? 더욱이 프롤로그 제목은 ‘가련하게 산다’라니. 이 작가는 괴짜인가? 회의주의자인가? 낙관주의자인가? 궁금해졌다. 저자 정성갑은 월간지 <럭셔리>, <도베 DOVE> 등에서 피처 에디터로 20년간 일했고 작년 11월부터 한점 갤러리 ‘클립’의 대표이자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집을 쫓는 모험』은 아파트, 빌라, 한옥으로 즐겁게 이사를 다니다 서울 서촌에 3층짜리 작은 집을 지은 모험기다. “성격이 급해서 안 행복한 것을 못 견딘다”는 사람. 3분마다 “껄껄껄”웃음을 아끼지 않으며 대화하는 사람. 이것이 진정한 ‘갑’의 인생이 아닐까? 싶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똑똑한 것이 똑똑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빨리 가는 것이 빨리 가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의 미소가 훗날 눈물이 씨앗이 될 수도 있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집을 쫓는 모험』, 150쪽)





슬쩍 옆구리를 찌르는 책

프로필을 읽는 순간, ‘아, 이 책 재밌겠다’ 생각했어요. 특히 첫 문장에 확 끌렸습니다.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잘못 팔아 6억을 손해 봤다.” 아무리 솔직한 소개글이어도 액수를 언급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은 무척 드물어요. 

하하, 아무래도 오랫동안 에디터 생활을 했으니까요. 강렬한 첫 문장의 효과를 생각했어요.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에요. 제가 15년간 이사를 여섯 번 했는데, 이렇게 여러 집에 살게 된 가장 큰 동기 중 하나가 아파트를 잘못 팔아 손해를 봤기 때문이니까요. 팔고 나서 치솟은 아파트 시세를 보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돌아보면 웃음도 나고 아찔해지기도 해요. 

책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요?

서촌에 3층집을 짓고 나서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에디터를 이렇게 오래 했는데도 물꼬가 안 터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b.read’ 대표님을 만났죠. 프롤로그를 보내 드리고, 주제랑 방향성을 좁혀 나갔어요. 확실히 속도가 나더라고요. 

4월에 계약하고 7월까지 최종 원고를 주는 일정이었다고요. 굉장히 빨리 쓰셨습니다.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이에요. 원고를 보내 드리면 빨리 피드백 받고 싶어 하고. 잡지사 기자들은 원고 마감을 잘 지켜야 하잖아요. 계약서에 쓴 날짜가 아마 주말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원고를 드렸죠. 

신혼 시절부터 2년 반마다 짐을 싸셨어요. 전세로, 자가로. 전세로 한옥집에 살 적에도 인테리어를 하셨고요. 솔직히 웬만한 열정 아니고서는 굉장히 힘든 과정이에요. 두 딸의 아빠이시기도 한데요.

어떨 때는 돈을 좇아, 어떨 때는 낭만을 좇았죠. 아파트 분양권을 샀을 때는 엄마 집에 얹혀살기도 했고, 처음 빌라로 이사 갈 때는 2천 만원을 들여 공사를 하기도 했고, 그러다 한옥 한 채가 다시 레이더망에 걸려서 이사를 하고. 화장실이 밖에 있는 한옥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주저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그러다 마침내 협소주택을 지었고요. 

사람들이 저희 집에 와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아, 귀여워”예요. (웃음) 실제로 정말 작죠. 1층이 8평, 2층이 6평, 3층이 8평이니까요. 하지만 작은 집인데도 풍경이 좋아서 답답하지 않아요. 3층 창문으로는 저 멀리 청와대도 보이고요. 두 아이들의 방을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내 집이니까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한옥에 살 때는 제 집이 아니니까 제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불안했거든요. 그리고 주택을 지어 보니까, 집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게 돼요. 옆집이 만약 매물로 나오면, 1층을 뚫어서 에어비앤비로 돌리면 어떨까? 하는. 사람이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보통 집에 관한 책은 사진을 많이 넣잖아요. 집짓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요. 그런데 『집을 쫓는 모험』은 표지에 나온 3층집 일러스트를 제외하고는 사진이나 그림이 없어요. 글로만 승부한 느낌이 들어요. 

사진을 넣어 버리면 상상력의 지평이 줄어들 것 같았어요. 왜냐면 제가 살았던 집은 제 삶에서 매우 특정적인 순간이라서요. 집은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서 달라지니까요. 고정적인 답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어요. 대신 ‘집 짓기를 위한 가이드’를 넣었어요. 설계 전에 좋은 건축가를 알아보는 법도 썼고요. 저는 투자할 수 있다면 설계비를 많이 쓰라고 해요. 좋은 건축가를 알아보는 노하우 중 하나는 남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 기울이는지 유심히 살피는 거예요. 중간에 말을 끊거나 자기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일 확률이 높아요. 




작은 모험을 계속하는 삶

“단숨에 읽힌다”는 리뷰가 많더라고요. 실제로 저도 그렇게 읽었고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나요? 

“에디터 갑의 모험기” 같다는 리뷰도 기억에 남고요. 가장 의미가 있었던 건, “집이라는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갈등했는데 이렇게 집이 중요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리뷰였어요. 이 책은 단독주택 예찬론이 아니에요. 그저 집은 충분히 ‘모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시세 때문에 아파트에 살지만 ‘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슬쩍 옆구리를 찌르고 귀에 바람을 넣고 싶었어요. 

만약에 지금 5억 정도의 돈이 생긴다면, 무얼 하고 싶으세요?

아직 한옥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마당이 넓은 집에 살고 싶어요. 지금 사는 집은 정원이 작아서 네 식구는 못 앉거든요. 한옥에서 살 때는 여름만 되면 아이들이 마당에서 수영을 했어요. 마당이 주는 즐거움을 세포들이 기억하는 것 같아요. 아파트에 살 때도 저는 베란다를 좋아했는데요. 왜냐면 마루랑 타일을 밟을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거든요. 그래서 아파트를 사는 사람들에게 거실을 확장하지 말고 베란다를 살리라고 말해요. 

가장 중요한 건,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집인 것 같아요. 시세를 떠나, 아파트의 삶이 더 맞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렇죠. 단독주택이냐? 아파트냐? 고민하는 분들께는 “내가 몸을 쓸 때 얼마나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이 드는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으면 좋겠어요. 단독주택은 살면서 계속 신경을 써야 하거든요. 저는 이게 맞고요. 한옥에 살 때도 마당을 쓸고 움직이고 있으면 참 좋았어요. 하지만 이런 일들이 스트레스로 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조차 단독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아파트에 살긴 사는데, 값이 오르는 것 말고는 좋은 걸 전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이라면 다른 대안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에디터 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건축가, 예술가 등을 많이 만나셨어요.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아요. 

그럼요. 그나마 피처기자를 해서 안 망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의 제가 대단히 괜찮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년간 훌륭한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봤잖아요. 예술가들은 자신이 어떻게 남들과 차별화해서 잘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라,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하는 말 한 마디는 다르죠. 진정성이 있죠. 일을 하면서 꾸준히 제 마음이 물갈이가 된 것 같아요. 정신을 가다듬게 되는 거예요.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좋은 쪽으로 삶의 태도를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물론 오래는 못 가지만,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에요. 

후배들에게 글쓰기에 관해 조언도 많이 해주셨을 텐데요.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셨나요?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분위기 잡는 글, 멋부린 느낌 나는 글을 질색했어요. 조금 문장이 서툴고 멋있지 않더라도 순박하고 진정성 있는 글이 좋죠. 인터뷰이를 과도하게 신격화 하는 글은 멀리 하라고 했어요. 한 글자를 쓰더라도 솔직하고 진실되게 쓰라는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또 하나는 글에도 숨구멍이 있어야 한다는 점인데요. 글에도 중간중간 여유가 있어야지 끝까지 읽을 수 있어요. 2,3일 발효시키면 더 좋죠.


 

마흔 중반에 독립을 하셨죠? 

독립을 한지 이제 딱 일 년이 됐어요. 잡지사에서 퇴사하고 나서 바로 콘텐츠 기획사를 차렸는데요. 퇴사하면서 목표로 한 건 딱 하나였어요. “잡지사 원고 청탁만 기다리면 안 된다.” 그래서 한점 갤러리 ‘클립’도 오픈했고요. 매월 한 명의 아티스트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고요. 3층집의 1층이 갤러리인데, 집이 작지만 그래도 쪼개니까 만들어지더라고요.

만약 두 번째 인생이 있어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건축가를 해도 좋겠고, 뭔가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건축은 사실상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잖아요. 비율, 각도 모든 게 너무 중요한. 건축물을 볼 때 느끼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월간지 <럭셔리> 기자로 일할 때, 모든 인터뷰이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럭셔리하게 사는 걸까요?”라는 질문을 하셨고, 이어령 선생은 “이야기 속에 살아라”라는 답을 해주셨다고요. 작가님께도 같은 질문을 드려 보고 싶어요. 

크든 작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작은 모험을 계속하는 것, 이게 럭셔리한 삶이 아닐까요? 집은 정말 살아보지 않으면, 이 집이 얼마나 재미있는 공간이 될지 다이나믹한 공간이 될지 모르거든요. 나이가 들어 내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집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헛헛할 것 같기도 해요. 




*정성갑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잘못 팔아 6억을 손해 봤다. 팔고 나서 치솟은 아파트 시세를 보며 1~2년간 얼굴에 열꽃이 피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하지만 그 덕분에 빌라, 한옥으로 즐겁게 이사를 다녔고, 서울 서촌에 3층짜리 작은 집을 지을 수 있었으니 인생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게 아니라고 믿는다.

월간지 [럭셔리]와 네이버 디자인판을 운영하는 [디자인프레스]에서 에디터와 편집장으로 일하며 수많은 건축가를 인터뷰했고, 집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았다. 여러 번 이사를 하며 각각의 집에는 저마다의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파트에서만 살았다면 억울할 뻔했다. 갤러리로얄에서 [건축가의 집] 토크를 진행했고, CGV에서는 [정성갑의 하우스토크]를 열었으며, [한 점 갤러리 클립]을 운영하고 있다. 인스타그램(@editor_kab)에서 일과 일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집을 쫓는 모험
집을 쫓는 모험
정성갑 저
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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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울 “왜 아픔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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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서의 낭독회는 불가능한 것일까?” 뚜렷한 병명 없이 만성통증을 앓던 작가 이다울은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봐야 하는 생활이었지만, 끊임없이 상상하고 통증과 함께하는 삶을 기록했다. 알 수 없는 아픔과 지낸 시간을 자신이라도 기억하기 위해서, 그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빨리 나아서 건강해져”라는 말은 아픔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납작하게 짓누르는 게 아닐까? 이다울은 말한다. 당신이 아팠을 때의 일을 자세히 듣고 싶다고. 질문하고 들으며, 그렇게 구체적인 몸들의 이야기는 서로 만난다. 

이다울 작가는 일상의 비범한 모습에서 삶의 본질을 발견하는 시선을 지녔다. 첫 에세이 『천장의 무늬』는 이름 모를 병과 통증이 자신의 삶에 미친 변화 속에서, 자신의 바깥과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 과정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업물은 웹 사이트 (https://www.pul-lee.com)에서 만날 수 있다. 



고통이 납작해지지 않도록

시작은 웹 사이트에 셀프 연재한 에세이 「등의 일기」였죠. 

네,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되면서 침대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병원에서도 병명을 찾을 수 없으니까 억울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제 몸과 통증을 관찰해야겠다는 생각에 기록을 시작했어요. 저라도 쓰지 않으면, 아픔이 어디에도 말해질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을 느꼈거든요.

왜 ‘등의 일기’였나요?

등을 대고 누운 시간에 대한 기록이어서요. 실제로 침대에 누워 글을 쓰기도 했고요. ‘등’은 아프고 난 후에 새롭게 인지하게 된 단어예요. 성동혁의 시 「6」에 ‘발가벗겨져도 창피하지 않은 방에서 나의 지루한 등을 상상한다’는 구절이 나와요. 그 시를 떠올리면서 지은 제목이에요.

주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셨어요?

통증이 완화될 때마다 썼어요. 너무 아픈 시기에는 누워서 무작정 제 말을 녹음한 적도 있는데, 그건 앓는 소리에 가까웠어요. 일어나는 게 힘들면 누워서 영화나 책을 볼 수 있는 반사안경 ‘레이지 글래시스’를 착용하고 썼고요. 

웹 사이트 연재 당시, 독자들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고요.

제 글을 읽고 이메일이나 SNS 메시지를 보내는 분들이 많았어요. 말하기 어려운 통증에 대해 본인들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고,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요. 생각보다 말하기 어려운 병을 앓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예를 들면, 생리통을 심하게 앓는 사람도 많은데 엄살처럼 여겨질 때도 많잖아요. 그렇게 드러내기 힘든 경험들을 들을 수 있었어요.



아픈 몸과 살아가는 시간

‘투병’이 아니라 병을 다스린다는 뜻의 ‘치병’이라는 단어를 쓰셨어요.

물론 저도 질병과 싸우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그런데 병을 적으로 만들고 나와 분리하니, 질병이 있는 상태를 비정상으로 간주하게 되더라고요. 아픈 시간은 쓸모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계획을 완치 이후로 유예하면서요. 건강해지면 내 인생이 다시 시작될 거야 하면서.(웃음) 그런데 ‘치병’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후, 아픈 상태를 받아들이고 살아나가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어요. 통증이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스리고 관찰하는 것이 됐죠. 이 아이디어는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김신식 작가의 ‘치병일기’ 강의를 들으면서 얻은 거예요. 

이름 없는 통증에서 오는 두려움을 외부에서는 잘 알 수 없잖아요. 어떤 두려움인지 들려줄 수 있나요?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제일 크죠. 진단명이 있다고 해서 완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약간의 가이드는 있을 거예요. 약을 며칠 먹으면 나아서 일상으로 복귀하겠구나 상상이 되죠. 그런데 저는 병명을 모르니까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어요. 학교를 다시 나가야 하나, 휴학을 해야 하나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죠. 그런 막연함 때문에 힘들었어요.

“덜 아픈 삶을 택할 수 있다면 택하겠지만, 다른 몸을 살면서 새로운 기회가 열린 것 같다”(294쪽)고 썼어요. 

원래 저는 훌라후프 대회에서 1등을 하고 ‘기물 파손’이 꿈일 정도로 건강한 몸을 갖고 있었어요. 학창시절에는 몸을 활발하게 쓰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면서 자랐고요. 그런데 막상 몸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니까 새로운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자연히 아픈 몸들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됐고요. 돌봄 노동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어요. 저는 아주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프고 나서부터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수한 돌봄을 받았어요.

책으로 묶으면서 과거의 글을 다시 읽어보는 기분은 어땠어요?

제 몸이 왜 아픈지 작은 힌트를 얻기도 했어요. 갑자기 찾아온 질병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고. 그렇지만 아직은 익숙한 모습들이라, 이게 나구나 다시 깨닫고는 해요.



나의 세계를 유심히 응시하기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얼른 나아서 건강해져”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궁금해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작가님은 “모두의 아픔이 보다 자세히 말해졌으면 좋겠다”(6쪽)고 썼어요. 

구체적인 경험들이 늘 궁금해요. 살면서 한번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잖아요. 가벼운 감기라도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을 겪었는지 세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한 친구가 제 책을 읽고 나서 어린시절 아팠던 경험을 들려줬어요. 자기 집에서는 체하면 고추장을 먹거나 뒤꿈치로 콩콩 뛰어다닌대요. 또, 어떤 친구는 갑자기 심장이 안 좋아서 숨을 몰아쉬었는데, 학교에서 한숨을 많이 쉰다고 오해를 받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아주 구체적인 경험을 들을 때 즐거워요. 다 다르지만 공통점을 발견할 때도 있고요. 

개별적이고 고유한 아픔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거군요.

네, 병원에서의 경험도 궁금해요. 뚜렷한 병명이 없으면 엄살로 여겨지기도 하고, 여성 환자들에게는 병약하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하잖아요. 그렇지 않은 환자들도 분명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런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싶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머무르지만, 작가님의 생활은 다채로워요. ‘침대 위의 낭독회’ 아이디어가 정말 기발했어요. 침대 밖에 나갈 수 없을 때, 침대 위에서 모두가 잠옷을 입고 낭독하는 모습을 상상했다고요. 

실제로 해보고 싶어요.(웃음) 그런데 ‘집콕 기간’이 길어지면서 현실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생겨나더라고요. 요즘 침대에서도 할 수 있는 온라인 모임들이 많잖아요. 실제로 아프고 나서 못 나갔던 책 모임이 온라인으로 재개됐고, 글쓰기 수업도 화상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현실에 제약이 생기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웹 사이트에 사진, 일러스트, 에세이 등 다양한 작업물이 올라와 있어요. 기본적으로 창작 욕구가 강한 사람이군요.

너무 심심하니까,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어요. 순수하게 재미있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글은 어떤 장면을 꼭 기억하고 싶을 때 쓴다면, 그림은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는 일에 가까워요. 언젠가 아주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요.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을 기록하기도 했죠. 산책하며 마주친 사물들을 사진으로 찍어 웹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고요. 

저희 동네는 대학교 근처라 밤에는 취객도 많고 정신이 없어요. 그래서 저를 자주 놀라게 했고, 처음에는 그게 반갑지 않았어요. 그런데 통증과 싸우다가 결국 관찰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 것처럼, 제 동네에도 점차 유심한 눈길을 건네게 되더라고요. 언뜻 버려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버려지지 않은 채 다양하게 사용되는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길가에 널린 가정용 의자가 사람들이 쉬어 가는 평상 역할을 하기도 하고, 가게 앞 의자가 주차 금지 표식으로 활용되기도 하고요.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방식이 담기면서, 더 이상 버려진 것이 아닌 새로운 사물이 되더라고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혼재된 모습을 발견하는 게 즐거웠어요.



기대하는 독자의 반응이 있나요?

재미있다는 말이 가장 좋아요. 아픔에 대한 기록이니까 재밌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그럴 때 저는 ‘왜 안 되지?’하고 생각해요. 재밌다는 말이 제일 듣고 싶었거든요. 

똑같이 이름 모를 통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제가 감히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요? 그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혹시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제가 들어줄게요 하면서요. 



천장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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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울 저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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