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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집은 한 사람의 삶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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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집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올렸다. 눈밝은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집과 취향에 대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계약은 작가의 의견에 따라 초고를 쓰고 난 후 하기로 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예상 밖의 이야기로 풀어졌다.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한 여성의 성장기로 흘러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가 만들어졌다. 전작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으로 호평을 받았던 하재영 작가의 이야기다.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198쪽)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책

블로그에서 출발한 책이라고요.

아버지랑 오래된 빌라를 인테리어 하는 이야기를 올렸었어요. 그걸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을 주셨어요. 책을 염두에 두고 썼던 글이 아니라서, 고민을 좀 하다가 우선 써보기로 했는데 취향에 관한 이야기가 안 써지더라고요. 서너 꼭지를 써보니 집이 한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졌어요. 

독자들의 리뷰를 찾아보니, 책을 읽고 자신이 거쳐온 집들을 떠올렸다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반가운 반응이었어요. 제 이야기가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연결성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실린 책이지만, 한 시대를 공유하며 성장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성과 보편성을 담고 깊은 마음이 있었어요.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어요. 서간문을 상상한 독자도 있더라고요. 

퇴고를 쓸 때까지 제목이 없었어요. 처음 생각한 제목은 ‘디어 마이 홈’이었는데, 당시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읽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웃음)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마지막에 떠오른 제목인데, 표제에 그 표현을 쓴 이유는 행복했던 집과 벗어나고 싶었던 집을 모두 포함하는 한 가지 말을 찾자면 ‘친애하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였어요. 책이 서간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느낌도 있었고요. 독자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과거의 자신에게 괜찮다고, 잘했다고 말해주기를 바라요. 

프롤로그 없이 글이 시작돼요. 유년 시절을 보냈던 대구 북성로 이야기부터요.

처음에는 북성로 이야기를 프롤로그처럼 썼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이게 첫 꼭지가 됐어요. 저는 책이 ‘작가의 말’로 시작되는 걸 조금 안 좋다고 생각해요. 본문을 다 쓴 다음에 정리하는 글로 ‘작가의 말’을 쓰는 게 좋아요. 프롤로그는 굳이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거주하는 집, 또는 공간에 따라서 쓰여지는 글의 소재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책에 쓴 집들을 예로 들면 각 집에 살 때 제가 품고 있는 질문이 달랐어요. 난곡에 살 때에는 재개발로 밀려날 위기에 처해 있는 저소득층 주민들이나 방범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동네와 집에 거주해야 하는 여성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들은 저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저도 그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까요. 그때 품고 있었던 질문은 ‘주변부의 사람이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회는 그것을 어떻게 가능/불가능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행신동에서는 ‘집다운 집이 무엇인가’에 대해, 결혼 후의 집에서는 ‘집에서의 내 자리는 어디인가’에 대해 질문했고요. 각각의 집에 살 때 제가 가진 질문들이 달랐다는 것은 그 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글의 소재와 방식이 달랐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담담한 필치가 인상적이었어요. 행복했던 일이나 힘들었던 기억 모두가 굉장히 차분하고 고요한 서사로 읽혔어요. 어떤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일단 문장 자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요. 서사를 그냥 잘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가를 만났는데 비유가 신선했어요. “그런 걸 하루 종일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이 상황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만, 기발한 문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르포를 쓸 때는 내가 이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극적인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에요.


 

‘지금, 여기’의 소중함

집에 관한 많은 추억 중 가장 고맙다고 여기는 시간 또는 순간, 장면이 있을까요?

사실 저는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감사하게 된다는 식의 말에 반감이 있었어요. 세상에는 그 일을 겪기 전의 나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좋았던 일도, 좋지 않았던 일도 지금의 내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준 건 사실일 거예요. 글을 쓰면서 집에 관한 이야기가 한 사람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정희진 선생님의 추천사에도 “생애사는 곧 집의 역사이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글을 쓰면서 정말 그렇다고 느꼈어요. 집에 대한 기억들이 가진 연속성이 있었고 그 연속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특정한 집이나 기억이 좋았다기보다는 그 순간들이 만들어낸 지금의 저를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양가감정을 느끼는 공간도 있겠고요. 

그렇죠. 어릴 때 북성로 집에서 대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기억이 감사할 일이라면 감사할 일일 거예요. 하지만 이 기억은 그 대가족의 살림을 젊은 엄마가 혼자 감당해야 했다는 사실에 빚지고 있기도 해요. 엄마에게는 그때가 가장 가혹한 시절 중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 시절을 행복하게 회상하는 데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시기에 저는 엄마의 어려움을 알기엔 너무 어렸고 많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어린 시절이 제 자존감을 형성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긴 해요. 성장 이후 힘든 시간을 보낼 때마다 그때를 떠올리며 견뎌왔기도 하니까요. 

지금 살고 있는 구기동 집을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기꺼이 혼자가 되는 공간”이라고 표현하셨어요. 집 역시 책만큼이나 고요한 느낌이에요. 집에서 머물 때,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요.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드물어요. 낯선 사람이나 낯선 장소에 가는 것을 좀 꺼리는 편이기도 하고요. 일과로 치면 가사노동도 하지만 제 작업과 관련한 일, 읽거나 쓰거나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요. 조용한 동네에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혼자 보낸다는 것은 제가 선택한 생활이긴 하지만 너무 정적이고 자극이 없기도 하죠. 그래서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밤에 남편과 식탁에 앉아 대화할 때가 좋아요. 그날 제가 썼던 글과 읽었던 책, 혼자 몰두하던 생각과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한 뒤, 이해받고 때로는 조언을 듣고 피드백을 듣는 순간들이 중요하게 느껴져요. 어떤 인터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구가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개인적인 가구인 책상도 소중하지만 타인과 함께 마주앉을 수 있는 식탁도 그만큼 소중하다고 대답한 기억이 나네요.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 편인가요? 끝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편이신지 또는 다른 일을 하면서 사고를 전환하시는지요?

책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저는 다행히 잘 앉아 있는 편이에요. 책 작업에 들어가면 써지든 써지지 않든 그날 쓰기로 한 분량을 마칠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요. 하지만 ‘책을 쓰는 시기에 글을 쓰지 않는 시간대’도 있잖아요. 그때는 다른 것들을 많이 흡수하려고 해요. 다양한 주제의 책도 읽고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보면서요. 그 시기에는 무엇을 읽거나 봐도 제가 쓰고 있는 글과 관련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전혀 연관성 없는 데에서 제가 써야 할 방향을 찾을 때도 있고, 어떤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정하기도 해요. 그밖에 하는 일로는 산책 정도. 어쨌든 바깥바람도 쐬어야 하니까요. 

후속작이 '여성'에 관한 책이 될 것 같다고요.

이번 책에서 저의 이야기뿐 아니라 엄마의 이야기도 종종 등장하는데요, 저희 엄마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작 형식의 논픽션으로 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사실 그대로인 책. 저희 엄마를 비롯해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들의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 같다고 느껴요. 당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하면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책의 소재가 되냐며 손사래를 치지만요. 그러나 저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낄 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여성들의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하게 돼요. 페미니즘이 이룬 성취는 크지만 동시에 그것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평범하지만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해보고 싶어요. 



'집'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는 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집에 대한 고민의 범위가 워낙 넓고 다양해서 저의 이야기가 온전히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제에 의지하여 말하자면 저의 경우 집에 대한 고민은 그 집에서 보내는 나의 시절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어요. 좋았던 집도, 그렇지 않았던 집도, 글을 쓰다 보니 한 시절의 배경으로 제 서사의 일부가 되어 있었어요. 집은 한 사람의 삶의 배경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때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며, 시간이 지나면 자기 서사의 일부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아요. 이 책을 통해 ‘지금, 여기’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요. 




*하재영

2006년, 작가가 되었고 ‘피피’라는 이름의 강아지와 살게 되었습니다. 2013년, 유기동물 구조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동물과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18년, 버려진 개들에 관한 책인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냈고 그밖에 지은 책으로는 두 권의 소설이 있습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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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한국 사회, 이제 신화에서 깨어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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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위기, 신화가 무너졌다.” 선진국 중심의 질서가 깨졌다는 박노자 교수의 진단은 우리가 더 이상 기존의 사회를 믿으며 살 수 없음을 알렸다. 전염병과 경제 위기에 직면한 이 시점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당신들의 대한민국』 이후 20년,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미아로 산다는 것』의 메시지는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 박노자 교수는 그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꾸준히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다. 그에게 한국 사회의 현재를 물었다.



코로나 위기 이후 세계는

2주간 격리를 마치고 한국에 왔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의 모습은 어떤가.

외국이나 한국이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아마 단기간에 끝나진 않을 것이다.

노르웨이 상황도 궁금하다. 코로나19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북유럽이라고 체계적으로 대처하는 건 아니다. 노르웨이는 한국처럼 추적을 치밀하게 하지 못하고, 자가 격리도 자율에 맡긴다. 다만,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장점이 있다. 감염자가 늘어도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거다. 인구가 몰려 있지 않으니까 비교적 유리하기도 하다. 서울의 인구가 노르웨이 인구의 거의 2배니까.

지난해 3월에 쓴 칼럼 「코로나가 무너뜨린 신화들」이 화제가 됐다. 선진국 중심의 신화가 팬데믹 상황을 맞아 깨졌다고 봤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이번 코로나19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만큼 위상도 꺾이고 경제적 타격도 만만치 않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더 이상 미국, 유럽이 옛날처럼 중심 역할을 못 할 거다. 더 다양한 중심이 있는 세계로 가는 길목이라 본다.

이번 책에서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포착하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10년 전에 비하면 말을 건네는 방식이 친근해졌다는 느낌도 든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큰 그림을 보려는 욕심이 생긴다.(웃음) 사회가 어떻게 발달하는지 큰 변화를 그려보고 싶다. 최근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를 보면서, 누군가는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위치에서 큰 그림을 그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완벽하게 객관적인 것은 없겠지만, 객관성을 향해 노력해야만 전체 사회에 유익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말을 건네려다 보니, 자연히 말투도 부드럽게 느껴진 게 아닐까?



우리는 미아가 되었다

‘미아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미아’라는 키워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박노자’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되고 지금은 노르웨이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의 위치와도 연결되는 것 같다.

내 상황이 미아 같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태어나고 자랐던 소련 사회가 갑자기 없어졌고, 한국에서 살다 유럽에서 20년을 산 셈인데 여전히 이질감을 느낀다. 그건 역사적인 경험이 달라서인 것 같다. 노르웨이는 내 체질에는 지나치게 편하다. 러시아에서는 공동체와 개인이 공멸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았고, 한국도 굉장히 파란만장한 사회였지 않나. 그런 면에서 노르웨이는 공유하는 것이 적다. 물론 몸은 편하지만.(웃음)

‘미아’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사회적인 의미와도 연결된다. 젊은 세대 전체가 공동체를 잃고 미아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요즘은 미아처럼 ‘뿌리 뽑힌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전처럼 평생 직장도 없고, 미래에는 젊은 세대 전체가 일을 해도 ‘워킹푸어’ 계층이 될 거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가족의 해체’다. 산업화, 민주화와 맞먹는 엄청난 사건이다. 기존 가족 형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가족이 생겨나기도 한다. 50년 후면 한국에서 전통적인 가족은 없어지지 않을까?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엄청난 수의 개인들이 쏟아져 나올 거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족을 잃은 개인들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고 외롭지 않게 살아갈까.

이제 개인들은 안정적인 가족과 직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노르웨이에서도 젊은이들은 대부분 미혼을 택한다. 같이 살아도 동거 형태지 결혼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이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보다는 사정이 낫다. 결국, 개인들이 다양하게 관계 맺는 방식을 배워가야 한다. 과거의 수직적인 공동체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평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계약을 맺는 플랫폼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이 변화를 어떻게 보나.

자본이 세게 선수 친 거다. 자본은 개인을 유사 ‘자영업자’로 만드는 게 꿈이다. 사람을 쓰고 싶을때만 쓰고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플랫폼 노동자는 등록은 자영업자이지만 노동자성을 부정당한 노동자다. 휴가비, 의료보험, 연금 등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다. 

산업별, 기업별로 뭉치던 개인들은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혼자로는 불가능하다. 수평적으로 모이는 노동자들의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반격을 시작해야겠지. 아마 긴 과정이 될 거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인 성 평등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언급했다. 여성에 분노를 표출하는 일부 한국 남성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부 한국 남성들이 여성을 비난하는 걸 보면, 백인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게 떠오른다. 미국 트럼프 정권하에서 백인 하층민들이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유색인종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것처럼. 현재 한국에서는 인종보다 젠더 문제가 더 뜨겁다. 20년 전만 해도 여성들이 사회 진출이 쉽지 않았다. 공무원 사회에서 국회에서 여성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야 조금씩 평등이 실현되고 있는 건데, 왜 자꾸 여성 탓을 하는지 모르겠다. 



불평등한 사회, 희망을 찾는 법

최근 출판계의 키워드 중 하나는 ‘차별’이다. 그만큼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면 할수록 다수가 고통받는다는 자각이 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차별에 분노하고, 그게 출판 시장에도 반영되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성장 신화를 믿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 개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거라는 믿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외형적인 성장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부를 가져다주지 못하지 않나. 부자들만 돈을 버는 구조고, 부동산 가격만 오르고 있다.

한국을 ‘급의 사회’라고 봤다. 학벌, 나이, 성별 등 모든 면에서 등급을 매기고 거기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재력’의 힘이 가장 세다고 했다.

신자유주의의 큰 원칙 중 하나는 국가 위에 자본이 있는 거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대기업의 이해관계를 국가가 알아서 봐주는 시스템이다. 이 구조에서는 자본가만 승리하고, 대다수는 노동을 하면 할수록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살게 된다. 노동은 더욱 값싸지고, 자본가들은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번다. 지금은 세금을 강하게 매기고 있다고 해도 큰 흐름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국가 시스템은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학벌’이 한국 사회의 중심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학벌 중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부의 세습을 합리화하는 수단이다.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건 곧 사회의 상류층에 속하게 된다는 뜻이고, 명문대 출신들은 대학 시절의 경험을 배경 삼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 그리고 실제로는 부모의 재산이 자녀의 학벌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능력의 결과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지배층의 명분이 되는 것이다.



현재 사회는 비관적으로 보지만, 한국 사회에 거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은 신자유주의로 전환된 것이 큰 비극이었지만, 아직은 낙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인권 의식은 급속도로 성숙했다. 내가 1991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의식 있는 대학생들조차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조롱하고 혐오했다. 소수자를 인간답게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최근 성소수자들이 사회로 나오고 있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해 대체복무제도 신설됐다. 90년대에 비하면 정말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평등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실현될까.

단기적으로는 쉽지 않을 거다.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은 쉽게 뭉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단 밀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배타성 속에서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럼에도 낙관을 잃지 않는 이유는 촛불집회 이후 시민사회가 꾸준히 성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극단적인 세력이 잠시 집권한다 해도, 저항적인 시민 의식 덕분에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한국 사회에 희망을 거는 이유다. 


(장소 제공: 서울콜렉터)



* 박노자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박노자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 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난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귀화한 것은 스스로 한국사회에서 국적, 또 외국인과 내국인이라는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리트머스지가 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아로 산다는 것
미아로 산다는 것
박노자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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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시인 김선오 "사랑으로 세계의 질서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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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쉽고도 어려운 일이 있을까. 너와 내가 기쁘게 만나는 일이 사랑이라면,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무거운 질문과 맞닥뜨린다. 왜 너의 손을 잡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다정함을 주고받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까. 가장 자연스러워야 할 일이 왜 이렇게 힘겨운 일이 될까.

사랑의 막막함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나이트 사커』의 세계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막 도착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을 두고, 황인찬 시인은 “사랑이 끝났다고 집요하게 말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의 불가능을 파괴하려 하는 것 같다”고 평했다. 사랑이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가는 시라니. 저절로 마음이 열렸다.

시집을 처음 펼쳤을 때, 눈길을 끈 것은 시인의 이력이었다. 흔한 미사여구없이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단 한 줄의 문장. 그는 이전에 시를 발표한 적 없이, 이번 시집으로 처음 독자를 만나는 신예다. 그럼에도 44편의 시에서는 오래 시를 써온 사람의 태도가 읽혔다. 겨울 오후, 아침달 서점에서 김선오 시인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물었다. 시를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냐고.

“처음 시를 쓴 건 고등학교 때였어요. 도서관에서 우연히 시집을 읽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느꼈어요. ‘해방의 언어’를 만난 기분이었고, 다음날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게 미래파 시라는 건 뒤늦게 알았죠.”

시작은 고등학생 시절이었지만, 시를 쓰지 않는 기간도 길었다. 오히려 그는 한때 시인이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음악이나 그림이 예술에 더 가까워 보여서 시를 멀리하는 삶을 살다가 다시 시로 돌아왔다고. 회사를 다닐 때는 아침에 출근하며 시를 쓰고, 퇴근 후 이어 쓰다가 잠드는 날도 많았다. 결국, 시 쓰는 일이 가장 재미있어 시인이 됐다.



『나이트 사커』는 낯선 사랑시로 가득한 시집이다. 시를 읽다 보면, 이건 분명 사랑인데 사랑하는 대상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 속에서 사랑하는 ‘너’의 얼굴은 너무도 불확실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 윤곽이 없거나 빛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이 유령 같은 얼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너’가 이토록 불확실함을 시인은 시를 쓰면서 의식했다고 한다.

“어떤 사랑은 사회적으로 승인받기 어려워요.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 아니지만, 그동안 저는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서 사회적인 위치나 정체성이 결정되는 일을 자주 겪었어요. 관계가 상대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고요. 결국, ‘너’라는 존재가 ‘나’에게 늘 불안정했기 때문에, 제 시에서 흐릿하고 위태롭게 표현된 게 아닐까요.”

사랑을 위협으로 만드는 사회는 제대로 된 곳일까? 사랑이 너무도 소중할수록, 그 사람에게 세계는 더없이 폭력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이트 사커』에는 어둠과 죽음이 곳곳에 배어 있다.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세계가 낯설어 보일수록, 화자의 눈에 은페된 것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걸 가리는 건 어떤 것은 사랑이고 어떤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말’이다.

“사회에는 많은 폭력이 은폐되어 있죠. 그리고 은폐하는 주체가 때로는 언어일 수 있고요. 예를 들면, ‘고기’라는 단어에는 동물들의 죽음과 고통이 지워져 있어요. 기본적으로 언어는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시 쓰기 밖에 없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언어는 너무나 불확정적이고 많은 것을 유실하게 만드는데, 그럼에도 잃어버리지 않고, 이 세계가 만들어 놓은 질서대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열망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해 11월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그는 이수명 시인의 “시 쓰기는 영원한 휴식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 세계의 질서가 무겁고 숨 막히는데 시 쓰기는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실존의 밑바닥으로 가장 강력히 뛰어내릴 수 있게 한다고. 그러한 즐거움이 계속 시를 쓰게 만드는 것 같다고.

자유를 꿈꾸는 시인의 의지 때문인지, 『나이트 사커』의 세계에는 어둠과 강한 빛이 공존한다. 시집을 펼 때는 짙은 남색의 표지처럼 어둠을 만나게 되지만, 덮을 때쯤이면 눈부시다는 인상이 남는다. 이 빛에 대해 묻자 시인은 아프리카를 여행했던 일을 들려주었다.

“지금도 자주 떠올리는,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어요. 아프리카의 자연은 정말 한국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거든요. 바다에서 엄청난 크기의 검은 파도가 몰려오는 장면을 보고는 문득 죽음 직전의 감각은 이렇겠구나 했죠. 최근에 명상하다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서, 문득 생각했어요. 죽음을 떠올리는 이유는 결국 삶에 애정이 있어서구나. 나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일시적 순간을 사랑하고 있구나.”

우리를 짓누르는 세계의 질서 속에서도 빛의 아름다움은 존재하고, 사랑하던 순간들은 남는다. 그 기록이 『나이트 사커』라는 한 권의 시집이 아닐까. 인터뷰가 끝나고 시집을 덮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지만, 한동안 그 빛이 마음에 남았다. 여전히 너는 어느 쪽이냐 묻고 사랑은 자꾸만 부정되지만, 그럼에도 기억할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너’는 흔들리고 사라져가도 “옆얼굴이 빛으로 붉게 물들어도/잊지 않을게”(「야간 비행」)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이트 사커』를 경유하여 발견한 새로운 사랑의 세계다.



나이트 사커
나이트 사커
김선오 저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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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짓는 사람] 이진, 편집자라는 성실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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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다른 주제를 만나는 일 

16년차 편집자 이진은 푸른숲에서 처음 출판 일을 시작해 현재는 사계절출판사에서 인문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만든 책은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반응이 좋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한 달여 만에 5쇄를 찍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 책의 마케터는 벌써 올해 어린이날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는 후문. 이진 편집자는 좋은 책을 만들고, 그 책을 아껴주는 독자들의 사랑을 느낄 때 책 만드는 보람을 느낀다. 

“동료랑 일하는 게 너무 좋아요.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작업을 하고 좋은 시너지가 날 때, 행복감을 느껴요. 『어린이라는 세계』가 나오고 김소영 작가님이 출판사에 방문하셨는데, 직원들이 자기가 산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오더라고요. 우리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니까 책을 그냥 받을 수 있는데도 응원해주고 싶어서, 굿즈를 받고 싶어서 산 거예요. 뿌듯하고 고마웠어요.”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이진은 공기업에 취직했다가 1년만에 퇴사 후 출판사에 취직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상사들을 보았을 때, 스스로가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렇게 20년을 어떻게 살지?’ 고민 끝에 보게 된 출판사 공고. 서평을 내고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은 ‘과연 이 사람이 출판사에 들어올 것인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열심히 어필했고 합격했다.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집안에 분란을 좀 일으키고 출판사에 들어갔죠. (웃음) 학창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어요. 도서 대여점 맨 윗칸에 있던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세계문학 문고본을 한 권씩 빌려보곤 했어요. 그때는 청소년 논픽션 같은 책이 많지 않았으니까요. ‘편집자’라는 직업은 대학교 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됐어요. 도서관에 자주 가고 책을 열심히 읽는 편이었는데 진로를 고민하던 무렵 ‘책은 누가 만들지?’하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님이 쓰신 『편집자 분투기』를 읽는데 저자와의 긴밀한 상호 작용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푸른숲에 인문 담당 편집자로 들어가서 처음 받은 원고는 독일 심리학 책이었다. 마음속 내면의 아이를 이야기하는 책이었는데 내용 자체에 공감이 안 됐다. 그래서 당시 팀장에게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 책은 출판되지 않았다. 신입 편집자의 의견을 받아들인 출판사는 그에게 두 번째 책으로 『여성 철학자』의 편집을 권했다. 2005년에 출간된 마르트 룰만의 책이 이진 편집자가 만든 첫 번째 책이다.  

“출간된 책을 받았을 때가 아직도 생각나요. 뿌듯했어요. 제가 되게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뭔가 세상에 없었던 걸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책이라는 게 한 권을 끝내면 계속 다른 주제를 만나게 되잖아요. 그래서 지루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책임감과 유연함이 필요한 직업 

편집자로서 만나고 싶은 저자는 분명한 자기 생각, 남다른 경험, 고유한 세계가 있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진솔하게 잘 풀어내는 사람이다. 출판 제안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주제가 단행본의 형태로 다루어진 적이 있는가’,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의미나 재미를 줄 수 있는가’, ‘저자의 글뿐만 아니라 삶 전반이 나 그리고 내가 일하는 회사의 지향과 어울리는가’이다.

작업했던 각별한 여러 책 중 하나는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오랫동안 일을 쉬다가 새로 일하게 된 출판사에서 야심을 갖고 추진한 기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저자의 삶에도 편집자의 경력에도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줬다. 

“사계절출판사에 오기 전에 출산과 육아로 인해 3년 4개월을 쉬었어요. 경력에 공백이 있다 보니 아는 저자도 몇 없었고 이 일을 다시 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었어요. 절박한 심정으로 예전에 같이 일했던 저자들 가운데 가장 좋은 글을 쓰던 김원영 변호사님을 찾아가자! 했는데, 다행히 그가 여전히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던 덕분에 두 번째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었어요.”

가장 최근에 편집한 『어린이라는 세계』 역시 이진 편집자에게 각별한 책이다. 김소영 작가가 게스트로 출연하는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을 즐겨 듣다가 조심스럽게 어린이에 관한 책을 제안했다. 김소영 작가는 “우선 블로그에 글을 써볼 테니 천천히 봐달라”고 했고 초고를 완성한 후에야 정식 계약서를 썼다. 원고가 너무 좋아서 달뜬 기분으로 작업한 책 중 한 권이다. 

편집자로 가장 뿌듯할 때는 저자, 번역자는 물론이고 팀 동료들, 디자이너, 마케터 등 같이 일한 여러 파트너들이 결과물에 만족하고 함께 좋아해줄 때다. 독자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만족감, 즐거움이 이진 편집자에게는 우선이다. 편집자가 꼭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면, 책임감과 유연함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만들다 보면 정말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잖아요. 전체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도 편집자의 책임이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편집자는 원고 작업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이 나오기까지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책임지고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요구, 사정, 일정, 비용 등을 고려하며 유연하게 움직여야 하고요. 저는 ‘절대 안 돼!’가 별로 없는 사람이에요.”

저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업 중간에 생긴 여러 변화를 그때그때 공유해주는 것이다. 글의 내용이나 형식, 생각, 일정 등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편집자에게 알려야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하다.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미리미리 공유해주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력과 책임감을 잃지 않는 일은 편집자는 물론 저자에게도 꼭 필요하다.

“저는 기획을 엄청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교정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지도 않아요. 노력하는 건, 작업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하는 거예요. 저자의 뜻을 최대한 반영해서 만족스러운 작업이 되도록 하고, 서로 호감을 만들어 다음 작업까지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려고 해요. 저는 교정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5교, 6교까지 봐요. 교정은 많이 볼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출판사 상황에 따라 빨리 출간해야 하는 경우에는 여유가 없겠지만, 교정을 계속 보다 보면 사소한 오류가 많이 나와요. 세 번 볼 때랑 다섯 번 볼 때는 확실히 다르거든요. 한 번 더 보면 표현도 좋아지고요.”



해결사가 돼가며 결국 마감을 하는 사람

올해는 이진 편집자가 저자로 데뷔하는 해이기도 하다. 곧 유유출판사에서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이 출간된다. 인문교양서를 만드는 전 과정을 소개하는 책인데, 다 쓰고 보니 ‘협업’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책이 됐다. 

“스스로 확신을 갖고 용감하게 일을 추진해가는 편이 못 되어서,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의견을 물으며 방향을 찾아가거든요. 그런 면에서 출판이 가진 ‘협업’이라는 속성이 제게 잘 맞는 것 같아요. 편집자는 원고만 보는 사람이 아니고, 책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결국 마감을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디자이너와도 잘 소통해야 하고, 가끔은 저자의 심리상담을 하기도 해야 하고요. 저자가 바라는 것을 위해 출판사 대표님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도 있죠.”

2019년 11월에 이진 편집자가 작업한 『아이들의 계급 투쟁』은 일본인 브래디 미카코가 영국 최악의 빈곤 지역 무료 탁아소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가난이 낳은 혐오와 차별이 아이들의 일상을 어떻게 침식하는지를 담아낸 책이다. 처음에는 기획이 통과가 안 됐지만 몇 달 동안 포기가 안 됐다. 다시 회사를 설득했고 출간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제가 스물 여섯살 때 함께 작업했던 저자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저에게 ‘선생님, 제가 나이 오십에 교수가 됐어요’라고 연락을 주신 거예요. 제가 2년차 편집자였을 때, 그분은 강사셨거든요. 그 이후에 연락이 거의 못 닿았는데, 오랜만에 전화를 하셔서 최근에 있었던 좋은 일들을 전해주셨어요. 이럴 때 참 반갑고 뿌듯해요. 그래도 제가 아직 책을 만들고 있으니, 닿을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은 김원영 변호사와 김초엽 소설가가 <시사인>에 연재했던 『사이보그가 되다』. 김원영 변호사가 칼럼을 기획했고 이진 편집자에게 단행본 작업을 함께 하자고 했다. 새로운 저자를 계속 만나는 일도 좋지만, 지금껏 함께 작업했던 저자들과 더 깊게 교류하면서 후속작을 꾸준히 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업 과정에서 충분한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동안은 저희 집 아이들이 ‘어린이’인 시기에 어린이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어린이라는 세계』를 만들면서 이룬 것 같고요. 그다음으로는 ‘꼭’이라기보다는 ‘언젠가 한 번쯤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제가 대학에서 전공한 ‘인류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이론서일 수도 있고, 현장 연구에 바탕을 둔 에세이나 교양서일 수도 있고요. 전공 공부를 대단히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관점 같은 걸 상당 부분 형성해주었기 때문에 보답하는 마음이랄까요?”

출판사에 투고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출판사의 출간 목록, 특히 최근 목록을 확인한 뒤에 원고를 보내달라고 조언한다. 출판사 구성원들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는 책이라야 채택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일했던 선배들이 독립해서 자신들의 관심사에 맞는 책을 출간하는 모습을 보면되게 좋아 보여요. 저는 출판사를 운영할 자신은 없고, 여기서 할 수 있는 만큼 작업하고, 못하게 되면 독자로 남고 싶어요.”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스스로 책을 고르는 수고로움을 즐겨보자는 것. 베스트셀러 순위나 단체에서 발표하는 추천목록, 선정목록 등에 포함되지 않은 책 중에도 좋은 책이 정말 많다.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을 갈고닦아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진 편집자가 작업한 책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지음

저자는 수년 만에 책을 쓰는 탓에 내내 자신 없어 했고, 나는 잘될 거라고 회사에 장담을 한 터라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는데 그 모든 불안과 걱정을 가라앉힐 만큼 좋은 원고가 들어왔다.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지음 

저자 스스로 매주 마감을 지키며 독자를 만들고, 지면을 얻고, 자기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작가의 탄생'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인생극장』노명우 지음

시간이 흐르며 사라져가는 것들, 잊거나 잃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데 부모가 남긴 삶의 조각들을 가지고 그 세대의 삶을 복원해보려는 저자의 노력에 보탬이 될 수 있어 좋았다.



『영화하는 여자들』 주진숙 외 지음

자기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성실하게 임하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 일을 돌아보게 되었다. 편집에 관한 책을 쓰자는 제안이나 이 인터뷰에 응한 것도 어쩌면 이 책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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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택 “관종의 조건? 사실은 ‘관심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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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이 되고 싶진 않지만, 관심은 필요하다. 지나쳐도 문제, 없어도 걱정인 타인의 관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플랫폼의 출현으로 활짝 열린 ‘관심 시장’에서 개인과 기업은 타인의 관심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적절히 얻을 수 있을까. 

『90년생이 온다』 임홍택 저자의 새 책 『관종의 조건』은 흔히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관종’을 재해석하고, 성공적으로 관심 받는 방법을 설명한다. 관심이 돈이 되는 시대, SNS에 올릴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되는 시대에 승자가 되는 첫걸음은 ‘관심 문제’에 관심 기울이기. 『90년생이 온다』에 이어 새로운 화두를 들고 돌아온 임홍택 저자를 만나 관심에 관심이 생긴 계기, 성공적인 관심 추종자가 되는 법을 물었다.  



관심이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90년생이 온다』 출간 이후 1년여 만에 새 책을 냈어요. 퇴사했다고 들었는데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건가요? 

전업 작가가 되려고 퇴사한 건 아니고요. 『관종의 조건』만 쓰고 다시 직장을 구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요즘 다시 일하려고 알아보는 중이에요.  

전작이 베스트 셀러가 돼서 후속작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 같아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꼭 후속작에 대한 부담이라기보다 그냥 쓰는 게 싫어요. (웃음) 글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힘들었죠. 자료도 찾고 논문도 읽어야 해서요. 

글쓰기를 안 좋아하는데도 계속 쓰는 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인가요?

그렇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기에 책이 다른 저작물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제가 상업 감독이면 마음대로 못하잖아요. 이번 책에 둘째 딸에게 바친다고 썼는데 이런 것도 할 수 없고요. 물론 전작이 잘 돼서 기회를 얻은 측면이 있지만요. 

제목이 ‘관종의 조건’이에요. 보자마자 요즘 시대에 딱 맞는 화두라고 생각했어요. 

제목은 소위 말하는 ‘어그로’에 가까워요. (웃음) 제목만 보고 ‘관종’만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요. 사실 관종이 아니라 관심의 조건을 말하는 책이에요. 관심이 자원이 된 지금, 개인과 기업이 ‘관심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책이고, 모두 관종이 되자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것을 ‘관심’이라는 프리즘으로 모았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일단 표지가 ‘관종’스러워요. (웃음)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는데 주위에서 다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내용이 잘 표현된 것 같아요. 디자이너 덕분이죠. 

책의 내용을 처음 생각한 게 2010년이었다고요. 

그때 제가 ‘주니어’였는데요. 회사생활 해보니까 같은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인정받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일 잘하는데도 자기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튀려고만 하고, 거짓 액션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렇게 여러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다 관심의 문제더라고요. 그래서 실력만으로는 안 되겠다. 관심받는 법을 알아야겠다 싶었어요. 실력과 관심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10년이 지난 지금은 관심이 더 중요해졌어요. 관심이 돈이 되는 시대가 됐죠.

지난 10년 동안 이른바 ‘관심 시장’이 열렸어요. 관심은 원래 자원이었지만 교환할 수 없었거든요. 특히 개인은요. 연예인처럼 TV에 출연하는 게 아니라면 교환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각종 SNS와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발달하면서 관심을 즉시 교환할 수 있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관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요. 

흔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관종’을 새롭게 조명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관심이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책을 쓰면서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요. 10명 중 3명은 관종을 복합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고 답했어요. 그러니까 관심받으려는 행동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지만, 관심을 추종하는 행위는 본연의 욕구니까 관종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실제로 관종이라는 단어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이고요. 

그래서 ‘관심 추종자’와 ‘관심 병자’를 구분한 거고요?

관심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관심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관심 추종자’와 관심을 받으려는 마음이 지나쳐서 문제를 일으키는 ‘관심 병자’가 있는데 모든 관심 병자는 관심 추종자이지만, 모든 관심 추종자가 관심 병자는 아닌 거죠.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후속작으로 또 다른 세대론 책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요.

『90년생이 온다』가 잘 돼서 그런지 ‘2000년생이 온다’와 같은 책을 바라는 목소리들이 있었죠. 그리고 그런 책을 냈으면 평균 이상의 성과를 얻었을지도 몰라요. 세대론을 말하는 저자로 굳힐 수도 있었을 거고요. 그런데 성과가 보장된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시대의 흐름을 잘 포착하는 것 같아요. 비결이 있나요? 

운이 좋더라고요. 겸손 떨려는 게 아니고요. 『90년생이 온다』가 2018년에 나왔지만, 2014년에 쓰려다 못 쓴 책이거든요. 제가 생각하고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다’ 싶었지만, 시장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라 그때 나왔으면 잘 안 됐을 거예요. 『관종의 조건』도 마찬가지고요. 비결이 있다면 저도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고, ‘회사’라는 현장에서 얻는 경험을 중시하면서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90년생이 온다』의 첫 제목이 ‘9급 공무원’이었다고요. 이 책의 제목은 처음부터 ‘관종의 조건’이었나요?

네. 처음부터 ‘관종의 조건’이었어요. 여러 가지 다른 안을 주셨는데 출판사를 설득했죠. 이거 아니면 안 된다고 했어요.

제목에 대한 확신이 있었나 봐요. 

잘 팔리는 제목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관심받는 조건을 이야기하는 책이니까 일단 ‘조건’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좋다는 반응이 많더라고요. 한 가지 걱정했던 건 ‘관종’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순간 부정적 프리즘이 생기지 않을까 한 건데요. 어쩔 수 없었어요. ‘관종의 조건’이라는 말이야말로 내용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관심의 조건이라고 하면 관심 못 받을 것 같았어요. (웃음) 

확실히 관심의 조건이라는 제목보다는 눈길이 가요. 

여러 가지 후보가 있었어요. ‘Attention’도 있었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도 있었고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라니 재밌네요. (웃음)

누가 “책 제목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거죠. (웃음)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에세이처럼 보일 것 같아서 안 했어요. 어그로 적당히 끌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관종의 조건’이라는 제목이 적정선이라고 생각했고요. (웃음) 

책에 ‘관심 추종자 테스트’가 나오는데요. 작가님은 어느 정도 관종인가요?

C타입 중립적 관심 활용 유형이요. 별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요. 단지 돈을 많이 벌고 싶고요. 그런데 유명해질수록 돈을 잘 벌 거든요. 이 둘 사이의 거리를 조절해야죠. 

어떻게 조절하나요?

『90년생이 온다』 저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 책 저자세요?’라고 알아주지만, 그렇다고 길을 가는데 얼굴을 알아보지는 않아요. 이게 저의 적정선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 사촌 중에 OO이가 서울대 갔어!’라고 하는 거랑 비슷한 거예요. 저를 아는 사람들만 저를 추켜세워 주는 거죠.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요. 핵심은 제가 아니라 제 책이 유명해지길 바란다는 거예요.

관심 시장에 뛰어들기 전에 어느 정도까지 유명세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고(209쪽)요. 앞서 말한 ‘균형’을 이루려면 이게 선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조금씩 해보는 거죠. 회사를 관두고 유튜브에 올인하기 전에 조금씩 찍어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해야 해요.

SNS를 열심히 하는 작가들도 많은데요. SNS가 판매량에 영향을 줘서 출판사에서 권유하거나 일부러 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작가님은 어떤가요? 

SNS를 통해서 자기 팬을 가지면 그게 성공의 기반이 되죠. 관심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적당히 하는데요. 이것도 균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 책을 직접 홍보하지는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조금 했어요. 저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해서요. 그 외에는 제가 활동하는 ‘전빨련(전국빨간자동차연합회)’ 활동사진 같은 거 종종 올리고 그래요. 



‘관심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관심 시장이 커지면서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어요. 

관심이 돈이 되니까 돈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있어요. 대중은 그걸 소비하고요. 그러면서 더 자극적인 콘텐츠가 유통되고, 이른바 ‘어그로’ 끄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책 마지막에 부분에서 관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야기한 것도 이런 것들 때문이에요. 개인이 아니라 플랫폼, 사회가 나서서 경제적으로 조절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수익이 나지 않게 제도화해야 한다는 건가요?

수익을 조절해야죠. 기회비용을 높이고 수익 가능성을 낮추는 방법밖에 없어요. 거짓말에 대한 가격이 낮으니까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왜 과격한 행동을 하느냐? 누우면 다 돈이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경제적 제재를 가해서 사회적으로 바꿔야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무관심이 답이다’라는 말로 대응하면 바뀌지 않아요. 

돈이 목표인 사람들을 돈을 못 벌게 함으로써 막는 거네요.

블로그에 이른바 ‘뒷 광고’가 생기면서 그에 따른 법규가 만들어졌거든요. 그다음 인스타그램, 유튜브로 이어졌고요. 이렇게 서서히 옮겨 간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무관심이 답’이라고 말한 지 오래됐잖아요. 그런데 그 이후로 부정적 관종들이 줄었나요?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관심 시장은 점점 커지고 그에 따르는 문제도 많아지는데 관심 문제에 관심이 없는 거죠.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법은 항상 한 발짝 느리게 따라가는 게 아쉬워요. 

왜 관심 문제에 관심이 없을까요?

다른 일이 많으니까 관심 문제까지 신경 안 쓰는 거죠. 그리고 관심 자원이 돈이 될수록 그걸 먹으려는 입들이 많아지잖아요. 돈이 벌리는데 왜 바꾸려고 하겠어요. 플랫폼 기업의 핵심이 거기 있거든요. 사람들이 점차 휴대폰에 몰두하잖아요. 플랫폼 기업이 휴대폰에 집중하게 만드는 거예요. 

휴대폰으로 모든 걸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더 휴대폰만 보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렇죠. 재미있어서 유튜브를 보기도 하지만, 유튜브가 사람들이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기도 해요. 아주 교묘하게요. 미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아직 한국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유튜브나 넷플릭스 우리를 위해서 영상이나 영화를 추천해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플랫폼에 계속 머물게 해서 돈 벌려고 하는 거잖아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어요. 

SNS가 활발해지면서 개인 브랜딩이 중요해졌잖아요. 회사에 다니면서 출간한 선배 작가로서 개인 브랜딩을 강화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 조언한다면요?

50살 이후에는 어차피 개인 사업자가 돼야 하잖아요. ‘바벨 전략’이라고 책에 쓰기도 했는데요. 양쪽을 모두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작가로서 책을 쓰지만, 현장에 있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장에 있으면서 다른 책 쓸 기회가 오기도 하고요. 

그런데 기업에서는 개인이 두드러지는 걸 원하지 않잖아요. 그런 위험과 불편을 감수할 만큼 개인 브랜딩을 할 만하다고 생각하나요? 

기업에서는 전념하길 원하죠. 그러니까 어느 정도 유명해졌을 때 회사를 나올 것인지 잘 생각해야 해요. 예를 들면 많은 유튜버가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어도 못 하고 나와요. 회사에서 못 하게 하니까요. 그런데 그분들이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나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제 첫 책이 『포스퀘어 스토리』라는 책인데 잘 될 줄 알았는데 안 팔렸어요. 회사에서는 찍혔고요. 

책이 나왔다는 이유로요?

물론 개인의 새로운 시도로 좋게 봐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사람은 다양하니까요. 그래서 잘 숨겨야 해요. (웃음) ‘척’을 잘해야 하고요. 조직마다 다른 부분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기업에서도 개인의 힘을 조직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개인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으면 장점을 살려서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쫓아낼 생각만 하면 안 되죠. 앞으로는 그걸 잘하는 일부 회사가 성공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경향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하고요. 



치열한 관심 시장에서 『관종의 조건』은 얼마나 관심받을 거라고 예상하나요?

출판사에서는 『90년생이 온다』 작가의 차기작으로 밀면서 많이 기대하고 있는데요. 저는 평균 정도 바라고 있어요. 다만 이 책이 그냥 시류 타서 적당히 쓴 책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라요. 쉬운 길은 아니었거든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임홍택

1982년에 태어났다. KAIST 경영대학에서 정보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에 출생한 신입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마주하며 받았던 충격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들을 관찰한 내용 <9급 공무원 세대>를 연재해 제5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은상을 받았으며, 이 내용이 담긴 《90년생이 온다》(2018)는 <2018년 올해의 경제/경영서>에 선정(한국경제신문, 인터파크 공동 선정)되었다. 기존 저서로는 IT 전문서적 《포스퀘어 스토리: 소셜미디어를 넘어 위치기반 플랫폼으로》(2011)가 있다. 



관종의 조건
관종의 조건
임홍택 저
웨일북
90년생이 온다 (금별색 스페셜 에디션)
90년생이 온다 (금별색 스페셜 에디션)
임홍택 저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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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조선영 “도서 MD를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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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의 생생한 글을 읽는 건 즐겁다. 그동안 몰랐던 직업의 면면은 독자의 시선을 넓히고, 덕분에 평면으로 보이던 일이 입체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20년 차 도서 MD로 일하는 조선영 저자의 『책 파는 법』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1년, 온라인 서점에 입사해 현재 예스24 도서1팀 팀장으로 일하는 조선영 저자는 “팔기 위해선 ‘뭐’든지 ‘다’ 한다”의 줄임말이라는 우스갯소리로 MD의 일을 소개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하고, 메인에 노출할 책을 선정하는 역할로 인해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깍쟁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이는 ‘뭐든지 다 하는’ MD의 업무 중 일부일 뿐. 재고가 남지 않게 관리하고, 책이 끝까지 판매될 수 있도록 책임지는 것까지 오롯이 MD의 몫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독자에게도 MD의 일은 종종 가려져 있다. MD는 ‘텀블러를 샀더니 책이 왔다’에서 텀블러를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고, 독서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한 좋은 책을 소개하기 위해 하루에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나고, 공들여 책을 고른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파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책 파는 법』을 읽고 나면 어느새 모니터 뒤에서 애쓰며 일하는 사람이 보인다. 

어쩌면 남녀노소 모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세상과 소통하는 이 시대에, 종이책을 팔고 있다는 것만큼 아날로그적인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의 서점은 웹 속에 존재하지만, 이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한다. (169쪽) 



저자의 마음을 알게 됐어요 

‘파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된 소감이 어떤가요?

온라인 MD가 하는 일에 대한 책을 써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 ‘내가 책을 쓸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쓰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도 MD로서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어요. 일단 한 번 해보면 그분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경험을 계기로 작가들의 마음을 정말 잘 알게 됐어요. 

어떤 마음이요? 

왜 마감을 잘 안 지키는지 알게 되었죠(웃음).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나서 “준비하는 책은 왜 아직 안 나오냐”고 물으면 대부분 “저자 분이 원고를 안 주신다”고 답하거든요. 그때마다 ‘도대체 왜 마감을 안 지키지?’라고 생각했는데 일부러 안 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게 되었고요. 책을 잘 홍보하고, 많이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자가 최고의 홍보 담당자다. 저자가 활약해서 책을 알려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 제가 저자가 되었잖아요?(웃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요. 책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리지 말고 다 해보려고요. 

그래서 인터뷰에도 흔쾌히 응해주셨군요(웃음).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요(웃음). 요즘은 책을 알릴 방법이 마땅치 않아요. 유명한 저자의 책이라면 출판사에서 광고 계획을 잡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어디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홍보를 해야 하는 단행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저자를 인터뷰해주는 매체도 많지 않잖아요. 실제로 책이 출간되면 마케터들은 홍보 방안으로 ‘인터넷 서점 웹진 인터뷰 요청’을 제일 먼저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책을 읽고 인터뷰를 하러 오면서 살짝 걱정했어요. ‘연말’의 ‘오후’ 약속이라서요.(인터뷰는 12월 말, 오후에 진행됐다) MD들이 제일 바쁘다는 시간이 두 가지나 겹쳤더라고요.  

원래 이 시간은 대면 미팅을 할 때라서 미팅룸이 꽉 차는데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전부 다 취소되었어요. 대면으로 하는 회의도 많았는데, 그것도 줄었고요. 또 연말에는 사업 계획을 세우고 워크숍 가서 1년 계획을 발표하는 일로 늘 바빴거든요. 이제 워크숍도 갈 수 없으니 상대적으로 예년보다는 좀 여유로운 편이에요. 

2020년 ‘올해의 책’ 시상식도 하지 못했던 거죠? 

맞아요. 『책 파는 법』에는 연말에 ‘올해의 책’ 행사 준비를 하느라 MD들이 무척 바쁘다는 이야기를 썼잖아요. 평소 같으면 지금쯤 시상식 마치고 마무리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올해는 그조차도 하지 못했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24권의 책을 펴낸 출판사와 저자에게 케이크와 트로피를 보내드리는 걸로 행사를 대신했어요. 

출간을 앞두고 무엇이 가장 고민스러웠나요? 

이 이야기가 상업출판으로 나와도 괜찮을지 의심스러웠어요. 그런데 유유출판사에서 땅콩문고 시리즈로 “~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문고본을 여러 권 펴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죠. 수많은 시리즈의 일부라면, 온라인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쯤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게 아니라 누군가가 갑자기 “온라인 서점 MD의 이야기를 써보자”고 했다면 절대 안 한다고 했을 거예요. 

또, 출판사 관계자 분들을 위해서 우리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출판사 마케터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이 온라인 서점 MD일 텐데요. 최근에 “MD를 만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한 10년 전만 해도, 출판사에 영업만 맡아서 하는 담당자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또 편집자가 독립해서 1인 출판사를 차리는 일이 많아지면서, 편집자가 마케팅, 영업까지 도맡아 하는 경우가 생겼죠. 그분들은 영업 업무도 익숙하지 않은데 MD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막상 만나도 5분이면 미팅이 끝나니까 부담을 느끼시는 거예요. 온라인 서점 MD가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지 말씀드린다면, 그 부담을 조금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페이스북에서 “1인 출판사나 신규 출판사에서 책을 살펴봐 달라고 보내는 메일에는 가능한 꼭 답하려는 편이다”라고 쓰신 글을 봤어요. 

큰 출판사는 협업해서 일할 사람이 많잖아요. 마케터도 있고, 영업 담당자가 따로 있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1인 출판사는 대표가 일당백 역할을 하는 데다가, 온라인 서점에 소개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계시는 경우가 많아요. 신규 출판사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서 가능하면 꼭 살펴보려고 노력해요. 비단 1인 출판사나 신규 출판사가 아니더라도 책 소개 메일을 보면 짧게라도 회신을 드리려고 하죠. 사실 답장을 하는 건 별거 아닌 일인데, 제가 메일 잘 봤다고 보내는 그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일일 테니까요.


 

도서 MD의 기쁨과 슬픔

표지 카피가 ‘온라인 서점에서 뭐든 다하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에요. MD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기쁨과 슬픔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매출이 많이 날 때 특히 기쁘죠. ‘이 책 잘 팔릴 거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프로모션을 준비하고, 굿즈를 만들고, 재고도 충분히 발주해 두었는데 정말로 잘 팔릴 때! 진짜 기분 좋아요. ‘내 감이 통했구나’라는 희열이 있죠. 

반대로 하기 싫은 일을 꼽자면, 저의 경우는 공급가를 협상하는 게 힘들었어요. 요즘은 도서정가제 때문에 이런 일이 없지만, 옛날에는 같은 책도 서점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거든요. 어떤 서점에서 그 책을 30% 할인하고, 우리가 15% 할인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30% 할인하는 곳에 가서 사잖아요. 그래서 MD들은 늘 가격비교를 하고, 그만큼 공급가를 낮춰야 했어요. 밑도 끝도 없이 깎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협상을 하는 게 고통스러웠죠. 요즘은 아마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당해야 한다는 게 가장 힘들 거예요. 내가 일을 열심히 안 하고, 준비를 안 한 게 아닌데 늘 비교되는 입장에 놓이거든요. ‘다른 서점은 그런 이벤트 하던데, 우린 왜 안 해?’라던지 ‘다른 서점은 책 사면 예쁜 굿즈 주던데 여기는 왜 안 줘요?’ 같은 말을 계속 듣게 되니까요.  

책을 읽으면서, 숫자로 모든 게 판가름 난다는 것도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아요. 숫자로 평가받는 게 어려운 사람은 MD로 일하기가 힘들어요. 반대로 생각하면 숫자가 명확해서 좋은 점도 있어요. 그러니까 숫자로 내 일의 결과가 드러나는 게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이 MD로 일하기에 훨씬 수월하죠. 예를 들어 제가 과거에 <채널예스> 팀을 담당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참 어려웠어요. 숫자로 이야기하는 업무만 하면서 살다가 정성적 평가를 하는 팀을 이끌어야 했으니까요. ‘한 달에 기사를 100건 쓴 기자, 기사는 몇 개 쓰지 않았지만 조회수가 높고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기사를 쓴 기자, 조회수는 낮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기사를 쓴 기자’ 중에서 누가 가장 일을 잘하는 걸까요? 이건 우위를 가르기가 힘든 일이죠. 모두 다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어쨌든 평가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척 힘들었는데요. 오히려 숫자는 간단해요(웃음). 다른 서점은 전년 대비 8% 성장했는데, 우리는 7% 성장했다고 치면 1% 더딘 성장에는 여러 맥락과 이유가 있을 테지만, 어쨌든 1% 뒤진 건 사실이잖아요. MD는 이렇게 정량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받죠. 이게 고통스러우면 MD를 할 수가 없어요. 

숫자로 평가되는 걸 즐겨야 하는 걸까요? 

그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해요(웃음). ‘어차피 매출은 하늘이 주는 거니까, 나는 오늘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지’라는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이 MD 업무에 적합하죠. 예를 들어 역사 분야가 어느 해에 크게 이슈가 되었다고 하면, 다음 해에는 어렵거든요. 어떤 분야든 연이어 큰 성장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늘 숫자로 비교당하니까, 후배 MD들이 와서 “어떡해요. 올해는 책이 안 팔려서 너무 힘들어요”라고 하소연을 하죠. 그럼 제가 “1년만 기다려 봐”라고 말해요(웃음). 특정 분야가 주목받는 것도 사이클이 있기 때문에, 그걸 버티면 다시 매출이 올라가는 순간이 와요. 물론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하기가 어렵죠. 저도 20년간 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보이는 거예요. 

세월이 가져다준 여유네요(웃음). 

저는 인문·교양 분야 MD를 오래 했는데요. 처음 입사해서 매출이 안 좋았을 땐, 다른 분야 MD가 불쌍하다고 자기 분야에 있는 책을 제 분야로 넘겨주기도 했었어요. MD들은 목표 매출을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받는데, 저 혼자만 인센티브를 못 받은 적도 있고요. 제 성격 자체가 ‘뭐 어쩔 수 없지’라고 넘기고 쉽게 잊는 편이라 그 시기를 견뎠는데, 버티다 보니 매출이 급성장하는 날도 오더라고요. MD는 멀리 내다보는 자세로 일하는 게 중요해요. 물론 한 해에 달성해야 할 목표가 정해져 있지만, 그렇다고 정성적인 업무가 없는 건 아니거든요. 매출이 안 날 땐 의미 있는 이벤트를 기획하고, 독자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는 데서 기쁨을 찾고, 매출이 잘 날 땐 매출을 보며 기쁨을 느끼면 되죠. 

출판사 관계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책이 메인에 소개되는 일일 거예요. 메인에 노출될 책을 선정하는 첫 번째 조건이 있다면요? 매출이 잘 날 것 같은 책일까요? 

최우선 순위로 매출을 삼지는 않아요. 신간 중에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책인데, 매출이 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이는 걸 추천해야 하죠. 잘 팔린다고 해서 불온한 내용이 담긴 책을 권할 순 없으니까요. 아마 모든 MD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불신의 시대인지 ‘오늘의 책’을 돈 받고 선정하는 거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는데요. 절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웃음). 

수많은 마케터를 만날 텐데, 책을 어떻게 소개하는 분들을 볼 때 설득이 되나요?

이 책이 다른 책과 왜 다른지 말씀해주실 때 솔깃해요. 예를 들어 세계사를 다룬 책이라면, 지금껏 세계사에 관한 책은 꾸준히 나오고 있잖아요. 하지만 이 책은 어떤 측면에 집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책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왜 지금 출간해야 했는지, 어떤 소구점이 있는지 설명해주시면 좀 더 귀담아듣게 되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간.결.하.게!(웃음)

중요한 포인트네요(웃음). 책을 읽기 전까지는 MD가 매일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는지 몰랐거든요. 

출판 관계자 분들이 MD를 만나고 실망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분들은 책을 몇 달, 몇 년씩 붙잡고 만들었으니 얼마나 애착이 크고,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시겠어요. 미팅을 하면서 책에 대한 반응을 읽고 싶은데, MD들은 무표정하게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고 그 마저도 5분~10분 만에 “네 알겠습니다” 하고 끝나 버리니까 허무하고 힘이 빠질 수밖에 없겠죠.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희도 줄줄이 약속이 잡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MD는 많은 사람의 주장과 바람을 듣고 그중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나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자리이기에,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할 수도 없고 무조건 안 된다고 잘라 말할 수도 없다.(51쪽)”고 했어요. 무표정의 이유는 상대가 괜한 기대를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가요?

그렇기도 하고요. 경력이 많은 MD의 경우에는 매우 다양한 사람을 만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실제로 저는 두 시간 가까이 책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도 있고요(웃음). 어느 편집자께서는 미팅이 시작되자마자 느닷없이 “74쪽” “143쪽” 이라며 특정 페이지를 펴게 하더니,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하신 적도 있어요. 너무 당황해서 페이지를 펼치고 계속 들었는데 나중에는 저에게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묻기도 하시더라고요.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서 “우리 책은 왜 노출 안 해주냐”고 전화로 항의하시는 분들도 있죠. 요즘은 이런 분들이 거의 없긴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당황스러운 일을 종종 겪게 되거든요. 이런 일이 여러 번 쌓이면 자연스럽게 처음 만나는 분은 탐색하게 되는 거죠. 

MD의 고충이네요(웃음). 

사실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단행본의 경우는 알릴 수 있는 통로가 너무 적어서, 상대적으로 출판사가 온라인 서점에 기대야 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예전에는 신문 출판면에 책이 소개되거나, 광고를 하는 것도 홍보에 효과적이었지만 지금은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요. 사실 MD를 어렵게 느끼는 분들은 굉장히 예의 바르게 저희를 대해준 분들이실 거예요. 주어진 시간에 맞게 책 소개를 하고 돌아가셨는데, 그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고 속상하신 거죠.


 

온라인 서점 화면 너머에 MD가 있다 

주변 동료, 후배 MD들이 책을 읽고 들려준 이야기가 있나요? 

꼭 사서 보겠다는 말은 많이 하는데, 아직 책에 대한 후기를 들려준 사람은 없어요. 사실 책 쓰면서 좀 걱정했어요. 팀장이 책을 냈다는 거 자체가 MD에게는 너무 부담이잖아요. 제가 MD로 일할 때 이런 상황이 있었다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라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웃음). 그래서 팀원들에게는 책 낸다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다만 이 책 담당인 인문 MD에게만 “정말 미안하다. 내 책이 곧 배본될 거야”라고 말해줬죠(웃음). 다행스럽게도 저희 MD들은 다 지각과 교양이 있는 친구들이라서 오버하지 않고 공정한 눈으로 책을 봐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인문 MD가 본부 전체에 팀장님이 책 냈다고 메일을 보내긴 했지만요(웃음). 

그동안 MD로 일하면서 판매한 책 중, 특히 애착이 가는 게 있다면요? 

갈라파고스 출판사에서 2007년에 펴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꼽고 싶어요. 출판사 대표님이 오셔서 책을 소개해주시자마자 다음날 바로 ‘오늘의 책’에 노출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분량이 많지 않고,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쉬운 문체로 쓰여 있는데 담고 있는 주제는 묵직해서 빨리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바로 올렸거든요. 제가 책을 발굴했다기보다는, 다른 서점보다 좀 더 빨리 알려서 판매가 먼저 시작될 수 있었고 내용이 워낙 좋다 보니 언론에서도 많이 소개돼 더 퍼져나갔어요. 

그리고 같은 해에 김영사에서 출간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도 잘 팔렸죠. 굉장히 두꺼운 책인데도, 유신론에 지친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서 독자들의 선택을 많이 받았어요. 리처드 도킨스를 한국에 초청하긴 어려우니까, 출판사가 국내 저자 중 책의 내용에 공감하는 분을 섭외해서 강연도 기획했거든요. 여러 프로모션을 시도했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요. 

소개한 책이 스테디셀러가 되고, 세월이 흘러 개정판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 무척 반갑겠어요.

맞아요. 그런데 MD의 추천으로 잘 팔리게 된 책이 있으면, MD보다 출판사 관계자 분들이 더 잊지 못하세요. 10년 전에 책 한 번 소개했을 뿐인데, 계속 기억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그분들과는 지금까지도 아주 사이좋게 지내고 있습니다(웃음). 

사실 치열하게 일하는 시기에는 서로 얼굴 붉힐 일도 많거든요. 책은 매일 출간되는데, 특정 출판사나 특정 저자의 책만 소개할 수는 없으니까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지난번 책은 소개 잘해주고, 이벤트도 같이 했는데 이번 책은 왜…?’라고 생각할 수 있고, MD 입장에서는 ‘지난번에는 업무적으로 손발도 잘 맞고, 즐겁게 일했는데 이번 책은 저쪽 서점에만 잘해주고 나한테는 왜…?’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웃음). 입장 차이가 있으니 얼굴 붉힐 일도 많은 게 사실인데, 또 영영 안 볼 순 없는 게 출판사 직원과 온라인 서점 MD의 관계예요(웃음).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MD의 업무에도 변화가 많았을 것 같아요. 지난 한 해가 어땠나요? 

MD의 업무 중 7할은 미팅이 차지하는데, 2020년에는 미팅을 거의 못 했어요. 가을에 잠깐 예약제로 만나다가 또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상향돼서 모든 약속이 취소됐죠. 아마 이게 가장 큰 변화일 거예요. 사실 MD들에게는 미팅이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예요. 서로 좋은 얘기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고, 소개받은 책 중 고르고 골라서 노출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거든요. 그 스트레스가 사라져서 마음이 편하다는 MD가 많았어요. 하지만 미팅을 계속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만나서 이야기하면 금방 끝날 일인데 여러 번 메일과 전화가 오고 가야 하다 보니 불편한 점도 있었거든요. 지난 한 해는 MD에게 미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어요. 

코로나로 인해 매출에도 변화가 많았죠? 

많이 성장했어요. 오프라인 서점을 찾는 사람이 줄었고, 도서관도 문을 닫은 날이 많아 책을 대출해서 보시는 분들까지 다 온라인 서점으로 몰렸거든요. 특히 온라인 수업에 필요한 학습서, 유아동 홈스쿨링 도서 등의 판매량이 높았죠. 온라인 서점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갈수록 매출이 더 상승해요. 

마지막 장의 제목은 ‘AI는 MD를 대신할 수 있을까’예요. 평소에 MD의 업무가 AI로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종종 하셨던 건가요? 

네, 실제로 고민이 돼요. 현재 온라인 서점에서는 SCM(공급망 관리)의 일부 기능만 이용할 뿐, 재고 주문과 관리 등 대부분의 업무를 MD가 판단해서 결정하는데요. 일반적인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재고 주문, 발송, 이벤트 등록과 노출 등 많은 업무를 SCM을 통해 진행하고 있거든요. 이론적으로는 도서 MD의 일도 충분히 대체 가능하죠. 물론 과거에는 MD가 일일이 손으로 하던 일이 지금 자동화된 경우도 많아요. 그럼에도 도서 MD가 줄어들지 않는 걸 보면 아직까지 MD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언젠가는 대체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정도까지 AI로 대체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고민해야 할 부분인데요. 앞으로는 자동화할 수 있는 업무를 AI에 맡기고, MD는 좋은 책을 추천하는 일에 조금 더 힘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AI가 하는 알고리즘에 의한 추천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추천이요. 동네책방을 찾는 고객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책방 주인의 큐레이션이잖아요. 서점 주인의 취향을 선택하는 셈인데요. 여러 쇼핑몰에서 고객에게 맞는 제품을 추천하는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여전히 동네 책방을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 독자가 MD에게 원하는 것도 좋은 책을 추천하는 일일 거예요. 그렇다면 MD는 거기에 시간을 더 할애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발주, 재고 관리 등의 업무는 자동화시키고, 우리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감동적인 문장으로 책을 소개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리뷰를 쓰는 건 AI가 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독자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요즘 SNS에 ‘#책파는법’ 해시태그를 검색해서 리뷰마다 ‘좋아요’를 누르는 게 저의 중요한 일과가 됐어요(웃음). 정재승 교수님이 책 『열두 발자국』을 출간했을 때,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를 검색해서 일일이 좋아요를 다 누르셨대요. 그래서 그 책 정말 많이 팔렸거든요(웃음). 전작 『정재승의 과학콘서트』가 스테디셀러라서 이걸 뛰어넘을 후속작이 나올까? 싶었는데 저자가 홍보를 하니까 반응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따라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 책이 대중적으로 읽힐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읽어주시는 독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또 온라인 서점이 출판계에서는 거대 자본이라는 느낌이 있잖아요. 가끔 검색해서 보면 저희를 매출의 노예처럼 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한 번은 ‘매출 달성 못하면 MD들 여의도 공원 달리기 한다’고 쓴 글도 봤어요(웃음). MD들은 깍쟁이라는 이미지도 많고요. 그렇지 않습니다(웃음). 책을 읽으시면 ‘온라인 서점 MD는 이런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되실 테니, 저희를 편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는 독자 분들이 책을 보신다면 ‘책 사고 굿즈 받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모니터 뒤에 사람이 있었구나. 얘네가 책을 팔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하네’라는 걸 한번쯤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책 파는 법』을 ‘오늘의 책’ 편집회의에 가져간다면, 어떤 말로 MD들을 설득해서 메인에 노출시킬 수 있을까요?

문고판이라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기 어려울 것 같지만(웃음) 그래도 소개해야 한다면요. “지금까지 온라인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해 다룬 책이 없었다. 누가 우리 이야기를 다뤄줬나? 이 책이 처음이다. 이건 온라인 서점에서 소개할 때 더 의미가 있다. 우리 이야기는 우리가 소개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겁니다(웃음). 




*조선영

학창 시절, 우등상보다 교내 도서관 최다 대출로 다독상을 받은 것이 더 자랑스럽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국어도 문학도 잘 알진 못한다. 책에 파묻혀 지내고 싶다는 단순하고 낭만적인 생각으로 온라인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정작 현실은 근 20년째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 사이에 깔려 지내고 있다. ‘유능한 도서 MD’까지는 아니어도 ‘성실하고 합리적인 직장인’으로는 기억되고 싶다. 알라딘과 인터파크도서를 거쳐 현재는 예스24 도서팀에서 일하고 있다. 



책 파는 법
책 파는 법
조선영 저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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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소영 기자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서 차오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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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부터 굶었을까?’. 반려묘를 만난 후, 비쩍 마른 길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밥을 주기 시작했고, 한 번의 관심으로 그칠 수 없어 급식소를 차렸다. 고양이 다섯 마리와 함께 살면서 매일 퇴근 후 2~3시간 고양이 급식소에 들러 먹이를 주는 사람. 10년 차 기자이자 첫 책 『살리는 일』을 펴낸 ‘캣맘’ 박소영 저자의 이야기다. 

『살리는 일』은 배우, 책방 주인, 출판사 ‘무제(無題)’ 대표 박정민의 제안으로 탄생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살리는 일’(5쪽)이라는 말을 품고 사는 박소영 저자에게 먹이를 주고, 위기에 처한 동물을 구하는 일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실천. 『살리는 일』에는 동물권에 눈을 뜬 그가 지난 5년간 동물들을 만나 사랑한 기록이 담겼다. 



거창한 이론 아닌, ‘캣맘’의 기록

출판사 ‘무제(無題)’의 첫 책이자 작가님의 첫 책이에요. 소감이 어떤가요?

신기해요. 책 읽고 동물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면서 구체적 경험을 이야기해주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내가 직접 만나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책으로 전하고, 그걸 읽고 실제로 변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고 감동해서 혼자 고무됐었어요.  

박정민 배우가 대표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잖아요. 아무래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데 좋은 점도 있고 걱정되는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보다는 박정민 대표가 혹시 배우라는 타이틀 때문에 책의 진정성이 묻힐까 봐 걱정했죠. 저는 박정민 대표가 갖는 영향력이 있으니까 그 힘으로 한 분이라도 더 읽고 변화하면 좋겠다 싶었고요. 읽게 하려고 만든 책이잖아요. 

출판사에서 제안했다고요. 제안받고 어땠나요?

밥을 주거나 동물들을 구조하는 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여러 경험을 하다 보면 차오르는 말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 말들을 어떤 식으로든 한 번은 꺼내 놓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박정민 대표가 기회를 만들어 준 거고요. 처음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들였는데 거창한 동물권 이론이나 개념이 아닌 내가 어떻게 밥을 주게 됐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떻게 나를 확장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라면 쓸 수 있겠구나, 겁먹지 말아야지 싶었어요. 

작가님의 관심, 경험이 확장되는 게 느껴졌어요. 독자들이 간접 경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캣맘뿐만 아니라 동물 구조활동이나 다른 약자를 위해 일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외롭고 고단한 활동을 하는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이 위로를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힘을 얻거든요. 

작가님의 고단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책이 비관적이라는 후기도 봤는데요.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잘 분노하고 눈물도 많거든요. (웃음) 읽는 분들이 동물의 삶과 동물권에 대해 알기도 전에 제 고단함이나 분노에 지치지 않을까 걱정했죠. 그래서 최대한 저의 감정을 덜어내고, 분노를 깎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모습도 제 일부이니 완전히 뺄 수는 없겠더라고요.

슬픔이나 분노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싶어요. 현실이 어려우니까요. 

저의 동력은 확실히 분노와 슬픔인 것 같아요. 이런 마음이 없으면 추동력이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요. 책에 쓰려다 말았는데요. 아직도 동물 학대 뉴스나 비슷한 소식을 들으면 무너질 때가 많아요. 그러지 말아야지 싶은데 잘 안 돼요. 마인트 컨트롤 하려고 노력하죠.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하나요?

예전에 어떤 인터뷰 기사에서 『아무튼 비건』을 쓰신 김한민 작가도 분노로 움직인다고 말씀하신 걸 봤거든요. 그런 걸 생각하면서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분노 없이 할 수 없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다독이죠. 그리고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분들, 김한민 작가님이나 홍은전 작가님, 동물자유연대를 떠올려요. ‘괜찮아, 내가 당장 달려가서 해결할 수 없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고 있어’라면서 진정하죠. (웃음)

낙관도 필요하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직은 더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가끔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은 이런 목소리가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가고 싶은 미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잖아요. 지금 이 정도의 상황이 된 것도 그런 목소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나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제목이 묵직해요. ‘살리는 일’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책을 내기 전부터 내 삶이 ‘살리는 일’이라는 화두로 정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카카오톡 프로필에도 써 놨고요. 채식하고 고양이한테 밥 준다고 하면 쓴소리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은근히 스트레스받거든요. 그럴 때 생각했어요. 나는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휘둘리지 말고 내 할 일을 하자고요. 그래서 책 제목도 ‘살리는 일’로 하고 싶었는데 독자들이 읽고 싶어지는 제목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고민했는데요. 내가 생각하는 걸로 속이지 말고 가야겠다 싶어서 결정했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살리는 일’은 뭔가요? 

작은 벌레나 고양이 한 마리 한 마리를 살피고, 한 끼 정도 고기 안 먹는 것처럼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사소한 행동이 다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목표보다 작은 규모의 살리는 일을 반복하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회사 생활 하면서 캣맘으로 활동하기 쉽지 않잖아요. 일상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고 있나요? 

처음에는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고 하긴 어려운 것 같은데요. (웃음) 그래도 책을 쓰기 시작한 작년 초보다는 지금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졌어요. 예전에는 고양이들을 그냥 지나치질 못했거든요. 길목에 뭐라도 꼭 놓고 그랬어요. 지금은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해요. 이를테면 카라나 동물자유연대에서도 못하는 게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자신한테 부담 주지 말자고, 우리 동네 고양이들 챙기는 것만 확실히 하자고 다독이면서 수위를 조절하죠. 체력뿐 아니라 정신력도 필요한 일이거든요. 오래 하려면 건강하게, 균형을 잘 잡아야 해요. 

말씀하신 대로 쉽지 않은 일이라 연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연대가 필요한 초보 캣맘에게 팁을 주신다면요?

동지는 꼭 필요해요. 그러니까 꼭 다른 캣맘을 찾아서 같이 활동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지역 커뮤니티에 가입하는 게 제일 좋아요. 각종 정보 외에도 밥 주는 에피소드가 많이 올라오거든요. 너무 지칠 때는 다른 분들이 올려놓은 글만 봐도 위로가 돼요. 그리고 아주 가끔 캣맘 활동에 호의적으로 반응해 주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고생하시네요’라면서요. 그런 반응을 기억하고, 잘 붙잡는 게 중요해요. 

책을 쓰면서 걱정했던 게 있다면요?

가장 조심스러웠던 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나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하는 거였어요. 실제로 비슷한 생각을 하신 독자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책을 읽고 당장 내일부터 캣맘이 되어야겠다거나 큰일을 계획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저 독자들이 우리 동네 캣맘을 이전과 다른 눈길로 바라본다던가 ‘수고한다’고 말하는 등의 작은 실천 하나라도 할 수 있으면 이 책이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캣맘’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제일 힘들다고요. 

‘까망이’라고 저랑 동생을 캣맘이 되게 한 친구가 있었는데요. 그 친구한테 집을 만들어줬거든요. 근처에 계신 경비 아저씨가 말씀해 주셨는데 까망이가 계속 거기 있으니까 오가는 분들이 싫은 소리를 많이 한대요. 발로 차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씀하시는데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저에 대한 공격은 괜찮은데요. 내가 한 어떤 일 때문에 누군가는 그걸 빌미로 괴롭힐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나요. 

그런 부정적인 반응에는 어떻게 대응하세요?

처음에는 상처도 받고, 화도 나고 그랬는데요. 사실 요즘도 마음 같아서는 성격대로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죠. 혹시 제가 없을 때 고양이들을 괴롭힐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최대한 참고, 화를 돋우지 않으려고 해요. “고양이 살찌니까 밥 주지 말라”고 하면 “아, 네 조금 줄이려고요”라고 맞장구치면서요.



“태어나면서부터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없잖아요”

책을 쓰면서 회의감도 드셨다고요.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김제동 씨가 어렸을 때 집에서 소를 키워서 소 눈이 생각나서 고기를 못 먹었다고 하신 걸 봤거든요. 그러니까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계기가 필요한데 그게 동물하고 함께 살면서 교감하지 않고서는 생기기 어렵겠다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차라리 당장 나가서 한 마리라도 더 구조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런데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책이 불씨 역할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만약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0에서 100까지 있다고 하면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0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100이 될 수는 없겠지만, 30인 사람이 50이 될 수는 있는 거죠. 여전히 책보다는 한 번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책이 직접 경험의 1/5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썼어요. 

구조한 고양이나 강아지를 입양 보낼 때는 어떤 걸 가장 중요하게 보세요?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 때까지 입양을 원하시는 분과 면밀하게 대화하는데요. 한 가지 원칙은 동물을 잘 아는 것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잘 몰라도 받아들이고 공부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많이 아는 것보다 사랑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지를 보고 잘 키울 수 있겠다 싶은 분께 보내요. 저도 처음에는 고양이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면 알게 되더라고요. 배우고 싶어져요. 

그런데 마음은 한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진심인 분과 아닌 분이 어떻게 다른가요?

입양 절차가 꽤 까다로워요. 처음에 입양하고 싶다고 문자를 받으면 이런 상황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엄청 꼬치꼬치 캐물어요. 불쾌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많이 물어보는데요. 대부분 중간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요. 예를 들어 입양계획서를 보낸다고 해놓고 안 보낸다던가, 연락한다고 하고 답이 없어요. 이런 분들이 다 정리되고 끝까지 입양하시는 분들이 한 10% 정도인데요. 전화나 문자를 해보면 이분들은 확실히 반응이 달라요. 

비건이자 캣맘으로 살면서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고요. 어떻게 균형을 찾나요?

지금은 많이 내려놨는데요. 처음에 채식한다고 했을 때는 힘들었어요. 제가 고기를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채식한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다들 놀라면서 “네가 채식을 한다고”라면서 한마디씩 하는 거예요. 예전에 누군가가 이효리 씨에 대해 일관성 없는 사람이라고 한 걸 봤거든요. 과거에 한우 홍보대사를 하고 육식하던 사람이 채식하는 게 일관성 없고 우습다는 거죠.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생각보다 동조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맞아, 왜 그렇게 일관성이 없냐’면서요.

사람은 변화하는 존재라고 쓰신 내용과 연결되는 이야기네요. 

맞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채식주의자인 사람은 없잖아요.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살다가 어떤 계기로 채식하는 거고, 변화하는 시점이 다를 뿐인 거죠. 과거의 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저를 그때의 모습으로 알겠지만, 그사이에 저는 달라졌거든요. 

새로운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한테 유독 완벽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죠. 

아주 안 좋은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지금은 구스다운 같이 동물을 이용해 만든 옷을 사지 않는데요. 2013년 즈음에 산 구스다운 패딩은 계속 입거든요. 누군가 저한테 비건이라더니 구스 다운 패딩을 입냐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전에 산 것들을 버릴 수는 없죠. 낭비잖아요. 그 옷을 만들기 위해 이미 희생된 동물들에도 좋지 않고요. 이런 식의 자기검열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쉽지 않지만, 묶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최근 들어서 동물권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서 앞으로는 조금 더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게 돼요. 

홍은전 작가님이나 이슬아 작가님 등등 여러 작가님이 목소리 내시는 걸 보면 정말 반가워요. 그런 걸 보면서 올해는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최근에 동물단체에서 개 식용 종식 문제에 대해 헌법 소원을 냈거든요. 언제 결론 날지 모르지만, 2021년에는 그것만 돼도 행복할 것 같아요. 



동물권의 목소리를 전하는 ‘스피커’가 됐으면

기자 박소영과 작가 박소영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기자 박소영이 독자들이 궁금해하면서 동시에 내가 알고` 싶은 걸 쓴다면 작가로서는 내가 알고 싶은 것보다, 꼭 해야 하는 이야기, 독자들이 알았으면 하는 걸 써요. 기자로 쓰고 싶은 기사는 주로 책, 영화, 미술, 연극에 관한 건데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두 제가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들이에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쓰는 기쁨이 있거든요. (웃음) 기자로서 그런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책과 영화도 많이 등장해요.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나 책이 있다면요?

영화 <마틴 에덴>이 좋았어요. 코로나 때문에 극장에 못 가서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요. 책은 너무 많아서 꼽기가 어려운데요. 김홍중 교수님 『은둔 기계』가 생각나요. 단상을 정리한 책인데 빛나는 구절이 많아서 좋았어요. 『짐을 끄는 짐승들』도 읽고 있는데 정말 좋아요. 일단 홍은전 작가님 추천사에서 이미 무릎 꿇었어요. (웃음) 너무 좋아서요. 

부제가 ‘동물권 에세이’예요. 독자들이 동물권을 어떻게 받아들이길 바라세요?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당하게 밥 먹을 권리, 잡아먹히지 않을 권리, 묶여 있지 않을 원리,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 실험도구가 되지 않을 권리가 동물권이에요. 

작가로서 첫발을 뗐어요.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동물권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데요. 혼자 분투하는 캣맘들이 정말 많거든요. 9년 동안 밥을 주다가 사설 보호소를 차린 분도 있고, 애린원에 있었던 개 천여 마리를 중성화 수술시킨 분도 있고요.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런 분들이 너무 많은데 스피커가 없어서 밖으로 이야기가 안 나오거든요. 제가 스피커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동물권에 대해 할 수 있는 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영화나 책을 보면서 느낀 것들을 쓰거나 미술 관련 책을 써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박소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0년째 기자생활을 하고 있다. 2016년 첫 고양이 토라를 만났고, 이후 길에서 만난 석수, 쇼코, 모리, 수리를 차례로 식구로 들였다. 친동생과 함께 10여 군데의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하는 중이다. 모든 동물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기를 바라며, 곧 그런 날이 올 거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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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성 “유아, 초등생, 한국사를 공부하면 좋은 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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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사 최태성과 스토리텔러 곽승연, 그림작가 신동민이 함께 쓴 『큰★별쌤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이 여덟 번째 이야기 ‘조선 그리고 광복’ 편으로 완결됐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그림 동화책으로 초등학생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큰★별쌤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는 1권 선사시대를 시작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시대 등 한국사를 처음 배우는 어린이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역사를 큰★별쌤과 바다, 강산이가 번개도둑을 물리치는 설정으로 재미를 더했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포인트는 숨은 그림 찾기, 글자 맞추기, 카드 게임. 부모와 함께 볼 수 있도록 ‘엄마 가이드 엽서’까지 부록으로 제작했다.

하루에 서너 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한국사를 알리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고 말하는 최태성 강사를 만났다. 



사건을 암기시키지 마세요

그림 동화책 작업은 처음이시죠? 『큰★별쌤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가 거의 2,3년에 걸쳐서 준비한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완결한 소감이 어떠신가요?

너무 기쁘고 뿌듯해요. 이렇게 책이 재밌게 잘 나올지는 몰랐거든요. (웃음) 그리고 이 책은 혼자 쓴 책이 아니라서 더 의미가 있어요. 그림을 그리신 신동민 작가님이 아마 고생을 가장 많이 하셨을 텐데요. 처음 제안 받았을 때부터 기획이 너무 좋았어요.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공부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게임 같은 방식으로 한국사를 추적해서 들어가는 추리물이잖아요. 신박한 기획이었던 것 같아요. 

6,7세부터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아이들 책이라서 더 신경 쓰셨던 부분이 있으실 것 같아요.

제일 중요한 건 “제발 어려운 용어를 쓰지 말자”는 점이었어요. 저를 포함해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자주 우를 범하는 게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시선이에요. 되게 위험한 시선이거든요. ‘이 정도는 알겠지’가 아니라 ‘이 정도는 모릅니다’. 항상!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어려운 용어를 너무 일찍부터 알려주면 오히려 역사와 더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최대한 어려운 용어를 빼고 스토리 구조로 썼어요. 스토리 안에서 역사 사실을 입혀 나가면서 흐름을 잡아야 되거든요. 이게 ‘한국사 수호대’의 첫 번째 숙제였어요. 

아이들은 ‘번개 도둑’을 찾는 재미에 푹 빠졌더라고요. 

책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제가 볼 때 번개 도둑이 진짜 주인공이에요. 번개 도둑이 하나씩 벗겨져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재미있더라고요. 흥미로운 스토리 구조가 들어오는 순간, 역사가 생동감 있게 머릿속에 들어오거든요.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느낌도 주면서요.

‘한국사 수호대’라는 제목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전문가 분들의 의견을 들었죠. (웃음) 제가 네이밍에 약해요. 전작인 『역사의 쓸모』도 그렇고 책 제목은 출판사에서 정하는 게 맞더라고요. 스토리를 잘 안고 있는 제목인 것 같아서 만족합니다.

신동민 작가님과는 두 번째 작업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책 작업을 함께한 적이 있는데 포인트를 정말 잘 잡으시더라고요.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걸 그림으로 담는 건 또 다른 일인데 너무 잘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신동민 작가님이라면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들어간 작품이에요.

요즘 아이들이 한글을 빨리 깨치긴 하지만, 유아일 때부터 역사책을 봐야 할까? 싶기도 한데요. 어릴 때부터 한국사를 알면 좋은 점이 있을까요?

너무 어릴 때부터 무리하게 역사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죠. 아이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가만히 보면 만화로 되어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굉장히 많이 읽어요. 우리 땅의 역사도 있는데 이 땅 밖의 이야기를 더 먼저 접하는 거예요. 꼭 무엇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우리 땅의 이야기도 충분히 흥미로우니까요. 요즘 부모님들을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읽히는데 『삼국유사』는 안 읽혀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자기도 어렸을 때 『삼국유사』를 안 봤거든요. 『신데렐라』, 『백설공주』 같은 책을 먼저 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손이 가요. 

아무래도 더 익숙한 것을 먼저 알려주게 되죠.

하지만 아이들이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갖고 출발한다면, 자신이 부모가 됐을 때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할 거예요. 역사를 안다는 건 우리가 인생의 어려운 선택을 할 때, 큰 도움이 되니까요. 

교사나 부모가 아이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사건을 암기시키지 않는 것. 두 번째, 연도를 외우지 않게 하는 일이에요. 역사를 싫어하는 지름길이 바로 이겁니다. 강박적으로 자꾸 암기를 시키는 부모님들이 많은데요. 부모님 세대의 학습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큰★별쌤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도 여러 개의 사건이 흐름별로 나와 있잖아요. 이 사건들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까먹어요. 그럼 ‘뭘 배운 거지?’ 생각하면서 역사무용론을 이야기 하시는데, 사건을 까먹는 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건 사건과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뭔가 나의 삶과 연결 고리를 찾는 일이에요. 내 삶에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는 무엇, 그것을 얻는 게 역사 학습의 목표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개별적인 사건을 잊는다고 해도 개별적 사건을 접근하는 과정 속에서 가졌던 내 삶에 대한 적용성. 이런 것들로부터 사람은 성장하는 거잖아요? 그럼 역사를 배운 거예요. 사건, 연도를 외우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답을 알려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자녀와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나요?

제 딸이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데요. 다른 학교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 역사 수업은 참 좋게 느껴졌어요. 수업이 끊임없이 토론으로 이뤄지더라고요. 예를 들면 ‘정도전과 정몽주, 누가 죄인인가’ 같은. 모든 수업의 70%가 이렇게 진행된다고 해요. 사실 이런 질문은 답이 없잖아요. 가끔 딸이 물어보곤 하는데, 여러 의견을 알려 주지만 답은 안 줘요. 더 찾아보라고 하면 아이는 짜증을 내죠. (웃음) 

짐작은 되지만 왜 짜증을 낼까요?

요즘 애들은 잘 포장해서 입에 집어넣어줘야 좋아하니까요. 사교육에서는 이게 너무 잘돼있으니까 아이들이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떠먹여주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하는 거예요. 딸만 해도 제가 주는 거친 방식을 너무 힘들어 해요. 아빠는 왜 늘 답을 안 주냐는 거예요. 이러니까 사교육 선생님들한테 아빠가 뒤처진다고 (웃음) 하지만 제가 답을 알려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지금 저 아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고민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고요. 그래서 딸한테 러프하게, 터프하게 알려주는 불친절한 역사 선생님이에요.

『큰 별쌤 최태성의 초등 별별 한국사』는 딸아이를 생각해서 쓴 책이라고 들었어요.

아빠 수업을 재미있어 하진 않지만 자꾸 물어보긴 하거든요. 그래서 딸아이에게 의미 있는 역사 이야기를 조금 쉽게 접근하고 싶어서 쓴 책이에요. 『큰★별쌤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가 유아용이니까 이 책을 본 다음에 보면 좋을 책이에요.



만화 작가 김연큐 님이 그림을 그린 『최태성의 만화 한국사』도 최근에 출간됐어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분들께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만든 책이에요. 최대한 시험에 많이 언급되는 부분을 만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작업했어요. 사실 독서를 위해서는 만화를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상상력을 많이 제한시키니까요. 『큰★별쌤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도 유아용 책임에도 불구하고 글밥을 그래도 많이 넣은 건,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부모로서 가장 많이 챙겼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다르게 생각하기’를 강조하려고 했어요. 언젠가 딸아이가 ‘아빠, 홍익인간이 뭐야?’라고 묻는 거예요. 그럴 때 뜻을 설명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건국 이념 아래 나라를 세웠어. 그러니까 너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간을 자꾸 고민해보고 실천해보면 어떨까?”라고 말하는 거예요. 역사와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역사와 자신의 삶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면, 인생이 풍부해지잖아요.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영웅’이라고만 말하잖아요.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어요.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 건 아니죠. 이렇게 보여지는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아픈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을 거라는 것. 이런 점도 놓치지 말자고 종종 이야기했어요. 당시에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싹이 피어날 거예요. 

요즘 아이들이 학교도 자주 가지 못하고, 모든 걸 비대면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가정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방법이 있을까요?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아이들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건 독서인 거 같아요. 요즘 애들이 집안에서 정말 힘들어 해요. 그래서 자극적인 영상이나 스토리를 진통제처럼 흡수해요. 잠깐 기분은 풀릴 수 있지만 진통제는 어디까지 진통제거든요. 사람의 이야기를 눈으로 보지 못할 땐, 책으로 접했으면 좋겠어요.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는다면 좋을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사 음성 도서를 만들기 위해 녹음 중인 최태성 강사.
2019년 5월 첫 녹음을 시작으로 재능 기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주는 ‘역사’

성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많이 하시죠? 요즘에는 어떤 주제로 강연 요청이 들어오나요?

코로나 바이러스. 그러니까 국난 극복의 역사를 알려달라는 분들이 많아요. 과연 우리 선조들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의 사례 같은 거죠. 2019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었잖아요. 그때는 대한민국 탄생의 역사를 주로 이야기했다면, 2020년은 국난 극복입니다.

30, 40대를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말을 많이 해요.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제발 우리 시대에 멘토를 갖지 말자는 말도 많이 해요.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어떤 모습들은 미디어를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 포장된 모습들이 많잖아요. 검증이 아직 안 된 거예요. 사람들이 정말 좋아했던 많은 유명인들이 얼마 후 사건의 중심이 되고 뉴스에 나오잖아요.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저 역시 저를 다 몰라요.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으로써의 역사 속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검증이 됐단 말이에요. 물론 시대에 따라 평가가 또 달라질 수도 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사람보다는 검증이 됐죠. 그 사람들의 삶은 A부터 Z까지 이미 나와있잖아요. 순간순간마다 이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우린 다 알 수 있단 말이에요. 이렇게 검증된 멘토가 오히려 더 안정감이 있지 않을까 해서 30, 40대 분들한테는 그런 멘토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시라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유튜브에서 두 개 채널을 운영하고 계세요. 한국사 인강 전문채널 <최태성 1TV>와 한국사 교양 전문채널 <최태성 2TV>. 최근에는 예스24 수험서 자격증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교재 수익금의 일부와 유튜브 광고 수익금을 기부하셨어요. 굉장히 즐거워 보이시더라고요. 

너무 재밌오요. (웃음) 유튜브는 확실히 여러 세대와 소통할 수 있어요. 구독자들을 보면 20, 30대가 압도적이지만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모두 보세요. 라이브 방송할 때 채팅창을 보면 너무 재밌어요. 3대가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종종 보여요. 수익금은 교재를 만들 때부터 독자분들과 약속했고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점점 인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2020년에 49만여 명이 응시했어요. 매년 50만 명이 보는 시험이니 어마어마하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6급부터 1급까지 단계별로 있으니까 도전하게 되는 거예요. 또 국가와 관련된 일을 하려면 무조건 이 자격증이 있어야 해요. 나중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내 실력도 테스트해볼 겸 보는 거예요. 

지금 인터뷰를 하는 시간이 오전인데, 벌써 두 개 스케줄을 마치고 오셨다고요. 그런데도 굉장히 활기차 보이세요. (웃음)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편이신가요?

그런 것 같아요. 역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에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우리는 오늘 벌어진 일, 어제 벌어진 일 거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요. 적어도 역사는 100년은 되어 봐야 기본 전제를 바라보는 거기 때문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는, 역사는 결론적으로 볼 때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거든요. 오늘 벌어진 가슴 아픈 사건들이 속상하지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또 고쳐 나가면서 좀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책도 쓰시고, 강의도 하시고, 유튜브도 하시잖아요. 일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오늘 인터뷰를 오면서 이런 댓글을 읽었어요. “제 인생은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 제가 볼 때는 너무 과한 분에 넘치는 댓글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분한텐 제 강의가 어떤 자극이 된 것 같아요. 건강한 자극을 받았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저도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시간을 달려가고 있는데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건 돈을 남기는 것도 명예를 남기는 것도 아니에요. 가장 의미 있는 건 내가 사는 사회에 건강한 가치를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조금은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너무 감사해요. 



2019년에 출간된 『역사의 쓸모』도 반응이 정말 좋았습니다. 다른 책도 준비 중에 있으신가요?

책 쓰는 일이 진짜 영혼을 갈아 넣는다는 표현이 맞더라고요. 매년 책을 내는 분들을 보면 너무 존경스러운 거예요. 한 번 쓰고 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되거든요. 마치 껍데기가 되어버린 듯한. 분명히 외향은 있지만 텅 비어버린 느낌? 그 텅 비어버린 것들을 채워야 하는데, 저는 그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출판사에서 제안이 많이 오는데 아직 엄두가 안 나요. 시간적 여유도, 제가 채워지는 시간도 필요해서요. 그런데 조금씩 묘한 느낌이 들어요.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을 때, 절대 다시는 안 낳는다고 하다가 아이가 크는 걸 보면 너무 예뻐서 또 낳고 싶다고 생각하잖아요. 지금 제 마음에 딱 그래요. 탈고하고 나서 다시는 안 쓴다고 했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이런 얘기는 좀 쓰고 싶은데?!’ 요런 생각이 들기 시작해요. (웃음)




*최태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광고등학교 등에서 20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EBS 한국사 대표 강사로서 학생들에게 ‘웃으며 듣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한국사 명강의를 선사하고 있다. 현재는 이투스에서 무료 온라인 강의 사이트 ‘모두의 별★별 한국사’를 열어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KBS 1TV <역사저널 그날>, KBS 라디오 <박은영의 FM대행진> 등 각종 매체에 출연하였으며, 다양한 강연을 통해서도 한국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 1
최태성의 한국사 수호대 1
최태성,김지원 글 | 신동민 그림
메가스터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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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서효인 시인 “아무튼 ‘오마이걸’을 쓸 걸 그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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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이다! 오마이걸에 진심인 작가가 쓴 에세이” 『아무튼 인기가요』를 읽고 독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서효인 시인은 매주 가요 프로그램을 보고, 신곡을 찾아 헤매는 K-POP 애호가다. “이글거리는 마음의 갈피를 찾지 못하던” 학창 시절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보다 적당히 옛것이 좋기도 한”지금까지, 그는 여전히 인기가요를 듣는다. 그의 하루를 북돋우고 위로하는 “3분의 세계”가 책 한 권에 모였다. 

노래 이야기를 하면 시커먼 밤도 새하얗게 샐 수 있다. 당신과 하루 정도는 그랬으면 좋겠다. 그게 지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물보라가 일어난다. 살짝 설렌다. 오마이걸의 <Dolphin>을 듣고 자야겠다. 

안녕, 나의 3분. 안녕, 나의 모든 것. - 174쪽 



내 취향은 B플러스 감성

‘아무튼 시리즈’ 책 날개에 쓰인 근간의 지박령이었다고요(웃음). 출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책이에요. 

아무튼 시리즈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 계약을 했는데요. 회사 다니고 하다 보니 원고 작업이 계속 미뤄졌어요. 제가 게으른 탓이죠(웃음). 

드디어 출간되었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후련하기도 하고, 더 잘 썼어야 한다는 아쉬움도 있어요.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았거든요. 좋아하는 마음을 다 담는 건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던 거 같아요. 애초에 불가능한 도전이었으니, 이 정도에 만족하자고 생각했죠. 

‘인기가요’를 주제로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책을 계약할 당시에는 아무튼 시리즈가 출간되기 전이라서 물성이 없었는데, 좋아하는 걸 쓰면 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사소하고 누구도 쓰지 않을 법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에세이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제가 좋아하는 것 중에는 암흑의 영역이 있고 밝은 영역이 있는데요(웃음). 전자가 야구라면 후자는 가요예요.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를 썼으니까 이번에는 가요로 써보자 싶었죠.  

책에 쓰지 못해서 아쉬운 이야기도 많았다고요. 

책에는 1990년대 가요와 최근 가요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거든요. 2000년에서 2010년 사이에도 좋은 노래가 많은데 다 담지 못했어요. 군대에서 자주 들었던 ‘보아’의 노래를 포함해 SM엔터테인먼트 가수의 노래를 별로 안 썼더라고요. 아마 취향의 영역일 텐데요. 책에 제 취향은 “B플러스감성”이라고 썼잖아요. SM엔터테인먼트의 가수들은 늘 A 플러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관심에서 살짝 빗겨 나간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서태지보다 양현석이 좋고, 이효리나 성유리가 아닌 이진을 좋아하는 B플러스 감성이요(웃음). 남과 다르고 싶은 마음일까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어요. 물건을 사거나 브랜드를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죠. 친구들이 다 나이키 살 때 저는 혼자 리복 샀거든요(웃음). 남들이 다 좋아하는 것에서 약간 다른 선택을 하는 건, 가장 쉽게 나를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런데 또 너무 달라지기 싫은 두려움이 있어서 완전히 남다른 선택은 못하는 거죠. 주류에서 약간 비껴가고 싶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떨어지고 싶지는 않은 비겁한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보통 출퇴근 시간에 가요를 자주 듣잖아요. 매일 아침 BGM을 선곡하는 기준이 있나요? 

아침에는 바쁘니까 주로 유튜브 뮤직에서 나만의 믹스를 듣고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어떤 노래가 새로 나왔는지 탐색하는 시간을 가져요. 탐색은 벅스뮤직으로, 플레이는 유튜브 뮤직으로 합니다. 

“노래는 날씨다. 날씨는 노래가 된다.(89쪽)”고 했어요. 마침 어제 눈이 펑펑 왔는데, 눈이 오면 생각나는 노래가 무엇일지 궁금해요. 

핑클의 <화이트>요. 아내랑 연애할 때 노래방에 갔는데 아내가 <화이트>를 불렀거든요. 그런데 성유리 파트까지는 잘 부르고, 옥주현 파트에서는 음이 안 올라가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목소리가 성유리 닮았다고 놀렸던 기억이 있어요. 요즘 가요 중에는 이하이의 ‘For You(Feat. Crush)’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제 눈이 오면 설레는 마음보다 귀찮고 싫을 때가 많은데, 이 노래를 듣는 동안에는 낭만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좋은 노래, 같이 듣자”고 말하는 책 

그룹 ‘오마이걸’에 대한 이야기가 책을 열고 닫더라고요(웃음). 혹시 리뷰 보셨어요? “이 작가 찐이다, 오마이걸에 진심이다”라는 내용이 있었어요. 

봤어요. 사실입니다(웃음). 

오마이걸이 특별히 좋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마이걸이 처음 데뷔했을 당시에 황인찬 시인이 “형이 좋아할 거 같은 그룹이 있다”고 얘기해줬는데요. 무대를 찾아보고 “무슨 소리 하냐. 난 아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마치 교통사고처럼(웃음) JTBC <투유프로젝트 슈가맨>에서 오마이걸 멤버 승희와 미미가 유피(UP)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는데 참 좋더라고요. 이후에 앨범 <WINDY DAY>가 발매됐고 노래와 뮤직비디오 모두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좋아하게 되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주일이 내게 주어진다면 저녁마다 가요 프로그램을 볼 것이다”라고 했어요. 가요 프로그램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가요프로그램 MC들의 독특한 화법이 있어요(웃음). 그걸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요. 출연한 가수들의 순서를 보는 것도 좋아해요. 보통 신인은 앞에 등장하고, 인기가 있을수록 마지막에 나오거든요. ‘작년에는 저 가수가 앞에서 두 번째에 나왔는데, 이제 중반부에 나오네? 10위 했네?’ 이런 변화를 보는 것도 즐거워요. 못 보던 신인이 나오면 이 그룹 뜨겠다, 못 뜨겠다 같은 걸 예측하는 것도 재미있죠. 가요를 좋아하고 무대를 봐 온 구력이 있다 보니까 정말 제가 생각한대로 흘러갈 때가 많아요. 제가 가요 프로그램 보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으면 아내가 “어디 가서 연예기획사 대표인 척 하지 말라”고 하죠(웃음). 

각 장 마지막에는 내용에 등장하는 노래를 모은 플레이리스트가 있어요. 

‘좋은 노래, 같이 듣자’는 의미로 수다를 떠는 책이니까요. 독자분들과 함께 듣고 싶어서 플레이리스트를 넣었어요. 요즘은 『아무튼 인기가요』 덕분에 그 노래 들었다고 말씀해주실 때 제일 좋아요. 

요즘 특히 꽂힌 노래가 있나요? 

최근에는 ‘이달의 소녀’ 앨범을 잘 듣고요. ‘스트레이키즈’의 <Back door>도 좋아요. 제가 남자 아이돌 노래에는 잘 안 꽂히는데 이건 좋더라고요(웃음). ‘골든차일드’와 ‘비비(BIBI)’ 앨범도 잘 듣고 있어요. 

중년 남성이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면 흔히 돌아오는 반응이 있을 것 같아요. 

일단 분위기가 좋아져요(웃음). 재미있으니까요. 요즘은 아이돌 가수의 수준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가요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걸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요. 아이돌 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곳곳에 K팝 팬들이 정말 많거든요. 씬 자체가 커지고 다양화돼서 팬 층도 폭넓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아이유의 노래 <시간의 바깥>을 주제로 쓴 ‘시간의 바깥에서 만나’에는 최근 몇 년 사이 세상을 떠난 아이돌 가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어요. 마지막 플레이리스트를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남성으로서 아이돌과 그들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수많은 아이러니를 동반하거든요. 아이돌 가수는 대상화되기 쉬우니까요. 나쁜 방식으로 가수를 소비하며,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죠. 캐릭터 이면에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깜빡 잊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이돌 가수들은 10대에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서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사회생활을 하잖아요. 휘몰아치는 시간에 비해 심리적인 서포트는 너무 미미한 현실이 안타까워요. ‘시간의 바깥에서 만나’에 쓴 이야기는 제가 노래를 틀고 출근하면서 실제로 느낀 감정이었어요.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가수 故서지원 씨의 노래들이 나왔는데요. 그걸 보고 ‘1990년대에서 지금까지 변한 게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돌 음악을 좋아하는 만큼, 안타까운 마음도 커요. 



가요가 채우는 일상의 빈틈

1990년대 가요도 많이 등장해요. 과거를 회상하는 작업은 어땠나요? 

‘기억’은 에세이를 쓸 때 늘 화두예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부분은 왜곡되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하는데요. 에세이는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쓰는 장르이지만, 어쩔 수 없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흐릿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쓰면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죠. 최대한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의 인기가요를 다룬 글은 밝고 경쾌한데, 과거의 인기가요를 다룬 글은 대부분 씁쓸하고 어두웠어요. 

1990년대를 응답하다 시리즈 감성으로 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배제한 내용이 많았어요. 개인적 경험은 글로 풀어냈지만, 90년대를 기억하는 대다수의 사람이 공유할 추억은 쓰지 않았죠. 저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요. 그렇게 낭만적이고 그리워할 만한 시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시절이었죠. 그 야만과 폭력을 잘 해결하지 못한 채로 2020년까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3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에 비례하는 만큼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선으로 1990년대를 봤기 때문에 씁쓸한 내용이 많았죠. 

인기가요에게 특히 고마운 순간이 있다면요. 

저희 집은 ‘파주’고 회사는 ‘강남’이라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량 걸리는데, 이때 가요가 없으면 뭘 했을까 싶어요. 어떤 사람들은 전철에서 책도 읽고, 그날 해야 할 업무 생각도 한다는데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웃음). 가요는 너무 열심히 하고 싶지 않은 모든 순간마다 늘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하든 10~20%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이 책은 일을 하거나 공부할 때, 청소할 때 가요를 틀면 생기는 빈 공간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 10~20%의 자리를 가요가 채워주지 않으면 일상의 100%를 완성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아무튼 시리즈를 한 번 더 쓴다면, 떠오르는 주제가 있나요? 

중간에 집필하면서 그런 생각했어요. ‘그냥 아무튼 오마이걸이라고 할 걸.’(웃음) 멤버 한 명 한 명, 무대, 앨범에 대해 써도 재밌었을 거 같아요. 아니면 다른 분께서 ‘아무튼 뮤직비디오’를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가요의 여러 요소 중 뮤직비디오를 가장 좋아하거든요. 

좋아하는 뮤직비디오 소개해주세요. 

야외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를 좋아해요. 오마이걸의 <윈디데이>, 에이핑크 <리멤버> 등이 있죠. 마마무의 <별이 빛나는 밤>, 태연 <I> 뮤직비디오는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는데 정말 명작이에요.

코로나 시국이 시작된 이후로 나온 뮤직비디오는 거의 세트 촬영이라서 아쉬워요. 최근 노래 중 가장 아쉬웠던 건 에이프릴의 <Now or Never>이에요. 그 노래의 분위기로 보면 최소한 발리까지는 가야 할 텐데, 국내 해안가 풀빌라 펜션 같은 곳에서 촬영했더라고요. 코로나 시국이 정말 원망스럽죠. 

『아무튼 인기가요』를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어떤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같이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요. 음악 말고 노래. 아마 가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친구와 수다 떨 듯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읽고 나면 자기 안에 있는 노래에 대한 이야기도 떠오를 것 같고요.

 


마지막으로 오마이걸에게 한마디 해주세요(웃음). 

오랫동안 활동해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아마 멤버들의 20대 초반, 중반, 후반의 모습이 다 다를 텐데요. 오마이걸의 다양한 모습을 오래도록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서효인

시인, 출판 편집자 그리고 가요 애호가. 시를 짓고 글을 쓰고 책을 꿰며 산다. 그 사이사이에 노래를 듣는다. 198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2006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매일같이 여러 책을 만나고 붙들고 꿰어서 내보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무튼, 인기가요
아무튼, 인기가요
서효인 저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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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심윤경 “인간은 추하지만 물건은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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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심윤경 작가는 우연히 노랗게 변색된 앨범에서 어린 자신이 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을 한 장 발견한다. 할머니 뒤편으로 유럽식 탑과 흰 톱니 모양 테두리의 창문이 있는 대저택이 찍혀있었다. 그 아름답고 눈에 띄는 저택이 왜 사라졌을까. 이 질문이 8년을 소설가의 마음에 남아 한 편의 소설 『영원한 유산』이 되었다. 소설은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저택 ‘벽수산장’이 1966년 식목일에 불이 나는 실제 사건을 향해 나아간다. 주인공 ‘해동’은 해방 이후 벽수산장에 둥지를 튼 ‘언커크(UNCURK,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외교관 ‘애커넌’의 통역비서이자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24살의 나이에 어린 해동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가슴에 품은 인물이다. 이 외로운 인물이 갑작스레 저택에 등장한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을 지켜보며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 하는 것인지”(235쪽) 고통스럽게 자문한다. 심윤경 작가는 소설을 통해 적이라는 것, 적이 남긴 유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많이 생각했다며 한 사회가 할 수 최선의 있는 일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택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래 준비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바로 오는 작품이었어요.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저택이라는 소재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은 저택의 존재를 알자마자 느꼈어요. 2012년이었는데요. 이렇게 아름답고, 눈에 띄는 것이 존재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그 일 자체로 아주 흥미롭고, 소설적으로 중요한 소재가 되겠다는 사실은 바로 알았죠. 그런데 그냥 저택이 있었다 사라졌다는 사연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어요. 이 소설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저택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많았고요. 그러다 2019년 무렵 여러 뉴스를 보면서 정리가 됐어요. 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 명예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라는 것이 저택에 기대 할 수 있는 이야기겠다 생각했어요. ‘적산(敵産)’이라는 것이 중요한 키워드구나 깨달았던 거예요.  

말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저택을 소설에 복원하기 위해서는 취재가 중요했겠죠? 크고 작은 이야기를 끌어오기까지 취재를 하는 데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동네에 떠돌았던 ‘저택에 귀신이 나온다더라’는 소문 같은 것은 이야기에 아주 몰입하게 만드는 내용이었어요. 

주로 기댄 건 뉴스라이브러리예요. 옛날 신문들 가운데 윤덕영과 그의 가족들, 저택 또는 친일파 등의 키워드로 찾아 읽었어요. 당시 신문 논조가 정말 자유로웠더라고요.(웃음) 윤덕영이 ‘능참봉(조선 시대 각 능(陵)의 일을 맡아 보던 벼슬 이름)’ 작위를 팔아먹다가 고소를 당해서 ‘시종원경’ 작위를 빼앗기고 크게 망신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에 대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얀 양복을 입고 고개 뻣뻣이 세우고 법정에 나왔다”라는 내용을 신문이 아주 시니컬한 말투 그대로, 요즘보다 훨씬 가리지 않고 적었더라고요. 저택에 대해 “저렇게 화려해도 사람들은 귀신이 붙었다고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내용도 다 신문에서 찾았어요. 당시 사람들이 갖는 저택에 대한 정서가 그랬구나,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가깝게 느끼지 않고 아주 재수없다고 생각했구나, 라는 걸 느낄수록 참 재미있었어요. 

이 소설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지는데요. 우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찍 죽고 만 아버지에 대한 해동의 감정을 담은 이 말, “좀더 약게 살 줄 몰랐던 그들의 실패와 요절은 해동에게 어느 정도 원망의 마음을 남겼다”(59쪽)라는 부분이 탁 걸리거든요.  

아버지가 했던 일, 그 결과 돌아가신 사실에 대해 해동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건 고모의 “장한 애였다”라는 한 마디뿐이죠. 그것 외에 해동은 집도 없고, 부모도 없는 고아예요. 부모만 있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고요. 어째서 내 부모는 나를 낳아놓고 거두질 못했는가, 하는 대상 없는 원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렵게 지낸다는 뉴스가 있잖아요. 긍지를 키울 수 있는 어떠한 감사나 존경의 표시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동은 고모의 “장한 애였다”라는 말을 생명줄 삼아 차츰 약지 못했던 부모에 대한 원망을 극복하잖아요. 얼마나 목숨을 건 선택이었는가를 자신도 알게 되면서 말이에요. 주변의 인정이나 역사를 바꾸는 영향력 같은 문제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존엄을 걸고 한 일로써 부모의 선택에 서서히 존경심을 품게 되고, 결국 그러한 선택을 해동 자신이 이어 받거든요. 그 과정을 최대한 그리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을 갖기가 어려운 건 충분히 긍지를 가져야 할 상황임에도 번번이 그것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주변 상황 때문인 것 같아요. 고모의 아들인 해동의 고종사촌형도 해동의 아버지 일을 쉽게 비하해버리잖아요. 

자긍심은 혼자 힘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주변의 도움이 정말 필요하고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표시해야 하는 사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해요. 그런 마음을 많이 잊고, 가볍게 넘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그 이유에서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의 뻔뻔스러움에 더 경악하게 되는 거죠. 

그렇죠, 아버지 윤덕영을 추사 김정희에 비견하고,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서 저택을 만든 것이라고 하는 식인데요. 우리가 적에 대해 너그러움을 가지기 힘든 이유는 그들이 야비하기 때문이잖아요. 해동이 어떤 포용의 마음을 가지려 해도 윤원섭이 하는 꼴을 보면 있던 자비심도 사라지는 거죠. 그 시대 사람들이 하기 힘든 생각이지만, 해동은 저택을 충분히 소중히 여기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데요. 결국 그 생각을 목소리로 내지 못하게 한 것은 윤원섭이에요. 윤원섭을 보면 도저히 저것이 아름답다고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지잖아요. 적들의 저 야비함, 천박함이 우리가 적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이유임을 윤원섭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우리가 적을 포용하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신축시켜야 하는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윤원섭으로 보여주려고 했어요. 

언니에게 맞았다든가 하는 윤원섭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여준 이유도 거기에 있을까요? 

어떤 악행을 한 인간에게도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범죄자 신창원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 단 한 번이라도 “너 착한 놈인 거 안다”는 말을 해줬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말을 듣고 정말 충격 받은 적이 있어요. 신창원 정도의 인생이라면 중고등학교 때 이미 유명한 비행청소년이었을 텐데 그 마음 속에 누가 나 착한 것을 알아봐줬으면 하는 욕망이 있었다는 것이 가슴 아프게 들렸어요. 그리고 그가 착했던 순간도 있었던 거겠죠. 누구도 한 면만 갖고 있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다 역사가 있고 여러 감정과 생각의 복합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그렸던 거예요. 윤원섭 같은 사람은 일평생 얄밉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싫었고요. 절대로 고생과 고민이 없는 인생은 없잖아요. 그것이 우리가 놓치는 중요한 존중의 포인트라 생각했고요. 윤원섭 같은 얄팍한 자아에게도 측은지심의 포인트가 있다, 또 누구에게나 그 포인트는 있다는 거예요.

 


명예를 지키는 순간 가장 외로워진다

적산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작가님의 고민이 담긴 부분이 또 있어요. 나라 전체가 잘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올바른 사람들이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큰 이익인가, 라는 해동의 물음이 그것이죠. 

생각했던 건, 사람은 명예를 지키는 순간 가장 외로워진다는 거였어요. 명예를 지켜야 하는 순간에는 정말 큰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은 그것을 바보짓이라고 비웃을 거예요.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해요. 사실 그것은 개인의 명예라기보다 세상의 명예거든요. 그러나 윤덕영, 윤원섭이라면 그런 선택을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어쩔 수 없다면서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런 인생이 되는 거죠. 결국 온 세상의 명예를 내가 짊어지게 되는, 나만 아는 순간의 외로움이 있는데 그 외로움을 해동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직장, 즉 월급으로. 해동 역시 차마 결단을 못 내리고 오랫동안 망설이잖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려놓아요. 그럴 때 보통 사람이 얻게 되는 숭고함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이 그나마 명예롭고 조금 나은 곳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결말 고민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해동이 불 타버린 저택을 보다가 “축복도 저주도 남기지 않고”(275쪽) 돌아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데요.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이 저택이 1966년에 불이 나서 1973년까지 그냥 폐허로 내버려진 채로 있었거든요. 이 저택을 존치할 것인가, 없앨 것인가 하는 논란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있었을 거예요. 그 논란을 언급은 하고 싶은데 불이 난 후로도 소설을 이어간다는 것이 상당히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타이밍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불이 났을 때 해동이 무척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으로 넣게 된 거죠. 저택에서 일하는 ‘팔묵 영감’도 같잖아요. 저택을 욕은 하지만 실제로 큰 타격을 입었을 때는 인지상정으로 마음 아파 해요. 더구나 그 저택이 워낙 거대하고, 특이해서 눈에 띄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은 못했어도 설마 저게 그냥 없어지진 않겠지, 라고 생각은 했을 것 같거든요. 그것을 말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해동이 황망해하는 모습 정도로만 처리를 했어요. 

“인간은 추하지만 물건은 아름다운 것”(253쪽)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네요. 작가님 개인의 생각은 어떤 건가요? 책에 나오지만 한쪽에서는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정말 없애야 할까 생각도 하는데요. 

저는 아름다운 것이 지금도 우리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요.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있었고, 이런 인물이 있었고, 그가 이런 것을 남겼다, 라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가 아닌가 싶어요. 그 저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들 윤덕영이 숭상했던 친일의 정신을 우리가 배우진 않을 것 같거든요. 그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에요. 그런 사람이 있었고, 그가 이것을 남겼다는 걸 보여주면 사람들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할 거예요. 저는 정직한 것이 한 사회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하나의 생각만을 남기고 이외의 생각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사회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회, 둘 중 어느 사회가 더 건강하고 강한 사회일까요?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같아요. 

그나저나 해동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 한 명이 없는 외로운 인물이잖아요. 친구 한 명도 주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웃음) 

해동은 외로운 사람이 맞아요. 간당간당 이어진 사람들만 있죠. 그 간당간당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웃음) 보통은 그것도 중요하냐고 반문할 관계가 해동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요. 이를테면 고모가 그렇고요. 고모가 간당간당 사라질 무렵 차례를 이어받듯 진형이 나타나잖아요. 그들의 지지에 기대서 해동은 자기 정신을 수습하고 힘을 얻고 살아가요. 



한없이 외로운 인간인 해동

이 작품에서 독자들이 이 장면은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게 있나요? 작가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을 갖는 장면은 고모가 돌아가신 이후에 해동이 장래의 처가 식구들에게 섞여 들어가는 장면이에요. 그토록 외로운, 천애고아인 그가 대가족 안에 뚝 떨어져서 왁자지껄한 어떤 순간을 보내는 그 장면이 좋아요. 해동에게는 축제 같은 일이고, 꿈만 꿨지 처음 겪어보는 일이잖아요. 정말 한없이 외로운 인간인 해동을 위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축제여서 그 부분이 참 마음에 들어요. 

책 보도자료의 첫 줄에 “작품에서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잖아요. 작가님의 작품을 계속 따라 읽은 작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보고 ‘어? 그런가?’ 생각했어요.(웃음) 쓰면서 동어반복하는 것 같다, 맨날 똑같은 인물들이다, 라고 스스로 느낄 때가 많거든요. 그걸 벗고 싶은 욕망이 강하니까 어떻게든 변화하려고 많이 애쓰는 편이에요. 그래서 독자 분들 입장에서는 작품의 분위기가 확확 변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는 감사한 이야기죠. 제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된 부분은 ‘믿는 것에 뒤통수 맞은 인간의 반응’이에요. 믿은 것이 배신한다는 중요한 컨셉을 한쪽에 늘 갖고 있고요. 자기가 믿어온 세계를 떠나 보내고, 새로운 것을 찾아 기준을 세워야 하는 인간의 고군분투가 제 거의 모든 작품에 담긴 인간상 같아요. 

최근작인 『영원한 유산』 『설이』만 두고 생각해봐도 말씀하신 내용이 읽히네요.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뒤통수를 맞지만 나를 믿는 아주 작은, ‘간당간당’의 관계만 있어도 나는 회복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거죠? 

정확하게 짚어주셨어요. 중요한 줄 몰랐던 간당간당하는 지지에 기대서 사람은 큰 배신을 이겨내고 다시 나로 서게 되는 것 같아요. 『설이』 때는 이모였고, 『영원한 유산』에서는 고모죠.(웃음) 지지자들이 중년 여성으로 나타나는 건 그런 지지가 대저택처럼 눈에 확 띄고 누가 봐도 든든할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본인이나 주변 사람조차 있는 줄도 모르는, 중요한 줄도 모르는 그런 것이기 때문일 거예요. 너무나 일상적이고, 미미하고, 소박하고, 하잘것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인데요.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생각해요. 



덧붙이자면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그런 고모와 이모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누군가에게 믿음을 보여주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역할인 것 같아요. 

『설이』나 『영원한 유산』 모두 주인공이 친구나 가족이 없죠. 그들에게 중요한 지지가 되는 것은 그냥 이웃이나 다름 없는 아주 느슨한 관계 안에서의 지지거든요. 사실 내 가족 안에서, 내 자식을 잘 키우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주 분투하고 있잖아요. 그건 힘과 에너지가 되게 많이 드는 일이고,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죠. 그러나 그것에 비하면 누군가에게 든든한 이웃, 믿음직한 아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은 훨씬 에너지가 적게 들지만 효과는 굉장히 좋은 일이에요. 그 정도의 사람은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어요. 그것도 쉽게요.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야말로 정말 좋은 사회라고 생각해요.


 


*심윤경

1972년 서울 출생.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대학을 졸업 후 얼마간의 직장생활을 거쳤으며, 1998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02년 자전적 성장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제7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달의 제단』으로 제6회 무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이현의 연애』 『서라벌 사람들』 『사랑이 달리다』 『사랑이 채우다』, 동화 『화해하기 보고서』 등을 펴냈다. 『설이』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공 동구와 세상 아이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쓴 작가의 두 번째 성장소설이다. 



영원한 유산
영원한 유산
심윤경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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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잃어가는 느낌을 아는 독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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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아는 것이 친밀함이 아니다

작년 2월 첫 에세이 『한 몸의 시간』이 출간되고, 소설은 꽤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셨나요?

많은 분들이 비슷하겠지만 2020년은 인생에서 아주 이상한 해로 기억될 것 같아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였거든요. 제 시간이 줄어들 거라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밖을 나가는 일이 어려워지고 외출하는 동안 계속 마스크를 쓰고 지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이와 집에서 어떻게 하면 하루를 잘 보낼까, 궁리하면서 비대면 수업을 하고 이따금 공원을 산책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소설 쓰는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분리된 공간도 필요하셨을 텐데요.

아이가 보육기관에 다녔을 때는 낮 동안 카페에서 많이 썼고, 밤에는 아이를 재운 뒤 책상이나 식탁에 앉아 썼는데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져서 좀더 근원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게 됐어요. 소설을 쓰는 남편과 번갈아 가면서 아이를 보고 소설을 쓰는 날은 카페에서 일했는데 카페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공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작업실이 절실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의 주인공 ‘경주’는 경단녀입니다. 엄마, 아내이기도 하고 취업준비생이기도 하죠. 경주는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카페 제이니’에 가서 이력서를 쓰고 비슷한 취향을 지닌 카페 주인을 멀찍이 관찰합니다. 우리가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풍경, 그리고 곁에 있는 인물로 다가왔어요. 

아이와 문화센터를 갔을 때, 그리고 카페에서 마주친 여자들의 얼굴이 있었어요.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뿌듯함과 초조함과 외로움이 얽힌 표정들. 소설에 따라 다른데, 어떤 인물의 표정이나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하고 한 문장이나 하나의 공간에서 나오기도 해요. 한 장면이나 하나의 표정이 다가오면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이야기를 더듬어보고, 이야기에서 소설이 시작되면 그 이야기 안에 숨어있는 얼굴과 표정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경주’는 비혼인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읽혀요. 하지만 이 고립이 과연 스스로 선택한 걸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어쩌면 생존본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주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이 중요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경주의 그런 면이 누군가에게는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보면 후회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경주의 고립은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계에서의 물러남이나 고립 역시 즉흥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소설 속 ‘카페 제이니’는 경주에게 무척 특별한 공간이에요. 개인으로서의 시간이 보장되는 곳이기도 했고요. 결말 즈음에서는 경주와 카페 주인이 친밀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소설에서 공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인물이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 성격이나 감정이 많이 달라진다고 느껴요. 경주가 카페에 간 건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해서지만 집처럼 편한 곳을 원한 건 아니었어요. 어느 정도의 거리감, 낯섦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카페 제이니’와 미스 제이니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어떤 질문을 던지거나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라고 설정했어요. 어른이 되면 더 많이 아는 것이 친밀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있었나요?

소설의 전반부에 경주가 카페 제이니의 테이블에 앉아서 그 자리에 앉게 되기까지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부분에서 경주의 결혼, 임신, 출산, 퇴직, 육아의 시간이 지나가요. 긴 시간을 회상하는 부분이라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나 고민됐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소설이 육아하는 경단녀의 하소연이나 넋두리로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누구에게나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계기, 궤도를 수정하는 시기가 있고 알 수 없는 고립감에 빠지는 때가 있는데, 그게 노경주에게는 결혼, 출산, 육아였던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직이나 이별, 갑작스러운 발병이나 이민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표면적으로는 육아나 경단녀에 대한 얘기로 읽힐 수 있지만 속절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느낌을 아는 독자분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그런 생각, 당신도 우리도 해요

낮에는 ‘지우 엄마’로 밤에는 ‘노경주’로. 두 삶을 사는 여성들이 많아요. 작가님은 어떠신가요?

저 역시 낮과 밤,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 아이와 같이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 많이 달라요. 소설 속의 노경주처럼 아이가 어릴 때는 일하러 나와서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아이 생각을 하느라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막상 아이와 놀아주는 동안에는 일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웠어요.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 적도 많고요. 그런데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인 것 같기도 해요. 돌이켜보면 학생 때도 공부해야 할 때 딴 짓하고 딴 생각하고, 놀라고 자리 마련해주면 시험이나 진로 걱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 저 자신을 분리하려고 노력해요.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글 쓰는 저는 작업하는 책상에 놓아두고, 아이를 재우고 나와서 일할 때는 아이 생각은 잠시 접어두려고 애써요.

경주에게 좀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었어요. 

경주에게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고민을 털어놓고 공감과 이해를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해요. 자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아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누군가, 어떤 얘기든 묵묵하고 진지하게 들어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 우리의 인생은 어쩌면 그런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과 함께 해나가는 여정인지도 모르죠. 그런 한두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불안해지고 얇고 넓은 관계에 기대고 실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요. 

소설의 끝에서 손님들이 ‘카페 제이니’를 응원하는 쪽지를 문에 붙이잖아요. 되게 뭉클했어요.

수업을 하러 신촌에 자주 갔는데, 거대한 광고판이 눈에 많이 띄었어요. 좋아하는 연예인의 전광판에 빼곡하게 남긴 메모들을 보면서 ‘상대가 볼지 안 볼지 모르는 데도 내 마음을 전한다는 건 뭘까?’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넣고 싶었어요. 



부모가 된 후, 글의 소재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나요?

저라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달라진 건 아니지만 아이로 인해 관심 분야에 변화가 생겼고 그 변화가 소설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예전에 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지금, 여기의 나' 에 깊이 천착했다면, 엄마가 된 뒤로는 좀 더 주위를 둘러보고 이후를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소설가들이 왜 역사소설을 쓰는지,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2007년에 『판타스틱 개미지옥』으로 등단하시고 벌써 14년이 흘렀어요. 한국문학의 변화를 느끼시나요?

2000년대에는 어떻게 하면 소설이 대중에게 다가가고 독자의 마음을 소설로 끌어올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목소리가 주변에 많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다른 서사 장르와 경쟁한다거나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다거나.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소설이 그저 소설의 일을 할 때 좋아해주시는 독자 분들이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된 것 같아요. 종이책이나 소설이 위기라거나 사라질 거라는 의심 속에서 문학과 소설은 굉장히 클래식한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소설과 에세이 창작을 가르치고 계세요. 작가지망생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나요?

소설에 관해 말할 때는 이야기를 피어 올리라는 말을 자주 해요. 이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 지점을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소설은 서사와 정서가 만나야 쓸 수 있는 글이잖아요. 이야기를 쓰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감정만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안 되죠. 에세이를 쓸 때는 내 이야기라도 거리감을 두라고 말해요. 내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대면 독자들이 들어갈 구멍이 없으니까요. 거리를 둬야 독자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어요.

요즘 주로 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새로 시작하려는 소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년과 나이듦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인간의 예상하지 못한 변화나 변하지 않음도 흥미롭게 들여다보는 부분이에요. 코로나 바이러스를 지나면서는 이 세계의 지속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요. 우리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추상이 아니라 구체로 실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어떤 독자에게 가닿으면 좋을까요?

일단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노경주처럼 혼란스러워하는 분들, 그리고 어떤 시기를 지나면서 궤도를 이탈한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분들이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좌표와 관계 안에서 “나한테 문제가 있나?” 라고 질문하는 분들에게 당신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육아와 경단녀의 얘기로 읽어도 되지만, 노경주를 통해 내가 삶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지? 그것을 잃은 뒤에 나는 무엇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라는 질문이 생겨나면 좋겠어요.



*서유미(소설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 서유미 지음 / 현대문학



우리가 잃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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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저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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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재수, 시인 오은 "우리 책 한 권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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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친구가 만나 전에 없던 형식의 그림시집이 탄생했다. 다람이 이모티콘과 『재수의 연습장』으로 유명한 만화가 재수가 그림을 그리고,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자이자 말놀이가 특기인 시인 오은이 시를 썼다. 글과 그림을 넘나드는 창의적인 연출로 청소년뿐만 아니라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은 모두를 사로잡는다.

만화가 재수는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모베러 블루스』(글/그림) 『감정코치 K 1·2』(그림) 『천적 1』(그림) 『재수의 연습장-그림이 힘이 되는 순간』(글/그림) 등을 펴냈다. 페이스북, 트위터에 꾸준히 업데이트 하고 있는 <재수의 연습장>은 현재 약 28만 명이 구독하고 있는 인기 연재물이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똘망똘망 다람이’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4주』 『다리 위 차차』 등을 연재하고 출간했다. 

시인 오은은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유에서 유』『왼손은 마음이 아파』『나는 이름이 있었다』와 산문집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너랑 나랑 노랑』, 『다독임』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우리 책 한 권 만들어 볼까

3년 전 “나중에 우리 같이 책 한 권 만들까?” 하면서 시작된 책이라고요.

재수: 네, 치밀하게 계획해서 나온 게 아니고, 우연히 만들어진 거예요. 평소에도 작업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제 그림을 보내주면, 오은은 그걸 보고 글을 쓰고, 또 제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그게 일상이에요.

오은:실제로 몇 편의 시를 재수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쓰기도 했어요. 마침, 제가 청소년시집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자연스럽게 “나 시집 내는데, 같이 작업해 볼까?” 제안했죠. 그래서 『마음의 일』이 청소년 시선 시리즈 시집, 재수와 함께 만든 그림시집 이렇게 두 권으로 나왔어요.

이 조합 너무 칭찬합니다!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났나요?

재수: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이 신촌에 있던 시절, 유희경 시인을 보러 자주 갔었거든요. 어느 날 같이 밥을 먹는데 이 친구가 옆에 있더라고요.

오은: 유희경 시인은 저희 성격을 다 알잖아요. 둘이 성격이 정반대인데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했대요. 재수는 일할 때 정말 똑부러지는 성격이에요. 저는 퉁 치고 넘어가는 편이고요. (웃음)

첫인상은 어땠어요? 

재수:재미없는 사람. 저 사람이랑 말 섞을 일은 없겠다.(웃음) 근데 입을 여니까 그 순간 첫인상이 바뀌더라고요. 어라, 의외다 했죠.

오은:야!(웃음) 사실 재수를 처음 만난 날, 서점에서 『재수의 연습장』을 사서 읽었어요. 인상은 딱딱해 보였는데, 책이 너무 발상이 뛰어나고 재미있는 거예요. 둘 다 말놀이에 관심 있으니까, 서로의 작품을 좋아할 것 같다는 인상이 들었어요.

오은 시인님은 평소에 말수가 많은 편이신데 글을 보면 차분하고, 재수 작가님은 지금은 진중한데 만화를 보면 위트가 엄청나요.

재수: 저는 온라인 수다쟁이거든요. 반대로 오은은 SNS에서 진중한데 실제로 만나면 쾌활하고요. 서로 각자 균형을 맞추고 있나 싶었어요.

오은: 그래서 재수를 온라인에서 만나면 저를 보는 것 같아요. SNS로 저를 안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당황하기도 해요. 

책을 열자마자 목차 대신 프롤로그가 펼쳐져요.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재수: 시 하나하나 다 다른 형식으로 그렸기 때문에, 어떻게 통일감을 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프롤로그에 힘을 줬어요. 첫 장면부터 대사도 없는데 그림이 이어지잖아요. 교문에서 창문으로 이어지고, 소년이 책을 펼치면 수많은 문이 나오고요. 영화적 연출인 거죠. 

에필로그에서 재수 작가님이 “만화책도 아닌 그림책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한” 새로운 책을 내고 싶었다고 썼어요. 어떤 책을 만들고 싶었나요?

재수: 단순히 시에 삽화가 붙은 책을 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시를 한 편 한 편 성실하게 정면승부해서 그림으로 그려내야 저한테도 의미가 있겠더라고요.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마지막까지 궁금했어요. 시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책을 내면, 시에 익숙하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 같은 형태의 ‘그림시집’을 제안한 거예요. 편집자님도 불안했을 거예요. 저도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기분이었으니까요. 



모두가 주인공인 시집

책의 물성을 고려해서 연출한 느낌이 들어요. 연필 선이 주는 질감도 있고, 글자가 흐릿해지는 효과도 나오고요. 

재수: 요즘 시대에 책을 만들려면 책에서만 할 수 있는 걸 계속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굳이 책이 아니어도 되는 형식이면 다른 매체여도 되잖아요. 기왕 책 작업을 하기로 했다면, 책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고 싶은 거죠.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면서 가장 걱정한 부분이 있었나요?

재수: 시마다 다른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걸 한 사람으로 통일해야 하나 여러 명을 등장시켜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결국 여러 인물을 택해서, 책을 덮고 나면, 한 명이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 달랐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오은: 맞아요. 한 명의 캐릭터로 밀고 나가면 통일성은 있겠지만, 청소년 시절을 떠올려보면 각자 다른 이유로 힘들잖아요.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마음들을 보여주고 싶어서, 등장인물을 다 달리 해봤어요. 이 시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일 수도 있고, 내 주변의 친한 친구일 수도 있고요. 

모두가 주인공이네요!

오은: 그렇죠. 「교실에 내리는 눈」에 학생들의 뒷모습만 보이는 교실 장면이 나오거든요. 책 맨 끝에서 같은 장면을 앞에서 보여주는 그림을 넣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시집에 등장한 친구들의 얼굴이 짠 하고 모이는 거죠. 이 작업 자체가 뒷모습만 보이는 친구들의 입을 열어주고 각자 사연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을까 해요. 

재수: 그런데 시에 등장하는 한 친구가 시골에 살아서 그 장면을 못 썼지.

오은:전학을 왔어야 했어! 그러면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재수: 아, 아니야. 이대로 괜찮은 것 같아.(웃음)

『마음의 일』은 처음에 청소년 시집으로 나왔잖아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시를 쓸 때 차이점이 있나요?

오은:‘청소년 시집’ 하면 흔히 교육적인 메시지를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저도 청소년기에 그런 글을 읽었으면 싫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냥 그 시기, 우리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어요. 청소년기가 아주 유쾌하지만은 않죠. 어려운 것도 많고, ‘다 힘든데 너만 힘드냐’고 말하는 어른 때문에 더 힘들고. 그런 ‘마음의 일’을 떠올리면서 써 내려갔던 것 같아요.

오은 시인님의 산문집 『다독임』에도 아이들을 관찰하는 장면이 자주 나와요.

오은:늘 관심이 많아요.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너무 재밌기도 하고요. 제가 종종 중학교에 가서 시 강연을 해요. 학생들에게 “어떤 시가 가장 좋니” 물어보면, 다 달라요. 각자 처한 상황이나 감정이 다 다르니까요.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나서 한 교실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그럼 세 개까지 꼽아봐 하면, 많이 말하는 시가 「삼킨 말들」이에요. ‘아파요, 힘들어요, 모르겠어요’라는 정말 단순한 말들로 이뤄진 시거든요. 아이들이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고 삼켰던 말들인 거예요. 저도 청소년기에 사회적 자아를 만들면서 여러 감정을 느꼈던 것 같은데, 지금 친구들도 똑같구나 싶었죠. 



함께해야 새로워져요

두 분이 함께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면서 쓴 시도 있다고요.

오은:「네가 떠나고」가 그렇게 나온 시예요. 세월호에 관한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재수가 그 칼럼을 읽고 그림을 그린 거예요.

재수: 그리고 제 그림을 보고, 오은이 시를 쓴 거죠.

오은: 솔직히 저는 찰나의 영감을 믿는 사람은 아니에요. 일상을 살아가다가 주위를 관찰하고, 자극이 오면 그 감각을 쓰는 건데, 재수의 반응이 그중 하나인 거죠. 제 글이 그림이 되고 다시 시가 되는 걸 보면서, 우리 작업이 선순환되고 있구나 느꼈어요. 그래서 그림은 온전히 재수가 그렸지만, 이 책은 같이 쓴 듯한 느낌이 들어요.

재수: 평소에도 메시지를 많이 주고받아요. ‘이거 어때’ 하고 아이디어를 던지면 상대방이 ‘어, 나도 그런 생각 했는데!’ 답할 때도 있고, 바로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오은 시인님의 글에 자주 나오는 말이 ‘장래희망’이에요. 두 분의 현재 장래희망은 뭔가요?

오은:지방에 가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쳐주는 게 꿈이에요. 몇 년 동안 지역 강연을 다니면서 보면 확실히 모든 기회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강의를 가면, 아이들이 굉장히 신나서 듣거든요. 보내온 감상문을 읽으면, 눈물이 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상적인 말에서 시작해서 재미있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재수: 오은에 비하면 전 너무 속물적인데요? 저는 더 나은 하루를 사는 것! 하루를 충만하게 보내야 제가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갈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근사한 작업실을 꾸려서 작업을 해나가고 싶네요.

오은: 『마음의 일』 했으니까, 우리의 다음 작업은 ‘마음의 이’! 하하.



*재수

만화가, 이모티콘 제작자. 펴낸 책으로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모베러 블루스』(글/그림) 『감정코치 K 1·2』(그림) 『천적 1』(그림) 『재수의 연습장-그림이 힘이 되는 순간』(글/그림) 등이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에 꾸준히 업데이트 하고 있는 <재수의 연습장>은 현재 약 28만 명이 구독하고 있는 인기 연재물이다. 카카오톡 이모티콘 ‘똘망똘망 다람이’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4주』 『다리 위 차차』 등을 연재하고 출간했다. 

*오은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항상’의 세계 속에서 ‘이따금’의 출현을 기다린다. ‘가만하다’라는 형용사와 ‘법석이다’라는 동사를 동시에 좋아한다. 마음을 잘 읽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와 산문집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너랑 나랑 노랑』, 『다독임』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작란(作亂) 동인이다. 



마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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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모든 걸 한번에 결정할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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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신나라

똑똑하고 사려 깊은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을 읽었다. 이다혜 작가의 인터뷰집 『내일을 위한 내 일』. 전작 『출근길의 주문』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필요한 말과 글을 이야기했던 그는 『내일을 위한 내 일』에서 각별한 성취를 쌓아 온 7인의 여성을 만나 일에 관한 생각을 들었다. 7명의 인터뷰이는 영화감독 윤가은, 배구 선수 양효진, 바리스타 전주연, 작가 정세랑, 경영인 엄윤미, 고인류학자 이상희,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인터뷰이의 선정 기준은 가능한 한 연령과 분야를 다양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다혜 작가는 “동시대에 한창 일하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진행형의 커리어를 쌓는 이들의 여정을 가능하면 과대 포장하지 않고 전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할 수 있다고 믿으며.(10쪽)”, 『내일을 위한 내 일』을 집필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는 청소년,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진로에 관한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 직장인, ‘일을 잘한다’는 새로운 기준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도움이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이다혜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모두가 불확실성을 갖고 시작한 일

창비 청소년출판부로부터 제안을 받고 기획한 인터뷰집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책을 쓰고 싶으셨는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분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진로를 정할 때 무엇을 보고 성장했느냐의 영향을 주로 받습니다. 부모님의 직업, 친척들의 직업, 친구 부모님의 직업, 동네 유망 업종, 시대 유망 업종에 따라 진로를 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비를 부모님이 내니까 진로를 정할 때 아무래도 부모님 의견이 중요하게 반영되기도 하는데 부모님도 본인 경험 말고는 잘 모르는 일이 흔하고요. 

『내일을 위한 내 일』을 쓴 가장 큰 목적은, 10대와 20대 독자분들께(그리고 사실은 제 자신에게도) 너무 한 번에 모든 걸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내일을 위한 내 일』에 실린 사람들의 경험을 보면, 애초에 원하던 일을 한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는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일을 잘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안전한 길을 확인하느라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일을 시작하고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 보는 것이 확실한 해결책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간 인터뷰를 많이 하셨지만, 단행본 인터뷰집 출간은 처음입니다. 다른 에세이를 쓸 때와 어떻게 달랐나요?

매체에 소속되어 일하다 보니 인터뷰 진행을 오래했는데요. 매체에서 진행하는 인터뷰는 ‘근황’과 ‘신작’에 관련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내일을 위한 내 일』 인터뷰는 일하기, 진로, 커리어에 관련한 이야기를 담으면서 일 중심의 삶을 글로 옮긴 경우입니다. 50년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직업으로 골랐고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기자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제 자신이 드러나는 글쓰기에 대해서는 늘 부담이 있었습니다. 에세이라는 글의 양식이 제가 전달하려는 많은 이야기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져 선택하기는 했지만, 더 큰 틀에서 데이터나 자료, 이번처럼 인터뷰를 바탕으로 저보다는 다른 사람을, 세상을 보여 주는 방식의 글쓰기에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일 테고요.

책에 실린 7명은 모두 여성입니다. 인터뷰를 하며 작가님이 느낀 7명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내일을 위한 내 일』에서 만난 7인의 가장 큰 공통점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여성들이 진로를 정할 때는 첫 번째 질문에서 답한 것에 문제가 하나 추가되거든요.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해라”라는 말이 여성들에게는 “가정과 ‘병행’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남편이 싫어하지 않을 일,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 그 말은 결혼할지 생각도 안 해 본 젊은 여성들의 직업 선택의 폭을 확 줄여 놓습니다. 범죄자를 만나는 일은 아니라고 봐. 애 키우면서 회사 경영은 어렵지. 집에서 서포트 안 하면 미국 유학은 안 돼.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시집가기 좋은 진로도 많은데 왜 커피숍 일을 직업으로 삼아? 여자 프로 리그가 돈이 되나? 영화감독은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하는 거라며? 소설가가 되면 굶어 죽기 딱이라던데. 여자의 삶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끼어들어서 한마디씩 합니다. 걱정하는 말에 압사당할 지경이 되고, 어느 순간에는 결정도 책임도 남에게 미루고 싶어지거든요. 

그러지 마시라는 뜻에서 『내일을 위한 내 일』의 여성들을 선정했습니다. 저렇게 멀리까지 가 본 사람들도 여러분과, 나와 똑같은 불확실성을 안고 시작했고, 수많은 걱정 오지랖의 말들과 달리 자기 일을 만들었다고 ‘보여 주고’ 싶었어요.

직업인으로서의 태도가 읽히는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성과를 이야기하는 내용보다 어떤 일을 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많았는데요. 작가님이 집중해서 담고 싶은 것은 인터뷰이의 어떤 면들이었나요? 

책에 실린 일은 일곱 가지뿐입니다. 일곱 사람이 거쳐 온 일을 합하면 더 많아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직업을 아우를 수 없어요. 게다가 『내일을 위한 내 일』 인터뷰이들은 모두 자기 직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입니다. 이 정도의 성공은 일반화되기 어려워요. (제가 꼭 해 보고 싶은 인터뷰 프로젝트는 보통의 여자들이 하는 보통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엮는 것입니다. 뉴스 검색해서 나오는 사람들 말고, 처음으로 이름이 매체에 언급되는 사람들의 삶과 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요.) 하지만 뛰어난 성취를 거두었다고 해서 『내일을 위한 내 일』의 일곱 사람이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양손에 든 것 중 무언가를 택하는 결정을 하는가 하면 버리는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내일을 위한 내 일』은 그런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민하고, 책임지고, 용기 내고, 버텨 낸 시간을 담고 싶었습니다.

녹취를 풀면서, 정말 기억에 남는 문장, 말 한 마디가 있나요? 

책에서는 뺐는데, 이수정 교수님이 인터뷰를 하면서 “뚝심이 있는 게 중요한 거 같아. 뚝심 있게 가다 보면, 흘러 흘러 어디 가서 어느 경지에 도달해 있는 거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라고 말씀해 주신 부분이 있습니다. 팟캐스트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녹음 때를 제외하고는 문자 한번 주고받는 일이 없는 이수정 교수님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라고 하신 말씀이 엄청난 부담이기도 하고 기쁨이기도 했어요. 

충분히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만성적인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해 온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어요. 이제야. 전주연 바리스타 인터뷰는 사람에게서 좋은 기운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는데요. 좋은 것을 좋은 식으로 해 왔을 것처럼 보였던 전주연 바리스타가 과거 가족의 반대 등에 대해 언급하며 인터뷰 중에 몇 번이고, “보여 주겠어, 바리스타가 얼마나 대단한 직업인지.”라는 말을 반복하던 단호함을 잊을 수 없어요. 상대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죠. 내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는 것.


이다혜ⓒ신나라

흐름을 읽어 내면서 틈새를 잘 찾는 사람들

책에서 소설가 정세랑 작가님은 “글을 쓰는 사람이 모두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다른 사람의 업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고. 나 자신도 안 해치고 타인도 안 해치면서 예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편집자로서 얻은 제일 큰 교훈.”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작가님도 편집 기자로 일하시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기자라는 경험을 통해 작가로 데뷔하셨는데, 이점이 있었을까요?

『내일을 위한 내 일』의 정세랑 작가님 인터뷰는 저랑 생각이 같은 부분이 많고 많은데, 인용하신 대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편집 기자로 일을 할 때는 왜 다들 원고를 늦게 쓰는 것인지 분노를 느끼지만, 저 역시 글 마감을 제때 못 할 때가 있단 말이죠. 내가 하는 일의 티끌 모아 태산 같음은 잘 보지만, 남이 하는 일은 늘 중간 단계 없이 완성되는 듯 확신하는 일을, 경력을 쌓으며 하지 않게 됐어요. 주간지 편집 기자로 일을 한 경험의 가장 큰 장점은 기획하는 법과 타이밍의 중요성을 배운 것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글을 다루는(읽고, 쓰고, 편집하고) 법을 익힌 것 역시.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작가로서, 7명의 여성과 인터뷰를 한 일이 큰 도움이 되셨을 것 같습니다. 특히 새롭게 알게 된 점이나 인사이트를 준 내용이 있었을까요? 

인사이트를 얻은 부분은 C프로그램의 엄윤미 대표님과 한 인터뷰인데요.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소통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정해 놓고 정확하게 사용하는 편이 좋다는 것. 때로는 그것이 가치에 대한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어라 하더라도, 같은 가치를 반복해 공유하고 언어화하는 습관이 조직원 모두에게 중요해요. 한국에서는 이런 사실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어서 기분대로 말한 뒤 서로 다른 단어를 그게 그거라면서 뭉뚱그려 사용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팀이나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특히 정확한 언어를 선별해 반복해 공유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일을 잘한다는 것의 정의는 사람마다, 조직마다 다를 거예요.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다르죠. 하지만 어느 일이든 오래 하다 보면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능력만큼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능력을 요구받게 되고, 사람을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되거든요. 오래 일한다는 건 내가 목표로 한 적이 없는 일들을 핸들링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조직 내 소통이 안되는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은 소통을 시도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도 높아요. 소통해서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조직에서 튕겨 나가니까. 

오랜 시간 동안 여성들은 직장 내 성추행에 대해서 묵인하고 차라리 퇴사하는 편이 공론화하는 것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았고요. 그런 때 일을 잘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팔다리를 묶는 말로도 쓰인답니다.

조직 내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따돌림을 당하는 동시에 일을 못한다는 낙인을 가장 먼저 받는다는 것도 기억하세요. 일을 잘한다는 말 자체가 때로는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직장인이라면 승진, 이직, 연봉 인상, 자영엽자라면 사업 확장, 프리랜서라면 소득 인상 등을 기준으로 일을 잘한다고 평가하겠죠. 제가 일을 잘한다는 기준은, 흐름을 읽어 내면서 틈새를 잘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제가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일을 주로 하기 때문일 거예요.

작가님께서 기자를 그만두시고,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면 작가 이외에 무엇이 있을까요?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실까요?

콘텐츠 기획과 관련된 일을 더 하고 싶어요. 영화나 드라마, 단행본 무엇이든지.

『내일을 위한 내 일』을 가장 추천하고 싶은 독자층은 누구인가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는 젊은 여성들에게 읽힐 수 있다면 가장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위한 책이기도 하기 때문에 현역에서 일하는 여성분들께도 읽혔으면 하는 마음이고요. 다른 여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일이 있어도 힘들고 없어도 힘든 여성들에게 권합니다.

같은 주제로 2권이 나온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신가요?

2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정해진 게 없을 때는 말하지 않는 것이 기획의 기본!

그럼 확정된 출간 소식을 알려주세요.

지난해 완성해서 출판사에 넘긴 원고가 있고, 이제 시작해야 하는 원고가 있는데요. 어떤 책이 먼저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감정에 대한 에세이가 여름쯤 나올 것 같습니다.



*이다혜

작가. 해가 갈수록 아침이 똑바로 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큰 변화 없이 살고 있다. 아직은 회사원. 주요 활동 분야는 글쓰기와 말하기다. 「한겨레」 공채 입사. 주간 영화전문지 「씨네21」, 주간 생활정보지 「세븐데이즈」, 월간 장르문화전문지 「판타스틱」의 편집, 취재기자를 거쳐 현재 「씨네21」에서 팀원 없는 편집팀장으로 일한다.



 
        내일을 위한 내 일     
      
내일을 위한 내 일
        
이다혜 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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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정지돈 소설 독서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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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지돈은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의 주인공 정웰링턴을 2015년 처음 알게 된다. 그 후 6년간 『모든 것은 영원했다』 참고 목록에 있는 약 85권의 책을 읽으며 정웰링턴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탐구하고 습득했다. 기억하고 싶은 책 속 구절들이 몸에 스며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장들을 하나 하나 컴퓨터에 옮겨 적으며. 약 3~4페이지를 한 단위로 조각조각 펼쳐진 정웰링턴의 이야기를 한 번에 읽으려 한다면 당신은 어느덧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정지돈 소설은 ‘정지돈 소설 독서법’으로 읽어야 제맛이다. 한 단락, 아니면 한 문장만 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읽고 멈추기를 반복해도 좋고, 건너뛰고 싶은 부분은 건너뛰고, 읽고 싶은 부분만 반복해서 읽어도 좋다. 정지돈의 지적인 세계에 호기심이 생긴다면 ‘정지돈 소설 독서법’으로 그의 소설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모든 것은 영원했고 정지돈은 눈부실 것이다.



중심에서 비켜난 사람들 

정웰링턴이 주인공입니다. 그의 어떤 부분에 관심이 갔나요? 

우선 정웰링턴이 언급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처음 정웰링턴을 사진으로 봤을 때 잘생겼더라고요.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옛날 분인데 옛날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 왠지 모르게 가까운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에도 언급하긴 했는데, 정웰링턴은 중심에서 비켜나 있었죠. 정웰링턴은 어머니, 외삼촌, 할아버지처럼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했어요. 신분 때문에 자신이 원했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지 못했고, 연구자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환경, 상황에 관심이 갔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웰링턴의 불능은 그가 가진 가장 적나라한 능력이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웰링턴을 불능하게 한 시대는 어떤 시대였나요? 

정웰링턴은 68혁명 직전인 1963년에 사망합니다. 1940~1950년대 사람인 정웰링턴이 그 시기, 세계대전이 끝나고 68혁명을 가능하게 한 열망이 올라오기 전에 있었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나 68혁명은 자료가 엄청 많아요. 그런데 그사이 시대는 자료가 별로 없어요. 극적이지도 않고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서, 책에서도 가볍게 다루고 본격적으로 다루는 역사서도 없고요. 역사나 혁명에 관심을 갖다 보니 그 시대가 궁금하더라고요. 러시아혁명이 있었고 아방가르드가 나왔고 스탈린이 나타나서 1930년대에 대숙청을 했잖아요. 대숙청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10년, 20년 동 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 이후 지지부진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시기가 더 궁금했습니다. 그 시절의 미학이나 혁명 시기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보다 거기서 비켜난 사람들을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있으신 것 같아요. 

혁명이라는 개념은 고등학생 때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알게 됐습니다.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고등학교 생활이 너무 싫었는데, 혁명이 일어나면 더 이상 안 다녀도 될 것 같더라고요. 대학도 안 가도 되고. 물론 오해였지만 아무튼 시작은 그랬어요.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는 어떻게 읽게 되셨나요?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김두식 교수님이 책이 정말 좋다고 하시면서 추천하셨어요. 2015년에 나오자마자 읽었어요. 그때부터 정웰링턴에게 꽂혀 관련 책들을 읽다가 소설을 쓰게 됐죠. 

‘미래를 전망함’ 챕터가 있습니다. 이 챕터를 읽은 후, 소설을 다시 읽으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더 좋다는 말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에요. 

정웰링턴과 그의 아내 안나, 선우학원 등 소설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미래를 전망함’ 챕터에서 마치 작가와도 같은 ‘나’라는 화자가 나와서 서술합니다. 이런 구성은 처음 본 거 같아요. 이런 구성을 취하신 의도가 있나요? 

저는 소설 쓸 때 계획을 안 세우거든요. 이 소설은 계간지 『문학과 사회』에 연재했는데, ‘미래를 전망함’이 네 번째 파트였어요. 계획을 세우진 않지만 머릿속에서는 세 번째까지와 동일한 형식으로 쓰는 걸 생각했는데 안 써지더라고요. 계속 안 써져서 펑크도 한 번 내고, 그다음 호 다가올 때도 안 써지다가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네 번째 파트가 써지기 시작한 거 같아요. 의도와 이유 전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본능적으로 쓴 거 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는지 찾아가면서 그 안에 이야기를 넣었던 것 같습니다. 



걱정 마시고 계속 쓰세요 

많은 자료를 읽고 소설을 쓰시잖아요. 읽는 양이 굉장히 많으셔서 읽은 걸 기록하는 나름의 기술이 있을 것 같아요. 

무식하게 합니다.(웃음) 종이책으로만 얘기하면 자료들을 읽으면서 표시를 해둬요. 그래서 가능하면 책을 사서 보는데, 책 귀퉁이를 접고 중요한 부분에 줄을 치거나 하면서 표시를 하고, 이후에 다 본 책이 어느 정도 쌓이면 PC에 메모한 부분을 옮겨 적어요. 옛날에는 그렇게 표시한 부분 대부분을 PC로 옮겨 적었어요. 지금은 다는 못 하고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하고 있어요. 옮겨 적는 것은 다시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좀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일종의 복습처럼 잘 스며들게 하고 싶어서예요. 나한테 있었던 일은 어제 뭘 했고 어땠고 등 그냥 얘기할 수 있잖아요.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쓸 때 내 얘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기 위해 쓰는 거 같아요. 

자료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그 인물을 알 것 같다는 확신이 들 듯도 합니다. ‘빙의’라는 말이 있기도 한데, 정웰링턴의 경우에는 어땠나요? 

제 문학관, 예술관과도 연결되어 있어요. 독자들이 어떻게 느끼실지 잘 모르겠는데 저는 그 인물이 된다거나 빙의를 한다거나 이런 말을 경계하고 안 좋아해요. 폄하해서가 아니라 전 작가가 무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개인인 작가가 고유한 내가 있어서 나를 지켜야 하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개인의 자아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타자의 영향, 사회 문화적 영향들이 다 겹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어떤 인물이 따로 있어서 그 인물에 빙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정체성과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과 시대 등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데 그 사람과 내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면, 왜 그럴까 탐구하게 되죠. 

집에 책이 많을 거 같아요. 특별히 아끼는 책이 있나요? 

제가 어떤 시기에 읽고, 많이 접혀 있고 많이 표시한 책에 마음이 가는 거 같아요. 지금 떠오른 책은, 제가 당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즈음에 읽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에요. 여러 번 읽고 많이 표시해두었어요. 

그 책을 여러 번 읽은 이유가 있을까요? 

어떤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문제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정립하는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제가 얻은 교훈은 하고 싶은 일, 스스로가 즐거운 일을 해도 된다는 응원이었던 것 같아요. 책을 읽을 당시에 직장인이었는데 회사를 그만두는 데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회사 그만두고 한동안 고생을 하긴 했지만요. 

본격 장편소설은 처음이세요. 호흡이 더 긴 글을 쓰는 과정이 어떠셨어요? 

길다.(웃음) 장편을 더 쓰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그런데 현실적인 여건은 장편을 쓰는 것이 갈수록 더 힘들고 읽기도 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요. 더구나 저처럼 쓰는 경우에는 누가 읽겠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어쨌거나 욕심이 있고 더 많이 더 길게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 복권에 당첨되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번 소설을 쓰시면서 궁극적으로 가졌던 목표가 있을까요? 

아마… 완성? 소설을 쓸 땐 늘 이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두려움과 맞서 글을 써나가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편집자 이외에 최초의 독자가 있나요? 

우선은 제가 최초의 독자입니다. 그다음은 오한기 소설가, 금정연 서평가, 이상우 소설가. 이 세 분이 제 소설을 자주 먼저 읽었죠. 글마다 조금씩 다른 거 같긴 한데 어느 순간 한 번씩은 꼭 보여주게 됐어요. 『모든 것은 영원했다』는 연재할 때 첫 번째 원고를 보여줬어요. 200매라고 하면, 200매를 모두 쓰고 보여준다기보다 처음 50매, 100매를 썼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쓴 것이 맞을까, 두려운 시기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 보여주는 것 같아요. 



금정연 서평가는 첫 번째 연재 원고를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쓰고 있는 동안에는 비판받는 것을 싫어해요. 비판받을 게 없어서가 아니에요. 그건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글을 쓸 때 확신이 없고 고통스럽고 힘들 때 원고를 읽어 달라고 보내는 것이어서 비판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너지게 돼서 못 쓰게 되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신랄하게 듣는 것이 지나고 보니까 제가 쓰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누구보다도 본인이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 자신도,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조건 칭찬을 하고 그다음에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굉장히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편이거든요. 그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극찬을 하고 시작해요. 오랫동안 해오다 보니 서로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있을 거 같아요. 정연 씨가 보낸 메일을 찾아볼까요? 메일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돈 씨 소설이 제게 살아갈 희망을 주었습니다. 당신이 내 삶을 구했어요. 걱정 마시고 계속 쓰세요. 저와 다른 독자와 세계를 위해.” 

너무 설레는 말이네요. 금정연 서평가와는 어떻게 친해지셨어요? 

등단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저랑 정연 씨 사이에 누군가가 계셨어요. 번역도 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시는 분이었어요. 트위터로 같이 보자고 하셔서 봤어요. 처음 만난 날 밤새도록 얘기를 한 거 같아요. 술도 한잔 안 마시고 밤 10시부터 아침 9시까지. 할 얘기가 너무 많았던 거예요. 대부분 한국문학에 대한 이야기였던 거 같은데 그런 얘기를 하면서 친해진 거 같아요. 정연 씨가 좋은 이유는 너무 예의 바른 사람이라서? 예의 바른 사람이라서 쉽게 가까워지게 된 거 같아요.

 ‘예의 바르다’라는 건 어떤 걸까요? 

제가 성격이 약간 이상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지금도 정연 씨와는 서로 존댓말을 해요. 아무리 가까워져도 서로 말을 놓지 않아요. 사실 불편할 수 있잖아요. 정연 씨가 두 살 위예요. 저는 정연 씨라고 부르고 정연 씨는 저를 지돈 씨라고 불러요. 그런데 전혀 불편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 사회에서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씨’라고 하면 불쾌해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면 선이 생기고, 반말을 하거나 형이나 누나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 힘들고 입에 붙지 않아요. 저보다 어린 분들이 저에게 ‘~씨’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고, 뭐라고 부르건 자유롭게 하면서 선을 지키면 될 거 같은데 그런 방식이 저랑 잘 맞았던 거 같아요. 



정지돈 소설 독서법 

소설가라고 하면 보통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설가를 생각합니다. 작가님 소설은 흔히 얘기하는 서사가 강조된 소설이 아닙니다. ‘작가님은 왜 소설을 그렇게 쓰시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으실 거 같아요. 

그런 질문 많이 받아요. 어떤 때는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열심히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제가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제 소설의 문제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점이에요.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요. 소위 서사가 없다는 말이 일종의 레토릭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파편적이다”, “서사가 없다”라는 말을 어느 순간 어떤 평론가가 어느 시기에 쓰면서 독자들에게 전염이 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레토릭처럼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많은 작품임에도 없다고 받아들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야기가 너무 많다’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내 소설은 서사의 구조가 다르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구조나 방식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주류적인 소설의 구조는 연극에서 가져온 방식이에요. 클라이 맥스가 있고 인물, 전개, 배경이 확실하게 있습니다. 연극적 구성이 갖는 힘이 강력하고, 그 강력한 힘이 소설이라는 장르적 형식에 굉장히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구조를 따르지 않아도 이야기이고 또 이야기도 풍성하고 인물도 풍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익숙하지 않은 구조이고 읽는 방식이 다른 거죠. 공연 같은 경우에는 두어 시간 몰입해서 시간도 잊게 만들잖아요. 이런 구조가 아닌 소설들은 다른 읽기 방식이 있습니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누가 나에게 시간을 정 해 주지도 않고 원하는 부분을 펴서 읽을 수도 있고, 이런 자유로움이 있지요. 

그런데 소위 페이지터너라고 하죠, 그것이 가져다주는 힘이 너무 강력하니까 거기에만 중요성을 두고, 아까 말한 그런 표현들이 생기고 오해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어디서든 멈출 수 있고 어디서든 다시 읽어도 되고 어디에나 임의 접속할 수 있는 특성 때문 이거든요. 그래서 영화도 극장에서 볼 때보다 집에서 보는 것을 더 좋아해요. 그런 독서에 어울리는 소설은 이야기가 조각 조각 많은 책이에요. 4페이지가 하나의 이야기로 차 있을 때 그런 독서에 잘 맞습니다. 다만, 그런 소설은 주욱 읽으면 어느 순간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어디서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확 날아가 버리는 특성이 있어요. 다른 독서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지돈의 소설을 좀 더 즐기고 싶은 사람을 위해 정지돈 소설 독서법을 알려주신다면요? 

한 단락, 아니면 한 문장만 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읽고 멈추기를 반복해도 좋을 것 같아요. 건너뛰고 싶은 부분은 건너뛰고, 읽고 싶은 부분만 반복해서 읽어도 되고, 원하는 부분을 펼쳐서 그냥 읽어도 되고요. 뒷부분을 먼저 읽고 앞을 읽어도 상관없는 그런 독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지돈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지적 허영심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에 대한 작가님 의견이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허영심이라는 것이 없을 수 없고, 그 허영심이 일종의 욕망인데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발현되느냐에 따라 나쁘게 될 수도 있고 좋게 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지적 허영심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고 좋은 것이 없지 않나요? 저는 대부분의 것이 허영심에서 시작한다고 보거든요. 그것을 허영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호기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하려는 것을 허영이라고 하겠죠. 호기심은 그냥 알고 싶은 것이고요. 지적 허영심은 혼재되어 있는 거 같아요. ‘저 작가가 특이한 거 같아, 내가 모르는 걸 이야기해. 그래서 내가 읽고 싶어. 있어 보여.’ 이건 호기심인 거죠. 그 호기심으로 알면 알수록 그 장르의 상황에서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장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알게 되고 그걸 이해하면 자신의 이해 폭이 훨씬 넓어지고 또 스스로가 즐겁기도 하고요. 그렇게 본다면 지적 허영은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적 허영으로만 끝날 수도 있지만, 그게 있어야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제 작품을 읽는 사람은 지적 허영심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얘기한다면 저는 영광이지요. 자신이 파고들거나 좋아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이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계신 라이프북스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득 정지돈의 소설이 그 포지션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광이지만 그런 포지션에 있다면, 책을 팔아서 먹고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슬프네요.(웃음)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상 받았을 때? 

상 받을 때는 별로 기쁘진 않았어요. 쑥스럽고 많은 생각이 들었지요. 기본적으로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가 일종의 롤러코스터 같아요. 매일 소설을 몇 페이지씩 쓰고 있는데 오늘 글이 너무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요. 정말 날아갈 거 같아요. 제가 사는 곳이 한강 근처거든요. 소설이 잘 써진 날 한강을 산책하면 기분도 아주 좋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요. 그다음에 그 글을 다시 보면 ‘어떡하지? 왜 그렇게 못 썼지? 그다음에는 어떻게 쓰지?’라는 마음이 들고 너무 고통스러워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 뭔가를 썼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가장 큰 기쁨인 거 같아요.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취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 같아요. 그 감정이 책이 출간됐을 때 느껴지진 않는 거 같아요. 글이 써졌을 때 느껴지고 그것이 작게 왔다가 사라지고 왔다가 사라지고, 그렇습니다. 일종의 중독 같은 걸까요?(웃음)



*정지돈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에서 영화와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2013년 『문학과 사회』의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눈먼 부엉이」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과 「창백한 말」로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묻는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역사와 현재, 미래의 의미를 묻는 작업을 지속 중이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아키토피아의 실험] 도록의 에필로그 「어떤 작위의 도시」를 실었고, 낸 책으로는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문학평론집 『문학의 기쁨』(공저), 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야간 경비원의 일기』가 있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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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

1992년 가을, 초등학생 6학년이었던 김보희 편집자는 드라마 <아들과 딸>을 열혈 시청했다. 극중 주인공 ‘후남’(김희애)의 직업은 편집자.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사람’을 처음 인지한 것이 바로 ‘후남’을 통해서였다. 허름하고 추워 보이는 출판사에서 후남이가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빨간색 돌돌이 색연필로 교정을 보는 장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김보희 편집자는 당시 ‘출판사에서 일하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구나’ 생각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출판사에 들어갔다고 외할머니께 말했을 때, 할머니는 손녀를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할머니 역시 <아들과 딸>의 애청자였다.

“드라마에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받고, 집을 나와 고생하고 결핵까지 걸린 상황에서도 늘 책을 놓지 않았던 후남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저에겐 ‘편집자’라는 직업을 최초로 알게 된 드라마라서 무척 각별해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영화 연출을 꿈꾸다 졸업 후 길벗출판사에 들어갔다. 3년쯤 실용서 위주로 책을 만들다가 다른 분야의 책을 만들고 싶어 마음산책으로 이직했다. 이후 웅진씽크빅 단행본본부, 청림출판, 큐리어스, 넥서스 등에서 일하다가 현재 휴머니스트에서 만 5년째 일하고 있다. 편집자 경력은 올해로 17년차다.

“ 휴머니스트는 원래 인문, 역사, 청소년 분야가 강한 출판사인데요. 2030세대, 즉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책을 만들자는 미션으로 새 팀이 신설되었고, 주간님과 함께 입사했습니다. 처음 1년은 거의 시리즈 브랜딩에 집중했어요. 고객을 연구하고 페르소나 독자를 만들고요. 첫 책 『안 부르고 혼자 고침』이 출간된 게 13개월째였어요.”

‘자기만의 방’ 이름으로 나오는 책들은 가상의 독자 페르소나인 ‘32세 김시영’을 위한 시리즈다.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시영 씨의 일상과 삶에 필요한 모든 책을 만드는 일이 시리즈의 큰 방향이기 때문에 ‘페르소나에게 전해 주고픈 메시지나 조언, 노하우’를 담은 책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자기만의 방’ 팀은 편집자 네 명으로 이뤄졌다. 90년대생이 두 명, 80년대생과 60년대생이 각각 한 명씩 있다. 디자인은 외부 디자인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하고 있다. 김보희 편집자는 유일한 80년대생.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어렵지 않을까? 물으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저희 팀 주간님이 권위적인 분도 아니시고, 팀 내 소통도 자유로워서 중간 역할이 어렵진 않아요. 오히려 중간에서 제 역할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요. 제가 우당탕하며 책 만드는 모습을 보며 후배들이 ‘아, 선배도 책 만드는 게 쉽지 않구나.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일이 원래 쉬운 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질문을 많이 하는 것요. 마음의 안부를 자주 묻는 일이라고 할까요.” 

오랫동안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은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레 성장하지만, 마음의 일은 다를 수 있다.

“책과 자신을 너무 동일시해도, 일과 나를 너무 밀접하게 생각해도 오래 일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갖는 일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책이 다르게 보여요

인스타그램(@_jabang) 페이지를 가보면 ‘자방’ 팀은 특유의 팀워크를 자랑한다. 독자들이 만드는 책도 아끼지만, 책을 향한 진심도 아낌없이 응원한다.

“선물 같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왜 그렇잖아요. 선물은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이 더 큰 것처럼. 수공업으로 굿즈를 포장하다가 ‘우린 누구? 여긴 어디? 싶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웃으면서 일해요. 왜 이 일이 가능할까? 생각해보면 ‘자기만의 방’ 주민들의 피드백이 너무 좋기 때문이에요.”

‘자기만의 방’ 시리즈는 현재까지 34권이 나왔다. 책이 출간이 될 때마다 독자들은 SNS에 정성스런 리뷰를 남겨준다. ‘자방’ 마을소식지를 발행할 때는 출판사로 손편지 답장을 보내오기도 한다.

“몇 년 전에 독립서점에서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책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독자 분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재밌어 하시더라고요. 그 후에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불러주시면 최대한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모두 입을 모아 해주신 말씀이 “이제 책이 다르게 보여요”였어요. 책뿐 아니라 제품이든 브랜드든 만들어가는 과정을 알면, 의미가 더 깊어지잖아요. 좁게는 저희 책을 더 의미 있게 전달하고 싶었고, 넓게는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소통하기 시작했어요.”

작년 12월에는 독자들에게 ‘자방일보’라고 이름 붙인 손편지를 보냈다. 코로나 세상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묻고, 편집부의 근황도 전했다. 며칠 후 전국 곳곳에서 독자들의 답장이 도착했다. ‘책 몇 부가 출고되었다’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느낌을 만끽했다. 책을 만들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다. 

김보희 편집자가 만나고 싶은 저자는 ‘존중과 신뢰’의 태도로 편집자를 대하는 사람이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로, 출판전문가로, 그리고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신뢰해주는 저자는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람과 일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니까.

“지금까지 만든 책을 영화에 비유하자면 상업영화와 독립장편 사이를 오간 것 같아요. 대중성이 있는 독립단편영화 같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몸집을 가볍게 하고, 틀에서 벗어난, 그간 책 만들며 안 해본 혹은 할 수 없었던 시도들을 해보는 책, 그런데 심지어 잘 팔리는 책, 그래서 트렌드의 한 귀퉁이라도 만들 수 있는 책 (웃음)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 <놀면 뭐하니?> 초창기에 저런 책!! 했었는데, 독립단편과는 거리가 머네요. 답하다 보니 제가 욕심이 크네요. (웃음)”



오래오래 같이 책 만들어요

후배 편집자들에게 종종 하는 이야기는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되돌아보면 당시에 만들고 싶은 책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따라 출판사를 선택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무언가 조급했다. 잘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텐데, 역시 그 마음 때문에 힘들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조급해하지 않는 일”이다.

“편집자의 일은,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이 중심인 듯해요. 독자, 저자, 동료 등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시작되고 사람에 대한 진심으로 만들어지는 일. 그래서 관심과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평소 저자들에게 ‘함께 나이 들어가요’라는 말을 자주 해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텐데요. ‘계속 써주세요. 저도 계속 만들게요, 그리고 저희랑 오래오래 같이 책 만들어요’ 같은 마음일 거예요.”

김보희 편집자는 우연히 신문에서 출판인회의가 운영하는 출판편집자 입문과정 광고를 봤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수업을 들은 후 출판사에 입사했다.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금은 예비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종종 한다.

“강의할 때는 포트폴리오를 만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이를 위해 추천하는 건 출간된 책을 보고 역으로 기획서를 써보는 ‘역 기획안 쓰기’예요. 나라면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을까?를 떠올려보면서요. 또, 좋은 제목과 카피들을 수집하는 것도 좋아요. DB처럼 쌓아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고민한 결실이잖아요. 그 안에서 많은 힌트를 찾을 수 있고요.”

수년 전 김보희 편집자는 일본의 한 출판사를 방문했다. 실용서를 중심으로 출간하는 곳이었는데, 1년에 한 권은 어떤 조건 없이 편집자가 만들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출간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렇게 기획한 책들에서 초대박 베스트셀러가 탄생하기도 했다고.

“당시 일본에서 반응이 좋은 소설이 있었거든요. 알고 보니 그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한 분이 우연히 본 연극이 너무 좋아서 직접 작가를 섭외해서 소설화한 작품이더라고요. 동기 부여가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실력은 먼지처럼 쌓인다는 말을 믿는다. 첫 책을 함께 만든 작가와 두 번째 작업을 이어갈 때, 각별히 행복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김보희 편집자. 그가 2021년에 만드는 책들은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할까. ‘자기만의 방’ 독자들은 손꼽아 기다린다.


김보희 편집자가 작업한 책들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최고요 지음 / 휴머니스트)

하우투 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자에게 제안하는 삶의 태도가 담긴 에세이,라는 편집 방향(혹은 스타일)의 책을 오래전부터 만들고 싶었는데 최고요 작가 덕분에 행복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방’을 널리 알려준 고마운 책이기도 하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임진아 지음 / 휴머니스트)

작가님과 1년 반 정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며 차근차근 만들었다. 작가와 ‘함께’ 만들고, ‘함께’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와 즐거움을 일깨워준 작업이었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최혜진 지음 / 휴머니스트)

‘편집은 경험의 설계다’. 나름의 편집에 대한 정의다. 분야 막론하고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책은 특히 경험 설계에 공을 들였다. 교양 실용 분야를 접목한 첫 번째 시도이기도 하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지음 / 휴머니스트)

2021년 첫 작업 책이다. 작가님을 ‘기록 동기부여전문가 김기록’ 씨라고 부르곤 하는데, 작업하면서 나도 여러 가지 기록을 시작했다. 책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기록을 제안하는데, 4장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록을 특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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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소설가 한정현, 좋아하는 마음은 멀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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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면 무엇이 될까? 한정현 소설가에게 그것은 ‘소설’이다.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쓰며 작가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나쁜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어요.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저런 삶의 태도가 나올까 싶죠. 저는 나쁜 사람은 절대 이해해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는 작가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쓴 듯한 소설들이 가득하다. 첫 번째로 수록된 「괴수 아키코」는 그가 꽤 오래 소설 쓰기를 쉬다가 발표한 작품이다. “그 시간 동안 소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이구나.”

한정현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들이다. 퀴어, 여성, 이민자 등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간 인물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깊이 이해한다. 현실에서 그들은 ‘이상하다’고 규정되지만, 소설은 그들에게 자긍심을 되돌려준다. 쓰는 사람인 그는 왜 이들을 사랑하게 됐을까?

“어린 시절, 특이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거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말을 거의 안 할 정도로요. 그때의 경험이 남아서 저처럼 별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좋더라고요. 실제로 제가 힘들 때 퀴어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어요.”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한정현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을 향한다. 한 사람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젠더, 국적 등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그중, 「소녀 연예인 이보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출발한 이야기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이켜보면 참 별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시대 사람들 같지 않은 면이 많았어요. 글쓰기를 좋아해서 일기도 많이 남기셨고, 일반적인 성 역할에 부합하지 않는 면들이 많았죠. 저를 그렇게 키우기도 하셨고요. 지금도 과거 사건을 조사하다 그 분들이 한 말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역사적 사건이 한 사람과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싶죠.”

좋아하는 사람들을 좇는 소설의 궤적은 폭넓다. 근대 식민지 시기와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국가 폭력, 기지촌 여성의 삶이 다채롭게 이어진다. 타인의 삶을 소설로 옮기며 그는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생물학적 제인」을 쓰려고 1년 동안 기지촌 이모들을 취재했어요. 근데 하면 할수록 제가 쓸 자격이 없는 것 같았어요. 실제로 출판사에도 못 쓰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나 같은 사람이 그 고통에 대해 뭘 안다고 소설로 쓰는 건지 회의가 들더라고요. 결국 사연을 극적으로 만들기보다, 그 과정을 보여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인터뷰, 다큐멘터리 같은 장치가 들어간 것 같아요.” 「생물학적 제인」에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미국인 여성 메리가 등장한다. 그는 기지촌과 관련된 여성들을 인터뷰한 후 말한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싶다고, 그저 응시해 보겠다고.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는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봐야 한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의 문장처럼, ‘좋아하는 마음’의 필터를 거치면, 사라졌던 이들이 보인다. 남녀의 역할을 자유롭게 뒤바꿨던 여성국극에 열광하던 얼굴들, 가부장적인 사회를 떠나 세계의 바깥으로 향하고 싶었던 이들,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꺼이 손을 잡았던 사람들. 공기처럼 떠다니는 혐오를 걷어내고, 소설 속 인물들은 곧게 나아갈 것이다. 그만큼 좋아하는 마음은 강하며, 멀리 간다. 




*한정현

1985년 출생.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로 제43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가 있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
소녀 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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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작가 “우리가 미신에 빠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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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미신을 믿나요?’라는 질문이 어색하다면, ‘나는 미신 따윈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지식 스토리텔러 오후(Ohoo) 작가의 새 책 『믿습니까? 믿습니다!』를 읽어보자. 마지막 장을 덮으면 알게 된다. 세상에는 미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닌 서로 다른 미신을 믿는 사람만 존재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는 별자리, 손금, 사주, 종교, 사상 등 인류와 함께해 온 미신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이다. 개인의 호오, 과학적 타당성과 관계없이 미신은 인류와 함께 존재(367쪽)해 왔다.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전해도 미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후 작가를 만나 ‘근거 없는 믿음’을 뜻하는 미신을 화두로 이야기를 나눴다. 90분가량 진행한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솔직함과 재미. ‘같은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는 작가’, ‘작가님 진짜 웃겨요’라는 독자들의 평은 과언이 아니었다. 

특정한 행동이나 사물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을 지킴으로써 행운이 온다고 믿으면, 우리는 미래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미신을 적당히 믿으면 긍정적인 태도가 생기고 고민을 덜 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341쪽)



맹목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쓴 책 

숫자 4가 재수 없다는 미신을 독자들이 박멸해 주길 바라면서 미신 관련 책을 네 번째로 내고 싶었다고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건 아니고요. 막연하게 그러면 좋겠다 싶었어요. 다행히 시기가 맞아서 네 번째에 나올 수 있었고요. 

미신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요?

솔직히 특별한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를 쓰고 나서 편집자가 다음 책도 같이 쓰자고 해서 어떤 이야기를 쓸지 고민하다가 제가 예전에 사주 관련 ‘썰’을 풀었던 걸 떠올리고 그런 걸 모아서 쓰면 재밌겠다 싶어서 썼어요. 

솔직하시네요. 그대로 써도 되나요? (웃음) 

물론이에요. 출판사에서 괜찮다면… (웃음) 굳이 이야기하면 지난 몇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이해해 보자는 취지도 있었어요. 

어떤 점을 이해할 수 없었나요? 

사람들의 광적인 믿음 있잖아요. 물론 당사자는 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요. 이를테면 종교나 사상에 대한 믿음 같은 건데 특히 요즘에는 정치 이슈에도 민감한 사람이 많잖아요. 그게 무엇이든 자기편에 대한 옹호가 심한 사람들을 보면서 합리적이지 않다고 느꼈고,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면 잘 맞는데 왜 유독 자신이 꽂힌 부분에 대해서는 말이 안 통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이해해 보고자 썼고요. 그런데 ‘아, 이건 다른 거구나’라고 그냥 받아들였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끝난 건가요. (웃음) 

맞아요. 이해할 수 없고 우리는 계속 이럴 거라는 사실만요. (웃음) 각자 믿음 체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미신 중에서 종교, 사상, 별자리 등을 소개했는데요.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나요?  

재밌다고 생각하는 걸 썼어요. 제가 재미있어야 다른 사람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맥락이 있어야 하잖아요. 나열하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뒤에는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다뤘죠. 한 마디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 다음에 하나의 맥락으로 엮기 위해서 중요한 것들을 끼워 넣었어요. 너무 솔직한가요? 

작가님이 괜찮으시다면요. (웃음)

괜찮습니다. (웃음) 별자리 이야기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앞부분에 넣었어요. 그다음으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심리, 언제부터 미신을 믿기 시작했는지도 이야기하면 재밌겠더라고요. 과거의 미신이 현대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궁금했고요. 사실 현재를 말하려고 과거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과거에 만들어진 미신 중에서 지금 적용되는 게 뭘까?’하고 생각하다가 종교나 사상을 포함했죠. 

농경이 인류 최대 미신이라는 이야기가 신선했어요. 만약 우리 조상이 농경이 아닌 다른 미신을 선택했다면 인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농경을 안 했으면 인류가 사라졌거나, 있다 해도 지금처럼 지배적인 종족이 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요? 농경을 안 하면 집단 생활하기 어려우니까 문명을 만들기 힘들었겠죠.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도 호모 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도 다 죽었잖아요. 우리도 그랬을 수도 있고요. 농경이 인류 최대의 미신이라는 이야기를 가장 앞에 배치한 이유가 있는데요. 시대순이기도 하지만, 미신이 꼭 나쁜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인류와 미신은 떼려야 뗄 수 없기도 하고요. 

다 계획이 있었군요. (웃음) 작가님의 기획력이 엿보이는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봤을 때 재밌어야 하니까요. 종종 하는 생각이 있는데요. 새로운 독자들이 제 책을 사주는 것도 좋지만, 저를 예전부터 알고 있던 독자들이 책을 사주는 게 더 좋아요. 그래서 그분들이 실망하지 않을 만한 책을 만들고 싶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제 책을 많이 안 사는 것보다 제 책을 좋아하던 독자들이 “오후 작가 책 이제 재미없다”라고 하는 게 더 슬플 것 같아요. 



작가로서 캐릭터를 구축하려고 노력해요

얼굴 없는 작가가 되고 싶으셨다고요.

꼭 그래야겠다는 건 아니었고요. 막연하게 그러면 좋겠다 싶었죠. 개인사와 구분할 수도 있고 좋잖아요. 원래 하는 일마다 이름을 다르게 쓰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부캐를 만들면 좋겠다 싶었죠. 책만 보고는 작가가 남자인 여자인지 모르게 하고 싶기도 했는데 이제 다 물 건너갔어요. (웃음)

‘오후(Ohoo)’라는 필명의 뜻도 궁금해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더라고요.

못 찾으신 이유가 있어요. 아무런 뜻이 없거든요. 첫 번째 책 내면서 만들었는데 어감이 좋은데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어를 쓰고 싶었어요. ‘Oho’가 중간에 들어간 단어가 필기체로 쓰여 있는 걸 봤는데 느낌이 좋더라고요. 나른하고 편한 느낌이었어요.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어떻게 글을 쓰게 됐나요?

예전에 방송국에서 작가 생활을 짧게 했어요.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영화 제작 현장에 있다가 방송국 작가가 돼서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일했는데요. 거의 막내 생활만 하다 관뒀어요. 그러다 서울시에서 하는 인터넷 방송을 만들었고요. 이 과정에서 자료 조사를 많이 했는데 조사한 내용을 버리려니 아깝더라고요.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쓰신 거군요. 

혼자 일하는 게 좋으니까 책을 써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출판사에서 책을 다 내주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무슨 책을 쓰면 출판사에서 내줄까 고민하다 마약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 했죠. 마약  관련 책이라면 내가 누군지 상관없이 내줄 것 같아서 시도했는데 성공했죠.

그렇게 나온 게 첫 책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죠? 

맞아요. 그 책이 구어체로 쓰였는데요. 실제로 제가 말하려고 쓴 글이어서 그래요. 투고하면서 다시 쓴 게 아니라 써놓은 걸 정리만 해서 드렸거든요.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으로요. 원래 돈이 안 되는데 미리 하지 말자는 주의예요. (웃음) 계약하기 전에는 쓰지 않는다는 주의여서 약간 편집만 해서 드렸어요. 지금 보면 약간 오그라드는 부분이 있죠. 구어체로 쓰여서요. 

작가님의 글이 재미있어서 좋다는 후기가 많더라고요. 혹시 원고 쓸 때 재밌게 써야 한다는 강박이나 부담은 없나요?

작가라면 당연히 있지 않을까요? 꼭 그게 웃겨야 한다는 건 아니고요. 재미있다는 게 웃길 때만 쓰는 표현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그 영화 재밌어?”라고 물어볼 때 단순히 그 영화가 웃기냐고 물어보는 게 아닌 것처럼요. 누가 제 책을 두고 “그 책 재밌어?”라고 물어보면 “볼만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써야겠다고 생각해요. 

추천사도 재미있어요. 명리학자와 과학 전문기자의 추천사가 하나씩 있는데 이것도 기획한 건가요? 

그럼요. 책 쓰기 전부터 두 분한테 받고 싶었어요. 강헌 선생님은 음악 평론가인데 명리학을 공부하셨어요. 제가 강헌 선생님께 명리학을 배웠거든요. 그래서 꼭 추천사를 받고 싶었고,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를 쓰면서 강양구 기자님을 알게 됐는데 과학 전문기자니까 받으면 좋겠다 싶었죠. 추천사를 요청할 때도 고심하는 편인데요. 다음에 나오는 책이 연애에 관한 책인데 추천사를 전 여친한테 받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웃음)  

재밌네요. 전무후무한 추천사가 아닐까 싶은데…벌써 요청하신 건 아니죠?

네. 아직이요. 출판사에 물어보고 가능하다고 하면요. (웃음)

명리학은 왜 배웠나요?

강헌 선생님이 좋아서 배웠어요. 예전에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는 온라인 강연을 하셨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다음에 강헌 선생님 오프라인 강연이 있으면 꼭 가야겠다 싶었는데 그다음 강연 내용이 명리학이었어요. 그래서 배운 거예요. 물론 배워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겠죠. 그런데 강헌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안 배웠을 가능성이 커요. 

그런데 사주는 믿지 않는다고요. 

믿지는 않는데 다른 사람이 사주 봐달라고 하면 진지하게 봐줘요.

강헌 선생님 강의의 무엇이 좋았는지 궁금해요. 

음악사에서 장르가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 전환되는 시기를 다룬 강연이었는데 일단 재미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글쓰기가 그런 방식을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사실 강헌 선생님은 무엇을 해도 재밌어요. 원래 발화자가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글을 쓰면서 주제에 구애받기보다는 캐릭터를 구축하려고 노력해요. ‘내 팬을 만들겠어’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야 보는 사람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미신을 없애는 건 불가능해요

모든 미신은 시대적 특성을 가진다고요. 최근에 MBTI가 이른바 ‘핫’했잖아요. 미신으로서의 MBTI는 어떤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다고 보세요?

글쎄요. 인터넷이 발달해서 아닐까요. 잘 모르겠어요. (웃음) 다른 미신보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추측하자면 과학적으로 보여서 아닐까 싶고요. 결과가 16개이고 그래서 개별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리고 나쁜 말이 없어요. 이게 중요한데요. 나쁜 소리를 안 하지만 입바른 칭찬 같지도 않은 거죠. MBTI가 그 지점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점쟁이들도 다 좋은 말을 해주는데 그걸 어떻게, 얼마나 리얼하게 해주느냐가 관건이잖아요. 

사랑, 연애에 비유한 대목도 꽤 있었어요. 사랑과 연애도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미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더라고요. 

그렇죠. 저도 연애할 때 몰입하는 편인데 사실 연애는 정말 이상한 거예요. 특히 여성들의 경우는 더 그런데요. 인류 역사상 여성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은 여성들의 남성 파트너였거든요. 그런데도 많은 여성이 남성과 연애하잖아요.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요.  

사랑과 연애까지 미신에 포함한다면 인간은 미신 없이 살 수 없다는 명제가 더욱 사실이 되는 것 같네요. (웃음)  

미신도 그렇지만 책을 쓰는 일도 개별적인 사건을 묶어서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드는 거잖아요. 이런 것들이 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닌가 싶어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요. 특히 소설이 그런 것 같은데요. 현실에서는 모든 일이 파편적으로 일어나는데 소설에서는 개별 사건이 연결되고, 복선이 되기도 하잖아요. 지나고 나면 과거의 일이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본능적으로 개연성을 찾고, 부여한다는 말인가요?

네. 그런데 개연성 없거든요. 그렇게 안 했어도 일어날 일일 수도 있는데 이유를 찾아서 연결하는 경향이 다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심리적으로 편해지는 것도 있고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으니까 그렇겠죠. 

그런 이유로 ‘미신’도 만들어지고 현재까지 존재하는 거고요?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우리는 미신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현실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잖아요. 정보는 다 공개되지 않고, 정말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도 있고요. 그런데 방법이 없는 거죠. 이런 것들을 다 이해할 방법이요. 반대로 음모론을 보면 아주 완벽하죠. ‘이런 이유로 지금의 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모든 걸 설명해요. 현실에 있는 빈틈이 음모론에는 없는 거예요.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모든 미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불가능하겠다 싶었어요. 

미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상에 ‘믿음’이 아닌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돈, 약속 이런 것도 다 믿음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믿음이라는 체계가 있어서 인간 사회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사상이든 종교든 믿음 체계가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이런 맥락에서 미신을 이해하면 인간 사회에서 미신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죽을 때까지는 안 없어질 것 같아요. (웃음)


 


*오후 (ohoo)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도 노동이므로 결국 하루 종일 일을 하는 셈. 주 40시간 노동이 목표지만 한동안 이뤄질 것 같지 않다. 어떤 권위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사랑에는 언제나 보호장치 없이 휘청이며 힘겹게 버티고 있다. 뜨거운 욕조에서 차가운 아이스크림 먹기, 와인 코르크 따기, 키스하기 직전의 설렘,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 연인과 함께 맞는 휴일 아침을 좋아한다. 물론 대부분 시간은 골방에서 영화를 보며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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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스몰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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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트라우마 전문가가 들려주는 ‘영화로 만나는 심리학’ 이야기, 그 두 번째 책이 출간됐다. 김준기 저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식이장애 전문가로서 25년 동안 트라우마를 지닌 내담자들과 만나왔다. 영화를 통해 트라우마를 설명하고 내담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노력하며 지난 2009년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을 펴냈다. 이번에 나온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에는 전작에서 다루지 못했거나 이후에 개봉한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정의되는 트라우마의 모습을 조명한다.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이 출간된 후에 지난 십여 년 동안 트라우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트라우마 치료 센터도 처음에는 한 개로 시작했던 게 지금은 전국에 열 몇 곳까지 늘어났어요. 특히 세월호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였죠. 그게 굉장히 큰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전문가 집단에서도 트라우마 치료에 많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11월에 학회에서 트라우마에 대해 발표를 했는데, 예전과 달리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지난 10년 동안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라우마는 더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경험이나 대상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동시에, 트라우마 치료를 받는 것은 예외적인 일로 여긴다. 굉장히 드물고 강력한 사건을 경험한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의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인용돼 있다. “우리 삶에서 트라우마란 어찌할 수 없는 필수불가분의 것이다.” 아울러 책은 빅 트라우마와 스몰 트라우마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평범한 일상의 경험 범주를 넘어서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자신감 혹은 자존감을 잃게 만드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도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전문가들도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트라우마의 피해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큰 트라우마가 있어도 이전에 좋은 관계와 환경에서 자랐다면 극복해내는 거예요. 극복을 못 해내는 사람들을 봤더니 이전에 스몰 트라우마가 많았어요. 그걸 이제 알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트라우마는 약한 사람들이 받는 건데, 그 사람들은 자신이 아프거나 힘들다는 표현을 크게 못해요. 대개 참고 지내고 가슴에 안고 지내요. 그러다 보니까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생생한 말들이 아직 사회에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거죠. 스몰 트라우마는 일상의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생기기 때문에, 스몰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 일을 겪었을 때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받아야 극복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은 스몰 트라우마로 인해서 여전히 영향 받는 사람들을 볼 때, 정신과 의사로서 ‘이 사람을 지지하고 안심시켜주는 힘이 약했구나’ 하고 반대로 유추해 보게 돼요.”

누구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모두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지난날의 상처로 남는 경험과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한 경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현재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어려움이 생긴다면 치료를 받아야죠. 어렸을 때 힘든 일이 있었지만 지금 나는 별 일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큰 트라우마가 있었어도 ‘괜찮아, 너 잘 했잖아’ 하고 뇌에서 정보 처리를 잘 한 거예요. 문제는, 그 정보를 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때 정보가 처리되지 않은 상태로 닫아두려고 하거든요. 그렇게 그대로 남아있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증상으로 남는 거예요. 누구나 힘든 일과 아픈 일을 겪어요. 그게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자신의 힘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여러 이유로 회복이 안 되는 상태가 이어지면 성인이 돼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요.”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경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 ACE 연구(아동기 부정적 경험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는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 추적 연구한 것인데, 그 결과를 보면 ‘어린 시절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사람은 응답자의 1/3에 불과했다. 전체 인구 중 64%의 사람들이 최소한 1개 이상의 아동기 부정적 경험을 겪었다는 것이다. 또한 “ACE 점수가 높을수록, 그에 상관 비례하여 정신적 건강 및 신체적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ACE 연구 결과를 통해서) 결국은 트라우마가 생활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지금 미국에서는 ACE 점수를 줄이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요. 공공 의료에 소비되는 금액을 줄이기 위해서는 예방이 중요한데, 그 첫 번째 시도로 ACE 점수를 줄이려고 하는 거예요. 힘든 일을 경험하는 아이들을 리페어(repair) 하는 시스템들을 자꾸 더 만들려고 하는 거죠. 그 아이들에게 빨리 다가가서 도움을 주고, 부모들을 미리 교육하고, 이런 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good enough mother’는 ‘perfect mother’가 아니다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에서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는 ‘연결감’의 중요성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라우마 치료를 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트라우마 기억을 떠올리고 버티면서 그 기억과 함께하는 것stay with it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컸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트라우마 전문가들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기억을 떠올릴 때 곁에서 누군가가(사랑하는 사람, 가족 혹은 신뢰할 수 있는 치료자) ‘내가 지금 함께 있어요stay with me’라고 말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요한 사람과의 연결감을 통해서만이 트라우마 기억의 압도적인 에너지로 마비되었던 우리 뇌의 적응적 정보처리 시스템이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34쪽)

앞서 이야기한 ACE 연구의 결과를 떠올려 볼 때, 아동기에 ‘연결감’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이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존재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할까. 양육자에게조차 연결감을 느낄 수 없다면, 아이는 자라서 어떤 자아상을 갖게 될까. 

“제일 흔하게 쓰는 방어막은 ‘내가 나쁜 아이여서 누구도 내 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부모가 나쁜 사람이다’가 아니라 ‘내가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나에게 뭔가 큰 결격 사유가 있어서 아무도 내 편을 안 들어준다’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 비난의 소리’가 생기거나 혹은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게 되면서 모든 것에 자기 탓을 하게 되죠. 끊임없이 그런 것에 시달리면 제대로 자기를 발현하고 살기 어려워지겠죠. 늘 긴장하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누가 알게 될까 봐 걱정하고, 비난할까 봐 걱정하고, 이번에는 잘 했지만 다음에는 못 할까 봐 도망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스스로를 비난함으로써 살아남는 게 첫 번째 방법이에요.”

책에는 영화 <아이, 토냐>와 <러브 앤 머시>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영화는 두 명의 실존 인물,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과 뮤지션 ‘브라이언 윌슨’의 삶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자신에 대한 부모의 부정적인 평가, 비난, 억압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들의 내면에는 부모가 들려준 목소리와 이야기가 깊이 자리 잡았고 끊임없이 재생됐다. 

“생각보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자기 비난의 소리’는 부모가 자신에게 항상 했던 이야기예요. ‘넌 왜 그렇게 유난을 떠니, 네가 이상한 거야,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그런 말들이 내 안에서 내 목소리로 나를 야단치면 ‘자기 비난의 소리’라고 해요. 생생하게 그 목소리 그대로 야단치는 경우에는 ‘가해자의 내재화’라고 이야기하고요.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인간은 그만큼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거죠.”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고, 남겨진 트라우마를 치유해줄 수 있을까.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은 ‘든든한 안전지대로서의 부모’가 되는 여러 방법을 알려준다. 아이의 반응에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반응해주는 ‘타당화’도 그 중 하나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누군가가 안정감을 제공해야 하는데 첫 번째는 같이 사는 가족, 가까운 친구들이에요.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야 돼요. 엄마가 ‘타당화’를 해주는 게 제일 중요한데, 그러려면 엄마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돼요. 우리 뇌는 껍질로 싸여있어서 클로즈 시스템이라 생각하지만 오픈 시스템이에요. 다 감정이 오가거든요. 하물며 가족끼리는 오죽하겠어요. 영향을 아주 직접적으로 받아요. 그래서 엄마가 먼저 편안해지는 게 우선인 거죠.”

그러나 저자는 ‘마치 모든 것이 부모의 책임인 양’ 오인되는 것을 경계했다. 근본적인 변화와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25년 동안 트라우마를 지닌 내담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면서, 무엇도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결책으로서 부모가 중요한 것이지, 원인으로서 엄마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good enough mother’는 ‘perfect mother’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실수하지만 리페어(repair) 할 줄 아는 엄마예요. 좋은 엄마는 반영을 잘 해줘야 돼요. ‘그랬구나’ 하고 타당화를 잘 해주는 거죠. 그런데 타당화를 100% 잘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해요. 실제로 충분히 좋은 엄마들의 경우를 봤더니 40% 정도밖에 (타당화를) 정확하게 못 해줬다고 해요. 그 대신에 못 한 60%를 리페어 해주면 된다는 거예요.”



사람으로 치유되는 트라우마

책의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영화는 <한공주>와 <김복동>이다. <한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트라우마 사건 자체의 충격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사건 이후 주변 상황이 어떻게 피해자를 돕고 지지하는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예후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특히 청소년의 경우 가족의 지지, 친구들의 관심, 주변 어른들의 배려는 아이가 트라우마의 영향에 함몰되느냐, 아니면 트라우마의 영향을 극복하고 성장하느냐 하는 방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9쪽)

<한공주>, <김복동>에 실려 전해지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사회는 트라우마 생존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 질문이 떠올랐다. 저자는 “피해자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된다”고 말했다. 

“사건을 정치화, 이슈화 하니까 문제인 것 같아요. 피해자를 피해자로 보지 않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 하면서 보는 거죠. 피해자들은 자기 아픔을 잘 표현 못해요. 일단 언어 중추가 마비 돼서 그럴 수 있고요. 그 다음에 (관계에서) 너무 약해서, 또 순종하며 지내는 데 너무 익숙해서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사회에서 아무도 안 도와주면 이 사람들은 더 약해지는 거예요. 대개 약자가 트라우마를 받잖아요. 가해자인 강자는 자기를 보호할 수단이 많아요.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죠. 처음부터 대등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거예요. 제삼자들이 깜빡 잘못하면, 특히 정치적 이슈화가 돼버리면 자칫 가해자가 맞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 제일 분노가 일어나죠. 한두 사람쯤은 피해자 편이 되어줘야 해요. 그런데 이 사회에 불분명한 정보가 너무 넘쳐나니까 피해자를 잘 보호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영화 <김복동>의 이야기를 끝맺으며 저자는 ‘외상 후 성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분노와 복수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가치와 정의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까지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 나갔고, 다른 아픈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외상 후 성장의 삶이 아닐까? (306~307쪽) 

‘외상 후 성장’이란 “인간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게 되면서, 오히려 내면에서 긍정적인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일컫는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뇌에 있다는 가설이다. 

“많은 연구들이 그런 힘이 우리 뇌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50~60%는 일어나는 일이라고요. 뇌가 안정이 되면, 그 이전의 생각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니까, 더 높은 차원의 생각을 해서 좋아지는 경우가 흔히 일어나요. 조금이라도 누가 옆에서 도와주고 뇌가 안정적인 상태가 되면 기존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는 거죠. 우리 뇌에 그런 적응적 정보처리 시스템이 원래 있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온고잉 트라우마(계속 진행 중인 트라우마, ongoing trauma)’가 있든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우리는 그 힘을 끄집어낼 수 있어요. 그런 힘이 우리 뇌에 있다는 게 연구 결과로 밝혀지고 있어요.”



저자는 책에서 다룬 25편의 영화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세 작품으로 <쓰리 빌보드>, <자전거 탄 소년>, <그랜 토리노>를 꼽았다. 세 편 모두 가족이 아닌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트라우마 치유를 경험하는 이야기였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 <쓰리 빌보드>는 “상상치 않은 사람들끼리의 연결이 일어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에 실린 <쓰리 빌보드> 이야기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앞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치료약이 발명되고, 아무리 기발한 치료기법이 개발되어도, 트라우마의 치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더 많이,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217쪽)




*김준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트라우마 연구자이자 식이장애 전문가. 폭력이나 폭행, 강간이나 성폭력, 학대, 방임, 끔찍한 죽음의 목격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지닌 환자들을 25년간 만나고 진료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마냥 유쾌할 것만 같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조차 인물들이 겪는 미묘한 마음의 상처를 발견하곤 했으며, 영화를 통해 트라우마를 설명하고 내담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노력해왔다. 25편의 영화 이야기와 함께 트라우마의 증상과 종류, 치유의 과정까지 담아낸 이 책은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그 곁에 있는 이들, 트라우마를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친절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김준기 저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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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민철 야나두 공동대표 “모델 조정석, 0원 마케팅 등 성공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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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혈단신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월급 23만 원을 받는 오락실 캐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광고기획사를 다니다 창업에 도전했지만, 10여 년간 스물네 번 실패하고 잃은 돈만 150억 원. ‘실패 장인’으로 불리는 ‘야나두’ 김민철 공동대표의 이야기다. ‘야 너두 할 수 있어’라는 광고 카피로 전 국민의 95%가 아는 영어 교육 기업의 대표가 되기까지, 김민철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거듭된 실패 경험이 실패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끊임 없이 되뇐 ‘나도 할 수 있다’는 말과 매일 이뤄낸 작은 성공 때문. 김민철 대표의 새 책 『야, 너두 할 수 있어』에는 실패를 실험 삼아 성공에 이른 김민철 대표가 전하는 성공 비법이 담겼다. 

공포감을 이기고 회사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나는 100퍼센트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을 100퍼센트 성공해내기로 했다. 95퍼센트의 성공 가능성도 안 된다. 반드시 100퍼센트 성공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해 100퍼센트의 성공을 맛봐야 했다. (138쪽)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책

3쇄를 찍었다고 들었어요. 인세를 기부했다고요. 

제가 이른바 ‘사회안전망’에 있던 사람이거든요. 사회안전망의 중요성을 잘 아니까 자연스럽게 기부를 생각하게 됐어요. 누구나 실패할 수 있으니까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자기계발서예요. 어떻게 쓰게 됐나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했는데 조회 수가 100만 가까이 나왔어요. 그 뒤로 고등학생이나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 강연자로 서게 됐고요. 강연 준비하면서 ‘그때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 하며 옛날 일을 되짚어 보니 자연스럽게 실패와 성공 원인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꼭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었어요. 마침 출판사에서 책으로 정리해 보자고 요청하셨고요. 3년 동안 모았던 자료와 그동안 강연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썼죠. 

실패를 경험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하루 세 번 양치하기’에 집중했다고요. 

작은 성공의 경험이 꼭 필요하거든요. 특히 실패했을 때는 작은 성공을 하면서 자신한테 괜찮다고 이야기해야 하고요. 100% 성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면서 성공의 감각을 되찾고, 성공할 수 있는 일을 늘려가야 해요. 저한테는 그게 ‘하루 세 번, 3분 양치하기’였던 거죠. 

작은 성공을 이루려면 목표를 작은 단위로 쪼개는 게 중요하겠네요.

아주 중요하죠. 목표가 크면 금방 치쳐요. 반대로 작은 성공 경험을 쌓으면서 가면 오래, 멀리 갈 수 있고요. 

첫 사업에 실패하고 야구팬들에게 응원용 머리띠를 팔아서 번 돈으로 ‘EBS 토목달’에 투자해서 성과를 이뤘잖아요. 토목달의 무엇을 보고 투자를 결정한 건가요? 

일단 콘텐츠가 좋았어요. 당시 선생님이 숨은 보석이셨고요. 문제는 강의가 다른 곳보다 조금 길고, EBS답게 강의가 정직하다는 점이었는데요.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끝까지 수강한 분들의 점수는 반드시 오르더라고요. 강의가 좋다는 건 증명된거니까 나는 이걸 끝까지 듣게 하면 되겠다 싶었죠. 

‘0원 마케팅’의 시작인 거죠? 

맞아요. 미국 흑인 사회 어느 학교의 교장이 학생들한테 학교에 올 때마다 1달러씩 줬대요. 학생들이 학교를 잘 안 나오니까 묘책을 쓴 거죠. 그 뒤로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기 시작했다는 사례를 듣고, 강의를 끝까지 들으면 수강료를 환급해주는 이벤트를 기획한 거예요. 

그런데 그 마케팅이 대박이 났죠. 지금은 흔한 마케팅 기법이 됐고요. 

사람은 효율을 추구하기 마련이잖아요. 학습 이력을 보면 실제로 수강하는지 틀어만 놓는지 파악할 수 있는데요. 2주 정도 지나면 중간에 포기하든지 끝까지 듣던지 둘 중 하나로 결정 나요. 처음에는 틀어 놓기만 했다가 중간에 변화하는 분들이 상당했어요. ‘환급받아야 하니까 틀어놓기만 하자’ 했다가 이왕 재생하는 거 들어보는 거죠. 

그런 변화를 보면 짜릿할 것 같아요. 

정말 좋죠.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많은 부모님이 우리 아이가 공부를 많이,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5분이었지만, 나중에는 10분, 20분으로 늘어나요. 그런데 내 아이가 당장 3~4시간씩 앉아서 공부하길 원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정작 부모님 본인들은 안 그러셨으면서요. (웃음)

뜨끔한 분들 많을 것 같은데요. (웃음) 

‘야 너두 할 수 있어’의 핵심도 똑같은데요.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반드시’라는 단어를 기억하면 사람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대략 6.8%래요. 학습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22%밖에 안 되고요. 이 수치가 의미하는 게 뭐냐면 성공하는 사람들은 22% 안쪽에 있고 6.8%는 많이 성공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들으면 참 쉽고 간단한데 알면서 못하는 게 항상 문제인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 다 아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아는 이야기를 실천하는 사람이 적어요. 왜 이미 알고 있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지 알려주는 게 이 책이고요. 중요한 건 뭐든지 한 번에 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오늘부터 공부해야지’가 아니라 ‘오늘부터 책상에 앉아야지’로 바꾸고, 포기하더라도 그걸 실패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니야 나는 내일 다시 할 거니까’라고 마음먹는 태도가 필요해요. 



조정석 배우에겐 그저 감사하죠

명함을 보고 궁금해졌어요. 영어 이름이 Min Tru인데 무슨 뜻인가요?

대학교 때 사람들한테 ‘민처류’라고 불러 달라고 했어요. 포유류, 갑각류처럼 나는 나만의 종족이라는 의미로요. 그런데 다들 부산 사람이니까 발음하기 불편해서 ‘민뚜루’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때부터 제 닉네임이 ‘민뚜루’가 됐어요. 그래서 영어 이름도 ‘민뚜루’라고 해야겠는데 영어로 ‘민뚜루’라고 할 수 없으니까 ‘Min Tru’가 된 거죠.  

역사가 있는 이름이네요. 

‘야나두’도 비슷해요. 야나두 메인 대표 강사님 이름이 원예나예요. 영어 이름은 ‘예니’고요. 2000년대 초반에 한참 이메일 만들 때 원예나 강사님이 ‘예니’라는 이름으로 계정을 만들려고 하니까 이미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었대요. 그래서 ‘예니’를 ‘야나’로 바꿨는데 ‘야나’도 누가 사용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야나’라는 이름 뒤에 do를 붙인 거예요. 일반적으로 이름 뒤에 생년월일 적는 것처럼요. 원예나 강사님은 주로 ‘do’를 붙였던 거죠. 그래서 ‘야나두’가 됐어요. 

조정석 배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작년 연말 SBS 연기대상에서 조정석 씨가 영어로 소감 이야기하는 장면 보셨나요? 

봤죠. 깜짝 놀랐어요. 조정석 배우는 실제로 야나두 강의를 열심히 들으시거든요. 감사했죠. 

다른 배우들이 먼저 분위기를 만들었고, 보는 사람도 웃음이 나는 훈훈한 분위기였잖아요. 그래서 대표님은 과연 그걸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했어요. 

그저 감사했죠. 운이 좋았고요. 조정석 배우 소속사 전 직원한테 선물 보내드렸어요. 

조정석 배우가 ‘인간 야나두’로 불릴 만큼 모델로서 임팩트가 강했어요. 처음에는 마동석 배우와 더블 캐스팅을 계획했다고요. 

에이전시 제안에 따라 남자 고객은 마동석, 여자 고객은 조정석 배우로 정하고 더블 캐스팅하려고 했죠. 그런데 광고를 방영해야 하는 시점에 마동석 배우가 한창 영화를 찍고 있었거든요. 촬영 시점이 안 맞았어요. 어쩔 수 없이 마동석 배우는 포기하고 조정석 배우 원톱으로 갔는데 다행히  <질투의 화신>과 <형>이 흥행해서 야나두 이미지에 큰 도움이 됐죠. 

지금은 조정석 배우와 계약이 끝났고 앞으로는 모델을 쓰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이유가 있나요?

모델 전략은 브랜드 인지도를 위한 건데 이제 서비스로 승부를 겨뤄야 하는 시점이 왔다고 생각해요. 카카오 키즈랑 합병한 가장 큰 이유도 IT기술이나 콘텐츠를 공고히 해서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고요. 물론 모델도 쓰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품질에 더 많이 투자해서 고객만족도를 높이는 데 방점을 두려고 해요. 야나두의 상품은 ‘고관여 고가격’ 상품이니까 모델보다는 품질이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죠.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습성

‘잠재력을 보고 투자했다’는 언급이 많아요. 야나두에 투자할 때도 그렇고요. 개인이나 기업의 어떤 점에서 잠재력을 발견하나요?

핵심은 꾸준함인 것 같아요. 현재 상황이 어려워도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편인데요. 옛날 어른들 말 중에 지름길은 없다는 말 있잖아요. 정답이 아닌가 싶어요. 젊은 사람들한테 이런 이야기 하면 시끄럽다고 하겠죠. 정말 재미없는 이야기인데요. (웃음) 어쨌든 저한테는 그게 정답이에요. 예를 들어 저는 주식을 살 때도 한 기업의 대표님이 어떻게 사업을 하고 있는지 보고 결정하는데요. 일단 성실하고, 본인의 사업을 정말 좋아하고, 동시에 주변 사람을 대할 때 매너 있다면 그 회사 주식을 사요. 그 정도의 정보만 있어도 그 회사는 반드시 성장한다는 믿음이 있는 거죠. 결국 대표가 의사 결정을 하잖아요. 좋은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습성이에요. 

영어 학습 시장이 이른바 ‘블루오션’은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영어 학습 시장에 뛰어든 이유가 있나요?

2005년 즈음부터 블루오션이라는 용어가 알려졌는데요. 사람들이 단어만 알고 실제 의미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블루오션의 정확한 의미는 시장의 혁신이지 없는 시장을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블루오션이라는 용어를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태양의 서커스’만 봐도 그래요. 세상에 없는 서커스를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서커스 시장의 모양을 바꾼 거예요. 그러니까 블루오션이냐 레드오션이냐가 아니라 시장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해요. 모바일로 대체되는 시장에서 선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시장이 충분히 크니까 가능성 있다고 판단한 거네요. 

성인영어시장이 1.8조 원가량 되는데요. 1.8조 중에 모바일로 바꿀 수 있는 시장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와요. 진출 당시에 2천억 수준이었거든요. 모바일 시장은 점점 커질 테니까 잠재력 있다고 생각한 거죠. 장사할 때도 ‘목’이 중요하잖아요. 좋은 상권을 잡고 있으면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고요. 

코로나19가 계속되고 있어요. ‘야나두’가 더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가 싶은데 어떤가요?  

분명한 사실이고요. 지금처럼 생활 전반에서 비대면이 활성화될 거라는 건 예상했어요. 코로나가 5년에서 10년을 앞당긴 것 같고요. 당연한 수순인 것 같아요. 모바일이 세상에 나왔다는 건 개인에게 미디어가 주어졌다는 거고,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진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개인은 집단생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죠. 만나서 소통하고, 그걸 바탕으로 이득을 발생시키는 건데 이런 활동이 다 온라인으로 이뤄지니까요. 

대표로서 채용도 많이 할 텐데 면접에서 주로 어떤 질문을 하는지 궁금해요. 

실패 경험과 실패의 원인을 어디서 찾는지를 물어요. 가장 안 좋은 답은 원인을 환경에서 찾는 사람인데요. 물론 그게 사실일 수도 있어요. 모든 상황에서 그 답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데도 안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같은 환경이 주면 그 사람은 또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바뀌는 게 없잖아요. 

여행에 대한 언급도 많더라고요. 여행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여행 경험 중요하죠. 실제로 면접 볼 때 여행 스타일이 어떻게 되냐고 꼭 물어보는데요. 여행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과 똑같아요.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비행기 표를 준비하고 일정을 계획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반드시 돌아오는 날이 있고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비슷해요. 각자의 방법이 있겠지만 저한테는 여행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요즘 밸런스 게임 많이 하잖아요. 일 잘하는데 불성실한 사람과 일을 조금 못하지만 성실한 사람 중 한 명을 꼽는다면요?

둘 다 필요해요. 성실하게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스페셜리스트로서 성과를 내야 하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회사에 스페셜리스트들이 너무 많으면 밸런스가 안 맞아요. 결국 스페셜리스트를 성실한 사람들이 받쳐주는 구조거든요. 원래 사피엔스 종은 서로 도우면서 살도록 만들어졌잖아요. (웃음)

우문현답이네요. 대표님다운 답변이랄까요. (웃음) 

그래도 만약 한 명만 선택하라면 저는 스페셜리스트를 선택할 것 같아요. 

의외의 답변인데요?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잘해야 재미를 느끼거든요. 재미를 느껴서 더 잘하고 싶어지면, 불성실함이 사라져요. 사실 제가 그런 스타일이에요. (웃음) 재능 있는 사람이 더 큰 목표를 만나면 불성실함이 사라지더라고요. 강력한 경쟁자가 생겨도 마찬가지고요. 왜냐하면 자기가 불성실해서 못 이긴다는 걸 그때 알게 되거든요. 그리고 성실한데 성과가 안 나온다는 건 어쩌면 재능을 잘못 파악한 걸 수도 있고요. 빨리 다른 직업을 찾아보셔야 해요. 

‘나 사용설명서’를 작성해야 한다고요. 본인이 생각하는 인간 김민철은 어떤 사람인가요?

흥분 잘하고 즉흥적이에요. 재밌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고요. 단시간 내에 집중력 있게 하는 건 잘하는데 꾸준히는 잘 못 해요. 다행히 회사를 합병하면서 함께한 대표님이 꾸준하세요. 꼼꼼하시고요. 제가 토끼 같은 사람이라면 그분은 거북이 같은 스타일이에요. 그걸 알기 때문에 같이 저 대표님하고 같이 일해야겠다 싶었죠. 

작은 습관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어요. 요즘 대표님의 루틴은 무엇인가요?

요즘 몸이 너무 망가져서 ‘야핏’으로 하루 10분씩 운동하려고 해요. 곧 야핏 사이클이 집에 들어오는데 그거 기다리고 있어요. 또 다른 루틴은 책 읽기인데요. 안 보더라도 들고 다녀요. 한 장이라도 읽으려고 하고요. 독서든 운동이든 조금씩 하다 보면 반드시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에요. 

독서라는 목표를 쪼개셨군요. (웃음) 들고 다니기만 하는 그 책은 어떤 책인가요?

『지금 팔리는 것들의 비밀 』이요. 아주 괜찮더라고요. 다 읽지는 못했는데 들고 다녀서 손때가 많이 탔어요. 그래서 아마 사람들은 제가 다 읽은 줄 알 거예요. (웃음) 



목표를 명확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야나두’ 대표로서의 목표와 개인으로서 목표가 있다면요?

50대를 준비하고 있어요. 토요일마다 스타트업 직원들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데요. 기부보다 중요한 게 이런 교육인 것 같아서 반짝이는 분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래서 저보다는 조금 빨리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으면 해요. 개인적으로는 60대가 되면 그림이나 음악같이 예술을 공부해 보고 싶어요. 죽음과 더 가까워지니까 죽음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그때 되면 회사 일에서 한 발 떼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김민철

대한민국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 일명 ‘실패의 장인’이라 불린다. 부산에서 태어나 팬티 세 장 달랑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 화려한 학벌이나 차별화된 스펙과 거리가 멀었던 저자는 100여 번의 취업 실패 끝에 월급 23만 원의 오락실 캐셔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광고 기획사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다 호기롭게 창업에 도전한다.
야구 신문 창간, 노점상 운영, 도시락 판매, 홍대 카페 개업 등 27번의 창업을 시도하고 24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무려 150억 원을 실패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실패가 아니라 실험일 뿐’이라는 마음으로 재도전을 거듭하다, 마침내 인터넷 강의 EBS ‘토익목표달성’ 브랜드를 단 1년 6개월 만에 매출 150억 원의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이후 전 국민의 95%가 아는 온라인 영어 교육 기업 야나두를 세우며 업계 1위 자리에 오른다.



야, 너두 할 수 있어
야, 너두 할 수 있어
김민철 저
라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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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위로 특집] 권할 수 있는 불안 - 시인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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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책방을 운영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책방에서의 시간을 기록하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내는 것은 희귀한 풍경이다. 시인이 3년간 운영해온 호숫가 책방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고, 이윽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의 책방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이듬의 시집 『히스테리아』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10월,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아울러 받았다. 한국문학 작품이 전미번역상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행도 연도 구분하지 않은 표제작 「히스테리아」는 불안하고 처절하다. 『히스테리아』 초판 출간일로부터 6년 5개월여가 지났다. 그사이 시인이 자초한 가장 큰 변화는 책방이듬의 문을 닫고 다시 연 것이다. 근작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혼자 먹는 밥이 가장 달았던 이가 더불어 사는 법을 뒤늦게 알아가고 있다. 바람이 없다면 어떻게 항해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불어주는 온기로 이 배가 천천히 항해하고 있다.”(37쪽)시인은 이제, 불안보다 온기를 더 자주 생각한다. 



송구하게 수상 소식도, 새 책도 아닌 불안에 대해 여쭙고자 뵙자고 했어요. 

전혀 미안할 필요 없어요. 불안이라니, 정말 나와 딱 맞는 단어라고 생각한 걸! 책방이듬도 불안 그 자체이고, 하하. 나는 내 운명이 떠돌이라고 생각해요. 이방인으로 산 날도 많아요. 책방 문을 연 것도 그 운명 때문이에요. 베를린에서 파견 작가로 살 때, 매일 가던 북카페가 있었거든요. 이방인들은 한 번씩 사무치게 외로울 때가 있어요. 그런 날 그 카페에 가서 넋 놓고 앉아 있으면 주인이 말없이 커피잔을 채워주기도 하고 말을 걸어오기도 했어요. 어떤 날에는 노벨상 수상 작가가 학생들 몇 앞에서 상기된 얼굴로 자기 작품을 낭독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요. 그러다 바라게 됐죠. 한국에도 이렇게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결국 불안과 외로움이 책방이듬을 탄생시켰군요. 

책방을 열겠다고 하니 주위의 작가 열이면 열 말렸어요. 그런데 나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속수무책으로 달려가는 사람이에요. 책방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불이 붙기 시작한 순간, 이미 결론은 정해져 버린 거죠. 

그때는 책방이듬이 그토록 많은 불안을 안겨줄지 몰랐던 거죠? 원형탈모를 앓고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내동댕이쳐진 순간들이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에 참 많이도 적혀 있어요. 

불쑥 들어와 “시인이라는 사람이 시나 쓰지, 책방을 왜 해요?” 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 ‘김이듬이 저잣거리에서 물장사를 한다며?’ 하고 말하고 다닌다는 소문도 들려왔죠. 그런 건 괜찮았어요. 그런데 한 달째 한 글자도 쓰지 못하니까 미칠 것 같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문학을 떠나는구나, 두려웠어요. 휴지 사러 뛰어다니고, 택배 박스를 이고 지고 우체국을 들락거리고, 커피 원두를 구하러 다니고…. 그러다 집에 들어오면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잠드는 날이 많았어요. 글은, 하물며 시는 엄두도 내지 못했으니까.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많을 때는 두 번씩 낭독회를 하고 섭외부터 설거지까지 다 내 손으로 했어요. 그런데도 그만둘 수 없더라고요. 그때 나는 물에 머리를 처박힌 것 같았어요. 그런데 글을 쓰니까 숨을 쉬더라고요. 비로소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매일 썼어요. 누군가 내 험담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는 그 사람 욕도 하고요, 하하. 

이번 책은 산문집이에요. 그럼에도 많은 글이 시였어요. 호흡이 긴 글도 마지막 문장에서는 결국 전복되어 시가 되는 과정을 여러 번 목격했고요. 

타인에게 보여주려고 쓴 글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다잡기 위해, 나에게 말하기 위해 썼어요. 그러지 않으면 속물이 되거나 문학을 버리고 살게 될 것 같았으니까. 이 책은 제 이야기를 담은 첫 번째 산문집이에요. 시집 외에 두 권을 더 냈지만 『모든 국적의 친구』는 파리지앵 인터뷰집이고, 『디어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 안내서 성격이 짙거든요. 

책방을 연 지 오래지 않아 쓴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세상에 지친 이웃들에게 이곳이 위안의 최전선이 돼줬으면 좋겠다.”(29쪽) 그 바람은 얼마나 이뤄졌을까요? 

처음에는 안 이뤄졌어요. 그래서 절망했고, 내가 허황된 꿈을 꿨구나 했죠. 변곡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데드 포인트에 대해 썼더군요. 정말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지나면 호흡이 편해진다고. 참 신기하게도 죽을 것 같을 때 한 사람, 한 사람 제게 왔어요. 넋 놓고 달을 쳐다보고 있으면 세탁소 아주머니가 오곡밥에 나물을 가져오시는 거예요. “정월 대보름인데 밥은 먹었어요?” 하며. 너무 이상한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저한테. 돌이켜보면 저만 몰랐던 것 같아요. 어떤 이유로 은폐하고 있을 뿐, 작은 틈만 있으면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을 꺼내 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진실을. 

책방이 삶에 온기를 전했다는, 어쩌면 뻔한 이야기인데 읽고 들을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요. 아마도 우리 모두 진심으로 ‘연대’를 바라고 있었나 봐요. 당연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느슨한 연대를요. 

베를린에서 제가 꿨던 꿈이 제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지금은 모두가 다정하고 자유로우며 평화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믿어요. 그렇게 하나둘 모인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서울 사는 사람이 두물머리로 점심을 먹으러 가고, 서로 일자리를 알아봐 줘요. 이사하던 날도 참 추웠거든요. 새벽 여섯 시 반에 이사 준비하러 갔다가 가슴이 철렁했어요. 정말 많은 사람이 책방 앞에 모여 있더라고요. 포장이사라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사양해도 끝까지 가지 않고 이사를 도왔어요. 저한테는 묻지도 않고 테이블이 부족한 것 같으니 돈을 모아서 사자, 책장은 내가 사겠다, 나는 배관 공사를 돕겠다. 두 번째 책방이듬은 그렇게 완성된 공간이에요. 매일 슬리퍼를 신고 찾아와 말동무를 해달라시던 같은 건물 주민은 이제 택시를 타고 오세요. 사실 책방을 접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여는 건 제 맘대로 했지만, 닫는 건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 같아요. 

단편영화 <하필이면 코로나라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어요. 불쑥 찾아온 손님에게 영화 출연 제의를 받은 책방 주인, 그 자체로 한 편의 단편영화 같잖아요. 또 책이 창작에 미치는 일파만파 영향력을 확인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네요. 

네, 일파만파! 우리 낭독회 타이틀이 ‘일파만파 낭독회’인 건 아시죠? <하필이면 코로나라서> 박성경 감독과는 만취 손님과 책방 주인으로 처음 만났어요. 그러다 꽤 오랜 후인 작년 가을 책방에 와서 출연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장소는 빌려주겠다, 출연을 해주면 장소를 빌리겠다,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둘 다 하게 됐어요. 그 영화가 지금 부천판타스틱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심사 중인 걸로 알고 있어요. 

수상 소식도 책방에서 들으셨잖아요. 

아휴,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저를 책방 주인으로만 알고 있던 동네 주민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단골손님들이 현수막을 붙이는 바람에 온 동네가 알게 됐어요. 문을 열려고 책방에 나가니 건물 관리하시는 분이 “아이고, 시인님!” 하고 인사하시는 거예요. 한동안 편의점 가는 마음도 불편했죠. 그래도 참 재미있었어요. 혼자만 들뜨는 것보다 좋았어요. 두 상 모두 번역에 준 상이지 제게는 상금도 없는데 말이죠. 아, 어쩌면 저 곧 부자가 될지도 몰라요. 엊그제 사라 맥과이어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거든요. 이번에는 시인에게 주는 상이에요. 이 또한 책방의 마법일지도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책을 처방하는 책방이, 그것도 시인이 운영하는 책방이 있다고 소개된 이후 부쩍 책 처방 요청이 늘었다고 하소연하셨잖아요. 

지금은 일시 정지 상태예요. 제가 처방하기 어려운 주제를 들고 오는 분이 많아져서, 하하. “돈 잘 벌게 하는 책을 알려달라”고 하시는데, 제가 알 리 없잖아요. 마음이 힘들기도 했고요. 책 처방을 원하는 손님 중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분들 이야기를 한두 시간 듣고 나면 그 고통과 슬픔이 온통 저에게로 와요. 그런 날에는 밤새 끙끙 앓아요. 

그렇다면 잠시 일시 정지 해제를 부탁드려야겠군요. 품고 있는 불안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때이니까요. 

책방이듬에는 자기계발서가 없어요. 이 사람이 산책을 더 많이 하길 바랄 때는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추천하는 식이죠. 오늘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용산에서 찾아온 손님에게는 고전을 몇 권 권해드렸어요. 『폭풍의 언덕』을 구입하신 것 같네요. 칩거의 시절이잖아요. 이럴 때는 두꺼운 책 몇 권을 머리맡에 두고, 꼭 끝까지 읽겠다는 결심 없이 이 책 저 책 옮겨가며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책 읽는 마음은 가벼이 하고 좋은 책을 읽는 자신을 어여삐 여길 수 있도록 말이에요. 얼마 전 입원한 친구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권했어요. 지금 우리가 바로 그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이참에 묵혀뒀던 불안과 직면하고 자신이 정말로 찾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요? 『장자』도 좋을 것 같고요. 선택할 수 있다면 현암사 버전을 권해드려요. 네, 읽을 책은 무한해요! 



책에서 고 황현산 선생의 글을 빌려 시인의 변을 남기셨어요. “내 존재 자체의 바탕을 변화시키고 삶의 목적까지 다른 것이 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지속될 수도 있고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런 순간을 시적 순간이라고 한다.”(『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코로나가 생산해낸 불안은 당분간 유지될 것 같고, 불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전환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해요. 시가 우리에게 그 일을 해줄 수 있을까요? 

황현산 선생은 “과거의 나를 자빠뜨리지 않는 예술을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까지 말씀하셨죠. 어떤 사람은 제 시를 읽고 “이게 무슨 시야?” 하겠죠. “대체 무슨 말이야?” 할 수도 있고요. 저는 그 순간이 좋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아집이나 편견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쾅!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죠. 도종환 시인이 썼듯이 흔들리며 꽃도 펴요. 씨앗이 꽃 안에 갇혀 있어서는 꽃이 되지 못해요. 바람에 불안스레 흔들려 날아가야 비로소 다른 토양에서 꽃을 피울 수 있죠. 시는 바람이나 파동을 일으키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이에요. 

지금, 머리맡에 두고 읽을 시를 한 편 권해주실 수 있을까요? 

심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에 「두 번은 없다」라는 시가 있어요.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좌절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답죠. 단 한 번뿐이니까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대로 살아야 하고요.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제가 이렇게 책방에 앉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맞이하며 살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 밤에도 시를 쓰겠지요? 김이듬의 새로운 시들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2019년에 나온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와도 많이 다를 거라는 기대도 되고요. 

거기 실린 시들은 책방 초기에 쓴 시예요. 가장 최근에 쓴 시를 보면 굉장히 밝아요. 코로나 한가운데 쓴 시임에도. 저는 어려서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 했고, 그래서인지 늘 어둡고 버려진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책방을 하면서 사람을 믿게 됐어요.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은 계속해서 있겠지만, 아마도 나는 계속 불안하겠지만, 이제는 굳건하게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싶어요. 물론 여전히 해야 할 말은 하겠죠. 그런데 말하는 방식은 조금 바꿀지도 모르겠어요.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저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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