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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위로 특집] 머뭇, 머뭇거리는 우정 - 소설가 조해진, 시인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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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김현

조해진 소설가와 김현 시인이 우정의 운을 뗀 건, 지난 2010년의 일이다. 

‘4대강개발사업반대를위한작가행동’에서 시인은 투쟁을 위한 원고를 쓰고 모았고, 소설가는 연대와 결집을 위해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사회를 향한 발언에서 함께 보폭을 맞춘 둘은 ‘차츰 일상의 안위를 묻고, 맛있는 차와 고소한 빵을 나누고, 서로가 쓴 글을 응원하고, 걷고, 대화하고, 그런 ‘산책의 행복’에서 영감을 얻어 서로의 소설이나 시에 현과 해진 같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사이가 됐다. 이렇게 쓰니 아주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시인님과 나는 사실 전화도 자주 하지 않고 따로 만나는 일도 드물며 함께 여행을 하거나 서로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죠. 그러나 멀리 있어도, 자주 만나지 못해도, 나를 걱정하는 시인님의 다정함이 전해지곤 합니다.”함께 쓰고 최근 펴낸 책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86쪽에 달린 소설가의 추신이다. 시인은 이런 우정을 ‘머뭇거리는 우정’이라고 프롤로그에 적었다. 둘은 ‘영화’라는 매개를 앞세워 편지라는 형식에 눌러쓴 문장 사이사이에 이 ‘우정’을 북마크처럼 끼워놓았다. 당신이 이 책에서 서로를 향한 안부와 질문과 다정을 확인하다 어느덧 ‘위로’와 마주하게 되는 이유다. 



‘머뭇거리는 우정’이라는 표현이 참 절묘합니다. ‘머뭇’이라는 어근의 뉘앙스 때문인데, 많은 감정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더라고요. 

김현(이하 김): 머뭇거린다는 게 약간의 거리감도 있으면서 다가가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잖아요. 확 가까워지고 늘 붙어 다니는 우정도 있지만, 이런 거리감 있는 우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썼어요.

조해진(이하 조):김현 시인과는 오랜만에 만나도 마음속 얘기를 많이 하게 돼요. 서로를 잘 아는 것 같다고 할까. 언젠가 나에 대해 ‘속마음에 걸려 바깥에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정말 놀랐어요.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그렇게 표현해주더라고요.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는 온라인에 연재하는 공개 편지라는 프로젝트의 결과잖아요. 처음 제안받았을 때, 흔쾌히 응하셨나요?

조: 에세이는 힘들고 부끄러운 장르라 고민이 없진 않았어요. 하지만 김현 시인이어서 흔쾌히 응했죠. 삶을 얘기하는 거라면 부담을 느꼈을 텐데, 편한 사람, 좋은 친구인 김현 시인과 영화 얘기를 하는 거라면?.

김: 김현 아니면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웃음) 처음 제안이 왔을 때 올 게 왔구나 생각했어요. 조해진 소설가가 상 받을 때 축사도 하고, 출간 행사 사회도 보고, 추천사도 썼던 터라 책으로 할 일이 남았구나 생각하던 차였거든요. 지금까지 쓴 산문집에 없던 편지 형식이기도 해서 고민할 게 없었고요.   

조: 처음 의도라면 영화 얘기를 쓸 줄 알았는데, 막상 편지가 오고 가면서 사는 얘기, 삶의 의문, 사회적 이슈, 작품 얘기 등 생각지 못한 내용을 담게 되어서 훨씬 즐거웠어요. 

김: 편지를 미리 써놓을 수 없다는 것도 매력이었어요. 어떤 편지가 올지 모르니까. 누구든 편지를 받아야 답장을 쓸 수 있잖아요.

김현 시인이 언급했지만 조해진 작가님의 소설 『단순한 진심』, 「산책자의 행복」은 편지 쓰는 사람이 등장하거나, 편지로 시작해 편지로 끝납니다. 실제로도 편지(쓰기)를 좋아하시나요?

조: 다른 작가에 비해 서간체가 많은 편이긴 한데, 실제로 그렇진 않아요. 마음으로는 많이 쓰는 편이에요. 쑥스러운 성정이라 쓰고 싶은 문장이 생기면 따로 적어놓긴 해요.

김: 생활인 조해진은 안 쓴다고 하지만, 소설가 조해진은 편지라는 속성이 잘 어울리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워낙 잘 보고 듣는 사람인데, 소설을 읽으면 잘 들은 걸 잘 말하려는 게 느껴지거든요. 


소설가 조해진

조해진 작가님이 보낸 첫 편지의 첫 질문이 “인간은 아름답니?”입니다.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함께 언급되고요. 각각의 편지에는 각자의 일상과 근황도 적혀 있지만, 사회 이슈, 삶과 죽음과 존재와 계절과 계급, 자신의 글쓰기와 관련한 사유가 영화와 함께 버무려져 있습니다. 혹시 편지를 받았을 때 답장을 쓰기 어려웠던 질문 혹은 내용이 있었나요? 

김: 첫 편지 쓸 때가 어려웠어요. “인간은 아름답니?”라는 질문에 답도 해야 하고, 내 얘기도 해야 하고, 너무 많은 얘기가 떠올라서?. 한창 원고 쓸 때 친구 두 명이 세상을 떠났는데, 죽음 얘기가 너무 반복되는 게 아닌가, 내용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답장을 받으면 그런 무거움을 위안을 주는 방식으로 누나가 바꿔 놓더라고요. 책 속에 있지만, 누나가 이번에는 영화 <벌새>를 언급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역시나 <벌새> 얘기가 있어서 ‘통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는 재밌기도 했어요.

조: 따로 교감한 것도 아닌데,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인 2부에서는 연애 얘기, 행복에 대한 얘기를 똑같이 쓰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답장을 쓰기 힘들고, 쓰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던 건 노동자 얘기를 할 때였어요. 

방금 김현 시인이 ‘누나’라고 말한 것처럼,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존칭과 편하게 이름을 부르는 내용이 섞여 있어요. 편지 쓸 때의 마음 상태가 반영된 건가요?

조: 이유는 따로 없어요. ‘현아’로 시작하는 편지를 계속 쓰려고 했는데, ‘시인님’ 하고 부르면서 다양하게 쓰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김:밀당하는 느낌?(웃음) 관계의 맥락이라는 게 있잖아요. 누나와 현, 소설가와 시인이라는 관계. 둘의 관계 안에 여러 가지 속성이 있을 텐데, 편지 내용에 따라 어떨 때는 누나라고 하는 속성이 앞서고, 어떨 때는 존대를 쓰고 싶은 속성이 앞서더라고요.

149쪽에 이런 질문이 있어요. “영화가 삶이 된다면 어떤 영화를 고르시겠어요?”

조: 평범하고 잔잔해 보이는 삶도 그 안에는 파고가 있잖아요. 제 경우, 어릴 때는 작가가 되는 게 두려웠어요. 작가의 삶이 너무 파란만장해 보여서. 그런데 막상 작가가 되고 보니 파란만장한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물론 그것 역시 겉모습이고, 안에서는 엄청 많은 파고가 일고 있지만.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 엔딩 신을 정말 좋아하는데, 여주인공이 영화 내내 외로움과 고통을 드러내지 않다가 폭발적으로 터뜨려요. 삶이 그런 것 같아요.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도시적 삶이지만 그 안에 죄의식도 있고, 욕망도 있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고, 여러 가지 마음이 일렁이는 삶을 다루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결국 일상을 얘기하지만 그 안에는 온전히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고르고 싶어요.    

김:첫 번째 책 『걱정 말고 다녀와』에 임대주택을 찾으러 다니는 게이 커플의 하루를 다룬 글이 있어요. 만약 영화를 만든다면 이 스토리로 ‘견본세대’라는 영화를 찍고 싶다고 얘기했었어요. 그런데 지난해 가장 좋아하는 시를 모티브로 조해진 작가가 퀴어 단편을 썼는데, 그걸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어요.

조:김현 시인의 시 「가장 큰 행복」과 동명의 제목으로 큐큐 시리즈에 쓴 소설인데, 근미래에 기후 위기로 세계가 망한 뒤 게이로 살고 싶은, 이제야 나답게 살고 싶은 중년 게이 이야기예요.

김:묘하게 저와 짝꿍 얘기 같았어요. ‘견본세대’에 등장한 젊은 게이 커플이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얘기를 찍고 싶은데,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각색하면 좋을 것 같아요. 


시인 김현

책 속에서 언급한 영화가 무려 105편입니다. 자주 듣는 질문일 텐데, 좋아하는 감독과 영화를 꼽아주신다면요?

조: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인간에 대한 믿음, 희망이 과하지 않게 들어 있어서 좋아요. 냉소적인 영화, 냉소적인 소설도 좋지만, 어느 시점부터 인간을 신뢰하는 <환상의 빛>이 느껴지는 영화가 좋더라고요. 참, 인생 영화로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꼽고 싶어요.

김:요즘은 지난해 본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꼽아요. 지금 막 떠오르는 감독 이름은 데이비드 린치, 켄 로치. 알랭 레네?. 

서로의 편지에서 가장 위로받은 내용 혹은 문장 혹은 ‘다정한 추신’이 있을까요?

조:다 좋았지만, 마지막 편지의 추신이 제일 위로가 됐어요.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행복했다는 내용인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김: 저도 마찬가지예요.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누나가 해변 얘기를 소설로 썼다는 추신. 해변에 서 있는 김현처럼 보이는 인물로 소설을 썼다는데, 분명 그 사람의 생애를 아끼면서 인물화하고 글을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묘하게 찡하더라고요.

“이 편지들이 묶여 책이 나오는 날, 그땐 내가 너에게 작은 동전 지갑을 사주고 싶다. 동전 지갑이 찰 만큼은 부자가 되라고, 그러니까 길을 걷다 목이 마르면 음료수 한 캔 정도는 언제라도 사 마실 수 있는 …”이라는 내용이 있어요. 동전 지갑은 사주셨나요?

조: 사줬어요. 공진단까지 추가해서.(웃음) 2년 전에 현이가 하도 비실거려서 인터넷으로 공진단을 주문했는데, 케이스만 배달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다시 사줬어요. 

김: 저는 못 사줬어요. 누나가 그때 보낸 공진단 케이스는 메모지 꽂이로 쓰고 있어요.(웃음) 

책의 1부는 서로에게 쓰는 편지, 2부는 ‘모모님’이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2부의 연장선에서, 2021년 2월호를 읽을 독자들, 혹은 코로나블루로 힘들어하는 ‘모모님’에게 추천하실 영화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 다르덴 형제가 감독한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만, 우리 사회가 연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코로나를 맞고 있는 것 같아요. 연대의 포즈를 취할 때 피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은 사회에 코로나까지 닥치니까 내 것부터 챙겨야지 하는 마인드가 더 강해지는 느낌이에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는 복직을 위해 동료들의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누군가는 보너스를 포기하고 복직에 동의하고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 일일이 직면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내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어떻게 해야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추천합니다.

김: 데브라 그래닉 감독의 <흔적없는 삶>.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아빠와 거기에 종속된 삶을 사는 딸이 등장하는데, 결국 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환한 삶을 찾게 되는 이야기예요. 아빠는 아빠대로, 딸은 딸대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과정이 감동적인데, 도시가 아닌 숲에서  공동체와 연대를 이루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얘기라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시의성이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얹자면, ‘5인 이상 집합금지’에서 새삼 느낀 건데, 지금까지 5인 이상을 자주 만나고 있었구나, 거기서 에너지를 받고 있었구나 하는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독자들도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이 과정이 지나면 극장에 가리라. 그런 한 방울의 희망과 기쁨을 동력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조해진,김현 공저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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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위로 특집] ‘계속’ 하는 위로가 진짜 위로니까요 - 정신과 의사 김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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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모를 불안과 끝을 알 수 없는 불안. 둘 다 달갑지 않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고르게 될까? 2021년 1월 13일, 신문들은 일제히 “문재인 대통령, 전 국민이 코로나19 백신을 무료로 맞을 것이다”를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그러나 기대는 불과 수초 만에 무너졌다. 집단면역이 되려면 전 국민의 60~80%가 백신을 맞아야 하고, 그때까지는 얼굴의 절반을 감금한 채 살아야 한다는 기사가 바짝 뒤를 쫓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는 좋은 소식이 들려와도 단 수초 만에 불안의 추격을 받는다. 정신과 의사 김병수는 작년 8월, 스스로 ‘아마도’라고 기억하는 아홉 번째 책 『상처는 한 번만 받겠습니다』를 펴냈다. 책 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는 다음과 같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태도를 살짝 바꿔주고 어울리는 자세를 찾아주고 싶다.”태도를 ‘살짝’ 바꿈으로써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속삭임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척이나 달콤한 것이다.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불안에 휘둘리지 않으면 된다.” 56쪽에 나오는 문장에 밑줄을 쳤어요. 코로나가 인류에게 불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불안할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은 정상적인 감정이에요. 그리고 필요하고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지만, 일상적인 불안은 저마다 기능을 갖고 있어요. 예를 들어, 입시생이 느끼는 불안은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거든요. 물론 지금은 특수 상황이죠. 누구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거예요. 이럴 때는 어느 정도의 불안에는 겁먹지 않는 게 맞아요. 당연한 불안이니까요.

겁먹지 않겠다는 태도만으로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뜻밖에도 그래요. 하지만 그전에 불안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해요. 내 불안이 정상적인 불안인지, 이 상황이 누구나 불안을 느낄 만한 것인지, 유독 나만 더 고통스럽게 느끼는지, 과거의 상처나 어떤 이유 때문에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 사실과 자기 안에서 증폭된 불안을 분리할 수 있게 돼요. 그런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주저앉지 않도록, 나를 위안하고 달랠 방법을 찾아야죠. 비상약처럼 꺼내 먹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일수록 좋아요. 

책에 나와 있는 라이프스타일 처방들이 비상약이 돼줄까요? 실제로 선생님이 행하고 있는 처방들이 나오더군요. 

그런 건 디테일이 중요하거든요. 자기한테 딱 맞아야 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해요. 아침마다 하는 뜨거운 물 샤워, 매일 하는 달리기나 등산은 제가 저에게 내린 처방이니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는 없어요. 우선 정리 정돈으로 시작해도 좋겠네요. 우울증 환자들이 좋아지면 백발백중 정리 정돈을 하거든요. 반대로 살짝 우울한 날에 정리 정돈을 하면 우울감이 사라지는 효과를 볼 수 있어요. 식습관을 바꾸는 것도 큰 도움이 돼요. 유산균만 꾸준히 먹어도 마음 건강에 일정한 효과를 볼 수 있죠. 장과 뇌는 연결돼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술은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약도 최선은 아니고요. 3개월만이라도 술을 끊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 경험하는 게 백배 나아요. 

다들 마음이 유리 같은 시기라 생활에 또 다른 긴장감을 주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선 일단 그 일을 하기로 한 시간을 비워두세요. 그리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자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계획한 바의 1%라도 행하게 되죠. 그렇게 차츰 리듬을 만들어가야 해요. 아주 단순하지만 기본을 지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에서 ‘연민 집중 치료’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연민’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연민의 대상이 된다는 것 만한 위안도 없을 테니. 

요즘 많이 행해지는 치료법이죠. 정서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유지돼야 해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위안, 즉 연민을 가져야 해요. 그다음에 다른 사람과 연결돼 있어야 하고. 또 가치 추구 행동을 해야 하죠. 그래야 ‘잘살고 있다’, ‘행복하다’, ‘평온하다’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자기 위안이 1단계이군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맞아요. 우울이나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개 1단계에서 실패해요. 우선 나 자신이라도 나를 따뜻하게 대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야 해요. 그것이 가장 중요해요.

마음을 먹으면 되는 걸까요? 

마음을 먹지 않기도 하니까요. 너무 많은 사람이 자기 비난 습관을 못 버려요. 그동안 충분히 고생했잖아요. 하지만 “괜찮다”, “이해한다” 류의 위로는 효과가 낮아요. 자신에 대한 관점을 넓히는 작업이 꼭 함께 수반돼야 하죠. 지금의 내 모습이 이렇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니까요. 부모님, 살아온 과정, 직장 생활, 정말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라는 사람이 이뤄졌잖아요. 다양한 측면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왜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했는지 이해해야 해요. 그러고 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죠. ‘그럴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가 자기 위안의 1단계고요. 다음 단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잘했다’예요. 이 많은 이유에도 이만큼 살아내다니 대단하다고 인정해주는 거죠. 마지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예요. 내가 추구하는 가치 - 그것이 돈이든 소명이든 - 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과정이에요. 이 세 단계를 차근차근 해내야 해요. 

타인을 향한 위로하는 방법도 같을까요? 

이 세 단계를 타인에게 똑같이 해줘야 해요. 포기하지 말고 ‘그럴 수도 있겠다’를 찾아나가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도 꼭 거쳐야 하고요. 계속 묻어둘 수는 없으니까요. 

위로에도 적당한 온도가 있을까요? 

쉽지 않은 문제네요. ‘공감피로’라는 게 있어요. 흠, 암환자 가족들이 정신과 진료를 많이 받으시거든요. 너무 힘을 빼셔서 그래요. 그분들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이래요. “하루 이틀 하다가 그만둘 거 아니면 그렇게 시작해선 안 된다”고. “이러다가 몇 달 못 가서 환자에게 배신감을 안겨줄 거냐고.”  매정한 말이죠. 하지만 정말 그래요. 중요한 건 ‘일관성’이에요. 그러려면 자기 삶을 지속해야 해요. 취미 생활도 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에너지를 유지해야 해요. ‘계속’ 하는 위로가 진짜 위로이니까요.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한국인의 고달픈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로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직장인의 스트레스, 중년 여성의 우울, 마흔의 사춘기 등 한국적 특성에 기초한 세대별, 상황별 아픔에 주목한다. 이를 주제로 『버텨낼 권리』 『감정의 색깔』 『사모님의 우울증』 『이상한 나라의 심리학』 등 여러 책을 출간했으며 다양한 매체 출연과 강연, 칼럼 등을 통해 대중과도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임상교수로 근무했고 같은 병원 건강증진센터의 스트레스 클리닉에서 진료했다. 대한우울조울병학회, 한국정신신체의학회,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등에서 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서울 교대역 사거리에 있는 작은 의원에서 내담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상처는 한 번만 받겠습니다
상처는 한 번만 받겠습니다
김병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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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젤라 “폭식증의 실체를 알리려 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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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의 나는 깡마른 몸매가 되고 싶었다.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뼈에 겨우 살가죽만 붙어 있어 여기저기 뼈가 튀어나온 몸이 좋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좋았다. 그런 몸매가 되고 싶어 음식을 줄여나갔다.(중략)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그렇게 쉽게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었고,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니 부작용이 뒤따랐다. 바로 폭식증이다.(10쪽)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뒤 패션 잡지 기자로 일하다 현재는 콘텐츠 제작 PD로 활동하는 김안젤라 작가는 어느 날 끝내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폭식증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프로아나(거식증을 지지하는 행위)’ 기사를 접한 뒤였다. “너무 너무 화가 났다”는 김안젤라 작가는 이게 어떤 병인지 알려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장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 먹었다. 치킨 한 마리, 피자 한 판, 식빵 한 봉지, 밥 한 솥, 과자 10봉지를 우습게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이른바 ‘폭토(폭식과 구토)’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며 같은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당신 탓이 아니다, 나도 겪어봤다, 당신만이 아니니까 용기 내서 치료를 해보자.”라는 말을 건네고자 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필명 출간을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명감이 더 컸다. 혹시나 필명을 사용한 것을 보고 폭식증을 결국 숨겨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싫었다. 여전히 가족들에게는 책 소식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김안젤라 작가는 그렇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를 완성했다. “사회에서 만든 병이기 때문에 사회가 같이 나서줘야 한다”는 그는 이 책을 다이어트에 골몰하고 있는 10대에게 권한다고 말했다. 



정확한 실체를 알면

작가님의 <브런치> 최근 글에 “글을 쓰고서야 제대로 제 상처를 보듬고 체중에 대한 강박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이 있었어요. 글 쓰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자기 객관화가 됐다고 할까요. 지금의 입장에서 과거의 내가 어땠는지 돌아보고, 썼더니 그 전에는 몰랐던 제 모습을 깨닫게 됐어요. 사실 저는 수치심이 많았어요. 폭식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고, 음식에 이런 감각을 갖고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남들이 알면 분명히 나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거라는 공포감이 있었는데요. 쓰고 보니 내가 이런 상태였구나, 내가 이런 게 힘들었구나, 라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책을 쓴 후에야 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다 털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글을 씀으로써 그런 변화가 생길 거라는 건 작가님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군요. 

사실은 기자를 그만두고도 글이 너무 쓰고 싶었어요.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면서 생각했던 게 나는 뭘 쓸 수 있는 사람이지, 어떤 부분에서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어떻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하는 것이었어요. 너무 당연하게 폭식증이라는 결론이 났는데요. 그때 마침 ‘프로아나’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된 거예요. 엄청나게 화가 났고요. 그 화가 추진력이 됐어요. 이 병을 심하게 앓았던 몇 년은 제 인생을 너무 많이 흔들어놨거든요. 그 이후 인생들은 말하자면 선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데 프로아나가 유행한다는 기사가 너무 충격인 거예요. 이게 어떤 건지 정확한 실체를 알면 감히 ‘안 먹는 게 멋지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가 없을 거다, 사람들한테 들려줘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폭토’하는 과정을 굉장히 상세하게 썼어요. 

무척 힘든 이야기잖아요. 막상 그 과정을 자세히 쓰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그 부분을 읽다 재발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 방법을 취하는 사람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고민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어쨌든 가감 없이, 이 병의 추한 바닥까지 다 보여줘야 사람들이 병의 실체를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아름다운 것을 선망해서 걸린 병이잖아요. 그런데 그 병이 만드는 내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모습이더라고요. 지금도 연예인들 다이어트 비법이라면서 말도 안 되는 비정상적인 것들이 성공담처럼 들려와요. 말도 안 돼요. 그렇게 하면 사람이 못 살아요. 그런데 그런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은 저렇게 먹어야겠다, 그래서 저렇게 아름다운 몸매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사람들의 기사를 보면서 내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식이니까요. 그러면 안 돼요.

문제는 가까운 사람들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에요. 당사자가 워낙 자신의 상황을 숨기기도 하고요. 

한창 병이 심할 때 친언니랑 같이 살았는데 언니도 제 병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언니도 “토하지 마”라는 말을 못 꺼냈어요. 이 병은 타인이 의심하기도 조심스럽고, 내가 폭식과 구토를 하고 있다는 걸 말하기도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또 저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병이 더 심해졌을 수도 있어요. 한편 가족처럼 누군가와 같이 사는 친구들은 들키면 안 된다는 압박이 심해서 혼자 있을 때 증상이 터져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결론적으로는 들키면 수치스러운 병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는 거예요. 섭식장애는 분명한 증상이고 치료해야 하는 병의 한 종류예요. 게다가 어떻게 보면 미디어나 사회가 많든 건데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내가 정신력이 약해서, 나약해서, 내가 뭔가 생각이 잘못되어서 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을 하고요.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갖는 거죠. 그런 생각에서 발현되는 행위가 폭토인데 거기서 또 다시 수치심이 생기고요. 악순환이죠. 

“밥을 먹고 나서 조금이라도 옷이 타이트해지면 포만감이 지속되는 내내 내 몸이 점점 커지는 것 같은 과대망상에 빠졌다”(33쪽)고 했죠. 

음식에 너무 집착하면서도, 음식이 너무 공포의 대상이에요. 빵을 보면 배고프니까 조금 먹어볼까, 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저거 너무 먹고 싶다, 먹으면 살 찌겠지, 그렇지만 너무 먹고 싶어, 나 통통해지면 어떻게 해, 이런 생각을 되게 오래 해요. 먹고 살이 찔까봐 너무 무서우니까요. 저는 배가 조금만 불러도 몸이 거대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더니 폭식증 환자들에게 다 그런 증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그렇게 깨달았어요. 



병원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작가님의 경우 이게 내 잘못이 아니구나, 치료해야 하는 병이구나, 라는 걸 처음 자각했을 때는 역시 병원에 갔을 때인가요?

저는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거식증 같은 병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상태였고요. 제 병이 폭식증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잘못된 행위라는 걸 알면서 멈추지는 못하는 상황이 악화됐던 거죠. 나중에는 ‘외식하는 날 진짜 많이 먹고 토해버려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이 진행됐고요. 폭식과 구토가 점점 제어가 안 되면서 일주일에 한 번, 3일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심할 때는 하루에 3번까지 늘어났어요. 내 몸매가 좋아지면 내 삶이 나아지겠지, 라는 믿음으로 구토라는 행위까지 한 거였는데 하루에 세 번씩 구토를 하니까 그냥 내 삶이 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대로는 진짜 살기 싫다, 나 지금 도움이 필요하구나, 생각하게 됐고요. 그래서 병원을 가게 됐죠. 

의사에게서 받은 상처도 쓰셨는데요. 내게 꼭 맞는 병원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 같아요. 

병원에 처음 갔을 때가 2005년이었는데요. 제가 다닌 병원은 당시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섭식장애 전문병원이었을 거예요. 선택권이 없었죠. 어쨌든 병원 치료로 많이 호전이 됐어요. 그런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과연 그 치료가 맞았을까라는 생각도 솔직히 해요. 담당 의사에게 상처 받은 부분도 있고요. 그럼에도 무조건 치료는 필요해요. 그만큼 자신에게 맞는 병원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무엇보다 병원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을 치료의 한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 같아요. 

작가님처럼 환자 본인이 치료를 다짐하고 병원을 찾아가는 게 아주 드문 경우라고 했잖아요. 

맞아요, 외부의 강요로 치료를 시작했을 때는 효과가 좀 떨어져요. 저는 제가 갔고, 의지가 무척 강한데도 제 안에 있는 음식에 대한 공포심과 살이 찌고 싶지 않다는 강박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거든요. 끝까지 내려놓을 수 없었는데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더 치료가 안 되겠죠. 그런 경우 치료는 거의 불가능하고 가깝다고 저는 생각해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의상디자인을 전공했고,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잖아요. 그런 배경이 병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세요? 

네, 저는 어릴 때부터 잡지를 많이 읽었고요. 거기서 말하는 ‘여자는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몸매는 예뻐야 한다’는 식의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요. 아이러니하죠. 한 매체 안에 주체적이어야 한다, 몸매는 예뻐야 한다, 는 내용이 함께 있는 거예요. 게다가 살 빼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 자연스럽게 살은 빼야 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의상디자인학과에 들어가서는 그런 친구들이 눈앞에 있고, 그게 너무 좋아 보였죠. 저 친구가 잘되면 예뻐서 그런 것처럼 느껴졌고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저 친구보다 안 되는 건 뚱뚱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너무 쉽게 들어버렸어요. 

나를 둘러싼 세계가 그런데 거기에 개인이 비판적인 시선을 갖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죠. 

어쨌든 지금의 패션계는 다양한 미에 대해서 예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이야기하죠. 가슴 크고, 허리 가늘고, 엉덩이는 큰 몸이 표준이라는 생각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면에 여전히 강박적으로 마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너무 많았던 거예요. 그렇다는 것은 세계가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아직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마른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작가님이 남자친구를 만나 상대가 크게 호전됐다고 한 부분에서 지지자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꼈어요. 

당시 저는 너무 극심한 상태였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원에 갔지만 영영 정상적이라는 감각을 못 갖게 될 줄 알았어요. 그때 저는 계속 난 정신병자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남자친구를 만나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졌어요. 사는 게 예전처럼 힘들지도 않고, 먹는 게 힘들지도 않고요. 아마 이 기분을 못 느꼈으면 나중에 재발이 됐을 때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못 가졌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경험을 해보니까 ‘그래, 지금은 안 좋은 상태지만 또 나올 수 있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후에도 폭식증이 반복됐지만 그래도 너무 흔들리지는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알았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요.

 


날마다 위기가 오는

상태가 되게 호전됐다가도 영화 속 한 장면이 트리거가 되고, 또다시 악순환에 빠지면서 증상이 반복되는 것도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 

약간 양날의 검 같아요. 재발이 돼도 다시 나을 거라는 걸 아니까 재발했을 때 되게 무덤덤해져요. 먹어버렸네, 괜찮아, 이런 식인 거예요. 역설적으로는 그래서 오랫동안 이걸 앓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음식을 매일 먹잖아요. 날마다 위기가 오는 셈이에요. 그게 너무 어렵죠. 

알코올 중독은 술을 완전히 끊는 게 우선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음식은 완전히 끊을 수가 없어서 더 힘든 거군요.  

음식은 먹으면서도 먹는 게 틀린 게 아니라고, 먹는 게 옳은 거라고 생각을 해야 하니까 그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고통을 모르고 미디어에서 프로아나 같은 얘기를 하면 진짜 너무 화가 나요. 인스타그램 같은 데서도 운동 열심히 하면서 다이어트 한다는 분들을 보면 화가 나죠. 살을 빼고 싶은 사람들은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것만 먹으면 살 빠져요”라는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리고 싶거든요. 그런 환경을 혼자 피할 수 없어요. 

그래서 작가님은 자살 사건의 기사 하단에 우울증으로 힘든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의 연락처가 표기되듯이 다이어트 등에 관한 기사에도 섭식장애는 치료가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시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그 점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그런 기사를 읽으면 다이어트 생각에 심리적인 파동이 너무 커요. 그러니까 이게 나쁜 것이라는 점을 인지할 수 있는 문구가 하나라도 들어가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저야 이제 무시하자고 생각하고 넘기지만 어떤 분들은 내가 잘못된 거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특히 누군가가 살이 너무 빠져서 걱정된다, 거식증일까, 같은 기사는 가십으로 쓰면 안 돼요. 지금은 ‘팬들이 거식증이 아닐까 우려한다’는 기사 같은 걸 너무 쉽게 쓰는 것 같아요. 외국도 그렇지만 한국은 뚱뚱해도 비판을 하고 말라도 비판을 하거든요. 뚱뚱하다는 악플을 받았던 가수가 어느 날 살을 빼서 돌아오면 또 통통하니까 좋았다, 이러면서 달라진 몸매를 평가하잖아요.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함부로 얘기를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솔직한 고백을 하셨는데요. 정말로 너무 쓰기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나요? 

어쨌든 섭식장애에 대한 책이니까 그 부분을 많이 쓸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죠. 그런데 원인을 찾아가다 보니까 그동안 겪은 여러 일들이 다 나오는 거예요. 학창시절 일, 유학시절 일 등이 다 나왔어요. 그러다 묻어두었던 데이트 폭력에 대한 얘기를 쓰게 됐어요. 제가 그 일을 당했을 때는 데이트 폭력이란 단어를 몰랐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인지를 못하고 있었어요. 이후에 데이트 폭력이 많이 다루어지면서 다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됐고요. 내가 당했던 게 데이트 폭력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책에 그때의 일을 구체적으로 쓰니까 그때 일들이 너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많이 힘들었어요. 그밖에 나 자신의 결함도 마주해야 했고요. 책을 쓰는 것은 그런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진짜로 나를 마주보는 것.




*김안젤라

1985년 태어나 천사라는 의미의 이름을 얻었다. 덕성여대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했고, 호주에서 유학했다.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피처 에디터로, 『우먼센스』에서 취재 기자로 일하며 글을 썼다. 브런치에서 ‘룽지’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이다. 17년 동안 폭식증을 앓았다.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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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젤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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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20대 박서련의 소설 걸작선 같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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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모호해도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다. 지금은 정확한 문장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누구에게나 공감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닌다.(121-122쪽)

박서련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이자 <트리플>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호르몬이 그랬어』에 실린 에세이에서 작가는 20대의 자신과 30대의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설명한다. “공동 저자로 승인받는 것 같은 기분”(122쪽)을 느끼며 20대에 쓴 수록작들을 다시 썼다는 박서련 작가는 이이서 또 말한다. 이 작품들이 미웠다고. 수록작은 모두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쓴 작품이다. 미숙하고 은밀하고 강렬했던 사랑을 기억하고(「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엄마의 남자친구를 충동적으로 만나고(「호르몬이 그랬어」), 죽은 연인의 유골함을 훔치는(「총 塚」) 이야기들에는 20대의 작가가 많이 담겨 있었다. 세상을 다 안다고 여기며 취하는 위악적인 태도, 거기서 발현되는 거친 생각과 말들이 거기에 살아 있었다. 미움은 그런 과거의 자신을 “지나치게 잘 알아볼 수 있어서”(120쪽) 오는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과는 별개로 작가는 이 세 작품을 “20대 박서련의 걸작선”이라고 말했다. 내보일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내보이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박서련 작가는 그렇기 때문에 등단 여부와는 상관없이 더 많은 작가들이 더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문학플랫폼 던전>에 연재하기도 했던 이 작품들과 괴롭게 대면하면서도 벅찬 마음으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은 이유다.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인정하고 싶진 않았던

수록 작품은 모두 20대에, 그러니까 등단 전에 처음 쓰신 것들인데요. 책 뒤에 실린 에세이를 보면 이 작품들을 많이 미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작품들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이 작품들은 <트리플> 시리즈에 앞서 <문학 플랫폼 던전>에 연재하려고 추려둔 것들이에요. 제가 상상한, 『던전』에 소설을 내려는 분들은 ‘재고 원고’가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호르몬이 그랬어』에 실린 것들 역시 모두 저의 재고 원고였고요. 조금 부끄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내보일 수 있는 정도의 퀄리티는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연재작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긴 한데 막상 열어보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연재 준비를 하면서 내가 이걸 미워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럼에도 연재는 해야 하니까 어떻게 고치면 연재할 수 있는 작품이 될까를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재고 원고로 갖고만 있었고, 그동안 열어보지는 않았던 거군요? 

네, 물론 아깝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아예 생각을 안 했어요. 이번에 고치면서 다른 작가의 글이라고 상상하니까 조금 수월해지더라고요. 다른 작가가 이 글을 썼다면 전혀 미워하지 않았을 텐데 이 글의 저자가 나라는 사실 때문에 미워한 거니까요. 거기에는 타임캡슐처럼 내가 묻어둔 20대의 제가 있었고요. 그때의 저를 미워하느라 글을 미워한 것 같아요. 최규석 만화가가 홈페이지에 일기를 연재하던 때가 있었는데요. ‘과거의 자신을 깔보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흔히 ‘내가 옛날에 왜 이런 걸 좋아했지? 촌스럽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때의 자신이 만들어진 일련의 과정이 있고, 여러 경험이 만들어준 자신이잖아요. 그런 과거의 자신을 깔보는 것은 안 좋은 태도라는 내용의 말씀이었는데 그 말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났어요. 나보다 어린 타인을 대할 때 그를 존중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도 어느 정도의 존중을 품고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작품들에는 20대의 작가님이 얼마나 많이 담겨 있나요? 

세상을 안다고 착각하고 말하는 태도 같은 게 그때의 저와 닮았어요.(웃음) 특히 되바라지고, 까지게 말하는 위악적인 부분이 그래요. 

작가님 스스로는 그때와 지금의 글을 쓰는 나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 직접 듣고 싶어요. 에세이에는 또 “이 책의 세 작품을 쓴 나와, 그것들을 고친 나는 분명히 연속적이고 동일한 존재지만 또 이토록 다르다.”(122쪽)고 하셨잖아요. 

좌절을 맛보기 전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글은 자존심이 가장 강하고, 자존감이 가장 높고, 좌절을 아직 맛보지 못했고, 이제 곧 등단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던 시절의 제가 쓴 글이에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해고 사건과 아주 비슷한 일이 2010년 홍익대학교에도 있었는데요. 그 일이 제가 그간 사회에 관심이 없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었어요. 그때까지도 학생회 활동 등 이런 저런 활동을 했었지만, 그 즈음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인정하고 싶진 않았던 저의 계급적 성격을 깨닫는 시기였던 거죠. 아마 「총 塚」을 쓰던 시기일 텐데요. 그 전에는 사회적 흐름과 상관없이 미학적인 걸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예술가적 자의식이 지나치게 과잉된 사람이었고요.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게 깨지기 직전, 또는 깨져가면서 느낀 혼란을 겪으면서 쓴 글들이에요. 

2010년 홍대 청소노동자 해고 사건은 저도 기억이 나는데요. 그 사건이 작가님에게는 얼마나 영향을 준 걸까요? 말하자면 작품의 방향을 바꿔놓은 셈이잖아요. 

홍대 로비에서 숙식을 하며 농성을 했을 때가 있었어요. 저도 함께 밤샘 농성을 했었죠. 여러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술적인 자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어린 여자를 약간 깔보는 진보 중년 남성도 많았고요. 그런데 그때는 그것이 불쾌하다는 생각은 못 하고 그저 ‘내가 진짜 닫혀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요. 결국 어떤 균형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지의 세계관을 바꾸는 체험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상당히 큰 체험이었어요. 

『체공녀 강주룡』을 2011년 김진숙 위원의 고공농성에 대한 기사들이 함께 언급하던 강주룡을 알게 되면서 쓴 작품이라고 밝히기도 하셨죠. 작가님의 변화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아까 말한 위악적인 태도라는 게 ‘내가 다 안다’고 착각하는 태도이기도 하잖아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저한테는 아주 큰 변화예요. 어떻게 비유를 해야 할까요. 가령 점 빼는 수술을 받은 뒤, 점이 있던 나와 없는 나는 완전히 다른 나잖아요. 큰 사건이라고 말해놓고 점 빼는 일에 비유하게 됐는데요.(웃음)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내가 된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게 정말 많구나, 라는 걸 절감했으니까요.


 

누가 책을 낼 자격이 있는가

작품을 고친 과정도 궁금한데요. 어느 정도 균형을 잡고 수정을 하신 건가요? 작품을 다시 쓰면서 고민했던 것은 무엇인지 들려주세요. 

가장 뚜렷한 태도를 갖고 수정했던 건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였어요. 작품 자체가 30대 초반의 화자가 20대 초반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소설을 쓴다는 내용의, 일종의 메타픽션을 30대가 되어 실제로 고치고 있는 설정이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도 그랬잖아요. 이 글을 쓰던 때가 20대 초반이었는데요. 지금의 제가 고친 것이죠. 이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이 글을 쓰던 20대 때의 저는 몰랐지만 지금의 저는 아는 거고요. 그 점을 더해주는 쪽으로 수정을 했어요. 「호르몬이 그랬어」와 「총 塚」은 아까 말씀 드린, 제가 미워했다는 그 태도를 조금 덜어냈어요. 까진 척 하느라고 반여성주의적인 태도로 썼던 부분들을 많이 고민하고 고친 것 같아요. 무조건 고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렇게 썼을까를 생각하면서 고쳐나갔어요. 

표현 하나를 그냥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수정하지 않고 어떤 맥락에서 화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분명한 이유를 붙여주어서 좋았어요. 그 시기의 그 인물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요. 

예를 들어 「호르몬이 그랬어」에서 주인공이 ‘자버리겠다’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원래 버전은 그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었어요. 위악적이고 철없는 모습이 그냥 있었던 건데요. 수정하면서 왜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더 넣었어요.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신이 무력하다는 걸 아는 20대 여성이 섹슈얼리티로나마 자신의 유능감, 효능감 같은 것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쪽으로요. 그냥 삭제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기만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런 때도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은 그것이 잘못된 것도 안다는 걸 그때의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에세이는 아니지만 소설에도 그때의 제가 있기 때문에요. 

그 마음은 지금 20대의 작가님과 같은 시기를 보내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에게도 닿을 수 있는 부분일 것 같은데요. 작가님도 그런 독자를 의식하지는 않으셨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던전>에 연재할 때는 그냥 ‘재미있겠지?’라는 생각까지는 했었는데요. ‘공감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은 거의 안 했던 것 같아요. 처음 이걸 쓰던 20대 때를 돌아본다면 ‘나 소설 잘 쓴다, 이거 봐라’ 하는 오만한 태도, 그래서 더더욱 심상해 보이지만 심상치 않은 것들을 찾아 다녔던 것 같고요. 

수록작들이 지금 작품들에 비해 ‘돌출된다’고도 표현하셨는데요. 그런 작품이 또 있나요? 이 세 작품을 선정한 이유도 궁금해요. 

선정한 이유는, 제가 잘 썼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웃음) 2008년, 2009년, 2010년의 박서련 대표작 같은 느낌이죠. 이를 테면 ‘20대 박서련 걸작선’(웃음) 같은 거예요. 제가 뽑으니까 좀 이상하긴 하지만요. 

이 작품에 담긴 과거의 내가 갖고 있던 태도 때문에 이 작품들을 미워하긴 했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큰 애정을 갖고 있었던 거네요. 앞서 ‘재고’라고 표현하셨지만 언젠가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쓰면서 애정을 안 가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막 쓴 게 아니니까요. 내보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글인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내보일 기회가 없을 거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사실 이런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기도 해요. 

말씀 들을수록 등단이라는 것의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돼요. 작가는 계속 쓰고 있었는데 등단을 하고, 수상을 해서 이름을 알린 다음에야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는 것, 그 환경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저 같은 사람들이 되게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단행본으로 엮기에 충분한 원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거라고요. 그런데 제도를 탓할 순 있지만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어서 누구의 책임도 결국은 아니게 되어버리는 등단이라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등단은 누가 책을 낼 자격이 있는가의 얘기가 되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저는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런 창구의 하나로 <던전>이 기능할 수 있다면 저는 <던전>에 합류해 그 창구를 만들기로 했을 때의 목표를 이룬 셈이에요.


 

언제든 추위를 기억해낼 수 있는

수록된 세 작품 중, 작가님이 제일 좋아하는 장면을 하나 꼽는다면요? 저는 「총 塚」의 마지막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고, 슬프면서도, 황당하고, 웃겼어요. 정말 좋았어요.

그 작품을 쓰기 전에 본 내용이 있었어요. 2007년인가 2008년에 일본 철도청에 접수된 이색 분실물 목록이었는데요. 유골함이 7건인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7건이나 된다고? 하긴 뭐 철도 이용자가 많은 걸 생각하면 예닐곱 건은 많은 것도 아니겠다, 그런데 그 중에 일부러 두고 내린 사람도 있을까?’ 하는 식의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총 塚」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고 거기서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저도 「총 塚」에서 그 장면을 좋아해요. 

또 하나 약간 짓궂게 답하고 싶은데요.(웃음) 「호르몬이 그랬어」에서 주인공이 아빠 차를 타고 가다가 심심해서 콘솔박스를 열어봤는데 거기서 이상한 쿠폰이 나오잖아요. 그 장면도 꼽고 싶어요. ‘아비’에게 일종의 연민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와장창 무너지는 장면이라서 좋아해요. 

윤경희 평론가의 해설에 “작가에게 겨울은 적어도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된, 아니면 가장 강렬하게 체감된 계절”(132쪽)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런 해석을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해보면 작가님은 항상 프로필 첫 줄에 ‘철원에서 태어났다’는 문장을 넣었어요. 

꽤 그런 것 같아요. 지인들에게도 추위 ‘부심’을 종종 부려요. “벌써 롱패딩 꺼냈어?” 하면서요.(웃음) 사람이 몸을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추위에 떨며 다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가면 온 신경이 녹으면서 긴장이 풀리잖아요. 과장하자면 추위 속에서는 무장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그 감각을 되게 오래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감각이 제게 중요하기도 했고요. 사실 자각하진 못했고, 그냥 소설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윤경희 선생님께서 써주신 글을 보고 깨달은 게 있어요. 세 작품 모두 겨울의 하루를 썼더라고요. 저는 그걸 몰랐어요. 저한테는 왠지 내내 겨울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여름에도 겨울을 쓰는 게 너무 자연스럽고요. 땀을 흘리며, 에어컨을 틀기 직전에 있으면서도 손으로는 추위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 건데요. 저한테는 추위가 아주 생생하고, 몸에 새겨 있는 느낌이 있어요. 언제든 추위를 기억해낼 수 있죠.


 

『호르몬이 그랬어』는 단편집 시리즈인 <트리플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에요. 장편과 단편을 쓸 때 어떻게 다른가요? 

다른 것은 잘 모르겠는데요. 규모 면에서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고 느껴요. 단편은 구상을 구체적으로만 해두면 초고는 한달음에 쓸 수 있거든요. <월간 채널예스>에 연재했던 ‘짧은 소설’의 경우 조금 새로운 시도였어요. 원래 단편이 80매에서 100매 분량인데요. ‘짧은 소설’로 쓴 작품들은 50매였거든요. 내가 이 소재로 과연 50매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들을 그 분량으로 쓴 거예요. 20매로 예상했던 게 50매로 부풀려지거나 80매를 예상했던 걸 50매로 쓰는 식이었는데요. 재미있더라고요. 제한된 분량 안에서 독자가 최대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구조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고요. 장편은 주로 풀게 되는 것 같아요. 




*박서련

철원에서 태어났다. 2015년 「미키마우스 클럽」으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송지현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과 『마르타의 일』을 썼다. ‘암흑의 한국문학 카운슬’의 일원, ‘문학 플랫폼 던전’(www.d5nz5n.com)의 운영진이다.



호르몬이 그랬어
호르몬이 그랬어
박서련 저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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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튜더 “팔로워 1만 명보다 중요한 건, 한 명의 진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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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걸 얻을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과도 언제든 소통할 수 있는 시대다. 기술의 발달은 삶을 풍요롭게 했지만, 관계에 있어서도 그럴까.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자로 일하며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통찰을 드러냈던 다니엘 튜더가 새로 주목한 문제는 ‘외로움’이다.

서울살이 11년차 이방인이자, 명상 애플리케이션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그는 ‘혼자 살고, 소속 없이 다양한 일을 하고,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라이프스타일이 외로움을 부추긴다고 했다. 에세이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은 현대인의 삶에 바이러스처럼 파고든 이 불편한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수많은 사람이 느끼는 만성적인 외로움은 이제 개인의 치부가 아닌 사회문제다. 다니엘 튜더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대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직도 만성적으로 외로운 사람들을 타고난 괴짜거나 사실은 친구가 많은, 그러니 어서 기운을 차려야 할 사람 정도로 간주한다. 지인의 수보다 관계의 질 문제라는 걸 직관적으로 알면서도 그런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수의 관계를 제공하는 데는 아주 능하지만 질 측면에서는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고립감을 느낀다. 사회는 그 방향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190쪽)



현대인의 보편적 정서, 외로움

이번 책의 주제는 ‘외로움’이다. 외로움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나. 

5년 전, 우리 가족에게 큰 사건이 하나 생겼다. 아버지께서 자살시도를 하신 거다. 당시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연락을 받고 곧장 영국에 가서 10개월가량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그동안은 오직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 모처럼 아들 노릇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곁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내가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 좀 어둡고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지 깊이 들여다본 적은 없다. 영국에 있으면서 비로소 내 라이프스타일이 나를 외롭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인가.

먼 타국에서 혼자 살고, 종교 없고, 결혼하지 않았고, 대체로 어디에 소속되지 않은 채 일을 했다.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거다. 가끔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누가 날 그리워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현대사회에는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굉장히 많다. 만약 내가 100년 전 태어났다면 이미 결혼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을 테고 자녀가 4~5명은 있었을 거다. 작은 마을에 평생 살며 매일 공장 노동자로 출근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갔겠지. 과거에는 단단한 공동체에 속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부담스러운 자유가 주어진다. 물론 현대화에는 장점이 무척 많지만 외로움을 가중시키는 측면이 있다. 현대인의 보편적인 외로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 책은 서울에 사는 한 외국인의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선진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외로움에 대한 것이다. 

자료 조사를 충실히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외 주요 기사, 과학자들이 쓴 리서치 페이퍼 등을 무척 많이 봤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자료 찾고, 글을 썼다. 책에 실린 내용을 모두 쓰기까지 1년쯤 걸렸다. 

제목이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이다.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독은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이 없는 중립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은 원치 않는 고독감이다. 나는 외로움이 ‘충족되지 못한 유대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깊은 관계를 원하지만, 주변에 얕은 관계만 남아있을 때 우리는 외롭다. 나에게는 지인 같은 친구, 친구 같은 지인이 정말 많다. 이게 문제다. 특히 기자가 된 후에 더 외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외신기자로서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사회적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점 마당발이 되었지만, 만남을 마치고 오면 허무했다. 대학생 때는 매일 같은 친구들과 공원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고 노래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인간에게는 그런 교류가 필요한데, 일을 하면서부터 무언가를 주고받기 위한 관계만 늘어났다. 이렇게 얕은 관계가 많을수록 소외감과 외로움은 심해진다. 

“모임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처음 소개될 때면 나는 하나의 캐릭터를, 나의 캐리커처를 보여주는 기분이 든다.(108쪽)”고 했다. 비즈니스에 필요한 모임을 참석하면 내가 소진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일과 관계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나. 

2년 전부터 그런 모임을 많이 줄였다. 스타트업의 특성상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었다면 사업이 훨씬 잘 됐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업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나의 정신건강을 더 신경 쓰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모임에 참석하면 최대한 일찍 빠져나온다. 일부러 한 사람씩 만나려고 노력하고, 되도록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지 않으려 한다. 비즈니스적인 관계에서 오는 기회보다 나의 행복을 챙기는 게 더 중요하다.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바라본 독자 리뷰가 많았다. 외로움 장관은 어떤 일을 맡고 있나. 

‘조 콕스’라는 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이 지난 2016년, 브렉시트 투표를 앞두고 암살당했다. 극우파이자 백인우월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그녀를 향해 총을 쏘고 수차례 칼을 휘두른 것이다. 테러범은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살며 외로움으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조 콕스가 외로움을 사회문제로 보고 외로움 예방 캠페인을 주도한 의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기리기 위해 영국 의회는 외로움 의원회를 만들고 ‘외로움 장관’이라는 직책을 제정했다. 물론 외로움이라는 이슈만 다루는 장관은 아니고 사회의 여러 분야 일을 하면서 실직자, 은퇴자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정책을 만든다. 외로움 장관이 생겼다고 해서 당장 영국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직무가 등장했다는 게 중요하다. 외로움을 현대 사회의 문제로 바라본 신호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내 삶의 배경음악

개인적으로 특히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이 있나. 

나에게 외로움은 배경음악 같다. 늘 함께한다. 이 불편한 감정을 견제하기 위해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스타일이다. 바쁘면 바쁠수록 외로움을 생각할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에 명상 애플리케이션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에 도전한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소속감이었다. 매일 같은 사람과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외로움으로 마음이 힘들 땐 주로 무얼 하나. 

자연으로 간다. 나무, 산, 흐르는 물 근처에 있으면 행복지수가 올라간다. 지금 부암동에 사는데 이 동네로 이사한 이유도 자연이 가깝기 때문이다. 혹은 한 명의 친구를 만나 치맥을 먹거나 동네 카페에 간다. 고급스럽고 유명한 레스토랑은 별로 안 좋아한다. 소박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좋다. 멋진 장소에 가기 위해 친구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좋아서 어디를 가도 괜찮다는 마음이다. 

명상 애플리케이션 ‘코끼리’를 런칭했다. 명상이 외로움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될까.

명상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세상의 모든 게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명상을 하면 내가 걱정하는 수많은 문제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나의 외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 중 하나일 뿐이다. 나도 명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SNS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드러냈다.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SNS를 최소한으로 한다는 건 손해일수도 있을 텐데, SNS 활동을 줄이고 얻은 이득이 있다면? 

시간이 많다(웃음). 주변에서는 다들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데, 나는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제 인스타그램으로는 가끔 내 소식을 전하고, 페이스북은 회사 구인 광고를 올리는 정도로만 사용한다. 카카오톡 등의 메신저도 이따금 쓰지만 미팅 시간을 잡거나 오랜만에 안부를 나누는 용도이지 일상적 대화를 나누기 위함은 아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직접 만나야 한다. SNS의 가장 큰 문제는 타인의 가장 좋은 모습과 내 진짜 모습을 비교하게 만들고, 모든 걸 인기 경쟁으로 전락시킨다는 거다. 또 누군가의 단편적인 면만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트위터를 보고 ‘이 사람 너무 감정적이다.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나면 괜찮은 경우가 많다(웃음). 인간의 최고 혹은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는 게 SNS인 것 같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누군가를 직접 만나고 싶다. 

쓰면서 본인에게 가장 힘이 된 글은 무엇인가.

엄마에 대한 에세이다. ‘충분히 잘 해냈어, 칭찬받지 못해도’라는 제목으로 책에 실렸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시절, 따뜻한 말을 듣지 못하고 자라서 늘 칭찬에 목말라 있는 분이다. ‘난 아무 것도 아니야,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오셨다. 간호사가 꿈이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얼른 취직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아마 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았을 거다. 사실 성인이 된 후에 엄마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엄마는 왜 슬프고 외로울까. 왜 나에게 자꾸 잔소리를 할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엄마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이제야 엄마라는 사람을 이해하게 됐다.


 

우리에게는 깊은 유대가 필요하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볼 때, 한국인이 느끼는 외로움의 특징이 있나. 

잘 사는 나라에서 나타나는 외로움과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요즘 한국 사회의 외로움은 압축성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빠르게 선진화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급속도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세대간 갈등이 유난히 심하다. 노년, 중년, 청년이 완전히 다른 나라 사람 같다.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 정치관이 너무 다르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거다. 또 노인빈곤률이 높고, 독거노인도 많다. 빈곤은 외로움의 원인 중 하나다. 한국인의 외로움은 소외감에 더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인 내가 한국을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인 ‘정’은 이제 시골에 가지 않으면 접하기 힘든 문화유산으로 죽어가고 있다(113쪽)”고 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와 비교해 달라진 분위기를 많이 느끼나. 

가장 많은 변화는 길거리에 보이는 상점이 대부분 프랜차이즈가 되었다는 거다. 옛날에는 동네 빵집, 카페, 식당 등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주인과 대화하고 감정을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떤 식당을 자주 방문하면 주인과 친해지고, 단골이 되는 문화가 좋았다. 그땐 서비스나 덤도 무척 흔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다. 며칠 전, 경리단길의 한 수제 맥주집에 갔는데 직원이 무료로 감자칩을 가져다 줬다. 몇 년 만에 받은 서비스라서 기쁘고 반가웠는데, 유통기한이 임박해서 주는 거라고 하더라(웃음). 사소한 사례지만 이런 부분에서 정이 사라졌다고 느낀다. 이제 서울 사람은 런던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내 일은 내 일. 네 일은 네 일이니까 우리 서로 피해주지 말자”는 생각이 많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장점도 있지만, 아쉽기도 하다. 

남자들도 외로움과 같은 나약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본주의, 대기업 중심인 사회에서는 ‘일’이 프라이드와 연결된다. 영국인에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외향적이고,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무슨 회사를 다니고 어떤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경력으로 개인을 증명하는 시스템 속에서는 커리어가 사라지면 자존감까지 낮아진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회사에 헌신하는 문화가 있어서 가족, 친구와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은퇴 후 더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기 때문에 외로움을 억누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 힘들 수 있다. 

요즘은 관심사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대하는 커뮤니티가 많이 생기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에는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공동체가 있었지만, 이제 인류 역사 최초로 커뮤니티를 일부러 만들어야 하는 세상이 왔다.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공동체는 서열화되어 있었고 직업, 종교, 계층이 뚜렷했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속하든 그건 숙명이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공동체 문화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유대감마저 사라진다는 거다. 이러한 시대에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커뮤니티는 좋은 대안인 것 같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 있다. 자본주의적인 커뮤니티라는 점이다. 내가 운영하는 명상 애플리케이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 수면장애, 불안 등 심리적 문제의 대안책을 자본주의가 준비한다는 점이 안타깝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니 자본이 그 사이에 들어오는 거다. 미국에는 80달러를 내면 안아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게가 있다. 반려동물 산업이 점차 커지는 것도 외로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정서적 유대감까지 돈으로 사야 하는 세상이 올까 봐 두렵기도 하다. 

현대인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선천적인 공동체가 사라진 시대이므로, 우리 스스로 공동체를 다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천 명과의 얕은 관계보다 3~4명과의 깊은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SNS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관계를 줄이고 직접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게 유대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 

분명 외로운데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 자주 우울한데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외로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사회문제라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현대화는 좋은 점이 많지만, 부작용도 있다.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는 거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점점 늘고 있는데, 여기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대면 서비스는 대면 만남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으면 좋겠다. 술자리에서 찍은 사진을 나누거나, 약속을 정하기 위한 도구 말이다. 인간에게는 눈 마주치고, 손 잡고, 끌어 안는 스킨십이 정말 중요하다. 그걸 잊지 않아야 한다.




*다니엘 튜더

1982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는 대체로 단조롭고 평탄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범생이’와 ‘사차원’ 중간 어디쯤에 속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학·경제학·철학을 공부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을 찾았다가 사랑에 빠져, 2004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에 머물며 영어를 가르치다가 미국계 증권회사와 한국의 증권회사에서 일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영국으로 돌아가 맨체스터 대학에서 MBA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헤지펀드 회사에서 일했다.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
다니엘 튜더 저 | 김재성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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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들을 글로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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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들 작가  

정들 작가가 쓴 『의미 있는 의미 부여』의 그림에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수채물감처럼 터치감이 겹겹이 살아있는데 물의 투명함이 아니라 기름의 진함이 배어 있어, 그림에서 훨씬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색연필보다 훨씬 빈틈이 없고 색이 분명하다. 새롭게 접해본 그림의 결에 뭘로 그렸을까? 궁금했는데, 마카펜이라고 한다. 정들 작가는 마카펜의 매력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마카펜은 선이 굵고 거칠게 그려져요. 그런데 그런 선이 쌓이고 쌓여서 면이 되고, 한 폭의 그림이 되면 그 그림은 참 따뜻한 느낌을 줘요. 한 개의 선만 봤을 땐 몰랐던 매력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되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죠.” 

지난해 마카펜 그림 에세이 『의미 있는 의미 부여』를 출간한 일러스트레이터 정들 작가는 원래 방송작가였다고 한다. 책을 내기 위해 글 작업을 할 때, 삽화는 당연히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삽화에도 자신의 개성과 메시지를 담고 싶어 그림을 직접 그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로 마카펜를 구입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과감한 시도였지만 완성도 있는 첫 책을 출간하고,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는 정들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그림 에세이 『의미 있는 의미 부여』를 출간하셨습니다. 첫 책으로 알고 있는데요, 책을 내야겠다라고 생각하시게 된 동기나 계기가 있으셨나요? 

원래 방송작가로 활동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게 됐고,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멈추게 됐었죠.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니 다시 글이 너무 쓰고 싶은 거예요. ‘아니, 내가 글 쓰기를 이렇게 좋아했었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서 무작정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꾸준히 써 내려간 글의 분량이 상당해지자 이 글들을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출간 계획을 세우게 되었죠.

책에 수록된 글과 그림 작업은 원래 틈틈이 하셨나요? 아니면 책 출간을 결정하고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시게 되었는지요. 

글은 틈틈이 썼어요. 물론 그때 쓴 글들은 ‘작업’이라고 하기엔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고 써 내려간 일기에 가까웠어요. 이후 책 출간을 결정한 뒤로는 썼던 글들을 다시 쓰거나 다듬고 수정했습니다. 그림 작업은 책 출간을 위한 글 작업이 완전히 끝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고요.

마카펜으로 작업을 하십니다. 마카펜의 매력을 알려주신다면요? 

마카펜은 선이 굵고 거칠게 그려져요. 그런데 그런 선이 쌓이고 쌓여서 면이 되고, 한 폭의 그림이 되면 그 그림은 참 따뜻한 느낌을 줘요. 한 개의 선만 봤을 땐 몰랐던 매력이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되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도구적인 면에서 접근이 쉽습니다. 유화나 수채화는 물감, 붓, 팔레트, 캔버스 등 필요한 것이 많지만 마카펜 그림은 딱 두 개만 있으면 돼요. 마카와 종이. 그런 면에서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고 싶어 하는 분들께 저는 마카를 강력 추천합니다.

마카펜으로 그림 그리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하시게 되셨나요? 

『의미 있는 의미 부여』를 준비하면서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 글 작업만 할 땐 삽화는 당연히 다른 일러스트레이터 분께 맡기려고 했었죠. 그래서 그림이 들어갈 부분엔 대략 이런 그림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메모 정도만 해 두었어요. 그러다 문득 삽화에도 글처럼 내 개성, 내 메시지가 묻어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책이 온전히 저만의 색깔을 띈다면 참 좋겠다 싶었죠. 그림을 직접 그려야겠다는 다짐은, ‘무엇으로’ 그리느냐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어요. 그런데 디지털 그림 보단 종이에 그린 손 그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워낙 아날로그 느낌이 나는 것들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던 중, 전부터 좋아했던 마카펜 그림들이 떠올랐고, 당장 마카펜 세트를 구입해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죠. 

마카펜으로 그린 그림이 우리 인생을 닮은 것 같다고 책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분이 우리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무는 자랄수록 겹겹이 나이테가 늘잖아요. 사람도 똑같은 것 같아요. 세월의 흔적, 지난날의 추억, 새로운 다짐, 그런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맞물리고, 하나하나 쌓이고 쌓여가며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이 마카펜 그림과 닮았어요. 마카펜 그림은 슥슥 그은 수많은 선들이 쌓이고 쌓여 한 폭의 그림이 되거든요. 실제로 마카펜 그림을 자세히 보면 특유의 결과 선이 보여요. 사람도 겪어보면 볼수록 그 사람만의 결과 특징이 보이듯 말이죠.

제목은 어떻게 정해지게 되었나요? 

소재를 찾을 때, 가장 먼저 주위를 둘러보는 편이에요. 어떤 사물 하나에 꽂히면 그것을 집중해서 관찰하고 그것의 특징을 파악해 의미를 부여하며 글감을 찾죠.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히 쓰는 볼펜 한 자루에도 그것만의 물성이 있고, 또 저마다의 사연이 있잖아요. 이 볼펜이 갖고 있는 특징, 이 펜으로 써 내려간 수많은 메모와 글들, 이 펜이 내게 주는 의미들… 그런 것들을 발견해보는 거죠. 대부분의 소재를 이런 식으로 찾아내다 보니 ‘의미 부여’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렸어요. 그런데 ‘의미 부여’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더라고요. 흔히들 말 하잖아요. “그런 거에 의미 부여 좀 하지 마.” 라고요. 하지만, 다분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 부여라면, 살아가는 데 제법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앞에 ‘의미 있는’ 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수록한 그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바다 그림이 세 개 있어요. 두 개는 깊은 바닷속을 묘사했고, 하나는 육지로 밀려오는 파도를 그렸죠. 그 그림들이 좋습니다. 마카펜 그림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거든요. 겹겹이 쌓은 선들이 만들어낸 한 폭의 그림. 거칠고 뭉툭한 선들이 모여 만들어낸 따뜻한 느낌이요.



원래 글을 꾸준히 써오셨는지요?

네. 버릇처럼 글을 썼어요. 일기도 꾸준히 쓰는 편이었고요.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글을 써요. 친한 친구가 알려준 방법인데요, 감정이 마구 휘몰아칠 때, 의식의 흐름대로,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쓰는 거죠. 컴퓨터 메모장을 켜놓고,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을 다 쏟아낸다는 느낌으로 앞뒤도 없이 마구 쓰는 거죠. 그렇게 모든 걸 글로 쏟아내고 나면 조금은 스트레스가 풀려요. 앗,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을 쓰다 보면 스트레스 받기도 하는데, 스트레스를 또 글로 풀다니. 저, 평생 글 쓸 운명인가 봐요.

글쓰기를 하신 후 찾아온 변화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제 글이 삶에 지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길 바라며 책을 썼어요. 그런데 첫 책을 내고 깨달은 게 있어요.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책에 쓴 모든 말들이 사실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것을요. 내가 세상을 향해, 혹은 타인에게 간절히 하고 싶은 말이야말로 사실 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문에 타인의 말을 잘 듣는 것만큼이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예전의 저는 그 점에 소홀했던 것 같아요. ‘먼저 내 마음을 돌보세요.’,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들 많이 하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저도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돌보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은 꼭 제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하려고 해요. '지금 내 기분이 어떻지? 왜 그렇지?’ 자주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제 자신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글을 쓰며 무언가를 쏟아낸 시간만큼 꼭 독서나 영화감상, 타인과의 대화 등으로 채우는 시간을 갖는다거나, 예쁜 미술도구를 제 자신에게 선물하기도 하고요. 소비 합리화는 아닙니다. (웃음) 

스물여섯 살 때, 워킹홀리데이 때 독일에 가셨습니다. 워킹 홀리데이를 하는 나라로, 독일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해외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너무 운 좋게도 거기에 뽑혀서 생애 첫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됐어요. 당시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을 다녀왔거든요? 한달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떠올리면 박물관, 관광명소들이 생각나더라고요. ‘와, 내가 에펠탑에 갔었다니!’하고 말이죠. 그런데 독일을 떠올렸을 땐 좀 달랐어요. 거리의 풍경, 카페에 앉아 구경했던 독일인들의 소소한 일상들, 분위기, 무뚝뚝하다고 들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친절했던 사람들… 그런 것들이 떠올랐어요. ‘삶’과 관련된 것들 말이죠. 그래서 언젠가 해외에 거주할 날이 온다면 꼭 독일에서 살아봐야겠다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막상 살아보니 역시 저와 잘 맞는 곳이더라고요.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고, FM 기질이 다분한 저에게 딱 맞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정들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자연을 좋아해요. 그래서 원래 성(姓)인 '정'은 그대로 두고, 뒤의 이름은 꼭 자연과 관련된 것이었으면 했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넣어봤죠. 그런데 정'바다'라고 하니 작가의 필명이 아니라 낚시왕의 필명 같았어요. 정'강'이라고 해보니 정강이가 떠오르고, 정'산'이라고 하니 마치 기업 회계팀에서 일해야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러다 문득 너른 들판이 생각나서 ‘들’이라는 말을 넣어봤는데, 입에 너무 잘 붙더라고요. 정들. 어감도 좋고 제가 좋아하는 자연도 들어갔고. 딱 이거다 싶었어요.


어린이 책선물 캠페인- 예스24 선물의 집 

<예스24 어린이 책선물 캠페인>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하셨습니다. 어떻게 참여하시게 되셨나요? 

작년 가을, 예스24 뉴미디어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어린이 책선물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인데, 일러스트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보시더라고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일단 캠페인의 취지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좋은 취지로 하는 일에, 제 나름의 좋은 뜻을 더하면 참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실제로 저에겐 정말 뜻 깊은 작업이 되었고요. 너무나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예스24 어린이 책선물 캠페인> 그림 작업을 하시면서 신경 쓰신 부분이 있다면요?

사실, 모든 부분에 많은 신경을 썼어요. 마카펜 그림은 한 번 그리면 수정할 수가 없거든요. 디지털 그림처럼 특정 부분만 지우고 수정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죠. 점 하나라도 잘못 찍으면 그림을 새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만 해요. 그래서 채색에 심혈을 기울였어요. 선물의 집 내부 그림을 보면 소파 밑에 네이비 러그가 깔려 있어요. 그 러그 색만 해도 몇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천장, 옆면, 바닥까지 모두 그려놓고 러그만 채색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한번 잘못 칠하면 전부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이다보니 섣불리 채색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종이에 여러가지 색을 채색해서 가위로 잘라 그림에 대보며 수없이 고민했어요. 러그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그리거나 칠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색 하나를 입히는 것에도 정말 많이 고민했죠. 


정들 작가 두 번째 책에 수록될 삽화 중 하나

두 번째 책은 어떤 내용인가요? 

다음 책도 그림 에세이입니다. <계절의 온도는 사람이 정한다>라는 가제를 달아 놓았어요. 주변 분들께 ‘그림이 참 따뜻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요, 마카펜 그림 자체가 주는 분위기도 한 몫 하지만, 아무래도 따스함을 표현하기 위해 그려 넣은 요소와 장치들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 요소와 장치라 함은, 바로 ‘사람, 삶’과 관련된 것들이에요. 예를 들어 겨울 풍경 그림을 보면, 눈 쌓인 언덕 위에 노랗게 불이 켜진 집 한 채와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그림에 온기를 더하죠. 꼭 붙어 함께 언덕을 오르는 두 사람, 그 옆을 총총 뛰어가는 한 마리 강아지는 왠지 모르게 미소를 짓게 만들고요. 추운 겨울 밤의 풍경에서도 따스함이 느껴지는 건, 그 안에 우리 삶과 관련된 무언가가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소하게, ‘그저 살아가는 모습’만큼 온기를 뿜어내는 것이 과연 또 어디 있을까 싶어요. 다음 책엔 이렇듯 따스한 온기를 뿜어내는 ‘사람, 삶’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림을 책으로 담아 볼 예정이에요.


*정들

기쁨, 슬픔, 행복, 죄책감···.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한 인간입니다.

떠오르는 것을 쓰고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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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의미 부여
        
정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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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수정 “미술 감상은 인간관계와 비슷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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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다. 눈길이 간다. 잘 모르지만 계속 보고 싶다.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진다. 흡사 연애의 시작과 같은 이 흐름은 미술 감상에 그대로 적용된다. 미술을 감상한다는 건 미술과 관계를 맺는 일. 시간이 쌓이며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는 인간관계처럼 미술과 나의 관계도 변화한다. 

코로나19로 편히 미술관을 갈 수 없는 요즘, 우리는 어떻게 미술과 관계를 맺고 이어갈 수 있을까. 『미술 경험치를 쌓는 중입니다』는 ‘비대면 시대’에 미술을 가까이하는 법을 소개하는 책이다. 좋아하는 작가 SNS 팔로우하기, 미술 영화로 취향 찾기, 예술 책 모임 만들기, 나에게 맞는 미술책 고르기, 유튜브로 그림 감상하기 등 평범한 사람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팁을 제공한다. 미술 교사로 일하며 『그림은 마음에 남아』『그림의 눈빛』을 쓰고 그림이 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온 김수정 저자는 삭막한 시대에 미술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일상에서 미술과의 접점을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예술가가 SNS를 한다면? 유튜버 ‘피카소’, 인스타그래머 ‘달리’     

비대면 시대에 미술을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 책이에요. 전작보다 실용적인 면이 강한데요. 어떻게 쓰게 됐나요?

그동안 내 안에 들어온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아름다움이 들어오는 통로를 소개하고 싶었어요. 교사로 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미술을 소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방법’을 말하게 되더라고요. 강연에서 그림을 만나는 방법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미술을 소개하면 반응이 좋기도 했고요.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통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낀 건가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많죠. 일단 저조차도 설명하기 어려웠어요. 단계별로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공학처럼요. 미술도 이렇게 단계별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걸 설명하기 어렵더라고요. 미술이라는 게 머리를 써야 하지만, 몸으로 하는 활동이기도 해서 체화해야 하거든요. 수학에서 ‘한 단계’를 넘어야 다음 단계를 갈 수 있는 것처럼, 미술도 그래요. 그래서 한 장을 끝까지 그려보는 것, 한 장을 깊이 있게 읽어 보는 일이 중요하죠. 

‘프리다 칼로가 인스타그램을 한다면?’ 이라는 가정이 재미있었어요. 만약 과거의 예술가들이 살아 있다면 SNS를 활발히 할 것 같은 예술가는 누굴까요?

블로그를 활발히 할 것 같은 사람으로는 글을 많이 쓴 사람이 떠오르는데요.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는데 ‘전체 공개’가 아닌 ‘이웃 공개’로 소극적으로 하는 사람 있잖아요. 영국 화가 ‘그웬 존’이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로댕의 숨겨진 여자 중 하나인데 짝사랑하는 사람한테 편지를 수백 통 썼지만, 보내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 놓은 사람이거든요. (웃음) 인스타그램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활발히 했을 것 같고요.

왜 초현실주의 작가들이에요?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치장을 많이 하거든요. 사진으로 실험을 많이 하기도 했고요. 한 명을 꼽자면 일명 '관종' 사진을 많이 남긴 ‘살바도르 달리’가 생각나요. 희한한 사진을 많이 남겼거든요. 요즘 말로 ‘인싸’에 ‘관종’이었어요. 

재밌네요. 유튜브는요? 

피카소가 영상을 하루에 2~3개씩 올리면서 아주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마티스와 피카소가 경쟁 구도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마티스보다는 피카소 방송이 더 인기 있을 것 같아요. 자연을 사랑했던 ‘훈데르트바서’는 산, 강, 호수를 찍어서 보여줄 것 같고요. <나는 자연인이다> 콘셉트로요.


 

음악보다 미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평범한 사람에게 미술 감상의 벽은 유독 높게 느껴져요.

구체적인 대상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에요. 시험지와 유사한 구도죠. 그러다 보니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답을 안 찾아도 된다는 것만 확인해도 충분해요. 느낌만 있으면 돼요.  

미술은 ‘관람자의 몫’이 큰 예술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은 저마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왠지 짧게 감상하면 미술에 대한 나의 깊이 없음이 탄로 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곤 했는데 음악과 비교해 설명해 주니 그 부담감이 이해되더라고요.  

음악은 감상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얼마나 잘 감상하는지 비교적 티가 안 나요. 시간이 지나면 음악도 끝나니까요. 그런데 미술은 그렇지 않죠. 계속 내 앞에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렵게 느껴지고 해석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는 거예요. 이미지도 결국 정보이기 때문에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한데요. 저절로 생기지는 않고,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해석의 틀이 생기고 그림과의 접점이 만들어져요.  

좋은 작품을 보고 감명받아도 왜 좋은지 설명하려면 어려울 때가 많아요. 내가 받은 감동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요?

상담 활동 중에 감정을 기록하는 훈련이 있어요. ‘감정 단어장’에 내 감정을 써보는 거예요. 이런 것처럼 명사, 형용사, 동사 상관없이 한 단어만 있으면 그게 나의 감상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른바 ‘원 포인트 그림 감상’인데요. 『원 포인트 감상』이라는 책도 있어요. 이 책의 서문을 보면 ‘난 딱 한 놈만 판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딱 하나만 보셔야 해요. 예를 들어 여러 색깔 중에 내 눈에 들어온 색이 겨자색이라면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해요.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하나로 시작해도 좋고요. 

꼭 감정일 필요도 없고요?

그럼요. ‘흔들린다’ 같은 움직임을 표현하는 말도 괜찮고, 명사도 좋아요. 그게 무엇이든 작품과 교류가 있으면 되는 거예요. 하나의 지점만 있으면 나와의 연결고리가 생기고, 거기서 출발하면 나중에는 또 다른 연결고리가 생겨요. 우리가 말을 배우고, 관계 맺기를 훈련하는 것과 똑같아요. 



처음의 감동이 사라지기도 해요 

‘미술이 우리를 구원하는 순간’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9p)고요. 어떤 작품에서 처음 구원을 경험했나요? 첫 순간을 떠올린다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동아갤러리에서 하는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전시회를 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원화를 보고 거장의 터치를 실감했어요. 특히 일리야 레핀이 자기 아들을 그린 『유리 레핀의 초상』이 가슴에 박히더라고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나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같은 대표작보다 인상적이었어요. 그림 속 인물의 선명한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고, ‘너는 앞으로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될 거야’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고요. 

사실적인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이런 표현이 작가한테 어떻게 들릴지 궁금해요. 실례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한테는 칭찬이에요. 제 그림을 보고 '사진인 줄 알았어'라고 하면 기분 좋더라고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좋아하신다고요. 왜 좋은가요?

일리야 레핀의 그림을 봤을 때와 비슷해요. 어느 순간 마음에 들어와 박힌 것 같아요. 대학교 실기실에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처음 봤는데요. 그림이 영롱하고 인물의 눈빛이 강렬해서 잊히지 않았어요. 

역시 좋아하는 그림을 처음 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시네요.

그렇죠. 그런데 처음에 좋았던 그림이라고 해서 끝까지 좋은 건 아니에요. 처음에 받았던 감동이 오래 계속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해요. 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에 처음에 받았던 감동이 사라지나요?  

그림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 같아요. 처음보다 더 많이 알게 되니까요. 예를 들어 제가 색보다는 형태를 더 잘 표현하는 사람이라 컬러리스트 화가들을 흠모하거든요. 그래서 강렬한 색이 특징인 고갱의 그림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고갱이 아주 무책임한 사람이었고, 타히티에서 어린 원주민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고갱의 그림이 더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아, 공감하는 분들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예전에도 고갱의 그림을 보면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긴 했어요. ‘왜 그릇에 가슴을 얹어 놓지?’, ‘왜 저렇게 여자들을 벗기지?’ 싶어서 기분이 묘하게 나빴죠. 그런데 그때는 이유를 몰랐던 거예요. 미술을 깊이 공부하기 전이었으니까요. 이런 면에서 미술 감상은 결국 그림과 관계 맺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림과 관계 맺기’라는 표현이 참 좋네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면 알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잖아요. 호불호와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기도 하고요. 그림과 나의 관계도 그렇지 않나 싶어요.

작품과 사생활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지 않는 사람도 물론 있고요. 작가님은 후자에 가까운 편인가요? 

그렇죠. 시대 상황과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상황을 고려할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 거슬리는 건 내가 다스려야 하니까 사생활로 인해 예술가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조금 거칠게 말하면, 좋은 작품은 얼마든지 많아요. (웃음)

 


좋은 그림은 ‘사고 싶은 그림’

가볍게 시작해서 깊이 있는 감상으로 옮겨갈 것을 권했는데요. 미술 감상에 깊이가 있다면 무엇으로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요?

미술 감상에 정해진 방법은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감상법만 말씀드릴 수 있을 텐데요. 한 마디로 ‘곱씹음’ 아닐까 싶어요. 열정으로 시작해서 성심으로 이어지는 건데요. 연애와 비슷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감정에 이끌려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장단점을 발견하고 함께 시간을 쌓아가면서 관계가 깊어지잖아요. 물론 멀어지기도 하고요. 

저마다 감상법이 다르지만, ‘명작’으로 인정받는 그림이 있잖아요. 좋은 그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그림과 나에게 의미 있는 그림은 달라요.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고, 특히 수상작은 심사위원 기준에 좋은 그림이기도 하고요. 영국 화가 ‘프레드릭 레이튼’의 그림 중에 <타오르는 6월>이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한때는 그 작품이 일명 쓰레기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재평가받으면서 아주 값비싼 그림이 됐죠. 

‘좋은 그림’의 객관적 기준을 말하기 어렵다는 건가요?

개인적인 측면에서는요. 다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은 ‘사고 싶은 그림’이에요. ‘좋다’, ‘나쁘다’는 욕망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돈을 주고 사서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림이 본능적인 욕망을 깨운다고 생각해요. ‘좋은 그림’에 대해 그보다 더 정확한 사인은 없지 않나 싶고요. 그리고 다른 의미로 ‘첫 만남’ 이후에도 내 곁에 오래 남아있다면 좋은 그림이에요.

20년 가까이 미술 교육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교육자’와 ‘작가’로서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요? 

완전히 달라요. 첫 미술 시간에 아이들한테 하는 말이 있는데요. “내 수업의 목표는 너희들이 미술을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이 시간을 지나서 성인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에요. 제 미술 수업을 듣고 아이들이 나중에 대학에 가면 미술 교양 강의를 선택해 듣고, 데이트하면 미술관에 한 번이라도 더 갔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것보다 미술을 즐기는 게 중요하거든요. 

작가로서는 어떤가요? 

별을 보듯 미술을 봐요. 미술은 저한테 잡지 못한 별 같은 느낌인데요. 잡지 못하고, 담지 못해도 별을 한 번 보면 오래 기억에 남잖아요. 그 기억을 평생 가지고 살면서 같이 그 별을 보자고 말하는 게 작가로서 미술을 대하는 태도예요.

‘오마주’를 과거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방식(150쪽)이라고 표현한 것이 좋았어요. 독자들에게 오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묻기도 했는데요. 작가님은 오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김환기 선생님의 파트너였던 예술 CEO김향안 여사요. 일명 ‘배운 여자’이셨는데 굴곡이 많은 인생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셨거든요.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나갔고요. 본인의 자원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만든 사람이라 인생 CEO라고 생각하고, 제 인생의 목표예요. 

비대면 시대가 되면서 정보 격차가 더 심해질 거라는 우려가 있어요. 여러 이유로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미술을 감상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다른 방법이나 보완책이 있을까요? 

‘한 책 깊이 감상하기’나 특정 그림과 내가 통할 때까지 관계 맺는 방식을 추천하고 싶어요. 인쇄된 작품을 보고 또 보는 거예요. 요즘에는 명화나 좋은 일러스트로 표지를 만드는 책도 많고, 굿즈도 많거든요. 이런 것들을 활용하셨으면 좋겠어요. 




*김수정

퇴근 후에 그림 읽고 책 그리는 사람. 좋아하는 것을 늘 곁에 두고 자주 보려고 한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페르메이르의 눈빛이 영롱한 소녀가, 마우스패드에는 에곤 실레의 영민한 소년이 있으며, 웹브라우저의 홈 화면은 매일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는 ‘위키아트’다.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가 담긴 휴대폰케이스를 늘 손에 쥐고, 조선 민화 「책가도」를 섬세히 수놓은 비단 가방을 고이 들고 다닌다. 현재 교육 현장에서 르네상스 인간형 미술교육에 힘쓰면서, 다수의 영재교육 기관에 출강하며 페인팅 이외에도 영재성과 창의성, 미술사 및 미술 감상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그림 같은 일상을 이야기한 미술 산문집 『그림은 마음에 남아』 『그림의 눈빛』 및 예술교육 교양서를 펴냈다. 경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학창작집 및 수필 분야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미술 경험치를 쌓는 중입니다
미술 경험치를 쌓는 중입니다
김수정 저
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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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결에 시작된 출판 인생

“봄날의책은 믿음이에요.” 한 독자의 리뷰를 읽고 세 번째 ‘책 짓는 사람’의 주인공으로 박지홍 대표를 만났다. 2013년 4월 첫 책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시작으로 8년간 40권의 책을 출간한 봄날의책. 박지홍 대표는 “참 느리고 게으른 출판”이었다고 자평했지만 봄날의책을 각별히 아끼는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가 책 한 권을 만들 때 쓰는 정성과 애씀, 전문성을. 박 대표는 올해로 편집자 경력 28년을 채웠다. 푸른나무, 열화당, 솔출판사, 아카이브 등에서 13년을 보냈고 나머지 날들은 가끔은 출판사 기획자로, 대체로는 프리랜서 편집자(교정교열자)로 지냈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국 고전문학을 공부해서 그에 관한 좋은 글을 써보고 싶었어요. 지금으로 치면 정민, 안대회 선생의 모습일 듯한데요. 임형택, 박희병, 김명호 선생이 계신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몇 개월 동안 혜화동을 들락거리며 청강도 했는데, 어느 여름날 문득 자신 없고 막막해지더라고요. 당시 자취하던 집에 서점 주인이 사셨는데 그분이 자기가 아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를 구하는데 서류를 한번 내보라고 하시네요. 재미 삼아 주섬주섬 뭔가를 적어 냈는데, 면접을 보게 됐고 며칠 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1993년 여름, 얼결에 시작된 출판 인생이었다. 첫 직장인 푸른나무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도제식 훈련 대신, 선배 편집자가 작업한 것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바로 실전에 투입됐다. 상사의 지도 편달이나 간섭을 내켜하지 않는 기질과 잘 맞았다. 

“과감하게 원고에 손을 대고 흐뭇해하고 있으니까 어느 날 선배가 버럭 화를 내시더라고요. ‘박지홍, 지금 네 글 쓰는 거 아니야. 뭐 하는 짓이야?’라며. 참 순하고 다정한 선배셨는데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으면 그러셨을까요? 그 후로도 빨간 펜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하지만 호되게 혼난 기억이 있어서 적당히 멈추게 돼요. 그리고 편집자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자의 개성이 존중돼야 하니까요. 또 개입을 크게 해야 하는 글이라면 애초에 출간하지 않는 편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마지막 직장인 아카이브에서는 국내외 사회과학을 주로 다뤘다. 사회에 꼭 필요한 책들, 절실하게 뜨거운 책들이었다. 바로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진숙의 싸움을 다룬 책 『사람을 보라』, 르포작가 희정의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등이었다. 독립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주 분야를 ‘문학’으로 정했다. 시와 소설은 기존 출판사들이 워낙 잘하고 있어서 틈새라고 부를 만한 산문(에세이)을 내고 싶었다. 

“출판사 이름은 왠지 따뜻하고 따스한, 양명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어쩌면 그런 책들을 내고 싶다는 마음의 반영일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봄’, ‘봄날’이라는 단어는 꼭 들어갔으면 싶었고, 거기에다 이런저런 단어들을 조합해 보았어요. 봄날의뜰, 봄날의정원, 봄날의마당 등등. 그렇게 돌고돌아 결국 ‘책’에 이르렀고요. 그리하여 ‘봄날의책’이 됐습니다.”



독자의 기대와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

1인출판사의 장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날 수 있고, 그 결과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힘닿는 대로 마음껏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기꺼이 져야 한다. 박지홍 대표는 처음 원고가 들어왔을 때 전체적인 파악, 콘셉트를 궁리하고, 오랜 경력의 외주 편집자가 초교와 재교를 본다. 최종교와 보도자료 작성, 홍보 및 마케팅은 다시 박지홍 대표의 몫이다.

“마케팅이 책의 편집, 구성, 제작, 홍보 등을 두루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이라면, 저는 책의 ‘구성’ 단계에 좀더 힘을 쏟는 편입니다. 익숙하기도 하고요. 가장 그 책을 돋보이고 빛나게 해줄 수 있는 조합을 찾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데요. 특히 해당 책에 가장 어울리는 추천사, 발문, 해설 등의 조합에서요. 그동안 낸 책들 중, 『불안의 서』는 배수아와 김소연의 조합이 좋았고, 『아픈 몸을 살다』는 번역가 메이와 옥희살롱 김영옥, 전희경의 조합이 참 좋았고, 최근작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은 메이와 김금희, 박연준의 조합이 좋았던 것 같아요.”

봄날의책이 펴내는 책들은 디자인이 훌륭하기로도 유명하다. 제작비를 아끼지 않는 이유를 묻자 “어쩌면 자기 만족이 큰 것 같아요”라고 했다. 적어도 저자와 디자이너 그리고 스스로는 만족스러워야 하니까. 또 ‘봄날의책’에서 만든 책이라는 독자의 기대와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 종이 하나를 고를 때도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한 권의 책은 전체 레이아웃, 본문 및 표지 용지의 결정, 양장 여부, 사철제본 여부, 후가공 여부, 래핑 여부 등, 아주 많은 공정이 조화를 이루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각각의 책에 가장 어울리는 재료들, 방식들이 있겠지요. 그에 대한 설명과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제작비(주로 표지 및 본문의 용지대, 후가공에서의 박작업)는 그에 따라 결정됩니다. 가령 『불안의 서』는 8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어서, 최대한 가벼웠으면 싶었어요. 그래서 부러 양장은 하지 않았고, 당연히 사철 제본은 했고, 본문 용지로 가벼운 수입지인 바르니(60g)를 과감히 사용했습니다. 본문에 주로 사용하는 용지의 두 배 이상 가격이었지만, 애초 기대했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듯하여 그렇게 진행했어요. 그러다 보니 책값이 좀 비싸졌죠.”

봄날의책은 그동안 공미경, 전용완 디자이너와 주로 일해 왔다. 두 사람은 각각 30년, 10년 이상 책을 만들어온 베테랑 디자이너다. 봄날의책에서 만드는 책들은 크게 보면 단정하고 깔끔한 디자인, 스스로 자기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디자인이 되길 바랐다. 박지홍 대표는 아주 가끔 좀더 과감하고 거침없는 디자인을 제안하는데, 『달걀과 닭』, 『G.H.에 따른 수난』 등이 그런 의논을 통해서, 좀더 특별해진 경우다. 

“캐롤 앤 더피의 시집 『세상의 아내』는 표제작을 표지에 타이포로 구현한다는 원칙 아래, ‘세상의 아내’라는 제목이 특정 시에 머물지 않고 모든 시를 아우르는 제목이어서, 수록 시 전체를 표지 앞면 전부, 그리고 뒷면 전부에 백박으로 처리했어요. 디자이너한테 나중에 들어보니, 작업 시간은 꼬박 이틀, 비용은 170만원이었다고 하네요. 물론, 두 경우는 저희 책들 중에서 아주 특수한 사례이겠지만요, 그런 노력들이 눈 밝은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또 좀더 오래 그 책을, 출판사를 기억하게 하는 힘도 있었던 듯해요.”



작가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2020년은 봄날의책에게 특별한 해였다.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 출판인들이 꼽은 ‘올해의 책’이 되는 등 큰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홍은전 작가는 2016년 『노란들판의 꿈』을 봄날의책에서 출간한 바 있다. 

『노란 들판의 꿈』이 나오고 나서 홍 작가님을 만날 때마다 ‘작가님은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라고 물어보곤 했어요. 작가님은 그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자길 ‘작가’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쓰고 싶은 글 딱히 없다고 어색해 하고 민망해 하셨어요. 아마도 시인, 소설가 등, 뭔가 ‘작가들’을 다른 과(科), 다른 행성 사람들로 여기셨던 듯해요. 그리하여 ‘저자 홍은전’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접고, 사는 모습이 참 좋아서 열심히 차 마시고 수다 떨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쩌다 작가님이 신문에 글을 쓰게 되셨고, 어쩌다 5년이 지나 한 권의 책으로 묶일 만큼 글이 모여서 자연스레 『그냥, 사람』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편집자로서, 독자로서 참 반갑고 고마운 사람, 고마운 책이에요.”

박지홍 대표는 저자를 찾을 때, 일단 독자의 마음으로 저자들을 만난다. 계약서부터 준비하는 경우는 없다. 책으로 만났던 저자, 행사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저자들에게 정중하게 만남을 청하고 그들이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잘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인지를 찬찬히 살핀다. 『아네모네』를 쓴 성동혁 시인의 경우도 그렇다.

“성동혁 시인과는 인연이 오래됐어요. 6년 전쯤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열린 304낭독회에서 처음 뵈었어요. 낭독자로 나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글을 낭독하는데, 글도 좋았고 그날의 분위기 또한 너무 강렬했어요. 며칠 뒤, 독자로서 만나고 싶다고 청해서 만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몇 해 전 시집까지 내게 되었어요. 지나고 보니, 카페나 밥집 못지않게 서울대 어린이병원 병실에서도 자주 만났던 듯해요. 대개는 저자와 편집자, 그리고 가끔은 형과 동생의 관계, 그런 마음이었던 듯도 해요. 저는요.”

박지홍 대표는 우연히 마주친 글에 대한 처음 느낌을 신뢰하는 편이다. 거침없이 직진하는 글, 쿵 하고 마음에 충격을 주는 글,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잔잔한 글을 좋아한다. 그 글들은 대체로 정확하고 아름답다. 

“달리 표현한다면, 뜨겁거나 차갑거나 등 글에 온도가 있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등 글에 색깔이 있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등 글에 감정이 있거나 할 때입니다. 그런 글을 만나면, 주체할 수 없는 팬심이 솟아나, 만나기를 청하는 연락을 합니다. 그리고 잘 듣고, 잘 기억해 두었다, 그이한테 지금 가장 절실한 글, 또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이 무엇일지 찾아보고 제안합니다.”

박지홍 대표는 한 명의 작가를 오랫동안 탐색하는 편이다. ‘잘 팔릴 책인가?’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작가가 잘 쓸 수 있는 글인가?’를 더 깊이 고민한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긴장감을 주는 사람

편집자로 일하며 가장 기쁠 때는 독자들이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했던 책이 좋은 반응을 얻을 때다. 지난해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 예상보다 더 크게 사랑 받았을 때, 박지홍 대표는 조용히 안도하며 뜨겁게 기뻐했다. 코로나 시절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갖고 전국 곳곳의 독자들과 만났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크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좀 물러가면 꽃 피는 봄날에 서점 리스본, 옛따책방, 버찌책방, 전주의 책방들에서 은전 작가님을 모시고 그곳 독자들을 만날 계획이에요. 어느 도시를 가든 그곳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곳, 가장 자유롭게 책에 몰입할 수 있는 서점을 들르곤 하는데요.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차를 권하고 밥을 권하고, 도시의 보물 같은 곳들을 소개해주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분들이 전국의 서점에 머물고 계세요. 독자들이 주위의 동네 서점을 자주 들러주셨으면 좋겠어요. 그전보다 한 뼘쯤 지성도, 관계도, 삶도 넓어지고 깊어질 거라 장담해요.”

28년차 편집자로서 편집자 지망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출판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 특히 ‘권리’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는 일”이다. 그것이 일하는 사람,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 품위와도 통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교정, 교열의 전문성, 폭넓은 교양과 균형 잡힌 독서,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 등, 편집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차고 넘치지만, 누구도 줄 수 없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태도와 관점이 아닌가 싶어요. 하나의 방법으로 출판노조에 가입할 수도 있겠고요.”

좋은 편집자를 정의한다면 “늘 겸손하고 다정한 사람, 늘 의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다. ‘글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 저자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더불어 저자에게 긴장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편집자는 맨 처음의 독자이자, 가장 애정 넘치는 비판자이자 조력자라고 할 수 있어요. 나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되, 내 글의 장점과 한계를 나보다 더 잘 바라보고 짚어주는 사람이 좋은 편집자가 아닐까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환희 어크로스 편집자를 추모하면서, 제주대학교 이소영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쓰신 글이 딱 그에 어울리는 듯해요.”

저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을까. 박지홍 대표는 똑같은 말을 남겼다. 

“편집자가 저자를 대하듯, 아니 그 이상으로 편집자를 존중하고, 또 그이에게 긴장감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아, 편집자만이 아니라, 디자이너, 영업자 등 전문성을 갖춘 이들을 최선을 다해 존중해 주셨으면 하고요. 또 자신의 글이, 관점이 현재의 최선이되, 언제나 완벽하고, 늘 맞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겸손함을 갖추었으면 좋겠어요.”


박지홍 편집자가 작업한 책들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김연수, 오은 외 지음 | 봄날의책)

‘봄날의책’의 이후 출간 방향이랄까 지향을 뚜렷이 담은, 씨앗 같은 책이다. 앞으로 다루고 싶은 산문의 주제와 방향과 저자들에 대한 고민과 공부가 시작되기도 했다. 제주 ‘소리소문서점’의 서점지기들이 참 좋아하는, 그곳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일인용 책』 (신해욱 지음 | 봄날의책)

애정하는 시인의 산문집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이 통하여 뚝딱뚝딱, 신나서 한달음에 만든 책이다. 저자와 디자이너와 편집자 모두가 맘에 쏙 들어 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이 어떤 것인지 ‘발견’한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김현 지음 | 봄날의책)

함께한 책을 통해, 저자의 삶을 더 잘 알게 되고, 또 저자와 더 가까워지고, 그 과정에서 소중한 벗을 여럿 얻은 참 귀한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다. 또 시인의 나날이, 노동하는 생활인의 나날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김영옥, 이지은 외 지음 | 봄날의책 )

‘책’을 매개로 한 인연이 이어져, 새로운 책이 탄생한 경우. 『아픈 몸을 살다』에 추천사를 써주신 인연으로, 그리고 ‘옥희살롱’ 학생으로 살면서, 그이들의 고민과 문제의식에 공명하여, 고맙고 흔쾌한 마음으로 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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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성실하고도 성실한, 소설가 임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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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설가이자 산문가 임경선은 책을 여러 권 함께 작업한 편집자에게 “선생님, 정말 롱런하셨어요”라는 말을 듣고 ‘현타’가 왔다고 한다. 2002년 20대 후반에 첫 책을 냈으니 올해로 작가 생활 19년째. “내년에는 이 책 내야지” 하면서 1년 단위로 책을 내다보니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 것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캣우먼이라는 닉네임으로 연애와 회사 생활에 대해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똑똑하고 깐깐한 언니 캐릭터에서, 인간의 복잡한 감정들을 서정적이면서도 정확한 표현으로 잡아내는 소설가이자 산문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총 5권의 소설, 18권의 산문집(개정판 포함), 1권의 번역서가 19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좋게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평범한 결혼생활』이라는 제목의 25번째 책을 자신의 1인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원고 작업부터 책 제작, 유통까지 책 출간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착착 진행하고 있는 그를 창덕궁 근처에서 만났다. 


독립출판을 한 이유 

25번째 책을 결혼 생활이라는 주제로 독립출판으로 내셨어요. 

지난해 장편소설 끝내고 다음 책 뭐 할까, 네다섯 가지 주제로 계속 고민하다 불현듯 올해가 결혼 20주년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무슨 선물을 스스로에게 하지 하다가 ‘결혼에 대해서 정리하고 넘어가자’라는 마음이 확 들었어요. 무엇을 책으로 쓰자고 정할 때에는 기세가 필요하거든요. 그 기세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납득되어야 해요. 내가 느끼는 그대로의 진실을 정리해서 쓰는 것이 20주년을 기념하는 온전한 방법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걸 독립출판으로 내려고 생각한 이유는 너무나 사적인 얘기가 많아서 제가 완전하게 오너십을 가지고 싶었어요. 원고에 대한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듣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예전에 마틸다라는 출판사로 책을 내신 적이 있는데, 토스트라는 출판사를 새로 냈어요. 

5년 전에 마틸다라는 출판사로 『임경선의 도쿄』를 냈었죠. ‘마틸다’라는 이름이 살아 있어서 이번 책을 내도 되긴 했어요. 그런데 제가 출판사 이름을 정할 때 책벌레 소녀 마틸다로 생각하고 지었는데, 점점 영화의 마틸다로 인식되는 거예요. 그게 싫어서 새로 짓기로 했어요. 당시 보고 있던 책 표지에 바싹 잘 구운 토스트 그림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토스트가 어떨까’ 생각했어요. 토스트가 축배라는 뜻도 되고 발음도 예뻐서 검색해봤는데 쓸 수 있어서 바로 결정했어요. 길게 생각 안 했어요. 이 책 자체도 정말 충동적으로 지난해 12월부터 한 달 동안 쓴 거여서요.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4~5년에 한 번은 독립출판을 하는 의미가 업계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예요. 특히 유통이나 물류같이 저자들이 못 보는 백스테이지의 일들이 항상 궁금했거든요. 그걸 알려면 할 수밖에 없어요. 업데이트된 시장 상황도 알고 싶었어요. 거기에 맞춰 제가 글을 쓴다는 건 아니지만 호기심이 굉장히 있어요. 실제로 5년 동안 큰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번에 알게 되신 5년 동안의 변화가 궁금합니다

일단 책을 직접 내는 사람들이 ISBN을 따든, 없이 하든 굉장히 많아졌고, 그분들을 서포트하는 인프라가 많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특히 제가 5년 전에 가장 힘들어했던 것이 물류와 배본이었어요. 당시 한정판 2,000권을 집에 쌓아놓고 팔았거든요. 그런 어려움이 다 해결됐어요. 또 인터넷 서점 이외 다른 형태의 온라인 커머스도 많아졌고요.

저술업자 마인드로 봤을 때 출판계는 어떤 거 같아요?

이 바닥 어떻게 될 것인가, 작가들과 그런 얘기 하고 있어요.(웃음) 문학 쪽만 얘기하면 판매가 점점 줄어드는 게 피부로 느껴지거든 요.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누구의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를 오래 했는데, 실제로 판매 부수를 들어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숫자라는 걸 지표로 알 수 있잖아요. 그런 파이가 적어지면서 생기는 부작용들이 걱정돼요. 개별 책이 많이 팔리지 않으니까 출판사들이 제작 종수를 늘리고, 책이 가짓수가 많아져요. 점점 옥석 가리기가 힘들어지고, 때로는 뭔가 아수라장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회전율이 너무 빠르다 보니 진득하게 책의 가치를 음미하거나 얘기하는 게 어려워져요. 어떻게 하지? 이런 마음 있잖아요. 앞으로 이렇게 가는 건가, 이게 다인가? 그런 고민들을 해요. 

저는 항상 생각하는 게 기존에 책 읽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안 읽던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은 파이에 내 것을 욱여넣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저는 소설을 낼 때 기존 에세이 독자가 소설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소설을 읽어보고 괜찮네 하면서 다른 책도 읽는 것. 넷플릭스를 보다가 책도 볼 수 있는 거고요. 어차피 출판이 사양 산업이다,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든다를 기정 사실화하면서 패배주의적으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임경선의 결혼 생활

결혼 생활을 쓴다고 했을 때 남편의 반응이 궁금해요. 

쓰기 전에 얘기를 살짝 했던 거 같아요. 나 이거 쓸 거니까 다 쓴 다음에 읽어보라고요. 처음에는 알아서 하면 되지 뭘 읽냐 하더라고요. 그래도 당신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니까 읽어보라고 했어요. 원고 읽고 빼라고 얘기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깜짝 놀랐어요.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면 좀 그렇지 않을까 하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빼라고 한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결혼 생활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 다른 글을 쓸 때와 비교하면 어땠나요? 

제일 가까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것 때문에 알게 모르게 무게감이 있었던 거 같아요. 제가 편하고 자연스럽게 쓰긴 했지만 은연중에 신경이 쓰였던 것 같아요. 혹시나 내가 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같은 것. 그것은 즉시 부부싸움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런 가능성에 긴장하면서 썼어요. 남편에게 상처 줘서 부부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 심지어 이혼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진짜로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뻔한 글이 될까 봐 자가 검열을 한다는 내용이 책에 있습니다. 

제가 결혼 생활에 관한 글을 쓰면서 우려했던 점이 진부해질까 봐예요. 방송이나 대중매체에 나오는 잉꼬부부에 관한 흔한 레토릭이 있잖아요. 두 가지 부부 유형이 있는데 알콩달콩 잉꼬부부 혹은 아웅다웅하지만 우리는 사이가 좋아, 이런 건 너무 납작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부부는 어디까지나 남자와 여자이고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거고, 계속 둘 사이의 관계가 변하는 거죠. 어떤 순간 남남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서로 벽을 느끼고 차가워질 수도 있는 거고요. 두 사람이 계속 좋은 의미로 변해가지 않으면 서로 호흡을 맞출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려운 인간관계인 거죠. 서로 적당히 긴장하고 낯설었으면 좋겠어요. 이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네 하고 신선한 발견을 하거나 계속 좋은 의미로 낯설었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까지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가끔 얻어걸리듯이 설레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괜찮은데 그건 사실 어려운 이야기고, 무엇보다 좋은 의미로 낯설면서 서로에 대해 진심으로 호기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동지 같은 느낌은 분명히 있는 거 같아요. 전 양가 부모님 네 분을 다 보냈어요. 3년 사이에 상을 연달아 치렀거든 요. 그때 고생을 많이 해서 동지애가 더 생긴 거 같아요, 슬픔으로 더 깊어지는 관계.

슬픔으로 더 깊어지는 관계, 굉장히 공감 가는 말이에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갑상선암이 재발했거든요. 그때 아프지 않았으면 이혼했을지도 몰라요.(웃음) 제가 아플 때 보살펴주고 그러면서, 오히려 슬픔이 우리에게는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준 거 같아요.

이번 산문에도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이 독창적으로 표현된 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남자들이 농담처럼 얘기하는 “가족이랑 뭘 해?”처럼 부부간의 관계가 단순하게 표현되는 것이 저는 너무 별로예요. 일단 멋이 없어요. 요즘과 같은 장수 시대에 부부가 되면 얼마나 오랫동안 사는 거예요. 그사이 정말 많은 일이 있을 텐데요. 또 부부는 연애와 다르게 문 안에 닫혀 있는 영역이잖아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 이야기를 엿보지도 못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도 뭐하고, 그래서 표면적으로만 좋게 표현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안으로 곪는 것도 있고 불만도 있고 답답함도 있지만 겉으로는 함부로 얘기 못 하는 것들. 저는 결혼 생활에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도 세세하게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이 짧은 텍스트이긴 하지만 잘 전달된다면 좋겠고 독자들이 ‘아, 나도 그런 느낌 있는데’ 하면서 즐거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삶의 큰 배경화면을 이루는 거시적인 문제들, ‘가치의 우선순위’, ‘속물 정도’, ‘좋은 인간의 정의’, ‘정치 성향’”이라는 표현이 책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결혼 전에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거 같아요. 

서로의 조건을 견주어보면서 ‘이 정도면 결혼해도 되겠다’라고 매칭하는 결혼이 되어버리면 가치관 같은 것들이 많이 가려지기 쉬운 거 같아요. 그 사람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나 조건에 눈이 가 다 보면 본질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이 거론이 안 된 채로 결혼을 하 게 되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언젠가 표면에 올라올 수밖에 없거든요. 물론 세속적으로 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 사람이 분명 있거든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꼭 서로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혼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기술적인 조언이 있다면요? 

제가 글에 쓰기도 했는데 침대는 각각 쓰는 것이 안 좋은 거 같아요. 저는 싱글 침대 두 개를 붙여놨는데 편한 대신 조금 외로워요. 몸이 부딪치질 않잖아요. 편하게 잘 쓰긴 하지만 ‘부부는 한 침대에서 부대끼며 자는 게 맞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둘이 같이 외출할 때엔 무조건 손잡고 다니기. 저희 부부는 어딜 가서도 손잡고 있는데, 그게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또 서로의 몸을 만질 거리가 있는 것이 좋아요. 예를 들어 손톱을 깎아주거나 귀 청소를 해주거나 상대의 흰머리를 뽑아주거나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 같은 돌봄 있잖아요. 저는 그게 굉장한 애정인 거 같아요. 친구든, 제 아이든, 배우자든 몸 만져주는 것이 중요한 거 같아요.



산문가 임경선 그리고 소설가 임경선 

19년 동안 작가로 살아오는 과정에서 위기나 슬럼프는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지나고 나면 잊어버리는 걸 수도 있고요. 저는 요즘 사람들이 자의식 과잉인 거 같아요. 자기 자신을 너무 의식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많아요. 

왜 자의식 과잉인 거 같아요?

자의식 과잉은 말 그대로 ‘내가 나를 너무 많이 의식한다’잖아요. 사유가 깊어지는 건 좋은 일이겠지만, 생각이 얕은 지점에서 도돌이표처럼 오래 머물러 있으면 울적함이나 자기 연민으로 흐르 기 쉽고 그렇게 되면 손쉬운 ‘위로’를 찾아 헤매게 되죠. 경제나 환경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상처나 실패나 인간관계나 갈등을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기보다 ‘약한 나를 보호 하고 싶은’ 마음이겠죠. 스스로를 약하다고 단정 지으면 불행히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자의식의 꼬리를 단호하게 끊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걸 시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연대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 이전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도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그동안 다섯 권의 소설을 내셨어요. 소설을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 혹은 결심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등단 제도를 거치지 않고 한국 기성 출판사에서 소설을 내기는 무척 힘들어요. 우여곡절 끝에 2011년 첫 소설집 『어떤 날 그녀들이』를 낼 수 있었어요. 실용서에 가까운 에세이를 다섯 권이나 낸 다음이니 저로서는 큰 변화와 도전이었죠. 다행히 첫 소설집이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서 다음 소설을 낼 기회가 어떻게든 생기겠다 생각했고, 또 한편으로는 첫 소설을 낸 다음에 『엄마와 연애할 때』를 쓰면서 제가 기존에 쓴 에세이들과 다른 결의 글을 쓸 수 있게 됐다는 확실한 감촉을 느꼈어요. 저는 그것이 소설을 써본 경험 때문이라는 걸 체감했는데 새로운 방식으로 글을 쓰면 감각이 새로 확 열리는 것 같아요. 그 이후로 가급적이면 다양한 글 근육을 키우는 것이 두루 좋겠구나 싶어 힘닿는 데까지 나만이 쓸 수 있는 소설도 계속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이제는 에세이를 쓰고 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쓰고 싶어지고, 소설을 쓰고 나면 자연스럽게 에세이가 쓰고 싶어지는 나름의 정반합 회로가 몸에 장착된 것 같아요. 『평범한 결혼생활』 다음에도 단편소설집을 준비하려고 해요.

첫 소설 『어떤 날 그녀들이』를 쓰게 된 계기가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에서 유희열 씨가 새해 계획을 물었을 때, “소설에 도전해볼까”라고 대답해서라고 알고 있습니다.(웃음) 

맞아요. 계획적으로 쓴 건 아니었어요.(웃음)

내뱉은 말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첫 소설을 냈다는 것이 대단한 거 같아요. 

네, 저는 시작을 하면 어쨌든 매듭을 지으니까요. 글을 쓰고 발표하지 않거나 세이브 원고, 이런 게 없어요. 그냥 하는 거예요. 이건 직장 생활 12년 하면서 훈련이 됐어요. 내가 책임지고 시작한 일은 결과를 본다. 그건 성실한 직장인의 자세에서 온 거예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지를 주거나 여유를 주었으면 오히려 망했을 거 같아요. 중요한 것은 끝내는 거예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맺음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아쉬운 부분은 다음번에 하면 되는 거죠. 

에세이를 쓰는 임경선과 소설을 쓰는 임경선. 어떻게 다른가요? 

에세이를 쓰는 저는 주로 분명하고 유쾌하고 꼬장꼬장한 사람이고요, 소설을 쓰는 저는 속수무책으로 감정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마치 한창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심장이 부들부들 시큰시큰 한 상태로 변해요. 그런 마음을 다독이면서 쓰려고 하니까 정작 문체는 담담하고 서늘하게 되지만요. 다만 ‘가족’과 관련된 에세이를 쓸 때는 평균치보다 훨씬 더 감상적이 되는 것 같아요. 『다정한 구원』, 『엄마와 연애할 때』 그리고 『평범한 결혼생활』이 그랬죠.

아무래도 임경선을 소설가보다는 산문가로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에세이가 소설보다 더 많이 읽혀서일까요? 

판매 부분에서 에세이가 더 많은 독자에게 읽힌 것처럼 보이는 건 『태도에 관하여』가 오랜 기간 스테디셀러여서 그렇게 보이는 착시효과가 큰 것 같아요. 다섯 권의 소설도 다른 에세이들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판매된 것도 있어요. 공교롭게 에세이는 그러지 못했지만 소설은 다섯 권 모두 베스트셀러 매대에 올랐고요.(웃음) 참 아이러니하죠. 첫 단추나 선입견이라는 게 그만큼 무섭습니다.



그동안 쓰신 소설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소설은 무엇인가요? 

마음이 가기보다 마음이 쓰이는 소설은 아무래도 막내 격인 장편 소설 『가만히 부르는 이름』일 거예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특히 남자 주인공 ‘한솔’이 온 마음을 다해 애쓰는 마음이 안쓰럽고 아름다워서 오래 품어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엔 소설집 『곁에 남아 있는 사람』에 수록된 단편소설 「치앙마이」의 여자 주인공 ‘희진’에게 마음이 많이 갑니다.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끝까지 가버리는 사람들의 무모한 용기를 동경해서 인가 봐요. 저는 작품 자체보다 특정 등장인물에 마음이 더 가고, 그러면 그 소설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문학상 등을 받으며 문학계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친 적이 있어요. 지금은 그 마음에서 자유로워지셨나요? 

이제는 ‘문학계’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인정받는’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말을 과거에 했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다음 소설을 낼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기존의 권위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지금은 관행이나 시스템상 제가 문학상을 받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그래서 지금의 저에게 중요한 건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가 쓰고 싶은 소설을 잘 써낼 수 있을 것. 둘째, 제가 이해받고 싶은 방식으로 제 소설이 독자에게 이해받는 것. 셋째, 평소 소설을 잘 읽지 않던 독자들에게 가닿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욕심을 부리자면 제가 흠모하는 작가들이 제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것. 보편적인 명예도 좋지만 내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사랑받고 응원받는 편이 더 장기적인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명예니 인정이니 인기니 다 떠나서, 작가는 어떤 위치에 놓여 있든 누구나 결국 외톨이로 남게 되겠죠. 그래야 글을 쓸 수 있는 거니까. 그것만큼은 참 공평한 것 같아요. 

자기가 원하는 걸 편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원하는 걸 편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것은, 그렇게 하면 자신이 뭔가를 잃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건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 나를 잃는 법입니다. 다만 잃게 될 그것보다 내가 지금 원하는 그것이 더 간절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예요. 모든 열쇠는 결국 자신이 쥐고 있어요. 마음의 소리에 정직하게 귀 기울인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겠지요. 인생은 유한하고 젊음은 매우 짧습니다. 원하는 것을 밖으로 말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임경선

글쓰는 여자.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거쳐 13년째 전업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일과 사랑, 인간관계와 삶의 태도에 대해 쓰는 것을 좋아한다.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인생 상담을 하기도 했다. 

소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나의 남자』, 『기억해줘』, 『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공저), 『다정한 구원』, 『태도에 관하여』, 『자유로울 것』, 『나라는 여자』, 『엄마와 연애할 때』,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하는 여성에게 들려주는 『월요일의 그녀에게』, 그리고 여행서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독립출판물 『임경선의 도쿄』를 비롯해서 다수의 책을 냈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임경선의 개인주의 인생상담’ 시즌2를 진행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kyoungsun_lim



평범한 결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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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강민영 “재난을 해결하는 두 여성을 떠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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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얼어붙었던 겨울, 얼른 봄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소설은 가만히 온기를 불어넣는다. 강민영 작가의 첫 소설 『부디, 얼지 않게끔』은 선의를 지닌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재난을 헤쳐나가는 이야기다. 주인공 ‘인경’은 하루아침에 ‘변온 인간’이 되지만, 그의 곁에는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직장 동료 ‘희진’이 있다. 소설을 쓰며, 작가는 2019년 세상을 떠났던 두 여성의 소식을 떠올렸다. 슬픔을 딛고 자라나 소설은 마침내 말을 건넨다. “우리 무사히 살아남아 안전한 봄으로 가자.”

소설가 강민영은 ‘제3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첫 소설 『부디, 얼지 않게끔』을 출간했다. ‘변온인간’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두 여성이 재난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담았다. 현재, 영화매거진 『cast』의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팟캐스트 <월간 자영업자>로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봄의 따뜻함을 닮은 소설

온기가 필요한 시기에 맞춰 소설이 나온 것 같아요.

다행이에요. 일부러 계절감을 맞추려고 지난겨울에 출간했어요. 오늘은 햇빛이 따뜻한 게 조금씩 봄이 오는 것 같네요.

유례없는 전염병 때문에, 겨울이 유독 길었죠. 그래서인지 소설의 주인공에게 닥친 재난이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글 쓸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출간하고 나니 정말 그랬어요. 주변에서도 시의성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물론 소설은 주인공 ‘인경’에게만 닥친 재난이긴 하지만요.

주인공 ‘인경’은 갑자기 자신이 ‘변온인간’이 됐다는 걸 알게 되죠. 아주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가도 체온이 안 변하는데, 추위는 못 견뎌요. 특이한 설정이에요. 

소설에서 한 사람의 상황이 변하는데 그게 비현실적인 이유였으면 했어요. 사실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평소에도 날씨가 너무 추우면 겨울잠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설정은 SF적인데, 전개는 현실적이더라고요. 특히 회사 생활을 묘사한 장면에서는 제 일상을 보는 것 같았어요.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메신저로 대화하고.(웃음)

얼마 전까지 회사 생활을 해서인지 실제 경험이 많이 반영되더라고요. 아직도 사내 메신저로 이상한 이모티콘 많이 쓰나요?(웃음) 조용한 사무실에서 메신저로 옆자리 친구에게 “오늘 팀장님 왜 그러냐” 하고. 다들 똑같은 것 같아요.

뜻밖에도 일상생활이 힘들어진 ‘인경’을 돕는 게 직장 동료 ‘희진’이잖아요. 처음에는 친하지 않았는데, 인경이 변온인간임을 알게 되면서 급격히 가까워져요. 원래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어떻게 서로를 도울 수 있지 싶더라고요.

전혀 안 맞을 것 같던 사람이라도, 어떤 일을 계기로 친해지거나 같이 행동하게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 신기한 상황이 일상에서 가끔 일어나죠. 인경과 희진은 정반대의 성향이잖아요. 인경은 겨울이 힘든데, 희진은 더운 걸 싫어하니까요. 그런데도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같은 뱡항을 보게 된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예요.



누구도 다치지 않는 세상

‘작가의 말’에서 2019년 세상을 떠난 두 여성의 소식이 이 소설에 영향을 줬다고 고백했어요. 그들을 사랑한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한 사건이었죠. 소설의 두 여성 인물을 보면서도 애틋한 마음이 들었어요.

한창 소설을 쓰고 있을 때, 사건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죠. 한동안 정말 슬프고 우울했어요. 마침 제 소설이 여자 주인공 두 명이 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누구든 다치거나 죽는 사람 없이 안전한 곳에 도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두 사람이 실제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지만, 깊은 유대감을 나눴을 거라 상상하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소설 속 인경과 희진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요. 눈앞에 닥친 재난을 해결할 방법을 찾으면서요.

원래 재난 영화를 즐겨 봐요. 그중에서도 원인을 찾기보다, 닥친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습해나가는 영화를 좋아해요. 저도 성격이 좀 그래요. 원인을 파고들기보다 앞으로 조심해야지, 잘 살아 있자 하거든요. 

인경과 희진 모두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 온도’랑 안 맞는 인물이잖아요. 회사 내에서의 소문, 미움 같은 것들에 한걸음 떨어져 있고, 굳이 분위기를 과하게 맞추지도 않고.

사실 제가 그래요.(웃음) 회사 생활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해 안 되는 일이 생기잖아요. 문제를 제기하면, 좋게 넘어가면 되는데 굳이 나서지 말라고 하죠. 그런데 저만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다들 속으로 ‘원래 그런 게 어딨어’ 생각하죠. 그런 사람들끼리 친해지는 거고요.

둘의 우정이 사계절을 거치면서 깊어지죠. 계절감이 느껴지는 게 참 좋더라고요. 여름날의 제주도나, 더위를 잊기 위해 한강에서 마시는 맥주. 누구나 공감할 것 같아요.

여름을 참 좋아해요. 특히 야외 운동을 시작하고부터 날씨에 민감해졌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날씨 어플 켜서 바람 방향부터 확인하거든요. 한강 따라 자전거도 타고, 그러다 보니 겨울보다는 여름을 즐기게 됐고요. 자전거 타는 게 취미인데, 소설 속 인경에게 적합한 운동을 생각하다 보니 달리기가 떠올라서, 퇴근 후 달리는 장면을 넣었어요. 

계절을 따라가다 보니 소설이 순식간에 읽히더라고요. 출퇴근길, 점심시간 언제든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어요.

잘 읽히도록 신경을 많이 썼어요. 소설을 오랫동안 안 읽은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문장을 많이 다듬었고요. 최근 한국소설도 단편이나 경장편소설이 인기가 많잖아요. 아무래도 최근 독자들이 짧은 호흡을 선호해서인 것 같아요. 저 역시 영화 러닝타임 정도의 시간에 집중해서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호흡으로 쓰려고 해요. 

잘 읽히는 이유 중 하나가 대상 독자가 넓어서인 것 같아요. 사전 지식이 없어도 주인공의 일상에 손쉽게 들어갈 수 있더라고요. 

타깃 독자를 의식하진 않았지만,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해요. 특히 10~20대 젊은 독자들이요. 어렸을 때 소설을 좋아했는데, 돌이켜보면 거의 40대 이상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더라고요. 나이가 어릴 때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쉽게 찾아 읽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 소설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고요.



좋아하는 일은 끝까지 해요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죠. 첫 소설이라 각별할 것 같아요.

사실 원래 분량은 단편이었어요. 신춘문예를 목표로 했는데, 쓰다 보니 경장편 분량이 됐어요. 당시 다른 공모전에도 짧은 소설을 투고했기 때문에,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서 심호흡을 했어요. 강아지랑 산책하고 있었는데, 몇 시간을 집에 못 들어갈 정도로요. 될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추천사를 쓴 강화길 소설가와의 인연도 있다고요.

제가 편집자로 일할 때, 작가님의 단행본 『서우』 작업을 맡았어요. 그걸 계기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이 소설을 쓰기 직전에 강화길 작가님의 소설 창작 수업을 듣기도 했거든요. 추천사를 부탁할 때, 맨 처음 떠오른 사람도 작가님이었죠. 

소설 발표 전에도, 영화 매거진을 만들고 영화평론도 쓰고 ‘부캐’가 굉장히 많네요.

그렇죠.(웃음) 잡지는 2007년부터 만들었으니 꽤 오래됐네요. 20대 초반에 종이에 스테이플러 찍어서 신나게 배포했던 게 기억나요. 다행히 폐간하지 않고 『cast』라는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어요. 그에 비하면 소설 쓰기는 최근에 시작한 거죠. 



팟캐스트 <월간 자영업자>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해내세요? 한번 시작하면 오래 끌고 가는 것 같아요.

좋아하니까 오래 할 수 있어요. 시작할 때, 언제까지 해야지 정해 놓고 하면 오히려 잘 안되는 것 같고요. 즐겁게 시작한 일이 이제는 습관이 됐어요. 조금이라도 열의가 있으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주도하게 되더라고요. 바쁘긴 하지만 잠도 충분히 자고,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차기작도 쓰는 중이고요.

벌써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데요?

한창 작업 중일 때도, 새로운 이야기가 떠올라서 다음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웃음) 다음 소설도 재난 이야기예요. 재난의 스케일이 더 커지고, 이번에도 여성 인물이 주인공이죠. 소설 쓰는 건 늘 즐거워서 계속 지금처럼 써나갈 것 같아요.



*강민영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제3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영화매거진 『cast』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부디, 얼지 않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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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저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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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김신지, 반짝반짝한 일상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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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도 반짝반짝 보낼 순 없을까? 바쁜 하루를 보내고 문득 마음이 허해질 때,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는 언제나 위로가 됐다. 출근길에 마주친 강아지, 누군가의 집 앞에 놓인 화분, 계절마다 바뀌어 가는 창밖 풍경… 사소한 순간들이 그의 글에서만큼은 유독 빛나며 “여기 있어요” 외치는 듯했다. ‘행복의 ㅎ을 모으는 사람’인 그를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바쁜 일상에서도 행복을 발견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거냐고.



김신지 작가가 내놓은 답은 바로 ‘기록’이다. 그는 원래 덜 쓴 노트들을 쌓아 두는 ‘미루기 대장’이었지만, 사랑하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꾸준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됐다. 기록을 시작하자 늘 똑같은 일상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보였다. 그 기억들을 수집해 글로 쓴 것이 에세이집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평일도 인생이니까』다. 그리고 이제는 실전 편!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는 김신지의 에세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보여주는 비하인드 스토리이자, 독자들에게 일상의 기록을 제안하는 다정한 연습장이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는 ‘읽고 쓰는’ 책이다. 김신지 작가가 추천하는 기록의 방식을 통해 쓰고 싶은 마음을 예열한 후, ‘기록 연습’이라는 줄 노트에 직접 글을 쓰도록 구성됐다. “저도 기록하다가 그만둔 노트가 정말 많아요. 습관을 강조하는 책을 읽어도, 막상 안 따라 하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읽는 사람에게 쓰고 싶다는 마음을 불어넣고, 펜을 들게 할까 편집자님과 고민한 끝에 이런 구성을 택했어요. 독자분들이 낙서도 하면서 자유롭게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김신지표 기록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싶을 정도로 다채롭다. 창밖의 풍경을 SNS 부계정에 올려 계절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보고, 친구랑 크게 웃었던 농담을 수집하고, 영감이 떠오르면 즉시 온라인 메모 툴에 적는다. 즐거우니까 시작한 기록은 작가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줬을까? 

“확실히 일상을 더 소중히 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여행이 큰 낙이었거든요.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요. 어느 순간, 왜 나는 하루를 여행처럼 소중히 대하지 않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일상에서 인상 깊었던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기록은 결과물로 쌓이면 재밌어지거든요. 적을 땐 사소한 거 같은데, 나중에 돌아보면 와, 이런 순간들도 있었구나 해요. 그걸 경험하면서 쓰는 게 더 즐거워졌어요.”



내 삶을 돌아보는 기록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는 고향집에 내려가 할머니와 사진을 찍고, 가족의 삶을 인터뷰하며 함께하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려고 노력한다. 특히 엄마의 손 편지는 작가에게 오늘 하루 더 살아갈 힘을 준다. “엄마는 늘 보살 같은 말씀을 하세요. 일 때문에 힘들어하면 ‘스트레스 그거 안 받을라믄 안 받제’ 하시고.(웃음) 큰 택배 꾸러미를 보내실 때, 다정한 쪽지를 꼭 넣으시고요. 그 말 덕분에 저도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 같아요.”

평일을 행복한 순간으로 채우기 위해, 김신지 작가는 잠들기 전 기록을 잊지 않는다. 오늘 보았던 하늘의 아름다움을 다음 해에도 기억하고, 소중한 사람을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서. 물론,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오늘의 순간들도 금방 사라질 거라는 슬픈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 뒤에 작은 희망의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기록해두기만 한다면요.” 



*김신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일상에 밑줄을 긋는 마음으로 자주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적는다. 10년 동안 잡지 에디터로 <PAPER>, <AROUND>, <대학내일> 등에 글을 썼고 현재는 트렌드 당일 배송 미디어 캐릿(Careet)을 운영하고 있다. 출근한 자아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Z세대 트렌드를 탐구하고, 퇴근한 자아는 느리게 흐르는 세상에서 주로 맥주를 마시며 에세이를 쓴다. 일상을 사랑하기 위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기록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지에서 마시는 모닝 맥주. 『평일도 인생이니까』,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오늘의 할 일력』 등을 펴냈다. 

최선을 덜 하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 이 정도면 됐지, 그럴 수 있어.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런 말을 해 주려 노력한다. 너무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좋아하는 게 취미다. 오늘을 잘 기억하면, 내일을 기대하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으로 순간을 모은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로 오늘만 사는 ‘맥덕’이 되기로 다짐했다. 언젠가 바닷가 근처 작은 숙소의 주인이 되는 게 꿈.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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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 저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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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으로 아직 건너오지 않았을 2019년 겨울, 유선애 기자는 ‘자기 삶의 단독자로 선’ 1990년대생 10명의 여성을 만났다. 같은 해 몸을 담고 있는 패션지에서 ‘3.8 세계 여성의날’ 특집으로 기획했던 ‘90년생 여자사람’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었고, 인터뷰집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평균 연령 28.4세, 각자의 방식으로 커리어를 일구며 자기 삶의 단독자로 살아가는 1990년대생 여성들(예지, 김초엽, 황소윤, 재재, 정다운, 이주영, 김원경, 박서희, 이길보라, 이슬아)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젠더, 세대론에 관한 질문을 흔쾌히 받아준 이들 덕분에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이 탄생했다. 




무너진 채로 오래 두지 않는 사람들

“진짜 힙한 책, 그냥 이 책이 밀레니얼이고 미래”라는 리뷰를 읽었어요.

종종 독자분들의 리뷰를 찾아 읽곤 하는데요. 벅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무 감사해요. 힘을 얻었다는 말씀을 많이 듣는데, 사실 저도 책을 출간하고 나서 엄청 힘을 얻었어요. 한 아버지가 딸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와, 멋진 아빠시다’ 생각했어요. (웃음)

이 책의 시작이 <마리끌레르>의 피처 에디터로 쓴 ‘90년생 여자사람’ 인터뷰였잖아요. 당시 독자들의 피드백이 많았다고요. 

그 기사는 일회성 특집 기사였는데요. ‘대한민국에서 젊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33명의 인터뷰이들이 용감하고 솔직한 생각들을 표현해주셨거든요. 인터뷰이와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감들을 보면서, 20,30대 독자들이 이런 방향의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덕분에 1990년대생 여성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기를, 어떤 변화를 바라는지 가까이 볼 수 있었죠.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에 실린 10명의 여성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셨나요?

제가 2019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만났던, 그 당시 제가 좋아하고, 또 동시대 여성들에게 사랑과 지지를 받는 인물들로 추렸어요. 그 가운데 직업군을 달리하고자 했고요. 제가 현업 안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양하다 보니 출판사에서는 저의 인물 제안에 너그럽게 동의해주셨어요. 

주제가 있는 인터뷰였잖아요. 개인의 창작물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닌, 세대론에 관한 인터뷰라서 고심했던 인터뷰이도 있을 것 같아요.

섭외할 때부터 주제에 관해 명료하게 말씀드렸어요. 제안서를 쓰듯이 기획의도를 정확하게 밝혔고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20대 여성의 생각에 관한 질문을 드릴 것이고,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는 인터뷰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어요. 평소 자신이 갖고 있었던 생각이나 시선,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여쭐 거라고도 설명했고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질문이 있었나요?

중요한 질문보다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비관으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어요.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 하다 보면 아무래도 우리가 스스로를 피해자화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데서 머무르는 게 아니라 한 계단 더 도약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혐오하는 것 역시 주의하려 했고요. 다행히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 10명의 인물들은 모두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때때로 비관하기도 하지만 끝내 낙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누구와 인터뷰를 해도 그 끝은 애써서 얻게 된 낙관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노력하는 낙관에 대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흐를 때, 저는 그 대답과 연관된 질문을 몇 가지 더 해 이야기를 키워갔고요. 낙관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독자들에게 더 전달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아요. 

‘내일’을 말하는 인터뷰집이라 더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보통의 인터뷰가 주로 과거의 업적, 현재의 성공에 초점을 둔다면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이 우리와 다르고 또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이 분들은 비교적 자신의 재능을 빠르게 발견했고, 최선을 다해 그 재능을 연마해온 사람들이긴 한데요. 이들 역시 시행착오를 거쳤고, 거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인터뷰 중 김원경 선수가 “지금 제가 기분이 좋은 상태라 그런데요. 안 좋을 때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죠. 무너질 때는 그냥 무너져요. 어떻게 강하게만 살 수 있겠어요. 그럼 로봇이지”라는 말을 했거든요. 이들 역시 저와의 인터뷰 자리에서는 분명하고 선명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지만 일상에서 때때로 방황하고, 좌절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사람들이에요. 다만 이 사람들은 무너지지만 자신을 무너진 채로 오래 두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제가 이들로부터 배웠듯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도 그 회복의 힘을 함께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는 사람들

특별히 담고 싶었던 이야기, 또는 인터뷰이들의 태도와 말은 무엇이었나요?

타인과의 연결, 이해에 대한 이야기가 소중하게 다가왔어요. 뮤지션 황소윤 님이 했던 “고여있지 않기 위해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 세상과 좀 더 호흡하려는 노력은 꾸준해야 한다고요”라는 말, 다큐멘터리를 찍는 정다운 감독님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 같아요”, 이슬아 작가님의 한 “용기가 있으려면 너무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등 10명의 인터뷰이 모두 대화 중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이해로 주제가 옮겨지더라고요. 나에 대한 질문을 자주 던지고,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사는 일이 자칫 자기만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오히려 이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 자신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타인을 유심히 바라보고 연결되길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뷰이의 어떤 말은 굉장히 오래 기억되기도 해요. 

특별히 기억하고 싶던 인터뷰이의 대답들은 책 안에서 발문 처리를 하거나 밑줄을 그었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새롭게 밑줄을 긋고 싶은 부분들이 생기더라고요. 가령 프로듀서 예지 님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성공한 뮤지션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냐고 물었던 질문에 “내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고, 이를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는 상태.” 같은 대답. 김초엽 작가님의 “유토피아가 완성형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유토피아로 바꿔가려는 개인들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과정적인 측면에서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등 다시 읽다 보니 새롭게 마음에 들어오는 말들이 계속해서 생기고 있어요. 여기 열 분의 대답들이 다 좋아서 아마 독자분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계실 것 같아요.

12년간 피처 에디터로 일하며 다양한 직군, 연령대의 사람들을 인터뷰하셨을 텐데요. 1990년대생에서 특별히 느껴지는 특징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만난 1990대생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는 사람들 같아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보다 구체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단독자로 살아갈 것인가 또는 어떤 순간에 어떤 이들과 연결될 것인가 등등,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거죠. 질문이 거듭되고 자신에 대한 답이 쌓여갈수록 자신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풍부해지는 것 같아요. 이들을 보면서 자신에 대한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삶을 대하는 자신감, 주변 목소리와 시선을 필터링할 줄 아는 능력, 스스로를 치유하는 회복력 같은 것이 생기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를 꼭 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강경화 전 장관은 언젠가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마음 속으로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표현하는 단 한 장의 사진이 있어요. 남성 중진들 가운데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심지어 아주 멋진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웃음) 그 때의 턱의 각도와 시선 처리, 팔 동작 등 그 사진 한 장이 그 사람을 다 이야기해주고 있는 듯 해요. 그 사진으로부터 그 분과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요.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뾰족하게 기획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이 기사를 어떤 누가 보게 될 것인지 상정하고, 특정 독자를 상상하며 기사를 완성해갑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기사 하나를 완성하며 크건 작건 누구의 마음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에요. 아무래도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적어도 누군가 크게 만족하지는 못해도 크게 실망하는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해요. 그러려면 세심한 동시에 무척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전히 너무 어렵고, 매번 실패하는 것 같아요. 

피처 에디터, 인터뷰어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망생들이 기자님께 조언을 구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세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요. 조금 소심한 편이라면 인터뷰어가 되기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인터뷰어의 자질과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쉽게 판단하거나 단정짓고 싶지 않은 주저함을 가진 사람들이 인터뷰어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더 묻고, 더 들어보려고 하는 것. 인터뷰이에게 돌발 상황 같은 것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신뢰를 주는 것, 인터뷰이보다 더 많은 말을 하거나 자아를 세우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요.


 

각별히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대상이 있을까요?

사실 저는 이 책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20, 30대 여성들에게 많이 읽히고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요. 이슬아 작가님이 이 책이 10대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작가님의 말에 따르면 본인이 10대, 20대 초반까지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그 가능성을 가까이서 보거나 배우지 못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건 1980년대생인 저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이토록 다양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10대분들이 일찍이 알게 된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아요. 



*유선애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에서 문학과 언론학을 공부하고 12년 동안 피처 에디터로 일해왔다. 현재 패션매거진 〈마리끌레르 코리아〉에 몸담고 있다. 매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그냥 나라면 결코 대면할 수 없을 사람들을 만나왔다.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익힌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잘 쓰고 싶다.
인스타그램 @seonae_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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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작가, 영화감독, 배우 염문경 “나에게 농담은 안전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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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 펭TV>를 기획한 작가이자, 영화 <백야>, <현피> 등을 만든 영화감독, 다양한 연극과 영화에서 연기한 배우 염문경. ‘다목적 프리랜서 배우’라는 수식을 명함에 넣고, 만약 책을 쓴다면 소설을 써서 자비출판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던 왕성한 창작자인 그가 올해 『내향형 인간의 농담』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하며 에세이스트라는 새로운 수식을 추가했다. ‘오랫동안 공들여온 일보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 더 강력하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목도’한 프리랜서의 고민, 세상의 무례를 농담으로 거리두기 하는 삶의 노하우, 연극계에 만연했던 성폭력의 경험 등을 솔직하게 내놓은 염문경은 이 이야기가 “창작하는 사람들, 사회에 막 발을 내딛어 부딪히고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은 글”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배우 정체성을 가진 창작자로서 자신만의 시선을 찾아가는 그의 태도에서 나를 더 잘 알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목격한다.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은 창작자로서도 배우로서도 그가 가장 바라는 소망이다. 



제가 가지고 싶은 태도는

가제가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이었다고요. 그 제목에 담으려던 이야기, 그리고 결국에는 제목을 바꾸어야 했던 이유가 궁금했어요. 

2019년에 ‘헤이조이스’라는 곳에서 <자이언트 펭TV>와 관련해 대담 같은 걸 한 적이 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제가 그때 “어쨌든 이건 예능이고, 농담을 만들어내는 일인데 최대한 아무도 불편하지 않는 농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느라 등골이 빠진다”(웃음)는 이야기를 했대요. 책 제안을 주신 편집자님께서 그 말이 인상 깊으셨는지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이라는 주제에 맞춰 책을 써보자고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글을 하나씩 쓰기 시작했는데요. 제 이야기밖에 솔직하게 쓸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생각보다 분노했거나 좌절했던 일들이 많이 쓰여서 고민을 많이 했죠. 편집자님이 다시 주신 제목 중 ‘무례한 세상에 친절한 선긋기’도 있었는데요. 선을 긋는다는 게 저의 태도와 연결이 되면서도 좀 냉정하게 느껴질 것 같았고요. 결국 ‘내향형’이라는 좀 더 공감할 만한 키워드로 결정이 되었어요. 결국 제가 빨리 말을 못하고 내향적으로 계속 고민해서 생긴 일이에요.(웃음) 

작가님은 책 제안을 받고 난 뒤에야 내가 무슨 책을 쓸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건가요? 그 전에 책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크지 않았고요? 

언젠가 책을 쓰면 좋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했고,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어요. 감사하게도 제안이 빨리 온 것 역시 ‘펭수’ 덕분이라는 생각도 당연히 있었고요. 그럼에도 출판사에서는 단지 펭수의 성공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제가 해온 이야기도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덕분에 용기를 얻어서 썼죠.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농담은 말씀하신 대로 <자이언트 펭TV>의 지향점이기도 한데요. 실은 무척 어려운 부분이에요. 

일단 말씀드려야 할 것은 <EBS>라는 채널의 특성일 거예요. 이 채널을 보는 시청자의 잣대가 다른 곳에 비해 좀 빡빡해요. 공중파, 종편에서 흔히 다뤄지는 소재나 발언도 <EBS>에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죠. 그런 보수적인 면에서의 안전성을 추구해야 하고요. 한편 <자이언트 펭TV>는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사용했잖아요. 여러 가치들이 난무하는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어요. 어떤 의견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죠. 그런데 매번 완벽하지는 못해요. 저희가 아무리 괜찮겠다고 생각해도 누군가는 별로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게스트 선정이 그렇고요. 편집 단계에서도 재미있었지만 애꿎은 사람이 불쾌할 수 있으면 고민을 많이 해요. 예를 들어, 펭수가 화를 잘 내잖아요. 어떤 점에서는 그냥 재미있게 넘어갈 수 있지만 너무 공격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을 덜어내는 식으로 애를 쓰고 있어요. 

지금은 시청자도 인권 감수성 측면에서 많이 민감하게 바라보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잖아요. 그럴수록 더 많이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해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죠. 물론 저희가 실수를 할 때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 농담이라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해’ 라고 생각하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해서 자기 색깔이 강해지는 창작자도 있을 텐데요. 저는 그러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싶은 태도는 이것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상황마저 다 인정한 뒤에 그래도 하려는 이야기를 최대한 녹여내는 방식이에요. 그런 것을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원하는 작업들을 선택하자

책에는 일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어요. 그 중, 지금까지는 관심이 가는 대로 작업을 해왔다면 이제는 “내가 선택하는 작품과 행보가 하나의 결을 만들고, 그것이 모여 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것”(43쪽)을 안다고 적은 부분이 눈에 띄었어요. 

책을 쓴 작가님들이 흔히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말하잖아요. 그걸 실감했어요. 여기에 쓴 글은 애초에 직업인으로서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기에 쓴 글들인데요. 쓰면서 정리되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지금까지 제가 해온 작업을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게 싫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죠. 그런데 글을 쓰고, 이후 여러 작업을 제안 받는데 결국 제가 선택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누가 보기에는 좀 불완전할 수 있는 소재, 여성의 이야기들, 첨예한 이야기더라고요. 그러면서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이 그렇고, 내가 앞으로도 아직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구나 깨달았어요. 

내 정체성으로 내가 욕먹는 것까진 괜찮다. 하지만 공영방송으로서 안전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에 불이익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중략) 프리랜서로 다른 작업들을 선택할 때, 내가 속한 팀의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지를 고려해야 하는 걸까. 별 생각 없이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바쁘게 지내다가도 가끔씩 그게 헷갈렸다.(41쪽)

앞으로 일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어요. 일을 선택할 때의 기준이 생겼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배우로서 하는 작업들은 작품의 지향이나 정체성, 작품이 가지는 태도 등을 다 고려해 선택하기가 쉽지 않아요. 일단 내가 맡을 배역이 재미있는지, 내가 할 만한 배역인지를 고민하는 데 더 집중하게 되죠. 그건 소위 말하는 큰 배우가 되더라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주변에 너무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배우 언니들을 봐도 결국 비슷한 고민을 하거든요. 특히 여자 배우에게 오는 배역의 제한성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뭔가 포기하더라도 조금씩 내가 원하는 작업들을 선택하자, 생각해요. 제작사와의 인맥, 포트폴리오 같은 것이 욕심 나더라도 나와 맞지 않는 작업은 결국 내 프로필에서 지우고 싶어질 거라는 생각을 옛날보다 더 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작가로서는 그런 생각이 훨씬 크죠. 작업하는 동안 충실하게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업 위주로 선택하자는 생각을 해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서 있는 자리가 불안정해서 고민하게 될 때도 있지 않나요? 

누구나 경제적인, 또 심리적인 면을 고려하게 되죠. 그걸 고려해서 설령 나를 조금 죽이는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나를 잘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일을 끝마쳐야 하잖아요. 작업 기간, 힘든 사람을 만나는 횟수 등을 잘 고려해서 내가 견딜 수 있는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누군가는 경험 있는 사람이 잘 끌어주기를 바랄 수 있잖아요. 반면에 그게 힘든 사람도 있고요.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스스로 잘 물어보고 판단해서 결정을 하는 게 중요할 거예요.

작가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알아차렸나요? 

제가 똘똘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스스로는 되게 늦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배우가 된 게 아닌가 생각도 하고요. 내 안에 여러 감정들이 들끓고, 세상은 부조리하고, 나는 거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을 줄곧 느꼈거든요. 누군가는 그런 기분이 들어도 탁 털고 다른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을 텐데요. 저는 계속 탐구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연극을 했죠. 나한테 가해지는 혹은 사회에 있는 폭력들과 거리두기가 안 되니까 아예 이야기라는 세계로 도피하듯이 들어가서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로서도 저를 던지는 작업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러다 ‘현타’도 왔고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사람들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발견했던 것 같아요. 그게 한 서른즈음이었어요. 

“이토록 뜨거운 내향형 인간인 내겐 그래서 농담이 필요하다. 좋은 농담은 대체로 자기 객관화와 거리두기를 연습시켜주니까.”(10쪽)라고 쓴 부분이 떠오르네요. 

<모던 패밀리>라는 미국 시트콤이 있어요. 그 가족이 완전 막장이거든요. 시트콤이니까 그렇지 사실 엄마는 너무 강박적이고, 아빠는 아무 생각이 없고, 언니는 임신을 해서 오고, 엉망진창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시트콤, 무엇보다 희극 안에서 그 사람들은 서로가 결점이 있는 민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화합을 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해요.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바꾸거나 개선시키고 싶다면 농담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마음은 그대로 가져가되 너무 힘들면 앞으로 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농담이 안전지대라고 표현을 했고요. 고통에서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볼 수 있는 시야가 장착돼 있으면 너무 힘들어도 다음 장으로 나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배우는 일종의 학문

작가님은 영화도 만드셨고, 배우로도 오래 활동하셨어요. 책에 배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는데요. 내가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는 정체성 무엇인지, 그게 다른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해요.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는 혼란스러웠는데요. 지금은 그냥 배우라고 이야기해요. 아무래도 저의 시작이니까요. 또 저는 계속 공부하고, 탐구하고 싶거든요. 그런 저한테 배우는 일종의 학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연기가 아니었다면 글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글을 쓰거나 연출을 하면서 다른 배우와 소통을 할 때도 연기 경험이 분명 도움이 되거든요. 대본에도 배우로서 내가 하기 힘들 것 같은 말은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하고요. 만약에 썼더라도 이 말투가 배우한테 불편하면 아무리 이 뉘앙스가 꼭 필요해서 썼어도 배우가 편한 쪽을 찾으려고 해요. 장단점이 있지만 저는 그 방향으로 가는 게 제가 쓰는 글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자이언트 펭TV> 일도 배우가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배우 활동을 할 수 있는 한 계속 하고 싶어요. 

“학문 같다”는 말을 하셨는데요. 다른 일을 하면서는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를 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배우하고 작가의 비슷한 면은 어떤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파악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러면서도 배우 쪽이 비교적 이해심이 부족해도 이해해야 하는 면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완전히 그 사람이 된다는 개념은 사실 신화화되어 있는 것이고, 배우 역시 어떤 판단 하에 연기하는 것이지만요. 진짜 말도 안 되는 사이코패스도 어쨌든 내 안에서의 처리가 있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배우는 훨씬 더 몸의 경험인 것 같아요. 작가는 어떤 인물의 경우,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일종의 기능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반면 배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한 명만을 이해하려고 내 마음과 몸을 써줘야 하는 작업이니까요. 

아까 주신 명함에 ‘다목적 프리랜서 배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어요. 이러한 수식을 갖고 활동하는 입장에서 지금 가장 크게 하는 고민은 뭔가요? 

정체성 고민이 아직 많기는 해요. 어떤 길을 가려면 유리한 선택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런 기준에 맞지 않은 일들을 선택하다 보니까요. 내가 좋은 일들을 선택했다 생각하면서도 ‘이러다 몇 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진 않을까’하는 불안이 수시로 찾아오죠. 그렇지만 찾아올 뿐 내 앞에 있는 일을 하려고 해요. 만드는 에너지가 즐거우니까 하는 거겠죠.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하게 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배우 일이 줄어드는 건 고민이에요.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올해도 역시 배우로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더 늘리고 싶어요. 

일터에서 겪은 성폭력 경험에 대해서도 쓰셨죠. 공감하는 분들이 아주 많을 것 같아요. 쓸 때의 마음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글 몇 개는 5년쯤 전에 웹진 <핀치>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수정한 거예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화가 많이 나 있었어요. 그래서 책에 실어도 되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수정했죠. 그런데 5년도 전에 겪었던 것과 같은 진창에 지금도 누군가는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건 분명히 잘못됐다, 빨리 잘못됐다는 걸 알아야 하고,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 마음이 제일 컸어요.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절박한 사람이거든요. 물론 당시에는 저도 다른 언니들이 만류할 때 바로 귀담아듣지는 못했지만요. 책에 적은 것처럼 구체적인 일화를 들으면 이게 내 얘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어요. 지금도 그때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제 경험을 듣고 살짝이라도 피할 수 있으면 하는 연대의 마음이었어요.


 

<2020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작지원 선정작인 영화 <백야>는 성추행 가해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무게를 다룬 작품이죠. 영화를 만든 이유에 대해 “고통받은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128쪽)이라고 했어요. 

<백야>는 지원작으로 뽑혔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됐던 것 같아요. 단지 이게 필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우선 안심이 됐고요. 촬영을 다 마치고 편집을 하는 과정에 박원순 전 시장의 성폭력과 자살 소식이 뉴스에 나왔어요. 막상 저는 영화와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주변에서 괜찮냐는 연락이 계속 왔어요. 점점 이런 일은 결국 또 발생하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들이 모르지만 이런 일은 정말 많을 거예요. 제가 했던 아주 작은 고소도 세상은 모르는 사건이었으니까요. 확신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한 마음이지만 그런 동력으로 계속 했어요. 아직은 이런 이야기가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으로요. 




*염문경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2012년 배우로 데뷔했다. 2015년부터 드라마 작가 일도 시작했으나 2019년 ‘펭수 작가’로 살짝 알려지기 전까지는 오랜 무명의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공들여온 일보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 더 강력하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목도하면서 꿋꿋이 연기와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웹드라마 <멍냥꽁냥> 등에 작가로 참여했고, 영화 <악질 경찰>, 연극 <도처의 햄릿>, <로봇을 이겨라> 시리즈 외 다수의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자이언트 펭TV〉의 시작부터 함께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감독이자 작가, 배우로 단편 영화〈백야〉를 만들었다.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가장 약하다. 그럴 땐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되뇐다.



내향형 인간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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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문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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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헌 “느린 독서가 필요한 이유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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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예요. 옛것을 익혀서 그것을 현대적으로 잘 해석할 수 있으면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공자가 이야기하죠.” 임자헌 저자는 말했다. 『마음챙김의 인문학』이 전하는 의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에 담긴 옛 선현들의 문장은 지나간 시간 속에 머물러 있지 않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통찰과 삶의 지혜를 전한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주위에 휩쓸리지 않으며, 진정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40편의 명문을 통해 일깨워준다. 

임자헌 저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고, 잠시 미술 잡지 기자로 일하던 중 한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일성록> 번역을 시작으로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왕조실록> 현대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시민을 위한 조선사』, 『銘, 사물에 새긴 선비의 마음』 등이 있다. 



과거의 지혜, 지금도 유효할 수밖에 없어요

목차를 보면 계절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렇게 구성하신 이유가 있나요?

시간에 쫓기지 말라고요. 우리는 생각보다 계절에 맞춰서 생각을 많이 해요. 계절마다 풍경이 바뀌고 달마다 일이 바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생각을 하게 되죠. 옛 선현들이 그 계절을 어떻게 살았고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지, 거기에 기대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때 도움을 받으면 좋잖아요. 

첫 꼭지에서 정도전의 시(題樵?圖, 나무꾼이 나무하는 그림을 보고 짓다)를 소개하셨어요. 덧붙여 말씀하시길, 우리는 항상 ‘급한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서 ‘중요한 일’은 뒤로 미뤄둔다고 하셨죠. 

제가 그렇게 느껴서 그런 말을 했을 거예요. 만약 제가 급하게 공부를 했다면, 빨리 논문을 써야 되는 상황이었다든지, 그랬다면 한문이 이렇게 맛있고 옛글들이 이렇게 예쁘다는 생각을 잘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뒤늦게 한문을 공부하면서 내놓을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는 시간들을 오래 지나다 보니까 한문을 볼 수 있는 실력이 쌓였고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대로 살지 않아도 꼭 틀린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20대 후반에 한문 공부를 시작하셨죠. 그 시기에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고전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우리가 굉장히 케케묵은 이야기를 말할 때 ‘공자 왈, 맹자 왈’이라고 하잖아요(웃음). 그런데 <논어>, <맹자>를 배워보니까 그렇지 않은 거예요. 하나도 케케묵지 않은 거죠.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가 굉장히 합리적이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저는 공부를 늦게 시작했잖아요. 그때 공자와 맹자가 좋았던 게, 목표를 위해서 달려가지 않아요. ‘네가 할 일을 다 해, 이루는 건 하늘에 달려있는 거야’라고 말하죠. 그 말이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늦게 공부를 시작할 때 ‘지금 이걸 시작해서 뭘 할 건지’, 그런 생각 없었거든요(웃음). 그냥 내용이 좋으니까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한문에서 만난 세계는 ‘네가 지금 충실하게 하고 있으면, 그리고 계속 충실하게 하면, 어디론가 갈 것이고 그 결과는 하늘이 만들어주는 것이지 네가 만드는 게 아니다’라는 거였어요. 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죠.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셨고, 졸업 후에는 미술 잡지 기자로 일하셨어요. 지금은 고전 번역을 하고 계시고요. 진로를 변경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시나 봐요.

책에도 썼지만 제가 요즘 사람들한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성실(誠實)’이거든요. 우리는 외부의 평가로 성실함을 이야기하는데 ‘성(誠)’이라는 개념은 나에게서 먼저 시작되는 거예요. 나에게 진실한 것, 나에게 충실한 것. 나에게 진정성을 갖고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 나에게 필요한 걸 선택하게 되는 거죠. 외부에서 평가하는 ‘성(誠)’에 맞추려면 나를 점점 마모시켜가야 하는 거예요. 유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誠)’을 이야기해요. ‘어떻게 인생을 볼 것인가’에 대한 방향의 전환이 되게 중요한 거죠. 외부에 성실에 나를 맞추면 ‘doing(실행)’이 중심이 되는 삶이잖아요. 그러나 나에게 성실한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being(존재)’이 중심이 되는 거죠. 한문을 공부하면서 ‘관점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면 어떤 일을 해도 의미 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군자를 버린 논어』를 출간하셨을 때, 한 기사에서 “논어에서 엄숙주의를 벗겨낸 발칙한 번역가”라고 표현했더라고요. 이번 책에서도 엄숙주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신 것 같아요. 

그렇죠. 저는 대학에서 한문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가학(家學)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저한테 엄숙주의가 없어요.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재밌다, 되게 현대적인 분들이구나’라고 느끼면서 한문에 흥미를 느꼈어요. 처음부터 수업에 너무 열정적으로 덤비지도 않았고, 들을 만큼 듣고 졸만큼 졸고 쉴 만큼 쉬면서 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 ‘이 점은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선생님이 되게 괜찮은 해석을 말씀해주시면 적어놓고 ‘아, 이렇게 볼 수 있구나’ 생각했고, 그런 게 재밌었어요. 닫힌 사고로 생각할 필요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 그 분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고, 혼자 이야기도 만들어 보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훨씬 재밌었어요. 

『마음챙김의 인문학』을 읽다 보면, 고전이 쓰인 과거와 우리의 현재가 맞닿는 지점들을 많이 발견하게 돼요. 

제가 논어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이거든요. 옛것을 익혀서 그것을 현대적으로 잘 해석할 수 있으면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공자가 이야기하죠. 공자가 살던 때나 그 이전이나,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지금이나, 인간의 기본 조건은 바뀐 게 없어요. 밥 안 먹으면 배고프고, 잠 안 자면 죽을 것 같고, 곁에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많이 있으면 짜증나고... 똑같아요. 그래서 과거의 지혜는 지금도 유효할 수밖에 없죠. 그때의 표현이나 도구들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만 현대적으로 윤색해주면 지금하고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거예요. 길이 안 보일 때, 오히려 길은 과거에 있을 수 있거든요. 미래지향적으로 가고 싶다면 과거의 지혜를 현대식으로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틀로 세상을 보는 ‘인문학의 힘’

책에 실린 선현들의 문장 중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나무 심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54세의 나이에 해송(海松)을 심었던 황린(黃璘)의 일화예요. 그 이야기도 좋고요. 젊은 세대들이 공부하기 전에 반드시 읽었으면 하는 글은 율곡 이이의 ‘뜻 세우기(立志, 입지)’예요. 공부를 왜 하는가,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뜻을 세웠으면 자신의 나쁜 습관을 주체적으로 바로잡아야 세운 뜻을 밀고 나갈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고요. 그런 사람이라면 김득신의 ‘읽은 책의 횟수를 기록해봄(讀數記, 독수기)’가 크게 도움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 글을 읽으면서 지금도 많이 부끄럽거든요. 너무 쉽게 ‘나는 못하겠어’라고 이야기하는데 만 번은 시도해보고 하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기 원한다면 그런 집요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공부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셨을 텐데, 답을 찾으셨나요?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 이 많은 공부를 하는 거죠(웃음). 사실 책을 쓸 때마다 저를 제일 많이 돌아봐요. 나는 써도 되는 사람인가, 헛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타인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나는 그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제가 쓰는 글이 어떤 사람이 되자거나 어떤 세상을 만들자고 설득하는 글이다 보니 ‘그렇다면 내가 그런 인생을 살지 못하면 안 되지 않나’ 하는 고민을 되게 많이 해요. 그리고 ‘너의 시간의 소중함을 봐, 너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보고 네 존재에 알차게 살아’라고 말했는데 저는 세상을 쫓아가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저도 순간순간 그러거든요(웃음). 그래서 공부를 계속 해나가는 게 ‘다른 세상을 살아야지’ 하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시간이에요.


 

허초희의 작품도 실려 있는데요. 고전을 공부하면서 여성 작가의 작품을 보시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거기에서 느끼는 답답함이나 갈증이 있으실 것 같아요. 

‘그런 시대였으니까, 그래서 아팠겠구나’ 싶죠. 저는 여성 작가나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서얼, 천민들을 다 같이 봐요. 여성 운동이 나아가야 하는 바 또한 여자의 위치 상승이 아니고 약자의 위치 상승이겠죠. 허초희의 시를 푸는 것도, 여자로 보는 것보다는, 그가 시대의 약자였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약자를 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허초희의 시를 골랐어요. 

조선 유학자들의 독서에 대해 쓰신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느린 독서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기도 하셨는데요.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가 있는데, 제가 되게 좋아하는 제자예요. 자로는 하나를 듣고 그걸 실행하지 못했으면 다음번 가르침을 듣는 걸 두려워했다고 해요. 저는 그렇게 엄격한 학생은 본 적이 없어요. 지식을 쌓는 독서는 굉장히 빠르겠죠. 하지만 나를 돌아보고, 삶을 돌아보고, 타인을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면서 그 작가에게 질문을 건네고, 답을 듣고, 나의 답을 생각해본다면 그건 당연히 느린 독서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게 느린 독서를 하고 나면 정말로 그 책을 ‘읽은’ 게 되겠죠. 살아있는 독서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읽고 나면 그 책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있겠죠.


 

책에 실린 마지막 글에서 코로나 이후의 세상에 대해 쓰셨는데 “안정된 상태에서는 판을 흔들 수 없지만 이미 흔들리는 판에서는 새 질서를 기획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언제나 판이 흔들리면 변화가 오죠. 대신에 각오가 단단히 돼있어야죠.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이고 지구는 늘 변해요. 확정적인 건 아무것도 없죠. 그런데 기묘하게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해요. 그래서 언제나 변화가 멈추기만을 바라죠. 변화에 뛰어들 생각은 잘 안 하거든요. 그런데 변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조금 적극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사회도 지금 이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잖아요. 어디론가 가야 되는데,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갈까를 생각해 봐야죠. 지금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변화가 시작됐다면 빨리 그 흐름을 보고 앞에 지도를 그려보는 게 훨씬 효율적인 일이잖아요. 인문학의 힘은 ‘꿈꾸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임자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잠시 미술 잡지 기자로 일하던 중, 우연히 접한 한학의 매력에 빠져 진로를 바꾸었다.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상임연구부를 거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성록》 번역을 시작으로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조선왕조실록》 현대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옛 문헌 속에서 지내면서 자연스레 과거와 현재의 공통점과 간극을 읽게 되었고, 옛글들이 그 외투가 낡았을 뿐 내용은 얼마든지 오늘과 소통할 수 있는 생기발랄한 것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여기’의 문제에 대해 과거가 줄 수 있는 지혜의 가능성을 열심히 모색해가고 있는 중이다.



마음챙김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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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전문가 구자영 “온라인에서 잘 팔리는 물건들의 영업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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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온택트(ontact) 시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재택근무, 온라인 개학, 비대면 전시와 공연 등 일상의 온라인화가 이뤄지고 있다. 쇼핑도 예외는 아니다. 매장을 방문해 쇼핑을 즐기던 소비자들은 이제 PC와 스마트폰으로 온라인몰에 접속한다. 온라인 매출이 오프라인 매출을 뛰어넘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어떻게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을까. 

『잘 팔리는 브랜드의 법칙』은 온라인 쇼핑 환경에 대응해야 하는 직장인, 자기 사업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책이다. 화려한 성공담, 거창한 이론 대신 온라인 쇼핑 환경에서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할 때 유념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A부터 Z까지 단계별로 설명한다. 구자영 저자는 나이키 코리아, 코오롱 인더스트리 FnC 등에서 영업,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현재 마켓컬리 브랜드 리더로 일하고 있다. 『잘 팔리는 브랜드의 법칙』에는 구자영 저자가 지난 16년간 ‘오프라인과 온라인’, ‘실무와 총괄’을 두루 경험하며 쌓은 노하우가 담겼다. 



“다 알려줘도 괜찮겠냐”고 하더라고요

추천사에 ‘영업 비밀’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공감했어요. 실무자가 바로 참고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어서요. 

지인이 책을 읽고 “적당히 넣지, 너무 다 이야기한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브랜드를 만들거나 운영하는 분들이 고민이 많은데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데가 별로 없거든요. 사회에서 나이는 어리지만 브랜드를 빨리 구축한 분들을 만나면 대부분 성공한 케이스를 이야기해 주니까 일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나 미리 준비하면 좋은 것들을 알기 어렵고요. 그간 저한테 브랜드 운영에 관해 물어보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말로 설명했던 걸 한 번 정리해 보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썼어요. 실무부터 총괄까지 경험한 터라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일이 어렵지 않기도 했고, 개념이나 원론적인 이야기는 가급적 빼려고 노력했어요. 

최근 들어 온라인 시장이 급성장했다고 하죠. 현업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어느 정도인가요?

주변인들의 반응에서 실감하는데요. 오랜만에 만나면 “요즘 어떠냐”고 물어보잖아요. 100% 온라인 베이스로 사업하는 분들은 작년 한 해 동안 힘들다는 말 안 했어요. 100% 온라인 기반이 아니어도 온라인으로 소통할 준비가 된 브랜드도 여유 있었고요. 코로나19가 심해지면서 온라인 플랫폼들은 예외 없이 성장한 것 같아요. 반면 오프라인 베이스로 사업하는 분들은 힘들어했고요. 생존을 위해서 온라인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여러 기업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것 같아요.

온라인 시장의 성장과 함께 산업의 변화도 컸다고 들었어요. 

산업 선호도가 달라졌죠. 예를 들어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패션 산업보다는 인테리어 관련 산업이나 이너뷰티 쪽에 소비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어요. 소비 패턴 자체가 달라진 거죠. 생활의 중심이 온라인으로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변화인데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더 빠르게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현재 마켓컬리 브랜드 리더로 일하고 있는데 예상과 달리 ‘마켓컬리’ 사례는 거의 등장하지 않더라고요. 

제가 컬리에서 일하기 전에 책이 구상되기도 했고요. 상품을 중심으로 만든 브랜드를 온라인으로 어떻게 판매할 것인가를 다루는 책이라 컬리와는 관계가 없어요. 영업 관련 이야기를 쓸 때도 컬리보다 일반 오픈마켓을 예로 드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했고요. 컬리는 전문몰에 가깝지, 일반 오픈마켓 형태의 유통 플랫폼이 아니거든요. 인지도 높은 플랫폼의 사례를 들어야 독자분들이 이해하기 쉽잖아요. 

‘브랜딩’이라는 단어가 들린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아요. 기업에서 급하게 현업에 적용하다 보니 마케팅과 브랜딩의 차이를 정확히 모르는 담당자도 꽤 있고요. 브랜딩과 마케팅의 차이를 간략히 설명한다면요?

실제로 두 개의 차이를 모르는 실무자가 꽤 많아요. 브랜딩이 해당 브랜드가 어떤 브랜드인지 정의하고 말하는 일이라면, 마케팅은 그렇게 만들어진 브랜드를 알리는 활동에 가까워요. 핵심 가치와 차별점을 전달하고, 소비자들에게 특정 감정이나 경험을 주는 게 브랜딩이죠. 그래서 브랜딩은 장기적인 활동이고 ‘관계’에 비유할 수 있어요. 소비자가 브랜드를 보게 만드는 활동이 마케팅이라면 브랜딩은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보게 하는 일이죠. 그래서 마케팅은 매출 등의 성과랑 이어지는 활동이 대부분이고 브랜딩은 신뢰도, 충성도와 같은 지표와 연결돼요. 

‘브랜딩이 잘되면 영업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브랜딩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겠지만, ‘그 정도인가?’ 싶었어요. 

‘브랜딩이 잘되면 영업이 수월하다’가 더 정확할 것 같아요. 사회 환경이나 트렌드 등 외부적 요인에 따라서 또는 어떻게 소통하는가에 따라 같은 예산을 써도 고객에게 전해지는 감정이 달라져요. 고객들이 브랜드의 가치를 잘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영업의 역할이라 브랜딩과 함께 적절하게 이뤄져야죠. 



지금 잠깐 창피한 게 낫잖아요

브랜드들은 이용 고객에 대한 구체적인 페르소나를 설정하기도 한다(57쪽)고요. 이 책의 페르소나가 있다면 누굴까요?

첫 번째는 오프라인 기반 사업에 대한 이해는 있지만, 온라인을 처음 접하는 30대 중후반 직장인이에요. 온라인 커머스의 역사가 길지 않거든요. 그래서 오프라인 기반 사업에 종사하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발 빠르게 온라인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분들의 혼란이 커요. 대부분의 기업에서  외부에서 사람을 영입하기 힘드니까 온라인 사업에 내부 직원을 배치하는데 담당자는 브랜드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온라인 비즈니스 환경을 모르니까 어려운 거죠. 이런 분들이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고요. 두 번째는 언젠가 자기 사업을 하려고 하는 직장인들이에요. 

실제로 요즘 창업이나 N잡 등 퇴사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 많이 눈에 띄어요. 

다들 직장 생활에 대한 부담감이 있잖아요. (웃음)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니까 자기 사업을 하려고 하는 분들이 많죠. 그런데 처음부터 브랜드를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을 알기 어렵거든요. 물론 벌어진 상황에 직면해서 경험하면 하나씩 알게 되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잖아요. 본인이 가진 전문성과 역량만으로 출발하고 끌고 가야 하는데 브랜드를 만들고 유지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시행착오를 덜 겪으면서 운영할 수 있어요. 그래서 창업하는 분들, 자기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분들이 또 다른 페르소나예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사업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있나요?

실수라기보다 어려워하는 것들인데요. 온라인 판매를 위한 툴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 게 대표적이에요. 상품 사진과 상품을 설명하는 콘텐츠인 ‘섬네일’ 등이 필요한데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는 어느 단계에서 어떤 마케팅 활동이 필요한지 몰라서 비용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해요. 주로 저와 비슷한 연배의 분들이 어려워하는 영역이죠. 목적에 따라 성과를 측정하는 척도가 다를 수 있거든요. 그리고 어떤 광고 구좌를 어느 단계에 쓸 것인지를 관리자가 판단해서 제안하고 방향을 리드해야 하는데 이해를 못 하면 실무자한테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요. 실무자들이 잘해주면 괜찮겠지만, 그들도 시야가 넓지 않아서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요.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익숙한 사람과 온라인 비즈니스에 익숙한 사람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요.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익숙한 사람이 관리자고, 온라인 비즈니스에 익숙한 사람이 실무자인 경우가 다수일 텐데요. 실무자 입장에서 관리자를 잘 설득하는 기술이 있다면요? 

기술이라기보다 태도의 문제인데요. 뻔한 말이지만 서로 노력해야 해요.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는 관리자가 많거든요. 오프라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온라인을 모르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런데 순간의 민망함을 모면하려고 실무자한테 배우지 않으면 결국 자기 손해죠. 앞으로 계속 창피한 것보다 지금 잠깐 창피한 게 낫잖아요. (웃음) 저도 예전에 실무자한테 과외를 받았어요. 그리고 솔직하게 얘기했죠. “미안하지만, 내가 잘 모른다. 그러니 설명해 달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잘 이해하고 있어야 너도 수월하게 일할 수 있다”고 했어요.

관리자로서 실무자를 설득하셨군요. (웃음)

실무자 입장에서는 귀찮죠. ‘이것도 모르면서 저 자리에 앉아 있나?’ 싶을 수 있고요. 그런데 의사결정은 관리자가 하잖아요. 관리자가 실무를 잘 몰라서 잘못된 결정을 하면 실무자도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서로 역할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이해하고 수용해야죠. 관리자는 좋은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 부끄러움이나 민망함을 내려놓고 배워야 하고, 실무자는 귀찮고 짜증이 나도 일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알려주는 방식으로요. 

상품이 아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도 많아요. ‘책’처럼 차별성이 크지 않은 상품도 있고요. 이런 것들을 파는 기업에서도 책에 나오는 법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세부 사항이 다를 수 있지만, 상품이든 서비스든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점에서 전체 맥락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모든 게 무언가를 받는 대상과 그걸 만든 이유, 이것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의 문제니까요. 

요즘 ‘라이브 커머스’가 떠오르고 있는데요. 라이브 커머스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요.  

라이브 커머스에 맞게 인프라가 개선되어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중국의 라이브 커머스에서 소비자가 바코드를 찍어서 바로 구매할 수 있게 만든 것처럼요. 그런데 아직 한국의 라이브 커머스는 방송을 보고 다시 사이트로 가서 구매하는 방식이 많은 것 같아요.


 

브랜드 운영자로서 시야를 넓히고 싶다면

브랜드 전문가가 좋아하는 브랜드는 무엇일지 궁금해요. 소비자로서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나요? 

‘이솝(Aesop)’을 좋아해요. 브랜드에 대한 로열티가 높은 편인데요. 주변에 선물할 일이 있으면 거의 이솝(Aesop) 제품을 줘요. 이솝(Aesop) 오프라인 매장이 다 다르거든요. 인테리어도 다르고요. 친환경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객과의 접점을 만들어서 잘 소통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브랜드는 ‘나이키’인데요. 과거에 나이키 코리아에서 일하면서 나이키가 정말 대단한 브랜드라고 생각하게 된 일화가 있어요. 

어떤 일화인가요?

벌써 1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인데요. 당시 박태환 선수가 한창 활동할 때라 대부분 브랜드에서 수영복을 협찬하려고 했는데 나이키는 하지 않았어요. 나이키는 수영이라는 카테고리에 대한 연구, 스페셜리티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죠. 한 마디로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만 한다는 거예요. 끝까지 일상복만 협찬하고 수영복은 하지 않는 걸 보고 정말 철학이 두터운 브랜드고, 잘할 수 있는 거에 집중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아까 로열티가 높은 고객이라고 했잖아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는 전부 나이키예요. (웃음) 

개인 브랜딩이 중요한 시대잖아요. 책에 나오는 브랜드를 구축하고 가치를 전하는 방식을 개인 브랜딩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 브랜딩이라는 개념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단순히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자기 PR’에 가까웠다면 요즘은 내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말하죠. 연차가 쌓이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어떤 걸 잘하는지 파악할 수 있고, 그걸 토대로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정리해서 소통해야죠. 요즘은 각종 SNS에 브런치, 클럽하우스까지 수많은 소통 채널이 있잖아요. 이중 어떤 채널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가가 중요하고요. 결국 개인 브랜딩을 잘하는 것도 일반 브랜드를 운영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봐요. 

‘구자영’이라는 개인은 어떤 브랜드인가요? 차별화 포인트, 전하고 싶은 핵심 가치가 있다면요?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현업 경험과 전락, 기획 커리어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사업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양측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 필요한데 많지 않거든요. 저는 오프라인 시대에 마케팅, 영업, 채널 플래닝 등 여러 분야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신사업, 글로벌 전략 업무를 거쳐서 온라인 베이스 브랜드의 프론트 전반까지 운영해 봤어요. 이런 경험을 통해 서류가 아닌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체적으로 경험했고요. 

아직 현업에 있지 않지만, 향후 브랜드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은 분들도 이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은데요. 브랜드 담당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 있다면 뭘까요?

필요한 자질은 브랜드의 규모에 따라 다른데요. 공통 자질이 있다면 시장의 흐름, 고객의 변화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두고 ‘감’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데이터가 쌓이는 시대니까, 데이터를 읽고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아요. 사실 브랜드를 책임지는 사람은 A부터 Z까지 다 알아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걸 처음부터 알아야 하는 건 아니고요. 부딪히고 경험하면서 충분히 알 수 있어요. 다만 브랜드의 핵심가치를 고객이 어떻게 기억하고 경험하게 할 것인지 확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다른 마케팅, 브랜드 운영에 관한 책과 이 책의 차별점이 있다면요? 

유사한 다른 책이 마케팅이나 브랜딩을 깊게, 원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 책은 현장 경험을 토대로 브랜드를 만드는 것부터 브랜드를 운영하고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을 단계별로 소개해요.  온라인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도 자기 분야 외에 다른 영역, 해당 업무의 전과 후를 알기 어렵거든요. 그런 분들의 시야를 넓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온라인 환경을 접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온라인 시장에서 브랜드 운영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구자영

마켓컬리 브랜드 리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이키 코리아에 입사해 마케팅과 영업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더 넓은 관점에서 비즈니스를 경험하고자 2011년 코오롱 인더스트리 FnC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신사업 기획 및 글로벌 전략을 담당했는데, 점점 치열해지는 비즈니스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중심의 전략 수립과 빠른 실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영국 브루넬대학교(Brunel University)에서 디자인·브랜딩 전략(Design & Branding Strategy)을 공부했고 2015년 논문 우수상(distinction)을 받으며 졸업,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에는 CJ 올리브영 성장 전략 사업 부문을 거쳐 ㈜와이즈유엑스글로벌 아임닭&아임웰에서 브랜드 총괄 본부장을 맡았다. 이때 온·오프라인 채널과 국내외 시장을 넘나들며 쌓은 전략적 사고와 감각으로 상품 기획 및 개발, 온라인 운영, 브랜드 및 퍼포먼스 마케팅, 디자인 총괄, 고객 대응을 포함한 다섯 개의 팀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아임닭&아임웰이 온라인 브랜드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잘 팔리는 브랜드의 법칙
잘 팔리는 브랜드의 법칙
구자영 저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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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신영 “기획서 쓰기가 어려운 건, 감성 천재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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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온종일 기획서 작성에 매달린 A씨. 며칠 밤을 지새운 끝에 30페이지짜리 최종본을 완성했다. 성취감과 긴장감을 마음에 반씩 나누어지고 들어간 회의실에서 발표까지 멋지게 끝마쳤는데, 기획안을 찬찬히 넘기던 상대가 잠깐의 침묵 끝에 말한다. “잘 듣긴 했는데…어렵네요.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가요? (뭔가 그럴 듯 한 것 같은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2013년 『기획의 정석』을 펴내며 ‘배운 적 없지만 해내야 하는’ 직장인들의 가이드가 되어 준 박신영 저자가 ‘기획 시리즈’의 네 번째 책 『산으로 가지 않는』 정리법을 펴냈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라는 질문을 받는 이들을 위한 실용서다. 이 책에는 10년간 10,000장의 기획서를 코칭하며 얻은 기획자의 9가지 정리법과 30개의 사례가 담겼다. 박신영 저자는 생각이 많아서 주저리주저리 하게 되고, 아이디어는 있지만 문서로 정리하는 게 어려운 이들에게 ‘한 장 도식화 그리기’를 권한다. 



쓱 봐도 알 수 있는 그림 한장 남기기 

한 장 도식화 그리기가 왜 중요한가요? 

우리의 아이디어와 시간은 너무 소중하니까요. 보고서나 기획서 등은 내가 보려고 쓰는 게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거잖아요. 그러면 상대가 읽고 싶어하는 구조로 써야 해요. 주저리주저리 하는 글로는 상대를 설득할 수 없어요. 한 장 도식화 그리기의 필요성은 상대방의 궁시렁을 떠올려 보시면 금세 알 수 있죠.


1) “뭔 소리인지 그림이 안 그려져!” → 그림을 그려줘야 이해한다. 

2) “좋긴 한데, 한 방이 없네.” → 상대가 가져갈 그림을 하나 그려줘야 한다. 

3) “한 눈에 안 들어 와” → 스마트폰 영향으로 집중력이 짧아진 이들에게는 긴 글 대신 쓱 보여지는 그림이 효과적이다. 

결국 이 궁시렁을 종합하면 ‘그림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제가 충격을 받았던 이론이 있는데요.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발표한 뇌파 측정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이 한 사물에 집중하는 시간은 8초라는 거예요. 8초의 주의집중력을 가진 사람을 사로잡으려면 쓱 봐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그림 한 장이 필요해요. 

‘기획 교과서’ 시리즈의 네 번째 버전이에요. 전작 세 편(『기획의 정석』 『제안서의 정석』 『한 장 보고서의 정석』)을 아우르는 끝판왕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웃음). 

이 책에는 히스토리가 있어요. 첫 책 『기획의 정석』을 펴낸 이후 2014년에 『보고의 정석』을 출간했는데, 예시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저는 독자 분들의 말씀에서 힌트를 얻을 때가 많아서 리뷰를 열심히 찾아보는 편이거든요. 책을 낸 이후 줄곧 ‘예시가 부족하다’는 말이 너무 마음에 남아 『보고의 정석』을 절판시키고, 계속 사례를 모았어요. “한 눈에 알아보게 정리해!”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9개의 방법론을 정리하고, 이를 실제로 적용한 30가지의 사례를 보완해 새 책을 펴냈습니다. 

비단 기획서에 국한된 게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전단지의 내용이나, 누군가의 말을 도식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재밌었어요. 특히 책 『고흐의 편지』를 읽고 받은 위로를 표로 정리하는 예시가 흥미롭더라고요. 

주저리주저리 하게 되는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감성적이고, 논리적인 부분에 약해요. 이건 핸디캡이 아니라 문화예술 부분에서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거든요. 저 또한 그런 사람이라서, 좌뇌 영역의 개념을 우뇌 영역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설명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한 장 보고서의 정석』에서는 윤종신의 노래 ‘좋니’로 보고서 쓰기를 설명하기도 했죠. 

저는 강의에 오셔서 주저리주저리 기획서를 쓰고 계신 분들을 보면 손을 한번 꼭 잡아드리고 싶어요. ‘여기 또 고흐가 앉아있네.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이 들거든요(웃음). 저도 감성적인 사람이라, 그분들이 기획서 쓰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늘 이렇게 얘기하고 강의를 시작하죠. “여러분이 생각을 한 장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건 고흐처럼 천재이기 때문이에요. 기획서나 보고서를 쓸 때만큼은 보통 사람으로 내려오세요. 평범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1,2,3 넘버링을 해주시고요. 항목을 좀 구분해 주세요.” 그러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하시더라고요(웃음). 강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논리적이지 않은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회사에서 꿋꿋이 그런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있어요. 그분들의 막막함을 덜어드리고 싶어요. 

이번 책을 쓰면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점이 무엇인가요. 

모든 책이 비슷한데, 제목에 부합하는 내용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기획의 정석』 쓸 때는 “기획이 잘 안 된 책이네”라는 말을 들을까 봐 너무 무서웠거든요. 이번에는 산으로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죠(웃음). 한 챕터 원고를 끝낼 때마다 스스로에게 “1.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고 물었어요. 그때 바로 한 문장으로 답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정리를 했고요. 이후에는 “2. 여기서 머릿속에 남는 그림 한 장이 있어?”라고 물은 뒤,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더 정리를 했죠. 마지막으로 “3. 진짜 써먹을 수 있어?”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예시를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사례가 30개나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번 읽고 마는 책을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이 책을 한 장으로 정리하면 뭘까?’를 고민하다 정리한 한 장의 그림 


듣는 사람은 산에 오르고 싶지 않다

기획스쿨을 찾는 수강생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어려움이 있나요?

대부분 똑같은 말씀을 하세요. “생각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된다”고요. 실컷 열심히 설명했는데 상대가 “그래서 하고자 하는 게 뭔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너무 화가 난다고 말씀하시죠(웃음). 그래서 하고자 하는 걸 간략히 설명해달라고 하면 못 하세요. 스스로도 무슨 생각인지 정리가 안 되는 거예요. 사실 저도 이 원리를 깨닫기 전에는 상대에게 맞추라는 말을 싫어했어요. ‘난 내 스타일대로 할 거야~’라면서 쓰고 싶은 대로 기획서를 썼는데, 그럼 고생도 내가 하더라고요(웃음). 결국 상대에게 맞추는 방법론을 계속 연구하고, 만든 거죠. 내 노동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상대의 궁시렁을 열심히 들어야 해요. 

가장 꽂혔던 문장이 “말 센스만큼 중요한 건 남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센스. 말하는 사람이 산으로 갈 때 듣는 사람은 산에 오르고 싶지 않음을 기억하기(214쪽)”였어요(웃음). 

맞아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말만 열심히 하면 전달되지 않을 확률이 높죠. 하고 싶은 말을 한 장 도식화로 그리는 건 상대를 향한 배려이기도 해요. 

작가님은 언제부터 상대의 궁시렁이 들리기 시작했나요? 

몇 번의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었죠(웃음). 예를 들어 한 기업에서 9시간가량 강의를 했는데요. 이건 말하는 저도 힘들지만, 듣는 사람도 엄청 힘든 시간이거든요. 강의를 마친 뒤 서로 감기는 눈꺼풀을 겨우 뜨며 마지막 질의응답을 하는데, 누가 질문을 해요. “강사님, 정말 잘 들었는데요. 그래서 뭘 하라는 건가요?”(웃음) 만약 질문을 하는 분의 태도가 무례했다면 제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열심히 강의를 들으신 분이, 아주 예의 바르게 그렇게 물어보니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비슷한 경험을 몇 번 거듭하면서 고민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강의로 내가 말하려는 게 한 마디로 뭐지?’ 생각했는데 써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뭐든 한눈에 보이도록 정리하는 연습을 했어요. 수천 번 깨지면서 터득한 기술인 셈이에요(웃음).

‘한 장 도식화 그리기’를 익히고, 변화된 사례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사회연대은행에서 진행하는 ‘사회적기업 육성 프로그램’에서 기획서 쓰기 교육을 하며 ‘느린 걸음’이라는 발달장애인 부모 카페의 대표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줄곧 아이만 키우다가 처음 창업을 하며 ‘발달장애 아이들을 위한 비대면 교육서비스’를 운영하고 싶어 하셨죠. 좋은 아이디어는 있지만 기획서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으셔서, 저와 함께 사업 모델을 도식화로 정리하고 기획서를 만들었어요. 그 기획서로 투자를 받아서 실제로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기쁘더라고요. 

사실 도식화는 대단한 기술이 아니에요. 단지 언어가 다를 뿐이거든요. 보석 같은 아이디어가 있지만, 그걸 정리하는 방법을 모르는 분들께 이 기술을 가르쳐드린 뒤 나오는 아웃풋을 보면 정말 멋있어요. 특별한 생각이 있는 자들에게 ‘한 장 도식화 그리기’ 정리법이 더해지면 어마어마한 성과가 나오더라고요. 도식화는 ‘정리 언어’라고 볼 수 있어요. 알파벳을 배우면 영어를 읽을 수 있듯,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방법만 조금 익히면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는 거죠.



‘나’에게도 연습할 시간을 주세요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정리할 때도 도식화를 활용하시나요? 

저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조건 종이에 써 봐요. 그렇게 해서 한 장으로 정리가 안 되면 일을 진행하지 않고, 다시 생각하죠. 한 장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건 내 안에서도 정리가 안 되었다는 뜻이거든요. 사실 도식화 그리기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정리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 분들은 타고난 달변가인 거고, 저는 후천적 노력으로 기술을 습득한 거죠. 너무 주저리주저리 하는 스타일이어서 일부러 의식하고 더 잘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걸 가르치게 된 거예요.

비단 기획서 쓸 때가 아니라 일상적인 생각을 정리할 때 써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조금만 마음이 불편하면 무조건 종이에 써 봐요. 두루뭉술하게 느끼는 어떤 감정에 대해서도 쪼개고 흐름을 그리다 보면 쉽게 정리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왜 불안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불안한 이유를 쭉 써 보고,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없는 문제를 나눠보기만 해도 쓸 데 없는 걸로 깊이 고민했다는 걸 알게 되죠(웃음). 

책을 보면 쉽게 느껴지지만, 막상 따라하려면 막막한 독자들이 있을 텐데요. 정말 연습하면 도식화 그리기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저희 아이가 지금 38개월인데요. 뭐든지 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시기라 오늘 아침에는 마스크에 끈 끼우는 걸 하겠다고 우겼어요. 결국 제가 해주면 1초에 끝났을 일이 20분이나 걸렸죠. 오늘은 20분만에 끈을 끼웠지만 ‘스스로 집중하고 격려 받는 경험을 반복’하면 곧 잘하게 될 거예요. 언젠가는 저처럼 1초만에 끈을 끼우는 날도 오겠죠.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책 한권 읽고 ‘어? 해봤는데 안 되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스스로 집중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하면서 속이 터지고 답답할 때가 많겠지만 나라도 나를 기다려줘야죠(웃음).  

『기획의 정석』은 여전히 신입사원들의 필독서로 여겨지고 있어요.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첫 책을 내고 비장해지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카이스트 대학교에 강의를 가서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교수실에 기획의 정석 책이 몇 박스 쌓여 있는 거예요. 상담하러 온 친구들에게 책을 선물로 준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어떤 분은 회사에서 팀장님이 “이거 읽고 이대로 써와라”라고 하셨대요. 제 책이 시작하는 사람들의 가이드로 쓰인다는 걸 알게 되니까 어깨가 정말 무거운 거예요. 그래서 매번 새로운 책을 펴낼 때마다 스스로에게 ‘진짜 써먹을 수 있어? 막막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돼?’라는 질문을 괴로울 정도로 했어요. 비장하게 ‘기획, 제안, 보고, 도식’ 시리즈 안 끝내면 다른 거 안 한다고 마음 먹은 세월이 어느덧 10년이네요(웃음). 도식까지 펴내서 이제 홀가분 해요.


 

『산으로 가지 않는 정리법』을 왜 읽어야 하는지, 한 마디로 정리해 주신다면요.

“책을 읽고, 한 장 도식화 그리기를 딱 3개월만 연습해보시면 주위의 반응이 달라질 거예요!” 한 달은 너무 짧고요. 3개월 정도 해보시면 감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한번 변화를 느끼면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되실 걸요? 




*박신영

대학시절 ‘공모전 상금으로 혼수준비를 다 마친 공모전의 여왕’이라 불리며 상을 휩쓸고 다녔다. 제일기획 입사 후 AP전략그룹에 소속되어 맨땅에 구르며 거칠게 실무 기획 내공을 쌓았다. 그때 기획은 정답 없는 영역이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막막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느끼고 10년 삽질 후 얻은 엑기스를 탈탈 털어 ‘기획의 정석’ 시리즈를 출판했다. 이 책은 배운 적 없지만, 해내야만 하는 눈물겨운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의 절절한 지지를 받으며 입소문을 타고 10만 권 이상 팔리며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그녀의 책은 삼성, LG, 포스코, CJ, 롯데, 월드비전 등 유수 기업에 기획 교과서로 선정되었고 대학교 교재로도 쓰이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출강 의뢰를 받고 있는 그녀는 현재 기획이 막막한 기막힌 사람들의 학교, ‘기획스쿨’에 소속되어 기획, 제안, 보고, 발표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연구와 출강에 집중하고 있다.



산으로 가지 않는 정리법
산으로 가지 않는 정리법
박신영 저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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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정 “에세이는 자기 인생을 팔아서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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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키워드는 공정과 성장인 것 같아요.” 정문정 저자는 말했다. ‘무례한 세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던 전작(『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성장의 출발점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은 그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자연스레 ‘공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거듭 들여다봐도 시대는 불공정했고 그 속에 기회를 갖지 못한 청춘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정문정 저자는 “더 좋은 곳으로 함께 가자”고 이야기한다. 



에세이, 인생을 팔아서 쓰는 장르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 나온 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책이 나온 2018년은 저한테 정말 선물 같은 해였어요. 그 책으로 인해서 새로운 기회도 많이 얻었거든요. 그러면서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게 됐어요. 졸업하게 된 거죠. (웃음) 또 2019년은 아기 엄마로 살았어요. 회사를 졸업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 것들이 있었고, 2020년은 그것들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쓰는 시간이었어요. 

전작이 엄청난 사랑을 받았잖아요. 이번 책을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잘 돼야 될 텐데’라는 생각에 부담감도 조금 있었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약간 내려놨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제 평생에 팔 책을 이미 판 거예요. (웃음) 그렇게 생각하면 판매량에 대한 생각보다는 조금 더 정돈된 느낌,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의 글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그런 고민도 조금 있었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려면 계속 책을 쓰는 방법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에세이는 자기 인생을 팔아서 쓰는 장르예요. 자기의 인생, 사고방식, 생각 같은 것들을 온전히 압축해서 어떤 변화들 속에서 조금씩 나오는 것인데 ‘과연 1~2년 사이에 이전의 책에서 움켜쥐지 못했던 것들을 풀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았어요. 독자들이 ‘이 작가가 조금 더 성숙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네, 문장이 조금 더 좋아졌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성숙의 측면에서 접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엄청 부담을 갖지는 않았어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은 동명의 칼럼에서 시작된 책이었죠. 이번 책은 어땠나요? 

이번에는 ‘나를 키우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변한 저의 시각에 대해서 써보자고 생각했고요.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같이 좋은 곳으로 가자’는 거였는데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는 느낌을 계속 받게 됐어요.『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쓸 때는 제가 ‘갑질’이라는 키워드에 굉장히 집중했었어요. 갑질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칼럼을 썼던 거고, 갑질 또는 무례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에 조금 더 집중해서 책을 썼던 거예요. 이번 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요즘에는 불공정이라는 화두가 굉장히 많아지고 있잖아요. 

‘공정’은 이번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네. 심지어 제가 아이를 낳고 나니까 더 많이 느껴져요. 책에서도 저희 남편 이야기를 했는데, 저희 남편은 정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에요. 연애를 할 때 ‘저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성숙하고 삶의 지혜가 있을까’ 신기했어요. 그런데 결혼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거죠. ‘저 사람은 주변에 ’책 같은 사람‘이 참 많았네, 그러니까 굳이 책으로 간접 경험할 필요가 없었네’ 하고요. 그런데 저는 간접 경험을 해야만 했던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나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나는 간접 경험을 해서라도 그런 것들을 쌓았고, 남편은 간접 경험을 하지 않아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렇게 불공정한 시대에 기회가 없는 젊은 친구들은 나처럼 고민하고 있는 경우가 많을 텐데 그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떻게 하면 돈 없고 빽 없는 친구들에게도 ‘우리 더 좋은 곳으로 가자,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그게 저의 가장 큰 고민이고 화두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좋은 곳으로 가자』가 책의 제목이 되었군요.

언론에서는 자꾸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말하고, 어떤 수저를 타고 나지 않으면 끝장인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니야, 내가 살아보니까 그게 아니야’, ‘물론 그건 중요하지,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돈이 최고야, 부모 잘 만나는 게 최고야, 네가 노력해봤자 닿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런 생각들이 책에 실렸고, 이것을 가장 포괄하는 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니까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을 거는 이야기더라고요. 그 문제의식이 있어서 제목을 그렇게 짓게 된 거예요.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곳이 ‘좋은 곳’일까요?

좋은 곳이라는 건 굉장히 주관적이잖아요. 나에게는 좋은 환경이 다른 친구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일 수도 있죠. ‘더 높은 곳으로 가자’고 하지 않고 ‘더 좋은 곳으로 가자’고 한 이유는, 어쨌든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어요. 연애든, 직장이든, 결혼이든, 어떤 환경에서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어요.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을 때, 여기보다 좋은 데로 못갈 것 같을 때, 그럴 때 우리가 괴로워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을 약간 버틸 수 있어요. 이게 임시라고 생각하면.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기 힘든 이유는 뭘까요?

요즘은 더 좋은 곳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믿는 것은 굉장히 나이브하고 순수한 사람의 착각처럼 사람들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돼, 여기에서 더 망하는 거야’라고 자꾸만 협박하고 위협하고요. 지금 ‘영끌’이라는 말로 부동산과 주식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런 것을 소비하는 가장 큰 논리는 불안감 조성인 것 같아요. 지금이 아니면 끝장이고, 지금이 아니면 더 나빠질 거라고 압박을 주는 거죠. 저는 ‘아니야, 더 좋은 곳이 있을 수 있고 분명히 이게 끝이 아닐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더 좋은 곳이 있다는 걸 상상할 수 있어, 그건 누군가가 단정하는 객관적인 건 아니야, 너의 삶에서 더 좋은 곳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니컬하게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책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솔직하게 들려주셨어요. 굳이 드러내거나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 않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지난 시간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맞아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저는 글을 쓸 때, 다시 떠올려서 지금의 감정이 움직이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절대 쓰지 않아요. 그건 저의 원칙이에요. 지금 너무 뜨거운 것이라면 이미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소리예요.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쿨한 척 쓰려고 해도 나의 입장으로만 쓸 수밖에 없어요. 내가 비극의 주인공, 피해자가 돼요. 그런데 객관화를 하고 거리를 둔 다음에 쓸 수 있는 글은 분명히 달라요. 

객관화, 거리두기를 위해 노력하시는 부분이 있나요?

그걸 위해서 항상 저 자신에게 물어봐요. ‘이걸 쓸 때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이제 이것 때문에 괴롭지 않니? 확실하니?’ 하고요.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만 글을 써요. 객관화되고 거리두기를 했을 때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게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예술가가 씹어 삼켜서 자기 것으로 소화했을 때 줄 수 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앞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셨죠. 두 번째는 뭔가요? 

저는 솔직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솔직함을 무기로 쓰지는 않아요. 제가 어떤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함이에요. 분명한 의도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요즘 친구들이 (현실이) 너무 불공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제가 가난했던 이야기를 넣어요. 제가 너무 가난하고 불쌍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 이야기를 쓰는 게 절대 아니에요. 목적의식 없이 솔직함만을 무기로 쓰면 그 글은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보는 사람들이 지겹고 지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솔직하지만 목적의식 없이 솔직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데는 자기연민이 깃들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책의 내용에 따르면, 작가님은 경제적/문화적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하셨어요. 주변에는 ‘너는 다 이룰 수 있다,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어른도 없었고요. 그런데 주저앉지 않고 더 좋은 곳으로 가셨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일단 첫 번째는요, 그게 중요하다고 믿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자기한테 없는 게 보이면, 그걸 자꾸 의식하는 게 괴롭기 때문에, 별 거 아니고 필요 없는 거라고 생각해버려요.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처럼 ‘그거 별 거 아냐, 해봤자 아무것도 아냐’ 하고 생각해버려요.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게 중요하다는 걸 잊어버리면 안돼요. 중요하다는 걸 아는데 지금 가질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라도 어떻게든 가져야 되니까, 저는 그러려는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책 같은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어요. 문화 자본이나 인맥 자본이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책인 것 같아요. 굳이 사지 않아도 도서관에 가면 읽을 수 있잖아요. 자꾸만 ‘안 된다’고 하는 말들을 들으면 책에서 ‘된다’고 하는 말들을 많이 읽었어요. ‘안 된다’는 말들 때문에 마음이 조금 더러워지는 날이면 ‘된다’는 말들을 통해서 다시 원점으로 만들고요.


 

책에서 “긍정의 말들로 채워진 부적”이라고 표현하셨죠.

네. 그런 부적을 많이 모으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그리고 가능하면 나와 비슷했던 사람들을 많이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자기연민에서 벗어나려는 연습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20대 때 저의 투쟁 같은 것이었어요. 취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자기연민이 가장 최악인 것 같아요. 자기를 불쌍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나아갈 수가 없어요. 누군가가 도와주려고 하더라도 자꾸만 ‘네가 뭘 알아?’ 하는 식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멀어지게 해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하셨어요?

책으로라도 간접 경험을 했던 것이 한 흐름이었고, 두 번째는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그런 사람들이 근처에라도 있는 환경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언저리라도 가려고. 예를 들면 독서모임을 간다든지, 익숙한 곳을 떠나서 나를 특이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 있는 거예요. 여기보다 조금 더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는 곳으로, 의식적으로 계속 갔던 것 같아요. 여기에서 ‘안 된다고’ 하는 말들과 여기보다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그래, 이게 끝이 아니야’, ‘이게 다가 아니야’ 하는 말들을 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사랑하는 이에게 말하듯이

전작과 이번 책 모두 안타까움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초년생 또는 청년들을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인데, 그들 안에서 ‘과거의 나’를 보시는 것 같아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은 제가 팀장이 됐기 때문에 쓴 책이에요. 팀장이 되지 않았다면 안 썼을 거예요. 제가 사회초년생일 때 괴로웠던 것들을 팀장이 된 후에 어떤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걸 보면서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이고, 나 또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망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객관화되는 지점이 있었어요. ‘사회초년생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또 상사들도 저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히 있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 싶었던 거예요. 저는 항상 글을 쓸 때 안타까움에서 출발하고 ‘어떻게 해야 되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이번 책도 그런 거죠. 모든 에너지가 기본 원리가 낙차에서 얻어진다는 거잖아요. 저는 낙차를 굉장히 많이 경험했어요.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낙차를 경험했고, 돈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메뉴판에서 가격부터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됐고, 내가 선망하던 직업도 가졌고, 아이 엄마가 되었고... 이런 식으로 전후의 삶의 격차를 경험하다 보니까 보이는 것들이 있었어요. 디테일한 말로 그것들을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훈계의 방식이 아니라, 디테일 없는 조언이 아니라, 최소한 내가 알아냈던 방식에서 자기연민하지 않고 우월감을 가지지 않는 방식으로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런 이유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주신 건가요?

제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동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 저는 되게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제가 어떤 사회적인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저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고 끝도 아니라는 말을 계속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안타까움에서 끝나면 안 되잖아요. 제 모토 중에 하나가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할 때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받아들여’라고 말하지 않을 거잖아요. 절대로. 우리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잖아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말하듯이 한다면, 그게 다가 아니고 끝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것 같아요. 

회사 생활과 관련해서 디테일한 조언들도 많아요. “그 사람, 영원히 네 위에 있지 않다”는 말도 그 중 하나예요. “어떤 상황도 삼 년은 안 간다”는 거죠. (웃음)

진짜 그렇더라고요. 물론 3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게 영구하지는 않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더라고요. 

퇴사는 ‘1년 동안 버틸 수 있는 자본을 만들고 나서’ 하라는 말씀도 해주셨죠. 

제가 살면서 실수했던 것들 또는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들을 돌아보면 항상 너무 절박했어요. 그 절박함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박함은 결국 돈에서 나오거든요. 일단 1년치 생활비 정도만 있어도 비굴하지 않게 회사를 다닐 수 있고,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조금은 여유를 가진 상태에서 다음 스텝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홧김에 그만두고 나면, 여기에서 굽신거리기 싫어서 그만뒀는데 더 굽신거려야 돼요. 누군가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굽신거리든, 아니면 더 안 좋은 곳에서 굽신거리든. 그 굽신거리게 되는 게 사람의 영혼을 굉장히 파괴해요. 그래서 인간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주 최소한의 자기 자본금이 있어야만 해요. 그러니까 더럽고 치사해도 일단은 1년치 생활비, 힘들면 최소한 6개월의 생활비는 모은 다음에 다음 스텝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버려진 사람’이 아니라 ‘생존한 사람’이에요

「버려진 게 아니고 발견되었다」라는 글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돌아보며 내 식으로 해석해낼 때, ‘발견되었다’라고 쓸 수도 있는 것에 굳이 ‘버려졌다’고 쓰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본다”고 쓰셨습니다. 

조해진 소설가님의 『단순한 진심』을 읽으며 깨달은 건데, 그 책을 읽고 한동안 너무 기분이 좋고 설렜어요. 한편으로는 ‘내 아이에게도 이 말을 꼭 해줘야지’ 싶었어요. ‘어떤 것들을 볼 때 당장 ’버려졌다‘고 생각하더라도 ’발견됐다‘고 말할 수 있어, 네가 철도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철도에 버려진 건 아니잖아?’ 하고요. 우리가 그런 말들을 계속 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애써 거부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걸 통해서 어떤 힘을 얻는 거죠. 그런데 굳이 안 내도 되는 상처를 낼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상처를 피할 수도 있는데, 그걸 너무 자기 캐릭터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버려진 사람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건 모 아니면 도인 것 같아요. 정말 위대한 예술가가 되거나, 증오와 미움의 힘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그런데 그런 사람은 소수인 것 같아요. 오히려 ‘이게 다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주변을 봐도 ‘발견됐다’고 쓰는 사람들이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더라고요. ‘버려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랐더라도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더라고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기가 피해자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는 거죠. 내가 제일 피해자인데 어떻게 다른 피해자들의 말이 들리겠어요. 그래서 피해자의 관점에서 벗어났을 때 보이는 게 있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저도 한때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죠. ‘왜 나에게는 이런 조건밖에 주어지지 않았지? 왜 나는 버려진 걸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그 시기를 지나고 와서 보니까, 거기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나의 힘이잖아요. 

힘이라고요?

그걸 나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나아갈 수 있어요. ‘버려진 사람’이 아니라 ‘생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위대한 사람인 거예요. 대단한 사람인 거죠. 이미 존재 자체로 대단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자신 있게, 조금 더 가뿐하게 할 수도 있어요. 이미 커다란 걸 이뤘으니까 이제부터는 부담을 조금 덜 갖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전작은 ‘무례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나를 키울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제 책이 단순한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자기계발적인 요소가 굉장히 많죠. 자기계발이라는 건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데, 제가 말하는 자기계발은 나를 희생해서 조직에 무언가가 되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지금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예요. 나를 지금의 환경보다 조금 더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거죠. ‘나를 키우는 법’에 대해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나는 버려진 사람이 아니니까 포기하지 말고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조금 덜 지치고 조금 더 오래 가기 위해서 ‘요령’도 더하고, 말들의 ‘부적’도 많이 가지고서 담백하게 갔으면 좋겠고요. 그런 마음들이 위로가 되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자 힘이 되면 좋겠어요. 




*정문정

대구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잡지 기자로 시작해 기업 브랜드 홍보팀장, 대학내일 디지털미디어파트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십 년간 다양한 채널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었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와 함께 책 『20대를 읽어야 트렌드가 보인다』 『20대가 당신의 브랜드를 외면하는 이유』를 썼다. 전작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은 누적 판매부수 50만 부를 넘어섰으며 아시아 6개국(중국, 일본, 태국, 대만, 베트남, 인도네시아)에 판권이 수출되었다. 『빅이슈』 『언유주얼』 『포포포 매거진』, 브런치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했으며,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배워서 남줄랩], [잠깐만 캠페인], [열정 같은 소리]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지침으로 삼고 있다. 막막한 순간에 누군가 내게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말들을 모으고 쓴다.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더 좋은 곳으로 가자
정문정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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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종, 이재익 “서울대 아빠가 내 아이에게 꼭 해주고 싶은 교육은 ‘문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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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재익, 김훈종 PD

『서울대 아빠식 문해력 독서법』의 저자 김훈종과 이재익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어릴 때 책을 아주 좋아했던 점, 학업 성취도가 좋았던 점, 방송국에서 PD로 일한다는 점, 그리고 자녀의 독서 교육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아빠라는 점이다. 현재 중학생 자녀를 둔 김훈종과 고등학생 자녀를 둔 이재익은 지금 같은 영상의 시대에 읽고 쓰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즉 문해력은 가깝게는 학습 능력부터 멀게는 직장 생활과 인간 관계에서의 소통 능력에까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해력 교육은 일상 생활에서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자들은 입을 모아 “자녀에게 문해력을 길러주는 것이야말로 자녀의 삶에 큰 도움이 되는 무기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훈종과 이재익은 문해력 교육에 왜 자녀와의 친밀한 관계가 중요한지, 자녀와의 친밀함을 위해 그들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궁금한 사람들, 특히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들에게 이 책을 권하며 “오늘 조금 피곤하더라도 그 피곤함을 조금은 무릅쓰는 용기를 내달라”고 말했다.



아빠의 관심이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

책을 기획한 것이 김훈종 PD님이었죠? 자녀를 위한 독서법 책을 쓰고 싶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김훈종: 요즘 아이들이 책을 많이 안 읽잖아요. 제 아이도 예외는 아니고요. 아이 키우는 부모님들 대부분이 같은 고민을 갖고 있을 것 같았어요. 마침 이재익 PD의 아들이 저희 아이보다 두 살 많거든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가 했던 고민, 우리가 가진 솔루션을 나눠보자고 제안을 했죠. 전형적인 얘기들 있잖아요. ‘아이 교육을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고요. 저희는 그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 편이었거든요. 아빠의 관심이 아이들에게 더욱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저희 경험을 전하고 싶었어요.

두 분에게는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보이는데요. 먼저 공통점이라면 방금 말씀처럼 자녀와의 관계가 일찍부터 돈독했다는 점일 거예요. 관계야말로 자녀 교육에 중요한 요소잖아요. 

이재익: 아이를 교육하려면 일단 아이의 귀가 열려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아빠라는 사람은 내가 얘기를 해 볼 만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요. 그게 정말 쉽지 않거든요. 저도 돌아보면 학창시절에 아빠와 대화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 부분을 굉장히 많이 신경 썼어요. 언론을 열어놓기 위해서요.(웃음)

김훈종: 핵심적인 부분을 지적해 주셨는데요. 이 책은 단순히 문해력 독서법에 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니고요. 자녀에게 사랑과 관심을 많이 주자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에요. 결국은 소통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소통을 위해 했던 노력 중 파격적인 일화도 있죠. 이재익 PD님이 자녀의 초등학생 시절에 욕설을 듣고, 그냥 넘어가는 장면이 그랬어요. 

이재익: 삶에서 최선을 택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오지 않잖아요. 보통은 그저 그런 것과 나쁜 것 중에 나쁜 것을 피하고, 어지간한 것을 선택하는 일이 반복돼요. 아이가 제 앞에서 무심코 친구들과 하던 욕을 했을 때 고민한 것도 비슷했는데요. 그 욕설을 고치려다 아이랑 어색해질 것인지, 아이의 욕설을 감안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면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 고민한 거죠. 최선은 아니지만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이와 어색해지는 것보다는 덜 나쁘다는 생각을 한 거고요. 무엇보다 아이가 내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순간 저는 아이에게 친한 척을 한 거죠.(웃음)

김훈종 PD님은 청소년기 자녀와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10년 전부터 이른바 “트로이 목마”를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죠. 

김훈종:트로이 목마라고 말했지만 아이가 어릴 때부터 계획적으로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요. 그저 좋은 아빠의 기준은 소통이라고 생각을 했던 거예요. 저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명예로운 일을 해도 아이와 대화가 끊기면 좋은 아빠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건 하기 싫었어요. 한편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놀이밖에 없거든요. 흔히 부모들이 불평하는 게 중학교 1학년 아이가 벌써부터 방문을 팍 닫고 들어간다, 문 잠그고 불러도 대답도 안 한다, 말을 안 한다, 같은 거잖아요. 하지만 아이가 서너 살일 때, 놀자고 하면 매일 놀아줬다 말할 수 있는 분은 아마 없을 거예요. 힘들고 지치는 게 당연해요. 그걸 탓하는 건 아닌데요. 아이가 사춘기 때에도 소통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면 아이가 어릴 때 힘들어도 함께 노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진짜 아이와 많이 놀았어요. 

아이와 놀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봤다고 할 만한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김훈종: <전망대>라는 새벽 시사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어요. 오전 6시에 방송이 시작이라 늦어도 새벽 4시에는 일어나는 생활을 했죠. 또 프로그램 특성상 월요일에 방송할 내용을 토요일이나 금요일에 미리 정해 둘 수가 없었거든요. 사실상 토요일 하루 정도 쉬었던 것 같아요. 강행군이었죠. 그 와중에 어느 날 아이가 수영장을 가고 싶다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아내는 저보다 더 바쁜 상황이라 제가 수영장을 데리고 가야 했어요. 아직도 그 수영장 땡볕에 서서 눈으로는 아이를 보며 국회의원 섭외 전화를 했던 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웃음)


이재익 PD

책을 읽도록 유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두 분이 말하는 독서교육의 큰 전제는 ‘내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인데요. 아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도 말하죠. 

김훈종: 저는 어릴 때 책을 너무 좋아했는데 아이는 책을 너무 안 보더라고요. 저는 어릴 때 책이 비싸고 귀해서 맨날 읽은 책 또 읽고, 빌려서 읽고 그랬는데요. 사실 아이는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제가 관련 참고도서까지 막 사다 주거든요. “아빠는 책이 없어서 못 봤다”는 말을 너무 하고 싶은데(웃음) 그래도 참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대화가 끝나버릴 것 같아요.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을 그대로 투사하면 관계는 무조건 깨진다고 생각하고요.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도 “나 때는~ ”이라는 말은 사용하면 안 됩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여러 방안을 만들고 유혹을 해야죠. 

두 분은 책을 읽도록 유혹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들을 하셨는데요. 특히 이재익 PD님은 웹툰이나 웹소설도 무제한으로 허용했다고 했잖아요. 이것도 차악을 선택한 거죠? 

이재익: 어쨌든 학원 일정 등 실질적인 면에서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내죠. 제가 적극적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아내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부탁을 했어요. 웹툰과 웹소설 보는 부분은 풀어줘야 한다고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설득을 많이 했는데요. 저는 그 덕분에 엄청나게 길고, 어려운 문제집 지문을 빨리 읽어내는 방법이 자연스럽게 길러졌다고 생각해요. 아마 웹소설을 못 보게 했다면 그렇게 긴 글을 읽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예요.  

글의 종류, 분야를 떠나 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최대한 허용했다는 거군요. 

김훈종: 당연히 인문서, 과학서를 읽으면 좋겠지만 그런 책들을 처음부터 읽을 수는 없어요. 저나 이재익 PD도 어릴 때 소설을 많이 읽었거든요.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읽었던 경험이 공부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저희의 학습 능력에 굉장한 도움을 줬다는 것을 둘 다 공통적으로 느꼈고요. 때문에 아이가 이야기책만 읽더라도 어쨌든 종이로 된 활자를 읽는 것은 무조건, 열렬히 환영했어요. 그런 시간이 학습에도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확신해요. 

두 가지 고민이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가 책을 아예 안 읽는 아이를 어떻게 읽게 할 것인가고요. 두 번째는 어떻게 읽히고 싶은 책으로 넘어가게 할 것인가예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첫 번째 고민에 대한 힌트라면 두 번째 고민에 대한 힌트는 어떻게 줄 수 있을까요? 

이재익:아이들은 멋있는 걸 좋아해요. 뭔가 있어 보이는 걸 좋아하잖아요.(웃음) 책도 그런 걸 살살 자극하면 좋죠. 내가 지금까지 봤던 이 책들이 사실 유치한 거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알아서 읽게 되어 있거든요. 저도 그랬어요. 다 이해도 못하고 『코스모스』를 읽으면서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커리어와 권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 있게 던지는 말들이 너무 멋있게 느껴져서 끝까지 읽었거든요. 읽고 나니 성취감이 대단했어요. 그런 경험을 하면 점점 더 도전 의식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활자 중심의 제대로 된 읽을거리로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강요하면 절대 안 되고요. 아이가 어떤 걸 읽으면서 뿌듯해 하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잘 보면 다 보여요. 

김훈종: 도서관을 잘 활용하시면 좋겠어요. 도서관에 가서도 절대로 어떤 책을 읽어보라고 강권하시면 안 됩니다. 심지어 가기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그냥 가서 라면 한 그릇만 먹고 와도 돼요. 자꾸 가다 보면 아이가 도서관 내부로 진입하는 단계가 올 거예요. 일단 진입만 하면 반은 성공한 거고요. 거기서 <씨네21> 같은 잡지나 보고 싶었던 책을 읽으면서 “너도 하고 싶은 거 해”라고 해보세요. 알아서 책을 골라오기 시작할 거예요. 처음에는 아이들도 잡지도 보고, 그림책도 보고, 여러 가지를 볼 텐데요. 재밌으면 대출도 하는데 대출은 반납 기간이 있으니까 대개는 완독을 하죠. 이렇게 꾸준히 도서관을 이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림책에서 활자책으로 넘어갈 거예요. 


김훈종 PD

말 그대로 은밀하게 벌어지는 ‘유혹’이군요.

김훈종: 그렇죠, 또 좋은 방법이 있는데요. 책 관련 예능 프로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유튜브 영상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걸 같이 보는 것도 좋아요. 보다가 아이가 관심을 보이면 바로 그 책을 총알 배송 하셔야 합니다.(웃음) 역시 강권하면 안 되고요. 그냥 책상에 책을 놓아두기만 하면 돼요. 저희 아이는 그랬더니 『멋진 신세계』 같은 책을 하루 만에 읽더라고요. 일단 스파크가 튀니까 스스로 읽는 거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서 체험이 쌓이고, 관심 분야가 넓어지는 것 같아요. 

김훈종 PD님은 만화로 요약된 명작류의 책은 지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셨는데요. 

김훈종:아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작품들이 있죠. 니체니 맹자, 논어 같은 책들 말이에요. 문제는 이 책들이 어렵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어려운 고전을 만화로 쉽게 녹인 책을 읽으면 결국은 얻는 것은 ‘나 뭐 읽었다’ 라는 느낌뿐이에요. 『논어』 같은 책들은 저도 열심히 읽었기 때문에 아이가 보는 만화로 된 논어를 한 번 봤더니 안 읽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그런 책을 아이가 읽도록 둔 것이 가장 후회되는 부분인데요. 역시 이것도 안 읽는 것보다는 낫죠. 참고로 그냥 만화책은 괜찮습니다. 그냥 만화책은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픽션이니까요. 



일찍부터 문해력 독서를 한다면

이재익 PD님은 자녀 분이 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잖아요. 그동안 시도한 수많은 유혹법이 학교에서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 것 같나요?  

이재익: 얼마 전에 교내 백일장 1등을 했어요.(웃음) 아이의 학교 국어 시험지를 본 적이 있는데요. 엄청 어렵더라고요. 지문이 너무 길고요. 그런데 저희 아이는 일단 속독이 되거든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엄마한테 들키기 전에 빨리 웹소설을 다 읽어야 하니까 정말 막 읽거든요.(웃음) 활자를 빨리 머릿속에 집어넣는 습관이 일찍 길러진 덕분인지 국어 시험을 볼 때 시간 부족하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어요. 보통은 다 못 풀었다, 지문 두 개를 못 봤다, 이런 고민들을 많이 말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독서량이 많은 친구들은 어렵고 긴 것들을 만날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거죠. 

김훈종: 이재익 PD는 수능 첫 세대, 저는 두 번째 세대인데요. 수능으로 바뀌면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이 언어 영역이었어요. 엄청나게 지문이 늘었고요. 수능이 뭔지도 모르고 시험을 봤지만 어릴 때 읽었던 명작 동화가 정말 도움이 된 것 같거든요. 더구나 지금은 수능뿐 아니라 학교 내신조차도 국어 영역에서 긴 지문들이 나오는 시대가 왔단 말이죠. 일찍부터 문해력 독서를 한 친구는 아마 날아다닐 거예요. 문제는 문해력이 단기간에 습득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공식도 없고, 외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죠. 일주일 동안 책을 읽는다고 늘어나는 실력이 아니거든요.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읽은 수많은 책들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어릴 때 한자를 가르치라고도 했잖아요. 어떤 이유인지 설명해주세요. 

김훈종: 우리 말의 70-80%가 한자로 이루어져 있죠. 한자를 아는 것은 악보를 볼 줄 아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악보를 그냥 외워서 연주하면 그 한 곡만 연주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악보를 볼 줄 알면 어떤 악보가 주어져도 언제든 연주가 가능해요. 마찬가지로 한자를 알면 말의 뜻을 쉽게 알 수 있거든요. 가령 수학에 등비수열, 등차수열이 나와요. 한자를 알면 개념이 바로 머리에 들어와서 외울 필요가 없어요. 하다못해 수학도 그런데 국어나 사회과목은 오죽하겠어요. 한자를 아는 것은 굉장히 예리하게 벼린 도구를 하나 얻는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뭉툭한 칼이나 손으로 자를 때 예리한 칼을 가지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그렇다면 한자 교육은 언제부터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김훈종:초등학교 저학년 부모님들께 특히 권하고 싶은데요. 당장 수학, 과학 등 할 게 너무 많으니까 한자 가르치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국어 과목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거든요. 문해력이 정말 중요해졌어요. 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도 문해력은 정말 중요하고요. 아이가 문과를 가든 이과를 가든 결국은 문해력이 필요한데 이때 한자는 너무나 좋은 도구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자에 들이는 시간들이 안 아까우실 거예요. 

“독서도 글쓰기도 느슨한 계획을 짤 필요가 있습니다.”(301쪽)라고도 했어요. 

이재익: 책을 쓰면서 시중에 출간된 관련 책들을 봤는데요. 다 계획을 근사하게 제시하고 있더라고요. 그대로 하면 완벽하겠지만 절대 그대로 안 되는 게 문제죠.(웃음) 아이들이 우선 바쁘고요. 따라서 최대한 효과가 있을 정도의 선을 정해서 느슨하게 하는 게 중요해요. 무엇보다 아이가 어릴 때 시작하는 게 중요하죠. 벌써 중학교 들어간 아이를 붙들고 갑자기 “아빠가 서울대 나온 아빠들이 쓴 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해봐”라고 하면 안 될 거예요. 




*이재익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문학사상〉소설부문으로 등단해 종이책, 영화시나리오, 일간지 칼럼, 네이버 웹툰-웹소설 등 전방위적인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오리콤 카피라이터를 거쳐 SBS 라디오 피디로 입사, <컬투쇼>, <씨네타운> 등을 연출하고 현재는 <시사특공대>를 연출 및 진행하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과학고에 다니는 아들을 둔 뼛속까지 문과 아빠.


*김훈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먹을 갈아 화선지에 붓으로 써가며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외웠고, 한글 반 한자 반 신문을 옥편 찾아가며 읽었다. 이미 윈도95가 전 세계를 휩쓸던 시절에도 대학에서 《맹자》 원문을 한 땀 한 땀 필사하며 익혔다. 정이 떨어질 법도 하지만 삶의 굽이굽이마다 고전을 읽었고, 큰 힘을 얻었다. 이제는 어떻게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고전의 맛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하하의 텐텐클럽>, <최화정의 파워타임>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거쳐 현재 <허지웅쇼>를 연출하고 있다. 이재익 등과 함께 2012년부터 지금까지 팟캐스트 <씨네타운나인틴>을 진행하고 있다. 이과 기질의 중학생(영재원 출신) 아들을 둔 서당 출신 문과 아빠. 




서울대 아빠식 문해력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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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 김훈종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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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시인 “이렇게 솔직해도 되냐는 물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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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감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시인 백은선의 산문을 읽는 재미. 솔직하지 않은 글은 쓸 수 없다는 태세를 갖추고 쓴 듯한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시인은 갈팡질팡한 마음을 수시로 드러내며, 무엇도 단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는 전 남편의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이혼하기 전) 계약한 책이다. 이 사실을 굳이 밝힌 이유는 감춰야 할 이야기도, 못할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백은선 시인은 스스로를 두고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글에서만큼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마음을 내보이며 손짓하고 있다. 시인은 이 책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산문집”이라고 했다. 




나를 좀더 드러내도 되는구나

작년에 <주간 문학동네>에서 연재했던 산문들을 묶었어요. 당시 반응이 꽤 특별했던 걸로 기억해요. 

원래 산문집을 먼저 계약했는데 제가 원고를 계속 안 드렸어요. 한 1년 정도 가만히 있었거든요. 아마 저를 그냥 놔두면 원고를 받기 힘들겠다고 생각하셔서 연재를 제안하신 게 아닐까 (웃음) 싶어요. 반응은 글쎄요. <주간 문학동네>는 조회 수를 볼 수도 댓글을 쓸 수 있는 형태도 아니다 보니까 얼마만큼 읽으셨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간혹 시차가 거의 없는 리뷰를 보게 되면 많이 신기했죠. 눈치도 약간 보이고요. 

좋은 리뷰가 많았는데 다시는 산문집을 “절대 안 쓸 것”이라고 책에 밝히셨어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생각하면서, 말하는데요. (웃음) 이 책의 반응이 엄청 좋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리고 다시는 산문을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백퍼센트 진심이었어요. 왜냐면 연재하는 동안에 시를 한 편도 못 썼어요. 아무래도 시를 쓸 때는 내 안에 언어가 생겼을 때 천천히 두고 보면서 사유가 성장할 때까지 지켜보고 글을 쓰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산문을 써야 하니까 뭐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바로 글로 옮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시로 썼으면 좋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휘발되니까, 그게 좀 힘들었어요. 또 시 청탁은 안 오고 산문 청탁만 오는 거예요. 내가 이러다 시를 못 쓰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커서 이제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재 제목은 ‘우울한 나는 사람이에요’였는데 산문집은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로 바뀌었습니다.

편집부에서 정해주신 제목인데요. 편집자님이 너무 신이 나셔서 “이 제목 너무 좋지 않냐?”고 연락을 주셨어요. (웃음) 처음엔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생각나긴 했는데, 계속 두고 보다보니 마음에 들더라고요. 저는 양보하지 않는 영역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에요. 

프로필이 실린 책 앞날개에 “파편이 내 삶의 숙명 같아요. 엄마로 시인으로 작가로 가사노동자로 선생으로 살면서 매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숙명이라면 파편의 대마왕이 되고 말 거야.”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요. 책의 정체성이 응축된 문장으로 읽혔어요.

이 문장도 편집자님이 뽑아주셨어요. 사실 이 책은 편집자님의 책이죠. (웃음)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서문에는 이런 문장도 나오죠. “이 책을 쓰게 만든 전남편 예정자가 너무나도 싫다.(13쪽)” 

당시 전남편이 카드빚이 많아서 제가 그걸 막아주려고 책을 서너 권 계약했어요. 전남편한테 말했죠. “네 이야기가 책에 들어갈 수 있고 너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간 문학동네>에 이 글을 연재할 때, 누가 전남편한테 링크를 보내줬대요. “야, 네 이야기 나온다”고. 그런데 읽고 나서 “재밌게 잘 읽었다”고 연락이 왔었어요. 책을 만들 때 편집자님도 조금 우려하셨는데요. 전남편은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알았던 사람 중에 가장 오래 알기도 했고, 친한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특별히 그런 걸로 문제 삼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연재와 단행본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었나요?

일단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볼까?’라는 생각이 있고요. 제 사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전국노래자랑> 같은 데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요. 

산문을 쓰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정리되기도 하잖아요. 어땠나요?

글이라는 게 아무리 솔직하게 써도 내가 나를 편집하잖아요. 비밀일기장을 쓰는 느낌을 갖고 글을 썼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읽는 글이니까요. 과연 이 글이 받아들여질까? 싶었는데 받아들여주시는 거죠. 그래서 ‘나를 좀더 드러내도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저는 시를 쓸 때 레이어를 많이 쌓는 편이거든요. 날것을 보여주는 일에 공포가 있었는데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최고 좋았던 건 내 글 읽고 뭔가 쓰고 싶어져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혹은 글을 쓰게 되었다는 리뷰들이었다.(151쪽)”고요. 왜 그럴까요? 

뭔가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이 제일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좋은 글을 읽으면 자극도 받고 공감하게 되면서, “아 나도 어서 쓰고 싶다” 하는 생각에 설레곤 하거든요. 제 글을 읽는 분들이 좀더 솔직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바깥으로 꺼내도 된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아서 기뻐요. 그런 목소리들이 모이면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병 생일병」에서 “이혼 후의 삶이 지금 내 가장 큰 화두.(135쪽)”라고 하셨어요. 이 산문집의 큰 줄기가 되는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범위가 있잖아요. 예를 들면 아이 유치원에서 가족사진을 가져오라고 할 때, 당연히 엄마 아빠 아이의 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조건들. 제가 작가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겪고 극복하는지를 책에서 얻고 싶은데, 그런 텍스트가 별로 없어요. 흠처럼 여기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크게 외치면 어떨까 생각한 거예요. 저도 이혼하면 하늘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또 잘 살아져요. 즐겁게요.



그렇지 않은 자신도 옳다

7살 아이의 엄마로서의 일상도 곳곳에 등장합니다. “만약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아이를 또 낳았을까?”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셨어요. 

처음부터 아이를 가진 적이 없었다면 쭉 아이가 없이 살겠다고 했겠지만 한번 만났기 때문에 ‘돌아가면 안 만날 거야’라는 선택은 못할 거 같아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아이와 저 사이에서만 가능한 사랑, 어떤 절대적인 사랑을 제가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확언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셨어요.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확언하지 않는 사람이요.(웃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 솔직하고 이면이 없는 사람이 좋아요. 의미를 감추고 있는 말들에 시달리다보면 쉽게 피로해지니까 정직하게 직진하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있을 때에 가장 행복하고 나답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연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요. 어쩐지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에게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 이 산문집을 읽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시인님이 기대하는 독자도 혹시 있을까요?

조금 모호하지만, 인생에서 어두운 구간을 통과하고 있거나 통과했던 분들이 읽으면 어떨까 싶어요. 작지만 다정한 독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저는 낯을 많이 가려서 사람들에게 먼저 잘 다가가지 못해요. 예전에 상담을 받을 때 선생님이 다가가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셔서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어려워요. 일단 전화번호를 알아도 연락을 먼저 못해요. 친구가 “나 오늘 점심 뭐 먹었는데 맛있었어.”라고 하면, “진짜 맛있었겠다”라는 메아리 수준의 답을 해요. (웃음) 저처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마음 안에 말을 쌓아두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산문집의 경험이, 백은선의 시 세계를 조금 다르게 확장시킬까요?

저는 아직 제 세계의 지도를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어떤 경험이든 겪고 나면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그런 면에서 산문집 이전과 이후가 뚜렷하게 대비되지는 않지만 분명 달라지는 지점이 생길 거라고 예감하고 있어요. 

학생들을 가르치시죠? 시 창작 수업 때, 가장 자주 하는 말들이 있나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언어로 적확하게 포획하는 법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무엇을 가르친다는 생각보다 조금 더 멀리까지 가본 사람으로서 좋은 안내자가 되자고 스스로에게 자주 이야기 하는 것 같아요.

나의 우울을 감추고만 있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계속해서 감추고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요. 언제까지나요. 스스로 드러내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 드러내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자신도 옳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시집도 곧 나온다고요. 

제목은 『도움받는 기분』이에요. 첫 시집 『가능세계』이후에 쓴 시들을 묶었으니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쓴 시들이지요. 첫 시집 이후 자유롭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최대한 스스로에게 두었던 금기를 깨며 나아가는 방식으로 쓰인 시들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래도 제 특성상 좀 어두운 내용이 많은 편인 것 같고요.(웃음) 여성으로 살고 견디며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일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인생이라는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삶과 자신 사이의 지속적인 어긋남, 그 미세한 틈을 끝없이 노려보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지 자주 다짐했어요. 




*백은선

2012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이 있다. 2017년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고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 자신의 바깥으로 가고 싶다고 늘 소망하면서도 나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슬퍼지곤 한다. 도저히 아직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일에 격렬한 동시에 의연해지고 싶다.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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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서호준 시인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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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 미지의 장소로 가고 싶은 마음을 품어본 적 있다면, 지금 한 권의 책에 ‘로그인’ 하자. 

시집 『소규모 팬클럽』은 행과 행을 건너는 모험 같은 책이다. 시집을 열면, 게임이나 판타지 같은 가상 공간에 떨어지고 한 걸음 내딛으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좌표가 휘발된 듯한 이상한 세계를 만든 설계자는 누구일까? 바로 신인 작가들을 위한 문학플랫폼 <던전>의 운영자이자 첫 시집을 낸 서호준 시인이다. 



시인이 시의 문 앞에 선 건 고등학교 때부터다. “교과서 밖 현대시를 좋아하게 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당숙한테 과외를 받았는데 시를 습작하는 분이어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생일 선물로 주셨거든요. 그 시집을 몇 번이나 읽었던 기억이 나요. 간혹 참고서에도 현대시들이 나오잖아요. 일제시기 시만 읽다가 비교적 최신 시를 읽으니 새로웠죠.”그 후 시인은 ‘대체 어떻게 이 문을 열 수 있는지’(「역사물리학」) 물으면서 시를 꾸준히 써왔다. 그래서인지 49편의 시들은 닫힌 문을 열려는 시인의 모험처럼 느껴진다.

이 모험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룰이 있다. 첫째, 현실에 없는 것을 쓸 것. 낯선 골목길을 걷듯 시를 읽다 보면 중세풍의 성이었다가 해변이었다가 떠들썩한 축제의 한복판에 다다른다. “시에서만큼은 잘 모르는 걸 쓰려고 해요. 제 성격 때문인 것 같아요. 일상이나 사람 이야기보다, 잘 모르는 걸 쓰고 싶거든요. 평소에도 낯선 곳을 가는 걸 좋아해요. 큰길 말고 일부러 골목길을 돌아다니고요. 제겐 시도 그런 모험 같은 거예요. 어디로 가도 상관 없으니까 좋은 거죠.” 

가상공간에서 마주치는 얼굴들도 모두 낯설다. 잭슨 콕, 존 코너, 아키코 등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고유명사가 펼쳐진다. “실제로 있는 걸 쓰면, 구체적인 것이 떠오르니까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를 자주 써요. 읽었을 때, 현실이 연상되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쓰다가도 너무 말이 잘 흘러가면, 맥락을 건너 뛰는 등의 시도를 하고요. 그중 유일하게 아키코는 실존 인물이긴 해요. 친구 이름이 '아키호'였는데 다들 발음을 못해서 '아키코'라 불렀죠.(웃음)” 



두 번째 룰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가상공간을 떠도는 화자는 문득 멈춰 서서 사랑과 슬픔을 떠올리지만, 그 감정을 애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사랑했어?/아마도’ (「던전이 있던 자리」)라고 답하는 다음 순간, 왜 화자는 덤덤한 표정을 지을까? “시에 어쩔 수 없이 제 상태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 감정에 갇히지 않기 위해 재빨리 빠져나오는 걸 선호해요. 제 감정이 시에 드러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다만, 감정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낙차만을 즐기는 것 같아요.” 무표정 앞에서 독자는 시를 대신해서 울고 웃게 된다. 아마 우리 역시 ‘웃을 일보다 웃음을 참는 일이 많’(「그라운드 제로」)기 때문일까.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시처럼, 시인은 시를 쓸 때도 무표정하게 쓴다고 말한다. "현실의 저는 당연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죠. 그래도 시를 쓸 때만큼은 최대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요. 아무 생각 없는 상태가 찾아오도록. 쓸 때 기울이는 유일한 노력이 그거예요. 기분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  

시인이 기다리는 건 이 모험을 함께 전개할 읽고 쓰는 동료들이다. 예전에는 문학상을 수상한 이른바 ‘등단’ 작가들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면, 지금은 독립문예지, 메일링 서비스 등 다양한 통로로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들이 늘어났다. 그중 하나가 서호준 시인이 운영하는 온라인 문학 플랫폼 <던전>이다. 정기구독을 하면 지금 가장 활발히 창작하는 신진 작가들의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창작자가 직접 작품을 발표하는 온라인 문학 플랫폼이 없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만들게 됐어요. 작가들이 작품을 투고하면 심사를 거쳐 연재하는 시스템으로요. 한두 편만 읽고는 한 사람의 세계를 알 수 없으니, 여러 편을 묶은 작품집의 형태를 택하고 있어요. 문예지에서 신인 작가의 시를 읽었는데, 운 나쁘게 그 몇 편이 하필 취향에 안 맞을 수 있잖아요. 그래도 20편 정도 읽어야, 그 사람의 시 세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온라인 플랫폼을 택한 이유는 저와 친구들이 다 인터넷에 사는 사이버 인간들이어서예요.(웃음)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죠.”

‘서호준 월드’는 당분간 계속 확장될 것이다. “굴렁쇠를 굴리듯 끝까지 뻗어 나가는 시를 쓰고 싶어요. 더 많은 걸 시에 끌어들이고 싶고요. 쓸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있어요. 쓰면서 막힐 때도 있지만 다 썼을 때 기분이 좋죠. 쓰고 나면 모든 게 원상복귀 되지만요.(웃음) 그 중독성 때문에 계속 쓰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시인은 어떤 새로움을 보여주게 될까?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의 속편이 궁금하다면, ‘소규모 팬클럽’의 일원이 되자. 미로는 이미 준비됐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문학플랫폼 <던전> 바로가기



*서호준

1986년에 태어났다. 문학 플랫폼 ‘던전’을 운영하고 있다. 『소규모 팬클럽』은 서호준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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