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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최진영 소설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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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소설에는 두 명의 ‘태희’가 등장한다. 성인 태희와 십대 태희. 성인 태희의 삶은 심란하다. “꺾이는 중이었고 부러지기 직전”이다.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한 뒤 씻고 누워 비극적인 상상과 나쁜 원망에 빠져들며 하루를 마감한다. 자기 안에 짜증이 가득 고여 찰랑거리며 지저분하게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성인 태희가 할머니의 죽음을 겪게 된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 “오늘 내가 쓴 편지를 1년 뒤에 받아도 괜찮은 사람, 그때까지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 사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약간은 유치할 수도 있는 이벤트에 동요하지 않고 그것을 비밀에 부쳐줄 사람”에게. 그 사람은 바로 십대 때의 자신이었고, 놀랍게도 그 편지가 십대 태희에게 배달된다. 편지를 받은 태희는 (미래의 자신인 줄 모르는) 또 다른 태희에게 편지를 쓴다. 이 과정 속에서 현재의 성인 태희는 엄마의 집에 찾아갈, 오랜 친구 집에 전화할 여유와 힘을 얻는다. 그렇게 태희는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내가 되는 꿈』은 인상적인 소설이다. 십대 태희가 현재의 성인 태희의 회상으로 소환되지 않고 둘의 이야기는 각각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둘을 편지라는 장치가 연결시켜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소설이 자아내는 결들이 한 층 풍부하고 생각할 거리를 많게 한다. 소설가 최진영은 단편보다는 장편 쓰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최소 3개월을 그것만 생각 할 수 있어서, 더 많이 빠져들 수 있어서다. 매일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 책상 앞을 떠나지 않고 글을 쓰는 루틴을 지키며 한국 소설에 아주 선명한 또 하나의 성장소설을 추가한 소설가 최진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명의 태희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성인 태희와 십대 태희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설정 때문에요. 

편지가 한 번씩 왔다 가죠. 예전에 소설을 쓸 때도 평범한 일상 속에 충격적인 사건을 심어놓곤 했어요. 『해가 지는 곳으로』에는 아포칼립스, 『구의 증명』에는 죽은 연인의 살점을 먹는 설정이 들어갔고요. 그런 기둥을 하나 정해놓고 쓰는 편이에요. 이번에도 성인 태희와 십대 태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소설이니까 가능한 장치를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과거의 편지와 현재의 편지가 오가는 설정을 넣었어요. 그리고 그게 소설을 쓰는 재미이기도 했습니다. 

성인 태희가 자신의 편지가 과거로 배달됐다는 걸 알게 되지만 뭔가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미래의 태희가 보낸 편지가 과거의 태희에게 큰 간섭이 안 되면 좋겠다, 그리고 과거의 태희가 보낸 편지가 미래의 태희를 결정적으로 뒤바꾸는 간섭이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십대 태희는 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것을 모르죠. 미래의 태희는 어느 정도 과거의 자기를 아니까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그것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요.

매일매일의 삶이 버거운 성인 태희에게 십대 태희가 힘을 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그렇죠. 호되게 꾸짖는 거 같기도 하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직접적인 말을 하지는 않지만 십 대 태희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괴로움 같은 걸 성인 태희에게 보여줌으로써 성인 태희가 정신을 차리는 느낌이죠.

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태희가 너무 안타까웠어요. 회사를 그만두려는 상황에서 팀 동료에게 이런 식으로 그만두면 어떡하냐는 말을 들어요.

어른이라고 다 능수능란한 것도 아니고 이별은 누구에게나 처음인데 이별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것도 이상하죠. 그런데 우리는 어른이라면 서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어느 정도 익숙하고 노련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닌 거 같더라고요. 저도 성인이지만 대부분의 상황이 다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어른이라고 아이들을 무시하면 안 되고, 아이들은 어른을 완벽한 존재라고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 속에서 성인 태희가 다양한 이별들을 경험해요. 

성인 태희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이죠. 회사도 나와야 하고 연인과도 헤어지고. 연인과는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배신당해서 헤어지는 거죠. 태희가 할머니의 죽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느꼈어요. 죽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걸 실감하지 못하는 상황인 거 같아요. 그런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떨까 상상하지만, 실제로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예상 했던 것보다 크게 무너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하게 되죠. 어쨌든 모든 이별의 순간이 살면서 한 번은 꼭 오죠. 그게 성인 태희에게 한데 모여서 온 측면이 있지만, 그만큼 한꺼번에 경험해서 태희가 잘 일어설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인간적 도리를 피하고 싶을 때마다 과잉 업무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일이 나를 망친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핑계 삼아 내가 나를 망치는 경우도 많았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에 공감하는 독자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간접 체험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기도 해요. 일이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그것만큼 그림자도 짙어서 ‘저 사람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중요한 걸 놓치고 있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어요. 저를 봐도, 제가 빨리 마감을 해야 하고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소홀할 때가 있어요. 결국에는 일 핑계를 대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을 때 자괴감이 들죠. 많은 사람이 그런 것을 느낄 거 같아요. 일은 우리를 살게 하지만 망치기도 해서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할 거 같아요.

제목은 작가님이 정하셨나요?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는 문장이 소설에 있긴 하지만, ‘내가 되는 꿈’이라는 말의 의미를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파일명이 ‘내가 되는 꿈’이었어요. 제목을 바꾸는 것에 대한 얘기도 전혀 없었고요. 어떻게 보면 꼰대같은 말일 수도 있는데, 자신의 롤 모델이나 장래 희망을 생각할 때 직업적인 측면에서 많이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단편적인 것 같아요. 직업적인 목표를 성취하기도 힘들지만 성취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스스로 직업이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어떤 내가 마음에 들어?’라고 생각하면 나를 그쪽 방향으로 이끌면서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제는 서로에게 그런 것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너 연봉 얼마야?’, ‘직급이 뭐야?’, ‘퇴사하면 뭐 할 거야?’를 묻는 것보다 ‘너는 지금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이런 걸 물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요. 그런 얘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작가님이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하늘과 나무를 자주 보고,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는 용기를 내는, 의젓한데 귀여운 구석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핑계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되겠다 

작품을 쓰면서 십대 태희와 성인 태희 중 누가 더 좋았나요? 

십대 태희에게 많이 의지했고 감정이입을 했어요. 십대 태희가 어른 태희를 살리는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십대 태희에게 친한 척을 많이 했어요.(웃음)

작가님의 십대는 어떠셨어요? 

진짜 조용했고 혼자 있을 때가 많았어요. 점심시간, 쉬는 시간에 운동장 스탠드에 혼자 앉아 있는 걸 좋아했어요. 책은 거의 읽지 않았지만 매일 일기를 썼어요. 겉은 조용했는데, 속은 시끄러웠던 거 같아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 내 미래는 참담하고 나는 절대 어른이 안 될 거 같고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이고 염세적이었어요. 그래서 꿈도 없고, ‘내가 무슨 꿈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새벽 2시까지 라디오 듣고요. 십대 때니까 잠이 부족하잖 아요. 그런데도 자기 전까지 뭘 썼어요. 일기라고 보기엔 힘든 감정 토로 같은 거였어요. 그런 걸 쓰다 보면 잠이 오잖아요. 마구 휘갈겨서 다음 날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새벽에 졸면서 글을 썼어요.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을 글을 쓰면서 풀었던 거 같아요.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해져도 글자는 남는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쓰는 행위에 대한 작가님의 믿음이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건 자신 없고, 부끄럽고, 해가 될 거 같고, ‘누가 내 얘기에 관심 있겠어?’ 싶고. 그리고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아요. 그런데 쓰는 것은 어쨌든 저 혼자 쓰면 되고 나중에 후회할 일도 없어요. 부끄러울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쓸 수 있으니까 온갖 나쁜 생각, 비관적인 생각 그런 걸 쓴다고 해서 덜해질 것도, 더해질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저는 저를 괴롭히는 문제가 생기면 써요. 쓰다 보면 제가 생각했던 것 같지 않은 문장들이 나와요. 그렇게 답을 찾을 때도 있어요.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때는 이 감정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체를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을 글자로 풀어 쓰다 보면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구나’라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요. 그런 것과 비슷하게 소설도 쓰다 보면 제 안에 없던 건데, 제가 쓴 문장인데 뒤늦게 저를 놀라게 할 때가 있어요. 십대 태희의 일을 쓰면서도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작가님을 놀라게 한 문장들이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 “내가 나를 모욕하는 순간이 있다”, “중요한 말일수록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같은 문장들이 그랬어요. 문장을 쓴 다음에야 누군가의 핑계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나를 모욕하지 말자고 생각했고 혼잣말이 늘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말하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엄마, 아빠는 형편없어서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핑계가 필요하고, 네가 그 핑계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태희 엄마가 메모를 쓰고 지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났어요. 태희도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고 생각하지요. 

제가 누군가에게 무한 애정을 느끼고 이 사람 편이 되어야겠다 느낄 때가 상대의 나약함을 볼 때거든요. 상대의 강함이나 잘난 점이 아니고 한없이 외롭고 작고 많이 흔들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 보기 위해 애쓰는, 그런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볼 때 나는 이 사람 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 상대가 나한테 잘해줄 때가 아니고 상대의 약한 모습을 우연히 봤을 때. 그 장면도 엄마가 태희에게 이러저러해라고 시키거나 엄마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엄마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잘난 어른도 아니고 강한 어른도 아니고, 굉장히 형편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너의 핑계를 대서라도 잘 살아 보고 싶어’라고 말할 때 태희는 소설에 쓴 것처럼 엄마의 핑계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어요. 평소에 제가 사람에게 흔들리는 장면이 들어간 거 같아요. 

소설을 읽으면서 어릴 때 모습 중 좋았던 점을 좀 더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작가님은 어떤 모습을 기억하고 싶으세요? 

잘못을 잘못이라고 아는 것?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내 잘못은 나만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전전긍긍한 거? 그래서 어떻게든 잘못을 만회하려고 애썼다는 거? 어른이 되고는 그냥 눈치 보며 지나려는 순간들이 있어요. 괜찮겠지 하면서. 그때 그 모습이 저를 부끄럽게 할 때가 있어요. 어릴 때 나는 잘못이 잘못인 줄 알고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인 줄 알았는데 어른 태희의 말처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없이 소심하고 눈치 보던 제가 그래도 제일 빛나던 때가 그때가 아니었을까? 그랬던 거 같아요. 그리고 혼자인 것을 좋아했던 것? 혼자였던 나에 대한 불만이나 그런 것 없이 혼자로도 잘 존재했던 면이 좋아요.

아이보다 어른이 많이 알고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까 작가님이 말씀하기도 했지만 어린 십대 태희가 성인 태희를 살립니다.

어른들이 더 많이 알긴 하죠. 많이 살았으니까. 사회생활도 많이 알고, 사회에서 지켜야 할 것도 더 많이 알죠. 그런데 저는 어린이들의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면을 보면서 배울 때가 있어요. 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소설을 보면 어린 태희가 부모가 싸울 때 야광볼을 보잖아요. 그리고 싸우는 어른들에게 “이거 야광”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럴 때가 있어요. 어른들이 어른들의 문제로 사는 것이 지치고 팍팍해서 막 싸울 때 어린아이가 와서 이거 야광이야 하면 저는 그 싸움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거 같아요. 우리가 도대체 왜 싸우고 있지? 그런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어린아이의 야광볼 같은 것을 우리가 어른으로서 잊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어요.



뭔가 꿈꾼다는 것이 무서웠어요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은 어떻게 생겼나요? 

대학교를 가고 친구가 없으니까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책을 읽고, 소설을 읽었어요. 읽다 보니 뭔가 쓰게 되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혼자서 소설을 썼어요. 내가 쓰는 것이 과연 소설일까, 남들도 소설로 볼까 궁금해서 응모했고요. 이런 수순이었어요. 소설을 많이 읽다 보니 쓰게 된 것 같아요. 현실의 나는 납작하고 작은데 소설 속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현실에서 하지 못 하는 말을 소설에서는 할 수 있고. 그렇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았어요. 그런데 소설이라는 것을 쓰면서도 제가 소설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은 안 했어요. 너무 큰 꿈이니까. 그리고 뭔가 꿈꾼다는 것이 무서우니까. 

꿈꾼다는 것이 왜 무서웠을까요? 

이루지 못하리라고 확신했으니까요. 열망하는 마음은 상처로 남을 테고 나는 나를 더 싫어하게 될 테니까. 내가 나에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기던 때가 있었어요. ‘내 가 하긴 뭘 해’라는 자조가 컸죠. 십대와 이십대는 거의 그런 시기인 것 같아요. 요즘도 마음이 약해지면 그 시절의 제가 나타납니다. 나를 쓸모 없고 하찮고 비열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내가 있고 그 영역이 커지면 저는 엉망진창이 돼요.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 나를 조금은 더 알고 예측할 수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자조하는 나와도 많이 친해졌으니까, 어릴 때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기보다는 대화하는 편이에요. 내면의 못 된 나와 대화하고 때로는 농담을 건넬 정도는 된 것 같아요.

10년 넘게 글을 쓰면서 글쓰기에 대한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셨나요?

더 좋아졌어요. 더 깊은 사랑에 빠졌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한편에 있어요. 자신감도 생겼어요. 쓸 수는 있다는 자신감. 500매, 600매, 700매 쓸 수는 있어요. 예전에는 그런 자신감이 없었거든요. 지금은 익숙해지다 보니까, 뭐든지 10년 이상 하면 익숙해지잖아요. 그런데 그냥 쓰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이런 마음이 직장 생활 10년 차의 고민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하면 하는데, 그냥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는 느낌이에요. 

요즘 작가님의 마음을 끌고 있는 주제는 어떤 건가요? 

일상적으로는 쓰레기를 최대한 만들지 않는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제가 배출하는 쓰레기의 양을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쓰레기야’ 같은 비관적이고도 쉬운 결말에는 가 닿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어요. 어린이와 늙은 사람에 대해서도 꾸준히 생각합니다. 어린이 또는 청소년이던 시절의 제 생각과 느낌을 되도록 늦게 잊고 싶어요. 그리고 늙음에 다가서는 저의 육체와 사고의 변화를 뚜렷하게 감각하고 싶습니다. 

성인 태희처럼 만약 십대 때의 선생님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쓸까요? 

“너는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도 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빨리 포기하려고 애쓰지 마. 네 생각과 달리 처음 은 계속 나타날 거야.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는 순간이 올 거야. 이런 글이 우습겠지만 조금만 더 쓸게. 나는 여기에서 네 덕을 많이 보고 있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 그리고… 네가 너의 일기와 편지를 태우지 않으면 좋겠다.”



*최진영 

박범신, 공지영, 황현산 등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15회 한겨레문학상에 당선되었다.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 어딜 가도 내 집, 내 고향 같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소설은 쓰고 싶었다. 낮엔 일하고 밤엔 글 쓰다가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등단 2년 후부터 낮엔 글 쓰고 밤엔 푹 잤다. 다음 생엔 적은 돈으로도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 혹은 행성에 태어나고 싶다. 은근히 열정적으로, 다음 생의 우주를 치밀하게 준비 중이다.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내가 되는 꿈』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되는 꿈
내가 되는 꿈
최진영 저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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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짓는 사람] 정소영 창비 편집자 “잘 넣고 샥 비벼주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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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세계가 궁금했다

편집자로 일한 지 올해로 15년, ‘창비’에서만 15년이다. 정소영 창비 편집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퇴사나 이직을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얼마 전 집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입사지원서에는 “이사를 아무리 많이 다녀도 늘 갖고 다니게 되는 책을 만들겠다”고 써있었다. 아마도 이 야심찬 포부가 15년간 실현됐기 때문이 아닐까. 청소년소설 『아몬드』『스노볼』 등을 편집하고 지금은 청소년출판부에서 청소년문학, 청소년교양팀을 이끌고 있는 정소영 편집자는 책의 세계가 궁금했던 대학 4년차에 출판사에 입사했다.

“인문학부로 입학해서 이후 전공은 철학을 골랐어요. 학부 때 배운 특정한 방법론이 유용했다기보다는, 다양한 책을 편집해야 할 때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던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졸업을 앞두고 책 만드는 일이 뭔지 궁금한 마음에 한번쯤 그 세계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입사지원서를 냈어요. 입사 후에 반차를 쓰면서 졸업했고요. 그렇게 15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네요.”

파주출판단지로 첫 출근을 한 날, “얼마나 더 이 통근버스를 타겠어?” 생각했는데 인생에서 가장 오래 속한 조직이 ‘출판사’가 됐다. 문학팀으로 입사해 3년간 편집 일을 배웠고 이후 3년간 『창작과 비평』을 만들었다. 문학팀에서 처음으로 만든 책은 시인 김승희의 시집이었다. 형식 면에서 많은 것이 정해져 있는 시집을 제외하면, 그다음 책은 소설가 권여선의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이다.

“권여선 작가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나요. 작가님의 분위기나 에너지가 정말 신기하고 좋았던 기억이 나요. 가족에게 상처받은 20대로서 교정보면서 위로도 받았고요. 설레면서 만들긴 했는데 너무 잘 몰랐던 때라서,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만든다면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청소년출판부에서 책을 만들기 시작한 건 2011년. 막연하게 어떤 텍스트를 쉽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청소년출판부 소속으로 처음 만든 책은 제4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내 이름의 망고』. 이후 이후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들을 쭉 편집했다. 

“가장 최근에 후배들과 함께 만든 책은 『두 번째 엔딩』이라는 소설집이에요. 그동안 각별하게 사랑받은 『우아한 거짓말』『아몬드』『페인트』 같은 책들의 스핀오프, 외전을 청탁해서 받아 본 경우였어요. 작가님들이 독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를 가면 ‘그래서 그 주인공은 어떻게 됐나?’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으신대요. 이미 발표한 작품이기 때문에 완결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거절하더라도 여쭤보자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흔쾌하게 수락하셨고요. 이 책은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의 100권째 책이에요. 제가 이 시리즈의 1권이 출간될 때부터 이 회사에 있었으니까, 이런 경험을 하는 편집자는 드물 거예요.”

올해 초 100쇄를 찍은 손원평의 『아몬드』는 정소영 편집자가 만든 책 중에 가장 많이 사랑 받은 책이다. 판권이 계약된 나라만 16개국. 요즘도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전세계의 독자 리뷰와 인증들을 번역기를 돌려가면서 보고 있다.

『아몬드』가 2017년 3월에 출간됐으니까 벌써 4년이 지났네요. 이 소설이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데 앞서 성공한 작품도 있었지만 가능성을 크게 본 작품이었어요. 물론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문학상은 공모를 통해서 신인 작가를 발굴하는 일이 목표라서 더 큰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요. 발견의 기쁨이 큰 작업이라고 할까요?”

정소영 편집자는 청소년출판부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잘 감각하고 있는 저자들에 주목하고 있다. 미숙함, 정체성에 대한 고민, 성장 등에 관한 답을 주는 작가들을 만날 때, 각별하게 반갑다. “10대 시절의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최애’에 대한 사랑을 많이 드러내주세요

편집자들은 대개 MBTI 유형 ‘INFP’라는 이야기가 있다. 열정적인 중재자. 정소영 편집자는 스스로를 ‘금사빠’라고 말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동시에 쑥스러움도 감추지 못하는 사람.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면서 또 임기응변형이라고. 

“기자 같은 직업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거리를 둬야 하잖아요. 의심을 갖고 상대를 대해야 하기도 하고요. 반면 편집자는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서 저자에게 애정을 표현해도 되죠. 물론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선에서요. 작가의 시선과 동일하진 않더라도 책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편집의 매력인 것 같아요.”

편집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과정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구현해볼 때다. 표지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잡으며 미지의 독자들을 상상할 때, 여전히 설렌다. 

“진짜 재밌어서 몰입되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책을 더 많이 만들고 싶어요. 청소년기에 책이 재밌다는 걸 알게 되어야 더 두껍고 난해한 책도 읽을 수 있는 성인 독자가 될 수 있거든요. 이번에 펴낸 『두 번째 엔딩』 독자 리뷰 중에서 ‘책 속 인물들이 다들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이제 저만 잘 크면 되겠네요’라고 말씀하신 분이 있었어요. 이 책은 그런 말씀을 해 주실 것 같은 독자에게 선물하려고 만든 건데 너무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최애’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많이 드러내 주시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에요.”

정소영 편집자는 2018년에 에세이 『곰돌이가 괜찮다고 그랬어』를 썼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칼럼을 묶었는데 스스로가 쓴 책을 알리고 브랜딩 하는 일이 얼마나 쑥스러운 일인지를 몸소 체험했다. 출간 이후 인터뷰라든지 SNS에 출간 소식을 알려주는 저자들에게 더 많이 고마워 하게 되었다고. 

“함께 일한 저자들에게는 늘 믿고 일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작가들은 글로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앞에 나서는 건 쑥스러워하시는 분들이 더 많거든요. 그래서 책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종류의 일들에 선뜻 응해 주시는 작가님들께는 특별히 고마운 마음이 더 드는 게 사실이에요. 저도 책을 냈을 때 많이 망설였거든요. 그런데 유명한 작가들도 그 쑥스러움을 감수하고 책을 홍보하는데, 내가 뭐라고 못하나 싶은 거예요. (웃음) 그래서 나름 열심히 했죠. 그리고 첫 책을 내는 작가님들은 일단 이 순간을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첫 책은 신인상 같은 거니까요. 그 뒤에는, 너무 힘을 주지 말고 다음 책 다음 책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시면 된다고 응원해 드리고 싶어요.”



편집자와 저자는 ‘협업하는 관계’

정소영 편집자는 지난해부터는 책임편집 일을 내려놓고 부서장으로서 후배 편집자들을 이끌고 있다. “그간 중간관리자로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아이스’가 되어야 한다”며 웃었다. 요즘 많이 하는 고민은 ‘취향에 갇히지 않는 일’. 주력하는 타깃 독자가 있더라도 빈 독자를 늘 염두에 둔다. 엣지 있게 표현해주지 않아서 놓치는 독자층이 없도록, 틈새를 보려고 노력한다.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결정 권한을 알아서 넘기지 말자’는 것. 편집자와 저자는 협업을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의견을 듣다 보면 다 이해가 가요. 미묘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본문의 텍스트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1차적으로 편집권은 편집자에게 있거든요. 꼭 수정해야 할 문장이 있을 때는 저자께 공유를 해드리되‘물어보지는 말라’고 이야기해요. 투명하게 일을 하면 되는 거라서요. 편집자가 일부러 자세를 낮추기 시작하면 더 낮아지고, 당연하게 낮아지거든요. 신입이든 경력이든 ‘협업자’라는 인식이 중요한 것 같아요.”

편집자가 꼭 갖춰야 할 덕목은 ‘균형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올바름, 안목과 취향 같은 것은 점점 더 벼려지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필수적이다. 정소영 편집자가 생각하는 좋은 편집자상은 “글과 그림을, 기획과 작가를, 제목과 카피를, 소개할 매체와 추천하는 사람을, 잘 넣고 샥 비벼 주는 존재”다.

“의외의 조합으로 만들 수도 있겠고 익숙한 맛일 수도 있겠죠. 요즘은 스스로를 잘 브랜딩 하는 편집자들이 많잖아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보면서 편집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는 독자들도 많고요. 편집자 지망생이 있다면 새로운 콘텐츠를 많이 경험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넷플릭스>도 많이 보고 전시회도 다니고. 영화 포스터나 앨범 커버, 그런 모든 것에 감각을 열어놓는 게 중요해요. 책은 물론이고요. 편집자는 늘 새로운 걸 다루니까요.”


정소영 편집자가 만든 책

『아몬드』 (손원평 지음 / 창비)



2017년 3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멋진 장편소설을 한 권 편집해서 내놓았다. 제목은 『아몬드』. 모든 책에 애정을 쏟게 되지만, 이 책은 좀 더 그랬다. 다들 이 멋과 힘을 느껴줬으면." 그 이후 정말로 많은 독자들이 이 멋과 힘을 느껴 주셨다.

 


『청기와주유소 씨름 기담』 (정세랑 지음 / 창비)



하나의 단편소설로 한 권의 작은 책을 만들어 그림과 함께 제안하는 시리즈. 소설과 별로 안 친한 사람들에게 책을 권할 때, 나는 이 책부터 집어든다. 

 


『스노볼』 (박소영 지음 / 창비) 



‘영어덜트장르문학상’에 응모된 이 작품을 처음 읽다가, 새벽에 "대체 뭐야, 이 소설은!"하고 소리 질렀다. 그다음 날부터 팀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 "그거 읽어봤어?"진짜 재미있기 때문이다. 후속권도 곧 나올 예정이다.


 

『모두 깜언』 (김중미 지음 / 창비)



글과 삶이 일치되는 작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이 작가의 편집자로 일한 것이 내 삶에서도 커다란 배움이 될 것임을 알았다. ‘깜언’은 베트남어로 고맙습니다라는 말. 곁에 있는 모두에게 감사를 전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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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천종호 판사 “비행 청소년은 버려진 존재, 아무도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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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라는 말로 세상에 알려진 판사 천종호. 단호한 말투와 엄정한 판결로 ‘호통판사’, ‘사이다 판사’라는 별명을 얻고 주목받았지만, 그에게 ‘호통’은 눈앞에 아이와 다시는 법정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궁여지책이었다. 우리나라 판사 최초로 8년 연속 소년재판을 하며 그가 목격한 사실은 비행 청소년 범죄 이면에 어른들의 학대와 방임, 가난이 있다는 것. 천종호 판사는 “비행 청소년은 우리 사회의 약자 중의 약자”라 말한다. 

저는 자주 묻습니다. “소년범의 죄는 누구의 죄인가요?” 많은 경우, 소년의 비행은 소년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입니다. 소년재판을 담당하면서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되는 방임과 학대의 그늘 아래 놓인 아이들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비행이라는 거푸집을 벗기고 나면 삶의 부조리와 폭력 앞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내던져진 아이들의 유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9쪽) 

소년재판을 맡은 후, 천종호 판사는 비행 청소년의 실상과 고통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글을 써왔다. 비행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새 책 『내가 만난 소년에 대하여』는 천종호 판사가 그동안 펴낸 책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받은 글을 추린 특별판이다. 비행 청소년들의 이야기 외에 천종호 판사가 생각하는 법치주의와 공동체 이야기, 소년법 개정에 대한 최종 의견도 실렸다.



‘정치할 거냐’는 오해 많이 받았지만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 『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등 이전에 출간한 책에서 반응이 좋았던 글을 추려 펴낸 특별판입니다.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지난 10년간 비행 청소년들의 실상과 가정 해체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알리려고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책을 모르는 분들도 있고, 세 권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독자들 반응이 가장 좋았던 글만 모아보기로 했어요. 이전에 쓴 책에는 청소년이 읽기 부적절한 내용도 담겨 있는데 그런 내용은 다 빼고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만들었고요. 얼마 전에 제 늦둥이 아이에게 책을 줬는데 금방 읽는 걸 보고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2010년부터 8년간 소년재판을 담당했다고요. 최장기간이라고 들었어요. 

원래 2년 단위로 재판이 바뀝니다. 소년재판 2년하고, 다른 재판 2년 하다가 다시 소년재판 맡아서 도합 6년가량 하신 분도 계세요. 저는 연속으로 8년 한 거고요. 

이례적인 경우네요. 

그렇죠. 처음에 창원에서 소년재판 3년 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했는데 청소년회복센터(천종호 판사가 2011년 설립한 사법형 그룸홈) 운영 문제 때문에 3년 더 하고 싶다고 부탁드렸어요. 그렇게 창원에서 3년 더 소년재판 하고 나중에 부산가정법원에서 5년 더 했고요. 그때 제 인사 문제로 대법원에서 인사위원회가 열렸다고 하더라고요. 8년 연속 소년재판을 맡는 게 전례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소년재판을 담당하지 않는다고요. 어떻게 지내나요?

2018년 2월부터 부산지방법원에서 2년간 형사 재판하다 작년부터 민사재판하고 있습니다. 일상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소년들과의 교류는 줄었죠. 

별명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요. ‘호통판사’보다 ‘사이다 판사’라는 별명을 좋아하신다고요.

판사를 수식하는 말로 ‘호통’이 괜찮나 싶어서요. 실제로 판사 앞에 호통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고,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제가 처음 호통칠 때만 해도 재판 과정에서 언행 때문에 징계받은 판사들이 있었거든요. 그나마‘사이다 판사’는 상쾌한 느낌이라도 있잖아요. 호통이지만 ‘사이다 같다’는 의미니까. (웃음) 

소년재판을 하고 ‘사이다 판사’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한 마디로 유명해졌어요. 좋은 점,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소년재판 하면서 알게 된 비행 청소년들의 현실을 알리는 데 아주 큰 도움을 받았죠. 2010년 2월에 소년재판을 처음 했는데 한국은 그때 이미 OECD 회원국이었고, 경제 대국이었어요. 그런데 비행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는 경제 사정이 우리보다 좋지 않은 국가보다 더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상황을 개선해 보려고 목소리 내고 발버둥 쳤는데 아무도 안 알아줘요. (웃음) 우리 사회가 비행 청소년 문제에 관심 없지 않습니까? 이슈화하면 혐오감만 비추고요.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방송에 출연해 유명해지니까 그나마 관심을 받았죠. 

유명세 때문에 재판할 때 어려운 건 없나요? 재판받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반가워한다든지요.

물론 있습니다. 저한테 표현하지는 않지만, 눈빛을 보면 알아보는 티가 나죠. 그런데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 재판은 대부분 정해진 절차에 의해 진행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다만 바깥에서 활동할 때 불편하죠. 특히 아내가 많이 불편해합니다. (웃음) 

“정치할 거냐”는 오해도 많이 받으셨다고요. 

많이 듣죠. 실제로 기회도 있었고요.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비행 청소년 문제를 이슈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양했습니다.



비행 청소년 문제에 더 분노하는 이유

‘청소년회복센터’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대안 가정’ 역할을 하는 청소년회복센터이 필요성을 오래전부터 이야기하셨더라고요. 

비행 청소년이 생기는 주요 원인은 ‘가정 해체’입니다. 아이들 상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데 관심이 없으니까 아무도 몰라요. 처음에는 지인들과 함께 비전만 가지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힘들더라고요. 제도화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이다 판사’로 알려진 이후로 청소년회복센터 제도화에 올인했고요. 

어떤 게 가장 힘들었나요?

예산이죠.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잖아요. 하루에 여섯 끼 먹어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웃음) 잘 먹을 때이기도 하지만, 가정 해체를 겪은 아이들이라 정신적 허기 만큼 육체적 허기가 심하거든요. 그래서 일단 먹여야 해요. 두 달 정도 제대로 먹이면 그때부터 정신 교육이 됩니다. 그런데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자원하신 분들의 자비로 운영하다 보니 한계가 있어요. 꼭 필요한 일인데 비용 때문에 안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제도화가 시급하다고 본 거죠. 

밥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나는데요. 이수정 교수님이 인터뷰하신 걸 본 적 있어요. 소년원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는데 제빵 기술을 배운 소년들의 재범률이 가장 낮다고 하더라고요. 

맞습니다. 가장 낮아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빵을 만들면 아이들이 자기가 만든 걸 먹지 않습니까? 그 과정에서 허기가 채워져요. 그만큼 밥을 잘 챙겨 먹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사단법인 ‘만사 소년’을 통해서 소년원에 한 달에 두 번씩 간식을 지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조직폭력배와 청소년을 비교해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조직폭력배보다 청소년에게 더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130쪽)고요. 

청소년 비행을 주제로 강연을 하면 항상 물어봅니다. “조직폭력배 다섯 명이 선량한 시민을 해쳤을 때 몇 년을 선고해야 분이 풀리겠냐”고요. 평균적으로 5년에서 최대 10년 정도를 말씀하세요. 그런데 청소년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때 어떻게 하겠냐고 물으면 다릅니다. ‘소년법 폐지하자’, ‘무기징역해야 한다’, ‘사형 선고하자’고 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른 상황이네요. 

소년보호재판의 취지는 처벌 이전에 보호과 재교육에 있습니다. 많은 분이 처벌에만 관심 있지, 근본적인 문제와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어요. 물론 범죄에 대한 분노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반복될 뿐입니다. 비행 청소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 왜곡된 거예요. 

말씀하신 대로 청소년 범죄가 터지면 소년법을 개정하고, 엄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죠. 

분노를 표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이 유일하게 마음 놓고 분노를 쏟아내는 대상이 비행 청소년 아닌가 싶어요. 이유가 충분해 보이거든요. 일단 학교 폭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어서 혐오감을 주고요. 무엇보다 비행 청소년을 보호하는 어른이 없어요. 부모는 물론이고 유권자가 아니니까 정치인들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을 위한 단체도 없고요. 

가장 약한 존재라서 쉽게 분노를 표출하고 혐오한다는 말로 들려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조직폭력배보다 더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고요. 비행 청소년에게 마구 분노를 쏟아부어도 거기에 제동을 걸 사람이 없어요. 요즘 이슈인 운동부 폭력만 해도 문제가 생기면 대항 세력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비행 청소년 문제는 그렇지 않아요. 일방적이고 절대적으로 당합니다. 비행 청소년 문제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낸 산물로 봐야 해요.

 


모든 청소년 문제를 ‘학교 폭력’으로 보는 시각 없애야  

아이들이 더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과다하게 노출된 것(131쪽)일 뿐, 실제로 청소년 범죄는 줄어들고 있다고요.  

2010년 이전에는 비행 청소년에 관한 혐오성 기사나 발언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2010년에 학교 폭력 문제가 터지면서 청소년 비행을 학교 폭력 관점에서 보는 분위기가 조성된 거죠. 모든 문제를 학교 폭력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니 내 아이와 손자도 다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서 엄벌을 주장하고, 혐오가 더 심해진 겁니다. 실제로 청소년 범죄를 분석해 보면 학교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20%도 안 되는데 청소년은 모두 학생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다 학교 폭력으로 보는 거죠. 

학교 폭력와 학교 폭력이 아닌 것은 어떻게 구분하나요? 

예를 들어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은 사실 성적 경쟁에서 낙오된 학교 밖 아이들이 저지른 사건인데요. 피해자 아이가 당시에 학교를 60일 결석한 상태였어요. 3일만 더 결석하면 유급돼서 공식적으로 학교 밖 아이가 되는 거였죠. 그런데 3일을 앞두고 사건이 터져서 사실상 학교 밖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으로 알려지고 ‘학교 폭력 사건’이 된 겁니다. 학교 폭력으로 잘못 알려져서 사람들의 공포와 혐오감이 더 커졌고요. 

비행 청소년 문제를 모두 ‘학교 폭력’으로 보지 않고, 정확히 분류해야 한다는 말이네요. 

그럼요. 정확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으니까 청소년 전체에 대해서 혐오감과 비난 발언이 쇄도하는 거예요. 폭력의 종류와 특징이 다릅니다. 원인도 다르고요. 정확히 진단하지 않고 학교 폭력으로 뭉뚱그려 놓으면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1차로 학교 폭력과 학교 바깥에서의 비행을 구분해야 하고, 학교 폭력 내에서도 일반 사건과 운동부 폭력 사건을 구분해야 해요. 이렇게 보면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염려하는 종류의 문제는 10%도 안 됩니다. 

재판에 참여한 아이와 부모에게 노래 가사를 읽게 하거나 ‘사랑한다’, ‘잘못했다’고 말하게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더라고요. 

소년재판 시작하자마자 했어요. 한 아이에게 할당되는 재판 시간이 3분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누구든 법정에 오면 긴장하거든요. 앞에서 제가 말하는 게 온전히 들리겠습니까? 안 들립니다. (웃음) 그러니까 제가 잔소리하기보다 스스로 행동하게 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열 번 정도 하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그러다 5번 정하면 99%의 아이가 울컥합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아이들이 스스로 해야 무언가를 느끼거든요. 처음에는 불평, 불만하다가도 여섯 번 정도 하면 울컥하고, 아이가 울컥하는 걸 보면 부모는 당연히 울컥합니다. 그 순간에 부모와 아이가 하나가 돼요. 물론 이후에 이걸 지속하는 게 중요하지만, 법정에서 이렇게라도 시작해 주면 조금씩 나아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죠.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안 되는 아이들에게는 시를 읽게 하고요.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온 ‘그 남자’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읽게 하기도 하셨죠. 

맞아요. 그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부모님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재판에 오는 부모님들이 대체로 사회적으로 학식이 높거나 자기 표현력이 뛰어난 분들이 아니어서 아이한테 말하고 싶어도 잘 못 해요. 그런데 ‘그 남자’라는 노래 가사를 개사해서 읽게 하면 재판장이 눈물바다가 됩니다. ‘그 아빠가 그대를 사랑합니다. 늘 그림자처럼 그대를 따라다니며 그 아빠는 언제나 울고 있어요’. 이런 가사인데 이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시나 노래 가사로 자기 마음을 대신 표현하게 하는 거죠. 

재판이 문학적이네요. (웃음) 

저도 배워서 실천하는 겁니다. 1년에 한 번 소년재판 담당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있는데 거기서 배운 거예요. 괜찮다 싶어서 바로 실천했고요. 

판사님들도 재판을 위해 따로 교육을 받으시는군요.

그럼요. 소년재판 노하우를 배워야 하니까요. 그런데 배운 걸 실천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 남자’ 노래 가사를 활용한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학대 문제 해결하지 않으면 재발할 수밖에 없어

청소년 범죄 수는 줄어드는 데 연령은 낮아지고 있다고요. 이유가 있을까요?

2008년에 소년법을 개정했잖습니까. 촉법소년 기준을 12세에서 10세로 낮췄어요. 그러다 보니 이전에 규율 받지 않던 아이들이 규율 받기 시작한 거예요. 결정적으로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아이들이 비행에 노출되기 쉬워졌고요. 특히 코로나 시대에 SNS를 통한 범죄가 심각하게 늘어났어요. 전북지역에 강연하러 갔는데 부모님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이의 학교 친구들이 ‘000 찌질이’라는 이름의 단체방을 만들어 놓고 자기 아이를 초대해서 괴롭힌다고요. 

범죄도 진화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생기면 기존의 기준으로 처벌하기 어렵지 않나요?

그렇죠. 탄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존의 처벌 기준을 개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런데 처벌보다는 재비행 방지가 핵심이에요. 범죄 중에서도 특히 청소년 비행은 사회에서 조치하지 않으면 재발할 수밖에 없어요. 처벌이야 어떻게든 하면 되지만요. 

재비행 방지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있다면요?

비행 청소년 중에 학대당한 아이들이 많아요. 가정해체 과정에서 학대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창녕에서 부모에게 학대당하던 아이가 몰래 베란다를 통해 도망간 사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아이들이 부모의 학대를 피해 집을 나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요즘 같은 핵가족시대에는 친척 집에도 못 가거든요. ‘가출팸’에 갈 수밖에 없어요. 동시에 범죄가 시작되고요. 숙식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자아이들은 절도, 강도를 합니다. 여자아이들은 성매매하고요.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이 혼자 가기 겁나니까 남자아이들하고 같이 가요. 그러면 가서 성매매하고 저녁에는 같이 간 남자아이들한테 당하고 이런 구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청소년 범죄와 학대 문제가 깊이 연결돼 있네요. 

그렇습니다. 청소년 비행 문제가 발생하면 두 가지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일단 처벌은 하되 처벌 이후에 아이들을 보호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시켜서 사회에 적응하게 해야 해요. 대안 가정의 역할을 하는 청소년회복센터가 제도화되면서 비행 청소년 문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처럼 학대 아동 전용 회복센터를 만들어야 해요. 

학대를 예방하는 전문적인 센터를요?

예를 들어 아동학대가 발생해서 아이를 부모로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다 싶으면 아이를 부모 품에서 떼어 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떼어 놓은 이후부터 문제가 생겨요. 이 아이들을 어디로 보냅니까? 대부분 보육원으로 가는데요. 아이들은 부모가 반성하고 자기한테 잘해주길 원하지 보육원에 가는 걸 원하지 않아요. 보육원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고요. 그러니 아동과 부모를 격리했을 때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전용 센터가 필요합니다. 

학대 아동 전용 회복센터 제도화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네요.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 저출생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미 태어난 아이 하나라도 소중하게 생각해야죠.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해요. 지금은 거의 버려진 아이들입니다. 숲을 잘 가꾸려면 병든 나무를 간벌해야 하지만, 인간사회는 그렇지 않아요. 간벌이 안 됩니다. 못 생기고, 못나도 같이 가야 해요. 그럴 수밖에 없고 영원히 격리할 수도 없습니다. 

비행 청소년이 다른 비행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좋았다’고 소감을 말하는 게 인상적이더라고요.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닫는 게 있구나 싶었어요. 

책 읽고 아이들이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나만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같은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에서 희망을 품고요. 

이 책을 특별히 권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책을 쉽게 쓰고, 삽화를 넣은 이유가 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주인공의 삶을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비행 청소년들이 어떤 상황에 있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고, 다른 아이의 삶을 이해하고 간접적으로 추론해서 서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천종호

어릴 때부터 꿈이 판사였다. 극빈의 경험은 ‘세상은 기울어진 저울’이라는 진실에 일찌감치 눈뜨게 해 주었고, 기울어진 저울추를 조금이나마 평편하게 만들고자 법관의 길을 택했다. 저울추에 그려진 십자가처럼, 법의 잣대는 엄정하게 적용하되 법관이 사회적 약자에게 따듯한 시선을 지닐 때 세상이 좀 더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만난 소년에 대하여
내가 만난 소년에 대하여
천종호 저
우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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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코칭심리전문가 김윤나 “진정한 리더는 이렇게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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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만 들어가면 얼어붙는 분위기. 오늘도 잘 해보려 했는데 호통만 치고 나왔다. 회사원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말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직장인에게, 코칭심리 전문가 김윤나 저자는 ‘마음’을 돌아보라고 강조한다. 특히 앞만 보고 달려와 자신의 생각과 욕구를 알아채지 못했던 리더들에게 필요한 조언이다. 높은 직급이나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리더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직장인과 아이를 잘 이끌고 싶은 부모 모두가 대상이다. 

김윤나 저자는 코칭심리전문가로서 주요 기업의 강연 및 코칭,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리더의 말 그릇』은 전작 『말 그릇』 이후 3년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리더’를 위한 조언을 담은 책이다. 그동안 수많은 교육과 코칭을 통해 얻은 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사람을 성장시키고 성과를 만드는 리더의 말 그릇에 대해 알려준다. 



일하고 싶은 회사, 리더가 바뀌어야

『말그릇』 이후 3년만에 ‘리더’를 위한 책을 내셨어요.

직장인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원인이 리더의 말인 경우가 많아요. 상사가 사무실에서 한번 소리치면 직원들의 마음이 상하고 가정에도 영향을 미치죠. 실제로 강연과 상담을 해보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리더를 많이 만나고요. 물론 모두에게 ‘말 그릇’을 키우고 마음을 되돌아보는 건 필요하죠. 그런데 말의 파급력이 센 사람부터 바뀌면 그만큼 효과적이니까요.

“리더란 파트너와 팔로워가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한다”고요. 리더의 범위를 넓게 보셨습니다. 

직책이 높은 사람만 리더인 건 아니에요. 팀의 막내라도 협력사를 만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고, 부모도 아이를 이끌어야 하니 다 리더죠. 리더십은 인간관계 속에서 역할을 맡은 모두에게 필요한 거예요. 저도 직장인이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매순간 느끼거든요. 회사원부터 주부까지 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전하고 싶었어요.

보통 ‘비즈니스 말하기’하면 강연이나 프레젠테이션 같은 기술을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작가님은 ‘마음’을 강조하셨어요.

말을 잘하고 싶을 때, 보통 어떻게 말할지만 고민해요. 어떻게 말해야 부하 직원을 일하게 만들 수 있을까 기술부터 배우려 하죠. 그런데 말의 원인인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이 말을 왜 했는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마음에 답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인지 작가님의 코칭은 단순히 말을 교정하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 상담 같아요. 

굉장히 진솔하죠.(웃음) 지난 몇 년 동안, 강연뿐만 아니라 일대일 상담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말에 대한 코칭으로 시작하지만, 상담자에게 “그때 마음은 어떠셨어요?” 물어보면 비로소 속 이야기를 꺼내거든요. 회사에서는 누군가의 리더인데, 정작 자신이 뭘 느끼고 원하는 지 모르는 거예요. 그제서야 인생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는 거죠. 



화내기 전에, 일단 멈추세요

성과를 내려고 모였는데, 불같이 화를 내는 상사의 한 마디에 얼어붙는 회의실.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겪는 상황이에요. 해결책이 있을까요?

회의실만 들어가면 화내는 리더분들 정말 많이 봤어요.(웃음) 화가 찾아오면 일단 멈춰야 해요. 감정은 몸으로 오거든요. 얼굴에 열이 올라오고 심장이 빨라지면, 불편한 상태라고 스스로 인식해야 해요. 유독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분에게는 화가 찾아오는 순간 “아, 왔다!” 하고 외치게 해요. 인식하는 게 첫 번째예요. 자기 상태만 알아도 큰 말실수는 줄일 수 있어요. 

일단 멈추고, 말하기 전에 감정을 바라보라고 강조하셨죠.

감정을 다양하게 느끼는 법을 연습해야 돼요. 제가 추천하는 건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는 거예요. 사람마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개수가 다르거든요. 다양한 사람도 있고, 딱 한 개인 분도 있어요.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싫다’에만 반복적으로 버튼이 눌리는 거죠. 그런데 한꺼번에 밀려드는 감정을 들여다보면, 화만 있는 게 아니라 서운함, 실망, 답답함 등 여러 가지거든요. “보고서가 왜 이 모양이야!”라고 외치기 전에, 감정에 다른 이름을 붙여보는 거예요. 그러면 “아, 후배가 좀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기대와 달라서 실망했구나” 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요.

평생 반복해온 습관적인 감정이 있을 테니, 연습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에 ‘늪지대’가 있어요. 리더로서 부모로서 못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런데 늪에 빠지듯이 말을 할수록 자기를 깎아먹고 서로 마음을 다치는 거죠. 예를 들면, 저는 ‘불안’이 굉장히 높은 편이에요. 스스로 정한 규칙에 조금만 어긋나도 금세 불안해지거든요. 이게 저의 자동화된 감정이에요. 여기서 빠져나와 자신의 늪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마음이 좀더 편해지고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겠죠.

리더라면 칭찬을 잘하는 법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좋은 칭찬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허한 칭찬이 정말 많지 않나요?(웃음) 칭찬의 본래 의미는 ‘축하’인데, 많은 분들이 남을 내 뜻대로 하기 위한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그건 상대방도 칭찬이 아니라는 걸 알거든요. 좋은 칭찬은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면, 아이에게 그냥 “잘했다” 하기보다, “네가 숙제를 꼼꼼히 해서 실수가 없었네” 하고 직접 관찰한 걸 말해주는 거예요. 거기에 그 사람만이 지닌 강점, 기여한 내용을 덧붙여주면 더욱 좋죠. 결국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큰 동기부여가 되거든요. 

리더의 피드백이 부하 직원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도 있어요.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정확하게 피드백하면서도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법은 없어요.(웃음) 어떻게 말해도 상대가 서운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돼요. 상대가 상처받으면 어쩌지 고민하는 분도 많은데요. 이건 비즈니스잖아요. 상대방의 감정까지 리더가 책임져주지 않아도 돼요. 모든 감정을 책임지려고 하면 힘들어져요. 서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세요. 다만, 비난하지 않는 건 중요해요. 피드백을 한다고 다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은 공포에 질리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거든요. 상황을 피하려는 순간, 생각은 멈추고 피드백이 들리지 않는 거죠. 잘못을 추궁하는 게 아니라 문제점을 알려주고 개선방안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해요.



진정한 리더는 성장을 책임지는 코치

요즘 세대와 함께 일하는 법도 짚어 주셨어요. MZ세대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MZ세대는 공동체에서 중심이 된 경험이 많아요. 어릴 때부터 “넌 뭘 원하니”하는 질문을 받았고, 마음을 거리낌없이 표현하는 걸 독려 받았어요. 입시나 취업도 멘토의 지원을 통해 의사결정 한 세대예요. 그러니까 선배에게 ‘코치’ 역할을 바라는 거예요.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해주고 이끌어주는 상사를 원하는 거죠. 

반대로 기성세대는 개인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으니, 소통에서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거네요.

기성세대는 기존에 믿고 있던 생각이 들어맞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죠. 회식을 하자고 했는데 후배가 약속이 있다고 먼저 나가면, 뒤통수를 보면서 눈이 흔들리거든요.(웃음) 예전 조직문화에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전체를 위해 묵묵히 희생하는 걸 강조했으니까요. 그런데 리더라면 “요즘 애들은 이해가 안 돼” 하고 멈추지 말고, 자신이 가진 생각을 점검해봐야 해요. MZ세대는 마음을 표현하고, 직접적인 피드백을 해주길 원해요. 리더도 기존의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을 전하는 언어를 배워나가야 하는 거죠.

코로나19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났어요. 달라진 환경에서 유의해야 할 요소로 ‘정확성, 안전성, 공감’을 드셨습니다.

언택트 시대에는 소통의 정보량이 너무 적어요. 예전에는 분위기로 알아차렸던 것도 온라인에서는 불가능하죠. 그럴수록 정확하게 묻고 답하는 과정이 중요해요. 평소라면 알아서 넘길 것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일일이 물어야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거든요.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안전성’이에요. 원래 회의실에서 직원들은 리더의 표정을 살피거든요. 그런데 화상 회의로는 반응을 알 수가 없어서 더 무서운 거예요. 그럴수록 리더가 나서서 분위기를 풀어줘야 직원들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공감’도 잊어서는 안되죠. 예전엔 눈빛으로 전달했던 것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로 공감을 표현하는 게 좋아요. 

회사문화가 ‘성과’에서 ‘성장’을 중시하는 문화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하셨어요. 예전엔 조직의 성과가 우선시됐다면, 요즘 회사원들은 개개인의 성장에 관심이 많죠. 

성장 중심 문화에서 리더는 코치 역할을 해야 해요. 구성원들의 성장을 책임지고 목표를 위해 함께 달리는 파트너가 돼야 하죠. 그런데 현실은 리더에게도 플레이어의 역할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아요. 관리자와 실무자의 역량을 동시에 요구하니까 리더가 방향을 못 잡는 거죠. 코치형 리더를 키우는 인사 제도와 조직 문화가 필요한 이유예요. 적절한 보상과 훈련이 뒷받침 돼야겠죠.

오늘도 ‘말’ 때문에 고민인 리더분들에게 당부의 말을 해주신다면요?

자신의 마음부터 잘 보살펴야 해요. 리더의 역할을 잘 하려고 무작정 달리다가 정작 삶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리더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고, 결국 그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거잖아요. 식사도 불규칙하고 잠도 못 자는데 좋은 기분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요? 제가 강연할 때, 마무리 인사가 늘 “밥 잘 드시고, 숙면하시고, 영양제 잘 챙겨 드세요”예요. 기본적인 것을 잊지 마시고, 늘 자신을 챙기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말도 자연히 달라져요.



*김윤나

말마음 연구소 (Communication & Mind Lab) 소장.

말과 마음의 연결과 회복을 인생의 핵심 프로젝트로 삼는다. 이를 위해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상담을 한다. 말과 마음의 상처를 돌보고 싶다면 ‘말마음 상담소’을 통해 저자와 직접 만날 수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김윤나TV〉로도 독자들과 소통 중이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기업에서 강연을 해 왔고, 코치로서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한국HRD협회가 인증한 ‘2013년 BEST 코치’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인재개발 전공)을 마치고 광운대학교 산업심리학과 박사과정(코칭심리 전공)을 수료했다. 저서로는 『말 그릇』, 『당신을 믿어요』, 『슬기로운 언어생활』, 『자연스러움의 기술』, 『진짜 나를 만나는 라이팅북』이 있다.




리더의 말 그릇
리더의 말 그릇
김윤나 저
카시오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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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SF에는 세계를 파괴할 힘과 재생할 힘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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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5년에 살고 있는 ‘해미’는 20년 전 원전 사고로 엄마를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군인 출신 잠수사다.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하면서 거듭 상처를 받고, 그럼에도 다시금 그 일에 뛰어들며 엄마를 잃은 상처로 괴로워한다. 해미에게는 동생 ‘다미’가 있다. 다미는 원전 사고가 난 부산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다쳤고, 언니 해미를 구하러 갔다가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끊임없이 해미를 원망한다. 후회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들에게 갑자기 놀라운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20년 전 그날로 돌아가 엄마 ‘수아’를 살리는 것. 이들의 시간여행은 성공할 것인가. 과연 엄마와 해미, 다미는 상처 없는 삶을 다시 살게 될 것인가. 

『테세우스의 배』로 ‘2020 SF어워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경희 작가의 두 번째 장편 『그날, 그곳에서』는 타임리프 SF소설이다. 이경희 작가는 구상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작품을 쓰면서 이 이야기가 2014년 4월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에 이경희 작가는 “제 마음 속에 자리잡은 후회나 공포, 슬픔 같은 것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라며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게 “어떻게든 위안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부산에 있는 이경희 작가를 이메일로 만났다. 



치유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간여행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필연적으로 ‘후회’라는 감정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요. 이다혜 작가님의 추천사 중 “애달팠다”라는 말에 많이 공감하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쓰면서 어떤 마음이었나요?  

이건 작가의 특권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썼기 때문에 애달픔을 느끼진 못했어요.(웃음) 오히려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세상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고 힘든 곳인데 적어도 소설 속 주인공에게는 그 힘든 상황을 벗어날 능력이나 기회가 한 번쯤 주어지잖아요. 주인공 한 명에게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보다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소망하는 바를 최대한 이뤄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위안을 주고 싶다, 치유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해미, 다미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현실의 사람들까지도요.

『그날, 그곳에서』는 원전 사고로 엄마를 잃은 해미와 다미가 시간여행을 통해 엄마를 살리려는 이야기죠. 작품 구상은 어떻게, 언제 시작되었나요?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주관한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을 준비할 당시 전략적으로 세 가지 다른 아이디어의 작품을 준비했어요. 그 중 첫 번째는 공모전 당선작이자 저의 데뷔작이기도 한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예요. 이 단편은 전형적인 시간여행 플롯 위에 임진왜란, 구미호, 그리고 몇몇 역사적 인물들을 엮은 작품인데요. 검증된 이야기 구조를 활용하는 대신 소재를 남들과 최대한 차별화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두번째로 준비한 작품이 「루프 트립」이라는 제목의 단편인데요. 이 작품은 거꾸로 재난, 죽음, 가족, 타임머신 같은 안전하고 뻔한 소재를 사용하는 대신 플롯 구조를 극단적으로 꼬아본 작품이에요.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정말 많이 반복하는 거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말았는데요. 주위에서 장편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루프 트립」을 장편으로 고쳐 쓴 작품이 바로 『그날, 그곳에서』예요.

단편에서 시작된 이야기였군요? 독자로서는 장편이 된 덕분에 이야기를 충분히 만끽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조금 신기했던 점이 있는데요. 단편 버전에서는 이 이야기가 ‘구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조를 방해하는 이야기’였거든요. 그걸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대중적인 취향을 고려해 가족을 구조하는 이야기로 변경하게 됐어요. 그런데 ‘구조하는 이야기’로 시놉시스를 바꾸고 보니 이 작품이 2014년 4월의 어떤 사건을 강하게 은유하게 되어버렸다는 걸 알게 됐어요. 처음엔 특별한 의도 없이 구상했던 재난 상황과 스쿠버다이빙을 모티브로 한 시간여행 설정들이 갑자기 그때의 사건과 밀접한 장치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설정을 전부 뜯어 고칠까 생각한 적도 많았고요.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저 스스로가 그 사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이런 각색 과정들을 거쳐온 것은 아닐까 하고요. 제 마음 속에 자리잡은 후회나 공포, 슬픔 같은 것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그 후론 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공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제 나름의 답을 완성하기 위해서요. 부족하지만 나름의 결과물로 완성된 작품이 『그날, 그곳에서』 입니다.



구체적인 현실 공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 

해미와 다미 자매, 그리고 엄마 수아까지. 인물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모두 ‘서로를 살리기 위해서’예요. 심지어 자신을 죽이는 선택을 해서라도 구하고 싶어 하는데요. 이러한 마음에 집중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대형 재난 사건의 유가족 인터뷰를 많이 읽었어요. 거기서 가장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표현 중 하나가 그런 정서를 담은 말들이었고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시간여행에 뛰어드는 인물의 내면을 상상했을 때 이외에 다른 감정의 방향을 떠올리기가 어려웠어요. 

“중요한 건 과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것”(377쪽)이라는 대사가 등장하죠. 작가님의 가장 큰 메시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생각인지 좀 더 들려주세요. 

시간여행 픽션을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과거를 바꾸는 일을 대리 체험할 수 있어요. 그걸 목적으로 삼는 이야기도 분명 존재하고요. 그런데 『그날, 그곳에서』는 다루고 있는 소재의 특성상 독자가 작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몇 배의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았어요. 소설 속에서 아무리 과거를 바꾸는 데 성공한들 우리 현실은 그대로니까요. 현실의 우리는 과거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상처를 안고 현재를 살아내는 것뿐이에요. 사실 치유라는 말도 어느정도 판타지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온전히 치유되는 상처라는 건 없고, 적당히 수습해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고작인 것 같아요. 그마저도 주위 많은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만 겨우 가능하고요.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지도가 나오죠. ‘작가의 말’에서 이곳이 모두 실재하는 장소인 것을 밝혔는데요. 구체적인 현장을 독자에게 보여준 이유가 있나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원전 반경 30km가 죽음의 땅이 되었다고 해요. 지금도 출입 불가 지역으로 설정되어 있고요. 저는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데요. 기장에 있는 원전에서 직선 거리를 재보면 저희 집이 딱 30km가 나와요. 저 역시도 안전하지 못한 거죠. 고리 원전, 월성 원전, 한빛 원전이라고만 하면 사람들은 그게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요. 원전이 생각보다 정말 가까이에 있고, 구체적인 현실 공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만약 COVID-19가 아니었다면 직접 소설 속 공간을 걸으며 진행하는 다크 투어리즘 북토크 같은 걸 해도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쉬워요.(웃음)

안전가옥은 특별히 작가와 PD가 협업해서 이야기를 개발하잖아요. 이번 작품에서 PD의 의견으로 처음 구상과 바뀐 대목도 있나요? 

스포일러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초반부에서 주인공이 테스트를 받는 장면은 PD님의 제안으로 완전히 새롭게 쓰여졌어요. 덕분에 더 긴장감 있고 재미있는 장면이 됐어요. 어떻게 보면 사소한 수정일 수도 있는데 그로 인해서 동생 다미의 존재감이 굉장히 커질 수 있었고요. 전체 작품이 해미 원톱의 이야기가 아닌 자매의 이야기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작품 속에는 붕괴, 지진, 원전 사고 등 각종 재난이 등장하는데요. 재난을 다룰 때 세운 규칙이 있었다고요?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이나 정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어요. 누군가에게는 그게 고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너무나 민감한 주제이고, 쉽지 않은 소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쓰는 내내 한 줄 한 줄을 조심해야 했어요.



언젠가 그게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쓰면서 작가님이 가장 고민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해서 답해야 할 것 같은데요.(웃음) OOO이 OOO의 문자를 받고 호텔에서 기다리게 되는데 이 장면에 대한 인물들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결정하는 부분이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문장이잖아요. 좀 엉뚱할 수도 있는데 제 눈물 버튼 중 하나가 청개구리 이야기거든요. 평소에는 엄마 말을 뭐든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가 무덤을 물가에 세우라는 말만 곧이곧대로 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말하자면 OOO이 약간 그런 캐릭터예요. 그래서 슬프고요.

작가님은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라는 에세이도 쓰셨지만 질문 드리자면, SF의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에세이에도 나오는 내용인데요. 보통 소설에서 ‘그녀의 세계가 파괴되었다.’ 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면 그건 대개 은유이거나, 내면을 묘사하는 표현일 거예요. 하지만 SF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녀의 세계가 파괴되었을 수 있어요. SF에는 세계를 파괴할 힘과 재생할 힘이 있어요. 물론 판타지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내는 것은 가능해요. 하지만 SF는 판타지보다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는 장르이고, 그렇게 거짓말을 쌓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게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와 작품이 무엇인지도 소개해주세요. 

이서영 작가님의 『유미의 연인』에 수록된 단편 「센서티브」와 『악어의 맛』에 수록된 「노병들」을 정말 좋아해요. 작품 속에 깊게 자리잡은 정서와 힘을 사랑합니다. 『악어의 맛』 후기에 ‘세상을 총체적으로 사랑하려 했다’는 표현이 나와요. 세상의 좋은 면과 나쁜 면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시선. 언젠가 저도 꼭 그런 경지의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요.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작가님은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기왕이면 미래로 가고 싶어요. 더디지만 인류는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적어도 지금보단 예의 바르고 어른스러운 존재가 되어있지 않을까 해서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아니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겠죠?  

마지막으로 어떤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었으면 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아무래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다만 이 작품을 읽는게 상처를 상기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분들을 잘 피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이경희

환상문학웹진 거울 필진.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가 황금가지 제4회 타임리프 공모전에 당선되어 데뷔하였고,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으로 황금가지 제6회 작가프로젝트 공모전, 「χ Cred/t」로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을 수상했다. SF와 판타지 양쪽에서 활동 중이며, 대표작으로는 『테세우스의 배』, 「다층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 「마음 여린 땅꾼과 산에 깔린 이무기 설화」 등이 있다. 그는 SF와 판타지의 팬보이로 10대를 보내며 오랜 세월을 방황한 끝에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1980~1990년대 걸작 애니메이션과 만화들, <스타트렉> 에피소드들, 톨킨과 이영도, 르 귄과 젤라즈니, 알프레드 베스터와 코드웨이너 스미스, 듀나, 배명훈, 곽재식, 김보영, 이서영 등 위대한 장르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자신만의 샛길을 발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한민국이 SF 불모지라는 음모론이 들불처럼 일어나 한국 SF를 집어삼킬 대위기에 처하자 그는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SF 불모론자들의 목을 꺾….



그날, 그곳에서
그날, 그곳에서
이경희 저
안전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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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 “폴짝폴짝 뛰면서 완성한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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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지 말고 잘 가” 하며 이별을 껴안던 시인은 이제 다정한 ‘안녕’을 건넨다. 바로 시 그림책 『우리는 안녕』을 출간한 박준 시인이다. 박준은 이번 그림책을 “폴짝폴짝 뛰면서 완성한 책”이라고 말했다. 1년간 서양화가 김한나 작가와 글과 그림을 주고받는 동안, 동화처럼 구체적이었던 글은 가벼워졌고, 그림도 다채롭게 변했다. 그렇게 완성된 강아지와 새의 이야기. 그들이 주고받는 만남과 이별의 ‘안녕’도 트램폴린을 뛰듯 밝고 따뜻하다. 한없이 어려운 만남과 이별도 결국 ‘안녕한 우리’로 이어진다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박준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통해, 섬세한 서정을 전해온 시인이다. 현재 매일 밤 자정 CBS 라디오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안녕』은 시인과 서양화가 김한나 그림작가가 함께 완성한 첫 그림책이다. 주인공 강아지 단비는 어느 날 날아든 새 한 마리에게 용기 내 “안녕?”하고 말한다. 그 후, 단비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 ‘안녕’의 의미를 알게 된다. ‘안녕’의 기쁨과 그리움, 슬픔을 다채롭게 담아낸 그림책이다.



시만큼 어렵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났어요

‘시인 박준’의 첫 시 그림책입니다. 어떤 계기로 그림책을 작업하게 되셨어요?

원래 그림책을 좋아했어요. 아내가 어린이책 편집자였는데, 평소에도 그림책을 많이 모으거든요. 저도 함께 읽으면서 늘 그림책을 한 권 쓰고 싶었는데, 너무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 분야도 굉장히 깊을 텐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마음이 컸어요. 시를 쓴다고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었나요?

주변에 그림책을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조언을 구했어요. 어린이책 편집자이기도 한 유병록 시인에게 “선배, 나 그림책 쓰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하고 물어보니까 용기를 주더라고요. 좋은 그림책을 100권 정도 읽고, 그 분야를 존중하면 된다고. 쉽게 보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 말이 힘이 됐겠네요. 

그림책도 시만큼 어렵고 깊은 세계라고 인정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는 시의 영역 안에서 슬럼프도 겪고 이리저리 뚫고 나가면서 몸과 마음을 다해 노력해왔잖아요. 시도 이렇게 어려운데, 당연히 그림책의 세계도 쉽지 않을 거예요. 그걸 인정하니 오히려 두려움이 좀 사라졌어요. 당연히 어려울 걸 알지만 해보자는 마음이 든 거죠.

실제로 그림책의 세계로 진입해보니 어땠나요?

진입했다고 인정해주시는 거예요?(웃음) 시와 그림책이 닮았다고 새삼 느꼈어요. 어렸을 때 최초의 독서가 기억나세요? 저는 부모님이 없는 돈을 털어서 월부로 사주셨던 아동문학 전집 시리즈인데요. 어느 날, 몇 권을 뽑아 보는데 글쓴이가 시인이예요. 나중에 신경림 시인을 만나서 “제 최초의 독서가 선생님 책입니다”라고 했더니, 놀라시면서 “어린 나이에 시집 『농무』를 읽었어?” 하시더라고요. “아닙니다. 계몽사에서 나온 어린이책을 읽었습니다.”라고 대답했죠. 실제로 많은 시인들이 아동문학을 창작했고, 반대로 아동문학가들이 시를 쓰기도 했어요.

그림책을 쓰면서 시인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참 낯선 환경을 무서워하는 아이였어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해서, 걱정하던 어머니가 저를 미술학원에 보내셨죠.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운데 학원에 안 가면 혼날까 봐 누나한테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었죠. 육교까지만 가 달라, 전봇대까지만 가 달라. 누나는 귀찮아하고 저는 엉엉 울고. 당시의 저는 모르는 사람들한테 ‘안녕’ 하고 말을 건네기가 너무 어려웠던 거예요. 책을 쓰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수없이 고치면서 자유로워졌어요

1년 동안 김한나 그림작가님과 협업하며 수없이 고쳤다고 들었어요.

과정이 참 재밌어요. 처음에는 제가 그림도 그렸어요. 하필 4B연필을 골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촌스럽네요.(웃음) 첫 원고는 동화에 가까울 정도로 구체적이었거든요. 배경에 빵집을 그려주면 충분할 것을, ‘건너편에 빵집이 있는데, 오전 아홉 시에 한번 오후 세 시에 한번 바게트가 나와’ 하고 구구절절 썼죠.

시와 달리 말이 많아지셨군요.(웃음)

맞아요. 시랑 다르니까 너무 신났던 거죠. 시는 ‘말’이랑 비슷해서 늘 더 쓰고 싶은데, 그렇다고 너무 떠들면 실없는 사람이 될까 봐 ‘그만 써야 해’ 하는 습관이 들었거든요. 그러다 그림책의 세계를 만나니 마음껏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은 거예요. 한편으로 내 뜻을 그림 작가님이나 독자가 다 알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그런데 작가님의 그림을 받아보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걸 굳이 길게 쓰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그림책은 그림으로 더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음 원고부터 글을 확 줄였어요.

갑자기 원고 스타일이 바뀌니 김한나 작가님 반응이 어땠나요?

처음에는 놀라시더니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서 보내왔어요. 저는 더 용기가 나서 더 자유롭게 쓰고요. 그때 깨달은 거죠. 그림과 글이 2인 3각 달리기하듯이 매번 발맞춰서 걸을 필요가 없구나.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되는구나. 그 후로는 번갈아 가며 폴짝폴짝 뛰듯이 진행했어요. 그림작가님이 그림으로 점프하면, 저도 따라서 한 번 더 뛰고. 폴짝폴짝 작업이 이어졌어요.

그림책 주인공이 개예요. 시인님은 실제로 개 두 마리를 기르시고 있죠. 개를 좋아해서 어릴 때, 수의사를 꿈꾸시기도 했다고요.

이 책의 모델이 된 ‘단비’는 고향 파주에 사는 개예요. 제가 기르는 하비, 달비의 엄마죠. 개와 함께하는 삶은 정말 행복해요. 하루에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흔치 않은데, 사랑하는 개와 산책하는 일은 크게 애쓰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죠. 결국 좋아하는 상대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구나 싶어요. 



만남과 이별의 ‘안녕’은 닮아 있다

이 책은 ‘안녕’에서 시작하고 끝나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던 개 앞에 새가 나타나서 ‘안녕’ 하고 인사하면서 ‘안녕’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지죠.

‘안녕’은 두 가지 의미가 있죠. 만날 때와 이별할 때의 안녕. 저는 둘 다 어려운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안녕’ 하고 먼저 다가가는 게 힘들죠. 새로운 집단에 속할 때,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안녕’ 하고 싶은데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만남의 안녕도 힘든데, 헤어질 때의 안녕은 더 어렵더라고요. “안녕은 말하기 싫을 때에도 해야 하는 말이야”라고 적었듯이, 이별의 안녕도 너무 힘든 일이죠.

작가님은 만남과 이별의 ‘안녕’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첫인사의 안녕과 끝인사의 안녕이 닮아 있다”(산문 「두 얼굴」)고 쓰신 적이 있고요.

마치 3월과 2월 같습니다. 3월은 학기가 새로 시작하니까 많은 어린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그런데 사실 2월은 헤어짐의 달이에요. 3월과 2월이 붙어 있는 것처럼 사실 안녕과 안녕은 붙어 있는 거죠. 제가 혼자 하는 쓸데없는 일 중 하나가 버스 터미널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누군가를 보내고 앉아 있는 사람일까,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일까. 열심히 관찰해도 구분이 안 가요. 보내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 사실은 같기 때문이죠. 알고 보면 만남과 이별이 같은 건데,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게 아닐까 싶어요. 

‘안녕’에 대한 여러 문장들이 나오죠. 특별히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나요?

“안녕은 밥을 나누어 먹는 거야. 그러다 조금 바닥에 흘리고는 씨익 웃는 거야.” 음식을 흘리고 씩 웃는 행동들이 정말 친밀한 관계에서 하는 일이잖아요. 수많은 ‘안녕’들이 정말 친한 사이에 사소한 것들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지죠. 매일 밥을 먹고, 흘리기도 하면서요. 

‘안녕’에는 그리움도 녹아 있어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는 아버지와 단비의 그리움에 대해 쓰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적 돌아가신 기억나지 않는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개 단비는 갑자기 떠나간 새를 그리워하죠.

단비는 제 시 「단비」에도 등장하는 개예요. 새벽마다 아버지가 단비를 데리고 논둑길로 나가서 함께 울고 온다고 하셨는데, 그게 너무 슬픈 거예요. 아버지는 얼굴도 보지 못한 엄마를 그리워하는 거고, 단비는 키우던 새끼들을 떠나보내서 우는 거고요. 한번도 보지 못한 대상을 그리워하는 것과 늘 곁에 있던 대상을 잃었을 때, 그리움의 크기는 뭐가 더 클까요? 멍청한 질문이죠. 그리움의 크기를 어떻게 잴 수 있을까요. 어쨌든 울음의 이유는 다르지만, 단비와 아버지가 같은 ‘안녕’을 만들어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떠오른 것 같아요. 

어린이도 어른만큼 만남과 이별 앞에서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거예요. 어린이들이 어떻게 만남이나 이별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셨는지 궁금합니다.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첫 번째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는 누구에게든 자신감 있게 ‘안녕’해도 된다는 거예요. 어린이들에게는 세상에 처음 보는 것들이 가득하겠죠. 거기에 마음을 열어 놓고 ‘안녕’하고 말을 건네면 새로운 세계 역시 똑같이 ‘안녕’하며 맞아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두 번째는 정말 하기 싫은 순간에도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이 나더라도 손을 흔들어줘야, 다음 ‘안녕’이 있는 거니까요. 그런 과정이 있어야 다시 만나서 반갑게 ‘안녕’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매일 밤 자정 라디오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를 진행하고 계세요. 라디오 대본을 쓰는 건 시와 어떻게 다른가요?

라디오는 물로 글씨 쓰는 기분이에요.(웃음) 시는 늘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서 무겁게 써야지 해왔거든요. 먹을 갈아서 붓으로 딱 한 점 찍는 것처럼요. 그런데 라디오는 그게 능사가 아닌 거예요. 귀로 듣는 글이니까 너무 가벼워도, 너무 무거워도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또렷하게 남지 않지만 아예 휘발되지는 않게, 물자국 정도만 남기는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시 그림책은 과연 어떤 독자를 만나게 될까요?

그동안 제 책은 밤에 혼자 읽는 용도라고 생각했어요. 잠이 안 올 때, 문득 나는 이제 혼자구나 느끼는 순간, 곁에 있어주는 책이요. 제가 진행하는 심야 라디오도 기본적으로 그늘이 져 있죠. 누군가에게는 조금 어두운 그늘이 위로가 되는 거고요. 그런데 그림책은 빛으로 한발짝 나가는 장르예요. 아직 눈이 부셔서 어떤 독자들을 만날지는 저도 아직 상상이 안 되네요.(웃음)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늘 개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안녕
우리는 안녕
박준 시 | 김한나 그림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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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조율사 조영권 “경양식집의 매력은 가성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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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동안 피아노 조율사로 일해온 조영권에게 지역 출장은 “무척 고마운 일”이다. 어떤 곳에서 출장 연락이 와도 좋다. 일정이 잡히면 일을 마치고, 그곳에 있는 오래된 경양식집을 찾는다. 그렇게 지낸 것이 어느덧 30년 세월. 조영권은 “배달문화와 더불어 사라져가는 경양식집 이야기를 책에 담아봐야겠다” 는 생각을 했고 전국 28곳의 경양식집을 묶어 『경양식집에서』를 출간했다. 

『경양식집에서』는 『중국집』에 이은 조영권 저자의 두 번째 책이다. 『중국집』과 마찬가지로 이윤희 만화가의 만화가 곳곳에 빼어난 샐러드처럼 놓여 있고, 십수 년 경양식집을 운영해온 주인장들의 인터뷰가 진한 소스처럼 올려져 있다. 경양식집의 가장 좋은 점을 “만 원 한 장이면 코스로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조영권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경양식집에서』의 가장 좋은 점은 ‘책 한 권이면 전국의 특별한 경양식집을 탐방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제일 처음 보는 건 외관

작가님에게 경영식집 탐방은 여행을 즐기는 특별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역에서 출장 제안이 오는 게 “무척 고마운 일”(184쪽)이라고도 하시는데요. 

누가 그런 말 해요. 아무리 제안이 온다고 해도, 피아노 조율 한 대 하려고 먼 곳까지 가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요. 그런데 저는 일정이 없는 날에는 일부러도 찾아 나서거든요. 출장으로 가면 일해서 돈도 벌고, 번 돈으로 음식도 사 먹을 수 있으니 고맙게 가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빨리 가야죠.(웃음) 

자주 가기 어려운 지역으로 출장을 가면 하루에 식당을 여러 군데 가시기도 하더라고요?

업무 중에는 아니고요. 여행으로 갔을 때 그럴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이틀 정도 일정이 없으면 집에 있기도, 친구 만나서 밥 먹기도 무료하니까 여행 가야겠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이때 강릉에 간다고 해봐요. 가고 싶은 데가 여러 군데 있잖아요. 예전에 갔던 데도 있고, 궁금한 데도 있고요. 어차피 가는 거 가능하면 여러 곳을 경험하고 싶어서 저는 네 끼를 계획하고 가요. 대신에 다 먹지는 못하죠. 식사 간 시간 차이가 별로 없을 때도 있고요. 그러니까 식당에 일단 가면 양해를 구하고요. 음식을 적게 달라고 하거나 그냥 절반 정도만 먹어요. 그렇게 조절하는 거예요. 식탐이 많은 걸까요.(웃음) 

주로 혼자서 많이 가니까 손님이 많지 않을 때는 사장님과 본격적인 대화도 나누세요. 

어차피 그 식당을 찾아갔으니까 정보를 많이 얻고 싶잖아요. 일단 가면 정보를 많이 캐려고 하죠. 당연히 손님이 많고, 바쁘면 안 되지만 사장님이 옆에 그냥 왔다 갔다 하시면 그때부터는 말을 걸어요. 식당이 몇 년 됐는지, 요즘 장사는 어떤지, 왜 시작했는지, 이런 걸 캐물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얘기가 되는 경우가 있죠. 

『경양식집에서』에 소개된 경양식집 사장님 가운데 책에 소개된 것을 아는 분도 계신가요? 

아마 대부분 모르실 것 같은데요. 책을 쓰기 전에 다녀온 곳도 있고, 책을 위해서 갔어도 특별히 말씀을 드리지 않은 곳도 있으니까요. 직접 인터뷰를 했던 곳은 당연히 아시고요. 책도 보내드렸어요. 

인터뷰 한 곳이 세 곳 있죠. ‘라임하우스’와 ‘라르고’, ‘그릴데미그라스’인데요. 인터뷰는 어떻게 기획하시게 된 건가요? 

출판사 대표님이 제안을 주셨어요. 식당의 더 깊은 내용을 정확하게 알 필요도 있다고, 인터뷰를 진행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저도 공감했어요. 리얼 스토리를 제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요. 섭외를 위해서 출판사 대표님이 애를 많이 쓰셨어요. 인터뷰를 거절한 경우가 많거든요. 일단은 식당 쪽에서 수락한 곳만 진행을 했어요.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요. 덕분에 현장감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경양식집에 가면 꼭 하는 루틴이 있는지 궁금했어요.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갔을 때 제일 먼저 체크하는 건 뭔가요? 

대부분은 가본 곳이라 해당 안 되는 이야기인데요. 처음 가는 곳은 정보가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제일 처음 보는 건 외관이에요. 외부를 살피면서 이 식당이 여기서 얼마나 오래 했는지 상상해봐요. 만약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영업을 한 곳이라면 최소한 지역 주민들한테는 맛 평가가 끝났다는 의미잖아요. 그렇게 첫인상을 살피죠. 그 다음 내부 분위기도 많이 살피는데요. 가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인테리어가 어떤 스타일인지, 처음 가는 곳은 아무래도 분위기를 많이 살피는 것 같아요. 

역시 경양식집은 음식만큼이나 분위기죠. 

맞아요, 저도 분위기를 살피고요. 또 요리하시는 분을 가능한 보려고 노력해요. 경양식집은 대부분 연세가 많은 남자 분이 요리하는 경우가 많긴 해요. 서양 음식의 경우 주로 남자가 요리를 많이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돈가스도 한국 음식이다

조율사로 오래 일하셨잖아요. 식당의 배경음악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세요? 

다른 식당과는 다르게 경양식집은 음악을 많이 틀어줘요. 주로 올드팝을 많이 틀고요. 주인장들의 성향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30대 요리사가 70년대 올드팝 좋아하지는 않겠죠.(웃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대부분의 요리사가 연세 많은 분들이 많아서 올드팝을 많이 트는 것 같은데요. 왠지 그런 음악이 경양식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경양식집이 좋아서 부러 찾아 다니고 계신데요. 지금은 워낙 맛집도 많고, 메뉴도 다양해서 경양식집을 찾아간다는 생각을 잘 안 하는 것 같거든요. 계속해서 찾아가게 되는 경양식집만의 매력은 뭔가요? 

가성비가 좋죠. 만 원 한 장이면 코스로 먹을 수가 있잖아요. 스프가 나오고, 샐러드 한 접시가 딱 나오고요. 그걸 먹고 있으면 커다란 접시에 돈가스나 함박 스테이크 같은 게 나오는데 옆에는 또 다양한 가니쉬가 곁들여서 나와요. 얼마나 좋나요. 나중에 커피나 음료수, 아이스크림 같은 후식까지 나오잖아요. 요즘 만 원 주고 그렇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몇 안 돼요. 오늘 인터뷰 오기 전에 출판사 대표님과 점심을 먹었는데요. 그냥 반찬 몇 개, 고기 몇 개 해서 거의 2만원씩 받더라고요. 그런 거 생각하면 경양식집이 정말 좋아요. 경양식집에서 외식하곤 했던 어렸을 때의 추억도 있지만, 간혹 시간 여유가 생기면 저는 경양식집 가서 혼자 밥 먹을 때가 많아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소주를 시키는 모습이었습니다.(웃음) 

소주는 우리나라 술이고, 경양식은 일본을 거쳐 온 서양 음식이라 둘의 조합이 어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경양식은 이제 한국 음식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슈니첼이라는 독일 음식과도 다르고 일본의 돈카츠와도 다르죠. 돈카츠가 한국에 들어올 때 한국이 좀 어려웠잖아요. 고기가 커 보여야 하니까 고기를 얇게 두드렸죠. 그러면 200g, 150g 정도의 고기만 갖고도 접시 하나만큼 크게 만들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한식으로 바뀌면서 반찬으로 깍두기도 주고, 밥도 주는 형태가 됐는데요. 그러니까 소주를 안 팔 이유가 없어요. 사실 경양식집 대부분은 소주를 다 팝니다. 당연히 근무하기 전에 마실 수 있는 건 아니고요. 업무가 다 끝났을 경우에는 식사를 하면서 마시는 거예요. 물론 운전을 안 할 경우를 말씀드리는 거고요. 그럴 때 반주로 소주만큼 좋은 게 없어요. 

짜장면을 한국 음식으로 봐야 하는 것처럼 돈가스 역시 한국 음식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셨죠. 

중국에 출장 가보면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어요. 그런데요. 한국과 똑같은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데가 있어요. 바로 한국 식당입니다. 한국식 식당에 가면 짜장면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짜장면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을 수는 있지만 중국 음식은 아니라는 거예요. 돈가스도 마찬가지로 한국 음식이고요. 

관련해서는 이렇게 한국 음식으로 개량되는 음식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말씀도 해요.  

짜장면이 한국 음식으로 바뀔 거라고 아무 생각 안 했을 거예요. 당연히 경양식도 그렇고요. 저 어렸을 때는 경양식은 서양 음식으로 인식이 됐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다 한국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새로운 것이 개량될 가능성이 있어요. 파스타도 바뀔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요즘에 뚝배기 파스타도 많잖아요.(웃음) 

음식 문화의 매력적인 부분이 바로 그런 점 같아요. 한편 노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곳곳에 묻어 있어요. 특히 경양식 같은 경우 후계자가 없어서 단절될 우려가 있는 곳들이 많더라고요. 

지금 경양식 하시는 요리사 분들 대부분 호텔 양식당 출신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88올림픽’ 이후 개방이 되고, 해외 관광객도 많이 오면서 호텔에 가야만 먹을 수 있었던 서양 음식이 동네로 퍼진 건데요. 그러면서 호텔에서 요리하셨던 분들도 호텔을 나와 직접 식당을 운영했고, 경양식이 활성화된 시기가 있었죠. 그러다 하향세를 보인 건 냉장고 보급과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에는 며칠씩 먹을 음식을 하는 게 아니라 아침마다 장을 봐와서 찬장에 넣었다가 하루에 다 소진하는 식이었단 말이에요. 냉장고가 보급되고, 냉동식품이 발달하면서 경양식집을 점점 안 가게 된 것 같아요. 물론 질은 다르지만 식품회사에서 만든 냉동돈가스가 분식집에서 1,500원~2,000원 하는데 경양식집을 가서 더 비싼 돈을 주고는 안 사 먹으니까요. 더구나 지금은 물론 후계 문제도 있고요. 이제는 외식 문화가 다양해지니까 그런 면에서 입지 조건이 너무 좁아진 것 같아요.  



차림표 맨 위에 적힌 메뉴를

‘이것만 봐도 여기는 맛있는 집이구나’ 하고 느낌이 오는 것이 있으세요? 

아주 놀라운 스프 맛을 내는 집들이 있어요. 사실 스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지 몰라요. 그런 것을 보면, 스프를 그렇게 만드는데 생선가스를 외부에서 받아 하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죠. 당연히 메인 음식은 직접 다 생선을 손질해서 만들 테고요. 더구나 인천 같은 경우 아직도 레스토랑에서 “밥 드릴까요, 빵 드릴까요”라고 묻는 곳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빵을 직접 만든다는 의미거든요. 그럼 음식도 기대가 돼요. 경양식집 운영이 워낙 할 것이 많거든요. 그런데도 10년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정성껏 직접 만들었다는 게 감동적이죠. 하지만 일일이 만들어 쓰기가 쉽지는 않아요. 나름대로 사정도 있죠. 장사가 안 돼서 직원도 없이 운영을 하는데 사장님 부부 둘이 하려면 스프 같은 것은 일일이 못 만들거든요. 그런 부분도 이해해야 해요. 시제품 스프를 쓴다고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우연히 발견한, 처음 본 경양식집에 가면 주로 어떤 메뉴를 시키세요? 역시 돈가스인가요? 

누구나 그러실 것 같은데요. 중국집을 가면 보통은 차림표 가장 위에 짜장면이 먼저 적혀 있잖아요. 그런데 간혹 우동을 맨 위에 적어 둔 집들이 있어요. 그러면 꼭 우동을 시킵니다. 경양식집도 대부분 돈가스가 제일 위에 쓰여 있잖아요. 그런데 보면 비후가스가 먼저 써 있는 곳이 있어요. 그러면 ‘오호’(웃음) 하고 비후가스를 주문하죠. 보면 예상이 틀리지 않고 항상 맛있어요. 그런 게 없다면 옆 테이블에서 뭐 드시는지 보기도 하고요. 

책에 소개한 곳이 28곳인데요. 이 가운데 너무 알려지지는 않았으면 했던 곳도 있는지 궁금해요. 

일단은 수원 ‘케냐’, 부산 ‘가미’ 두 군데가 떠오르네요. 가미는 사실 커피 맛 때문이에요. 사장님이 핸드 드립 커피의 숨은 고수예요.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미 지역 주민들한테는 커피 맛으로 잘 알려진 분이더라고요. 제가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커피콩을 사러 오는 손님들이 여럿 있었어요. 다 직접 로스팅한 거고요. 그런데 혹시 너무 많이 알려져서 커피 맛이 변하거나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실까 걱정이 돼요. 커피라는 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양이 있으니까요. 또 케냐는 제가 30년 가까이 다녀본 경양식집 중 가장 친절한 곳이었어요.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너무 궁금해서 생선가스 직접 만드는지 여쭤봤거든요. 그런데 정말 친절하게 직접 만든다고 설명해주셨어요. 거긴 분위기도 정말 좋아요. 올드팝이 은은하게 나오고, 아프리카 나무 인형이 전시되어 있고, 한쪽 통창에는 수원 시내도 쫙 보이거든요. 그곳도 유명해져서 친절함이나 분위기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죠. 

『경양식집에서』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은 이윤희 만화가님의 만화잖아요. 작가님의 캐릭터가 재미있는데요.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똑같죠.(웃음)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윤희 만화가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몰라요. 사실 저랑 직접 만난 적은 열 번도 안 되거든요. 『중국집』 때와 지금 제 헤어스타일이 좀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머리에 뭘 바르고 다녔는데 지금은 안 바르고 다니는데요. 그걸 이윤희 만화가가 포착해서 책에 묘사를 했더라고요.(웃음) 그 변화를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책에서 만화 부분이 중요한데 『중국집』때와 다른 만화가를 섭외하면 작업이 어려웠을 것 같아요. 새로 대화도 많이 나누어야 하고, 작업 방식도 맞춰야 하니까요. 다행히 이윤희 만화가가 이번에도 작업을 해주었어요. 

중국집과 경양식집을 사랑으로 탐방하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는 소식도 있던데요?

원래는 그랬는데요. 아무래도 요즘은 관객이 적다 보니까 제게 제안을 했던 영화사에서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하더라고요. 일단은 계약을 했고요. 아마 스토리는 피아노 조율사가 전국에 출장을 다니면서 맛있는 집을 찾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언젠가 또 써보고 싶으신 주제가 있으신가요? 

『중국집』책을 쓴 다음에 경양식집에 대해서 써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다음 책도 아직은 모르겠어요. 다행히 『경양식집에서』가 반응이 좋아서요. 만약 이번 책을 정말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다음 책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아지면 어떤 주제일지는 몰라도 혹시 ‘써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어쨌든 너무 무리하게 책 작업을 생각하고 싶진 않아요.




*조영권

28년 차 피아노 조율사. 조율 의뢰가 오면 어디든 달려간다. 조율을 마친 뒤, 그 동네 경양식집과 중국집을 찾아 식사하는 소박한 취미. 그 작은 즐거움 또한 28년이 됐다. 쓴 책으로는 『중국집』이 있다.



경양식집에서
경양식집에서
조영권 저 | 이윤희 그림
린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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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천운영 “음식에 진심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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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사바랭은 말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그의 말을 소설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인물이 무엇을 먹었는지 살펴보면, 작가가 왜 그 음식들을 호명했는지 생각해보면,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방식의 ‘읽기’가 얼마나 흥미롭고 유의미한지, 책 『돈키호테의 식탁』은 잘 보여준다. 소설가 천운영은 『돈키호테』 속의 음식을 따라 감미로운 모험을 떠났다. 400년 전 돈키호테가 먹었던 음식을 찾아 나서며 돈키호테, 산초, 그리고 세르반테스의 이야기 속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소설 『돈키호테』, 스페인, 스페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서게 됐다. 『돈키호테의 식탁』에 담긴 그 순간과 경험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새로운 방식으로 읽는 『돈키호테』’와 만나게 한다. 

2001년 첫 소설집 『바늘』을 시작으로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엄마도 아시다시피』,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생강』 등을 발표한 천운영 소설가는 새로운 여성 미학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13년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스페인에 머물며 『돈키호테』에 매료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와 스페인 가정식 식당 ‘돈키호테의 식탁’을 운영했다. 『돈키호테의 식탁』은 등단 21년 만에 처음 선보이는 산문집으로,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 이후 7년여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음식에 진심인 편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많은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7년 만이에요. 마지막 책이 『엄마도 아시다시피』라는 단편집이었는데요. 그 책을 내고 2년 동안 남극에 두 번 다녀왔고, 스페인에 2년 머물렀고, 그리고 식당을 2년 운영했고, 그 뒤로 또 2년이 지났으니 7~8년 됐죠. 그 사이에 소설을 안 쓰는 대신 굉장히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딴짓을 조금 하다 왔어요(웃음).

딴짓을 하시면서 즐거우셨나요? 조금 초조하지는 않으셨어요?

음... 약간의 초조함이 없었던 건 아닌데 ‘내가 지금 체질을 바꾸고 있구나, 그게 조금 오래 걸리는구나’ 이런 느낌이었어요. 체질과 근육을 바꾸는 것 같은. 처음 남극에 갔을 때는 다큐라는 다른 장르를 하는 맛이 있었고, 스페인에서는 물론 『돈키호테』에 빠져 지냈어요. 거기에서도 배운 게 굉장히 많았어요. 식당을 운영한 것도 체질 변화에 큰 도움을 줬고요. 처음에는 ‘아, 내가 잊히나? 내가 소설가로 살지 않는 게 정말 잘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다가, 오히려 초조함이 사라진 것 같아요. ‘나는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도 있고요.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셨어요?

방식이 달라지고... 제가 등단하고 나서 소설만 열심히 쓰고 다른 건 한 게 없었거든요. 소설만 쓰고 살았어요. 그래서 ‘내가 너무 문학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나?’ 그런 생각들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던 차에 하게 된 외유는 생각과 시각을 달라지게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 시간 동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문학을 바라보게 되셨을 것 같아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개인적으로는 어떤 순수 문학의 권위에 저 스스로도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아, 소설은 너무 멋진 거야’ 혹은 ‘소설은 되게 훌륭해야 해’ 이런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문학적’이라는 권위에서는 벗어난 것 같아요. 저한테는 참 다행이에요. 그래서 쓰는 것도 되게 자유로워졌어요. ‘이것이 문학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 없이 편안하게 썼어요. 스스로 질문이 약간 바뀐 것 같아요. ‘이것이 세상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으로. 결국은 같은 질문인데, 느낌으로 표현하자면, 갑옷 같은 걸 입고 있다가 벗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갑옷을 입으면 기사가 돼야 되잖아요. 늘 돈키호테 같다가 산초처럼 돼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돈키호테의 식탁』은 오래 전부터 생각하셨던 책이죠? 동명의 식당을 운영하실 때 이미 출간 계획이 있으셨다고요. 

제가 식당을 하게 되기까지 자극을 준 이야기들인 거죠. 『돈키호테』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다 들어 있어요. ‘소설 『돈키호테』에 나온 음식을 찾아가야지’ 해서 스페인을 헤매게 된 것이 이 책 때문인 거예요. 그러다가 식당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고요(웃음). 처음에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말라가에 있을 때, 그때 갖고 간 책이 『돈키호테』였어요. ‘스페인 하면 『돈키호테』 아니야? 내가 안 읽어봤으니 읽어봐야지’ 하고 가지고 간 거예요. 아시다시피 『돈키호테』는 두꺼운 책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읽다 보니 너무 재밌었어요. 그리고 중간 중간 음식 이야기가 나오는데 먹어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음식들을 찾아다니다가, 작정하고 몇 개월은 음식과 세르반테스 문학 기행을 다니고... 그러다 보니 책이 나오기까지 6년이 걸렸어요. 

소설에 나오는 음식을 찾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말라가에서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동네 아주머님들하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돈키호테』를 읽었고, 그러다가 소설에 나오는 음식을 찾아다녔어요.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다음에는 원서와 번역본을 놓고 음식이 나온 부분만 찾아서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음식 이름만 뽑아내는 데 1년이 걸렸어요. 그리고 비슷한 음식을 찾기 위해서 구글에서 식당 검색해서 메뉴판을 확인하고 찾아가서 먹어봤어요. 그렇게 1년 동안 한 거예요. 제가 식당을 운영하는 동안에는 이 책에 실린 글들 중 일부를 <경향신문>, <한국일보>에 연재했고요. 그 칼럼을 쓸 때 항상 ‘돈키호테의 음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그렇게 자료 조사 2년, 스페인 떠돌아다닌 거 2년, 식당 하면서 연재한 2년... 6년 만에 나온 책이에요. 

정말 열정적이셨네요! 워낙 ‘음식에 진심인 편’이셔서 그랬을까요(웃음).

네, 음식에 진심이죠(웃음). 맛있겠다고 생각되는 건 먹어봐야 되는 스타일이라 (소설 속 음식이) 너무 먹어보고 싶었어요. 스페인도 너무 좋았고, 그렇게 만나는 새로운 음식도 너무 좋았고, 돈키호테도 너무 좋았어요. 실은 돈키호테보다 산초가 더 좋았죠. 너무 멋있는 사람이에요. 

돈키호테보다 산초를 더 좋아하시는 게 책에서도 느껴져요(웃음). 

산초가 훨씬 더 좋아요(웃음). 미식가이고,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돈키호테』를 그냥 모험의 대명사, 엉뚱한 짓 하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하는 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근대문학, 현대문학을 만든 양대 산맥이거든요. 이후의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두 작가의 작품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고 단언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모든 인물 유형들이 다 들어 있어요. 정말 위대한 소설인데, 요즘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모르잖아요. 그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소설 『돈키호테』도 알리고 싶고, 내 사랑 산초도 알리고 싶고(웃음), 그런 욕심이 있었죠. 이 책이 그냥 음식 산문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세르반테스와 ‘유럽 맛집 지도’

작가님이 보시기에 돈키호테와 산초는 어떤 인물인가요?

돈키호테는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문제가 생겨요(웃음). 말로만 ‘둘시네아만 사랑해’라고 하고, 머릿속으로는 ‘저 여자가 또 나한테 빠졌군’ 이러면서 ‘그러지 마시오’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조금 우울한 스타일이죠. 햄릿에 더 가까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기사의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진중한 고민들을 하는 사람이에요. 산초는 재담가, 입담가, 그리고 촌철살인의 대명사죠. 책에도 산초의 어록은 따로 모아놨는데, 어록들 중에 반도 안 될 거예요. 음식에 관련된 말들만 뽑았어요. 산초는 말도 정말 잘하고, 또 와인 맛을 기가 막히게 잘 아는 소믈리에죠. 냄새만 맡아도 “이 포도주 시우다드 데 레알산 아닌가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순정파예요. 훌륭한 총독이기도 했고요. 두뇌가 명석해서, 상상하는 일에 있어서는 돈키호테랑 대결했을 때 훨씬 더 뛰어나요. 소설가가 됐으면 지금 대박났을 거예요(웃음). 

산초에 비하면 돈키호테에 대한 평가는 조금 야박하신 것 같은데요(웃음).

그렇죠(웃음). 야박한 이유가 있어요. 마지막에 모험을 다 하고 돌아왔을 때, 어쩔 수 없었겠지만, 자신이 미치광이 기사로 살다가 이제 제정신이 돌아와서 그냥 시골 양반으로 돌아와 죽는다고 하거든요. 자신의 일생을, 그 아름다운 모험을 완전히 부정하고 죽는 거죠. 여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있는데, 검열이 있을 당시여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소설 『돈키호테』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이유도,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한테 핍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이 출간되지 못할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 안타깝기도 해요. 그러나 돈키호테는 사랑에 관련해서는 최고의 로맨티시스트죠. 가장 아름다웠던 문장이 있잖아요. “실제로 고귀하다고 상상하고 믿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세르반테스에 대해서는 “오 세르반테스여! 어쩜 이리 복잡한 서술 구조를 가진 소설을 400년 전에 쓰셨단 말입니까!”라고 하셨어요. 

서사 구조가 너무 놀라워요. 옛날 소설에서는 작가가 마치 신이 말하듯이 쓰는데 『돈키호테』는 감춰진 작가, 화자가 있잖아요. ‘사실은 이게 아랍의 작가가 쓴 역사서이고, 내가 그 책을 번역가한테 맡겨서 번역한 다음에 다시 이야기로 만들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렇게 1부가 끝이 나고 2부에서는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돼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걸어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는 상태가 됐어’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요. 진짜 천재예요. 지금도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만들려면 힘이 들 텐데, 400년 전이잖아요. 세르반테스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두말 할 필요가 없죠. 이 책을 쓰면서 저의 욕심이 있었다면 ‘『돈키호테』라는 좋은 작품에 음식으로 조금 쉽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맛을 가진 이야기라는 것이 더 잘 와 닿았으면 좋겠다’라는 거였어요. 그러기를 바라죠. 

이런 문장도 있죠. “세르반테스는 분명 음식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하죠. 『돈키호테』에서 키테리아와 카마초의 결혼식 장면만 보더라도 두세 페이지에 걸쳐서 음식 이야기를 해요. 과장도 심하죠. 느릅나무를 통째로 잘라 꼬챙이를 만들었고, 송아지 배 속에 어린 새끼돼지 열두 마리를 넣었고, 치즈가 벽돌처럼 쌓여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요(웃음)? 

그러니까요(웃음).

그리고 처음에 돈키호테라는 사람을 표현할 때, 돈키호테가 되기 전에 이 시골 양반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주일치 식단을 자세하게 알려주거든요. 세르반테스는 음식에 관심도 많고, 그걸로 이 사람을 표현해야겠다는 목적이 분명히 있었던 거죠. 산초가 바라토리아라는 섬의 총독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봐도, 주치의가 이 음식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음식은 저래서 안 된다고 하다가 결국 시원찮은 음식을 주거든요. 그때 ‘산초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라고 하면 될 걸 “밀라노의 자고새나 로마의 꿩, 소렌토의 송아지고기, 모론의 메추리 고기, 라바호스의 거위 요리가 나온 것보다도 더 맛있게” 먹었다고 썼어요. 세르반테스는 유럽의 맛집 지도를 알고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완전히 미식가이고, 음식에 관심이 정말 정말 많은 사람이었어요. 

‘키테리아와 카마초의 결혼식’에 대해 쓰신 꼭지에서 ‘오빠의 결혼식과 홍어’의 기억을 떠올리셨는데요. 음식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예를 들면, 저는 딸기 향 쮸쮸바 냄새가 나면 ‘아, 여름이구나’ 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날에는, 너무 더워서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옆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머릿속에서 쮸쮸바 향이 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면 한여름에 먹는 쮸쮸바의 시원한 느낌이 살짝 돌아요. 음식이 그런 연상 작용을 강력하게 해주죠. 첫사랑의 기억도 그렇잖아요. 같이 먹었던 음식과 같이 갔던 장소가 기억나잖아요. 음악도 ‘그때 흐르던 음악인데’ 하고요. 음식도 비슷한 것 같아요. 흐른다, 풍긴다 등등이 되게 미세한 단어인 것 같은데 음식으로 더 강력하게 다가오기도 하죠.

 


음식, 과학, 소설의 공통점

『돈키호테』 속의 음식을 찾아 여행하시면서, 소설뿐 아니라 스페인도 더 알게 되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냥 여행을 하는 거랑은 정말 다르죠. 인생을 사는 데에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잖아요. ‘네가 뭘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알려줄게’라는 유명한 말처럼, 먹으면서 스페인을 배웠죠. 그것보다 더 재밌었던 건, 새롭게 만난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요리를 가르쳐줄 때였어요. 『돈키호테』를 빌미로 요리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배웠거든요. 보통은 여행 다니면서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할머니, 어떤 음식 해주세요, 가르쳐주세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좋았어요. 그렇게 찾아서 맛보고 알게 되면서 소화를 시킨 느낌이에요. 피부에 와 닿은 걸로 느낀 게 아니라 소화시킨 느낌.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이, 소설을 쓰고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세요?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음식을 해서 누군가한테 먹이는 것과 내가 소설을 써서 읽히는 것이 비슷하다고 느껴요. 소설이라는 게, 내가 먹어보고 눈으로 본 것들이 내 몸을 거쳐서 나가는 ‘무엇’이잖아요. 음식을 하는 것도, 세상에 있는 재료들을 내 손을 거쳐서 먹여주는 거니까 같다고 여겨져요. 똑같은 재료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음식을 만들잖아요. 음식의 성향도 달라지고. 그런 점도 소설과 닮은 것 같아요. 

『돈키호테의 식탁』과 함께 또 다른 산문집(『쓰고 달콤한 직업』)이 나왔습니다. 등단 21년 만에 처음으로 산문집을 출간하셨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제가 7년 동안 책이 안 나오기도 했고, 그동안 몸도 체질도 바뀌었고, 그 상태에서 여태까지는 소설만 쓰다가 산문을 내는 거라 첫 책을 냈을 때만큼 설레요. 그러니까, 첫 책 낸 사람 같아요. ‘어떻게 읽힐까’ 하는 느낌으로 설레고, 좋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요. 가장 지배적인 기분은 이제 막 등단한 새내기 작가 같은 느낌이라는 거예요. 첫 책 『바늘』이 나왔을 때는, 두렵기는 했지만, 훨씬 더 용감하고 훨씬 더 아무것도 몰랐거든요(웃음). 그때 제가 서른 살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소설은 잘 빚은 이야기들을 내는 것 같다면, 산문은 저의 날 것을 다 보여주는 느낌이 있어요. 어떤 의미로는 그래서 자신감이 붙었어요. 소설에서는 내 이야기인데도 아닌 척 하는 게 있는데, 이번 산문집은 그렇게 안 했죠. 그래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많이 설레네요. 

두 권의 산문집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내가 보기에도 체질 개선이 됐구나’ 싶으셨어요?

체질 개선이 되기도 했고... 그보다는 이런 거예요. 편안해졌어요. 만들어진 문장이 전혀 없고 그냥 흘러나온 문장인데, 그러기 위해서 노력을 했어요. ‘쌓고 쌓아서 그대로 우러나오는 문장을 체로 거르듯 걸러서 내자’, ‘고민하지 말고 쌓을 때까지 기다리자’ 하고요. 그게 6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칼럼으로 연재할 때도 뭘 써야겠다거나 멋지게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나한테서 나오는 문장이 바로 내 문장이야, 내 몸의 문장이야’라는 걸 믿고 아주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썼어요. 처음에 이야기했던, 소설이라는 것 때문에 긴장했던 어떤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에서는 훨씬 더 좋죠. 이 산문집은 훨씬 더 편하지만, 내 문장이지만, 꽉 채운 문장이 아니라 꽉 차서 흘러나온 문장들인 거죠. 

『돈키호테의 식탁』과 『쓰고 달콤한 직업』의 결이 사뭇 다른 것 같아요. 두 책을 같이 읽으면 작가님의 세계를 더 촘촘하게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정말로 그래요. 『돈키호테의 식탁』은 소설 『돈키호테』를 음식으로, 그리고 돈키호테와 산초에 대한 저의 사랑으로 읽으면서 경험한 음식, 스페인, 추억에 대한 것들이 다 합쳐진 결이라고 할 수 있고요. 『쓰고 달콤한 직업』은 식당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식당을 하면서 느낀 것들, 자영업자로서 힘들었던 것, 그런 제 삶의 기록이 더 많이 나와 있어요. 훨씬 더 현실의 저와 생활과 사람들, 음식과 삶의 이야기가 많은 거죠. 그런데 그 이야기만 읽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궁금하실 수 있어요. 그럴 때 『돈키호테의 식탁』을 읽으시면 ‘아, 이런 경험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 『돈키호테의 식탁』에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되게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 점에서 두 책의 이야기가 합쳐지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요. 

작가님의 소설은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식당을 그만두고 2년 동안 장편 연재를 했어요. ‘폐업일기’라고 문학동네 계간지에 연재했는데, 책으로 묶지는 못했고 고민을 했죠. 지금 많은 식당들이 폐업을 하고 난리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폐업에 이르는 과정을 여러 각도의 이야기로 썼는데,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넘치지 못하는데 억지로 퍼서 쓰고 있구나’ 싶어서 묵혀두고 있어요. 다음 책은 그동안 틈틈이 썼던 단편들과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던 소설(「아버지가 되어주오」)을 묶어서 10월쯤에 내려고 해요. 원래 목표는 ‘세르반테스 문학기행’까지 해서 올해 12월까지 4권을 내는 거였는데, 11월에 남극으로 떠나는 일정이 잡혀서 조금 미뤄질 것 같아요. 일단 올해 단편집이 나오고, 내년에 ‘세르반테스 문학기행’과 장편이 나올 것 같고, 이제 시동 걸기 시작했으니 더 많이 쓸 것 같아요(웃음). 

현재 진화생물학 연구를 하고 계시잖아요. 남극에도 연구차 가시는 거고요. 생물학 연구는 소설 쓰기와 완전히 다른 일 같은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제가 깨달은 바로는 과학 하는 과정과 소설 쓰는 과정이 같아요. (과학은) 동물과 환경을 관찰하고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왜 이런 유전적 특징을 갖게 된 거지?’라는 질문을 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해서 어떤 결과를 얻는 거거든요. 소설은 ‘저 사람은 왜 저래? 저 관계는 왜 저래?’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요. ‘사람이 이래서 그런가 봐, 세상이 이래서 그런가 봐’ 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하고, 그런 장면을 글로 써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이 과정이 소설 쓰기와 과학 하는 방법이 같아요. 특히 동물 행동학은 그렇거든요. 과정이 너무 재밌어요. 거기에 ‘과학적’이라는 말이 붙는 건데, 지금은 그 방법론에 빠져 있어요. 그리고 소설은 책상에서 쓰는데 연구자는 필드에 나가잖아요. 필드에서 자연, 동물하고 교감하는 순간이 너무너무 짜릿하다는 걸 배웠어요. 7년 전부터 언젠가는 필드에서 연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천생 소설가예요

식당 운영하실 때 인터뷰하신 기사를 봤어요. 너무 문장이 쓰고 싶어서 괴로울 정도라고, 깊은 그리움을 나타내셨는데요. 다시 쓰기 시작하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다시 식당하고 싶더라고요(웃음). 몇 달 쉬면서 몸을 추스르고 나니까 식당 운영하던 때가 그립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스페인에 가서 김밥 장사를 할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요(웃음). 그런데 천생 소설가예요. 소설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요. 제가 30대라면 빨리 성공하고 싶고, 사람들한테 팔리고 싶고, 이런 마음이 있을 텐데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를 더 정확히 찾아내고 표현하자’고 생각해요. 그래서 조금 더 느긋해졌어요. 나이가 드니까 예전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단점이 있지만, 60세까지는 머리가 선명할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은 열심히 써야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2권을 마무리하고 한 달 뒤엔가 죽었거든요. 죽는 순간까지 썼다는 이야기죠. 그게 소설가한테는 가장 큰 목표, 꿈이 아닐까요? 죽는 날까지 소설을 쓸 수 있는 것.

계속 새로운 길을 가시는 것 같아요. 식당 운영도 그렇고, 진화생물학 연구도 그렇고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건 모험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용기가 필요하죠. 무모하죠. 그래도 비겁한 것보다는 낫다고, 돈키호테가 말하잖아요. “모험에 도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모자란 것보다는 지나친 편이 낫다고. 소심하고 겁쟁이 기사라는 말보다는 겁도 없고 무모한 기사라는 말이 훨씬 듣기 좋지 않냐고.” 돈키호테는 참 멋진 말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이 결코 우왕좌왕하는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전혀 다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모험이 아니라 시도와 모색은 용기 있게 끊임없이 하자고 생각해요. 제가 겁이 많은데 이제는 겁이 안 나요. 자영업자도 해봤잖아요(웃음). 영화 <극한직업>에도 그런 말이 나오잖아요. 자영업자들은 목숨 걸고 한다고(웃음). 자영업자까지 거쳤으니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웃음). 그런 생각을 해요. 

작가님이 다방면으로 시도, 모색하시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소설, 글로 꿰어진다고 생각하세요?

맞아요. 그냥 저는 소설가예요. 식당을 해도 여전히 몸은 소설가여서 글 쓰고 싶어 미치겠고, 이야기 생각하고, 사람들 관찰하는 거죠. 소설을 안 쓰고 있었지만 소설가가 아닌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남극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게 다 궁극의 소설을 향한 모험 같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떤 권위를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요즘 사람들이 이런 소설을 쓰니 나도 이렇게 써봐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없어요. ‘내가 소화한 이 세상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세상에서 무엇을 봐야 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해요. 그렇게 중심을 잡게 만드는 것이 소설이기도 하고요. 저의 목표는 눈치 안 보고 끝까지 소설 쓰는 것,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에요. 

소설가로서의 목표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처음 등단하셨을 때는 어떠셨어요? 30대의 신인이었을 때 가졌던 목표는 지금과 달랐나요? 

그때는 소설가가 되고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왜 소설을 쓰고 싶은지 몰랐던 것 같아요. 처음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진짜 소설을 쓰고 싶나? 딱 10년만 해보자, 그때도 쓰고 싶은 게 맞다고 생각되면 그 뒤로 10년 더 하고 그때 안 되면 그만두자’ 생각했어요. 그러고 나서 서울예대 문창과를 갔고, 소설 쓰겠다고 했을 때부터 등단하기까지 5~6년이 걸렸죠. 등단하고서는 열심히 쓰면서 ‘내가 정말 소설을 쓰고 싶은 거야?’라는 질문 자체를 안 했어요. 그냥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된 거죠. 그런데 최근 5~6년 동안 소설을 안 쓰고 쉬면서 ‘내가 정말 소설을 쓰고 싶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이 소설이었구나, 나한테 소설이란 ‘무엇’이구나, 내 마지막은 소설이었으면 좋겠다‘ 등등으로 삶의 목표가 조금 더 명확해졌어요.  

그 과정에 『돈키호테의 식탁』가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돈키호테』 덕분이에요. 세르반테스 덕분이고. 이 책에 담긴 건 돈키호테의 식탁이면서, 산초의 식탁이면서, 결국은 세르반테스의 식탁인데요. 세르반테스가 차려놓은 돈키호테의 식탁이 사람들한테 모험과 용기 같은 걸 줬으면 좋겠어요. 그걸 거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삶,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삶을 배웠으면 좋겠고요. 




*천운영

천운영은 1994년 한양대학교 신방과를 졸업했으며 1997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현재 고려대 국문대학원에 재학중이다. 지난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늘」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2001년 제 9회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등단작을 표제로 한 소설집 『바늘』을 출간했다. 2004년 소설집 『명랑』을 출간했고, 지난해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를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990년대 들어 문단의 전면을 장식하며 등장했던 일군의 여성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와 작가관을 선보여 새로운 여성 미학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3년 신동엽창작상, 2004년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돈키호테의 식탁
돈키호테의 식탁
천운영 저
arte(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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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우리는 지구의 주인으로 사는 마지막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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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함께한 지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의 일상에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비대면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졌고 생활의 대부분이 디지털로 전환됐다. 느릿느릿 다가오던 4차산업혁명에 엔진이 달린 현재, 우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까. 

뇌과학을 연구하는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는 “개개인의 현실이 쪼개지고, 인공지능이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은 인류 역사에 있어 거대한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이 중요한 시점에 그가 주목한 것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키워드다. 세상이 변하면, 단어의 의미 또한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키워드』에는 ‘외로움, 사랑, 고향, 친구, 외모’ 등 평범하고 익숙한 34개의 단어들이 김대식 교수의 사유와 통찰을 거쳐 새롭게 그려진다. 그동안 알고 있던 키워드가 낯설어지는 순간, 우리는 미래를 살아갈 힌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외로움, 사랑, 고향, 교육 같은 평범한 키워드를 새롭게 정의하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나는 뇌과학을 전공했고, 인공지능을 연구하기 때문에 인류의 큰 변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금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아주 거시적인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변곡점이다. ‘다중현실’이 출현하고, ‘인공지능’이 현실화되고 있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지구 전체를 인간 위주로 바꿔 놓았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자연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구를 인간 위주로 바꾸어도 된다는 허락을 누구에게도 받은 적이 없다.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 중 인간이 가장 똑똑하니까, 그냥 우리 마음대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인공지능’이라는, 우리보다 더 똑똑한 존재가 새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우리가 1등이지만, 곧 금메달을 넘겨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지구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마지막 인류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키워드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34개의 키워드는 어떻게 선정했나. 

‘흔히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키워드를 나를 위해 재정의해보자’는 마음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개인의 위치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저택의 주인이 생각하는 ‘집’과 하인이 생각하는 ‘집’의 의미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즉, 인간이 지구의 주인으로서 만든 수많은 개념 중, 인류 역사상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 다시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았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그럼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매 파트마다 명화를 설명하며 이야기의 문을 연다.  

나는 고전미술을 좋아한다. 미적으로도 아름답지만, 메시지가 하나씩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다. 이번 책을 쓸 때는 키워드를 찾고, 그 단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은 뭐가 있을지 생각했다. 혹은 거꾸로 미술관을 다니다가 좋은 그림을 보고 ‘이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리는 키워드는 뭘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상당히 많은 챕터들이 이렇게 시작됐다. 그림에서 글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첫 키워드는 ‘외로움’이었다. 

인간의 본질적 욕구 중 하나는 외로움을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기한 건, 인간은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 또 갈망한다. 같이 있으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면 같이 있고 싶은 거다(웃음). 한꺼번에 성립될 수 없는 두 개념이 늘 부딪혔는데, 흥미롭게도 기술의 발전을 통해 최근에는 이게 가능해졌다. 평소에는 혼자 지내다가, 외로워지면 언제든 가상현실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 또 같이 있는 게 귀찮아지면 그 창을 닫아버리면 된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Z세대가 온라인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 좀 더 익숙한 것이다. 언제든 외롭고,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시대에 외로움이라는 개념은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변했다기 보다는 우리 주변의 현실이 달라지면서 키워드의 의미도 바뀌는 것이다. 

요즘은 공동체도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시대다. 

공동체는 현재 상당히 중요한 이슈다. 민주주의 사회에는 공론장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투명한 공론장. 인간은 다양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논쟁을 벌여서 다양한 사람들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합의가 가능했는데, 불과 5~10년 사이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이제 공론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을 개발하는 단계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이 개발될 때는 정보격차가 해소되면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정보가 거의 무료가 되었는데, 세상은 반대로 가고 있다. 

왜 그런가.  

인공지능 기반의 추천 알고리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사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다양한 의견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보다. 인간에게는 내 의견이 맞다고 확신 받고 싶은 본질적 욕구가 있다. 내 생각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때 인간의 행복지수는 어마어마하게 높아진다. 인터넷 알고리즘은 이 부분을 파고든다. 나의 선호도를 파악해서, 원하는 정보만 보여주기 때문에 중독성이 있다. 

문제는 내가 원하는 정보만 계속 보다 보면, 세계관이 점점 ‘나’ 위주로 좁아진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폐성적인 사회관을 갖게 된다. 이렇게 쪼개진 현실 속에서, 나의 편견만 강화하는 게 만연해지면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해진다. 그때부터는 하나의 현실을 보고 각기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현실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팩트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논의를 할 수 있겠나. 

실제로 코로나19가 발생하며 수많은 음모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현실을 보는 것이다.  

얼핏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음모론이 나오고, 그걸 믿는 사람들이 많다. 빌게이츠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등의 이야기다. 이런 음모론이 20년 전에 나왔다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을까 싶다. 물론 거짓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늘 있었지만, 과거에는 그 비율이 1%도 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의 퍼센트가 두 자릿수로 늘어났다. 사실이 아니라는 수많은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다.

움베르트 에코는 “현대와 중세기의 차이가 있는데, 중세기에는 개인이 자신만의 현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중세기에는 본인이 태어난 마을, 믿는 종교가 현실이었다. 그 외의 현실은 물리적으로 교환될 수 없었다. 이후 현대로 오면서 개인들의 현실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고, 20세기 하반기에 와서는 세계화 시대가 되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인들이 대부분 같은 현실을 공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제 현실이 다시 쪼개지고 있다. 움베르트 에코의 말을 빌리자면, 개념적으로는 세상이 다시 중세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아주 발달된 중세기로 돌아가는 셈이다.


 

인간은 왜 있어야 하나? 

키워드 ‘기계’ 파트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오싹했다. “약속시간에 늦어 뛰어가는 우리 발에 밟혀 죽는 벌레들이 무의미하듯, 드디어 세상을 느끼게 된 기계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300쪽)”

인공지능에는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이 있다. 약한 인공지능은 기계학습, 심층학습 등을 이용해 인간의 지적능력이 필요한 기능을 기계가 대체하는 기술이다. 자동인식 기술이나 자율주행차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강한 인공지능이다. 터미네이터가 무서운 건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자율성이 있어서다. 기계가 인간을 능가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동차는 인간보다 빠르다. 망치는 인간의 주먹보다 세다. 그런데 망치에 자율성이 생긴다면 어떨까? 인간의 머리 위를 혼자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내려치는 망치가 있다면, 상당히 위협적이다.  

사실 강한 인공지능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하고 대비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현재의 약한 인공지능도 누가 프로그래밍해서 만든 게 아니라, 데이터를 주고 학습을 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AI 알파고를 보면 알 수 있듯, 학습 알고리즘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기계의 학습 능력이 좋아진다면 언젠가는 자율성까지도 학습해버릴 수 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책, 인터넷 정보에는 자율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걸 기반으로 기계가 ‘아, 자율성이란 이런 거구나’라고 학습하는 순간 강한 인공지능이 될 텐데, 그럼 인류 역사에 또 다른 변곡점이 생길 것이다. 

만약 강한 인공지능이 탄생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 

개인적으로 영화 <터미네이터>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기계가 세상을 지배할 이유는 없으니까. 사실 우리는 기계가 무얼 원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민해야 할 21세기의 가장 질문 중 하나는 ‘기계는 무엇을 원할까?’이다. 이 제목으로 몇 년째 책을 집필 중인데, 아직 답을 몰라서 완성을 못하고 있다(웃음). 

‘과연 자율성이 있는 기계들은 뭘 원할까?’라는 상상을 해보았을 때, 돈이나 금을 원할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쭉 돌아보면 ‘지구를 인간이 원하는 쪽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핵심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가장 똑똑했기에 이게 가능했는데, 이제 인간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이 나타났다. 그럼 기계 입장에서는 앞으로 지구를 인간 위주가 아닌, 기계 위주로 바꾸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논리적일 것이다. 그 첫 번째 단계로 지구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기능을 물어볼 것 같다. 인간도 그랬으니까. 인류는 ‘이건 왜 있어야 하지? 이게 인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세상을 여기까지 만들어 왔다. 그러니 기계도 같은 질문을 하지 않겠나. 그리고 어느 한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질문을 던지겠지. “인간은 왜 있어야 하나?” 

상상만해도 두려운 질문이다. 

그렇다. 이건 정말 위험한 질문이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는 인간끼리 앉아서 인간에 대해 토론했다. 팔은 당연히 안으로 굽는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존재가 처음으로 이 질문을 던진다면? 그리고 지구 전체를 보았을 때 인간이 여기에 계속 있는 게 좋을지, 사라지는 게 좋을지 묻는다면 어떨까? 지구의 모든 생태계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지구에서 빠져주는 게 훨씬 좋을 것이다. 지구에서 발생하는 상당히 많은 문제는 다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기계가 생각했을 때 지구에 인간이 없는 게 더 좋다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인류는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그동안 몇 가지 제안이 있긴 했다. 하나는 미국의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로봇이 인간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되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등의 ‘로봇 3원칙’을 반도체에 심어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기계가 자율성을 학습하면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법이 있지만, 안 지키는 사람이 있지 않나(웃음). 어느 중국 학자는 ‘기계가 인간을 부모로 섬기게 하자’는 제안도 했다. 이것도 기계가 지키지 않으면 끝이다. 

결국 방법은 없다. 나보다 더 똑똑한 녀석을 영원히 제어할 방법이 어디에 있겠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을 때, 개인적으로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기계를 제어할 순 없지만 설득하는 건 가능할 수도 있다. “우리 과거가 그리 좋진 않지만, 계속 노력하고 있어. 기회를 주면 계몽할게. 그리고 너도 혼자 있는 것보다, 지능을 가진 다른 종과 함께 사는 게 더 재미있을 거야. 인간에게는 수많은 드라마와 사랑 같은 감정이 있거든.” 이렇게 계몽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기계를 설득해보는 건 가능할 지 모른다. 이때는 조건이 필요하다. 기계가 우리를 믿고 기회를 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강한 인공지능이 독일식이 아니라, 이탈리아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이탈리아식 인공지능이란 게 무슨 의미인가. 

독일식은 원칙을 따른다(웃음). 인공지능이 원칙대로 한다면, 인류를 없애는 게 맞다. 하지만 기분파이고, 분위기에 강한 이탈리아식 인공지능이라면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해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미래에 나올 강한 인공지능이 완벽함을 요구한다면 인류에게는 미래가 없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안전성을 갖춘, 너그러운 인공지능을 만들어 나가는 게 우리에게 좋지 않을까 싶다(웃음).


 

우리에게 실재하는 건, 아날로그 현실이다 

최근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가 무엇인가. 

현실의 다양성을 잘 표현하는 ‘메타버스(Metaverse)’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다. 21세기에는 4가지 세대가 함께 산다. ‘부머’라고 불리는 가장 나이든 세대, X세대, 밀레니얼 세대, Z세대다. 여기에서 ‘부머, X세대, 밀레니얼 세대’까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Z세대부터는 지금까지의 인간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인간은 뇌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서, 10년간의 경험을 통해 뇌가 완성된다. 우리의 뇌를 완성시킨 환경을 ‘고향’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거기서 뇌가 만들어졌으니까. 밀레니얼 세대까지는 인간 세상 위주로 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Z세대는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접해서 뇌가 만들어지는 10년간 스마트폰과 함께했다. 이 친구들의 뇌는 인간 세상이 아니라 사이버 세상에 더 최적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자라는 Z세대의 고향이‘한국’이 아니라 ‘인터넷’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서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낄 것이다. 이미 그게 메타버스라는 컨셉트로 시작되고 있다. 

키워드 ‘모던’ 파트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는 달리 여전히 20세기 수준의 정치와 사유에 갇힌 오늘날, 21세기에 태어난 Z세대를 보면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걱정이 들기도 한다.(150쪽)”고 했다. 

현재 Z세대에게는 2가지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는 현실도피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도피가 아니라, 자기만의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착한 기업’을 바란다는 점이다. 현재 10대인 Z세대는 자신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있는 것 같다. 물질적으로 멸망을 하거나,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가 사라지거나.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수많은 경제학자가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일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나. 여태껏 세상은 계속 발전했는데, 기성세대가 만든 문제 때문에 앞으로는 세상이 안 좋아질 거라는 불안이 있는 것이다. 특히 기후위기 같은 환경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다.  

결국 이 친구들이 착한기업을 찾는 건,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20년 후, 자신들이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기업, 정치인, 나라에 응원을 하는 거다. 아직은 아무런 권력이 없으니 소비나 인터넷 댓글을 통해서 그걸 표현한다. Z세대의 이런 모습을 응원하기도 하지만, 다중현실 속으로 숨어드는 부분에 있어서는 염려가 된다. 

Z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우선 기성세대가 망쳐놓은 세상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본인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세상이 안 좋아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가지고 있다. 사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걱정은 이해하지만, 역사는 예측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가면 미래가 안 좋아질 거라는 결론을 얻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가 미래를 바꿔갈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고 생각하고 자꾸 다중현실로 숨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걱정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다중현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현실로 나와야 한다. 진짜 현실은 그대로 두고, 내 마음이 편한 개개인의 현실로 도망치면 우리가 걱정하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노력은 다중현실이 아닌 아날로그 현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에게 실재하는 건 아날로그 현실이기 때문이다. 

책의 미래는 어떨까? 서문에서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매일 그 질문을 한다. 책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실 책은 불편하다. 무겁고, 한 권 안에 든 정보도 한정적이다. 효율성을 기준으로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책은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인 매체다. 그런데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의 가격이 0이 된 세상이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15세기까지는 동물의 가죽에 손으로 글씨를 써서 책을 만들었다. 큰 동물을 하나 잡으면 7~8페이지 정도의 책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중세기 때 책 한 권은 현재의 자동차 한 대 정도로 비쌌다. 그런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책 값이 단숨에 만 원으로 떨어졌다. 당시에도 ‘책 값이 저렴해졌으니 세상은 더 좋아지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쇄술 발명 후 100년간, 유럽은 지옥이었다. 30년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종교전쟁의 핵심은 가짜뉴스와의 전쟁이었다. 정보의 가격이 저렴해지니 페이크 뉴스가 그만큼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정보의 가격이 저렴해지고, 더 편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은 인터넷보다 비싸고 불편하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봐야 한다. 나는 책이 불편해서 좋다. 나에게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편한 것만 추구하면 안 좋아진다. 뇌도 계속 도전을 받아야 한다. 또, 책은 정말 신비하다. 종이에 인쇄된 글씨가 인간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기억이 되고, 아이디어가 되고, 희망과 슬픔이 되니까. 이토록 신비스러운 절차가 또 있을까. 그러니 좋은 책이 계속 나오기 위해서는 독자가 꼭 있어야 한다. 독자가 살아남는 게, 책의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큰 과제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김대식의 키워드는』 21세기 현실을 사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흥미로운 키워드를 다시 정의해 본 책이다. 그런데 현실의 다양성과 인공지능이라는 21세기 인류 역사의 큰 변화는 나 혼자 경험하는 게 아니다. 현재를 사는 모두가 다 같이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고민과 관심을 가진 분들이 계시다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자신만의 키워드를 한번 정리해보길 권한다. 아마 그 키워드는 책에 등장하는 키워드와 100%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나만의 키워드를 정리해보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대식

연구하고 글 쓰고 가르치는 뇌과학자. 독일 막스 플랑크 뇌과학 연구소에서 뇌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MIT에서 박사후과정을 보냈고, 일본 이화학연구소 연구원, 미국 미네소타대학 조교수, 보스턴대학 부교수를 거쳐 현재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 존재와 세상에 대한 질문을 붙들고 과학, 철학, 예술, 역사를 종횡무진하며 뇌를 파헤치고 있다. 주된 연구 분야는 뇌과학, 뇌공학, MRI, 인공지능 등이다. 현재 인문과학예술 혁신학교 건명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김대식의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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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솔뫼 “이건 가능한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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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한다는 표현만이 정확한 순간이 있다. 마치 뚜렷한 목적이 없는 산책처럼, 그 시간의 의미를 묻지 않아도 “좋아하고 있군”하고 느껴지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박솔뫼의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 역시 독자에게 그런 순간을 선사한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8편의 소설을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뜨는 감각, 동면과 또 다른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떠올리는 인물들, 이동하고 반복하는 움직임들.

박솔뫼 작가는 “좋아하는 것들이 결국 소설로 나온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를 전달해야겠다고 의식하며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좋아하는 것들이 담긴다고. 그는 글쓰기를 색종이를 접거나 지점토를 붙이는 ‘만들기’로 비유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출발해서 가능한 이야기 중 하나를 쓰고, 그것은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라는 걸 이해하는 과정이 아닐까? 대답의 끝에 그는 종종 덧붙였다. “물론 다르게 쓸 수도 있겠죠.”이 인터뷰 역시 작가를 만난 이야기라기보다는 박솔뫼의 말 주변을 배회한 이야기다.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로서 말들은 여기 도착했고, 우리는 그것을 들을 수 있다. 

소설가 박솔뫼는 200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우리의 사람들』, 장편소설 『을』『백 행을 쓰고 싶다』『도시의 시간』『머리부터 천천히』『인터내셔널의 밤』『고요함 동물』『미래 산책 연습』 등이 있다. 김승옥문학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좋아하는 것이 소설에 담긴다

제목 ‘우리의 사람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선명한 푸른색의 표지에 적혀 있으니 더 마음에 들어오더라고요.

사실 제목은 여러 개를 두고 고민했어요. 원래 소설집을 묶을 때, 작품 중 하나를 제목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제목을 지어볼까 싶기도 했거든요. 근데 딱 이거다 싶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진 않더라고요.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도 표제작 후보였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 봤을 땐 역시 「우리의 사람들」이 제목으로서는 더 좋겠다 싶었어요.

첫 번째 소설 「우리의 사람들」에서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의 한 문장이 반복해서 언급돼요. “여기에 또 자신이 받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는 소녀가 있군.” 등장인물 앙투안느가 제니를 보고 떠올리는 생각인데요. 다정한 사람과 다정함을 알아봐 주는 섬세한 사람이 동시에 읽혀서 좋았어요. 

저도 『티보가의 사람들』을 읽다가 그 구절이 참 좋더라고요. 평소 좋아하는 것들이 소설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니까 쓰게 된 것 같아요. 그 대목은 소설 속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이에 대해서 이런 소녀구나 하고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우리의 사람들」에서 ‘내’가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장면이 나와요. 부산에 살며 결혼을 일찍 하고 애를 두 명 키우는 ‘또 다른 나’를 상상하죠. 작가님도 그런 상상을 자주 하시나요?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것 같아요. 다들 그런 상상을 많이 하지 않나요? 다른 곳에는 지금과 다른 세계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요. 

작가님의 소설에는 반복되는 것이 많아요. 「여름의 끝으로」(『사랑하는 개』)에 나왔던 ‘동면’이라는 주제가 이번 「건널목의 말」에도 나오고요. 등장인물들은 부산으로 가고, ‘광주’라는 소재도 자주 등장하죠.

저는 반복하는 게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물론 의식적으로 반복해야겠다 하고 쓰는 건 아니지만, 반복할 때 느껴지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무언가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길게 가진 않으니까, 재미를 느낄 때까지는 반복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도 ‘장소’가 중요한 요소인데요. 물리적인 장소보다는 그 장소의 느낌을 섬세하게 전달하는 것 같아요. 특히, 여행지의 호텔에 가서 빳빳한 침대 위에 눕는 것 등 주인공들이 낯선 장소를 향해서 느끼는 감각이 자세히 묘사돼요. 

움직임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걸 쓰는 게 좋아요.

「이미 죽은 열두 명의 여자들과」는 살해된 여자들이 모여 살인자를 어떻게 죽일지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인데요. 폭력적인 사건을 보여주면서도 ‘증오’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으신 것 같아요. 사건을 둘러싼 행동과 에너지를 쓰는 것에 가까운데, 왜 이렇게 쓰셨는지 궁금했어요.

사건을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텐데, 가능한 수많은 ‘이야기 만들기’ 중 한 가지를 써보자는 마음이었어요.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이 조금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뉴스를 보면서 저런 일이 생기면 나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잖아요. ‘누가 계단에서 굴러서 다쳤는데,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난간을 잘 잡아야겠어. 누군가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하면, 우리 집은 잠금장치가 잘 되어 있으니까 괜찮아’ 하는 식으로요. 자연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과정을 떠올리는데, 이 소설에서는 여자들이 안전하기 위해서 방법을 고민하고 살인자를 죽이는 거죠. 물론 다른 이야기도 가능할 테지만, 색종이를 붙이고 지점토를 만드는 것처럼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본 거예요. 

「자전거를 잘 탄다」는 “무엇에 대해 쓰려고 하셨지?”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어요. 분량이 짧기도 하고요.

기본적으로 무엇에 대해 써야지 하고 시작하지는 않아요.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런 식으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정말 안 하는 것 같아요. 이 소설은 17이 어딘가에 들어가는 걸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가뿐한 이야기인데요. 잘 찾아보면, 17이 어딘가에 나온답니다.(웃음)



스스로 잘 서 있는 글이 좋다

첫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가 재출간되기도 했잖아요. 당시와 지금 소설이 달라진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직접적 폭력을 덜 쓰시는 것 같고, 문장의 느낌은 더 일상에 가까워졌어요.

그땐 혈기왕성했던 것 같아요.(웃음) 구체적인 면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늘 책을 한 권씩 낼 때마다 달라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제 책을 따라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은 그렇게 안 느낄 수도 있지만요. 예전에 제가 쓴 소설은 굳이 찾아 읽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럼 무얼 부르지』는 재출간 과정에서 다시 읽어야 해서 괴롭기는 했지만 담당하는 분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겁게 작업했어요.

소설을 많이 고치시는 편인가요?

『그럼 무얼 부르지』는 꽤 고쳤고, 『겨울의 눈빛』도 계간지에 발표한 것보다 많이 달라졌어요. 현재의 내가 읽어봤을 때, 납득하기 힘든 대목은 고쳐요. 가끔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고 느낄 때도 있죠.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평론이 많더라고요. 소설을 쓴 당사자는 어떻게 느끼시는지 궁금했어요.

기본적으로 나는 소설가의 일을 하고, 평론가는 평론가의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크게 영향받지는 않는데요. 간혹 흥미롭게 느껴지는 글이 있어요. 꼭 소설의 의미를 잘 드러내 주지 않아도 그냥 자기 글로서 잘 서 있는 글이 재밌더라고요. 작품에 대해 쓰면서도 작가나 작품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글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요소가 좋은 독서를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니까요. 이번 소설집에 해설을 쓴 강보원 평론가의 글도 그랬어요. 

최근 재미있게 본 책이 있나요?

하라 료 신작소설 『지금으로부터의 내일』이요! 하라 료는 마흔이 넘어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해서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만 쓰고 있는 작가인데요.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읽는 작가 중 한 명이에요. 이번 편에서는 확실히 달라졌더라고요. 탐정도 나이를 들고, 변화된 일본 사회도 반영됐고요. 그런 변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요.

작가님도 ‘고양이 탐정’이 등장하는 『고요함 동물』이라는 추리소설을 쓰신 적이 있죠. 

본격 탐정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어요. 추리소설이라기 보다 탐정이 등장인물인 소설이요.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면서 글을 쓰게 될 텐데요. 저는 탐정소설을 좋아하니까 한번 써보고 싶어요.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하라 료도 마흔이 넘어서 데뷔했으니까 저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꾸준히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소설을 쓰시는 이유가 있나요? 「농구하는 사람」, 「우리의 사람들」처럼 역사적 사건 없이 전개되는 소설도 있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역사적 시간 속 개인들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특히 ‘광주’의 역사성은 작가님의 소설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인데요. 이번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에서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돼요. 등장인물들은 영화감독을 인터뷰하거나 5.18에 대한 자료를 아카이빙 하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광주를 방문해요.

지금까지는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을 중심으로 쓰지는 않았어요. 아마, 그건 당시에 설정했던 글쓰기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다르게 쓸 수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저는 그동안 실제 역사적 사건을 겪은 당사자를 취재하는 방식보다는, 자료를 보고 장소를 걷는 방식을 택해왔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인물을 만나고 인터뷰를 해서 써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이건 지금까지 한 방식을 택해서 써봤으니까 할 수 있는 말 같아요.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더라도 결과물은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작가의 말’에서 “며칠 전에는 소설을 쓰면서 무척 재미있다고 느꼈다”고 쓰셨어요. 어떤 즐거움인가요?

당시 다른 소설의 마감이 있었어요. 열심히 쓰고 끝내니 ‘아, 끝났다’하고 기분 좋은 상태였던 거죠.(웃음) 사실, 소설 쓰는 건 늘 재밌다고 느껴요. 쓰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것을 만나고 결국 끝까지 완성했을 때, 그때가 가장 기쁘죠. 



*박솔뫼

200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우리의 사람들』,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인터내셔널의 밤』, 『고요함 동물』, 『미래 산책 연습』 등이 있다. 김승옥문학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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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미의 작업실 인터뷰] 어린이라는 세계를 보호하고 소개하는 김소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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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소영 작가와 엄윤미 인터뷰어

작업실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저는 엄윤미라고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작업실, 어린이 미술관, 박물관, 학교 등의 공간에서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청소년들에게 안전하고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을 매일 만나며 일합니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는 2020년 출간 이후 제 주위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일을 하며 만나는 디자이너, 건축가, 예술가, 교육자들이 이 책을 사랑한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떠올린 얼굴들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린이와의 연결고리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 어른의 일상을 바쁘게 살고 있는 지인들도 이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리뷰를 인스타그램에, 페이스북에, 브런치에 올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이 책은 2021년 4월 현재 약 6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리커버 한정판이 발간된 이후 판매량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자기계발서도, 경영서도, 백만 관객이 본 영화의 원작소설도 아닌,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을 만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누군가 일상에서, 나의 일을 하며 발견한 작고 중요한 세계를 소개한 책이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거구나 생각하면 반갑고 궁금해집니다.  

김소영 작가와 인터뷰를 위해 만난 곳은 제가 일하는 공간, 대학로의 ‘스토리 스튜디오’ 입니다. 어린이, 청소년 창작자들의 자유로운 작업을 응원하는 곳입니다. 작업의 끝이 반드시 책이거나 매끈한 작품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세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세상에 소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좀더 다양한 반짝임이 있는 세상, 그리고 작은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살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작업실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과, 나의 세계를 세상에 내어 놓는 창작자들을 만나는 일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터뷰 시리즈를 고마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첫번째 창작자: 어린이와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어른 

김소영 작가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어린이라는 세계』 149쪽)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41쪽) 어른이기도 하고요. 어린이들을 존중한다는 말은 당연하게 들리지만, 막상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을 존중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시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나요? 책에는 어린이와 서로 반말 쓰는 건 도저히 안되겠다고 (웃음) 쓰셨죠. 

제일 조심하려고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린이와 되도록 스킨십을 안하려는 거예요. 아홉살, 열살 친구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너무 사랑스럽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여기까지 올라오지만, 저 스스로도 어린이한테도 독서교실에서 만나는 선생님과의 관계가 사회적인 관계라는 것을 인식시키려는 거죠.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지키는 사회적 거리 정도를 생각하면 됩니다. 어린이 말을 모두 들어준다거나 하자는 대로 하는 것도 아니예요. 어린이도 긴장하면서 서로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이지 어른이 일방적으로 존중하려 노력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관계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어린 시절에는 권위적인 관계나, 반대로 아주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만 경험해 보는 경우가 많은데요. 적당한 거리를 두는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것은 선생님과 같은 ‘제 3의 어른’들이 가장 잘 해줄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독서교실을 열면서 제 3의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양육자도 교육이론가도 아닌데 어린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인정해줄까 고민했고, 처음에는 어려워서 거리가 생겼고요. 어려워하다 보니 편집자가 작가 대하듯, 출판사에서 일할 때 세미나 손님 모시던 것처럼 대하자고 생각했어요. 어린이들도 자기를 완전히 장악하지 않는 어른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린이 양육이 가정, 학교로 제한되면서 사회는 손을 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염려스러워요. 공공성의 영역이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이들이 함께 (문제를) 풀어보는 경험, 좋은 공공의 서비스를 받아보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특히, 판데믹 이후로는 어린이들이 경험하는 격차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지역 특성에 맞는 공공의 공간이 한시가 급하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도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고, 어린이 회관도 필요하다는 이야길 하셨었죠. 혹시 이상적으로 생각하시는 공간, 좋아하시는 어린이 공간이 있다면 어떤 곳일까요. 

제가 가장 좋게 기억하고 있는 곳은 지금은 폐관된 오사카 국제아동 도서관입니다. 어린이책 아카이빙 공간이었는데, 만화책만 모은 코너가 좋았어요. 이 책들을 보는 어린이라면 어른의 간섭을 싫어할 거라며 조금 비밀스럽게, 아늑하게 꾸며 둔 것이 두고두고 생각났어요. 저에겐 ‘사용자 중심의 공간’ 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되었거든요. 

어린이를 그 공간의 사용자로, 그래서 디자인의 중심에 두는 것. 적당한 거리와 사회적 관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은 어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종종 만나는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보호해 주었으면 좋겠고 간섭은 싫어요.” 라는 명확한 의견을 냅니다. 요청할 기회가 주어질 때, 어린이들은 원하는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 목소리를 대신 내어 주는 책의 존재가 누군가에겐 고맙고, 누군가에겐 신선했을 것입니다. 


김소영 작가 


어린이 이야기를 (하려고) 쓴 책이 어른들을 만났을 때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 책을 쓰신 건데, 책의 반응이 정말 좋았지요.  

저 뿐만이 아니라 공연장에서 보는 어린이, 경찰관이 보는 어린이, 마트에서 만나는 어린이…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어린이의 이야기를 많이들 해 주어야 어린이 이야기가 집안 이야기, 학교 이야기로만 갇혀 있지 않고 공공의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던 건 시기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판데믹을 겪으면서 어린이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들, 어린이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아요. 교육 공백, 아동 학대 등의 문제가 드러났고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서도 심각해졌을 거예요. 페미니즘의 물결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고 소수자의 형편을 서로 살펴서 개선해 나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관점이니까요.

시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 책 특유의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뭘까요?

어느 팟캐스트에서 ‘야단치지 않는 책’ 이라고 표현하신 것에 공감했어요. 어린이들을 이렇게 대하면 안된다고 야단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일상에서 차곡차곡 쌓인 생각을 전한 책이라서 오히려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면서) 책 속 어린이, 독자 어린이만 만나다가 독서교실을 하면서 어린이의 생활을 들여다보니 새롭게 안 것이 많았고, 고민하고 갈등되는 부분도 많았어요. 어느 부모님들과는 교육관이 너무 달라 어렵기도 하고, 결이 맞는다고 생각한 분들 중 독서교실이 사교육을 한다고 다르게 보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갈등의 시기를 지나고 나니 내가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는 게 맞나 고민하게 되었어요. 서로 비판하고 야단치는 글은 많으니 나부터 혼나자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또, 어린이와 지내다 보면 돌아보기보다 내다보는 시간이 많다는 점이 좋은 점이에요. 제안하고 변화하는 것이 지적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글을 읽는 분이 작은 것 하나라도 변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어린이가 누를 수 있게 기다려주는 사소한 변화 같은 것이라도요. 그렇지 않더라도, 이 글을 읽고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린이와 관계 있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어린이 혐오가 공공연한 사회에서, 어린이와 관련된 기분좋은 기억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은 분명 전해진 것 같습니다. 책이 나온 이후 가장 기쁜 일,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나요?

어린이에게 나도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이 제일 기뻤어요. 

어린시절의 내가 이해받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런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고 말씀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나도 이해받는 것 같았고 과거로 가서 김소영 어린이를 안아주고 싶었다는 말이 너무 좋았고, 저도 내가 그래서 이 글을 썼나 보다, 나를 이해하고 싶어서 썼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은, 책을 읽으며 우셨다는 피드백이 많아서 처음엔 어리둥절했어요. 저도 쓰면서 울었던 부분이 있지만 대부분은 즐겁게 썼는데. 어떤 부분은 (독자들이) 웃기를 기대했는데 우셨다고 하고요. 그런데 며칠 지나 커피를 내리다 갑자기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힘들게 어른이 되었구나, 간단하게 한번에 어른이 된 게 아니라 어려운 과정으로 컸구나, 너무 고생했다, 하는 걸 깨달은 거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지금 이야기 나눈 책 외에도 두권의 책을 더 쓰셨죠. 첫 책을 쓰신 이후 다양한 매체를 경험해 오셨고요. 일간지 칼럼도 쓰시고, 유튜브나 팟캐스트에도 출연하시는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경험이 선생님의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첫 책 『어린이책 읽는 법』 을 내고 강연을 여러 차례 하다 보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책을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연강한 내용을 모아 『말하기 독서법』 을 썼습니다. 『말하기 독서법』 출간 이후엔 유튜브 제안이 많아서 몇차례 해보았는데, 결국 나중엔 대부분의 제안을 반려하게 되었어요. 책에 대한 것은 책과 비슷한 형식으로, 글에 대한 것은 언어를 매개로 이야기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강연을 하고 사람을 만나거나 책을 소개하는 글은 쓸 수 있지만 책을 소개하는 영상은 저에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어린이들의 시선을 높이는 양질의 미디어 콘텐츠를 소개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키우도록 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채 이루어지기 전에 판데믹이 왔고, 어린이들이 노출되어 있어서 현장이 해야 할 일이 많아졌죠. 그러나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어린이들이 언어를 매개로 읽고 말하고 쓰고 생각하는 힘을 키우도록 하는 일이예요. 나처럼 생각하는 어린이, 나만큼 생각하는 어린이가 아니라 저랑 반대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어린이를 기르는 것,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어린이를 키워내는 일이 제가 사회에 보탤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영상은 표현하고 분출하고 이해하는 데 강하지만, 불편해도 어렵고 딱딱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만큼은 책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그 영역을 공공에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웃음) 

이렇게 들려 주실 말씀이 많으신데, 일간지의 칼럼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 <경향신문>) 을 쓰시기 전에 망설이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께서 부추겨 주셨다는 이야기가 저는 참 좋았습니다. 

다른 매체들보다 일간지는 영향력도 크고 분량도 길어서 고민을 했었죠. 두 편쯤 쓰고 나서 괜히 하기로 했나보다 할 때 김지은 선생님께서 전면광고라고 생각하자고, 어린이 이야기를 어디서 전면광고로 실어 주겠느냐고, 어린이 이야기를 한군데에서라도 더 하자고 말씀해 주셨어요. 김지은 선생님은 제가 어린이 이야기를 많이 하게 하는 원동력을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와 김지은 선생님은 함께 공부하고 의지하는 사이지만 자세히 보면 의견이 조금씩 다를 때도 있어요. 합의점을 찾아가기도 하고 다른 의견을 갖기도 하는데, 김지은 선생님 뿐만 아니라 같이 읽기 모임을 하는 다양한 분들이 같은 방식으로 가장 큰 자극을 주시는 것 같아요. 큰 틀에서는 비슷한 지향을 갖고 있지만 어린이를 만나는 접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이야기들도 있고요. 낯선 것을 같이 공부할 수 있는 모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공부하면서 다른 관점을 배우고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이 저의 방식이예요. 내가 아는 영역의 지형도가 영역 밖에 나와서 설명하려고 보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 과정에서 저도 성장하고, (내 영역) 밖으로 나와서 보니까 새롭게 보는 것 같아요. 어린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린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용도 형식도 달라질 수 밖에 없겠다, 이렇게 다른 이야기들이 많아지면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많아지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도 여기에서 이어진 일이에요.

안에서만 보이는 것, 나와 봐야 보이는 것이 있지요. 그렇게 안팎을 넘나들면서 작업이 진화해 오신 거군요. 지금 가장 관심을 가지고 계신 작업은 무엇인가요 

『어린이라는 세계』 를 읽은 독자들의 생각을 듣는 일이예요.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분명 혜택이고 특권이잖아요. 책에 대한 피드백을 많이 듣는 것도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들어보려고 합니다. 할 수 있다면, 주로 생활 속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써왔는데, 앞으로는 매체에서 만나게 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요. 그 매체가 책이 될지, 영화나 공연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이야기, 그림,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표현된 어린이의 모습을 관찰하고 싶어요. 아직 준비도 공부도 해야 해서 조심스럽지만, 우선 <한겨레>에 ‘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라는 짧은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어요.


(왼쪽부터) 엄윤미 인터뷰어와 김소영 작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선생님의 작업이 ‘언어를 매개로 어린이라는 세계를 세상에 알려주는 일’ 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린이들을 어른의 세계로 초대하는 방식도 있지만, 선생님은 어린이라는 세계를 보호하시려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호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책임지고 보호하는 것을 기꺼이 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고, 어른이 그렇게 해 줄 거라고 믿을 때 어린이들은 자유롭게 시도 해볼 수 있고, 안전하게 실패하면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알아볼 수 있어요. 내가 뭘 해도 선생님이 지켜줄 거고, 이 안에서는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필요한 거죠.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작업실이 그런 역할을 하듯이, 사회 전체가 그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조금 거창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개인의 행복도 사회 구성원이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올라간다고 하잖아요. 어린이들이 어릴 때부터 신뢰를 기본값으로 알고 커야 사회의 행복도 올라갈 거예요. 법이나 제도도 중요하지만, 지나가는 어린이를 좋게 대해주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변화에 제 책이 일조할 수 있었다면 저는 다리 뻗고 자겠습니다 (웃음).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단한 생각이 거창한 구호보다 강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 온 나(만)의 세계를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요. 무심히 넘겨왔거나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어린이라는 세계를 구체적이고 다정한 언어에 담아 소개하는 김소영 작가의 책이 많은 어른들에게 다가가고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작은 세계의 이야기들은 흘러가서 결국 세상과 만납니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통해 어른과 어린이가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 신뢰가 기본값이 되는 사회, 어린 사람들이 자라는 동안 지켜주는 일을 기꺼이 책임지는 어른들이 있는 사회를 소개받은 것처럼요. 매월의 만남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기대하며 첫번째 작업실 인터뷰를 마칩니다. 




*김소영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출판사에서 어린이책 편집자로 10년 넘게 일했다. 지금은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과 책을 읽고 있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 등을 썼다.

저자의 독서교실을 찾은 아이들은 무엇보다 책 읽기의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되는데, 그 비결은 ‘말하기 독서법’에 있다. 책을 읽은 후 아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고 실제로 도움 되는 활동은 ‘말하기’다. 책을 읽고 내용과 느낌,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책 읽는 재미를 알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면 읽기 능력이 생기고, 읽기 능력이 생기면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면서 자연스레 공부머리도 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평생 책을 가까이하는 독자이자 교양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저자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독서 교육의 필수 지침과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기 독서법』에 담아내었다.



어린이라는 세계 (리커버 한정판)
어린이라는 세계 (리커버 한정판)
김소영 저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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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기업인 박용만 "공감하지 못하면 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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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전,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백팩을 메고 출판사 미팅룸으로 들어섰다. 일주일에 두 번, 독거노인을 위해 반찬 봉사를 하고 오는 길, 아무리 바빠도 꼭 챙기는 스케줄이다. 박용만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메뉴는 오이생채무침과 과일 샐러드. 칼질만큼은 셰프가 부럽지 않다. 박용만은 올해 초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를 썼다. “대기업 회장이 쓴 책이니 당연히 대필 아니겠냐?”는 오해를 받아 곤혹스러웠지만 그는 꽤 오랫동안 글을 써온 글쟁이다.



그늘이 있었기 때문에 양지의 감사함을 알다

첫 책입니다. 저자, 작가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기분은 어떠신가요?

적응하는데 힘들었어요. 기업 활동은 소비자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오는데, 책은 시간이 한참 걸리더라고요. 책이 일단 서점에 깔려야 하고 또 독자들이 그 책을 읽어야 반응이 오니까요. 그리고 선입견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당연히 대필일 거라고 생각하고 아예 책을 집어 가시질 않더라고요.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한두 개씩 리뷰도 생기고 적응이 됐어요. 

인터뷰도 많이 안 하셨더라고요.

과연 책을 홍보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요. 많은 사람이 책을 읽어주시면 좋지만, 책을 팔기 위해 내가 애쓴다는 것이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좀 주저하다가 이 책이 팔리면 인세로 뭘 할 것인가? 생각해봤어요. 제가 용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반찬 값에 보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보니 책을 알리는 일이 좀 괜찮아지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인터뷰도 하고 그랬습니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제 닉네임이 YM인데요. 딱 YM이다! 음성 지원되는 책이라고 하던 걸요.

제목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당신에게 그늘이 있냐?”는 질문도 들으셨다고요.

제목은 출판사에서 정해줬어요. 가끔 책을 보면, 내용은 이게 아닌데 왜 제목이 이렇게 달렸지? 싶을 때가 있어요. 제가 제목을 정하면 어색할 수도 교만해 보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부탁을 드렸는데 다행히 좋은 제안을 주셨어요. 제가 글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가깝게 표현한 제목이거든요. 제가 그늘이 많아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삶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잖아요. 다만 그늘이 있었기 때문에 양지의 감사함을 더 알게 됐어요.

책을 내자는 제안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여러 출판사에서 이야기를 주셨어요. 그 중에는 제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모르고 연락을 주신 곳도 있었고요. 시간만 조금 내서 인터뷰를 해주면 만들어준다고 해서 쉽게 거절했죠. 또다른 출판사는 적당히 써주면 우리가 만져주겠다고 하셔서, “제가 만약 책을 내면 한 글자도 못 고칩니다”라고 말했죠. 그런데 막상 책을 내려고 보니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때 친한 작가가 마음산책 출판사를 소개해줬어요. 글을 몇 개 보내 드렸더니 “일단 글을 쭉 써보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쓰기 시작했죠. 

집중해서 글을 쓴 기간은 언제인가요? 

작년부터 썼죠.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면서 약속이 줄줄이 취소되는 거예요. 집에 앉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즐겁더라고요. 거의 보름을 밤낮 가리지 않고 썼어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아침에는 지팡이를 집고 일어나야 할 정도였는데, 그래도 좋았어요. 책의 분량 80%를 6개월 동안 썼는데 600쪽이 넘었던 거 같아요. 책은 많이 덜어낸 거예요. 

요즘 이렇게 두꺼운 산문집은 잘 나오지 않아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대필에 대한 경계심이 있어서인지 요만한 사이즈로 내고 싶진 않은 마음도 있었어요. 내용을 많이 담고 싶기도 했지만 이 책이 세상 밖으로 나갈 때까지만 해도 두껍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초고를 가장 먼저 읽어본 분은 아내분이라고요?

일단 쓰면 봐달라고 했어요. 아내가 빼라고 해서 뺀 부분도 많아요. 원래 제 사생활 이야기가 더 많았는데, 이렇게까지 다 이야기할 필요가 있냐?는 질문에 동의가 됐어요. 그리고 아이들 이야기도 썼는데 나중에는 뺐고요.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부모가 다시 할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배려할 필요가 없게 해야 한다 

기업인 박용만으로서의 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수술을 많이 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안 가본 과가 산부인과 말고는 없으실 정도라고요.

네, 그런데 끝인 줄 알았는데 또 생겼어요. 밤에 코를 심하게 골지 않는 편인데, 심장 박동을 체크하는 기기를 차고 잤는데, 그래프가 이상한 거예요. 기계가 망가졌나 싶어서 회사에 기기를 보냈더니 수면 검사를 해보라고 해요. 검사를 해보니 중증 수면 호흡 장애라고 합니다. 제가 잠을 잘 때 호흡이 1시간에 38회나 멈춘다는 거예요. 길게는 50초까지 멈추고. 지금은 산소를 공급하는 기계를 달고 자요. 벌써 한달이 됐어요. 

통증이 올 때는 어떻게 하나요?

가능한 한 무시해요. 물론 쉽지 않지만 아픈 곳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고통은 더 커집니다. 반대로 고통을 받아들이되 마음 주머니 속에 처박아 버리면 훨씬 덜 아파요. 곧 통증이 덜해질 거라는 믿음은 약과 치료 자체 못지않은 효과를 나타내요. 고통을 의식의 주머니에 애써 넣어두고 ‘곧 가시겠지, 내일이면 좋아질 거야’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잠시 통증이 잊힙니다. 

사람을 각별하게 좋아하는 면면이 책에 많이 담겼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사람에 관한 문제 때문에 갈등도 많이 겪으셨을 텐데요. “역시 사람을 품는 것이 제일 좋았다(316쪽)”고 밝히셨습니다. 

갈등이 왜 없었겠어요? 정말 많았죠. 제 성향이 이래도 조직 내에는 일종의 규범이 존재하잖아요. 앞서가야 우수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으니, 요구 받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변하지 않는 건 사람에 관한 투자를 단단하게 해야 경영이 지속가능하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그룹 회장이 됐을 때, 따뜻한 성과주의를 두산의 철학적 방향으로 내놓았어요. 그런데 참 힘들게 하더라고요. 의미를 자의적으로 판단해 온정주의로 평가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회장으로 지내다 보니 어느 한계를 넘게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철학적 생각이 가능해지기 시작했고요. 결국은 선택의 문제예요. 만약 저에게 경영을 다시 하라고 한다면 제 선택에 맞는 경영을 할 겁니다. 

분노를 내면 안된다고 강조하셨어요. “리더의 분노는 감정적인 이유에서도 자제되어야 하고, 전략적인 이유에서라면 원천적으로 없어야 하는 것이다.(201쪽)”라고 쓰셨습니다. 

제 성격이 다혈질이에요. 성취지향이고 반응이 빠르고,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편이에요. 저도 젊었을 때 화를 많이 냈어요. 제 화의 근원이 뭔지 아는 동료들은 저에게 감정적 앙금이 많지 않지만, 자꾸 화를 내는 건 그 자체로 옳지 않아요. 제가 낸 화조차도 분노의 영역까지 가면 정당하지 않은 거거든요. 가만히 살펴보니 분노를 남발하는 상사가 정말 많아요. 부당한 분노, 계획된 분노 등 너무 많은데, 정당하지 않은 분노를 파보면 모두 갑질이에요. 전 갑질을 정말 싫어합니다. 생리적으로 거부 반응이 심해요. 회사 안에서 성희롱 사건이 생기면 굉장히 단호하게 대응했어요. 성희롱은 성인지감수성 이전에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발생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갑질을 ‘정말’ 싫어하는 상사는 흔치 않습니다.

제가 다른 그룹의 회장처럼 자랐으면 몰랐을 수도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실패하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하는 불안을 늘 갖고 살았어요. 처지가 다르지 않으니까 감정적인 어려움을 공유하니까 알 수밖에 없죠. 또 구성원의 복지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공감하지 못하면 배려하는 차원이잖아요. 구성원들은 배려가 필요 없어요. 고용은 약속이니까요. 약속에 의해서 노력을 제공하는 것이고 회사는 보상을 하면 돼요. 공동체의식이 생기면서 소속감이 생기는 거지, 맨 처음은 약속이에요. 배려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공감하지 못할 때 배려가 되는 건데, 구성원은 배려가 고맙지 않아요.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하죠. 성평등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성 차이에 대한 배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배려할 필요가 없게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시나요?

진실한 사람이 좋아요. 역량이 조금 떨어져도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함께 일하기 좋죠. 수리 능력은 뛰어나도 소통 능력이 어려우면 힘들어요. 대개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정치적이에요. 정치적이라서 진실하지 못한 거죠. 나를 잘 보이기 위해 포장을 하잖아요. 그런 사람은 예측가능하지 않죠. 

평소 골목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으시죠? 예술을 직업으로 삼으면 어땠을까요? 

1992년이었을 거예요. 상무 시절이었는데 그때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내적 갈등이 너무 심해서 아내한테 “나 그냥 사진할래”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아내가 처음엔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해서 그때 주저앉았죠. 후회는 안 해요. 마음먹고 나서 열심히 일했으니까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시죠? 국제봉사활동을 전개하는 몰타기사단(구호기사단) 한국지부가 설립된 2015년부터 초대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저는 봉사활동을 조직적으로 키우는 데는 큰 관심이 없어요. 몸이 움직여질 때까지 땀 흘려 일하고 싶어요. 동시에 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지나친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돼요. 너무 힘들어 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우리의 작은 봉사로 그분들의 삶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해요. 

30대, 40대 독자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일하지 말고 놀라는 게 아니고요. 거울의 자신을 볼 때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 책도 염두에 두고 계신가요? 

뭘 써야 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에피소드가 많아요. 300쪽은 더 쓸 수 있는데, 똑같은 책을 또 쓰는 건 아니라면서요. 더 고민해 봐야죠. 




*박용만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보스턴대학교 경영학 석사를 거쳐 한국외환은행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두산에 입사해 식품, 출판, 광고, 건설, 중공업 등 여러 사업 부문을 거치고 두산그룹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두산 인프라코어 회장직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겸하고 있다. 호기심 넘치는 ‘얼리어답터’이자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대기업 CEO로 잘 알려져 있지만 쉬는 날엔 혼자 골목골목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실바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국제적인 구호 봉사단체 ‘몰타기사단’ 한국 지부를 이끌며, 매주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마추어 요리사로 봉사에 매진한다.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박용만 저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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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영 마이크로소프트 이사 “10살 어린 상사 만나고 힘들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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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는 오랜 기간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모든 직원이 목표 달성에 몰두하고 피 말리는 사내 경쟁이 계속됐지만, 이러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성장은커녕 ‘IT업계의 늙은 공룡’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사티아 나델라 회장이 부임한 후 ‘성과’에서 ‘영향력’으로 평가 기준이 바뀌고 사내 문화가 변화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랜 부진을 털고 시가총액 1위를 재탈환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한 적 있는가?”는 사티아 나델라 회장이 도입한 평가 기준의 핵심을 담은 질문이다. 

17년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며 모든 과정을 겪은 이소영 저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성장 방식을 소개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한 적 있는가?』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성장 비결을 일터와 일터 밖, 개인에게 적용하는 방법을 정리한 책이다. 마이크로소프트 글로벌 인플루언서팀 아시아 지역 총괄 매니저인 이소영 저자는 글로벌 소프트웨어 인재 2,000명을 만난 이야기를 담은 『홀로 성장하는 시대는 끝났다』를 썼고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등 각종 강연을 통해 ‘함께 성장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주가가 10배 상승한 비결

제목이 눈길을 끌어요. 익숙하지 않은 질문이라 새로웠어요. 

한국에 살면서 이런 질문을 받아 볼 일이 많지 않죠. 내 성적이나 성공에 집중하느라 바빠서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면서 처음 하게 됐어요. 지난 십여 년간 마이크로소프트는 정체기였어요. 계속 실적 부진을 겪는 중에 새로운 회장님이 왔는데 오자마자 직원 평가표를 바꾸더라고요. 평가표의 핵심이 이 질문이었어요. 그동안 회사가 개인의 성과에 주목했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의 성공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다른 사람이 잘한 것을 보고 어떻게 내 것으로 가져와 성과로 만들었는지 묻기 시작했고, 회사의 문화가 달라졌죠. 

갑자기 달라져서 어려웠을 것 같아요. 처음 새로운 평가표를 받았을 때 어땠나요? 

1년 정도는 헤맨 것 같아요. 딱 떨어지는 숫자로 표시했던 과거의 방식이 쉽게 느껴지더라고요. 간단하게 몇 문장 쓰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해보면 쉽지 않거든요. 자기가 한 일이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에요. 평가 방식이 바뀌었을 당시에 제가 팀 리더가 됐거든요. 매니저로서 팀원들을 이끌어야 해서 부담이 더 컸어요. 팀원들이 물어보니까 내가 먼저 이 새로운 방식에 대해 잘 알아야겠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보다 이 질문을 더 깊이 생각한 것 같아요. 다른 팀에 가서 물어보기도 하면서요.  

어떤 질문을 했나요? 

“지금 가장 힘든 게 뭐야?”,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라고 자주 물어봤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 솔직히 말하지 “내가 알아서 할게” 하지 않아요. 오히려 “사실 그때 이런 게 너무 힘들었어” 하면서 말하죠. 그러면 다 듣고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라고 물어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저번에 너희 팀에서 비슷한 거 하지 않았어?”, “그거 어떻게 됐어?”라고 도움을 요청하면서 같이 일하게 되는 거죠. 새로운 평가표에 이런 내용을 썼어요

평가 방식이 달라진 뒤로 회사가 다시 성장했다고요. 비결로 ‘성장 마인드셋’을 소개했어요.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기술도 달라지니까 외부 고객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사내 경쟁이 치열하니까 외부 고객에 집중할 여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경쟁 마인드를 버리고 ‘성장 마인드셋’을 갖추고 나니까 내부 경쟁에 과하게 쏟았던 힘을 외부에 쏟을 수 있고, 함께 성장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강연을 다니다 보면 많이 물어보세요. “대체 마이크로소프트는 어떻게 달라진 거냐”고요. 비슷한 경험을 하는 기업이 많은 거죠. 그럴 때 제가 이야기하는 게 ‘성장 마인드셋’이에요. 뻔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달라졌으니까요. 

경쟁 마인드와 성장 마인드의 차이가 있다면 뭘까요?

과거에는 ‘모두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문화가 있었다면, 사티아 나델라 회장이 온 뒤로 ‘누구든 배우면 된다’는 마인드로 바뀌었어요. 이게 가장 단순한 예시이자 큰 차이 아닐까 싶어요.

바뀐 문화를 따라오지 못한 직원의 사례도 나오더라고요. 

한 팀원이 1년 동안 경쟁하던 습관을 못 바꾸더라고요. 자기 일만 하기 바쁜 거예요. 그게 왜 나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경쟁에서 이기려고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항상 비교할 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고요. 실제로 그 팀원이 컴플레인을 많이 했어요. 

어떤 컴플레인이요?

본인이 열심히 했는데 회사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출하는 거죠. 내가 다른 직원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언제 승진하냐고 묻는다던가 이런 식의 의사 표현을 많이 하는 직원이었어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팀장이 직원을 멘토링하는 문화가 있거든요. ‘원온원’이라고 1대1로 만나서 어려운 점을 들어주는 건데요. 제가 팀장으로서 그 직원을 만나서 계속 가이드를 줬어요. ‘너의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 바뀐 평가 시스템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다’고요. 그리고 ‘당신이 잘한 건 알겠는데, 다른 팀원들한테는 어떤 기여를 했어?’라고 물어보면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1년 넘게 계속 말했는데도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면 보너스나 회사 주식을 받을 수 없거든요. 실제로 그 직원이 거의 못 받았어요. 충격받더라고요. 뒤늦게 ‘아, 이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었나 봐요. 그다음 해가 돼서야 바뀌었어요. 

변화를 체감하기 전에는 동기부여가 안 될 것 같기도 해요. 누군가 ‘왜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해야 하냐’고 묻는다면요?

자기 문제만 해결하면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세상은 연결돼 있어요. 회사 일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할 수밖에 없는데 경쟁 구도에 익숙해서 시야가 좁아진 거예요. 그런데 자기 영향력을 알고, 눈앞에 놓인 상황을 바꿀 권한이 나한테 있다는 걸 알면 자발성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파트너십을 이끌게 되더라고요. 이런 파트너십을 설명하는 질문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했느냐?”고요 실제로 달라진 문화 아래에서 3~4년 지내다 보니 회사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주가도 확 올랐고요.

 


새로운 성공 공식, “다른 사람을 도우며 나를 키워라” 

평가 방식을 부르는 명칭도 달라졌다고 했어요. ‘피드백’에서 ‘커넥트’로요. ‘커넥트’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예를 들어 제 매니저는 사장님인데요. 본인이 작성한 커넥트를 공유해줘요. 사장님만 하는 게 아니게 아니라 저도 하고요. 서로 커넥트하면서 함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우선순위에 따라 평가하는 거죠. 피드백이라고 하면 지적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커넥트라고 부를 때는 그런 부담이 덜어지죠. 커넥트 받는 방식은 다양해요. 사람을 지정해도 되고, 익명으로 해도 돼요. 누군가가 궁금하면 그 사람과 같이 일했던 사람한테 ‘그 사람 어떻게 일했어?’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요. 

열 살 어린 매니저를 만나셨다고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힘든 상황이 아닐까 싶은데 어땠나요? 

어려웠죠. 받아들이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는 왜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호주 직원이 매니저가 됐는지 알겠더라고요. 사티아 회장이 새로 오면서 평가 기준이 달라졌다고 했잖아요. 이전 매니저들은 한 마디로 잘난 사람들이었어요. 하버드 출신에 업무 기준이 높아서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직원들을 ‘아웃’시키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다 사라졌어요. 대신 성장 마인드셋을 갖춘 사람, 공감과 경청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어요. 저보다 열 살 어린 매니저는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이었던 거고요.

이후의 관계는 어떻게 됐나요?

내 일의 목적과 원칙을 정리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자신을 관찰하고 내 일을 생각하면서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니까 상황이 같아도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매니저가 가진 훌륭한 인성이나 효율적이면서 따뜻한 리더십이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매니저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도 보였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날 매니저가 저한테 아시아 지역을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열 살 어린 매니저를 만났을 때만 해도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했는데 승진 기회를 얻은 거죠. (웃음)

일터 밖에서의 파트너십을 이야기하면서 ‘커뮤니티 리더십’을 강조했어요. 커뮤니티 리더십을 설명한다면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알리고 나누어 공동체의 성장을 돕는 걸 말해요. 성장을 위한 유무형의 공동체인데요. 어떤 주제든 상관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코딩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걸 인터넷 카페나 유튜브를 통해 공유하면 코딩 관련 공동체가 생기고 발전하잖아요. 커뮤니티의 성장을 돕는 거죠. 이런 커뮤니티 리더십을 가지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게 돼요. 영향력이 생기는 거죠. 

특히 요즘에는 커뮤니티 플랫폼이 발달해서 더 접근하기 편할 것 같아요. 

사회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기회가 많잖아요. 커뮤니티 리더십이 중요한 사회가 된 거예요. 발달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자신을 알려야 해요. 특히 요즘처럼 기술이 빨리 바뀔 때 더 필요한데요. 새로운 기술을 경험한 사람이 드물잖아요. 예를 들어 회사에서 AI 전문가를 찾는데 AI를 대학교 때부터 공부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꼭 AI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AI 관련 기술에 관심 있어서 혼자 공부한 사람이 있거든요. 공부하면서 매체에 기고도 하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관련 커뮤니티에 발표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제 이런 사람들이 눈에 띄는 거예요. 

책에서 설명한 ‘개인 브랜딩’과도 연결되는 내용인 것 같아요. 

저도 지금은 개인적으로 강의도 하고 책도 내면서 커뮤니티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애쓰지만, 예전에는 몰랐거든요. 그냥 내 일 열심히 하고, 매니저한테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 매니저가 회사를 그만두면 어떡하죠? 나는 누가 인정해 주냐고요. 회사 밖에서도 나라는 사람을 알려야 해요. 특히 요즘은 더 그런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단순히 나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알게 된 걸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다 보면 영향력이 생기고, 그 영향력이 곧 셀프 브랜딩이 되는 거죠. 셀프 브랜딩이 되면 기회가 주어지고요.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나를 알리는 게 핵심이네요. 

피터 드러커가 “21세기에는 경쟁력이 아니라 공헌력이 중요하다”고 했는데요. 요즘은 기업에서도 하버드 나온 사람이 아니라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커뮤니티 리더십이 있으면 채용해요. 채용뿐만 아니라 기업 활동도 마찬가지고요. 예를 들어 자동차 회사에서 단순히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자동차는 이미 세상에 많거든요. 대신 전기자동차, 수소자동차같이 제품 자체가 환경에 기여할 것 같은 걸 만들죠. 

요즘 화두인 ESG 경영이나 윤리적 소비와 연결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지속 가능성이 중요한 사회가 된 거죠. 기업은 물론이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경쟁력보다 공헌력이 뛰어난 사람이 주목받는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공헌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온라인에 공부한 흔적이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봐요. 예를 들어 기술 블로그를 운영한 경력이나 오픈 소스에 기여한 정도,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에서의 영향력 같은 것들이요. 책을 썼다면 책도 보고요.



‘개인’을 강조하는 시대지만, 함께할 누군가는 꼭 필요하다

성장 마인드셋과 파트너십을 개인과 가정에도 적용했어요.  

중요하니까요. 사실 3장의 개인 파트너십을 메인으로 쓰고 싶었어요. 그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IT업계에서 20여 년 일하다 보니까 한 마디로 너무 힘들더라고요. 모든 게 아주 빠르게 변하는데 그 변화를 따라가기 힘들고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기 쉽지 않아요. 자괴감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개인을 강조하는 시대잖아요. 제가 가정에서의 파트너십을 소개했지만, 결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의 파트너십이요.  

배우 남편과의 파트너십, 아이나 부모님, 시부모님과의 파트너십 등 다양한 사례가 나와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다 어려웠죠. 쉽지 않고요. (웃음) 그런데 인간관계라는 게 모호하고 어렵기 때문에 사람을 더 성숙하게 하는 것 같아요. 간단하고 배우기 쉬우면 사람이 성숙하지 않아요. 그래서 힘들더라도 가족 내에서 파트너십을 맺고 관계하는 게 중요한데 이걸 배울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좋은 파트너십은 무엇인지 이런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잖아요. 

성공적인 파트너십의 원칙이 있다고요.

그게 정답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비춰 봤을 때 성공적인 파트너십에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일단 비전을 공유하는 게 중요해요. 나는 왜 사는지, 상대방은 왜 사는지를 궁금해하고, 상대에게 어떤 어려움과 바람이 있는지를 알고 시작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상호호혜를 잊지 말아야 해요.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부모 자식 사이라 해도 한 쪽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게 아니라 서로 상대에게 내가 어떤 것을 줄 수 있는지 알고 행동해야죠. 서로의 기여 정도를 따져서 정확히 나누자는 게 아니라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파트너십을 이야기하면서 공감과 경청을 강조했어요. 파트너십의 기반이 되는 자질인 것 같아요.

일터에서든 가정에서든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감정 자체에 대한 비판을 내려놓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제 팀원 중에 호주 사람이 있었는데 아시아권 직원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거예요. 이런 태도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이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이 컸는데 어느 날 이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예요. 그때 제가 그 사람의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해줬거든요.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꿈꿀 만큼 야심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야심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야심이 나쁜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너는 회장감이다’, ‘내가 어떤 도움을 주길 원하냐’고 물어봤죠. 일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피드백을 주면서요. 이렇게 하니까 저에 대한 태도가 바뀌더라고요. 



결국 성장 마인드셋과 파트너십의 핵심은 태도와 관계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죠. 성공 방식이 바뀐 거예요. 코로나19도 그렇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삶의 형태가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잖아요. 디지털 혁신 이전 세대의 성공 방식이나 문화는 이제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경쟁에서 성장으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빠르게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이소영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친구, 선배들과 인터넷 벤처기업을 설립하면서 IT 업계에 입문했다. 한국 스타트업의 원조인 네오위즈를 거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7년 동안 다양한 IT 전문 커리어를 개발해왔다. 현재는 마이크로소프트 글로벌 인플루언서팀, 아시아 총괄 리전 매니저로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IT 커뮤니티 리더의 성장과 발전을 도우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한 적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기여한 적 있는가?
이소영 저
퍼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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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민철 “글로 여행하는 기분을 낼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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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사라진 코로나 시대. 김민철 작가의 책 『모든 요일의 여행』을 꺼내 읽던 독자들은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행을 못 가서 너무 답답해요’ ‘작가님 책을 읽으니 정말 여행 가고 싶어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애틋한 소식을 전해 받은 김민철 작가는 편지를 쓰기로 한다. ‘지금 여기’가 아닌 ‘언젠가의 그곳’에서, “여행을 도둑맞은 당신에게. 마스크를 꼭꼭 눌러쓴 출근길 지하철에서 지난 여행 사진을 뒤적거리는 당신에게.” 

당장 여행을 떠날 순 없지만, 그때 그 공간에서 행복했던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을 순 있다. 김민철 작가의 신작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는 아직 여행을 잊지 못하고 있는 당신에게 여행자의 방식으로 건네는 다정한 위로다. 



이 시간을 건너면 다시 여행이 찾아올 거야. 봄꽃처럼 돌연 피어날 거야. 마치 계절의 흐름을 믿듯이 여행의 생명력을 믿자. 다시 여행 가방을 싸는 그날까지 몸도 마음도 건강하길. 

- 2021년 봄, 민철 (334쪽)


아직도 여행을 잊지 못한 우리에게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종종 샘이 날 때가 있어요(웃음). 여행을 가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울 때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를 읽을 땐 그런 기분이 안 들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좋은 곳에 갔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책을 읽으면서 ‘아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 하며 각자가 가진 여행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편지 형식을 택했어요. 

편지라는 콘셉트는 어떻게 떠올렸나요? 

작년 5~6월쯤 인스타그램에서 DM을 많이 받았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여행을 못 가서 요즘 『모든 요일의 여행』을 다시 꺼내 읽고 있는데, 너무 떠나고 싶다는 내용이 많았죠. 처음에 그런 DM을 받았을 땐 ‘다들 얼마나 답답할까?’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비슷한 메시지를 계속 받다 보니까 ‘올해 여름에는 다들 휴가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글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줄 순 없을지 계속 고민했어요. 어느 순간, 편지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만난 적 없는 당신에게’ 쓴 편지는 출판사 이벤트로 진행되었어요. 책이 출간되기 전, 당첨자에게 샌프란시스코에서 쓴 편지를 보내주는 이벤트였는데요. 여행지를 샌프란시스코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해요.

2006년에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가면서 실제로 비슷한 이벤트를 했었어요. 여행을 가면 왠지 외로울 것 같아서, 당시 제가 운영하던 홈페이지에 샌프란시스코 소인이 찍힌 엽서를 보낼 테니, 원하는 사람은 주소를 남겨달라는 글을 올렸거든요. 그때 20명 정도가 주소를 남겨주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써서 보냈던 경험이 있어요. 그 이벤트를 생각하며 이번에도 편지를 써봐야겠다 싶었던 거죠. 

이벤트에 당첨되어 편지를 받고, 거기에 답장을 쓴 독자들도 있더라고요.

맞아요. 답장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편지를 썼는데, 실제로 답장을 써주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너무 신기하고 좋았어요.

제목이 좋다는 리뷰도 많았어요.  

저는 보통 제목이 먼저 정해진 뒤, 책을 쓸 때가 많았어요.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이 그렇고요. 『하루의 취향』도 제목이 나오고 나니까 비로소 뭘 써야 할지 감이 잡혔거든요. 아마 광고일을 할 때의 버릇인 것 같아요. 슬로건이나 콘셉트가 명확히 잡혀야 글이 떠오르는 편인데요. 이번에는 편지라는 콘셉트만 있었고, 제목이 끝까지 나오지 않아서 너무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여행을 부칩니다’처럼 여행과 편지라는 의미가 담긴 제목을 정했었는데, 편집자님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그래서 계속 고민하다 어느 날 문득 떠올랐죠. 그런데 이제니 시인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와 비슷한 거예요(웃음). 바꾸기엔 너무 마음에 드는 제목이라, 이제니 시인에게 메일을 보내서 허락을 받았어요.

여행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꼭 넣고 싶었어요. 저의 여행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여행을 다녀온 기억이 있잖아요. 다들 잊지 못하는 그 기억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거든요.


 

편지에는 사소한 이야기가 담기잖아요

편지를 쓰는 작업은 어땠어요? 여행자와 수신자를 동시에 떠올려야 하기에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 같아요. 

여행지와 편지를 보낼 인물을 매치하는 게 좀 어려웠어요. 사실 처음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땐, 모두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보니 여행지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연을 맺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어요. 신혼여행지에서는 남편을 소개해 준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제가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포르투갈 마르방에 여행을 다녀오신 박웅현 CCO님께는 마르방을 떠올리며 편지를 쓰는 등 그 여행지의 추억과 연관된 사람들을 맞춰나갔죠. 

한편으로는 좋았을 테고요. 편지는 내밀한 글인 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담길 수 있잖아요.

맞아요. 언젠가 꼭 한번 쓰고 싶은데, 너무 사소해서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미뤄두었던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어요. 편지에는 원래 사소한 이야기가 담기는 법이니까요. 전작들에 썼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쓴 편지도 있는데요. 이전 책에서 이야기를 했다 할지라도, 편지라고 생각하니 완전히 다른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어 루르마랭에서 만난 화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모든 요일의 기록』에도 썼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할아버지와 헤어진 다음 날을 이야기하게 되는 거예요. 그건 사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경험이잖아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함께 여행하다가 혼자가 되는 순간이 한 번쯤 있을 테니, 독자들도 비슷한 감정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에게 쓴 편지도 있어요. 오소희 작가, 박웅현 CCO, 김하나 작가 등이요. 

처음 이 책을 구상할 때, 김하나 작가님에게 “편지 형식으로 책을 쓸 건데 괜찮을까?”라고 물었더니 “철군! 나한테 써라”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한 꼭지 썼고요. 박웅현 CCO님께는 출력을 해서 가져다 드렸어요. “책에 실으려고 편지를 썼는데, 싫으실 수도 있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편하게 말씀해주세요”라면서 방어적으로 보여드렸는데 금방 다 읽으시고는 “너무 좋아. 실어!” 하시더라고요(웃음). 오소희 작가님께도 이런 형식의 책을 쓴다는 말은 했었는데, 언니에게 편지를 쓸 거라고 말하진 않았거든요. 나중에 언니한테도 썼다고 보여줬더니 “안 썼으면 울 뻔 했다”고 해서 쓰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지인들에게 쓴 편지는 모두 보여주고, 실어도 될지 허락을 받았어요. 다들 너무 좋아해줘서 제가 오히려 기뻤죠. 

만춘서점 사장님과의 인연도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오래 전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어요. 만춘서점 사장님이 그때 카페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남편과 우연히 거길 갔다가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이틀 후에 또 방문했거든요. 저희 부부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저기요. 책 눈에 안 들어오는 거 알아요. 여기 와서 같이 술 마셔요”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땐 사양을 하고 그냥 헤어졌는데 『모든 요일의 기록』이라는 책이 출간되고 나서, 제주도에서 그 책을 사오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나중에 ‘소심한 책방’이라는 곳에서 일하는 분이 그 책을 손님들에게 추천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분이 만춘서점 사장님이었죠. 이후에 『모든 요일의 여행』을 쓰면서 트위터에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문장을 올렸거든요. 그때 사장님이 “그걸 줄이면 여행이지요”라는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홀라당 가져다가 썼는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 됐죠. 그런데 사장님은 아직도 제가 그 카페에 있던 손님이라는 걸 기억 못하시더라고요(웃음). 

편지에 만춘서점에 조만간 또 갈 거라고 썼어요. 정말 다녀오셨어요? 

다음주에 가려고요. 편지에 썼으니 약속 지켜야죠(웃음).

 


역사 속 ‘여행기’에 잠시 살아본 건 아닐까

코로나19 때문에 지난 1년간 여행을 전혀 못 가게 되었잖아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 사실 엄청난 집순이거든요. 그래서 별로 답답하지 않았어요. 집에 있으면 너무 행복하고, 집 앞 슈퍼에 나가는 것조차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요(웃음).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할 때도 좋았고, 팀원들이 다 재택근무 할 때 팀장이라서 사무실에 혼자 나가 있는 것도 너무 좋더라고요. 혼자 있는 걸 즐기는 편이에요. 

의외의 대답이에요(웃음).

물론 여행은 매 순간 그리웠죠. 해외에 못 나가니까 아쉬웠고, 실제로 여행 가는 꿈도 많이 꿨어요. 그래도 이 책을 쓰느라 좀 괜찮았던 것 같아요. 무슨 이야기를 쓸지 생각하면서 여행 사진 찾아보고,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며 마음을 달랠 수 있었어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다녀온 마지막 해외여행은 어디였어요? 

미국 포틀랜드요. 마지막 포틀랜드가 될 줄 몰랐어요. 너무 그리워요(웃음). 

책을 읽는 내내 포틀랜드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네가 어떤 인종이든, 종교이든, 출신이든, 성 정체성이든, 성별이든, 능력이든 우리는 환영해. 우리는 네 편이야. 너는 이곳에서 안전해(269쪽)”라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은 도시라니요. 

저도 한 번 다녀오고 완전히 반해서 이듬해에 또 다녀왔어요(웃음). 포틀랜드는 도시의 발전 방향 자체가 현대의 도시와 완전히 달라요. 자연친화적이고, 도시 중심가에 가도 맥도날드나 스타벅스 대신 작은 상점들이 즐비해 있죠.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건물을 지을 때, 건물 앞에 미술품을 놓잖아요. 포틀랜드에서는 건물을 한층 더 높게 짓고 싶으면 공원용 땅을 기부해야 해요. 그리고 조금만 경사가 있어도 ‘이곳은 각도가 몇 도라서 휠체어를 타고 내려갈 수 있다/없다’ 같은 메시지가 표시되어 있어요. 오래된 나무도 많고, 맥주도 정말 맛있죠(웃음). 도시의 슬로건조차 “Keep Portland Weird(포틀랜드를 이상하게 유지하자)”예요. 너무 매력적이에요.  

시칠리아 라구사에서 쓴 편지에는 “낡은 취향 전문가(64쪽)”라고 썼어요. 낡은 골목이 좋은 이유가 있다면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낡은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유럽여행 할 때 깨달았어요. 독일, 오스트리아, 프라하 등을 여행할 땐 좋긴 하지만 큰 감흥이 없었는데, 이탈리아에 가니 쓰레기통까지 사진을 찍게 되더라고요. 그땐 막연히 ‘내가 이탈리아와 잘 맞나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스위스에 갔더니 갑자기 막 화가 나는 거예요. ‘내가 이 달력 풍경을 보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싶어서요(웃음). 이후 파리에 가니깐 또 너무 좋더라고요. 그제서야 제가 낡고 똑 떨어지지 않는 풍경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요. 

작가님은 왜 여행을 좋아하세요? 집순이임에도 자꾸 떠나고 싶은 건 왜일까요. 

여행은 정해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매 순간, 내가 선택하는대로 여행의 모양이 만들어진다는 게 좋아요. 선택을 한다는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드러내주는 행위인 것 같아서요. 일상에서는 그렇게 고민해서 선택할 일이 별로 없잖아요. 몇 시까지 출근하고, 무슨 일을 하고, 누굴 만나는지 대충 정해진 삶을 살다가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는 시공간에 저를 던져 놓으면 제가 무엇을 편하게 느끼고, 좋아하고, 못 견디는지 잘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여행을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인류 역사의 유일한 ‘여행기’에 운 좋게 살아본 게 아닐까.(331쪽)”라는 문장이 슬프게 공감됐어요.  

마치 역사에만 존재하는 ‘공룡기’처럼, 우리가 운 좋게 ‘여행기’에 살았던 건데 그동안 여행을 당연하게 생각해온 건 아닐까 싶었어요.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언젠가 다시 여행을 하게 되겠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쉽사리 떠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항공사들이 적자를 메꾸기 위해서 항공료를 인상할 테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 코로나19가 사라지려면 한참의 시간이 더 걸릴 테니까요. 최근에는 ‘환경오염의 주범인 비행기를 계속 타고 다니는 게 옳은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그러면서 ‘어쩌면 내가 마지막 여행기를 살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죠. 예전에는 수시로 구글에 들어가서 여행지를 검색했거든요. 회사에서 일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항공권 찾고, 구글맵에 별표를 치곤 했는데 이제 그 취미가 아예 없어졌어요.


 

여행을 그리워하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우리가 이렇게까지 여행을 생각하고, 그리워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요즘은 ‘사람들이 원래 이렇게 봄에 열광했나’ 싶을 정도로 화창한 날씨에 감탄하는 걸 자주 봐요(웃음). 다들 많이 답답할테지만, 이 시간을 견디고 여행을 가면 정말 재밌고 행복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여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김민철

남자 이름 같지만 엄연히 여자. 카피 한 줄 못 외우지만 엄연히 카피라이터. 회사를 꾸준히 다닌 덕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라는 직함까지 얻게 되었다. 회의 시간의 치밀한 필기를 바탕으로 『우리 회의나 할까?』를 냈고, 평소의 다양한 기록을 바탕으로 『모든 요일의 기록』이라는 책을, 틈틈이 떠난 여행에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모든 요일의 여행』을 썼다. 덕분에 종종 작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본업은 여전히 광고이며 일룸 ‘가구를 만듭니다’,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 SK브로드 밴드 ‘See the Unseen’, SK텔레콤 ‘사람을 향합니다’, T ‘생각대로 T’ 등의 캠페인에 참여했다.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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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저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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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수 소설가 “이 에세이는 소설창작 과정이 담긴 ‘메이킹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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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해 소설가로 활동한 지 올해로 꼭 21년이 되는 해이수 작가. 작가생활 20년을 정리하며 한 권의 에세이집을 품에 들었다. “소설을 출간할 때는 늘 에너지가 고갈되던 것과 달리 에세이를 펴내는 지금은 모든 것이 양호하고 충만하다”(218쪽)고 쓴 작가는 자신의 첫 에세이집 『기억나지 않아도 유효한』에서 바다와 사람, 작가의 고독하고 분투하던 시절을 한 데 모아두었다. 무엇보다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 안에 들어온 것들을 모두 기억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기억나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 안에서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것. ‘과정 자체가 전부’라고 말하는 소설가 해이수는 『기억나지 않아도 유효한』에서 그가 솔직하게 고백한 “막막해서 불필요한 통증에 시달린 시간”을 독자가 읽고, 부디 불필요한 통증을 떨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숫자로는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작가생활백서’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어요. 첫 산문집인데요. 책을 묶을 때 어떤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네, 작가생활백서 맞아요. 어떤 일을 할 때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잖아요. 작가생활 20년의 재무제표를 보니 확실히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래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담은 거죠. 소설을 쓰는 행위가 가만히 앉아 글자를 심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고, 사람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하고, 그 중에서 좋은 글감을 골라내고, 효과적으로 스토리를 디자인해야 해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저는 다양한 삶을 살았고, 그 안에서 풍요로워졌어요. 재무제표라고 표현을 했지만 숫자로는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작가생활을 통해 얻었기 때문에요. 내가 만난 사람, 그들의 이야기와 배운 것 등을 한 자리에 모으고 싶었어요.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작가가 영향 받는 것에는 소재나 주제뿐 아니라 작가가 만난 사람, 작가가 가지고 있던 고민, 그밖에 세계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이 담기는 것이라는 말을 책에 풀어내고 싶으셨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소설의 씨앗이 떨어지고 그것이 성장하기까지 많은 것들이 작용하지요. 작가가 당시에 하던 고민의 스펙트럼, 주변 사람들의 영향, 사회의 분위기,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용량 혹은 운용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거든요. 당시 그 씨앗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이 모두 모여서 서로 관계를 맺고 화학작용을 일으키지요. 영화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메이킹 필름’이라고 한다면, 그런 측면에서 이 에세이는 소설창작 과정이 담긴 ‘메이킹 픽션’쯤 될 거예요.

자세히 보면 10년 전에 쓴 편지도 있던데요. 얼마의 기간 동안 쓴 글들이 모인 건가요? 

20년 동안의 글이죠. 사실은 세 권 분량의 글이 나왔는데 선별 작업을 했어요. 편지글도 실은 더 많아요. ‘편지 쓰는 작가 모임’이 전에는 활발했는데 저도 거기 멤버였어요. 편지글은 대개 발신자와 수신인이 한 명이잖아요. 독자가 한 명뿐인 글이지요. 그런데 대중이나 다수를 위해 쓴 글보다 때로 파급력이 큽니다. 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도 좋지만 서간문을 훨씬 자주 읽거든요. 오로지 ‘개인적 진실’ 하나를 무기로 삼는데 그게 그렇게 세요.

‘지은이의 말’에서 “소설을 출간할 때는 늘 에너지가 고갈되던 것과 달리 에세이를 펴내는 지금은 모든 것이 양호하고 충만하다”고 쓰셨잖아요. 소설과 에세이가 어떻게 달랐는지 더 듣고 싶어요. 

소설은 아무래도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크죠. 완성도에 대한 부담도 있고요. 특히 장편의 경우 2-3년 내외의 집필시간이 걸리는데 들인 공력에 비해 저평가 되면 어쩌나 걱정하게 돼요. 평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퇴고 작업도 무척 신경이 곤두서고요. 작품을 출간하고 판매가 저조하면 맥이 쫙 빠져요. 그에 반해 이번 에세이는 ‘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이게 독자들에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쓰고도 기분이 좋고, 묶고 나서도 신이 났어요. 더욱이 작가생활 스무 돌 기념 에세이는 왠지 폼이 나잖아요. 

작가가 되기 직전, 작가 초년생 시절 등 오래 전에 품었던 치열한 고민을 솔직하게 기록하셨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는지도 궁금했어요. 이 솔직한 기록이 부담되진 않았나요? 

부담은 없었어요. 아마도 제 고민이 깊었기 때문일 거예요. 예전부터 인상적인 작품을 읽고나면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 때문인지 산문을 쓸 때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고민을 솔직하게 적게 됐어요. 장편 『탑의 시간』(2020)을 출간하자 사람들에게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왜 배경이 미얀마인지, 어떻게 쓰였는지, 하는 질문 말이에요. 『기억나지 않아도 유효한』은 제가 쓴 여러 소설에 대해 제가 해야 하는 답변들을 에세이화한 것이라 볼 수도 있어요. 따라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하는 부담보다는 작품에는 쓰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했던 것들을 쓰는 기쁨이 있었어요. 어떤 분들은 정작 작품보다는 뒷얘기를 더 좋아해요.(웃음) 



기억나지 않아도 그것은

당시에는 그저 시간을 겪었을 뿐이었지만 글을 쓰고 나니 해석이 되었던,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어떤 것인지 궁금한데요. 

요가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장편 『눈의 경전』(2015)을 쓸 때 집필 기간이 3년 반이 넘어가니까 막판에는 너무 힘이 들었어요. 건강도 나빠지고 조급증도 조절하기 어려웠어요.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술담배도 많이 했죠. 이렇게 죽으면 ‘장편 한권 없는 작가’로 남는다는 두려움도 컸어요. 그러다 하루 한 시간만 스트레칭을 하면서 놀자는 생각으로 요가를 시작했죠. 요가를 배우던 당시에는 ‘왜 나는 저 동작이 안 되지?’(웃음) 같은 생각뿐이었어요. 지나서 보니까 요가를 하면서 배운 게 많더라고요. 이를테면 불필요한 힘을 빼는 게 그랬어요.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곳에 안간힘을 쓰면서 힘들어 했던 거죠. 거기에 힘을 들이지 않아야 제대로 하는 것인데 거기에 힘을 들이지 않으면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수련 3년이 지나자 ‘균형’이라는 개념을 몸으로 처음 알았어요. 그러니까 요가 에세이를 쓰면서 이런 것들이 정리되고 해석된 것이죠.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도 상당히 유효한’이라는 챕터에서 가져온 것이죠? 첫 에세이라 제목 고민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제목에 어떤 마음을 담은 것인지 들려주세요.  

우리 안에 들어온 것들을 모두 기억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기억나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 안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거든요. 요가도 마찬가지예요. ‘시르사사나(거꾸로 서기)’를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그 동작까지 가기 위해 수련한 순간만은 유효하거든요. 30분을 더 호흡한 사람은 반드시 달라요. 가시적인 숫자로 성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우리 안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유효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즉 ‘과정 자체가 전부’라는 건데요.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안은 바로 ‘나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전부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의 끝에 있는 한 단어만 정답이라고 쉽게 오해해요. 얼마 전에 고등학교에 강연을 갔는데, 이 친구들이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해요. 그래서 “나란 말이죠, ‘나란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의 나’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나를 찾는 과정이 바로 나인 거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낱낱이 기억할 수 없어도 유효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표지 그림은 모딜리아니의 <젊은 견습생>잖아요. ‘문턱을 넘지 못한 자의 시간’이라는 글에도 이 그림에 담긴 작가님의 일화를 쓰셨거든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시간에 대해서 쓴 것 역시 과정에 대한 관심에서 온 것이란 생각도 들어요. ‘견습생’의 시간이 나에게 아주 유효했다는 거죠. 

시드니 유학 당시의 경험인데, 모딜리아니를 좋아했고 <젊은 견습생>이라는 그림도 알았어요. 미술관에서 모딜리아니 전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간 거죠. 그림을 마주하는데 문턱을 넘지 못한 자의 쓸쓸함과 우울을 이 그림에서 발견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내면의 모습이 벽에 걸려 있었던 거예요. 저는 당시 대학원생도 아니고, 대학원 준비생이고 현지인 회사의 비정식사원 신분이었거든요. 등단은 했지만 고작 단편을 세 편 발표한 상태니까 책 한 권이 없어서 작가라 하기에도 애매했지요. 시작을 안 한 사람은 아닌데 정식 인가를 받은 사람도 아닌, 어떤 마디나 틈에 끼인 신분이었어요. 실제로 정식이 아닌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 사회에 많잖아요. 취업준비생, 부사수, 2급, 인턴, 계약직 같은 개념들이 너무 많고요. 어쩌면 이런 상황은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뭔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견습생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방금 말씀은 그 시절의 나에게 건네는 말처럼도 들리고, 그런 시절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처럼도 들려요. 

고인의 위패를 모실 때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고 쓰잖아요. 여기서 ‘학생’은 삶의 시작과 끝을 배움을 통해서 사셨다는 뜻이거든요. 보통 배우는 자는 쉽게 단정짓거나 판단하지 않아요. ‘견습생 정신’을 갖는 사람들은 단번에 눈에 띄진 않고 일면 위축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길게 보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문턱을 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 새롭게 배워야 하거든요. 많은 분들이 문턱을 넘으려고 애를 쓰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해볼까?’ 고민하는데요. 그 고민과 태도를 문턱을 넘더라도 계속 가지고 있길 바라요. 또 문턱을 넘으면 안정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계속 다른 뭔가를 새롭게 배워야 해요. 어떤 면에서 계속 견습생이 되는 것이지요. 견습생 정신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말을 저를 포함해서 다른 분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어요. 

좌절과 고민의 순간에 ‘어휘선택놀이’를 하면서 그 끝에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제일 달콤한 낱말을 고를 것이다”(26쪽)라고도 하셨죠. 

그건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혁명』이라는 책에서 발견해서 활용한 놀이인데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속삭임 같은 것이죠. 지금 너무 힘든 상태인데 마음 속에서 ‘달려’와 ‘쉬어’라는 단어가 동시에 떠올랐을 때, 스스로 ‘쉬어’를 선택하면 어쩔 수 없이 쉬는 게 아니라 자발적 쉬기가 되는 거예요. 이건 일을 하기 싫어서 쉬는 것과는 달라요. 자발적 판단과 선택에서는 쉼이 부끄럽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앉아/일어서’ 중 ‘일어서’가 늘 긍정의 단어는 아니에요. 이 놀이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되고 싶은 모습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요.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해요. 만일 제가 지금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면 저는 ‘수동/능동’ 중에서 ‘능동’이 더 근사하고 ‘포기/완수’ 중에서 ‘완수’가 더 달콤하다는 판단이 들어요.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인지는 나를 잘 관찰한 후 나에게 가장 긍정적인 단어를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나를 관찰하는 것,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나랑 좀 친해져야 해요. 자기가 어떤 생각과 어떤 감정, 어떤 기분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 경우가 드문데요. 자신을 좀 면밀하게 관찰하고 스스로 얘기하는 시간을 가져야죠. 타인을 관찰하고 평가하듯이 자신에 대해 자주 써보는 일도 중요하고요. 에세이집에 히말라야 트래킹 에피소드가 몇 군데 등장하는데요. 스무 날 동안 셰르파와 단 둘이서 눈 쌓인 산길을 걸었어요. 새벽에 일어나 걷고, 아침 점심을 먹고 또 걷고, 자고 일어나서 계속 걷는 거예요. 히말라야 산길은 거대한 나선형으로 이어져 있는데 길을 오를수록 저 자신을 많이 보게 됐어요. 높이 오를수록 제가 보기 싫었던 저의 모습이 열리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관찰하면서 제가 몰랐던 저를 이해하게 되고 전보다 친해지게 되었어요. 일상에서 이런 순간을 만들기 쉽지 않지만 살면서 이런 끓는점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혼자 있을 때, 명상을 할 때,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비교적 용이하게 만들어지겠지요.

 


매일 쓰는 게 훌륭하다

“수첩은 몸 밖에 꺼내 놓은 뇌이자 심장이다”(55쪽)고 할 정도로 수첩을 애용하시는데요. 지금도 변함이 없나요? 

물론이죠, 올해도 수첩을 다섯 권 샀어요. 매년 그 정도 구입하지요. 이번 에세이에 실린 글들은 전부 수첩에 쓰였던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흔히 글을 쓴다면 노트북이나 데스크 탑을 열어서 ‘빈 문서’를 켜고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하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글은 어디서든 쓸 수 있도록 습관을 들였어요. 지하철 안에서도 생각 나면 바로 쓰고, 사람들을 기다리면서도 쓰죠. 술을 마시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적어요. 글을 쓰는 특별한 시간을 만들지 않고 틈이 나면 자주 적는 것이죠. 그렇게 쓴 수첩들이 책장 가득해요. 

“문학을 머리 위에 높이 두고 숭배하던 시절이 있었다”(12쪽)고도 했는데 그 시절의 작가와 지금의 작가는 어떻게 다른가요? 

지금은 머리 위는 아니에요. 그래서는 안 되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머리 위에 문학을 두고 있다면 좀 이상해지지 않았을까요.(웃음) 문학은 많이 내려와서 일상으로 들어왔어요. 곁에 있고요. 그것을 알고나서 표정이 편해졌어요. 전에는 마감이 있으면 잠을 못 잤어요. 잘 써야 하니까요. 각각의 작품은 과일로 비유하면 망고이고, 사과이고, 배잖아요. 등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저는 등수가 있다고 착각한 거죠.(웃음) 지금은 잠도 잘 자고 일어나서 써요. 문학을 창작하려는 학생들에게 제일 많이 하는 얘기가 ‘일상적 글쓰기’예요. 매일 50분 정도 몰입하며 글을 쓰는 태도를 권하죠. 단편집필을 위해 식음전폐 사흘 밤낮을 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매일 50분씩 지속적으로 몰입하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해요. “훌륭하게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만 매일 쓰는 게 훌륭하다”고 강조해요. 그 시간만큼 훌륭해지니까요. 50분을 통째로 내기 힘들면 25분씩 두 번을 내면 되고요. 그래야 오래 쓸 수 있어요.


 

케냐에서 쓴 편지 부분에서 “내 사전 최고의 문장은 ‘보고싶다’”(135쪽)라고 했잖아요. 현재 작가의 최고의 문장을 하나 꼽는다면 무엇이 될까요? 

‘너와 함께 읽고 싶다.’ 혹은 ‘네가 읽는 모습을 보고 싶다.’(웃음)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인터뷰에서 주고 받은 이런 생각들을 사람들이 전해 듣고 불필요한 심적 고통을 덜 받았으면 좋겠어요. 29편의 에세이 중에는 우는 장면이 간혹 등장해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고 막막해서 불필요한 통증에 시달린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한 심리적 부담이 이 책을 읽으면서 줄어들면 좋겠어요.




*해이수

2000년 [현대문학] 중편 부문으로 등단하여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과 『젤리피쉬』, 장편소설 『눈의 경전』과 『십번기(十番棋)』가 있다. 심훈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재직 중이다.



기억나지 않아도 유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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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수 저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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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회 “꼭 필요한 책임감은 따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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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바람, 흩날리는 꽃잎. 마음마저 가벼워지는 계절에 에세이스트 김신회 작가는 ‘책임감’을 말했다. 한없이 무겁기만 한 이 단어가 매일매일 쌓아가는 일상을 만나 가뿐해졌다. 막연한 책임 앞에서 당황하던 한 사람은 도망가고 싶던 마음과 마주하고 고민 끝에 반려견의 보호자가 되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배워나간다. 그 과정이 14번째 에세이 『가벼운 책임』에 담겼다. “책임감이라는 말을 떠올려도 더는 숨 막히지 않게 됐다”는 그에게서 하루만큼의 책임을 지며 걸어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김신회 작가는 14년 동안 14권의 책을 낸 에세이스트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심심과 열심』『서른은 예쁘다』『여자는 매일 밤 어른이 된다』『모든 오늘은 떠나기 전날』 등을 썼고, 『보노보노의 인생상담』을 우리말로 옮겼다. 신작 『가벼운 책임』은 그가 일상에서 ‘나를 책임지며 사는 삶’을 실천해나가는 기록이다.



부족한 걸 채우면서 가벼워졌어요

늘 일상에서 주제를 찾아내시잖아요. ‘여름’과 ‘글쓰기’에 이어 이번엔 ‘책임감’이에요.

저는 늘 제 삶이 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번 책은 기획하기 전부터 생활이 이뤄지고 있었어요. ‘책임감’에 대해 고민하고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결심했을 때, 친한 편집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죠. 자연스럽게 “어, 그럼 책임감에 대해 써볼까요?” 하고 시작된 거예요.

왜 ‘책임감’에 대해 고민했나요?

코로나19 상황이 큰 영향을 줬어요. 달라진 일상을 살면서 갑자기 1인분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거예요. 저는 정말 개인주의자였거든요. 눈앞의 일에 집중하면서, 나만 사고 치지 않고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면서 몇십 년을 살아왔어요. 그런데 코로나 시대는 나 혼자만 잘 산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장 부족한 면이었기 때문에 떠올리신 거군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까 제게 가장 결여된 점이 보였어요. ‘난 책임감이 진짜 없구나’ 싶더라고요. 철이 늦게 든 거죠.(웃음)

‘책임감’은 무거운 단어잖아요. 작가님도 처음에는 어렵게만 느껴졌다고요.

꿈과 희망처럼 막연한 단어여서 부담스럽고 무겁게만 느껴졌어요. 뭘 해야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죠. 결국 거창한 것이 아니라 매일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것이 책임감이더라고요. 규칙적인 습관이 없을 때는 일상이 너무 힘들었어요. 새벽에 눈 뜨고 작업도 잘 안 되고요. 근데 강아지를 입양하면서 규칙적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더라고요. 그렇게 일상의 일을 해나가면서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죠.



강아지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강아지를 입양한 것도 새로운 책임을 느끼게 된 계기잖아요. 그런데 강아지와 함께하는 일상보다 입양을 고민한 과정을 더 길게 쓰셨어요.

선택을 내리기까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계속 고민하잖아요. 최선을 다하기까지 이리저리 흔들리고 후회도 하면서요. 제게는 강아지 입양이 그랬어요. 데려오겠다고 마음 먹었다가 직전에 포기하기도 하고, 아는 게 없어서 주변에 물어보거나 공부도 했어요. 강아지 입양뿐만 아니라 모든 새로운 일이 그런 것 같아요. 처음 해보는 일은 정말 겁이 나잖아요. 같은 두려움을 가진 분들에게 제 시행착오가 공감이 됐으면 했어요. 

강아지가 온 후, 생활이 달라지는 것도 두려웠을 것 같아요.

정말 자유롭게 살았구나 새삼 느껴요. 여행 가고 싶을 때 가고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일상이 당연한 게 아니었던 거예요. 강아지를 데려오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자유? 다 필요 없어. 나는 이 친구랑 같이 살고 싶어’라는 열망이 컸죠. 계획도 많이 했는데, 막상 강아지가 오니까 제 뜻대로 안 되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지금은 아무리 계획해도 소용없다. 하루하루 잘하자는 생각으로 함께 살고 있습니다.(웃음)

강아지와 맞춰가는 과정이 너무 버거워서 글로 나오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고요.

처음에는 일기처럼 막 썼는데, 결국 이만큼 힘들었다는 이야기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이 과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전달하려면 과잉된 감정을 덜어내야겠다 싶어서 원고를 많이 줄였죠. 사실 강아지가 집에 온 뒤 몇 개월 동안 많이 울었어요. 경험이 없는 사람이 혼자 강아지를 키우려다 보니까 너무 어려운 거예요. 또, ‘풋콩이’는 습성을 이미 갖고 있는 유기견이었거든요. 맞춰가고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그렇게 1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니 지금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죠. 

반려견과 맞춰가는 과정이 마치 타인과 함께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일 같더라고요. 강아지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도 하고요.

맞아요. 상담 선생님에게 “우리 풋콩이가 너무 자존심이 강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선생님이 “강아지가 사람처럼 자존심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되물으시더라고요. 강아지를 또 하나의 나처럼 생각하고, 풋콩이가 제게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석한 거죠. 그래서 더 다가가지 못했던 거고요. 아마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거예요. 어떻게 만났건, 강아지와 보호자는 마치 애착이 깊은 가족처럼 애틋한 관계거든요. 상호작용 하면서, 결국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돼요. 

강아지의 보호자로 살아가면서 어떤 변화를 느끼세요?

신기하게도 시야가 넓어졌어요. 예전에는 길고양이를 봐도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은 집을 나서기 전에 먹이를 챙기고, 주변에 길고양이 급식소가 있는지 보게 되고요. 이전에는 눈앞의 제 삶만 보고 살았다면, 지금은 동물이나 아이들의 권리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요. 정말 긍정적인 변화죠.



스스로에게 진심인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인간관계에서 상대의 마음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연애노력주의자’였다고요. “과연 그게 책임감이었을까” 하고 되돌아보는 대목이 공감됐어요. 

상대에게 잘해주고 이해하는 일이 예전에는 선의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남을 내 뜻대로 하려는 통제 욕구도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행동을 해주면 내게 호감을 갖겠지, 서운해하지 않겠지 하고 기대하면서 상대의 감정도 제 숙제처럼 생각했던 거죠. 그러다 보니 계속 노력하고 원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하고요. 그런데 타인의 감정은 그 사람 것이잖아요. 저를 낮추면서까지 완벽한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책임지려는 욕심을 버리니 훨씬 가벼워졌어요. 

좋은 책임감이 아니었던 거네요.

‘완벽을 지향하는 책임’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관계든 일이든 완벽해지려고 하면, 무리하게 되죠. 저도 어차피 완벽할 수 없으니까 시작조차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실수하더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계속 주저했다면 지금 강아지랑 살고 있지도 않았겠지만, 선택하니 너무나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잖아요. 책임지기 싫어서 결정하지 못하는 마음은 덜어내는 게 좋죠.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많이 듣잖아요. 그런데 “꼭 사랑해야 하나요?”라고 되물으셨어요. “나를 사랑하지도, 아름답다 생각하지 않아도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나를 존중하고 싶다”고요.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소화가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방법을 모르겠는데’하는 마음만 드는 거죠. ‘나만 나를 안 사랑하나?’ 하는 의심도 들었던 것 같고요.(웃음) 근데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잘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나에 대해 완벽하게 만족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지금은 그냥 하루하루 잘 살자고 생각해요. 자괴감을 느끼면서까지 매 순간 나를 사랑할 필요는 없어요.

“귀여운 할머니는 되고 싶지 않다”는 문장에도 밑줄을 그었어요. 할 말 다 하고 본인에게 진심인, 적당히 괴팍한 할머니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물론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목표도 좋죠. 그런데 귀엽다는 말은 상대를 약자로 만드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무해하면서 사랑스러워야 하는 거죠. 저는 나이가 들어서까지 남을 신경 쓰기보다는 적당히 무심하고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조금 괴팍하게 보이겠지만요.(웃음)



에세이를 쓴 지 14년이 됐어요.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요?

문득 국내에 20년 동안 에세이만 쓴 작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6년 남았으니 내가 해보자 하면서 혼자 파이팅을 외쳤어요.(웃음) 외국에는 할머니가 되어도 계속 에세이를 쓰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굳이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한결같이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요. 저는 에세이 말고 다른 장르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그렇게 20년, 30년 써나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날이 금방 오지 않을까요?




*김신회

십여 년 동안 TV 코미디 작가로 일했다. 보노보노에게 첫눈에 반했다가 살짝 지루해했다가 또다시 생각나서 푹 빠졌다가 한참 안 보고 있다가도 불쑥 떠올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정주행하기. 이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에 어느새 보노보노를 친구로 여기며 살고 있다. 보노보노만큼이나 겁 많고, 포로리처럼 고집이 세고, 너부리인 양 자주 직언을 하는 사람. 전반적인 성격은 너부리에 가깝다는 것을 자각하고 가끔 반성하면서 지낸다.
다정하지만 시니컬하고, 대범해 보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긴장한다. 웃기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그 말을 듣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을 울적하게 보내고 ‘못 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결국 하는 사람, ‘하자’보다 ‘하지 말자’를 다짐하며 지내왔지만 처음으로 해보자고 결심한 것이 ‘책임감 갖기’ 면서도 여전히 무책임과 책임의 경계에서 허둥대며 살아간다.



가벼운 책임
가벼운 책임
김신회 저
오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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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알렉스 룽구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면 행복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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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자기개발서들이 성공자의 습관을 이야기한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고, 긍정적인 확언을 외우고, 명상을 하고, 감사일기를 쓰면 언젠가 기적이 찾아올 거라고. 책을 덮자마자 금세 성공할 것 같은 확신에 차 새벽 기상을 시작하지만 대부분 이내 지치고 만다. 피곤만 쌓일 뿐, 언젠가 온다는 기적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성장 리더로 활동하는 알렉스 룽구는 이게 바로 “자기계발의 함정”이라고 말한다. 바퀴가 헛돌 듯 이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책 『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를 펴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실천할 수 있는 세세한 방법을 모두 집대성하기 위해 보낸 시간만 3년. 내용은 500페이지에 달한다. 책을 읽고 나면 자기개발에 관한 여러 의문들이 풀릴 것이다. 

10대 때 우연히 시트콤 <뉴 논스톱>을 보고 한국에 반해 이민을 결심한 독일인 알렉스 룽구는 23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하이어셀프코리아(HigherSlfeKorea)’와 의식 성장 학교 ‘하이어셀프’를 운영하며 의식성장, 의미 있는 삶, 자기개발 등에 관한 통찰을 나누고 있다. 



자기계발서의 끝판왕이래요 

3년 만에 완성된 책이라고 들었어요. 정말 홀가분하실 것 같아요. 

3년간 짊어지고 있던 짐이 확 사라지니 조금 이상해요(웃음). 이제 다 끝났으니 ‘좀 쉬어도 된다’고 계속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책 작업이 계속 늦어져서 출판사에 혼날 줄 알았는데, 편하게 쓰라고 배려를 해주신 덕분에 원하는 내용을 다 넣을 수 있었어요. 

책 작업이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이전까지는 간단한 워크북만 제작했는데요. 언젠가부터 ‘제대로 된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도 이제 책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에 갔는데, 도착해서 이메일을 열었더니 수오서재에서 출간 제안이 와 있더라고요. 너무 신기했죠. 느낌이 좋아서 바로 계약을 했어요. 사실 집필 시작 단계에서는 워크북 수준의 내용으로 진행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제가 점점 더 성장하면서 그 방법들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었어요. 책을 쓸수록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앞서 쓴 내용을 다 엎고 다시 시작했죠. 만약 3년 전에 출간했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번역가 없이 모든 글을 한국어로 썼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유튜브 채널도 한국어로 운영하고 있었고, 의식 성장과 자기개발에 대한 공부도 여기서 시작했기 때문에 관련 용어들도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 가장 자연스럽거든요. 당연히 한국어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책 작업 때문에 한동안 유튜브 영상이 뜸했어요. 그래서인지 출간 소식을 알리는 영상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더라고요(웃음). 

맞아요. 댓글들 다 봤어요. 지난주에는 북토크도 했는데 사람들 눈이 반짝반짝 하더라고요(웃음). 구독자들과 가까이에서 상호작용하고 싶은데 늘 거리가 있는 게 아쉬웠거든요. 책 덕분에 독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었나요? 

너무 많은데요. ‘영혼의 책이다’ ‘자기개발서의 끝판왕이다’ ‘이 분야에서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고전이 될 책이다’ 같은 말들을 보고 정말 기뻤어요. 딱 제가 바라던 바였거든요. 사람들이 자기계발서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좀 더 거시적인 틀에서 현실을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그럼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다양한 전략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루틴보다 중요한 건 ‘의미’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매일 명상을 해도 인생에 큰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공통적인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방법론에 집착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새벽 5시 기상은 자기개발을 위한 좋은 도구예요. 하지만 무조건 새벽 5시에 일어난다고 해서 행복이 올까요? ‘무엇을 위해서, 어떤 의미를 위해서’ 그 도구를 이용하는지 모르는 채 하는 행동은 소용이 없죠. 이게 자기계발서들의 한계예요. 삶에 적용하면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수단을 알려주지만, 독자가 방법 자체에만 몰두하면 지속하기가 힘들어요. ‘이 방법대로 실행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성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하는 ‘의미’를 찾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게 되죠. 과거에는 저 또한 그랬어요.  

요즘 리추얼이 유행이에요. SNS에는 #미라클모닝 해시태그로 수많은 인증샷이 올라오고요. 

리추얼을 하는 건 아주 좋아요.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그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빠르게 돌아가는 바퀴가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아무리 강력한 바퀴라고 해도 바닥이 없으면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잖아요. 그냥 헛돌 뿐이죠. 우리의 현실도 똑같아요. 내 삶의 형태를 정하지 않았는데 일정한 루틴을 지킨다고 변화가 생길까요? 무엇을 위해서 그 루틴을 지키는지 스스로 명확히 알고 사용하는 게 중요해요. 그러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할 거예요. 

삶의 의미를 찾고 싶지만,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독자들이 많을 텐데요. 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을까요? 

‘나는 뭘 하고 싶을까?’라는 질문 대신 ‘내가 어디에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세요. 이게 훨씬 더 강력한 질문이거든요. ‘하고 싶은 게 뭘까?’라는 질문에서는 치맥을 먹거나,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것 같은 단순한 행동만 떠오를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어디에 기여할 수 있을까? 내 강점을 어디에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부분에서 타인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서는 내 한정된 자아를 벗어난 의미를 찾을 수 있죠.

곰곰이 생각해보면 몇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을 거예요. 그럼 망설이지 말고 그냥 해보세요. 실험하는 셈 치고 몇 번 해보면, 나에게 무엇이 잘 맞는지 감이 와요. 여기서 중요한 건,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그저 슬슬,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볼 필요가 있죠. 아마 90%의 실험이 실패를 할 텐데요. 그 과정에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의미가 형성될 거예요. 내가 의미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나와 일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돼요. 그러니 무엇이든 일단 해보세요. 물론 가는 길이 힘들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길이 맞는 길이에요. 

‘돈’에 대한 파트가 비중 있게 다뤄진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의미 있는 삶도 좋지만,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 “돈을 포기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게 맞겠죠?” 저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왜?”라고 묻고 싶어요. 의미 있는 삶을 살면, 왜 돈을 포기해야 하죠? 많은 사람들이 의미와 생존을 대립 관계라고 생각하는데요. 둘 다 누리면서 살 수 있어요. 돈 많이 벌면 의미 있는 삶을 살기가 더 쉽고, 더 풍부해지죠. 더 많은 가치를 나눌 수 있고요. 

그동안 돈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을 많이 목격했어요. 보통 돈을 벌려면 가면을 쓰고 나를 숨기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왜 그렇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즐기면서 돈 벌어도 돼요. 그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돈을 버는 건 죄가 아니에요. ‘돈’과 ‘의미’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자기 자신과 싸우지 마세요 

의욕적으로 목표를 설정해도, 그걸 이루기 위해 행동을 지속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죠. 책에도 행동을 막는 장애물을 무려 10가지로 정리해주셨는데요. 우리의 마음은 왜 이렇게 행동을 막는 걸까요? 

두려움, 불안, 강박, 게으름, 미루는 습관 등이 생기는 건 우리가 변하기 싫어서 직접 만들어내는 반응이에요.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보호 메커니즘이죠. 사람들은 행동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를 대지만, 사실 회피하고 포기하는 건 결국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갑자기 우울감이 생겨서 계획대로 실행을 못한 게 아니라, 계획을 실행하기가 두려워서 우울감이 생긴 거죠. 그 감정이 나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내적 저항이 생기면 그걸 극복하려 하지 말고 그냥 두세요. 그리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의미에 집중하세요. 그럼 의식적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게 돼요. 하지만 억지로 안 보려고 하면 거기에 휘둘리게 되죠. 자기 자신과 싸우지 마세요. 내가 억누른 부분이 결국 나를 망가뜨릴 수 있거든요. 

‘극복하려 하지 말고 바라보라’는 말씀에 공감했어요. 저는 불안도가 높은 편인데요. 노트를 한 권 정해 놓고,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그 감정을 기록해보니, 어느새 마음이 좀 편안해지더라고요. 

불안을 그냥 바라보고 살면 돼요. 만약 짜증이 날 정도로 불안이 심해져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가만히 앉아서 왜 이러한 감정이 생겼는지 살펴보면 좋아요. 물론 하루 안에 깨달을 수 없을 거예요. 기간을 길게 잡고, 꾸준히 해보세요. 그럼 어느 순간 내가 왜 불안한지에 대해 알게 될 텐데요. 그때 가서 원하면 불안을 내려 놓고, 원하지 않으면 그대로 살면 돼요. 

작가님은 심리적 저항이 생길 때, 어떻게 해결하세요?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아요. 그냥 ‘오 신기하다. 다시 우울감이 밀려오는구나’ 하고 그 감정을 즐기죠. 자기관찰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 우울함도 유쾌하게 느껴지거든요. 우울하다는 감정은 나를 보호하는 거잖아요. 내가 상처받을까 봐 감싸주는 감정이니까 억지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아요. 

다만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까지도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푹 쉬죠. 쉬면서 그동안 못했던 활동들을 이것저것 해봐요. 쉬는 건 죄가 아니라 새로운 영감을 받고, 또 다른 직감에 접속하는 걸 연습하는 시간이에요. 우울함 속에서 충분히 쉬고 나면 그 다음 단계를 깨달을 수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하면 안 돼, 우울감에서 벗어나야 해’ 라고 생각하죠. 그러면 우울감이 더 심해져요. 

주입식 교육, 즉석 성과에 대한 압박도 자신을 ‘실패자’로 낙인 찍어 행동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했어요. 특히 한국은 완벽주의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요? 교육 환경이 다르면 이러한 신념에도 차이가 생기나요? 

한국에서는 ‘나는 부족하다’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나는 실패했다’ 같은 밑바닥 신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면, 독일에는 ‘나는 충분히 실용적이지 않다’ ‘과학이나 기술이 아닌 창의적인 활동을 좋아하는 나는 잘못된 걸까’ ‘나는 충분히 강하지 않다’ 같은 신념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독일은 실용주의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이니까요. 문화적 배경 때문에 밑바닥 신념의 형태가 다를 뿐, 어디에나 결핍은 존재해요. 

밑바닥 신념에 대한 파트를 읽으며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감이 더 강해졌어요.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일종인 밑바닥 신념이 생기지 않도록 아이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건 조건 없는 사랑이에요. 어떤 실험, 성공, 실패에도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줘야 하죠. 아이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안전한 선에서 다 허락해 주세요. 성과가 좋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네가 꼴등을 해도, 실패를 해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명상, 의식확장 등 현재의 관심사에 눈뜨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몇 년 전, 베트남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제 동의 없이 함께 산악마라톤에 참가신청을 했더라고요(웃음). 저는 운동을 즐겨하지도 않았고, 휴식 차 여행을 떠난 거라 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이미 등록을 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훈련을 시작했어요. 베트남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북한산, 도봉산 등을 다니며 3개월간 운동을 했죠. 덕분에 10kg이 빠지고, 몸도 건강해지는 걸 느끼며 점점 등산에 빠져들었어요. 그런데 출국 전 날, 친구에게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나 다른 프로젝트가 생겨서 못갈 것 같아. 너 혼자 마라톤에 참가해” (웃음). 그래서 혼자 베트남까지 가서 뛰었는데요.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때부터 등산에 푹 빠져서 산악회도 나가고, 산에 자주 다녔어요. 당시 제가 스포츠웨어 브랜드 회사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동료들 중 운동을 하는 사람이 저뿐인 게 좀 이상했어요. 운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과 매일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게 과연 맞는 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요가를 시작했고, 덕분에 명상까지 하게 되었죠. 그리고 1년 후에 회사를 그만두고 전문적으로 이 길을 걷기로 결심했어요. 그때그때 직관대로 움직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의식성장 학교 ‘하이어셀프’의 워크숍은 여느 자기개발 워크숍과 무엇이 다른가요?

저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코치’라고 부르지 않아요. 의식 성장 퍼실리테이터라고 생각하죠. 한 마디로 조력자인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달라”고 하는데요. 그건 제 일이 아니에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스스로 부딪히고, 자기를 돌아보며 깨달아야 하죠. 하이어셀프의 워크숍은 그걸 알게 되는 과정이에요. 워크숍이 끝나고 나면 자기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 모든 도구를 가지게 돼요. 그것으로 제 역할은 끝이에요. 사람들이 저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를 원해요. 

이제 책이라는 산을 하나 넘었어요.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관조 중이에요(웃음). 저는 삶이 4가지 단계로 순환한다는 비유를 좋아해요. 1. ‘방황’ 단계에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니 이것저것 체험을 해 봐요. 2. ‘준비’ 단계로 들어가면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는 등 본격적인 행동을 하죠. 3. ‘성공’ 단계에서는 실행하고, 가치를 나누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일을 키워 나가요. 그러다 슬슬 이 활동에 매력이 없어졌거나, 더 이상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4.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조금씩 손을 놓을 준비를 하죠. 책을 출간했으니 하나의 마무리를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 다시 방황 단계로 돌아갔어요.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지만,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영감이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가 독자들에게 어떤 책으로 읽히기를 바라나요?

방황을 그만하게 해주는 책이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행 방법에 대해 빈틈없이 다 적었다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으면 아마 많은 의문이 사라질 거예요. 물론 책을 읽는다고 저절로 행동하게 되진 않아요. 실행은 여전히 어렵지만 혼돈이 생길 때 한 번씩 책을 펼쳐보면서 ‘맞아. 이렇게 하면 되지’ 하고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만 이 책을 새로운 자기개발서로 읽지 말고, 그저 하나의 청사진으로 유연하게 사용하시길 바라요. 이 방법대로 하면 성공한다거나, 행복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삶의 형태는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해요. 




*알렉스 룽구

독일 출신으로 열일곱 살 때 우연히 TV 프로그램으로 한국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 문화에 푹 빠져 독일 함부르크 대학 시절 경영학과 한국학을 복수 전공했다. 독일어, 루마니아어, 영어, 프랑스어 등 언어에 남다른 감각이 있어 서울대, 서강대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 최고급 단계까지 수료했다. 2013년 대학원 졸업 후 한국 이민을 결심하고 푸마코리아 전략기획팀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세종대 MBA 과정을 거치며 한국에 정착했다.
개인의 의식을 높이고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 강화, 나아가 사회의식을 높이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두고 있다. 그 목적으로 ‘HigherSelf 의식성장 학교’를 설립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아무리 굵고 선명한 계획을 세워도 온전하고 충만한 삶과는 거리가 먼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을 보며 의문에 빠졌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면 좀 더 의식을 높여 실패 사이클에서 벗어나 의미 있고 진정한 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답을 얻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계발을 넘어 철학, 심리학, 의식성장, 존재론, 형이상학, 영성, 역사, 인문학, 과학까지 섭렵하며 ‘자유롭고 진정한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 내적 자기관찰로 깊고 넓게 탐구하고 있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
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
알렉스 룽구 저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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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김중미, 공부방 큰 이모로 사는 것이 나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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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미 작가의 『모두 깜언』을 편집한 창비 청소년출판부 정소영 부장은 『월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글과 삶이 일치되는 작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이 작가의 편집자로 일한 것이 내 삶에서도 커다란 배움이 될 것임을 알았다.” 이 말에 한 문장을 더하고 싶다. “글과 삶이 일치되는 작가와 동시대에 함께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다.”스물다섯 살이 되던 1988년 빈민 운동을 하기 위해 만석동으로 왔으니까 33년이 지났다. 공부방 아이들의 이야기를 남겨야 할 거 같아 무작정 쓴 첫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200만 부 이상 팔렸지만 여전히 공부방 큰이모로 살고 있고 또 공부방 큰이모로 살기를 원하는 작가 김중미 이야기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출간된 후 20년이 지나고, 다시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독자를 찾은 작가의 얼굴을 맑고 웃음은 편안했다. 오래간만에 장편 소설 『곁에 있다는 것』을 출간한 작가 김중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괭이부리말 아이들』 20년 후 

언제부터 쓰시기 시작했나요?

2015년 여름 ‘쪽방체험관’(소설 속 명칭)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오랫동안 지역 활동을 했으니까 아무래도 후유증이 있었죠. 2016년 넘어가면서 능력 있는 사람들만 결승전을 통과하는 분위기가 생겼던 거 같아요.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자학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걸 보면서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쓸 때와는 가난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가난을 혐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 시기를 지나고 사람들이 가난을 빨리 갈아엎어야 하는 것, 혐오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게 느껴졌어요. 가난이 개인의 잘못이라는 점이 더 부각됐고요. ‘지금의 가난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가 됐나 보다’라고 구상한 것이 2016년이에요. 자료를 더 모으고, 학생들 인터뷰도 더 하고 그러면서 2018년에 얼개가 잡혔어요. 틈틈이 쓰다 지난해 4월 탈고했어요.

『곁에 있다는 것』이라는 제목은 선생님께서 지으신 건가요? 

아니오. 원래 거칠게 ‘가난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썼어요. 할머니로부터의 가난부터 지금 청소년들까지 흘러온 시간들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지역성도 드러내고 싶었고요. 요즘 제목에 가난이 붙은 책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가난의 시간’이라는 표현에 무거운 느낌이 있기도 해서 편집자분께서 제안을 주셨어요. 처음에는 에세이 같아서 망설였었는데 계속 생각해보니까 어쩌면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하겠다 싶었어요. 곁에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 2000년에 나왔으니까 그때부터 20년이 흐른 거네요. 그 때의 가난과 지금의 가난의 양상은 어떻게 다른가요?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있었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서 그렸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삶은 늘 고달팠고요. IMF 이전에는 노동 강도도 세고 인권 문제도 있었지만 내 몸을 혹사시키면 어쨌든 먹고는 살았어요. 경제개발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제조업에 취업하고, 일자리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거 같아요.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온 거잖아요. 그분들 하나하나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고 해도 내 몸을 열심히 움직여 일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다 비슷비슷했죠. 빈민 지역에서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살았잖아요. 

지금은 제조업 하청 공장들이 동남아나 해외로 가면서 일자리가 많이 없어졌어요. 옛날처럼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이 사라졌어요. 엄마들도 책 속에 나오는 은강 방직 이야기처럼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였고 이웃이었는데 IMF 이후로는 엄마들 직업도 대부분 서비스직이 됐어요. 횟집에서 서빙을 하거나 주방일을 하거나 아빠들 직업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더 밀려났어요. 저희 동네도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플랫폼 노동자도 될 수 없는 분이 많으니까. 빈곤 문제가 더 피부로 와닿는데, 필요한 것은 더 많아졌어요.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안 되니까 더 게으르고 무지하다는 취급을 받아요. 가난이 어느 틈에 혐오의 대상이 된 것 같아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문제가 되니까 못사는 게 내 탓이 되어버리는 거죠. 적어도 예전에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거든요. 이제는 가난이 무능력하고 게으르고 소비력이 없어서 쓸모없는 것이 된 거죠. 존재감도 없고요. 그런 것이 요즘 가난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모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은 지우, 간호조무사가 꿈인 강이, 교대에 진학해서 은강을 떠나고 싶어하는 여울. 은강에 사는 세 명의 고3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들의 묘사가 굉장히 생생하다는 점에서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꼈습니다.   

공부방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까 아이들 일상은 늘 보고 듣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아이들이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제가 평소에 보는 부분이 아니어서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하고, 얘기도 해달라고 하죠. 



지우, 강이, 여울, 세 친구 중 선생님께서 가장 마음이 가는 친구는 누구인가요? 

세 명 모두 애정이 가요. 누가 더라고 할 건 없는데 강이 같은 친구가 현실에 더 많으니까 더 많은 희망을 주고 싶은 아이이긴 해요. 

강이는 간호조무사로 취업할 것을 생각합니다.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조무사를 꿈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성화 고등학교를 가거나 일반고등학교를 간 친구들도 취업을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하잖아요. 요즘은 경리, 회계 일은 고등학교를 나와서 하기 힘들어요. 그런 아이들이 서비스직으로 가기도 하고 그러면서 간호조무사를 현실적으로 만나는 거죠. 원래 강이도 어릴 때 꿈은 간호사이고 의사였지만 실제 일반고등학교에서는 간호대학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가서 그 아이들을 따로 묶어 입시를 준비할 정도니까요. 어쨌든 차선이기는 해요. 실제로 제가 만난 친구들은 간호 학원을 다니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이 친구들이 서비스직으로 가지 않았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직업 형태가 결국은 돌봄 노동인 거예요. 보육사이거나. 그걸 좀 드러내고 싶었어요.

지우가 강이에게 ‘난 네가 남 돕는 일 하지 말고, 부려먹는 일 했으면 좋겠어’라는 얘기를 해요. 그 장면이 마음이 찡하더라구요.

실제로 애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서로 아니까 더 많이 안타깝죠. 

『괭이부리말 아이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는 요청이 많았는데, 쓸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굉장히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처음 들었던 얘기는 해피엔딩으로 속편을 쓰라는 말이었어요. 저희 공부방 아이들이 했던 말이에요. 그 이후로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은 사람들이 5년, 10년 지날 때마다 “지금 그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요?”, “지금 그 아이들에 대해 다시 써주세요”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몇몇 출판사에서는 제안도 주셨어요.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이들을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렸으면 하는 마음, 얘네들은 사람들의 온기가 있는 공부방에서 자랐으니까 잘되었을 거야, 라는 기대감 같은 거였어요.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그런 이야기는 절대 안 쓸 거라고요. 

왜 절대 안쓸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실제로 그런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깐요. 

‘4부 우리 이야기’는 2015년에 실제로 있었던, 만석동에 쪽방체험관을 만들려고 추진했던 사건에 대해 쓰셨어요. 

주민들과 공유되지 않은 채 추진을 해서 동네 어른들도 많이 분노하셨어요. 소설에 꼭 쓰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어린이날이었어요. 저희들은 다 강화로 놀러 가서 없을 때 관광버스 서너 대가 와서 아이들과 엄마 아빠가 손잡고 사진을 찍고 그랬대요. 마늘 까는 모습, 공중화장실 나오는 모습 같은걸요. 왜 이런 걸 찍냐 항의하니까 어떤 엄마가 공부 안 하면 이렇게 산다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일 이후에 주민 모두가 반대하셨어요. 우리 동네에 아파트를 지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개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난을 상품화하는 거잖아요. 동네 주민들 반대 서명받고 여론도 안 좋으니까 무산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죠. 지금 다시 강이네 집 근처 재개발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사람들 욕망은 좋은 집이겠죠. 그런데 어떤 자본이 들어와도 그곳이 이윤이 남을 만한 곳도 아니고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될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살펴보는 중이에요. 거기에 따라서 대응을 해야겠죠.  



기찻길 옆 작은 학교 

아이들은 공부방에서 어떻게 지내나요? 

원래 공부방에서 하던 것이 굉장히 많았어요.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하고 좋은 전시회가 있으면 같이 가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요. 팬데믹 이후엔 아무것도 못 하게 됐죠. 아이들이 공부방 문을 열고 “이모, 오늘 학교에서는요” 이렇게 얘기들을 털어놓고 저학년 아이들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서 울면 고학년 언니 오빠들이 위로도 하고 서로 곁을 내주며 살아왔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거죠. 지난해 연말에는 유튜브로 라이브 공연을 했어요. 원래 이런 행사를 하면 왁자지껄하게 먹어야 하는데 도시락 주문해서 하나씩 따로 먹었어요. 그 곁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많이 깨달았던 거 같아요. 공부방에서 하는 건 서로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거거든요. 얘가 마음이 아프구나, 외롭구나, 서로를 알아봐 주는 건데, 그걸 빨리 하고 싶어요.

코로나 시대에 공부방의 역할이 또 있을 거 같아요. 

지난해부터 저희가 하는 것이 네트워크예요.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 안 들어왔다고 하면 아이들을 찾아가거나 연락하죠.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역시 일자리가 없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분들이 계시고 엄마든 아빠든 할머니든 혼자 아이를 돌보는 경우가 많아서 보호자에게 계속 전화를 드려요. 공부방에서 아이 상태를 전달하다 보면 할머니나 엄마들이 힘든 일들을 얘기하세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도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까요. 또 정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잖아요. 정보가 있어도 해석할 수 없는 경우 저희가 설명을 해드리죠. 결원 가정이나 장애 가정은 다 고립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기존 제도 안에 있는 것들을 연결하고 알려드리고 있어요.



2001년에 강화도로 이사를 가셨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IMF 지나고 얼마 안 됐을 때인데 개인도 피폐해지고 가정도 파탄 난 경우가 많았어요. ‘이 아이들이 무슨 꿈을 찾을 수 있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아이들과 캠핑 가서 농촌 체험을 하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농담처럼 “시골에 공부방 하나 만들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그때마다 아이들이 좋다고 했어요. IMF 지나면 해봐야겠다 생각해서 후배들과 돈 모아서 2001년 이사를 하게 됐어요. 2년 동안은 공부방 안 하고 만석동에 있는 친구들이 현장체험학습 내고 계절별로 오면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세끼 먹고 자기만 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어른들이 잠자리를 봐주는 것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라 책 읽어주고 깔깔대며 웃다가 편안하게 웃으면서 잠드는 것 자체가 소중했어요. 그것만 2년 하고 나니까 동네도 보이고 그러더라고요. 

기찻길옆공부방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그 동네에 들어간 게 스물다섯 살 때였어요. 한 살 터울인 후배와 함께 일 년 동안은 일곱 살 미만 아이들 돌보고 신문 배달하면서 동네를 살폈어요. 그 아이들을 통해 부모님이나 초등학생 아이들을 만났죠. 그러면서 1988년 초에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친구가, 자기도 학교 끝나고 오면 갈 수 있는 공부방 해주면 안 되냐고 하더라고요. 이모들이 동생들 봐주는 게 너무 부러웠던 거예요. 만석동에 갔던 동료들이 서울로 떠나게 됐는데 저는 아이들과의 약속이 자꾸 생각나 공부방을 하게 됐죠. 그때 공부방을 만들어달라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지금 공부방 상근자가 됐어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쓰신 조세희 선생님과의 만남을 작가의 말에 쓰셨어요.『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나오기 전에 만나신 거죠? 

네. 공부방 다락방으로 쓱 올라오셨어요. 신발이 많아 올라 와 보셨다고요. 만석동에 몇 번 다니셨대요. 그때도 이미 빈 집도 생기고 동네가 쇠락해가는 즈음이었거든요. 1997년에 만석동 주변은 재개발이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가고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많으니까 궁금해서 올라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난쏘공’을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읽게 되셨나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용돈을 아껴가며 문학 잡지를 봤는데 아마 거기에 연재된 것 같아요. 드문드문 봤어요. 그러다 책방에 갔더니 책으로 나와서 사보게 됐어요. 

그 책을 읽고 빈민 운동을 해야겠다 생각하신 건가요? 

운동까지는 아니지만 가난에 대한 문제들이 눈에 보였던 것 같아요. 제가 동두천에서 자라면서 차별이나 불평등에 예민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난쏘공’을 읽기 전에 『분노의 포도』를 읽었어요. 어릴 때 읽어서 어렵기는 했는데, 그때부터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아무래도 글을 써야할 거 같아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공부방 처음 시작할 때, 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다 떠올린게 책이었어요.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었으니까. 문제는 돈이 없다는 거였는데, 마침 선배의 여자 친구가 창비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어요. 제가 부탁했더니 ‘창비아동문고’ 100권 세트 두 질을 주겠다는 거예요. 200권을 들고 집에 갔어요. 들춰보다 보니 제가 어릴 때 읽은 책도 많고 화가들이 그린 삽화도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애들에게 읽히니까 안 읽더라고요. 그래서 읽어줬지 요. 읽고 나서 그림도 그리고 사진으로 책을 만들어보기도 하고요. 아이들과 놀기 위한 방편으로 책을 사용하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아이들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느 날 갑자기 쓰게 된 것인데, 쓰면서 좋았어요 남편에게 아무래도 글을 써야 할 거 같아, 앞으로 공부 좀 할 거니까 많이 도와달라고 얘기한 기억이 나요. 살면서 여러 일들을 겪잖아요. 누군가 떠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요. 글을 쓰지 않았으면 이렇게 오래 버텼을까 싶기도 해요. 또 글을 안 썼다면 삶에 매몰돼서 공부방 밖, 만석동 밖 사회문제에 무감할 수도 있었는데 글을 쓰면서 좀 더 조망하기도 하고 헤쳐나가기도 하고요. 글쓰기와 삶이 서로 도움을 주는 느낌이에요.

예전과 지금, 글쓰기를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글쓰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때는 뭔가 쏟아내듯이 썼어요. 그나마 시간이 생기는 새벽 한두 시에 어떻게 될지 결말도 모른 채 주욱 썼는데, 두 달 반 정도 썼던 거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쓸수록 힘든 거 같아요. 초고를 작성하고 편집자들이 읽고 수정할 걸 얘기하면서 책으로 내자고 하는데 자꾸 미심쩍은 거예요. 지금 시대에 이게 의미가 있는 작품일까, 지금 가난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귀 기울여줄까, 한편으론 그래서 더 필요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해요. 그래서 더 힘든 거 같아요. 무조건 쏟아내듯이 썼을 때가 훨씬 편한 거 같아요. 

작가와 공부방을 운영하는 운동가 중 어떤 모습이 작가님의 모습에 더 가깝나요? 

큰이모에요. 이놈의 팬데믹 때문에 큰이모로 사는 일이 예전보다 줄었지만 큰 이모에요. 

지금 작가님의 소망은 무엇인가요?

‘어린이날에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예요. 초등학생, 중학생이라도 모임을 하면 좋겠는데요. 멀리 보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는 거예요. 아이들이 각자 고립되어 있으니까요. 팬데믹을 거치면서 저희의 역할에 대해 좀 더 생각했던 건, 우리가 코디네이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의 좋은 시스템을 주민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전달해주는 부분이에요. 경제적 고립, 관계 문제로 마음이 아픈 친구가 많아요. 그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빨리 만나서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김중미 

동화, 청소년 소설 작가.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기찻길옆공부방’을 열고 지역 운동을 해 왔으며, 2001년 강화 양도면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기찻길옆작은학교’의 농촌 공동체를 꾸려 가고 있다. 1999년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에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화 『종이밥』 『내 동생 아영이』 『행운이와 오복이』, 청소년소설 『조커와 나』 『모두 깜언』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나의 동두천』,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 강연집 『존재, 감』 등을 냈다.



곁에 있다는 것
곁에 있다는 것
김중미 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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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선 “여행 유튜브 ‘여락이들’, 58만 구독자수를 모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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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을 전하는 유튜브 채널 ‘여락이들’. 운영자인 ‘더티(김옥선)’와 ‘그래쓰(김수인)’는 동네 헬스장에서 처음 만났다. 희한한 인연만큼이나 희한하게 닮은 점이 많았던 두 사람은 5년 넘게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 시작은 멜버른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내밀며 그래쓰가 말했다. “너무 지쳐서 잠깐 호주로 도망갈 건데... 같이 갈래?”그때를 떠올리며 더티는 말한다. “도망가자! 라는 마음으로 떠났다”고.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여행지에서 촬영한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무서운 속도로 좋아요가 올라가고 댓글이 달린 것. 이후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영상을 공부하며 크리에이터로서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리얼하고 재미있는 여행 이야기’를 볼 수 있는 채널 ‘여락이들’은 58만여 명의 구독자에게 사랑 받으며 유튜브의 대표 여행 채널로 자리 잡았다.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는 여락이들이 함께한 여행의 기록이자, 저자인 김옥선(더티)의 이야기다. 그에게 떠남이 필요했던 이유, 여행을 하며 보고 느낀 것들, 일하듯 여행하며 사는 일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어느 때보다 여행이 그리워지는 지금, 우리의 그리움을 잠시 달래줄 뿐만 아니라 ‘후회 없는 삶’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여락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잖아요. 책에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솔직히 재미없는 것들은 뺐어요. 글을 쓸 때 신나서 써지는 게 있고 재미없다고 생각되거나 막히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글을 쓰는 입장이지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많이 생각했어요. 영상을 만들 때도 제가 재밌게 만든 건 보는 분들도 재밌어하고, 제가 조금 루즈하다고 느끼는 건 똑같이 느끼시더라고요. 그래서 재밌게 써지는 글 위주로 실었고, 또 제가 꼭 넣고 싶은 나라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래서 다녀온 나라들 중에서 빠진 곳들이 조금 많아요.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든지 그곳에 대한 제 감정이 별로 없으면 많이 뺀 것 같아요. 

이 책은 김옥선 작가님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첫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어떠셨어요?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 있었나요?

여행가기 전에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직업으로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없었고, 장래희망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돈 많이 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했는데, 확실히 금방 질리고 지치더라고요. 동시에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남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나만 못 견디겠다고 투덜거리는 건가? 내가 너무 나약한 사람인가?’ 걱정도 되고요. 그런데 동시에 ‘어쩌라고, 나는 이렇게 먹고 살고 싶지 않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많이 걱정했던 것 같아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나요? 

특히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후회되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낀 것 같은데, 이렇게 살면 오늘 죽어도 너무 후회할 것 같은 거예요. 머리로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된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남들도 다 버티고 살아’라고 하니까 ‘나도 버텨야 되나? 내가 너무 철없는 소리를 하나?’라는 생각으로 괴리감이 되게 컸죠. 

우연히 불법 콜센터에서 일하게 되셨고, 그곳을 그만두고 멜버른으로 첫 여행을 떠나셨죠? 

그때 현실에 많이 지치고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행을 떠날 때도 ‘여행 간다~’가 아니라 ‘도망가자!’라는 마음으로 떠났어요. 당시 만들었던 여행 영상에 ‘도망에 성공한 노예의 기쁨’이랄까요(웃음), 그런 게 너무 잘 드러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영상을 보면서 같이 신나고 좋아하신 것 아닐까 싶어요. 

요리가 하고 싶어서 호텔조리학과에서 공부하셨고, 졸업 후 요식업계에서 일하셨죠.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많이 달랐나요? 

너무너무 달랐죠. 저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좋아서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하고 성취감이 느껴져서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그때 ‘요리하는 남자’, ‘요섹남’이 엄청 유행했어요. 하얗고 깨끗한 요리복을 입고 카리스마 넘치게 요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요리를) 시작했는데, 현실은 지하상가에 있는 빕스에서 엄청 큰 그릴판 앞에서 고기를 굽는데, 사람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구워지고 있는 게 고기인지 내 손인지도 모르겠고 어쩔 때는 ‘그냥 미친 척 내 손을 구워서 화상 입고 병원에 간다고 나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고...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게 현실이 맞다고 생각은 하는데, 스무 살에 벌써 ‘이게 내 현실인가 보다’ 하고 안주하기에는 너무 삭막한 현실이었죠. 이건 내가 생각하던 길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던 요리는 이게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책 앞부분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작가님이 ‘여행하는 삶’을 사는 데, 두 분이 미친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엄청 많은 영향을 받았죠. 제가 공부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어요. 대학을 가야 되는 이유를 전혀 모르고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해? 나는 공부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당당하게 말하던 학생이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네가 서울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인서울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인서울로 갈 게 아니면 큰 세상을 겪어볼 필요도 없다는 주의였는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공부뿐만이 아니다, 네가 할 수 있을 때 다 보고 다 누려 봐’라는 주의로 바뀌시더라고요. 그리고 원래는 걱정이 많으셨어요. 저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혼자 서울이든 해외든 나가서 뭘 할 수 있을까, 나가서 잘못되면 어떡하나, 내가 품에 안고 케어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셨대요. 

그 생각도 바뀌셨나요? 

나중에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빠도 같은 공간 안에 있다가 이렇게 됐는데, 너를 내 공간 안에 잡아놓는다고 해서 그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네가 내 손 안에 있든 넓은 세상에 있든 그건 엄마가 다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네가 나중에 생각했을 때 그 선택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했으면 좋겠다’고요. 아마 그래서 제가 중동이나 인도, 이집트 같은 나라를 갈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원래라면 무서워서 잘 못 갔죠(웃음). 안전한 나라들만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딱 1년만 해보자, 후회 없을 정도로

‘그래쓰’와의 인연은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 만남도 독특했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친해졌고,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함께 하고 있잖아요. 

그래쓰가 저보다 훨씬 더 외향적인 사람이에요. 아마 그래쓰가 저한테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냥 (인연을) 흘려 보냈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모든 게 좋은 타이밍으로 잘 만났던 것 같아요. 원래 서로의 접점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래쓰가 먼저 다가와 줬고, 우리가 되게 닮은 사람이란 걸 같이 깨닫게 됐고... 그래서 저희도 ‘와, 우리는 진짜 신기하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두 분이 처음으로 같이 떠난 여행의 영상이 페이스북에서 큰 화제가 됐어요. 그때 어떤 기분이 드셨어요?

진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해요. 제가 불법 콜센터를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다음 날 도망가듯이 떠난 여행이었잖아요. 그래서 에코백에 지갑, 여권, 휴대폰, 휴대폰 충전기, 딱 그것만 들고 갔었거든요. 돌아와서 사실 그대로 ‘회사 때려치우고 친한 언니랑 멜버른 여행 갔다 왔다’ 이런 식으로 영상을 만들었는데, 올리고 나서 얼마 되지도 않아서 좋아요가 다다다다다다 올라가는 거예요. 진짜 너무 얼떨떨하고 ‘어, 뭐야? 우리 재능 있나 봐, 우리 할 수 있나 봐, 이건가 봐’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생각이, 사람들이 댓글로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물어보니까, 점점 ‘그 다음은 어디로 가지?’ 하는 생각으로 변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우리도 그 순간에 너무너무 재밌었고 인정받는 기분이었어요. 

뒤이어 태국 여행 영상을 올리셨는데, 반응이 기대에 못 미쳤어요.

완전 망했죠. 멜버른 영상은 우리끼리 ‘재밌다, 키키’ 하면서 만든 건데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해줬거든요. 그런데 태국 영상은 ‘진짜 각 잡고 만들어보자’ 했는데 아무도 안 봐주는 거예요. ‘뭐가 잘못된 거지? 멜버른 영상이 떴던 이유는 단순히 운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인정받은 느낌을 다시 뺏긴 것 같았다고 할까요. 사탕 받았다가 다시 뺏긴 것처럼. 영상을 만들면서 나는 똑같이 재밌었는데 왜 멜버른 영상은 터지고 태국 영상은 망한 건지 너무 궁금했어요. ‘이걸 성공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시기를 굉장히 치열하게 보내셨더라고요. 아르바이트, 영상 공부, 영상 제작, 세 가지 일에만 전념하셨죠. 

돈이 없으니까 계속 여행을 갈 수가 없었어요. 카메라, 영상 편집할 노트북, 편집 프로그램도 없었고요. 그래서 저희가 선택했던 방법이 영상 공모전에 나가는 거였어요. 우승하면 상금도 주니까요. 카메라 같은 건 알바 해서 대여했고, 편집실은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시설이 있거든요. 그런 곳을 예약해서 영상 편집을 했어요. 그리고 공모전에 출품하고 떨어지고, 다시 출품하고 떨어지고, 그걸 반복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계속할 수 있었나요?

솔직히 돈도 안 되고 계속 떨어지기만 하니까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 전까지는 제가 ‘해야만 해서’ 일을 해왔잖아요. 주방에서도 돈을 벌어야 되니까 일을 해야만 했고, 콜센터도 그랬고. 그런데 이건 처음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결과가 안 나오더라도 해보자 싶었어요. 그리고 지금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딱 1년만 투자해보자’ 생각했어요. ‘1년만 후회 없을 정도로 다 쏟아 보자,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깔끔하게 포기하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10개를 지원하면 간혹 한두 개씩 붙는 거예요. 공모전 주제에 따라서 원하는 영상이 어떤 건지도 알게 됐고요. 그러다가 러쉬라는 회사의 영상팀에 계약직 인턴으로 일하게 됐죠.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인턴쉽 기회를 가졌던 거죠?

네. 3개월 동안 계약직 인턴쉽 생활을 했고, 그 안에서 영상에 대해서 되게 많이 배웠어요. 속성 과외를 받은 것처럼. 

그때 직업으로서 유튜버, 영상 크리에이터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엄청 유명한 유튜버가 됐어요. 

아마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잃을 것도 없었고 책임질 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해보자, 해보고 아니면 나중에 다시 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다 도전하는 게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제가 스물일곱인데,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다른 걸 한다고 생각하면 ‘이건 어떡하고 저건 어떡하지?’ 하는 고민들을 하게 되죠. 이런 이야기는 20대 초반의 친구들이 저한테 메일이나 인스타그램 DM으로 질문하는 것이기도 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 이런 것들을 가지려고 모든 걸 포기하면서 열심히 살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좋은 집이나 차, 직업 같은 것들이 나를 아무데도 못 가게 묶어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들이 하나라도 없을 때, 그런 것들에 의존성이 하나라도 적을 때 떠나는 게 아주 좋다’고 이야기해요.

 


어디로 튈지 몰라서 새로운 것 같아요

인턴쉽이 끝나는 걸 기념하기 위해서 유럽 여행을 떠나셨고,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셨죠. 그 이야기가 책에도 실려 있는데 남다른 애정이 느껴졌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약간 뭉클할 정도예요. 일단 횡단 열차에서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횡단 열차에 대한 후기나 리뷰 같은 게 없었어요. 열차 안에서 데이터가 안 터진다는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탔어요. 그랬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색다르고 신기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졌어요. 그리고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만났으니까, 감동이 배가 돼서 오는 거예요. 말이 안 통하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기 위해서 행동이나 눈빛이나 진심에 더 귀를 기울였고,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애틋한 친구들로 남은 것 아닌가 싶어요. 원래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거지만, 영국은 잘 기억도 안 나요. 시베리아가 너무너무 좋았다는 기억만 나고. 

말씀하신 ‘횡단 열차 오형제’도 그렇고, 파리에서 만난 ‘필승이’도 그렇고, 여행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진짜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그날이 여행이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요. 사람이 주는 여행의 즐거움이 있고 자연이 주는 여행의 즐거움이 있는데, 두 개는 서로 완전히 다르면서 서로 완전히 완벽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게 여행이 가진 장점인 것 같아요. 

자연이 주는 즐거움이 가장 컸던 나라를 꼽으라면요?

스위스, 인도, 쿠바가 정말 대박이었던 것 같아요. 스위스는 별개이기는 하지만,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은 곳들은 다 대박인 것 같아요. 여행일 재밌게 만들어주는 건 그 나라에서 만난 사람들이지만,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였고 내가 하는 걱정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하고 세상은 이렇게나 넓고 아름답다는 걸 느끼게 하는 건 입이 턱 막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인도의 사막에서 잔 적이 있는데, 게르에서 자는 건 비싸서 그냥 침낭을 깔고 잤어요. 그런데 사막의 일교차가 진짜 심하거든요. 자다가 너무 추워서 깼는데 눈앞에 보이는 별이 정말 밝은 거예요. 누가 형광들을 켠 것처럼 빛나고, 낮보다 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이 많았어요. 그 장면을 찍고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는데 휴대폰 액정에서 나오는 불빛보다 하늘의 별이 더 밝더라고요. 그럴 때 ‘세상은 진짜 넓고, 나는 진짜 작고,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고, 내가 볼 수 있고 해볼 수 있는 것들이 진짜 많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살고 싶은 나라는 스위스인가요(웃음)?

네(웃음), 살아보고 싶은 나라죠. 사실 살고 싶은 나라가 두 개예요. 하나는 스위스이고 하나는 포르투갈. 스위스는 한 달 살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정말 이민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나라는 포르투갈이에요.

그렇게 좋아요?

정말 좋아요. 날씨, 음식, 에그타르트까지 너무 좋아요. 거짓말이 아니라, 공항 밖으로 나감과 동시에 온 나라가 달콤한 냄새가 나요. 에그타르트 가게가 너무 많아서. 대리석 바닥은 맨들맨들하고 벽면에는 타일이 깔려 있고 사방팔방에서 달콤한 에그타르트 냄새가 나고 지붕은 다 주황색이고... 너무 낭만적이고 뭔가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포르투 와인이 되게 유명해요. 와인 하나 먹고 디저트 하나 먹으면서 걸어 다니니까 ‘여기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하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죠. 그래서 저는 포르투갈에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집트, 인도로 떠나기 전에 걱정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요?

인도는 전혀 예상을 못 하고 가게 된 거라서 걱정을 할 틈도 없었고요. 유일하게 고민했던 곳이 이집트였어요. 제가 <이집트 왕자>라는 애니메이션을 되게 좋아하는데, 거기에서 이집트는 너무 예쁘게 나와요. 그래서 이집트는 ‘미지의 나라로 떠난다~’ 하는 생각으로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확실히, 무언가를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실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처음 이집트에 갔을 때 너무 많이 실망을 했는데, 이집트에 대한 모든 정이 다 떨어졌을 때 도착한 곳이 다합이었어요. 

완전 반전이었죠. 

네. 다합 바다에서 프리다이빙을 배웠는데 그 바다가 진짜 예뻐요. 순간순간이 너무 벅차고 행복했어요. 여행은 진짜 어디로 튈지 몰라서 늘 새롭게 재밌고 즐거웠던 것 같아요. 




불완전해도 그대로 좋았는데

코로나로 여행을 못 가게 되자 “솔직한 마음으로 이제 조금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했다”고요. 번아웃이 왔던 거죠?

그때는 번아웃인지 전혀 몰랐고, 책을 쓰면서 ‘그때 내가 번아웃이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좋아하는 일이 ‘일’이 되어버리면 원래 의미가 많이 퇴색되는 것 같아요. 점점 ‘나는 여행이 너무 좋아, 그래서 나는 여행 유튜버야’가 아니라 ‘나는 여행 유튜버니까 여행을 좋아해야 해’로 주객전도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직업이니까 사람들 앞에서는 티 낼 수 없고, 늘 즐거운 척 재밌는 척 행복한 척 해야 되죠. 제가 5년 동안 여행을 했는데, 아무리 잘 달리는 마라토너도 5년 동안 달리라고 하면 쓰러지다 못해 죽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많이 쉬고 싶었는데 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었나 싶어요. 점점 내가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설레지가 않고, 이 나라나 저 나라나 여권에 찍히는 도장만 다를 뿐 똑같은 거예요. 영상을 찍을 때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가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는 거 찍고, 어디 어디 돌아다니는 거 찍고, 근방에 맛집 있는지 찾아서 넣고, 마지막에 노을 영상 집어넣고 잔잔한 노래 넣고 끝내야겠다’ 이렇게 기계화 되어 가고요.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주방에서 ‘싫지만 해야 되니까’ 일했던 때처럼 여기에서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터졌어요. 처음에는 메르스나 사스 정도로 3~4개월만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아, 이제 합법적으로 쉴 수 있겠다’ 싶었어요(웃음).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길어질수록 제 상태도 더 심각해지는 거예요. 나는 아직 해결된 게 하나도 없고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상황은 계속 안 좋아지고, 이도 저도 못하고 묶여있는 느낌이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던 순간이요?

네. 콜센터에 다닐 때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늘 느꼈던 거거든요. 그걸 또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그때 어떻게 했지? 어떻게 극복했더라?’ 생각해 보니까, 그때 멜버른으로 도망갔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도망가야겠다’ 해서 떠난 게 국토대장정이었어요. 걸으면서 되게 많은 사람들도 만나고, 그때 느끼는 것도 있고, 그러면서 또 번아웃이 극복됐던 것 같아요.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인상적인 순간이 있었나요?

번아웃에서 벗어나게 해줬던 상황이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삼척 바다까지 갔었어요. 밤에 숙소 주인 분이 어떤 노래를 틀어줬는데, 저희가 이집트 야간 버스에서 들었던 노래인 거예요. 듣자마자 여행 갔을 때로 생각이 넘어가면서 ‘그때는 되게 즐거웠는데, 뭐가 그렇게 좋았지? 지금은 뭐가 그렇게 힘든 거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생각해 보면 그 야간 버스는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되게 재밌고 즐거웠던 기억인 거예요. 그리고 그때 버스 안에서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새벽에 자다가 (창 밖으로) 본 돌산이 황금같이 반짝거리면서 너무 예뻐 보였거든요. 그런 것들이 조금씩 상기되면서 여행 갔던 일들이 생각났어요. 

또 다른 순간은 언제였나요? 

정점을 찍었던 게, 정선 게스트 하우스의 사장님을 만났을 때였어요. 그 분을 보자마자 ‘이 분은 진짜 찐 여행자다’ 싶었어요(웃음), 실제로 히말라야에 갔다 오신 분이더라고요. 그런데 그 분이 사시는 곳은 너무 산골짜기여서 인터넷이 안 돼요. 전화도 안 터지고 불도 안 들어와요. 벌레도 엄청 많고, 고기도 장작 긁어 모아서 불 피우고 돌 위에 구워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사시는 게 힘들고 불편하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불편한 게 훨씬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한테 ‘불편하지 않으려면 다 해내야만 하는데 너는 다 해내고 싶냐’고 하셨어요. 그때 뭔가 울림이 오는 거예요. ‘그렇지, 내가 왜 완성시켜야만 하지? 약간 불완전해도 그대로 좋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고, 멜버른에서의 추억이 생각났어요. 온천 가는 길에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길을 걷던 순간들이 다 좋았던 거예요. 사실 온천 자체는 딱히 좋지 않았거든요.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서 ‘맞아, 나는 여행지가 좋았던 게 아니라 여행지까지 가는 길에서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이 좋았던 거지, 여행이 문제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왜 여행을 좋아했는지를 다시 알게 됐고 ‘여행을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 것 같아요. 

번아웃이 지나간 지금은 다음 여행이 기다려지세요? 

코로나가 풀리면 해외여행이 제일 가고 싶어요. 원래는 해외를 배경으로 웹드라마도 제작을 하려고 했었거든요. 

<인도행 티켓>이요? 

네, 맞아요. 원래는 진짜 인도에서 찍으려고 사전 답사까지 마치고 게스트하우스도 계약까지 하고 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갑자기 진행을 못하게 돼서, 코로나가 끝나면 해외에서 웹드라마도 찍고 싶고요. 그리고 포르투갈에 가서 에그타르트 레시피를 배워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배워서 한국에 와서 가게를 차리는 게 제 현재의 꿈입니다. 

책 제목이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잖아요. 요즘 작가님을 설레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가장 설레는 건, 너무 에그타르트에 집착하는 사람 같은데(웃음), 에그타르트 가게 창업할 생각이 진짜 제일 설레는 것 같아요. ‘어느 지역에 어떤 인테리어로 하지? 인테리어는 한국식으로 말고 진짜 리스본하고 똑같이 해야지, 이 가게에 온 사람들은 리스본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해야지’ 하는 생각도 하고요. 리스본은 제비가 행운의 상징이라서 모든 포장 용기에 제비가 그려져 있거든요. ‘나도 포장해줄 때 제비를 그려놔야지’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너무 즐거워요. 저는 무조건 포르투갈에 가서 레시피를 배워올 거라서, 이 레시피로 하면 대한민국 원탑이 될 자신이 있어요. 요즘 그 생각할 때가 제일 설레는 것 같아요. 확실히(웃음).




*김옥선

1995년 2월생. 워낙 조그맣게 태어나 ‘동네에서 맞고 다니진 않을까’걱정하던 부모님의 우려를 보기 좋게 무시한 채 골목대장으로 자랐다. 동네 할머니에게도 스스럼없이 친구 하자며 말을 걸던 관종끼는 한국을 너머 동남아, 유럽, 미국, 중동으로 뻗어 나가 멈출 기세 없이 달려나갔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금은 잠시 중단, 하려다가 ‘작가’에 관심을 보여 2021년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를 출간하였다.

유튜브 여락이들
인스타그램 @youlakk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김옥선 저
상상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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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짓는 사람] 강소영 후마니타스 편집자, 움직이는 책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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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서 일하다 출판 편집자로

7년간 영화 일을 하다가 편집자로 일한 지 올해로 10년. 강소영 후마니타스 편집자는 스스로를 ‘17년차 콘텐츠 제조/서비스 노동자’라고 말한다. 영화사도 출판사도 사업자등록증상 ‘업태’가 제조/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강소영 편집자가 처음 편집 일을 시작한 곳은 마티 출판사, 이후 생각정원에서 일했고 2017년부터 후마니타스에서 책을 만들고 있다.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장래희망 란에 ‘소설가’라고 적었는데요. 그 시절 서점에서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나 문화센터 같은 데서 기획한 성인 대상 소설 창작 강의에 많이 찾아다녔어요. 좋은 작가가 되려면 뭐든 많이 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뭐든 닿는 것마다 제 안에 넣고 싶었고, 감응하려 했죠. 그러다 영화를 깊이 좋아하게 돼서 고등학생 때부터는 영화감독, 비디오가게 사장을 꿈꿨어요.”

대학 졸업 후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영화학교 입학도 고려했지만 월급을 받는 영화 일을 하고 싶어서 영화사에 입사했다. 현장은 분명 흥미로웠지만, 사람들의 좌절을 많이 봤다. 많게는 79고까지 고치는 시나리오와 몇 년째에도 엎어 지는 영화를 보면서, 그런 작업을 하는 감독, PD, 연출부와 동고동락하면서 당장 ‘되는’ 투자받는 영화에 참여했다.

“일하던 중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후유증이 크게 와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밤마다 잠이 너무 안 오는 거예요. 불온한 생각을 굴리고 굴리다 전업을 결심했어요. 창조적인 일을 하되 영화보다는 리스크가 적은 일, 그리고 그간 해온 일을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업종을 생각해보니 출판 마케팅이었어요.”

서른이 훌쩍 넘은 여성이었기에 전업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마티 출판사가 그의 손을 잡았다. 마케터 채용은 끝난 상황이었지만 강소영 편집자의 이력서를 인상 깊게 본 정희경 대표가 ‘마케터가 아닌 편집자’ 업무를 제안했다. 

“마티에서 작업한 책들은 모두 기억에 남아요. 그중 노시내 선생님과 엮은 두 권의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요. 노시내 선생님이 일본, 미국, 오스트리아 빈, 스위스 베른 등을 거쳐 지금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계시거든요. 출판사에서 몇 권의 역서를 내셨는데, 빈의 숨은 ‘명소’를 소개하는 기획이 돼 있어요. 그 책을 맡아 땡스북스스튜디오 디자이너들과 함께 알록달록한 책을 만들었어요. 첫 책 『빈을 소개합니다』가 나올 때쯤 스위스 베른으로 거처를 옮기셨기 때문에 스위스를 거쳐 간 ‘사람들’ 이야길 해보자며 『스위스 방명록』을 만들었어요.”



책 쪽으로 나와 준 독자와 중간에서 만나게 될 책

2018년에 출간된 『배틀그라운드』는 지금까지 편집한 책 가운데 최단 시간 가장 많은 북토크를 진행한 책이다. 연구자, 활동가, 의사, 변호사 등으로 일하는 여러 필자들이 두세 명씩 조를 짜서 지역을 가리지 않고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갔다. 종교, 의료, 장애 등 전방위한 분야와 연결 지어 강연했다.

“낙태죄가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나고 2020년 12월 31일 자정에 폐지되기까지, 이 책이 한 역할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연초에 사비로 “낙태죄(1953~2020)”이라고 자수한 수건을 제작했어요. 낙태죄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모낙폐(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운영위원들과 『배틀그라운드』의 필진이 소속돼 있는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 분들을 중심으로, 생각나는 이들에게 수건을 돌렸어요. 제가 책 만드는 편집자이기 전에 한국의 여성으로서 이런 중요한 운동의 한가운데를 책과 함께 관통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기쁠 것 같아요.”

강소영 편집자가 가장 최근에 만든 책은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이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로 일하다가 방송 현장의 장시간 노동과 비정규직 해고 같은 부당한 업무 강요, 폭언 등의 인격 모독을 고발하며 떠난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 저자가 쓴 책이다. 

“그전에 후마니타스에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님에 관해 쓴 『유월의 아버지』나 세월호 엄마, 아빠들이 쓴 편지글을 엮은 『그리운 너에게』가 나왔는데요. 그 책들과 연결되면서 길이 조금 다른 책이에요. 저는 ‘어떤’ 죽음임을 상기하기보다는,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그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책을 엮었어요. 잘 살겠다, 울지 않겠다고 말하다가도 바로 그 말을 뒤집는, 그 분열하는 심정을 책에 어떻게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누군가 손잡아 주기를 바라면서도 아무도 없는 곳에 처박히고 싶은 마음, 뭔가를 말하다가도 영영 이해 받을 수 없을 거라며 단념하는 마음의 고립을 누가 들여다봐 줄까. 아마 이 책을 집어 든 독자들은 어쩌면 책보다 더, 저자나 편집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일 거예요. 글의 행간을 잘 이해하려고, 필자의 이야기에 잘 닿으려고 몸을 숙여 집중하는 독자일 거고요. 독자 쪽으로 가는 책이 아니라 책 쪽으로 나와 준 독자와 중간에서 만나게 될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강소영 편집자는 원고 앞에서 단호하지 못한 사람이다. 원고에 개입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막 고치다가도 ‘이러면 안 되지’하고 되돌릴 때가 많다. 그래서 그의 교정지에는 교정한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때 쓰는 한자 ‘生’이 많은 편이다. 책을 만들면서 알게 된 필자들로부터 ‘활동가 같은 편집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과분하고 감사한 이야기인 동시에 곱씹어보게 되는 말이기도 했다.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만들고 있으니, 책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쓰이길 바라고, 그것이 책이 가진 ‘실용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책의 의미를 강조하다 보면, 재밌어 보이지 않고 뭐랄까요, 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잖아요. 상업성은 일절 추구하지 않는, 어떤 면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편집자로 보일까 봐 내심 걱정했던 마음을 건드렸나 봐요. 일례로 제가 어느 자리에서 ‘100명의 독자가 당연히 더 좋겠지만 한 명의 독자를 잘 만나는 것도 소중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한 명의 독자면 충분하다’고 기사가 나간 적이 있거든요. 세상에, 이 무슨! 정말 깜짝 놀랐어요. (웃음) 모든 편집자가 그렇겠지만 언제나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고, 그 책이 저자, 역자들과 출판사의 살림에 도움이 되길 바라요.”

경력이 쌓이다 보니, 딱히 써둔 원고가 없는 책을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책을 제안하는 경험이 늘었다. 지난해 8월에 출간한 『김군을 찾아서』도 저자의 첫 책이다. 강소영 편집자는 이 책으로 제61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 부문을 수상했다.

“영화 <김군>을 보고 영화에 다 담기지 않은 아까운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어요. 그런 이야기들의 맥락을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 책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제가 강상우 감독을 만나 책을 내보자고 했을 때, 감독을 움직인 것은 책을 쓰고 싶다는 평소의 욕망이 아니었어요. 풀어낼 이야기가 분명 있고 한 번쯤 정리해야 할 것 같다는 당위였어요. 이 책으로 상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한 일은 저자에게 책 작업을 제안한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연출에 이어 책 집필까지 멋지게 해낸 감독님께 감사해요.”



뻣뻣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이 기획되고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편집이라는 이름 앞에 ‘책임’이라는 묵직한 단어가 보태진다. 강소영 편집자가 생각하는 좋은 편집자는 ‘협업을 잘하고 협업을 중시하는 편집자’다. 

“편집자가 마감을 해야만 책이 나오지만, 그 공정엔 많은 협업자가 있어요. 특히 저는 디자이너와의 협업에 몰입하는데요. 이를테면 표지 시안이 나왔는데 마음에 차지 않을 때는 그게 디자이너 탓이라고 생각지 않으려고 해요. 그 디자이너에게 작업을 의뢰하고 책 내용을 설명하고 레퍼런스를 제시한 건 편집자인 저니까. 애초 콘셉트가 불분명했거나, 책 설명을 잘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죠.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필요하다면 처절한 자기반성을 녹여 어떤 지점을 두고 고민하는지 고백합니다. 그리고 수정 시안을 함께 만들어 나가요. 이 과정에서 경험하는 성취감이 크고 많은 것을 배워요. 책을 만드는 저의 미감이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면,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과정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강소영 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뻣뻣해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연차가 쌓이고 책을 만드는 경험이 많아져 자신감이 붙을수록 샛길로도 가보고 다른 길로도 가볼 용기와 기회가 있길 바란다. 책 만드는 주체들이 ‘책을 위한 각자의 열심’을 발휘할 수 있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잘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제가 만들고 싶은 책의 중요한 기준은 결국 ‘접점’인 것 같아요. 이 문제가 다른 문제에 연결된다, 이 존재가 다른 존재에 연결된다는 것을 말하는, 접점을 드러내는 책이요. 이 책을 꼭 읽을 것만 같은 사람뿐 아니라 언저리에서 고민하던 독자들이 ‘이거다’ 하고 반길 책을 만들고 싶고, 저쪽에만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도 와 보게, ‘움직이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강소영 편집자가 만든 책  

『배틀그라운드』

 나영 외 지음, 후마니타스



<책읽아웃>에 소개되면서 방송을 들은 수신지 작가의 『곤』에 영감을 준 책(낙태죄 폐지에 못지않게 기쁜 일). 하나의 이슈에 얼마나 여러 쟁점이 연결될 수 있는지, 읽을 때마다 다른 지점에서 멈칫거리며 읽었다. 쇄를 거듭할수록 수록된 사진 연표가 어떻게 업데이트되는지 찾아보는 것이 소장 포인트. 



『원본 없는 판타지』

오혜진 외 지음, 후마니타스




14명의 빛나는 필자들의 글을 집대성한(!) 책.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다만 한 권이 아니라, 14권 α의 책을 읽는 것이라고 자부한다. 14명의 필진과 주고받은 메일 타래 양이 엄청난데, 내 이메일 보관함에서 가장 점유율 높은 책이 아닐까 싶다.



『김군을 찾아서』 

강상우 지음, 후마니타스



1980년대생 저자, 디자이너, 편집자가 ‘포기하지 않음’을 두고 경쟁한 책. 그 결과 제61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을 받았다. 곧 5월이 오는데, 벚꽃 시즌마다 다시 울려 퍼지는 그 노래처럼, 도서 판매 순위를 역주행하기를 편집자는 기대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음”.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김혜영 지음, 후마니타스



자식 잃은 엄마의 글이라니, 걷잡을 수 없는 슬픔부터 예감되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누구나 자식이거나 부모니까, 노동자이거나 사회의 구성원이니까 지닐 수 있는 ‘인지상정’을 건드린다. 가정의 달 5월에 읽거나 선물하기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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