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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이것은 시에 대한 동경을 담아 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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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이탈리아에서 독립한 이오니아 해의 작은 섬나라 ‘삼탈리아’. 시를 사랑하는 요리사 ‘이원식’이 삼탈리아에 밀입국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은 이원식이 삼탈리아에서 겪는 기상천외한 일들과 그가 삼탈리아에 가기 전 한국에서 지나온 시간들이 병렬로 이어진다. 

『예테보리 쌍쌍바』 이후 7년 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한 박상 작가는 오래전 썼던 단편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에서 이야기를 발전시켰다. 시가 재산이 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고 난 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소설 써야지 생각했다. 이 소재는 꼭 쓰고 넘어가야 했던 이야기였다”는 박상 작가는 이 소설에 “시에 대한 짝사랑을 고백했다”고 밝혔다. 

“13년 동안 신춘문예에 시를 냈는데 다 떨어졌어요. 14년차에 소설을 내봤는데 됐죠. 주인공 이원식의 시에 대한 짝사랑과 갈망은 다 제 것이에요. 심지어 그가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도 과장하긴 했지만 제가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담은 거예요.(웃음)”



시가 재산이라면

원래 작가님이 생각했던 제목은 ‘삼탈리아 빈티지’였다고요. 

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제목으로 하면 망한다고 해서 포기했죠.(웃음) 편집자 님과 상의할 때도 끝까지 제안을 해봤어요. ‘삼탈리아 빈티지 레시피’로 가자고요. 반응은 냉랭했어요. 사실 ‘복고풍’보다는 ‘빈티지’에 방점을 찍고 소설을 썼었거든요. 지금의 제목을 정한 후에 내용도 약간 수정을 해야 했어요. 빈티지란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 같은 것인데요. 복고풍이라는 말보다 더 넓은 의미로 쓰기가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지금의 제목에 만족합니다. 

작품의 배경은 가상의 섬나라 ‘삼탈리아’예요. 이곳은 ‘시(詩)’가 화폐처럼 통용되는 곳이죠.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2009년 발표한 첫 단편집 『이원식 씨의 타격 폼』에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라는 단편이 있었어요. 시 내놓으라는 강도에게 시는 없다고 하니까 “그럼 써”라기에 시를 쓰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이야기인데요. 거기서 확장을 시킨 거죠. 그보다 처음에 했던 상상은 시가 재산이면 얼마나 좋을까, 였고요. 책장에 시집이 100여 권 꽂혀 있는데요. 어느 날 이게 다 돈이면 얼마나 좋을까(웃음) 싶더라고요. 시가 워낙 소비되지 않는, 동시에 쓰기는 아주 어려운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잖아요. 이걸 돈으로 치환해보면 어떨까 하는 게 처음의 구상이었어요. 재미있잖아요. 시가 재산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난할 것인가, 혹은 부유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거기에 결국 제 소설은 탐미주의라 시의 아름다움과 결합시킬 수 있는 것으로 요리를 함께 이야기해봤어요. 

이융희 문화연구자가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을 "문학이 이 세계에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 끝없이 모색한 결과"(359쪽)라고 썼어요. 

해설에서 “서사가 서정에 바치는 신실한 사랑가”라고도 써주셨는데요. 그걸 읽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쓰는 것은 서사고요. 비슷하면서도 반대되는 개념이 결국 서정이에요. 제목에 서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 역시 제가 시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거든요. 시로부터 받은 감상을 서정이라고, 폭넓게 해석해본 것이죠. 저는 시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잘 쓰지도 못해서 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어요. 그 동경을 담아 쓴 이야기예요. 게다가 친구인 시인들이 이 얘기를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상상으로 할 수 있는 것 중 이만한 게 있을까, 생각해요. 

실제로 발표된 지금 한국문학의 시들을 인용했잖아요. 작품 인용을 모두 허락받았다고요? 

네, 제가 직접 연락한 시인도 있고요. 출판사에서 연락해준 시인도 있어요. 그 과정이 제일 무서웠어요. 안 된다고 어떡하나 싶더라고요. 그러면 내용을 다 바꿔야 하잖아요. 다행히 대부분 허락해주셨어요. 시의 울림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 시도 넣어보고, 저 시도 넣어보고 많이 했거든요. 혹은 그 시를 꼭 넣기 위해 앞뒤 스토리를 만들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어떤 시는 넣었더니 이야기와 딱 떨어졌어요. 정말 희열이 느껴졌죠. 이런 시가 나를 위해 존재했구나, 이 장르를 위해 존재하는구나(웃음) 싶어서요. 독자 분들이 이걸 읽고 시집도 좀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제멋대로인 이야기면 좋겠다

소설 안에 소설가가 메타적으로 직접 등장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어요. 깜짝 놀랐어요. 

적절한 타이밍에 한두 번 메타적으로 등장하면 괜찮은데 여기저기 소설가가 막 드나들면 없어 보이잖아요. 제가 등장한 것은 변명이 필요해서였어요.(웃음) 허연 시인의 시를 인용한 부분은 실제로 그 부분을 시인에게 통째로 보여주고 허락을 구하기도 했는데요. 직접 만나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소설 안에 살짝 남겨놓으면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변명 차원에서 메타적으로 들어간 거고요. 그밖에 제가 등장한 장면은 반드시 웃기거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잘 모르겠어요. 남겨둔 부분은 그나마 괜찮은 것 같은데 원래는 훨씬 더 많았거든요. 많이 뺐어요. 

그런데 만약 허연 시인이 이 빌어먹을 소설을 읽는다면 자신의 아름다운 시가 이 따위 장면에 등장하는 걸 얼마나 불쾌해할지 심히 걱정되었다. 아마 에밀리를 민사재판에 고발하겠지? 이 글을 쓴 박상 작가와 SNS 팔로우도 끊어버리겠지? 나는 마음이 다급해서 비문을 썼다.(130쪽)

이번 소설에도 작가님의 소설에 종종 등장했던 이름 ‘이원식’이 등장하죠. 2014년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이원식이라는 이름이 어디에나 잘 어울려요”라고, 자주 사용하는 이유를 밝힌 적도 있어요. 

『예테보리 쌍쌍바』 주인공 이름은 ‘신광택’이었는데요. 그건 세차장이 배경이었거든요. 거기에는 ‘이원식’이 왠지 안 어울렸어요. 이번 소설에는 시를 좋아하는 요리사가 주인공이죠. 이름을 하나 지어야겠는데 안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원식이라는 이름을 넣어보니 또 잘 맞았어요. 그냥 쓰던 이름 쓰자, 생각했죠. 제가 작명을 못해서 그런 거예요. 워낙 친근해진 이름이기도 하고요. 이제 제 소설에 이원식이라는 이름이 안 나오면 이상할 것 같아요. 

말씀처럼 주인공 이원식은 시를 사랑하는 요리사예요. 요리하는 모습, 주방 풍경이 실감나던데 작가님의 경험이 많이 담긴 거죠? 

주방 풍경은 제가 했던 일들 위주로 많이 묘사했는데요. 라멘집에서 약 6개월 일한 적이 있어요. 육수를 저어가며 직접 만들어봤으니까요. 다만 그 경험을 그대로 쓰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양자역학을 엮어서 써본 거예요. 그런데 양자역학은 너무 어렵더라고요. 어디까지 써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다가 쉽게 풀이해둔 자료를 봐도 이해가 안 돼서요. 그냥 썼어요. 실제 과학 이론과 하나도 안 맞는다고 생각하시면 딱 맞아요.(웃음) SF 작가들은 실제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야기에 맞추는 작업을 하잖아요. 정말 존경하게 됐어요. 그런데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은 기존의 상식을 다 깨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쓴 게 맞을지도 모르죠. 실제 요리에서 그런 작용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작가님의 소설관을 엿보게 하는 말씀인데요. 좀 더 자유롭게 소설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처럼도 들리거든요. 

맞아요, 제 소설은 그냥 자유롭게,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제멋대로인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그런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계속 ‘이러면 왜 안 돼?’라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더 나아가봐요. 어떨 때는 ‘이거 너무 평이한데? 어떻게 꼬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작가마다 세계가 다 다른 것 같아요. 제 소설의 재미라면 전형성을 깨는 걸 거예요. 파격, 낯섦인데요. 이것이 전에 없이 새로운 것은 아니겠지만요. 현실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경험하는 데서 오는 신선함이 제게는 중요한 것 같아요. 반드시 웃기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낯선 환기를 소설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특히 작가님이 재미있게 쓴 장면을 꼽아주시면 어떨까요? 

거의 대부분 쓰면서 재미있었어요. 워낙 편집을 많이 했어요. 대략 17교까지 받은 것 같아요. 고쳐야 할 게 너무 많았던 거죠. 그렇게 많이 봤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웃겨요. 아무 생각 없이 지은 인물의 이름도 웃기더라고요. 가령‘셰르비엥 삼시용사시옹’이나 ‘로라 앙노라’라는 이름은 편집을 볼 때마다 웃었어요. 저는 그런 말장난에 재미를 많이 느껴요. 



오래 남는 것의 아름다움

소설의 한 축이 시라면 다른 한 축은 요리잖아요. 흥미롭게도 이 둘이 아주 긴밀하게 움직여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요리와 시의 공통적인 가치는 무엇인가요? 

우선 재료들이 있죠. 그걸 지지고 볶아요. 그래도 맛이 안 나는 경우가 많아요. 정확한 타이밍, 불 조절, 식재료의 성질, 조리하는 순서 등을 모두 맞춰야 요리가 되는 거잖아요. 시도 마찬가지 같아요. 우리가 단어들을 다 갖고 있어도 그걸 써서는 시가 되지 않아요. 그런 묘한 데가 닮았어요. 전문적인, 반짝이는, 노력에 의해 얻어진 뭔가 하나가 들어가야 시가 되고, 요리가 된다는 것. 결국 예술성이고요. 그것이 가미되어야 완성이 된다는 점이 비슷한 것 같아요. 

“인간의 짧은 생은 지나가지만 그 무언가는 꾸준히 남는 것이었다”(256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주제가 되는 문장이죠. 이 소설의 제목이 ‘삼탈리아 빈티지’일 때부터 그 주제를 정해두고 썼어요. 인간이야 길면 백 년 살지만 빈티지는 몇 백 년도 가잖아요. 그것만이 가지는 아름다움, 오래 남는 것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려고 했어요. 이제 막 나온 것보다 오래된 것이 더 괜찮아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무게, 그것이 보아온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탐미주의적으로 너무나 끌리는 소재였어요.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 묘비 앞에서 이원식이 그간의 역사를 목격하는 장면도 처음부터 정해두고 쓰신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쓰면서 어떻게 이 주제를 보여줄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죠. 여러 개의 안이 있었는데요. 가장 나은 장면인 것 같아요. 더 황당한 것도 많았어요.(웃음) 

소설은 한편으로 사랑 이야기로도 읽히거든요. 어느 평행 우주에서 다른 사람과 연인이 되는데 어쩌면 이곳의 연인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말이에요. 아주 로맨틱했어요. 

이 세계의 연인과 저 세계의 연인. 되게 비슷한 캐릭터인데 어떻게 만나게 해줄지 고민이 됐어요. 그러다가 이름으로 연결을 했죠. 독자는 ‘이 사람이 이 사람인가?’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사랑의 순정은 잘 그려보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원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어요. 남자인 주인공이 다른 연인들을 만나는 게 바람둥이처럼 보일 것도 같고, 싫은 거죠.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순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한 사람을 계속 만나는 것으로 바꾸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요. 자다가 벌떡 일어났어요.(웃음) 이 관계 역시 시간이 쌓여가는, 빈티지의 아름다운 점들이 담기는 느낌을 줄 수 있겠더라고요. 정말 딱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빈티지라는 말은 순정이라는 말과 많이 닮아 있네요. 

의외로 그랬어요. 순정만 남아 있는 게 빈티지죠. 순정이 아니었던 것은 빛이 바래고 순정만 쌓이는 거예요.

 


웃긴 소설은 이제 정리해두고

‘작가의 말’에서 왜 자꾸 웃기려고 하느냐는 동료들의 물음에 “그동안 웃기게 대답한 게 부끄러워 요즘 소화가 잘 안 된다”(368쪽)고 쓰셨잖아요. 요즘의 답은 많이 달라졌나요? 

우주에 태어난 인간은 우주 안에서 웃길 수밖에 없다는 게 지금의 답이에요. 왜냐하면 우주 자체가 유머에서 탄생했으니까요.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 아직은 모르잖아요. 만약 ‘웃기려고’가 답이라면 어떨까요. 우주 자체가 정말 웃기잖아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사정없이 흩어져 있고, 우리는 또 왜 이 조그만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인지. 결국 이 모든 게 거대한 유머가 아닐까 생각하면 이 우주 안의 인간은 웃긴 게 당연한 거예요. 이렇게 거창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웃기게 답변했구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죠.(웃음) 최근 쓴 단편이 있는데요. 주인공이 비운에 시달리다가 결국 우주 안에 지구, 그 안에 생명체로 살고 있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그 행운의 생명체가 잠깐 일이 안 풀린다고 비운이라고 여기는 건 맞지 않는 얘기다, 라는 내용이에요. 곧 공개할 예정이에요. 

꼭 쓰고 넘어가야 했던 이야기라고도 하셨잖아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웃긴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었어요. 웃긴 소설은 저의 1기 소설로 정리해두고 싶었거든요. 이제 정통 소설도 쓰고 싶어요. 이 정도 웃겼으면 됐으니까요.(웃음) 이번 소설에서 웃길 수 있는 건 마음껏 하고 다음부터는 하지 말자, 생각했죠. 

팬 분들이 아쉬워할 이야기 같네요. 

아쉬워하시면 또 쓰고요.(웃음) 그런데 한계에 봉착했다고 느꼈어요. 점점 유머감각이 떨어지잖아요. 이제는 아재개그를 쓰게 되고 말이에요. 20-30대를 웃길 방법은 못 찾겠더라고요. 그렇다고 계속 몸개그만 할 수는 없잖아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웃기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요. 유머의 세계가 만만치 않아서 사실 그것만 파고 들어도 부족할 거예요. 거기에 문학도 하려면 에너지가 너무 분산이 되어서 ‘여기까지만 할까?’ 생각했어요. 물론 웃기려고 하는 말일 수도 있어요.(웃음) 




*박상

나이 같은 건 모르겠고, 기분엔 이천년 대에 태어난 것 같음. 태어난 곳 부산, 다시 태어난 곳 서울, 런던, 전주. 기분엔 안드로메다에서 태어난 것 같음.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가서 아주 간신히 졸업했음. 음식배달, 트럭운전, 택시운전을 하다가 면허정지 취미에 빠져 그만둠. 정신 차리고 삼겹살집 차렸다가 냅다 말아먹었음. 절망으로 찌그러져 있었지만 2006년 신춘문예에서 운이 좋았음. 인생 모르겠음.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문학 동지들과 아직도 소설을 읽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애정이 있음. 쉽게 부끄러워짐.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저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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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 아나운서 “실패담을 기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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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글을 썼다. 아나운서이기 전에 책을 무척 좋아하는 독자였기에 4년 전 신뢰하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고 여러 차례 수정 끝에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이 나왔다. 전종환 MBC 아나운서의 첫 에세이 이야기다. TV에서 꾸준히 등장했지만 한 번도 ‘스타 아나운서’가 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전종환. 그는 원래 기자 지망생이었다. 얼결에 본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지 않았더라면 기자로 살았을 것이고, 실패를 기록한 책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 살 아들 ‘범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묶인 전종환의 에세이는 투박하면서 부드럽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적당한 감미료를 치게 되는데, 전종환의 글은 바짝 마른 천일염 같다. 습기가 없어서 읽는 내내 산뜻했다. 15년 근속 휴가를 하루 앞둔 날, 상암동 MBC 사옥 옥상에서 전종환 아나운서를 만났고, 제주로 떠난 뒤 짧은 이메일 인터뷰를 주고 받았다.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말하는 인터뷰이는 참 오랜만이었다. 



아쉬움이 조금도 없는 책

처음 원고를 썼을 때 가제가 “저는 실패한 기자입니다”였다고요.

맞아요. 출판사에 초고를 보내 드리고 김민정 난다 대표님을 만났는데 원고를 뽑아 오셨더라고요. 슬쩍 종이를 봤는데 이 제목이 펜으로 지워져 있었어요.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건방진 제목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내 실패를 규정하는 것도 오만한 일이 아닌가, 싶거든요. 원고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MBC 파업이 끝났을 무렵이라서 기자로서 겪은 부조리함, 답답함, 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기록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글을 많이 고친 셈이네요.

원래 파업 이야기가 중심이었는데 거의 다 뺐어요. 그때의 뜨거웠던 감정을 책에 담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혼자 뜨거웠으니까요. 물론 일반적인 회사가 아닌 공영 방송사의 이야기지만, 저의 분노와 아픔이 주가 되는 책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어요. 파업 당시, 직후의 이야기들은 여러 선배들의 책을 통해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요. 

1부 제목이 ‘아나운서를 하면 마음공부 많이 하게 된다’입니다. MBC 최초의 대학생 아나운서가 됐지만 방송에 적응하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리셨다고요. 현직 아나운서가 자신의 실패담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기록한 책은 아마도 처음 본 것 같아요.

아나운서들은 보통 아카데미 등에서 훈련을 받고 방송사에 입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로 들어왔어요. 중간에 보도국으로 자리를 옮겨 기자로 일했으니까 두 번의 처음을 경험한 셈인데요. 아나운서라는 직업 때문에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회 초년생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요. 아나운서라서 실패담을 쓰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죠. 그리고 솔직하게 쓰지 않으면 이 책을 쓰는 의미가 없잖아요. 서점에 가면 매달 새로운 책들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 한 권을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있는 그대로를 내어 보이는 일이 두렵다면 글을 쓸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경쟁이 치열한 아나운서 시험에서 단번에 합격했지만 신입 시절 라디오 뉴스 현장에서 부장에게 한 말은 “죄송한데,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됐습니다.(40쪽)”였다고요. 

제가 뛰어난 게 그리 많지 않은데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게 자기객관화 능력인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든 자동적으로 자기객관화를 해보는 게 몸에 배어 있고요. 다만 “준비가 안됐다”고 말한 건 정말로 너무나 준비가 안 돼 있어 그리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 용기이거나 자기객관화의 성격은 아니었던 듯해요. 

아나운서로의 시작도 쉽지 않았는데, 7년차 때 기자로 직종을 바꾸셨어요. 그리고 또 6년 만에 아나운서국으로 돌아오셨고.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에요. 

문지애 아나운서와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직종 전환에 지원했어요. 당시 주말 아침 뉴스 앵커를 하고 있었는데, 이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의지까지 보이면서 면접을 봤고 최종 합격했어요. 결혼이 부서를 옮기는 데 영향을 안 줬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대학생 때부터 제 꿈은 기자였어요. 얼결에 본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덕분에 아나운서가 됐지만요.

 


우리는 모두 실패할 수 있는 사람

첫 장을 열면 ‘범민에게’라는 문구가 보여요. 아들 이름을 새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책을 쓰면서 ‘이 책을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싶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들이 떠올랐어요. 새벽 방송을 마치고 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아들과 보내거든요. 이 다섯 살짜리 친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건 뭘까?를 생각해봤을 때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알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훗날 범민이가 이 책을 보고 우리 모두 실패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때로는 지기도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다만 잘 지는 방법도 있다는 걸 배워간다면 아빠로서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아요. 

지금도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또 실패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인생을 전쟁으로 비유한다면 이런 저런 도전과 거기서 발생하는 실패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뤄지는 전투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전투만 보지 말고 전쟁 전체를 보고 살면 실패가 그렇게 아프지만은 않을 것도 같아요.

책이 나오기 전에 인쇄소도 직접 가셨다고 들었어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과정을 직접 보고 싶었어요. 오래 전부터 제 이름으로 된 책이 한 권 있었으면 좋겠다고 꿈꿨었는데 이제 실현이 된 거니까요. 굉장히 떨리고 설렜죠. 

평소 난다 출판사를 각별하게 좋아하셨다고요.

네, 너무 좋아하는 출판사에서 제 책이 나와서 정말 여한이 없어요. (웃음) 다른 출판사랑 했으면 나를 더 잘 알아주지 않았을까? 내 의도를 더 잘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하나도 없어요. 제 책을 편집해주신 분이 김민정 시인님인데요. 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근 3년간 지켜봐 주신 다음에 만든 책이니까요. 누구도 저를 이렇게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아쉬움이 조금도 없어요. 

저자로서 요청한 부분은 없었나요?

표지에 그림을 쓰고 싶었고 형태는 각양장을 원했어요. 하지만 이우성 작가의 그림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고요. 그 외에는 편집자가 최선의 판단을 해주시리라 믿었어요.

3부의 두 번째 글 제목이 ‘문지애 남편 전종환입니다’예요. 문 아나운서는 책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저답게 나왔다고 했어요. 글도 그렇게 딱 오빠 그 자체인 것 같다고. 오빠가 오롯이 담겨 있는 책이라고 이야기해줬어요. 문지애 씨도 곧 첫 책이 나오는데요. 시기를 맞춘 건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비슷하게 나오게 됐어요. 저는 회사 내의 이야기를 썼고 문지애 씨는 회사 밖의 이야기를 쓴 셈인데, 아내는 방송사에 있을 때 워낙 스타 아나운서였기 때문에 결핍이 없었을 거예요. 좋은 의미로 저와는 다른 삶을 살았죠. 

약간의 경쟁 심리 같은 건 전혀 없나요?

그랬다면 연애부터 못했겠죠. 결혼 후 아내와 방송도 인터뷰도 함께 해본 적이 없어요. 각자의 길을 가자는 것이 아내의 생각이고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원래 처음에는 아내 이야기를 책에 쓰지 않았는데, 글의 생기를 위해 아내 이야기를 썼어요.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결혼하며 오래된 애정에 우정이 스며 들고 그 틈에서 의리가 탄생하는 자연스런 과정들을요. 한때 이 책의 제목 후보 1순위는 ‘문지애 남편 전종환입니다’이기도 했어요. 



뻔한 답 같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15년 근속 휴가로 가족과 제주 한달 살이를 하고 계시죠. 요즘 일상은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한 달의 휴식시간이 있다 보니 무리하지 않고 하루 한 곳씩 즐기자는 마음으로 쉬고 있어요. 서울을 떠나 있지만 책을 내자마자 휴가를 온 거라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일지 관심이 많아요. 리뷰도 종종 찾아 보는데, 입사 동기인 오상진 아나운서의 리뷰가 인상적이었어요. 20대 중반 어린 나이에 만나 서로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이니까요. 서로의 시간과 성장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책이 좋아야 책 읽어주는 아빠가 됩니다’ 글에서 ‘내 인생의 책 10권’을 소개하셨어요. 평소 즐겨 읽는 책은 무엇인가요? 제주에 오면서 들고 온 책도 궁금합니다.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러면서도 문장이 아름다운 책을 좋아해요. 고종석, 김훈, 신형철, 김규항 작가의 글을 좋아해요. 건축도 좋아하는 편이어서 서현 교수가 쓴 『내 마음을 담은 집』과 유현준 교수가 쓴 『공간의 미래』를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고요. 제주에 오면서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일하는가』, 오진영 작가의 『새엄마 육아일기』, 송일준 PD의 『제주도 한달 살기』를 들고 왔어요. 

문지애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유튜브 <애TV>에서 ‘문득 전종환’에서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고 있어요. 부모 독자들이 특히 전종환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좋아하더라고요. 

처음엔 유튜브를 하는 게 너무 어색했는데 하다 보니 즐기게 됐어요. 요즘은 지애 씨가 많이 바빠서 업로드를 자주 못하고 있는데요. 독자 분들과 책으로 소통하는 재미가 있어요.

아들이 조금 더 큰다면 아빠 책을 읽겠죠? 아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나요?

제 책 제목처럼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뻔한 답 같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좋은 삶, 행복한 삶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책에도 나왔지만 고종석 작가가 쓴 말을 인용해보려고요. “당신의 삶이 은근한 쾌락으로, 그리고 그 쾌락을 감당할 만큼의 건강으로, 그만큼만의 돈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말을 훔쳐 오자면,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전종환(아나운서)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MBC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2011년 보도국으로 자리를 옮겨 기자로 일했다. 2017년 6년 만에 다시 아나운서국으로 돌아왔다. 현재 <생방송 오늘아침>과 <PD 수첩>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전종환 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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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홍춘욱 “재테크 초보의 ‘멘탈’을 잡아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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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개미운동’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주식 투자가 활발했던 지난 2년. 주식시장이 꾸준히 상승세를 보였지만, 투자자들의 수익률은 부진했다. 『돈의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이코노미스트 홍춘욱이 이러한 현상에 의문을 가지고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 쓴 책이다. 한국금융연구원, KB국민은행 등을 거쳐 28년간 투자 이력을 쌓아온 홍춘욱 저자는 금리, 주가, 환율의 관계를 토대로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법을 소개하는 한편, ‘달러 저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투자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시대, 돈의 주도권을 잡고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투자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홍춘욱 저자에게 서면으로 물었다.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안전자산 ‘달러’

‘돈의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솔깃했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어느 때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2000년도 정보 통신 거품 전후의 주식시장 상황과 유사해요. 매력적인 스토리텔링과 낮은 금리, 빨리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에 찬 투자자들로 자산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죠. 한 가지 공통점은 이때도 지금과 비슷하게 개인 투자자들의 성과가 부진하다는 것인데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책에서 달러 저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요. 달러 투자가 갖는 장점을 설명한다면요?

달러 저축을 통해 투자 실패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낮출 수 있어요. 환차익을 거둬 자산 가격이 낮아질 때 자산을 매입할 여력을 갖출 수 있고요. 

종잣돈을 모으는 방법으로 미국 국채 등 안티프래질한 자산 투자를 권했어요. 투자 초보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는데 이를 위해 선행해야 할 게 있을 것 같아요.

아주 간단한 경제 지식을 갖춰야 해요. 예를 들어 한국의 주요 자산 가격이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과 반대로 움직인다는 걸 알아야죠.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상승할 때 주식이나 부동산 등 핵심적인 자산 가격이 왜 급락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환율이 상승할 때 자산 가격이 급락하는 이유가 뭔가요?

첫째, 한국 경제의 장래가 어둡다고 생각하는 투자자들이 늘어나면 한국 주식(이나 부동산)을 매도하고 다른 나라 자산에 투자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심리의 변화인데요. 1997년 외환위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한국은 상대적으로 위험한 나라로 인식돼요. 글로벌 경기가 나빠지거나 자금 사정이 어려워질 때마다 원화의 인기가 떨어지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어려워도 한국경제에 무슨 일이 생기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보유하는 원화 자산의 일부를 다른 통화로 전환하고 싶어져요. 세 번째로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 수출 경기가 어려워지고 외환 수급이 악화하면 달러를 구하기 어려워요. 결국, 환율의 상승 압력이 높아지는 거죠. 

그러면 환율이 급등할 때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에 관심 있는 투자자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연간 최소 200원 이상 상승할 때를 노려야 해요. 만약 이때 달러를 보유했다면 두둑한 환차익을 거둔 상태에서 자산을 골라 담기만 하면 되는 거죠. 

처음 ‘환 스위칭’ 전략을 사용한 건 언제였나요?

2008년, 모 은행에서 이코노미스트로 일할 때 소액의 달러 예금을 원화로 환전해 삼성전자나 한진중공업 같은 수출기업을 매집한 것이 시작이었어요. 당시 환율이 900원에서 1,500원까지 수직으로 상승할 때였거든요. 이후 2015년에 다시 환율이 급등할 때, 모 기관을 퇴사하면서 받은 퇴직금과 가지고 있던 외화예금으로 미분양 아파트를 매입했어요. 

포트폴리오에서 달러 비중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요? 

저는 전체 금융자산의 50%를 달러 자산에 투자해요. 지금처럼 부동산이나 주식가격이 모두 상승할 때에는 아무래도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하락하기에 약간의 평가손이 발생할 수 있지만, 언제 시장의 추세가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국내 주식을 조금씩 차익 실현해서 달러를 사요.



금 투자, 한국 주식을 추천하지 않는 이유

또 다른 안전자산으로 알려진 ‘금 투자’는 어떤가요?

한국 투자자에게 금은 매력적이지 않다고 봐요. 달러가 약세일 때 금값이 오르는데 달러가 약세를 보일 때는 한국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도 상승할 수 있거든요. 즉, 한국 사람이 굳이 금에 투자할 이유가 없는 거죠. 저도 전체 자산 중 아주 소액만 금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처음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 또는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요? 

첫 번째 원칙은 ‘분할 매매’예요. 환율이 급등해 달러를 매도할 때에도 하루에 모두 매매하기보다, 석 달 정도에 걸쳐 분할 매도하는 것이 유리해요. 우리는 시장의 바닥 혹은 고점이 언제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거든요. 두 번째는 ‘분산’이에요. 달러를 팔고 한국 주식을 매입할 때, 한두 종목에 올인하면 안 돼요. 어떤 스캔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요. 다른 산업에 속한 기업에 나눠 투자하는 걸 추천합니다. 참고로 저는 2020년 3월 코로나 팬데믹 구간에 삼성전자, 현대차, 기업은행에 분산 투자했어요.  

한국 주식을 추천하지 않는다고요.  

한국 주식 시장이 생각보다 어려워요. 2000년도 정보통신 기업 투자자들과 최근 동학 개미의 저조한 수익률이 이를 잘 보여주죠. 세계에서 가장 배당수익률이 낮은 데다, 수출 경기에 주식시장의 추세가 좌우되는 등 변동성도 크고요. 그래서 본인이 잘 아는 분야의 기업에 제한적으로 투자하거나, 아예 시장 전체를 매입하는 인덱스 펀드 투자를 추천합니다. 

전문가 대부분이 경제를 낙관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신호(166쪽)이며 ‘만장일치’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초보 투자자들은 전문가의 의견을 무작정 따라가기 쉽잖아요. 일반인들이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면 좋을까요? 

가장 손쉬운 판단법은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한 사람이 비난받고, 마이크를 잡을 기회조차 잃어버리는 시기를 조심하는 거예요. 시장 참가자들이 모두 한 방향을 예상하고 또 자신의 투자 실패를 어떤 특정인의 탓으로 돌리면 조심해야 해요. 저는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달러 자산 비중을 조금씩 늘립니다.

 


집, 언제 사야 할지 고민이라면? 

언제 집을 사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에 대해 부동산시장에 진입하기 좋은 징후로 ‘낙찰률’을 꼽았는데 투자 초보자를 위해 낙찰률을 설명한다면요? 

감정평가액 대비 경매 낙찰가격의 비율을 말해요. 예를 들어 2019년 3월처럼, 낙찰률이 80%를 기록했을 때를 보면 10억 원 정도에 거래되는 서울 아파트에 대한 감정평가액이 9억 원이에요. 이 아파트가 감정평가액의 80%인 7억 2천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가정해보죠. 이때 낙찰자는 시세 10억 원보다 저렴하게 아파트를 낙찰받은 거예요. 당시 서울 평균 전세가율이 60%였으니 6억 원에 전세를 놓을 수 있고요. 결론적으로 이 낙찰자는 단 1억 2원만 원을 투자해 시가 10억 원의 아파트를 매입한 셈이 되는 거죠. 물론 낙찰 이후 낙찰받은 집에 사는 사람을 내보내기 위해 추가적인 자금이 들어갈 수 있지만, 이 비용을 고려하더라도 매우 성공적인 투자가 되는 거예요. 

리밸런싱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리밸런싱 타이밍은 어떻게 정하는 게 좋을까요? 

리밸런싱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정기적’으로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매년 6월마다 자산 배분한 비율이 지켜지는지 확인하고 대응하는 거예요. 50대 50으로 달러와 원화 자산에 투자하기로 했는데, 6월 말 기준으로 이게 40대 60으로 바뀌어 있다면 원화를 10% 팔아서 달러를 그만큼 보충하는 거죠. 두 번째는 ‘이탈률’을 점검하는 방법입니다. 즉 달러와 원화 자산에 50대 50으로 투자하다 그 비율이 10% 포인트 이상 이탈할 때 행동하는 거예요. 2020년 3월이 대표적인 경우로 당시 환율이 급등했지만, 한국 주식가격이 폭락해 비율이 65대 35로 바뀌었어요. 저는 달러를 15%만큼 팔아서 원화 자산에 투자했죠. 

오를 때 팔아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오르고 있으면 더 오를 것 같아서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아요. 매도할 때 지키는 원칙이 있다면요? 

분할 매매하면 이 문제가 해결돼요. 리밸런싱도 도움이 되고요. 환율이 연중 200원 이상 급등하는 시기에는 달러를 처분하되, 분할 매매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특정 자산의 보유 비중이 목표를 크게 벗어날 때 매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돈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매일 체크하고 추이를 파악해야 할 최소한의 지표가 있을까요? 

주식이나 환율, 금리 등의 경제지표를 매일 관찰하면 좋겠지만, 일반 투자자들이 매일 확인하기는 어렵죠. 장단기 금리 차, 연체율, 그리고 수출 통계 등을 월 1회 정도 점검하는 걸 추천해요.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재테크 초보가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투자자들의 멘탈을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의 경험이 충분한 투자자들은 ‘너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홍춘욱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명지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한국금융연구원을 시작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운용팀장, KB국민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이사) 등을 거쳤다. 현재 EAR Research 대표이자 숭실대학교 금융경제학과 겸임교수로 있다. 2016년 조선일보와 에프앤가이드가 ‘가장 신뢰받는 애널리스트’로 선정했으며, 수년 간 부동산 및 금융 분야, 국제 경제 전망을 아우르는 전문가로서 각종 미디어의 1순위 인터뷰어로 손꼽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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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별 PD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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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시발 시발 비용으로 시골에 폐가를 충동 구매했다.” PD라는 꿈도 이뤘고, 일도 잘 풀렸지만, 세상과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돌아보건대,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시간도 여력도 없는 날들이었다. ‘약간 미친 짓’을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것 같았고, 덜컥 집을 사버렸다. 최별 MBC PD의 이야기다. 4500만 원에 대지가 300평이라더니, 등기를 떼어 보니 115년 전에 지어진 집이었다. 가계약을 하고 회사에 제안서를 냈다. 폐가를 고쳐서 사는 과정을 담아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큰 기대 하지 않았는데, 회사가 제안을 받아버렸다. 유튜브 채널 <오느른>의 시작이었다. 

마당 앞으로 너른 김제평야를 품은 오래된 집. 그곳의 자연과 풍광과 사람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오느른>을 본 사람들은 ‘힐링’을 말했다. 최별 PD는 그들과 함께, 때로는 홀로 머물며, 1년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삶의 태도가 달라졌고, 해방감을 맛봤고, 새로운 고민도 생겨났다. “이 집을 몰랐다면 어쩌면 꽤 오래 몰랐을 것들”이다. 그 모두가 책 『오느른』에 담겼다. 



미친 척하고 사볼까?

프롤로그에 “이게 참, 괜찮은 인생인 걸까?”라는 문장이 있어요. 폐가를 사기 전에, 그 즈음에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나요?

지나고 나니까 그래 보였는데, 그때는 제가 그렇게 화가 나있는 줄 못 느꼈어요. 그때 쓴 글이나 기억나는 저의 표정들, 순간들이 엄청 화가 나있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 대한 화도 있지만 저에 대한 화가 너무 큰 거예요. 거의 맹목적으로 PD가 되고 싶어서, 또는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는데 막상 손에 쥔 게 하나도 없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꿈을 이루는 순간이 지나고 나니까 제 인생에는 이 직업밖에 없는 거예요. 직업 외의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느낌이었어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못 받은 느낌이었는데, 보상을 안 해준 건 구조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스스로가 너무 맹목적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돌아보게 됐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저는 지상파 방송국 PD니까 52시간 근무제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외의 시간은 어디 간 거죠, 도대체? 그렇다고 집이 회사에서 먼 것도 아니었어요. 

5분 컷이었죠. (웃음)

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약간 어디에 정신 놓고 사는 사람처럼,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다 공허했던 것 같아요. 약간 비어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때는 기어코 나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때 내가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도망쳤구나, 쉬고 싶다는 말이 그 뜻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삶의 태도가 많이 달라지기도 했어요. 

‘다 때려치우고 시골 가서 카페나 할까’라는 생각을 하는 직장인은 많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다 다르겠죠. PD님은 어떠셨어요?

성과는 엄청 이뤘던 것 같아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장관상도 받고 대한민국 100주년 기념 프로그램도 하고, 잘 나간다면 잘 나가는 시기였는데... 뭔가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같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대로 쭉 잘 나가려면 내가 포기해야 될 것들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뭘 모르고 어리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다 지킬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는 이것도 하면서 저것도 할 수 있고, 나는 변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도 성공할 수 있고... 그러다가 ‘아, 내가 여기에서 더 나가려면 하나씩 포기하게 되겠구나,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이 들어서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살아가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으셨군요. 

그랬던 것 같아요. 나이 들어서도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고, 리셋하려면 약간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되게 경쟁하면서 살았더라고요. 사실 일적으로는 불만족이 크게 없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터질 법한 어떤 것들이 계속 쌓이다가 코로나가 터지니까 불가능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일을 할 때 열심히 해서 불가능이 없게 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극복하지 못할 무언가가 생기고, 그때 약간 허무한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되돌아보고 싶었어요. 막연히 너무 답답해서 속으로는 ‘약간 미친 짓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도 안 나타나더라고요. (웃음)

그게 내가 됐던 건가요? (웃음)

마지막에는 ‘그래, 내가 해줄게’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회사와의 관계에서도 그때는 계속 억울한 거예요. 제가 10만큼 하면 회사는 1을 주는 것 같고, 이 관계가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갇혀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때 잠깐 헤까닥 했던 순간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회사를 이용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그 마음은 없어졌어요. (웃음)  

당시에는 그런 마음으로 집을 사신 거군요. (웃음)

회사를 그만둬도 굶어 죽지는 않아야겠다, 그런 마음이었다고 할까요. (웃음) 그래서 집을 산 거죠. 선배들한테 집 계약했다고 얘기할 때도, 그때만큼 아무런 고민이 없던 때가 없었던 것 같아요. ‘(폐가를) 샀는데, 안 하실 거면 저 혼자 고치고요’ 약간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이상하게, 회사에서 덜컥 제안을 받은 거예요. 약간 아차 싶었죠. (웃음) 

그 전에 두 달 동안 기획하신 게 있었죠? 연예인이 출연해 구옥을 리모델링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엎어졌죠. 그 일이 폐가를 사는 데 영향을 미쳤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여러 모로 화가 나있던 이유 중에 그것도 있었어요. 협찬도 들어와 있었고, 첫 촬영 같은 것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순식간에 없어지니까... 그런데 그때 제가 막연하게 그런 걸 너무 보고 싶었어요. 

구옥이 다시 태어나는 모습이요?

그것도 그렇지만, 무계획으로 되는 그런 것들을 보고 싶었어요. 약간 좀 편한 것. 제가 원래 시끄러운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 걸 되게 보고 싶었는데 엎어진 거예요. 그리고 그 후의 상황이 너무 불편했어요. 제가 부서를 옮겼는데, 코로나 때문에 난리니까 스튜디오물, 제작비 거의 안 드는 간단한 걸 하라고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들었나 봐요. 지금은 가서 할 것 같은데, (웃음) 그때는 ‘그러면 내가 PD를 왜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PD를 하는 이유는 저의 일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콘텐츠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인데, 코로나로 인해서 모든 상황이 바뀌어서 그게 제한되니까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나요?

진짜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런데 빚이 있었고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고요. (웃음) 

화가 나서 집을 사셨군요. (웃음)

그렇죠. (웃음) 친구랑 유튜브에서 4500만 원짜리 집이 있다는 걸 봤는데, 제가 <PD수첩>에서 일했었기 때문에 위성사진 같은 걸 잘 찾거든요, (웃음) 그런데 진짜 집이 논 위에 있는 거예요. ‘너무 궁금하다, 한 번 가볼까?’ 해서 친구랑 휴가 아닌 휴가를 가게 됐어요. 집에 찾아갔을 때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 그래도 저는 ‘어떻게 이걸 사?’ 하는 생각이 컸는데, 같이 간 친구가 ‘나라면 산다’ 이러는 거예요. (웃음) ‘이 여사님’도 이 집을 사라고 하고요.

그때 이미 ‘이 여사님’을 만나셨네요.

네, 옆집 할아버지도 그날 만났어요. 저는 원래 평소의 우연한 만남을 그냥 스쳐 지나가게 두는 편이에요. 그런데 제 친구는 이웃이 너무 좋다면서 (집을) 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럴까? 미친 척하고 사볼까?’ 이렇게 해서 사게 된 거예요.

 


좋은 어른

유튜브 영상에서는 집 상태가 이 정도인 줄은 모르셨어요? 115년이나 된 집이고, 쓰레기가 쌓여 있고.

네. (웃음) 115년 된 건 나중에 등기를 떼고 나서 알았어요. 그런데 보통 115년 된 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잖아요? 115년 된 건 진짜 촬영하는 날 (등기 보고) 알았을 걸요. 솔직히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웃음) 그리고 집을 사기 전에는 디딤돌대출이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사원 대출을 끌어다 쓰게 됐고, 저는 온전히 MBC에 묶인 몸이 된 거죠. (웃음) 우리 아빠는 이런 상황을 몰라요. 제가 착실하게 돈을 모아서 산 줄 아세요. (웃음)

유튜브 영상과 책에 담긴 내용을 보면, 폐가를 사서 고치는 과정만 있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 기획안을 쓰실 때는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집을 뜯어고치는 거에 맞춰져 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이웃들과) 친해질 거라고 진짜 생각을 못 했어요. 친해지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의 의도는 동떨어지고 싶은 거였기 때문에 ‘아무도 나한테 말 걸지 마, 나 혼자 있고 싶어’ 약간 그런 거였어요. (웃음) 그때 되게 상처 받고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거 있잖아요, 삐쳐서 울고 있는 아이가 누가 말 걸어주면 고마워하는. 약간 그런 느낌이었어요. (웃음) 

결국 처음의 기획과는 달라졌네요. 

처음에는 리모델링이 끝나면 거기에서 요리 브이로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제가 그런 걸 좋아하니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쉬운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웃음) 지금도 가끔 요리하는 걸 찍는데, 스토리가 전개되다 보니까 넣을 구석이 잘 없어요. 매주 바뀌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밖에 없거든요. 어떤 스토리를 정해 놓아서가 아니라, 찍다 보면 그날그날 바뀌어요. 

채널 이름이 <오느른(오늘을 사는 어른들)>이고,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간절히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어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셨어요?

나이가 드는데 저는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서른이 넘어서도 계속하니까 약간 답답하더라고요. ‘도대체 어른이 뭔가’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어요. 다들 어렸을 때 배운 어른의 이미지는 있잖아요. 좋은 어른이라면 이래야 돼, 라는. 그런데 그게 모델로만 남아있고 실상에 잘 없는 느낌이었어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나도 그럴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진짜 아찔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선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는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쌓여서 나를 만드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사소한 결정부터도 ‘이런 선택을 하다 보면 이런 사람이 되는구나’라는 게 어느 순간 실감이 났어요. 서울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다들 이러고 산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는데, 제가 보고 싶었던 어른의 원형들을 그 동네에 가서 봤던 것 같아요. 

‘동네친구 1호’는 아흔다섯의 할아버지세요. ‘이 여사님’도 중년이시고요. 어른들 사이에서 깨닫거나, 위안을 얻거나, 표본으로 삼은 모습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제가 본 어른들은 다 업계에서 일로 부딪히는 분들이었어요. 그런 어른들이 아니고서는 굳이 만날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로 부딪히지 않는 어른들을 그 동네에서 만난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주신다고 할까요. 이건 저의 피해의식일 수도 있는데, 그 분들은 제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가 상관이 없어요. 그냥 정말 친구 대하듯이 대해주신다고 해야 될까요. 그게 너무 낯설었어요. 다른 집도 그럴 것 같은데, 저는 아빠한테도 ‘더 잘해야지’라는 식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컸는데, 그러면서 그냥 대화를 단절시키고 살았는데, 거기에서는 어른들이 굳이 그러지 않는 거예요.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겠어요.

너무 편했어요. 그리고 저는 일을 조금 일찍 시작한 편이어서 스물네 살부터 뭔가 어른이어야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동네에 가서는 제가 굳이 어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동네에서 제일 막내고, 그냥 애처럼 돌아다녀도 되고, 그게 처음에 너무 신났던 것 같아요. 뭔가 해방된 느낌이었어요. ‘내가 애로 있어도 되는구나.’ 뭔가 긴장감도 확 풀어지고, 그래서 작년에는 신나서 헤집고 다녔던 것 같아요. (웃음) 

마을 어르신들은 자연의 리듬에 맞춰서 사시는 분들이잖아요. 자연하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 않나요?

와서 살아보니까, 자연에 맞추고 순응해서 살아간다는 건 그냥 ‘쿨함’인 것 같아요. 집착이 딱히 없어요. ‘내가 해서 그런 게 아닌데, 뭐’ 이런 태도가 그냥 프로그래밍 되어 있으시더라고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농촌만큼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날씨가 바뀌면 오늘 예정했던 일도 그냥 바꾸세요. 내가 자연에 맞춰야 한다는 걸 너무 잘 아세요. 열심히 1년 동안 농사를 지었는데 태풍을 맞아서 벼가 쓰러졌어도 ‘어쩔 수 없지, 하늘이 그런 걸 내가 어떡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어땠는지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직업적으로 저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고, 열심히 했는데 위에서 알아주지 않거나 시청률이 안 나오면 억울했는데, 그 분들이 그렇게 사시는 걸 보니까 ‘그렇게까지 억울해할 일이 아니었네’ 싶은 거예요. 괜히 나한테 스트레스 주고 살았다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그러네~’ 이렇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큰 깨달음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약간 허탈하기도 했어요.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왜 그렇게 속 끓이면서 살았나, 어차피 다 갈 데로 갈 텐데’ 싶은 거예요. 제 PD 인생을 봐도 항상 일을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했던 것보다 <오느른>이 훨씬 잘 됐잖아요. 그것도 너무 웃긴 거예요. (웃음) 자포자기 심정으로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시작했는데. (웃음) 그리고 저도 9년 동안 일한 게 남아있으니까 갑자기 잘하고 싶어져요. ‘잘하고 싶은데? 좀 멋있게 해보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드는데, 그러면 여지없이 잘 안돼요. (웃음) 그래서 ‘힘 좀 빼고 살아야겠다, 보는 사람이 편해야 되는구나’ 생각해요. 그런 걸 배우고 있는 거죠. 



‘아무 이유 없음’이 주는 힐링

집에서 보는 평야, 일출과 일몰... 그런 풍경들의 영향도 있을까요?

상암동으로 처음 출근하게 됐을 때 제일 충격적이었던 장면이, 점심시간에 직장인들이 다 지하로 가는 거였어요. 그런데 입사하고 나니까 어쩔 수 없이 저도 그러고 있잖아요. 솔직히 그게 약간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돈을 버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게 잘 살려고 하는 건데,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지내잖아요. 특히 삼십대가 넘어가면 회사 일을 하려고 병원 다니는 사람 진짜 많잖아요. 플러스 마이너스를 제대로 따져봐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엄청 들었어요. 그러다가 4500만 원짜리 폐가를 사면서, 우선은 급한 불을 끈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솔직히 재테크나 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울 근처도 아닌데, 그런 ‘아무 이유 없음’이 저한테 조금 힐링이 된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는데 나를 위해 여기까지 해줬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진짜 플렉스한 거죠. (웃음)

그렇죠. (웃음) 그리고 시야가 확 트인 게 너무 좋아요. 어떤 분이 인터뷰하러 오셨다가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쉼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고. 되게 와 닿는 말이더라고요. 거기에서는 바쁘게 일하다가 10분만 쉬어도 ‘나 쉬었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거든요. 서울에서는 그게 안 됐어요. 제가 주변의 사람들이나 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라 쉴 수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거기는 진짜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 ‘아무것도 없음’이 저를 쉬게 만들었던 거죠. 

<오느른>이라는 콘텐츠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계실 텐데요.

처음에는 시골살이 하고, 소소하게 텃밭 가꾸고, 그게 좋아서 오신 분들(구독자들)이 대부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을 모아놓고 굳이 다른 일을 하는 게 맞나, 라는 고민을 되게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개인 유튜버가 아니다 보니까 ‘그러면 그냥 유튜버를 하지, PD라고 말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저를 되게 힘들게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을 하다가, 처음에도 오래된 것들과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시작했으니 그냥 일을 벌여보자고 생각했어요. 이제 개인의 힐링에서는 넘어가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왜 안 쉬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기는 한데, (웃음) 팀장님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여기에서 계속 힐링만 하면 나중에 거짓말하고 있을 것 같아요.’ 

거짓말이요?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을 살면서 오늘도 쉬고 힐링했다고 거짓말하는 콘텐츠를 만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초반의 콘텐츠가 가진 느낌이 좋아서 찾아오셨던 분들이 다른 콘텐츠로 떠나가더라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어요. 한 달 전까지 제 내부의 이슈였던 게 ‘<오느른>스러운’ 게 도대체 뭐냐는 거였어요. 제가 <오느른>을 만들었는데, 오느른스러운 게 저를 이겨버렸더라고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느른스러운 것’은 뭘까요?

뭔가 느리고, 실수해도 괜찮고, 이런 걸 오느른스러운 걸로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은데, 그게 약간 저의 행동을 가두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었어요. 약간 자연주의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거기에서 1년 산다고 갑자기 자연주의가 되지 않거든요. 기대하시는 콘텐츠의 방향이 그렇다는 건 너무 잘 알지만, 이제는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느른스럽게 살고 싶지도 않고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고민과 방향이 달라지는 게 당연하고, 계획대로 되는 게 인생이 아니라는 걸 (<오느른>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데, 제가 거기에 맞춰서 살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날그날 생각이 달라지면 달라지는 대로 표현해드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성실함일 것 같아요. 



제 또래가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잘 팔리는 글’이라는 꼭지가 있어요. 어떤 책을 만들지,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더라고요.

창피한 고민도 솔직하게 말해야지, 라는 게 <오느른> 영상의 코드라면 코드였는데요. 책은 지면으로 남는 거니까 그렇게 쓰면 너무 창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도 에세이를 많이 읽는데, 서점에서는 마음에 와 닿아서 사는데 집에 가면 안 보게 되더라고요. 분명히 저의 고민의 깊이가 그 정도로 깊지 않은 것 같은데, 글로 보여지는 제 모습이 너무 얕으면 어떻게 하나 조금 걱정됐던 것 같아요. 

글 쓰실 때 솔직해지려고 애쓰셨어요?

네, 그게 너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솔직해지기가. 영상에서보다 조금 더 솔직해야 된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아요. 영상은 편집해서 들어가는 그림이 있으니까요. 글은 한 꼭지 안에서 주제에 맞게 최대한 솔직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저의 사적인 고민이나 개인적인 경험이 조금 더 들어간 것 같아요. 가장 다행이었던 건 ‘읽히다 말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교정볼 때 읽어 보니까 계속 읽히더라고요. 그리고 제 나이에 맞게, 저답게 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책 『오느른』을 보고 좋았던 부분은 어떤 거였어요? 

가장 좋았던 건, 1년 동안 제가 달라진 게 한눈에 보여서, 스스로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게 설득이 되더라고요. ‘아,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1년을 축약해서 보니까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1년 동안의 변화를 보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되게 막연했고 그렇게 갈 수 있는 방향도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다행이다, 방향이 틀리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런 느낌이에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나요?

이렇게 가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명히 한켠에는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쉬고 싶다는 마음이랑 또 다른 건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 마음하고는 계속 싸워야 되는 것 같아요. 

PD로서 <오느른>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목표도 있겠죠. 한 인터뷰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브이로그이지만 일종의 주거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하셨어요. 

사실 브이로그는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의 형식을 따온 거라고 생각해요. 그 안의 주제의식은, 아마 앞으로 계속 반복해나가게 된다면, 실험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저라는 개인이었지만 이미 저 때문에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6~7명 정도 되거든요. 이미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있죠. 그리고 회사의 시스템도 달라지고 있어요. 올 초에 팀장님이랑 ‘거점 오피스처럼 할 수도 있겠다’는 얘기를 했었거든요. <오느른>이 콘텐츠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의 대단한 변화는 아니지만, 경험을 콘텐츠로 나눈다는 것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많은 회사나 개인들에게 학습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돼요. 그러면 새로운 삶의 형태에 도전할 때 훨씬 두려움이 덜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굳이 의미 부여를 하자면, 조금은 의미 있는 시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집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작년이었다면 ‘섬 같은 공간’이라고 얘기했을 것 같아요. 어느 정도 독립적이어야 된다고 말했을 것 같고요. 지금은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그래서 앞으로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게 될 것 같고요. 그 관계에는 나와 나의 관계도 있고, 아빠와 나의 가족 간의 관계도 있고, 이웃과 나 또는 친구와 나, 그리고 회사와 나의 수평적이고 건강한 관계도 있어요. 지금 제가 거기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거의 매일 (관계에서) 실패와 성공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보면 ‘이만큼 달라져있구나’ 하고 느끼게 되고요. 집은 그런 관계성을 나답게 표현해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제 책이나 영상 콘텐츠를 제 또래가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저는 시골에 가서 이런 방식으로 살아도 된다는 걸 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제 또래가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최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외주 제작사 조연출로 방송 PD를 시작하여 2013년 SBS 〈SBS 스페셜-물 한잔의 기적〉으로 얼떨결에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데뷔하였다. 콘텐츠 기획 제작 1인 프로덕션 〈눈길〉을 차렸으나, 2016년 MBC 경력직 공채에 합격하며 창업 3개월 만에 폐업 신고하고 MBC 시사 교양 PD가 된, 태어나니까 사는, 이왕 태어났으니까 열심히 살아보는 여자 사람 PD이다. 지금은 MBC 공식 라이프스타일 유튜브 채널 〈오느른〉을 제작, 운영하며 MBC D.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PD로 재직 중이다. 인생은 ‘경험의 총량’이라는 데 동의하며 최대, 최선의 경험을 수집하는 데 골몰하는 편이다. 수상 경력으로는, MBC 〈기억록, 100년을 탐험하다〉로 ‘2019년 차세대 미디어대전’ 방송콘텐츠 대상 부문 대상, ‘양성평등 미디어상’ 최우수상(여성가족부 장관상), 〈오늘을 사는 어른들, 오느른〉으로 2021년 제33회 한국PD 대상 디지털 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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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우 “그림이 아니라 식물이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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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은행나무 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기 위해 일요일에도 학교에 뛰어가던 소녀는 자라서 식물 그림을 그리는 식물학자가 됐다. 그의 일러스트는 식물의 정보와 특징, 형태, 생애를 세부적으로 보여주는 학술적 그림이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는 식물 자체를 본다. “그림이 아니라 원래 그 식물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신혜우 작가는 식물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식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식물학자의 노트』를 썼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식물

그림을 그리는 식물학자이고,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이기도 해요. 자기소개를 할 때 보통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요즘은 ‘과학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소개해요. 혹은 식물 도해도를 그리는 사람이요. 제가 그리는 건 보테니컬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주로 연구 목적으로 사용되는 학술적인 식물 그림이에요. 

대학에서 식물학을 공부하며 식물 도해도를 그리기 시작하셨죠.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식물 실험실에서도 종종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본 교수님께서 식물을 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죠. 식물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그림이 꼭 필요하다고요. 그때부터 식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보테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이 국내에서는 생소한 분야라 배울 수 있는 책도 없고,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교수님이 동경대에서 박사과정을 하신 분이었는데, 일본에서 가지고 온 책을 몇 권 보여주신 게 다였죠(웃음).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던 찰나에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분야이지만 열심히 해서 이 길이 맞으면 국내 식물 연구에 좋은 보탬이 되는 일이고, 그게 아니라 해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거다. 3년만 열심히 해봐라. 그게 모이면 뭐든지 된다”고요. 그 말에 감명을 받아서 밤 늦게까지 남아 그림을 그렸어요. 무작정 교정에 있는 식물부터 그리기 시작했죠. 초반에 했던 스케치를 보면 백목련, 개나리, 살구나무 같은 것들이 많아요. 

식물 그림이 무척 고된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그림이라는 걸 책을 읽고 알았어요. 현미경으로 일일이 식물의 형태를 관찰하고, 정확한 표본을 구하기 위해 여러 해를 기다리기도 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은 ‘예술’보다 ‘연구’에 가까워요. 저 스스로는 여전히 그림이 아닌 식물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식물학 연구도 어떤 것은 글로, 어떤 것은 그래프로, 어떤 것은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제가 하는 건 그중 그림인 거죠. 

특히 오래 걸린 그림이 무엇인가요? 

‘시서스 에렉타(Cissus erecta)’라는 포도과 식물을 완성하기까지 5년 넘게 걸렸어요. 저에게 그림을 의뢰한 박사님이 미얀마에 연구 프로젝트를 하러 갔다가 발견한 식물이었는데요. 채집을 떠났다가 길을 잃었고, 비가 쏟아지는 길을 걷던 와중에 낯선 식물을 보고 가져왔는데 도감을 찾아보니 없는 거예요. 세계에 보고된 적 없는 신종이었던 거죠. 당시 저에게 그림을 의뢰하며 보여주신 건 열매였어요. 그래서 꽃도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멸종위기종이고 길을 잃어서 발견한 식물이라 찾기가 어려웠어요. 사실 새로운 종을 보고하는 논문은 내용이 많지 않아요. 보통 4장 정도로 이루어지는데 꽃을 찾아다니는 데만 5년의 시간이 걸린 거죠.

그림에 그릴 식물은 어떤 기준으로 정하나요? 

개인적으로는 형태학적이나 생태학적으로 연구가 덜 된 식물을 그려요. 의뢰를 받을 땐 연구와 관련된 일이 우선이고 상업적인 그림은 후순위로 두죠.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될 그림이라고 해도 식물을 정확하게 그려야 한다는 원칙은 꼭 지켜요. 제일 아름다운 식물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식물이 들어간’ 그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관념적으로 꾸미지 않고, 식물이 있는 그대로 진정성 있게 그려져야 보는 사람도 아름답다고 느껴요. 그림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식물이 아름다운 거죠. 



식물학자, 첫 번째 꿈이었다

6살 때 처음 식물도감을 보고 식물학자가 되고 싶었다고요. 

어릴 때부터 식물을 좋아했어요. 매일 꽃잎을 분해해보고 그러니까 오빠가 저를 “식물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죠(웃음). 그러던 어느 날 김태정 선생님의 『어린이 식물도감』이라는 책을 보고 식물학자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식물학자가 되고 싶었죠. “네 꿈이 뭐니?”라는 질문에 처음으로 했던 대답이 “식물학자”였어요. 

식물이 왜 그렇게 좋았나요.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라면서 계속 바뀌는 모습이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초등학교 1~2학년때쯤에는 학교에 있는 동백나무의 씨앗을 양쪽 주머니 가득 주워 와서 집에 심기도 했어요. 시골집이라 마당이 넓었는데 몇 개는 ‘그늘 지고 습기가 많은 곳’에 심고, 몇 개는 ‘햇빛이 많은 곳’에 심은 다음 어디에서 싹이 나는지 관찰했었죠(웃음). 그 동백나무가 지금은 제 키만큼 컸어요. 

와, 그 나무가 여전히 살아있군요. 

네, 지난 겨울에 집에 내려가서 사진을 찍어왔는데 제 키보다 조금 크더라고요. ‘내가 태어난 해 이 나무를 심었다면, 우리가 동갑이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아쉽더라고요. 아기가 태어난 기념으로 나무를 심기도 하잖아요. 참 의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식물학 박사이면서 식물 그림을 그리는 이력이 독특해요. 학부 때는 어떤 학생이었어요? 

특이한 학생이었어요. 1학년 때부터 패션디자인을 복수전공해서 제가 패션디자인과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았어요. 교수님들이 의류 전공자들은 옷을 잘 입어야 한다고 해서, 희한한 옷을 입고 자연대 건물을 들락날락 거렸던 기억이 나요(웃음).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이시죠. 

흥미가 생기면 고민없이 도전해보고 질릴 때까지 해야 그만두는 타입이에요. 덕분에 식물 연구를 하면서 그림도 놓지 않을 수 있었죠. 흔히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왜 하나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커서 찾아봤더니, 현대사회에 대학과 전공이 생긴 게 약 2~300년 밖에 안 되더라고요. 이전 사람들은 원래 다양한 일을 했어요. 루소도 교육학자인 동시에 식물학자였거든요. 저는 식물학과 그림도 질리면 언제든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라지는 것,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

책을 읽으며 ‘식물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큰 고민 없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나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삶이요. 식물을 공부하며 깨닫는 게 많을 것 같아요. 

인간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걸 많이 느껴요.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보면 ‘지구에서 인간만 사라지면 되겠다’는 파괴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하고요(웃음). 자본주의의 여러 산물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많죠. 일상적으로는 물건이 많이 쌓인 걸 볼 때 그래요. ‘한 사람이 사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한가?’ 생각하면 아찔해요. 특히 저는 천천히, 오랫동안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점점 더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애착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식물에게 위로를 받을 때도 있나요? 

위로를 받기 보다는 응원을 하게 돼요. ‘제발 잘 살아남아라. 내가 한라산에 다시 올 때까지 살아있어라. 더 이상 개체수가 줄지 말아라’ 같은 기도를 하죠. 안타까운 경험이 많거든요. 한번은 제주도 어느 계곡에 멸종위기종인 식물을 보러 찾아간 적이 있어요. 먼저 도착한 다른 식물학자들이 어제 그 꽃이 핀 걸 분명히 봤다고 했는데, GPS 주소를 받아서 똑같은 장소에 갔더니 하루 사이에 구덩이가 파여 있더라고요. 이미 밀수꾼들이 와서 가져간 거죠. 난초 종류는 밀수가 정말 많아요. 멸종위기종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죠. 식물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춘란’ ‘보춘화’ 같은 종은 줄무늬나 반점이 있는 등 약간의 변이만 있어도 비싼 값에 잘 팔리거든요. 

식물을 잘 안 키우신다고 들었어요. 식물학자가 식물을 안 키운다는 게 의외였는데, 이해가 가네요.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도리어 소유하지 못하는 거죠. 

어제도 친구가 집들이 선물로 화분을 사가지고 와서 한바탕 뭐라고 했어요(웃음). 인테리어용으로 인기가 높은 식물들은 대부분 외래종이거든요. 우리나라 식물이 아닌데 여기까지 떠나와 있는 걸 보는 것도 슬프고, 좁은 화분에 갇혀 있는 걸 보는 것도 슬프고, 제가 그 식물을 소유함으로 인해 거기에 얽매이는 것도 슬퍼요. 여러모로 좋은 방향이 아닌 것 같아서 웬만하면 안 키우려고 하죠. 

“독초들만 모아서 정원을 만들어야겠다(159쪽)”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요. 책을 읽으며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어요. 

사실 제가 좀 우울한 성향의 사람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인생을 어떻게 마칠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해요. 추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삶을 정리하는 건 너무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 고민 끝에 나온 생각이었어요. 독초를 잘 키운 다음, 그걸로 만든 독약을 먹고 생을 마감해야겠다고요(웃음).



소설 같은 결말이네요.

나는 식물학자니까 그에 걸맞는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식물 채집을 하느라 오지를 많이 다니다 보니까 인생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어떻게 하면 식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여기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고민 끝에 깨달은 건 ‘잘 사라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거였어요. 우리도 자연이니까, 언젠가는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자연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죠.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침대 곁에 두고 잠들기 전에 한 꼭지씩 읽고 주무셨으면 해요. 그래서 숲에 가는 꿈을 꾸신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신혜우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스미소니언 환경연구센터의 연구원을 거쳐 현재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식물형태학적 분류 및 계통 진화와 같은 전통적인 연구부터 식물 DNA바코딩과 식물 게놈 연구와 같은 최신 연구들을 수행 중이며, 식물생태학 분야로 연구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는 신진연구자다.
영국왕립원예협회의 식물세밀화 국제전시회에서 2013, 2014, 2018년 참여하여 모두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고전시상 트로피와 심사위원스페셜 트로피를 받았다. 영국왕립원예협회 역사상 참여하여 연속 모두 3번의 금메달과 트로피를 수상한 유일한 작가다. 영국왕립원예협회,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교,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등에 다수의 그림이 컬렉션으로 선정된 바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식물학자의 노트
신혜우 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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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 “나답게 살고 싶어서 타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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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처지를 생각하는 일은 왜 필요할까. 작가 한승혜는 말한다. 값싼 동정이나 이타심 때문이 아닌 나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차별이나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한 명의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을 같은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마주할 때마다 당신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글을 써왔다는 한승혜 작가. 자신을 설명하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한 그의 글쓰기는 점점 타인에게 가닿았다. 『다정한 무관심』은 한승혜 작가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칼럼집이자 집단이나 무리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오롯한 개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살피며 개인주의를 연습해 온 날들의 기록이다. 

서로에게 일정한 거리를 지키며 간섭과 참견을 하지 않는, 나와 다른 타인의 개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적당한 무관심의 사회. 그러면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을 잊지 않는, 서로에게 다정한 사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다정한 무관심’이 아닐까. (18쪽)



내가 왜 글을 썼는지 생각해 봤어요 

<서울신문>에 연재한 칼럼과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묶은 책이에요. 어떻게 나왔나요?

그간 공들여 써 온 글을 책으로 묶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주제로 묶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내가 무엇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왜 글을 남기고 싶은지를요. 생각해 보니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나의 욕망과 글쓰기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요. 

제목이 책에서 말하는 ‘개인주의’를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다정한 무관심’이었나요?  

처음에는 ‘개인주의 연습’이었어요. 글 쓰는 일이 개인주의를 연습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출판사 대표님이 『이방인』에 나오는 말인 ‘다정한 무관심’을 제안하셨고, 그걸로 결정했죠. 제목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다들 비슷한 욕구를 가지고 있구나 싶었어요.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태도가 저자 소개에서도 드러났어요. ‘부엌에서 쓴다’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는데요. 전작의 저자 소개에도 이 문장이 있더라고요. 강조하는 것 같았는데 이유가 있나요? 

일단 실제로 부엌에서 쓰고요. (웃음) 저의 정체성 중 하나가 주부인데 우리 사회에 주부를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있잖아요. 예전에 누가 주부를 낮춰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빴는데요. 은연중에 저도 주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나는 주부가 아니라 작가’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요. 왠지 모르게 감추고 싶은 ‘주부’라는 정체성을 내가 먼저 인정해야 다른 사람도 나를 인정할 수 있겠다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주부라는 정체성과 가장 관련 있는 공간인 부엌을 강조한 것 같아요.  

실제로 <서울신문> 칼럼에 본인을 ‘주부’라고 소개하셨죠.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저는 주부입니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요. 

‘주부’라는 타이틀을 쓰면서 놀란 게 있는데요. 글은 좋은데 저자를 왜 주부로 소개하냐면서 ‘신문사에서 무시하는 건가?’라고 반응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주부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어떤지 드러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주부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쓰고, 주부라는 타이틀에 관해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저는 주부입니다’라는 글을 썼고요. 

집단이나 무리에 기대서 나를 소개하면 편하긴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집단과 무리에 목을 매는 것이기도 할 테고요. 그런 욕망이 들 때는 없나요?

당연히 있죠. 그런데 그렇게 나를 소개하는 방식이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자제하려고 해요. ‘저 작가예요’ 또는 ‘저 누구랑 친해요’ 이런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기댈 만한 게 별로 없기도 하고요. (웃음) 

서문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죠. 공감했어요.

이기주의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거라면 개인주의는 내가 개인으로 존중 받으려면 다른 사람도 개인으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는 것 같아요. 작년 여름에 신천지 사태가 일어났을 때 사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코로나가 순식간에 퍼지면서 학교나 음식점이 문을 닫고 사회가 마비됐잖아요. 물론 그들의 잘못이 크지만, 내부를 잘 들여다보면 대부분 외롭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이었어요. 경제적, 정서적으로 취약하니까 신천지 같은 종교에 기대게 된 거죠.

코로나 팬데믹이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고 드러냈다는 지적이 있었죠. 

물론 그렇다고 이들에게 잘못이 없고, 무조건 따뜻한 시선을 보내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분들이 고립된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바이러스가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무리해서 만나지 않았겠죠. 그러면 바이러스가 이렇게 급속도로 퍼지지 않았을 거고, 회사나 학교가 문을 닫지 않았을 거고, 내가 이렇게 독박 육아를 하면서 고통받는 일도 없었을 텐데 싶었어요. (웃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우리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지 실감 나더라고요. 그래서 나의 어떤 것을 지키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것도 보장해줘야 하는구나 싶었고요. 



한 사람의 맥락을 살피려는 노력

‘페미니즘은 개인으로 서기 위해 여성으로서 필연적으로 거쳐 가는 통로’라고 했는데요. 페미니즘을 대하는 작가님의 태도이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로 들리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분들도 많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으로 말을 시작하는 여성들이 많았거든요. 또는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고 개인주의자야’라고 하기도 하고요. 저도 마찬가지였는데요. 페미니즘과 개인주의를 완벽히 분리할 수 있는 건가 싶어요. 여성이 여성에 대한 낙인이나 혐오에 맞서지 않으면 개인이 될 수 없거든요. 같은 맥락에서 여성이라는 성별뿐만 아니라 소수성을 가진 사람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수자 의제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요. 제가 <명예남성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에도 썼는데요. “나는 차별받은 적 없다”라고 하는 여성들이 간혹 있는데 심한 차별은 아니라 해도 선입견을 품고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러니 그런 선입견을 뛰어넘어 한 명의 개인이 되고 싶으면 소수자 이슈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명예 남성을 위한 변명’도 그렇고 최근에 페이스북에 쓰신 ‘김지영의 남편은 정말로 괜찮은 남자였을까?’를 보면서 다양한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그게 글을 잘 쓰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기보다 실제로 여러 위치에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았어요. 

의식적으로 애쓰는 건 아니고요.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특정 행동을 하기까지의 배경을 생각해 보거든요. 그 행동이 나오기까지의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맥락을요. 

그래서인지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태도가 보였어요. 김겨울 작가님이 추천사에 쓰신 ‘안정감’의 비결이 거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었고요. 

요즘 들어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 마음이 돌아오지 않으면 미움으로 바뀌는 것처럼요.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은데요. 기본적으로 적정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물론 항상 그게 잘 되는 건 아니지만요. 

일상의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사회 구조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글의 시야가 확장되는데요. 글을 쓰면서 특별히 신경 쓰거나 주의하는 게 있다면요?

소설을 많이 읽어서 어떤 사람의 맥락을 살피려고 노력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좋은 점도 있는데 가끔 제 마음대로 한 사람을 판단해 버릴 때가 있어요. 이 사람은 의미 없이 한 행동인데 과하게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일방적으로 동정한다거나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여전히 미숙하고 실수도 많이 해서 주의하려고 해요. 

이를 테면요?

책에는 실리지 않은 글인데요. 버닝썬에 관한 글을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 N번방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피해자에 대입해서 쓴 글이었는데 잘 읽었다는 반응이 많았던 반면,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왜 피해자들을 불행하고 관심 못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느냐고요. 이 사람들도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했을 수도 있는데 의미를 과하게 부여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처음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 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지 알겠더라고요.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실수를 하기 쉬운 것 같아요. 

맞아요. 소수자를 불쌍한 존재로만 그리거나 위대한 사람처럼 과하게 의미를 부여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 태도를 지양하고 비판하면서도 제 안에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책에는 그 부분을 빼고 새로 써서 실었어요. 언제든 실수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려고 하죠. 

‘칭찬의 기술’이라는 글도 좋았어요.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순위를 매기는 칭찬을 하거나, 반대로 그런 칭찬에 의해 강제로 평가 당하는 때가 많구나 싶더라고요. 

얼마 전에도 봤는데요. 페이스북을 하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 TOP3에 드는 분’, ‘내가 아는 소설가 중 제일 잘 쓰는 사람’ 이런 댓글이 종종 보여요. 그런데 만약 어떤 소설가가 ‘내가 아는 소설가 중 제일 잘 쓰는 사람’이라는 글을 보면 그 소설가도 자동으로 평가받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저도 별생각 없이 평가하는 말을 많이 했는데요. 누군가를 평가하는 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상대를 조종하는 말인 것 같아요. 이런 평가를 받으면 본능적으로 그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 사람의 마음에 들게끔 행동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칭찬할 때는 상대의 ‘고유함’에 주목하는 게 좋겠다고도 하셨죠. 

순위를 매기거나 평가하는 대신 ‘나는 이 사람이 좋다’ 내지는 ‘이 사람이 쓴 글이 좋다’라고 자신의 호감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이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요 

원래 직장 생활을 했다고요.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하게 됐나요?

회사 다닐 때는 굳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안 쓰게 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긴 했지만, 사회 생활하면서부터 쓰지 않았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고립되어서 아이들하고만 지내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거예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데 마땅치 않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된 것 같아요. 마침 SNS도 있었고요. 그런 걸 보면 결국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외롭거나 고립된 느낌이 들 때 생각하게 되고, 표현하게 되잖아요. 

처음에는 친구나 지인을 대상으로 사적으로 쓰다가 공적인 글쓰기로 전환했다고 들었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 글을 쓸 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왜 출판사들은 나한테 연락을 안 하지?’하면서요. (웃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를 드러내지 않는데 누가 나를 알아주나 싶은 거예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글을 공적으로 쓰면 사람들이 ‘네가 뭔데 이런 이슈에 말을 보태?’라면서 욕할지 모른다는 마음이요. 그런데 동시에 빨리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상반된 마음이 있는 상태로 지내다 어느 날 밤에 번뜩 각오하고 써야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 순간에 앞으로 유명해져서 칼럼을 쓰고 책도 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나를 노출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싶어서 친구 공개로 했던 서평을 전체공개로 늘렸는데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 유료 플랫폼에서 연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원해서 거절했다고 쓴 글을 봤어요. 유료 플랫폼에서 연재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었을 텐데요.  

물론 저도 다른 분들처럼 책 많이 팔고 돈 많이 벌어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데 글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쓰지 않으면 안 돼서 쓰는 거거든요. 계속 남아서 나를 따라다니는 생각이나 감정들로 인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글을 쓰는데 누군가 그 글을 읽어주면 그 사람이 저한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읽어주는 분들 덕분에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돈도 좋지만, 더 많은 분이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아요. 

독자의 어떤 반응을 볼 때 가장 좋나요?

‘내 마음 같았다’ 또는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글’이라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아요. 저도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아니까요. 내 마음 같은 책을 읽으면 반갑고 좋거든요. 그러니 내 글의 독자가 그런 기쁨을 느낀다고 하면 너무 좋죠.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고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관계가 생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서평을 쓰는 건 이전과는 다를 것 같아요. 

누군가 내 책의 서평을 써주면 나도 써야 한다는 부담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정확한 후기로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친분 때문에 억지로 쓸 수는 없더라고요. 읽어보고 정말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책만 쓰자는 생각으로 쓰고 있어요. 그리고 예전에 책에 별점을 매겨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는데 잠깐 했다가 싹 없앴거든요. 완성도는 높은데 나한테 와 닿지 않는 책도 있고, 허술하지만 어떤 면에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책도 있어서 별점 매기기 어렵더라고요. 

똑같은 이야기를 해 왔지만,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상황이나 목소리가 닿는 범위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300쪽)고 했어요. 저도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내 생각이나 취향이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신문에 칼럼을 쓰고, 책이 나오면서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나 목소리가 도달하는 범위가 달라지는 거예요. 이를테면 저는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과 거의 똑같은 상황에 있었어요. 육아 때문에 퇴사했고, 이후에 경력이 단절되면서 재취업을 못 했고요. 예전에 제가 이런 상황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불평이 많다 또는 피해 의식이 심하다, 예민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일리 있다고 하죠. 

목소리에 힘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여전히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고, 그분들도 자기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는데 예전에 제가 받았던 취급을 받아요. 그런 광경을 거듭 보면서 계속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의 힘을 갖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궁극적으로 저한테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요.  

다른 장르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나요? 

예전에 소설 쓰기 수업을 다녔어요. 지금도 가끔 소설을 쓰는데요. 에세이나 비평보다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에세이나 비평이 나를 표현하는 글이라면 소설을 쓸 때는 나의 감춰진 욕망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요. (웃음) 읽는 사람들은 허구라고 생각할 거고 허구가 맞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나도 모르던 진심이 드러나서 공개 못 하겠더라고요. 언젠가는 쓰고 싶긴 한데 아직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가 있다면요?

더 많은 사람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에세이 읽는 사람들은 많은데 소설 읽는 사람은 드문 것 같더라고요. 소수의 유명한 소설가들의 작품은 많이 나가지만, 알려지지 않는 소설 중에도 좋은 게 많은데 읽히지 않는 게 많아서 아쉬워요. 소설이 얼마나 재밌는지, 소설 읽는 기쁨을 알려주는 책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한승혜

이름이 많은 사람. 한국인, 여성, 엄마, 아내, 가사노동자, 마감노동자, 독자, 작가, 모든 것에 해당하는 동시에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사람.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 중이며, 베스트셀러 서평집인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를 썼다.
오롯이 한 사람으로서 서기 위해 개인주의를 연습하는 중이다. 주로 부엌에서 쓴다.



다정한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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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 저
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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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시인 “생활이라는 풍경을 집요하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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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혼자 시를 쓰던 시간이 있었다. 등단은 했지만 시인은 아닌 것 같았던 순간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 서윤후 시인은 “채우는 것에 몰두하며 20대를 보냈다”고 했다.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것들”로 삶이 빼곡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새로운 다짐을 한다. 그만두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그는 여러 번 “선언”이라는 단어를 말했다. 애써 그만둔 일로 노트를 채우는 건,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맹세와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선언이 오랜 결심 끝에 이루어지듯, 무언가를 그만 두는 것 또한 그에게는 큰 용기였다. 서른 세 가지 용기의 결실이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에 담겼다. 그만둠으로써 일상에 여백이 생기자 소중한 것들이 더 선명해졌다. 



나는 계속 요동치고 있다 

시집(『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과 산문집(『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이 열흘 차이로 출간되었어요. 무척 바쁘셨을 것 같아요. 

작업할 때는 힘들었지만, 책이 나오고 나니 좋아요. 책으로 여러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 받고 저도 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이번 산문집은 ‘한 권의 노트’에서 시작된 책이라고요. 

친구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허름한 수제 노트를 선물로 사왔어요. “너라면 이걸 잘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라며 노트를 건네는데 그 말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노트에 천착해 있었죠. 그러다 문득 흔히 쓰는 ‘To do list’ 말고 ‘안 해도 되는 것’ ‘그만두어야 할 것’에 대해 써볼까 싶었어요. 순수하게 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는데, 혼자 하면 흐지부지될 것 같아서 지난 산문집 약력에 이런 리스트를 쓰고 있다는 소개를 넣었죠. 그걸 보고 편집자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햇빛세입자』 출간 후 인터뷰에서도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 “올해 초부터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 목록의 이름을 번번이 되뇌는 것 만으로도 좋다”고요.

맞아요. 처음에는 큰 부담 없이 적기 시작했는데, 리스트를 채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오늘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가 내일 다시 하게 되는 일들도 있고요(웃음). 그런데 그 불안정한 목록을 보는 게 좋았어요. ‘내가 계속 요동치고 있구나, 요동치는 삶의 감각을 이 리스트로 알 수 있구나’ 싶었거든요. 

제목을 보고, 그만 둔 ‘행동’이 많을 거라 예상했는데 대부분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소진된 상태였거든요. 그 즈음 인터뷰를 하면, 기사에 늘 “지난 10년을 온전히 시인으로 살았다”는 문구가 있었어요. 덕분에 제가 20대를 시인으로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죠. ‘20대를 시인으로 산다는 건 뭘까?’ 생각해봤는데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웃음). 단순히 시만 쓴 게 아니라 내 안의 절박함과 겨뤄야 할 때도 있었고 조급해지는 나를 계속 다독여야 했으니까요. 그 과정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첫 시집을 낸 이후, 저를 소진시키기 위해 애를 썼어요. 혼자서 들끓고 에너지가 넘치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빨리 이 에너지를 소진하면 다음 스텝이 오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 시기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을 쓰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괜찮아졌나요? 어떻게 그 마음을 이겨냈을지 궁금해요. 

모든 일에는 앞면과 뒷면이 함께 있으니까요. 내가 무언가를 소진했다면, 그만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 마음으로 계속 견뎠던 것 같아요. 저는 성미가 급하고, 생산적인 삶에 대한 강박이 있어요. 그래서 무엇을 그만두거나 멈추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큰 용기였어요. 



생활이라는 풍경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리스트를 쓸 때, 가장 먼저 쓴 항목과 마지막에 쓴 항목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요. 

생활에 가까운 것들을 초반에 썼어요. ‘빈티지 옷 쇼핑하기’ ‘딸기 집착’ 같은 것들이요. 마지막으로는 ‘고독의 몸부림’처럼 추상적인 것들을 썼네요. 돌아보니 후반에 쓴 목록은 결심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을 그만 뒀고,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 거야’ 라는 자기 선언에 가까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마지막에 떠올랐죠. 

마지막에 쓴 항목이 책의 첫 꼭지가 되었네요. “고독에 몸부림치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고독이 나의 모국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12쪽)”고 했어요. 

살면서 고독과 우울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만 우울하고 싶어’ ‘그만 고독하고 싶어’라는 생각때문에 사소한 실패를 겪게 되는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고독을 살갑게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삶에서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게 된 거죠. 어쩌면 고독이 문학이라는 형태로 나에게 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고독을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이해하니까 고독이 나의 일부가 된 것 같고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책으로 방공호 쌓기’를 그만둔 것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침실에는 절대 책을 두지 않는다고요. 책과 각방을 쓰니 어떤 점이 좋던가요? 

잠을 더 잘 자게 됐어요. 언젠가 정세랑 작가가 “집에 노페이퍼존이 있고, 침실에 절대 책을 두지 않음으로써 수면의 질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거든요. 최근 이사를 하면서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침실에 종이 한 장도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꾸몄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저는 독서도 노동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공간을 분리하니, 내가 전환되는 느낌이에요. 서재와 침실에 들어갈 때의 마음가짐이 달라요. 서재에 갈 때는 마음을 다잡고, 침실에서는 읽고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시적 허용’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삶에 시적 허용을 적용하며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자기합리화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는 못마땅 했다(151쪽)”고 했죠.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겪으면서 그 생각이 명확해졌어요. ‘문학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그릇된 의식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니까요. 시인이라면 누구나 문학적인 자의식이 있을 텐데요. 이게 외부로 발현되었을 때 과대포장되거나 권위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죠.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해도 “시인이잖아. 시 쓰려면 그럴 수 있지”하고 넘어가는 게 너무 싫어요. 저는 시인이지만, 시인의 티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모를 자의식은 작품으로 보여줘야지, 이해 못 할 행동으로 나타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시인도 좀 포멀하게 살 수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썼어요(웃음).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그만두고 보니 어떤가요. 생활이나 마음가짐에 뚜렷한 변화가 있나요? 

생활의 바탕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그만두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확 달라지진 않는 것 같아요. 타고난 기질이 있으니까요. 저는 ‘권태로움’을 두려워하거든요. 애써 발버둥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이 두려울 때가 있는데, 이 목록을 쓰면서 좀 나아졌다는 걸 느껴요. 무언가를 그만 두고,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것을 하는 과정이 계속 순환하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감각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가장 좋은 점이었어요. 이 목록은 앞으로도 계속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 제 삶에 있어서도 굉장히 의미있는 책이죠. 

33가지의 ‘그만두길 잘한 것들’을 곱씹어보니 하나의 결론에 이르더라고요. 얽매이지 않고,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생활을 잘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요. 

맞아요. 저는 생활이라는 풍경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심적으로 힘들고 사는게 벅차면 집이 엉망이 돼요. 마음이 엉망인 상태에서 그 풍경을 보면 더이상 갈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늘 생활을 정돈하려고 하죠. 생활에서 내가 묻어나고, 나에게서 생활이 묻어나니까요. 이 목록을 쓰면서 일상의 풍경을 곡진히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잘 견딘 것 같아요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젊었을 땐 나를 소진시키기 위해 안간힘(31쪽)”을 썼지만, 현재는 “내 여분을 나의 모자람에 정확히 두는 일(33쪽)”이라는 걸 안다고 했어요. 여백을 채우기만 하는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텅 비웠을 때 오는 불안감은 없었나요? 

여전히 불안해요(웃음). 저는 원고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아무도 날 찾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박함이 몸에 배인 것 같아요. 청탁을 받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하겠다고 응할 때가 많아요. 저는 마감 독촉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정말 성실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독촉전화를 종종 받게 되면서 깨달았어요. 무언가를 그만두는 건,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요. 여백은 불안감을 주지만, 동시에 원동력이 되기도 해요. 불안할 때는 ‘이 여백을 채우고 싶은데,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 생산적인 기회로 만들려고 해요. 

그 절박함은 일찍 등단한 데서 비롯된 걸까요? 

연관이 많죠. 문단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고 하지만, 젊은 것과 어린 것은 다르거든요. 어리면 좀 더 지켜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일찍 등단한 친구들을 보면 좀 안쓰러워요. 기회를 갖지 못할 때,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나아갈지가 보이니까요. 저도 등단하고 2년 정도는 불러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거든요. 

문예지 청탁도요? 

네, 전혀 없었어요. ‘이게 무슨 시인이지?’ 라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 좀 힘들었죠(웃음). 그래서 입대를 했어요. 어차피 그 사이에 다 나를 잊을 테니, 시인 생활을 이대로 끝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계셨고, 다행히 기회를 얻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물리적인 나이 탓은 아닌 것 같아요. 문학은 자기탐구가 충분히 된 상태에서 작품을 쓰느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어려서 기회를 안 줬던 게 아니라, 작품에서 저의 부족함이 보였을 수 있겠죠. 그래도 그 시간을 잘 견딘 것 같아요. 저에게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견디지 못했다면 지금은 시를 쓰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것밖에 없었다”는 말이 의미있게 들려요. 시가 어떤 존재였어요? 

아마 시를 쓰지 않았어도 저는 회사에 잘 다니면서 계속 밥벌이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심적인 부분을 기댈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가 시였던 것 같아요.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면 한 가지 음식만 먹는 사람들이 있잖아요(웃음).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심적으로 힘들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을 때 그걸 먹고 나아서 맹신하게 된 경우가 많더라고요. 어린 저에게 시가 그랬던 것 같아요. 외롭고 두려울 때 시를 쓰는 게 위안이 됐어요. 글쓰기가 친구 같았죠. 요즘도 “제가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건 그만큼 괴로웠단 뜻”이라고 자주 말해요. 저는 주로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거든요. 그래서 “그땐 그것밖에 없었다”는 말은 결국 20대의 초상이 그만큼 외롭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잘 견딘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겠어요. 

‘애썼다’ 싶어요(웃음). 같은 해에 등단한 시인들이 여러 곳에서 청탁 받고 시집을 내는 걸 보기가 괴로웠거든요. 그때 주변 선배들에게서 다 때가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을 생각하며 버텼고, 버티니까 정말 기회가 왔어요. 그래서 요즘은 당시의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동료들을 보면 꼭 한 마디라도 힘이 될 말을 해주려고 노력해요.



30대의 속도를 즐기려고요 

몇 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현재의 가장 큰 화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른”이라고 답했어요.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다”고요. 지금도 그런가요?

저는 20대와 30대가 정말 다르게 느껴져요. 완전히 다른 몸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죠. 첫 번째로 육체적인 부분이 많이 달라졌어요. 20대때도 아주 건강한 건 아니었는데, 돌아보면 진짜 건강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지금은 체력이 소진될 걸 예상해서 최대한 나를 아끼려고 해요. 그러다보니 도약할 수 있는 동선이 좀 짧아지는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있죠. 20대가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는 시기였다면, 30대는 그걸 솎아내는 시기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속도감이 달라요. 저는 글을 빨리 쓰는 게 굉장한 장점이었거든요. 마감을 어긴 적 없다는 사실이 늘 저를 떳떳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글을 쓰는 속도가 점점 느려져요. 예전에는 뭘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문장이 팡팡 터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이야기를 품고 품어서 겨우 써내죠. 고민도 더 많아지고요. 

정말 공감해요(웃음). 저도 20대때 쓴 기사를 보면 생경하더라고요. 왜 그럴까요? 

내 안의 유속이 달라진 게 아닐까요? 그냥 그 유속에 맞게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20대때의 나는 이랬는데’라는 단서가 자꾸 실패를 만드는 것 같아서 30대의 속도를 즐기려고요. ‘좀 더 여유롭게, 느긋하게 해보자’ 같은 맹세를 자주 하게 돼요(웃음). 

편집자로 일하는 동시에 작품활동도 하시잖아요. 편집자와 시인, 모두 정신력이 필요한 일인데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세요? 

예전에는 퇴근하면 스타벅스로 출근해서 배고파질 때까지 글을 쓰고 집에 갔어요. 그런데 지금은 밥이 안 들어가면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웃음). 그래서 평일에는 저를 좀 놔주는 편이에요. 대신 주말에 전환을 해서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는 글쓰는 일에 매진해요. 20대 때는 회사에 다니면서 작품을 쓰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할 게 많아서 오히려 좋았는데, 30대가 되니 ‘할 게 왜이렇게 많아?’라는 뉘앙스로 바뀌었어요(웃음). 그래도 회사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균형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자가 되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나요? 

작가 혼자 오롯이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편집자 분들이 제 시와 글을 내밀하게 읽어줄 때 정말 좋았기 때문에 저도 글자 하나, 문장부호 하나까지 세세히 보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이 작가를 지구상에서 가장 지지하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지’ 싶어요. 어느 누가 이 책을 반대해도, 편집자라면 끝까지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제가 편집자 분들의 지지를 많이 받아보았기 때문에, 그 믿음이 창작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거든요. 

책 사인본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어가는 당신의 생활에게”라고 쓴 문구를 보았어요. 어떤 의미였나요? 

생활이 늘 자기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 그 순간을 얼룩으로 보느냐, 무늬로 보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것 같아요. 얼룩은 지우고 싶고, 털어버리고 싶지만 무늬는 괜찮게 느껴지죠. 제가 얼마 전에 흰색 고양이를 입양했는데요. 다리 한 쪽에만 검은 털이 조그맣게 있어요. 그걸 보고 정말 예쁜 무늬라고 생각했어요. 오로지 그 아이만 가질 수 있는 무늬요. 먹고 사는 게 다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시행착오, 기쁨, 노력 같은 과정을 통해 각자의 무늬가 생겼을 거예요. 우리 모두가 그 무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삶이 나쁘지도,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은 상태일 때 이 책을 읽으며 작은 파동을 느끼셨으면 해요. 그만두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쓰면서 제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던 것 처럼요.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에게 시가 그렇거든요. 어떤 시든 읽고 나면 아주 조금씩은 달라진 저를 발견할 수 있어요.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생활의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서윤후

1990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9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과 『휴가 저택』, 『소소소(小小小)』,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그리고 여행 산문집 『방과 후 지구』, 『햇빛세입자』, 만화 시편 『구체적 소년』 등을 펴냈다.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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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규 “등산과 독서는 닮은 구석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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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한마디 칭찬에서 시작되었다. “아이고 마, 어린데도 잘 걷는데이”라는 어른들의 말은 소년을 산으로 이끌었다. 부모님을 따라간 첫 산행 이후, 슈퍼마켓에 라면 사러 가는 복장으로 틈날 때마다 산에 올랐다. 군대, 취업, 결혼이라는 인생의 관문을 통과하며 불안할 때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산으로 향했다. ‘중년의 취미’로 알려진 등산을 즐기던 소년은 자라 중년을 목전에 둔 어른이 되었고, 산에 갈 수 있는 날을 꼽아보며 직장생활과 육아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밥보다 등산』은 예스24에서 인문 MD로 일하는 손민규 저자가 산과 함께해온 지난날을 기록한 등산 에세이다. 자신을 평범한 산객이라 소개함으로써 어려운 등산을 하는 전문 산악인에 대한 존경심을 에둘러 표현하는 그는 인생의 고비마다 산이 좋은 처방약이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초여름 낮, ‘웃기지 않은 이야기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철학을 가진 손민규 저자를 만나 웃기는 산 이야기를 나눴다.  

합격 발표가 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견디는 것이었다.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였다. 걸으면 괜찮아졌다. 그 길이 산길이면 더 좋았다. 산길은 험하니, 안 넘어지고 안 다치기 위해서는 좀 더 걸음에 집중해야 했다. 산에서는 잡념이 내 몸을 갉아먹을 틈이 없었다. (133쪽)



등산하는 젊은 사람, 지금은 많아졌지만 

서점 직원에서 작가가 됐어요. 책 내자는 제안 받고 어땠나요? 

많이 망설였어요. 저 대신 제가 구독하는 등산 관련 인플루언서를 저자로 추천하려고 했죠. 그런데 대표님이 “꼭 네가 써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유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책을 내려면 일단 700매를 써야 하니까 그나마 제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사진이 없는 등산 에세이에요. 등산 가면 사진을 많이 찍기 마련인데 독자에게 보여줄 수 없어서 아쉽진 않았나요?

전혀요. 오히려 사진 없는 등산 에세이를 만들자고 해서 반가웠어요. 제가 찍은 사진 보면 달력 사진 같거든요. 풍경 위주인 아재스러운 느낌의 사진이요. 산 사진이 실린 책을 보면 사회과 부도 같아서 예쁘지 않더라고요. 

등산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분이 부모님이라고요. 출간 소식을 들은 부모님 반응은 어떤가요?

아버지가 엄청나게 좋아하세요. 부산 본가에 계시면서 친구분들에게 소개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친구분들 후기를 들려주시는데 들어보면 제 친구들 후기와 아버지나 아버지 친구분들 후기가 달라요. 

후기가 다르다니 신기하네요. 어떻게 다른가요? 

친구들은 ‘재밌게 읽었다’ 또는 ‘너 웃기려고 뻥을 많이 쳤구나’ 이런 반응인데 아버지 친구분들은 진지하시더라고요. 군대에서 맞은 경험이나 취업 안 돼서 고생한 이야기, 결혼하고 도시에 자리 잡으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읽고 네가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까지 왔는지 알겠다는 반응이었어요. 대부분 한국 전쟁 직후에 태어나신 분들이라 저보다 더 많이 고생한 분들이잖아요. 그런데도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던 자식 세대에게도 나름의 고충과 고민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반응이 다른 게 재밌네요. 

어쩌면 지인이니까 혹평 못 했을 수도 있어요. 실제로는 ‘뭐 이런 걸 에세이로 냈어?’ 했을지도 모르죠. (웃음) 아버지 세대분들은 비교적 산을 자주 타셨잖아요. 그래서 ‘너의 산행 경험이 많진 않지만 어떻게 다녔는지 알겠다’라는 태도로 읽어 주신 것 같아요. 

‘등산’보다 ‘산행’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했어요. 두 개를 구분함으로써 무언가를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는데요. 

책 내기 전부터 등산이라는 용어를 안 좋아했어요. 산행은 올라갔다 내려오는 건데 등산이라는 말은 하산을 포함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등산한다고 하기 부끄럽기도 하고요. 제가 요즘 산에 자주 못 가기도 하고, 『서재의 등산가』라는 책에서 저자가 이런 말을 하거든요. 알파인(alpine)과 투어리즘의 경계가 사라지는 게 슬프다고요. 그런 걸 보면 선배 등산가나 어려운 도전을 하는 분들의 눈치를 보게 돼요. 등산이라고 표현해도 되나 싶어서요. 물론 그분들이 이 책을 읽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요. (웃음) 

등산하는 분들이 정상석 옆에서 인증 사진 많이 찍으시잖아요. 있으신가요?

아재 느낌 나서 그런 사진 싫어해요. 그런데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곳을 가면 안 찍을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여길 올랐구나 싶은 마음에 찍게 돼요.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요. 어떨 때 변화를 체감하나요?

(책을 꺼내며) 이게 제가 산을 다니면서 참고했던 책인데 91년, 93년에 발행된 거예요. 이때만 해도 젊은 사람이 산에 가면 장하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만큼 등산하는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많아졌죠. ‘BAC 100’이라고 블랙야크에서 선정한 100대 명산이 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이 ‘BAC 100’ 인증하는 젊은 사람이 정말 많아요. 코로나 이후로 더 많아졌고요. 코로나 때문에 활동을 못 하게 된 다른 동호회 사람들이 등산으로 많이 이동한 것 같아요. 

이렇게 표현하면 싫어하실지 모르겠지만 아재 농담이 많더라고요. 읽으면서 몇 번 피식거리다가 ‘수락했으니 수락산에서 만날 수밖에(117쪽)’라는 문장에서 결국 터졌어요. (웃음) 

더 많았는데 다 잘리고 남은 게 그 정도예요. 사실 그 문장도 더 길었어요. 말장난하기 좋은 산이 몇 개 있거든요. 그런 산 이름으로 ‘우리가 명성이 높았다면 명성산에서 만났고, 유명했다면 유명산에서 만났을 텐데 그냥 일반인이라 수락해서 수락산에서 만났다’고 썼는데 편집자님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해서 앞부분 삭제하고 수락산만 살아남았죠. (웃음) 저는 웃기지 않은 글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세상을 구원하지 못했겠지만, 구원하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아재 개그 많이 하는 편이긴 한데 나이가 들수록 타율이 줄어서 요즘은 잘 안 해요. 

취업전략으로 어학연수 대신 등산을 선택했다고요. 실제로 등산 이력이 입사할 때 도움이 됐나요?

딱히 도움 된 것 같진 않고요. (웃음) 자기소개서에 쓰긴 했어요. 자기소개서 단골 질문 있잖아요. ‘내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이나 ‘가장 큰 실패’ 같은 거요. 남자들은 거의 군대 이야기 쓰는데 저는 지리산 종주 이야기를 썼죠. 지금은 젊은 사람들도 등산 많이 하는데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등산하는 사람 별로 없었거든요. 

자소서에 쓰셨으면 전혀 쓸모없었던 건 아니네요.

그렇죠. 군대에서 선임한테 맞고 신고한 이야기를 쓸 수는 없는데 초코파이 한 박스로 버틴 지리산 종주 이야기는 재밌잖아요. 취미도 마찬가지예요. 등산이 취미라고 하면 면접관들이 ‘어디 가봤냐’라고 물으면서 좋아해요. 물론 요즘은 워낙 등산을 많이 해서 차별화하기 힘들지만요. 

등산이 주는 운동 효과가 생각보다 적다고요. 의외였어요. 

어릴 때 부산 영도에 살았는데 바로 뒤에 산이 있어서 아버지랑 주 2~3회 정도 갔어요. 그 정도 가면 운동이 돼요. 그런데 요즘처럼 두세 달에 한 번 가면 운동 효과가 전혀 없어요. 오히려 갈 때마다 힘들고 다리에 쥐 나요. 오히려 산에 가기 위해 운동해야 하는 상황이죠. 

독서와 등산이 궤를 같이한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예를 들어 ‘BAC 100’이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지표가 된다면 책에는 베스트 셀러가 있잖아요. 등산하는 사람들은 ‘BAC 100’이나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같은 리스트를 보고 산을 고르고, 책 읽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을 참고하고요. 그리고 대개 한 번 갔던 산은 잘 안 가요. 지리산이나 설악산같이 유명한 산을 제외하면요. 독서도 그렇잖아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책 아니면 한 번 이상 안 보게 되잖아요. 

그러고 보니 비슷한 점이 많네요. 

자기 취향을 잘 알아야 책도 잘 고를 수 있는 것처럼, 등산도 마찬가지거든요. 자주 가봐야 나한테 맞는 산행 스타일을 찾고, 좋아하는 산도 알 수 있어요. 요즘 SNS에서 ‘BAC 100’ 최단기간 인증하는 분들이 많은데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그렇게 산행하면 과연 산에서 무얼 보고 느낄 수 있을까 싶어요. ‘BAC 100’같은 기업의 마케팅 활동이 우리나라의 좋은 산을 알리고 등산 인구를 늘리는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산에 관한 양극화를 만드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고요. 

산에 관한 양극화요? 

어떤 목록을 짠다는 건 그 목록에 들어가지 않은 것들을 소외시키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블랙야크 명산 목록에 포함된 산은 유명해지거든요. 주말에 가면 사람들이 정상석 찍으려고 줄 서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산은 사람들이 안 가요. 그만큼 관리도 안 되고요.  

그렇겠네요. 산도 관심을 받아야 관리가 잘 되는 거군요. 

물론 그만큼 훼손되기 쉽기도 한데요. 확실히 사람들이 많이 가는 산 정상에 가면 조망이 좋아요. 전망대도 있고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산에 가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다 나무로 덮여있고요. 



산의 두 가지 모습을 보려고 노력해요

문답 중에 ‘정상까지 얼마나 가면 되냐?’는 질문에 무조건 “조금만 더 가면 돼요”라고 답하면 된다는 부분이 재밌었어요. 

요즘은 대부분 어플을 키고 등산하니까 얼마나 남았는지 다 알아서 잘 안 물어봐요. 그런데 옛날에는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죠. 마치 전교 1등이 “아, 나 어제 공부 안 했어”라고 말하는 거랑 똑 같은 거예요. 뻔한 거짓말이죠. 시간에 따라 늦게 올라오는 분들한테는 “지금 해질 것 같으니까 내려가라”고 하기도 해요.

아내 분을 배우자라고 부르는 것도 눈에 띄었어요. 흔한 호명은 아닌 것 같아서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는 대학을 다녀서 페미니즘이나 노동 이슈를 일찍 접했어요. 2003년 무렵이었는데 그때부터 선배들이 성차별적 용어를 쓰지 말자고 했죠. 그중 하나가 아내였거든요. 아내라는 말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지만, 안과 밖을 이야기할 때 ‘안’의 의미로 쓰이면 위계적이잖아요. 남자한테는 쓸 수 없는 용어고요. 그래서 남자, 여자 모두에게 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배우자’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쓰기 시작했어요. 조금 딱딱하긴 하죠. 이혼 소송할 때 쓰는 법률 용어 같기도 하고요. (웃음) 

그러네요. 남녀 모두에게 쓸 수 있는 몇 없는 표현이 배우자인 것 같네요. 

서유미 작가님과 강태식 작가님은 ‘옆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시더라고요. 좋은 표현이라 생각해서 따라 써볼까 했는데 조금 간지럽기도 하고 안 되겠더라고요. 저희는 옆에 잘 안 있거든요. (웃음) 서로 바빠요. 

등산 관련 문답도 유용했어요. 연애를 목적으로 등산동호회에 가입하는 걸 추천하지 않는다고요. 

저도 동호회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지난 10년간 제가 속한 등산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면 성사율이 처참해요. 일단 대체로 동호회는 성비가 안 맞아요. 여성들이 훨씬 많은데요. 여성들은 가볍게 나갔다가 잘 안 맞으면 다시 안 나가는데 남성들은 동호회 활동 자체를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관리를 잘하는 분들이 더러 있지만, 대체로 등산하면 땀 범벅이 되거든요. 등산복도 안 예쁘고요. 한 마디로 등산은 외모를 돋보이게 할 수 없는 활동이에요. 그 상태에서 우호의 감정이 생기기 힘들죠. 

블로그에 산행 후기를 올릴 때 아래에서 바라본 모습하고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을 꼭 넣는다고 했어요. 이유가 있나요?  

사회학자들이 ‘나’에는 ‘I’와 ‘ME’가 있다고 하잖아요. 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바라봤을 때의 산과 정상에 갔을 때의 산이 있는데 그 둘이 합쳐질 때 종합적으로 산이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서면 아래를 볼 수 있지만, 지리산은 못 보는 거잖아요. 그래서 두 가지 모습을 꼭 보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보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는 느낌이라서요. 



등산 이야기 쓰고 싶어지는 책이 되었으면 

책 이야기도 많아요. 그중에서도 출판사 ‘책 밥상’의 책이 자주 등장하던데 의도한 건가요?

네 의도했고요. (웃음) 힙합 하는 사람들 보면 몇몇 사람들끼리 모여서 크루 만들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가수인데 B, C랑 같은 소속사면 내 앨범에 한 곡 넣어주고, 몰려다니면서 같이 공연도 하고요. 출판사마다 지향하는 바가 있고, 거기에 맞는 저자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취향이나 가치가 잘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홍보해 주고, 인용도 하고, 같이 북 콘서트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언젠가는 산에 가기 힘들어질 때가 올 텐데요.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산에 갈 수 있다면, 누구와 어느 산을 가고 싶나요?

책에서 소개한 두타산을 다시 가보고 싶어요. 그때 같이 갔던 친구랑요. 특별한 산행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 많이 읽은 관동별곡 같은 산이었어요. 절경이 이어졌고, 8시간 정도 걸리는 긴 코스였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친구랑 나체로 계곡에서 놀았거든요. 태초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아주 어릴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때의 경험이 진하게 남아 있어요. 물론 그 친구도 저도 서로 바빠서 다시 가기 쉽지 않겠지만요. 

자신을 산에 비유한다면요 ?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영도 봉래산이겠죠. 태어나서 자란 곳이고, 가장 많이 간 산이니까요. 제가 봉래산을 200회가량 갔다고 썼는데요. 70회는 어릴 때 갔을 거예요. 그리고 봉래산 산신으로 알려진 봉래산 할매가 산신이지만,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거든요. 저도 그래요. 

아, 본인이 인간적이라는 말인가요? (웃음)

네. 뒤끝이 길고 자주 속상해하거든요. 그리고 봉래산이 아주 작거든요. 계곡도 없고요. 한 마디로 볼품이 없는데 제 인격도 그래요. 딱 봉래산처럼 작고 볼품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영도구에서 싫어할 수도 있겠네요. (웃음)

‘누군가에게 쾌감을 주는 산서가 되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이어서 ‘그런데 잘 안 된 것 같다’고 썼어요. 이게 마지막 문장이고요. 왜 잘 안 된 것 같다고 생각하신 거죠?

저자라면 본인이 쓴 책이 독자들에게 감동이나 의미를 주기를 바라잖아요. 그런데 그런 책을 만들기는 쉽지 않고요. 물론 몇 명은 좋아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스쳐 가겠죠. 이 책이 ‘밥보다 OO’시리즈인데 밥이 몸에 꼭 필요하지만, 먹고 2~3일 지나면 소화돼서 몸 밖으로 나가잖아요. 이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주 약간의 재미가 있을 수 있지만, 세상을 구원한다거나 독자가 감동한다거나 이런 건 잘 안 된 것 같아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기를 바라세요?

등산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자기 등산 이야기도 쓰고 싶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저도 산에 갈 수 없던 시기에 등산 에세이나 히말라야 알파인하셨던 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대리만족했거든요. 재밌더라고요. 마치 제가 산에 따라가는 것 같고, 운동하는 느낌도 들고요. 이 책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손민규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배웠다. 책에서 많은 걸 얻었고, 틈틈이 산을 오르며 위안을 받았다. 지금은 예스24 서점에서 인문 MD로 일하고 있다. 책을 좋아하나, 책보다 헤비메탈을, 헤비메탈보다는 산을 조금 더 좋아한다. 살아온 동안, 가장 좋아한 산에 대한 이야기로 첫 책을 내게 되었다. 이 책이 잘 되어서 『밥보다 등산』 2탄을 내는 꿈이 생겼다.



밥보다 등산
밥보다 등산
손민규 저
책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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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커버 스토리] 다시 센 소설로 돌아온 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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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정유정이 돌아왔다. 욕망 3부작의 첫 번째 책인 『완전한 행복』을 가지고. 『7년의 밤』『28』『종의 기원』에 매료됐던 독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 될 만큼 이번 소설의 서스펜스는 강렬하다. 주인공 유나에게 조종당하고 이용당하는 인물들을 보며 가슴이 조여오는 긴장감을 느낄 수도 있고, 유나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살짝 찔릴 수도 있다. 작가 자신이 ‘읽을 만한 소설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정유정 작가를 만났다. 요즘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다는 작가의 몸은 탄탄하고 웃음소리는 시원했다. 2, 3년에 한 번씩 마치 선물처럼 세상에 나오는 그의 작품들처럼.



주인공이 나르시시스트인 이유는 

주인공 유나가 나르시시스트예요. 

평소 성격 장애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나르시시스트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살에서 세 살 사이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배우는 시기에 그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경우 생기는 결함이에요. ‘DSM-5’라고, 미국정신의학협회가 발행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서적에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있어요. 이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바로 나르시시스트로 불리는 거예요. ‘DSM-5’는 성격 장애를 A군, B군, C군, 기타로 분류하는데 이 중에서 B군에 속하는 성격장애가 경계선 성격장애, 반사회적 성격장애, 자기애성 성격장애, 연극성 성격장애예요. 유독 타인에게 피해를 많이 끼치는 장애이고요.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셨는데, 2019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떠올랐어요. 

원래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준비하던 차에 그 사건을 접하고 모티프를 얻은 건 맞아요. 그는 무엇을 원해서 사람들을 없앴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사이코패스 쪽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결혼 생활이 가능했고, 타인과의 사랑도 가능했거든요. 프로파일러 배상훈 선생님도 찾아뵈었는데 그렇다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악성 나르시시스트였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목이 『완전한 행복』이에요. 나르시시스트가 완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뜻인가요? 

나르시시스트들이 추구하는 게 자기 자신의 행복이에요. 이번 소설은 주인공 유나가 자신의 완벽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야기가 한 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인생에서 완벽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완전한 행복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돼요. 행복이라는 건, 불행과 고통도 내 삶이라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저는 고통스러운 청춘기를 지났고 또 부끄러운 청춘기도 있었어요. 그걸 견디면서 지나온 모든 것이 제 삶이에요. 지금에서야 드디어 이 모든 걸 겪은 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겠다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인공 유나는 그런 모습을 못 받아들이는 거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가능성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거죠. 

주인공 유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습니다. 딸 지유, 여동생 재인, 남편의 시선에서 서술되면서 점차 유나라는 사람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느낌이에요. 

나르시시스트로 인해 고통받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좀 더 조명하고, 내가 타인의 행복에 책임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 방식을 취했어요. 작가로서 새로운 소설을 낼 때마다 미션을 부여하는데 이번에는 그게 저의 미션이었어요. 주인공 입에 지퍼를 채우고 주변 사람들 이야기로 주인공을 만들어내는 건 어떨까?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어려웠어요. 주인공이 직접 말하는 것 이상으로 존재감을 부각시켜야 하니까요. 『종의 기원』 은 세 번 다시 썼는데, 이번 소설은 쓰다가 중간에 이야기를 뒤집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점 때문에 힘들었어요.

다른 사람을 통해 그려지니까 유나가 더 무섭게 느껴지고 읽는 내내 긴장감이 있었어요. 

다행이에요.(웃음)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이 숨어서 우리를 가스라이팅하고 착취하고 조종하는 것이 두렵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이런 경우 있잖아요. 친구가 “나 잠깐 화장실 갈 건데 가방 좀 들어줄래?”해서 들어줬더니 어느 순간 내가 친구의 시녀가 되어 짐을 다 들고 따라가는 경우. 저는 그런 경험이 굉장히 많아요. ‘나,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럴 때가 많았거든요. 

언제 그러셨는데요? 

어릴 때도 그랬고, 처음엔 나르시시스트인 줄 몰랐는데 관계에서 벗어난 후 ‘그런 관계였구나, 조종당했구나’라는 걸 알게 된 인간관계도 있었어요. 

엄마에게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유가 굉장히 강해요. 지유를 어떻게 그리고 싶었나요?

나르시시스트의 아이들이 보통 부모의 클론이 되거나 에코이스트라고 해서 부모의 희생물로 자라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희생자가 되는 에코이스트로 자랄 확률이 높고요. 저는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서 건강하게 크는 아이의 표본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그런데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굉장히 강한 아이로 그렸어요. 기어코 엄마를 이겨내잖아요. 이 아이는 평생 지배당하지 않을 거예요. 그 조력자로 이모 재인이 등장해요. 옆에서 엄마가 해줄 말을 다 하죠. 삼촌이 아니라 이모로 설정한 건, 엄마 대신 강한 아이로 자랄 수 있게 서포트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예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신을 방어할 나르시시스트적인 부분이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 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버려야죠. 내가 인간들 사이에서 특별하게 행동해도 되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또 나에게 오는 고통, 불행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면 다른 방어적인 것을 가져오게 돼요. 예를 들어 내가 자꾸 시험에 떨어지는 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정당하지 않은 일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품는 거죠. 사실은 그게 아닌데 그렇게 남 탓을 하는 일들이요. 그런 것들이 자기애성 결함을 만드는 거예요. 나 자신을 똑바로 봐야 건강한 자기애와 자존감이 생기는데, 자기와 전혀 다른 허상을 만들고 저 모습이 나라고 믿고, 실제 자신과의 괴리감은 부정하고 외면해요. 그런데 이걸 고치기 힘들다고 해요. 유아기 때 고착되기 때문에, 약을 먹거나 상담을 해도 엄청 어렵다고 해요. 

유아기 때 어떤 일이 극성 나르시시스트를 만드는 건가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자아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해요. 아기는 자기라는 걸 인식 못 해요. 엄마도 나이고, 나도 나고, 한동안 한 덩어리로 혼동 상태인 거예요. 세 살 정도 되면 더 큰 혼란이 와요. 보호자가 내 맘대로 안 해주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떼쓰고 뒹굴고 그러는데 보호자가 오냐, 오냐 하면 거기에서 경계선이 생기질 않는 거예요. ‘나는 엄마이고 너는 애기야’처럼 타인과의 경계 짓기를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자기애성 결함이 만들어진대요. 동시에 자기애의 가장 핵심에 있는 것이 수치심이에요. 내가 부끄러운 일을 당할까 봐 철저하게 방어하는 거거든 요. 마음속 깊이 엄청난 수치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뻔뻔한 얼굴을 드러내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는 적절한 좌절이 필요하다고 해요. 가령 아이와 시장에 갔는데 필요 없는 걸 사달라고 해요. 엄마가 안 된다고 다음에 사자고 했을 때, 거기서 떼를 쓰고 뒤집어져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때리거나 화를 내면 아이에게 좌절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기는 거잖아요. 수치심은 주지 않고 적절한 좌절감을 줘야 한다고 해요. 내가 떼를 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구나. 이 점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해요.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한다고 타인이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는 거죠. 



정유정 작가가 히말라야에 간 진짜 이유 

작품을 쓸 때 철저하게 필기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셀프 강의하는 것으로 유명하세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공부법인데,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셨을 것 같아요. 

못했어요.(웃음) 지금 하는 것처럼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해요. 쓰면서 이해해요. 그러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혼잣말처럼 서서 강의를 해요. 이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된 거야.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거죠. 논리가 안 맞으면 이야기의 신뢰가 떨어지거든요. 그런 식으로 해야 기억이 오래가더라고요. 

작가님의 작품 목록을 보면 굉장히 탄탄한 느낌을 받습니다. 슬럼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슬럼프 있었어요. 『28』을 쓰고 나서 엄청 심했어요. 과정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공식적으로 처음 하는 얘기인데, 2012년 2월이었어요. 『7년의 밤』 끝내고 『28』을 쓰려고 준비를 했는데 유방암이라는 거예요. 당장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수술하고 약물 치료 받고 몇 년 동안 약도 먹어야 한대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암이고 나발이고 나는 이걸 써야 하는데. 『28』을 어느 신문에 연재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엎었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서 쓰고 나올까, 별생각을 다 했어요. 남편이 설득하더라고요. 책 한 권 쓰고 그만할 거냐, 치료받고 어디 들어가서 너 혼자 있는 공간에서 책을 써라. 남편 말대로 수술을 했어요. 그리고 방사선 치료 38회차. 가슴이 새까맣게 탔어요. 2 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주사를 맞았고요. 방사선 치료 끝나자마자 지리산 암자에 들어가서 『28』을 쓰기 시작했어요. 수술하고, 방사선 치료 끝나고 올라왔기 때문에 날마다 지리산 올레길을 걸었어요. 몸을 추스리기 위해서요. 그러면서 『28』을 썼죠. 그래서 저한테는 『28』이 아픈 손가락 같은 소설이에요. 『28』은 정말 밑바닥까지 소진하면서 쓴 거예요. 투병하면서 썼으니까요. 그래서 다 쓰고 슬럼프에 빠져버린 거예요. 30매짜리 원고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거죠. 그래서 히말라야를 갔어요. 

히말라야를 그런 이유로 가셨군요. 

그동안 아무에게도 이런 얘기를 안 했어요. 암팔이 한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요. 제가 그런데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거든요.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얘기해도 될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씩 주사를 맞아야 하니까 주사 맞은 다음 날 김혜나 작가와 함께 히말라야로 떠났어요. 다음 달 주사 맞는 날 돌아올 수 있도록 하고요. 그해 겨울에는 2년 맞는 주사가 끝나서, 50일에 걸쳐 산 티아고를 또 갔어요. 산티아고 다녀와서 슬럼프를 깨고 쓴 소설 이 『종의 기원』이에요. 그 뒤로는 다행히 슬럼프는 없어요. 그때 히말라야와 산티아고 다녀오면서 인생에서 얻을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얻은 것 같아요. 건강에도 아무 이상 없어요. 올해 10년 차니까 완치됐고 건강하다고 주치의가 말씀하셨어요. 뼈가 20대 같대요.(웃음) 

히말라야와 산티아고 가신 것이 슬럼프 극복에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더 듣고 싶어요. 

제가 정신이 산란하면 몸을 혹사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래서 히말라야를 간 건데 정신적인 부분이 해결이 안 된 채 돌아왔어요. 몸을 혹사해 마음의 고통은 떠나보냈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거예요. 조금 더 혹사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산티아고를 갔어요. 50일 동안 1000km를 걸었어요. 다녀오니까 그제서야 뭔가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완전한 행복』을 쓰고 나를 털어내야 하니까요. 저는 소설을 쓸 때 마치 빙의하듯 주인공처럼 살거든요. 유나처럼 사는 것이 어떻겠어요. 글을 쓸 때는 밖에도 잘 안 나가요. 이 기간에 나한테 생긴 독성을 털어내려고 김혜나 작가와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어요. 하루에 30km 걸을 때도 있고 두 코스씩 갔어요. 지금도 온몸이 삐그덕삐그덕해요. 배낭 메고 너무 많이 걸어서. 기분은 좋아요. 금방이라도 다음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스탠바이 상태예요.(웃음) 



항상 걱정이에요 

오랜 시간 등단 준비를 하셨잖아요. 계속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 자존감이 한없이 바닥 쳤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속 쓰실 수 있었나요. 

자존감이 밑바닥에 있잖아요. 그러면 누워서 생각을 해요. 그러고는 저한테 물어요. 너는 글을 쓰고 싶니, 작가가 되고 싶니?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직업에 대한 것이고,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은 자유 의지에 대한 거거든요. 내가 인생에서 뭘 원하는가. 그것을 위해 내 삶을 던질 각오가 돼 있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글쓰기를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면 나오는 답이 ‘글을 쓰고 싶다’였어요. 그러면 또 일어나서 쓰는 거죠. 다시 시작하는 거죠. 어차피 300계단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 할 때 계단 하나를 올라가지 않으면 못 가는 거예요. 네 번째 계단까지 올라가서 고꾸라졌다고 다시 안 올라가면 영원히 못 올라가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씩 올라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꾸준하게 글쓰기, 정말 어려운 거 같아요. 

운이 많이 따라줘야 하는 거 같아요. 저는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았을 때나 세계문학상을 받았을 때 운이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잘 써도 심사자의 취향에 안 맞을 수 있고 작품이 시대의 흐름과 안 맞을 수도 있고요. 이런 조건들이 맞아서 제가 당선된 거예요.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이에요. 그래서 습작생들이 저에게 물어보면 운이 따라야 한다고 말해요. 물론 자기가 준비되지 않으면 운의 등에 올라탈 순 없어요. 그래서 항상 준비는 해 놓되 운이 오기를 기다리라고 얘기하면서 가슴 아파하죠. 제가 너무 많이 떨어져 봐서요.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서 독자들이 읽을 만한 소설을 쓰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며 노력한다는 걸 밝히기도 하셨어요. 작가님은 읽을 만한 소설의 기준을 뭐라고 생각하나요? 

재미와 의미예요. 재미는 내가 이 소설을 썼을 때 얼마나 몰두했는가에 따라 느껴지는 것 같아요. 내가 주인공을 사랑하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기어코 뚫고 나갈 힘이 있다면 이 소설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야기의 주제가 확실해야 한다는 거죠. 단지 어떤 사건만을 말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건 정말 아니라고 봐요. 소설이 재미있다면 의미가 담겨야 하는 거죠. 세상 사람들이 들었을 때 그 의미가 하찮은 게 아니고 적어도 읽은 날 밤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고민하게 하는 정도의 의미는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혼한 여성이 글쓰기같이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당장 돈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남편이 집안일을 많이 했어요. 아침에 장 볼 것, 심부름할 것 등 리스트를 주면 남편이 퇴근하면서 다 했어요. 내가 맡은 유일한 집안일은 밥하고 반찬 만들기였고요. 주말엔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갔어요. 제가 집에서 글을 쓸 수 있게 하루 종일 집을 비워주려고요. 그렇게 6년 뒷바라지하는데, 왜 안 지치겠어요. 그런데 그걸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어요. 내가 글을 써야 하니까 책을 사봐야 하잖아요. 혼자 외벌이하면서도 책 사보라고 한 달에 100만 원씩 꼬박꼬박 줬어요. 세계청소년문학상 상금 5000만 원, 세계문학상 상금 1억 원을 모두 남편에게 줬고, 인세도 남편이 관리해요. 이 정도면 의리를 지킨 거죠?(웃음) 



다음 책 계획이 궁금해요. 

제 소설이 사실은 사이클을 타고 있어요. 『내 심장을 쏴라』라는 성장 소설로 등단해 『7년의 밤』『28』『종의 기원』 이렇게 악의 3 부작을 썼어요. 『진이, 지니』라는 성장 소설로 돌아와서 이제 욕망 3부작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완전한 행복』이고요. 다음 소설은 미래 디스토피아 소설인데, 소유에 대한 욕망에 대해 쓸 거 같아요. 제가 쓴 소설 중에서 가장 세계관이 크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에요. 2년 만에 쓰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가능할까요? 

그럼요. 쓰실 수 있을 거예요. 

가능하지 않을 거 같아요. 무서워요. 

이런 걱정을 하신 적 있으세요? 

항상 걱정이에요.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이걸 쓸 수 있을까, 쓰는 중간에는 내가 이걸 끝낼 수 있을까, 끝나고 나면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좋아할까, 이렇게 질척질척하고 어둡고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할까, 항상 불안하고 무서워요. 하지만 세상의 비위를 맞출 생각은 없어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이 좋아해 주길 바라는 것이지 내가 세상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쫓아다니며 쓸 생각은 없거든요. 불안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코로나블루라는 말이 있어요. 우울해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코로나 때문에 저도 좀 우울했어요. 원래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사람인데도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인류가 이렇게 망할 것 같고, 불길한 생각들을 하게 되잖아요. 운동을 많이 했어요. 하루에 두세 시간씩. 웨이트트레이닝도 많이 하고요. 육체적으로 건강해 지니까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우울하신 분들께 혹독한 운동을 권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다음 소설로 2년 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요.(웃음)



*정유정  

장편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내 심장을 쏴라』로 제 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은 주요 언론과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어 큰 화제를 모았고, 영미권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 핀란드, 중국, 일본, 브라질 등 해외 22개국에서 번역 출판되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에세이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장편소설 『진이,지니』가 있다. 



완전한 행복
완전한 행복
정유정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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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가 유행이지만, 소설가 윤고은의 매력을 4개의 알파벳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9개의 자아가 있다”고 고백하는 윤고은은 베테랑 라디오 디제이지만 빈틈이 많고, 미루기 대장이자 워커홀릭이며,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즐기면서도 일상의 지하철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관찰한다. ‘500개월이 조금 넘은 아이’처럼 즐겁게 1번부터 9번까지의 자아를 설명하다가도, 글 못 쓰는 자신을 자책하는 자아가 또 한가득 있다고 고백하는 소설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를 만난다면 조용히 지나치자. 아마 3번 자아가 신나게 일상을 기록 중일 테니까.

소설가 윤고은은 기발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현실의 틈을 새롭게 보게 하는 작가다. 소설집 『1인용 식탁』『알로하』『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장편소설 『무중력증후군』『밤의 여행자들』『해적판을 타고』가 있다. 『밤의 여행자들』은 2020년 미국, 영국에서 <The Disaster Tourist>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됐다. 『빈틈의 온기』는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지하철에서 하루를 기록합니다

라디오 디제이와 소설 쓰기를 병행하니 하루가 바쁘겠어요. 출퇴근 시간은 왕복 4시간이나 된다고요.

방송국은 일산에 있고 저희 집은 정반대에 있거든요. 주4일은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가로지르고 있어요. 그 생활을 2년 동안 한 거죠. 지금은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중심으로 하루가 돌아가요. 주말에는 소설을 쓰고요. 

18년간 소설을 써 오셨는데, 왜 이제야 에세이가 나왔나 싶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데!

수다쟁이인 걸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네요. 에세이는 원래 좋아하고 꾸준히 써오긴 했지만 책으로 묶을 생각은 못 했거든요. 그런데 라디오 일을 맡게 되고 이동 시간이 길어지면서 출근길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소설로만 독자를 만났으니까 ‘생활인 윤고은’을 보여주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에세이를 쓰는 동안에는 쑥스러운 마음도 있었죠. 제 삶을 그대로 글에 담아내야 하니까요. 막상 책을 내고 나니까 오히려 신나요. 리뷰도 열심히 찾아보고요. 소설은 독자에게 직접 다가가기가 좀 어렵거든요. 독자만의 감상이 있는데 작가가 나서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근데 에세이는 오히려 독자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애써 참을 정도예요. 댓글도 달고 싶고, 좋아요도 누르고 싶고. 검열한 사람치고는 너무 적극적인가요?(웃음)

매일 낮 12시 <윤고은의 EBS 북카페>로 청취자를 만나잖아요. 생활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가장 큰 변화는 에세이를 내게 됐다는 거예요. 라디오가 아니었으면, 제게 이런 일상의 리듬이 생기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소설 작업이 주기적인 출퇴근이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근데 라디오는 매일 청취자를 만나서 일상 이야기를 나누죠. 프로그램 이름도 ‘윤고은의 북카페’여서 정말 2시간 동안 카페 영업을 하는 기분이 들고요. 자연스럽게 사소한 일상을 누군가에게 말하게 됐고, 에세이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전까지 저는 일상의 에피소드도 소설로 가공하고 싶어 했는데, 이번엔 그대로 털어놓게 된 거죠. 

그래서인지 출근길의 지하철이 에세이의 중요한 소재예요.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편안히 잘 수 있는지 연구도 하시더라고요.(웃음) 지하철에 대해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라디오에서 ‘윤고은의 출근길’ 코너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출근길에서 지하철 안에서 떠오른 생각을 한 편의 글로 완성했는데요. 지하철은 일상적인 공간이라 편안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는 공간이니까 알고 보면 글쓰기 소재가 무궁무진해요. 지하철의 리듬이 책 읽을 때도 좋고요. 열심히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축지법을 쓴 것처럼 목적지에 도착한 경험 다들 있지 않나요?



농담에서 소설이 시작된다

‘내 안에는 9개의 자아가 있다’고 고백했어요. 기록하는 1번 자아부터 이벤트를 좋아하는 9번 자아까지 정말 다채롭던데요. ‘생활인 윤고은’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어요. 

정말 하나의 캐릭터로 설명할 수 없더라고요. 제 모습을 막연히 나열하다가 9번 자아까지 등장한 거고, 그 모두를 다 끌어안은 것이 저라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1번 자아는 좀 게으른 애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미루는 버릇이 있는데요. 마감을 미루면서 겨우 해내고 다음 마감을 또 하고 그러다 보니 남들은 저를 일 중독으로 봐요. 워커홀릭이야말로 저랑 가장 안 맞는 말인데!(웃음) 사소한 걸 실수하는 2번도 있고, 소설 소재를 기록하는 3번도 있죠. 새로운 걸 좋아하고 그때그때 전환이 빠른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낼 것 같은 작가님이 이렇게 실수투성이인 모습도 있어서 의외였어요. 치약과 의치부착재를 헷갈리고, 평소에는 단어를 헷갈리는 ‘말실수 전문’이라고요. 

저 정말 상담을 받고 싶을 정도예요.(웃음) 마침 오늘도 에피소드 하나가 있는데요. 라디오 오프닝 멘트로 ‘마오리족’이 나왔는데 제가 그걸 ‘마오리죽’으로 읽으려고 한 거예요. 다행히 티는 안 났지만 ‘와, 나 잘못 읽을 뻔했네’ 하면서 속으로 놀랐죠. 이런 실수가 정말 많아서, 이 중에서도 경쟁이 치열해요. 재밌는 것만 에세이가 되죠. 

이렇게 사소한 순간을 다 에세이에 녹여 내셨어요. “오류와 실수, 착오와 오작동이 내포한 유연성이 나를 설레게 하고 그 헛발질을 기록하게 한다”(245~246쪽)고요. 

사실 저는 일기도 안 쓰는 사람이거든요. 대신 소설 소재를 위해서 메모를 많이 해요. 오늘 하루 있었던 실수를 적기도 하고, 친구와 이야기하다가도 “앗, 나 이거 써도 돼?” 하고 일단 적어두는 거죠. 이건 소설로 쓸 수 있겠다 하는 감이 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 조각이 모여서 실제로 소설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일상을 즐겁게 하는 것 같아요.

실수가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되는 걸 보니, 작은 실수는 괜찮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누구나 자주 반복하는 실수가 있잖아요. 우리는 사랑스러운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반복할 때 그걸 있는 그대로 봐주는데, 나 자신에게 똑같이 생각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거기에 나만의 이유를 붙여주기도 하고, 기록도 해보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도 일부러 하려면 못 하는데, 타고난 재능이다 하면서요.(웃음) 저는 농담하는 게 좋아요. 그래서 소설도 자조적인 농담에서 출발할 때가 많아요. 

농담에서 출발한 소설로 어떤 게 있나요?

단편소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은 북한 아파트를 분양받는 이야기인데요. 이 소설의 출발도 농담이었어요. 머리를 감다가 며칠 전에 나눈 대화가 떠오르는 거예요. 친구들과 모여서 집 걱정을 하다가 “서울 집값이 비싸서 이제는 위로 가야 돼! 개성 e편한세상 이런 거!”라고 농담을 했거든요. ‘아, 그러면 부루마블 게임하듯이 북한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로 이어진 거죠. 

소설의 상상력이 그렇게 시작된 거였군요. 머리를 감다가.(웃음) 

제가 좋아하는 방식은 굉장히 기이한 소개팅을 시켜주듯이,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소재를 만나게 하는 거예요. 파격적인 데이트 어플 같은 거! 진지한 방식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경쾌한데 조금 씁쓸한 농담을 좋아하죠. 



‘작가의 말’을 좋아하는 소설가

팬데믹 시대에 모두들 ‘재난’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2013년에 출간된 『밤의 여행자들』이 ‘재난 여행’ 이야기잖아요. 작년에 번역되어 영미권에 소개되기도 했고요.

마침 『밤의 여행자들』 영문판 제목이 ‘재난 여행자’예요. 실제로 번역본 출간 당시 받은 질문이 이거였어요. ‘팬데믹 상황을 재난 여행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에 재난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가 나오니까요. 그 질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못하겠더라고요. 보통 재난 장소에 여행을 간다면, 내 삶이 안전하다는 전제하에 떠나는 거잖아요. 근데 현재 코로나19에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건 여행사에서도 못 팔 것 같은 상품인 거죠. 기분이 이상했어요. 2013년에는 재난 여행을 소재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시키지 않은 택배를 받듯이 재난이 모두에게 찾아온 거니까요. 

소설이 외국 독자에게 전해진 경험도 특별했을 것 같아요.

작가로서 막연한 꿈 중 하나였어요. 재밌었던 건 제 소설을 ‘페미니즘 에코 스릴러’라고 소개하더라고요. 물론 이런 요소가 없진 않지만, 저는 의식하고 쓴 게 아니거든요. 좋은 에코 스릴러에 대해서 글을 청탁 받고는 ‘아니, 난 에코 스릴러도 모르는데’ 하면서 썼죠. 지금 『밤의 여행자들』은 범죄 추리 문학에 주는 영국 골드 대거 상 최종심에 올라 있어요. 내가 쓴 작품에 이런 요소가 있었구나 하면서, 외부의 시선으로 제 문학세계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어요. 

소설 끝에 붙은 ‘작가의 말’을 쓰는 걸 좋아하신다고요. 이전 ‘작가의 말’들을 읽어봤는데, 독자를 좋아하는 소설가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니까 제 말이 들어갈 여지가 없잖아요. 근데 ‘작가의 말’에서는 조명이 저한테 오니까 특별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촛불이라도 켜두고 마치 의식처럼 그 시간을 잘 누리고 싶고요. 정신없이 이야기 한편을 겨우 마치고 출구를 찾아 나왔는데, 앉아도 되나 싶은 의자 하나가 있는 느낌. 거기 앉아서 이제 독자를 기다리는 거죠. 



이제 에세이라는 의자에 앉아서 독자를 기다리고 계시죠. 윤고은의 일상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주었으면 하나요?

이 책은 제 소설이 탄생한 뒷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생활인으로서 겪는 좌충우돌 일상이기도 해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 일상의 조각들을 마치 내 이야기처럼 공감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죠.



빈틈의 온기
빈틈의 온기
윤고은 저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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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납작하게 눌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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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명의의 통장을 만들거나 휴대폰을 개통할 수 없다. 수학여행은 물론 반나절의 체험학습을 가는 것도 어렵다. 봉사동아리 부장이지만 ‘1365 자원봉사포털’에 가입할 수 없고, 반에서 1등을 해도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건, 만 18세가 되면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연고도 없는 낯선 나라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는다. 모두 한국에 거주하는 2만여 명의 ‘미등록 이주아동’이 겪는 일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인데, 아이들은 부모가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삶의 토대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지?’ 작가 은유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이야기를 접하고 거듭 되물었다고 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노와 감동의 연료가 바닥난 것 같아서”당분간 집필 활동을 쉬겠다는 다짐은 아이들의 좌절된 삶 앞에서 뒤집어졌다. 그의 신작 『있지만 없는 아이들』에는 다섯 명의 이주아동을 비롯해 이주아동의 부모, 이주인권활동가, 이주아동을 지원하는 변호사의 인터뷰가 담겼다. 인터뷰에 참여한 아이들은 모두 같은 꿈을 말한다. 그저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고,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것. 현재는 불안하고 미래는 암담한 아이들의 소망은 너무 당연한 권리라서 눈물겹다. 



우리 사회 최밑단에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

출간 제안을 받고 어떠셨어요?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어요. 제안 메일에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기사 링크가 함께 있었는데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지? 어째서 아이들이 제도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거지?’ 싶으면서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고요. 

저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 문제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아서 책을 읽으면 적어도 한 가지씩은 알고 있는 내용을 만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읽은 어떤 책에서도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 놀랐어요. 

그래서인지 프롤로그의 첫 줄부터 인상적이었어요. “그들의 있음을 알게된 건 지난여름이다.(6쪽)”라는 문장이요. ‘있음’에 강한 방점이 찍힌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들의 있음’이란 굉장히 타자화된 말이잖아요. 특정한 상황이나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 즉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로 그렇게 썼어요.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해 무지했던 제 상태를 날 것 그대로 말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방증이겠죠. 

그렇죠. 너무 소수이기도 하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지난겨울에는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속행’ 씨가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자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잖아요. 성인 이주노동자의 상황도 이렇게 열악한데, 그들의 아이들까지는 사회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거죠.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말하기도 어렵고요. 어찌 보면 미등록 이주아동은 우리 사회 최밑단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납작하게 눌려 있기 때문에 존재조차 보이지 않는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목에서 아이들의 상황이 직관적으로 와닿아 좋았어요. 직접 지으신 건가요? 

‘있지만 없는 아이들’은 활동가들이 쓴 미등록 이주아동 관련 사례집에도 나온 문장이고, 경향신문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해 다룬 기사의 제목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가제로 정해두고 인터뷰를 진행했는데요. 아이들을 만나다 보니 ‘없는 아이들’로 제목이 끝나는 게 너무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정말 없는 아이들로 낙인을 찍는 느낌이었거든요. 여러 후보를 놓고 고민하다 처음의 제목으로 돌아갔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책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저를 포함해 국가인권위원회 담당자, 창비 편집자, 책에 등장하는 이탁건 변호사와 석원정 이주인권활동가가 한 자리에 모여 첫 미팅을 가졌고요. 그 자리에서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었어요. 그후 활동가들이 쓴 미등록 이주아동 관련 사례집을 전달받아 읽기 시작했고, 다양한 사연을 고려해 인터뷰할 만한 후보를 추렸어요. 10여 명의 후보들을 두고 어떤 인물이 좋을지 편집자, 활동가 선생님과 같이 의논을 했고요. 상당한 공동작업이었어요.


 

아이들만큼은 평등하게 자라야 한다 

미등록 이주아동을 직접 만나보니 어땠나요? 

책에 나온 아이들은 모두 자기 삶에 대해 설명을 많이 해본 경험이 있었어요. 언론 인터뷰나 방송 출연을 한 적이 있고,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깊이 한 친구들이라 때로는 인권 강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죠(웃음). 자기 삶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불합리한 사회 모순을 직시한 자의 날카로움이 있더라고요. 게다가 어떤 사회가 올바르고 정의로운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까지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많이 배웠죠.

인터뷰에서 오고 간 말들 중, 가장 오래 곱씹었던 말이 있을까요? 

언어·청각장애가 있는 몽골 국적 부모에게서 태어난 ‘마리나’의 인터뷰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솔직히 엄마 아빠가 저를 키워준 게 아니고 제가 엄마 아빠를 키워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 정말 강렬한 진실이 담겨 있죠. 마리나뿐 아니라 한국의 아이들 중에도 가장 역할을 하면서 부모를 먹여 살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흔히 아이들은 미숙하고, 어른이 돌봐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부모자식간의 상호 돌봄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잘 보여준 것 같아요. 마리나가 스스로 “나는 부모를 돌보고 있다”고 말하는 모습이 당당하고 멋지기도 했고요. 

미등록 이주아동의 부모인 ‘인화’님의 인터뷰를 통해서는 체류자격이 없는 채로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는 부모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어요. 덕분에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가 더 입체적으로 이해되더라고요.

‘나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부모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업 막바지에 섭외를 했어요. 인화님은 자신으로 인해 아들마저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자라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본 분인데요. 사례집에서 인화님 사연을 보고 너무 슬펐어요. 6살짜리 아들을 방에 혼자 둔 채 밖에서 문을 잠그고 공장에 일하러 갔다는 내용이 있었거든요. 우리 사회에도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아이가 혼자 집을 지키다가 화재가 나서 사망하는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빈곤, 돌봄 공백, 양육의 어려움이 이주민 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게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인화님을 처음 만났을 때, 힘들게 일을 하셔서 그늘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젊고, 활기찬 분이어서 놀랐어요. 이것도 제가 가진 편견이라는 걸 알았죠. 

이외에도 인터뷰를 하며 깨어진 생각, 편견 등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전까지는 일방적으로 한국이 그들을 위해 일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주노동자를 바라봤어요. 그런데 이탁건 변호사와 석원정 활동가 인터뷰를 통해 그 생각이 깨졌죠. 이탁건 변호사가 한국에서 미등록 상태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럼에도 수십 년을 사는 이주노동자가 있다는 건 “한국도 이 사람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을 때 눈이 번쩍 뜨였어요. ‘그렇지,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우리 사회가 안 굴러가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관점으로 이주노동자 문제를 바라본 적은 없었는데, 덕분에 인식의 전환이 되었어요. 

지난 4월, ‘국내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방안’ 발표가 있었다고요.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건가요?

이제 국내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살았을 경우, 심사를 통해 체류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됐어요. 인터뷰에 참여한 마리나도 한국에서 태어나 성인이 된 케이스라 다행히 체류자격을 얻었죠. 그런데 1년마다 갱신을 해야 한다는 불편이 있어요. 왜 한국에 머무는지 서류를 매년 증빙해야 자격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이 제도로 구제되는 아동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맹점도 있고요. 기준이 모호하거든요. 만약 태어나 100일 만에 한국으로 왔다면, 여기서 나고 자란 거나 진배없는 셈인데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심사 대상이 아니에요. 그런 부분이 좀 안타까워요. 어쨌든 시작을 했다는 의의가 있으니 앞으로 개선하고 보완해 나가야죠. 

이번 책을 쓰는 동안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무엇이었나요?

프롤로그에 썼듯이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 게 공적 지원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라는 일본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의 말에 오랫동안 감응해왔어요. 배고플 때 밥 먹고, 아플 때 치료받고, 공부하는 것까지는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이 기본적인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회는 너무 야만적이지 않나? 생각했죠. 이런 관점에서 체류자격조차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문제는 아주 극단화된 사례잖아요. 우리 사회 최밑단에 있는 존재를 이야기함으로써 여러 문제가 다 연결되는 것 같아요. 이건 미등록 이주아동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어요.


 

우리는 그들의 노동에 빚지고 있다

한 고등학교 토론대회에 참석했을 때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발언하는 학생을 보고, 이 책의 구체적인 독자의 모습으로 상정했다고 하셨어요. 그날 학생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궁금해요. 

노동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인 공장, 농죽산업의 노동력을 이주노동자가 메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나라의 경제를 지탱하는 건, 삼성 같은 글로벌 기업뿐이 아니라 경제구조의 가장 아래층에 있는 영세사업자의 이주노동자도 있고, 이는 한국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와 별개라고요. 또 어떤 누구라도 노동권이 보장된 환경에서 일해야 한다는 걸 강조했죠. 만약 우리 학생들이 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갔을 때, 이주민이라고 해서 낮은 처우를 받고 기본권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그게 합당한 일인지 이야기해보자고요. 사실 이러한 편견은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거나, 인터넷 댓글 등을 보며 파편적으로 생긴 거잖아요. 편견은 모를 때 생기는 것이니, 알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주노동자를 향한 비난은 대개 비슷해요. 일자리를 빼앗는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이들이 많은데 왜 이주민을 돕냐는 거죠.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를 반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다 여기 와서 아이를 낳으면 어쩌냐”고 하잖아요. 무지에서 오는 불안일까요? 

불안정한 경제구조 속에서 사는 불안이, 자기보다 취약한 대상에 대한 분노로 향하는 거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야 하는데, 약자가 자기보다 더 약자인 자에게 불만을 표출하며 해소하는 것 같아요. 책에서 석원정 활동가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 동감해요. “미등록 아동의 부모까지 국적을 주자는 것도 아니고, 체류자격을 주자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평생을 살고 공교육을 받은 아이들을 여기서 살게 해주자는 것”뿐이고,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살겠다고 일부러 애를 낳겠느냐. 설사 그런들 그게 뭐갸 문제냐. 지금 인구가 부족해서 문제인데”라고 하시잖아요.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다문화인은 현재 243만 명으로 인구의 5.1%(통계청, 2019)라고 해요. 이주배경을 가진 인구가 전체의 5%를 넘으면 다인종국가라고 하는데요. 우리나라도 이제 다인종국가에 들어선 거죠. 시대가 변한 만큼, 외국인을 심사의 대상이 아닌 동료 시민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그들의 노동에 빚지며 살고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너무 바빠요.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는 정말 무관심해요.(203쪽)”라고 했던 인화님의 한 마디가 우리 사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쟁이 심한 사회이기 때문에 내 몫을 지켜야 한다는 정서가 일반적이죠.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의 분위기가 그리 몰아가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일자리도 불안정하고, 자칫하면 나의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불안이 있는 상황에서는 남을 돌아보기 어렵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그런 고민을 하는 사회여야, 나도 약자가 되었을 때 보호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희망을 보셨을 것 같아요. “김민혁의 사례를 접하며 동료 시민의 역할과 중요성을 깨달았다(18쪽)”고 하셨어요.

‘시민의 정의를 무엇으로 내릴 거냐’고 묻는다면, 저는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시민이라 답하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민혁을 도왔던 선생님의 경우 진정한 시민의 역할을 하신 분이었어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민혁에게 ‘2주 내로 이란에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진 사연을 옆자리에서 우연히 듣고, 해결할 방법을 함께 찾아주신 거잖아요. 선생님의 그 마음이 없었다면 민혁은 체류자격을 얻기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석원정 활동가가 말씀하신 ‘민우’의 사례에서 등장하는 담임선생님도 기억에 남아요. 자사고 학생이던 민우가 친구들의 싸움을 말리는 과정에서 출동한 경찰에게 비자가 없는 걸 발각당하는 바람에 강제추방을 당했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이주노동자 단체를 찾아가고 이 문제를 계속 파고든 게 미등록 이주아동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시발점이었잖아요. 바로 옆 사람,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 한번 눈 감으면 내 삶에 굳이 연루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갖는 관심이 마침내 사회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어요.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하루를 살고 있잖아요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가라는 소개는 들을수록 민망하다. 그럴 때면 내가 잘못 살지는 않았지만, 글은 잘못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33쪽)”고 하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동안 마음에 끌리는 일,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는 일들을 해왔기 때문에 내 삶에는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글에 있어서도 그런가 싶어요. 예를 들어 청소년 현장실습생 문제에 대한 르포를 썼다면, 사람들이 그 아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지 작가인 제가 부각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제가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죠. 저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관심있는 분야에 대한 작업을 꾸준히 해왔을 뿐인데 “좋은 일 한다, 훌륭한 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부끄럽고 민망해요. 진짜 훌륭한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는 것 같고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이후 한동안 책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신 것도, 그 마음의 연장선이었나요? 

그건 아니고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펴내고 피해 서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함께 하고 싶다는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당분간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글쓰기의 최전선』 이후 감사하게도 계속 책을 냈고 특히 국가폭력 피해자들,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관성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거든요. 그 문제에 대해 새롭고 낯설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글을 쓰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제 어떤 사안을 봐도 ‘이게 문제니까 문제야’ 싶은 거죠(웃음). 그런데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어요. 초심자의 마음으로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업을 시작했던 거죠.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니 어떠셨어요? 

후회했어요(웃음). 잘 알고 써도 힘든 일인데, 초심자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미등록 이주아동 사례집을 읽는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어요. 한 줄, 한 줄이 다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부모에게 체류자격이 없다고 왜 아이들까지 체류자격이 없지?’ ‘왜 형제 중 한 명만 체류자격을 인정해주는 거지?’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핸드폰 개설을 못 하고, 수학여행을 못 간다고?’ 너무 많은 궁금증과 생각이 올라오니까 못 읽겠더라고요. 꼭 완전히 처음 보는 과목을 새로 공부하는 느낌이었어요. 이주노동자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관련 책도 많이 읽었고요. 글을 쓰기까지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죠. 작업하는 동안은 내내 불안과 싸웠어요.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 왜 하겠다고 했을까?’라면서요(웃음). 

여전히 책 작업을 할 때 불안하세요? 

그럼요. 출간 이후 석원정 활동가 선생님께서 책 잘 써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셨어요. 그래서 “선생님, 책 내고 나면 너무 불안한데 다정한 말씀 해주셔서 고마워요”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전업작가도 불안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웃음). 책 나오면 항상 어디로 숨고 싶은 기분이에요. ‘실수한 거 없을까,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될까’ 싶어서 초조하고,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도 있어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옮기는 작업이 심리적으로 힘드실 것 같아요. 바뀌지 않는 사회가 답답하기도 할 테고요.  

힘든 만큼 많이 배우고, 자극을 받죠.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내가 의협심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괴로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사치예요. ‘내 자리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게 맞죠. 사회의 커다란 문제를 상정하고, 바꿀 수 없다고 무기력해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에요.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하루를 살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는 인생수업”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언제나 글쓰기 수업의 마지막 시간에는 학인들에게 인터뷰 과제를 내주시고요. 이유가 궁금했어요. 

인터뷰는 타인의 이야기를 한두 시간 집중해서 듣는 일이잖아요. 누군가를 만나려면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하고요. 그렇게 타인과 사려깊은 자리를 갖는 건, 한 사람을 이해하는 무척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듣는 능력이 별로 없어요. 내가 동의하는 이야기는 잘 들리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는 흘려보내기 마련이죠. 그런데 글을 쓰려면 듣는 능력이 뛰어나야 해요. 글을 쓴다는 건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거니까요. 인터뷰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많은 감정, 위험, 사건, 경험이 있는지 듣는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재구성해 서사로 만드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좋은 글쓰기 수업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저는 타인을 만날 때마다 겸손해졌던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일이 참 많구나’ 싶거든요. 무언가를 새로 안다는 건, 자기 무지를 깨닫는 일이잖아요. 인터뷰가 그 깨달음의 기회를 주죠. 

“우리는 영원히 슬퍼야 하리라”는 문장으로 책이 끝을 맺습니다. 요즘 작가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건 무엇인가요? 

‘책이 많이 나가야 할 텐데…’(웃음) 이건 슬픔이 아니라 욕심이겠죠? 아직 이 책을 쓸 때의 여운이 남아있는 상태라서 책에 등장하는 미등록 이주아동 중 ‘카림’과 ‘달리아’가 체류자격을 얻지 못한 게 가장 속상해요. 더 나아가 국내 아이들도 생각하게 되죠. 달리아가 고3때, 친구들이 모이면 다 대학 이야기를 해서 소외감을 느꼈다고 하잖아요. 이건 미등록 이주아동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에요. 수능을 목표로 하는 교육에서는 여러 이유로 대학을 못 가는 아이들이 완전히 배제되죠. 이처럼 국내 아동들도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될 때가 있는 거예요. ‘왜 다 공부를 잘해야 하지? 왜 수능 위주의 교육을 할 수밖에 없을까? 오직 공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돌볼 수 있지?’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슬플 때가 많아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시나요? 

이 책을 다 쓰고,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박완서 선생님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었어요. 개성에 살던 ‘나’가 엄마와 오빠를 따라 상경해 셋방에서 눈치를 보며 살게 되는 대목에서 “엄마는 내가 있어도 없는 아이처럼 굴길 바라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오더라고요. 

이처럼 미등록 이주아동 외에도 가난하거나, 어떤 사정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이 우리 주변에 정말 많아요. 학교에서도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없는 취급을 받곤 하잖아요. 누구는 주류로 인정받고, 누구는 배제되는 모습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읽어낼 수 있어요. 이 책을 읽고 단순히 ‘미등록 이주아동 불쌍하다. 안 됐다’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있지만 없는 존재들’에도 눈 뜰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은유(김지영)

산문, 칼럼, 인터뷰 등 논픽션을 쓰고,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다. 『올드걸의 시집』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 『폭력과 존엄 사이』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출판하는 마음』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썼다.



있지만 없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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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저 |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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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미의 작업실 인터뷰] 판을 짜는 사람 – 이길보라 작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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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길보라 작가와 엄윤미 인터뷰어


“사회가 부여한 이름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붙인 내 이름을 내가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요. 저는 ‘로드스쿨러’이고, ‘코다’ 이고, ‘영화작업자’ 이자 ‘글 쓰는 사람’ 이에요.”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274쪽)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여자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287쪽) 

“아티비스트 Artivist 는 예술가이자 활동가, 두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연대, 활동, 작업을 하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당신을 이어 말한다』, 239쪽) 


네 권의 책과 (『길은 학교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 책과 동명의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든 이길보라 작가를 만났습니다. 사회 비평집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중심에 두고 만났지만, 그동안의 작업을 아우르는 인터뷰가 되었습니다. 각각의 작업이 분절된 것이 아니라 계속 정체성을 찾고 선언하며 성장해 온 여정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이길보라 라는 사람의 고유한 시선이 있습니다.



이길보라의 시선이라는 렌즈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첫 사회비평집이지만, 이전의 에세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와 톤이 크게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전의 책에서도 개인적인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를 항상 함께 제시해 오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두 책이 서로 비슷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책의 주제나 소재에 따라 조금 달라질 뿐, 모든 책이 저의 시각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사회에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이 책은 칼럼을 모은 책이다 보니 사회비평적인 이야기들이 조금 더 들어가 있고, 수어나 페미니즘,  장애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들의 방향이 달랐던 것 같아요. 

그동안 스스로에게 로드스쿨러, 코다, 영화 작업자, 글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왔고, 그 정체성이 이길보라라는 렌즈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출간된 네 번째 책, 『당신을 이어 말한다』 에서는 이에 더해 ‘아티비스트’ 라는 정체성을 소개하셨죠. 

‘아티비스트’ 라는 말을 발견하고 난 후에 안도감이 들었어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와 정체성이 있고, 그 정체성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는 건 안도감을 갖게 하는 일인 것 같아요. 

협업하는 프로듀서가 저에게 사회운동가, 활동가로서의 정체성과 작가-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다는 이야길 늘 했었어요. 내 영화와 글이 어느 쪽을 향해야 하는 건가, 둘 중 한쪽을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한 적도 있었어요. 난 무얼 하는 사람이지 하고요. 지금은 양쪽을 모두 하면 된다고, 자연스럽게 영화 만들고 글 쓰고 이야기를 만들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야기를 이어가는 매체로 글과 영화를 사용하고 계시죠. 영상도 텍스트와 이야기가 기반이긴 하지만, 글과 영화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담아낼 때 서로 다른 역할을 할 것 같아요. 

맞아요. 영상도 텍스트가 기반이라고 생각해요. 기획안 쓰기, 시나리오 쓰기에서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영화와 책은 관객층도 독자층도 다르고, 할 수 있는 영역도 다른 것 같습니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예를 들면, 동명의 책과 영화가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달라요. 주인공이 농인인 콘텐츠를 만들었을 때, 영화로는 농인인 저희 부모님이 가진 시각적인 풍요로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두 분의 풍부한 얼굴 표정을 한번에 보여줄 수 있어요. 책은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보는지, 나의 기억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사람들이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고요.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너무나 흥미로운 지점들, 또 책이라는 매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두 매체를 통해 실험하고 있는 거지요. 두 매체를 다룰 수 있고 양편을 오가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 번아웃이 오면 영화 작업으로 넘어가기도 해요. 그러다 다시 글을 쓰고요. 두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할 수 있다는 일은 굉장히 감사한 일입니다. 



영화에서 어머님 표정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해상도 높은 표정을 짓는 중년 여성을 주변에서 많이 볼 기회가 없으니까, 글로 읽었다면 영화로 보여주신 표정을 상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영화라는 매체는 언제 발견하셨나요? 

어릴 때부터 다큐멘터리를 보는 걸 좋아했어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부모님은 영화관에 가는 취향을 가진 분들이 아니니까, 저도 어릴 때 영화관에 간 적이 거의 없어요. TV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랐는데, 고래와 상어가 나오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어릴 때부터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자연스럽게 앞으로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열 아홉 살에 처음 다큐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만들어 보니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를 전공하게 되었고요. 픽션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저는 논픽션 장르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기 때문에 글과 영화 모두 논픽션 장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영화 작업을 하고 계시거나 구상하고 계세요?

여성의 재생산권에 관련한 장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잘 준비해 보려고 천천히 작업하고 있습니다.

가을에 관련 주제로 보안여관에서 전시를 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전시도 영화 작업의 일부인가요?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이 있어요. 이전에는 작업을 시작해서 끝내고, 작품이 관객을 만나고 나면 작업이 끝나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과정으로 생각하면 작업이 굉장히 풍부해질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필름 아카데미 이전에도 피칭 과정에서 관객들을 만나 반응을 듣는 일이나 영화 GV, 관객과의 만남을 열심히 했어요.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작업의 일부로는 정의하지 못했는데, 만드는 과정으로 정의하게 된 거지요. 그렇다면 이 과정 자체를 어떻게 관객 분들과, 사회와 호흡하면서 가져갈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경험도 풍성해지고, 한편으론 영화를 더 많은 분들이 보시게 되는 계기도 되겠네요. 

그렇죠. 전시를 보시는 분들이 가져오시는 이야기들도 영화의 또 다른 씨앗이 될 거라 생각해요. 전시는 10월에 열릴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성장의 여정 

전작 에세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도 밑줄 그어 가며 재미있게 읽었어요. 무엇이 당연한 기준인가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얻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공감도 많이 되었지요.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은 이번 책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가치의 중심을 바꾸는 일을 이야기하는 작가님에게 다른 사회에서 살아보는 건 생각이 한결 자유로워지는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길 위를 여행하며 배우고 성장한 로드스쿨러지만, 한 도시에서 어느 기간 이상 일상을 살아보는 건 또 다른 경험을 주었을 것 같은데, 어떤 점이 가장 달랐나요? 

네덜란드는 유럽여행을 할 때도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잖아요. 저도 네덜란드에 여행을 갔으면 제가 배운 것들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여행보다는 살아보시라고 적극 추천할 거예요.

여행으로 만나는 다름과 살아보면서 만나는 다름은 정말 큰 차이예요. 유학생활하면서 작은 것에 깜짝깜짝 놀라고 매일 울면서 지냈어요.. 지금 필름 아카데미는 1년 동안 재정비하며 프로그램을 바꿔서 신입생을 다시 모집하고 있습니다. 내부 구성원들의 커리큘럼에 대한 피드백이 많았고, 내부적으로도 의견에 균열이 생기고 한바탕 혼란이 있었지만 피드백을 적극 수용하면서 전체 프로그램을 바꿔버린 거예요. 유럽 친구들은 학교가 엉망진창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런 과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유연함과 혁신 같은 것은 살아보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로드스쿨러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친구들이 모두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었는데 (웃음) 여행이 주는 배움도 있지 않나요? 

자기 위치를 바꾸는 것, 일상을 살아가는 흐름과 다른 흐름 속에 나를 물리적으로 위치시키는 것이 여행이고, 그래서 다르게 보기, 낯설게 보기가 여행을 하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장기적으로 지속시키는 일이 살아보기예요. 칸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면서 사유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불가능한 사람이라 나를 다른 위치에 놓음으로써 낯설게 보기를 할 수 있었어요.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한달 살기든, 다른 흐름 속에 나를 위치하게 하는 것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지가 어디냐 보다는 여행자라는 정체성이 주는 배움이군요.

네, 여행을 하면 카페에서도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잖아요. 일상생활에선 그렇지 않을 텐데, 자신을 열려있는 모드로 만들면서 여러 가지 감각으로 주변의 흐름을 감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학교를 떠나 여행을 하면서, 공동체와 글방에서 함께 글을 쓰면서,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고 성장했고, 이후 예술학교에서 공부하시기도 했지요. 학교를 떠나 얻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학교를 떠나 아쉬운 것도 있을까요? 

최근에 계속 학교를 다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어요. 일간지 인터뷰를 본 어릴 때 친구들이 연락을 했거든요. 만약 학교에 계속 다녔다면 대학에서 사회학이나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결국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제 삶이 크게 달라졌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영화를 찍는 대신 NGO 에서 일한다 거나, 직업은 달랐을지 몰라도 제가 작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바꾸고자 하는 사회상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직업의 이름은 달라도, 작가님이 하는 일을 나타내는 동사는 같았을 거란 의미겠네요.   

맞아요. 어린 시절에 장래희망이 뭐야? 라고 물을 때 직업에 대한 장래희망 대신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동사나 방향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다시 학교라는 기관에서 공부한 경험은 또 새로웠을 것 같습니다. 반드시 가야 하는 학교라기보다 ‘선택해서’ 간 학교 (한예종, 네덜란드 필름 아카데미) 였으니까요.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로는 선택한 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원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간 게 아니라 이런 배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선택해서 간 것이고요. 저의 경력을 보신 어떤 분들은 시스템 밖에 있는 경험을 하다가 다시 시스템으로 들어온 경험을 했다고 보시고 어떻게 다르냐고 질문하시는데, 저는 다른가? 합니다. 저에겐 똑같거든요. 내가 필요한 배움을 그때 상황에 맞게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시스템 안인지 밖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나의 시간표를 짜고, 나의 시간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저는 아직 로드스쿨러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어떻든, 시스템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로드스쿨러라는 이름은 사회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명하는 것이니까요.



글방에서 만난 친구들, 글방을 여는 마음

이제 ‘글방을 운영하는 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하나 더해야겠습니다. 책 말미에 소개하신 보라글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 어떤 글을 함께 쓰시는지 궁금해요.

1기를 마무리하고 이제 2기를 한달 째 운영하고 있어요. 저를 포함해서 총 아홉 명이고요. 

‘머시기마을’ 이라는 곳이 있어요. 마을 사람들도 뭔지 모르는 마을이에요. 20대 후반 여성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모임인데, 제 영화 ‘기억의 전쟁’ 상영회를 자체적으로 조직해서 저를 초대해 줬어요. 가서 재밌게 놀았고, 이 친구들의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계속 뭔가 하셔라,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 분들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를 돌려 읽으면서 교환 일기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리뷰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모두가 볼 수 있는데, 6개월 동안 돌려가며, 택배를 서로 보내 가며 쓰고 읽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일들을 자기만의 속도로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요청해서 만들어진 것이 보라글방입니다. 보라글방 feat. 머시기마을 인 셈이죠. 

(어딘글방의) 어딘이 저에게, 네가 언젠가 글방을 열게 되면 그건 사람들이 찾아와서 같이 하자고 제안할 때다, 그때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할 때다 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어요. 그게 언제가 될까 생각하면서 내심 부담스러웠는데 머시기 마을 사람들이 저를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글을 쓰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까요?” 하고 질문하는 순간, 글방을 열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순간이 왔구나 생각했어요. 이 순간이 그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어말하기’ 의 순간이네요.

맞아요. 책의 마지막 챕터에 보라글방 이야기를 넣은 이유도 그것이었어요. 이어 말하는 사람들을 계속 만들어나가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엄청난 속도가 아니어도 내 방식대로, 내 속도대로 다른 판을 짜는 일을 계속 해야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보라글방 이야기로 마무리한 거였죠. 

‘어딘글방’ 이라는 글방의 존재를 이길보라 작가님과 이슬아 작가님 글에서 발견하고 아니 저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보라글방엔 어딘글방의 영향도 있을테고, ‘보라글방’ 이기때문에 다른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저의 위치가 다르고, 피드백의 방법이 다릅니다. 어딘글방은 하자센터의 창의적 글쓰기 수업이 전신이었어요. 이후 학생들이 계속 글을 쓰고 싶다고 어딘을 찾아가서 글방을 연 것이고, 그때 저는 청소년이었으니까 어딘은 선생님 같은 존재였지요. 그런데 저와 보라글방 사람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요. 제가 서른두 살이고 글방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중-후반이거든요.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먼저 글을 쓴 사람, 먼저 책을 내 본,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으로서, 가이드로서 글방을 함께 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서로의 글을 사려 깊게 합평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날카롭게 피드백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는 일이에요.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에서 배운 피드백 방법, 다르게 사회를 바라보는 법을 적용하는 연습을 해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끌어가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비평을 연습하는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고, 저도 글방을 통해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다정하고 날카롭게’ 피드백하는 훈련이 많이 되어 있지 않잖아요. 날선 공격을 스마트함의 표현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다정함 쪽으로 치우친 경우엔 날카로운 피드백을 불편해하거나 실례로 여기고요. 날카롭고 다정하게 비평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은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보라글방의 목표라고 생각해요. 글을 잘 쓰는 것도 목표지만, 이 글방의 목표는 작가가 되는 게 아닙니다. 글방에서 쓰는 어떤 글은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글, 어떤 글은 사람들을 바깥으로 유인하는 글일 거고, 어떤 글은 행동하게 하는 글일 겁니다. 어떤 글은 책이 되겠지만, 책으로 출판되기엔 조금 부족하다 해도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이라면 그 자체로 목표를 다하고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딘글방에서 ‘지금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글이 있다’ 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요. 글이 어떤 공동체를 만드는데 기능할 수 있는지, 이 글을 통해 각자의 목표를 이뤄가고 있는지, 글쓰기와 합평, 피드백하는 일을 통해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지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꼭 필요한 글을 쓰는 역할을 친구분들이 함께 하고 계시죠. 『당신을 이어 말한다』의 5부, ‘각자의 방식으로 모험하며 살아간다’ 에서 이랑, 이슬아, 이다울, 양다솔, 하미나.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야기할 때 든든함, 자랑스러움, 신남 같은 기운이 전해졌어요. 책에 등장하는 또래 여성 창작자들은 이길보라 작가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5부에 친구들 이야기를 꼭 넣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어요. ‘세대’ 라고 하면 너무 클 것 같고, 저희 친구들이 다른 방식으로 판을 짜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친구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90년대생, MZ세대로 주목 받으면서 안타까운 것이 언어나 판을 짜는 방식이 기존의 방식과 너무 달라서 기성 미디어가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였어요. 저와 제 친구들이 하는 작업과 이야기의 방식, 모이는 방식들이 기존 프레임에는 하나도 맞지 않아서 흘러 넘쳐버리는 거지요. 그래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소개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5부를 신나게 썼어요. 보라글방도 그런 마음으로 계속 언급하려 합니다.

머시기 마을 친구들 중 몇 명은 요즘 생태마을 디자인 교육에 참가하여 숲에서 4주간 살아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생태마을을 고민하고 생태 전환, 기후 위기,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는 이런 활동들이 너무 소중하고 이런 친구들의 이야기와 방식이 결국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설명하긴 정말 어려워서, 그 브릿지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생태를 전환하겠다고 숲에 들어가고 누군가는 국회에 들어가고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어야 세상이 변화할 거예요. 어떻게 나의 작업과 영화와 글과 말하기가 기여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 쪽을 향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작가로서 많이 합니다.

동시대의 친구들이 같이 등장한 것이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기존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는 동료 그룹이 있다는 것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였으면 좋겠어요. 이슬아, 이다울 작가와 셋이 북 토크를 했는데 재밌었어요. 우리를 소개하고, 이쪽으로 모이라는 이야기를 한 자리였고, 그런 일들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이어 말하기를 하고 싶은 이유도 결국 판을 짜는 일 때문이에요.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혼자는 결코 무언가를 할 수 없잖아요.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 말하고 판을 짜야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판을 짠다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데, 정확한 의미가 뭘까요.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해요. 둘 다 필요한 일이고, 또 두 가지 일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요. 저는 제가 해온 일이 늘 판을 짜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학교를 그만둔 것도, 책을 쓴 것도, 영화를 만든 것도 모두요. 그런 세상을 꿈꾼다고 이어 말하고 싶은 사람 모여라, 하고 우리 편들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가 최근의 저의 고민입니다.



이어서 말하기, 듣고 다시 말하기 

책을 읽는 독자들, 영화의 관객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것도 이야기를 지속해 가는 힘을 줄 것 같은데, 어떤 채널을 통해 피드백을 받고 계신가요? 가장 인상적인 피드백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피드백을 받습니다. 온라인으로도, 그리고 영화를 상영하면서는 GV 행사로 관객들을 만나고, 독자들을 만나는 행사에도 참여하고요.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은, 최근에 동해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녀왔어요. 독서동아리 학생들이 제 책 중 세 권 (『길은 학교다』『반짝이는 박수 소리』『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을 읽고 작가와의 만남을 준비해 주었는데, 학생들이 질문을 엄청 많이 준비해서 답하고 말하는 과정에만 세 시간이 들었어요. 세 시간 내내 긴장이 풀리지 않았고, 너무 아름다운 시간이었어요. 제가 2009년에 쓴 글이 계속해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경험이기도 했고요. 

학생들은 학교 밖 공간을 너무나 궁금해 했고, 학교를 뛰쳐나간 청소년이 자라서 영화 만들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바라보는 경험이 큰 인풋이 되었을 거라 생각해요. 친구들이 한 질문에 바로 답을 하는 대신 질문을 뒤집어보는 질문을 다시 던지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처음엔 당황해 하다가, 질문이 재미있으니까 뒤집어 보는 연습을 같이 했지요. 질문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해 보는 연습을 같이 한 흥미로운 시간이었어요. 동시에 미래세대라고 부르는 이 세대와 어떻게 같이 갈까, 뭘 더 할 수 있을까를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나도 충분히 어른이지 않나? 뭐가 어른인가? 질문하게 돼요. 더더욱 급진적으로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대화를 하는 사람 

이길보라는 감독, 작가라는 직업을 떼어 놓고도 다양한 단어로 다채롭게 설명할 수 있을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발견한 정체성인 아티비스트, 오늘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판을 짜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좋은 대화를 하는 사람’ 이라는 특징을 더하고 싶습니다. 잘 듣고, 어렵고 모호한 개념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면 상대가 사용한 표현을 함께 사용하며 같은 이해를 만들어 가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는 이길보라 작가와 대화를 나누어 보니, 보라글방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합평과 피드백의 방식도 여기서 멀지 않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좋은 피드백을 주고 받는 방법을 찾아가는 일은 좋은 대화를 나누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풍부한 표정으로 이야기 나누는 농인들의 세계와 섬세한 음성 언어를 구사하는 청인들의 세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다리 역할을 해 온 경험, 글과 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쌓아온 시선이 빛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이겠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사려 깊고 날카롭게 피드백하며 다정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풍부하게 나눌 수 있을까요.


*이길보라(작가, 영화감독)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사람.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에서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 등을 통해 자기만의 학습을 이어나갔다. ‘홈스쿨러’, ‘탈학교 청소년’ 같은 말이 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자신과 같은 청소년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해 ‘로드스쿨러’라는 말을 제안했고, 그 과정을 2008년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첫 영화 〈로드스쿨러〉에 담았다. 지은 책으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길은 학교다』, 『기억의 전쟁』(공저),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 등이 있다. 2021년 네덜란드 정부가 전 세계 여성 리더에게 수여하는 젠더 챔피언 상을 받았다.



당신을 이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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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저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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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유병욱 “코로나19가 가르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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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일상 깊숙이 들어온 2020년의 여름, 폭염 속에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카피라이터 유병욱은 몇 개의 질문을 떠올린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이 굵직한 질문 아래 세 번째 책을 써 내려갔다. 전작 『생각의 기쁨』『평소의 발견』에서 카피라이터로서 훈련해 온 발상법과 창의성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그는 세 번째 책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랐다. 코로나19라는 ‘질문의 질병’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들을 함께 점검해보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를 바랐다.

『없던 오늘』은 그렇게 쓰인 책으로 ‘음미력’, ‘미트로놈’, ‘시간의 단층’, ‘레트로 위크’ 등 카피라이터 유병욱만의 섬세한 시선을 통해 없던 오늘을 살아갈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넓이와 깊이의 인식을 선사한다. 탁월한 점은 이것이다.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인한 불안을 직시하면서도 절망보다는 희망을, 경쟁보다는 존중을 이야기한다는 것. 



코로나19가 많은 걸 빼앗아갔지만

고민의 흔적이 많이 느껴지는 제목이에요. 집필 단계부터 생각한 제목이었나요? 

전작 『생각의 기쁨』과 『평소의 발견』은 책을 쓰는 도중 제목이 나왔어요. 출근하는 길에 떠올랐죠. 그런데 이 책은 달랐어요. 시작할 때 어렴풋이 ‘오늘’이라는 단어는 있었는데요. 아무리 고민을 해도 마땅한 제목이 안 나오더라고요. 탈고를 하고, 제목을 정해야 하는 단계에서 나온 건 ‘그날 이후’였고요. 이 책이 변화의 전과 후에 대한 얘기라 생각한 제목이고, 괜찮은 것 같았어요. 드라마틱하기도 하잖아요. 그 제목으로 거의 기울었는데요. 조금 어둡다, 소설 제목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그래서 또 고민을 하다 떠오른 제목이에요. 두 제목을 가지고 지인들에게 투표를 했더니 『없던 오늘』이 압도적인 표를 받았어요. 특히 MZ세대 후배들은 거의 다 이 제목에 표를 주더라고요. 무엇보다 이 책이 확장성이 있기를, 이전 책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MZ세대 후배들이 선택한 제목으로 결정을 했어요. 

이전 책들을 쓸 때와 느낌이 많이 달랐군요. 

달랐어요. 책을 낼수록 독자층이 조금씩 넓어지긴 했거든요. 그러니 세 번째 책을 기왕 냈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한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한편 크리에이터는 변주가 계속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이번 책도 의도적으로 다른 시도들을 해봤어요. 어투도 바꿨고, 제목도 다섯 자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표지색도 노란색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요. 나름대로는 실험을 한 건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단어가 '음미력'인데요. 사전에는 없는 단어잖아요. 

만든 단어예요. 시작은 영국에서 유학할 때인데요. 보통 외국 여행을 가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잖아요. 저도 몇 달 지내니까 한국 음식이 너무 먹고 싶더라고요.(웃음) 그러다 짜장면이 생각났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가장 흔한 음식이 짜장면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한국 식당을 갔더니 너무 비쌌어요. 지금 짜장면 한 그릇이 5,000원이라고 하면 35,000원짜리 짜장면이었던 셈이에요. 그래도 왔으니까 주문을 해서 먹는데, 너무나 맛있는 거예요. 엄청 소중하고요. 그때 알았어요. 처한 상황이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에요. 음미력이라는 단어는 그때 떠올리지 못했고요. 그런 식의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 이후로 점점 이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관련해서, "압도적이지 않은 것들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19쪽)고 한 문장이 있어요. 

코로나19 이후, 예전에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할 기회를 다 빼앗겼잖아요. 저가 항공이 생기면서 해외 여행도 한결 쉽게 갈 수 있었는데 다 차단됐어요. 재미있는 것은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카드 안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을 아주 소중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이었어요. 작년에 굉장히 아름다운 구름과 노을이 등장한 날이 있었거든요. 소셜미디어가 다 노을과 구름이더라고요.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다 음미하고 있던 거죠. 그걸 보면서 코로나19가 우리한테 많은 걸 빼앗아갔지만 가지고 있는 것들을 세심하게 보게 하는 능력을 줬구나, 모두에게 그 능력이 생겼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몇몇 사람들한테는 음미력이 생겼구나, 그 훈련을 하기 시작했구나, 하고 느꼈어요. 

확실히 일상의 소중함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나저나 작가님에게는 음미력이라는 감각이 꽤 일찍 자리하고 있던 거네요. 

조금 빨랐던 것 같긴 해요. 영국에서 짜장면을 먹고 감동한 게 거의 십 몇 년은 됐으니까요. 사실은 광고 일이 어떤 것의 장점을 찾아내는 일이거든요. 기자의 일이 검사의 일이라면 광고인의 일은 변호사의 일이라는 말도 하는데요. 광고는 변호사처럼 좋은 점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음미력 훈련을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필요한 것은, 존중

코로나19를 지나며 남길 가장 중요한 교훈을 '존중'으로 꼽았어요. 아주 중요하게 들리는 말이에요.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진짜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느낀 것 같아요. 그냥 ‘나만 잘하면, 우리나라만 잘하면’이 아닌 거죠. 생각보다 지구는 거대하게 연결돼 있고 한 사람의 소비가 환경과 다 연결돼 있는 거잖아요. 심지어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가 슬기롭게 헤쳐왔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죠. 많은 사람들이 그나마 안전하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배달, 택배 노동자분들과 수많은 의료진들의 희생 덕분이에요. 이렇듯 모든 게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존중의 감정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코로나19라는 질병은 인류가 무분별한 개발을 위해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빼앗는 과정에서 온 것이죠. 이 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이러한 상황은 몇 년 후에도 온다는 얘기를 굉장히 많은 학자 분들이 하시잖아요. 코로나19가 끝났다고 예전처럼 석탄, 석유를 파고 자연을 해치는 방향으로 간다면 또 끔찍한 상황을 견뎌야 할 테니까요. 

여기서 존중은 인간 대 인간뿐 아니라 인간 대 지구까지도 나아가는군요.  

네, 지구와 환경에 대한 존중도 포함한 생각이에요. 환경 문제, 기후 위기 어젠다에 대해 코로나19 이전에는 설명이 많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렇지, 방향은 이쪽이 맞아’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런 점은 있어요. 우리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공감대는 있는 반면 다른 집단에 대한 공격성은 올라갔어요. ‘감정의 범퍼’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감정의 범퍼가 얇아진 것 같아요. 이해도 돼요. 예민할 수밖에 없잖아요. 저 사람이 잘못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 안전을 해치는 것 같으면 크게 화를 내고 공격하고 예민해진 것 같아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사회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는 걸 피부로 많이 느낀 것 같아요. 그래서 코로나19를 “질문의 질병”이라고 하신 거죠? 

어떤 질문인가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질문을 하게 되었다는 게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이제 가장 근본적인 것, 이를테면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나 아이들이 배우는 방식, 음식을 먹는 방식, 일하는 방식들이 다 바뀌고 있잖아요. 사실은 ‘4차 산업혁명’ 같은 말로 서서히 바뀌고 있긴 했죠. 그러다 코로나19로 더 근본적인 변화가 벌어진 거예요. 지금은 우리가 하는 이 방식이 맞나, 이 방식만이 진리인가와 같이 전에는 하지 않았던 스케일의 질문들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코로나19를 질문의 질병이라고 말한 거예요.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없던 오늘』의 일관된 방향이기도 한데요. 코로나19라는 질문에서 이어지는 생각이 '그러니까 더 빨리, 많이'가 아니에요. 여기서 또 하나의 조어, '미트로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잖아요. 어떻게 세상의 속도와 달리 내 속도를 찾을 것이냐 하는 질문도 중요할 것 같아요. 

그 단어는 ‘메트로놈’에서 착안해 만든 말인데요. 한국 사회는 어떤 박자들이 되게 견고한 사회였던 것 같아요. 누군가 “한국 사회는 시간표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요.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할 때다, 왜 좋은 직장 취업 안 하냐”라고 바로 주변의 압박이 들어오죠. 점점 그 주기가 빨라져서 이제는 대학교 1학년 2학기나 2학년 1학기만 돼도 그 고민을 한다잖아요. “왜 결혼 안 해?” 같은 질문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다른 사람이 따르는 박자를 지키는 게 약간 우스워진 거예요. ‘어차피 엉망진창이 됐는데 왜 이 박자를 따라가야 되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직장도 목표점을 향해서 달리고, 승진하는 게임이 많이 무너졌잖아요. 산업 자체가 무너지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을 목격하면서 회사에 충성하고 상명하복 하기는 힘들어요. 오히려 지금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들을 점점 하게 되죠.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관심 있게 보는 장면이 있으세요? 

직장을 과감하게 그만두는 사람, 하고 싶은 걸 해보는 사람이 굉장히 많이 눈에 띄고요. 책에도 썼는데 조그만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거든요. 예전처럼 자본을 투입해 차린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개인이 차린 조그만 가게인데 매력이 있고, 아주 정돈된 곳들이 많아요. 작은 커피집의 커피가 아주 맛있는 곳도 많고요. 동네 책방도 그렇잖아요. 셀럽인데 작은 책방을 차리기도 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역의 도시에 차리기도 해요. 이런 것들을 되게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그 조그만 것들의 완성도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에 감탄하는 중이에요. 

작가님은 어떠세요? 작가님의 미트로놈은 어떤 박자를 갖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도 예전에는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 광고를 잘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런데 그냥 이 일만 죽을 때까지 해서 이 업계의 마스터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게 됐어요. 당연히 이 일은 계속할 거예요. 잘할 거예요. 카피라이터 일을 정말 사랑하고요. 근데 그것만큼 중요한 게 회사라는 틀보다 한 사람 같거든요. 지금은 한 사람이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는 안테나가 되기에 아주 좋은 시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미디어가 받쳐주고 있잖아요. 소셜미디어도 그렇고, 블로그도 있고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어떤 메시지 같은데요. 그 메시지를 저는 광고로 발신할 수도 있고, 책으로 발신할 수도 있고, 소셜미디어로도 발신할 수 있는 그 가능성들을 확인을 하고 있거든요. 동시에 해보고 싶어요. 



코로나19 이후의 중요한 열쇠는 진정성

서울 도심을 보면서 ‘시간의 단층’ 느끼길 즐긴다거나 이른바 ‘한강 구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등 작가님만의 시선이 담긴 부분도 인상적인데요. 작가님께서 하고 있는 일상의 연습 가운데 주변에도 적극적으로 권하는 것들이 있나요? 

한강 구간은 주위에 얘기하면 많이들 흥미로워하세요. 지하철을 타고 가다 갑자기 한강이 열리는 구간이 너무 좋아서 그 구간을 지날 동안은 적어도 보고 있던 걸 내려놓고, 디지털이 없는 시간을 보내는데요. 나아가 일주일에 하루 정도를 ‘스마트폰 프리 데이’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어요. 참 신기한 게, 하루 동안 업무를 위해 사용하는 것 외에 나머지 시간만 스마트폰을 안 써도 할 수 있는 게 엄청나게 늘어나더라고요. 요즘 제가 하는 핑계가 책 읽을 시간이 없어(웃음)인데 책 읽을 시간이 생기고 말이에요. 스마트폰이 아주 매력적인 매체지만 짜투리 시간을 쏙쏙 빨아먹는 시간 흡수기 같아요.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안 써보는 노력을 하는 게 한강 구간에서 시작된 스마트폰 프리 데이예요. 한 번 해보세요. 정말 좋아요. 

‘레트로 위크’도 좋았어요. 

사실 저는 새로운 걸 봐야 된다, 신제품이 나오면 써봐야 한다, 새로운 영화가 나면 봐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트렌드를 알아야 된다는 강박이 있어서 계속 뭔가를 내 안에 집어넣으려고 해요. 그런데 일이 너무 많고 뇌가 꽉 차 있을 땐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날카로운 날에 뭉툭한 것들에게서 힘을 얻는 거죠. 뭉툭한 것이라는 건 나와 계속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둥글둥글해진 것들을 말해요. 그런 콘텐츠들이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어떤 시절에 봤던 영화나 10대 때 친구랑 같이 이어폰 나눠서 끼고 들었던 음악 같은 거요. 그런 음악들을 한 주 동안 듣는 거예요. 내가 정말 사랑했던 영화들을 다시 보기도 하고요. 그러면 그 콘텐츠 안에 내가 남아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어요. 덕분에 과거의 나를 생각해 보게 되고요. 여전히 나한테는 있는, 나의 본질도 알게 되죠. 그게 정말 좋아요. 실제로 해본 분들도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카피라이터로서 직업적으로 쓰는 글과 책은 다르겠죠? 각각의 매력은 뭘까요? 

카피는 오랫동안 트레이닝을 해왔어요. 제 나름의 방식들이 있죠. 우선 자료들을 쭉 보고, 그 다음 어떤 톤을 쓸지 마음속에 정해요. 그러고 나면 집중이 잘 되는 시간에 아주 집중해서 쓰고, 맑은 정신에 고치거나 친구, 후배들로부터 아이디어를 막 받아서 섞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이고, 카피는 온전히 내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는 않아요. 한편 책은 물론 편집자님과 같이 하긴 하지만 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걸 만드는 기쁨이 되게 크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책을 쓰는 사람은 문장 쓸 때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어렵죠. 저도 일단 그 감각이 기본적으로 좋아요. 

2017년 <채널예스> 서면 인터뷰에서 ‘들어가본다’는 표현을 좋아한다고 밝히셨더라고요. 요즘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 있다면요? 

뻔한 단어일 수 있지만, '진정성' 같아요. 코로나19 이후의 시대, 진정성이 굉장히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정성에 쉽게 마음을 열고, 반응해요. 진정성은 시간의 힘이 필요하고, 쉽게 흉내낼 수 없으며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담고 있거든요. 책 밖에 있는 말을 찾아보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제 화두는 진정성이네요. 



*유병욱

광고의 본질은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20년차 카피라이터. 현재는 광고회사 TBWA KOREA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웨스트민스터대학교에서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석사학위를 받았다.

글로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이라는 이유로 망설임 없이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선택했고, 쉬지 않고 쓰다 보니 사람들이 들어봤음 직한 카피들도 썼다.

시디즈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 비타500 ‘착한 드링크’, ABC마트 ‘세상의 모든 신발’, 겔포스 ‘겔의 포스가 함께하길’같은 광고들을 만들었고, SBS의 슬로건 ‘함께 만드는 기쁨’을 썼다. 오직 광고의 마케팅적인 효과만으로 평가받는 에피 어워드 코리아Effie Awards Korea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페이스북 어워드Facebook Awards에서 글로벌 위너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생각의 기쁨』 『평소의 발견』 『없던 오늘』이 있다.




없던 오늘
없던 오늘
유병욱 저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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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에 대한 가장 트렌디한 글을 쓰는 크리에이터, 유물을 독특하게 풀어낸 책 『유물즈』로 독립출판계의 스타로 떠오른 작가. 모두 김서울을 수식하는 말들이지만, 그를 빛내는 건 현재의 ‘나’를 중심에 두는 용기다. 김서울이 생각하는 자신은 ‘싫어하는 걸 못 버티는 사람’이다. 백자 항아리를 보고 여인의 뒷모습 같다거나 역사적인 사실만 나열하는, 늘 똑같은 설명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나’의 언어로, 내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옛사람들의 문화를 즐길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에세이 형식으로 생각을 풀어냈다.



그래서인지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은 젊고 발랄한 표현으로 가득하다. ‘마약 방석을 깔고 앉은 해치’, ‘댄스 댄스 레볼루션 나무’ 같은 김서울식 감상법에 독자들은 ‘궁며들었다’며 응답했고, 첫 책부터 꾸준히 그를 좋아하는 팬도 생겼다. 그러나 정작 그는 『유물즈』의 인기에 한발 물러섰다. “서울 사람들의 문화에 참여해보고 싶어서 보름만에 글을 써서 ‘언리미티드 에디션’ 독립출판 부스에 내놓은 게 시작이었어요. 근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놀랐던 거죠. 제 의도는 자유롭게 사적인 감상을 나누자는 것이었거든요. 제 표현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서 굳어질까 봐 태도만 전하자는 생각으로 절판을 결정했습니다.”

유물부터 궁궐까지 이쯤 되면 문화재에 대한 오랜 사랑을 고백할 법한데, 그는 오히려 처음에는 ‘싫었다’고 말했다. “저는 역사를 싫어하는 학생이었어요. 전통 미술을 공부했지만, 처음부터 제 전공을 좋아한 것도 아니었고요. 그렇지만 박물관이라는 공간만은 좋았어요. 답답한 기숙학교 생활 동안, 유일하게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거든요. 오늘은 불화관, 다음날은 조각관 그렇게 매일 한 칸씩 옮겨가며 매력에 빠졌죠.”

그는 궁궐 답사도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궁궐도 좋아하지 않았는데요. 점점 좋은 요소들이 보이더라고요. 원래 돌을 좋아하는데, 어떤 날은 좋은 기술자가 다듬은 돌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더 들여다 보니 훌륭한 나무도 참 많고요. 마치 팬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열심히 알리는 것처럼 좋아하는 요소를 영업하는 마음으로 썼어요.” 



인터뷰 도중, 김서울은 창덕궁을 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조선시대에 대한 선입견이 있잖아요. 방한도 안되는 방에 소박하게 살았을 것 같고.(웃음) 근데 사실 그 시대 사람들도 열심히 생활을 꾸려가며 살았거든요. 손가락을 넣으면 뚫리는 창호지만 사용한 게 아니라, 두꺼운 천을 걸어서 방한을 하기도 하고요. 왕실 문화는 더 화려했고요. 궁궐도 지금 보이는 것처럼 공간이 비어 있었던 게 아니고, 이동할 수 있는 낮은 담도 있고, 해시계나 괴석으로 장식해두기도 했어요. 지금 생활하는 사람이 없으니 생활감이 사라진 거죠. 마치 모델하우스랑 실제 사는 집이 다른 것처럼요. 그런 이야기도 전하고 싶었어요.”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궁궐에서 사용된 유물들이다. 김서울이 큐레이션한 유물들은 마치 편집숍의 인테리어 소품들처럼 감각적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색을 참 잘 썼던 것 같아요. 핑크도 다 같은 핑크가 아니라, 베이비 핑크가 유행했다가 또 핫핑크가 유행하기도 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유행이 있었죠. 우리가 생각하는 오방색과 조선시대의 오방색은 톤이나 조합이 많이 다를 거예요. 지금 봐도 어떻게 정제된 색을 저렇게 조화롭게 사용했을까 싶은 것들이 많아요.”



나의 언어로 좋아함을 표현하는 것. 김서울은 이 태도가 ‘전통’을 이어가는 동력이 된다고 했다. “보존과학 일을 하면서, 전통이란 과거의 것을 현재에서 미래로 잘 보내주는 것이라고 느꼈어요. 우리가 할 일은 새로운 태도와 언어로 그 물줄기를 이어나가는 거고요. 그동안 문화재 애호 문화도 구시대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즐기지 못했잖아요. 특히, 젊은 여성들이 향유하기 어려웠죠. 제가 개인적인 감상을 풀어냈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김서울과 함께 궁궐을 걸었다. 그전에는 스쳐 지나갔던 디테일에 시선이 자주 머물렀다. 바닥에 깔린 체스판 같은 박석, 기둥 아래를 받치는 돌, 다리 위의 깜찍한 돌짐승들. 그는 빛을 받아 새파랗게 반짝이는 기와를 가리키며, 햇빛과 날씨, 계절에 따라 다 다른 푸른빛이 보인다고 했다. 똑같은 파랑이 아니라, 매번 달라지는 파랑을 섬세하게 감각하는 사람. 정직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수많은 파랑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려 깊은 안내자 김서울과 함께한 여름날의 궁궐은 유별나게 반짝였다.



*김서울

박물관을 좋아하는 유물 애호가. 대학에서 전통회화를 전공하고 문화재 지류 보존처리 일을 하다 현재는 대학원에서 박물관과 유물에 관해 공부하고 있다. 역사 성적은 엉망이었지만 유물을 향한 애정은(박물관과 유적 답사 횟수를 기준으로 하면) 남들의 세 배쯤 앞서 있다고 자신하는 문화재 덕후. 박물관에서 유물 앞 설명 카드를 읽는 대신 그저 물건을 감상하듯 재미있게 봐주기를 바라며 쓴 『유물즈』(2016)를 시작으로 『뮤지엄 서울』(2020) 등 박물관과 유물·유적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서울의 대표 유적인 고궁 역시 ‘조선왕조 500년’은 잠시 잊고 뒤뜰을 산책하듯 가볍게 거닐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을 썼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김서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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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 아나운서 “그림책을 각별하게 사랑하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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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습니다”라고, 그는 적었다. 어릴 적부터 꿈꿨던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리랜서 방송인이 되었고, 엄마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어느새 ‘문지애’는 사라지고 한 아이의 ‘엄마’만이 자리한 것 같은 날들 속에서 크게 앓았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렇기에 살아볼 만한 것이 되기도 하는 걸까. 그는 예상치 못한 길목에서 그림책을 만나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가끔은 그림책이 제 영혼의 동반자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힘든 시기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위로를 건네는 그림책들이 있었으니까요. (중략) 그림책이 저를 아주 용감하게 만들어준 게 분명합니다.” (5~6쪽)

그림책과 사랑에 빠진 후 그는 유튜브 채널 <애TV>를 시작으로 ‘그림책학교’의 원장이 되었고, 이제는 그림책 키트 배송 서비스(애TV 앳 홈)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림책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더 많은 아이들과 만나고, 다른 부모들과 교감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찾고 성장시킨 시간들이었다. 그 동안의 이야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니까』에 담겼다. 



문지애는 문지애

프롤로그에 “내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쓰셨어요.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신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제일 중요한 계기가 됐던 건 (‘그림책학교’에서 가졌던) 엄마들과의 만남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엄마들이 어렵게 꺼냈던 자기의 이야기들,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비슷한 고민, 그림책을 읽으면서 다 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풍경들, 그런 모습들이 되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거든요. ‘이걸 그냥 날려버리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 장, 한 장씩 써내려가기 시작한 게 책의 형태로 만들어졌던 것 같고요. 만약에 제가 그림책학교를 열지 않았다면 이 책이 나오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책학교라는 작은 공간에서 만나왔던 수백 명의 사람들 안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제 생각들이 조금 정리가 되면서, 책 한 권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애TV 그림책학교’에서 ‘엄마책학교’도 운영하시죠. 엄마들이 가장 좋아했던 그림책은 『엄마 셋 도시락 셋』이었다고요. 

“날마다 많은 일을 하지만 때때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기분이 든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엄마들한테 제일 크게 공감이 됐던 것 같아요. 그 대목에서 엄마들이 다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거든요. 엄마들은 다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워킹맘과 육아맘의 차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면서 내 삶을 꾸려나가는 엄마들이라면 모두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뭔가를 하고 있는데 뭐 하나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불안하고 두렵고, 스스로 조금 죄책감도 느끼고,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 셋 도시락 셋』의 그 구절을 읽을 때, 엄마들이 ‘나도 그런데 당신들도 그렇구나, 이 작가도 그렇구나, 다행이다’ 하면서 안도하는 느낌을 저는 받았던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떠셨어요? 엄마가 된다는 게, 많이 힘드셨나요? 

좀 힘들었어요. 그 정도로 힘들고 고민이 깊을 거라는 얘기를 주변에서 아무도 안 해줬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제 이야기가 아니어서 주의 깊게 듣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아기가 태어난 후에 갖게 되는 심리적인 부담과 체력적인 한계가 너무 느껴졌어요. 그러면서도 엄마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그냥 나로서 살고 싶은 욕심은 계속 남아 있는 거죠. 어쩌면 그 내적 갈등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시작하고 이루고 싶다는 욕심이 컸기 때문에 그림책학교 같은 공간을 시작해보면서 결국 이렇게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돼요. 

그렇게 고민하고 힘들어하실 때 『민들레는 민들레』를 만나신 거예요? 

그렇죠. 그림책으로 뭔가를 해본다는 계획도 없을 때였고, 그림책이라는 건 그냥 그림책 육아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 때였어요. 아마 아기를 낳고 몇 달 안 지나서였을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꼼짝을 못 하니까, 동네 서점에 가서 아기한테 읽어줄 그림책 훑어보고 사서 돌아오는 게 바람 쐬고 머리 시키는 유일한 해방구였어요. 밤에도 아기 우는 소리에 스프링처럼 일어나서 아기 방에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잠이 깨요. 숙면을 못 취하죠. 그때 『민들레는 민들레』를 보니까 전혀 다르게 읽혔던 거죠. 온전히 저에게 해주는 이야기로 느껴졌어요. 이번 책에서도 첫 번째로 『민들레는 민들레』를 소개했는데, 그만큼 저한테는 굉장히 의미 있고 특별한 책인 것 같아요. 

책에서 ‘우리 아이 독서 습관 기르는 방법’도 조언해주셨는데요. 아들 범민 군의 독서 습관은 어떻게 키우셨는지 궁금해요.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책을 읽나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렇게 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책 읽는 시간이 정해져있기는 해요. 저는 그 시간이 꼭 저녁이어야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유치원이 끝난 뒤에든 엄마의 일이 끝난 시간이든, 그건 전혀 관계없는 것 같고요. 하루에 15~20분 정도 읽고 싶은 책 두 세 권 정도는 반드시 읽는 시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가능하면 아이가 조금 침착하게 잠들기 위해서 책 한 권을 같이 읽어주면서 잠들고요. 책만 읽고 끝나는 것에서 흥미를 못 느끼면, 읽은 후에 할 수 있는 스케치라든지 쓰기라든지 그림 그리기 같은 걸 해보면서 끝내요. 그 정도는 비교적 매일매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있죠. (웃음) 어른들은 한 장씩 넘겨서 스토리를 다 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애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자기가 꽂혀 있던 그림을 먼저 본다든지, 사실 애들한테는 순서라는 게 없어요. 저도 처음에는 책 한 권을 잘 읽어야 ‘다 읽었다, 책 육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을 만나고 또 제 나름대로 공부도 해보니까 그건 아니더라고요. 하루에 15분 정도 아이가 책이랑 가까워지고, 아이가 직접 책의 물성을 만져보고, 그림 하나와 책 제목 정도를 기억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오히려 책 육아를 하면서 ‘책을 몇 권 읽어야 돼’라는 부담을 내려놓고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었어요. 책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는 딴 곳에 가 있거나 안 듣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계속 엄마가 책을 잡고 있으면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어찌됐건 다시 돌아와서 ‘우리 오늘은 이 책을 읽었다, 책의 제목은 무엇이다’ 하고 끝내면 그날의 책 육아는 마무리되는 거죠. 

“멋있게 졌어?”

읽기 습관을 길러주려면 ‘읽는 시간을 즐겁게 느끼도록’ 만들어줘야 할 것 같아요. 

어른들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어른들도 자신의 읽기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은 베스트셀러나 필독서라고 해도 안 읽고 싶고 재미가 없어지잖아요. 제일 중요한 게 ‘아이의 첫 책으로 어떤 책을 골라서 보여주느냐’, ‘어떤 책을 함께 읽느냐’인 것 같아요. 그 결과 아이는 책을 ‘재미없는 것, 어려운 것’ 또는 ‘재미있는 것, 쉬운 것’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엄마들이 아이의 책을 선택하는 과정을 가장 어려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부분에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번 책에) 간략하게 적어놓은 내용들이 있어요. 

아이와 같이 책을 읽으실 때, 주로 어떤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이끌어내시나요?

요즘의 컨디션을 많이 물어보는 것 같아요. 저희 아이 같은 경우에는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도 강한 편이에요. 제가 볼 때는 분명히 강한 아이가 아니거든요. 집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만 밖에 나가면 어떤 공격을 받았을 때 당황스러워서 말을 잘 못하거나 얼어버리는 아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 때 그걸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얘기는 다 하면서 불편했던 감정에 대해서는 저한테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혹시나 그런 부분들을 계속 감추거나 아이한테 스트레스가 될까 봐 책을 읽으면서 요즘 가장 속상했던 일이나 너의 마음은 어땠는지, 이런 마음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걸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실 엄마들이 그림책 육아를 하는 목표는 두뇌 발달 같은 거라기보다는 정서적인 안정이 제일 크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그 부분을 가장 놓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화가 나서 그랬어!』가 오랫동안 범민 군의 책장에 꽂혀 있으면 좋겠다고 하신 거죠? 

네, 그렇죠. 아이의 컨디션을 묻는 게 일상적인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크고 나면 꼭 그림책을 통해서 묻지는 않겠지만 ‘요즘 기분이 어떤지, 힘든 건 없는지’를 묻고 답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림책 육아도 ‘나와 내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그림책을 읽으면서 어떤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건, 공통적으로 하나로 모아졌었던 것 같아요. 책의 내용은 다 다르지만 결국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은 엄마의 관심과 사랑과 행복인데, 그 행복이 자기만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인 거죠. 그래서, 이게 굉장히 뻔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엄마로서 부모로서 행복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아이의 꿈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이의 행복도 함께 보장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여러 가지 그림책을 통해 결국 얻은 것은 아이에게는 우리의 행복을 지켜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의 행복도 잘 지켜나갈 수 있을 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충족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해왔던 것 같아요.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를 소개하시면서, 남편 전종환 아나운서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굉장히 뭉클하던 데요. 

남편도 저와 범민이 때문에 그림책을 제법 보게 되는 편인 것 같아요. 가끔 서점에 가면 좋은 그림책을 잘 골라오기도 하고, 쌓여있는 아이의 책 중에서 ‘나는 이 책이 좋더라’ 하고 보여줄 때도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였던 것 같아요.



두 분이 같이 좋아하시는 책이군요. 

네, 남편도 굉장히 좋아했던 책이에요.

『네가 일등이야!』를 소개하시면서 이렇게 쓰셨어요. “아이가 승부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왜 졌어?”라고 말하기보다는 “멋있게 졌어?”라고 묻는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남편 전종환 아나운서의 에세이의 제목도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인데요. 두 분이 ‘잘 지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이십대 때부터 쭉 만나왔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만나오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참 잘 살아왔던 사람이었는데 ‘어떤 자리에 갔느냐’ 내지는 ‘이겼느냐, 졌느냐’,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는 시점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것을 이루었느냐보다는 이루지 못했을 때 망가지거나 멋있지 않게 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저희가 공통적으로 봐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고 가장 멋있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가장 잘 지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왔던 것 같고요. 

작가님은 ‘멋있게 질 줄 아는’ 사람인가요?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늘 이기고 싶어 하고 욕심도 많고 그리고 ‘잘 졌다’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실패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책 제목(『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대로 살아왔던 사람이거든요. 그런 남편 옆에서 제가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졌을 때도 멋있게 지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고 좋아 보였어요. 그래서 우리 아들이 저보다는 아빠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책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나 싶어요.

만약 범민 군이 ‘엄마, 멋있게 지는 게 어떻게 지는 건데?’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 것 같으세요?

음... 자기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 ‘내가 졌기 때문에 못난 게 아니고 실패한 게 아니고, 그래도 나는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책이었으면

『쿵쿵이와 나』에 대해 쓰신 글이 있는데, 퇴사 당시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때는 작가님 안의 ‘쿵쿵이’가 많이 컸었나요?

쿵쿵이가 가장 컸던 시기를 꼽으라면 입사 초기, 그리고 퇴사 후 프리랜서로서의 초기일 것 같아요. 입사 초기 저의 쿵쿵이는 어떤 두려움으로 느껴졌다기보다는 어떤 걱정이 더 많았었다고 한다면,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의 쿵쿵이는 전혀 달랐었던 것 같아요. 아마 제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꼽으라고 하면 그때의 5~6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일단 저는 굉장히 조직에 맞는 사람이거든요. 조직 안에서 루틴하게 제 일들을 하고 늘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는 그 삶이 저한테는 훨씬 편안하고 본성이 더 맞는 자리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나오게 됐어요.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정말 낭떠러지에 저 혼자 서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뭔가를 해나가고 싶고, 해나가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길이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쿵쿵이는 진짜 거대했었죠. 그리고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 커졌어요. 그런데 조금씩 경험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줄어들더라고요. 이제는 어느 정도 제 몸에 적당한 사이즈의 쿵쿵이하고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쿵쿵이와 나』가 처음 나왔을 때 ‘이건 너무 내 얘기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웃음) ‘이 책은 어른들한테 꼭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튜브를 통해서도 한번 소개를 했었고요. 이번 책을 쓸 때도 빼놓을 수 없었죠.

책을 읽어 보면 ‘프리랜서 아나운서로서 나의 역할, 나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셨던 것 같아요. 답은 찾으셨나요?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길이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방송에서 조금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 사람들에게 ‘요즘 어디 나오시잖아요, 잘 보고 있어요’ 하는 익숙했던 인사들을 듣는 것, 그게 프리랜서 방송인이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요. 아예 새로운 일들을 해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어요.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꼭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일이 아닐지라도, 저의 삶을 부지런히 이어지고 있고 그렇게 해서 조금씩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어요. 그럴 때 ‘답이 하나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미디어 환경들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가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잘 가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행자를 벗어나서 저의 콘텐츠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자리에 서보는 일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돼요. 

‘좋은 그림책’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갖고 계실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좋은 그림책은 여백이 많은 것 같아요. 아이에게도, 어른들에게도. 글이 다 전하지 못하는 메시지를 그림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 좋은 그림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제가 이번 책에서도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에게 좋은 그림책과 다른 아이들에게 좋은 그림책은 다를 수 있거든요. 우리 아이에게 가장 좋은 그림책은 ‘우리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책, 우리 아이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아요. 

이번 달 ‘애TV 앳 홈(그림책 키트 배송 서비스)’에서 선정한 책이 『가만히 기울이면』이죠? 말씀처럼 여백이 많은 그림책이에요. 이런 책은 아이에게 그림을 잘 설명해줘야 하는데, 작가님은 어떻게 하세요?

주로 질문을 하죠. 분명히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그림이지만 아이한테 그걸 이야기해 줄 필요도 없고 아이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잖아요. 저는 엄마가 느낀 것과 아이가 느낀 것을 그냥 나누라고 말씀드리는 것 같아요. 특히 글 없는 그림책은 엄마들이 소개해주기 힘들어 하거든요. 그럴 때는 그림책에 스토리를 붙여서 이야기를 들려주시라고 해요. 한 장씩 넘기면서 등장인물을 정해 두고 스토리를 붙이면서 그림책 읽기를 하라고 말씀드리거든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아이들한테 어떻게 느껴지는지, 이 인물이 뭘 하고 있는 것 같은지, 다음 장에는 어떻게 변한 것 같은지, 그래서 이 책이 너한테 어떤 감정을 줬는지, 이런 걸 물어가면서 답을 찾아가라고 말씀드리고 있어요. 정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림책의 그림들을 보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을 것 같아요. 서로 질문하고 느낌을 나누면서 그림책을 활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이번 책에 소개된 그림책 중에 꼭 추천하고 싶은 한 권을 꼽는다면요?

아마 『아름다운 실수』라는 책일 것 같아요. 제가 워낙 많은 이야기를 했었고, 이 책과 함께 했던 수업이 그림책학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냈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수업의 하나로 꼽고 있고요. 어른과 아이들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저는 큰 고민 없이 『아름다운 실수』를 고를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니까』는 어떤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으세요?

갑작스럽게 환경이 변화해서 당황스러운 분들, 예를 들면 퇴사라든지 출산이라든지 아니면 결혼이라든지, 생각했던 것보다 내 주변 환경이 훨씬 더 갑작스럽게 변화해서 당황하고 있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겠어요. 특히나 여성들에게 이 책이 작은 시작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문지애

2006년 MBC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뉴스데스크], [피디수첩], 라디오 [푸른 밤 문지애입니다] 등을 진행했다. 2012년 프리랜서 방송인이 되었다. 2017년 범민의 엄마가 됐고 그림책과 인연이 닿았다. 인왕산과 경복궁이 보이는 서촌에서 애TV그림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 : 애TV
인스타그램 : iam_jiae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니까
        
문지애 저
        
한빛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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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아득하고 미래는 막막할 때, 스멀스멀 마음에 불안이 피어난다. 저 멀리 앞서가는 이의 등을 보며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초조함과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사실은 나도 그렇다’’라고 말해 주는 이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는 구글 수석 디자이너 김은주가 갖가지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고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쓴 글을 모은 책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격려의 메시지와 함께 25년간 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일하며 배운 것들을 모았다. 스물일곱, 영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김은주 저자는 구글 수석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과 자괴감을 이기고 ‘일단 저지르자’라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자기계발은 집 짓는 일과 비슷해요 

블로그에 쓴 글이 묶여 책으로 나왔어요.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서른 즈음 분들의 반응이 더 컸다고요. 

대학생들보다 서른 즈음의 분들이 더 불안해하시더라고요. ‘멘붕’ 상태에 있는 것 같았어요. 대학생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한다면 서른 즈음의 분들은 이제 준비할 시간도 없다고 생각해서 조급한 거예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갈 수도 없고, 지금까지 해온 걸 앞으로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어렵고요. 

처음 블로그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요?  

2020년 8월 즈음부터 쓰기 시작했는데요. 당시에 ‘우물 안 개구리’라는 글을 써서 구글 직원들에게 공개했는데 반응이 좋았거든요. 그게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그 이후 글로써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라인 강연을 하면서 대학생, 취업준비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많은 분이 제가 그 나이 때 했던 고민을 똑같이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글로 써봐야겠다 싶었죠. 

말씀하신 대로 ‘우물 안 개구리’라는 글이 구글 직원들 사이에서 화제였다고요. 어떤 마음으로 쓴 글인가요?

사실 그 글을 처음 쓴 건 10년 전이에요. 미국 생활 10년차 되었을 때, 30대 후반에 쓴 글인데요. 미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매일 자괴감을 느낄 때였어요. 나름 한국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미국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나하는 생각을 매일 했거든요. 회사만 가면 말도 잘 못하고, 못 알아들으니까 바보 같은 거예요. 그러던 중에 심리 상담 받고 주변 사람들하고 이야기해 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정리해서 쓴 글이었어요. 

그러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한 거고요?  

네 인터넷에 글을 올린 건 한참 뒤였는데요. 구글에서 일하면서 힘들어서 심리상담을 받았는데 심리상담사가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써놨던 ‘우물 안 개구리’라는 글을 올렸어요. 작년에 구글에서 평가를 시작한다고 해서 사내에 공유했고요. 제가 영어로 처음 쓴 글이었거든요. 올릴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완벽한 준비는 없다는 생각에 일단 저지른 거죠. 

구글 직원들도 자괴감이나 불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더라고요. (웃음) 

불안하지 않은 직장인이 있을까요? 구글 직원들도 마찬가지예요. 구글에서 신입 직원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요.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으니 일하다 ‘나는 부족해’, ‘실력이 없어’와 같은 생각이 들면 당신만 그러는 게 아니니 상담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으라고 알려줘요. 얼마나 많으면 오리엔테이션에서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겠어요. 

회사 생활하다 보면 업무 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게 스트레스, 마음 관리인 것 같은데요. 책에도 일하면서 가져야 할 마음,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처음에 블로그를 시작할 때는 커리어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그런데 강연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이 책을 보고 자기계발서와 에세이를 합쳐 놓은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자기계발은 집 짓는 일과 비슷한 것 같아요. 집을 지으려면 일단 기초 공사를 하고 골조 공사와 내외장 공사를 해야 하잖아요. 제일 중요한 게 기초공사인데 자기계발의 기초 공사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거거든요. 

내면의 힘이 있어야 자기계발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말로 들리네요. 

건물의 기초가 튼튼해야 외부에서 충격이 왔을 때 적절히 분산함으로써 충격을 완화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해야 무너지지 않고요. 자기계발도 마찬가지예요. 열등감이라는 충격이 오면 자존감이 중심을 잡아주고, 초조함이 생기면 가족애가 잡아주는 식으로 내면의 힘이 바탕이 되어야 다른 것들을 하면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어요. 



실패를 기준점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

실패의 필요를 강조했어요. 가장 좋은 약이 된 실패 경험이 있다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에 실패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디자인을 공부했으니까 꼭 홍대를 가고 싶었어요. 전공보다는 타이틀이 우선이었고, 점수에 맞춰서 지원했는데 떨어졌죠. 그제야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데?’라고 자신에게 묻기 시작한 거죠.

‘실패를 기준점으로 삼으라’는 말이 좋았는데요. 몸소 보여주셨네요. (웃음) 

‘실패가 기준점’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제 커리어 트랙은 새로운 걸 찾는 과정이었거든요. 웹 디자인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웹 디자인을 해야 했고, 증강현실이나 웨어러블이 생소했을 때 도전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모르는 게 당연하고 안 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구글도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라고요. ‘구글은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보는 곳’이라는 비유가 재밌었어요. 처음에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어색했죠. 딱 봐도 안 되는 걸 계속하는 거예요. 그간 일한 경험이 있으니까 어떤 프로젝트를 보면 ‘저건 상품화 안 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걸 끝까지 하는 사람이 있어요. 윗사람들도 말리지 않고요. 

좋은 태도이지만,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윗사람들이 실패할 걸 몰라서 내버려 두는 건가 싶었어요. 답답하더라고요. 저도 구글 문화에 적응 못 했던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중요하더라고요. 실패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배우게 되기도 하고, 결과는 알 수 없는 거거든요. 다른 팀에서는 다 실패했는데 어떤 팀은 성공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약간의 가능성을 막지 말고, 안 될 거라고 단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일단 해보는 과정에서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내버려 두는 측면도 있어요. 그 직원이 이 프로젝트에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계기로 성장할 테고, 그러면 언젠가 다른 상황에서 기여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실패도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UX디자이너에게 코딩능력보다 중요한 건 문제해결력, 문제정의력이라고 했어요. 내가 이 능력을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측정하는 법이 있다면요?

예를 들어 명함 지갑을 만든다고 가정해 볼게요. 그러면 최소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 질문하고 이에 대해 답할 수 있는지 보시면 돼요. 이를테면 이걸 왜 꼭 우리 회사에서 만들어야 하는지, 이게 없으면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길래 우리가 이걸 만드는 건지, 이걸 만들면 그 어려움이 해결되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하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구체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지 알아야겠네요.

그게 문제정의력이고 문제해결력이거든요. ‘명함 지갑 만들어야 하니까 디자인해’라고 하면 대부분 디자인부터 하느라고 바빠요. ‘어떻게 하면 예쁘게 디자인할까’만 골몰하는 거죠. 실패하는 상품의 패인을 분석해 보면 ‘Why’에 대한 정의가 잘 안 되어 있을 때가 많아요. 문제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니까 해결이 안 되고, 실패해도 왜 실패했는지 모르는 거죠. 앞단에서 문제를 명확히 정의해야 실패했을 때 앞으로 돌아가서 다른 걸 시도해 볼 수 있거든요. 

그러면 일상에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면 문제정의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요?

그럼요. UX 디자이너는 사람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잖아요. 일상에서도 UX 디자이너의 촉을 세우고 있어야 해요. ‘저 사람은 왜 저런 동작을 할까?’, ‘사람들은 왜 이걸 안 사고 저걸 사는 걸까?’와 같은 것들을 궁금해야 해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이 있으면 좋아요.  

서로를 평가하는 ‘다면평가’ 이야기가 나와요. IT 기업에만 있는 선진 제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최근에 한국에서 ‘다면평가’와 관련한 이슈가 생겨서 궁금해지더라고요. 과연 좋은 제도인가 싶어서요. 

말씀하신 대로 최근에 한국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꼭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면평가가 미국 문화와 교육 시스템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제도라는 사실이에요. 미국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거든요. 성장에 보탬이 되는 피드백을 주고받는 훈련이 되어 있어요. 피드백을 잘하는 게 능력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이런 문화 기반 없이 제도만 가져가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제도가 원래 목적대로 잘 시행되려면 문화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해요. 오랜 훈련이 필요하고요.  

그러면 실제로 구글에서 ‘다면평가’를 하면서 느낀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좋은 점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관심을 두게 한다는 거예요. 서로 경쟁하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고 함께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실제로 탄탄한 문화 기반에서 다면평가를 잘 시행하면 구성원이 함께 성장하는 걸 확인할 수 있고요. 아쉬운 건 자신의 성과나 장점을 잘 어필하지 못하는 성향을 가진 분들에게는 어려운 제도라는 점인데요. 어딜 가나 일만 잘하고 사회성을 떨어지는 분들이나 자기 PR을 못하는 분들 있잖아요. 이런 분들은 정확하게 평가받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그래서 매니저가 이런 사람들을 잘 챙겨야 해요.


 

10%만 맞아도 나한테 맞는 일

‘10% 맞아도 나한테 맞는 일’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꿈’을 강조하는 자기계발서의 흔한메시지와 달라서요. 

저한테 ‘프로 이직러’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많은 분이 제가 큰 야망을 품고 도전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게 아니라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돈벌이가 되는 일들을 선택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남의 돈 버는 일은 원래 어려운 거잖아요. 신나기만 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웃음) 기본적으로 일은 밥벌이인데 그러다 가끔은 ‘그래도 이 일 하길 잘했다’ 또는 ‘오늘 재미있었다’라는 마음이 10%라도 들면 그 일이 나한테 맞는다는 거죠. 물론 1년 내내 죽을 것 같다면 다시 생각해야겠지만요.

이직한 회사에서 1년 정도가 제일 힘들었다고요. ‘프로 이직러’로서 이직한 곳에서 잘 버티는 비결이나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있다면요?

그 전에 다른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고정관념을 가지고 새 회사에 들어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적응이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새 회사에 업무 방식이나 프로세스 같은 것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한데 경력이 쌓일수록 유연성이 떨어져요. 해오던 버릇이 있고, 내가 하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는데요. 나를 믿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회사가 나를 뽑았고, 나를 뽑았다는 건 내가 필요하다는 뜻이잖아요.  

회사 내에서 자기 PR을 잘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기’를 꼽은 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이 있을까요?

자기 PR을 잘하기 위해서 인정과 칭찬의 말을 한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다 보니 결국 자기 PR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요. 제가 좋은 물건이나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굉장히 흥분하는 사람이거든요. (웃음) 꼭 찾아가서 ‘좋았다’고 말하고, 소문을 내요. 좋은 걸 좋다고 말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동료들이 저랑 일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자기 성과가 빛이 나니까요. 

알아주는 일의 선순환이군요. (웃음) 

맞아요. 별것 아닌 일을 제가 대단한 것처럼 알아주니까, 다른 사람이랑 했으면 조용히 묻혔을 일들이 멋지게 회자되는 거예요. 그렇다 보니 저랑 일하고 싶어 하고, 나중에 제가 어떤 일을 도와달라고 할 때 호의적이고요. 사람이 생각보다 감정적인 동물이거든요. 저한테 좋은 감정,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다른 사람한테 제 이야기를 해요. 결국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그 사람의 성과를 알아주는 일이 제 평판과 네트워크로 돌아오는 거죠. 

얼마 전에 일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고 들었어요.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터닝 포인트가 되는 강연이었어요. 디자인 비전공자들 대상으로 디자인이 아닌 제 이야기를 한 첫 번째 강연이었거든요. 많이 긴장했고,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요. 일하면서 겪은 슬럼프와 그걸 극복한 이야기를 하니까 다들 공감하시더라고요. 이야기를 듣다가 우는 분도 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울컥하고, 부흥회 같은 분위기였어요. (웃음)



상상하게 되네요.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감정이나 경험이 공유되었을 테니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됐을 것 같아요.(웃음) 일하는 여성들의 모델로서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일하는 아시아 여성으로서 좋은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미국에 있는 아시안 친구가 자기가 지금까지 만난 매니저들은 다 남자였고, 원어민 아닌 여성 리더는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길이 보이는 것 같대요. 아시아인이면서 여성이고, 원어민도 아닌 제가 리더로 일하는 걸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말 기뻤어요. 이렇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계속하려고 해요.  




*김은주

구글 수석 디자이너. ‘일단 저지르면 수습할 힘이 생긴다’라는 믿음으로 지난 25년간 열 번의 이직과 열한 번의 취업에 성공한 글로벌 직장인. 이름 없는 조력자의 삶을 살다가 삼성전자 근무 시절 디자인한 세계 최초 원형 스마트워치의 성공으로 직장 생활 20년 만에 업계의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현재는 구글 본사의 핵심 부서인 검색과 인공 지능 팀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
김은주 저
메이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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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작가 서현 “달걀프라이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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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상상력과 유머, 카타르시스가 담긴 그림책을 선보이는 작가 서현이 4년 만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형제책 『호라이』 『호라이호라이』를 출간한 것. 전작 『눈물바다』 『커졌다!』 『간질간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했던 달걀프라이가 이번 작품의 주인공 ‘호라이’로 새롭게 탄생했다. 호라이는 밥 위에서 머리 위로, 교실로, 수박 속으로, 자유롭게 시공간을 날아다닌다(『호라이』). 선언하듯 “밥 위에만 있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우주에 다다르기도 한다(『호라이호라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호라이의 행보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거대한 세계로 나아가는 그의 모험은 흥미진진하다. 

서현 작가는 2009년 발표한 『눈물바다』를 시작으로 『커졌다!』 『간질간질』 등 세 권의 창작그림책을 발표했다. ‘유쾌한 상상력으로 어린이의 마음을 그리는 작가’로 평가받으며, 누구나 즐겁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그린다. 『간질간질』로 ‘2017년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 ‘호라이’

『눈물바다』 『커졌다!』 『간질간질』에 공통적으로 달걀프라이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달걀프라이로 이야기를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다고요.

네, 맞아요. 

그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전작들에 모두 달걀프라이가 등장한다는. 

되게 우연히 발견하게 됐어요. 개인적으로 달걀프라이 자체에 대한 이미지도 좋았고, 또 제가 달걀프라이를 먹는 것도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달걀프라이의 모양이나 이미지가 귀엽고 따뜻하잖아요. 포근하고, 엄마 생각도 나고, 색깔 조합도 너무 예쁜 것 같아요. 달걀프라이에 대한 좋은 기억과 이미지가 있어서 그림책에 조연이나 요소로 조금씩 출연을 시켰었어요. 『눈물바다』에서는 달걀프라이를 쓴 고양이가 나오고 『간질간질』에서는 엄마가 달걀프라이를 요리하는 식인데요. 아이들이 볼 때는 자기가 평소에 즐기던 요리가 등장하는 게 되게 재밌었나 봐요. 그래서 수시로 질문을 받았어요. 

‘여기에 왜 달걀프라이가 나와요?’라고 물어봤던 거예요?

네. 그래서 세 권의 책을 봤더니 다 달걀프라이가 나오더라고요. ‘이렇게 재밌는 요소를 나는 왜 항상 조연으로만 등장시켰을까? 달걀프라이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상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호라이』 『호라이호라이』에는 각각 특별부록이 들어 있습니다. 작가님의 아이디어였나요?

네. 제가 만화도 되게 좋아해서 나중에 꼭 한 번 만화책을 그려보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그리고 만화 중에서도 4컷 만화의 리듬감을 좋아하는데요. 전체적인 큰 줄거리와 흐름이 있기는 하지만, 4컷으로 끊으면서 에피소드들이 아주 경쾌하게 끝맺음 되잖아요. 그런 것들을 되게 좋아해서 어디선가 4컷 만화를 작업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책을 내면서 편집부랑 조금 더 재미 요소를 넣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4컷 만화를 넣으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별책부록처럼 끼워 넣는 형식으로 그려보자고 해서 Q&A와 작업 과정을 짧게 그려봤어요. 

특별부록에서 말씀하시길, 처음에는 세 권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제가 자유롭게 달걀프라이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떠오른 에피소드가 서너 가지 정도 있었어요. 그 중에서 재밌는 것 하나만 추려서 그림책으로 완성하기보다는, 하나의 소재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을 조금 가볍게 여러 권으로 묶어서 내는 것도 의미 있고 재밌는 작업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출판사에 말씀을 드렸고 편집부에서도 재밌겠다고 이야기를 해주셔서 세 권으로 진행을 하다가, 중간에 편집자 분이 한 번 바뀌었어요. 그 분이 에피소드를 살펴보시고 ‘여러 개로 가는 것도 괜찮지만 조금 더 줄이고 정리해서 깔끔하게 이야기들을 완성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 조언을 받아들이셨군요. 

저도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더라고요. 나쁜 마음이 아니라, 작가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들을 바꾸거나 굽히기가 조금 어렵잖아요. 어느 정도 진행이 되어 있던 상태였으니까요. 어디를 어떻게 수정해야 될지 너무 막막하고 어떻게 합쳐야 될지 너무 걱정이 돼서, 처음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한번 시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준비 중이던) 세 편 중에 한 편이 『호라이』였는데, 그대로 정리를 해서 출간이 됐고요. 나머지 두 편은 정리되고 합쳐져서 『호라이호라이』로 완성이 됐어요. 



『호라이』의 주인공이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작품 속에서 달리기도 하고 인터뷰이도 되잖아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호라이’는 어떤 존재인가요?

달걀프라이는 계란에서 태어났잖아요. 대체로 알에서 부화한 것들은 무언가가 되는데, 달걀프라이는 병아리가 되지 못한 존재인 거예요. 한편으로 너무 슬펐어요. 완성형의 생명체가 된 것도 아닌 되게 애매한 상태라는 게. 그런데 한편으로는 굉장히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병아리가 돼서 나중에 닭이 되는 게 아니라, 뭐가 될지 모르는 상태인 거예요. 생명을 갖고는 있지만 아직 무언가가 되지 않은, 알 속에서의 그 상태에 있잖아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이 아이가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상상을 펼치게 됐고, 나중에는 이 아이가 꼭 달걀프라이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라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으신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먹을 것으로서의 달걀프라이가 아니라 그냥 이 아이 자체가 어떤 상상력의 덩어리나 매체, 무언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름을 새로 붙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금은 다른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어서 새롭게 명명했다고 해야 될까요. (웃음) 그리는 동안 저도 호라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달걀프라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유롭게 상상했으면

『호라이』 『호라이호라이』를 연결해서 읽는 분도 계실 것 같고, 다른 이야기로 보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은 각각의 다른 상상으로 시작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리면서 자꾸 바뀌더라고요. 책에서 직접적으로 같은 이야기라고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림책 안에 약간의 연결고리가 있기는 해요. 그런데 같은 캐릭터라고 생각하셔도 좋고, 그냥 새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아요. 

두 권의 톤이 다른 것 같아요. 그리는 방식을 달리 하셨나요?

그리는 방식은 처음부터 조금 다르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재료나 그리는 방식, 장면 구성 등을 다 생각해서 나름대로는 이야기에 어울리게 작업한다고 했지만, 보시는 독자 분들은 어떠실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두 권이 시리즈라기보다는 형제책이라는 이름으로 동시에 선보이는 책이다 보니까, 비슷한 느낌이 들도록 그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처음부터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렸던 것 같아요. 『호라이』는 조금 더 다양한 컬러로 라인이나 형태도 조금 단순화해서 진행했다면 『호라이호라이』는 노란색과 흑백으로만 표현을 했어요. 이야기의 흐름과 호라이라는 캐릭터에 조금 더 집중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작업한 것 같아요. 

『호라이』 『호라이호라이』를 동시 출간하신 이유가 있나요?

제가 두 권이 같이 나오는 걸 꿈꿨었어요. 뭔가 시리즈랑은 되게 다른 느낌이잖아요. 저는 두 권이 함께 나와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같이 나올 수 없을까 해서 의논을 드렸고, 출판사에서도 그게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따로 출간했다면 시리즈로 인식됐을 수도 있겠어요. 

네. 그리고 출간 일정을 나누어버리면 1권 2권 하는 식으로 순서를 정하게 되잖아요. 저의 의도는 그런 건 아니었거든요. 어떤 것을 먼저 읽어도 상관이 없고, 시리즈가 아니라 그냥 같이 읽는 책이기를 바랐어요. 어떻게 보면 독자들에게 ‘이 중에서 재밌어 보이는 걸 선택해서 읽어주세요’ 하는 느낌이어서, 함께 나오는 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호라이호라이』의 시작은 주인공이 “밥 위에만 있고 싶지 않아”라고 하면서 뛰쳐나가는 거예요. 왠지 뭉클했어요. (웃음)

저도 생각해 봤는데, 만약에 제가 병아리가 아닌 호라이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되게 막막하고 ‘난 뭘까?’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사실은 없어진 이야기 중에, 엄마 닭이 알을 7개 정도 낳았는데 나머지는 모두 병아리로 태어나고 혼자만 호라이로 태어난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렇게 되면 더 직접적으로 비교를 하게 되잖아요. ‘형제들과 달리 나만 왜 이렇게 물렁하고 이상한 모습일까’ 사실 그런 것들이 짬뽕되면서 『호라이호라이』가  된 건데, 그 부분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없앴어요. 그래도 거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출발하다 보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존재로 세상에 던져지면 ‘난 뭘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거든요. 

뛰쳐나간 호라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길 바라셨나요? 호라이가 어떤 경험을 하길 바라셨어요?

그냥 뭔가... ‘그래, 나는 물렁물렁하고 연약하지만 정말 소중해’ 이런 식의 결말은 너무 싫었어요. (웃음)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그래도 나에게는 다른 장점이 있어’라고 직접 말하면서 깨닫는 과정은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서 이 아이를 멀리 멀리 보내버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어떤 걸 가진 아이라고 표현하고 싶더라고요. 

잠재력 같은 건가요?

네. 그래서 진짜 우주로 보내버렸나 봐요. (웃음) 어떻게 보면 『호라이』처럼 『호라이호라이』의 주인공도 하나의 상상의 덩어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상상을 하다가 어느 순간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 ‘이건 말도 안 돼’ 하면서 상상을 멈추게 되잖아요. 그런데 멈추지 않고 그냥 자유롭게 상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비록 말도 안 되고 현실이 되지는 않더라도 ‘상상인데 뭐 어때’ 하는 생각으로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호라이를 보면서 ‘너라도 좀 자유로워져라’ 이런 느낌도 들었고요. 저도 호라이를 멀리 보내버리니까 되게 재밌었어요. 



그런 마음이 『호라이』에도 담긴 것 같아요. 주인공이 아주 다양한 곳들을 자유롭게 다니잖아요.

사실 처음에는 어떤 아이의 상상이 가 닿는 곳에 호라이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그런 의도로 제가 여기저기에 호라이를 놔봤는데, 나중에는 갑자기 캐릭터가 생명을 얻게 되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언제부턴가 인터뷰도 가고, 또 다른 데도 가고, 그러면서 저도 즐겁게 호라이의 뒤를 쫓아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호라이가 ‘상상’이라는 생각을 하면, 순간 저도 제 책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상상이 적을 수도 있고, 갑자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고, 그렇게 상상 자체가 생명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면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중에는 ‘이 아이는 단순한 달걀프라이가 아니고 상상 그 자체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린이 독자를 상정하고 작품을 만들지는 않으신다고 들었어요.

네. 『눈물바다』 『커졌다!』『간질간질』 모두 어린아이가 주인공이기는 했지만 ‘이 책의 독자는 유아,어린이야’라고 생각하고 그리지는 않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주인공이 아이들이기도 하고, 또 그림책의 형식이다 보니까, 아이들이 특히 많이 읽어주는 거죠. 그런데 아이들만을 위한 책으로 정해서 가다 보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만들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선을 긋는 건 싫더라고요. 『간질간질』 같은 경우도 텍스트가 짧고 간결하고 의성어로 많이 이루어져 있다 보니까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훨씬 재밌어 해주고 더 많이 읽는 것 같은데요. 사실 그건 상관없는 것 같아요. 작가가 독자를 한정해서 발표한 건 아니지만 선택하는 건 독자들의 몫이니까요. 그런데 성인 분들도 아이들처럼 똑같이 재밌게 즐겨주시면 더 좋기는 하죠.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든 다음에 읽어주시면 조금 더 재밌지 않을까요?

요즘은 ‘그림책=어린이책’이라는 인식이 많이 없어졌잖아요. 작가님이 활동하신 10년 동안 일어난 변화이기도 하죠?

제가 성격상 외부 활동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그런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지는 못하는 편인데요. 그래도 확실히 많이 달라진 것 같기는 해요. 10년 동안 출간되는 그림책의 스타일이나 분위기도 굉장히 많이 달라진 것 같고, 독자 분들이 생각하시는 그림책에 대한 이미지도 많은 변한 것 같아서, 저는 되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림책을 단순히 어린이들이 보는 책으로 치부하시는 게 아니라 장르로써 이해하고 접근해주시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그런 흐름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상상의 시작점

늘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시잖아요. 작업 과정에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길 바라시고요. 작가님에게 ‘재미’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아직까지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나는 왜 이렇게 즐겁고 유머러스한 것들을 좋아할까. 이야기도 그렇고, 일상생활에서도 유머의 요소가 들어있는 것들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꼭 대중적인 게 아니더라도 저에게 어떤 감흥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해요. 그 이유는 더 살면서 더 나이를 먹으면서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요. 지금으로서는 어찌됐건 제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이 웃음과 재미 같은 부분들인 것 같아요. 작가로서 이야기를 할 때도 내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그것들이 독자들에게 진정성 있게 와 닿을 수 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생각하고 상상하다 보니까 늘 이야기가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이번 책의 작가 소개에 “하루 한 가지씩 재미난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문장이 있어요. 

그건 어떻게 보면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매일 작게라도 뭔가 재밌는 걸 발견하고 싶다는 마음인 것 같기도 해요. 

요즘에는 어떤 재밌는 일을 하고 계세요?

사실은 한동안 그림책을 만드는 게 조금 스트레스였어요. 다른 분이 쓰신 글의 그림을 그리는 일도 함께하고 있는데, 그 마감에 시달리다 보면 이미 에너지가 소진돼서 정작 제가 만드는 창작그림책을 하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이번 책이 조금 늦게 나온 부분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호라이』 『호라이호라이』를 통해서 다시 그림책 만드는 재미를 찾았어요. 빨리 다음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오늘은 독자 분들한테 편지를 쓰다가 왔는데, 그게 재밌었던 것 같아요. 서포터즈 분들 중에서 열 분을 뽑아서 선물을 드리는데, 제가 직접 편지를 써드리고 싶었어요. 아주 길게는 쓰지 못했지만 ‘제 마음을 받으세요’ 하는 마음으로 (웃음), 짧게나마 편지를 썼는데 재밌었어요. 

어렸을 때는 만화가가 꿈이었다고요. 만화로 할 수 있는 이야기와 그림책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으로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것도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책이 그림책이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만화책도 그림책도 다 포함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충분히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화가 갖고 있는 특유의 어떤 것들, 예를 들면 장면 연출이라든지 그것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섬세함이나 리듬감을 굉장히 좋아해서요. 그것에 어울릴 만한 이야기로 만화책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습작이 조금 있기는 한데 아직 정식적으로 완성을 하지는 못해서 조만간 한 번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고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요새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림책이 됐든 만화책이 됐든 저의 책이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농담이었으면 좋겠다는. (독자들이) ‘농담 한 권 참 재밌게 읽었다’는 기분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농담이 그냥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사실은 그 안에 삶의 페이소스도 묻어 있잖아요. 살면서 경험한 것들을 재미난 농담으로 풀어낸다는 생각으로 책을 만들고 싶고, 그게 독자 분들에게도 전해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호라이』 『호라이호라이』 재밌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유머도 감동이다’라는 말을 되게 좋아하는데요. 마음에 남는 농담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머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호라이』 『호라이호라이』를 읽은 독자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독자들 각자의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그런 의도를 담은 책도 아니고요. 사실 『간질간질』 같은 경우는 ‘이 책을 읽고 그저 즐거우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감정이 남으면 이 책이 할 일은 다 한 거다, 그 감정을 독자가 느끼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 부분은 『호라이』 『호라이호라이』에도 계속 이어져 오는 저의 바람이지만, (독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상상 외에 더 많은 상상을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독자에게 상상의 시작점, 문을 열어주는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서현

노란색을 정말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 노란 호라이처럼 숨어 있는 유머를 찾아서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여행자이기도 합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재미난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림책 작업도 하고 아트 토이도 만듭니다. 그림책 『간질간질』로 2017년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습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 『눈물바다』 『커졌다!』가 있습니다.



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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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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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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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아무튼, 술집』, 내가 쓸 수밖에 없었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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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이 나왔을 때 울었다는 작가 김혜경. 술에 관한 사랑은 누구보다 크다고 자부하는데, 김혼비 작가의 책을 읽고는 몹시 질투가 일었다. “아, 나만큼 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멋진 글을 쓰다니!”그로부터 2년 후, 김혜경은 아무튼 시리즈의 마흔네 번째 책 『아무튼, 술집』을 쓰기 이른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술집 리스트를 쭉 소개할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튼 시리즈는 작가가 애호하는 세계, 작가를 만든 세계를 펼치는 에세이 아닌가. 사람 없는 술집이 의미 없듯 『아무튼, 술집』은 진한 사람 냄새가 풍긴다. 소맥의 향인 것 같다가도 위스키 한 잔을 마신 것 같기도 한 뒤끝 좋은 책. 김혜경 작가를 혜화동 시집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만났다.



20대를 갈아 넣은 책

이곳에서 책을 썼다고요?

위트앤시니컬을 운영하고 있는 유희경 시인님과 친해요. 영업이 끝난 시간에 맥주 먹으면서 썼어요. 팟캐스트 <시시알콜>을 녹음하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술집』이 막 나오기 직전에 유희경 시인이 인스타그램에 책 소개를 해줬잖아요. 사실 그 글을 읽고는 ‘아! 이 책 진짜 읽고 싶다’ 생각했어요. 너무나 진심이 묻어나는 추천이라서요.

엄청 고마운 사람이에요. 얼마 전에 포털 사이트에도 이 책이 소개가 됐더라고요. 놀라서 찾아봤더니 유희경 시인님이 블로그에 적어주신 글이 메인에 뜬 거였어요. (웃음) 공저로 책을 쓴 적은 있지만 단독 저서는 처음인데 많은 분들이 힘을 주셨어요. 오은 시인님도 긴 추천 글을 보내주셨고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도 축하해주셨고요. 

반응이 뜨거워요.

오은 시인님이 그러셨어요.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 (웃음) 그런데 책이 나온 뒤로는 확실히 리뷰를 찾아 읽게 돼요. 누가 내 책을 읽고 어디에 흔적을 남겨주시지 않았을까 하고요. 

책 계약은 언제 하셨어요? 

작년 7월이요. 책이 딱 1년만에 나온 셈인데, 김태형 제철소 대표님을 작년에 뵙고는 3개월 만에 책을 내고 싶다고 했었어요. 무조건 겨울에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왜냐면 제가 작년에 운세가 좋았거든요. 하지만 대표님을 뵌 다음날 바로 후회했어요.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술은 사계절 마셔도 좋지만 아무래도 여름에 나오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대표님의 의견을 따랐죠. 

표지를 보고서 시종일관 깔깔, 유쾌한 책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도입이 묵직해요. 그래서 더 좋았고요. 

이 책은 제 20대를 갈아 넣은 책이에요. 10대 시절 식당에서 밥을 많이 먹어야 했던 이유부터 시작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고 정겨워진 술집의 풍경.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과 수시로 부딪힌 술잔 덕분에 스스로를 담담하게 인정할 수 있게 됐고요. 술집은 과거의 제가 막연히 상상만 하던 다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곳이었어요. 사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요. 많이 덜어냈는데도요. 

책의 카피가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 술집’입니다.

‘인싸’로 많이 오해 받는데 저는 내향적 관종이에요. 지금 기자님 눈도 길게 잘 못 마주치잖아요. 그런데 이런 제가 술집에 가면 달라져요. 적극적으로 합석도 하고 서슴없이 깊은 이야기도 하고. 모두의 눈동자를 마주할 용기가 생겨요. 

책을 읽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서 쓰러져도 출근할 수 있도록 여벌의 속옷과 셔츠가 있는 백팩”을 들고 다니셨다고요.

그땐 경기도에 살았거든요. 술 마시는 곳은 거의 망원동인데 심야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하잖아요. 택시비를 계산하면 안주 두 접시고요. (웃음) 술을 계속해서 마실 수 있게 하는 월급에 대한 집착과 최소한의 사회적 체면 유지를 위한 노력이 묻어나는 아이템들을 짊어지고 광역버스를 타면 여행하는 기분이 들곤 했어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술집을 가기 어려워졌잖아요. 요즘은 ZOOM으로 술을 마신다고요?

원래도 여러 명이 술을 마시진 않아서요. 갈 수는 있었는데 횟수가 많이 줄었죠.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에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술을 마셨어요. 평일에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거든요.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신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요즘은 ZOOM으로 친구 네 명이 주로 만나요. 제가 취업을 조금 빨리 한 편이라 올해로 직장인 8년차인데요. 아직은 체력이 되는 것 같아요. 

혼술을 하거나 집에서 마시면 돈이 많이 들진 않지만, 술집은 또 다르잖아요. 

결혼을 하고 나니까 돈 쓸 일은 별로 없는데, 먹고 마시는 데 쓰는 지출이 너무 크긴 해요. 남편이랑 가끔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데, 책이라도 나와서 다행인 것 같아요. 뭐라도 남겼으니까요. (웃음) 



내가 할 일을 했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술집 사장님들이 이 책의 출간을 환대해 주셨을 것 같아요. 

302호 와인바 사징님은 책을 읽어 보시더니, 와인바에 『아무튼, 술집』을 갖고 오는 손님들에게는 책값만큼 할인을 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웃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자주 들르진 못하지만 좀 상황이 나아지면 거하게 돈을 쓰면서 책을 선물하려고요.

술과 술집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반응하나요? 좀 알아보지 않겠냐고 설득하시나요?

아니요. 그 사람의 인생에는 술 말고 다른 게 있으니까 살고 있겠지 생각해요. 총량의 법칙이 있잖아요. 오히려 걔가 안 마시니까 내가 이렇게 신나게 마실 수 있구나, 이렇게 만족해요. 

광고대행사에서 AE로 일하는 일상이 책에 슬쩍 담겼어요. 회사에서도 술 좋아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나요?

그럼요. 그래서 이 책을 낸 것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봐요. 내가 할 일을 했다! 생각해요. 

술 맛이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인가요?

일단 안주 맛이 좋고 옆에 승용이(남편) 같은 애들이 공감해주면 최고죠. 같이 술 마시면 좋은 상대는 아무래도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요. 취기, 텐션을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자기 혼자만 맨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기꺼이 취함에 동참하는? 아 그리고 최근에 한신포차에서 배달을 시작했더라고요? 스팸김치찌개를 주문했는데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자마자 숟가락을 밥그릇에 땅 치면서 ‘아! 소주다!’ 싶었어요. 그날은 신기하게 술이 안 취하더라고요. (웃음) 

가장 좋아하는 술은 소맥인가요? 

많이 마시는 건 소주인데 아무래도 위스키를 좋아해요. 가성비가 훌륭하거든요. 한 병으로 따지면 비싸지만 오랫동안 마실 수 있잖아요. 그리고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술집』과 어울리는 주종은요?

음, 소주를 많이 넣고 맥주를 조금 따른 소맥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전작 에세이 『시시콜콜 시시알콜』을 200권이나 사주셨다고요. 그런데 이번 책은 아버지께 비밀로 하려고 했다고요. 

네, 정말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검색을 해서 알아내셨어요. 제가 그냥 6월쯤 책이 나온다고만 말했고 굳이 안 봐도 된다고 그랬거든요. 아빠 이야기가 좀 많이 나오니까. 그런데 다섯 권 정도를 사셔서 친구분들께 선물한 것 같아요. 본인은 안 보시고. (웃음) 아마도 아빠가 아빠 친구로부터 책 이야기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게 책에 털어놓을 수 있는 건, 관계가 많이 회복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지금은 사이가 좋으니까 이렇게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았까 하고요. 

대화를 많이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저는 글로 쓰다 보니까 응어리가 많이 풀렸어요. 하지만 아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까 아빠도 극복하는 시간이 필요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아빠가 읽어보고 제 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고요. 



만약 또 다른 아무튼 시리즈를 쓴다면 어떤 키워드가 될까요?

‘아무튼, 싸움’이요. 제가 지인들의 감정 싸움에 관해 조언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일단 제가 못난 모습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줘요. 그리고 ‘아무튼, 해장’도 좋을 것 같네요. 




*김혜경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비록 내 명의의 집은 없지만 세상 모든 술집이 내 집이란 생각으로 산다. 술 마시며 시 읽는 팟캐스트 〈시시알콜〉 디제이로 활동 중이며, 책 『시시콜콜 시詩알콜』(공저)을 썼다.



아무튼, 술집
아무튼, 술집
김혜경 저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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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자 신지수 “여성 ADHD 환자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욕구와 욕망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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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심리학자 신지수는 정신장애의 진단 기준, 병의 원인, 치료법, 최신 논문까지 수시로 업데이트 하며 분주하던 대학원 시절, 대부분의 정신 장애를, 심지어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의심한 적도 있지만 결코 ADHD는 의심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병원에서 임상심리학자로 일하다 비로소 ADHD를 의심하게 됐고, 그렇게 서른이 되어서야 ADHD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전문가 영역에서 일하는 그가, 그 오랜 시간 ADHD를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자책감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ADHD를 “익숙하고도 성가신 나의 친구”(173쪽)라고 말하는 신지수는 그 이유를 젠더 편향에서 찾았다.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는 ADHD 진단에서 어떻게 여성이 배제되어 왔는지 진료실 안팎의 현실을 꼼꼼하게 짚는 동시에 여성이자 ADHD 환자가 받게 되는 이중구속의 문제점을 살핀다. 저자 신지수는 말한다. “ADHD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이 병원에 갈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 나를 하나의 모델로 보여줌으로써 ADHD 진단을 받은 성인 여성들이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 정신 장애와 심리학에서의 젠더 편향을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여기에 더해 그는 책을 읽고 스스로 불편감을 느낀다면 반드시 ADHD가 아니더라도 꼭 병원에 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너무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관련 분야의 전문가임에도 오랜 시간 나 자신이 ADHD일 거라고 의심조차 안 했다는 점이 무척 공교롭게 느껴지더라고요. 

수련 2년 차 초반일 거예요. 아동 ADHD 환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제가 환자의 문제를 지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때는 ‘왜 이 정도 가지고 ADHD라고 얘기할까? 모두가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라는 불만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감이 있었죠. 한번은 동료 선생님한테 검사지 문항 중 ‘학교 다닐 때 가끔 교무실에 불려 간 적이 있다’는 문항 진짜 별로 아니냐고, 당연히 교무실은 맨날 불려가는 거 아니냐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선생님 교무실 자주 가셨어요?”라고 되물으시더라고요. 저는 정말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교무실에 불려 갔거든요.(웃음) 지각을 하거나, 떠들거나, 교복을 제대로 안 입거나, 학교 담을 넘거나 하는 이유들로요. 그런데 그분은 그런 경험은 학창시절 통틀어 한두 번 정도라는 거예요. 그때부터 저에 대한 객관화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ADHD라는 진단을 받고 난 후에 찾아온 안도감에 대해서도 쓰셨어요. 어떤 마음이었는지 자세히 듣고 싶어요. 

복잡한 마음이었는데 안도감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성격 문제가 아니었구나’ 하는 점 때문이었어요. 내가 정말로 못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노력해도 안 됐던 것이 신경학적인 문제 때문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용서받은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죠. 또 ADHD 환자들이 약을 먹고 좋아지는 것을 그동안 봐왔으니까 나도 약 먹으면 개선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내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세상에 엄청 많다는 얘기구나, 싶었던 거예요. 그동안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ADHD 증상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는 걸 인지하니까 불안함도 많이 가라 앉았고요. 

진단을 받기 전에는 죄책감이나 불안함이 굉장히 많았던 거죠? 

늘 비난을 받고, 혼이 났으니까요. 스스로도 자책하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ADHD 증상 중 하나가 반복적인 실수인데요. 실수한 후 진심으로 반성을 했어도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에서는 이전에 배운 게 떠오르지 않거든요. 아차, 싶으면서도 계속 실수를 하고요. 그러니까 ‘내가 또 왜 그랬지?’ 하는 자책을 계속 하게 돼요. 

그런가 하면 진단 후에는 제 경향성이나 취향, 성격, 감정의 높낮이가 다 ADHD로 설명이 되더라고요. ADHD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는 ADHD를 빼면 뭐가 남는 거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ADHD가 나를 잡아먹는 느낌, 그런 불편함이 진단 이후에 많았어요. 자아가 사라지는 느낌도 들고요. 사람 신지수가 아니라 ADHD로 나를 설명하려고 하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돼서 오히려 제가 저를 낙인 찍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분투하고 노력하고 있을 여자아이들

기존 ADHD 연구가 남성을 기본형으로 설정한 채 진행되어 왔고, 진단도구나 기준도 남성 편향적인 부분이 많아서 여성의 ADHD 진단이 많은 부분 누락되어 왔다고 지적하셨어요.  

일단 진단도구가 여성의 ADHD 증상을 잡아내기 어렵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여성이 불편함을 느껴서 병원에 갔을 때, 전문가 입장에서 주의력이나 충동성에 문제가 의심돼 진단기준을 확인한다 해도 여성 환자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언어가 부족하죠. 때문에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결국은 치료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고요. 여성의 경우 ADHD 대신 우울이나 성격적인 문제로 해석되기 쉬운 것 같아요. 

한편 여성들은 꼼꼼해야 한다, 얌전해야 한다는 일차적인 억압이 있죠. ADHD는 그와 정반대의 증상을 보이니까 남성보다 훨씬 더 자신을 억누르며 살거든요. 그 억압이 남들이 보지 않을 때 관찰되지 않는 형식으로 발산되면 남성 ADHD 환자들에 비해 우울이나 자살시도가 훨씬 높고, 더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겪게 돼요. 그것도 정확한 진단의 어려움 중 하나 같아요. 

연결하면, 여성 ADHD 환자의 경우 완벽주의 경향을 가진 사례가 드물지 않다고 한 대목도 떠오르네요. 증상을 감추기 위해 분투하는 것도 여성 ADHD의 특징으로 꼽으셨잖아요. 

어디선가 본 건데요. 말소리를 크게 낼 때 남자아이에 비해 여자아이가 몇 배는 더 많은 제지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상황이 그러니 ADHD가 있는 여자아이들은 훨씬 많은 제지와 비판을 받겠죠. 그러면서 학습하는 거예요. 이러면 또 싫은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까 꾹 참고 앉아서 손을 뜯거나 머릿속으로 공상에 빠지거나 혼나지 않으려고 강박적인 노력을 하는 거죠. 저는 그런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늘 눈물이 나요. ‘마스킹한다’고 하는데요. 들키지 않으려고 분투하고 노력하고 있을 여자아이들이 지금도 정말 많을 텐데, 그들을 생각하면 늘 안타까워요. 

교실에 부주의 증상을 보이는 여자아이, 과잉행동/충동형 증상을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교사는 전문가에게 어떤 아이를 가장 먼저 의뢰하며, 어떤 아이를 가장 마지막에 의뢰할까? 실험의 결과를 고려해 예상해보자면, 과잉행동/충동성 남자아이가 가장 먼저 전문가의 진료를 받을 것이다. 그 다음은 과잉행동/충동형 여자아이, 마지막으로는 부주의 증상의 여자아이일 것이다.(101쪽)

이 지점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 ADHD의 이런 성별에 따른 특성이 타고난 성(sex)의 문제이냐, 사회적 성(gender)의 문제이냐 하는 걸 텐데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성별의 생물학적 차이를 없는 것처럼 지워버리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사회적 성이 증상 양상에 미치는 영향이 지금보다는 강조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전문가들이 여성 ADHD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의 문제 같아요. 임상가들도 사람이니까 사회적 편향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이때 내가 편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느냐, 내 편향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에 따라 얼마나 주의 깊게 환자를 볼 수 있는지가 결정될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 자신에게 확신할수록 그런 고려 없이 진단하는 경우가 많을 거고요. 지금도 여성 ADHD에 익숙한 전문가가 많지 않은 상태예요. 따라서 교육 과정부터 여기에 대해 초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 입장에서는 안심하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거잖아요. 

의사가 여성 ADHD를 잘 몰라서 진단을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병원을 전전하게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면 안 되는 거죠. 그나마 요즘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ADHD 검사를 받으러 오는 여성 청소년을 많이 보는데요. 왜 ADHD라고 생각했는지 물으면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봤는데 내 얘기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놀랍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는 모호한 환자를 볼 때 저도 불안해요. 진단기준과 여성 환자의 증상이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진단은 환자의 증상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증거가 여성 ADHD를 충분히 잡아내지 못하니까 결국 “의심이 되니 추적검사를 해보자” 정도로만 말하게 되는 거예요. 답답할 때가 많죠. 



뒤늦은 성장을 하는 시간

ADHD는 치료가 상대적으로 잘 된다고 했는데요.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거든요. 그간 쌓아온 자기비난의 고리를 끊는 것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기술을 회복하는 데에도 인지행동치료가 중요한 거겠죠?  

약을 먹는다고 갑자기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일의 우선순위를 무엇으로 따져야 하는지, 타인과 대화할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등을 바로 알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과거의 것은 ADHD의 증상이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과정이 필요하고요. 이제부터는 상황을 달리 해석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그랬어요. 약을 먹기 전에는 오랫동안 공부하기 어렵거나 시험을 잘 못 보는 것이 기본이었으니까 약을 먹은 후에도 뭔가를 시도할 때 무심코 ‘이 정도는 안 되니까 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든 해보니 되더라고요. 안 했으면 큰일날 뻔했다 싶은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실질적인 경험과 해석의 수정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될 준비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변화가 드라마틱하지 않더라도 나에 대한 정의를 수정해나가는 게 중요해요. 

책 후반부에 아주 구체적으로 저자가 실천하고 있는 생활의 기술들을 담으셨잖아요. 실패한 과정까지 담고, 그럴 때는 또 어떤 생각을 하는지까지 적으셨죠.  

방법을 아예 모르기 쉬운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자신을 방치해 온 느낌과 비슷할 거예요. 기본적인 의무만 충족시키는 데도 힘이 많이 들어서 나 자신을 돌보거나 주변 환경을 돌보는 일을 안 해본 거예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모르고, 어떻게든 해보다가도 실패하고 좌절하기 쉽고요. 어느 날은 환경을 잘 가꾸고 싶다는 다짐 자체를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계속 실험하듯 해봐야 하는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실패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내가 발견한 작은 교훈과 그때의 감정을 기억해뒀다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게 어떤 건지를 찾아가야죠. 이것은 진짜 어린 아이가 다시 성장하는 것처럼 뒤늦은 성장을 하는 시간 같아요. 

그런 실패의 순간에 다시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다짐이 있나요? 

언두잉, 취소라고 하잖아요. ‘나 진짜 또 망했네’ 라는 생각이 들 때 ‘아니야, 망한 것까지는 아니지’라고 수정을 해주려고 해요. 과잉해석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방이 또 엉망이 되거나 시험을 잊어버리거나 과제를 안 했어도 이것은 개별적인 사건이고, 이 사건이 나의 전체라고 일반화하지는 않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지금 실수를 했다고 앞으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라는 건 내 추측일 뿐이잖아요. 지금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이런 추측이나 걱정을 하면 내가 슬퍼진다는 것이에요. 다음 시험에는 잘할 수도 있고, 다음주에는 집이 깨끗할 수도 있잖아요.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확실한 것은 그 생각들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뿐이다, 라는 생각을 하려고 많이 애쓰는 것 같아요. 



너도 나도 좀 이상한 사람

임상심리학자로서 ADHD를 공부하고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면서도 자기 의심이나 자책감이 계속되고 있나요? 지금은 어떠세요? 

ADHD가 있는 사람 중 강박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요. ‘사기꾼 증후군(자신의 능력과 성공을 인정하지 못해 늘 남을 속이고 있는 것 같은 불편감과 제 실력이 탄로 날 까봐 두려워하는 증상)’과 비슷하게 내가 잘했어도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분명히 실수가 있을 테니 더 많이, 반복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잠시 침묵)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너무 집중이 안 되는데요. 이런 것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집중이 잘 되고 기민해서 해야 할 일을 잘하고, 좋은 피드백을 받는데요. 어느 날은 집중이 너무 힘들고 기복이 있으니까 안 좋은 피드백을 받거든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잘했을 때의 나는 운이 좋았구나,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아서 그랬구나,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하는 거라 진짜를 알게 되면 나를 무시하고 싫어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유튜브 <씨리얼> 인터뷰에서 ‘ADHD 꿀팁’으로 사과가 빠른 것,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도움이 됐다는 말을 하셨잖아요. 저는 이것이 끊임없는 자기 비난의 굴레를 벗으려는 저자의 노력처럼 들리더라고요. 

사실 주변 사람들은 ADHD가 아닌 성향으로써라도 제가 실수 많은 사람인 걸 알아요. 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실수를 주변에서 인식하고, 미리 알려줘서 실수를 방지할 수 있게 해주죠. 그걸 알게 됐을 때 고맙다고 말하고, 제가 잘못한 것은 사과를 하고, 실수를 만회할 다른 측면의 노력을 하다 보면 혼자서 분투하는 것보다는 덜 힘들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에겐 ADHD로 인해 오는 결핍들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른 결핍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걸 서로 보완하면서 지내는 방향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너도 좀 이상한 사람, 나도 좀 이상한 사람이니까 서로 폐 끼치면서 살자는 마음이 가장 편하고 좋다고 생각해요.

“나는 ADHD 환자로서 나와 같은 여성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동안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욕구와 욕망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17-218쪽)고도 말했어요. 

일단 ADHD 특징 중 하나가 흥미를 빨리 잃는 거예요. 한 가지에 장기적으로 몰두해서 성과를 내는 일이 어렵거든요. 취미도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보니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만성적인 불확실성을 갖고 있기 쉬워요. 잘하는 게 있을 수도 있는데 더 노력하지 않고 어느 정도 선에서 포기해버리기 때문에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정말 많고요. 저는 ‘정말 그럴까?’라는 반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너 이거 못해”라고 하거나 나 스스로 “사실 이거 안 좋아했어”라고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요. 먼저 욕구와 욕망을 들여다보면 좋겠어요. 또 ADHD가 동기를 유지하고 끌어올리는 데도 문제가 있어서 지연행동도 생기는 거거든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동기도 자연히 올라오니까 그런 부분에서도 욕구와 욕망을 찾아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신지수

임상심리학자. 대학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을, 대학원에서 성인임상심리학을 전공했다. 대학병원 소아심리실에서 임상심리전문가로 3년의 수련 과정을 마쳤다. 한국임상심리학회에서 주관하는 임상심리 전문가 자격을 취득했으며, 현재 정신과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대학병원에서 임상심리학자로 일하던 어느 날 동료들 몰래 검사실에 들어가 주의력 검사를 받았고, ADHD 의심 결과를 확인했다. 이후 정신과에서 ADHD를 진단받은 후 치료 중이다.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신지수 저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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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아 “뒤늦게 울지 않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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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는 사계절을 한껏 즐길 줄 안다. 자두를 한 바구니 쌓아 놓고 먹는다거나, 밤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의 맛으로 여름을 행복하게 기억하는 이들을 보면 저절로 흐뭇해져서 지나가는 여름을 붙잡고 싶다. 전작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사물에게 배웁니다』 등으로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포착해 기록한 작가 임진아가 이번에는 반려견 키키와 살며 애틋하게 다가온 계절의 단어들을 모았다. 『오늘의 단어』는 키키와 진아가 함께 쓰고 그린 이야기다.

 



키키와 진아의 사계절

반려견 키키와 함께한 책은 처음이시죠? 기분이 남다를 것 같아요. 

제 그림 속에 키키가 등장한 적은 많았지만, 키키의 이름을 담아 책을 만든 건 처음이에요. 키키와 함께하게 되어서 너무 좋죠. 만화에서는 키키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이후 등장하는 글에서는 키키의 목소리를 넘지 않는 선에서‘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라는 설명을 썼어요. 저의 이야기보다 키키의 시선이 잘 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시 큐레이션 앱 ‘시요일’에 연재했던 만화 「키키의 산책-우리가 아는 단어」가 책으로 묶였어요. 어떻게 작업이 이루어진 건가요? 

시요일에서 만화 연재 제안을 받고, 머뭇거림 없이 수락을 했어요. 제가 키키에 대해 그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키키가 동거인 진아를 관찰한 일기’였으면 한다는 기획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키키의 눈에 비친 진아의 모습은 저에게도 무척 궁금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작년 봄부터 연재를 시작해 겨울까지 이어가는 동안 이걸 책으로 묶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연재가 끝나자마자 바로 출간 작업에 들어갔어요. 함께 실릴 글을 추가로 쓰고, 그림 작업을 더해서 책이 완성됐죠. 

책에서는 ‘여름’의 이야기로 시작해 ‘봄’ 이야기로 끝을 맺어요. 

연재 당시에는 봄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이 났는데요. 연재 담당자님께 “책에서는 꼭 봄이 처음에 오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어렴풋이 한 적이 있었어요. 이후 출간 일정이 잡히면서 책을 편집해주신 김미라 편집자님을 만났는데 원고를 쭉 보시고는 “이 만화는 봄이 아니라 여름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마음이 통한 것 같아서 놀랐고, 기뻤죠(웃음). 독자 분들께서도 책이 출간된 계절인 여름의 이야기를 처음에 보실 수 있어서 더 좋아하실 것 같아요. 

작가 후기에서 “이 만화는 저에게 시작입니다”라고 했어요. 어떤 의미였나요? 

그동안 일러스트를 만화 형식으로 작업하거나 한두 컷 정도 짧은 만화 느낌의 그림을 그린 적은 있지만, 책 한 권을 만화로 채운 건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동경하는 만화가의 원화를 보기 위해서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바로 끊을 정도로 만화를 좋아하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라는 질문 앞에서는 늘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책 덕분에 용기를 얻었죠. 앞으로 내가 만화 작업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만화를 그리는 나’의 시작은 지금이 아닐까 싶었어요. 『오늘의 단어』는 ‘지금은 못하는 것도, 언젠가는 할 수 있겠구나’라는 용기를 준 책이에요. 



뒤늦게 울지 않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

키키와의 첫만남이 궁금해요. 

원래 오빠가 키우던 강아지였는데, 바빠지면서 키키를 본가로 보냈어요. 그 당시 저희 가족은 16년간 함께한 반려견과 사별을 한 상태였거든요. 키키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며 알게 모르게 우리의 슬픔을 품어줬던 것 같아요. 쭉 본가에서 함께 살다가 키키가 6살이 되었을 때 제가 독립을 하면서 같이 나오게 됐죠. 저 혼자 키키를 온전히 책임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기 때문에, 제가 독립한 날이 키키와 처음 만난 날처럼 느껴지곤 해요. 

독립할 때 키키를 데리고 나온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부모님이 주는 사랑의 방식이 키키의 건강에는 안 좋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먹는 음식을 자꾸 나눠주셔서, 한때 키키의 건강이 나빠졌었거든요. 그리고 키키는 조용한 걸 좋아하는 강아지라서 성향이 비슷한 저와 함께 사는 게 더 편할 것 같았어요. 이를테면 엄마가 크게 통화를 시작하면, 키키는 다른 방으로 건너가요(웃음). 아빠가 술을 드시고 들어온 날은 침대 밑에 숨기도 하고요. 그런 키키에게 평화를 선사하고 싶었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키키가 사람이라면, 어떤 성향일 것 같냐’는 질문을 하려다가 책을 끝까지 읽고 그만두었어요. ‘키키를 왜 사람에 빗대야 할까? 키키는 키키인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동적인 이야기네요(웃음).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키키를 의인화해서 그린 게 아니라, 평상시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키키와 나누는 대화가 많거든요. 예를 들면 단둘이 집에 있을 때 어디서 소리가 나면 동시에 그쪽을 돌아봤다가, 곧장 서로를 쳐다봐요. 제가 “무슨 소리야?”라고 키키에게 묻기도 하고요(웃음). 이런 우리의 모습이 만화에 자연스레 담긴 것 같아요. 

만화 속에서 ‘진아’보다 ‘키키’의 책 읽는 모습이 많은 게 재미있었어요. 

만화 속 키키의 성격을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갖는 캐릭터’로 설정했거든요. 누구와 함께 살더라도 책을 읽는 시간은 철저히 혼자인 시간이 되잖아요. 한 공간에 있지만 우리에게는 각자의 시간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키키는 책을 읽기 위해 산책을 마다하기도 하고, 원하는 책을 사려고 다른 동네에 가기도 해요. 그렇게 자기 세상을 모으고, 일상을 잘 돌보는 강아지로 그리고 싶었어요. 

책에 실린 단어 중, 특히 애착이 가는 게 있나요? 

‘양말’과 ‘반’이요. 두 단어 모두 키키와의 마지막을 생각하는 이야기인데요. 키키와 함께하는 날들을 슬프게 그리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끝이 있고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소중한 하루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어요. 

“먼 훗날의 내가 다시 읽더라도 울지 않을 수 있는 만화를 그립니다.(342쪽)”라고 한 것도 키키와의 마지막을 생각했기 때문인가요?

키키와 사는 모습을 SNS에 종종 올린 뒤로, 개에 관한 에세이를 써보자는 제안을 더러 받았어요. 그런데 애써 거절을 했던 건 키키의 이야기를 하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에요. 반려견과 함께 산다는 건 기약된 헤어짐을 알고 지내는 거니까요. 그 생각을 빼놓고 키키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작업을 할 때 너무 슬플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이번 책은 ‘키키가 진아를 바라보는 이야기’라는 기획이었기 때문에 즐겁게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키키가 되어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작업하는 내내 ‘만화 속 진아와 밖의 진아가 이걸 보고 뒤늦게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계절의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았으면

감각적인 행복의 이야기가 많았어요. 키키가 냄새로 세상을 알아간다면, 진아는 좋은 소리를 모으는 사람이더라고요. 

혼자 살면서 일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어요. 이를테면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할 때 동네 사람들이 동시에 창문을 막 닫거든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너무 좋아요(웃음). ‘이건 비 오는 마을의 소리야!’ 하면서 비가 오기를 기다리게 되고요. 키키처럼 냄새에 행복해할 때도 많죠. 작업실 옆에 쿠키집이 하나 있는데요. 잼이나 초코를 끓일 때 향이 엄청나거든요. 그래서 쿠키를 미리 사놨다가 카페에서 잼을 끓일 때 맞춰서 먹어요(웃음). 그럼 너무 맛있어요.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행복해하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시잖아요. 두 장르가 작가님에게 어떻게 느껴지나요?

그림은 동력이 많이 들어서,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는 장르인 것 같아요. 또 제 그림이 삽화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글을 넘지 않으려 애쓰죠. 반면 글은 육체적으로는 덜 힘들지만 생각을 꺼내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기까지 감정소모가 정말 많다는 걸 느껴요. 둘 다 너무 좋고, 재미있는데요. 제 성향에 더 잘 맞는 건 글인 것 같아요. 잘 쓰고 싶다는 의욕이 뒤늦게 생겨서 요즘은 좋은 글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주 고민해요. 

요즘 작가님을 가장 즐겁게 하는 게 있다면요. 

여름 과일을 챙겨 먹는 거요. 최근에 신비복숭아를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네 박스째 먹고 있어요(웃음). 이 계절이 지나면 한동안 못 먹으니까 열심히 먹어야죠. 

키키와 함께 보내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예요?

산책 갈 때요. 아침에 일어나면 같이 밥을 먹고 도보 20분 거리의 작업실로 출근을 하거든요. 제가 일을 할 동안 키키는 계속 기다리는 입장인데, 산책을 할 때만큼은 키키가 주인공이 돼요. 그동안 못 누린 걸 다 누리겠다는 기세로 앞장서서 막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 키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참 좋아요. 

오늘 작가님과 키키의 하루를 표현할 단어는 무엇일까요? 

저는 ‘시작’이요. 그동안 인터뷰를 많이 안 해봐서, 책을 앞에 두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게 어떤 ‘시작’ 같은 느낌이 들어요. 키키는 아마도 ‘편지’를 고를 거예요. 저에게 만화 연재를 제안해주신 편집자님이 오늘 키키에게 편지를 주셨거든요. 저에게 쓴 이야기는 없고, 오직 키키를 위한 편지였어요. 그래서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바쁘게 지내느라 오늘의 계절을 놓치는 분들 혹은 우리에게 계절이 있다는 걸 ‘춥고 더운’ 날씨의 힘듦으로 먼저 느끼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계절이 주는 그날만의 행복이 분명히 있으니까 이 책을 통해 한번 예습해 보시고, 다음 계절에는 꼭 그 작은 행복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




*임진아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그리거나 쓴다. 일상의 자잘한 순간을 만화, 글씨, 그림으로 표현한다. 누군가의 어느 날과 닮아 있는 순간을 그리거나 쓴다. 좋아하는 것이 있기에 스스로 감동받는 삶을 살고 있다. 연재한 만화로는 「엊그제」와 「임양의 사소한 일상」이 있고, 개인 작업으로는 〈괜찮씨의 하루〉, 〈이십대 쌀 상회〉, 〈인생 아마추어〉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사물에게 배웁니다』,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아직, 도쿄』가 있으며, 그린 책으로는 『오늘도 대한민국은 이상 기후입니다!』, 『마음 곁에 두는 마음』 등이 있다. 『지금은 살림력을 키울 시간입니다』, 『나의 복숭아』 등에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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