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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 “삶이 만만치 않아서, 정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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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는 신작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프롤로그에 이렇게 썼다. 타인과 어울려 함께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기에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단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살아내기로 결심하는 태도의 한가운데에 ‘정치’가 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공부란 무엇인가』 등의 전작으로 인간의 삶과 앎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졌던 김영민 교수가 이번에는 ‘정치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살아있는 한, 어느 누구의 삶에서도 정치는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를 서면으로 만났다. 



인간의 삶은 원래 어렵다

이번 책의 주제는 ‘정치’입니다. 

정치외교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정치에 관한 교양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이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때마침 역대 가장 ‘비호감’ 대선이라는 말이 들리기도 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우리의 삶이 만만치 않다는 것, 그래서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 정치에는 생각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라는 제목이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지은 제목인가요?

세상에 태어난 이후, 지속적으로 분투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잘 유지되지 않는 게 인간의 삶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이며,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정치 가 있다(19쪽)”라고 썼는데 출판사에서 그 문장에 특히 주목을 하셨어요. 부제인 ‘정치적 동물의 길’은 저의 제안이었습니다.

비단 ‘정치’라는 주제를 떠나 교수님께 특히 어렵다고 느껴지는 삶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삶의 어느 한두 문제가 어려운 게 아니라 삶 자체가 총체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해요. 어려움의 정도는 각기 다르겠지만, 삶이 어렵다고 느끼는 점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을 거예요. 생활을 유지하려면 경제활동을 해야 하고,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남과 협력해야 하고, 아무리 스트레스가 쌓여도 제정신을 유지해야 하고, 허물어가는 육체의 건강을 보살펴야 하고, 때로는 삶의 의미까지 찾아야 하죠. 다들 이 삶을 어떻게 감당하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그 와중에 대통령이 되고자 선거에 뛰어드는 정신력은 또 어디서 오는 것인지(웃음).

 


품위 있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정치를 외면하는 국민들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어요. 

저는 정치를 냉소하거나, 혐오하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해요.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정치는 그런 마음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죠. 동시에 그러한 냉소, 혐오, 외면 또한 애초에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무관심과 혐오는 다르니까요. 일단 ‘대면’을 했기 때문에 ‘외면’도 가능한 거죠. 삶의 여러 영역의 일들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해결의 수단을 쥔 권력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로써 정치에 대단한 관심을 쏟게 되지요. 그런데 이 관심을 배반해온 것이 정치의 역사이기도 한 것 같아요. 배반에 대한 분노는 한국 정치를 추동해 온 힘이기도 하죠. 

코로나19는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리의 집회에서 삶의 활력을 찾고, 내가 파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일부가 된 것 같아 가슴이 벅찰 수 있는 시절은 당분간 가버렸는지도 모른다(99쪽)”고 쓰셨는데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정치에 참여해야 할까요?

거리에 나갈 수는 없지만 온라인으로 정치 공론장에 뛰어들 수 있어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품위를 버리지 않으면서 정교한 정치적 논의를 해 나가는 체험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각종 매체에서도 이를 활성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죠. 특정 정파에 관한 의견으로만 기울어지지 않는 공론장이요.

더 중요한 것은 공론장에서 각자 어떤 입장을 어떻게 펼치느냐겠죠. 동문서답, 거친 어법은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정치 현실의 정황은 매우 복잡합니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가 연루되어 있는 문제제기들도 현재진행형이고, 집권당 검찰총장이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죠. 자기 당이 배출한 대통령을 기소한 전직 검찰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한편, 이른바 진보 대학생 단체가 그 후보를 공식 지지하기도 하고요. 그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정교한 생각과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정치계에서도 MZ세대가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습니다. 젊은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젊은 정치인이 필요한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하나는 젊은 세대의 열망이 충분히 반영되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젊은 정치인이 등장하여 그 세대의 열망을 대표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기성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오는 것이죠. 현재 우리나라 정당들이 표방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대체로 빈약한데, 정치 사상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가 뛰어들어 그 이데올로기를 풍부하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하루아침에 갑자기 정치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일찍 입문하여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이 잘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4부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파트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회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다민족, 동성애, 여성, 인구, 아파트, 윤리, 유사가족, 전염병, 중앙과 지방, 신분 등은 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한동안 한국 정치를 정의해나갈 키워드예요. 사람들이 이미 인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고, 좀 더 지적인 고려가 필요한 사안들이죠. 이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편견을 강화하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칼럼계의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으세요. 여러 매체에 발표된 교수님의 칼럼을 모두 모아 두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고요. 사람들이 교수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잘 모르겠어요. 저보다는 독자들이 대답해주면 좋을 질문인데요. 언젠가 강연이 끝나고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분께서 책에 사인을 요청한 적이 있어요. 그분이 저에게 “저희 시어머니와 시어머니 친구들이 사인을 받아달라고 부탁하셔서 왔어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아 내 책을 읽는 노년층의 독자들이 있구나’라고 깨달았죠.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저자 사인이 있는 신간을 자신에게 보내주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저에게 디저트를 사주겠다고 하더군요(웃음).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분포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볼 때, 아마 각기 다른 이유로 좋아해 주시지 않을까 추측해요.

교수님의 글은 결론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통쾌하거나, 유머러스하거나, 찔리는 등 평범하지 않은 시선으로 글이 마무리되는데요. 글을 잘 마무리하는 교수님만의 비결이 있을까요?

복잡한 결을 가진 삶의 맥락을 단순화하는 글, 그래서 독자의 편견을 강화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요. 그걸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삶에는 ‘예측가능한 법칙’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아이러니’가 많습니다. 그 아이러니를 함께 생각해보자고 권유하는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단정적인 결론을 내지 않게 되는 듯 해요. 

요즘 자주 하는 생각, 고민이 있으세요?  

저의 직업 활동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대학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터져 나올 뿐 아니라, 팬데믹으로 인해 기존의 대학 교육 방식이 큰 도전을 받았죠. 이러한 와중에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또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새삼 생각하는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저도 정치에 무관심하고 싶은데요. 그게 가능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삶이더군요. 


“어떻게든 다 잘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가? 나 하나만큼은 평범하고 은은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거기에 정치는 없다. 세상에 혼자 그냥 잘되는 일은 없다. 잘되고 있다면, 누군가 정념과 에너지와 인생을 갈아 넣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위해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갈아 넣을까 고민하는 데 정치가 있다.”   _(19쪽)





*김영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브린모어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중국정치사상사 연구를 폭넓게 정리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7)를 출간했다.
『중국정치사상사』는 영어 저서의 한국어판 번역을 저본으로 하였으나 국내 독자를 위해 영어판과는 다른 문체로 다듬고 큰 폭으로 원고를 수정 집필한 새로운 중국정치사상사이다. 이 외에도 산문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 논어 에세이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2019)을 비롯해 『공부란 무엇인가』(2020)를 펴냈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김영민 저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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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배우 류승룡 “일상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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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룡 배우 (사진제공: NEW)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양한 모습을 연기해 온 배우 조은지의 첫 상업 영화 감독 데뷔작 <장르만 로맨스>에는 친구의 전 배우자와 비밀 연애 중이거나 동성 제자의 애정 공세에 곤란해 하거나 나이 차 많이 나는 이웃집 여성을 남몰래 좋아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기분 좋게 씩씩하고, 유쾌한 인물들은 복잡해 보이는 사정이라는 것이 실은 얼마나 분명한 감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해 주인공 ‘김현’을 연기한 류승룡 배우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색을 선명하게 발산하는 시나리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류승룡, 오나라, 김희원, 이유영 등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만들어온 개성 있는 배우들이 관객의 예상을 뛰어 넘는 연기를 펼치는 것 또한 <장르만 로맨스>의 즐거움으로, 지난 11월 5일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배우들은 입을 모아 촬영 현장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이야기했다. 오는 11월 17일 개봉하는 <장르만 로맨스>에서 주인공이자 슬럼프에 빠진 유명 소설가 ‘김현’을 연기한 류승룡 배우를 서면으로 만났다.


영화 <장르만 로맨스> 포스터

기존의 캐릭터와는 다른

“웃음 뒤에 오는 묵직함, 공감을 나누고 싶었다”고 언론시사회 이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말씀하셨어요. 영화 <장르만 로맨스>를 선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배우님이 생각하는 이 작품의 매력과 탁월함은 무엇인가요? 

다양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색을 선명하게 발산하는 시나리오가 독특하면서 공감이 됐어요. 저는 머릿속에 상상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읽는 편인데요. <장르만 로맨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았어요.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연기를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하는데요. 이 영화가 그랬습니다. 참여했던 전작들과는 또 다른 팀워크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캐릭터들의 시너지가 모이면 힘이 있겠다 싶어서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류승룡 배우님은 작품을 선택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처음 읽었을 때 주는 느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초독했을 때 재미든 의미든 남는 작품에 마음이 움직이는 편입니다. 연달아 비슷한 캐릭터나 장르를 선보이는 것은 지양하는 편이고요.


류승룡 배우 (사진제공: NEW)

이번 작품이 배우님의 “필모에 방점이 될 것 같다”고도 하셨잖아요. 이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이 작품에 어떤 기대감을 갖고 계세요?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을 많이 선보였어요. <최종병기 활><7번방의 선물><명량><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을 생각해보면요. 제가 연기한 인물들은 대부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인물들이었죠. 그렇다 보니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요. 생활연기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마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이 저에게 특별합니다.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난 뒤, 새롭게 느낀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뜻밖에 이야기의 주된 줄기에서 조금 벗어난, 작은 리액션들이 눈에 보였어요. 크게 의식하지 않고 지었던 작은 표정이나 몸짓들이 보이면서 캐릭터들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중 특별히 좋았던 장면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김현이 북콘서트에 참석한 장면을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는 장면이거든요. <장르만 로맨스>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장르만 로맨스> 스틸컷 

미울 수 있는 캐릭터지만

연기하신 역할은 소설가이자 교수인 김현이라는 인물입니다. 김현을 연기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특정 장면을 꼽아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김현이 처한 갈등들만 놓고 보면 부족함투성이에요. 이 인물이 미울 수 있죠. 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로서 최대한 밉지 않게, 한편으로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면 장면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많은 고민을 거쳤고요. 감독님과도 상의를 많이 한 것 같아요.

혹시 염두에 두었던 실제 인물이 있었나요? 배우님이 생각한 김현은 어떤 사람인가요? 

특별히 실제 인물을 모델로 두고 캐릭터를 연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김현은 여러 갈등의 중심에 있는 만큼 부족한 면도 있는 캐릭터지만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깊이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늘 평단의 기대를 받아온 유명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심정의 김현이 가진 직업적인 피로도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도록 신경 썼던 것 같습니다.


영화 <장르만 로맨스> 스틸컷 

그럼에도 영화 속 김현이라는 인물과 실제 류승룡이라는 사람의 닮은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조은지 감독님은 류승룡 배우님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고도 밝혔는데요. 김현과 류승룡,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부분은 다른지 궁금합니다. 

공통점이라면요, 김현과 저는 갈등 상황을 유머로 유쾌하게 헤쳐 나가려는 부분이 닮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걸 제외한 대부분의 설정들이 다르죠(웃음).

그밖에 <장르만 로맨스>의 인물들 중, 연기해보고 싶은 다른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김희원 배우님이 연기하신 출판사 대표 ‘순모’의 순애보가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순모는 김현과 오랜 친구이자 출판사 대표와 작가라는, 업무적인 관계이기도 한데요. 친구와의 신의, 업무적인 책임감,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는 아주 매력 있는 캐릭터예요.

<장르만 로맨스>를 기대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위드 코로나’ 시대의 시작과 함께 극장가도 조금씩 활기를 찾게 되기를 조심스럽게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 영화 <장르만 로맨스>가 그 출발을 기분 좋게 열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애정을 부탁드려요. 관객 여러분 모두 방역 수칙을 꾸준히 잘 준수하시면서요. 건강하고 따뜻한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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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하미나 “그냥 알아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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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하 『미괴오똑』)에는 우울증을 앓는 한 명의 인터뷰어와 서른한 명의 인터뷰이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그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고통의 목격자”다. 진료실의 안과 밖에서 분석과 이해의 대상으로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파고들고, 공부하고, 소통하고, 연대한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이삽십 대 여성이라는 것. 하미나 작가는 말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 방식으로 보편을 말할 수도 있지만, 아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보편에 가닿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해요.” 고유한 개인으로서 그들이 갖고 있는 서사 안에는 공동의 그것 또한 존재한다. “우리가 질병을 서사화할 때, 살기 위해 마주해야 했던 각자의 배경들이 유사하다면, 그것은 더 큰 공간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쓴 이유다.

하미나 작가는 대학에서 과학과 철학을, 대학원에서 과학사를 공부했다. 강남역 여성 표적 살인사건 이후 여성 운동 단체 ‘페미당당’에서 활동가로 지냈고 칼럼니스트, 과학 기자, 글쓰기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작가로 살기로 결심한 뒤부터 《시사IN》, 《한겨레21》, 《한국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짧은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공통의 경험을 발견하기 위해서

『미괴오똑』은 에세이가 아닌 르포입니다.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와 작가님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쓰셨는데, 이유가 있었나요? 

일단 저는 저를 잘 못 믿고요. 저뿐만 아니라 아픈 여자들이 그런 것 같아요. 내 고통에 대해서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세월이 너무 길기 때문에, 저의 경험 하나만으로는 쓸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고 확신하기 어려웠어요. 나와 비슷한 여자를 찾아다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들을 만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믿음을 쌓아간 것 같아요. 두 번째 이유는, 많은 질병 관련 수기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게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어떤 집단의 경험이 있는데 그게 잘 드러나지 않고 이야기가 안 되고 있다고 느꼈어요. 병명으로 다 환원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담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공통의 경험을 발견하기 위해서 많이 만나고 다녔죠.

‘단순히 개별적인 서사만이 아니다, 그 안에 집단의 경험이 있다’라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제가 처음 병원에 간 게 2016년이니까, 그때 즈음인 것 같아요. 2016년에 ‘페미당당’ 활동을 하면서 여러 활동을 했는데, 그때 ‘OO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나 페미니즘 관련 사건이 많이 터졌고, 그걸 대응하는 과정에서 친구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우울증을 깊게 앓았어요. 서로 병원에 가라고 제안하기도 했는데, 진료실에서는 그 맥락이 다 삭제가 되는 거예요. 그게 불편했어요. 우리는 우리 고통의 맥락이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병원에서의 경험이 뭔가 불충분하다고 계속 느끼던 중이었는데 마침 제가 석사 논문을 써야 하는 타이밍이었어요. 과학사를 공부하다 보니까 궁금한 게 생기면 책을 통해서 공부를 시작하는 게 저에게 익숙한 방식이었고, 그래서 교과서나 정신의학 서적들을 보기 시작했는데, 역사적으로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여자들이 있는 거예요. 

어떤 경험들이요?

시대도 굉장히 멀고 국적도 다르지만, 여자들이 공유하는 ‘내가 정말 미친 사람인 걸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미친 사람으로 치부되는 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 상황인 거잖아요. 그 사람의 판단, 인지를 믿지 않잖아요. 그 역사가 유구하다는 게 좀 충격이었죠. 저랑 비슷한 사람들이랑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어요. 이건 되게 역사적이고 유구한 문제이고 우리에게는 선배들이 있다는 것. (웃음)

서른한 명의 인터뷰이와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초반에는 제가 직접 컨택한 사람들과 만났어요. 주변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친구들, 글방에서 글쓰기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그러다가 좀 한계가 있다고 느꼈고, 무엇보다 수도권 외 지역의 사람들을 만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겨레21》에 기사를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인터뷰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연락 달라’고 썼는데, 기사가 나가고 나서 진짜 많은 이메일이 왔어요. 정말 다양한 곳에서 자기 이야기를 담아서 보내주셨는데, 이메일이 쌓여가는 걸 보면서 답장을 할 엄두를 못 냈어요. 한 달 정도 지난 뒤에야 제가 평소에 만나기 어려웠던 분들이나 조금 다른 맥락이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에게 연락을 드리고 진행하게 됐죠.



‘《한겨레21》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에 당선된 뒤였나요? 

그렇죠. 공모전에 당선이 돼서 하게 된 일이었어요.

책의 부제가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입니다. 첫 장에서 ‘남성 우울증과 달리 여성 우울증은 어떤 시선과 평가를 받아왔는지’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작가님이 진료실에서 받은 느낌은 어땠나요?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되게 세련돼 보이는 젊은 남자 선생님을 만났어요. 저의 오해일 수 있지만, 너무나 안쓰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영혼 없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셨어요. ‘정말 안 되셨군요, 안쓰럽군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런데 ‘이 사람과 내가 닿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도와주시려고 하는 거지만 ‘이 사람과 내가 굉장히 구분된 세계에서 살고 있고, 지금 이 사람은 나를 완전한 타자로서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저는 환자의 입장이고 그 사람은 저보다 압도적으로 지식이 많으니까 그 사람 말이 다 맞는 것 같고, 그 사람의 한마디 한 마디에 내 인생이 순식간에 정리되는 경험을 하는데, 그게 너무 싫고 불편했어요.

정서적으로 같은 문제를 겪는다고 해도, 여성의 경우는 남성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리타’라는 분의 강의를 듣는데요. ‘여성적 공격성의 형상들’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어요. 어제의 주제는 수치였는데 ‘여성이 갖는 수치는 굉장히 인바디드 되어 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여성의 수치는 여성과 구분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몸으로 나타나는 감정인데, 남성의 수치는 수치라기보다는 오히려 불명예로 여겨진다는 거예요. 디스인바디드 되어 있어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어도 극복 가능하고 그걸로 성장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의 몸과 불명예스러운 일이 분리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성은 몸과 딱 붙어 있어서 성장하는 동력이 잘 되지 않고, 부끄럽고 감춰야 되는 일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존재 자체로 사라져야만 할 것 같다는 메시지를 계속 준다는 거예요. 

우울증과도 비슷한 면이 있을까요?

우울증도 여성 호르몬 때문이라고 말하면 몸의 문제가 되잖아요. 그러면 여성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인 거거든요. 남성 우울증은 아빠로서 가장으로서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하면 우리가 그 사람을 돌봐야 되는 문제가 되거든요. 힘들지 않게 (원인과) 분리돼야 되고, 그 남성의 취약한 점은 남성의 몸과 함께 있는 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걸 통해서 성장 가능하다는 거고. 그게 저는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공론화나 말실수에 대한 공포가 엄청 큰데 ‘왜 나는 그렇게 산뜻하게 넘어가지지 않을까, 왜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을까, 그걸 통해서 성장하자는 결론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자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뭘까’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1장의 마지막 문장이 “우선 자신의 고통부터 믿어야 한다”예요. 진료실에서조차 여성 환자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그러다 보면 환자도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잖아요. 작가님 본인도, 작가님이 만난 서른한 명의 여성들도, 같은 경험을 했을 것 같아요. 

엄청나게 많죠. 저는 진료실뿐만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프다고 할 때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는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서 우울이나 분노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내 고통에 대해서 적절한 해석의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자꾸 믿어주지 않는 경험을 하고, 나는 힘들다고 하는데 ‘너는 힘들만 한 상황이 아니야’라는 식의 말이 돌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감정은 어쩔 수가 없는 거잖아요. 내가 힘들고 아픈 건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건데,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자꾸 마주하게 될 때 감정 시스템이 고장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애인이 혹은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이렇게 상처 입혔다는 걸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감정을 부정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건 유년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이는 거겠죠. 

그렇죠. 특히 여성들은 분노를 표현하기가 어렵잖아요. 항상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여자의 모습으로 남아야 된다는 압박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십 대 중반쯤에 터지는 게 아닐까 생각돼요. 비슷한 시기에 많이들 터지거든요.

이삼십 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체 국민 집단 중에서 이삼십 대 여성이 더 특별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다 중요하지, 더 중요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 방식으로 보편을 말할 수도 있지만, 아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보편에 가닿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저에게는 이삼십 대 여성 우울증이었어요. 그게 제가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중년 우울증이 관심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엄마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삼십 대의 우울증으로) 좁히는 과정에서, 제가 주변에서 인터뷰이를 찾기도 쉽고 무엇보다 인터뷰를 더 편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상황을 제가 좀 더 이해하고 있고요. 그래서 택했어요.

세대를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읽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인터뷰이의 이야기가 되게 좋기 때문에, 굉장히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나 주변 사람들을 대입해서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들이 참 신기하죠? 보세요’라는 것보다는 ‘이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좀 들어주세요’에 가까운 것 같아요.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탐구하고 공부하고 들여다봤는지, 거기에는 당신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눈을 통해서 봐 주세요’라는. 사실 모든 이야기는 특수하지 않아요. 다만 어떤 이야기는 유난히 한 집단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금의 이삼십 대가 처한 특수한 상황도 있겠죠. 책에 나오는 것처럼 “너희처럼 편하게 자란 세대가 어디 있느냐고, 너희가 가난을, 전쟁을, 민주화운동을 아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이 세대는 생각이 성장해 있는데 사회는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그 간극 때문에 힘들기도 할 거예요.

맞아요. 그게 불안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돼요. 원론적으로는 다 가능한 거예요.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도 가능하고 삼성전자의 임원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세상은 말해요. 우리가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이제 여자라고 못하는 세상이 아니라고. 대학 때까지 그렇게 믿고 컸고, 심지어 잘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까 현실은 그게 아닌 거예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계속 부딪히고, 일단 취업에서부터 한 번 확 꺾이죠. 회사에 들어가도 나를 온전히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리고 저는 성폭력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그걸 확인시킨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인간으로서 이 사람에게 가닿지 않고 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냥 성기를 가진 여자다’ 이걸 확인시켜주는 계기들이 성폭력이라고 생각해요. 연인과의 관계도 그렇고요.

이전 세대와는 다른 이유로 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것 아닐까요. 

작업을 하면서 고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요. 청년들이 되게 힘들어하잖아요. 여성뿐 아니라 남성 청년도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그게 파괴적인 방식으로 가기도 하는데, 인간은 고통이 고립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의미를 갖지 못할 때 훨씬 고통스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 죽거나 내가 다치거나 앞길이 막혀도, 그게 민주화운동이라는 시대적인 사명과 묶였을 때는 좀 다른 맥락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다 같이 통과하는 공동체의 고통의 경험이 됐을 때, 의미가 부여된 고통은 사람을 좀 파괴시키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그리고 그게 온전히 내 잘못인 것 같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지 못할 때는 다르죠. 대표적인 게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밖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고통들이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들을 이제 막 발견하는 단계 같아요.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사오십 대가 되면 우리가 겪은 시대적인 어려움들이 되게 중요한 걸로 위상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그런 작업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냥 알아서 할게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인터뷰이들이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맞아요. 정말 그랬어요. 두 가지를 계속 바랐는데, 하나는 우리의 고통이 인정받아서 이것이 폭력의 피해였다는 걸 말하는 것도 중요했고요. 또 하나는 우리가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는 것, 우리가 이걸 되게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나아가려고 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 공부하고 친구들을 찾고 동지를 찾고 거리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데 언제나 폭력을 증언하는 자리에서는, 증언이 앞서다 보니까, 증언하는 사람에게서 피해자 외의 정체성이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되게 외로워지는 일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생기고요. 

그렇죠. 그 사람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복잡하고 입체적인 면들, 무엇보다도 자기 피해를 말하는 그 사람이 굉장히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이 놓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걸 동시에 계속 말하고 싶었고요.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인터뷰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지금 우리는 울면서 되게 힘든 이야기를 했지만, 보세요, 저한테 이 이야기를 해준 당신은 진짜 용기 있고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나 잘 전달하는 사람이에요’라고. 제 마음속의 독자는 거의 항상 인터뷰이였거든요. 구체적인 얼굴들이 늘 있었기 때문에 그걸 너무 말하고 싶었어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그려질 때가 많았던 것 같은데요. 이 책의 인터뷰이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자신의 서사나 고통을 직시하죠. 밑바닥까지 파고들어서 실체를 확인하고 이해하려 해요. 그 과정이 괴로울 텐데도 피하지 않죠. 

맞아요. 정말 인터뷰할 때마다 ‘이 사람은 진짜 표범이다’라고 느꼈어요. 책에도 썼지만 ‘이 사람은 정말 으르렁거리는 느낌이다, 정말 에너지가 엄청나다’ 이렇게 느낄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자기 몸에 맞지 않는 곳에 있어서 자기가 표범인 것도 잊어먹고 있는 거고, 그 에너지가 어디 가지는 못하니까 자꾸 내면으로 향해서 우울의 형태로 가는데, 어쩜 이런 통찰을 할 수 있을까 놀라웠어요. 그걸 제가 ‘똑똑한’이라고 쓴 건, 학력이나 제도권 교육의 문제가 전혀 아니거든요. 그 정도로 자기 고통을 들여다봤다는 거예요. 완전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는데도 스스로 체득하고 깨달은 거예요. 진짜 내가 하는 생각이 뭔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그게 너무 놀랍죠.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엄청 멋있고.



“이들은 미쳐 있고 괴상하지만, 동시에 오만하며 똑똑한 여자들이다.” 이 문장에서 책의 제목이 탄생했나요? 제목은 어떻게 지으셨어요? 

『미괴오똑』은 친구가 지어준 제목이에요. 인터뷰이들 녹취를 풀면서 글을 쓸 때, 이 이야기가 저에게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못 건드리고 계속 망한 글을 썼었어요. 길을 못 찾았던 거죠. 그 과정에서 친구들이 피드백을 해주면서 많이 도와줬는데 ‘근데 이 여자들이, 이 미쳐있고 괴상하면서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자기 얘기를 너무 잘하잖아’라는 말을 했어요. 이 사람들이 피해자이고 환자만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주체로서의 존재라는 걸 지적하는 말이었고, 그게 너무 맞는 말인 거예요. 어떤 전환점이 됐어요. 모든 게 다 혼재되어 있었고 말로 정리가 안 됐었거든요. ‘이게 뭐지? 고통만 말하면 안 되는데, 이 사람들은 되게 다를 수도 있는데 이걸 어떻게 동시에 말하지?’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기준이 될 줄기를 찾은 거예요. ‘아, 이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존재이구나.’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우울증이라는 말을 빼고 이 제목을 만들게 됐습니다.

인터뷰이들이 메일을 보내온 적도 있었죠? 작가님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엮으셨고, 인터뷰 과정에서 모두가 글쓰기를 한 셈이에요. 대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또 다른 지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쓰는 행위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쓰는 것이 역사가 되잖아요. 그래야 멀리 갈 수 있고 누군가의 참고 문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괴오똑』이 나오고 나서 얼마 안 돼서도 계속 인용 요청이 들어왔어요. 어떤 작가의 소설을 비평하는 글에 인용되기도 하고, 의료를 다루는 교과서에도 환자의 경험으로 인용이 되는 거예요. 저는 과학사를 공부했으니까 어떤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려면 인용할 수 있는 글이 돼야 된다는 걸 알고 있긴 했거든요.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지식은 ‘쓰인 글들’이기 때문에. 그걸 하는 과정이었죠. 

마지막 꼭지의 제목이 ‘상처는 자긍심이 될 수 있을까’예요. 작가님은 가능해지셨어요?

아니요, 아직이고요. (웃음) 자긍심이랑 자랑스러운 건 좀 다른 것 같긴 한데... 모르겠어요. 저도 항상 거기서 계속 미끄러져요. 아까 얘기한 여성의 수치가 몸과 붙어 있다는 이야기랑 되게 비슷한 것 같아요. 여전히 누가 저한테 조울증 환자라고 이름을 붙여버리면 수치스럽거든요. 말하기 좀 어렵고 탁 막히는 게 있어요. ‘그런가? 나 미친 애인가?’ 여전히 그 앞에서 약간 작아지는 거죠. 그리고 그건 제가 회복하거나 아예 없앨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 살아가면서 그렇게 지내야 될 텐데... 어려워요. 근데 저는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왔어요. 내가 가진 성향으로 삶을 운용하는 것까지는 온 것 같아요. 그냥 이런 나를 포기하고 그냥 살자, 까지 왔어요. (웃음) 

포기라고 하셨지만 수용이겠죠.

네, 수용하는 것까지는 왔어요. 그리고 그 수용의 단계에 『미괴오똑』이 엄청난 도움을 줬죠.

다음 작업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 어떤 건가요?

하고 싶은 거 많죠. 이걸 쓰면서는 제 안에 규율이 너무 많았어요. 하면 안 되는 게 진짜 많았거든요. 사실 그 규율 안에서 엄청 경직된 상태로 썼어요. 그런데 저는 되게 장난이 많고, 웃기고 밝은 면도 분명히 있거든요. 다음 작업에서는 좀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은데, 광기에 대한 얘기는 계속 가져가야 될 것 같고요. 지금은 키워드로만 있어요. 광기, 환각, 환상, 과학, 판타지, 그리고 페미니즘과 여성 사이의 계급. 이런 것들을 계속 가지고 갈 것 같아요. 그리고 좀 더 저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썼으면 좋겠어요. 뭔가 내가 잘못해도 쉽게 공론할 수 없는, (웃음) 좀 더 편안하게 상상력을 밀고 나갈 수 있는 방식으로 쓰고 싶어요.

‘나를 더 보호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책에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의미일까요?

음... 어쩔 수 없었어요. 뭔가 노출시키고 싶어서 했다기보다는, 일단 첫 번째로는 제 경험을 씀으로써 저를 좀 믿고 이게 중요하다는 걸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요. 두 번째로는 인터뷰이들이 자기 얘기를 이만큼이나 해줬는데 제가 안 보이는 곳에서 그거를 전달하는 사람의 입장으로만 남는 게 되게 불공평하다고 느꼈어요. 이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했듯이 나도 나의 취약한 면을 공유함으로써 같은 쪽에 서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나왔어요.

더 하고 싶으신 말씀 없으세요?

제가 이 책을 쓰고 또 페미니스트 글을 많이 쓰니까 저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이삼십 대 페미니즘의 대변자라는 식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거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정당한 모습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누구의 기대도 만족시키지 않고 그냥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뭔가 실망하셔도 어쩔 수 없다는. (웃음) 첫 번째 북토크에서도 이 얘기를 했어요. 너무 걱정되는 부분이었고 저를 옭아맸던 문제였거든요. 아마 제가 뭘 하든 욕할 거예요. 제가 화장을 해도 욕할 거고, 안 해도 욕할 거고, 내 얘기만 하면 내 얘기만 했다고 욕할 거고, 다른 사람 얘기하면 다른 사람 얘기 가져다 썼다고 욕할 거고, 뭘 해도 욕먹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알아서 할게요. (웃음)




*하미나

1991년생 출생. 논픽션 작가.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학부에서 지구환경과학과 철학을 함께 전공했다. 과학사및과학철학 협동과정 대학원에 입학한 뒤에는 길을 조금 틀어 과학사를 공부했다. 같은 시기 2016년 강남역 여성 표적 살인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여성 운동 단체 ‘페미당당’에서 활동가로 지냈다. 이 시기에 깊어진 우울증을 고민하다 이를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대학원을 탈출했다. 생계를 위해 칼럼니스트, 과학 기자, 글쓰기 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작가로 살기로 결심, 《시사IN》, 《한겨레21》, 《한국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짧은 글을 기고하고 있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은 그간의 연구와 만남, 고민을 한데 모은 첫 책이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저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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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지 “어른이 돼서 그림책 세계에 눈을 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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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은 어떻게 시작되고, 깊어지는 걸까. 최민지 작가의 『나를 봐』는 우정의 비밀을 ‘보다’라는 동사로 풀어내는 그림책이다. 『나를 봐』 속 두 주인공인 ‘나’와 ‘친구’는 서로를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오래 보기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가 하면 남모를 아픔을 공유하며 진정한 친구가 되어간다. ‘이제 너를 잘 알 것 같아’라고 느끼는 순간도 잠시, 지켜보기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를 발견해 가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나와 친구, 나아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다르잖아요

책의 반응이 좋아요. ‘한국 그림책의 미래’라는 수식어도 있더라고요.

예전에는 책이 나오면 기분이 가라앉거나 들뜨거나 둘 중 하나였거든요.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까 싶어서 부담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고요. 이제는 다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바로 다음 책을 준비할 수 있게 됐어요. 매일 온라인 서점 순위를 확인하긴 하지만요. (웃음)

순위를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데요. 작가들이 본인 이름이나 작품명으로 검색해서 독자 반응을 확인하잖아요. 그런데 그림책 작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독자 반응을 확인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어린이 독자가 많으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강연이나 북 토크가 소중해요. 어린이 독자들이 어떤 장면에서 웃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거든요. 처음에는 북 토크 같은 행사가 저한테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어요. 독자를 위해서 하는 행사라고 생각했는데 해보고 알았죠. 나를 위해 해야 하는 거고, 필요한 일이구나 싶었어요.

‘몰랐는데 친구가 되었다’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게 좋았어요. 제목보다 먼저 이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이 메시지를 먼저 배치한 이유가 있나요?

모든 관계가 작은 공통점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적어도 저한테는 그런 경험이 많았어요. 그래서 같은 책을 보고 있는 두 아이가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친구가 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싶었어요.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던 사실을 가까이 가서야 알게 되는 장면이 반복돼요.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바로 알게 되기도 하고요.

누군가를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보이는 게 다르잖아요. 여러 위치에서 다른 시선으로 보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서로 몰랐던 사람이 친구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는 게 신기해요. ‘친구가 된다는 게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중간에 화자가 친구에게 ‘이제 널 다 아는 것 같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 말을 하자마자 얼굴에 있던 점을 새로 발견하죠.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모르는 게 있고, 끊임없이 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그 장면을 좋아하는데요. 다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낯선 모습을 볼 때가 있잖아요. 그런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멀리서 보던 코끼리를 가까이에서 다시 보는 장면에서 코끼리를 슬프게 표현했는데 이유가 있나요? 

화려하고 재밌다고 생각한 어떤 공간에 갔는데 막상 가보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운 걸 목격한 적이 있거든요. 화려하고 다들 신난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고독할 수 있잖아요. 동물원 철창에 갇힌 코끼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런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등장인물에게서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전작 『문어 목욕탕』에도 엄마가 없어서 목욕탕에 가보지 못한 아이가 등장하는데 외로운 아이들 또는 아이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에 주목하는 것 같아요.

제가 외롭나 봐요. (웃음) 어린이들이 주로 보는 책을 만들지만, 어린이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잘 알아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를 할 뿐인데요. 어렸을 때의 나를 생각해 보면 지금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적어도 감정이나 마음의 문제만큼은 어른과 어린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린이라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특별히 어린이들의 외로운 마음을 알아주고 거기에 집중했다기보다 지금 내 마음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어린이도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제 그림책에 공감하는 것 같아요.



그림책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장르

전작에서는 주인공의 성별이 모호하게 표현됐는데 이번 책에서는 두 인물 모두 여성이에요. 

특별히 의도한 건 아닌데 제가 여자니까 자연스럽게 여성 인물을 생각하게 돼요. 『마법의 방방』에서는 의도적으로 성별을 모호하게 했어요. 남동생을 생각하면서 만든 이야기라 처음에는 남자아이로 그렸는데요. 생각해 보니 모험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자였던 것 같아서 아쉽더라고요. 그럼 여자로 그려야겠다 싶었는데 여자라는 걸 긴 머리나 화려한 옷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중성적인 이미지로 그렸어요. 성별 구분 없이 모든 아이가 자기 이야기로 읽기를 바라면서요.

실제로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주인공의 성별을 물어본 독자들이 있었나요?

엄청 많이 물어보셨고요. (웃음) 어린이 독자보다 성인들이 많이 물어보세요. 어린이 독자들은 대부분 본인 성별로 받아들이고요.

재밌네요. 어린이 독자와 성인 독자의 질문이나 반응에 차이가 있나요?

성인들은 그림책 읽는 방법을 많이 물어보고요. 어린이 독자들의 질문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 달라서 정말 신기해요. 어린이 독자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배우는 게 많고, 다음 책을 준비할 때 많이 참고해요. 질문 받고 당황스러울 때가 많은데요. 당황스럽지 않은 척하는 훈련을 하고 있어요. (웃음)

독자의 영향을 받아서 달라진 장면이나 작품이 있나요?

첫 책 『문어 목욕탕』이 나오기 전에 전시회를 열었는데요. 전시에 왔던 어린이 독자가 그림에 있는 물고기가 나중에 죽는지 안 죽는지 물어보더라고요. 그 물고기는 한 번 나오고 안 나오는 서브 주인공이었거든요. 스쳐 가는 캐릭터였어요.

비중 없는 인물에 집중한 독자였네요.

어린이 독자는 작은 인물에게도 관심이 많더라고요. 그 인물이 본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그렸어요. 그 뒤로 면지에 있는 엑스트라 같은 인물에게도 서사를 넣으려고 노력해요.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요. 앞 면지에 임신한 사람이 있는데 뒷면지에서 아이를 낳아요. 작은 그림책이지만 이 안에서는 모든 인물이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렸어요.

텍스트로는 이야기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림에서는 표현되는 거네요.

그렇죠. 그림책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어린이 독자들이 작은 것들을 잘 읽어내요.

어린이 독자들이 한 이야기나 질문 중에 인상 깊은 게 있다면요?

하나를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요. 특징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진짜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진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묻는 것들이 재밌어요. 이를테면 전작인 『문어 목욕탕』을 읽은 어린이 독자가 ‘문어 목욕탕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는 식이죠. (웃음)

어렵네요. 없다고 할 수도 없고요. (웃음) 그런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하나요?

“책에 있고, 나는 아직 안 가봤는데 너는 꼭 가봤으면 좋겠다”고 해요.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썼다”라고도 하고요. 없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는 걸 있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으니까요. 『마법의 방방』을 읽은 독자가 달 토끼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어요. (웃음) 다 그림책의 이야기가 실제라고 생각하니까 할 수 있는 질문들이죠.

제목은 처음부터 ‘나를 봐’였나요?

처음에는 ‘보이니?’라는 질문 형태의 제목이었는데요. 왠지 모르게 아쉽더라고요. 다른 책의 제목이기도 했고요. 고민하던 중에 편집자님이 책에 나오는 말인 ‘나를 봐!’를 제안해 주셨고, ‘이거다’ 싶어서 결정했어요. 책의 메시지를 잘 표현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책은 비교적 분량이 짧잖아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함축적으로 해야겠다고 의식하고 작업하지는 않아요. 글과 그림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장면이 구성되는데요. 글보다 그림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게 그림책이잖아요. 오히려 다른 책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하고 다 쏟아낼 수 있어서 해방감도 들고 재밌어요.

많이 덜어내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겠네요.  

필요 없는 장면을 삭제하거나 생략한다는 면에서 덜어내기도 해야 하지만 텍스트보다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생략하거나 삭제한 장면이 있나요?

영화관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두 친구가 같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었고, 모든 관객이 한 장면을 보고 있는데 상황을 표현하고 싶어서 넣었는데 흐름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삭제했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예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셨다고요. 어떻게 그림책 작가가 됐나요?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그림책 독자가 되었는데요. 졸업하고 나서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왜 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재밌더라고요. 원래 글이 익숙한 사람이었는데 어른이 되어서 그림책의 세계에 눈을 뜬 거죠. 그림책이 나를 위한 이야기로 느껴지더라고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졌고, 혼자서 A4용지 잘라서 만드는 미니북을 만들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했어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생소하지는 않았나요?

생소하긴 했는데 불편하다거나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림에 대한 재능을 고민하지 않아서 그림책 작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되고 나니까 고민되더라고요. ‘더 잘 그려야 하는데’ 싶어서요. 소설 쓰기를 오래 공부해서인지 예전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로 하는 게 익숙했는데 지금은 그림책이 훨씬 편하고 좋아요. 그래서 계속 쓸 수 있는 것 같고요.

어린이 책을 만드는 어른으로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릴 때 경계하거나 특별히 주의하는 게 있다면요?

누군가에게 내 책이 첫 그림책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해요. 처음에는 무섭기도 했어요. 책에 나의 고정관념이 들어가진 않을까 싶어서요. 『마법의 방방』에 나오는 ‘백점만’이라는 캐릭터를 엄마 이미지로 그리려고 했다가 로봇으로 바꿨어요. 엄마를 잔소리하는 양육자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양육자가 꼭 엄마일 필요는 없는데 저도 모르게 엄마로 그리고 있더라고요.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 작가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겠네요.

그림책 만들면서 내가 편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있어요. (웃음) 배우는 것도 많고요. 면지에 강아지가 나오는데요. 처음에는 이 강아지가 목줄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강아지를 키우는 편집자님이 목줄을 허리줄로 바꾸자고 하셔서 나중에 수정했거든요. 요즘은 목줄보다 허리줄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또 하나 배웠죠. 그림책을 잘 만들려면 끊임 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림책은 쉽게 쓰고, 쉽게 읽힌다는 편견이 있기도 한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림책을 만들 때는 인물이 들어가는 위치에도 신경 써야 해요. 면지에 휠체어 타는 인물이 있는데요. 이 인물이 구석에 있는 것과 가운데 있는 것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거든요. 이 책을 만들면서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걸 배웠어요.

수상 작가로서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분들한테 조언한다면요?

독자였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뻔한 이야기지만, 그림책을 많이 보라는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많이 읽어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야기하고 싶은 방식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본인이 그림과 글에 재능이 있는지 고민하기 앞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해요.

작가로서 바라는 게 있나요?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이전 작품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 다른 이야기로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림을 그릴 때도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던 도구를 쓰면서 책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려고 노력해요.





*최민지

심심해 마을에 살고 있는 그림책 작가.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습니다. 그림책 『문어 목욕탕』과 『코끼리 미용실』을 쓰고 그렸으며, 『OK슈퍼 과자 질소 도난 사건』에 그림을 그렸다. 이 책을 만들 때는 심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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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수정 “여성용이니까 2,000원 더 받겠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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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퓨즈 서울’ 대표의 커리어는 이 장면에서 전환점을 맞는다. 어느 날, 남동생의 바지를 우연히 입어본 것. 동생의 바지는 놀랍도록 편했다. 대체 옷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착용감이 이토록 다른 것일까. 여성복과 남성복을 하나씩 비교해가며 연구한 김수정 대표는 주머니의 개수부터 주머니의 깊이, 사용되는 원단의 재질과 원단의 봉제법까지 여성복과 남성복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려서부터 옷을 좋아했고, 거의 평생을 옷에 관심을 가져왔음에도 이런 차이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 화가 났다는 김수정 대표. 그가 집중한 것은 오직 제대로 된, 좋은 품질의 옷이었다. 남성복에 비해 터무니없이 나쁜 품질의 옷들,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에 불과한 옷들은 더 이상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어느 여성복 제작자의 고군분투기이자 여성복 시장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편견과 불평등을 낱낱이 드러내는 고발기이다.



편견이 진짜 무서웠어요

출간 제안을 받았을 때,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어요. 책 한 권을 쓸 만큼 그동안 얘기가 많이 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옷 제작을 하면서 공장이랑 부딪칠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누군가한테 꼭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그럴 때마다 SNS에 이야기를 쓰기도 했는데요. 문제는 그렇게 해도 이야기들이 결국 휘발되고,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이었어요. 때문에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죠. 어느 날 우연히 출간 제안을 받았는데 바로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최근 몇 년간 여성복의 낮은 품질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목소리들이 많아졌다고 느꼈는데요. 대표님은 언제 처음 여성복과 남성복의 차이를 인식하셨어요? 

남동생 바지를 우연히 입어본 게 계기였어요. 입자마자 느낌이 되게 다른 거예요. 착용감이 애초에 다르더라고요. 여성복, 남성복이 겉보기에는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이유를 찾아보려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 일단 남성복은 밑위가 엄청 길어요. 또 주머니가 말도 안 되게 깊었고요. 차이를 보면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A라는 브랜드와 B라는 브랜드가 다르다면 이해를 할 텐데요. 보편적으로 모든 제품에 여남 차이가 발견되니까 나중에는 화가 났어요. 이걸 나만 알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그렇게 공부한 내용을 SNS에 올린 거고요. 유튜브 등에 출연해서도 계속 문제라고 얘기한 거죠.

워낙 의류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을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옷을 만졌으니까요. 10년 넘게 옷에 관심을 가져왔고, 옷을 사랑했던 사람이라 옷을 다 안다고 착각을 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났어요. 내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바꿔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퓨즈 서울’이라는 브랜드였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에요.

변화를 만드는 과정, 대표님의 고군분투도 인상적이에요. 아무리 제작 의도를 명확히 설명해도 ‘여성복처럼’ 샘플을 만드는 공장들을 겪어야 했잖아요. 

제작을 하면서도 이해가 안 됐어요. 그냥 남성복처럼 만들면 되지 않을까 했던 것뿐인데 왜 ‘여성복’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면 갑자기 옷이 달라지고 단가가 확 올라가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공장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데 너무 애를 많이 먹었어요. 저희의 시도가 처음이라 더 그랬을 거예요. 공장 사장님들이 다들 연세가 많으시거든요. ‘지금까지 이런 거 아무도 안 했는데 네가 해서 성공시킬 수 있겠어’ 하는 입장이어서 처음에는 안 해주려고 했던 거죠. 다행히 저희가 몇 번의 성공을 거듭하면서 주문량도 많아져서요. 지금은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처음에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게 너무 힘들었죠. 이해시키는 과정 말이에요. 

특별히 기억나는 사례가 있다면 좀 더 들려주세요. 

남성 슬랙스 공장에 갔을 때예요. 미리 말씀을 드렸죠. 여자들이 입을 옷이고, 기존 남성복 슬랙스처럼 밑위가 길게, 품질 좋게 만들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공장에서 “이런 거 여자들 안 입어. 이런 거 하지 마.”라는 거예요. 또 한 번은 자켓 공장을 갔는데요. 그곳이 남성용 자켓을 만드는 곳이었어요. 여성복과 남성복의 여밈 방향이 다르잖아요. 다른 것은 오직 그것뿐인데 여성용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까 2,000원을 더 받겠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말문이 턱 막혔어요. 다 똑같고 차이라고는 여밈 방향 하나였는데 말이죠. 편견이 진짜 무서웠어요. 



유행은 소비자가 복종하는 것

“남성복은 착용자가 ‘활동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다”(9쪽)는 부분이 의복 차이를 말함에 있어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사회적 편견이 옷에도 부여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충격적인데요. 

여성복은 주머니가 깊지 않아도 가방을 들기 때문에 괜찮다는 인식이 있는 거예요. 한편 남자들은 가방 드는 걸 귀찮아하고, 활동성이 많으니까 주머니가 많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요. 이건 편견이죠. 실제로 그런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냥 그렇게 ‘여겨지는’ 편견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왔던 거죠. 저는 패션 시장이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주 오래되어 온 만큼 보수적이어서 아직도 그런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불편해 할 여성복 업체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중에 나와 있는 SPA 브랜드가 출시한 여성복과 남성복의 차이를 하나씩 분석해놓은 챕터도 인상적이었어요. 하나같이 여성복의 품질이 떨어지더라고요. 대표님이 가장 놀랐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봉제가 그랬죠. 사실 봉제 같은 건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르지만요. 저는 옷을 만지면 늘 원단 재질과 봉제를 중심으로 보거든요. 그런데 자켓 하나에도 남성복에 들어가는 패턴이나 봉제랑 여성복에 들어가는 패턴이나 봉제가 다른 거예요. 셔츠만 해도 여성복은 그냥 ‘오버로크’인데 남성복은 ‘쌈솔’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너무 놀랐어요.

남성복은 봉제에서도 차이가 났다. 티셔츠는 오버로크 제품이 다수였으나 바지나 아우터, 특히 셔츠류는 대부분 ‘쌈솔’ 방식으로 봉제되어 있었다. 쌈솔은 오버로크처럼 원단 끝의 올이 풀리지 않게 하는 봉제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오버로크에 비해 작업이 훨씬 더 까다롭다. 오버로크는 단 한 번의 박음질로 마무리되는 반면, 쌈솔은 박음질을 한 뒤 다림질을 하고, 다시 한 번 박음질을 해야 해서 무려 세 번이나 손이 간다. 손이 많이 갈수록 당연히 봉제 단가도 올라간다.    _(73쪽)

그래서 “여성들도 제대로 된 원단으로 만든 제대로 된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53쪽)고 하신 거겠죠. 사실은 여성들이 그동안 입어온 것이 제대로 된 옷이 아니었던 거고요. 

맞아요, 게다가 여성복은 유행이 엄청나게 빠르잖아요. 요즘 여성복에서는 크롭티가 유행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만드는 입장에서는 크롭티라는 게 정말 가성비가 좋아요. 일단 원단이 적게 들어가니까요. 그렇지만 사실 입기에는 너무 불편한 옷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유행하는 것들은 소비자가 만든 거다, 수요가 있으니까 이런 유행이 나오는 거다, 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기업들이 만드니까 소비자가 어쩔 수 없이 그걸 사는 거예요. 유행은 소비자가 복종하는 거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게 맞아요. 요즘은 니트를 사러 가도 전부 크롭티니까 그럼 소비자는 크롭티를 살 수밖에 없잖아요. 여성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선택권이 필요하고요. 저희가 더 품질 좋은 의류들을 선보이고 있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책에서는 레깅스를 언급했죠. 결코 편하기만 한 옷이 아니라고요. 

지금은 유명 스포츠 브랜드 매장에 가서 보면 여성 스포츠웨어는 전부 레깅스죠. 운동복이 필요해서 매장에 가신 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게 레깅스뿐이라 차선책으로 남성용 운동복을 입으시는 분들도 많은데요. 사실 레깅스 불편해요. 입고 벗는 것도 불편하고, 세탁도 신경 써야 하고, 금방 망가져요. 만약 훨씬 튼튼하고 관리도 편한 스포츠웨어가 선택지에 있다면 레깅스 시장은 이렇게 크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항상 생각해요. 제가 여성용 런닝 팬츠를 만든 이유도 같은데요. 착용감이 편하고, 너무 몸에 붙어서 민망하지도 않고, 품질 좋은 스포츠웨어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따진다면 일단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아요. 여성복은 대개 55, 66, 77 정도로 구분되거나 S, M, L가 다잖아요. 여성의 신체가 그 셋에만 해당하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심지어 ‘프리 사이즈’라고 된 제품들도 보면 다 너무 작고요. 

프리 사이즈도 마찬가지로 제작자 입장에서는 너무 좋은 거예요. 재고 관리가 너무 쉽고요. 제작 공정에 있어서도 좋아요. 그냥 한 가지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런데 같은 프리 사이즈여도 남성복과 여성복이 다르거든요. 제가 비교를 해봤을 때가 2018년 정도였는데요. 여성복은 거의 가슴 단면이 46cm였어요. 이 마저도 최근에는 더 작아지는 것 같고요. 50cm 넘어가면 좀 크게 나왔다, 오버핏이다, 라고 할 정도죠. 반면에 남성복은 기본적으로 가슴 단면이 55-60cm였어요. 사실 그게 진짜 프리죠. 프리라는 단어를 붙일 거면 정말 자유로운 사이즈여야 하는데 왜 여성복은 프리라는 단어 안에 사람들을 맞추게 하는 건지, 참 답답해요. 



빨리, 많이 만들어야 자주 소비하니까

만들 수 있는데 안 만들어온 것은 “소비자 기만”(204쪽)이라고 분명히 적으셨어요. 옷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입장에서 소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도 있을 것 같아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생기는 딜레마가 저희 옷이 너무 크다는 얘기를 들을 때예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 저희가 만드는 옷이 너무 큰 게 아니라 지금까지 여성들의 몸이 너무 작았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거든요. 여자들도 더 운동해서 근육도 키우고, 많이 먹고, 좀 튼튼해야 되는데 사회가 너무 마르기만을 강요하잖아요. 미디어든 뭐든 다 그렇죠. 저는 여전히 성인 여성들은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운동하고, 더 많이 건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간혹 죄책감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세요. 나는 크롭티, 레깅스 입고 있는데 내가 잘못한 건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절대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행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소비자가 복종하는 것이니까요. 자신을 탓하지 마시고 그런 제품 만들어낸 기업들을 탓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일 분노하게 되는 것은 단연 여성복의 제작 의도가 “더 잦고 많은 소비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79쪽)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에요. 이에 대해 대표님은 ‘여성세’라고 말하기도 하셨죠.

일단 어떤 브랜드를 가든지 여성복이 남성복에 비해 세 배쯤 종류가 많아요. 매장 사이즈도 훨씬 더 크고요. 그것을 어떻게 보면 선택의 폭이 더 넓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결국에는 더 많은 소비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거든요. 빨리, 많이 만들어야 소비자가 더 자주 소비를 하니까 계속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남성복에 들어가는 쌈솔 봉제 같은 것을 여성복에 넣으려면 봉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너무 튼튼하니까 새로운 소비가 안 일어날 테고요. 그것이야말로 여성세인 거죠.

심지어 세탁비까지 차이가 있었어요. 남성복은 그만큼 “제품 규격화가 잘 되어 있”(169쪽)다는 것이고, 그동안 여성 소비자들은 부당한 소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죠.

저도 세탁소에서 셔츠 세탁비가 1,000원이라는 광고를 보고 갔던 건데요. 제 셔츠는 남성복 공장에서 만든, 남성복 원단과 봉제를 사용한 셔츠였고요. 심지어 그 옷은 여밈까지도 남성용 방향을 했었어요. 공장에서의 갈등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여성인 제가 입는 옷이라고 하니까 세탁소에서 세탁비를 더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화가 나서 그곳을 나와 다른 지점으로 갔죠. 거기서 이 셔츠가 남동생 옷이라고 말을 하니까 그냥 1,000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충격이었어요. 사실 남성용 셔츠는 사이즈 체계가 어느 정도는 규격화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기계로 대량 세탁을 할 수 있는 거고, 그 가격이 가능했던 건데요. 여성복은 사이즈가 워낙 천차만별이라 공정화를 할 수 없어요. 그런 여성세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제는 소비자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의 목소리를 서서히 내고 있는 것 같아요. 대표님도 “’젠더’를 고려한 가치 소비 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131쪽)이라고 분석하셨거든요. 실제로 어떤 변화를 목격하고 계신가요?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하게 되면 패션 시장은 움직일 거예요. 그렇게 되면 조금 더 튼튼한 의류들이 보편화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느 SPA 브랜드를 가도 여성용과 남성용 옷의 품질 차이 없이 옷을 살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사실 쉽진 않을 것 같아요. 가장 큰 이유는 수익성이죠. 지금 이대로도 옷이 팔리니까요. 저희가 성공 사례를 계속 남기면 대기업들도 하나둘 뛰어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제일 좋은 건 저희가 대기업이 되는 거고요.(웃음)

여성복 쇼핑몰을 운영하다가 제대로 된 옷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퓨즈 서울’을 운영하게 됐고요. 이후에도 속옷, 운동복, 생활한복 등으로 영역을 넓혀왔어요. 오프라인 공간도 생각하고 계시던데, 어떤 계획이신가요? 

저의 최종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이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다가가는 거예요. 이렇게 질 좋은 의류를 만들었잖아요. 이것을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매를 해주셔야 하거든요. 단순히 의류를 판매하는 행위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카페를 만들든 게스트하우스를 만들든 궁극적으로는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스며들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요. 그런 공간에서 질 좋은 의류를 체험해보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김수정 저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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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경 “과연 ‘계모’는 못되고, 추한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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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미지의 세계를 그린 『호텔 파라다이스』, 인간과 인간이 먹는 것 사이의 관계를 묻는 『레스토랑 Sal』, 인간과 비인류의 연대를 다룬 『콤비』 등 이채롭고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해온 소윤경 작가가 이번에 주목한 것은 가족의 이면이다. 전래동화 ‘장화 홍련’을 모티프로 해 꼬박 2년에 걸쳐 작업한 『수연』은 아빠와 엄마, 아이들로 구성된 언뜻 완벽해 ‘보이는’ 가족 사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저마다의 고민과 가족 간 갈등을 담는다. 글 없이 그림으로만 진행되는 단단한 구성, 종이에 연필로만 작업한 섬세하고 날카로운 그림, 『수연』은 소윤경 작가의 예술 세계를 한층 깊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한편 소윤경 작가는 『수연』을 작업하는 내내 힘들었다고 고백gks다. 남달랐던 작업의 무게감은 가라앉아 있던 작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앙금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기도,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가족의 구조를 고민하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책을 출간하면 한 달은 기쁘다고들 하던데 『수연』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이 이야기가 더 이상 내 안에 머물지 않았으면 싶더라고요. 이 아이들이 얼른 세상 속으로 훨훨 날아가서 저를 떠나 사람들 생각 속에서 살아가면 좋겠어요.”



완벽한 가족 사진 

『수연』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여쭤보려고 해요. “깊은 자연을 관찰하는 시간이 쌓여서” 탄생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처음에는 표지에 실린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됐어요. 제가 ‘바캉스 프로젝트’라고, 전래동화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독립 출판 그룹에 속해 있는데요. ‘장화 홍련’을 테마로 잡고 그림을 한 장 그렸거든요. 그런 다음에 이야기가 끌려 나오게 됐어요. 마침 제가 사는 양평집 주변에 수련이 엄청나게 피는 커다란 연못이 있어요. 그 연못 주변 산책을 매일 나가면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한 10년 넘게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요. 거기에 제가 고민하던 가족에 대한 생각까지 연결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세 가지 요소가 같이 온 건데요. 그 중, 가족에 대한 고민이 담기게 된 특별한 이유도 있을까요? 

저는 굉장히 보수적인 집에서 자랐어요. 가부장적인 구조 안에서 괴로움을 많이 겪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동안 전래동화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기존의 이야기들이 싫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전래동화는 너무나 보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유교적인 가치, 권선징악 같은 것인데요.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의 고통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장화 홍련’ 이야기를 현재로 가져오면서 재혼 가정이라는 설정을 한 거죠. 과연 ‘계모’라는 불리던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못되고, 추한 사람들이었을까 묻고 싶었어요. 그들 또한 이 가부장 사회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또 장화나 홍련 같은 아이들이 착하기만 한 아이들이 아닐 수도 있죠. 새엄마를 내심 인정하지 않고, 독하게 행동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다양한 추론을 전래동화를 가지고 많이 했고요. 여전히 재혼을 통해서 새로운 가족이 된 사람들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이야기를 생각했어요.

작가님의 이전 작품들도 떠올려보면, 작가님은 비어 있던 공간들을 건드리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작업을 이어오셨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맞아요, 『수연』에 가족들이 피크닉을 가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 장면을 보면 가족이 과연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완벽한 가족 사진을 원하지만 우리의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 꼭 엄마, 아빠가 온전하게 있고 자녀들이 그 밑에서 행복하게 사는 그림은 아니지 않을까 해요. 그런 장면 속에서 서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고 싶은 거죠. 저도 그런 가족 사진 속에서 살았지만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거든요.

『수연』은 특히 글 없이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풀어가요. 그것이 엄청난 몰입감을 주더라고요. 그림을 더욱 깊이 보게 하고, 더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게 했어요. 능동적인 그림책 읽기라고 할까요. 여기에 작가님의 의도가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동안 늘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어요.(웃음) 그런데 지금의 출판 환경에서는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글 없는 그림책을 불친절하다고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글을 붙여서 책을 내는 경우가 저 말고도 많이 있는데요. 무엇보다 『수연』은 한 가지 코드로만 읽히지 않았으면 했어요. 우선 분위기가 어둡고 무섭잖아요. 공포 그림책은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장르이기도 하니까 무서운 이야기로 읽으셔도 되고요. 한편으로는 출판사 서평에서 보셨듯이 ‘가족’이라는 키워드에 맞춰서 전개를 따라가면서 읽으셔도 돼요. 또 ‘수연’이라는 것이 불교에서는 인연을 따라간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표지 그림을 보시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이어져 있죠. 하나의 인물일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요. 그렇게 그린 이유도 떠올리면서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다만 해석에 너무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싶지는 않아요.

그림 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연필 소묘로 그린 그림들이 섬세하면서도 묘하게 날카로움을 느끼게도 하거든요. 

그림책 작업을 할 때마다 컴퓨터로 작업해야 하나, 수작업을 계속해도 될까, 갈등해요. 수작업은 너무나 지난한 작업이고, 인쇄에도 좋지 않거든요. 컴퓨터 작업이 출판사 입장에서도 비교적 수월하죠. 수작업은 비용이 많이 들어요. 원화를 스캔 받은 뒤 인쇄해야 하고요. 그래서 점점 수작업을 선호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굳이 수작업을 하는 이유는 원화를 남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에요. 화가라서 그 욕심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리면서도 인쇄를 하고 나면 그린 그림의 60-70%도 담기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에 늘 절망을 하면서(웃음) 작업을 하죠. 『수연』은 가장 단순한 재료인 종이와 연필만 썼는데요. 다른 화려한 기법은 전혀 없이, 빨간색과 노란색 외에는 아무 재료도 쓰지 않고 한 권을 밀도 있게 완성해내고 싶다는 기초적인 욕구가 있었고요. 온갖 컴퓨터 기능과 다양한 재료들이 많음에도 오직 종이와 연필만 사용해서 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화가로서의 원초적인 욕구로 작업을 했어요.



가장 두려운, 인간

『수연』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쉽게 넘길 수 없는 작품인데요. 작가님께서 특히 공들였던 장면이나 가장 고민을 많이 하며 그린 장면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물 속에 나오는 괴물 얼굴 장면은 저도 포기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했어요. 아마도 이 그림을 출간해 줄 수 있는 출판사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출판을 해도 그 부분은 삭제하라고 분명히 얘기할 것이다, 이건 빼야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작업했죠. 또 엄마가 자녀의 가위로 머리를 자르게 해서 아빠와 엄마가 실랑이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 장면도 너무 잔혹하다고 출판사에서 처음에는 빼면 어떻겠느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다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라고 설득해서 모든 장면을 다 넣을 수 있었죠. 그래서 출판사에 무척 감사해요. 아마도 이 그림책이 포함된 ‘웅진 당신의 그림책 시리즈’가 작가주의를 지지하는 파트이기 때문에 최대한 잘 해주신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지금과는 다르게 나왔을 거예요.

말씀을 들으니까 그 장면이 이 작품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는 장면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그 장면이 있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하는 말씀처럼도 들리고요.

인간 내면에 가장 어둡고 두려운 것,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거울을 통해서 계속 나오거든요. 저는 그것을 인물들이 자기 마음속의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다시 거울 속에 누군가를 끄집어 내면서 끝나게 되는데요. 그런 의미가 담긴 장면들이라 빼면 안 됐어요.

작가님은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두려운 것이 인간”이라고 하시죠. 인물들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이야기가 『수연』에도 포함되어 있다면, 이러한 생각이 작가님으로 하여금 작품을 지속해 나가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요. 인간의 잔혹성 있잖아요. 권력이나 욕망에 의해 약자들을 희생시키는 그 마음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요. 세월호 사건으로도 충격을 많이 받았는데요. 지금도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보면 어떻게 다음 세대까지 죽여가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할까, 나는 과연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크게 생기는 것 같아요. 그것은 또한 내 안에도 그런 유전자가 있을까, 어쩌면 똑같을지도 모른다, 라는 두려움이기도 한데요. 내가 싫어하고 증오했던 괴물 같은 잔혹함과 이기심이 내 안에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면 인간이 두렵고 내가 두렵죠. 그런 게 작품에 아마 담길 거예요. 사실 『수연』은 작업을 하는 내내 너무 힘들었어요. 이전 작품들은 늘 나를 동물에 빗대는, 어떤 타자와의 관계였는데 이것은 가족을 투영해야 했으니까요. 나이를 먹으면서 내 안에 가라앉았었던 가족 내에서의 관계 앙금들이 떠올라서 힘들더라고요.

작가님은 또 그림책을 보는 독자들에게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예술 작품을 본 것 같은 체험을 그림책으로 주고 싶다고 말씀하시죠. 어떤 마음으로 그림책 작업을 하시는지, 그림책을 보는 독자 분들에게 건네고 싶은 당부는 무엇인지도 궁금해요. 

그림책을 스토리 위주로, 또는 교육적 관점에서 많이 보고요. 그렇다 보니 그림책의 독자는 어린이라고 한정하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그림책의 시각성에 대해 평론해주시는 분들도 거의 없고요. 대부분은 문학 평론을 많이 하시다 보니까 시각성에 대해서 소통할 수 있는 채널도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실 그림책이 어린 시절 가장 먼저 접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면 그림책이야말로 시각 예술을 접하는 첫 번째 통로잖아요. 어려서부터 높은 수준의 예술 세계를 보고 성장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는 미술관 문턱을 높게 생각하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책만 펼치면 그 안에 있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저는 그런 것을 위해서 그림책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시각 예술의 세계는 엄청나게 풍부하기 때문에 저는 그 중에서도 다소 어둡지만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들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림책 독자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계신 거군요. 그림책은 꼭 어린이만 읽어야 된다는 식의 선입견이 여전히 존재하니까요. 

요즘은 조금 나아졌어요. 그림책 작가들이 강연도 많이 다니면서 그림책을 이제 초등학생까지는 보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 아예 안 보죠. 어른이 되면 아예 책과 거리가 멀어지고요. 저도 제 책이‘유아’ 코너에 꽂혀 있을 때마다 난감해요.(웃음) 사실 유아 카테고리를 넘어서면 판매가 거의 되지 않기 때문에 출판사들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거죠. 그나마 ‘100세 그림책’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어서 요즘은 성인들도 그림책을 많이 보시게 됐잖아요. 해외 그림책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열려 있는 것 같고요. 다만 아직 국내 창작 그림책들에 대해서는 교육적인 생각으로 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이건 독자층이 확산되지 않으면 방법이 별로 없어요. 그림책은 교육성과 예술성 사이에 존재하는 것인데요. 그냥 교육성에만 가깝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같이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많이 곤란하죠.(웃음) 물론 제 책들을 어린이들이 봐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2018년 《채널예스》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도 “그림책의 독자층이 다양해져야만 저같이 낯선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도 계속 작업을 이어갈 수 있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장르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었죠. 

저는 사실 풍전등화 같은 존재가 아닐까 가끔 생각해요. 그림책이라는 커다란 장르의 가장 외곽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중심이 줄어들게 되면 제일 먼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해요. 그만큼 독자층들이 다양해지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작업하기가 어렵죠. 이번 『수연』도 출간 자체가 쉽지 않았어요. 지켜줄 수 있는 게 없는 세계거든요. 국가 지원도 없고, 오로지 출판사의 상업성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저도 일찌감치 출판사와 콘티 단계에서 출간 계획을 잡고 작업을 한 적도 있는데요. 아무래도 출판사의 입김이나 편집자의 의견에 의해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꾸 흘러가게 되더라고요.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흘러간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다음부터는 저만의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되도록이면 완성된 것을 그대로 내줄 수 있는 출판사를 찾자고요. 하지만 이 방식이 작가에게는 막막함 그 자체죠.  



나의 창작 동력은

작가님은 화가, 일러스트로도 활동하시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림책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저도 가끔 제가 왜 굳이 그림책 세계에 와서 이런 일들에 자꾸 부딪혀야 하나, 많이 고민해요.(웃음) 순수 회화를 하거나 일러스트레이터로만 작업을 하면 될 것을, 하고요. 그래도 그림책 작가님 대부분이 그렇듯 저 또한 그림책 작가가 되길 잘했다고 늘 생각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그림책이 갖는 보편성과 대중성 때문에 그래요. 어찌 됐건 누군가에게는 전달이 된다는 것이죠. 제가 아무리 낯선 그림책을 만들어도 알아보시는 분들은 또 굉장히 좋아해 주시거든요. 그것이야말로 지치다가도 다시 작업을 하게 하는 동력이에요. 물론 큰 인기는 얻을 수는 없더라도 제가 표출하려고 하는 세계가 꾸준히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요. 누군가가 분명히 제가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감지해서 저에게 신호를 보내주면 그래도 정말 잘했구나, 생각하죠.

미지의 세계를 그린 『호텔 파라다이스』, 인간과 인간이 먹는 것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레스토랑 sal』, 인간과 비인류의 연대와 공존을 다룬 『콤비』, 그리고 가족의 이면을 보여주는 『수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뤄오셨는데요. 작가님이 자꾸만 돌아가게 되는 어떤 궁극적인 질문 같은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존재감 약한 사람으로 살기를 늘 교육받아온 존재예요. 딸이고, 둘째고요. 어디서도 조용하고 예쁜 존재로 있어야 사랑받는다는 교육을 받았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본질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냥 하나의 인간인데 자꾸만 그런 틀로 나를 봐야 했어요. 그런 마음에서 또 다른 생명들을 보고 있으면 걔네들도 인간이라는, 먹이사슬의 위에 있는 존재가 강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고요. 그래서 자꾸 고민하게 되는 건 생명의 경중이라는 문제 같아요. 실업자, 노숙자나 권력자의 생명에 경중이 있을까, 또 아주 작은 애벌레의 생명에는 경중이 있을까, 늘 생각하게 돼요. 누군가는 추앙 받는 존재가 되고, 누군가는 파리처럼 죽일 수 있는 가벼운 존재가 되는데 도대체 그걸 누가 정하나, 자꾸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나조차도 동물보다는 낫다고 자꾸만 착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존재, 다른 생명체에 대한 관심이 자꾸만 작품으로 들어오는 거군요.

그런 질문이기도 하고요. 나도 어쩌면 그냥 하루살이가 아닐까, 나 자신을 확장시키고 팽창시키는 것도 인간의 착각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자꾸 이야기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삶이 비루하고, 슬프고, 처참하게 느껴질 때가 많죠. 그렇지만 그래도 책을 한 권 만들어내면 마음이 좀 낫고요. 그래도 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것이 계속 창작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해요.

『수연』을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으세요? 

청소년기가 되면 부모님과 갈등이 굉장히 많이 생기죠. 자아는 커지는데 부모님들은 여전히 강압적이거나 참견을 하고요.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가 들었던 게 저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답답함을 느끼는 청소년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저희 세대도 마찬가지지만 재혼 가정도 많잖아요. 그런 다양한 가족의 상황 속에 있는 분들이 보시면 좋겠죠. 또 저처럼 이미 가정을 나와서 독립해서 살아가는 성인들에게도 누구나 가족에 대한 앙금이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그래도 가족은 행복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냥 그것이 가족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소윤경 (글·그림)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파리국립8대학에서 조형 예술을 전공하고, 회화 작가로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전시에 참가했다. 그림책 『내가 기르던 떡붕이』, 『레스토랑 sal』, 『콤비 combi』, 『호텔 파라다이스』를 쓰고 그렸고, 동화 「다락방 명탐정」 시리즈, 『캡슐 마녀의 수리수리 약국』, 『거짓말 학교』, 『컬러 보이』, 『김원전』, 『무대는 언제나 두근두근』, 『레스토랑 Sal』, 『요괴 소년』, 『아기도깨비와 오토제국』, 『일기 감추는 날』, 『벌거벗은 임금님』, 『내가 형이랑 닮았다고?』, 『각시각시 풀각시』, 『건방진 도도군』, 『소심쟁이 김건우』, 『아기도깨비와 오토 제국』, 『거짓말 학교』 등이 있습니다.




수연
수연
소윤경 글그림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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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인생의 쓴맛을 보느라 애쓴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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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정직하게, 뿌리까지 낱낱이 이해하고 깊게 껴안는 작업이 바로 치유 글쓰기의 과정이다.” 

30여 년간 심리상담가, 마음칼럼니스트, 치유하는 글쓰기의 안내자로 살아온 박미라 작가는 말한다. 그는 17년 동안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글을 쓰면서 나의 내면과 직면하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 글을 쓰면서 자신이 성장했음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곁에서 변화를 이끌었고 지켜봤다.

그 과정들이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에 담겼다.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고, 그 결과 다다르게 되는 ‘자기 이해’와 ‘자가 치유’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심리학적 지식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려주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책장을 덮을 때쯤 ‘치유하는 글쓰기가 이런 것이구나, 나도 시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 필요한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와 동시 출간된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이다. 박미라 작가가 오랜 시간 연구하고 적용해온 치유적 글쓰기의 방식 153가지를 담았다. 구체적인 글쓰기 기법을 소개하는 동시에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을 때’ ‘위로가 필요할 때’ ‘내 경험과 거리두기가 필요할 때’등 다양한 순간에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무의식이 말하도록 하는 글쓰기

『치유하는 글쓰기』 이후 13년 만에 출간된 ‘글쓰기 치유서’입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어요? (웃음)

그냥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라는 걱정이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용적으로 더 보충해서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를 개정판으로 내게 됐고요. 이론적인 것보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을 쓰게 된 거예요.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에서도 챕터마다 글쓰기 매뉴얼을 넣었었는데, 그러면서 제가 굉장히 할 이야기가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글쓰기와 관련해서 경험도 많고, 글쓰기를 좋아하시는 분들한테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그래서 용기를 내서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을 썼어요. 글을 쓰면서 많이들 답답해하시는 문제들에 대해서 제가 강의에서 하듯이 말씀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썼는데, 한 권의 책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상처 입은 당신에게 글쓰기를 권합니다』는 『치유하는 글쓰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전 책과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시대적인 것들과 함께 제 생각, 마음이 조금씩 변한 게 있고요. 글쓰기 프로그램이 굉장히 많이 바뀌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할 때 그 분이 오셨었는지, (웃음) 뿌리부터 갈아엎을 만큼 변화하지는 않았어요. 더 많은 디테일들이 생겼고, 오히려 처음에 만든 틀이 옳았다는 걸 보충하는 경험들이 많이 쌓였어요. 그렇지만 이론적으로 조금 미진했던 것, 특히 ‘미친년 글쓰기’ ‘여성주의적 글쓰기’에 대한 부분을 많이 보완했고요. 이후에 추가된 글쓰기 방법들도 실었어요.

‘미친년 글쓰기’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죠?

그렇죠. 어떤 남자 분들은 ‘그러면 나는 미친놈 글쓰기를 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시는데요. (웃음) 남자들의 경우는 억압된 여성성, 여성들의 경우에는 부정당했던 여성의 정체성에 관련한 문제니까요.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는 거죠.

‘미친년 글쓰기’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내재화된 규율이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쓰는 걸까요?

네. 이성적 합리적 글쓰기가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감정적이거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말들 속에 진실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훈련 받아서 쓰는 이성적 합리적인 글은 자아의식, 에고에 의한 글쓰기인 거죠. 에고를 더 강화시키기 위한 글쓰기이고. ‘미친년 글쓰기’는 에고 아래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이 말하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 말해도 좋으니까 입을 열어봐, 들어줄 거야’ 이런 태도를 갖게 하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무의식이 말하도록 하는 글쓰기’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치유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무의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쉽지 않은 작업일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떤 분들이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찾아오세요?

일단 글쓰기를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그리고 글을 쓰다가 뭔가를 경험하신 분들이에요. 글쓰기가 도움이 된다거나 힘이 된다거나, 또는 뭔가 가벼워졌다거나,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오세요. 글쓰기를 하면서 좋은 보상을 받은 분들이 그걸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오시는 거죠. 이 과정을 두려워하시는 분들은 무의식과 마주하면 무시무시한 것들이 나올 거라는 오해를 하세요. 그것도 일종의 각본이거나 환상일 수도 있어요. 마음의 행복을 위해서 좋은 첫 발을 내디디면, 우리 마음에서 굉장히 좋은 보상이 나와요.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그런 경험을 하시고 더 많은 선물 꾸러미를 받으려고 오시는 거죠.

글쓰기로 치유하는 작업이 꼭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 이것도 편견이네요. 

맞아요. 마음의 고통이나 문제를 갖고 계신 분들에게도 필요하고요. 자신의 의식을 성장시키고 싶어서, 어제보다 더 낫고 싶어서, 더 성숙한 모습이 되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도 꽤 많아요.

작가님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고, 계속 글 쓰는 삶을 사셨는데요. 글쓰기의 치유 효과를 처음 알게 되신 건 언제였나요? 

기자를 그만두고서 조혜정 교수님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를 읽으면서 ‘나다운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글 말고 나다운 글을 써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초보 엄마 파이팅!』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때 실험을 해봤어요. 친구한테 수다 떨 듯이 에세이를 써보자. 그렇게 하니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살 것 같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경험을 했어요. 그리고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일할 때, 저는 다른 분들의 글을 받으면 굉장히 열심히 피드백을 해주는 기자였고 편집장이었어요. 잘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으면 마음대로 고치는 게 아니라 전화를 해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굉장히 좋아하시는 거예요. 다들 너무 좋아하시고 기꺼이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그럼요! 누구라도 그럴 것 같아요. 

그때 생각한 게 ‘아무리 유명한 저자라도 글을 함부로 쓰지 않고, 자신이 쓴 글을 되게 소중하게 여기는구나’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제가 이해가 안 됐던 대목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면서 알게 된 게, 자신이 정리되지 않은 부분에서 문장도 꼬인다는 거예요. 문장이 꼬이는 건 글쓰기 기법이나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반영되는 거구나, 그걸 알게 됐던 것 같아요. 내가 그 사람의 글을 존중해주면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갖는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처음에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을 만들 때, 사람들이 써오는 글에 정성껏 피드백을 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쓴맛 보느라 수고한 나에게

처음에는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기를 권하시는데요. 손이 가는 대로 쓰는 일이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어떤가요? 

다들 너무 잘 쓰세요. 오시는 분들 중의 절반은 글을 좋아하고 왕년에 써봤던 분들이고, (웃음) 절반 정도는 글 쓰는 게 두렵다고 하시는데요. 저하고 같이 시작하면 대부분은 줄줄 쓰세요. 열 명 중에 아홉이나 열은, 나중에 ‘글이 이렇게 쉽게 써지는 건지 몰랐다’고 하세요. 제가 줄리아 카메론, 나탈리 골드버그 같은 사람들의 말을 많이 인용하는데, 그들이 글쓰기 치료의 전문가가 아니거든요. 창조성이나 작가와 관련된 클래스를 운영했던 사람들인데 ‘그냥 떠오르는 대로 쉬지 말고 쓰라’고 이야기해요.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해서 쓰는 글은 에고가 쓰는 거고, 그냥 떠오르는 대로 받아 적는 건 내면의 창조성이 말하는 걸 에고가 받아 적기만 하는 거라는 의미죠. 그래서 쉽게 쓰라고, 그래야 에고보다 힘이 센 창조성이 뭐라고 줄 거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 사실을 몰랐을지라도, 저도 『초보 엄마 파이팅!』 이후로는 첫 문장만 생각한 상태에서 그냥 써요. 그러면 어떤 부분에서는 의도하거나 기획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훨씬 더 진솔해진다는 느낌도 들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한 분들이 잘 쓰실 수 있는 건, 작가님께서 좋은 피드백을 주셨기 때문이겠죠. 

다들 열심히 잘 따라와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늘 드리는데요. 저는 지지하고 격려하는 것밖에는 할 게 없다고 생각해요. ‘너무 잘했다, 너무 훌륭하다’ ‘제가 3분 동안 쓰시라고 했지만, 3분 동안 쉬지 않고 쓰시다니 대단하다’ 저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그렇게 계속 지지와 격려를 받다 보면 글쓰기를 통해서 내면 여행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간혹 제 설명을 잘못 들으시고 글을 쓰시기도 해요. 그래도 저는 대단하다고 칭찬을 드려요. 제가 가르쳐드리지 않은 방식으로 해보셨다니 대단하다고요.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그렇게 자꾸 격려를 받으면 ‘이제는 조금 센 걸 경험해 볼까?’ 하는 욕심이 생기게 되고, 그런 자발성이 있어야 내면 여행을 하실 수 있게 되니까요.

책에서도 스스로를 계속 칭찬해주라고 말씀하셨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쓴 것, 그 모두가 너무 대단하다고 자신을 칭찬해주라고요.

맞아요. 내 마음을 보는 건 굉장히 고된 일이고 골치가 아플 거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당근을 계속 줘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글을 통해서든 인생을 통해서든 쓴맛을 보잖아요. 쓴맛을 본 것에 대해서 가리거나 방어할 필요는 없는데 ‘쓴맛을 보느라 수고했다, 애썼다’고 이야기해줄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 다음에도 수고할 용기가 생기는 거죠. 기본적으로 글이라는 것은 혼자 쓰는 거더라고요. 혼자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 속에서 쓰느냐, 나에 대한 태도가 어떠하냐가 매우 중요해요. 나 자신과의 관계가 우호적이 됐을 때,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됐을 때 치유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글쓰기에서 계속 그걸 강조하는 거고요.

스스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려고 할 때마다 ‘내면의 비판자’가 걸림돌이 되는 것 같은데요. 책에서 ‘내면의 비판자’를 살살 달래는 방법을 알려주셨죠. (웃음)

(‘내면의 비판자’에게) ‘네 이야기도 고려해줄게, 일단 지금 쓰는 글을 마저 쓰고’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면의 비판자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순기능도 있어요. 내면의 비판자가 없으면, 남들에게 대신 비난 받으면서 살게 될 거예요. 그래서 자기 검열이라는 건 어느 정도는 필요한데요. 문제는 내면의 비판자에게 한 번 의욕이 생기면 과잉으로 작동되는 거예요. ‘너는 이제 나 없으면 살 수 없어’라는 식으로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나를 점점 꼼짝 못하게 만들죠. 다른 사람하고 말할 때도 자유롭게 말할 수 없게 되고, 혼자 글을 쓸 때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되고.

맞아요. ‘내면의 비판자’는 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할까요? 

이런저런 잔소리를 계속 한다는 건 걱정이 많은 거거든요. 내면의 비판자가 왜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언젠가는 꼭 이야기를 들어줘야 돼요.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에서도 내면의 비판자와 직접 대화를 해 보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왜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게 되는지, 걱정의 궁극적인 의도가 뭔지 들어보는 일이 필요해요. 달래주면서 함께 가는 거죠.

말씀을 들으니까 ‘떠나보내기’에 대해 내용이 생각나요. 무의식이든, 내 안의 어린아이든, 직면한 무언가를 떠나보내야 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셨죠. ‘그동안 너에게 도움 받은 것도 있어, 고마워, 그런데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아, 잘 가’ 하면서 떠나보내라고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완전히 떠나보낼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 힘이 약화되면서 다른 건강한 성질로 변형될 수는 있거든요. 그걸 저는 ‘떠나보내기’라고 했는데요. 내 안에서 생긴 그 무엇도 ‘나라는 존재를 잘 살아보게 하려고’ 보완적으로 만들어진 측면이 있어요. 어떤 식으로든 기능을 했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공로를 인정해주는 게 필요한 거죠.

간혹 ‘아픈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좋은 이야기만 쓰면 안 돼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가요?

그럼요, 있어요. 제가 처음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지금은 10년도 훨씬 넘었죠, 그 시기에는 너무 거부감을 느끼면서 자리에 앉지도 않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픈데, 그런 이야기를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많아요. 그럴 때 저는 그냥 괜찮다고, 그렇게 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려요. 각자 내면의 치유사가 있고,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해요. 더 즐거운 이야기를 해야 힘이 나고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하시라고 해요. 그렇게 하시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힘든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걸 알고 나니까 내가 너무 좋아졌어요, 힘이 생겼어요’라고 말하는 걸 들으시면서 조금씩 변하시기도 해요.



수치심을 느껴도 괜찮아

글 쓰는 시간을 정해주셨어요. 어떤 글은 3분 어떤 글은 7분 동안 쓰라고 하시고, 글쓰기 시간은 하루 최대 30분을 넘기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이유가 있나요?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도 줘보고 적게도 줘봤지만, 효과는 똑같아요. 어떤 때에는 시간을 적게 줄 때 더 빠르게 중요한 이야기들이 나오거든요. 처음에는 시간을 넉넉하게 드렸는데 한정된 시간 때문에 점점 짧은 시간을 드리게 됐어요. 그런데 20분의 시간을 드렸을 때랑 2분의 시간을 드렸을 때랑 효과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20분을 드렸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계시던 분들이 ‘2분 드립니다’라고 하면 쓰실 의욕을 내요. 2분이니까 쓸 수 있겠다면서요. (웃음) 글쓰기도 그렇더라고요.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표현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무언가를 치유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내면의 치유자가 어떤 조건에서도 필요한 자료들을 다 올려 보내주는 거죠. 그런 것들이 저도 정말 신기하고 재밌고 놀라워요.

치유하는 글쓰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무의식을 보게 되는데요. 중간 중간 막히는 지점들이 있지 않나요? 

있죠. 이를테면 자책감이 굉장히 큰 부분이 그래요. 부끄럽거나 수치스럽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한 것, 내가 피해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빨리 이야기하시는 편이에요. 그런데 내가 누군가의 가해자였던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만 갖고 있을 뿐이지 글쓰기로 드러내기를 힘들어하세요. 또 다른 지점이 있다면, 어느 순간까지는 글을 써서 되게 후련했는데 그 이상 써지지가 않고 계속 같은 이야기만 나오는 때가 있어요.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만 나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는 ‘혼자 쓰면 무시무시한 감정들이 드러나서 견딜 수 없어요, 너무 무섭고 두려워요’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때는 어떤 말씀을 해주시나요?

세 번째 경우는 가능하면 혼자 쓰시지 말고 같이 쓰시라고 하죠. 함께 쓰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라고요. 두 번째 경우,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하실 때에는 해결 방법이 있어요. 책에도 나와 있는데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또는 ‘더 위험한 이야기를 하자면’ 하고 글을 써보는 거예요. 그러면 글이 줄줄 써져서 다들 깜짝 놀라세요.

‘자기 용서’에 대해서 쓰셨는데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이끌어주세요? 

용서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글을 써야 돼요. 용서는, 남에 대한 것이든 나 자신에 대한 것이든, 섣불리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그 모든 감정을 충분히 겪어야 하는 것 같아요. ‘수치심을 느끼지 마, 너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수치심을 느껴도 괜찮아’ ‘죄의식에 시달려도 괜찮아’ ‘그러느라 고생했겠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나 자신에 대해 좀 편안해져요.

『모든 날 모든 순간, 내 마음의 기록법』을 읽으면 치유하는 글쓰기를 혼자 시작해볼 수 있는데요. 책의 끝에서 함께 글쓰기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고 하셨어요. 두 방식이 서로 보완되는 측면이 있을까요?

너무 많아요. 사실 저는 함께 쓰시기를 권해요. 서로가 주는 치유의 힘이 있고요. 서로 경쟁적으로 열심히 쓰는 효과도 있어요. (웃음) 그리고 다들 말씀하시길 ‘이상하게 혼자서는 안 써지는데 함께 쓰면 너무 잘 써진다’고 하세요. 그리고 함께 쓰면서, 글을 낭독하지는 않지만, 글쓰기 경험을 나누거든요. 그러면 ‘저 사람은 글쓰기를 통해서 저런 걸 배우는구나, 나도 해봐야지’ 하면서 서로 되게 많이 배우세요. 그래서 함께 쓸 때 훨씬 더 효과가 있어요. 꼭 전문가의 안내가 아닐지라도 그룹을 만들어서 함께하시면 훨씬 좋다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책에서 알려주신 방법들은 모두 현대 심리학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가족학, 여성학, 심리학, 자아초월심리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를 공부하셨는데요. ‘나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공부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셨나요? 

네. 꿈꾸고 글쓰기하고 이러면서 알게 된 건데요. 저희 어머니의 열등감, 학력 콤플렉스라는 그 열등감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이전 세대는 무학이신 분들이 많았잖아요. 저는 어머니의 열등감을 마음의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달리면서 갔던 것 같아요. 덕분에 공부는 많이 했어요. (웃음) 또 다른 이유는, 상담자나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분들의 특성일 텐데요, 남의 마음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매일 불안해요. 저도 프로그램이 뭔가 잘못 진행된 것 같거나 누군가에게 말을 조금 잘못한 것 같으면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엄청 열심히 공부하러 다니세요. 저도 그 중에 하나인 거죠. 불안감 속에서 계속 배우고 공부하는 것 같아요.

독자들에게 더 하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꼭 한 가지가 있는데요. 내년 한 해 동안 매일 조금씩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를 하시는 방법으로 이 책을 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과 노트 한 권으로 ‘올해는 매일, 하루에 10~20분씩, 글을 쓰면서 나를 돌봐야지’ 생각하시고 새해를 시작하시면 진짜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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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 작가 “B급 느낌이 묻어나는 A급 문장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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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축구, 술, K-축제. 지금까지 작가 김혼비가 다룬 주제다. 어쩌면 비주류로 여겨질 소재를 펄펄 뛰는 월척으로 담아낸 김혼비의 글맛. 그의 네 번째 글감이 ‘다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짐작하건대 가장 김혼비다운 이야기이겠다고 생각했다. 『다정소감』은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김혼비가 다정한 마음으로 쓴 산문들을 그러모은 책. 재밌게도 이 책을 쓰는 동안 김혼비는 또 다른 편집자에게 ‘다정’을 주제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가식을 응원하고 싶다

김혼비와 다정이라니! 출간 소식을 듣고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부담감도 있지 않았나요? 사람들에게 더 다정히 다가가야 할 것 같은 책임이랄까요.

부담 이전에, 책을 만들 때 편집자님이 주제와 소재가 제각각인 산문들 속에서 ‘다정’이라는 키워드를 바로 집어내셨고, 책에도 ‘다정’이라는 단어를 딱 박게 됐는데요. 정작 제가 다정한 사람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산문집을 낸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어요. 그동안 늘 하나의 주제를 향한 책만 써와서 이렇게 여러 주제를 아우르는 책은 감이 안 왔어요. 심심한 것 같다가도 산만해보이고, 너무 진지하기만 한 건 아닌가 싶다가도 너무 가볍지 않나 싶고.

하지만 김혼비의 다정을 여러 번 목격한 사람이 많아요. 짧은 문자, 짧은 이메일에서 또 팟캐스트 녹음 현장에서도요.

앗, 그런가요? 이 인터뷰가 나가고 나서부터야말로 진짜 책임감을 가져야겠네요(웃음) 문득 생각났는데 『다정소감』을 한창 쓰던 중에 추천사 때문에 어느 편집자 분과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요. 마침 저에게 ‘다정’을 주제로 책을 써보자고 제안하셨던 신기한 우연이 있었어요. 심지어 '다정소감'이라는 제목을 확정지은 지 정말 며칠 안 지났을 때였는데.

여자 축구, 술, 전국 축제 등 그간 써온 글을 보면 모두 주제가 선명했잖아요. 다정은 좀 다른 느낌이에요. 어쩌면 더 비주류인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오히려 ‘다정’이라는 키워드가 이미 많이 나왔다고 생각해서, 특히 에세이 분야에서는 약간 포화상태가 아닌가 싶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조금 다른 결의 다정을 담고 싶었어요. 

기억에 남는 리뷰가 있나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때부터 저를 굉장히 응원해주셔서 마음속에서는 이미 친구처럼 느끼고 있는 N이라는 독자가 계신데요. 그분이 최근에 『다정소감』을 읽고 이런 글을 써주셨어요. “누구에게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는 감정적 태도가 ‘다정’의 전제라면 다정한 내 의도가 받는 이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겸손이 ‘소감’이라는 행위를 결정한다”라고. 이 말이 되게 좋았어요. 이걸 앞으로 삶의 모토로 삼아도 좋겠다 싶을 만큼이요.



「가식에 관하여」라는 글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식은 어쩌면 필수 조건인데 자괴감이 들 때가 많죠.

고민 상담을 듣다 보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스스로를 너무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게 좀 안타까워요. 가만히 듣다보면 사실 잘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스스로가 사라지는 느낌을 안 가지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데, 주변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그렇게 못하잖아요.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지만 굳이 단순화시켜서 표현했을 때 선과 악의 두 갈래 길에서 가식일지언정 선한 선택을 하면, 그리고 그런 가식적인 선택들이 계속 쌓이면, 점점 자기 안에서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붙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종류의 가식은 계속 응원하고 싶어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해요. 저에게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이 피곤하지 않고 여유 있는 것. 갑자기 누군가에게 달려갈 일이 생기거나 밤을 새워도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와줘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 상태였으면 좋겠어요.

기본적으로는 건조하게 살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선배로서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평소에는 별 존재감 없다가 필요할 때 손 뻗으면 늘 있는 곽 티슈 같은 사람이요. 선배의 역할은 딱 그 정도가 적절한 것 같아요. 아니 그 정도만 되어도 무척 훌륭하죠.

스스로를 까칠하고 다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까칠함은 ‘정확하게 다정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질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에 두루두루 다정하다 보면 때로는 그 어떤 것도 지켜낼 수 없어요. A에게 다정하기 위해서, A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 A가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 까칠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다정소감』의 어떤 글들도, 어떤 위치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다정하기도 하지만 무척 까칠하기도 한 것처럼요. 제가 지금 까칠하게 굴어서 지켜내거나 바꿔가는 어떤 관습이나 규율이 제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세계의 토대를 만들 수 있기도 하고요. 위악에 가까운 까칠함이나 목적 없는 까칠함은 주변도 본인도 해칠 수 있지만, 넓은 틀 안에서 따져봤을 때, 나의 까칠함이 누군가에게 다정한 세계를 만들어주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떠받치고 있다면, 까칠함으로서 다정하고 있다고 믿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까칠함들에 진 빚들이 정말 많고, 그래서 저는 목적 있는 까칠함들에 진심으로 고마워요.



조언이 점점 터부시되는 게 불안해요

프로필 문구에 “여전히 백지 앞에서 낯을 많이 가린다”고 쓰셨어요.

기본적으로 글을 무서워해요. 완성하기까지 오래 걸리고요. 글이 무서워서 항상 예전에 쓴 원고(파일)를 열어서 그 위에 덮어 써요. 은유적인 표현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두려움이 있어요.

문장에 관한 고민도 하나요?

글쓰기 책에서 이렇게 쓰지 말라고 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쓰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웃음) 예전에 글쓰기 강좌들을 다녀봤는데요. 항상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너무 쓸데없는 말장난도 많고 비유도 많고 문장부호도 턱턱 쓰고 만연체라고. 피드백이 항상 좋지 않았어요. 

고쳐본 적도 있나요?

그럼요. 그런데 시키는 대로 쓰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글쓰기 강좌에 다닐 때는 딱히 작품을 쓰고 싶다거나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고, 그냥 지금보다 조금 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다녔던 건데요, 재밌자고 쓰던 글이 글쓰기 선생님들의 조언을 다 수용해서 문장도 짧게 끊어 쓰고, 접속사 부사 형용사 비유 드립 다 빼고 쓰려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굳이 이렇게 써야 한다면 꼭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싶어서 언젠가부터 강좌를 안 나갔어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아무튼, 술』은 김혼비의 문장을 고쳤으면 나오지 않았을 책이에요. 

첫 책의 초고를 편집자께 보낼 때 걱정이 많았어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를 만들어준 분이 서효인 편집자인데 시인이고 또 문장을 명징하게 쓰는 분이라서요. 내 글에 엄청 빨간 줄이 그어져서 오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개성이라 여기고 살려 주셨어요.(웃음) 저의 군더더기 많은 세계관을 스타일로 존중해주시고 보존해 주셨죠.

『다정소감』도 같이 만드셨고요.

네, 저에게는 되게 고마운 사람이에요. 첫 책에서 깊이 신뢰하는 누군가로부터 내 글이 책의 언어로 통과될 수 있다는 걸 겪지 못했다면 아무 책도 쓰지 못했을 거예요. 덕분에 두 번째 책도 제 개성에 관해 좀 더 믿고 신나게 쓸 수 있었어요.

독자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김혼비식 유머를 살려 주셔서.

(웃음) 저는 확실히 B급 느낌이 묻어나는 A급 문장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요. 누가 보면 “B급이야, 유치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리고 “뭐 한두 문장이면 될 걸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써?”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장치를 일부러 넣는 게 좋아요. 추천했다가 원망을 사곤 하는 책이기는 하지만(웃음) 기타오지 기미코의 글을 정말 좋아해요. 딱히 교훈도 메시지도 없고 정말 사소한 이야기를 만담처럼 장황하게 가끔은 좀 과하다 싶게 익살을 부리며 쓰는데 사실 저는 이런 글을 쓰고 싶고 이런 글에 굉장히 끌려요.



『다정소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어요.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75쪽) 평소 충고, 조언을 듣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네. 저는 조언을 정말 받고 싶어요. 제 커다란 콤플렉스이자 단점이기도 한데요. 저는 주로 제 의견에 대해서 자신이 있기보다는 ‘어, 내가 틀렸나?’ ‘내가 놓친 게 있나?’라는 불안을 먼저 갖는 편이에요. 확신을 갖기까지 레퍼런스를 많이 찾아야하는 타입이고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 의견을 가능한 많이 모으고 싶어 해요. ‘확신의 외주화’라고 할까요? 그래서 조언이 점점 터부시되는 게 불안해요. 받아들이든 아니든 일단 소스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현재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고 계시잖아요. 전업 작가를 해볼 생각은 안 하셨나요?

오히려 반대예요. 저는 아직도 글을 쓰는 일이 제 직업이라기보다 제 인생의 어느 특정 시기에 잠깐 하고 있는 어떤 이벤트 같은 느낌을 갖고 있어요. 이를테면 제가 한때는 팬픽을 열심히 썼지만 그 시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처럼, 관심사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넘어간 것처럼 에세이를 쓰는 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싶고. 글 쓰는 일은 언젠가 끝점이 있을 것만 같고. 가끔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선뜻 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내가 3~4년 후에도 글을 쓰고 있을까?’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어서예요.

꼭 쓰고 싶은 책이 인터뷰집이라고요.

네, 예전에 그렇게 말했었는데요. 근데 사실 제가 하고 싶은 게 인터뷰인지, 인터뷰집을 쓰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 두 가지는 커다란 차이여서 계속 고민해보고 있어요.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다른 지역의 축제에 가고 싶어요. 축제장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그리워요.




*김혼비

여전히 백지 앞에서 낯을 많이 가린다.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고 싶어서 자꾸 그 위에 뭘 쓰는 것 같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전국축제자랑』 등을 썼다.




다정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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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판사 “법정에 선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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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판사 

세 명의 청년이 한 여관방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듯, 죽음도 함부로 선택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이들은 자살방조미수 혐의로 재판장에 섰다. 사건을 담당한 판사는 사건 기록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수차례 자살을 시도한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고, 사기를 당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울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청년들이 부디 다시 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판결문을 쓰고, 책 두 권과 현금을 건넸다. 영화 같은 이 이야기는 울산지방법원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 박주영 판사가 『법정의 얼굴들』을 펴냈다. 책에는 그가 지난 몇 년간 진행한 형사재판, 그중에서도 우리가 기억해야 마땅한 얼굴들이 담겼다. 끔찍한 사건은 매일 일어나고 우리는 사건을 단 몇 줄의 기사로만 접한다. 판단자인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본 세상의 일부가 사라진다”는 마음으로 쓴 글. 박주영 판사는 언제나 법정 너머를 본다. 거기에는 유죄와 무죄라는 단어로 그칠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공감과 연대는 서사 이후에 온다 

『어떤 양형 이유』에 이은 두 번째 책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책을 쓰셨나요? 

현직 판사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재판 이야기로 책을 연이어 출간한다는 게 솔직히 부담스럽고 걱정되기도 해요. 그럼에도 독자들이 『어떤 양형 이유』에 보내준 지지를 보면서, 평범한 판사 중 한 명에 불과한 저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임이 어쩌면 기록을 통해 법원과 국민 사이의 창구 역할을 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법정의 얼굴들』은 아주 작은 단신 하나로 다뤄지며, 눈 깜짝할 사이 소비되고 쓸려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참혹하고 안타까운지에 대해 말하는 책이에요. 지금처럼 뉴스가 쏟아지는 시대에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서사를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법정에 선 사람들의 서사에 주목하고 글을 썼어요. 공감과 연대는 서사 이후에 찾아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사가 없으면 공감과 연대가 싹틀 수 없고, 서사가 빈약하면 제대로 자랄 수 없어요. 서사는 공감과 연대의 토양이죠.

첫 책이 ‘양형 이유’를 중요하게 다루었다면, 『법정의 얼굴들』은 법정에 선 가해자 혹은 피해자의 얼굴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법정에서 피고인을 마주하며 느끼신 인상적인 감정이 있을 것 같아요. 

법정에서 범죄자를 마주하면 대부분 첫인상이 너무 보잘 것 없게 느껴져요.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국가권력 앞에 선 사람은 무력하고 왜소하죠. 그래서 더 섬뜩합니다. 저렇게 선하고 유악한 얼굴을 하고 어떻게 이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싶거든요. 그 감춰진 이면이 두려운 동시에 악의 교묘함, 위선, 강력함에 매번 놀라죠. 

저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보면서 ‘악은 왜 항상 선보다 강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리고 ‘에밀 시오랑’의 『독설의 팡세』를 보며 깨달았죠. 시오랑이 단테의 3부작(지옥, 연옥, 천국)을 언급하며 지옥에 대해 “보고서만큼이나 정확하다”고 표현하거든요. 악은 욕망이 아주 강해서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든 현실로 옮깁니다. 반면 선은 추상적이고 모호하죠. 그래서 유약합니다. 결국 선 역시 아무리 미미해도 구체적으로 발현되어야 힘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피고인을 볼 때마다 그들의 보잘 것 없음과 악성에 놀라면서도 그들 내면에 숨겨진 추상적이고 모호한 선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판사님이 쓰신 ‘울산 자살 방조 미수사건’의 판결문은 대중에게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다른 글과 달리 이 사건에 대한 글에서만 판사님 본인을 3인칭으로 지칭하신 이유가 궁금했어요. 

이 재판은 그야말로 작정하고 쇼를 한 사건이었어요. 김영배(가명) 피고인의 자살 의지가 너무 강해서 어떻게든 사회의 배려와 환대, 따뜻한 격려가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했어요. 그 기억이 아주 작은 삶의 불씨라도 되어주기를 바라는 절박한 심정이었죠. 그래서 선고를 앞두고 양형의 이유와 당부의 말을 최대한 감동적으로 쓰고, 힘이 되는 두 책(장강명 『팔과 다리의 가격』, 오히라 미쓰요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을 주었습니다. 이 판결이 2019년 12월 초순에 있었는데, 마침 연말이라 미담 기사로 너무 많이 알려졌어요. 담당 판사가 너무 미화되어있기 때문에 제 이야기를 스스로 가감없이 하기가 민망해서 3인칭으로 썼죠. 또 이미 판결문이 전면 공개되고 기사, 책 등 여러 매체에서 인용된 데다가 책에 쓰려는 이야기도 판결문에 거의 들어있는 내용이라 1인칭으로 쓸 경우 새롭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서술에 있어 객관성과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라는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은 읽고 또 읽어도 감동적이더라고요. 

여담이지만 그 문장은 사실 예전에 제 생각에만 빠져 아내의 말을 계속 흘려듣고 상처줬던 걸 반성하며 메모해둔 문구였어요. 그 문구가 판결에 쓰이고, 이렇게 널리 알려질 줄은 저도 미처 몰랐네요. 오랜 세월 혼잣말한 아내에게 새삼 미안하고 고맙습니다(웃음).


현실은 해피엔딩이었으면  

이번 책에서 가장 쓰기 힘들었던 글은 무엇인가요? 

딱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운데요. 사건 자체가 힘들었던 건 아동학대 사망사건, 정신질환자 존속살해사건, 성범죄 사건이었어요. 건강에 갑자기 이상이 생긴 후 삶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확 달라진 상태에서 쓴 꼭지 ‘어떤 부고’도 글을 쓰며 감정이 격해졌죠.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아동학대 사망사건입니다. 책에도 썼듯이 아이들이 사망한 사건은 정말 재판을 맡기가 싫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어요. 눈물을 머금은 채 기록을 봤고, 흐느끼면서 판결을 썼고, 울먹이며 선고했어요. 재판이 끝나고 선고 당시 녹음을 다시 들어봤는데, 양형의 이유를 읽다가 끅끅대고 10여 초 정도 말이 끊어지더군요. 아이들과 여성에 대한 범죄만큼은 하루빨리, 획기적으로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극악한 범죄를 들여다보는 일을 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할 텐데요. 판사님의 글에서는 늘 ‘선’과 ‘희망’에 대한 굳은 믿음이 엿보입니다. 

저는 영화나 소설에서 해피엔딩보다 새드엔딩을 더 좋아하는 편이에요 해피엔딩은 뭔가 간지럽고 진부하고 싱겁다고 할까요(웃음). 그런데 실제 이야기라면 완전히 달라지죠. 현실의 새드엔딩은 끔찍해요. 무조건 해피엔딩이어야 하지만, 재판에서 해피엔딩이란 없어요. 참혹한 범죄가 이미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고를 통한 단죄는 그저 이야기의 끝일 뿐이에요. 사형을 선고해도 해피엔딩이 될 수 없죠. 죽은 사람이 살아올 수는 없으니까요. ‘어떤 부고’ 꼭지에 인용했듯이, 살인자의 어머니를 부럽다고 말하는 단 한 사람이 있어요. 살해당한 딸의 어머니입니다. 

결국 악은 어떻게 해도 이기고, 우리는 악이 남긴 상처로 서서히 모두 파멸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을 피살자 어머니의 얼굴 위에 피고인의 얼굴로 오버랩하고 끝내는 것은 정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현실에서는 아무리 식상하고 진부하더라도, 반드시 선고 다음을 바라보고 절망 위에 희망을 겹쳐보려 했어요. ‘피살자의 어머니’와 ‘강간당한 여성’과 ‘학대로 사망한 아이’의 얼굴에 같이 울어주는 누군가의 얼굴을 겹치고, 위로하는 손길을 포개서 종국에는 활짝 웃는 어머니와 서현이, 정인이를 상상하는 거죠. 이 마음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워요.

배석판사들에게 “영혼에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 단단히 먹읍시다(115쪽)”라고 당부한다는 말씀이 떠오르네요. 직업적 고통으로 힘들 때, 마음을 어떻게 다잡으세요?

뾰족한 방법은 없어요. 그저 판사의 숙명이려니, 팔자려니 하죠. 최대한 덜 고통스러우려면 틀리지 않은 판단을 하는 게 최우선이에요. 그럼에도 인간이 하는 일이니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단 선고한 사건은 가능한 한 잊으려고 애씁니다. 그나마 1,2심 판사는 좀 견딜만한 편이에요. 혹시 내가 틀려도, 존경하고 신뢰하는 동료법관들이 바로잡아줄 거라고 생각하면 되죠. 그런 면에서 저는 최종심 판사는 정말 못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동료들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동료 판사들과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나면 큰 위안을 얻죠. 판사들은 직업적 고통을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거든요. 재판 결론은 선고 전, 절대로 외부 유출이 금지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이 비밀의 영역에 있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흔들릴 때마다 뒤를 돌아봅니다. 판사는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이니까요. 내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새삼 인지하면, 마음과 다리에 더 힘이 들어갑니다.

한 마약 피고인이 판사님께 보낸 편지도 감동적이었어요. “재판장님의 그 말이 저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기 때문(198쪽)”이라는 편지의 한 구절에서는 판사님이 양형 이유를 공들여 쓰시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편지를 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판사가 각별한 심정으로 재판과 판결에 노력을 기울여도 현장에서 이런 피드백을 받는 건 무척 드뭅니다. 기대하지도 않고요. 그저 무소식이 최고의 희소식이죠. 저는 작고 하찮은 것, 딱 한 개의 선한 케이스로 세상이 바뀌고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 그 편지를 받았을 때 ‘무너져가는 우주의 한 귀퉁이를 바로 세운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이분이 『어떤 양형 이유』를 읽으면서 매일 단약의 의지를 다진다고 하셔서 책을 쓴 보람이 컸죠. 이분께 즉각 답신하고 싶었지만 판사가 피고인과 개인적인 서신을 나누는 게 부적절할 수 있고, 책으로 답신하는 게 더 큰 선물일 것 같아 그 이야기를 책에 실었어요. ‘단약한 의지’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쓴 꼭지예요.

판사님이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요? 

현실에서 ‘법’이라는 모습으로 구현된 정의는 따지고 보면 철학자 ‘파스칼’의 말처럼 그저 ‘강한 힘’에 불과하죠. 다수의 힘이 법으로 관찰된 거니까요. 법철학이나 정치철학에서 정의의 본질과 실체를 규명하려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딱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다만 현장에서 제가 깨달은 정의는 ‘절대 쉽게 정의될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반드시 열망해야 하는 것, 바르게 살려는 인간의 욕망이자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좋은 국민이 좋은 판사를 만든다

변호사로 7년간 일을 하시다가 경력법관제도로 판사가 되셨어요. 법관의 입장이 되어보니 어떤가요? 

변호사로 있으면서 법원 욕을 참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판단을 내리는 과정, 판단의 이유를 잘 설명해주지 않아 무척 궁금했고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건성건성 처리하는 것 같아 대단히 분개했죠. 개구리가 올챙이 때 모른다고, 지금은 그 이유가 대부분 이해됩니다. 핑계처럼 들리시겠지만 판사들의 업무가 너무 과중해요.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길게 재판할 시간이 없죠. 저는 매체와 인터뷰할 때마다 판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판사들을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판사 수를 대폭 증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을 쓰는 도중 건강에 문제가 생겨 휴직을 하셨다고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울산지방법원 형사합의부장 2년차였던 지난해 연말에 몸에 문제가 생겼어요. 이미 결심된 사건들이 있어서 올해 1월까지 선고를 마치고, 2월부터 8개월 정도 휴직했습니다. 다행히 그 기간동안 잘 회복되어 지난 10월에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 복직했어요. 지금 복직한 지 한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라 법원 업무에 다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웃음). 거기다 출간까지 겹쳐서 정말 바쁘게 지내고 있죠.

프롤로그에 “2년 전 짧은 칼럼을 읽고 같이 눈물 흘려준 조은혜 편집자가 없었다면 아예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여정이다(9쪽)”라고 쓰셨어요. 편집자의 어떤 말이 판사님을 저자의 길로 이끌었을지 궁금해요. 

2018년 상반기 《법률신문》 ‘월요법창’ 란에 약 1,000자 분량의 짧은 칼럼 여섯 꼭지를 썼어요. 조은혜 편집자가 그 칼럼을 유심히 보고 연락을 취해왔죠. 평소 ‘늘그막에 자비 출판이라도 했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로 책 내는 일을 동경해왔는데 출판사의 갑작스러운 제안이 많이 놀랐어요. 동시에 부담스럽고 두려웠습니다. 글쓰기의 지난함을 잘 아는 입장에서 단행본 원고를 새로 써야 하는 데다가,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이 제 글을 어떻게 평가할까 너무 무서웠거든요. 욕망은 들끓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할 때, 조은혜 편집자가 레이먼드 카버의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중 ‘카버’가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관해 쓴 문장을 메일로 보내주었어요. 아래의 구절입니다.

“만약 우리가, 작가와 독자 모두가 운이 좋다면, 우리는 단편소설의 마지막 한두 줄을 마치고 잠시 조용히 앉아 있을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방금 우리가 쓴 또는 읽을 글에 대해 생각하리라. 아마 우리의 심장 또는 지성은 글을 읽기 전에 비해 아주 살짝 그 위치가 달라졌으리라. 우리의 체온은 눈에 띄게 올라가거나 내려가리라. 이윽고 숨이 다시 차분해지면, 우리는, 작가와 독자는 마찬가지로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리라. 그리고 체호프의 등장인물이 말했듯이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다음 일을 향해 전진하리라.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이 구절과 함께 “판사님의 글을 읽은 독자 역시 ‘조용히 앉아 누군가의 삶을, 어떤 삶의 무게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메일을 써주었는데 그 말에 용기를 냈어요. 지금 다시 읽어보니 약간 속았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 당시에는 카버와 체호프가 저와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작가라는 걸 잘 몰랐거든요(웃음).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저는 좋은 독자가 좋은 작가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글에 애정을 갖고 몰입해서 읽어주는 분들이 평범한 문장을 빛내는 거죠.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보면, 독자의 오류로 좋지 않은 작가도 함께 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판뿐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의 수준을 결정하는 건 결국 독자와 관객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애정을 갖되,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게 참 중요하죠.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옥석을 가려내지 못하면 나쁜 작가에 묻혀 좋은 작가가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이런 식의 비유는 ‘법’에도 있죠. ‘신은 나쁜 국민을 벌주려고 나쁜 판사를 내린다’는 어느 나라의 속담이 있는데요. 판사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도 곧 국민입니다. 요즘 판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우리 국민들이 뛰어나므로 좋은 판사가 쏟아져 나올 거라고 확신해요. 실망스러운 점이 많으시더라도 법원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지적과 함께 애정의 눈길도 거두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국민이 좋은 판사를 만듭니다.




*박주영

지방법원 부장판사. 성균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7년간 변호사로 일하다 경력법관제도로 판사가 됐다. 지금은 지역법관제도가 폐지되어 지역법관이 아니지만 자의로 부산고등법원 관내에서 근무하고 있다.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부산지방법원, 울산지방법원, 대전지방법원 등에서 주로 형사재판을 했지만 부산가정법원에서 소년재판을 한 적도 있다. 언론을 상대하고 행정기획업무를 하는 공보기획판사도 세 번이나 했다.

공보기획판사로 일하며 인터뷰와 대외행사를 많이 했지만 실제로는 낯을 많이 가리고 소심하다. 읽고 보고 듣는 것을 좋아해 시간이 나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유일하게 부리는 사치는 오디오 기기다. 주머니 사정상 소박한 진공관 앰프에 LP로 음악, 특히 재즈를 자주 듣는다. 빌리 할리데이와 쳇 베이커를 좋아한다.
지은 책으로 『어떤 양형 이유』가 있다.



법정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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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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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오은영 박사 "마음을 표현하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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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는 2008년부터 꾸준히 육아서를 출간하며 저자로 활동했다. 최근작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는 1년 만에 45만 부가 팔리며 예스24 독자들이 선정하는 ‘2021년 올해의 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대한민국 육아 멘토’를 넘어 전 국민의 인생 멘토가 된 오은영.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의 독자는 비단 부모들만이 아니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바깥 활동은 어려운 지금,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함께하는 가족들은 오히려 대화가 줄었다. 너무 익숙해서 노력하지 않았던 가족 간의 대화법. 오해를 일으키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실천적 회화 노하우가 필요했다. 



빈말이어도 표현을 해야 한다

부모가 아닌데 육아서를 읽는 독자들이 늘었어요.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세월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2005년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촬영했을 때는 목적이 둘이었어요. 아이를 때리면서 키우지 말자와 훈육은 자기 조절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채널A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를 부모가 아닌 젊은 세대도 많이 봐요. 이유를 따져보면 나를 더 잘 알고 이해해서 좀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라고 봐요.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보면 다소 극단적인 문제 행동을 보여요. 부모들은 해답을 찾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곤 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부모가 어린 시절에 감정적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종종 발견됩니다.

옛말에 “내가 큰 대로 아이에게 그대로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학문적으로도 밝혀졌어요. 1985년도 버클리대학의 애착학자 메리 메인이 성인을 대상으로 애착유형검사를 했는데, 만 12개월에서 3세 사이에 자신과 부모와 맺은 관계가 자식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현상이 80%에서 90%까지 보였어요. 이건 어마어마한 결과거든요. 어릴 적 부모와 편안한 관계가 형성됐다면 성인이 돼서도 안정적인 애착을 보였어요.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이 이 결과를 들으면 실망하겠지만, 이걸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내 성장 과정을 잘 파악하고 있으면 미래에 겪을 어려움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감정에서 한발 물러서서 나를 탐색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거치면 후천적으로 안정감을 획득할 수 있어요. 노력을 통해 충분히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희망의 메시지인 거예요.

타고난 기질에서 더 큰 영향을 받지 않나요?

기질도 중요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어떤 기질이 더 좋고 더 나쁘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사람 됨됨이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이가 부모를 무시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아이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나 자극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식이 조금 다른 건데, 부모가 이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어려움이 생겨요. 아이의 기질과 발달도 이해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부모인 내가 ‘이 상황이 왜 이렇게 유난히 거슬릴까? 화가 날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는 육아 상황에 따른 현명한 대화법을 알려주는 책인데, 성격이 무뚝뚝한 부모들은 ‘아이가 크면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라고 넘기잖아요. 꼭 표현법을 연습해야 하나요?

네. 연습이 중요해요. 저는 부모들을 만나면 끝까지 계속 모델링을 해줘요. 처음에는 도저히 어색해서 못 하겠다는 부모들이 있어요. 그래도 시킵니다. 하다 보면 많이 좋아져요. 중요한 건 포문을 여는 거예요. 허들을 넘으면 의외로 잘할 수 있고 아이들이 되게 좋아해요. 그리고 꼭 표현법을 연습해야 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고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부모의 착각이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은 본인이 어른이 된 다음에 이해해요. 대개 마흔이 넘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내가 마흔이 돼서야 이해했던 기준을 현재 내 앞에 있는 어린아이한테 적용하면 안 돼요. 좋은 감정은 좋은 감정으로 화가 날 때도 화를 표현해줘야 해요.

화도 표현해야 하나요?

그럼요. 희로애락을 배워야 하니까요. 중요한 건 과도하게 격분하고 노여워하면서 아이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에요. 제가 부모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아이들을 키우라고 하니까, 많이 오해하시는데요. 격분하고 분노하지 말라는 거지 화를 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스무 살이 넘으면 저절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마음도 가르쳐야 해요.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부모가 알려줘야 합니다. 

감정을 컨트롤하는 건 성인이 돼서도 어려운 일인데요. 박사님은 어떻게 항상 일관적인 태도로 아이들을 대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였어요. 울기도 많이 울었고 편식도 너무 심해서 부모를 잘못 만났으면 엄청 구박받고 컸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운이 좋았어요. 뭘 해도 순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는데 어머니가 대장부셨어요. 기본적으로 사소한 데 많이 연연하지 않으셨고 제가 편식이 심한 데도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는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었어요. 저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저항하는 성격이었는데, 아버지가 제 말을 무시하신 적이 없어요. 말대꾸를 해도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기지 않고 제 말이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셨어요. 그때만해도 남존여비가 심했는데 ‘여자애가 무슨’이라는 말을 한 번도 안 듣고 자랐어요. 그래서 자라면서 지나치게 원망스럽거나 맺힌 부분이 없어요. 의사가 돼서 공부를 하다 보니 부모의 역할이 너무 중요한데 내가 운이 좋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자녀분이 대학생이시죠? 어릴 때 가장 자주 해준 말은 무엇인가요?

사랑한다는 말을 진짜 많이 해줬어요.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한다고. 네 아빠도 사랑하지만 종류가 다른 거라고. 굳이 저울에 올려놓으면 엄마는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리고 네가 내 아이라서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고. 낯간지러운 말일 수도 있는데, 아이한테는 많이 표현해주는 게 정말 중요해요. 이 고백이 주는 위로와 행복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인데요. 어떤 분은 왜 빈말까지 해야 하냐고 묻기도 해요. 그럴 때 저는 빈말이라도 해보라고 말씀드려요. 아이가 화답해주지 않아도 노력해보시라고 해요. 이 노력이 쌓이면 굉장히 큰 힘이 되기 때문이에요.



이해받는 경험이 중요하다

요즘 부모들의 가장 큰 목표는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키우는 일이에요. 하지만 지나친 칭찬은 독이 되기도 하잖아요. 어떻게 선을 지켜야 할까요?

일단 사랑을 많이 주고 표현하는 게 중요해요. 자존감이라는 건 자신이 생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마음이거든요. 하지만 자아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는 건 좋지 않아요. 모든 걸 잘해라, 성과를 만들어내라고 강요하면 아이는 자신을 남과 비교한다고 생각해요. 부모는 충고라고 생각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비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부모에게 받는 비난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비난이거든요. 그래서 굉장한 불안과 두려움을 줘요. 어른이 돼서도 굉장히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뭘 좀 잘하는 게 중요해 보일 수 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사회성이 중요해요.

사회성은 어떻게 키워야 하나요?

사회성은 타인과 편안하게 관계를 맺고 문제가 생기면 잘 해결하는 능력인데요. 모든 걸 성취 지향으로 따라가면 사회성이 잘 안 길러져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점이 절대로 물리적인 힘에 의한 두려움을 경험시키지 말라는 거죠. 오냐오냐 하는 건 안 되지만 부모가 지나치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건 나쁩니다. “너 그렇게 해서 나중에 깡통 찬다” 이런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아이에게 하면 ‘내가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은데 많은 부모가 착각해요. 충격 요법으로 따끔하게 말하면 애가 깨달을 거라고. 물론 일부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적당한 정도를 찾기가 어려워요.

일단 1단계는 아이의 마음을 수용해줘야 해요. 마음을 수용하라는 게 아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소원 성취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아이가 어제도 장난감을 사줬는데 또 사달라고 할 때가 있잖아요. 아이들은 원래 장난감을 좋아하니까요. 이때 부모는 화내지 말고 “그래, 장난감을 보면 계속 사고 싶지? 네 마음은 잘 알아. 그런데 보는 족족 다 사는 건 안 되는 거야.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엄마는 그걸 알려줘야 해. 오늘은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 매우 중요한 교육이에요. 

공감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네요.

맞아요. 자기 마음을 이해받는 경험을 많이 하면 아이와 부모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단단하게 연결돼요. 그리고 이게 단단하면 되게 편안한 사람이 돼요. 타인의 마음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아이 스스로 ‘내가 생존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느껴요.

먼저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매사 우울하고 비관적인 부모를 마주한다면 아이는 편안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부모들은 갈등하게 돼요. 내 삶을 우선적으로 챙기면 아이에게 소홀해지니까 우선순위를 어떻게 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잘 키우고 싶다는 건 기본 전제가 맞아요. 그런데 육아는 최소한 20년 과정이에요. 육아가 현실이라는 걸 딛고 시작해야 해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그 선에서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 해요. 예를 들어 엄마가 목이 아픈 상태로 퇴근했는데 아이가 자꾸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 아이를 잘 키우려고 노력하는 엄마일수록 자신의 컨디션을 후순위로 두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줘요. 그런데 아이는 또 읽어달라고 해요. 그러면 엄마는 참다 참다 “너 그만하라고 했지”하고 소리를 질러요. 이건 좋지 않아요. 언제나 우리가 애를 쓰고 노력해야겠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나의 한계를 빨리 인정하게 해야 해요. 몸이 너무 힘들 때는 “엄마가 너랑 동화책 읽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오늘은 엄마가 몸이 힘들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아이가 실망하고 엄마가 밉다고 말해도, 그건 그냥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 정도로 받아들이고 “그래, 네 마음 알아. 그런데 엄마가 오늘은 병이 날 것 같아서 그래. 내일은 꼭 약속 지킬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지속성을 염두에 둬야겠네요.

또 너무 비장하게 모성을 들이대지 않아야 해요. 매일 반찬을 사서 먹여도 사랑이 부족한 부모가 아니에요. 요리하는 시간을 벌어서 아이랑 같이 놀아줄 수도 있는 거예요. 자신의 역량을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한결같이 할 수 있는 편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봐요.

아이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을까요? 

“너 진짜 나쁘다, 너 정말 나쁜 아이야”라는 말은 정말 하면 안 돼요. 이 행동은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지 아이를 나쁜 아이라고 명명하는 건 좋지 않아요. 그리고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어?”라는 말도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언제나 완벽해야 하는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또 “너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너 그래가지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겠니”, “엄마가 너 괜히 낳았다” 이런 말도 진짜 해서는 안 돼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아이들은 열 번의 칭찬보다 한 번의 비난을 평생 기억해요. 그게 부모가 했던 말이라면 더더욱. 칭찬을 아무리 다시 받아도 회복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조건이 있는 칭찬만 받아서 그래요. “우리 딸이 공부를 너무 잘해서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아이 입장에서는 ‘내가 공부를 못하면 자랑스럽지 않겠네’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칭찬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해요. 공부를 잘했을 때는 “네가 성실하구나, 학교 생활을 열심히 잘하네. 그건 되게 훌륭한 거야”라고 말하는 게 좋아요.

부모가 아이에게 실수했을 때 어떻게 사과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타이밍에 안 맞는 사과는 너무 형식적인 사과로 여겨지기도 해요. 

일단 너무 지나치고 불필요하게 미안하다고 하는 건 좋지 않고요. 자신이 타당하지 않았던 면에 대해 사과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예를 들어 아이 앞에서 소리를 질렀을 때는 “내가 어른인데 어른답지 못했다. 미안하다. 엄마가 네 잘못된 행동을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미안해. 이건 엄마가 정말 노력해야 돼. 엄마가 잘못한 거야”라고 말하는 게 좋아요.



흘려보내야 하는 관계도 있어요

개인적인 질문도 여쭤보고 싶어요. 이제 박사님은 부모들의 육아 멘토를 넘어 전 국민의 멘토로 지지를 받고 있잖아요. 때때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오해를 받을 때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조금은 당연하게 생각해요. 얼굴이나 이름을 내놓고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하는 면도 있다고 보고요. 제가 6년 넘게 일간지에 상담 칼럼을 쓰고 있는데 인터넷 댓글이 많이 달려요. 어떤 때는 분노도 들어가 있고 적개심도 보여요. 저도 사람이니까 안 좋은 댓글을 보면 기분이 좋진 않아요. 하지만 잠깐이에요. 이렇게 새벽에 칼럼이 올라오자마자 댓글을 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걸까, 이렇게 사는 게 힘들구나 싶어요. 내가 힘들 때는 아무래도 타인에게 너그럽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리고 더 겸손하게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면 좋을까를 궁리하기도 해요. 

자녀를 “마음이 편안한 아이로 키우는 게 목표였다”고 하셨어요. 박사님은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저는 원래 성향 자체가 긍정적인 편이에요. 나쁜 것도 별로 없어요. 화도 많지 않고 잘 안 삐치고요. 의학을 공부하고 트레이닝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웬만하면 이해가 돼요. 또 종교도 있고요. 가장 큰 영향은 2008년에 대장암 선고를 받고 치료를 받으면서 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아프기 전보다 지금 더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생명이 몇 달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냥 매일 하던 일을 할 것 같아요. 잠언에도 있는 구절인데 “불안을 감내하는 것이 인간의 성숙”이에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안해요. 그걸 어떻게 잘 감당하고 감내하면서 사느냐에 따라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고요.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을 주저하고 어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어려운 문제인데요. 저는 그냥 단계별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아주 강력한 애착을 형성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과 약간 친한 사람,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조금 구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영어로 말하면 ‘the other’인 사람과 겪는 갈등은 좀 흘려보내도 된다고 생각해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잖아요. 흐르는 물을 막으려고 물을 잡는다고 잡아지지가 않아요. 그냥 흘려보내도 당신이 진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길을 지나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 어깨를 딱 부딪혔어요. 되게 아프지만 의도가 없을 때, 굳이 그 아저씨를 불러 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큰 부상이 아니면 흘려보내는 게 좋아요. 그렇지 않으면 악연이 생겨요. 

가까운 사람과 갈등이 생길 때는요?

그럴 때는 소통해야죠. 가족 내지 배우자, 연인, 자식, 절친과 문제가 생길 때는 서로 이야기해야 해요. 가까운 사람과도 언제나 좋은 자극을 주고받는 건 아니거든요. 물론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 관계라도 연을 끊는 게 나은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인 상황일 때는 원인을 따져보고 진솔한 소통을 해야 해요. 팁을 드리면 미리 거울을 보고 연습한 다음 말해야 해요. 연습하지 않으면 감정 조절이 힘들 수가 있어요. 내가 꼭 해야 할 말이라면 미리 연습하고, 그다음에는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마음먹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성숙해져요.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전공의, 서울삼성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전임의 및 임상 교수를 거쳐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이자, 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및 학습발달연구소 원장, 오은영 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EBS <60분 부모> 등 방송과 강연 등을 통해 대한민국 부모들이 가장 신뢰하는 최고의 ‘국민 육아 멘토’, ‘육아의 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주요 일간지와 '네이버 오디오클립' 등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오은영 저 | 차상미 그림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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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배우 신소율 “저는 분명 나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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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율 배우

“결혼 2년차. 2세 계획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신소율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듭 질문을 받으면서, 선의로 건넨 말인 줄 알면서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마음에 불편함이 쌓이면서 급기야 몸이 통증을 호소했다. “왜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는지” 질문을 붙들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2세 계획을 함께 상의하고 선택해야 할 한 사람,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솔직한 마음을 담은 글과 함께 심리 상담도 시작했다. 분명 시작은 아이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또 다른 ‘아이(I, 나)’와 깊이 만나게 됐다. 내 안의 불안, 두려움, 진짜 나의 모습과 직면했다. 그 시간과 과정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이보다 아이』에 담겨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토로하고 나니 시원했어요

첫 책을 출간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글을 쓰고 책으로 엮는 일은 어떤 경험으로 기억되는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조금씩 나아지고 성장하는 경험을 했어요. 이 마음을 독자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첫 에세이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쓸 때는 철저하게 혼자가 된 느낌이었는데 그 외로움의 시간이 지난 후, 이제 독자 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합니다. 평소 책과 글을 너무 사랑해서 세상의 모든 작가님들을 존경하고 동경해왔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마음이 더 커졌어요.

“남편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심리 상담을 받았다”고 하셨고, 책에도 편지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요. 남편 분께 편지를 쓰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시기별로 해내야 하는 기본적 과제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결혼 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따라오는 질문인 걸 알면서도 2세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불편함을 넘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과민반응으로까지 나타나자 저의 마음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알아봐야 했고, 남편에게도 제 심정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보다는 편지로 전하고 싶었어요. 편지를 쓰면서 차분히 과거를 돌아보기도 하고,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면서 저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제가 인정하기 싫었던 진짜 제 모습과 마주하게 되면서 감정이 무너져 내렸고, 스스로 감당하기 버겁다고 느껴져 상담을 받게 되었어요.

상담실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작가님과 같이 대중에게 알려진 분들은 더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떠셨나요? 

직업의 영향도 분명 있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미움 받고 싶어 하지 않는 본성 때문인지 그동안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조금씩 포장해왔었나 봐요. 쌓이고 쌓여 그 벽이 너무 단단해지고 두꺼워져 저의 진짜 모습을 꺼내놓기가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극복해야 할 부분이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열려고 다방면으로 여러 번 노력한 결과 조금 편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더군요. 저를 완벽히 드러내는 것에는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모든 마음을 다 꺼내놓고 싶을 때는 조용히 방에 혼자 앉아 전화 상담을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땐 상담 선생님과 저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어요.

상담 과정에서 마음을 더 열게 된 순간도 있었나요?

우리는 가끔 가까운 누군가의 상담가가 되어주기도 하잖아요. 저도 종종 상담을 요청을 받을 때면, 어떻게든 알맞은 조언을 해주려 하거나 해결책을 같이 찾아주려 노력했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이번 상담을 받으면서 그냥 조용히 들어주고 공감을 해주는 것만으로 정말 큰 위로가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저에게 닥친 감정의 파도가 당장 잔잔해질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차라리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다 쏟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속에 있는 말을 내뱉고 감정적으로 바닥을 드러내며 토로하고 나니 시원했어요. 거기에 “그동안 마음이 많이 아팠겠어요”라는 공감 섞인 단순한 반응 한마디에 꽁꽁 얼어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내릴 기미를 보였던 것 같아요.

‘왜 나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걸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신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신 것 같고요. 어떤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셨나요?

아이에 대한 질문에 거부반응을 일으킨 근본적인 이유가 다른 곳이 아닌 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마음이 힘들 때마다 괜찮다며 억지로 감춰둔 것들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나 봐요. 저는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들도 너무 많이 해요. 과민하고 불편한 게 많은 부정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자기애와 자기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모순적인 사람이기도 해요.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늘 성격 좋고, 둥글둥글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했어요. 제가 그려놓은 이상적인 제 모습과 진짜 제 모습의 충돌과 괴리감이 저를 더 힘들게 한 것 같아요.

그런 면모들을 갖게 된 데에는 배우라는 직업, 대중에게 보여지고 선택 받아야 하는 일의 특성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카메라 앞에서는 다행히 걱정과 근심을 훅 내려놓는 편이라 한참 일에 빠져있을 때는 다른 생각을 잘 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주관적으로 자평을 해보자면, 실수나 시행착오를 막기 위해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다 보니 과정상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때문에 촬영 현장에서 실수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리고 해냈을 때 성취감 및 해방감을 크게 느껴 미련이나 후회가 없습니다. 반면 작품과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에는 과감한 편이지만 정작 세부적인 순간의 선택과 결정에는 망설임과 걱정이 너무 많이 작용해요. 저는 지금까지 연기를 해온 십여 년의 기간 동안 흔히 얘기하는 즉흥대사(애드리브)를 해본 적이 없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연출님이 당황하시면 어쩌지? 작가님과 상대 배우에 대한 예의가 없는 행동은 아닐까? 혹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뱉어 분위기가 어색해진다면? 나중에 편집 과정에서 이 장면이 튀면 어쩌지?’ 온갖 걱정들이 꼬리를 물어대기 시작하면 그냥 포기해버립니다. 어떤 감독님께 저는 안정적이지만 자극적이지는 않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어요. 꼭 자극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배우들의 연기에서 나오는 불안정한 느낌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너무나 큰 매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잖아요. 그럼 더 궁금해지고 계속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제 자신을 꽉 조이고 사는 일이 그렇게 싫지는 않지만, 배우로서는 조금 느슨해져야 할 필요를 느끼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조금 더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분명 나아지고 있습니다

삶에서 ‘결혼’은 엄청나게 큰 변화잖아요. 크건 작건 많은 것들이 변하고, 그 과정에서 혼란스럽거나 압박을 느낄 수도 있는데요. 작가님의 경우는 어떠셨어요? 

물론 부부 사이라고 늘 모든 감정과 속마음에 솔직한 건 아니겠지만 든든한 내 편이 뒤에 있어서 늘 기댈 수 있다는 믿음만으로 상당한 안정감을 느끼긴 해요. 하지만 저에게 결혼이라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이 갑자기 와버린 인생의 큰 선택점이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정말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근데 사실 많이 상상해 보았다 하더라도 이상과 현실의 거리는 멀지 않을까요?) 서로 간의 사소한 감정 변화와 말투의 달라짐도 엄청 크게 다가왔고, 늘 함께 있다 보니 작은 다툼도 많아졌어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화로 풀 수나 있죠. 문제는 ‘누군가와 같이 만들어가야 하는 미래’가 생긴 것이었어요. 저 하나만의 미래를 감당하며 살기에도 순간순간 너무나 벅찼는데 그곳에  다른 누군가가 뚝 떨어진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게 과연 글로 설명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가장 큰 압박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지요.

3장의 제목이 ‘남편의 상담실’이에요. 누구보다 ‘신소율’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남편 분이 조언해준 내용들이 담겨 있는데요. 상담 전문가 분들의 조언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을 것 같고, 실제로 유용했을 것 같습니다. 어땠나요? 

지금까지 받은 모든 상담들이 근본적으로 저의 온전한 행복과 기대감이 넘치는 밝은 미래를 꿈꾸며 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최대한 많이 수용하고 실천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물론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고, 속도도 굉장히 더디기는 하지만 저는 분명 조금씩은 성장하고 있어요. 남편은 늘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저를 지켜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상담과 조언들은 상대적으로는 서툴지만 가장 유용하고 현실적이었습니다. 책에 쓰인 것보다 더 많은 조언들을 해주었지만 제가 노력하여 개선해 볼 수 있는 방법들만 골라 소개를 해 본 것이고,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적용하여 스스로 뿌듯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 챕터 제목을 ‘남편의 잔소리’로 바꿔도 될는지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반 진담 반입니다.) 그래도 본인의 조언으로 제가 조금 생기를 되찾아 남편도 만족스러운가 봅니다. 저는 분명 나아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다짐한 일들에 대해서도 쓰셨어요. ‘친절한 사람이 되는 걸 포기하기’ ‘불편한 것들을 표현하기’ ‘부정적 생각이 들 때 쓰는 노트 만들기’ 등... 다짐은 잘 지켜지고 있나요? (웃음)

잘 안 됩니다. (웃음) 상담 선생님들이나 남편이 해준 조언과 생각 전환 방법들은 실천해가며 조금씩은 바뀌고 있는 것 같은데 스스로 다짐한 부분들이 가장 지키기 어려운 거 같아요. 아마도 그것들이 가장 단단해지고, 달라지고 싶은 저의 모습들이기 때문에 나아지고 있더라도 스스로 만족을 못 하는 걸 거예요. 아, 한 가지. 타인이 평가하는 시선을 신경 쓰느라 억지로 착한 사람인 척하려는 강박은 많이 줄어든 듯합니다. 진짜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순간과 상황이 일시적으로 불편해질지언정, 착한 사람인 척하느라 본심을 숨기며 괜한 속앓이를 하고, 뒤에서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늘 정중히 말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의미 전달이 확실치 않고, 결론이 돌아 돌아서 도달하게 되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가 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요. 잘 타협해야겠죠.

열 가지 다짐 중에서, 가장 크게 도움이 되거나 변화를 불러온 것은 무엇이었나요? 

직접적인 변화를 가장 크게 느끼는 다짐은 ‘부정적 생각이 들 때 쓰는 노트 만들기’입니다. 원래의 취지는 내면에서 부정적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도식화하여 생각을 정리해 보려는 의도였습니다. 요즘은 갑작스러운 분노에 손이 떨리고, 온갖 걱정들이 꼬리를 물어 스스로 이성적인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마다 말과 행동으로 무엇을 표출하기 전에 일단 노트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노트에 적어요. 그리고 그 감정이 왜 찾아오게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적습니다. (사실 상담실에서 선생님들이 제 의견을 들어주셨을 때와 비슷한 루트로 자문자답을 하는 거예요.) 그 대답에서 또다시 연관된 질문들을 하고 계속 답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 나의 상황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고, 서서히 이성이 돌아와요. 마음이 진정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된 것 같으세요?  

이전에는 감정이 급격하게 변하는 일이 있을 때 친구들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었어요.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나게 되어 아주 조금이라도 시야가 열리는 기분이랄까요? 친구와 대화하듯 내 내면과 짧은 인스턴트 메시지를 나누는 기분을 느끼는 거예요. 굳이 노트에 적기를 이용하는 이유는 속도 때문입니다. 생각만으로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가장 좋겠지만 저에게는 너무 빠른 속도라 따라가기가 힘들더라고요. 메시지를 보내는 속도보다도 느린 내면과의 필담은 (물론 저는 저의 대답만 간단하게 키워드로 써놓습니다만) 단순히 생각만 할 때 보다 느린 속도로 대응이 가능하고, 써놓은 것들을 다시 바라보며 객관화도 가능합니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세요? 

흔히 말하는 표현으로 ‘지릅니다’. 스스로에게 몇 번을 되물었는데도 용납이 안 된다면 분명 내 안에 무언가가 건드려진 거예요. 그때는 의견과 감정을 표출하거나 행동으로 옮깁니다. 물론 처음의 흥분은 많이 사라져 있는 상태라 ‘지르기’로 마음먹었더라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될 거예요.



내 마음은 내가 잘 안다고 믿는 오만함

‘아이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자신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셨는데요. 그 시간들을 지나온 지금,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글을 쓰기 전 이 질문(2세 계획에 대한 질문)은 너무나 불편하고 싫은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에 쓰인 모든 과정들과 생각을 거친 후 더 이상 중요한 질문이 아니게 되었어요. 물론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합니다만, 제가 지금 당장 걱정하고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은 일이 아니라면 잠시 떨어뜨려놔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질문의 대답과 선택은 완벽히 개인의 문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의사와 계획을 물어볼 수는 있으나 조금이라도 의무나 강요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모두 다른 생각과 감정,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인데 “당연한 과제”가 어디 있겠어요.

늘 ‘작가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셨어요. 첫 책이 ‘마음 돌봄 에세이’가 될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전혀요! 전 에세이 장르로 분류된 책을 많이 읽고 위로를 받기는 합니다만 제가 에세이를 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작가의 꿈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제가 쓴 대본이 학예회에서 공연으로 올려지고 나서 늘 가지고 있던 꿈이었어요. 이후 학생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기도 했지만 계속 연결되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있다가, 배우가 되고 나서는 언젠가 꼭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생겼어요. 사실 조금씩 쓰고 있기는 했지만 에세이를 먼저 쓸 줄은 몰랐네요. 말 그대로 정말 “꿈”같은 일이에요.

다음에는 어떤 책을 쓰고 싶으세요? 

저는 앞으로도 꾸준히 배우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글쓰기도 멈추지는 않을 것 같아요. 책을 집필하는 과정 동안 조금의 부담과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분명 행복한 일이었고, 즐거웠어요. 우리가 마음이 힘들 때 좋은 책을 읽고 글귀에 위안을 받아 다시 삶의 원동력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사실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쓰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로도 많은 힘을 받을 수가 있다는 걸 느꼈어요. 요즘은 사실 짧은 소설들을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공개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즐겁게 임해볼 생각입니다.

『아이보다 아이』를 읽고 작가님이 들려주는 마음속의 문제, 결핍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신가요?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고민과 문제는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이건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거 같아요.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덮어두고 피해왔던 내 진짜 감정들은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내 마음과 감정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함은 결국 안에서 서서히 곪아 들어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져버릴 수도 있고요. 이건 꽤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터지기 직전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었고, 다행히 어떠한 신호로 발견되어 더 늦기 전에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어요. 인생은 많은 고민과 선택들을 반복해야 하는 여정이잖아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소홀하게 여겼을 수 있는 나의 진짜 마음을 돌아보고 어떤 상처와 아픔들이 숨어 있는지 물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여정에 제 부족한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신소율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배우가 되었다. 비혼주의자이지만 결혼을 했다. 살아가면서 항상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 문제’에 이르자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왜 나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걸까?’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 책 『아이보다 아이』는 그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쓰였다. 그 과정에서 당신의 답도 찾았으면 좋겠다.


▶ 출연작 : <티끌모아 로맨스>, <나의 PS 파트너>, <경주>, <상의원>, <검사외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더 펜션>



아이보다 아이
아이보다 아이
신소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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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아은 “우리는 누구나 복잡한 사람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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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동료 문인으로부터 미투 가해자로 지목 받은 50대 남자 ‘지성’. 잘 나가는 문학평론가에서 범죄자로 일순간 몰락하지만, 문제가 된 ‘그날 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라진 기억, 피해자의 죽음으로 자신조차 진실을 알 수 없게 된 상황. 저마다의 진실을 내세우며 자신의 옮음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 ‘진실’은 희미해질 뿐이다. 

소설가 정아은의 신작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옳은 것과 그른 것,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들의 희미한 경계를 보여주는 연작 소설이다. 미투 가해자가 된 문학평론가 ‘지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와 ‘지성’과 함께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 여자이자 딸 둘을 둔 40대 주부 ‘화이’의 이야기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이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면서 독립된 채로 교차한다. 




미투 가해자의 이야기를 쓴 이유

독립된 두 개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에요. 이런 형식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같은 상황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때가 많잖아요. 이런 현상이 항상 흥미로웠고,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는 모습을 통해서 인물 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둘 중에 한 권만 읽어도 괜찮다’는 말도 하셨더라고요. 정말 한 권만 읽겠다는 독자가 있다면 둘 중 더 추천하고 싶은 게 있나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한 권만 읽는다면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미투’ 가해자로 지목받은 50대 남성 ‘지성’의 이야기예요. 책을 읽으면서 ‘미투’에 대한 작가님의 복잡한 심경이 엿보였는데요. ‘미투 운동’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성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어 온 여성으로서 미투 운동을 지지했고, 반가웠죠. 여성들이 만든 ‘자치 법정’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법, 사회, 문화적인 영역에서 외면한 성폭력, 성차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여성들이 직접 행동에 나선 거니까요.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아쉽기도 했는데요. 미투 운동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더 정교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정교해진다는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미투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를 인정하고, 개선하자는 거죠. 미투 가해자를 단죄하고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고가 인정되면 사죄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의를 이룬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구체를 놓치거나 작은 희생을 못 본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미투 운동이 남성들이 주도한 다른 사회 운동들과 다를 게 없잖아요. 미투 운동에도 손해고요. 미투 운동을 없애버리고 싶은 사람한테 빌미를 줄 수 있거든요.

미투 정국에서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남성들이 많았죠. 

미투 운동이 과거에는 쉬쉬했던, 그래서 일상적으로 이뤄졌던 성폭력 문제가 ‘범죄’라는 걸 알렸잖아요. 그 문제로 인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목격했고요.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한 게 미투 운동의 성과이기도 한데요. 한편으로는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요. 무고함이 밝혀졌는데도 피해자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으니까 ‘나도 무고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가 생기는 거죠. 남성들이 미투 운동에 동참할 수 있게 하려면 불편하더라도 더 정교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성’은 저명한 문학평론가예요. 예전에 앞으로 쓸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유명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요. 왜 유명인이길 바랐나요? 

인간의 모순이나 이중성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순과 이중성을 가지지만,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 특히 지식인들에게서 더 교묘하게 굴절되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이름난 사람들은 자신의 외적 자아를 확장하기 쉽잖아요. 외적 자아가 커지면 상대적으로 내적 자아는 왜소해지고, 지나치게 왜소해진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소외시키기도 하고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을 지우는 방식으로요.

‘지성’도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완전히 잊고 있다가 나중에 떠올리잖아요. 읽으면서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지? 싶어서 놀랐는데 생각해 보니 현실에 그런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웃음) 

아주 많죠. (웃음) 힘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을 지우는 게 쉬운 것 같아요. 본인만 지워버리면 끝이거든요. 일종의 ‘자기방어’라고 생각하는데요. 얼마 전에 전 대통령 한 분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분을 보면서 항상 궁금했거든요. ‘정말 본인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걸까?’하고요. 늘 일관되게 답하는 걸 보면서 정말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과오를 진짜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지성’도 마찬가지죠. 내면 깊은 곳에 본인이 했던 짓이 부끄럽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사실은 자기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 페미니즘을 외칠 정도로 지적이고 선량한, 대의를 외치는 문학평론가로서의 모습을 훼손하니까 지워버린 거죠.  

‘미투’라는 소재 외에도 실제를 떠올리게 하는 사실적인 요소가 많아요. ‘문학평론가’나 ‘시인’이라는 직업도 그렇고, 미투 정국에서 서로 의견 차이로 인해 ‘페절(페이스북 절교)’을 하는 상황처럼요. 독자들이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부담은 없었나요? 

어떤 소설을 쓰든지 그런 부담은 있는 것 같아요. 내 주변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 봐 걱정되죠. ‘지성’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특정인을 떠올리지 않도록 여러 남성 지식인들의 모습을 섞었어요. 인물을 만들기 위해 문학계 전반이나 남자 평론가들이 처한 상황을 잘 아는 분들을 취재했고요.



혼란스러움을 느끼길 바랐어요

‘전소현’이라는 인물에 마음이 쓰였는데요. 이유를 생각해 보니 피해자 입장을 볼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미투’가 터졌을 때 정작 당사자인 피해자는 지워진다고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피해자의 마음이 어떤지, 용서할 의향이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거예요. 가해자를 단죄하는 목소리나 옹호하는 목소리는 큰데 피해자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으니까요. 

정확히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저 역시 당사자가 지워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고, 모두가 함께 돌을 던지는 방식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전소현’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가해자 편이냐, 피해자 편이냐’는 문제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속죄가 무엇이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질문해 보고 싶었어요. 미투가 터졌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가해자는 누구한테 용서받아야 하고 어떻게 진정으로 속죄할 수 있는지를요.

‘스포’일 수 있어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편집자 ‘전소현’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요.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끝까지 읽으신다면 단순히 가해자를 편드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지성’과 ‘화이’의 관계를 보면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굳이 표현하자면 아주 모호하고 희미한 사랑이랄까요.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아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린 남자 ‘지성’과, 기혼 유자녀로서 미투도 할 수 없는 여성인 ‘화이’는 각자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찬 사람이들이에요. 그래서 사랑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만 하죠. 서로에게 무신경하고, 방어적으로 굴기도 하고요. 자신의 모든 걸 던지는 사랑보다 ‘지성’과 ‘화이’의 모호한 사랑이 더 현실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특히 자기 인생에서 책임져 할 것들이 많은 4~50대의 사랑은 더 그렇죠. 완전하지 않고, 선명하고 깨끗하지도 않아서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어느 한 순간에도 분명 있었던 감정 같은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보도블록 틈새에 위태롭게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처럼, 제한적인 상황에서 피어나는 실낱같은 사랑이요.

유명 시인인 ‘민주’와 평범한 주부인 ‘화이의’ 차이도 생각해 보게 됐어요. 말씀하신 대로 같은 여성이지만, 미투를 할 수 있는 사람과 미투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살에 대해서요.  

분명히 존재하는 차이죠. ‘화이’를 통해 기혼 유자녀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예전에는 ‘화이’처럼 강간으로 결혼하는 여성들이 있었잖아요. 이런 분들이 미투조차 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미 낳아서 키우고 있는 아이한테 너의 아빠가 성폭력범이었다는 말을 하기 쉽지 않거든요. TV에 나오는 유명 연예인이 사실은 강간으로 인해 결혼했다고 고백하는 걸 본 적 있는데요. 대체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에요. 옛날 분들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이가 이미 성인이 돼서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감각이 부각되는 소설이기도 해요. 감각은 ‘지성’과 ‘화이’의 괸계에서도 중요하고, ‘화이’는 ‘인간 고양이’로 표현될 정도로 아주 감각적인 인물이기도 한데요. 감각에 집중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인데 이른바 정신적인 것들은 추켜세우고 감각적인 것들은 폄하하고 있지 않나 싶었거든요. 특히 저를 포함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감각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가까운 일을 하고,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래서 간혹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게 아닌가 싶었고,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이 감각을 매개로 만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취재하다 만난 고양이를 통해 ‘감각’에 눈을 떴다고 들었어요. 

5, 6년 전쯤에 취재원 집에 갔다가 고양이를 만난 적이 있어요. 인터뷰하는 동안 저에게 와서 냄새를 맡고, 몸을 비비는데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더라고요. 그 후로도 종종 그 순간을 떠올릴 정도로요. 동물들은 아주 감각적이잖아요. 고양이가 준 깨달음이 아주 컸고, 자연스럽게 감각에 집중하게 됐죠.

소설을 보는 독자들이 1차로 느끼는 감정이 ‘혼란스러움’ 아닐까 싶어요. 등장인물들이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거든요. 

누구나 하나로 정의될 수 없잖아요. 누군가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처럼요.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너무 치사하고, 비겁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조금 괜찮은 사람 같을 때, 있지 않나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의 욕망에 눈길이 가요 

소설과 에세이를 모두 쓰시잖아요. 내 안의 이야기가 활자가 되어 나온다는 점에서는 같을 수 있지만, 이야기가 나오는 과정은 다를 것 같아요. 에세이가 되는 이야기와 소설이 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다른가요?

내 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그 문제에 천착해 있을 때 에세이를 쓰는 것 같아요.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하는 방법으로요. 『엄마의 독서』를 쓰면서 그랬거든요.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엄마들을 만날 수도 있었고요. 소설은 상상에서 출발해요.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이면을 상상해 보게 되는데요. 여러 상상이나 이야기 중에서 제 안에 끝까지 살아남은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작가님들이 부럽기도 해요. 나의 고민이나 문제를 글로 풀어냈을 때의 오늘 희열이 있기도 하고, 또 거기에 같은 마음으로 반응하는 독자들을 만나기도 하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그런 면이 정말 좋긴 한데요. 악플도 많아요. (웃음) 열 개의 칭찬보다 하나의 욕에 더 신경 쓰이는 게 사람이잖아요. 불특정 다수의 평가에 항상 노출되어 있지만, 거기에 답할 수는 없는 게 작가의 숙명이에요. 불편한 것들을 잘 소화하는 능력이 꼭 필요하죠.

잘 소화하는 편인가요?

아뇨. 상처받고 ‘다신 글 안 써!’ 하는 스타일이에요. (웃음)

작가로서 연차가 쌓여도 나쁜 평가에는 무뎌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쓰게 되시죠?

상처받았다고 징징대고 불편해하면서 다시 쓰죠. (웃음) 가끔 악플을 남기는 사람을 통해서 타인이라는 존재를 공부하기도 해요. 내 이야기가 가닿을 수 없는 배경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죠. 누군가가 나를 안 좋게 평가해서 힘들 때는 나에게서 그 사람으로 포커스를 옮길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상처를 받아도, 죽지는 않거든요. (웃음) 

‘도시 세대의 관찰자’라는 수식어가 있어요. 이전에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작가로서의 내 몫인 것 같다’라는 이야기도 하셨더라고요. 요즘 작가님 눈에 들어오는 문제는 뭔가요? 

돈, 빈부격차, 부동산이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소재네요. 시선이 가게 된 배경이 있나요? 

어딜 가나 부동산 이야기를 하잖아요. 부동산이 거의 주식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지금까지 소설을 통해 욕망을 말해 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소설이 지적 욕망에 대한 거라면 지금 제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부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흥미로운데요. 욕망에 대해 말하니까 갑자기 작가님의 욕망이 궁금해지네요. 작가님의 여러 가지 욕망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욕망은 뭔가요?

지금까지는 인정 욕구였던 것 같아요. 글 쓰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요즘은 건강한 몸에 대한 욕망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지적 욕망이나 인적 욕구를 앞설 정도로요. 그동안 인정 욕구를 1순위에 둘 수 있었던 건 몸이 건강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제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니까 다른 사람들의 인정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고 싶더라고요. 건강해야 아름답잖아요. 





*정아은

2013년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모던하트』,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공저 『젠더 감수성을 기르는 교육』을 썼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정아은 저
문예출판사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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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 저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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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지은 편집자 “밀도 높게 사랑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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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환희, 이지은 편집자 

2020년 11월 21일. 7년차 출판편집자 이환희 씨가 만 35세 발병한 뇌종양으로 반년간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날, 대한민국 출판계에는 각별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유명인이 아님에도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글이 쏟아졌다. 고 이환희 편집자는 오랫동안 가수 윤종신 공식 팬클럽 ‘공존’에서 총무로 활동했다. 그의 발인 날, 윤종신은 SNS에 추모 글을 올려 ‘이환희’라는 이름은 연예 기사 포털 면을 장식했고, 은유 작가와 노명우 사회학자는 《경향신문》에 각각 칼럼을, 김현 시인은 출판잡지에 ‘이제야 당신을 알아 갑니다’라는 글을 써 추모했다. 서점 정치발전소는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이환희 편집자 추모 도서전’을 열기도 했다.

이환희 편집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딱 두 달 전, 그의 동료 편집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환희 편집자를 응원하는 저자, 역자, 동료들의 응원 메시지를 모아 작은 책을 만들고자 하니 짧은 글을 보내 달라”고. 이렇게 각별히 그를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쾌차할 거라고 믿었지만 그는 6,661매의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환희 편집자는 13년차 출판편집자 이지은 씨와 2016년 결혼했다. 친구 1년, 애인 1년의 시간을 거쳐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고 “생활동반자법이 통과되면 이혼하자”고 약속했다. “서로의 남편과 아내가 아닌 온전히 평등한 동반자이길 바랐기에 삶의 동료, 반려자 등이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는 고 이환희 편집자가 생전에 남긴 글과 그의 아내 이지은 편집자가 쓴 글을 교차 편집해 묶은 에세이다. 이환희 편집자의 1주기에 맞춰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해답을 책 속에서 발견했다. “우리는 비교적 일찍, 그것도 사별이라는 형태로 헤어졌지만 누구보다 밀도 높게 사랑했다고 자부한다.(59쪽)”는 이지은 편집자의 말.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는 한 부부의 사랑 서사를 뛰어넘는 책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애도로부터 시작한 글이지만 결국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관계를 탐구하게 만들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아, 그러면 내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딱 1년만에 나온 책이에요. 짧으면서 또 긴, 길면서 짧은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요. 책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하셨는지 궁금해요.

책을 쓰는 내내 환희 씨가 계속 사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서로 모여 그 친구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며 기억하고, 그 친구가 꿈꾸던 아름다움을 함께 실천한다면 그가 계속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정말 많은 면모를 가지고 있던 입체적인 친구가 고작  ‘편집자 이환희’, ‘이지은 남편 이환희’, ‘윤종신 팬클럽 총무 이환희’ 같은 한 줄로 기억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친구가 책 만드는 것을 정말 사랑하고 더 좋은 책을 위해 끝없이 고민했지만 그에 비례해 고통받았고, 제 반려자로서 딱 맞는 짝이었으나 동시에 가부장제와 결혼 제도에 속함으로써 많이 버거워했고, 모두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고 혼자 곱씹은 뒤에 말을 내뱉는 진중한 타입이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던 친구인 걸 알아주었으면 했어요. 

덕분인지 책 출간 이후 환희 씨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많이 왔습니다. 책 내줘서 고맙다고, 환희의 모르던 면을 발견해 기쁘다고요. 책에 등장하는 준혁 씨는 “환희 울보인 거 세상에 소문 다 났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이지은 편집자님은 『편집자의 마음』을 쓰셨죠. 고 이환희 편집자님이 세상을 떠난 후 몇 차례 출간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책을 출간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첫 책은 예상 독자를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어요. 예비 편집자부터 3년차 내외까지, 사수 없이 혼자 고군분투하는 출판계 후배 동료들의 시행착오를 조금은 줄여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출간했어요. 반면에 두 번째 책인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는 어떤 이들이 읽으면 좋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출판노동자니까, 책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공이 들어가는지 잘 알잖아요. ‘고작 일기일 뿐인데 이런 글을 초판 2천 명이 사줄까?’ 출간해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매일같이 일기를 올리다 보니 점점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고, 덕분에 출간 제안 메일이 꾸준히 들어왔습니다. 응원하는 좋아요 수와 댓글들도 계속 늘어났고요. ‘이 글을 사람들이 왜 읽어 주는 거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죠. 많은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책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제 질문을 받은 지인 가운데 한 분이 입안으로 말을 한참 고르더니 “저는 위로 받았어요”라고 대답해 주더라고요. 듣자마자 제가 그 말을 계속 기다려 왔다는 걸 알았어요. ‘아, 그러면 내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위로 받았다”는 말이 동기부여가 됐군요.

네, 제가 주저하고 고민을 하니까 한 동료 편집자가 그러더라고요. “편집자들은 왜 그렇게 의미, 의미를 찾아대는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은 출판사에 폐 끼치지 않을까, 세상에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안 하고 그냥 하고 싶으면 한다고요. 아마 편집자의 습習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출간을 결심하기까지 오래 걸렸던 게 아닌가 싶어요.

출간 제안에 주춤했던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요, 사별을 겪은 초반에는 환희 씨 1주기에 맞추어 ‘이환희 문집’을 독립출판물로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어요. 환희 씨 글을 찾아다니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때라, 이 글들을 읽을 만하게 편집해 그 친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종종 그이를 떠올려 달라’는 의미와 함께 선물처럼 전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애도 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들에 큰 감흥이 없었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의 글을 함께 묶은 건, 출판사의 제안이었나요?

제가 후마니타스 출판사에 역으로 제안했어요. ‘환희 씨가 남긴 글들을 추려서 내 일기와 엮어보겠다’ '내 책이 아니라 우리의 책을 내고 싶다’고요. 환희 씨가 남긴 글들을 몇 번씩 탐독한 독자이자 그의 속내를 가장 깊이 들여다본 반려자, 매일 남의 글을 들여다보고 엮는 게 일상인 출판편집자인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애도라고 생각했어요. 환희 씨의 글과 제 글을 엮은 샘플 원고 두어 꼭지를 첨부해 메일을 발송했죠. 담당 편집자께서 며칠 세심히 고심한 뒤에 제 제안을 수락해 주었어요.

책의 흐름이 시간 순서대로가 아닙니다. 이렇게 편집된 이유가 있을까요?

환희 씨는 스무 살이던 2003년 1월 1일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비교적 정신이 온전하던 2020년 9월 21일까지 글을 쓴 사람이에요. 그래서 남긴 글들이 참 많았지만, 책 출간을 상정하고 쓴 것들이 아니다 보니 대부분 조각글이었어요. 한정된 글들 안에서 추려야 하는 상황이라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기는 어려웠어요. 제 글을 기준으로 환희 씨의 글을 매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봄부터 겨울, 다시 봄이 돌아오는 계절감이 느껴지도록 읽혔으면 싶었습니다. 다만 꼭지 순서는 제가 면밀히 살펴볼 수 없었어요. 환희 씨 떠난 지 6개월쯤 지난 시기가 최종 원고 인도일이었는데, 제 글을 읽을 마주할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 그 일을 반복해 겪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무거웠거든요. 아직 탈상脫喪을 하지 못한 주제에 어쭙잖게 덤볐다가 혼이 났던 거죠.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환희 씨 글과 제 글을 어울리게끔 배치만 하고 연애부터 이후 이별까지 대충 나열한 뒤에 담당 편집자에게 “죄송해요. 도저히 못 보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공을 넘겨 버렸어요. 원고도 편집자가 수정 요청하는 내용 위주로만 살폈고, 순서도 필요하다면 다시 배치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제 원고를 기준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편한 순서를 고민해 다시 배치하신 걸로 알아요.

환희 편집자님이 쓰신 글 중, 가장 좋아하는 꼭지는 무엇인가요?

‘시작할 때의 마음’에 들어가는 글(16쪽)은 저희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 밤, 집으로 돌아간 환희 씨가 잠들기 전에 쓴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의 달뜸이 그대로 전해져서, 그게 너무 예뻐서 당시에 저 글을 캡처해 읽고 또 읽곤 했어요. 이후 제 친구들 사이에서 환희 씨 별명이 ‘환희 버터칩’이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글이에요. 

또 ‘당신의 빈자리를 채우는 법’에 들어간 글(107쪽)은 읽을수록 마음 한쪽이 저릿해집니다. “힘든 시기에 당신이 옆에 있는 게 너무 고맙고 좋아서.” 저 말을 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하거든요. 환희 씨는 굉장히 여린 친구였는데, 그 감성을 제 앞에서만 드러냈어요. 제게 기꺼이 곁을 내주던 그 친구가 고마워요.

일상을 그리워하는 글들도 마음에 남아요. ‘언제 가장 보고 싶냐는 질문’의 글(339쪽)이 신혼 초 풍경을 표현했다면 ‘나에게 기대지 그랬어’의 글(65쪽)은 질병 이후 평범한 일상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에요. 두 글이 묘사한 풍경을 보면 환희 씨가 어떤 삶을 행복이라 여겼는지 알겠더라고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걸 당시에는 몰랐죠.


(왼쪽부터) 이지은, 이환희 편집자 

너는 어쩜 그리 강하니

“누구보다 밀도 높게 사랑했다고 자부한다”(59쪽)는 문장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 밀도가 책에 담겨 있어서 좋았고요. 이 책을 쓰고 퇴고를 하고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 느낀 감정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시엄마가 미워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었는데, 오히려 시엄마에 대한 미움이 많이 옅어졌어요. 시간이 지나고 사건에서 빠져나온 덕분이겠지만, 글을 쓰고 남들에게 읽힐 만하게 수정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거든요.

2020년 5월 환희 씨가 뇌종양으로 긴급 수술하고 같은 해 11월 떠나기까지 고작 6개월 걸렸더라고요. 준비 없이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이 저희 가족 모두에게 처음이니까, 날벼락 같은 불행 앞에 서로를 배려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병간호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겪으며 저도 많이 예민했고, 한없이 날카로운 저를 대하느라 시엄마도 부단히 고생했겠구나 싶은 마음이 이제야 듭니다. 언젠가 저희 엄마가 그러셨어요. “나는 너 같은 며느리 들어오면 너무 무서울 것 같아”라고. 저도 제가 제 며느리면 감당 못 할 것 같아요. 제가 사랑하는 아들의 반려자니까 저한테 져주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며느리이기 때문에 시엄마와의 갈등이 많이 공감이 됐어요. 더불어 아들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시엄마의 마음도 각별하게 이해가 됐어요.

제게 공감했다는 말씀보다 시엄마에게도 공감해 주셨다는 말씀이 더 감사하네요. 언급했듯이, 처음에는 시엄마가 미워서 글을 썼어요. 저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별하지 못하게 막는 듯한 그분을 용서할 수 없었죠.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 낱낱이 기록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주체되지 않더라고요. 한 친구는 저를 보며 ‘분노가 너를 잡아먹을까 봐 조마조마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저를 어쩌지 못하는 시간들이었어요.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사람들은 글을 쓰는 이의 입장에 우선 공감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제 글 아래에 시엄마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며 제 편을 드는 댓글들이 종종 달렸어요. 그게 또 그렇게 속상하더라고요. 살리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는 그 마음,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그런 댓글이 달린 날은 ‘그분도 저도 환희 씨를 사랑하는 마음밖에 없던 것뿐인데, 상황이 저희를 이렇게 만든 것뿐인데’ 싶어서 저희 시엄마를 대변하는 글을 써내려 갔어요. 감정이 널을 뛰었죠.

실제 가족 이야기가 많이 들어 갔는데요. 고민은 없으셨나요?

책으로 엮기로 결심한 뒤에 가장 걱정되는 건 시부모의 반응이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가 제 글 때문에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편집자와 의논해 가족을 향해 널뛰는 감정의 파고들을 최대한 잔잔하게 만들려 노력했습니다. 원고를 다듬은 다음, 시아빠에게 한번 살펴봐 달라고 보내 드렸어요. 원고를 받아보신 시아빠는 “너희가 이토록 알뜰하게 살았다니 참 기쁘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코멘트해 수정하게 도와주시고, 또 제가 속상해했던 부분들은 따로 해명도 해주셨죠. 책에 시부모가 저희 집에 있던 환희 씨 옷을 다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제가 빈 장롱을 보며 한껏 화를 내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게 당시에는 저를 도우려고 한 행동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스스로 정리하려면 너무 힘들 테니까 대신 해주려던 거였다고요.

시엄마는 책을 읽으셨나요?

시엄마는 환희 씨를 기억나게 하는 모든 것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계세요. 그 ‘기억나는 모든 것’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그러다 보니 원고는 보지도 않으셨고, 책도 읽지 않으실 것 같아요. 그래도 출간은 독려해 주셨습니다. 최근 환희 씨 1주기에 만난 시엄마가 “너는 어쩜 그리 강하니? 어떻게 100일 동안 글을 써서 그걸로 책을 만들어 내니. 환희는 어쩜 이렇게 똑똑한 마누라를 얻었을까” 하며 우셨어요. 두 분이 고마워하시는 것만으로도 책 낸 보람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왼쪽부터) 이지은, 이환희 편집자

남들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글쓰기였다

애도의 글을 SNS에 올릴 때, 팔로워가 사라지기도 하고 좋지 않은 댓글을 읽게 되기도 하셨다고요. 지금도 SNS에 일상을 자연스럽게 올리시고 계시는데요.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궁금합니다.

당시에는 이중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끝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 저를 한없이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공존했습니다. 전자의 마음이 클 때는 그저 이불 속에 틀어박혀 한없이 침잠해 버리면 그만인데, 후자의 마음이 클 때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저를 위로할 수 있는 건 환희 씨뿐인데 그 친구는 지금 곁에 없잖아요.

고민하다가 혼자 성당에 갔어요. 잘못을 고백하는 고해성사 보는 자리에서 신부님에게 “시엄마를 미워했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제 뒤에 다른 신도들도 줄을 쫙 서서 순서를 기다리거든요. 다음 사람을 위해서라도 보통은 빨리 보속(천주교식 숙제)을 주고 끝내는데, 그분은 특이하게 어디가 밉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래저래해서 밉습니다, 대답했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한 톤 높이면서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서 그렇다”고 하셨어요. 제 마음이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고작 몇 마디 듣고 멋대로 단죄하는 그 말에 속이 상해서 집에 돌아오는 내내 울었어요. 사람에게도 종교에도 기댈 수 없는 신세가 서러웠던 것 같아요. 혼자 있으면서 남들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글쓰기였어요.

써야 풀리는 마음이 있죠.

이 일이 있기 전에는 개인 SNS에 시답잖은 일상이나 고양이 사진, 정치적 이슈 품평, 읽은 책 리뷰를 주로 올렸어요.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불안과 분노, 원망, 울음 같은 감정들로 가득해진 제 SNS가 기존 SNS 친구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매번 제 피드에 있는 글에 ‘좋아요’를 눌러 주던 이가 어느 날부터 안 보인다 싶어 찾아보면 어김없이 팔로잉을 끊었더라고요. 어떤 이는 “이제 그만 힘들어하고 어디 여행이나 좀 다녀와라”는 댓글을 달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내가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구나. 이제 애도 글을 그만 써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남들에게 읽히는 글이라면 효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제 고민을 들은 지인이 한마디 하더라고요. “아니, 언니 글이 싫으면 그 사람이 팔로잉을 끊어야지 언니가 글을 왜 그만 쓰는데요.” 듣고 보니 그 말도 맞잖아요? 게다가 글을 쓰면서 떨어져 나가는 이들보다 새롭게 연결된 이들이 훨씬 더 많아요. 제게는 그들이 나눠 주는 온기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계속 썼습니다.

처음부터 애도 일기는 딱 100일까지만 쓰려고 마음먹었어요. 100일 이후로는 저도 일상을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환희 씨에게 약속한 게 있습니다. 제가 당신 몫만큼 살겠다고, 좋은 것도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당신만큼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환희 씨 몫까지 살려면 제가 조금 바쁠 것 같아요. 종종 슬프겠지만 저희를 응원해 준 분들을 위해서라도 슬픔 안에만 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온기가 필요할 때면 한없이 우는 소리로 가득한 글을 올릴 때도 있겠지만 되도록 전처럼 소소한 일상들로 제 피드를 채워 가야겠죠. 

비슷한 아픔을 겪은, 겪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슬픔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와 비례해요. 그러니 참지 마시고 많이 울고 마음껏 슬퍼하시면 좋겠습니다. 돌아보면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그 시기를 꼭 겪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덕에 비교적 빨리 그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침잠하는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지만, 당신이 얼른 떠오르기를 바라는 존재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손잡아 달라고 말해 주길 기다리는 이들이 분명 곁에 있습니다. 없다고 느껴지면, 저처럼 손잡아 줄 이들을 찾아나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지금의 이별이 영원한 헤어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곧 다시 만날 테고, 다시 마주했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기운이 생기더라고요.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 보낸 사람이 곁에 있을 때, 가장 좋은 위로의 형식은 무엇일까요?

병원으로부터 환희 씨에게 남은 시간이 3개월 남짓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휴직했어요. 그 친구를 잘 보내준 뒤에 회사에 돌아와 담당 작가들에게 복직 소식을 알리는 이메일을 돌렸는데요.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저자인 산만언니 작가님이 ‘미팅하자’고 짧은 답신을 주셨습니다. 본인 집으로 오라고요. 오래 기다리시게 한 만큼 죄송한 마음이 커서 얼른 미팅 날짜를 잡았죠.

작가님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분이 부엌에 서서 프라이팬 위에 얇게 밀전병을 부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하필 손도 많이 가는 구절판을 만들고 계시더라고요. 제게 미뤄 두었던 책 얘기는 하나도 없이, 아무 말씀도 보태지 않으시고 그저 잘 꾸며진 식탁에 앉혀놓고는 자꾸만 제 접시 위에 그 얇은 밀전병을 올려 주셨어요. 당시 입맛을 잃어버려서 하루에 밥 한 그릇 정도 먹던 때였는데, 그날은 식탁 앞에 앉아 훌쩍거리면서 그 밥을 양껏 먹었어요. 그때 깨달았죠. ‘위로는 그냥 말없이 곁에 앉아 밥 한 끼 내주는 거구나.’ 그리고 감탄했어요. ‘한껏 불행해 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되는지 아는구나.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날이 불행의 효용을 깨달은 유일한 날이에요.

불행에 빠진 이에게 힘내라는 말, 괜찮냐는 말들은 너무 공허해서 닿지 않아요. 그보다는 말없이 저를 한껏 껴안아 준 사람, “휴지로 눈물 닦으면 눈가 다 짓무른다”며 손수건 한 장 건네준 사람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는 사람 옆에서 ‘그만 울라’고 하지 마시고, 말없이 기다려 주세요. 어깨가 필요할 때 가만히 내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떤 독자들이 각별히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최근에 어떤 분이 제 글에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요, 저와 비슷한 시기에 반려자를 떠나보내고 제 글을 읽으며 꼭 자기 마음 같아서 위로 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첫눈이 오는데 연락할 사람이 없다는 글도, 어떤 것을 보아도 당신과 해본 것과 못 해본 것, 가본 곳과 못 가본 곳, 먹어본 것과 못 먹어본 것으로 구분한다는 글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 보면 ‘저 사람은 어떻게 저 나이까지 살아 있지’ 생각한다는 글까지 그분 마음과 꼭 같아서 많이 우셨다고요.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적 있는 분, 떠나보낼 예정인 분들에게는 본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게 아니구나’라는 마음이 일말의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남의 불행이 제 불행을 줄이는 데 하등 쓸모없음에도 그 옆에 있으면 제 불행이 조금 작아 보이거든요. 그게 제 불행의 역할이라면 그분들에게 기꺼이 나눠 써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함께 책을 쓰신 환희 편집자님께, 이 지면을 빌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안에서도 밖에서도 치열하게 싸웠던 친구가 제 반려자라 너무 뿌듯했다고, 힘겨운 세상에 태어나 굳이 고된 나를 만나줘 고마웠다고, 다시 만날 때까지 당신 자리에서 안녕하라고, 나도 그러겠다고. 조만간 우리 다시 만나 못 다한 사랑 계속하자고 전하고 싶어요.


이지은, 이환희 편집자의 결혼 서약문




*이환희

7년 차 출판편집자, 정치적 삶을 실천하려 노력했던 생활정치인, 윤종신 공식 팬클럽 ‘공존’에서 10여 년간 활동한 ‘종신총무’, 두 마리 고양이의 집사, 그리고 같은 직업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지은의 반려인. 작은 몸에 큰 이상을 담고 살던 그는 만 35세에 발병한 뇌종양으로 반년간 투병하다, 2020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에 남긴 글 조각은 A4 2094쪽, 원고지로 6661매에 달한다.



*이지은


13년 차 출판편집자, 작은 것에 애정을 기울이는 에코페미니스트, 『편집자의 마음』이라는 책을 쓴 작가, 두 마리 고양이의 집사, 그리고 같은 직업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환희의 반려인. 2020년 반려인 이환희와 고양이 리아가 동시에 암을 앓고 같은 해 세상을 떠나자, 이별과 애도의 과정을 담아 글을 썼다. 이 글들은 브런치 누적 조회 수 30만을 기록하는 등 많은 이의 공감을 받았다.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들어 봐, 우릴 위해 만든 노래야
이환희,이지은 공저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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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우 시인 “오래된 일기장에서 시작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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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쏟아지는 어둡고 추운 다락방. 한 소년은 윤동주의 시를 필사하며 슬픔을 배웠고, 자라서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시인이 됐다. 바로 첫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로 독자를 만났던 정현우 시인이다. 시집이 세상에 나온 후 그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시집 전체에 깔린 슬픔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거듭 등장하는 천사는 누구냐고. 시인은 한 시절을 한 권의 산문집으로 묶으며 다채로운 대답을 내놓는다. 유년 시절의 일기장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에는 슬픔과 상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담겼다.



슬픔은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진다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에 선정됐어요. 첫 시집이 많은 사랑을 받아서 기분이 각별할 것 같은데요. 

사실 아직 실감은 안나요.(웃음) 코로나19로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갑자기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늘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메시지로 소감이나 좋았던 구절을 보내주시고요. 제 글에 대한 반응이 돌아오는 게 신기하고 감사해요.

이번 산문집은 어린 시절부터 써온 일기장에서 시작된 책이라고요.

아주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요. 저희 어머니가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셨더라고요. 한동안 잊고 살다가 KBS 다큐멘터리 <바람, 별 그리고 윤동주>에 출연했을 때 다시 꺼내 봤거든요. 그런데 예전의 기억과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예요. 한 권의 책이 되려고 내가 일기를 써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목을 오래 고민했다고요. 핵심이 ‘사랑’이구나 싶었어요. 

원래 생각한 제목은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 없다’였어요. 그런데 슬프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내가 슬픔을 이야기해도 될까 망설이게 되더라고요.(웃음) 글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니까 결국 이야기들이 ‘사랑’으로 묶이더라고요. 엄마, 할머니, 고양이 등 다양한 대상을 향한 사랑이요.

원래 정현우 하면 ‘슬픔’의 시인이잖아요.

하하. 맞아요. 상실에 대한 슬픔을 많이 이야기해왔는데요. 슬픔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지금 슬픔에 빠진 분이 있다면, 제 산문집을 보면서 이 사람도 이렇게 힘들었지만 다시 사랑으로 딛고 일어서는구나 용기를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시집에서는 슬픔에 깊게 파고든다면, 산문집은 훨씬 구체적인 감정을 펼쳐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산문이 줄 수 있는 매력 같아요. 시는 함축해서 보여줘야 하는 장르여서 쉼표 하나 여백 하나 치밀하게 계산하거든요. 시를 쓰다 보면 마치 물 위에 짓는 건축물 같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슬픔이라는 감정을 쌓아 올리다가도 어느 순간 모래성처럼 흩어져 버리거든요. 그에 비하면 산문은 현실에 발을 딛은 장르예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감 없이 보여주어야 하니까 숨을 곳이 없는 거예요. 일기장에 적힌 내용을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나 고민도 여러 번 했어요.

시의 뒷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글들도 있었어요. 

맞아요. 시에 등장한 장면과 이어지는 산문들이 많아요. 시집에서 시인이 말하려던 게 이런 거였구나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시집 출간 당시, 많은 독자들이 ‘천사’의 정체를 궁금해했거든요. 산문을 보면 천사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계속 바뀐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엄마이기도 하고 사랑했던 친구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내내 함께했던 고양이이기도 하죠. 제 인생에서 수호천사처럼 저를 지켜준 존재를 표현한 거예요.



나를 지켜준 유년 시절의 천사들

감성의 원점이 늘 유년 시절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느낀 슬픔이 짙게 배어 있기도 하고요.

어릴 때, 집이 많이 가난해서 그 결핍이 크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산문집을 묶으면서 새삼 그때의 가난 덕분에 제가 잘살아올 수 있었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었어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늘 슬픔과 기쁨도 공존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슬픔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다는 기쁨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윤동주와 릴케 시를 필사하기도 했다고요.

제가 처음으로 가져본 시집이 윤동주와 릴케 시집이었어요.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책꽂이에 동화 전집이 꽂혀 있는 거예요. 집에 와서 엄마한테 나도 동화책을 갖고 싶다고 졸랐어요. 다음날 엄마가 윤동주, 릴케 시집을 주셨는데, 그게 주워온 책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죠.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다른 존재를 애도하는 마음을 발견한 것 같아요. 언젠가 ‘얼마나 많은 슬픔을 깨뜨려야 사람이 인간이 될까’ 하는 문장을 쓴 적이 있어요. 모든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은 상실을 끝없이 애도하면서 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에도 그 슬픔을 감싸는 일이 인간이 가진 최고의 능력 같아요.

책을 펴자마자 어머니의 일기가 나와요. 어머니의 삶이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글쓰기가 유전인가 싶을 정도로 엄마도 일기를 오래 써오셨어요.(웃음) 틈틈이 가계부에 일기처럼 메모를 많이 남기셨죠. 일기장에서 이름 세 글자를 발견했을 때, 엄마의 삶을 다시 알게 된 기분이었어요. 엄마는 당연히 내 곁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평소에는 소중함을 잘 떠올리지 않잖아요. 그런데 일기장을 보니 어머니 개인의 삶이 밀려오더라고요.

어머니에 비하면,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미묘한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 슬픔을 배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떤 존재였나요?

사실 아버지와 추억이 많지는 않아요. 제가 어릴 때, 직장암에 걸리셔서 늘 술을 드시거나 예민했던 모습이 떠오르거든요. 아픈 사람이 집에 있으면, 크게 기뻐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가 생겨요. 그래서 제가 일찍 슬픔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성인이 되고서야 아버지의 삶도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조금씩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이 산문에도 담긴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우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슬펐지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더 슬프더라고요. 사람이 죽어도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기관이 귀래요. 그래서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귀에 대고 마지막 한마디를 속삭였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어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집 앞에 연못을 만드셨거든요. 그런 기억이 분명 나한테 남아 있었는데 잊은 채로 흘러왔다고 생각하니 슬프더라고요. 한 세대가 함께하는 시간이 짧구나 싶기도 했고요. 



음악과 시가 만나는 순간

글 곳곳에서 ‘수야’하고 말을 거는 장면들이 있어요. 누구인지 궁금했어요. 

‘수야’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제 친구예요. 그 친구를 군대에서 만났는데 둘 다 문학을 좋아하니까 이야기가 잘 통했어요. 제가 시 쓰고 노래도 부르는 걸 알고는 친구가 응원을 많이 해줬죠. 친구가 떠나던 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저는 군대에서 앰뷸런스 운전병을 했는데요.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출동하려고 밤늦게까지 대기를 해요. 그날도 졸고 있는데 누가 8층에서 떨어졌다고 연락을 받았죠. 서둘러 가보니까 친구였던 거예요.

상심이 컸겠어요.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죠. 친구를 떠올리며 썼던 시가 「면」이에요. 완성하고도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신춘문예에 냈는데 당선이 됐어요. 그 상이 꼭 제 친구가 선물해준 것 같더라고요. 제 인생의 변곡점이자 시 쓰기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어요. 평생 잊지 못할 친구예요.

등단 전 불안을 고백한 글도 있었어요.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도 읽혔고요. 

요즘은 등단제도를 거치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 생각해요. 제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문학상을 받지 못하면 시인이 아닌 것 같은 옛날 사고방식이 있었거든요. 저도 심사에서 많이 떨어졌고, 시인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노래로 도망갔다 시로 돌아왔다 하면서 내가 시인인가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죠.(웃음)



작가님은 음악가로도 활동하고 있죠. <별이 빛나는 밤에>와 <위대한 탄생>으로 데뷔한 이래, ‘시인의 악기상점’이라는 활동명으로 EP 앨범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발매하기도 했고요. 

스무 살 때 앨범을 냈지만,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제 목소리를 인정받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아서 신기했죠. 시인이 되고 나서 우연히 팟캐스트 <문장의 소리>에 로고송을 부르게 됐어요. 그걸 계기로 영화 음악에도 참여하게 되고 조동희 작사가와의 인연도 생겼죠.

문학과 음악을 오가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맞아요. 지금은 문학적인 음악을 하고 싶어요. 요즘은 조동희 작사가와 함께 제 시 「유리의 집」을 가사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결국 노래는 시에서 왔다고 생각해요. 어떤 감정을 은유적으로 전달할 때, 문장으로 전달하는 건 시고, 멜로디와 가사로 전달하는 건 음악이잖아요. 제가 느낀 감정을 최대한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장소 제공: 언브릭커피)



*정현우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 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가 있다.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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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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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서이제,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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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지 종종 헷갈린다. 분명 디지털에 길들여졌는데, 여전히 80년대 대학가요제 무대를 보면 가슴이 뛰고 LP판에 이유 없는 향수를 느끼니 말이다. 그럴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가 믿는 것처럼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을까? 알고 보면 시간은 시작과 결말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뒤섞이고 겹쳐진 이상한 사건이 아닐까? 

소설가 서이제도 어느 날 기묘한 시간을 떠올렸다. 미술관이었고, 필름은 조각조각 잘려 전시되고 있었다. 하나의 면이 되어 붙어 있는 필름을 보고,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상상했다. 단순히 차곡차곡 쌓아 결말에 이르는 소설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 소설집 『0%를 향하여』의 시작이다. 

인터뷰 내내 서이제는 ‘우연’에 대해 말했다. 소설을 쓰며 우연히 행복해졌고, 삶이란 우연으로 가득한 것 같다고. 그런 삶을 닮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그 말을 듣자 나 역시 믿고 싶어졌다. 소설의 페이지마다 담긴 수많은 우연들을,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만남들을. 앞으로도 어쩌면 현실은 우리에게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길 요구하겠지만, 서이제의 소설이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로울 것이다. 자유롭게 뻗어가는 시간 속에서. 



좋은 이야기를 찾아서

원래 영화를 공부하셨어요. 소설을 어떻게 쓰게 됐는지 궁금했어요.

학교 다닐 때, ‘좋은 이야기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좋은 이야기가 뭘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예요. 실제로 써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하면서, 졸업 무렵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의외로 너무 즐거운 거예요. 영화를 찍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고 감정도 잃는데(웃음) 소설은 실패해도 언제든 다시 쓸 수 있고, 돈도 안 들고. 이런 식이면 계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90년대생인 작가님이 영화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예술영화관이 많았고 독립영화를 보는 문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영화관도 문을 많이 닫았고, 이제 다들 넷플릭스, 왓챠 같은 OTT 서비스로 영화를 보죠. 

입학할 때만 해도 필름으로 영화를 찍었어요. 술자리에서도 친구들끼리 영화가 디지털로 바뀔까, 아냐 필름은 사라지지 않아 하면서 토론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휴학을 오래 하고 복학을 했는데 다 디지털로 바뀌어 있는 거예요. 당시에는 변화를 그냥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영화제에서 오랜만에 필름 영화를 보게 됐어요. 아 이게 영화였지 싶은 거예요. 필름은 보관 상태에 따라 색감이 변하고 먼지도 들어가잖아요. 영화가 스토리만이 아니라 질감의 표현이라는 걸 다시 느꼈죠. 그 고민을 할 무렵에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을 썼어요.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시간이 뒤섞인 채로 배열된 소설이었어요. 필름을 새롭게 본 경험이 소설의 형식에도 영향을 줬나요?

늘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영화는 항상 러닝타임이 정해져 있는데 그게 싫었거든요.(웃음) 그 무렵 미술관에서 벽에 필름을 붙여 놓은 걸 봤는데, 시간이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면으로 존재할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콘텐츠를 즐기는 방식도 그래요. 바를 눌러서 시간을 왔다갔다 선택해서 볼 수 있잖아요. 그렇게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수용자에 의해서 여러 갈래로 활성화되는 것을 떠올렸어요.

독자는 어떤 순서로 읽어도 상관없는 거군요. 

사실 제가 그래요. 영화는 결말부터 보고, 책 읽을 때도 일부러 마지막 페이지를 펴요.(웃음) 책은 종이가 겹겹이 쌓인 물건이잖아요. 소설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쌓아 올려서 결말에 이르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소설.

각 소설이 매번 다른 형식을 보여줘서 신기했어요. 이런 건 어떻게 만들지 싶을 정도로요.

형식이 정해지면 안에 들어갈 내용은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항상 형식이 주제라고 생각하고, 그게 제게 맞는 표현 방식 같아요. 왜 말을 할 때 속이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저는 새로운 형식으로 쓸 때, 그런 후련함을 느껴요. 



청춘이라는 말은 좀 어색하지만

첫 소설 「미신」은 ‘모른다’로 끝나는 문장으로 어디까지 써나갈 수 있는지 실험한 결과물이라고요. 실제로 써보니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어려웠죠. 이렇게까지 몰라도 되나 싶고. 사실이란 없고 계속 문장을 뒤엎으니까 쓰는 저도 계속 헷갈리게 됐죠. ‘물’과 연관된 이미지를 집요하게 따라갔던 것 같아요. 쓰고 나니 후련했지만, 발표 직전에는 너무 떨리는 거예요.(웃음)

독자들의 반응이 두려웠나요?

그 때는 걱정이 됐는데, 어느 순간 믿게 된 것 같아요. 왠지 잘 읽어주실 것 같다는 믿음.

작가님 소설에 ‘청춘’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붙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우리가 스스로 ‘청춘’이란 말을 붙이는 건 좀 어색하죠.(웃음)

맞아요. ‘청춘’이란 말을 의식하고 쓴 적은 없었어요. 아무래도 ‘청춘’ 하면 외부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느낌이 들잖아요. 소위 ‘밀레니얼 세대’가 고학력자인데 취업은 안 되고 어렵게 살아간다고 말하잖아요. 근데 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희망도 없는 세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다른 걸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주변에 예술을 하는 친구가 많은데, 어느 순간 내가 이 사람들과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큰 돈을 벌지 못하고 미래도 불안정하지만, 이 사람들 곁에 있으면 될 것 같다는 믿음이요.

저도 소설을 읽으면서 특별한 사건이 없더라도 인물들이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좋더라고요. 의미 없는 말만 계속하지만 그것도 교류니까요.

제 소설이 되게 비극적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늘 희망적이라고 생각하고 쓰거든요.(웃음) 절망적으로 보이는 세계 안에서도 다들 같이 있잖아요. 그게 유일한 희망 같고요. 혼자이지만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룹사운드 전집에서 삭제된 곡」은 엄마 세대의 청춘을 다루죠. 

한동안 유튜브에 올라온 80년대 대학가요제 영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그 영상 속에 없는 사람들은 다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을 다니지 않았거나, 지방에 있는 사람은 여기 나올 수 없었을 텐데. 그렇게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딸이 전생체험을 통해, 엄마의 청춘을 만난다는 설정도 독특했어요.

심심풀이로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전생체험을 해본 적이 있는데요. 너무 몰입해서 울면서 깨어난 거예요.(웃음) 그 경험을 떠올리면서, 엄마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법 보다는 딸이 전생체험처럼 엄마의 삶을 훑고 돌아오는 방식을 택했어요. 왜 우리도 집에서 80년대 영상만 보고 있으면, 이 세상이 80년대로 변해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잖아요. 그렇게 시간이 뒤죽박죽 섞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시간이 발생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SNS나 유튜브 같은 새로운 매체 환경이 소설에 적극적으로 드러나기도 해요. 기존 소설이 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다룬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일상에서 스마트폰을 갖고 다니고 유튜브를 보는데, 그런 이야기가 없으면 어떻게 우리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기술이 발달하면 인간의 감각도 바뀌잖아요. 카메라와 눈이 협력해서 주변 사물을 인식하고, 보정되고 수정된 이미지로서의 나를 보게 되고요. 그런 감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했어요. 왜 영원한 것만 소설에 담아야 하지 하는 의문도 있었어요. 30년 뒤에 펼쳐봤을 때, 소설에 인스타그램 이야기가 있으면 그것 또한 좋은 게 아닐까? 이걸 써도 될까 하는 망설임은 없었어요.



나는 이제 우연과 협력한다

『0%를 향하여』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한국 영화 100주년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죠.

15년 정도 영화를 좋아해 왔는데 저도 뭔가를 기념하고 싶은 거예요. 힘든 시간에 나를 위로해 준 게 영화였는데, 정작 내가 영화를 위해 한 일이 있었나 싶었어요. 예전에 지인이 첫 책에 대한 계획이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 독립영화에 대한 소설을 써서 마지막에 넣고 싶다고 대답했거든요. 그래서 20대의 마지막에 이 소설을 썼어요.

‘독립영화’ 하면 상업영화의 전 단계 정도로 많이들 생각하잖아요. 막연히 힘들겠다는 동정의 시선도 있고요.

‘독립영화’라는 말 자체가 텅 비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독립영화계에서 유명해지면 다 메이저 상업영화계에 가잖아요. 결국 독립영화 판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어요. 의미 있는 작업을 하더라도 관객을 모으지 못해서 사라지고요. 그래서 제가 느낀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어요. 너무 비극적인 것 아니냐는 평도 들었는데, 저는 반대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나름의 즐거움과 숭고함이 있어요. 0%를 향하는 움직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동아리에서 영화를 찍던 친구들도 생각나고, 독립영화관을 찾던 추억도 떠올랐어요.

신기하게도 독자분들이 책을 읽고 독립영화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올려주시더라고요. 독립영화관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던 사연이나, 작은 공연장에서 일했던 경험 같은 것들요. 그럴 때 소설 쓰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소설을 읽고 한 명이라도 독립영화관을 오랜만에 찾게 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기억들이 모여서, 결국 소설이 끝나지 않고 무한하게 뻗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시작과 끝이 정해진 게 아니라, 우연히 움직이는 사건들이 결국 작가님의 소설이 아닐까 싶었어요. ‘작가의 말’에서도 그런 자유가 느껴졌는데요.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었어요. “나는 이제, 우연과 협력한다”

소설을 쓰게 된 것도 우연이었어요. 그런데 일단 해보니까 우연히 행복해졌거든요. 삶이 항상 인과에 의해 결정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오히려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가 거짓이고, 나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사람은 우연히 불행해질 수도, 행복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왜 그런 경험 너무 좋잖아요. 오늘 기분이 울적해서 영화를 보러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난다거나, 길을 걸어가는데 때마침 불꽃놀이를 보게 된다거나. 모두 우연이 만들어낸 사건이잖아요. 그런 삶을 닮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책은 누군가를 만나면서 각자의 운명을 가지게 된다”고 하셨어요. 독자들을 만나서 이 서사들은 계속 변화해나갈 것인데, 어떻게 읽어주었으면 하나요?

자유롭게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읽다가 멈춰도 좋고, 거꾸로 읽어도 좋고. 독자의 능동적인 선택이 많이 발현되는 책이 됐으면 해요.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요.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종이에 공백이 있잖아요. 여기서 여기로 넘어갈 때, 이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문득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고, 앞과 뒤를 나름대로 연결할 수도 있겠죠. 그런 다양한 해석을 떠올리면, 소설 쓰는 게 너무 재밌어요. 늘 독자의 반응이 궁금해요. 



0%를 향하여
0%를 향하여
서이제 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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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택 “개나리 열매 찾기에 완전히 빠져서 다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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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택 작가  / 촬영 장소 제공_ 도화북스

『꽃을 기다리다』『오늘은 빨간 열매를 주웠습니다』 등의 식물 에세이, 생태 만화 『꼬마애벌레 말캉이』『식물 탐정 완두, 우리 동네 범인을 찾아라!』 등을 쓰고 그려온 숲놀이 기획자이자 생태만화가 황경택 작가는 자연을 관찰하는 일이 인간의 일을 다시 보게 한다고 그 의미를 짚어낸다. 겨울의 나목을 보며 꾸미지 않은 진짜 나를 발견하고, 곤충 날개의 상처를 보며 우리 모두는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자연을 보며 “살아 있음은 매일이 기적 같”(11쪽)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자연의 시간』은 그런 황경택 작가가 우리 자연에서 찾아낸 100가지 명장면을 1월부터 12월까지 계절의 시계에 맞춰 보여주는 책이다. 놀랍도록 가까이에 보석처럼 숨어 있던 이 장면들을 따라 봄의 시작을 산수유와 생강나무의 노란 꽃으로 인식하고, 매년 첫 매미 울음 소리를 들은 날짜를 기록하는 일. 이것은 내 일상에 더 많은 행복의 순간을 불러들이는 일과 같다.

“자기 얘기를 쓰는 사람들의 기본 조건을 저는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을 좋은 글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글이란 자신의 생각이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해야죠. 자연을 관찰할 때 일단 제가 행복하니까 많은 분들에게 여러분도 저처럼 행복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싶고요. 그래서 자연을 자세히 보고 새로운 걸 발견해 보는 즐거움을 계속 얘기하는 것 같아요.” 



발견의 즐거움 

책의 첫 문장이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죠. 『자연의 시간』은 계절을 체감하는 수단이 달력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었어요. 

자연을 산책하면 정말로 매일이 다르거든요. 이런 거죠. 매일 다니는 출근길을 사람들은 그저 같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좀 지루해져요. 자세히 보면 새로운 풀이 있기도 하고요. 어제는 안 피었던 꽃이 새로 피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어요. 그 자체의 즐거움이 있죠. 자연을 관찰하며 지내는 것을 저는 ‘즐거움’으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발견의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늘 생활하던 공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 그런 게 있으면 생활이 좀 덜 지루하겠죠. 삶을 보다 행복 쪽에 맞출 수가 있고요.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은 그냥 말로 하면 잘 모르시니까 자꾸 그림으로 그려드리려고 하고, 그것들을 찾아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매일 다른 풍경을 관찰할 줄 안다는 것은 행복의 빈도가 훨씬 늘어나는 일이기도 하겠어요. 작가님도 책 작업을 하실 때 자주 행복하셨어요? 

행복하죠.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해온 작업이긴 한데요. 우리 자연 속 100가지 장면을 그린다는 책의 주제가 있어서 한 2년 정도에 걸쳐 다시 그렸어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정리하면서 다시 보니까 또 즐겁더라고요. 기본적으로 관찰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즐거움 자체가 커요.

자연을 관찰하는 게 정말 즐거운 일이라는 걸 처음 느꼈을 때가 기억 나세요? 

제가 ‘개암나무’라는 아이디를 쓰거든요. 어릴 때 동화책에서 접하죠, 개암나무. 저도 동화책에서 보고 너무 궁금했어요. 도대체 어떻기에 도깨비들도 놀라게 하고, 도적들도 놀라게 하는지 말이에요.(웃음) 깨물면 큰 천둥 소리가 난다고 해서 어릴 때는 그냥 상상의 식물인가보다 하고 지나쳐버렸죠. 나중에 공부를 하면서 책을 보다 개암나무가 나왔는데 너무 깜짝 놀랐어요. 어렸을 때 매일 보던 나무였거든요. 저희 동네에서는 ‘깨금나무’라고 부르던 그 나무가 개암나무였던 거예요. 그때의 놀라움이 아마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실에 대한 기쁨과 충격을 얻은 첫 기억이었을 거예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많았을 테고요. 

숲 해설가 양성 과정에는 강사도 많이 계시고, 책도 많아요. 그렇지만 한 권의 책에 모든 걸 다 담아 놓은 건 없어요. 도감에도 지면의 한계가 있어서 모든 내용을 다 적어 놓지는 않거든요. 어떤 것들은 알면서도 안 쓰고, 어떤 것은 관찰을 못했기 때문에 안 쓰는 식으로 빠져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저도 공부하면서 도감이 없는 내용을 발견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이것도 내가 기록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죠. 무궁화 같은 것도 열어보면 털이 달려 있는 씨앗이 들어있거든요. 씨앗은 약간 하트 모양이고요. 이런 것들이 다 새로운 사실이잖아요. 씨앗에 털이 달려서 바람에 날아가는 모습을 발견하면 또 그렇게 즐거웠어요.

책 내용 중, 인터뷰를 하는 오늘과 가까운 날짜가 12월 5일인데요. 글의 제목이 ‘솔씨의 여행’이에요. 이 대목을 보는데 새삼 주변에서 솔방울을 그렇게 많이 봤어도 솔방울이 벌어지고, 솔씨가 떨어지는 과정을 관찰할 생각은 못했었구나, 싶었어요. 

사실 숲 해설가들은 다 아는 내용이긴 한데요. 그렇지만 이런 내용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책을 써야 하니까요. 저도 처음 알았을 때 놀랐던 내용들을 생각해보고 책에 담은 거예요. 아직 자연에 관심이 없거나 지나치는 사람들이 알면 흥미로울 부분들이 많아요.

“저마다 사계절을 느끼는 자기만의 시그니처를 하나씩 갖고 있다면 삶이 좀 더 낭만적이지 않을까?”(77쪽)라고 쓰신 부분이 떠오르네요. 

그렇게 하나를 알게 되면 나만의 비밀을 하나 갖는 느낌이죠. 이 책은 자연에 관찰할 게 아주 많지만 그 중에서도 100개, 특히 우리 일상에 있는 것들 위주로 뽑은 거예요. 예를 들어 ‘희망봉용담’이라는 애가 있어요. 걔는 평소에 꽃잎을 닫고 있어요. 원래 꽃은 꽃가루가 바람이나 비에 젖거나 떨어지면 안 되니까 꽃잎을 닫는 게 유리하거든요. 그렇지만 대개는 닫아 놓으면 벌이 못 오니까 꽃잎을 열어놓는 거예요. 한편 희망봉 용담은 평상시에는 꽃잎을 닫았다가 특정한 벌이 와서 날개 짓을 하면 거기에 맞춰 꽃잎을 열어요. 그때 수분이 이루어져요. 신기하죠? 하지만 이걸 보려면 히말라야 희망봉까지 가야하잖아요. 재미있는 게 토마토가 그래요. 그걸 보기 위해 멀리 안 가도 되는 거예요.(웃음) 또 ‘아카시아’(한국에 있는 ‘아카시’와 다른)라고 아프리카에 있는 나무는요. 그 안에 개미가 살아요. 개미는 꿀을 먹고 다른 곤충들이 못 오게 하죠. 그런데 주변에도 많이 볼 수 있는 벚나무가 그래요. 우리 주변에서도 신비함을 발견할 수 있어요. 



아마추어의 힘 

개나리에 열매가 맺힌다는 얘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열매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면 보고도 몰랐을 것들이니까요. 

개나리 이야기도 처음 듣는 분들이 재미있어 하시는 내용인데요. 저도 공부하면서 알게 된 내용이에요. 놀랍게도 개나리가 멸종위기종이라고 하더라고요. 맨날 보는 건데 신기하잖아요. 알고 봤더니 암나무와 수나무 두 종류가 있는데 개나리는 꺾꽂이로도 쉽게 번식이 되니까 한 곳에 한 종류를 많이 심는다고 해요. 그 때문에 수분이 이루어지지 않아 열매가 거의 없다는 거죠. 그 내용을 보고 실제로 찾아봤어요. 진짜로 개나리에 열매가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개나리 열매 찾기에 완전히 빠져서 다녔죠.(웃음) 그러다가 월드컵공원에 갔는데 개나리 열매가 너무 많은 거예요. 정말 놀랐어요. 그 다음부터는 열매가 눈에 조금 더 잘 들어오더라고요. 지금도 어디를 가서 봐도 몇 개 정도는 찾아요.

나의 한 계절을 나의 속도로 느끼기, 나만의 전통을 만드는 일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주시는데요. 그 중, 매년 첫 매미 소리를 들은 날을 기록해보라고 제안하신 부분도 좋았어요. 쉽게 따라할 수 있으면서도 계절의 변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록의 힘이 있어요. 제가 어딘가 가서 사슴벌레를 한 마리 보고 그린 적이 있거든요. 그 옆에 날짜도 물론 적고요. 얼마 뒤에 우연히 곤충학자와 대화를 하는데 제 스케치를 보고 어디서 그린 거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어디서 본 거라고 답했더니 “설마요, 거기는 그 곤충이 안 사는데.”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사진 찍어 둔 것도 있다고 말씀을 드리니까 그제야 “걔네가 그렇게 아래쪽에는 없는 걸로 알았는데 생각을 바꿔야겠네요.”라고 하셨어요. 그게 기록이 가지는 힘 같아요. 특히 저는 아마추어의 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전문가들은 바쁘기도 하고 동선이 의외로 좁아요. 한편 아마추어들은 다양한 숲에 가서 여러 가지 관찰을 많이 하거든요. 제가 까치가 둥지 짓는 것을 2월에 봤지만 어떤 분은 1월에 관찰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또 발견인 거예요. 많은 분들이 이것들을 재미 삼아 해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는 분은 자신의 생일을 “라일락 필 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자신의 생일을 향기로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죠.

“자연 지식을 대하는 좋은 태도는 일단은 할 수 있는 경험을 한 후에 판단하는 것(111쪽)”이라고 하셨어요. 

대학 다닐 때 미학 개론 수업을 들었어요.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커피 얘기를 하시는데 커피가 언제 발견됐는지, 누가 처음 마셨는지 등을 언급하면서 커피의 가치와 놀라움을 설명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 지식을 아는 게 과연 커피에 대한 미학일까 싶은 거죠. 내가 커피를 직접 맛보면서 그 맛으로 커피의 가치를 찾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질문을 드렸어요. 야구의 탄생 배경이나 메이저리그에 대한 여러 이력, 야구의 규칙 등을 다 아는 게 야구를 즐기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휘두른 야구 방망이가 공을 맞췄을 때의 기쁨을 느끼는 게 야구를 더 즐기는 걸까요, 하고요. 저는 지금처럼 개나리에 대한 이야기를 머리로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직접 가서 내가 그것을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공부도 중요하죠. 하지만 직접 경험이 제일 중요해요.

그래서 책에도 식물의 생태나 지식을 간략히 소개하면서도 그보다는 나라는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나의 일상에서 어떻게 보였는지를 많이 기록하신 거군요.  

네, ‘나는 일단 이렇게 느꼈으니 여러분들도 한번 직접 나가서 맡아보고 해보세요’ 이런 거죠. 그건 숲해설을 할 때 어린이들에게도 똑같이 하는 말이에요. 어린이들과 수업을 할 때 인사하고 건네는 첫 질문이 “자연이 뭘까?”거든요. 그러면 어린이들은 나무요, 풀이요, 하면서 이런 저런 답을 해요. 자연은 보호해야 돼요, 하면서요.(웃음) 그러면 저는 “맞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오늘 자연은 경험하는 거라고 얘기하고 싶어요.”라고 해요. 경험이 제일 중요하고, 거기서부터가 출발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자연을 관찰하는 이유가 지식을 쌓기 위해, 현명해지기 위해만은 아니에요. 그건 두 번째인 것 같고요. 우선은 직접 만져보고 냄새 맡는 경험을 해봐야죠.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으니까요. 그 이후에 보호나 지식, 지혜도 오는 것 같아요. 



결국 사람의 이야기 

자연을 그저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각각의 의미 있는 생명체로 자세히 지켜보는 것이 중요한 의미 같기도 해요. 

자연의 이야기가 결국 사람의 이야기와 똑같거든요. 제가 책에 사람 이야기, 우리 이야기를 많이 적은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도 언뜻 보면 키도 작고, 젊거나 멋지고 화려하게 보이진 않으니까(웃음) 지나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도 좀 자세히 봐주시면 제 안에 여러 가지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도 자세히 봐야 그 사람에 대한 것도 매력도 알 수 있고 그 사람 이야기도 더 많이 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자연에서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네요. 

실제로 저도 위로를 많이 받아요. 활엽수와 침엽수가 다른 삶을 살잖아요. 다른 형태로 살고요. 저도 예전에는 단순히 다르다는 것, 각각의 종류가 몇 개인지 혹은 생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에 집중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달라도 된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돼요. 나도 다른 사람과 달라도 되는 거죠. 그래서 위안이 되는 거예요. 또 자연을 관찰해 보면요. 어떤 나무나 풀, 어떤 곤충도 상처 없는 게 없어요. 다 상처가 있어요. 곤충도 날개나 딱지가 너무 예쁘지만 자세히 보면 흠집이 꼭 있거든요. 하지만 다 잘 살고 있잖아요. 세상에 어떤 생명체가 상처가 없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친구로 인해 받은 상처도 그저 일상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그런 식으로 자연의 일을 보고 위안을 얻는 게 많아요.

앞서 우리 가까이에서 자연의 놀라움을 발견해 보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이것 역시 삶의 비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화려한 순간, 놀라운 성취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더 잘 관찰하는 일의 소중함 같은 것 말이에요. 

그렇죠, 그렇다고 해서 그 목표를 이루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만 답이 있지는 않다는 거죠. 저도 외교관이 되고 싶어서 대학에 갔는데요. 막상 가보니까 재미가 없었어요.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게 진짜 내가 원하는 꿈이었는지 혼란스럽더라고요. 혹시 주변 사람들을 겨냥한 꿈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대학에 가서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죠. 결국 그 목표가 진짜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겠다,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만화도 하고, 작가가 된 것 같아요.

해가 바뀌는 시기예요. 이런 시기를 보내는 분들에게 어떤 자연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세요? 

겨울이 혹독하죠. 그래서 자연은 저마다의 방법을 개발해서 이 시기를 견뎌요. 침엽수는 부동액처럼 끈적이는 것을 만들어내서 조금씩 수분을 배출해 가며 최대한 천천히 견디고요. 활엽수는 잎이 크고 물을 많이 쓰기 때문에 아예 그냥 이 기간에는 멈춰버리죠. 보세요, 이것도 방법이잖아요. 아예 쉬는 거예요. 그래야 또 이 시기를 견디고 다음을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이 시간을 좀 쉬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으로 삼자는 얘기를 드리고 싶어요. 생계가 있는 분들께 이런 이야기가 공허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요. 어려운 시기를 다른 상황으로 역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한편으로는, 잎을 다 떨어뜨리면 나무들이 쓸쓸해 보이죠. 저는 그게 어찌 보면 진솔한 모습 같기도 해요. 나목이 주는 가치가 있는 것 같거든요. 옷을 다 입고 있고 멋지게 꾸미고 있는 모습도 나의 모습이지만 내면의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진솔하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해드리고 싶어요.

겨울의 산은 언뜻 쓸쓸하고 황량해 보이지만 그 안에 조만간 폭발하듯 뿜어져 나올 봄빛의 향연을 숨기고 있다. 이파리가 없어 무채색 같아도 자세히 보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저마다의 빛깔이 묻어 있다. 가지 끝에 겨울눈 빛깔들이 모여 멀리서도 보라색이 살짝 돈다. 저 안에 노오란 생강나무 꽃도, 산벚나무의 밝은 연보랏빛 꽃송이도, 알알이 붉게 익어갈 산딸기 열매도, 실베짱이의 날갯짓도, 꿀벌들의 웅웅대는 소리도 모두 담겨 있을 것이다.  _(15-16쪽)





*황경택 (글·그림)

1972년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사)우리만화연대, (사)숲연구소에서 활동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만화가가 되었다. 데뷔 후 숲 공부에 빠져 생태 만화만 그렸다. 20여 년째 어린이를 위한 생태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숲에 나가 놀이와 관찰법을 가르치고, 자연의 변화를 꾸준히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자연을 잘 관찰하는 사람만이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으며,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 숲과 길 주변의 식물 산책을 즐긴다. 그 경험을 토대로 어린이를 위한 생태 만화와 어른을 위한 식물 관찰 에세이, 교육자를 위한 생태 안내서를 다양하게 펴냈다. 대표 저서로는 식물 드로잉 에세이 『꽃을 기다리다』와 『오늘은 빨간 열매를 주웠습니다』, 어른을 위한 숲놀이 책인 『내 안의 자연인을 깨우는 법』, 생태 만화 『꼬마애벌레 말캉이』와 『식물탐정 완두』, 생태 교육자를 위한 안내서 『숲 해설 시나리오 115』와 『주머니 속 자연놀이 100』 등이 있다.




자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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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경 “한국, 본격 럭셔리 호텔의 조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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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경 저자

한이경은 “새 호텔의 문을 여는 사람”이다.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다 30대 초부터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약 20여년 동안 “허허벌판의 맨 땅 위에 호텔이나 리조트를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기획하는 단계부터 들어서기까지의 전 과정, 그리고 문을 연 이후 초반 운영 단계까지 도맡아 하는 일”을 해왔다. 그리고 2018년, 한국에 온 한이경은 현재 ‘메리어트 호텔 그룹’ 기술 자문 총괄을 맡아 “한국에서 새로운 호텔이 문을 열 수 있도록 기획부터 오픈까지의 전 과정을 호텔의 브랜드 스탠다드에 맞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이경의 첫 책이기도 한 『호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호텔이 다양한 고객의 요구에 맞춰 어디까지 발 빠르고 섬세하게 변화를 거듭해왔는지 짚어낸다. 조명이나 음향, 가구부터 조경과 기타 운영까지, 화려한 호텔의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호텔 안팎의 정보들을 아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한이경은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호텔에 관한 정보뿐 아니라 “각자의 공간이 갖는 의미를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코로나19 이후의 호텔

『호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구상한 때가 20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고요. 지금의 책이 되기까지 어떤 고민들이 있으셨던 건가요? 

책의 구성안을 짜고 본격적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할 때가 떠오르는데요. 처음 원고를 쓰기 시작할 때는 지난 20여 년 동안의 기억과 경험으로 축적된, 동시에 머릿속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정보들을 한 곳에 모으는 작업이 낯설기만 했어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책에 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줄곧 따라다녔던 거죠. 그리고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글을 쓰고 싶은데 자꾸만 전문적인 내용이 튀어나와서 그걸 억누르는 것이 꽤 어려웠어요.

하시는 업무라는 것이 소비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야, 달리 말하면 저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호텔을 이용할 수 있어야 의미가 커지는 작업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일에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기획부터 문을 열 때까지 제가 함께 만든 호텔이나 리조트를 찾아온 분들이 “다시 또 오고 싶다.”고 말씀하실 때인 것 같아요. 또 제가 마음을 담은 공간에서 진행한 행사에 참여한 분들이 의도에 맞게 그 공간을 즐기시는 모습을 볼 때야말로 이 일을 하는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죠.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코로나19’ 이후의 변화들입니다. 코로나19는 많은 영역의 패러다임을 바꾸었고, 호텔 역시 큰 영향을 받은 곳 중 하나인데요. 향후 호텔은 변화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게 될까요? 

한마디로 답하자면 ‘디지털 기술 도입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미 디지털화는 진행되었고요. 앞으로 빨라질 일만 남았어요. 아울러 안전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빼놓을 수 없겠죠. 지금까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테러나 화재 등을 먼저 떠올렸다면 코로나19를 겪으면서는 바이러스에 대한 대비 역시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가 되었어요. 앞으로 이런 추세가 더욱 강화될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호텔마다 이미 그 대비책을 세우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어요.

같은 맥락에서 지속가능성, 환경 보호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 역시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돼요.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호텔들이 하고 있는 노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환경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호텔이 지목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이에 대한 호텔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지도 오래되었어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노력도 눈여겨봐야 하겠지만요. 그뿐 아니라 산업적 측면에서의 거시적인 변화 방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전 세계 수천 개의 호텔을 운영하는 글로벌 그룹들은 앞장서서 전기 소비 절감, 이산화탄소 배출 절감, 음식물 쓰레기 처리 방안은 물론 빗물이나 한 번 사용한 물의 재활용 시스템 등을 시도하고 있어요. 또 태양에너지로의 대체를 위해 새로운 건물 설계 단계부터 다양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죠. 특히 제가 주목하는 것은 호텔이 납품업체들에게 점점 자연친화적 설비, 친환경 제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건데요. 생각해보면 각 업체에서 글로벌 호텔 그룹에 납품하는 각각의 품목이 해당하는 것이니 그 양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겠죠. 이런 기조가 한 번 정착되면 사회 전반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호텔의 트렌드

‘호텔’에도 다양한 등급이 있고, ‘럭셔리’라고 해도 저마다 다른 서비스 수준이 있더라고요. 그 중, 아직 한국 호텔에 ‘우버’나 ‘어퍼’ 럭셔리 호텔이 없는 것을 “적절한 시기가 오지 않았기 때문”(47쪽)이라고 분석하셨는데요. 본격 럭셔리 호텔의 시대, 언제쯤으로 예상하시나요? 

한국 사회에도 점차 본격 럭셔리 호텔의 시대가 시작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어요. 지금 준비 중인 서울과 강원도 등의 몇몇 호텔 등이 몇 년 후 문을 연다면 한국 호텔업계 지형은 대대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기도 하고요. 책에도 언급했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럭셔리 호텔은 투자 대비 수익을 거둘 수 있을 때 가능해요. 한국 시장에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룻밤에 몇십 만 원씩을 쓰려는 수요가 그리 두텁지 않았던 게 현실이었죠. 하지만 최근에는 부쩍 그런 수요가 늘어나고 있거든요. 이런 흐름이 지속되고 성장하는 동시에 해외 관광객들이 한국을 더 많이 찾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럭셔리 호텔의 등장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21세기 호텔의 새로운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웰니스’ 호텔 트렌드도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웰니스 호텔이란 어떤 곳인지 낯설게 느끼는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웰니스 호텔은 간단히 설명하면 휴식만이 아닌 ‘치유를 위해 찾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휴식과 치유는 개념이 좀 다르죠. 웰니스 호텔은 해외에서는 이미 엄청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데요. 적극적으로 웰니스 호텔을 표방하면서 다양한 동서고금의 테라피는 물론 심리치료, 마인드풀니스 등을 접목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한 패키지 상품을 제공하는 곳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단순히 휴식이 아닌 치유를 목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웰니스 호텔은 일반 호텔에 비해 재방문 고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어요.

더불어 한국 웰니스의 “가능성은 이미 충분하다”(105쪽)고 단언하셨잖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들이 웰니스 호텔 구현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시는 거예요? 

한국에는 흔히 말하는 ‘땅의 기운’이 좋은 곳이 많아요. 토양도 좋아서 건강한 먹거리 등도 쉽게 구할 수 있죠.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자연을 통해 효과적인 힐링을 부각할 수 있는 장점이 매우 많아요. 그저 경치만 좋은 곳에 들어선 웰니스 호텔보다 훨씬 더 유니크하고 상품성 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그 가능성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죠.

호텔 건축 프로젝트에 있어 조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스터플랜 단계부터”(40쪽) 조경 디자인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한국은 여전히 조경의 중요성을 그만큼 인식하지 않고 있는 듯하거든요. 

호텔이나 리조트를 기획할 때 관계자들이 주로 관심을 갖는 부분은 아무래도 건축물, 즉 건물이죠. 조경은 대개 뒷전으로 밀리곤 해요. 조경에 대해서는 그저 건축물을 다 짓고 난 뒤에 채워 넣으면 된다고 여기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아요. 하지만 조경은 건축의 한 부분이에요. 건물만큼 중요한 요소죠. 건축이 내부 공간을 책임진다면 조경은 외부 공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고요. 강조하자면 조경은 건물과 동일한 메인 플레이어가 되어야 해요.



호텔의 세심한 배려와 손길

“사소한 걸로 눈길을 돌려 봐도 세심한 손길은 이미 다녀간 뒤다”(176쪽) 하신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호텔 곳곳에 소비자들이 미처 모르는 세심함도 많더라고요. 이런 것은 알고 이용하면 좋겠다, 제안해주신다면요? 

이용하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호텔마다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요. 욕실의 온수 온도 역시 섬세하게 체크하고요. 엘리베이터 내부도 호텔의 일관된 디자인 언어로 기능하는 곳이에요. 또 객실 로비에 비치된 전화기가 과연 필요할까 싶으시겠지만 꼭 필요한 이유가 있어요. 이외에도 호텔들이 세심하게 살피는 부분은 아주 많죠. 그중에서 제가 관심 있게 보는 서비스 중 하나로 ‘턴다운 서비스’를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직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밤에 늦게 객실에 오는 분들을 위해,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객실을 다시 점검해주는 서비스를 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침대 아래 놓인 매트나 실내화 위치와 방향을 이용하기 편한 곳으로 바꿔 놓는다거나 조명의 조도를 미리 조정해 놓는 것 등이지요. 사소해 보이지만 서비스를 받는 입장에서는 세심한 배려와 손길을 느낄 수 있어서 만족도가 높은 서비스 중 하나입니다.

책에는 서울 ‘JW메리어트’ 황종민 셰프, ‘하얏트 호텔 그룹’ 브랜드 호텔의 소방 컨설팅 회사 ‘젠슨 휴’의 김진경 차장, 부탄 ‘아만 코라’ 운영자 존 리드 등의 인터뷰도 짧게 소개되어 있어요.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조사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을 것 같거든요. 공부가 된 부분이나 확신을 갖게 된 부분이 있나요? 

정말로 어느 곳,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겉에서만 호텔을 보는 분들은 호텔이라는 곳이 얼마나 화려하고 럭셔리한지를 먼저 보지만요. 현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편안한 잠자리, 샤워 시설, 후방 시설 등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무엇보다 호텔의 서비스는 시설이나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접객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새삼 확신하게 되었죠.

호텔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한 발 앞서 전진해 온 공간”(114쪽)이라고 하셨어요. 그만큼 시대의 가치를 발 빠르게 실험하는 곳이기 때문에 ‘호텔의 미래’를 전망하기는 어렵다고도 하셨는데요.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예측해보는 호텔의 미래는 어떤 것인가요? 

지금까지 호텔의 변화를 언급할 때면 대체로 기능적인 요소나 멋지고 아름다운 요소를 중시해왔다고 할 수 있어요. 모두 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변화에 주목한 것이죠.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달라질 것 같아요. 비접촉, 비대면의 시대로 접어들었고요. 탄소 배출, 기후 위기, 친환경 등이 전세계적인 화두로 등장한 지도 오래 되었으니까요.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요소들에도 영향을 더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어요. 성격 면에서는 휴식보다는 치유의 성격을 강화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즉 웰니스 호텔들이 호텔의 미래를 끌고 나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어요.

‘좋은 호텔’의 정의를 내린다면 어떻게 답하고 싶으세요? 

어떤 브랜드냐, 어떤 시설을 갖췄느냐가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좋은 호텔은 직원들의 진정성이 만든다고 생각해요. 시설은 좀 부족해도 진심이 담긴 접객이야말로 그 호텔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는 절대적인 요건이 아닐까요.

저자가 생각하는 『호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활용법은 무엇인가요? 

책을 쓰면서 다양한 분야에 계시는 독자 분들을 떠올렸어요. 제가 호텔업계에 있으니 호텔의 서비스부터 역사, 기술을 비롯해 호텔의 크고 작은 여러 부분을 책에 담았지만요. 이 책을 읽은 분들은 책을 읽고 나서 각자가 속한 공간을 돌아보시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호텔이라는 공간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통해서 각자의 공간이 갖는 의미를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죠. 이 책을 읽은 한 분 한 분이 자신의 공간들을 다시 살피고, 보완할 부분은 보완하고, 개선해 나갈 부분을 바꿔 나가기 시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누리는 공간이라는 다양한 환경과 이를 둘러싼 전반적인 문화가 나아지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는 데에 이 책이 어쩌면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요. 

 



*한이경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89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건축을,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을 공부했다.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건축가로 잠시 일하다 이내 호텔 및 리조트 비즈니스에 뛰어든 그는 미국 ‘피라미드 호텔 그룹’ 부사장,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이 속한 사디야트(Saadiyat) 섬 문화지구(Cultural Precint) 수석 디자인 매니저, ‘윈담 호텔 그룹’ 아시아 기술 자문 총괄, 중국 ‘옥타브’(Octave) 부동산 그룹 대표로 일했다.
30대 초반 이후 약 20여 년 동안 미국 전역과 유럽, 아랍에미리트와 일본, 말레이시아, 중국 등 대륙과 국경을 넘나들며 ‘메리어트 호텔 그룹’의 여러 브랜드 리조트, ‘힐튼 호텔 그룹’, ‘스타우드 호텔 그룹’의 여러 브랜드 호텔, 중국 최초 웰니스 리조트 ‘상하 리트리트’ 등을 비롯한 약 40여 곳 호텔과 리조트 개발 작업, 마스터플랜 수립은 물론 라이프 스타일 오피스 프로젝트 개발을 진두지휘해 온 그는 2018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메리어트 호텔 그룹’ 한국 신규 오픈 총괄 PM 회사 ‘폴라리스 어드바이저’ Polaris Advisor 대표이자 힐링 호스피탈리티의 세계적인 선두 주자 ‘Healing Hotel of the World’ 협력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국내 호텔업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대전 ‘신세계 오노마’(Marriott Autograph), 서울 ‘조선팰리스’(Marriott Luxury Collection), 판교 ‘그래비티’(Marriott Autograph Collection) 등 약 11곳의 호텔이 모두 그의 손길을 거쳤으며, 이후로도 여러 곳의 새로운 호텔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서울로 돌아온 직후 1960년대 지어진 서대문구의 ‘원앙여관’을 리모델링하여 복합문화공간 ‘원앙아리’로 만들어 직접 운영하는 그는 한편으로 여러 대학 및 단체의 특강자로, 독서 모임 커뮤니티인 ‘트레바리’의 클럽장으로, ‘헤이조이스’ 강연자로, MBC ‘구해줘숙소’ 패널 등으로 활동하며 관심의 중심에 서 있다. 이번에 펴낸 『호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생애 최초의 저서다.



호텔에 관한 거의 모든 것
호텔에 관한 거의 모든 것
한이경 저
혜화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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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우 작가 "나를 지키기 위해 일과 건강한 관계를 맺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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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가벼운 애정이나 호감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다. 성실과 노력은 기본. 과정 속에서 여러 기술과 인격을 성장시킬 수 있고, 몸이나 머리를 쓰는 만큼 마음을 쓰게 되는 일. 황선우 작가가 말하는 일과 사랑의 공통점이다. 사랑의 결정적 순간에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일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황선우 작가의 새 책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그런 용기를 주는 책이다. 일에 관한 글을 쓰면서 일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또렷해졌다는 황선우 작가를 만났다.



‘일하는 50대 여성들은 어디에 있을까?’

단독 화자가 되어 쓴 첫 책이에요. 

세 번째 책이지만 처음처럼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김하나 작가와 함께 썼고 『멋있으면 다 언니』는 인터뷰집이었으니까요. 공저자나 인터뷰이들의 이름에 의지할 수 없다는 자각이 책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출간 당일에 2쇄를 찍었다고요. 소식 듣고 어땠나요? 

예상보다 빠르게 중쇄를 찍어서 깜짝 놀랐어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이나 『멋있으면 다 언니』 때도 반응이 빨랐는데요. 이런 반응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앞으로의 목표로 삼지 않으려고 해요. 대신 힘을 빼고 느긋하게 다음 책을 준비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독자들의 호평이 눈에 띄더라고요. 독자의 어떤 반응을 볼 때 특별히 반가운가요?

일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더 아끼게 되었다는 반응,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같이 읽고 싶다는 이야기, 자기 일의 사랑하는 부분을 돌아보게 됐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쁘죠.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일에 대한 글을 묶은 책이에요.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거나 흐릿한 감정이 또렷해지기도 하는데요. 책을 쓰면서 새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요?

앞으로도 일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또렷해졌어요. 자연스럽게 내 일의 미래를 생각하게 됐고요. ‘결혼하지 않은 40대 여성들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썼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쓰고 난 후, 앞으로 한동안은 ‘일하는 50대 여성들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할 것 같아요.

제목을 보고 가슴이 뛰었어요. 사랑 에세이 같기도 한데요. 어떻게 나온 제목인가요?

조금만 진지해도 ‘오그라든다’는 말을 듣기 쉬운 요즘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지만, 제가 지금까지 일하며 만난 수많은 여성이 이미 자기 일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일을 둘러싼 환경이나 일의 조건과는 불화할 수 있겠지만요. 일을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며 자기를 검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요. 여성들의 이런 마음의 한 부분을 함께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은 제목이에요.

‘너무 크고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사람들에게’라는 문장을 오래 들여다봤어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진 ‘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뜻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요. 어떤 의미인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 사회는 틀에 박힌 모습을 강요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특히 여성들에게 생김새부터 행동, 역할까지 많은 것들을 강요하는데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여성이 사회가 원하는 기준을 내면화하는 동시에 의문을 품는 것 같아요. 사회가 말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쓰다가 자신을 미워하기도 하고요. 이런 과정을 지나오면서 지쳐 있을 여성들에게 달라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차별을 거듭 경험하다 보면 지칠 때가 있어요. 피해를 자각하되, 피해자 정체성에 사로잡혀 피폐해지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면 좋을까요? 

일상을 정성스럽게 영위하는 데 집중해야 해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것들을 애써 찾고, 좋은 곳에 자신을 데려가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많이 웃어 두면 분노해야 할 때도 더 잘 분노할 수 있어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으면

“타인에 대해 내리는 평가를 보면 평가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가하는 사람이 보일 때가 많다.(42쪽)”는 문장이 인상 깊었어요. 책에서 말한 것처럼, 각자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으로 타인을 평가하게 될 텐데요. 동료 또는 선배로서 누군가를 평가해야 할 때 주로 떠올리는 기준이 있나요?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인데요. 문제를 만들지 않는 사람보다 일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충분히 공유한 다음 함께 해결책을 찾아가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괜찮은 동료가 아닐까 싶어요.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책을 읽으면서 나를 드러내고, 타인과 연결되는 일의 중요함을 느꼈어요. “과거에 나를 드러내는 걸 지독하게 꺼렸던(37쪽)” 사람으로서 여전히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고, 네트워킹에 소극적인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요? 

저에게 네트워킹이란 없던 연결을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내가 이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프리랜서가 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와 같은 질문이 중요하고 절실해졌죠. 조직에 있으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동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프리랜서는 애써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볼 수 없거든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를 주저할 때도 있는데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으면 좋겠어요. 혼자 모든 것을 잘하려고 하기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회사 안 다니는 거 너무 좋아. 근데 너는 웬만하면 오래 다녀(70쪽)”라는 문장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기분으로 조용히 웃었어요. 이 복잡한 마음에 대해 더 듣고 싶어요. 

막연하게 퇴사 이후의 삶을 두려워하다 쫓기는 마음으로 그만두기보다는 자기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 회사 밖에서 어떤 형태로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탐구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말이에요. 회사를 나온다 해도 은퇴 전까지 일해야 하니까 회사에서 충분히 일을 경험한 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늦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책의 한 파트가 끝날 때마다 긴즈버그, 비비안 마이어 등 우리가 아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와요. 김하나 작가가 대미를 장식하는데요. 글을 본 김하나 작가의 반응은 어땠나요?  

예전에 김하나 작가가 추천사를 쓴 책이 있는데요. 그 책 띠지에 이런 문구가 있더라고요. ‘마거릿 애트우드, 조이스 캐럴 오츠, 김하나 추천!’. 그 띠지를 봤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고 해요. (웃음) 저에게 ‘도대체 기준이 뭐냐?’고 묻기도 했는데, 앞서 말한 책의 띠지와 비슷한 기준 아니었을까요? 



조금씩 각도를 바꿔가며 해내는 사람

‘황선우의 일’을 이야기할 때 ‘인터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옛날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들거나 인터뷰이의 이름을 열거하기보다는 인터뷰어의 일하는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더 이야기하고 싶다.(155쪽)”고 했는데요. 단서를 붙였어요. ‘후배들이 먼저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겠다’고요. 책을 보고 궁금해할 후배들을 대표해 묻고 싶어요. 

매체의 권위가 해체되고 민주화된 가장 대표적인 장르가 인터뷰 아닌가 싶어요. 만인의, 만인을 향한 인터뷰가 가능한 시대라고 할까요? 인터뷰어의 소속과 관계없이 좋은 인터뷰를 수행하고 정돈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과 기술이 더 필요하고 돋보이는 시대가 됐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뿐만 아니라 콘텐츠 산업 전반에 일어난 변화이기도 하고요.

잡지 에디터로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언론사 공채 시험을 보다가 가장 먼저 합격한 잡지사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아마 다른 회사에 먼저 합격했다면 그 회사의 미디어에 맞는 콘텐츠를 만들고, 그러다 지금처럼 책을 쓰게 됐을 수도 있겠죠. 천직을 찾은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이 있다기보다 우연이 겹치고 시간과 노력이 쌓여서 각자의 커리어가 된다고 생각해요. 

새로 도전하고 싶은 영역의 일이 있다면요?

제가 어떤 제안을 받고 고민할 때 김하나 작가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서 각도를 조금 바꾸는 쪽의 일을 하라’는 건데요. 올 한 해 동안 김하나 작가와 함께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타이포잔치 2021)’에 글 작가로 참여하고, 직접 낭독한 목소리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오디오북을 만든 것도 도전과 결심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해내면서 이룬 일들이었어요. 각도를 바꾸면서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새로운 일을 계획하기보다 받은 제안을 잘 선별하고 새로운 방향의 일들을 골라서 충실히 해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용기 내고 싶은 상황이나 사람이 있을까요?

저보다 어린 세대들을 피상적으로 단정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 그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용기 내 다가가고 싶어요.

일을 사랑에 비유한 대목이 좋았어요. 여성들에게 일이란, 자기 삶을 책임 있게 사랑하는 방식(13쪽)이라고도 했는데요. 내 삶을 책임 있게 사랑하기 위해 어떤 태도로 일하면 좋을까요?

상대를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사랑이 좋은 사랑은 아니잖아요. 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아낌없이 나를 쏟아보고,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도 하면서 일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면 좋겠어요.





*황선우

잡지 만들고 인터뷰하는 일을 20년 했고, 그중 패션매거진 《W Korea》에서 가장 오래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에디터 시절 배우고 익힌 콘텐츠 제작과 큐레이션 기술을 다양하게 활용하며 일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펜유니온 TV]를 운영하며, 쓴 책으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김하나와 공저)가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황선우 저
책읽는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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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골드키위새 “10년 전 데뷔작, 책이 될 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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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지나』에는 끊임없이 사랑과 복수를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혹한의 땅 ‘그롬’에 살며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한 민족 ‘로미’와 그롬을 침략해 3일 만에 멸망시킨 정복 국가 ‘아큔’의 아큐리안들. 이들은 얽히고 설킨 사랑과 증오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한다. 

수많은 판타지 만화 덕후들에게 ‘인생 만화’로 손꼽히는 『메지나』가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죽어도 좋아’ ‘순정 히포크라테스’ 등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사랑받는 웹툰을 그려온 골드키위새 작가의 십년 전 데뷔작이다. 2011년 시작되어 2014년 연재를 종료한 만화는 그동안 연재처가 바뀌고, 계약했던 출간이 무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팬과 작가 모두에게 ‘아픈 손가락’인 작품. 만화가 처음 연재된 날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메지나』에 매료된 독자들은 계속 탄생하고 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두가 복수와 사랑을 하는 이야기

10년 만에 출간된 단행본입니다. 팬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작가님께도 의미가 큰 작품일 것 같습니다. 

종이책 출간은 작가로서 늘 의미하는 바가 큰데, 10년 전 데뷔작이 시간을 뛰어넘어 2021년에 출간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워요. 꾸준히 『메지나』에 관심을 갖고 사랑해주신 독자분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독자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출간소식을 알리는 공지에 “메지나 칭칭나네”라고 달린 댓글을 보고 웃었어요. 작가님의 기억에 남는 반응은 무엇인가요?

활동 연차가 길어지면서 작품에 관련된 팬 여러분의 드립이 쌓여가는 게 재미있어요(웃음). 저는 “골드키위새가 그리는 금발 쓰레기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드립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이 점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려보고 싶기도 해요. 

헤르만 헤세의 단편 「난쟁이」를 보고 영감을 받으셨다고요. 『메지나』는 어떤 생각에서 출발한 이야기인가요?

헤르만 헤세의 「난쟁이」가 시발점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막상 다시 읽어보니 제가 어느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이야기더라고요. 과거의 저는 대체 어디서 초안의 영감을 얻었던 걸까요(웃음). 영감의 시작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메지나』를 그릴 당시 ‘복수’와 ‘사랑’의 균형을 굉장히 고심하면서 그렸던 기억이 나요. 모든 등장인물이 복수와 사랑을 하고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어요. 

특히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독자로서 안타까웠습니다. 작가님은 개인적으로 어떤 인물의 사랑과 복수가 가장 안타깝게 느껴지시나요? 

과거 편에서는 한결같이 왕 ‘루테’를 사랑하다가 비극적 결말을 맞은 여왕 ‘벨라’, 현재 편에서는 체자를 사랑한 난폭한 왕자 ‘퀼라’가 아닐까 싶어요. 전자의 경우는 사랑에 헌신적인 벨라를 애잔하게 보시는 독자분들과 비슷한 마음이고요. 후자는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먼저 목숨을 잃은 퀼라가 가장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한 채 ‘이게 사랑인가? 사랑이겠지?’ 하고 죽어버렸으니까요. 퀼라의 타고난 기질이 호전적이긴 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거나 변화할 여유도 없이 너무 짧은 시간을 살다 가버린 것 같아요.


사랑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두 등장인물 ‘벨라(위)’와 ‘퀼라(아래)’ 
사랑받는 캐릭터에 눈길이 간다

작가님의 작품에는 진취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돋보입니다. 『메지나』에서는 종양을 가진 로미 ‘체자’가 그렇죠. 여성인 데다, 장애를 가졌다는 점에서 체자가 더욱 특별하게 보였어요. 

과거 『메지나』 연재 초기에 저를 담당했던 피디님이 체자의 종양 디자인을 크게 반대하셨어요. 여주인공이 되기에 외모가 흉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죠. 그래서 디자인을 여러 번 다듬긴 했지만, 체자의 종양은 이야기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체자 삶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체자는 아큔에 잡혀오기 전부터 끊임없이 자기의 얼굴을 덮어오는 종양과 싸우며 분투하던 아이였으니까요. 체자는 결국 ‘생존자’라고 생각해요.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을까요?

저는 만화를 그릴 때 일부러 애착이 가는 인물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묘하게 제 취향과 빗나가게 등장인물을 설계하죠(웃음). 제가 아끼는 캐릭터가 욕을 먹으면 너무 마음이 아프거든요. 애착 있는 캐릭터가 작품에 있으면 스토리를 만들 때 괜스레 몸을 사리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사람 마음이 간사하게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에 또 눈길이 갑니다. 『메지나』의 경우는 ‘벨라’였죠. 

이번 단행본에 실린 외전 「힛클리마의 포로들」도 인상적이었어요. 십 년이 지난 후, 다시 독자들 앞에 찾아온 노령의 힛클리마는 이제 증오를 내려놓고 평안해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단행본의 소제목은 문학동네 편집자님이 붙여주셨는데, 이 단편의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힛클리마의 포로들’은 말 그대로 힛클리마가 잡아온 로미 혼혈 포로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늙어서도 씻어내리지 못한 감정과 복수에 얽매여 사는 힛클리마 본인 역시 그의 포로라는 의미로 생각했어요. 죽음으로써 현실에서 해방되어 평화로워졌을 수도 있지만,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 같아요. 

『메지나』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여러 이야기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작품은 언제쯤 탄생할까요? 

사실 몇 번 시도했는데, 기획에서 장렬하게 탈락했습니다. 독자 분들이 언제 그리냐고 물어보시는 작품의 대다수는 기획에 있어 프로탈락러인 제가 기획을 통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그려나가면서 점점 더 재미있어질 만화가 많은데, 연재처에서는 초반의 몰입감과 상업적 가치를 중시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연재처를 꼬실 수 있는 매력적인 기획안 만드는 법을 좀 더 연마할게요(웃음).

 

이야기의 끝없는 생명력

단행본 편집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메지나』는 다른 출판사에서도 여러 번 출간 제의가 있었지만, 편집 도중 계속 파토가 났던 작품이라 끊임없이 편집자님을 의심했던 것 같아요. 책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왜 이걸 책으로 내겠다는 거지? 책이 진짜 나오는 거 맞나? 중간에 못 내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계속 했거든요. 실물 책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찾았어요. 『메지나』를 정말 예쁜 책으로 만들어주신 김지애 편집자님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문학동네는 정말 좋은 출판사입니다!(웃음) 

웹툰 작가로 데뷔하신 지 10년이 지났어요.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나요? 

어릴 때는 생각 없이 만화를 그렸던 것 같아요. 오직 재미만 추구해서 그림을 그렸죠. 지금은 잃을 게 많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림이나 연출이 묘하게 경직되는 느낌이 들어요. 예전처럼 재미라는 본질에만 충실하고 싶은 순간이 있죠. 물론 지켜야 할 건 지켜가면서요.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메지나』 단행본 출간을 오래 기다려 온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메지나』를 보고 감상을 올려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뒤늦게 들려오는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한 이야기가 끝을 맺어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재생산되며 생명을 얻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지나』가 머물 책장 한 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무한한 영광입니다.


 


*골드키위새 (글·그림)

•2010 : 「완전한 인간」 발표

•2011~2014 : 「메지나」로 데뷔, 연재
•2013 :「우리집 새새끼」 연재, 단행본 출간
•2015~2016 : 「죽어도 좋아♡」 연재
•2015 :「죽어도 좋아♡」로 <2015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2016~2017 :「망고의 뼈」 글 연재
•2018 :『죽어도 좋아♡』 전3권 출간
•2019~2021 현재 :「순정 히포크라테스」 연재중
•2021 :『메지나』전5권 출간



메지나 1~5 세트
메지나 1~5 세트
골드키위새 글그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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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온다 리쿠 “재능이란 뭘까? 소박한 의문에서 시작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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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작가

2017년, 제14회 ‘올해의 서점대상’ 1위를 차지한 동시에 제156회 ‘나오키상’을 수상해 큰 화제가 된 온다 리쿠의 장편소설 『꿀벌과 천둥』은 같은 해 국내에 출간되어 한국 독자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3년에 한 번 열리는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배경으로 저마다 다양한 사연과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네 명의 참가자 ‘아야’, ‘마사루’,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가자마 진’의 이야기를 펼쳐 놓은 이 소설은 열정을 쏟는 마음, 타인의 재능을 지켜보는 마음과 선한 마음으로 기꺼이 경쟁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700쪽 분량, 집필 기간만 7년이 걸렸을 만큼 작가의 공력을 쏟은 『꿀벌과 천둥』의 스핀오프 소설집 출간 소식은 그래서 반갑기만 한 것. 『축제와 예감』은 『꿀벌과 천둥』에 등장한 주요 인물과 그 주변인들의 소소하면서도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꿀벌과 천둥』에서는 몰랐던 인물들의 반짝이는 마음, 그 자리에 오기까지 인물들이 지나온 숨은 장면들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주는 『축제와 예감』은 그러므로 작가가 독자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일 것이다. 이에 온다 리쿠는 속편을 쓰는 작업이 부담스러웠다고 말하면서도 의외로 “과거에 열심히 활동했던 동아리 OB 모임에 나가는 기분”이라 편하게 썼다고 밝혔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스핀오프를 출간한 이유

2016년 『꿀벌과 천둥』을 출간한 이후 3년 만에 『축제와 예감』(2019년)을 출간하셨지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했어요. 

이 스핀오프를 쓰게 된 이유는 『꿀벌과 천둥』 안에서 연주한 음악을 전부 수록한 CD를 발매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 라이너노트에 부록으로 쓴 게 「축제와 성묘」였어요. 결국 『꿀벌과 천둥』 컴필레이션 CD는 세 회사에서 내주셨는데요. 한 곳에는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에세이를 썼고, 다른 한 곳에는 역시 스핀오프로 쓴 소설을 실었습니다. 그것이 「전설과 예감」이었죠. 영화화도 결정되었고 모처럼 두 편을 썼으니 조금 더 써서 영화 개봉에 맞춰 내기로 하고 다른 단편을 써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꿀벌과 천둥』은 156회 나오키상에 이어 2017년 올해의 서점대상 1위를 차지한, 많은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도 물론 독자들이 열광하며 읽었고요. 그런 만큼 완결된 작품에 이야기를 더하는 작업이 조심스러웠을 것도 같아요. 스핀오프를 쓰는 데 부담은 없으셨나요? 

말씀대로 인기를 얻은 책의 속편을 쓰는 작업은 부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열심히 활동했던 동아리 OB 모임에 나가는 기분으로(웃음) 의외로 편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은 집필을 할 때 가장 먼저 제목을 정하신다고 하는데요. 이번 제목 『축제와 예감』은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요? 

『꿀벌과 천둥』의 속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와 XX'라는 규칙을 정하고 단편들의 제목을 고민했습니다. 책 제목을 『축제와 예감』으로 정한 이유는 첫 단편 「축제와 성묘」와 마지막 단편 「전설과 예감」의 처음과 마지막 단어를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축제와 예감』에는 인물들의 조금 더 사적이면서도 조금 더 사소한, 어쩌면 그래서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뜻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독자에게 선물 같은 이야기였고요. 한편 이 작품을 쓸 때 작가님께서 특히 즐거웠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꿀벌과 천둥』은 콩쿠르 기간에 한정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과거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즐거웠습니다. 아아, 이런 면이 있었구나, 이런 과거가 있어서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발견이 있었죠.

두 작품 모두 ‘예술’이라는 비범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좋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큰 감흥을 주는 것 같아요. 

두 작품은 재능이란 뭘까, 하는 소박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피아노 콩쿠르를 봐도 다양한 재능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재능, 듣는 재능, 조숙한 재능, 늦게 꽃피는 재능 등 다양합니다. 재능이라는 건 꼭 선천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 아닐까? 사람들 사이의 만남으로 자극을 받아 비로소 태어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형태로 담아낸 것이 이 두 작품입니다. 

작가님께서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 속 인물이 있으세요? 작가님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누구인지도 궁금하고요. 

소설을 쓰다 보면 특별히 누가 저와 닮은 게 아니라 각각의 등장인물에 저의 일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듣는 재능’을 가진 ‘가나데’, 서툴고 인간적인 ‘너새니얼 실버버그’가 마음에 듭니다. 

『꿀벌과 천둥』『축제와 예감』 두 작품에서 특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나요? 

『꿀벌과 천둥』에서는 ‘에이덴 아야’와 ‘가자마 진’이 ‘달’을 테마로 한 곡을 함께 연주하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영혼의 교류’를 잘 써낸 것 같거든요. 『축제와 예감』에서는 ‘마사루’와 너새니얼이 베이글을 먹는 부분이 마음에 듭니다(웃음).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쓰는 작업은 즐거워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쓴다

『꿀벌과 천둥』이 『축제와 예감』으로 연결되었듯,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계속해서 작가님께 말을 거는 작가님의 작품 속 인물들이 있을 것도 같거든요. 

저는 원래 시리즈 작품은 별로 쓰지 않는 편입니다. 전에 쓴 작품도 금세 잊어버려요. 『꿀벌과 천둥』의 경우 너무 오랫동안 연재하다 보니 아무래도 정이 들어서 스핀오프를 써보았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속편을 쓰는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는 미스터리는 물론 호러, 판타지, SF, 학원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죠. 작품을 쓰는 데 있어 장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선택이 되나요? 특별히 장르를 염두에 두고 집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작품과 장르의 관계는 무엇인지 듣고 싶어요. 

아마도 저는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인 것 같아요. 독자로서도 다양한 장르에 관심이 있다 보니 작가로서도 자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항상 몇 편씩 동시 진행으로 연재하고 있어서 되도록 다른 장르를 쓰는 게 서로 기분전환이 되어 쓰기 편하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언제나 다음 번 작품은 지금까지 써본 적 없는 장르를 쓰려고 합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에서 장르 믹스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현재는 몇 작품이나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거죠?  

항상 네다섯 편의 원고를 동시에 쓰다 보니 좀처럼 새 작품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발레 무용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요코하마를 무대로 한 환상소설, 로지스틱스(물류)를 테마로 한 소설을 잡지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2021년만 해도 한국에 작가님의 작품이 세 권이나 소개되었습니다. 그동안도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해오셨죠. 팬으로서는 굉장한 행운이고요.(웃음) 작가님의 집필 일과, 글쓰기 방식, 하루 일상이 궁금합니다. 

옛날에는 완전히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나이가 쉰을 넘고 나서 완전히 아침형 인간이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기차게 원고를 쓰고는 있는데 예정대로 원고가 진척된 적이 없어서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도 흔해요. 마감이 있으니 항상 조마조마합니다. 이제는 전혀 밤샘을 못 하게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한국에 있는 작가님의 팬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친애하는 한국의 독자 여러분, 코로나 장기화로 몹시 갑갑하지만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들으면 세상 어디에서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디 여러분도 건강 조심하시고 또 다음 책으로 만나요.




*온다 리쿠

기존 장르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 유연하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 한국에서도 이미 든든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보기 드문 진짜 이야기꾼으로 연간 200편의 도서를 독파하는 문자 중독자로 유명하다. 1964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그녀는 와세다대학교 교육학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집필한 소설 『여섯 번째 사요코』로 데뷔했다. 이 책은 1991년 제3회 일본 판타지노벨 대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회 나오키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6년 12월에 발간된 『네버랜드』는 일본의 인기 아이돌 그룹인 V6와 쟈니스주니어가 출연하여 드라마로 만들어져 화제가 되었다.

 


축제와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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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저 | 김선영 역
현대문학
꿀벌과 천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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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저 | 김선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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