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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 “수능 만점이 가능했던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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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 저자

“엄마, 나 수능이 기대돼요.”  (중략) 

나의 마음을 설명할 말을 찾다가 고사성어 하나를 떠올렸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 맞다. 나는 열심히 준비했기에 두렵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촘촘히 준비했기에 설렘을 느꼈고, 설렘이 시험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다.  _(254쪽)

이른바 ‘불수능’이라는 평을 받았던 2019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학원이나 과외 없이 인터넷강의로만 공부했고, 3년의 백혈병 치료 경험이 있던 김지명은 수능이 기대된다고 말하고는 결국 수능만점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자신이 병원에서 만났던 의사를 보며 마음까지 치료하는 의사를 꿈꾼 그는 서울대 의예과에 정시 수석으로 합격했고, 자신이 쌓아온 ‘혼공’의 기술을 대학에서도 이어나가고 있다. 

김지명을 수식하는 화려한 말들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는 과연 어떻게 공부했을까. 『스스로 뒤집는 붕어빵』은 저자 김지명이 초등학생 시절에 웹툰을 보듯 즐겁게 인강을 보며 공부했던 이야기, 전교 1등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열심히 공부했던 중학생 시절의 이야기, 본격적인 수험 레이스에서 전략적으로 공부 루틴을 쌓은 고등학생 시절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김지명은 자신이 기질적으로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스스로 뒤집는 붕어빵』에 공개한 자신의 공부 노하우에 대해 “처음부터 이 책에 소개된 모든 것들을 그대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 저도 처음부터 공부를 책의 내용처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쉬운 것부터 천천히 시도해 보는 걸 추천하고 싶다”는 김지명 저자. 그는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고 공부를 대하는 ‘혼공’의 힘을 강조하며 공부를 ‘내 편’으로 만들라고 말한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혼공’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수능 만점자로 출연한 뉴스와 방송을 “민망”해서 거의 보지 않으셨다고 ‘머리말’ 첫 부분에 밝히셨죠. 책 쓰는 것 또한 조금 망설이셨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있었을 텐데요. 

제가 2019학년도 수능 만점을 받고 세상에 알려졌을 때, 많은 분들께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주셨어요. 그때 받은 응원과 사랑에 보답하고자, 공부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드리려는 마음에 책을 쓰기로 결정했어요. 

책의 부제가 ‘수능 만점 김지명의 혼공의 기술’이죠. 책에서 진정한 혼공이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흥미와 의지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25-26쪽)이라고 정의하셨는데요. 혼공이 공부의 차원을 어떻게 끌어올린다고 보세요? 

누군가 시켜서 하는 공부라면 결국 집중하기 어려워질 수 있죠. 시키는 사람이 없을 때나 외적인 강제가 없을 때는 의지가 부족해질 테니까요. 특히 지금 닥친 코로나 위기처럼 학원 수업에 갈 수 없고, 많은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는 상황에서는 기존처럼 외적인 요인에 의존해 공부했던 학생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거예요. 굳이 코로나 위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학생들은 혼자 자발적으로 공부해야 할 상황에 자주 놓이는데요. 스스로 공부의 원동력을 만들고 공부 의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혼공’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의 변화와 관계없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공부할 수 있어요.

혼공이란 결국 마음가짐,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어요. 공부에 들이는 절대적인 시간이나 분량보다는 공부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죠? 

네, 물론 시간과 분량도 중요하지만요. 같은 시간과 분량을 공부하고도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지는 공부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공부’라는 개념에는 전혀 부정적인 요소가 없는데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하는 것 등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공부를 해서 성적이 오르거나 시험을 잘 봤을 때의 성취감과 즐거움 등 공부에도 충분히 긍정적인 요소가 많은데 말이죠. 공부는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기 때문에 내가 싫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 자신만 손해예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듯이 내가 공부라는 길을 선택했고 어차피 해야 하는 공부라면, 공부의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다시 말해,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공부의 주인이 되”(98쪽)는 것이겠네요. 그러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용이한 방법 중 하나가 ‘질문은 힘이 세다’(61쪽) 부분일 것 같아요. 저자는 해당 글에서 “삶의 모든 부분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밝히셨는데요. 

제가 공부할 때 했던 ‘왜?’와 관련된 질문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수능 공부의 특성상, 과목에서 배우는 학문적인 사실에 대한 질문보다는 문제 풀이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죠. 예를 들어 문제를 풀고 해설을 보면서 ‘왜 이렇게 풀까?’,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왜 이런 풀이가 가능할까?’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미 많은 학생분들이 하고 계셨을 질문일 거예요. 하지만 이런 의문을 갖는다고 해서 모두가 답을 찾는 것은 아니고요. 이런 질문에 스스로 깊게 생각해서 답을 찾는 게 중요해요. 그러면 그 내용은 상당히 오래 머릿속에 남게 되고, 다른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공부를 하실 때 ‘왜?’라는 질문을 어느 정도나 활용하셨어요? 

수학이나 과학탐구 킬러 문제 해설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가장 많이 던졌던 것 같은데요. “왜 이 문제에서 이런 풀이법을 적용할까?”, “왜 이런 과정을 통해 풀이할까?”와 같은 질문을 많이 했어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니까 다른 새로운 킬러 문제를 만났을 때에도 어떤 방법으로 풀어야 할지 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요. 알고자 하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정말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부할 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보세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다 푼 문제집 목록을 만들기

사실 혼공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겪는 다양한 시행착오가 있을 것 같거든요. 저자가 제안하는 ‘가장 먼저 해보면 좋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자신이 공부한 것을 기록해 보는 방법도 좋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이전보다 더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노력도 좋겠죠. 같은 난이도의 문제인데 저번보다 더 잘 풀린다거나 더 깔끔한 풀이를 해냈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소한 것에서 성취감을 찾으면서 그것을 공부의 원동력으로 만들려고 하면 되거든요. 사실 자신이 해낸 작은 성취가 모이고 모이면 그로부터 얻는 뿌듯함 덕에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긍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공부 자체를 “매일 해야 할 숙제가 아닌,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도구로 바라보려고 했다.”(130쪽)고 하신 부분이 떠오르네요. 그래서 매일 공부한 것과 문제집의 이름을 메모장에 기록하는 것을 “게임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132쪽) 즐기셨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공부했구나’ 하고 나 자신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야자 시간이 끝난 뒤 그날 아침부터 공부한 부분들, 풀었던 문제집, 실전 모의고사의 양 등을 살펴보면서요. 말씀처럼 책 한 권을 모두 공부했을 때 리스트에 적을 때마다 성취감도 들었고요. 구체적으로는 단순히 제가 푼 문제집 이름을 컴퓨터 메모장 txt 파일에 적어 놓은 것뿐이었거든요. 그럼에도 그렇게 적어 놓은 목록을 가끔 열어 보면서 ‘이 정도 했으니 좋은 결과가 나올 만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혼공에 좋은 동반자가 되었던 ‘인강’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무엇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하셨거든요. 요즘처럼 비대면 학습이 확대된 상황에서 특히 학생들에게 꼭 제안하고 싶은 나만의 인강 혼공 규칙이 있다면요? 

핸드폰 등 유혹이나 방해가 될 만한 요소를 없애는 것도 중요한데요. 무엇보다 ‘불편한 환경에서 인강을 듣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여기서 불편하다는 건 공부하기에 불편하다는 것이 아니고요. 딴짓하기에 불편하다는 뜻이에요. 저 역시 인강을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지만 항상 딴짓을 하지 않고 인강에 집중하기는 쉽지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인강을 트는 매체 자체가 다른 작업도 가능한 것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인강을 틀어 놓고 다른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 수밖에 없죠. 제 경우, 어머니께서 인강을 들을 때 옆에 계시면서 딴짓을 못 하게 하셔서 도움이 되었어요. 아니면 자습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습하는 환경에서 인강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인강을 들을 때 자기통제를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정도 강제적인 요소를 끌어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한편 바둑의 복기를 예로 들며 반복과 복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어요. 

흔히 어려운 문제가 너무 안 풀리면 조금 쉬다가 시간이 지나서 다시 풀어보라는 말들을 하잖아요. 속된 말로 ‘삽질’이라고 하죠?(웃음) 시간이 지나면 기존에 그 문제에 접근하던 잘못된 방법이 머릿속에서 나가고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요. 틀린 시험 문제는 이와 반대입니다. 자신이 문제를 풀면서 했던 생각들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에서 확인해야 문제가 풀리지 않았던 접근법과 사고를 어떻게 개선할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요. 다음에 다른 문제를 풀 때에 더 나은 풀이를 할 수 있게 돼요. 제가 공부할 때 문제를 풀고 나서 직접 채점하고 해설지를 바로바로 확인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어요.

문제를 많이 푸는 것보다 틀린 문제를 “최소 세 번 이상 다시 보며”(144쪽)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시험이 끝난 뒤에 최대한 빨리 틀린 이유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같죠. 

문제를 틀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이때 개념이 부족해서 틀렸다면 개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실수로 틀렸다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풀이 방향이 잘못되어서 틀렸다면 다음에는 더 나은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틀린 문제를 반복해서 보는 것이 중요해요. 



어쨌든 오늘 공부를 했으니

“매일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283쪽)라는 말은 모두에게 의미가 큰 이야기 같습니다. 잘하려 하지 말고 그냥 하는 것, 저자는 어떻게 실천하고 계신가요? 

저도 공부를 하다 보면 잘 되는 날도 있고 잘 안되는 날도 있어요. 문제가 잘 풀리고 점수가 잘 나온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많았고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크게 연연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잘 안 됐더라도 어쨌든 오늘 공부를 했으니 무언가는 달라졌을 것이고, 오늘 한 공부가 저축이 되어 미래에 더 좋은 결과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아픈데 어떻게 공부할 수 있었나?”에 대해 책에서는 “병을 내가 공부하지 않는 핑계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81쪽)고 쓰셨죠. 

‘내 공부의 주인은 나’라는 마음가짐이었어요. 어차피 내가 가야 할 길이 공부라는 길뿐이었고요. 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 대신 공부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아파서 공부를 못 하면 손해 보는 것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요. 공부를 못 할 정도로 아픈 것이 아니라면 아프다는 이유로 공부를 안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무엇보다 투병생활을 했던 중학교 때에는 전교 1등이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것도 있었어요.

꾸준히 여러 곳에서 받은 장학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부해왔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어떤 마음인가요?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기부를 하지 않고 살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요. 기부를 시작하고 나니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마음이 뿌듯하고, 마치 부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투병생활을 할 때 ‘정각사’를 통해서 기부금을 받았는데요. 이러한 기부금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기부한 돈이라 생각하니 그분들께 고마움을 느꼈어요. 그렇다면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해서 내 마음도 행복해지는 동시에 또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이 책을 어떤 분들이 읽었으면, 하고 바라세요? 

공부로 힘들어하거나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과 자녀에게 공부 습관을 만들어주고 싶은 학부모님을 생각하며 글을 썼어요. 사실 이 책에 나온 내용을 모두 똑같이 따라 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힘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 혹은 학부모님이시라면 자녀에게 적용해 볼 수 있겠다 생각되는 쉬운 것들부터 먼저 실천해 보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조금씩 공부 습관이 잡혀가면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자기 자신(혹은 자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지명

초등학교 6학년 때 발병한 백혈병으로 인해 중학교 3년 내내 항암치료를 받으며 투병하였고, 자사고인 선덕고에 입학한 후 인강과 자율학습만을 활용하여 역대급 ‘불수능’이라고 불리는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아 서울대 의예과에 정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학원이나 과외 없이 오로지 인강으로만 공부, 비강남권 현역으로 수능 만점 획득, 3년간의 투병생활 등의 이력으로 여러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았으며 2020년에는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수능 만점자’편에 이과 대표로 출연하며 다시 한 번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백혈병 투병 당시 주치의 선생님을 보고 세웠던 ‘믿음을 주는 마음 따뜻한 의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되새기며 2021년 현재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스스로 뒤집는 붕어빵
스스로 뒤집는 붕어빵
김지명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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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혜 “불투명한 우리는 말을 통해 겨우 투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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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시인으로 글을 쓰고, 만화가로 말풍선을 채우며 매일같이 언어를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언어세공가다.” 

홍인혜 작가는 말에 기대어 산다. 머릿속으로 입속으로 말을 굴려보며 즐거워하고, 말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것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들을 모아 언어 에세이 『고르고 고른 말』을 썼다. 일상과 여행 속에서 사람과 일 사이에서 건져 올린 언어를 ‘말맛’나게 담아냈다. ‘희망의 말’ ‘나를 울린 말’ ‘그리움의 말’ ‘뜻밖의 말’ ‘단단한 말’ ‘외치는 말’ 등 세심하게 골라낸 말들이 가득하다.

일상툰 ‘루나파크’를 시작으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받고 있는 홍인혜 작가는 광고회사 TBWA에서 일하며 홈페이지에 만화를 연재했다. 현재 회사를 떠나 다양한 분야의 창의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2018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혼자일 것 행복할 것』, 『루나 파크 옷걸이 통신』『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루나 파크』 등이 있다.



깊은 이야기를 담은 묵직한 책

이번 책의 제목을 지으시는 데 친구 분의 도움이 있었다면서요?

네. 제가 언어적인 일을 하는 사람임에도 제 책의 제목을 잘 못 지어요. 객관성을 상실해서 그런지, 이번 책도 출간이 얼마 안 남은 시점까지 제목을 못 짓고 있었어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도움을 요청했는데 다들 농담만 하는 거예요. ‘언어 생활이니까... 맛있는 훈제 언어 어때?’ ‘말이야 방구야는 어때?’ 이런 말들. (웃음) 그러다가 제 베프가 ‘홍, 너는 말을 고르고 골라서 하는 사람이잖아. 『고르고 고른 말』이라는 제목이 딱 맞는 것 같아’라고 했는데, 너무 감동적이고 너무 좋은 제목인 거예요. 두말할 나위 없이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출판사 분들도 너무 좋아하셔서 제목으로 결정하게 됐어요.

『고르고 고른 말』이라는 제목이 너무 잘 어울려요. 많은 말들 중에 ‘고른’ 것들의 기록이기도 하고, 작가님은 항상 말을 ‘고르고’ 난 후에 이야기하시는 분이니까요. 

저도 정말 잘 지은 제목 같아요. 책 제목을 줄여서 ‘고고말’이라고 불러주시는 것도 너무 귀엽고요. 그리고 저는 흔히 쓰이는 말인데 제목에 올랐을 때 파괴력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가장 보통의 존재’라든지 ‘생각이 나서’ 이런 제목들 있잖아요. 딱 그런 제목인 것 같아서 너무 좋았어요.

지금까지 나온 작가님의 책들과 다르게, 이번 책에는 ‘루나의 카툰’이 실려 있지 않은 책이에요.

맞아요. 이전에도 에세이집 두 권을 냈는데 다 만화가 들어있거든요. 늘 처음에는 ‘만화 없이 해도 되지 않나’ 생각했는데 (작업) 중후반부에 가면 약간 아쉽기도 하고, 출판사 분들도 만화가 들어가도 전혀 (내용을) 해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그러면 ‘그런가?’ 하면서 넣게 됐어요. 팬 분들도 ‘만화가 루나’에게 기대하시는 부분이 있고요. 그런데 제가 마지막 에세이와 이번 책 사이에 시인으로 등단을 했잖아요. 그래서 애초에 ‘이건 문인으로 내는 책이다, 문학사에 스크래치라도 내보자’ 이런 느낌으로 테마를 정했어요. (웃음) 진짜로 조금 더 문학적으로 쓰고 싶었어요. 출간 제안을 받을 때도 만화를 같이 싣자고 하시면 제가 생각하는 바와 너무 다르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이번 책의 에디터 님은 ‘깊은 이야기를 많이 담은 묵직하고 진중한 책’을 내자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딱 내고 싶었던 책이었어요.

‘저는 시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직도 어색하세요?

네, 말하기가 부끄러운데... (웃음)

왜요?

...그러게요. (웃음) 늘 ‘등단하면 이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등단한 뒤에도 그렇지 않아서 ‘지면에 조금 더 시를 발표하면 당당할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지금은 ‘시집을 내면 당당할 수 있으려나’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때 되면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좀 부끄러워요. (웃음)

‘호칭’이라는 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걸 획득하기까지 열망했던 시간이 있기 때문에, 얻게 되었을 때의 만족감과 희열도 엄청 크잖아요. 

그럼요. 저는 진짜 반 년 정도는 시인 뽕에 취해서 살았어요. (웃음) 그때 친구들이 ‘못 볼 꼴 봤다’고 할 정도로 장난 아니었어요. (웃음) 항상 주머니에 시집을 넣어 다니고, 친구가 5분만 늦어도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집 펼쳐보고... 그때 좀 심각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현실 감각을 찾았고요. (웃음) 인생이 되게 많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시인 뽕’에 취해 있던 시절에도 ‘저는 시인입니다’라는 말을 잘 못하셨어요? (웃음)

친구들한테는 그렇게 행세했지만, 어디에 가서 시인이라고 말하는 거에는 늘 자신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시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고 너무 동경해서 아직도 실감이 덜 난다고 할까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시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 같아요.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내가 맞게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이라는 얘기를 다들 하거든요. 시인들도 해요. 시가 조금 특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어 생활자, 창의노동자, 그리고 창작 관종

『고르고 고른 말』을 읽어 보면, 작가님은 말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굴려보는 걸 굉장히 재밌어 하시는 것 같아요. 

네, 진짜 너무 재밌어요. 「단어 올림픽」이라는 글에도 에피소드가 나오잖아요. 혼자 가만히 있을 때는 외국어를 떠올리면서 단어들끼리 경합을 펼치게 하는데, 그게 저한테는 맨날 하는 짓이라서 대단치 않게 썼거든요. 그런데 읽으신 분들이 인상 깊게 보시더라고요. ‘이러고 논단 말이야?’ 이러면서. (웃음) 저는 사전 찾는 것도 되게 좋아해서, 단어 하나에서 시작해서 이어지는 단어들을 찾아가면서 보는 것도 좋아해요. 심심할 때 유의어 사전도 찾아보고요.

‘말맛’이 정말 잘 살아있는 책이에요. 그 맛을 활자로 고스란히 재현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제가 17년째 카피라이터로 글을 쓰고 있는데, 솔직히 광고 문구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글이에요. 유튜브 볼 때 광고 나오면 다들 싫어하잖아요. 기본적으로 광고는 사람들이 안 보고 싶어 하는 글이고 ‘내가 광고를 당했다’라고 생각하는 글이라서 굉장히 맛있게 써야 돼요. 안 그러면 아무도 안 먹어주거든요. 굉장히 맛있는 설탕을 막 뿌려서 떠먹여 줘야 돼요. 그리고 한입에 쏙 들어가야 돼요. 길게 늘어지면 관심을 끊어버리니까요. 저한테는 그게 훈련이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글을 쓰면서 ‘지금 재밌나? 템포 안 떨어졌나? 사람들의 집중력이 안 흐트러졌을까?’를 판단하는 게 체화돼 있어요. 아니면 ‘너무 어렵지 않나? 여기에서 헷갈리지 않나? 이중적으로 이해돼서 사람들의 주의력이 산만해지지는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글을 쓸 때 말을 너무 많이 고르게 되는 거죠. 기본적으로 그런 훈련이 돼 있어서, 거기에서 ‘말맛’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광고의 언어’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시의 언어’는 어떤 것 같으세요? 

시를 처음에 배웠을 때 되게 놀랐어요. 수업 첫 시간에 선생님이 ‘시는 진상하는 글이 아니다, 바치는 글이 아니다’ ‘시는 소통하려고 쓰는 거 아니다, 시는 아름다운 불통이다’라고 하셨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광고랑 정반대잖아요. 광고는 바치는 글이고 쉽게 써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글인데, 시는 소통하려고 쓰는 게 아니고 ‘아름다운 오해를 낳기 위해 쓰는 글, 우리에게 초대하는 수수께끼’라는 거예요. 너무 달라서 더 반한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광고의 언어와 시의 언어가 완전히 다른데, 작가님은 둘 다 잘하시니까 ‘사기캐’라는 생각도 들어요. (웃음)

(웃음) 광고에서 시로 넘어갈 때 저도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사실 처음 시 수업은 엄청 거만한 마음으로 갔거든요. 그때 광고회사에서 일한지 7~9년차 될 때라서 ‘나는 준 프로인데’ 생각하면서 갔어요. 그런데 시적인 글을 못 쓰는 거예요. 너무 광고적 글쓰기가 체화돼서. 아름다운 불통을 해야 되는데 제 글은 너무 친절하고 쉽고, 그러니까 시적이지 않은 거예요. 그걸 내려놓는 데 5년 정도 걸렸어요. 등단하기까지 5~6년 걸렸는데, 그 시간 동안 시적인 글쓰기를 새롭게 익히는 과정을 거친 거예요. 지금도 광고 일에 몰입하는 시기에는 시를 못 써요. 동시에는 못 합니다. 

광고 회사에 다니실 때는 어떻게 시를 쓰셨어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자고 일어나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렇게 하면서 뭔가 다른 서버에 로그인하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같은 자아로는 쓰기가 조금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만화는 그 중간쯤에 있는 것 같기는 해요. 그래서 만화는 광고하다가도 할 수 있어요. 광고와 만화가 조금 가깝게 붙어 있고, 그 둘과 조금 떨어진 곳에 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앞서 ‘사기캐’라는 말씀도 드렸는데요. (웃음) 에세이, 시, 광고, 만화까지, 어떻게 다 하실 수 있는 거예요? (웃음)

(웃음) 분야가 다양하기는 한데, 사실 골자에는 비슷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기본적으로 언어라는 형식에 많이 기대고 있잖아요. 광고 카피는 말할 것도 없고 시도 그렇죠. 만화는 그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연출과 대사와 내용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말풍선을 채우는 것도 글 쓰는 일이니까, 만화에서도 글이 중요해요. 결과적으로는 ‘언어에 어떤 옷을 입히느냐’가 다른 것 같아요. TV를 통해 보여주는지 문예지에 싣는지 말풍선 안에 담는지, 그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다양하지만 많이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책에서 ‘언어 생활자’ ‘창의노동자’라는 말로 스스로를 정의하셨어요. 그 외에 홍인혜라는 사람, 루나라는 창작자를 설명하는 단어가 있다면 뭘까요? 

제가 농담 삼아 ‘창작 관종’이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하는데요. (웃음) 창작하는 것 자체도 좋아하는데 그걸로 소통하는 것, 더 솔직히 말해서 관심 받는 걸 좋아해서 저는 진짜 창작 관종인 것 같아요. (웃음) 제 주변에 창작자들이 많은데, 창작하고 그 이후는 관심 없는 사람도 많거든요. 말하자면 이런 느낌 있잖아요. ‘나는 만들어냈으니까 됐다, 이게 어떻게 유통되든, 사람들이 보든 말든, 몇몇만 봐도 상관없다’ 같은. 찐 예술가죠. 그런데 저는 ‘만들어내는 건 절반은 한 거다, 이걸 발표하고 소통하는 게 나머지 반이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이건 개인의 스타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나머지 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안 보여줄 걸 왜 만들어?’라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라, 창작 관종이에요. (웃음)

책에서 ‘만 단위의 법칙’이 있다고 하셨어요. “독자의 수가 천 단위에서 만 단위가 될 때 피드백의 양상이 달라진다”고요. ‘호보다 오가 적극적’이라고도 하셨죠. 게시물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댓글을 잘 달지 않지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댓글을 단다는 이야기인데요. 현실이 그렇다 보니 ‘창작 관종’으로 사는 게 쉽지 않은 일 같아요.

그걸 수련하는 것도 한 10년 걸린 것 같아요. 이게 딜레마가 있어요. 웹툰 그리는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해보면, 사실 댓글이 무서워요. 불특정 다수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런데 플랫폼에서 ‘작가님 댓글을 없애드릴까요?’라고 하면 다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해요. 댓글이 없으면 내 작품을 사람들이 어떻게 봤는지 반응을 전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원하고, 당연히 악플은 누구나 싫어하는 거죠. 저도 똑같은 심리 상태로 쭉 활동을 하다가 어느샌가 ‘내가 반응을 원하는데, 좋은 반응만을 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될 부분이 있으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수련하는 과정이에요. 아직도 작은 말 한두 마디에 너무 흔들리고 마음이 안 좋고 그래요. 단지 마음만 안 좋으면 회복할 수 있는데, 문제는 길을 바꾸는 거죠.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이제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되죠. 

네. 그래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그것은 남은 평생 이어지는 수련입니다. (웃음) 아마 관 뚜껑 닫을 때쯤 ‘이제는 악플도 괜찮아’ 이러면서 죽지 않을까... (웃음)



불투명한 우리는 말을 통해 겨우 투명해진다

‘말’이라는 것이 무용하거나 미약하게 느껴질 때는 없으세요? 

저는 기본적으로 소통을 좋아하는 인간이어서, 말을 좋아하는 것도 작품 발표를 하는 것도 소통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프롤로그에도 썼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우리는 결국 다 남남’이라는 사실이 슬펐어요.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좋아해도 결국 마음 어딘가에 벽이 있어서 완전히 일치될 수는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말’이 제일 확실한 무기죠. 글도 다 말이고요. 소통이 힘든 와중에 그나마 갖고 있는 제일 확실한 무기가 말이니까,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이런 생각을 해요.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어요. 만약에 어떤 신이 나타나서 ‘그럼 서로의 마음이 다 들리게 해줄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다 읽을 수 있게 해줄게, 그렇게 할래?’라고 한다면, 그러고 싶지는 않은 거예요. 저는 ‘언어에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를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아요. 한계 없이 모두가 한 명인 것처럼 비밀도 없이 살게 된다면, 개별자로서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아직 『고르고 고른 말』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한 편의 글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떤 글을 권하고 싶으세요? 

「손을 떠는 영웅」이요. 저도 그 꼭지를 되게 좋아하고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글의 전반부는 되게 시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할까요. 제가 시를 쓰면서 익힌 감성이나 문법을 에세이에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를 많이 고민하면서 썼어요.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영웅’이라는 단어에 대한 저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라서, 이 책의 언어적인 테마도 정확하게 담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너무 매섭지 않게 마음을 움직이게 해주는 메시지가 있거든요.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뭔가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하고요. 제 딴에는 그 세 가지를 다 갖춘 글이라서 생각해서 「손을 떠는 영웅」이 마음에 드는 글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참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작가님은 이 책에 어울리는 단어로 무엇을 꼽으시겠어요?

‘다정’도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처음 만화를 그릴 때부터 ‘소심한 사람’의 테마를 계속 갖고 갔거든요. ‘루나파크는 소심한 사람들의 쉼터다.’ 그런데 소심하다는 말이 약간 비난처럼 쓰이기도 하잖아요. ‘야, 소심하게 왜 그래? A형이야?’ 이런 식으로 많이 표현했었죠. 그럴 때마다 제가 ‘나 소심한 거 아니라 세심한 거야’ 이렇게 말했거든요. 이 책을 설명해줄 수 있는 단어를 꼽는다면, 저는 ‘세심’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엄청 세심하게 말을 고르고 고른 거니까.

‘아꼬와’는 어떤가요? (웃음) 책에 나오는 말이기도 한데,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웃음)

(웃음) 후기 중에 ‘아꼬와’에 대한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그 말이 너무 좋다고. ‘아꼬와’의 어원을 찾아봐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어요. ‘아깝다라는 말에서 왔다’든지 그런 말은 없는데, 그런데 느껴지잖아요. ‘닳을까 아깝다’ 이런 느낌이죠. 그 말도 좋은 것 같아요. 

책에 담긴 많은 말들 가운데,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 말이 있다면요?

“불투명한 우리는 말을 통해 겨우 투명해진다.” 그 구절이 제가 제일 하고 싶었던 말 같아요. 책의 전체 내용을 담은 말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은 결국 소통이 안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잖아요. 각각의 껍질에 다 들어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다 불투명한 인간인데, 말로 흘러나오는 무언가를 통해서 속에 뭐가 들었는지 엿보잖아요. 그래서 ‘말을 통해 투명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시집을 출간하실 계획도 갖고 계세요?

영원한 꿈이고요. 계획이야 늘 있죠. (웃음) 그래서 2022년 목표는 시집을 내는 것이고요. 시집을 내려면 일단 50편 정도 꾸러미를 갖춰서 출판사를 두드려야 되는데, 그럼 그 50편이 퀄리티가 좋아야 되잖아요. 50편이 있긴 한데 퇴고를 하고 하고 또 하고 있어요. 매년 시를 보는 눈도 달라져서, 작년에 쓴 시가 올해 보면 별로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눈에 맞춰서 열심히 고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년의 목표는 50편 꾸러미를 들고 출판사에 ‘한번 봐주십시오’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팬 분들의 애칭이 ‘달토끼’이죠? 

네. (웃음)

책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나의 주파수에 공명해줄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 문장이 퍼즐 조각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맞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쓴다.” 이번 책과 다음에 나올 시집도 달토끼 님들의 ‘주파수’와 맞을까요? 

사실 (지금까지의 작품들과) 약간 다르다고 생각하고요. 특히 시가 조금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시는 평소에 즐겨 읽으시지 않으면 난해하게 느끼실 가능성이 좀 높잖아요. 그리고 저의 밝고 희망적인 어떤 부분은 만화나 에세이로 더 많이 풀고, 다크한 부분들을 시로 더 많이 쓰거든요. 불안 우울 슬픔 같은 걸 특히 시로 많이 쓰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조금 놀라실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해요. 일단 ‘낯설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고, 또 하나는 ‘이렇게 어두운 사람이었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달토끼 님들이 큰 애정으로 봐주시니까 막 싫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시는 워낙 난해하니까 그렇게 반응하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기존 독자 님들도 중요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시인으로서 약간 다른 분들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우리는 모두 입체다」라는 글이 떠오르네요. (웃음)

네, 맞습니다. (웃음) 에세이나 생활 만화나 광고는 그 안에 나오는 자아가 쓰는 사람과 일치하잖아요. 그래서 부도덕한 이야기를 하면 화자가 부도덕한 거잖아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부도덕한 것과는 다른 거죠. 그런데 시는 더 내밀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시 안에도 도덕이 있지만, 문학의 품에 있기 때문에 허용치가 좀 많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저도 에세이에서조차 밝힐 수 없었던 더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은 시로 쓰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제가 전세 사기를 당하고 그 이야기를 <전세 역전>이라는 만화로 그리는 동안 시를 진짜 많이 썼거든요. 그때는 어디에서도 그 복잡한 사연을 말할 수가 없으니까, 그 시커먼 마음을 정리해서 시로 다 쓴 거죠. 그러니까 우울하고 슬플 수밖에 없는 건데, 어쩌면 (보시는 분들은) ‘속에는 저런 마음들이 있었구나’ 싶어서 좀 놀라실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엄밀히 말해서 제 만화를 봐주신 분들이랑 (시집이) 약간 주파수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아직 모르죠. 시집을 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발표한 시도 많지 않고요.

독자들이 작가님께 기대하는 바와 다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것 때문에 고민도 하세요? 

기대하시는 바는 기대하시는 분야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를 ‘만화가 루나’로 좋아하시는 분들한테는 당연히 만화로 갚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전세 역전> 같은 콘텐츠도 한 거고요. 조금 더 ‘일상 기록가’로 좋아하시는 분들한테 가 닿기 위해서 『고르고 고른 말』처럼 에세이로도 소통하는 거고요. 그러다 남는 저의 마음은 또 시로 쓰고요. 사실 광고는 전 국민을 상대로 팡 쏴버리는 거고, 에세이는 소수의 독자님들한테 가닿는 거잖아요. 시의 독자는 더 소수이고. 사실 점점 마이너해지는 건데, 그런데도 각각을 다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제가 다양한 ‘주파수’를 쏘는 거죠. 비밀 주파수로. (웃음)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요즘 후기들 읽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되게 꼼꼼하고 섬세하게 써주셔서, 달토끼 님들께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웃음) 제가 만화가로서 창작 활동을 한 것도 15년 정도 됐는데, 롱런하는 게 되게 힘든 일이라는 걸 느껴요. 유튜브를 봐도 그렇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다가도 확 돌아서기도 하고. 그런데 15년 동안 계속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게, 계속 주의 깊게 봐주시는 분들한테 너무 감사해요. 독자 분들이 후기나 개인 메시지를 통해서 ‘평생 창작해 주세요, 계속 계속 이야기 들려주세요’라고 말씀해주실 때가 있는데, 그 말씀이 진짜 너무 감사해요. 그래서 그런 메시지가 올 때마다 ‘관 뚜껑 닫기 전까지 창작하겠습니다, 고희까지 만화 그리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웃음) 그렇게 계속 계속, 평생 소통하면서 창작하면서 살고 싶고요. 계속 봐주시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홍인혜(루나)

광고회사 TBWA에서 일했고, 홈페이지 루나파크를 만들어 만화를 그려왔고, 2018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지금은 회사를 떠나 다양한 분야의 창의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여러 마리의 토끼를 쫓느라 늘 힘에 부치지만 모든 토끼가 사랑스러워 걸음을 늦출 수가 없다. 지은 책으로는 『혼자일 것 행복할 것』 『루나 파크 옷걸이 통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루나파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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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달 작가 “밝게 그리고 싶었던 그림책 『눈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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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달 작가의 신작 그림책 『눈아이』가 출간됐다. 수박과 소라 속, 외계 행성과 유치원을 판타지 세계로 만들어 온 작가가 이번에는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계절을 배경으로 뭉클한 우정 이야기를 선보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번 작품은 어느 겨울날 한 아이가 들판에 홀로 있던 눈덩이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당근 유치원』 이후 1년 반 만의 신작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당근 유치원』 작업을 끝내고 어디 오래 놀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을 해서 여행은커녕 집 밖에도 무서워서 잘 못 나갔어요. 밖에 못 나가고 침대에만 누워서 하나도 안 움직였더니 몸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놀러 못 갈 때 일을 하고 놀러 나갈 수 있을 때 쉬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을 주섬주섬 꺼내 했어요.

『눈아이』는 어떻게 출발하게 된 작품인가요?

원래 같은 제목의 어두운 이야기를 작업하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뭔가 잘 안 풀렸어요. 그래서 같은 소재로 밝은 버전의 이야기를 만들어 봤어요. 그게 지금 출간된 『눈아이』예요. 예전에 한 아이가 녹는 눈사람더러 울지 말라면서 안아 주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그 일러스트가 이야기가 되었어요. 지금은 먼저 작업하던 어두운 버전의 '눈아이'를 이어 작업하고 있어요. 아마도 새해에는 책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눈아이』의 시작이 된 안녕달 작가의 일러스트 Don't Cry(2012)

이야기의 도입에서 선생님이 국어 교과서를 들고 계신데, 교과서 속에 '눈아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어요. 『눈아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 또는 상징이 이 글 속에 숨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야기의 복선 정도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작품 속 화자인 아이가 초등학생으로 등장하는데요. 직전에 펴내신 『당근 유치원』의 주인공인 아기 토끼가 자라서 이 친구가 된 것은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그간 펴내신 작품의 세계관을 연결 지으시거나 전작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신작에 등장시키기도 하시는지요?

그런 생각은 종종 하고 있는데 『눈아이』 속 아이가 『당근 유치원』 속 토끼는 아니에요. 토끼는 자기 의사 표현을 잘하는 활발하고 적극적인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렸고 『눈아이』에 나온 아이는 좀 더 섬세한 성격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렸거든요.

작가님의 대표작인 『수박 수영장』과 『할머니의 여름휴가』 덕분에 작가님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여름이 생각납니다. 올해에는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신작을 출간하셔서 신선하기도 하고 또 반가웠는데요. 겨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지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겨울을 좋아하시나요?

아니요, 제가 추운 걸 싫어해서 겨울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여름에는 신나 하면서 밖에 잘 나가는데 겨울에는 이불 속에서 잘 안 나오거든요. 『눈아이』는 눈으로 된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다 보니 배경이 겨울이 되었는데, 눈을 그려야 되니까 눈이 오면 밖에 나가서 눈아이도 만들고 눈 자료 사진을 찍으려고 설산에도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겨울이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아요. 사진 찍으려고 올라간 설산이 너무 황홀해서 그날 밤에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도 하얀 설산이 보였어요.


 『눈아이』 작업 중 안녕달 작가가 직접 눈으로 만들어 본 눈아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눈빵'에는 소가 들어 있나요? '눈빵'은 물맛일까요?

표지 그림 속 눈아이가 아이에게 건네는 빵에는 진흙이 팥소처럼 들어 있어요. 그리고 눈빵은 차가운 맛이 납니다.

'눈아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혹시 다름 이름 후보도 있었나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먼저 작업하고 있던 어두운 이야기의 제목이 ‘눈아이’였어요. 거기에도 눈으로 만들어진 아이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눈아이』는 출판사 내에서 '밝은 눈아이'로 불렸어요. 이 책이 먼저 세상에 나와 버려서 먼저 작업하고 있던 어두운 버전의 눈아이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눈아이』 를 읽은 독자님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울컥했다는 감상을 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아이가 눈아이와 다시 만나는 결말 부분에서요. 지금과 같은 결말을 만드시기까지 작가님께서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아이와 눈아이가 함께 해를 보다가 눈아이가 사라지는 결말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다시 보면서 추운 계절이 돌아와 두 아이가 만나는 장면을 그리게 되었어요. 이 이야기는 좀 밝게 그리고 싶었거든요. 함께 『눈아이』를 만든 편집자님이 "어떤 아이가 책을 다 읽고 '뿌듯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했어요. '둘이 다시 만나서 뿌듯하다는 걸까?' 싶어서 지금 결말에 만족하고 있어요.


 『눈아이』 초기 썸네일

작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눈아이』 속 한 장면이 있나요? 

눈아이가 '따뜻해서' 우는 장면이요. 아이가 따뜻하게 대해 주니까 눈아이가 녹아 버리는데 그게 우리 마음 같기도 해서요. 우리도 누군가의 따뜻한 말 앞에서 울컥 무너져 버릴 때가 있으니까요.


 『눈아이』 본문 그림

작년에 창비 블로그와 함께하신 인터뷰에서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책 읽기라고 답변하셨어요. 1년간 책을 많이 읽으셨는지,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여전히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그때 집에서 책이 안 읽혀서 템플 스테이를 찾고는 한다고 답변했는데 저 진짜 템플 스테이 가서 책 읽고 그랬어요. 그때 이후로 편집자님이 책을 많이 선물하고 추천해 주세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는데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서 좋았어요.

작가님의 작업실 풍경은 어떤가요? 작업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혹은 도구가 있나요?

저는 어느 낡은 건물에 있는 공동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는데, 같이 쓰는 사무실 안에 사람당 한 테이블을 놓고 작업하는 식이에요. 서로 서먹해서 작업실 사람들끼리 있으면 적막이 흐르는데 아래층이 노래 교실이라서 쿵짝거리는 리듬과 신나게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매일 ‘아... 여기도 참 희한한 곳이군.” 하면서 일해요. 저는 작업실에서는 해야 되는 일만 하는 편이어서 작업실보다는 제 방에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해요. 특히 침대를 좋아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편하게 누워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요즘 작가님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과 제일 괴로워하는 시간이 언제인가요?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낮잠 자는 시간이고 제일 괴로워하는 시간은 밤에 잠이 안 올 때인 것 같아요. 제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데 낮쯤되면 왠지 피곤해져서 낮잠을 자거든요. 근데 제가 평상시에 너무 많이 자서 밤에 종종 잠이 잘 안 와요. 잠이 안 오면 생각만 너무 많아지고 힘든데도 저는 대낮에 낮잠 자려고 눕는 행위도 너무 편안하고 좋고, 좀 자다가 일어날 때 기분도 너무 상쾌해서 낮잠을 못 끊겠어요.

최근 보신 그림책 중에 좋았던 작품 몇 편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름의 잠수』라는 책을 우연히 봤는데 아이가 우울증을 앓는 아빠를 보러 아빠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요. 아이가 병원에서 본 슬픈 아빠와 그곳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예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어서 좋았어요. 또 한 권은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책이에요. 너무 아름다운 글과 그림 앞에서 자꾸 멈추게 되는 책이어서 좋았어요.



*안녕달 (작가)

물 흐르고 경치 좋은 산속 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저 멀리 바닷가 마을 학교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수박 수영장』 『할머니의 여름휴가』 『왜냐면…』 『메리』 『안녕』 『쓰레기통 요정』 『당근 유치원』을 쓰고 그렸다.




눈아이
눈아이
안녕달 글그림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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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성동혁 시인 “두꺼운 편지로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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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건강하시기를.” 

성동혁 시인이 산문집에 사인을 하며 보탠 말이다. 몸이 오랫동안 아파본 사람은 인간에게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같이 체험한다. 성동혁 시인과 인터뷰하기로 한 날은 12월 3일이었다. 산문집 『뉘앙스』를 펴내고 독자들과 마주하는 날. 앞 시간을 비워 놓기로 했는데, 이틀 전 그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인터뷰는 일주일 뒤로 미뤄졌고 다수의 독자와 약속한 소규모 북 토크는 담당교수의 허락을 받고 겨우 외출할 수 있었다. 성동혁 시인은 소아 난치병 환자로 병동에서 긴 시간을 보냈으며 여전히 투병 중이다. 



이 언어로 쓸 수밖에 없는 글

오늘 컨디션은 어떤가요?

괜찮아요. 요즘 운전을 못해서 편집자님이 저희 집까지 와주셨어요.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고 그래요.

지난주에 정말 오랜만에 독자들을 만나셨어요. 항상 산소통을 갖고 외출해야 해서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일단 몸이 너무 힘들었어요. 북 토크를 진행하는 장소에 올 때까지도 정말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이 생기더라고요. 사람들로부터 오는 기운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이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가까이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와서 좋은 기운으로 며칠을 보냈어요. 그리고 시집 낭독회랑은 또 다르더라고요. 

어떻게 달랐나요?

좀더 밝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어떤 게 더 좋고 낫다의 의미는 아니고요. 행사할 때마다 꼭 와주시는 독자 분들이 계신데요. 산문집을 내고 건네 받는 질문들이 좀더 밝고 거리가 가까운 것 같아요.



시인을 인터뷰할 때도 비슷한 것 같아요. 시집보다는 산문집을 두고 하는 질문들이 더 편해요.

맞아요. 그럴 거예요. 시집을 냈을 때 이 시를 해석해달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가끔 SNS로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분들도 계세요. 이런 질문을 받기 싫다는 건 아닌데요. 이 언어로 밖에 쓰지 못해서 시를 썼는데, 자꾸 설명을 요구 받으면 마음이 복잡해져요. 제가 이 시에 관해 뭔가 설명할 수 있었으면 글을 안 썼을 것 같거든요. 잘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좀 난감할 때가 있어요.

주로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제 시 중에 숫자가 들어간 시들이 있어요. 이 숫자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요. 독자 분이 읽어주시는 해석이 이 시의 답이고, 이런 해석들로부터 시가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말씀 드려요.

『뉘앙스』는 성동혁 시인의 세 번째 책이고 첫 번째 산문집이에요. 10년간 쓴 글들이 묶였어요. 

아카이빙한 원고가 많았어요. 예전에 쓴 글들은 버리고 요즘 쓴 글로만 채울까 고민했는데요. 어릴 때 썼던 조금 밝고 맑았던 글을 지금은 쓸 수 없잖아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예전에 쓴 글도 수록했어요. 전체 원고의 반 정도가 오래 전에 쓴 글이고 나머지 반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쓴 원고예요. 원래 저는 표지부터 제목, 목차, 시인의 말까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글의 순서를 항상 제가 짜왔어요. 순서를 남에게 맡긴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뉘앙스』는 편집자님이 글의 순서를 짜주셨어요.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거든요. 편집자님이 너무 훌륭하게 이질적인 모습이 전혀 없이 매끄럽게 잘 만들어주셨어요.

첫 장을 열면 “아무 말 하지 않고도 모두를 말하는, 뉘앙스”라고 써 있습니다. 어떻게 나온 제목인가요?

시집 『6』도 그렇고 『아네모네』도 그렇고 저는 책을 쓸 때 제목을 먼저 정해요. 산문집도 마찬가지였는데요. 10년 동안 내가 본 풍경, 사람, 장소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제목이 ‘뉘앙스’였어요. 뉘앙스라는 말이 굉장히 작고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모든 걸 아우르는 둘레의 말로 느껴졌거든요. 차선책은 떠오르지 않았어요.

전작 시집 『아네모네』가 2019년 ‘올해의 북 디자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죠. 표지에 시집 제목 없이 김현정 작가의 목탄 시리즈 「파도」를 책 전체에 감쌌어요. 『뉘앙스』의 표지 그림도 직접 선택하셨나요?

네, 이번 책에 실린 작품도 제가 제안 드렸어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데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작품이에요. '알렉스 카네프스키(Alex kanevsky)' 작가의 화집을 너무 사고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판매하지 않아서요. 책 표지로 꼭 넣고 싶어서 원고를 다 묶지도 않았는데 편집자님께 연락 좀 해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다행스럽게도 흔쾌히 수락해 주셨고요. 이 그림을 제 책이 싣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웃음)



옆 사람도 같이 건강해야죠

의도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천천히 읽히는 책이었어요. 빠른 템포로 넘어가지 않았어요.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뭔가 휘발되지 않고 남는 감정들이 있다면 감사하겠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두 권의 시집을 냈을 때 친구들, 친척들이 “그런데 네 시는 잘 모르겠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마땅히 답할 말이 없더라고요. “이렇게 읽으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해석해드릴 수도 없으니까요. 내가 너무 동떨어진 일을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간혹 들 때가 있었는데요. 『뉘앙스』를 내면서는 제 친구들이 이 책을 두꺼운 편지라고 생각하고 읽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주변에 문학을 전공한 친구들이 거의 없거든요.

아픈 이야기, 힘든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가 많은데 글들이 우울하거나 침체되어 있는 느낌을 받지 않았어요. 감정선의 기복이 크지 않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덤덤한 마음이 들면서 또 평온해졌어요.

책을 정리하면서 친구에게 선물할 수 있는 책, 친구와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병원에 계시는 분들, 환자들, 보호자들, 의료인들이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이 책이 어떤 의료계의 문제를 파헤치고 공론화하는 책은 아니지만 ‘이런 환자도 있구나, 이런 보호자, 이런 의료인도 있구나’라는 걸 알면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번 책에 유독 친구에 관한 글이 많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제가 학교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부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혹시 학교에서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건강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를 굉장히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그 나이에 보여줄 수 없는 의젓함을 가진 친구들이 정말 많았어요. 늘 제 가방을 들어줬고 저희 집에 와서 저를 데리고 가줬고, 소풍 같은 행사 때도 엄마는 걱정이 돼서 저를 안 보내려고 했거든요. 그러면 친구들이 걱정 말라고 동혁이 제가 챙길 테니까 소풍 보내달라고 설득하고 했어요. 저한테는 친구들이 가족 같은 개념이에요. 엄마도 제 친구들을 아들처럼 생각하시고요.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척 따뜻해졌어요.

너무 고맙고 미안한 친구들이에요. 얼마 전에 한 친구한테 연락이 왔는데 자주 못 가봐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되게 속상해요. 괜찮거든요.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30대 들어서 친구들한테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야, 내가 성공해서 효도할게”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효도라는 게 다 지나고 나서야 더 잘할 걸 후회하잖아요. 저도 그럴까 봐 걱정해요. 뭔가 더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거 같아서요.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너무 다 착해요. 그 친구들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제가 더 아프지 않고, 내 삶을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성인이 됐지만 주치의가 바뀔 수 없어 어린이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계시죠. 아이들을 위한 동시를 쓰신 적도 있고 동화를 써보고 싶으시다고요. 병원에서 아이, 부모 들을 만날 때 어떤 대화를 나누나요?

늘 하는 이야기가 “부모님이 잘 지내야 아이가 이 기운으로 또 잘 지낸다”는 말이에요. 저희 집 식구들은 다 무뚝뚝하거든요. 엄마도 무덤덤한 성격이신데 제가 정말 그 힘으로 버텼던 거 같아요. 아시겠지만 부모님이 감정기복이 심하면 아이도 그걸 느끼고 힘들어 해요.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다 보면 가끔 너무 과민한 부모들을 볼 때가 있어요. 비교적 작은 시술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요. 부모님들도 물론 힘드시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에게 대해주는 게 좋아요. 그리고 청소년기가 되면 병원에서 아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걸 이야기해 줘요. 아이들도 자신의 병을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요.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육체적으로는 너무 건강한 사람인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사람은 다 다른 거고, 누가 더 건강하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요. 그냥 몸의 형상이 다 다르고 뭔가를 더할 수 있고 덜할 수 있는 편함과 불편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하죠. 저렇게 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과연 건강한 걸까, 남의 건강을 해치면서 사는 삶이 자신이 건강한 삶인가. 저는 건강은 같이 안고 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나만 건강하게 산다고 해서 건강한 삶이 아니잖아요. 내가 건강해서 옆 사람도 같이 건강할 수 있어야죠. 육체적으로는 좀더 발달된 사람일 수 있겠지만 건강의 개념은 다른 것 같아요.

시집 『6』과 『아네모네』가 좋아서 『뉘앙스』를 펼쳤을 독자도 있겠고 ‘뉘앙스’라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읽고 계실 독자도 있을 거예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낭독회에서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진심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정말 정말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올 겨울을 잘 마무리하시고 진짜 평온하셨으면 좋겠어요.




뉘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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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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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이가라시 미키오 “합시다. 콜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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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라시 미키오와 이랑 작가 ⓒHirokawa Takeshi

“합시다. 콜라보!”

만나자마자 서로에게서 통하는 면을 발견한 두 사람은 ‘콜라보’를 외쳤다. 뮤지션 이랑과 『보노보노』 작가 이가라시 미키오의 편지 에세이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의 시작이다. 어릴 때부터 이가라시 미키오의 만화를 읽으며 자란 이랑과, 이랑의 콘서트를 보면서 “흐르는 강물을 넋 놓고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는 이가라시 미키오. 팬데믹 시기, 일상을 가로지르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두 사람은 이별과 사랑, 신에 대한 질문을 담아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경험은 특별했을 것 같습니다. 히로카와 타케시 작가님의 그림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서도 이건 정말 이랑 작가님과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의 책이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책을 받아보시고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이랑 : 준이치와 보노보노를 닮은 해달이 손을 잡고 물 위에 떠 있는 그림이라니… 이것 말고 다른 표지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 해달은 잠을 자는 동안 해류에 휩쓸려 멀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미역을 몸에 감고 자거나, 다른 해달의 손을 잡고 잔다고 하더라고요. 생존본능이지만,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참을 수가 없네요. 표지 그림이 나오자마자, 라인 메신저로 이가라시 상에게 보냈더니 “그레이트!!”라며 무척 기뻐했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지금껏 여러 권의 책을 내왔는데 제가 쓴 책의 표지 중에 가장 근사한 것 같습니다. 기쁜 마음에 받아들어 보니 예상보다 묵직하더군요. ‘이것이 이랑 씨와 내가 함께한 1년의 무게구나’ 하는 생각에 감회가 깊었습니다.


ⓒHirokawa Takeshi

두 분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궁금했어요. 이창동 감독이라는 접점이 있었네요. 두 분 모두 서로에게서 닮은 모습을 발견하신 것 같은데, 그 느낌은 어떤 것이었나요?

이랑 : 십대 때부터, 『보노보노』 만화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매 권마다 바뀌는 등장인물 설명도 좋았고, 내용이 너무나 철학적이라 ‘어른을 위한 만화’라고 느끼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노보노』 만화책을 볼 때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느꼈습니다. 2019년, 일본 센다이에서 저와 이가라시 상 공통의 지인을 통해 직접 만나고 돌아와 이가라시 상의 에세이 『불꽃 소리만 들으면서』를 읽은 뒤, ‘이 사람은 나랑 뇌 구조가 똑같다’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이가라시 상에게 어떤 얘기든 겁내지 않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두 사람 다 이창동 감독의 팬이라는 점에서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셈이었죠. 그러다 일본에서 열린 이랑 씨의 공연을 보러 갔는데, 노래하는 목소리와 기타 소리가 제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흐르는 강물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바라보는 듯한 기분의 콘서트였습니다. 그 후, 이랑 씨가 폴짝폴짝 뛰어 저의 작업실로 놀러 왔고요.

편지가 오가는 동안, 그 여백을 라인이 채워주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분의 일상에서 편지 및 라인을 주고받는 리듬은 어땠나요?

이랑 : 편지를 쓰는 리듬은 체감상 한 달에 한 번 주기였던 것 같습니다. 편지를 보낸 직후나 받은 직후엔 항상 라인을 주고받았습니다. 서로의 편지를 빨리 읽고 싶어서 번역이 되기도 전에 번역기로 대강 읽고 간단하게나마 인상 깊었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중에 편지로 나눴던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생각이 날 때도 라인을 나눴고요. 이가라시 상에게 생일축하 영상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라인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이가라시 상은 라인 답장이 정말 빠릅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라인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연락 수단이었는데, 자동 번역을 경험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랑 씨의 메시지를 번역한 일본어 문장의 오역이나 오탈자는 금방 눈에 들어왔지만, 한국어로 옮겨진 제 메시지가 어떻게 번역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죠. 그래도 서로가 보낸 메시지의 잘못된 부분을 스스로 고쳐가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행위가 재미있었습니다. 책에 실을 때는 오역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고요.


▲ 작가가 직접 그린 캐리커처 ⓒIgarashi Mikio

▲ 작가가 직접 그린 캐리커처 ⓒlanglee

가장 오래 시간을 들여 쓴 편지가 있었나요? 

이랑 : 편지가 후반으로 갈수록 ‘익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쓰는 시간에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내용면에서 더욱 깊게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마지막 편지 두 편은 정말 몇 번을 읽어도 가슴을 깊게 울립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이랑 씨가 보낸 편지 속에 이미 제가 써야 할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혼자 글을 쓸 때보다 수월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시간이 오래 걸린 편지는 없었는데, 마지막 두어 편 정도 남았을 때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긴 했어요.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은 “무명인 사람들의 일생”(120쪽)을 그리고 싶다고 하셨고, 이랑 작가님은 ‘엑스트라’로 사라지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죠. 창작의 테마로 무명의 삶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랑 :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명’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하고 세상에 잘 들리는 이야기보다 세상에 크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삶의 이야기가 더 적은 것은 아니니까요.

이가라시 미키오 : 지금껏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예요. 그러니 누군가는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무명인 사람을 취재해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인간일생도권』에서는 제가 직접 무명의 사람을 창작해 그려가고 있습니다.

두 분의 일상 속에 일어나는 상실을 지켜보면서, 독자인 저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편지가 도움이 될 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경험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랑 : 이가라시 상이 편지에서 ‘그나저나 이랑 씨는 참 많은 일을 겪네요.’라고 할 정도로 저에게는 이상하게도(?)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일을 단 한 사람에게 편지로 정리해 적으며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쓰는 일기와는 또 다른 위로의 감각이었습니다. 최근(2021년 12월 10일) 친언니가 사망한 뒤, 이가라시 상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가라시 상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저에게 ‘생명연장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생각을 더욱더 깊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라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저도 이제는 일기를 쓰지 않아요. 그러나 일기가 그렇듯, 자신이 쓴 글은 최고의 읽을거리입니다. 아마 저는 이 책도 여러 번 다시 읽게 되겠죠.



영화 <벌새>를 보고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은 일본과 한국이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하셨다고 했는데요. <벌새>를 통해 일본과 한국의 1994년, 1995년을 겹쳐 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큰 사건과 두 공간이 동시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다가오는 느낌이랄까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다른 사회를 살아왔지만, 이건 정말 비슷하네 하고 공감을 느낀 부분이 있었나요?

이랑 : 저와 이가라시 상이 살고 있는 사회(한국, 일본)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사회. 소수가 부와 권력을 가지고 다수를 위협하고 지배하는 사회. 그 외의 가치에 대해 그다지 논의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저희가 ‘무명’이나, ‘엑스트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도 지금 사회 모습에서 한계를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이랑 씨도 자신이 자라온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제가 자린 가정과도, 이 세상의 다른 가정들과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부모가 있고, 그 슬하에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연령까지는 부모의 말을 따릅니다.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우는 일도 있지만, 차별과 폭력을 학습하기도 하죠. 다양한 문제들이 바로 가정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을 함께 읽으며 ‘지금과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셨죠. 자본주의 사회의 신화를 함께 생각해보는 경험은 어땠나요?

이랑 : 한마디로 너무 즐거웠습니다. 평소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생각에 대해 가까운 친구들도 ‘또 이상한 소리 한다’고 가벼이 취급할 때가 많은데 이가라시 상과 ‘지금과 다른 세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함께 상상할 수 있어, 동지를 만난 것처럼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평소에 막연히 상상했던 ‘돈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땅에는 왜 주인이 있을까?’, ‘가치는 어떻게 정해질까’ 하는 질문들에 대해, 이가라시 상과 같은 책을 같은 시기에 읽고, 이상한 것들은 역시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한국은 일본보다 빠르게 디지털 화폐가 자리를 잡았죠. 저는 신용카드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는 아날로그 현금주의인데 ‘돈은 마치 굿즈 같아요’라고 말한 이랑 씨의 발언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굿즈로 물건을 사고 있었던 거야’ 하는 생각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워졌어요.

‘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대목들이 재밌었습니다. 이랑 작가님은 <신의 놀이>라는 앨범을 내셨고, 이가라시 미키오 작가님은 『I(아이)』를 통해 신의 주제를 다루셨죠.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현재 시점에서 신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

이랑 : 저는 신이 된다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꿈도 희망도 슬픔도 고통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그리고 나서 신인 제 자신도 없애버리고 싶네요. 신이라서 결국 ‘무(無)’가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유(有)’인 채로 무한함 속에서 가만히 있을 겁니다. 그게 신의 업보라고 생각하면서요.

이가라시 미키오 : 이랑 씨의 말처럼 모든 걸 무(無)로 만드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저는 국가든, 회사든, 가족이든, 권력으로 향하는 욕망을 없애보고 싶습니다. 그런 욕망이 없어진 인간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한번 보고 싶어요.



전염병 시대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요즘이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된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큰 질문이지만, 코로나19를 경험한 이후 재난 시대에 우리에게는 어떤 것이 중요해질지 두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랑 :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지 더욱 공고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결코 사랑이 최우선이 아닌 사회라는 것을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고통이 너무 큽니다.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안부를 전하고, 감염병 시대에 더욱 고립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특정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가라시 미키오 : 올해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한 저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쉬죠. 그런 생활이 재미있냐고요? 매우 편합니다. 편한 생활은 의외로 즐겁더군요. 즐거움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방식도 한 번쯤 시도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랑

1986년 서울 출생. ‘한 가지만 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가수이자 작가, 영상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청소년기에 미술학원을 열심히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생활 중 취미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해 결국 영화와 음악, 그림 그리는 일을 전부 직업으로 삼고 있다.


*이가라시 미키오


책과 영화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은 『보노보노』의 작가이며 일본의 유명한 만화가이자 영화 제작자입니다. 출판물과 애니메이션 작업을 활발하게 이어 가고 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이랑,이가라시 미키오 공저 | 황국영 역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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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 망가진 책을 사랑하는 수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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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수선가’라면, 책을 아주 깨끗이 볼 줄 알았다. 하지만 재영 작가는 그 누구보다 책을 험하게 보는 독자이자, 망가진 책을 사랑하는 수선가다. 책 주인의 독서 습관과 사연을 고스란히 담은 채 낡아온 책을 받아 들며, 그는 이것 또한 사랑의 여러 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한층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수선가의 역할이다. 그렇게 완성된 한 권의 책은 오랜 세월을 견딘 사랑의 흔적이 된다.



옷 수선처럼 친숙하도록

한국에서 ‘책 수선’은 아직 낯선 분야예요.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죠.(웃음) 책을 새로 사는 것보다 비싼 비용이 들 수도 있는데, 과연 맡기는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작업실을 열 때 사업자등록증을 만들러 세무서에 갔거든요. 직원분들이 책 수선이라는 직업을 처음 들으니까 어디에 분류할지 회의를 하시더라고요. 어떻게 이 일을 알려야 하나 고민이 됐죠.

예상과 달리 꾸준히 의뢰가 들어온다고 들었어요.

저도 놀랐어요. 이 분야가 있는 줄 몰라서 못 맡긴 것이지, 다들 추억의 책이나 고치고 싶은 책 한 권쯤은 있는 것 같아요. 

‘복원’이 아니라, ‘수선’이라는 말을 택한 이유도 궁금했거든요. ‘복원’이 원본 그대로 되돌리는 걸 말한다면, ‘수선’은 파손된 부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좀 더 열린 개념이라고 하셨어요. 

보통 의뢰인분들이 책을 가져오면 “복원해주세요” 하시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 보면, 원하시는 게 ‘수선’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 차이를 알려드리면서 어떤 방향이 나을지 상의를 하죠. ‘수선’이라는 말을 택한 건, 안 그래도 낯선 분야를 조금이라도 쉽게 전하고 싶어서였어요. 옷 수선을 맡기듯이, 책 수선도 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느꼈으면 해요.

책 수선가라면, 책을 아주 깨끗하게 볼 것 같았는데 정반대여서 의외였어요.

친구들이 놀랄 정도로 험하게 책을 보는 편이에요. 밑줄도 긋고 낙서도 하고요. 보통은 그러면 책을 막 다룬다고 하는데요. 이것 또한 책을 아끼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저는 망가진 책을 좋아해요. 서점에 가도 일부러 흠이 있는 책을 골라서 사 올 정도로요.

“나는 이 파손들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30쪽)고 쓰기도 했죠. 

‘파손됐다’는 표현에는 이미 부정적인 느낌이 있잖아요. 저는 긍정적으로 책이 변화해서 다른 무언가가 됐다고 말하고 싶어요. 파손 형태를 보면, 책 주인의 독서 습관이 드러나거든요. 책을 꾹꾹 펼쳐서 보는 분도 있고 접거나 낙서를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 다른 책이 되어가잖아요. 그런 다양한 형태를 관찰하는 게 즐거워요.

책 수선 분야에 뛰어든 계기도, 책이 망가진 모습에 매력을 느껴서였다고요.

맞아요. 책 수선 일을 하면 다양하게 망가진 형태를 원 없이 볼 수 있으니까요. 사실 이 일을 택한 것도 우연의 결과였는데요. 원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파인 아트와 디자인을 전공했거든요. 그러다 미국 유학을 갔는데, 지원한 학교가 북아트와 페이퍼 메이킹에 특화된 곳이었어요. 교수님이 책 수선가로 일하며 기술을 배우라고 하셔서 ‘책 보존 연구실’에서 일하게 됐는데, 책이 망가진 모습들이 너무 흥미롭더라고요. 오래된 종이는 손만 대면 부서질 정도로 형태가 달라지거든요. 종이가 수천 년 전부터 이어진 매체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게 신기했죠.

“축적된 시간의 흔적에 매료”(122쪽)된다고 하신 것처럼, 낙서도 하고 손때도 묻히면서 유일무이한 책이 되는 것 같아요.

책 보존실에서 일할 때,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색색깔의 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은 책을 발견한 적이 있어요. 남들이 보면 책을 훼손한 것일 텐데, 이상하게 그게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제 상사가 그 책을 소장하기도 했어요. 틈날 때마다 책을 폐기하는 창고에 가서 망가진 책을 고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죠. 



한 권의 책을 다루는 일

책 보존실에서 처음 일하게 됐을 때, 풀질과 가위질부터 배우셨다고요. 

처음에는 자존심이 조금 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어요.(웃음) 보통 우리가 다루는 종이는 다 빳빳한 새것이지만, 보존실에 오는 책들은 정말 오래되고 약한 종이들이에요. 똑같이 가위질을 해도 결과물이 너무 달라지니까 필요한 힘도 도구도 다 신경 써야 하죠. 평생 해온 간단한 일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거예요. 실제로 그 기간을 못 견디고 그만두는 사람도 많은데요. 제게는 제일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책 보존 연구실에서 일하다가, 개인 작업실을 여셨잖아요. 일의 성격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개인 작업실도 보존실 일이랑 비슷하겠지 생각했는데, 실제로 들어오는 책을 보니까 한 권 한 권 추억과 가치가 있는 거예요. 보존실에서는 도서관의 장서를 다루니까 개별 책을 감정적으로 이해해야 할 일도 없었고, 한 권에 집중할 수 있는 기술이나 예산도 제한적이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매 의뢰가 특별하다는 걸 예상하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스스로를 기술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구나. 책 한 권의 사연에 깊이 들어가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죠.

실제 작업 과정이 궁금했어요. 한 권의 책을 수선할 때, 49단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요.

책마다 필요한 과정이 다 다른데요. 일단 의뢰가 들어오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봐요. 아무리 의뢰자분이 찢어진 부분을 수선해달라고 해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거든요. 

작업 전에, 의뢰자분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신다고요.

이 책이 의뢰자분에게 왜 중요한지, 왜 수선하고 싶은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선물용인지, 자주 펼쳐볼 용도인지, 소장용인지에 따라서 수선의 방향이 정해지고요. 만일 외관을 바꿔야 한다면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인지도 많이 물어보고요. 최근에는 이 분야가 조금씩 알려져서인지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많아졌어요. 소중한 무언가를 상대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감사하죠. 

아무리 길게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결과물을 내놓는 건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굉장히 어렵죠. 그게 어떻게 보면 핵심이잖아요. 의뢰인이 빨간색이 좋다고 해도 제가 생각하는 빨강과 다를 수 있으니까요. 책은 한 권밖에 없고, 한번 수선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매번 긴장이 돼요. 그래서 최대한 샘플을 여러 개 보여드려요. 여러 가지 실물을 놓고 의뢰자가 선택하도록 하죠.

완성된 책을 의뢰인에게 보여줬을 때의 희열이 있을 것 같아요.

솔직히 그 순간은 너무 떨려서 즐길 새가 없어요.(웃음) 늘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서죠. 수선이 끝난 후에야 메일을 통해서 의뢰자분들의 사연을 듣고 “아, 내가 이런 일을 해냈구나” 하면서 좋아해요. 이번 책을 쓰면서 제 일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내 일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구나 새삼 느꼈어요.



그것 또한 ‘책의 인생’

책 작업 도중에 나오는 조각을 모으시고, 책 사이에 끼어 죽은 벌레도 함에 담아 보관하신다고요. 보통 쉽게 버려지는 것을 간직하시네요. 

망가진 책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증거의 한 조각으로 두려는 마음이 있고요. 또 하나는, 온전한 형태로 죽어있는 벌레가 불쌍해서예요. 곤충들은 종이가 따뜻하고 서식환경에 맞아서 들어간 것뿐인데 눌려 죽는 거잖아요.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함을 만들어서 넣어두게 됐어요. 

책의 역할을 열어두시는 것이 좋았어요. 어린 시절 추억의 동화책이나 인테리어 소품용 책도 나름의 ‘책의 인생’을 산다고 하셨죠. 

어릴 때, 책을 많이 읽는 어린이는 아니었거든요. 읽는 것보다는 동화책을 꺼내서 탑을 쌓고 놀고 그런 용도로 책과 가까워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갖고 놀던 책이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 제목과 표지만 기억하던 책을 다시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요. 흔히 책을 아낀다고 하면, 밑줄도 절대 안 긋고 깨끗이 읽는 것만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제한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책을 갖고 놀면서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전집이 유행했을 때, 장식용으로 책장에 꽂아두는 것도 이해가 되네요.(웃음)

책의 역할도 계속 변화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장식품으로 쓰는 책도 좋아하거든요. 읽는 용도가 아니라고 해서, 책의 본질이 훼손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최근에 한 카페에서 손님 앞에서 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서 컵받침으로 주는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어요. 어떻게 책을 그렇게 쓸 수 있냐는 것부터, 어차피 그 사람 책인데 괜찮은 것 아니냐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요. 저는 반반이에요. 책을 만든 사람들을 떠올리면 예의가 아니지 싶다가도,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것도 책을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싶거든요. 책이 너무 진지한 것이 될수록, 마음에서 멀어지기 쉬운 것 같아요. 저는 책을 다루는 사람이니까 열린 태도를 가지려고 해요. 

책 수선가로서 ‘이것 하나만은 꼭 해보고 싶다’ 하는 일이 있을까요?

책 수선가의 전문성을 살려서 다른 문화 영역과 협업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책 수선은 책 수선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작업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예술 분야와 시너지 효과를 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재영

망가진 책을 수선하는 ‘재영 책수선’ 대표. 기술자이면서 동시에 관찰자이자 수집가다. 오늘도 연남동의 개인 작업실에서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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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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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박준 시인, 어떤 위로가 무용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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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지만 답변은 술술 나온다. 천천히 말하는 듯하지만 끝까지 말하는 사람, 박준 시인이다. 얼마 전 그는 부모님의 반려동물을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다.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병원이었는데 동물등록제 신청을 하기 위해 온 어르신들이 수의사에게 자신의 아픈 몸에 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가 동물병원인 것을 잊은 채. 박준 시인은 가만히 수의사의 반응을 살폈다. 시인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수의사는 어르신들께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건네고 있었는데, 문득 그 수의사가 작가처럼 보였다. “어떤 약을 드세요”라는 구체적인 대안을 말할 수는 없지만 추상적인 위로를 애써 거두지 않는 사람. 만약 시인이 안 됐더라면 그와 같은 수의사가 됐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박준 시인은 두 번째 산문집 『계절 산문』을 쓰면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이 나”인 사람들을 떠올렸다. 또렷한 위로는 아니더라도 곁에 서서 안부를 전하고 싶었다.



시는 사람의 마음을 쓰는 일

촬영을 너무 잘해서 스태프들이 깜짝 놀랐어요.

제가 잘해야 빨리 끝나잖아요.(웃음)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하기로 했으니까요. 

어제까지 제주에 계셨다고요.

EBS에서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짧게 제주 기행을 다녀왔어요. 라디오를 미리 녹음하고 가야 해서, 전날까지도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지 고민했는데 다녀오고 나니까 좋았어요. 힘든 일을 힘들 게 할 때는 싫은데, 좋은 일을 힘들 게 할 땐 좋은 것 같아요. 운동처럼요. 

평소 조용히 지내는 듯하지만 잘 살펴보면 활동 범위가 넓으신 것 같아요. 학교 강연도 자주 하시고요. 

강연을 일 년에 백 번 정도는 하는 것 같아요. 마치 유명하지 않은 시 홍보대사처럼. 주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가는데요.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에너지가 빠진다는 생각은 안들어요. 시라고 하면 보통 추상적이고 재미없고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시는 그냥 사람의 마음을 쓰는 거다, 세상에는 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비형식의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게 꼭 문학이 아닐 수는 있다”라고 말하죠. 학생들이 제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더라도 한 문장이라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학교에서 시인을 만나는 일이 드문 일이니 기억할 것 같아요.

최근에 대학에 갔는데 그때 만난 친구가 저를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두 번 이상 만난 친구들이 대여섯 명은 되는 거 같아요.

CBS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를 진행한 지 곧 2년이 돼요. 처음 DJ를 제안받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어요?

처음엔 두려웠어요. 라디오 게스트를 해봐서 방송 형식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는데 대본을 쓰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라디오 작법 책부터 구해서 읽고 좋아했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찾아 듣고 했어요.

 시, 산문과 라디오 대본은 많이 다르던가요?

달라요. 라디오 원고는 왠지 편하게 써도 될 것 같지만 형식이 완전히 달라요. 제가 시를 써온 방식과는 많이 달라서 초반에는 좀 헤맸어요. 그동안 저는 의미를 만든 다음, 그 의미를 다음 문장으로 이어가면서 주어를 바꾸며 글을 썼거든요. 그런데 라디오 원고는 첫 번째 주어가 끝 문장까지 따라와야 해요.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글쓰기인데 산문과 비슷할 것 같지만 다르죠. 라디오 대본을 쓴 게 곧 2년이니까 오프닝과 클로징만 1,400개. 중간에 코너 원고까지 합하면 거의 2,800개의 원고를 썼는데요. 이번 산문집에는 다섯 개만 실렸어요. 

심야 방송이라 밤낮이 완전히 바뀌었겠어요.

새벽 2시에 방송이 끝나니까 집에 오면 거의 새벽 서너 시예요. 그때 잠이 들면 점심쯤 일어나서 그날의 대본을 쓰고 산책하고 저녁부터 방송을 준비해요. 가끔 외출을 하지만 이례적인 일이고요. 굉장히 단순하고 반복되는 하루인데 삶이 훨씬 간결해져서 좋아요. 

‘시작하는 밤’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시인이니까 ‘시를 쓰다’의 ‘시작(詩作)’의 의미도 있고요. 프로그램이 자정에 시작하잖아요. 자정이라고 하면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만약 속한다면 ‘오늘’일 텐데요.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늦었고 무엇을 마저 하기에는 또 너무 늦은 시간성을 생각해봤어요.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던 기록 

『계절 산문』은 1월부터 12월까지 열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 산문을 수록했어요. 3년 전에 나온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눠졌는데요. 

아무래도 글을 쓸 때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게 계절, 날씨, 시간인 것 같아요. 첫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 두 번째 시집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했는데 이번 산문집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시를 쓸 때는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쓰거든요. 그런데 산문은 기준이 좀 달라요. ‘거짓 없이 쓰자, 자연스럽게 쓰자’가 먼저예요. 주제, 테마, 의도 같은 것이 배제된 상태에서 쓰다 보니 계절에 따라 나누는 게 자연스러웠어요.

처음으로 짧은 제목의 책이에요. 

『계절 산문』으로 하고 싶어서 출판사에 미리 말씀드렸어요. 이 제목을 꼭 사용하고 싶다고요.

커버는 전작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와 같은 갈색이에요. 

제 머릿속의 책은 나무를 떠나지 않는 것 같아요. 종이 형식이든 질감 형식이든, 종이도 나무처럼 결이 있잖아요. 가장 책다운 건 나무다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최근 출간된 작가들의 산문, 에세이를 읽으면 코로나 이후의 변화를 자주 언급해요. 그런데 시인님의 산문에서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코로나 이전과 이후에 수많은 사람의 삶이 달라졌는데 저는 크게 변한 게 없어요. 여행을 가도 주로 혼자 가고 무엇을 보고 써도 거의 혼자 하니까요. 영향이 별로 없어요. 특별히 힘든 것도 없고요. 

‘~에게’라는 글이 많아요.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글을 편지글로 채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수신인이 명확한 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글도 있더라고요. 모든 글을 편지 형식으로 쓴다면 수신자가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아 포기했어요. 제가 인간관계가 좁고 서툴고 누군가에게는 무심해 보일 수 있을 만큼 먼저 연락하는 경우가 정말 없거든요. 서운함을 느껴서 떠나는 사람도 있고 이 특성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분들도 있는데요. 제가 가끔 먼저 연락하거나 전화를 한 번에 받으면 상대가 놀라서 끊는 경우가 있어요. 

이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 주변에는 제 특성을 이해해주는 사람들만 남아 있는데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할 때 한 번에 잘 못 해요. 아무리 친해도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이 이야기는 너무 창피한 게 아닐까, 혹은 이 이야기를 꺼내면 상대가 너무 걱정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 마음이 말 대신 손끝으로 나오는 것 같아요. 하소연하듯 토로하듯 자랑하듯 쓰게 되는데, 이것도 대상이 존재하는 거잖아요. 혼자 자랑할 수 없으니까 실제든 가상이든 수신자가 정해지고 그러다 보니 ‘~에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붙었어요.

예전에 “편지 같은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고 말하셨죠. 여전히 같은 마음이신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잘 묻지 못해요. 예전에 허수경 선배랑 마지막 통화를 하는데 그때 선배가 통증이 심하셨거든요. 우리 둘 다 이 통화가 마지막이 될 거라는 짐작을 했는데, 제가 ‘괜찮아지실 거예요,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하면서도 하나 마나 한 이야기만 계속하는 거예요. 저는 행사를 하러 바닷가 근처에 왔는데 파도가 친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하나 마나 한 말들을 하는데, 그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위로의 방식이 그런 것 같아요. 어떤 신박한 위로가 존재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십이월 산문」이 생각나는데요. 산사에서 기왓장에 흰 글씨로 자신의 소원을 적는 ‘기와불사’를 유심히 살펴보곤 하신다고요. “아직까지 요행이나 무리한 소원이 적힌 기왓장은 보지 못했습니다”(161쪽)라고 쓰셨는데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보통 가족의 건강, 평안, 행복을 빌죠. 문득 궁금해졌어요. 2022년 새해, 기왓장을 하나 건넨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실지. 

‘20만 부 돌파’ 같은 건 쓸 수 없을 것 같고요.(웃음) 은유적으로 쓸 것 같아요. 신도 못 알아보게. 얼마 전에 오은, 김민정 시인과 처음으로 ‘기와불사’를 했는데요. 그때 주위에서 계속 바람이 불길래 “바람이 계속 불길”이라고 썼어요. 무엇을 희망하는 일이 계속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2017년 첫 산문집을 출간했을 때 “되게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고 말하셨어요. 두 번째 산문집을 펴내는 마음은 어떤가요?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던 기록이라서요. 여전히 부끄럽지만 노력을 했으니 부끄럽지 않으려고요. 아까 사진을 찍을 때도 보셨겠지만 스스로를 좀 덜 괴롭히게 된 것 같아요. 물론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어요. 하지만 나에게 해를 끼칠 만큼 조마조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인 것 같아요.



자신을 괴롭히지도 말고 외면하지도 말고 

시인님과 마주해 인터뷰한 게 오늘이 세 번째인데요. 뵐 때마다 편하고 이야기를 잘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사소한 질문도 공들여 생각하고 답하시는 인상이 있어요. 능수능란한 모습도 있고요.

실은 어제 많이 걱정했어요. 그동안 내가 했던 이야기와 다른 변별력이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내 이야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실망하시진 않을까 불안했어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불안이기도 할 텐데요. 그런데 이 불안이 빛나는 순간이 있어요. 불안 때문에 무엇을 더 준비하게 되고 스스로 조심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이 불안이 끝나고 나면 자신감이 돼요. 그래서 오늘 아침 촬영할 때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어요.

“불안이 끝나고 나면 자신감이 된다.” 정말 그럴 수 있겠네요. 불안이 많은 사람은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해서 실수를 안 하기도 하고요.

맞아요. 이제는 라디오 생방송을 매일 하니까 떨리는 일이 거의 없어졌어요. 라디오는 초 단위로 움직이잖아요. 기침을 해도 안 되고 3초간의 정적도 있으면 안 되고요. 

2020년 인터뷰에서 “세 번째 시집은 7년 후 쓸 것”이라고 말하셨어요. 이제 5년 남았네요. 

작가마다 혹은 사람마다 출력하는 빈도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가뜩이나 천천히 출력하는 사람이라서요. 라디오 대본이든 산문이든 하나로만 집중되진 않을 텐데요. 다시 말하면 수압이 약해질 수 있는데 수압이 약해졌다고 전전긍긍하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물이 쫄쫄쫄 흘러나오게 하자, 그런 마음이에요. 예전에는 시가 안 써지면 너무 힘들고 불행했거든요. ‘어, 나 40일 동안 시 한 편도 못 썼어’라고 불안해하면서 계속 핑계를 댔어요. ‘회사를 그만두면 시가 잘 써질까? 이 약속을 나가지 않고 시를 쓰면 써질까?’ 직장 잘못이 아닌데 자꾸 핑계를 만들다 이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시에 관해서는 더 초연해졌어요.

그렇네요. 수압이 강해야만 좋은 글이 나오는 건 아니죠.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꼭 껴안고 있을 때도 있고 손을 잡을 때가 있고 때론 멀어질 때가 있잖아요. 너무 멀어져서 안 보일 때가 있더라도 그 멀어짐을 인정하면 언젠가는 또다시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가 안 써진다고 완전히 단절된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마음을 먹으면 갑자기 잘 써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예상과 다르게 안 써진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런 긍정도 갖고 있고요. 

“여름보다 겨울이 글을 쓰기 좋은 계절”이라고 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 몸이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특히 몸이 아픈 계절이 있고 몸이 가벼운 계절이 있는데요. 저는 여름에는 무얼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핑계일 수도 있는데, 겨울이 글쓰기에 조금 더 적합한 조도인 것 같아요.

라디오에서 사연도 받으시죠. 시 처방도 해주시고요. 지금 글을 써야 하는데 너무 안 써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글의 장르가 무엇이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요. 어떤 연주곡을 끊임없이 듣는다든가, 내가 뭔가가 잘될 때 조성한 환경을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말고 피하지도 않는 일이에요. 무엇이 안 된다고 할 때, 밥 먹고 와서 한다고 친구랑 커피를 마시고 와서 한다고 잘되는 건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오후 두 시까지 글을 써야 했는데 못 썼어요. 결국 오후 여덟 시에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면 여섯 시간 동안도 일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시간 동안 스스로를 너무 자학하지 말고 마음을 너무 놓아서도 안 되고요. 적당히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고 그렇다고 회피하지도 않고 묵묵하게 견디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오프닝 원고가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세요?

세상을 오프닝으로 보면 돼요. 그리고 ‘나는 라디오 작가다’라는 탈을 써요. 지금 카페 안에 유리창이 크잖아요. “유리창이 크면 클수록 바람이 많이 들어옵니다. 동시에 유리창이 크면 클수록 가끔 훤히 보입니다. 유리창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와, 지금 바로 쓰신 거네요? 

네, 그런데 이게 저에 대한 믿음으로 하는 거예요. “나는 잘 쓸 수 있어”가 아니라 그냥 나를 믿고, 시작이 안 될 때는 일단 나를 믿는 거예요. 어긋나더라도 일단 해보는 거죠.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 정말 큰 사랑을 받았어요. 부담도 컸을 것 같고 기대도 하실 것 같아요.

첫 산문집을 좋아해주신 분들의 기대에 배신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첫 산문집을 너무 빠르게 가볍게 편하게 읽은 분들에게는 반전도 좀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무거워져볼까’라는 생각도 있었고, 좋아하셨던 것들을 좀 더 넣어보자는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느리게 읽는 사람이 있잖아요. 글에 대한 호불호도 다 다르니까요. 무게 있는 글로 인해 이 산문집을 읽게 되시는 분이 있다면 또 반갑고 감사할 것 같아요.

독자들에게 책에 서명해주시는 일을 좋아하시죠. 이번에는 어떤 서명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세상 끝 등대」에 나오는 문장을 써드리고 싶어요. “불행이 길도 없이 달려올 때 우리는 서로의 눈을 가려주었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라는 건 이런 것 같아요. 거대한 불행이 찾아올 때, 서로의 눈을 가려주면서 ‘너, 이렇게 보지 마’라고 말해주는 일. 누가 보면 무용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과 비슷한 의미네요.

그럴 수 있겠네요. (웃음) 





*박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시 그림책 『우리는 안녕』을 펴냈다. 신동엽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편운문학상,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다.




계절 산문
계절 산문
박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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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곽민지 “보이지 않아서 내가 쓴 비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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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 ‘관찰형 예능’ 에세이

본격 비혼라이프 가시화 방송, 팟캐스트 ‘비혼세’를 시작했을 당시, 곽민지 작가는 프리랜서로서 코로나 시대를 헤쳐가고 있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세상에 비혼 싱글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언제까지 기혼을 기본값으로 설정한 콘텐츠만 보면서 살아야 하나? 남이 하지 않으면 내가 하자는 생각으로 기획한 팟캐스트는 ‘망한 연애 올림피아드’, ‘비혼 경조사’ 등 주옥 같은 에피소드를 탄생시키며 누적 조회수 800만을 기록했다.

“미디어를 보면, 기혼자나 곧 결혼을 할 사람 이 두 가지만 다루는 게 답답했어요. 1인 가구를 보여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도 꼭 마지막 질문은 ‘결혼은 언제 할 거냐’로 끝나고요. 결혼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정말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저만 해도 결혼을 하지 않은 프리랜서이고, 주변에 혼자 사는 친구들이 많아요. 다들 평범하게 똑같이 살아가거든요.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이 사람들이 결혼한 사람만큼이나 흔하고 자연스럽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팟캐스트가 조금씩 애청자를 늘려가던 초기, 눈 밝은 편집자가 ‘비혼’에 대한 책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비혼’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결혼을 권하는 사회를 헤쳐가는 한 사람의 일상이 담겼고, 인간 비혼세를 보여주는 ‘관찰형 예능’ 같은 에세이가 됐다.

“팟캐스트를 시작한 지 한 달 밖에 안 됐을 때, 편집자님이 먼저 연락을 주셔서 비혼을 주제로 하는 책을 한 권 만들자고 제안하셨어요. 처음에는 솔직히 책이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어요. 팟캐스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비혼 이야기를 실컷 하는데, 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가 나올까 걱정이 됐었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글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책을 쓰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발견해서 저도 놀랐어요.”

‘비혼’으로 살면서 가장 못마땅했던 건, 선입견이 가득한 질문들. 비혼에는 거창한 결심이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계기로 비혼이 됐느냐’,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시냐’, ‘노후 준비는 되어 있냐’는 식상한 물음들이 이어졌다. 그 때마다 진지한 답변을 하다가, 좀 더 유쾌한 나만의 대응 방식이 없을까 고민하게 됐다. 책의 제목이 된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에는 결혼을 전제로 하는 세상의 낡은 잣대를 향한, 곽민지식 대응법이 담겨 있다.

“비혼자가 투사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해서 늘 안 좋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냥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인데 사회 제도에 투항하는 것처럼 보는 것도 비혼자에게 덧씌워진 이미지 중 하나니까요. 그래서 처음 떠올린 제목은 ‘그런 질문을 받지 않습니다’ 였어요. 비혼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고, 결혼을 했더라도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 수행에서 벗어나면 무수한 질문을 받으니까요. 여기서 좀 더 유쾌함을 더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나온 게 지금의 제목이에요. 무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런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 물어봐’ 하면서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게 우리끼리의 구호처럼 되어도 재밌겠다 싶어서 정하게 됐어요.”



‘비혼’ 하면 외로울 것 같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는 독립된 개인들이 주고받는 다정함으로 가득한 책이다. 작가는 ‘1인 가구 비혼’으로 시작한 기획이지만, 쓰다 보니 점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고 말했다. 하나의 모습만이 ‘비혼’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비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팟캐스트 <비혼세>에는 법적 결혼을 원하지만 할 수 없는 성소수자나 비혼과 결혼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 등 다양한 ‘비혼’의 사연들이 소개된다. 처음에는 왜 기혼자의 사연을 다루냐는 질문도 받았다. 그러나 작가는 소수자성을 가진 집단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다양한 사례가 가시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팟캐스트를 시작하고 다양한 사연을 소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 제 팟캐스트는 기혼자인 분이나 딸을 양육하는 분도 많이 들으시거든요. 우리 사회에는 결혼을 원해도 혼인신고가 안되는 사람도 있고, 비혼이지만 1인 가구가 아닌 형태로 가족이나 친구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요. 처음에는 ‘비혼’이라는 주제로 시작했지만, 진행하면서 시야가 많이 넓어졌어요. 청취자분들이 저를 업어 키운 거죠.(웃음)”



결혼과 사랑이 꼭 같은 것일까

사랑의 결말은 꼭 결혼으로 끝나야 할까?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에는 작가가 직접 겪은 K연애의 리얼리티도 등장한다. 결혼을 전제하지 않기로 합의했는데도, 연인의 부모님에게 애써 잘 보이려 한다거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하며 너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싶을 것이라는 넘겨짚음. 거기에 작가는 대답한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사랑의 크기가 작은 건 아니라고.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못 해주는 것이라고. 비혼 역시도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할 가치관이라고.

“사람들은 결혼을 기본값으로 정해두고, 정말 사랑하면 언젠가는 결혼하겠지 하잖아요. 그런데 제게 비혼은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하는 가치관이거든요. 이건 두 사람이 여행을 갈 때, 어디로 갈지 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호주에 가고 싶은 사람과 남미에 가고 싶은 사람이 같이 여행을 떠날 수는 없잖아요. 연애도 그래요.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건강하게 연애를 할 수 있죠. 여행이라면 나를 사랑하면 네가 같이 남미를 가줘야지 할 수 있지만, 결혼은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연애를 시작할 때, 이런 가치관을 밝히고 관계를 시작하려고 해요.”

물론 ‘파워 결혼주의자’로 평생을 살아온 가족들의 이해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소통 끝에, 오히려 ‘비혼’은 가족들과의 새로운 대화 주제가 됐다.

“나의 확실한 정체성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을 때, 좋게 넘어가려고 하면 그 순간은 모면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 가족은 말하는 걸 저만큼 좋아하거든요. 서로 답답하니까 의견이 다른 것을 계속 확인하고 물어보는 과정이 있었어요. 물론 평생을 기혼자로 산 부모님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건 쉽지 않죠. 저희 아빠는 아직 미련을 못 버리셔서 사위를 주려고 제일 비싼 술을 찬장에 두세요. 제가 작은 사위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해도 모르는 일이니 안 딴다고 하시거든요.(웃음) 그렇게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건 어렵지만, 그런 주제를 싸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 같아요.”

엄마 ‘쏘냐’는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딸 못지않은 입담을 자랑하기도 했다. ‘비혼’ 자녀를 둔 엄마로서, 그는 딸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세상에는 비혼을 택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웬만한 부모님은 서른을 훨씬 넘겨서 따로 사는 딸이 이번 주에 뭘 하고 살았는지 한시간 넘게 듣는 경험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저희 엄마는 방송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최근에는 뭘 먹었는지 세세한 정보를 다 알게 되는 거예요. 나중에는 ‘네 나이에 결혼 안 한 친구들이 주변에 이렇게 많다는 걸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엄마도 평생 기혼자로 살아오셨으니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보신 적이 없었던 거예요. 그걸 팟캐스트가 많이 도와줬죠.”



우리에게는 다양한 사랑이 필요하다

‘비혼’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아이를 싫어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다. 그러나 작가는 비혼을 하면서 어린이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고 말한다. 기혼자가 겪는 불합리함과 비혼의 입장을 모두 살펴보면서, 양육이 부모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조카에게 좋은 양육자 중 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곁에 있어 주었던 어린 시절의 어른들을 떠올리게 되기도 했다. 한 어린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무수한 어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비혼자에게 덧씌워진 이미지 중 하나가 아이를 안 좋아한다는 거예요. 조카를 예뻐하면 ‘애가 그렇게 좋으면 네 애를 낳아라’는 훈계를 듣고요. 그런데 한 사람이 자랄 때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조건 없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인물이 있다는 건 큰 이모한테서 배웠고, 잘한 것도 없으면서 기죽지 않는 면은 작은 이모한테서 배운 거였더라고요. 길을 잃어버렸을 때, 엄마가 올 때까지 같이 있어줬던 신발 가게 할머니도 떠오르고요. 그 많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고요.”

결국, 한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필요하다. 비혼 생활을 담은 에세이는 그간 애정을 쏟아왔던 대상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번아웃이 오는 순간마다 나를 잡아줬던 ‘최애’ 김이나 작사가와 김희진 선수, 이동봉사로 만난 반려견까지, 결혼과 연애로 포착되지 않는 사랑의 순간들이 일상을 지탱한다.

“책을 처음 기획할 때, 생각한 제목 중 하나가 ‘남편은 없고 최애는 있습니다’ 였어요. 덕질이 얼마나 비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지 꼭 말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가장 어렵게 쓴 원고가 ‘덕질’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너무 사랑하다 보니까, 어떻게 쓰면 될지 굉장히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많은 ‘덕질 메이트’들의 검토를 받고 완성했죠.(웃음) 마지막에 김이나 작사가님한테 추천사를 받았는데, 읽자마자 감동을 받아서 울었어요. ‘결국 이 책은 비혼이라는 탈을 쓴, 내가 나를 책임지고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써주셨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딱 그랬거든요.” 

‘고온의 사랑을 다루는 법에 대한 안내서’라는 김이나 작사가의 추천사처럼,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는 결혼을 택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필요하다. 인터뷰 내내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떠올린 생각이었다.





*곽민지

배우자 없이 태어난 이후 살던 대로 살고 있다. ‘비혼 라이프 가시화 팟캐스트, 비혼세’ 제작자 겸 진행자. 『걸어서 환장 속으로』 『난 슬플 땐 봉춤을 춰』 『미루리 미루리라』 등을 쓴 에세이스트 겸 칼럼니스트이기도 하고, 광고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모바일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자이기도 하다. 곽민아의 동생, 이준과 이솔의 이모, 맥주, 폴댄스, 여자 배구팀 그리고 고유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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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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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 “쉽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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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빠순이’었다. 아이돌부터 운동선수, 정치인까지 수많은 오빠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화려한 무대 위에 있어야 할 오빠들이 하나둘 신문 사회면의 주인공이 되었고, 뜨거웠던 사랑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는 유명한 시구가 내 이야기 같았다.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덕질’을 인생의 비타민 삼아 살아왔다는 최지은 작가의 이야기다.

너무 쉽게 남자를 사랑했던 시절을 지나, 다음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최지은 작가의 새 책 『이런 얘기 하지 말까?』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폐허가 된 자리를 돌아보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기울어진 구조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넘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다. 



쓸까, 말까 망설인 이야기가 많았어요

‘내가 사랑한 남자마다 모두 폐허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 문장에 반응하는 독자들이 꽤 많더라고요. 

이 문장에 반응한다는 건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았다는 거잖아요.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쓴 사람으로서 반응해 주시니 반갑지만, 좋아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웃음)

시를 패러디한 문장이잖아요. 어떻게 이 표현을 쓰게 됐는지 궁금해요. 

어느 날 제가 좋아했던 남자 연예인 중 한 명이 성범죄자가 돼서 뉴스에 나왔어요. 그때는 그분을 좋아하지 않을 때였지만, 그래도 씁쓸하더라고요. 한때 나에게 매력적이었던 사람이 알고 보니 그렇게 멋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니까요. 비슷한 시기에 연예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남성 명망가들의 안 좋은 뉴스가 연달아 터졌고, 그러다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말 그대로 제가 좋아했던 세계가 다 폐허가 된 거니까요.

작가님과 같은 문제의식이 있으면서도 ‘덕질’을 멈추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죄책감을 느끼거나 내적 갈등을 겪는 분들이 있죠. ‘페미니스트라면서 왜 그런 남자를 좋아해?’라는 비난을 받을까 봐 스트레스받을 수도 있고요. 비난하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하지만, 개인의 모든 욕망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제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저 각자가 더 잘 견딜 수 있는, 딜레마가 적은 방향을 선택하는 게 최선이지 않나 싶고요. 

책을 끝까지 쓸 수 없을 것 같았다고요. 이유가 있나요?

쓸까, 말까 망설인 이야기가 많았어요. “이 원고는 빼주세요”, “이 이야기는 하지 말까요?” 같은 말을 정말 많이 했는데요. 독자를 가늠하기 어려웠거든요. 첫 책이 미디어 속 여성 혐오 이야기이고, 두 번째 책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여성들의 이야기라면 이 책은 저의 이야기잖아요. 지금 덕질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른바 ‘탈덕’한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을까 싶어서 걱정했어요.

걱정과 달리, 재미있게 읽었어요. 더 정확히는 웃픈 마음이었는데요. ‘이런 얘기 하지 말까?’라는 질문에 ‘계속해주세요’라고 답하고 싶었어요. (웃음)

이번 책을 내고 나서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안도했어요. 사실 이 책을 내기 전까지, 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거든요. 회사를 안 다닌 지 오래됐고, 예전에 다닌 회사도 일반 직장과는 조금 다른 곳이었기 때문에 내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책을 내고 난 후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든가 공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죠.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좋았어요. 

써야 풀어지는 마음이나 생각이 있잖아요. 혹시 이번 책을 내면서 글로 써서 특히 좋았던 이야기가 있다면요? 

덕질 이야기죠. 부제가 ‘열정적 덕질과 그 후의 일상’이지만, 사실 덕질 이야기가 많지 않은데요. 책의 분량과 관계없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 번쯤 정리하고 싶었어요.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덕질은 제 삶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거든요. (웃음) 내가 과거에 왜 수많은 남성을 덕질했는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사랑하던 덕질을 그만두게 됐는지를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쓰고 나니 부끄럽긴 하지만, 하길 잘했다 싶어요. 덕질을 그만둔 사람으로서 앞으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던 건 아니에요

말씀하신 대로 덕질 이야기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일상 이야기가 더 많아요.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날씬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고요. 어떤 순간에 그런가요? 

지금처럼 인터뷰할 때 그렇고요. 옷 가게에서 ‘이거 안 들어가는데요’라고 말해야 할 때도 날씬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웃음) 생각해 보면 대체로 사람들 앞에 서야 할 때 날씬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 미디어에 계속 노출되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감이 얼마나 심하겠어요. 다행히 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이 많지 않아서 나를 덜 미워할 수 있게 됐지만, 회사에 다니거나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외모에 대한 강박을 버리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코르셋을 거부하는 속도도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마다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결혼하고 남편이 생긴 후로, 코르셋을 버리는 일이 더 수월해졌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복잡한 심경이었다고요.  

결혼하고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에요. 더는 이성애 시장에서 평가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있어요.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한 사람하고만 사랑을 주고받으면 된다는 사실이 저를 편하게 해주고요. 그런데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게 자존심 상하는 거예요. 책에서 이민희 작가님이 ‘남편과의 관계 안에서 나의 외모 강박감이 줄어드는 게 기쁘지만, 마음이 복잡하다’고 하신 것처럼요. 

어떤 복잡함인지 알 것 같더라고요. 아주 모순적인 일이잖아요. 저는 왠지 모를 굴욕감이 들기도 했는데요. 어쩌면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건 나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말 그렇죠. 최대한 모순을 줄이고 싶지만, 누구도 완벽하게 살 수 없는 것 같아요. 2018년 즈음부터 탈코르셋 운동이 대중화됐잖아요. 저도 그전까지는 페미니스트이지만 멋있고, 세련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거든요. 남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기보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리베카 솔닛 북 토크 사회 보는데 메이크업 받고 그랬던 거죠. (웃음)

하이힐도 신고 가셨다고요. (웃음) 엄청 솔직하게 쓰셨더라고요. 그날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그날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더라고요. 자주 생각했어요.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하고요. 사실 오늘도 머리를 드라이하고 왔는데요. (웃음) 리베카 솔닛 북 토크 이후로 깨달은 것 같아요. 기존의 공식을 따르지 않아도,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요. 머리를 꼭 길러야 할 필요가 없구나부터 시작해서 통이 넓은 바지가 더 편하구나 등등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더 좋아하는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100% 확신을 가지고 하는 선택은 없다’는 문장이 좋았어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선택하면서 했던 생각이라고 했는데 사실 모든 선택이 그런 것 같아요.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에도 썼는데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면서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던 건 아니에요.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인생의 중요한 무엇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있었죠. 지금은 그런 부대낌이나 흔들림이 많이 줄었어요. 어떤 선택을 하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덜 흔들리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깊이 고민하고 선택하면 ‘이 선택이 맞았구나’하고, 더 빨리 100%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 같고요.



‘어른 여자’는 환상일지 모르지만 

젊은 여성과 나이 든 여성의 로맨스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여자 선배를 숭배했다가 실망하고 관계가 소원해졌던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왜 젊은 여성들이 숭배할 대상을 찾아다니는 걸까요? 

삶이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전까지는 다들 혼란스러우니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존재를 찾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남자는 위험하니까 본능적으로 여자 선배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같은 여자로서 어려움을 헤쳐나간 사람이라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저 사람은 이제 나처럼 실수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갖추고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숭배하는 거죠.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를 선망함으로써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나이는 들었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아서 혼란스러울 때 어른처럼 보이는 여자 선배를 만나는 게 큰 위안이 됐어요. 그런데 누구든 완벽하지 않잖아요. 덕질도 마찬가지지만, 누군가를 숭배할 때는 그 사람이 나에게 보여준 것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주지 않은 무엇까지 내가 만들어내거든요. 내가 만들어 놓은 판타지를 좋아하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내가 숭배하던 여자 선배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그때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실망하고, 멀어지기도 하고요. 노라 에프론의 책을 읽고,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걸 알고 놀랐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나만 경험했던 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반갑더라고요. 

책을 쓰고 나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또 놀랐는데요. 그때 알았죠. 여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한 번쯤 겪는 일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때 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줬던 분들은 ‘얘는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나한테 얼마나 친절했는지를 생각하면 복잡한 마음 끝에 정말 감사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지금 약간 울컥하신 거 같은데요.

이상하게 저 글을 다시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고마운 마음에서 나는 눈물일까요?

미안함도 있죠. 관계가 오래 유지되기도 하지만, 점점 멀어지다 끝나기도 하잖아요.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하고, 끝날 때가 많고요. 관계가 끝날 때는 내가 받은 게 얼마나 고마운 건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복잡했어요.  

그 선생님께서 이 글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이미 보셨고요. (웃음) 사실 쓰면서 많이 고민했어요. 글 속에 등장하는 선생님이 제 글을 보실까 봐요. 그런데 책 나오고 얼마 안 돼서 글 잘 봤다고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어쩌면 어른 여자라는 건 환상일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공감하는 동시에 그래도 이 선생님은 나보다는 계속 어른이고, 항상 내 앞에 있는 사람이겠구나 싶었어요.



별것 아닌 이야기, 계속할 것 같아요

어머니 이야기도 많이 나오더라고요. 

쓰고 보니 엄마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더라고요. 세 번 중에 한 번은 한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제가 엄마랑 아주 친한 딸은 아니에요. 어떤 면에서는 저와 가까운 여자 중에 나랑 가장 다른 사람이어서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어머니 이야기를 계속 한 건 왜일까요?

중요한 사람이니까 저도 모르게 계속하지 않았을까 싶고요. 나이가 드니까 엄마가 얼마나 저한테 최선을 다했고, 개인으로서도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게 됐어요. 왜냐하면 저에 관해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된 게 거의 없거든요.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제가 하는 일을 부정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으셨어요.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그게 아주 고맙고 대단한 거더라고요. 

대단하시네요. (웃음)

제가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안 계시면 제 인생에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부모님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고 많이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엄마 이야기를 많이 쓰게 된 것 같고요. 

저자소개 마지막 문장에도 눈길이 갔어요. ‘본의 아니게 아는 게 진심이 되는 편이다’인데 어떤 의미인가요?

많은 일을 하면서 살지는 않지만, 가능한 마음이 움직이는 일들을 하는 것 같아요. 비장하게 결심하면서 무언가를 하는 편은 아닌데 그게 무엇이든 하려고 하면 마음을 다하게 돼요. 예전처럼 누군가를 무작정 숭배하지는 않지만,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하고요.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이나 그것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책의 마지막 문장이 재미있어요. 문장이 완결되지 않은 채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끝나는데요. 그리고 다음에 어떤 내용이 이어질까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 이야기가 독자에게 어떤 의미와 재미를 줄 수 있을지 계속 의심하면서 썼다고 했잖아요. 책을 내고 나서 별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주고 공감하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요. 이제는 조금 제 글을 믿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편한 마음으로 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이런 얘기 하지 말까?
이런 얘기 하지 말까?
최지은 저
콜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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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우리는 질문을 잘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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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소설가를 창의적이라고 여길까. 소설가 김중혁은 자신이 종종 받아온 이 질문, “창의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나요?”에 대해 고민하다 자신이 지금껏 해온 방법을 정리해 책으로 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든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는 그러므로 소설가 김중혁의 첫 번째 자기계발서인 셈. ‘책을 찢어서 벽에 붙이자’, ‘무생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자’, ‘날마다 하늘 사진을 찍어 보자’ 등 일상을 색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 100가지를 소개한 작가는 “작가 생활을 하던 20년 동안 혼자 놀았던 방식을 거의 그대로 다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어떻게든 맨 땅에서 무언가를 지어냈기 때문에요. 이런 과정들을 모아서 질문하시는 분들께 보여드리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어요.”라는 소설가 김중혁. 그러니까 이 책은 나를 질문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이 계단이었으면 좋겠어요. 책을 딛고 조금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계단도 일정한 계단이 아니고요. 어떤 단은 높고, 어떤 단은 낮아서 미리 짐작하기 어려운 계단을 상상했어요. 한 발 한 발 높이를 가늠하고 발을 내딛는 그런 계단 같은 책이길 바라요.”



사소하고 가벼운 창의력

책의 뒷표지는 물론 책의 입구에도 ‘이 책을 사용하는 방법’을 소개해 두었어요. 독자에게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시작하는 책이에요. 

왜냐하면 이 책은 자기계발서니까요. 한동안 자기계발서를 많이 봤어요. 무슨 내용이 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너무 재밌게 봤고, 동시에 이런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창의력에 관심이 많아서 그에 대한 걸 써보면 어떨까 싶었죠. 제 생각에 창의력이란 매일 새로워지면서 재미있게 무언가를 도모하는 것 같거든요. 일상에서 사소하거나 가벼운 창의력은 늘 올 수 있는데요. 많이들 그걸 놓치는 게 아닐까 생각했죠. 책에 소개한 것들은 제가 실제로 다 하고 있는 거예요. 해봤거나 지금도 하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이걸 보여드리면 저라는 사람을 통해 창의력에 대한 걸 얘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100가지 항목 모두 작가님께서 실제로 하던 것들이라고요? 

책을 쓰기 위해서 새로 구상한 건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365가지를 적어보고 싶었으나 능력의 한계로 그렇게 하진 못했고요.(웃음) 다만 여기 소개한 100가지를 반드시 100일에 걸쳐 하나씩 다 해보라는 얘기는 아니거든요. 이 중 각자에게 맞는 것도, 안 맞는 것도 있을 텐데요. 맞는 게 있다면 그것을 삶의 루틴으로 만들어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때문에 작가의 말 대신 굳이 책 사용하는 방법을 넣게 됐죠.

새삼 자기계발서를 읽어보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작가적 호기심 같은 건데요. ‘내가 이쪽은 빼먹었네’ 생각했어요. 얕고 넓은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찾아보니까 정말 유명하다는 책들 중에도 안 본 책이 꽤 많더라고요. 그런 책에 또 무언가가 있겠다, 생각해서 보기 시작했어요.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라면 역시 ‘창의력’과 ‘새로움’일 텐데요. 이런 개념이 모든 개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강의를 가면 “창의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아이를 창의적으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등의 질문을 많이 하시죠. 그럴 때 일단 드는 첫 번째 생각은 ‘내가 창의적인가?’였어요. 사람들이 소설가를 창의적으로 본다는 게 저는 신기했거든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소설 자체를 창의적인 과정으로 생각을 하는구나, 그러면 나도 할 말이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20년 동안 어떻게든 맨 땅에서 무언가를 지어냈기 때문에요. 이런 과정들을 모아서 질문하시는 분들께 보여드리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 뒤, 책을 쓰면서부터는 정말 즐거운 일들이 많고 사소하게 놀랄 일들이 많은데 우리가 약간 둔해졌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요. 저는 “원래 그래”라는 말을 싫어해요. 그러는 순간 감각이 둔화되면서 창의적인 세포들을 죽여가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 감각을 일깨우자는 의도를 담은 거예요.

한편 책을 읽기에 앞서 미리 목차를 읽지는 말라고도 하셨는데요. 

사실 목차 자체를 빼고 싶었어요. 제가 구상했던 책의 활용법은 ‘오늘은 뭐 할까?’ 하고 아무 데나 펼쳐서 그날 걸리는 걸 해보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이 책에 가지고 있는 버릇 중 하나가 목차를 보고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게 읽으면 대체로 완독을 할 수가 없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이 책은 그냥 아무 표지나 펼쳐서 볼 수 있게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래도 목차는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서 그나마 한눈에 잘 안 들어오도록 편집해서 실었어요. 창의력이라는 건 순차적으로 쌓이는 것이기도 한데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임무가 주어졌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 한계에 부딪혔을 때 돌파하는 방식, 혹은 문제를 듣고 답을 내려고 머리를 쓰는 방식 같은 것이야말로 창의력에는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때문에 책을 목차대로 읽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창의력의 핵심은 본인을 믿는 것 

따라하고 싶은 신선한 내용이 아주 많았어요. 그 중, 눈을 감고 지구본을 돌려서 손가락으로 찍었을 때 나오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자고 한 부분은 요즘 시절에 특히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직접 가지 않아도 그곳의 음식, 음악, 책 등을 조사해보라고 했죠. 시선만 조금 달리하면 새롭게 일상을 볼 수 있고 그런 방식의 여행도 떠날 수 있는 거예요. 

워낙 음악, 미술, 문학, 영화 같은 것들을 좋아하다 보니까 터득하게 된 여행법이에요. 예를 들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나라에서 나온 영화를 보면 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이 영화 속에서 펼쳐지죠. 그 풍경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 만들었으니까요. 그걸 보는 것만으로 저는 여행 같거든요. 또 이미 다녀온 곳도 영화나 책으로 다시 보면 환기가 돼요. ‘맞아, 저기 저런 게 있었지, 저기를 돌면 뭐가 있지’ 떠올릴 수 있죠. 이것도 추억을 환기하는 좋은 방법이잖아요. 지금은 실제로 가봤느냐 안 가봤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곳을 내가 어떤 감각으로 느꼈는지가 더 중요해진 것 같고요. 그렇다면 영화도 굉장히 좋은 여행법일 수 있겠다, 싶어요.

영화뿐 아니라 그곳의 음식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죠. 유튜브를 봐도 되고, 요즘은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유튜브를 아주 많이 보진 않는데요. 일단 자료 찾을 때 자주 보게 돼요. 현지 분위기를 알려면 다큐멘터리나 그쪽에서 찍은 영상을 보는 게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또 하나가 요리법이죠. 영상으로 요리를 보여주기가 제일 쉽다고 생각했는지 유튜브를 보면 전 세계 요리법은 다 올라와 있는 것 같아요.(웃음) 언어를 몰라도 영상을 보면 어떤 식으로 조리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따라 해볼 수도 있고, 여행하듯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도 있을 거예요. 

‘억지로 하는 일 목록’을 적어보자는 항목은 작가님께서 “추천한다”고 쓰셨거든요. 

보통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많이 만들죠. 저도 그렇고요. 저는 목록 만드는 걸 되게 좋아해서 모든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곤 하는데요. 특히 무엇을 하면 좋은 이유와 하지 않으면 좋은 이유, 이런 식으로 목록으로 비교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요. 억지로 하는 일 목록 적어보기는 그렇게 나왔어요.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 절대 하면 안 될 것 같은 일과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처럼 상반된 개념들을 가지고 목록 만드는 놀이를 한 적이 있는데요. 하다 보면 우선 재미도 있고요.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돼요. 목록을 쭉 보면 거기에 어떤 일관성 같은 게 보이거든요.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일 수도 있고요. 그게 목록의 장점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나날이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럴 것 같아요. 창의력의 핵심은 본인을 믿는 것 같거든요.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아야만 거기서부터 뭐가 나오니까요. 그래서 책에 등장하는 항목들은 내가 누군지를 알도록 하는 질문들이 많아요. 이 질문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었네’ 깨달으면 ‘이런 사람이었는데 왜 그동안 내가 잘할 수 있고 재미있어 하는 걸 안 했지?’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맞아요, 이 책은 다양하게 질문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제일 중요한 건 사실은 질문이죠. 사실 우리가 질문을 잘 못하잖아요. 인터뷰를 할 때도 상대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질문이 더 많아지거든요. 저도 그 때문에 질문하는 걸 정말 중요하게 생각을 했는데요. 질문을 잘하는 게 좋은 답변을 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평소에도 질문을 잘하려고 노력을 해야 해요. 그런데 그 노력을 많이 안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질문을 잘하기 위해서 늘 한쪽을 비워두고 있어요. 제가 ‘노션’이라는 프로그램을 쓰는데요. 4단 페이지 구성을 해요. 그 중 오른쪽 맨 끝에는 영화를 보든, 책을 보든, 뭘 하든 간에 질문거리를 기록하는 공간으로 비워두죠. 질문을 하겠다고 생각하면 뭐든 약간은 다르게 보이거든요. 이렇듯 비워 두는 페이지에 질문거리를 채우는 것처럼 이 책을 통해서도 그런 질문거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흥미로웠던 것 중에 1초씩 매일 영상 찍기가 있어요. 작가님은 이 작업을 8년째 하고 계시다고요? 

따져보니 8년이 아니더라고요. 2012년부터 해왔으니까 올해로 11년 차가 됐어요. 매일 뭘 찍고 있는 거죠. 하루에 1초지만 그 1초를 품고 있는 상황, 주변의 느낌 같은 것들까지 다 기억이 나고요. 그래서 실은 1초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저장하는 방법 같은 느낌이 들죠. 또 오늘의 1초를 정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심사숙고와 편집, 순위 경쟁이 필요해요.(웃음) 어떤 날은 너무 박빙일 때도 있고요. 어떤 날은 진짜 아무것도 없기도 해요. 심지어 사진밖에 찍은 게 없기도 하죠. 어쨌든 그렇게 만든 영상들을 가끔 보면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고, 계절의 변화도 보여서 재미있어요.

아주 귀한 나만의 데이터잖아요. 정말 멋진 아이디어 같아요.  

이건 실제로 아이디어가 있는 거예요. 1초만 찍는 어플도 있고요. 영화에서도 잠깐 나온 적 있어요. 이런 문명의 이기를 활용해서 시간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찾아보면 많으니까 꼭 해보세요.



책이라는 베이스캠프

책을 보면 소설이나 다른 콘텐츠 보다 영화 레퍼런스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해요. 그 점이 눈에 띄더라고요. 

가장 쉬워서 그런 것 같아요. 설명하기도, 접근하기도 쉽죠. 책은 아무리 사전 설명을 해도 접근해서 감상하고 느끼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요. 그에 비해 영화는 즉각적이어서 쓰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책을 쓰는 입장이지만 꼭 책을 봐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유튜브나 영화 속에서도 느끼고,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면에서는 빨리 전달할 수 있는 건 훨씬 좋은 것 같고요. 예를 들어 『오만과 편견』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같은 건 영화로 먼저 보면 훨씬 쉬울 수도 있어요. 물론 때로는 반대일 수도 있지만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책에 영화를 좀 더 많이 언급한 것 같아요.

말씀을 들으니 생기는 궁금증인데요. 그렇다면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에 담긴 이야기를 책이라는 형태로 내보인 것은 어떤 이유였나요? 책의 장단점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아날로그 세대였기 때문에(웃음) 전자책으로 너무 재미있게 본 책은 꼭 종이책을 사더라고요. 종이책이라는 실물로 내 곁에 두고 여기에 뭔가를 해보는 게 너무 좋아요.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에 한 이야기도 유튜브로 할 수도 있고, 매일 팟캐스트로 하나씩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책이라는 베이스캠프가 있어야만 안정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나아가 책에 뭔가 낙서도 했으면 좋겠고, 책을 한 장씩 찢어서 갖고 다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책으로 내게 된 거죠.

‘책을 찢어서 벽에 붙이자’라고 한 항목도 떠오르네요. 전 못할 것 같아요. 상처 받았어요.(웃음) 

<대화의 희열>에 같이 출연했던 신지혜 기자님도 책을 보시고 그 항목은 절대로 못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럼 내가 책을 한 권 더 선물할 테니까 찢어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책을 찢는 게 왜 그렇게 나쁠까요? 빅터 파파넥이라는 디자이너를 좋아하는데요. 저는 그분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두 권 사서 한 권은 다 낱장으로 찢었어요. 찢은 책을 벽에 쫙 붙여놨거든요. 이렇게 붙여 두면 늘 책을 보는 느낌이 있어요. 그 느낌 때문에 정말 좋아하는 책 몇 권은 찢는 거죠. 『랩 걸』도 그렇게 했었고요. 특히 그림이나 사진이 예쁜 책들은 그렇게 하면 정말 좋아요. 책은 그렇게 써도 되지 않나 생각해요. 물성이 있으니까요. 물론 한 권을 더 사야 한다라는 조건은 있습니다.(웃음) 

이 책은 글쓰기나 소설 쓰기의 팁도 주는데요. 그 중에서 “글을 쓰려면 지하 8층에 뭐가 살고 있는지 가 봐야 한다.(중략) 거기에서 맞닥뜨린 녀석에 대해서 글을 써야 한다”(162-163쪽)고 하셨거든요. 

글쓰기를 하시는 분들은 아마 다 공감이 될 것 같은데요. 글을 쓰다 보면 좀 피하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이 얘기는 쓰지 말자, 이 얘기는 쓰면 내가 아플 것 같아, 하는 식으로 피하게 되는 게 있는데요. 실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봐야만 글쓰기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계속 피하기보다는 한 번 내려가 봐야죠.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썼던 것도 글쓰기가 위험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거든요. 글쓰기는 자신을 포장하기에 너무 좋은 도구여서 내가 아주 좋은 사람, 멋있는 사람, 쿨한 사람인 것처럼 하기가 좋아요. 그렇지만 포장하는 기술을 맛들이면 계속 포장만 하게 되겠죠. 그걸 유의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도 한 거고요. 같은 의미로 지하 8층을 써야 한다고 말한 거예요. 진짜 내 속마음, 잊고 있던 혹은 숨겨두려고 했던 감정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더 좋은 글쓰기 같거든요.

“나는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잡(雜)’이라고 생각한다.”(183쪽)는 문장이 중요하게 읽히는데요. 다양한 것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저를 변호하는 말이기도 한데요.(웃음) 이제 창의력이라는 건 많은 분들이 얘기하듯 연결시키는 게 보다 중요하고요. 이럴 때는 얕고 넓은 게 좁고 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학문을 하시는 분들은 깊이 파서 끝을 봐야겠지만 어떤 것을 도구로 이용해서 나를 발전시키고 싶은 사람은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양한 방면에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이것도 저것도 해봤던 감각을 가지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연결되는 지점이 생길 때가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잡스럽다는 건 지금 시대에서는 아주 중요한 덕목 혹은 필요한 감각 같은 게 아닌가 싶어요. 최근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면서도 느꼈는데요. 그 영화가 약간 한 편의 잡지처럼 만들어졌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영화도 이렇게 구성할 수 있구나, 싶었고요.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관심사들을 계속 가지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펼쳐질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나의 중요한 가치로 ‘잡’을 생각한다면 매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늘 좋은 선택만을 하지 않더라도 의미가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실패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고요. 

저는 지금까지 어떤 제안이 왔을 때, 아주 이상한 게 아니면 어쨌든 하려고 했어요. 그랬던 입장에서는 안 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하고 망하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요. 하고 나면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있지만 안 하고 생각만 하는 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예전에 오정희 선생님께서 “실패라고 해봤자 사소한 실패인데 뭐 그렇게 두려워하냐”는 식의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우리가 보통 인생을 걸고 뭘 한다고 하지만 사실 인생을 걸지는 않죠. 인생을 걸고 하는 일이 실제로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실패해도 어느 정도는 괜찮은 일을 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그 실패가 큰 실패가 아니에요. 막상 현실에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성공과 실패는 없다고 생각해요. 





*김중혁

2000년 <문학과사회>에 중편소설 「펭귄뉴스」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엇박자 D』로 김유정문학상을, 『1F/B1』으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요요』로 이효석문학상을, 『가짜 팔로 하는 포옹』으로 동인문학상을, 『휴가 중인 시체』로 심훈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1F/B1 일층, 지하 일층』,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나는 농담이다』 『뭐라도 되겠지』, 『대책 없이 해피엔딩』(공저), 『모든 게 노래』, 『메이드 인 공장』, 『바디무빙』, 『무엇이든 쓰게 된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공저), 『탐방서점』(공저), 『질문하는 책들』(공저) 등이 있다. 앤솔러지 『놀이터는 24시』에 「춤추는 건 잊지 마」를 수록했다.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
김중혁 저
자이언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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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보나 작가 “생명에 어떻게 계급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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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로 독자의 주목을 받은 박보나 작가. 그는 두 번째 책을 써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에 억압받는 수많은 생명을 떠올렸다. 전염병과 기후위기, 환경오염이 세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지켜보면서 필연처럼 하게 된 생각이다.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에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넘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름을 빼앗겼거나, 이름조차 없는 존재를 부르기 위해 힘쓰는 미술가들의 외침이다.



우리 곁의 모든 존재와 ‘옆으로 나누는 대화’ 

작가님의 책은 제목부터 인상적이에요. 제목을 짓는 비결이 있나요?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좋아하는 전시의 제목을 차용한 문장이라서 금방 지을 수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주제가 ‘생명’인 데다 모든 글을 아우르는 제목을 붙이려니 어려웠어요. “이 세상에 남아돌거나 소외되어도 괜찮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말이 너무 좋아서, 그 느낌을 제목으로 가져가고 싶었죠. 김춘수의 시 ‘꽃’을 보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이미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생각의 이동을 제목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번 책에서는 착취와 계급, 환경문제 등을 다루는 미술작품을 통해 지구 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죽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였어요. 출간을 제안받았을 당시, 사무엘 베케트의 『몰로이』를 읽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조약돌을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옮기는 장면이 있어요. 거기서 문득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할 때 호주머니에 돌을 잔뜩 넣고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게 떠올랐어요. 전혀 상관없는 두 장면이지만, 창작자로서 ‘혹시 버지니아 울프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속 한 장면을 생각하고 돌을 넣었을 수도 있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출판사 담당자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하다가 책의 주제가 ‘죽음’으로 잡혔는데요. 워낙 큰 주제라 글을 쓰기가 어렵기도 했고, 죽음과 생명은 거울처럼 이어지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생명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었어요. 

코로나19도 주제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맞아요. 최근 미술계에도 인류세, 환경 등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죠. 이제 환경에 대한 사유는 단순히 자연보호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의미하게 된 것 같아요. 또 책을 쓰는 와중에 에콰도르 출신의 현대미술 작가 ‘오스카 산틸란’과 협업을 했는데요. 이 친구의 작업 중, 젖소의 우유를 입에 머금고 걷다가 길고양이에게 전해주는 퍼포먼스가 있어요. 이러한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생명을 서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개념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지구 위의 삶을 좀 더 지속해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옆으로’ 얘기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7쪽)”고요. 옆으로 나누는 대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이 책을 쓸 때 영감을 준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가 악마는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의 경쟁’이라고 이야기해요. 착취와 소외를 일으키는 사악한 악마를 등지고,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들과 손잡고 나아가는 방식이자 태도를 ‘옆으로 뻗어나가는 대화’라고 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환경보호도 마찬가지죠. 풀이나 나무를 더 심는 식의 환경보호는 중산층의 정원 가꾸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이러한 행동에 앞서 구체적인 질서와 생각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는 관점에서‘옆으로’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외된 이웃, 식물, 동물, 사물 등 모든 것을 포함해 옆으로 뻗어나가는 태도가 중요한 거죠.



‘생명’뿐 아니라 ‘비생명’에까지 뻗어 나간 이야기들이 특히 흥미로웠어요. 

이제 미술계에는 인간 중심의 주체에서 타자를 보는 관계를 넘어서서 무엇이든 객체로 동등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조각에 대한 담론이 그렇죠. 과거처럼 인간이 사물을 깎아서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시각이 아니라 사물 자체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거든요. 인간 중심이 아닌 것으로 주인공을 바꾸었을 때 또 다른 시각을 갖게 되는 새로운 세계관이에요.

“돼지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가르쳐주려고 이 세상에 온 거 같다”는 작가님의 한탄에 동물에 대한 작업을 하는 조은지 작가가 “돼지는 그냥 잘 살려고 태어났지, 인간을 위해 뭘 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는 대목이 떠오르네요(웃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는 실수를 늘 반복하게 돼요.

저도 그래요. 여전히 반려동물을 보면 ‘이 아이들이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왔다’고 생각할 때가 있죠. 동물도 나름의 삶이 있고, 취향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간의 시각에서 그들의 삶을 해석하게 되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동물들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왜 내 밥은 조금밖에 안 주고, 매일 TV만 보고 있나’라면서요(웃음). 대단한 노력을 하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기억하려고 해요. 지구도, 동물도, 물건도 무엇 하나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죠.

어떤 장면을 볼 때 특히 슬픈가요? 

생명과 비생명에 관계없이 무엇이든 착취당하거나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볼 때요. 착취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자유와 평등을 빼앗는 거잖아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보면 성 착취, 노예, 동물학대 등의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요.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버는 인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차라리 가난한 게 자랑스럽고 다행인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 사회에 사람이 사람을 착취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동물, 식물, 나아가 지구상의 모든 게 착취당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이게 모든 걸 초토화시키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비슷한 맥락으로 작가님의 작품 <코나키나 블루 1>을 보며 서늘한 감정을 느꼈어요. 휴양지에서 들을 수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소리의 이면에 그 소리를 만들기 위해 손이 빨갛게 부어 오르도록 찬물을 휘젓는 노동자의 모습이 있었죠. 

온종일 미술관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 중에는 미술 행사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분들이 많아요. 휴가지에서도 마찬가지죠. 예컨대 당나귀 등에 올라타 경치를 구경하는 관광상품을 보고 그저 순수하게 ‘좋은 경험’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어요. 이런 이면들에 대해 날을 세워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고기도 잔인한 도축 과정은 생략한 채, 슈퍼마켓에서 예쁘게 포장된 모습만 보잖아요. 불편하다는 이유로 안 보는 게 최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이면을 알고 나면 더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죠. 안 보고 싶은 순간에도, 감춰진 고통이 보이니까요.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세계 정상들을 향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걸 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의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도 많은데요. 방법을 모른다고 외면한 채 아무 것도 바꾸지 않으면 끝은 선명해요. 환경운동가도, 동물보호 활동가도 아닌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불편해도 바라보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책을 썼어요.



책임감을 나누어 가질 수 있기를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전공을 바꿔 조형예술을 공부하셨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글을 쓰고 싶어서 영문학과에 갔는데, 학부 수업이 생각과 많이 달랐어요. 그러던 중 신문방송학을 복수전공하면서 아이디어를 광고 등으로 시각화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죠. 아빠가 미대를 나오셔서 막연한 동경도 있었고요. 문득 미술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덜컥 미대에 붙었죠. 갑작스럽게 시작된 일이었어요. 원래 뭘 바꾸거나 결정할 때 오래 고민하지 않는 편이에요.

작가님의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미술에세이임에도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처음 글을 연재한 매체가 신문이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희 엄마가 신문을 잘 읽으시거든요. 학력이 높지도, 독서를 많이 하지도 않는 엄마가 읽고 이해해야 하는 글이라고 생각하니 쉽게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미술의 문턱이 높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져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건 비평과 번역의 언어로 글이 쓰여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현대미술의 접근성을 높이고 싶다는 약간의 사명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미술작업을 할 때도 그런 사명감이 있으세요? 

아니요(웃음). 쉬운 작업이 꼭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작업은 문이 여러 개라서 어느 문으로 들어가든 가져갈 수 있는 게 있는 거예요. 글의 영역에서는 ‘시’가 그렇죠. 어느 날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반면, 어느 날은 수많은 의미를 찾게 되잖아요. 그래서 미술 작업과 에세이 쓰기는 서로 다른 태도로 작업을 하게 돼요.

“내일은 나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이 폭력적인 속도와 착취의 구조에서 벗어나 한껏 반짝였으면 좋겠다. 그 빛이 환하게 밝힐 푸르른 지구의 미래가 미리 눈부시다.(172쪽)”는 마지막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희망에 방점이 찍혔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막연한 희망이나 긍정적인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요. 약간의 책임감을 나누어 갖고 싶었어요. 미술가는 예쁜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여러 관점을 작품으로 펼치는 사람이거든요. 생명과 지구 관점에 있는 작품들을 함께 보면서,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짐을 여러분과 나누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박보나

박보나는 영상이나 사운드, 퍼포먼스와 텍스트를 결합해 예술과 노동, 역사와 개인의 서사에 대한 상황을 만드는 현대미술작가다. 2019년 아시아 태평양 트리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9년에 예술에 대한 에세이집 『태도가 작품이 될 때』를 출간했다.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
박보나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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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황정은, 오은 "읽고 쓰고 말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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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오은 시인, 황정은 소설가 

2021년 7월 말, 황정은 작가에게 메일을 썼다. <책읽아웃>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제안. 반드시 수락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바람만 가득했을 뿐. 며칠이 지나 답장이 올 거라 예상했는데 이튿날 아침, 답장이 왔다. “부담이 크고 걱정도 됩니다만 제가 하고 싶습니다.” 뜻밖의 빠른 회신이었다. 후에 들어보니 황정은 작가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했다. 문득 오은 시인에게 받은 답장이 떠올랐다. 2018년 3월이었고 오은 시인 역시 이튿날 아침, 수락 메일을 보내왔다. “여러 가지를 고민해봤는데, 즐겁게 하면 즐거운 팟캐스트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손 내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잘해볼게요!” 이렇게 두 사람은 〈책읽아웃〉 진행자가 됐다.


방심이 터지는 순간, 몰입하는 순간

두 분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공통점을 떠올려봤어요. 첫째, 이름에 ‘은’이 들어간다. 둘째, 잠들기 직전의 시간을 좋아한다. 셋째, 메일을 짧게 쓴다.

황정은 : 업무 메일은 짧게 씁니다. 그거 읽는 것도 일이잖아요.

오은 : (웃음) 본론은 만나서.

아, 중요한 공통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책읽아웃〉의 게스트로 출연하신 후에 진행자가 되셨어요. 황정은 작가님은 『연년세세 年年歲歲』를 출간하셨을 때 ‘오은의 옹기종기’에 출연하셨어요.

황정은 : 2020년 겨울이었죠. 팬데믹 때문에 집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던 때였어요. 멀리 나갔다돌아오는 일이 사라지니까 사람이 더 편협해지는것 같고, 낯선 사람을 만난 지도 너무 오래되어서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나가고 싶었어요. 〈책읽아웃〉을 제작하는 분들이 녹음실에서 친절하게 맞아줘서 고마웠습니다.

〈책읽아웃〉 진행자가 되기 전에도 방송을 들으셨나요?

황정은 : 게스트가 출연한 방송을 골라 들었어요. 구병모 작가님과 박상영 작가님, 제현주 작가님이 출연하신 방송을 들었고요, 제현주 작가님 목소리가 좋아서 두 번 들었어요. 이길보라 감독님이 출연한 에피소드도 들었고 그 방송 덕분에 감독님의 책을 읽고 영화도 봤습니다.

두 분은 진행자이면서 청취자이기도 하시죠. 서로의 방송을 어떻게 듣고 계신가요?

오은 : 일단 황정은 작가님의 목소리 톤을 좋아해요. 그리고 따뜻함과 냉정함이 다 있으셔서 참 좋아요. 저는 녹음하다 보면 감정에 휩쓸릴 때가 많아요. 동화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황정은 작가님의 방송을 들으면 평정심이 느껴져요. 게스트들이 작가님 앞에서는 그냥 말을 편하게 털어놓는 느낌이랄까요? 내가 이 사람 앞에서는 중요한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된다,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하세요.

황정은 : 제 진행에서 평정심을 느끼셨다니 놀랍습니다.(웃음) 저도 자주 휩쓸려서 애를 쓰거든요. 방송을 모니터링하면 게스트분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말문이 막히거나 숨 막힌 부분이 다 느껴져요. 너무 떨어서 숨을 그만 쉬면 좋겠다거나 제발 숨 좀 쉬었으면 좋겠다, 싶은 부분도 번갈아가면서 많고요.

현장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자신만 아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황정은 : 저는 오은 시인님의 톤이 균일해서 그 점이 좋고 부러워요. 그리고 게스트에게 질문할 때 어미를 정확하게 말씀하시잖아요. 저는 문장을 쓸 때 마지막 말을 많이 고민하는데 방송 중에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말을 뭉갤 때도 있는데 오은 시인님은 그런 실수가 없어서 불안하지 않아요. 듣는 입장에서요.

오은 : 요즘은 자꾸 “~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많이 쓰게 돼요.

황정은 : 저자와 마주 앉아서 대화하고 질문할 때에는 그게 가장 적당한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내 오독이 전제된 추측이고 내 생각이니까. 게다가 질문을 한다는 건 질문을 받는 상대를 어느 정도는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데, 그게 마주 앉아서 질문을 받는 사람에게는 공격으로 여겨질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조금이나마 겸손하게 물을 수 있는 방법이 ‘~한 것 같다’는 말인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글을 쓸 때에는 가급적 쓰지 않는 말이기는 합니다. 

입말과 글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황정은 : 아, 그리고 오은 시인님이 웃을 때가 좋습니다.

오은 : 웃음 하면 황정은 아닙니까? 방송을 들어보면 아주 빵빵 터지시던데요.

황정은 : (웃음) 오은 시인님이 웃으면 방심이 느껴져요. 방심,이라는 작은 주머니가 그 순간에 펑 터지는 거 같고. 그럴 때 사회자의 마음이 게스트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게 느껴져서 좋아요. 그리고 게스트의 이야기를 잘 듣고 오은 시인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서 대화를 바로 이어가잖아요. 순발력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 속도나 자연스러움이 제게는 많이 부족합니다.

오은 : 제가 성격이 급해요. 뭔가 재치 있는 말이 떠오르면 이걸 빨리 써먹고 싶어서.(웃음) 저는 황정은 작가님의 신중함이 무척 부럽습니다. 그 신중함이 방송을 편안하게 이끄는 느낌이 들어요. 

시인님이 꿈꾸는 진행자로서의 이상형이 있을까요?

오은 : 말 잘 들어주는 사람이 은근히 많지 않은 듯해요. 다들 각자의 사연으로 법석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소연할 게 많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네요. 잘 들어주는 사람, 그런 말까지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속사정을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편하면 편한 대로, 어색하면 어색한대로 흘러나오고 때로 튀어나오는 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거기에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을 수도 있고요. 상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찾아주고 그것을 입 밖에 내게끔 하는 캐릭터, 꿈이 거창하지요?(웃음)


(왼쪽부터) 오은 시인, 황정은 소설가 

‘모든 책을 좋아한다’는 고백

어떤 루틴으로 방송을 준비하시나요?

오은 : 일단 책을 읽기 전에 최대한 백지 상태를 만들어요. 이미 게스트의 전작을 다 읽었더라도 모른다고 생각하려고 해요. 내가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설렁설렁 준비하게 되잖아요. 이 마음이 제일 무서운 거라서 조심하려고 해요.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은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요. 이전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기도 하고요. 이미 다른 매체에 소개된 이야기를 굳이 우리 방송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황정은 : 수요일에 녹음이 끝나면 그날은 놉니다. 정말 행복하게 놀아요. 다음 날인 목요일엔 좀 의기소침하게 놀고, 금요일부터는 슬슬 압박감을 느끼죠. 게스트의 전작들을 읽어야 하고 ‘삼자대책’에서 소개할 책도 골라야 하는데 그러면서 소설도 써야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어야 하니까 요즘은 시간이 늘 부족합니다. 알맞은 루틴을 아직 만들지 못했는데 차차 괜찮아지겠죠. 

책은 어떻게 고르시나요?

황정은 : 관심사 위주로 책을 읽다 보니 대개는 앞선 독서가 다음 독서를 결정해요. 그래서 인문사회 도서는 주제로 책을 찾아 읽고요, 문학 도서는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서점에서 첫 장을 읽고 결정합니다.

오은 : 거의 매일 예스24 ‘오늘의 책’과 국내 도서의 ‘신상품’을 확인합니다. 제목과 목차를 보고 마음에 드는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아둡니다. 오늘 넣은 책은 『정읍시인론』과 『페인트 잇 록 Paint It Rock』, 그리고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입니다. 장바구니를 비우는, 결제의 시간은 보통 저녁입니다. 관심 작가의 새 책이 나오면 무조건 구입하는 편이고요, 문학 도서는 자주 가는 동네 책방에서 삽니다.

두 분은 인터뷰 코너 외에 각각 ‘삼자대책’ ‘어떤 책임’에서 독자로서 읽은 책을 소개하고 계세요. 작가로서 책을 추천하는 일, 어쩌면 더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소개할 때 경계하는 부분이 있나요? 오독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시나요?

오은 : 〈책읽아웃〉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책을 소개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저는 오히려 오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어요. 이해가 ‘가장 잘한 오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단지 이 책을 소개할 때 나만의 시선이 깃들 수 있을지를 고려해요. 물론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배제할 수 있는 책은 가급적 소개하지 않으려고 해요.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다’ 말하지 않아야 ‘더’ 궁금하더라고요.

황정은 : 오독을 걱정한다기보다는 오독을 늘 염두에 두는 것 같아요. 책 소개는 제가 관심 있게 읽은 부분, 좋았던 점을 중심으로 말하는 일이라서 늘 하나의 관점일 수밖에 없어요. 책 전체 내용에 비해 아주 작은 조명일 뿐이니까, 오독의 가능성은 늘 있고 그걸 굳이 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책을 소개할 때 제가 경계하는 점은 녹음 일정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책을 선택하는 일이에요.

“책을 읽을 때 어떤 형태로든 나한테 상처를 남기는 책을 좋아한다.” 황정은 작가님이 〈책읽아웃〉에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읽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독자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하신 말이에요. 유독 기억에 남았어요. 상처를 남기는 책이란 무얼까요?

황정은 : 사실 거의 모든 책은 읽는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는 성질이 있는 것 같아요. 내 기준이나 편견이나 생각, 하다못해 기분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모든 책을 좋아한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만(웃음), 책 중에 특히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책은 읽는 사람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쳐요. 저는 그게 좋습니다. 예컨대 르포 기록 노동자들의 책을 읽는 경험은 세상을 대하는 내 태도를 생각하게 하고 타인을 대하는 마음과 타인의 사정을 생각할 여지를 주기도 해요. 저는 그런 책들의 도움으로 너무 무감한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게다가 고통을 담은 책을 읽을 때 내가 상처받는 이유는 상처 입은 누군가가 이미 있기 때문이니까, 저는 그런 독서에서 발생하는 상처를 감당하고 싶어요.

최근 읽은 책 중에 강렬하게 좋았던 문장이 있을까요?

황정은 : “비극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겉발림으로 하는 다정한 말이 아니다. 비극의 본질에 상응하는 깊이를 지닌 언어뿐이다. 그것을 나는 지금도 찾고 있다.” 헨미 요가 쓴 『1★9★3★7 이쿠미나』의 문장입니다. 한 번 지나가듯 봤을 뿐인데 잊을 수가 없었고 결국은 책을 찾아 읽게 만들었고 계속 생각나는 문장이에요. 끈질기게 ‘왜’를 물으면서 집단과 개인의 기억에 다가가려고 하는 작가의 태도가 저는 좋았어요.

오은 :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읽고 압도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글이 다 좋았으나(좋다는 말로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합니다) 이 문장을 꼽고 싶네요.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왼쪽부터) 오은 시인, 황정은 소설가 

두려움이 말실수를 막아준다

황정은 작가님의 첫 방송은 2021년 10월이었어요. 지금까지 박상영, 다드래기, 조해진, 최진영, 희정, 김지윤, 문유석, 송지현, 임솔아 작가님을 인터뷰하셨어요. 언제 〈책읽아웃〉을 진행하기로 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시나요?

황정은 :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마치고 책상에서 일어설 때. 일주일간 방송을 준비하면서 서서히 긴장이 쌓이는데 그게 해소되는 순간이 좋아요. 그리고 작가와 마주 앉아서 어떤 순간, 어떤 표정을 겪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게스트로 모신 작가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세상과 사람과 자기 자신을 깊이 고민하며 글을 쓴 사람들이잖아요. 그 이야기에 몰입할 때 그분들이 보여주는 각자의 표정이 있어요. 그런 순간 때문에 게스트로 방문한 작가들을 제가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하길 잘했다’ 싶죠. 

지난해 첫 에세이집 『일기』를 출간하셨죠. 요즘도 일기를 쓰시나요?

황정은 : 가끔 씁니다. 방송 녹음을 다녀온 뒤에도 쓰고요. 마음이 어둡고 생각이 복잡할 때 주로 쓰기 때문에 정돈된 구조의 글은 아니에요.

오은 시인님은 “글을 쓸 때마다 찾아오는 기진 맥진함이 좋다”고 하신 적이 있었죠. 〈책읽아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해요. 사람을 참 좋아하니까, 방송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은 : 사실 방식의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수렴’과 ‘발산’이랄까요. 글 쓸 때는 나 자신에게 수렴하는 모드가 되는 듯싶어요. 안팎으로 모은 자극들이 내 몸을 투과해 어떤 활자들로 나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쓰다가 좌절하고 쪼그라드는 일도 많지요. 사람을 만나는 일, 대화하는 일은 발산하는 일에 가까워요. 현장 분위기가 한껏 드러날 수 있게 에너지를 퍼져나가게 하는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답하다 보니 공통점이 떠올랐어요. 둘 다 어려워서,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이토록 오래 품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글도, 사람도. 

팟캐스트 진행자가 되고 나서 달라진 독서 습관이 있나요?

오은 : 더욱 궁금해하려고 노력해요. 이전에도 독서할 때 궁금한 것들을 따로 메모해두긴 했는데 이 일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하게 된 듯싶어요. 사람을 만날 때도 상대가 궁금해야 이것저것 묻게 되잖아요. 궁금증이 생기는 곳에 색인을 하는 것도 바뀐 습관이에요. 철저하게 독자의 입장에서, 혹은 청자의 입장에서 알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상념에 잠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내 말이 음성 파일로 남는다는 사실이 두려워 라디오나 팟캐스트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작가님이 종종 있었어요. 정제된 글이 아닌 말로 남겨지는 것, 이제는 두려움이 없으신가요?

황정은 : 있죠. 두려움도 있고 창피함도 있어요. 그래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말을 세상에 남기면 오해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무슨 큰일일까 싶어요. 오해는 늘 있고, 오해가 아닐 수도 있고요. 좀 창피하면 어때, 그런 생각도 해요. 그래도 여전히 말은 어렵고, 두렵습니다. 

오은 : 저 역시 늘 두렵습니다.(웃음) 남는다는 것은 언제든 누군가가 들출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읽고 쓰는 사람에서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이 된 지금, 별수 없이 이를 떠안고 가야겠지요. 동시에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두려움이 없다면 생소리와 허튼소리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두려움이 말실수를 막아주는 역할도 하는 듯 싶습니다.

 


내 생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2022년이 시작된 지 딱 한 달이 지났어요.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황정은 : 나무를 생각하고 있어요. 세상에 없는 나무인데 이 나무에서 시작되는 소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은 : 연초가 되면 사전을 펼쳐 단어를 찾는 의식을 갖습니다. 한 해를 예측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죠. 올해는 ‘ㄴ’에서 고르려고 펼쳤는데 ‘ㄲ’ 부분이 나온 거예요. 아차 싶었죠. 가장 먼저 눈길이 가닿았던 단어는 바로 ‘깜냥깜냥’입니다. ‘자신의 힘을 다하여’ 혹은 ‘저마다의 능력대로’를 뜻하는 부사인데요,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제 모습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미뤄두었던 시집 원고 정리 작업을 슬슬, 깜냥깜냥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시인님은 2022년이 등단 20주년입니다. 신인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오은 :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처음 시를 썼을 때 느낀 해방감이 정말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았거든요. 친구들은 모두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던 때니까요. ‘지금 내가 글을 써도 되나?’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냥 나는 나의 삶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좋은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은 작가님께도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황정은 : “뭐가 됐든 네가 뭔가를 사랑하고자 하면 상처받지 않을 도리는 없다.” 첫 단편집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제가 세상을 향해 두꺼운 벽을 세우고 살았거든요. 상처받기가 끔찍해서.

앞으로 〈책읽아웃〉에 초대하고 싶은 작가가 있나요?

황정은 : 이서수 작가님의 단편집을 기다리고 있어요. 「미조의 시대」라는 단편을 좋아하는데, 그 소설에서 사람들을 보는 작가님의 시선이 무척 좋았어요. 이서수 작가님이 동시대를 어떻게 겪고 있는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오은 :첫 책을 낸 작가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장르를 불문하고 첫 책은 그 사람의 지향점 같은게 가장 잘 드러나는 듯싶어요. 첫 책만이 가진 패기랄까, 가능성이랄까 그런 것에 절로 마음이 가는 사람이기도 해서요. 첫 발자국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 작가 입장에서도 분명 큰 힘이 될 거예요.

세상을 떠난 작가 중에 인터뷰하고 싶은 작가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오은 : 박경리 소설가, 김진영 철학자, 이환희 편집자. 책을 읽고 책을 쓴 사람을 오랫동안 떠올렸습니다. 그들이 남긴 빛무리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다시 또 읽어야겠지요. 

황정은 : 세상을 떠난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세상에 남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으로 만족합니다.

〈책읽아웃〉 청취자의 질문입니다. “좋은 책을 발견하는 법이 있을까요?”

황정은 : 경험을 쌓는 것 말고는 적당한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각자에게 좋은 책을 알 수 있도록 독서 경험을 쌓고, 그러다 보면 각자에게 잘 맞는 책을 고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오은 : 무엇보다 ‘나’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를 둘 다 알면 서점에 가서 오랜 시간을 헤매지 않을 수 있어요. 물론 어떤 책을 통해 ‘지금의 나’를 직면하기도 하고 ‘되고 싶은 나’를 헤아려볼 수도 있겠지요. 실패한 선택일지라도, 나의 취향과 관심사, 가치관을 뾰족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웃어넘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같은 맥락에서 책을 고를 때만큼은 마음이 가벼울수록 좋은 것 같아요.

좋은 독서란 결국 무엇일까요? 

오은 : 내가 ‘우물 안 개구리’임을 깨닫게 해주는 독서가 아닐까요. 동시에 우물 밖을 상상하게 해주는 독서, 마침내 우물을 박차고 나오게 해주는 독서, 이는 제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황정은 : 내 삶과 내 고통과 내 생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가는 과정. 내 무지를 깨달아가며 독서를 통해 기쁘게 ‘무지’라는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




*오은

시인. 시집 『유에서 유』,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나는 이름이 있었다』, 산문집 『다독임』 등을 썼다. 여전히 가장 즐겁고 잘하는 일은 시 쓰기.


*황정은

소설가. 소설 『百의 그림자』, 『계속해보겠습니다』, 『연년세세年年歲歲』, 에세이 『일기日記』 등을 썼다. 소중한 것이 많아 걱정도 많은 사람.



일기 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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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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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궂은 인터뷰] 그래, 내 멋대로 읽어보겠어 - 『평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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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_타별

책 정보를 꼼꼼히 읽지 않고 이 책을 집은 독자라면 저자 소개글을 읽다가 숨이 가빠질지 모른다. "조화와 우아가 나에게 가장 모자라는 덕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로 시작하는 글. 일단 이 문장부터 반하고 들어간다. 『평균의 마음』은 전작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로 독서계에 반가운 실례를 저지른 이수은 작가의 고전 독서 에세이다. 편집자, 번역가로 일한 저자는 ‘이런 책 있으면 좋겠다’고 출판 기획안을 썼지만 필자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책을 쓰게 됐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작가로 전업한 것인가?

아니다. 운영하던 출판사는 그만뒀다기보다 망한 쪽에 가깝고, 작가로 전업은 한 적이 없다. 그냥, 망해가는 출판사에 종일 혼자 있다 보니 적적해서 옛날 책들 좀 뒤적거리고, 그러다 또 혼자 과몰입해서 캬~ 이 좋은 걸 나만 보긴 아까우니까, 이러면서 책까지 쓰게 됐을 뿐. 작가를 직업으로 삼을 만큼의 책임감이나 열망을 가질 자신이 없다.

글발이 엄청나던데 지나친 겸손이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한 적은 더더욱 없고. 책을 쓰겠다는 생각 자체를 한 지가 몇 년 안 됐다. 다만, 내가 어느 정도 ‘훈련된 문장’을 구사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다 내가 읽은 책들에서 온 걸 거다. 내가 읽어본 정말 좋은 글들은 그 내부의 엄청난 에너지로 심신을 후려치기 때문에 글이 어떻다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글쓰기에 있어 나의 한계는 극명하지만, 사실은 글을 잘 쓰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잘 쓰지 못하리라는 걸 이미 알기 때문이다.

『평균의 마음』이라는 제목, 자꾸 곱씹게 되더라. 

책을 쓰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내가 제목을 먼저 정하고 글을 쓰는 타입이었다. 흘러 넘치듯이 글이 나오는 천부적 작가가 아니고, 꼭 써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제목과 콘셉트가 확정돼야 글을 시작할 수 있다. ‘평균의 마음’은 ‘위대하지도 않은 보통의 사람이 위대한 걸작을 읽고 이렇게나 감동할 수 있는 이유를 탐구해 보자’는 의도로 지은 제목이다.

스스로를 은둔형 덕후, 아주 괴팍한 족속, 취미와 특기가 의심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고전을 읽었기 때문에 스스로와 타인을 이해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앗, 그런 건 비밀이었는데, 고전 얘기만 계속하면 지루하다고 뭐라 할까 봐, 이 말 저 말 늘어놓다 말실수를 한 거 같다. 고전을 읽고서 새사람이 될 만큼 유연하진 못하고, 탁월한 작품들에 스스로를 비춰 보다 자아의 각성에 이른 것 같긴 하다. 이토록 각양각색으로 빤한 인간 종족이라니! 이렇게 생겨먹은 나 자신, 식상해서 다행이다, 이렇게.

20여년간 편집자로 일했고 2014년에 스윙밴드 출판사를 열었다. 전직 출판사 대표의 저자 마케팅, 기대해도 되나?

얼마나 홍보에 재주가 없었으면 출판사가 망했겠나. 젠장. 저자의 적극적인 활동이 판매에 가장 효과적이라는데. 책 내준 출판사들에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하다. 그래도 SNS에다 셀프 디스하고 자폭하는 저자보단 아무것도 안 하는 저자가 차라리 나은가 보다. 뭐라도 해보라고 시키지도 않는다.

역시 현명하다. 『평균의 마음』을 읽은 독자의 반응 중, 선호하는 것은? 1. 와! 이 책 짱 재미! 작가 님 글 짱 잘 써! 2. 아, 나도 고전을 읽어야겠어!

3번을 추가하겠다. 3. 그래, 나도 이제 내 멋대로 읽어보겠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언제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가 단지 책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때, 나 또한 대부분의 시간을 독자로 보내는 한 사람으로서, 응원의 야광봉을 격하게 흔들어 드리고 싶다.

그래도 고전은 너무 지루해서 못 읽겠다고 말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한 권의 책은?

단 한 권의 책이라니, 너무하다. 2500년에 걸쳐 쌓여온 기나긴 고전의 목록에서 감히 한 권의 필독서를 꼽을 주제가 못 될뿐더러, 취향의 망망대해에 흩뿌리는 소금 한 꼬집 같은 추천의 말로 누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발자크를 같이 읽는 독서 모임을 해보면 어떨까, 가끔 생각만 한다.(막상 하자고 하면, 무덤까지 같이 가잔 소리처럼 들릴까 봐 무섭다)




*이수은

조화와 우아가 나에게 가장 모자라는 덕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언제부터 알았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일찌감치 알았다. 비록 황금비율의 신체는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언행을 삼가고 마음 씀씀이를 바르게 하여 품격 있는 인간이 되고자 정진할 수도 있겠건만, 바로 그 말투와 행동거지가,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내 뜻대로 조절이 안 됐다. 일희와 일비의 극렬한 파동운동 속에서 매사가 너무 좋거나 너무 싫어서 도대체 중간이라는 게 없었다. 양철통 같은 마음과 그 안에 담긴 모난 자갈들 같은 생각이 나를 이루는 요체라는 인식은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래서 고전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걸 쓴 사람들과 그들이 그려낸 인물들이 모두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시대를 힘껏 살다 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평균의 마음
평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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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크리에이터 드로우 앤드류 “좋아하는 일 모르면, 부러운 사람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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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로 행복하게 일하는 사람’. 동영상 10개로 구독자 10만을 모은 크리에이터 ‘드로우 앤드류’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튜버’, ‘인플루언서’, ‘밀레니얼 프리워커’와 같은 트렌디한 단어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50평 한강뷰 작업실에서 유튜브 채널 ‘드로우앤드류’와 ‘마세슾’ 콘텐츠를 만들고, 1년에 3억 원 이상을 버는 사람이 되기까지 그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드로우 앤드류의 성장 과정이 담긴 책 『럭키 드로우』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무기력한 20대 청년에 지나지 않았던 나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드로우 앤드류는 말한다.

‘내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은 점점 희미해졌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비밀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일이 성공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_(298쪽)



재테크 책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이 사람을 처음 본 게 2년 전인데 이렇게 성장했구나’라는 댓글을 봤어요. 

저도 봤는데요. (웃음) 작년까지만 해도 제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9만 명이었거든요. 지금은 30만 정도 되고요. 1년 사이에 구독자가 많이 늘었어요. 아마 이 댓글을 쓰신 분은 제가 유튜브를 시작했을 때 저를 처음 보신 것 같아요. 예전부터 저를 봐온 사람이나 제 지인들은 지금 상황을 신기해해요.

책을 쓰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요. 특별히 쓰기 어렵거나 힘든 건 없었나요? 

돈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웠어요. 솔직하게 밝히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 콘텐츠가 ‘이렇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재테크 책으로 보일까 봐요. 돈을 많이 버는 법이 아닌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고, 어떻게 하면 이런 메시지를 더 매력적으로 전달할까 고민하면서 썼어요.

솔직하다고 생각했어요. 수익도 공개하셨더라고요.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주었으면 하는데 그렇다면 제가 이룬 결과물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또래의 평범한 직장인보다 많이 버는 건 사실이지만, 대단한 부를 이룬 건 아니고요. 그저 제가 처음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일을 행복하게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유튜브에서 두 개의 채널을 운영하고 계시죠. ‘드로우앤드류’보다 ‘My Safe Space (이하 마세슾)’의 수익이 더 높다고 해서 의외였어요. 

브이로그는 수익 전환율이 낮다는 인식이 있어요. 누가 유튜브 시작한다고 하면 브이로그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정도로요. 그런데 브이로그라고 할 수 있는 ‘마세슾’의 수익 전환율이 ‘드로우앤드류’보다 더 높아요. 작년 매출의 반 이상이 ‘마세슾’으로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마세슾’은 저의 안전 공간을 꾸미는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예요. 대부분 인테리어, 공간에 관한 이야기라 협업을 제안하는 브랜드도 대부분 인테리어나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고요. 그러니까 모두가 말하는 성공 공식을 따르는 것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게 결국 돈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마세슾’을 아이폰으로 촬영하신다고요.  

네. 아이폰으로 해요. ‘드로우앤드류’는 촬영팀과 함께 만들기 때문에 아이폰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마세슾’은 저 혼자 만들거든요. 에너지를 최소화해서 운영하기 힘들지 않도록 최대한 간단한 방법으로 촬영하고 있어요.

아이폰으로 그런 아웃풋이 나올 수 있다니 놀랍네요. (웃음)

충분히 가능해요. 제가 아이폰으로 촬영한다고 밝히는 것도 저를 보고 쉽게 따라 하셨으면 싶어서 예시를 드리는 거예요. 유튜브 시작한다고 장비부터 사는 분들이 많은데요. 아이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일단 시작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다면? 부러운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미국 문구회사에서 일할 때 갑자기 퇴사 권고를 받았다는 일화를 보고 놀랐어요.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면 어떤가요? 

회사가 이사하는 날 퇴사했는데요. 저도 이사 준비하려고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불러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러웠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첫 번째 ‘럭키 드로우’였어요. 그 이야기가 없었으면 제 책이 얼마나 재미없겠어요. (웃음)

나중에 클라이언트가 되어 그 회사에 가셨다고요. 통쾌했어요. 직원들 반응은 어땠나요? 

일부러 그 회사랑 일했어요. 너희가 날 그렇게 홀대했지만, 나 지금 이렇게 인정받으면서 일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요. 사장님은 저랑 안 마주치려 했는지 먼저 퇴근하셨더라고요. 저를 괴롭혔던 상사는 아무렇지 않게 ‘얼굴 좋아 보이네’라며 인사를 건넸고요. 본인들이 왕따시키고 쫓아낸 사람이 클라이언트가 되어 왔으니 민망했겠죠. 가장 좋은 복수는 내가 잘되는 거라는 걸 그때 몸소 깨달았어요. 한편으로는 그 회사에 고맙기도 해요. 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제가 나라는  브랜드를 키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드라마 같아요. (웃음) 

댓글로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구독자분들이 계세요. 그런 댓글을 보면 옛날의 제가 떠올라요. 그래서 이렇게 답글을 달죠. 지금 당신이 힘든 건 당신이 주인공이어서 그렇다고요. 원래 주인공에게는 시련이 있잖아요. 시련 없이 잘되기만 하면 재미없고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저한테도 똑같이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드로우 앤드류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좋아하는 일로 행복하게 일하자’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게 문제죠. 이런 질문 많이 받으시죠?

정말 많이 받는데요. 그만큼 어려운 문제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인데 한순간에 답을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면 자신과 오래 대화해야 하니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일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과소평가하거나 현실성 없다고 생각해서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질투와 열등감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으셨다고요. 

부러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을 질투하고 열등감 느끼는 나를 발견했고요. 열등감이나 부러움이 저를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본능이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달라졌어요.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유심히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구체화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만약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다면,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고 그 사람을 좇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지금은 작가님이 질투와 열등감의 대상이 됐죠. 부정적인 댓글도 많이 받는다고요.

누군가에는 제가 열등감이나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겠죠. 제 콘텐츠가 자랑으로 보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제가 단순하게 명품을 소비한다거나 이른바 플렉스 하면서 돈을 자랑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열등감을 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은 이야기를 하는 건데 이것조차 누군가에게 질투와 열등감을 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질투와 열등감으로 성장했으니까요.



퍼스널 브랜딩에 실패하는 건 자신을 모르기 때문

퍼스널 브랜딩이 중요한 시대예요. 퍼스널 브랜딩 코치로서 퍼스널 브랜딩에 실패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뭘까요?

첫 번째는 자기를 잘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를 모르니까 자기가 전할 수 없는 것, 자기한테 없는 걸 자꾸 이야기해요. 메시지를 찾았으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자격을 갖춰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는데요. 자격을 갖추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격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내가 성장하는 사람이라면 성장하는 과정을 공유해야지 전문가 행세를 하면 안 돼요. 제가 전문가보다 코치라는 표현을 더 좋아하는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거든요. 강연할 때도 되도록 전문가라는 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려요. 성장하는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을 빠르게 공유하는 사람이지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자격을 갖추지 않았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요?

일단 오래 할 수가 없어요. 잘할 수도 없고요.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건데요. 가끔 아주 괜찮은 것 같은 아이디어가 번뜩일 때가 있거든요. 너무 좋아 보여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자신을 속이게 돼요. 그런데 진짜 열정은 그렇게 한순간에 생기는 게 아니라 서서히 밑에서부터 끌어올라 오거든요.  

성공한 크리에이터들이 가장 강조하는 게 ‘꾸준함’이더라고요. 

친한 크리에이터들하고 만나면 이런 얘기를 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다 구독자가 2만, 5만 명 정도였는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니까 다 성장해서 이렇게 만났다고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집중한 사람들은 해내요. 진심으로 좋아서 하고요. 



‘럭키 드로우’라는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요?  

책 제목을 봤을 때 제가 생각났으면 해서 ‘드로우’라는 단어를 꼭 포함하고 싶었어요. 많은 분이 성공은 노력과 운이 모두 따라줘야 가능하다고 하는데 저도 이 생각에 동의하거든요. 저의 성공 역시 수많은 시도와 운이 맞았던 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걸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럭키 드로우’ 이고요. 노력과 운이라는 성공의 요소를 표현하고 싶어서 ‘럭키’와 ‘드로우’를 일부러 띄어 썼어요.

‘럭키’한 순간을 만날 때까지, 끊임없이 ‘드로우’ 해야겠네요.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점이 결과를 알 수 없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여러 가지 일을 시도 즉 ‘드로우’했다는 건데요. 카지노에서 슬롯머신 레버를 당긴다고 생각하고 두려움보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많은 걸 시도해 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미국 회사에서 일하다 퇴사하고,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고 유튜브에 도전하는 것 모두 마찬가지였거든요. 두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설레는 일이었어요. 정말 좋아하는 일이니까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도전했고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계속 ‘드로우’하다 보면 잭팟이 터질 수도 있잖아요.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책을 읽으면서 드로우 앤드류도 한 때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거든요. “드로우 앤드류니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진짜 뛰어난 사람들은 큰 회사에서 이미 잘하고 있어요. 스카웃 받으면서요. (웃음) 그런데 저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나만의 무대를 만든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누구든 그렇게 할 수 있고요. 부디 이 책이 동기를 부여하는 책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도 빨리 움직여야겠다’던가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봐야겠다’라고 몸을 근질거리게 하는 책이요.




*드로우앤드류

유튜브 채널 ‘드로우앤드류’와 ‘마세슾’을 운영하고 있으며, ‘9 to6’의 삶에서 벗어나 한강이 보이는 50평 작업실에서 “앤드류를 그리다”라는 예명으로 활동한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우연히 지원한 미국 인턴십에 합격해 시급 10달러를 받고 LA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직원 3명의 작은 회사였지만 최선을 다해 일해 회사 SNS 계정 팔로워 수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문구 제품이 미국 지상파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부당한 이유로 해고를 당하고는 극심한 무기력에 빠져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실패자’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는, 5만 원짜리 이케아 책상을 구입해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크리에이터로 일하며 ‘드로우앤드류’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럭키 드로우
럭키 드로우
드로우앤드류 저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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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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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끝나는 순간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고, 목정원 작가는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 썼다. 그는 프랑스에서 한 생을 보내며 여러 공연을 봤고, 시간과 더불어 생생함은 사라졌다. 하지만 슬픔의 기억들은 남아서 한 권의 책이 됐다. 질서를 부수고 알지 못했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비극은 뒤늦게, 하지만 정확히 돌아온다.



뒤늦게 쓰인 비평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공연 예술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어요. 

어릴 때는 예술가가 꿈이었고, 사실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술가는 못 될 것 같은 거예요.(웃음) 대신 아름다움을 변호하기 위해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게 됐는데, 1학년 수업시간에 니진스키의 춤 ‘목신의 오후’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사람이 몸을 움직인다는 게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 공연이 고전에서 현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품이거든요. 지금도 경계에서 약동하는 것들에 관심이 많아요.

이번 책도 에세이와 평론의 경계에 놓인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 본 공연에 대한 비평이자, 작가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처음 시도하는 종류의 글이었어요. 직전에 낸 글은 박사논문인데다가 외국어로 써야 했으니까요. 당시에도 비평을 바로 쓰고 싶을 만큼 좋은 작품이 많았는데, 논문 때문에 유예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비평을 쓰기엔 늦었으니 이번에는 자유롭게 써보고 싶었죠.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순간들을 길어올리면서요.

공연은 상연 후 사라지기 때문에 바로 글을 쓰지 않으면 생생함이 사라지는데요. 그런데도 오래 기다린 후에 쓰는 것을 택하셨어요. 

맞아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뒤늦게 쓰인 비평’인데요.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의 독자는 글에서 다뤄지는 공연을 못 봤을 테니, 저 또한 많은 것을 잊은 뒤 남은 기억만 갖고 쓰면 독자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그래서인지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함께 녹아 있어요.

작품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프랑스에 있을 때,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가 떠오르는데요. 한 연극 연출가가 세상을 떠나서 추모 행사가 열렸어요. 미리 공연장에 갔는데도 절대 못 들어갈 만큼 긴 줄이 있는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무슨 줄이에요” 묻는데, 연출가 이름을 듣더니 다 고개를 끄덕이는 거죠. 한 연출가의 죽음을 모두가 알고 공유하는 문화가 놀라웠어요. 그런 순간을 만날 때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쌓여 갔던 것 같아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어서 느리게 읽을 수밖에 없었던 글이었어요. 실제로 쓰실 때는 어땠나요?

처음에 생각한 주제는 많았는데, 너무 힘들어서 딱 10편만 쓰게 됐어요.(웃음) 글에는 슬픔이 많이 담겨 있지만, 쓰는 사람으로서는 감정에 취하는 것을 경계했어요. 슬픔이 찾아오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담담한 상태로 돌아오고. 그렇게 느리게 쓴 것 같아요.

작가님이 오래 기억하는 공연은, 전달 불가능한 슬픔과 고통을 전하려고 시도하는 작품 같았어요. 어떤 순간이 작가님을 사로잡았나요?

사실 저는 평화롭고 잘 짜인 연극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다만 할 말이 생기는 순간들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뤄서 호불호가 엄청나게 갈리는 작품을 보고 내가 크게 건드려졌다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져요.


우리는 비극을 왜 볼까

제목이 시적이었어요. 책장을 다 넘긴 후에야 뒤늦게 의미를 깨닫게 돼요. 

오래전부터 막연히 첫 책의 제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문장이었어요. 프랑스에서 살면서 늘 외국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거든요. 그 막막함이 모국어로도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을 때 이 표현을 떠올렸다가 노랫말에 쓴 적이 있어요. 파리의 길은 방사형으로 생겨서 한번 잘못 들면 완전히 멀어진다는 가사였는데요. 이번 책을 쓰면서도 내가 결국 말할 수 없는 아픔에 대해 쓰고 있었구나 느끼는 순간이 있었어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제목을 주게 됐죠. 

글과 함께 사진을 만나는 감동도 있었어요. 직접 찍은 사진이죠?

필름 카메라를 들고 여행갈 때마다 틈틈이 찍었어요. 뒤표지 사진은 가장 아끼는 것인데요. 이 모래 언덕이 보기보다 굉장히 높아요. 힘들게 올라가면 이런 평지가 나오고 양 옆으로 숲과 바다가 보이죠. 처음 흑백 필름으로 찍어봤는데 다행히 잘 나왔어요. 제가 잘 찍었다기보다는 우연히 거기 있었기 때문에 포착할 수 있었던 풍경이에요.(웃음)

비극의 기원을 읽으면서, 두 가지 비극에 대해 생각했어요. 카타르시스를 주고 안정된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 비극은 이해가 잘 됐어요. 그런데 진실을 전복하고 억압된 것을 폭로하는 비극은 불편한 것이겠구나 싶었는데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보러 갈까요?

‘우리는 비극을 왜 보러 갈까’ 물으면 의외로 답하기 어려워요. 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가설을 내놓았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잘 모방된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껴요. 현실에서 죽은 동물을 보면 절망과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이 잘 묘사된 그림은 어쩐지 들여다보게 되고, 그게 무엇인지 인식하면서 배우게 돼요. 비극을 볼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요. 우리 삶의 고통이, 세계의 모순이 저런 것이었구나, 알게 되는 데서 일종의 해소를 겪을 때가 있잖아요. 편안한 작품만이 아니라 질서를 전복하는 작품을 보게 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물론 잘 만든 작품은 단지 불편함만 남기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하죠.

‘테러와 극장’을 유독 힘들게 쓰셨다고요. 파리에 테러가 나던 날의 기억에서 시작해서, 테러를 논쟁적으로 다루는 앙헬리카 리델의 연극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연출가 앙헬리카 리델의 연극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어요. 리델의 작품은 늘 논란을 불러일으켜요. 테러 자체를 억압된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보기도 하고, 한 여성이 강간범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기도 하죠. 강력한 전복으로만 읽어내기에는 혼란스러운 지점들이 있어요. 실제 현실에서 사람들이 죽잖아요. 그 죽음에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오래 고민해야 했어요.


풍성한 나무가 되는 꿈

언젠가 꿈이 관객 학교를 만드는 것이라 하셨어요. 작가님이 꿈꿨던 ‘관객’의 모습이 궁금했어요.

한국에서는 공연이 싫어서 화를 내며 나가버리는 관객은 잘 없잖아요. 그런데 아비뇽 연극제에서 쿵쾅거리며 자리를 뜨는 관객들을 만났어요. 동시에 환호하는 관객들도 옆에 있었고요. 그 부끄럼 없는 반응들의 공존이 좋아 관객 학교를 꿈꾼 적이 있는데요. 사실 지금은 꿈이 없어요.(웃음) 염세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낙관적인 마음이 된 것일 수도 있어요. 현재 관객들이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과거보다 공연장을 찾는 관객도 많아졌고요.

책을 읽으며 관객이 되는 것이 곧 삶을 살아가는 것과 겹쳐 보여서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공연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무언가를 바라보고 내 삶과 연결 지으며 살잖아요. 저는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고 상상하는데요. 본 것과 알게 된 것을 축적해가며 뿌리를 내리고 풍성하게 가지를 뻗어 나가는 거죠. 관객이 된다는 것은 그 나무를 가꿔가는 일 같아요. 이때 본다는 것은 물론 은유적인 말이에요. 우리는 눈이 아닌 다른 감각을 통해서도 보니까요.

공연을 향유한다는 건, 몸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움직임을 기록한 문장을 따라가면서 몸들을 상상하게 되는데요. 작가님은 춤을 배우기도 했는데, 어떤 경험이었는지요?

몸은 정직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미지의 영역 같아요. 무용을 배운 건, 지금 움직여보지 않으면 나중에 글을 쓸 때 부끄러울 것 같아서였어요. 처음에는 테크닉에만 집중하느라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기도 했지만, 어느새 체화되어서 자연스러운 감각이 되더라고요. 프랑스 국립무용단에서 매시즌 정기 공연 전 관객들에게 춤을 나눠주는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거기서는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런 경험 덕분에 하나의 공연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감각적인 언어들이 있구나 조금씩 깨달았던 것 같아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노랫말도 쓰신다고요.

프랑스에 있을 때, 기타를 하나 샀는데 미학자이자 뮤지션인 최정우 씨가 이름을 뭘로 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내 기타의 이름은 기타로 할래요”라고 대답했어요.(웃음) 그 뒤에 최정우 씨도 새 기타를 사더니 이름이 ‘바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 활동하면 ‘기타와 바보’로 하자 하면서 웃었거든요. 그러다 논문 쓰기가 힘들어서 도피가 필요한 때에 함께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제가 노랫말을 써서 문자로 보내면, 최정우 씨가 곡을 붙여줬죠. 음악 축제날 루브르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누가 동전을 놓고 가는 거예요. 그 경험이 너무 즐거웠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을까요?

올해 ‘기타와 바보’의 앨범이 나와요. 제게 음악은 그동안 순수한 재미였거든요. 이제 더는 아마추어일 수 없으니 조금 긴장이 되기도 하네요.(웃음)



* 제목은 ‘기타와 바보’의 동명의 노래에서 가져왔습니다.




*목정원

서울대 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렌느2대학에서 공연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공연예술이론 및 예술학일반을 가르치며, 변호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비평을 쓴다. 가끔 사진을 찍고 노래 부른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저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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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가] 최재원 시인, 여기부터는 낯선 말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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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내딛으면 새로운 무대가 펼쳐진다. 최재원의 첫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를 펼쳤을 때, 순간 이동을 하는 감각을 느꼈다. 페이지를 넘기면 낯선 배역이 주어지고, 사투리와 은어가 들려온다. 다음 무대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궁금해졌다. 창원, 횡성, 뉴욕 등 여러 도시에서 자라, 물리학과 시각 예술을 공부했으며, 두 언어를 오가며 번역을 하는 시인은 왜 몸과 말을 계속 바꾸는 세계를 만들었는지. 이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지.



표준어 바깥의 말

제목이 파격적이었어요. 

사투리, 속어 등 표준어 바깥의 말에 관심이 많아요. 실제 말을 들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게 대부분의 삶이 표준어 밖에 있다면, 말의 구조 안으로 들어올 때 깎여나가는 건 뭘까. 그런 걸 자주 떠올리는 편이에요.

시를 쓰기 전에는 물리학과 시각예술을 공부하셨어요. 말 이외의 것을 찾아 헤맨 듯한 인상이 들기도 했는데요. 

당시에는 생각과 말의 간극에 좌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마요네즈를 쭉 짜면 원래 형태가 어떻든 별표 모양으로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생각 자체는 무질서하고 덩어리로 존재하는데, 말이 되는 순간 형태가 달라져버리는 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반대로 수학과 물리는 모든 것을 한번에 포착할 수 있는 지도가 펼쳐진 느낌이었어요. 거기서 느끼는 안정감이 있었죠.

그런데 ‘말’을 다루는 시를 쓰게 됐군요. 

어느 순간, 좌절하지 말고 표현을 해봐야겠다, 한번에 다 알지 못해도 괜찮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욕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번역 일도 하고 있어요. 시를 접한 계기도 번역이었다고요. 

어렸을 때부터 영어랑 한국어를 같이 사용해서 모국어의 개념을 오래 생각했어요. 어떤 언어에도 이방인인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유년 시절의 경험은 한국말로 떠오르는데, 고등학교 이후에 배운 것들은 다 영어로 존재하거든요. 그렇다 보니 경험이 바로 번역되는 게 아니라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 들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에 더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미지의 세계를 처음 탐험하는 것처럼요.

성형외과가 늘어선 강남의 거리 등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시 속에서는 낯설게 감각돼요. 실제로 시를 쓸 때는 어떤가요?

익숙한 것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좋아해요. 잘 아는 것이 갑자기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사물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될 때가 있잖아요. 오늘도 길을 걷는데 길 위에 새 동전이 보도 블록 위에 떨어져 있는 게 갑자기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럴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그 순간의 장소도 시에 들어오고요.

각 시들이 퍼포먼스 같았어요. 일관된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질적인 경험들이 튀어나와요. 

독자에게 갑자기 낯선 경험으로 왔다갔다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일상에서도 순간 이동하는 것 같은 감각을 많이 느끼거든요. 시를 읽을 때도 나와 다른 화자의 경험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음 시에서는 또 다른 경험으로 이동하는 순간을 좋아해요. 그래서 일부러 대조적인 시를 배치해서 이질성을 극대화하려고 했어요.

띄어쓰기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글자를 배치한 것도 눈에 띄었어요. 

말을 뜯어보고 해체하고 다시 붙여보는 과정이 제게는 중요해요. 덩어리로 존재하던 생각이 언어가 되는 입구를 찾는 과정이랄까요. 첫 시 「모 조」도 ‘모’와 ‘조’ 두 글자 중에 어떤 것이 더 ‘모조’의 느낌이 들어있나 생각하면서 썼고, 두 글자 중 어떤 것이 밀도가 더 큰가, 바다에 던져 넣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어요.

“시라는 장르로 생각하고 쓰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소설처럼 읽히는 시도 있고 연극 같은 시도 있는데요. 장르 바깥의 것을 시에 놓아보면서 재미를 느끼나요?

애초에 장르 구분을 안 하고 써요. 그냥 하나의 덩어리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깎아낼 것인가 덧붙일 것인가만 생각해요. 물론 완성한 후 저도 독자로서 의견은 있어요.(웃음) 그렇지만 이게 어떤 장르 같다거나 하는 느낌은 수정 단계에서 알아차리죠.


다른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시집을 펼치면, ‘소리’로 가득한 시들을 만나게 돼요. 특히 소리를 내는 곤충 ‘매미’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절지 동물이나 곤충에 관심이 많아요. 포유류는 몸이 다 연결되어 있는데 절지 동물은 다리가 빠지기도 하고, 허물 껍데기가 남아 있다거나 하는 일이 많아요. 그 이질감에 두려움도 느끼지만 홀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매미를 밟는 순간, 인간과 매미의 몸이 뒤바뀌는 상상도 그래서 나온 거군요.

다른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어떤 일일까 늘 궁금해요. 그래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시를 쓸 때도 있고, 다양한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 같은 시가 나오기도 해요. 나와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언어는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보면서 쓴 시도 있고요.

사투리를 쓰는 상황이 시에 등장하기도 해요.

맞아요. 사투리나 특정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에 관심이 많아요. 나랑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의식을 체험해보고 싶어서, 이질적인 언어에 늘 귀를 열어놓고 있어요. 사람마다 독특한 말투, 반복되는 표현이 그 사람들의 환경이나 신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시의 화자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구축되는 운동 같았어요.

알고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계가 불분명하죠. 지금 우리가 의자에 앉아있고, 사물과 사람이 분리된 것으로 느껴지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하나의 장에 에너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거시적으로 봤을 때 분리된 사물로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죠. 이 간극이 재밌어요.

몸이 다른 차원으로 상상되는 것도 좋았어요. 몸이 세포 다발이나 곰팡이가 핀 물질, 삼각형으로 표현되기도 하죠. 시인님에게 시는 몸이 또 다른 무언가로 감각되는 가능성 같기도 했는데요.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지만, 시를 쓰면서 몸과 친해지기는 한 것 같아요. 저는 삶이 비참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몸이 있다는 것도 제약이잖아요. 사회가 불평등하니까 더 비참해지는 것도 있고요. 그렇지만 계속 이대로 살 수만은 없으니까 삶의 비참에 불복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요.

시 쓰기가 그런 일 아닐까요?

죽음을 망각하고 현재에 완전히 집중할 때, 잠시나마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순간을 관찰하면서 시를 쓰거나, 시공간을 벗어나 다른 존재를 상상해보는 것이 제게는 그런 일 같아요.




*최재원

거제도, 창원, 횡성,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자랐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시각 예술을, 럿거스대학교 메이슨 그로스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2018년 Hyperallergic을 통해 미술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한영·영한 번역과 감수를 하고 있다.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제4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최재원 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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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학부모는 일종의 독서 코치여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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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초등학생은 읽는 중학생이 된다. 읽는 습관은 사고력과 문해력을 차곡차곡 키우고, 그렇게 성장한 읽는 중학생은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초등학생 독서교육의 목표는 ‘읽는 중학생’이 되는 것. "부모가 최고의 독서 코치"라고 말하는 『초등 매일 독서의 힘』의 저자 이은경은 초등학교 교단에서 지낸 15년의 시간과 두 자녀의 독서 교육에 매진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서야말로 초등학생 시절에 최우선으로 해야 할 활동이라고 확신했다. 문제집을 푸는 것보다, 학원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라는 신념 아래 학생들과는 매주 월요일 아침 도서관에 갔고, 읽지 않던 자녀마저 책벌레로 만들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책 읽을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그는 『초등 매일 독서의 힘』을 '서점에 가서 초등학생 자녀를 옆에 세워놓고 문제집을 잔뜩 골라 결제하려는 학부모'에게 권한다. 지금은 마음껏 독서를 할 때다. 



꾸준한 독서로 사고력과 문해력을

초등 독서의 목표를 ‘읽는 중학생을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셨죠. 초등 독서 지도에 있어 이 목표를 명확히 이해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특히 학습과 관련해서 말이에요. 

중학교에서 얼만큼 했느냐가 고등학교 성적을 좌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느냐에 따라 중학교 성적이 달라지거든요. 초등 학부모가 대입까지 바라보기엔 너무 멀죠. 대입은 좌우하는 변수가 너무 많으니까요. 따라서 초등 학부모 입장에서는 일차적인 목표를 공부 잘하는 중학생, 혹은 초등 고학년 때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가지는 것으로 두게 될 거예요. 이때 그 힘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두 가지 있는데요. 바로 사고력과 문해력이고요. 이 두 가지를 충분히 키울 수 있는 게 독서예요. 꾸준한 독서로 사고력과 문해력이 키워져 있으면 학습 능력도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어요.

“’독서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최상위권이 될 수 있다’가 아니라, ‘독서를 꾸준히 하면 안 했을 때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33쪽)라고도 하셨거든요. 

네, 독서를 꾸준히 하면 공부를 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그 사람들의 성적은 다 다르잖아요. 생각할 것은 독서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얼마나 압도적으로 공부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과가 갈린다는 거예요. 결국은 공부를 해야 공부를 잘하는 거니까요. 다만 독서로 준비되지 않은 아이는 준비된 아이에 비하면 공부를 잘할 가능성이 높지 않아요. 

작가님이 학교 현장에서 목격한 바이기도 하죠? 초등학교 교실 안에서 읽는 학생의 학습 능력은 더 기대해 볼 만했다고도 하셨잖아요. 

맞아요, 제 교직 경력 15년 중에 무척 좋았던 경험 하나가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학생들을 6학년까지 봤다는 거예요. 휴직을 했다가 돌아왔더니 6학년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요. 많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특히 석차가 많이 달라져 있었어요. 1학년 때 분명히 100점을 받곤 하던 학생들이 6학년이 됐는데 너무나 평범해진 모습인 거예요. 한편 눈에 띄지도 않고, 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했던, 그냥 조용히 구석에 앉아 책 읽고 멍을 많이 때리고 엉뚱한 소리를 하던 몇몇 친구들은 의젓하게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는 힘을 가진 학생으로 성장해 있었고요. 그래서 확신했죠. 학습지와 문제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요.

공부하는 힘은 역시 독서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겠네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잘하는 학생들은 미리 학습지 문제를 많이 풀어봤던 경우가 많아요. 학부모님들이 7살 때 문제 풀이를 미리 많이 시키면 1학년 때 잘해요. 그래서 점점 더 학습지, 문제집과 학원에 집착을 하게 되는데요. 그렇지만 우리 목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잘하는 게 아니잖아요. 1학년 때 잘한다는 얘기 못 들어도 돼요. 초등학생 때 단원평가 100점을 못 맞아도 되고요.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 더 많이 생각하게 할지, 어떻게 더 많은 문장을 읽게 할지, 하는 것이에요. 그게 학습 전략이어야 하고요. 거기에 독서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죠.

그래서 작가님은 두 자녀 분의 초등학생 시절에 문해력 문제집도 풀게 하지 않았다고요? 

초등학교 교사들은 다양한 사례들을 본 다음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자녀에게 시키거든요. 저는 학습지 문제집을 한 번도 시키지 않았어요. 만약 그게 좋으면 시켰겠죠. 하지만 저는 문제집을 미리 풀고, 몇 가지를 더 외워서 단원평가 100점 맞는 게 아이들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요. 그 시간에 사고력과 문해력에 집중을 했죠. 김연아 선수가 기초 체력과 기본기 없이 점프 연습만 했다면 금메달을 딸 수는 없었을 거예요. 독서는 안 하고 문제집만 미리 푸는 건 기본기 없이 점프 연습만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문제 푸는 기술은 고등학교 때 연습해도 늦지 않는 기술이거든요. 저는 그런 확신으로 저희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문제집을 안 시켰어요.

 


왜 우리 아이는 집중력이 낮을까

앞서 사고력과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죠. 요즘은 특히 문해력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요. 그게 도대체 학습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궁금해하실 분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문해력, 왜 중요한가요? 

왜 우리 아이는 집중력이 낮을까요? 왜 우리 아이는 수업 시간에 자꾸 딴 생각을 할까요? 그걸 이해하려면 보통 성인이 지금 의과대학 교실에 가서 앉았다고 생각해보면 돼요. 모르는 어휘로 가득 찬 문장, 그것도 그 한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나 한 편의 글을 읽고 이해한 뒤에 해결해야 되는 과제를 받는단 말이죠. 그런 상황이라고 보시면 돼요. 문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 그리고 글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선생님의 설명이 이해가 되질 않고요. 아무리 집중을 하고 싶어도 못 알아들어요. 마치 외국어를 듣고 있는 것 같겠죠. 결국 아이가 수업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미리 문해력을 쌓아 놓아야 해요. 그게 안 된 채로 문제집 풀이부터 하면 설령 문제를 잘 풀어도 교과서는 이해를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요.

지금 초등학생들이 놓인 환경을 생각하면 문해력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죠. 책보다 편하게 학습할 수 있는 도구들이 아주 많잖아요. 그래서 독서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 같고요. 

맞아요, 과거에는 문해력이 큰 이슈가 아니었던 이유가 그거예요. 책 읽고 쓰는 게 별일 아니었고요. 어쨌거나 읽은 경험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질문이나 새로운 내용들을 만나도 읽어낼 수는 있었어요. 그게 지금 학생들은 안 되는 거죠. 이건 아이들 탓이 아니거든요. 태어났는데 벌써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졌잖아요. 울기만 하면 스마트폰을 막 줬잖아요. 이건 얘네가 원한 게 아니고, 그런 환경에 놓였던 것뿐이죠. 그런데 아이들의 문해력이 낮다면서 마치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든 건 어른들, 환경인데 말이죠. 지금 아이들 입장에서는 유혹이 너무 크다는 걸 이해해야 해요.

작가님은 또 공부를 덜 시키라는 게 아니다, 학원에 무조건 다니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는 말이다, 라고도 했거든요. 우선순위에 있어 독서를 더 먼저 챙겨야 한다는 이야기죠? 

저희 아이들도 학원 많이 다녀요. 학원은 필요할 때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곳이에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더 중요한 걸 결정적인 시기에 놓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저희 동네도 보면 밤 10시가 됐을 때 동네가 막 바글바글하거든요. 그때 학원 수업 끝나고 아이들이 차 타고 집에 가요. 그럼 이 아이들이 그 시간에 셔틀을 타고 집에 가서 책을 읽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서 아이한테 자꾸 왜 책 안 읽느냐고 하면 안 되죠.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해줘야 해요.



중요한 건 시기가 아니다

다른 학습활동보다 독서를 우선하지 못하는 이유가 불안함 같아요. 공부 안 하고 독서만 해도 될까, 하고요. 작가님은 독서가 그 불안감에 대한 확실한 답이라고 확신하세요? 

네, 제게는 확신이 있어요. 지금 학부모님들이 책 읽을 시간을 빼서 학원을 보내고, 문제집 풀게 하는 이유는 진도 때문이거든요. 더 먼저 배우게 하는 거죠. 저도 시켜봤는데요. 엄청 자랑스럽더라고요. 되게 기분이 좋아요. 우리 아이가 지금 2학년인데 3-4학년 진도를 공부하고 있다는 자체가 학부모님한테 큰 위안이 되는 건 맞아요. 저는 선행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요. 선행이 우리 아이한테 필요한지를 먼저 점검하고 결정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선행을 했을 때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학생이 있는 반면 선행을 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는 학생도 있거든요. 실제로 굉장히 강도 높게 갔을 때 따라가는 아이들이 있어요. 반에 한두 명 정도죠. 그런데 반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그러고 있다는 게 문제고요. 저도 불안해했던 엄마고, 학부모의 불안함을 다 이해하지만 뭐가 유리한지를 고민해야 해요.

불안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생길 때 기준으로 갖고 있어야 할 질문으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아이가 책을 더 좋아하게 만들고 더 자주 읽게 만드는 것일까?”(293쪽)를 꼽으셨잖아요. 여기에 핵심이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아이들은 학부모의 태도에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아요. 잔소리 안 한다고 생각하시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자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계속 감시받는 것만으로 계속 잔소리를 듣는 느낌일 수밖에 없어요. 책을 건성으로 읽든 천천히 읽든 빠르게 읽든 읽던 책만 계속 읽든 ‘그래도 되나?’ 싶은 순간에 어쨌든 생각하셔야 될 것은 그 질문이에요. 우리의 목표는 계속 읽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기억하시고요. 책을 읽을 때마다 간섭하고 잔소리해서 뭔가를 바꾸려고 하다 보면 결국 책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작가님은 어떤 고민을 하셨었나요?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궁금해요. 

저희 아이들이 글밥을 늘려가는 건 좋았는데요. 자꾸 전쟁, 총, 판타지, 탐정, 추리, 살인 같은 키워드에만 빠져들더라고요.(웃음)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들을 가지고 글밥을 늘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결론적으로는 그 시기를 개입하지 않고 지나왔는데요. 솔직히 되게 참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개입하면 아예 책을 안 볼 아이들이라는 걸 알았고요.(웃음) 개입하는 순간 얘네들은 책과 멀어지겠다, 그건 얘네들한테 불리한 거다, 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너무 자극적이거나 봐서는 안 되는, 성인이 봐야 되는 책들은 제가 미리 검열을 한다거나 해서 괜찮으면 보여줬죠.

중요한 건 어쨌든 읽는 것에 재미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겠네요. 

글밥이 늘어난다는 건 단순히 글자수가 많다는 게 아니고 서사가 복잡해진다는 뜻이잖아요. 등장인물이 갑자기 확 쏟아져 나오는데 인물들이 어떤 개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하나 하나 기억하지 않으면 읽어낼 수가 없어요.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읽어낸다는 건 그 서사를 기억하고 이해한다는 뜻이고요. 그걸 해봐야 고전이든 더 어려운 단계 혹은 더 복잡한 내용의 책들도 읽어낼 수 있으니까요. 복잡한 서사가 있는 재미있는 글을 경험해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은 학습 만화도 권장한다고 하셨어요. 

만약 저에게 만화책이라도 읽기만 하면 좋은 거냐고 물으시면 저는 ‘예스’라고 답하고 싶어요. 만화책도 그렇고, 편독도 그렇고 한 시기가 있는 것 같거든요. 어떤 아이들은 몇 달 안에 빨리 끝나고, 어떤 애들은 몇 년 동안 가기도 하죠. 이때 중요한 건 시기가 아니고요.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여기서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학부모라는 거죠. 그래서 학부모는 일종의 독서 코치여야 해요. 만화 다음에 어디로 가라고 코치해주지 않고 자꾸 만화 보지 말라고 하면 안 돼요. 만화만 보고 있다면 “이건 어때?”라면서 새로운 걸 보여주시면 돼요. 



버스에서 내리지만 말자

책에 정리된 ‘초등 5단계 독서법’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학년별 독서법’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고학년이어도 2-3단계일 수 있고, 저학년이어도 3-4단계일 수 있으니까 지금 아이가 어느 위치에서 어떤 정도의 독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한 다음 이 독서법을 따라가라고 하셨죠. 

독서 단계를 학년으로 제한하지 말자고 생각한 건 아까 말씀드린 1학년 때 봤던 아이들을 6학년 때 다시 만난 경험 때문이었어요. 1학년 때는 아이들이 다 그림책과 만화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런데 6학년이 되어서 만난 아이들을 보니까 어떤 아이는 계속 만화책만 보고 있었고요. 어떤 아이는 이미 성인 책을 읽더라고요.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각자 아주 다른 시간을 보낸 거겠죠. 그래서 독서는 경험이 너무 중요해요. 어떤 책과의 만남이 있었는지 말이죠. 6년 동안 단계를 올려가면서 재미있는 책과의 만남이 많이 있어야 하는 거고요. 그래서 학년에 매이지 말고 지금 아이의 단계에서 어떻게 다음 단계로 올라갈 것인가를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하루도 빠짐없이 세끼를 정성껏 차려 먹지 않아도 되지만, 굶지는 말자' 정도면 충분합니다."(84쪽)라고 하신 부분도 의미가 컸어요. 조금은 여유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요. 

같은 맥락에서 제가 또 많이 쓰는 표현이 “버스에서 내리지만 말자”는 거예요. 너무 잘하려고 해봤자 어차피 못해요.(웃음) 특히 초등에서 뭔가를 시도할 때는 독서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일단 시작하면 결과를 보는 건 최소 3년이라고 생각을 해야 해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럼 5학년이면 늦었나요? 6학년이면 늦었나요?”라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거든요. 안 늦었어요. 고등학교 학부모한테 물어보세요. 초등학교 6학년은 완전 아기예요.(웃음) 오늘 하루, 이틀 만에 아이의 대학 간판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시고요. 여유를 가지고 꾸준히 하시면 좋겠어요. 

책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보호자 분들도 많으실 것 같거든요. 작가님의 ‘대화하기 꿀팁’이 있으세요? 

일단은 아이와 대화가 계속 있었어야 해요. 대화의 소재 중 하나로 책이 들어오는 것뿐이죠. 어쨌든 대화가 되고 있어야 드라마 얘기를 하든지 연예인 얘기를 하든지 할 수 있고요. 그렇다 해도 “오늘부터 책에 대한 대화를 할게요”라는 아이는 없어요. “이거 재미있다” 그 정도 딱 던질 거예요. 혹은 “지루해” 정도로요. 그때도 “왜 지루해? 그 책 베스트셀러야.” 하면서 강요할 필요 없어요.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 왜 꼭 재밌어야 하나요? 그냥 “왜 그렇게 느꼈어?” 정도만 해도 좋아요. 책에 대한 대화를 열고 싶으면 그냥 먼저 던져보세요. “여기 코끼리는 왜 코가 빨간색이야? 아파?” 정도만요. 그러면 아이가 이 대화를 하고 싶은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말하기 싫은 애들은 “몰라요” 하고 끝나요. 괜찮아요. 꾸준히만 시도하면 말이 나와요. 편안한 질문 하나 정도만 던졌으면 일단 우리 대화가 시작됐다고 생각하세요.

책을 잘 읽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잖아요. 

책에 대한 대화에서 학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책에서 아이가 알게 된 것들을 말하게 만드는 걸 목표로 생각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내용인지, 누가 나오는지, 줄거리가 뭔지 물어요. 사실 줄거리는 성인들도 잘 못 간추려요. 그러면 안 돼요.

책 좋아하는 성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줄 수 있다고도 하셨어요. 둘째 자녀 분의 사례가 그랬죠. 

뭐든 타고난 건 초등학생 때까지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에서 100점 받는 애들 중에 연습해서 점수 받는 애들도 있지만 공부 안 해도 100점 계속 나오는 애들이 있거든요. 얘는 똑똑한 애들이에요. 타고 나는 거예요. 그렇지만 딱 초등학생 때까지예요. 그 이후부터는 초등에서 어떤 경험을 가졌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초등학생 때 100점 맞았다고 공부 안 해도 좋은 대학 가는 거 아니잖아요. 그 이후에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책 좋아하게 타고난 애들이 많지 않아요. 거의 극소수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렇게 녹록하거나 흔쾌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하는 일을 초등학생 때 해주자는 거죠. 놀랍게도 그렇게 조정을 해주면 그런 줄 알고 따라와요. 그게 어린이들의 유연함인 것 같아요. 

초등학생 자녀를 둔 보호자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뭘까요?

저는 엄청 교육열이 높아요. 과하다 싶을 정도죠.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을 바라봤고요. 고학년 때는 중학교를 계속 염두에 두었어요. 지금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 2학년 되는데 저는 계속 고등학교 정보를 모으고 있거든요. 그런 엄마가 왜 문제집 살 돈이 없던 것도 아니고, 로드맵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교육에 몸 담았던 사람인데 왜 문제집을 안 풀렸을까 꼭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어요. 얼마나 책이 유리하길래 책을 저렇게 읽혔을까를 말이에요. 또 부모님이 책을 읽으면 애들이 따라 읽는다는 것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 학부모님들이 부담을 되게 많이 가지세요. 근데 영어 못하는 부모가 애가 영어를 못하면 나 때문에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이 안 맞는 부모들도 많아요. 그건 그것대로 인정을 하고요. 다만 최대한 해줄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아이들의 독서의 길을 열어주시면 좋겠어요. 




*이은경

15년간 초등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사이자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20년 가까이 쌓아온 교육 정보와 경험을 나누기 위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 지난 2년간 초등공부, 학교생활, 부모성장을 주제로 한 600편에 이르는 강연을 유튜브와 네이버오디오클립에 공유해왔다. 현재 ‘슬기로운초등생활’이라는 이름의 4개 채널은 총 10만 명이 믿고 보는 초등교육 대표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 지은 책으로 『초등 매일 글쓰기의 힘』, 『초등 자기주도 공부법』, 『초등 완성 매일 영어책 읽기 습관』 등이 있다.




초등 매일 독서의 힘
초등 매일 독서의 힘
이은경 저
한빛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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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상담가 김태경 “당신의 지혜로운 힘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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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경 저자 

강력범죄가 발생하고 ‘사건’과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넘쳐날 때 ‘피해자’는 뒤로 밀려난다. 사건 정황과 범죄 수법, 가해자의 신상과 범죄 동기가 주목 받을 때, 그곳에 피해자의 이야기는 없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사람과 말과 태도에 대해.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감내해야 하는 시간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범죄 이후에도 이어지는 피해자의 삶에 대해. 이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한다. 피해자에게 어떤 생각과 감정이 찾아들고, 무엇이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고민하게 한다. “범죄 피해자의 선량한 이웃”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과 되돌아봐야 할 것들에 관하여.

김태경 저자는 임상심리학자, 피해자학자, 범죄심리학자로서 오랜 시간 범죄 피해자들을 만나왔다. 그들이 후유증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동시에, 범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 <PD 수첩>,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차이나는 클라스>, <궁금한 이야기 Y> 등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냉철한 분석을 들려주는 이유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도 “범죄 피해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줄어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이 담겨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고 쓰셨습니다. 집필을 결심하시기까지 우려하신 바가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집필 중에도 스스로 경계하신 바가 많았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례를 제시해야 할 상황이 많을 것 같았기에, 자칫 너무 자극적이거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해서 의도치 않게 피해자에 대한 오해를 조장 내지 심화시킬 것에 대한 염려가 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이 책을 쓸 만큼 충분한 경험과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내부검열을 위한 시간도 제법 필요했는데요. 부족하더라도 더 늦기 전에 쓰는 것이 낫다는 주변 사람들의 압박(?)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책에 담긴 이야기, 부제가 말하듯 “피해자를 바라보는 적정한 시선과 태도에 관하여” 오랫동안 말하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말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셨을 것 같기도 하고요. 

네, 짐작하셨듯이 범죄 피해자에 대한 대중의 오해와 편견 해소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껴 시작한 작업입니다. 범죄 피해가 강력한 심리적 트라우마인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기존의 흐름을 끊어야 피해자 보호적인 환경 조성이 더 빨라질 것이라는 믿음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라는 제목에서 ‘용서를 강권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오랜 경험에 비춰보면 어떤가요?

우리는 일상에서 참 쉽게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마음 상태가 결코 아닙니다. 부정적인 사건을 수용해서 자신의 삶에 통합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용서입니다. 이 때문에 용서는 당사자가 아닌 한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구도 강권할 수 없습니다. 한편, 용서는 피해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고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용서’가 ‘선택’의 문제인 양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속 좁은 사람’으로 낙인 찍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사자가 아닌 한 용서를 논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책 제목에 ‘용서’와 함께 ‘권리’라는 말이 쓰여서 참 좋았습니다. 용서를 할지 말지는 피해자가 결정한다는 것, 피해자는 그러한 권한을 가진 주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피해자가 주체성을 잃지 않고 주변인에게 지지 받는 것이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나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용서할 권리가 피해자에게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선택’인 양 읽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범죄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그들이 삶의 주체성을 잃은 사람 내지 망가진 사람처럼 처우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피해자가 범죄 피해에도 불구하고 삶의 주인으로써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 상담 장면에서도 저는 이런 자세로 피해자들을 대하고 있고, 이것이 피해자들의 통제감 회복-나아가 ‘나아지는 것’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가지도록 함으로써 삶의 재건 속도를 높여주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일상 경험을 토대로 범죄 피해자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하며 그것을 이해라고 착각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오해를 양산한다”고 쓰셨습니다. 섣부른 추측과 오해를 낳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자신이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착각을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라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오해와 편견이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평소 내가 가진 상식이 타당한지 자주 검토하고 의심해 봐야 합니다.

“오해가 편견을 형성하고 그것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의 원인이 된다는 점”도 지적하셨는데요. 관련해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집착과 강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공고한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것은 어떤 형태의 2차 가해로 이어지나요? 

무엇보다 피해자는 망가진 사람다워야 한다는 편견이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는 울고, 두려워하고, 매달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에 놓여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관련 전문가들조차도 범죄 피해자라면 응당 이런 상태에서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워하리라고 예상하는 것 같으며, 이 때문에 쉽게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포함한 정신장애 진단을 내리고 과잉보호 하거나 과잉 의존하도록 조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범죄 피해가 극도의 고통감을 초래할 만한 트라우마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건의 유형이나 가해자와 피해자 간 관계, 피해자의 인구통계학적 특성, 사건 후 경과된 시간의 양과 질 등에 따라 후유증의 양상은 매우 큰 차이를 드러냅니다. 누군가는 좀 더 빨리 회복하고 누군가는 좀 더 느리게 회복하고, 심지어 누군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악화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들이 같은 방식, 같은 속도-좀 더 정확히는 자신들이 정해 둔 방식과 속도로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오래 피해자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비난하고, 지나치게 오래 고통스러워한다고 생각되면 나약하고 망가진 사람 취급하는 모순을 드러내곤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피해자에게는 2차 가해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책에서 ‘피해자의 회복과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이웃의 역할’을 알려주셨어요. 상황 별로 세세하게 짚어주셔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말하기보다 듣기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 어설픈 위로나 공감보다는 침묵이 낫다는 것, 두 가지 사항이 기본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네,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묵묵히 피해자가 고통의 시간을 안전하게 잘 버텨내도록 곁을 지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진심을 담은 위로도 피해자에게는 공허한 말로 들릴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 둬야 합니다.

‘제대로 된 공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아닌 ‘그 사람의 견지’에서 헤아려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경험이 아닌 그 사람의 경험으로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는데요. 잘 이해되지 않으면 어설프게 이해한 척하기보다 ‘따듯한 마음’으로 곁을 지키는 것이 더 낫습니다.

상담 과정에서 교수님이 가장 많이 건네시는 말은 무엇인가요? 

제가 트라우마 상담 과정에서 내담자에게 가장 많이 건네는 말은 ‘당신의 지혜로운 자기의 힘을 믿으세요’입니다. 이 말은 범죄 피해로 인해 자기의 일부가 상처를 입었음에도 (다친 영역이 아니라)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는 커다란 자기 영역이 있음을 알리고 그 힘에 주목하도록 안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말이 범죄 피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담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며, 자기 삶의 최고 전문가라는 감각을 유지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장 많이 삼키는 말이 있다면요? 

애써 삼키는 말은 ‘나아질 것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물론 나아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피해자에게는 확신감 있게 나아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인사건에서는 적당한 시기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나아질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유족들이 (스스로) 나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해주실 때도 있나요?

상담 과정에서 제가 먼저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경우는 (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한) 없습니다. 다만, 피해자가 먼저 ‘용서’를 언급하는 경우에는 용서의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런 다음 선택은 피해자 스스로 하도록 돕습니다. 용서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야만 편안함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으니까요.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서둘러 ‘용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는데요. 그것 역시 그들의 선택이니 하고자 하는 대로 두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 하지만 언제든 용서하기를 취소할 수 있다고 꼭 말합니다. 그것 역시 피해자의 선택이니까요.



트라우마 피해자를 상담하는 과정에서 ‘대리 외상’을 경험하거나 ‘연민 피로(compassion fatigue) 증후군’을 겪기도 한다고요. 교수님도 후유증을 경험했다고 하셨는데, 그 시기는 어떻게 지나오셨나요? 

연민 피로(compassion fatigue) 혹은 공감 피로(empathy fatigue) 증후군은 STS나 대리 외상, 소진 등과 중첩되는 개념으로 정서적 혹은 육체적 소진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공감이나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감소하는 것을 말한다.  _192쪽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대리 외상이나 연민 피로 증후군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트라우마 상담 과정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자가 치유 기술과 동료와의 교류도 그것들을 이겨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일상과 일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축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교수님이 하시는 일이, 교수님의 인간관?세계관을 바꾸기도 했나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범죄 피해자들이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의 선량한 의지와 내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바꿔주었는데요. 크기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누구나 내면에 선량한 부분을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외상 후 성장”에 대해 말하셨습니다. 트라우마적 사건을 경험한 후에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성장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포함한 트라우마 상담가들은 ‘트라우마 직후’부터 회복을 위한 심리내적 작업이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모든 트라우마 후 증상은 극복을 위한 노력의 결과이며 회복의 징후인 셈이죠.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성장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속도와 방식에 개인차가 있을 뿐이죠.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서울동부스마일센터(강력범죄피해자전문심리지원기관) 센터장으로 재직 중이다. 범죄 피해자들이 후유증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는 고된 과정을 돕기 위해 힘쓰고 있다. 또한 대법원 전문심리위원, 검찰청 과학수사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형사사법기관의 의뢰를 받아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분석이나 진술 신빙성 관련 자문을 제공하는 임상심리학자이자 피해자학자, 그리고 범죄심리학자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
용서하지 않을 권리
김태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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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 "내리 초보 사랑의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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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운전이었다. “원래 좀 무슨 일에든 정도를 모르고 낙관하느라 급발진하는 경향이 있”(21쪽)는 강이슬은 면허 딸 생각을 하자 운전만 할 수 있다면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애인과의 드라이브, 친구와의 여행, 한껏 확장되는 자유. 그래서 운전 학원에 등록했다. 현실은?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은 저자 강이슬이 운전과 비건, 나아가 삶에서 맞닥뜨린 수많은 ‘첫’ 순간을 기록하며 세상의 초보들을 응원하는 책이다. 눈물 나는 실패와 무릎 탁탁 털고 일어나는 결기가 가득하다. 그 모든 순간이 유쾌하고 따뜻하다. 강이슬은 도전하는 마음, 시작 앞에서 덜덜 떠는 마음이야말로 무언가를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힘주어 묻는다. 그리고 희망하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초보 시절을 더 기억하면 좋겠다고. 그로 인해 이곳이 타인의 초보 시절에 사랑을 갖고 공감하는 세상이면 좋겠다고. “포기든 실패든 다 결과적인 일이고요. 그저 내가 이 삶의 방향을 약간 틀었다는 측면에서, 혹은 내 삶에 조금 더 양념을 쳐줬다는 측면에서만 봐도 너무 재미있잖아요.”라는 그의 말에는 ‘내리 초보 사랑’의 기운이 풍요롭다.

“책을 쓰며 쓰는 동안 내 안에 사랑이 싹 드는 기분을 많이 느꼈어요. 뭔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 처음을 어려워하는 사람들, 자기 좌절감에 휩싸인 사람들이 애를 쓰는 게 눈에 보이고요. 저의 초보 시절도 너무 많이 생각이 났어요. 누구보다 잘하고 싶어서 떨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많이 생기는 경험을 했죠.” 



실수의 웃긴 점 

살면서 맞게 되는 수많은 ‘처음’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어요. 처음 앞에 서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궁금한데요. 이른바 ‘초보자 응원 에세이’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이 책을 쓰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는 운전면허 학원이었어요. 학원비가 비싼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알고 보니 운전 학원은 운전 외에도 커다란 삶의 철학을 알려주는 곳이었죠.(웃음) 일단 학원 선생님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운전이 처음인 사람을 이렇게나 답답해 하는 건 법으로 막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할 정도로요. 자신들도 초보자였을 때가 있었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냉정하고 초보의 입장을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또 도로 주행 연습을 할 때도 그랬어요. 다른 차들이 노란색 학원 차를 귀찮아 하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조금만 천천히 가거나 안전거리를 지키려고 하면 트럭이 끼어들고, 신호가 바뀔 때 조금만 늦어도 바로 빵빵거리고요. 그게 너무 서러웠고, 점점 운전 배우러 가기가 싫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억울해진 거예요. 비싼 돈 내고, 운전은 못하고, 우울하고, 상처만 받고 끝내면 너무 억울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이 얘기를 콘텐츠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예요.

책의 기획이 먼저 작가님 안에 있었던 거군요? 

제가 원래 엄청 즉흥적인데 지구력이 별로 없거든요. 운전면허 학원에 간 날 진짜 너무 서러워서 이렇게는 너무 억울해서 진짜 작은 판형으로 독립 출판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는데요. 또 실행력은 없으니까 그냥 아이템 리스트에 넣어둔 거예요. 놀랍게도 그 시점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편집자 님과 만나서 요즘 새로 시작하는 게 많다는 얘기를 나눴죠. 운전도, 비건 지향적인 삶도 초보적인 단계라고요. 그렇게 책을 함께 구상했고요. 처음 가제도‘채식과 운전’이었어요.

“나의 꿈은 강이슬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강이슬의 영원한 믿을 구석이 되는 것”(33쪽)이라는 말이 참 좋았거든요. 그것이 작가님의 계속된 도전의 동력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옛날에는 ‘세상아 덤벼라’ 이런 태도였는데요.(웃음) 요즘은 그냥 ‘세상이랑 놀자’는 생각이 더 커졌어요.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친구들은 제가 많이 순해졌다고들 얘기하거든요. 신입 시절에는 진심으로 실수하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실수에 대한 강박이 컸어요. 하지만 아무리 여러 번 확인을 해도 생기는 게 실수더라고요. 더구나 이미 벌어진 실수에 너무 매몰돼 있으면 더 우울하고 슬프죠. 지나고 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실수를 하면 그 실수의 웃긴 면모를 좀 생각해 보는 연습을 하게 됐어요. 

실수의 웃긴 점이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일하면서 생긴 직업병 중 하나인데요. 아이템을 엄청 많이 짜야 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템이라는 게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코미디여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이템을 내 생활에서 많이 찾게 되더라고요. 실수를 하고, 좌절하다가도 ‘이걸 대본화 시키면 어떨까, 이거 좀 웃기지 않나?’ 하면서 조금 웃게 되고요. 그게 엄청 도움이 되더라고요. 어떤 실수를 크게 저지르더라도 코미디의 넓은 세상에서 보면 그냥 에피소드 하나로 줄여지는 거죠. 진짜 너무 슬픈 것마저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연습이 많이 됐어요.

운전에서 시작해 운동, 비건 등 다양한 영역에 자신을 초보의 상태에 놓으시더라고요. 작가님은 원래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덜한 편이세요? 

원래는 아니었어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데요. 중학생 때 특별활동 수업을 비즈공예부로 들어갔어요. 당시 유행이었거든요. 그런데 제 손재주가 꽝이었던 거죠.(웃음) 그러면 그냥 단순한 걸 만들면서 즐기면 되잖아요.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비즈로 가방을 못 만드는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나서 비즈 시간만 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만들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내가 뭔가를 못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에요. 그러다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편하다는 걸 살면서 서서히 알게 됐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겁날 때마다 ‘나는 히어로다’ 주문을 외요”(242쪽)라고 했는데요. 이 역시 경험을 통해 터득하게 된 주문이겠네요. 

처음에는 엄청나게 못했던 것들도 나중에는 잘할 수 있게 되죠. 그게 너무 감격스러울 때가 있어요. 내가 이걸 이렇게 할 줄 알게 됐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얼마 전에도 처음 방송 작가를 하던 때의 동기들과 만났는데요. 시간이 벌써 9년이나 지난 거예요. 그때는 하나 하나가 어려워서 선배들한테 계속 질문하고, 모르는 방송 용어 외우느라 애쓰고 그랬거든요. 그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 보니 정말 많이 컸더라고요.(웃음) 참 대견했어요. 어릴 때 헤맨 것들이 지금 다 이렇게 쓰이고 있구나, 싶었죠.



헛수고가 아니다

책은 작가님이 운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면허를 딸 때까지의 이야기를 굵은 줄기로 삼고 있잖아요. 궁금했어요. 그래서 지금 작가님의 운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웃음) 

지금은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일일보험을 들어서 아빠랑 하루 2시간 정도 연습을 하는데요. 진짜 처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늘었어요. 그렇지만 아직 혼자서 운전을 하면 굉장히 위험할 정도예요.(웃음) 얼마 전에는 책 홍보를 위해 유튜브 촬영을 했는데요. 마지막 코너가 제가 직접 운전을 해서 어딘가로 가는 거였어요. 그런데 제 옆에 타셨던 편집자 님이 비명을 너무 지르시더라고요. 깔끔하게 실패했습니다.(웃음)

마침내 면허를 따고 조금씩 운전을 하게 된 지금의 강이슬이 처음 운전면허 학원에 갔던 강이슬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일단 가장 해주고 싶은 얘기는 “너 그걸로 책 낼 거다, 영판 헛수고가 아니다(웃음)”예요. 이 얘기를 해준다면 더 힘내서 엉망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기죽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요. 당시에는 ‘나는 왜 이렇게 바보 멍청이일까’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말 나쁜 건 저에게 그렇게 윽박지르던 학원 선생님들과 도로 위에서 만난 잔인한 운전자들이잖아요. 당시에는 제가 너무 못하니까 “제가 본 학생 중에 제일 못합니다”라는 말을 믿었는데요. 알고 보니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얘기들을 들었더라고요. 그래서 자책하던 저에게 그건 그저 레퍼토리니까 너무 기죽지 않아도 괜찮다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학원에서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어쩜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초보 시절을 잊고, 초보가 가진 불안함과 두려움을 공격하는 걸까 싶었어요.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면서 반성을 많이 했는데요. 운전이라는, 내가 가보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했어도 내가 안온하게 있던 나만의 그룹에서는 나 역시 그런 꼰대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더라고요.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는 게 초보 시절의 기억 같은데요. 진짜 그 기억을 잘 간직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구나, 싶었어요. 초보시절, ‘못했던 나’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요. 초보 시절 잊어버리는 사람 좀 재수 없잖아요. 저는 진짜 재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처음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 만해질 것이다.”(238쪽)라고 하셨죠. 중요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어요. 

‘내리 초보 사랑의 세상’이라고 저는 표현했는데요. 초보 운전자 강습생을 돈 내고 배우러 온 타인으로만 볼 때는 그가 운전을 못하는 게 내 일거리를 늘려주는 너무 귀찮은 상대일 뿐이죠. 하지만 내 초보 시절을 기억하고, 상대를 가슴 깊이 공감하게 된다면 ‘너무 힘들지, 나도 알아, 그러니까 내가 더 잘 알려줄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취미를 배우는 곳이든 일터든 진정한 공감이 있다면 다를 것 같고요.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면 무엇보다 나의 초보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상대방이 어려워하는 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겹쳐 보인다면 좀 덜 냉정해지지 않을까요.

특히 아버지와의 일화가 재미있는데요. 아버지께서 정말 포용적이고, 작가님에게 응원이 되는 존재시더라고요.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데 어쩌면 이렇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을까, 늘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저와 아빠의 관계가 더 긴밀할 수 있었던 건 아빠가 참 잘 들어주는 분이라는 점이거든요. 그게 저희 아빠를 남다른 아빠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들어준다는 것은 곧 상대를 이해해보려고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잖아요. 저희 아빠는 딸들에게 마음이 열려 있으니까 서로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딸로서도 ‘우리 아빠는 내 얘기를 일단 들어주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어려운 얘기도 어렵지 않은 얘기가 되고요. 저는 그래서 어릴 때부터 흔히 부모님한테 말 안 하게 되는 연애 얘기 같은 걸 아빠한테 정말 많이 얘기했었어요.

바꿔 말하면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게 작가님의 목표이기도 하겠어요. 

맞아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싶어요. 잘 들어주는 줄 준비는 누구나 되어 있을지 몰라요. 문제는 상대가 말을 하고 싶게 하는 사람이 되었느냐죠. 조금이라도 심리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래서 들어주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런 생각도 요즘은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점점 후배들도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작가님은 스트레스도 지나치게 안 받는 성향에, 탁월한 긍정성을 갖고 계시잖아요. 자신의 그런 성향이 초보의 상태를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는 데에는 어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저는 저의 실수가 도덕적으로 그른 일이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닌 이상 진짜 별로 무섭지 않거든요. 실수에 집중하기보다 내가 열심히 했다는 걸 부정하지 않으려고 하고요. 이 실수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려고 해요. 운전할 때도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렇게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돈도 많이 냈는데 왜 나는 운전을 못할까 생각을 하다가도 내가 세상을 너무 오만하게 살았다는 자기 반성을 하는 거죠.(웃음)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이렇게 떨어보는 기회가 별로 없었구나, 이건 어쩌면 내 인생에 한 번쯤 꼭 와야 하는 긴장의 순간인가보다,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초보를 두려워하지 않는 데 많은 도움이 돼요.

다양한 것들에 도전하고, 포기도 하면서도 정말로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지켜나가는 모습도 눈길이 가요. 현재 작가님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가 비건 지향 생활이잖아요. 

비건 지향 생활을 한 지 2년 가까이 됐어요. 처음에는 함께 일하는 팀원들이 당황했는데요. 지금은 어느 카페에 비건 메뉴가 나왔다고 하면 팀원들이 먼저 알려주고, 저보다 더 기뻐해줘요. 정말 마음으로 이해를 해주죠. 더구나 팀원들 사이에서 고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없는 것이라는 선입견도 사라졌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엄청 감사하고 뿌듯하죠.

하지만 방송 작가 일을 하면서 겪게 마련인 신념과 일 사이의 충돌에 대해 고민하신 부분도 있었죠.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계세요? “비건계의 만만한 예시가 기꺼이 되고 싶다”(154쪽)고 하셨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아요. 평소 개인적인 식생활에 있어서는 어려운 일이 전혀 없는데요. 일은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동료들과 같이 애쓰는 프로그램이라 힘들 때가 있어요. 답사를 가면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요. 그럴 때는 양념 정도, 혹은 덩어리가 지지 않은 선에서 타협을 하죠. 그런데요. 흔히 비건을 한다고 하면 가장 많이 보이는 반응이 ”진짜 대단하다, 나는 절대 못해”거든요. 저는 그건 안 해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든 한 달에 한 끼라도 의식적으로 채식을 한다면 그것도 비건 지향 생활을 하는 거거든요. 그것은 나는 절대 못한다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식생활이 정 어렵다면 옷이나 다른 제품을 살 때 동물 소비를 하지 않는 것 또한 비건 지향이에요. 누구나 어떤 일도 완벽할 수 없거든요. 완벽이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데 비건에 대해서는 너무 완전한 것만 생각하니까 더 멀게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방금 말씀은 책 전체에 담긴 메시지이기도 할 것 같아요. “이도 저도 아닌 완벽주의자 말고 확실한 헐렁주의자로 살아버리겠다”(105쪽)고도 하셨죠. 포기마저도 성과로 바라보자, 그러므로 과정을 중요하게 보자는 이야기예요. 

맞아요, 아무것도 안 했을 때의 나와 뭔가를 했을 때의 나는 다르죠. 뭔가를 해봤다면 포기를 하든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어쨌든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주 달라요. 1년도 아니고요. 그냥 하루 전의 나도 너무 다르거든요. 1초 단위로 봐도 그래요. 뭔가를 시작한 순간 바뀐다고 생각해요. 어떤 의지를 가지고 일단 한 거니까요. 그것은 그 자체로 칭찬받아 마땅한 것 같아요. 포기든 실패든 다 결과적인 일이고요. 그저 내가 이 삶의 방향을 약간 틀었다는 측면에서, 혹은 내 삶에 조금 더 양념을 쳐줬다는 측면에서만 봐도 너무 재미있잖아요. 또 시작을 한다는 것, 사실은 별 것 아니거든요. 포기를 두려워하는 것,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요. 도덕적으로 어긋나거나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처음의 순간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실수로 괴로워하거나 분들에게 작가님이 전하는 응원의 말이 있다면요? 

예전부터 많이 하는 생각인데요. 나중에 늙어서 생각할 때 무엇을 시작했다고 후회할 게 있을까, 싶거든요. 따져보면 보통은 아니더라고요. 시작한 걸 후회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얼마 전에는 친구가 모아 놓은 돈으로 어학연수를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친구에게 무조건 가라거나 가지 말라고 하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네가 70대의 노인이 돼서 뒤돌아봤을 때 이 순간이 후회될까? 젊은 날의 도전으로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는 영웅담이 될까?”라고요. 제 경우 인생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후회할 만한 시작은 없었어요. 예를 들어 수영을 배우는 도전은 작은 거지만 막상 앞에 닥쳤을 때는 너무 고민들이 많잖아요. 일찍 일어나야 되고, 회사일에도 어느 정도 영향이 갈 거고요. 그렇지만 이것을 원근법처럼 멀리서 보면 달라요. 수영을 하는 노인이 된다는 건 멋진 일이잖아요. 그런 식으로 작은 선택을 할 때도 좀 멀리서 바라보는 그런 연습을 해보시면 좋겠어요. 그러면 선택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요. 




*강이슬

이렇게나 못하는 운전을, 수영을, 채식을 ‘이렇게나 열심히 하는 나’를 믿는다. 초보들에게 따뜻하고 다정한 미래를 지키러 온 히어로의 마음으로, 기꺼이 초보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놀라운 토요일>, <SNL 코리아>, <인생술집>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는 방송작가.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아 에세이 『안 느끼한 산문집』을 출간했고, 『새드엔딩은 없다』를 썼다.




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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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 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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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닥터프렌즈 이낙준 “웹소설은 하고 싶은 이야기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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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인후과 전문의’, ‘유튜브 닥터프렌즈 출연자’, ‘웹소설 작가.’ 수식어가 많은 이낙준은 요즘 의사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유튜버 이낙준’과 웹소설 작가 ‘한산이가’로 살고 있다. 처음 웹소설에 도전했을 때만 해도 ‘의사가 무슨 글이냐’며 핀잔을 줬다는 가족들은 요즘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글 많이 썼어?’. 

평범한 독자에서 웹소설 지망생을 거쳐 『중증외상센터 : 골든 아워』, 『닥터 조선 가다』 등 걸출한 작품을 쓴 작가가 되기까지, 작가 이낙준(한산이가)은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웹소설의 신』은 이낙준(한산이가) 작가가 웹소설 지망생들을 위해 쓴 웹소설 작법서이자 웹소설 그 자체다. 허름한 고시원에 사는 웹소설 지망생과 느닷없이 나타난 신이 나누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도 웹소설 한 번 써볼까?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웹소설 지망생이 시행착오를 줄여가는 이야기

요즘은 병원을 운영하지 않는다고요.

소설 쓰기에 전념하고 싶어서 잠시 쉬고 있는데요. 다신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에요. 웹소설로 저보다 더 성공한 작가님들이야 당연히 전업하셔야겠지만 저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웹소설 지망생분들에게도 겸업을 추천하는 편이고요.

표지가 인상적이에요. 처음에 의아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왜 이렇게 홀리한 분위기인지 알겠더라고요. (웃음)

자기애가 넘치죠? (웃음) 출판사에서 정해주는 대로 했어요. 책으로 나온 걸 보니까 생각보다 멋있더라고요.

제목도 심상치 않은데요. 처음부터 ‘웹소설의 신’이었나요?

네. 일부러 ‘웹소설의 신’이라고 지었어요. 웹소설 쓸 때는 ‘어그로’가 필요하거든요. 독자들이 제목 보고 ‘이 작가 뭐지, 자기가 신이라는 건가?’ 싶을 거 아니에요. (웃음) 이렇게 흥미를 끌어서 다음 내용을 보게 하는 게 웹소설 잘 쓰는 기술 중 하나예요.

성공한 전략인 것 같아요.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웃음) 웹소설 작법서를 웹소설로 쓴 이유는요?  

처음에는 보통의 실용서처럼 쓰려고 했는데 도무지 진행이 안 되더라고요. 에세이로 시작해도 쓰다 보면 점점 웹소설이 되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웹소설 잘 쓰는 법도 웹소설로 써봐야겠다 싶었어요.

한석준 아나운서가 대표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기도 한데요. 어떻게 쓰게 됐나요?

한석준 아나운서도 저만큼 웹소설을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 제가 볼 때마다 아나운서가 나오는 웹소설을 써보라고 했어요. 처음에 조금 쓰더니 나중에는 안 쓰는 거예요. 오히려 저한테 웹소설 쓰라고 말만 하지 말고 웹소설 쓰는 법을 책으로 써보라고 역제안했고요.

바로 수락하셨나요?

‘아니 이렇게 역으로 공격이 들어온다고?’ 싶었는데요. (웃음) 그때 마침 쓰고 있던 소설이 잘 써져서 시간이 남았거든요. 총 40챕터로 구성하고 하루에 하나씩 쓰면 40일이면 되겠다 싶어서 수락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책에 등장하는 ‘웹소설의 신’이 말하죠. 쓰고 싶은 소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웹소설의 신』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요? 

웹소설 지망생이 웹소설의 신을 만나서 시행착오를 줄여가는 이야기요.

단순하고 명료하네요. 

무조건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특히 웹소설은요. 독자들의 생각을 물어보는 책들도 있지만, 웹소설은 그렇지 않거든요. 작가가 자기 작품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으면 재미없을 게 뻔해요. 그러니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알았다면 그다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해요.

어떤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웹소설을 한 번 써봤거나, 쓰고 있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본인의 작품이 아직 유료화되지 않아서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은 지망생들이요. 또는 가까스로 소설을 유료화했는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수익이 나지 않는 분들에게도 좋고요. 대체로 이런 분들은 글에 대한 열정도 있고 성실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있는 건데 저도 그 과정을 다 거쳐왔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하우를 이 책에 담았기 때문에 도움이 될 거예요.



내 별명은 ‘웹소설 전도사’

군의관 시절에 웹소설을 많이 보셨다고요. 왜 웹소설이었나요? 

아버지가 책을 좋아해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으시거든요. 어렸을 때 집에 책이 많았어요. 다른 분야의 책은 어렵지만, 장르소설은 비교적 재미있게 읽혀서 『드래곤 라자』같은 책을 많이 읽었고요. 커서도 자연스럽게 웹소설을 읽게 됐는데 의대 본과나 레지던트 때는 시간이 없어서 못 읽다가 군의관 생활하면서 시간이 많이 생기니까 더 많이 읽었죠.

그러다 ‘나도 한 번 써볼까?’ 하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요?

어렸을 때 봤던 『데이몬』이라는 판타지 소설을 어른이 돼서 다시 봤는데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어릴 때는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읽을 때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재미있게 잘 쓰지, 나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웹소설 작가님들과 함께 메시지를 나누는 사이가 됐죠. (웃음) 

별명이 웹소설 전도사라고요. 

친한 사람들한테 웹소설 쓰라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 웹소설 쓰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고요. 웹소설은 평범한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아요. 

지인 중에 작가님께 전도를 당해서 웹소설을 쓴 분이 있는지 궁금해요. 

친동생이 웹소설로 데뷔해서 네이버 웹소설 진출을 앞두고 있고요. 고등학교 친구는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중견작가예요.

내가 웹소설 작가로서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요?  

일단 웹소설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요. 웹소설이 재미있지 않지만, 돈이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쓰면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도 한계를 마주하거든요. 물론 간혹 웹소설을 전혀 읽지 않고도 잘 쓰는 천재 같은 분들이 있지만, 아주 드문 케이스고요. 웹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이면서 기본적인 문장력이 있으면 시작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소설을 쓸 때 독자의 반응에서 힌트를 얻으라고 조언했는데요. 모든 댓글이 유의미한 건 아니잖아요.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요? 

무조건 매출이요. 지난 화에 달린 댓글을 참고해서 이번 화를 썼는데 매출이 확 오르면 지난 화 댓글은 유의미한 피드백이에요.

명쾌하네요.

매출은 정직하거든요. 반대로 댓글에 비슷한 비판이 계속 달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매출이 떨어졌다면 다음 화는 절대 이번 화처럼 쓰면 안 되는 거죠. 단, 작가가 지금 연재하는 작품의 전개를 미리 정했고, 그 전개가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비판 댓글이 달려도 고치지 않고  계획대로 쓰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어설프게 고치면 더 악영향이 있을 수 있거든요. 대신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다른 작품 쓸 때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죠.

이런 점을 보면 웹소설은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이 특히 활발한 것 같아요. 

모든 작가와 독자가 그런 건 아니에요. 저처럼 매일 연재하기 위해 소설을 미리 써두는 작가는 거의 수정을 안 해요. 이 작품에서 안 좋은 피드백을 받으면 다음 작품에 반영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비축해둔 소설이 없이 라이브로 쓰는 분들은 아무래도 댓글을 많이 보시죠.

전반적으로 몸에 힘을 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한산이가’라는 필명에도 특별한 뜻이 없다고요. 

맞아요. 별다른 뜻은 없어요. 제 소설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쓴 게 아니었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한 번 써봤는데 다행히 한 번 더 써볼 수 있겠다 싶은 정도의 결과를 얻었고, 두 번째 소설을 썼을 때는 다음 소설은 더 잘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요.



‘대박’난 작품 하나로 버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웹소설이 처음 나온 5년 전 즈음보다 요즘 독자들의 눈이 더 높아졌다고요.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아요. 독자들의 눈이 높아짐과 동시에 작가들의 실력도 좋아졌어요. 모든 분야가 그런 것처럼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시장이 커지잖아요. 잘하는 사람들이 계속 시장에 들어오고요. 웹소설도 그렇죠.

어떤 부분에서 과거와 달라졌다는 걸 가장 많이 느끼나요?

제 첫 소설만 봐도 알아요. 지금 보면 비문도 있고, 문장 호응도 안 되고 대사도 어색하거든요. 그런데도 유료화에 성공했어요.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요. 아마 제 첫 소설이 지금 나왔으면 유료화도 힘들었을 거예요. 좋은 고기 먹으면 그다음에 안 좋은 고기 못 먹는 것처럼, 글도 똑같거든요. 잘 쓴 글을 본 사람은 못 쓴 글을 단번에 알아봐요.

문장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쓰기 위해 김영하, 김애란 같은 문학 작가들의 글을 많이 보라고 조언해서 의외였어요. 

가리지 않고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웹소설을 좋아해야 웹소설 작가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웹소설만 읽어서는 잘 쓰기 어렵죠. 특히 김영하 작가님 문장은 담백하게 딱 떨어지는 느낌이 있는데 그런 문장이 웹소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김영하 작가님이 웹소설 써주시면 좋겠다는 망상을 하기도 하지만, 절대 안 쓰시겠죠. (웃음) 

지난 5년간 웹소설 시장이 꾸준히 성장했는데요.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웹툰, 드라마 등 다른 장르와 융합되면서 계속 성장할 것 같아요. 소설 속 인물이나 설정이 일종의 이야기 지도가 되어 여러 장르로 만들어지는 거죠.

웹소설 작가로서 앞으로 바라는 바가 있다면요? 

예전에는 작품 하나를 대박 내서 그 작품으로 버티고 싶다는 생각했는데요. (웃음) 지금은 가능한 글을 오래 쓰고 싶고요. 앞으로 웹소설 장르가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고요.




*이낙준(한산이가)

65만 팔로워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닥터프렌즈]의 출연자이자 이비인후과 전문의, 그리고 웹소설 작가다. ‘한산이가’라는 필명으로 네이버 웹소설에서 활동 중이며, 여섯 번째 작품인 『중증외상센터: 골든 아워』가 흥행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유튜브 채널에서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내과 전문의와 함께 의학 상식은 물론, ‘의학 게임 리뷰’ ‘첫 만남에서 호감을 얻는 방법’ ‘저탄고지 다이어트의 진실‘ 등 유익을 넘어 재미까지 사로잡는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틈틈이 소설을 쓴다. 써낸 작품으로 『군의관, 이계가다』, 『의술의 탑』, 『닥터, 조선 가다』, 『의느님을 믿습니까』, 『A.I. 닥터』 등이 있다.




웹소설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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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준(한산이가) 저
비단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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