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필요한 극약 처방은 뭘까.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 황금빛 크레마로 내려진 에스프레소?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정주행할 법한 드라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는 게 없다면 윤가은 영화감독에게 SOS를 쳐도 좋겠다.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영화 말고도 좋아하는 게 아주 많은”윤가은은 언제나 뭐든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는, ‘호(好)’가 너무 많아 첫 산문집의 제목을 『호호호』라고 지은 사람이니까.
좋아하는 마음을 찾는 일
읽는 내내 기분 좋은 에세이는 오랜만이었어요. 제목부터 『호호호』.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갑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책을 내고 하는 인터뷰가 처음이라 엄청 긴장되고 떨리네요.
“영화 밖으로 밀어낸 나의 수많은 사랑들을 다시 돌아보고 되찾고 싶었다.”(9쪽) 『호호호』는 감독님의 첫 산문집이면서 동시에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 책입니다.
두 번째 영화를 마치고 번아웃이 찾아왔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회복되지 않았고 영화에 집중하느라 잠시 가장자리에 치워뒀던 좋아하는 것들을 써보기로 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였는데요. 글을 완성하고 보니 결국 그 많은 좋아하는 것들 중에 여전히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마음들로부터 내가 영화를 하게 됐구나.’ 생각했죠.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 그것을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 저는 정말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눈치를 많이 보셨다고요.
제가 한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게 잘 안 돼요. 게다가 좋아하는 건 또 되게 많고. 뭔가 뚜렷한 기준 없이 뭔가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진짜 심했어요. 영화라는 게 어쨌든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가야 하잖아요. 저는 정말로 얘는 이래서 좋고 쟤는 저래서 좋은 건데, 취향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요. 예리하지 못하고 분석적, 비판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는 성격이라 아예 책으로 다 오픈해버리자, 깨버리자는 생각도 있었어요. 영화 말고 다른 것, 그냥 개인적인 살풀이 같은 걸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책 계약은 한참 전에 하셨더라고요.
2017년에 〈씨네21〉에서 「윤가은의 디스토피아로부터」라는 칼럼을 연재했어요. 4주마다 쓰는 글이었는데 영화인의 시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코너였어요. 주제가 분명한 글이었죠. 이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을 주셨는데 뭔가에 홀린 듯 책을 계약하고 있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이후 몇 년 동안은 글이 안 써졌어요. 매년 부채감을 이기지 못하고 “저 아무래도 못 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2020년 말에 여러모로 심경의 변화가 생겼어요. 그때는 책을 내겠다는 생각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월간 채널예스』에 연재했을 때 칼럼명은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좋아했죠.
연재 글은 정말 신나게 썼어요.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글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책은 또 다르더라고요. 정말 솔직히 “내 글이 책으로 나와도 되나?” 이런 질문을 진짜 많이 했어요. 출판사에 “창피하지 않겠느냐?”고 여쭙기도 했고요. 왜냐하면 일단 제가 유명 영화감독이 아닌 데다가 되게 사적인 취향에 관한 글이라서 이게 독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주변의 작가 친구들이 책을 낼 때마다 “나무야, 미안해.”라고 말하는데, 저는 정말 나무에게 미안했어요.
와, 너무 솔직하세요.
이상한 창피함, 부끄럽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정말 컸는데요. 한편으로는 어설프고 서툴러도 처음이니까,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었어요. 저에겐 되게 의미 있는 기록이라서요.
시나리오와 출판물, 어떻게 다르던가요?
영화 시나리오는 가지치기를 많이 해야 하는 작업이에요. 시나리오가 최종적으로 완성되기까지 엄청난 객관화 작업이 필요하고 또 엄청난 피드백을 받아야 해요. 진심을 다해 글을 쓰지만 어떤 룰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요. 그런데 책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어요. 제가 어떤 단어를 선택해서 문장을 완성하면 웬만해서는 이 단어가 바뀌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하게 되고, 기승전결의 서사에서 조금 벗어나도 되는 자유로움,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글쓰기 수업도 들으셨더라고요. 책 집필을 위한 과정이었을까요?
그때는 시나리오가 너무 안 써져서 약간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어요. 주체할 수 없는 어떤 탈진 같은 것 때문에 글쓰기의 힘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김지승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을 추천해줬어요.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진행한 과정이었는데요. 코로나19 때문에 거의 모든 수업을 온라인으로 하던 시절인데 운이 좋게도 저희 기수만 100% 오프라인 수업을 했어요. 작가님의 수업도 정말 좋았고 같이 참여한 동료들로부터 자극을 엄청 많이 받았어요. 각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글로 쓰는 분들이었거든요.
저도 그 수업을 추천받은 적이 있어요. 수강생들이 정해진 책을 함께 읽는 수업으로 기억해요.
맞아요. 매주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했는데, 이런 수업이 아니었더라면 혼자 읽기는 어려웠을, 아주 좋은 책들이었어요. 사실 글을 쓰려고 간 것보다는 책을 읽고 싶었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동기가 컸어요. 제 안을 채워야 했거든요. 진짜 빡센 수업이었어요. 매주 책 읽어야 하지, 내 글 써야 하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피드백도 해야 하지, 이론 공부도 해야 하지. 그런데 수업을 들을수록 책을 더 많이 깊게 읽고 싶고, 뭔가 쓰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점점 차올랐어요. 진짜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너무 신기해서 저 재활원 다닌다고 여기저기 엄청 소개했어요. 지금도 가끔씩 김지승 작가님을 원장님이라고 불러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이 있나요?
정말 다 재밌어서 특별히 고를 수가 없는데요. 지금 생각나는 책은 샬롯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 조이스 캐럴 오츠의 『흉가』, 앨리슨 벡델의 『당신 엄마 맞아?』예요. 『누런 벽지』는 묘사가 엄청 기괴한데 재밌어서 단숨에 빠져들었어요. 짧지만 기승전결이 완벽한 이야기였고요. 『흉가』는 저도 두려워서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소녀들의 악몽을 직시하는 놀라움이 있었고 완전 반해버렸어요. 『당신 엄마 맞아?』는 울다 웃다 하면서 읽었는데, 선생님과 동기들과 함께 나누는 각자의 모녀 이야기가 정말 재밌었어요. K―도터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자리였다고 할까. 그 이후에 모녀 서사 수업도 들었는데, 그것도 진짜 재밌었어요. 계속 커리큘럼이 조금씩 바뀌는 수업이라 나중에 또 들으러 갈 것 같아요.
산문집을 쓰면서 도움을 받은 책이 있나요?
이경미 감독님의 『잘돼가? 무엇이든』을 정말 좋아해서 진짜 많이 읽었어요. 이 책이 나왔을 때 큰 위로를 받았거든요. 솔직한 글이 주는 힘이 정말 세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번 책을 쓸 때도 이 책을 책상 옆에 놓고 썼어요. 제 책을 만들어주신 편집자님께“저 정말 이렇게 쓰고 싶은데 이렇게는 못 쓴다.”는 이야기를 진짜 많이 했어요.
빵집이랑 문방구에는 무조건 들어가야 해요
왠지 감독님은 코로나 블루를 크게 겪지 않았겠다 싶었어요. 물론 마감의 압박은 있었겠지만 『호호호』 글쓰기를 하셨으니까요.
크게 느끼진 않았는데요. 자진해서 밖을 안 나가는 것과 나오지 말라고 해서 못 나가는 것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걸 실감했어요. 2019년 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시작됐을 때는 다음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기간이어서 사람들을 거의 안 만나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1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는 힘들더라고요. 글 쓰는 일에도 지장이 생기고. 코로나19가 작가들에게는 더 직격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변에 책을 쓰는 동료들이 많잖아요. 『호호호』의 추천사는 김소영 작가님이 쓰셨습니다.
김소영 작가님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예요. 아직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지만 진짜 오랜 팬이에요. 영화를 만들면서 김소영 작가님의 블로그를 시시때때로 염탐해왔던 터라 『어린이라는 세계』의 추천사 청탁이 들어왔을 때 엄청 놀랐어요. 그때 처음으로 연락하게 됐는데 『호호호』를 준비하면서 편집자님이 김소영 작가님께 추천사를 부탁하면 어떻겠느냐기에 여쭤봤는데 바로 해주겠다고 말씀하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의외인 부분이 있었어요. 좋아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어요. 일부러 뺀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누군가, 그러니까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제 글에 들어올 때 엄청 겁나더라고요. 내 마음대로 판단해서 써도 될까? 상대방이 이걸 읽었을 때 어떻게 느낄지도 걱정이 돼서요. 『호호호』에 등장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는 작은 것도 다 허락을 받았어요. 이니셜로 할지 실명으로 할지도 다 물어보고요.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쓸 수 없으니까, 눈치를 덜 보고 쓸 수 있는 소재를 쓴 것 같아요. 친구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빵 이야기를 하는 게 더 편하니까, 그런 식으로 정리가 된 것 같아요.
중요한 소재가 나왔네요. 바로 빵! 『호호호』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에피소드가 바로 「좋은 빵, 나쁜 빵, 이상한 빵」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영화사 아토의 김지혜 대표님이 긴히 할 말이 있다며 감독님을 불러 이야기하지요. 그건 바로 “감독님, 제발 빵 좀 그만 사 와요. 저것 봐, 많아서 다 먹지도 못해!”(78쪽) 글의 도입이 너무 심각했던 터라 저는 ‘빵’ 터지며 웃었습니다(웃음).
그때가 영화 〈우리집〉 프리프로덕션으로 한창 정신없는 시기였는데요. 매일 빵집에 들러 빵을 구경하고 사 오는 일이 저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어요. 마침 영화 사무실 근처에는 맛난 빵집이 많았고요.
오늘도 빵을 사 오셨죠. 저도 촬영용으로 빵을 사 왔는데, 정작 감독님은 빵을 못 드신다고요.
네. 안타깝게도. 저는 자타 공인 빵순이, 언제나 밥보다 빵인 사람이지만 사실 빵을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빵을 먹으면 눈이 붓거나 시릴 때도 있고 피부가 가렵고 그래요. 정신 놓고 빵 먹다가 발견할 때도 있고. 요즘은 밀가루와 술을 완전히 끊었어요.
빵 이야기는 정말 재밌으니까 독자분들이 책에서 더 확인하셨으면 하고요. SNS 소개글을 보니 ‘야채파’, ‘초등학교 앞 문방구 습격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가 고기를 먹지 않은 지 20년이 됐어요.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인데요. 처음에는 체질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지금도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면 놀라는 분들이 있는데 20년 전에는 정말 놀라던 때였죠. 그런데 제가 또 〈콩나물〉 같은 영화를 찍으니까 영화 작업을 하시는 지인 한 분이 “야, 너는 앞으로 야채파 감독이야.”라고 하셔서(웃음) 그때부터 ‘나는 야채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담문방구 아저씨 이야기가 책에 소개됐지요? 요즘도 문방구를 가세요?
가요.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밖을 자주 나가진 못하니까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하지만 새로운 동네에 갔는데 문방구가 보이면 일단 무조건 들어가요. 빵집이랑 문방구에는 무조건 들어가야 해요.
그대로 자연스러운 사람
윤가은 감독님을 떠올리면 영화 〈우리집〉, 〈우리들〉 그리고 ‘하이텔 영화퀴즈방’이 생각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중고 비디오 플레이어가 생기면서 비디오를 빌려 보기 시작했고, 3학년 때는 영퀴방 정모에도 가셨죠. 그것도 어머니께서 정모를 데려다주셨다고요?
제 부모님의 최고 장점은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하신 거예요. 물론 이게 단점이기도 해요. 너무 방임이라 제가 알아서 해야 하니까요.
그 결과 공부를 하셨고.
그러니까 그게 부모님의 방침이었던 거죠(웃음). 어렸을 때는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게 되게 좋았는데 또 스트레스이기도 했어요. 어떤 것도 알려주시지 않으니 스스로 우당퉁탕 하면서 가야 했으니까요.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혼자 고민을 많이 한 시기였는데요. 그래도 부모님께 감사한 건 제가 뭘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본격적으로 영화를 한다고 하셨을 때도요?
네. 그냥 신기해하셨어요. 그래서 전 다른 집들도 저희 집 같은 줄 알았어요. 영화 일을 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요. 어쩌면 제가 오랫동안 영화를 꿈꾼 건 어떤 강력한 허들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어요. 부모님이 모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늦게까지 애쓰신 분들이라 어차피 자신이 좋아하는 길로 가게 돼 있다는 걸 일찍부터 아셨던 것 같아요.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우리집〉 촬영 공지 글(‘어린이 배우들과 함께하는 성인분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이 영화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죠. “〈우리집〉의 현장은 어린이와 성인이 서로를 믿고, 존중하고, 도와주고, 배려하는 것을 제1원칙으로 합니다. 어린이 배우들을 프로 배우로서 존중하며,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이자 삶의 주체로서 바라봐주세요. 항상 어린이 배우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시고,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동료이자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세요.” 이 글을 쓰실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
영화가 개봉될 때 그 수칙이 마치 선언처럼 소개가 되었는데, 사실 제 입장에서는 ‘실수 방지용 대비책’ 같은 거였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어린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실수와 잘못을 자꾸 하게 되더라고요. 현장이 워낙 정신없이 몰아치는 곳이다 보니까 예상치 못하게 어린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가 많아요. 지나고 잘못한 걸 알아차리고 나면 죄책감이 너무 컸고요. 저뿐만 아니라 스태프들이 모두 그랬어요. 그래서 다음엔 적어도 아는 실수는 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적은 수칙이에요. 사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적어놔서 좀 부끄럽기도 해요. 그렇게 당연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소리이기도 하니까요.
아역 배우들의 오디션을 볼 때 5차까지 보신다고요. 더 눈길이 가는 배우들의 공통점이 있나요?
아무래도 아이들은 성인보다 꾸밈이 덜하니까요. 대화할 때 느껴지는 진심이 정말 좋고 또 다 재밌어요. 그런데 이야기할 때 정말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아이들이 성인을 만날 때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되게 용감한 친구들인 거죠. 그래서 더 궁금해지고요. 또 영화를 찍으려면 수십 명의 스태프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잖아요. 내가 나인 것을 드러내는 일이 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친구들이 눈에 들어와요. 즉흥극을 하다 보면 아이들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거든요. 이 상황을 진짜로 믿으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한두 시간이 그냥 가요. 안 끊으면 영원히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연기가 나오죠.
어떤 연기를 해도 자연스러운 배우들이 있잖아요. 연기력을 떠나서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느낌. 그런 배우들을 작품에서 만날 때 반가워요.
현장에서도 비슷한 것 같아요. 영화 〈우리들〉에서 ‘선’ 역을 맡은 최수인 배우는 리허설을 할 때 정말 조용하고 말수도 별로 없었어요. 보통 현장에서 대기할 때 워낙 끼가 많은 아이들이니까 자기네들끼리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면서 놀곤 했거든요. 그런데 수인 배우는 가만히 앉아서 친구들을 보고 또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화에 집중하고 그랬어요. 반응은 보이지만 자기의 말은 많지 않은. 그건 또 그 친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거든요. 자기 자신을 자연스러워하는 게 참 중요하다는 걸, 아이들을 보면서 많이 느꼈어요.
지겹도록 자주 들으신 질문이겠지만 후속작에도 아이들이 나올까요?
말씀드리고 싶은데 아직 확정 단계가 아니라서요. 어쨌든 제가 해왔던 이야기에서 더 확장해서 나가는 영화예요. 갑자기 좀비 영화를 찍거나 그러진 않을 것 같아요.
아, 좀비 영화도 찍고 싶으세요?
그럼요. 제 생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웃음).
저는 작은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가 좋아요. 너무 일상처럼 느껴져서 특별하게 기억에 안 남지만, 영화에서만큼은 중심이 되는 이야기. 감독님이 그런 작품을 많이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일상을 담아낸 작품은 계속계속 하고 싶어요. 그리고 가끔은 크리스마스 특별 영화 같은 것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옛날 제가 어렸을 때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족 영화가 꼭 나왔어요. 〈나홀로 집에〉 같은 건 아니어도 가족들이 막 어울려서 우당탕 놀다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영화를 언젠가 만들고 싶어요.
좋아하는 어른이 있나요?
특정인의 이름을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임순례 감독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임순례 감독님 밑에서 스태프로 일한 경험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우러러보던 분이거든요. 뵐 때마다 늘 격의 없이 대해주시는데요. 어떤 특별한 조언을 해주시는 게 아닌데도 항상 일대일로 대화한다는 느낌이 있어요. 상대가 유명하든 안 유명하든, 권위가 있든 없든, 경험이 있든 없든 누구를 만나도 일대일로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임순례 감독님을 만날 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60세, 70세, 80세 할머니가 돼도 9세 친구랑도 20세 젊은 친구와도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참 쉬운 일은 아니에요.
문득 유년 시절의 윤가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뭘 하든 괜찮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저는 내성적인 아이였는데요. 생각해보면 겁이 많았던 것 같아요. 겁이 많은 것도 내성적인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렇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말, 그 이야기를 가장 해주고 싶어요.
『호호호』를 읽고 나서 전 용기가 생겼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거리낌없이 말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독자분들도 비슷한 마음을 가질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될 때 쉽게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여러 선택지 중에 이걸 더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거든요.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 그 마음을 우리가 좀 더 들여다보면 좋겠어요. 남의 시선, 사회적인 지위 때문에 말하지 못한 것들이 분명 있을 텐데요.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좋아하는 마음이니까요. 그 마음을 꼭 끌어안아주면 좋겠어요.
세상 어딘가에 혹시 나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찾아 헤매는 누군가가 있다면, 부디 이 글이 작은 위로와 웃음이 되어 가닿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이든 얼마만큼이든 좋아하는 마음을 꼭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윤가은
영화감독.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서강대학교 사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예술전문사를 졸업했다. 첫 단편 〈사루비아의 맛〉 (2009) 을 시작으로 〈손님〉(2011), 〈콩나물〉 (2013) 등을 쓰고 연출했다. 〈손님〉은제34회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에서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콩나물〉은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부문에서 수정곰상을 수상했다. 이후 장편영화 〈우리들〉 (2016)과 〈우리집〉 (2019)을 쓰고 연출했다.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제53회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시나리오상 등을 수상한 바있다. 영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영화 말고도 좋아하는 게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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