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다. 2002년, 축구로 세계가 들썩이던 어느 여름이었다. 소설가가 발견한 사진 속에는 기이할 만큼 평온하고 눈이 맑은 예순여덟 살의 목동 네레오 코르소가 그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소설가는 이 사진이 실린 폴커 한트로이크의 기사가 ‘운명처럼’ 찾아왔음을 직감한다. 이후 이 목동은 오랜 시간을 견뎌 한 권의 소설 『바람을 만드는 사람』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개들의 왕』으로 개성 넘치는 인물과 새로운 분위기를 보여준 마윤제의 신작 소설 『바람을 만드는 사람』은 남미 파타고니아의 고원 지대와 바람, 외로움과 강직함이 그대로 신체에 새겨진 어느 목동의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네레오 코르소’,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우는 소년이자 바람 소리를 무서워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지혜로운 노인에게 바람을 만드는 존재 ‘웨나’ 이야기를 듣고 소년의 알을 깬다. 성실하고 배움이 좋은 소년은 능력 있는 목동으로 성장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고 웨나를 찾아 세상에 나선다. 그의 여정은 때론 혼란스럽고, 때론 따뜻하며, 때론 풍요롭고, 외롭다. 세상과 인간의 욕망, 고독, 이상향 등에 대한 넓고 깊은 네레오의 성찰, 구도자의 자세로 미지의 존재 웨나를 쫓는 네레오의 시선, 언제나 안주하지 않고 경계 바깥을 상상하는 이 주인공의 특별함만으로도 독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사색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책머리에 ‘브루스 채트윈과 폴커 한트로이크를 위하여’라고 적었어요. 알 수 없는 이름들을 궁금해 하면서 책 읽기가 시작되죠.
쓸 때부터 첫머리에 반드시 두 사람 이름을 넣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걸 안 넣어주면 책을 안 내겠다.(웃음) 폴커 한트로이크는 독일 기자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었는데요. 이 사람이 쓴 기사가 아니었으면 소설은 절대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브루스 채트윈도 마찬가지죠. 그의 『파타고니아』라는 여행기를 바탕으로 소설이 쓰였으니까요. 이들 덕분에 소설이 쓰인 것이기 때문에 둘의 이름을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브루스 채트윈은 국내에도 책이 출간되어 있으니 아는 분들이 있겠지만 폴커 한트로이크는 잘 모르거든요. 저로서는 우연한 인연이 된 셈인데요. 이 사람이 기사를 통해 상상력의 씨앗을 심어준 거예요. 그의 기사가 오랫동안 남아 있다가 소설로 나타난 것이죠.
폴커 한트로이크의 기사와 거기에 실린 늙은 가우초의 사진 한 장이 그토록 오래 마음에 담기고, 소설까지 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요?
기사를 본 것은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었을 때예요. 우리나라 분위기는 난리였잖아요. 그러니까 늙은 목동 사진을 보고는 ‘이들은 도대체 이 높은 고원지대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싶었던 거예요. 전 세계가 축구 하나 때문에 난리법석인데 이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확산 되었어요. 그때 바로 소설이 된 것은 아니고요. 그러다 2010년 이후에 파타고니아가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됐고 다시 이 인물이 떠올랐어요.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 하나를 꼽는다면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69쪽)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 이야기를 써야 했던 작가로서의 이유도 있었을 거예요.
항상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늘 그 전제 하에 소설이 시작 돼요. 저는 그것을 확신하고요. 이 소설은 어찌 보면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쫓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앞부분에서 그 이야기를 명시하고 시작한 것일 수도 있죠. 사실 처음에는 소설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처음엔 그냥 단순하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정도의 이야기를 생각했죠. 중편 정도로 생각했어요. 가볍게 시작했어요. 반경 수백 킬로미터 내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노인이 죽어가고 있고, 그 노인을 한 사람이 만난다, 이 두 사람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밖에 없다, 라는 설정으로 시작한 거였어요. 당시에 이런 소설을 쓸 거라고 지인에게 말했더니 “그건 굉장힌 스릴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건 아닌데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조금 헤매기도 했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경계의 바깥, 같은 개념들이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잖아요. 시작은 단편적인 이미지였지만 결국 이런 이야기를 써내게 된 것은 이것이 작가의 내면에 깊이 담긴 생각이라는 증명이기도 할 텐데요.
소설이 앞으로 안 나가고 지지부진 했다가 풀려 나가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야기에 저의 세계관이나 철학을 넣고부터 이야기가 진행이 되더라고요. 그때 이야기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거죠. 네레오 코르소라는 인물이 세상을 돌면서 보고, 듣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얻게 되는 이야기에 작가의 세계관을 넣으면서 이런 형태의 이야기가 된 것 같아요.
그 이야기들, 네레오 코르소가 만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 네레오의 생각과 그 생각이 변화는 과정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도 가볍지가 않아요. 책장이 무거운 소설이에요.
이야기가 쉽게 풀린 반면 읽는 분들은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 겪는 일이죠. 전혀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저는 또한 이 소설을 쓰면서 국내 소설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 싶은 욕심도 좀 있었는데요. 한국 소설의 시공간이 협소한 편이잖아요. 그걸 탈피하고 싶었어요. 가까운 예로 일본만 하더라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같은 소설은 중세 유럽 수도사를 주인공으로 15-16세기를 배경으로 하죠. 그 뒤에 나온 『장송』은 쇼팽이나 들라크루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단 말이에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쓸 때는 그런 부분을 확 벗어나서 공간을 확장하고 넓게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좀 있었죠.
등장인물들의 이름부터 그렇죠.
이런 소설을 쓰고자 한 기저에는 사람의 욕망이란 피부색, 국적, 문화에 따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외국을 배경으로 소설 쓴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더라고요. 항상 저의 대답은 “삶의 보편성을 보면 이해될 수 있다”였어요. 세계 좋은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많이 읽었는데요. 딱 눈에 하나 들어오는 것은 ‘삶의 보편성’이었어요. 인간의 욕망은 같다. 인간 근원의 욕망은 똑같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았고요. 이 소설을 충분히 쓸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다행히 시공간은 넓혔는데 어렵다고 하니까(웃음) 걱정이에요.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요. 그 중에서 ‘아나’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어요.
세 사람을 얘기할 수 있죠. 주인공 네레오의 대척점에 ‘발터’라는 장사꾼이 있어요.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데요. 발터는 가장 보편적인, 평범한 사람들의 시각이죠. 네레오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에요. 한편 네레오와 발터의 가운데에 있는 인물이 아나라고 할 수 있어요. 아나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죠. 아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순수한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좋은 곳에서 태어나고, 완벽하게 죽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예요. 네레오는 아나를 만남으로써 세계를 보는 눈이 변하게 돼요. 단순하게 이상향을 쫓던 네레오가 아나를 만난 후에 자기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직시하게 되죠. 아나를 통해 네레오가 심리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거예요.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에요.
아나는 비참한 죽음 때문에도 더 오래 남아요. 네레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아내도 안 떠올리면서 말이에요!
아내 ‘루이사’는 이성으로 만나 결혼을 한 사이지만 아나는 자신의 이상을 이해해준 사람이거든요. 물론 아나의 생각은 좀 달랐지만, 짧은 시간에 네레오는 아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요. 그렇기 때문에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아나를 떠올리게 되는 거죠.
등장인물들이 꾸는 꿈 장면이 여럿 있거든요. 꿈인 만큼 환상적이고 암시적인데요. 이 장면으로 전하려고 했던 게 있었던 건가요?
특별히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네레오의 꿈은 어떤 극적인 전환의 시점이 되었을 때에 썼던 건데요. 특별한 암시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일종의 혼란과 불안 같은 것이죠. 네레오는 자신이 쫓고 있는 인물이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 단지 이름 하나만 갖고 찾아다니는데요. 그런 현실에 대한 고민, 끝없이 쫓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꿈으로 나왔다는 걸 표현한 거죠. 꿈을 어떤 의도로 쓴 것은 아니고요. 저도 모르게 무의식에서 문장이 나오니까요. 나중에 써놓고 보면 내가 쓴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 경험이 굉장히 많아요. 특히 이 소설을 쓸 때는 그런 적이 많았어요. 무의식에서 나온 것 같아요.
꿈과 이상을 쫓아가는 현자들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달라질 것 같아요. 사색적인 면이 있어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전달 받는 것도 다르겠죠.
출간 전에 가제본으로 서평회를 한 적이 있어요. 젊은 독자들 서른 명 정도와 만났는데요. 주로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런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를 느꼈는데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현재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도 그렇고요.
네레오는 계속해서 다른 세계를 좇잖아요. 경계 바깥을 말이에요. 경직된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는 특별히 다르게 읽히는 면이 있어요.
맞아요, 경계 안에서의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경계 밖으로 나가서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우리는 경계 바깥에 아예 나가지를 못하게끔 하죠. 철통처럼 담장을 둘러놓고 ‘나가면 죽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웨나를 찾아 다니는 네레오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거죠. 웨나는 일종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읽는 사람에 따라 웨나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을 거예요.
제목 ‘바람을 만드는 사람’이 가리키는 존재를 처음에는 당연히 웨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읽을수록 웨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람을 만드는 사람은 네레오일지도 몰라요.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요. 책 안에도 얘기했는데요. 따지고 보면 역사란 반드시 경계 밖으로 뛰어나간 사람들에 의해 영역이 확장되고, 그 뒤를 쫓아간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서 그 영역에서 살게 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네레오가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아흐간 족의 펠리페라는 노인 역시 그렇죠. 그 조상들이 동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 해협을 넘어 남쪽 19,000㎞ 정도 되는 거리를 이동했잖아요. 저는 인간에게 내재된 어떤 부분에는 꿈과 이상을 쫓아가는 현자들이 확실히 숨어 있다고 봐요. 생각해보세요. 누군가는 저 달에 가보자고 말한 최초의 사람이 있을 것이잖아요.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먼저 그 생각을 하고 이야기한 사람도 있겠죠. 항해자 마젤란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사람들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경계인이에요. 웨나는 경계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방향성을 가리키는 하나의 표석이라고 볼 수 있을 거예요.
웨나의 존재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작가의 의도를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먼 과거가 아니고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잖아요. 지금은 말하자면 과학의 시대고, 발견되지 않은 것이 과거보다 적은 시대일 텐데 이런 시대에 경계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어떤 중요성을 가진다고 보세요?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위험하더라도 말이죠. 각 분야에서 자기만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 그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것이 반드시 산을 오르는 일이 아니라도 말이에요.
결국 처음에 얘기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과 ‘경계 바깥을 상상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모든 세계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요. 두 가지가 맞닿아 있다는 말이 맞아요.
정말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사내’는 네레오의 아들인가요?
하하하.(웃음) 얼마 전에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들 모임에 초대 받아서 다녀왔는데요. 딱 한 분이 슥 오더니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냐고 묻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알았어요?”(웃음)라고 했었어요. 맞아요, 숨겨놓은 코드인데 잘 보셨네요.
인터뷰에서 얘기해도 되나요?(웃음)
뭐, 괜찮아요. 처음에 쓸 때는 선명하게 알 수 있도록 했는데요. 나중에 고칠수록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이런 형태가 됐죠. 그걸 아셨으면 책을 제대로 읽으신 거예요.(웃음) 실은 그게 핵심이에요. 왜냐,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거든요. 베링 해협을 넘어서 티에라델푸에고 섬까지 인류가 걸어갔듯, 우리의 꿈과 이상도 어느 한 곳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끝없이 이어져나간다는 함의가 담겨 있는 거거든요.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의미예요.
네레오가 숨을 거둘 때 그 사내에게 귀엣말을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죠. 하지만 짐작할 수 있어요. 무언가 사내에게 전달하고 떠난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사내는 노인의 말에 반문할 수 없었다. 먼 지평선에서 굉음이 들려왔지만 사내는 오직 노인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말은 점점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노인의 입에 귀를 바짝 갖다 대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러나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던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지더니 긴 침묵이 찾아왔다.(304쪽)
하지만 그 순간 네레오는 사내가 아들일 거라는 건 몰랐죠. 다만 살아가는 길만 열어준 것이고요. 그렇지만 사내는 왠지 저 사람이 마음에 남아요. 제가 일부러 네레오의 기억과 사내의 기억이 엇갈리도록 하기도 했거든요. 사내가 어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부분이 네레오가 기억하는 아내와는 좀 달라요. 철저하게 다르게 해서 숨겨둔 거였어요.(웃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앞서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힐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작가에게 그런 소설은 무엇이 있는지 듣고 싶어요.
세계의 좋은 문학 작품들을 쭉 봤어요. 중앙아시아부터 시작해 터키, 유럽으로 갔다가 나중에는 미국으로 갔고요. 골고루 많이 읽었는데요. 제 경우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전 작품을 다 읽거든요. 끝없이 먹고, 취하죠.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는 필립 로스, 가즈오 이시구로, 이언 매큐언, 오르한 파묵, 이창래, 제발트, 미셸 우엘벡 같은 작가들이에요. 그들의 책이 나오면 별안간 쫓아가서 읽어요. 특히 필립 로스는 굉장히 좋아하죠. 국내에 번역된 책은 다 읽었어요.
다음 소설도 준비 중이신가요?
2013년 여름 무렵 네 달 동안 초고를 두 개를 썼어요. 하나는 지금 쓰고 있고요. 다른 하나가 이 소설이에요. 쓰고 있는 것은 분량이 좀 많아요. 2,400매 정도 돼요. 이 소설은 당시 700매 정도밖에 안 됐죠. 그래서 이 소설부터 시작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걸렸어요.(웃음) 지금 쓰고 있는 건 청춘 소설이에요. 국내에는 『바람을 만드는 사람』같은 소설도 드물지만 청춘 소설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뤄보려고 해요. 계획대로라면 연령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청춘이라는 말을 되새김질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 소설 역시 다른 사람이 안 가본 영역으로 가서 재미있게 써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시 경계를 넘는군요.
이 소설도 어찌 보면 경계를 넘어갔다고 할 수 있거든요.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도 너무 어려웠으니까요. 아까 얘기했듯이 삶의 보편성이라는 면이 없었다면 못 했을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서 ‘수많은 번민과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한 줄의 글이 우리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잠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333쪽)이라는 ‘작은 소망’을 적었는데요. 인터뷰에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너무 많은 책이 있죠. 그 중 한 권을 읽는다고 해서 인생이 획기적으로 달라지진 않아요.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지침은 될 수 있지만 자기를 바꾸는 것은 자기의 선택이지 성경은 아니거든요. 또 성경이 세상의 모든 지혜도 아니고요. 그렇듯 이 책을 읽고서도 대단한 변화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단순하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이 세 가지만 생각해볼 수 있다면 작가로서는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책이 많이 팔리건 팔리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죠. 숫자가 많으면 좋겠지만, 그렇진 않을 테고요.(웃음) 다만 몇 명이라도 읽는 분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책은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는 기능을 하잖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바람을 만드는 사람마윤제 저 | 특별한서재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에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소통으로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길을 찾는 독자들에게 마윤제 작가만의 진중한 언어와 이야기로 위로와 격려, 용기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