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때로 누군가에게는 너무 가혹하다”고 작가는 썼다. ‘장미’는 가혹한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진 존재다. 열여덟의 나이에 엄마가 된 소녀. 그보다 일찍 부모에게 외면당한 아이. 가출청소년, 미혼모 같은 차가운 단어로 손쉽게 설명되는 사람. “그러니까 이 꼴이지.”라고 혀를 차도 될 것 같은 대상이다. “멍청하고 어리석고 몸뚱이 함부로 굴린 불량소녀”이니까.
그러나 작가는 말했다. “이 사정의 배경에 뭐가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장미의 안에도 웅크리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것은 성폭행이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생겨나는 거”라고 들었지만 아이를 낳았다고 모성이 솟아나는 건 아니었다. 아기 ‘하티’의 살냄새를 맡으면서도 이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장미는 알지 못한다. 입양을 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양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티를 데리고 도망쳐 나온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반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분유를 살 돈도 없는 현실.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하티는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다는 사실. 장미의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갈수록 더 짙은 어둠에 휩싸이는 것 같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몹시 괴로운 것이어서 가슴이 죄이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다행히 책장을 덮으며 안도할 수 있을 테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현실은 다르다. 가혹한 세상이 일순간 낯빛을 바꾸는 일은 극히 드물고, 그 속에 많은 장미들이 남겨져 있다. 어쩌면, 장미의 이야기는 그렇게 기억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엑시트』가 탄생하기까지, 황선미 작가는 ‘입양’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10년을 보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진행 중인 이야기이기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작가적 기질 때문이었고, 덕분에 얻은 것은 고질적인 입병이었다. 작품을 끝맺고 지병도 나아졌지만 이야기를 대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장미의 이야기가 쉽게 휘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황선미 작가는 무겁게 입을 뗐다.
입양인의 입장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요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님이 너무 미웠어요(웃음). ‘장미’가 계속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는 걸 보는 게 힘들었거든요. 쓰시는 분은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싶어요.
힘들었죠. 정말 힘들었어요. 10년 동안 붙잡은 소재니까 ‘어쩌다 이런 데 걸려버렸나’ 싶기도 했죠. 덫에 걸린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버릴 수도 없잖아요. 작가 습성은 있으니까 자꾸만 소재를 모으는 거예요. 말씀하신 것 같은 반응도 있더라고요. 작가가 미울 정도로 아이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그런데 취재를 하면서 제가 만났던 사정들은 이보다 더해요. 이런 일이 너무 많고요. 그 중에서 맥락에 맞게 추려서 정리를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더 심한 일이 너무 많아요.
장미의 심리가 아주 세세하게 그려져 있어요. 그 상황을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들이죠. 긴 시간 동안 취재하셨을 것 같아요.
장미라는 아이는 없어요. 어떤 모델이 있어서 상상을 한 건 아니고요. 좋지 않은 상황에 있다고 할까요, 그런 여자 아이 하나를 만든 거예요. 주인공을 여자로 할까 남자로 할까 하는 생각도 별로 안 했어요. 그런데 취재를 할수록 남자보다는 여자를 많이 만나게 됐어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저지른 일인데, 여자가 계속 피해자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남자는 책임지는 일이 별로 없고 여기에서 너무 자유로운 거예요. 이후에 벌어지는 좋지 않은 사건들을 여자 혼자 감당해야 되는 일이 많은 거죠. 부모도 딸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해줘야 될 것 같은데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연을 끊자고 한다든지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일도 많고요. 학교에서 강제전학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자퇴를 해야 되는 상황까지 생기는데 그걸 다 여자 혼자 감당해야 되는 경우도 많아요. 사회에 나온다고 해도 보호 장치가 없는 일도 너무 많고요.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면요?
미혼모 협회를 갔을 때 지원 정책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지원금을 가지고 근검절약해서 생활하면 공부도 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안 된다는 사정 얘기를 들었고 많은 사례를 봤어요. 또 해외 행사를 가면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이 그런 경우들을 봐요.
장미 주변에는 입양을 권하는 목소리만 있어요. 보호시설의 사람들조차 그렇죠. 아이를 데리고 사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말해요.
미혼모 시설에 갔을 때 아이들이 쓴 수기를 읽었어요. 대부분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더라고요. ‘너에게는 미래가 있다, 학업도 계속 해야지’ 소설에 나오는 얘기 그대로예요. ‘현실은 다르다, 아이를 위해서도 네가 포기하는 게 낫다, 입양을 보내서 좋은 가정에서 키우는 게 낫다’는 식의 조언 내지는 권유를 하는 거예요. 장미 같은 여자 아이들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조차도 입양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자유를 느끼는 것 같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입양 보낸 아이가 어떻게 될지 고민하기보다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충격이었어요. ‘이렇게 일을 벌인 남자애들은 다 어디 갔어?’라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고요.
입양 가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있는 거군요.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제가 해외에서 만난 입양인들은 할 말이 너무 많았고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수기에서 입양인들의 입장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어른들도 그렇고, 아이를 낳은 사람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제가 가정위탁지원센터의 홍보위원을 했었는데, 거기는 부모가 책임질 수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기관이에요. 시설에 보내기보다 위탁해줄 가정을 찾는 곳이고, 부모가 준비될 때까지 도와주면서 기다려주는 곳이에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정책이 있는 거죠. 그런데 잘 모르잖아요. 그리고 그런 보호시설에서조차 입양인들의 입장은 얘기를 안 해요. 미혼모들에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너는 이렇게 해야 돼’라고만 하는 건데, 여전히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성의 화신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미혼모, 입양인을 다뤄온 시각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편견이죠.
맞아요. 한 예로, 조국을 찾아온 입양아는 늘 감동적인 상봉을 하잖아요.
그러니까요. 어떤 프로그램은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려고 하는 게 보이는데, 너무 싫었어요. 엄마는 울고, 집에 데리고 가서 잡채며 불고기며 만들어서 먹이잖아요. 그런 음식을 먹고 큰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요. 저는 그런 프로그램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매스컴의 긍정적인 역할도 분명히 있지만, 매우 사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에 대한 배려는 정말 부족한 것 같아요. 매스컴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것들이 철저하게 유린돼 버리는 게 너무 불쾌했어요.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이 없었을 때도 그랬어요. 그런데 그때는 이 불쾌한 감정이 정확하게 뭔지 몰랐어요.
소설을 준비하시면서 알게 되셨나요?
입양인 입장에서 서술된 글들을 많이 읽었어요. 역시나 제가 불쾌하게 느꼈던 지점이 있더라고요. 어떤 입양인은 살라미를 먹으면서 자랐고 그게 고향의 맛인 거죠. 매스컴에서는 마치 김치 맛이 핏속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들끼리 있을 때는 살라미 맛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 걸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픈 거죠. ‘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구나’ 싶고 ‘그 사람들이 카메라 앞에서는 웃었지만 속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미혼모를 그리는 방식도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아요. 모성애가 아주 강한 경우에만 조명 받는다고 할까요. 장미와는 많이 달라요.
장미를 모성의 화신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도 사랑 받은 경험이 없는 아이가 느끼게 되는 이상한 본능이 있는 거죠. 그런데 장미도 때때로 아이만 없으면 자유로울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열여덟 살짜리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간절하겠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렇죠. 그런 인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모성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해요. 그런 마음으로 쓴 건 아니거든요. 버려진 장미가 모성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로 읽는다면 마음이 불편해요. 그런데 반대로, 모성애를 느끼지 않는 인물이면 ‘어떻게 그런 감정도 없어?’라는 반응도 보이거든요. 그게 무서운 편견이죠.
『엑시트』와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모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데요. 한 가지 더 닮은 점이 있어요. 혈연이 아닌 관계가 가족공동체를 이룬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우리에게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걸 권장할 수는 없어요. 사실 모성이라는 것도 경험하면서 학습되는 거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하게 보살피는 건 동물적인 본능인 거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그보다 앞서는 감정인데요. 내 새끼도 아닌 남의 새끼를 품어 아는 일은 더 힘든 거죠. 더 노력해야 되는 거고 훨씬 더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보고 하라고 하면 과연 할 수 있을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위탁센터나 가정지원센터에서 많이 봤어요.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셨죠.
맞아요. 위탁부모들이 청와대에 초청받았을 때 함께 간 적이 있는데요. 아이들은 낯선 데에 오니까 신기하고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막 뛰어다녔어요. 그런데 청와대에는 방문객이 가면 안 되는 곳이 있으니까 경비하시는 분들이 아이들을 붙잡으러 따라다니시는데, 잘 통제가 안 되죠. 홍보위원인 저도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매는데, 그런데도 그 분들은 다 품어주세요. 아이들이 제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도 다 참고 봐주고요.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참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분들이 있는 걸 보면 천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진짜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사회가 그렇게 돼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강조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요. 그래도 그런 사회가 다행인 거죠. 스웨덴에 있을 때도 입양 가족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세 집이 모였는데 집에 아이들이 두 명씩 있었어요. 그 중에 제일 어린 아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엄마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더라고요. 엄마 껌딱지예요.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 보듬어주는 거예요. 참 감동적이었어요. 그 아이들은 정말 다행인 경우였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양이 돼서 나이가 비슷했어요. 여섯 명이 형제가 된 거죠. 집안끼리도 자주 왕래를 하더라고요. 한국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있으면 다 같이 참여하고요. 부모가 아이들한테 맞춰서 많은 노력을 하는 거죠. 그걸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어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니까 여러 형태의 가정이 있어요.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거죠.
각각 장단점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기왕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누가 답을 제시할 수 있겠어요. 시스템 안에서 가장 적합한 걸 찾아야겠죠. 소설에서 김순영이 장미에게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하는 게, 선뜻 나온 게 아니에요. 그 사람도 끝없이 밀어내고 싶었어요.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런 거죠. 자기 경험의 영향도 있을 거고. 그러니까 이해하는 건데, 이해가 제일 먼저인 것 같아요. 경험이 있다고 다 그러는 것도 아니거든요. 성품이 그 정도가 되니까 하는 거죠. 사실은 다행인 거예요. 제가 본 사연 중에는 이런 일도 없었어요. 이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거죠.
너 이러는 거, 너희 엄마는 아시니?
취재를 하시면서 입양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지셨을 것 같은데요. 어떠셨어요?
제 입장은 분명했어요. 입양인을 취재할 때 한국 정부나 엄마, 가족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물어봤었어요. 그랬더니 ‘당신들이 낳은 아이들은 당신들이 키우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아, 이게 답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아침에도 뉴스에 출산율이 낮아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이런 아이들도 집계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아이들도 물론 보호받아야 되지만, 이 아이들이 더 시급하잖아요. 아직 준비가 안 된 부모도 당연히 도와줘야 되는 거고요. 그 아이들도 여기에서 크면 우리나라 국민인데, 열외 시키고 다른 곳으로 보낸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요.
작품을 준비하시면서 미혼모, 미혼부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도 많이 느끼셨죠?
사회적 편견을 바꾸는 것도 노력이거든요. 학교 다닐 때 보면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쟤가 뭘 했대, 정학을 맞았대, 하면서 흉을 보는데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어요. 사정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런 기회가 생겼던 적도 없고, 그 입장이 돼보지도 못했고, 그러다 보니까 비난하는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이건 누가 나쁘거나 못돼서가 아니에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고 나면 일종의 카르텔이 생겨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거죠. 그냥 감상적인 데 매이지 말고 매뉴얼 대로 할 수 있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다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서 차츰 정착시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건 개인의 감정 면면을 움직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에요. 정책이 필요해요. 그리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네. 개개인이 감상적으로 접근을 하고 후원을 하는 건 그것대로 있는 상태에서 국가 정책이 마련돼야죠. 그러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말을 하기 싫었어요. 제가 미처 모르는 여러 사정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함부로 말하는 게 될까 봐 되게 조심스러워요.
‘김순영’이라는 인물을 두고 “장미에게 유일한 어른”이라고 쓰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더라고요. 어른다워야 어른인 경우가 많죠. 이 소설에도 여러 어른이 나오는데, 사실은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어요. 나름대로 자기 깜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거죠. 김순영 씨처럼 살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어쨌든 짐작을 했을 거 아니에요? 장미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장미가 분유를 사기 위해서 돈을 달라고 했을 때도, 아이가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마 안 되는 돈인데 그걸 안 주고 ‘너 이렇게 사는 거 너네 엄마가 아니?’ 이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제가 어렸을 때 주변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 어떤 아이를 비난할 때 어른들이 그렇게 말을 해요. 너 이러고 있는 거 너희 부모가 아냐고.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아이를 때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진짜 나쁜 사람이라고 느껴요. 자기는 마치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내 자식은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런 눈초리를 가지고 비난하는 거죠. 그런 사람은 어른이 아닌 거예요. 자기 경험을 통해서 아직 준비가 안 된 아이들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어른다운 어른인 거죠.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 대접을 받아서도 안 되고, 강요해서도 안 돼요.
집필하시면서 마음이 너무 괴로우셨을 것 같고, 중간에 ‘그냥 덮을까?’라는 생각도 하셨을 것 같아요.
몇 번이고 있었죠. 안 쓰고 싶었죠. ‘도망갈 수 있으면 도망가고 싶다, 왜 이게 나를 이렇게 붙들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10년 동안 입병에 시달리셨잖아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많이 괜찮아졌어요. 아주 나쁜 컨디션이 아니면 생겼다가도 금방 나아요. 그런데 그때는 잘 낫지 않고 끝까지 갔어요. 이 소설 때문인 줄은 몰랐어요. 작가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는 걸 겪으면서도 몰랐던 거죠. 제 경우에는 몸이 고장 나면 제일 먼저 표시 나는 데가 입이에요. ‘말하지 말고 쓰라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는데요(웃음). 아마 이 소설을 쓰지 않았어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 썼을 때 ‘드디어 살았다, 나 자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런데 책이 나온다고 하니까 또 부담감이 엄청나더라고요. 이걸 누가 읽게 될 거라는 부담이 너무 심하게 왔어요.
이번 작품이 유독 심했나요?
다른 것들도 그런 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이전에는 있는 정보 안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든 거였잖아요.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싶은 부분들에 담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고요. 그런데 이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에요. 내 상황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진행 중인 상황이죠. 미혼모협회를 취재하고 올 때도 늘 미안한 마음이 많았어요. 그 분들한테 필요한 건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도움일 텐데, 사실 제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가 안 되거든요. 갈 때마다 아이들 주려고 여러 가지를 사가기는 했지만, 제가 필요한 것만 빼서 오는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미안함이 있었어요. 뒤가 부끄러운 느낌이라고 할까요.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조심스러운 이야기군요.
제 입장에서는 그래요. 읽는 사람은 ‘이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 나는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작가의 책임의식은 또 다른 거니까요. 상당 부분 팩트를 통해서 나온 이야기이다 보니까 가십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침시’를 만드는 방법
덮고 싶은 순간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쓰신 이유는 뭔가요? 안 쓰면 계속 괴로울 거라는 걸 아셨기 때문인가요?
그런 사회적인 감정보다는 작가 기질 때문이에요. 자꾸만 스토리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제 경우에는 그걸 엉긴다고 표현하는데요. 정리가 잘 되면 집을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랬어요. 소재가 들어오면서 저절로 집이 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이미지들이 선명하게 연상이 되는 거예요. 이미지 연상이 안 되면 글을 못 써요. 어떤 장면이 이미지로 생기고, 그 이미지가 역동적으로 움직여줘야 돼요. 소재가 막 들어오는 단계는 정리가 안 되고 엉기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에요. 그런데 스토리가 들어오니까 기질적으로 이야기가 꿈틀거리는 거죠. ‘이런 일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있는데, 너는 그걸 글로 쓰겠다는 거구나’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있었어요.
장미라는 아이를 떠올리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장미는 너무 자존감이 낮은 아이라, 자기가 충분히 괜찮은 애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실패자가 아니거든요. 살면서 다들 크고 작은 일들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 지나가요. 죽을 것 같아도 지나가요. 그러니까 이런 실수 때문에 자기가 낙오자라고 생각하거나, 큰 치명상을 입어서 어디에도 가기 어렵고 더 이상 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설에 ‘침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땡감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요.
그게 장미의 상황이거든요. 굉장히 상징적인 표현이고, 전체를 말해주는 하나의 단어이기도 해요. 만약 제목을 『엑시트』 로 하지 않았으면 ‘침시’로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고, 좋지 않은 연상을 할 수도 있어서 제목으로 삼지는 않았죠.
상징적인 단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떫은 감은 아무도 먹지 않아요. 감이라고 할 수도 없죠. 그런데 그걸 먹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 거예요. 바늘로 찌르는 거죠. 그게 얼마나 아픈 거예요. 고통을 주는 거잖아요. 그리고는 소금물에 담가요. 소금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소금물이 감 속으로 들어가서 화학 반응이 일어나고, 그러면 굉장히 단맛이 돌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침시’는 많은 분들에게 생소한 말일 것 같아요.
저희 엄마가 항상 침시를 해놓으셨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게 뭔지를 알죠. 또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감나무예요. 저는 평생 감나무를 제일 예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아버지 고향에 감나무가 흔했는데, 제가 일곱 살 때 그곳을 떠나왔는데도 굉장히 좋은 풍경으로 기억에 남아있어요. 가을에 예쁘게 물들어서 달려있었던 풍경이. 아버지가 노동자로서 집을 처음 사셨을 때,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하고 싶은 일이 감나무를 심는 거였어요. 지금은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고 그 집을 팔았는데도, 아직 그 집에 그때 심은 감나무가 있어요. 『푸른 개 장발』에 보면 달팽이 계단이 나오는데요. 실제로 아버지가 감나무에 만들어주신 거예요. 내가 죽어도 손주들이 감을 따라고, 꼭대기에 있는 것까지 쉽게 따라고 만들어주셨거든요. 그때도 아버지가 침시를 만들었어요.
엑시트황선미 글 | 비룡소
앙다문 입으로 세상을 대하고 자신을 대책 없이 취급하는 장미의 삶은 살갗으로 고스란히 저미는 듯한 묘사와 문장을 통해 살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