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을 인정 받은 무용가 ‘제인’은 그러나 은퇴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 오로지 무용가로서의 성공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제인, 그에게는 남편 ‘진’도, 딸 ‘레나’도, 딸의 곁에서 엄마의 자리를 완벽하게 지켜온 하우스헬퍼 ‘크리스티나’도 무용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텐’이라는, 무용가로서의 경력을 한 발짝 더 내딛도록 도와줄 유명 안무가가 나타나고, 이제 남은 제인의 목표는 그와의 공연, 그뿐이다. 그러나 미스터리한 그 인물은 어째선지 제인에게 반감을 갖고 있다.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는 제인에게 텐은 어떤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는다.
박영 작가의 『불온한 숨』은 첫 장편 『위안의 서』로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두 번째 장편이다. 그 자체로 도전이었던 소설. 그만큼 힘들고 그만큼 치열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연애하듯 썼다는 작가는 어느 날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크리스티나의 질문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라는 말을 적고 숨이 막혔다. 목표지향적인 인물 제인과 치열한 사춘기를 보내는 인물 레나, 내면의 약함과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위악을 부리는 인물 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세상의 금기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 크리스티나 등 강렬한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버린, 우리의 아름다운 일면”을 되찾자고 말이다.
경계
소설의 배경이 싱가포르죠. 작가의 말에서 “한국에 돌아와서야 나는 이국의 거리에서 한 여자가 나를 따라왔음을 알아차렸다.(221쪽)”고 하셨는데요. 왜 한 여자가 작가를 따라오게 됐는지, 궁금해요. 싱가포르의 어떤 점이 소설을 시작하게 만들었나요?
싱가포르에 대해 공부를 하고 간 것은 아니고, 그냥 여행을 갔던 건데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다니는 풍경이었어요. 다양한 나라의 음식, 음악이 거리에 함께 공존하고 있었거든요. 그 속에 함께 어우러지면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갑자기 느끼게 되더라고요. 특히 중국인 거리가 소설에도 등장하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그곳에서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어요.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고요. 알아보니 싱가포르에 축제가 많더라고요. 그날은 축제 전날이어서 설렘 같은 게 거리에 가득했어요. 한쪽은 축제에 대한 설렘으로 들떠있는데 한쪽에서는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던 거죠. 길의 한복판에 관이 놓여 있고, 향을 피우고,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기리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요. 보는데 신선한 충격 같은 걸 느꼈어요. 이런 거리에서 마지막을 맞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지금까지의 제 삶과는 거리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렬했어요.
해방감을 느꼈다고 하셨는데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요?
켄 윌버의 『무경계』 를 보면서 생각할 게 많았는데요. 까닭 없이 미워하게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이 가진 일면이 내 안의 어떤 면과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우리는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죠. 그중 내가 추구하는 것이 강해질수록 추구하지 않는 것을 배척하게 되고 그것을 나의 일부가 아니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면서 경계를 짓는 거예요. 그 경계를 통해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협소해지고 있는 거죠. 그 내용을 보고 한참 멍했던 기억이 나요. 그동안 제가 써온 작품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힘들고, 고독한 작업인데 왜 글쓰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이 작업에 끌리는가, 가 늘 의문이었는데요. 그 책을 읽고는 소설을 쓰면서 내가 나의 경계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소설 속 인물들은 작가님과 닮지 않은 부분이 많겠어요.
그럴 때 너무 신이 나요. 사실은 원래 나였지만 어떠한 이유에서든 버린 나죠. 사실 나였지만 지금은 멀어진 나,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인물에 반영을 많이 하고요. 그것은 나에 대한 도전인 것 같은데요. 나아가 이것이 제 책을 읽는 독자 분들에게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독자 분들도 제 소설을 보면서 정서적 해방감을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같은 테이블에서 보드 게임을 즐기듯이 말이에요. 제 소설 속 인물들과 만나고, 소설 속 거리를 거닐면서 심리적인 모험을 하시길 바라요.
주인공 제인은 한국에서 태어나 입양되었고, 텐은 중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죠. 크리스티나 역시 이주노동자고요. 이 인물들의 경계성이 방금 말씀하신 ‘모험’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부러 캐릭터를 모험적으로 했어요. 『위안의 서』는 첫 소설이라 차가 우러나듯 제 안에서 걸어 나온 인물들이었는데요. 운 좋게도 그 작품으로 여러 독자 분들을 만났고요. 소설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분들과 용기 내어 더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저는 지금 소설을 모험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요. 현실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고요. 그 맥락에서 인물 설정을 했죠. 대표적인 인물이 크리스티나예요. 욕망이 강하고, 야성적인 인물이잖아요. 어찌 보면 저는 크리스티나처럼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그리게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제게는 금기 그 자체인 인물이에요. 우리가 버린, 우리의 아름다운 일면 같아요.
공감해요. 왜 그렇게 크리스티나에게 마음이 갔는지 몰라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웃음) 소설을 읽은 분들이 제인에게는 애증을 느낀다면 크리스티나에게는 굉장한 애정을 느끼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크리스티나라는 캐릭터는 여기서 끝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소설을 퇴고할수록 크리스티나의 숨결과 체취가 강하게 되살아나서 통제가 안 되는 느낌이었거든요. 저에게는 운명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어서 꼭 크리스티나가 아니더라도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인 소설을 언젠가는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랑
무엇보다 크리스티나는 제인의 정반대에 있잖아요. 제인은 “세상 사람들에게”“부도덕이자 파렴치한 폭력일 뿐”인 춤으로부터 도망친 인물이지만 크리스티나는 세상이 부도덕이라고 말할 어떤 시선들에 맞서기를 택하죠.
“다시 말하지만 난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거예요.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중략) 그렇지만 그런 사실들이 내 마음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129쪽)
누구나 목표가 있죠. 인간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고요. 그러나 그러면서 자기다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거기서 불행이 시작되는 것 같은데요. 제가 소설을 쓰기 위해 밀실에 들어가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나 자신을 만나는 순간에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답은 어떤 사람을 거침없이 마음껏 마음에 담아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것을 통해서만 나를 벗어날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그런 사랑을 통해서만이 한 번뿐인 생을 안타까움 없이 떠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해요.
역시 크리스티나가 제인에게 한 질문,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66쪽)가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겠어요. 소설이 이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는데요. 이 질문으로 작가님이 환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맞아요, 이 질문을 독자 분들에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 대사를 쓸 때는 정말로 의식적으로 개입한 게 아니었어요. 크리스티나가 생생하게 외친 거예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부분을 카페에서 썼었는데요. 쓰다가 숨이 확 막혔어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그때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그 문장까지만 쓰고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아, 이 소설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야겠다, 라고 생각했죠. 크리스티나가 무의식에서 저에게 질문을 던져준 것 같아요. 결국 이 질문이 독자 분들에게 가닿는다면 일단 이 소설은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문장이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온몸으로 그 대상을 껴안고 부서지는 것인지도 몰랐다.”(182쪽)였어요.
이 소설에 숲 이미지가 강하게 나오잖아요. 제인과 맥스와 마리의 숲을 우리가 엿보기도 하고, 크리스티나가 숲에서 사랑하는 장면을 보기도 하고요. 그래서 처음 생각한 제목에는 ‘숲’이 들어가기도 했었는데요. 저는 사랑에 대한 답을 숲이라는 것으로 대신 드리고 싶어요. 숲은 굉장히 많은 존재들이 어우러져 있어요. 물론 서로 잡아먹기도 하고, 경쟁도 하고, 치열하게 부대끼겠죠. 자신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해 서로를 침해하기도 할 거고요. 그렇지만 같은 비와 햇빛, 바람을 맞으면서 끝없이 뻗어나가는 생명력이 숲 같아요. 저는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숲이 메마르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닮아 있는 것이 바로 숲 같아요.
제인은 매우 위태로워 보여요. “이제껏 나의 생은 그저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벌인 한낱 연극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몰랐다.”(137쪽)라는 문장처럼 제인을 움직인 것은 그 자신의 온전한 욕망이 아니었거든요. 그를 “해방”시켜야 했던 이유는 뭔가요?
텐도 그렇지만 특히 제인은 강박에 가깝게 목표 지향적이에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잘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죠. 누구나 자기 안에 제인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잘하려고 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 때문에 어느 순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는 생각이 소설을 쓰면서 많이 들었어요. 잘하려고 하면 뭔가를 절제하게도 할 것이고요. 자신을 통제하려고도 하겠죠. 그러면서 나를 나답게 하는 감정을 경계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인처럼 나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정의 대상인데요.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지금까지의 규칙을 파괴하게 하잖아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나를 해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문화도 그렇잖아요. 익숙하고, 기존에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고수하려다가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것은 확장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숲이 되려면 나무 한 그루로는 안 되는 거죠.
네, 확장에 있어서는 필수불가결하게 파괴가 있어야 하고요. 부서진다는 것이 위기와 위협, 혼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확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춤
경계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제인이 춤을 추는 사람이라는 것도 중요해요.
소설을 쓰다가 한계에 부딪히거나 하면 연락을 드리는 은사님이 계세요. 『불온한 숨』 을 쓸 당시 춤에 대해 쓰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거든요. “두 번째 소설에서 너무 도전을 하고 말았구나.” 하시더라고요. 당연히 두려웠죠. 더구나 몸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저로서는 무용을 선택한 것이 굉장한 도전이었어요. 잘하고 익숙한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갈등도 컸는데요. 그러나 역시 모험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어떤 투쟁과 저항, 해방을 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전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 전 독자와의 만남을 갖는 행사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전 제 스스로의 소설이 독자 분들에게 일종의 모험처럼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제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하고 싶었고요. 그래야만 떳떳하게 이 책을 읽은 분들께도 시도하고, 도전해보시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소설의 줄거리 자체도 더 나아가는 이야기이니까요.
네, 그러니까 제가 시도를 해야 제인의 이야기,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도 용기를 내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제가 먼저 보여드리고 싶은 욕구가 많아요. 요즘 더 그런 것 같고요. 결국, 위험하게도(웃음) 도전을 했어요.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많이 힘들었어요. 일단 몸보다는 머리를 써버릇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힘들었죠. 그래서 춤도 많이 봤고요. 몸에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보니까 저는 저의 정신, 감정, 마음, 이런 쪽만 비대해져 있더라고요. 미뤄두었던 것이 나의 감각들이었죠. 감각에 관심을 두려고 애썼고, 감각에 대한 책도 많이 봤어요. 스킨십 자체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고요. 먹을 때도 풍미 같은 것을 더 느껴보려고 했고, 내 몸을 깨우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요가도 해보고, 발레 스튜디오에 찾아가서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너무 아파 비명도 지르면서(웃음) 내 몸이 얼마나 굳어 있었나, 느꼈고요. 거의 소설 쓰는 작업이 아니라 연기하는 작업 같았어요. 연애하듯 썼어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 도전하는 느낌으로 썼죠.
쓰기 전과 쓰고 난 후, 작가님도 많이 바뀌셨을 것 같아요.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도 바뀌고 있는 중인 것 같고요. 아마 세 번째 소설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요. 작년에 한 전시회에 갔다가 어떤 스파이의 일생을 봤어요. 그 사람이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이름만 55개였다고 하더라고요. 그 많은 이름으로 각각 인연 맺은 사람들이 있겠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그를 다르게 기억한다는 기록이 있더라고요.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우리 안에는 다양한 면이 있을 텐데 어떤 것을 위해서 어떤 면을 희생하지 마시고 다 거침없이 풀어놓아보셨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소설로 꼭 전달하고 싶어요.
제인에게 마리 선생이 “너의 춤을 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네. 너만의 춤을 추라고요. 마리 선생님 너무 좋아해요.(웃음) 저도 마리 선생이 곁에 있다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마리 선생이 버려진 연습실로 자기와 영혼이 통하는 학생들을 초대하잖아요. 그 버려진 연습실은 세상의 도피처 같은 공간이었고요. 연습실 창을 통해 숲이 보이는데요. 숲의 열기가 그대로 들어와요. 상징적으로 볼 때 그런 숲과 같이 세상이 버린 곳,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곳에 마리 선생이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죠. 세상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 허용하지 않는 것에서 진정한 나 자신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마리 선생이 제인과 맥스를 그곳으로 초대한 거예요. 제가 좋은 소설가가 된다면 마리 선생과 같은 소설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어요. 그러려면 제가 도전을 많이 해야겠죠.
불온
네이버 사전 연재 댓글에 ‘세밀한 묘사’에 대한 감상이 많더라고요. 어떤 부분을 쓰실 때 특히 힘드셨어요?
버려진 연습실에서의 세 사람의 접촉이 농밀하게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손도 잡게 되고, 가닿을 수 없는 마음이 들수록 더 많이 스킨십을 하게 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끌림이 있잖아요. 그런 절박한 간절함, 떨림을 세 사람의 밀회 장면에서 만큼은 받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손에 피부가 스치는 것 같은 통렬한 자극 같은 거요. 그 부분을 묘사할 때 촘촘하게 한 사람을 만지는 기분을 그리고 싶었고, 앞으로 한 번 더 도전(웃음)해보고 싶다, 생각했어요.
쓰면서 뒤라스의 『연인』이 많이 떠올랐어요. 나이와 인종의 경계를 넘잖아요. 스킨십을 통해서 말이에요. 그 소설을 16살에 읽었는데요. 어린 나이에 굉장한 떨림을 느꼈어요. 제게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미지로까지 각인이 된 것 같아요. 정신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생명의 원리 같기도 하고요. 그걸 억제하지 않고 분출해보고 싶었어요.
제목에 들어간 ‘불온’이라는 말이 꽤 역설적으로 들려요.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데 작가님은 이것을 긍정하고 계신 거잖아요.
강하게 긍정하고 있어요.(웃음) 두 번째 소설에서 향후 제 작업의 화두를 과감하게 던지지 않았나 생각하는데요. 사실 저는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요. 모험가적 기질이 강해요. 도전해보고 싶은 게 많고요. 아까 얘기한 이름이 55개인 스파이처럼, 소설을 낼 때마다 독자 분들이 ‘내가 읽었던 작가 맞아?’라고 하실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제 삶도 그렇고요. 계속해서 끊임없이 변하고 싶어요. 그래야 살아있단 생각이 들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독자 댓글도 있으세요?
질문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꼭 말씀드리고 싶은 분들이 계시거든요. 『위안의 서』 때부터 리뷰를 올려주신 독자 분들이 계세요. 사실 답장을 다 드리고 싶은 마음인데요. 행사 때나 언젠가 뵙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 못 뵀거든요. 그분들께서 이번에도 리뷰를 올려주셨더라고요. 첫 번째 작품 『위안의 서』 에 비해 뭐가 좋고, 뭐가 아쉬운지 다 적어주셨는데요. 되게 감사하더라고요. 앞으로 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뵙겠다고, 이 기회에 인사드리고 싶어요. 어디 계시는지 모르니까요. 특히 기억나는 리뷰가 있었는데요. 아이가 다쳤대요. 정신없는 중에 제 책을 읽었는데 많이 우셨다고 하셨어요. 왜 눈물이 흐르셨을지 공감이 갔어요. 한 사람의 여성으로 자기 자신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정말 벅찼어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고요. 응원하고 싶어요.
창작자에게 리뷰가 정말 큰 힘이 된다는 말씀을 많이들 하시더라고요.
그렇죠, 이번 작품은 독자 100분께 가제본을 보내드리고 미리 서평을 받기도 했어요. 네이버에서 사전 연재도 했었고요. 그 리뷰들 모두 정말 꼼꼼하게 보고 있다고(웃음) 말씀드리고 싶어요. 열심히 보고 있고, 여러 번 읽고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제대로 소통하고, 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항상 불안하고요.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불안하고 위태로운 여자. 그리고 그녀 주변의 불완전하고 부도덕한 여자들. 이런 여자들의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그녀들의 욕망과 방황을 사랑한다”는 조남주 작가님의 추천사를 받아보고 어떠셨어요?
정말 좋았어요. 감사했어요.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저보다 먼저 수상하신 선배님이기도 하셔서 작년에 논산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할 때 뵌 적이 있어요. 그때 주로 어떤 독서를 하시는지 여쭸더니 실제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기록들, 르포를 문학 작품 못지않게 찾아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소설을 쓸 때는 문 닫고 들어가게 되지만 주의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그 밀실에서 영원히 못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요. 저는 제 작품이 아름다워지는 것만을 바라지 않고, 분명히 이 세상에 쓰임새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 목소리를 껴안지 않는 아름다움은 공허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려면 세상에 대한 시선을 탄탄하게 가꿔야 할 텐데 그런 것들을 먼저 하고 계신 선배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추천사를 받았다는 게 의미가 크죠. 그 말을 그대로 믿기보다 앞으로 이런 글을 써줬으면 좋겠다, 로 들었어요.
소설
소설가로서, 관심 두고 있는 것은 뭔가요?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우리가 경계 지은 자연의 원초성, 그건 원래 우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어야 한다, 동물과는 달라야 하고 이성적인 존재다, 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수없이 내리면서 원초성, 자연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 같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회복을 향해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요. 나의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둔, 억압되어 있는 것을 깨어나게 하는 작업이 될 것 같고요. 그것을 통해 저와 동시대를 호흡하는 분들이 제 책을 읽는 과정에서 떨림과 해방감을 다시 떠올리실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요. 포장하지 않고 제 안에 있는 날것 그대로를 꺼내서 보여드리는 작업을 계속 하고 싶어요. 점점 솔직한 작가이자 사람이 되고 싶죠.
그렇다면 개인의 깊은 내면을 해방하는 작업과 앞서 말한 사회와의 호흡을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 가실지, 조금 더 묻고 싶거든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설에서는 좀 더 감각적인, 개인의 욕망과 같은 것들에 집중했다면 세 번째 소설부터는 좀 더 세계에 대한 묘사가 풍부해질 거예요. 지금 세 번째 소설을 90% 정도 완성한 상태인데요. 여기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그려질 거예요. 쓰면서 실제로 용기 내서 많이 만나러 다니기도 했는데요. 살짝 말씀드리면 역시 해방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이야기예요.
작가님이 좋아하는 소설가가 궁금해요.
한강 작가님 존경해요. 학창 시절부터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왔어요. 「내 여자의 열매」 「아기 부처」 같은 단편, 중편들은 아직도 제게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어요. 인간의 심연과 본질을 꿰뚫는 섬세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읽다보면 리듬감 있게 번지는 문장도 좋고요. 황정은 작가님도 빼놓을 수 없어요. 장편 『백의 그림자』도 아름다웠고요 「양의 미래」라는 단편도 좋았어요. 황정은 작가님은 맛깔스럽게 읽히는데 깊이 있는 생각까지 이끌어 내게 하신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소설 쓸 때는 일부러 책상에서 치우는 작가님 중 한 분이죠.(웃음) 압도되기 때문에요.
만약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으세요?
제가 일하는 곳 맞은편에 약사선생님이 여름휴가를 떠나셨는데, 알고 보니 해마다 보름씩 해외 봉사를 다녀오시더라고요. 일 마치면 작업실에 앉아 소설만 구상하고 있는 제 자신이 때로 무력하게 느껴져요. 장편소설은 날마다 조금씩 쓰지 않으면 원하는 이야기에 다가가기가 어려운거 같아요. 그것 때문에 한자리에 붙들려 있어요. 만일 소설을 쓰지 않는다면 정말 먼 나라로 원정 다닐 수 있는 직업을 택했을 것 같아요.
언젠가 꼭 써보고 싶은 소설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이름이 여러 개인 한 남자의 이야기에요.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여성과 자신의 이름이 없는 여성이 나와요.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해방되어 가닿는 세계를 묘사할 건데요. 그 세계에 대한 상상을 지금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그들이 떠나고 싶고, 떠나야만 하는 이 세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돼요. 우리가 발붙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세상을 그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하고요.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신비하고 아늑한 이미지가 될 것 같아요.
불온한 숨박영 저 | 은행나무
감추고 싶고 벗어나고 싶었던 오래전 숲에서의 비밀스러운 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거짓말, 오해, 그리고 죽음, 함께 나눠 갖게 된 고통의 기억들이 서사를 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