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은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현상이다. 공학적으로도 많은 중요한 응용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전자공학의 절반 이상은 진동과 관련된다. 이공계대학에서 배우는 수학의 대부분이 진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동은 떨림이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느낌은 다르다.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진동은 기계적이지만 떨림은 인간적이다.
- 6-7쪽
물리학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모두 원자와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앞에 있는 찻잔, 매일 마주하는 노트북 모니터와 휴대전화는 왜 딱딱할까? 왜 이것은 검은색이고 이것은 흰색일까? 세계의 모든 존재를 이루는 단위까지 내려가 우리 존재부터 우주라는 커다란 세계까지 들여다보고 질문하는 물리학자는 비과학자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김상욱의 기존 책 제목( 『김상욱의 과학공부』 , 『김상욱의 양자 공부』 )처럼, 김상욱 물리학자는 과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다. 『떨림과 울림』도 물리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을 소개했지만, 그는 더 나아가 인문학의 언어를 빌려 물리학을 설명했다.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물리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설렘이 다른 이들에게 떨림을 전해주길 바랐다. 이 떨림이 어떻게 전해질지, ‘울림은 독자의 몫이다.’(7쪽)
인문학의 언어로 자연과학을 이야기하기
강의하는 대학을 옮기셨다고 들었어요. 근황을 좀 말씀해주신다면요.
재작년까지는 부산대에 있었고 경희대로 오게 되어서 정신없는 한 해였죠.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기고 새로운 학생과 조직을 만나서 일이 많았어요. <알쓸신잡3> 출연하기로 한 게 작년 6월 정도였던 것 같아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중에 『떨림과 울림』이 나오게 됐고요. 가을부터 천천히 고치겠다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었는데 프로그램 홍보 효과로 인해 2018년 안에 책이 나오게 됐어요.
제목이 ‘떨림과 울림’이에요. 문학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울림도 여러 중의적 의미가 있고요.
출판사에서 다섯 개 정도 후보를 주셨는데 처음부터 마음에 든 게 ‘떨림과 울림’이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책의 의도 자체가 인문학의 언어로 자연과학을 이야기해보자는 취지가 있었어요. 내용은 과학적이지만 인문학적인 내용으로 바꾸는 게 제일 좋거든요. 다른 대안은 없을 만큼 잘 지은 제목인 것 같아요.
프롤로그 중 ‘물리학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를 바랐다’는 문장이 있었어요.
의도가 그랬어요.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을 바탕으로 쓴 책인데, 물리를 설명하는 입문서로 쓸 수 있었겠죠. 그러면 ‘김상욱의 물리 교실’이 되었을 거예요. 칼럼 연재를 끝내면서 보니 제가 저도 모르게 인문학적으로, 감성적으로 글을 쓰고 있더라고요. 물리를 설명한 책은 많고, 비슷하게 써봐야 많은 책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형태로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책을 편집하면서 더 인문학적으로 보이게 많이 고쳤어요.
은근히 과학자의 개그 같은 것도 느껴져요.
본래 글은 농담이 난무하는 편이에요. 그편이 과학을 쉽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서요. 이 책을 편집할 때는 유머 코드는 많이 빼고 인문학적 감성을 더 넣으면 좋겠다고 해서 편집자님과 실랑이 끝에 유머를 거의 다 뺐어요. 제가 말을 잘 듣는 편이어서요. 싸우다 알겠습니다, 하고 들었죠.
말 잘 듣는 타입이실 것 같아요.
얼굴에 ‘범생이’라고 쓰여 있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과학은 세상을 바꾸는 근거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물리’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어요.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은 다 양자역학이에요. 19세기까지 고전 물리학이 사람의 오감으로 감지되는 상황을 다뤘다면, 20세기 초에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의 거대한 혁명이 나타났죠. 이후 연구는 원자 없이 할 수 없어요. DNA 연구자는 DNA와 원자를 연구하고, 재료과학도 원자로 하고, 20세기 이후 모든 과학은 어느 과목이나 양자 역학을 필수로 가르치고 있어요. 현대 문학과 고전문학이라는 비유로 생각하면 가장 적절할 거예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다 현대 문학을 하는 거잖아요. 양자 역학은 분과라기보다는 필수 과목이에요.
저에게는 물리학이 물성으로 이루어진 학문이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양자 역학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이론적으로 다가가야 하니까 어렵다고 생각했고요.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어려워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건 아시잖아요. 하지만 누가 물어본다면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망원경으로 관측해도 손쉽게 알 수 없어요. 몇십 년씩 관찰하고 연구해야 보이거든요. 양자역학만 어려운 게 아니라 과학 자체가 인간을 배제한 학문이어서 그래요. 인간의 경험과 이해 방식으로 우주가 이해될 거라는 믿음을 깨뜨리죠. 양자역학이 특별히 어려운 이유는 언어가 없어서 그래요. 고전 역학은 적어도 용어는 있어요.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 판별하긴 어렵지만, 태양이 돈다는 게 뭔지 상상할 수는 있어요. 마찬가지로 상대성 이론도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걸 상상해 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전자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한다는 말이 나오면 이건 머리에 그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알리려고 시도하는 원동력은 뭘까요?
알리는 것에는 과학의 지식적 측면과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서의 과학이 있어요. 두 번째를 과학적 태도라고도 하는데, 호모 사피엔스 사회에서 과학은 과학적 사고 방식으로 가장 크게 기여했어요. 누가 한 이야기나 책에 쓴 증거가 아니라 물질적 증거, 실험으로 재현되는 증거에 입각해 이야기하는 게 바로 과학이에요. 과학적 사고방식은 권위를 깨뜨릴 수 있어서 대단해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권위가 아무리 대단해도, 뉴턴이라는 물리학의 아버지의 권위가 아무리 대단해도 특허청에서 일하는 말단 기사 아인슈타인이 그 권위를 깨뜨릴 수 있어요. 서양에서 생겨난 이 인식이 사회를 바꾸고 민주주의를 만드는 합리성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합리적 사고방식은 철학에도 있지만, 그걸 물질적 증거까지 끌고 와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지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인 거죠.
과학의 지식적 측면을 알린다는 점에서는 어떤가요?
첫 번째 이유라면 모두가 지식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과학적 지식은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데, 제가 그걸 말하는 한 가지 이유는 제가 재미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과학적 지식을 알면 사람들이 사는 데 도움이 돼요. 이 지구가 우주에서 보잘것없는 하나의 행성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를 주거든요.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근거를 댈 수도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DNA가 인종 간의 차이보다 한 민족 내에서의 차이가 더 크다는 걸 보여주면 우리가 세상을 바꿔야 하는 탄탄한 근거를 주게 돼요.
물리학을 이야기하면서 생물과 화학이 나오게 되는데,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 전공하는 사람들은 철학을 인문학의 정점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물리학도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걸 저희끼리는 물리학 제국주의라고 해요. (웃음) 물리학자들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건데, 오만한 거죠. 물리학이 다루는 규모가 클 뿐이에요. 그래서 공간에 대한 책을 하나 준비하고 있어요. 물리에서 가장 작은 단위가 쿼크인데, 원자와 분자와 단백질, 단세포 생물, 다세포 생물을 지나 행성과 우주까지 물리학자의 눈으로 스케일을 섞은 글이에요. 이전 단계에서는 절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충분한 숫자가 보였을 때 창발적 행동이 나타나요. 결코 원자 하나로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죠.
환원주의와 전일주의에 대한 설명도 있었어요. 대상을 쪼갠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이해하는 방식이 환원주의라면,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전일주의가 있고요.
원자를 아무리 연구해도 원자로 이루어진 사람의 소화불량을 설명할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한 인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을 이해할 수는 없죠. 하지만 어떤 면에서 사회는 개개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인간의 괴상한 활동이 국가 전체 방향을 틀기도 하잖아요. 환원주의와 전일주의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봐요. 환원주의에 초점을 맞춘 게 물리학이라면 전일주의는 주로 생물학 등에서 많이 이야기하죠. 원자 수준에서는 어떻게 생명이 번식하고 항상성을 유지하는지 예측할 수 없는 측면이 나타나니까요.
전체를 보는 틀
원론을 다루는 학문이 대학에서 배척당할 때가 많아요. 강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요새 친구들은 재미있거나 취업에 도움 되는 것, 학점에 도움 되는 강의를 듣고는 하죠. 보고 있으면 안타깝죠. 원론적인 걸 왜 사람들이 배척할까요?
쓸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사실 10년 넘게 융합이니 소통이니 하는 화두가 있었는데, 핵심은 원론적으로 보라는 거거든요. 우리가 너무 분과 학문에 매몰되다 보니까 가습기 살균제 문제 같은 것도 나타나는 거겠죠. 그걸 만든 화학자들은 분명 알았을 텐데요. 개별 학문만을 연구한 사람들이 다른 인간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고 기계처럼 시키는 대로 하면 결국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악의 평범성이 나타나겠죠. 각자 사람들이 자기 일만 하는 평범함이 전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과 피해를 줄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이나 크리스퍼 같은 생명과학 기술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과학자들이 세상을 전일적으로 보지 않고 불쑥 실수해서 망칠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요. 이미 개별 학문 분야의 발전 수준은 상당한 수준까지 도달해서 이걸 다 모으면 엄청난 능력이지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덫에 걸릴 위기가 가장 큰 위험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개별 분과에 있든 모든 걸 다할 순 없겠지만 전체를 보는 틀을 봐야 해요.
다른 분과를 봐야 한다는 것도 과학적 태도 안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인간에 대한 문제를 모두 과학으로만 다루려는 태도는 또 아닌 것 같아요.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도 다 뇌과학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진 않아요. 물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부분이 과학화 될 거예요.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이나 행동이 결국 다른 동물과 다름없는 번식 욕구 충족이나 많은 자손을 남기려는 행위에서 나왔다고 발견될지 몰라요. 하지만 과학의 발견을 아무리 넓혀도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을 파악할 순 없을 거예요. 왜냐면 인간의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치의 문제거든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되고 나이 많은 개체를 돌봐줘야 하고, 자원을 나눠야 하는지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어요. 그건 제가 인간답게 살려면 따라가야 하는 합의의 산물이죠. 아마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가 과학으로 추론할 수 없고 인간을 위해 합의한 거니까 따라야 한다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믿고, 그걸 다룬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면 과학적 방법보다는 지금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게 나아요.
인문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계기가 있었나요?
저도 한때는 과학으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어요.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24시간 물리만 공부하던 골수 물리학자였죠. 그때는 정말 물리가 좋았고 물리만한 학문은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2000년대 초 이공계 위기 같은 게 왔을 때 고교생들이 물리학과 기피하는 걸 보면서 어떻게 하면 물리를 알릴 수 있을까 불순한 의도로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이양선을 타고 동아시아 가는 전함 제독처럼, 인문학자들에게 물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감화된 거죠.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한 번도 한국에 와본 적 없이 한국의 장례식장에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과학적 추론으로는 할 수 없어요.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칙이라는 게 다 역사적 맥락의 산물이잖아요. 과학적으로는 왜 지금 갓을 쓰면 이상한지 입증할 수 없거든요.
이런 내용으로 강의를 하면, 학생들은 어떤 반응이에요?
객관적일 거라고 확신은 못하겠지만(웃음) 좋다고 해요. 끝나고 나서 좋았던 분만 와서 좋았다고 이야기하니까, 통계를 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이게 과학적인 자세가 아닐까요?
물리는 사랑입니다
말하기에 기반해 글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책을 읽는다는 게 사실 머릿속에서 말을 하듯 읽게 되잖아요. 눈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묵독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쓸 때도 말을 하듯 써야 읽는 사람이 말하듯이 읽게 될 테니까, 머릿속에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들리기 바라면서 써요. 그래서 가급적 길게 안 쓰고 단문으로 쓰려고 하고요. 고칠 때도 내용 전달보다 물 흐르듯이 안 읽힐 때 고치고요.
칼럼은 언제, 어떻게 쓰세요?
아마 칼럼 쓰는 사람의 90%가 하는 방법일 것 같은데요? 전날, 마감이 써 줘요. 오늘도 마감이 있는데 도망쳐 나왔어요. 아, 정말 안 써지네요.
책을 몇 권씩 쓰고도 글쓰기가 힘드신 거죠?
다 그렇지 않을까요? 물리 논문도 마찬가지인걸요. 은퇴를 앞두신 존경하는 교수님이 있는데, 어느 날 지금도 논문의 서문을 쓰려면 너무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서문을 맨 마지막에 쓰거든요. 자기가 한 실험의 내용은 그냥 죽 쓰면 되지만, 서문은 이제까지의 역사와 함께 실험의 이유를 밝혀야 하는데 그게 정말 힘들어요. 지금도 서문을 쓰려고 앉으면 이틀은 못 써요.
인문학 책이나 다른 분야의 책을 많이 찾아보셨다고 했는데, 책은 보통 어떻게 고르세요?
한 책을 읽다 재밌으면 그쪽 분야를 한동안 읽거나, 누군가 불쑥 이야기해준 소설을 보다가 그 작가의 작품을 다 보기도 하고요. 언제나 집에 안 읽은 책이 쌓여 있어요. <알쓸신잡3> 때문에도 책을 어마하게 많이 봤어요.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시작해서 한 회차당 열댓 권씩 샀던 것 같아요. 물론 다 보진 못했죠.
성실한 면이 여기서도 드러나네요.
그게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방식과 비슷해요. 논문을 하나 쓸 때 레퍼런스를 기본으로 4,50개는 써야 하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물질적 증거가 논문에서는 레퍼런스예요. 내 논문의 모든 문장은 다른 데에서 인용해서 보장하거나 직접 실험해서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은 문장이 하나라도 있으면 심사위원이 지적하죠.
방송에서 무한동력을 주장하는 사람이 난입했을 때, 과학의 용어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사람의 언어로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의견을 듣기 힘들다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말씀하셨던 무한동력기관 발명자의 문제점은 학문하는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거였어요. 자기가 아무리 좋은 일과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이뤄냈더라도 그걸 아무도 못 알아듣는 말로 떠들면 안 돼요. 그냥 자기 한 일의 결과만 뽑아내는 건 며칠 안 걸려요. 하지만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사전지식이 어마어마하게 많거든요. 그것 역시 중요한 과학적 사고 중의 하나죠. 설명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납득을 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이 쓰는 언어를 써야 하는데, 그게 사실 어려워요. 저도 다른 분야를 공부하면 용어들을 모르니까 그게 큰 장벽이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생각을 바꿔서 제가 그들의 용어를 써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떨림과 울림』 도 마찬가지지만 장벽을 낮추는 방법의 하나가 용어를 다른 걸 쓰는 거거든요. 물리학 용어를 써야 할 곳에 인문학 용어를 쓰니까 명징해지지 않거나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그게 장벽을 낮춰주는 거거든요.
물리의 아름다움이란 뭘까요?
물리학자들의 미적 감각은 놀랍게도 고대 그리스의 미적 감각과 같아요. 이 우주의 저번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고, 그걸 확인해가면서 실제 그렇다는 것을 볼 때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요. 우주가 수학적인 법칙으로 굴러간다는 것의 안도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보통 물리는 사랑이라고 그래요. “물리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세요.” 라고 말하죠.
인문학에 맞닿아 있네요. 정언명령이랄까요.
우주도 사랑이라고 말해요. 우주가 뭘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우주는 존재를 사랑한다고 하죠. 우주는 존재를 사랑해서 존재하는 거죠. 존재하는 건 놀라운 일이거든요. 존재하지 않으면 설명할 필요 없는데 존재하면 왜 존재하는지 설명해야 해요. 우주는 존재를 사랑하니까요.
마지막으로 『떨림과 울림』을 어떤 식으로 읽어줬으면 하나요?
사실 물리학 이야기를 한 책이에요. 이공계 학생이 1학년 때 배우는 거의 전 과정의 내용을 다 집어넣었거든요. 이걸 읽으면서 인간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리는 원래 인간을 배제한 학문이에요. 배울 때도 인간적인 것들을 버리도록 철저하게 교육받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과학을 일반 사람들에게 가져갈 수 없으니까, 이단의 방법을 쓴 거죠. 이 책으로 물리를 다 알았다고 할 수 없지만, 물리가 멀지 않다는 걸 느껴서 이걸 시작으로 다른 것들에 흥미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떨림과 울림김상욱 저 | 동아시아
나의 존재를 이루는 것들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죽음을 어떻게 성찰할 수 있을지, 타자와 나의 차이는 무엇인지… 엄밀한 과학의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물리학자만이 안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