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보장된 가까운 미래에 ‘센터’가 설치된다. 그곳은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이 입소해 전문가의 관리를 받으며 자신이 죽는 날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곳이다. “죽음이 필요한, 죽음이 최선인” 사람들이 가는 곳. 어렵게 가족을 설득해 그곳에 입소한 주인공 ‘이서우’는 의사로부터 센터에서 한 달의 기간을 지내면 이후 언제든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처방을 받는다. 하루하루가 무채색의, 고립된 시간이었던 이서우에게 센터에서의 하루는 놀랍게도 “1분 1초가 전부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서우의 룸메이트이자 서우를 사람들과 만나도록 하는 조력자 김태한, 잘 꾸민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한 여사, 반려견의 죽음이라는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양지, 센터에서 위암이 발병하자 삶을 다시 원하며 퇴소하는 작가 선생까지. 센터의 사람들은 말이 나오지 않아 휴대전화로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서우를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상처처럼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며 조심스럽게 서우에게 조금 다른 세상을 선사한다. 과연 이서우는 죽음을 선택하게 될까.
첫 장편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을 쓰면서 조수경 작가는 서우의 선택을 꽤나 오래 고민했다고 말했다. 구상은 오래, 집필은 빠르게 하던 여느 때의 쓰기와는 달랐던 이유를 묻자 “쓰다보니 붙잡게 됐다”고 답했다. 무엇보다 이것은 무책임한 희망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며 작가는 ‘죽음을 생각하는 건 언제나 삶을 생각하는 일’(347쪽)이라고 설명했다. 매년 유서를 쓰고,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그로 인해 삶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조수경 작가. “억지로 살아갈 수 없듯이 억지로 죽을 수도 없는 일일 거고, 삶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힘든 것처럼 죽음도 마음처럼 할 수 없다면 힘들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죽음이 삶과 연결된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주인공을 붙잡고 싶어졌어요
첫 장편의 소재로 죽음을 삼으셨어요.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셨어요?
많이들 죽음을 금기시 하고 부정적인 것, 외면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죽음을 평소에도 많이 생각했어요. 삶에 대해 생각하듯 말이에요. 삶과 죽음을 떨어뜨릴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 역시 준비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왔고요. 오래 전부터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안타까웠죠. 그래서 ‘편안하게 떠날 수 있는 어떤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죽음까지 생각한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고통스럽게 떠나야한다는 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거든요. 자살 뉴스가 많잖아요. 댓글을 보면 안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게다가 자살 유가족에 대한 편견도 많고요. 그런 게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정말 떠날 수밖에 없다면 편하게 떠날 수 있는 곳을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쓰게 됐어요.
2007년 습작 시절에 쓴 단편이 시작이었다고 ‘작가의 말’에 쓰셨잖아요.
그때는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벗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썼던 것인데요. 사실 쓰기 쉽지 않은 이야기고,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서 계속 묵혀두다가 이번에 쓰게 됐죠.
여러 이유로 조심스러웠던 부분도 많았을 것 같아요.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은 정말 100% 동의해요.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고,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죠. 이건 누군가가 지지할 일도 아니고 반대할 일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정신적 질병의 경우 워낙 다양한 각자의 상황이 있잖아요. 100명에게 우울증이 있다면 100개의 이유가 있다고 하니까요. 경제적 이유도 있을 수 있고, 여러 상황이 있을 텐데요. 사실은 저도 그 선택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붙잡고 싶은 마음인 거예요.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할 때는 주인공이 죽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는데요. 쓰다보니까 붙잡게 됐어요. 그래서 쓰는 데 오래 걸리기도 했고요.
‘타인의 삶에 대해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으므로, 어떤 이에게는 죽음이 최선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누군가 생의 끈을 놓으려 한다면, 나는 그의 손을 꽉 붙잡을 것이다’(349쪽)라고 했던 말이 그것이죠?
맞아요. 저는 소설을 쓸 때 구상을 많이 하고, 결말도 다 생각해놓은 다음에 써요. 생각을 오래 하고, 빨리 쓰는 편인데요. 이 소설은 쓰면서 결말이 바뀌더라고요. 중간에 크게 한 번 뒤집은 적도 있고 그랬어요. 처음에 구상했을 때는 마음의 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도 그 생각 자체는 바뀌지 않았는데요. 그냥 주인공을 붙잡고 싶어진 거예요. 무책임한 희망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기본적으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마음의 병이 그 이유라면 권리 행사를 좀 미루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거죠. 죽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삶은 한번 끝내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죽음은 내일, 또 내일로 미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구상했던 것과 다른 결말이었다니 놀랍네요.
주인공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기보다는요. 어떤 날은 마음이 깊이 가라앉아 버겁기도 하겠지만 또 어떤 날은 테라스에 앉아 햇볕도 쬐고, 바람이 불어오면 ‘좋다’는 생각도 하고, 시원한 밀크티를 마시며 산책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울기도 하고, 화가 날 때는 화도 내고 욕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마음의 체급도, 약점도, 살아온 시간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죠. 고통에는 표준이란 게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긍정과 희망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소설의 결말을 보고 자칫 빤한 희망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놀라운 반전을 노리고 쓴 얘기가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주체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어요.
삶도 죽음도 주체적이어야
주체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한 여사’라는 인물은 “생은 내가 어쩌지 못했지만, 마지막은 내 계획대로 이렇게 떠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184쪽)이라고 말하고 죽음을 선택하는데요. 이 부분이 죽음에 대한 작가님의 오랜 생각이 담겨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가만히 생각하면 제가 제일 두려운 건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병으로든 정신적인 이유로든 말이에요. 한 여사는 주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잖아요. 늙어서, 전처럼 무엇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적당한 때라는 마음이 와서 죽음을 선택하는 건데요. 저는 그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그때가 되면 하루하루 미루고 싶어질 수도 있겠죠. 어쨌든 삶도 죽음도 주체적이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을 다 알 수 없고요. 타인의 삶을, 선택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돼요. 억지로 살아갈 수 없듯이 억지로 죽을 수도 없는 일일 거고, 삶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 힘든 것처럼 죽음도 마음처럼 할 수 없다면 힘들 거니까요. 한 여사는 파티를 열고 정말 행복하게 떠나잖아요. 그런 죽음, 자기에게 맞는 죽음이라면 정말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요.
최근 스위스에서 한국인 2명이 안락사 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잖아요.
‘더 나은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늘 존재했을 거예요. 최근 <서울신문>에 실린 ‘디그니타스’ 인터뷰 내용과 제 생각, 소설에 쓴 부분들이 상당 부분 겹쳤다는 게 그 증거겠죠. 소설을 쓸 때, 계속해서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는 걸 느꼈거든요. 예전에는 안락사는커녕 존엄사에 대해서도 자살이라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요. 최근 조사 결과를 보니 안락사 찬성 여론이 80%를 넘었더라고요. 이제 우리나라도 존엄사법이 시행됐고요. 외국에서도 심각한 육체적 질병이 아닌 경우나 구달 박사처럼 고령인 경우에도 안락사를 진행한 사례가 있었죠. 그런 걸 보면서 존엄하고 주체적인 죽음을 존중하는 쪽으로 세상이 변해가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물론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악용할 수 없도록 법적 장치가 분명히 있어야 해요. 노인 분들이나 환자 분들이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사회복지제도가 먼저 마련돼야죠.
베토벤 교향곡을 들으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구달 박사 뉴스는 저도 기억이 나는데요. 작년 5월에 그 뉴스가 있었으니까 소설을 쓰고 있을 때 뉴스를 보신 거잖아요. 느낌이 남다르셨겠네요.
이 소설의 시작이 된 2007년 당시 단편을 쓸 때는 자살이나 우울증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서 생각을 했던 건데요. 점점 세상이 바뀌는 게 느껴졌고요. 그게 참 반가웠어요. 육체적 질병으로 회생이 불가능한 경우가 아닌데, 충분히 살 수 있는데도 죽음을 선택한 분 이야기가 뉴스에도 나오니까 정말 바뀌고 있구나 생각했죠.
소설에서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센터’가 들어선 뒤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크게 줄잖아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사회가 그렇게 변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확신해요. 생각해보면 충동적인 자살도 많을 것 같거든요.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픈데요. 어떤 선택은 조금 미루려면 미룰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때 만약 센터가 있다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더라고요. 오늘 날씨 좋은데 내일로 미룰까, 하는 식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우선 충동적인 자살은 막을 수 있을 테고요. 설령 진짜로 죽음이 최선인 분들도 조금씩 죽음을 미루다가 생각이 어쩌면 바뀔 수도 있어요. 아니면 한 여사처럼 자기가 원한 방식으로 떠날 수도 있는 거고요. 어느 기사를 봤는데 학자들의 의견도 비슷하더라고요. 아예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실제로 충동적인 자살이 정말 많겠죠.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난 분들이 그 순간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다 알 수는 없죠. 언론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을 수 있는데요. 충분히 충동적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아요.
적당한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때문에 주인공 ‘이서우’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거예요. 역설적으로 자신의 세상과 관계를 넓혀나가는 곳이 센터였고요. 센터에서는 “1분 1초가 전부 살아 있었다”(146쪽)고 말하잖아요. 자기 방에만 있을 때와 다르게요.
주변에 글 쓰는 친구들 중에 섬세하고 예민해서 우울증 약을 먹는 친구들도 많은데요. 보면 너무나 섬세해서 타인을 더 잘 배려하기도 해요. 오히려 더 조심스럽고요. 센터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비슷하잖아요. 서로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는 사람들인데요. 그러다 보니까 센터에서는 서우도 사는 게, 친구를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하는 사람들만 있는 곳이니까요. 적당한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느낌이에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큰 상처를 안고 있죠. 학교 폭력, 사이버 불링, 성폭력 등 아주 다양한 경우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워낙 죽음을 오랫동안 생각해왔기도 하지만요. 죽음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함께 생각하다보니까 여러 상황을 쓰게 된 것 같아요. 대개는 아픈 죽음이 뉴스가 되지 행복한 죽음이 뉴스화 되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 그런 아픈 죽음들을 보면서 왜 저 사람은 저런 선택을 했을까 혹은 왜 아프게 떠난 사람을 위로는 못할망정 악플을 다는 걸까 생각하면서 쓴 거였어요.
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나다운 것’과 ‘다양성’인데요. 죽음 역시 마찬가지예요. ‘다양성’이라는 말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잖아요.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에도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삶의 계획이 저마다 다르듯, 죽음의 계획도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 중 작가님이 제일 마음 쓰였던 인물은 누구였어요?
‘오민아’라는 인물은 고독사가 두려워서 센터에 들어온 인물인데요. 저는 민아가 마음에 남았어요. 요즘은 1인 가구도 정말 많고요. 고독사도 너무 많잖아요. 보통 죽음이라고 하면 가족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헤어지는 장면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평생을 혼자 외롭게 살았던 사람은 죽음마저 혼자 겪어야 하는 거죠. 사실 죽음의 순간, 숨이 끊어지는 순간은 엄청 힘든 것일 텐데 그걸 혼자 감당하고, 죽은 이후에도 아무도 이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 무명씨로 남는 상황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서 오민아라는 인물이 제일 마음 아프죠. 어쩌면 오민아는 좋은 누군가를 만났다면 센터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 있거든요.
자본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이 부딪치는 장면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었어요. 주인공 이서우가 들어간 센터는 “중산층을 위한 곳”(75쪽)이죠. 소설에는 빚 때문에 센터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례도 나오고, 센터의 돈벌이에 대한 비판도 나오거든요.
예전에 인도 여행을 갔는데요. 갠지스 강에 화장하는 곳이 있거든요. 정말 충격적이었던 게, 돈이 많은 사람은 장작을 아주 높이 쌓아서 시체가 다 타고 남을 때까지 태울 수 있더라고요. 반면 가난한 사람은 장작을 많이 살 수가 없어서 시체가 덜 탄 상태에서 강에 떠내려보내지고요. 죽음까지도 돈에 영향을 받는구나, 그때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서우를 계속 붙잡고 싶은 서우의 엄마도 등장하지만 가족들은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것 같다고 말하는 ‘손형’도 있잖아요. 소설에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많이 드러나진 않는데요. 죽음에 있어 가족이라는 문제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는 것도 가족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가족이 반대하는 경우도 많고요. 아니면 환자가 의식이 없으니까 가족이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아서 연명의료를 계속하는 경우도 있는 거예요. 가족이라서, 가족이니까 그걸 반대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요. 가족이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가장 편한 것, 당사자를 가장 위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을 한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쓰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어떤 장면이었나요?
서우의 중학교 시절을 쓸 때 많이 울면서 썼어요. 감정적으로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연수가 서우에게 “왜 나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걸까?”(279쪽)라고 묻잖아요.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서우나 성폭력을 당했던 연수를 보면서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도 많이 하는 생각인데요.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하다 내린 결론은 그들은 뻔뻔하기 때문이다, 였어요. 양심이 없으면 살기 쉬운 것 같아요.
필요할 때 꽉 잡아주는 손이 되어주기를
제목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는 어떻게 정하신 건가요?
소설에 나오는 “우리 집 개를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266쪽)라는 문장에서 단어 하나를 바꾼 건데요. ‘아침’이라는 단어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이나 삶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고요. ‘당신’이라는 단어에는 소중한 사람을 포함한 살아갈 다양한 이유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닌 아침을 보는 것의 차이, 당신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 당신을 떠올리는 것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고요. 제목에서 어떤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지길 바랐어요.
‘죽음을 생각하는 건 언제나 삶을 생각하는 일’(347쪽)이라는 말을 오래 곱씹게 되는데요. 작가님의 생각이 듣고 싶어요.
누구나 암에 걸리는 게 아니고 누구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게 아닌데도 많은 사람이 보험에 가입하거나 대비를 하잖아요. 그런데 누구나 겪는 죽음이라는 것은 왜 준비를 안 할까, 하는 의문이 있어요. 저는 죽음을 많이 생각했다고 했잖아요. 가령 이런 거예요. 만약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내 지인들에게 연락을 할 텐데 누구에게 하라고 할까, 생각하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거든요. 아주 자연스럽게 삶을 생각하는 거예요. 또 죽음을 생각하면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하잖아요. 이건 또 삶으로 연결이 돼요. 정말 그렇거든요. 피할 게 아니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해요. 그래도 요즘은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긴 하고요.
작가님은 매년 유서를 쓰신다고 들었어요.
일 년에 한 번은 여행을 가거든요. 비행기를 타기 전에 꼭 유서를 써요.(웃음) 정리하는 것도 좋아해서 집도 늘 깨끗하게 두는데요. 제가 죽었는데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게 저는 싫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죽었을 때 연락했으면 하는 사람을 메모하고 그랬어요. 유서를 쓰기 시작한 게 십 년도 넘었는데요. 매년 업데이트를 하다 보니까 점점 구체적으로 쓰고 있어요. 연락할 사람들도 적어두고요. 장례식은 안 했으면 한다든가 화장하고 어디에 뿌려줬으면 한다든가 하는 내용들을 다 적었죠. 또 제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우는 건 싫더라고요. 제가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웃긴 사람이라(웃음) 그런 기억을 갖고 웃으면서 보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적어놨어요. 이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내 삶을 일 년에 한 번씩 정리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삶이 정말 선명해져요.
『모두가 부서진』출간 당시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저는 사람들이 들여다보기 두려워하는 내면의 지하실 같은 곳에 시선이 머물러요”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작가님이 이런 곳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모든 감정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으로 태어난 게 그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내릴 때처럼 작은 일에도 큰 행복을 느끼는 반면, 안타까운 기사를 보면 오랫동안 앓곤 하거든요. 일상을 ‘밝은 나’가 이끌어간다면, 작가로서의 삶은 ‘어두운 나’가 끌고 가는 것 같아요. 삶의 사각지대라든가 내면의 지하실 같은 곳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집요함이 소설로 이어지는 것 같고요.
그게 참 힘든 일일 텐데 말이에요.
소설을 쓸 때 감정적으로 힘들 때도 많지만요. 어둠이나 우울 역시 잘 활용하면 좋은 에너지가 되어준다고 생각해요. 저는 더 괴로워도 섬세한 심장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첫 소설집 나왔을 때 가족들도 충격을 받았어요.(웃음) 제가 평소에는 밝다고 했잖아요. 그러다보니까 방송국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많이 놀라더라고요.
라디오 작가로 10년 넘게 지내고 계시잖아요. 라디오 작가와 소설가, 두 정체성 사이에서 작가님은 어떻게 다른가요?
방송 글과 소설 글이 진짜 다르죠. 소설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면 방송은 듣는 분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써야 하는 거니까요. 방송에서도 제가 진짜 관심이 가는 건 청취자의 사연이에요. 심야 방송을 오래 했는데요. 힘든 분들이 너무 많아요. 낮에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분들, 고된 육아로 잠 못 이루는 분들, 병원에서 통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익명으로 사연 남기는 분들처럼 사연도 다양하고요. 소설가로서 그 사연들에 깊이 빠지는 동시에 라디오 작가로서는 희망을 많이 얘기해요. 위로 하는 글을 많이 쓰죠.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앞으로도 어두운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들이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누군가는 어두운 곳을 바라봐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둠 역시 우리 삶의 일부잖아요. 첫 소설집도, 첫 장편도 같은 ‘어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있지만, 그 온도는 달라요. 첫 소설집이 서늘하고, 때론 자기 자신마저도 태워버릴 만큼 뜨거웠다면, 첫 장편은 그럼에도 따스한데요. 앞으로 쓸 소설들은 어떤 온도를 갖게 될 지 저 역시 궁금해요.
이 책을 꼭 읽으셨으면 하는 분들이 있나요?
우선 마음을 앓는 분들이 읽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어요. 죽음을 생각하셨거나 생각하시는 분들이 보시면 좋겠는데요. 이 책이 적당한 거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존재가 되어주기를, 필요할 때 꽉 잡아주는 손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거든요. 무책임한 희망을 말하는 책이 아니에요. 적당한 거리에 앉아 있는 온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좋겠다는 마음을 썼으니까요. 그런 분들이 보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여러 안타까운 사건 때문에 우울증에 대한 시선이 안 좋은데요. 그로 인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더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개인 성정의 문제가 우울증으로 일반화되지 않았으면 하는 하고요. 자살 유가족에 대한 편견도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조수경 저 | 한겨레출판
죽음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안락사가 가능하다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은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