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음성을 지닌 사람과 이야기할 때, 마음을 활짝 열게 된다. 흩어지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자꾸 더 귀 기울이게 된다. 2년만에 루시드폴과 다시 마주했다. 반려견 ‘보현’과 함께 쓰고 지은 사진 에세이 『너와 나』를 앞에 두고서, 그가 손수 지은 감귤을 까먹으면서 제주의 날씨를 걱정하고, 아티스트로 정식 데뷔한 ‘보현’의 저작권 문제를 궁금해하며, 다음 앨범의 주인공이 될지 모르는 ‘식물’의 소리를 BGM으로 틀어놓은 채 조용하고 긴 대화를 나눴다.
풀코스 요리를 준비하는 마음
오늘도 일찍 일어났나요?
농부는 원래 일찍 일어나요. (웃음) 농사철에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요. 1시간쯤 차를 마시고 일을 시작하죠. 저녁 8시가 제겐 늦은 시간이에요. 새벽 6시가 가장 피크로 일할 시간이고요.
8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 도 에세이와 함께 냈는데, 9집도 사진 에세이를 썼어요. 처음에는 보현의 사진집 출간으로 제안받았다고요.
작년 여름에 그림책( 『손으로 말해요』) 번역 작업을 제안 받았어요. 좋은 책이라 번역하기로 했는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번역비를 받으면 동네 유기견보호소에 보내야겠다’고. 제주에 유기견이 무척 많아요. 개를 너무 사랑하는 한 분이 유기견보호소를 열었는데, 단체나 법인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라서 지원을 잘 받지 못해요. 알음알음 아는 분들이 도움을 주고 계시지만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이 말을 들은 편집자님께서 보현의 사진집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해주셨고요.
평소 필름 카메라를 즐겨 찍으시죠. 사진은 충분히 많았을 것 같은데.
보현이를 찍은 사진이 필름으로 따지면 아마 수백 롤은 될 거예요. 물론 낼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보현과 저의 사진이지,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 책은 이미 많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렇게 고민을 계속하다가 나만이 할 수 있는 뭔가를 넣으면 유니크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귤은 아니고(웃음) 결국 음악이더라고요.
‘처음부터 보현과 같이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던 거네요.
그땐 백지도 아닌 까만 먹 같은 상태였어요. 작년에 손가락을 크게 다쳤고 당시에는 회복이 안 된 상태였거든요. 예전처럼 기타를 잡을 수 있을지 겁이 났어요. 뭔가를 해야 하니까 기타와 관계 없는 음악만 들었는데, 여러 가지가 꼬이는 거예요. 머릿속에 일어나는 건 루시드폴스럽지 않았고, 그럼 루시드폴스러운 게 뭘까? 내가 앨범을 과연 낼 수 있을까? 좀처럼 정리가 안 됐어요. 생각해보면 굉장히 두려웠던 것 같아요. 어차피 정규 앨범은 안 될 것 같으니까 비정규앨범을 만들어야겠다, 음악이 될지 사운드가 될지 모르지만 일단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까 조금 자유로워졌어요. 뭐가 됐든 우연히 걸려든 걸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보현과의 공동 작업이 시작됐군요.
보현과 매일 산책하면서 소리를 채집했어요. 소리를 음악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일이 점점 커졌고 하고 싶었던 것들이 스멀스멀 나오더라고요. 정승환이랑 같이 곡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엠비언트 음악을 해볼까? ‘그래뉼라 신테시스'란 기술을 활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아이디어가 계속 이어지면서 사운드 스케치에서 데모 상태로 머물러 있는 곡이 17개까지 만들어졌어요. 이 정도면 정규 앨범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에 사진 에세이까지 더해졌고요.
작년에 에세이와 같이 8집 앨범을 냈을 때 반응이 좋았어요. 저도 만족했고요. 저는 앨범을 만들 때 풀코스 요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거든요. 애피타이저부터 시작해서 차 마시고 디저트까지. ‘아 잘 먹었다’는 기분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책이랑 같이 만들면 정찬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앨범을 찬찬히 들으면서 인터뷰 장소로 왔거든요. 곡마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굉장히 고요했다가 또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슬픈 마음도 느껴지고요.
앨범을 만들어놓고 보니,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만들어졌어요. 총 열 세곡이 들어갔는데 한 곡은 히든 트랙이라 네 곡씩 카테고리가 나눠졌어요. 지금까지 노래 가사에 사랑하는 존재를 ‘너’라고 표현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모든 게 흘러가듯 만들어졌어요. 저도 보현이를 ‘너’라고 부르고, 보현도 저를 ‘너’라고 부르고. 우리를 둘러싼 또 다른 ‘너와 나의 노래’가 만들어졌어요. 앞에 실린 네 곡은 ‘너의 노래’, 중간의 네 곡은 ‘나의 노래’, 마지막 곡들은 ‘너와 나의 노래’로 나눌 수 있어요.
한 권의 읽을 수 없는 책
타이틀곡 제목이 「읽을 수 없는 책」이에요. 보현이가 만든 앨범, 보현이가 주인공인 책인데 보현이는 읽을 수 없구나, 싶었어요.
보현과 저는 오랜 시간을 함께 살고 있어요. 우리의 나눈 추억은 상당히 많죠. 그 추억이 노래가 되기도 책이 되기도 하지만, 보현은 정작 읽을 수 없는 책이에요. 이 곡은 가사를 정말 빨리 썼어요. 10분인가? 1시간인가? 체감상으로는 10분만에 쓴 것 같아요. 예전에 「봄눈」, 「고등어」, 「할머니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아직, 있다」를 그렇게 썼거든요. 어떤 과정에서 썼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써지는 곡들이 있어요.
보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적은 없나요?
제가 번역한 그림책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아빠가 읽어줄게”라고 말하니, 표지 냄새를 킁킁 맡고 ‘재미없어’하고 가버리더라고요. (웃음) 정말 보현스러운 거죠. 얘한테 가장 중요한 자극은 냄새니까요. “아빠, 나 이 냄새 맡았어”하고 가버린 거예요.
보현이가 노래를 듣다가 잠들면 그건 좋은 노래였다고요. 『너와 나』앨범을 들었을 때는 어떤 반응이었나요?
자기 목소리가 나오면 막 짖더라고요. 자기인 줄 모르고 다른 강아지의 소리라고 생각한 것 같았어요. 보현이랑 산책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어요. “네 목소리인 줄 아니?”라고. “안다”고 하더라고요. 여기서부터는 믿거나 말거나예요. (웃음)
(당연히 믿죠.) 이번 앨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곡이 보현이 직접 연주한 「콜라비 콘체르토」입니다. 왜 콜라비였는지도 궁금했어요.
보현이가 단단한 과일을 먹을 때는 다 좋은 소리가 나와요. 사과는 속이 좀 쓰릴까 봐 안 줬고요. 이 곡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들으면, 보현이가 콜라비를 먹고 있는 소리인지 알기 어려울 거예요. 저는 빗물 튀는 소리, 종이를 구기는 소리, 유리를 밟는 소리라고 느꼈어요.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신비로운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가공과 편곡만 했을 뿐, 보현이가 작곡한 곡이에요.
보현의 저작권이 궁금해요. 당연히 따로 받겠죠?
(웃음) 이미 보현이 통장을 만들었어요. 책의 인세가 들어오면 일부가 보현이 통장으로 들어가요. 밥이 됐든 무엇이 됐든 필요한 게 있겠죠. 우선은 보현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저작권협회에도 등록했어요. 직접 못하니까 아티스트 이름으로 ‘보현’을 등록했고 저희 부부가 보호자예요. 한국음악실연자협회도 있거든요. 노래를 부르거나 코러스, 기타를 쳐도 등록할 수 있어요. ‘보현’ 이름으로 신청했더니 문자가 왔더라고요. “앨범 발매 후에 다시 등록하라”고. 저희가 너무 서둘렀나 봐요.
좀더 보현이 입장에서 즉각적으로 만족할 만한 선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앨범이 나오는 날이 보현이 생일과 닿아 있어요. 보현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재밌게 노는 일.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에요. 그날은 보현이랑 하루 종일 놀아주려고 해요.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보현과 이렇게 오래 살았으면서도 보현이 시선에서 보현에게 집중해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는 사실이었어요. 함께 음악을 만든 것도 좋았지만 보현이에게 온전히 집중한 시간들이었으니까요. 그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요.
『너와 나』는 보현과 제대로 협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소리로 재구성한 측면에서도 독보적이에요. 새로운 작법에 도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손가락을 다쳤을 때, ‘테일러 뒤프리’의 인터뷰를 읽었어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시골로 이사해서 소리를 연구하고 있는 아티스트인데, 그가 만드는 앰비언트 곡에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작곡의 시작부터 기계와 협업한다면, 다친 손가락을 쓰지 않고도 음악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모듈러 신스, 샘플링, 필드 레코닝, 그래뉼라 신테시스 등을 공부했어요.
이번 앨범은 주로 ‘고요연구소’에서 작업하셨다고요. 이름을 딱 듣는 순간, ‘루시드폴스럽다’ 싶었어요.
앨범을 만들면서 침묵, 소리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소리를 만드는 사람에게 침묵은 뭘까,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깊이 해본 것 같아요. 침묵의 반대는 소리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의도한 침묵도 있을 거고 의도하지 않은 침묵도 있을 거란 말이죠.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중에 ‘음악이 없는 곳을 ‘연구소’라고 한다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침묵연구소’를 떠올렸어요. 마지막 크레딧을 정리하는데 편집자 분이 ‘고요’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해서 ‘고요연구소’라고 썼어요. 생각의 흐름대로 간 거예요.
「불안의 밤」은 보현의 불안을 생각하며 쓴 곡이에요. 강아지들은 사납게 비가 오는 날에 공포감을 느낀다고 알고 있어요.
보현이는 태풍이 오거나 천둥이 치면 밤새 잠을 못 들고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해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무력감을 느꼈던 마음으로 쓴 곡이에요. 언젠가 대학 친구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어요. 강아지랑 잘 놀아주는 친구라서 “너 되게 잘 놀아준다”라고 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이 “아니야, 얘가 나랑 놀아주는 거일 수도 있어”였어요. 맞는 말 같았어요. 보현이랑 산책할 때도 그래요. 제가 놀아주는 게 아니라, 보현이가 저를 산책 시키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빠. 운동 좀 해야 하지 않니? 내가 나가 줄게”하고서 말이에요.
어떤 과정으로 돌보았는가
새해가 됐으니 이제 7년차 농부예요. 올해 귤 수확은 어땠나요?
농사가 잘됐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년보다는 올해가 귤이 맛있어요. 지금 제주도는 난리예요. 9월부터 비가 많이 와서 귤 농사를 하는 분들이 힘들었죠. 제주는 이제 겨울이 없어진 것 같아요. 어제 아내가 과수원에서 일하는데 낮에 기온이 17도였대요. 저는 좀 걱정이 돼요. 매년 기후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바뀌니까요. 저희 기준에 귤은 당도가 높은 과일이 아니에요. 감귤의 당도가 평균 9에서 9.5브릭스거든요. 저희 귤은 10정도 나오고요. 그런데 사람들의 입맛은 한라봉(13), 천혜향(14)에 맞춰져 있어요. 요즘 사과는 마냥 달잖아요. 어릴 때 먹었던 맛이 안 나죠. 저희는 와일드하고 복잡한 맛을 내는 귤이 진짜 맛있는 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은 다른 것 같아요. 음악으로 치면 저흰 록이 좋은데, 사람들은 발라드를 원하는 거죠.
소비자의 취향도 무시할 순 없을 텐데요.
기준이 헷갈리지만 농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봐요. 어떤 면에 있어서는요. 아내나 저나 어쨌든 농사는 농부가 주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무가 하는 일이고, 저희는 나무를 도와서 수확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는 역할을 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귤이 맛있다고 하면 너무나 기쁘지만, 우리가 어떤 과정으로 나무를 돌보았는지가 중요해요. 그것이 사람이 됐든, 땅이 됐든 해를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돌봤다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레몬 농사도 도전하셨다고요.
제대로 익은 레몬이 나오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덜 익은 풋레몬이 나고요.
앨범 작업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도 되도록 잠은 제주에서 잔다고 들었어요.
서울에 오래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엊그제 마스터링을 마쳤는데 너무 늦었더라고요. 마지막 비행기라도 타려고 했는데 그날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비행기를 취소하고 다음날 첫 비행기표를 끊어서 공항 근처 호텔을 잡았어요. 두 시간이라도 좀 자보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기본적인 도시의 소리, 자동차 소리가 힘들더라고요.
제주는 어때요?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깡촌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골이거든요. 저녁 8시가 지나면 조용해요. 다만 집 주변에 슬슬 새로운 건물이 생기고 있어서요. 아침 7시, 8시가 되면 집 짓는 소리가 들려요. 365일 땅을 파는 소리가 매일매일 들려요. 오늘은 무슨 땅이 팔려서 뭐가 생길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소음과 소리가 참 달라요. 가요도 장르마다 제각각 다르죠. 루시드폴이 만든 노래를 들으면 일단 차분해져요. 흥분보다는 고요에 가깝죠.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집중해서 들어도 편안해요. 무해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자연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어요. 청력에 문제가 있어서 도저히 도시에서 생활이 안돼서 혼자 살다시피 하셨대요. 그러다 우연히 제 앨범을 들었는데 귀가 아프지 않아서 너무 기뻤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저로서는 상상하지 못한 피드백이었죠. 제 7집 앨범 제목이 『누군가를 위한,』이었어요. 제 바람 같은 제목이었지만, ‘내 노래가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한 마음이 들었어요. 책이라는 매체도 그래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책을 읽어?”라고 하지만, 읽는 사람은 읽죠. 쉽게 버리지 못하고 애착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반갑고 기뻐요.
『너와 나』는 반려견과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더 특별한 앨범이 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이번 앨범은 펄프가 된 심정이었다”고 말했어요. 제가 사는 동네는 밭농사를 많이 해서 주변에 건강원이 많거든요. 양파, 비트, 브로콜리 등 즙을 짜주는 곳이 많아요. 비트를 갖다 부면 물 한 방울 안 넣고 고압으로 엑기스를 만들어요. 그러면 굉장히 작은 펄프가 남는데, 제가 그런 펄프가 된 것 같았어요.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해서, ‘어떤 반응이 올까’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안 들어요. 혼자 만든 앨범이 아니라 보현과 작업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저 자신을 만족시킨 뭔가가 좀더 커진 것 같기도 하고요.
평범한 일상도 살아내는 사람이라서, 어쩌면 더 초연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천상 뮤지션인가? 그런 마음은 없어요. 다만 제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에요. 음악도 농사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음악에게 선택 받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제가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음악을 했다고 생각해요. 농사도 마찬가지예요. 거창하게 말하면, 저에게 귤은 먹는 음악 같기도 해요. 제가 대한민국에서 음악을 만들지만 마음만 먹으면 전세계 사람이 제 음악을 들을 수 있잖아요. 귤도 그래요. 택배 송장에 주소를 쓰다 보면 제가 가본 곳이 얼마 안 돼요. 심지어 귤이 어떻게 꽃을 피우고 자라는지 모르는 분도 있거든요? 그런 분도 전국 곳곳에서 귤을 주문하죠. 귤도 음악도 묘한 것 같아요. 좋은 쪽으로요.
좀 이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갑자기 묻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 너무 큰 질문인데요. 대답이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아내랑 ‘쉽게 산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산다는 걸 긍정하고,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자유롭게 사는 거라고요. 우리가 평소 ‘자유롭게 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걸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건 빨리 인정하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에 승복하기 좀 쉬울 것 같아요. 수긍일 수도 있고요.
85쪽에 실린 사진이 특별히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오랜 팬이 짜준 커플 목도리를 두르고 뮤직비디오를 찍은 겨울이었어요. 루시드폴에겐 오랜 팬이 많다고 느껴지거든요. 팬들에게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 같아요.
팬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앨범을 만들면서 너무 지치니까 ‘이쯤 했으면 그만하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오래하지 못하게 해주는 분들이에요. 99%는 제가 모르는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그분들로 인해 제가 음악을 할 수 있어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우리가 연결돼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라는 끈 하나를 갖고 각자의 삶을 살다가 앨범을 내면 공연장에서 다시 만나고. ‘뮤지션으로 살아간다는 게 뭘까’ 생각할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팬들을 생각해요.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항상 이 질문을 품고 지금처럼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다음 앨범은 정말 식물과 콜라보를 할 생각인가요?
진지해요.(웃음) 밭에 수백 그루의 나무가 있어요. 나무가 내는 신호를 소리로 바꾸는 기계를 연결해서 소리를 채집 중이에요. 계절마다 내는 소리가 다를 거예요. 꽃이 필 때, 열매를 딸 때 그 달라지는 소리를 음악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너와 나루시드 폴 저 | 미디어창비
반려견 보현과 함께한 산책 같은 사진과 노래를 한데 엮은 작품집으로, 2년 만에 발표하는 정규 9집 음반과 동시에 선보인다. 이번 앨범의 CD는 책 이외의 형태로는 별도 판매하지 않으며, CD에는 음원으로 공개되지 않는 루시드폴의 음성이 담긴 특별한 낭송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