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 미지의 장소로 가고 싶은 마음을 품어본 적 있다면, 지금 한 권의 책에 ‘로그인’ 하자.
시집 『소규모 팬클럽』은 행과 행을 건너는 모험 같은 책이다. 시집을 열면, 게임이나 판타지 같은 가상 공간에 떨어지고 한 걸음 내딛으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좌표가 휘발된 듯한 이상한 세계를 만든 설계자는 누구일까? 바로 신인 작가들을 위한 문학플랫폼 <던전>의 운영자이자 첫 시집을 낸 서호준 시인이다.
시인이 시의 문 앞에 선 건 고등학교 때부터다. “교과서 밖 현대시를 좋아하게 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당숙한테 과외를 받았는데 시를 습작하는 분이어서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생일 선물로 주셨거든요. 그 시집을 몇 번이나 읽었던 기억이 나요. 간혹 참고서에도 현대시들이 나오잖아요. 일제시기 시만 읽다가 비교적 최신 시를 읽으니 새로웠죠.”그 후 시인은 ‘대체 어떻게 이 문을 열 수 있는지’(「역사물리학」) 물으면서 시를 꾸준히 써왔다. 그래서인지 49편의 시들은 닫힌 문을 열려는 시인의 모험처럼 느껴진다.
이 모험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룰이 있다. 첫째, 현실에 없는 것을 쓸 것. 낯선 골목길을 걷듯 시를 읽다 보면 중세풍의 성이었다가 해변이었다가 떠들썩한 축제의 한복판에 다다른다. “시에서만큼은 잘 모르는 걸 쓰려고 해요. 제 성격 때문인 것 같아요. 일상이나 사람 이야기보다, 잘 모르는 걸 쓰고 싶거든요. 평소에도 낯선 곳을 가는 걸 좋아해요. 큰길 말고 일부러 골목길을 돌아다니고요. 제겐 시도 그런 모험 같은 거예요. 어디로 가도 상관 없으니까 좋은 거죠.”
가상공간에서 마주치는 얼굴들도 모두 낯설다. 잭슨 콕, 존 코너, 아키코 등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고유명사가 펼쳐진다. “실제로 있는 걸 쓰면, 구체적인 것이 떠오르니까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를 자주 써요. 읽었을 때, 현실이 연상되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쓰다가도 너무 말이 잘 흘러가면, 맥락을 건너 뛰는 등의 시도를 하고요. 그중 유일하게 아키코는 실존 인물이긴 해요. 친구 이름이 '아키호'였는데 다들 발음을 못해서 '아키코'라 불렀죠.(웃음)”
두 번째 룰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가상공간을 떠도는 화자는 문득 멈춰 서서 사랑과 슬픔을 떠올리지만, 그 감정을 애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사랑했어?/아마도’ (「던전이 있던 자리」)라고 답하는 다음 순간, 왜 화자는 덤덤한 표정을 지을까? “시에 어쩔 수 없이 제 상태가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 감정에 갇히지 않기 위해 재빨리 빠져나오는 걸 선호해요. 제 감정이 시에 드러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다만, 감정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낙차만을 즐기는 것 같아요.” 무표정 앞에서 독자는 시를 대신해서 울고 웃게 된다. 아마 우리 역시 ‘웃을 일보다 웃음을 참는 일이 많’(「그라운드 제로」)기 때문일까.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시처럼, 시인은 시를 쓸 때도 무표정하게 쓴다고 말한다. "현실의 저는 당연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죠. 그래도 시를 쓸 때만큼은 최대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요. 아무 생각 없는 상태가 찾아오도록. 쓸 때 기울이는 유일한 노력이 그거예요. 기분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
시인이 기다리는 건 이 모험을 함께 전개할 읽고 쓰는 동료들이다. 예전에는 문학상을 수상한 이른바 ‘등단’ 작가들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면, 지금은 독립문예지, 메일링 서비스 등 다양한 통로로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들이 늘어났다. 그중 하나가 서호준 시인이 운영하는 온라인 문학 플랫폼 <던전>이다. 정기구독을 하면 지금 가장 활발히 창작하는 신진 작가들의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창작자가 직접 작품을 발표하는 온라인 문학 플랫폼이 없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만들게 됐어요. 작가들이 작품을 투고하면 심사를 거쳐 연재하는 시스템으로요. 한두 편만 읽고는 한 사람의 세계를 알 수 없으니, 여러 편을 묶은 작품집의 형태를 택하고 있어요. 문예지에서 신인 작가의 시를 읽었는데, 운 나쁘게 그 몇 편이 하필 취향에 안 맞을 수 있잖아요. 그래도 20편 정도 읽어야, 그 사람의 시 세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온라인 플랫폼을 택한 이유는 저와 친구들이 다 인터넷에 사는 사이버 인간들이어서예요.(웃음)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죠.”
‘서호준 월드’는 당분간 계속 확장될 것이다. “굴렁쇠를 굴리듯 끝까지 뻗어 나가는 시를 쓰고 싶어요. 더 많은 걸 시에 끌어들이고 싶고요. 쓸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있어요. 쓰면서 막힐 때도 있지만 다 썼을 때 기분이 좋죠. 쓰고 나면 모든 게 원상복귀 되지만요.(웃음) 그 중독성 때문에 계속 쓰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시인은 어떤 새로움을 보여주게 될까?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의 속편이 궁금하다면, ‘소규모 팬클럽’의 일원이 되자. 미로는 이미 준비됐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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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준 1986년에 태어났다. 문학 플랫폼 ‘던전’을 운영하고 있다. 『소규모 팬클럽』은 서호준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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