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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최진영 소설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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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소설에는 두 명의 ‘태희’가 등장한다. 성인 태희와 십대 태희. 성인 태희의 삶은 심란하다. “꺾이는 중이었고 부러지기 직전”이다.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한 뒤 씻고 누워 비극적인 상상과 나쁜 원망에 빠져들며 하루를 마감한다. 자기 안에 짜증이 가득 고여 찰랑거리며 지저분하게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 성인 태희가 할머니의 죽음을 겪게 된다. 그리고 편지를 쓴다. “오늘 내가 쓴 편지를 1년 뒤에 받아도 괜찮은 사람, 그때까지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 사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약간은 유치할 수도 있는 이벤트에 동요하지 않고 그것을 비밀에 부쳐줄 사람”에게. 그 사람은 바로 십대 때의 자신이었고, 놀랍게도 그 편지가 십대 태희에게 배달된다. 편지를 받은 태희는 (미래의 자신인 줄 모르는) 또 다른 태희에게 편지를 쓴다. 이 과정 속에서 현재의 성인 태희는 엄마의 집에 찾아갈, 오랜 친구 집에 전화할 여유와 힘을 얻는다. 그렇게 태희는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내가 되는 꿈』은 인상적인 소설이다. 십대 태희가 현재의 성인 태희의 회상으로 소환되지 않고 둘의 이야기는 각각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둘을 편지라는 장치가 연결시켜 묘한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소설이 자아내는 결들이 한 층 풍부하고 생각할 거리를 많게 한다. 소설가 최진영은 단편보다는 장편 쓰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최소 3개월을 그것만 생각 할 수 있어서, 더 많이 빠져들 수 있어서다. 매일 정오부터 오후 5시까지 책상 앞을 떠나지 않고 글을 쓰는 루틴을 지키며 한국 소설에 아주 선명한 또 하나의 성장소설을 추가한 소설가 최진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명의 태희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성인 태희와 십대 태희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설정 때문에요. 

편지가 한 번씩 왔다 가죠. 예전에 소설을 쓸 때도 평범한 일상 속에 충격적인 사건을 심어놓곤 했어요. 『해가 지는 곳으로』에는 아포칼립스, 『구의 증명』에는 죽은 연인의 살점을 먹는 설정이 들어갔고요. 그런 기둥을 하나 정해놓고 쓰는 편이에요. 이번에도 성인 태희와 십대 태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소설이니까 가능한 장치를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과거의 편지와 현재의 편지가 오가는 설정을 넣었어요. 그리고 그게 소설을 쓰는 재미이기도 했습니다. 

성인 태희가 자신의 편지가 과거로 배달됐다는 걸 알게 되지만 뭔가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미래의 태희가 보낸 편지가 과거의 태희에게 큰 간섭이 안 되면 좋겠다, 그리고 과거의 태희가 보낸 편지가 미래의 태희를 결정적으로 뒤바꾸는 간섭이 일어나지 않는 선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십대 태희는 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것을 모르죠. 미래의 태희는 어느 정도 과거의 자기를 아니까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그것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요.

매일매일의 삶이 버거운 성인 태희에게 십대 태희가 힘을 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그렇죠. 호되게 꾸짖는 거 같기도 하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직접적인 말을 하지는 않지만 십 대 태희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괴로움 같은 걸 성인 태희에게 보여줌으로써 성인 태희가 정신을 차리는 느낌이죠.

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태희가 너무 안타까웠어요. 회사를 그만두려는 상황에서 팀 동료에게 이런 식으로 그만두면 어떡하냐는 말을 들어요.

어른이라고 다 능수능란한 것도 아니고 이별은 누구에게나 처음인데 이별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것도 이상하죠. 그런데 우리는 어른이라면 서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어느 정도 익숙하고 노련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닌 거 같더라고요. 저도 성인이지만 대부분의 상황이 다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어른이라고 아이들을 무시하면 안 되고, 아이들은 어른을 완벽한 존재라고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 속에서 성인 태희가 다양한 이별들을 경험해요. 

성인 태희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이죠. 회사도 나와야 하고 연인과도 헤어지고. 연인과는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배신당해서 헤어지는 거죠. 태희가 할머니의 죽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느꼈어요. 죽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걸 실감하지 못하는 상황인 거 같아요. 그런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떨까 상상하지만, 실제로 그런 순간이 닥쳤을 때 예상 했던 것보다 크게 무너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하게 되죠. 어쨌든 모든 이별의 순간이 살면서 한 번은 꼭 오죠. 그게 성인 태희에게 한데 모여서 온 측면이 있지만, 그만큼 한꺼번에 경험해서 태희가 잘 일어설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인간적 도리를 피하고 싶을 때마다 과잉 업무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일이 나를 망친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핑계 삼아 내가 나를 망치는 경우도 많았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 문장에 공감하는 독자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간접 체험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기도 해요. 일이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부분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그것만큼 그림자도 짙어서 ‘저 사람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중요한 걸 놓치고 있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어요. 저를 봐도, 제가 빨리 마감을 해야 하고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소홀할 때가 있어요. 결국에는 일 핑계를 대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을 때 자괴감이 들죠. 많은 사람이 그런 것을 느낄 거 같아요. 일은 우리를 살게 하지만 망치기도 해서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할 거 같아요.

제목은 작가님이 정하셨나요?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는 문장이 소설에 있긴 하지만, ‘내가 되는 꿈’이라는 말의 의미를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파일명이 ‘내가 되는 꿈’이었어요. 제목을 바꾸는 것에 대한 얘기도 전혀 없었고요. 어떻게 보면 꼰대같은 말일 수도 있는데, 자신의 롤 모델이나 장래 희망을 생각할 때 직업적인 측면에서 많이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단편적인 것 같아요. 직업적인 목표를 성취하기도 힘들지만 성취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스스로 직업이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어떤 내가 마음에 들어?’라고 생각하면 나를 그쪽 방향으로 이끌면서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제는 서로에게 그런 것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너 연봉 얼마야?’, ‘직급이 뭐야?’, ‘퇴사하면 뭐 할 거야?’를 묻는 것보다 ‘너는 지금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이런 걸 물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요. 그런 얘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작가님이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하늘과 나무를 자주 보고,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는 용기를 내는, 의젓한데 귀여운 구석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핑계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되겠다 

작품을 쓰면서 십대 태희와 성인 태희 중 누가 더 좋았나요? 

십대 태희에게 많이 의지했고 감정이입을 했어요. 십대 태희가 어른 태희를 살리는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십대 태희에게 친한 척을 많이 했어요.(웃음)

작가님의 십대는 어떠셨어요? 

진짜 조용했고 혼자 있을 때가 많았어요. 점심시간, 쉬는 시간에 운동장 스탠드에 혼자 앉아 있는 걸 좋아했어요. 책은 거의 읽지 않았지만 매일 일기를 썼어요. 겉은 조용했는데, 속은 시끄러웠던 거 같아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 내 미래는 참담하고 나는 절대 어른이 안 될 거 같고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이고 염세적이었어요. 그래서 꿈도 없고, ‘내가 무슨 꿈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새벽 2시까지 라디오 듣고요. 십대 때니까 잠이 부족하잖 아요. 그런데도 자기 전까지 뭘 썼어요. 일기라고 보기엔 힘든 감정 토로 같은 거였어요. 그런 걸 쓰다 보면 잠이 오잖아요. 마구 휘갈겨서 다음 날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새벽에 졸면서 글을 썼어요.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을 글을 쓰면서 풀었던 거 같아요.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해져도 글자는 남는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쓰는 행위에 대한 작가님의 믿음이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건 자신 없고, 부끄럽고, 해가 될 거 같고, ‘누가 내 얘기에 관심 있겠어?’ 싶고. 그리고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아요. 그런데 쓰는 것은 어쨌든 저 혼자 쓰면 되고 나중에 후회할 일도 없어요. 부끄러울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쓸 수 있으니까 온갖 나쁜 생각, 비관적인 생각 그런 걸 쓴다고 해서 덜해질 것도, 더해질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저는 저를 괴롭히는 문제가 생기면 써요. 쓰다 보면 제가 생각했던 것 같지 않은 문장들이 나와요. 그렇게 답을 찾을 때도 있어요.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때는 이 감정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체를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을 글자로 풀어 쓰다 보면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구나’라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요. 그런 것과 비슷하게 소설도 쓰다 보면 제 안에 없던 건데, 제가 쓴 문장인데 뒤늦게 저를 놀라게 할 때가 있어요. 십대 태희의 일을 쓰면서도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작가님을 놀라게 한 문장들이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 “내가 나를 모욕하는 순간이 있다”, “중요한 말일수록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같은 문장들이 그랬어요. 문장을 쓴 다음에야 누군가의 핑계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나를 모욕하지 말자고 생각했고 혼잣말이 늘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말하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엄마, 아빠는 형편없어서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핑계가 필요하고, 네가 그 핑계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태희 엄마가 메모를 쓰고 지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났어요. 태희도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고 생각하지요. 

제가 누군가에게 무한 애정을 느끼고 이 사람 편이 되어야겠다 느낄 때가 상대의 나약함을 볼 때거든요. 상대의 강함이나 잘난 점이 아니고 한없이 외롭고 작고 많이 흔들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 보기 위해 애쓰는, 그런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볼 때 나는 이 사람 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 상대가 나한테 잘해줄 때가 아니고 상대의 약한 모습을 우연히 봤을 때. 그 장면도 엄마가 태희에게 이러저러해라고 시키거나 엄마의 강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엄마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잘난 어른도 아니고 강한 어른도 아니고, 굉장히 형편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너의 핑계를 대서라도 잘 살아 보고 싶어’라고 말할 때 태희는 소설에 쓴 것처럼 엄마의 핑계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어요. 평소에 제가 사람에게 흔들리는 장면이 들어간 거 같아요. 

소설을 읽으면서 어릴 때 모습 중 좋았던 점을 좀 더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작가님은 어떤 모습을 기억하고 싶으세요? 

잘못을 잘못이라고 아는 것?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내 잘못은 나만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전전긍긍한 거? 그래서 어떻게든 잘못을 만회하려고 애썼다는 거? 어른이 되고는 그냥 눈치 보며 지나려는 순간들이 있어요. 괜찮겠지 하면서. 그때 그 모습이 저를 부끄럽게 할 때가 있어요. 어릴 때 나는 잘못이 잘못인 줄 알고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인 줄 알았는데 어른 태희의 말처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없이 소심하고 눈치 보던 제가 그래도 제일 빛나던 때가 그때가 아니었을까? 그랬던 거 같아요. 그리고 혼자인 것을 좋아했던 것? 혼자였던 나에 대한 불만이나 그런 것 없이 혼자로도 잘 존재했던 면이 좋아요.

아이보다 어른이 많이 알고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까 작가님이 말씀하기도 했지만 어린 십대 태희가 성인 태희를 살립니다.

어른들이 더 많이 알긴 하죠. 많이 살았으니까. 사회생활도 많이 알고, 사회에서 지켜야 할 것도 더 많이 알죠. 그런데 저는 어린이들의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면을 보면서 배울 때가 있어요. 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소설을 보면 어린 태희가 부모가 싸울 때 야광볼을 보잖아요. 그리고 싸우는 어른들에게 “이거 야광”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럴 때가 있어요. 어른들이 어른들의 문제로 사는 것이 지치고 팍팍해서 막 싸울 때 어린아이가 와서 이거 야광이야 하면 저는 그 싸움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거 같아요. 우리가 도대체 왜 싸우고 있지? 그런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어린아이의 야광볼 같은 것을 우리가 어른으로서 잊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어요.



뭔가 꿈꾼다는 것이 무서웠어요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은 어떻게 생겼나요? 

대학교를 가고 친구가 없으니까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책을 읽고, 소설을 읽었어요. 읽다 보니 뭔가 쓰게 되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혼자서 소설을 썼어요. 내가 쓰는 것이 과연 소설일까, 남들도 소설로 볼까 궁금해서 응모했고요. 이런 수순이었어요. 소설을 많이 읽다 보니 쓰게 된 것 같아요. 현실의 나는 납작하고 작은데 소설 속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현실에서 하지 못 하는 말을 소설에서는 할 수 있고. 그렇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았어요. 그런데 소설이라는 것을 쓰면서도 제가 소설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은 안 했어요. 너무 큰 꿈이니까. 그리고 뭔가 꿈꾼다는 것이 무서우니까. 

꿈꾼다는 것이 왜 무서웠을까요? 

이루지 못하리라고 확신했으니까요. 열망하는 마음은 상처로 남을 테고 나는 나를 더 싫어하게 될 테니까. 내가 나에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기던 때가 있었어요. ‘내 가 하긴 뭘 해’라는 자조가 컸죠. 십대와 이십대는 거의 그런 시기인 것 같아요. 요즘도 마음이 약해지면 그 시절의 제가 나타납니다. 나를 쓸모 없고 하찮고 비열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내가 있고 그 영역이 커지면 저는 엉망진창이 돼요. 그래도 지금은 예전보다 나를 조금은 더 알고 예측할 수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자조하는 나와도 많이 친해졌으니까, 어릴 때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기보다는 대화하는 편이에요. 내면의 못 된 나와 대화하고 때로는 농담을 건넬 정도는 된 것 같아요.

10년 넘게 글을 쓰면서 글쓰기에 대한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셨나요?

더 좋아졌어요. 더 깊은 사랑에 빠졌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한편에 있어요. 자신감도 생겼어요. 쓸 수는 있다는 자신감. 500매, 600매, 700매 쓸 수는 있어요. 예전에는 그런 자신감이 없었거든요. 지금은 익숙해지다 보니까, 뭐든지 10년 이상 하면 익숙해지잖아요. 그런데 그냥 쓰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이런 마음이 직장 생활 10년 차의 고민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하면 하는데, 그냥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는 느낌이에요. 

요즘 작가님의 마음을 끌고 있는 주제는 어떤 건가요? 

일상적으로는 쓰레기를 최대한 만들지 않는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제가 배출하는 쓰레기의 양을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쓰레기야’ 같은 비관적이고도 쉬운 결말에는 가 닿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어요. 어린이와 늙은 사람에 대해서도 꾸준히 생각합니다. 어린이 또는 청소년이던 시절의 제 생각과 느낌을 되도록 늦게 잊고 싶어요. 그리고 늙음에 다가서는 저의 육체와 사고의 변화를 뚜렷하게 감각하고 싶습니다. 

성인 태희처럼 만약 십대 때의 선생님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쓸까요? 

“너는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도 될 거야. 그러니까 너무 빨리 포기하려고 애쓰지 마. 네 생각과 달리 처음 은 계속 나타날 거야.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는 순간이 올 거야. 이런 글이 우습겠지만 조금만 더 쓸게. 나는 여기에서 네 덕을 많이 보고 있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 그리고… 네가 너의 일기와 편지를 태우지 않으면 좋겠다.”



*최진영 

박범신, 공지영, 황현산 등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15회 한겨레문학상에 당선되었다.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 어딜 가도 내 집, 내 고향 같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소설은 쓰고 싶었다. 낮엔 일하고 밤엔 글 쓰다가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등단 2년 후부터 낮엔 글 쓰고 밤엔 푹 잤다. 다음 생엔 적은 돈으로도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 혹은 행성에 태어나고 싶다. 은근히 열정적으로, 다음 생의 우주를 치밀하게 준비 중이다.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내가 되는 꿈』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되는 꿈
내가 되는 꿈
최진영 저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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