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함정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4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그 사람의 키와 몸무게를 평균 냈더니, 키가 175cm였고 몸무게가 70kg이었다. 이 집단이 단체로 옷을 맞추는데, 평균 키와 평균 몸무게로 치수를 주문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평균만을 생각한다면 돈 주고 주문한 옷은 걸레 대용으로나 쓰일 게 뻔하다. 사회에도 평균의 함정은 존재한다. 평균은 그 집단의 전반적인 경향을 알려줄 수는 있겠지만, 인간 개개인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사람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듯, 책에도 책만의 개성이 존재한다. 개성을 표현하는 게 인간에게는 일차적으로 옷이나 머리 모양, 신발이라면 책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게 표지다. 그래서 책의 표지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표지를 잘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 디자인이다. 흔히 디자인을 본질에 딸린 부속품, 옵션 정도로 생각하지만 디자인은 제품의 본질과 뗄 수 없다. 인간의 몸과 정신을 분리할 수 없듯이. 앞서 평균의 함정, 이라는 명제로 돌아가자면, 디자인은 평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사물에 어울리는 외관을 입혀주기 때문이다.
『멋지게 실수하라』는 표지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적인 고민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은 닐 게이먼이 필라델피아 예술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을 담았다. 닐 게이먼은 전 세계 판타지 팬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작가다. 그는 연설에서 미래 창작자를 대상으로 포기하지 말고 도전할 것을 주문했다. 연설문답게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임헌우 디자이너에게 처음 온 제안은 번역이 아니라 디자인이었다. 책을 보면서 그는 이 책은 글자를 번역할 때도 디자인적인 고민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디자인과 함께 번역도 해보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멋지게 실수하라』가 탄생했다.
『멋지게 실수하라』는 읽고 보고 생각하는 책
기존의 책을 번역하는 게 아니라 새로 책을 만드는 수준으로 작업했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원서와 번역서가 다른가?
졸업식 연설문이라 구어체 표현이 많았다. 말을 글로 다듬는 작업을 했다. 날 게이먼의 의도를 살리되,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윤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내용과 어울리게 활자를 조율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책 앞에 보면 타이포그래피는 르나르 수열을 참고했다. 르나르 수열은 역동적이다. 이 책에서는 큰 글씨와 작은 글씨의 조화에 르나르 수열의 역동성을 활용했다. 이렇듯 글만 번역한 게 아니라 이미지도 함께 번역했다.
제목 및 표지도 원서와는 다소 다르게 나왔다.
원제는 Make Good Art다. Art가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고, 굳이 번역하자면 ‘좋은 작업 작업을 하세요’ 정도일 텐데 제목으로 다소 평범했다. 부제가 Fantastic Mistakes였는데, 부제를 활용해서 ‘멋지게 실수하라’라고 지었다. 원래 책 표지색이 에메랄드 그린에 가깝다. 책의 내용을 살리려면 충동적이고 자극적인 느낌의 핑크 계열이 좋겠더라.
제목도 그렇고, 닐 게이먼도 실수를 권한다. 인생에서 한 실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실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만화책을 따라 그렸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만화방에 가서 몰래 만화책에서 몇 장씩 뜯어 왔다. 안 걸릴 줄 알았는데, 결국 걸렸다. 그 당시가 1970년대인데, 2만 원 정도를 변상해줬다. 당시에는 큰돈이었다. 다음부터는 만화방도 출입금지였고, 부모님도 내게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했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린다는 데 이해나 공감이 없었으니까 부모님의 반대도 극심했다.
이 책에서 인상 깊은 가르침이 많은데, 역자에게는 어떤 부분이 기억에 남나?
산에 관한 비유. 목표를 산으로 생각하라, 산에서 멀어지면 똑바로 가지 않는 것이고 산에 가까워지면 맞는 방향이라고 저자가 말한다. 너무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쭉 해 보라, 이런 격려가 마음에 들었다. 젊었을 때는 잘 모른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호하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보인다. 작은 것이 모여서 나의 삶을 이루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젊었을 때는 조바심, 불안이 많다. 한편으로는 불안이 청춘의 특징이다. 이런 게 없으면 젊다고도 할 수 없고. 하고 싶은 것 중 많은 걸 버리고 선택해서 집중해야 하는 부담감이 젊은 시절에 크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청춘이 보면 좋겠다.
청춘에게 위안을 많이 줬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나라 정서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실수를 용인하는 사회가 아니니까. 그래도 앞으로는 실수를 용인하는 사회가 다가오지 않을까. 뭔가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실수를 많이 해 봐야 한 사람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이 책은 읽는 책이면서 보는 책이기도 하다. 여기에 바람이 있다면, 읽고 보고 생각하는 책이 됐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없애고 축 처졌을 때나 위로가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할 때 편안하게 펼치면 된다. 다만 편하게 보되, 공감하고 자극받기를 바란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말하다, 디자인이란?
임헌우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GDUSA 2012’와 세계 3대 디자인대회로 알려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2012’, ‘iF 디자인어워드 2013’에서 본상(Winner)을 받았다. 특히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와 ‘GDUSA’등 두 대회는 2년 연속 수상이다. 그는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면서도 계명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세계적인 디자인상을 많이 받았다. 상 받을 때 감회가 어떤가.
열심히 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제자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그 나이에도 상을 받을 수 있고 현역처럼 활동하는 게 부럽다고. 상 받은 것 자체보다도 나이가 들어도 도전할 수 있다는 걸 제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상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 안 된다, 이런 건 없지만 젊을 때 감각이 더 반짝이는 건 사실이다. 반면 오래 경험한 디자이너가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감각적이지는 않지만 좀 더 성숙하고 진중한 디자인이 가능하다.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디자인은 범위도 넓고 쓰임새도 광범위하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보수적이다. 부속품 정도로 여긴다. 디자인은 단순히 외형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생각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이런 과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냥 예쁘게 만들어 주세요, 할 때 디자이너로서 화가 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이전에는 경영컨설팅이 담당했던 분야를 외국에서는 디자인회사가 많이 맡는다.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게 디자인이기에 컨설팅을 못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디자인계의 작업 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다. 보통 디자인을 외주에 맡기면서, 공개입찰을 붙여 가격이 싼 업체를 선정할 때가 많기도 하다.
어려운 문제다. 디자인 수준은 많이 올라왔으나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직 미진하다. 우리나라는 압축성장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먹고 사는 문제, 경제적인 문제가 우선했고 나머지는 부차적 문제였다. 이러다 보니 문제점이 한꺼번에 여러 분야에서 터진다. 그중 한 가지가 디자인이다. 디자인 경영이 도입된 지는 오래나 디자인 수준이 선도적이라 볼 수 없다. 선진국에서 중요하다 하니,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왜 디자인이 중요한지, 디자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깊은 성찰과 고민이 없었다. A, B를 붙여서 싼값으로 공개 입찰하는 방식이 가장 나쁜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취하면 질적 저하가 당연하다. 디자인을 위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빨리, 싸게 갖고 오라고 하니 디자인 수준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교수가 되기 전에 회사생활도 하지 않았나. 과거와 비교하면 어떤가?
오히려 디자인이 들어온 초창기에 디자이너가 주도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디자이너도 희소했고. 지금은 디자이너가 많고 일반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외주에 맡기니 운신의 폭이 좁다. 디자인 담당자 의견, 팀장님 의견, 마케팅팀 의견, 사장님 의견, 기획팀 의견, 이런 식으로 여러 의견이 보태지니까 디자이너가 처음 한 것과 최종 결과물이 달라진다. 디자인은 창조적인 하나를 결정하면 나머지는 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많이 더해지고 첨가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여러 의견이 더해지고, 보태지면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없다. 디자이너를 전문가로 인정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디자이너가 문제 해결 전문가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디자인, 디자이너라는 환상을 품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아니겠나. 학생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하나.
학생에게 두 가지를 조언한다. 첫째, 디자인이 예쁘게 꾸미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소통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이 중요할 때가 있지만,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그들을 공감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건 디자이너에 관한 본질적인 조언이다. 둘째, 디자인의 현실이 이렇다고 인지시킨다. 많은 사람이 디자이너라는 낭만적이고 멋진 이름 때문에 학과를 선택하는데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말 좋아해서 해야지만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의 대상은 인간이고, 인간이 사는 세상이다. 세상을 이해하지 않고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없다. 낭만적인 눈으로만 보지 말고, 많이 경험해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번에 낸 책 제목이 ‘멋지게 실수하라’인데, 회사에서 또는 학교에서 후배나 학생이 실수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하다.
디자인 쪽에서는 인쇄 사고가 자주 난다. 잡을 수 있는 실수였다면 따끔하게 한소리 할 때도 있지만, 누구라고 고의로 실수를 저지르겠나.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지, 어쩌겠니, 이런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한다. 학생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실수는 피할 수 없다. 실수를 양적으로 많이 하다 보면 질적으로 올라간다. 실수를 많이 해 보고, 부딪쳐 봐야 생존할 수 있다. 프로가 아닐 때 실수를 많이 해 보라고 말한다.
작업할 때 음악을 항상 듣는다고 하더라. 어떤 음악을 듣나?
요즘은 아이슬란드 음악을 주로 듣는다. 시규어로스, 올라퍼 아르날즈. 최근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수록된 오브 몬스터스 앤 드 맨도 자주 듣는다. 항상 주변에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한다.
BMW(Bus Metro Walking)족을 고집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차가 있긴 한데 거의 안 탄다. 원래 걷기가 우리 인간에게 친근한 활동이다. 예전에는 인류의 일과 중 95%가 걷기였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하루에 20km, 30km씩 걷는다. 이렇게 걸으면 건강에도 좋고, 무엇보다 디자이너에게는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이 온다. 또 하나는 생태적인 차원인데,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면서 자동차를 타서 굳이 오염 물질을 배출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순수 국내파다. 유학을 고민하는 학생도 꽤 있을 텐데,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할까?
일부 나라가 우리보다 디자인 선진국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디자인을 해야 한다. 내가 정말 세계에 나가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겨루겠다, 한다면 외국에 나가는 게 꽤 괜찮은 방법이다. 유학이란 네트워크를 넓힌다는 의미도 있고. 그런데, 단순하게 디자인을 배우겠다는 생각이라면 굳이 유학을 갈 필요는 없다. 인터넷도 발달했고, 좋은 강의를 얼마든지 원격 강의로 들을 수 있으니까. 내가 어떤 목적을 갖고 유학을 갈 거냐를 판단해야 한다. 가장 안 좋은 사례가 유학가서 한국의 어떤 것, 예를 들면 한글의 조형성 등을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잘할 수 있는 분야인데, 굳이 외국에 나가서 공부해야 할까?
저자 임헌우가 읽는 책, 앞으로 쓸 책
임헌우 디자이너는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책이 나온 때가 2007년이다. 이후에 책을 낼 만도 하나 공저로 참여한 적은 있지만 오롯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쓴 게 없다. 오랜만에 임헌우 저자의 신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작년부터 저술한 책이 곧 나온다고 한다.
그간 집필 활동이 뜸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라』후속편을 내자고 제안 왔지만 글이 안 나왔다. 글을 써도 형식적인 글이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 쓸 마음이 들 때까지 놀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작년 초부터 글을 썼는데, 써진다는 느낌이 들더라. 그 과정에서 『멋지게 실수하라』가 나왔다. 책을 번역하고 디자인하면서 글 쓰는 데 많은 위로도 받았다.
방학 기간인데, 집필활동 외에는 어떻게 지내나.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주로 철학책이다. 철학자는 대부분 좋아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최근에는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 교수가 인상적이었다. 한병철 교수는 시대를 대표하는 질병이 있는데, 산업시대에는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질병인 흑사병이 그랬고 지금은 우울증이 대표적인 질병이라 말한다. 우울증이 널리 퍼진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사회다. 개인이 과도한 자기 계발로 스스로 소진된 사회, 이걸 피로사회라고 칭했다. 그리고 에바 일루즈라는 사회학자가 쓴 『사랑은 왜 아픈가』를 인상 깊게 읽고 있다. 보통, 사랑이라 하면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지만, 사회학의 관점에서 사랑을 사회적인 문제로 다룬다. 설득력 있는 책이다.
앞으로 나올 책은 어떤 책인가.
인문 에세이다. 제목은 『스티브를 버리세요』다. 여기서 스티브가 스티브 잡스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고정관념, 굳어진 생각, 낡은 생각들, 지배적인 시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에서 죽음은 삶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으로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치운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사회는 낡은 것, 고정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 이제는 좀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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