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적인 에세이를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가 통쾌한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어설픈 꾸밈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글. 거침없이 솔직한 글이 주는 쾌감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솔직함은 글을 업으로 삼지 않는 내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했다. 그의 첫 에세이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에는 빛나는 연주자 조진주가 아닌, 무대 아래 인간 조진주의 ‘혼란과 욕망’, 때때로 ‘옹졸해지는 마음’, ‘분노’와 같은 숨기고 싶은 감정들이 가감없이 드러나 있다. “누구보다 테크닉이 뛰어나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매일 “연습 좀 안 해도 원하는 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잘 나가는 누군가를 보며 불쑥 타오르는 질투심에 울고, 음악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조진주의 이야기는 일을 잘하고 싶어 고군분투하는 모든 직업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솔직함, 최소한의 예의였다
강력한 질투는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처럼 아프다. 그런데 이 불은 오로지 내 안의 것만 태운다. 나의 능력, 나의 가능성, 나의 미래. (56쪽)
읽는 내내 ‘정말 솔직한 에세이’라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어요. 독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제가 겪은 일이 모두의 사실은 아니잖아요. 음악계에 대해 제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그게 일반적인 사실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망설임없이 다 쓸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솔직하게 쓰는 건, 제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죠.
독자에 대한 예의요?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계신 분들에 대한 예의요. 저는 음악하는 사람이잖아요. 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제가 책을 펴내려면, 솔직하게 쓰는 것만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것마저 하지 못한다면 너무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작가님들에게 도리를 다하자는 마음으로 글을 쓰다 보니 솔직한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요.
수시로 찾아오는 열등감에 대해 쓴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에서 솔직함이 특히 더 돋보였어요.
제가 정말 싫어하는 제 모습이에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그런 감정이 계속 올라오는 걸요(웃음).
그럴 땐 어떻게 이겨내세요?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이 찾아올 때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떨어질 때거든요. 체력이든, 마음이든 어딘가가 소진된 거죠. 그래서 그냥 기다리면서 채우려고 노력해요. 또 앞으로 계속 찾아올 감정이라는 걸 인정하면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나는 원래 질투심이 많은 사람인 걸 어쩌나. 그냥 이대로 사는 수밖에’ 하고 인정해버리면 어느 순간 잊게 되더라고요(웃음).
“열심히만 하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를 조정하는 건 참 아픈 일이었다(55쪽)”는 문장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 하죠. 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요. 이미 반짝이는 사람으로 보이거든요.
커리어에는 중독성이 있잖아요. 내가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느낌이 들면 ‘그래, 나 잘했어. 정말 대단해’라고 생각하기 보다 ‘이 다음은 뭐지?’ 하고 스스로를 자꾸 채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좋지 않은 생각인 걸 알지만, 자꾸 그렇게 되죠. 아마 누구나 이런 마음을 느낄 거예요. 저 또한 여전히 어릴 때 동경했던 연주자, 지휘자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지금도 무던히 노력하는 중이니까요.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20대 때는 계속 성취하지 못하는 게 분하고 초조했어요. 지금은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지 어디까지 가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요. 클래식 분야의 커리어는 연예계와 비슷해요. 실력뿐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하고, 매력도 있어야 하고 여러 요소의 꼭지점이 맞아야 스파크가 튀거든요. 여기서 제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그저 좋은 연주를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에요. 좋은 자세로 충실히 연주에 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할 뿐이죠.
첫 페이지, 첫 문장에 밑줄을 그은 책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연습을 제대로 하려면 이름도 책임도 없는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5쪽)’는 문장이었죠.
그 문장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웃음). 큰 고민없이 툭 나왔는데 저도 마음에 들어요. 지금은 스케줄이 많아서 오롯이 연습만 할 수 있는 하루가 정말 귀해요. 그래서 연습에 집중해야 하는 날은 마음가짐이 좀 다르거든요. 저에게 특별한 그날의 감각을 언어로 묘사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온 문장이었어요.
처음에는 매거진 <객석>에 쓴 칼럼을 모으려던 작업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들었어요.
어린시절부터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책을 워낙 좋아해서, 내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는데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고 여러 출판사에서 연락을 주셨어요. 처음에는 지금껏 연재했던 칼럼들을 모아서 조금 수정하면 되겠다고 아주 심플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큰 고민 없이 한다고 했는데, 프롤로그를 쓰면서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기고했던 글과는 너무 결이 다른 글이 나왔거든요. 첫 꼭지를 쓰는 과정에서 ‘이 순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전부 다시 쓸 수밖에 없었죠(웃음). 자가격리를 많이 한 덕분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코로나19가 책 작업에는 도움이 되었군요(웃음).
네, 캐나다에 머물면서 쓴 글이 많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 하고 커피 마시고, 책 좀 읽다가 음악 들으면서 원고를 쓰곤 했는데, 그 감각이 너무 좋더라고요.
책을 쓰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상실의 단계’라는 글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험을 썼거든요. 그걸 쓰면서 ‘이 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해본 게 처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컸기 때문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가족과 친구들이 슬퍼할까봐 아예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였어요. 아마 글로 쓰지 않았다면 평생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1년쯤 되었는데 그 상실의 의미가 뭔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죠. 그 글을 쓸 때 많이 울었어요. 읽는 것조차 힘들어서 다 쓰고 최종 탈고까지 마친 뒤에는 한 번도 다시 읽지 않았어요.
음악이 삶에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음악을 사랑하는 법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워야 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무슨 뜻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때로 많은 아픔을 동반했다. (19쪽)
“나는 바이올린도, 음악도 선택하지 않았다. 아니,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39쪽)”고 했어요. 엄마의 선택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는 고백이 인상적이더라고요.
바이올린뿐 아니라, 사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죠(웃음).
그럼 바이올린에 재미를 느낀 건 언제부터였어요?
처음 자의로 열심히 바이올린을 했던 건, 16살쯤이에요. 아스펜국제음악제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음악을 배우고, 매년 같은 국제 콩쿠르에 나갔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그러면서 엄마와 사이가 많이 틀어졌죠. 16세가 되면 혼자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을 할 수가 있는데요. 당시만 해도 엄마는 저를 혼자 놔두는 게 불안해서 함께 갈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싸움이 잦아지니까 ‘이제 너를 위해 희생하는 건 더 이상 못 하겠다’면서 저를 혼자 아스펜에 보내셨어요. 그리고 그 해에 우승을 했죠. 콩쿠르에 나가기 위해 연습을 하면서 처음으로 음악에 대한 쾌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어떤 쾌감이었나요?
아마 태어나서 바이올린을 제일 열심히 한 순간이었을 거예요. 어린 마음에, 엄마와 함께 있을 때 제가 좋은 성취를 하면 그 공이 다 엄마한테 돌아갈까봐 분했던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온종일 연주 연습만 했어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제 자의로 연습에 임했고, 곡을 완벽히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동안 음악적으로 들리지 않았던 게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음악이 가진 건축성, 연결성, 서사의 매력을 맛보았던 거죠. 그때 처음으로 ‘와 이거 되게 재미있구나. 나에게 잘 맞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음악, 나아가 내 직업을 사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17쪽)”고요.
음악을 평생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건 20대 중반쯤 부터였어요. 그전까지는 ‘연주를 하고, 음악을 만들어가는 게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아무리 고민해도 도무지 답을 못 찾겠더라고요. 한동안 방황을 했었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쓴 꼭지 ‘상실의 단계’에 그 고민이 가장 많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삶과 죽음에 정말 필요한 게 음악이 아니라면, 나는 이제부터 뭘 해야 하지.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소멸되고 나 혼자 남았는데 이제 나는 누가 돼야 하지. 뭘로 살아가야 하지. 질문은 많았지만 답은 없었다(167쪽)”고요.
어느 한 순간은 아니었고,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아요. 특히 독립해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 생계를 꾸려갈 때 많은 걸 느꼈죠. 내가 하는 일을 음악이나 연주, 악기 등으로 좁게 생각하지 않고 ‘문화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문화예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니 너무 비참할 것 같은 거예요. 어쩌면 이런 슬픔을 위로하는 게 문화예술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면서 서서히 의미를 찾게 되었어요.
방황했던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품고 있는 후배를 만난다면,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제 경험은 그들의 경험과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단언하긴 어려운데요. “언젠가는 찾게 되겠지”라고 말해줄 것 같아요. 만약 이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를 깨닫게 될 거라고요. 만약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다면 그만둬야죠. 21세기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의미도 없이 바이올린만 붙잡고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웃음).
어린시절, 경쟁과 폭력의 환경에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도 공감하며 읽었어요. “우리는 너무 어릴 때 실패를 경험했고 모두 함께 패배자가 됐다(33쪽)”고 했죠.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는데, 올바른 스승의 역할과 태도에 대해 생각이 많을 것 같아요.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인데요. 혹평은 연주자에게 분명 도움이 돼요. 다만 그게 담당선생님의 역할은 아니죠. 스승이라면, 아이가 프로의 세계에서 받고 온 혹평을 어떻게 하면 인생의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지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며칠 전 어느 자리에서 “다들 좋은 소리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건 옳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럼 평론가가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비평을 하는 게 평론가의 직업인데 저희가 그걸 건드리면 안 되죠. 다만 나를 믿고, 인생을 맡긴 아이에게 스승으로서 혹평을 하는 건 올바른 일이 아니에요.
아마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실 텐데요. 음악계에서 일하는 저희가 받는 비평의 양은, 보통 회사에서 받는 피드백의 100배 이상이 될 거예요. 저희는 매일 평가에 노출된 삶을 살아요. 그래서 강해야 하죠. 다양한 평가들을 견딜 수 있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만들어주는 게 스승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혹평도 긍정적인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고, 만약 어떤 평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면 가차없이 무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저의 역할이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참 어려워요.
연주와 교육 중 무엇이 더 어렵게 느껴지나요?
서로 다르게 어려워요. 연주는 너무 떨리고, 압박감이 진짜 심해요. 저는 연주를 앞두고 있으면 화장실을 스무 번씩 갈 때도 있어요. 동시에 한편으로는 ‘나 혼자 창피한 일이니까, 그냥 한번 창피하고 말자. 한 시간만 참고 내려오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런데 가르치는 건 아이의 인생이 걸린 일이잖아요. 특히 선생님의 역할이 그 아이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척 조심스럽죠.
그래서 제가 쓸 수 있는 한 가장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쏟으려고 노력해요. 꼭 레슨이 아니라, 그 아이의 음악이 가야할 방향, 나와 함께하는 5~6년의 시간이 이 아이에게 어떤 힘으로 작용할 것인지 등을 충분히 고민하죠. 그게 모든 걸 아우른다고 생각해요. 그 마음가짐만 있으면, 다른 태도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 같아요.
고단한 얼굴을 가지고 싶다
이런 말을 자꾸 듣다 보면 그 말을 믿기 시작한다. 나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슬금슬금 스며들기 시작하면 슬프고 서럽다. 그리고 분노한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 이 모든 분노를 녹여 창작하는 것이다. (141쪽)
동양인 여성 연주자로서 수많은 편견에 시달리고, 무례한 평가를 받기도 하잖아요. 거기에 전복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모습이 멋지더라고요. ”성공의 어머니는 아마 분노일 것이다(142쪽)”라고 썼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 투지가 막 생겨요. 분하잖아요. 그 사람이 틀렸는데 왜 내가 움츠러들어야 하죠?(웃음) 내가 틀린 게 아니라, 비열한 말을 하는 네가 틀렸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요. 그저 상대에게 실망스러울 뿐이죠. 특히 대내외적으로 제가 존경했던 사람이 편견에 휩싸인 발언이나 무례한 평을 하는 걸 볼 땐 너무 실망스러워서 긴 시간 동안 우울해요.
음악계에 자리한 성차별에 대해서도 종종 목소리를 내시잖아요. 사회적으로 들려오는 평가에 대한 부담은 없나요?
부담은 없고, 민망해요(웃음). 제가 무슨 여성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 한마디 할 뿐이니까요. 다만 이런 생각을 자주 해요. 저는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계신 중년 여성들을 보면 그냥 다 좋아요. 오래 일을 해 온 여성들의 얼굴에서 나오는 고단함이 있어요. 여자 얼굴에 고생한 티가 난다는 걸 보통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만큼 전투적이고 강하게 살아왔다는 뜻이거든요. 저도 그 고단한 얼굴을 가지고 싶어요. 우리 모두 다같이 고단했으면 좋겠어요(웃음).
바이올린을 시작한 건 나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에는 수많은 자신의 선택이 있었을 텐데요. 어떤 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맨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만, 그걸 뛰어 넘어서 ‘이게 아름다운 선택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이걸 수락했을 때 다른 누군가를 짓밟게 되지 않나, 세상에 피해를 주지 않나, 내 인생 전반에서 아름다울 수 있는 일인가 등이요.
학생들에게 감각적 연주를 가르치고, 매년 여름 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비영리단체 ‘앙코르 챔버 음악 캠프(ENCORE Chamber Music Institute)’를 설립한 것도 그 아름다운 선택의 일환이겠네요.
어쩌다보니 하게 되었어요(웃음).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 업계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음악을 가르치고 콘서트를 여는 게 지금과 같은 방식밖에 없나?’라는 의문에서 시작했어요. 막상 해보니 업계에 충분한 지원이 없고, 음악가들도 콘텐츠 개발에 소홀했다는 등 수많은 이면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연주자가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다양한 형식의 공연을 해보고 싶어요. 힘들긴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앞으로 하고 싶은 바가 명확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무얼 하고 싶은가요?
여러 방면에서 자극이 많은 문화예술 이벤트를 만들고 싶어요. 단순히 “이 작곡가가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었으니 우리 음악회 보러 오세요”라고 하는 건 부족해요. 그 곡이 연주를 하는 우리에게는 충분한 의미가 있지만, 관객에게는 그렇지 않잖아요. 작곡가의 명성에 기대지 말고, 연주자로서 곡을 더 빛나게 만들 수 있는 나의 책임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더불어 어떻게 하면 재미와 의미를 다 잡은 공연을 만들 수 있을지, 문화적 콘텐츠로서의 연주는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죠.
클래식은 어렵다는 생각에 대한 아쉬움도 있나요?
그렇진 않아요. 클래식은 어려운 게 맞아요(웃음). 저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국악이 어렵거든요. 뭐든 순서가 있는 것 같아요. 저처럼 국악에 관심 없던 사람이 ‘이날치밴드’의 공연을 본 뒤 관심을 갖고 민요를 찾아 들어보게 되는 것처럼 어떤 장르든 레벨이 있는 거죠. 모든 전문 분야의 심화 과정은 원래 어려워요. 저는 클래식이 쉽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클래식에 마음을 열게 되는 계기를 만나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그럴 기회를 제공하는 게 저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죠. 관객들에게 “클래식은 어렵지 않으니까 들어주세요”라고 하는 건 치사한 일이에요. 말도 안 되고요.
유튜브를 하고, 글도 쓰는 등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거침없이 도전하는 편이죠?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기는 것 같아요. 저는 겁없이 저질러요. 재미있을 것 같으면 일단 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죠. ‘내가 이걸 왜 했지?’하고(웃음). 일단 시작했으니 끝은 내야 하니까, “와 미쳤다. 미쳤어”하면서 끝마치죠. 그런데 막상 또 새로운 걸 시작할 땐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책을 쓸 때도 그랬나요?
엄청나게 그랬죠(웃음). 계약금 돌려주고 그만 둘까? 칼럼이나 몇 개 쓰고 말 걸. 오늘은 꼭 전화를 해야지. 이런 생각 엄청했어요(웃음). 시간은 없는데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니까 힘들더라고요. 또 글쓰기는 제 업이 아니잖아요. 익숙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한 편을 쓰려면 엄청난 집중을 해야 해요. 온전히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아서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책에 실린 글들을 쓴 건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쓴 것 같아요(웃음). 제 이야기가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겠지만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만 17세에 이례적으로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 201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1위와 오케스트라상, 2011년 윤이상 국제 콩쿠르 2위, 2012년 앨리스 숀펠트 국제콩쿠르 1위 등 연달아 국제대회에서 우승했다. 지난 2014년에는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굿바이 콩쿠르”를 선언하고 연주, 창작,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비영리단체 앙코르 챔버 뮤직 캠프를 설립했고, 캐나다 맥길대학교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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