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가요?, 직장 상사에게 실망했어요, 거절을 못 하겠어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일상이 불편해졌어요.” 이 주제들에 전혀 해당이 안 되는 대한민국 여성이 있을까?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쓴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은 여자라서 겪어야 하는 일들에 마음이 자주 지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12년간 1천여 명의 내담자를 만나온 저자는 진료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했고 열두 가지의 고민을 토대로 여성들의 마음속 근원을 파헤친다.
“자신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귀찮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진정으로 불행하게 하거나 나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246쪽)”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묻는 일
제목을 보고 책이 궁금해졌다. 굉장히 큰 주제라고 생각했다.
제목이 정해지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아무래도 20,30대 여성들이 주로 하는 고민을 주제로 글을 썼기 때문에 아우를 수 있는 제목을 선택했다.
여성학을 공부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정신과의사로 일하면서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상처에 사회 환경 및 젠더 이슈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연은 다 제각각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다. 페미니즘 이슈를 직접 갖고 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기처럼 페미니즘 이슈가 베어 있었다. 성역할을 강요 받는 데서 느끼는 불편함이 남성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뭔가가 있었다. 진료실에 찾아오는 분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세계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고통이 발생하는지, 그 고통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색해야 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여성학을 공부했다.
진료에도 영향을 미쳤나?
물론이다. 새로운 생각들이 생긴 건 아니지만, 비언어적인 형태로 막혀 있었던 부분이 깨끗하게 설명됐다. 이를 테면 대상화, 감정노동, 교차성, 가부장적 배당금 등의 개념들이다. 정신의학(특히 정신분석)과 여성학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 사회에서 미덕으로 여기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왜 그런 마음이 들고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다.
첫 번째로 다룬 주제가 ‘결혼’이다. 결혼을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인생의 과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려면 ‘세분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상은 보통 개인이 할 일들을 패키지로 제안하지만 그것을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결혼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안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들어 있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고 싫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 누군가 함께 사는 것이 싫은 건지, 되돌리기 어려운 계약을 하기 싫은 건지, 책임이 늘어나는 것이 싫은지, 누군가가 내게 의존하는 것이 싫은지, 결혼한 여성에게 기대하는 성 역할이 싫은 건지. 결혼이라는 단어를 잘게 나눠 따로따로 생각하면 내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들이 선명해진다. 과거에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제는 취할 것은 취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있다.
주변으로부터 지나친 조언을 들어야 할 때, 곤혹스럽기도 하다.
자신은 결혼을 했으면서 ‘결혼하면 끝장이야’라는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책임져줄 수 없으면서 ‘결혼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건 그들의 생각이 아니고 나의 선택이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사람도 내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결국 모든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는 것, 이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여성들은 관계로부터 얻는 스트레스가 많다. 특히 갈등을 많이 두려워하는 경우,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사실 갈등을 줄이는 능력, 즉 다른 이의 마음을 짐작하는 능력과 인내심은 아무나 갖추기 어려운 귀한 역량이다. 이를 잘 활용하면 자신에게 소중한 자원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고 무조건 참으면 겉으로는 갈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등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거절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이 거절을 편안하게 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절하고 거절을 받을 때, 여기에 수반되는 긴장감, 서운한 감정은 반드시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이 데미지를 없애는 게 아니라 안전하게 데미지를 갖고 가는 게 중요하다. 원초적으로 버림받는 것에 관한 공포, 소멸되는 공포가 큰 사람들에게는 안심시켜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게 좋다. 그리고 이 상황에 처한 것은 내 탓이 아니라는 것, 내 탓은 아니지만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언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거절을 한다고 이 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괜찮다.”(92쪽)고 했다.
어떤 선택이든 다 거기서 거기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삶은 계속되고, 내 앞에는 또 다른 새로운 기회들이 주어진다는 의미다. 선택의 결과물이 처참한 크기로 삶을 좌지우지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 믿음을 키워간다면 신경증적 갈등으로 겪는 고통을 줄 일 수 있다. 그리고 속상한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을 미워하기보다는 일단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것이 좋다. 그 이후에 나 자신과 긴밀히 대화하고 대책을 의논하는 것이 현명하다.
열한 번째 주제는 ‘남자친구의 질투’다. 먼저 직장인이 된 여자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남자의 연애. 의존과 열등감 사이에서 관계가 틀어질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볼 문제는 무엇일까?
나의 기분, 마음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 연애에서의 나 자신이 마음에 드는가?를 떠올려봐야 한다. 상대가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그 사람에게 발생한 감정이다. 나의 성취가 상대에게 미안한 일이 될 필요는 없다. 또한 건강한 갈등을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 갈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이 잘 맞는지가 연인 관계를 결정한다. 겉으로 갈등이 없다는 건, 어쩌면 한쪽이 무언가를 감내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관계에서 상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조마조마해하거나, 떠날까 봐 자신의 진심을 숨겨야 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다. 결코 오래갈 수 없다. 관계에서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보다는 “나를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가 전제여야 한다.
가혹한 가족 안에서 자랐지만, 양육자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여성들도 많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하는 것이 현명할까?
일단 죄책감을 느끼는 건, 실제 죄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죄책감은 명시적인 명령이나 억압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면서 은밀하게 사람을 조종하기 때문에, 이 감정을 잘 살펴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죄책감을 유발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는 갖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이 우리를 움직이게 그냥 둔다면, 하지 않아도 되는 희생과 불필요한 자기 처벌, 그리고 그것에 대한 새로운 분노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자신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진정으로 불행하게 하거나 나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해주는 것이 좋다. 이 과정이 어렵고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면 이 불편함을 중요한 주제로 삼아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또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정 환경에 놓인 경우라면, 가족에게 받는 대우와 자신의 가치를 분리하기 위해 안전을 확보하고, 심리적, 경제적, 관계적 자원을 키울 필요가 있다.
덜 예민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내가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을 일부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감정이 부끄럽고 별로이고 뭔가 찝찝하고 불편하고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는 훈련을 하면 좋다. 뭔가 오글거리는 이 감정, 2차적으로 따라오는 내 감정들을 바라봐야지 원인을 알 수 있다. 요령은 없다. 상담을 받는 일이 아닌 이상, 나만의 시간을 가진 상태에서 고요하게 내 감정을 써보거나 정리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중복돼서 찾아오는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타인과 비교를 많이 하는 사람의 경우, 행복감을 누리기가 어렵다.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만 중요한 건, 내 안의 경쟁, 질투심 같은 감정을 제대로 봐주고 인정해주는 일이다. 비교하는 마음이 들어오면 누구나 속상하다. 하지만 이 부정적인 마음들을 덜 미워하는 사람은 좀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을 때, 가장 좋은 방식이 있다면?
상대의 상황에 깊이 공감하되, 뭔가를 더하려고는 하지 않는 것.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충분히 공감해주고 ‘네가 힘들 때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사인만 줘도 상대는 큰 위로를 느낀다. 지나친 감정이입과 동일시는 진정한 공감과 다르다. 상대가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몫이 있는데, 그 몫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자기 자신을 너무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에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아서 의아했다. 많은 심리서가 자존감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부러 안 쓰려고 노력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너무 고정관념으로 익숙해진 나머지 그 이상의 생각으로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더라. 학술서가 아니기 때문에 꼭 써야 할 경우에는 자신감으로 대체했다.
인생 신조가 있나?
“최선을 희망하되 최악을 대비하라”는 말을 좋아한다. 마음껏 소망하되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책이 굉장히 잘되기를 희망하는데 또 그렇지 않아도 하나의 에피소드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받기가 두려워서 소망을 안 하는 건, 즐거운 삶이 아닌 것 같다. ‘이번 일이 잘되지 않으면 끝장이야’ 같은 마음을 갖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자기 자신을 너무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의심하는 역량을 자신에 대해서 순수하게 호기심을 갖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약간 틀면 어떨까 싶다. 의심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의심을 물음표로 바꿔서 자신에게 던지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부속 의료원에서 수련했다. 12년간 1천여 명이 넘는 내담자를 만났고, 여성들이 지닌 다양한 상처에 사회 환경 및 젠더 이슈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깨달았다. 이 문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여성학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에서 석사를 수료했다. 현재 광화문에 있는 병원에서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위주로 진료하면서, 내담자들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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