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천선란은 늘 성실하게 달리고 있었다. 사이보그와 동물, 인간의 공존을 그렸던 『천 개의 파랑』, 외로움 끝에 몰린 자를 비추는 뱀파이어 로맨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거쳐, 천선란의 시선은 ‘식물’과 ‘외계인’을 향한다. 신작 장편소설 『나인』은 식물의 소리를 듣는 외계인 ‘나인’의 이야기다. 그는 한 아이가 실종된 사건을 외면하지 못하고 기꺼이 피해자의 곁에 선다. 왜 그렇게까지 애쓰느냐는 질문은 천선란의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타고난 선의로 오로지 살리는 일을 향해 달려나간다.
우리 주변에 외계인이 있다면
인스타그램에 ‘장편소설 하나를 완성하는 건 아주 길게 떠났던 여행을 끝내는 기분’이라 썼어요.이번에도 인물들과 헤어지기 싫어 마지막을 빠르게 쓰지 못했다고요.
맞아요. 몇 달 동안 등장인물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는데, 헤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사이보그, 뱀파이어에 이어 이번엔 외계인 이야기예요.
단편 『어떤 물질의 사랑』이 외계인 이야기였잖아요. 그때부터 외계인 이야기를 확장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이 아니라, 영화 <E.T.>처럼 우리 속에 섞여 살면서 친구도 될 수 있는 존재. 흔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보면 “쟤 참 특이해” 하고 말하잖아요.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아예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보고 싶었죠.
‘작가의 말’에 썼죠. ‘신호등 초록불이 삼 초 정도 남았는데 뛰지 않고 걸음을 멈추는 사람을 볼 때도(중략) 너무도 당연했던 선의를 잃은 인간들 속에서 그 원초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문장을 떠올린 이유는 제가 여행할 때만큼은 작은 신호도 잘 지키기 때문이에요.(웃음) 낯선 나라에서는 무서우니까 무단 횡단을 못 하잖아요. 누가 보지 않더라도 질서를 지키고 아무 이유 없이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어쩌면 낯선 곳에서 온 존재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인공 ‘나인’도 작은 것도 못 지나치는 캐릭터가 된 것 같아요.
‘나인’은 손톱 사이에 싹이 자라고, 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외계인이에요. 그 능력을 써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주변을 살리는 길을 택하죠.
외계인에게 가장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능력을 주려고 했어요.(웃음) 그런 인물이 여러 사건에 휘말리지만, 결국 선의를 갖고 이겨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나인’을 떠올리니 주변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정해지더라고요.
모두에게 존재할 이유를 주고 싶다
『천 개의 파랑』에도 등장인물들의 연대가 돋보였잖아요. 이번 『나인』에서도 ‘나인’을 돕는 두 친구 현재와 미래가 등장해요. ‘나인’ 혼자 헤쳐나가는 스토리를 생각해보진 않았나요?
그럼 재미없지 않을까요?(웃음) 주인공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저는 늘 주변 사람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일반적인 혈연관계와 다른 인물들이 나오는 것도 천선란 소설의 매력이에요. 이번 『나인』에서도 이모이지만 ‘지모’라고 불리는 인물이 등장하죠.
오히려 소설의 인물이 다 비슷해지는 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지모’를 만들 땐, 뭐 어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가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한 역사가 훨씬 더 길었잖아요. ‘엄마’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모’는 조연이 아니라 언제든 주연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소설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혼자 생각했던 ‘지모’의 로맨스도 있었고요.(웃음)
‘나인’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외계인 ‘승택’의 존재도 특이했어요. 사건 전개상 꼭 필요한 인물은 아니니까요.
마지막까지 ‘승택’을 뺄까 말까 고민했어요. 소설 구성면에서는 그게 더 완벽하니까요. 그런데 문득 필요 없다고 없애는 게 맞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건, 누구나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열심히 만든 캐릭터를 내 손으로 지워버리는 게 이상한 거죠. 승택이 소설 속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꿈틀거리고 있으니 그런 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살린 캐릭터예요.
‘나인’이 맞닥뜨리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학교폭력이에요. 가해자 학생이 나오지만, 소설은 아이의 성장 환경과 어른들의 이기심을 보여주며 폭력이 저질러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집중해요.
학교폭력은 가해자 학생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 무수히 많은 어른들의 방관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폭력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가해자 학생의 삶도 있었을 거고요. 그래서 학교폭력 사건을 접하면,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이런 일이 반복되는 사회를 생각하게 돼요. 소설을 쓸 때만큼은 가해자 아이에게 잘못을 돌아볼 기회를 주려고 했어요. 진정한 벌은 자신의 죄책감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작가님의 소설에는 늘 독자가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있는 인물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모든 인물에게 자기 서사가 있고, 이야기의 초점이 여러 인물로 이동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맞아요. 누군가가 제 소설을 좋아해 준다면, 그 이유가 등장인물을 너무 사랑해서였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 완전한 악역을 그린 적은 없지만, 저는 악역에게도 개인의 이야기를 줄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모든 인물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소설이니까요. 인물 하나하나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싶어요.
소설을 쓸 때만큼은 어떤 장면이 눈앞에 보일 정도로 그 세계에 몰두한다고 한 적이 있어요. 이번 소설은 어땠나요? ‘나인’의 힘으로 땅이 파랗게 빛나는 장면도 강렬했는데요.
한창 소설을 쓸 때는 식물이 파랗게 빛나는 이미지를 아름답게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그런데 막상 다 쓰고 나니, 가해자 학생이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사과하는 장면이 마음에 남더라고요. 모든 장면을 통틀어 가장 울컥하면서 쓴 대목이에요. 진심으로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온 마음을 다해 사과하는 장면을 현실에서 보고 싶었나 봐요.
소설에 맞는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쓴다고요. 이번 『나인』을 쓸 때는 어땠나요?
‘소녀’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이 힘차게 부르는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처음 소재를 잡을 때는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 유아의 ‘숲의 아이’를 들었고, 아이유 ‘에잇’과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도 많이 들었죠.
열심히 달려나가는 리듬으로
‘천선란’으로 살아가는 삶도 여러 단계를 거쳐 변화하고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일을 병행하며 작가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기를 거쳐, 지금의 ‘천선란’은 어떤 단계인 것 같나요?
언젠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완벽한 소설을 하나 써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늘 있어요. 아직 제게소설가란 아주 오랜 시간 한 문장 한 문장 꿰어나가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거든요. 물론 언제 그 시기가 올지는 모르겠어요. 지금은 열심히 달려 나가는 인물들이 좋고, 작가인 저도 그런 리듬으로 쓰는 것 같아요. 일단 쓰고 싶은 게 많으니 쓸 수 있을 때까지 써보고, 다음 단계를 생각하려고 해요.
이야기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단편 「서프 비트」를 메가박스 사운드 무비로 선보이기도 했고, SF 신인 작가를 멘토링 하여 창작을 돕는 아작 출판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매체에 따라 이야기의 재미가 달라지니까, 여러 시도를 해보고 있어요. 드라마 제작사에 기획안을 보내거나, 협업을 해보기도 하고요. 현재 「서프 비트」는 웹툰과 드라마화를 진행 중이에요.
(편집자 주: 인터뷰가 끝난 후, '2035 SF 미스터리'의 수록작 「옥수수밭과 형」이 드라마 계약을 체결했다)
최근 친구인 윤혜은 작가, 윤소진 편집자와 팟캐스트 ‘일기털기’를 시작했어요. 서로의 밀린 일기를 읽고 수다를 떠는 프로젝트인데요.
2년 정도 바쁘게 소설만 쓰고 살았어요. 돌아보면 제 생활에 소설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한창 소설을 쓸 때는 슬럼프가 안 오다가, 멈추면 한꺼번에 밀려오더라고요. 쉴 때는 쉬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이 두려워지는 거죠. 그래서 매일 차분히 스스로를 다지는 연습을 하려고 친구들과 기획했어요. 녹음할 때는 친구들과 수다 떠는 기분이에요.
요즘 글쓰기 외에 푹 빠진 것이 있다면요?
배우 덕질!(웃음) 한번 꽂힌 배우가 있으면 그분이 출연한 작품을 다 봐요. 최근에는 이도현 배우가 좋아져서 작품을 다 보고 구교환 배우 덕질로 넘어갔거든요. 배우를 워낙 좋아해서 소설 인물을 구상할 때도 가상 캐스팅을 하는 편이에요. ‘나인’은 김태리와 김혜윤 배우를, ‘지모’는 문소리 배우를 떠올리면서 썼어요.
소재를 다양하게 바꿔가며 소설을 쓰고 있어요. 외계인 다음은 무엇인가요?
늑대인간이 나오는 SF소설을 준비하고 있어요. 판타지의 소재를 모두 써보는 게 목표예요. 가능할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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