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동료 문인으로부터 미투 가해자로 지목 받은 50대 남자 ‘지성’. 잘 나가는 문학평론가에서 범죄자로 일순간 몰락하지만, 문제가 된 ‘그날 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사라진 기억, 피해자의 죽음으로 자신조차 진실을 알 수 없게 된 상황. 저마다의 진실을 내세우며 자신의 옮음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 ‘진실’은 희미해질 뿐이다.
소설가 정아은의 신작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옳은 것과 그른 것,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들의 희미한 경계를 보여주는 연작 소설이다. 미투 가해자가 된 문학평론가 ‘지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와 ‘지성’과 함께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 여자이자 딸 둘을 둔 40대 주부 ‘화이’의 이야기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이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면서 독립된 채로 교차한다.
미투 가해자의 이야기를 쓴 이유
독립된 두 개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에요. 이런 형식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같은 상황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때가 많잖아요. 이런 현상이 항상 흥미로웠고,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는 모습을 통해서 인물 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둘 중에 한 권만 읽어도 괜찮다’는 말도 하셨더라고요. 정말 한 권만 읽겠다는 독자가 있다면 둘 중 더 추천하고 싶은 게 있나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한 권만 읽는다면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미투’ 가해자로 지목받은 50대 남성 ‘지성’의 이야기예요. 책을 읽으면서 ‘미투’에 대한 작가님의 복잡한 심경이 엿보였는데요. ‘미투 운동’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성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어 온 여성으로서 미투 운동을 지지했고, 반가웠죠. 여성들이 만든 ‘자치 법정’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법, 사회, 문화적인 영역에서 외면한 성폭력, 성차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여성들이 직접 행동에 나선 거니까요.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아쉽기도 했는데요. 미투 운동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더 정교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정교해진다는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미투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를 인정하고, 개선하자는 거죠. 미투 가해자를 단죄하고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고가 인정되면 사죄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의를 이룬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구체를 놓치거나 작은 희생을 못 본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미투 운동이 남성들이 주도한 다른 사회 운동들과 다를 게 없잖아요. 미투 운동에도 손해고요. 미투 운동을 없애버리고 싶은 사람한테 빌미를 줄 수 있거든요.
미투 정국에서 막연한 공포를 느끼는 남성들이 많았죠.
미투 운동이 과거에는 쉬쉬했던, 그래서 일상적으로 이뤄졌던 성폭력 문제가 ‘범죄’라는 걸 알렸잖아요. 그 문제로 인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목격했고요.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한 게 미투 운동의 성과이기도 한데요. 한편으로는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요. 무고함이 밝혀졌는데도 피해자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으니까 ‘나도 무고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가 생기는 거죠. 남성들이 미투 운동에 동참할 수 있게 하려면 불편하더라도 더 정교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성’은 저명한 문학평론가예요. 예전에 앞으로 쓸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유명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요. 왜 유명인이길 바랐나요?
인간의 모순이나 이중성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순과 이중성을 가지지만,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 특히 지식인들에게서 더 교묘하게 굴절되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이름난 사람들은 자신의 외적 자아를 확장하기 쉽잖아요. 외적 자아가 커지면 상대적으로 내적 자아는 왜소해지고, 지나치게 왜소해진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소외시키기도 하고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을 지우는 방식으로요.
‘지성’도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완전히 잊고 있다가 나중에 떠올리잖아요. 읽으면서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지? 싶어서 놀랐는데 생각해 보니 현실에 그런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웃음)
아주 많죠. (웃음) 힘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을 지우는 게 쉬운 것 같아요. 본인만 지워버리면 끝이거든요. 일종의 ‘자기방어’라고 생각하는데요. 얼마 전에 전 대통령 한 분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분을 보면서 항상 궁금했거든요. ‘정말 본인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걸까?’하고요. 늘 일관되게 답하는 걸 보면서 정말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과오를 진짜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지성’도 마찬가지죠. 내면 깊은 곳에 본인이 했던 짓이 부끄럽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사실은 자기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 페미니즘을 외칠 정도로 지적이고 선량한, 대의를 외치는 문학평론가로서의 모습을 훼손하니까 지워버린 거죠.
‘미투’라는 소재 외에도 실제를 떠올리게 하는 사실적인 요소가 많아요. ‘문학평론가’나 ‘시인’이라는 직업도 그렇고, 미투 정국에서 서로 의견 차이로 인해 ‘페절(페이스북 절교)’을 하는 상황처럼요. 독자들이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부담은 없었나요?
어떤 소설을 쓰든지 그런 부담은 있는 것 같아요. 내 주변 사람을 떠올리게 할까 봐 걱정되죠. ‘지성’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특정인을 떠올리지 않도록 여러 남성 지식인들의 모습을 섞었어요. 인물을 만들기 위해 문학계 전반이나 남자 평론가들이 처한 상황을 잘 아는 분들을 취재했고요.
혼란스러움을 느끼길 바랐어요
‘전소현’이라는 인물에 마음이 쓰였는데요. 이유를 생각해 보니 피해자 입장을 볼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미투’가 터졌을 때 정작 당사자인 피해자는 지워진다고 느낄 때가 많았거든요. 피해자의 마음이 어떤지, 용서할 의향이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거예요. 가해자를 단죄하는 목소리나 옹호하는 목소리는 큰데 피해자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으니까요.
정확히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저 역시 당사자가 지워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고, 모두가 함께 돌을 던지는 방식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전소현’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가해자 편이냐, 피해자 편이냐’는 문제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속죄가 무엇이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질문해 보고 싶었어요. 미투가 터졌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가해자는 누구한테 용서받아야 하고 어떻게 진정으로 속죄할 수 있는지를요.
‘스포’일 수 있어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편집자 ‘전소현’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요.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끝까지 읽으신다면 단순히 가해자를 편드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지성’과 ‘화이’의 관계를 보면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굳이 표현하자면 아주 모호하고 희미한 사랑이랄까요.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아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린 남자 ‘지성’과, 기혼 유자녀로서 미투도 할 수 없는 여성인 ‘화이’는 각자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찬 사람이들이에요. 그래서 사랑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만 하죠. 서로에게 무신경하고, 방어적으로 굴기도 하고요. 자신의 모든 걸 던지는 사랑보다 ‘지성’과 ‘화이’의 모호한 사랑이 더 현실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특히 자기 인생에서 책임져 할 것들이 많은 4~50대의 사랑은 더 그렇죠. 완전하지 않고, 선명하고 깨끗하지도 않아서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어느 한 순간에도 분명 있었던 감정 같은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보도블록 틈새에 위태롭게 피어 있는 꽃 한 송이처럼, 제한적인 상황에서 피어나는 실낱같은 사랑이요.
유명 시인인 ‘민주’와 평범한 주부인 ‘화이의’ 차이도 생각해 보게 됐어요. 말씀하신 대로 같은 여성이지만, 미투를 할 수 있는 사람과 미투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살에 대해서요.
분명히 존재하는 차이죠. ‘화이’를 통해 기혼 유자녀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예전에는 ‘화이’처럼 강간으로 결혼하는 여성들이 있었잖아요. 이런 분들이 미투조차 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미 낳아서 키우고 있는 아이한테 너의 아빠가 성폭력범이었다는 말을 하기 쉽지 않거든요. TV에 나오는 유명 연예인이 사실은 강간으로 인해 결혼했다고 고백하는 걸 본 적 있는데요. 대체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에요. 옛날 분들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이가 이미 성인이 돼서 겨우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감각이 부각되는 소설이기도 해요. 감각은 ‘지성’과 ‘화이’의 괸계에서도 중요하고, ‘화이’는 ‘인간 고양이’로 표현될 정도로 아주 감각적인 인물이기도 한데요. 감각에 집중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인데 이른바 정신적인 것들은 추켜세우고 감각적인 것들은 폄하하고 있지 않나 싶었거든요. 특히 저를 포함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감각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가까운 일을 하고,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래서 간혹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게 아닌가 싶었고,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이 감각을 매개로 만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취재하다 만난 고양이를 통해 ‘감각’에 눈을 떴다고 들었어요.
5, 6년 전쯤에 취재원 집에 갔다가 고양이를 만난 적이 있어요. 인터뷰하는 동안 저에게 와서 냄새를 맡고, 몸을 비비는데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더라고요. 그 후로도 종종 그 순간을 떠올릴 정도로요. 동물들은 아주 감각적이잖아요. 고양이가 준 깨달음이 아주 컸고, 자연스럽게 감각에 집중하게 됐죠.
소설을 보는 독자들이 1차로 느끼는 감정이 ‘혼란스러움’ 아닐까 싶어요. 등장인물들이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거든요.
누구나 하나로 정의될 수 없잖아요. 누군가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처럼요.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면 너무 치사하고, 비겁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조금 괜찮은 사람 같을 때, 있지 않나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의 욕망에 눈길이 가요
소설과 에세이를 모두 쓰시잖아요. 내 안의 이야기가 활자가 되어 나온다는 점에서는 같을 수 있지만, 이야기가 나오는 과정은 다를 것 같아요. 에세이가 되는 이야기와 소설이 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다른가요?
내 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그 문제에 천착해 있을 때 에세이를 쓰는 것 같아요.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하는 방법으로요. 『엄마의 독서』를 쓰면서 그랬거든요.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엄마들을 만날 수도 있었고요. 소설은 상상에서 출발해요.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이면을 상상해 보게 되는데요. 여러 상상이나 이야기 중에서 제 안에 끝까지 살아남은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작가님들이 부럽기도 해요. 나의 고민이나 문제를 글로 풀어냈을 때의 오늘 희열이 있기도 하고, 또 거기에 같은 마음으로 반응하는 독자들을 만나기도 하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그런 면이 정말 좋긴 한데요. 악플도 많아요. (웃음) 열 개의 칭찬보다 하나의 욕에 더 신경 쓰이는 게 사람이잖아요. 불특정 다수의 평가에 항상 노출되어 있지만, 거기에 답할 수는 없는 게 작가의 숙명이에요. 불편한 것들을 잘 소화하는 능력이 꼭 필요하죠.
잘 소화하는 편인가요?
아뇨. 상처받고 ‘다신 글 안 써!’ 하는 스타일이에요. (웃음)
작가로서 연차가 쌓여도 나쁜 평가에는 무뎌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쓰게 되시죠?
상처받았다고 징징대고 불편해하면서 다시 쓰죠. (웃음) 가끔 악플을 남기는 사람을 통해서 타인이라는 존재를 공부하기도 해요. 내 이야기가 가닿을 수 없는 배경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죠. 누군가가 나를 안 좋게 평가해서 힘들 때는 나에게서 그 사람으로 포커스를 옮길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상처를 받아도, 죽지는 않거든요. (웃음)
‘도시 세대의 관찰자’라는 수식어가 있어요. 이전에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작가로서의 내 몫인 것 같다’라는 이야기도 하셨더라고요. 요즘 작가님 눈에 들어오는 문제는 뭔가요?
돈, 빈부격차, 부동산이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소재네요. 시선이 가게 된 배경이 있나요?
어딜 가나 부동산 이야기를 하잖아요. 부동산이 거의 주식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지금까지 소설을 통해 욕망을 말해 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번 소설이 지적 욕망에 대한 거라면 지금 제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부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흥미로운데요. 욕망에 대해 말하니까 갑자기 작가님의 욕망이 궁금해지네요. 작가님의 여러 가지 욕망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욕망은 뭔가요?
지금까지는 인정 욕구였던 것 같아요. 글 쓰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요즘은 건강한 몸에 대한 욕망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지적 욕망이나 인적 욕구를 앞설 정도로요. 그동안 인정 욕구를 1순위에 둘 수 있었던 건 몸이 건강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제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니까 다른 사람들의 인정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고 싶더라고요. 건강해야 아름답잖아요.
*정아은 2013년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모던하트』,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공저 『젠더 감수성을 기르는 교육』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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