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골목의 담벼락, 학교 화장실, 도서관 책상. 이런 곳은 낙서를 발견하기 쉬운 곳이다. ‘우리 사랑 이대로’, ‘로또 1등’ 등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낙서부터 음담패설, 특정 정치인 욕까지 낙서의 범위는 끝이 없다. 흔하고 흔해서 주의해서 본다면,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지나친다. 낙서는 쓰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그런 존재니까.
낙서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래, 있을 수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사니까. 그런데 낙서를 모아서 책까지 냈다고 한다. 서점에서 일하는 필자로서는 호기심이 생겼다. 주인공은 도인호. 그가 낸 책은 『청춘의 낙서들』이다.
한국말 ‘의’는 다양한 뜻을 함의한다. ‘청춘의 낙서들’도 마찬가지. 청춘이 쓰는 낙서, 청춘 시절에 쓴 낙서, 청춘이 발견한 낙서 등 다양한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힘들었을 때 위안을 받았던 낙서를 모았다. 낙서, 하면 으레 음담패설을 떠올릴 수 있으나 이 책에 실린 낙서는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렇다곤 해도, 이런 낙서, 왜 모았을까.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식목일에 태어난 꽃집 아들, 낙서에 빠지다
첫 책입니다. 채널예스 독자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저는 도인호입니다. 1986년 식목일에 태어났습니다. 꽃집 아들이에요. 잠깐 꽃집을 창업했다 처참하게 실패하고, 그전부터 취미로 모아놓은 낙서를 소재로 실패한 청춘 이야기를 책으로 냈어요. 지금은 책 홍보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요?
요상하지만 취미생활처럼 낙서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사업 실패하고 나서, 위로하는 글을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장난 같은 낙서를 소개하면서 시작했는데, 가면 갈수록 실패한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이 책은 그런 식으로 낙서를 소재로, 제 젊은 시절을 주제로 쓴 책입니다. 화장실의 낙서를 발견한 것처럼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심심할 때 한 번씩 읽으면 재밌는 책이에요.
낙서를 수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군대 가기 전, 잠실 인근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었는데요. 화장실에 으레 있는 야한 낙서가 있었어요. 제대하고 나서 보니 그 자리에는 성소수자 이야기가 보이더라고요. 흥미로웠죠. 2006년보다 2008년에 성수자 담론이 더 많았거든요. 이걸 보면서 낙서가 시대를 반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집 앞에 있던 낙서가 지워졌어요. 낙서가 시대를 반영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구나, 해서 사라지기 전에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취미가 됐죠.
모든 공간에서 낙서를 수집할 수는 없잖아요. 낙서를 모으기 위해 돌아다닌 공간은 주로 어디였나요.
홍대 근처나, 이태원 쪽이에요. 술집이 많은 데에 낙서도 많죠. 요즘은 카페도 일부 허용하는 곳이 있고요. 화장실은 예전에는 많았는데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돌아다니는 공간마다 유심히 보는 편인데, 문화가 다양한 곳이나, 오래된 곳에 낙서가 많죠.
화장실 낙서는 왜 없어질까요?
첫째로는 스마트폰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 예전에는 펜 있고 심심하면 화장실에 낙서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 보잖아요. 둘째로는, 화장실이 전반적으로 깨끗해지니까, 낙서할 생각을 못하는 거죠.
본인도 낙서를 하나요?
어렸을 때 이후로는 안 했어요.
모든 낙서를 수집하진 않을 듯한데, 낙서를 모을 때 기준은?
홍대에 그래피티가 많은데, 거리 예술이라 생각해서 안 모으는 편이고요. 낙서는 심심할 때, 뭔가를 끄적이고 싶을 때 쓰는 건데요. 이런 식으로 나온 낙서를 좋아해요. 제가 봤을 때, “이 사람 정말 심심하구나” 하고 느낄 만한 게 좋죠.
일단 착한 낙서 위주로, 19금 낙서는 나중에
화장실 낙서를 보면 음담패설이나 욕설도 많은데, 책에 실린 낙서는 대체로 선량합니다.
실제로 제가 수집한 낙서도 음담패설이 훨씬 많은데요. 나중에 19금으로 한 번 내볼까, 생각은 하지만 이번 책에는 독자가 불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걸렀죠. 너무 야한 낙서나 정치적으로 치우친 낙서는 사람에 따라서 불쾌하게 느낄 수 있잖아요. 『청춘의 낙서들』은 우선은 재밌게 읽히면 좋겠네요.
낙서가 인터넷으로 보면 익명성이 보장된 댓글과 비슷하기도 한데요.
둘 다 공통점은 배설의 욕구가 아닐까요. 책에 실리진 않았지만, 정치적 낙서나 음담패설을 보면 익명성에 기대 감정을 배설하려는 욕구가 보여요. 인터넷 댓글창에 보이는 지저분한 댓글과 낙서가 비슷하죠. 그래서 둘 다 시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죠.
월간 <잉여>에 기고하기도 했는데요. 낙서는 잉여일까요?
관점이 여러가지가 있겠죠.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확실히 잉여죠. 낙서를 쓰는 사람은 심심해서 쓰고, 수집하는 사람은 재밌어서 하는 거니까요.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면, 어디엔가 누군가의 글이 남겨져 있고, 남겨진 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지워져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낙서가 시대를 반영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잉여가 아니라 의미 있는 기록이 아닐까요.
사업 실패했던 기간을 3년 정도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데 책에는 사업 실패 이야기가 없습니다.
평범하게 실패한 이야기라 딱히 더 할 이야기가 없었고요. 그렇지만 사업 실패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책으로 내고 싶기도 해요.
평범한 실패라면?
동업은 하지 말아야겠다? (웃음) 제가 사회에 나가기 위한 준비가 충분히 안 돼 있었어요.
요즘 청춘, 어렵다
책에서 실패를 많이 이야기했는데, 기성세대가 풀어놓는 청춘 담론과 다른 느낌 같기도 하네요.
청춘에 관한 책을 나이가 있는 분이 쓰다 보니, 독자보다 스펙도 좋고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이잖아요. 제 책은, 읽는 독자보다도 스펙도 없는 사람이다 보니, 기존의 청춘 책보다는 진정성 있고, 위로 받듯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낙서가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는데, 낙서로 봤을 때 지금 시대 청춘은 어떤 것 같아요.
어떤 시대나 그렇겠지만, 요즘 청춘은 빡빡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 듯해요. 열심히 일해도 자신의 힘으로 결혼을 한다거나, 집을 마련한다거나, 이런 게 불가능하잖아요. 매우 힘든 상황이에요. 이런 상황을 정면으로 받았던 사람이라, 사람들은 재밌게 읽지 않을까요.
낙서 모으면서 겪은 황당한 사건도 있나요.
남산에서 사랑의 낙서를 찍고 있었어요. ‘철수 영희 우리 사랑 이대로’ 이런 낙서죠. ‘사랑 영원할 줄 아냐’ 이런 것도 있었고요. 제가 찍는 걸 보고 중국인 관광객들이 함께 찍으시더라고요. 전혀 명소가 아닌데 중국말을 몰라서, 말은 못 드렸네요.
이번 책에서는 주로 서울에서 수집한 낙서를 담았는데, 앞으로 전국 편을 기대해도 될까요.
책 쓰는 게 힘들어서 당분간은 계획에 없고요.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재밌는 낙서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요.
조경학을 전공했는데, 글쓰기에 빠진 계기는?
뭐를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던 시기였어요. 조경학을 전공했는데, 인턴 생활을 잠깐 하면서, 이건 진짜 아니다, 하면서 학교로 돌아갔죠.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어요. 그때 '예술과 미학'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에세이로 1주일에 A4 한 장씩 써야 했죠. 글을 쓰니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힘든 시기에 일기 쓰듯, 썼어요.
원래부터 책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최근에 읽은 책 중 인상 깊었던 게 있다면.
책보다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책도 좋아해요. 요즘에는 『반 고흐 인생 수업』이 좋았어요. 반 고흐가 생각했던 것보다, 찌질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냈어요. 그런 반 고흐의 인생에 맞춰 저자 자신의 사연을 더해서 설명해준 책인데, 재밌었습니다.
앞으로 발견하고 싶은 낙서가 있나요?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라고 홍대 편의점 앞에 있었던 낙서인데요. 그 낙서를 보고 묘하게 위안을 받았어요. 제가 찍었던 낙서 모두를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청춘의 시련이라고 받아들였죠. 사정이 나아지면, 낙서가 변한다기보다는 제가 거리의 낙서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끝으로 채널예스 독자에게 한 마디 해 주세요.
이 책에서 발생한 수익은 저의 생계 유지비로 이용되니, 많이 많이 사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너무 힘듭니다. (웃음)
청춘의 낙서들도인호 저 | 앨리스
그는 스펙 쌓기에 매진하는 여느 20대와는 달리, 낙서를 수집하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청춘으로, 이 책에서 그간 모은 낙서를 매개로 자신의 삶과 고민을 풀어놓는다.『청춘의 낙서들』에 담긴 낙서들의 빛깔은 다채롭지만 이 책의 지은이가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은 ‘이 청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이다.
[추천 기사]
- 김애리 “30대 여성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하죠”
- 소설가 성석제의 결핍과 호기심
-강풀 “아빠가 읽을 만한 그림책이 없어 그렸죠”
- 성석제, '투명인간'이라기엔 너무 평범한 남자 이야기